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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튜토리얼 탑의 고인물(1)
튜토리얼 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 세계가 갑작스레 나타난 몬스터들에 의해 뜨거운 열병을 앓고 있을 때 생긴 일종의 '튜토리얼 던전'이었다.
튜토리얼 탑이라 불리는 그곳에서는 일정한 주기마다 전 세계의 사람 중 일부를 튜토리얼 탑에 강제로 끌려갔고.
그렇게 해서 탑에 끌려간 사람 중 20% 정도만이 탑에서 빠져나가 몬스터를 잡는 '헌터'가 되었다.
탑을 클리어한 헌터가 '튜토리얼 탑'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지 12년.
세계는 탑을 빠져나온 헌터로 인해 몬스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헌터'가 등장함과 함께, 세계는 대격변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크게 바뀌어 나갔다.
등급 중 최하급이라고 불리는 D급 헌터부터 최상급이라고 불리는 S급 헌터까지.
몬스터를 토벌할 수 있는 헌터들은 각 국가의 국력과도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다.
초반에는 헌터가 뭐길래 국력으로 취급되나?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끝없이 나타나는 몬스터와 헌터가 가진 규격 외의 힘은 '헌터가 곧 국력이다'라는 유언비어를 농담이 아닌 정설로 만들어 주었고.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자 헌터의 몸값은 자연스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헌터들은 자신의 몸값을 더더욱 올리고, 또 국가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협회'와 '길드'를 설립하며 자연스럽게 시장을 형성했고- 그렇게 세계정세가 흘러감에 따라 헌터는 이미 어엿한 '직장'을 넘어서서 '대박 직장'과도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다.
물론 헌터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죽음을 앞에 두어야 한다는 걸 뜻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은 헌터가 되기를 원했다.
헌터가 벌어들이는 돈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니까.
평범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한 달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
헌터들은 미궁이나 던전을 탐험하는 것만으로 그 정도 돈의 두세 배, 많게는 수십 배도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그런 이들 중에서도 등급이 올라 시민들의 인지도가 높아진 헌터 중에서는 미디어 쪽으로도 진출하는 이들도 생겼고, 그들은 옛날의 아이돌, 연예인 같은 취급을 받으며 떼돈을 벌기도 했다.
그래,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헌터를 알다'의 이해영입니다! 반갑습니다!"
한국의 3개 지상파 중 하나인 MTC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그램인 '헌터를 알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에 있는 대형 길드의 '길드장'을 섭외해 일반인들이 헌터에게 궁금한 점이나 헌터의 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라이브 방송이었다.
소재 자체는 헌터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프로그램.
하지만 그런 특별 할 것 없는 프로그램에 '길드장'을 섭외하는 것만으로, '헌터를 알다'는 저번 주 시청률 35.7%를 찍으며, 인기 방송의 대열에 오른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콘서트장처럼 꾸며져 있는 곳에는 메인 MC인 이해영과 각각 '고구려', '아랑', '서울' 길드의 길드장이 한쪽의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었고.
곧 이해영이 길드장들을 소개하며 본격적인 방송이 시작되었다.
매끄럽게 진행되는 방송.
이미 4회차나 진행된 방송이라 그런지 메인 MC인 이해영은 자연스러운 톤으로 길드장들에게 질문을 던졌고.
그런 이해영과 마찬가지로 길드장들은 카메라에 익숙해진 듯 전회차 방송 때보다도 능숙하게 MC의 말을 받아치며 방송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저희 고구려 길드는 이번에 튜토리얼 탑에 들어간 헌터들에게 많은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고구려 길드의 길드장이자 S등급의 헌터인 한석원의 말을 끝으로 이해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카메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자, 이것으로 방청객 질문은 끝내도록 하고-"
이해영은 슬쩍 촉박해진 마감시간을 보곤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서
'궁금합니다! 인터넷 질문 TOP10!'
중 하나만 질문을 드리고 오늘 방송은 끝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이해영은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카드를 향해 시선을 옮겼고.
"자, 지금부터 읽어 드릴 것은 인터넷 TOP10의 질문 중 1위를 차지한 질문입니다. 질문의 내용은-"
곧 질문을 읽어 나갔다.
'한국에 있는 튜토리얼 탑에는 '고인물
'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 고인물이 누구인가요?'
라는 질문이네요?"
그녀는 질문을 읽은 뒤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고선 길드장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도 인터넷에서 가끔 '고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혹시 길드장님들은 '고인물'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그런 이해영의 물음에 대답한 건 고구려 길드장 한석원이었다.
그는 무척이나 간만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와, 최근에도 고인물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보니까 아직도 안 죽고 잘 살아 있나 보네?"
"오, 혹시 한석원 씨는 그 고인물에 대해 알고 계시는 건가요?"
과장되게 톤을 높여 말하는 이해영.
하지만 그녀의 말에 대답한 것은 한석원이 아닌 그 옆에 있는 아랑 길드의 길드장이자 S등급 헌터인 이서연이었다.
"아마 그 사람을 여기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걸요? '그'는 저희와 같이 튜토리얼 탑에 떨어진 1회차 헌터니까요."
"네? 이서인 길드장님이랑 같이요? 잠깐, 그럼 그 고인물이라는 사람은 1회차 헌터라는 소리인가요?"
"네 맞아요."
"……1회차 헌터가 아직도 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요?"
이해영의 궁금하다는 듯한 말투에 이서연이 대답하려는 찰나.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탑에 갇혔다'고 말하는 게 맞죠."
이서연의 말을 끊으며 들어온 서울 길드의 길드장 '김시현'은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를 빛내며 말했고, 이해영은 질문을 이어나갔다.
"갇혔다고요?"
"그는 '탑의 저주'에 걸려 있거든요."
"탑의 저주? 그건 또 뭔가요? 그 말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인데."
이해영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앉아 있던 길드장들을 바라봤고, 김시현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저주라고 말하기에는 모호하죠, 그게 무슨 현상인지 모르니까. 다만 한 가지 예상 할 수 있는 건……."
그는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그는 다른 헌터처럼 튜토리얼 탑을 클리어해도 다시 튜토리얼 탑의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네?"
김시현의 말에 한순간 멍하니 대답한 이해영은 순간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다 이내 슬쩍 눈치를 보고는 대화를 잇기 시작했다.
"아…… 그러니까 그 '고인물'이라는 헌터는 시작의 탑을 클리어해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튜토리얼 탑 1층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인 거죠?"
"맞지."
"맞네."
"그렇죠."
길드장의 일관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이해영은 순간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목소리 톤을 올려 질문했다.
"그럼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그 헌터는 엄청 강하겠네요? 제가 듣기로 헌터는 '마력'을 제외한 기본 능력 한계치를 튜토리얼 탑에서 수련하고 나온다고 들었거든요!"
제 말이 맞나요? 라고 질문을 끝맺은 이해영.
"글쎄…. 내 생각에 아마 지금쯤이면 '마력'을 제외한 기본 능력은 이미 진즉에 일반적인 헌터의 수준을 넘었을 것 같은데."
한석원의 말에 그 옆에 앉아 있던 김시현도 말했다.
"저번 튜토리얼 탑에서 나온 헌터 중 우리 길드에 들어온 헌터의 말로는 탑을 하루 안에 클리어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고 하던데요?"
"타, 탑을 하루만에?"
이해영의 버벅임에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만약 그 사람이 우리가 나가고 나서도 계속 탑을 반복해서 클리어했다고 하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요?"
분명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뜻밖의 긍정적인 의견을 내비치는 길드장들.
이해영은 그런 길드장들의 모습에 잠시 당황하면서도 이내 2분밖에 남지 않은 생방송 타이머를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만약 그 '고인물'헌터가 빠져나오게 되면 대충 어느 정도 등급이 될까요?"
"음……. 만약 그 녀석이 탑의 저주에서 빠져나와 현대로 오게 된다면……?"
"최소 A등급 아닐까?"
"……S등급일 것 같은데?"
"S등급 같은 A급이 나올 것 같은데? 형…… 아니, 그 사람은 튜토리얼 탑에만 있어서 마력등급이 없을 테니까."
김시현이 튜토리얼 탑을 빠져나와야만 얻을 수 있는 '마력'에 대해 언급하자 한석원과 이서연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도 탑에 빠져나온 뒤 한 달 정도면 S등급까지는 그냥 올라오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긴 해. 근데 이렇게 이야기해 봤자 뭐 하냐? 녀석은 나오지 못할 텐데."
한석원의 말에 묘한 탄식을 터뜨리는 이서연.
새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길드장들을 본 이해영은 이내 생방송 카운터가 30초 이내로 줄어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멘트를 쳤다.
"네! 요번 주
'헌터를 알다.'
는 시간 관계상 여기에서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를 기대해 주세요!"
마무리를 짓는 이해영의 멘트.
그렇게 '헌터를 알다' 5회차는 1시간의 생방송을 성공적으로 채우고 종료되었다.
그렇게 생방송이 끝나고 방청객들이 차례대로 이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본 길드장들은 각자 자리로 일어나 세트장 뒤에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아직도, 탑을 돌고 있는 걸까?"
휴게실로 가는 도중 들린 이서연의 목소리에 김시현은 대답했다.
"아직도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아직도 탑을 돌고 있는 건 확실하지."
"만약 오빠가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온다면 어떨까?"
방송에서와는 다른 어투로 그를 말하는 이서연의 물음에 순간 휴게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한석원이 발걸음을 멈췄다.
"…글쎄다. 만약 그 녀석이 나온다면… 아마 한국을 독점하고 있는 외국 길드를 조금이라도 압박하는 데에는 더없이 효과적이겠지."
"그렇겠지?"
"그 녀석은 탑 안에 있을 때도 우리보다 강했으니까 말이야."
이서연의 긍정에 한석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고, 그 둘을 바라보고 있던 김시현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게 이야기해 봤자 뭐 해, 아까 방송에서도 말했듯이 사람들한테 고인물이라고 알려져 있는 형은 탑 안에서 나오지를 못하는데."
김시현의 말에 이서연과 한석원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냈다.
그렇게 '헌터를 알다'가 성공적으로 방송된 이후, '헌터킬'이라는 팬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하나의 떡밥이 '인기 게시물'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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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번에 '헌 알'에서 마지막에 나온 그 고인물인가 뭔가 하는 놈은 대체 뭐임?
글쓴이: 서연누나넘모조아
오늘 보다가 갑자기 딱 그 이야기로 넘어가니까 길드장들 다들 엄청 묘한 표정 지으면서 대답하던데 그 고인물 이라는 게 대체 누구길래 다들 묘한 표정 짓냐??
그리고 우리 이서연 길드장님이 최소 A~S랭크라고 하던데 무슨 탑 나오자마자 A~S랭크 찍는 건 씹불가능 아니냐?
S랭크면 능력으로 산 하나 정도는 날려 버려야 되는 급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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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232개
ㅁㄴㅇㄹ: 누가 우리 이서연 길드장님이냐 뒤질라고 ㄴ 서연누나넘모조아: 아니 왜 갑자기 지랄이시죠?
윤원아꽃길만걷자: 그러게. 나도 좀 신기 하기는 함. 근데 생각해 보면 1회차가 아직도 튜토리얼 탑에서 썩고 있으면 확실히 S랭크 찍을 수도 있지,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고인물그자체: 나 B급 헌터인데 2년 전에 고인물이 던전 클리어하는거 방 겹쳐서 한번 봤는데 완전 빠요엔 그 자체임. 72층에 웨어울프 3마리 나왔는데 떡춤 추면서 다 잡아버리더라 엌ㅋㅋㅋㅋㅋㅋㅋㄴㅈㄷㅈㄷ: 흠……. 지랄하지 마시죠.
ㄴ DWD: 이건 또 무슨 허언증수듄 엌ㅋㅋㅋㅋㅋㄴ A급헌터: 흠 닥쳐 주십쇼. 2년 만에 B랭크 헌터라니 무슨 한서린 헌터 보는 줄.
ㄴ 또와버렸자너: 허언증이 또 와버렸자너~~ㄴ 허언증을 보면 짖는 개: 월 월월월 으르르르릉 월월월월 월월월 으르르르릉 월월월월 월월월 으르르르릉 월월월월 월월월 으르르르릉 월월월월 월월월 으르르르릉 월월월월 월월월 으르르르!!!!!!
SSS랭크: 나도 본 적 있다. 그 고인물 새끼는 이미 인간이 아님, 내가 1년 전에 던전에서 빠져나왔는데 완전 고인물 그자체임, 1층에서 발차기하면 10층까지 던전 뚫려 버림,
ㄴ ㅈㅈㅈㅂ: 흠좀무
ㄴ 제발: 허언증 제발 좀!!!!
ㄴ 인생무상: 근데 아랑 길드장이 S랭크 급이라니까 좀 강할 것 같기는 한데 시발 니가 말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허언증이 맞는 것 같다.
그렇게 한국 최대 커뮤니티 사이트인 '헌터킬'에서 고인물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튀어나오고 있을 때-튜토리얼 탑 최종 층인 100층에서는.
꽈드드드드득!
"누가 진짜 남자냐! 나야! 내가 존나게 남자! 얼마나 존나? 존나게 존나! 나는 10점 중 12점짜리 남자!"
한 남자가 튜토리얼 탑 100층 보스인 발록의 뚝배기를 맨손으로 깨버리고 있었다.
# 2
002. 튜토리얼 탑의 고인물(2)
튜토리얼 탑의 마지막 층인 100층에 있는 발록.
그 몬스터는 튜토리얼 탑을 오르는 헌터가 탑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거쳐야 할 마지막 관문이기에 튜토리얼 탑의 보스로 불리기도 했다.
99층까지 올라오며 단련이 된 수십의 헌터를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발록.
서부에 있는 또 다른 튜토리얼 탑에선 99층까지 올라왔던 95명의 헌터 중, 발록과 싸우다 70명의 헌터가 죽기도 했을 정도로 발록은 신입들에게 악명이 자자한 몬스터였다.
그러나-
"…"
그렇게 튜토리얼 탑의 보스라고도 불리는 발록은-
"후…."
깔끔하게 머리가 날아간 체 그 몸체만이 차가운 동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허나 정작 탑의 보스라고 할 수 있는 발록의 머리를 단 한 방에 날려버린 남자는 그 시체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멍하니 빛나는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1349번째 클리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힘없는 발걸음으로 환하게 빛나는 문을 향해 몸을 움직였고, 곧 문 안으로 들어가자 환하게 비추는 빛이 남자의 시야를 빼앗았다.
그리고, 남자가 다시 시야를 되찾았을 때.
"…그리고 1350번째 시작."
남자는 튜토리얼 탑 1층 로비에 서 있었다.
"역시나…."
그렇게 로비에 한가운데에 소환된 '고인물', 김현우는 입안에서 올라오는 욕지거리를 참지 않고 내뱉었다.
"으아아악! 이런 개 씨발!"
한동안 씩씩거리며 1층 로비를 둘러본 김현우.
그것도 잠시, 그는 곧 이 이상 화낼 기운도 없다는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아, 집 가고 싶다."
벌써 똑같은 곳에서 수백, 수천 번은 더 했을 말을 중얼거리며 김현우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정보 창"
그가 중얼거리자 눈앞에 떠오르는 반투명한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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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현우
나이: 24(36)
성별: 남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A++ [튜토리얼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민첩: A+ [튜토리얼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내구: S+ [튜토리얼 한계치를 강제 돌파했습니다. 한계치 상승 +3]
체력: A+ [튜토리얼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마력: -- ?
행운: B
SKILL -
[튜토리얼 플레이어입니다.]
[루프가 해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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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오르지도 않는구만."
1200번째 클리어를 기준으로 더는 오르지 않는 능력치를 보며 저도 모르게 실소를 내뱉은 김현우는 이내 그 자리에 누워 허공을 바라보곤 멍하니 생각했다.
'역시 나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는 게 아닐까?'
이 탑에 들어온 지 자그마치 1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처음 이 탑에 소환되었을 때는 탑 1층에 쓰여 있는 튜토리얼에 따라 100층까지만 올라가면 현대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탑을 올랐다.
정말 열심히 탑을 올라 100층에 도달한 김현우와 동료들은 아주 기뻐하며 환하게 빛나는 문으로 걸음을 옮겼고, 김현우는 다시 1층으로 돌아왔다.
그래.
분명 다 같이 나갔는데 나와 같이 탑을 올랐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고, 김현우만 다시 탑의 1층으로 돌아왔다.
처음 그 상황을 마주했을 때, 김현우는 오갈 곳 없는 허탈감과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 채 혼자 생쇼를 했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다음 기수와 다시 탑을 올랐다.
허나 그렇게 또 탑을 클리어해 빛나는 문으로 들어갔을 때도, 김현우는 다시 1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제야, 김현우는 정보창에 떠 있는
'탑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라는 창을 볼 수 있었다.
그 뒤부터 김현우는 가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혹시 나는 나 혼자서 이 탑을 클리어해야만 나갈 수 있을까?'
혼자서 탑을 클리어했지만 나갈 수 없었다.
'혹시 저주니까 탑을 10번 깨면 저주가 사라지지 않을까?'
실제로 탑을 10번 깨봤으나, 역시 저주는 풀리지 않았다.
그 뒤로도 탑을 빠져나가기 위해 안 해본 짓이 없었다.
신체 등급을 한계까지 올린 것부터 시작해서 새로 들어온 헌터들을 데리고 키우기 게임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기수들이 늦게 들어 올 때면 혼자서 탈출할 방법을 찾기 위해 혼자서 탑을 몇 번이고 클리어하기도 했다.
그렇게 대충 4, 5년쯤 지났을 때도 김현우는 계속해서 탑을 클리어했다.
물론 그때에도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방법을 찾기 위해 탑을 클리어한다고 김현우는 생각하긴 했었으나.
그때 쯤 김현우는 이미 이 탑을 빠져나가는 것을 반쯤 체념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저 반쯤 의무감으로 탑을 클리어하던 그 그때.
그렇기에 어느 시점부터 김현우는 컨셉을 잡고 탑을 클리어하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탑의 1층에서 헌터들을 수련시키는 교관을 자처하며 놀기도 하다가 또 어떨 때는 튜토리얼 NPC인 척하며 헌터들을 돕기도 했다.
그러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을 듣는 것은 덤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탑에 들어오는 헌터에게 세상일에 관해 물어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세상 돌아가는 일을 듣다 보니 정말 미칠 것 같아서. 김현우는 헌터들에게 세상 밖의 일을 물어보는 것을 그만뒀다.
"하……."
김현우는 멍하니 정보창을 훑었다.
변함없는 정보창.
"변함이 없네."
변함없는 정보…창?
"변함이…없어?"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정보창 제일 아래에 쓰여 있는 문장을 바라보고, 눈을 깜빡였다 다시 바라봤고.
"루프가 해제되었습니다…?"
이내 그 문장을 중얼거리고, 저도 모르게 놀랐다.
"설마…!!"
조금 전까지 정보창을 끄기 위해 움직였던 손이 덜덜 떨리며 아래로 내려갔고, 이내 새롭게 바뀐 글자를 클릭하자 김현우의 앞에 로그가 떠올랐다.
--
[루프가 해제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이다음 탑을 공략 완료 시 탑을 통과하실 수 있습니다!
--
심플하게 떠 있는 문장.
"!!!"
하지만, 그 문장 하나를 보고 김현우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그가 튜토리얼 탑 1층에서 일어났을 무렵. 여의도에 있는 MTC 본사 내에 차려져 있는 세트장에서는 '헌터를 알다' 6회가 생방송으로 진행 중이었다.
"튜토리얼 탑을 클리어하는 시간은 아무리 줄여도 10개월 정도라는 말이 헌터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해영의 물음에 아랑 길드의 길드장인 이서연은 대답했다.
"솔직히 그렇게 확정해서 말할 수는 없죠.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있으니까요."
"어떤 변수들 말씀인가요?"
"가장 중요한 건 튜토리얼 탑에 들어간 헌터의 숫자. 그리고 같이 들어온 헌터들의 능력이 있겠죠? 그다음으로는 단합력도 있을 거고요."
"그리고 그, 저번 방송에서 말씀하신 그 고인물 헌터 같은 분도 변수 중에 하나겠죠?"
이해영이 반 장난을 담아 이야기를 하자 이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네 뭐, 그런 것도 있겠죠. 아무튼, 기본적으로 탑을 클리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개월이라는 말은 뭐, 당장 지금은 맞는 말인 것 같네요."
"당장 지금은 말인가요?"
이해영의 되물음에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시다시피 탑의 클리어 주기는 회차가 지날수록 빨라지고 있어요. 그건 알고 계시죠?"
"네, 저번 17회차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 미국 센디에고쪽에 있던 튜토리얼 탑이었잖아요? 그 현재 A등급 헌터인 알리사가 주력으로 움직였던 탑이요."
이해영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그리고 아마 이번에도, 제 생각엔 이번에도 탑 클리어 속도가 단축될 거에요."
"어, 왜 그런가요?"
"정보가 풀리니까."
이해영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서울 길드의 길드장인 김시현이었다.
"정보요……?"
"튜토리얼 탑에 대한 정보. 지금 지구에는 총 158개의 탑이 있고, 그 탑은 모두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죠."
"게다가 최근에는 튜토리얼 탑에 누가 갈지 모르니, 몇몇 나라에서는 아예 자국민들을 모아놓고 튜토리얼 탑에 대비해 기초 훈련을 시키기도 하잖아?"
당장 우리나라도 지원자 받아서 하고 있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말을 끝낸 고구려 길드의 길드장 한석원.
이해영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길드장님들은 이번 18회차 헌터들이 튜토리얼 탑에 들어간 지 이제 10개월을 다 채워가고 있는데……."
이해영은 슬쩍 눈을 빛내며 물었다.
"거기에서 한국에 있는 튜토리얼 탑에 들어간 헌터들은 언제쯤에 탑을 클리어할 거라고 보시나요?"
"얼마가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지. 50층까지는 실력이 없어도 어떻게든 낑겨서 기어 올라올 수 있지만 51층부터는 재능 있는 애들이 많아야 하니까."
"아, 그렇죠! 저도 헌터킬이라는 커뮤니티에서 봤는데 51층부터는 탑의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진다고 하던데!"
이해영이 눈을 빛내며 과장되게 연기를 하자, 이서연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맞아요. 1층부터 50층까지는 그냥 각 층에 있는 몬스터와 싸우면 손쉽게 다음 층으로 넘어 갈 수 있거든요."
"그럼 51층부터는……?"
"51층부터는 지금 저희 세상에 나와 있는 '던전'이나 '미궁'처럼 각 층이 생태계를 이루고 있어서 몬스터를 잡기가 배는 어렵죠. 게다가……."
이서연은 한번 말을 끊고 이어서 말했다.
"51층부터는 10층마다 '계층 보스'가 있다 보니까 아무래도 난이도가 상당히 올라가죠."
***
"씨발 다 비켜!"
김현우는 90층의 계층 보스인 '사이클롭스'의 몸을 두 갈래로 찢어버린 뒤, 곧바로 다음 층의 문을 열고 91층에 도착했다.
"왜 보스 몬스터가 있는 층은 벽이 안 뚫리는 거야!!"
그는 짜증을 내며 머리 위를 막고 있는 벽을 조준하고 몸을 힘껏 오므렸다.
그와 함께 주변의 공기가 묘하게 진동하며 자세를 잡고 있던 김현우의 발이 동굴 바닥에 패여 들어갔고, 어느새 그의 발목이 지반을 뚫고 들어갔을 무렵-꿍!
"벽도 꺼져!!"
김현우는 그대로 천장으로 도약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꽈가가가강!
엄청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일어나며 91층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지만, 김현우의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연속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92층의 천장이 박살 나고.
93층의 천장이 뚫린다.
94층.
95층.
96층.
97층.
98층.
99층.
그리고…… 100층까지.
한 번의 도약으로 10계층을 뚫고 올라온 기행을 보인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핏발이 선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헌터가 탑의 보스인 발록과 싸우고 있었다.
벌써 절반 가까이는 발록의 주변이나 벽 주변에 처박혀 쓰러져 있었고, 그나마 서 있는 헌터들의 눈에도 절망과 체념이 머금어져 있었다.
"무, 무슨."
허나, 조금 전까지 체념의 빛을 머금고 있던 헌터들은 갑작스러운 김현우의 등장에 저도 모르게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고.
꽝!
그는 말없이 땅을 박차 이제 막 손에 쥐고 있던 헌터를 포식하려던 발록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보스도 꺼져!!!"
꽈지지직!
헌터를 포식하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던 발록은 김현우의 발차기에 맞아 머리가 세 바퀴나 돌아갔고-쿵!
발록은 그대로 절명했다.
그렇게 찾아온 한순간의 정적.
그런 무거운 침묵에도 불구하고 그는 빛나는 문을 보며 입을 열였고-
"씨발 존나 나는 오늘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곧, 김현우는 빛나는 문을 향해 몸을 들이밀었다.
# 3
003. 튜토리얼 탑의 고인물(3)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튜토리얼 탑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 심심해."
한국 헌터 협회 소속 직원이자 D급 헌터이기도 한 그. 이천명은 자신의 옆에서 서류판을 보고 있는 신입 사무원을 보며 물었다.
"뭐 해?"
"아, 튜토리얼 탑에 들어간 인원들 명단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좀 이상한 게……."
"……이상한 거?"
"네."
"뭔데?"
"이거요."
사무원은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판을 넘겨주었고, 이천명은 사무원이 넘겨 준 서류판을 보고는 말했다.
"딱히 이상한 데 없는데?"
"이거 이상하지 않아요?"
"어느 부분이?"
"여기 김현우라는 사람이요. 분명 이번 15회차에 들어간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10개월 전인 2018년 7월경 탑에 들어갔잖아요?"
사무원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서류철 제일 위에 쓰여 있는 이름을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했다.
[2006.2.21. / 24세 / 김현우]
"근데 지금 이 최상단에 올라와 있는 헌터는 애초에 년도부터가 다른데요?"
"아, 이거?"
사무원에 물음에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듯 피식 웃더니 이내 서류판을 사무원에게로 넘겨주며 입을 열었다.
"그거 정상이야."
"네?"
"정상이라고, 너 혹시 '고인물' 몰라?"
"고인물이요?"
"그래, 이번에 '헌터를 알다'에서 한국 소속 길드장들이 이야기했었잖아?"
이천명의 말에 사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 사람 말하는 거죠? 우선 밖에 빠져나오기만 한다면 무조건 확정으로 A등급을 받을 수 있다는 그 사람."
"그래."
"……어? 그럼 설마 이 위에 써져 있는 게……?"
사무원이 묻자 이천명은 피식 웃었다.
"맞아 그 길드장들이 말하는 고인물이지."
"와, 진짜 고인물이 있었구나."
사무원의 새삼스러운 감탄사에 그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왜, 없는 줄 알았냐?"
"아니 뭐, 저도 듣기는 해서 있는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명단에 적혀 있는 걸 보니까 뭔가 실감이 나서요."
사무원의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나도 처음 여기 근무할 때는 그게 굉장히 신기했는데. 시간이 좀만 지나면 그 고인물이라는 사람이 엄청 불쌍하게 느껴질걸?"
"……불쌍하게 느껴진다고요?"
사무원의 되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녀석이 탑에 들어간 날을 봐. 2006년이지? 그 녀석은 지금 12년 동안 그 탑 안에서 갇혀 있는 거라고, 그 아무것도 없는 탑 안에 말이야."
"…아."
이천명의 말에 그는 그제야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천명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헌터들은 탑 안에 들어가면 자신의 능력이 성장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멈춰, 식욕도 못 느끼고 수면 욕구도 못 느끼지. 거기에 덤으로 나이도 안 먹어."
"나이도요?"
"그래, 사람이 튜토리얼 탑 안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탑 안에 들어간 사람들의 시간은 멈춰 버리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좋아 보이지만, 한번 생각해 봐."
그는 그렇게 말하고 한번 뜸을 들인 뒤, 사무원을 보며 말했다.
"그는 수면욕도 식욕도 나이도 안 먹는 세상에서 12년 동안 있는 거야. 아무런 유흥이나 오락거리 없이, 그저 탑을 빙빙 돌기만 하면서."
이천명이 그리 말하자 사무원은 뭔가 생각하는 듯한 체스쳐를 취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 말을 들으니까 하신 말씀이 조금 이해가 되기는 하네요."
그의 말에 그렇지? 라고 답하며 피식 웃음을 짓던 이천명은 이내 시선을 돌렸고,
"어?"
분명 조금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 생겨있는 균열을 볼 수 있었다.
하얀빛을 내며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균열.
"헉! 저거 출구 열린 것 맞죠?!"
"야, 빨리 협회 소속 인원들 호출해, 지금 날짜 확인하고 바로 상부에 전화해서 보고서도 올려."
"네 알겠습니다……!"
이천명의 말을 들은 사무원은 곧바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일렁거리는 문 안에서 한 명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남자.
"내가 빠져 나온 건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멍하니 주변을 돌아봤다.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본 이천명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서류판을 들고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축하드립니다.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오셨군요."
"내가 정말로 빠져나왔다고?"
이천명의 말을 듣고도 몇 번이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돌아보고 있는 남자를 보며 쓴웃음을 지은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사람이 종종 있기는 하지'
그 지옥 같은 튜토리얼 탑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 게 믿기지 않는 듯, 정말로 몇 번이나 주변을 돌아본 그는 이내 현대로 돌아왔다는 확신이 생긴 듯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씨발!"
"!?"
"내가 돌아왔어! 내가 돌아왔다고!!!"
'이거 미친놈 아니야……?'
갑작스레 욕설을 내뱉으며 외치는 남자의 모습에 이천명은 당황했으나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이름을 말해주시겠습니까? 튜토리얼 탑에 들어간 인원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신원확인을 하게 되어 있어서요."
남자가 다시 외치기 전에 선수를 친 이천명은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 판을 그에게로 슬쩍 들어 올리며 추가로 말했다.
"물론 신원확인이 전부 된 뒤에는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도 전부 해드리겠습니다."
이천명의 말에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서류 판을 본 남자는 이내 찢어질 듯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그를 바라봤다.
"김현우, 내 이름은 김현우다."
"네 잠시만요."
자신을 김현우라 소개한 남자의 말에 이천명은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 판을 들여다보며 그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한 장, 그리고 또 한 장.
이번 튜토리얼 탑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된 총 382명의 이름 중에서 '김현우'라는 이름을 찾던 이천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름이 김현우가 맞으십니까?"
"맞아."
'…이 새끼는 왜 반말이야?'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남자의 말에 이천명은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이내 크게 내색하지 않은 체 서류판을 들여다보았다.
허나 이천명은 곧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이…… 없는데?'
서류판을 몇 번이나 둘러봐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이천명이 이상함을 느끼던 중,
'어?'
이천명은 서류판맨 앞에 끼워져 있는 용지의 상단을 바라봤다.
처음 이곳에 배치되고 나서 3년 동안은 볼 일이 없었던 용지의 상단.
[2006.2.21. / 24세 / 김현우]
그리고 그곳에서 이천명은 남자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어…… 어어, 어!?"
"왜?"
"이, 이름이 김현우 씨…… 맞으십니까?"
이천명은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그런 이천명의 물음에, 그는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채 대답했다.
"맞다니까?"
"이런 미친……!"
이천명이 욕을 하며 서류판의 맨 윗장에 표시를 한 것을 기점으로.
12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튜토리얼 탑의 고인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그다음 날.
강동구 천호에 위치해 만들어져 있는 튜토리얼 센터는 때 아닌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예약했습니다! 저 이창진 기자라고요!"
"죄송하지만 내부 인원이 너무 많아서 통제 중입니다! 기자분이시라면 1층에 있는 기자실로 내려가 주세요!"
입구가 미어터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
그것은 바로 어제. 튜토리얼 탑에 들어갔던 헌터들이 전 세계 최단 기록을 갈아 치우고 탑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미국 센디에고 튜토리얼 탑 클리어 기록을 깬 헌터 타이틀은 국내외의 길드 스카우터나 기자를 끌어들이기에는 충분한 미끼였다.
"와, 진짜 이 정도는 역대급인데?"
튜토리얼 센터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 앞에 몰려 있는 인파를 바라봤다.
"아니, 보통 이 정도로 안 몰리지 않아요?! 아무리 기록을 갈아치우고 나왔다고 해도 이건 좀……!"
옆에 있던 경호원이 투덜거리듯 말하자 남자는 조금 전 쪽문을 통해 들어가려는 기자를 제지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아마 사람이 이렇게 몰리는 건 고인물 때문이겠지."
"그 고인물이요?"
"그래."
선임으로 보이는 경호원의 말에 되물었던 경호원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튜토리얼 탑 안에서 12년 동안이나 빠져나오지 못하고 탑을 루프한 헌터이자.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길드라고 할 수 있는 3대 길드의 길드장과 같은 1회차 헌터.
그 이외에도 방송 매체에서 길드장들이 고인물에 대해 떠들었던 이야기들까지 종합하면…….
"확실히……."
"그렇지? 기자들 입장에서도 특종이고, 스카우터들 입장에서도 거대한 건수니까 안 시끄러울 수가 없지."
"하긴, 오늘이 본격적인 등급 책정 날이니까요."
가득히 보이는 기자들을 보며 질린다는 듯 말한 후임 경호원을 보며 선임은 센터 본관을 보며 말했다.
"사람들도 다들 확인하고 싶겠지. 커뮤니티에서도 종종 이름이 나왔고 길드장들도 있다고 공언했던 '고인물'이 어느 정도인지 말이야."
그렇게 경호원들이 입가에서 기자들을 막아내고 있을 때쯤,
"진짜 그 녀석일까?"
튜토리얼 센터의 본관, 무척이나 거대한 본관 하늘에는 거대한 홀로그램 시계가 지나가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축구장 넓이는 우습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동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 한쪽 끝에는 길드 스카우터들을 위한 스카우트룸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룸 안에 있던 서 있던 고구려 길드의 길드장 한석원은 김시현을 보며 말했고,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2006년부터 저 튜토리얼 탑에 갇혀 있던 사람은 그 '형'밖에 없으니까 사기를 치는 게 아니라면 그 형이 맞을 것 같은데."
"쯧, 한번 만나봤으면 좋으련만."
한석원은 짧게 혀를 차며 거대한 홀로그램 시계를 보았다.
어제, 튜토리얼 탑에 들어간 헌터들이 귀환했다는 소식과 동시에 탑에 12년 동안 갇혀 있던 고인물이 빠져나왔다는 소식이 협회를 통해 전해졌다.
허나 그 고인물이 빠져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한석원은 그를 만날 수 없었다.
협회의 보호 덕분에.
처음 튜토리얼 탑에서 헌터가 빠져나오고 헌터가 어느 정도의 직업에 올랐을 때 1회차 헌터들이 모여 그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협회.
그들은 튜토리얼 탑에서 나온 헌터들이 현대에 나와 겪을 수 있는 불이익을 막기 위해 막 탑에서 나온 헌터를 몇 일간 보호하며 필요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그 덕분에 처음 튜토리얼 탑에서 나온 헌터는 협회의 도움을 받아 지식을 어느 정도 쌓은 뒤 사회에 합류했다.
그렇게 김시현과 한석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스카우터룸의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여성이 들어왔다.
아랑 길드의 길드장이자 S등급을 가지고 있는 헌터 '이서연'.
그녀는 슬쩍 주변을 바라보다 한쪽 구석에 있는 김시현과 한석원을 발견하더니 이내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안 늦었지?"
"너는 어떻게 된 게 맨날 늦냐?"
"그래도 쿨병환자보다는 낫지 않아?"
"이게 진짜…."
김시현의 차가운 타박에 거침없이 반박하는 이서연.
공적으로 만날 때나 '헌터를 만나다'에서 만났을 때와는 다른 그 둘의 모습에 한석원은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곧 한동안 김시현과 입씨름을 하고 있던 이서연은 이내 얼마 남지 않은 홀로그램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 오빠는 진짜 그대로일까?"
"……뭐, 우리야 바로 빠져나와서 나이를 먹기는 했지만, 그 녀석은 탑 안에 있었으니까 아마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겠지."
"그렇겠지?"
별 의미 없는 대화, 허나 튜토리얼 존을 보고 있는 3대 길드장의 눈빛에는 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아아, 알려드립니다. 15시 00분을 기점으로 튜토리얼 존을 오픈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대화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크 소리가 들리고, 그와 함께 어제 탑을 빠져나온 헌터들이 대기하고 있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쟤 뭐야?"
"……?"
"방어구를 안 입고 있네?"
"……츄리닝? 저거 츄리닝 아니야?"
열린 대기실의 문에서 스카우터들은 츄리닝을 입고 있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 4
004. 튜토리얼 탑의 고인물(4)
데이빗.
그는 헌터 협회 한국 지부의 소속되어 있는 외국계 A급 헌터로 어제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온 헌터들의 능력 측정을 위해 튜토리얼 존으로 파견을 나와 있는 상태였다.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온 헌터들에게 이 튜토리얼 존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중요한 자리 중 하나였다.
사실 원래 튜토리얼 존을 만들어진 이유는 회차마다 탑을 빠져나온 헌터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재기 위해 만들어졌다.
뭐, 지금에 와서는 이전의 의미보다도 길드나 국가에 소속되어 있는 스카우터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자리가 되어버렸지만, 그 의미가 어떻게 변질되든 튜토리얼 존은 헌터에게 무척 중요한 자리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저게 뭐야?'
그리고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 데이빗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협회에서 지급된 무기와 기본 방어구를 입은 수십의 헌터 사이에 껴 있는 한 명의 남자.
"……."
그가 입고 있는 것은 검은색 츄리닝이었다.
"하……."
거기에 신고 있는 건 삼선 슬리퍼.
그 어처구니없는 조합에 데이빗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려고 했으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저 녀석이 이번에 탑을 빠져나왔던 고인물인가 뭔가 하는 녀석인가?'
그렇게 생각한 데이빗은 다시 한번 그를 보았다.
긴장감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
'정말 저 녀석이 탑에서 12년 동안 살아남은 헌터라고?'
어처구니가 없다. 라는 생각이 데이빗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보통 튜토리얼 탑에 들어간 헌터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탑을 오르며 점점 성숙해진다.
탑에 끌려 들어간 남녀노소 그 모두가 목숨을 부지하고 현대로 돌아오면 일반인과는 굉장히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런데 저 모습은 무엇인가?
비록 죽지 않는 튜토리얼 존이라고 해도 탑에서 빠져나온 헌터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혹시라도 모를 사태에 대비해 무기를 들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맨몸.
입고 있는 건 그저 검은색의 츄리닝 한 벌과, 신고서는 제대로 달리지도 못할 것 같은 검은 삼선 슬리퍼가 끝이었다.
'……쯧.'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몇 번이고 입을 열고 싶다고 데이빗은 생각했으나, 이내 그는 억지로 시선을 돌리곤 말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저 녀석에게 신경 써봤자 남는 것은 없으니까.
[아아, 어제 다들 들었겠지만, 다시 한번 첫 번째 튜토리얼을 설명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데이빗이 입을 열자마자 한순간 그에게로 몰리는 시선.
[이 튜토리얼 존에서 치를 시험은 총 세 가집니다. 첫 번째는 여러분들의 앞에 보이시는 함정이 가득한 미로를 최단시간 안에 탈출하는 '미궁 탈출'입니다.]
그는 짧게 쉰 뒤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아시다시피 현대에는 던전 외에도 '미궁'이라 부르는 지역이 있습니다. 그 미궁 안은 무척이나 좁고 복잡하고, 또 많은 함정이 설치되어 있지요.]
이 첫 번째 튜토리얼은 그 미궁에 대한 적성도를 평가하기 위해 진행하는 튜토리얼입니다. 라고 마지막 말을 끝마친 데이빗은 곧 시선을 돌려 넓은 공터를 바라봤다.
축구장을 3개 정도 붙여놓은 크기의 거대한 공터.
허나 데이빗이 손에 들고 있는 버튼을 누르자 공터는 곧 변화하기 시작했다.
쿡…… 구그그그그그긍!!
드드드드드득!
기계음이 들리기 시작하고 아무것도 없던 거대한 공터 밑에서부터 벽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금세 사람 키를 훌쩍 넘어 높게 솟아오르는 거대한 벽들.
"와……."
헌터들은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압도된 듯 탄성을 내뱉고 있었고, 데이빗은 벽들이 전부 올라오자마자 튜토리얼 존 하늘에 있는 거대한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부터 30초 뒤, 저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할 때부터 헌터분들은 이 미로 건너편에 있는 출구로 탈출해 주시면 됩니다."
데이빗의 말과 함께 헌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올려 하늘에 떠 있는 홀로그램 시계를 보기 시작했고.
곧 시계의 타이머가 시작되었을 때, 헌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열려 있는 미로 안으로 달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들 열심히 하네."
그리고 수많은 헌터들이 미로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온 뒤, 그는 헌터 협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지난 12년 동안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 갑작스레 나타난 미궁과 던전,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몬스터.
그리고 그런 몬스터를 사냥하는 헌터.
물론 그 이야기 이외에도 현재 사회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헌터가 어떤 식으로 돈을 버는지까지.
나름대로 당장 중요한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그냥 다 때려치고 놀고 싶은데.'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사실 마음만 같아서는 이런 튜토리얼이고 뭐고 이것저것 맛있는 거나 먹고 잠이나 퍼질러 자며 적당히 쉬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12년 동안 먹을 필요도 없고 잘 필요도 없는 그곳에 갇혀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좀 쉬고 싶었다.
'아무래도 못 쉴 것 같긴 한데….'
"쯧."
김현우는 짧게 혀를 찼다.
'결국, 나오자마자 해야 하는 게 돈 걱정이라니.'
돈.
그것이 바로 김현우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처음 협회 소속 직원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들을 때만 해도 김현우는 설명 중 졸지 말라고 나눠준 젤리를 먹으며 가공식품의 위대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달콤한 젤리 맛을 보며 협회원에게 슬슬 12년 동안 바뀐 사회에 대해 듣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본능적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돈이 필요하다는 걸.
'그리고 이 튜토리얼 존이 신입 헌터들에게 중요하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는데…….'
그는 어제 12년 만에 느껴진 수면 욕구 덕분에 정말 편안하게 숙면을 취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김현우는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해 다른 헌터들이 들고 있던 장비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다른 헌터들이라면 땅을 치고 후회할 상황.
그러나 김현우는 별 신경을 안 쓰는 듯, 헌터들이 달려갔던 미로를 향해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저기요."
김현우의 목소리에 데이빗이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러지?"
딱딱한 말투.
묘한 적의가 섞여 있는 말투에 김현우는 슬쩍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개의치 않은 채 물었다.
"어떻게든 출구에 넘어가기만 하면 됩니까?"
김현우의 물음에 데이빗은 슬쩍 그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래, '무슨 수'를 써서든 출입구까지 도착하면 끝이다. 그런데,"
"?"
"그렇게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이 튜토리얼이 쉽다고 생각하는 건가?"
김현우의 몸을 위아래로 훑는 데이빗의 눈빛에는 명백한 적의와 한심함이 깃들어 있었다.
"오지랖은 저기 열심히 뛰어가고 있는 친구들한테 푸시면 될 것 같은데."
그리고 데이빗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어 낸 김현우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데이빗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쯧, 오만하군."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 데이빗, 그런 데이빗의 모습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나랑 내기 하나 할래?"
"뭐?"
데이빗은 갑작스레 반말을 내뱉기 시작하는 김현우를 보며 노기 어린 표정을 지었고, 김현우는 그와 대조되게 빙글거리는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내가 지금부터 출발해서 20초 안에 출구에 도착하는 거로 100만원빵, 어때?"
김현우의 말에 데이빗은 이제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헛소리도 정도껏 해라."
"왜, 후달려? 오지랖 부릴 만용은 있는데 책임은 지기 싫은가 보지?"
"뭐?"
"뭐, 후달리면 하지 마시던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데이빗은 자신의 주먹을 꽉 쥐더니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좋다. 네가 20초 안에 반대편 출구에 도착하면 내가 오늘 받는 일급이랑 보너스까지 해서 총 1,000만 원을 넘겨주지."
"1,000만 원…!?"
데이빗의 말에 깜짝 놀란 김현우.
'미친? 헌터 월급이랑 보너스가 그렇게 많아?'
헌터가 길드나 국가에 소속 되서 돈을 번다는 것은 들었으나, 정확히 얼마를 벌지는 듣지 못했기에 김현우는 깜짝 놀랐고.
"왜, 후달리나?"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착각한 데이빗은 비아냥거리는 시선을 보냈지만, 김현우는 오히려 활짝 웃으며 말했다.
"콜."
"뭐?"
"조금 있다 딴소리하지 마라."
김현우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데이빗을 향해 말한 뒤 미로 쪽으로 튀어나갔고.
"흡…!"
순식간에 강철로 만들어진 벽 근처에 다다른 김현우는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끄그그극……!
자세를 잡았던 발이 크게 돌아가며 아래에 있던 돌바닥이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한껏 비틀린 허리와 왼쪽 어깻죽지가 옆에 주먹이 올라온다.
마치 팽팽하게 시위를 당긴 발리스타처럼 장전된 김현우의 주먹이 어느 한순간을 기점으로 내밀어졌다.
그리고-
꽈가가가가가가각!!!!
강철로 만든 벽이 터져나갔다.
***
튜토리얼 존 한쪽 끝에 만들어 져있는 스카우트 룸은 신나게 헌터들을 품평하고 있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미친…."
"저게 뭐야?"
"와…."
스카우터들은 몇 번이고 자신의 귀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명을 느끼며 저마다 허탈한 듯한 웃음을 지었고, 그것은 스카우트 룸에서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던 길드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쟤 예전에도 저렇게 또라이 새끼였나?"
"허…."
한석원이 멍하니 말하고 김시현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이서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체 그저 멍하니 눈앞에 만들어진 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미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던 튜토리얼 존의 미로는 김현우로 인해 미로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미로를 뚫었다고?"
"미쳤군, 미쳤어…!"
"통짜 강철로 만든 미로벽 중간을 전부 뚫어버리고 출구에 도착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
"이렇게 되면 등급 측정은 어떻게 되는 거야…?"
헌터들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있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횡설수설하며 미로의 출구에 서 있는 김현우를 바라보는 스카우터들.
그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몸에는 검은색 츄리닝을 입고 있었고, 발에는 제대로 뛰지도 못할 것 같은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는 김현우.
미로를 완전히 개 박살 냈으면서도 무척이나 태평해 보이는 김현우의 모습에 스카우터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나갔고-
"아니, 이거 마력 사용한 거 아니야?"
"튜토리얼 탑에서 이제 막 나온 헌터가 어떻게 마력을 사용해!?"
"그건 그런데…… 아니, 애초에 2006년부터 있던 헌터니까 탑 안에서 마력을 깨달았을 확률은?"
"그럴 리가 있나, 애초에 탑 안에는 마력이 존재하지 않아서 마력을 수련 할 수 없다고…!"
그것은 스카우터룸에 같이 서 있던 길드장들도 마찬가지였다.
"…12년 동안 탑 안에 있었다더니, 진짜 괴물이 돼버렸군."
"마력을 안 쓰고 저 정도 출력이 나온다면…."
"진짜로…… 미쳤잖아?"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은 이서연이 입을 열고, 한석원과 김시현이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린다.
그렇게 한순간 벌인 일로 다른 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김현우는,
'…생각해 보니까, 이거 설마 배상하라고 하는 거 아니겠지?'
완전히 박살 나버린 강철 벽들을 보며 괜스레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 5
005. 튜토리얼 탑의 고인물(5)
[흠흠……. 첫 번째 튜토리얼인 '미로'에서 문제가 생겨 더 이상 튜토리얼을 진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에 튜토리얼을 보류하겠습니다.]
마이크에서 나오는 목소리와 함께 완전히 박살 나 버린 강철 벽들이 구그긍거리는 기계음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스카우트룸 바로 맞은편에 있는 뉴스룸에서는-
"야! 조금 전에 그 장면 찍은 사람! 찍은 사람 없어?"
"지금 그 장면 찍은 거 넘기면 바로 현찰로 100 쏴드릴게요. 없습니까?!"
"정 기자. 우리 남 아니다? 저번에 내가 특종 물어줬던 거 기억하지!?"
그야말로 난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 그걸 못 찍다니……!"
현재 한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신문 매거진인 '헌터 헌팅' 소속의 기자 이창훈은 인상을 찌푸리고 머리를 긁으며 짜증을 냈다.
"아…… 씨발. 그거 찍었으면 그냥 오늘 쫑 내고 가도 될 정도였는데……!!"
그 옆에 있던 '라이프 헌터' 매거진 소속인 '이준성'도 마찬가지로 이창훈의 옆에서 얼굴을 쓸어내리며 낙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
"아! 시발 '이강현'이 튜토리얼 탑 들어가기 전에 검도 4단이었다길래 집중 조명해서 찍고 있는데 다 망했네."
"아니, 츄리닝 입고 나온 정신병자가 진짜 저럴 줄 알았냐고."
이준성은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출구 근처에서 외국계 헌터인 데이빗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현우를 보았다.
이준성과 이창훈을 포함한 기자들 모두, 맨 처음에는 고인물에 대한 기대를 키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인물'은 탑 안에 갇혀 있었다고 해도 꾸준히 다른 사람에 의해 커뮤니티나 대중매체에 언급되었던 인물이었고.
최근 한국을 대표하는 3대 길드장이 나오는 '헌터를 알다'에서도 언급이 되었었다.
그렇게 최근 '헌터를 알다'로 인해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고인물'이 12년간의 공백기를 깨고 탑으로 나왔다고 했을 때, 기자들은 직감했다.
이건 특종감이라고.
허나 그가 튜토리얼 존에서 츄리닝과 슬리퍼를 질질 끌고 등장했을 때, 기자들은 그 기대감이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
튜토리얼 탑에 12년 동안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느긋한 표정.
처음 그곳에서 절반, 기자들의 카메라는 원래 생각해 놨던 세컨드 헌터를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튜토리얼 존이 시작되었을 때,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고인물을 보면서 나머지 대부분의 기자들이 카메라를 돌렸다.
그나마 끝까지 남아 그에게 카메라를 들이밀던 기자도 있었으나, 그는 한가한 표정으로 관리헌터와 이야기를 나누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결국 카메라를 돌려 버렸다.
어차피 움직이지 않는 '고인물'을 찍는 것보다 다른 헌터를 찍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것은 기자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애초에 뒤통수도 아니었지만, 이창훈은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혼란스러움이 이어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기자 중 그 누구도 고인물의 모습을 찍지 못했다는 것이 확인된 뉴스룸 안에 마이크 소리가 울렸다.
[그럼 지금부터 곧바로 두 번째 튜토리얼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이런 미친……."
"저게 말이 되냐?"
"하……."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남자. '이강현'은 저 멀리서 관리 헌터인 데이빗과 이야기를 하고있는 김현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실화야…?"
김현우와 함께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온 15회차 헌터이자.
그 헌터들 중에서는 현재 가장 강하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 그, '이강현'은 어제 발록을 잡고 있을 때 느꼈던 '공허감'을 절찬리에 다시 느끼고 있었다.
'아니 시발, 분명히 츄리닝 입고 왔잖아…!!'
처음 탑에서 고인물 이라고 불리는 김현우가 빠져나왔을 때 그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강현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었으니까.
처음 탑에 들어갔을 때부터 그는 끊임없이 노력했다.
다른 헌터들과 합을 맞춰 탑을 올랐지만, 그는 굉장히 영리하게 다른 이들과 합을 맞추며 자신의 이득을 챙겼고, 다른 이들보다 위에 있기 위해 몇 배고 노력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탑의 100층을 뚫고 나와 처음 자신의 가치가 매겨지는 이곳에서, 다른 헌터보다 성공적으로 헌터계에 데뷔하고 싶었기에 그는 노력했다.
'그런데…….'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는 이강현의 눈에 원망과 적의가 깃들었다.
솔직히 조금 전, 튜토리얼 때만 해도 이강현은 그를 보고 안심했다.
김현우는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협회에서 지급한 츄리닝과 방 안에서 신고 있으라고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었으니까.
튜토리얼을 할 마음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추례한 모습.
그렇기에 솔직히 안심했다.
그런데-
"시발 이게 뭐야……."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튜토리얼을 할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던 김현우는 모든 헌터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는 이 튜토리얼을 눈 깜짝할 새에 클리어해 버렸다.
그것도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방법으로.
'젠장...!'
이강현이 그를 적의 어린 눈빛으로 노려본 것도 잠시.
'아직, 아직 아니야.'
한동안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던 이강현은 슬쩍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전부 끝난 게 아니다.'
두 번째 튜토리얼이 남아 있다는 것을 상기한 이강현은 자신을 고개를 슬쩍 저으며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중얼거렸다.
"다음 튜토리얼에서 전력을 보이기만 하면."
'아직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찬스는 남아 있다.'
이강현은 현대로 돌아오자마자 준비할 수 있었던 자신 나름의 '무기'를 생각하며 김현우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
튜토리얼 존에서 치르는 두 번째 튜토리얼은 바로 존 내에서 만들 수 있는 가상 몬스터를 사냥하는 '몬스터 웨이브'였다.
크루르르륵!
가상현실이 아닌 실제라고 해도 될 정도로 현실적인 모습을 가진 오크가 헌터의 머리 위에 도끼를 찍어 내렸다.
깡!
그런 오크의 공격에 헌터는 간단히 몸을 오른쪽으로 트는 것만으로 공격을 피했고, 곧바로 쥐고 있던 검을 이용해 오크의 목에 칼을 박아 넣었다.
푸욱!
목에 칼이 꽂히자 입자처럼 변해 사라지는 오크.
"…진짜 신기하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감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설명을 듣기로는 미궁 안에서 얻은 아티팩트와 몬스터가 뱉어내는 마정석, 그리고 과학기술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가상 몬스터'는 정말 실제 몬스터와 비슷했다.
김현우가 그렇게 신기해하며 만들어진 가상 몬스터와 싸우는 것을 얼마나 지켜보았을까?
[시험 종료.]
천장에 있던 홀로그램이 '시험 종료'라는 표지판을 만들고 그와 함께 헌터가 상대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입자로 변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32번 지천웅 헌터, 사살한 몬스터 총 36마리입니다.]
그 뒤에 들리는 마이크 소리.
조금 전까지 몬스터를 사냥하던 헌터 지천웅은 성적을 듣고 만족했는지 대기실 쪽으로 몸을 돌렸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스카우터룸은 훈훈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번에 참가한 헌터들의 수준이 대부분 준수한데?"
"그치? 저번 15회차 헌터들이 혼자 사냥했을 때, 평균적으로 제한시간 내에 27마리 정도가 평균 아니었나?"
"그러게 말이야."
"전체적으로 지금까지 보이는 실력은 준수하구만."
"맞아, 고인물을 제외하고서라도 무난하군."
스카우터들이 각자 들고 있는 노트북이나 스마트 패드에 무엇인가를 적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33번 이강현 헌터는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이크 소리와 함께 자리에 앉아있던 이강현이 공터로 나서자 스카우터들은 금세 화제를 전환했다.
"이강현인가, 걔지? 탑에 들어가기 전에 국제 검도 대회를 우승했다고 하는."
"맞아."
"능력은 어떠려나?"
"아까 볼 때는 고인물이 시험장을 망쳐놓지만 않았으면 1등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게다가 저런 쪽으로 운동을 하다 탑에 들어간 이들은 기본적으로 능력도 괜찮으니까 볼만하겠는데?"
스카우터들은 그런 말을 하며 어느새 공터 한가운데 서 있는 이강현을 보았다.
[제한시간은 2분,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이크 소리와 함께 튜토리얼 존에서 재현할 수 있는 기본 몬스터인 '오크'들이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지지지직! 파지직!!
"어!?"
"뭐야!?"
스카우터들은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강현이 들고 있는 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봤다.
파지지직!
"뇌전!?"
"뭐야 신규 헌터가 벌써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스카우터들이 한순간 크게 술렁이고, 그와 함께 이강현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달려가 눈앞에 있는 오크를 베고, 곧바로 옆으로 몸을 틀어 오크의 몸을 어깨로 밀며 주둥아리 아래에 칼을 꽂아 넣는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공격으로 한순간에 세 마리의 오크를 처리한 이강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한석원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대단한데? 탑에서 나온 지 단 하루 만에 마력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다니."
"저 정도면 천재 수준인데?"
한석원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김시현은 이강현을 바라봤다.
처음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온 모든 헌터들은 마력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튜토리얼 탑' 안에서는 마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헌터는 탑에서 빠져나오고 난 뒤 후천적으로 마력을 익혔고.
마력을 얼마나 잘 사용하냐에 따라 차후 등급이 달라질 정도였기에, 헌터들은 마력 등급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이강현이 검에 두르고 있는 뇌전은,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일반 헌터라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일는 일이고 별 다른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겠지만-파지지직!
그게 탑에서 나온 지 단 하루밖에 되지 않는 헌터라고 한다면 그 이야기는 달라졌다.
[33번 이강현 헌터, 사살한 몬스터 총 78마리입니다.]
"78마리!"
"대박이다!"
"마력을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서 전투 센스 자체도 엄청 뛰어나잖아?"
대기실로 돌아가는 이강현의 뒷모습을 보며 스카우터들은 각자 들고 있는 수첩이나 전자기기에 무엇인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고.
이강현은 슬쩍 시선을 돌려 바쁘게 무엇인가를 적어나가고 있는 스카우터들을 보며 소리 없는 웃음을 짓고는 생각했다.
'좋아 성공이다...! 이걸로 시선을 끌었어!'
그렇게 이강현이 자신의 성적에 만족하며 대기실로 돌아갔을 때,
[34번 김현우 헌터는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고인물의 이름이 불렸다.
"나왔다."
그와 함께 집중된 이목.
열려 있는 문에서 걸어 나오는 그는 여전히 첫 번째 튜토리얼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협회에서 지급한 검은색 츄리닝과, 검은색의 삼선 슬리퍼, 느긋해 보이는 표정은 그가 과연 튜토리얼을 수행하러 왔는지 놀러 왔는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허나 그런 추레한 모습으로 등장한 김현우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스카우터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것은 뉴스 룸에 있던 기자들도 마찬가지였고, 대기실에 있던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제한시간은 2분,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이크에서 나오는 목소리와 함께 주변에서 오크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완벽하게 모습을 갖춘 오크들이 김현우에게로 몸을 움직인다.
그 모습을 보며 여유로운 웃음을 짓는 그.
그리고-
꽈드드드드드드득!!!!!
김현우의 발길질 한 번에 튜토리얼 존의 돌바닥이 무참히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 6
006. 고인물을 대하는 법(1)
"저게 뭐야 미친……."
뉴스룸에서 김현우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캠코더를 들고 있던 이준성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며 찍고 있던 캠코더를 내렸다.
그것은 뉴스룸에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카메라, 액션캠 등등의 촬영 장비들은 모두 기자들의 손에 들려 있었지만, 그것들은 튜토리얼 존에서 일어나는 일을 찍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두 눈으로 튜토리얼 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도대체……."
이준성의 옆에 있던 이창훈이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내뱉으며 튜토리얼 존 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튜토리얼 존 안쪽.
콰직!
그곳에는 학살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준성의 눈에 부서진 돌조각과 함께 이제 막 만들어져 부서진 바닥을 딛고 중심을 잡은 오크가 보인다.
그리고 그런 오크의 앞에 지금 튜토리얼의 진행하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콰득!
김현우는, 오크의 머리통이 사라짐과 동시에 같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는 없었다는 듯, 머리통이 날아간 오크의 앞에서 사라진 김현우는 어느덧 다른 곳에 나타나 또 다른 오크의 머리통을 부수고 있었다.
부수고, 부수고, 또 부순다.
김현우의 이전에 나왔던 이강현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어떻게 보면 투박하고 단순한 작업의 반복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 행위.
허나 그런데도 기자들이 김현우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저게……신입 헌터의 속도라고…?"
빠르다.
김현우는 여태껏 봐온 그 어떤 헌터보다도 빨랐다.
이제 막 데이터 덩어리에서 벗어나 육체를 가지게 된 오크가 체감상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머리가 터져 다시 데이터 쪼가리로 변화한다.
분명 튜토리얼 존 오른쪽 끝에서 오크의 머리통을 터뜨리고 있던 김현우는 1초 뒤에는 전혀 다른 곳에 서 있었다.
마치 A등급 헌터 중에서도 마법사만이 사용하는 '블링크'를 사용하는 것처럼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뉴스룸의 기자들이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말없이 튜토리얼 존을 보고 있을 때, 그 반대편에 있는 스카우트룸은-
"..."
뉴스룸과 마찬가지로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스카우터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던 패드와 종이서류에서 눈을 뗀 채 튜토리얼 존에서 일어나는 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의 뒤에서 마찬가지로 튜토리얼 존을 내려다 보고 있던 한석원은 진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보이나?"
"…흐릿하게 보이네요."
"나도 마찬가지야."
그의 중얼거림에 대답한 이서연과 김시현은 한석원과 같은 표정으로 튜토리얼 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마력을 사용하는 것 같진 않은데, 저게 마력을 사용하지 않은 인간의 움직임이라고?"
"도대체 탑에서 혼자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이서연이 허탈한 듯 중얼거리자 그 앞에 있던 김시현이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한석원은 튜토리얼 존에 시선을 집중했다.
정확히는 튜토리얼 존 내부를 빠르게 돌아다니고 있는 김우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무투계인 나도 잔상이 그저 흐릿하게 보일 정도라니.'
무투계는 몬스터의 지근거리에서 전투를 이어나가야 하는 헌터들이기에 여타 다른 헌터보다도 그 눈이 월등히 좋았다.
그리고 한석원은 그런 무투계 중에서도 한국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실력자였다.
한석원의 눈이 쉴새 없이 움직이며 김현우가 있는 곳을 쫓는다.
오른쪽 아래, 왼쪽 위, 중앙 아래.
흐릿한 잔상만을 남기며 계속해서 이동하는 김현우.
그 모습을 한동안 쫓고 있던 한석원은 이내 자신이 그 김현우의 모습을 더 자세히 바라보기 위해 마력을 사용했다는 것을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완전히 괴물이 돼버렸군."
한석원이 묘하게 허탈한 투로 뇌까림과 동시에-
[시험… 종료.]
두 번째 튜토리얼이 끝이 났다.
그와 함께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튜토리얼 존 내부, 뉴스룸 기자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던 김현우는 어느새 자신이 처음에 서 있던 그곳에 선 채 느긋하게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고,
곧-
[34번 김현우 헌터가 사살한 몬스터는…… 초, 총 248마리입니다.]
그 말을 들음과 함께, 김현우는 피식하고 웃음 지으며 몸을 돌렸다.
***
대한민국 종합 헌터 관련 커뮤니티인 '헌터 킬'에서는 오늘 오후에 올라온 한 영상이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저게 뭐야 미친…….
헌터킬에 올라온 화제의 영상의 첫 부분에서는 욕설 섞인 목소리가 별다른 변조 없이 그대로 흘러나왔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가지 욕설이 영상 안에 잡혔지만, 평소에 자극적인 기사로 사람들을 끌어모아 기자들을 싫어하는 회원들도 영상에 잡힌 욕설에 대해서는 별 댓글을 달지 않았다.
오히려 영상 속에 흘러나오는 욕설을 들으며 오히려 공감한다는 듯 댓글을 달기도 했다.
그 정도로, 현재 헌터킬을 달구고 있는 그 영상은, 헌터 관련 이슈를 좋아하는 회원들에게는 무척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댓글 1342개
내가바로달님이다: 뭐지? 내가 무엇을 본 것이지?
ㅁㄴㅇㄹ: 와 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저거 뭐냐? 진짜 머임? 저거 튜토리얼 존 두 번째 시험 맞지?
ㄴ윤원아꽃길만걷자: ㅇㅇ 맞다. 그보다 진짜 영상 실화냐? ㅋㅋㅋㅋ 처음 볼 때 나는 S등급 마법사인줄 알았다. 진짜 블링크 쓰는 줄 알았어.
ㄴ미스터퀀시트리: 나 영상 보면서 영상 안에 있는 녀석들이랑 똑같은 말이 입안에서 흘러나왔음ㅋㅋㅋㅋㅋ알랄랄라랄: 야 시발 저게 뭐야? 저게 뭐냐고!!! 쟤 마법사임? 그냥 블링크 쓰는 것 같은데? 근데 신입들은 마력 못쓰지않냐? 도대체 저거 머임?
ㄴSSS랭크: 들어보니까 마력 사용 못 하고 그냥 순수하게 신체능력으로 움직인다고 하는데…… ㅅㅂ 카메라에서도 안 잡히고 그냥 순수하게 신체 능력으로 움직인다고 하니까 어처구니가 없다ㅋㅋㅋㅋㅋㅋㅋㅋㄴA급헌터: ㅁㅊ 저런 애가 마력 등급 올려서 마력 사용하면 퀵실버처럼 변하는거 아니냐? 응?
ㄴ도둑맞은빡빡이: ㅅㅂ 그냥 지금도 퀵실버 그 자체인데? 저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거 중국 S등급 헌터중에 미령인가? 걔밖에 못 본 것 같은데.
저세상헌터: 저 사람이 그 이번에 12년 만에 탑에서 빠져나왔다는 그 고인물이냐?
ㄴ 안동시헌터: ㄹㅇ, 쟤 그 사람 맞음.
ㄴ 너돈좀많아보인다: 머야? 쟤가 걔였음? ㅁㅊ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실화냐. 그냥 도시괴담인 줄 알았는데 진짜라고?
ㄴ 고인물그자체: 자세한 건 ->https://namu.wiki/w/%BC#s-2고인물헌터#은#// 여기서 보고 나 저번에 고인물이 춤추면서 탑 클리어했다고 올린 사람인데 내말이맞지? ㅅㅂ.
....
...
..
.
튜토리얼이 끝난 뒤 헌터 협회 측면에 붙어있는 헌터합숙소의 휴게실.
"으아아아아 이런 씨발!"
이강현은 인상을 쓰며 아무것도 없는 책상을 내리쳤다.
콰직!
튜토리얼 탑을 빠져나온 헌터답게 근력 능력치가 올라있는 이강현의 주먹은 책상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었지만, 그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은 체, 침대에 기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내가 얼마나 준비를 했는데……!!'
튜토리얼 탑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탑을 빠져나온 이때까지 단 한 번도 긴장을 끈을 놓쳐 본 적이 없었다.
탑에 들어오자마자 이것이 기회라는 것도 모른 체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다른 녀석들을 조소하며 자신은 어떻게든 이 기회를 휘어잡기 위해 노력했다.
탑 내에서 몬스터의 막타를 치면 등급이 올라간다는 소리에 몰래몰래 몬스터의 막타를 치고, 다른 헌터들은 쉰다며 잠을 청할 때, 그들을 비웃으며 자신은 훈련에 몰두했다.
성공하고 싶어서.
튜토리얼 탑을 빠져나왔을 때 그 누구보다 빛나고 싶어서…!
"그런데…그런데…!!"
꽝! 우지지직!
저도 모르게 후려친 침대의 프레임이 찌그러졌지만 아프다는 기색도 없이 이강현은 분노한 채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 자식이…! 그 개자식이…!'
한참 괴담만 무성하던 '고인물'.
그 녀석이 갑작스레 같이 빠져나오게 되며 이강현의 노력은 허망한 잿빛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분명 처음에는 제대로 다루기도 힘들다는 마력을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이강현은 그 고인물의 행동에 묻혀 자신에게 향할 스포트라이트를 전부 빼앗겨 버렸다.
"하…… 이런 시발……."
이강현은 그렇게 욕짓거리를 하며 아까 전 김현우의 시험을 치렀던 장면을 떠올렸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눈을 한번 깜빡일 때마다 오크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그 모습.
"씨발 신새끼야 이게 평등이냐!!!!"
김현우가 시험을 치루던 모습을 떠올리던 그는 평소에 믿지도 않는 신에게 쌍욕을 하며 이를 으득 갈았다.
***
"이게 뭡니까?"
"이번에 김현우 헌터를 만나고 싶어 하는 길드 목록이에요."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을 일정 시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협회 합숙소의 휴게실에 앉은 김현우.
그는 앞에 내민 서류뭉치를 받아들고는 이내 자연스레 자신의 앞에 앉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아,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한국 헌터 협회에서 정보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앨리스라고 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에게 명함을 건네주었고, 그것을 무심하게 받아든 김현우는 명함을 츄리닝 주머니에다 아무렇지도 않게 쑤셔 넣은 뒤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헌터 협회에서 보호받는 며칠 동안 김현우는 조금 더 현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들었다.
헌터들의 주 수입원이 되는 미궁과 던전, 그리고 그런 헌터들을 위해 만들어진 길드.
그 이외에도 헌터 합숙소에서 나갈 때쯤이면 튜토리얼 존을 관람했던 있던 길드에서 마음에 드는 헌터에 한해 영입 제안을 하러 올 거라고 듣기도 했다.
"근데 협회 정보부장이 왜 제게 길드 목록을?"
그렇기에 그는 궁금했다.
김현우가 저번에 듣기로는 분명 길드 목록을 전해주는 것은 합숙소를 관리하는 관리원이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물음에 앨리스는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뭐, 사실 제가 굳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되지만 그냥 궁금해서요."
"?"
"당신은 꽤 유명인사라서요. 거기에 덤으로 전해주고 싶은 것도 있고요."
"전해주고 싶은 거?"
김현우의 되물음에 앨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김현우가 들고 있던 서류 위에 서류 뭉치 하나를 더 올려놓았다.
"……아레스 길드?"
"한번 읽어 보세요."
앨리스의 말에 따라 김현우는 원래 들고 있던 서류를 놓고 현재 자신의 위에 올라와 있는 서류를 쭉 넘기며 대충 훑어보다 말했다.
"이거, 계약서네요?"
"네, 계속 읽어 보세요."
앨리스의 말에 김현우는 계속해서 계약서를 뒤로 넘겼고, 이내 곧 경악 어린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미친……!"
'이게 얼마야!?'
김현우는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에 놓고 손가락까지 짚어가며 계약금의 숫자를 세어보기 시작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팔십억……!?"
80억.
그 거대한 숫자가 일순 김현우의 머리를 복잡하게 어지럽혔다.
# 7
007. 고인물을 대하는 법(2)
한순간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하니 계약서를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앨리스를 보며 말했다.
"여기 써져 있는 거, 80억 맞아요?
어느새 묘하게 불량한 어투에서 미묘하게 공손하게 바뀐 김현우의 말투에 앨리스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앨리스의 물음에 말없이 입을 벌리고 있던 김현우는 멍하니 계약서를 읽어 나갔고, 이내 그가 계약서를 다 읽자 앨리스는 말했다.
"그게 아레스 길드가 처음에 당신을 영입하기 위해 제시한 계약금이에요."
"아레스 길드가?"
"만약 계약서에 쓰여 있는 2년의 계약이 만료된 시점에서 당신이 원한다면 아레스 길드에서는 처음 제시한 계약금의 2배를 지불하고 당신과 재계약을 할 의사도 있다고 하더군요."
"2배……? 그럼…… 160억?"
"네."
"허,"
그 말을 듣고 김현우가 헛웃음을 지었고, 앨리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 이외에도 미궁 내에서 얻은 마정석과, 던전에서 얻은 전리품의 권리도 일정 부분은 길드에 내줘야겠지만, 비율은 김현우 헌터가 더 높을 겁니다."
이어지는 앨리스의 말에 말없이 앨리스와 계약서를 몇 번이고 바라본 김현우는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우리나라 화폐 가치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까?"
"네?"
"아니, 그…… 있잖아요? 짐바브웨 달러처럼, 혹시 제가 없는 12년 사이에 그렇게 된 게 아닐까……."
김현우가 의심 어린 눈빛으로 앨리스를 바라보자 그녀는 말했다.
"한국의 화폐 단위는 그대로예요. 물론 김현우 헌터야 탑에서 12년 동안 갇혀 있었으니 좀 괴리를 느낄 수도 있겠네요."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갈색 머리를 넘기며 뭔가 고민을 하는 것 같더니 말했다.
"탑에 들어가기 전에 어디 살고 계셨죠?"
"천호동이요. 강동구 천호동쪽."
"잠시만요."
김현우의 말에 앨리스는 뭔가를 검색해 보는 것 같더니 말했다.
"2006년 강동구 천호동 빌라가 3억인데 지금은…… 13억이네요??"
"……."
앨리스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김현우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녀를 바라보자 앨리스는 흠흠 하고 괜히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김현우 헌터,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지난 12년 동안 한국은 땅값이 좀 많이 올라서… 다들 이 정도는 올랐습니다."
"……정말이요?"
"네, 그럼요."
마치 영업사원처럼 일말의 거짓말도 묻어 있을 것 같지 않은 투명한 웃음에, 김현우는 시선을 누그러뜨리려다 이내 응? 하는 느낌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헌터 협회 정보부장이라고 했던데 왜 길드 계약서를……?"
"제가 그쪽에 좀 연이 있어서…… 그쪽의 스카우터가 꼭 좀 전해달라고 그러더라고요."
'……분명 협회 합숙소의 기간이 끝나기 전까지 직접 헌터에게 계약서를 넘기는 건 위반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앨리스의 말에 김현우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들고 있던 계약서를 내려두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앨리스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 저는 길드에 가입할 생각이 없는데?"
"네?"
"길드에 가입할 생각 없다고요."
앨리스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묻자 돌아온 대답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 실풋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 심하시네요."
"아닌데요."
"네?"
"농담 아니라고요."
무척이나 여유롭고 담담하게 말하는 김현우의 태도.
순간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앨리스는 표정이 굳었으나, 이내 억지로 어색한 웃음을 만들며 물었다.
"길드에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요?"
"네."
"저기, 김현우 헌터가 아레스 길드가 내건 조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뇨, 굳이 설명 안 해주셔도 돼요. 조금 전에 계약서 읽어보고 대충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으니까."
"그럼 도대체 왜…….?"
앨리스의 이해를 못 하겠다는 말투에 김현우는 슬쩍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굉장히 건방진 자세에 앨리스의 눈이 슬쩍 꿈틀했지만, 그는 느긋하게 말했다.
"원래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잖아요?"
"……."
"그런데 이 정도의 계약금을 주는 거라면 저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죠."
세상은 기브앤테이크.
주어진 무엇인가에 대가가 없는 것은 없다.
김현우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80억을 받고 아레스 길드에 들어가 당장 돈이 많이 생긴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저는 좀 편하게 살고 싶거든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느긋하게."
그의 자신감 넘치는 백수 선언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본 앨리스는 물었다.
"그렇다면 헌터 활동을 하지 않으실 생각인가요?"
"아뇨, 그건 아닌데. 제가 여기서 들어보니까 또 혼자 활동하는 헌터들도 있다 하더라고요."
용병.
그들은 길드에 가입되어 있지 않고 혼자 미궁을 도는 헌터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용병에 대해서 좀 일찍 알았다면 튜토리얼 존 나가지 말고 잠이나 더 잤을 텐데.'
하필이면 튜토리얼 존이 끝나고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기에 김현우는 괜히 시간을 손해 본 기분을 느꼈었다.
김현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의 말을 파악한 앨리스는 반박했다.
"미궁을 탐험하는 용병을 말하는 거라면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길드를 거쳐 이미 어느 정도 성장을 한 헌터라고 말해드리고 싶군요."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과연 길드를 거치지 않고 제대로 성장도 하지 않은 당신이 그 용병들처럼 혼자 미궁을 탐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앨리스의 말에 김현우는 빙글거리는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될 것 같은데요?"
"네?"
"말 꼭 두 번 하게 하시네, 될 것 같다니까요?"
"…오만하군요."
"글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이 사람, 진심인가?'
한동안 그의 진의를 파악하려던 앨리스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곤 휴게실의 입구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뭐, 그래도 우선 부탁받은 거니까 혹여나 생각이 바뀌시면 제가 드린 명함으로 전화를 주세요."
"네. 뭐……."
흥미 없다는 듯 대답하는 김현우.
'아마 지금 당장 헌터 업계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서 저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한번 두고 보도록 하죠.'
앨리스는 그가 자신감이 넘치는 이유를 '정보 부족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라 치부하곤 조소를 지으며 휴게실을 빠져나갔고.
김현우는 앨리스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무의식적으로 아까 계약서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길드 목록을 바라봤다.
'한번 봐 볼까.'
딱히 길드 가입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심심했기에 길드목록이 적혀 있는 서류를 들어 올렸고.
곧, 길드목록을 쭉 읽어 나가기 시작한 김현우는-
"어?"
그곳에서 무척이나 그립고 익숙한 이름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서울 길드 길드장 김시현? 그 아래는 고구려 길드 길드장인 한석원…… 그리고 그 아래는……."
화랑 길드 길드장 이서연.
"혹시?"
김현우는 문득 12년 전, 자신이 처음 튜토리얼 탑에 들어왔을 때, 100층까지 함께했던 동료들을 떠올렸다.
100층까지 올라오며 그때 당시에는 이길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발록을 죽이고 남았던 4명의 동료.
그중에서도 가장 친하게 지냈던 3명의 이름이, 길드 목록에 차례대로 쓰여 있었다.
***
5일 뒤, 헌터 협회 측면에 있는 헌터 합숙소 앞.
"이번에는 좀 빨리 왔네? 옛날에 맨날 형 붙잡고 찡찡거리던 걸 생각해 보면 보고 싶은 마음에 한 걸음에 달려온 건가?"
서울 길드장, 김시현의 놀림 어린 물음에 이서연은 가늘게 뜬 눈으로 한석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빨리 오지 않았어? 평소에는 맨날 지각하잖아? 한국 연합 길드 모임 때도 지각, 방송 출현에도 지각, 튜토리얼 존에서도 지각-"
"조용히 좀 해 이 쿨병환자야!"
이서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빽 소리치자 한석원은 그 둘을 보더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 그만하고, 그보다 김시현, 너는 기분이 어때?"
한석원이 묻자 김시현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앞을 바라봤고.
"뭐, 별생각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포커페이스를 지키려고 했으나-
"그래? 예전에 탑 8층에서 오크한테 머리통 깨지고 오빠한테 달라붙어서 며칠 동안 질질 짰……."
"마ㅣ너이ㅏ너!!! 뭔 개소리야!"
"왜? 내가 없는 말 했어?"
이서연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야기에 그는 얼굴을 붉히며 이서연을 째려보았다.
한석원은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다들 안 그런 척을 해도 은근히 들떴군.'
평소에는 둘이 있더라도 이렇게 티격태격하지 않는데, 오늘은 유독 긴장이 되는지 둘은 서로의 흑역사를 꺼내며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하긴, 12년 전 우리를 이끌던 녀석은 그 녀석이었으니.'
한석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12년 전, 자신이 튜토리얼 탑을 오르던 때를 가볍게 회상했고-곧, 합숙소의 문이 열림과 함께 그가 빠져나왔다.
***
목동에 있는 한 고급 일식 레스토랑의 단독 룸.
언뜻 보기에도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인테리어를 가지고 있는 그곳에서, 김현우는 무엇인가 낯설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본 뒤, 이내 앞에 앉아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차례대로 석원이 형이랑 서연이, 그리고 시현이라 이거지?"
김현우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묻자 한석원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래 맞다. 몇 번이나 물어볼 생각이냐?"
한석원의 말에 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보호 기간이 끝난 7일째. 김현우는 그제야 합숙소의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합숙소에서 요청한대로 12년 전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김현우가 처음 나왔을 때 그 세 명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아니, 진짜 나랑 같이 탑을 오르던 그때랑은 좀 달라졌으니까 그렇지."
'그냥 달라진 것도 아니고…….'
김현우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대며 앞에 앉아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12년 전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였던 한석원은 어느새 얼굴이 주름진 아저씨로 변해 있었다.
그 외에도 내 뒤에서 항상 찡얼거리던 자존감 제로였던 고등학생 김시현은 꽤 멀쩡하게 생긴 미남이 되었고.
나이가 어려서 정신적으로 여려 많이 챙겨줬던 중학생 이서연은 아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김현우는 멍하니 그들의 모습을 둘러보다가 룸 안에 음식이 나올 때쯤 돼서야 입을 열었다.
"너 진짜 김시현 맞지? 50층 보스 상대하기 전까지는 항상 내 뒤에 붙어서 찡ㅉ……."
"ㅁ니어ㅤㅣㅂㅈㄱ배ㅑ겨!!! 아니 뭐 그런 걸 기억하고 있어요!?"
김시현이 포커페이스를 깨뜨리고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리는 것을 보며 김현우는 피식 웃은 뒤 이번에는 이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14층에서 벤시보고 오ㅈ……."
"거기까지, 그 이상 말하면 오빠라고 해도 가만 안 둘 거예요?"
이서연이 웃음을 지으면서도 살벌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하자 김현우는 그제야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야…이서연 성격 드러운 거 보면 진짜구나."
"뭐욧?!"
이서연의 눈가에 힘을 준 체 김현우를 바라봤으나, 그는 오히려 이 상황이 즐거운 듯 키득거리며 말했다.
"진짜 너희들 엄청 많이 달라졌다."
"저희는 오히려 오빠가 아무런 변화도 없으니까 위화감이 느껴지네요."
이서연의 말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탑에 있는 12년 동안은 나이를 먹지 않았으니까."
그의 말에 이서연과 김시현, 그리고 한석원은 마주 앉아 있는 김현우를 보며 똑같이 생각했다.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튜토리얼 탑에서 봤던 그 모습에서, 그는 마치 시간이 멈춰 있었던 것처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 목소리부터 시작해서 외모, 그 이외에도 지금 당장 보이는 자신감 넘치는 말투나 자연스레 장난을 거는 친근감 있는 모습까지.
그것은 전부 앞에 있는 이가 틀림없는 김현우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현우는-
"와 씨……! 이거 존나 맛있다!"
에피타이저로 나오는 초밥을 간장에 찍어 먹으며 12년 만에 먹는 초밥에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감동하고 있었다.
# 8
008. 고인물을 대하는 법(3)
김현우가 초밥의 맛에 황홀함마저 눈물을 찔끔거리자 김시현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뒤 말했다.
"옛날에 형이 맨날 그랬잖아요?"
"뭘?"
"기억 안 나요? 형 맨날 70층 오를 때 어인들 잡으면서 맨날 초밥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잖아요."
"……그랬었나?"
김현우가 슥 고민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자 이서연이 기억났다는 듯 풋 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 그때 기억난다. 석원이 형 칼 빌려서 어인 꼬리 잘라다가 회친 거 말하는 거지?"
"서연이가 말하니까 기억나는군, 그때 현우가 내 칼 들고 가서 꼬리 예쁘게 자르려고 발광했었던 것까지 기억이 나."
이윽고 추억을 공유하듯 키득거리는 세 사람.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피식 웃은 뒤, 초밥을 입에 넣었다.
"그래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그렇게 김현우가 초밥을 먹던 중 건네 온 한석원의 질문에 그는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니? 나야 계속 탑 안에 있었지."
"그러니까, 그걸 물어보고 있는 거야."
"탑 안의 이야기?"
"그래."
"오빠 관련해서 좀 재미있는 괴담이 여러 개 돌거든요."
"뭐? 괴담?"
'괴담이라고 할 만한 게 있나?'
김현우는 문득 자신이 탑 안에서 지냈던 일상을 쭉 떠올려 봤다.
"확실히…… 있을 만하네."
김현우는 탑에서 자신이 행했던 컨셉질과 또라이짓을 생각하며 초밥을 먹다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어? 잠깐, 내가 지금까지 했던 컨셉질과 또라이 짓이 괴담화됐다면…….'
김현우는 갑작스레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옷 안 입고 던전 클리어한 거랑 골룸 코스프레 하고 던전 클리어 한 것도……!'
"그, 그래서, 무슨 괴담이 있는데?"
김현우가 평점심을 가장하며 물음에 이서연은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뭐, 여러 가지가 있기는 한데, 제일 유명한 거로는 무슨 춤추면서 던전 보스들 잡고 다닌 거랑…… 혼자서 탑 1층에서 발차기로 탑을 10층까지 뚫었다는 이야기 정도……?"
"다른 이야기는?"
"음, 많기는 한데. 제일 유명한 건 이 두 개 정도인 것 같은데……?"
이서연의 말에 김현우는 그제야 은근슬쩍 마음을 놓으며 말했다.
"그거 내가 한 거 맞아."
"진짜요?"
"……진짜 형 탑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닌 거야?"
김시현의 물음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춤추면서 던전 보스 잡은 건…… 뭐, 혹시 이렇게 하면 탑에서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시도해 본 거고."
김현우는 초밥을 마저 삼키고 이야기했다.
"탑을 10층까지 뚫은 건 그냥 아무리해도 탈출이 안 돼서 답답한 마음에 그냥 점프했는데 그 정도까지 올라가던데?"
"……와."
"솔직히 튜토리얼 존에서도 괴물이 됐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본인한테 직접 검증받으니까 더 확실하게 와닿네."
이서연이 말없이 감탄하자 그 옆에서 김시현이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지었고 김현우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네가 탑에 안 갇혀봐서 그래. 진짜 탑을 클리어하고 또 클리어해도 탑을 못 빠져나가면 그때부터는 진짜 뭐든지 해보게 된다니까?"
그렇게 음식이 전부 나올 무렵 김현우는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탑 안에서 키웠던 제자들도 있는데. 걔들은 뭐 하고 지내려나?"
"제자들이요?"
"응."
김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석원은 흥미가 동한다는 듯 물었다.
"무슨 제자들?"
"음…… 그러니까 대충 몇 회차였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한참 50층에서 60층 사이에서 지내고 있을 때, 탑에서 낙오된 애가 한 명 있었거든."
"그런데?"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내가 혼자서 무술 만들겠다고 깝죽거리던 때라."
"무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한석원이 머리에
'?'
를 띄우며 말하자 김현우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 예전에 만화나 소설 같은데 보면 어디 갇힌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으면 탈출하잖아? 어쩌면 나도 깨달음을 얻으면 탈출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헐……."
그 말을 들은 이서연이 저도 모르게 탄식을 했고 김현우는 큼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결국 52층쯤에서 낙오돼서 죽으려고 하는 애를 구해줬거든."
"그래서 그 녀석을 제자로 들여서 키웠다?"
"뭐, 그렇지. 덤으로 거기서 만들었던 제 무술 비스무리한 것도 알려주고."
"무술 비스무리한 거……?"
김시현이 왠지 떨떠름하게 중얼거리자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근데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녀석에게 미안하기는 하네. 생각해 보면 녀석한테 그 이상한 무술을 가르친 거니까."
"그 정도야……?"
김시현이 묻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무술의 무 자도 모르고 몬스터는 그냥 순수하게 때려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데다가 무술 관련은 웹소설 밖에 읽어보지 않은 내가 멀쩡한 무술을 만들 수 있었겠어?"
"……하긴,"
김시현이 그제야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 옆에 있던 이서연은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 제자라는 사람 이름은 알아요? 이름만 알면 찾아볼 수도 있을 텐데."
"응? 이름? 알기는 아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왜요? 궁금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 되묻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그 녀석은 내가 정확히 누구인지 모를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녀석을 제자로 들였을 때, 나는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거든."
"……네? 그건 또 무슨……?"
이서연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지만, 김현우는 거기까지 말한 채로 서둘러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리며 생각했다.
'사실 그때 당시에 중2병 비스름한 것에 걸려 있었다고는…….'
말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막 무술로 깨달음을 얻어 보겠다고 숲 지형이 있던 50층에서 머물고 있던 때의 김현우는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얼굴이 부끄러워졌다.
무술 같지도 않은 짝퉁 무술을 가지고, 탑에서 낙오한 애 한 명을 낚아 소설에나 나오는 '은거기인'인 척하며 세상 만물이치를 지 멋대로 해석해 씨부렸던 걸 생각하면…….
'역시 그냥 묻어 두는 게 상책이다. 게다가…….'
김현우는 문득 엉터리 무술을 수련시켰던 제자를 떠올렸다.
'…눈 똑바로 안 뜬다고 때리고, 반말한다고 때리고, 도망치려 한다고 때리고, 대든다고 때리고…어, 이거 만나면….'
폭행으로 끌려가는 거 아니야?
'역시 제자하고는 만나지 않는 게……'
김현우는 그렇게 결정하곤 불만을 토해내려 입을 여는 이서연보다도 빠르게 말했다.
"그래서, 내 이야기는 해줬으니까. 너희들 이야기를 좀 해줘 봐."
"음, 그럴까?"
그리고 김현우는 오히려 반대로 자신이 없었던 12년 동안 그들이 겪었던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
그날 저녁, 처음 스시집에 들어간 뒤로 4시간이 넘게 전 동료들과 회포를 푼 김현우는 합숙소에서 잠시만 기다려 보라는 동료들의 말을 듣고 합숙소로 돌아왔다.
"……."
멍하니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본다.
졸림도,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는 그곳과 다르게 지금은 적당히 배부르니 기분이 좋았고, 등이 푹신한 침대에 누우니 잠도 잘 왔다.
거기다가 오늘 만난 동료들.
그들은 다들 세월의 흐름 덕분에 나이를 먹기는 했지만, 그들은 틀림없이 처음 탑에 같이 떨어졌던 자신의 동료들이 맞았다.
그리고 오늘 그렇게 동료들을 만나고 이렇게 침대에 눕고 나서야, 김현우는 자신이 정말 탑 밖으로 빠져나왔다는 걸 실감했다.
"정보."
탑 안에서, 수십 수백 번을 외쳤을 그 단어를 외치자 김현우의 눈 위로 익숙한 창이 떠오른다.
------------------------
이름: 김현우
나이: 24
성별: 남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A++
민첩: A+
내구: S+
체력: A+
마력: -- ?
행운: B
SKILL -
없음
[루프가 해제되었습니다!]
-----------------------
수십 번도 더 봤을 그 능력치 창은 탑을 빠져나오며 변해 있었다.
각 능력치의 옆에 붙어 있었던 [튜토리얼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라는 문구는 사라져 있었고, 나이 옆에 떠 있던 36이라는 숫자도 사라져있었다.
'24살이 사라진 게 아니라 36살이 사라진 걸 보면…… 나는 아직도 24살인 건가?'
문득 김현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궁금증에 그는 머리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그는 피식하고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24살이면 어떻고 36살이면 어떠냐. 이제부터는 적당히 돈이나 벌면서 인생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텐데.'
그가 그렇게 피식하고 웃으며 정보창을 끄기 위해 시선을 옮겼을 때.
문득 그의 눈에 걸리는 문장이 있었다.
"……이건 왜 아직도 떠 있지?"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정보창 아래에 떠 있는 [루프가 해제되었습니다!]를 클릭했고, 이어서 그의 눈에 익숙한 문구가 떠오르지-
--
축하합니다! 당신은 성공적으로 탑을 빠져나왔습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시려면 최소한의 증명을 위해 세 개의 던전 보스를 클리어 해주시기 바랍니다.
- 아도론의 연구소
- 숲지 부락
- 눈에 보이는 늪
--
-않았다.
"뭐야……?"
김현우는 탑을 빠져나온 이후로 처음 보는 문구에 이상함을 느끼며 그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고, 곧 찬찬히 문자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다음 단계? 세 개의 던전 보스를 클리어 해?"
'뭐야 이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현우가 다시 한번 알림창을 눌렀지만, 로그를 출력하고 있는 알림창은 더이상 변하지 않았다.
그저 똑같이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한 증명을 위해 세 개의 던전 보스를 죽이라고 할 뿐.
"이건 대체……?"
김현우가 눈앞에 뜬 로그에 의문을 느끼는 그때-
"김현우 헌터, 계십니까?"
문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김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그곳에는 합숙소를 관리하는 관리원이 서 있었다.
"무슨 일로……?"
"아, 김현우 헌터를 만나고 싶다는 분이 찾아오셔서요. 아레스 길드 소속의 스카우터인 것 같던데."
"아레스 길드요?"
"1층 휴게실에 있습니다."
협회원의 말에 귀찮음을 느낀 김현우는 귀찮음이 섞인 음색으로 말했다.
"안 간다고 전해주세요."
"그, 꼭 좀 불러달라고 하셔서……."
협회원의 말에 김현우는 짧게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느낌을 보니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확실하게 말하고 오는 게 낫겠군.'
짧게 생각을 정리한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
김현우는 대답과 함께 슬리퍼를 신고 방 밖으로 나와 아레스 길드의 스카우터가 기다리고 있다는 1층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 당신이 김현우 헌터?"
"……."
그는 휴게실에서 상당히 거만해 보이게 앉아 있는 한 남자와 그의 뒤에 서 있는 대머리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김현우가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에 앉자. 그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내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아레스 길드의 인사과장인 강병호입니다."
그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본론으로 들어갔다.
"분명 저는 길드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자 자신을 강병호라고 소개한 남자는 묘한 웃음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뭘요?"
"김현우 헌터가 아레스 길드에 들어오지 않고도, 제대로 성장할 수 있겠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 9
009. 고인물을 대하는 법(4)
'아레스'길드의 인사과장인 '강병호'는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 김현우를 바라보며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한 채로 생각했다.
'네가 아무리 화제의 고인물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라도 결국 이 헌터 업계에서는 눈에 띄는 신인일 뿐이지.'
강병호는 김현우에 대한 평가를 그렇게 내렸다.
아무리 말도 안 될 정도의 기본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신인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따져보면 김현우는 이제 막 탑을 빠져나온 신인이었다.
마력도 아직 사용하지 못하고,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도 못했다.
만약 그가 저 능력치를 가지고 제대로 성장했다고 하면 아레스 길드에서도 살짝 긴장해야 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김현우의 상태는 다 크지 않은 새끼 호랑이와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기를 잡아 놔야지.'
자기가 호랑이 새끼란 것을 그가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무기를 길들이는 것처럼, 사람도 길들이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강병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덤으로 이 계약을 확실하게 끝낼 수 있다면 내 가치를 조금 더 올릴 수도 있으니까.'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아레스 길드 한국지부 내에서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미묘한 줄타기와 다음 분기쯤에 있는 인사이동을 떠올리고 있자.
"풋"
김현우가 돌연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강병호에게 물었다.
"지금 나 협박하러 온 거냐?"
갑작스러운 그의 반말에 일순 강병호의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그는 억지로 웃음을 만들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협박이라니 그럴 리가요! 다만 저는 현실을 알려주러 온 것뿐입니다."
"그게 그냥 협박하러 온 거 아니야?"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강병호를 바라본 김현우.
"이 자식이 과장님한테……!"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강병호의 뒤에 서 있던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떡대 같은 몸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강병호는 그를 손짓으로 재지하곤 말했다.
"판단을 잘 하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김현우 헌터."
"무슨 판단?"
"저희 아레스 길드를 적으로 돌리고 한국 헌터 업계에서 살아남을 것 같습니까? 당신이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저희 아레스 길드는……."
"한국 던전의 66%를 혼자 독점으로 처먹고 있는 길드라고?"
김현우의 말에 강병호는 말했다.
"잘 아시는군요."
불과 몇 시간 전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과 회포를 풀다 주제로 나온 길드 이야기 때문에 김현우는 '아레스 길드'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다.
아레스 길드는 한국이 헌터가 부족했던 7년 전, 결국 해외 헌터 시장 유입을 허락한 정부 덕분에 들어오게 된 외국 길드였다.
표면적으로 가지고 있는 타이틀은 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초대형 길드'로서 세금도 꼬박꼬박 내며 한국 내 헌터 시장에 관여하고 있는 외국 길드였지만.
동료들에게 들은 아레스 길드의 실체는 어떤 관점으로 봐도 그냥 쓰레기 짓을 하는 악덕 길드와 다름없었다.
혼자서 한국 전체 던전 중, 퍼센트로 따지면 약 66%에 달하는 던전을 독점으로 관리하고 있는 아레스 길드.
그들은 신입 헌터들이 다닐 수 있는 D급 던전과 여러 가성비가 좋은 A등급 던전을 홀로 독점해, '던전 입장권'을 만들어 헌터들을 압박했다.
'던전 입장권.'
아레스 길드 소속의 헌터는 입장권이 없어도 던전에 입장 할 수 있다.
허나 그들은 자신의 길드 소속이 아닌 헌터들에게는 무척이나 비싼 값을 받고 던전의 입장료를 파는 것으로 헌터들에게 갑질을 했고.
그나마 실력이 좋은 헌터에 한해서는 그 헌터가 다른 길드에 속해있더라도 '던전 입장권'을 빌미로 아레스 길드에 끌어들여 다른 길드의 헌터를 빼앗았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헌터를 먹어 치우는 아레스 길드 덕분에, 아레스 길드 외의 다른 길드는 그 힘이 점점 약해졌고.
반대로 아레스 길드는 점점 강해지는 독점 시장이 되어 버린 것이 현 한국 헌터 업계의 상황이라는 것을 김현우는 동료들에게 들었다.
"알다마다, 아주 쓰레기 같은 곳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했지. 너희들이 그렇게 인성 터진 짓을 잘한다며?"
씩 웃으며 거침없이 막말을 내뱉은 김현우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강병호는 안색을 굳힌 채 말했다.
"내가 말했을 텐데? 입을 조심하라고."
"어우 갑자기 그렇게 목소리 깔고 나오는 거야?"
"여기가 협회 내의 합숙소라고 해서 너에게 아무런 손도 못 댈 줄 아나?"
그 말과 함께 강병호의 뒤에 서 있던 남자는 갑작스레 강병호가 김현우가 사이에 두고 있던 책상의 한쪽 끝을 집더니.
우지지지직!
통짜 철로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이는 책상을 그대로 우그러뜨리기 시작했다.
별 힘을 들이지 않은 것 같은데도 순식간에 우그러진 책상.
"미안하지만 협회도 우리의 입김이 닿은 지 오래다. 한 마디로 내가 말 한마디만 하면 이 곳에서 있던 모든 일은 '없는 게' 될 수도 있다는 소리지."
"이야, 아까는 협박이 아니라고 광고를 하더니 이젠 그냥 대놓고 협박을 하네?"
하지만 강병호가 어떻게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목소리를 깔고 눈을 살벌하게 떠도 김현우는 무서운 척도 하지 않고 그들을 비아냥거렸다.
마치 어린아이의 조롱을 보는 것처럼.
"지금 상황을 이해 못 하는 모양인데, 지금 내 뒤에 있는 헌터는 종합 능력치 판정 A등급을 받은 헌터다. 네가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강병호의 말과 동시에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보기만 해도 역겨운 미소를 지으며 김현우를 바라봤다.
"아주 쓰레기 새끼들 아니랄까 봐 와꾸도 꼭 지같이 생긴 것들만 데리고 왔네."
김현우는 그 말을 끝내고는 더이상 입을 열 필요도 없다는 듯이 갑작스레 몸을 숙여 무엇인가를 손으로 집었다.
"야 일로 와봐."
그것은 슬리퍼였다.
검은색 배경에 메인에는 하얀색 줄이 세줄 그어져 있는 삼선 슬리퍼.
김현우는 그것을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너 같은 놈들은 직접 손을 쓰기도 더러우니까 내가 슬리퍼로 상대해 준다."
탁! 탁!
그는 마치 강병호의 등 뒤에 있는 헌터를 놀리듯 슬리퍼를 책상에 탁탁 소리 나게 치며 등 그의 호위로 온 A급 헌터의 어그로를 끌었고…….
"이 새끼가 진짜……!"
강병호의 뒤에 서 있던 헌터는 금방이라도 김현우를 죽을 듯 노려보며 그대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쫘아아아악!
"끄악!?"
김현우가 쥐고 있던 슬리퍼가 거침없이 움직이며 정면을 달려든 헌터의 얼굴을 후려쳤다.
우당탕탕! 쾅!
얼굴에 슬리퍼를 맞은 헌터는 순식간에 붕 떠오르더니 휴게실 내에 있는 책상과 의자들을 모조리 박살 내며 바닥을 굴렀고.
그는 그것을 끝으로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
그 일련의 모습을 보며 강병호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박살 난 휴게실 사이에 미동도 하지 않는 헌터를 보았고,
"다시 한번 지껄여 봐. 새끼야."
곧 자신에게 입을 여는 김현우를 쳐다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기선제압과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 강병호는 A급 헌터를 데려왔다.
그냥 A급 헌터도 아니었다.
그는 현재 아레스 길드 내에서도 던전 파밍률이 제일 높은 2파티의 탱커였으니까.
두꺼운 방패를 들기 위해 성장한 근력은 두말할 것 없었고, 탱커로서의 맷집은 아레스 길드 내에서는 두각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런데…… 한 방에?'
강병호는 멍하니 시선을 돌려 김현우의 손에 들려 있는 슬리퍼를 바라봤다.
이미 그것은 슬리퍼라고 하기에는 여기저기가 전부 터져 버려 김현우가 들고 있던 끝부분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건, 분명히 슬리퍼였다.
분명히 자신의 앞에서 몸을 숙여 손에 쥐었던 슬리퍼였다.
'슬리퍼로…… 아레스 길드의 탱커를 단 한 방에?'
긴 사고를 거쳐 마침내 결론에 도달한 강병호의 사고는 그제야 지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했고, 강병호는 거기에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평소 그의 특기인 태세전환으로 상황을 무마할 수도 없었고-그가 등에 업길 좋아하는 아레스 길드의 인사과장이라는 직책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이 끝없이 떠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좆 됐다.'
그래, 좆 됐다.
그렇게 강병호의 안색이 파리해질 때쯤, 김현우는 이미 꼭대기 부분밖에 남지 않은 슬리퍼를 쥐며 말했다.
"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알아?"
강병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김현우의 팔 움직임에 따라 서서히 고도를 높이고 있는 슬리퍼 때문에.
그리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올라가던 슬리퍼가 멈출 무렵-?
김현우는 말했다.
"나는 나를 협박하는 걸 제일 싫어해."
이 개새끼야.
빠아아아악!
휴게실에서 거대한 파육음이 터져 나왔다.
***
"그래서, 완전 개 박살을 내고 온 거예요?"
잠실 쪽에 있는, 보기만 해도 굉장히 미래적인 디자인이 엿보이는 고급 아파트의 꼭대기 층.
한강의 뷰가 한눈에 들어오는 방 안에서 김시현은 소파에 앉아있는 김현우를 바라봤다.
"먼저 개기길래 개 박살을 내줬지."
김현우가 당당하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딸기를 먹자 김시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형도 진짜 대책 없네요. 아레스 길드 그놈들 아주 지독한데."
"뭐가 지독한데?"
"그 녀석들 자기들 쪽 당하면 어떻게 해서든 복수하려고 지랄 발광을 하거든요."
"복수? 어떻게?"
"뭐…… 여러 가지가 있죠, 길드 가입하려고 하면 길드에 압박 넣어서 가입 못 하게 하는 것도 있고, 아니면 미궁에 들어갔을 때, 아무도 못 본다는 점을 이용해서 조용히 슥삭 하기도 하고."
"슥삭?"
"죽인다고요."
"……진짜?"
"뭐, 솔직히 그런 일이 없지 않긴 하죠."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도 협회소에서 듣기는 했는데 진짜 미궁 속에서 그렇게 죽인다고?"
"네, 미궁 내는 어차피 너무 넓고 깊어서 제대로 파악도 못 하고, 거기서 죽으면 시체는 몬스터들이 뜯어먹으니까 사실상 누가 봐서 신고하는 게 아니면 들킬 수가 없죠."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혀를 차며 말했다.
"세상 참 살벌하구만."
"제가 볼 때는 형이 이번에 한 짓이 더 살벌한데요? 그냥 이참에 제 길드 들어오는 건 어때요?"
"말했잖아, 길드는 가입 안 한다고."
"아니 형 편하게 지내고 싶다면서요? 그럼 최소한 적은 만들지 말아야죠. 무슨 탑에서 나온 지 1주일밖에 안 됐는데 적을 만들어요?"
왜인지 따지듯 묻는 김시현의 말에 걱정하지 말란 투로 손을 휘적거리며 딸기를 먹던 김현우는 문득 머릿속에 든 생각에 먹던 딸기를 삼키고 물었다.
"아 맞아, 우선 당분간 편하게 지내면서 하고 싶은 거 하는 건 보류하기로 했어."
"또 왜요?"
"좀 해야 할 일이 생겼거든."
'탑의 비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아까 전 합숙소에서 보았던 로그를 떠올렸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최소한의 증명을 위해 세 개의 던전을 클리어하라는 그 문구.
'어쩌면 탑의 비밀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아니었지만, 김현우는 탑에 갇혀 있을 때 항상 혼자만 탑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항상 의문을 느껴왔다.
의문만 느껴봤겠나?
혼자 탑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가면 늘어갈수록 김현우는 이 탑을 만든 장본인을 찾아 죽여 버리고 싶었고, 마찬가지로 자신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둬놓은 사람도 찾고 싶었다.
찾아서 말을 섞을 것도 없이 똑같이 탑에 처박아 버리게.
"야 시현아."
"네?"
그렇기에-
"너 혹시 '아도론의 연구소'라고 알고 있냐?"
김현우는 탑의 비밀을 풀기로 했다.
# 10
010. 나한테 빠꾸는 없다(1)
"아도론의 연구소는 왜요?"
"아냐니까?"
"알기는 하죠. 의정부에 있는 C급…… 아니, C-급 던전이었나? 신입 헌터들이 성장하기에 좋은 던전이라고 해서 기억하고 있기는 해요."
"그래?"
"그런데 거긴 왜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좀, 볼 일이 있어서."
"볼 일이요? 혹시 던전 한번 돌아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뭐, 그런 것도 있긴 한데 그 던전 안에서 확인할 게 있거든."
"확인할 거?"
김시현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묘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더니 이내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근데 아마 형은 거기 못 들어갈걸요?"
"그게 무슨 소리야?"
김현우가 의아하다는 듯 묻자 김시현은 곧바로 말했다.
"거기, 아레스 길드가 독점권을 쥐고 있는 곳이거든요. 오늘 점심에 제가 설명해 준 거 들으셨죠?"
"들었지."
아레스 길드가 던전의 독점권을 쥐고 던전을 빌미로 헌터들에게 갑질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아레스 길드에 대해 생각하던 중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김현우는 물었다.
"그런데, 정부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야?"
"정부요?"
"그래, 뭐 이렇게 일방적인 독점에 대한 규제라거나, 그런 게 있을 거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김시현은 피식 웃더니 자조하는 듯한 느낌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어요. 정치꾼들 뒤로 날름날름 받아 처먹는 건 잘하잖아요?"
그렇게 날름날름 쳐드시고 세금까지 깔끔하게 받고 있으니까 건드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죠.
김시현이 그렇게 뒷말을 중얼거리며 커피를 마시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김시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로?"
"저도 제대로 물증이 있고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규제 없이 혼자 헌터업계를 다 처먹고 있는 걸 보면 딱 각이 나오잖아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 어처구니없는 듯 헛웃음을 보인 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주 개판이구만."
"아무튼, 아마 형은 못 들어갈 거예요."
"몰래 들어간다거나 하는 건?"
"당연히 지키고 있죠. 24시간 교대 돌리면서 지키고 있을 걸요?"
"입구는 열려 있는데 그냥 그 던전 입구 앞에서 자기 길드 소속이 아니면 못 들어가게 지키고 있다 이 소리지?"
"그렇죠."
"억지로 들어가면?"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설마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말했다.
"억지로 들어가면…… 뭐, 아레스 길드랑 척을 지는 사이가 되죠."
"그래? 그럼 나는 상관없겠네."
"네? 그게 뭔 소리예요?"
"어차피 척을 지었으니까. 상관없을 것 같다고."
"설마 형……?"
김현우는 김시현의 말에 답하지 않고 그저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
강남역에 있는 수많은 고층 빌라 중에서도 유난히 높게 솟아있는 중앙의 빌딩.
빌딩의 중앙에는 딱딱하면서도 위풍당당한 글씨체로 'Ares'가 음각되어 있는 그 빌딩의 상위층의 한 공간.
고풍스러운 레드 카펫이 깔려 있었고 중앙에는 거대한 원목 테이블이 놓여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회의실.
"그렇게 돼서 '패도'길드의 견제로 현재 한국 지부 쪽에서 아레스 길드의 중국 진출은 조금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회의실의 상석에 앉아 있는 남자는 느긋하게 앉아 남자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지?"
"최소 5개월 정도가 소요될 것 같습니다."
"다른 지부는? 러시아의 예상 진출 시기는?"
"러시아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8개월, 일본은 7개월입니다."
남자의 말에 상석에 앉은 남자.
아레스 길드 한국지부의 지부장이자 S등급 헌터이기도 한 남자, '흑선우'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쁘지 않군. 내가 말했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상관없어. 요점은 무조건 남보다는 빨라야 한다 이거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먹는 것처럼 말이야."
흑선우의 말에 보고를 올리던 남자는 슬쩍 고개를 숙이곤 흑선우의 손짓에 따라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래서 너는?"
흑선우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남자. 인사부장 유병욱에게 묻자 그는 슬쩍 고개를 숙인 뒤 서류 하나를 책상 위에 올리며 말했다.
"저번에 말씀하셨던 김현우에 관한 능력치 표입니다."
유병욱의 말에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서류를 들어 올리더니 이내 서류의 내용을 보고 허 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뭐야?"
"저번에 말씀하신 김현우 헌터의 세부 능력치입니다. 분석과에서 헌터 협회의 튜토리얼 존 영상과 이번에 프로토타입으로 배치한 능력치 분석 비교기를 이용해 만든 겁니다."
"이거 분석과 새끼들이 제대로 파악 못 한 거 아니야?"
"분석과에 문의한 결과 아무리 차이가 나더라도 한 등급 차이라고 합니다."
"……그럼 실화라고?"
"……저도 믿기는 힘들지만 아무래도 분석과에서는 그렇게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흑선우는 허, 하는 웃음을 짓더니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영입은 했어?"
흑선우의 물음에 슬쩍 유병욱은 곧바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강병호 과장이 접선을 시도하기는 했는데……."
"아, 됐어. 더 말할 필요도 없군. 영입 못 했다 이거지?"
"예."
"오히려 이런 녀석은 영입을 안 하는 게 좋아."
"예……?"
유병욱이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 슬쩍 그를 향해 묻자 흑선우는 그를 보며 피식 웃곤 말했다.
"에이, 우리 유 부장 그렇게 멍청하지 않잖아? 연기 안 해도 돼."
"……."
흑선우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그는 입을 다물었고, 그것을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흑선우은 피식하는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뭐, 이런 녀석을 영입하면 당연히 아레스 길드에는 이득이지. 나도 당장 돌아오는 실적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런데- 이런 녀석은 나한테는 독사과야 독사과."
독사과 알지?
느긋하던 흑선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그는 원목 책상에 두 발을 올리곤 말했다.
"먹음직스럽게 생겼고, 지금 당장 먹으면 달콤하겠지만 이런 녀석들을 아레스 길드 내로 들이면 압도적인 성장에 더불어 지원도 빵빵하게 받을 거고 그러면……."
그는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내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
"이런 놈은 영입하기보다는 '상처'를 내 줘야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그의 말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는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고, 그 모습에 흑선우는 만족한 듯 어깨를 으쓱이며-
"'관리부' 애들한테는 말해 놓을 테니까. 잘 해봐."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유병욱은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것을 끝으로 회의실을 빠져나왔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중-
"부…부장님!"
"왜 그러지?"
유병욱은 자신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뛰어오는 인사계원을 보며 물었다.
"이, 일이 터졌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유병욱의 얼굴이 굳은 것을 본 인사계원은 급하게 입을 열었고, 유병욱의 굳어진 얼굴에 인상이 드리워지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의정부에 있는 천보산에 있는 C-급 던전 '아도론의 연구실'의 입구 앞.
"한 번만 들어가게 해주시면 안 되나요……?"
"안 된다니까?"
입구 앞에 설치된 매대와 비슷해 보이는 아레스 길드 휘하의 건물 앞에서는 한차례의 실랑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제발요……! 여기 아니면 사냥할 곳이 없어요……!"
던전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아레스 소속의 길드원들은 애절하게 두 손을 맞잡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낄낄거리더니 말했다.
"아니, 그럼 미궁이라도 가서 사냥해야지~ 미궁은 무료잖아? 깊숙하지 않은 곳에는 저급 몬스터도 많고."
물론 아레스 길드 소속 헌터가 하는 말은 개소리 중의 개소리였다.
미궁 초반에는 분명 신입들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약한 몬스터가 있었지만, 그곳은 기본적으로 사냥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무법지대였다.
게다가 아무리 던전의 초입이라도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강한 몬스터 때문에 A급 이상의 헌터도 길드 파티를 맺어 아티팩트를 발굴하러 가는 것이 아니면 잘 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소녀는 자신을 비웃고 있는 그들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발…… 한 번만……."
"흠, 정말 안 되는데, 뭐 우리에게 성의를 조금 보여준다면 또 은근슬쩍 눈감아줄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
아레스 길드원이 은근슬쩍 손을 맞잡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야리꾸리하게 웃었고, 그들의 시선을 받던 헌터는 읏 하는 신음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본인에게 자문했다.
'이런 상황도 예상은 하고 부탁하러 온 건 맞는데…….'
그녀가 아직 아레스 직할의 하위 길드에 가입되어 있었을 때, 그녀는 이런 종류의 소문을 많이 들었었다.
아레스 길드 소속이 아닌 헌터들이 은근히 던전의 입구를 지키는 헌터들에게 몸을 주거나 돈을 써서 몰래 던전을 들락거린다는 소문.
아니, 사실 소문도 아니었다. 그녀가 하위 길드에 소속되어 있을 때도 그런 장면은 얼핏 몇 번 정도 봤으니까.
그렇게 그녀가 입을 다물고 묘한 공기가 흐를 때쯤-끼이익.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뭐야?"
아레스 길드원들은 순간 묘한 분위기가 깨진 것에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눈앞에 나타난 남자를 바라봤고, 곧 그들은 조금 전 들어온 남자를 훑으며 물었다.
"……이건 또 뭐야?"
검은색 츄리닝과, 파란색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는 남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의 앞에 서 있던 아레스 길드원은 조금 전 들어온 남자를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쯧 하는 소리와 함께 말했다.
"여기 화장실 없어요."
'여기가 무슨 자기들 화장실인 줄 아나.'
아무래도 던전의 입구가 등산로 중에 있다 보니 시민들 중에서 가끔 길을 잘못 들어 이곳으로 오거나 잠시 화장실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화장실을 빌리러 오는 시민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길드원은 짧게 혀를 차며 말했고, 곧 문 앞에 서 있던 남자는 말했다.
"화장실 찾으러 온 게 아니라 이 던전에 볼일이 있어서 온 건데?"
"……뭐?"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순간 되묻던 길드원은 다시 한번 그의 옷차림을 바라봤다.
상하의는 검은색 츄리닝, 발에는 파란색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는 남자.
'……미친놈인가?'
그는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츄리닝 차림의 남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고, 그것은 옆에 있던 다른 길드원도 마찬가지였다.
"저기요 아저씨, 여기 장난치는 데 아닙니다. 여기 던전이에요, 던전. 예?"
길드원의 짜증스러운 말에 순간 남자는 눈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래, 알고 왔다니까? 던전에 볼 일이 있어서 왔다는데 왜 말을 못 알아먹어? 귀에 좆 박았냐?"
# 11
011. 나한테 빠꾸는 없다(2)
한순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던 아레스 길드원들은 이내 자신들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리며 역정을 냈다.
"미칠 거면 곱게 미칠 것이지…… 너 뭐하는 새끼야?"
순식간에 험악하게 변한 분위기 속에서 조금 전까지 그들에게 부탁하고 있던 여자는 어색한 표정으로 아레스 길드원들과 뒤에 선 남자를 번갈아 봤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아레스 길드원, 그에 비해 남자의 표정은 평온하다 못해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희들은 안 되겠다. 친절하게 말해도 말귀를 못 알아 처먹네."
김현우는 갑작스레 그렇게 말하더니 느긋하게 허리를 숙여 자신의 슬리퍼에 손을 가져갔다.
이윽고 그의 손에 들린 파란색 슬리퍼.
"야, 이리 와 봐."
김현우는 파란색 슬리퍼를 쥔 손으로 손짓하며 카운터 너머에 있는 그들을 불렀고, 그 모습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던 아레스 길드원 중 한 명은 헛웃음을 지으며 카운터를 넘었다.
"이 새끼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카운터를 넘은 그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김현우에게 다가갔다.
험한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며 헌터가 다가오는 모습에 김현우는 그를 느긋하게 쳐다봤고, 이내 김현우의 지척에 다가간 남자는 그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짜아아아악!
와장창창!
올리지 못했다.
"어?"
카운터 너머의 남자에게서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현우가 있던 곳을 바라보던 남자.
그는 곧 시선을 돌려 소리가 난 오른쪽을 바라봤고-
"이, 이게 무슨……?"
그곳에서 그는 거꾸로 처박힌 채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동료를 볼 수 있었다.
"야."
그리고 곧 그는 자신의 귓가에 똑똑히 전달되는 목소리에 눈알만을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검은색 츄리닝에 파란색 슬리퍼를 들고 있던 남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슬리퍼의 윗부분은 마치 폭탄을 터뜨린 것처럼 흉하게 터져 있었다.
"헉……!"
그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억 소리를 내자. 김현우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파란색 슬리퍼를 처박혀 있는 길드원 쪽으로 내던지더니 이내 쯧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힘 조절을 했어야 했는데…… 야."
"네…… 네!"
건들거리던 아까와 다르게 무척이나 예의 바르고 똑바르게 대답하는 아레스 길드원을 본 김현우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신발 내놔."
"네?"
"너도 쟤처럼 귀 뚫어 줄까?"
"아, 아…… 아닙니다!"
김현우가 금세 얼굴을 굳히며 말하자 남자는 곧바로 자신이 신고 있던 강철 슈즈를 벗어 그에게 내주었다.
'끄…… 이번에 받은 보너스로 산 500만 원짜리 신발이……!'
하지만 그런 남자의 소리 없는 절규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현우는 그가 신고 있던 강철 슈즈를 신고 움직여 보며 생각했다.
'이거 좋은데?'
무거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가벼웠다.
500만 원이나 들인 슈즈인 만큼 '경량화' 주문이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김현우는 순수하게 신발의 성능에 감탄하며 이내 자신의 옆에 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야."
"예……!"
"내가 그렇게 나쁜놈은 아니거든?"
툭.
"이거 가져라."
그는 조금 전 자신이 신고 있던 파란색 슬리퍼를 남자에게 건네주며 말했고, 졸지에 맨바닥에 아무것도 신지 않고 서 있던 남자는 김현우가 건네준 파란 슬리퍼를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김현우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씩 웃더니 이내 별다른 말도 없이 '아도론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김현우가 던전에 들어간 뒤,
"저, 그…가보겠습니다."
조금 전 던전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실랑이를 벌이던 소녀는 눈치를 보더니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소녀가 나간 뒤.
건물 안에는 거꾸로 처박힌 남자와.
"이런 씨발……."
자신의 신발을 빼앗긴 체 파란색 슬리퍼를 들고 있는 남자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
"그래서, 현우 오빠를 그냥 보냈다고?!"
"아니, 뭐 그냥 보냈다기 보다는 형이 그냥 갔……."
"그걸 그냥 보내면 어떻게 해!!"
"아이, 씨 왜 갑자기 소리를 빽빽 지르고 난리야?! 귀청 떨어지겠네!"
"그 말을 듣고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성내 공원 사거리 쪽에 있는 서울 길드의 빌라 건물 꼭대기 층의 길드장실에서 김시현과 이서연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 현우 형이 네 남자친구야?!"
김시현의 말에 이서연은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말했다.
"이 멍청아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너도 아레스 길드가 얼마나 지랄 맞은지 알면 말렸어야 될 거 아니야!!"
이서연의 빼액거림에 김시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문질거리더니 이내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말했다니까? 그런데 막무가내로 걱정하지 말라면서 가는 걸 어떻게 하냐고. 너는 현우 형이 막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냐?"
김시현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이서연은 약간 주춤한 기색으로 그를 바라봤다.
"봐, 너도 확신 못 하지?"
김시현의 말에 이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서연도 김현우의 성격을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과거까지도.
이서연은 한숨을 김시현과 마찬가지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아 조금 전 탔던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며 생각했다.
정말 오래전이라고 할 수 있는 12년 전, 튜토리얼 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가 어쩌다보니 뭉쳐서 살아남게 되고 김현우를 비롯한 현재의 맴버들과 친해졌을 때.
이서연을 포함한 그들은 김현우의 과거에 대해 들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12년이나 지난 일이라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뭉뚱그려 기억나긴 했다.
그의 불우한 과거.
사촌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의 유산을 빼먹고, 김현우를 쓰레기 같은 고아원에 처박은 것부터 시작된 그의 과거 이야기.
덕분에 이서연은 김현우의 비틀린 성격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고 있었다.
'뭐, 가만히 있으면 그렇게 문제 되는 성격은 아닌데…….'
오히려 가만히 있으면 멀쩡했다.
다만,
"아무튼 현우 오빠랑 아레스 길드랑은 지금 척을 졌다 이거지?"
"나도 상황을 자세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현우 형 말에 의하면 그렇지."
그의 말에 이서연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랑 척을 졌을 때.'
그 척을 진 사람에 한해서, 김현우는 비틀린 성격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렇게 이서연이 김현우에 대해 걱정하고 있자 커피를 마시고 있던 김시현은 그런 이서연을 바라보더니 커피잔을 내려두고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뭐."
"솔직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뭐?"
이서연이 마치 이상한 놈을 쳐다보듯 김시현을 바라봤으나 그는 이서연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뒤 그녀를 마주 봤다.
"진짜로,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니까? 적어도 형이 해준 말이 사실이라면."
"……그게 대체 뭔 소리야?"
이서연의 물음에 김시현은 답했다.
"어제 아레스 길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나서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현우 형의 능력치 등급에 대해서 들었거든."
"들었는데?"
그녀의 되물음에 김시현은 어젯밤 들었던 김현우의 능력치를 말해 주었고.
"그거…… 사실이야?"
그 말을 들은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런 이서연의 물음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
C+ 급 던전 아도론의 연구실.
연구실 내부는 다른 일반적인 곳과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바닥에는 여기저기 피로 얼룩진 목재 바닥이 깔려있고, 벽은 마치 콘크리트를 깐 것처럼 무척 깔끔하게 마감이 되어 있는 던전.
연구실 내에는 이제 막 탑에서 빠져나온 헌터라도 침착하게 연습하며 잡을 수 있는 '좀비'와 '구울'들이 주 몬스터로 나타났고, 이 던전의 중앙 연구실에는--큭큭큭큭…… 내 연구 소재! 내 연구 소재는 어디에 있나!
이 아도론의 연구실의 보스인 '아도론'이 있었다.
"우리가 잡자."
그렇게 던전의 보스가 리젠되어 있는 상황에서, 아도론의 중앙 연구실의 쪽문에 서 있던 3인으로 이루어져 있던 파티는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이 앞에 아도론이 리젠되어 있는 건 확인했어?"
"그럼! 아까 정찰할 때 있었다니까?!"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남자검사의 말에 쌍수 단검을 양 허리에 차고 있던 여자 도적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내가 그런 것까지 안 찾아봤겠어?"
그녀의 자신만만한 말에 남자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뒷돈까지 찔러 주고 들어왔으니까 어지간하면 잡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한데…… 문제는……."
검사가 그렇게 말하며 굳게 닫혀 있는 쪽문을 바라보다 이내 파티원들을 바라봤다.
"우리가 잡을 수 있냐 이거지. 게다가 원래 보스들은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잡지 않나?"
던전 내의 보스들은 다른 몬스터들에 비해 그 부산물이 돈이 되기에 각 길드는 던전의 보스 몬스터의 리젠 시기를 재며 꾸준히 잡는 편이었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남자 '이천'이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이자 이민영이 말했다.
"아도론은 돈이 안 되서 안 잡는다고 전에 아레스 길드에서 말했잖아? 나오는 부산물도 없고, 게다가-"
이거 안 잡고 나가면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이득이잖아?
쌍수단검을 쥐고 있는 도적, 이민영이 투덜대자 옆에 있던 마법사 김창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던전에 보스 몬스터가 운 좋게 리젠되어 있다면 잡고 가는 게 좋기는 하지."
어차피 우리는 뒷돈찔러주고 몰래 들어온거니까 애초에 우리가 잡았다는 것도 눈치 못 챌 테고.
김창석이 말하자 그녀는 거기에서 힘을 받았는지 설득하는 투로 말했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봤는데 오도론은 방어력만 높지 공격력이 높지 않아서 조금만 시간을 들이면 잡을 수도 있다고 하던데."
이민영이 그렇게 희망적인 관측을 대며 말하자 이천은 고민에 빠졌다.
'잡아야 하나?'
그들은 17회차 때 탑에서 빠져나온 헌터들이었다.
준수한 실력으로 탑을 통과하지 못한 터라 어느 길드에서도 영입제안을 받지 못했던 그들은 헌터로서의 역량을 키워 재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모인 파티였다.
'확실히 보스 몬스터를 잡으면 능력치 상승폭이 크다고 했으니…….'
잠시간 고민하던 이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 잡아보자."
"좋아!"
"다만, 위험해지면 바로 빠진다. 죽으면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이천의 말에 이민영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고, 그와 함께 그녀는 미리 찾아놓았던 중앙 연구실의 쪽문을 열었다.
그리고-
"응?"
연구실의 쪽문으로 들어온 그들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연구실 중앙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도론이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도 있었다.
"……저 사람은 또 뭐야? 헌터?"
"아니, 헌터로는 보이지 않는데……?"
"??"
연구 가운과 함께 온몸에 이상한 기계장치를 붙이고, 이제야 내 연구 소재가 왔다며 광기 어린 웃음을 짓고 있는 오도론의 앞에 있는 남자.
그는 던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츄리닝을 입고, 발에는 그 츄리닝과는 어울리지 않는 강철 슈즈를 신은 채 싸울 준비는 하지도 않은 채로 눈앞에 아도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깡! 깡!
-키히히히히히! 어디부터 연구해 볼까? 눈? 심장? 그것도 아니면 척추? 원하는 곳을 말해라. 어디든 내가 잘 어루만져 주지.
아도론이 손에 쥐고 있는 실험용 메스를 이리저리 튕기며 음침하게 웃자 남자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하지 마라."
-뭘 하지 말라는 거냐 키---?!!
꽝!
그대로 발을 들어 올려 오도론의 상체를 날려 버렸다.
"?????"
그 비이상적인 광경에 쪽문 근처에 테이블에 숨어 있던 파티원들이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을 때,
"칼로 쇳소리 내지 말라고 이 씹새끼야."
김현우는 짜증을 내며 오도론의 남은 하체를 발로 후려 차버렸다.
# 12
012. 나한테 빠꾸는 없다(3)
"미친."
이천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으며 조금 전까지 아도론이 서 있던 곳을 바라봤다.
아도론이 서 있던 곳은 싸웠다는 흔적 하나 없이, 그저 그가 들고 있던 메스 두 개가 떨어져 있을 뿐이었고, 그 앞에는 단 한 방에 아도론을 박살 낸 김현우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우선 하나는 끝났고."
------------------------
이름: 김현우
나이: 24
성별: 남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A++
민첩: A+
내구: S+
체력: A+
마력: --
행운: B
SKILL -
없음
[루프가 해제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성공적으로 탑을 빠져나왔습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시려면 최소한의 증명을 위해 세 개의 던전 보스를 클리어 해주시기 바랍니다.
- 아도론의 연구소 [완료]
- 숲지 부락
- 눈에 보이는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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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현우는 눈앞에 떠 있는 로그를 보며 만족스럽게 끄덕이곤 곧바로 다음 로그를 바라봤다.
'이다음은 숲지 부락.'
곧바로 다음 행선지를 정한 김현우.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아도론의 연구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어? 저 사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천의 일행 중 한 명인 이민연은 김현우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왜?"
"저, 저 사람 그 사람 아니야??"
"……그 사람?"
"그, 있잖아? 이번에 헌터킬에서 1주일 내내 이슈게시판 1위 먹었던 그 사람……!"
이민영이 연구실을 빠져나간 김현우를 손가락질하자 곰곰이 생각하던 김창석은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그 고인물?"
"그래, 걔! 지금 조금 전에 그 사람 그 고인물 아니야?"
"어? 진짜 생각해 보니……!"
이천은 영상 속에서 보았던 '고인물'과 조금 전 보았던 고인물의 외형이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색 츄리닝에 아무렇지도 않게 기른 더벅머리, 거기에 덤으로 느긋해 보이는 표정까지.
"소름 돋아……!"
이민영이 저도 모르게 양팔을 감싸 앉고 소름이 돋는다는 듯한 체스쳐를 취했고.
튜토리얼 존에서 봤던 것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김현우를 보며 저도 모르게 그가 빠져나간 문을 바라봤지만, 이미 김현우는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
아레스 길드가 가지고 있는 고층 빌라 지하 5층에 만들어져 있는 '관리부'.
그곳은 아레스 길드의 한국지부 내에 있는 대표적인 부서인 '정보부', '인사부'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권력을 가진 부서였다.
그런 관리부의 사무실에서 두 남자는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한 명은 바로 인사부서의 '유병욱'.
다른 한 명은 바로 아레스 길드 한국 관리부를 책임지고 있는 '우천명'이었다.
그는 앞에 앉아있는 유병욱을 말없이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우리 인사부장님께서 이 지하까지는 왜 찾아오셨을까?"
우천명 특유의 말려 올라가는 듯한 목소리에 유병욱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흑선우 지부장님께서 따로 말해 놓는다고 들었는데, 아직 듣지 못했나?"
"아니, 다 듣기는 했지. 다만 정보를 받지는 못했어."
우천명의 말에 유병욱은 곧바로 자신이 쥐고 있던 서류철을 우천명에게 넘겼고, 그는 유병욱에게 받은 서류철을 곧바로 펼쳐 확인하더니 이내 놀랍다는 듯 말했다.
"A등급 능력치가 두 개? 탑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신인 헌터가 이 정도 능력치라니…… 이거 확실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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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현우
나이: 24
-능력치-
근력: B+
민첩: A-
내구: A-
체력: 알 수 없음.
마력: 알 수 없음.
행운: 알 수 없음 .
------------------------
유병욱이 건네준 서류철 안에 들어있는 서류를 보며 그가 놀랍다는 듯 말하자 유병욱은 대답했다.
"100% 확실한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협회에서 받은 영상으로 분석부에서 능력치를 임시로 지정해 둔 것뿐이야."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라니 대단하군, 아니, 대단한 걸 넘어서 초기 능력치가 이 정도면 괴물수준이야."
우천명은 진심으로 대단하다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말했다.
"그래서, 이 녀석을 죽이면 되는 건가?"
우천명에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살인 예고.
하지만 유병욱은 그런 우천명의 살인 예고에도 불구하고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지부장님께서는 죽이지는 말고 적당히 상처만 입히라고 하셨지만 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별 문제는 없을 거다."
"네가 원하는 게 아니라?"
미묘한 웃음을 지은 우천명은 이어 말했다.
"이번에 듣기는 들었지, 그 녀석이 건방지게 아레스 길드가 독점으로 잡고 있는 던전을 무단으로 들어갔다고, 근데 하필이면 그때 그 독점 던전을 지키던 헌터들이……."
"잘 알고 있군."
유병욱이 그 말을 끊자 우천명은 씩 웃으며 말했다.
"인상 좀 구겼겠군."
"그래, 그 녀석 덕분에."
그렇게 말하며 유병욱이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걱정하지 마, 솔직히 이 정도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면 우리도 적당히 '상처'만 입히는 건 힘들거든."
거기에 더해서-
"이번에 중국 쪽 시장 진출하는 데도 힘을 조금 보태야 해서 말이야."
"……중국?"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이번에 우리 지부장님께서 중국 진출에 발하나 걸치겠다고 열심히 일하는 중이잖아?"
우천명은 그렇게 말하더니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우리 지부장님 배에 탄 나도 지부장님이 원하는 바를 팍팍 밀어드려야지.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우천명이 느긋하게 묻자. 유병욱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중국 진출에 관리부가 움직이는 거지? 진출하고 난 다음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관리부.
그들은 명목상으로는 그저 길드 내 헌터들의 불법행위를 징계하는 징계부의 색깔을 띠고 있었지만, 그 실상은 헌터 업계의 더러운 뒷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부서였다.
유병욱이 묻자 그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말했다.
"패도 길드 덕분에 좀 바쁘지."
"패도 길드라면…… 그?"
"그래, 이제 막 중국에 나타난 지 얼마 안 된 신생인데, 말도 안 되는 기세로 중국 길드들을 먹어치우며 2년 만에 중국 전체 던전 중 52%를 먹어치운 괴물 길드."
거기에다가-
"그 패도 길드의 길드장도 탑에서 빠져 나온 지 4년만에 길드를 그정도로 성장시킨 데다가, 녀석이 데리고 있는 녀석들도 하나같이 괴물들뿐이라……."
게다가 이런저런 소문도 많지.
"……무슨?"
"패도 길드의 길드장은 신원미상인데 듣기로는 이번에 S등급 세계랭킹에서 5위를 차지했다더군."
"……신원미상인데?"
"그래, 협회에서 집계한 정보로 랭킹을 먹였으니 확실하겠지."
뭐, 그 뒷이야기는 말 하지 않아도 대충 알겠지?
우천명의 말에 우병욱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만족스럽다는 듯 바라본 그는 말했다.
"이 녀석은 걱정하지 마. 우리 쪽에서도 '상처'입힐 만큼의 인원을 쓸 수 없는 만큼, 그냥 깔끔하게 죽여 줄 테니."
그의 말이 사무실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그날 밤, 김시현의 집.
"진짜 세상의 발전이 끝없이 이룩하다 못해 한계치까지 돌파했구만."
"그렇게 감탄할 정도예요?"
김시현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김현우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더니 이내 커피를 들고 있는 김시현을 찍었다.
찰칵!
"왜 찍어요?"
"와, 화질 선명한 거 봐."
김시현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조금 전 찍힌 사진을 보며 신기해하는 그를 보며 김시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집에 오며 김현우에게 연락을 하려던 그는 김현우가 아직도 스마트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스마트폰을 사 와 선물했고-
"와, 이게 진짜 폰으로 되는 게임이라고……?"
김현우는 장장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조작하며 현대 문명의 발전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김현우가 스마트폰으로 게임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시현은 이내 떠올랐다는 듯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형이 아까 물었던 '숲지 부락'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응."
"그거 저희 서울 길드에서 관리하고 있는 독점 던전이긴 한데, 아마 보스 몬스터는 없을 거예요."
"……응? 뭐라고?"
김시현의 말에 반응한 김현우는 스마트폰을 내리고 그를 바라봤다.
"보스 몬스터가 왜 없어?"
"몇 주 전에 잡아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
김현우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 김시현을 바라보자 그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원래 던전의 보스몬스터는 일반 몬스터처럼 항상 있는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면 저희 탑 있잖아요?"
"…탑?"
그의 말에 김현우는 얼마 전까지 갇혀 있던 탑을 떠올렸다.
"그곳에는 몬스터가 대충 하루 기준으로 리젠 되잖아요? 일반 몬스터나 보스 몬스터나 똑같이요."
"그렇지?"
"근데 현실에 있는 독점 던전들은 달라요. 일반 몬스터들은 죽여도죽여도 어디선가 끝없이 나타나는데 비해, 보스 몬스터는 한 번 죽이면 다시 리젠되는 데 시간이 걸려요."
"얼마나?"
"그것도 다 다른데, 숲지 부락 같은 경우는 대충 1달 정도?"
"……한 달?!"
"네."
"그럼 나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자 김시현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아뇨, 한 달이나 기다릴 필요는 없어요, 이제 대충 2~3일 정도만 있으면 숲지 부락은 리젠 주기가 채워지니까요."
"그럼 아까 같이 물어봤던 '눈에 보이는 늪'은?"
"거기는 아레스 길드가 독점권을 행사하고 있는 던전인데, 거기 보스 몬스터는 언제 리젠될 지 모르겠네요."
뭐, 그런 정보야 자세히 찾아보면 나돌아 다니니까 찾아볼 수는 있지만요.
김시현이 짧게 뒷말을 붙이자 김현우는 혀를 차며 구시렁댔다.
"아니 뭐 몬스터 한 마리 잡는다고 해도 이렇게 신경 쓸 게 많은 거야?"
김현우의 투덜거림에 김시현은 그런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내 물었다.
"형, 그러고 보니까 헌터 협회에 랭크 등록은 언제 할 거예요?"
"……뭐?"
"랭크 등록이요. 협회에 가서 능력치 측정을 해야 그때부터 헌터 등급이 매겨지거든요."
"……그래? 근데 그거 굳이 해야 돼?"
"하는 게 좋죠."
"왜?"
"뭐 여러 가지로 좋은 게 있어요. 예를 들면 각종 편의 시설 혜택 같은 걸 거의 최대치로 받을 수 있고, 돈이 나오거든요."
"뭐? 돈?"
"네, 돈이요."
"얼마나?"
김현우가 궁금하다는 듯 묻자 김시현은 슬쩍 고민하는 듯한 몸짓을 취하더니 이야기했다.
"뭐… 등급에 따라 다르긴 한데 B급이 130인가 나오고 A급이 250, 그리고 S급이 좀 차이가 크긴 한데 제가 한 700정도 받아요."
"뭐? 700?"
"네."
"야, 그럼 존나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 있어도 협회 등록만 되어 있으면 그 돈 받는 거야?"
김현우가 굉장히 기대하는 표정으로 묻자 김시현은 답했다.
"아뇨, 한 2~3달에 한 번 정도는 실적이 있어야죠."
그 말에 김현우의 표정이 흐려졌지만, 그는 곧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아무튼 두세 달에 던전을 한 번 정도만 들어가도 그 정도 돈을 받을 수 있다 이거지?"
"네."
"내일 당장 하러 가자."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 13
013. 나한테 빠꾸는 없다(4)
다음 날, 아침 즈음 일어나 김시현의 자가용을 타고 함께 협회 능력 측정소로 가고 있던 김현우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물었다.
"야 시현아."
"네?"
"너는 근데 할 일 없냐?"
"……그게 뭔 소리예요?"
김현우의 말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며 그를 바라본 김시현.
하지만 김시현이 그런 시선을 보내든 말든 김현우는 물었다.
"아니 너, 가만히 보면 꽤 시간이 널널해 보여서."
"제가요?"
"응."
"……."
김현우의 말에 뭔가 상처받았다는 듯, 읏 소리를 낸 그는 이내 대답했다.
"전혀 안 한가하거든요? 지금도 형 때문에 일부러 시간 내서 같이 다니는 거거든요?"
"그래?"
"석원이 형은 현우 형 만난 뒤부터 길드 파티 데리고 미궁공략 들어갔고, 서연이는 이번에 독점 던전 보스몬스터 잡으러 돌아다니고 있어요."
다른 길드장들이 이렇게 바쁜데 저는 안 바쁘겠어요?
묘하게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한 김시현은 본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그래~!"
그러면서 다시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김현우를 보며 김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협회를 향해 가던 중,
"와, 진짜 이거 완전 중2병이네 야 이거 봐봐."
김시현은 갑자기 운전을 하던 중 그의 시야를 가리는 스마트폰에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건 대체 뭐……."
"이거 존나 중2병 걸린 것 같지 않냐?"
김현우가 내민 스마트폰에는 한 남자가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체 화면에 나와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허리가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발도자세.
실용이라고는 전혀 없이 그저 멋을 위해 취한 것 같은 자세에 그의 몸 주변으로 둥둥 흘러나오는 검은색 오오라 효과.
"형, 그거……."
김시현이 말하기도 전에 김현우는 묘한 감탄을 하며 말했다.
"이거 게임 로딩 화면이거든? 근데 어제부터 계속 던전 이동할 때마다 얘가 나오는 데 이거 찍은 이 자세로 찍은 쪽도 없나? 어떻게 이런 병신 같은 자세를 잡고 사진을 찍지?"
"아니."
"진짜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문명은 발전했는데 사람들 인터넷 감성은 12년 전 그대로냐 큭큭큭……."
그렇게 김현우가 키득거리며 스마트폰을 터치하고 있을 때, 운전을 하고 있던 김시현이 입을 열었다.
"형."
"응? 왜?"
"그거 나야."
"?"
"그거 나라고……."
"……."
그 말과 동시에 김현우는 웃고 있던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그 둘은 헌터 협회에 도착할 때까지 어느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
"흠."
헌터 협회에 속해 있는 능력 측정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 '신약용'은 느긋한 한숨을 내쉬며 앞에 있는 스테이터스 창을 바라봤다.
------------------------
이름: 이강현
나이: 23
성별: 남
-능력치-
근력: C
민첩: C+
내구: D
체력: C-
마력: C-
행운: B
SKILL -
[헌터등급 'C' 입니다!]
-----------------------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이강현이 조심스레 묻자 신약용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네가 그 튜토리얼 던전에서 뇌전의 마력을 사용했다던 그 헌터로군?"
"네 맞습니다."
신약용이 그를 알아보자 이강현이 묘하게 뿌듯한 티를 내며 대답했고, 그는 자신이 쥐고 있는 상대방의 스테이터스창을 띄워주는 아티팩트인 '탐색하는 눈'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뭘 그렇게 물어보나? 자네도 알 텐데? 이 정도 능력치면 꽤 좋은 편이지 근력 민첩 체력이 C등급에다가 내구가 D, 사실 이 정도면 보통 헌터보다 살짝 능력치가 좋은 정도지만."
신약용은 레이져 포인터로 '마력'등급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는 마력이 무려 C-등급일세. 그 말은 마력이 'A-'등급까진 오른단 소리지. 아마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을 거야."
그의 말에 이강현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이내 슬쩍 조심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저 혹시……."
"왜 그러나?"
"오늘 찾아온 헌터들은 몇 명이나 됐습니까?"
"자네까지 합하면 대충 10명 정도 되는 것 같군."
"그럼 혹시, 저보다 능력치가 좋은 헌터는…있었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이강현의 물음에 신약용은 쯧쯧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다른 헌터 능력치의 발설은 기밀이라 말해줄 수 없다네."
"아, 그렇습니까?"
묘하게 실망한 듯 보이는 그는 이내 신약용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려다-멈칫.
"저, 혹시…능력 측정소에 혹시 '김현우'라는 이름을 가진 헌터는 오지는 않았습니까?"
"…김현우?"
이강현의 말에 신약용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말했다.
"내 기억에 그런 헌터가 온 적은 없는 것 같군. 그보다, 헌터 능력치는 기밀이라고 말했을 텐데?"
신약용의 눈빛이 슬쩍 가늘어지자 이강현은 그제야 재빠르게 서둘러 인사를 하고 능력 측정실을 빠져나갔고, 신약용은 그가 빠져나간 문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자기보다 강한 헌터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은 알겠다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보는 놈은 또 간만이군.'
처음 탑을 빠져나오고, 본격적으로 헌터가 되기 위해 헌터 등급을 매기러 오는 신입 중에서도 가끔가다 저렇게 묻는 녀석이 있었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더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확실하게 듣고 싶어 하는 녀석들.
'이해는 하지만.'
저렇게 초보 때부터 노골적으로 행동하는 게 보이면 헌터 생활이 꼬일 수도 있었다.
물론 등급 높은 헌터들이 더 대우를 받는 건 당연하다.
허나 헌터 업계에서는 필수적으로 파티를 짜야 하기에 어지간하게 높은 등급이 아니면 기본적으로 헌터의 '인성'을 보고 뽑는다.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그렇게 짧은 감상을 남기며 다음 헌터를 기다린 지 얼마가 되었을까.
끼이익-
이윽고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검은색 츄리닝을 입고 느긋하게 문 안에 들어온 남자는 신약용을 보자 슬쩍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그의 앞에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신약용은 그런 김현우의 반응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뭔가?"
"김현우요."
"김현우……?"
신약용은 조금 전에 왔던 헌터에게서 언급된 그 이름을 듣고 저도 모르게 되물었으나 이내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말했다.
"탑에는 언제 들어갔지?"
"12년 전이요."
"12년…… 뭐? 12년 전?"
"네."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우의 모습에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신약용은 머릿속 한 구석에 있는 '고인물'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고 그제야 말했다.
"아, 그럼 자네가 설마 그 12년 만에 탑에서 빠져 나왔다는……?"
"네."
신약용도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을 뿐이지 김현우가 튜토리얼 존에서 보여줬던 모습들을 알고 있었다.
튜토리얼 존의 두 번째 시험 영상은, 수많은 헌터의 등급을 매기던 그가 보기에도 경악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김현우에 대한 흥미가 급격히 오른 신약용은 그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탐색자의 눈'을 넘겼다.
"우선 인적사항은 전부 체크했고, 이제 그것만 잡고 있으면 자네의 등급이 스테이터스가 옆에 있는 홀로그램에 뜨면서 헌터등급이 매겨질 걸세."
신약용에 말에 김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신약용이 준 큐브 형태의 물건을 집어 들었고, 신약용은 깨끗하게 비어 있는 홀로그램창을 흥미롭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과연 등급은 어떨까? B등급? 아니, 그 정도의 포텐이라면 몇몇 등급이 B+등급 정도일 수도 있겠군. 특히 속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B++등급이야. 그렇지 않고는 그런 속도는 내기 어렵지.'
그렇게 신약용이 빈 홀로그램창을 보며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
"……?"
신약용은 저도 모르게 눈앞에 떠 있는 홀로그램창을 보며 생각을 멈췄다.
------------------------
이름: 김현우
나이: 24(36)
성별: 남
-능력치-
근력: A++
민첩: A+
내구: S+
체력: A+
마력: --
행운: B
SKILL -
[헌터등급 'A+' 입니다!]
-----------------------
"????"
신약용이 저도 모르게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쳐다보았다.
"????"
그런 신약용의 모습에 김현우는 자신도 마찬가지로 의문을 표했고-
"!!!!!"
그 뒤, 신약용의 경악 어린 괴성이 측정소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
※ 이 글은 베스트 게시물로 선정되었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대박 사건 정리해 준다.
글쓴이: Neversun
대박 사건이 뭐냐고?
모르겠으면 그냥 헌터킬 이슈란 뒤져보면 된다. 그냥 1페이지가 그 이야기로 꽉 차 있으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지금 이 글은 그냥 헌터킬에서 나오고 있는 이슈 모아서 차례대로 정리한 거니까 그렇게 알길 바라고 설명해 준다.
우선 첫 번째로, '헌터를 알다'에 나오고 있는 한국 3대 길드장 김시현 이서연 한석원이 이번에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온 고인물 이라고 불리는 신규 헌터 김현우와 처음 탑을 같이 클리어했던 동료라는 이슈다.
이건 사실 전에도 이래저래 헌터를 알다 때문에 이미 말 나오는 떡밥이었는데 이번에 사실 확인된 걸로 안다.
그리고 지금 헌터킬이 제일 뜨거운 이유는 두 번째 이슈 때문인데, 바로 지금 탑에서 빠져나온 고인물 헌터의 능력치 이야기인데. 고인물의 모든 능력치 등급이 마력 빼고 올A등급이라는 소문임.
S급도 하나 끼어 있다고는 하는데 그건 진짜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고, 지금 이슈 게시판에서 난리 난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ㅋㅋㅋㅋㅋ지금 이것 때문에 이슈 게시판은 불판 피우고 난리 난데다가 헌터 협회 측에서는 약간 부정하는 투로 이야기하는데 이게 존나 웃긴 게 능력 측정하는 측정원이 김현우 능력치 보고 비명 지르면서 소리친 덕분에 다 퍼졌다.
능력 측정하는 측정원이 소리 지르는 영상 이슈게에 있으니까 가봐라.
아무튼 이걸로 정리 끝~ 나는 20000!
댓글 704개
내가바로측정원: ???? 어케 했노 시X련아;;;;;;
ㄴ궁금하다: 내가 다 궁금하다 씨발 진짜 어케 했노 시X련아????
ㄴ 낭선: 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이런 맘이었을 것 같다.
ㄴ 그림자왕: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얼마나 당황했을까 맨날 C등급만 보다가 갑자기 올 A보는거임 ㅋㅋㅋㅋㅋ 엌ㅋㅋㅋㅋㅋㄴ SSS랭크: 와…… 진짜 개쩔겠다. 홀로그램 딱 뜨는데 신입인데 올 A면…… 소름끼칠 듯, ㅁㄴㅇㄹ: 와 시발 뭐라고? 마력 빼고 올A등급? ㅅㅂ 오지게 충격적이네 ㅋㅋㅋㅋㅋㅋㅋ 한국 말고 전 세계에서도 올A 맞은 사람 없지 않냐???
ㄴ 알리타리아: 올A등급은 없는데 그 민첩만 B++ 이고 나머지 올A인 사람 있다. 세계 헌터랭킹 1위 '괴물'이 그렇잖어 ㅋㅋㅋㅋㅋㄴ 아리타리: 와 실화냐? ㅋㅋㅋㅋㅋ 진짜 미쳤다 미쳤어.
C급헌터인생: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부럽다부럳바부럽다부럽다!!! 뱀심 초 폭발한다!!!!! 죽여라!!! 코로세!!! 코-로-세!!!!!
ㄴ 전문드립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어머니도 당신을 죽이고 싶었을 것.
ㄴ C급헌터인생: ? 왜 갑자기 패드립이시죠? PDF 캡쳐 했습니다. 각오하시길~ㄴ 전문드립퍼: 너희 부모님도 PDF로 캡쳐했을 것.
ㄴ 병신을 보면 짖는 개 : 월 월월 월! 으르르르릉! 월!월 월월 월! 으르르르릉! 월!월 월월 월! 으르르르릉! 월!월 월월 월! 으르르르릉! 월!월 월월 월! 으르르르릉! 월!월 월월 월! 으르르르릉! 월!월 월월 월! 으르르르릉! 월!월 월월 월! 으르르르릉!?
그날 밤, 측정원의 비명 소리로 인해 헌터 킬의 이슈게시판은 다시 한번 '고인물'로 인해 뜨겁게 달아올랐다.
# 14
014. 제발 깝치지 마라(1)
아레스 길드 지하 5층의 관리부 사무실.
"올 A등급이라."
우천명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서류철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이내 서류철을 책상에 던져두곤 생각했다.
'괴물이군. 지부장님이 왜 그 녀석을 처리하려는지 알겠어.'
똑똑똑.
그렇게 그가 짧게 감상을 마칠 무렵 문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대답했고, 곧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부르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머리를 스포츠머리로 자른 남자는 게임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붉은색 가죽튜닉을 입고 있었다.
"중국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신천강"
"별말씀을,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열심히 해야죠."
남자가 슬쩍 웃으며 대답하자 우천명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에게 자신이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철과 스마트폰 하나를 넘겨주었다.
"서류철 안에 있는 녀석이 네가 이번에 처리할 녀석이다."
우천명의 말에 남자는 서류철을 펼쳐본 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 이 녀석 걔 아니에요? 이번에 탑에서 12년 만에 빠져나왔다고…… 이야, 이거 정말 초기 능력치 맞아요?"
"그러니까 굳이 이번에 S급 헌터 심사에 오를 널 부른 거지."
우병천의 말대로 신천강은 행운을 제외한 5개의 능력치중 2개 이상이 S등급으로 올라 다음 년 S등급 헌터로 승격이 확정되어 있었다.
"어지간히 지부장님 미움을 샀나 보네요?"
"뭐, 그 녀석 정리하려고 일부러 언론도 좀 조용히 만들어 놨거든."
"이야, 언론까지? 그 녀석이 무슨 짓 했나 보네요?"
"그럴 일이 있지."
우병천은 굳이 길게 대답하고 싶지 않았기에 적당한 선에서 대답을 끊었고 신천강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했다.
"그래서 개시일은?"
"그 녀석 뒤에 사람을 붙였으니 딱 네가 움직이기 좋은 상황에 알아서 그 스마트폰으로 연락이 갈 거다. 그전까지는 쉬고 있어."
그의 말에 신천강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곤 관리부 밖을 빠져 나갔다.
그렇게 김현우를 처리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 아레스 길드 내부에서 정해질 때쯤, 김현우는 오늘 보스 몬스터가 리젠 되는 숲지 부락에 와 있었다.
"그래서 이 녀석은?"
김현우는 슬쩍 고개를 돌려 김시현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묻자, 등 뒤에 거대한 가방을 들고 있던 남자는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가문이라고 합니다."
김현우가 묻자 곧바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그.
"형이 숲지 부락의 보스인 트윈헤드오우거를 잡으면 그 부산물을 챙길 서포터들이야."
"부산물?"
"숲지 부락의 다른 몬스터는 몰라도, 트윈해드오우거에서 나오는 부산물은 돈이 되거든."
"……돈? 얼마나?"
"글쎄? 그때그때 시세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대략 2000에서 비싸면 3500까지 갈 때도 있지."
"뭐? 고작 부산물이?"
김현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시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부산물을 어디다 쓰는데?"
"방어구나 무기 만들 때 쓰지. 모든 헌터가 형처럼 그렇게……."
김시현은 말을 하려다 말고 김현우의 차림을 바라봤다.
그가 탑에서 빠져나온 지도 2주째인데, 어째서인지 김현우의 옷차림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검은 츄리닝에 분홍색 슬리퍼.
'…슬리퍼 색은 계속 바뀌네.'
"…츄리닝만 입고 던전에 들어가지는 않거든."
김시현이 짧은 감상을 생각하며 말하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했다.
"그래서, 얘는 한마디로…나 따라서 부산물 가지러 간다 이거지?"
"어차피 형이 오우거를 죽인다고 해서 가죽이랑 피를 일일이 해체해서 가져올 생각은 없잖아? 그러니까 겸사겸사 챙기는 거지."
"뭐, 알았어."
"그리고 이거."
김시현의 말에 가볍게 대답한 김현우는 곧 그가 내민 종이를 하나 받았다.
"이건 또 뭐야?"
"숲지 부락은 들어가면 완전미로랑 다름없거든, 들어가서 던전을 빙빙 도는 건 짜증나니까."
김시현의 말을 들으며 종이를 펴자 그곳에 지도가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한 김현우는 이내 주머니에 지도를 집어넣었고.
김시현의 뒤에 있던 박가문은 김현우가 들어가는 것을 보며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김현우는 곧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두 명과 함께 숲지 부락에 발을 들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백년은 묵은 것 같은 나무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어 하늘을 가린 덕분에 무척이나 어두침침한 던전을 보며 김현우가 지도를 펼쳤을 때,
"저기…."
"응?"
그의 뒤에 있던 박가문이 은근슬쩍 눈치를 보며 김현우에게 말을 걸었다.
"왜?"
"저, 혹시…괜찮으면 동영상을 좀 찍어도 될까요…?"
"뭐? 영상?"
김현우가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자 박가문은 그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면서도 입을 열었다.
"그, 이번에 김현우 헌터가 요즘 인터넷에서 많이 이슈잖아요?"
"그래서?"
그것은 김현우도 알고 있었다.
처음에야 몰랐지만, 김시현에게 스마트폰을 선물 받고 이런저런 웹사이트들을 눈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김현우는 본인이 인터넷에서 상당히 유명인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요즘에 이렇게 이슈가 되는 헌터의 사냥 영상 같은 건 찍어서 올리면 조회수가 대박 터지거든요. 그렇게 되면 돈도 좀 들어오고……."
'거기다가 내 채널의 구독자 수도……!'
"돈이 들어온다고?"
"아, 혹시 유X브 모르세요?"
"아니, 알기는 아는데 거기서 어떻게 돈이 들어와? 그냥 영상 올리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말에 박가문은 왠지 김현우를 설득할 수 있겠다 싶어 유X브의 수익구조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고, 그 말을 들은 김현우는 굉장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내 사냥 영상을 찍어서 올리면, 조회수가 올라서 돈을 벌 수 있다?"
"정확히는 그 사이에 끼는 광고로 돈을 벌 수 있어요."
박가문의 말에 김현우는 씩 웃더니 말했다.
"좋아."
"정말요?!"
"다만 내 영상 팔아서 나온 수익은 8:2다."
"네?"
"내가 8, 너가 2."
"아, 아니……."
"싫어? 싫으면 말고."
김현우가 피식 웃으며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박가문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아니! 할게요! 할게요!"
'8대2 라도 지금 한창 이슈인 김현우의 사냥 영상을 유X브에 올릴 수 있다면……!!'
박가문은 구독자 수를 끌어 올리기 위해 그의 제안을 수락했고, 김현우는 금세 캠을 들어 올린 박가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좋아, 근데 말이야……."
그 말과 함께 김현우는 지도를 한번 보며 무엇인가를 가늠하는 듯하더니 이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마 내가 사냥하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지금부터 잘 찍어둬."
"네?"
그 말과 함께, 김현우가 자세를 취했다.
오른발을 뒤로, 왼발을 앞으로 한걸음 옮겨 자세를 취한 그는 몸을 자연스럽게 비틀어 마지 격투기 선수와 같은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흡……!"
김현우의 허리가 힘차게 오른쪽을 기점으로 꺾이기 시작했다.
그가 쥐고 있던 주먹이 허리의 축에 따라 그대로 돌아가고.
그의 팔이 마치 쏘아내기 직전 팽팽하게 도르레를 돌린 발리스타처럼 당겨진다, 그와 함께-쿵…… 쿠궁…… 콰드득!
그가 자세를 잡고 있던 땅이 마치 말라붙은 나뭇가지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헉……!"
박가문은 그 심상치 않은 김현우의 자세를 보며 본능적으로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보호하며 몸을 뒤로 물렸지만.
이미 박가문이 한 걸음 몸을 뒤로 움직인 그 순간. 팽팽하게 조여져 있던 김현우의 오른손은 두꺼운 고목을 때리고 있었다.
그리고-
꽈가가가가가강!!!!!
"으아아아악!?!"
마치 부락 내에 폭탄이 터져나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박가문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과 함께 사방으로 불어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몸을 엎드려 바닥에 들러붙었고 그의 입은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비명을 내질렀다.
귓가에는 무엇인가가 터지고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고.
몸에서는 지반이 실시간으로 덜덜 떨리는,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한동안 웅크려 있었던 그는 지반의 떨림이 멈춤에 따라 겁먹은 눈으로 슬쩍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와…."
박가문은 흙먼지가 완전히 걷힘에 따라 보이는 풍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 현재 인터넷에서 고인물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남자의 앞에는 '길'이 있었다.
'깨끗한 길.'
원래 '숲지 부락'의 길처럼 여기저기 나뭇가지가 있던 것도 아니고, 오크나 고블린 같은 몬스터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깨끗한 길.
그래, 그것은 그냥 일직선으로 만들어진 깨끗한 길이었다.
수백 년은 묵은 것 같은 고목들을 주먹 한 방에 뚫어버리고 만들어낸 길.
박가문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박가문에게 말했다.
"야."
"ㄴ, 네!"
"가자."
그 말과 함께 훤히 뚫린 길로 걸어 들어가는 김현우를 본 박가문은 저도 모르게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저게…고인물……!'
처음 인터넷에서 봤을 때만 해도 그저 감탄했을 뿐이었는데, 이렇게 실제로 눈앞에서 그의 능력을 보니 김현우의 능력은 감탄을 넘어 경외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개 간지난다…….'
그렇기에 박가문은 그런 감상을 남기며 김현우를 쫓아갔다.
그리고 곧 박가문은 다시 한번 김현우의 경외 어린 무력에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크에에에에엑!
긴 길을 뚫고 별다른 몬스터를 사냥하지 않고 한 번에 보스 몬스터가 있는 곳까지 도착한 김현우는 그곳에서 숲지 부락의 보스몬스터를 만났다.
트윈헤드오우거.
딱 보기에도 김현우보다 몇 배나 덩치 차이가 나는, 마치 겉으로 보기에는 소인족과 거인이 대결을 펼치는 것 같은 장면에 박가문은 긴장했지만-꽝!
"오, 피부가 질겨서 몸이 터져 나가지는 않나봐……?"
뛰어올라 오우거의 머리를 향해 휘두른 발차기 한 방에 속절없이 땅바닥에 매다 꽂히는 오우거를 보며 전율했다.
'저런 헌터가 있었나?'
혼자서 트윈헤드오우거를 죽일 수 있는 헌터는 많았다.
당장 A+급만 해도 조금 힘겹기는 하겠지만 혼자서 오우거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S급을 넘어가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박가문이 김현우의 모습에 전율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무력 때문이었다.
A급 헌터들은 마력을 사용한다.
마력으로 자신의 몸을 강화하고 자신이 발전시킨 스킬을 이용해 몬스터를 상대한다.
마법사는 두말할 필요 없이 거의 모든 공격을 마력에 의존하고, 전사나 도적 같은 무투계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스킬과 마력을 사용한다.
그런데 저것을 보라.
"이것도 막아봐라 돼지 새끼야……!"
오우거가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하자마자 김현우는 그의 머리 중 하나에 힘차게 발차기를 꽂아 넣는다.
꽝!!!
거대한 폭음소리와 함께 일어나지도 못한 채 머리 중 하나가 지반에 처박힌 트윈헤드오우거.
'와…….'
김현우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마력이고 스킬이고 뭐고 없는 그저 순수한 신체 능력으로만 보여주는 압도적인 무력.
그 모습에 박가문은 전율을 느꼈다.
# 15
015. 제발 깝치지 마라(2)
세계 1위의 동영상 커뮤니티 사이트라고 불리는 유튜X, 항상 세계 각지의 재미있고 놀라운 영상들이 올라오는 그곳에 하나의 영상이 올라간 것은 불과 하루 전이었다.
'고인물 헌터 김현우의 숲지 부락 솔로플레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하꼬 유튜버의 6분 20초짜리 영상.
그 영상은 현재 인터넷상에 퍼지고 있는 이슈를 타고 올라 순식간의 유튜브 조회수를 뻥튀기하기 시작했고, 영상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하며 외부로 영상링크를 퍼 올린 결과.
"와…이 영상 벌써 올라왔어?"
김현우는 유튜X 앱 실시간 조회수 1위의 영상에 자신의 이름이 박혀 있는 영상을 클릭했고, 곧 광고가 지나고 익숙한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 잘 찍었는데?"
분명 스마트폰으로 찍었던 것 같은데, 영상의 화질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물론 도중도중 박가문이 엎드리거나 비틀거려서 부분 부분 과하게 흔들리거나 영상이 잘리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영상이 찍힐 곳은 전부 찍힌 것 같았다.
"조회수가……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백만이면 돈이 어느 정도 들어오는 거지?'
김현우는 순간 생각했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스크롤을 내렸다.
어차피 자세히 몰라서 계산도 못 하니까.
그렇게 김현우가 스크롤을 내리자 곧 영상에 달린 댓글이 김현우의 스마트폰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의견 9244
나김두한이다: ??????
ㄴ나랑드사2다: ???????
ㄴ얕은놈가: 뭐지 시발?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저거 탑 이제 막 빠져나온 헌터 맞냐?
이천만원만: 와 씨발, 진짜 그거 팩트였던 거냐? 헌터킬에서 이슈됐었던 그 능력치 마력 빼고 올 A등급 썰??? 시발 지린다.
ㄴ아이돈노: 아니 시발 야, 이해가 안 가는데 저게 말이 되나? 마력 빼고 A등급인데 오우거를 저렇게 개패듯 패려면 등급이 A++은 되야 할 것 같은데?
기수식대마왕: 시발……나는 탑 나와서도 방구석 찐따인데 쟤는 나오자마자 저렇게 뜨네. 뱀심 터진다 씨바!!! 죽여라! 코로세! 코로세! 코-로-세!!!!
ㄴ 머저리를 보면 짖는 개: 월! 월월! 으르르르 컹! 월! 월월! 으르르르 컹!월! 월월! 으르르르 컹!월! 월월! 으르르르 컹!월! 월월! 으르르르 컹!월! 월월! 으르르르 컹!월! 월월! 으르르르 컹!월! 월월! 으르르르 컹!월! 월월! 으르르르 컹!
ㄴ SSS랭크 : 이 새끼는 헌터킬에서도 이러고 있더니 여기서도 똑같이 이러고 있네 ㅋㅋㅋㅋㅋㅋㅋ 이새끼 하는게 고인물영상 쫓아가서 지랄하기 밖에 없냐.
A급헌터이박사: ????? 도대체 저거 어떻게 하는 거냐? 시발 길 뚫는 거 말이 돼? 스킬 있냐?
ㄴ노가다장인: ㅅㅂ 나 배관공 하는데 저런 능력이나 있었으면 좋겠다 주먹 한번 휘두르면 그냥 쫙쫙 뚫리네 ㅋㅋㅋㅋㅋ 노가다 뛰어도 돈 잘 벌겠다.
ㄴ파릇한나무: 이 찐따새끼야 저런 능력이 있으면 헌터를해야지 노가다 뛸 생각을 하네 ㅋㅋㅋㅋㅋ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는 댓글창을 보며 김현우는 카페의 의자에 앉아 키득거렸고, 그의 앞에 앉아 있던 이서연은 물었다.
"그래서 오빠, 오늘은 '눈에 보이는 늪'에 가시려고요?"
"그래야지, 오늘이 보스 리젠 날이라고 시현이한테 들었거든."
여유로운 김현우의 대답.
"…근데, 도대체 그 아레스 길드가 독점으로 가지고 있는 던전에는 왜 가려는 거예요?"
이서연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으로 김현우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김현우가 아레스 길드가 서로 척을 지게 되었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적극적으로 아레스 길드를 건드릴 줄은….'
이서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김현우를 바라봤지만 정작 그는 굉장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말했잖아? 좀 볼 일이 있다니까?"
"…던전에 볼 일이 있다고요? 경험치나 그런 것 때문에?"
김시현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니고, 뭐…… 때가 되면 알려줄게."
"설마 아레스 길드 건드리려고 일부러 그렇게 가는 건 아니죠?"
"……그것도 조금?"
김현우의 답변에 이서연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현우 오빠가 가지고 있는 능력치만 들어보면 어디 가서 꿀릴 능력치는 아닌데…….'
김시현이 자신에게 해준 이야기가 맞다면 김현우의 능력치는 어디가 꿀릴 능력치는 아니었다.
게다가 어제 유튜브에 떠 있는 김현우의 던전 공략 영상을 보니 그를 정말 걱정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허나 그럼에도 이서연은 그가 막연히 걱정되었다.
'…마치 물가에 애를 내놓은 기분이야.'
물론 그가 걱정이 필요 없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건 맞다.
하지만 그런데도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후……."
그런 이서연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현우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근데 서연이 너는 왜 여기에 있냐? 시현이한테 들으니까 최근에 바쁘다며?"
"뭐, 저희도 독점하고 있는 던전들이 있으니까, 그 중 등급이 높은 던전은 제가 파티를 이뤄서 가야 보스 몬스터를 잡을 수 있거든요. 그거 때문에 바쁘죠."
"그래? 오늘은?"
"오늘도 바빠요, 근데 오빠가 도대체 왜 그렇게 아레스 길드를 건드는지 궁금해서 이유라도 들어보려고 온 건데……."
이서연은 그를 불만스럽다는 듯 김현우를 바라보곤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아무튼 조심해요. 아마
'눈에 보이는 물가.'
는 A-등급 던전이라 아마 그쪽에서도 날짜에 맞춰서 레이드를 뛰려고 할 테니까요."
김시현에게 그가 대충 어떤 목적으로 던전 안에 들어가는지 들었던 이서연은 그렇게 조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언 고마워."
그런 이서연의 조언을 제대로 들은 건지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이내 카페를 떠났다.
***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 김시현의 집 근처에 있던 카페에서 '눈에 보이는 늪'이 있는 중구에 도착한 김현우는,
"이 미친 새ㄲ…… 켁?!"
쾅!
"이 새끼 너 뭐하는 새끼야?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어? 너 지금 아레스 길드를 적으로 돌리는 거라고 이 새끼야……!!"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서 검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자를 보며 피식 웃더니 말했다.
"어째 너희들은 레퍼토리가 변하지를 않냐?"
"뭐, 뭐라고?"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무시하는 것도 똑같고, 무시하다가 나한테 쳐 맞는 것도 똑같아."
김현우는 검을 빼들고 있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피식 웃고는 말했다.
"게다가, 나중에 다 안 될 것 같으면 자기 길드 이름 팔아서 어떻게든 발악하는 것도 아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똑같은 거 아냐?"
쿵! 와장창창!
"컥!"
김현우는 그 말과 함께 남자의 머리통에 그대로 딱밤을 날려 주었고, 머리에 딱밤을 맞고 힘없이 널브러졌다.
김현우는 그렇게 널브러진 두 아레스 길드원을 보며 피식 웃은 뒤, 망설임 없이 던전 안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김현우가 던전으로 들어가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남자가 던전 입구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무척이나 평온한 표정으로 들어와 완전히 개박살이 나 널브러져 있는 헌터들을 보더니 이내 피식 웃고는 말했다.
"화려하게도 벌여 놨군."
그렇게 중얼거린 남자. 신천강은 김현우가 들어갔던 던전을 바라보더니 씩 하는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자, 그럼 느긋하게 한번 처리해 볼까?'
그는 망설임 없이 던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A-급 던전 '눈에 보이는 늪'은 발 그대로 늪지 지형의 던전이었다.
바닥에는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녹색의 늪지가 있었고, 그 이외에 밟을 수 있는 땅 부분이라고 해도 무른 땅들이 군데군데 있을 뿐이라 던전의 전략적 가치는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아레스 길드가 이 던전을 버리지 않고 독점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늪의 보스 때문.
-끄륵! 끄르륵! 끄륵!
늪지에서 순식간에 무른 땅으로 튀어나와 김현우를 공격하는 이 던전의 보스 '메가 엘리게이터'의 부산물은 현재 헌터 시장에서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메가 엘리게이터'는 가죽이 질기고 가죽 자체에 항마의 성질을 띠고 있기에 상대하기 어려운 보스 몬스터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얻을 수 있는 소재가 굉장히 좋다는 것이었다.
질기고 단단한 데다 그 자체에 항마력을 가지고 있는 가죽은 매우 비싼 값에 팔리는 장비 소재였고.
메가 엘리게이터의 이빨은 그리 큰 세공을 거치지 않아도 단검으로 만들기에 좋았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부산물의 가치가 높게 나가는 메가 엘리게이터는-펑!
김현우의 힘이 담긴 발차기에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날고 있는 중이었다.
쿵!
엘리게이터는 지상으로 떨어지자마자 김현우의 공격을 피하고자 늪지로 들어가려 했으나-
"어딜 가려고!!"
-끄르르륵?!
늪지로 파고 들어가려던 하던 메가 엘리게이터의 꼬리를 붙잡은 김현우는 곧바로 엘리게이터의 두 꼬리를 잡아 엘리게이터의 몸체를 끌어냈다.
그리고-
"너 자이언트 스윙이라고 아냐? 응?"
-끄에에엑!!!!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엘리게이터의 몸을 붙잡은 뒤, 자신의 몸을 축 삼아 엘리게이터의 몸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우직! 우지지직! 우직! 쾅!
거대한 메가 엘리게이터의 몸이 늪지 주변에 있는 나무들을 제초기마냥 갈아 버리고, 김현우는 그대로 반동을 추진력 삼아 엘리게이터의 몸을 던져 버렸다.
콰지지지직!
주변의 나무들을 쓸어버리며 배를 뒤집어 깐 채로 정신을 못 차리는 메가 엘리게이터를 보며 김현우는 곧바로 달려가.
쿠지지직!
메가 엘리게이터의 턱을 주먹으로 뚫어버렸다.
김현우의 주먹이 엘리게이터의 턱을 파고 들어가자마자 발작을 하듯 엘리게이터는 사방으로 몸을 틀었지만.
끄엑! 끄르르르엑! 끄륵……끄
이내 메가 엘리게이터의 움직임은 서서히 줄어들었고, 곧 움직임을 멈췄다.
김현우는 메가 엘리게이터가 완벽하게 죽었는지 확인한 뒤, 만족하며 녀석의 턱을 뚫었던 주먹을 빼냈다.
쥬르륵……주륵……
"윽……."
김현우는 자신의 손에 녹색의 점액질과 검붉은 피가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자신의 눈앞에 뜨는 로그에 미소를 지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최소한의 증명을 완료했습니다! 당신의 스테이터스창이 새롭게 업데이트 되고 정보: 최하위가 열립니다.]
로그를 확인하자마자 그는 망설임 없이 바뀐 정보창을 열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
김현우는 입을 열기도 전에 순식간에 자신의 온몸을 감싸기 시작하는 붉은빛 마력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또 뭐야?"
"마력으로 만든 줄이지."
"……뭐?"
김현우는 어느새 자신을 완전히 꽁꽁 감은 붉은 마력실을 확인한 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고, 그 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스포츠머리로 깎은 머리에 눈이 째져 있는 남자. 신천강은 자신의 오른손에서 붉은 마력을 뿜어내며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또 뭐야?"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신천강은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비웃음 가득한 표정을 짓고는 대답했다.
"뭐긴 뭐야, 아레스 길드에서 너 때문에 친히 보낸 귀한 몸이시지."
# 16
016. 제발 깝치지 마라(3)
무른 땅에서 모습을 드러낸 신천강을 가만히 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레스 길드에서 보낸 자객, 뭐 그런 거야?"
"이해력이 빠르네?"
신천강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김현우의 뒤에 있던 메가 엘리게이터를 보고 감탄했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메가 엘리게이터를 잡는 모습은 봤어, 진짜 대단하더군.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메가 엘리게이터를 그렇게 잡고 돌릴 수 있다니. 진짜 근력 A등급 맞아?"
"왜, 아닌 것 같아?"
붉은 마력에 몸이 묶인 상황에서도 김현우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하자 신천강은 붉은 마력을 더욱 뽑아내며 말했다.
"솔직히 근력 A등급으로는 그 정도 출력을 뽑아낸다는 게 말이 안 되거든…아무리 A등급이라고 해도 말이야."
"……그래?"
'보통 A등급이면 이 정도 근력이 되는 거 아닌가?'
애초에 김현우는 다른 사람과 자신의 능력치를 제대로 비교해 본 적이 없기에 대충 이 능력치 정도가 되면 이런 출력이 나온다고 생각했었다.
허나 신천강의 반응을 보고 김현우는 자신의 능력치에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뭐, 아무튼 그렇게 대단한 건 보스 잡는 걸 봐서 알았는데 마력 사슬에 묶이고도 그렇게 느긋해도 되겠어?"
"마력 사슬? 이거?"
김현우가 턱짓으로 자신의 몸을 감고 있는 사슬을 가리키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거. 보기에는 그냥 붉은 마력으로 만든 사슬이지만, 그 사슬에서 빠져 나오려면 마력이 필요하거든. 그것도 마력 A-등급인 나보다 강한 마력이 말이야."
그리고 너는-
"아직 탑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안 돼서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아니야?"
신천강의 물음에 김현우는 시험 삼아 몸에 힘을 주었으나, 정말 신천강의 말대로 마력이 필요한 것인지 마력 사슬을 끊길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다.
김현우가 새삼스레 붉은 사슬을 보며 신기해하자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대충 감이 오나? 너는 지금 위기라고."
김현우가 그렇게 몸에 힘을 주고 있자 신천강이 이제야 네 처지를 알았냐는 듯 잔뜩 비웃음을 머금으며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몸에 힘을 주던 것을 멈추고 그 모습을 바라본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위기? 왜?"
"그렇게 억지로 침착한 연기를 할 필요 없……."
"아니,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도대체 왜 내가 위기인데?"
김현우가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신천강을 바라보자 그는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슬쩍 지우더니 말했다.
"의뢰받은 놈들을 처리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어떻게 너희들은 그렇게 하나같이 똑같지?"
"이건 또 뭔 소리야?"
"그래 지금 네가 하는 말도 똑같아. 뒤늦게 허를 찔러 몸을 구속당하면 억지로 침착한 척하며 어떻게든 머리를 굴리지. 어떻게 해야 이 함정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고."
"……."
"그런데 이렇게 침착한 척하면서 오히려 역도발하는 놈들의 특징이 뭔 줄 알아?"
"뭔데?"
신천강이 허리춤에서 2척 길이의 소검을 꺼내 들었다.
딱 보기에도 예기가 흘러넘치는 소검을 든 그는 망설임 없이 도약해 붉은 사슬에 묵인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김현우에게 뛰어들었다.
"바로 내 신경을 건드려서 명줄을 재촉한다는 거야!"
그렇게 소리 친 신천강은 곧바로 그의 몸에 소검을 박아 넣었고, 그와 함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킬을 입에 담았다.
"맹독-"
신천강의 소검이 보라색 빛으로 물들고-
"폭발"
쾅!
보라색 빛으로 물든 소검의 끝이 폭발한다.
공격이 성공한 것에 대해 신천강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폭발로 인한 검은색 매연이 가라앉기를 기다렸고-
"어?"
"너, 뭐하냐?"
분명히 상반신이 날아간 김현우의 모습을 확인하려던 신천강은 무척이나 멀쩡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얼빵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런 미친……?!"
그것도 잠시, 곧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신천강은 몸을 뒤로 빼기 위해 소검을 회수해 백스텝을 밟았고,
"어딜 가려고?"
빡!
"끄악?!"
백스텝을 밟음과 동시에 김현우의 왼발에 옆구리를 걷어차인 신천강은 그대로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어떻게…어떻게…!!"
신천강은 나무에 처박힌 그 순간에도 그동안 수많은 헌터들과 싸웠던 암투에서 본능적으로 터득한 기술로 정신을 잃지 않고 날렵하게 바닥에 착지했지만,
"헉…?!"
어느 순간 자신의 앞에 와 있는 김현우의 모습에 기겁을 하고 소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각!
"미, 미친……!"
허나 곧 신천강은 자신의 소검이 김현우의 팔뚝에 막혀 살짝의 상처만을 내고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며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너는 선택을 잘못했어."
"뭐, 뭐라고?"
"나를 잡고 싶었으면 내 팔을 묶는 게 아니라 온몸을 이 붉은 사슬로 칭칭 감았어야지. 응?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게."
꽝! 우지지직!
"크엑!"
김현우의 발이 신천강의 가슴을 강하게 찍어 누르자 삽시간에 소검을 떨어뜨린 신천강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처지가 되었다.
그와 함께 신천강의 집중이 풀렸는지 김현우를 묶고 있던 붉은 사슬이 서서히 사라졌고 김현우는 자세를 바꾸지 않은 체 신천강에게 말했다.
"야."
"끄으으으……!!"
"사람을 죽이러 왔으면, 너도 죽을 각오는 하고 온 거지?"
그와 함께 신천강의 눈이 크게 떠졌지만, 김현우는 마치 잘 가라는 듯 씩 웃으며 그를 향해 선고했다.
"이미 늦었어, 병신아."
콰드득! 우지지지지직!!!
신천강의 가슴을 밟고 있던 발이 힘차게 앞으로 들어가자, 신천강의 몸이 그대로 나무 안쪽으로 푹 꺼져 들어가는 것을 본 김현우는 그에게서 발을 뗀 뒤-쾅! 우지지지직!
그대로 나무를 발로 차 부러뜨렸다.
우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너지는 나무.
신청강이 박혀 있던 나무는 곧 완전히 부러져 늪지대에 처박혔고.
크륵…크륵, 크륵……
나무가 아래로 처박히자마자 그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한 엘리게이터들을 보며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렇게 김현우가 다른 아레스 길드원이 오기도 전에 빠져나간 그 날 밤. 아레스 길드 지하 5층의 관리부.
"……신천강이 죽었다고?"
"예."
"확인 확실히 했어?"
"그게, 시신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왜?"
"신천강의 시신이 박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나무는 이미 늪 안에 가라앉아 있던 터라……."
남자가 다음 말을 하지 않아도 우천명은 자연스레 그다음에 일어났을 일을 짐작했다.
'아마 몬스터들이 신천강의 시체를 남김없이 먹어치웠겠지.'
"쯧, 우선 나가 봐."
우병천의 말에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곤 밖으로 빠져나갔고, 부서원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그는 곧 서류철을 열었다.
------------------------
이름: 신천강
나이: 24
-능력치-
근력: B
민첩: S+
내구: B-
체력: S
마력: A-
행운: B
-스킬-
맹독사슬 폭발강화
지속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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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강이 죽었다고?"
우천명은 부서원에게 들었던 사실을 떠올리며 서류를 바라보다 헛웃음을 지었다.
"신천강이?"
우천명으로써는 신천강이 졌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예전부터 뒷 세계에 들어오며 몬스터를 잡기 보다는 사람을 담그는 일을 훨씬 많이 한 신천강이었고, 그의 능력치는 다른 헌터들보다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S급인 민첩과 체력.
6개나 있는 각종 유틸과 공격스킬들.
그 외에도 탑에서 빠져나온 아시아 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레스 길드의 암투나 한국의 뒷세계에서 활약한 덕분에 그의 이름은 '뒤'에서는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근데, 그런 녀석을 이겼다고?'
우천명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한동안 신천강의 능력치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을 때, 김현우는 김시현의 집 소파에 앉아 묘하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고 있었다.
"정보 창."
------------------------
이름: 김현우 [임시 가디언]
나이: 24
성별: 남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A++
민첩: A+
내구: S+
체력: A+
마력: --
행운: B
SKILL -
정보 권한
[정보 권한]
당신은 최소한의 증명을 완료해. 정보 권한: 최하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에서 '임시 가디언'이 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갈 경우 당신은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2시간 34분 21초.
-----------------------
'이건 또 뭐야?'
집에 와서 정보 창을 열어본 김현우는 능력치 부분을 빼고 생소하게 바뀌어 있는 로그들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 옆에 붙어있는 임시 가디언은 뭐지?'
그 이외에도 증명을 완료했다면 '정보 권한'이라는 스킬이 생겼다.
게다가 그 아래에는 시스템의 초대랍시고 남은 시간까지.
김현우는 서서히 시간 초가 떨어져 내려 2시간 33분으로 넘어간 남은 시간을 보며 슬쩍 스마트폰의 전자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간 9시 27분……."
'대충 맞춰보면 딱 12시인가?'
그렇게 짧게 상황을 분석하면서도 김현우는 새롭게 나타난 로그를 몇 번이고 읽었지만 이내 혀를 차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이걸로는 뭐 하나 알 수 있는 게 없네."
혹시나 탑에 대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나온 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이 시스템의 초대인지 뭔지에 가보면 탑에 대해 알 수 있을까?'
김현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스템의 초대라고 써있는 로그를 손가락을 눌러봤으나, 로그를 손가락으로 눌러봐도 별 반응이 없었기에 그는 이윽고 시선을 위로 올렸다.
"정보 권한……?"
[정보 권한을 사용할 인물을 지정해 주세요.]
김현우가 입을 열자마자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새로운 로그를 보며 이게 뭔지를 생각할 때쯤-
"형 오늘 일찍 왔네요?"
김현우는 타이밍 좋게 문을 열고 들어온 김시현을 바라봤고,
"어?"
"왜요?"
곧 그는 자신의 앞에 떠오른 새로운 로그를 보며-
------------------------
이름: 김시현
나이: 30
성별: 남
-능력치-
근력: --
민첩: --
내구: --
체력: --
마력: --
행운: --
정보 권한이 최하위에 해당함으로 능력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SKI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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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씨발?"
대부분이 가려져 있는 능력치에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그리고 김현우에게 면전에서 욕을 들어먹은 김시현은 묘한 표정으로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며 생각했다.
'…나 뭐 잘못했나?'
# 17
017. 제발 깝치지 마라(4)
김현우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 메인에 띄워져 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11:58분.
아까 전 '권한 사용'으로 인한 헤프닝으로 충격받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시현을 달래준 김현우는 간단하게나마 새롭게 생긴 스킬이 어떤 종류의 스킬인지 알 수 있었다.
다만,
'아니, 근데 이거 이름이랑 나이 성별만 뜨면 별 의미 없는 거 아니야?'
그는 아까 전 떠오른 김시현의 로그를 보며 생각했다.
제대로 뜬 건 이름과 나이, 그리고 성별뿐이고 나머지는 정보 급이 최하위라 열람하지 못한단다.
'…이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잖아.'
알 수 있는 거라곤 상대방 나이랑 이름뿐인데, 스킬을 써가면서까지 이름을 알고 싶은 상대는 아예 없었다.
'뭐, 보니까 정보 등급이 점점 오르면 그에 따라서 상대방 능력치를 조금 더 많이 볼 수 있는 건 알겠는데.'
정보 등급은 또 어떻게 올리는지 모르는 김현우로서는 지금 새로 생긴 스킬은 별 의미 없는 쓰레기 스킬로 받아들여졌다.
'뭐, 이것도 그 시스템의 초대인가 뭔가를 받으면 자세히 설명을 들을 수 있겠지.'
다만 김현우는 12시에 있을 시스템의 초대라는 것에 은근히 기대를 심으며 소파에 앉아 기다렸고, 마침내 12시가 되자-
"?"
김현우가 있던 곳은 바뀌었다.
마치 불을 껐다 켠 것처럼 완전히 바뀌어 버린 김현우의 주변 풍경.
"……."
분명 조금 전만 해도 김현우는 김시현의 집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그가 앉아 있던 소파는 파란색의 엔틱한 소파였고, 그의 앞에는 유리로 된 테이블이, 그리고 맞붙어 있는 벽에는 거대한 TV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풍경은 어떠한가?
"이건……."
김현우는 주변의 풍경을 돌아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방 안이었다.
5평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작은 방.
방바닥은 하얀색의 대리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벽지는 마치 어느 사무실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레이색의 벽지가 붙어 있었다.
그렇게 어디선가 본 취조실처럼 꾸며놓은 방 안에 김현우는 그 테이블 두고 앉아 있었다.
갑작스럽게 바뀐 환경에 김현우는 놀라면서도 침착하며 주변을 파악했고, 곧 얼마 있지 않아 밖으로 통하는 통로라고는 아무것도 없던 맞은편에 한 명의 여자가 나타났다.
"?!"
"안녕하십니까."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듯 나타나는 여자.
처음부터 앉은 상태로 갑작스레 나타난 터라 키는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어려 보인다는 인상이 돋보이는 백발의 장발을 한 여자는 김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가디언, 저는 당신의 조력자입니다."
"……조력자?"
"어차피 당신이 살아 있는 한 자주 볼 사이니 편하게 '아브'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뭐? 아브?"
"네."
"뭐…… 그래."
김현우는 그 말에 자신을 아브라고 소개한 여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
"……."
"……."
"……."
"……저기?"
"왜 그러십니까 가디언?"
왜 그러냐는 듯 김현우를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브를 보며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곤 물었다.
"뭐, 설명 같은 거 안 해줘?"
"…무슨 설명 말입니까?"
"아니, 무슨 설명이냐니…."
'아니 뭐야 이게?'
보통 이런 곳에 오면 대충 설명해 주지 않나? 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김현우는 아브의 대답에 저도 모르게 말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내가 질문해야만 답할 수 있는 거냐?"
"맞습니다."
김현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아브.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김현우는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또 어디서부터 상황을 설명해야 할까를 대략적으로 생각한 뒤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나를 튜토리얼 탑에 가둬 놓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어?"
"정보 등급 최하위로는 답변이 불가능 한 정보입니다."
"뭐?"
"정보 등급 최하위로는 답변이 불가능 한 정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설마 여기도 정보 등급이 높지 않으면 답변 못 받고…뭐 그런 거야?"
"잘 알고 있으시군요."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아브를 보며 허 하고 웃은 김현우는 어처구니없지만, 우선은 수용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그럼 우선 정보 등급이 높으면 나를 탑 안에 가둬놓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다는 소리야?"
"정보 등급 최하위로는 답변이 불가능 한 정보입니다."
"……아니 이건 그냥 물어보는 거잖아?!"
"결국에는 정보 등급 상위에 관련된 질문이라 답변이 불가능합니다."
"……."
"……."
"그럼 튜토리얼 탑이 뭔지에 대해서는?"
"정보 등급 최하위로는 답변이 불가능한 정보입니다."
"튜토리얼 탑을 만든 이유는?"
"……현대에 몬스터가 있는 이유는?"
"이런 씨발 나랑 장난쳐?!"
빡!
"꺅?!"
김현우가 저도 모르게 승질을 내며 얄밉게 앉아 있는 아브의 머리를 때리자 아브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끄으으으으으으~~~아아아아!!!"
순간적으로 고통이 몰려온 듯 비명 어린 신음을 지른 아브.
"아니 씨발 최하위 등급은 대체 뭔데!"
김현우가 화를 내자 아브는 도끼눈을 뜨고 빼액 소리를 질렀다!
"정보 등급 최하위로는 답변이 불가능한 정보라고요!!!"
"이게 진짜…!"
"히익!"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이 올라갔지만, 곧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아브의 눈빛을 보다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내리곤 말했다.
"그럼 가디언은 뭐야?"
"2주 동안 빤 것 같지도 않은 츄리닝을 입고 있는 당신의 정보 등급으로는 답변이 불가능한 정보…히익!…….는 아니라 말씀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기계처럼 말하다 김현우가 손을 들어 올리자 급하게 말을 바꾸는 아브의 모습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눈물을 그렁그렁한 체 그를 바라보고 있는 아브, 그녀는 곧 그렁그렁한 눈물을 집어넣곤 무감정한 목소리를 다시 내기 시작했다.
"가디언은 즉 방어하는 자입니다."
"……."
"……."
"……??"
"……??"
김현우의 갸웃거림에 맞춰 같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브.
"그게 끝?"
"네, 끝입니다."
"……너 나한테 지금 싸움 거는 거지? 응? 지금 싸움 거는 거지?"
김현우가 빡침을 웃음으로 승화하며 이를 악물자. 손을 올리자 아브는 짐짓 억울하다는 몸짓으로 아까 맞은 곳에 손을 올리곤 말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정보 등급 최하위에게 제공할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소수라 어쩔 수 없다고요……!"
김현우가 손을 올리냐 마냐에 따라 말투가 바뀌는 아브를 본 그는 헛웃음을 짓곤 소리쳤다.
"그럼 네가 도대체 뭘 대답할 수 있는데?!"
"……가디언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결국 궁금증은 해결할 수 없다는 거 아니야?"
"당신이 본격적으로 '임시 가디언'직을 벗어 던지고 나면 당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도 아주 세세하게 알게 될 겁니다."
아브의 대답에 그녀를 불만스럽게 노려보고 있던 김현우는 쯧 하고 혀를 찬 뒤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뭔데?"
"5일 뒤, 당신이 사는 지역에 '크레바스'가 열릴 겁니다."
"……크레바스? 그건 또 뭐야."
김현우가 물었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그 크레바스의 제일 깊숙한 곳에 정보 등급을 올릴 수 있는 열쇠가 있을 겁니다. 그걸 얻는다면 당신은 '임시 가디언'이 아니라 진짜 '가디언'이 되죠."
아브는 그렇게 말하며 뭔가 고민하는 듯 고개를 슬쩍 갸웃하곤 말했다.
"그렇게 가디언이 되고 나면 아마 당신이 원하는 진실에 조금 더 가까워 질 겁니다……?"
"……어째 말이 의문문이다?"
아브는 김현우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고."
"……또 있어?"
김현우가 묻자 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 있습니다. 우선 '임시 가디언'이지만 최소한의 자격을 얻은 만큼 가지고 있는 '권한 사용'의 스킬을 업그레이드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업그레이드? 그거 그냥 정보 등급이 높으면 보이는 거 아니었어?"
"그 이외에 기능을 하나 더 추가해 드리는 거죠."
"뭐, 그래……."
'어떻게든 스킬의 성능이 올라간다는 건 나쁜 게 아니니까.'
김현우가 그렇게 혼자 수긍하자 아브는 말했다.
"그럼 이제 전할 말은 모두 끝냈으니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는 열쇠를 가진 채로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뭐?"
아브의 말에 김현우가 되물었으나, 곧 김현우는 다시 한번 세상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가 파란색의 엔틱한 소파로 변하고, 아브가 있던 곳에는 유리테이블과 TV가 위치한다.
마치 스위치를 변경한 것처럼 한순간 바뀌는 풍경에 김현우는 고개를 돌려 주변들 둘러봤지만 아까 그 풍경은 어디에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그 한순간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묘한 느낌에 김현우는 정보창을 열었다.
"……정보창."
그리고 곧 정보창에 주르륵 떠오르는 로그를 보며, 그는 오묘한 표정으로 로그 끝에 새롭게 업데이트 되어 있는 내용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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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현우 [임시 가디언]
나이: 24
성별: 남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A++
민첩: A+
내구: S+
체력: A+
마력: --
행운: B
SKILL -
정보 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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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
최소한의 증명을 완료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증명일 뿐, 이제 곧 일어날 '크레바스'의 깊은 곳에서 '열쇠'를 휙득하는 것으로 당신을 증명하세요.
위치: 서울시 강서구 일대
남은 시간: [04] 21: 33: 32초
***
넓은 공동.
흑백을 조화롭게 맞춰 놓은 타일이 깔려있는 그 공동의 한가운데, 무척이나 거대한 원탁이 있었다.
족히 50명 정도가 둘러앉아도 제대로 들어차지 않을 것 같은 원탁.
그 원탁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외모는 제대로 묘사할 수 없었다.
그의 몸 주변에 모이는 검은 오오라가 그의 형체를 가리고 있었으니까.
허나-
"'9계층'이 각성했습니다."
"그래?"
의자 뒤에 나타난 남자의 말에 대답한 그 검은 무언가의 목소리가 굵은 것이라는 단서 하나로, 그가 남자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형체를 알 수 없는 오오라를 뿜어내는 무언가는 남자에게 물었다.
"완전히 각성했나?"
그의 물음에 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기장의 검은색 로브를 입은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직 완전히 각성하지 않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확실히 직책을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 뭐 그리 나쁜 타이밍은 아니군."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이내 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와 함께 검은 로브를 입고 있던 남자는 꾸벅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그 자리에서 없었다는 듯 사라졌고, 형체가 보이지 않는 그는 기대된다는 듯 톤을 살짝 높여 중얼거렸다.
"과연 얼마나 할 수 있는지 볼까?"
그의 목소리가 거대한 공동 안에 울려 퍼졌다.
# 18
018. 크레바스(1)
"미궁으로 내려가면 뭘 얻을 수 있는데?"
다음 날 점심, 어제 미궁 탐사에서 돌아왔다던 한석원을 포함한 옛 동료들과 점심을 같이 먹게 된 김현우는 문득 미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질문했다.
"미궁? 뭐, 여러 가지가 있지."
바로 어제, 미궁에 내려갔다가 올라온 한석원은 전혀 변함없는 모습으로 입안에 스테이크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던전이랑 다르게 미궁은 아티팩트를 얻을 수 있거든."
"……아티팩트?"
"그래, 보통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몬스터들을 죽이고 나온 마정석을 제외하면 그 던전의 지형에서 나오는 특수한 자원이라든가 몬스터의 부산물뿐이거든."
"그런데?"
"미궁에서는 아티팩트…… 그러니까 한마디로 장비를 파밍 할 수 있다 이 소리지."
"장비? 그건 몬스터 부산물로도 만들 수 있는 거잖아?"
김현우가 그렇게 질문하자 그의 옆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이서연은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미궁에서 얻을 수 있는 장비는 지금 일반적으로 가공해서 얻을 수 있는 방어구 보다 훨씬 좋은 경우가 많아요."
"그래?"
"뭐…… 보통 등급이 높아서 그런 것도 있는데, 그것보다 아티팩트 장비가 더 좋은 이유는 인챈트가 되어 있거든요."
"……인챈트? 게임에 나오는 그거?"
김시현에게 스마트폰을 선물 받은 뒤로 열심히 게임만 하는 김현우가 자연스레 게임에 빗대 묻자 이번에는 김시현이 답했다.
"네, 그거요. 막 인챈트 같은 거 해보면 아이템 능력치가 올라가고 그러잖아요?"
"그렇지?"
"그런 상태로 장비가 파밍된다고 보면 돼요, 거기에 이런저런 스킬까지 붙어 있는 장비도 많고요."
"……그거 완전 게임 아니냐?"
"그렇죠? 저도 어쩔때 보면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라니까요."
김시현이 피식 웃으며 말하는 걸 들은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려 한석원을 바라봤다.
"그래서, 이번에 미궁 내려가서 수확은 있었어?"
"당연! 미궁에 내려가는 중에 보물창고를 발견해서 말이야."
"보물창고……? 미궁은 그냥 몬스터 득실거리는 데 아니었어?"
"그랬으면 내가 내려갔겠어? 미궁은 깊게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몬스터도 강해지지만 그런 미궁들 사이에 숨어 있는 보물창고가 있거든."
거기에서 아티팩트를 얻는 거지.
한석원은 그렇게 말하더니 김현우에게 반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반지?"
"그냥 평범한 반지가 아니야. 미궁에서 구한 아티팩트지."
김현우는 한석원이 내민 아티펙트를 받았고, 곧 김현우의 눈앞에 새로운 로그가 출력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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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람의 반지
등급: A+
보정: 없음
스킬: 염화
-스킬, 정보 권한으로 숨겨진 설명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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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권한으로 숨겨진 설명 확인 가능?'
김현우는 아래에 있는 로그를 읽으면서도 말했다.
"이 염화라는 스킬은 뭐야?"
"음, 부여계 마법인데, 자기가 들고 있는 무기나 자기 몸에 속성을 부여하는 거야."
"그래?"
김현우는 태연하게 대답하면서 어제 얻은 스킬인 정보 권한을 이용해 아이템의 추가 설명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
이탈람의 반지
등급: A+
보정: 없음
스킬: 염화
-정보 권한-
이탈람의 반지는 5계층의 -권한부족- 가 가지고 있던 반지로 그는 -권한부족- 덕분에 이 반지를 가지고 있게 되었다. 그는 -권한부족- 에 -권한부족-, 그리고 -권한부족-을 막아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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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개……."
'병신 쓰레기 스킬을 봤나 진짜.'
김현우는 아니나 다를까, 자신 눈에 밟히는 권한 부족의 향연에 저도 모르게 욕을 하려다 조용히 반지를 한석원에게 돌려주었다.
"그래서 그건 팔면 얼마 정도 하냐?"
"글쎄? 이런 아티팩트는 똑같은 매물이 없으니까 정해진 가격이 없는 편인데 이건 등급도 A+에 염화가 붙어 있어서 한 20억쯤은 가지 않을까?"
"……20억?"
"응, 20억."
"집 두 채 값이라고?"
"그렇지?"
한석원의 태평한 말에 김현우는 허탈하게 웃더니 말했다.
"그 조그마한 반지 하나에 20억???"
"세금 떼면 한 17억 정도 되지 않을까?"
"……."
김현우는 일이 끝나고 궁금증을 풀고 나면 미궁 탐험을 하기로 결심하곤, 독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안내인을 불렀다.
"여기에 있는 음식 전부 하나씩 가져다주세요."
"너 다 먹을 수 있어?"
"다 먹는다."
김현우의 말에 한석원은 피식하고 웃더니 말했다.
"그래그래, 많이 먹어라."
"형…애예요?"
"오빠…."
한석원의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말투와 동시에 김시현과 이서연이 김현우의 의중을 눈치채고 가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으나.
"뭐?"
김현우는 당당했다.
그렇게 안내인이 주문을 받고 빠져나가자 김현우는 문득 어제 있던 일을 떠올리곤 말했다.
"야, 너희들 크레바스라고 알아?"
"크레바스? 당연히 알죠. 겪어본 적은 없지만."
"그래?"
"근데 그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
"꺼무위키 검색해보면 금방 나오기는 하는데……."
'아, 이 형 어차피 지금 스마트폰 게임기로밖에 사용 안 하지.'
대략 2주 정도 김현우과 같이 살아 본 김시현.
그는 김현우의 스마트폰이 그 어떤 용도로도 사용되지 않고, 오로지 게임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새삼스레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음, 그냥 그건 일종의 재앙 같은 건데……."
"재앙?"
김시현은 그 뒤로 간단하게 크레바스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그 크레바스라는 건 그냥 던전이나 미궁이 아니라 갑작스레 땅 속에 균열이 생기는 거고, 그 위에서 몬스터가 끝도 없이 올라온다는 거야?"
"뭐, 그렇죠. 그래서 실제로 그 크레바스를 겪었던 독일이랑 중국에서는 '헬게이트'라고 말하기도 한다네요."
'진짜 생각해 보니 그러네.'
갑자기 땅바닥에 균열이 생기더니 거기서 몬스터가 올라온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지옥문이 열리는 것과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김현우는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럼 크레바스가 한번 일어나면 지옥이겠네?"
"지옥 수준이겠어요? 그냥 조기에 진압 못 하면 박살 나는 거죠."
"사실 크레바스에도 등급이 있기는 해, C등급부터 A등급까지 말이지."
김시현의 말과 함께 한석원이 말했다.
"그래?"
"C등급은 2년 전에 중국에서 한번 일어났는데 패도 길드가 크레바스를 막는 데 성공했고, B등급은 독일에서 한번 일어났는데 아주 개박살 났어."
"……등급 차이가 좀 있나 보네?"
김현우의 물음에 한석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C등급, 그러니까 고블린들이 잔뜩 올라오는 거라면 물량으로 막을 수 있지. 헌터만 넘쳐나면 되니까."
그런데-
"B등급 이상의 몬스터들이 올라오면 B급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헌터들이 줄어드니 당연히 막을 수 있는 헌터도 줄어드니까, 아무래도 차이가 좀 더 있지."
한석원의 말을 들으며 김현우는 정보창을 띄워 점점 다가오고 있는 시간을 바라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길래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지금 나보고 재앙을 막으라고 한 거야?
김현우는 이 상황에 투덜거렸지만, 어느새 테이블 위에 새롭게 세팅되는 음식을 보며 물었다.
"만약 우리나라에 크레바스가 열리면 막을 수 있을까?"
"…크레바스가 우리나라에 올라오면?"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이 저도 모르게 따라 말하며 침음성을 흘렸다.
"막을 수는 있겠지."
"그래?"
"다만 크레바스가 올라온 지형은 끝장일걸……볼모지 행일 거야 분명히."
"…C등급이라도?"
"그렇지. 어차피 크레바스 일어난다고 해봤자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건 우리랑 소수의 한국길드뿐일 거고, 아레스 길드는 미적거릴 테니까."
"……해외 기업이라?"
"그렇지. 굳이 아까운 헌터 보내서 죽일 이유가 없다 이거지. 아 물론 헌터 독점하려고 어영부영 계약한 애들이나 보내놓고 자기들은 같이 막았습니다~ 이따위 정치질이나 하고 있겠지."
아오 이 새끼들 생각하니까 또 빡치네?
김시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본 김현우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럼 크레바스가 일어나면 아예 장점은 없는 거냐?"
"장점? 있기는 있지."
"뭔데?"
"우선 크레바스를 막는 데 성공하면 정부랑 국제헌터 협회에서 상금을 뿌리고, 거기에 덤해서 크레바스 내에 있는 아티팩트들을 전부 먹을 수 있지."
다만 크레바스가 한번 열리면 그 아티팩트를 먹는 거로는 수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피해를 보니까 문제지.
김시현이 그렇게 뒷말을 끝내며 스테이크 후식으로 나온 빵을 먹었다.
김현우는 그런 동료들을 보며 말했다.
"4일 뒤까지는 편히 쉬어둬."
"갑자기 무슨 소리야?"
"보면 알게 될 거다."
***
아레스 길드 상층에 있는 회의실, 고풍스럽게 만들어져 있는 회의실에는 총 3명의 인원이 앉아 있었다.
제일 상석에는 아레스 길드 한국지부의 지부장인 '흑선우'.
그런 그의 양옆 자리에는 각각 인사부서의 부장인 유병욱이, 그 맞은편에는 관리부장 우천명이 앉아 있었다.
조용한 회의실.
그런 침묵 속에서 흑선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처리하지 못했다는 거야?"
"면목 없습니다."
우천명이 고개를 숙이자 흑선우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아니 뭐, 그렇게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어. 인사부장의 말을 들어보니 관리부에서 제일 잘 나가는 놈을 보냈는데 그렇게 죽었으면…뭐 어쩔 수 없지, 씨발."
흑선우는 한순간, 아무렇지도 않았던 표정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리더니 테이블을 후려쳤다.
콰지지지지직!
순식간에 부서져 두 개로 나뉜 테이블이 또 한번 박살 난 뒤에야 흑선우는 손을 거두곤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응? 자네를 탓하는 게 아니야. 그 녀석이 너무 비정상적으로 강했던 거지."
흑선우는 우천명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가죽 의자에 몸을 기대곤 눈을 감았다.
또 한번 이어지는 침묵.
그리고 곧, 흑선우의 잔잔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리기 시작했다.
"유 부장."
"예."
"지금부터 그 새끼 묻어. 알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유병욱은 흑선우가 자신에게 언플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숙였다.
"예, 알겠습니다."
"바로 시작하지 말고, 천천히 해. 대충 5일 정도가 좋겠군. 그 녀석 조질 수 있는 거라면 모두 모아서 그냥 조져 버려."
흑선우는 그렇게 말하곤 곧 우천명을 쳐다보곤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우 부장 자네는 당분간은 중국 패도 길드쪽에 집중하라고 하고 싶지만, 인원 몇 명 더 빼놔. 그 저번에 보냈다는 놈보다 강한 놈으로."
"용병을 구인해도 되겠습니까?"
"맘대로 해, 돈은 밀어주지. 다만 비밀 보장이 확실해야 한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될 테고."
"예."
"용병 구인한 뒤에는 패도 길드에 집중해라, 요즘 들어 패도 길드 쪽에서도 가면 군세인가 뭔가 별 엿 같은 별동대를 구성해서 우리 길드원들을 쳐내고 있는 것 같으니까."
흑선우의 말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했고, 흑선우는 부서진 테이블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있어서는 안 되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있어선 안 돼……."
# 19
019. 크레바스(2)
[현재 국제 김포 공항에서 일어난 크레바스 사태로 인해 공항은 긴급히 폐쇄되고 헌터들이 투입되고 있습니다.]
[김포 공항 반경 5KM 내에 거주 중인 모든 시민들에게 긴급 대피 명령이 내려왔으며, 현재 김포 공항에 일어난 크레바스를 막아내려 협회 소속 헌터들이 투입되고 있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모니터의 화면이 넘어가며 김포 국제공항을 비추기 시작했다.
국제공항 내에 있는 비행기 정차장에는 딱 봐도 무척 거대한 크기의 균열이 생겨 있었고, 그 안에서는 끊임없이 몬스터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던전이나 미궁에서 볼 수 있는 몬스터가 현실에 나와 활공장 내에 있는 항공기들을 부수고, 공항 내를 박살 내고 돌아다니는 모습.
종래에는 그런 몬스터와 헌터가 모여서 싸우는 모습을 차례대로 중계한 뉴스.
곧 화면을 돌린 모니터 하단의 타임라인에 '긴급 속보' 라는 글을 올려둔 뉴스는 지속적으로 시민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방송을 계속해 나갔다.
김포국제공항의 외곽 쪽.
"야! 거기 막아! 여기서 몬스터 밖으로 보내면 진짜 끝이야 끝!"
"거기 막으라고 이 새끼야!"
"창후야! 창후야!"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사방이 몬스터와 헌터의 괴성과 비명으로 가득 찬 그곳.
거기에서 같은 헌터에게 명령을 내리던 남자 심강찬은 몰려오는 몬스터를 보며 이를 악물고는 입을 열었다.
"속박"
입을 열자마자 달려오던 도중 몸이 묶여 그대로 꼬꾸라진 오크의 머리에 칼을 박아 넣은 그는 주변의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수가 너무 많다. 지원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심강찬의 검이 쉴 새 없이 움직여 몬스터의 몸을 베어내고 새롭게 달려오는 몬스터의 공격을 방어해 내면서도 주위를 살폈다.
주변은 아수라장.
같이 출동했던 헌터들은 몬스터의 물량공세에 밀려 주춤주춤 방어선을 벗어나고 있었고, 특히 몇몇 헌터들은 몬스터에게 이미 공격당해 중상을 입거나 죽은 이들도 있었다.
'이런 씨발……!'
그는 신경질적으로 오크의 글레이브를 쳐낸 뒤 오크의 머리에 검을 꽂아 넣고는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안 좋아.'
몰려오는 몬스터는 다행히도 C급 정도의 고블린과 오크, 그 뒤로는 C+급인 놀들뿐, 그런데도 상황이 안 좋은 건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는 바로 압도적인 물량.
김포공항 내부에 생긴 크레바스에서는 심강찬이 몬스터를 베어버리고 있는 순간에도 그에 몇 배나 되는 몬스터를 내뱉고 있었고-
"쫄지 마 병신아! 쫄면 뒤진다고!"
두 번째는 바로 상황의 생소함이었다.
던전이던 미궁이던 몬스터를 상대할 때면 항상 다수로, 전략을 짜 최대한의 안정성을 추구하며 몬스터를 잡는 헌터들은 오히려 그 습관 덕분에 현재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이렇게 넓은 외곽에서는 지형을 이용한 전략도 짜지 못하는 데다가, 지금 상황에서는 넓은 공간을 방어해야 하니 팀플보다는 개인의 역량이 더 중요해야 했다.
크에에엑!
조금 전 자신의 뒤를 노리고 달려온 놀의 허리를 그대로 두 동강 내는 데 성공한 심강찬.
그는 점점 몬스터의 괴성보다 많이 들려오는 헌터들의 비명을 들으며 인상을 찌푸리며 상황을 회상했다.
불과 3시간 전에 갑작스레 김포 공항에 만들어진 크레바스.
크레바스가 만들어지며 생겼던 거대한 진동 덕분에 비행기의 운행이 중지되고 시민들은 재빠르게 김포공항을 벗어나 인명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크레바스 안에서 끈덕지게 흘러나오는 몬스터들.
그 시점부터 헌터협회는 길드에게 긴급 호출을 보냈으나, 크레바스가 나타나고 30분, 아직 김포공항은 그 어떤 길드의 지원도 오지 않았다.
'씨발, 씨발!'
욕지거리를 하며 몬스터를 베어 넘기던 심강찬은 자신 옆에서 놀에게 죽을 위기에 처해 있던 헌터를 구했다.
"가…감사합니다, 팀장님!"
"인사는 나중에 하고 빨리 일어나! 여기서 몬스터들한테 먹히고 싶어?!"
"ㅇ, 예!!"
심강찬의 목소리에 남자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와 함께 심강찬은 다시 몸을 돌려 몬스터를 처리하며 주변 상황을 관찰했다.
'그래도 A등급 헌터가 10명은 있어서 어느 정도는 버틸 수는 있어.'
이 주변에 퍼져있는 10명의 A등급 헌터.
그들은 A등급이 딱지치기로 얻은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침착하게 다른 하위 헌터들을 통솔해 몰려오는 물량에 대응하고 있는 듯했다.
'어디가 전멸했다는 무전이 오지는 않고 있으니까…우선은 다행이다.'
심강찬이 그렇게 생각하며 몬스터를 베고 있을 때쯤,
"끄아아아아악!"
"어…어어? 저, 저거 뭐야! 저거 뭐냐고!"
갑작스럽게 터지는 비명에 심강찬은 곧 고개를 돌렸고, 곧 그는 그곳에서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
"저…… 저거!"
"자이언트 스켈레톤?!"
"아니 왜 저 몬스터가 갑자기……!!"
-A+급 몬스터! 자이언트 스켈레톤! 발견!
주변의 헌터들과 동시에 귓속에 꽂아 넣은 수신기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심강찬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자 스켈레톤은 움직였다.
크기만 해도 오크의 5배는 되어 보이는 높이를 가지고 있는 자이언트 스켈레톤은 고작 몇 걸음을 움직여 심강찬이 맡은 구획에 오더니 그대로 들고 있던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 제물이 되었던 카이트쉴드를 쥐고 있던 B급 헌터는 쇠몽둥이를 피하는 게 늦었다고 판단해 그대로 방패를 들어 올렸으나-
"끄아아아악!"
"호천아!"
두터운 카이트 쉴드라도 압도적인 체급 차이에서 나오는 중력과 힘을 이기지는 못했다.
카이트 쉴드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몬스터와 함께 하늘을 날게 된 헌터.
그는 순식간에 저 멀리 날아가 망가진 자동차에 처박혔고, 심강찬은 그쪽으로 다가가는 자이언트 스켈레톤을 보며 외쳤다.
"속박!"
그와 함께 자이언트의 스켈레톤의 아래에서 푸른색의 마력들이 튀어나와 몸을 움직이는 자이언트 스켈레톤의 몸을 묶었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 잠시뿐.
"이런 젠장……!"
불과 5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그의 속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버린 자이언트 스켈레톤은 곧바로 몽둥이를 들어 차에 처박힌 헌터가 있던 곳을 향해 몽둥이를 찍어내렸고-
"안 돼!!!"
콰드드드드득! 콰직!
심강찬의 비명과 함께 자이언트 스켈레톤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그와 함께 나타난 남자.
"ㅈ, 저 사람은…?"
검은 츄리닝을 입은 체 주변을 머리를 잃어 뒤로 넘어가는 자이언트에게 발차기로 최후의 일격을 선물한 그 남자는 바로 김현우였다.
"후…."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자신의 앞에 떠 있는 로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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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
최소한의 증명을 완료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증명일 뿐, 이제 곧 일어날 '크레바스'의 깊은 곳에서 '열쇠'를 획득하는 것으로 당신을 증명하세요.
위치: 서울시 강서구 일대
남은 시간: [00] 0: 22: 32초
"아니 시간은 남았는데…! 이런 씨발 뭐 하나 제대로 알려 주는 게 없어……?!"
신경질적으로 정보창을 끈 김현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야말로 아수라장.
그는 현재 상황을 그렇게 일축해 머릿속에 집어넣고는 이내 공항 쪽을 바라봤다.
"…"
그곳에서 김현우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몬스터 밭'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소름 끼치게 많은 몬스터들이였다.
그동안 전혀 본 적 없는 압도적인 물량.
사람이 제대로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가득 메워져 있는 몬스터들의 모습에, 김현우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바라봤다.
'더럽게 많네.'
짧은 감상.
여기 있는 헌터들 중 그 누구도 가볍게 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물량을 보며 김현우는 그저 간단한 감상평 하나만을 남긴 채 곧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어차피 녀석들이 온다고 했으니 이대로 들어가고 싶지만-'
그래도 시간이 걸릴 테니 좀 처리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는 공항 내에서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몬스터를 보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하나 잡기에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몬스터의 수는 압도적.
전부 때려죽일 수는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었다.
'…차라도 던질까?'
대량으로 죽일 수 있나?
압도적인 물량을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죽이기 위해 고민하던 김현우.
그는 곧 고개를 돌리던 중, 자신의 뒤쪽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자이언트 스켈레톤이 쥐고 있던 쇠몽둥이.
그의 앞에는 그것이 있었다.
결정은 빨랐고, 김현우는 곧바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몇 배나 되는 크기의 거대한 몽둥이 앞으로 다가간 그는 두 팔로 쇠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크그그그긍!
그와 함께 땅속에 파고 들어갔던 쇠몽둥이가 김현우에 의해 끌려 나왔다.
양팔로 가득 안아도 손이 닿지 않을 정도의 굵기를 가지고 있는 쇠몽둥이를 든 채, 김현우는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쿠궁…콰자자작!
김현우가 발에 힘을 주자마자 콘크리트가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해 부서지고 그의 주변에 작은 크레이터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꽝!
그는 콘크리트를 터뜨리며 자이언트 스켈레톤의 쇠몽둥이를 들고 날아올랐다.
"헉……!"
"미친 저걸 어떻게 들고 뛰는 거야?!"
그와 함께 김현우에게 집중된 헌터들의 시선.
허나 김현우는 헌터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읍!"
김현우가 몸을 회전시키자 하늘에서 거대한 몽둥이가 회전한다.
한 바퀴, 두 바퀴,
점점 빠르게 회전하는 쇠몽둥이와 함께 헌터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에 떠 있는 김현우에게로 쏠린다.
후우우우우웅!!! 후우우우우웅!!!!!
쇠몽둥이를 회전시킴에 따라 나오는 육중하고도 둔중한 바람.
그리고 어느 순간-
"이거나 처먹어라……!!"
김현우는 회전하고 있던 몽둥이를 타이밍에 맞춰 그대로 놔버렸고, 그대로 회전하고 있던 몽둥이는 몬스터가 우글거리고 있는 김포공항 쪽으로 날아갔다.
콰가가가가각!!!
그와 함께 터지는 폭음!
쇠몽둥이는 바닥에 닿았는데도 불구하고 회전력을 잃지 않은 채 주변의 몬스터들을 마치 믹서기에 갈아버리는 것처럼 갈며 앞으로 나아갔고.
쿠구구구구궁!!!
그와 함께 지반이 떨리며 김포공항의 외벽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회전하는 쇠몽둥이에 맞은 몬스터들의 몸이 사정없이 터져나가고, 무너지는 외벽에 깔린 몬스터들이 생매장되는 엄청난 광경.
심경찬은 멍하니 하늘에서 떨어져 조금 전 그 풍경을 만들어 냈던 남자를 바라봤고-
"새…생각났다! 고, 고인물, 고인물이다…!!"
그와 함께 옆에서 들리는 자신의 후임 헌터의 말에 심경찬은 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남자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탑에서 12년 동안 갇혀 있었던 남자.
현재 남아 있는 3대 한국길드의 길드장들과 동료였던 남자.
고인물 김현우.
심경찬은 김포공항이 무너지며 생기기 시작한 붉은 화마를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저도 모르게 경외를 느꼈다.
# 20
020. 크레바스(3)
심형찬이 김현우를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쿵!
그의 몸이 일순 높이 뛰어오른다 싶더니 한참 몬스터들이 모여 있었던 김포공항 쪽으로 쏘아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
몇백 미터나 되는 주차장의 넓이를 짧은 시간 안에 주파한 그는 김포공항의 너머로 움직여 순식간에 심형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후…!"
그제야 심형찬은 다시금 본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자각하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의 전장 한가운데.
조금 전 나타난 고인물이 위험한 순간을 모면하고 몬스터들을 거의 쓸어버리다시피 했지만 그럼에도 몬스터는 진득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김현우의 그 공격 속에서 살아남은 몬스터들이 꾸역꾸역 기어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심형찬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렇기에 그는 검은 들어 태세를 정비했고, 달려오는 몬스터를 향해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일검-!"
오크들이 일 자로 베였다.
"……!"
주차장을 가로지르며 달려오던 오크들이 달려오던 상태 그대로 몸이 절반으로 나뉘어 차가운 도로주차장에 녹색 피를 흩뿌린다.
"괜찮나?"
그와 함께 심형찬의 앞에 나타난 한 남자.
"……다, 당신은!"
심형찬은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
흑빛의 동양무갑을 입고 허리춤에 있는 5척의 환도에 손을 대고 있는 남자.
"너무 늦진 않은 것 같군."
"서울 길드……!"
심형찬은 저도 모르게 환희했다.
아무리 김현우가 몬스터를 정리했다고 해도 몬스터는 많았다.
김포공항 전역에 넓게 퍼져 있는 몬스터들 중에는 김현우의 압도적인 일격을 피해간 녀석들도 많았으니까.
그런 상황에 서울 길드의 지원.
그것이 심형찬으로서는 굉장한 희소식이었다.
허리춤에 있는 검은 흑도에 손을 올리며 걷는 김시현의 뒤로 서울 길드원이 나타나고.
파직! 콰강!
그와 함께 공항 주차장 내 몬스터가 밀집해 있는 곳에 천둥이 떨어져 내렸다.
메케한 매연과 사방으로 터져 올라가는 콘크리트 더미, 그리고 그 위에 파직거리며 돌아다니는 뇌전,
"뭐가 너무 늦진 않아? 공항 상황 안 보여?"
"그래도 전멸하기 전에 도착한 게 다행이다."
"또 중2병 걸렸네."
"…이…이서연."
서울 길드원이 몬스터를 잡기 위해 합류함과 동시에 김시현의 뒤로 푸른빛의 로브를 입은 이서연이, 그 뒤로는 온몸을 중갑으로 무장한 한석원이 걸어 나왔다.
그와 함께 서서히 맞기 시작하는 머릿수.
김시현, 이서연, 한석원이 끌고 온 길드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공항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몬스터들을 토벌하기 위해 달려들었고, 한석원도 마찬가지로 들고 있던 방패를 크게 내리쳤다.
"자, 그럼 나도 한번 가 볼까…! '가속'."
한석원이 마치 전차처럼 거대한 방패를 앞세워 몬스터들이 밀집해 있는 지형으로 돌격한다.
쿵! 쿵! 거리는 육중한 발소리가 들림에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빠른 속도로 이동한 한석원은 마주 달려오는 몬스터와 그대로 부딪혔다.
콰지지직!!
아니- 몬스터들을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한석원의 카이트 쉴드에 얻어맞은 오크가 그대로 공중으로 떠오른다.
고블린이 짓눌리고, 놀의 머리통에 깨져나간다.
수십, 어쩌면 수백일지도 모르는 몬스터가 한석원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오히려 몬스터들은 그의 돌격을 막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김시현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 형이 저렇게 나가 버리면 일검도 못 쓰는데."
"너도 스킬 좀 그만 쓰고 몸으로 좀 뛰어 좀."
이서연이 김시현을 나무라며 자신의 전용스킬인 '뇌전'을 다룬다.
공중에 떠올라 있는 4개의 전격 구체가 사방으로 어지럽게 튀어나가며 몬스터들에게 벼락을 선사한다.
김시현은 구체를 움직이고 있는 이서연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검을 잡아들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김시현 앞에 있던 몬스터는 보이지 않는 일격에 자신이 죽는지도 모른 채, 목이 잘려나갔다.
***
크에에에에엑!
"시끄러 새끼야."
쾅!
쉴 새 없이 비명을 질러대는 놀의 머리통을 박살 낸 김현우는 쉴 새 없이 몬스터가 터져 나오고 있는 그곳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길이 있기는 한데.'
김현우는 크레바스가 그냥 균열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크레바스 내에는 몬스터들이 올라오고 있는 길이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 길이 빽빽하게 몬스터로 들어차 있다는 것.
"흐음……."
'어떻게 내려가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점프나 해볼까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크레바스의 지하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몬스터들을 일일이 처리하며 내려가려니 그것도 너무 오래 걸릴 것 같다.
김현우는 그렇게 어떤 식으로 내려갈까를 고민하며 시선을 돌렸고, 그러던 중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었다.
"……."
그의 시선이 고정된 곳, 그것은 바로 크레바스 근처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한 대의 승용차였다.
"괜찮겠는데?"
그리고 곧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크레바스 끝에 걸쳐 위태롭게 덜렁거리고 있는 차량으로 다가가 걸쳐 있던 차량을 그대로 들어 올렸다.
쾅 콰지지직! 쿵!
차량은 정상이 아니었다.
차체는 멀쩡했으나, 하단부는 완전히 박살이 나 있는 상태였고, 승용차 앞에 달려있는 엔진부도 무엇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날아가 있었다.
허나 김현우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씨익 웃으며 차를 그대로 끌고 나왔다.
그리고-
우지지지직!
김현우가 승용차의 앞문을 뜯어냈다.
마치 종이를 찢듯 가볍게 앞문을 뜯어낸 김현우는 곧바로 차 반대편으로 몸을 움직여 반대편에 있는 차문을 뜯어냈다.
우지직!
처음 문을 뜯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부드럽게 뜯기는 차문.
김현우는 만족한 표정으로 차 문을 뜯어냈던 차량의 프레임을 그대로 발로 차 크레바스 아래로 떨어뜨려 버렸다.
끄에에엑!
몬스터의 비명이 들려왔으나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그는 곧 뜯어낸 양쪽의 차 문을 각각 한 손으로 들어 올려 앞으로 치켜들었다.
"오, 이거 괜찮은데?"
만족스럽다는 듯 차문에 달려있는 유리로 앞을 보며 혼자 말한 김현우는 곧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띠곤 그대로 크레바스 안쪽에 있는 길로 뛰어들었다.
크게겍!
꽈지직!
조금 전까지 벽을 타고 올랐던 고블린이 김현우의 발에 깔려 머리가 터져나가고, 곧 그는 차 유리 문밖으로 보이는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를 한 번 더 확인한 뒤,
"청소 한번 해 볼까……!!"
차 문을 그대로 앞쪽으로 치켜올리며 뜀박질을 시작했다.
김현우가 차 문을 들고 뛰어들자 몬스터들은 당황해하면서도 괴성을 지르며 제각각 들고 있던 무기를 그에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직! 콰가가가가가각!
그러나 몬스터들의 움직임은 그저 의미 없는 허우적거림일 뿐.
김현우는 말 그대로 길을 청소를 하듯 몬스터들을 전부 다시 크레바스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전진했다.
몬스터들과 몬스터 사이에 끼어서 짜부되는 고블린.
어떻게든 무기 한번 휘두르다 동족의 머리에 도끼를 선물해 준 오크.
미늘창을 가지고 어떻게든 해보려다 김현우의 돌격에 밀려 자기가 올라왔던 크레바스 지하로 떨어지는 놀.
몬스터들의 비명은 줄지 않았으나, 웃기게도 몬스터는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크레바스의 길목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김현우는 얼마나 달렸다고 사정없이 찌그러져 버리는 문에 슬쩍 불만을 품었지만, 몬스터를 밀면서 가기에는 아직까지 무리가 없었기에 계속해서 전진했다전진, 전진, 또 전진.
차 문에 붙어 있는 유리는 어느새 깨져 있다.
차 문 사이사이에는 미늘창과 오크의 글레이브가 붙어 있고, 그나마 덜 깨진 오른손에 들고 있던 차문에는 오크의 팔이 덜렁거리며 위태하게 걸쳐 있었다.
그렇게 길을 따라 올라오던 몬스터를 밀어버리던 김현우는 곧 크레바스의 바닥이 보이는 것을 깨닫고는 이제는 거의 부서질 듯 위태하게 덜렁거리고 있는 차문을 그대로 앞으로 내던졌다.
콰가가가강!
던져진 두 개의 차문이 당황하던 몬스터들의 머리통을 깨버리고, 김현우는 조금 전까지 몬스터를 밀어버렸던 낭떠러지로 점프했다.
한순간, 붕 떠올랐던 김현우의 몸이 중력의 힘을 받아 급속하게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김현우는 곧 자신이 낭떠러지로 밀어버렸던 수많은 몬스터의 시체 위에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 $@#"
그리고 그런 크레바스의 끝에서, 김현우는 인간의 형태를 한 어느 몬스터를 볼 수 있었다.
몸은 인간의 형태와 비슷했다.
다만 다른 점은 붉은색의 피부와 이마에 달려있는 뿔.
머리 한가운데는 자신의 머리 크기 정도의 거대한 뿔이 달려 있었고, 이빨은 마치 상어의 이빨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 #$%#$ @!#!@!!"
어찌 보면 도깨비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그 녀석은 몬스터의 시체를 밟고 올라 서 있는 김현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건 또 뭐라는 거야?"
물론 김현우는 그 도깨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도깨비가 갖추고 있는 상의탈의에 가죽바지 패션을 보던 중, 그의 허리춤에 있는 이질적인 열쇠를 모며 웃음을 지었다.
'저거다.'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있는 도깨비가 퀘스트의 목표인 것을 깨닫자마자 달려들었다.
재빠른 행동.
몬스터들의 시체를 밟고 한순간 도깨비에게 도약한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뻗었다.
깔끔하게 직선으로 움직이는 김현우의 주먹,
"?!"
후욱!
분명 조금 전만 해도 입을 열고 있던 도깨비는 얼굴 앞에 도달한 김현우의 주먹을 피해냈다.
김현우의 눈이 오른쪽으로 움직인 도깨비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발을 움직여 도깨비의 배를 노렸지만.
팡!
이내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역으로 날아간 건 김현우였다.
"?!"
'반격 당했다고?'
순간 몸이 붕 뜨는 감각을 느낀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움직여 다가오는 도깨비를 보면서 왼발을 휘둘렀다.
꽝!
공격을 방어하면서도 그는 조금 전 그 찰나의 시간에 자신의 복부를 파고 들어왔던 반격기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고.
그런 김현우의 생각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듯 도깨비는 그를 향해 몸을 꺾어 다음 주먹을 날린다.
옆구리로 꽂아 들어오는 주먹.
허나 김현우는 허공을 나는 상태에서 자세를 바꿔 도깨비의 공격을 피해냈고, 그 상태로 도깨비의 주먹을 잡아챈 뒤,
"흡!"
그대로 그의 몸을 끌어 올리며 안면에 발차기를 먹였다.
순간 크게 뒤로 돌아가는 도깨비의 머리.
김현우는 도깨비의 몸을 그대로 몬스터의 시체밭쪽으로 던지며 자세를 잡았다.
콰드드득! 콰득!
도깨비의 몸이 몬스터의 시체를 뚫고 들어가며 섬뜩한 소리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 @#$@#%@#@#$@#$@#$!!!!"
도깨비는 그 몬스터들의 파육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빠져나와 녹색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김현우의 앞에 섰다.
# 21
021. 크레바스(4)
크레바스의 지하 안에서 공방이 이루어진다.
김현우의 손발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도깨비의 몸을 노린다.
쿵! 쿵! 쾅!
한 방, 한 방, 때릴 때마다 나는 육중한 소음.
그런 육중한 소음이 김현우의 손발에 담긴 힘을 짐작케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깨비는 분명 김현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김현우의 발차기와 주먹질을 몇 번이고 막아낸 도깨비는 그가 깊게 훅을 휘두른 그 순간 반격을 노리며 주먹을 쳐올렸다.
쾅!
깔끔한 클린히트에 김현우의 턱이 위로 들어 올려짐과 동시에 도깨비는 공격을 이어나갔다.
오른발을 휘둘러 옆구리를 찍어 내리고 땅바닥에 처박힌 김현우의 몸에 축을 돌던 왼발을 휘두른다.
콰가가가가각!
순식간에 바닥에 내리꽂힌 김현우.
그러나 도깨비의 공격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콰드드득!
도깨비는 찰나의 순간 힘을 모은 뒤 발을 움직여 바닥에 박혀 있는 김현우의 몸을 차올렸다!
꽝! 콰직! 콰드드득! 뿌드득!
김현우의 몸이 쌓여 있는 몬스터들의 시체 쪽으로 날아가면서 그들의 시체를 박살 냈고.
시체에서 터져 그 안에서 흘러나온 녹색 체액이 김현우의 몸을 더럽혔다.
"이런 씨발…!"
도깨비의 공격으로 인해 쌓여 있는 시체 안에 파묻힌 김현우는 신경질을 내며 몸을 크게 움직였다.
우르르르르! 쾅!
오크들의 시체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빠져나오는 김현우.
"윽…!"
허나 그는 곧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몸에 묻은 녹색 체액의 냄새는, 김현우의 인상을 삽시간에 일그러뜨리기에 차고 넘치는 고약한 냄새였다.
'이 새끼…생각보다 쎈데?'
김현우는 눈앞에 서 있는 도깨비를 보며 그렇게 평가했다.
12년 동안 튜토리얼 탑에 갇혀 몬스터만 잡았던 김현우.
물론 처음에는 고블린 한 마리를 잡는 것도 힘겨웠지만, 탑을 점점 많이 클리어하게 되고 클리어한 회차가 늘어나면서 그는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나중에, 김현우는 주먹 한 방으로 탑 100층의 보스인 발록조차도 보내 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보스를 한 번에 죽이는 힘뿐이겠는가?
탑의 1층부터 10층을 한 번에 뚫어버릴 정도의 파괴력과, 탑 안에 있는 몬스터한테는 아무리 맞아봤자 별 상처도 안 생기는 경지에 다다랐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도깨비는 어떤가?
분명 힘겨워 보이기는 했으나, 도깨비는 김현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오히려 도깨비는 그렇게 방어만을 고집하다 김현우가 방심한 틈을 타 반격까지 했고.
'조금, 욱씬거리는데?'
그 반격은 김현우에게 확실히 먹혔다.
그는 조금 전 발로 차였던 옆구리가 욱씬거리는 것을 느끼며 헛웃음을 짓고는 도깨비를 바라봤다.
"야."
김현우가 입을 열었다.
물론 서로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넌 이제 뒤졌다."
그는 그저 담백하게 선고하며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김현우의 기세가 순간 달라졌다.
얼굴에 느긋함을 담고 있었던 김현우는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눈앞의 도깨비를 바라봤고.
곧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그의 양다리가 적절하게 앞뒤로 벌어지며 어깨가 틀어진다.
오른손은 배 아래에, 그리고 왼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려 쭉 핀 김현우는 왼손바닥을 펼친 채 마치 도깨비를 조준하듯 겨눴다.
갑작스레 바뀐 김현우의 모습에 도깨비가 긴장한 모습을 드러내며 그의 모습을 관찰했다.
하지만 도깨비가 그러든 말든 김현우는 그저 손바닥을 펼치고는 마치 길이를 가늠하듯 맞은 편의 붉은 도깨비를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분명 몬스터들이 넘치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어느새 정적이 가득 차기 시작한 크레바스 안.
콰드득!
결국 먼저 움직인 것은 도깨비였다.
그리고-
씨익.
김현우는 지반을 부수며 달려드는 도깨비를 보며 웃음 지었다.
옛날, 그가 아직 탑에 있었을 때.
탑을 수도 없이 클리어하고 무료함에 미쳐 돌아갈 때쯤, 김현우는 언젠가 봤던 웹소설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혹시 무술 같은 것으로 '깨달음
'을 얻는다면 이 탑에서 나갈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저 무의식에서 떠올린 생각이었으나 김현우는 곧바로 실행했다.
그는 탑에 지쳐 있었고,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을 정도로 간절했으니까.
그렇게 해서 그는 무술 수련을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잘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사회에서 무술이라고는 애니나 무협 웹소설, 그리고 영화에서나 보는 것들로만 알고 있는 김현우.
실전 무술이라고는 단 하나도 모르는 그가 무술 수련을 잘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뿐.
그는 무작정 떠오르는 무술들을 따라 했고.
김현우가 탑을 수백번 클리어하며 그 몸에 자리 잡은 압도적인 능력치들은 그가 엉망진창으로 창안한 무술들을 '진짜'로 탈바꿈시켜 줬다.
웹소설에서나 있는 말도 안 되는 기술.
애니에서 보이는 화려함을 추구한 기술.
그리고 영화에서 봤던 '근거는 있어 보이나 사실은 개소리'일 뿐인 기술들.
그런 공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기술들은, 그의 말도 안 되는 신체 요건이 뒷받침되어 '공상'이 아닌 '진짜'가 되었다.
쿠득!
정면 돌파는 안 된다는 듯, 앞으로 다가오던 도깨비가 돌연 각도를 틀어 김현우의 측면으로 돌아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
어느새 주먹을 휘두르던 도깨비의 머리 앞에, 김현우의 왼손이 닿았다.
펼쳐진 손끝이 도깨비의 이마에 닿았으나, 도깨비는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그의 얼굴을 짓이길 듯 파고 들어가는 도깨비의 주먹.
그때.
돌연 도깨비의 이마에 닿았던 김현우의 손이 말아쥐어 지고,
"패왕(?王)-"
김현우는 도깨비의 머리를 향해-
'-경(勁)'
-자신의 기술을 선보였다.
콰지지직!!
김현우가 밟고 있던 크레바스의 지반이 사정없이 일그러지고,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직인다.
아주 짧고 간결한 하나의 움직임.
허나 그 하나의 움직임으로, 크레바스의 지하에는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앙!!!
그리고,
도깨비의 주먹이 김현우의 얼굴에 닿았을 때, 이미 도깨비의 머리는 없어져 있었다.
어깨 위에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허한 모습을 가지고 있던 도깨비의 몸체가 곧 뒤로 기울어졌다.
털썩.
초라한 소리.
김현우는 자세를 바로잡은 채로 도깨비를 바라보다-
"아오…말할 뻔했네."
저도 모르게 기술명을 외칠 뻔한 자신을 탓하며 녹색 피가 달라붙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흑역사는…꺼내지 말자.'
튜토리얼 탑에서 제자한테 기술을 가르치고 혼자서 기술을 수련할 때마다 기술명을 외친 탓인지 저도 모르게 쪽팔린 이름을 내뱉을 뻔했다며 깊은 한숨을 내쉰 김현우.
그는 곧 자신의 앞에 떠오른 로그를 보며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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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
최소한의 증명을 완료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증명일 뿐, 이제 곧 일어날 '크레바스'의 깊은 곳에서 '열쇠'를 획득하는 것으로 당신을 증명하세요.
[등반자 '홍마 아르키르'를 잡는데 성공하셨습니다!]
당신은 홍마 아르키르를 잡고 스스로를 증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테이터스 창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에서 정식으로 '가디언'이 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면 당신은 부름을 받아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3일 21시간 12분 34초
***
그다음 날, 헌터 관련 커뮤니티 사이트 중 제일 큰 대형 사이트인 헌터&킬에서는 어제 일어난 크레바스 사태와 동시에 현재 유튜x 1위를 찍고 있는 영상 때문에 활활 불타고 있었다.
※ 이 글은 베스트 게시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번에 일어난 크레바스 사태 드론 촬영한 거 떴다 ㅅㅅㅅㅅㅅㅅ!!!
글쓴이: 이거 실화야
어제 술 쳐먹고 꼴아서 뭔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김포공항에 크레바스 터졌다고 해서 ㄹㅇ 깜놀했다.
근데 시발 이거 영상 보다보니까 크레바스터진게 깜놀한 게 아니라 고인물 때문에 더 깜놀한 거 아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사진)
[김현우가 승용차 문짝 두 개를 떼서 방패로 사용하기위에 몸을 막고있는 사진.
시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게 뭐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걸 뭐라고 부르냐? 문짝 탱커라고 부르면 되냐?ㅋㅋㅋㅋㅋ솔직히 여기서 그냥 웃고 말았는데 더 소름 돋는 건 저 차 문 들고 진짜 크레바스 쭉 밀고 들어가더라?
지금 저 모습 보고 반해서 고인물 팬카페 가입했다 ㅆㅂ ㅋㅋㅋㅋㅋㅋ
댓글 3423개
아라이상: 와 씨발 진짜 어케했노 씨X련아!?!?
ㄴ B급헌터김진섭: 아니 이거 실화야? 저거 실화냐고 ㅋㅋㅋㅋㅋ 유튜브 영상 보니까 진짜 미쳤더라 불도져임 불도져ㄴ 헌터하고싶다: 저거 진짜 창의적인 또라이 아니냐? ㅋㅋㅋㅋㅋㅋㅋ 무슨 차 문 두 개 뜯어서 방패로 들 생각을 하냐 진짜 창의력 대장상 줘야 한다.
ㄴ 이창사릉: 목숨이 두렵지 않은 자…… MARCH
'풋,'
고인물파티: 지금 김현우 네이버 팬카페 가입자 수 실화냐? ㅋㅋㅋㅋㅋㅋㅋ 개설일 12시간도 안됐는데 가입자 수 2만 명 뭐냐 시발 ㅋㅋㅋㅋ
ㄴ 오로커: 링크좀
ㄴ 고인물파티: https://cafe.naver.com/GOINMUL1123
ㄴ 하와와와와: ㄱㅅㄱㅅ
C급헌터: 시발 저거 진짜 사람이냐? 진짜 영상 보면 오랜만에 한국 3대 길드장 싸우는 거 봤는데 진짜 김현우 따라갈 새끼가 없네 ㅋㅋㅋㅋㅋㅋㅋ 시발 문짝탱커 씨발 ㅋㅋㅋㅋㅋㄴ 여고생쟝: 진짜 저걸로 어케 한 거지? 문짝 다 찌그러지지 않냐?
ㄴ 구와아아악: 근데 나는 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게 저게 진짜 A등급 헌터라고? 말이 안 된다 ㅅㅂ 존나 사기야 ㄴ 아일랜드산: ㄹㅇ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신입이 올 A라고 하길래 진짜 개뻥이다 ㅅㅂ 이랬는데 영상으로 보니까 A등급이 아니라 S등급인데? ㅋㅋㅋㅋㅋㅋㅋㅋ이름만들어도: 야 근데 그거 이외에도 마지막 장면에 김현우 저거 뭐냐, 가만히 있는데 같이 싸우던 도깨비 대가리 터지는데?? ㄹㅇ 머지 ㅅㅂㄴ 앙리띠: 솔직히 문짝 불도져에 가려서 그렇지 진짜 김현우의 힘을 확인하는 건 저 장면이 ㄹㅇ 인 것 같다ㅋㅋㅋㅋㅋㅋ 가만히 서서 뚝배기를 날리는데 저거 근력 몇 돼야 가능??? 응???
낭인기수식: 아 시발 부럽다! 부럽다부럽다부럽다! 나도 재능가지고 싶다!! 개같은 재능충 새끼들……!!! 코로세! 코로세!!!!!!!!!!!!!!!! 코-로-세!!!!!!!!!
ㄴ병신을 보면 지저귀는 새: 짹짹 짹 째짹! 짹짹 짹 째짹!짹짹 짹 째짹!짹짹 짹 째짹!짹짹 짹 째짹!짹짹 짹 째짹!짹짹 짹 째짹!짹짹 짹 째짹!짹짹 짹……더보기
'이건 또 뭔 미친놈이야?'
멍하니 김시현의 집 소파에 누워 있던 김현우가 피식 웃은 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방에서 나온 김시현이 입을 열었다.
"형, 가요."
"그거 꼭 가야 해?"
"가야죠. 포상금 안 받을 거예요?"
"아니, 받기는 받을 건데 귀찮아서…… 그냥 안 가고 받을 수는 없어?"
"…그럴 수는 있는데, 가는 게 좋겠죠?"
그의 설득에 김현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시현과 김현우가 오늘 외출을 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김현우와 한국의 3대 길드가 막아낸 크레바스 사태의 공로를 인정 받아서. 정부에서 내려오는 표창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형."
김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오자 김시현은 묘한 표정을 지었고.
"왜?"
"아니, 옷 그렇게 입고 가려고요?"
"……이게 어때서?"
이내 김현우가 입고 있는 파란색 츄리닝을 보며 입을 열었다.
김현우가 처음 탑에서 빠져나왔을 때 입고 있던 검은 츄리닝은 크레바스 사태 때 그린스킨의 피에 젖어 버렸고, 그 김에 김시현은 옷이라도 사라고 카드를 주었다.
주었는데….
"아니, 진짜 츄리닝밖에 안 샀어요?"
"난 이게 편해."
김현우의 단답에 김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 22
022. 뭘 막으라고?(1)
'이게 뭐야?'
아레스 길드 상층의 회의실.
긴 테이블의 끝에 켜져 있는 거대한 프로젝터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보며 흑선우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그것은 그 양옆에 앉아있던 유병욱과 우천명도 마찬가지였고.
유병욱의 옆에 앉아 있던 헌터 협회 한국 지부 정보과에 속해 있는 앨리스도 마찬가지였다.
회의실에 배치되어 있는 프로젝터에서는 현재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
그것은 바로 김포공항에서 일어났던 크레바스 사태에 대한 영상.
더 정확히 말하면 한번 터지면 도시가 완전히 날아가 버린다는 크레바스 사태를 단신으로 들어가 막아버린 김현우의 영상이었다.
영상에서는 한참 김현우가 문짝을 떼어낸 체 그것을 방패 삼아 몬스터들을 밀어내며 내려가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렇게 카메라의 시야에서 그가 사라진 뒤.
뒤늦게 김현우의 모습을 따라 크레바스의 안쪽으로 내려간 드론은, 그의 마지막 일격을 찍을 수 있었다.
카메라에서는 제대로 찍히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인 붉은 도깨비가 한순간 김현우의 측면으로 나타나 주먹을 휘둘렀고.
-콰아아아앙!
박살이 난 것은 가만히 있던 김현우가 아닌, 오히려 조금 전까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붉은 도깨비였다.
그와 함께, 김현우가 드론을 의식한 듯 시선을 위로 들어 올리는 것으로 끝난 영상과 함께 회의실은 침묵에 빠졌다.
정적, 그리고 또 정적.
"저게, A급이라고?"
그리고 마침내 그 무거운 정적 속에서 입을 연 것은 회의실 상석에 앉아 있던 흑선우였다.
"우선 파악한 바로는……."
유병욱이 입을 열었지만 흑선우는 그의 옆에 앉아있던 앨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A급 맞아?"
"서류를 보시면 아실 텐데, 이번에 제가 드린 서류는 분석반에서 분석한 게 아닌, 저희 헌터 협회측에서 공식적으로 김현우 헌터의 능력치를 측정한 거니까요."
앨리스의 말에 흑선우는 앞에 있던 서류철을 펼쳐 들었다.
헌터협회의 정보부장으로 취임해 있는 그녀가 아레스 길드의 본사까지 직접 찾아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서류철.
------------------------
이름: 김현우
나이: 24(36)
성별: 남
-능력치-
근력: A++
민첩: A+
내구: S+
체력: A+
마력: --
행운: B
SKILL -
능력치를 고려한 헌터 등급 A+
-----------------------
그 안에 있는 한 장의 A4용지.
써져있는 내용은 그게 끝이었다.
그 짧은 몇몇의 단어들을 흑선우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멍하니 훑어보더니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구가 S+…… 그래, 이건 확실하게 예상하지 못했어. 솔직히 탑에서 처음 나온 녀석이 가지고 있는 능력치라고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능력치지. 그런데 문제는 말이야."
흑선우는 서류철을 툭툭 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지금 저 영상에서 보는 저 녀석의 능력은 '고작' 이 정도가 아니라는 거야."
"그사이에 마력을 개화했을 확률은요?"
앨리스가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마력을 당장 C등급, 아니 애초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B등급으로 개화한다고 하더라도 저건 말이 되지 않아."
"……그런가요? 하지만 저런 던전 공략 영상은 언뜻 보면 꽤 있지 않나요?"
"저 녀석을 잘 봐."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다 들리는 우천명의 말에 고개를 돌려 조금 전 영상이 재생되었던 프로젝터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김현우가 크레바스 지하로 내려가는 장면이 정지되어 있었다.
우천명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자네의 말대로 그런 영상은 유튜X를 찾아보면 흔하진 않지만 찾아볼 수는 있지, 미국에 있는 S급 상위 랭커 '폭군' 제이크는 그런 학살 영상을 흥미 본위로 찍어 올리니까."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본질적으로 달라.
우천명은 그 말과 함께 손을 움직여 김현우를 가리켰다.
"저 녀석이 뭘 입고 있지?"
"……츄리닝?"
"그래, 츄리닝이지. 들고 있는 건?"
"……차 문?"
앨리스는 대답하고 나서야 알겠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중얼거렸다.
"…아이템을 하나도 안 끼고 있어?"
아이템.
그것은 헌터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아무리 시스템의 축복을 받고 능력치가 높다고 해도, 압도적인 신체능력과 몸집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서 헌터들은 더 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강함'의 비율을 상대적으로 높게 끌어올려 주는 '아이템'은 헌터에게 있어선 떼어 놓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오죽하면 S등급 랭커에 오른 헌터들이라도 정기적으로 아티팩트를 얻을 수 있는 미궁 탐사를 지속하는 것을 보면 '아이템'이 헌터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앨리스가 멍하니 영상을 바라보고 있자 우천명은 중얼거렸다.
"알겠어? 저 녀석이 한 짓은 쉽게 말하면 게임에서 아무런 장비도 안 입고 보스를 클리어 한 거랑 똑같다고."
게임으로 치면 빤스런이랑 똑같은 거야 저거.
"……."
우천명의 중얼거림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조용해진 회의실.
"유 부장."
"네. 지부장님."
"자료는 전부 모았나?"
"우선 모을 수 있는 곳까진 전부 모았습니다."
유병욱의 긍정.
흑선우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오늘 중으로 확실하게 준비해서 내일 바로 터뜨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흑선우는 자신 있게 대답하며 툭툭 치던 서류철을 들었다.
다시 한번 펼쳐 봤지만 변함없는 단어들.
김현우의 능력치를 찬찬히 읽어 본 그는 짧게 생각했다.
'절대 이 능력치일 리가 없다.'
흑선우는 슬쩍 시선을 돌려 정지되어 있는 프로젝터 화면을 보고 아까 전 영상을 회상했다.
말도 안 될 정도의 강력함. 차문을 방패로 써 몬스터들을 낭떠러지로 떨어뜨리는 건 그렇다고 쳤지만, 그가 마지막에 보여준 그 일격.
그것은 흡사 S등급 상위권 랭크인 제이스의 고유스킬 중에서도 필살기라고 할 수 있는 '블레스트'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마력도 없고, 스킬도 없이…… 그 정도의 파괴력'
적으로 돌리면 그야말로 재앙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압도적인 모습.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강함이 통하지 않는 상황도 있지.'
강함은 압도적이지만, 압도적이지 않다.
모순적이지만, 이 말은 현재의 헌터업계를 가장 잘 반영해 주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또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론'과 그 언론에 낚인 '시민'들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에 미리 돈 좀 먹여둔 '권력'까지 한 줌 풀어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순수한 강함으로는 이길 수 없는 또 다른 강함.
'어차피 지금 와서 재권유를 하기엔 너무 늦었어. 그러니 지금이라도 빨리 뭉개 버려야 한다.'
흑선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책상에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
헌터 협회 한국 지부.
평일 오후.
평소라면 협회대문에 사람 한 명 돌아다니지 않을 그곳에는 현재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셔터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자판 소리.
그 이외에도 주변에 몰려있는 시민들과 협회원들.
그리고 그런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단상 위에는 김현우를 비롯한 한국의 3대 길드의 길드장인 김시현과 이서연 그리고 한석원이 차례대로 서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건, 이 자리가 바로 크레바스 사태 해결에 적극적인 도움을 준 헌터들을 표창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박…… 대박이다……!!'
서울 길드에 소속 되어 있는 헌터 '박가문'은 현재 서울 길드원의 특혜로 표창식을 가장 앞에서 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박가문은 유튜X 생방송을 열었고.
'시발 이게 몇 명이야!?'
최근 떡상하기 시작한 자신의 구독자수보다도 많이 들어온 시청자 수를 보며 입이 찢어질 듯 올라갔다.
[오로나민CBCK: 이거 표창식 맞냐? 김현우 개웃기네ㅋㅋㅋㅋㅋㅋㅋ]
[가라: 오 이제 들어왔는데 딱 맞춰서 하고 있네. ]
[이영천선생님: 아니이거왜이렇게채팅을못치겠지.]
[김현우홍보대사: 헉헉 김현우 떴다 떴뜨아!!!]
[고인물이되고싶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발 저것 봐 단상 위에 올라가있는 사람들 김현우만 츄리닝이네. 다른 애들은 전부 정장인데.]
[나는인싸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파란색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츄리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holyss: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찬은이안이: 저거 일부러 엿맥이려고 입고 나온 거 아니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국방부 장관의 입이 마치 중학교 교장 선생처럼 별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말을 하고 있을 무렵에도 채팅방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채팅방의 주된 이야기는 크레바스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바로 김현우가 입고 온 옷에 관한 이야기가 주로 나오고 있었다.
표창을 받으러 나온 3대 길드의 길드장,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협회 소속의 팀장급 인원.
그들은 모두 정갈한 정장을 입고 차려자세로 서서 국방부 장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허나 김현우는 어떠한가?
입고 있는 것은 파란색의 츄리닝. 심지어 신발도 깔맞춤인지 파란색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
츄리닝 지퍼라도 좀 올리면 좋으련만 지퍼는 가슴께까지 내려와 있었고, 분명 차려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굉장히 엉성했다.
마치 제대를 하루 앞둔 말년병장 같은 자세.
그리고 그렇게 끓어오르던 채팅방의 열기는 김현우가 표창식을 받을 때 터져 버리고 말았다.
발단은 바로 국방부장관의 농담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이었다.
"흠, 제가 김현우 헌터의 옷을 좀 사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김현우에게 표창장을 수여하며 그런 말을 던졌고, 그의 김현우는 그런 국방부장관의 말에 표창장을 받으며 받아쳤다.
"신경 쓰지 마십쇼."
"……."
순식간에 묘한 정적이 흐르게 된 단상 위.
김시현을 포함한 다른 길드장들의 눈이 확대를 누른 것처럼 커지고, 기자들이 김현우의 말을 들으며 타자기를 멈췄다.
하지만 그에 반해 박가문이 틀어 놓은 채팅방은-
[아르타민: ㅋㅋㅋㅋㅋㅋㅋ]
[칼르르를: 으하하하핳핳핳]
[ㅁㄴㅇㄹ: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경 쓰지 마십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인물이되고싶은: 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국방부장관 아가리 한방으로 버로우 시키는 거 봐라 괜히 고인물이 아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천년전: ZZZZZZZZZZZZZZZZ]
[탈룰라: ㅋㅋㅋㅋㅋㅋㅋㅋ]
[칼튼9892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실화냐ㅋㅋ]
채팅방의 로그가 순식간에 올라 무슨 채팅이 올라왔는지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상태로 변해 버렸다.
그렇게 유튜X의 채팅방 트래픽이 한순간 과도하게 늘어나 채팅의 로그가 더 이상 로딩이 되지 않고 지연이 걸릴 때쯤, 국방부 장관이 굉장히 불편하면서도 어색한 표정으로 '褒賞金(포상금)'이라고 쓰인 봉투를 김현우에게 주었고, 그 봉투를 받은 김현우는 국방부장관이 발을 옮기기도 전에-
"저 이제 가봐도 되죠?"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츄리닝 바지에 손을 집어넣고 단상 아래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23
023. 뭘 막으라고?(2)
중국, 베이징 수도 외곽에 있는 거대한 궁전과도 같은 성.
거대한 산을 밀어버리고 그 위에 지어진 성안에는 수십 개의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마치 소형 도시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였다.
마치 중세시대의 영지개념을 되살아나게 하는 듯한 풍경.
그런 성 중심에 있는 거대한 궁전의 안.
"……."
궁전의 안쪽은 무척이나 휘황찬란했다.
벽에는 고풍스러운 동양화가 여러 점 걸려 있었고, 바닥은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붉은 목재를 사용해 마감했다.
그리고 그런 궁전의 한쪽 방.
"……."
그곳에는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
홍안(紅眼)은 기묘할 정도의 무심함을 머금고 있었고, 그녀의 등 뒤에 그려져 있는 기묘한 가면 문신은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에 가려져 있었으나, 그 독특함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런 그녀가 대리석으로 만든 것 같은 비싼 욕조의 안쪽에서 한 영상을 보고 있었다.
이번에 한국에서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김현우의 크레바스 영상.
김현우가 문짝을 뜯어 몬스터를 학살하고, 붉은 도깨비를 만나 일전을 치르는 그때까지도 그녀는 그저 무감정한 눈빛과 표정으로 그저 욕조 안에 몸을 담구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
어느 한 순간, 그녀의 눈빛에 무심함이 사라지고 다른 것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영상이 10초 정도 남았을 때, 하늘을 날고 있는 드론에 찍힌 김현우의 모습.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김현우의 모습 때문이 아닌, 그가 취하고 있는 자세 때문이었다.
"저건, 저건……!"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나신이 궁전 내부에 있는 이들에게 보였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은 채 화면에 집중했다.
영상 속의 김현우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양팔과 다리를 벌리고, 오른손을 배 아래, 그리고 왼손은 어깨 위로 올려 손을 펼치고 있는 모습.
그리고 붉은 도깨비가 측면으로 돌아 김현우를 공격했을 때, 김현우는 움직였는지도 모를 그 한순간에 도깨비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렇게 끝나는 영상.
무심했던 그녀가 눈가에 이름 모를 감정을 담고 욕조에 서서 TV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잠시.
"…저자의 이름이 뭐라고?"
옥구슬이 흘러가는 듯한 작고 귀여운 목소리.
허나 모순되게도 그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묵직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물음에 뒤에 서 있던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이번에 한국에서 튜토리얼 탑을 빠져나온 '김현우'라는 헌터입니다."
"김현우…."
그녀는 조용히 읊조리며 검게 변한 화면을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를 조사해 봐라."
"…조사라 하시면?"
"모든 걸, 전부 조사해. 뭐 하나 빠뜨리지 말고 그의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행적 전부 다."
"알겠습니다."
어찌 보면 이유가 궁금할 법한 명령인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숙이는 남자.
그녀는 어느새 하녀들이 가져온 황금색의 가운을 입으며 말했다.
"위연 길드는?"
위연길드.
그들은 현재 중국을 한 손에 넣고 흔들고 있는 초대형 길드 중 하나였다.
패도길드에 꽤 많은 지분을 빼앗겼으나, 아직도 중국 던전 지분율 4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길드.
"이번에 홍콩 쪽에 있는 주요 던전을 전부 빼앗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른 특이사항은 있었나?"
"이번 홍콩 던전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아레스 길드와 마찰이 있었습니다."
"그래?"
"예, 결국 홍콩 주요 던전들은 전부 점령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저희 쪽 인원 중에서도 간부급 한 명이 그쪽 길드의 꾐에 당했습니다."
"…당했다고?"
"예, 아마 정황상 살아 있는 채로 납치당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남자의 말에도 그녀는 그저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가운을 입은 체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왼쪽으로 모아 묶었다.
머리를 모아 묶자마자 그녀의 키와 머리스타일이 조화되어 상당히 어려 보이는 인상을 얻게 된 소녀.
그녀는 사이드테일로 묶어 올린 머리를 만지작거리다 이내 손을 내리곤 말했다.
"속도를 더 내라. 고작 같은 땅덩어리에 있는 길드 하나 제대로 먹어치우지 못해서야 내 맹세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납치당한 길드 인원에 대한 건은……."
"놔둬라. 고작 그런 머저리에게 방심해서 간부까지 달아놓고 납치당할 녀석이라면 이곳에 그 녀석이 있을 자리는 없다."
혹시라도 살아서 돌아온다면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녀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남자를 바라본 소녀는 이내 시선을 돌려 영상재생이 끝난 어두운 화면을 바라봤다.
그 화면에 비춘 그녀의 눈빛에는 처음과 같이 무심함이 깃들어 있었으나, 그녀의 눈빛 한구석에는 '무언가'에 대한 묘한 기대감이 생겨나 있었다.
그렇게 베이징 외곽에 지어진 궁전이자 '패도'길드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패왕성'의 중심지에서 그런 말이 오가고 있을 때, 한국에서는-
"……오빠 지금 완전 유명인사 된 거 알아요?"
"그래?"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김현우가 대답하자 앞에 앉아 있던 이서연은 한숨을 내쉬었고, 그 옆에 있던 한석원은 큭큭 거리더니 말했다.
"그냥 유명인사도 아니고 아주 대단한 유명인사가 됐지."
"이게 지금 웃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한석원이 웃는 모습을 보며 진한 한숨을 내쉬는 김시현을 보며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던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래?"
"아니, 형 뉴스도 안 봐요?"
"보기는 하지."
"그럼 이것도 봤을 것 아니에요?"
김시현이 스마트폰을 조작해 화면을 들이밀었다.
[12년 만에 탑에서 빠져나온 고인물 헌터 '김현우'! '자신감'인가 '오만'인가?]
['인성'최악? 국방부장관의 얼굴 찌푸려질 정도.]
[김현우, '내가 다 부셔버릴 수 있어' 압도적 자신감!!]
[크레바스를 홀로 박살 내 버린 남자 '김현우' 그는 어디까지 달려갈 것인가?]
[김현우와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3대 길드장의 비호? 진짜인가?]
김시현의 스마트폰 화면에 올라와 있는 자극적인 뉴스의 헤드라인들을 보며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주 이때라고 달려드는구만. 어째 기자라는 새끼들은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질 않냐."
"형이 그럴 만한 소재를 던져 줬으니까 그렇죠."
"내가 뭘?"
김현우가 나는 모르겠다는 투로 묻자 이서연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어 말했다.
"누가 표창식 하는데 자기 상 받았다고 그냥 쑥 내려가서 가버려요? 게다가 옷도 파란색 츄리닝에 파란색 슬리퍼……."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정장차림으로 왔거든요?
이서연이 따지듯 그에게 말하자 김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스마트폰을 바라보곤, 이내 자기 생각을 주장했다.
"뭘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써? 어차피 포상금만 받으면 이 이상 만나지도 않을 사람인데.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나는 나 꼴리는 대로 하면서 살 거야."
다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쪽팔리다고 생각할 만한 일은 빼고.
그렇게 김현우는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가져가려다 무엇인가 떠올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요?"
김시현이 묻자 김현우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약속 때문에."
"약속?"
"약속이요?"
김시현과 이서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김현우가 뚱한 표정으로 그 둘을 봤다.
"왜, 나는 약속 있으면 안 되냐?"
"아니, 오빠…… 친구 없다면서요?"
"맞아, 저번에 갑자기 인터넷 같은 거 둘러보더니 자기는 친없찐이라고 하더만."
이제 슬슬 인터넷에 적응해 가는 그가 말이 재미있다며 써먹었던 것을 기억하며 김시현이 말했지만, 김현우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금방 끝나니까."
"아니, 형 저희 저녁 약속은?"
"그 저녁 약속 끝나기 전에 온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1시간…… 아니, 30분만 기다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카페의 문을 열고 나갔고, 김시현과 이서연은 그런 그의 모습을 멍하니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이다…… 걱정이야"
이서연이 중얼거리자 한석원은 피식 웃더니 커피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뭐가 걱정이냐? 저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도 그렇지만 원래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잖아요? 적이란 자고로 많이 만들지 않는 게 좋다고요."
"어차피 녀석은 이미 아레스 길드랑 적대관계잖아?"
"그러니까! 안 그래도 골치 아픈 녀석이 적으로 있는데 적을 쓸 때 없이 늘리는 건 좋지 않다 이 말이죠."
김시현의 걱정에도 한석원은 여전히 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저 녀석은 아무런 생각 없이 배짱부리고 다닐 놈은 아니니까."
한석원의 믿음 어린 말투에 이서연이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으나, 이내 그녀는 입을 다물고 손에 쥐고 있던 카푸치노를 입에 머금었다.
그렇게 카페에서 길드장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이.
김현우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 안에 들어가 눈앞에 있는 로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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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에서 정식으로 '가디언'이 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면 당신은 부름을 받아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0시간 0분 14초
김현우가 잠깐 카페에서 나온 이유.
그것은 바로 시스템의 초대가 바로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남아 있던 타이머가 서서히 떨어지며 0초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타이머의 시간이 0초가 되었을 때-
"……이건 참 신기하네."
김현우는 저번에 봤던 그 공간 안에 있었다.
외부로 통하는 그 어떤 경로도 없는 작은 방, 가운데에는 테이블이 있고, 그 맞은편에는 기계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 '아브'가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그래 나도 반갑다. 그래서, 네가 준 퀘스트는 클리어했는데, 이제 그 정보 권한인가 뭔가는 좀 올라갔냐?"
"네, 이번에 본격적으로 등반자를 처리하면서 김현우 헌터는 정보권한 최하위를 넘어 정보권한 하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최하위에서 하위?"
"네."
"……그거, 결국 제자리걸음이랑 좀 비슷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
"흠, 사실 최하위에서 하위로 올라왔다고 해도 열람할 수 있는 정보가 도긴개긴이기는…… 히익! 손 올리지 말아요! 저는 배운 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요!!"
"누구한테 배운 대로 말하고 있는데?"
"시스템님이요!"
아브는 말을 하는 도중,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린 김현우를 보며 기겁한 듯 입을 열었다.
김현우는 어느새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있는 아브를 보며 왠지 폭행자의 입장이 된 듯한 기분에 손을 내리곤 혀를 찼다.
"쯧."
그가 혀를 차는 모습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들고 있던 손을 내리더니 김현우의 눈치를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정보권한이 최하위에서 하위로 오르고 이제 임시 가디언에서 등반자를 처리하고 정식으로 '가디언'이 된 만큼 본격적으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해야 할 일?"
"네, 가디언으로 임명된 당신은 이제부터 등반자들을 막아야 합니다."
# 24
024. 뭘 막으라고?(3)
"등반자……?"
"네, 등반자요."
"그 녀석들은 또 뭔데?"
"그들은 탑을 오르는 이들입니다."
빡!
"끄아앙!?"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이번에는 진짜 고통이 뭔지 가르쳐 주지. 내가 탑에서 이것저것 좀 많이 해봐서 그런 건 아주 잘 알거든? 응?"
몬스터한테 여러 가지 실험을 해봐서 말이야.
김현우가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하자 아브는 눈물이 그렁한 상태로 얼굴에 슬쩍 공포의 빛을 띠며 말했다.
"아, 알았어요."
기계적이었던 목소리랑은 다른 인간과 다름없는 아브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손을 내렸고, 곧 아브는 아직까지도 딱밤을 맞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몇 번이고 같은 부위를 문질거렸다.
"…제대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곤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지도 않고 아브는 김현우를 노려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등반자를 설명하기 이전에 이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전 지식이 필요하니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아브의 말.
김현우는 그저 가만히 앉아 아브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의 눈가는 점점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브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김현우는 물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구'가 '탑'이라는 소리야?"
"네."
아브의 확답에 김현우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그녀에게 들은 내용은 김현우에게 있어서는 꽤 충격적이었다.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미간을 꾹꾹 누르더니 입을 열었다.
"자, 그러니까 네게 들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간단히 정리해 보도록 하자."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겁니까?"
아브의 물음에 김현우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 말했다.
"우선 첫 번째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탑 안이라는 소리야?"
"정확히 말하면 총 12계층의 탑에서도 가디언이 현재 지키고 있는 곳은 9계층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는 지금 탑을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 탑을 벗어난 게 아니라는 소리네?"
"정확히 말하면 9계층에서 '인간'들이 직접 명명한 '튜토리얼 탑'에서는 벗어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당신이 살던 곳은 탑 안이었으니 탑을 벗어났다는 소리는 또 어떤 의미로 보면 조금 모순되긴 합니다.
담담하게 말을 끝맺는 아브.
김현우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곤 무엇인가를 고민하듯 테이블에 두 손을 올리고 머리를 슬쩍슬쩍 움직이다.
"아니 씨발, 이거 생각해 보니까 조금 열 받네?"
"??"
갑작스레 열이 받는다는 듯 아브를 쳐다봤다.
무슨 상황인지 순간적으로 이해를 못한 것인지 아브는 멍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고, 그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아니, 시발 분명 나는 그냥 단순히 나를 누가 탑에 박아 넣었는지 알고 싶었단 말이야? 근데 이거 계속하다 보니까 알고 싶은 정보는 알지도 못하고 오히려 해야 할 일이 늘어나네?"
"아…아니, 그……."
"아니야 맞아?"
김현우가 다시 주먹을 들며 으르렁 거리자. 아브는 겁먹은 표정으로 맞지도 않은 머리를 감싸쥐더니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니 그…… 맞기는 한데, 그……."
"뭐?"
"그…… 어차피 '등반자'들을 막지 않으면 9계층은 멸망하는데요? 그렇게 되면 어차피 당신이 살 곳은 사라지니까, 그……."
"아~! 한마디로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이거네?"
"그, 그렇죠?"
"그러니까 한마디로,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까 닥치고 해라…… 이거네?"
꽈득…… 꽈드드드득!!
김현우가 쥐고 있던 책상을 부셔버리자 아브의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아아아아니! 닥치고 해라! 라는 소리가 아닌데요!?"
"그럼 뭔데?"
"그……만약 진짜 닥치고 해라! 라고 말할 거면…… 아니! 진짜로 그렇게 말했다는 게 아니라! 그 손 좀 치워줄래요!?"
히이잉……!
김현우의 올라가는 손을 보며 울상을 지으며 습관처럼 두 손을 머리에 올린 아브.
허나 김현우가 손을 내려놓는 일은 없었다.
"다음 말해."
김현우의 냉정한 말투에 시스템은 끅!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그래도 명색이 9계층의 시스템 관리자 중 한 명인데……!'
아브는 순간 반항적인 눈빛을 0.1초, 아니 그 콤마단위로 드러냈으나, 그것도 김현우의 눈길에 사라질 뿐이었다.
"그, 그러니까. 저희들이 굳이 당신을 '가디언'으로 찍은 이유는 '등반자'를 막는 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예요."
"……흠."
김현우가 탐탁찮은 눈빛으로 보자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거…… 거기에 보상도!"
아브가 급하게 덧붙이자 김현우는 그제야 약간 흥미가 생겼다는 듯 표정을 슬쩍 풀고 물었다.
"무슨 보상?"
"그, 그러니까…… 제가 아는 선에서 가능한 건 어느 정도 선까지……? 그, 그리고!"
"그리고?"
"등반자를 처리하면 처리할수록 메인 시스템에 대한 공적치가 높아져서 분명 당신이 원하는 진실에 도달 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은 결국 내가 원하는 진실을 듣고 싶다면 등반자를 조지라는 소리네?"
"그, 그렇죠? 거기에 보상도 얻고……."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보상이냐니까?"
"그, 그건 시스템 공적치에 따라 제가 또 따로 판단을 해야 하는 문제라 지금 당장 무슨 보상을 어떻게 줄 수 있는지는……."
말꼬리를 흐리며 김현우의 눈치를 보는 아브.
김현우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부서진 테이블을 발을 슬쩍 움직여 한쪽으로 밀어버린 김현우는 아브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좋아, 알겠어. 대충 이해했어."
"네, 네에……."
"그러니까 이 한 가지만 확실하게 물어보자."
"네…… 네, 말씀하세요."
아까처럼 기계적인 말투가 아닌, 공손해진 아브의 말투.
김현우는 물었다.
"튜토리얼 탑을 만든 놈이랑, 나를 튜토리얼 탑에 가둔 씹새끼에 대한 정보는 지금 들을 수 없지?"
"네, 그건 지금 정보권한 등급으로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머리로 가져가는 아브를 보며 김현우는 말했다.
"그럼, 그 정보를 듣는 데는 어느 정도의 정보등급이 필요한데?"
"그 정보를 들으려면 최소 상위 등급의 정보권한이 필요합니다."
"……상위 등급의 정보 권한은 그 공적치를 얼마나 쌓아야…… 아니, 그러니까 그 등반자라는 놈을 몇 명이나 잡아 족쳐야 얻을 수 있지?"
김현우의 물음에 그녀는 어물쩍거리면서 답했다.
"그것도 조금 다 다르긴 한데요……그, 등반자들도 다들 좀 급이 달라서…그, 상위 등반자 5명? 아마 그 정도면 상위 권한이 풀릴 것 같은데……."
자신이 없다는 듯 그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아브.
"그, 내가 처음 잡았던 녀석은 어느 정도인데?"
"네?"
"그 녀석 있잖아 붉은 도깨비 그 녀석도 등반자라도 뜨던데… 그러니까, 이름이 뭐였지? 아르…아르카르?"
"아, 홍마 아르키르라면, 하위 등반자일……거예요. 아마도."
아브의 말을 끝으로 김현우는 이상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
그날 밤, 김시현의 집에 딸린 집무실. 여기저기 이름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한문으로 된 이름표가 가득 들어차 있는 책들 사이에, 김현우는 서 있었다.
그는 주변의 책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런 거 다 읽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겉멋으로 들여놨구만.'
책 표지 위로 선명하게 있는 먼지를 본 김현우는 실소하며 김시현의 책상 앞으로 가 그의 앞에 있던 지구본을 건드렸다.
"탑…탑이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곳이 탑…….'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에 지어진 실소를 지우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정보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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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현우 [9계층 가디언]
나이: 24
성별: 남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A++
민첩: A+
내구: S+
체력: A+
마력: --
행운: B
SKILL -
정보 권한 [최하위]
알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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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시스템의 초대에 그곳에 갔다 온 뒤, 김현우의 정보 창은 다시 한번 소소한 변화를 가졌다.
분명 아무것도 써져 있지 않던 정보 권한은 그 옆에 최하위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 아래에는 '등반자'가 올라올 때를 미리 알려주는 '알리미' 기능이 생겼다.
그 이외의 변화는 없었으나, 김현우는 왠지 그 변화가 크게 느껴졌다.
특히 오늘 시스템에게 들었던 이야기.
김현우 본인은 결국 간단명료하고도 담백하게 요약했지만, 실질적으로 아브가 해주었던 말들은 더욱 많았다.
사실 지구가 탑 일부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 세계에 '튜토리얼 탑'과 '던전', '미궁'이 생기게 된 이유를, 아브는 전부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다만 김현우는 그런 설명이 쓸데없다고 생각했을 뿐.
'그런 자잘한 것까지는 신경 쓰고 살기에는 머리가 너무 아프지. 그러니까.'
"딱 하나."
김현우는 지구본을 돌리며 생각을 이었다.
'딱 하나만 본다.'
어차피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봤자 자신이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튜토리얼 탑에 자신을 누가 처박아 놨는지 알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등반자'를 조진다.
물론 거기에 세계를 구하는 건 김현우에게 있어서 덤이었다.
'확실하게 딴지 걸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기는 하지만.'
그건 내가 정보등급을 얻어 모든 사실을 알아낼 때까지 미룬다.
그래, 그 정도의 여유는 있으니까.
김현우가 그렇게 홀로 생각하고 있을 무렵 그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스마트폰의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
김현우의 스마트폰에 뜬 발신인은 바로 '이서연'.
그는 이제 익숙해진 스마트폰을 조작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오빠 큰일 났어요. 뉴스 봐요! 뉴스!
이서연의 다급한 목소리에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
-아니! 아우 답답해 진짜! 그냥 지금 당장 거실 달려가서 뉴스 켜보라니까요!?
이서연의 말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김시현의 집무실에서 빠져나가 거실로 향했다.
이미 예능프로그램이 틀어져 있는 TV.
그 상태에서 김현우는 리모콘을 조작해 TV를 돌리기 시작했고, 곧 그는 뉴스가 나오고 있는 채널을 틀 수 있었다.
"……이건 또 뭐야?"
TV 뉴스 타이틀의 헤드라인에 떠 있는 글자를 읽으며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김현우, 아레스 길드가 관리하는 던전에 들어가 아레스 길드원 살해?]
화면 아래측에 박혀있는 헤드라인 위에서는 여자 아나운서가 입을 열고 있었다.
-네, 소식이 좀 충격적이라 현재 여론이 굉장히 뒤숭숭한 정보입니다. 바로 12년 전, 탑에 들어갔다 이번에야 빠져나온 김현우 헌터가 아레스 길드원을 던전에서 살해했다는 정보입니다.
뉴스를 취재한 이진명 기자가 보도합니다.
그와 함께 전환된 화면에서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된 내용은 바로 이번에 탑에서 빠져나온 김현우 헌터가 아레스 길드가 독점하고 있는 던전에 강제로 들어가 사냥을 하고 있던 길드원을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오빠 이제 어떻게 할 거에요!?
이서연이 스마트폰 너머로 보채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새끼들 봐라?"
김현우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내용을 보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 25
025. 수틀리게 하지 마라(1)
12년 만에 탑에서 빠져나온 김현우가 아레스 길드의 헌터를 살해했다는 정보는 언론을 타고 빠져나가 단 하루 만에 세상을 뜨겁게 달궜다.
지금까지만 해도 헌터 업계쪽에서만 이슈가 되던 김현우.
그는 안 그래도 크레바스를 혼자 클리어했다는 사실 덕분에 주변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거기에서 이번에 터진 이슈 덕분에 김현우는 동아시아 전체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거기에 덤으로 김현우가 그런 이슈로 이목을 끌다 보니 현재는 그와 친하다고 알려진 한국의 3대 길드장, 김시현과 이서연, 그리고 한석원까지 이슈에 논란거리로 꼬인 상태였다.
"쯧……."
한석원이 사는 목동의 2층 저택. 마치 TV CM 광고에나 나올 것 같은 고풍스러운 목조 저택으로 꾸며 놓은 저택 안에서 이서연은 자신의 스마트폰이 진동하는 것을 봤다.
"아주 불나겠네."
"이게 누구 때문인지 아는 거예욧!?"
김현우의 말 한마디에 이서연이 히스테릭을 부리며 소리를 빽 질렀다.
그래 봤자 김현우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소파에 몸을 뉘고 피식 웃으며 이서연을 달랬다.
"걱정 마, 뭘 그렇게 걱정해?"
"아니 그럼 지금 걱정 안 하게 생겼어요!? 안 그래도 저번에 아레스 길드랑 척 졌다고 말했을 때부터 불안하다 싶더니만…… 사람이 좀 유도리 있게 살아야죠! 여기가 탑인줄 알아요!?"
이서연이 따지듯 여유로워 보이는 김현우에게 대꾸하자 그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야."
"왜요!?"
"이렇게 듣고 있으니까 뭔가 굉장히 바가지 긁히는 것 같은데……"
마누라는커녕 여자친구도 없었는데…….
학창시절에는 고아, 고아원에서 나온 뒤에는 열심히 일하다가 인생이 참 힘들어서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군대를 나오자마자 탑에서 12년 동안 갇혀있던 그로서는 여자친구를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근데도 뭘까 이 기분은.
'이거, 진짜 묘하게 바가지 긁히는 것 같은 기분인데?'
"너 나 좋아하냐?"
"오빠, 진짜 한마디만 더 씨부리면 제가 뇌전으로 지져드릴 수 있는데 한마디만 더 해보실래요?"
김현우의 농담에 이서연의 표정이 한 순간 굳어지는 것을 보며 김현우는 흠칫 떨었다.
뭐, 이서연과 싸워도 지지는 않겠지만 뭔가 여기서 더 장난치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에, 그는 누워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 모습을 보던 김시현이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폰을 흔들었다.
"제 폰 좀 봐요."
[이창진 기자]
뚝
부재중 전화 (182)
[오영택 팀장]
부재중 전화 (183)
"세상세상 저 처음 나왔을 때 빼고 부재중 전화 이렇게 많이 본건 처음이라니까요……."
"그래서 나는 그냥 폰을 꺼버렸지."
한석원의 대답에 김시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 형은 왜 그렇게 태평해요? 지금 저희들 다 같이 사회적으로 매장되기 직전이라니까요? 길드원들한테는 이야기해 놓기는 했는데……."
김시현의 한숨에 김현우는 스마트폰을 조작해 현재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를 쭉 둘러보았다.
1. 고인물
2. 고인물 헌터 김현우
3. 김현우 살인
4. 아레스 길드 피해자.
5. 아랑 길드
6. 고구려 길드.
7. 서울 길드
8. 김시현.
9. 이서연.
10. 한석원
11. …….
…….
……
…….
'이야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먹어보긴 또 처음이네.'
물론 그가 처음 빠져나와 튜토리얼 존을 클리어할 때도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먹긴 했지만, 김현우는 그때 당시 본인이 1위를 하는 것도 몰랐다.
그는 실시간 검색어 밑에 있는 헤드라인도 살펴봤다.
[고인물 헌터 나오자마자 살인 용의자!?]
[3대 길드 길드장 그들도 사실 김현우와 비슷한 성향?]
[아레스 길드의 열띤 증언, 진짜일까?]
[김현우에게 맞았다는 아레스 길드 피해자 증언하다.]
자극적인 제목의 향연.
그는 한석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 기자회견은 몇 시예요?"
"이제 30분 뒤야."
김현우는 어젯밤 이서연에게 소식을 듣고 TV 뉴스를 접하자마자 한석원에게 연락해 기자들을 모아달라고 전했고, 한석원은 그의 말대로 인맥을 동원해 기자들을 모아 주었다.
"오빠, 기자들 모아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서연이 묘하게 불안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김현우를 바라보자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니, 왜 그런 눈으로 봐?"
"…정말 모르는 거 아니죠?"
이서연이 진짜로 몰라요? 라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지만, 김현우는 당당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내가 왜?"
그 말에 김시현과 이서연이 저도 모르게 서로 눈을 맞췄다.
그리고 김현우는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가볍게 이야기했다.
"내가 항상 말했잖아?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가 설마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기자들 모아달라고 했겠어?"
"……형 스타일이면 그럴 것 같기도 한데……?"
"기자들 후려 패면서 아레스 길드도 박살 내겠다고 지랄하려는 거 아니에요?"
"……."
김현우는 생각보다 무척이나 많이 떨어져 버린 신뢰에 할 말을 잃었다.
***
그렇게 한석원의 저택에서 30분밖에 안 남은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을 때, 강남에 있는 아레스 길드의 본사에서는 흑선우가 유병욱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우선 현재 상황은 성공적입니다. 언론들은 정보를 풀자마자 달려들어서 어젯밤 거의 모든 S뉴스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뤘고, 오늘 낮쯤에는 토론회도 열릴 예정입니다."
"그래?"
"그 이외에도 기자들이 열심히 정보를 퍼다 새로운 의혹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아마 당분간 여론의 열기는 식지도 않을 겁니다."
그의 말에 흑선우는 좋다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말했다.
"자, 그래서 그 녀석들은 어떻게 하고 있지?"
"우선 현재 들어온 정보로는 오늘 오후 2시경, 기자회견을 연다고 하더군요."
"그래?"
"하지만 그 기자회견에서 김현우가 어떻게 행동한다고 해도 현재 여론을 바꿀 수는 없을 겁니다."
여론은 무조건 먼저 치는 게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져오니까요.
유병욱 인사부장의 말에 흑선후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모든 건 선빵 필승이지.'
뭐든지 먼저 시작하는 게 좋다.
다른 사람보다도 한 걸음 더 먼저 내딛는 게 성공의 지름길이다.
심지어 그 한걸음이 다른 사람을 짓밟기 위해 내디디고 있는 한걸음이라면 무조건 걸음을 먼저 내디뎌야 한다.
그래야 조금 더 앞에서 그 녀석을 확실하게 눌러 버릴 수 있으니까.
'게다가 그 녀석이 어처구니없는 짓을 해서 더 좋았지.'
흑선우는 키득키득하며 며칠 전에 있었던 표창식을 떠올렸다.
굉장히 싸가지없는 자세로 국방장관은 표창과 포상금을 받고 그냥 내려가 버리는 김현우의 모습에 사람들은 약간의 반감을 품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그때까지는 반감보다 김현우를 경외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지만.
지금 뿌린 정보로 인해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김현우가 크레바스를 단신으로 클리어하고 얻은 인기가 그대로 독이 되어 김현우에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
흑선우는 이 즐거운 상황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기자회견은 생방인가?"
"예, 아무래도 주변국들의 시선도 집중되어 있다 보니 아마 지상파와 케이블에서도 실시간으로 송출할 예정인 것 같습니다."
"아주 인기가 넘치다 못해 터지는군."
"아, 그리고 기자회견장에서 일어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몇 명 정도 사람을 보내 놓았습니다."
유병욱의 말에 그는 잘했다는 듯 미소짓고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깝치지 말았어야지.'
흑선우는 지 꼴리는 대로 행동했던 김현우의 모습을 생각하며 비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흑선후가 느긋하게 김현우의 기자회견을 기다리고 있을 때쯤.
기자회견을 열기로 한 목동의 시설에 마련되어 있는 무대에 수많은 사람이 들어서 있었다.
앞에서 카메라를 점검하듯 이리저리 돌리는 기자부터 시작해서,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언제든 기사를 적을 준비를 하는 기자들, 그 이외에도 시설 내에 별다른 통제가 없다 보니 기자들이 앉아있는 그 뒤에는 일반 시민들도 와서 스마트폰으로 회견장 내부를 촬영하고 있었다.
엄청난 인구.
공연장으로 사용되는 꽤 넓은 홀인데도 불구하고 자리가 꽉꽉 들어차 있는 그곳에.
"왔다! 김현우다!"
"진짜다!"
기자들이 무대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들이대며 다가왔지만, 김현우는 빠른 속도로 마이크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자 다들 앞으로 오지 마시고요. 다들 서로서로 에티켓 지켜줍시다.]
울리는 김현우의 말에 엉덩이를 들었다가 다시 착석한 기자들.
김현우는 혼자서 기자들과 시민들 앞에 섰다.
기자들은 금방이라도 집중하려는 듯 눈을 부릅뜨고 김현우를 바라봤고, 시민들은 웅성대면서도 스마트폰을 쥔 체 김현우를 촬영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김현우는 여유롭게 입을 뗐다.
[자 우선 알다시피 제가 기자회견 하는 법을 잘 몰라서, 그냥 제가 아는 대로 할게요. 저한테 질문하실 분?]
김현우의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드는 기자들.
[네 그쪽 기자.]
김현우는 앞에 있는 안경을 쓴 남자를 지목했다.
"현재 심정이 어떠십니까?"
[네 그냥 좆같네요.]
"네?"
[좆같다고요.]
김현우의 말에 순간 뻥진 기자.
그는 망설임 없이 다음 기자를 호명했다.
[네, 그쪽 기자분은?]
지명된 기자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 질문했다.
"아시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이번 일로 인해 모든 이목이 김현우 씨에게 쏠렸는데, 아레스 길드가 일부러 노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나요? 당연히 노렸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아레스 길드의 길드원을 살해하신 것으로 굉장히 논란이 되고 계시는데 진실 여부가 궁금합니다."
[안 그래도 그거 대답해 주려고 기자회견 연 거잖아요?]
기자의 말에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하곤 곧바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는 무엇인가를 꺼냈다.
"저건?"
김현우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 그것은 바로 그가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이었다.
그는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이야, 저는 솔직히 아레스 길드 위쪽이 이렇게 무식할 줄은 몰랐는데…….]
김현우는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조작하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저는 이 일을 이렇게 키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김현우의 말에 조금 전 질문했던 기자는 추가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지금 현재 아레스 길드의 길드원을 살해하셨다고 인정하시는 겁니까?"
기자의 질문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네.]
"헉!"
그 말에 기자회견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퍼지기 시작하는 웅성거림, 허나 김현우는 스마트폰 조작을 끝마치고-
[단,]
입을 열었다.
[기자님들이 손가락 놀리시는 건, 이 내용을 전부 듣고 나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스마트폰의 재생 버튼을 눌렀고, -뭐긴 뭐야, 아레스 길드에서 너 때문에 친히 보낸 귀한 몸이시지.
곧 스마트폰에서 켜진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회견장을 울리기 시작했다.
# 26
026. 수틀리게 하지 마라(2)
[아레스 길드에서 보낸 자객, 뭐 그런 거야?]
[이해력이 빠르네?]
스마트폰에서 김현우의 목소리와 함께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뭐, 아무튼 그렇게 대단한 건 보스 잡는 걸 봐서 알았는데 마력 사슬에 묶이고도 그렇게 느긋해도 되겠어?]
[마력 사슬? 이거?]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예전, 김현우가 최소한의 증명을 위해 아레스 길드가 가지고 있는 던전을 클리어 할 때, 김현우를 죽이러 왔던 남자 '신청강'의 목소리.
[내가 꼭 아레스 길드에서 의뢰받은 놈들을 처리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어떻게 너희들은 그렇게 하나같이 똑같지?]
[이건 또 뭔 소리야?]
[그래 지금 네가 하는 말도 똑같아. 뒤늦게 허를 찔러 몸을 구속당하면 억지로 침착한 척하며 어떻게든 머리를 굴리지. 어떻게 해야 이 함정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고.]
김현우의 스마트폰에서 들려오는 신천강의 목소리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기자회견에 사실을 고백하고 있었다.
뭐, 스마트폰 안의 녹음기가 재생되었을 뿐이었지만.
[…….]
[그런데 이렇게 침착한 척하면서 오히려 역도발하는 놈들의 특징이 뭔 줄 알아?]
[뭔데?]
[바로 내 신경을 건드려서 명줄을 재촉한다는 거야!]
[콰아아앙!]
그 뒤에 들리는 거대한 폭음 소리를 끝으로 김현우는 재생이 멈춰진 스마트폰을 바라보곤 눈을 돌려 기자회견장을 바라봤다.
얼어붙은 기자회견장.
김현우가 말했다.
[이것 참, 아레스 길드의 높으신 분들도 제가 또 아무런 증거를 안 남겨 놓을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은데.]
이것 참 유감이네요?
마치 비웃는 것 같은 미소를 지은 김현우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과시하듯 흔들더니 또 한번 스마트폰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혹시 지금 김현우 씨가 틀어 준 소리는 어디서 녹음된 겁니까?"
그렇게 스마트폰을 조작하던 도중, 들려오는 기자의 말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그건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 제가 왜 이 녹음을 이곳에서 틀었겠습니까?]
김현우의 말에 순간적으로 웅성이는 기자들.
그들은 곧바로 자판기에 손을 가져가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시민들과 앞 대열에 있는 기자들은 김현우 쪽으로 카메라를 돌려 사진을 찍었다.
그러던 중, 한참이나 웅성거리던 사람들 사이에서 한 기자가 손을 들지도 않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결국 녹음일 뿐 아닙니까? 녹음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는 담백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그의 눈 속에 은근히 녹아 들어있는 초조함을 본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안 그래도 그 이야기가 안 나오면 섭섭할 뻔했네요.]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뭐, 이 녹음이 언제 녹음된 파일인지 까보면 그걸로도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굳이 또 저렇게 질문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제가-]
그와 함께 김현우는 주머니 속에서 꺼낸 스마트폰을 다시 한번 들이밀었다.
[-하나 더! 증거를 준비해 드렸습니다.]
모여 있던 기자들과 시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김현우의 스마트폰을 향해 움직이고, 그때 김현우가 입을 열었다.
[자, 이게 뭘까요?]
"그건……?"
[이건 바로 저를 죽이러 왔던 헌터의 스마트폰입니다. 뭐, 사실 락이 걸려 있어서 제대로 확인은 못 했어요.]
그래도 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보안 업체나 경찰관님들한테 맡기면 다 나올 테니까 우선 한번 보시라고 가지고 나와 봤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스마트폰을 몇 번 정도 주변에 보여주는 것처럼 왔다갔다 하더니 문득 기억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이건 말해두려던 건데, 대충 그때 상황을 모르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좀 요약해 보려고 합니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더니 단상에 두 손을 올리곤 느긋하게 몸을 기댄 상태로 말했다.
[저는 그 사람을 죽일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근데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어쩌겠습니까? 저는 이제 막 탑에서 빠져나온 신입인데, 열심히 반항했죠.]
웃기는 소리. 라고, 회장에 모여 있는 기자들과 시민은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눈앞에서 회견을 열고 있는 김현우는 비록 탑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 능력은 이미 입증된 상태였다.
단신으로 크레바스 안에 들어가 안에 있는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고 홀로 그 재앙을 멈춘 남자.
그게 바로 김현우였다.
그렇기에 세간의 집중이 김현우에게 쏟아졌던 것이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김현우는 마치 기만을 하듯 과장되게 몸을 움직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죽지' 않으려고, 네 거기 자판 치고 계신 기자분 잘 알아들으셨습니까? 저는 '죽지' 않으려고 싸운 겁니다.]
자판을 치고 있는 기자를 굳이 손가락질까지 하며 입을 여는 그의 모습.
자판을 치던 기자는 김현우의 손가락질에 얼어붙었지만, 그의 입은 계속해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정당방위로 싸우다 보니, 결국 그는 그 던전에서 나오는 보스 몬스터인 '메가 엘리게이터'한테 기습을 당해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 참, 이렇게 보면 제가 죽인 것도 아닌데, 그쵸?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 안쪽으로 집어넣은 뒤 입을 열었다.
[뭐 저도 아레스 길드랑 딱히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아서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판을 키워주시니…….]
저도 저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끝까지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체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무대에서 몸을 돌렸고, 그 순간을 끝으로 기자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기자들은 들고 있던 카메라를 두고 급하게 노트북을 꺼내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각각 SNS 자신들이 찍은 사진이나 영상을 업로드 하거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회견장 안에 있는 기자들은 기사를 작성하면서도 아레스 길드의 뒷돈을 받아먹은 기자들을 빼고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김현우가 내뱉은 말은 하나하나가 전부 특종감이었으니까.
그렇게 기자들이 새로운 이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을 때.
"…."
김현우는 회견이 열렸던 무대를 떠나며 키보드를 치고 있는 기자들을 한번 봤다.
'사건은 더 큰 사건으로 덮는다.'
옛날, 고아원에서 지낼 때, 막연하게 고아원 원장새끼를 사회에 고발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런저런 방송 관련 책을 보다 읽었던 김현우의 머릿속에 깊게 박혀 있는 그 문장.
그것을 떠올리며 김현우는 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쉽게 당할 줄 알았어?"
처음 신천강이 자신을 습격하러 온 던전을 들어가기 하루 전, 김시현은 김현우에게 몇 번이고 되도록 조심하는 소리를 들었었다.
그렇기에 정말 혹시나? 하는 싶은 마음에 그는 그날 던전에 들어감과 동시에 스마트폰의 녹음기를 켜두었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닌지 신천강이 왔다.
김현우는 혹시나 저장해 둔 녹음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는 듯 스마트폰을 괜히 문질거리곤, 김시현이 미리 대기시켜 놓았던 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오후 2시에 있었던 김현우의 기자회견 뒤로, 전세는 크게 기울었다.
아레스 길드와 은밀하게 연결되어있는 언론이 어제 터뜨린 김현우의 아레스 길드원 폭행사건을 사실을 애써 언급하며 발악해도 그 사건은 순식간에 묻혀 버렸다.
김현우가 퍼뜨린 아레스 길드의 사건 때문에.
그야말로 김현우의 '사건은 더 큰 사건으로 덮는다'는 전략이 제대로 먹힌 상황에서-
"이런 씨발!"
와장창-!
유병욱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컴퓨터 모니터를 책장을 향해 던져 버렸다.
책장에 부딪힌 모니터가 산산이 부서지며 큰 소리가 났지만, 불이 꺼져 있는 관리부서는 침묵만이 있을 뿐이었다.
'씨발…씨발!'
유병욱은 신경질적으로 의자에 앉은 뒤 눈을 질끈 감았다.
'좆됐다…좆됐어……!!!'
몇 번이고 발을 구르던 유병욱은 아까 전 눈에 띄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흑선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실책이다…실책이야……!'
그는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며 바닥을 쿵쿵 찼다.
유병욱은 자기 자신의 안일함을 탓했다.
'그 개새끼가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을 줄이야…!!!'
솔직히 누구라도 한번은 '혹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곤 했다.
그리고 그 혹시, 그러니까 '만약'의 상황에 대해서 유병욱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자료를 조사하면서도 그거 혹시 이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증거나 또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생각은 당연히 그도 했었다.
꽤 많이 했었다.
그는 매사에 의문을 많이 달고 다니던 사내였으니까.
그 의문과 의심을 통해 아레스 길드에 입사하고 인사과에 들어와 흑선우의 인정을 받고 인사부장 자리까지 꿰찰 수 있었으니까.
허나 그런 유병욱이라도 김현우를 깊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가 보여주는 일상 때문.
처음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그에게 사람을 붙였을 때도, 유병욱을 도저히 그를 의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끄……!!!!"
그의 생활은 단순했으니까.
집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일상다반사였고, 혹시 집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동료라던 길드장들과 밥을 먹고 카페를 가는 것 정도였다.
그 이외에 다른 곳은 이동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가 여러 방송 매체에서 보여줬던 특유의 오만하고 타인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유병욱은 우습게도 그를 그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이미 김현우는 유병욱의 머릿속에 '힘만 쎄고 세상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머저리'로 보였으니까.
"하……."
그렇기에 그런 그가 이런 증거를 숨기고 있을 거라고 그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다.
한참이나 책상에 얼굴을 묻은 채 몇 번이고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른 그는 어느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당탕!
그가 거칠게 일어남과 동시에 의자가 나가 떨어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지금이라도 수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인사이동 때, 아니, 그다음 인사이동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는 무척이나 잘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유병욱이 이를 갈며 일을 수습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을 때쯤, 강남에 위치한 고급 양식집의 개인룸에서는 김현우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저녁을 먹으며 강남역의 뷰를 보고 있었다.
"으엑, 이게 뭐야."
"왜요?"
"아니, 이건 뭐 양도 작고 나는 맛이라고는 야채 맛밖에 안 나잖아?"
그렇게 말하며 야채 소스가 곁들어진 고기를 삼킨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옆에 있던 물을 들이켜곤 말했다.
"나는 역시 이런 고급 음식은 안 맞나 봐."
그가 그렇게 말하며 입을 슥 닦자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던 김시현이 입을 열었다.
"형, 그보다 그건 언제 챙긴 거예요?"
"응? 뭘?"
"그 스마트폰이요. 전 진짜 방송 보면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걸 언제 챙겼나 하고요."
"그러게, 솔직히 저도 깜짝 놀랐어요. 분명 기자 폭행이나 안 나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김시현과 이서연이 차례대로 말하자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거, 뻥이었는데?"
"……??"
"……뭐라고요?"
"스마트폰 뻥이었다고."
# 27
027. 수틀리게 하지 마라(3)
"거짓말이라고요?"
"응."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와인 잔에 담겨 있던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아니, 진짜 아니었어요?"
"아, 내가 녹음해 놓은 재생 파일은 진짜지. 근데 걔들한테 보여줬던 스마트폰은."
김현우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검은색 스마트폰.
얼굴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냥 네 집에서 굴러다니던 폰 하나 집어 왔어."
"네?"
"네 서재에 가보니까 폰 많이 있던데? 그래서 그냥 하나 주워 왔지."
김현우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김시현.
확실히 김시현은 폰을 꽤 자주 바꾸는 성격이라 그의 서재 한쪽구석에는 1년도 쓰지 않은 스마트폰들이 몇 개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니, 그렇게 거짓말하다가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요?"
이서연이 톡 쏘듯 말하자 김현우는 곧바로 대답했다.
"들킬 일 없어."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호언장담을 해요? 그러다가 진짜 들키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들킬 일 없다니까?"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전 에피타이져로 나온 홍시를 먹었다.
이서연과 김시현이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한석원이 말했다.
"너무 너만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우리한테도 좀 알려줄 수 있잖아?"
한석원의 농담 반 진담 반의 아쉬운 소리.
"뭐, 별건 아니야."
"그럼 뭔데."
"그냥, 어차피 이 스마트폰을 보안 업체에 넘기기 전에, 그 녀석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아니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해? 아니, 생각해 보면 분명 그럴 수도 있긴 한데…그래도 너무 희망적인 진로로만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야, 너희들은 뭐 그렇게 걱정만 늘었냐?"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과 이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이 안 늘래야 안 늘 상황이 아니니까 그렇지. 지금 네가 누구랑 붙고 있는지는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거야?"
아레스 길드.
그들은 이미 길드를 뛰어넘어 초대형이라는 말이 앞에 붙어야 할 정도로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본거지인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전 세계 곳곳에, 던전과 미궁이 있는 곳에는 손을 뿌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그들은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뭐, 한국처럼 압도적으로 던전 점유율이 빼앗긴 나라도 없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고로 김현우의 동료인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그런 동료들과 다르게 김현우는 멀쩡하게 홍시를 퍼먹으면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제 어떻게 나오시려나?'
대충 김현우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두 가지 정도가 있었다.
'나랑 협상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또 멍청하게 다른 일을 꾸미거나.'
사실 그것 이외에도 이 상태로 빠꾸 없이 여론전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아레스 길드가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을 거라고 김현우는 은연중에 확신했다.
'그쪽은 나랑 싸워서 잃을 게 많지만, 나는 없거든.'
게다가 판도 뒤집혔고, 거기에 덤으로 아레스 길드에게 돌아가는 상황도 불리하다.
뭐 그 모든 걸 감수하고 압도적인 몸집으로 짓누르겠다고 달려들면 또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아마 거기까지 가지는 않겠지.'
한번 선택해 봐라.
김현우는 속으로 그렇게 짧은 생각을 마치며 때마침 나온 메인 디쉬인 등심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현우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나는 잠깐 산책 좀 하다가 들어갈게."
"네?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에요?"
"말 그대로 산책 좀 하다가 들어간다고."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김시현의 말을 듣기도 전에 아파트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따라오지 마라."
김시현은 그를 따라가려다 들리는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며 몸을 옮겼다.
'…어째 형 오고 나서 점점 한숨이 느는 것 같단 말이야.'
따라오지도 말라고 했으니…….
김시현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아파트로 몸을 돌렸다.
'…형이 어련히 하겠지.'
그가 보여준 압도적인 무력을 떠올린 김시현은 이내 김현우에 대한 걱정을 지워버리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야, 들어가자마자 아주 바로 나오시네?"
김현우가 얼마 걷지도 않고 아파트를 빠져나와 으슥한 골목으로 걸어가자마자 주변에 빠져나오는 검은 옷을 입은 흑의인들을 보며 김현우는 이죽였다.
"이 새끼들 패션 감각이 왜 그래? 너희가 중세시대 어쎄신이냐?"
키득거리며 그들을 놀린 김현우.
그러나 검은색의 갑옷에 얼굴까지 가리고 있던 그들은 별다른 미동 없이 그저 김현우의 앞뒤를 막을 뿐이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는 압박감이 들 만한데도 김현우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 있자 그 사이로 한 명의 흑의인이 걸어 나왔다.
"당신을 찾는 사람이 있다."
"아레스 길드의 높은 분께서 나를 찾아?"
"……."
입을 다무는 흑의인.
"입 다무는 거 보니까 맞나 보네?"
"네가 조용히 따라가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될 거다."
"지랄."
흑의인에 말에 짧게 욕설을 되돌려준 김현우는 주변을 둘러싼 흑의인들을 쭉 둘러보았다.
'진짜 이렇게 혼자 다니면 나올까? 생각했는데……'
진짜로 나왔다.
게다가 무더기로.
'뭐, 쫄리지는 않는다만.'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내가 가기 싫으면 어쩔 건데?"
"그럼 강제로 끌고 갈 뿐이지. 네가 우리들을 전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신감이 아주 팡팡 터지다 못해 넘치시네? 너 나 누군지 몰라?"
분명 자신의 크레바스 영상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에 김현우는 웃으며 물었고 남자는 묵직하게 대답했다.
"네가 누군지 알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저 너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들었을 뿐이다."
"아, 그래서 나를 강제로 끌고 갈 수가 있다?"
"못 할 것 같나?"
묵직하고 조용한 목소리.
그러나 그 속에 담겨 있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김현우는 슥 웃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땅바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
김현우는 낡은 골목길 사이,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있는 화단에서-후드드득,
"야, 너 일로 와봐."
심겨 있는 대파를 뽑아냈다.
김현우는 파를 툭툭 털어내더니 파를 들고 있는 손으로 손을 까딱거렸다.
일순 가면 속에 가려져 있는 흑의인의 얼굴이 흠칫하고 떨리고, 곧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나를 고작 던전 입구나 지키고 있는 애송이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두 손에 마력을 유형화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넘실거리기 시작하는 푸른 마력.
남자는 이제 세 걸음 뒷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는 김현우를 보며 주먹을 꾹 쥐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김현우가 얼마나 강한 헌터인지 남자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관리부 소속인 신천강을 역으로 살해한 게 그라는 것도 알고, 크레바스 사태를 그가 단신으로 처리한 것도 알고 있다.
그가 튜토리얼 존을 클리어하는 영상 또한 봤다.
도저히 하달받은 자료에 있던 등급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레벨.
허나 김현우가 그렇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는 쫄지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신천강 그 새끼는 혼자였지만,'
지금 자신의 주변에는 자기와 비슷한 등급의 헌터들이 무려 10명 가까이 있었다.
이제 곧 하위이기는 했으나 S등급에 진출할 수 있는 최소 자격을 갖춘 헌터들이 10명.
이 전력이면 중위권 정도에 있는 S등급도 어떻게 상대해 볼 수 있는 레벨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주변에 서 있는 흑의인들에게 눈짓을 주고, 그에게 마력을 욱여넣을 수 있는 마지막 한 발자국의 사정거리를 좁혔고-콰직! 쾅-!
그가 정신을 차리는 일은 없었다.
"……?"
흑의인들은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하다 붉은 벽돌을 뚫고 머리가 처박혀 기절한 자신들의 리더를 바라봤다.
거대한 소리와 함께 일어난 잠시의 정적.
흑의인들은 멍하니 머리가 처박힌 리더를 바라보며 머릿속에 물음표를 하나둘 띄우기 시작했고, 곧 앞에 있는 김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쥐어져 완전히 박살 난 파를 보며 쯧 하는 소리와 함께 내버렸다.
"역시 파는 약하네."
사실 파로 때린 것이라기보단 주먹으로 때렸다는 게 맞는 말이었으나, 김현우는 파의 나약함을 탓하며 완전히 박살 난 파를 버리곤 다시 몸을 숙였다.
그리고 이번에 그가 주운 것은-
"……."
누르는 부분이 망가졌는지 골목 한켠에 버려진 300원짜리 볼펜이었다.
그는 볼펜의 끝부분을 잡고 흑의인들을 보며 씩 웃었다.
"다음엔 이거다."
말과 함께 정적에 휩싸인 공간.
흑의인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고, 곧 리더 옆에 있던 흑의인이 달려드는 것을 시작으로 주변의 흑의인들이 제각각 무기를 뽑아 들었다.
"끄악!"
볼펜을 쥐고 있던 주먹에 맞은 남자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감속."
"속박."
"중독."
"혼란."
흑의인들의 입에서 순식간에 수십 개의 단어가 튀어나온다.
형상화된 마력이 다음 상대를 기다리는 김현우의 몸 주변으로 움직이고 그 언어에 따라 고유한 형상을 재현한다.
땅속에서 튀어나온 검은색의 밧줄과도 같은 무언가가 김현우의 하체를 붙잡고, 김현우의 몸이 마치 슬로우 모션이라도 걸린 것처럼 느려진다.
그와 함께 김현우의 피부가 누렇게 변하고 흑의인들을 노려보던 눈빛이 흐려진다.
"가속!"
"극점!"
"강화!"
"치중!"
그와 함께 대기하고 있던 흑의인들이 각각의 무기를 뽑아 들고 제 몸에 버프를 걸며 달려든다.
순식간에 김현우가 흑의인들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고, 그들은 제각각의 무기로 김현우를 공격했다.
흑의인의 두 검이 그의 배와 오른쪽 팔을 향해 움직인다.
측면에 있던 흑의인의 창이 그의 오른쪽 허벅지를, 쌍수단검을 들고 있던 흑의인이 양손에 쥔 단검으로 그의 발목을 내리친다.
목숨을 빼앗는 공격은 아니었지만, 저 공격 중 단 하나라도 당한다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할 만큼 치명적인 부위에 망설임 없이 무기를 꽂아 넣는 그들.
그들은 무기가 그의 몸에 닿기 직전, 그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망설임 없이 무기를 찔렀다.
그러나-
"무슨……?"
그의 몸에 무기가 박혔다.
그래 박혔다.
그의 피부에-
김현우의 배와 오른쪽 팔을 향해 휘두른 검에 피가 맺힌다.
창에도 마찬가지로 붉은 피가 맺히고, 쌍수 단검의 양쪽 칼끝에도 붉은 피가 방울방울 맺힌다.
그래.
그게 끝이다.
"미친……!"
5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던 공격.
거기에서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김현우의 몸에 무기를 맞추기는 했으나 김현우에게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아니, 주기는 했다.
그의 피부에만.
"하고 싶은 일은 전부 끝냈냐?"
흑의인들의 무기는 김현우의 몸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김현우가 씨익 웃으며 자신 주변에 무기를 들이밀고 있는 흑의인들을 한번 둘러본다.
그리고, 김현우의 팔이 움직였다.
꽈득!
"끄엑!?"
앞에서 배를 찌르던 흑의인이 괴성을 내지르며 날아간다.
투두두두둑!
그의 몸을 속박했던 검은 무언가가 끊어져 나가고, 흑의인은 아차 하는 마음과 동시에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어딜……!"
김현우는 몸을 뒤로 빼는 흑의인을 붙잡았다.
그 찰나의 순간,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흑의인을 보며 김현우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영광으로 생각해라."
그의 몸이 김현우의 팔 궤적을 따라 마치 무기처럼-?
"생명을 무기로 쓴 건 네가 처음이니까…!"
-크게 휘둘렸다.
꽝!
김현우는 엄청난 힘으로 쥐고 있던 흑의인을 뒤로 빠지고 있는 나머지 녀석들에게 던져 버리고-쾅! 콰가강! 콰직!
곧바로 달려 들어가 남은 흑의인들을 쥐어패기 시작했다.
뒤늦게 몸을 빼려던 흑의인들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김현우의 손에 잡혀 얼굴을 갈렸고-
"히…… 히이이익!"
"너는 특별히 살려주지."
김현우는 마지막 남아 부들부들 떨며 창을 붙잡고 있는 흑의인을 보며-
"안내해라, 나를 부르는 녀석이 있는 곳으로."
웃었다.
# 28
028. 수틀리게 하지 마라(4)
경기도 광주 외곽 산맥에 있는 지하 벙커.
그곳은 아레스 길드가 여러 가지 비밀스러운 일을 위해 정부에 돈을 먹여 극비에 제작한 벙커였다.
밖에서 볼 때는 그저 낡은 철문 하나밖에 없었으나, 그 철문을 넘은 지하에는 현대 문명의 이기가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후…."
그런 철문 앞에서, 두 명의 흑의인은 문틏 가장자리에 기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휴, 씨발 우리 길드는 뭐 이렇게 돈을 이런 데다 꼬라박냐?"
"그런 말 하지 마라. 이런 데가 생겼다는 게 우리 같은 머더러 헌터들이 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거잖아?"
머더러 헌터.
그들은 협회와 국가에서 민간인 '살인'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범죄를 저지른 헌터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보통 헌터끼리의 싸움은 던전 안에서 이뤄지는 터라 증거도 거의 없기에 거의 모든 수사가 애매한 반면, 머더러 한터들은 던전 안이 아닌 밖에서 시민이나 헌터들을 죽인 이들이었다.
그 말을 들은 흑의인이 낡은 철문을 한번 바라보곤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 이런 것들을 만들어 두니까 우리도 재미있게 작업 할 수 있고 말이야…… 그치?"
"아, 그러고 보니까 그, 관리부 1팀 녀석들 작업 나간 거 이쪽으로 온다고 했었나?"
"아니, 지부장님은 오늘 잠깐 일이 있어서 여기에 들른 거고 우리가 그 '고인물'인가 뭔가 하는 녀석 볼 일은 없을걸?"
"그래?"
"너 좀 아쉬워 보인다?"
흑의인이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솔직히, 요즘에 TV에서 혼자 존나 띄워 주니까 좀 쳐맞고 질질 끌려오거나 쫄아 가지고 1팀 애들한테 둘러싸여서 오는 거 보면 좀 웃길 것 같았는데."
"그렇지? 나도 그 생각하기는 했다."
그렇게 철문에 기댄 흑의인들이 키득키득하고 있을 때-쿵!
그들의 앞에 한 명의 남자가 떨어져 내렸다.
아무것도 없다가 갑작스레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남자를 보며 흑의인들이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는 투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자신의 손에 들른 남자를 흔들었다.
질질….
"야, 여기 맞아?"
"예…예예! 맞…맞습니다!"
파란색 츄리닝에 마찬가지로 파란색 슬리퍼를 깔로 맞춰 입은 김현우가 손에 잡혀 있는 흑의인을 탈탈 털자마자 나오는 대답.
"좋아."
그는 만족한 표정으로 흑의인을 바라보더니-쿵! 꽈드드득!
"끄게에에엑!"
"죽이지는 않았다."
흑의인의 얼굴을 그대로 흙바닥에 처박으면서 대답했다.
"뭐……뭐야!?"
갑작스레 앞에서 일어난 유혈사태에 흑의인들은 당황하며 기댔던 자세를 풀려고 했으나-
"끅……!?"
"끄아아아아아악!?!"
이미 자세를 풀려고 했던 두 명의 흑의인은 김현우의 손에 얼굴을 잡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들린 채로 몸을 버둥거리는 흑의인들에게 김현우는 짧게 선고했다.
"뭐긴 뭐야? 너희들 저승으로 보내줄 저승사자지."
쾅!
두 흑의인의 머리를 벽에 그대로 처박아 버린 김현우는 쓱 하는 웃음을 머금으며 낡은 철문을 그대로 차 날렸다.
"이야~ 돈 많이 처발랐나 보네?"
그리고 곧 철문을 날려 버리자마자 보이는 내부의 풍경에 절로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 보였던 낡은 철문의 이미지와 달리 내부는 굉장히 깔끔했다.
마치 고급 빌라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따온 듯한, 어찌 보면 모델 하우스처럼 깨끗하게 꾸며져 있는 그곳을 감상하던 도중,
"누구냐!!"
"저 새끼다, 저 새끼!"
"저건 또 무슨 또라이 새끼야!"
하나밖에 없는 통로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제각각의 무기를 든 헌터들을 보며 김현우는 씩 웃었다.
"찾아갈 필요 없이 이렇게 몰려와 주니까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구만?"
김현우는 몰려오는 헌터들을 보며 입가를 길게 찢었다.
그렇게 김현우가 몰려드는 헌터들을 상대하기 위해 움직일 때, 그 벙커의 제일 안쪽의 방에서는 아레스 길드의 지부장인 흑선우가 붉은 마력에 묶여 있는 한 여자를 보고 있었다.
온몸에는 고문의 흔적이 여실해 보이는 상처들이 여기저기에 나 있고, 눈은 금세 맛이 갈 것처럼 흐리멍텅해져 있는 여자의 모습.
흑선우는 그런 여자의 모습을 무감정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친구야. 인제 그만 좀 버티는 게 어때? '패도'길드에서도 널 버렸다니까?"
"……."
"내가 몇 번이나 제안했잖아? 또 제안할까? 응? 네가 여기서 패도 길드 내부 정보와 인원 취약점만 알려주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니까?"
응?
흑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흐리멍텅한 눈빛을 가진 여자와 눈을 맞췄으나, 그녀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힘겹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명백한 거절을 표현.
"이야, 이거 독한 년이네? 야, 한 발 더 못 넣냐?"
"헌터한테도 치사량이 있어서 이 이상 투여하면 온몸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 죽을 겁니다. 게다가, 사실 지금만 해도 위험합니다."
"쯧, 돌겠네."
흑선후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다시 무릎을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들었어? 너 이 이상 가면 진짜 큰일 난다는데 정말 그렇게 뻐팅길 거야? 응? 너 저기 있는 친구들 보이지?"
흑선우는 방 안에 있는 총 8명의 헌터들을 쭉 가리켰다.
"쟤들 취향 좀 쎈 애들이다? 응? 너 진짜 여기서 말 안 하면 좆된다니까? 몸도 박살 나고 정신도 박살 나."
흑선우의 말에도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돌리는 그녀를 보며 흑선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야, 한 발 더 놔줘."
"그럼 잠깐 동안은 말을 하겠지만 결국에는 취조를……."
"어차피 이렇게 두면 말도 안 할 것 같은데 뭐, 그냥 시원하게 한방 놔주고 망가질 때 여기 친구들한테 한번 쫙 돌려줘, 해소라도 하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말을 한 흑선우.
그의 명령에 남자가 옆 테이블에 있던 주사기를 쥐며 묶여 있는 여성에게로 다가갔고.
꽝!
그와 함께 닫혀 있던 문이 부서져 나가며, 그 앞으로 김현우가 튀어나왔다.
"뭐…!? 끄엑!"
콰드득.
그는 문 옆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그대로 발로 차버린 뒤, 방 안의 상황을 관찰했다.
방을 두르고 서 있는 헌터들.
그 가운데에 있는 딱 봐도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와 그 앞에 묶인 상태로 흐리멍텅한 눈을 자신에게 보내고 있는 여자.
그녀의 몸에 있는 숱한 상처와 팔뚝에 있는 주사 바늘, 그리고 오른쪽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주사기들을 보며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이거 사람을 불러놓고 다른 사람 먼저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넌 김현우……?! 네가 어떻게 여기에…관리 1팀은……!?"
여자의 앞에 서 있던 남자 흑선우가 몸을 돌리며 입을 열자 김현우는 츄리닝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말했다.
"아, 네가 보낸 그 친구들? 다 차가운 길바닥에서 잘 자고 있을걸? 얼굴에는 끈적끈적하게 피도 흘러나와서 입이 돌아가진 않을 거야."
낄낄거리는 웃음을 짓는 김현우의 모습.
그리고 곧 그의 맞은편에 서 있던 흑선우는 김현우가 발로 차고 걸어왔던 그 길 뒤로 잔뜩 쌓여 있는 아레스 길드 소속의 헌터들을 보았다.
"아, 여기에 있는 네 친구들도 마찬가지고."
"죽어라 이 새끼야!!"
김현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서 있던 헌터가 순간 가속을 사용한 속도로 김현우의 목 아래까지 치달았다.
꽝! 우탕탕탕!!
허나 당한 건 김현우가 아닌 그.
김현우는 발로 남자의 몸을 후려치곤 말했다.
"이것 참, 분명 나는 초대를 받고 온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친구들이 과격하지? 응? 나랑 한번 해보고 싶다 이거야?"
그의 말에, 방 안에 있는 이들이 순간 긴장한다.
분명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저 보기만 해서는 평범한 남자였다.
아니, 평범한 것도 아니다. 그는 외모만 보자면 그냥 백수에 가까웠다.
입고 있는 건 파란색 츄리닝, 머리도 자르지 않아 더벅머리에다가, 발에는 파란색 슬리퍼를 끼고 있었다.
자세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고, 싸울 준비라고는 단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 느긋한 자세.
그런데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압박에 흑선우는 이를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저게 A급이라고?'
지랄, 지랄이다.
저건 A급이 아니었다.
S급, 그중에서도 상위.
이 벙커에 있는 헌터들은 최하가 B+등급에서 놓으면 A+등급의 '머더러 헌터'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헌터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단신으로 온다?
단신으로 와서 그 헌터를 전부 쓰러뜨리고 자신 앞에 서 있다?
저런 실력을 가진 헌터가 A+등급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분명 S급 하위 예정자들로만 이뤄져있는 관리 1팀을 보냈는데, 그 녀석들이 전부 당했다는 것만 생각해봐도 흑선우는 그의 등급을 감히 측정할 수 없었다.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S급 중상위권, 452위라는 랭킹을 가지고 있는 흑선후.
그는 과연 자신의 무기와 방어구를 들고 왔을 때, 지금 그를 상대해서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으나.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흑선우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야, 귀먹었어? 빨리 정하라니까? 나한테 뒤지게 맞고 여기서 다 같이 매장될래? 아니면 나랑 이야기를 좀 할까?"
아레스 길드 한국 지부장의 위치에 올라서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폭언에 흑선우는 욱했지만, 그는 우선 숙이기로 했다.
'그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알기 전에는 움직이지 못한다.'
"이야기를 좀 하는 걸로 하지."
"좋아."
김현우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입을 열고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털썩 소리가 나게 자리에 앉는 김현우.
이곳이 적진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는 자연스러운 모습.
그 맞은편에 흑선우가 자리에 앉자. 김현우는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너는 내게 무슨 보상을 해줄 수 있는지 좀 들어볼까?"
"뭐?"
"우선 헌터들을 내게 보내서 귀찮게 한 것도 있고, 나를 살해하려고 사람을 보낸 것도 있고, 니들이 먼저 잘못해놓고 언론 터트려서 물 먹이려 하고, 응?"
흑선우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
어두운 세상,
하늘에는 잿빛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고 지상에는 부서진 돌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아마 멀쩡했다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을 저택은 이제는 그 기둥밖에 남지 않아 초라함을 더하고 있었고,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던 냇물과 자연의 녹색 빛을 만연에 퍼뜨리던 나무는 이미 시들고 메말라 회색빛의 세상에 동화되어 있었다.
그런 아무것도 없는 메마른 세상.
아무것도 없이 부서진 자택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검은 흑발을 뒤로 묶은 말총머리에 마치 옛날 동양풍의 무의를 입고 있던 남자는 회색빛으로 물들어 버린 세계를 감상하듯 시선을 주곤 이내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그는 이 멸망해 버린 회색빛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을 볼 수 있었다.
"……."
거대한 '탑'.
멸망한 세상에서 오직 그 탑만이 회색빛 하늘을 뚫고 높게 솟아올라 있었다.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솟아있는 그 탑을 보던 말총머리의 남자.
─그 어느 곳에서는 '뇌신'이자 마교의 '천(天)'라고도 불렸던.
턱.
그가,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 29
029. 수틀리게 하지 마라(5)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왜?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
김현우의 말에 흑선우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 모습에 김현우는 마치 흑선우를 놀리듯 입가에 진한 웃음을 지으며 이죽였다.
"그러니까 사람도 봐가면서 건드렸어야지. 누가 날 건들래? 막말로 그냥 나 안 건들고 잘 넘어갔으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 응?"
"……."
'이 개자식이……!'
김현우의 이죽임.
흑선우는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내 손을 벗어난 일……."
"그래? 진짜 그렇게 이야기해도 되겠어?"
"……."
김현우의 장난스러운 눈빛이 어느 순간 사이하게 빛났다.
누가 봐도 장난스러운 눈빛 뒤에 섬뜩한 표정을 머금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그는 이를 꾹 깨물었다.
"내가 그렇게 큰 걸 바라는 건 아니잖아? 그냥 피해보상금 100억 정도에, 거기에 덤으로 나한테 니들이 가지고 있는 독점 던전 몇 개만 내주면 된다니까?"
김현우가 빙글빙글 웃으며 미소를 짓자.
"하지만 지금 네가 말하고 있는 건……!"
지금 우리가 힘들게 먹어 치운 초급 던전들을 먹어치우겠다는 거잖아!!
라는 말을, 흑선우는 속으로만 외쳤다.
김현우가 협상 조건으로 내놓은 것, 그것은 바로 자신의 정신적 피해보상금 100억 원과 바로 독점 던전의 인수권이었다.
그래, 100억 정도까지는 괜찮다.
계약금도 아닌 순수하게 100억이라는 돈을 차출하는 것은 조금 힘들지만, 시간을 들이면 무난하게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다.
문제는 그게 아닌 독점 던전의 인수권.
김현우가 요구한 4개의 던전은 바로 신입 헌터들이 사냥하기에 좋은 초급 던전의 인수권이었다.
그리고 곧 그 독점 던전의 인수권을 달라는 것은 지금까지 아레스길드가 유지해 온 신입 헌터의 절대 독점권을 빼앗겠다는 말과 다른 바가 없었다.
흑선우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김현우는 그런 그를 보며 느긋하게 기다리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시간 끄네? 5억 추가."
"뭐? 그게 뭔 개……!"
"또 끄네? 저기에 묶여 있는 저 여자도 추가."
"이런 씨……."
"욕하네? 5억 추가."
마치 친구에게 말장난을 하듯 조건을 계속해서 올리는 김현우의 모습에 흑선우는 입을 열었다.
"잠깐……!"
"왜, 이제야 좀 할 마음이 들었어? 그런데 어쩌나 조건이 계속 올라서 지금은 10억 추가에 저 여자도 같이 사은품으로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응?"
"김현우 헌터…… 당신이 강한 건 인정하지. 하지만 과연 우리랑 '진짜'로 싸우고 감당 할 수 있을……."
"와…… 진짜 이 새끼들 답답하네."
그런 흑선우의 말을 끊어버리고,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야. 너희들은 뭐 똑같은 단어 주입식 교육이라도 받냐? 어떻게 하는 레퍼토리가 이렇게 똑같아?"
"뭐라고?"
"그 얼마 없는 알량한 힘 좀 믿고 깝치다가 역으로 찍어 눌릴 것 같으면 자기가 붙어 있는 알량한 권력 꺼내서 휘두르고…… 응?"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등을 기대곤 얼굴에 웃음을 지웠다.
"만약, 그 권력도 안 먹히면, 어떻게 할 거냐?"
한순간 바뀐 김현우의 분위기에 방 안에 서 있던 헌터들이 긴장하기 시작하고, 흑선우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진다.
엄청난 중압감.
하지만 조금의 시간 뒤, 김현우는 다시 그 중압감을 풀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밀당을 싫어해, 애초에 그런 건 잘 하지도 못하니까. 그러니까 우리 그런 밀당 말고 확실하게 하자."
김현우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원한 조건대로 해줄래? 아니면……."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발을 까딱까닥 거리며 흑선우의 대답을 기다릴 뿐.
김현우의 입가는 미소 짓고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흑선우에게 가해지는 중압감은 이전보다도 강했다.
'싸울까?'
찰나에 든 생각.
흑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
그 어떤 상황을 상정해도 지금 이 곳에서 그에게 도망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직접 싸워보지도 않았지만, 그가 여기까지 오면서 일으킨 일들을 보면 대충 그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실수.'
실수다.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니까. 그 정도 인원이라면 그래도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본인의 실수.
흑선우는 결국 입을 열었다.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좋아."
김현우는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묶여있는 여자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왜? 내가 받아가기로 했잖아?"
김현우는 그 말과 함께 여자를 묶고 있던 줄을 가볍게 끊어버렸다.
'아티팩트로 이루어져 있는 마력밧줄을 저렇게 쉽게……!?'
헌터들이 놀라는 와중에도 그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어깨에 짊어진 체 부서진 문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문득 기억났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김현우는 손에서 스마트폰을 들어올렸다.
"우리가 한 대화 여기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으니까. 혹시라도 발뺌이나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 우리, 응? 인수권 보낼 길드는 내가 또 따로 만들어서 연락 줄게, 알았지?"
김현우는 그 말을 끝으로 벙커의 밖으로 향했고, 곧 흑선우는 그가 완전히 떠난 뒤,
"이런 씨발새끼!!!"
쾅! 콰지지직!
김현우와 마주보고 앉았던 테이블을 그대로 부셔버리며 혼자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쾅! 쾅! 쾅!
흑선우는 구겨진 자존심에 더해서 김현우에게서 느낀 중압감에 그가 녹음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끼며 주변 가구를 개박살 내기 시작했고, 그렇게 흑선우가 혼자서 날뛰기 시작했을 때, 빠른 속도로 벙커 밖으로 빠져나온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야부리가 잘 먹혔으려나?'
이런 상황이 생길 것을 어느 정도 선에서는 미리 인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정작 녹음을 안했다.
그렇다. 김현우는 아까 그 상황에 깜빡하고 녹음기를 켜 놓지 않았다.
한마디로 흑선우에게는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한동안 꺼냈던 스마트폰을 바라본 김현우는 스마트폰을 주머니 안쪽으로 집어넣고 이내 걸음을 옮겼다.
'쯧, 뭐 어때.'
김현우는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
그다음 날.
김시현은 자신의 침대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여자를 보며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래서 얘를 데려왔다고요?"
"응."
"거기에 덤으로 110억이랑 초급던전 인수권까지 합쳐서?"
"그렇지."
"……그 권력 욕구로 꽉꽉 들어 차 있는 흑선우가 그렇게 해줘요?"
"뒤지기 싫으면 해 줘야지."
김현우의 대답에 김시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확히는 머리가 아프다기보단 인지 능력이 상황을 제대로 못 따라가서다.
'아니, 어떻게 한번 혼자 나갔다 오더니 이런 대형사고를…….'
김시현이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보고 김현우를 보았으나 정작 그는 데려온 여자는 관심 밖이라는 듯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니, 근데 얘는 대체 왜 데려왔어요?"
"인질용. 써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겸사겸사 좀 궁금한 것도 있어서 말이야."
"궁금한 거요?"
"응, 이건 뭐 개인적인 거니까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된다."
"개인적인 건 또 뭐예요……."
김시현은 그의 말을 듣더니 이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을 휘적휘적 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형은 오늘 안 나갈 거죠? 저 오늘 좀 늦게 들어올 거예요. 오늘 순회해야 하는 던전이 좀 많아서."
"그래?"
"오늘이 보스들이 무더기로 리젠되는 날이거든요. 하루만 늦게 잡아도 손해니까 오늘 안에 싹 잡아 줘야죠."
"그래그래, 화이팅."
성의 없는 파이팅을 외친 그를 본 김시현은 익숙하다는 듯 집을 나갔고, 곧 스마트폰을 두들기던 김현우는 아. 하고 입을 열었다.
"길드, 어떻게 만드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물론 협회에 가서 길드를 만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김현우는 세부적인 필요요건을 몰랐다.
'나중에 물어보면 되지.'
그렇게 생각을 마친 김현우는 이내 스마트폰을 그만두고 소파에서 일어나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을 가지고 있는 꽤 미형의 여성.
"정보권한."
김현우가 외치자마자 그의 눈앞에 로그가 떠올랐다.
------------------------
이름: 홍린
나이: 24
성별: 여
상태: 안정 중 (중독 상태)
-능력치-
근력: B+
민첩: A+
내구: C++
체력: B+
마력: A++
행운: B
SKILL -
정보 권한이 최하위에 해당함으로 능력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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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금 있으면 눈을 뜨려나?'
눈앞에 주르륵 떠오르는 정보 창을 보며 김현우는 생각했다.
김현우가 그녀를 굳이 데리고 온 이유.
그것은 김현우가 그녀를 일종의 인질로 사용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김현우가 그녀를 구했던 것은 '흥미' 때문이었다.
'이 여자의 오른쪽 어깨에 그려져 있는 문신.'
그래,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그려져 있는 문신 때문에.
그녀를 덮고 있던 이불을 치우자 보이는 그녀의 쇄골. 그리고 그 옆에 그려져 있는 문신.
상당히 넓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는 그 문신은 마치 김현우가 잘 알고 있는 어느 '가면'의 모양과 매우 흡사했다.
'아무리 봐도 똑같은데….'
그는 가만히 집중한 체 시야에 들어온 문신을 감상했다.
이마 위에 나 있는 두 개의 뿔, 그 아래로는 양 눈가에는 붉은 안광이 그려져 있지만, 언밸런스 하게도 입 아래는 도깨비의 이빨을 끝으로 턱이 그려져 있지 않은 가면 문신.
'이건…… 아무리 봐도.'
김현우는 옛날,
정확히는 햇수를 제대로 세지도 않고 있던, 탑에 있었을 때. 자신이 만들었던 어느 한 가면을 떠올렸다.
어느 웹소설에서 봤던, '무'는 자신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어느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발상을 빌려.
김현우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해 자신을 버린다는 상징으로써 '가면'을 만들었다.
물론 가면이 멋지진 않았다.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조각은 배워보지도 않았고, 또 거기에 덤으로 탑에 들어왔을 때도 문화생활을 즐겨본 지 꽤 오래 지났던 그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가면을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문신은 내가 만들었던 가면인데?'
근데 지금 그녀의 어깨에 그려져 있는 가면은 분명 약간 어레인지 되기는 했지만, 그때 만들었던 그 가면과 무척이나 비슷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거기에 흥미를 느껴 이 여자를 데려왔었다.
이 가면 문신에 관해 묻기 위해서.
그렇기 김현우가 쇄골에 그려져 있는 문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무렵.
"응?"
그의 눈에 새로운 로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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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9계층의 통로로 새로운 '등반자'가 등반을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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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게?"
김현우가 저도 모르게 말을 꺼내자 그의 앞에 새롭게 떠오르는 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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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에서 정식으로'가디언'이 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면 당신은 부름을 받아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0일 0시간 0분 05초
김현우는 곧바로 소환되었다.
# 30
030. 뇌신(雷神)인가, 천(天)인가(1)
"'그'가 오고 있습니다."
"그? '등반자' 말하는 거야?"
"네, 등반자입니다."
그녀의 말을 듣던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앞에 앉아 있는 그녀 '아브'를 보며 말했다.
"그래, 뭐 그건 들어서 알고 있기는 했는데. 설마 이 알리미 스킬도 그 정보권한이 올라야 완벽해 지고 그런 거냐?"
"네 그렇습니다."
빡!
"끄앙!? 왜 때려요!?"
"너는 이게 알리미냐!? 알리미야!? 응!?"
김현우는 앞에 떠 있는 로그를 다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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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9계층의 통로로 새로운 '등반자'가 등반을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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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냐고! 남은 시간이 표시가 안 되면 알리미 의미가 있냐 이 말이야!"
"아니 저도 몰라욧! 왜 때려요!? 그거야 가디언의 정보권한이 낮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평소 같으면 맞은 부위를 감싸며 히익 거렸을 아브가 드물게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쌍심지를 켜며 대답하자 김현우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때릴 만하니까 때리지! 애초에 이 시스템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러니까 그걸 왜 저한테 화내고 저를 때리냐고욧!! 저는 아무 잘못도 없단 말이에요! 아무튼 부모님한테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아서……!"
아브는 머리를 매만지며 소리를 빼엑 지르며 생각했다.
'계속 이렇게 맞기만 해서는 안 돼……!'
아직 가디언이 성장하지 않아서 많은 권한이 없기는 하나 그래도 명색이 9계층의 메인 시스템의 간부.
엄연히 말하면 가디언과 동급인데 언제까지고 이런 취급을 받을 수는 없었다.
'동요하고 있어……!'
아브는 머리를 매만지면서도 자신의 빼엑거림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주먹도 쥐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 부모님 없는데?"
"네…… 네?"
"부모님 없다고."
갑작스러운 김현우의 커밍아웃에 아브가 혼란에 빠졌다.
"아, 아니, 그…… 아…… 아닌데? 분명히 있다고……."
"나 어릴 때 두 분 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아, 아니, 그…… 양부모……."
"나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
"……."
"……."
갑자기 싸해진 방 안의 분위기.
아브는 시선을 어디에다가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큰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이내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저기, 그, 미안…미안해요. 그……그럴 생각은."
"후……."
'낄낄낄, 이거 골때리네.'
김현우의 깊은 한숨에 아브는 당황했으나, 김현우의 머릿속은 당황스러워하며 눈알을 굴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즐기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김현우에게 있어서 부모님이 없는 건 그리 큰 상처가 아니었다.
뭐, 예전에 들었으면 조금 욱할 수도 있는 내용이었으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게 당황하고 있는 아브를 지켜보고 있던 것도 잠시,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됐어, 별로 신경 안 쓰니까 우선 부른 이유나 말해 봐."
"아, 그…네……."
조심스럽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는 아브. 그녀는 슬쩍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그, 제가 부른 이유는 말 그대로 '등반자'가 오고 있어서 그런데…."
"그런데? 그건 전에 들었던 설명이잖아? 뭐, 네가 직접 올라오는 시간이라도 말해주려고?"
"아뇨, 그건 저도 불가능해요. 우선 그, 가디언인 당신이랑 저는 뭔가 협업관계……? 같은 느낌이라 당신이 모르는 건 저도 모르거든요."
"……그래?"
김현우는 머릿속 한구석에 그 정보를 욱여넣었다.
"그럼 부른 이유는?"
"그, 이번에 오는 '등반자'는 충분히 조심하실 필요가 있기 때문이에요."
"……조심할 필요? 이번에 올라오는 등반자가 네가 말한 그 '상위급 등반자'인가 그거냐?"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적어도 지금은 상위급 등반자가 올라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니, 애초에 상위급 등반자가 올라오면 정말 위험해요."
"……그렇게 강해?"
"앞에 '상위급'이라는 단어를 붙였다는 건 그야말로 단위급 재앙이 아닌 세계급 재앙이라고 보면 되요, '등반자'들이 위험한 건 사실이지만 상위급은 그냥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어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멸망…… 멸망이라.'
경험한 적이 없기에 와닿지 않았다.
다만, 상위급은 엄청나게 강하구나. 라는 감상만이 어렴풋이 느껴질 뿐.
"그래서,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이번에 올라오는 등반자는 어느 정도인데?"
"그게."
"?"
"이번에 올라오는 등반자의 등급은 이제 막 중위급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등반자이기는 한데…."
"…중위급이면 중위급이지, 뭔데?"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만약 이번에 등반하는 등반자가 중위 초입 이상이라면… 당신이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어요."
"뭐…?"
갑작스러운 위험선고에 김현우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빨리 '마력'을 깨우치세요!"
"마력을 깨우치라고?"
"네, 적어도 지금의 당신은 마력이 없으면 중위급 이상을 상대하지 못할 거예요."
그, 마력이 없어도 중위급 초입을 상대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하지만….
아브는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를 슬쩍 바라봤고, 김현우는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툭- 툭.
'마력, 마력이라.'
분명 능력치 한켠에 있었던 마력.
확실히 언제인가 한번 마력을 겸사겸사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다.
다만 어쩌다 보니 잊고 있었을 뿐.
"뭐, 아무튼 알았어."
뜻밖의 과제를 받은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고, 이내 물었다.
"그래서, 그 등반인이 언제 오는지는 모르지? 위치 같은 것도 몰라?"
"네, 처음에 말했다시피 당신이 모르는 정보는 저도 몰라서…… 그리고 아마 위치도 랜덤일 거예요."
"그럼 이번에도 그 녀석이 나오면 크레바스가 나타나나? 저번에도 그랬던 것처럼."
"아뇨, 등반자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는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몰라요."
"……그것도 몰라?"
김현우가 묘하게 핀잔을 주듯 입을 열자 아브는 묘하게 억울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등반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치나 업적 같은 것에 따라 등반자의 등장 형태는 여러 가지라서."
여전히 물어봐봤자 대부분 알 수 있는 게 없는 아브.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아무튼 알았어."
김현우는 아브에게 들었던 내용을 정리했다.
"……."
내용을 정리했다.
"……."
'내용이 없잖아. 씨발?'
어쭙잖은 찌라시 정보들은 몇 개 들었다만, 이건 그다지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었다.
……한참동안이나 다시 한번 아브를 면박줄까 생각하던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돌려보내 줘."
"네…."
"아, 참 그리고."
"네?"
"나 화 안 났으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마."
김현우의 말에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고, 그때 김현우는 이미 사라졌다.
그리고-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사람 경험이라고는 김현우가 처음인 아브의 순수한 생각이 그의 장난 하나로 인해 너무나도 쉽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
김현우가 아브에게 호출을 받고 난 그다음 날.
"우선 모든 요건이 총족되셨으니 길드는 충분히 설립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요?"
"네, 원래 길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총 5명의 인원이 필요한데, 사실 이것도 어느 정도 협회에 금액을 지불하시면 만들어 드리거든요."
"얼마인데요?"
"한 사람 당 100만 원씩 해서 총 400만 원이요."
"……400만 원?"
김현우의 입이 묘하게 벌려졌다 다시 닫혔다.
"……낼 테니까 설립 신청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저쪽 창구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김현우의 말에 그녀는 웃음을 짓고는 접수처 뒤로 향했고 김현우는 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진짜 많이 받아 처먹네.'
1명 당 100만 원, 총 해서 400만 원.
물론 지금 김현우에게 있어서 400만 원은 절대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400만 원 자체가 크지 않은 돈은 아니었다.
정말 모순적이긴 하나, 김현우는 12년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사이에 금전적인 혼란을 겪고 있었다.
12년이라는 시간 덕분에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
'역시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솔직히 요즘에는 돈 쓸 때 얼떨떨했다.
특히 자주 사 먹던 250ml짜리 콜라가 700원이 아니라 1300원이라는 사실은 정말 그 가격표를 볼 때마다 멈칫멈칫하기도 했다.
그렇게 김현우가 길드 서류를 기다리며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자.
"저기……."
"?"
"그, 혹시 김현우 헌터…… 아니세요?"
그의 옆에 한 여자가 다가왔다.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는 것을 보며 그녀가 헌터라는 것을 알아챈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요?"
"그, 혹시……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사인 좀……."
"저한테요?"
그녀는 더 말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은근슬쩍 자신의 사이드 백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 들었다.
곧, 김현우가 얼떨떨하게 그녀가 내민 볼펜과 수첩을 받아들자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 예……."
김현우는 여자의 말에 얼떨떨하게 대답하면서도 수첩을 펼치고 볼펜을 누르다 멈칫했다.
'사인을……어떻게 하더라?'
아니, 애초에 내가 쓰던 사인이 있었나? 를 진지하게 고민한 김현우는 이내 모르겠다는 듯 한글로 자신의 이름을 휘갈겼고,
"그, 괜찮으시면 아래에 '나예진에게'라고도 좀 써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의 부탁에 곧바로 아래에 그 글귀까지 써넣은 김현우는 그녀에게 수첩을 건네주었다.
"와!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뭐…… 별말씀을."
사인된 수첩을 가지고 협회 내를 신나게 뛰어가는 그녀를 보며 김현우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내가 유명해졌나?'
본인 스스로가 유명해졌다는 사실은 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직접 누군가가 다가와 사인을 받는 일은 처음이기에 그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뭐, 애초에 유병욱이 얼마 전에 조사한 것처럼 그의 루트가 집 카페를 반복하고 가끔 가다 동료들이랑 밥 먹는 것밖에 없는 것이 김현우의 생활 루트였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타인을 만날 일이 적은 것이었지만 정작 김현우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김현우가 그녀가 사라진 협회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
"오래 기다리셨죠? 이쪽에 차례대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김현우의 앞으로 들이밀어진 한 장의 문서.
"길드 설립서는 모두 작성하고, 승인절차를 밟고 난 후에 정식으로 길드 활동이 가능하시고, 기부금은 어떻게 하실래요……? 카드? 현금?"
협회원의 물음에 김현우는 지갑 속에서 카드를 꺼내 건네주었다.
카드를 건네주자마자 다시 저쪽으로 사라지는 협회원에게서 시선을 돌린 김현우는 이내 설립서를 작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름이라."
김현우는 설립서 맨 마지막 줄에 있는 길드명을 작성하는 곳을 보며 볼펜으로 툭툭 테이블을 누르다, 길드명을 적어 나갔다.
# 31
031. 뇌신(雷神)인가, 천(天)인가(2)김현우가 길드를 창설하고 4일 뒤, 광진구에 있는 아랑길드 고층빌라.
"그러니까, 그 느낌이 도대체 뭐냐니까?"
고층빌라 지하 3층에 지어져 있는 거대한 연습실.
"설명해 드렸잖아요? 말 그대로 느낌이라고요 느낌! 마력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그런……?"
거대한 연습실의 한구석. 거대한 마력진이 그려져 있는 그곳에서, 이서연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퉁퉁 치며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생각해요. 오빠는 헌터로 각성했으니까 분명히 몸 안에 뭔가 돌아다니고 있는 기분이 느껴질 거라니까요?"
지금까지 본 사복과는 다르게 붉은색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는 이서연은 자신의 스태프를 바닥에 퉁! 하고 내리쳤다.
사아아아-
그러자 그녀의 주변에 피어오르는 파직거리는 기운.
"자, 대충 이런 느낌으로요."
"아니, 너는 어떻게 말이 계속 다르냐?"
"뭐가요?"
"처음 물어봤을 때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또 안에서 돌아다니는 기운을 느끼라고 하고."
도대체 뭐에 맞춰야 해?
김현우의 투덜거림에 이서연은 복잡하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말 했잖아요!? 딴 짓 했어요!?"
"여기서 어떻게 딴 짓을 하냐!?"
"제가 말했잖아요!? 마력은 밖에서 받아들이는 '외부 마력'이랑 안쪽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내부 마력'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그리고 그건 본인이 직접 마력을 느끼기 전에는 모른다고!"
그러니까 둘 다 해보란 말이에요 둘 다!!!
빼애애애액!!!
이서연의 고성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귓가를 틀어막았다.
김현우는 도저히 이서연의 설명이 이해되지 않아 답답했지만 그것은 이서연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오빠가 이렇게 돌 머리일 줄이야.'
이서연은 슬슬 어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김현우를 바라봤다.
분명 처음 김현우가 마력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는 그가 지금까지 보여 온 압도적인 무력을 생각하며 그가 금방이라도 마력을 깨우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마력을 느끼겠다고 노력하기 시작한 지 4일째,
"아니 씨발! 이거 안 되는 거 아니야!?"
"하……."
"이거 사기야 사기! 사기라고! 이 마법진도 사기야 씨발!"
"아아아아아!!! 그거 만지지 말라고요 오빠! 그거 50억 짜리예요, 50억짜리!! 헌터 중에서도 '작성' 고유스킬이 있는 헌터만 만들 수 있는 거라고요! 그거 지우면 오빠 머리 찍어 버릴 거예요!!"
이서연의 비명에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려던 김현우는 이서연의 영혼 어린 외침에 흠칫하더니 이내 들었던 발을 내려놓았다.
"뭐 마법진 그리는 데 그렇게 돈이 많이 들어!?"
"원래 그러거든요!? 저는 오히려 오빠가 더 신기하다고요!"
보통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온 헌터는 마력을 깨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몬스터를 사냥하며 자연스레 마력을 깨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이렇게 옆에 선생이 붙어서 '마법진'까지 준비해 지도해 주기만 한다면 하루 내로 마력을 깨우치는 것도 가능했다.
근데 김현우는?
"설마 나 마력 같은 거 못 느끼는 체질 뭐 그런 거 아니야!?"
인상을 팍 쓰는 그.
이서연이 말했다.
"헌터 중에 그런 사람 있다고는 못 들어봤거든요? 아무리 늦어도 전부 마력을 깨우치기는 해요…… 그런데……."
오빠는 답이 안 보여요.
이서연은 입을 다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4일, 4일이다.
4일동안 이서연은 김현우의 옆에 붙어서 마력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별 쌩쇼를 다하고 있었다.
현재 회사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 가장 가치가 높은 '마력 집중진'을 수백 개의 마정석을 박아 넣어가면서 활성화하고, 거기에 덤으로 이서연 본인의 마력도 항상 주변에 뿌려두었다.
그것은 '무투계'라면 불가능했지만, '마법사'인, 그것도 S등급 중위서열에 머물고 있는 이서연이기에 가능한 배려였다.
그리고 보통 이 정도의 배려를 받는다면 신입 헌터들은 하루 내지 이틀 안에 마력을 느낀다.
그에 반해 김현우는…….
"에이 씨 몰라!"
그대로 뒤집어지는 김현우를 보며 이서연은 스태프를 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현우 오빠가 강한 건 그 탑에서 12년 동안 계속 탑을 돌아서 그런 건가?'
처음, 김현우가 처음에 탑에서 빠져나오고 자신의 힘을 드러낼 때, 이서연은 그의 힘을 보고 질투심을 넘어 경외심을 느꼈었다.
하지만 지난 4일간, 그가 마력 하나를 느끼는데 이렇게 개고생을 하는 것을 보며 그녀는 김현우의 강함이 전부 이유가 있다는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하고, 또 깨달았다.
그는 천재가 아니었다.
12년.
그의 강함은 자그마치 12년 동안 탑 안에 있으면서 쌓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형, 아직도 그대로예요?"
그렇게 이서연이 자빠져서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을 때 들려온 목소리.
"왔냐……?"
"왜 그렇게 누워 있어요?"
김시현은 트레이닝 복장을 하고 있는 둘을 보며 다가왔다.
"왜긴 왜겠냐? 마력이 더럽게 안 느껴지니까 그렇지."
"와, 아직도요? 이제 4일째 아닌가??"
"놀리냐? 응? 응!?"
"아니, 뭘 그렇게 반응해요? 그냥 4일 동안 마력을 못 느꼈다길래 좀 놀라서 그런 거죠."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죽겠다는 듯 입으로 끅끅 소리를 내며 마법진 위에 엎어졌다.
"몰라…… 시발, 마력이고 뭐고 그냥 신경 안 쓸래."
"흠, 마력 있는 게 좋을 텐데."
"마력이란게 그렇게 꼭 필요하냐?"
"필요하죠. 원래 헌터의 힘의 원천은 마력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인데, 헌터들 중에 마력안 쓰는 사람은 신입들이랑 형밖에 없어요."
"……."
김시현의 말에 아아아아~~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늘어진 그.
그런 김현우를 보며 김시현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이건 뭐야?"
"길드 설립 승인서요. 집으로 왔길래 길드 업무 끝내고 집 갔다가 다시 전해주러 온 거예요."
"뭘 굳이 그렇게까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받아들였고, 김시현은 여전히 누워있는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은 뒤 말했다.
"형. 근데 길드 이름은 왜 그렇게 지었어요?"
"뭐?"
"길드 이름 '가디언'이던데."
"그게 어때서?"
"아니, 형 스타일이랑 좀 안 어울리지 않아요?"
"……내가 어때서? '지키는 자' 멋지지 않냐?"
"전혀 형이랑 안 어울리는데요?"
김시현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 옆에 있던 이서연은 그의 행적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처음 탑에서 빠져나와 튜토리얼 존에 가자마자 튜토리얼 장비들을 망가뜨려 협회원을 엿 먹이고, 거기에 덤으로 아레스 길드에게 수많은 엿을 먹였다.
아레스 길드 독점 던전을 혼자 뚫고 들어가서 보스를 처치하고 나와버리고, 자기를 죽이러 왔던 헌터를 역으로 죽여 버렸다.
거기에 크레바스 사태에서는 혼자 크레바스 안으로 밀고 들어가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고.
최근에는 아레스 길드의 한국 지부장을 설득해 돈과 초급 던전의 독점권을 빼앗았다.
뭐, 독점권은 지금 당장 받지는 못했지만, 아마 곧 있으면 받겠지.
김현우가 빠져나온 지는 불과 이제 한 달이 약간 안 됐지만, 그가 보여주고 있는 행보는 도저히 '가디언'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순적인 느낌이었다.
"뭐 어때, 그냥 길드 이름인데."
"……그렇기는 하죠, 뭐. 그렇기는."
"아, 그보다 걔는 일어났냐?"
"걔……? 아, 그 여자요? 아뇨 아직도 그대로예요."
김현우가 5일 전 아레스 길드의 은밀한 벙커에서 구해 왔던 여자는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잠에서 깨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걔 뇌사상태 아니지?"
"아니라니까요."
이미 그 여자가 쓰러지고 2일이 지나도록 일어나지 않았을 때, 김시현은 비밀리에 집 안에 간호사를 들여 그녀의 상태를 진단한 적이 있었다.
'듣기로는 그냥 쇼크에 의해 눈을 뜨지 않을 뿐이라는 건데…….'
"그럼 됐어…… 그보다, 진짜 어떻게 하지……."
"뭘요?"
"마력 말이야 마력."
김현우는 답답하다는 듯 자기가 깔고 앉은 세밀한 마력진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게 전혀 마력을 느낄 수가 없단 말이지."
"……음, 그렇게 답답하면 그냥 차라리 진짜 마력을 뚫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 보는 게 어때요?"
"……마력을 뚫어 줄 수 있는 사람?"
"네, 그 일본에 있는 '이자나미'길드의 길드장인 '나카가와 야스미'라는 사람인데, 그 친구가 '무투계'스타일에 마력을 기가 막히게 다루는 헌터거든요."
"그래?"
"고유 스킬도 '혈도'라는 스킬이라서, 저번에 들어보니까 마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헌터의 혈도를 뚫어줘서 마력 등급을 올려줬다는 소리도 들었던 것 같아요."
물론 오피셜은 아니고 찌라시지만요.
김시현의 뒷말에도 그는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스마트폰을 꺼내들어 '나카가와 야스미'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이 사람이야?"
"네, 이 사람 맞아요."
그리고 곧 스마트폰 화면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느낌에 검지와 중지를 편 채로 기수식을 잡고있는 여자.
김현우가 그렇게 사진을 보며 손가락을 툭툭 치던 도중, 쿠득-
"어?"
조금 전까지 환한 빚을 내고 있던 마력진이 갑자기 정전된 듯 꺼져 나갔다.
그 상황에 순간 이서연과 김시현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며 김현우를 바라봤고, 그도 마찬가지로 물음표를 띄우며 그 둘을 바라봤다.
"?"
"?"
"?"
그리고 곧 김현우는 자신의 손에 짓눌려 있는 돌 부스러기를 발견하고, 시선을 돌려 자신의 오른손이 있었던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
"아."
""
김현우는 자신이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꾹꾹 누르다 마법진의 끝 부분을 짓눌러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 아랑길드 지하 2층에-
"잠깐! 진정해! 내가 돈으로 고쳐 줄게!!"
"야…… 야! 나는 뭔 죄야! 나는 무슨 죄냐고!! 끄아아아악!?!?"
마법진의 빛보다도 강한 푸른빛의 뇌격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랑길드 2층에서 이서연의 분노가 터졌을 때, 일본 도쿄에 스기나미에 있는 '중급 미궁'에는 무척이나 많은 사람, 아니, 헌터가 모여 있었다.
제각각의 방어구를 입고 있지만 그들의 방어구 어딘가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될 만큼 초승달 문양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고, 그런 헌터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에-한 명의 여성이 서 있었다.
여러 가지 방어구를 걸치고 있는 다른 헌터와 같이 몸에는 검붉은 색의 가죽 튜닉을 입고 있는 여성.
손에는 푸른색의 권갑을,
다리에는 마찬가지로 화염의 수가 놓아져 있는 각반을 끼고 있는 그녀는 바로 일본의 대형길드 '이자나미'의 길드장이자 S급 중에서는 중상위 서열인 172위라는 랭크를 가지고 있는 헌터였다.
그녀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황은?"
"이제 곧입니다. 길드장님."
"……참으로 특이하군요. 미궁 앞에 생겨나는 크레바스라니."
나카가와 야스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냉정한 눈으로 전황을 파악했다.
'다른 대형 길드인 '오로치'가 오기까지는 대략 30분. 만약 열리는 크레바스가 하위 크레바스라면 클리어, 만약에 중위 크레바스라면 망설임 없이 전력을 뺀다.'
크레바스라는 재앙이 열림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손익을 계산하고 있는 그녀는-
그그그그긍--
곧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는 땅을 느끼며 자세를 잡았다.
다른 헌터들도 긴장한 채로 제각각의 무기를 잡고 협회 일본 지부에서 예정해 주었던 크레바스의 진원지를 바라봤고,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땅은 그저 잠시 흔들렸을 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그저 텅 빈 미궁.
들리는 것은 긴장한 헌터들의 막힌 숨소리뿐.
나카가와 야스미가 이상함을 느끼며 입을 열려고 할 때-그 소리는 들려왔다.
터벅- 터벅.
작은 소리, 하지만 무척이나 선명하게 귓가에 꽂히는 그 걸음소리에 나카가와 야스미가 긴장하기 시작했고, 곧- 미궁 안에서 어느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
"사람?"
남자.
지반이 흔들린 뒤, 미궁에서 걸어 나온 것은 한 남자였다.
몸에는 현대 사람들은 절대 입지 않을 듯한 흑의를 입고, 길게 기른 머리는 뒤로 묶어 말총머리를 하고있는 남자.
그 어느 방어구도 입지 않고, 그저 한 손에는 척 보기에도 낡은 검 하나를 가지고 나온 그.
헌터들은 어리둥절함을 느끼며 미궁 밖에서 걸어 나온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나카가와 야스미, 그녀만이 격앙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모두 공ㄱ─!"
그리고-
그 어느 세계에서 '뇌신(雷神)'이자 '천(天)' 이라고 불렸던 그가-측-!
검을 휘둘렀다.
# 32
032. 뇌신(雷神)인가, 천(天)인가(3)
"?"
그곳에 있던 모두가 느끼지 못했다.
미궁에서 걸어 나온 그가 검을 뽑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고, 어느새 낡은 검집 속에 나와 있던 검이 자신들을 베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결과를 봤을 뿐이다.
그래, 결과를.
츳-츠츳-!
앞에 서 있던 무투계 헌터들의 몸에 불규칙한 사선이 생겨난다.
그 사선이 자신의 몸을 긋고 있는 와중에도 헌터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줄 모른 채, 그저 긴장하고 있을 뿐.
그곳에서 그 현상을 알고 있는 것은 바로 검을 뽑아 든 남자와, 무투계 헌터들의 뒤에 있던 나카가와 야스미뿐이었다.
그리고-
"크…!?"
"뭐…뭐야?!"
사선이 그어졌던 헌터들은, 제대로 된 비명 한마디도 지르지 못한 채 그어진 사선대로 몸이 잘려 붉은 피를 내뿜었다.
"이…이게 뭐야!"
"무…무슨 무슨 일이 일어난 거- 끄억!?"
동료가 고깃덩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금세 동요하기 시작한 헌터들은 혼란스러워하며 대열을 망가뜨렸다.
나카가와 야스미는 그 모습을 보며 필사적으로 길드원들의 멘탈을 잡기 위해 소리쳤지만,
"그만! 진정해라! 대열이 망가지면 모두 죽은 목숨-!!"
"대열을 유지해 봤자 죽는 건 전부 똑같을 뿐이지."
야스미의 목소리를 뚫고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 그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했으나, 그 목소리는 묵직하게 미궁 주변에 있는 헌터들의 귓가를 울렸고.
그와 함께, 남자의 검이 다시 한번 휘둘러졌다.
횡으로 휘둘러졌던 검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쳐진다.
마찬가지로, 아까와 같이 허공을 가르는 검.
허나 그 별 의미 없어 보이는 한 번의 휘두름은, 측면에 서 있는 헌터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 버리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사…살려줘!"
"도대체 뭐냐고…도대체 뭐……!!"
"나…나는 이곳에서 빠져 나가겠어!"
그것으로 끝.
분명 대형 길드에다 미궁 탐사도 15차례나 무사고로 성공한 이자나미의 헌터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대형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나카가와 야스미는 순식간에 전열을 이탈하는 헌터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지만, 곧바로 입을 열었다.
"모두 철수해! 철수!"
철수.
그것이 나카가와 야스미가 생각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S등급 몬스터의 레이드까지 성공해 봤던 나카가와 야스미는 눈앞에 나타난, 어떻게 보면 인간과도 흡사해 보이는 그 남자를 S등급의 레이드 보스보다도 강하다고 판단했다.
'공격이, 전혀 보이지 않아……!'
아무리 강한 보스라도, 공격이 보인다면 방어할 수 있다.
허나 공격이 보이지 않는다면?
대비할 수 없다.
회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결과는 단 하나뿐.
죽음.
'도대체 무슨 스킬을 사용하길래……!'
그녀의 말이 울려 퍼짐과 함께 그나마 전열을 지키고 있던 헌터들도 몸을 내빼기 시작했다.
일본 헌터업계에서는 미궁 탐사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헌터들이 대열도 지키지 않은 채 꼴사납게 후퇴하는 모습은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지만 야스미는 개의치 않았다.
'전력을 잃는 것보다는 낫다.'
어차피 막지도 못하니 그럴 바에는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게 더 효과가 좋겠지.
그녀는 짧은 감상을 마치고 헌터들과 함께 몸을 뒤로 내뺐다.
그리고-
"!?"
검을 쥐고 있던 남자는 어느새 그녀의 앞에 와 있었다.
몸을 돌리는 그 한순간의 과정에, 남자는 이미 나카가와 야스미의 앞에 서서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한순간의 시선 교환.
남자의 무심한 눈빛이 야스미의를 훑고 지나갔고, 그 상태에서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발목에 무리가 갈 정도로 몸의 축을 틀며 얼마 없는 반동을 이용해 몸을 반대쪽으로 날린 야스미는 천마의 검을 피할 수 있었다.
츠악!
"끅!"
그 대신 야스미를 놓친 천마의 검은, 도망치고 있는 한 헌터의 몸을 갈라놓았다.
마치 종이 인형처럼, 허무하게 갈라져 피를 흩뿌리던 사람을 본 야스미는 떨리는 눈으로 어렴풋한 자세를 잡으며 남자의 앞에 섰다.
어차피 도망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새롭게 각인되었기에, 그녀는 그와 싸우는 것을 택했다.
정적.
사방에는 헌터들의 소란스러운 발소리와 혼란스러운 말소리가 퍼지고 있었으나, 그 와중에도 그와 그녀가 있는 곳은 조용했다.
정적-
"도대체 당신은 뭡니까……?"
그 정적 속에서 나카가와 야스미는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남자는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원래라면 답하지 않지만, 너는 비록 운이라도 내 검을 피했으니 답해주도록 하마. 허나……."
그는 지독히 무심하면서도 지루한 듯한 눈빛으로, 그저 담담히 뇌까렸다.
"나는 네게 어떤 이름을 말하면 좋을까."
"뭐라고……?"
"어떤 대답을 원하지? 나는 너희 계층인들에게 무수히 많은 이름으로 불렸다. 그 누구는 나를 '등반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파괴자'라고 부르기도 하지."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악마'라 불릴 때도 있었고, '마신'이라 불릴 때도 있었다."
계속해서-
"'구도자'라 불릴 때도 있었고, '사도'라고 불릴 때도 있었다."
말했다.
"그리고 아주 먼 옛날에는……그래, '뇌신(雷神)'으로 불리기도 했고, 또한 '천(天)'이라고 불리기도 했지."
그는 거기까지 중얼거리곤, 이내 감정이라고는 하나 없을 것 같은 그 얼굴에 미미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답에는 그렇게 대답해 줄 수 있겠군."
"!!"
남자의 말과 함께, 그는 칼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올라가는 칼을 제대로 인지할 사이도 없이, 그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본좌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의 검이 휘둘러진다.
짧게, 한순간처럼.
그와 함께 나카가와 야스미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점멸한다.
그리고 점멸하기 시작한 그 의식의 사이로, 그녀는 질문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천마다."
그녀의 의식이 완전히 점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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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통로를 통해 새로운 '등반자'가 9계층에 도착했습니다.
남은 시간 [ 00: 00: 00 ]
위치: 일본 도쿄 스기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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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서연이 흩뿌리는 치사량의 뇌격을 피해 아랑길드를 빠져나온 김현우와 김시현.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잠시 도망가는 것으로 생각을 맞춘 그들은 망설임 없이 차를 타고 아랑길드를 빠져나왔다.
그러던 중 눈앞에 뜬 로그.
"……일본 도쿄 스기나미?"
일본에 등반자가 나왔다고?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왜 해외에 등반자가 등장해?'
김현우는 이상하다고 투덜거렸지만, 곧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생각해 보니 아브는 분명 지구 전체가 9계층이라고 말해줬고,'
등반자는 이 9계층을 멸망시키기 위해 온다고 했으니, 종합적으로 해외에 등반자가 나타나는 일은 예상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다만 김현우가 본인 편한 대로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던 에러일 뿐.
"쯧."
김현우는 짧게 혀를 차고는 김시현에게 물었다.
"야."
"네?"
"여기서 일본 도쿄까지 가려면 몇 시간이나 걸릴까?"
김현우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김시현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말했다.
"글쎄요……? 여기서 인천공항까지 한 2시간, 거기에 가장 빨리 있는 비행기를 타면 대충 5시간 정도 걸리지 않을까요?"
"그래?"
"네, 그 정도면 충분히 가죠…… 가 아니라 형 설마 서연이 피해서 일본까지 날아가게요?"
"아니."
"그것도 아니면…… 아, 설마 제가 아까 말해줬던 그 나카가와 야스미요?"
"그것도 아니야."
"아니 그럼 그걸 왜 물어본 거예요?"
김시현의 물음에 김현우는 대답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조작해 자판을 치기 시작했다.
검색어는 '도쿄 스기나미 크레바스'.
자판을 치고 검색을 누르자마자 삽시간에 떠오르는 여러 정보들.
[이번에 일본 협회에서 아티팩트를 이용해 독자적 개발에 성공한 '던전'레이더. 크레바스 신호 포착?]
[오후 2시경, 스기나미에 크레바스가 일어난다. 日 헌터 협회.]
[스기나미 긴급 대피 발령.]
김현우는 뉴스의 헤드라인이 위에서부터 시간대 순으로 배열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일 아래에 있는 [스기나미 긴급 대표 발령.]을 클릭했다.
누르자마자 순식간에 로딩되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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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나미 긴급 대피 발령되다.
일본의 도쿄에 속한 구 스기나미는 일본 시 2시 20분을 기점으로 스기나미 구를 포함한 도쿄 전체에 긴급 대피 경보를 발령했다.
대피 경보 발령의 원인은 바로 미궁 속에서 나온 사내 때문.
[사진]
어느 국적인지 알 수 없는 이 신상미상의 남자는 미궁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이자나미 길드원 17명과 이자나미 길드의 길드장인 '나카가와 야스미'를 살해하고, 현재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살해하고 있는 중.
그나마 사진에 보이는 남자의 이동속도가 빠르지 않아 대피는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를 막기 위해 투입된 헌터는 죄다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에 헌터 협회 일본 지부는 각 근처 지부에게 S급 헌터의 지원을 요구 중이다.
[뉴스 댓글 32개]
구석에서산다: 와, 저거 사진 뭐냐? 컨셉샷 아니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개잘찍혔네 ㅋㅋㅋㅋ 쟤도 김현우처럼 팬카페 생기냐?
ㄴ이천사는헌터: 이 새끼 인성 터진 거 봐라? 새끼야 여기는 드립치는 공간이 아니다, 지금 위에 시민들이랑 헌터들 살해됐다는 글자 안보이냐 새끼야.
ㄴ구석에서산다: 진지충 뭐냐ㅋㅋㅋㅋ나혼자100 ; 일본 현지에서 이야기해 준다. 지금 도쿄 살고 있는데 위로 쭉쭉 올라가고 있다. ㅅㅂ 이러다가 방사능 터진 곳까지 올라가겠누;;
ㄴ구와아아악: 지금 일본 상황 어떠냐 혼란의 도가니임?
ㄴ나혼자100: ㄴㄴ 우선 내가 있는 곳은 그렇지 않은데 앞에는 난리 났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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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뉴스와 함께 동봉되어 있는 사진과 영상.
사진에는 이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마치 무협 소설에나 나오는 흑의를 입은 남자가 검을 들고 있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알리미를 보면 지금 뉴스에 나온 저 녀석이 등반자인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김현우는 멍하니 스마트폰을 바라보다 고민했다.
'마력을 아직 배우지 못했는데, 괜찮으려나?'
김현우는 몇 일 전, 아브가 말해주었던 사실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만먕 마력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면 등반자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떠들었던 아브.
그렇게 아브가 했던 말을 짧게 회상했던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시현아."
"네?"
"지금 인천공항으로 가자."
"네? 농담이죠?"
"아닌데?"
김현우의 대답에 질렸다는 듯 김시현을 바라본 김현우.
그는 스마트폰을 끄고는 앞을 바라봤다.
'애초에 옛날부터 내가 강하고 상대방이 얼마나 강한지 같은 건 생각도 안 해 봤는데 지금 와서 무슨…….'
옛날에도 그랬고, 탑을 오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현우는 상대방이 자신보다 얼마나 강한 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어차피 그렇게 생각해 봤자 나오는 것은 없으니까.
탑을 탈출하고 싶으면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몬스터들을 어떻게든 뚫고 올라가야 했고, 그렇기에 그는 상대의 강함을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써야 하는 건 오직 나 자신뿐.
'내가 어떻게 해서 저 녀석을 이길 수 있냐'에만, 김현우는 온 신경을 쏟아부을 뿐이었다.
그렇게 김현우가 자신을 상기할 때쯤, 김시현이 물었다.
"그런데 형."
"왜?"
"진짜 갑자기 일본을 가겠다는 건 알겠는데…… 형, 여권 있어요?"
"……아."
김시현의 말에 그는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 33
033. 뇌신(雷神)인가, 천(天)인가(4)도쿄에 있는 헌터 협회 일본 지부의 상층 회의실.
그곳에서는 모두가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방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총 4명.
회의실 테이블의 제일 상석에 앉아 있는 남자는 바로 헌터 협회 일본 지부의 지부장을 맡고 있는 남자였고, 그 아래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길드'의 길드장들이 앉아 있었다.
양옆에는 후쿠오카를 주축으로 활동하는 길드인 '카라스' 길드의 길드장인 '킨 케이칸'과, 오사카를 주축으로 활동하는 '오로치'길드의 길드장인 '쿠로 시로기'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
"……."
그곳에는 분명 이전 '천마'가 나타났을 때, 그의 검에 몸이 두 갈래로 나누어졌던 여자.
도쿄를 주축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자나미'길드의 길드장인 '나카가와 야스미'가 살짝 힘겨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침묵. 그리고 또 침묵.
분명 그들이 자리에 앉은 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래서, 너는 분명 죽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살아 있지?"
상당히 차가워 보이는 인상을 가진 남자. 킨 케이칸이 야스미를 보며 질문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케이칸을 슬쩍 바라보곤 말했다.
"얼마 전에 미궁 탐사를 내려갔을 때 얻은 아티팩트가 있어서, 그것 덕분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뭐? 아티팩트?"
"자세한 건 설명하기 어려우니, 그냥 아티팩트 덕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다.
분명 천마에게 베여 죽음을 맞이했을 그녀 '나카가와 야스미'는 그녀가 얼마 전 미궁 탐사를 하며 얻었던 아이템 덕분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미궁 탐사에서 얻었던 아티팩트인 '소생자의 목걸이'는 목걸이를 걸고 있는 대상에 한해 사용자가 죽으면 목숨을 살려주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아티팩트가 능력을 발하는 즉시, '소생자의 목걸이'는 그대로 깨져 사라져 버리고, 살아나는 대상은 시스템상으로 모든 등급이 한 단계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애초에 능력치가 부실한 헌터는 금방 능력치를 복구할 수 있다.
허나 그녀같이 S등급 랭킹 상위권에 오른 인물에게 있어서 능력치가 깎인다는 것은 '몇 년'을 날리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걸 미쳤다고 사실대로 풀어 놓을 리 없는 야스미는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어쩔 겁니까?"
"뭘 말이지?"
"……'그'에 대해서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시선을 돌려 회의실 메인에 걸려 있는 프로젝터를 돌아보았다.
프로젝터에서는 하나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마치 드론으로 촬영된 듯 애매한 허공에서 뷰를 잡고 있던 영상에는 한 남자가 찍히고 있었다.
낡은 흑의를 입고, 각각 손에는 검짐과 검을 잡은 채 아무도 없는 도로를 걷고 있는 남자.
그는 천마였다.
천마가 검을 휘두른다.
쿵! 쿠구구궁! 콰가가가가가각!
그가 휘두른 일 검.
고작 그 일 검에, 도로에 세워져 있던 작은 2층 주택이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
"꺄아아아악! 살ㄹ……! 꺽!!"
"어…엄마…ㅇ…."
푹!
그리고, 곧 무너진 건물에서 들린 비명소리는, 멀리서 움직이고 있던 천마의 검질 한 번에 조용해졌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순식간에 눈을 질끈 감았을 텐데, 드론은 무심하게도 그 장면을 유심히 촬영했다.
그리고 곧-
카메라의 뷰가 넓어지며 주변의 풍경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하……."
누구의 탄식인지는 모른다.
허나 드론이 찍고 있는 이 풍경은 누가 보더라도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는, 그런 풍경이었다.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목소리조차 없는 죽은 도시 사이에서, 천마가 걸어온 길만이 핏빛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가 걸어온 길에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와 수많은 시체가 있었다.
평범한 시민들의 시체,
그중에는 양복을 입은 회사원도 있었고, 평범한 옷을 입은 주부들도, 그리고 아직 뭣 모르고 놀이터에서 뛰어 놀 나이인 아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민들 사이에 섞여 있는 헌터들의 시체.
저마다 무기를 들고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외치는 듯 입을 벌린 채 죽은시체가 있었다.
반면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듯 공포에 질린 시선으로 죽어 있는 시체도 있었고, 보기 싫은 것을 봤다는 듯 꾹 감긴 시체도 있었다.
그 모든 장면.
그 모든 풍경이 빠짐없이 담기고 있는 드론을 보며, 협회 내에 있던 지부장과 길드원은 망연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했다.
"미치겠군……."
그동안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던 남자. '쿠로 시로기'가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이라도 추가로 협회 헌터들과 길드내의 헌터들을 보내야……."
그 모습을 보며 지부장이 슬쩍 입을 열었다.
"제정신입니까 지부장?"
"그럼 대안이 없잖소! 우선 시민들이 대피할 때 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개소리하지 마! 지금 네 눈에는 저게 안 보이나? 저 시체가 안보이냐고! 지금 저 녀석을 막으려고 투입된 헌터만 200이 넘는다고!"
근데 어떻게 됐어!?
시로기는 격앙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 뒤졌다!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 200명이 넘어가는 헌터가 저 미친 괴물 새끼의 발걸음 한 번을 잡지 못하고 모조리 죽었다고! 저 녀석이 휘두르는 저 검에!"
"그렇다면 이대로 저 녀석이 시민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만 있자 이 말인가!"
"지부장! 네 녀석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헌터는 사람 아니야? 헌터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이 새끼야! 네가 뭔데 희생을 강요해!!"
"그만하세요."
시로기와 지부장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가는 중, 나카가와 야스미가 입을 열었다.
그들은 야스미를 보더니 이내 큰 소리를 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야스미는 그런 그들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지금 이 상황에서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달려든다고 해도 저 '천마'를 이기기는 힘들 겁니다."
그의 말에 야스미를 제외한 다른 길드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실이다.
지금 일본에는 나카가와 야스미의 S등급 세계랭킹과 크게 차이 나는 헌터가 없으니까.
킨 케이간은 150위, 쿠로 시로기는 174위였다.
100위권 안으로, 아니, 50위권 안으로 들어가면 각 순위가 가지는 전투력의 차이가 엄청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100위보다 낮은 서열에 있는 헌터들의 능력은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였다.
한 마디로, 나카가와 야스미가 쪽도 못쓰고 당했다면 그것은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라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결국 저희들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건 외부의 힘인데…… 지부장님? 지원은 요청하셨습니까?"
"지원 요청은 이미 사태가 발생했던 7시간 전에 신청했네…… 다만."
"다만?"
"지원을 온다는 곳이……."
지부장이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며 나카가와 야스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있을 리가 없었다.
S등급 헌터가 국가의 전력으로 취급되는 세상. 그곳에서 선뜻, 그것도 S등급 헌터를 잃을 수도 있는 이런 상황에 투입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됐다.
'만약 내가 죽지 않았다면….'
아마 거금의 보상금을 미끼 삼아 S등급 헌터들의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겠으나 이미 그녀가 죽었다는 뉴스가 전 세계에 보도된 시점에서, 헌터들의 지원을 바라는 것은 힘들다.
설령 헌터가 원한다고 해도 국가가 막을 터.
"후……."
야스미가 긴 한숨을 내쉬자 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있기는 하네."
"있나요!?"
야스미가 깜짝 놀라서 말하자, 오히려 앉아 있던 지부장이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는 이내 흠흠 하며 목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데……?"
"단 한 곳뿐이라네."
그래도 괜찮다.
나카가와 야스미는 생각보다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자신이 죽었다는 뉴스를 봄에도 일본에 지원을 오겠다는 헌터가 절대 쭉쩡이 일리가 없었다.
최소 50위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부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한국일세."
"…한국?"
나카가와 야스미는 저도 모르게 맥빠진 소리를 냈다.
'한국에 그런 헌터가 있었나?'
그녀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머릿속의 정보를 여기저기 두드려봤으나, 적어도 자신이 알기에 한국에는 50위권 내에 있는 S등급 헌터가 없었다.
"…지원을 오겠다고 한 헌터는 누구입니까?"
"김시현일세.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요즘 한국에서 유명하다던…김현우…? 라고 하더군."
"김현우……아, 설마 그…."
김시현의 이름에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던 그는 이내 지부장의 입에서 나온 생소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다. 그 이름에 대해 깨달았다.
"그 있지 않은가? 혼자서 크레바스 안으로 들어가 보스 몬스터를 죽였다던."
그리고, 그녀는 필연적으로 실망했다.
'김시현은 S등급 헌터 랭킹 160위대 초반, 그리고 같이 오는 그 김현우라는 헌터는…….'
랭킹조차 없다.
야스미는 저도 모르게 밀려오는 묘한 절망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무리 크레바스를 혼자 클리어한 장본인이라고 해도, 지금 일본에 나타난 인물은 누가 보더라도 명확히 '규격외'라고 표현할 수 있는 존재였다.
물론 탑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크레바스를 홀로 클리어했다는 것은 위대한 업적으로 남을 수 있겠지만,
'저 괴물을 막을 정도는 아니야.'
야스미는 우울한 눈으로 실시간으로 드론이 촬영하고 있는 프로젝터를 바라봤고,
"어?"
그곳에서 나카가와 야스미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어벙한 소리를 내자, 회의실에 앉아 있던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로 프로젝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재생되고 있는 드론의 카메라를 통해, 그들은 모든 걸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천마 앞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이제 막 석양이 된 해를 등지고 선 남자.
검은색의 츄리닝이 석양빛에 의해 붉게 물들어 있고, 그의 발에는 한국에서 그 누구나 한번은 신어 본다는 검은색의 삼선 슬리퍼가 신겨져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는 한참이나 부는 바람에 휘날려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고 있었고, 지나가면서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천마 앞에서, 그는 양손을 츄리닝 바지에 넣은 채 서 있었다.
"뭐야 저거?"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쿠로 시로기'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나카가와 야스미는 본능적으로 저 모습을 보며 천마의 앞에 서 있는 게 누구인지 깨달았다.
"저……저 사람, 김현우?"
김현우,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가 생각하고 있었던 남자.
그가 천마의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협회 내부의 길드장과 지부장이 드론이 찍고 있는 카메라고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을 때,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마주 선 남자를 보았다.
뒤로 묶은 말총머리, 눈은 무감정했으나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무료함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의 양손은 각각 검집과 낡은 검을 붙잡고 있었다.
김현우는 은근슬쩍 '정보권한'을 통해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능력치를 훔쳐보려 했지만-
[확인 불가.]
'역시 안 되나.'
간단명료하게 떠오르는 로그에 그는 짧게 혀를 찼다.
말 없는 대치상태.
먼저 말을 건 것은 김현우였다.
"너는 뭐냐?"
그의 대답에 날아온 것은 천마의 검이었다.
인간의 동체시력으로는 쫓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휘두른 천마의 검.
그 검에서 빠져나온 무형의 기운은 김현우의 목을 노리고 날아갔다-허나-
"……!"
"허."
김현우는 천마가 검을 휘두른 그 순간, 이미 그 공격을 피한 상태로 그의 앞에서 어이없는 듯한 미소를 짓고는 곧바로 주먹을 쳐들었다.
"검을 휘두르지 말고, 대답을 해 이 씨방새야……!"
꽝!
김현우의 주먹이 힘껏 내리쳐지며 느껴지는 거대한 충격파, 허나 그는 본능적으로 공격을 당한 남자가 일체의 타격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검을 버텼으니, 대답해 주지."
아니나 다를까, 폭음 속에서 검집을 손에 쥔 체 걸어 나온 남자는 김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천마다."
그리고, 천마의 검이 다시 한번 번뜩였다.
# 34
034. 뇌신(雷神)인가, 천(天)인가(5)
"후……."
헌터 협회 일본 지부.
헌터 지원을 통해 긴급하게 일본으로 올 수 있었던 김시현은 일본 지원 상층으로 걸어가면서도 자신의 옆자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형은 또 어디 간 거야…."
비행기에 내리자마자 무엇인가를 열심히 검색하더니 자신에게 별말도 하지 않고 열심히 튀어나가는 김현우를 생각하며 김시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뭐냐고…."
김시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스마트폰에 떠올라있는 뉴스를 보았다.
2시를 기점으로 일본에 시작된 재앙.
김현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재앙을 막으려고 온 것처럼 김시현과 함께 일본에 왔다.
'이거, 뭐 있는 거 아니야?'
생각해 보면 저번에도 김현우는 크레바스가 나올 날을 정확하게 예측해서 자신들에게 전해주었다.
'……'
정말 뭔가 있을 것 같은데? 하고 짧게 생각하던 김시현은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며 짧게 생각했다.
'뭐, 당장 이렇게 생각하는 것보다 이번 일이 끝나면 물어보는 게 낫겠지. 게다가 그것보다도….'
김시현은 어느 한 문구를 다시 한번 읽어나갔다.
''이자나미' 길드장의 사망이라…….'
…진짜 형 괜찮으려나?
김시현이 그렇게 일본지부의 회의실로 걸어 올라가며 김현우를 걱정하고 있을 때, 싸움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쾅!
천마의 검이 휘둘러짐과 동시에 김현우의 몸도 움직인다.
'빠르다.'
눈에 어렴풋이 보일 정도의 속도.
허나 못 피할 것은 아니었다.
천마가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느껴지는 무형의 기운.
검에서 퍼지는 그 무형의 기운은 굉장히 얇고 예리했지만, 그렇기에 반대로 느낄 수만 있다면 피하기는 쉬웠다.
그의 뒤에 있던 상가가 천마의 검에 무참히 박살 난다.
그에 김현우는 천마에게 도약하는 것이 아닌, 한 걸음 한 걸음씩 확실한 족적을 남기며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천마의 검이 휘둘러진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한 번, 그러나 김현우는 그 한 번의 휘두름으로 보이는 그것이 사람을 수십 조각으로 분해할 정도로 수많은 참격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오른발에 힘을 주고 힘껏 땅을 밀어내 천마의 참격을 피한다.
천마의 참격이 이어진다.
또 피한다.
김현우가 천마에게 다가가는 고작 5초 남짓한 사이에 벌어진 수백의 공격과 수백의 회피.
그 수백 번의 과정을 통해, 김현우는 천마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놀람의 기색이 스치고, 김현우가 곧바로 주먹을 휘두른다.
꽝!
"큭!"
김현우의 주먹이 천마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그것을 기적 같은 움직임으로 막아낸 천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쾅! 콰가가강! 꽝!
드디어, 진짜 싸움이 시작됐다.
조금 전처럼 회피 일변이나 공격 일변의 싸움이 아니었다.
천마의 검이 날카롭게 휘둘러져 김현우의 심장을 노린다. 김현우의 몸이 한계까지 비틀려 천마의 참격을 피해내고 발을 휘두른다.
막고, 회피하고, 공격한다.
천마는 사거리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듯 계속해서 몸을 뒤로 내빼며 검을 휘둘렀으나, 반대로 김현우는 천마가 멀어지려는 틈을 주지 않고 가까이 붙었다.
'근접, 초 근접전이 내게는 유리하다.'
천마가 들고 있는 장검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사정거리가 어느 정도 확보되어야만 위력을 발하는 무기였다.
그렇기에 주먹 한번 휘두를 틈도 없는 아주 자그마한 거리는, 오히려 천마에게 있어선 약점이 된다.
콰가가가각!
김현우의 공격을 허공에서 막아낸 천마가 그 반탄력을 버티지 못해 저 멀리 날아간다.
날아가며 자세를 정비해 검을 휘두르는 천마.
김현우는 기다렸다는 듯 아예 그 '공간'을 비워버리는 것으로 공격을 회피하고-
"!"
날아가고 있는 천마의 앞에 도착해-
"이거나 처먹어라."
허공에서 자세를 잡고, 주먹을 크게 당겼다.
발리스타처럼 팽팽하게 쥐여지는 근육들, 김현우가 앞에 다가와 공격을 준비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미 허공에서 한번 자세를 바꾼 천마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저 들고 있던 검집을 내밀어 김현우의 공격을 최소화 하려는 움직임만 보일 뿐.
그리고-
꽝!!!!
김현우의 주먹질이 천마의 검집을 깨부수고, 그의 배에 직격타로 들어갔다.
폭죽 100개가 한 번에 터지는 것 같은 엄청난 소리.
천마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며 입에서 피를 토해내고, 그의 몸이 스스로가 부쉈던 건물에 처박힌다.
콰가가가각! 쾅!
부서졌던 콘크리트 잔해들을 해치고 천마의 몸이 파묻힌다.
김현우는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하기 위해 천마가 처박혔던 콘크리트 잔해를 향해 쏜살같이 튀어 나갔지만-
"신기하군."
"!?"
치지지직…… 쾅!
김현우의 몸은, 그의 바로 앞에서 내리쳐지는 뇌격에 그대로 멈추어 버리고 말았다.
부서진 잔해 사이에서 천마가 걸어 나온다.
입고 있던 흑의가 찢어지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집은 이미 손잡이만이 남아 버린 천마.
그는 걸어 나오며 말했다.
"지난 계층에도 없었고, 지지난 계층에도, 나를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은 없었던 것 같은데……너는 누구지?"
치직…치지직……
콘크리트 잔해에서 걸어 나온 천마는 몸에 푸른 전력을 내뿜고 있었다.
김현우는 대답하지 않고 달려들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쾅! 쾅쾅쾅! 콰가가가각!
그의 주변에 내리치는 수십 줄기의 번개 덕분에 그 움직임을 제재당했다.
석양이 진 마른하늘에서, 푸른색의 뇌전이 내리꽂힌다.
기상으로 보면 기이하고도 괴변스러운 일.
허나 그것을, 천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있었다.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씨발, 그건 또 뭔 말도 안 되는 스킬이야?"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온 투덜거림.
천마는 그 말을 받았다.
"스킬? 너는 이게 스킬로 보이나?"
"그럼 아니라고?"
김현우의 물음에 천마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쥐고 있던 검을 다시 한번 고쳐 쥔 채 입을 열었다.
"그래, 확실히 계층을 오를 때 나를 막아서던 녀석들은 항상 죽기 직전에 그런 말을 하더군.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은 사기라고."
천마의 입가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무감정이 떠올랐던 그 눈빛에 약간의 빛이 돌아왔다.
"그래, 항상 그랬다, 내가 그 누구로 불렸을 때도, 그들은 항상 내게 '스킬'에 대해 물어왔지. 물론 그 누구에게도 답을 들을 가치가 없어 그 사실에 대해 답해주지 않았지만."
천마는 미미하게 올라간 입가를 지우지 않은 체 검으로 김현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나를 한 번 때렸으니 답해주도록 하지."
"마조히스트 같은 새끼."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고, 천마는 말했다.
"내가 사용하는 건 그 어느 것도 '스킬'이라는 미개한 시스템의 힘에서 파생되지 않았다."
천마는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
순식간의 일.
김현우는 알아채지 못했다.
"처음 내가 사용했던 참격도, 지금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뇌령신공(雷令神功)'도, 그리고 지금 너를 베어버릴 '천마신검(天魔神劍)'도."
스킬이라는 이름 아래에 묶인 것은 없다.
천마의 뒷말과 함께 김현우는 휘둘러지는 천마의 검을 바라봤다.
그 찰나, 시간이 느려진다.
천마의 검이 느릿하게 올라가. 정확히 김현우를 일도양단하기 위해 움직이고.
그 콤마 단위의 시간에 김현우의 눈알도 함께 움직인다.
'씨발.'
피해야 한다.
김현우의 뇌리에 깊게 박힌 생각.
하지만 그의 검이 느리게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도 김현우는 몸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움직일 공간을 찾지 못했다.
뒤로 빠진다?
천마의 검에 사정거리를 더해주는 것뿐이다.
위나 아래로?
그 뒤에 천마의 이어지는 연계기에 베이겠지.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다른 잡놈들의 검에 비해서, 천마가 쥐고 있는 저 검은 한번 걸리는 순간 두부처럼 자신을 베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김현우는-
"말하면서 공격하는 게 어디 있어-"
역으로 천마의 얼굴에 그대로-
"이 씨발새끼야!"
박치기를 했다.
쾅!!!!!!
천마의 느릿하게 움직이던 검이 순간 궤도를 잃어버린 채 비틀거리고, 천마의 눈이 과하게 찌푸려진다.
설마 이럴 줄은 몰랐다는 천마의 표정.
'다음 공격을 하기 전에, 천마를 끝낸다.'
김현우는 인정했다.
천마는 적어도 '지금의' 자신보다는 강했다.
그렇기에 그는 곧바로 움직였다.
검을 잡은 천마의 손을 내리친다.
"큭!"
천마의 입에서 처음으로 튀어나온 신음.
그는 검을 놓쳤다.
뒤늦게 기묘한 보법을 밟으려 다리를 움직이는 천마의 다리 사이에 발을 끼워 넣은 김현우는 그대로 어깨를 쳐올렸다.
턱이 올라가는 천마.
곧바로 그의 주변에 뇌전이 쏟아졌지만.
김현우는 피하지 않았다.
꽝!
그의 몸에 뇌전이 직격 했다.
그러나 김현우는 그 공격을 무시하고 부릅뜬 눈으로 천마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천마의 뇌격을 피했다간 연계가 끝나고, 연계가 끝나면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김현우는 잘 알고 있었기에.
콰가가가각!
김현우의 몸이 다시 한번 움직여. 천마의 몸을 후려친다.
천마가 막아내려 급하게 양손을 들어 올렸으나, 미처 그 힘을 전부 받아내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흡!"
곧바로 날아오고 있는 천마의 뒤로 도약한 김현우는, 천마가 날아오는 그 경로에서 자세를 잡았다.
붉은 도깨비를 상대할 때 사용했던, 그 자세를 다시 한번 잡는다.
그리고- 천마의 몸이 김현우의 손에 닿았을 때,
'패왕경(?王勁).'
김현우가 탑에서 연구했던 그만이 무술이. 다시 한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짧지만 역동적인 움직임.
꽝!
공격을 맞음과 동시에 천마의 몸이 크게 흔들리고, 그의 몸이 마치 총탄처럼 날아간다.
쾅! 콰가가강! 쾅! 쾅!
부서진 잔해를 파고 들어가, 그 뒤에 있는 건물까지 날아가 박살내버리는 천마의 몸.
김현우는 여전히 자세를 풀지 않은 체, 천마로 인해 무너지고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쿵…쿠구구궁!
"……!"
김현우는 잔해를 헤치고 빠져나온 그를 바라봤다.
입고 있는 흑의는 이미 전부 다 헤져 상의를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부서진 검집만이 쥐어져 있었다.
자신의 무기를 잃은 그 상황에서, 천마는 웃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확연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그래, 너는 신기한 게 아니라 대단한 것이었군. 내가 맨 처음 등반자가 될 때를 제외하고 사용하지 않았던 전부를 사용하게 하다니…!"
"뭐?"
김현우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자세를 잡고는 발로 짓누르고 있는 천마의 칼을 꾹 쥐었다.
아무리 세게 찍어 눌러도 부서지지 않기에 잡고 있는 것이 고작인 그의 검.
그러나 천마가 무기를 잡지 못하게 하면 충분하다고 김현우는 생각했다.
그와 함께 천마의 몸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솟아져 나온다.
"!!"
푸른색의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그의 주변에 쉴 새 없이 뇌전이 내리친다.
석양이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그 공간에서 내리치고 있는 뇌전이 천마의 주변을 밝게 비춤과 동시에 그의 등에 푸른 아지랑이가 솟아나와 하나의 원을 만든다.
푸른빛으로 이루어진 광원.
그동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김현우가 직접 몸으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마력이 천마의 몸 안에서 흘러나오고, 이내 그의 몸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마가 입을 열었다.
"지키는 자여."
"……?"
"혹시, 검이 없으면 내가 검술을 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말과 함께-
"!!"
-천마의 손에, 푸른색의 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형태의, 검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하게 파직거리는 뇌전의 기운이 한데 뭉친다.
그 모습에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위험함을 느끼고 그에게 달려들려 했다.
"보여주마."
김현우의 몸이 도약해 천마에게로 튀어나간다.
쾅!
하늘에서 뇌전이 떨어져 내리지만, 이번에도 김현우는 그 벼락을 몸으로 받아냈다.
온몸이 저릿거리는 격통을 느끼면서도 그는 튀어나가길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게 바로-"
김현우의 손이 천마의 끝에 닿았으나-
"내가, '뇌신'이자 '천(天)'이라 불렸던 이유다."
'극-천뢰령신검.'
이미-
콰가가가각─!!!!!
-천마는 뇌전의 검을 휘둘렀다.
# 35
035. 뇌신(雷神)인가, 천(天)인가(6)
"세상에……."
회의실에 있는 그 누구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현우에게 당한 직후, 온몸에 푸른 뇌전을 감고 있는 상태로 각성한 '천마'는 드론의 카메라로는 잡히지도 않는 빠른 김현우의 도약을 막아내고, 뇌전의 검을 휘둘렀다.
그로 인해 일어난 압도적인 풍경.
"……이거 진짜야?"
쿠로 시로기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카가와 야스미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TV의 화면을 보고 있었고, 킨 케이칸과 헌터 협회의 지부장, 그리고 조금 전 회의실에 도착한 김시현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씨발, 말도 안 되는 괴물이잖아?"
그러던 중, 김시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
드론에서 보여주는 그 장면은 김시현이 그렇게 입을 열기에 충분했다.
천마가 검이 지나간 그 부채꼴의 공간 안에 남은 것은 없었다.
마치 그곳만이 세계에서 깔끔하게 지워진 듯, 천마의 푸른 뇌전이 스치고 지나간 곳에는 무엇 하나 남지 않았다.
남은 것이라고는 석양이 지는데도 색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시꺼메진 땅과, 위태롭게 서 있는 자택의 철골뿐,
"뒤에 서 있던 빌라들이……."
그 이외에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새끼, 도대체 정체가 뭐야?"
킨 케이칸이 멍하니 중얼거리고, 상석에 앉은 지부장은 그 무슨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드론이 비추고 있는 화면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사이에서, 문득 김시현은 그 공격을 맞은 김현우의 존재를 찾기 위해 눈알을 굴렸다.
드론의 비행고도가 그리 높지 않기에 사람을 구별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고, 김시현은 곧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검은 땅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천마가 있는 곳을 봤다.
그리고 그런 천마의 측면에-
"……."
"상황 판단 하나는 빠르군, 검을 휘두르는 그 순간 내 옷깃을 잡고 몸을 비틀 줄이야."
김현우가 있었다.
천마가 극-천뢰령신검을 운용하며 검을 휘두른 그 순간, 김현우는 천마의 옷깃을 잡고 몸을 측변으로 돌려 신검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여파에는 벗어날 수 없었다.
파직…… 파지지직!
김현우의 몸에서 튀어 오르고 있는 뇌전, 분명 다음 공격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멈추어 있었다.
그의 몸을 타고 들어오는 엄청난 뇌전 때문에.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로그 때문에.
[마력을 개화했습니다! 첫 마력 등급은 E- 입니다!]
[외부 마력이 몸으로 강제 침입합니다. 마력이 강제 개화됩니다. 마력 등급이 올라갑니다.]
……
…….
……
.
'에이 씨발 이미 싸우고 있을 때 개화하면 어쩌라고……!'
김현우는 눈앞에 떠오르는 로그에 신경질을 내다가도 힘겹게 몸을 움직여 천마의 옷자락에서 손을 놓고 사정거리를 벌렸다.
어차피 저렇게 변해 버린 상황에서 사정거리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으니까.
천마는 김현우가 무슨 짓을 하든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오히려 그의 눈동자는 이전보다도 살아 있는 것 같았다.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는 눈동자는 무감했던 아까의 눈동자와는 다르게 생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의 몸 주변이 크게 파직거리며 푸른색의 뇌전이 다시금 모인다.
그의 뒤에 푸른빛으로 이루어진 광원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누가 봐도 이미 인간을 초월한 모습에 김현우는 혀를 내둘렀다.
천마가 몸을 돌려 김현우를 마주 본다.
파직거리는 뇌전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며 지반을 터트리고 돌조각들을 사방으로 날려 보낸다.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그를 인정했다.
시스템의 스킬에 구애받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그 기술들.
천마(天魔).
시스템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서 그가 올라선 저 인외의 모습은 무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경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외한다고 해서, 대적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
"대단하군. 이 모습을 보고도 아직 싸울 생각을 하다니."
천마가 이죽인다.
"왜, 그 모습을 보여주면 전의가 꺾일 줄 알았어?"
김현우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천마는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지금 네게서 나오는 자신감은 만용과 오만이 들어가 있군. 설마 지금 네가 이 상태의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인간의 몸으로 무(武)를 익혀 그 끝에 다다랐다고 감히 자부하는 천마는 김현우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보며 웃음을 비웃음으로 바꾸었다.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웃었다.
"그래, 뭐 그건 맞는 말이지."
깔끔한 인정.
"?"
천마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김현우는 이어서 말했다.
"맞아, 적어도 지금 가지고 있는 내 힘으로는 너를 이길 수 없어."
"…모든 걸 포기해 버린 자의 여유였나?"
비웃음을 머금고 있던 천마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 모습을 보고 김현우는 웃었다.
"아니, 아니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천마의 앞에서, 불과 조금 전까지는 깨닫지도 못했던 마력을 끌어냈다.
온몸을 거칠게 찌르고 있는 뇌전들은 통각으로서 김현우에게 마력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알게 해주었고.
그 결과로, 김현우는 자신의 몸에서 검붉은 마력을 내뿜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
그 모습을 보던 천마의 미간이 일순간 역팔자로 휘며 파직거리는 뇌전의 검을 집어 든다.
그런 천마의 모습을 보면서도 김현우는 움직일 기색조차 없이 처음으로 뿜어내는 자신의 마력을 컨트롤 했다.
옛날, 탑 안에서 무술을 수련했을 때, 김현우는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기술들을 실험해 보곤 했었다.
그중에는 애니에서 무척이나 과장되어 실제로는 비슷하게라도 따라 할 수 없을 움직임도 있었고, 슥슥 넘기던 무협 웹소설에서 보던 '천마신공'도 있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적어도 무협이라는 장르에서는 그 어디에 가서든 최강이자 그것을 익힌 자들은 '천하제일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설명되는 천마신공도 물론 김현우의 머릿속에 있었다.
물론 처음 천마신공을 따라 하려 했을 때, 김현우는 실패했다.
애초에 김현우에게 내공은 없었고, 그 내공이 무슨 혈이 어떤 혈도를 타고 어떻게 지나가는 과정 따위, 김현우의 머릿속에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김현우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천마신공의 다양한 기술들.
적어도 그가 읽었던 수십 개의 작품에서 나오는 천마들이 쓰는 '천마신공'에 속한 기술.
그는 수많은 웹소설 속의 천마를 스승 삼아. 그들이 사용했던 기술들을 수련했다.
물론 그 기술을 전부 수련했다고 해서 천마에게 있던 내공이 없는 이상 그는 천마신공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가 수련했던 것은 그저 겉모습뿐.
그렇기에 김현우는 아쉬워했다.
쿠구구구구구구궁!!!
김현우의 몸에 검붉은 마력이 터져 나온다.
순식간에 대기를 장악하고 천마의 뇌기에 대항하는 김현우의 마력.
천마가 인상을 찌푸릴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10초."
"……?"
"10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천마의 물음에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10초 동안, 너는 내 스승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진짜' 천마에게 감사했다.
웹소설로 읽었던 수많은 '천마'들에게서 얻을 수 없었던 마지막 한 가닥.
눈앞에 있는 천마는, 김현우에게 그 한 가닥을 보여주었다.
콰가가가가가각!
김현우의 마력이 터져나간다.
대항하고 있던 마력이 천마의 뇌령신공을 잡아먹을 듯 증식한다.
도저히 이제 막 마력을 개화한 헌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마력증폭에 천마가 저도 모르게 뇌전의 검을 치켜든다.
하지만-
……뭣!?
곧 천마는 자신의 앞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경악을 내뱉었다.
김현우의 몸에서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그의 몸이 검붉은색의 마력을 증기기관처럼 뿜어내고, 그의 등 뒤로, 천마의 것과는 다른 검붉은 흑원이 생겨난다.
그와 동시에 김현우는 자신의 몸속에 들어온 마력을 돌리기 시작했다.
물론 혈도의 위치 같은 것도 하나도 모르는 김현우는 그저 되는대로 마력을 때려 박고 돌릴 뿐이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은 곧바로 죽음을 맞이할 만큼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김현우의 내구 S등급은, 그의 난폭한 마력 운전을 그저 격통 정도로 낮추어 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천마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기감에 인상을 찌푸리며 뇌전의 검을 휘두른다.
다시 한번 푸르른 마력이 도로를 지배하며 확장된다.
사정거리 내에 있는 것이라면 그 어느 것도 무로 돌릴 정도의 강력한 파동이, 김현우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
"네게 배웠으니 바로 보여주도록 하지."
검을 휘두른 천마의 앞에 있었다.
그가 등에 쥐고 있는 흑원 뒤로, 마치 날개와도 같은 검붉은 아지랑이가 생겨나며,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뇌격을 막아낸다.
천마가 등 뒤의 광원에서 급하게 뇌격의 창을 만들어냈지만, 그는 두 손으로 만들어지는 뇌격의 창을 붙잡아 경로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김현우는 자신의 혈도를 타고 달리는 마력들을 한 곳으로 집중했다.
그의 왼쪽 다리에 폭발적으로 집중되는 검붉은 마력.
수많은 천마들의 무공을 그저 겉으로 따라 했을 뿐이던 그 탑 안의 기억이, 눈앞에 보인 천마의 능력과 함께 재정립된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 짧은 한순간.
단 한 가닥의 정보로- 천마의 기술을 따오는 것에 성공했다.
김현우는 검붉은 마력에 휩싸인 상태로 입가에 진득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기술이다."
받아봐라.
김현우가 왼쪽 다리를 움직였다.
검은 마력에 의해 폭발적으로 증가한 각력이 천마의 몸을 걷어차며, 그와 함께 마치 증기선처럼 검붉은 마력을 방출했다.
극(極)-
"패왕(?王)-"
그리고 그 마지막, 김현우는 날개를 유지하고 있던 마력을 모조리 왼쪽 발에 집중해,
'괴신각(怪神脚).'
-발출했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그와 함께, 시민들이 대피해 아무도 존재하지 않던 유령도시는 귀가 멍멍할 정도의 소음에 사로잡혔다.
헌터 협회 일본 지부로 영상을 보내던 드론은 터져 나온 마력의 여파에 휩쓸려 이리저리 움직이다 결국 날개가 부러져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고, 그 땅바닥에 처박힌 드론은 옆으로 쓰러진 채 김현우와 천마가 있었던 그곳을 금이 간 카메라의 렌즈로 계속해서 송출했다.
그렇게 해서 보인 마지막의 풍경.
그것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김현우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천마였다.
그리고 김현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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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통로를 통해 새로운 '등반자'가 9계층에 도착했습니다.
남은 시간 [ 00: 00: 00 ]
위치: 일본 도쿄 스기나미
[등반자 '천마' '무월'를 잡는데 성공하셨습니다!]
[정보 권한의 실적이 누적되기 시작합니다!]
-----------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에서 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면 당신은 부름을 받아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10일 3시간 8분 11초
눈앞에 떠오른 로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36
036. 흑역사를 깨우지 마라(1)
김현우가 일본에 나타난 재앙, '천마' 무영을 쓰러뜨린 그다음 날, 한국의 커뮤니티 헌터 킬은 또 김현우에 대한 주제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글은 베스트로 선정 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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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킹갓제네럴엠페러 고인물 김현우 모음집. + 일본 커뮤니티 2hunter 반응.
작성자: 고인물이되고싶다.
[사진]
[사진]
[사진]
[사진]
ㅎㅇ, 이미 이슈게가 불타고 있어서 알겠지만 이건 어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헌터 고인물 김현우가 일본에서 '재앙'이라고 불리던 '천마'를 죽일 때 찍힌 사진이다.
정확히는 사진이 아니라 영상 편집해서 만든 건데 진짜 어느 사진 찍어도 잘 찍히더라.
아무튼 현재 퍼질 대로 퍼져서 전 세계에서 다 아는 사실은 좀 넘겨두도록 하고 오늘 이렇게 글쓴 이유는 지금 헌터킬에 김현우가 일본에서 천마를 쓰러뜨린 사실이 각 해외 커뮤니티에서 유행이란다.
근데 글 보다보니까 미국 커뮤니티랑 러시아 중국 커뮤니티 번역해 놓은 게 베스트 게시물 선정돼서 나도 베스트 가보고 싶은 마음에 김현우에 대한 일본 반응 번역해 왔다ㅋㅋㅋ번역한 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사이트인 2ht, 그러니까 2hunter 이라는 곳임.
물론 전체 번역은 아니고 재미있고 웃긴 것, 그리고 통상적인 반응 몇몇 개만 번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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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현우가 일본 도쿄 스기나미에서 재앙급 보스몬스터로 불류된 '천마'를 잡는 데, 성공했다……]
2
영상 봤는데…… 이거 인간 맞아?
3
김현우상, 진짜 존나 멋져어wwwwwwwwwwwwwww
4
진짜 영상 보고 그야말로 실금해 버렸어w 그 상대인 천마가 뇌전 번쩍번쩍 거릴 때는 진짜냐ww 이거 어떻게 이겨www 했는데 그 뒤에 김현우의 공격을 보니……
52
>>4 wwwwwww 나도 그렇게 생각해 현우 상 진짜 멋져 솔직히 김현우에게는 일본 국적을 주고 일본에 안착시켜야 한다구 wwww
142
야스리쨩이랑 김현우 은근히 잘 어울리지 않아? 둘이 결혼해~ 그리고 일본 지켜줘!!!!
210
이건…… 명백하게 일본이 김현우에게 신세를 졌습니다. 일본도 도울 수 있을 때 김현우를 도울 수 있었으면 한다.
422
wwwwwwwwwwwww 너희들 바보 아냐? wwwwwww 어차피 김현우 그 녀석은 우리들의 식민이였던 춍(조선인 이라는 뜻;)이라구 wwwwwww 속국은 당연히 본국을 지켜야 하는 법이야 wwwwwwww
445
422>>> 머저리 같은 새끼. 죽어.
542
422>>> 너 같은 쓰레기는 사라지는 게 나아, 너 같은 것 때문에 일본 관계가 점점 망쳐지는 거야 이 머저리야.
722
422>>> 너 같이 어린 녀석들만 돌아다니는 일본 사회가 이 꼴이 나는 거다 꼬맹아w. 좀 더 대국적으로 봐라.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일본과 한국의 동맹관계가 체결되지 않는 거라고 어이,…….
……
…….
……
.
1000
이 게시판은 천 개의 댓글을 모두 소모했습니다! 다음 게시판으로 넘어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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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 너희들도 보다시피 현재 일본도 김현우 관련해서 난리다. 특히 일본의 피규어 회사가 김현우와 접촉해 피규어를 만든다는 소문도 있더라.
아무튼 나는 출근해야 하니 번역은 여기까지 하고 가본다, 베스트 가 있으면 다른 반응도 좀 번역해서 올려봄.
댓글 9921개
방구석김씨: 와…… 일본애들 질질 싸는 것 보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역시 갓인물 센세…… 믿고 있었습니다!
ㄴ 이차원킥: 와, 근데 사진도 사진인데 마지막 사진 진짜 씹간지다. 검붉은 마력 날개처럼 퍼져 있는거 뭐냐, 진짜로 개간지네.
ㄴ 기수식: 아…… 진짜 존나 멋있다. 저기서 직관했으면 존나 좋았을 것 같다 진짜로.
하와와여고생쟝: 와, 진짜 아침 출근길부터 지금까지 말이 안 나와서 계속 영상 돌려보고 있다. 진짜 저거 뭐냐? 김현우 뭐 무술인이라거나 그런 거냐?
ㄴ 아첨자: 나도 계속 돌려보고 있는데 씨발 이건 말도 안 된다. 이런 간지는 S등급 상위 서열에서도 제대로 찾아 볼 수 없는 좆간지임. 진짜 일본애들이 왜 피규어 만든다는지 알 것 같더라.
하와와여고생쟝: 나 이거 피규어 나오면 산다, 씨발 진짜 퀄리티 제대로만 뽑히면 무적권 사 무적권!
그렇습니다MO: 와 시발련아 진짜로 어떻게 했누, 저게 인간이냐??? 저 정도면 일본에서 진짜 포상금이랑 총리가 직접 나와서 절하고 표창 줘도 모자르겠다 ㅋㅋㅋㅋㅋㅋㅋㄴ 나는얅고길게살고: 리얼인데? 오늘 3시인가 4시에 그 총리가 표창 직접 수여하고 거기에다가 달라로 포상금까지 지급한다고 하더라.
ㄴ 꼰대기질: 김현우 이새끼 또 포상금 받고 휙 나가 버리는거 아니냐 존나 웃기겠다. ㅋㅋㅋㅋㄴ 리폰인: 우효wwwwwwwwww 현우상의 쿨함 너무 멋져 버린다구!!! 우효wwwwwwww
"……와, 이거 장난 아니네."
화면에 떠 있는 헌터킬의 이슈게시판 베스트 게시물을 보며 김시현은 혀를 내둘렀다.
엄지를 이용해 스크롤을 몇 번이나 내렸건만, 댓글의 행렬은 끝나지 않았다.
하나하나가 전부 김현우 찬양.
그중에는 가끔가다 어그로를 끌기 위해 나타난 녀석들도 있었으나 그런 녀석들은 다른 댓글들의 공격에 댓글을 삭제하거나 신고당해 댓글이 삭제당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끄으으으으으"
"형, 괜찮아요?"
"너는 이게 괜찮아 보이냐 임마……? 끅."
"아니, 뭐…… 그래도 그 엄청난 일을 해낸 사람 치고는 멀쩡해 보이는데."
그는 일본에서 준비해 준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 소파에 앉아 힘겹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 김현우를 바라보았다.
몸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뚜둑뚜둑 거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지만, 김현우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몸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제 천마 무영을 처리한 뒤, 그의 시체가 마치 먼지처럼 흩어지는 것을 볼 때까지는 분명 괜찮았다.
문제는 그 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긴장이 풀어짐에 따라 김현우는 나름대로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투드드득!
"끄억!"
"…형, 그러다 죽는 거 아니죠?"
"내가 왜 죽어 임마…!"
몸을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
물론 그것은 김현우가 자초한 일이기는 했다.
처음 얻어서 아직 회로조차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몸에, 그는 처음 만들어진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다 썼다.
거기에 천마에 의해 공기 중에 농염하게 물들어 있는 마력과.
천마에 의해 강제로 주입된 마력까지. 김현우는 닥치는 대로 혈도를 달리게 만들어 연료로 사용했다.
그 결과, 김현우의 내구 능력치가 S급을 넘어 죽음과 심각한 부상은 피했으나, 그 대신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근육통이 왔다.
제대로 정착하지도 않은 힘을 한계치까지 끌어다 쓴 결과였다.
"씨발…… 이러다 죽겠네……!"
"아까는 안 죽겠다면서요……?"
"그건 말이 그런 거고 새끼야……!"
아오…….
김현우는 뒷골을 잡으며 몸을 비틀었다.
김시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냥 일정 취소하고 한국으로 돌아갈래요?"
"그럼 돈은?"
"돈이야 당연히 주겠죠. 물론 총리가 직접 전달한다는 돈은 못 받겠지만."
"……그 돈이 얼마인데?"
"……글쎄요? 생각해 보면 국제 포상금이야 원래 지급하게 되어 있긴 한데…… 총리가 지급하는 포상금은 얼마인지 모르죠."
"그래?"
김현우는 짧게 고민했다.
그리고 정했다.
"받자."
"네? 몸 아프다면서요?"
"받을 수 있을 때 받아 놔야지.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야."
"그게 뭔 소리예요?"
"대비는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소리지."
마치 자기는 언제 끝날 줄 모른다는 듯한 말에 김시현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김현우의 어제 영상을 보고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김시현이 그렇게 김현우를 보며 탄식하는 도중에도 김현우는 자신 앞에 떠 있는 로그를 확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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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현우 [9계층 가디언]
나이: 24
성별: 남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A++
민첩: A++
내구: S+
체력: A++
마력: C+
행운: B
SKILL -
정보 권한 [하위]
알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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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다만 로그는 확연하게 변해 있었다.
우선 근력과 체력에는 + 가 하나씩 붙었고, 마력 같은 경우 E였던 등급이 한번에 C+까지 올라 있었다.
그러나 달라진 능력치를 보며 별 감상을 내뱉을 새도 없이 김현우의 몸은 굉장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렇게 끅끅 거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스위트룸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김시현은 문을 열었고,
"……나카가와 씨?"
"안녕하십니까."
"여기에는 무슨 일로……?"
문 앞에 서 있는 나카가와 야스미는 슬쩍 김시현의 문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 김현우 헌터가 어제의 전투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들어서 제가 도움이 될까 해 와봤습니다."
정중하게 말하는 나카가와의 말에 김시현은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몸을 틀어 길을 내주었다.
"우선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김시현의 말에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온 나카가와 야스미는 이내 온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뭐……? 곤…… 뭐?"
김현우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나카가와가 슬쩍 당황했고, 그제야 김시현은 아차 한 표정과 함께 그에게 반지 하나를 주었다.
"형 이거 깜빡했어요."
"이건 뭔데"
"통역반지요."
"뭐? 통역반지?"
김현우는 김시현에게 받은 반지를 바라봤고, 곧 그의 앞에 로그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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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반지
등급: D+
보정: 없음
스킬: 번역
간단한 설명.
김현우가 반지를 끼자-
"제 말이 잘 들리시나요?"
놀랍게도 일본어로 말하던 나카가와의 입에서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와, 뭐야 이거?"
"형, 그거 비싼 거니까. 혹시 서연이 것처럼 망가뜨리면 안 돼요."
김시현이 뭐라고 하던 몇 번이고 자신의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뺏다 꼈다 하며 나카가와의 말을 들은 김현우는 놀라며 말했다.
"이거 겁나 신기하네……는 그렇다 치고 당신은 누구?"
김현우의 질문에 나카가와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도쿄를 주축으로 활동하는 '이자나미'길드의 길드장인 '나카가와 야스미'라고 합니다. 이번에 저희 일본을 도와주신 것에 대해 감사인사라도 할 겸 전투의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들어서……."
나카가와 야스미는 간단히 자신이 온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아마, 지금 김현우 헌터가 겪고 있는 게 근육통을 동반한 마력 과도로 인한 혈도 부동 현상이라면, 제가 좀 고통을 완화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렇다면 좀 도와줘요."
그렇게 말하며 단번에 소파에 몸을 뉘는 김현우.
나카가와 야스미는 그 모습을 굉장히 신기한 듯 바라봤으나, 이내 그 시선을 지우고 자신의 스킬을 사용했다.
나카가와 야스미가 이곳에 온 이유.
그것은 말 그대로 일본을 지켜준 김현우에게 감사를 표현하기 위한 마음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카가와 야스미 본인으로선 도쿄가 피해를 본다는 것은 곧 자신의 활동영역이 아득히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하지만 그것 이외에도 나카가와 야스미가 굳이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김현우에게 온 이유.
'궁금하다.'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탑에서 나온 지 1달도 되지 않은 헌터가 저런 힘을 가질 수 있을까부터 시작해. 그가 마지막에 보여주었던 압도적인 마력의 방출되는 기술.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
어제 김현우의 그 압도적인 광경을 직접 목도한 나카가와는 그가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자신이 일검을 버티지 못했던 그 남자와 대등하게 겨루고, 전투 끝에 이겨낸 김현우.
그것은 나카가와 야스미의 안에 있던 '압도적인 강함에 대한 이유 없는 동경'을 끌어냈고.
그것이, 나카가와 야스미를 이곳에 서 있게 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끄덕.
소파에 누워 고개만을 한번 까딱이는 김현우의 모습에도 그녀는 반응하지 않고 오로지 그의 몸에 시선을 집중하고 눈을 감았다.
"혈도."
자신의 고유스킬인 '혈도'는 정확히는 아니었지만, 사용하면 혈도의 움직임이나 크기 등을 통해 마력이나 근력을 어느 정도로는 파악할 수 있었다.
나카가와 야스미는 긴장한 표정으로 눈을 떴고,
"헉……."
-곧 경악했다.
# 37
037. 흑역사를 깨우지 마라(2)
베이징 수도 외곽에 있는, 거대한 산을 깎아서 만든 영지와도 같은 성.
그 성 한가운데에 있는 궁전의 제일 거대한 방.
흑색의 대리석 타일이 깔렸고, 중앙에는 그 누가 보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거대한 가면의 문양이 황금으로 음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검은 타일이 깔려있는 방의 끝에 있는 옥좌.
마치 옛날 사극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 누가 보더라도 사치의 끝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그 옥좌에 한 소녀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의 앞뒤로 줄을 서서 몰려있는 수많은 사람.
그 사람들의 사이에서 마치 황제처럼 오만한 자세로 옥좌에 자리를 잡은 소녀는 손에 쥔 서류와 눈앞에 재생되고 있는 영상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루 전, 김현우와 천마가 싸움을 벌였던 그 장면이었다.
분명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은 적절한 편집을 가한 영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전혀 편집을 가하지 않은 무편집 영상.
소녀의 눈에 영상이 비춘다.
처음에는 인간과 인간으로 싸웠던 전투가, 영상이 진행됨에 따라 인외와 인외의 전투로 바뀌어 간다.
온몸에 푸른 기운을 끌어올려 번개를 치는 '천마'의 모습은 신화에서나 나오는 '뇌신'과도 같은 모습이었고.
반대편에서 그런 뇌신에 대항해 검붉은 마력을 뿜어내며 천마에게 대적한 남자 김현우는 패도 길드에서 동경하는 '패왕'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등 뒤에 펼쳐지는 검붉은 날개.
검은 날개가 떨어지는 번개를 무위로 돌리고, 나중에는 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 초유의 일격을 만든다.
"……."
그녀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 영상을 전부 바라보고, 시선을 내려 서류를 바라봤다.
서류에 작성된 것은 누군가의 신상명세서.
"김현우…김현우……."
소녀가 조용히 읊조린다.
그녀는 문득, 검게 변한 화면을 보며 정말 오래전에 있었던 탑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약했을 때,
혼자서는 무엇도 하지 못했을 때, 그래서 탑을 오르다 다가오는 죽음에 무력하게 손을 놓고 있었을 때, 만났던 스승님에 대한 기억.
탑을 오르는 헌터들이라면 은신을 해서 지나갈 정도로 끔찍한 '아귀'들이 살아가는 서식지.
그 서식지에서 자신은 낙오되어, 그녀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수백에 달하는 아귀에게 머리를 뜯어 먹히려던 그 순간 나타난, 머리에 기괴한 가면을 쓴 남자.
자신이 처음으로 '위'로서 섬기게 된 그 남자.
자신에게 무(武)를 가르친 스승.
"으흣…!"
저도 모르게 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약한 신음.
그러나 그녀의 신음에도 궁전 안에 있는 이들은 그 누구 하나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동요를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
허나 그들이 그런 노력을 하든 말든 그녀는 계속해서 상상을 이어 나갔다.
그의 몸이 패도적인 기운을 발산하며 달려드는 아귀들을 때려눕힌다.
일 권에 수십,
그의 손과 발이 그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는 무기가 되어 달려드는 아귀들을 모조리 쳐죽이고, 그는 자신에게 무(武)를 알려주었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탑에서 낙오했을 뿐인 그녀를 위해, 그는 무를 알려주었다.
그 무엇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녀의 멱살을 쥐고 무를 알려준 그.
그 무엇의 대가도 바라지 않았던 그.
그렇기에 그녀는 모종의 이유로 탑을 나가지 못했던 스승에게, 모종의 맹세를 하고 탑을 빠져나왔다.
탑에서 빠져나가 세상에 스승님의 자리를 만들어 놓겠다는 맹세를.
그리고-
그것이 바로 중국을 2년 만에 반절 가까이 먹어치운 괴물이자, 패도 길드의 길드장을 맡은 그녀.
'미령'의 과거였다.
"하아…."
저도 모르게 달아오른 몸에 미령이 저도 모르게 달뜬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남자가 문득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였으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곧 입을 열었다.
"남은 지역은?"
주어는 없었으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는 알아들었다는 듯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제 위연 길드가 가지고 있는 주요 던전은 동부 쪽입니다."
"한 달."
"예?"
"한 달 안에 위연을 무너뜨려라."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궁전 안의 인원들이 움찔했다.
패도 길드가 처음 중국에 드러나고 위연길드를 무너뜨리며 중국의 지분율을 50% 가까이 확보하는 데 걸린 시간이 1년 하고도 9개월이었다.
그것은 엄청난 속도였다.
고작 소규모로 시작한 길드의 성장률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전 세계 그 누가 보더라도 말이 안 되는 속도.
그런데 남은 지분율 50%를 가지고 있는 위연을 한 달 안에 무너뜨려라?
중국이 독점 던전의 유통권을 '길드끼리의 해결'로 걸어놨다고 해도, 그것은 무리였다.
위연은 지금 독이 바짝 오른 상태였다.
패도 길드가 다른 길드들을 흡수하며 말도 안 되게 덩치를 불리고, 그것을 이용해 던전의 지분율을 먹어치우는 것을 보고 더는 던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결속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령이 내린 '위연을 무너뜨려라'라는, 정확히 말하면 '중국을 모두 먹어치워라'라는 말은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알겠습니다."
남자는 대답했다.
패도 길드의 부길드장이자. 미령에게 직접 무(武)의 끝자락을 전수 받았던 남자 천영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자신에게
'알겠습니다.'
이외에 다른 대답은 허용되지 않았으니까.
미령은 그렇게 고개를 숙인 천영을 한동안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고 있군."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 없다. 누구든,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미령은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옥좌에서 내려왔다.
사이드 테일로 묶은 머리가 그녀의 허벅지 아래까지 스르륵 내려오고,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치파오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몸은 매우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했다.
그가 옥좌가 있던 자리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이번 '위연'을 무너뜨리는데 미궁에서 탐색한 모든 아티팩트 사용을 허가한다."
"……!!"
미령의 말에 인원들이 술렁거린다.
"그리고-"
미령은 은연중에 붉은색과 같은 핏빛 마력을 흩뿌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나도 움직이도록 하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중얼거리며 궁전의 입구를 바라봤다.
"스승님을 맞이해야 하는데 고작 이런 땅덩어리 반으로는 턱없이 작으니까 말이다."
미령은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중국의 궁전과도 같은 패도길드의 본거지에서 위연길드의 향방이 결정되었을 때, 일본에서는-
"일본을 지켜주신 김현우 씨에게 도쿄 시민들을 대표해 감사하는 바이며 저희 측에서 준비한 자그마한 포상금과 표창을 수여하겠습니다."
김현우가 은근히 불편해하는 것을 알았는지 재빠르게 이런저런 과정을 생략하고 표창과 포상금을 수여하는 총리의 모습에 김현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총리가 준비해 준 차로 곧바로 나리타 공항까지 이동할 수 있게 된 김현우가 느긋하게 차에 앉자 김시현이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아니, 물론 아까보다는 조금 나아졌는데 그래도 아픈 건 마찬가지야."
그래도, 확실하게 나아지기는 했어.
그렇게 말하며 몸을 여기저기 틀어보는 김현우를 보며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일본 총리는 꽤 똑똑하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형이 저번에 한국에서 보상받은 것처럼 개판 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표창이랑 포상만 주고 바로 보내 버렸잖아요?"
"뭐…… 그게 똑똑한 거야?"
"그렇죠. 일본에서는 김현우와 별문제 없이 공개적으로 표창이랑 포상해 주는 걸로 우선 시민들에게 김현우를 부른 게 일본 측이라고 은연중에 깔아놓고."
김시현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더 말했다.
"거기에 덤으로 형이 개판칠 거 생각하고 미리 보낸 다음에 지금 회견하고 있을걸요?"
"…야, 내가 무슨 개판을 치냐?"
"형, 국방장관님 단상에서 싸다구 친지 얼마 안 됐거든요……? 물론 실제로 쳤다는 말은 아니긴 한데…."
"아니, 그게 무슨 싸다구야."
"형, 진심으로 하는 말?"
김시현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으나, 김현우는 나는 한 치 부끄러운 게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 이번에도 김시현은 김현우를 타박하는 것보다는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신했다.
물론 김시현이 그렇게 한숨을 내쉬는 와중에도 김현우는 어느새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자신과 관련된 기사를 찾아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일본 기사.
'이거 진짜 짱이네.'
김현우는 자신의 손에 끼어진 반지를 보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김시현의 번역반지.
분명 말하는 것까지만 번역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직접 눈으로 보는 시각 정보까지 전부 번역되었다.
그것도 꽤나 준수한 퀄리티로.
그렇기 김현우가 일본의 웹사이트 탐방에 빠져 있을 때 쯤, 김시현은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걸려온 로밍 전화를 받았고, 곧 김현우를 불렀다.
"형."
"……."
"형?"
"응? 왜?"
스마트폰을 하다 건성으로 대답하는 김현우.
김시현은 그런 김현우를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거듭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 애 깨어났데요."
"걔? 누구?"
"…형 관심 좀 가져요. 걔 있잖아요, 형이 저번에 그 아레스 길드 후드려 패면서 데리고 왔던 그 여자요."
"…아, 걔?"
"네. 걔 깨어났대요."
그렇게 김시현과 김현우가 그런 대화를 나누며 한국으로 향하기 위해 공항에 가고 있을 때.
이제 막 일본의 총리가 연설을 끝내고 내려가는 것을 보며 일본 길드장들은 말없이 서 있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3대 길드.
카르마 길드와 오로치 길드, 그리고 이자나미 길드장이 모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터지는 플래시 세례는 없었다.
가끔가다 건너편에서 한 번씩 터지는 플래시에 그들이 찍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뿐.
"이거, 우리는 완전히 찬밥이군."
쿠로 시로기가 중얼거린다.
"뭐, 우리가 찬밥신세인 건 어쩔 수 없지. 결국, 우리는 길드원들만 잃었을 뿐이고, 그 미치광이를 멈춘 건 한국에서 온 그 녀석이었으니까."
킨 케이칸이 입을 열자 쿠로 시로기는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쯧, 그냥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네."
"절차적 관계다. 총리가 들어갈 때까지는 자리를 지켜야지."
물론 헌터가 그러라는 법은 없었으나, 일본에서는 정부와 헌터 협회, 그리고 길드와의 관계가 굉장히 우호적으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정도는 어쩔 수 없었다.
…뭐, 결국 정부와 협회, 길드가 한데 끼리끼리 모여 놀 뿐이라 일본에는 해외 길드들이 독점하지 못했고 높은 랭킹을 가진 헌터가 없는 것이었지만.
"…그보다, 이자나미의 길드장은 왜 그렇게 넋 나간 표정으로 서 있는 거지?"
"아, 음…생각 중이었습니다."
사무적인 어투로 대답한 나카가와 야스미.
허나 그녀의 머릿속에는 케이칸의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김현우…….'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몇 시간 전, 혈도 스킬을 사용했던 그때 당시에 멈춰 있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처음 혈도 스킬을 사용했을 때, 나카가와 야스미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의 혈도는 자신이 여태껏 봐온 그 어느 혈도보다도 그 크기가 넓고 거대했으니까.
그녀가 혈도 스킬로 그의 근육통을 줄여주는 동안에도 그녀는 그 말도 안 되는 혈도의 크기를 보며 김현우에게 물었었다.
마력 랭크가 어느 정도 되냐고.
거기에 김현우는 별 의심 없이 답해주었다.
C등급 이라고.
'그건, C등급이 가질 수 있는 혈도가 아니야.'
최소 S등급, 그 이상.
물론 김현우가 억지로 마력을 운용하는 중에 억지로 크기를 늘렸다는 것을 모르는 야스미는 그가 정말 터무니없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그곳에서 깨달았고.
'만약, 그 사람을 잡을 수만 있으면…….'
그녀는 모종의 결심을 했다.
# 38
038. 흑역사를 깨우지 마라(3)
비행기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김현우가 도착한 인천 공항에서는 엄청난 인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기자와 파파라치들이 서 있을 뿐이었지만, 기자들과 파파라치가 서 있는 것을 본 시민들은 덩달아 누가 나오는지 궁금해 몰리기 시작했고, 곧 인터넷 이슈로 김현우가 귀국한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인천 공항의 게이트 앞은 북새통을 이뤘다.
"아, 거기 밀지 좀 말아요!"
"거참! 밀지 말라고!"
"야! 나 발 밟혔어! 발 발 발!!!"
"여기 누구 나온데요?"
"이번에 김현우 귀국한다고 해서 다 모여 있는 거 아니에요?"
"사인 받을 수 있나?"
그야말로 아수라장의 끝 자락쯤에 와있는 인천 공항의 게이트 앞.
허나 그 아수라장은 게이트의 문이 열리며 김현우가 오자마자 더욱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 왔다! 김현우다!"
"김현우 씨! 이쪽 한 번만 봐주세요!"
김현우의 옆에 서 있던 김시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낭패한 표정으로 아수라장인 게이트 앞을 바라보았고, 김현우는 몰려 있는 기자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곤 입을 열었다.
"전부 조용!!!"
그와 함께 사그라든 소리에 김현우는 마저 입을 열었다.
"자, 대충 몇 개정도 질문받아줄 테니까 우리 시끄럽게 하지 맙시다. 알다시피 제가 지금 좀 피곤해서요."
알겠죠?
그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렇게 말하자,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입이 열리는 기자들을 보며 김현우는 한마디를 더 했다.
"물론 이렇게만 말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질문하려고 들 테니까 한 사람씩 찍어서 질문 받을게요. 네, 거기 기자."
김현우가 바로 앞에 나와 있는 기자를 손가락질하자 그는 입에 모터라도 달린 것처럼 빠르게 질문을 쏟아냈다.
"네 김현우 헌터! 어제 일본에 크레바스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지원을 갔다고 세간에 밝혀져 있는데 혹시 김현우 헌터는 친일 성향이 있으신 겁니까?"
"좆 까는 소리 하지 마세요."
"네…… 네?"
"기자 양반, 오피셜을 쓰려고 질문을 해야지, 자극적인 기사를 원하고 질문을 하면 제가 퍽이나 대답하겠습니까?"
이 멍청한 양반아.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곧바로 다음 기자를 지목했다.
"네, 김현우 헌터 아까와 같은 질문 이입니다만 조금 취지가 다른데, 혹시 지원을 바로 가신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아까 기자가 욕먹는 것을 본 탓인지 조심스레 질문하는 기자의 말에 김현우는 답했다.
"뭐, 별건 없습니다. 그냥 볼 일이 있어서 들리려고 했다가 우연히 아다리가 맞아 떨어졌습니다."
평범한 답변.
김현우는 곧바로 또 다른 기자를 지목했다.
"혹시 그 볼일에 대한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건 또 찌라시가 퍼질 것 같아서 말 못 하겠네."
"이번에 국제 협회에서 '일본'에 새로운 형태로 등장한 '재앙'의 이름을 정하는 데 있어 김현우 헌터가 이름을 지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그냥 마음대로 지으면 좋겠네요."
"김현우 헌터! 이번에 길드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직접 길드를 만드셨는데 헌터 업계에 정식으로 들어서려는 밑거름입니까!?"
"그런 거 생각 안 해봤어요."
그 외로도 이어지는 수 많은 질문들.
김현우는 그 질문들을 귀찮음이 묻어난 말투로 나름 성실하게 대답했고, 어느 정도 답변을 했을 때, 그는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
"자, 이제 질문은 그만, 저도 사생활 있는 거 알죠? 또 질문이 있으면 뒤에 회견 같은 거나 방송 같은 거 나가서 답해줄 테니까 이 이상 막지 마세요."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물론 그 뒤에도 끈덕지게 붙는 기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거하게 욕을 한 사발 먹인 김현우는 입 좀 곱게 쓰라는 김시현의 타박을 들으며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현우는 어느새 깨어나 있는 그 여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다짜고짜 김현우를 보더니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우선,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홍린'이라 합니다."
"그래도 내가 구해준 건 기억하고 있나 보네?"
내심 그녀가 구해준 은인도 모르고 날뛸 거라 생각한 김현우는 잘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만약 은인도 모르고 날뛰었다면 피곤한 몸으로 참교육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내가 궁금한 걸 좀 물어보도록 할까?"
김현우의 말에 홍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본격적으로 그녀가 왜 거기에 잡혀 있었는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김현우야 그녀가 왜 거기에 잡혀서 온몸이 구속된 체로 뽕을 맞고 있었는지 단 1%의 관심도 없었다.
다만, 자기 멋대로 김현우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이야기를 시작한 그녀의 진지한 표정 덕분에 김현우는 별로 원하지도 않던 정보를 꾸역꾸역 듣고 있어야만 했다.
'끊으려면 끊을 수 있는데…너무 진지해서 못 끊겠다.'
그런 눈치라고는 원래부터 하나도 보지 않았던 김현우였으나, 무척이나 순수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녀를 보니 이야기를 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너는 패도 길드의 간부고, 아레스 길드가 너희 던전을 빼앗으려고 해서 싸우던 도중에 끌려왔다…뭐 이런 말?"
"네, 맞습니다."
"아, 그래 뭐…."
별로 궁금한 건 아니었다만 아무튼 잘 알았다.
라고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내뱉은 김현우는 그녀가 설명을 다 끝낸 이후가 돼서야 그녀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네 쇄골에 있는 문신. 그건 뭐지?"
김현우의 물음에 홍린은 곧바로 답했다.
"제 쇄골에 있는 문신은……."
그녀는 순간 대답을 늘이면서 눈치를 봤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제 쇄골에 있는 문신은 패도 길드의 '간부'를 상징하는 문신입니다."
"간부임을 상징하는 문신?"
"예, 저희는 일정한 직책에 오르면 무조건 이 문신을 몸 어딘가에 새겨야만 합니다."
"그 문신이 뭐길래?"
"이 문신은 길드장님이 말씀하시길, 천(天)의 아래에 있음을 상징하는 문신이라 했습니다."
"그게 뭔 개…"
김현우는 급히 말을 멈췄다.
"…소리야?"
"사실 저도 간부라 해도 패도 길드 내에서는 고작 말단일 뿐이라 그 깊은 뜻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
"다만, 길드장님이 이 문신을 직접 새겨주시며 하신 말씀이 있기는 합니다."
"그 말은 뭔데?"
김현우는 그 말을 물으면서도 내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만 유난히 눈에 띄는지 모를 그 가면 문신이 마치 자신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염과 동시에-
"그 무엇도 너의 위에 있을 수는 없다."
"끅!?"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고양이처럼 비틀었다.
허나 오래전에 들었던 그 말을 기억하느라 눈을 감은 홍린은 그런 김현우의 이상 현상을 감지할 수 없었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네 위에 있는 것은 오직 한 명, 천(天)뿐이니."
"그…."
"그 이외에 모든 것들은 네 아래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만……!"
"그러니 너는-"
"그마아아아아안!!!!!"
"끼약!?"
갑작스레 괴성을 내지르는 김현우의 말에 홍린은 저도 모르게 귀여운 소리를 내며 말을 멈췄고, 곧 묘하게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제가 뭔가 잘못이라도?"
"…아니, 네가 잘못한 건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지……!'
김현우는 자신의 혹시나 하는 생각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느꼈다.
세상에 그 누가 개지랄을 떨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김현우가 유일하게 치부로 여기고 있던 것, 그것은 바로 그가 탑 안에 있을 때 했던 말들이었다.
물론 모든 말들을 치부로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김현우가 자신의 치부로 여기는 것들은 바로 그가 한참 무술을 배운다고 심취해 있을 때 자신의 제자들에게 지껄인 말이었다.
'내가…내가 미쳤지……왜 그런 병신 같은 짓을…!'
김현우는 그때 당시에 지껄인 말들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몸을 비틀었다.
무술을 배우면 깨달음을 얻어 탑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그때를 기점으로, 김현우는 미친 것인지 그 시기에 중2병 비스무리한 것에 걸렸다.
애초에 웹소설에나 나왔던 무(武)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리라는 말을 덥석 믿어버린 것부터 감이 오지 않는가?
'이런 씨발….'
그때 당시의 김현우는 자신이 진짜 무협에서 나오는 은거 기인인 것처럼 행세했다.
수많은 웹소설들에 한 번쯤은 등장하지 않으면 섭섭한 은거 기인들의 말투를 따라하고, 그들의 뭣도 없는 개똥철학을 심도 있게 탐구하였으며-
'끄아아아아!!!!'
나중에는 은거기인들에게 한두 개씩 붙어있는 설정인 '사실 나는 '천마
'다.'
같은, 숨어 있던 전 세대의 천하제일인 같은 설정을 가감 없이 따 와 심취해 있을 때였다.
홀로 손가락을 꺾으며 발광을 하기를 잠시, 김현우는 좌절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하던 일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언제까지나 그 탑에서 영원히 묻힐 것으로 생각했던 그 치부가 엄청나게, 그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나게 번져가고 있었다.
"…야."
"…네?"
"그, 패도 길드는…대형 길드냐?"
김현우의 물음에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패도길드는 2년 만에 중국의 헌터 업계 지분율을 절반이나 가지고 있는 대형 길드입니다."
홍린의 말.
김현우의 기분은 나락을 쳤다.
'뭐지? 무엇이지? 이건 나를 국제적으로 엿 먹이려는 의도인가?'
김현우는 자신이 한참 무술에 취해 있을 때 가르쳤던 두 제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볼 것도 없이 결론을 내렸다.
'그 새끼다…….'
한 제자가 있었다.
혼자 헌터들 사이에서 낙오돼서 아귀에게 죽을 것을 데려온 자신의 첫 제자.
물론 그녀를 데려온 이유는 별거 없었다.
웹소설 속의 은거 기인들은 제자들이 꼭 한 명씩 있지 않은가?
그래서 데려왔다.
그리고 그렇게 그 녀석을 데려와 도무지 50층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모를 그 녀석에게 자신은 무술을 가르쳤다.
……사실 말이 무술이지 그건 반쯤 폭행이나 다름없었다.
말 안 듣는다고 패고.
제대로 무술 못 쓴다고 패고.
도망치려 해서 패고.
고기 제대로 못 굽는다고 팼다.
'씨발, 생각해 보니까 팬 기억밖에 없잖아?'
왜 그렇게 팼냐고 물어본다면, 그것도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은거기인들이 주인공을 존나 패면서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다른 소설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김현우가 봤던 웹소설들은 죄다 은거 기인들이 주인공을 개 패듯 패면서 가르쳤다.
사실 그렇게 개 패듯 패면서 무술이라도 잘 알려줬으면 모르겠는데…… 그녀에게 알려준 건 김현우가 사용한 무술이라고 할 수도 없는 개판 무술이었다.
그저 김현우라서.
김현우의 능력치라서 가능한 무술들을 그녀에게 억지로 배우게 했다.
그리고 기술을 제대로 못 쓰면 팼다.
'결국 나중에는 내 기술을 애매하게 따라 할 수 있어서 하산하라고 개소리 지껄이면서 내보내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때 들였던 첫 제자가 뭐라고 했던 기억이 있기는 했는데 그때 당시에는 그냥 '기특한 소리'정도로 치부하고 넘겼던 것 같았다.
아무튼 그때 했던 '개소리'를 제자는 아주 훌륭하게 전파하고 있었다.
그것도 중국에서.
헌터 업계 지분율 50%를 넘어서고 있는 길드의 길드원들에게.
"…."
"…저기?"
홍린이 뭔가 불안한 표정으로 지랄발광을 멈춘 김현우를 바라봤다.
홍린에게 그 모습은 김현우가 무척이나 깊고 심오하게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고, 이내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너, 패도 길드로 돌아갈 거지?"
"아, 예. 만약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더 없이 감사하겠지만 거기까지는…."
"아니, 도와주지. 그 대신-"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홍린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를 찾지 마라."
김현우는 수많은 선택 중, 결국 '외면'을 선택했다.
# 39
039. 몇 번이나 말했지만, 덤비지 마라(1)아레스 길드의 본사 꼭대기 층.
강남의 뷰가 한눈에 보이는 그곳에서 흑선우와 우천명은 앉아 있었다.
흑선우는 말없이 강남의 뷰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우천명은 그런 흑선우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간의 정적.
흑선우가 말했다.
"유병욱은 잘 처리했나?"
"예, 잘 처리했습니다."
현재 아레스 길드 내부의 상황은 인사이동 기간이 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폭풍전야와 같은 상태였다.
이유는 바로 아레스 길드 한국지부의 지부장인 흑선우의 분노.
그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기라도 하는 날엔 인사이동에서 미끄러지는 것은 시간문제고 어쩌면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는 문제였기에 사원들은 흑선우의 시선을 무서워했다.
"어떻게?"
"…예?"
"어떻게 처리했냐고 묻잖아?"
흑선우가 순식간에 인상을 팍 쓰며 입을 열자 우천명은 급하게 고개를 숙이곤 입을 열었다.
"우선 흑선우 지부장님이 아레스 길드내의 자산을 횡령했다는 명목으로 유병욱부- 아니, 유병욱을 해임하고 나서…."
"본론만 말해! 본론만!"
"…지금 현재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유병욱은 죽이지 않고 지하 벙커에 감금만 해 놓은 상황입니다. 이후 3, 4달 정도 이슈가 없으면 처리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한껏 히스테릭을 부리는 흑선우의 성질에도 욱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한 우천명.
흑선우는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펴지지 않았다.
"…독점 던전 인수권은 어떻게 됐지."
"김현우 헌터가 요구한 건 서울 의정부에 있는 초급 던전 두 곳과, 홍대 쪽 던전 한 곳, 그리고 강동구 쪽 던전 두 곳입니다."
"이런 개새끼…."
우천명의 말에 그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유병욱이 자료를 모아 시작한 김현우를 죽이기 위한 공격은 지금 아레스 길드에게 엄청난 타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다른 초급 던전은 아레스 길드에도 아직 있었다.
부산지역에도 있고, 전국에 걸쳐 있는 초급 던전의 개수는 아직 5개 정도로 충분했다.
문제는 독과점 형태가 깨져 버린다는 것.
아레스 길드는 처음 한국에 진출하며 어마어마한 돈을 뿌렸다.
정부에 뿌리고, 헌터협회에 뿌렸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다른 해외길드와 한국 내에 존재하던 길드들을 찍어내리고 돈과 인해전술의 위력으로 던전을 독점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처음에야 초급 던전에 여러 가지 문제가 걸리기도 했다.
허나 그것은 돈을 뿌리는 것으로 충분히 무마할 수 있었다.
그렇게 초급 던전을 차지하는데 뿌린 돈.
그 돈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독과점의 형태가 5년 이상은 더 유지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툭툭툭툭툭-
흑선우가 발을 덜덜 떨며 짜증을 냈다.
그의 머릿속에선 이 난관을 빠져나가기 위한 수많은 다른 수가 떠올랐으나, 그 모든 것이 이 난관을 완전하게 해쳐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최근 이번에 새롭게 등장한 '재앙'을 쓰러뜨리며 더 큰 인기를 구가하게 된 김현우 덕분에 안 그래도 쓸 수 있던 방법의 폭이 더더욱 줄어버렸다.
한참이나 다리를 떨며 초조하게 생각하던 흑선우는 이내 떨던 다리를 멈추고는 강남의 뷰에서 눈을 돌려 우천명을 바라봤다.
"…우 부장."
"예."
"…그 개자식이 말했던 던전들 전부 독점 넘겨줘."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우천명의 말에 흑선우는 이빨을 혀로 핥으며 말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가 아니야, 어차피 해야 한다. 김현우에게 사회적으로 무슨 방법을 쓰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어."
"……."
"그러니까 우선은 넘겨준다, 어쩔 수 없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생각하자. 우선은 김현우에게 던전을 넘겨주고-"
흑선우는 입을 열었다.
"판데모니엄을 불러와."
"…판데모니엄을 말입니까?"
판데모니엄, 그들은 실질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허나 그 이름을 단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판데모니엄'이란 이름은 평범한 이름이 아니게 된다.
공포스러운 이름.
'판데모니엄'은 그 이름과 출저를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무한한 공포를 선사해 주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는 이름 '판데모니엄'은 어느 한 용병 집단의 이름이다.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전부 '머더러 헌터'.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판데모니엄'에 소속된 모든 머더러 헌터들은-
"아마 김현우 그 녀석이라도 100위 권 내의 '머더러 헌터'들이 달려들면 어쩔 수 없을 거다."
지금은 '머더러 헌터'가 되어 순위권에서 빠져 있었으나 판데모니엄의 헌터는 모두 S등급 상위권 100위 안에 들어 있던 '헌터'들이었다.
그렇기에 '판데모니엄'이라는 이름은 아는 사람에 의해 두려움을 샀다.
제대로 된 대가만 지불한다면 그들의 임무 성공률은 100%에 육박했으니까.
흑선우의 말에 일어난 잠시간의 정적, 우천명은 곤란하다는 듯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부장님, 판데모니엄을 부르려면 예산이 부족합니다."
판데모니엄이 그런 악명을 떨친 만큼, '판데모니엄'을 부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돈이 필요했다.
한 번에 100억? 그 정도면 우습다.
그들은 암살할 대상을 보고 가격을 책정한다.
더 웃긴 건, 그 암살할 대상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암흑 용병단을 10번 정도나 고용할 수 있는 돈을 받아 간다는 게 문제였다.
"부족한 예산은 어떻게든 마련해 주지."
흑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우천명을 바라보곤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해 우 부장, 지금 당장은 그 머저리를 잘라낸 것으로 대부분의 화살을 회피할 수 있었지만 결국 화살대는 우리를 향해 돌아선다."
그전에-
"해결해야 해. 그 어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곧바로 준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오빠."
"왜"
"…진짜 TV 출연할 거예요?"
"나는 하면 안 되냐?"
"오빠 하는 꼴을 보면 좀……."
"야! 내 꼴이 어때서!?"
검은색 츄리닝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이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꼴이 TV에 출현하기 좋은 꼴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 그럼 여기서 뭘 더 해야 하는데?"
"다른 옷은요?"
"다른 옷은 불편해. 그리고 이거 츄리닝 아니거든? 뒤에 모자 달린 거 안 보이냐?"
김현우는 자신의 뒤에 달려 있는 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서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뭔 차이인데요?"
"이거 나름 이번에 새로 나온 신상이거든?"
"후……."
김현우의 말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이서연,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아니, 도대체 다른 옷은 왜 안 입어요? 제가 이번에 TV출연한다고 옷도 다 따로 보내줬구만."
"그건 너무 불편하더라."
김현우는 이서연이 김시현의 집으로 보내준 정장과 수많은 옷들을 생각하며 혀를 내둘렀다.
이서연이 그의 신체 사이즈는 어떻게 안 건지 입는 옷마다 사이즈가 턱턱 맞아 떨어졌다.
그럼에도 결국 김현우는 결국 옷을 입지 않고 오늘 김시현와 이서연, 한석원이 참가하는 TV 프로그램 '헌터를 알다'의 대기실에 왔다.
"아니! 니트 같은 것들도 있었는데."
"아무튼 불편해."
물론 김현우도 이서연의 배려에 옷을 입을까 고민하긴 했으나, 너무 불편해서 관뒀다.
탑에서 지낸 12년 동안 그는 거의 상의는 입지도 않다시피 했고, 하의도 거의 다 헤진 하의를 입고 있었다.
그렇게 12년 동안 살다가 밖으로 나와 보니 지금 스타일의 옷은 너무 딱딱 맞아서 입기가 불편했다.
현재 김현우에게 편한 옷은 한국 회사에서 나오는 츄리닝뿐.
그렇게 김현우와 이서연이 옷을 빌미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자 대기실의 문을 열고 한석원과 김시현이 들어왔다.
"형 이제 10분 뒤면 나가서 준비해야 해요."
"엉."
김현우가 천마를 잡고 한국에 귀국한 뒤부터 8일째, 그동안 김현우에게는 나름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첫 번째는 아레스 길드에서 구했던 홍린을 바로 중국으로 보내 버린 것, 그녀는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보은을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김현우는 절대로 나를 찾지 말라는 소리를 몇 번이고 그녀에게 말해 돌려보냈다.
그다음으로는 드디어 아레스 길드에게 전에 이야기 했던 길드 독점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언론에서는 한차례 난리가 터졌었다.
뭐, 그것도 아레스 길드에서 언론 통제를 기가 막히게 하는지, 하루가 지나서는 더 이상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허나 독점 던전에 관한 언론이 죽었다고 해서 김현우에 대한 인기가 식은 것은 아니었다.
김현우가 8일 전 게이트에서 했던 발언들은 그대로 인터넷에 올라갔고, 확실한 반응을 끌어냈다.
그중에는 나쁜 쪽에 대한 반응도 있었다.
그러나 좋은 쪽의 반응이 압도적이었기에 나쁜 쪽의 반응은 거의 묻히다시피 했다.
그리고 곧 시민들의 관심은 김현우의 마지막 이야기로 집중되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나중에 어디 TV나 따로 회견 열어서 질문 받겠다.'
그 말에 사람들은 김현우가 어느 TV프로그램에 출현할지 관심을 모았고, 그때를 맞춰 각종 TV 프로그램은 김현우에게 오퍼를 보냈다.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좋은 조건의 오퍼.
말 그대로 김현우는 그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그 소리를 했던 것뿐이었으나, 그 자그마한 이야기는 기자에게 부풀리고 부풀려져 너무 거대해졌다.
"현우야, 이제 방송 준비해야 한다. 가자."
"응."
물론 김현우가 진짜 세간의 관심을 위해서 이렇게 직접 방송 출연을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들어온 오퍼를 보다보니 돈의 액수에 혹해서 결정했고, 거기에 덤으로 할 말도 있어서 신청한 것뿐이었다.
물론 김현우에게 오퍼가 들어온 돈은, 지금까지 그가 받은 돈보다 적은 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의 눈에는 여전히 커 보였다.
그렇다. 아직까지 김현우는 물가의 괴리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거대한 돈은 너무 현실감각이 없어서 그저 그렇게 느끼고 자신에게 대충 감이 잡힐 정도의 금액은 입을 떠억 벌리면서 좋아했다.
김현우는 대기실을 넘어 세트장으로 가자마자 그 안의 스태프에게 인사를 받았다.
김시현이 미리 이야기를 해 놓았는지 사인 권유는 하지 않았다.
"아! 안녕하세요!"
"아, 예."
김현우는 눈앞에 잔뜩 꾸미고 나온, 최근 한국에서 아이돌로 인기를 끌고 있는 여자 '이해영'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그런 김현우의 모습에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곧 스타트 사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에 곧바로 표정을 고치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짧은 스타트라인 시간에 김현우는 PD에게서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들었다.
"예."
아무튼 뭐라고 한 것 같은데 대충 욕하지 말라는 소리인 것 같아서 김현우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리고 곧 방송이 시작되었다.
방송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게 진행되었다.
이미 이 방송을 15회차 넘게 끌고 가고 있는 길드장들은 완전히 방송인이라도 되는 듯 여유롭게 입을 놀렸고, 그것은 MC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놀랍게도 TV출연이 처음인 김현우도 마찬가지로 그들 속에 녹아 대화를 잘 이끌어 나갔다.
정말 매끄러운 진행.
방송 초보라고는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끔가다 입에서 나오는 욕설을 빼면 이야기가 잘 이어나가지는 것에 PD는 놀랐다.
물론 그것은 김현우가 별다른 긴장을 하지 않아서였지만, 애초에 탑에서 벌였던 유일한 치부 빼고는 자신이 개지랄했다고 해도 당당해질 수 있는 김현우였기에, 카메라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방송에 김현우가 몇 번이나 욕설을해서 방심위에 권고 조치를 먹을 예정이었으나, PD의 입꼬리는 올라갔다.
권고 조치야 한번 먹고 말면 되는 거고 시청률이 억 소리 날 정도로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기 전, 마지막 김현우의 말-
"제가 길드를 만들었는데, 길드원을 모집하기 위해 TV에서 공고를 띄우려 합니다."
'끄아아아아!!!!!! 이번 실검은 우리 거다!!!!!'
그의 말과 함께, PD의 소리 없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 40
040. 몇 번이나 말했지만, 덤비지 마라(2)강동구 성내동에 위치한 1층 사무실, 그곳은 김현우가 길드도 만들었으니 대충 사무실이나 구해보자 해서 김시현의 도움을 받아 구한 20평 남짓한 사무실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현우는 사무실 한쪽 자리에 잔뜩 몰려 있는 10박스짜리 사무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씨발."
"형, 제가 그거 하지 말라고 했죠?"
"이렇게 될 줄 알았냐?"
3일 전 나갔던 헌터를 알다에서 김현우는 길드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했었다.
직접 알바천국같은데 공고문은 올려본 적도 없는데다가 인터넷으로 알리면 너무 싸보일 것 같아서 한 행동이었는데….
'시발, 이건 좀….'
너무 많잖아?
김현우는 앞에 있는 박스를 뜯어봤다.
"씨발."
보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서류들이 수천 장이나 쌓여 있었다.
혹시나 이런 상황이 있을까 싶어서 접수 마감 시간도 짧게 만들어 놨는데….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야."
"왜요?"
"우리나라에 헌터 없다며?"
"없었죠, 옛날에는."
"그럼 지금은?"
"아레스 길드 친구들도 많고 용병신세인 친구들도 많아요. 게다가 해외에서 원정 뛰러 온 헌터들도 많고요."
"아니 시발 도대체 그게 뭔 개소리야?"
아레스 길드가 독점했다며!
김현우가 괜히 짜증을 내자 김시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말했다.
"아니 왜 저한테 괜히 화를 내요?"
"시발 이거 어떻게 하냐고!"
"제가 어떻게 알아요!"
"……."
김시현이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지르자 김현우는 하, 하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 앞에 서서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그는 입을 열었다.
"전화해서 서연이랑 석원이 형도 부를 수 있으면 불러봐라."
"…같이 까보자 하려고요?"
"그것 말고 뭐가 있냐?"
"…형, 저 형이 가끔가다 착각하는 것 같은데 어엿한 길드의 길드장이거든요? 지금 이런 거 할 시간 없-"
"초급 던전 안 쓸 거야?"
김현우의 말에 꼼짝없이 입을 다문 김시현은 이내 궁시렁거리며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그는 김시현의 제압 방법으로 '초급던전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걸었고, 초급 던전이 부족한 김현우의 동료들은 그 제안에 무척이나 감격하며 수락했다.
뭐, 애초에 동료들이 말하지 않아도 쓰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김현우는 굳이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3시간 뒤, 김현우의 사무실에는 총 4명의 사람이 모였다.
아랑 길드의 이서연.
서울 길드의 김시현.
고구려 길드의 한석원.
그리고 김현우까지.
"……얘는 어때요?"
"모르겠는데?"
"얘는?"
"마찬가지."
"…그럼 얘는?"
"흠, 마찬가지로 모르겠다."
"…형, 저 맘에 안 들죠?"
"그게 뭔 개소리야?"
"아니 뽑을 생각은 있어요?"
김시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김현우는 들고 있던 서류를 툭 던지고는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뽑을 생각이고 뭐고 애초에 서류가 이상한데?"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고.
김현우는 불만스러운 투로 말하더니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거 대체 뭔데?"
능력치가 있는 것은 대충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 아래에 써 있는, 원래의 이력서라면 자격증을 쓰는 란 대신 있는 던전 기록란은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지 이해가 안 된다.
"호구 솔로플레이 경험 있음, 씨발 이게 뭔 개소리냐고 자기가 호구라는 소리야?"
"그건 호인의 구덩이를 말하는 것 같네요."
"그럼 눈깔미아 파티플레이 보스 클리어는?"
"그건 '눈 아래에 깔린 미이라의 아궁이'이라는 던전을 요약한 거네요."
"아니 씨…… 이력서 쓰는데 왜 말을 줄여!? 이거 완전 기본이 안 된 놈들 아니야?"
'꼰대다.'
'꼰대'
'꼰대 같다…….'
김현우의 묘한 꼰대 말투에 이서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기 오빠, 원래 최근에는 전부 말 줄여요. 누가 요즘에 호구나 눈깔미아를 모르겠어요? 그냥 오빠가 12년 동안 탑 안에 있어서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뿐이라고요."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그를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보던 한석원은 물었다.
"근데 왜 굳이 길드를 만들려고 한 거야? 설마, 우리한테 초급 던전 주려고?"
한석원이 혹시나 하는 맘에 말했으나 김현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있긴 한데, 그냥 돈 좀 벌어볼까 해서."
"……뭐?"
"아니, 내가 좀 찾아보니까 던전 독점하면 그냥 애들 몇 명만 딱딱 대기시켜 놓으면 돈이 절로 굴러 들어오더라?"
"……아니, 그건 맞긴 한데……."
김현우의 말이 맞기는 했다.
우선 던전을 독점하기만 하면 정말 김현우의 말대로 돈이 꼬박꼬박 들어오긴 한다.
우선 헌터들이 소속 던전에서 사냥하고 나온 마정석을 협회에서 교환해 길드에 2를 가져다주고, 또 보스가 나올 때가 되면 보스에게서 나온 아이템을 정산해 또 길드에 2가 들어온다.
물론 길드유지비로 나가는 돈이 있긴 하나, 분명 돈이 쌓이긴 한다.
"근데 형."
"왜?"
"어차피 이미…… 아니에요."
어차피 돈 많은데 뭐하러? 라고 물으려던 김시현은 뻔한 김현우의 대답에 말을 줄였다.
"근데 애초에 이거 몇 명 뽑는 거예요?"
"초급 던전 5개니까, 교대로 지킬 사람 포함해서 한 20명 뽑으면 되지 않을까?"
"……뭐, 던전 5개니까 그 정도 있으면 충분히 돌아가기는 하겠네요……. 근데 그건 최소 인원이고 여유 인원들도 더 뽑아야 할걸요……?"
"……어? 그래?"
"네."
"야, 그럼 돈 많이 드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그렇겠죠? 초급 헌터들 위주로 뽑으면 그렇게 돈 안들 수도 있긴 해요. 그냥 걔들은 초급 던전 들어가는 걸로 고마워 할 테니까."
게다가-
"형 네임벨류에다가 어차피 저희 던전도 자연스럽게 공유할 테니까 조건이 그렇게 좋을 필요는 없지만, 아무튼 돈이 좀 나가긴 할 거예요."
"……그렇지?"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뭐, 농담이야. 나도 돈 조금 받는 열정페이가 얼마나 좆같은지는 당해봐서 아니까."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예전을 생각했다.
탑에 들어오기 전, 김현우가 군대에 제대로 들어갈 수도 없는 나이였을 때, 그는 쓰레기 같은 원장의 손에서 빠져나와 홀로 고시원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알바를 하면서 느꼈던 부조리함.
자신이 '제대로 된' 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돈을 떼먹으려던 점주도 있었고, 애초에 최저 시급조차 제대로 쳐주지 않는 점주도 있었다.
'으, 이 개새끼들'
생각하니까 열받네?
김현우는 잠깐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아무튼 그 새끼들처럼 쓰레기가 될 생각은 김현우에게 추호도 없었다.
결국 그렇게 해서 몇 시간 정도를 길드원을 뽑는 데에 투자한 김현우는 저녁쯤이 돼서야 대충 면접을 볼 인원들에게 전화를 돌렸고, 곧 김시현의 집으로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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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에서 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면 당신은 부름을 받아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0일 0시간 0분 0초
시스템의 초대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그래."
밝게 인사하는 아브를 보며 김현우는 말했다.
"이제 그 기계어투는 그만뒀냐?"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흠칫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어차피 유지가 안돼서……."
"잘 생각했다."
김현우는 피식 웃더니 테이블에 앉았고,
"야, 여기 좀 늘어난 것 같다?"
"아, 네. 당신이 등반자를 처지하고 권한을 얻을 때 마다 제가 지내는 이 방도 권한의 누적크기에 따라 커지거든요."
"그래?"
"네."
아브의 말에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이내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이번에 나를 소환한 이유는? 또 등반자가 나타났는데 알리미가 등장하지 않았다든가, 뭐 그런 거냐?"
"아뇨, 그건 아니고…이번에는 가디언이 가지고 있는 스킬을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 해주려고 해요."
"업그레이드?"
"네."
"무슨 업그레이드?"
"저번이랑 똑같은 거예요. 권한은 상승 되는 게 아니지만…부가적인 옵션을 추가로 붙여주는? 뭐 그런 거예요."
아브는 그렇게 말하더니 무엇인가를 조작하듯 손가락을 움직이곤 말했다.
"됐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번에는 무슨 기능을 추가했는지 제대로 듣지도 못했던 것 같았다.
'아니, 생각해 보면 그때 정보권한을 받기 전이랑 후랑 업그레이드 된 게 있었나?'
…애초에 스킬을 받아놓고 지금까지 사용한 횟수가 5번도 안되다 보니 잘 모르겠다.
"저번에는 무슨 기능을 추가해 준 건데?"
"저번에는 정보 권한으로 열어본 상대의 상태를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해 드렸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처음에 열었을 때 상태가 안 떴나?
'…모르겠다.'
뭐 제대로 사용한 적이 있어야지.
"그래서, 이번에는?"
"이번에는 성향 확인 기능을 넣어 드렸습니다."
"…성향 확인?"
"네, 물론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시스템에서 표시하는 성향은 9계층의 도덕적 기준점으로 봤을 때 생명체가 한 행동을 도덕적 판단에 빗대어 선악을 판단합니다."
그동안 한 행동으로 인해 성향을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가변적인데다가 행동을 종잡을 수 없을 때는 기묘하게 표시되기도 해요.
아브가 그렇게 말하며 말을 줄이려다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알리미 스킬도 업그레이드 했습니다."
"…어떻게?"
"이번엔 대충 날짜까지는 특정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위치는……."
"모른다?"
"그건 권한 밖의 일이라 어쩔 수 없어요."
"거참, 더럽게 불편하네."
쯧.
그렇게 입을 열며 혀를 찬 김현우.
"그럼, 우선 할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야?"
"네, 그러네요."
"그럼 돌려보내 줘."
"네 알겠습니다."
아브는 김현후의 말에 곧바로 손을 까딱했고, 그와 함께 김현우는 아브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 김시현의 집 소파 위에 앉게 됐다.
그리고 그다음 날,
"와, 긴장 된다, 진짜……!"
김현우의 자그마한 사무실 안에는 그에게 면접을 보러 찾아온 헌터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끝에서 사이좋게 123번 124번 125번 번호표를 붙이고 있는 세 명의 헌터.
예전, 로드란의 연구실에 뒷돈을 찔러주고 들어갔다 김현우의 힘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된 이천과 이민영, 김창석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사무실 문 너머를 보고 있었다.
그들이 긴장하는 이유,
그것은 김현우의 길드가 아레스 길드에게 착취받지 않고 초급 던전을 들어갈 수 있다는 매력적인 조건과 더불어 상당히 좋은 계약조건을 내건 것도 있었지만-이 사무실에 있는 헌터가 모두 긴장한 채로 목소리도 얼마 내지 않은 체, 앉아 있는 이유는 바로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그래서 C급 던전 토벌경험이 총 25번 정도 있습니다."
"탈락."
"예…… 예?"
"탈락이라고, 다음."
"아니! 왜...? 이력서를 읽어 보시면 아실 텐데 저는 C급 헌터중에서도 상당히 경험이 많은 입장이-!"
"내가 이력서 읽어 보고 맘에 안 든다는 데 왜 네가 지랄이야?"
"그러니까 왜 탈락했냐는 겁니다!!"
"네 이력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개새끼야! 여기가 내 회사지 네 회사야!? 꺼져!"
쿠탕탕탕!
사무실의 안쪽에서는, 기존 길드의 면접과는 전혀 다른 면접이 펼쳐지고 있었다.
# 41
041. 몇 번이나 말했지만, 덤비지 마라(3)
------------------------
이름: 심추현
나이: 21
성별: 남
상태: 양호
-능력치-
근력: D
민첩: D
내구: D
체력: D
마력: D
행운: B
성향: 이기주의적 성향
SKILL -
정보 권한이 하위에 해당함으로 능력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
'이새끼는 D랑 친구먹었나…거기에 이기주의?'
"너도 탈락."
"아니, 왜…."
"너도 조금 전에 나간 새끼처럼 머그컵으로 맞아볼래?"
김현우가 손잡이만 남아 있는 머그컵을 흔들자 그는 히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 빠져나갔다.
김현우는 도망치듯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를 한심하게 바라본 뒤, 피식 웃으며 앞에 떠올라 있는 로그를 바라봤다.
'이거, 상당히 도움 되는데?'
이번에 아브에게 업그레이드 받은 정보 권한은 인재를 뽑는 데에 한해서 굉장한 시너지를 발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너무 많이 거르긴 했는데….'
김현우는 이 자그마한 사무실에 134명의 헌터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가 134명의 헌터중에서 122번째를 볼 때까지 뽑은 헌터는 15명, 원래 능력 부분을 중점으로 보지 않으려고 하긴 했지만, 김현우의 업그레이드 된 정보 권한은 그의 그런 생각을 확실하게 어드바이스했다.
덕분에 김현우가 본건 오로지 성향.
보스를 잡지 않아도 좋았다.
어차피 그건 동료 길드들과 동맹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동료 길드의 길드원들이 잡으면 되는 거니까.
그렇기에 지금 김현우에게 필요한 것은 잘 싸우는 길드원들이 아니라 몰래 뒷돈 안 빼먹고 고스란히 회사로 가져오는 헌터들이었다.
한마디로 능력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다음."
김현우가 입을 열자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헌터 세 명이 차례대로 들어왔다.
"뭐야? 너희들은 왜 세트로 들어오냐?"
김현우의 물음에 제일 앞에서 들어왔던 헌터, 이천이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파티로 가입 신청해도 된다고 들어서…."
"…들어와."
그게 뭔데? 라고 물으려던 김현우였으나 또 그렇게 실랑이하기도 귀찮았기에 김현우는 그냥 세 명 다 들여보냈다.
김현우의 앞에 세 명이 전부 서자 김현우는 아래에 있는 서류를 흘끔 보곤 정보 권한을 이용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헌터들의 정보를 읽어 들였다.
------------------------
이름: 이천
나이: 27
성별: 남
상태: 양호
-능력치-
근력: C+
민첩: C-
내구: D
체력: C++
마력: E++
행운: B
성향: 자기희생적 성향
SKILL -
정보 권한이 하위에 해당함으로 능력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
이름: 이민영
나이: 23
성별: 여
상태: 양호
-능력치-
근력: D++
민첩: B-
내구: D-
체력: C-
마력: D-
행운: B
성향: 기회주의적 성향
SKILL -
정보 권한이 하위에 해당함으로 능력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
이름: 김창석
나이: 28
성별: 남
상태: 양호
-능력치-
근력: D-
민첩: D+
내구: D-
체력: C-
마력: C++
행운: B
성향: 우정 중심 성향
SKILL -
정보 권한이 하위에 해당함으로 능력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
'…두 놈은 마음에 드는데….'
양옆의 남자는 각각 자기희생적 성향과 우정 중심 성향이었다.
뭐, 능력치는 다른 헌터들과 같이 별로 특별할 게 없었다만 뭐 어떤가, 김현우가 바라는 것은 그냥 던전 제때제때 잘 지켜주는 헌터다.
'근데 얘는 좀…기회주의자?'
김창석의 우정 중심 성향도 마찬가지지만 이것도 또 처음 보는 성향이었다.
'나쁜 건가?'
기회주의……기회주의자…? 기회주의자는 이기주의자랑 똑같은 거 아닌가?
다른 게 뭐야?
순간 김현우의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지식이 똬리를 풀고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으나 그는 쉽게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쯧."
김현우가 혀를 차가 이천을 포함한 헌터들은 저도 모르게 얼어버린 상태로 김현우를 바라보았다.
탈락하나?
이천의 머리에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쯤, 김현우가 말했다.
"셋 다 합격."
"허, 헉! 정말요?"
"그럼 뻥으로 말하겠니? 나가라."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혹시 김현우가 다른 말을 할까 서둘러 나간 그들을 보며 김현우는 들고 있던 볼펜으로 3개의 번호를 동그라미 쳤다.
이로써 총 18개가 된 동그라미표.
"쯧."
'인원만 더 있었으면 그 여자는 빼는 건데.'
김현우가 그들을 그냥 전부 합격시킨 이유는 단순히 합격 인원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합격 인원이 부족하면 그 수 많은 서류를 꺼내 보고 다시 면접자를 모은 다음 합격자를 뽑으면 됐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그냥 김현우가 귀찮기 때문.
'기회주의는 이기주의랑 다를 수도 있지 뭐.'
그런 귀차니즘 덕분에 '기회주의'라는 성향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길드 면접에서 통과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이민영은 사무실에서 빠져나가자마자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렇게 '가디언' 길드의 면접심사는 약 1시간 30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모두 끝났다.
김현우가 가지고 있는 정보 권한 덕분이었다.
그렇게 김현우가 가디언 길드의 인원수를 정확히 21명으로 맞추고 만족스러운 미소 짓고 있을 때쯤, 강남에 있는 아레스 길드의 지하 5층.
"…."
우천명은 슬쩍 시선을 돌려 이제 막 오후 4시를 가리키기 시작한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후우우우우-
분명 바람 한 점 들어올 수 없는 이 지하 공간에 갑작스럽게 불기 시작하는 바람을 느끼며 우천명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사무실의 빈 바닥에 보라색의 마법진이 그려진다.
한 겹.
두 겹.
세 겹.
네 겹.
연속으로 겹쳐진 마법진은 처음 내뱉었던 보랏빛 마력을 주변으로 방출했고. 그와 함께 마법진이 있던 곳에는 한 남자가 나타났다.
온몸에 검은 정장을 입고, 머리에는 중절모를 쓴 남자.
검은색 중절모 사이에 보이는 금발과 모자 챙 아래에 감춰져 있는 벽안이 우천명을 바라보고 이내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상담'요청을 받았는데, 그게 이곳이 맞습니까?"
남자의 정중한 말투에 우천명은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그럼 잠깐 자리에 앉도록 하지."
그는 곧바로 그렇게 말하더니 우천명의 별다른 허락 없이 앞에 있는 테이블 소파에 앉았고, 다리를 꼬았다.
실로 거만한 자세.
하지만 우천명은 그런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그의 앞에 와 있는 남자는 우천명도 잘 알고 있는 남자였으니까.
"……전 S등급 헌터랭킹 72위, 건슬링어 잭……."
그는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자리에 있던 헌터였다.
우천명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저도 모르게 헙 하고 입을 닫자 그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아직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놀랍군, 내가 퇴출당한 지 벌써 5년째인데……."
"흠흠. 죄송합니다."
"아니, 그렇게 죄송할 건 없지. 내 이야기를 밖으로 떠벌리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야…… 밖으로."
그는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지포라이터를 꺼내 그 입구를 열었다가-팅-!
닫았다.
탁-!
그 모습에 우천명은 순간 알 수 없는 소름을 느꼈지만, 곧 서둘러 그의 앞에 다가가 앉았다.
"그래서, 아레스 길드가 굳이 '기사단'을 안 쓰고 우리에게 의뢰하는 이유는?"
"그, 사정이 있어서."
우천명의 말에 잭은 뚱한 표정으로 지포라이터를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뭐, 괜한 걸 물어봤군. 그렇지. 우리는 그저 의뢰를 들어보고 마음에 들면 할 뿐이니까."
그는 피식 웃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맡아야 할 의뢰인은 누구지?"
"아마 당신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겁니다."
우천명은 그렇게 말하며 미리 준비해 놓았던 서류를 잭에게 건네주었고 여유롭게 서류철을 받아 펼쳐본 잭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아, 이 녀석은, 그 녀석이지? 이번에 크레바스에서 '재앙'을 막았다는."
"예, 맞습니다."
우천명은 잭의 표정을 살피더니 서둘러 말을 덧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판데모니엄에게 섣불리 딜을 치려 하거나 동정표를 구하는 것은 하책.'
우천명이 한참 뒷세계에서 구를 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이야기를 가이드 삼아 입을 다물었고, 잭은 한참이나 서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래서, 아레스 길드 한국지부에서는, 이 '김현우'라는 헌터를 우리가 처리해 주었으면 한다 이거지?"
"네, 맞습니다."
우천명의 대답에 잭은 고민하듯 지포라이터를 열었다 닫았다.
팅-! 하는 깔끔한 소리가 사무실에 주기적으로 울려 퍼졌으나, 우천명은 잠자코 잭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곧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거, 좀 비싸겠는데?"
"……그렇습니까?"
"생각해 봐, 물론 상대는 S등급 랭킹에도 이름을 안 올린, 그야말로 이제 막 탑에서 막 나온 초짜지만 그 녀석이 한 일은 일개 헌터가 해냈다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사무실에 잠시간 일어난 정적.
잭이 말했다.
"200."
"예?"
"200억이다."
"2, 200억…?"
"그래, 그나마 김현우 이 친구가 아직 S등급 랭커에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정도로 잡은 거지, 원래는 조금 더 받아야 돼."
잭의 말에 우천명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250억,
잭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그 200억이라는 단어에 당황하기를 잠시, 우천명은 곧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자금은 흑선우가 어떻게든 대보겠다고 확언을 들은 상태였다.
그리고 어차피 김현우를 죽이지 않는다면 이 상황은 해결할 수 없게 돼버렸다.
모든 상황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해결하기 위해서는 김현우, 그 녀석이 던전의 독점권을 가져가는 2주라는 기간 안에 죽어줘야만 했다.
잭은 우천명의 대답에 무척이나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선택을 잘했어. 남자가 한번 정했으면 끝까지 가는 패기는 있어야지."
그렇게 말한 잭은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스마트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기 시작하자마자 그의 아래에 아까와도 같은 보라색의 마법진이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잭은 그에게 서류 한 장을 날렸다.
"입금 방법은 거기에 있으니 참고하고, 혹시 의뢰를 맡긴 그 친구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녀석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전투'와 '암살'은 다른 거거든. 게다가-
그의 말과 함꼐 보랏빛을 내는 마법진이 겹치기 시작하자 그는 입가를 씩 올렸다.
" 판데모니엄에서 그 목표물을 처리하기 위해 가는 사람은 4명이 될 테니까."
그 말과 함께 다시 한번 마법진을 타고 사라지는 잭을, 우천명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 42
042. 순위 좀 높다고 깝치지 마라(1)
"야, 너희들은 몇 위냐?"
"뭘 물어보는 거예요?"
"그거 있잖아 S등급 랭킹?"
스시집에 와서 에피타이져를 먹는 중 갑작스레 물어온 김현우.
김시현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제가 아마 이번 분기 163위인가 그럴걸요?"
"석원이 형이랑 서연이는?"
"나는 175위고…서연이가 아마 가장 높았나?"
"네, 제가 161위요."
"…어째 그렇게 안 높다?"
김시현의 말에 김시현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 이런 말 하면 좀 자랑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200위 위쪽부터는 어딜 가서든 전부 알아줘요."
"……그래?"
김현우가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지만 12년 전 탑에 들어와 처음으로 탑을 빠져나온 김현우의 동료들은 전 세계에서 충분히 '괴물'로 불릴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제 막 전 세계에서 5000명을 넘고 있는 S등급 헌터.
그 5000명도 수많은 헌터 중에서 고르고 골라진 S등급 헌터였다.
그런데 그런 S등급의 헌터 중에서도 상위.
물론 100위권 내에 들어가면 더한 괴물들이 존재하고, 50위권 아래로 내려가면 '인외'라고 말 할 수 있는 헌터들이 득실거리긴 했으나, 아무튼 김현우의 동료들도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요?"
"아니, 그냥 문득 생각나서, 저번에 유튜X 보다가 S등급 랭킹표를 세대별로 정리해 놓은 걸 봤는데, 한번 랭킹표가 바뀔 때마다 사라지는 이름들이 너무 많아서."
다 뒈지는 거냐?
김현우의 물음에 이서연은 미묘하게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음, 오빠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요. S등급 헌터는 많이 죽거든요."
"왜? S등급이면 강한 녀석들 아니야? 강한 녀석들이 오히려 더 많이 죽는다고?"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말하자 한석원이 대신해서 답변했다.
"그래. 미궁에서 아티팩트 찾다가 죽지. S등급 정도 되면 미궁 하위층까지는 어떻게 내려가 볼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한마디로 전투능력을 조금이라도 더 올리려고 좋은 아이템 파밍하러 갔다가 죽는다는 거네?"
"그렇지."
"아니, 그냥 수련하면 되잖아?"
그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게 되면 다들 그렇게 할 텐데, 유감스럽게도 형 말처럼 모든 게 수련으로 올라가지 않거든요."
"뭐?"
그 뒤로 김현우는 그 동안 자신이 몰랐던 사실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출발의 탑에서 빠져나온 능력치 기준 3등급 이상은…… 능력치가 올라가지 않는다고?"
"네, 마력은 후천적으로 올라가는 거라 또 재능의 문제인데 모든 능력치는 탑에서 빠져나온 그 능력치를 기준으로 3등급까지밖에는 안 올라가요."
한 마디로 자기가 근력 C-로 빠져나왔으면, 근력을 최대치로 올릴 수 있는 건 A- 라는 소리죠.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물론 올릴 수는 있어요. 다만 그건 시스템의 보정을 받는 것보다 엄청난 시간을 할애해야 해요. 원래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 능력을 어거지로 올리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그렇게 어거지로 올리는 것보다 미궁 지하에 묻혀있는 아티팩트로 전력 상승을 꾀한다?"
"그렇죠."
형은 잘 몰랐겠지만, 이라고 말을 이으며 김시현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미궁의 깊은 곳에 들어가면 등급 ST+ 라는 아이템이 있어요. 그리고 그 아이템은 사용자의 능력치를 강제적으로 한 단계 끌어 올려주는 역할을 해요."
"능력치가 S등급이라도?"
김현우가 알기로 시스템상에 표시되는 등급은 S등급이 끝이었다.
"능력치가 S등급이면 SS등급으로 올라가죠. 실제로 S등급 랭킹 10위 권 내의 헌터들은 전부 그런 ST+ 아이템을 가지고 있고요."
김현우는 유튜X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막 메인으로 나온 스시를 집어 먹다 이어서 물었다.
"아니, 근데 서연이의 그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소리는 뭐야?"
"그건 S등급 헌터 중에서 '머더러 헌터'로 빠지는 친구들이 많아서 그래요."
"…머더러 헌터?"
"그냥 이름 그대로 살인자 헌터를 말하는 거예요, 범죄 저지른 애들이요."
뭐, 뒤에서야 알게 모르게 다들 슥슥 해버리지만….
이서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걸 이제 사회적 이슈로 만들면 S등급 헌터에서 제명되고 협회한테 현상금이 걸리거든요."
"……그 S등급들이 머더러 헌터가 되는 이유는 다른 순위 헌터들 아티팩트 뺏으려고……?"
"딩동댕."
이서연이 맥빠지는 소리를 내며 스시를 집어먹자 김현우는 '허' 하고 웃으며 스시를 집어 먹었다.
"사람 사는 곳 다를 거 하나 없다더니 어떻게 안 봐도 비디오냐. 그래서 그렇게 해서 아티팩트 빼앗으면 뭐해? 어차피 범죄자로 걸리는데?"
"안 걸리게 빼앗으면 되죠. 아, 뭐 몇 년 전에 그렇게 뺏다가 걸려서 국제적으로 수배 걸린 애들도 몇 명 있긴 한데……."
"그래? 누구?"
"한 명은 70위쯤이었나? 총을 쓰는 헌터였는데, 혼자서 몬스터 학살하는 게 발군이었죠. 걔랑…그 50위 근처에 한 명 있었어요. 어떤 마법사."
"…마법사?"
김현우가 되묻자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근데 걔는 좀 특이한 게 전투 마법을 쓰는 게 아니라 마법진을 이용한 디버프 마법이 특기였죠."
"그럼 서포터형이야?"
"그렇죠. 그 애랑…… 또 몇 명 더 있긴 한데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네요, 뭐 이상한 무협지 많이 본 중국 칼잡이랑 일본 야쿠자였나? 아마 그 정도였을 거예요."
"넌 그걸 어떻게 그리 전부 기억하고 있냐?"
"그 이야기는 그때 헌터 활동했을 때쯤이었으면 다들 알고 있을걸요? 좀 유명했거든요."
"그래?"
"네, 그 새끼들 ST+ 등급 아티팩트에 미쳐서 100위권 S등급 랭커들을 다구리로 죽여 버렸거든요."
"아, 그때 유명했지."
"우리도 걱정하지 않았나?"
"우리가 걱정은 개뿔, 우리는 그때 아레스 길드랑 싸우느라 아티팩트 장비 하나도 없을 때잖아?"
"아……."
김시현과 한석원은 안 좋은 과거가 기억났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그들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든 말든 김현우는 어느새 앞의 스시를 먹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그렇게 스시를 먹던 도중, 이제 막 떠올랐다는 듯 입을 김시현은 입을 열었다.
"형."
"왜?"
"이번에 일본 측에서 형한테 연락 왔어요."
"무슨 연락?"
"그, '천마의 검'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던데요?"
"……천마의 검?"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되묻다가, 떠올랐다는 듯 아, 하고 탄성을 냈다.
"근데, 그게 왜?"
"결국 재앙인 '천마'는 형이 잡았으니까 일본 측에서 말도 없이 꿀꺽하기 그래서 연락했나 본데요? 천마의 칼을 어떻게 처분할 거냐고."
"아, 그래?"
"그래서 말인데……."
"?"
"그 검 저 주면 안돼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김시현의 눈가에 들어있는 기이한 열기.
김현우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뭐…네 마음대로 해라."
김현우는 미련 없이 김시현의 말에 대답했다.
"어?"
"왜?"
"아니 그, 이렇게 쉽게 허락받아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이 잠시."
"뭐, 내가 검을 쓰는 건 아니니까."
물론 검을 수련한 적이 있기는 하다.
검뿐만인가?
검, 방, 창, 도끼, 단검 그 이외에 몬스터가 들고나오는 무기는 전부 다 수집해서 사용해 본 적이 있었다.
뭐, 결국에는 무기 없으면 약해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그냥 맨몸으로만 무술을 수련했다.
김현우가 쉽게 허락하자 뭔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린 김시현은 멍하니 있다 씩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형."
"나는?"
"?"
그렇게 김시현이 대답하던 중 들려온 이서연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요?"
"아니 나 얻은 마법봉 같은 게 없는데?"
"우리 길드에 있는 마법진도 개박살 내놓고……."
이서연이 무표정하게 중얼거리자 김현우가 움찔했다.
그렇다, 김현우는 아직 이서연의 지하에 있는 그 마법진을 고쳐주지 않았다.
물론 고쳐주지 않으려던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아다리가 맞지 않아서 고치지 못했을 뿐이다.
결국 김현우는 슬쩍 눈을 피했다.
"천마의 검, 서연이 주는 걸로……."
"네!?"
김시현의 비명이 고급 스시집에 울려 퍼졌다.
***
"그래서, 이번에 의뢰받은 녀석이 그 녀석이라고?"
"그래."
"거참, 또 고생하게 생겼구만."
고풍스러운 방 안,
밖에는 독일의 풍경이 환하게 보이고, 고가의 원목으로 인테리어가 되어있는 집 안에서 총 4명의 인원은 상석의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 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느긋해 보였다.
바이올렛 색 머리를 가지고 있는, 얼굴에 회로문신을 한 여자는 느긋한 표정으로 소파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 앉아 있는 흑발의 남자는 자신의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잭의 맞은편에 있는 머리를 파란색으로 물들인 백인은 긴 청바지에 붉은 피로 물든 하얀색 반팔을 입은 채 앉아 있었다.
느긋해 보였지만, 그들은 모두 몇 년 전에는 헌터 협회로부터, 그리고 세계로부터 공격을 받던 S등급 헌터였다.
한 명 한 명이 국가전력으로 취급받는 괴물들.
그곳에서 잭은 입을 열었다.
"야, 아슬란, 너 또 납치했냐?"
"응."
"…미친 새끼, 그러다 걸리려면 어쩌려고?"
"안 걸려, 내가 괜히 5년 전에 마스터라는 이명을 얻었겠어?"
"그렇게 데려왔으면 좀 안 들키게 오래 가지고 놀던가."
"미안, 이번에는 50분 만에 죽여 버렸다."
아슬란의 산뜻한 미소에 잭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은 뒤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무튼 4명이 전부 가야 할 것 같은데 불만인 사람?"
"금액은?"
"아까 말했듯이 달러로 환산하면…한 2500만 달러?"
"나쁘지 않아…근데 아직 S등급 순위도 들지 않은 쩌리라며? 4명이 갈 필요 있어?"
한때는 S등급 랭커이자 검귀라고 불리던 남자 '이부키 아스오'의 말에 잭은 입을 열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 이번에 헌터 협회에서 새로 지정한 '재앙'을 죽인 녀석이야, 영상 봤어?"
"아니."
"그러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지, 그 녀석 이제 막 나온 신입이라 그렇지 실력은 50위권이 아니라 더 높아."
"…뭐?"
그게 말이 돼? 하는 표정으로 잭을 바라보는 아스오.
허나 대답한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확실히 영상을 보니까 적어도 우리보다는 강해."
"…S등급 순위도 제대로 안 든 놈이?"
아스오의 물음에 입을 연 사람은 바로 얼굴에 회로 문신을 한 여성.
그녀는 몇 년 전 S급 랭커에서 50위권을 차지했던, 그때에는 '서클러'라는 이명으로 불렸던, 아냐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살짝 찝찝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솔직히 나는 불만인데."
아냐의 말에 잭은 말했다.
"뭐가?"
"굳이 그런 괴물을 잡을 필요가 있을까? 보니까 아스오 빼고는 전부 영상을 본 것 같은데 걔는 완전히 괴물이잖아? 우리보다 훨씬 세 보이는 놈을 잡겠다고?"
아냐가 슬쩍 회의적으로 입을 열자, 잭은 슬쩍 생각하는 듯 하다가-
"확실히,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건 우리보다 강하기는 하지. 그래도-"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걔랑 싸우러 가는게 아니라 그 녀석을 암살하러 가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싸움과 암살은 다르다.
싸움이 순수하게 서로의 전력을 부딪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본다면. 암살은 은밀하게 때를 기다려 상대가 전력을 낼 수 없는 그 한순간에 끝내는 것을 말한다.
아냐가 고민하는 듯 하자 잭은 계속해서 말했다.
"게다다 그 녀석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우리는 4명이고 그쪽은 혼자야, 그뿐만 아니라 네 '디버프'가 들어가기만 하면, 그 녀석이 과연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잭이 말한 아냐의 고유 능력.
그 동안 판데모니엄이 50위 이상의 고위 헌터들을 죽일 수 있던 이유는 아냐의 고유능력인 '디버프'덕분이 컸다.
그렇기에 잭은 아냐의 고유능력에 절대적인 믿음을 보였고-그의 말에 아냐는 한동안 고민하는듯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잭은 이내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슬슬 준비해보자고."
# 43
043. 순위 좀 높다고 깝치지 마라(2)김현우는 김시현의 차에 탄 채로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다 걸린 영상을 보는 중이었다.
김현우의 영상 속에서는 어느 한 남자가 붉은색과 푸른색의 총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몬스터를 때려잡고 있었고, 차례로 영상의 화면이 바뀌며 또 다른 헌터들이 나왔다.
검 한 자루로 던전 내에 있는 산의 끝부분을 잘라내는 헌터.
또 다른 헌터든 아래에 몇 개의 마법진을 중복으로 깔아내 던전 내에 인위적인 지진을 일으키는 영상도 있었다.
하나같이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해내지 못할 일들을 행하고 있는 헌터들의 영상을 보고 있던 중 김시현이 말했다.
"형 뭘 그렇게 봐요?"
"몰라, 그냥 유튜X 영상 돌리다 보니까 나와서 보고 있는데?"
"어? 그거 머더러 헌터들 영상 같은데?"
"응? 머더러 헌터?"
"그, 전에 말해준 거 있잖아요? 머더러 헌터라고."
"아, 저번에 저녁 먹을 때 들었던?"
"네, 그거요."
김시현은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근데 좀 이상한데? 머더러 헌터 영상은 유튜X에서 자체적으로 규제하는데?"
"왜?"
"범죄자잖아요, 거기에 덤으로 요즘 대가리에 뇌 대신 우동사리 찬 놈들이 많아서 그런 간지나는 영상 보고 범죄자의 팬이 되는 애들도 종종 있거든요."
그래서 한 3~4년 전부터 머더러 헌터 관련 영상은 유튜X에서 싹 없앴을걸요?
김시현의 말에 그는 유튜X를 뒤로 돌렸다가 연관 영상을 다시 클릭했다.
[이 영상은 저작권법 위반으로 삭제되었습니다]
"헐. 진짜 삭제했잖아?"
"원래 다 잡는다니까요. 그걸 또 본 것도 신기하네."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얼마나 남았냐?"
"이제 곧 도착이에요. 그리고 정말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그는 말을 이었다.
"그, 저희는 그냥 적절하게 인사만 하고 사인만 해서 검만 받아오면 되는 거 알죠? 거기 가서 뭐 다른 거 할 필요 없어요."
그의 말에 김현우는 불퉁하게 대답했다.
"야, 넌 내가 무슨 일을 개판치고 다니는 놈으로 보냐?"
"……형,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
"양심 찾았어요?"
"가기나 해."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피식 웃으며 차를 몰았다.
그들이 가고 있는 곳은 여의도 쪽에 있는 국제 홀이었다.
그렇다면 김현우와 김시현이 그곳에 가고 있는 이유는?
바로 요전 '재앙'인 천마를 잡고 그가 가져가지 않은 '천마의 검'을 일본에게서 돌려받기 위해서였다.
그날 저녁부터 지난 3일간, 일본은 은근슬쩍 천마의 검을 꿀꺽하려 했으나, 김현우의 요구에 결국 검을 뱉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기에 일본은 '천마의 검'을 그에게 돌려주는 대신 요구 아닌 요구를 했다.
그것은 바로 김시현과 김현우가 참가하는 국제 친목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뭐, 말이 친목회지 그냥 정치 놀음이겠지만.
아마 그들은 '천마의 검'을 먹어치우는 것보다, 김현우와의 커넥션을 만들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 한 것 같았다.
"아~ 집 가고 싶다."
정작 그 정치권의 대상인 김현우는 머리에 그런 생각 따위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뒤, 김현우와 김시현은 국제 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일은 일사천리였다.
김현우는 곧바로 국제 홀에 들어가 한국말인데도 도저히 뭐라고 떠들어대는지 알 수 없는 간단한 의례를 끝낸 뒤 사인을 하고 일본의 총리에게서 천마의 검을 받았다.
그때는 몰라봤는데 딱 보니 상당히 고풍스러운 느낌이 났다.
자기가 직접 받은 것도 아닌데 좋아서 미치려는 김시현에게 그렇게 바라던 천마의 검을 쥐어주고, 김현우는 두말할 것도 없이 홀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안녕하세요?"
"아, 예, 나카가와 씨?"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이네요."
"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고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를 얼굴에 써 붙여놓은 김현우는 그 상태로 건물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혹시, 괜찮다면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이번에 두 번째로 그를 만난 나카가와 야스미는 묘하게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다.
***
중국 시안의 지하.
'헌터'가 생기고 나서부터 은연중에 시안시에 만들어진 지하 거리는 중국에서 이뤄지는 모든 암거래의 중심지였다.
팔지 않는 것은 없었다.
마약부터 시작해서 인간까지.
원하는 것이면 모든 지 얻을 수 있다.
그래, 돈만 내면.
그렇게 성장해 온 곳이 바로 시안의 지하 도시이고, 그 지하 도시의 뒤에는 위연 길드가 있었다.
뒤에서 모든 암거래의 수수료를 먹어치우는 지하 도시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바로 위연 길드였고.
그렇기에 위연 길드의 본거지는 시안에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은 길드원들이 시안시의 지하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끄아아아악!"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금색의 진달래가 수놓아진 치파오를 입고 지하도시의 거리를 걷는 소녀.
그녀의 주변에는 다른 사람도 없었다.
혼자.
그녀는 혼자였다.
자신의 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구매자도 헉하는 사이에 '물품'으로 전락하는 그곳에서 소녀는 무척이나 태평하게, 얼굴에는 미소를 띠며 걷고 있었다.
그렇게 미소를 띠며 걷고 있는 소녀의 앞에는 무수히 많은 헌터들이 있었다.
그들은 위연 길드의 길드원들,
위연 길드의 길드원들은 소녀가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던 중.
"으아아아아!"
승진에 욕심이 멀었던 한 남자가 소녀를 향해 돌격하고,
-핏
그대로 몸이 절반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그렇게 소녀가 걸어왔던 길에 핏빛이 하나 더해졌을 때, 문득 그녀의 앞에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이, 이도천 님!"
"ㅅ, 수라귀 이도천 님이다…!"
소녀 한 명에게 그저 뒤로 밀리기만 했던 위연 길드원들 사이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수라귀 이도천,
그는 위연 길드의 5강자 중 한 명이자, 5명밖에 없는 위급 중, 제4위급을 차지하고 있는 남자였다.
S등급 세계랭킹에서는 82위라는 순위를 가지고 있고, '수라귀'라는 이명이 붙어 있는 그 남자.
이도천은 소녀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네 녀석, 패도 길드에서 나온 년이냐?"
묵직한 음성.
그의 물음에 소녀는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이는 그녀의 말투에 이도천의 얼굴이 굳었고. 이내 그는 시선을 돌려 그녀의 뒤에 있는 광경을 바라보고는 혀를 찼다.
"쯧…."
그곳에는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헌터들의 시체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방에 널브러져 있고,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지하바닥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핏빛의 길이, 그 소녀의 뒤에 펼쳐져 있었다.
이도천은 그 사이사이에 껴있는 A등급 헌터와 하위 랭킹의 S등급 헌터가 껴있는 것을 보며 이내 눈앞의 소녀를 노려보곤 말했다.
"혼자 왔나?"
"보이지 않나?"
양손을 슥 올리는 소녀의 모습에 그는 대답했다.
"미쳤군."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곳은 위연 길드의 최대 요충지다. 지금 이곳에서는 나를 포함한 3위급과 5위급이 있지. 그들도 지금 이곳으로 오는 중이다."
"그래서?"
"거기에 수많은 위연 길드의 헌터들을, 너 혼자서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녀의 힘은 강하다.
당장 그녀의 뒤에 만들어져 있는 저 광경만 보더라도 이도천은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허나 3위급과 5위급이 오고, 이 지하 도시를 관리하는 헌터들이 전부 몰려든다고 하면, 그녀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이도천은 생각했다.
헌터들이 괜히 길드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숫자의 폭력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다.
'마치 한 손바닥으로 열 손바닥을 막을 수 없는 거처럼 말이지.'
그렇게 생각은 이도천은 목소리에 약간의 비웃음을 섞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으나-그녀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좀 더 끌어 올렸다.
그리고-
"좋은 날이구나, 좋은 날이야."
그녀는 마치 노래를 부르듯, 그렇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스승님에게 인정받아서 좋고…."
그녀는 자신의 사이드 테일을 만지작거리며 그들을 바라봤다.
"굳이 일일이 찾아가야 했던 녀석들이 한 곳에 모여 있으니 따로 찾아갈 필요가 없어서 좋고…."
응? 안 그래?
동의를 구하듯 입을 여는 그녀, '미령'의 모습에 이도천이 '허'하는 웃음을 흘렸다.
'지독하게도 오만하군.'
지독한 오만,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의 오만함이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도천이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섬뜩했던 것은-
"…."
-그런 '오만함'이, 그녀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
이도천은 검을 뽑았다.
3위급과 5위급이 오기 전이었으나, 그는 불현듯,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협감에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고.
그런 이도천의 모습에 그녀는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자세를 취했다.
"영광으로 알 거라. 너희에게는 아까운 기술이지만, 스승님을 한시라도 빨리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으니."
그녀의 양다리가 적절하게 앞뒤로 벌어지며 어깨가 벌어진다.
"그 아둔한 눈으로, 조금이라도 보도록 하거라-"
오른손은 배 아래에, 그리고 왼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려 쭉 핀 손.
"이게, 무(武)라는 것이다."
손바닥을 펼친 채 마치 길이를 가늠하듯 한쪽 눈을 감은 미령은-
"엇-?"
이도천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있는 누구도 보지 못했다.
느끼지 못했다.
인지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도약하기 위한 자세가 아니었다.
그저 그 자세는 기수식이었다.
이제 무술을 시작하겠다는 의미의 단순한 기수식.
이도천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미령의 모습을 보며 본능적으로 들고 있던 검을 움직였으나, 이미 그녀의 펴진 손바닥은-
"극(極)-"
이미 굳게 쥐어져 있었다.
"-패왕경(?王勁)."
콰아아아아아아!!!
그와 함께 지하도시를 울리는 엄청난 소음, 미령의 주먹 끝에서 빠져나간 붉은 마력은 마치 플라즈마 포처럼 부채꼴의 모양으로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웠고, 이내 청력마저 먹어치운 그 붉은색의 마력이 사라졌을 때, 그녀의 앞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하에 만들어진 도시들은 그 형태를 잃고 모조리 사라졌으며 그녀의 앞에 보이는 것은 붉게 타오르고 있는 바닥뿐.
허나 그 참혹한 장면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미령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어제의 일을 기억했다.
며칠 전, 아레스 길드에게 당했다가 돌아온 길드원에게서, 그녀는 스승의 전언을 들을 수 있었다.
'찾아오지 말라.'
그분은 그저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뜻을, '미령'은 이해했다.
우매한 제자가 아직 지키지 못한 맹세를 이룰 수 있도록 '기다리겠다'는 뜻으로, '미령'은 김현우게 홍린에게 한 말을 이해해 버렸다.
그렇기에 그녀는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몸이 덜덜 떨려오는 그 환희.
이 땅에 스승의 자리를 위해 하는 일이 인정받았다는 그 충족감은 탑에서 빠져나온 뒤 서서히 사그라져 버린 그녀의 욕구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새하얀 피부에는 그 누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붉은 홍조가 들게 했다.
그 결과, 미령은 직접 행동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 이상 어떤 무감정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눈동자에 들어있는 것은 환희와 열락. 그리고 어떠한 욕구.
'중국의 전부를 최대한 빨리 손안에 넣는다.'
그 한 가지의 욕구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끝없이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중국을 손에 넣는가?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을 위해-
스승님이 앉을 자리를 위해-
지금도 그녀의 손아귀에 중국의 절반이 손에 들어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전부.
스승님이 앉을 자리를 위해서는 전부가 필요했다.
전부가.
저 멀리에서 느껴지는 마력과 함께 자신 쪽으로 뛰어오는 수십의 마력들을 느끼며 미령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소녀의 목소리로-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스승님."
츄릅-
자신의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 44
044. 순위 좀 높다고 깝치지 마라(3)
"아아, 이것은 '노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스마트폰을 끈 김현우.
"…형 뭐 해요?"
국제 홀에서 일어난 시상식을 맞추고 돌아가는 길, 갑자기 중얼거리는 김현우를 보며 김시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일본 웹소설 보는데?"
"…일본 웹소? 형 단어…아…."
김시현은 그렇게 말하려다 그의 오른손에 검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의 존재를 확인했다.
원래라면 상당히 귀한 물건이라 반드시 돌려받으려 했지만, 김현우가 천마의 검을 선물로 주었기에 김시현은 더 이상 번역 반지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천마의 검과 번역 반지의 저울추를 재면 압도적으로 천마의 검이 높았으니까.
"…근데 일본 웹소설은 갑자기 왜요?"
"그냥, 아까 그 나카가와가 일본 글도 재미있다고 하길래 한번 봤지."
근데 나하고는 안 맞네. 이상한 걸 봐서 그런가?
김현우가 묘하게 고민하는 투로 스마트폰을 바라보자 김시현은 물었다.
"아까 나카가와 씨랑은 무슨 이야기 한 거예요?"
"몰라, 그냥 와서……."
김현우는 아까 전, 국제 홀에서 만났던 나카가와 야스미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이야기하자 그래서 그럭저럭 이야기에 어울려 줬는데 듣다 보니까 그냥 별소리 안 하는 것 같아서 나와 버렸다.
"…기억 안 난다."
"…뭐라고요?"
"아니, 분명 이런저런 소리를 했는데 내가 초반 빼고는 주의 깊게 안 들었거든. 아, 그래도 마지막에는 일본 올 때 꼭 이자나미에 들려달라고 하더라."
보답한다고,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는 껐던 스마트폰을 켰고, 김시현은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나카가와 야스미.
그녀가 오늘 친목회에 굳이 따라온 이유는 김현우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김현우와 친해지기 위해서,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김현우를 꼬시기 위해서 왔다.
그녀가 은연중에 봤던 김현우의 힘은 탑을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헌터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했으니까.
그렇기에 그가 조금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전에 그녀는 김현우를 꼬셔 보고자 했다.
물론-
"진짜 존나 노잼이네."
애초에 그녀에게 별 관심도 없는 김현우 덕분에 나카가와의 혼신을 다한, 어쩌면 굉장히 노골적일지도 모르는 구애를 김현우는 전부 씹어버렸다.
김현우는 김이 팍 샌다는 듯 스마트폰을 주머니 안에 집어넣은 뒤 입을 열었다.
"야, 시현아."
"왜요?"
"가는 길에 '눈에 보이는 늪'에 좀 내려다 주고 가라."
"거기는 왜요?"
"보니까 오늘이 보스 잡는 날이던데?"
"응? 형이 벌써 보스 잡으려고요?"
"이제 내 던전인데 돈 뽑아먹을 건 빨리빨리 뽑아먹어야지."
"아니, 근데 양도권 이전은 아직 안 끝나지 않았나?"
"괜찮아 이미 내가 전화해 뒀거든, 이번 보스부터는 내가 만든 길드인 '가디언'에서 관리한다고."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차를 그쪽으로 돌렸다.
뭐, 김현우의 말이 맞기는 맞았다.
독점 던전의 보스는 나오는 즉시 잡는 게 좋았으니까.
그렇게 달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김시현은 꽤 빠른 시간 안에 김현우를 '눈에 보이는 늪'의 던전 입구에 데려다줄 수 있었다.
"기다릴까요?"
"아니, 먼저 가. 던전 보스 처리하고 알아서 택시 타고 갈게."
얼마 전 김시현에게 받은 지갑을 흔들자 그는 알았다는 말과 함께 곧바로 차를 타고 저 멀리 사라져 버렸고, 그 모습을 보던 김현우는 몸을 돌려 던전 입구를 향해 걸었다.
드르륵.
던전 입구 앞에 있는 매대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직 양도 일이 전부 지나지 않아 던전을 지키고 있는 아레스 길드원들이 있었다.
"누구…힉!"
"어?"
김현우가 들어가자마자 앉아있던 아레스 길드원들은 그를 보며 기겁했고, 김현우는 곧 서 있는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기, 김현우……!"
"사람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면 쓰나, 슬리퍼로 덜 맞았어?"
김현우는 얼굴을 찌푸리는 남자를 보며 그가 얼마 전 자신에게 슬리퍼로 두들겨 맞았던 헌터 중 한 명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유롭게 걸어간 그는 터벅터벅 걸어가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입을 열었다.
"나 던전 들어간다? 이제 이 던전 내 거니까 별문제 없지? 응?"
"예…예예……."
꼬리를 만 개처럼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는 남자를 본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던전의 입구를 향해 들어갔다.
던전 안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익숙한 지형이었다.
가끔가다 멀쩡하게 있는 바닥, 그 사이사이에는 늪지대가 있었고, 그 늪지대 아래에는 머리통 끝부분만 내놓고 돌아다니는 엘리게이터들이 있었다.
김현우는 그런 엘리게이터들을 뛰어넘어 곧바로 던전의 가운데로 몸을 움직였다.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튀어나가며 주변의 늪지대를 통과하고, 몇 번의 도약 만에 이 던전의 보스인 메가 엘리게이터가 존재하는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
김현우는 이미 몸이 절반으로 갈라진 채 죽어 있는 메가 엘리게이터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다. 이내 그런 보스 몬스터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철판 견갑을 입고 있는 금발 벽안의 남자.
한 손에 지포라이터를 쥐고 있는 그 남자는 김현우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지랄."
김현우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남자는 순간 몸을 굳혔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입이 좀 험하시군요."
"이번에도 아레스 길드냐?"
이 새끼들 또 지랄버튼 눌렀어?
김현우가 같잖지도 않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자 맞은편에 있던 남자, '잭'의 눈가가 슬쩍 찌푸려졌으나,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아레스 길드에서 보내긴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저는 그 길드 소속이 아닙니다."
"그럼 넌 뭔데? 용병이냐?"
김현우의 말에 잭은 슥 하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바로 맞추셨군요. 맞습니다, 저희들은 정확히 말하면 아레스 길드가 고용한 용병입니다. 이름은 '판데모니엄'이라고 하죠."
"좆 까고 있네. 판데모니엄마다, 병신들아."
훅 들어오는 김현우의 패드립에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문 잭.
최근만 해도 욕설은 씨발 개새끼에서 끝나던 김현우였지만, 점점 스마트폰과 인터넷 사용이 익숙해진 그는 남는 시간을 하루 종일 인터넷 서핑과 게임을 하는 데 사용했고.
"저희가 누구신지 모르시나 본데……."
그 시간은 곧 정말 자연스럽게 김현우의 언변 스킬을 상승시켜주었다.
"모르니까 이러지, 알면 이 지랄 하고 있겠냐?"
…물론 좋은 쪽은 아니었다.
김현우는 그렇게 툴툴거리곤 어디 계속 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참, 인성이 개 같은 친구네."
그리고 마침내 잭의 입에서 존댓말이 아닌 반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너 같으면 딱 봐도 나 잡으러 온 녀석들한테 존댓말이 나오겠니? 시발 공감부적응자 새끼야?"
"그렇게 아가리를 싸게 놀리다가는 편하게 죽지 못하는 수가 있다."
"지랄 염병을 하세요.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하지 않았니? 아, 너희들은 뭐 용병이라고 했지?"
김현우는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휘휘 저으며 과한 제스쳐를 취했다.
"시발 그럼 좀 아레스 길드 애들한테 듣고 오지 그랬냐? 응? 그 레퍼토리 이미 세 번 이상 들었으니까 다른 걸로 바꿔오라고."
영화가 재미있어도 세 번이면 질리는데 너희들 레퍼토리는 한 번만 봐도 물려. 근데 그걸 세 번이나 하고 있냐?
김현우의 입에서 쉼 없이 쏟아지는 말에 잭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굳고, 마침내 인상까지 찌푸려진다.
허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미소를 짓곤 입을 열었다.
"왜? 이런 반응이 아니라 너희들이 누군지 물어 봐주길 그랬어?"
"……아가리 닥……."
"지랄, 그것도 레퍼토리 뻔~ 하다. 내가 물어보고 너희들이 멋들어지게 자기가 누군지 답하고 응?"
김현우는 피식피식 놀리려는 의도가 가득한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다음에 내가 왜 이런 정보 알려주는지 물으면 존나 진지하게 자세 잡고 어차피 당신은 여기서 살아가지 못할 테니까요~! 이 지랄 하겠지? 응? 틀리냐?"
"……."
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자신의 몸속에서 끌어 오르는 분노 때문도 있었지만, 김현우의 말이 놀랍게도 대부분 판데모니엄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수치심에 잭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총을 꺼내 들고 싶었으나 참았다.
아직은 참아야 할 때였다.
그리고-
-우우우우웅!!!
"?"
"후……."
김현우는 갑작스레 자신의 아래에 퍼지기 시작한 기괴한 형태의 마법진들을 바라봤고, 그제야 잭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키이이이잉!
마법진에서 화려한 마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김현우의 몸이 구속되기 시작했다.
"?!"
대형선박에서나 사용할 것 같은 거대한 보랏빛 사슬이 그의 몸을 묶고, 김현우의 위로 통상 중력보다 20배는 더한 중력이 가해진다.
그의 눈에 인식저해 마법이 걸리고, 귀는 끊임없이 이명을 만들어내며, 보랏빛 마력은 그의 달팽이관을 건드려 몸의 밸런스를 망가뜨린다.
그리고-
"이런 개새끼!"
빠아악!
잭은 손이 묶여 있는 김현우의 얼굴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후, 후……이런 개새끼가 말 진짜 엿같이 하네."
보랏빛 사슬에 묶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그를 보며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잭은 몇 번이고 그의 얼굴을 후려친 뒤에야 진정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잭이 김현우의 막말을 듣고 가만있었던 이유.
그것은 전부 '판데모니엄'의 마법사이자 '서클러'라고 불린 아냐의 마법진이 제대로 기동하기까지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혹시나 김현우가 판데모니엄의 전력보다 강하다고 해도, 아냐의 마법진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헌터는 일반인보다도 못한 상태가 되어버리니까.
그리고 아냐가 지금 보여준 힘은 잭이 그녀를 맹신하게 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강력했다.
김현우의 아래에 발동된 5개의 마법진은 마음대로 떠들어대던 그를 완전히 봉인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사슬의 묶인 김현우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찡그린 눈으로 잭을 바라보자, 잭은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상황이 이해가 되냐? 응?"
눈조차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찡그리는 모습에 잭은 키득키득 웃었고, 그 뒤를 따라 그들이 나왔다.
"뭐야 이거, 우리가 다 올 필요도 없었잖아?"
아스오가 자신의 검을 만지작거리며 늪지 근처의 숲에서 걸어 나오고, 그 뒤를 따라 판데모니엄의 맴버인 아슬란과 아냐가 걸어 나왔다.
그들은 맥이 빠진다는 듯, 마법진 중앙에 묶여 있는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러게 말이야. 이거 그냥 잭이랑 아냐만 있어도 될 뻔했네."
아스오가 김이 샌다는 듯 말하자 아냐가 눈을 얕게 뜨며 말했다.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내 말은 쓸데없는 인력 낭비는 하지 말자 이거지. 그보다 역시 아냐의 마법진은 봐도봐도 대단하네, 이 녀석 재앙 처리한 그 녀석 맞아?"
판데모니엄의 동료들도 아냐의 마법진이 얼마나 사기적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머더러로 찍히기 전, 그녀는 자신과 같은 50위권 대의 헌터를 마법진에 가두어 일반인보다도 못하게 만든 적이 있었으니까.
아스오가 새삼스럽게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말하자 아슬란은 김현우의 앞에 다가가 그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맞겠지. 얼굴은 똑같은데."
"너무 싱겁다."
"그렇지? 솔직히 나는 마법진에 안 걸리고 좀 날뛰어 줬으면 했는데."
"…왜 굳이?"
"그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
"무슨 모습?"
"한참 막 날뛰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 튀어나와서 심장에 칼을 박았을 때, 난처해하는 그 모습!"
"…너는 그 싸이코패스 같은 성격 좀 고쳐라."
"그래, 들어보니까 너는 좀 고치는 게 맞겠다."
"…응?"
아스오의 말 뒤에 들려온 자연스러운 대화 소리에 판데모니엄 일동의 동작이 멈추었다.
그리고-
"컥!?"
"!!!"
선박용으로 쓸 것 같은 굵은 사슬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조금 전까지 김현우의 앞에 있던 아슬란의 머리통을 잡아챘다.
뿌득- 뿌드득!
"끄악…… 끄아아아악!"
"왜, 상황이 이해가 안 돼?"
김현우의 선명한 눈동자가 앞에 서 있는 판데모니엄 일동을 바라보곤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알려주지."
그는 머리를 붙잡고 있던 아슬란의 머리를 자신을 묶고 있던 쇠사슬에 처박아 버렸다.
콰드득-
사슬의 접촉면에서 들리는 섬뜩한 소리.
김현우는 말했다.
"아아, 이것은-"
툭-투두두둑! 툭!!!!
"-너희들이 '좆됐다'는 것이다."
굵은 쇠사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 45
045. 순위 좀 높다고 깝치지 마라(4)
"이, 이런 미친……!"
"어떻게!?"
판데모니엄의 간부진들이 순식간에 산개한다.
잭이 들고 있던 지포 라이터가 순식간에 액체처럼 변해 그가 사용하는 두 개의 총으로 변한다.
아스오가 들고 있던 흑도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냐의 스테프가 보라색 마력을 강하게 발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김현우는 무척이나 느긋하게-투두둑…투두두두둑!!
자신의 온몸에 감겨 있는 사슬을 부쉈다.
콰치치치직!
겹쳐있던 5개의 마법진 중 하나가 사라진다.
크그그그그극-
"속사!"
잭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수많은 S급 헌터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갔던 총알을 쏘아 보낸다.
탕! 타타탕!
그가 들고 있는 총에서 솟구치는 화염과 소음.
일반적인 총알보다도 빠른 속도로 공기를 관통하며 날아가는 열두 발의 총알, 허나 그가 김현우의 온몸을 노리고 쏘아 보낸 12발의 총알은 김현우의 몸에 닿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잭이 날려 보냈던 총알은 전부….
"뭣…!?"
김현우가 내민 주먹 하나에, 전부 잡혔다.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지만, 잭은 알 수 있었다.
다른 녀석들보다 비정상적으로 민첩 등급이 높은 잭은, 그 한순간 날아가고 있던 총알들이 모조리 김현우의 주먹 하나에 막히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콰치치치직!
또 하나,
마법진이 사라진다.
"순간 일격"
아스오의 입에서 나온 그 언어가 시스템에 읽혀 들어가 그의 몸과 무기를 보정하기 시작한다.
그가 들고 있던 검이 순간 새하얗게 빛나고, 아스오는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그 상황에도 무척이나 침착하게 김현우를 노려,
츳-
검을 발도했다.
그렇게 해서 날아가는 것은 붉은색의 검기.
아스오가 '검귀'라는 이명을 가지게 해 주었던, 그 무엇도 베어버릴 수 있는 붉은색의 검기는,
"!?"
김현우가 가볍게 몸을 뒤트는 것으로 피했다.
김현우를 감싸고 있던 마법진이 또 하나 깨지고, 그의 다리를 묶고 있던 속박진이 사라진다.
그 상황에서-
김현우는 뒤로 튀어나간 세 명의 용병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실험해 보지 않았었지.'
탑에 갇혀 무술을 수련할 때.
김현우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그 모든 무술을 혼자 따라 해보고, 혼자 배웠다.
허나 그런 그가 유일하게 제대로 따라하지 못했던 무술과 기술들이 있었다.
바로 어떤 보조가 필요한 기술들.
순수하게 신체의 힘이 아닌, 웹소설에서 나오는 무술들은 거의 대부분이 신체의 힘 외에 보조적인 힘이 필요했다.
마력, 또 어느 곳에서는 내공, 다른 곳에서는 오라.
웹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능력들은 한 마디로 '마력'과 같은 보조능력의 존재성을 부각 시켰다.
그가 썼던 천마의 기술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김현우는 천마와의 싸움을 통해 마력을 얻었다.
그리고 곧 김현우가 천마의 기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건-
"아아, 이것은 '총알'이라는 것이다."
던지면 총알로 사용할 수 있지.
탑 안에서 마력이 없어 사용할 수 없었던 그 모든 기술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김현우의 손에 쥐어져 있던 총알들이 일순 그의 손을 떠나 하늘로 날아오른다.
누구의 시선에서는 빠르게, 허나 김현우의 시선에서는 무척이나 느리게 보이는 그 장면에서 김현우는 떠올렸다.
그것은 흔한 양판소 속에 나오는 장면이었다.
총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주인공이, 총을 잃어버려 더이상 공격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그는 총으로 총알을 발사하는 게 아닌-
"핸드-."
손가락 끝에 마력을 집중에 총알의 뒤를 치는 것으로, 총알을 발사했었다.
"-건!"
엄지와 검지를 들어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바꾼 김현우가 검지의 끝에 검붉은 마력을 모은다.
마력을 사용함으로 인해 이미 넓혀져 있는 혈도를 통해 그의 마력이 돌기 시작하고, 그의 검지에는 검붉은 마력이 넓게 퍼지다 일순 작게 응축된다.
손톱만큼 작게 응축된 김현우의 마력.
그 상태에서 김현우는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잭을 바라봤다.
서둘러 총을 조준하는 잭.
그 타이밍에 맞춰 김현우는 잭과 정확히 수평하는 한 발의 총알에 검지 끝을 가져다 댔고, 총알의 뒷부분과 검지가 닿는 그 순간-꽝!
응축시켜 놓았던 검은 마력을 검지에서 폭발시켰다.
김현우의 손에서 미사일이 터져나가는 것 같은 거대한 소리와 함께, 눈으로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총알이-
"끄…헉!?
-잭의 심장을 꿰뚫었다.
잭이 입고 있던 S등급의 방어구를 뚫고 들어간 총알.
그것은 정확히 잭의 심장 한가운데에 박혀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그의 죽음에 아냐와 아스오의 눈빛에 어스름한 공포가 깃든다.
본능적인 공포,
무엇으로 인해 공격당하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이들이 느끼는, 원초적인 공포감.
콰치치치직!
그러는 와중에도 김현우를 묶고 있는 마법진은 깨져나갔고, 김현우는 씩 웃음 지었다.
그가 탑 안에서 익혔던 수많은 기술들과 무술들이 자신의 손안에서 펼쳐지는 느낌.
그저 겉모습만 상상으로 익혔던 기술이 자신의 손을 통해 재현되는 모습은 김현우에게 썩 나쁘지 않은 고양감을 선사해 주었다.
김현우는 곧바로 다음 타깃을 정했다.
이번에는 흑도를 쥐고 있는 남자.
선택을 했기에 행동은 빨랐다.
그는 곧바로 몸을 움직여 반으로 갈라져 죽어 있는 메가 엘리게이터의 시체를 집어 들고는 곧바로 아스오에게 돌격했다.
그는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떴으나, 이내 잘되었다는 듯 발도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현우는 다시 한번 자신의 기억 한 구석에 있던 수많은 기술을 떠올렸고.
5M가 넘어가는 메가 엘리게이터의 몸 정도의 거대한 무기를 사용해야 했던 '남자'의 기술을 떠올렸다.
"거인-(巨人-)!"
전 세계가 거인에게 침략당해 지구가 멸망을 향해 걸어가던 때, 거인들을 막아내기 위해 거대한 망치를 무기로 삼은 어떤 남자의 기술.
"살-(殺)."
거인의 머리를 터뜨리기 위해 그 남자가 사용했던 기술이-꽈────앙!
김현우의 손에서 다시 한번 재현되었다.
아스오가 있던 지반에 마른 나뭇가지처럼 상흔이 새겨진다.
그나마 조금밖에 없던 땅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지고, 늪지의 물이 크게 터져나가며 물속에 있던 엘리게이터들이 하늘로 떠오른다.
그 상황에서, 이미 김현우는 하늘에 떠오른 엘리게이터를 밟고 마지막 남은 적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사…사사살려주세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항복에 주먹을 멈췄다.
그녀는 김현우가 공격을 멈췄다는 것을 깨달음과 함께 입을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여기서 죽기 싫어요? 네? 진짜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저, 저! 시키는 거 다 할 수 있어요! 네?"
"…그래? 다 할 수 있다고?"
"네, 네네! 저 다 할 수 있어요! 저 마법 잘하거든요? 네? 막 아이템도 C등급이긴 한데 잘 만들 수 있고-마……."
"그럼 뒤져."
김현우는 쥐었던 손을 크게 내리쳤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 자신을 공격했던 녀석을 살려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어떤 꼴을 보려고 살려주는가?
우선 적의를 품었고, 한번 제대로 싸웠다면 다시 화해라는 것은 없는 거라고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법진! 저 마법진도 그릴 수 있어요!"
아냐의 머리 1㎝ 정도에 멈춰진 김현우의 주먹.
"…마법진?"
"네, 네네! 마법진이요! 저 마법진도 잘 그리거든요? 저 있으면 여기저기 다 편하게 옮겨 다닐 수도 있고…… 네? 네? 진짜 편해요!"
비굴하게 헤헤 거리는 아냐를 보며 김현우는 짧게 고민하더니 물었다.
"마법진 고칠 수도 있냐?"
"네, 네네!! 당연하죠! 저 이래 봬도 명색이 서클러라는 이명까지 달았는데 그거 하나 못 고치겠습니까?"
김현우의 말에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비굴하게 양손을 비비며 말하는 아냐. 김현우는 그런 아냐를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네!"
'주,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아냐는 살고 싶었다.
조금 전,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보았던 것은 그저 데리고 왔던 자신의 동료들이 김현우의 공격 몇 번에 죽는 모습을 봤을 뿐.
그렇기에 그녀는 저항을 그만뒀다.
그리고 저항을 그만두는 대신 그녀는 목숨을 구걸했다.
그녀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김현우의 시선이 아냐를 유심히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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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아냐
나이: 23
성별: 여
상태: 양호 (불안, 초조)
-능력치-
근력: A-(B-)
민첩: S-
내구: A-
체력: B-
마력: S++
행운: B
성향: 생존주의
SKILL -
정보 권한이 하위에 해당함으로 능력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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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주의?'
김현우는 앞에 떠 있는 쭉 훑어본 김현우는 성향에 써져 있는 생존주의를 보며 슬쩍 고개를 갸웃했다.
'생존주의는 또 뭐지? 게다가 근력 표시는 또 뭐고.'
"흠…."
대충 감이 오기는 왔는데 역시 이 성향 시스템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다 몇 배는 낫지만.
김현우는 잠시간 그녀의 능력치를 보며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야."
"네…네네!"
"마법진 고치는 데 뭐 필요하냐?"
"그…아,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마력석 하고 제 손가락만 있으면…."
"그래? 그럼 스태프 내놔."
마치 동네 양아치처럼 당연하다는 듯 손을 척 내놓는 김현우의 모습에 아냐는 자신이 시안의 암거래장에서 산 40억짜리 스테프를 소중하다는 듯 쥐었으나, -이내.
"여기요……."
스테프를 김현우의 손에 쥐여주었다.
순간 아냐의 얼굴이 울상 비슷하게 변했으나, 김현우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스테프의 정보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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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람의 첫 번째 지팡이.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캐스팅 심화 , 캐스팅 가속 , 순간 주문 , 메모라이즈 , 자동 심화 , 마력 증폭-스킬, 정보 권한으로 숨겨진 설명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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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S+ 등급의 무기라 그런지 6개나 붙어있는 스킬을 보며 새삼스레 스테프를 다시 본 김현우는 이내 어깨에 스테프를 걸치고 말했다.
"벗어."
"네?"
"벗으라고."
"…버, 벗으라고요?"
"…그럼 안 벗게?"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아냐는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어떻게 하지?'
아니, 대충 예상을 하고 있기는 했다.
자신은 처음부터 마력 재능이 높아 랭커에 진입하기 전에도 좋은 길드에서 성장했던 반면 그녀와 함께 탑을 나온 동료들은 하나같이 험한 꼴을 당했다.
생각보다 재능이 없어 밑바닥 용병 생활을 전전하던 친구들이 많았고, 그런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는 헌터끼리 싸움이 났을 때, 여성 헌터는 곱게 죽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냐는 불안한 눈빛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여기서 거절하면 살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고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아까 전 그의 손속을 봤을 때, 거절하면 죽음뿐이었다.
그렇기에 고민하던 그녀는 조금이라도 생존할 수 있는 길을 택하기 위해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며 입고 있던 로브를 풀었다.
그 안에 입고 있는 분홍색의 반팔,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분홍색의 반팔을 벗기 시작했고-빡!
"꺄아아아---!?"
그녀는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고통에 뒷머리를 잡고 비명을 지르며 김현우를 바라봤다.
"장난치냐?"
김현우의 말에 순간 얼어붙은 그녀는 아, 아아 하며 입을 달달 떨었지만,
"아티팩트 벗으라고 미친년아."
빡!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뒤통수를 한 대 더 가격했다.
# 46
046. 정의봉(正意棒)을 아는가?(1)아랑 길드 지하에 있는 훈련실, 이제 막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는 훈련실에서 김현우와 아냐는 얼마 전, 김현우가 부순 마법진 앞에 서 있었다.
"고칠 수 있겠어?"
"네, 네."
"얼마나 걸리는데?"
"그, 이 마법진은 한번 깨지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하는 거라 그…최소 1주일 정도…."
"…1주일?"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면서 되묻자 그녀는 서둘러 말을 바꿨다.
"아, 아니. 5일…."
"5일…?"
"무조건 그 정도는 필요해요. 지, 진짜라고요!"
마치 혼나기 직전의 강아지 같은 얼굴로 목을 쓱 집어넣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김현우는 흠 하고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시작해."
"네네! 그, 그런데"
"뭐?"
"이……이거 전부 끝나면 저는 그, 살 수 있나요?"
아냐의 질문에 김현우는 흠…하며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는 거 봐서."
"네?"
"못 들었어? 하는 거 봐서라니까?"
그 질문에 아냐는 몸을 덜덜 떨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세상에."
그리고 그 옆에서 김현우와 아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서연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보며 마법진으로 걸어가고 있는 아냐를 보며 물었다.
"저기, 오빠."
"왜?"
"지금 저기 걸어가고 있는 애, '서클러'아니에요?"
서클러.
이서연은 그 이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은 몇 년 전 전 세계의 헌터 업계를 강타했던 이름이니까.
자기와 비슷한 실력대의 헌터들을 모아 팀을 만들어 ST+ 장비를 위해 같은 헌터들을 사냥한 머더러 헌터.
그것이 바로 지금 김현우의 눈치를 보고 있는 그녀 아냐였다.
"맞아. 자기가 서클러라고 하던데?"
"아니, 근데 저 범죄자를 어떻게 데려온 거예요……?"
"던전 보스 몬스터 잡으러 가는 도중에 나 죽이려고 직접 찾아 왔던데?"
"……네?"
"아레스 길드가 사주했다고 하더라."
김현우의 말에 이서연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션을 취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 오빠."
"왜?"
"그, 저 녀석을 어떻게 잡았어요?"
"저 녀석? 쟤?"
김현우의 삿대질에 아냐가 움찔하고 이서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더 서클러.
머더러 헌터가 된 뒤, 아냐가 헌터 업계의 뒤에서 용병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이서연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냐가 헌터 업계에서는 나름대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판데모니엄'의 일원이라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냥 자기가 살려달라고 하던데?"
"……몇 명이나 오빠를 죽이러 왔는데?"
"4명?"
"…4명이요?"
"야!"
"히익! 네!"
"너희들 너 포함해서 4명 맞지?"
"네. 저 포함해서 4명이 전원이에요."
이미 김현우의 기에 눌려 이런저런 정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말해버리는 아냐를 보며 기가 막히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서연은 김현우를 돌아 봤다.
"오빠…… 능력치가 몇이라고 했죠?"
"나?"
김현우는 곧바로 정보창을 열었다.
그의 앞에 주르륵 떠오르는 정보창을 읽어주자 이서연은 이상한 듯 입을 열었다.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요?"
"거, 거짓말!"
"뭐?"
"히익, 아, 아니에요."
"너, 제대로 안 하면 뒷산에 묻어버린다?"
저도 모르게 김현우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소리친 아냐는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하며 마법진을 보수하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물었다.
"근데 왜?"
"아니, 지금 오빠 말을 들어보면 판데모니엄의 헌터 전체가 왔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그 헌터들은 제가 알기로 전부 능력치 등급이 굉장히 높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의 능력치로는 판데모니엄의 헌터들을 이기는 게…….
이서연의 말에 김현우를 바라보자 그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능력치에 대한 의문은 그도 아레스 길드와 부딪힐 때부터 가지기 시작한 의문이었다.
탑에서 나온 현재, 처음부터 A등급의 능력치를 찍은 사람은 없어도 성장을 통해 A등급 능력치를 찍은 사람들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과 비교해 봤을 때, 김현우는 자신이 이상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걸 풀어야 하는 대단한 비밀로 인식하고 있진 않았으나.
"뭐, 그런가 보지."
김현우는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능력치가 자신을 어떻게 표시하든 김현우의 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는 다음에 아브에게 갈 때는 이 힘의 비밀에 관해 물어보기로 했다.
'뭐, 보나마나 정보 권한이 부족하면서 알려주지도 않겠지만.'
김현우는 그렇게 머리 한구석으로 생각을 밀어두고 입을 열었다.
"아, 그보다."
"?"
"맞지? 마법사는 스테프가 없으면 마법 캐스팅 못 하는 거."
"네 맞아요. 물론 기초적인 스킬은 캐스팅할 수 있어도 본격적인 마법은 캐스팅할 수 없어요."
이서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곧바로 들고 있던 망토와 지팡이를 이서연에게 넘겨주었다.
"이건……?"
"저 녀석 거야, 스테프는 S+ 등급이고 로브도 S+ 등급이니까 너 가지고, 나 어디 좀 갔다 올 테니까 쟤 좀 보고 있어."
"어……어어? 진짜요? S+?? 아니, 이게 아니라…… 오빠는 어디 가시게요!?"
이서연의 물음에 김현우는 슥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친절하게 선물을 받았는데 또 돌려주러 가야하지 않겠어?"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걸어 나갔다.
"오빠! 설마 아레스 길드에 깽판치러 가는 거예요!?"
이서연이 비명을 지르며 입을 열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 나갔다.
"선물 주러 가야지!"
"아니 오빠, 여기 탑 아니거든요? 그런 일 하면 온 세상에 소문나고 오빠 머더러 헌터 될 수도 있다니까요?"
그 말에 김현우가 순간 멈칫했지만, 그는 이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걱정 마. 대책은 확실히 있으니까."
"대……책이요?"
"그래."
그 말과 함께 빠져나가는 김현우.
그리고 곧 그곳에는 마법진을 고치다가 이서연에 손에 넘어간 로브와 스테프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아냐와, 김현우가 빠져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는 이서연만이 남았다.
***
강남역 중심에 있는 아레스 길드의 고층 빌라.
이제 막 오후 5시를 넘어 하루의 마감으로 분주해지고 있는 1층의 안내 데스크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입고 있는 옷은 검은색 츄리닝.
신고 있는 것은 검은색 삼선 슬리퍼.
어디를 봐도 아레스 길드와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입은 그가 아레스 길드 내부로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1층 데스크 근처에 있던 헌터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어이구, 이거 또 금세 소문이 퍼졌어?"
흑선우가 시키드나?
김현우는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낄낄 웃자 한 남자가 그의 앞에 마주 섰다.
"돌아가라, 여기는 아레스 길드원 외에는 출입 금지다."
"이렇게 모여 있는 거 보니까 흑선우 여기 있나 보네?"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여전히 낄낄거리던 김현우는 이내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
그것은 망치였다.
"그건…뭐지?"
남자가 묻자 김현우는 짐짓 대답하려다가 흠흠 하고 목소리를 깔더니 입가를 쭉 찢으며 이죽였다.
"아아, 이것은 '뿅망치'라고 하는 것이다."
한 방으로 너를 천국에 보내 줄 수 있지.
김현우는 그렇게 입을 열더니 뿅망치를 자신의 손에 휘둘렀다.
뾱- 뾱- 하고, 아기자기한 소리가 나는 것에 남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김현우를 바라봤고, 그는 뿅망치를 왼손에 쥐고는 말했다.
"왜? 이렇게 보니까 이걸로 어떻게 천국에 가는지 실감이 안 나지?"
내가 나름 성심성의껏 준비해 왔는데,
"헛소…."
"그럼 한번 맞아 봐야지."
남자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앞에 다가간 김현우는 곧바로 뿅망치를 내려쳤다.
"으껙!?"
꽝!
그리고 뿅망치에 맞음과 함께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기절한 남자를 보며 김현우는 아직까지도 건제한 뿅망치를 툭툭 두들겼다.
"이거 N-마트에서 3000원 주고 사온 뿅망치다. 설마……."
이걸로 처맞고 신고하는 새끼는 없지?
마치 조롱하듯 뿅망치를 허공에 휘두르는 김현우를 보고 헌터들은 숨을 삼켰다.
조금 전 남자의 머리를 때렸을 때 뿅망치에서 난 소리를 들었는가?
뾱이 아니었다.
뾱이 아니라 꽝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이쿠."
김현우가 갑작스레 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는 남자의 옆을 가린다.
헌터들은 그 모습에 김현우의 발치를 바라봤고, 그의 삼선 슬리퍼 옆으로 미처 가리지 못한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에 헌터들의 입이 닫혔다.
그 어느 헌터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눈동자를 떨었고, 또 다른 녀석은 손을 떠는 이들도 있었다.
안내 데스크에 있던 안내원은 이미 도망쳤고, 김현우만이 아레스 길드의 본사에서 뿅망치를 들고 당당하게 선 채 말했다.
"지금부터 옥상에 갈 텐데 내 앞을 막을 사람은 막아도 좋다. 그 대신……."
뾱-
"천국 갈 준비는 하고 내 앞을 막아, 알겠지?"
그와 함께 김현우가 걸음을 옮겼다.
***
콰지지직! 우장창!
"!?"
"반가워, 우리 구면이지?"
나무문을 깨고 자신의 책장에 처박힌 남자와 함께 등장한 김현우를 보며 흑선우는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김현우는 이미 너무 많이 훼손되어 제대로 된 소리조차 나지 않는 뿅망치를 옆에 두었다.
'마력으로 강화해도 역시 일정 이상은 못 버티네.'
확실히 이전처럼 펑펑 터져나가는 물건들과 달리 마력으로 뼈대부분을 강화한 뿅망치는 잘 버텨주긴 했다.
결국 박살 났지만.
"…김현우."
"우리 이렇게 만나는 거 좀 익숙하지 않아? 이렇게 만나는 게 아주 구면인 것 같아 우리, 그치?"
김현우는 마치 친구를 대하듯 웃으며 소파에 앉았으나, 흑선우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앉아 있는 흑선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 복잡한 과정은 전부 넘어가도록 하고, 이번에는 바로 선택지로 들어가 보도록 할까?"
"뭐?"
"첫 번째, 나한테 뒤지게 맞고 정보도 전부 까발려진 다음에 한국에서 매장당하고 국제적으로 매장당한다."
두 번째.
"나한테 합당한 보상을 제시한다. 어쩔래? 아, 그리고 막 또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구질구질하게 그러지 말자."
판데모니엄 맴버 중 한 명 인질로 잡아놨으니까.
김현우의 말에 흑선우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확실히 그가 이미 1층에 도착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판데모니엄이 그를 잡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나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들으니 흑선우는 점점 김현우가 괴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50위권의 랭커도 처리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을 판데모니엄이 김현우를 잡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한 명은 인질로 잡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매우 잘 알고 있었기에.
"…어느 것을 보상으로 제시하면 되겠나?"
그는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천하제일인에 대해 알고 있는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그것은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고.
그 누구에게나 경외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마교의 '천(天)'마저도 동급- 아니,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천하제일인'의 자리였고, 비상천공(非想天功)이라 불린 남자 '혁천'은 그 누구도 부러워 마지않는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자였다.
"크-학!"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어떠한가?
천하제일인에 어울리는 용포는 이미 제 형상을 잃어버린 채, 더러워져 있었고. 한쪽 팔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잘려있었다.
남은 한 손에 쥐고 있는 신기(神奇)의 애검 '월아검'은 이미 무기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부서져 있었다.
천하제일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추레한 모습으로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얀 눈을 뿌린 듯, 날갯죽지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머리칼. 양 이마에는 붉은 뿔이 위로 치솟아 올라 있고.
마치 산적들이 입을 것 같은 호랑이의 가죽을 기워 만든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오른 손목에 있는 구속구를 흔들거리며 그를 오연하게 내려다보곤 입을 열었다.
"내기는 끝났다."
"아니야."
"너는 지고, 나는 이겼으니."
"아니야……!!"
"약속대로, '마지막 도시'를 받아가도록 하마."
"안 돼……!!!!"
혁천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으나, 그녀는 '천하제일인'의 비명을 같잖지도 않다는 듯 무시한 채로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마치 상어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들어남과 함께 소녀는 입을 열었다.
"네가 지키려고 했던 것이 파괴되는 순간을 지켜보거라. '마지막 수호자'."
그 말과 함께 소녀의 발걸음이 움직여졌다.
-일 보.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천하제일인이 자신의 부서진 애병을 던지며 그녀의 걸음을 막아내려 했다.
툭!
허나, '월아검'은 소녀의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걸었다.
-이 보.
그와 함께 혁천이 보고 있던 '마지막 도시'가 들썩거리기 시작하고, -삼 보.
그녀가 또 한 걸음을 내딛자 도시의 건물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사 보.
또 다른 한걸음에 사람들의 비명과 곡소리가 혁천의 귓가에 내리꽂히고--그녀가 다섯 보를 걸었을 때,
"아…아아……아아아아악!!!!"
그가 지키고자 했던 도시는 이미 그녀의 다섯 보에 의해 멸망해 있었다.
그렇게 멸망한 도시를 보며 비명을 지르는 '천하제일인'을 보며 그녀는 무표정하고도 무감하게 중얼거리며-
"이래서야 십보멸살(十步滅殺)이 아닌 오보멸살(五步滅殺)이겠구나."
파삭!
천하제일인의 머리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깨부쉈다.
# 47
047. 정의봉(正意棒)을 아는가?(2)
"마음만 같아서는 네가 직접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면 네가 힘들겠지? 응?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입을 여는 김현우.
흑선우는 시선을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지만, 그의 청각은 김현우의 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친절하게 전부 정해줄게. 좋지? 똥은 네가 싸는데 결국 해야 할 일은 내가 다 정해주니까."
"……."
"왜 싫어?"
"그 말……!"
흑선우는 시선을 돌려 입을 열려고 하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분명 목소리는 누군가를 비아냥거리듯 낄낄 거리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다.
지독한 무표정.
그 모습과 함께 흑선우의 기억 저편에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벙커에서 봤었던 그의 무표정.
금방이라도 아무런 가책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그 표정에 흑선우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래도 던전도 아닌 이곳에서 살인을 저지르겠어? 라고 흑선우의 마음 한 편에서는 안일한 마음이 피어올랐으나,
"……."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뒤를 보면 그런 마음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쓸려나갔다.
김현우가 흑선우가 있는 지부장실까지 오는 동안 만들어 놓은 것은 쓰러진 헌터들의 길이었다.
여기저기 처박힌 채 힘없이 대리석 바닥을 구르고 있는 헌터들.
다들 죽었는지 살았는지 제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는 헌터들을 보며 흑선우는 소름이 끼쳤다.
물론 자신도 아레스 길드원을 뚫고 이 지부장실까지 올라오라고 하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흑선우는 S등급 세계 랭킹에서도 나름 중위 랭킹을 차지하고 있는 헌터 중 한 명이었으니까.
허나 현실에서 저런 일을 벌인다?
그것은 흑선우로서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던전이나 미궁이 아닌 현실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시민들의 눈도 있고, 언론들의 눈도 있다.
그 두 개가 아니라더라도 상대 길드나 해외에 있는 직속상관이 일일이 한국 지부를 체크하고 있는 것을 흑선우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김현우가 더 소름 끼쳤다.
다시 한번, 그의 뒤에 쓰러져 있는 헌터들을 본다.
손속에 자비라고는 전혀 둔 것 같지 않은 모습.
마치 처음부터 외부 시선을 관찰하는 리미터가 빠그러진 듯,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에서 헌터들을 족치고 있었다.
그 어떤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그는 순수하게 자신의 시선을 관철하고 있었다.
"……."
그리고 그것이 흑선우에게는 터무니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현실에, 아레스 길드의 지부장이라는 자리로 인해 얻은 생존권이 통째로 뜯겨나가는 듯한 기분을 흑선우는 느끼고 있었다.
"왜? 할 말 있으면 해."
"아, 아니다."
그렇기에 흑선우는 결국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김현우의 눈을 피했다.
그런 흑선우의 모습에 김현우가 박살 난, 정확히 말하면 박살 나기 직전의 뿅망치를 툭툭 두들기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뭘 받을까.'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았고, 이내 씩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200억."
"……준비해 보겠소."
순수하게 긍정하는 흑선우를 보며 김현우는 잠시 의외의 눈빛을 보냈으나 이내 그 시선을 지워 버렸다.
'던전을 가져갈 수도 있지만…그럼 너무 귀찮지?'
던전을 빼앗을 수 있다.
근데 그러기에는 너무 귀찮았다.
정확히 말하면 던전을 빼앗는 것까지는 안 귀찮은데, 또 던전을 관리할 헌터를 뽑는 게 귀찮았다.
'……그냥 빼앗을까?'
순간 그렇게 생각했으나, 김현우는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너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이 상황, 유도리 있게 잘 처리하는 거 알지? 응?"
"알겠소."
"그리고."
터벅 터벅-
김현우가 흑선우에게 걸어왔다.
"무슨-?"
"뭐야, 설마 한 대도 안 맞을 생각이었어?"
저기 네 부하들은 나 막으려고 하다가 지금 전부 천국 갔는데?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뿅망치를 들어 올리곤 입을 열었다.
"우리 구질구질하게 변명하지 말고 딱 깔끔하게 한 대만 맞자. 그걸로 이 일은 쫑내는 거야, 알겠지?"
"잠-끄에에엑?!"
꽈-앙! 우당탕탕탕! 쩡!
흑선우의 말을 전부 듣지도 않은 채 뿅망치를 휘두른 김현우.
그는 얼굴 정면에 뿅망치를 맞고 날아가 곧바로 뒤에 있던 책상에 몸을 부딪쳤고, 이내 멋을 내기 위해 꽂혀 있던 책들에 깔렸다.
그 위로 자욱한 먼지가 떨어지고, 김현우는 다리만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흑선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휴, 그러니까 책 좀 읽지 그랬냐."
가볍게 타박을 한 뒤, 김현우는 곧바로 흑선우 옆에 처박혀 있던 남자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야."
툭툭.
"기절 안 한 거 알고 있으니까 일어나라, 너만 살살 때렸거든?"
"예, 예예!"
김현우가 말하자마자 곧바로 책장의 나뭇조각을 털어내며 일어나는 길드원을 바라본 그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내가 너만 왜 약하게 때렸을까?"
김현우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눈알을 이리저리 골린 그는 이내 어색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저를 좀 어여쁘게 봐주셔…까악!?"
빡!
남자가 입을 열자마자 그의 뒤통수를 후려친 그는 쯧 하며 입을 열었다.
"병원에 전화하라고, 씹새끼야."
그 말과 함께 김현우는 지부장실에서 빠져나갔다.
***
※이 글은 베스트 게시물로 선정되었습니다!
제목: 오늘 일어난 아레스길드 뿅망치 폭행사건 간략하게.araboza
글쓴이: 고인물 빠돌이
자 애들아 이번 사건 이슈게시판에 개소리 존나 많아가지고 다들 혼란스럽지?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이번 사건 요약하고, 이번 일 왜 일어났는지 대충 정리해서 썰 풀어보고자 한다.
우선, 2일 전에 일어난, 아레스 길드 본사에 있던 헌터 150명을 모조리 부상으로 병원에 보내 버린 뿅망치 폭행사건은 누가 저질렀을까?
그건 바로 김현우다.
왜냐면 아레스 길드 본사 내로 김현우가 뿅망치 들고 들어가는 게 찍혔거든ㅋㅋㅋㅋㅋㅋ 근데 아레스 길드에서는 단체로 김현우한테 쳐맞고 입도 뻥긋 못 하는 상황이다.
자, 그럼 여기까지는 말 그대로 요약본이고, 이제부터는 왜 아레스 길드가 이렇게 쳐맞고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있는지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나온 결론을 이야기 해보려한다.
아레스 길드가 김현우한테 처맞고 입도 뻥긋 못 하는 이유.
그건 바로 아레스 길드가 잘못한 게 많아서임.
뭘 잘못했냐?
솔직히 이건 우리 헌터 커뮤니티에 들려오는 흉흉한 소문 몇 개 조합해 보면 다들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이걸 말하면 이 글 신고 먹고 알게 모르게 삭제되니까 말은 안하기로 하겠음
'불법적인 일'은 너희들이 상상해라ㅋㅋㅋㅋㅋ애초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양도도 엄청난 거잖아?
한국에 기어 들어와서 헌터들한테 갑질하며 자원 좀먹는 놈들이 자신 독과점 체재에 제일 중요한 요점인 던전을 그냥 양도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흑선우는 왜 던전을 양도하게 됐는가?
김현우에게 뭔가 덜미를 잡힌 거다.
그래서 양도하는 도중에 이 돈을 엄청 들인 독과점이 깨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또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거고, 김현우가 그걸 알고 다시 와서 존나 후드려 패서 일이 끝났다. 뭐 이런 의미지.
뭐 솔직히 나는 내 판단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니까 나는 여기서 줄이도록 하겠다ㅋㅋㅋ.
댓글 8832개
SSS랭크: 와 근데 진짜 김현우 미친 거 아니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츄리닝이랑 뿅망치 하나 들고 가서 다 쥐어 패냐 ㅋㅋㅋㅋㅋ.
ㄴ우효WWW: 우효wwwwwww 우리 김현우상 외국계길드 박★살! 초 캇쿠이다제!!!!!!!!!!!!!!
ㄴ이러니저러니: 근데 진짜 김현우는 그 정도의 힘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긴 함 어떻게 저러냐 ㅋㅋㅋㅋ 진짜 보다보면 존나 쎈 것 같다.
ㄴ아저씨여기국뽕: 영상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건 유출 안 되나? 아레스 길드에서 전부 폐기했다니까 유출 안 되겠지……? 존나 아쉽다.
올림푸스가디언: 근데 김현우도 진짜 또라이 아님? 아무리 그래도 언론이나 시선이 가득하게 보이는 이곳에서 저렇게 또라이짓을 한다고? 좀 미친 거 아니냐 ㅋㅋㅋ;
ㄴ킹리적갓심: 흠, HOXY……?
ㄴ병신은병신을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그냥 이러지 말고 닉에 아레스 길드로 박고 와서 입을 열어라 병신아ㅋㅋㅋㄴ쉴드치러왔어요: 쉴드로 치러 왔다고 씨발아!
ㄴ아트를해라: 근데 너무 다들 그럴 필요는 없는 듯, 김현우가 한 일은 진짜 이례적이긴 해 ㅋㅋㅋ……어떤 누가 수틀린다고 본사 쳐들어가서 다 패냐.
고인물이되고싶다: 님들 팬카페 가입하삼, 지금 팬카페에 김현우 유출 떴음! 아레스 길드원이 영상 유출했다던데?
ㄴ 오토코: 실화? 실화야??
ㄴ 아우야: 또 속냐~~~~~~~~ 그거 뜨면 김현우 좀 힘들어질 것 같은데?
"낄낄낄"
"형, 괜찮아요?"
그야말로 난리가 난 헌터 커뮤니티를 보며 김현우가 낄낄거리고 있으니 김시현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봤다.
"왜?"
김현우가 오히려 당당하게 묻자 김시현은 당황했다.
"아니, 형 왜 그렇게 태평해요?"
"태평하면 안 되냐?"
"아니! 형? 지금 아레스 길드에서 같이 자살하자고 정보 뿌리면 형도 가고 아레스 길드도 간다니까요?"
"왜? 나는 꿀릴 거 없는데? 자기의 목숨을 위협받으면 정당방위로 처리된다며?"
"아니, 형 그건 던전 이야기고요…… 현실에서는 좀 이슈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좀 절차상 처리한다고요."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난 무죄 아니냐?"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그도 그럴 게."
김현우는 소파 옆에 있던 뿅망치를 꺼내 들었다.
칙칙하게 노란색 테이프로 금이 간 부분을 칭칭 감아둔 뿅망치는 손잡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정의봉(正意棒).'
어디서 알아왔는지 한자까지 멋들어지게 쓴, 거의 다 망가져 가는 뿅망치를 들어 올린 김현우는 당당하다는 듯 말했다.
"1호가 무기로 보이냐? 장난감이지."
"……아니, 그래도 형 뿅망치에 맞은 사람이 다 골로 갔잖아요? 그때 아레스 길드 아래에 구급차가 몇 대나 온 줄 알아요?"
47대예요, 47대!! 그것도 부족해서 두 번이나 왔다갔다 했다고요.
"그리고 또 1호는 뭐에요?"
"1호는 1호지, 이제 곧 있으면 2호도 만들 거다."
"……."
김현우의 태평한 소리에 김시현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
안 그래도 그는 최근 집 앞을 서성이는 파파라치와 기자들 덕분에 없는 스트레스를 만들어가며 받는 중이었다.
김시현은 소파 옆에 놓여 있는 정의봉 1호, 뿅망치를 바라보더니-
'에라이 모르겠다. 어차피 형이 알아서 하겠지.'
그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사실 어떻게 해주려고 해도 김시현은 결국 하는 게 없고 해결은 김현우가 하니까 이럴 바에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현우 형이 알아서 하겠지.
김시현의 머릿속에 쌓인 걱정에 대한 스트레스와 그의 머리 한쪽에 있는 김현우의 신뢰가 쌓여 만들어진 기괴한 생각이었지만 김시현은 그 생각을 고치지 않았다.
"그래서, 할 거예요?"
"뭘?"
"뭐긴요?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저번에 국제 홀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김시현은 그렇게 말하며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놨고, 김현우는 그것을 짧게 요약했다.
"그러니까, 요컨대 일본 탑에서 빠져나온 신입이랑 한국 탑에서 빠져나온 신인 데리고 던전 하나 클리어해라?"
"그런 거죠. 약간…… 신입들에게 보여주기용?"
"그걸 왜 해? 던전이 장난이야?"
물론 김현우에게 던전이 그리 위협적인 장소는 아니었으나, 귀찮았기에 그는 그리 대답했고-
"돈 준다는데요?"
"돈? 얼마나?"
"이것저것 다 빼고 강의비만 5000이요."
"그럼 하지 뭐."
"…형 너무 속물인 거 아니에요?"
"원래 합당한 보수가 지급되면 뭐든지 할 의욕이 생기는 법이지."
***
모든 곳이 붉게 물든 세상이었다.
화마가 세상을 덮치고, 모든 것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그곳.
동양풍의 건축물들은 이미 자신의 예술성을 잃어버리고 본디 자연과 같은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붉은 핏자국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단편적으로 알려주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붉게 물든 세상 속에서, 그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괴이하게 생긴 지네가 인간의 몸을 파먹는다.
목이 마치 뱀과 같이 긴 인간이 같은 인간의 목을 물어뜯고 있고.
어둠을 먹고 자라는 '괴이'가 먹힌 사람들의 영혼을 빨아먹는다.
그렇게 이비규환이 넘쳐나는 그 끔찍한 현장에 한 소녀가 인간들의 시체로 만든 산 위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불과 얼마 전, 천하제일인을 가볍게 밟아 죽인 소녀였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궁-
그녀의 앞에 하늘을 뚫을 정도로 거대한 탑이 생겨났다.
탑이 생김과 함께 붉은 화마에 겹친 마귀들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인간들의 비명이 시들거리며 사라지고, 마귀들이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그들이 시선이 간 곳은 하늘을 뚫을 정도로 높게 서 있는 탑이 아닌, 시체의 산 위에서 탑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였다.
그녀의 눈가에 기쁨이 서린다.
무표정하던 입가는 주욱 찢어지며 그녀 안에 있던 날카로운 이빨들을 보여주었고, 이내 시체의 산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입을 열었다.
"가자."
한 마디.
그 말과 함께 마귀들이 탑을 향해 움직이는 소녀의 뒤에 따라붙기 시작했다.
거대한 지네도,
머리밖에 없는 괴물도,
어둠을 먹는 괴이도 아무런 말도 없이 소녀를 따랐고.
마침내 소녀의 뒤에 만들어진, 모든 계층에 '공포'를 흩뿌리며 세상을 먹어치우던 '백귀야행(百鬼夜行)'이 다음 먹이를 찾아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 48
048. 정의봉(正意棒)을 아는가?(3)3일 뒤.
성내동에 있는 서울 길드의 '숲지 부락'의 던전 내부.
그곳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 아니 헌터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이제 막 탑을 빠져나온 지 1달을 넘어 2달을 향해 가고 있는 18회차 헌터들 이었다.
한국 헌터가 몇 명 있긴 해도, 그들 대부분은 이제 막 탑에서 탈출한 지 1달 정도 된, 일본에서 원정을 온 헌터들이었다.
'국제 홀에서 일본과 한국의 관계 증진을 위해,' 라는.
도대체 누구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졌는지 모를 요상한 행사 덕분에 양국의 18회차 헌터는 김현우의 뒤에 모여 숲지 부락을 걸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이 행사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김현우에게 행사에 대한 말을 전한 것은 김시현이었으나 이 행사는 굉장히 미묘한 행사였다.
차라리 김현우가 아니라 노련한 파티를 고용해서 던전을 클리어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모르겠지만 김현우는….
'헌터 중에서도 절대 평범하진 않지.'
물론 정부와 협회에서 지시한 의견대로 최대한 '평범'을 지향해 달라고 김시현은 그에게 말해두었다.
문제는.
'형이 그걸 알까? 아니 애초에 '평범한'이라는 기준을 알고 있기나 할까?'
김시현이 그렇게 회의적인 생각을 하며 일본 협회에서 나온 인솔헌터와 숲지 부락을 뒤에서 따라가고 있을 때.
김시현과는 전혀 반대의 생각을 하는 헌터도 있었다.
'고인물 헌터의 영상!'
그것은 바로 박가문.
바로 그였다.
이미 헌터일은 진즉에 때려치워 버린 것인지 한 손에는 무기 대신 육중해 보이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아이시떼루: 우효wwwww 김현우 헌터의 행사영상 겟또다제!!!!]
[낭선: 와ㅋㅋㅋㅋ 나온다! 팝콘 가져왔습니다. 콜라 가져올 분?]
[SSS급: 김현우가 입고 있는 츄리닝 어디 거냐? 진짜 궁금하네, 나도 김현우가 입고 있는 츄리닝 가지고 싶다.]
박가문의 다른 한 손에는 액션캠과, 그 반대편에는 박가문이 볼 수 있도록 스마트폰이 달려 있었다.
72,214명 시청자 수.
이제 막 오후 3시를 넘겨 한창 바쁠 때인데도 불구하고 영상을 킨 30분 전부터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는 시청자 수에 박가문은 입가는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물론 버는 돈 중에 2할밖에 못 얻기는 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박가문의 영상은 어느새 김현우 전용 크리에이터로 소문이 나 구독자수가 실시간으로 올라 얼마 전 89만을 찍었고, 그 결과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돈이 나오는 중이었다.
애초에 얼마 전에는 자기 이름을 따 지었던 '가문 TV'에서 'Goinmul official'로 이름까지 바꿨으나 박가문은 개의치 않았다.
'무조건 따라간다! 무조건!'
박가문은 얼마 전에 정산한 돈맛으로 김현우의 등을 죽을 때까지 쫓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박가문이 김현우가 싸우는 것을 고대하고 있을 때쯤.
익숙하다는 듯 빠져나오는 고블린과 오크들, 그들은 각각의 무기를 쥐고 충혈된 붉은 눈으로 괴성을 내며 다가왔지만 헌터들은 별반 긴장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숲지 부락에 와 있는 헌터들은 도합 50명.
긴장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 신입 헌터들 앞에는 검은색 츄리닝에 파란색 슬리퍼를 신고 있는 전 세계적인 유명인, 김현우가 있었다.
그는 이제야 나온 몬스터들을 보며 어떻게 잡을까 고민하다 이내 달려오는 고블린에게 다가가-
"키에에엑?!"
고블린의 다리를 잡아챘다.
김현우의 순식간의 대응에 무기를 놓친 채 허공에 팔을 저으며 허우적거리는 고블린을 본 김현우는 이내 신입 헌터들을 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이것은 '고블린'이라는 것이다."
다리를 잡으면 무기로 쓸 수 있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짜고짜 고블린의 다리를 잡은 채 그린스킨들이 몰려 있는 곳을 향해 도약했다.
키엑-! 키에에에엑! 끼에에에에에에!!!
그리고- 손에 들려 있는 고블린을 이용해 그린스킨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김현우의 손에 들려있는 고블린이 순식간에 움직이며 동료들의 대갈통을 부숴 나가고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고블린이 마찬가지로 고블린의 형체를 잃어갔다.
그 모습에 김시현은 하- 하는 표정과 함께 한 손으로 눈을 가렸고- [알라랄라라라: 씨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말하는 거 들었냐? '아아 이것은 고블린이라는 것이다']
[낭선: 와ㅋㅋㅋㅋ 나온다! 팝콘 가지고 오기를 잘했네. 저거 실화냐 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개웃기다]
[무공기수식: 고블린 씨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리로 들면 무기로 쓸 수 있대. 개웃기네 ㅋㅋㅋㅋㅋ]
[아이시떼루: 우효wwwww 김현우 헌터의 고블린 휠윈드!!!! 진짜냐고오오오옷!!!! 우효wwwwww]
[개드립학과: 아아, 이것은 김현우의 '음경'이라는 것이다]
-------------- 개드립학과님이 매니저에 의해 강퇴 당하셨습니다 --------------
[08년생지필씨: 병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반대로 박가문이 열어 놓은 방송에서는 김현우의 행동으로 인해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와 함께 끝없이 올라가는 후원금에 박가문의 입이 찢어질 때쯤, 김현우가 글레이브를 휘두르는 오크를 마찬가지로 붙잡아 무기로 사용하는 모습은 슬슬 진정되려던 채팅방에 불을 지피다 못해 터트려 버렸다.
그렇게 김현우가 반장난 삼아 던전을 클리어하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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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9계층의 통로로 새로운 '등반자'가 등반을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 [04]: 12: 11: 32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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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에서 정식으로'가디언'이 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면 당신은 부름을 받아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0일 1시간 0분 0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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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앞에 연달아 떠오르는 알리미에 김현우는 로그를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양손에 쥐고 있던 고블린이었던 '것' 과 오크였던 '것'을 던져 버렸다.
몰려온 고블린와 오크들은 이미 완전히 전멸해 버린 상태.
김현우는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전투를 한번 보여줬으니까 바로 보스를 잡는 것을 보여줄게."
이미 일반 몬스터 잡는 거 보는 건 질렸지?
아니, 질리지 않았다. 라고 그들은 말하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사냥하는 방법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아무런 방어구도 입지 않는, 그저 츄리닝만 입은 헌터가 '고블린'과 '오크'를 무기로 삼아 몬스터를 죽인다?
만화에도 없는 장면이었다.
허나 곧 헌터들은 그 생각을 멈추고, 두꺼운 나무쪽으로 다가가는 김현우를 보았다.
그 모습에 박가문은 터져 버릴 조회수에 대한 긴장감과, 저번에 느꼈던 그 후폭풍을 생각해 몸을 바짝 엎드리기 시작했고, 몇몇 헌터들은 그런 박가문의 모습을 보며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꽈아아아아앙!
"으헉?!"
"꺄악!?"
곧 그런 의문을 가졌던 헌터들은 박가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김현우는 박가문과 처음 왔을 때처럼 굵은 나무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 이 숲지 부락의 보스인 트윈 헤드 오우거가 있는 곳까지 한 번에 길을 연결했다.
쿠아아아아아아악!!!
길을 뚫고 신입 헌터들이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트윈 헤드 오우거가 사방으로 괴성을 내지르며 김현우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었다.
그냥 오우거와는 1.5배 정도 더 큰 크기에 이제 막 탑에서 빠져나온 헌터들은 저도 모르게 긴장감을 느꼈다.
덩치라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그런 엄청난 덩치를 가지고 있는 트윈 헤드 오우거의 앞에서 그는 서 있었다.
그는 땅이 쿵쿵거릴 정도로 맹렬하게 다가오는 오우거를 보며 짧게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쓱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했다."
정하자마자 김현우는 자세를 취했다.
그것은 어느 한 '소인'이 거인국에 끌려와 자신을 증명하고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보여주었던 일생일대, 필살(必殺)의 기술.
"흑운(黑雲)-"
마치 학선류의 자세처럼 다리를 들고 있던 김현우의 다리에서 엔진을 사출하듯 검붉은 마력이 터져 나오고,
"보(步)."
김현우가 마력을 폭발시키며 날아올랐다.
그리고- 트윈 헤드 오우거의 머리 위에-크에에에에에엑!
검은 구름이 떨어져 내렸다.
그 전율적인 모습에 헌터들이 멍하니 김현우의 모습을 바라보고 박가문이 열어 놓은 채팅방은 '와'로 도배가 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김시현은 문뜩 사방으로 잔뜩 세고 있는 검붉은 마력을 보며 생각했다.
'…형은 도대체 저 마력이 어디서 나오는 거지?'
***
"안녕하세요."
"그래, 반갑다. 이번에도 등반자 때문?"
"네, 등반자 때문에."
"……어차피 알리미로 얻을 수 있는 정보만 얻을 수 있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말에 앞에 앉아있던 아브는 찔끔하는 듯한 표정으로 김현우의 눈치를 봤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저번에 정보 권한이 누적되면서 조금 더 정보를 볼 수 있게 바뀌어서요."
"……그래?"
"네."
"그럼 어떤 이야기인지 들어나 보자"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 제가 열어볼 수 있는 정보 권한을 최대로 사용해서 본 결과 이번에 9계층에 등반하는 등반자는, 혼자가 아니에요."
"혼자가 아니라고?"
"네."
"…그럼 저번에 봤던 그 크레바스의 몬스터와 비슷한 건가?"
김현우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뭔데?"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쓰며 묻자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원래 등반자들이 올라오는 방식은 대부분 다르지만, 하위 등반자들이 크레바스를 끌고 와요. 그리고 크레바스에는 몬스터가 소환되긴 하는데, 그건 등반자가 '데리고 온' 게 아니에요."
"데리고 온 게 아니라고?"
"네, 말하자면 일종의 시스템 버프 같은 거예요. 너무 약하니까 그래도 이 정도는 해줘야…."
"…엥?"
김현우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아브를 바라봤다.
"그러니까…그 등반자가 너무 약하니까 세계 좀 잘 조져보라고 시스템에서 버프를 주고……뭐 그런 거야?"
"네. 그래서 하위 등반자와 같이 나타나는 몬스터는 '등반자'와 같이 올라오는 동료라 치지 않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김현우는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시스템이 아무튼 그렇게 했다는 건데, 이걸 아브에게 따져봤자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대답만 나올 게 뻔했다.
"그래서, 지금 올라오는 등반자는, '동료'를 끌고 온다 이거야?"
"네."
"그 등반자는 중위 등반자야?"
"네, 중위 중에서도 중간 이상은 가는 등반자예요."
"보통 그러면 그 등반자의 동료들은?"
"그건 다 다르다고 나와 있어요. 중위 등반자와 비슷할 정도로 강한 이들도 있다고 하고, 아니면 더 약한 이들도 있다고 하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아무튼 간에 전에 온 천마보다는 강하다?"
"네."
아브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눈치를 보았지만, 김현우는 그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
"왜 그런 표정으로 봐?"
"아니, 또 결국 정보가 그 녀석 강하다는 것밖에 없냐고 뭐라 타박할 줄 알아서…."
아브가 슬쩍 눈치를 보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쩌겠냐 결국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그것밖에 없다는데, 그냥 적당히 타협해야지. 그리고 천마보다 강하다고 해서."
-벌써부터 걱정해 봤자 나오는 것도 없고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중, 김현우가 입을 열었다.
"아."
"…왜 그러세요?"
"그러고 보니까 물어봐야 하는 게 있는데."
"물어봐야 하는 거요?"
아브의 대답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내 능력치에 대해서."
얼마 전에 묻기로 생각했던 그 주제를 아브에게 꺼내 놓았다.
# 49
049. 정의봉(正意蜂)을 아는가?(4)※이 글은 베스트 게시물로 선정된 글입니다.
제목: 이번에 김현우 고유스킬 관련으로 불판 터진 거 자게로 옮겨본다ㅋㅋ
글쓴이: 나는오늘만사는놈
ㅎㅇㅎㅇ 이번에 보니까 이슈게시판에서도 이거 가지고 댓글 싸움 나고 있길래 불판 열어본다. 무슨 불판인지는 너희들도 잘 알고 있지?
바로 김현우 고유스킬 불판이다.
사실 탑에서 얼마 나오지 않은 헌터라서 애초에 고유스킬 관련해서는 이야기도 아예 안 나오고 있었는데 최근에 김현우가 천마 잡은 이후로는 다들 그 이야기만 하길래 가져와 봤다.
근데 솔직히 김현우가 탑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안 된 걸 보면 벌써 고유스킬을 가졌을지는 아직도 좀 실화인가 의문이 들긴 하는데 솔직히 김현우쯤 되면 고유스킬을 얻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게 해서 내가 짐작한건데, 아마 내생각에 김현우 고유스킬은 '증폭'계열인 것 같다. 애초에 김현우가 천마전에서 싸우는 것을 보면 줄곧 개털리다가 한 번에 빡 몰아쳐서 죽이잖아?
내가 볼 때 제한시간 있는 대신에 힘을 팍 끌어 올려 주는 종류인 걸로 예상된다.
너희들은 어떰?
댓글 1024개
고인물이되고싶다: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김현우가 탑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시간 비례해서 그 정도 싸울 수 있는걸 생각해 보면 증폭계열이 제일 크다고 느낀다.
ㄴ SSS등급: 이거 ㅇㅈ 나도 그렇게 생각함. 사실 증폭계열이 아니면 저렇게 단기간에 높은 피지컬 보여 주는 건 말이 안 되긴 한다.
ㄴ 로로로롤: 그런데 그것 말고도 애초에 김현우가 12년 동안 탑 안에 갇혀 있었던 것 생각해 보면 진짜 저 정도로 강한 게 이해가 가기도 한다 나는.
인생해피하고싶다 : 솔직히 지금 시점에서 봤을 때 김현우의 고유 스킬은 이미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맞기는 하다, 그리고 나도 글작성자와 마찬가지로 김현우의 고유스킬은 거의 100% 증폭계라고 확신한다. 다만 정확히 몇 배 정도 증폭하는지는 모르겠음.
ㄴ 칼튼900 : 222222222222222222222222이거 맞다. 나도 이렇게 생각함ㄴ 기수식재림 : 33333333333333 나도 이렇게 생각하기는 하는데 나는 정말 혹시 어쩌면 김현우가 사실 고유스킬이 없을 거라고도 생각을 해본다.
ㄴ 로팅엄비 : ㄹㅇ 지금 이슈게에서도 고유스킬이 증폭계냐 아니냐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 고유스킬이 있냐 없냐로 싸우고 있던데, 나도 왠지 없을 것 같음ㅋㅋㅋㅋ오토랑이 : 김현우 고유스킬 내가 볼 때는 개씹사기치트스킬 같은 거 아니냐? 솔직히 천마랑 싸우는 거 보면 그냥 개씹사기라는 느낌이 풀풀 나서 치트 스킬 아닌가 싶은데ㅋㅋㅋㅋㄴ 그만해 : 응 ㅈㄹ이구연~ 지금까지 상위 헌터들도 고유스킬보면 전부 사기가 아니라 자기 실력 쌓아서 올라간거다 ㅋㅋㅋㅋ 운빨이라는 게 있을 것 같냐?
ㄴ오토랑이 : 그냥 내 생각 말한건데 왜 갑자기 들어와서 지랄이신지? 갑자기 프로 불편충 등판하셨네 ㅋㅋㅋㅋㅋㅋ PDF 캡쳐 했으니까 또 아갈털어봐~ㄴ그만해 : 응 계속해 줘? 니 애-아랑길드 지하 2층의 훈련실.
"흠……."
그 이외에도 게시글에 달린 수십 개의 댓글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김시현에게 물었다.
"시현아."
"왜요?"
"고유 스킬이라는게 그렇게 중요하냐?"
고유 스킬.
그것은 바로 헌터 개개인에게 부여되는 스킬 중 하나였다.
물론 언제 부여되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식으로 부여되는지는 아직도 제대로 된 사실관계가 밝혀진 바 없으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모든 헌터는 어느 순간 고유 스킬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고유 스킬은 일반적으로 몬스터를 사냥해 '경험'으로 얻는 일반 스킬보다도 좋은 효율을 보여준다.
"그렇죠? 고유 스킬이라는 건 각각 개개인이 받는, 다른 헌터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만의 스킬이라는 거니까,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중요하죠."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죠. 보통 고유스킬이 생기면 자신만의 명확한 전투 스타일이 생기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김현우는 이내 고유 스킬에 대해 생각하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그 생각을 접어두었다.
'아직 나한테는 안 생겼으니까.'
그렇게 짧게 생각을 정리한 김현우는 이내 며칠 전 아브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3일 전, 김현우는 자신을 불러 낸 아브에게 자신의 능력치에 관해 물었으나, 그녀에게서 자세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다만 한 가지 알아낸 게 있었다.
아브가 말해준 것.
정확히는 정보 권한을 이용해 제한적인 정보를 보고 그녀는 김현우의 능력치 이상을 나름대로 추리한 뒤 도출한 결론.
'출발의 탑에서 떠올랐던 메시지는 '페이크'일 거다……라.'
김현우는 12년 동안 탑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탑 안에 갇혀 있는 12년 동안, 김현우는 1층부터 100층까지의 몬스터를 수백 번도 더 넘게 잡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오른 능력치들.
물론 어느 순간부터 김현우의 능력치는
'튜토리얼 능력치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라는 알림창과 함께 이 이상 오르지 않았다.
허나 아브는 그 떠오른 알림창에 의문을 제시했다.
능력이 '더 이상'오르지 않은 게 아니라, 시스템의 한계상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라는 의문을.
물론 진실은 모른다.
이게 진짜 아브가 한정적인 정보를 얻어서 추리한 대로 사실은 시스템의 한계 때문에 더이상 능력치를 측정하기 어려운 것인지.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원래는 그래서 랭커들하고 비교를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너무 변수가 많았다.
스킬도 마찬가지고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게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귀찮아…….'
너무 귀찮았다.
애초에 힘의 총량을 알아서 뭐 하겠는가? 상대해야 할 건 정보 권한으로도 정보를 볼 수 없는 녀석들뿐인데.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하고 앞에 떠 있는 로그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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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9계층의 통로로 새로운 '등반자'가 등반을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 [00]: 0: 1분: 32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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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하지만 딱히 준비할 게 없었다.
지금 올라오는 등반자가 어디로 올 줄 알고 준비를 한다는 말인가?
'차라리 시간이 아니라 위치가 나온다면 어떻게 죽치고 있기라도 할 텐데.'
김현우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아무리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산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미리 대비하고 막을 수 있는데 막지 않아서 사람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것을 보기에는 찝찝했다.
그가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흘리며 로그를 보던 중,
"다…다 됐다!"
김현우는 마법진에서 들리는 거대한 환호성 소리에 돌렸고-
우우우우웅-
그곳에는 김현우의 실수로 인해 망가져 있던 마법진이 다시 예전의 그 소리를 되며 공명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옆에서 마치 제 마법진을 고친 듯 신나하고 있는 아냐는 덤이었다.
김현는 슥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그래, 전부 다 고쳤다고?"
"네! 네네! 전부 고쳤다고요! 이 서클러인 아냐에게 불가능은 없다 이 말……."
아냐는 그렇게 신나게 소리를 치다 목소리를 낸 사람을 파악했는지 마치 녹슨 기계처럼 목을 돌리며 다가오고 있는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 든 묘한 공포.
아냐는 최대한 비굴하게 몸을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 저 전부 다 복구했는데…아마 전보다 효율도 좋을걸요?"
"그래?"
"네! 게다가 거기에 덤으로 지속시간도 훨씬 길 거예요!"
"그래?"
"거기에 추가로…음…음…."
"그래?"
"……."
김현우의 대답에 아냐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저…죽는 건가요?"
"글쎄다…."
김현우의 얼굴이 기묘하게 웃음을 짓고 아냐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죽을 때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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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통로를 통해 새로운 '등반자'가 9계층에 도착했습니다.
남은 시간 [ 00: 00: 00 ]
위치: 독일 작센 라이프치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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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앞에 새로운 로그가 떠올랐다.
***
독일 작센 라이프치히 근처 산맥에 있는 미궁.
평소라면 사람 몇 없이 썰렁해야 했던 그곳은 현재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하늘에는 헬기가 몇 대나 돌아다니고 있었고, 지상에는 헌터들이 대열을 맞춰 미궁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가장 뒤, 그 모습을 보며 독일 헌터 협회장 '게오르크 T 바넬'은 흡족한 미소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뒤쪽에서 다가오는 한 남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준비는 전부 끝났는가?"
게오르크의 물음에 남자는 곧바로 서류판을 그에게로 넘기며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현재 준비는 모조리 끝나 있는 상태입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헌터 중 대형 길드인 '슈바이거' 길드와 '보리스' 길드의 핵심 인원들도 전부 대기 중인 상태고요."
"랭커들은?"
"'쉐도우 스피어' 애릭 브래든과, '이명궁' 티라멜이 미궁 바로 앞에서 대기 중입니다."
그의 말에 게오르크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일본에서 처음 일어난 새로운 형태의 '재앙'은 불과 일본에서 그 일이 일어난 지 1달 정도밖에 되지 않아 독일에서 또 한번 감지되었다.
'물론 일본처럼 당하지는 않겠지만.'
게오르크는 미소를 지으며 앞에 깔린 헌터들을 보았다.
대부분이 A등급 헌터들. 그리고 그런 헌터들과 함께 있는 헌터들은 상당히 위쪽에 있는 S등급 헌터들이었다.
일본에서 그 재앙을 막을 때와는 달리 '과잉전력'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의 엄청난 전력.
그는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돌아다니고 있는 헬기를 바라봤다.
그것은 바로 게오르크가 미리 불러 둔 독일 방송사를 포함한 여러 통신 매체의 헬기였다.
'이번 '재앙'의 발 빠른 처리를 전 세계에 보여주기만 하면. 독일 협회는 다시 한번 인정받는다.'
예전, 독일에서 일어났던 크레바스 사태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해 퇴임당한 전 협회장 때문에 독일은 늘 국제 협회에서 은근히 무시를 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민가에 그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고, 확실히 막아낸다.'
그렇기에 게오르크는 독일에 찾아온 이 '재앙'을 제대로 막아냄으로써 협회 내외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하게 굳히는 야망을 꿈꾸고 있었다.
'거기에 덤으로 '재앙'을 포획할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더라도 인간과 비슷한 인종인 '재앙'을 포박했다는 것은 엄청난 업적으로 남으리라.
물론, 실질적으로 '재앙'을 막거나 포획하는 것은 랭커와 다른 헌터다.
그러나.
재앙에 '미리' 대비하고 헌터를 대기시킨 업적은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는 생각에 그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구구궁-
곧 그는, '재앙'이 올라오는 그 진동에 미소를 지었고-꽈아아아아!!
"저, 저게……!!!"
불과 5분도 되지 않아, 그는 절망에 빠졌다.
# 50
050. 괴력난신(怪力亂神)(1)
지반이 떨리는 듯한 느낌에 헌터들은 저마다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각각의 무기를 잡고,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 몸을 긴장시키며 미리 걸어둘 수 있는 강화스킬을 몸에 걸었다.
그 순간- 지반의 떨림이 멈췄다.
그리고-
"……?"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한 명의 소녀였다.
날갯죽지까지 내려오는 하얀 백발에, 붉은 홍안을 가지고 있는 소녀.
이마 위에 길쭉하게 나 있는 두 개의 붉은 뿔과 그녀의 입안에 보이는 상어의 이빨과도 같은 뾰족한 그것은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헌터들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준비를 취했고, 그런 헌터들의 최전선에 있던 남자.
슈바이거 길드의 길드장인 '애릭 브래든'은 흑갑 속에서 눈을 번뜩이며 자신의 흑창을 들어 올려 입을 열었다.
"만약 이 목소리가 들린다면 투항해라, 괴물."
애릭 브래든이 혹시나 해서 끼고 온 반지가 도움이 되었는지 그가 목소리를 열자마자 소녀는 그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답했다.
"투항?"
"그래, 투항해라. 그렇다면 목숨은 살려주도록 하지."
'인간'이 아닌 것과 대화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묵직한 톤으로 목소리를 내는 애릭 브래든.
그의 목소리에 소녀는 놀랐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열었다.
"뭐라고 했느냐?"
"투항하라고 말했다. 괴물."
"그다음엔?"
"…순수하게 투항한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했다."
브래든의 말을 들은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키득키득 거리며 웃어댔다.
정말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어대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살려준다고? 네가? 나를?"
그녀의 목소리 안에 숨겨져 있는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을 느낀 애릭은 자신의 흑창을 높게 들어 올려 돌격의 자세를 취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 숫자가 보이지 않는 건가?"
"숫자? 숫자 말인가?"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주변을 훑는다.
적어도 일백은 넘어 보이는 헌터들의 숫자.
"그래. 아주 잘 보이는구나. 근데, 설마 내 앞에서 숫자를 내세울 생각인 게냐?"
"이 곳에 있는 헌터는 전부 S등급 헌터들이다. 혼자인 네가 이 S급 헌터들의 포화를 뚫을 수 있을 거라고 보나?"
브래든의 말에 헌터들이 일제히 공격을 준비한다.
수많은 병장기가 헌터들의 손에 의해 날카로운 예기를 흩뿌리고, 각각의 무기에 마력이 담긴다.
하지만-
S급 헌터라도 오금이 지려 다리가 풀렸을 법한 그 상황에서도 그녀는 그저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재미있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녀의 빨간 혓바닥이 날카로운 이빨을 핥았다.
베인 혓바닥의 아릿한 혈항을 즐기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네 자신감은 그 알량한 머릿수에서 나오는 '자신감'이로구나."
"…정말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나?"
그런 소녀의 말에 브래든은 대답했으나, 그녀는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지우지 않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보기에 넌 그저 알량한 머릿수에서 나오는 저열한 자신감으로 내게 덤비고 있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도 재미있는 걸 하나 보여주도록 하지."
"뭐?"
브래튼의 입이 열림과 함께-
쿠구구구구구궁──!!!
그녀의 주변에서 마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누가 보더라도 진득한 살기가 담긴, 기묘할 정도로 소름 끼치는 마력에 헌터들은 저마다 기겁하며 움찔했지만, 브래든은 곧바로 입을 열어 소리쳤다.
"연습한 대로 공격해라! 적은 혼자다!!"
그의 외침에 순식간에 정리되는 전열. 그는 노련하게 헌터들을 진정시킴과 함께 마력을 폭사시키고 있는 그녀를 향해 도약했다.
"가속 , 초가속 , 기동 , 극점 , 폭발 , 화력 , 괴력 , 집중───!"
그 짧은 순간, 그의 몸에 10개도 넘는 스킬이 그의 몸에 중첩되며 소녀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힌다.
그리고-
"부스터!"
그는 자신의 고유스킬을 사용했다.
그 능력은 바로 브래튼이 사용하는 모든 스킬의 효과를 강제적으로 3배까지 끌어올리는, 일종의 도핑 스킬이었다.
S등급 헌터로서는 평범했던 그를 전세계 랭커 순위 중에서도 45위까지 끌어올려 주었던 그의 스킬은, 이번에도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의 신체를 극한까지 강화했다.
브래튼의 몸이 일순 인간의 동체 시력은 쫓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빨라지고, 그의 몸이 콤마밖에 지나지 않은, 그 짧은 시간 속에 소녀의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빛과도 같은 일격필살을 소녀의 머리에 꽂아 넣었다.
꽈아아아아앙!!!
창끝에서 나는 거대한 폭음, 순간적으로 귀에 이명이 들릴 정도의 거대한 쇳소리는 헌터들의 귀를 마비시킬 정도로 거대했다.
그래, 거대했다.
거대했었다.
"무…슨…?"
"정말, 내가 혼자라고 생각하는 게냐?"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브래튼의 창이 빛나간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의 창은 어느 강철로 된 거대한 손에 막혀 있었다.
소녀를 가릴 정도로 거대한 손이 그의 창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의 일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소개를 하도록 하마"
불현듯, 소녀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을 곳에, 무엇인가가 생겨난다.
"나는 너희의 오랜 공포이자, 또한 오랜 상상력이라."
그녀의 뒤에 온몸을 검은색으로 칠한, 괴이와 수백 개의 손을 가지고 있는 관음이 나타난다.
"나는 너희가 어둠을 직시하였을 때 느꼈을 첫 번째 감정이며."
그 뒤를 따라 수 많은 괴이들이 나타난다.
"나는 너희의 용기를 잡아 먹어온 괴이의 현현이니."
던전에서는 볼 수도 없었고, 또한 보여서는 안 되는 기괴하고 기이한 것들이.
"나는 너희들의 원초. 너희들의 상상력."
마치 자신의 자리라는 듯 그녀의 뒤에 하나하나 자리를 잡는다.
"너희가 어둠을 보며 상상한 모든 것들의 지배자."
괴이들이 웃는다.
마치 먹잇감을 탐색하듯, 탐욕스러운 눈동자로 주변을 돌아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렇기에- 이렇게 불렸다."
관음은 수백 개나 되는 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검은색의 괴이는 어둠을 먹어치우는 듯 거대해 진다.
"나는 '백귀야행(百鬼夜行)'의 두목."
그들의 뒤에 있는 미궁을 통째로 덮을 정도로 거대한 지네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듯 몸을 움찔거리고.
배가 고픈 아귀들은 금방이라도 머리 위에 있는 부적을 떼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그런 괴이들을 뒤에 둔 그녀가 입가를 비틀어 올려 입을 염과 함께-
"괴력난신(怪力亂神)이다."
모든 계층에 '공포'를 흩뿌리며 세상을 먹어치우던 '백귀야행(百鬼夜行)'은 완성되었고-히죽.
"공포에 먹힐 준비는 되었느냐?"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괴력난신의 일보(一步)가 세상에 드러났다.
그리고-
"아…아아아……아아아악!!!"
브래튼은 자신을 다가온 수백 개의 손을 본 그 순간을 마지막으로-콰직!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했다.
***
"오빠"
"응?"
"쟤 지금 뭐해요?"
"……마법진 그려."
"저건 또 무슨 마법진인데요?"
"순간이동."
"순간이……뭐요?"
"순간이동."
"순간이동이라고요?"
이서연이 이상하다는 듯 김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왜?"
"세상에 순간이동 마법진이 진짜 있다고요?"
"원래는 없는 거야?"
"제가 이런 저런 마법진은 다 들어봤는데 순간이동 마법진은 진짜 처음 들어보는데요? 순간이동 마법진이 있으면 사람들이 너도나도 다 순간이동으로 이동하겠죠."
"……그렇다는데 이건 어찌 된 일이냐?"
김현우의 물음에 아냐는 마법진을 그리다 말고 말했다.
"거짓말 아니에요! 진짜로! 제 고유 스킬이 '순간이동'이라, 그걸 마법진 술식으로 구현해서 순간이동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거예요!"
"……그래? 그럼 고유 스킬이 순간이동이라는 거네?"
"네……맞는데요."
아냐가 수긍하자 김현우는 새삼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너 왜 안 도망갔냐?"
"……그야, 저도 굴뚝……이 아니라, 순간이동은 제 마력으로는 순간이동을 발동하기에 택도 없거든요. 마법진의 보조를 받아야 스킬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거든요."
"……그렇다는데?"
김현우의 말에 이서연은 잠시 아냐를 바라보더니 이내 무엇을 이해하려고 하다 실패한 듯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래서, 마법진은 왜 만들고 있는데요?"
"잠깐 갈 데가 있어서."
"……갈 곳이요? 어디?"
"독일."
"……독일?"
"왜? 무슨 문제 있어?"
이서연의 말에 그녀는 잠시 김현우를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니, 안 그래도 제가 여기 내려온 이유도 그 독일이랑 연관되어 있어서요."
"……뭔데?"
"독일의 헌터 협회에서 '재앙'의 출현으로 인해 지원요청을 보냈는데, 저번에 일본 재앙 사태를 막은 게 오빠라서 그런지 오빠한테 지원요청을 보냈더라고요."
"그래……가 아니라, 어떻게 네가 나 지원요청 온 걸 알고 있냐?"
"지금 인터넷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떠 있거든요. 김현우 헌터, 또 한 번의 재앙을 이겨내나? 이런 식으로요."
이서연이 입을 열자 김현우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고 인터넷을 누른 뒤 아냐를 바라봤다.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심히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아냐.
김현우는 사실 아냐가 마법진 수리를 전부 끝낸 순간 그녀를 가차 없이 처리하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포장해도 그녀는 결국 김현우를 죽이러 온 헌터였고, 김현우로서는 이 이상 복잡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만큼, 그녀를 처리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동정심에 살려줬다가는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니까.
그런 그녀를 살려둔 것은 바로 그녀를 처리하려던 순간 그의 눈앞에 뜬 로그 때문이었다.
독일 작센의 라이프치히에 나타난 등반자.
이곳에서 독일까지 날아가려면 최소 1일 이상은 걸리는 엄청난 거리에 김현우가 신경질을 내며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아냐는 생존을 위해 김현우에게 딜을 걸었다.
자신에게 8시간을 준다면 곧바로 독일까지 보내 주겠다는 딜을.
"흠."
그리고 김현우는 곧 있어 독일까지 날아가야 한다는 그 끔찍함에 아냐의 딜을 받아들였고, 그게 아냐가 저렇게 열심히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이유였다.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며 인터넷을 켜자 아니나 다를까 이서연이 말한 대로 대문짝만 한 뉴스가 박혀 있었다.
[대한민국의 영웅 김현우, 이번에는 독일의 재앙까지 막아내나?]
자극적인 뉴스 헤드라인을 클릭한 그는 곧 그 하나의 사진과 함께 글 속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은 굉장히 자극적이었는지 여기저기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으나 대충 독일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모자이크를 친 사진 너머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현지 시각 10:23분에 미궁에서 나타난 재앙은 '재앙'을 미리 진압하기 위해 투입한 a급 헌터 68명, S급 헌터 32명과 S등급 세계랭커 45위인 애릭 브래튼과 51위 티라멜을 전부 살해한 뒤, 라이프치히를 공격했다.
라이프치히는 현지시각 11:00에 대피발령이 났지만, 헌터 협회장 게오르크의 도주로 인해 대피발령이 늦게 일어나 현 시간 추정 2만 3000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입었고, '재앙'은 실시간으로 도시를 파괴하는 중이다.
이렇게 일본보다 더한 상황의 재앙이 일어나는 와중에 헌터 협회 독일 지부는 한국의 '김현우'에게 지원 요청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번 '재앙'은 놀랍게도 미궁 상공을 찍고 있던 헬기의 카메라를 빼앗아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잔뜩 늘어져 있는 기사 밑에 있는 영상.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영상을 클릭했다.
그리고 얼마의 로딩이 끝난 뒤에, 그는 영상으로나마 그곳에 펼쳐져 있는 '재앙'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기를 하자.]
곧바로 나오는 목소리에,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 51
051. 괴력난신(怪力亂神)(2)
영상을 통해 보이는 것은 재앙이 강림해 완전히 박살 난 라이프치히의 중앙광장.
뭐 하나 제대로 남아 있는 것 없이 완전히 박살 나 있는 그곳에서 한 소녀- 아니, 이곳에 실질적인 '재앙'을 가져온 괴력난신은 그 부서진 잔해에 앉은 채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기를 하자.]
영상속의 소녀는 본격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24시간, 나는 이 도시에 체류해 있겠다.]
그와 함께, 그녀는 자신의 손에 쥔 어느 '손목'을 꺼내 들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인간의 손에는 검은색의 손목시계가 걸려 있었고, 그녀는 덜렁이는 손을 아무렇게나 흔들며 말했다.
[룰은 간단하다. 내가 체류해 있는 24시간 동안 만약 너희들 중 누군가가 나를 쓰러뜨린다면 나는 정복을 멈추고 얌전히 돌아가도록 하마.]
허나-
[만약 24시간 동안 아무도 오지 않거나, 설령 온다고 해도 나를 막지 못할 땐 나는 이어서 다음 도시를 파괴할 거다.]
괴력난신은 그렇게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흔들던 손을 바닥에 내버리곤 날카로운 이빨을 내보이며 씩 웃곤-
[그러니 누구든 와 봐라, 이 나를 막기 위해서.]
말했다.
[혼자라도 좋고 무리를 이끌고 와도 좋다. 그 어떤 방법으로 도전해도 나는 '혼자' 너희들을 상대할 테니까. 그럼-]
-기다리고 있겠다.
그렇게 끝난 영상.
"후……미치겠군."
독일 헌터 협회 부지부장, 아니 지금은 지부장인 '게오르크'가 죽었기에 임시 지부장으로 올라있는 '크리스탄 베르겔'은 진한 한숨을 내쉬며 유튜X에 돌아다니고 있는 영상을 보았다.
"쯧…."
독일 협회 지부장 게오르크는 이번 일을 계기 삼아 자신의 입지를 더더욱 끌어 올리려는 생각으로 일을 벌였지만, 이미 그 계획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너무 실책이 크다….'
독일에 있던 8명의 랭커 중 거의 중상위급에 해당하는 헌터, 애릭 브래든과 티라멜이 이번 재앙을 막다 죽임을 당했다.
그 외에도 독일에서는 꽤 알아주는 대형길드 두 개가 순식간에 대부분의 전력을 날렸다.
허나, 그것보다 더 골치가 아픈 것은 독일의 랭커가 죽고 헌터들이 무참히 죽어 나가는 그 모든 모습이 게오르크의 욕심으로 인해 부른 방송용 민간 헬기에 찍혔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부와 협회쪽에서 힘을 써 서둘러 영상의 유포를 막고 있기는 했으나 이미 5시간도 안된 시간에 영상을 뿌려질 대로 뿌려진 상태.
애초에 인터넷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안 볼 수 없을 정도로, 영상은 퍼져 있었다.
'이런 젠장.'
완전히 망했다.
라고, 베르겔은 짧게 탄식했다
안 그래도 이전 재앙을 제대로 막지 못한 터라 국제 헌터 협회에서 독일의 권력은 여러모로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안 그래도 없던 권력과 발언권이 극도로 축소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씨발, 도대체 저딴 걸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일은 본인이 벌여놓고 웃기게도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넘기고 뒤져버린 게오르크를 원망하며 그는 이미 꺼져버린 영상을 바라봤다.
'하, 도대체…….'
사실 처음에도 그렇고 베르겔은 게오르크를 몇 번이고 설득했다.
일본에서 일어난 '재앙'을 언급하며, 몇 번이고 게오르크에게 재앙을 독일의 힘으로만 제압하는 게 아닌, 협회의 힘을 빌리자고 몇 번이고 말했다.
이미 '일본'이라는 선례가 있었으니까.
그때의 영상은 이미 협회에서 따로 하이라이트로 편집된 영상을 빼고는 전부 사라져 버렸으나, 그는 아직도 그때 보았던 '천마'의 무서움을 머릿속에 각인하고 있었다.
일본의 도쿄를 완전히 핏빛의 길로 물들여 버린 천마.
그리고 지금 독일에 나타난, 자신을 '괴력난신'이라고 소개한 저 소녀는 일본에 나타난 '천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못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그렇게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베르겔은 그가 협회원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말했던 건?"
"네, 우선 말씀하신 대로 전부 처리했습니다."
"결과는?"
"…그게."
베르겔의 물음에 협회원은 묘하게 눈치를 보며 뜸을 들였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개새끼들…."
그는 라이프치히가 박살 난 그 시점부터 라이프치히에 긴급 대피령을 내리고 곧바로 전 국가에게 지원 요청을 보냈다.
허나 4시간이 훌쩍 넘겨 5시간이 지난 지금, 지원 요청에 응하는 국가는 하나도 없었다.
"독일 내 소속되어 있는 랭커들은?"
"그게……34위 스나이퍼 '게르노프'는 딱 봐도 자신이 죽일 수 있는 녀석이 아니라며 거부 의사를 전달했고, 그건 순위권에 있는 다른 랭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다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네, 아마…."
"이런…후…."
'그래, 그럴 만하지.'
분하지만,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헌터들의 생각을 이해했다.
'괴력난신'이 보여준 그 압도적인 힘과 그녀의 뒤를 따르던 수많은 '괴이'와 '괴물'의 현현은 그저 민간 TV의 송출 영상으로 보기만 해도 오금이 지렸다.
헌터들도 인간이다.
두렵지 않을 리 없겠지.
"그렇다고 해도 나라를 버리고 그렇게 쉽게 도망가다니……!"
쿵!!
베르겔은 저도 모르게 탁자를 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와'인정'은 다르니까.
그는 당장이라도 꼬리를 말고 도망친 녀석들을 끌고 오고 싶었지만 그렇기에는 무리였다.
이미 다들 무리라고 판단해서 어딘가에 꽁꽁 숨어 있을 게 분명하니까.
한동안 그렇게 탄식과 신경질을 번갈아 내며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이내 후, 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국제 협회는 어떤가?"
"국제협회에서도 연락이 오기는 왔습니다만……."
"…왔습니다만?"
"국제 협회에 속해 있는 'TOP 5'는, 아무래도 연락이 닿지 않는 듯합니다."
"뭐? 연락이 안 된다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여는 베르겔의 말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국제 헌터 협회의 TOP 5,
그들은 전 세계 어느 국적과 관계없이 S급 헌터 랭킹 10위 이내의 헌터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물론 가입한 인원은 5명뿐이으나, 그들은 누가 의심할 것도 없이 모든 헌터들의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고, 그들 중에는 S급 헌터 랭킹 1위 '무신(武神)'도 있었다.
"씨발, 지금 독일 민간인 피해는 몇 만 명에다 헌터들은 있는 데로 죄다 죽어 나가고 있는데 결국 민간인들 세금 빨아 먹는 새끼들이 출타라고!? 출타!?!"
그가 신경질을 내자 협회원이 움찔했지만, 베르겔은 그 이상 말하지 않고 그저 씩씩거리며 자신의 분노를 죽였다.
그들은 단연 최강의 전력.
거의 모든 헌터들의 위에 군림하고 있는 그들을 통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국제 헌터 협회도 그저 같은 집단 안에 묶어 놓는 것이 한계일 뿐.
그렇기에 연락이 닿지 않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러나
쾅!
"씨발…!"
아까와 마찬가지로 '이해'와 '인정'은 달랐다.
그렇게 그가 씩씩거리고 있을 때, 불현듯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이 협회원의 스마트폰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고, 베르겔은 말없이 턱짓으로 그가 전화를 받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네, 여보세요. 네, 네……? 그게 정말이야?"
갑작스레 협회원의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베르겔은 협회원을 바라보았고-협회원은 스마트폰을 조작해 전화를 끊자마자 묘하게 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부장님! 지원을 온다는 곳이 있답니다."
"정말인가! 어디? 어디인가?"
"하, 한국이랍니다."
"한국……?"
"그 있지 않습니까! 그, 일본에 나타난 '재앙'인 천마를 죽였던 그 헌터. 그러니까……그, 김현우요!"
남자의 말에 베르겔은 곧 생각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다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 정말인가!"
"예! 정말입니다!"
협회원이 화색을 띠며 말하자 베르겔은 깜짝 놀랐다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현우……천마를 죽인 그가 와준다면!'
이 엉망진창으로 박살이 난 상황을 어떻게든 해줄지도 몰랐다.
베르겔은 굉장히 급박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시간……! 지원 예정 시간은 언제라고 하지?"
"아, 아까 들은 바로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뭐?"
"듣기로는 이제 곧 도착할 거라고……."
협회원이 말을 흐리자 베르겔이 인상을 찌푸렸다.
'곧 도착할 거라고?'
그는 은연중 한국과 독일의 거리 차이를 계산했다.
'독일에서 한국까지의 거리는 못해도 12시간, 만약 사건이 일어나고 5시간 전에 출발했다고 해도 아직 7시간이나 남는다.'
"그가 정말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비행기를 타지는 않았을 테니……."
걸리는 시간은 지금부터 최소 13시간, 공항에 내려 협회까지 오는 시간을 합치면, 상당히 여유롭게 그녀가 말한 24시간 전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
베르겔이 생각을 끝내고 한숨을 내쉴 때쯤, 한국, 아랑 길드의 지하2층,
"이야, 이 새끼들 이거 정신 못 차렸네……?"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탄식하며 현장을 실시간으로 촬영해 송출하고 있는 유튜X 방송을 보았다.
아마 공중에서 찍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영상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라이프치히의 중앙광장.
딱 봐도 모자이크가 필요해 보이는 시체 위에 오연히 앉아 있는 소녀 '괴력난신'과 그 뒤에 있던 괴이들을 찍고 있었다.
'…아마 드론으로 찍는 것 같은데, 이 새끼도 엔간하군.'
김현우는 혀를 쯧쯧 찼다.
라이프치히는 이미 박살 나 있는 상태였는데, 그 와중에 도망가지도 않고 드론으로 이 장면을 촬영해서 생방송을 하고 있다는 게 김현우의 눈에는 퍽 웃기게 보였다.
'게다가, 이렇게 잔인한데 어떻게 방송이 차단당하지 않지.'
곧바로 김현우의 뒤를 따르는 의문에 그는 '흠'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갸웃했으나.
"그럼, 이제 시작해도 될까요?"
곧, 자신의 옆에서 조심스럽게 묻고 있는 아냐의 말에 입을 열었다.
"이거 저기로 가는 거 맞지?"
"네, 네. 맞아요. 물론 저 앞으로 순간이동 하는 건 아니지만, 저 근처에 순간이동 할 거예요."
아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하더니 답했다.
"가자."
"그, 그런데."
"?"
"저는, 그- 안 가면 안 될까요?"
"네가 안 가면 나는 어떻게 와?"
김현우가 그렇게 물으며 인상을 찌푸리자 아냐는 서둘러 대답했다.
"아, 그……이건 원격 마법진이라 우선 이렇게 한번 입구를 만들어 놓으면 제가 원격으로 소환할 수 있거든요."
아냐의 말에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김현우.
"……흠. 그래 뭐, 그럼 그렇게 해. 서연아 알지?"
"또요……? 가 아니라, 오빠 거기는 대체 왜……에휴, 알았어요."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열었다 닫았으나, 김현우의 표정에 이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말을 수락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냐의 말과 함께 김현우의 아래에서 보랏빛 마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김현우는 순식간에 자신을 감싼 보랏빛 마력에 신기한 기분을 느꼈고, 곧 그의 시선이 한번 점멸한 그 순간.
"오……."
김현우는 아랑 길드의 지하 3층이 아닌, 완전히 박살 나버린 라이프치히 한가운데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더 정확히 말하면-
끼릭 끼리리릭! 끼릭!?
백 개의 손을 징그럽게 움직이고 있는 관음 앞에, 김현우는 떨어졌다.
그리고-
"끼릭거리는 소리 내지 마라. 이 씹새야-!"
꽈아아앙!
김현우는 라이프치히에 도착한 지 5초도 지나지 않아, 괴이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 52
052. 괴력난신(怪力亂神)(3)
현재 생방송 되는 라이프치히의 방송.
이미 200만 명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접속해 있는 시청자 수 덕분에 옆에 열려 있던 채팅은 트래픽을 전부 받아내지 못하고, 접속자들을 나누어 지역별로 채팅방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안산동와사바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괴력난신 외모 ㅆㅅㅌㅊ 아니냐? 존예인데?]
[저는손절좋아함: 시발 지금 도시 하나 망했는데 그런 말이 나오냐]
[아토리: 우효wwwwwwwwwwwww 독일! 전부 망해 버린 거냐고!!! 어이!!!!]
[로튼이타리: 김현우 지원기사 뜨고 급하게 영상 켰는데,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냐]
현재 100만 명이 넘어가는 비율 중에서 약 1.4% 정도의 지분을 가지고 있던 한국인들은 한국의 포털 사이트에 뜬 하나의 기사를 보고 물밀 듯 유튜X로 모여드는 중이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에서 '고인물'이라고 불리는 헌터, '김현우'가 독일의 '재앙'을 막해 지원을 떠났다는 기사 때문이었다.
협회를 통해 작성된 기사는 순식간에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를 달성했고, 그 결과는-
[북덕TV: 김현우 등장 언제 하냐 시부레~~~~~~~~~낚시 기사 아니냐?]
[아트로트: ㄹㅇ루다가 낚시인가? 나 기사뜨고 1시간 동안 대기타고 있는데 드론에서 찍고 있는 거 괴이들이랑 부서진 라이프치히 구경만 시켜 주네 ㅋㅋㅋㅋㅋㅋㅋㅋ]
[천호동각껍질: 근데 이거 신기한 게 지금 시체도 나오고 하는데 유튜X 왜 안 짤리냐? ㅋㅋㅋ]
[오토메겜: ㄹㅇ 보니까 이번에 추가된 19금만 걸어주고 방송 안 꺼지네 ㅋㅋㅋㅋ]
[운상: ㅋㅋㅋㅋㅋ 보나마나 지금 이걸로 시청자수 계속 처먹고 있는데 안 끄는게 ㅇㄷ이라 그런 거 아니냐ㅋㅋㅋㅋㅋ]
그렇게 한국 지역 채팅이 순식간에 주르르륵 올라가기 시작할 때 쯤, 드디어 화르륵거리는 소리와 바람소리만 들렸던 영상에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론은 소리가 들리자마자 카메라를 돌려 소리가 울려 퍼진 곳으로 카메라를 틀었고, 그곳에는-
[아토리: 킷타!!!!!!!!!!!!!!!! 우효wwwwwwwwwwwwwwww 드디어 와버린 거냐고 젠장!!!!]
[운상: 와 실화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현우 진짜 등판했네 솔직히 독일이랑 거리 존내 멀어서 그냥 내일 보기로 하고 자려 했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북덕TV: 지금부터 영상 녹화 간다.]
김현우가 있었다.
징그러운 수백 개의 손을 가지고 있던 관음의 머리를 저 멀리 던져 버린 김현우는 정말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수백 마리의 괴이와 괴물이 득실거리고 있는 라이프치히의 중앙광장으로, 느긋한 걸음.
긴장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입고 있는 것은 이제는 그의 아이덴티티라고도 불리는 검은색 츄리닝에 삼선슬리퍼.
입가에는 느긋한 미소를 띠고 조금 전까지 관음을 박살 냈던 두 손은 이미 츄리닝 바지에 들어가 있었다.
괴물을 상대하러 가는 헌터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무방비해 보이는 그의 모습.
하지만, 유튜X의 채팅은 더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아니,
올라오지 않는 게 아니라 얼어버렸다.
한순간에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친 수천수만 수십만 개의 채팅 덕분에 트래픽이 버티지 못한 것이 그 이유였다.
"첫 번째 도전자는 자네인가?"
김현우가 걸어오자마자 시체들의 산에 앉아 있던 괴력난신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
"자네 같은 소리하고 있네. 존나 애늙은이냐?"
그녀는 곧바로 받아친 김현우의 말에 입가의 미소가 깨졌다.
"……뭐라고?"
"왜, 못 들었어? 다시 말해줘? 애늙은이냐고, 딱 봐도 몸은 발육도 제대로 안 된 꼬맹이인데 말투만 존나 늙었네."
환골탈태했냐?
김현우의 말에 괴력난신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망발을 한 자는 없었다.
전전계층의 최강자인 드래곤도, 전 계층의 '천하제일인'도 그녀의 앞에서는 한없이 긴장해 말 한마디를 아끼고 전투에만 몰입했다.
허나 지금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김현우는 어떤가?
"뭘 쳐다봐 씹새야, 나타날 거면 좀 조용히 나타날 것이지, 아주 도시를 병신으로 만들어 놓고…네가 책임질 거냐?"
그는 얼굴에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녀에게 막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김현우의 막말은, 지금까지 막말이라고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녀를 굉장히 열받게 했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나불거리는구나."
"네가 내 입 뚫는데 도와줬냐?"
"지독하게도 오만하군, 아니. 애초에 오만한 것이 아니라 무지한 것인가?"
"지랄. 내가 오만하든 무지하든 네가 뭔 상관이냐?"
"……."
김현우의 도발에 괴력난신은 그 이상 참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까득!
그녀의 입에서 난 선명한 소리. 괴력난신은 입을 열었다.
"원래 첫 상대는 느긋하게 놀아 주는 게 관례였지만, 너는 '선'을 넘었다 멍청한 계층인."
꽝!!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는 듯 괴력난신은 도약했다.
엄청난 속도.
얼핏 생각해 보면 천마가 순간적으로 보여주었던 빠르기를 웃도는 괴력난신의 스피드.
그러나 김현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몸 안으로 마력을 돌린다.
순식간에 검붉은 마력이 혈도를 타고 달리고, 김현우의 몸이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고 강해진다.
두 눈은 흐릿하게만 보였던 괴력난신의 신형을 쫓고, 몸은 콤마 단위의 공격에 대처할 수 있게 변한다.
꾸우웅!
괴력난신의 주먹이 김현우의 몸을 강타한다.
들리는 것은 피부와 피부가 닿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거친 폭음.
김현우의 신형이 크게 뒤로 밀린다.
"후…."
허나- 괴력난신의 공격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김현우가 공격을 막기 무섭게 그녀는 자신의 신형을 틀어 발차기를 날린다.
오른쪽 허벅지를 노리고 들어온 그녀의 발차기를 피해내지만, 그녀는 빗나간 발차기를 그대로 축 삼아 몸을 빙글 돌려 다시 한번 주먹을 내리꽂는다.
꽝!
아까 전보다도 확실히 거대한 폭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공방이 한순간 펼쳐진다.
김현우가 막고 피하고,
괴력난신이 끝없이 공격한다.
왼팔을 들어 막고, 오른발로 축을 돌아 회피한다.
회피했던 공격을 지지대 삼아 연속적으로 공격을 펼쳐나간다.
'틀'이라는 게 없는 듯 공격을 회피했다 싶으면 곧바로 이어지는 공격.
마치 야수와도 같은 움직임.
끝없이 이어지는 공격.
"흡…."
"!?"
허나-
'그렇다고 해서….'
공격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괴력난신이 오른발을 힘껏 차올림과 동시에 김현우는 방어 자세를 풀고 몸을 앞으로 집어넣었다.
인상을 찌푸리는 괴력난신은 급하게 공격을 거두려 했지만, 김현우는 곧바로 그녀의 몸에 파고 들어가 어깨를 이용해 그녀의 얼굴을 쳐올렸다.
"큭!"
위로 들리는 괴력난신의 얼굴.
이 공격 자체는 별 타격은 없다.
허나, 상관없다.
'진짜' 공격은 이거니까.
꽝!
뒤늦게 타점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괴력난신의 공격이 김현우의 옆구리를 친다.
순간적으로 찌푸려지는 인상.
'그래도 버틸 만하다.'
짧은 감상을 남긴 김현우는 턱이 올라간 상태에 있는 괴력난신의 품 안에서, 첫 '공격'을 준비했다.
김현우와 그녀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
그렇기에 크게 휘둘러야 하는 '공격'들은 애초에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의 속도와 공격을 역이용하는 패왕경도 그리 강한 데미지가 들어가지는 않을 터.
거리에 의해 사용할 수 있는 수많은 공격이 막혔는데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공격을 준비했다.
파고들어 있는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은 그녀의 심장에 다가가 있는 오른손.
그것은 김현우가 탑 안에서 수련했던 것 중 '웹소설'이나 '만화'에서 본 기술이 아닌, '영화'에서 본 기술 중 하나였다.
일순, 김현우의 마력이 혈도를 꽉 채운다.
그와 함께 츄리닝 너머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극한까지 근육을 들어낸 김현우의 육체.
괴력난신은 급하게 들어 올려졌던 턱을 아래로 내려 시야를 확보하려 했으나, 이미-
'영거리-'
-늦었다.
'-극살(?殺)'
김현우의 근육이 순식간에 오른팔로 몰려듦과 동시에 팔이 움직인다.
극한으로 절제된 김현우의 주먹이 1인치도 체 움직이지 않고 괴력난신의 가슴을 가격한다.
그리고-
꾸우우우우웅─!!!
귀가 먹먹할 정도로 거대한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괴력난신의 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튕겨 나간다.
중앙광장에 있는 빌라들을 으깨 버리며 빌라 단지 쪽에 처박히는 괴력난신.
허나, 괴력난신이 정신을 차릴 시간은 없었다.
"…!!"
"언제까지 그렇게-"
꽈아아아앙!
"쉬고 있으려고……!!!"
빌라 상층에 처박힌 그녀의 앞에 나타난 김현우는 곧바로 떨어지는 낙하량에 자신의 공격을 담아 괴력난신의 몸을 그대로 찍어 내렸다.
쿠구구구구구구궁-!!
빌라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하까지 뚫어버릴 듯 내려가는 괴력난신의 몸과 다시 한번 그것을 쫓는 김현우.
저번 '천마'와의 싸움으로 그들에게 시간을 주는 것보다는 무조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좋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체득한 김현우는 또 한 번 몸을 움직였으나-꽝!!!
"!"
김현우의 내리찍기를, 괴력난신은 막아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몸 주변으로 모여드는 푸른색의 마력.
"네 녀석, 확실히 입을 나불거릴 정도는 되는구나."
콰아아아아!
푸른 마력이 더더욱 진해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이 씹새끼도 2차 변신인가…!'
그때 당시에도 분명 이런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김현우는 천마 때를 상기하며 잡힌 발을 축 삼아 오른발을 휘둘러-꽝!
그녀의 얼굴을 맞추는 데 성공했지만-
"이런 미친."
"네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자신의 기술을 보여준 것 같으니. 나도 답례 삼아, 네게 내 능력을 보여주도록 하마."
계층인이여.
꽝!
"윽!?"
그와 함께 김현우의 몸이 뒤로 쏠려 나가고, 김현우가 급하게 자세를 잡았을 때.
"드래곤은 다섯 보."
괴력난신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는 오만한 칭호를 가진 머저리는 일곱 보를 버텼다."
'걸음'을-
"너는-"
옮겼다.
"몇 보나 버틸 수 있을까."
일 보-
무엇인가가 비틀렸다.
이 보-
김현우의 사고가 평소보다 빠르게 회전한다. 몸 안의 모든 세포가 또 한 보를 딛고 있는 괴력난신을 막으라고 경고를 보낸다.
빠르게 달려가서 막아낼까?
아니, 불가능하다.
이미 괴력난신의 주변에 거칠게 휘몰아치고 있는 마력의 폭풍을 김현우는 깰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쪽도 최대의 기술로 맞붙는다!'
삼 보-
주변의 마력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분명 멀쩡하게 지어졌을 건물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무너지려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고, 마찬가지로 김현우도 그 떨림을 느낀다.
허나, 그런 상황에도 김현우는 괴력난신을 보며 자신의 마력을 돌렸다.
사 보-
건물들이 터져 나간다.
김현우는 그제야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녀, 괴력난신의 일 보를 걸을 때마다 주변의 마력이 팽창하고 있었다.
공기 중에 퍼진 마력들이 무참하게 팽창하며 실체를 가지고, 그것들은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저 '팽창'함으로써 깨부수고 있었다.
김현우의 몸이 팽창하는 마력에 짓눌리기 시작한다-
오 보-
허나, 그런데도 김현우는 마력을 돌린다.
김현우를 짓누르는 마력은 검붉은 마력으로 막아낸다.
거대한 혈도를 타고 도는 김현우의 검붉은 마력이 '천마'에게서 배운 무공을 다시 한번 이 세상에 드러내게 만들어 준다.
육 보-
등 뒤에 검은 흑원이 생기고, 그 흑 원의 뒤로 검은색의 날개가 만들어진다.
온몸에는 마치 엔진을 돌리는 검붉은 마력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고, 마력들이 자신의 기세를 알리듯 사방으로 용오름 친다.
칠 보-
팽창하던 마력들이 주변 공간에 있던 빌라들을 박살 냈다.
마치 아귀처럼, 무엇 하나 남기는 것 없이 모조리 먹어치워 버리겠다는 듯,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잘게 부숴 없는 것으로 만든다.
팔 보-
공간이 팽창한다.
김현우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최대치를 갱신하고, 김현우의 몸속에 있는 검붉은 마력이 '괴력난신'의 뜻에 따라 팽창한다.
그에 느껴지는 격통-
허나 김현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구 보를 내딛으려는 그 순간-
"극-"
김현우는-
'패왕-'
보다 완벽해진 천마의 무공을,
괴신각-
'괴력난신'에게 내보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
# 53
053. 괴력난신(怪力亂神)(4)
콰아아아아아─!!!
세상에 검붉은 빛이 폭사하고, 그 뒤로 하얀빛이 청각과 시각을 먹어 치운다.
하얀빛으로 닫힌 시각.
삐- 거리는 전자음 소리에 빼앗긴 청각.
그저 촉각만이 살아 있는 그 상황에서, 김현우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모든 마력을 발에 쏟아부어 움직였고-
"축하한다."
서서히 청각과 시각이 돌아올 때쯤, 김현우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봤다.
분명 발에는 감각이 있었다.
공격이 제대로 먹혔다는 감각이.
허나 앞에 있는 괴력난신은-
"너는 구 보를 막아냈구나."
아무런 피해도 없이 김현우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김현우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분명 그의 발은 괴력난신의 명치를 차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김현우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가 막아냈다는, 구 보를 이미 밟고 있었다.
"!"
그제야 김현우는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미-친……!"
분명 천마의 무공으로 인해 깨져야 했을 괴력난신의 '기술'은-
"하지만-"
깨지지 않았다.
오히려, 끝없이 팽창하고 있는 괴력난신의 마력은 금방이라도 김현우를 먹어치워 세상에 지워버리려는 듯 그를 찍어 눌렀다.
그 상황에서 괴력난신은 섬뜩한 표정으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김현우에게 선고했다.
"내 마지막 걸음은, 막지 못했구나."
그와 함께 그녀는 마지막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이 떨어진다.
김현우는 당장이라도 그 발을 막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
이미 마력의 팽창이 한계까지 진행되어있는 공기는 김현우의 몸을 강제로 붙잡았고-
"이런 씨발!"
십 보(十 步)-
"-멸살(滅殺)"
삐────────────!
그녀가 탑을 오르고, 단 한 번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던 그녀의 기술이-?
콰아아아아아────!
김현우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과는 다를 정도로 거대하게 팽창하는 마력에 김현우는 이를 악물고 검붉은 마력을 내뿜었다.
이미 청각은 다시 먹혀 이명밖에 들리지 않았고.
시야는 난잡하게 터져 나가는 화마와 빌라들로 인해 가려져 버렸다.
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끝없는 파괴뿐.
그런 상황에서 팽창하고 팽창해, 이제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을 가득 채운 그녀의 마력은 김현우의 몸을 박살 내기 위해 전력으로 그를 찍어 눌렀다.
내부의 혈도에서도 김현우의 통제를 떠난 마력이 팽창했으나, 그는 버텼다.
버티는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김현우의 전신을 강타했지만, 그래도 버틴다.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며 눈앞에 파괴되어 가는 모든 것들을 보며 김현우만이 오롯이 그녀의 십 보를 버텼다.
내부에서 팽창하던 마력을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내구 S라는 등급은 김현우의 마력 컨트롤을 어떻게든 따라오고 있었다.
곧-
그녀의 기술이 끝났을 때-
"호오, 대단하구나."
김현우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땅 위에, 괴력난신과 함께 서 있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빌라촌은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김현우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괴력난신이 앉아 있던 라이프치히의 중앙광장도 보이지 않았고, 빌라촌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그저 저 멀리, 꽤 먼 거리에 있는 '도시'의 흔적뿐.
김현우와 괴력난신이 서 있는 곳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흙과 자갈,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미소를 짓고 있는 괴력난신뿐.
"내가 십보멸살(十步滅殺)을 온전히 쓰게 하는 것도 모자라 전부 맞았는데도 서 있을 수 있다니."
대단하구나, 대단해.
그녀는 진심으로 놀란 듯, 피식피식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 웃음이 미묘한 조롱을 포함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녀의 십보멸살은 그 이름 그대로 이 근처에 있던 모든 것을 먹어 치웠다.
어느 것 하나 남기지 않았다.
말도 안 될 정도로 패도적이고 난폭한 그녀의 기술.
"미쳤군."
그 기술에 김현우는 짧게 평가하곤 욱신거리는 몸을 붙잡았다.
기술을 정통으로 맞은 김현우의 몸은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정상이 아니었다.
마력은 아직 움직인다.
허나 십보멸살을 받아낸 그의 혈도는 팽창을 막아내느라 굉장히 약해져 있었고, 넝마가 된 츄리닝 사이로 보이는 김현우의 몸 이곳저곳에는 붉은 피멍들이 보였다.
십보멸살(十步滅殺)을 막은 대가.
욱씬-!
"쯧."
몸을 간단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엄청난 격통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천마 때와 비슷- 아니, 그보다 더 심한 격통.
괴력난신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내 기술을 막아냈지만 지금 네 몸은 이 이상 싸울 수는 없어 보이는구나."
어떻게 할 테냐-?
"그 알량한 목숨을 구걸하겠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자존심을 세워 죽음을 기다릴 테냐?"
괴력난신의 물음.
이미 전부 이겼다는 듯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김현우는 입가를 비틀었다.
"야."
"……?"
"선택지가 하나 부족하잖아."
김현우는 자세를 잡았다.
괴력난신이 슬쩍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며 의문을 표할 때, 김현우는 아까 전 괴력난신이 보여주었던 그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선언했다.
"너를 박살 내 버릴 거다."
그런 김현우의 선언에 괴력난신은 한순간 얼빠진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박장대소를 터트리며 좋아했다.
미친 것처럼 제자리에 서서 웃는 그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김현우.
괴력난신은 이내 박장대소를 멈추고 김현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좋구나! 좋아! 내 너를 너무 다른 머저리들과 똑같이 생각한 듯하구나!"
그녀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음을 짓더니 이내 혀를 내밀어 자신의 이빨을 핥았다.
그렇게 해서 흘러나오는 아릿한 혈향의 냄새를 맡으며 다시 한번 푸른 마력을 발산하며, 김현우와 똑같은 오만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네가 그렇다면, 나 또한 이번에는 예를 갖춰 최선을 다해 너를 상대해 주도록 하겠다."
그녀와 함께 푸른 마력이 사방으로 터져 나간다.
아까와 같은 상황이었지만, 뭔가 달랐다.
푸른 마력은 김현우의 숨을 멈추게 할 정도로 진득했고, 그것들은 아까 그녀가 보여줬던 마력과는 차원이 다른 농밀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게, 내가 백귀야행(百鬼夜行)의 두목이자-"
씨익-
"나, 괴력난신(怪力亂神)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마력으로 펼치는 '진짜'다. 어디 한번-"
받아 보거라.
김현우는 언젠가 들어봤었던 것 같은 대사를 치며 마력을 내뿜는 괴련난신을 보며 자세를 잡았다.
격통이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몸이 부서질 것만 같은 끔찍한 격통.
그러나, 김현우는 웃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마력 팽창을 막아내었습니다. 내구 등급이 올라갑니다!]
……
…
.
김현우는 버텼고,
[외부 마력이 김현우의 몸속으로 강제 침입합니다. 마력이 강제 개화됩니다. 마력 등급이 올라갑니다.]
……
…
.
김현우는 받아냈으며-
시스템은 그런 김현우에게 틀림없는 대가를 내려 주었다.
올라간 내구 등급은 피멍이 든 김현우의 온몸의 혈도를 올바르게 가동하게 도와주었고, 추가로 올라간 마력 등급은 김현우의 몸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 '괴력난신(怪力亂神)'이 보여주었던 십보멸살로 인해, 그는 천마 때와 같이 '가닥'을 잡을 수 있었고-
"흡……!"
'파훼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김현우가 탑 안에서 수련할 때,
그는 무엇을 했는가?
그는 무(武)를 공부했다.
그 어느 것이든 가리지 않았다.
웹소설, 만화, 애니, 영화, 어느 매체에서 나오는 모든 무(武)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그는 떠올렸고, 수련했고, 반복했다.
탑 안에서 제자가 있던 때를 제외하면 모든 것을 홀로 수련하던 그는, 모든 종류의 무(武)를 실험했으며 모든 종류의 기술을 자신의 몸에 안착시켰다.
말도 안 되는 허구의 무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과장되어 만들어진 무(武)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현실 세계, 무(武)의 원리를 터득했다.
그렇게 그가 익혔던 무술 중에서는-언젠가 그가 읽었던 수많은 신화 속, '괴신(怪神)'을 막아내는 '아수라(阿修羅)'의 무(武)도 있었다.
그 누군가는 그저 작가들의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엮어 만들어낸 허구라고 비하할 수도 있는 그 수많은 소설들.
그 수많은 소설의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은 모두 그의 스승이 되어 김현우에게 무(武)를 전수했다.
그렇기에-
그 수많은, 수십, 수백, 수천 명의 스승이 있었기에-
"후-"
김현우는 할 수 있었다.
"!?"
괴력난신이 사방으로 진득한 마력을 뿌리고, 마침내 일보를 내딛으려 할 때, 그녀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인상을 굳혔다.
분명, 그는 아까와 다름이 없었다.
이미 넝마에 가까워져 있는 옷 사이로는 치사량의 피해를 입은 듯 붉은 멍이 들어 있었고, 그의 몸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놀란 것은 바로 김현우의 뒤에 '팔'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현우의 뒤에 일렁이며 만들어져 있는 그것은, 분명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팔이었다.
그런 팔의 뒤로 그려져 있는 흑원, 그 흑원에 새겨져 있는 세 개의 만다라(曼陀羅).
아까와는 다른 기세를 뿌리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괴력난신은 인상을 굳히면서도, 오롯이 전력을 내기 위해-일 보를-
"!!!!!!"
내딛지 못했다.
어느새, 그 어떤 전조도 없이 그녀의 앞에 다가온 김현우는 오른발을 이용해, 그녀의 일 보를 멈췄다.
괴력난신이 인상을 찌푸린다.
김현우는 오롯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괴력난신의 입가가 억지로 비틀어 올라가며 정제되지 않은 투기와 마력을 사방으로 끌어내며 생각했다.
'아직, 구 보(九 步)가 남아 있다.'
그녀의 십보멸살(十步滅殺)은 중첩형이다.
고작 한 보를 내딛지 못했다고, 약해지는 허접한 기술과는 달랐다.
그렇기에 그녀는 일 보를 막힌 것에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투기를 내뿜으며 다음 보를 내디뎠다.
허나-
"이익……!!"
괴력난신의 이 보는, 김현우의 오른팔에 의해 막혔다.
분명 그 어떤 기술도 담기지 않았지만, 검붉은 마력을 내뿜고 있는 김현우의 몸은 괴력난신의 일보를 또 한 번 막아냈다.
괴력난신은 계속해서 걸음을 내디딘다.
삼 보가 김현우의 오른 다리에 의해 막힌다.
사 보가 일렁거리는 마력 팔에 의해 막힌다.
오 보도.
육 보도-
칠 보도-
분명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한하게 팽창하던 괴력난신의 마력은, 김현우에게 막혀 허공에 뿌려진 채, 팽창하지 못하고 있었다.
괴력난신의 얼굴에 귀기가 서린다.
"네 녀석-!"
푸른 마력이 폭풍우 치며 괴력난신이 팔 보를 내디딘다.
허나 김현우의 뒤에 만들어져 있는 검은색의 만다라는, 괴력난신의 팔 보를 허락하지 않았다.
구 보에는 두 번째 만다라가,
그녀의 기술이 완성되는 십 보에는 세 번째 만다라가,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게…… 무……슨!!!"
그녀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그녀가 펼친 십보멸살은 김현우에게 그 어떤 피해도 주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작센의 라이프치히의 일부를 완전히 '없던 것'으로 만들어 버렸던 그녀의 공격은 재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내 차례다."
괴력난신의 10보를 막기만 했던 김현우의 몸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분명 그녀의 걸음을 막아내며 사라졌던 만다라와 마력의 팔들이 다시금 재생된다.
폭발적인 마력을 먹어치우며 그 존재를 과시한다.
쿠그그그그긍!
김현우는 최후의 최후까지 쓰지 않았던 자신의 왼팔을 그녀의 심장에 가져갔다.
그런 김현우의 행동에 따라 등 뒤에 만들어졌던 4개의 팔이 일제히 괴력난신을 향했다.
화아아악-
김현우의 뒤에 있던 검은색의 만다라가, 마치 연꽃을 개화하듯 펼쳐지며 마력을 뿜어내고-그는 자신이 올라서고 이룩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무공에-
"수라(修羅)-"
-이름을
'-무화격(無華擊)'
붙였다.
──세상이, 검붉게 물들었다.
# 54
054. 조용히 해라(1)
김현우가 독일 작센의 라이프치히에서 괴력난신을 처리한 그 날, 유튜X는 검은 연꽃으로 도배되었다.
실시간 급상승 인기 영상의 1위부터 50위는 전부 동영상 메인에 검은 연꽃을 붙여 놓았고, 심지어는 김현우와 상관없는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어그로를 위해 검은 연꽃을 붙이기도 했다.
마지막, '괴력난신'과 김현우가 싸움을 벌일 때.
저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던 드론 카메라는 괴력난신에 의해 박살 나고, 그나마 깨진 렌즈로 촬영되었던 화면도 김현우의 공격으로 완전히 박살 났었으나.
김현우가 펼쳤던 '수라 무화격'은 그 깨진 렌즈에 온전히 담겨 그 전투를 보고 있던 430만의 시청자에게 무한한 경악과 소름을 선사해 주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기에 현재 유튜X 영상 1위를 먹고 있는 것은 '김현우의 신기술 보정버전'이라는 영상이었다.
카메라에 찍힌 마지막 영상에서 부서진 렌즈 부분을 그래픽 기술로 없애고 각도가 틀어져 찍히고 있던 영상을 시청자들이 보기 편하게 바꿔 올려놓은 영상은 순식간에 유튜X 1위를 차지했다.
영상은 짧았다.
앞에 리터칭 기술 같은 걸 설명하는 것을 빼면 불과 15초에서 20초밖에 되지 않는 영상.
본격적인 영상의 시작은 바로 김현우가 괴력난신의 마지막 십 보를 막고, 자세를 잡는 모습부터였다.
그의 몸이 살짝 벌어진다.
피멍이 든 등에 검붉은 색의 마력을 먹어치우며 4개의 팔이 생겨나고, 그 뒤에 검은색의 흑원과 만다라가 생겨난다.
그러나 괴력난신의 십 보를 막을 때와는 다르게, 만다라는 금방이라도 개화할 듯 검붉은 꽃망울을 일렁이고 있었다.
이윽고 느릿한 손짓으로 괴력난신의 몸에 왼팔을 들이미는 김현우, 그에 따라 등 뒤에 생겨난 4개의 팔이 일제히 그녀의 몸을 향해 팔을 지켜든다.
그 뒤에 보이는 것은 검붉은 몽우리를 개화하는 만다라.
아름다운 연꽃이 피듯-
검붉은 빛과 함께 개화한 만다라가 세상을 검붉은 빛으로 물들이는 것을 끝으로 영상은 종료되었다.
그 누가 보더라도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는 굉장한 풍경.
5시간 전에 올라온 이 영상의 댓글은 이미 수만 개를 가볍게 넘어가고 있었다.
SEKIRO: 와 개쩐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차이 개쩐다, 좀 김현우는 진짜 뭔가 다른 듯한 기분이 든다. 무슨 다른 헌터들 싸우는 거 보면 맨날 스킬명 외치면서 와다다다다닷!! 하는데, ㄴ asdfff: 와다다다닷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ㅇㄱㄹㅇ 이다. 맨날 스킬명 외치고 꼬라박 플레이밖에 안 나오긴 하지.
ㄴ 헌터지망생: ㄴㄴㄴ 그건 니들이 뭘 몰라서 그러는 거다. 기본으로 헌터들도 원래 체계적으로 싸우는데 영상미 챙기려면 스피디한 전투가 좋아서 그렇게 다들 찍는 거야 오해 ㄴㄴ(번역됨)오토체스하고싶다: 후, 나는 이 장면을 보니까 문득 생각하게 되는데, 김현우는 헌터랭킹 10위권에도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ㄴ 너의인생함초롱이: 이건 정말이야. 나는 그가 10위권 내에도 비벼 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싸운 상대를 봐, 그 크리쳐는 라이프치히의 30%를 그냥 날려버렸다고!
ㄴ 네인생불만있나: 흠, 과연 김현우가 10위권 내랑 비빌 수 있을까? 솔직히 저건 저번에 중국 랭킹 5위인 '패룡'도 가능하다고 들었던 것 같다.
ㄴ 라이프캐슬로와라: 너는 대체 뭘 이야기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그가 10위권 내랑 붙어볼 수 있다고 말한 거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의 5위인 패룡은 이명이랑 순위뿐이고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잖아? 그렇게 했다고 나온 것도 사진뿐이고.
아몰랑빼액: 호옹이, 근데 저거 결국 독일은 누가 책임지냐? 독일 라이프치히 그냥 개박살 나고 한쪽은 그냥 전투 때문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데? 김현우가 책임지나?
ㄴ선생님: 자자, ---------------------- 병먹금 ----------------------
ㄴ병신을 보면 짖는 게: 크랩! 크래래래랩! 크랩! 크랩! 크래래래랩! 크랩! 크랩! 크래래래랩! 크랩! 크랩! 크래래래랩! 크랩! 크랩! 크래래래랩! 크랩! 크랩! 크래래래랩! 크랩! 크랩! 크래래래랩! 크랩! 크랩! 크래래래랩! 크랩! 크랩! 크래래래랩! 크랩!
ㄴ아몰랑빼액: 노잼 병신아.
ㄴ병신을 보면 짖는 게: 욕하셨네요? PDF 캡쳐했으니 법정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피식!
욱씬-
"아으- 씨바아아아알!!!"
그다음 날, 김시현의 집 안방.
툭-
김현우는 사용하고 있던 스마트폰을 던져버린 채 조금 움직였다고 금세 욱씬거리기 시작하는 자신의 몸에 혼자 침대에 누워 발광하고 있자 곧 방문이 열리며 김시현이 들어왔다.
"형, 뭐 해요?"
"뭐 하긴 뭐해! 아파서 요단강 가겠다……!"
"에휴, 그러니까 왜 굳이 독일까지 가서 사서 고생을 해요?"
"걔한테 볼 일이 있었다니까……!"
김현우가 그렇게 몸을 비틀며 입을 열자 김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저도 그것 때문에 몇 개 형한테 좀 물어볼게 있기는 한데…… 그건 나중에 물어보고, 형 지금 난리 난 거 알죠?"
"왜?"
"아니, 조금 전까지 스마트폰 보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그래, 보긴 봤지. 내 영상으로 유튜X 다 도배되어 있던데?"
"해외 이슈는 봤어요?"
"그걸 내가 왜 봐?"
김현우의 당당한 말에 김시현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라는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말했다.
"지금 형 때문에 난리거든요……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금 다른 부분에서……."
"다른 부분? 뭔데?"
"뭐,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는 형이 직접 보는 게 더 빠를 거예요."
김시현은 그렇게 말하더니 곧바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조작해 김현우에게 건네주었고, 그는 곧바로 주르륵 쓰여 있는 글자를 읽어 나갔다.
[김현우, 어떻게 그 거리를 날아왔나? 의문 확산…中]
이번 독일 작센 라이프치히에서 일어난 '재앙'을 김현우가 막아내 전 세계적으로 매우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와중, 김현우에 대한 의문이 하나 제기되었다.
의문은 바로 김현우가 날아온 거리였다.
한국에서는 12년 동안 탑에 갇혀 있었다는 이유로 '고인물'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김현우 헌터는 당연하지만 '한국'에 살고 있다.
허나 그는 한국에 살면서도 독일의 '재앙'이 일어난 지 단 7시간 만에 라이프치히에 도착해 재앙, '괴력난신'과 싸워 독일을 지켜냈다.
그는 어떻게 7시간 만에 독일에 갔는가.
일련에서는 김현우가 애초에 미리 알고 찾아갔다는 의문까지 돌고 있는 와중이다, 그 이외에도 지금 괴력난신을 처리한 이유 김현우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
.
"이건 또 뭔 개 같은 소리야?"
"뭐긴 뭐예요. 형이 톡 튀니까 어디에서 한번 맥여보려고 의문설 제기한 거죠."
딱 봐도 아레스 길드인 것 같지만요.
"그게 이렇게 커진다고?"
김현우는 김시현의 폰을 조작해 뒤로가기를 눌렀다.
현재 인기 포탈 메인 실시간 검색어 7위를 차지하고 있는 '김현우 의문'이라는 검색어.
눌러보니 김시현이 보여줬던 것과 같은 의문형 기사가 여러 개 나타나고 있었다.
"게다가 형이 지금 좀 유명한 게 아니다 보니까 해외에서도 한국기사 떠서 해외로 나르고 있어요."
"아니 이 새끼들이……."
어떻게 구해줘도 지랄이지?
김현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짓다가 물었다.
"아니, 씨발 이거 말도 안 되는 찌라시잖아? 내가 어떻게 미리 알고 가, 씨발."
나타나는 시간은 알고 있어도 어디서 나타나는지를 모르는 데 미리 가서 대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게요?"
김시현이 묻자 김현우는 진득하게 한숨을 열었다.
"뭘 어떻게 하기는 해, 기자회견 열어야지."
"열어서 어떻게 하시게요?"
"어떻게 하기는 어떻게 해. 그냥 내가 한국에 있는 것만 보여줘도 이런 음모론은 사라지겠지."
"뭐, 그렇기는 그런데."
애초에 이 음모론은 김현우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독일에 갈 수 있었느냐로 시작된,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가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음모론이었다.
만약에 여기서 김현우가 기자회견을 열어 딱 참가하기만 해도 그 음모론은 박살 나는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는 건 또 하나.
"그럼, 순간이동은 어떻게 설명하시게요?"
"뭐?"
"순간이동이요. 이걸 설명하려면 결국 형이 머더러 헌터의 힘을 빌려서 독일에 갔다는 게 까발려지잖아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아, 걔는 지금 어디 있냐?"
"누구요. 머더러 헌터?"
"그래, 걔"
"어디 있기는요, 아랑길드 훈련실 지하 2층에 스태프랑 마정석 전부 뺏고 가둬놨죠."
"……음."
김현우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야."
"네?"
"어차피 순간이동 마법진 같은 거 없었다면서?"
"네, 뭐……그렇죠? 마력이 발달 되어 있는 마법사형 헌터들은 간헐적으로 블링크라는 스킬을 배워서 사용하기는 하는데 그거야 길어봤자 10~20m 정도고……."
순간이동은 없었죠.
김시현의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럼 됐네."
"뭐가 돼요?"
"그냥 순간이동 마법진을 쓸 수 있는 헌터를 구했다고 하면 되잖아? 한국에는 용병들 많다며?"
"아니, 그렇긴 한데…."
저번에 말했듯 한국에는 용병들이 많다.
뭐, 대부분 이유야 아레스 길드의 독점체재에 못 버티고 용병이 되어버린 헌터가 많은 것도 있고.
한국의 미궁이 다른 국가의 미궁보다 미궁 내에 있던 마정석과 아이템에 많은 수수료를 떼지 않기에 해외의 용병들이 한국에 몰리는 경향도 있었다.
'그래도 너무 어거지인데…….'
애초에 용병 중에서 제대로 된 헌터는 '거의' 없다.
당연하게도 헌터 등급이 높은 이들은 길드에 들어가서 한자리 차지하는 게 조금 더 인생을 쉽게 구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하면서도 용병집단이 되는 건 '머더러 헌터'거나, 미궁에서 나오는 아이템에 미쳐서 미궁에서 사는 '용병 탐사꾼'뿐인데….'
김시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김현우는 떠올랐다는 듯 아, 하고 탄성을 내더니 말했다.
"시현아."
"왜요?"
"기자회견 여는 김에, 아이스크림도 좀 가져다줘라. 바닐라 맛으로."
사방이 자신을 향한 이슈라서 조금 긴장이 들 만도 하건만 그런 반응은 전혀 보이지 않는 김현우의 모습.
'아니, 애초에 기자들 모으는데 아이스크림 가져다 달라는 건 또 뭔 소리야.'
김시현은 그런 그의 모습에 툴툴거리면서도 스마트폰을 넘겨받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
그로부터 5시간 뒤, 김시현의 고급 아파트 1층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냥 모여 있는 게 아니었다.
저번 아레스 길드 때문에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보다도 많은 인파가, 고급 아파트 1층에 몰려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인파 덕분에 사방에서 신고가 들어올 법도 했지만.
오히려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까지도 김현우를 보기 위해 베란다에서 몸을 빼고 김현우가 사는 아파트의 입구를 기웃거렸고-마침내-
"나왔다!"
"야! 진짜 나왔다!"
아파트의 1층에 김현우가 나타났다.
그는 분명 영상으로 봤을 때는 온몸에 피멍이 들어 몸이 성하지 않은 상태일 텐데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느긋한 걸음으로 아파트를 빠져나왔고.
"후……."
곧 수많은 기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김현우 헌터! 이번에 한국에서 독일까지 넘어간 시간 때문에 수많은 이슈가…."
"조용히 해 씨발 새끼야. 너 같은 새끼 때문에 기자회견 연 거니까."
-김현우의 욕이 울려 퍼졌다.
# 55
055. 조용히 해라(2)
기자들이 얼어붙었다.
조금 전, 열렬하게 목소리를 높이던 기자는 마치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뻥끗 뻥끗 거리고 있었고, 김현우는 시선을 돌리더니 아파트 앞에 있는 목조 벤치에 앉았다.
"자, 우리 서로 짜증 나게 하지 맙시다."
그와 함께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제 성격 다들 아시잖아요? 뭐, 제가 인터뷰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최소 서너 번은 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그래요?"
좀, 우리 편하게 갑시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조금 전까지 질문하고 있던 기자를 보며 말했다.
"아, 거기 질문하셨던 분은 좀 저리 꺼져주시고, 억지로 계속 그 자리에 서 있다면 저는 말리지 않긴 하겠는데, 나는 저 사람 있으면 한마디도 안 할 겁니다."
"……힉."
김현우의 말과 함께 군중들의 시선이 기자에게 모였다.
물론 지금까지 수많은 군중 중 하나는 되어 보았으나, 그 주체가 된 적은 없었던 기자는 곧바로 목을 움츠린 채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고, 김현우는 만족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질문을 받도록 하죠. 똑같은 말 하기 싫지만, 혹시 모르니 말하겠습니다. 만약 자기가 생각했을 때 이게 해야 할 질문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그냥 하지 마세요. 우리, 말의 무게를 잘 기억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입을 툭툭 친 김현우는 이내 손가락을 움직여 기자를 지목했다.
"네, 거기. 질문받을게요."
"아, 예! 혹시 김현우 헌터가 이번에 독일로 넘어가서 괴력난신을 상대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래서요?"
"세간에서는……."
"아, 그러니까 뭐 대충 내용을 정리하자면 어떻게 빨리 왔다 갔다 했냐 이걸 묻고 싶은 거죠?"
김현우가 갑자기 말을 뺏자 당황하던 기자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김현우는 말했다.
"그거야 뭐 별거 없습니다. 헌터를 한 명 구했습니다."
"네? 헌터요?"
"그게 무슨……."
"'순간이동'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는 헌터를 구했습니다."
"헉……!"
"정말입니까!?"
"그럼 제가 여기 사람 다 불러 모아 놓고 헛소리한단 거야?"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자 질문을 했던 기자는 움찔하더니 입을 다물었고, 김현우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순간이동 헌터를 영입해서 독일까지 빠르게 갔다 왔습니다. 지금 여기서 기자분들한테 귀중한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저만 봐도 알겠죠?"
김현우가 말하자 기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맞았다.
상식선으로 생각해 봤을 때, 김현우가 당장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올 수는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김현우는 다음 사람을 지목했다.
"순간이동 마법진을 활용할 수 있는 헌터는 누구입니까?"
"본인이 누군지 밝히고 싶지 않아서 함구하겠습니다. 아, 혹시라도 비밀스럽게 뒤를 캐서 밝혀낼 생각이라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긴 한데……."
그 사람의 뒤에 누가 있는지 잘 생각해 보시면 그럴 생각은 전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뒤로 이어진 여러 개의 질문.
김현우는 대충대충 대답했고. 곧 회견을 끝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네, 이제 2명 정도만 더 받고 그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김현우가 손가락으로 한 기자를 지목하자 그는 질문권을 빼앗길세라 곧바로 말했다.
"김현우 헌터! 저번에는 일본에서 재앙을 막고, 이번에는 독일에서 재앙을 막지 않았습니까?"
"네."
"재앙을 막는 이유가 뭡니까?"
"?"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기자는 당황하는 듯하면서도 슬쩍 눈치를 보곤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그 저번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김현우 헌터가 그 엄청난 재앙을 막아내며 요구하는 것이 너무 없어서…."
'…그런가?'
기자의 말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생각했다.
확실히 김현우는 말 그대로 탑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등반자를 사냥하러 다니는 것이었으나,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는 묘하게 보일 여지가 있긴 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음…."
드물게 김현우가 대답을 멈추자 기자들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물론 그런 시선이야 똥을 싸면서도 받아낼 수 있을 정도로 무관심한 김현우는 나름 적당한 이유를 머릿속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김현우는,
"그건?"
"별 이유 없는데?"
적당한 이유를 생각하기가 너무 귀찮았다.
김현우의 대답에 기자들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진다.
그 모습을 본 김현우는 그냥 적당히 이유를 붙였다.
"굳이 이유를 붙이면 더 강한 척 깝치는 녀석 조지는 게 취미라서."
그래, 그냥 그런 거로 하죠.
별 어처구니없는 것을 이유로 가져다 붙인 김현우는 이내 다음 말이 나오기도 전에 다른 기자를 지목하며 말했다.
"마지막 질문하세요."
"아, 그…… 혹시, 김현우 헌터가 가지고 있는 '고유 스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뭐? 고유 스킬?"
"네."
기자의 질문에 다시금 군중들의 포커스가 김현우에게 집중되었다.
기자는 마지막 질문답게 그를 둘러싼 의문 중 아직도 그가 직접 발언한 적이 없는 의문을 입에 열었다.
고유 스킬,
그것은 일정 이상 경지가 오른 헌터가 되면 '시스템'이 자연스레 헌터에게 부여하는 능력으로, S등급에서의 랭킹은 그 '고유 스킬'로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했다.
거기에 덤으로 김현우가 지금까지 보여줬던 기술들.
천마와 싸울 때 보여주었던 패왕괴신각과, 이번 괴력난신을 상대할 때 보여주었던 수라무화격 덕분에 김현우의 '고유 스킬'에 대한 의문은 더더욱 커지고 있었다.
무슨 스킬인가?
도대체 무슨 스킬이길래 김현우는 저런 강력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가.
기자들의 시선이 김현우의 얼굴을 뚫을 듯이 쳐다보고 김현우는 대답했다.
"고유 스킬 없는데?"
"네…… 네?"
"고유 스킬은커녕 일반 스킬도 없고."
"그, 그게 무슨…… 그렇다면 그 천마와 싸울 때 보여주었던 기술과 괴력난신과 싸울 때 보여주었었던 그 기술은……??"
"그건 스킬이 아니라 내가 탑 안에서 만든 '무술'인데?"
김현우의 말에 기자들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질문을 했던 기자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향해 말했다.
"그, 그러니까, 스킬이나 고유 스킬이 하나도 없는 기술이라면…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겁니까?"
"아니, 아니지."
김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나 쓸 수 있지는 않지. 그 기술들은 모조리 내가 만든 거니까."
나한테 배워야만 쓸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한 김현우는 이내 손을 휘적휘적하며 입을 열었다.
"이걸로 기자회견은 끝, 이 이상 입 뻥긋하면 여기서 개지랄할 거니까 전부 다 돌아가시고, 또 추가적인 질문 있으면 그, 나중에 시현이한테 물어봐요."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묘하게 귀찮아질 말을 했다는 생각에 탄식하면서도 김시현의 이름을 팔며 고급 아파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날 밤.
[김현우가 지금까지 사용했던 기술
'나한테 배우면 전부 가능해.'
발언 충격!]
[김현우, 순간이동이 가능한 헌터 영입!! 한국 헌터의 인재풀 김현우에게 빨려 들어가나??]
[고인물 헌터 김현우, 서울 길드의 길드장인 김시현과의 친분 과시 '나머지는 시현이한테 물어라']
[김현우 헌터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나???]
인터넷은 김현우의 기사로 인해 떠들썩해졌고,
"형!! 왜 나를 팔고 지랄이야!!!"
김현우의 몸이 어렴풋이 나을 때까지 기자들의 상대를 했던 김시현은 4일째 되는 밤에 김현우의 침대 앞에서 개지랄을 떨었다.
***
중국 상하이.
위연 길드의 거대한 '장원'이 있는 외각.
"크엑!"
한 남자가, 여자 앞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온몸에 강철과도 같은 녹갑을 차고 있는 남자.
그는 바로 위연 길드의 길드장이자 S급 헌터랭킹에서 17위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였다.
이름은 '현천'.
이명은 '현무'.
그 어떤 공격도 별다른 충격 없이 막아낸다고 해서 그에게 붙여진 '현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크에에에엑! 크학!"
그는 누가 봐도 확연하게 찌그러져 있는 녹갑을 부여잡으며 몇 번이고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현천의 앞에 오연히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녀가 있었다.
금색의 진달래가 수놓아진 붉은 치파오를 입고 있는 소녀.
미령은, 자신의 앞에 엎드려 있는 현천을 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17위라고 해서 여흥은 될 거로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아니었나 보구나."
"이런 젠장……!"
현천이 이를 악물고 미령을 바라봤으나, 그녀는 감정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현천의 얼굴을 발로 차버렸다.
뻐억!
"끅!?"
순식간에 뒤로 꺾이는 현천의 고개.
미령은 들었던 발을 그대로 아래로 내리 찍어 현천의 얼굴을 콘크리트에 찍어 내렸다.
꽈아아아앙!
"끄에에에에에엑!"
힘없이 부서지는 콘크리트와 함께 현천의 괴성이 들린다.
"나는 너 같은 것들이 제일 싫다."
꽝!
"분명 어느 경지에 올라 온 것을 봐서는 분명 오를 수 있는 길이 있을 텐데."
꽝!
"오로지 자신은 정체된 채로."
꽝!
"미궁에서 나오는 구더기 같은 아이템으로"
꽝!
"자신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키우려는……."
꽝!
"너 같은 녀석들이"
나는-
꽝!
"제일-"
"그-만-"
피이이이잉-
현천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애초에 멈출 생각이 없었다는 듯 자신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발에 모이는 붉은색의 섬뜩한 마력.
"-싫다."
미령은 어느 한순간, 들어 올렸던 발을 내리찍었다.
꽈아아아아앙!
미령의 발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던 현천의 머리를 수박 깨듯 으깨버리고, 대리석이 깔려 있던 주변의 지반을 엉망진창으로 흔들어 놓는다.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지반.
허나 그 상황 속에서도 미령은 오롯이 서서 이미 죽어버린 현천의 시체를 보았고, 이내 몸을 돌리곤 불만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쯧, 쥐새끼처럼 도망 다니기는."
미령은 그 말과 함께 장원 끝에 만들어져 있는 현무가 그려져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았고, 그녀가 앉음과 동시에 미령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얼굴에는 미령의 등에 그려져 있는 문신과 같은 가면을 쓴 채 부서진 장원에서 도열한 그들을 보며 미령은 말했다.
"치워라."
그 말과 함께 어디선가 나타난 헌터가 부서진 대리석 사이에 있던 현천의 시체를 가지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렇게 현천의 시체가 그녀의 눈에서 사라졌을 때, 미령은 입을 열었다.
"나머지는 어떻게 되었지?"
"지금 상하이 점령을 기점으로 패도 길드의 던전 점유율은 92%를 넘었습니다."
"나머지 8%는?"
"나머지 8%는 패도 길드에 복종하는 이들입니다."
"복종…복종이라…."
미령은 그렇게 중얼거리다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위연 길드는 모조리 박멸한 것인가?"
"아직 두 개 지역이 남았지만 기한 안에는 전부 점령할 듯합니다."
미령의 앞에 있는 남자.
패도길드의 부길드장 '천영'의 말에 그녀는 퍽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다 물었다.
"점령하고 나서 저항하는 녀석들을 박멸할 때까지는?"
"2주면 충분할 듯싶습니다."
"2주, 2주라……."
미령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움직여 자신의 등에 그려져 있는 거대한 문신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이 누구의 것인지 새겨 놓은 표식.
그 문신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천영아."
"예."
"나는, 너무나 기대하게 되는구나."
그녀는 볼에 홍조를 띄우고, 붉은 혀로 자신의 입술을 핥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스승님을 모시러 갈 그때가, 너무나도."
-기대가 돼.
무표정하던 그녀는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 56
056. 조용히 해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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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통로를 통해 새로운 '등반자'가 9계층에 도착했습니다.
남은 시간 [ 00: 00: 00 ]
위치: 독일 작센 라이프치히
[등반자 '괴력난신' '귀이'를 잡는데 성공하셨습니다!]
[정보 권한이 하위에서 중하위로 변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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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면 당신은 부름을 받아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0일 0시간 5분 11초
이제 새벽 1시가 다 되어가고 있는 늦은 밤, 김현우는 소파에 앉아 눈앞에 떠올라 있는 로그를 한번 바라보곤 이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서류를 바라봤다.
"보상…보상이라…."
김현우가 독일에 가서 괴력난신을 처리한 지도 이제 1주일이 훌쩍 넘어 10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에게 도착한 보상 목록을 보며 턱을 툭툭 두드렸다.
"햐, 참 많기도 하네."
저번에 김시현에게 독일 측에서 보상안을 작성 중이라는 사실을 듣기는 했으나, 사실 김현우야 그냥 지원 출동을 나가고 통상적으로 나오는 금액을 받아도 별 상관없었다.
그런데 독일 측에서 제시한 보상안은 A4 용지 한 장을 빽빽하게 채울 정도로 많았다.
다만, 김현우가 조금 불만이 있는 거라면.
"어째 자세히 보면 보상금이랑 괴력난신의 드롭 템을 제외하고는 전부 세금 완전감면 같은 것들뿐이네."
독일이 제시한 보상안의 대부분이 독일에서만 굉장히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보상금과 김현우가 미처 가져오지 못하고 놔두고 온 괴력난신의 아이템을 빼면 대부분의 보상이 혜택이 독일에 몰려 있었다.
"세금 완전 감면, 집 무상 제공……차도 무상 제공? 이건 또 뭐야……."
'거기에다가 수도권 내 길드 하우스 무상 제공에…….'
김현우는 꾸준히 독일이 작성한 보상안 읽다가 이내 피식 웃고는 던져 버렸다.
'말만 안 했지 이건 그냥 독일로 이민을 오라는 거 아니야?'
맞았다.
독일은 정말 김현우가 독일로 이민을 왔으면 해서 그에게 이런 보상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일반적인 보상안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과도한 보상안을.
"쯧."
뭐, 그렇다고 해서 김현우가 잘살고 있던 한국을 떠나 굳이 귀찮게 독일까지 갈 일은 없겠지만.
툭.
김현우는 들고 있던 보상안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어깨를 으쓱였다.
'받아두면 언젠가 쓸 때가 있겠지.'
그렇게 짧게 생각을 정리한 김현우는 이내 몇십 초 대로 줄어들고 있는 시간을 보고 얌전히 소파에 앉아 기다렸고 곧 0에 가까워진 순간.
"안녕하세요."
"그래."
김현우는 이제는 상당히 익숙하게 눈앞에 바뀐 풍경을 보면서 아브의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그녀의 인사를 받고 한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김현우는 순간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더니 세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
"여기, 뭔가 상당히 커진 것 같다?"
"아."
김현우의 말대로 아브가 있던 공간은 예전과는 달랐다.
분명 책상을 놓으면 무엇인가를 놓을 곳이 없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방이 상당히 넓어졌다.
평수로 따지면 대충 15평에서 20평 정도 되지 않을까?
"이것도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그 정보 권한이 누적될 때마다……."
"네, 등반자를 처지하고 권한을 얻을 때마다 제가 지내는 이 방도 권한의 누적 크기에 따라 커지거든요. 지금은 정보등급이 중하위라서 좀 많이 커졌죠."
아브의 대답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돌아봤다.
정말 아브의 말대로 방의 크기는 굉장히 커졌다.
"근데, 이거 방 크기가 넓어지면 뭐하냐? 뭐, 특수 기능이라도 있어?"
"안 그래도 그걸 설명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아브는 그렇게 말하곤 흠흠 하더니 자신의 품에서 버튼 하나를 꺼냈다.
붉은색에, 누르면 딸깍 소리가 날 것 같은 ON/OFF 버튼을 김현우에게 건넨 아브는 입을 열었다.
"김현우 헌터가 중하위 권한을 가지게 되면서 바뀐 게 많습니다. 우선 그중 첫 번째는 바로 이 '시스템 룸'을 꾸밀 수 있다는 거예요."
"시스템 룸을 꾸며?"
"네."
아브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버튼을 한번 꾹 누르고 자신이 원하는 방의 인테리어를 생각하면 이 방은 자연스레 가디언이 생각한 방으로 바뀔 겁니다."
"…그래?"
딸깍.
김현우는 곧바로 설명을 듣자마자 버튼을 눌렀다.
그와 함께 머리에 전자파가 몰리는 듯한 기묘한 느낌에 김현우는 흠칫했지만 이내 아브가 말한 대로 머릿속에 어느 한 공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
"여기는…… 보이는 걸로 봐서는 '튜토리얼의 탑' 1층이네요."
김현우가 생각하자마자 순식간에 바뀌는 풍경.
"에이 씨발."
김현우는 자신이 상상해 놓고도 실질적으로 만들어진 튜토리얼 탑의 1층을 보더니 짜증이 난다는 듯 욕설을 내뱉었고, 이내 다른 장면을 상상했다.
'이번에는, 김시현의 집'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튜토리얼의 탑 1층의 형상을 취하고 있던 집이 바뀌기 시작했다.
바닥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하얀색 대리석과 김현우가 앉아 있던 소파, 그리고 그 앞에 TV가 구현되어 있는.
"오."
"우와…."
그 누가 보더라도 김현우가 조금 전까지 있었던 김시현의 집이었다.
이내 옆에서 탄성을 내지르고 있는 아브를 보며 물었다.
"넌 왜 놀라냐?"
"아, 그…저도 사용법을 알기만 할 뿐이지, 저는 실제로 그 '변환' 버튼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
"게다가 이렇게 9계층이 사는 인간들의 방도 처음 보고요."
"?"
"왜요?"
"아니, 뭐…그냥 너무 당연하게 넘어가서 몰랐는데, 너 평소에도 이 방에서 생활하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무엇을 그리 새삼스레 묻냐는 듯 슬쩍 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기본적으로 가디언을 만나는 이곳이 제 활동구역이에요, 애초에 만들어질 때부터 여기였는걸요?"
"…그러니까, 그 아무것도 없는, 아니, 조금 전까지 테이블이랑 의장 두 개만 있는 곳에서 있었다는 거야?"
"그렇죠?"
"안 심심해?"
"…음, 평소에는 시스템 정보권한을 통해서 이것저것 정보를 탐구하고 있으니 그렇게 지루함을 느끼지는 않고 있어요."
"잠은 안 자?"
"가끔가다 피로감이 느껴질 때가 있긴 한데 그때는 책상에 누워서 자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빠졌다.
이게 무슨 느낌이지?
학대?
잠시간 생각하던 김현우는 이내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물었다.
"그래서, 이거 고정하려면?"
"그냥 버튼을 한번 누르면 돼요."
딸깍.
아브의 말에 버튼을 누른 김현우는 이내 짧게 생각했다.
'우선 지금 이야기는 여기서 나갈 때 다시 하는 거로 하고.'
"그래서, 또 뭐가 바뀌었는데?"
그의 물음에 아브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두 번째는 정보 권한이 중하위로 오르면서 가디언이 가지고 있는 '정보권한' 스킬과 '알리미'가 업그레이드되고, 거기에 덤으로 이제는 '출입'스킬이 생깁니다."
"출입? 그건 또 뭐야?"
"이제 제가 굳이 초대하지 않아도, 가디언인 당신은 하루에 한 번 이곳에 들어올 수 있게 됩니다."
"나쁘지 않네. 또 다른 건?"
"이제부터는 정보에 관해서인데"
"……정보?"
"네, 아직도 처음 여쭤봤던 '튜토리얼의 탑'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하지만, 그다음으로 물었던 능력치의 이상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아브는 김현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말했다.
"지금 정보창을 열어보실래요?"
김현우는 군말 없이 정보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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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현우 [9계층 가디언]
나이: 24
성별: 남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S-
민첩: A++
내구: S++
체력: A++
마력: B++
행운: B
SKILL -
정보 권한 [중하위]
알리미
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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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력난신을 상대하고 나서, 김현우의 능력치는 꽤 크게 상승했다.
마력은 단번에 B++ 까지 올랐고, 내구는 S++, 근력은 S-로 한 단계가 올랐다.
김현우가 얼마 전에 열어봤던 정보창을 새로이 확인하고 있으려니 아브가 말했다.
"역시."
"역시?"
"저번에 제가 설명해 드린 것 있죠?"
"……그, 네가 대충 추리했던 그거? 튜토리얼 탑에서 능력치의 표현을 막아 놨을 뿐이지, 실제로 내 능력치는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었다는."
"네, 그거예요."
아브는 그렇게 말하더니 뭔가를 더 파악하려는 듯하다 말했다.
"지금 당장 중하위에서 볼 수 있는 출발의 탑의 접근 권한으로는 탑을 만든 자가 '탑'에서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정 능력치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못하게 락을 걸어놨다고 해요. 근데, 그건 말 그대로 시스템상의 '락(Lock)'을 걸어 놨을 뿐이라……."
"그러니까, 네 말은 시스템상 락이 걸린 덕분에 능력치는 안 올라갔는데-"
"가디언의 신체는 시스템이 아니라 진짜 '신체'니까요, 컴퓨터로 따지면 네트워크에서는 전산이 안 되고 있지만, 컴퓨터에서는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거죠."
"……뭐, 그럼 결국에 네가 한 추리가 맞다는 거네?"
"네, 그렇게 되네요."
뭔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아브를 보던 김현우는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너는 맨날 이 안에 있다고 했지?"
"네."
"내가 노는 법을 알려주지."
"노는 법이요?"
아브의 순진한 눈동자에 김현우는 씩 웃고, TV를 향해 다가갔다.
"이게 뭔 줄 알아?"
"?"
"이건, 'TV'라는 것이다."
일명 바보상자라고도 불리지.
김현우는 TV를 틀었다.
***
아브에게 9계층의 신문물을 잔뜩 알려준 그다음 날.
아랑 길드의 지하 2층 훈련실에서, 김현우와 아냐는 독대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현우에게 머리를 찧을 듯 고개를 깊게 숙이는 아냐.
그녀는 틀림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김현우를 보며 머리가 땅에 닿을 듯 고개를 몇 번이고 숙였다.
"괜찮아 그렇게 감사하지 않아도. 너 내 밑에서 일해야 한다니까?"
"네, 네, 할게요. 하겠습니다……!"
"너, 얼굴 변환할 수 있다고 했지?"
"당연히 할 수 있어요! 못하면 악을 써서라도 할게요!."
"그래, 그러면 됐지. 뭐."
김현우는 아냐를 자신의 길드인 '가디언'에 채용하기로 했다.
이유는 그녀의 순간이동이 무척이나 편리하고 또 좋았기 때문.
사실 편리함을 추구하고자 불안 요소를 그냥 놔둔다는 게 김현우로서는 그리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김현우는 그녀의 성향이 '생존주의'라는 것을 철저하게 이용하기로 했다.
"야."
"네!"
힘차게 대답하는 아냐.
"뭐, 아직 계약서 작성하기 전이지만 이건 확실히 해두려고."
"네? 뭘…?"
김현우의 표정이 슬쩍 바뀌자 흠칫하는 그녀.
김현우는 말했다.
"너도 알겠지? 나는 내 '적'을 매우 싫어해. 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나는 나를 건드리는 건 싫어하거든."
너도 잘 알지?
김현우의 물음에 끄덕거리는 아냐.
"근데 너는 좀 '편리'하니까 살려둔 거야. 그것도 알지?"
"네, 네. 알죠. 압니다. 당연히 알죠."
"그러니까 확실히 해둘게. 나는 길드 계약이 시작되면 너를 일반적인 헌터처럼 대할 거야. 물론 거리 제한이나 뭔가 다른 제한도 없어."
"네…… 네?"
"왜? 싫어?"
"아, 아뇨! 좋습니다! 좋아요!"
아냐의 필사적인 끄덕임에 김현우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맞아. 네가 날 배신하지 않고 계속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있으면."
"네……?"
순간, 아냐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답하자 김현우는 친절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만약, 아주 만약에 말이야."
"……."
"네가 만약에 나와 계약을 하고 풀어주자마자 자기 멋대로 도망가 버리면 말이야…."
김현우의 웃음에 아냐의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 57
057. 네가 강한 게 아니다(1)
아냐는 김현우의 입가에 지어져 있는 미소를 보았다.
조금 전과 같은 부드러운 미소가 아니었다.
그녀의 동료들인 판데모니엄을 박살 낼 때 지었던 그 웃음을 지은 채, 김현우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어디에 있던 너를 지옥 끝까지 쫓아가고 쫓아가서 그 머리통을 후드려 깨버릴 거야. 아니, 아니지. 그건 너무 부족해."
"네……네?"
"머리통을 후드려 깨버리는 걸로는 부족하지 응? '적'을 살려주고 정규직으로 취직까지 시켜줬는데 도망간다면."
더 재미있는 걸 기대해도 좋아.
김현우의 말에 순식간에 안색이 파리해지다 못해 푸르죽죽해진 아냐.
그 모습에 김현우는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서로 힘들게 하지 말자. 알았지? 아니, 뭐 굳이 도망치고 싶다면 도망쳐도 되고, 내가 생각보다 한가해서 말이야."
여흥은 되지 않겠어?
김현우의 미소에 아냐는 파리한 안색으로 굉장히 필사적인 느낌으로 변명했다.
"아, 아니. 안 해요! 진짜 안 한다고요!"
"그래? 그러면 뭐, 다행이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김현우를 보며 아냐는 왜인지 속박되진 않았지만 속박된 것 같은 느낌에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던 중-
"오빠!"
"왜?"
"오늘 오빠 양도권 정식 양도 받는다면서요? 안 갈 거예요?"
"아, 그랬지."
새삼스레 떠오른 사실에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파리한 안색으로 덜덜 떠는 아냐를 보며 말했다.
"그럼, 이따가 '내' 길드 사무실에서 보자. 얼굴은 꼭 바꿔서 오고."
"네, 네!"
열렬히 고개를 끄덕인 아냐를 보며 김현우는 곧바로 이서연을 따라 1층으로 나와 그녀가 미리 준비시켜 놓은 차량에 탈 수 있었다.
***
툭! 확!
강남, 아레스 길드의 상층 회의실, 흑선우는 자신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 간 김현우를 원망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뭘 봐?"
"아니."
김현우의 눈빛에 기죽은 개처럼 고개를 숙인 흑선우를 본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양도권의 내용을 쭉 읽고는, 그 아래에 사인했다.
그것을 끝으로 무척이나 합법적이게, 그동안 아레스 길드가 가지고 있던 던전의 일부는 가디언 길드에게로 넘어왔다.
김현우는 망연자실해 보이는 흑선우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잠을 며칠 동안 자지 못한 듯 굉장히 초췌해져 있는 흑선우의 표정이 보였지만 그건 딱히 김현우가 알 바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어떻게 보면 김현우가 흑선우를 봐줬다고도 볼 수 있었다.
원래 양도권은 한참 전에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갑작스레 괴력난신이 나타나고 녀석을 처치한 뒤로는 또 한동안 요양하느라 양도권을 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김현우는 어쩌다 보니 흑선우에게 희망을 주었다.
혹시?
하는 희망을.
뭐, 김현우가 이미 가디언 길드에서 길드원까지 뽑아 놓은 걸 보면 흑선우가 그런 생각은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이란 건 그렇다.
자신의 힘과 권력, 그리고 그 무엇도 통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나중에 '운'이나 '인정'에 기댄다.
흑선우도 똑같은 것이었다.
결국 김현우가 제때 양도권을 받으러 오지 않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을 무척이나 크게 부풀렸을 뿐이었다.
뭐, 결국 그건 흑선우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양도권은 확실히 받았다."
거기에 받아야 하는 돈까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아레스 길드의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그가 빠져나간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는 정적만이 돌았다.
"……."
흑선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양도권만을 가지고 벌써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진 김현우를 멍하니 보다 이내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우천명을 보았다.
우천명도 흑선우와 별반 달라 보이진 않았다.
애초에 그로서도 더 이상 줄을 갈아탈 방법은 없었으니까.
흑선우가 죽으면 자기도 같이 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천명으로서는 별반 입을 열 수가 없는 것이었다.
"……."
"……."
그렇게 조용한 침묵이 얼마만큼이나 지났을까, 흑선우는 입을 열었다.
"우 부장……."
"예."
"이렇게 된 이상 지금 당장 좆됐다는 건 자네도 나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흑선우의 말에 아무 말이 없던 우천명은 이내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아레스 길드가 나름대로 힘을 써서 만들어 놨던 독점 체재를 일방적으로 빼앗겼다는 것부터 흑선우는 이미 자신의 권력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은 것은 이제 다음 인사이동 때 흑선우의 자리에 다른 이가 앉고, 그는 자신이 처리했던 유병욱과 같은 처지가 될 일밖에는 남지 않았다.
아니, 최악을 면하면 그건 피할 수 있겠지만.
"씨발."
흑선우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우 부장."
"…예."
"나는 어떻게 해서든 저 개자식을 죽여 버릴 거다. 어차피 자네도 더 잃을 게 없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
아니다.
라고 우천명은 말하고 싶었다.
허나,
'이 새끼….'
우천명은 흑선우의 눈이 맛이 간 것을 보고 마른 침을 삼켰다.
'진짜 끝까지 갈 생각이다.'
그, '관리부 부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우천명은 아직 살아나갈 수 있는 구멍이 아주 적기는 하나 남아 있기는 했다.
뭐, 살아남은 구멍으로 빠져나간다고 해도 자신의 대부분을 버려야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레스 길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재기'를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흑선우.
그는 우천명과 다르게 정말 갈 데까지 갔다.
더 물러설 곳이 없다.
게다가 다음 인사이동까지는 아직 1달 정도가 남은 시점.
'만약 여기서 흑선우를 배신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른다.
다시 한번- 우천명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그렇다고 해서 지금 상황에서는 본사에서도 어떤 지원도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
우천명이 말꼬리를 흐리자 흑선우는 묘하게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 이미 계획은 있으니까…."
"…설마 기사단입니까? 그렇지만 기사단도 본사 소속이라 지금 상황에서는 움직이지 않으리라 생각…."
"아니, 아니야. 본 길드에서 힘을 빌리려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우천명의 물음에 흑선우는 말했다.
"패도."
"설마, 지부장님…!"
"패도 길드에게 손을 벌린다."
"그, 그건 잘못하면……!"
우천명이 서둘러 그의 생각을 말리려 했으나 이미 흑선우는 핏발선 눈빛으로 확신을 가지며 말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내 목이 잘릴 건 이미 예정된 일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나는 패도길드에 청탁하러 갈 거다."
"아, 아니 만약에 그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니, 잘못될 일은 없다."
"그, 그게 무슨?"
"난 모든 것을 걸 테니까."
"……헉! 서, 설마."
우천명이 마치 미친놈을 바라보듯 흑선우를 바라보자 그는 핏발 선 눈으로 큭큭거리며 말했다.
"그 개새끼를 조지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내던져서라도 아주 개박살을 내주겠다, 이미 독점체재는 끝났어, 던전 몇십 개 정도 더 넘어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지."
"마, 만약 이라도 그랬다가는!!"
"그랬다간 뭐? 우 부장, 혹시 자네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말해두지만."
-자네도 이미 빠져나가기엔 글렀어.
흑선우는 큭큭 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게 무슨"
"아레스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새로 배치 될 지부장은 아마 자신의 심복을 전부 데리고 올 거야, 마치 내가 처음 이 자리에 앉으면서 자네와 유 부장을 데려온 것처럼."
그 말과 함께 일어난 잠시간의 침묵.
우천명은 그 말을 듣고 눈을 휘둥그레 떴고, 흑선우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곤 입을 열었다.
"중국으로 갈 준비를 해."
"…."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긴다. 돈? 던전 양도권? 주식 지분? 아티팩트?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건 전부 챙겨, 전부!!"
흑선우는 핏대선 눈으로 이를 악문 채 말했고-
"나는, 반드시 그 개새끼를 죽여 버리겠다……!!"
─그는, 역대급 지뢰를 밟으려 하고 있었다.
***
그날 저녁, 강남역 근처에 있는 고급 양식 레스토랑.
독방을 잡고 간만에 동료들과 밥을 먹으러 온 김현우는 앞에 나온 스테이크를 썰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많이 먹어라."
"드디어 현우가 사주는 밥을 먹어보네."
"그러게요. 못 먹어 볼 줄 알았는데."
김시현과 한석원이 피식거리면서 한마디 했으나,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돈 벌면 사준다니까?"
"돈은 저번부터 벌지 않았냐?"
"그때는 시간이 없었잖아. 뭘 그렇게 사소한 걸 따지고 그래?"
그렇게 말하며 스테이크를 또 한 점 입안에 넣을 무렵, 한석원이 입을 열었다.
"아, 현우야."
"왜?"
"아까 제가 말한 건 생각해 봤냐?"
"아까 형이 말한 거?"
김현우가 기억이 안 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옆에 있던 김시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도 아까 말했잖아요? 그, 무술."
"무술이 뭐."
"아니, 형 지금 최근에 이슈게시판 계속 형 때문에 뜨거운 건 알고 있죠?"
김시현의 물음에 김현우는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거?"
"네, 그거요."
괴력난신을 잡고 10일, 원래 인터넷이라는 게 그렇듯이 뜰 때는 정말 하루아침에 인기스타가 되지만, 떨어질 때는 아무도 모르게 떨어진다.
저번 천마전 때도 당장 1주일 정도가 화젯거리였을 뿐이지, 네티즌들은 그 뒤부터는 또 다른 이슈를 찾아낸다.
뭐, 결국 이야기는 소비될 뿐이니까.
'…그러고 보면 꽤 전에는 '패도'길드가 중국의 던전 지분을 전부 먹어치우고 있다는 이슈가 좀 뜨던 것 같기도 한데.'
김현우는 순간 옛적에 봤던, 자신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내용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인터넷에 대한 생각을 한 이유.
그것은 바로, 10일이 가까워지는 지금에도 김현우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계속 올라와 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김현우의 무술'로.
"하긴, 이리저리 지랄하는 게 좀 많이 보이기는 했지."
김현우는 실제로 어제만 해도 자신의 무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았다고 입을 털어 어그로를 끄는 네티즌들을 정말 많이 봤다.
뭐, 들어가 보면 죄다 어그로였지만.
아무튼, 지금 한국은 김현우의 발언 하나 때문에 '무술'에 대한 뜨거운 열풍이 불고 있었다.
"그래서, 뭐 이번에도 TV출연 하라는……뭐 그런 이야기였지?"
"형 내용 제대로 안 들었죠…? 뭐, 결국 TV출연 하는 게 어떠냐고 권유한 건 맞는데. 석원이 형도 그거 말한 거죠?"
김시현이 시선을 돌려 한석원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이렇게 계속 어쭙잖게 너 따라 하려고 깝죽거리는 애들이 생기면 나중에 네가 여러모로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까. TV에 나와서 확실하게 의견표현을 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굳이?"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딱히 나갈 필요는 없긴 하지."
"아니, 뭐 쟤들이 결국 내 영상보고 무술이랍시고 따라 한다 이거잖아? 그게 문제가 되나?"
"그렇지,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
"이제 네 이름을 어떻게 몰래몰래 걸고 장사하는 친구들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게 문제지."
"누가 그렇게 간덩이 큰 짓을?"
김현우가 피식하며 웃자 한석원은 뭘 모른다는 듯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야, 돈 만 원에도 목숨 걸면서 핏대 세우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 판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러는 친구들도 있을 거라는 소리지. 그 외에도…."
이대로 놔두면 분명 무슨 귀찮은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거다.
한석원의 말에 곰곰이 고민하던 김현우는 이내 후, 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TV 출연 한번 하는 게 좋다 이거지?"
"그거지."
한석원의 말에 한동안 고민하던 김현우는 이내 썰었던 스테이크를 입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래, 뭐……까짓거 한번 하지. 나중에 귀찮은 일 생기면 짜증 날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해서 3일 뒤, 김현우는 다시 한번 TV에 출연하게 되었다.
# 58
058. 네가 강한 게 아니다(2)
그로부터 3일 뒤,
"안녕하십니까 김현우 헌터, 저번에도 한 번 뵈기는 했는데 그때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려서…저는 '헌터를 알다'를 총괄하고 있는 지승현 PD라고 합니다."
"아, 예."
김현우는 자신에게 명함을 내민 지승현의 명함을 받고 건성으로 대답한 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용이 뭐라고요?"
"아, 그러니까. 오늘 내용은 말 그대로 김현우 헌터가 이전 인터뷰에서 발언하신 '무술'에 관련해서 주제를 잡고 이야기를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김현우가 되묻자 지승현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김시현 헌터님께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 김시현 헌터를 포함한 3분은 전부 길드 일로 바쁘니 참석하지 못한다고……."
"?"
"혹시, 못 들으셨습니까?"
지승현 PD의 불안해 보이는 얼굴에 잠시 고민하던 김현우는 문득 깨달았다.
"아."
확실히 김현우가 TV에 출연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그다음 날 김시현은 그에게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앞으로 이틀 뒤에 연합 길드들끼리 미궁 탐험을 떠나야 해서 같이 TV 출연을 못 할 것 같다고 말이다.
뭐, 그제야 어째서 한석원이랑 김시현이 자신 TV 출연을 권유했는지 김현우는 깨달았으나 딱히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지난 3일간 김현우 무술에 관한 떡밥은 식지 않고 오히려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요즘에는 그의 인상을 슬쩍 찌푸리게 하는 것도 몇 개 보였기에 김현우는 확실히 이 열기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듣긴 들었던 것 같은데."
김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승현은 슬쩍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더니 다시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평소 게스트 분의 자리가 3개나 비게 돼서……."
"그래서?"
"혹시, 김현우 헌터 이외에도 무술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게스트로 초대해도 될까…… 하고."
지승현의 말에 김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술직에 종사하는 사람이요?"
"예."
지승현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침을 꿀꺽 삼켰다.
무술직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실 그가 김현우와 함께 출연시키려는 사람들은 바로 '달인'들이었다.
무술의 달인.
사실 헌터가 나오고 나서부터 '무술'이라는 것은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다.
아무리 일반인이 무술을 배운다고 해 봤자 무술로서는 결국 몬스터를 이기지 못하니까.
그렇기에 무술은 사장되었지만, 그런 '무술'을 아직도 수련하는 '달인'들은 존재했다.
'후…제발…제발!'
지승현은 김현우가 이 게스트의 출연을 허락해 주기를 진정으로 바랐다.
이유?
당연하지 않은가?
'김현우 헌터와 무술직에 종사하는 '달인'들은 분명 어떤 식으로든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
달인들이 김현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달인들이 김현우에게 시비를 걸 든, 달인들이 오히려 김현우의 무를 칭찬하든 관계없었다.
중요한 건 '달인'들이 출연하는지 마는지.
그것이 시청률 폭발의 기폭제가 된다는 것을 지승현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김현우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현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예상과는 다른 말이었다.
"시청률 좀 끌어올리고 싶어서요?"
"예…… 예?"
"아니, 딱 봐도 그림 나오는데? 저랑 그 무술직 종사한다는 사람들이랑 뭐 어떻게 포커스 좀 맞춰 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
김현우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지승현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망했나?'
그런 생각이 지승현의 머릿속에서 들 무렵.
"우리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지 않나?"
"……네?"
"말 그대로, 나를 통해서 장사하고 싶으면 소정의 보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지."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손가락을 말아 쥐자 지승현은 그게 곧 무슨 소리인지 깨달았다.
"추, 출연료는 저희 쪽에서 올려 드리겠습니다. 2배…아니, 3배로……!"
"음. 그 정도면 뭐……마음 가는 대로 잘 만들어 봐요. 단."
"……?"
"나는 누가 나오든 나 꼴리는 대로 할 거니까 그것만 잘 알아둬요."
김현우의 말에 지승현은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쯧, 하는 거 보니까 이미 나한테 말하기도 전에 미리 판을 다 깔아 놓은 것 같은데…….'
뭐, 별 상관없지. 출연료도 올려준다는데.
김현우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슬슬 기어 나오는 어그로꾼을 잠재우려는 용도도 겸해서 TV에 나가는 거니까.
'만약 게스트가 신경 거슬리게 하면…….'
본보기로 쓰지 뭐.
그리고 김현우가 그렇게 결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방송은 시작되었다.
방송의 진행은 MC인 이해영이, 그리고 원래는 한국의 3대 길드장이 있어야 했던 그곳에는 다른 이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한 명은 최근 괴력난신을 잡고 더더욱 유명세를 떨치게 된 한국의 헌터 '김현우'였고,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늙은이들은 바로 세간에 '무술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었다.
방송은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이해영이 오늘의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김현우를 포함한 다른 게스트들이 인사를 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3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저희 '청룡검법'은 자연의 기를 느끼고 그렇게 수련하면 반드시 정상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고구려의 역사를 담아 실전 무술로서 전수되어 온 '선인법'은 10년 동안 수련하면 온몸이 인간 병기가 될 수 있는…."
김현우는 눈앞의 '달인'들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뭐야 이 새끼들.'
그는 얼마 있지 않아 그 두 명의 '달인'이 왜 이 자리에, 그것도 김현우와 함께 나왔는지 깨달았다.
애초에 그들은 김현우가 걱정하는 것처럼 그에게 이런저런 훼방을 놓기 위해 출연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옆에 앉아 자신의 무공을 직접 무대 앞까지 나와서 시연하고 있는 달인들.
그들은 스스로의 무술을 세상에게 '홍보'하기 위해 자리에 나온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 사장된 '무술'을 김현우가 살려줬으니 어떻게 거기에 빌붙어서 돈이라도 한번 벌어볼까 열심히 발악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김현우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지금 거의 이해영의 통제를 듣지 않고 자기 무공을 홍보하는 데만 열이 나 있으니까.
뭐,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다.
자기한테 기회가 오면 안 잡는 사람보다는 잡는 사람이 더 성공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김현우와 함께 게스트로 나온 두 명의 달인들은 무엇인가를 아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기회'라는 착각이었다.
물론, 김현우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기회가 될 수는 있었다.
"야."
김현우의 입이 열리자마자 자신의 무술에 대해 떠들던, 자칭 '달인'들이 입을 다물고 불쾌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돌아보았다.
마치 왜 방해하냐는 듯한 표정에 김현우는 씨익 웃었다.
'어디서 나를 팔아서 장사를 해?'
-그러나, 김현우는 절대 그들의 장사에 당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상한 개소리 하면서 시끄럽게 떠들지 마라. 여기 너희들만 있냐? 그리고, 뭐? 정상의 경지? 인간 병기가 돼?"
지랄하지 마라.
김현우가 욕설을 내뱉자 순간적으로 뻥진 달인들, 그들은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나 의심하는 듯했으나 이내 얼굴을 뻘겋게 물들이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뭐……? 지랄?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는 거냐!!"
"무슨 소리를 해, 팩트를 말한 거지."
"네 녀석은 무술을 한다는 녀석이 다른 무술에 대한 존중도 없는 거냐!"
순식간에 둘이 합세해서 김현우에게 노발대발을 시전하는 그들을 보며 김현우는 같잖지도 않다는 듯이 웃을 터뜨리고는 말했다.
"너희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꽝! 우지지직!
김현우가 앉아 있던 바닥 내리찍으며 일어서자마자 순식간에 바닥에 쩌적 금이 가는 세트장.
"무…무슨……!"
달인들은 김현우가 벌인 일이 지례 겁을 먹었고, 김현우의 행동으로 인해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지만, 김현우는 무술인과 카메라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이참에 확실하게 말해주도록 하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돌아보다 '청룡검법'을 수련한다는 이가 가져온 검을 집어 들고 세트장 아래로 내려왔다.
순식간에 5대의 카메라가 김현우를 향해 움직이고, 김현우는 말했다.
"요즘 들어서 나를 빗대서 헌터들한테 무슨 무술을 꼭 배워야 하는 것처럼 아가리를 터는 애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김현우가 나온 명확한 이유.
그것은 바로 김현우의 발언을 빌미로 지금 앉아 있는 두 명처럼 장사하려는 녀석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무술의 무 자도 모르는 애들이 무술 배운다고 강해질 것 같냐?"
김현우의 말에 카메라가 일순 그에게 집중된다.
"내가 강한 건 그냥 말 그대로 '내'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 누가 했다면 지독히 오만한 발언으로 대중들의 인상을 찌푸려지게 하는 그 발언.
그러나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김현우의 발언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냥 내가 강한 거지 무술이 강한 게 아니라는 소리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곤 시선을 돌려 이내 자신을 죽일 듯 바라보고 있는 두 명의 달인을 보았다.
"뭘 봐 십새꺄."
그는 그렇게 달인들에게 타박을 주더니 이내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치이잉-
날을 갈지도 않았는지 끝부분이 뭉툭해 보이는 검을 보며 김현우는 말했다.
"뭐, 그래도 너희들 중에는 아직도 '무술'을 배워야만 강해진다고 생각하는 새끼들이 있겠지? 꼭 청개구리같이 이 악물고 자기주장이 맞다고 빡빡 우기는 애들 있잖아?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보여주지.
"'무술'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내가 강하다는 걸 말이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잡았다.
"…!"
그것은 불과 10분이 지나기도 전, 게스트 석에서 움찔거리고 있는 '청룡검법'의 달인이 검술을 비기 중 하나라는 '청룡 베기'를 쓸 때 취했던 자세였다.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달인들을 보곤 말했다.
"잘 봐 둬라."
검은 이렇게 쓰는 거다,
김현우은 그와 함께 마력을 뿜어냈다.
검붉은 마력이 세트장에 차오르고, 김현우는 검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와 함께 떠올린 기억.
그것은 바로 김현우가 얼마 전, 스마트폰을 이용해 읽었던 무협소설의 주인공이었다.
'청룡신공'이라는 무공을 쓰는 주인공.
주인공이 소설에서 나오는 첫 보스를 잡을 때 썼던 그 기술을, 떠올렸다.
검붉은 마력이 날도 없는 '도신'에 머문다.
쿠우우우우-
검과 마력이 조화하면서 두꺼운 공명음이 울리고, 김현우는 그 소설에서 나왔던 그때의 자세를 최대한 자세히 떠올리고 거기에 상상력을 섞어, 그럴듯한 기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청룡섬(靑龍閃)-"
김현우가 검을 힘차게 위로 올려 벰과 동시에 나타난 검붉은색의 용은-콰가가가강! 쾅!
-세트장의 천장을 뚫어버렸다.
한순간 이루어진 엄청난 상황에 그 장면을 촬영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들의 뒤에 서 있던 지승현PD도 마찬가지로 입을 벌리고 있을 때, 김현우는 들고 있던 칼을 세트장 구석에다 던지더니, 손가락을 올리고 말했다.
"자, 다시 한번 복습합시다."
내가 강한 거지, 무술이 강한 게 아니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강한 거지 너희들이 강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괜히 나 보고 무술 배우겠다고 깝죽거리지 마라.
"뭘 봐 씹새끼야."
김현우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무술인에게 다시 한번 욕설을 날린 뒤,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 59
059.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간다(1)방송이 나가고 이틀 뒤,
가디언 길드의 사무소.
[김현우 '내가 강한거지, 너희들이 강한게 아니야' 생방 중 발언!]
[김현우 생방 중 욕설, '뭘 봐 씹x꺄' 헌터들 사이다]
[이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무술가들 거세게 반발]
"흠."
가만히 스마트폰으로 포털 사이트 메인에 뜬 기사들을 보던 김현우는 쯧, 하는 소리와 함께 스마트폰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벌써 이틀이나 됐는데 기사들은 이슈화할 거리가 그렇게 없는지 김현우가 했던 말만을 계속 기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거기에 깨알같이 무술인들이 열심히 반발한다는 기사는 덤이다.
김현우는 그렇게 한동안 자리에 놔둔 스마트폰을 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의 옆 테이블에서 열심히 키보드를 치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야."
"네? 네……!"
보라색 머리를 흑발로 물들이고 전체적으로 저번보다 얼굴이 미묘하게 달라 보이는 그녀.
그녀는 바로 김현우를 암살하기 위한 의뢰를 받았던 '판데모니엄'의 일원 중 한 명인 아냐였다.
아냐는 김현우의 부름에 무엇인가가 불안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지만, 김현우는 별것 아니라는 듯 물었다.
"일은 할 만하지?"
"네, 네네! 할 만해요!"
"정말로?"
"네……정말로 할 만해요."
정말이었다.
사실 아냐는 이제 더이상 김현우에게 붙잡혀 도망치지 못한다는 절망감에 몸서리치며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가디언 길드에 왔었지만.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해. 상식선에서만."
"……."
실제로 김현우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가디언 길드의 사무 회계를 맡은 지 10일, 아냐는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곳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도 그렇게 어렵지 않고, 정시에 퇴근해도 뭐라고 안 하고……급여도 많이 주고…….'
물론 급여야 그녀가 판데모니엄에서 활동할 때만큼 많이 받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 살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아직 아레스 길드에게 받은 돈이 그대로 독일에 소유한 자신의 집에 있었다.
한 마디로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아냐는 슬쩍 시선을 돌려 김현우를 보았다.
어느새 책상에 둔 스마트폰을 다시 집어서 무엇인가를 하는 그를 보며 아냐는 다시 시선을 돌려 회계업무 중인 컴퓨터를 바라봤다.
'…게다가 살 집도 구해줬고.'
그렇다.
김현우는 그녀가 허튼 생각을 하지 않게 집까지 하나 마련해 주었다.
뭐, 김현우로서는 아레스 길드에게 받은 보상금이 꽤 남아도는 데다, 무엇 보다 아냐의 '순간이동'이 생각보다 매우 편리했기에 서로서로 좋게 가자는 뜻으로 집을 구해다 준 것이었으나.
"..."
아냐는 생각보다 자상한 그의 행동에 감사함을 느꼈다.
뭐, 그거야 그냥 단순히 아냐가 김현우에게 느끼는 착각이지만, 그런 현상이 있지 않은가?
자신의 눈에 보기에 굉장히 쓰레기 짓만 하던 사람이 한번 잘해주면 뭔가 굉장히 착해진 것처럼 느껴지는 착각.
아냐는 김현우에게 그런 현상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사무실이 조용해지기를 잠시.
"나 좀 나갔다 올 테니까 시간 되면 퇴근해라."
"네."
아냐는 대답을 들음과 함께 김현우는 사무실에서 빠져나와 사람이 없는 사무실의 옥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이 딱 한가할 때니까 새로운 스킬이나 한번 써봐야겠다.'
새로운 스킬.
그것은 김현우가 괴력난신을 잡고 나서 아브에게 받은 스킬인 '출입'이었다.
시스템의 초대 없이도 아브가 있는 그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스킬.
'한번 쓴다쓴다 생각해 놓고 안 쓰고 있었네.'
사실 출입을 쓸 기회야 많았다.
그는 김시현을 포함한 이서연과 한석원이 미궁 탐험을 내려간 뒤로부터 예전처럼 무척 한가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뭐, 그전에도 한가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김현우는 사무실 옥상에 도착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망설임 없이 스킬명을 외쳤다.
"출입."
그리고-
"…오."
-그와 함께 김현우의 시야가 뒤바뀌었다.
분명 아무것도 심겨 있지 않은 화단에 있었던 김현우는 어느새 그가 꾸며두고 갔던 '아브'가 있던 공간 안으로 들어왔고, '아브'는-
"……."
"……."
TV에서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서 방영하는 TV를 하릴없이 보고 있는 아브.
"야."
"어? 언제 오셨어요?"
김현우가 말을 하고 나서야 그가 왔다는 것을 깨닫고 TV에서 시선을 돌린 아브를 보며 그는 피식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언제긴 언제야 벌써 1시간은 됐는데?"
"…네!?"
김현우의 아무렇지도 않은 거짓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아브.
그는 아바의 뜨악한 표정에 답했다.
"농담이야."
"…."
아브의 표정이 순식간에 뚱해졌지만, 김현우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녀가 앉아 있던 소파에 마주 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어때? 저번에 책상에 앉아서 멍 때릴 때보다는 재미있냐?"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갑작스레 표정을 화악 하고 밝히더니 재잘재잘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진짜 재미있어요!"
"그래?"
"네네! 처음에는 이게 뭔가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재미있는 게 많더라고요! 버튼 누르면 원하는 드라마도 볼 수 있고……."
마치 김현우가 물어봐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쉴 새 없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는 아브.
김현우는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아브의 장단에 맞춰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래서 그 어떤 드라마에서…아, 가디언!"
"왜?"
"저, 혹시 그거 만들어 주시면 안 돼요?"
"뭘 만들어?"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뭔가를 툭툭 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 플…플, 플라이스테이션?"
"플라이스테이션?"
그것은 김현우도 굉장히 잘 알고 있는 게임기기였다.
정확히는 콘솔 게임기기.
"그, 전에 TV보다가 '게임'이라는 매체를 하는 걸 봤는데 굉장히 재미있어 보여서요……. 저도 한번 해보고 싶은데 안 될까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뭐 그 정도야…… 근데 그런 건 네가 만들면 안 되는 거냐?"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가디언 옆에 있는 관리 시스템으로써 존재할 뿐이지 이런 건 저희들이 못 만들거든요."
권한이 없어요.
뭔가 굉장히 처연하게 말하는 아브의 모습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책상 위에 있던 붉은 버튼을 집어 들었다.
딸깍.
"와…!"
버튼을 누르자마자 아브 주변에 만들어지는 플라이스테이션과 그 외에 잡다한 게임팩들, 김현우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게임팩들을 만들어 주며 물었다.
"그런데, 이런 거 있으면 시스템의 초대로 부르지 그랬어?"
그가 묻자마자 굉장히 신난다는 표정으로 플라이스테이션을 들고 있던 아브는 슬슬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래도, 이런 거로 호출하기에는 좀…… 그렇잖아요? 아니, 사실 최근에 알려드릴 일이 있어서 호출하긴 해야 했는데."
"그래?"
"아무튼, 고마워요 가디언! 이걸로 해보고 싶은 걸 할 수 있어요!"
그와 함께 김현우를 꾹 껴안는 아브를 보며 김현우는 피식 웃다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이거 결혼도 안 했는데 왜 딸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지…?'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게임팩을 쥐고 자신을 껴안고 있는 아브를 보다 이내 복잡한 마음을 한편으로 밀어두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를 호출하려 했던 이유는 뭐야?"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김현우에게서 떨어져 입을 열었다.
"아, 그거 관련해서 말인데요."
"응."
"이건 아무래도 제 착각일 확률도 있긴 한데 정말 혹시 모르는 거라서 말씀드리려고요."
"……뭐길래?"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귀를 기울였고, 곧 아브가 입을 열었다.
***
뉴욕.
세계의 수도라고 불리기도 하고, 도시 중에서는 다른 곳보다도 압도적인 인구를 가지고 있는 뉴욕의 중심부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빌딩.
층수만 해도 150층에 달하는 그 빌라의 가운데에는 그리스어 필기체로 ?ρη? 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고.
그 빌라의 꼭대기 층에는 한 남자가 가죽으로 만든 의자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있었다.
툭- 툭-
그의 손가락이 가죽을 툭툭 치는 소리가 길드장실에 조용히 울려 퍼지고, 그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들은 부동자세로 남자가 제스쳐를 취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후…."
아레스 길드를 최초로 설립한 그 남자-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마튼 브란드'는, 이내 의자를 돌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우선 분쟁 지역 국가에는 아레스 길드 본사 길드원들을 투입, 이라크 쪽에는 '미궁'을 독점하는 조건으로 본사 관리부 인원들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인도에서 일어난 분쟁 지역에는 주변 지부 도움을 받아 독점 던전을 늘려가는 중으로 대부분의 던전을 먹어치울 때까지 걸릴 시간은 3달 정도입니다."
"음……."
남자의 말에 그는 짧은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더니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또 다른 사항은 있나?"
"…있습니다."
"뭐지?"
"…이번, 한국에서 독점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아레스 길드가 던전을 일반 길드에게 양도했습니다."
"…뭐?"
남자의 말에 순식간에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연 '마튼 브란드'.
허나 남자는 동요 없이 계속해서 사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저희 본사 측에서 상황을 파악한 바로는 한국 지부장인 '흑선우'가 아무래도 일을 치르다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실수, 실수라……."
"예."
남자의 말에 브란드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지."
"…예?"
"그건 실수가 아니야. 그가 설령 정말로 어떤 일 때문에 실수로 벌어진다고 해도 그건 실수로 표현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지."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나.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해, 자네도 어쩌다 보면 실수를 할 수 있고, 나도 어쩌다 보면 실수를 할 수 있지."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야.
마튼 브란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습관처럼 툭툭 치던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턱을 문질거렸다.
"요점은 그때부터야. 사람이 실수를 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실수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래, 그렇지.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만, 그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에 '실수'라는 단어가 용인되는 거야. '실수'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 줄 아나?"
실수라는 건 말이야-
"자기가 실수했던 일을 온전히 처리하고 나서 내게 '보고'할 때 '실수'라는 단어를 쓰는 거야. 만약 그 녀석이 자신이 실수했던 일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보고를 했다면."
그는 무척이고 단호하게, 끊어 말했다.
"그건 '실패'라고 봐야 해."
"…죄송합니다."
"아니, 네가 죄송할 필요는 없지. 실패한 것은 그 녀석이니까."
그리고-
"실패하는 녀석은 우리 아레스 길드에는 하등 쓸모가 없는 인재야. 내 말이 무슨 뜻인 줄 알겠나."
"처리할까요?"
"그렇지, 깔끔하게. '아레스' 길드에 오점이 있어서는 안 돼. 정확히는 '독점 던전' 체제를 취하는 데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마튼 브란드는 순간 입을 멈췄다가, 이내 결정한 듯 명령을 내렸다.
"실패한 녀석을 처리하는 것도 포함해서, 우리 던전을 양도받아간 그 녀석들에게서도 돌려받아야지."
내 던전을 말이야.
씨익-
# 60
060.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간다(2)
"현우야, 독일은 언제 가냐."
"아마 3일 뒤인가…그럴걸?"
김현우가 아브를 만나고 다시 5일이 지나, 김시현과 이서연, 그리고 한석원은 미궁탐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김현우를 포함한 그들은 한석원의 집에 모여 작은 축배를 들고 있었다.
"그래? 그럼 그때 나도 가볼까."
"왜?"
"왜긴 왜야, 어차피 너 독일 갔다가 바로 올 거 아니잖아?"
"아니, 바로 올 건데?"
"관광 같은 거 안 하고?"
한석원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굳이?"
"아니, 12년 동안 탑 안에 갇혀 있었으면 세상 좀 돌아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그가 김현우를 묘한 표정으로 보며 이야기하자 김현우는 됐다는 식으로 손사래를 치곤 말했다.
"됐어. 세상을 돌아보기는 개뿔, 그것도 좀 쉬고 나서 해야지. 나는 아직 편하게 쉬어 본 적이 없거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현우가 정말 할 일 없는 백수처럼 집에 처박혀서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그는 탑에서 빠져나오고 대부분을 백수로 생활했다.
"안 질리냐?"
"12년 동안 탑에서 갇혀 있다가 나온 다음에 그 말 하면 봐준다."
김현우의 말에 한석원은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쯧, 너 독일 가면 따라가서 우리도 좀 따라가서 좀 놀다 오려 했건만."
"관광하려고? 하면 되잖아? 게다가 지금 독일 상황이 말이 아닐 텐데 거기 관광이 제대로 되긴 하겠어?"
"오빠, 라이프치히만 박살 난 거지 다른 데는 아니잖아요."
"아니, 그렇다고 해도…… 보통 그 정도로 날아가 버리면 한동안은 독일 전체가 시끄럽지 않나?"
김현우의 말에 이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오히려 그 정도는 금방 복구되죠. 물론 그것도 오래 걸리겠지만."
"금방 복구된다고?"
"네. 어느정도는요?"
"어떻게?"
"'마법사'계 헌터들이 있잖아요."
"……마법사들?"
김현우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말하자 이서연은 슬쩍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말 그대로예요.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들을 지원할 수 있으면 도시를 아주 빠르게 복구시킬 수 있거든요."
뭐, 그렇다고 지금 당장 복구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충 10년 걸릴 걸 1년 안으로 복구할 수 있다 이거죠. 사상자는 또 별개의 문제지만요."
"그 정도야?"
"그 정도예요. 그러니까 가끔 가다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고 크레바스 사태가 일어나도 완전히 볼모지가 된 도시는 없잖아요?"
전부 마법사 헌터들이 있어서 가능한 거라고요.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뭐, 그렇다고 해도 굳이 독일에 놀러 갈 이유가 있어? 다른 데 많잖아?"
그의 물음에 한석원은 말했다.
"있어."
"뭐?"
"네가 독일에 보상을 받으러 간 그다음 날에 경매장이 열리거든."
"경매장? 그건 또 뭐야?"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김시현은 곧바로 입을 열었고, 한동안 그가 설명해 준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정리했다.
"정리해 보면 국제 헌터 협회에서 주최하는 경매장이 이번에는 독일에서 열리고, 라이프치히가 박살 났어도 독일에서 열리는 건 변함이 없다?"
"맞아."
"그러니까 그 경매장을 보러 간다는 거지?"
"정확히 말하면 경매장을 구경하러 가는 것도 있긴 한데, 우리가 가는 건 이번에 미궁에서 얻었던 아티팩트를 팔러 가는 것도 있지."
거기에 덤으로 저번에 보여줬던 반지 있지?
한석원의 말에 김현우는 이내 그가 저번에 보여주었던 아티팩트 반지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기억나긴 하는데…… 벌써 경매장에 넘긴 거 아니야?"
"원래 국제 경매장에 넘기려고 하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이른 시일 내로 협회에서 주최하는 경매장이 열리길래 거기에 내는 게 좋다고 판단한 거지."
"거기는 뭐 국제경매장이랑 달라?"
"좀 다르지. 국제경매장은 아티팩트면 다 받는데 국제 헌터 협회에서 주최하는 경매는 엄선된 아티팩트만 받거든."
"한마디로 고오급 경매장이라는 소리네."
"그렇지."
한석원의 긍정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했다.
"뭐, 그러니까 결국에는 그냥 내가 간다니까 순간이동 타고 싹 가서 경매장 딱 참가하고 비행기 탈 필요 없이 다시 귀환하고 싶다 이 소리지?"
"흠흠."
김현우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헌석원은 흠흠 거리며 시선을 피했으나,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싶으면 그러지 뭐."
"오, 그럴래?"
한석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어차피 당분간은 할 일도 없을 텐데.'
김현우는 5일 전 아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등반자…… 등반자라.'
아브에게 들었던 이야기.
그것은 바로 지금 김현우가 사는 9계층에 '등반자'가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었다.
물론 말 그대로 그것은 아브의 단순한 추측일 뿐이었고, 확실하다고도 할 수 없다.
허나 아브가 김현우에게 내놓은 이런저런 경황을 들어 봤을 때.
'어쩌면 진짜 있을 수도'
김현우는 어쩌면 진짜 '등반자'가 아직 9계층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브가 제시한 의문.
그것은 바로 김현우가 탑에서 빠져나오기 이전에 일어났던 세 번의 크레바스였다.
원래 크레바스는 '보스'가 죽으면 사라진다.
실제로, 공항에 나타났던 크레바스는 김현우가 그 붉은 도깨비를 처리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렇지만 미리 일어났던 세 번의 크레바스 사태 중, 두 번의 크레바스 사태는 구멍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김현우는 아브의 설명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찾아보니까 헌터 협회측에서는 B급 크레바스와 C급 크레바스의 차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만약 아브의 의문이 맞아 떨어진다면, 현재 9계층에는 2명의 '등반자'가 남아 있다는 소리였다.
'…뭐 이렇게 예상만 해봤자 등반자가 누구인지는 죽어도 모르지.'
굳이 확인하자면 확인할 방법이 있긴 했다.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등반자들은 정보 권한이 통하지 않으니 그걸로 확인해 보면 되긴 했다.
다만-
'등반자를 찾자고 그 지랄을 하는 건 좀….'
애초에 그렇게 일일이 찾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
게다가 그 이외에도 김현우는 해야 할 일이 조금 생긴 상태였다.
'강해져야 한다.라….'
아브의 조언.
확실히 김현우는 지금까지 싸움이라 할 수 있는 두 번의 싸움을 통해 이전보다도 확실하게 강해졌다.
천마를 쓰러뜨리고,
괴력난신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중요한 것,
'녀석들은 전부 중위급 등반자들….'
지금까지 그가 상대했던 것은 전부 중위급의 등반자였다.
그리고 김현우는 중위급 등반자를 상대하는 데도 어떻게 보면 죽을 위기를 넘겼다.
그런 상황인데 만약 상위급 등반자가 등장한다면?
'확실히, 필요성이 있기는 하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아브에게 조언을 받은 다음 날, 아냐에게 강원도 등지에 있는 산을 하나 수배하라고 전해 놓았다.
뭐, 금방 김현우가 혼자서 날뛸 수 있을 만한 산을 살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으나.
'어떻게든 되겠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
"……."
베이징의 거대한 궁전.
마치 정말로 황제가 살 것처럼 으리으리하고 웅장한 그 모습에 흑선우는 넋을 잃고 그 장면을 바라보다 이내 주변을 돌아보았다.
궁전의 주변에는 도시가 만들어져 있었다.
분명 베이징의 수도 외곽에 있는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이 궁전 내에는 이미 하나의 경제권이 완성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서 있는 빌라들,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그런 도시의 끝에 올라가 있는 거대한 성벽.
마치 정말 현대적인 영지를 표현해 놓은 것 같은 모습에 그들이 주변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들의 앞으로 한 명의 남자가 나왔다.
"……들어오시오. 입궁을 허락하셨으니."
그, 흑선우가 '패도'길드에 단신으로 찾아온 이유.
그것은 바로 패도 길드의 길드장이 자신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S등급 세계랭킹 5위 패룡.'
그녀에 대한 것은 그저 길드와 이명밖에는 남겨져 있지 않았지만, S등급 세계랭킹 5위 안에 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흑선우의 긴장감은 극도로 높아져 있었다.
세계랭킹 5위.
모든 헌터들을 제치고 패룡이 올라서 있는 그 자리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자리니까.
'그런데, 도대체 왜 나를 부른 거지?'
흑선우는 남자의 뒤를 따라 들어가면서도 그런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처음 접촉은 우천명이 했다.
그는 패도 길드에 사과를 전달하고, 어차피 아레스 길드에게 죽임당할 것 김현우를 어떻게든 엿 먹여 보자는 심산으로 패도 길드에게 딜을쳤다.
바로 자신이 가지고 온 아레스 길드의 던전 양도권에다 아레스 길드의 3분기 예산까지.
우천명은 패도 길드의 '가면무사'들에게 그 사실을 확실하게 전했고, 곧 얼마 있지 않아 답을 받아왔다.
'의뢰를 사주한 이의 얼굴을 보고 싶으니 본궁으로 오라'는, 패도 길드장의 전언을.
사실 진짜로 간다는 것은 위험한 선택지였다.
그도 그럴 게 패도 길드와 아레스 길드는 결국 어찌 보면 싸우던 관계였으니까.
그런데도 흑선우가 이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바로 자신에게 이 이상 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김현우를 엿 먹이겠다는 선택을 하고 나온 이상 뒤는 없었다.
그렇기에 흑선우는 그 제안을 수락했고, 이렇게-
"이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드르르륵.
패도 길드의 길드장이자-
"왔는가."
-패룡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미령'과 독대하게 되었고.
곧, 흑선우는 놀랐다.
'…소녀?'
누가 봐도 엄청난 사치를 부린 옥좌에는 한 여인, 아니 소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여자아이가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진달래가 수놓아져 있는 치파오를 입고, 한쪽 머리를 사이드테일로 따 내린 그녀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리고, 그런 소녀의 모습에 흑선우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레스 길드 한국 지부의 지부장 흑선우라고 합니다."
"알았다."
소녀, 미령의 목소리와 함께 조용해진 궁전 안.
분명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척 보아도 10명이 넘어갔는데 그들에게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극도의 침묵,
그 속에서 흑선우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릴 때,
"그래."
마침내 미령이 입을 열었다.
"네가 우리 '패도' 길드에게 누군가를 죽여 달라고 '사주'를 했다고 들었는데, 맞나?"
"예. 맞습니다."
"그의 이름은 무엇이냐?"
미령의 물음에 흑선우는 무엇인가 굉장히 불안한 직감을 느꼈다.
말하면 안 된다.
마치 누가 전해주고 있는 것 같은 직감.
"그게…."
"말해봐라."
"..."
'그래, 어차피 이렇게 돌아가도 내게 남은 건 죽음뿐이다.'
미령의 재촉에 생각을 짧게 끊은 흑선우는 이내 고개를 팍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독일'에서 '괴력난신'을 처지한 헌터 '김현우'입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흑선우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만약 패도 길드에서 그를 죽여 주시기만 한다면 저희 아레스 길드 한국지부는 패도 길드에게 아레스 길드의 던전 20%를 양도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또 800억을 지급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예?"
그리고-
"너는 정말로 그렇게 말했구나."
"…그게 무슨?"
"'김현우'를 죽여 달라 말하지 않았느냐?"
"그, 렇…."
-흑선우는 말을 멈췄다.
"그래."
그의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너는…."
흑선우의 입이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고-
"지금 이 내게…."
그녀는 어느새 숨이 막힐 것 같은 붉은 마력을 사방으로 흩날리고, 핏발 선 눈으로 흑선우를 바라보며-
"내 '스승님'을 죽이라고 한 것이냐?"
무섭도록 무감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61
061.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간다(3)꽝! 우드드득……!!
"끄게에에엑!"
흑선우의 몸이 볼품없이 날아가 궁전 기둥 한쪽에 처박힌다.
그와 함께 들리는 걸음 소리.
터벅- 터벅-
흑선우는 기둥에 처박혀 정신이 어질어질한 상태에서도 본능적으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다.
부릅뜬 눈 위로 붉은 피가 맺히고, 그 너머로 붉은 마력을 사방으로 흩뿌리는 미령이 보인다.
"헉…."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적의에 흑선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눈에 하얀 서리가 끼듯 시야가 어질어질하고, 입은 산소를 수급하기 위해 들숨과 날숨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대체…이게…무슨……!"
그렇게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흑선우는 자신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의문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자신은 분명 김현우를 죽여 달라고 사주하러 왔다.
그런데 왜 중국을 발아래에 두고 있는 패도 길드장은 이토록 화를 내며 자신을 핍박하는가?
희미해지는 시선으로 눈앞의 그녀를 바라봤다.
모든 마이너스적인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마력을 발산하는 그 중심지.
그녀는 무감하고도 무심한 표정으로 오롯이 흑선우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거의 다 다가왔을 때쯤, 흑선우는 문득 자신이 날려지기 전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스승님…이라고……?'
스승님이라고 했다.
잘못 듣지 않았다.
현재 위연 길드를 밀어버리고 중국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 집어넣은 패도 길드의 길드장이자, S등급 세계랭킹 5위인 그녀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제야 흑선우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거기에 자신이 지금까지 하려고 했던 짓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도.
하지만-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흑선우는 그 상황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었다. 뭔가 잘못되었어……!!'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가정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죽을 위기인 상황에서 흑선우의 머리는 지금까지와는 상식을 넘은 속도로 빠르게 돌아가며 수많은 가정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흑선우는 틀림없는 '결점'을 찾았다.
그가 피를 뚝뚝 흘린 채 엎드리자 그를 향해 다가오던 미령의 걸음이 멈췄다.
흑선우는 그 모습을 보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패도 길드장은 뭔가를 착각하고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아무 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미령이 입을 열었다.
"말해봐라."
'됐다!'
흑선우는 적어도 살아날 수 있다는 확률이 높아졌다는 것에 감사하며 곧바로 말을 이었다.
"패도 길드장께서는……'그'가 스승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확언.
흑선우는 미령을 보다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혹 길드장님께서는 어디서 그 스승을 만났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미령을 두말할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탑 안이었다."
'그렇지!'
흑선우는 쾌재를 불렀다.
'왜 그녀가 김현우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애초에 김현우를 만난 것이 '탑 안'이라면 애초에 김현우와 그녀가 만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혹 패도 길드장님께서는 한국인이십니까?"
"아니다."
"그렇다면…… 아마 김현우는 길드장님이 찾던 스승님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움찔!
그 말을 하며 흑선우는 순간적인 분노가 터져 나올 것을 예견했으나-
"호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돌아오는 것은 흥미롭다는 듯, 아까 전과 같이 돌아간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흑선우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맞춰간 퍼즐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 지구에는 총 158개의 탑이 있습니다."
"그래."
"그리고 그 158개의 탑은, 서로 다른 지역을 관장하고 있는 것도……아시고 계십니까?"
"그래, 알고 있다."
지구에 있는 총 158개의 탑은 다들 제각각의 위치에 세워져 있고, 각각의 탑은 다른 지역을 관장해 헌터들을 랜덤으로 소환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 세워져 있는 탑은 한국인들만을 한정해 소환하고, 미국에 세워져 있는 15개의 탑은 마찬가지로 주를 단위로 나누어 소환한다.
'한 마디로…….'
"중국에 계신 패도 길드장께서 한국에서 12년 동안 탑에 갇혀 있던 김현우 헌터와는 만날 일이 없으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 이것이 바로 흑선우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탑은 각각 관장하는 구역이 다르다.
그리고 중국에 있던 미령이 탑을 들어갔다 나왔다고 해도, 김현우가 12년 동안 갇혀 있었던 '한국의 튜토리얼 탑'에 들어갔을 리가 없었다.
그 말과 함께 미령의 대답이 멈췄다.
허나 흑선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황금으로 수놓아진 대리석을 바라보며 눈알을 굴릴 뿐.
'설득된 건가?'
흑선우가 긴가민가하고 있을 때, 미령이 입을 열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냐?"
"……."
꽝!
"커허어어억!"
조금 전만 해도 엎드려있던 흑선우의 몸이 하늘로 붕 떠, 기둥에 처박힌다.
다시 한번 새하얗게 변하는 의식.
허나-
"누가 멋대로 기절하라 했지?"
"끄-아아아아악!!!"
흑선우는 미령이 사용하는 붉은 마력의 침투에 온몸의 혈도가 터지는 듯한 느낌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왜!!"
"스승님을 시해하려던 벌레가 어떻게 살려고 발버둥치나 보려고 했더니, 결국 하는 소리가 그것이냐?"
내가 스승님을 착각했다고?
미령은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흑선우를 기둥 위로 끌어 올렸다.
꺽꺽거리는 흑선우.
미령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지. 확실히 탑은 관장하는 지역이 달라. 그렇기 때문에 네 의문도 이해한다. 그런데 말이야……."
정말 유감스럽게도-
"나는 한국에서 튜토리얼의 탑을 클리어하고 나왔다."
미령의 말에 흑선우의 눈가가 커졌다.
"그때는 원망도 많이 했지, 못난 애비새끼의 말을 따라 한국에 갔다가 탑으로 끌려 들어갔으니까."
-허나 되었다. 스승님을 만났으니까.
미령은 웃음을 지었고, 흑선우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고로 어떻게든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탑 안에서 만난 사람이 정말 김현우라고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
그저 살기 위해 아무 말이나 던져대는 흑선우를, 미령은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끝까지 살기 위해 스승님을 부정하는구나."
"끄으으윽!"
"하지만 둘은 모르는 것 같은데, 지금 그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그건 무, 슨……."
"지금 내 모습은 전부 '스승님'이 원하는 모습을 토대로 해 만든 것이니까 말이다."
미령은 히죽 하고 웃으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입고 있는, 진달래가 수놓아져 있는 치파오."
-이 엉덩이까지 내려와 있는 긴 장발
"내 등에 그려져 있는 그분의 표식. 그리고……."
-'미령'이라는, 내 이름까지.
씨익-
"너는 나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거다. 벌레야…."
"미…미쳤……!"
흑선우는 본능적으로 맛이 가 있는 미령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으나, 그녀는 흑선우의 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그에게 선고했다.
"편하게 죽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벌레야. 너는 스승님을 시해하려 했고 심지어 자신의 보전을 위해 스승님을 부정하고 나를 부정했다."
그 죄가 얼마나 큰지-
"내, 직접 네게 알려주겠다."
"으……으……으아아아아아악!!!"
꽈지직!
궁전에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독일의 수도 베를린.
독일 지부에서 제공한 최고급 호텔에 앉아 있던 김현우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작은 뿔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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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력난신의 정수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없음
-정보 권한-
괴력난신 '귀이'는 자그마한 요괴로 태어나 삶을 시작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그녀는 지층에서 요괴들을 잡아먹으며 살아왔고, 결국 그는 모든 요괴들을 잡아먹고 통합해 '정수'를 취득한다.
그녀는 -권한부족- 의 뜻으로 -권한부족-을 오르게 되었고. 그녀의 정수인 이 뿔은 -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의 조건을 모두 총족할 경우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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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독일에 온 지도 2일째, 김현우는 어제 독일에 와서 표창과 함께 받은 아이템을 보며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이템의 등급은 S+.
등급이 S+인 아이템은 당장 경매장에 내놓으면 부르는 게 값이라는 소리를 김시현에게 들었지만, 이 아이템의 경우는 좀 특별했다.
"…도대체 뭐지"
'등급은 S+인데 보정도 없고 스킬도 없고….'
이게 왜 S+등급인지 의심이 가게 하는 아이템의 설명.
그나마 김현우는 정보 권한을 열어 이 아이템의 숨겨진 뜻을 알았으나, 정보 권한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이 아이템이 그리 좋지 보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가지고 있어봤자 무기로 쓸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판에 보정이나 스킬도 하나 안 붙어 있으니까.
게다가-
'이거 은근히 궁금하네.'
정보 권한으로 열리는 정보를 보니 이게 정확히 무엇을 하는 물건인지, 김현우는 조금 궁금해졌다.
그렇게 김현우가 괴력난신의 정수를 주머니에 넣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형, 나와요."
"벌써 가냐?"
"벌써가 아니라 지금 벌써 4시예요. 5시부터 경매 시작하니까 지금 미리 가서 자리 잡으면 딱 보기 편할 거예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고, 그곳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는 동료들을 보았다.
김현우를 포함한 그들은 바로 협회에서 준비해준 차를 타고 경매장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야."
"왜?"
"넌, 그 츄리닝 언제 벗을 거냐?"
한석원의 말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째 지금 다들 나한테 츄리닝 언제 벗을 거냐고 한마디씩 하는데, 츄리닝을 굳이 벗어야 해?"
그의 되물음에 김시현은 대답했다.
"제가 언제나 말하는데 츄리닝은 좀…사적인 공간에서 입으면 모르겠는데 공적인 공간에서 입기는 좀 그렇지 않아요?"
'…뭐, 이제 형이 츄리닝을 입고 있는건 다들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지만'
김시현은 불과 어제 표창식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분명 김현우는 평소와 같았다.
검은색 츄리닝에 무슨 동네 슈퍼 나온 것 같은 삼선 슬리퍼를 신고 표창식에 올라간 김현우.
김시현은 그 모습에 탄식하며 표창식이 끝난 뒤, 포털 사이트의 뉴스 헤드라인을 쭉 둘러봤으나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복장에 관해 나오던 기사들이 올라와 있지 않았다.
단 하나도.
"뭐가 그렇지 않아? 결국 츄리닝도 옷인데, 사람이 그냥 가릴 데만 다 가리면 됐지 뭐 그렇게 불만이 많냐?"
김현우의 말에 결국 한숨을 내쉰 김시현은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기를 잠시.
김현우와 그 일행은 곧 국제 헌터 협회에서 주최하는 경매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은근히 소소하네?"
"뭐, 애초에 비싼 경매고 사람들도 그렇게 많이 안 올 테니까요."
김현우가 슬쩍 경매장 건물의 크기를 가늠해 보며 입을 열자 김시현이 대답했다.
실제로 김현우가 본 것처럼 경매를 진행하는 건물의 크기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잘 쳐줘 봤자 헌터 협회 한국지부의 메인 홀 정도?
그렇게 김현우가 이곳저곳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그는 김시현의 말에 따라 경매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곧 김현우가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헌터 협회에서 직접 주최하는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김현우로서는 처음 보는 아티팩트 경매가 시작되었다.
# 62
062. 문신이 내가 다 부끄럽다(1)중국 베이징 중심지에 있는 한 고급 호텔.
딱 보기만 해도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서 만들었을 것 같은 룸 안.
우천명은 자신의 방에 앉아서 여태까지 오지 않는 흑선우를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오지 않지?'
그는 슬쩍 시간을 바라봤다.
이제 막 4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
흑선우는 분명 오늘 1시쯤 패도길드의 본궁에서 온 호출을 받고 길드장과 만나기 위해 나갔고.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정답은 단 하나.
흑선우에게 일이 생겼다.
'그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지.'
사실 고작 2시간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빠르게 속단하는 게 아닌가 했으나 그의 판단은 맞았다.
2시간, 무엇인가를 기다리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런 뒷 세계에서 2시간은 굉장히 긴 시간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 맛탱이 가버린 새끼한테 강제로 끌려 온 거니까.'
흑선우가 그렇게 겁을 주어도, 우천명은 알고 있었다.
결국, 본사에서 처리하려는 것은 '흑선후'뿐이고, 우천명은 그저 그의 오른팔로 '처리'까지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개새끼 덕분에 패도길드와 얼굴을 마주치긴 했어도 얼굴에 가면을 썼으니 안심이고, 중국에서 빠져나간 뒤에는 모아 놓은 돈으로 조용히 살아야겠군.'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아레스 길드에 복귀하는 것은 힘들어진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뒷세계에서 활동하자면 어떻게든 활동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 해서 복귀해 봤자 우천명은 아레스 길드의 '개'.
그 이상, 그 이하도 안 되리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미친놈도 패도 길드에게 처리당한 것 같으니 나도 빠르게 도망쳐야 한다.'
우천명은 그렇게 짧은 생각을 끝냄과 함께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그중에서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흑선우가 가져왔던 기타 양도권들을 전부 태워 버린 것이었다.
-화르륵!
애초에 누군가 사인만 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양도권은 새로 발급받을 수 있었으니까.
'괜히 욕심부리다가 아레스 길드에 찍힐 필요는 없지.'
그 자리에서 양도권을 태워 버린 우천명은 자신의 짐만을 챙긴 채 곧바로 룸의 문을 열었고-
"짜잔-"
푸화아아악!
"끄-윽!?"
우천명은 손잡이를 잡은 오른손이 베였다는 것을, 짧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느낄 수 있었다.
끄르르르륵!!
"끄아아아악!"
오른팔이 잘려나갔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느껴지는 고통에 우천명은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뒹굴었고, 그의 손을 잘라 버린 남자는 키득키득 거리는 웃음과 함께 그를 바라봤다.
"어우, 미안해. 원래 한 번에 죽이려 했는데- 제대로 죽이질 못했네?"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는 듯 말하는 남자.
우천명은 미친 듯이 피가 터져 나오는 오른팔을 꾹 누르면서도 그의 얼굴 아래에 그려져 있는 로마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 넌…기, 기사단…!"
"이야, 그래도 관리부라고 우리를 알기는 아는구나?"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을 마친 그를 보며 우천명은 공포에 떨었다.
기사단.
그들은 바로 아레스길드의 본사에 소속되어 있는 '머더러 헌터'들이었다.
총 10명으로 이루어져 있는 기사단은 실질적으로 누가 소속 인원으로 들어 있는지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관리부에 있는 이들은 그들의 실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사단에 속해있는 인원들은 전부 기사단에 들어가기 전에는 랭킹 40위 권 안의 강자들이었다는 것,
"도, 도대체 어떻게…기사단이 이곳에……!"
오른쪽 눈 아래에 로마자로 Ⅷ(8)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있는 남자를 보며 우천명이 중얼거리자 남자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에이, 그런 걸 왜 물어봐? 너도 잘 알고 있으면서."
"아, 안 돼."
그는 슥 웃음을 지으며-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아…안 된다고…안 돼!!"
파삭!
망설임 없이 팔을 휘둘러 우천명의 머리를 그대로 터트리곤 입을 열었다.
"아레스 길드를 배신한 너희들을 죽이기 위한 게 당연하잖아."
물론 그 말에 대답은 없었다.
우천명은 이미 머리가 터져 버려 그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으니까.
그 뒤, 그 남자가 우천명의 머리를 터뜨리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끼이익-
반쯤 부서졌던 문이 열리며 또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우천명을 죽였던 남자와 마찬가지로 얼굴에 로마자로 5라는 표기가 되어 있는 남자는 우천명의 시체에 앉아 있는 8을 보며 말했다.
"벌써 죽였어?"
"뭐, 일 처리 하는데 그렇게 오래 끌 필요 있나? 그냥 빨리 죽여야지."
8은 능청을 부르며 거부감이라곤 없는지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시체를 툭툭 두들겼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5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빨리 가자."
"너도 흑선우 처리했어?"
"아니, 처리 못 했어."
"그런데 뭘 가?"
8의 물음에 5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처리하고 싶은데, 녀석은 현재 패도 길드에 잡혀 있다."
"그럼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 아니야?"
"글쎄에……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더군."
"왜?"
"그 녀석이 들어가고 나서 패도 길드의 궁전에서 소름 끼칠 정도로 진한 마력이 터져 나왔거든."
"…네가 손쓰지 않고도 이미 죽었다는 거?"
"아마 그럴 확률이 높지. 뭐, 만약 죽지 않았다고 해도…."
뭐, 그럼 그때 가서 죽이면 되는 거니까.
5의 말에 8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니, 왜 굳이 일을 두 번 하려고 해? 한 번에 딱딱하면 좋잖아?"
"그럼 너는 음식도 안 맞는 중국에서 계속 있고 싶냐?"
나는 아직도 속이 느글느글해서 중국에는 못 있겠구먼.
5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문 너머로 걸어갔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8또한 그런 5를 따라가며 물었다.
"그럼 우리 일은 끝난 건가?"
"아직."
"또 더 있어?"
"당연히 더 있지. 그 녀석을 잡아야 하잖아."
"……그 녀석?"
8은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 그 양도권 받아먹었다는 길드장 녀석 말하는 거지?"
"듣기로는 위장할 필요도 없고 그냥 전력을 다해서 깔끔하게 죽이라는데."
"뭐야, 그럼 우리가 또 한국까지 가서 일을 치러야 해?"
8이 불만이라는 듯 입을 비죽였으나 5는 고개를 절레 젓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 그 녀석은 우리 말고 4, 7, 9, 10이 처리하기로 했어."
"…뭐? 그 녀석 한 명에 4명이나 붙는다고?"
"그래."
"그 양도권 받은 녀석이…아, 생각해 보니까 그 녀석이었지? 이번에 재앙을 쓰러뜨린-"
8이 말하자 5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러다 보니까 4명이나 붙는 거지."
"하긴 그 정도면…우리 쪽도 길드장 아티팩트 덕분에 지금 랭킹을 합산하면-"
"말조심해, 8. 우리 비공식 랭킹은 극비 사항인 거 몰라?"
5의 말에 8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그래 알았어."
"…아무튼, 통상적으로 임무가 끝나진 않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할 일은 없을 거야."
네 말대로 기사단이 4명이나 차출되었으니까.
"아마, 지금쯤 사냥을 시작하고 있을걸?"
***
독일 베를린 외곽에 있는 극장 건물.
"10억! 10억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그 안쪽에서는 한창이나 국제 헌터 협회 측에서 주최하고 있는 경매가 진행 중이었다.
"3, 2, 1!! 야타가스의 곡옥은 32번 참가자분에게 낙찰되었습니다!"
흥미를 끌어모으려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이야기하는 남자를 보며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생각했다.
'썩 재미있지는 않네.'
뭐 애초에 물건을 사고파는 경매에 뭔 재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저 아이템들이 내 손에 들어올 것도 아닌데.
게다가 애초에 김현우는 경매장에 전혀 올 생각이 없었다.
동료들이 아티팩트를 팔아 치울 겸 구경한다고 하길래 따라왔을 뿐.
'그래도 아이템 설명 보는 건 나름대로 재미가 있긴 한데.'
그럼에도 아직 김현우가 경매장을 떠나지 않고 앉아 있는 이유는 바로 경매에 튀어나오는 아이템의 정보가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평범한 헌터들은 그 정보를 읽을 수 없다.
정보를 읽을 수 있는 건 '정보권한'을 가지고 있는 김현우뿐.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경매자는 다음 물품을 경매장에 내놓았다.
"자, 이번에 경매장에 출품된 물건은 바로 '아슬란의 거창'입니다! 경매 시작가는 3억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듣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금액.
물론 김현우에게 3억이란 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3억은 거대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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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란의 거창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극격 , 신속 , 이변 , 그림자
-정보 권한-
창 하나로 한 제국을 세운 아슬란의 애병을 그대로 복제한 복제품이다.
말 그대로 복제품이지만 복제품의 복제도가 굉장히 높은 수준에 통달해 있기에 원본의 능력의 -권한부족- 했다.
아슬란, 그는 -권한부족- 의 -권한부족- 으로서 한평생 창에만 몰두했으며 그가 주로 사용했던 기술로는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등이 있다. 그는 제국의 이념과 맞아 떨어진 -권한부족-을 습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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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김현우는 아이템의 로그를 읽다가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째 그동안 제대로 된 아이템 설명을 읽어 본 게 없냐.'
물론 권한부족이 뜨더라도 어느 정도의 뜻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정작 김현우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궁금증의 해소.
그런데 중요한 정보는 전부 권한 부족으로 막혀 있다.
"형 어디 가요?"
"잠깐 밖에 있을 테니까 경매 끝나면 전화해라."
김현우는 더 이상 이 경매장 내에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아티팩트도 안 살 거고, 그나마 보고 있던 건 아티팩트의 로그뿐이었는데 로그도 제대로 안 뜬다.
한마디로 지금 열려 있는 경매장은 김현우에게는 전혀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김현우는 슬쩍 말하는 김시현에게 그렇게 언질한 뒤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매장을 빠져나왔고, 곧 건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한가한 풍경이었다.
앞에는 경매장을 지키는 헌터들이 서 있었고, 그 앞으로는 소극장치고는 상당히 거대한 주차장이 있었다.
일렬로 늘어서 있는 갖가지 비싸 보이는 차들을 보며 김현우는 별생각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끄억!?"
"꺽!"
김현우의 뒤에 있던, 조금 전까지 경비를 서고 있던 헌터들이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죽음과 동시에-
"!?"
김현우의 머리 위로 거대한 창이 떨어져 내렸다.
투창을 하듯 직선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창을 보며 김현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날아오는 창을 피해냈다.
그러나-
슈아아악-
곧바로 그의 하단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격.
그는 곧바로 반응해 점프하는 것으로 검격을 피해냈지만-
"빙고!"
"?"
김현우는 자신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댄 여성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사나워 보이는 눈매를 가진 채 김현우를 향해 날카로운 클로를 들이대는 여성.
카가가강! 카아악!
클로가 김현우의 팔뚝을 가르고 지나가고, 그의 몸이 튕겨 나간다.
쿵! 콰가가가각!!!
순식간에 주차장의 거리를 박살 내며 몸을 제동하는 데 성공한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로마자로 표기한 숫자를 큼지막하게 그려놓은, 각각 다른 무기를 쥐고 있는 녀석들.
얼굴에는 하나같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을 보며 김현우는 헛웃음으로 어처구니없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이 새끼들은 또 뭐야…?"
"이야, 역시 영상에서 본 것처럼 한 가닥 하는가 보네? 우리의 연계기…."
"하, 병신들이 또 나와서 지랄이네."
-김현우는 거침없이 막말을 내뱉었다.
# 63
063. 문신이 내가 다 부끄럽다(2)
"패도 길드…패도 길드라……."
뉴욕 중심지에 있는 아레스 길드의 본사 꼭대기 층에서, 아레스 길드장 마튼 브란드는 뉴욕의 뷰를 보며 중얼거렸다.
툭-툭-
습관적으로 가죽의자를 치던 그의 손가락이 어느 순간 멈추고,
"그래서, 흑선우는 죽이지 못했다?"
"우선 5번의 보고에 따르면 그렇다고 합니다."
"뭐, 만약 정말 처리해야 할 녀석이 그 길드에 들어가서 나오지 못했다면 실질적으로 그곳에서 죽었다고 봐도 되겠지."
하지만-
브란드는 그렇게 말하고 의자를 돌려 고개를 숙인 남자에게 말했다.
"5번에게 전해두도록, '실수'가 내게까지 올라오게 하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녀석은 어떻게 됐지?"
"그 녀석이라 하시면, 김현우 헌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보고 상태는?"
"우선 그가 있는 경매장에 대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이미 습격을 시작했거나, 전투를 치르고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헌데…."
"?"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남자의 말에 브란드가 물었다.
"뭘 말하는 거지?"
"상대는 '재앙'을 두 번이나 막아 낸 헌터입니다."
"혹시 '기사단'의 실력이 걱정되는 것인가?"
"……."
남자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브란드는 슥 웃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지금 김현우를 처리하기 위해 파견한 기사단이 누구지?"
"4번과 7번, 그리고 9번과 10번입니다."
"그렇다면 됐어."
"예……?"
남자의 물음에 브란드는 다시 가죽 의자를 돌려 뉴욕의 뷰를 감상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지금 파견한 4명의 기사로 그를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그게, 무슨…?"
남자의 물음에 브란드는-
"원래는 굳이 말하고 싶진 않지만, 내 일을 열심히 수행하는 자네에게는 특별히- 알려주도록 하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일종의 실험이야.
"양도권을 돌려받는 것 이외에도, 그에게 내 '아티팩트'가 얼마나 통하나에 대한 실험이지. 거기에 확인할 것도 있고 말이야."
그는 웃음을 지었다.
***
"뭐?"
김현우의 욕설에 주차장에 나타난 이들의 표정이 한순간 멍해진다.
"뭐? 뭐긴 뭐야 씨발새끼야."
한 번 더 그들의 귀를 강타한 김현우의 욕.
그들의 표정이 찌푸려진다.
"네 녀석 우리가 누군지 알…."
"너희들이 누구긴 누구야 미치광이 살인자 새끼들이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려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헌터들을 보았다.
그 어떤 경련도 일으키지 않고, 단 한 번에 심장이 뚫려 죽은 그들은 자신이 왜 죽었는지도 모른 채, 죽어 있었다.
김현우가 피를 흘리는 헌터들을 보고 있자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짱 두둑하군."
"내 배짱 네가 챙겨줬어? 어떻게 너희 같은 새끼들은 꼭지가 뭐 챙겨준 것처럼 훈수를 두더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들의 모습을 짧게 훑었다.
얼굴, 오른쪽 눈 아래에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있게 표기되어 있는 로마자 숫자를 가지고 있는 4명의 남녀.
3명의 남자는 각각 창과 검, 그리고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오른쪽에서 몇 번이고 목을 좌우로 꺾는 여자는 손에 척 보기에도 날카로워 보이는 클로를 끼고 있었다.
김현우의 이죽거림에 창을 쥐고 있던 남자, 4는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긴, 그 '재앙'을 상대했으니 그 배짱도 알아줄 만하군."
"뭐라고?"
"그런데, 너무 그렇게 자만하지는 않는 게 좋을 거다."
"뭐라고?"
"세상에는 네가 모르는 강자들이……."
"뭐라고?"
"……."
마치 잘 안 들린다는 듯 손을 귀에 가져다 대고 4를 향해 입을 여는 김현우를 보며 잠시 입을 닫은 4는 순간 욱하고 끌어 오르는 마음을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아무튼……."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가까이 와서 다시 한번 말해봐.
"찐따 새끼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도발하듯 그에게 손가락질했고, 4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움찔하곤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뭐? 말로 해서는 안 돼?"
김현우가 웃는 표정으로 되묻자 남자는 자신의 장창을 꾹 쥐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 너를 죽이기 위해 차출된 기사단의 전력 4명은 전부가 S등급 세계랭킹 30위권의 실력을 지닌……."
"나는 말이야."
물론, 김현우가 그 말을 전부 들어주진 않았지만.
"너희 같은 새끼들이 제일 싫어."
왜인 줄 알아?
"아주 입만 열면 아가리에서 사람을 깔아뭉개려고 협박을 존나게 해. 응? 존내 제대로 싸우지도 못 하고 쥐어터질 거면서."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전부 차량.
그리고 박살 난 콘크리트.
그는 곧바로 허리를 내려 자신의 아래에 부서져 있는 거대한 짱돌을 집어 들었다.
"자, 잘 봐."
응?
김현우는 뒤에 죽어 있는 헌터들을 가리킨 뒤, 이내 시선을 돌려 제일 오른쪽에 있는, 검을 들고 있던 남자를 가리켰다.
"너는 두 대."
그다음은 왼쪽에 있는 지팡이를 들고 있던 남자.
"너는 한 대."
김현우는 멈추지 않고 일렬로 서 있는 이들을 한 명씩 지명하며 입을 열었다.
"너도 두 대, 그리고 너는 사람을 죽였으니까 뒤질 때까지."
"…미쳤군.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런 망발을……."
"너희들이 누구인지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어차피 대충 5분 정도 뒤면 내 앞에서 뒤질 때까지 처맞으면서 불 텐데 뭐 하러 궁금해해?"
그리고-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 이치란다."
김현우는 들고 있던 짱돌을 한 번 위로 던졌다 받았다.
툭-
묵직하게 그의 손 위에 올라가 있는 짱돌.
"지금부터 내가 이걸로 벌을 줄 테니까. 달게 받아라."
"미친새끼……!"
김현우의 말과 함께 기사단은 한순간 전투를 속행했다.
창을 들고 있는 4번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순발력으로 김현우의 전방을 노리고, 은신을 이용해 몸을 숨긴 10번이 김현우의 뒤로 이동한다.
검을 쥔 9가 김현우의 측면을 공략하고 그들의 뒤에 있던 남자가 마법을 영창한다.
일반적인 속도라고는 할 수 없는, 경이적으로 빠른 마법 영창 속도는 그 짧은 순간에 그의 주변에 수십 개의 마법을 메모라이징 했고-마침내, 4는 사정거리 내에 들어온 김현우를 보며 창을 찔러 넣었다.
그와 함께 뒤에서 같이 들어오는 10번과, 측면으로 돌아간 9번은 4번과 마찬가지로 김현우의 심장과 머리를 향해 각각 클로와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결과는-
쾅! 콰직!
"끄악!?"
"?!"
조금 전까지 그들을 돕기 위해 마법을 영창하던 마법사가 쓰러졌다.
"무…슨?"
김현우가 쥔 짱돌에 의해 머리를 찍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진 마법사, 그의 뒤로 창을 찔러 넣던 4의 얼굴에 경악이 감돌았다.
'도대체 어느 순간에!?'
김현우는 조금 전만 해도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분명 창을 찔러 넣을 때도 무엇인가를 찔러 넣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린 그 순간 이미 그는 자신이 달려온 그곳에서 7번을 무력화시켰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속도.
"스킬……!"
양손에 클로를 끼고 있던 여자가 두 눈을 부릅뜨며 클로를 들어 올렸으나,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랄, 스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쓴 건 말이야-"
-툭
"!?"
"보법이라는 거야."
이 병신아.
콰직! 쾅!
검을 들고 있던 9번의 머리가 김현우가 휘두른 짱돌에 맞아 터져 나간다.
그 찰나의 순간, 김현우는 뒤늦게 창을 회수하고 있는 4번을 보며 입가를 비틀어 올리곤 입을 열었다,
"이형환위(移形換位)라고, 아냐?"
그 순간 4번의 창이 다시 한번 휘둘러진다.
민첩 S+에서 나오는 엄청난 속도의 찌르기-
"가속, 초가속, 극가속, 섬광, 일점, 극점────"
그와 동시에 위기를 느낀 4번의 입에서 수많은 스킬명이 흘러나온다.
나오는 스킬은 대부분 속도와 민첩에 관련이 있는 스킬들.
그의 말이 끝날 때마다 그의 창은 가속에 가속을 더하고, 나중에는 본인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을 빠르기로 창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의 손끝에 걸린 기묘한 감각 끝에는-
"미-"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 4번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온 세상이 느리게 보인다.
8개의 속도 스킬을 중첩 시킨 그의 몸은 그의 사고마저도 느리게 만들었고,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창이 나아간 곳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대신-
그는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빨라진 사고의 가속도 안에서, 그는 그저 눈알만을 돌릴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시간.
0. 하고도 그 안의 콤마를 다투는 그 시간 안에서, 그는 김현우를 볼 수 있었다.
분명 창을 찌를 때 보았던 그 모습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무릎을 굽히지도 않았고, 팔을 움직이도 않았으며 마력을 뿜어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입가에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짓고, 이미 진득한 피가 묻어 있는 짱돌을 들고 있는 김현우는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콰직!
그의 시야가 점멸했다.
터져 나간 머리.
김현우는 쯧 하고 사방으로 튀는 피를 피하며 자신의 생각보다 확실하고 빠르게 운용할 수 있게 된 보법을 밟으며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잘 되는데?'
김현우가 탑에서 한참 무(武)를 수련했을 때, 그는 정말 여러 가지의 무술을 수련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제대로 수련하지 못한 게 있으니, 그게 바로 '보법(步法)'이었다.
보법(步法).
무협지에서는 빠지지 않아야 하는 삼 대 요소 중 하나가 보법이었고, 사실 무협 말고도 판타지나 현대 판타지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게 이동술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웹소설에 나온 보법들을, 김현우는 단 하나도 제대로 수련하지 못했다.
이유?
간단했다.
적어도 김현우가 읽었던 웹소설 속에서 보법에 대한 묘사는 극도로 적었으니까.
적을 상대할 때 주력으로 사용하는 기술이 아니다 보니 보법은 묘사의 양도 아주 적은 데다가.
한번 배운 뒤로는 그저
'무슨무슨 경공을 써서 어디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정도가 나오는 게 끝이었기에 김현우는 보법을 수련할 수 없었다.
모든 웹소설에서 결국 보법이란 것은 이름만 나열되어 있을 뿐이었으니까.
천마가 쓰는 '천마군림보'
검선이 쓰는 '운무경공'.
혈마가 쓰는 '혈림신보'.
그것들은 모두 이름만 나왔을 뿐, 조금의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허나 딱 하나,
김현우가 형태나마 수련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형환위'.
오히려 다른 경공보다도 어려운 이 상위의 무공은, 김현우가 형태나마 수련을 할 수 있었다.
왜냐?
이형환위는 정말 기묘하게도 한국 웹소설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했고, 그 덕분에 상당히 데이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현우가 읽은 어느 웹소설에서는 웹소설의 본분을 잊었는지 이형환위를 완결까지 수련하는 미친 주인공도 있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이형환위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는 그저 형태만 따라서 쓸 뿐이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을 일축하며 클로를 들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Ⅹ(10)이 써져 있는 여자는 어느새 공포와 독기가 반반 섞인 눈으로 클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그런 10번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이거, 5분은 걸리겠지 싶었는데 1분도 안 걸렸네?"
김현우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찡그려졌으나,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아까 분명히 말했지? 너는 뒤질 때까지 팬다고."
툭-
김현우는 들고 있던 짱돌을 다시 한번 던졌다가 잡곤, 클로를 들어 올리는 그녀에게 선고했다.
"너는 네가 알고 있는 정보 전부 불 때까지는 편하게 못 갈 줄 알아라. 알았냐?"
# 64
064. 문신이 내가 다 부끄럽다(3)넓은 공동.
흑백을 조화롭게 맞춰 놓은 타일이 깔린 그 공동의 한가운데, 무척이나 거대한 원탁이 있었다.
족히 50명 정도가 둘러앉아도 제대로 들어차지 않을 것 같은 원탁.
그 원탁에, 그가 앉아 있었다.
외모를 제대로 묘사할 수 없이, 검은 오오라를 뿜고 있는 그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원탁을 한번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었나?"
그가 입을 열자. 분명 그밖에 없던 넓은 공동에는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 또한 온 몸을 후드로 가려 제대로 된 형체를 볼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것.
"현재 두 명의 등반자가 저지당했습니다."
"9계층에 올라갔던 등반자는 누구지."
"'천마(天魔)' 와 백귀야행(百鬼夜行)의 '난신'입니다."
남자의 목소리에 형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는 박수를 쳤다.
텁-텁-
마치 가죽 장갑을 끼고 치듯, 큰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적어도 분위기로서 남자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주인이 상당히 흥미로워하고,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솔직히, 너무 늦게 나타나서 틀림없이 등반자의 '제물'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
"그런 것 같습니다."
남자의 대답에 형체가 없는 자는 책상 위에 자신의 손으로 보이는 것을 올려놓으며 물었다.
"그래서- 9계층에 도착하는 다음 등반자는 누구지?"
그의 물음에 남자는 대답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
-뭐, 그래도.
"생각과는 다른 복병이 나타나니 이것 참, 기다릴 맛이 나는군."
형체조차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다음이 기대된다는 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시선을 주었다.
***
김현우가 그들에게 습격당한 그다음 날,
"형."
"왜?"
"그거 뭐예요?"
"이거?"
김시현은 김현우가 옆에 놔둔 거대한 보따리를 가리켰고, 그는 놔두고 있던 보따리를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전리품."
"……전리품이요?"
"응."
"……아, 어제 형 습격했던 그 괴한들이요?"
김시현은 그렇게 말하며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제, 갑작스레 김현우를 습격한 괴한들.
그들은 국제 헌터 협회에서 주최하는 경매장 앞에서 김현우를 살해하려다 오히려 김현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물론 처음에는 김현우가 이미 죽어 있는 시체들 사이에 서 있어 곤란한 상황이 연출되었으나, 다행히도 경매장에 설치된 CCTV는 김현우에게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 괴한들에 대한 정체는 알아냈어요?"
"알아내기는 뭘 알아내겠냐? 한 명 심문하려고 살려놨더니 바로 혀 깨물고 뒈져 버려서 허탕이었지. 게다가 CCTV도 찍히긴 찍혔는데 어떻게 영상이 그렇게 찍히냐?"
"아, 그거요?"
김현우가 투덜거리자 김시현은 바로 어제 확인했던 CCTV를 떠올렸다.
분명 CCTV는 김현우의 무죄를 증명하는데 막대한 공을 올렸지만, 유감스럽게도 김현우를 습격했던 괴한들의 얼굴은 나오지 않았다.
마치 그곳에만 인식 저해가 걸린 것처럼 괴한들의 얼굴은 전부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머리를 왜 터트려요?"
허나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할 가장 큰 원인은 김현우였다.
"싸우는데 어떻게 힘 조절을 하냐?"
"…제가 보니까 그냥 일방적으로 죽였던데, 아니에요?"
김시현의 물음에 김현우는 시선을 돌렸다.
사실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들의 연계에 살짝-아주 살짝 당황했으나, 그것도 그냥 한순간뿐이었고, 김현우는 그들을 깔끔하게 박살 냈다.
그래, 너무 깔끔하게 박살 내서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흠…."
"어휴, 근데 솔직히."
"뭐?"
"어차피 그 녀석들 얼굴 제대로 보존했다고 해도 그 괴한들 정체를 알기는 꽤 힘들 거예요. 그렇게 얼굴 까놓고 다니는 데다가 인식 저해까지 걸어놨으면…."
보나마나 기록도 전부 말소해서 조회해 봤자 뭐 안 나왔을 거예요.
"…역시 그렇지?"
"뭐, 그렇죠."
김시현은 그렇게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고, 김현우는 물었다.
"어디 가냐?"
"이제 곧 있으면 돌아갈 건데 잠깐 근처 들려서 기념품이라도 사가게요."
"기념품? 누구 주려고?"
"아, 그…있어요."
김시현은 말을 얼버무리더니 곧바로 문밖으로 나갔고, 김현우는 그런 김시현을 보다 피식 웃곤 보따리에 들어있던 물건들을 털었다.
툭! 투타다닥! 탁!
순식간에 땅바닥에 떨어진 아이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티팩트들.
이것은 바로 김현우가 어제 죽여 버린 괴한들에게서 빼앗은 아티팩트들이었다.
김현우는 곧바로 아이템 중 어제 자신에게 돌격했던 남자가 무기로 사용했던 창을 집어 들었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로그.
------
베오르그의 아사창
등급: S+
보정: ?
스킬: 극가속 , 가속 ,
------
[정보권한으로 인해 숨겨진 사실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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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KER-F-173
등급: S+
보정: ?
-정보 권한-
-권한 없음-이 신창 베오르그를 카피한 -권한 없음-
------
"……."
김현우는 또 다른 무기를 집어 들었다.
FAKER-F-119
FAKER-F-151
FAKER-F-12
FAKER-F-199
김현우가 들어 올린 아티팩트들은 전부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미궁 아래에서 주워 온 아티팩트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묘한 느낌이 강했고, 김현우만이 볼 수 있는 정보 권한의 추가 정보로는 누군가가 카피한 아티팩트에 이상한 명칭까지 나온다.
"…누군가가 만든 아티팩트."
아티팩트를 만드는 게 가능한가?
김현우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들어 찾아봤으나, 그 어디를 찾아봐도 아티팩트 제작과 관련된 소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김현우는 자신의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상념들에 이리저리 방문해 이런저런 추론을 내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정리 없이 시작한 추론이라 그런지 생각이 순식간에 꼬여 버렸다.
"쯧."
이내 아티팩트를 보며 짧게 혀를 차던 김현우는 이내 머리를 비우고 다시 한번 생각을 집중했다.
시작은 자신을 죽이러 왔던 괴한.
실력은 김현우가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헌터'중에서는 꽤 상당한 편이었다.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에게는 고의성이 짙게 묻어 나왔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알았고, 자신을 죽이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듯 암습을 강행했다.
그렇다면 나오는 대답은 결국 두 가지.
'아레스 길드에 소속된 녀석들이거나 '용병'.'
애초에 김현우가 자기 멋대로 막 나간다고 해도 적어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딱히 아레스 길드 말고는 이 정도로 척을 진 이들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상황을 쭉 추론해 봤을 때 나오는 결론.
'범인은 아레스 길드.'
"이 새끼들이 진짜…계속 지랄 스위치를 누르네?"
김현우는 인상을 팍 썼다.
그렇게 추론을 끝내도 풀리지 않는 의문.
'그럼 이건 대체 뭐야?'
김현우는 아직까지 자신의 시야 앞에 둥둥 떠 있는 로그를 관찰했다.
FAKER.
거짓말쟁이, 사기꾼.
대충 무기를 카피한 거라니까 무슨 뜻에서 지어진 이름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흠.'
그렇게 김현우가 아티팩트의 로그를 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에이 씨발 모르겠다.'
김현우는 이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창을 다시 자루 안에다 집어넣었다.
'이거 굳이 파서 뭐하나?'
김현우에게 필요한 것은 '이 아티팩트가 대체 뭐냐' 가 아니라 '누가 나한테 괴한을 보냈나'였다.
애초에 김현우가 이 아티팩트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이 아티팩트에서 자신을 공격한 녀석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이었다.
'흑선우 이 새끼. 정의봉(正意棒)을 맞고도 정신을 못 차려?'
김현우는 자신의 방 한구석에 있는, 테이프로 칭칭 감아 놓은 뿅망치를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리곤, 이내 시선을 돌려 책상 위에 올려 둔 그것에 시선을 돌린 뒤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 새끼는 1호로는 안 되니까 2호로 존나 패준다."
툭-
김현우가 집어 든 것, 그것은 바로 어제 김현우를 살해하러 왔던 괴한들의 뚝배기를 손수 깨주었던 짱돌이었다.
김현우는 짱돌을 몇 번이고 던졌다 받으며 입가를 비틀어 올리고 있을 때,
"오빠, 언제 갈 거예요? 저희 준비 끝났어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김현우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등에 가죽 자루를 멨다.
***
"흑선우 어디 있어 이 개새끼들아!"
빡!
"끄아아아아악!"
아레스 길드 한국 지부의 꼭대기 층, 김현우는 자신을 막으려다가 새롭게 만든 정의봉(定意蜂) 2호를 맞고 저 멀리 날아간 헌터를 보지도 않고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히, 히익!"
"흑선우 어디 있냐니까?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아, 아닙니다! 진짜로 아니에요!"
마치 절대로 죽기는 싫다는 듯 슬쩍 무릎까지 꿇는 남자의 모습에 김현우는 문득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너……저번에 1호에 맞고 책장에 처박혔던 그놈이지?"
"예예. 그,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렇다.
그는 바로 몇 주 전, 김현우가 들고 온 뿅망치에 맞고 책장을 박살 내 버리고 기절한 척을 하다 김현우에게 걸렸던 그 남자였다.
그는 비굴하게 웃으며 김현우의 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거대한 짱돌, 일반인이라도 저걸 들고 사람 머리에 휘두르면 그대로 골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대한 짱돌에 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입을 열었다.
"그…… 저는 박삼찬이라고 합니다. 그, 아까 그 친구는 저번에 일하는 친구가 지금 입원 중이라 얼마 전에 뽑은 친구라 아직 모르는 게 좀 많습니다."
"다른 애들도 다 새로 뽑았냐? 올라가려고 하니까 다들 막아서던데?"
"아니- 그……."
"그건 됐고, 그냥 말이나 하라니까? 네 길드장 어디 있어? 지금 당장 좀 보고 싶은데."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짱돌을 툭툭 던졌다가 받자 박삼찬은 흡,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삼키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 흑선우 지부장님은 지금 출타 중이시라……."
"누가 그거 몰라? 지금 길드장방에 없는 것 보면 딱 출타 중인 건 알아. 내가 눈 삔 것 같냐?"
"아, 아니, 그런 의도로 말한 건."
"그러니까, 걔 지금 어디 있냐니까?"
"그, 그건 저도…… 히이익! 말하겠습니다, 말할게요!"
김현우가 말없이 짱돌을 들어 올리자 소름이 끼치는 듯 비명을 지른 그.
김현우는 짱돌을 들어 올린 채로 말했다.
"말해."
"그런데…저도 대략적인 위치밖에는 모릅니다."
"뭐?"
"저, 정말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 정보는 다른 사람들도 전부 모르고 있을 겁니다! 진짜! 진짜로요! 흑선우 지부장님은 진짜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4일째 출타 중이십니다!"
"그럼 너는 어떻게 아는데?"
"그, 전 저번에 좀 덜 맞아서 입원을 안 했……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일하는 곳은 이 꼭대기 층 지부장실 앞이라 가끔가다 지부장실 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슬슬 눈치를 보며 입을 여는 남자를 보며 김현우는 잠깐 생각했다.
'이거, 100% 이 새끼다.'
사실 처음 올 때만 해도 설마 이 미친 새끼가 그렇게 당해 놓고 아직도 포기를 안 하는 머저리인가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정말 자신에게 괴한을 보낸 원인은 흑선우인 것 같았다.
안 그러면 왜 갑자기 행선지를 알리지도 않고 어디로 사라졌겠는가?
김현우는 계속해서 물었다.
"그래서, 걔는 어디 있는 데?"
"저, 저도 정확히 모르지만…중국! 중국에 간다고 하셨습니다!"
"…뭐? 중국?"
"예! 주, 중국이요! 그, 그러니까."
박삼찬은 무엇인가를 최대한 떠올린다는 듯 고민하다가 이내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그…아아 맞다! 베이징! 베이징에 간다고 했습니다! 패도 길드와 만나러요!"
"…뭐?"
김현우의 얼굴이 굳었다.
# 65
065. 흑역사를 퍼뜨리지 마라(1)김현우가 다시 한번 아레스 길드를 박살 낸 그 날 밤. 김시현과 함께 TV를 보고 있던 김현우는 문득 입을 열었다.
"시현아."
"네?"
"너, 패도 길드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거 있냐?"
김현우의 물음에 김시현은 슬쩍 고개를 갸웃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뭐. 그냥 대충대충 알고 있는 건 있죠. 몇 가지 찌라시랑."
"몇 가지 찌라시?"
"네, 근데 그건 왜요?"
"잠깐 궁금한 게 생겨서 물어보는 거지."
김현우의 대답에 김시현은 시선을 돌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뭐, 정말 알고 있는 거라고 해봤자 그냥 그런 것들뿐인데요?"
"네가 말하는 그런 것들이 뭔데?"
"그냥 말 그대로 그런 거죠. 뭐, 예를 들면 패도 길드가 이번에 중국의 던전 지분을 거의 대부분 먹어 치워서 완전 독점 체재로 변했잖아요?"
"야, 그거 저번에 들었을 때는 한 50% 정도라고 안 그랬냐?"
김현우가 되묻자 김시현은 답했다.
"그랬는데 최근에 완전히 먹어치웠다는데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야?"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죠. 다만 중국 특성상 합법적 무력으로 던전 독점권을 빼앗는 게 가능해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음, 예를 들면……한국 같은 경우는 던전을 독점으로 운용하려면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해요."
"……그래? 내가 양도받을 때는 그냥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그냥 형이 던전을 양도받는 그 상황 자체가 특이해서 그런 거고, 원래는 여러 가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어요. 게다가 저희 한국은…개판이죠."
"왜?"
"계속 법이 바뀌거든요. 이렇게 던전 양도 법을 제정해 놓으면 6개월 뒤에 또 바꾸고, 그 뒤에 또 바꾸고- 개새끼들 진짜."
김시현은 슬쩍 김현우를 보며 말을 이어나가다가 성질을 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한국에서는 좀 무력으로 던전을 차지해도 여러 가지 법적 절차가 많아서 일방적으로 탈취하지는 못하는데 중국은 아니거든요."
"…중국은 어떤데?"
"그냥 힘으로 찍어 누르고 뺏죠."
"…응? 진짜 그렇게 놔둔다고? 아니, 그렇게 놔두면 실제로 편하기는 하겠다만."
한마디로 중국의 헌터 업계는 약육강식의 세계랑 똑같다는 말이었다.
허나 곧 김현우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야, 그런데 정말 그런다고? 그냥 힘으로?"
"안 믿기죠? 사실 중국이 처음부터 법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던 건 아니에요. 아마 그쪽도 저희처럼 던전 때문에 골치 좀 썩으면서 법 개정 여러 번 했던 거로 알고 있는데."
아.
"생각해 보면 아주 옛날에, 처음 던전 나왔을 때 모든 던전은 중국 나라 소유였을걸요?"
"……근데 왜 지금 그렇게 바뀌었는데?"
"그게……대충 4년 전인가, 3년 전인가? 갑자기 그렇게 법 개정이 됐대요."
"갑자기?"
"네."
아, 그러고 보니까 이 이야기 하려고 독점 던전 이야기 꺼낸 거지?
김시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이게 그 찌라시 중 하나인데 중국에서 그 법을 개정한 사람이 바로 패도 길드장이라는 소문이 있기도 해요."
"왜 갑자기?"
"그도 그럴 것이 너무 공교롭게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아요? 4년 전에 그렇게 법 개정이 되고, 그 뒤로 곧바로 패도 길드가 나와서 마구잡이로 세력을 확장했거든요."
"그럼 그 소리는 패도 길드장이 중국에서 엄청난 거물이라는 소리네?"
"뭐,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되네요…… 뭐 솔직히 찌라시다 보니까 확실히 믿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김시현의 말을 들으며 김현우는 순간 과거로 기억을 돌렸다.
기억을 돌린 시점은 바로 자신이 탑 안에서 무술을 수련하며 처음 그녀를 구했던 그때, '…제자랑 내가 '밖'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나?'
꽤 오래전의 기억이기에 김현우는 잠시 골머리를 앓았지만, 곧 그는 기억 저편에서 자신의 제자와 나눴던 짤막한 대화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첫 만남.
그때의 그녀는 소심한 듯 몸은 웅크리면서도 상당히 반항적인 눈빛으로, 가면을 쓰고 있는 나를 미친놈 취급하며 입을 나불거렸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나를 이렇게 막…….'
빡!
'꺄아악!'
'조용히 하거라 제자야. 너는 오늘부터 나의 제자가 될 것이다. 빨리 내게 구배지례를 올리거라.'
'무, 무슨 소리야! 나는 빨리 그 녀석들과 같이 올라가야만 살아남을 수…….'
빡!
'시끄럽구나.'
억지로 제자에게 구배지례를 시켰을 때,
'왜 절을 한 번밖에 하지 않지? 반항하는 것이냐?'
'아, 아니 구배지례를 하라고 하시길래….'
'구배지례(九拜之禮) 모르느냐?'
'아니, 그,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구배지례는 아홉 번 절하는 게 아니라…….'
빠악!
'끼야악!'
'어디서 스승이 말하는데 말대답이야! 썩 하거라!'
제자에게 한창 무술을 빙자한 무술 샌드백을 시켰을 때,
'스, 스승님! 그만!'
'어허, 너는 너무 심지가 약하고 몸도 약하구나, 계속 그렇게 피하기만 하면 절대로 무(武)에 도달할 수 없다!'
빡!
'끼야아악! 사…… 살려주세요 스승님!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어허, 누가 죽인다고 했느냐? 너는 내 자랑스럽고 소중한 제자다. 너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다.'
'아, 아앗. 스승님……!!'
'그러니 이 악 물거라.'
'!?'
김현우가 슬슬 중2병 사태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으나, 아직 전부 빠져나가지 못했을 때.
'…가거라.'
'스승님…!'
'지금 당장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모두 가르쳤다. 가거라.'
'그치만 저는 아직 스승님에게 배우지 못한 것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변해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소심해 보일 뿐이었던 그녀의 눈에는 자신감이 들어차 있었고, 소심하게 쭈그려 있던 몸은 쭉 펴져 있었다.
그리고 반항적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빛은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었다.
'너는 더는 내게 받을 가르침이 없다.'
기억 속의 나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너는 더 이상 예전에 소심한 네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핍박받고, 원하지 않는 일을 강제로 했던 네가 아니다.'
그렇지?
내 물음에, 제자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가거라, 그리고 밖에서도 지금 내가 해준 말을 잊지 말거라.'
그 무엇도 너의 위에 있을 수는 없다.
네 위에 있는 것은 오직 한 명, 나 천(天)뿐이니.
그 이외에 모든 것들은 네 아래에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엿 같은 헛소리.
근데 그걸 들으며 제자는 또 눈물을 그렁그렁한 채로 내게 뭔가를 말했다.
분명 그때 당시의 내가 듣기에는 굉장히 기특한 소리였는데, 이상하게 그 끝부분만 노이즈가 낀 것처럼 기억이 불명확했다.
뭐, 그냥 귀찮아서 대충 들었던 것 같지만.
"이런 씨부레…."
분명 제자와 다른 이야기를 했던 기억도 분명히 있었는데, 이상하게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형 또 왜 그래요?"
한참이나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던 김현우가 욕을 내뱉자 묻는 김시현.
그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뭐, 그 이외에는 또 있어?"
"…음, 그 이외에는…좀 특이한 길드라고 소문이 퍼져 있긴 해요."
"뭐? 특이한 길드?"
"네."
"뭐가 특이한데?"
"좀 뭐라고 해야 하나…일반적인 길드 느낌이 아니라 무슨 왕국 느낌이라고 하는데……저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애초에 저도 길드장이지만 해외 길드 사정 알아볼 정도로 느긋한 게 아니라서요.
"…그래?"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갈까 말까.'
뭐, 보나 마나 기다리면 슬그머니 돌아올 것이다.
녀석은 아레스길드의 한국 지부장이니까.
그래도 그냥 이렇게 기다리자니 김현우의 급한 성격이 용납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게 딱 봐도 흑선우의 행선지를 전부 알고 있는 마당에 이렇게 기다리는 건 김현우의 성격상 안 맞으니까.
한동안 침음성을 낸 김현우는 이내 곧 결정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가야겠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어디를 가게요?"
"중국."
"…중국이요?"
"정확히는 중국 베이징."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을 하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헉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 미쳤어요?"
"……?"
"왜 갑자기 아무 상관 없는 패도 길드를 건드리러 가요!?"
"……야, 내가 무슨 패도 길드를 왜 건드리러 가?"
"아니, 지금 말하는 거 그거 아니었어요?"
"그게 패도 길드에 가기는 갈 건데……건드리러 가는 건 아니야."
"개소리하지 마요!"
"뭐? 개소리?"
"저번에도 무슨
'건드리러 가진 않아!'
하면서 뿅망치로 아레스 길드원들 입원시킨 사람이 누구인지 잊었어요?"
김시현의 반박에 김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팩트였으니까.
김현우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잠깐 볼 일이 있어서 가는 거니까."
'굳이 제자와 만나고 싶진 않지만.'
자신을 공격했던 흑선우를 가만히 놔두는 짓은 더 하기 싫었다.
바로 조져 버려야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일 바로 중국 베이징으로 떠날 예정을 잡았다.
***
중국의 베이징, 패도 길드의 궁전 내.
그녀, 미령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넓은 침실에서 조용히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희미한 빛.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곤 조금 전 꿈속에서 보았던 스승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햇수로는 4년,
일수로는 1500일가량.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미령의 머릿속에서 탑 안에 있었던 일들은 그 하나하나가 생생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탑은 '전환점'이었으니까.
그녀에게 있어서 탑은 처음으로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공간이었으며,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미천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령이 그 탑 안에 기억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 탑 안에서 만났던 스승 때문이었다.
그저 중국 정·재계에 있는 아비의 말대로, 돈을 써가며 인형 같은 삶을 살고 있던 그녀에게 진짜 '삶'을 알려준 자신의 스승.
자신이 한 번도 제대로 받아 본 적 없는 '정'을 느끼게 해준 스승.
그리고 자신을 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던 그 빌어먹을 아비와는 다르게, 오롯이 자신이 세상에 설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주었고, 세상으로 내보낸 스승.
"스승님."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대답이 올 것만 같았으나,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그 공간에는 그녀의 소리만이 메아리칠 뿐이었다.
그녀는 잠시 느껴지는 공허감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곧 미소를 지었다.
'이제 금방이다.'
이제 금방.
그녀는 불과 몇 시간 전 그녀가 임명한 부길드장에게 들었던 보고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위연 길드의 잔당은 거의 모두 처리하는 데 성공했고, 더 이상 중국에 패도 길드에 대항할 만한 세력은 남아 있지 않다는 보고.
그것은 곧 고대하고 고대하던 스승님을 모시러 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미령은 그 상황에서 조용히 미소를 지은 채 중얼거렸다.
"이제 조금 남았습니다, 스승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미령은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에서 중얼거렸다.
# 66
066. 흑역사를 퍼뜨리지 마라(2)
"아니, 이거 실화야?"
"이거 큰일 났는데."
중국 베이징의 호텔.
그곳에서 아레스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두 명의 기사단, 5번과 8번은 그들의 보안 스마트폰으로 온 문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 뒤졌다고? 전부?"
"보고서 내용이 바뀐 게 아니라면 전부 죽은 게 맞겠지."
5번의 중얼거림에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8번은 뜨악한 표정으로 오른쪽 귀에 있던 피어스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근데 지금 그 녀석을 우리보고 막으라고? 실화야?"
8번이 호들갑을 떨자 5번은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곤 타박했다.
"지랄하지 마."
"뭔 지랄을 하지 마? 지금 이거 안 보여? 임무 메시지?"
8번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스마트폰에 온 메시지를 5번에게 보여 주었다.
[기사단 4번 7번 9번 10번이 김현우를 처리하는 데 실패, 이에 8번과 5번은 김현우를 막는 임무를 부여함.]
그는 어깨를 으쓱하곤 말했다.
"그건 안 봐도 알아. 지금 나도 받은 게 그 메시지니까."
"근데 왜 이렇게 태평해!?"
"태평하기는 뭐가 태평해? 나도 쫄리기는 마찬가지지, 하지만……."
5번은 더벅머리처럼 자라 있는 자신의 흑발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야."
"……뭐?"
8번이 이상 하다는 듯 되묻자. 5번은 입을 열었다.
"봐, 8번, 우리의 임무는 뭐지?"
"우리의 임무? 아니 씨발 아까부터 뭔 소리 하는 거야? 우리 임무 지금 메시지에 나와 있잖……."
"이 멍청한 새끼야 그거 말고 우리가 지금 중국에 남아 있는 이유!"
5번이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8번은 가만히 생각하다 중얼거렸다.
"……흑선우 처리?"
"그래, 맞아 지금 우리는 흑선우를 처리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거다 이 말씀이야. 그리고 알다시피 우리 '기사단'은 제일 먼저 맡은 임무를 우선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흑선우'를 죽이기 전까지 우리는 베이징에 있어도 된다 이 말이지."
김현우가 베이징에 온 게 아니라면 딱히 우리가 문책당할 일도 없고 말이야.
5번에 말에 8번은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오! 그런 방법이!"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안전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이 말이지. 물론 왜 기다리고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흑선우'를 아직 처리하지 못했다고 핑계되면 되고."
"좋은데?"
8번은 좋다는 듯 화색을 띠며 긍정했으나 이내 곧 이상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왜?"
"왜 우리한테 김현우를 막으라고 연락이 왔지? 내 기억에 길드장님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은데 말이야."
8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직속 상관인 아레스 길드장을 떠올렸다, 빈틈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모든 것을 계산하고 실질적으로는 그 뒤에 더 많은 힘을 숨기고 있는 남자.
그는 사리 분별이 확실한 편이었다.
8번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이상함을 표현하자 5번은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확실히, 길드장이 명령을 내렸다기에는 좀 이상하긴 하지, 애초에 처음 김현우를 잡으러 가는 것도 애초에 우리보다는 1~3번을 보내는 게 더 맞지 않았을까?"
"그것도 그렇지."
아레스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기사단'은 총 1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1번부터 10번까지.
그리고 각 맴버의 강함은 넘버링 표기로 할 수 있다.
기사단 넘버링 중 1번이 제일 강하고, 10번은 기사단 중에서 제일 전력이 떨어진다.
'뭐 그렇다고 해서 기사단에 입단한 맴버가 약한 건 아니지만.'
5번은 그렇게 생각하며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8번을 돌아봤다.
'…….'
그만해도 '머더러 헌터'가 되기 전에는'복검마'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던 상위권 랭커였다.
게다가 아레스 길드의 길드장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ST+ 아티팩트를 낀 지금은 이전보다도 확실히 강해져 있었다.
절대로 약한 게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사단에 포함된 다른 이들도 전부 마찬가지였다.
전부 다 입단했을 때보다 아티팩트로 인해 상당한 전력 강화가 이루어져 있는 상황.
'그런데, 4명의 기사단을 전부 죽였다고? 혼자서?'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사단 4명을 혼자 잡았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괴물인가…….'
괴물.
그가 '재앙'과 싸우는 영상은 봤다.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강한 실력자.
허나, 그렇다고 해도 그건 말 그대로 '재앙'을 상대했던 것이고, 실제로 '재앙'과 '헌터'를 상대하는 것은 달랐다.
명백히 '전투'에서 경험치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분명 그는 탑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딱히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닐 텐데…….'
아레스 길드의 뒤처리를 담당하는 기사단을 홀로 4명이나 죽였다는 것은, 그가 어떤 의미에서 굉장한 괴물이라는 소리와 일맥상통했다.
'……아무튼, 부딪히지 않는 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길이라는 건 확실히 깨달았다.'
5번이 그렇게 생각하며 묘한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쯤.
쿠궁-
땅이 울렸다.
"?"
"뭐야, 지진이야?"
순간적으로 주변이 흔들리는 느낌에 8번이 이상함을 표할 때쯤-툭- 꽝!
"꺽-?"
분명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8번의 하늘을 날아 벽에 처박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5번의 표정이 다급하게 물들고, 그는 곧바로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자신의 애병인 쌍검을 빼 들어 앞에 나타난 괴인에게 휘둘렀으나-쿵! 쿠구구구궁
"……!!"
얼굴을 기묘한 가면으로 가리고 있던 남자는 5번의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냈다.
호텔 벽에 처박혀 얄팍한 신음을 흘리는 8번과, 괴인에게 검을 잡혀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된 5번.
그리고 곧 괴인에게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너희들이군."
"뭐?"
"너희들이 우천명을 죽인 놈들이야. 맞지?"
"……네 녀석은 누구냐!"
5번은 그렇게 말하며 남은 한 자루의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촤자자작!
"!!!"
그 한순간 자신의 목에 들어온 수십 개의 병장기를 보며 휘두르려던 칼날을 멈췄다.
어느 순간 나타난 그들.
얼굴에는 기묘한 가면을 쓰고, 제각각의 병장기로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5번은 마른 침을 삼켰고.
그, 패도 길드의 부길드장인 '천영'은 가면을 쓴 채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이 지금 질문을 할 처지가 된다고 생각하나? 너희들은 답만 하면 된다. 너희가 우천명을 죽였나?"
천영의 목소리에 5번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아무래도 맞나 보군."
그는 곧바로 5번의 얼굴을 보더니 그렇게 납득했고, 곧-우득!
"끄아아아악! 대…대체 갑자기 왜……!"
5번의 머리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원망하지는 마라. 길드장님이 손수 박살 내버리겠다고 하신 우천명을 너희들이 죽여 버렸으니."
나로서는 너희들이라도 데려갈 수밖에 없으니까-천영의 말과 함께 5번의 표정이 공포에 물들었다.
***
다음 날.
아랑 길드 지하 2층의 훈련실.
"후……."
"아니, 오빠. 왜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어요?"
"그럴 일이 있다…그럴 일이 있어."
김현우의 말에 이서연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아니, 그렇게 중국 가기가 싫어요? 그럼 안 가면 되죠."
"허허, 안 갈 수 있다면 진작 안 갔겠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마법진 앞에 섰다.
'후…….'
솔직히 어제 잘 때만 해도,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도 수십 번을 생각했다.
내가 중국에 가는 게 진짜 맞을까?
'맞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나오는 결론은 '맞다'였다.
김현우는 절대 참을 수 없었다.
딱 봐도 자신을 엿 먹이고 중국으로 잠적해서 패도 길드와 접선하러 가다니.
아마 그곳에서 자신을 엿 먹일 또 다른 계획을 짜고 있는 것도 분명했고, 무엇보다 김현우는 이번에 봐 줄 생각이 없었다.
'죽이지는 않겠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잔혹하게 박살을 내줄 생각이었다.
그러려고 정의봉 1호랑 2호도 챙겼다.
허나 그런 김현우의 생각과는 별개로 흑선우를 조지기 위해 패도 길드를 가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또 다른 생각이 들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좆같다.'
그래, 좆같다.
그게 바로 김현우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는 단어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전부 흑역사가 있었다.
김현우의 경우에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흑역사고 뭐고 없이 열심히 생활 전선에서 뛰어노느라 그런 낯부끄러운 흑역사는 없었으나-
"…"
-정말 유감스럽게도 그의 흑역사는 탑에서 생겼다.
'은거 기인' 놀이를 하면서 생겨 버렸다.
물론 탑 안에서 누구도 모르고 혼자 그 지랄을 했으면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제자야…도대체 왜….'
자신의 제자 중 하나가 그 되지도 않는 은거 기인의 사상에 물들어 그 사상을 중국 절반…아니, 이제 중국 전체에 물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어제, 사전조사를 위해 패도 길드에 대해 검색해 봤을 때, 김현우는 몇 번이고 이불킥을 했다.
억지로 외면해서 보이지 않았던 패도길드의 관련 뉴스들은 정말…….
"……."
김현우는 생각을 멈췄다.
더 이상 생각하면 발아래에 있는 마법진을 빠그라뜨릴 것 같기에 참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다잡았다.
'딱 하나만 생각하자.'
패도 길드에 가서, 흑선우만 조지고 바로 귀환한다.
그래, 어차피 김현우가 해야 할 일은 그것뿐이다. 물론 패도길드와 만나기는 하겠지만, 그건 잘 넘기고, 자신은 흑선우만 조지면 된다.
김현우는 자세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다짐한 뒤, 입을 열었다.
"아냐."
"네."
"마법진 가동해."
"네 알았어요. 목적지는 베이징인가요?"
"맞아 베이징……아니, 아니다. 베이징 말고 그냥 패도 길드 본사 앞으로."
"패도 길드 본사 앞이요?"
"그래."
어차피 한번 봐야 하는데 어물쩍거릴 필요는 없지.
김현우의 말과 동시에 가동하기 시작하는 마법진.
이서연은 걱정하며 말했다.
"근데 오빠."
"왜?"
"그 저번에 마법진으로 유럽 갈 때는 급한 상황이라 어떻게 넘어간 것 같기는 한데."
"근데?"
"이렇게 마법진으로 넘어가는 거 걸리지 않을까요?"
"걸린다고?"
"네, 이거 굳이 말하면……."
해외 불법체류 아니에요?
이서연이 슬쩍 걱정하는 듯한 느낌으로 말하자 순간 움찔한 김현우였으나 이내 손을 탈탈 털며 말했다.
"뭐 어때."
"네?"
"어차피 관광 가는 것도 아니고 흑선우만 조지고 올 거라니까?"
"아니, 그게 문제가……."
이서연은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 몇 번이고 입을 오물거렸지만 이내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김현우는 피식 웃었고, 아냐는 입을 열었다.
"이제 완전 가동해요!"
그와 함께, 김현우의 모습이 아랑 길드에서 사라졌다.
그 뒤-
베이징, 외각 '패도 길드'의 궁전 앞.
김현우는 곧바로 시야가 뒤바뀜에 따라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점멸했던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렸고, 곧 정상적으로 돌아온 시야를 통해 주변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김현우는 자신의 앞 무척이나 거대하게 세워진 궁전과 동시에, 그 옆에 엄청나게 크게 조각 되어 있는 그것-
"-씨발"
김현우가 탑에 있을 때 쓰고 있었던 그 가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 67
067. 오랜만이다, 제자야(1)
아랑 길드 지하 3층, 이서연은 마법진 위에서 사라져버린 김현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번에는 무슨 사고를 치려고…….'
물론 김현우야 자기가 사고를 치더라도 지금까지 아주 잘 알아서 해결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이서연은 이번에는 그가 감당하지 못할 사고를 칠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헤엑…헤엑 죽어요옷."
그렇게 이서연이 불안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갸웃 거릴 때, 들린 목소리에 그녀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조금 전까지 마법진을 운용하던 아냐를 보았다.
그녀는 퀭한 눈빛으로 마법진 바닥에 쓰러져 죽으려 하고 있었다.
"야근… 싫어…."
그렇다.
그녀는 어젯밤 갑작스레 베이징에 간다는 김현우의 말에 급하게 마법진을 준비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마법진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처참한 몰골.
이서연은 그런 그녀를 보고 한숨을 내쉬더니 아냐에게 다가갔다.
***
김현우는 말없이 거대한 궁전을 바라봤다.
정말로 옛날 사극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던 거대한 중국의 황궁을 떠오르게 만드는 웅장한 크기, 김현우의 앞에는 그의 키에 3배가 넘을 정도로 거대한 문이 가로막고 있고, 그 앞에는 검은색의 무복을 입은 이들이 갑작스레 나타난 김현우를 보며 당황해하고 있었다.
허나 그들이 당황하든 말든 김현우는 자신의 눈에 들어오고 있는 풍경을 보며 끝없는 탄식을 쏟아낼 뿐이었다.
김현우의 시야를 전부 가려 버릴 정도로 높은 문 너머에서도 가면은 보였다.
황금칠을 해놓은 것인지 황금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기묘한 가면.
그리고-
"으악 이런 씨발!"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문을 바라보다 높디높은 문 위에 써져 있는 글자를 바라봤다.
분명 중국어일 텐데도 불구하고 그의 손에 끼고 있는 반지는 저 글자를 그대로 번역했다.
'네 위에 있는 건 오직 천(天)뿐이다.'
"이런 미친."
미친!!!!
미친 씨발!!!!!!!!!!!
"누…누구냐!"
김현우가 혼자 발광을 하고 있자 검은 무복을 입고 있는 이들은 창을 들이댔다.
그러나, 김현우의 눈에는 여전히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저 문 위에 있는 증오스러운 그의 흑역사.
'네 위에 있는 건 오직 천(天)뿐이다.'
김현우는 끄으으윽!!! 거리는 소리를 내며 혼자 발광을 하더니, 이내 몸을 진정시키며 충혈된 눈으로 문구를 바라봤다.
'정했다.'
원래 처음에는 딱히 일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원래는 그냥 간단하게 와서 인사 정도만 한 뒤, 흑선우를 뒤질 때까지 패버리고 끝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건, 이대로 둬서는 안 되었다.
"움직임을 멈춰라! 도대체 네 녀석은 누구냐!"
검은 무복을 입은 보초병의 목소리에 따라, 순식간에 주변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처음에는 고작 두 명뿐이었던 호위병들이 순식간의 수십으로 변해 김현우의 주변을 감싼다.
물론, 아무리 모여봤자 김현우의 눈은 문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신원을 밝히라고 말했……."
쿵!
남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김현우는 그대로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날아 거대한 문의 문패 위까지 날아오른 김현우.
체공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김현우는 그의 목표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이 빌어먹을 문패를 전부 깨버리고, 저 동상으로 세워 놓은 금색 가면까지 모조리 부숴놓은 뒤에, 흑선우를 죽여 버릴 거다.'
어쩐지 '죽지 않을 정도'에서 '죽여 버린다'로 바뀌었으나, 김현우에게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흑운(黑雲)-"
김현우의 주변으로 검붉은 색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 마력은 곧 주변의 시야를 가리고, 보초병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김현우는 이미 행동하기 시작했다.
'-보(步)'
우지지지직! 꽈가가강!!
김현우의 발이 순식간에 내리쳐지며 패도 길드의 대문을 부숴 버렸다.
붉게 칠해진 문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나가고 그가 증오스럽게 생각하던 문패는 애초에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졌다.
"으, 으아아악"
"무, 무슨! 이게 무슨 일이야!"
"가면 무사…가면 무사를 불러!"
패도 길드의 실질적인 상위 전투원들인 가면 무사를 호출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나팔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김현우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가면 무사들
"이 새끼들이…."
그리고, 그것은 김현우의 표정을 더더욱 썩게 만들었다.
'저거 내 가면이잖아…!'
그들이 쓰고 있는 나무 가면.
물론 상당 부분 어레인지 되었다.
김현우가 간지를 위에 넣은 위의 왕관과도 같은 부분은 사라진 상태였고, 그 이외에도 김현우가 제대로 처리 못 했던 부분은 사라지거나 어레인지되어 있었으나 그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자신이 탑에 있을 때,
정확히는 제자를 키울 때 쓰고 있던 가면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에게 무기를 들이대며 자세를 잡았다.
"이런 미친?"
그리고 김현우는 가면 무사들이 잡고있는 자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지었다.
"저거…."
그들이 취하고 있는 자세.
그것은 김현우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자세였으니까.
실용성이라고는 제대로 있는지 모르는 자세.
양발을 적당히 벌리고 주로 쓰는 손을 어깨 위로 올려 뻗은 뒤, 주먹은 뒤로 말아 쥐고 있는 형태의 기수식.
그것은 바로 탑 안에 있던 김현우가 그저 영화나 웹소설에 있던 여러 가지 기수식의 설명을 떠올려 만든 자세였다.
이름도 존나게 쪽팔린 '패왕기수식'
그들은 분명 제각각의 무기를 들고 있으면서도 김현우의 패왕기수식을 그대로 취하고 있었다.
김현우는 이내 그런 가면 무사들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고, 그럴 때마다 가면무사의 수는 늘어났다.
초가 지날 때마다 주변에서 도착한 가면 무사들은 김현우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고, 뒤늦게 달려온 보초병들까지 김현우를 감싸며 그는 마치 일방적으로 포위된 형태가 되었다.
1대 다수.
한 손바닥으로는 열 손바닥을 못 막는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그의 주변으로 몰려든, 딱 봐도 일백은 가볍게 넘어 보이는 무리들을 보며 김현우는 같잖지도 않다는 듯 웃음을 지었고.
그 순간-
"합!"
한 가면 무사의 공격을 시작으로 그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공격을 피하며 김현우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크아압!"
김현우의 오른쪽 어깨를 노리고 들어온 공격은 '패왕경'.
그의 왼쪽 허벅다리를 노리고 들어온 공경은 '패령각'
그의 뒤에서 심장을 노리는 공격은 '패귀 수도격'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헌터들은, 하나같이 김현우의 공격을 그대로 카피해서 쓰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카피가 아니다.
그들은 전부 제각각의 무기로 김현우의 기술을 쓰고 있으니까.
일종의 어레인지.
하지만, 김현우는 가면 무사들을 공격을 보며 여전히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김현우의 얼굴을 굳어졌다.
"지금 이걸, 기술이라고 쓰고 있는 거야?"
김현우의 말에 가면 무사들이 더 열이 뻗친 듯 마구잡이로 기술을 사용했으나, 김현우는 기가차지도 않는다는 듯 그 기술들을 모조리 피해내며 생각했다.
'이것 좀 열 받는데?'
열 받는다.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처음에는 그저 쪽 팔리기만 했다.
자신이 탑에서 만들어 놓은 흑역사들이 그냥 화자 되는 것뿐만 아니라 산채로 꿈틀꿈틀 기어 다니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김현우의 머릿속에는 쪽팔리다는 감정 대신 다른 감정이 솟아올랐다.
분노.
그래, 어찌 보면 그것은 분노였다.
'안 그래도 쪽팔린 흑역사.'
그런데 그 흑역사를, 여기에 있는 놈들은 더더욱 쓰레기처럼 만들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탑에서 만든 무술들은 저렇게 약한 것이 아니었다.
컨셉 플레이는 흑역사였지만, 적어도 그가 만든 무술들은 진짜였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분노를 느꼈다.
자신의 무술이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애들 놀음으로 변하고 있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었다.
무엇보다 제자한테 빡쳤다.
'내 무술을 이런 병신 같은 무술로 바꿔서 가르쳤다고?'
알려주는 것도 빡쳤는데, 흑역사를 흑역사보다 더한 무언가로 만들어놓은 제자에게 김현우는 살의를 느끼며 몸을 쭉 뒤로 뺐다.
순식간에 가면 무사들을 피해 저 뒤로 점프한 김현우.
이제 상황은 포위된 상황이 아닌, 김현우와 패도 길드원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그 상황에서 김현우는 자세를 잡았다.
"애들아, 너희들이 쓰는 무공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야…."
김현우의 자세는 그들과 똑같았다.
양발은 앞뒤로 적절하게 벌려지고, 그의 왼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올려 쭉 뻗었다.
그리고 허리춤으로 가 있는 오른손.
"너희들이 쓰는 무술은 바로……."
김현우가 움직인다.
짧은 순간의 움직임.
"!?"
김현우는 눈을 깜빡하기도 전, 그 짧은 시간에 그의 앞에 있던 가면무사에게 도달했다.
가면 속에 가려져 있던 남자의 눈이 더 없이 커지고,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이렇게 쓰는 거다."
그와 함께 쭉 펴져 있던 김현우의 왼손이 그의 심장을 가볍게 쳤다.
그리고-
'패왕-'
김현우의 앞에 잔뜩 모여 있던 가면 무사들과 보초병들은-
'배격권-'
김현우의 무술이 보인 그 순간,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말도 안 되는 풍압에,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이 모여 있는 한 가운데에 거대한 공기층이 생긴 것처럼 하늘로 튀어 오르는 가면무사들과 보초병들.
콰직! 쿵! 콰득!
"끄아아아악!"
하늘로 날아올랐던 그들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며 섬뜩한 소리를 냈으나 김현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힘을 조절한 주먹, 게다가 고작 하늘로 떠올랐다 떨어진다고 죽는 '헌터'는 없을 테니까.
김현우의 앞에는 순식간에 쓰러진 패도 길드원으로 가득해졌다.
그리고-
"스승……님?"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김현우의 뒤쪽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현우는 그 목소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탑 안에 있을 때, 유일하게 제일 많이 들었었던 목소리 중 하나.
분명 탑 안에서 들었을 때와는 다르게 조금 성숙해진 느낌이 들었지만, 김현우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김현우가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열려 있는 거대한 본전의 문에는 떨리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미령이 서 있었다.
이제는 중국 전체를 손아귀에 집어넣고 있는 패도 길드의 우두머리이자.
S등급 세계랭킹 5위, 패룡(敗龍) 미령.
그녀는 쓰러져 있는 자신들의 부하 가운데에 오롯하게 서 있는 김현우를 보며 두 눈을 덜덜 떨며 입가를 몇 번이고 여닫기를 반복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미령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고, 눈앞에 있는 김현우의 모습에 그녀는 어지러움을 느끼면서도 생각했다.
'스승님이 맞다.'
미령의 기억 속. 자신이 스승으로 모신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등에 새긴 그 가면을 벗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김현우가 조금 전에 보여주었던 그 무(武).
김현우가 보여주었던 기술.
김현우가 보여주었던 자세.
그 이외의 미령의 머릿속에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자신을 오연히 내려다보는 저 눈빛.
그것만으로도 미령은 깨달았다.
이미 '김현우'가 자신의 스승인 것을 깨닫고 있었음에도 또 한번 확신했다.
저 앞에 오롯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자신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스승님이라는 것을.
두근두근두근두근-
"스승님이…맞으십니까?"
하지만 스승님이 맞다고 확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령의 입에서는 의문문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미령의 자그마한 투정.
자신의 확신을, '진실'로 만들어 달라는 미령의 자그마한 투정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굳게 닫혀있던 김현우의 입가가 열렸다.
"…오랜만이구나."
-제자야.
"……!!"
김현우의 말에 미령의 두 눈가가 크게 떠졌다.
그 눈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은 환희.
김현우의 입이 열림과 함께 미령의 마음 한구석에서 4년이란 기간 동안 멈춰있던 그 시간이, 비로소 딸깍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오랜 시간, 그녀는 스승에게 한 맹세를 기억하고 있었고, 이 땅에 스승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그 무엇이든 했다.
길드를 만들었다.
법을 바꾸었다.
사람을 바꾸었다.
"스승님."
던전을 빼앗았다.
정치가들의 자리를 빼앗았다.
헌터들의 터전을 빼앗았다.
오롯이 이 중국의 한가운데에, 스승에게 걸맞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그녀는 움직였다.
그러던 중 얻은 패룡이라는 이명.
그녀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S등급 세계랭킹 5위.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었다.
압도적으로 강해진 패도 길드.
의미가 없었다.
그녀가 이곳에 오롯이 서기 전까지 얻은 모든 것들은 그저 스승님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수단'들일 뿐이었으며, 그 무엇도 그녀에게 '목적'이나 '결과'가 되지 못했다.
그녀에게 '목적'이나 '결과'는 오롯이 자신의 스승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툭.
"불초 제자. 오랜 시간 동안 스승님께서 다시 오시길 기다렸습니다."
그녀, 미령은 자신의 스승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단지 지금의 이 순간에.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이 순간에, 소름끼칠 정도의 환희를 느끼며-
"1532일 하고도 2시간, 그리고 21분 하고도 30초."
거침없이 무릎 꿇고 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부정의 여지 없는 완벽한 오체투지의 자세.
귓가로 스미는 그의 혀차는 소리를 들으며.
고작 4년 만에 중국 전체를 먹어치운 패도 길드의 길드장이자-
"드디어 스승님께-"
S등급 세계랭킹 5위,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패룡(敗龍)은-
"그래."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신의 스승에게 절을 올렸다.
# 68
068. 오랜만이다, 제자야(2)
"……그래서."
"예. 스승님."
"이건?"
"스승님을 위한 옥좌입니다."
패도 길드의 거대한 궁전 내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몇백의 사람이 들어차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은 이 거대한 공간의 끝에서, 김현우는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입이 떡 벌어지는 옥좌를 바라봤다.
다리부터 팔걸이, 등받이부터 그 주변을 장식하는 모든 것에 황금빛이 번쩍이고, 심지어 등받이의 위에는 거대한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조각상이 만들어져 있었다.
'의자가 아니라 예술품 아니야?'
"앉으시지요. 스승님."
"뭐? 앉으라고? 내가?"
김현우의 물음에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령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물었다.
"혹여, 의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응? 그게 뭔……"
"스승님의 눈을 어지럽힌바, 이 의자를 만든 이들을 처형하도록 하겠습니다."
"……?"
'지금 이년이 뭐라는 거야?'
처형?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으나, 미령은 금방이라도 시선을 돌려 그녀를 따르고 있는 이들에게 입을 열었다.
"이 옥좌를 만든 이를 전부 죽…."
"헛소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제자야."
"…예. 알겠습니다."
김현우의 말에 조금 전까지 무서운 표정으로 입을 열고 있던 미령은 얌전한 양처럼 고개를 숙였고,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짓다 거대한 왕좌에 앉았다.
'미친, 돈을 얼마나 처바른 거야?'
지금 여기에 앉기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이 궁전은 말도 안 될 정도로 금전을 치덕치덕 처바른 곳이라는 걸.
이 수백 명을 들여도 차지 않을 것 같은 궁전의 크기부터 시작해서, 흑색의 대리석이 바닥의 타일은 굉장히 비싸 보였고, 또 그 위에는 금색의 거대한 가면은 가히 화룡점정이었다.
게다가 기둥은 어떤가?
'뭐가 저렇게 반짝거려?'
기둥은 하나하나가 금색의 고풍스러운 문양들을 음각해 놓았다.
"제자야."
"네, 스승님."
"이 의자, 통짜 금이냐?"
"그렇습니다만……혹여,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불민한 제자가 스승님을 위해 만든 옥좌입니다.
미령이 고개를 숙이자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짓다 이내 시선을 돌려 궁전의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그럼 저건 뭐냐?"
"저것은 소녀가 앉았던 옥좌입니다."
"……."
김현우는 미령을 말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이 세계의 자금에서 10%는 이곳에 쏟아부은 게 아닐 정도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궁전.
그리고 김현우는.
'……어? 그러고 보니까 왜 내가 여기에 앉아 있지?'
말 그대로 어쩌다보니 이곳에 앉아 있었다.
조금 전, 그에게 달려드는 패도 길드원들을 처리하고 미령을 만났을 때, 그녀가 갑자기 김현우에게 절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는 분위기에 휩쓸려 여기까지 따라왔다.
물론 김현우는 분위기를 따르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의 종말이 한 꺼풀 앞으로 다가와도 제 하고 싶은 대로 살 사람이었지만-
"제자야."
"예, 스승님."
"……아니다."
김현우는 현재 미령의 저 몸짓과 눈빛에 묘하게 압도당했다.
루비 같은 진홍빛의 빛깔을 내뿜은 홍안으로 마치 환희에 잠긴 듯 눈꼬리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리며, 입가에는 미소를 지은 채 무한한 신의와 신뢰를 보내는 저 눈빛!
그게 김현우의 제멋대로를 묘하게 봉인하고 있었다.
몸짓은 또 어떠한가?
마치 극도의 예를 익힌 듯, 미령은 옥좌에 앉은 자신의 옆에서 공손히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한마디 할까 했는데.'
부담스러워서 못 하겠다.
'아니 도대체 뭐지? 도대체…….'
그리고 곧, 김현우는 묘하게 볼에 홍조를 띠고, 자세히 들어보면 묘하게 하아하아 거리고 있는 미령의 숨소리를 들으며-
'얘가 왜 이러지?'
자신과 제자의 관계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김현우와 미령의 관계.
겉으로 보면 그리 나쁜 관계는 아니다.
김현우는 은거기인 컨셉으로 탑에 있을 때 미령을 살려 주었고, 거기에 덤으로 그녀에게 무(武)에 대한 가르침까지 내려 주었다.
그래, 여기까지 보면 웹소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은거기인의 기연' 패턴이었다.
주인공이 죽을 위기에 처하고, 산을 돌아다니던 은거기인이 주인공을 구해준 뒤, 어디서 맞고 다니지 말라고 무공까지 알려주는 패턴.
흔한 패턴이다.
허나 여기서 김현우와 미령의 관계가 다른 점은, 그 가르침이 심히 일방적이었다는 것이다.
미령은 김현우에게 억지로 가르침을 받았다.
그것도 존나게 맞으면서-
물론 중간쯤 돼서는 미령도 어느 정도 도망을 포기하고 김현우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아무튼 요점은 미령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김현우의 뜻에 따라 무술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탑에서 빠져나왔어도 굳이 자신의 제자를 찾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라.
"제자야."
"예, 스승님."
"아니다…."
"예. 스승님."
순종적인 양처럼 간드러지게 고개를 숙이는 미령의 모습.
김현우는 몇 번이고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
너는 나한테 존나 처맞았는데, 왜 너는 나에게 호의적이냐?, 라고 물어야 할까?
도대체 왜 네가 나한테 호의적인지 모르겠다. 라고 물어야 하나?
'…모르겠다.'
잠시 동안 생각한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젓고는 빠르게 생각을 일축했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지금 상황은 결국 이런 상황이다.
김현우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흑역사를 만천하에 뿌리고 다니는 건 어느 정도 제재를 시킬 생각이지만.
'아, 정보권한'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득 그녀의 정보를 열람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정보를 열어 보았다.
------------------------
이름: 미령
나이: 21살
성별: 여
상태: 매우 환희 중
-능력치-
근력: S++
민첩: Ss-
내구: S+
체력: S++
마력: S++
행운: A++
성향: 절대 헌신주의 성향
SKILL -
[정보 권한이 부족해 열람할 수 없습니다.]
-----------
"……."
능력치 무엇?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능력치를 보며 감탄하다 그 아래에 써져 있는 성향을 바라봤다.
'절대 헌신주의 성향?'
이건 또 처음 보는 성향이었다.
그런데 딱 성향을 보아하니.
'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김현우는 그런 평가를 내리며 미령의 정보창을 닫았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 김현우는 쯧 하고 혀를 차곤 말했다.
"제자야."
"예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좀 많기는 한데. 우선 볼 일이 있다."
"하명해 주십시오."
"여기, 흑선우라는 놈이 있지 않냐?"
김현우의 말에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는 현재 미궁 뇌옥에 갇혀 있습니다."
"내가 걔를 좀 만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안내 좀 해줄래?"
김현우의 말에 미령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움직이실 필요 없이 제자가 그를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미령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곤 이내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에게 말했다.
"가라."
짧은 한마디.
그 말에 그들은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궁전에서 빠져나갔고, 김현우는 이내 텅텅 빈 궁전을 바라보며 미령을 바라봤다.
자신을 바라보며 무한한 신뢰와 신의를 보내는 미령.
'부담스럽다.'
김현우는 그녀의 시선에 묘한 부담을 느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서 발광하며 몸을 뒤트는 흑선우를 볼 수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뭐야 이거?"
김현우는 정신이 나가버린 흑선우를 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미령을 바라봤다.
"제자야."
"예."
"분명 내가 알기로는 이 녀석이 너희 패도 길드와 접선을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얘 상태가 왜 이러냐?"
"스승님을 시해하라는 건방진 소리를 하길래 손을 좀 봐줬습니다."
"잘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김현우가 기다릴 틈도 없이 미령을 칭찬하자 부끄럽다는 듯 몸을 꼬는 미령.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발광을 하는 흑선우의 몸을 툭툭 쳤다.
"야 미친놈아 그만해."
"으악! 으아아악…… 악? 무, 무슨"
그제야 정신을 차린 흑선우를 보며 김현우는 그대로 쭈그려 앉아 흑선우를 바라보았다.
이미 옷 여기저기에 물린 자국이 가득한 흑선우는 공포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다 이내 김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기……김현우!"
"그래, 나다. 잘 지냈어? 아주 엿 제대로 먹이고 여기까지 와서 또 당하니까 기분 좋지?"
김현우가 이죽이며 그를 놀리자 흑선우는 순간 그의 얼굴을 보더니 다짜고짜 김현우의 어깨를 붙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사, 살려줘! 살려주라!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고! 네 제자는 미쳤다! 네 제자는 미- 히익!!"
그리고, 그와 함께 뒤에서 느껴지는 섬찟한 살기.
흑선우는 그 모습을 보고 얼어붙은 채 말을 잃었고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미령을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스승님?"
순한 양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령.
……?
조금 전의 살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곧, 김현우는 흑선우에게 말했다.
"자, 우리 이제부터 할 말만 똑바로 하자. 만약 제대로 대답해 주면 네가 원하는 대로 살려줄게."
'그래, 살려 주기만'
"저, 정말인가?"
김현우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한번 묻는 흑선우를 보며 김현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입을 열었다.
"자, 우선 독일에 나를 죽이러 온 녀석들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읊어 봐."
***
미국 뉴욕의 외곽.
군인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름 모를 산 아래에 지어진 거대한 비밀 벙커에서, 마튼 브란드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3명의 남자를 바라봤다.
기사단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세 명의 맴버.
1번, 2번, 3번.
그들은 제각각 다른 방어구와 다른 무기를 쥔 채 마튼 브란드를 보고 있었다.
잠시간의 정적.
"그래서, 갑자기 저희를 호출한 이유는?"
그곳에서 제일 가운데에 있던 1번이, 자신의 창을 한 바퀴 휘두르며 마튼 브란드에게 물었다.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은은히 퍼지는 냉기.
허나 마튼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당연한 말을 하게 하는군. 일이다."
"일? 길드장님,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이번에만 해도 저희 벌써 4번째인데?"
긴 곡도를 들고 있는 남자가 투덜거리자, 그 옆에 있던, 자그마한 마법서를 들고 있던 남자도 마찬가지로 불만을 토했다.
"맞아. 특히 이번에는 좀 빡센 일들만 계속해서 수행했는데, 좀 쉬게 해주면 안 되나?"
그들의 불만 어린 말에도 브란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만약 너희들이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STT+ 아티팩트를 지급하도록 하지."
그의 물음에 기사단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으나,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STT+ 급 아이템을 받으면, 너희들은 지금보다 몇 배는 강해질 거다."
그리고,
마튼 브란드는 눈앞의 1번을 바라보며 말했다.
"6위였던 1번은, 어쩌면 정말 '정상'을 노릴 수도 있지."
그 말에 기사단의 눈빛에 탐욕이 감돌았다.
특히 그들의 앞에 서 있는 1번의 눈빛에는 탐욕을 넘어선 광기가 엿보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3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데 그런 장비가 있긴 합니까? SST+ 라는 건……스탯을 두 단계 올려준다는 건데……!"
스탯을 한 단계 올린다는 것,
그것은 순위권 안에 든 헌터들에게는 하늘에 별 따기와 같은 과제였다.
그리고 그 덕분에 수많은 순위권 헌터들이 미궁에 내려가서 아티팩트를 찾는 이유이기도 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튼 브란드를 바라보자, 그는 슥 웃으며 기사단을 향해 주먹을 뻗으며 말했다.
"정말,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럴 수도 있겠군 STT+ 장비는 세상에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으니."
그러니까-
"내가 보여주도록 하지."
이윽고 브란드의 손이 펴짐과 함께 기사단의 얼굴에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던 탐욕의 빛이 감돌기 시작했고-브란드는 그 모습을 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 69
069. 오랜만이다, 제자야(3)
한국, 홍대에 위치한 고구려 길드의 본사.
15층 빌라로 꽤 깔끔하게 지어진 고구려 빌라의 상층에는 김시현과 이서연, 그리고 한석원이 모여 있었다.
"그래서, 미궁 탐험은 또 언제 가려고?"
"글쎄다, 솔직히 저번에 얻은 아티팩트가 꽤 괜찮아서 이번에는 좀 늦게 가도 되지 않나 싶은데."
한석원의 말에 김시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 어차피 이번 미궁에 들어가서 얻어 온 아티팩트, 석원이 형은 전부 팔지 않았어?"
김시현의 말에 한석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서연 너는?"
"나는 반지 하나만 남기고 전부 팔았지. 그러고 보면 너는 미궁에서 얻었던 아티팩트 하나도 안 팔았지?"
이서연의 되물음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제 슬슬 스펙업 좀 해야 하지 않겠냐?"
"…스펙업?"
"그래, 지금 계속 정체돼서 순위는 계속 밀리고 있잖아? 우리가 탑은 처음으로 빠져나왔는데 말이야."
"뭐, 그건 그렇긴 하지."
그렇다.
탑을 처음으로 빠져나왔던 1세대 헌터들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순위권에서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밀려나는 이유?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결론적으로 보면 한 가지였다.
하나는 그 어느 순간부터 김시현과 이서연, 한석원은 이 이상 스펙업을 하는 것보다는 길드를 관리하는 것에 주력했기 때문에.
게다가-
"…흠."
사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은 모두 갑작스레 튀어나온 김현우에 의해 가려졌을 뿐이지, 실제로는 한 가닥 하는 사람들에 속했다.
누가 뭐라 뭐라 해도 김시현와 이서연, 그리고 한석원은 s등급 헌터 랭킹에서 200위 안에 들어가는 강자였으니까.
"나는 굳이 이 이상 할 필요가 있나 싶기는 한데…우리 정도의 급이 되면 결국 기댈 수 있는 건, 아티팩트로 인한 능력치 상승이고."
그건 돈이 엄청 많이 들잖아?
한석원의 말에 이서연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
ST+ 급 아이템은 부르는 게 값이다.
그런 아이템 중에서도 특히 근력이나 민첩 같은, 전투에 실질적인 능력치가 올라가는 물건은 그야말로 돈을 쓰레기통에 밀어 넣는 정도의 갑부가 아니면 살 수도 없을 정도로 비쌌다.
"근데 왜 전부터 갑자기 스펙 업 타령이야? 무슨 일 생겼냐?"
한석원이 묻자 김시현은 슬쩍 우물쭈물한 티를 내더니 이내 말했다.
"아니, 뭐…."
"?"
"현우 형 옆에 있다 보니까 제가 좀 작아 보여서요."
그 말에, 한석원과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김시현의 마음을 이해하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니까. 이 녀석들은 네가 보낸 게 아니다?"
"마, 맞다."
패도 길드의 넓은 궁전 안.
김현우는 흑선우에게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또한 길드 내에서 뜻밖의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로, 김현우를 죽이러 온 괴한들의 정체는 아레스 길드 본사 소속인 '기사단'이라는 곳이다.
두 번째로, 흑선우는 패도길드에 김현우를 죽여 달라 하기 위해 온 것은 맞았으나, 기사단을 자신이 보낸 것은 아니다.
세 번째로, 그 아래스 길드의 기사단이라는 곳에서는 김현우 자신뿐만이 아니라 흑선우까지 살해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정도인데…혹시 틀린 거 있나?"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흑선우와.
"…."
그런 흑선우의 뒤에서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두 명의 기사단을 바라봤다.
두 명의 기사단 중 한 명은 이미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축 늘어져 있었고, 나머지 한 명, 얼굴에 로마자로 Ⅴ(5)라고 써져 있는 남자는 그나마 기척이 있었지만-
"……얘 살아 있는 거 맞아?"
"살아 있습니다. 스승님."
"얘는?"
"마찬가지로 살아 있습니다."
"……그래, 자세히 보니 숨은 쉬네."
그래, 정말 말 그대로 그들은 숨만 쉬고 있었다.
"이 녀석들 어떻게 데려왔다고 했지?"
"이들은 흑선우와 다르게 처음 패도길드와 접선했던 흑선우의 부하를 잡기 위해 파견한 부길드장에 의해 잡혀 왔습니다."
"……부하?"
"우, 우천명이다."
"우천명…… 그게 누군데?"
"……그게."
"바른 대로 빠르게 말하자."
김현우가 눈에 힘을 주며 위협하자 흑선우는 눈알을 굴리다 말했다.
"그는 관리부서의 부장이다."
"거긴 뭐하는 곳인데."
"……아레스 길드의 뒤를 관리하는 부서다."
"……아."
김현우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네 명령을 받고 나한테 암살자를 보낸 게 지금까지 그 녀석이었다는 말이네?"
"그, 그렇다."
흑선우의 더듬거리는 대답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본사 직원들이라고?"
"마…… 맞다! 정말이야! 애초에 나는 너 때문에 이미 아레스 길드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흑선우가 억울하다는 듯 외치자 김현우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흑선우의 설명은 앞뒤가 잘 맞기는 했다.
자신에게 양도권을 빼앗긴 흑선우는 아레스 길드 한국지부의 독점 체재를 완전히 부숴 버리고 말았고, 아레스 길드의 본사의 길드장은 절대로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라 했다.
그렇기에 흑선우를 처리하고, 그와 동시에 그에게 양도권을 받은 자신을 처리해서 던전을 다시 찾아오려는 생각으로 기사단을 파견했다.
그렇다면 모든 상황이 꽤 알맞게 떨어졌다.
김현우에게 기사단이 온 것도, 그리고 흑선우의 부하가 마찬가지로 기사단에게 죽임당한 것도.
모든 것은 본사에서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원래대로 확보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거지."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나는 살려주는 건가?"
김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흑선우가 우려하는 듯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아, 그렇지."
'살려주기로 했었지.'
정확히는 살려'만' 주기로 했었다.
"제자야."
"예."
"아까 이 새끼 지랄하는 거 보니, 이 지하에 있는 뇌옥은 꽤 지독한 곳이냐?"
"지금 이 궁전 아래에 만들어 있는 지하 뇌옥은 D급 던전 '쥐들의 미궁'을 개조하여 만들어진 뇌옥입니다. 감옥 안에서는 끊임없이 쥐가 흘러나와 뇌옥에 갇혀있는 헌터들을 파먹습니다."
"……그럼 죽는 거 아니야?"
김현우가 슬쩍 질린 표정으로 미령을 바라보자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죽지 않습니다. '쥐들의 미궁'에 나오는 식인 쥐들은 분명 사람을 잡아먹긴 하지만 헌터 내구가 C+만 되도 식인 쥐의 공격에는 내성을 가지게 됩니다."
허나, 고통은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럼?"
"탈출하지 못 하는 이상 갇혀서 쥐들에게 뜯어 먹히는 기분을 계속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쥐들은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흘러나오니까요.
미령의 말에 흑선우의 얼굴이 핼쑥해졌고, 김현우는 자신을 보며 무척 칭찬을 바라는 어린애처럼 눈치를 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제자가 미쳤군.'
어떻게 봐도 칭찬을 바라는 눈빛인데, 그런 살인 감옥을 만들고 왜 자신에게 칭찬의 눈빛을 보내는 것인지 김현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죽진 않는다는 거지?"
"예, 뇌옥에는 일정량이지만 죽지 않을 정도의 식사도 지급됩니다."
"그럼 한 30일 정도만 가둬두도록 하지."
"뭐…뭐!? 이야기가……이야기가 다르잖아!!"
김현우의 말에 순간적으로 발작한 흑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김현우가 제대로 움직이기도 전-
"끄악!?"
쿵!!
그의 뒤에 자리 잡고 있던 미령은 흑선우의 머리를 그대로 발로 내리 찍었다.
순식간에 흑색 대리석을 깨고 바닥에 얼굴이 처박힌 흑선우.
그 상태에서 미령은 김현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스승님의 말대로 행하겠습니다."
미령의 말과 함께 기절한 듯 힘없이 끌려나가는 흑선우와 기사단.
김현우는 궁전의 문이 닫힌 것을 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도중,
"?"
김현우는 조금 전 기사단이 쓰러져 있던 자리에 떨어진 하나의 반지를 볼 수 있었다.
별다른 음각 없이 밋밋한 반지.
'뭐야?'
김현우가 반지를 들어 올리자 떠오르는 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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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안의 반지
등급: ST+
보정: 근력+
스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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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권한으로 인해 숨겨진 사실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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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KER-F-111
등급: ST+
보정: 근력+
스킬: 없음
-정보 권한-
-권한 없음-이 우수리안의 물건을 카피한 -권한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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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저번이랑 똑같은?'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떠오른 로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저번에도 이런 아이템을 본 적이 있었다.
자신에게 찾아온 괴한들을 잡고 빼앗은 아티팩트.
그것들에게는 모두 이런 식으로 숨겨진 정보들이 나왔었다.
김현우는 조금 전 그들이 나간 문밖을 쳐다보더니 이내 주웠던 반지를 주머니 안에 넣고는 제자를 바라봤다.
"제자야."
"예, 스승님…."
"네 덕분에 일을 좀 편하게 처리했다."
김현우의 말에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 미령.
그녀를 보며 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럼 이만 나는 가 보마."
물론 하고 미령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당장 저 쪽팔린 가면을 쓰고 있는 녀석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미령에게도 이왕에 만났으니 좀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었다.
뭐라고 해도 결국 미령은 그의 제자이니까.
허나 지금 김현우에게는 미령과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레스 길드장이라고 했지?'
바로 아레스 길드장을 조지는 것.
물론 아레스 길드장은 전 세계의 길드 중에서 탑급으로 거대한 길드 중 하나였지만 애초에 김현우에게 그런 것은 별 상관이 없었다.
김현우에게 중요한 건 그거였다.
아레스 길드장이 자신에게 암살자를 보냈다.
그래.
그 사실이 중요한 거다.
'나를 죽이려 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거지.'
김현우는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그는 절대로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김현우가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간 뒤, 이번에는 아레스 길드의 본사로 쳐들어갈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자. 불현듯 목소리가 들렸다.
"…예?"
"응?"
"?"
"?"
목소리의 근원지는 미령.
그녀는 갑작스레 무표정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은, 혹 다시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데? 일 끝났으니까 가 봐야지."
"저를 이끌어 주시는 게……?"
미령이 뭔가 공허한 표정으로 굉장히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었다는 듯 김현우를 바라보자, 그는 묘한 표정으로 미령을 바라보다 짤막하게 생각했다.
'…뭘 이끌어 달라는 거야?'
그는 짧게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이다."
"그게 무슨…."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라."
내가 말 두 번 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알지?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미령은 읏, 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푹 숙였고,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우선 아레스 길드부터 좀 조지고, 너랑 이야기하는 건 다음이다."
그와 함께 김현우는 자연스레 열리는 문들을 지나쳐 궁전 밖으로 나가 버렸고,
그로부터 조금 뒤-
쿠구구구구구궁─
김현우가 빠져나간 궁전 안에 붉은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궁전에 미세한 지진이 나는 것처럼 굉장한 마력을 피워 올린 미령은,
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잘 들어라…."
미령의 말과 함께 궁전 주변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지고, 미령의 눈이 주변을 바라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선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던 홍안은 섬뜩하게 변해 있었고, 웃음 짓고 있던 입가에는 무표정이 자리했다.
그 모습.
패도 길드의 길드장이자 S등급 헌터랭킹 5위, '패룡(悖龍)'이라 불린 그녀는, 그에 걸맞은 붉은 마력을 사방으로 내뿜어대며-
"이 시간 부로…."
조용히.
"우리 관리하에 있는 지역에 아레스 길드가 있다면 그들을 모조리…."
아레스 길드와의 적대관계를-
"잡아 죽여라."
선고했다.
# 70
070. 오랜만이다, 제자야(4)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아브의 방 안.
"…이건."
"이건?"
"저도 확실하지는 않긴 한데, 이건 아티팩트가 아니에요."
"뭐? 아티팩트가 아니라고?"
"네."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아브에게 대답을 촉구했으나 아브는 당최 김현우가 가져온 반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몇 번이나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정보 권한 중하위로 열람할 수 있는 정보에는 아티팩트에 대해서도 열람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9계층에서 사용하는 '아티팩트'라는 명칭은 각 미궁의 지하에 묻혀 있는 장비들을 말하는 건데, 그 장비들은 저희 '시스템'에서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그럼?"
"전부 가져와요."
"전부 가져온다고?"
"네, 가디언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지금 가디언이 있는 계층은 9계층이고 그 아래위로 또 다른 계층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계층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을 시스템이 '전승'과 '신화' 같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이용해 등급을 매기고 '스킬'과 '보정'을 매긴 다음 미궁으로 가져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아티팩트가 되는 거죠.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문득 생긴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분명 가져온다고 말하지 않았어?"
"네, 그렇죠?"
"근데 거기의 그 신화나 전승이 있는 물건을 가져와 버리면 다른 계층은 어떻게 되는 건데?"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바로 대답했다.
"이 이상은 정보 권한이 열려 있지 않아 확실한 정보를 말하기 어렵지만 아마 지금 미궁에 묻혀 있는 아티팩트들은, 이미 멸망한 세계에서 가져온 게 아닐까요?"
"…멸망한 세계?"
"네. 지금 가디언이 있는 곳은 9계층이고, 등반자들은 탑을 오르기 위해 계층을 멸망시킬 필요가 있거든요."
물론 제가 말한 것들은 대부분 예상이긴 해도, 가능성은 있다고 봐요.
아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서, 그럼 결국 이건 뭐야?"
"제가 볼 때 이건…잘 만들어진 모조품인 것 같아요."
"…잘 만들어진 모조품이라고?"
"네."
"…아티팩트는 원래 만들 수 있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아티팩트를 만드는 건 불가능해요. 그냥 '아이템'을 만드는 거라면 몰라도 '전승'이나 '신화'가 필요한 아티팩트는 시스템에게 따로 검수 평가를 받아야 하거든요."
"그럼 이건 뭔데?"
"제가 볼 때 이건 아마……."
아브는 고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반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등반자'가 만든 것 같아요."
"등반자?"
뜬금없이 나오는 등반자 소리에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으나, 아브는 계속 말했다.
"물론 실질적으로 이런 식의 '모조품'을 만들 수 있는 등반자가 있는지는 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조품은 절대 일반 계층민이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모조품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등반자가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
"네, 말했다시피 '보정'이 들어가는 종류의 아티팩트를 일반 계층민이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아브가 단호하게 말하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김현우를 습격했던 기사단에서 나온 아티팩트는 전부 아브에게 가져온 반지처럼 기묘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오는 결과가 하나.
'그러니까, 한 마디로 아레스 길드랑 '등반자'가 연결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이건가?'
김현우는 바로 도출되는 결론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아브를 바라봤다.
저번에 그녀는 김현우에게 하나의 의문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김현우가 탑에서 빠져나오기 전 일어났던 세 번의 크레바스 사태.
그중에서 중국에서 일어난 크레바스 사태는 패도 길드가 깔끔하게 처리해 구멍이 닫혔으나, 나머지 두 번은 구멍이 닫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아브는 거기에서 아마 '등반자'들이 이 세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아레스 길드를 조지면서 등반자에 대한 단서도 잡을 수 있겠는데?'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야, 아브."
"왜요?"
"너, 정리 좀 하고 살아라."
김현우는 완전히 개판이 되있는 주변 풍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분명 김시현의 집과 흡사하게 만들어진 공간이었는데 지금 주변의 모습을 돌아보면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그."
아브가 슬쩍 시선을 피하고 김현우는 주변을 풍경을 바라본다.
보이는 것은 수많은 음료 캔들과 인스턴트 음식 껍데기들. 웃기게도 게임기가 있는 앞에는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고 그 주변은 굉장히 더러웠다.
김현우는 소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아이스크림을 보며 인상을 쓱 찌푸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버튼을 눌렀다.
-딸깍
버튼을 누르자마자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가는 집의 풍경 사방에 버려진 인스턴트들과 아이스크림 봉투, 찌꺼기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방은 깨끗하게 변했다.
"와- 감사해…요?"
그리고 아브는 김현우를 보며 감사의 인사를 하다 문득 TV 앞이 허전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저기요…가디언?"
"왜?"
"그, 게임기가…플라이스테이션이 사라져 버렸는데……."
아브가 위태로워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묻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다음에 올 때까지 게임기는 압수다."
"뭐, 라고……?"
존댓말을 쓸 새도 없이 멍하니 중얼거린 아브는 이내 웃음을 깨트리고는 김현우에게 매달렸다.
"아, 안 돼!"
"뭐가 안 돼?"
"저 잘할게요! 집안 청소도 잘 하고! 아이스크림 껍데기도 잘 버리고! 먹은 것도 잘 치울 테니까! 돌려주세요."
뭐, 김현우는 정말로 플라이스테이션은 빼앗을 생각은 없었기에 짓궂은 미소를 숨기면서 말했다.
"흐음, 어쩔까."
"돌려주세요!"
"흐으으음……뭐라고?"
"플라이스테이션 돌려주세요!"
"뭐라구우?"
김현우는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숨기지 않고 말하자 아브는 볼을 부풀리더니 이내 김현우의 허리에 매달리며 외쳤다.
"돌─려─줘─!!!!"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게 진짜 안 돌려주면 그 상태로 울어버릴 것 같아 김현우는 아브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플라이스테이션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내 세이브…데이터"
세이브 데이터가 전부 날아가 버렸다며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브에게 새로운 게임과 몇몇 새로운 군것질거리를 선물해 주고 나서야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
베이징, 패도 길드의 거대 궁전의 거대한 나무 끝자락에 한 명의 인영이 서 있었다.
얼굴을 가릴 필요도 없다는 듯 무엇을 가리지도 않은 남자.
얼굴에 Ⅲ(3)이라는 로마자가 표기된 그 남자는 가볍게 목을 좌우로 풀고는 생각했다.
'뇌옥에 있는 기사단 두 명 구출, 그리고 쓰레기 한 명 제거……흑선우라고 했나?'
그는 조금 전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통해 봤던 흑선우의 얼굴을 되새기곤 입가를 들어 올리며 자신의 오른손에 장착되어있는 장갑을 바라봤다.
'이 아이템을 써볼 수 있는 녀석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3번이 곡도를 쥐고 있는 오른손에 장착한 장갑.
그것은 바로 마튼 브란드가 이번 임무를 위해 그들에게 지급한 SST+급 아티팩트였다.
'근력이 두 단계나 올라서 S++ 가 되다니…!'
3번은 조금 전만 해도 자신의 정보창에 찍혀있던 두 개의 플러스를 떠올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S등급부터는 스탯을 한 단계 올릴 때마다 강해지는 '강함'의 척도가 달랐다.
만약 B등급에서 A등급으로 상승했을 때의 상승폭이 50정도라면, A에서 S로 상승했는 때는 100. S에서 S+로 상승했을 때는 그 이상으로 강해진다.
"후우…!"
3번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이 정도면, 10위가 아니라 9위, 아니 8위나 7위까지도 재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 이번 일만 잘 끝내면…!'
그는 이틀 전, 자신의 상사인 아레스 길드장 마튼 브란드에게 받았던 명령를 떠올렸다.
'패도 길드에서 이들을 구해내고, 재앙을 잡았다고 설치고 다니는 그 헌터 녀석 하나만 끝내면'
손에 끼고 있는 SST+ 급 장갑은 자신의 것이다.
그 생각에 3번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고, 곧바로 자신의 첫 번째 일을 시행하기 위해 패도 길드의 궁전 내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쥐새끼가 찾아왔구나."
그는 궁전 내로 잠입하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도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너는…."
미령이 있었다.
붉은 홍안을 번뜩인 채, 그녀는 가만히 선 채로 이제 막 궁전 안으로 뛰어든 3번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벼운 마음으로 궁전 안으로 뛰어들었던 그는 자신이 그녀의 움직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굳은 표정으로 곡도를 쥔 3번에 반해 미령은 미소를 지었다.
"네 녀석도 아레스 길드냐?"
"……!"
"맞나 보군."
3번이 별말도 하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답을 정한 미령은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 사실 네가 아레스 길드원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
-그저 지금의 나는 화풀이 대상이 필요할 뿐이니까.
미령의 말에 3번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곡도를 쥐어 잡았다.
'저년은 뭐야?'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붉은 마력은 결코 그녀가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전해주고 있었으나-
'저 꼬맹이년이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내게는 SST+ 아티팩트가 있다...!'
3번은 자신의 손에 끼워져 있는 장갑을 믿었고, 그렇기에 그는 곧바로 싸울 준비를 했다.
그리고-
"!?"
이미 자신의 몸 안쪽으로 파고 들어있는 미령의 모습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기묘한 움직임으로 그의 배에 주먹을 찔러 넣으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잘 버텨봐라."
-내 화가 조금이라도 풀어지도록 말이야.
꿍!!!!
패도길드의 궁전 한쪽에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
김시현의 아파트.
"…이것들은 또 뭐야?"
아브를 달래주고 그 공간에서 빠져나온 김현우는 김시현의 집안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인영을 볼 수 있었다.
한 명은 닿는 것만으로도 얼어 버릴 것 같은 시퍼런 냉기를 뿜어내는 창을 쥐고 있는 남자와, 그 옆에 마찬가지로 푸른색의 마력을 흘려대는 마법사를 쥐고 있는 남자.
김현우는 그들의 얼굴에 써져있는 로마자를 보며 그 녀석들이 '손님'이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시현이는?'
순간적으로 김현우의 머릿속에 든 생각.
김현우는 슬쩍 시계를 보았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이제 막 9시가 넘어가고 있는 상황.
듣기로는 오늘은 늦게 '헌터를 알다'를 촬영한다고 해서 새벽에나 들어올 것 같다고 말을 듣기는 했었던 게 기억났다.
그제야 김현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기까지 왜 왔어?"
"그걸 굳이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것 같은데, 그보다 놀랍군. 그건 무슨 마법이지?"
마법서를 쥐고 있는 남자. 2번이 묻자 김현우는 순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다 그가 시스템 공간에 갔다 왔다는 것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김현우는 피식 웃더니 그들의 맞은편에 앉아 말했다.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내가 물어봤잖아? 여기까지 왜 왔냐니까?"
김현우의 이죽임에 창을 쥐고 있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당연히 너희들이 왜 왔는지 알고는 있지. 그런데 말이야."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어차피 내가 다 찾아가서 조지려고 했는데 너희가 굳이 귀찮게 두 번 일해야 했냐 이거거든."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 71
071. 롤러코스터 한번 타볼래?(1)MTC 방송국 앞.
저번 김현우가 게스트로 나온 이후로 엄청난 시청률의 상승을 이뤄낸 '헌터를 알다'는 그 기세를 놓치지 않고 시청률을 잡기 위해 여러 가지 컨텐츠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오늘 생방송으로만 진행되는 '헌터를 알다'를, 토크쇼처럼 방청객을 불러서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헌터를 알다'의 MC인 이해영이 슬쩍 사람들이 있는 방청객과, 그 뒤에 있는 20분 정도가 세팅된 생방 타이머를 보곤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제 지금부터는 오늘의 주제 대신, 방청객분들의 궁금했던 점을 지금 이 자리에서 풀어드리기 위해 잠시 질문 타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이해영이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치는 방청객들.
그녀는 슬쩍 시선을 돌다 방청객의 중간쯤, 손을 들고 있는 남성을 가리켰다.
"네, 거기 검은 후드 쓴 남성분! 바로 질문해 주시겠어요?"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스태프는 곧바로 몸을 움직여 방청석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마이크를 가져다주었고, 그는 곧 간단하게 인사한 뒤 질문했다.
"혹시, 이 자리에 나오신 한국 3대 길드 길드장 분들께서는 그동안 나왔던 '머더러 헌터' 중 기억에 남는 헌터가 있습니까?"
"엇."
방청객의 질문에 이해영은 슬쩍 당황했다.
그 이유는 바로 방청객의 질문 때문.
머더러 헌터.
딱히 일반인이 머더러 헌터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런 질문의 경우는 어느 일부에서는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TV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주제였다.
이해영이 어떻게 해야 하나 눈치를 슬쩍 보고 있을 때쯤, 이서연이 입을 열었다.
"……음, 그냥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헌터는…4년 전에 종적을 감춘 '마도사'가 있겠네요."
"'대마도사'라면, 마법사 헌터로 거의 최상위까지 올라간 그 헌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그는 적어도 그때 당시 마법사 계열에서는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상위권에 있던 인재였으니까요."
4년 전, S등급 세계랭킹 최상위에 머물었고, 이명으로는 '마도사'라고 불린 헌터.
그는 한 가지 특성이 정해져 있는 여타 다른 마법사 계열 헌터들과는 달리 수많은 마법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의 고유스킬인 '해석'은 그가 우연히 얻은 마법서 내에 있는 마법들을 자연스레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불현듯, 4년 전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대형 길드를 홀로 멸망시키고 '머더러 헌터'가 되었다.
"그럼 이서연 헌터께서는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건가요?"
방청객의 묘한 질문에 이서연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렇죠. 같은 마법사 직군 중에서 그때 당시에 그는 상당히 유명했으니까요. 뭐, 지금은 그저 사람을 살인한 '머더러 헌터'일 뿐이지만."
이서연은 그렇게 말을 끝냈고, 방청객은 곧 이서연 옆에 있던 김시현과 한석원을 바라봤다.
"난 잘 모르겠군. 애초에 스스로 챙기기도 바쁜데 무슨 다른 사람을 생각하겠나?"
한석원은 그렇게 말하며 방청객의 질문을 넘겨 버렸고, 그 옆에 앉아있던 김시현은 이서연과 비슷하게 조금 생각하는 제스쳐를 취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저는 '빙설'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빙설……?"
"예, 그때 당시에 S등급 세계랭킹 8위에 있던 헌터요."
"그 헌터가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뭡니까?"
방청객의 물음에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뭐 별건 아니고, 다들 알고 계신다면 아실 텐데 10위권 내에 들어간 헌터 중, '머더러 헌터'가 된 사람은 그 사람 한 명뿐이거든요."
"아……."
그랬다.
지금까지 10위권 내에 들었던 헌터 중에서 '머더러 헌터'가 된 이는 지금까지 단 한 명 '빙설' 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이외에도 그 사람은 이력도 화려하잖아요?"
"……그렇긴 하죠."
S등급 세계랭킹에서 8위라는 순위를 가지고 있었던 '빙설'이 머더러 헌터가 된 이유.
그것은 바로 세계에서 제대로 막지 못해 정말로 거대한 피해를 보았던 두 번째 크레바스.
그곳에서 보스를 잡으러 들어갔던 빙설은 무엇에라도 홀렸는지 크레바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몬스터를 잡고 있는 헌터들을 학살했고, 그 결과.
"공식적으로 가장 많은 헌터를 살해한 머더러 헌터…."
그는 그런 불명예스러운 이명과 함께 세상에서 종적을 감췄다.
김시현은 방청객의 중얼거림을 듣고는 대답했다.
"네, 그러다 보니까 그냥 가장 먼저 기억에 남기는 하네요. 뭐, 그래봤자 지금은 머더러 헌터일 뿐이죠."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 질문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시현이 말을 끝내자마자 그것을 빠르게 캐치해 낸 이해영은 곧바로 화제를 돌렸고, 곧 방청객이 들고 있던 마이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며 질문을 끝마쳤다.
그렇게 헌터를 알다가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을 무렵-와장창!
김현우의 몸이 아파트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 뒤를 따라 튀어나오는 1번, '빙설'은 허공에 있던 그에게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창을 던졌다.
쉬이이익-
듣기에도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주변의 공기를 얼리며 김현우에게 내리꽂혔지만, 김현우는 허공에서도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날아오던 창을-콰가가가각!
그대로 붙잡았다.
창대를 잡은 손에서부터 푸른 냉기가 김현우의 몸을 좀먹었다.
허나 그는 곧바로 마력을 일으켜 냉기를 막아내곤 몸을 뒤틀어 창을 쏘아내려 했-
"?"
'없어?'
-었다.
"!"
김현우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창이 어느새 빙설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급하게 몸을 방어했으나.
꽝!
그는 망설임 없이 창대를 이용해 김현우를 내리쳤고, 김현우는 곧바로 아파트 앞에 조성되어있는 공원으로 떨어져 내렸다.
흙먼지가 한순간 사방으로 퍼지고 김현우의 눈이 난잡하게 주변의 상황을 파악할 때.
촤르르르륵-!!
김현우의 주변으로 푸른 마력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은 푸른색의 거대한 공간.
공간을 전부 덮을 정도로 거대한 푸른색의 마력은 한순간 주변을 덮었고, 그런 마력 공간 위에 한 남자가 떠올랐다.
아까 빙설과 함께 있던 남자.
얼굴에는 로마자로 Ⅱ(2)라고 써져있는 '마도사'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들고 있던 책을 허공에 띄운 채 김현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파─
그리고 그 한순간 그의 몸 뒤로-아니, 이 푸른 마력 공간 전체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마력 창들을 보며 김현우가 어처구니없다는 미소를 짓자 어느새 가볍게 착지한 빙설은 김현우에게 말했다.
"아직도 웃다니 대단하군."
"왜, 내가 이거 보고 쫄 줄 알았어?"
"직접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타입인가 보군."
빙설은 냉기가 줄줄 흐르는 창을 한번 휘두르곤 그 자리에서 자세를 잡고 입을 열었다.
"과연, 그 웃음이 언제까지 갈지- 지켜보도록 하지."
팟-
그와 함께, 다시 한번 빙설의 몸이 김현우에게로 도약했다.
저번에 찾아온 녀석들과는 비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신속한 빙설의 움직임, 허나 그 신속한 움직임도 김현우의 눈을 피하진 못했다.
기다렸다는 리치를 이용해 창을 길게 찔러오는 빙설.
그와 함께 빙설의 스킬인지, 김현우의 눈앞에 수십 개의 창날이 눈에 보였지만 김현우는 그 환상을 가볍게 간파해 빙설의 앞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피융-!
김현우의 주먹이 휘둘러지는 순간 그의 몸으로 날아다는 수십 개의 창.
쾅! 콰가강! 창!
바닥에 박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폭발을 일으키는 창 덕분에 한순간 어지러워진 시야 속.
허나 김현우의 귀는 빙설의 창이 휘둘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캐치하고 팔을 들어 올려 그의 창을 막아냈다.
크게 떠오르는 몸,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법사의 공격이 한 번 더 내리쳐진다.
앞에는 김현우의 몸을 쳐올린 빙설이 찌르기를 준비하고, 그 뒤에서는 마도사가 수십 개의 창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김현우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빙설이 눈이 순간 크게 떠지고, 마도사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그 순간,
"놀랐어?"
김현우는 어느새 마법사의 뒤에서 주먹을 굳게 쥐고 있었다.
그는 빙설의 창이 김현우의 몸을 찌르기 위해 올라왔던 그 순간, 빙설의 창을 밟고 이형환위를 펼쳤다.
물론 한순간의 재치를 이용해 펼친 이형환위는 올바르게 펼쳐지지 못해 김현우의 혈도를 꼬이게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마도사의 뒤를 점하는 데 성공했다.
마도사가 무슨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내리쳐진 김현우의 주먹.
꽝!
"쯧."
그의 주먹은 마도사를 날려 버릴 수 있었으나 김현우는 웃음 대신 혀를 찼다.
'주먹에 제대로 된 감각이 없다.'
이유는 바로 그것.
주먹에 제대로 된 감각이 없었다.
마치 벽을 때리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김현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김현우의 주먹에 맞아 바닥을 갈아버린 마도사는 인상을 찌푸리긴 했으나, 멀쩡히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나?"
"지랄 비틀비틀 거리면서."
김현우의 이죽거림에 마도사가 다시 한번 허공에 마력창을 만들어낸다.
허공에 주르륵 늘어선 푸른 마력창들.
김현우는 다시금 전투를 준비하는 둘을 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아주 지들끼리 잘 보완하네.'
저번에 왔던 녀석들은 팀워크가 형편없었다.
앞뒤 양옆을 일제히 공격했어도 그들에게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고, 그렇기에 김현우는 편하게 그들을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허나 저 둘은 어떤가.
'속도도 빨라, 대처능력도 빠르고, 무엇보다 팀워크가 좋다.'
팀워크.
마도사는 결정적인 순간에 김현우에게 창을 쏘아 보내고, 창들을 폭파시켜 빙설이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빙설도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자신에게 달라붙어 마도사에게 가려는 움직임을 차단하고 있다.
'이형환위는 시간이 필요하다.'
진짜 '이형환위'는 그 어떤 순간에서도 빠르게 발동할 수 있겠지만 빙설의 속도는 자신에게 창을 찔러 넣었던 4번보다 여러모로 월등했다.
순간적으로 창을 조절하는 피지컬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아직 '형태'만을 따라 해 마력을 크게 잡아먹는 김현우의 이형환위는 그의 공격 때문에 봉인 당했다.
그러나,
"후…."
그런 상황에도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마치 빙설을 도발하듯 손가락을 까닥했고, 그와 함께 빙설은 다시 한번 김현우에게 뛰어들었다.
쾅!
빙설의 도약이 무자비하게 지반을 터트리고 김현우에게로 도약한다.
그와 타이밍을 맞춰 마도사의 창들이 김현우에게 쏘아진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뭣……!'
김현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흙먼지가 묻은 츄리닝을 털며 빙설이 오기를 기다리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릴 뿐.
'뭐지? 함정인가?'
빙설의 머릿속에 수많은 가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그의 눈이 쉼 없이 주변을 탐색한다.
하지만 그 어디를 찾아봐도 함정으로 보이는 것은 없다.
그의 몸에는 마력이 터져 나오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입고 있는 아티팩트도 따로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 여유는 대체?'
그 짧은 콤마의 시간 속에서 빙설은 생각을 이어나간다.
이미 마도사의 창은 김현우의 주변을 남김없이 감싸고 있었다.
남은 것은 빙설의 공격뿐.
그렇기에 빙설은 그의 여유로운 모습에 의심을 두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근력과 스킬을 사용해 김현우를 찔렀고-콰가가가강! 쾅!!!!
그와 함께 마도사의 창들이 김현우의 몸을 강타했다.
순식간에 주변에 피어오르는 흙먼지. 빙설은 찌르기를 한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이내 생각했다.
'끝났나?'
그리고-
─턱.
"잡았다."
"!!"
빙설은 그 흙먼지 속에서 튀어나온 손에 저도 모르게 반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멱살을 잡혔다.
"내가 재미있는 거 하나 알려줄까?"
그와 함께-
"내 내구 랭크는-"
김현우는 이가 보일 정도의 웃음을 지으며.
"S++거든."
그에게 말했다.
# 72
072. 롤러코스터 한번 타볼래?(2)흙먼지 속에서 걸어 나온 김현우의 몸은 그리 좋은 상태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입고 있던 츄리닝은 이미 완전히 찢어져 넝마가 되어 있었고, 그의 몸 근처에는 검붉은 화상이 여기저기 나타나 있었다.
덤으로 머리카락도 엉망진창인 덕분에 김현우의 모습은 노숙자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S+급 내구를 가지고 있는 김현우의 몸에 타격을 줄 만큼 마도사가 쏘아낸 창은 강했다.
뭐, 그것은 곧 다르게 보면 마도사의 창은 김현우에게 '타격'밖에 못 입힌다는 게 되지만.
"큭!"
그 상황에서 빙설이 몸을 움직였다.
그는 곧바로 멱살을 잡힌 상태에서 그대로 몸을 띄워 김현우의 머리를 걷어차면서도 창을 회수했다.
후우웅-!
빙설의 발차기를 가볍게 피한 김현우.
허나 이미 창을 회수한 빙설은 초근거리에서 창대를 휘둘렀다.
꽝!
"크학!"
물론, 김현우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땅바닥에 내리꽂힌 빙설의 입에서 순간 비명이 터져 나온다.
붕 떠오르는 그의 몸.
턱-!
김현우는 붕 떠오르는 빙설의 머리를 붙잡고 입을 열었다.
"야, 너 놀이기구 타본 적 있냐?"
뚱딴지같은 물음에 빙설이 눈가를 와락 찌푸렸으나 김현우는 반대로 웃으며 대답했다.
"타본 적 없어? 그렇다면 기대해라. 지금부터-"
태워줄 테니까.
쾅!
김현우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붙잡은 빙설의 머리통을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리고-
콰가가가가가가가각!!!!
그 상태로, 마력을 일으킨 김현우는 빙설의 머리를 땅바닥에 박아버린 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빙설의 몸이 마치 농기구처럼 땅바닥을 갈아버린다.
어떻게든, 그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김현운의 팔을 붙잡는 빙설.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전벨트도 잘 매는 것 같으니 이제 위로 올라가 봐야지?"
"!!!"
땅바닥을 갈고 있는 상태에서 곧바로 빙설의 몸을 붙잡고 뛰어오른 김현우는 곧바로 마도사가 만들어 놓은 창이 있는 곳으로 도약했다.
마도사는 그 모습을 보고 기겁하며 창을 없애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빙설의 몸은 이미 마력창에 닿고 있었다.
쾅! 콰가가강! 쾅!
귀가 멀어버릴 정도의 소음이 김현우의 귓가에 울렸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이 공간을 만들어낸 마력 벽을 딛고, 김현우는 이형환위를 전개했다.
너덜거리는 빙설의 몸과 순식간에 반대편으로 몸을 움직인 김현우.
꽝! 콰가강!
여지없이 만들어 놨던 마력창이 빙설의 몸이 닿으며 터져나간다.
거기서 또 한 번 이형환위.
김현우는 만들어진 마력 벽을 마음껏 차고 움직이며 빙설의 몸으로 만들어져 있는 마력창을 전부 터뜨리기 시작했다.
마도사의 눈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자신이 만들어 낸 마력창을 없애려 했으나, 김현우의 속도는 마법사인 그가 쫓을 수 있을 정도로 느리지 않았다.
마치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마력공간에서 일어난 수십 차례의 폭발.
그리고-
"놀이기구 재미있었지?"
"끄-아-"
"씨발새끼야."
꽝!! 꽈드드득!
김현우는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더 이상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빙설의 몸을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반대로 꽂힌 빙설.
마도사는 그 모습을 보며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김현우를 바라봤고,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는 어떤 거 타볼래? 응? 얘처럼 땅바닥 익스프레스?"
아니면- 땅바닥 익스프레스는 이미 봤으니까--팟
"헉!"
마도사는 말하는 도중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다가와 있는 김현우를 보며 기겁하며 배리어를 펼쳤으나-
"너는 아파트 익스프레스로 하자."
김현우는 비웃음 어린 표정으로 마도사의 배리어를 후려쳤다.
***
"하룻밤에 집을 잃다니."
"내 잘못 아니다."
"누가 형 잘못이래요? 그냥, 이거 언제 치우나 싶어서 그런 거죠."
김현우가 습격을 받은 다음 날. 김시현은 자신의 집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집은 더 이상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방 안에 각종 가구는 이미 멀쩡한 곳이 없을 정도로 죄다 박살 나 있었고, 그것은 가전제품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분명 5개였던 방은 어느새 인테리어 공사라도 한 건지 벽이 전부 박살 나 있어 어느새 방 하나짜리 대형 룸이 되어 버렸다.
김시현이 그렇게 완전히 박살 나 버린 집을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자, 부서진 문을 통해 이서연이 들어왔다.
"와, 완전히 개판이네."
"놀리냐."
"놀리기는 무슨."
그냥 말해본 거지.
이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완전히 박살 난 집 안으로 들어오곤 말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잘 끝난 거 아니야?"
"뭐?"
"어차피 이거 집 박살 난 건 '머더러헌터'의 침입으로 밝혀져서 정부랑 헌터 협회에서 보상해 주기로 했잖아?"
거기에다 현우 오빠가 공원 한가운데에서 싸워서 천만다행으로 사상자도 전혀 없고.
이서연이 그렇게 말하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 근데 상황이 좀…."
"…상황? 무슨 상황?"
"더는 말하지 않겠다. 그냥 유튜X 들어가서 확인 한번 해봐."
김시현의 말에 이서연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스마트폰을 이용해 유튜X에 접속했고, 곧 그곳에서 이서연은 실시간 동영상 급상승 순위 1위에 걸려있는 기묘한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아파트 익스프레스…?"
이서연은 곧바로 영상을 클릭했고, 곧 짧은 광고가 지난 뒤 곧바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영상의 시각은 밤.
카메라는 아파트를 찍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파트 위에 있는 누군가를 찍고 있었다.
"……?"
이서연은 화면이 작아 아파트 위에 서 있는 게 누구인지 보이지 않았기에 화면을 전체화면으로 바꾸었고, 곧 그 화면 안에 비친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김현우.
아파트 위에 서 있는 건 김현우였다.
그는 자신의 손에 부들부들 거리는 누군가를 쥐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꽝! 콰가가가가가가가각!!!
불현듯 옥상에 올라서 있던 김현우가 곧바로 아파트를 수직으로 내달리며 손에 들고 있던 남자를 아파트 벽에 처박기 시작했다.
"헉……."
아파트 벽이 사정없이 부서지며 김현우의 손에 잡혀있던 남자의 몸이 아파트의 벽들을 부시며 앞으로 나아갔고,꽝!
김현우는 어느 순간 곧바로 맞은편에 있던 아파트로 뛰어들어 그곳에서도 똑같이 수직으로 내려가며 남자의 몸을 박살 냈다.
그리고 남자의 몸이 아파트의 벽이 아닌 땅바닥에 처박히는 것을 마지막으로, 김현우를 찍었던 영상은 끝이 났다.
"……."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스크롤을 내려 댓글 창을 바라봤다.
아이루아이시떼: 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거 오늘 아침에 뉴스 뜬 그 아파트 기사 맞지? 개웃기네 ㅋㅋㅋㅋㅋㅋ 치X리냐?
ㄴ 집가고싶어: 와 ㅋㅋㅋㅋㅋ 뇌X 실화냐 아파트 벽 긁으면서 내려가는 거 봐라 김현우한테 머리채 잡혀서 끌려 내려가는 거 실화냐ㄴ ㅁㄴㅇㄹ: ㅗㅜㅑ 저거 맞은 새끼 살아 있기는 하냐 ㅋㅋㅋ 내가 볼 때는 살아 있는 게 바로 기적 그 자체인 부분인데.
오투반이스라이트: 김현우 근데 왜 사람 붙잡고 저러고 있냐? 이걸 지금 니들이 웃으면서 키득키득 거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왜 사람을 붙잡고 저러고 있냐고 ㄴ 고인물헌터:우선 원본은 여기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22&aid=000332112345 이거 들어가 보면 알 텐데 김현우 헌터가 박살 내고 있는 건 머더러헌터다.
그것도 둘 다 4, 5년 전에 진짜 개쓰레기 플레이 하고 사라진 애들임, 한 명은 S등급 세계랭킹 8위인 '빙설'이라는 헌터고, 다른 한 명은 그때 당시 마법사 중에서는 제일 높게 올라갔던 '마도사'다.
아무튼 요점은 그런 애들한테 한 거라 상관없다는 소리를 하고 싶다.
ㄴ 학두야집가자: ㄹㅇ '머더러 헌터' 새끼들은 존나게 맞을 만하지ㅋㅋㅋㅋㅋ 김현우 잘했다!!!
ㄴ JK여고생쟝: 하와와와 현우쟝 간지인거시에오. 그런데 저러다가 인명피해 나면 책임지는 거시에요……?
ㄴ 집에가라: 컨셉충 ㄹㅇ 개극혐이니까 제발 그따위로 살지 마라, 그리고 인명피해 제로다 병신아 ㅋㅋㅋㅋㅋ 알고 지껄이셈, 거기에 덤으로 김현우는 오른쪽 외벽으로 긁은 거라 외관은 좀 이상해졌지만 아파트에 그리 충격가는 건 아니다.
"……."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로 개판이 나있는 댓글을 한동안 바라보던 이서연은 이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뭐…… 좀 대단한 일이 되기는 했는데…… 딱히 우리한테 나쁜 말은 없는 것 같은데?"
"우리한테 나쁜 말은 없지."
김시현의 대답에 이서연은 이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이서연의 물음에 김시현은 조용히 스마트폰을 들어올렸다.
[X매거진 기자 오택영]
[부재중 전화 192통]
[문자 423통]
"기억나지? 저번에 형이 더 물어볼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라 한 덕분에 내 스마트폰은 지금 다시 불이 나고 있다니까?"
"바꾸면……."
"저번에 형이 그렇게 말해서 바꾼 지 이제 1달 될까말까인데 또 바꾸라고?"
"……."
이서연은 김시현의 허탈한 표정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당장 석원이 형 집에 얹혀살아야 하나 걱정인데……."
김시현의 중얼거림에 김현우는 슬쩍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했다.
"야, 너무 걱정하지 마라."
"형, 양심 어디?"
물론 김현우가 잘못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일은 그가 시작하지 않았고, 김현우를 암살하기 위해 찾아온 머더러 헌터들이 문제였으니까.
허나 김시현은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반파된 집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져 은근히 김현우를 원망하는 마음이 슬쩍 들기는 했다.
김시현이 힘없이 앉아 있으니 김현우는 피식 웃고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던져 주었다.
"?"
"야, 우선 그거 가지고 힘내고 나는 서연이랑 잠깐 갔다 올 곳이 있으니까 잠깐만 고생하고 있어."
일 다 끝나면 딱 돌아와서 말끔히 해결해 줄 테니까.
"저랑요? 어디 가려고요?"
"너희 길드 지하 3층."
"…지하 3층? 아, 오빠 혹시 또 그 마법진 쓰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아니, 오빠 그거 그렇게 쓰면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제재가 들어올 거라니까요?"
"야, 괜찮아 그건 그때 생각하면 되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막무가내로 이서연을 끌고 갔고, 이서연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김현우의 뒤를 따라 완전히 박살 나 버린 집을 나섰다.
그 속편한 김현우의 모습에 김시현은 한숨을 내쉬며 김현우가 던져준 물건을 바라봤다.
"반지…?"
그것은 반지였다.
별다른 특수한 문양이 없는 그냥 무난한 반지.
그리고 곧 김시현은 자신의 눈앞에 떠오르는 로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기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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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안의 반지
등급: ST+
보정: 근력+
스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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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ST+ 급 아티팩트……?"
김시현은 그가 준 반지를 들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렇게 그가 김현우가 준 반지를 보며 개박살 난 자신의 집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을 때, 김현우는 이서연의 차에 타 아랑길드로 향하고 있었다.
"오빠 이번에는 그냥 비행기 타는 게 어때요?"
이서연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돼."
"왜……?"
이서연의 이해할 수 없다는 물음에,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당장 한걸음에 달려가야 할 일이 생겼거든."
-미국에 말이야.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 73
073. 복제자(Faker) (1)
"……."
지하 3층에 앉아 핼쑥한 얼굴로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아냐를 보며 김현우는 어제 그들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마튼 브란드."
이미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빙설 대신 김현우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었던 것은 배리어 덕분에 김현우의 공격을 다 받아내고도 제대로 죽지 못한 마도사였다.
아파트에 세 번 정도 갈리니 그때가 돼서야 어느 정도 정보를 풀어놓는 2번.
사실 김현우로서는 기사단에게 정보를 얻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나, 이상하게 이놈은 다른 녀석들과는 달랐다.
다른 기사단들은 정보를 열 바에 죽음을 택하겠다는 태도였는데, 이 녀석은 자신이 진짜 죽을 것 같으니 있는 대로 정보를 불었다.
뭐, 그렇다고 정보를 전부 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몇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정보들은 얻었다.
첫 번째로, 김현우를 죽이라고 사주한 것은 아레스 길드장인 '마튼 브란드'다.
두 번째로, 마튼 브란드는 지금 아레스 길드 본사에 있는 것이 아닌, 어딘가의 비밀 벙커에 숨어 있다.
'뭐, 둘 다 상관없지.'
우선 미국에 도착하기만 하면 필요한 정보는 얻을 수 있다.
어떻게?
아레스 길드를 박살 내면 된다.
물론 미국에 있는 대형 길드를 건들기 시작하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다는 걸 김현우는 잘 알고 있다.
흑선우를 상대할 때와 지금의 상황은 다르니까.
그러나-
김현우는 만지작거리고 있던 스마트폰을 꾹 눌렀다.
그와 함께 재생되는 목소리.
[우리한테 너를 암살하라고 사주한 사람은 마튼…… 마튼 브란드다.]
[마튼 브란드? 그게 누군데?]
[꽝!]
[끄아아아악! 말하겠다! 그는 아레스 길드의 길드장이다!]
-뚝.
"증거 좋고."
김현우는 마도사를 패던 도중, 누군가 버리고 도망쳤는지 모를 스마트폰을 이용해 그의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스마트폰은 이미 마도사의 창 공격을 받은 시점부터 그의 츄리닝 주머니 속에서 완전히 개 박살이 났다.
"…생각해 보니 이번이 벌써 세 번 째네."
처음 천마를 잡으러 갔을 때도 스마트폰이 박살 났다.
그 뒤에 괴력난신을 잡을 때도 또 한 번.
그리고 지금.
"쯧."
김현우는 짧게 혀를 차며 주웠던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물론 이 증거가 엄청난 지금부터 김현우가 벌일 일에 엄청난 면죄부를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다, 다 그렸어요."
김현우가 그렇게 기다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굉장히 피곤한 표정으로 마법진의 완성을 알린 아냐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 괜찮냐?"
"네…네. 저는 괜찮습니다…."
김현우의 말에 아냐는 굉장히 피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곧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지금 바로 이동 준비할까요?"
아냐의 말에 김현우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함께 아냐는 마법진을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보라색의 마력과 함께 가동되기 시작하는 마법진.
"위치는 아레스 길드 앞으로, 아까도 말했으니까 알지?"
"네, 알고 있어요."
그와 함께 진한 빛을 뽐내기 시작하는 아냐의 보라색 마법진.
김현우는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아냐를 향해 스마트폰을 던졌다.
"이…… 이건?"
"그거 서연이한테 전해줘라. 꼭 들고 있으라고."
"네……! 완전가동 합니다!"
그의 말에 왠지 핼쑥한 표정인데도 묘하게 활기찬 대답을 한 그녀는 곧 마법진을 완전가동했고, 그와 함께 김현우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하얀 점멸이 사라졌을 때,
"……?"
김현우는 자신이 어딘가로 순간이동 했다는 것을 깨닫고 시선을 돌렸다.
슬슬 회복되기 시작한 시야는 주변의 사물을 판단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우는 자신이 어두운 공동 안에 소환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척 보기에도 굉장히 넓어 보이는 공동.
김현우는 순간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돌아보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뭐지? 아냐가 설마…….'
배신?
김현우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든 생각.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음 생각을 이어가려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김현우의 생각은 끊기고 말았다.
"이제야 왔군."
한 남자 때문에.
김현우는 들리는 목소리에 곧바로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너."
"반갑군."
그곳에는 한 남자. 마튼 브란드가 김현우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튼 브란드?"
"오, 나를 알고 있군."
그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서양인 치고는 치켜 올라가 찢어져 있는 눈매, 그 사이로 보이는 벽안.
아무렇게나 풀어져 있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이 조금 달랐지만 분명 그는 김현우가 이곳에 오기 전 뉴스를 통해 얼굴을 확인했던 그 마튼 브란드가 맞았다.
김현우는 웃으면서 응수했다.
"알다마다."
"그래?"
"그래, 당연히 알지. 나를 조지려고 몇 번이나 암살자를 보냈는데, 이거 어쩌나?"
오히려 나를 조지지도 못하고 자기들이 전부 뒈져 버렸는데.
김현우가 짓궂은 미소를 띠며 브란드를 도발했으나,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 그 정도야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 애초에 '기사단'이 자네를 죽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거든."
"그래? 그런데 왜 그렇게 쓸데없는 힘을 소모하셨을까?"
응?
김현우가 묻자 그는 대답했다.
"겸사겸사 기사단도 처리할 겸. 자네의 정체에 대해서도 좀 알아봐야 했거든."
"뭐?"
"자네의 정체 말일세. 그래, 뭐 이를테면-"
브란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이 9계층의 '수호자'라는 정체 같은 것 말일세."
브란드의 말에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굳히고는 곧바로 자신의 스킬인 정보권한을 사용했다.
[확인 불가.]
곧바로 김현우의 눈앞에 떠오른 확인 불가 표시.
그리고 곧 [확인 불가.]라는 로그가 김현우의 눈앞에 떠올랐다는 것은 자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바로 '등반자'라는 것을 의미했다.
기사단에게서 나오는 아티팩트가 일반적인 다른 아티팩트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레스 길드와 등반자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긴 했었다.
허나 '등반자'가 아레스 길드의 길드장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야, 설마 '등반자'가 아레스 길드장일 줄이야."
마침 잘됐네.
김현우의 말에 브란드는 말했다.
"왜 그러지?"
"안 그래도 등반자도 찾아야 했고. 너도 존나 밟아 줘야 했는데 두 번 일할 거, 이왕이면 한 번 일하는 게 좋잖아?"
김현우의 물음에 그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역시 자신감은 높군. 역시 '등반자'를 두 명이나 막은 사람답다고 할까. 아주 자신감이 넘쳐흐르다 못해 터지는군."
그런데 말이야-
"내가 굳이 아레스 길드 본사 쪽으로 순간이동을 하는 자네의 마력 좌표를 강제로 빼앗아 내 앞으로 데려온 이유가 무엇일 것 같나?"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을 여는 브란드.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뭐긴 뭐야, 너도 다른 새끼들처럼 자신감이 넘쳐나서 불렀겠지."
"…뭐, 그래 어느 정도 맞기는 하지만, 내가 자네를 굳이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이곳'이 함정이기 때문이다."
"친절하시네? 그런 것까지 전부 알려주고."
"당연하지. 궁금한 게 있으면 전부 물어보게나, 어차피 곧 있으면 내 손에 죽을 텐데, 어지간한 건 전부 답해주지."
"지랄하고 있네. 너도 지랄병 환자냐?"
"왜 그렇게 생각하지?"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자시고, 너희들은 레퍼토리가 아주 똑같거든?"
"……레퍼토리?"
"그래 새끼야."
김현우는 비웃음을 머금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맨날 처음에 기습해서 등장하고는 아주 금방이라도 나를 죽여 버릴 수 있다는 듯 여유롭게 키득 거리다가 실제로 붙어보면 존나게 털려요. 아주 다 똑같아!"
맨처음 흑선우가 보낸 암살자부터 시작해서-
"고용했던 용병이랑, 흑선우 본인, 네가 보낸 기사단들이랑…… 그리고."
너까지.
김현우는 브란드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입가를 비틀어 올리자 그는 김현우와 마찬가지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래서, 자네가 보기에는 나도 비슷하게 보인다 이 말인가?"
"두말하면 입 아프지."
김현우의 반응에 그는 재미있다는 듯 큭큭 소리가 나게 웃더니 대답했다.
"정말로?"
"입 아프게 하지 마라."
그의 대답에 슥 하고 웃음을 브란드.
김현우는 그 말을 끝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형환위로 발휘된 김현우의 신형이 한순간 거대한 공동을 가로질러 브란드의 앞에 나타났고, 김현우는 곧바로 브란드의 심장을 향해 정권을 꽂아-콰가가가가각-
"오."
"……?"
넣으려 했다.
김현우는 브란다의 바로 앞에서 무언가에 막혀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주먹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고, 곧 그의 앞에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리어?"
"그런 저급한 마법과는 다르지."
꽝!
그와 함께 브란드를 감싸고 있던 무엇인가가 터져 나갔다.
거대한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간 배리어에 김현우는 곧바로 신형을 뒤로 젖혀 방어했고, 곧-
"!"
김현우는 자신의 주변에 떠 있는 무수한 양의 무기들을 보며 인상을 굳혔다.
검, 도, 도끼, 창, 철퇴, 단검─그 외에 그조차도 제대로 사용법을 모를 것 같은 수많은 무기가 그에게로 쏘아지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곧바로 몸을 틀어 무기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 그럼 우리 '수호자'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하도록 하지."
마튼 브란드, 아니 이제 오롯이 '등반자'의 모습을 갖추게 된 그는 김현우를 바라보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그의 모습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분명 방금만 해도 정장 차림이었던 그는, 어느새 누가 봐도 찬란히 빛날 것 같은 백색의 갑옷을 입은 채, 양손에는 각각 창과 칼을 쥐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다리에는 검은 마력을 비틀어 올리는 신발.
양 손목에도 각각 다른 형태의 보호대가 착용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그가 손가락에 끼고 있는, 보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의 많은 반지였다.
제각각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반지는 모조리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끼워져 자신을 빛내고 있었다.
그런 손으로 무기를 잡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지경.
"나는 이치를 탐구하고 골자를 탐하는 자."
그의 말에 따라 분명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무수히 많은 무기들의 그의 주변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힘이 없는 그 어느 이에게는 신물(神物)로-"
헤아릴 수도 없는 숫자들의 무기가 일제히 거대한 공동 안을 가득 채우고-
"힘이 있는 다른 이들에게는 패악(敗惡)으로 존재했다."
공동 안을 가득 채운 무기들이 일제히 무기의 날을 김현우에게로 돌린다.
"누구에게는 없는 힘을 만들어주는 수호자 였지만-"
마치 수백, 수천 명에게 둘러싸여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가 앞을 봤을 때, 마튼 브란드- 아니, 등반자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또 다른 이들은 나를 근본 없는 파괴자라고 칭했다. 그렇기에-"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복제자(Faker)라고 불렸지."
그와 함께, 김현우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무기들을 보며 몸을 움직였다.
# 74
074. 복제자(Faker) (2)
"!!!"
쾅! 콰가가강! 쾅!
김현우의 신형이 사라지고, 그가 있던 곳에 수많은 무기가 내리꽂힌다.
어떤 것은 지상과 충돌하며 땅을 얼리기도 하고, 어느 것은 폭발을 일으킨다.
그 이외에도 수많은 무기가 지반과 부딪혀 내는 효과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곧바로 이형환위를 사용했다.
그러나-
"어딜!"
마치 김현우의 움직임을 전부 보고 있었다는 듯, 김현우가 도약하는 루트에 따라 하늘에 떠오른 무기들을 투척하는 복제자.
수십 가지의 무기들이 김현우의 신형을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흡……"
김현우는 그 즉시 다시 한번 도약했다.
이형환위를 사용하고 있던 김현우의 몸에 마력의 도약력까지 겹쳐지자 복제자의 무기는 김현우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 채, 땅바닥에 박혔다.
그리고-
"!!"
그 찰나의 순간. 복제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현우는 곧바로 기술을 사용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가 주먹을 들어 올리는 찰나의 순간에도 이미 그는 김현우가 눈앞에 도달했다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공격을 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떤 것을 사용해야 할까.
일순 김현우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간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그의 몸에는 아까와 같은 배리어가 쳐져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클라이맥스로……!'
김현우는 곧바로 기술을 준비했다.
그의 몸에 검붉은 마력이 증기처럼 뿜어져 나오고, 그 뒤를 따라 검붉은 날개가 솟아 나온다.
'수라무화격은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김현우는 그런 생각을 머릿속 구석으로 날려 버리며 혈도를 통해 마력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의 등 뒤로 만들어진 검은 흑원과 검은 날개는 뒤늦게 김현우의 뒤로 날아오는 무기들을 방어했고, 김현우는 그와 함께 몸을 뒤로 내빼는 복제자를 바라봤다.
몸을 뒤로 빼는 와중에도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복제자.
김현우는 마주 웃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김현우의 신형이 일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이고, 검붉은 마력이 그의 다리로 몰려 들어간다.
"이것도 버티나 보자, 이 새끼야."
그와 함께 찰나의 순간 복제자의 앞에 도착한 김현우는 오른쪽 다리에서 엔진처럼 터져 나오는 검붉은 마력을 받아들이며 발을 차올렸다.
극-
순간적으로 눈앞에 닥치는 김현우의 공격에 복제자의 시선에 묘한 감탄이 어린다.
패왕-
김현우의 다리가 등반자의 배를 노리고 날아들어, 마침내 처음 김현우의 공격을 막아냈던 배리어에 도착한다.
콰가가가가각! 쩌저저저저적!!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가벼운 소리를 내며 짓이겨지는 배리어.
괴신격-!
그리고 배리어가 모조리 박살 났을 때쯤, 김현우는 임계점에 도달한 마력을 다시 한번 터뜨리며 복제자의 복부를 차올리려 했고-
"마력동결-"
마력이- 사라졌다.
김현우의 혈도를 타고 흐르던 마력이 발출이 막힌다.
사방으로 터트리고 있던 검붉은 마력이 단 한 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의 복부를 노렸던 김현우의 발에 힘이 사라진다.
그리고-
"대단하군. 이 공격을 준비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 초도 되지 않는데 이 정도의 출력이 나올 줄이야."
틀림없이 그의 복부를 차올렸던 김현우의 발은, 어느새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무슨…!"
쾅!
김현우의 탄성에 복제자는 대답하지 않고 김현우의 배를 쳐올렸다.
"큭!?"
그와 함께 뒤로 튕겨 나간 김현우는 몇 번이고 땅바닥을 구른 후에야 간신히 자세를 잡고 복제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김현우가 욱신거리는 배를 붙잡고 그를 바라보자, 더없이 여유로워 보이는 그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놀랐나?"
"이게 무슨……!"
김현우는 마력을 일으키기 위해 몇 번이고 몸 안에 있는 마력을 끌어 올리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그의 마력은 마치 봉인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열심히 마력을 움직이려고 해봤자 소용없네. 지금 이 공동은 마력동결 상태거든."
"뭐라고?"
"잘못 들었나? 내가 '마력동결' 상태라고 말하지 않았나."
복제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김현우, 나는 자네를 잘 알고 있지. 그리고 자네의 강함도 파악하고 있어."
나는 줄곧 예전부터 이 자리에 앉아서 '수호자'를 찾고 있었으니까.
복제자는 그렇게 말하며 비틀어 올린 입가를 한층 더 끌어 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의 강함은 이례적이지. 나도 인정하는 부분일세. 그런데 설마 자네의 전투 스타일까지 따로 파악한 내가, 정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자네를 내 앞에다가 끌어 놨다고 생각하나?"
아니, 아니지-
"자네를 죽일 준비는 완벽해. 앞서 있었던 두 번의 전투, 그리고 기사단의 전투를 통해 나는 자네를 어떤 식으로 상대해야 할지 정했네."
그게 뭔 줄 아나?
그는 자아도취에 빠졌는지 키득키득 거리는 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바로 지금 자네가 보는 대로 '마력동결'일세. 자네의 모든 기술은 '스킬'이 아니라 무술이라고 했지. 그리고 자네가 사용하는 무술들은 무조건 마력을 사용하지."
만약 자네가 아티팩트라도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자네는 자신의 몸을 맹신한 나머지 아티팩트를 단 하나도-"
"쫑알쫑알 존나게 시끄럽네."
"……."
김현우의 말에 의해 끊긴 복제자의 말.
그는 입가에 짓고 있던 웃음을 슬쩍 지운 채 김현우를 바라봤고, 혀를 차더니 말했다.
"그래서, 마력을 동결하면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마치 비웃음을 짓듯 물어오는 김현우의 모습에 복제자는 슬쩍 얼굴을 굳히려다 이내 표정을 풀고는 말했다.
"그래, 이곳은 이미 마력이 동결되었다. 너는 네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 대부분을 봉인 당한 거나 마찬가지지. 그런 상태에서 네가 뭘 할 수 있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 그는 멍하니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군. 이 지역 전체가 '마력동결'에 걸렸으니 너랑 나는 피차 차이가 없을 거라고."
"그럼 아니야?"
"그래, 맞지 나도 지금 이 공간에서는 '마력'을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툭-투두두두두둑! 툭! 쿠구구구구궁!
복제자의 말과 동시에 땅바닥에 박혀있던 무기들이 다시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하고, 김현우의 표정이 다시 굳어질 때쯤. 그는 말했다.
"아티팩트는 사용할 수 있지."
솨아아악-!
"……!"
그와 함께 시작된 무기들의 투척.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이형환위를 시도하려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마력을 느끼며 급하게 몸을 도약했다.
쿵! 콰가가강!
김현우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땅바닥에 꽂히는 무기들.
복제자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내 소개를 했을 텐데? 나는 '복제자(Faker)'다.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이던, 내가 보기만 했다면 나는 전부 복제할 수 있다.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하나하나가 위대한 신화와 업적을 품고 있는 아티팩트까지.
"-전부 복제할 수 있지."
꽝!
"큭!"
미처 피하지 못한 철퇴가 김현우의 어깨를 때리고, 김현우는 신음성을 흘리면서도 회피를 이어나갔다.
'이런 미친!'
김현우는 자신의 몸에 가해진 충격. 그리고 조금 전 철퇴에 맞았던 오른쪽 어깨가 박살 난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만약 자네의 내구를 믿고 무기에 정면으로 대항하려는 생각은 하지 말게. 그 무기들은 모조리 S+이상, 하나하나가 신화와 업적을 품고 있는 아티팩트들이니까."
자네의 몸에 타격을 주기는 쉽지.
마치, 나레이션을 하듯 키득키득하며 아티팩트명까지 말해주는 그.
김현우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씨발……!'
꽝! 콰가강!
김현우는 공동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무기를 피해 다니면서도 끝없이 생각을 이어나갔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현재 있는 곳은 제대로 위치조차 파악되지 않은 지하공동.
'탈출할까?'
시선을 이리저리로 흔들었으나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땅굴이나 천장을 뚫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이렇게 무기들이 투척되는 상황에서는 마찬가지로 무리.
천장을 뚫으려면 잠시나마 힘을 모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김현우의 시선이 수많은 투척 무기들을 뚫고 그 너머에 있는 복제자에게 닿는다.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복제자.
"흡……!"
김현우는 자신을 향해 투척 되는 무기를 그대로 회피한 뒤, 곧바로 벽을 박차고 복제자에게 뛰어들며 그를 파악했다.
그는 마치 재롱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김현우의 눈에 이미 그 모습은 들어오고 있지 않았다.
김현우가 찾는 것은 그의 약점.
'어디지, 어디야…!'
그의 눈알이 어지럽게 굴러가고. 이내 김현우의 눈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저기…!'
시선이 멈춘 곳은 바로 그가 쥐고 있는 창.
그가 쥐고 있는 창에서는 정말로 미미하게 묘한 금빛의 아지랑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저 창이 무슨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목표를 '창'으로 잡았다.
'배리어는 아직도 있을 거야.'
처음부터 김현우의 공격을 막아냈던 배리어.
단 두 번의 공격으로 김현우는 대충 배리어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했다.
그렇기에-
'그래도, 저 정도라면 억지로 뚫지 못할 건 없다.'
김현우는 곧바로 결정을 끝내고, 그의 앞에 착지했다.
복제자의 앞에 착지한 순간, 투척부기들이 일제히 그가 착지했던 복제자의 앞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와 함께 자욱해진 흙먼지.
김현우는 기다렸다는 듯 제자리에서 점프했다.
한순간 천장이 닿을 정도로 높이 뛰어오른 김현우는 이번에는 몸을 돌려 천장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흡!"
꽈가강!
김현우는 곧바로 다리에 힘을 주어 등반자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순수한 다릿심으로 지반을 향해 쏘아진 김현우는 그 짧은 시간에 자세를 잡았다.
그가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무협 소설에서 나온 '각법'을 위주로 사용하는 주인공.
그는 자신의 지하공동에서 자신의 라이벌인 혈마를 죽일 때, 이 각법을 사용했다. 물론 마력을 사용할 수 없어 김현우의 생각대로 그 기술이 펼쳐지지는 않겠지만-
"천뢰(天雷)-"
김현우는 마력이 없어도 이 기술이 복제자의 배리어를 깨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신각(神却).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빙그르 돌며 복제자의 머리를 내리치고-꽈아아아아아앙!!!!!
거대한 굉음이 공동에서 터져 나왔다.
발꿈치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김현우는 배리어가 깨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본능적으로 놀고 있던 오른발을 이용해 복제자가 창을 들고 있었던 곳을 향해 발을 휘둘렀다.
그리고-
"!!"
"공격이 먹히지 않아서 유감이군."
그 먼지 구덩이 속에서, 복제자는 자신의 창을 이용해 김현우의 공격을 막아내곤 곧바로 휘둘렀다.
깡!
깔끔한 소리와 함께 김현우의 몸이 뒤로 밀려나고, 복제자는 재미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봐도 대단하군. 마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내 배리어를 깨버릴 정도로 강한 일격이라니. 솔직히 조금 얕봤어. 그리고 자네의 눈썰미도 말이야. 그러니까-"
나도 자네에게 경의를 담아 내 기술을 보여주도록 하지.
그와 함께 복제자의 검이 빛나기 시작했다.
김현우의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환하게 빛나는 검.
"이 검은 '용사 아스쿠란의 성검'이라는 아티팩트일세. 이름대로 3계층의 어느 용사가 쓰던 검이지."
이 검의 재미있는 점이 뭔 줄 아나?
"이 검은, 무기의 스킬을 빌려올 수 있네. '용사는 항상 동료들과 싸운다'라는 신화가 껴 있어서 말이야. 그리고 그걸 활용하면, 이렇게도 쓸 수 있지."
그와 함께 그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가속, 극가속, 초가속, 이중가속, 극점, 이중극점, 나선, 일격, 초일격, 이중일격, 강화, 초강화─"
계속해서-
"폭발, 발화, 초폭발, 화극점, 비일극점, 연쇄, 이중연쇄, 중독, 극중독, 은복검 , 속검 , 창신검."
열린다.
수많은, 김현우는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한 스킬들이 복제자의 입안에서 끊임없이 나열되고 정립되어 시스템에 흘러 들어간다.
시스템에 흘러 들어간 언령은 그대로 복제자에게 힘으로써 치환되어 그를 뜻에 따라 강화했고-
"시작하지."
복제자가, 움직였다.
# 75
075. 복제자(Faker) (3)
"내…내가 알고 있는 건 이게 전부 다야……!"
"……."
"살려줘! 살려줘!!"
패도길드 지하에 있는 뇌옥,
그곳에서, 미령은 마력 구속구를 차고 던전 내의 식인 쥐들에게 쉴 새 없이 몸을 뜯어 먹히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바로 어제, 몰래 패도길드에 잠입했다가, 미령에게 걸린 3번이었다.
3번은 온몸이 쥐에게 뜯어 먹히고 있는 와중에도 그의 앞에 서 있는 미령을 보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왜! 왜! 풀어주지 않는 거야! 풀어줘! 풀어 달라고!"
3번의 비명. 식인 쥐들이 자신의 몸을 갉아 먹는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3번은 마치 물 밖에 있는 생선처럼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쥐는 떨어지지 않았다.
"끄아아아악!"
오히려 더 심하게 그의 몸을 붙잡고 늘어질 뿐.
그런 상황 속에서 미령은 쥐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는 3번을 보며 말했다.
"내가 왜 너를 풀어줘야 하지?"
"무…무슨! 분명 정보를 말하면 풀어준다고……!"
"그건 그냥 네가 멋대로 해석한 이야기일 뿐이지 않나?"
미령의 비웃음에 그의 표정이 일순간 퍼렇게 굳었고, 미령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아는 정보를 풀어 놓으라고.'
, 나는 이 말밖에 하지 않았다."
"그런…그런 궤변을……!!"
3번의 말에 미령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그래도 고마워는 하거라. 원래 마음만 같아서는 패도길드에 무단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네 녀석을 곧바로 죽여 버리려 했다만-"
미령은 3번의 눈가 아래에 있는 숫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혹시 스승님이 또 다른 정보제공자를 찾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스승님 덕분에 부지한 목숨을 잘 지키고 있어봐라."
키득-
"만약 스승님이 너를 살려보내라 명하면- 그 명줄을 살아날 수도 있겠지."
미령은 어느새 광기 섞인 웃음을 지으며 3번을 바라봤다.
***
"!!"
복제자의 신형이 순식간에 김현우의 앞에 도달한다.
김현우는 복제자의 신형이 앞에 도달함과 동시에 그의 검이 하늘 높이 치켜 올려지는 것을 바라봤고,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
복제자의 공격을, 김현우는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은 복제자의 공격을 정확히 캐치하고 있었다.
일순 신형이 사라졌을 때는 미처 따라잡지 못했지만, 그의 앞에서 오른 팔을 움직여 검을 들어 올리는 것까지는 확인했다.
그런데도, 김현우는 그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
왜?
'몸이 따라주지를……!'
마력동결.
그것은 김현우의 발목을 붙잡다 못해 끌어안고 있었다.
복제자의 검이 김현우의 머리 위로 내리쳐지고, 김현우는 필사적으로 몸을 비튼다.
그런데도 느리다.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력이 막힌 신체는 김현우의 의지를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
그리고-
콰득! 꽝!
"끅!!"
김현우의 어깨 끝에 닿은 검이 그의 몸에 닿음과 동시에 폭발을 일으켰다.
어깨로부터 시작된 고통이 순식간에 신경을 타고 뇌로 올라가 위험신호를 전달했고, 김현우는 고통에 이를 악물면서도 곧바로 다음 공격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런 씨발-!'
이미 김현우의 앞에는 복제자가 어느새 김현우에게 철퇴를 내리찍고 있었다.
"이건 아라곤의 철퇴야."
빙결 속성이 걸려있지.
꽝!
"또 이건 이클립스의 신창이다."
찔리기만 하면 상처부위에 끔찍한 화상을 새겨준다.
푸욱!
"아라크네의 단검."
자네의 혈도에 끊임없이 독이 돌게 될거야.
촤악!
그 이외에도 자신의 손에 있는 무기를 순식간에 바꿔 든 복제자는 그야말로 일방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김현우의 몸을 공격해 나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김현우는 누적되는 데미지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필사적으로 그의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른 어깨를 뒤튼다.
늦어서 살이 베였다.
배를 향하고 찔러오는 창을 손으로 비틀어낸다.
밀고 들어오는 힘이 강해 결국 오른손을 내주어야 했다.
옆구리를 노리고 단검이 들어온다.
옆구리 대신 팔뚝을 내주었다.
회피하지 못했다.
김현우는 그저 복제자가 휘두르고 있는 모든 공격을 최소한의 피해로 받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
"이게 마지막이다."
김현우의 몸이 완전히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때, 복제자는 김현우의 앞에 그 무기를 꺼내 놓았다.
그냥 세우기만 해도 높은 공동의 천장에 그대로 닿을 것 같은 거대한 무기.
형태는 검의 형을 띄고 있었지만, 그것은 엄연히 말해서 검이 아닌 몽둥이와도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건 내가 유일하게 '복제'하지 않고 원본 그대로를 가지고 있는 무기지."
거검(鉅劍) 기간토마키아.
복제자는 자신이 들고 있는 무기의 이름을 중얼거리곤,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잘 가라. 김현우."
쿠구구구구궁-
그와 함께, 비정상적인 크기의 거검이 김현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매우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거검.
검의 크기 때문인지 공동 내의 대기가 덜덜 떨리고, 김현우는 그 상황에서 빠르게 떨어져 내리는 거검을 보며 몸을 움직였고, 이내-쾅! 콰가가가강 콰아앙!!
지상과 맞닿은 거검이 공동 전체를 휩쓸 정도의 폭발을 일으켰다.
김현우와 복제자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고, 곧 김현우의 몸 여기저기에 끔찍한 고통이 새겨진다.
마치 수십 명이 몸 여기저기를 수없이 난타하는 기분에 김현우는 이를 악물었고, 곧 그 폭발이 끝난 순간.
"아직도 살아 있다니, 역시 조사한 대로 자네의 내구 능력치는 상상 이상인 모양이군."
"……."
김현우는 서 있었다.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이미 상의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져 있었고, 탑에서 시간을 들여 단련한 몸의 근육 사이사이에는 끔찍한 상처들이 자리했다.
무언가에 찔린 자국부터 시작해 몸 곳곳에는 피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또 다른 곳은 마치 피멍이 들어있는 것처럼 검퍼렇게 물들어 있기도 했다.
오른손은 붉은 피 대신 노란색의 중독액이 뚝뚝 흘러 나왔고, 왼 팔뚝에는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온다.
만신창이라고 하는 게 맞을 정도로. 김현우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 상황에서 복제자는 무기들을 움직였다.
그의 주변으로 공명하듯 회전하며 떠오르는 무기들.
수십, 수백 개의 무기가 부서진 공동 안을 부유하며 떠오르고, 이내 무기의 창날을 김현우에게 겨눈다.
그 누가 보더라도 다음 장면이 예상되는 그 상황에서,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씨발."
온몸에 느껴지는 욱신거리는 고통.
오히려 그 고통 덕분에 김현우는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있는 그를 바라봤다.
누가 보더라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은 그의 얼굴에 김현우는 물었다.
"야, 뭐 하나 물어보자."
김현우의 말에 복제자의 표정이 순간 오묘하게 변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갑자기 순한 양이 되셨군."
복제자의 비아냥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김현우. 그는 이내 슬쩍 흥미가 식었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지만, 이내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인데 한번 들어보기라도 하지."
복제자의 말에 김현우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너는 왜 나를 죽이려 하지?"
김현우의 물음에 복제자는 쓱 웃으며 대답했다.
"뭘 물어보나 했더니, 목숨을 빌고 싶어서 짖는 거였나? 그래 뭐…대답해 주도록 하지. 정답은 바로 너를 죽여 놔야 이 계층을 멸망시키는 게 훨씬 편할 테니까."
"……너희들은 다음 계층으로 왜 올라가려 하는 거지?"
이유가 뭐야?
김현우의 물음에 복제자는 계속해서 답했다.
"그것도 대답해 주지. 우리, 그러니까 등반자가 너희들을 짓밟으면서 올라가려는 이유는 바로 '좌'에 앉기 위해서다."
"뭐…?"
김현우는 그의 대답에 되물었으나 복제자는 그 이상 대답하지 않고 손짓했다.
순식간에 주변을 유영하던 수천 개의 무기가 금방이라도 쏘아질 듯 자세를 잡고.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충실히 대답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슬슬 끝을 내도록 하지."
"…끝이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주변에 떠 있는 무기들을 바라보았다.
하나하나가 S+등급의 무기들.
밖에 있는 무기들과 다르게 스치기만 해도 김현우의 몸에 치명상을 남기는 무기들을 보며 김현우는-
"이 템빨충새끼."
조금 전까지의 진중한 표정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
"아니야? 자기 마력도 봉인하면서 템 둘둘 마는 게 템빨충 아니면 뭔데?"
김현우의 이죽거림.
미소가 사라졌던 김현우의 입가에 다시 웃음이 생겨나는 모습을 본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죽을 때가 되니 미쳐 버렸군."
"템빨충 새끼 템으로 이겨놓고 존나게 폼 잡네."
"그렇게 입을 나불거리는 것도 끝이다."
"끝은 씨발 니미다 새끼야."
내가 진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너한테 물어봤겠냐?
김현우의 이죽거림에 복제자의 얼굴이 순간 찌푸려진다.
"무슨?"
"무슨이긴 무슨이야 씨발아. 너도 템빨로 이득 좀 봤으니. 나도 마땅히 내 권한을 사용하는 거지."
그와 함께 김현우의 몸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력.
분명 마력동결이 일어난 이 지역에서 김현우의 몸은 마력으로 덮이고 있었다.
"무슨!?"
이번엔 복제자가 경악을 터뜨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허공을 유영하고 있는 무기 중, 스태프로 되어있는 무기를 바라봤다.
아직까지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절대 동결의 지팡이'
'마력동결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리고 곧, 복제자는 김현우의 몸 속에서 나오고 있는 마력이 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곧바로 창을 조작해 무기들을 쏘아 보내려 했으나-
"킥킥-"
김현우는 그런 복제자를 보며 노골적인 비웃음을 지은 뒤, 톤을 높여서 말했다.
"야, 정보 고맙다? 거기에 더해서 네가 어떻게 싸우는지 알려줘서도 고맙고. 그러니까-"
복제자의 명령에 따라 허공을 유영하던 무기들이 김현우에게 쏘아진다, 일반적인 사람은 쳐다볼 수도 없는 빠른 속도.
거기에 아직 스킬이 풀리지 않은 복제자가 달려나갔지만-
"다음에 보자. 템빨충 새끼야."
김현우는 누가 봐도 조롱 섞인 웃음을 지으며-
"출입-"
그와 함께 김현우의 몸이 환하게 빛난다.
그가 굳이 복제자에게 말까지 걸어가며 시간을 끌었던 이유.
그것은 재사용 대기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출입 스킬때문이었다.
이미 어제 한번 출입을 사용한 김현우는 일정 시간 동안 스킬을 사용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조금 전 공격을 당하기 전까지도 최대한 버티기만 하며 출입의 대기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이익!!!"
무기들이 그의 몸에 도착하기도 전에 김현우는 환한 빛과 함께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이런 씨발새끼가……!!"
복제자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지며 쏘아진 무기 중 하나를 자신 쪽으로 불러드렸다.
그가 불러들인 '브라삭스의 차원 단검'
"이동 좌표 확인."
3계층의 수호자의 무기이자, 마법과 증기기관이 발달했던 그곳에서 만들어진 '브라삭스의 차원 단검'은 이동류의 마법을 사용한 상대방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따라간다……!'
복제자는 이를 악물며 좌표를 확인했다.
이 마력동결 지역을 빠져나간다고 해도 이미 김현우의 몸은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지금까지 복제자가 죽이면서 골자를 해석하고 분석한, 모든 영웅들의 무기는 김현우의 몸에 끔찍한 상처를 남겼다.
'지금 죽여야 해, 지금!!'
복제자의 눈이 일순 조급함으로 물들고 눈앞에 떠오른 로그를 초조하게 바라봤지만-
곧-
[상대방의 이동 좌표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씨바아아알!!!!"
복제자는 눈앞에 떠오르는 로그에 신경질을 내며 쥐고 있던 단검을 던져 버렸다.
# 76
076. 복제자(Faker) (4)
어두운 대공동.
분명 처음만 해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그곳은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여기저기 패이고 사라진 흔적들이 여실하게 남아 있었으며, 공동의 절반은 사람이 깎아 놓은 게 아니라 그냥 동굴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불규칙하게 박살 나 있었다.
그런 대공동 안에서, 한 남자는 서 있었다.
'아직, 아직이다.'
복제자.
바로 몇 시간 전까지 김현우를 상대하며 이 대공동을 박살 낸 복제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앞의 벽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벽 앞에 은은히 흐르고 있는 한 줄기의 마력 가닥을 보며 그는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마법에 숙련된 헌터라고 해도 볼 수 없는 가벼운 마력 실.
그러나 복제자는 아이템의 힘으로 이 공동 내에 남아 있는 가벼운 마력 실을 볼 수 있었다.
'저건 틀림없이 순간이동의 이정표다.'
순간이동은 한없이 복잡한 마력구조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간단하게 말하면 좌표와 좌표를 마력으로 이어 공간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거기에 사용되는 게 마력 실.
그런데 좌표와 좌표의 이동을 이어주면 사라져야 하는 마력실이 김현우가 순간이동 한 그곳에는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틀림없다.'
그리고 거기에서 복제자는 확신했다.
'이 녀석은, 어딘가로 텔레포트한 게 아니라, 아공간에 숨어든 거다.'
김현우가 어딘가로 순간이동 해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만이 틀어박힐 수 있는 종류의 반 안에 숨어든 것이라고.
물론 평범한 헌터나 등반자라면 그것을 알아채기 어려웠다.
마력 실을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상황을 추론하는 데까지에 있어서 필요한 지식은 방대했다.
5계층의 '대마법사'라고 불렸던 수호자도 순간이동이라는 마법에 대해 제대로 파헤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가능해, 알 수 있다.'
복제자는 가능했다.
그에게는 수많은 아티팩트가 있었다.
비록 복제품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한없이 진품에 가까운 복제품.
심지어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아티팩트들이 아닌, 하나하나가 영웅과 수호자들의 장비였던 무기와 장비들이었다.
그 하나하나의 업적이 칭송받고, 그 하나하나의 전승이 힘이 되어 시스템에게 인정을 받은 아티팩트들은 모조리 복제자의 손안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아티팩트의 힘을 이용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나마 이 상황을 빠르게 추론하고 김현우가 아공간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는 허공을 유영하는 수십, 수백 개의 무기를 조용히 회전시키며 다시 한번 마력 실을 노려보며-
'이다음에 나올 때가 네 목숨이 완전히 끝날 때다.'
홀로 뇌까렸다.
***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방 안.
허나 아브의 방안은 저번에 김현우가 마지막으로 인테리어하고 나간 방과는 전혀 달랐다.
보이는 것은 마치 자연동굴 같은 경관.
방 자체가 그리 크지 않아 그렇게 멋진 경관이 나오지 않았으나 아브는 김현우에게 들어서 그가 투영한 이곳이 어느 곳인 줄은 알았다.
'튜토리얼 탑의 1층.'
그렇다.
김현우가 현재 인테리어 버튼을 써서 조성해 놓은 풍경은 튜토리얼 탑의 1층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브는 저 멀리, 혼자서 어떤 자세를 연습하고 있는 김현우를 보았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자세.
양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무엇인가를 하는 김현우를 보며, 아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
그녀는 불과 몇 시간 전, 갑작스레 김현우가 나타났을 때를 떠올렸다.
옷은 이미 완전히 넝마가 되어 있어 걸치고 있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온몸에서는 보기 끔찍할 정도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건 어느 정도 마력을 사용해서 치료된 것 같지만.'
현재 어떤 수련을 하는 김현우의 몸에서 아까 같은 심각한 상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유는 바로 이 인테리어 버튼으로 만들어낸 약품으로 응급처치를 하고, 그 이외의 부과적인 상처들은 김현우가 뭔지 모를 마력을 사용해 치료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치료가 완벽하게 된 것은 아닌지 굉장히 흉한 흉터들이 그의 몸에 새겨져 있었으나정작 김현우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차라리 포션이나 회복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다면 좋을텐데-'
유감스럽게도 인테리어 버튼으로는 '아티팩트' 나 '포션' 같은 것은 만들 수가 없었다.
만들 수 있는 건 응급처치용 약품들 정도.
게다가 김현우에게서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현재 김현우의 상황은 굉장히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아브로서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등급의 등반자. 그러나 김현우의 말만 들어도 아브는 이번에 김현우와 싸우는 등반자가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티팩트를 마음대로 복사하는 등반자.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강한 적인데, 그 등반자는 심지어 아티팩트를 이용해 김현우의 마력을 봉인하는 방식으로 싸움을 이어나가는 것 같았다.
누가 보더라도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
아브의 입장에서 이 싸움은 일반인과 헌터가 싸우는 상황과 비슷해 보였다.
시스템의 축복을 있는 대로 때려 박아서 싸우고 있는 등반자.
그에 반해서 시스템의 축복 중 하나를 봉인 당한 채 싸우고 있는 수호자.
'게다가…….'
그녀는 슬쩍 시선을 돌려 이 공간 안에 이질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나무문을 바라봤다.
'이제 가디언이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
아브는 이 시스템에 포함된 존재이기에 본능적으로 김현우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여기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이제 길어봤자 20분 남짓.
김현우의 정보 권한이 상위 이상이었다면 이곳에 며칠을 죽치고 있어도 상관없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김현우의 정보 권한은 중하위.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24시간의 4분의 1.
즉 6시간 남짓이었다.
그렇게 아브가 김현우를 걱정하고 있을 때.
"…끝났다."
드디어 응급처치를 할 때를 빼고는 줄곧 무언가를 연습하고 있던 김현우의 입에서 말이 튀어 나왔다.
"…뭐가 끝나요?"
아브의 물음에 김현우는 그저 씩 웃음을 짓고, 입을 열었다.
"수련."
"…수련이요?"
'아니, 분명 무슨 수련을 하는 것은 맞았던 것 같은데.'
아브는 김현우가 했던 수련을 떠올렸다.
분명 무슨 기수식이었던 것 같은데 딱히 그녀의 정보 권한으로 찾아본 무술과는 다르게 굉장히 엉성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정말로 괜찮을 걸까.'
아브는 그렇게 걱정하며 김현우를 바라봤으나 그는 아브를 보며 피식 웃더니 망설임 없이 문으로 걸어갔다.
"가시게요?"
"그럼, 가야지."
"아니……불리한 상황이니까 최대한 전략을 생각하고 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고작 10분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브는 뒷말을 삼키며 그를 바라봤고, 김현우는 문고리를 잡은 뒤 이내 시선을 돌려 아브를 바라보곤 말했다.
"전략은 딱히 필요 없어."
아까와는 분명히 다를 테니까.
김현우는 그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남은 문으로 들어갔고, 아브는 멍하니 문밖으로 걸어나가 하얀빛에 둘러싸이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복제자는 자신의 눈앞에 하얗게 빛나는 마력 줄기를 보며 기다렸다는 듯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그래, 네가 다시 올 줄 알았다……!'
속으로는 환희했지만, 김현우를 조롱하기 위해 입가를 비틀어 올렸고, 곧 그는 빛 속에서 걸어 나온 김현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체는 거의 좀비라고 해도 될 정도로 거즈를 칭칭 감아댄 모습이 복제자의 입가를 끌어 올렸다.
"다시 온 걸 환영하지."
"이새끼 웃긴 새끼네?"
허나 복제자의 귀에 들려온 것은 김현우의 욕.
"뭐?"
복제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자 김현우는 입가에 실실거리는 미소를 띠고는 복제자를 도발했다.
"아, 미안. 여기가 자기 묏자리인 줄도 모르고 실실거리는 게 웃겨서 그만."
김현우의 말에 한동안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있던 복제자는 이내 그의 조롱에 인상을 찌푸렸다.
'무엇인가 바뀐 게 있나?'
복제자는 그의 몸을 훑었다.
갖가지 아티팩트로 그의 몸을 디텍팅하고, 혹시 모를 아티팩트를 가져왔는지까지 확인했지만, 그의 몸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변화가 있는 건 아까 전의 심각한 상처들이 그나마 응급처치로 조금이나마 나아졌다는 것.
'허세다.'
그제야 복제자는 찌푸리던 인상을 다시 웃음으로 바꾸었다.
"아까 도망쳤던 놈이 죽고 싶지 않아서 허세나 부리다니…… 처음이랑은 너무 태도가 다르지 않은가?"
"쯧, 진짜 자기 묏자리인 줄도 모르고 염병하는 거 보니까 당장이라도 때려죽이고 싶네."
제발 허세 좀 그만 부려 새끼야.
"허세? 허세는 네가 부-"
"좆 까."
일방적으로 상대를 도발하듯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린 김현우의 모습에 비웃는 표정을 감춘 복제자는 이내 인상을 쓰곤 창을 휘저었다.
"그렇게까지 빨리 죽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주지."
복제자의 창이 한 번 휘둘러지고, 그와 함께 허공에 유영하던 무기들이 다시금 투척 되기 시작한다.
그 상황에서 김현우는 눈앞에 다가오는 무기들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김현우는 다시 한번, 아까 잠깐 떠올렸던 이미지와 함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랐다.
시간이 멈춘 것은 김현우가 탑 안에서 수련을 하고 있을 때,아니. 정확히는 거의 모든 무술을 수련하는 데 성공했을 때, 그가 마지막으로 몰두했던 무술을 수련했을 때로 거슬러 올랐다.
김현우는 탑 안에서 무술을 수련하며, 수십 수백 가지의 무술을 수련했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어느 것은 글 내에서 무술이 제대로 설명되어 있는 반면, 또 어떤 것은 글 내의 무술이 정확하게 서술되지 않아 김현우의 상상력으로 때워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또 다른 글에서는 무술은 제대로 표현되어 있는데 말 그대로 대사만 있을 뿐이라 무술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던 글도 있었다.
하지만 김현우가 마지막으로 수련하고 있던 무술은 그 두 개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을 거칠 것 없이 외부 동작이라면 김현우의 기억 속에도 확연히 존재 할 만큼 많이 나왔고, 웹소설에는 구무협 때부터 단골로 등장하던 무술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 어느 매체에서나 가리지 않고 나왔던 무술.
'이화접목(移花接木).'
그것은, 이화접목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무술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무공의 초식.
무공이라고 부르기에는 덧없고, 무술이라고 부르기에는 이치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그렇기에 무협지에서는 이화접목을 무공이나 무술로 말하지 않고 일종의 '묘리'로 설명한다.
그런 묘리에 가까운 이화접목을, 김현우는 제일 마지막으로 수련했고, 그가 무술을 더 이상 수련하지 않게 되었을 때, 김현우는 이화접목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채 수련을 그만두었다.
김현우가 이화접목을 깨닫지 못한 이유?
간단했다.
김현우가 이화접목을 아무리 수련한다고 해도, 결국 그는 그 묘리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김현우의 스승은 많았다.
김현우의 스승은 혼자 세계의 구원자가 된 무술인이기도 했고, 혼자서 만인 앞에 군림하던 천마이기도 했으며, 또 어느 누구는 만인의 존경을 받는 그랜드 소드마스터이기도 했고, 그 누군가는 신(神)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김현우가 '질문'을 할 수 있는 스승은 없었다.
그렇기에 깨닫지 못했다.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후…."
그래, 그때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김현우는 느릿하게 숨을 내쉬며 어느새 자신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는 검을 보았다.
날카로운 기세를 가지고 있는 검.
─허나 지금은?
김현우는 손을 들어 올렸다.
가볍게 들리는 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시스템 룸 안에 들어간 6시간, 그 짧은 시간 안에 김현우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천재라서 고작 6시간 만에 이화접목을?
아니다.
그게 아니다.
"후……."
김현우가 탑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쏟아부었던 그 시간.
그저 묘리를 깨닫지 못해 그 묘리에 나왔던 묘사를 수십 수백 수천수만 번 따라 했던 그 시간!
거기에 더불어 김현우가 탑 밖에 나옴으로써 상대했던 두 명.
'압도적으로 절제된 힘을 사용했던 천마(天魔)와'
'제멋대로 날뛰는 야성적인 힘을 사용했던 괴력난신(怪力亂神).'
그 둘의 전투를 경험 삼아,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었던 경외 적인 힘을 스승 삼아-
"스으-!"
-김현우는, 마침내 도달할 수 있었다.
스으으윽!
-그가 혼자서는 도달하지 못했던 콰가가각 쾅!!!!!
-이화접목(移花接木)의 묘리에.
# 77
077. 복제자(Faker) (5)
김현우의 몸이 기이하게 뒤틀리며 그에게 투척 되었던 검을 피해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쳐낸다.
쾅!
김현우가 정확히 밑면을 슬쩍 흘려 친 것만으로도 투척 경로가 비틀려 김현우가 있는 곳과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검.
그 모습에 복제자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김현우에게로 투척 되는 수십 수백의 무기들이 일제히 그를 노리고 날아든다.
한눈에 보기에도 어지러워 보이는 양.
그 어느 것은 동시에 그의 앞뒤를 공격하는 무기도 있었고, 또 어는 것은 시간 차를 두고 날아오는 것들도 있었다.
허나-
"스으으으-"
김현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양손이 어지럽게 움직인다.
분명 처음에는 양손을 어지럽게 움직이기만 하던 김현우는 어느새 기수식을 잡고 그 자리에서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기를 피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움직임.
김현우의 손이 움직이며 날아오는 무기들을 쳐낸다.
철퇴, 단검, 창, 칼, 도, 그 이외의 많은 무기는 김현우의 몸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미친……!"
그리고 그 상황에서 복제자는 스킬을 걸어 자기 자신을 강화하면서도 그런 김현우의 모습에 경악하고 있었다.
김현우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모든 무기를 그 양손으로 철저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같은 속도로 똑같이 날아오는 무기는 한쪽 무기를 쳐냄으로써 각도를 비껴 올려 다른 쪽을 쳐내고, 미묘할 정도로 다른 시간 차를 두고 오는 공격도 동선의 낭비 없이 한 번에 쳐낸다.
그야말로 누가 보면 기예와 우연이 연속된 것 같은 그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
분명 무엇 하나 바뀐 것은 없었다.
그의 온몸에 거즈가 감겨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몸에 있는 상처는 여전하다.
딱히 다른 아티팩트를 가지고 와서 능력을 올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복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김현우는 진정 그가 6시간 전에 보았던 그 김현우가 맞는가?
머리 한쪽으로 떠오르는 의문에 복제자는 이를 악물고는 스킬을 중첩해 나갔다.
그의 말에 따라 순식간에 여러 가지의 스킬이 중첩한다.
전승과 업적에 의해 무기에 부여되었던 수십 수백 가지의 스킬들이 복제자의 말에 의해 시스템에게 전해지고, 다시 그 힘이 복제자에게 차오른다.
"후……!!"
수십, 수백 개의 스킬이 중첩된다.
신체 강화에 관련된 수십 개의 스킬이.
시스템이 표기해주는 5개의 능력치를 압도적으로 끌어 올려주는 스킬들이 모조리 그의 몸속에 틀어박혀 복제자의 힘으로써 발현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6시간 전과 똑같은 힘을 가지게 된 복제자는 무기들을 튕겨내고 있는 김현우를 공격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복제자의 도약에 따라 지반이 터져 나간다.
마치 로켓엔진이 사출된 것처럼 주변의 지반을 모조리 때려 부수고 도약한 그는 순식간에 김현우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복제자의 눈이 부릅떠지고 그가 검을 뒤로 당긴다.
그 누가 보더라도 명확한 찌르기의 자세, 아까 전의 복제자는 김현우를 최대한 농락하며 죽이기 위해 간을 봤다.
그를 농락하기 위해 수십 개의 무기를 꺼내 그를 타격했고, 그가 자신의 힘에 농락당해 무릎을 꿇는 과정을 즐겼다.
하지만 지금은?
'이번에는 죽인다……!'
복제자는 진심으로 그를 일격에 죽이려 하고 있다.
그에게 더 이상의 여유는 없었다.
상황을 보면 유명한 건 아직도 복제자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킬로 인해 직감적으로 차오른 위기 본능에 따랐다.
오히려 김현우의 상태는 이전보다 좋지 않았다.
허나 그럼에도 복제자의 직감은 김현우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김현우를 죽이라고!
직감에 따라 최대 능력으로 폭발된 그의 찌르기가 김현우의 심장을 노린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김현우는 자신의 배 안으로 파고 들어온 복제자의 모습을 확인하고,
"……!!"
그 자리에서 피하지 않고, 그저 복제자가 찔러오고 있는 검을 향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찰나의 모습을 본 복제자는 오히려 그런 선택을 한 김현우를 비웃었다.
'이 공격을 고작 손 하나로 흘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멍청한 녀석!'
수백 개의 신체 강화 스킬로 무장한 복제자는 자신의 힘을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하며 검을 찔러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검이 김현우의 심장 지척에 다가가 때쯤, 그의 검면 위에, 김현우의 손이 닿았다.
그리고- 김현우의 손이 가볍게 튕겨지는 그 순간-
툭-
콰드드드득!
"!?!?!?"
복제자는 한순간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김현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복제자가 투척했던 검들은 이미 김현우의 손짓에 의해 전부 와해되어 김현우의 몸 대신 차가운 땅바닥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복제자는-
"끄-"
완전히 뒤틀리다 못해 박살 나버린 자신의 오른손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악!"
"시끄러워 씨발아-"
복제자의 비명과 함께, 김현우는 기회라는 듯 그의 몸 안에 파고 들어가 곧바로 기술을 펼쳤다.
마력은 필요하지 않은, 순수하게 그의 신체로만 펼칠 수 있는 기술.
극-
패왕경(?王勁)
꽈아앙!
"커-억!"
김현우의 패왕경이 배리어가 사라진 그의 몸에 그대로 꽂히고,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피를 토해낸다.
순식간에 저 너머로 날려진 복제자,쾅! 콰직! 콰드드득!
복제자의 몸이 사방에 박혀 있는 무기들 사이로 치여 날아가 지반을 부수고, 김현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듯, 저 멀리 날아가는 복제자를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
김현우는 곧바로 날아가고 있는 복제자의 몸에 또 한 번의 일격을 내리 꽂았다.
꽝!!
"끄아아악!"
날아가던 복제자의 목이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하며 폭발을 터트리고, 흙먼지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김현우의 시야를 가린다.
그 상황에서도 김현우는 복제자가 처박힌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 또 한 번의 일격을 가하려 했지만-
"쯧."
공격 시간은 끝났다는 듯 일제히 투척되어 무기들을 보며 김현우는 몸을 피했다.
쿠그그그그긍!
대기가 떨림과 동시에 복제자의 주변에 일고 있던 흙먼지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곧 보이는 복제자의 모습.
"허억…… 허억……."
그의 모습은 불과 몇 초 전과 다르게 무척이나 볼품없이 변해 있었다.
그가 입고 있던 황금의 갑옷은 여기저기가 찌그러져 있었고, 특히 배갑은 완전히 박살 나 있어 갑옷으로서의 효용을 잃어버렸다.
그가 검을 쥐고 있던 왼손은 아마 아티팩트의 회복 스킬로 인해 재생되고 있었으나 굉장히 흉해 보였고.
하늘에 떠 있는 무기들은 여전히 그의 주변을 비호 하듯 회전하고 있었으나, 이미 김현우의 눈에 복제자의 하늘에 떠 있는 무기들은 장식품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아주 씹창이 나셨네?"
김현우의 이죽거림에 복제자의 인상이 악귀처럼 찌푸려진다.
그를 만나고서 처음 본 복제자의 화난 얼굴.
"어우 화났어? 이거 참 미안해서 어쩌나? 응? 보답으로 빨리 죽여줄까?"
김현우가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복제자를 조롱하자 그는 까득 소리가 나게 이빨을 물더니 곧 말했다.
"네녀석…! 후회하게 해주마…!!!"
쿠그그그그그긍!!!
그와 함께 김현우가 밟고 있던 지반이 덜덜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복제자의 등 뒤로, 푸른 마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마력 줄기처럼 복제자의 등 뒤에 나타난 마력들은 여기저기 가지를 타고 뻗어나가며 허공을 유영하고 있는 무기들을 붙잡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 있는 무기들이 복제자의 마력에 의해 붙잡히고, 김현우가 무엇을 할 새도 없이 하늘에 떠 있는 모든 무기에 푸른 마력을 연결한 복제자.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마력을 움직이려 했으나, 그의 마력은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아티팩트인가.'
김현우의 눈이 가늘어졌을 때쯤, 복제자는 그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손 위에 거대한 검을 소환해 냈다.
거검(鉅劍) 기간토마키아.
도저히 한 손으로 들고 있다는 게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대검을 쥐며 복제자는 악의로 가득 찬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기간토마키아는 다른 무기의 보정치를 그대로 끌어 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지금 나는 여기에 있는 모든 무기의 보정치를 이 한 몸에 받고 있는 거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환희가 넘쳐 오르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 새끼 병신 아니야?"
김현우는 오히려 멍청하다는 듯 그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뭐?"
그의 표정이 찌푸려졌지만, 그와는 반대로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갑자기 내가 한마디 하니까 쫄려?"
"이……이이이익!!"
복제자의 표정이 더더욱 흉악하게 일그러지고, 김현우는 그와 함께 미소를 지으면서도 자세를 낮춰 복제자의 모습을 바라봤다.
복제자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말도 안 될 정도의 힘을 사방으로 흩뿌리는 중이었다.
마력이 아니었다.
무형의 기운.
마력도 아닌 무형의 기운이 복제자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의 몸에서 생기고 있는 이상 현상들.
그는 분노에 이끌려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김현우는 확실하게 그의 이상을 감지하고 있었다.
과도한 힘을 버티지 못하는 복제자의 육체를.
그러나 그런 육체를 제외하고서라도 복제자의 몸 안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기운은 김현우의 기세를 일부 누를 정도로 기괴하고 강대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김현우는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그가 어떻게 들고 서 있는지 모를 거대한 거검이 김현우에게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쿠그으으응───콰아아아아!!
거대한 거검이 그저 주변을 훑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질량의 소닉붐을 만들어내고, 도저히 튕겨 낼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거검이 김현우를 이 세상에서 지우기 위해 떨어진다.
마치 막아 낼 수 없는 거대한 유성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에 김현우는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김현우는 웃었다.
저 말도 안 되는 힘을 받아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김현우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김현우가 해야 하는 것은 저 유성을 맞받아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찰나의 순간- 김현우의 손 위로, 거대한 거검이 떨어져 내린다.
툭-쿠와아아아아아아아!!!!
질량이 폭력이 무엇인지 알려주겠다는 듯 모든 것을 깔아뭉개며 떨어져 내리는 거검.
모든 것을 먹어치우겠다는 듯, 사방의 지반과 벽,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모조리 무(無)로 되돌리는 기간토마키아가 김현우와 복제자의 청각을 빼앗고-기간토마키아가 멈췄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제자는 볼 수 있었다.
"무……슨……!!!!"
모든 것이 가루가 된 그 상황에서, 아무런 상처도 없이 그저 기간토 마키아의 날에 손을 올린 채 오연하게 서 있는 김현우의 모습을.
"헉!"
그리고 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김현우의 모습이 복제자의 눈앞에 나타난다.
김현우의 온몸은 마치 마력을 사용한 듯 기괴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복제자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그건! 내……내!!!"
그것은 바로 복제자가 무기들의 보정치를 한 몸에 받고 얻은 폭발적인 기운.
기간토마키아에 깃들었던 그 기운은 어느새 김현우의 오른손에 잔뜩 뭉쳐져 있었다.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그의 면전에 대고 입을 연 뒤-
"네 힘, 돌려줄게."
그 말과 함께, 오른손을 힘차게 어깨 뒤로 꺾었다.
금방이라도 쏘아질 것 같은 활처럼 힘차게 꺾이는 그의 몸.
"이화접목(移花接木)"
일식(一式)
'반극(反極)-'
발리스타처럼 꺾여 있던 김현우의 오른손이 복제자의 얼굴을 향해 쏘아져 나가고--천격(千擊).
콰아아아아아아─삐──────!!!!!
거대한 공동이, 터져나갔다.
# 78
078. 네가 왜 여기서 나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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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은신해 있던 등반자를 찾아 처치했습니다!
위치: 미국 뉴욕
[등반자 '복제자' '하수분'을 잡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정보 권한의 실적이 누적됩니다!]
[현재 정보권한은 중하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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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박살 나 있는 대공동의 한가운데에서, 김현우는 마치 전쟁터처럼 변해 버린 풍경과 동시에 자신의 눈 위에 떠 있는 로그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시선을 내렸다.
시선을 내리자 그곳에는 이미 상반신이 날아가 버린 복제자의 남은 하반신이 서서히 먼지로 변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먼지로 흩날리기 시작한 무기들.
대공동의 사방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수십 수백 개의 무기가 복제자의 시체와 같이 먼지로 변해가는 것도 잠시.
"?"
김현우는 완전히 폐허처럼 변해 버린 그곳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두 개의 아티팩트를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아직도 오롯이 땅에 박힌 채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거검(鉅劍) 기간토마키아.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복제자의 하반신이 누워 있었던 그 자리에 놓아져 있는 아이템이었다.
검은색의 외형을 가지고 있는 주머니.
김현우는 그것을 들어 올렸고, 곧 그의 눈가에 로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
하수분(河水盆)의 아공간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아공간
소지 할 수 있는 물품 0/15
-정보 권한-
하수분(河水盆)은 '전설'의 구전으로 삶을 시작했다. 이지를 가지기 시작할 때부터 모든 물건의 골자를 탐하고 성분을 분석하려는 욕망을 가졌던 그.
시간이 지나 하수분은 마침내 자신의 계층에 있는 모든 물건들의 골자와 성분을 파악하는 데 성공해, 물건을 보는 것만으로도 복제할 수 있는 '눈'을 얻게 된다.
허나 그의 이지(異志)가 죽음으로서, 그는 다시 '전설'의 구전으로 돌아가 본연의 능력을 잃고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그는 -권한부족-을 탐구하기 위해 -권한부족-을 오르게 되었고 -권한부족- ?권한부족--권한부족-,의 -권한부족- 좌를 위해, -권한부족-.
------
"쯧."
김현우는 자신의 눈앞에 가득 떠오르는 권한 부족의 향연에 혀를 찼지만, 이내 곧 아공간 주머니의 로그를 보며 말했다.
"아공간."
수우우우-
김현우가 입을 열자마자 검은 주머니의 입구에서 검은 색의 무엇인가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칠흙 같은 무엇인가.
[아공간에 넣을 물건을 지정해 주세요.]
김현우는 눈앞에 떠오르는 로그에 곧바로 주변을 돌아보다 이내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옆에 꽂혀 있던 기간토마키아를 지정했다.
스으으으으으─!!
김현우가 기간토마키아를 지정하자마자 주머니의 입구에서 튀어나온 검은 무엇인가들은 곧바로 기간토마키아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오……."
마치 검은 암흑이 '검'을 먹어 치우는 것 같은 장면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김현우는 곧 어둠에 먹힌 거대한 기간토마키아가 자신의 허리춤에 매면 충분할 것 같은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놀라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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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분(河水盆)의 아공간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아공간
소지 할 수 있는 물품 1/15
거검(鉅劍) 기간토마키아.
------
소지 목록에 추가된 거검 기간토마키아.
김현우가 호기심에 기간토마키아가 표시되어 있는 로그를 누르자 기간토마키아에 관한 로그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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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검 기간토마키아
등급: ST+
보정: 근력+
스킬: 집단합심
-정보 권한-
3계층의 수호자이자 거인족들의 왕이 사용하던 보물. 일검에 태산을 짓누르고 하늘을 가르는 이 검은 그 누구의 손이 아닌 오로지 거인족이 사용해야만 -권한부족-의 힘을 제대로 끌어 낼 수 있다.
거검 기간토마키아는 -권한 부족-이, 아니더라도 -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에 이끌릴 경우 일부의 힘을 빌릴 수 있다.
이 무기를 꺼내시겠습니까? 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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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로그를 읽어 내려가다 안에 표시되어있는 로그에 NO를 누르고, 이내 남아있는 14개의 슬롯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좀 짜네.'
보통 웹소설 같은 곳에서 보면 아공간 주머니는 좀 편의성 있게 어느 물건이라도 무한대로 들어가는 게 많은데, 이 하수분의 아공간은 들어가는 슬롯이 15개밖에 없었다.
'뭐, 없는 것보다는 당연히 있는 게 좋지만.'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그나마 멀쩡한 왼쪽 주머니에 하수분의 아공간을 쑤셔 넣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제 볼일도 전부 끝났으니 슬슬 탈출해야 하는데.'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상태를 바라봤다.
신고 있던 슬리퍼는 애초부터 날아간 터라 아까부터 맨발로 싸웠다.
상의도 마찬가지로 이미 날아가 버려서 상체는 전부 붕대와 거즈로 치덕치덕 바른 상태.
그나마 다행인건 바지는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거다.
"…."
오른쪽만.
왼쪽은 이미 무엇인가에 타들어가 있어서 고무줄이 찢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이거 완전 거지꼴이네."
스마트폰이라도 들고 올 걸 그랬나?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들고 왔어도 옷 상태가 이런 것을 보면 스마트폰을 들고 왔다고 해도 완전히 박살 나버렸을 것이다.
"쯧."
'꼬였네.'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애초에 이렇게 갑자기 등반자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냥 아레스 길드 조지고 통신은 아레스 길드 것을 '빌려'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아레스 길드 앞에 소환된 것이 아니라 복제자에 의해 이곳으로 강제 소환된 것이라 뭘 빌려 쓸 생각은 할 수 없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김현우는 복제자에 의해 이곳으로 끌려 온 것이라 이곳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게 김현우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할 때쯤.
끼이이익-
"길드장님 이제 슬슬 밖으로 나가야 됩니다. 오늘 아침 회의……가?"
분명 일반 벽처럼 만들어져 있던 벽 쪽에서 끼이익 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나타났다.
얼굴에는 로마자로 6(Ⅵ)이라는 문신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공동 안으로 들어오려다 완전히 개 박살이 나 있는 공동을 보며 누가 봐도 확연히 당황해하는 행동을 취했고.
김현우는 문을 열고 들어온 6번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야."
"넌 뭐야!"
김현우의 나지막한 부름에 6번은 인상을 찌푸리며 양손의 크게 흔들었다.
그와 함께 어디서 나왔는지 그의 양손에 장착되는 거대한 두 개의 건틀렛.
6번은 그와 함께 김현우에게 달려들기 위해 준비하려 했지만-핏-
"…?"
6번은 순간 도약하려던 그경로 앞에 나타난 김현우와-
"…!!"
어느새 자신의 몸이 벽에 처박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늦게 몰려오는 고통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좀 힘들거든? 그러니까 우리 쉽게쉽게 가자. 응?"
"끄으으으윽!"
"입 없냐?"
김현우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들어 올리자 벽에 처박힌 채, 아무것도 못 하고 신음을 흘리고 있던 남자는 두 눈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끄덕했고.
"좋아."
김현우는 무척이나 만족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본 뒤 입가를 비틀어 올리곤 말했다.
"우선 옷부터 벗어 볼까?"
-그리고 스마트폰도 내놔라?
김현우의 말에 남자는 그저 덜덜 떨며 그가 하는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
그로부터 3일 뒤,
헌터 협회 한국 지부의 본관.
사람 100여 명이 들어차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게 만들어 놓은 헌터 협회 한국 지부의 본관에는 때에 맞지 않게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봐도 족히 수백 명은 넘을 것 같은 사람들이 각각 자리에 앉아서 카메라와 노트북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기자들은 땅바닥에, 심하면 본관 밖의 유리 창문 밖에서라도 노트북과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다! 나온다!"
"야! 지금 나온다!"
김현우가 본관으로 빠져나옴과 함께 기자들이 하나같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전만 해도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만이 들려왔던 본관은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현우가 올라간 간이 무대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그런 기자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자자, 전부 진정합시다."
김현우의 말과 함께 살짝 진정된 기자들.
허나 그럼에도 몇몇 기자들은 조금 더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주변의 기자들을 계속해서 밀어대고 있었고, 김현우는 그들 중 한 명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기요, 거기 뒤에서 같은 기자 밀고 있는 아저씨. 어차피 거기서도 들리는데 왜 그렇게 지랄을 떨어?"
가만히 좀 있어라 좀.
김현우의 말에 몇몇 기자들이 조용해지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김현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그리고-
"자, 그럼 지금부터 빨리 끝냅시다. 오늘은 질문 안 받고 할 말만 하고 갈 거니까-"
"김현우 헌터! 오늘 질문을 받지 않는다는 건 혹시 다른 날에-!"
"아 좀 닥쳐봐 나 이야기하는 거 안 보이냐?"
김현우의 말에 인상이 굳어진 기자. 김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
"뭘 꼬라봐?"
"김현우 헌터! 그런 식으로 기자들을 억압하면-"
"억압이 아니라 네가 먼저 선을 넘은 거겠지 응? 내가 뭔 말 했어? 분명히 네가 질문하기 전에는 분위기 좋았는데 지금 상황은 어때? 응?"
김현우의 말에 기자는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른 기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자는 묘한 압박감에 짓눌렸고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왜, 협박이라도 하려고 했어? 기자를 억압하면 어떤 식으로 뒤통수 맞을지 모른다고? 응?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멀쩡한 기자들도 기레기 취급 받는 거 아니야. 응?"
그러니까 그냥 꺼져 좀.
김현우는 그 말을 끝으로 그 기자를 돌아보지도 않고 입을 큼큼거리더니 말했다.
"자, 그럼 다시. 우리 서로서로 좋게 갑시다. 저는 기자들한테 아주 먹음직스러운 떡밥을 하나 뿌릴 거니까, 기자님들은 그걸로 기사 올려서 조회수 벌어서 좋고-"
나는 내가 퍼트려야 될 정보가 빨리빨리 퍼지니까 좋고.
그치?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기자들을 한번 쳐다보았고, 김현우는 이내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기자들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은 뒤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 있으신 분들은 다 아시죠? 3일 전에 저를 암살하러 시현이의 집까지 찾아온 놈들이 있다는 거."
대답은 없었다.
"뭐, 어차피 이 말만 하려고 기자 부른 거니까."
양념 안 치고 그냥 말하겠습니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슥 둘러보곤 말했다.
"저한테 괴한을 보낸 놈들이 누구인지 찾았습니다."
"!!!"
김현우의 폭탄 발언과 함께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끄러워진 기자들. 허나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빼내곤 말했다.
"자, 그리고 이건 제가 확보한 증거물 중 하납니다."
김현우가 주머니에서 꺼낸 스마트폰을 꾹 누르자 마이크를 타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한테 너를 암살하라고 사주한 사람은 마튼……마튼 브란드다.
-마튼 브란드? 그게 누군데?
-꽝!
-끄아아아악! 말하겠다! 그는 아레스 길드의 길드장이다!
그 말과 함께 끊기는 녹음 파일.
"아, 혹시 내가 자작해서 만들었다는 찌라시를 쓸까 봐 미리 말해두는데 아파트 CCTV 영상 확인하면 제가 이 폰으로 녹음하는 게 그대로 찍혀있으니까 확인하면 되고, 무엇보다."
이거 말고 또 증거가 몇 개 더 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 소리.
김현우는 쉼 없이 카메라 셔터와 키보드를 치는 모습을 보고 만족한 뒤, 입을 열었다.
"아무쪼록-"
김현우는.
"-아레스 길드에서 좀 빨리 잘난 해명을 좀 해봤으면 좋겠네요."
한번 들어나 보게.
그렇게 말하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 79
079. 네가 왜 여기서 나와? (2)
[아레스 길드, 김현우에게 암살자를 보내다?]
[아레스 길드 한국 지부장 김현우에게 암살자를 보낸 것으로 밝혀져. 누리꾼들 경악과 충격-]
[아레스 길드 한국 지부장의 갑작스러운 실종? '갑작스러운 지부장의 퇴출 전말']
[아레스 길드 지부? 아레스 길드 본사? 진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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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스 길드와 고인물 헌터 김현우의 악연, 어디서부터?]
고인물 헌터 김현우가 아레스 길드가 자신에게 암살자를 보냈다는 증거를 연이어 공개하며 현재까지 굉장한 이슈가되고 있다.
지난 4일, 김현우는 기자회견을 열어 아레스 길드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증거(녹음)를 공개했고, 거기에 더불어 고인물 헌터 김현우는 이 사건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치를 전부 취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아레스 길드 지부와 김현우 헌터 사이의 갈등이 이제는 아레스 길드 본사와 김현우 헌터 사이의 갈등으로 심화 될 것으로 보인다.
(중략)
현재 아레스길드는 김현우 헌터가 말한 일에 대해 아무런 표명하지 않다가 하루 전 '이른 시일 내로 입장 표명을 하겠다는' 말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 아레스 길드의 발언에 한쪽에서는 협회에서 강하게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는 말과 동시에 아레스 길드가 은밀히 일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라고 우려하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이채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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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가 헌터 협회 한국지부에서 아레스 길드에게 대형 폭탄을 터뜨린 지도 3일, 그가 터트린 초대형 폭탄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가 요 몇 일간 뉴스의 헤드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여러 시사 TV 프로그램이 먹잇감이 되어 보기 좋게 물어뜯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아레스 길드와의 이슈가 해외까지 타고 퍼질 때쯤.
웅성웅성.
"여기 맞지?"
"맞다니까."
"야 근데 어째 김현우 헌터는 얼굴도 안 보이냐?"
"기다려 봐, 어제 연락 들어왔다니까? 분명, 이 안에서 쉬고 있다고 들었는데."
"저번처럼 떡밥 안 뿌리나?"
강동구 천호대교 쪽에 있는 2층 단독주택.
현재 도로가가 좁은 그곳에는 매우 많은 기자가 각자의 노트북과 카메라를 들고 단독주택의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김시현이 소유한 주택 중 하나였다.
원래는 탑에서 돌아온 김현우를 위해 구매해 놓은 준비한 선물이었지만, 김현우에게 선물해 주려 해도 혼자 사는 것보다는 같이 사는 게 편하다기에 방치 해 놓았던 주택이었다.
물론 김시현의 집이 기사단에게 반파된 이후로 저택은 제값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 단독주택 앞에서 기자들은 며칠 전 김현우가 터트린 아레스 길드에 관한 추가 인터뷰를 듣기 위해 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정작 김현우는 그 기자회견을 이후로 지난 3일간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으나, 기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김현우의 한마디는 조회수를 끌어모으기에 굉장히 좋은 먹잇감이기 때문이었다.
기자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곳을 뛰어다니며 취재하는 것보다 김현우의 말 한마디가 다른 기사보다 몇 배의 조회수를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흐…."
그들은 김현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집 앞을 떠날 수 없었다.
"아, 안에 들어가서 몰래 촬영이라도 해볼까?"
한 기자가 아쉬운 마음에 입을 열었지만, 그 옆에 있던 다른 기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담을 어떻게 넘으려고?"
"그것도 그러네…."
단독주택의 1층이 싹 가려질 정도로 높은 담장.
기자들은 아쉬움을 표하면 결국 그나마 저택이 살짝살짝 보이는 담장 근처에서 괜히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을 뿐이었다.
기자들에 의해 웅성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저택 밖.
허나.
그렇게 웅성거리고 있는 밖과는 다르게 단독주택의 안방에서는 김현우를 포함한 김시현와 한석원, 그리고 이서연이 석연치 않은 분위기로 모여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오빠 말은. 그거죠? 저희는 아직 탑 안에 있는 거고, 지금 이 지구는 9계층 이라고…?"
"맞아."
"허."
김현우의 말에 한석원은 저도 모르게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솔직히 네가 거짓말할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긴한데……그래도, 뭔가 좀 믿기 어렵긴 하네."
한석원이 떨떠름하게 머리를 긁적이자 이서연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솔직히, 좀 믿기 어렵긴 하네요."
김현우는 묘하게 회의적인 느낌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자신의 동료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
그것은 바로 어제 돌아왔던 김현우가 조금 전 그들에게 해준 말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정리해 볼게요. 괜찮죠?"
"그래."
이서연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곧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지구는 탑 안에 있는 9계층이라는 곳이고, 우리가 '재앙'이라고 부르는 녀석들은 사실 탑을 오르는 등반자다…이런 이야기 맞죠?"
"잘 이해했네."
"그리고, 오빠는 그 등반자를 막는 가디언 같은 역할이고?"
"그것도 정답."
김현우의 말에 이서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물어보긴 했는데…이건 좀…."
"뭘 그렇게 믿기 힘들어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되지."
"아니, 그게 돼요?"
김시현의 물음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김현우가 동료들에게 이 이야기를 풀어 놓은 이유는 이서연과 김시현의 의문을 해소해 주기 위해서였다.
줄곧 김시현과 이서연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던 의문.
왜 김현우는 '재앙'을 막으러 다니는가?
김시현과 이서연, 그리고 한석원은 솔직히 그동안 김현우의 행각이 조금 기이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김현우는 처음 한국에서 일어난 크레바스 사태도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들에게 크레바스가 일어나는 날에 일을 만들지 말라고 일러두었고.
그 뒤에는 분명 일본이나, 이 한국에서는 더럽게 먼 거리에 있는 독일에 나타난 재앙을 홀로 잡으러 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김현우의 모습은 그와 함께 탑을 올랐던 그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어색한 모습이었다.
만약 김현우가 평소에도 남을 도와주는 것을 업으로 여길 정도의 선인이었으면 나름대로 이해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아는 김현우는 선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철저한 타인이 본다면 지나치게 냉철하고 시니컬하게 보이는 게 김현우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자신이 관련된 일 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무엇보다 탑 안에서의 그는 자신의 이익이 관련되어 있는 곳에서는 굉장히 철저했다.
동료들에게는 그런 느낌이 살짝 덜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얄짤 없었다.
그런 김현우가 그냥 재앙을 막으러 다닌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어제, 김현우가 아레스 길드를 조지러 간 것은 김현우의 이해와 맞아 떨어지는 행동이기는 했다.
아레스 길드 소속에 '기사단'이 김현우를 습격했고, 그는 자신에게 암살자를 보낸 아레스 길드를 박살 내기 위해서 미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김현우가 돌아왔을 때, 그의 몸은 어느 정도 치료하기는 했어도 완전히 개박살이 나 있었고, 아레스 길드는 멀쩡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서연은 문득 김현우가 혹시 이번에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재앙을 잡으러 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후…."
김현우에게 진실에 관해 물어보았던, 이서연은 답을 얻게 되었다.
"흠…."
김현우는 혼란스러워하는 그들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대충 이런 느낌이 될 줄은 알았지. 뭐, 나도 아브에게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 이야기가 충격적이었으니까.'
뭐, 지금은 아니지만.
'뭐, 그래도 언젠가는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김현우는 언젠가 자신에 동료들에게는 따로 이야기를 풀어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뉴스에서야 자기 좋을 대로 이야기를 풀어놔도 상관없겠으나 김현우는 딱히 동료에게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이내 정리를 마친 것인지 김시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결국, 형은 등반자를 막아야 하는 게 목적이네요?"
"맞지."
"…음, 솔직히 말해서 믿기는 힘든데…대충 이해하기는 했어요. 그럼 형이 왜 재앙이 등장하면 막으러 다니는지도 이해가 되고요."
그래서-
"이번에도 등반자 막으러 간 거예요?"
"아닌데?"
"그럼 뭐예요?"
"뭐긴 뭐야. 아레스 길드 조지러 간 거지."
"네……?"
김시현이 이상하다는 듯 대답하고, 한석원이 입을 열었다.
"아레스 길드를 조졌다고? 아레스 길드는 멀쩡한데?"
"아레스 길드는 안 건드렸어. 아레스 길드장을 조졌거든."
"……뭐?"
"아레스 길드장이 사실 등반자여서 말이야, 안 그래도 조지려고 했는데 조지는 김에 등반자도 죽여서 좋았지."
김현우가 피식하고 웃으며 말하자 그들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곧 그 자리에서 김현우는 장장 30분에 걸쳐 다시 한번 상황 설명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을 이해시키고 난 뒤, 웅성웅성.
"거 더럽게 시끄럽네."
생각 이상으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는 저택 밖의 소리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어제부터 웅성거린 게 거슬리기는 했으나, 그리 큰 소리는 아니라 무시했었다.
허나 지금은 기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김현우가 있는 안방까지 확연히 들릴 정도로 커졌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거 보니 형이 원하는 데로 아레스 길드 쪽에서 접촉을 시도하는 거 아닐까요."
김시현의 말에 그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려다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그 새끼들이 이렇게 대놓고 오진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든 길드 이미지 안 망치려고 열심히 노력하겠지."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나라보다도 길드 이미지가 좋아야 하는 게 미국이긴 하죠."
김시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밖.
"한번 나가보기는 해야겠네."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김시현이 물었다.
"좀 더 앉아서 요양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이미 거의 다 나았어."
실제로 김현우의 몸은 버프, 디버프 마법을 전문으로 사용하는 아냐에게 치료받고 난 뒤 상당히 호전되어 이제는 상당 부분 정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나마 미묘하게 남은 것은 오른쪽 옆구리에 미묘한 화상 자국뿐.
다른 사람에게는 흉터가 신경 쓰일 수도 있겠지만, 정작 김현우는
'어차피 옷 때문에 보이지도 않을 부위 흉터 생기면 어때?'
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넘기고 있었다.
그는 김시현의 말에 그렇게 대답한 뒤, 망설임 없이 안방을 나서 현관문을 열었고-
"와, 뭐야...? 뭔데!"
"어…어어어어어!!!"
찰칵찰칵!
-플래쉬 세례와 함께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기자들의 소리에 그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걸음을 옮겨 저택의 정문을 열었다.
그리고-
"……."
김현우는 벌떼처럼 모여 있는 기자들 대신 다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우선 분명 2차선일 터인 도로 앞에는 도대체 길이가 어느 정도인지 모를 리무진이 도로를 전부 막으며 대기하고 있었고, 리무진부터 저택의 문 앞에는 뭔지 모를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 사이로 기자들이 플래쉬 세례를 터트리며 김현우가 있는 정문을 찍고 있었고, 정문의 앞에는.
"제자, 스승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진달래가 수놓아진 치파오를 입고 허리를 90도로 숙인 미령과, 그의 뒤에 붙어있는 수많은 가면무사들이 있었다.
"제자야……."
네가 왜 여기서 나와?
# 80
080. 네가 왜 여기서 나와? (3)
천호동에 있는 저택 안.
제자, 미령의 등장으로 저택 밖은 이전보다도 훨씬 소란스러워졌지만, 그와 반대로 저택 안쪽은 긴 침묵이 도래하고 있었다.
"……."
"……."
"……."
"……."
조용한 침묵.
김현우의 동료들인 이서연, 김시현, 한석원은 김현우의 옆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미령을 보고.
"……."
그녀의 뒤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방 근처와 저택 주변에 깔린, 가면을 쓴 무사들을 은근히 돌아보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침묵 끝에,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김현우였다.
"제자야."
"예. 스승님."
"저것들은 뭐냐?"
"저들은 미천한 제자가 비루하게나마 준비한 스승님의 호위 병력입니다."
무릎을 꿇은 상태로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미령의 모습.
그 모습을 보며 김시현은- 아니, 그 자리에 있는 김현우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저 소녀가, 그 패도 길드의 길드장인 패룡(敗龍)이라고?'
김시현은 눈앞에 보이는 소녀의 모습과 동시에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소문들을 떠올렸다.
한국에서는 김현우의 활약(?)으로 인해 그리 큰 기사화가 되지 못했으나, 최근 패도길드에 대한 뉴스는 중국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도 나름대로 주목하고 있는 사안이었다.
불과 3년 전에 불현듯 나타나 중국 던전의 독점권한을 50%나 홀로 먹어치운 괴물 길드.
땅덩어리 크기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중국을 50%나 통일했다는 것만으로도 패도길드는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었고, 최근에는 그 주목도가 더 심해졌었다.
주목도가 더 심해진 이유.
그것은 느긋하게 중국을 먹어치우고 있던 패도 길드가 불과 몇 달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사이에 중국을 양분하고 있던 '위연' 길드를 박살 낸 것 때문이었다.
원래 중국의 패자였던 위연 길드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패도길드.
그리고 패도 길드가 그렇게나 빨리 중국 헌터 업계를 먹어치울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그동안 움직이지 않았고 제대로 된 신원조차 밝혀지지 않았던 패도 길드의 길드장이 드디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움직였기 때문이다.
S등급 세계랭킹 5위이자. 정보통이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위연 길드의 센터라고도 할 수 있는 지하도시를 혼자서 뭉개버린 괴물.
'패룡(敗龍)'
그녀가 움직였기에 위연 길드는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그녀의 등장은 임팩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임팩트에 따라 여러 가지 뜬소문도 흘러나왔었다.
그런데-
'…중학생. 아무리 잘 쳐줘도 고등학생.'
김시현은 다소곳이 앉아 있는 미령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물론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갸름한 얼굴.
게다가 김현우의 물음에 대답하는 목소리도 소녀답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명에 따라 저택 주변을 남김없이 지키고 있는 가면 무사는 눈앞에 있는 소녀의 정체가 패도 길드의 길드장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눈에 거슬리니까 치워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김현우의 말에 미령은 고개를 숙이곤 슬쩍 목을 움직였다.
-슥
그와 함께 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가면 무사들.
그냥 시선을 돌리기만 해도 5명은 보였던 가면 무사들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한석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거기에 있는 걔가 그 유명한 패도 길드의 길드장인 패룡이라는 거지?"
"패룡?"
"보잘것없는 제자에게 붙여진 이명입니다. 스승님."
김현우가 처음 들어본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김시현이 입을 열었다.
"형, 혹시 모르고 있는 거예요?"
"뭘 모르고 있어?"
"아니, 그러니까, 형 제자가 패룡이란 거요."
"모르고 있었지. 아니, 애초에 패룡이라는 이명이 유명해?"
난 딱히 인터넷을 돌아다녀도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갸웃하자 김시현은 뭔가 묘한 표정으로 김현우와 미령을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패룡이라는 이름은 S등급 세계랭킹 5위한테 붙은 이명이에요."
"뭐? 세계랭킹 5위?"
김현우의 되물음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미령은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제자가 세계랭킹 5위라고?'
김현우는 분명 자신의 제자가 어느 정도 강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강하지 않은 이상에야 중국 전체를 혼자서 먹어치울 정도로 힘을 가진 길드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근데 요점은 그게 아니었다.
'얘-'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미령을 바라보았다.
물론 미령에게 무술을 알려준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령에게 제대로 알려준 무술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김현우와 미령이 만났던 때는 그가 한참 은거기인 컨셉에 빠져 있을 초기였고, 그때 당시에 그는 딱히 실용적인 무술을 만든 적이 없었다.
전부 다 엉망진창에 엉터리, 무술이라고 하기에도 추잡한 무엇인가.
'그나마' 써먹을 수 있는 패왕식(?王式)이 있기는 한데 미령에게 알려준 패왕식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떻게 강해진 거야……?'
김현우는 미령이 S등급 세계랭킹 5위라는 사실에 묘한 표정으로 미령을 바라봤고, 그녀는 그런 김현우의 시선을 받더니 곧-
"죄송합니다. 스승님!"
쿵!
"!!"
"?"
갑작스레 오체투지를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동료들과 김현우, 미령은 신경쓰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불초 제자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고 스승님의 뜻을 가슴에 그리고 있었음에도 스승님의 자리를 마련한다는 이유 하나로 스승님의 뜻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무……뭐?"
김현우가 뭔 소리냐 물으려 했으나 미령은 그것을 곡해했는지 더더욱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으며 말했다.
"스승님은 제게 그 무엇도 제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로지 제 위에 있는 건 스승님뿐이ㅇ-……."
"아가리 닥쳐라 제자야!"
미령의 갑작스러운 흑역사 공개에 김현우는 당황하며 입을 열었으나, 미령은 그런 그의 비명어린 소리에 더 크게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불초 제자! 스승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았습니다! 천(天)인 스승님의 아래에는 제자밖에 없었어야-!!"
빡!
"꺅!"
"제자야, 한마디 더 하게 하지 마라."
네가 1위든 1위가 아니든 상관없으니까.
미령의 계속되는 공격에 김현우는 그녀의 머리를 한 대 후려치며 말했고, 미령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다가 이어지는 김현우의 말에 '아 아앗'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금방이라도 흑역사가 생각난 듯 끄으윽 거리는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붙잡는 김현우와 그의 말을 어떻게 착각했는지 홍조를 그리고 있는 얼굴로 그런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는 미령.
그 둘의 모습을 보고만 있던 김시현은 한석원과 마찬가지인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형."
"왜?"
"그러니까…그, 미령……?"
찌릿!
움찔.
김시현은 말하다 말고 한순간 자신에게 가해진 압박감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홍조를 띄고 있었던 미령이 무척이나 냉정한 눈빛으로 김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승님에게 받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거기에 추가로 김시현의 머릿속에 울리는 미령의 목소리.
그는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뜨다가 이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아니, 패룡과의 관계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물론 대략적인 상황을 봤을 때 이미 어느정도 사태를 파악 한, 김시현이었으나 그는 본인에게 대답이 듣고 싶었다.
그런 내심이 숨겨진 그의 물음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내 제자야. 그리고-"
툭-
김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령의 머리를 툭 치곤 말했다.
"너도 아무 데서나 살기 뿌리고 다니지 마라."
"…송구합니다. 스승님. 제자가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
조금 전 냉정한 눈빛과는 다르게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미령의 모습.
김시현은 왠지 머리가 어질어질 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그…도대체 어느 시점에 패룡을 제자로 받은 거야?"
김시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묻자 김현우는 대답했다.
"내가 저번에 말해주지 않았어?"
"저번에?"
"그래, 내가 탑에 있을 때 제자들 받았다고 했잖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김시현은 예전, 김현우가 처음 탑에서 빠져나와 같이 식사를 하러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분명 김현우는 자신의 제자가 있었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럼 탑에서 키운 제자 중 한 명이 패룡……?"
"그래."
웅성웅성-
"아…이 새끼들 더럽게 시끄럽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김현우는 집 밖에서 꾸준히 들려오는 소란에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고, 미령은 그때가 기회라는 듯 입을 열었다.
"스승님."
"왜."
"제자, 허락만 해주신다면 스승님의 근심을 해결해 드리고자 합니다."
"어떻게?"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 당장 무사들을 이용해 밖에 있는 이들을 전부 죽여 버리겠-"
"헛소리하지 마라. 제자야."
김현우의 말에 미령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안 돼……겠습니까?"
"그럼 되겠냐?"
"혹시 다른 사회적인 시선 때문이라면 이 제자, 은밀히 밖에 있는-"
"후, 제자야. 일 더 만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알겠습니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미령을 뒤로 한 김현우.
그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뭐 하게요?"
"뭘 하긴 뭘 해. 저 녀석들이 원하는 질문 타임 열어주러 가는 거지."
"질문 타임이요?"
"그래, 이제 대답이 안 오는 걸 보니 한 번 더 찔러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거든."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내 안방을 나서 다시 기자들이 있는 곳으로 나갔다.
김현우가 나가자마자 순식간에 몰려드는 기자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기도 전에 김현우가 선수를 쳤다.
"우리 다들 욕먹기 싫으면 아시죠?"
그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조용해진 좌중.
김현우는 빠른 기자들의 태세전환에 만족하며 입을 열었다.
"자, 룰은 전부 알죠? 제가 대충 얼굴을 기억하는 기자들도 있는 것 같은데."
주변을 슥 돌아본 그.
"우선 이번에는 제가 할 말 하기 전에 기자분들이 그렇게 원하시는 질문타임부터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김현우는 곧바로 손가락을 움직여 한 기자를 지목되었고, 그와 함께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매끄럽게 진행되는 기자들의 질문타임.
이미 3~4번의 기자회견으로 김현우에게 자극적인 질문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기자들은 김현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질문을 했다.
"김현우 헌터! 혹시 패도 길드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냥 좀 아는 사이요."
"김현우 헌터! 아까 전 찾아온 그 소녀는 누굽니까?"
"전과 동일. 그냥 아는 사람입니다."
김현우는 그렇게 질문을 받으며 슬슬 질문을 끝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자, 그럼 이제 슬슬 마지막 질문 받고 나서 질문은 좀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김현우 헌터 오늘 오후 2시에 아레스 길드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답변을 내놓았는데, 이 답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느긋하던 김현우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답변이요?"
"예! 오늘 오후 2시, 아레스 길드에서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자의 말에 김현우는 웃음을 지었다.
# 81
81화. 네가 왜 여기서 나와? (4)그로부터 하루 뒤, 김현우는 성내동의 한 카페 안에서 스마트폰에 뜬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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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스 길드,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다.]
하루 전, 미국 현지시각 새벽 7시, 아레스 길드에서는 이번 사태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올린 글의 시작은 세계적으로 거대한 길드가 이런 식으로 물의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있었으며, 그와 함께 아레스 길드 내부 사정에 이상이 생겨 답변이 늦었다는 내용 또한 담겨 있었다.
아레스 길드는 이번 사태에 대해 어느 정도 오해가 있는 것 같다는 내용과 함께 이 사건의 중심인 김현우 헌터를 당장에 만나 해결하고 싶다는 입장을 강하게 표명했으며 아마도 조만간 아레스 길드와 김현우의 만남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누리꾼들은 거대 길드가 개인을 찍어누르려 한다고 격분중이다.
이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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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에 떠올라 있는 기사와 함께 그 아래에 달린 댓글들을 주르륵 훑어본 김현우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래서,"
"……."
"당사자와 만나서 직접 협의하겠다는 말에 이렇게 나왔는데, 어디 한번 이야기나 들어볼까?"
"……."
그렇게 말한 김현우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
그는 아레스 길드의 부길드장이자 현재 마튼 브란드의 갑작스러운 실종으로 인해 긴급하게 길드장의 자리를 역임하고 있는 '카워드'였다.
'젠장…….'
카워드는 짧게 생각하면서도 눈앞에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김현우를 바라봤다.
현재 아레스 길드의 본사는 크게 울렁이고 있었다.
이유는 바로 아레스 길드장 '마튼 브란드'의 실종.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실종이 아니었다.
'……이자가,'
아레스 길드장, '마튼 브란드'를 죽였을 수도 있었다.
물론 확신도 없고 물증도 없다.
거기에다가 김현우의 알리바이를 증명하기도 어려우나,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인질을 생각해 보면 아마 그가 마튼 브란드의 '공방'을 박살 냈다는 생각이 제일 신빙성이 있었다.
'애초에 6번은 길드장님 공방의 문지기였으니까….'
카워드는 어제 김현우가 기자회견을 열며 아레스 길드에게 보란 듯이 뿌려 놓은 사진을 떠올렸다.
아니, 그건 사진조차도 아니고 그냥 A4용지로 문자를 인쇄해온 것에 불과했다.
A4용지에 인쇄된 문자는 'Ⅵ(6)'.
그것은 김현우가 기사단 중 6번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소리와 같았다.
그리고 6번이 마튼브란드의 공방이 박살 남과 함께 사라졌던 것을 떠올리면-
'김현우가 6번을 인질로 사로잡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카워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안 그래도 길드 내에서는 갑작스러운 길드장의 실종에 굉장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레스 길드의 정식적인 '앞'과 '뒤'는 모조리 길드장과 관련된 인사들이었으니까.
그러나 마튼 브란드가 사라지면서 혼란스러워하던 것도 잠시 그들은 이제 슬슬 눈치를 보며 길드 내의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분열을 막아내고 있기는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카워드는 자신이 이 먼 나라의 쪽 국까지 와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튼, 어쩌다 보니 아레스 길드의 길드장이 되긴 했으나 결국 지금 아레스 길드가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은 확실하니까.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은 직접 와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 맞다.'
김현우, 그는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어떤 행보를 취할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놈이었으니까.
카워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김현우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희 쪽에서는……."
"아,"
허나, 그가 입을 열자마자 김현우는 잊고 있었다는 듯 짧게 탄성을 내뱉으며 카워드의 말을 끊어버린 뒤.
"내가 이걸 말 안 했는데, 입 나불거릴 때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알지?"
너희 친구 중에 얼굴에 로마자로 문신해 놓은 애들 있잖아?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사람 빡치게 헛소리는 하지 말자."
알겠지?
김현우의 말에 카워드는 인상을 찌푸리려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뭘 원하십니까."
카워드의 말.
김현우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는 입을 열었다.
"그걸 내가 정하면 재미없지. 오히려 네가 내게 말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제 쪽에서는 김현우 헌터가 무엇을 원하는지 짐작하기가 어렵군요."
"그래? 나는 대충 너희들이 한 일 보면 딱 견적 뽑아서 올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
김현는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카워드를 도발했지만, 이미 철저하게 가면을 쓰고 그를 대하기로 한 카워드는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러나-
"저희 쪽은 김현우 헌터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그럼 한국에서 철수해라."
"무-"
"아, 물론 양도권은 전부 나한테 넘기고."
그런 카워드의 결심은 김현우의 다음 한마디에 모조리 깨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왜 억지라고 생각해? 너희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거 뿌리면 이미지 완전히 박살 날 텐데?"
헌터 개인을 상대로 여러 번이나 살인미수를 하고, 게다가 나 이외에도 여기저기 은근히 뒤가 구린 짓을 많이 했더라?
"그, 그게 무슨."
"그렇게 힘들게 부정할 필요 없어, 네 친구한테 전부 들었으니까."
거짓말이었다.
김현우가 데려온 6번은 지하에 가둬놓은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허나 그런 김현우의 협박에 카워드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해쳐 먹은 것도 더럽게 많으신가 보네.'
김현우는 피식 웃으면서도 그런 카워드를 보며 유감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봐, 그렇게 고민할 거면서 도대체 왜 나를 건드렸어?"
그의 말에 슬쩍 인상을 찌푸린 카워드.
김현우는 계속 말했다.
"만약 너희가 나를 안 건드렸으면 이럴 일도 없잖아? 내가 굳이 그 기레기들 사이에 껴서 그렇게 기자회견 할 일도 없을 거고, 너도 그렇게 내 앞에서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지."
"……."
"아니면 길드가 더럽게 커서 기본적으로 반격당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만약 그렇다면 이참에 교훈 하나 멋들어지게 새겨 놓으면 되겠네."
저기 아레스 길드 건물도 크더만? 거기 빌라 위쪽에 새겨 둬.
"누구를 먼저 건드릴 때는 자기도 좆될 각오를 하고 건드리라고."
김현우가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그저 굳어 있던 카워드의 인상은 더더욱 굳어지다 못해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고, 김현우는 그제야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래, 뭐 이번에는 내가 '특별히' 인심 썼다."
"인심……?"
"아레스 길드가 한국에서 철수하는 건 네가 생각해도 좀 아니지? 이 한국에 너희들이 던전 먹으려고 노력한 게 얼만데, 응?"
그러니까-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딱 인심 써서 40%,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던전 중 40%만 받아갈게."
이 정도도 많이 인심 쓴 거다?
김현우의 익살스러운 모습에 카워드의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그리고 얼마 뒤.
김현우는 카페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갑작스레 처음부터 있었다는 듯 나타나는 미령과 가면무사들.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스승님."
"제자야, 깝치지 말고 쟤들 데리고 다니지 말라 했지?"
김현우의 핀잖에 미령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고, 그와 함께 가면을 쓰고 있던 무사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놀란 표정으로 김현우와 미령을 쳐다보는 것을 느낀 김현우는 쯧, 하고 혀를 찼고 미령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감사는 무슨…… 가기나 하자."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누가 보더라도 상당히 길어 보이는 리무진을 향해 걸어갔고, 미령은 쭉 고개를 숙이다 슬쩍 시선을 돌려 카페 안에 있는 '카워드'를 바라보았다.
무심하고 냉랭한 표정.
"빨리 와."
"죄송합니다, 스승님."
미령은 손에 쥐고 있던 수신기를 그대로 뭉그러뜨려 쓰레기로 만들어 버린 뒤, 곧바로 몸을 옮겨 리무진으로 몸을 움직였다.
***
서울 목동에 위치한 5성급 고급 호텔.
김현우와의 만남을 위해 카워드가 잡아 놓았던 방 안에는-
"끄아아아아악!"
그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뚫려 있는 거대한 구멍을 보며 쉴 새 없이 비명을 질렀고, 그 방 안에 있던 8명의 가면무사들은 무표정하게 그를 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러던 중, 카워드의 뚫린 손이 거짓말처럼 치유되기 시작했다.
피가 줄줄 흐르던 손바닥에 다시 새로운 살이 돋아나고 뼈들이 재생된다.
그리고-
"끄-아아아아아악!!!"
손바닥이, 다시 한번 뚫린다.
"살려줘! 살려줘!!"
카워드는 두려운 눈으로 눈앞에 서 있는 가면 무사들을 바라봤다.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를 그들은 그저 무감정하게 서서 자신의 비명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카워드의 비명이 반복되었을까.
가면 무사 중 한 명.
그는 피가 부족한지 파리한 안색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카워드를 보며 말했다.
"별거 없군."
"대, 대체 가면 무사들이 왜……."
카워드. 그는 앞에 있는 가면 무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중국 전체를 홀로 먹어치울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길드이자 '가면무사'들은 그런 패도길드 내에서도 주 전력을 담당하는 이들이었다.
'이 녀석들의 가면은 검은색…….'
패도 길드의 가면 무사들은 가면의 색으로 자신의 위치를 나눈다.
제일 하급인 갈색부터, 중간급인 주황색, 그리고 높은 등급인 붉은색과 패도 길드장의 직속부대만이 쓴다고 하는 검은색 가면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카워드의 앞에 있는 8명의 가면 무사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 안에서 나온 묵직한 목소리에 파리한 얼굴을 한 카워드의 시선이 돌아갔고, 가면을 쓴 남자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원망하지 마라. 너는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는 것뿐이니."
"버, 벌이라니 내가 도대체 왜……! 나는 아무것도……!"
"정말 잘못을 모르나?"
"무-슨"
꽈드득!
"끄아아아아악!"
분질러진 손에 의해 카워드의 비명이 한 번 더 울려 퍼진다.
그렇게 비명을 질러대는 그를 보며 가면 무사는 조용히 읊조렸다.
"너는 심기를 건드렸다."
"…내…내가 대체……!"
콰드드드득!!
"끄아아아악!"
카워드의 다른 손이 분질러진다.
그는 양손이 분질러지는 과정에도 자신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검은 마력 덕분에 끝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가면 무사는 비명을 지르는 그의 앞에 다가가 낮게 읊조렸다.
"명심해라. 네가 무엇을 하든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허나 네가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는 날에, 우리는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다."
네가 그 어디에 숨어 있더라도 말이다.
가면무사는 그렇게 일어나서 몸을 돌리다 말고 슬쩍 그를 돌아봤다.
덜덜 떨고 있는 카워드.
가면 무사는 그의 공포에 질린 눈빛을 한차례 바라보고는 이내 말했다.
"그래, 굳이 알려주자면."
-그분 앞에서 천(天)에게 인상을 찌푸린 게 네 죄다.
그 말과 함께 가면 무사들은 카워드의 손을 치료하지 않은 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이 호텔 속에서,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사라진 그들.
하지만 사라지는 그들을 보고도 카워드가 할 수 있는 것은 박살 나버린 두 손을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을 것뿐이었다.
# 82
82화. 생각하기 싫다(1)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국제 헌터 협회.
처음 지구에 던전과 몬스터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나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국제 헌터 협회는 굉장히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거대한 땅덩어리 안에 지어져 있는, 보기만 해도 큼지막한 건물들.
그리고 그런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건물들 사이에서도 그 땅덩어리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국제 헌터 협회 본관 건물.
마치 고대 로마의 건축물을 따라 한 듯 화려한 조각품으로 장식된 본관의 건물 3층에는 거대한 연합실이 있었고.
그곳에는 총 3명의 사람이 거대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2명의 남성과 1명의 여성.
잠시간의 침묵.
"흠……."
그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회의실 상석에 앉아 있는 남자.
정갈한 정장을 차려입고 한 눈에는 금색 테두리의 오라클을 끼고 있는 그는 바로 이 국제 헌터 협회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최고의원 중 한 명인 '리암.L.오르'였다.
"다 모였나?"
"최고의원은 이게 다 안 모인 걸로 보여?"
그런 최고의원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책상에 발을 올리고 반박한 남자.
그는 바로 S등급 세계 랭킹에서도 4위를 차지하고 있는 헌터, 다른 이들에게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 라고도 불리는 '에단 트라움'이었다.
"그러게."
그리고 그 맞은편에 여자.
그녀는 마찬가지로 S등급 세계 랭킹에서 7위를 차지하고 있는 헌터였다.
이명은 '사일런스', 그 이름은 '라일리'였다.
그 둘의 타박에 남자는 흠흠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뭘, 나도 알고 있네, 그냥 시작한다는 의미로 말했을 뿐이지."
리암의 말에 에단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 때문에 우리를 호출했는데? 정기호출은 2주 전에 했잖아?"
에단의 물음에 리암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지 이번에는 그런 문제가 아니야. 어쩌면 조금 더 심각한 일일 수도 있지."
"뭔데?"
에단의 물음에 리암은 슬쩍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흐음 하고 짧게 침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메이슨이 이번에 슬슬 움직일 것 같네."
"…메이슨이?"
메이슨.
그는 이 국제 헌터 협회를 쥐고 있는 또 다른 최고위원 중 한 명이었고, 여기에 앉아 있는 리암과는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나 있는 적대관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리암에게 붙어 있는 에단과 라일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평소에 멀쩡하게 있던 놈이 갑자기 왜?"
"그쪽은 이미 미국 내의 동맹 기반을 확실하게 다져놨어. 이제 슬슬 우리도 치워버리고 자기 멋대로 협회를 주무르고 싶은 거겠지."
"우리 최고위원님은 그동안 뭘 한 거야?"
에단의 비아냥에 리암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론 나도 할 수 있는 바는 전부 했지, 하지만 막지 못했네. 자네도 알겠지? 메이슨의 지지기반은 그냥 튼튼한 게 아닐세."
그의 말에 에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리암과는 적대관계인 메이슨은, 미 정부 고위 측 관료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에 딱히 외부의 라인이 없는 리암은 확실히 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메이슨 쪽에는 TOP 5중에서도 3명의 지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1위와 3위, 그리고 6위.
사실 3위와 6위는 그다지 상관없었지만, 중요한 건 메이슨이 바로 TOP 5중에서도 1위, 무신의 지지를 받는 게 문제였다.
무신은 딱히 헌터 협회 내의 정치에 끼어들지는 않는다.
허나 그가 정치에 끼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이름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S등급 세계랭킹 1위, 무신(武神).
전 세계 헌터 중에서도 제일 꼭대기에 올라 있는 그 이름은 쉽사리 무시할 수 없었다.
당장 무신의 지지를 얻은 것만으로도 메이슨은 미 정부쪽과 헌터 협회 내 세력들, 거기에 더불어 대형길드들의 표를 확실하게 휘어잡았으니까.
그 덕분에 리암이 메이슨과의 정치 싸움에서 밀리는 것은 당연했다.
메이슨의 세력은 점점 커지고 있고, 그와 반대로 리암의 세력은 점점 더 위축되고 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에단의 물음에 리암은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턱을 툭툭 치다가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슬슬 우리 쪽에서도 새로운 카드가 필요할 것 같네."
"새로운 카드?"
"그래."
"뭐, 우리를 도와줄 새로운 스폰서라도 찾았어?"
에단의 물음에 리암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테이블 안에 있는 미니 서랍 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냈다.
"아니, 우리를 후원해 줄 스폰서를 찾는 건 이제 무리지. 안 그래도 우리 배는 무너지고 있는데 누가 오려고 하겠나?"
리암에 말에 라일리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기 일인데 너무 담담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자네들도 나랑 같은 배를 타지 않았나?"
"……내가 왜 이놈이랑 친구였을까."
이 새끼가 의원 되겠다고 깝죽거릴 때 말려야 했는데.
짧게 탄식하는 라일리. 그러나 리암은 그런 라일리의 모습을 한번 보고는 이내 그들의 가운데로 사진을 한 장 던졌다.
"아무튼, 무너지는 배에 스폰서를 태우는 건 불가능하지만 저 녀석들이 우리를 먹어치우지 못하게 방어할 만한 카드는 있지."
"……얘는 누군데?"
에단이 테이블 가운데로 던진 사진을 흘끔 보며 묻자 리암은 말했다.
"김현우."
"김현우?"
"아, 이번에 그 아레스 길드랑 1:1 삭제빵 뜨는 애?"
"……그것보다는 재앙을 막은 헌터로 더 유명하지 않나?"
에단의 물음에 라일리랑 리암이 답하고, 에단은 그제야 얘가 누군지 알았다는 듯 손뼉을 딱 치며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얘 그 또라이 아니야?"
"또라이?"
"그거 못 봤어? 인터뷰 영상 유튜x에 모아져 있는 거 한번 봤는데 개또라이던데?"
"어떻길래?"
"그냥 기자가 자기 심기에 거슬리는 질문 하면 바로 욕하던데?"
"……정상은 아니네."
"아레스 길드랑 1:1 캐삭빵 뜨는 것만 봐도 정상은 아니지."
에단과 라일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자 리암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무튼, 이번 분기에 그가 S등급 세계랭킹 안에 들게 될 걸세. 그리고 매우 높은 확률로 그는 10위권 안으로 진입할 확률이 높지."
리암의 말에 라일리와 에단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기사단' 조지는 영상 보니까 그리 엔간하게 보이지는 않았지."
"뭐, '재앙'이랑 싸우는 영상만 봐도……."
그 둘의 긍정.
그들의 반응에 리암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내 말은 이 헌터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면."
"끌어들이면?"
"물론 무신보다 못할지는 모르지만 나름대로 네임벨류가 있다 보니 우리도 어느 정도 버틸 지지기반이 만들어진다 이걸세."
재앙이 일어났던 '독일' 쪽과'일본' 쪽을 우리 쪽으로 회유시킬 수 있으니까.
리암의 말에 에단는 타당한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래서, 어떻게 김현우를 회유할 건데?"
하는 짓 보니까 보통내기가 아니던데?
에단의 말에 리암은 고개를 슥 하고 끄덕였고 이내 입을 열었다.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리암의 말에 모여 있던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
김현우가 카워드를 만나고 3일 뒤, 경기 하남시
"그래서, 이게 뭐라고?"
"스승님이 지내실 별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무척이나 거대한 집을 보았다.
'집? 아니, 아니야……이건 집이 아니라…….'
거대한 장원.
김현우는 문득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에 탄성을 내지르면서도 앞에 보이는 장원, 정확히 말하면 이제 70% 정도 만들어져 있는 장원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현우의 뒤에 있던 김시현도 마찬가지였다.
"하, 하남에 이런 곳이 있었나?"
김시현도 가끔가다 업무적인 이유로 하남에 온 적이 있었으나, 적어도 자신의 기억에는 하남에 이런 거대한 장원을 짓는 장면은 본 적이 없었다.
'뭐지? 뭐지……?'
김시현은 그렇게 고민하면서 거대한 장원이 만들어지고 있는 곳을 바라보며 시선을 돌리다 이내 자신의 발치에 걸린 한 판때기를 볼 수 있었다.
[새로운 도시! 우리의 도시로 오세요! 신도시 파미안.]
"아."
그리고 그제야 김시현은 지금 이 거대한 장원이 지어지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 분명 신도시 아파트 짓는다던 그곳 아니야!?'
맞았다.
현재 미령이 자신의 스승인 김현우에게 주겠다고 장원을 만들고 있던 자리에는 원래 신도시가 만들어지고 있는 자리였다.
그 증거로, 이 장원이 만들어지는 곳 이외에 다른 곳은.
'…아파트, 올라가고 있잖아.'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김시현은 순간적으로 높게 올라가고 있는 아파트를 확인하고 다시 장원이 지어지고 있는 땅을 바라본 뒤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도대체 이 엄청난 땅을 사고, 또 저 정도의 인부들을 고용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을 박아 넣어야….'
김시현은 생각을 계속하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아무리 해도 계산이 안 나왔으니까.
게다가 인부들 대부분이 장원 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 다니고 있는 걸 보면 거의 대부분이 '헌터' 노동력인 것 같았다.
김시현이 말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장원을 보며 입을 벌리고 있을 때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제자야."
"예, 스승님."
"도대체 돈을 얼마나 꼬라박은 거냐."
"스승님에게 받은 것에 비하면 이 정도의 금(金)이야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아니 그러니까 얼마나 꼬라박았냐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김현우였으나, 이내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봤다.
미령은 무척이나 밝은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그리고 그런 미령의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었던 그 의문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느꼈다.
'어째서 제자가 나에게 무한한 호의를 가지고 있는가?'
김현우는 탑에서의 생활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의가 생각하기에는 조금 힘든 구조였던 것 같은데 눈앞의 제자는 자신에게 엄청난 신뢰와 애정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탑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면 미령이 호의를 느끼고 있는 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우선 안쪽은 전부 만들어져 있으니 원하시면 한번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미령의 물음에 김현우는 미령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다른 수를 꾸미고 있나?'
김현우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수를 꾸미고 있으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김현우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쳐다보고 있자 미령은 순간 그런 김현우의 모습에 갸웃하며 그를 불렀다.
"스승님?"
하지만 미령이 김현우를 부르든 말든 이미 김현우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내가 탑에서 제자에게 제일 많이 했던 건 때리는 것밖에 없는데…….'
김현우는 문득 굉장히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실을 스스로 상기하며 어깨를 으쓱이다 엇 하는 표정으로 미령을 바라봤다.
그리고-
"제자야."
"예, 왜 그러십니까 스승님?"
"너 혹시, 마조히스트냐?"
"…예?"
김현우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다소 어이없는 물음을 그녀에게 던졌고, 잠시 그 말을 듣고 있던 미령과 김시현은 김현우를 보며 얼어붙었다.
# 83
83화. 생각하기 싫다(2)
"…너무해요! 너무하다구요!"
"그래그래,"
김현우는 붉은 버튼을 들어 올리며 두 손을 모으고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달고 있는 아브를 보며 피식 웃었다.
"웃을 때가 아니라니까요! 저 추웠어요! 무지하게 추웠다고요!"
"그럼 좀 부르지 그랬어?"
딸깍.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붉은 버튼을 누르자 주변의 풍경이 바뀌어 나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튜토리얼 탑의 1층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던 방안은 어느새 김현우가 옛날에 지내던 김시현의 집처럼 바뀌어 있었다.
아브는 그제야 살았다는 듯 새롭게 생긴 소파에 누워 불평했다.
"부르려고 했는데!"
"했는데?"
"이미 가디언이 한번 나갔다 와서 부르는데 제한이 걸렸었다구요!"
"……제한? 그런 것도 있어?"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래는 없었는데 가디언한테 출입 기능이 생긴 뒤로는 가디언이 한번 시스템룸에 들르면 5일간 가디언을 부를 수 없게 바뀌었어요."
"……그렇게 금방금방 업데이트 되는 시스템이야?"
"그렇죠. 데이터베이스에는 지금도 무한한 정보가 쌓이고 있을걸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브의 맞은편에 앉았고, 아브는 그 뒤로도 김현우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그 투정을 어느 정도 받아주던 김현우는 이내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아브."
"네?"
"이번에는 업그레이드되는 스킬 같은 거 없어?"
"아,"
김현우의 물음에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친 아브.
"한번 정보창을 열어보시겠어요?"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별말 없이 자신의 정보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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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현우 [9계층 가디언]
나이: 24
성별: 남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S-
민첩: S-
내구: S++
체력: A++
마력: B++
행운: B
SKILL -
정보 권한 [중하위]
알리미
출입
-----------
주르륵 떠오르는 정보창.
"어?"
"왜요?"
"아니, 민첩이 올라 있어서."
"무슨 문제라도?"
아브의 물음에 김현우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니, 보통 능력치가 오르면 로그가 떠오르지 않나?"
"그렇죠?"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정보창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확신했다.
'확실히 민첩이 A++에서 S-로 올랐다.'
다른 헌터들과는 다르게 정보창을 수시로 열어보지 않는 김현우.
'언제 오른 거야?'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민첩 능력치가 언제 올랐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복제자와의 전투인데……그때 로그가 떠올랐었나?'
멍하니 정보창을 보고 생각하던 김현우는 이내 쯧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뭐 그때쯤에 올랐겠지.'
어차피 더럽게 오르지도 않는 능력치가 오를 곳은 그때 즈음밖에 없으니까.
김현우는 간단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아브에게 말했다.
"그래서, 이번엔 어떤 스킬이 업그레이드 돼?"
"음, 솔직히 이번에는 별거 아니긴 한데, 성향표시의 업그레이드예요."
"성향표시의 업그레이드?"
"네."
"…그건 뭔데?"
"음, 말 그대로 '성향'을 조금 더 자세하게 보여주는…? 그런 거예요. 예를 들어 그냥 '기회주의자'로 표시되는 정보들이 어느 것에 대한 기회주의인지 조금 더 자세하게 표시되는?"
"……그거 쓸모 있냐?"
"……글쎄요?"
쓸모는 있다. 저번에 김현우는 성향표시 덕분에 무척이나 편하게 길드원들을 뽑았으니까.
'어, 그러 고보니 길드 사무소에 출근하지 않은 지도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언제 한번 가야겠다.
짧게 생각한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다른 스킬 업그레이드는 없고?"
"정보 권한이 완전히 중위로 올라오면 아마 새로운 업그레이드가 있을 거예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렇게 해서 언제 정보권한 상위까지 올라가냐."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음…하고 고민하더니 이내 무엇인가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가디언."
"왜."
"음, 이건 정말 만약의 이야기인데. 어쩌면 가디언이 알고 싶어 하는 걸 등반자들이 알고 있을 수도 있어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말했다.
"……등반자들이 알고 있을 수도 있다고?"
"네."
"어떻게?"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입을 열었다.
"물론 저도
'이게 이럴 것이다.'
라고 확정적으로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제게는 정보권한이 있잖아요?"
"그렇지?"
"정보권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조합하고 나름대로 추론을 해봤는데 지금 탑을 오르는 등반자 중에서는 '재등반자'가 있는 것 같아요."
"뭐? 재등반자?"
"네."
"그게 뭔데?"
"말 그대로 일반 등반자와는 다른, 탑을 끝까지 올랐다가 다시 등반하는 이들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 놈들이 있다고?"
"저도 재등반자들이 생겨나는 '이유'까지는 정보가 부족해서 추론하지 못하긴 했는데,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녀의 긍정에 김현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이미 탑을 한번 올랐던 녀석들에게 물어보면. 이 튜토리얼의 탑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거지?"
"음, 그렇죠. 그도 그럴 것이 결국 가디언이 있는 곳은 '계층'이고 탑을 이미 한번 올랐던 등반자들은 그 비밀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요?"
아브의 긍정에 문득 김현우는 얼마 전에 싸웠던 복제자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분명 그에게서도 등반자들이 탑을 오르는 이유를 언뜻 들었다.
좌를 얻기 위해서.
'…이 새끼 이유 알려준다고 해놓고 뭐 이렇게 추상적으로 알려줬어?'
김현우는 슬쩍 짜증이 나는 것을 느끼며 복제자와의 대화를 저 뒤로 밀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탑을 오르는 등반자 중 한 명이 '탑'을 만든 놈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거군.'
"가시게요?"
아브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뭐, 여기 있어봤자 할 것도 없잖아?"
김현우의 답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김현우가 문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며 소리쳤다.
"잠깐!"
"?"
"플라이스테이션 만들어 주고 가야죠!"
"……."
김현우는 말없이 들고 있던 붉은 버튼을 눌렀다.
딸깍.
***
천호동에 위치한 저택.
김시현의 집이 다시 원래대로 수리될 때까지 잠시간 이곳에서 머물기로 한 김현우는 새로운 정보 권한도 실험해 볼 겸 방 밖에 있던 미령의 정보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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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미령
나이: 21살
성별: 여
상태: 양호
-능력치-
근력: S+
민첩: S++
내구: S+
체력: S++
마력: S+
행운: A++
성향: 절대 헌신주의 성향 [대상: 김현우]
SKILL -
[정보 권한이 부족해 열람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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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야."
"예. 스승님."
"너는 중국으로 안 돌아가냐."
김현우가 미령의 성향을 보며 묻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는 미령.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김현우는 왠지 양심이 찔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제자가 불편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너 길드는 괜찮냐? 네가 길드장이잖아?"
김현우의 물음에 미령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스승님의 옆입니다."
"……."
김현우는 뭐라 말을 하려다 말고 이내 말했다.
"알았다. 나가봐라."
"예."
"그리고 문 앞에 서 있지 말고 너도 너 할 거 하고 있어라."
"제자를 생각해 주시다니! 이 은-"
"나가 좀."
미령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내보낸 김현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우가 있던 방 안에 김시현이 들어왔다.
그것도 상당히 묘한 표정으로.
"형."
"왜?"
"쟤 무슨 일 있어요?"
김시현의 쟤, 는 미령을 뜻한다는 것을 알기에 김현우는 물었다.
"왜 그러는데?"
"혼자서 중얼중얼하면서 헤실거리던데요?"
"……그냥 못 본 척해."
"아..네."
"그보다, 무슨 일?"
"무슨 일이라니요, 여기 엄연히 제 집이거든요?"
뭐, 일이 있어서 찾아온 건 맞긴 해요.
"아…그랬었지."
미령과 가면 무사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서 그렇지 사실 이 집은 김시현의 집이 맞았다.
정작 어처구니없는 건 갑작스럽게 미령이 이 집에 들어온 뒤 시점부터 김시현이 집이 부담스러워져 나가서 살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일 정도일까.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왔는데?"
김현우가 말하자 김시현은 곧바로 물었다.
"아, 미국 가실 거예요?"
"미국? 미국은 또 왜?"
"형, 스마트폰으로 뭐 안 왔어요?"
"뭐가?"
김현우의 대답에 김시현은 대답했다.
"이번에 뉴스 보니까 국제 헌터 협회에서 김현우 헌터를 공식적으로 호출했다고 하던데요?"
"그건 또 뚱딴지같은 소리? 누구 마음대로 사람을 오라 가라 지랄이야?"
"아마 S등급 세계랭킹 심사 때문에 오라고 하는 것 같은데요?"
"…뭐? 심사?"
"네, 심사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하곤 대답했다.
"그게 뭔데?"
"뭐긴요. 말 그대로 S등급 세계랭킹 등록하는 거죠."
"…아. 그, 네가 예전에 그 등록만 되어 있어도 돈 퍼준다는 그거냐?"
"왜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S등급이 되면 돈을 주는 건 맞으니까…그쵸?"
"흐음…."
김시현의 긍정에 그는 고민했다.
'지금 상황에서 굳이?'
분명 1~2달 전만 해도 돈을 준다면 바로 달려가려고 했던 게 김현우였으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탑에서 빠져나와 이곳에서 지낸 지도 어느덧 시간이 꽤 지났기에 김현우는 슬슬 자신이 벌어들이고 있는 돈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당장 아레스 길드에게 뜯어낸 돈만 해도 수백억이 넘는다.
"굳이 가야 하나?"
김현우가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김시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굳이? 라고 생각한다면 갈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어지간하면 전부 가는 편이죠."
S등급 세계랭킹에 순위를 올린다는 건 헌터들에게 있어서는 꽤 영광스러운 일이거든요.
"…그래?"
"그렇죠. 그래도 지천에 널려 있는 헌터 중에서도 상위 1%정도가 된다는 소리인데. 게다가 지금 형 입장에서는 아니긴 해도 보다 보면 들어오는 돈도 꽤 짭짤하고요."
뭐, 제가 던전 돌면서 버는 돈이 훨씬 많겠지만요.
"흐음…."
김현우는 김시현의 말을 듣고는 짧게 고민했으나 이내 답을 정했다.
"뭐, 까짓것 한번 갔다 오지 뭐."
'어차피 지금 당장 할 일도 없으니까.'
맞다.
어차피 지금 김현우로서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등반자가 나타난 것도 아니고, 아레스 길드와 남아 있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으니 느긋하게 기다렸다 답변이 나오면 행동하면 된다.
"뉴스에 떴다고?"
"네."
김현우는 김시현의 말에 따라 국제 헌터 협회와 관련된 뉴스를 보기 위해 곧바로 스마트폰을 이용해 네이버 포털의 뉴스를 들어갔고.
"…뭐야 이거?"
김현우는 뉴스 포털 최상단에 올라와 있는 뉴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고인물 헌터 김현우는 자신의 무술을 의무적으로 세상에 공개할 필요가 있다.]
김현우는 헤드라인을 클릭했다.
그러자 주르륵 떠오르는 기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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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레스 길드의 암살로 그들과 본격적으로 척을 지게 된 고인물 헌터 김현우.
그에 대한 원성이 일부 헌터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들, '헌터연합'이 고인물 헌터 김현우를 원망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김현우 헌터가 자신이 만든 무술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헌터연합의 장이자 A급 헌터 '심전도'씨는 지금 같은 몬스터와 재앙이 들이닥쳐 헌터들이 쉼 없이 죽어나가고 있을 때 김현우 헌터는 자신의 특권을 위해 무술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 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심전도씨는 '설령 본인이 만든 무술이라고 해도 헌터의 생존률을 올리기 위해, 그리고 인류를 위해 김현우 헌터는 의무적으로 본인이 만든 무술을 공개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이렇게 김현우 헌터를 향해 원성을 내뱉는 그들은 오늘 23일에 김현우 헌터의 무술 공개를 촉구하는 '무술 집회'를 열겠다고 선언하고 헌터들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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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뭔 개소리야?"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스마트폰을 바라보자 김시현이 물었다.
"또 왜요?"
"이것 봐."
김현우가 스마트폰을 넘겨주자 김시현은 그 스마트폰을 넘겨받더니 기사를 바라봤고 이내 아 하는 탄식을 내뱉으며 김현우에게 폰을 넘겨주었다.
"아 얘들이요?"
"알고 있어?"
"네, 알고 있죠. 저번에 형이 자세한 건 저한테 물어보라고 인터뷰했을 때 있죠?"
"응."
"그때 지랄 맞게 전화하던 새끼들이 이 새끼들이거든요."
"그래?"
김현우는 스마트폰을 돌려받으면서 기사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저도 모르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단 말이지……?"
김현우의 입가가 올라갔다.
# 84
84화. 생각하기 싫다 (3)
3일 뒤.
아랑 길드 11층의 길드장실.
이서연은 길드장실 소파에 앉아 있는 김시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미궁 탐험은 2주 뒤로 미루자고?"
"응, 어차피 저번 달에 두 번 다녀왔으니까 이번에는 2주 정도 미뤄도 되지 않을까?"
"……뭐, 우리 길드원들도 들어보니까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더라."
"석원이 형한테도 물어보니까 별 상관없다고 하더라고, 애초에 그때가 보스 사냥 기간이랑 겹쳐서 안 그래도 미루려고 했다더라."
김시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서연은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 미루는 건 현우 오빠 미국가는 데 따라가려고 하는 거지?"
"뭐, 그렇지. 너는 안 갈 거야?"
"이번에는 딱히,"
"그래?"
"그래서, 현우 오빠는 어디?"
"아, 오늘 그…… 헌터연합인가? 동대문역에서 집회하는데 한번 가본다고 하던데?"
"……가서 또 뭘 하려고……."
"낸들 알겠어……대충 예상할 수 있는 건, 이번 집회가 끝나고 나면 또 유튜x나 뉴스가 형으로 도배될 거라는 것 정도?"
"……그건 나도 예상할 수 있어."
이서연의 말에 김시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런 것 정도지."
"그래서, 오늘 그거 말하려고 온 거야?"
이서연의 물음에 김시현은 흠흠하고 목을 가다듬는 듯하더니 물었다.
"아니. 사실 그거 말고도 물어볼 게 하나 더 있어서."
"물어볼 거?"
고개를 끄덕이는 김시현. 이서연은 물었다.
"뭔데?"
"그……."
말을 길게 늘이며 슬쩍 눈치를 보는 김시현, 그 모습에 이서연이 이상함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시현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여자는 말이야,"
"?"
"어느 기념품을 사주면 좋아할까?"
김시현의 물음에 이서연은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
동대문역의 거대한 빌라 홀 가운데.
그곳에서는 상당히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빌라 홀의 절반을 채울 정도로 많은 사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헌터.
그래, 그곳에 모여 있는 이들은 단순한 사람이 아닌 헌터들. 그들은 '헌터 연합'이라는 글씨가 박힌 조끼를 입고, 빌라 홀 가운데에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 중에서도 한 사람.
헌터연합의 장이자 A급 헌터인 '심전도'는 헌터들이 모여 있는 무대 위에서 혼자 열심히 무엇인가를 연설하고 있었다.
"여러분! 고인물 헌터 김현우의 행태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개발한 무술로 손쉽게 던전 공략을 하면서 일부러 다른 이들에게는 무술을 알려주고 싶지 않아 우리를 기만하고 있습니다!"
""맞다!!"
"직접 만들어 낸 무술로 재앙을 두 번이나 막은 김현우는 전 인류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무술을 헌터 사회에 공개해야 합니다!"
""옳다!"
그 이외에도 김현우가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며 열심히 부르짖는 헌터 연합.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김현우는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바라보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미령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죽일까요?"
"제자야, 너는 너무 인생을 편하게 산 것 같구나."
김현우의 말에 미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래."
"허나 저번에 스승님이 네 앞을 가로막는 건 모조리 네 방식대로 치워버리라고-"
"……."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있었던 것 같은 게 아니라 있었다.
탑 안에 있을 때, 김현우는 은거기인 컨셉을 잡으며 그녀에게 여러 가지 상식을 집어넣었다.
물론 그 상식이 김현우 제멋대로 만든 상식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자신의 제자인 미령에게 가르친 상식은 '무협지'에서 나오는 웃기지도 않는 제왕학 같은 상식이라는 게 문제였다.
"아무튼 제자야."
"예, 스승님."
"사람을 죽이는 건 멋대로 하면 안 된다."
"그렇…습니까?"
"물론 네 마음에 안 들면 시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몰래 슥 해버리는 것도 좋지만……."
김현우가 말하자 미령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탄성을 내뱉었다.
"아!"
"대충 무슨 뜻인지 이해했냐?"
"예 스승님, 제자. 스승님의 뜻을 모두 이해했습니다!"
김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령은 곧바로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순식간에 그녀 앞으로 내려오는 검은색 가면을 쓴 가면무사.
미령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1호야."
"예."
"지금부터 저기 모여 있는 이들을 전부 마킹해라."
"예."
"그리고 그들이 혼자 있을 때 모조리 죽여라.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예."
"예는 씨발, 무슨 예야?"
"예? 스승님, 하지만……."
"하지 말라고 했다 제자야."
김현우의 말과 함께 미령은
'뭔가 잘못했나?'
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잊어라."
"예."
미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지는 가면무사.
"제자야."
"예, 스승님."
"너는 도대체 탑에서 빠져나오고 어떻게 산 거냐?"
물론 김현우가 누구에게 상식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우스운 상황이었으나 김현우는 지난 1주간 미령과 같이 있으면서 느꼈다.
'제자가 상식이 부족했다.'
김현우가 묻자 미령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 스승님에게 맹세한, '스승님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래."
"그리고 길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래."
"그리고 법을 바꿨습니다."
"?"
"?"
김현우가 미령을 바라보고 미령이 똘망똘망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이내 손을 휘적거리곤 말했다.
"그래, 계속 말해봐라."
"예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법을 바꾼 뒤에…… 우선 근처에 있던 길드들을 모조리 힘으로 찍어 눌렀습니다."
"죽였냐?"
"거슬려서 죽였습니다. 물론 전력은 필요했기에 몇몇은 길드원으로 흡수했습니다."
"……."
김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시위를 하고 있던 그들을 바라보다 또 한번 시선을 돌려 미령을 바라봤다.
"제자야."
"예, 스승님."
"너 혹시 탑에 들어가기 전에는 뭐했냐?"
"……뭘 했냐니……제자, 너무 미천해서 스승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의 질문이다. 탑에 들어가기 전에는 뭘 하고 지냈냐 이거다."
'듣다보니 이건 좀 상식이 부족한 수준이 아니라-'
상식이 없다.
김현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이 보통 상식이 없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제자처럼 이렇게 맹목적으로 상식이 없을 수 있을까?
김현우의 물음에 미령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탑에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스승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래."
"객관적으로 평가해보면 그저 흔한 재벌 2세였습니다."
"……."
"그리고-"
"됐다. 더는 이야기할 필요 없다."
"네 알겠습니다."
입을 다무는 미령을 보며 김현우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째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복잡해지는 것 같으니 그만두도록 하자.'
복잡한 걸 싫어하는 김현우는 이번에도 외면을 택했다.
한동안 그렇게 미령과 이야기를 나누던 김현우는 이내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차 안에 들어가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김현우의 말에 미령은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차 안으로 들어갔고, 김현우는 아직도 열심히 소리를 치고 있는 시위 현장을 바라봤다.
"무술을 공개하라! 무술을 공개하라!"
"지랄도 이 정도면 병이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시선을 돌려 시위 현장 옆에 있는 상당히 거대한 방송용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아주 실시간으로 촬영까지 해서 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곧 김현우는 한참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무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가가고 있는 김현우를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시위에 열중하고 있던 그들.
"어, 어어……김현우?"
"김현우! 고인물 헌터 김현우다!"
"뭐? 어디!"
허나 한 명의 사람이 김현우를 알아봄과 동시에 시위를 이어가고 있던 헌터들은 사방으로 고개를 돌리며 김현우를 찾기 시작했고, 그는 그 순간 망설임 없이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그들.
무대 위에 서 있던 심전도도 갑작스레 올라와 자신을 바라보는 김현우를 보며 몸을 움찔하는 듯했지만 이내 손을 올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김현우 헌터는 인류의 안전을 위해 무술을 공개해라!"
"맞다! 공개해라!"
"공개해!"
조금 전까지 당황하던 녀석들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소리를 지르는 그들을 보며 김현우는 피식 웃은 뒤, 입을 열었다.
"지랄 좀 그만 떨어라."
"뭐, 뭐?"
김현우의 말 한마디와 함께 조용해지는 거리.
그는 순식간에 조용해진 거리를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 뒤 말했다.
"왜? 못 들었어? 다시 한번 말해줄까?"
빙글거리는 웃음을 띈 김현우의 모습에 당황 심전도는 이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김현우 헌터! 지금 당신이 하고있는 행동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헌터를 죽이고 있는 일입니다!"
"내가 뭘 했는데?"
"저는 알고 있습니다. 김현우 헌터! 당신의 힘은 당신이 만들어 낸 그 무술에서 나온다는 것을"
"또 지랄이네? 내가 저번에 TV에 나와서까지 말해주지 않았나? 또 말해줘야 해?"
김현우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강하니까 내가 쓰는 무술도 강한 거라니까? 몇 번을 말해줘야 해?"
그의 말에 심전도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
어느새 존댓말은 하지도 않는 그.
"무슨 근거로?"
"그건 그냥 눈속임이 아닌가! 지금 너는 자신의 무술을 공개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야!"
"지랄하지 마. 머저리새끼야."
김현우의 말에 심전도가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김현우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주변을 한번 돌아봤다.
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헌터들.
김현우는 말했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이 새끼들아. 진짜 여기서 내 무술만 익히면 정말 나처럼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놈들 없지?"
있으면 병신이지.
김현우는 쯧 하고 뇌까리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너희들 내가 왜 고인물 헌터라는 웃기지도 않는 별명으로 불리는지 잃어버린 것 같은데, 나는 너희들이랑 다르게 탑에 12년 동안 갇혀 있었거든?"
12년이야 12년, 감이 와?
"너희가 탑 한번 돌고 밖에 나와서 세상 문물 다 즐기고 있을 때 나는 탑 안에서 12년 동안 존나게 뺑이치고 있었다고, 탑을 계속해서 돌면서."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마이크를 집은 채 움찔하고 있는 심전도를 바라봤다.
"그런데 뭐? 내 무술이 강해서 내가 강해? 진짜 지랄하지 마라. 죽여 버리기 전에."
팍 씨!
김현우가 손을 올리자 심전도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머리를 가렸고, 그런 그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본 김현우는 이내 그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강한 건 그냥 말 그대로 노력을 존나게 해서 그런 거야. 알았어? 너희들처럼 탑 한번 클리어하고 밖에서 쎄쎄쎄 거리면서 논 게 아니라 탑 안에서 열심히 뺑이치다 와서 쎈 거라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허접한 새끼 말에 선동당해서 나온 것도 어처구니가 없다 새끼들아.
"강함이라는 게 무슨 기연 하나 만나면 존나 쎄지고 그런 것 같냐? 응? 내가 무슨 만화 속에 주인공처럼 무술 하나 잘 만들어서 강해진 거라 생각해?"
그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귀 파고 잘 들어라, 애들아."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건 없어.
"응? 그런 건 없다고! 막 내가 제대로 강해지려는 노력도 안 하는 허접이였는데 무술 하나 배우고 세계최강!? 이딴 전개는 일본 웹소에서나 나오는 전개라고 병신들아! 그러니까-"
헌터 등급 올리고 싶으면 이딴 선동질 당하지 말고 던전 들어가서 몬스터 한 마리를 더 잡아라.
"이 멍청이들아."
# 85
85화. 샌드백은 딱딱해야 제맛이다 (1)인천공항.
김현우는 들고 있는 여권을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굳이 귀찮게 비행기를?"
"그럼 어떻게 가려고요?"
"마법진 있잖아."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형, 그건 형 개인적인 일로 왔다 갔다 한 거고 이건 공식적으로 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비행기 타고 가는 게 맞죠."
"그냥 마법진 사용해서 간다고 전화하면 안 돼?"
"…어디에다가 전화를 해요?"
"…헌터 협회?"
김현우가 고민하다 말하자 김시현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형, 우리 제대로 공항 게이트도 통과 안 하면 그냥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가는 거라니까요? 그리고 불편할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어차피 패도 길드 전용기 타고 가는 거잖아요?
김시현은 그와 함께 게이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하나의 비행기.
비행기 옆에는 어느 항공사의 로고가 붙어 있는 게 아닌 패도(悖道)라는 글자가 적혀져 있다.
잠시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김현우의 옆에 있던 미령은 이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스승님 이제 오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미령의 말에 김현우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면서도 비행기와 연결되어 있는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곧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게 비행기라고?"
김현우는 비행기 내부로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비행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넓은 공간.
어찌 보면 조금은 작은 외국의 호텔이라고도 볼 수 있을 모습이 그곳에는 펼쳐져 있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소파가 양쪽 벽에 붙여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또 그런 소파 옆에는 술과 음료수가 가득 채워져 있는 음료수와 함께 이런저런 조리를 할 수 있는 바(bar) 형식의 조리대가 있었고 그 옆에는 TV가 놓여 있었다.
"와. 전용기라서 대충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건 직접 보니까……."
김시현이 나지막이 감탄하고, 미령은 고개를 숙이고는 대답했다.
"스승님이 가는 길에 불편하지 않도록 나름대로 준비해 봤습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미령의 공손한 물음에 김현우는 몇 번이고 비행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건 내가 아는 비행기 수준이 아닌데?"
김현우는 감탄하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김현우의 머릿속에 있는 비행기의 모습은 일본에서 탄 비행기의 모습이었다.
그나마 1등석이라고 잡았으나 뒤로 누울 수는 있었으나 좁아서 불편했고, 화장실은 더 불편했으며, 그 1등석 뒤에 있는 다른 좌석들은 마치 버스 좌석과 같아서 굉장히 불편해 보였다.
물론 영화나 다른 매체 등에서 이런 호화스러운 비행기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김현우는 눈 앞에 펼쳐진 비행기를 보며 자기가 그냥 눈으로 보고 '상상한 것과 직접 느끼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멍하니 비행기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 미령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곤 대답했다.
"스승님이 자리에 앉으시면 비행기를 출발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김현우가 넓은 소파에 앉자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
"오늘은 해산!"
"수고하셨습니다, 길드장님!"
"그래, 오늘은 전부 해산하고 오늘 보스 레이드 참가한 인원들은 모두 내일 하루 휴가입니다."
아랑길드의 독점 던전인 '푸른 꽃의 성'에 있던 이서연이 입을 열자마자 저마다 환호성을 지르는 길드원들.
이서연은 순식간에 흩어지기 시작하는 헌터들을 보며 자신도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미리 던전 근처에 주차해 놓았던 차로 걸음을 옮겼다.
"후……."
차에 들어와서 한숨을 내쉰 이서연.
'이상하게 이번에는 다른 때보다 훨씬 몬스터들이 강했던 것 같은데.'
이서연은 묘한 표정으로 조금 전 몬스터를 레이드 하러 다녔을 때를 떠올렸다.
분명 잡았던 몬스터는 저번 달과 비슷했지만, 이상하게 이번 달에 나온 보스 몬스터는 저번 달과는 다르게 레이드하기가 힘들었다.
'…조금 더 강해진?'
아니, 뭔가 조금 더 똑똑해진 것 같기도….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피곤했나 보네.'
이서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운전석 등받이에 누워 한숨을 내쉬다 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슬쩍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현우 오빠랑 시현이는 미국에 잘 가고 있으려나.'
그리고 곧, 스마트폰을 이용해 김시현에게 메시지를 보낸 이서연은 곧 스마트폰을 이용해 오늘 아침에 미처 들어가 보지 못했던 뉴스를 확인하기 위해 앱을 실행했고, [김현우 헌터의 무술을 세상에 공개하라고 했던 (자칭)헌터 연합장 '심전도' 26일부터 헌터 연합장 자리 내려놔. 사유는 정신 이상?]
"……응?"
뉴스 헤드라인에 큼지막하게 걸려 나오고 있는 기사를 보며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그녀는 뉴스를 보자마자 얼마 전 김현우가 한참 집회가 일어났던 곳에 일어나 개판을 쳤던 그때 상황을 떠올렸다.
지금이야 이미 나흘이나 지난 일이라 슬슬 사람들의 관심도가 떨어지고 있었으나, 그때 당시 김현우는 다시 한번 헌터킬 커뮤니티와 이슈게시판을 뜨겁게 달궜다.
물론 이슈 게시판을 그렇게 뜨겁게 달군 것이 좋은 쪽이냐 나쁜 쪽이냐 생각해 본다면 좀 애매했지만, 김현우는 그날 9시 뉴스까지 타서 자신의 얼굴을 전 세계에 공개했다.
뭐, 이미 공개된 얼굴이다만…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심전도와 '헌터 연합'에서는 김현우가 그렇게 일장연설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에게 계속 무술 공개를 요구하겠다는 의견을 공수했었다.
'그래서 현우 오빠가 한동안 골치 좀 썩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걸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던 헌터 연합장이 갑자기 연합장 자리를 내려놓는다고?
이서연은 뉴스를 클릭해 내용을 확인했으나, 딱히 내용은 별거 없었다.
정말 헤드라인에 써져 있는 내용이 전부.
헌터 연합장은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 때문에 불미스럽게 헌터 연합장 자리를 내려놓게 되었고, 그 이유는 대충
'정신에 약간 문제가 생겨서 그렇다.'
라는 것 같았다.
"……."
현우 오빠가 뭘 했나?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김현우와 어제와 그저께 이틀 연속으로 만났었는데 딱히 김현우가 뭔가를 했다고 말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패룡도 김현우 옆에 조용히 붙어 있기만 했고.'
이서연은 뉴스를 보며 생각하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다른 기사를 보기 위해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그리고,
"응?"
이서연은 곧 스마트폰 하단에 떠 있는 해외기사를 바라봤다.
[TOP5 중 3위 '탱크', 현지시각 25일 중으로 국제 헌터 협회에 복귀한다.]
"……."
그리고 그 기사를 보며 이서연은 왠지 모르게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
"……와, 더럽게 크네."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보이는 거대한 국제헌터 협회를 보며 감탄을 터트리고, 주변을 슥 돌아보면서 감탄을 터트렸다.
15시간의 비행 끝에 김현우는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고, 별다른 관광 없이 곧바로 국제 헌터 협회로 향했다.
"야, 여기 전체가 국제 헌터 협회 부지라고?"
"네."
"저 멀리까지 있는 걸 봐서는 부지가 몇 만 평 정도 되겠는데?"
"몇 만 평도 우습지 않을까요?"
"역시 땅덩어리가 넓으면 클라스도 달라지는구나."
김현우는 저 멀리까지 지어져 있는 건물들을 보며 감탄할 무렵, 옆에 있던 미령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그럼 제가 이 정도의 장원을 만들어……."
"그건 아니다 제자야."
김현우의 말에 입을 다무는 미령.
그가 왜인지 시무룩해 보이는 미령을 한번 바라보고 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군요, 김시현 헌터."
"아, 오랜만입니다."
김현우는 곧바로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곧 그곳에서 김현우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정갈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
한쪽 눈에는 오라클을 끼고 있는 중년의 남성은 김시현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고, 곧 시선을 돌려 김현우와 미령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 김현우 헌터! 반갑습니다."
그는 곧바로 김현우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고,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맞잡았다.
"패룡도 같이 오셨군요."
"……."
남자는 미령도 잘 알고 있었는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지만, 그녀는 그저 남자의 손을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고, 이내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내밀었던 손을 회수했다.
"아 형, 이분은 국제 헌터 협회에 두 명밖에 없는 최고의원 중 한 명인-"
"리암.L.오르라고 한다네."
"리암……뭐요?"
"그냥 편하게 리암이라고 부르면 된다네."
리암은 웃는 낯으로 김현우와 김시현을 한번 돌아봤고, 김시현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상의위원님이 여기에는 왜? 보통은 협회원들이 마중 나오는데……."
김시현의 물음에 리암은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라면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김현우 헌터의 팬이어서 말일세. 한번 봐두고 싶었거든."
마침 시간도 꽤 남는 타이밍이라서 말일세.
리암의 말에 김시현은 슬쩍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렸고, 이내 리암은 김현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선,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김현우 헌터는 순위를 측정하기 위해 온 것 같은데."
"네. 그거 아니면 올 일 없었죠."
김현우의 다소 건방져 보일 수 있는 대답에도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따라오게, 안내해 주도록 하지."
리암의 말에 김시현을 포함한 김현우와 미령은 국제 헌터 협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김현우는 김시현과의 안부 인사를 나눈 리암에게서 곧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국제헌터협회가 언제 생겨나고 현재 무슨 일을 하는지 같은 자잘한 내용들.
물론 그것들은 김현우에게 있어서 별 관심이 없는 이야기.
그렇기에 그는 그저 건성건성 대답하는 것으로 넘겨 버렸고, 곧 그런 지루한 설명이 이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헌터 협회 어느 한구석에 있는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끼이이익.
나무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보이는 것은 거대한 구슬.
"여기가 S등급 헌터의 순위를 매기는 순위 측정실이지."
리암의 말과 함께 김현우는 멍한 표정을 주변을 바라보다 말했다.
"여기가 순위 측정실이라고?"
김현우의 물음에 리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손짓으로 거대한 구슬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맞네. 자네가 저 구슬에 손을 대게 된다면 자네의 정보가 구슬 안으로 흘러 들어가서 저 구슬 안에 들어 있는 헌터들과의 정보와 대조해 순위를 매기게 되지."
'그런 시스템이었어?'
생각해 보면 어떻게 순위를 매기는 거지하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순위를 정할 줄 몰랐던 김현우는 뭔가 김이 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시험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김현우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편한 게 좋은 거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구슬을 향해 다가갔고, 곧 거대한 구슬 앞에 선 김현우는 이내 자신의 손을 구슬 앞에 얹어 놓았다.
우우웅-
"후……."
구슬 앞에 손이 놓임과 함께 거대한 구슬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여러 가지 형형색색의 빚을 내는 구슬.
그리고-
"응?"
결과가 나왔다.
# 86
86화. 샌드백은 딱딱해야 제맛이다 (2)미국 뉴욕 중심가에 있는 거대한 빌딩.
'아레스'라는 언어가 로마자로 표기되어있는 그곳의 꼭대기 층.
"……."
길드장의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는 곳에는 '카워드'가 앉아 있었다.
그는 굉장히 피곤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는 서류뭉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
'마튼 브란드'가 실종된 지도 이제 시간이 꽤 지난 지금. 아레스 길드의 길드장을 역임하게 된 카워드는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는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젠장……."
그는 짧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현재 아레스 길드의 상황을 상기했다.
현재 아레스 길드의 상황은 그 누가 보더라도 개판 5분 전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상황이었다.
요직에 앉아 있던 아레스 길드의 헌터들은 마튼 브란드가 '사망'했다는 게 은근히 확실시되기 시작하자 자기들끼리 파벌을 만들어 길드의 지분을 차지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고 있었고.
다른 대형길드들은 이때다 싶어 외부적으로 아레스 길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정작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티팩트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그것은 바로 아티팩트들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마튼 브란드'가 헌터들을 다루기 위해서 뿌려댔던 아티팩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도대체!'
꽝! 우지직!
카워드의 짜증어린 주먹질에 책상이 부서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튼 브란드'가 사람을 편하게 다뤘던 이유.
그것은 바로 그가 미궁에서조차 쉽게 찾을 수 없는 아티팩트를 이용해 헌터들을 꼬셨기 때문이었다.
옛날에는 몰라도 지금 랭킹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 지금, 헌터들은 제자리에 안주하는 것 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서 남의 위에 올라서고 싶어 했으니까.
마튼 브란드는 그런 헌터들의 심리를 이용해 어디서 생겨났는지 모를 아티팩트들로 헌터들을 회유했고,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아레스'길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던 이유였다.
그러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마튼 브란드가 사라짐과 동시에 그가 뿌렸던 아티팩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덕분에 아레스 길드는 더없는 혼란기에 빠졌다.
그게 지금 상태.
"……씨발."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카워드는 또 하나,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짜증나는 일에 신경질 적으로 챙상을 한 번 더 내리쳤다.
우지직! 와당탕탕!
순식간에 박살이 나버리는 책상.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뇌까렸다.
"김현우…… 이 개새끼."
그는 얼마 전 한국에 갔을 때, 만났던 그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한국에서의 추억은 그에게 있어서 좋을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독점 던전의 40%를 내놓으라니, 이런 씨발, 씨발!!'
물론 그 제안은 아레스 길드에서 무시하고자 하면 충분히 무시할 수 있었다.
그래, 평소와 같은 아레스 길드의 상황이라면.
허나 지금은?
'안 돼. 지금 또 그게 터져버리면…….'
아레스 길드는 내부적으로도, 그리고 외부적으로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분열이 일어나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는 상황이고, 외부에서는 이때 조금이라도 아레스 길드의 세력을 축소 시키기 위해서 지랄을 떨어대고 있었다.
이 상황에 김현우의 암살건이 사실로 밝혀지고 기사단 6번이 있는 사실 없는 사실을 전부 불어버린다면?
'자멸이다.'
카워드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끔찍한 결말에 인상을 찌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고, 그렇게 그가 한숨을 내쉬고 있는 순간.
끼이익-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내가 분명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
카워드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앞을 바라봤고, 이내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군, 카워드. 마튼이 없는 사이에 일은 잘 하고 있나?"
"메이슨 최고의원님……?"
카워드의 앞에 서 있는 상당히 젊어 보이는 남자.
와인 색의 양복을 입고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그는 무척이나 여유로운 표정으로 카워드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최고의원님이 여기에는 무슨 일로……?"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자 메이슨은 슥 웃더니 이내 그의 맞은편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
"뭐, 마튼 브란드…… 그 친구와는 여러 가지로 인연이 있으니까 말일세."
메이슨의 말에 카워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레스 길드장인 마튼 브란드와 국제 헌터 협회의 최고의원인 '메이슨', 그 둘의 관계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상당히 친한 관계.
둘이서 대화를 할 때면 항상 옆에 두던 자신도 잠시 어디에 가 있어야만 했었다.
카워드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도 메이슨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방을 한차례 훑고, 마침내 부서져 있는 책상을 보더니 말했다.
"그리 상황이 좋은 것 같지는 않군."
"……면목 없습니다."
카워드는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다 결국 그리 말했고, 메이슨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내 말했다.
"뭐, 걱정하지 말게."
"예?"
"이제부터는 내가 좀 도움을 줄 테니."
"……저, 정말입니까?"
메이슨에 말에 카워드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를 바라봤으나, 이내 약간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저를 왜…."
"아니, 아니지. 자네를 도와주는 게 아니야. 실종된 그를 도와주는 거지. 만약 실종돼 있는 그가 돌아왔을 때 길드가 분열되어 있으면 그녀석의 심정이 어떻겠나?"
그러니까-
"자네는 내 말대로 하면 되네."
내 말대로만 말이야.
메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
"……."
[측정불가]
"……다시 한번 구슬에 손을 대보겠나?"
우우우우웅!!!
[측정불가]
김현우는 거대한 구슬 위에 두 번이나 떠오른 글씨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곤 이내 자신의 옆에 떠 있는 로그를 바라봤다.
'뭐야 이거?'
------
능력 정보 집약체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파악
-정보 권한-
능력 정보 집약체는, 4계층의 신세기. 자신들의 힘을 비교하기를 좋아한 한 -권한부족-이 만들어낸 아티팩트다.
-권한부족-은 능력 정보 집약체를 만들어 일정 이상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권한부족-족들이 쓸데없는 싸움을 멈추고 전투력 보존을 바라는 뜻에서 이 물건을 만들었지만, 오히려 -권한부족-이 만든 이 물건으로 인해 -권한부족-이 -권한부족-하게 되었다.
-권한부족-은 자신의 외표면에 닿은 생물체의 능력을 파악 분석해 자신의 내부에 저장되어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수치적으로 비교해 순위를 매긴다.
------
상세하게 써져 있는 정보권한의 정보를 보며 김현우는 다시 한번 손을 올려 두었으나. 이번에도 떠오른 것은 [측정불가]라는 문자뿐이었다.
"뭐야 대체?"
"…음.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런 김현우의 반응에 리암은 난색을 표했고. 김시현은 김현우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형, 제가 한번 해볼게요."
김현우가 슬쩍 비켜주자 김시현은 곧바로 구슬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172]
"…떨어졌네."
김시현은 구슬 위에 또 오른 순위를 보고 저도 모르게 힘 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분명 김시현 헌터는 제대로 반응하는 것 같은데."
그 뒤로 리암이 구슬을 관리하는 협회원들을 불러와 구슬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해 물었지만, 그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구슬을 관리하는 협회원들은 김현우의 [측정 불가]라는 표시를 보고 굉장히 놀라워했다.
"와…숫자 이외에도 문자가 출력되는 것은 저도 처음 봤습니다."
"아니, 이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거리자 리암은 드물게 난색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면…?"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군."
그의 말에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 했으나, 미령이 더 빨랐다.
"머저리 같은 우민. 그냥 발표하면 되지 않나!"
"그게 무슨?"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의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스승님 한 분뿐이다! 스승님이야 말로 이 세상의 천(天)! 그러니 당연히 스승님이 1위인 게-"
"제자야 스트레스받게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갑자기 자신의 흑역사를 세상에 까발리기 시작한 미령을 말 한마디로 제압한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저 여기까지 온 게 그냥 헛짓한 거?"
김현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리암은 흠흠……거리는 소리를 내며 시선을 돌렸다.
물론 애초에 리암에게 이것을 따지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허나 지금 김현우의 머릿속에는 그런 논리적인 생각보다는 짜증이 앞서 있었다.
그런 심리를 파악한 리암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게 어떻겠나? 안 그래도 이제 조금 뒤면 연회가 열릴 걸세."
"연회요?"
김시현이 묻자 리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네. 자네들이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이 국제 헌터 협회의 설립기념일이거든. 아마 입이 심심하지는 않을 텐데……어떤가?"
리암의 말에 김현우는 쯧 하는 표정으로 거대한 구슬을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그냥 허탕 치고 가는 건 어처구니가 없지만.'
측정 불가라고 뜨는데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에 있는 짜증을 털어냈고, 곧 리암은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그를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어이구, 이게 누구야? 이제 살날 얼마 안 남은 늙은이 아니야?"
"……탱크."
김현우는 연회장에 도착하자마자 리암의 앞으로 다가오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온몸에는 터질 것 같은 근육이 보였고, 군용조끼만 입고 있는 오른쪽 팔에는 검은 해골 문신을 한 남자.
S등급 세계랭킹 3위이자 '탱크'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남자. '트락 록'은 굉장히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지은 채 일행을 안내하고 있는 김현우 앞에 섰다.
리암은 아까와는 다른,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외눈 오라클을 만지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손님을 상대하고 있으니 자네와 놀아줄 시간은 없을 것 같은데?"
"뭐? 네가 나를 놀아줘?"
푸하하.
귓가가 쩌렁거릴 정도로 웃은 록은 노골적인 비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너무 늙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가 본데 영감, 당신 그런 식으로 허리 펴고 다니는 날이 얼마나 있을 것 같아? 응?"
"자네가 걱정할 건 아닌 것 같은데?"
"흐흐흐, 늙은 괭이가 말은 잘하는군, 이제 곧 있으면 너희들을 설거지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 텐데?"
국제 헌터 협회.
연회장이 열리는 홀.
분명히 연회를 준비하는 사람도 많았고, 심지어 연회를 즐기러 온 이들도 꽤 보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록의 말에 대해 태클을 거는 이나 불편을 드러내는 이들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뿐.
홀 한가운데서 당당하게 살해 협박이 이뤄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방관하고 있었다.
리암의 표정이 굳어지고, 록의 입가에 더더욱 짙은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록이 다시 입을 열 때쯤-
"기다-"
"시끄러워 씨발 새끼야 귀청 떨어지겠네."
연회실 홀 내에 노골적으로 퍼지는 욕설에 록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욕이 들린 쪽을 바라봤고,
"뭘 봐 씹새끼야?"
김현우는 록을 마주 보며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 87
87화. 샌드백은 딱딱해야 제맛이다 (3)트락 록. 그는 전 세계에서도 세계랭킹 3위로 어느 정도 상당한 인지도가 있었으나, 그가 진짜로 유명한 것은 그가 나고 자란 국가인 '미국'에서다.
헌터의 시대가 열리고 그가 튜토리얼 탑에 들어갔다 나올 때부터, 미국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간첩일 정도로 엄청난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 주로 안 좋은 쪽으로.
S등급 세계랭킹 3위, '탱크'.
그는 튜토리얼 탑에 들어가기 전에는 슬럼가의 갱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헌터가 돼서도 그가 탑에 들어가기 이전의 행동을 멈추는 것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사람이 힘이 생기면 그래도 겉으로는 겸손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록은 반대였다.
탑에서 빠져나오고 본격적으로 헌터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그는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헌터인데도 불구하고 공권력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헌터의 힘을 마구잡이로 사용하고, 그 힘을 이용해 돈이 되는 불법적인 일에는 전부 손을 댔다.
마약밀매부터 매춘까지,
물론 그가 유명하지 않을 때는 몰래몰래 그런 일을 진행했으나, 그가 점점 성장해 마침내 S등급 세계랭킹 3위에 올랐을 때, 그는 자신이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그런 불법적인 일을 하는 록을 보며 '머더러 헌터'로 지정해야 한다는 소리조차 나왔지만, 그는 머더러 헌터로 지정되지 않았다.
이유?
간단했다.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것을 숨기지도 않았고, 여러 가지 추문이 돌기는 해도, 그는 결코 공개적으로 다른 헌터나 일반인들을 살해한 적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로서는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국제 헌터 협회나 미국 정부는 록의 안하무인 적인 행동을 보고도 넘어갔다.
각각의 이익을 위해.
국제 헌터 협회에서는 TOP5에 들어와 결과적으로 '국제 헌터 협회'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주는 그를 적대하는 게 손해였고.
미국 입장에서는 국가 전력 중 하나인 자국의 헌터를 '머더러 헌터'로 만들어 쓸데없이 날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록은 그런 안하무인격인 태도로도 그 어떤 제재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살 수 있었다.
연회장이 얼어붙는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진 체 찌푸려져 있고, 그것은 리암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세 명.
김현우의 옆에 붙어서 무감정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미령과, 또 저질렀다는 표정으로 뭔가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시현.
그리고 자신보다 머리 한두 개는 더 커 보이는 록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였다.
"뭐?"
그의 눈가가 찌푸려진다.
명백한 적의의 눈빛.
자신이 뭘 들었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의문의 빛을 지우지 않는 록을 보며 김현우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네가 귀머거리라서 소리 땅땅 지른 거냐? 보청기 끼고 다녀 개새끼야."
시끄럽게 하지 말고.
김현우의 명백한 조롱과 욕설에 록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뭐? 지금 뭐라고 했어?"
"보청기 끼라고 이 씹새끼야."
"이런 미친 새끼가…."
김현우의 노골적인 욕설에 록이 반응한 것도 잠시, 그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김현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츄리닝에 검은색 삼선슬리퍼.
그 복장에서 그는 이내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하더니 이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 이 새끼 어디서 봤다 했더니 그 녀석이구나. 재앙 몇 번 막고 세상에 지 하나 있는 것마냥 깝치고 다닌다던?"
"어쩌라고 병신아. 이 새끼 내로남불 플레이하는 거 봐라?"
김현우는 슥 하고 주변을 둘러보곤 이내 다시 록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는 딱 입고 있는 옷이랑 아가리 터는 거 보니까 아주 지 좆대로 사는 것 같은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응? 넌 좆대로 살아도 되고 난 좆대로 살면 안 돼? 어?"
"어디서 들었던 것만큼 아가리도 걸레를 물었구나."
"네 인성만큼이나 걸레를 물었을까?"
"……."
김현우가 단 한마디도 지지 않고 록을 갈구자 그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더 이상 깝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우물 안의 개구리. 여기가 네 나라처럼 약한 놈들밖에 없을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지랄, 내가 볼 때는 네가 우물 안 개구리인 것 같은데?"
김현우의 이죽거림에 록의 얼굴이 비웃음으로 물들었다.
"뭐? 내가? S등급 세계랭킹 3위인 내가?"
"아,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순위충 새끼였네."
"뭐?"
"왜? 순위충 아니야? 벌써부터 별 같잖지도 않은 순위 가지고 어떻게든 남 위에 올라서 보려고 열심히 발악하고 있잖아?"
응?
김현우의 이죽거림에 록의 얼굴이 도깨비처럼 찌푸려졌다.
그와 함께 들어 올려지는 록의 손.
김현우와 록의 말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짓고, 김현우와 리암이 따급한 표정을 짓는 것과 동시에 록은 입을 열었다.
"인성교육이 필요한 개새끼로군."
그와 함께 김현우의 머리를 내리고 떨어져 내리는 록의 손-뻑-
"컥!"
그리고 록의 손은 김현우의 머리에 닿지 못했다.
그 누가 말리기도 전에 일어난 그 상황에서, 김현우는 손을 내리치고 있는 록의 앞으로 파고 들어가 그의 턱을 올려쳤다.
순식간에 붕 하고 뜨는 거체.
2미터가 넘어가는 록의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인성교육이 필요한 건 너지 병신아."
김현우는 곧바로 붕 떠오르는 록의 몸을 그대로 발로 차버렸다.
와장창창! 쿵쿠구궁!
"꺄아아악!"
그의 발차기를 맞자마자 저 멀리 날아간 록은 순식간에 음식이 가득 놓여 있는 연회테이블을 박살 내며 홀 한구석에 처박혔고,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마찬가지로 별다른 상처 없이 굉장히 열 받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록.
그의 몸에 여기저기 달라붙어 있는 음식물 찌꺼기를 바라보던 김현우는 비웃음을 흘렸고 록은 그 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여기서 성하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록의 선언.
"자, 잠깐 여기서 싸움을 벌였다간……!"
쿵!
리암이 미처 말하기도 전에 록은 다시 한번 김현우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세계랭킹 3위라는 말은 그래도 허명으로 얻은 것은 아니었는지 무척이나 빠르게 가까워진 록.
허나 김현우는 그런 록을 보며 여유로운 자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록은 그런 김현우으 모습에 더 약이 올랐는지 다시 한번 그의 몸을 노리고 크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
김현우는 다시 한번 그의 주먹을 피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김현우의 머리 옆을 스치고 지나간 록의 주먹. 김현우는 그 순간에도 여유롭게 그의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뻑!
"끅!"
아까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의 턱을 올려쳤다.
돌아가는 록의 고개, 그가 의식적으로 목에 힘을 뺏는지 몸이 붕 떠오르지는 않았으나, 이미 록의 가드는 완전히 사라진 것과 다름없었고 김현우는 곧바로 그의 명치에 주먹을 올렸다.
"영거리-"
-극살(極殺)
꽝! 콰가강!
"크학!"
명치에 김현우의 기술을 얻어맞은 탱크는 다시 한번 날아가 이번에는 연회장의 테이블을 박살내는 것이 아닌 연회 홀의 내벽을 부수며 밖으로 튕겨 나갔다.
'……너무 세게 때렸나?'
그런 상황에서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주먹을 폈다 말아 쥐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물론 괴력난신에게 사용하던 때보다는 확연하게 힘을 빼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세게 친 것 같았다.
꽝!
"이 개새끼가!"
허나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는 듯 록은 어느새 벽을 뚫고 날아와 자신의 머리통만 한 돌을 김현우에게 집어 던졌다.
쿠구구궁!
엄청난 소음을 내며 김현우에게 다가오는 돌덩이.
김현우가 주먹으로 다가오는 돌덩이를 쳐내자, 이미 록은 김현우의 뒤에서 그의 머리를 내리찍기 위해 양손을 망치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아까보다 확연히 빨라진 속도에 김현우는 슬쩍 놀라면서도 곧바로 몸을 돌려 그의 공격이 닿기 전에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
분명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후려쳤음에도 불구하고 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김현우의 주먹을 밀어냈다.
김현우는 뒤늦게 너무 힘을 뺀 것인가 싶어 힘을 주었으나, 이미 록의 주먹은 김현우의 몸을 후려치고 있었다.
꽝!
폭음이 터진 것 같은 소음과 함께 김현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록이 허공에 떠 있는 김현우에게 또 한 번 일격을 준비-크게 휘어지는 주먹.
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며 본능적으로 그 상태에서 다리를 틀어 그 상태에서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으로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쾅!
한 번 더 터지는 폭음 소리.
그리고-
"뭐-"
꽝!
분명 김현우의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록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김현우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다.
김현우는 그 찰나의 순간 자신의 두 주먹을 끌어 올려 록의 주먹을 막아냈지만, 그의 몸은 그대로 튕겨져나가 뒤에 있는 벽을 박살 내버렸다.
'뭐야?'
벽에 박힌 김현우가 멀리 위에 그런 의문을 띄웠으나-
"뒤져-"
-록은 이미 벽에 박혀있는 김현우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꽝!
그 상태로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던 홀에서 일어난 전투.
허나 전투의 양상은 일방적이었다.
꽝! 꽝! 꽝! 꽝!
록의 주먹이 맹렬하게 돌진하면 김현우가 그것을 피해낸다.
당연히 김현우가 피해낸 주먹은 그대로 연회장의 조형물이나 벽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분명 깨끗하고 우아한 분위기이던 연회장이 한순간 폐허와도 다른 바 없는 상태로 변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시현은 그 상황을 지켜보며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게 말로만 듣던 탱크의 고유능력……."
'금강불괴(金剛不壞)'
사실 록이 처음 헌터로 데뷔할 때만해도 그는 그리 유명한 헌터는 아니었다.
그저 자기가 살고 있던 센디에이고주에서 은근히 안 좋은 소문이 자주 도는 헌터 중 한 명이었을 뿐.
그러나 그가 A등급에 오르고 자신의 고유 능력으로 금강불괴(金剛不壞)를 얻었을 때, 그는 비로소 미국에서 이름을 떨쳤고, S등급 세계랭킹 3위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얻은 '금강불괴' 라는 고유능력.
그것은 가히 다른 헌터들에게 있어서 '사기'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능력이었다.
우선 록은 고유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모든 공격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 일종의 무적상태가 되었으니까.
날붙이도 통하지 않고 문명의 이기라는 총도 통하지 않는다.
한 프로그램에서는 그에게 거대한 출연료를 지불하며, 그에게 탱크를 상대하기 위해 쏘는 바주카포를 쏴 갈기는 미친 짓을 행했지만, 놀랍게도 미사일을 맞고도 그는 멀쩡했다.
탄 것은 그가 입고 있던 옷뿐.
그의 신체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그야말로 사기라고 할 수 있는 고유능력.
그 이외에도 그는 자신의 고유능력을 기반으로 몬스터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영상을 유튜X에 자주 찍어서 올리고는 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공격을 받더라도 그가 고유능력을 사용한 뒤 몸을 말아 돌진하면 그 몸에 맞아 짓이겨지는 몬스터들.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그에게 경외를 담아 '탱크'라는 이명으로 불렀다.
그렇게 김시현이 어쩌지도 못한 채 그 둘을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무렵, 옆에 있던 리암도 김현우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을 보고는 낭패했다는 표정과 함께 생각했다.
'우선은 싸움을 말려야 한다.'
처음이야 자기가 미처 어떻게 해 볼 시간도 없이 싸움이 일어났지만 이런 식으로 싸움이 지속되면 불리한 쪽은 리암, 자신이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김현우가 이기지 않는 이상 '메이슨'파에 조금 더 힘을 실어주는 일 밖에는 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리암이 생각을 끝낼 때쯤,꽝!!
록이 김현우가 있던 땅을 내리침과 함께,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 다니는구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던 록은 몸이 이제야 풀렸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이제 왜 네가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하는지 알겠나? 네 공격이 아무리 강해도 내 금강불괴 앞에서는-"
"지랄하고 있네."
"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는 록을 보며 같잖다는 듯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재주부리기는 끝났냐? 더 보여줄 것도 그것뿐이고? 그럼-"
이제부터는 내가 간다.
콰아아아앙!!
# 88
88화. 샌드백은 딱딱해야 제맛이다 (4)꽈아아앙!
"커-억!?"
김현우의 모습이 일순 사라졌다 록의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록은 김현우가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 이미 그의 몸은 허공을 날고 있었다.
완전히 부서진 연회홀의 한구석에 처박힌 그를 보며 김현우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미 연회 홀은 완전히 박살 나 폐허라고 말해도 될 정도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
고풍스러운 이미지를 주기 위해 여러 가지 문양이 그려져 있던 대리석 타일은 모조리 박살 났고, 로마식으로 조각되어 있던 내벽들도 마찬가지였다.
테이블은 이미 완전히 박살 나 그 파편만이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그것은 음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박살 난 연회 홀 한가운데에서, 김현우는 비틀린 웃음을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록을 바라봤다.
그는 김현우를 바라보고는 비아냥거리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왜? 뭔가 기대하고 있었나?"
큭큭-
"확실히, 그거 하나만은 칭찬해 주지. 금강불괴를 발동해 단단하고 무거워진 내 몸을 날려버리다니. 하지만 그것뿐이다. 네 공격은 나한테 통하지 않-"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뭐……?"
"지금 내가 너를 정말로 제대로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해?"
김현우의 말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김현우는 쯧 하고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야 네 힘이 얼마 안 되니까 니 좆대로 날뛰어 봤자 그냥 홀이 부서지고 끝이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힘을 쓰면 이 홀이 부서지거든. 응?"
그의 말에 록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곤 말했다.
"허세도 정도껏 떨어라."
"허세? 허세 같아?"
그러면-
팟-
"!!"
순식간이었다.
분명 홀 중앙에 있던 김현우는 록의 앞에 서 있었다.
"한번 확인해 보면 되겠네."
꽝!
김현우의 중얼거림이 그의 귓가에 닿은 그 순간 록의 시야가 반전했다.
한순간 김현우의 일격을 맞아 중심감각이 희미해진 그는 김현우의 일격에 의해 내벽을 뚫고 밖으로 튕겨져 나왔고, 그제야 느껴지는 햇빛에 정신을 차린 록은-
"!!!!"
-자신의 앞에서 검붉은 색의 마력을 풀풀 풍기고 있는 김현우를 볼 수 있었다.
허공에서 본능에 반응한 록의 몸이 김현우를 쳐내기 위해 몸을 움직이지만, 이미 김현우의 손은 록의 명치에 닿아 있었다.
"영거리-"
극살(極殺).
꽈아앙!!
거대한 폭음 소리와 함께 록의 신체가 잔디밭에 내리 꽂힌다.
마치 대전차지뢰가 터지는 것 같이 사방이 흙먼지로 변해 시야가 제대로 분간되지 않은 그 상황.
'천뢰-'
혹은 제바르게 시야를 파악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이미 그의 시야에는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김현우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신각-'
"크하악!?"
꽈아아아아앙!!!!
잔디밭에 거대한 파문이 퍼져나갔다.
미처 가라앉지 못한 흙먼지가 더더욱 크게 번지고, 흙들이 터져 올라온다.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된 잔디밭.
"이런 씨발!"
그 상황에서 록은 흙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손을 흔들었지만, 그 순간.
"야, 너 좀 버틴다? 좀 버티는 김에-"
펑!
"큭!?"
김현우의 말과 함께, 그의 등에 시큰한 고통이 울려 퍼졌다.
'이런 씨발!'
록이 신경질적으로 양 주먹을 주변으로 휘둘렀으나 닿는 것은 없었다.
"내 무술 상대 좀 해주면 되겠다."
꽝!
"이 새ㄲ-크헥!"
김현우의 발이 그의 턱을 올려 찬다.
시큰거리는 고통!
그가 '금강불괴'를 사용한 뒤로는 몇 번 느껴보지 못했던 고통이 그의 턱을 강타하고, 이어서 김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마일권(天魔一拳)!"
꽝!
허공에 떠 있던 록의 배에 지독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격이 꽂히고, 검붉은 마력과 함께 주변을 가리고 있던 흙먼지가 사방으로 날아간다.
"청룡각(靑龍脚)"
쿠구구구궁!
천마일권을 맞아 허공에 체공하고 있던 록의 신체가 다시 한번 잔디 바닥에 내리 꽂힌다.
사라졌던 흙먼지가 다시 한번 터져 나오며 록의 주변으로 거대한 크리에이터가 만들어진다.
"칠성일보(七星一步)"
쾅! 콰드드드드드─!!!
땅바닥에 내리꽂힌 록의 신체를 향해 검붉은 유성이 떨어져 내린다.
"백팔연각(百八軟脚)"
떨어져 내린 검붉은 유성에 의해 허공에 떠오른 록의 몸에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발차기가 연속으로 내리꽂힌다.
김현우가 알고 만들어 놓은 수십, 수백 가지의 무술들이 그의 뜻에 따라 즉석해서 조립되고, 또 만들어져서 세상에 그 모습을 보인다.
쿵! 꽝 쾅! 쾅!
록의 몸이 하늘로 떴다 하면 사라지고, 흙먼지가 튀어올랐다 싶으면 허공에 뜬다.
아예 땅바닥에 박혀 몇 번이고 거대한 폭격을 맞기도 하고, 그게 아니면 허공에 떠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김현우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끄……으으윽. 이……개새끼……!!!"
"와, 이 새끼 대단한 새끼네."
김현우는 완전히 개 박살이 나 더 이상 잔디밭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은, 마치 전쟁터처럼 변해 있는 흙밭 한가운데 서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록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여기 저기 얻어맞은 부분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피부에는 멍이 가득했고, 분명 짧은 스포츠 머리였던 머리카락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새하얀 두피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옷 또한 완전히 넝마가 되어 노숙자라고 봐도 될 정도로 그 모습은 추래했다.
허나 김현우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죽여 버리겠다!!!"
김현우에게 수십 가지의 기술을 얻어맞은 그는 아까보다 확연히 느려졌지만,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평범한 헌터라면 하나의 기술만을 맞았어도 죽었을 법한 기술을, 그는 수십 개나 맞고도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김현우는 순수한 감탄의 탄성을 내뱉었다.
"맷돼지처럼 생겨서 그런가 피부가 질기기는 질긴가 보구나?"
"이 개새끼!"
꽝!
이전보다 확실히 느려진 록의 주먹이 김현우를 노리고 날아들었으나, 김현우는 무척이나 간단하게 그 공경을 피한 뒤 피식 웃고는 자세를 잡았다.
'금강불괴(金剛不壞)'
무협지에서는 그 금강불괴를 '외공'이 최고경지까지에 이르러 창칼이 통하지 않는 무적의 경지로 표현하고는 한다.
그 어떤 무기나 무공도 통하지 않고, 금강불괴를 익힌 자는 절대로 외부적인 요인에서는 상처를 입을 수 없게 된다는 지고의 무공.
그렇다면 온갖 무기들의 공격이나 무공들을 막을 수 있는 '금강불괴'는 정말 최강의 무공이고 무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아니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웹소설에 나오는 '천마'나 잘나간다 싶은 '은거기인'들은 너도나도 금강불괴를 가지고 있었겠지.
그렇다면 창칼이 통하지 않고 온갖 무공들도 막아낼 수 있는 금강불괴는 왜 최강이 아닐까.
그래, 그 이유는 바로 금강불괴를 너무나도 쉽게 파훼할 수 있는 무공이-아니- 묘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김현우의 양발이 부드럽게 벌어지며 그의 왼손이 어깨 위로 올라가 쭉 펴진다.
마치 달려오는 록을 조준하는 것 같은 자세.
록은 그 모습을 보며 더더욱 성이 났는지 김현우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주먹을 뒤로 당기며 김현우의 머리를 조준했고,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그의 명치에 펴진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쿠우우우─
록의 명치에 닿은 김현우의 손에서 검붉은 파문이 튀어나옴과 함께- 김현우는 공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의 묘리-
"극진-파동권(劇震-波動拳)."
그의 몸을 쳐냈다.
쿠우우우웅──!!
그와 함께 근처에 울리는 거대한 소음.
마치 거대한 공기가 터진 것 같은 소음과 함께 록의 몸이 멈추었고-
"카-학!?"
록은 곧 자신의 입가에서 시뻘건 피를 토해내며 김현우의 옆으로 쓰러졌다.
털썩-
록이 쓰러지자마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지는 주변.
김현우는 주변을 돌아봤다.
이미 잔디밭은 개박살이 나있어 더 이상 잔디밭으로 불러주기 힘들 지경.
저 멀리 연회 홀이 있던 곳에서는 창문과 부서진 벽 사이로 수많은 사람이 김현우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현우는 왜인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굉장히 멍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이내 신경 쓰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어?"
그렇게 다시 쓰러진 록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얘는 S등급 세계랭킹 3위잖아?'
그랬다.
김현우가 자신의 수많은 무술들을 맨몸으로 받아낸 그는 S등급 세계랭킹 3위였다.
'그러면 내가 이 녀석을 이겼으니까.'
그냥 이걸로 측정해서 나를 3위로 만들어주면 되는 거 아니야?
김현우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과 함께 한동안 땅바닥에 퍼질러져 있는 록을 바라봤다.
***
그곳은 어두운 공동이었다.
불을 밝히지 않으면 그 무엇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공동 안.
공동 주변에는 돌로 만들어진 돌무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런 돌무덤의 한가운데에는 기묘할 정도로 붉게 칠해져 있는 정각이 하나 있었다.
마치 검은 공동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자리 잡은 정각.
그 정각의 안.
보이지도 않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입고 있는 것은 이 칠흑 같은 공동에 어울리는 검은 도복.
허리까지 길러진 머리는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했는지 여기저기 산발이 되어 있었고, 그의 양손에는 검붉은 액체가 묻은 붕대가 감아져 있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그 남자가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동 주변을 바라보고, 이내 정각의 끝부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괴하고도 칙칙한 목소리.
"축하한다. 너는 한때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라고 불렸고, 또 혈마(血魔)라고 불렸던 나의 '혈마신공'을 완벽하게 대성했다."
"……."
기괴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림에 따라 정각에 가만히 앉아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흑안이 자리하고 있었던 그의 눈은 붉은 홍안이 되어 있었다.
어느 한쪽을 주시하는 그.
기괴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런 남자를 보며 키득키득 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혈마신공을 대성하자마자 광기를 억제할 수 있는 '혈안'을 개안하다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
남자의 한없이 오만하고도 광오한 말.
하지만 그런 남자의 대답을 들었음에도 그는 기분이 좋다는 듯 낄낄 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맞는 말이지. 자네 정도나 되면 혈안은 당연히 개안을 하는 것이지 그래-"
나 혈마(血魔)의 무공 말고도 천마(天魔)의 무공과 정파 녀석들의 무공들을 모조리 대성한 너라면 말이야.
혈마의 기분 나쁜 끌끌거림이 들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붉은 정각에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남자가 붉은 정각을 빠져나와 돌무덤이 있는 길 위를 지난다.
그리고 그의 몸이 완전한 어둠에 가까워졌을 때, 마귀같은 목소리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너는 자신의 몸 안에 그렇게 수많은 업적과 업보를 쌓으면서 무엇을 할 생각이냐?"
마귀 같은 목소리의 물음.
그 목소리에 남자의 걸음이 멈춘다.
완전한 어둠에 가까워진 남자의 발걸음이 멈추고, 그가 개안한 핏빛과도 같은 붉은 홍안이 목소리가 들려온 장각을 바라본다.
그리고 곧 그-
"나는-"
S등급 세계랭킹 1위이자-
"정상으로 올라갈 거다."
무신(武神)이라고도 불리는 그 남자는-
"첫 스승님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포부를 밝히며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 89
89화. 나쁘지 않은 제안(1)
록이 김현우에게 박살 나고 하루.
'김현우가 탱크를 쓰러뜨렸다!'
그 한 문장은 미국협회원의 SNS를 통해 퍼져나가 순식간에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 뿌려졌다.
S등급 세계랭킹 3위 탱크.
탑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을 두 번이나 막아낸 김현우.
그 둘의 화학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라, 하루가 지난 시점에서 전 세계의 언론사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자신의 매거진 상단에 올려대고 있었다.
전 세계 뉴스 어디를 들어가 봐도 뉴스의 헤드라인에는 김현우와 탱크에 관한 기사가 하나씩 걸려 있었고, 그런 상황은 비단 매거진뿐만이 아니었다.
유튜X.
하루에도 수만 가지 영상이 올라오는 유튜X의 급상승 동영상의 순위 1위부터 10위까지의 내용은 모조리 김현우와 탱크에 관련한 영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조회수로 동영상 순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 영상은 바로 김현우와 록의 싸움을 그대로 찍어 올린 영상이었다.
툭-
스마트폰을 조작해 영상을 짤막한 광고가 지나고 곧바로 영상이 흘러나온다.
재생의 시작점은 김현우와 록이 연회장 내에서 싸우기 시작할 무렵.
동영상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김현우와 탱크가 몇 번의 공방을 벌이는 것부터 시작된 영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상세하게 찍혀 있었다.
김현우가 록을 홀 밖으로 찬 것부터 시작해서.
그가 거대한 파문과 함께 탱크를 쓰러뜨리는 영상까지.
아니나 다를까 그 유튜X 영상에는 그냥 내리기만 해서는 끝이 없을 정도로 스크롤바가 늘어나는, 엄청난 양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ㅁㄴㅇㄹㄹㄹ: 와 내가 진짜 얘는 언제 한번 사고 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냥 헌터 협회 가자마자 3위를 이겨버리누 ㄷㄷㄷ…….
ㄴ REIKAN: 와ㅋㅋㅋㅋㅋㅋㅋㅋ탱크 쳐맞는 거 봐라, 저거 내가 알고 있는 그 탱크 맞냐? 쟤도 던전 안에서는 여포처럼 돌격해서 다 찢고 다니더니 김현우한테 개 쳐맞네.
ㄴ 고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탱크 미국에서 쓰레기로 소문났는데 미국 애들 좋아하겠네, 쓰레기 치워 줬다고.
인성시관: 와, 진짜 김현우 싸우는 거 좆간지임, 록 팰 때 보이냐? 막 유성 떨어지는 것 같고 용 나오고 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게 진짜 무술인 아니냐?
ㄴ 오타시류: ㄹㅇ. 헌터연합새끼들이 왜 김현우한테 무술을 공개하라고 빼애애액 거리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지 않냐 ㅋㅋㅋㅋㅋㅋㄴ 울짚엽짚: 그런데 진짜 조금 전에 봐도 김현우 이야기는 팩트인 게 눈에 보이는 게 김현우 그냥 홀 내에서 싸우는 영상 보면 무술같은 거 아예 안 쓰고 손기술 발기술만 쓰는데도 존내 쎄다 ㅋㅋㅋㅋ 그냥 쎈 게 맞는 듯.
헌터연합[공식계정]: 이 영상을 보셨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김현우 헌터는 자신이 만든 무술로 저렇게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그 무술을 대외적으로 뿌리지 않고 있습니다. 저 행동은 인류에게는 한없이 손해가 될 행동이며 그렇기에 우리들은……[자세히 보기]
ㄴ 적당히해라: 제발 적땅히좀 해라 병신아 너희들은 어째 1절이라는 게 없누 ㅋㅋㅋㅋ 하는 거 보면 다 뇌절이네 ㅋㅋㅋㅋㅋㄴ 병신을 보면 짖는 개: 월! 월월! 으르르르릉!!! 월!!! 월! 월월! 으르르르릉!!! 월!!!월! 월월! 으르르르릉!!! 월!!!월! 월월! 으르르르릉!!! 월!!!월! 월월! 으르르르릉!!! 월!!!월! 월월! 으르르르릉!!! 월!!!월! 월월! 으르르르릉!!! 월!!!월! 월월! 으르르르릉!!! 월!!!월! 월월! 으르르[자세히 보기]
ㄴ 기수식: 헌터연합: 끄으으윽! 부러워! 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 나도! 나도 알려달란 말이야! 나도 알려달라고 빼애애애애애애액!!!!
"와……."
개판 5분 전의 댓글 창을 보며 말없이 탄성을 내뱉고 있던 김시현은 이내 한동안 스마트폰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폰을 집어넣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가 시선을 돌린 곳은 거대한 문.
어제 김현우가 록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린 이후, 상황은 굉장히 미묘하게 돌아갔다.
건립 기념일로서 이뤄져야 할 연회는 취소되었고, 탱크는 헌터 협회에서 긴급히 파견한 구조대에 의해 실려 가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렇게 록을 박살 내고 연회 홀로 돌아온 김현우의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분명 탱크와 이런저런 다툼이 있었을 때 그들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사람들은 탱크가 쓰러지자마자 조금 전의 태도가 어디 있냐는 듯 김현우에게 다가왔다.
물론 김현우는 피곤하다면서 그들을 뿌리쳤지만, 결국 김현우와 김시현, 그리고 미령은 리암의 권유에 따라 국제헌터협회에 있는 고급 숙소에 하루 묵고 있었다.
그리고-
"……."
"……."
김시현은 조금 전 찾아온 리암을 떠올렸다.
잠시 김현우와 조금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다며 김현우를 데려간 리암.
그 덕분에 김시현은-
"……."
"……."
평소 김현우를 따라다니던 미령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물론 미령은 김현우가 리암을 따라나섰을 때도 자신도 함께 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리암의 부탁 때문에 결국 이 숙소에 남게 되었다.
뭐, 리암의 부탁이라기보다는 김현우가 잠시 남아 있으라고 말한 덕분이었겠지만.
김시현은 슬쩍 그때 미령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얼굴에 콰광! 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표정을 짓는 미령을 얼굴과 동시에 리암을 적의 어린 눈으로 쏘아보는 그녀의 모습.
마치 게임 로그로 표현했다면 [리암에 대한 미령의 적개심이 +99]라는 표시가 들 정도로 그녀의 적의는 상당했다.
"……."
"……."
방 안에 침묵이 가득 찬다.
물론 서울 길드의 길드장을 맡고 있는 입장으로서 일부러 냉정한 표정을 연기했던 김시현에게 있어서 이런 침묵은 익숙했다.
"……."
그래도 이 어색함 좀 그랬다.
김시현은 그래도 자기와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평범하게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름대로' 사교적인 성격이었으니까.
그리고 미령은 김현우의 옆에 항상 따라다녀 이제는 서로 얼굴이 익을 정도로 자주 보고 있었기에 조금 친해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김시현은 몇 번이나 미령에게 말을 걸려고 하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유?
그녀의 텐션이 너무 낮아져 있기 때문에.
김시현이 항상 김현우의 옆에 붙어 있던 미령만을 봐와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표정은 굉장히 밝아 보였다.
'그게 뭐 활발하다, 그런 뜻은 아니긴 한데...'
지금은 어떤가?
"……."
"……."
시무룩한 표정도 아니다.
정말 인형이라고 생각 될 정도의 무표정으로 미령은 멍하니 책상에 앉아 있었다.
마치 세상을 다 살아서 피폐해진 것 같은 눈으로 공허하게 멍 때리고 있는 미령의 모습.
그게 바로 김시현이 몇 번이고 말을 걸려다가 꺼리게 한 이유였다.
그렇게 또 침묵이 흘러가고.
마침내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 김시현은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저기, 미…아니, 패룡 씨?"
"……."
슥- 하는 느낌으로 김시현을 바라보는 미령.
김시현은 그 순간 자신의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들을 떠올렸다.
기본적으로 처음 물꼬를 틀 때 하는 기본적인 질문들.
그러나 곧 그는 고개를 한번 저어 질문들을 털어냈다.
아마 그냥 물꼬를 트기 위해 기본적인 질문을 하기에는 이 어색한 분위기도 못 풀고 분위기가 떠 나락으로 가라앉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공통된 주제.'
김시현은 그 주제를 두고 다시 한번 쭉 생각했고, 이내 미령과 자신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냈다.
"뭐 사실 현우 형에게 듣기는 했는데, 제대로 듣지는 못해서……패룡 씨랑 현우 형은 정확히 언제 만난 건가요?"
김시현이 생각한 공통된 주제는 바로 김현우였다.
적어도 김시현이 봤을 때 미령은 김현우의 일에는 굉장히 크게 반응했으니까.
그런 김시현의 생각이 맞았는지, 미령은 김시현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조금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더니 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미령은 김시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다. 말해주지."
"오!"
"하지만,"
"?"
"조건이 하나 있다."
미령의 말에 김시현은 고개를 갸웃했고, 미령은 이내 뜸을 들이듯 입가를 우물우물하더니 이내 김시현을 향해 물었다.
"그…."
"?"
"스승님은…무엇을 좋아하시지?"
조금 전의 무표정과는 다르게 은근히 고개를 숙이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미령을 보며 김시현은 묘한 표정으로 미령을 바라보다 생각했다.
'형이 좋아하는 것?'
김시현은 김현우를 떠올리곤 곰곰이 생각했다.
'…좋아하는 게 있던가?'
김시현은 잠시 김현우가 무엇인가 때문에 좋아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에 탑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음식을 먹고 굉장히 행복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아니었고, 딱히 뭔가를 얻어서 좋아하거나 했던 기억은 적어도 김시현의 머릿속에는 없었다.
그렇게 김현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고민하던 김시현은, 이내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령을 보곤 마침내 답을 정하곤-
"…돈?"
-자기조차 확답을 내리지 못하겠다는 듯, 미령에게 답을 말했다.
***
"그래서, 할 이야기라는 건?"
국제헌터협회 본관 3층의 연합실.
마치 중세시대 영주의 회의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 방 한가운데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김현우는 맞은편에 앉은 리암에게 물었다.
그는 김현우를 보고는 짧게 고민했다.
'어떻게 그를 회유해야 할까.'
리암은 지금이 무척이나 중요한 때임을 스스로 깨닫고 그 짧은 시간 안에 몇 번이고 고민을 반복했다.
'상식적으로는 우선 그의 상대적인 약점을 건드린 다음 회유하는 것이 낫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사람에 한한 회유법.
리암의 눈은 그가 절대로 평범한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S등급 세계랭킹 3위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시끄럽다고 욕을 박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또 그렇게 시비를 건 3위를 개 패듯 팰 수 있는 사람은?
그리고 그 뒤에 몰려든 수많은 정부의 고위관직과 내로라하는 재벌들의 인사를 귀찮다는 이유하나로 피해 버리는 그 담력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평범하지 않은 이들을 어떻게 회유하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지, 리암은 오랜 시간의 세월로서 터득했다.
"나는 자네가 내 편에 서주었으면 하네."
그렇기에 그는 김현우에게 순수한 본심을 내보였다.
무언가를 꾸미다 간파당하는 것 보다는 순수하게 본심을 부딪치는 게 김현우를 회유하기에는 더 낫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리암의 말에 김현우는 일순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리암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선 상황설명부터 들어보고요."
김현우의 말에 리암은 고개를 끄덕이곤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제 국제헌터 협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TOP5 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자신과 똑같은 위치에 서 있는 최고의원 '메이슨'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 김현우를 필요로 하는지.
어느 하나의 거짓도 없이 사실대로 털어놓은 리암.
그는 긴정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김현우를 바라보았고, 김현우는 이내 재미있다는 듯 피식하고 웃음을 지은 뒤,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당신 편에 붙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뭔데요?"
# 90
90화. 나쁘지 않은 제안 (2)
[김현우! S등급 세계랭킹 3위, 탱크를 때려눕히다! 하지만 순위는 [측정불가]?]
[국제헌터협외 오피셜 '김현우 헌터' S등급 세계랭킹 측정결과는 [측정불가]
하루 전, 미국 워싱턴에 위치해 있는 국제헌터협회에서 S등급 세계랭킹을 측정하기 위해 협회에 들렀던 김현우가 마침 국제헌터협회 내에 귀환해 있던 S등급 세계랭킹 3위, '탱크'와 마찰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협회원들과 각 기자들의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싸움의 시작은 S등급 세계랭킹 3위인 탱크가 김현우를 얕잡아 본 것 때문으로 현재까지는 알려지고 있으며-(중략)
그 이외에도 김현우는 자신이 국제헌터협회에 들른 이유인 S등급 세계랭킹 측정을 했지만, 정말 놀랍게도 세계랭킹을 측정하는 아티팩트는 김현우를 [측정불가]로 평가했다고 한다.
이는 국제헌터협회가 생기고 그들이 S등급 세계랭킹이라는 제도를 만들고 난 이후로 처음 생긴 일이라고 하며 당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협회원조차도 굉장히 신기하고 놀라워했다고 한다.
홍대의 한 고급일식집.
"…아니나 다를까."
이서연이 괜스레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자 그 앞에서 스시를 먹고 있던 남자. 한석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왜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어?"
"아니 뭐라고 할까."
"어차피 우리한테 피해가 오는 건 없잖아?"
한석원의 말에 이서연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그렇기는 한데…."
끄응.
이서연은 뭔가 묘하게 불편하다는 듯한 느낌으로 스마트폰을 바라보다가 이내 폰을 꺼버리고 중얼거렸다.
"분명 저도 현우 오빠가 저보다 강하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한데, 뭔가 현우 오빠가 벌이고 있는 일을 보면 분명 내가 걱정할 짬은 아닌데 걱정하게 된다고 해야 하나……."
이서연은 끙하는 한숨을 내쉬었고, 한석원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대충 알 것 같기도 하네."
"그쵸?"
확실히 한석원도 이서연의 뜻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석원과 이서연, 그리고 김시현까지.
이들은 김현우보다 먼저 튜토리얼의 탑에 빠져나와 사회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한국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들은 김현우가 탑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남은 11년 동안 헌터 업계의 발전을 두 눈으로 보아왔다.
국제 헌터 협회가 만들어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들의 순위는 비록 100위권이었지만 그들은 이 사회에 헌터 업계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 모습을 전부 보았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지금 이서연과 한석원의 눈에 비치는 김현우의 모습들은 거의 전부가 12년 동안 사회에 자리 잡은 헌터 업계를 정면으로 깨부수는 모습들이었다.
길게 쌓아 온 세월을. 김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깨부수고 있었다.
그 어떤 사전적인 준비도 없이. 그냥 너무도 간단하게.
이서연은 젓가락으로 쥐고 있던 스시를 입안에 집어넣고 우물거리기를 한참.
이내 스시를 목 너머로 옮기곤 중얼거렸다.
"에휴, 걱정해서 뭐하냐."
"그렇지?"
"그러게요……."
이서연은 한석원의 물음에 답하고는 다시 한번 스시를 집어 먹었고,
"아."
그러던 중, 이서연은 문득 무엇인가가 떠올랐다는 듯 짧게 탄성을 내뱉더니 한석원에게 물었다.
"석원 오빠."
"왜?"
"혹시 최근에 김시현 관련해서 아는 거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한석원의 말에 이서연은 '흠'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팔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 김시현이 여자가 생긴 것 같던데요?"
"뭐?"
이서연의 물음에 한석원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렇게 김시현에 대한 주제로 이서연의 입이 열리는 도중, 국제 헌터 협회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그래서, 그건 다 뭐냐?"
김현우가 김시현의 오른쪽 아래에 있는 쇼핑백을 보며 묻자 그는 슬쩍 쇼핑백을 가리며 말했다.
"기념품이요."
"기념품?"
"네."
"누구 주려고?"
"…아는 사람?"
김시현이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알 게 뭐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물었다.
"기념품은 언제 샀냐?"
"아까 형 돌아오고 나서 잠시 번화가 좀 돌았잖아요? 그때 샀죠."
"그래?"
"그보다, 형은요?"
"뭐?"
"최고위원님이랑은 무슨 이야기 한 거예요?"
김시현의 물음에 김현우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곤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말했다.
"자기 편에 붙어달라고 하던데?"
"자기 편에……? 아……."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김현우는 리암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김시현과, 그 옆에 있던 미령에게 대충 들려주었다.
"흐음……."
김시현은 그런 김현우의 말을 듣고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런 상황이라면 최고의원 입장에서는 형이 꼭 자기 측에 붙어줬으면 할 것 같네요."
"그래? 어차피 내가 그 사람 편에 붙는다고 해서 내가 딱히 뭔가를 하지는 않을 건데?"
"그렇다고 해도 마찬가지죠. 형 말을 들어보면 지금 리암 최고의원은 메이슨과의 파워 게임에서 밀리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협회 내에서도 밀리고 외부에도 제대로 된 스폰서 없이 메이슨을 상대하기는 힘들죠. 근데 만약 그 상황에 형이 '그냥' 리암 최고의원쪽에 붙기만 해도 상당히 도움이 될 거예요."
"왜?"
"당연히 형이 가지고 있는 그 네임벨류 때문이죠. 형은 그런 거 애초에 신경도 안 쓰겠지만, 형은 지금 굉장히 네임벨류가 높거든요. 당장 어제 록을 박살 낸 것부터 시작해서-"
현재 세계 대형길드 중에서도 상당히 큰 길드인 아레스 길드랑 홀로 싸우고 있는 것까지 생각하면-
'게다가….'
김시현은 슬쩍 시선을 돌려 그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미령을 바라보았다.
'S등급 세계랭킹 5위, 패룡을 제자로 데리고 있다는 것까지 합해지면…….'
그야말로 엄청난 네임벨류였다.
김현우는 그의 말을 듣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단순히 그쪽에 서기만 하더라도 그 사람한테는 큰 힘이 된다 이거지?"
"그쵸. 형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말이죠."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김시현은 그런 김현우를 보며 질문했다.
"그래서."
"?"
"그쪽에서 제안한 조건은 뭐예요?"
"그쪽에서 제안한 조건?"
"네, 최고의원도 뭔가 제시하지 않았어요?"
"아, 그러기는 했지. 뭐 여러 가지 이것저것 이야기하기는 하던데."
솔직히 김현우로서는 이런 혜택이 굳이 필요하다고? 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뿐이라 흘려들었다.
물론 김현우로서만 그랬던 것이지, 리암이 그에게 내건 혜택들은 어지간해서는 받아 낼 수 없는, 리암으로서도 어느 정도 손해를 봐야만 그에게 내어줄 수 있는 거대한 혜택들이었다.
"아,"
"왜요?"
"뭐 이런저런 혜택 이야기 했는데 그건 어쩌다보니까 흘려들어서 잘 모르겠고, 그거 하나는 괜찮겠더라."
"뭐요?"
"순간이동 마음대로 써도 될 수 있게 해주는 거."
정확히는 헌터 협회 지부내로 순간이동을 해서 그곳에서 김현우만 따로 절차를 밟을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소리였지만, 김현우는 편한 대로 해석했다.
그런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해준다고 했다고요?"
"응."
"그럼 조건이 엄청 좋은 건데요?"
"그래?"
"그래서, 바로 대답했어요?"
"아니, 바로 답하지는 않았고, 만약 생각이 있으면 2주 뒤에 S등급 세계랭킹 TOP50 연회가 있다는데 그곳에 참석해 달라는데?"
"2주 뒤?"
"응, 그때는 순간이동으로 와도 괜찮다고 하더라."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약간 고민하는 듯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긍정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 늦은 오후, 김현우가 인청공항에 도착했을 때-
"김현우는 만든 무술을 공개해라!"
"맞다! 그는 무술을 공개해야 한다!"
"……이것들은 또 뭐야?"
김현우는 인청공항 게이트 앞에서 통로를 막고 있는 수많은 헌터들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
국제헌터협회가 있는 워싱턴 외곽의 한 병원.
"끅-"
어제, 김현우에게 볼품없이 맞고 줄곧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남자 록은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눈을 떴고,
"이제야 일어났군."
곧 그는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려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붉은 양복을 입은 남자.
"메이슨……?"
록의 목소리에 메이슨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이내 근처에 있는 서랍장에 기대 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조금 조심하라고 일러뒀을 텐데."
남자. 메이슨의 말에 록은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씨발……."
욕설과 함께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내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누웠고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새끼……대체 뭐야?"
"네가 말하는 그 새끼는……김현우를 말하는 건가?"
메이슨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 새끼……분명 무신(武神)이 나를 상대할 때 썼던 그 수법을 똑같이 사용했다고."
록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정신이 끊어지기 직전 보았던 김현우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느긋해 보이는 표정으로 자세를 잡은 그는 자신의 공격이 닿기 직전에 먼저 파고들어와 자신의 복부에 손을 댔고-욱씬-
"큭- 그 개새끼……!"
록은 자신의 명치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고통에 이를 악물며 떠올렸다.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고통.
이것은 그는 이 고통을 어디선가 한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꽤 오래전, 한참 S등급 3위라는 자리에 심취해 있던 록은 사석에서 만난 S등급 1위, 무신에게 싸움을 걸었고, 그에게 패배했다.
왜?
그에게는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능력을 쓰고 달려들어도, 그는 굉장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공격을 피하며 오히려 역공을 가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처음으로 능력을 사용한 뒤의 고통이라는 것을 느껴봤다.
그가 휘두르는 가벼운 주먹 한 방 한 방이 금강불괴를 사용한 피부를 뚫고 들어와 굉장한 고통을 선사해 주었고, 록은 결국 그의 기이한 주먹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새끼는……!'
자신이 몇 년 전에 느꼈던 그 고통을 다시 한번 아로새겨 주었다.
록이 말없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그의 너머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내가 사용하던 수법을 똑같이 사용했다고?"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록의 시선이 돌아가고,
"!!"
곧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병실의 문이 열린 곳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검은색의 도복.
신발은 애초에 신지 않았는지 검게 때가 탄 붕대를 감고 있었고, 양손에는 검붉은 무엇인가로 더러워져 있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머리는 몇 년 동안 정리하지 않은 듯 길게 늘어져 있었고, 분명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던 그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신(武神)?"
"오랜만이군."
무신의 대답과 함께 책장에 걸터앉아 있던 메이슨은 이내 똑바로 자세를 잡은 채 입을 열었다.
"무신(武神)이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메이슨의 말에 록의 시선이 무신에게서 그에게로 돌아가고, 록이 입을 열기도 전에 메이슨은 그를 보며-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는 '준비'를 시작한다."
-웃음을 지었다.
# 91
091화. 원하니까 알려 줬다(1)
김현우는 인천공항 게이트를 가득히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이젠 기자새끼들이 아니라 헌터들이 길을 막고 지-"
"김현우 헌터! 이번에 국제헌터협회에서 S등급 세계랭킹 3위와 싸우셨다는 게 정말입니까!"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서 튀어나온 마이크를 보며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슬쩍 시선을 돌려 옆을 보니 그 곳에는 기자들무리가 헌터들 사이에 껴 각자 카메라와 노트북을 들고 서 있었다.
"스승님 전부 치울-"
"나도 그랬으면 좋을 것 같은데 우선은 조용히 있어라. 제자야."
"예."
"김현우 헌터! 이번에 국제 헌터 협회에서 오피셜로 올라온 정보에 의하면 한국 3대 길드의 길드장인 김시현 헌터와 중국 패도 길드장이자 S등급 세계랭킹 5위인 '패룡'과 같이 방-"
"너도 앞에서 떠들지 말고 아가리 해라."
김현우의 짜증 어린 말에 조금 전까지 바로 앞에 마이크를 들이댄 채, 신나게 떠들고 있던 기자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런 기자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 김현우는 이내 자신의 앞에 열심히 입을 나불거리고 있는 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 헌터연합인가 뭔가 하는 걔들이지?"
"우리들은 헌터연합이 아니라 헌터들의 뜻을 표현하는 하나의 단체다."
"씨발 새끼들아, 헌터연합 아니라고 할 거면 그 촌스러운 빨간 조끼 좀 벗어 개 같은 새끼들아."
김현우의 가감 없는 욕설에도 남자는 두렵지 않다는 듯이 목소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김현우 헌터! 너는 숨기려고 했겠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여러분! 그리고 그쪽의 기자분! 잘 들어주십시오! 김현우는 자신이 개발한 무술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갑작스레 일장연설을 시작하는 그들을 보며 어처구니없던 표정을 짓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피식 하는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슬쩍슬쩍 눈치를 살피며 연설을 해대고 있는 남자와, 그 뒤에서 남자의 뜻을 옹호하며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는 헌터들.
김현우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이 5명 모이면 그중 1명은 병신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는 새끼들은 5명 중 1명이 병신이 아니라 그냥 병신들만 잔뜩 모여 있는 것 같지?'
원래 균형이라는 게 맞아야 하지 않는가?
5명 중 1명이 병신이 아니라면 그 반대로 5명 중 1명이 정상인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어째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병신이 아닌 녀석들이 없는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 열심히 무술을 달라고 빼애액 거리는 헌터도 그렇고, 그 옆에서 또 그 헌터가 하는 말을 열심히 받아 적고 있는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그렇기에-
"그렇게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무술을 배우고 싶냐?"
김현우는 한참 일장연설을 하는 그를 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 그들의 연설이 멈추고, 기자들의 플래쉬가 터진다.
헌터는 그런 김현우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민폐가 아니지! 우리는 그저 인류를 위해 노력하는 헌터들의 안전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기 위해 헌터들의 마음을 모아서-"
"진짜 개지랄하지 말고, 그러니까 너희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무술을 배우고 싶다 이거지? 응?"
김현우의 말에 헌터는 입가에 억지로 미소가 지어지려는 것을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주목된 시선 속에서 김현우는 찌푸리던 인상을 풀고는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정말로 뒤지더라도 '무술'을 배우고 싶다는 사람은 손 좀 들어봐."
체크하게.
김현우의 말에 주변의 헌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플래시를 터트리고 헌터들은 웅성거리며 이리저리 눈알을 굴린다.
생각보다도 가벼운 김현우의 허락에 이게 진짜인가를 연신 고민하고 있던 헌터들은 김현우의 앞에 선 남자가 손을 들자마자 곧바로 손을 들었고,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미령을 바라봤다.
"제자야."
"네."
"지금부터 손 들었던 녀석들, 전부 체크해 둬라."
"전부 죽이-"
"그런 건 묻지 말고 그냥 체크해라 제자야."
입에 죽인다는 말을 붙이고 사는 예비 살인마가 될 기질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 제자를 제지한 김현우의 말에 미령은 고개를 숙이고 손짓했다.
-슥
그녀가 손짓하자마자 인천게이트에 나타난 가면무사들.
미령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서 손을 들고 있는 이들을 전부 체크해라."
"예."
"자, 지금 여기서 자기가 무슨 일이 있든, 뒤져 버려도 반드시 무술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손을 계속 들고 있으면 됩니다."
가면 무사가 나오자 슬쩍 움츠리며 손을 내리려 했던 그들은 이내 김현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리려던 손을 올렸고, 김현우는 그사이에 곧바로 옆에 있는 기자들을 보며 말했다.
"자, 여기도 질문 타임 받겠습니다. 질문 몇 개 하고 건들지 마세요, 스트레스받으니까."
자, 그럼 거기부터.
김현우의 지적에 지목을 받은 기자는 곧바로 준비해 온 대답을 이어나가기 시작했고, 한동안 게이트의 웅성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김현우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기자들의 질문을 받던 도중 미령에게 사람들의 체크가 전부 끝났다는 말을 들은 김현우는 이내 그들을 보며 말했다.
"자, 그럼 지금 여기에서 지금 손을 드신 분들은…… 그래, 내일 오후 1시까지 하남에 있는 장원으로 오시면 됩니다. 주소는 저 앞에 있는 가면 쓴 놈한테 물어보고."
'아, 지금 생각해 보니까 가면 디자인 바꾸라고 말하려고 했었는데.'
김현우는 순간 들었던 다른 생각을 저 멀리로 날려 버리곤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그렇게 제 무술을 배우는 것을 원하니 특별히 지금 여기 있는 여러분들에게 제 무술을 수련받을 수 있는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 정말로……?"
"그럼요! 제가 안 그랬으면 제가 일부러 여기 있는 사람들 일일이 체크도 안 했겠죠?"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미령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슥슥 쓰다듬었다.
"아으!?"
순간 부끄러워하는 미령의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현우는 어느새 존댓말로 바뀐 어투로 그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명심하십시오, 내일 오후12시입니다. 제 무술을 배우고 싶다면 꼭 오세요."
제 제자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김현우는 그 말과 함께 모여 있는 헌터들 사이를 지나 자리를 뜨려다 무엇인가를 잊고 있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무기도 들고 오세요. 그래야 각자 맞는 무술을 알려드릴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정말 자리를 뜬 김현우.
이내 그 자리에 있던 헌터들은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다-
"정말…… 정말 배울 수 있는 건가?"
"해냈다, 해냈어!!"
어느새 자신들이 이뤄낸 승리를 자축하며 환호하고 있었다.
김현우의 무술을 배울 수 있다!
고작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헌터들은 마치 자신이 금방 S등급에 진입할 수 있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댔고.
"후……."
그것은 김현우의 맞은편에서 열심히 연설하고 있던 남자. A등급의 헌터인 '이수기'도 마찬가지였다.
"후후후후……!!"
그는 저 멀리 사라지는 김현우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됐다, 됐어!'
사실 그는 오늘 김현우에게 이런 대답을 받아 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가 노렸던 것은 김현우를 곤란하게 하는 것.
물론 무술을 배워야 하는 처지에서 김현우와의 사이가 틀어져 봤자 좋을 것은 없었지만, 어차피 시위만 해서는 김현우가 그들을 받아줄 리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김현우가 미국으로 향했다는 소리를 듣고 부랴부랴 준비한 것이다.
그를 곤란하게 할 기자들과 헌터들을.
그리고 보란 듯이 그는 김현우에게 대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심전도 병신 같은 새끼, 좀만 더 있으면 김현우의 무술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며칠 전, 갑작스레 전화 한 통으로 연합장 자리를 자신에게 넘겨 버린 심전도의 얼굴을 떠올리곤 피식 웃고는 자신의 미래를 떠올렸다.
김현우가 탑 안에서 12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만들었던 그 '무술'을 배우고, 순식간에 S등급 헌터에 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그는 그렇게 자신의 성공을 자축하며 미소를 지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리고 그렇게 인천 공항 게이트가 시끄러워질 때쯤, 김현우를 따라 미령의 리무진에 탄 김시현은 그를 보며 말했다.
"아니, 형 어쩌려고 그런 말을."
김시현이 골치 아프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김현우에게 말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 말만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뭐 어쩌겠어."
자기들이 무술을 굳이 배우고 싶다는데, 한번 기회라도 줘봐야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미령의 머리에 가져다 댄 손을 슥슥 문지르더니 입을 열었다.
"제자야."
"으. 예, 옛! 스승님!"
왠지 굉장히 텐션이 높아져 있는 미령의 태도에 김현우는 음? 하는 표정을 짓다 이내 입을 열었다.
"네가 전에 말했던 그 별장 거의 다 지어져 있지?"
"그, 그렇습니다! 다 지어져 있진 않지만, 스승님이 쓰시는 그날에는 반드시 완성되어 있을 겁니다!"
미령의 어법이 묘했으나, 김현우는 그것을 가볍게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면 됐다."
김현우의 미소.
……상당히 비릿해 보이는 그 미소에, 김시현은 왠지 모르게 한기가 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그다음 날,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
하남에 있는 거대한 장원.
미령이 김현우에게 했던 말대로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공사 중이었던 장원은 어느새 거의 다 완공되어 제법 그럴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장원의 곳곳에는 화단이 설치되어 있고, 제일 중앙의 거대한 연무장은 몇 백 명의 사람이 그 곳에서 무술을 단련해도 될 정도로 넓었다.
땅덩어리가 좁은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공간의 낭비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넓은 그 장원에는 현재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언뜻 보기만 해도 상당히 많아 보이는 헌터들.
그들은 거대한 장원 가운데에 있는 연무장에 모여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김현우 헌터는 왜 안 오는 거야?"
"그러게, 분명 12시라고 했었지?"
"맞아 분명 12시라고 했었어."
"뭐야, 설마 그때 무술 알려주겠다는 건 그냥 그때를 넘기기 위한 핑계인 거 아니야?"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연마장 여기저기에서 들려왔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이수기는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마 김현우는 올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다른 연합원의 물음에 그는 답했다.
"만약 그가 우리를 여기로 부른 뒤에 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결론적으로 스스로를 더 옥죄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그런 건가?"
"그렇죠, 오라는 말을 안 했으면 모를까, 오라는 말을 한 뒤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로 자신의 무술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이수기는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가 분명 올 것이라고 자부했고, 정말로 김현우는 12시로부터 30분이 지난 시점에 연무장에 나왔다.
그리고-
"전부 오셨습니까?"
"……저건?"
그렇게 30분이 지난 시점에 등장한 김현우의 손에는, 망가진 뿅망치가 들려 있었다.
# 92
092화. 원하니까 알려 줬다(2)
"감사합니다, 최고의원님."
"아니, 이 정도는 별거 아니지."
아레스 길드 본사의 길드장실.
그곳에서 카워드는 집무실의 상석에 앉아 있는 메이슨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분열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나?"
"예! 최고 의원님, 의원님이 힘을 조금 써주시자마자 며칠 전만 해도 날뛰던 녀석들이 현재는 더 이상 움직임을 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카워드는 그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고, 메이슨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런데 혹시……."
"뭔가?"
"도대체 어떻게 그들을 잡으신 겁니까……?"
"흠?"
"아, 절대로 메이슨 최고 의원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자신의 말이 어느 정도 의심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곧바로 말을 바꾸자 메이슨은 '흠' 하는 표정을 짓곤 이내 어깨를 으쓱이더니 입을 열었다.
"뭐, 별건 아니지. 말 그대로 아는 이들을 이용해 조금 타일렀을 뿐이네."
"그렇군요."
'힘으로 찍어 눌렀다는 건가……!'
카워드는 감탄하면서도 그 뒤에서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메이슨이 힘을 써주고 나서 요 며칠간, 길드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내부 분열이 일어나 얼마나 더 지분을 차지하느냐로 싸우던 각 부서의 부서장들과 이사들은 하나같이 싸움을 멈췄고.
더 놀라운 건 지부 쪽에서 슬슬 올라오고 있는 분열 조짐까지 메이슨이 잡아냈다는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카워드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면서 요 며칠간 어떻게 메이슨이 그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으나, 아무리 궁리해도 나오는 답은 없었다.
자신이 생각했을 때, 아레스 길드의 내부 분열은 막지 못하는 종류의 분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메이슨이 거둔 성과에 굉장히 놀라워하면서도 그 이상 메이슨에게 '어떻게' 그들을 통제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가 살아온 경험상, 모른 것보다 아는 것이 독이 될 때는 분명히 있었고, 카워드는 메이슨의 뒤에 있는 것이 알아서는 안 될 독이라고 단정 지었다.
'도대체 왜 나를 도와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이슨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도와주는지는 모른다.
겉으로는 전 길드장이었던 '마튼 브란드'를 언급하긴 했다.
허나, 솔직히 그를 언급한 것은 그저 아레스 길드에게 간섭하기 위한 하나의 핑계라는 것을 카워드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나는 내 손에 들어온 것들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
카워드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고, 메이슨은 그런 카워드의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예, 큰일이 해결되기는 했어도 이것저것 아직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아서…… 그만 제가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니, 굳이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 없네."
"감사합니다."
카워드의 대답에 메이슨은 만족한 듯 그를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자네에게 전해둘 게 있네."
"전해둘 것……입니까?"
"그래 전해둘 것이지."
메이슨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그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이건?"
카워드의 손 위에 놓인 것,
그것은 시커먼 구슬이었다.
빛이 투과되지 않을 정도로 시커먼 색을 가지고 있는 구슬.
카워드가 그 구슬을 받은 채로 메이슨을 바라보자, 그는 씩 웃더니 대답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 내가 계속 자네를 신경 써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내가 원하는 일을 조금 해주면, 자네에게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법을 알려주도록 하지."
메이슨의 말에, 카워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
헌터들은 파란색 추리닝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온 김현우를 바라보고, 이내 그의 손에 들려져 있는 빨간색 뿅망치를 바라봤다.
그가 들고나온 빨간색의 뿅망치는 그 사용 기간이 매우 위태위태해 보였다.
양쪽의 붉은색 소리가 나는 부분은 이미 완전히 헤져 있어 플라스틱 안쪽이 보이는 상태에다 그가 집고 있는 뿅망치의 뽕 부분은 이미 한번 부러졌었는지 검은 테이프가 감아져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감아놓은 검은 테이브 위에 붙여진 흰색의 양면테이프에는 한자가 적혀 있었다.
正意棒(정의봉)이라는 한자가.
김현우는 몰려 있는 헌터들을 보고 이내 뿅망치를 자신의 손으로 몇 번 두드렸다.
턱-턱-
뿅망치라면 응당 귀여운 소리가 나야 정상이거늘 김현우가 집고 있는 뿅망치는 낡고 둔탁한 소음이 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침묵만이 가득한 연무장에서 김현우가 입을 열었다.
"자, 우선 다 왔는지 인원 체크는……안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건 딱히 제 무술을 배우는 데 그리 관심이 없는 운이 좋은 분들이라고 치죠 뭐.
김현우의 말에 헌터들은 잠시 의문이 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는 피식 웃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이수기를 바라보곤 말했다.
"그럼 어제 말씀드렸던 대로, 지금부터 저는 제 제자에게 했던 것처럼 여러분들에게 똑같이 무술을 알려드릴 겁니다."
아시겠죠? 전부 모이세요.
김현우의 말에 그들은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몰려든 헌터들을 쭉 돌아본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쓸데없는 오해를 사는 것을 피하고자 지금부터 잠시 설명해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김현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옆에 미령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순식간에 나타난 미령의 모습에 헌터들이 놀라움을 표하고, 김현우는 미령의 머리에 손을 올리곤 말했다.
"뭐, 기자들이 잔뜩 싸지른 찌라시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미령- 아니, 패도 길드의 길드장인 패룡은 탑에 있을 때 제가 받은 첫 번째 제자입니다."
""오, 오오오!!"
김현우의 말에 헌터들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미령을 바라봤고, 김현우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미령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여러분들을 수련시킬 생각입니다. 불만 없죠?"
김현우가 주변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하자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본 김현우는 이내씩 웃은 뒤 말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첫 번째 수련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무기 드세요."
김현우의 말에 헌터들은 어리둥절하며 무기를 들었다.
그리고-
"자, 그럼 너희들은 지금부터 내 제자니까 존댓말을 하는 건 그만하고,"
김현우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
갑자기 입가에 미소를 짓는 김현우.
헌터들이 그 모습에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첫 번째 수련을 시작한다. 수련내용은 간단해. 나한테 공격을 맞추거나, 내 공격을 막기만 하면 돼."
김현우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이 쥐고 있던 뿅망치를 굳게 쥐었고, 그 모습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이상함을 느꼈으나-
"무슨-!"
뻑!
이미 김현우는 제일 앞에 있는 헌터의 머리에 뿅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뿅망치에 맞았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날아가는 헌터의 모습.
그 모습에 다른 이들이 경악을 토해내고, 그제야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이수기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수기의 말과 함께 김현우는 뿅망치를 쥔 채 그를 바라보곤 말했다.
"왜?"
"저희는 무술을 알려달라고 했지 당신의 샌드백이 되겠다는 소리는 한 적이 없-"
"어허! 말을 뭐 그렇게 섭섭하게 해?"
그러나 김현우는 그가 전부 말을 하기도 전에 이수기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분명히 말했는데?"
"뭘-!"
"내 제자랑 똑같이 수련을 시켜주겠다고 말이야."
"그게 무슨……! 제자를 이런 식으로 수련시켰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수기의 말에 김현우는 피식 웃더니 이내 김현우의 뒤쪽에 서 있는 미령을 보며 물었다.
"제자야, 내가 너를 들이고 나서 처음 했던 수련이 뭐였지?"
"맷집 기르기와 동시에 순발력 수련이었습니다."
미령의 대답에 이수기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 그건 무술이랑은 아무런 상관없는-"
"상관이 없기는 왜 없어? 너 무술 수련하려면 순발력이 얼마나 좋아야 하는지 몰라? 어? 게다가 맷집도 얼마나 좋아야 하는데? 마력 내부에 빙빙 돌리다 내상 입으면 피똥 싼다?"
김현우가 재미있다는 듯 입을 열자 그는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건 횡포다 횡포라고! 괜히 무술을 알려주기 싫으니까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다!"
"또, 빼애액 거리네? 너희들은 할 줄 아는 게 빼애액밖에 없냐? 응? 빼애액밖에 없어?"
"뭐…… 뭐라고?"
"아마 그랬겠지. 출발의 탑에서도 남한테 빌붙어서 하위권으로 올라왔을 놈들이 그래도 탑 뚫고 올라와서 헌터 됐다고 가슴 좀 피고 사는데 세상살이가 그리 만만치 않지? 응?"
헌터만 되면 아주 다들 우러러볼 줄 알았는데 응?
김현우의 조롱어린 말에 이수기는 무엇인가를 대답하려 했지만, 김현우는 그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좀 가슴 좀 펴고 살고 싶은데 괜히 던전에서 다른 놈처럼 좆빠지게 노력하고 싶지는 않아, 왜냐? 존나게 힘들거든!!"
그래서 딱히 노력하기는 싫고 그냥 꿀 빨면서 대접받고 싶은데 마침 보니 저기에 딱 보니까 이제 막 탑에서 나왔는데 존나 말도 안 되게 쎈놈이 있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쟤가 스킬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무술을 사용한대! 그럼 나도 그 무술만 배우면 쟤처럼 세지는 거 아냐?"
김현우는 마치 그의 속내가 훤하게 보인다는 듯 익살스럽게 말했고, 이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주 어제까지는 좋았지? 내가 볼 때 너희들은 아마 인생 꿀 빨 생각에 아마 밤잠도 설쳤을 것 같다."
"이건 횡포다! 횡포라고! 나는 이 수련에서 빠지겠어! 그리고 김현우 당신을 고소해 버릴 거다!"
이수기의 말에 김현우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
김현우는 어느새 이수기의 앞으로 도약해.
-빠아악!
그의 명치를 뿅망치로 후려쳤다.
"끄아아악!!"
이수기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가며 연무장의 땅바닥을 구르고, 김현우는 쓰러진 자리에서 발악하는 그를 보곤 말했다.
"고소? 할 거면 해. 그래도 그건 알아둬라. 나는 너희들에게 허락을 맡았다는 걸."
"그, 그게 무슨! 우리는 그런 말 한 적!"
이수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본 헌터 중 한 명이 반론을 내뱉었으나,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분명 했는데? 분명 어제 물어볼 때도 두 번이나 물어봤지. 나중에는 정확히 하려고 손까지 들어보라 했고."
"거기에서는 이런 수련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뒤지더라도 무술 배우고 싶은 사람만 손들라고, 불과 조금 전에도 말했는데? 다들 동의하냐고?"
김현우의 물음에 그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고, 김현우는 그렇게 망연하게 서 있는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애들아, 내가 분명 예전부터 몇 번이나 말했지만, 너희들이 계속 까먹는 것 같으니까 이참에 확실하게 다시 말해줄게."
김현우는 자신의 뿅망치를 꽉 쥐고 각자의 무기를 쥐고 있는 헌터들을 바라봤다.
"노력 없이 강해지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누구한테 달라붙어서 진득하게 꿀 빨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라."
뭐, 지금부터 말이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더니 뿅망치를 들어 올렸고, 이내 그 모습에 헌터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김현우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더니 말했다.
"그리고-"
김현우의 신형이 사라진다.
"헉-!"
그의 신형이 나타난 곳은 조금 전 이수기가 누워 있던 곳이었다.
그는 그제야 고통에서 헤어나온 것인지 헉헉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곧 자신의 앞에 다시금 나타난 김현우를 보며 숨을 삼켰고.
"스승한테 싸가지 없이 반말하지 마라."
이 씨발새끼야.
빠아아악!!!
# 93
093화. 원하니까 알려 줬다(3)
"형, 이번에는 일이 좀 커진 거 아니에요?"
"왜?"
"형 고소하겠다면서 헌터들이 열심히 청원 모으고 있어요."
김시현의 말에 소파에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청원 모아서 어쩌게?"
"형이랑 한번 해보겠다 이거죠. 다들 전치 2~3주 진단 끊었다고 단체 고소 들어간다고 하던데."
"그래?"
김현우가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대답하자 김시현은 그를 바라보곤 말했다.
"형, 이거 어쩌면 진짜 심각할 수도 있다니까요?"
김시현은 답답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곤 다시 한번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김현우가 수련의 일환이랍시고 몰려온 헌터들을 연무장에서 개패듯 패버린 것도 이제 1주일.
이미 TV나 인터넷, 각종 이슈 게시판에서는 이 사건을 매우 열심히 파고들고 있었다.
기자들이야 언제나 그랬듯 더 자극적인 기사로 조회수를 뽑아먹어야 하니 헌터 연합의 시점으로 기사를 쓰고 있었고 그 무엇보다-
'이 새끼들 정치질 오지네……!'
헌터연합 녀석들이 얼마나 돈을 처바른 건지, 아니면 자기들이 열심히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각종 헌터 커뮤니티들은 열심히 김현우를 까내라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모든 이슈 게시판이 김현우를 까는 글들로만 도배되는 것을 불가능할 텐데도, 지금 이슈 게시판의 글 90%는 김현우를 까내라고 있었다.
어떻게든 김현우를 조져보려는 게 눈에 보이는 상황.
김시현이 한숨을 내쉬고 있자 그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소파에 제대로 앉았다.
"뭘 그렇게 걱정해?"
"아니, 오히려 형이 이상한 거 아니에요? 인터넷이 이렇게 들끓고 있는데?"
"그래 봤자지. 내가 걔들에게 말했고 뉴스랑 기사에 퍼졌듯이 나는 몇 번이고 걔들한테 동의를 구했다니까?"
한마디로 내가 혹시나 끌려갈 일은 없다는 거지.
애초에 정말 김현우를 잡으러 오더라도 김현우가 쉽사리 잡혀 줄지는 의문이지만.
그의 자신감에 김시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저도 형이 그렇게 막 끌려다니고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한데."
"그런데?"
"이건 그냥 형이 굉장히 귀찮아질 수도 있는 거라니까요?'
"내가 왜 귀찮아져?"
"분명 형이 말한 대로 저 녀석들에게 동의를 받고 수련의 일환으로 저 녀석들을 때렸다고 해도 저 녀석들이 형을 걸고 지랄하면 굉장히 피곤해진다니까요?"
"그건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럴 수 있으면 좋은데 괜히 민사로 기소해서 법정까지 왔다 갔다 하게 만들면 골치아프다 이거죠."
저도 예전에 한 번 그런 적 있었거든요.
"그때 당시에는 별거 아닌 일이었는데 그거로 거의 2년 정도 법정 왔다 갔다 했다니까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그제야 곰곰이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잘못한 게 문제가 아니라 쟤들이 형을 어떻게든 조지려고 눈에 불을 켜는 게 문제라 이거죠."
한국법이 어떤 의미로는 좀……
김시현이 뒷말은 하지 않고 김현우를 바라보자 그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이것 참 어처구니가 없구만, 내가 뭐 애들 '패려고' 때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내 제자를 수련시킬 때랑 똑같이 대해준 건데."
거참 너무하네.
"안 그러냐 제자야?"
김현우가 소파 옆에 서 있는 미령을 부르자 미령은 고개를 끄덕 거리더니 말했다.
"스승님께서 은혜를 베푸는데도 불구하고 스승님을 모욕하려 하다니…… 스승님! 제가 녀석들을 모조리 직접 죽여 버릴까요?"
그냥 맞장구나 쳐달라고 말한 건데 곧바로 그 녀석을 모조리 죽인다는 이야기를 하는 미령을 보며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제자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생각하니 귀찮으니까 그냥 다 죽여 버리자는 논리 구조는 이제 슬슬 저리 치워라."
"죄송합니다. 스승님……."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는 미령. 김현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아무튼 이렇게 놔두면 많이 귀찮아질 수 있다 이거지?"
"그렇죠."
"그런데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분명 나는 걔들이 전부 무술을 그만둘 때까지 열심히 가르치려 노력했는데?"
그렇다.
김현우는 그들에게 처음 무술을 가르친다고 선언한 그때부터 지난 1주일 중 4일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헌터들을 낮12시에 모아 '수련'을 했다.
'……그게 수련이라고?'
김시현은 김현우의 말을 듣고 며칠 전 유튜X 영상에 올라왔던 영상을 떠올렸다.
김현우의 뿅망치에 맞고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헌터들.
아무리 생각해도 수련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뭐…… 굳이 정의해 보자면…….'
어떤 면에서는 수련이 맞기도 한 것 같았다.
물론 헌터들을 수련시키는 게 아니라 김현우 본인이
'어떻게 해야 더 정의봉을 다채롭게 쓸 수 있을까?'
를 수련하는 느낌이 강하지만.
아무튼, 수련이 맞기는 한 것 같았다.
뭐, 그렇게 따지면 김현우는 확실히 꽤 열정적으로 헌터들의 수련에 어울려 주기는 했다.
헌터들이 더 이상 연무장에 찾아오지 않는 4일째까지 김현우는 열정적으로 헌터들을 후드려팼- 아니, 수련시켰으니까.
"……."
김시현은 김현우의 '수련'에 대해 자세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해못할 것 같고.'
은근히 김현우와 지내며 그와 비슷하게 귀찮은 건 외면하자는 버릇이 생긴 김시현은 슬쩍 생각을 돌렸고, 김현우는 고민이 된다는 듯 머리를 툭툭 치더니 미령을 보며 말했다.
"제자야."
"네. 스승님."
"아무튼 인터넷이 그렇다는데 무슨 방법 없냐?"
"'업자'들을 고용할까요?"
"업자?"
"예. 제가 스승님에게 드리기 위해 중국을 손아귀에 넣을 때, 가끔 고용하던 업자들이 있습니다."
미령의 말에 김현우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그 업자들이라는 게 살인마는 아니지?"
"아닙니다. 저도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인터넷 위주로 활동하는 이들입니다."
'……아, 댓글 조작 뭐 그런 건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래, 그럼 한번 해봐."
"예, 알겠습니다."
김현우의 허락과 함께 미령은 곧바로 신호를 보냈고,
'……집 어디에 숨어 있던 거야 쟨?'
김시현은 집 안에서 갑작스레 나타나는 가면 무사를 보며 식겁했다.
분명 집 안이 넓기는 한데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공간은 없는데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물론 그런 김시현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도 없이, 검은 가면을 쓴 남자는 미령의 앞에 서 고개를 숙였다.
"그 녀석들에게 연락해라."
"예,"
짧은 한마디에 곧바로 대답하고 사라지는 가면 무사.
김시현은 그렇게 사라지는 가면 무사의 모습을 떨떠름하게 보더니 입을 열었다.
"……뭐, 어차피 저쪽에도 틀림없이 돈을 들여서 언론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게 눈에 보이고 있는 이상 저희도 이렇게 대응하는 게 맞기는 한데……."
본질적인 해결은 안 되지 않을까 싶은데.
김시현이 살짝 고민하는 투로 입을 열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근데 본질적인 해결을 하려면 저놈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데, 재들은 말이 안 통하잖아."
"그것도 그렇긴 하죠."
확실히 김현우의 말대로 자신을 헌터들의 대변자라고 부르는 '헌터 연합'은 말이 통하지 않는 부류이기는 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김현우가 가지고 있는 무술을 그 어떤 손해도 없이 '공짜'로 얻고 싶어하는 것부터가 양아치근성 이니까.
"뭐, 지금 당장 생각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지,"
"그것도 그렇긴 한데……."
김시현은 다시금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하는 김현우를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김현우에게 줄창 무술을 요구했던 헌터연합. 그 비밀이 알려지다!]
[헌터연합! 사실은 세무 비리에 연관되어 있는 연합체!?]
[헌터 연합! 부정하고는 있어도 실질적으로 거금의 금액 탈세와 세탁으로 잔뜩 떼가 묻은 연합체인게 밝혀져……]
"형."
"왜?"
"진짜 형 아무런 생각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
김현우에게 줄곧 무술을 달라고 요구했던 '헌터연합'은 최악의 개쓰레기가 되어 있었다.
***
강남구에 있는 한 대학병원의 VIP 1인 병실.
마치 그냥 일반적인 방처럼 잘 꾸며놓은 병실에 누워있던 이수기는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게 뭔 개소리야!"
[그..그게 저도 잘……!]
"그러니까 맨 처음부터 확실하게 설명을 해 보라고!!"
이수기의 악 소리에 한순간 그의 스마트폰 너머가 조용해졌고, 이내 곧, 스마트폰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잘 되고 있었는데……
"잘 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어제 다른 '세력'이 튀어나왔습니다.
"뭐? 다른 세력?"
김시현의 예상대로 이수기는 김현우에게 맞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부터 김현우를 어떻게든 엿먹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었다.
'헌터연합'에는 이미 연합장을 그만둔 심전도가 커넥션을 이용해 만들어 둔 정치가들이나 재벌들이 흘린 자금이 무척이나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것을 통해 이수기는 뒤쪽업계의 사람들을 구해 작업을 시작했고 실제로 어제까지 그 작업은 굉장히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 분명 어제까지 잘 이루어지던 '작업'들이 모조리 망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자들은?!"
-기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미리 전부 돈을 먹여놨는데 어제 작업세력으로 보이는 이들이 출현한 뒤로는 미리 매수해 놨던 기자들과도 연락이 불통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씨발!"
이수기는 짜증이 난다는 듯 주먹으로 침대를 내리쳤다.
쿵!
그 충격으로 인해 침대가 찌그러졌다.
아무리 헌터라도 환자가 벌인 일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
사실 이수기는 그리 크게 다치지 않았다.
당장 본인만 해도 A급 헌터였기에 아무리 김현우에게 후드려 맞았다고 해도 그것은 치명상이 아니었다.
즉, 이수기는 조금이라도 김현우의 죄를 무겁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환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수기는 스마트폰을 끄고 스마트폰을 조작해 포탈에 가득 차 있는 뉴스들을 바라봤다.
어제와는 다르게 하나같이 헌터연합에 비리에 대해서 치장되어 있는 뉴스들.
그중에서는 이수기 본인도 모르는 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런 젠장……!!"
이수기가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쿵-
그는 갑작스레 문 쪽에서 들린 소리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고, 그곳에는-
"너는!"
한 소녀가 있었다.
검은색에 진달래꽃이 수놓아져 있는 치파오를 입고 있는 소녀.
미령은 주변을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쯧 버러지에 어울리는 방이군."
"무, 뭐라고!"
미령의 말에 이수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고, 그와 함께 그는 자신의 목에 시퍼런 칼날이 닿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볼 수 있었다자신 근처에 있는 수많은 가면 무사들을.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가면을 쓴 채 이수기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순간적인 상황에 판단이 안되는 듯 눈알을 굴리다 이내 미령을 보며 외쳤다.
"네, 네년!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 이게 무슨-"
팍!
그리고, 이수기의 팔이 날아갔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깔끔하게 날아가는 팔.
그는 순식간에 피가 터져 나오는 자신의 팔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피바다가 된 병실.
그 상황에서 미령은 목짓했고 그와 함께 날아갔던 그의 오른팔이 서서히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려…… 살려줘…… 살려줘!!!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이수기는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 작은 병실에서.
그는 주변의 가면 무사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비명을 질렀고, 미령은 그런 이수기의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버러지가 목숨을 구제해 보려고 입을 놀리는군. 근데 유감스럽게도 너를 도와줄 사람은 여기에 없다."
"읏……!!"
미령의 말에 그는 순식간에 몸을 움직여 병실침대 위에 있는 붉은 벨을 눌렀다.
하지만-
"왜…… 왜 안 울리는 거야!"
이수기가 몇 번이고 벨을 눌러도-
"왜! 왜! 왜! 왜!!!"
벨은 울리지 않았다.
# 94
094화. 원하니까 알려 줬다(4)
이수기가 몇 번이나 간호사 호출 벨을 눌렀으나,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간호사도 오지 않는다.
그 상황에 이수기는 비로소 자신이 굉장히 위험한 상황 속에 놓였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 주변에 서 있는 가면 무사들과 그 사이에 서 있는 미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이명을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었다.
S등급 세계랭킹 5위 패룡.
그의 눈이 순간 공포로 물들었고, 이내 그는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그래도 공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슬쩍 떠는 듯한 목소리로 가면 무사들과 미령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 나를 건든다면 네 스승도 안 좋은 꼴은 면치 못할 거다!"
그의 말에 미령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지? 이미 네가 뿌려놓은 작업세력들은 모조리 적발 당했고, 지금 당장 뉴스를 채운 것들은 모조리 너의 목을 순식간에 조를 수 있는 뉴스뿐이다."
그런데도?
미령의 말에 이수기는 그제야 어제 출현한 작업세력이 미령의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대답해라. 너를 건든다면, 어째서 내 스승이 안 좋은 꼴을 본다는 거지?"
미령의 물음에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여기는 중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이 아니기 때문이라……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의 의미다! 여기는 네가 지배하고 있는 중국이 아니다! 만약 네가 여기서 나에게 무슨 해를 가한다면 너는 몰라도 네 스승인 김현우는 분명 이슈에 휘말리겠지!"
미령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자 이수기는 슬쩍 확신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네가 이미 작업세력을 밀어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미 내가 1주일간 해놓은 작업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연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나?
이수기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정확히는 본인만 그렇게 생각할 뿐, 그의 미소는 지극히 어색해 보였다.
조금 전에 터졌다가 재생된 오른 팔은 덜덜 떨고 있었고, 눈가는 파르르 떨렸다.
그 누가 봐도 긴장하고 있다는 모습이 역력히 보이는 그 모습.
미령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고작 이런 머저리새끼가 스승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다니……."
"아, 아무튼 나를 건들면 네 스승이-"
"상관없다."
"뭐…… 뭐라고?"
촤아아아악!
재생되었던 그의 오른팔이 한 번 더 잘려나간다.
그와 함께 이수기의 비명이 병실에 울려 퍼지고, 미령이 미친 듯이 발악하고 있는 이수기의 앞에 다가갔다.
그는 몰려오는 고통에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미령은 무정무감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아무리 그 아가리를 놀리고 다녀도 스승님이 피해를 보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그게 무슨……!"
"네 녀석은 내게 그렇게 말했지, 여기는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끅……끄으윽……!"
그는 핏발선 눈으로 미령을 바라봤고, 미령은 망설임 없이 그의 남은 왼손을 발로 찍어 눌렀다.
"끄아아아악!!"
이수기의 비명이 한 번 더 터져 나옴과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기형적인 각도로 꺾인다.
그와 함께 그는 기절할 듯 두 눈을 뒤집어 깠으나-
"끄엑!"
그의 등 뒤에 갑작스레 느껴지는 전류에 그는 정신을 잃지도 못한 채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그 모습을 보며 미령은 말했다.
"나는 네게 기절하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 네가 내 질문에 대답했으니, 나도 네가 다시 답해줄 의무가 있지 않나? 그러니-"
끝까지 들어라.
미령은 그렇게 입을 열며 이수기를 바라보곤 말했다.
"맞아, 네 말이 맞다. 여기는 '중국'이 아닌 '한국'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나?"
응?
미령은 그제야 무감무정한 얼굴에서-진득하게 두려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여기가 한국이라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내가 하고자 해서 못하는 것도 없고, 내가 얻고자 해서 못 얻는 것은 없다."
"끄륵…… 그, 그런 바보 같은……!!"
"왜? 아니라고 생각하나?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감스럽지만-"
-사실이다.
그녀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기본적으로 그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하나의 법칙은 똑같이 적용된다. 그 법칙이 무엇인 줄 아나? 그건-"
약육강식이다.
"약한 자는 먹힌다. 강한 자는 계속 살아남아서 올라간다. 그 하나의 법칙은 이런 사회가 만들어진 뒤에도 사라지지 않지."
"아…… 으그으으윽. 아윽!!"
"그리고, 내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왔다고 해도-"
-내가 강자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콰직!
"끄아아아아아악!!"
이수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미령은 그의 비명을 들으며 입을 열었다.
"죽이지는 않겠다. 스승님이 죽이지 말라고 하셨으니. 그래도-"
-대가는 확실해 받도록 하겠다.
미령의 표정이 미소에서 진득한 분노로 바뀐다.
"감히 머저리 주제에 우러러볼 수도 없는 스승님을 우롱한 죄부터 시작해서,"
-스승님을 귀찮게 한 것까지.
"확실하게,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받도록 하겠다."
그 말을 끝으로, 병실 내에는 끔찍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시각.
천호동에 위치한 단독주택.
"형,"
"왜?"
"그러고 보니까 패룡…… 아니, 미령은 어디 있어요?"
"미령……?"
김시현의 말과 함께 김현우는 자신의 옆을 한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아, 그러고보니까 잠깐 할 일이 있다며 사라졌었지."
"그래요?"
김시현의 물음에 김현우는 다시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보며 중얼거렸다.
"뭐, 곧 다시 돌아오겠지."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TV를 바라봤다.
그로부터 3일,
김현우는 김시현이 처음에 말한 대로 정말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깔끔하게 터져 버린 헌터연합을 볼 수 있었다.
헌터연합의 장인 이수기는 갑자기 3일 뒤, 갑작스레 TV에 등장에 자신이 김현우 헌터를 물맥이기 위해 작업 세력을 풀었다는 것을 밝혔고, 헌터연합은 그대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가만히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던 김시현은 이내 소파에 누워 선잠을 자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조신하게 웃고 있는 미령에게서 왠지 모를 오한을 느꼈다.
***
"흠…… 역시 오지 않는가."
리암.L.오르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보며 짧게 탄식했다.
"뭐야 아직도 그 녀석 오는 걸 기다리고 있어?"
S등급 세계랭킹 4위, 에단의 말에 리암은 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리암의 짧은 대답에 에단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만 포기해. 어차피 지금까지 오지 않은 걸 보면 안 오는 거나 다름없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리암이 말을 잇지 않자 라일리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왜 굳이 대답을 그렇게 받겠다고 한 거야? 그냥 그 자리에서 답변을 달라고 하거나, 메일이나 서신으로 언제까지 답변을 주세요~ 라고 했으면 될 거 아니야?"
라일리의 말에 리암은 답했다.
"그 당시에 바로 답해달라고 하기엔 좀 그랬지, 왜냐하면 내가 부탁하는 입장이었으니, 그렇다고 해서 답신을 요구하는 것도 아마 그에게는 좀 거슬릴 것 같았거든."
"그건 또 뭔 개소리야? 아니 제안을 하면 답을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연한 거지만 내가 볼 때 그 녀석은 좀 달랐거든. 내 생각에는 그냥 이렇게 와달라고 하는 게 그가 내 제안을 수락할 확률이 제일 높다고 생각했네."
리암의 말에 에단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라일리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한동안 지속되는 침묵.
"그래도,"
허나 곧 에단의 말로 인해 침묵은 다시 깨졌다.
"지금 당장은 시간을 번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 저번에 그 그림은 김현우가 일방적으로 리암을 구해주는 듯한 뉘앙스로 사람들에게 비춰졌을 테니까."
라일리는 그렇게 말하며 저번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은 길드를 관리하느라 미처 현장에서 보지 못하고 영상으로만 봤던 김현우와 록의 전투를.
그녀가 그렇게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 리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메이슨이 당장 어떤 신호를 보내오지는 않아도 지금 당장은 김현우가 내 편에 서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
지금 당장의 시간은 번 셈이지.
리암의 말에 에단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입을 열었다.
"뭐, 그럼 이제 기다릴 대로 기다렸으니까 슬슬 우리도 가보자고."
그의 말에 리암과 라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오늘 국제헌터협회에 모여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오늘이 세계랭킹 TOP 50안에 들어 있는 랭커들을 초대하는 연회를 열기 때문이었다.
굳이 이런 연회를 여는 이유?
겉으로는 다양했다.
'헌터들끼리의 친교를 다지기 위해' 같은 가벼운 이유부터 시작해 오만가지 이유가 이 연회의 목적에 주렁주렁 달라붙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이 연회의 목적은 하나.
'연줄 만들기'
그래, 연회의 목적은 그것뿐이었다.
헌터들은 나라의 고위층 인사들과 열심히 연줄을 만들어 자신의 미래에 대비하고 각 나라의 핵심 고위층들도 어떻게든 사익을 위해 헌터들과의 친교를 튼다.
결론적으로 오늘 열리는 연회는 그냥 세계적인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는 작은 정치판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래서, 연회 시작이 언제였지?"
"언제기는 언제야 벌써 시작했지."
"쯧, 생각해 보면 나는 애초에 별로 그 구렁이새끼들이랑 인연을 만들어두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지."
"그래? 그럼 빠지든가. 그런데 미래에 별일도 안 하고 평화롭게 놀고먹고 싶으면 연줄은 하나 쯤 있는 게 좋을걸?"
라일리의 말에 에단은 쯧 하면서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기는 하지. 그 양반들은 돈이 넘쳐나서 좀만 도와줘도 돈을 뿌려대니까."
그렇게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연회장에 도착했다.
"후. 여전히 징글징글하게 많네."
연회장은 굉장히 화려했다.
분명 2주 전, 탱크와의 싸움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연회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복구가 되어 있는 연회 홀은 다시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바닥에는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이 여기저기 깔려 있고, 성심껏 조각해놓은 벽화들은 다시금 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
"어?"
"……저건."
리암은 연회장의 중심 테이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 있는 그곳에서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를 보았다.
"……무신(武神)?"
S등급 세계랭킹 1위 무신(武神).
그가 연회장에 와 있었다.
"어? 저거 진짜 무신이야?"
"……뭐지?"
리암의 양옆에 있던 에단과 에일리도 그 S등급 세계랭킹 3위인 '탱크'와 6위인 '키네시스' 사이에 있는 무신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물론 랭킹 1위가 이 자리에 오는 것 자체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 연회는 애초에 TOP50으로 세계랭킹 50위 안에 든 헌터들이 참석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도대체 왜 무신이……?'
무신(武神)은 S등급 세계랭킹에 들고 나서는 단 한 번도 협회에 모습을 비춘 적이 없었다.
그가 모습을 비춘 때라고는 TOP5가 되겠다고 정식으로 신청하러 왔을 때뿐, 그는 그 이후로 그 어떤 곳에도 연회 같은 곳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리암의 동공에 표정 없는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는 무신의 모습이 보이고-이내 말 한마디 못할 것 같은, 다물어져 있는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헌터들은 전부 모여 있나?"
무신의 물음에 그의 옆에서 한창 그와 친교를 맺기 위해 떠들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음, 아마 지금쯤이면 전부 모였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이제 연회가 시작된 지 30분이 넘었으니 올 사람은 전부 왔다고 봐도 되겠지."
마치 무신과 친한 듯 서슴없이 반말을 내뱉는 어느 고위층의 자제.
무신은 그를 한번 보곤 중얼거렸다.
"그런가. 그렇다면-"
그리곤.
무신은 그대로 손을 들어-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지-"
촤아아악!
-그에게 말을 걸고 있던 고위층 자제의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 95
095화. 무신(武神)은 진짜인가?(1)
"오빠."
"왜?"
"이제 슬슬 다른 곳에다가 마법진 그리는 게 어때요?"
아랑길드 지하 2층에 있는 훈련실 구석.
이서연은 한쪽 구석에서 열심히 뭔가를 추가하고 있는 아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여기는 우리 길드 훈련실이거든요?"
"아니, 뭐……그렇긴 한데 어차피……."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훈련장을 바라보았다.
사람 하나 없이 텅텅 비어 있는 훈련장.
"사람 하나도 없는데?"
"당연히 사람 하나 없죠! 일부러 제가 지하 3층은 못 쓰게 출입 제한을 해놨으니까."
"아 그래? 그러면 뭐……바꿀까?"
김현우의 말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법진을 그리고 있던 아냐가 휙! 소리가 나게 김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호, 혹시."
"왜?"
"자리를 바꾸면 마법진 새로 다 그려야 하나요……?"
아냐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아앗, 아아앗……."
김현우의 긍정에 금세 얼굴이 울상이 되는 아냐.
분명 이전 판데모니엄의 용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가득 창 있었다.
……정확히는 평온한 음울함이 가득 차 있었다.
"야…야근……야근 싫어……."
아냐의 중얼거림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야근? 아니 그냥 느긋하게 하면 되잖아? 애초에 마법진 어디 그릴지 자리도 안 잡았는데."
"그치만……마법진 다시 그리려면 가디언 길드 사무 업무를 전부 끝내고 나서 그려야 하는데……지금까지 그려놓은 마법진 다 그리려면 최소 2주는 야근을……."
아냐의 음울한 대답에 김현우는 '흠' 하고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냥 아침에 업무 보지 말고 나와서 그리면 되잖아."
"네? 그러면 업무가……."
아냐의 물음에 김현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대타 구하면 되지."
"헉……진짜로요?"
"그럼 가짜겠냐?"
김현우의 말에 아냐는 마치 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더니 이내 힘차게 입을 열었다.
"여,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길드장님!"
"……."
갑작스레 의욕이 고취되어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그녀를 한번 바라본 김현우는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에 앉았고, 이서연은 김현우의 옆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미령을 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빠."
"왜?"
"시현이에게서 이야기는 들었는데, 결국 가기로 한 거예요?"
이서연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원래는 안 가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냥 이름만 빌려주고 전 세계를 마법진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면 편할 것 같아서."
"오빠 여행 좋아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솔직히 해외 나갈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잖아요?"
"글쎄다……."
뭐, 김현우는 해외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해외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그냥 어디 간다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는 게 김현우였다.
그렇기에 탑에서 12년 만에 빠져나왔어도 그가 하는 집에 처박혀서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두들겼다.
그런 그가 굳이 마법진 때문에 국제 헌터 협회에 가는 이유는 바로 '등반자' 때문이다.
지금은 이상하게 잠잠해도 등반자들은 언제 어디서든 올라온다.
그리고 지구에 올라온 등반자들은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것은 지나가던 개를 줘버린 것인지 나타나자마자 그 지역을 박살 내 버린다.
천마(天魔)때도 그랬고,
괴력난신(怪力亂神)이 나타났을 때도 그랬다.
뭐, 사실 사태가 이미 벌어지고 난 뒤라면 마법진으로 이동해도 태클을 받지 않겠지만-
'역시 최선은 사상자가 나기 전에 처리하는 거지.'
물론 재앙으로 인해 일어나는 사상자들은 김현우에게 있어서 그리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말 그대로 기분 문제였다.
'미리 막을 수 있는 걸 못 막아서 사상자가 나면 괜히 껄끄러우니까.'
"야, 이제 얼마 정도 남았냐?"
"이제 10분 정도면 완성돼요!"
힘차게 외치는 아냐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잠시 스마트폰을 보려던 중-쿵! 쿵!
"살려줘! 살려주세요! 밖에 사람있죠?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아아아아아악!!!"
김현우는 갑작스레 훈련실 지하 3층의 문이 시끄럽게 울리는 것을 보며 시선을 돌렸고, 이서연은 어? 하는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더니 이내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아!"
"……왜?"
"저 안에 저번에 오빠가 데려왔던 걔가 갇혀있었는데……."
까먹고 있었다.
이서연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자, 김현우는 걔가 누구냐는 표정으로 물으려다 이내 탄성을 질렀다.
"걔? 걔가 누구…… 아, 그 아레스 길드…… 걔?"
"네! 그 녀석이요! 생각해 보니까 가둬놓고 구속구랑 식량만 던져 놓은 뒤로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이서연은 그렇게 말하더니 잠겨 있는 쪽문 쪽으로 다가갔고, 김현우와 미령도 이서연의 뒤를 따라 3층에 있는 쪽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끼이이익-
"와, 와!! 살았다! 살려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
쪽문을 열자마자 갑작스레 튀어나온 6번의 모습을 보며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헉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아아아악!!! 아아악! 살려줘! 살려주세요! 저는 빛을 보고 싶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줘─!!!!!!"
"야, 왜 문을 닫아?"
"아, 아니,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짐승이 인간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닌가 싶어서……."
이서연의 말에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어깨를 으쓱이곤 문고리를 잡아 돌렸고,
"아…… 살려주십쇼. 아는 건 전부 말하겠습니다…… 살려주세요……."
""……."
그곳에는 한 남자가 굉장히 추례한 꼴로 질질 짜고 있었다.
분명 깔끔했던 얼굴은 수염이 여기저기 나 있어 굉장히 추레해진 모습의 6번.
"……."
"……."
자신들의 앞에 서서 질질 짜고 있는 6번을 보며, 김현우와 이서연은 할 말을 잃은 채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불과 몇 주 전,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협박을 당해 그에게 옷이고 뭐고 전부 빼앗기기는 했으나 6번은 분명 김현우에게 이곳이 끌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열지 않을 거다!'
'내 입을 열게 하긴 어려울 거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물론 김현우로서도 이미 등반자를 죽인 상황에서 6번은 정보보다는 인질로서의 느낌이 더 강하기에 그냥 구석에 박아놓고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제발…… 제발…… 다 말해드릴게요……."
"……."
"……."
"……만약 문 닫을 거면…… 빛이라도 보게…… 불이라도 좀…… 켜주세요……."
불과 1달도 안 되는 시간 만에 곧바로 모든 저항 의지를 잃어버린 그를 보며, 김현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
시간이 멈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리암은 자신의 시간이 마치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동공에 비추고 있는 무신의 모습부터 시작해서, 그가 손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그 손에 맞아 머리가 날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거기에서 무신의 근처에 모여 있던 이들은 저마다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새하얀 식탁보에는 붉은 피가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제의 몸이 털썩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으……으아아아아악!!!"
연회장이 난장판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의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지자마자 혼비백산하며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제야 리암의 시간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연회장 안.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직이고 시작했고, 연회장 중심에서 퍼지기 시작한 그 혼란은 순식간에 연회장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팟-
꽈직!
무신(武神)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회장 중간에 앉아 있던 무신은 리암의 눈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나타나 출구 쪽으로 뛰어가는 남성의 몸을 날려버렸다.
순식간에 저 멀리 날아가 조각상에 처박히는 남자.
그와 함께 무신의 옆에 앉아 있던 탱크와 키네시스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순식간에 벌어지기 시작하는 학살극.
사람들이 날아다니고, 헌터들이 날아다닌다.
"이런 미친……!"
순식간에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헌터들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듯 제각각의 무기를 들어 올린다.
이 연회장 안에 있는 것은 전부가 세계에서 TOP 50위 안에 들어가는 헌터들.
그들은 곧바로 이 학살을 시작한 무신에게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27위 '기간티커' 가 자신의 건틀렛에서 빛을 뿜어내며 달려든다.
16위 '타임스탑' 이 마법을 외우며 무신(武神)의 시간을 일시적으로 빼앗고-42위 '환영사' 가 사방으로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무신의 급소를 향해 칼을 찔러 들어간다.
다들 일면식도 없는 헌터들이라고 펼쳤다고 하기에는 일반인이 보기에도 정말로 훌륭한 연계기.
허나-
"엇-?"
무신의 상체를 분쇄하기 위해 새하얀 빛을 내뿜으며 나아가던 기간티커의 몸이 반으로 갈라진다.
사방으로 분신술을 사용해 다가오던 환영사는 어느새 본체가 잡혀 목이 사라졌으며-
"크학!"
조금 전 무신의 시간을 빼앗았던 '타임스탑'은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림과 함께 그 자리에서 쓰러져 명을 달리했다.
"이런 미친……!"
TOP 50급에 드는 헌터가 순식간에 3명이나 죽어 나간다.
그리고-
"영감, 내가 곧 죽을 거라고 이야기했지?"
"헉!"
어느새 리암의 뒤에 나타난 탱크, 트락 록은 악마같은 미소와 함께 리암의 머리를 찍어 내리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고-까아아앙!
리암을 향했던 주먹은, 곧 에단의 칼에 막히고 말았다.
"이런 인성 파탄자 새끼……!!"
"오! 검 없으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병신 아니야?"
"지랄하고 있네!"
에단은 자신이 제대로 들기에도 벅차 보이는 거대한 투핸디 소드를 크게 휘두르는 것으로 탱크를 밀어내고, 곧 이어 싸움을 이어갔다.
라일리는 어느새 사람들의 목을 졸라 죽이고 있는 염동술사 '키네시스'와의 전투를 이어하고 있었고-다른 헌터들은 에단과 라일리가 탱크와 키네시스를 막고 있는 그 틈을 타 모조리 무신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일 대 절대다수의 대결.
무신의 주변으로 수십 명에 달하는 헌터들이 몰려든다.
아까처럼 고작 세 명에서 하는 연계가 아닌. 수십명의 헌터들이 자신들의 특기를 살려 무신을 죽이기 위해 하는 연계.
근접계 헌터들은 무신의 급소를 향해 각자의 검을 휘둘렀고-마법형 헌터들은 헌터들과 무신에게 각각 버프와 디버프를 걸었다.
탱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잔상으로 날아오는 무신의 손발을 막기 위해 기꺼이 최전방에 섰다.
하지만-
콰아앙!!
"까-학!"
탱크의 공격에 에단의 투핸디 소드가 저 멀리 날아가고-
"끅-"
"쯧, 내가 말했지? 너는 애초에 나를 못 이긴다니까? 네가 아무리 은신해도 내 베리어는 못 뚫잖아?"
라일리는 키네시스의 염동력에 붙잡힌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돼는……!"
리암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망연하게 바라봤다.
완전히 박살이 나버린 연회장.
이미 연회장은 초반의 그 아름다운 풍경을 잊어버렸다.
여기저기 박살 나 있는 내벽들과 대리석 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피.
사람들의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몸뚱이는 연회장 사방에 뿌려져 그로테스크함을 더 했다.
그런 학살극의 중심.
"대체…… 왜……!"
그곳에는 자신 앞에 쓰러져 수많은 헌터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어느새 붉어진 눈으로 리암을 바라보고 있는 무신이 있었다.
TOP 50안에 드는 헌터를 별 어려움도 없이 모조리 죽여 버린 그.
리암은 시체의 늪이 만들어져 있는 무신의 주변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여기에 있는 헌터들을 처리하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까?
5분? 3분? 아니, 그것보다도 더 짧았다.
그가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자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무신은 리암의 망연한 물음에 대답했다.
"필요했으니까."
"필요하다니, 무슨……?"
무신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여는 리암.
무신은 답했다.
"말 그대로다. 세계멸망을 위해서는 몬스터를 막을 수 있는 헌터를 최대한 줄이는 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 그의 입에서 나온 '세계멸망'이라는 단어에 리암은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그렇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멍하니 서 있는 리암의 모습.
허나 무신은 그런 리암의 생각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슬슬 끝내도록 하지."
짧은 선고.
무신은 그 말과 함께 리암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세웠고, 리암이 곧 자신의 직감으로 찾아오는 불길함을 느끼고 있을 때-
# 96
096화. 무신(武神)은 진짜인가?(2)아랑 길드에서 텔레포트를 타고 국제 헌터 협회로 찾아온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벌어져 있는 풍경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곳에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연회 홀의 여기저기는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고, 그들이 흘린 피로 인해 아름다운 문양의 대리석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내벽에 조각된 벽화들도 마찬가지로 그 형체를 잃고 그저 돌무더기가 되어 있을 뿐이었고, 그 주변에도 마찬가지로 끈적해 보이는 피가 질질 흐른다.
그리고 그런 시체들의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 4명.
'아니, 잡혀 있는 놈들까지 6명.'
한 명은 익히 익숙한 얼굴이었다.
"자, 자네……!"
그는 바로 김현우를 국제 헌터 협회까지 오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니까.
그 이외에 김현우가 아는 다른 한 놈은-
"네 녀석……!"
조금 전까지 한 남자의 목을 붙잡고 있던 록이 남자의 몸을 저만치 던져버리며 김현우를 노려본다.
콰직!
"커억-!"
볼품없이 날아가 벽에 부딪혀 피가 흐르는 바닥에 몸을 처박은 남자 에단.
"에단!"
리암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에단을 부르지만,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꿈틀꿈틀하며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리고 있을 뿐.
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그 그로테스크한 상황이 펼쳐져 있는 연회 홀을 돌아보고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리암을 바라봤다.
"상황 설명 좀 해주지?"
김현우의 말에 리암은 순간 그의 말을 듣고는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생각했다.
허나, 리암이 말하기도 전,
"네 녀석인가, 탱크를 이겼다는 건."
리암의 뒤쪽, 무신(武神)에게서 들리는 목소리에 김현우는 시선을 그쪽으로 옮겼다.
자신의 발아래에 수많은 사람의 시체를 밟고 서 있는 남자.
"넌 또 뭐야?"
"나는 무신(武神)이다."
"뭐? 무신?"
김현우는 순간 그 이름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에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니 들어 본 적이 있는 게 아니라 자주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스승님, 무신은 현 S등급 세계랭킹 1위의 이명입니다."
"아!!"
그렇게 무신이라는 이름을 어디에서 들어봤는지 고심하던 중 옆에서 나온 미령의 말에 김현우는 그제야 알겠다는 뜻 손뼉을 치며 탄성을 내질렀다.
확실히 어디에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무신(武神)이라는 이름은 헌터 커뮤니티에서 많이 보던 이름이었고, 김현우의 머리 한쪽에 저장되어 있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 쪽팔린 이름 쓰는 놈?"
김현우가 히죽 하고 입가를 올리며 말하자 연회 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탱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고, 키네시스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허나 그럼에도 김현우는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진짜 안 그래도 궁금했거든. 랭킹 1위라서 얼굴도 많이 팔렸을 텐데 그렇게 쪽팔린 이름 쓰는 놈 얼굴이 어떤지 보고 싶었거든."
허나 그런 김현우의 도발 어린 말에도 무신은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고 김현우에게 말했다.
"마침 잘됐군."
"뭐?"
"네 녀석은 미리 죽여 놓는 게 좋을 것 같았으니까."
"……뭐?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나 만난 적 있어?"
"아니, 내가 너를 만난 적은 없다. 다만-"
무신은 손가락을 김현우에게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세계를 멸망시키고, 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너를 먼저 죽이는 게 제일 좋을 거라고 하더군."
"!!"
무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김현우의 인상을 찌푸려졌고, 그 순간 무신의 손가락에서 무엇인가가 튕겨져 나왔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무색투명한 무언가는 망설임 없이 김현우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으나-파앙!
"너, 등반자냐?"
무신이 날린 탄지공(彈指功)을 손으로 막아낸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정보권한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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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신천우
나이: 33
성별: 남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S++
민첩: Ss
내구: S-
체력: Ss
마력: Ss
행운: --
SKILL -
아이템 기억 회귀 [고유 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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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의 눈앞에 열리는 로그.
'등반자가 아니잖아?'
만약 무신이 등반자라면 로그가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무신의 정보는 김현우의 눈 앞에 적나라하게 떠올라 있었다.
누가 보면 경탄할 정도로 대단한 능력치.
아이템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이, 오로지 순수한 자신의 힘으로 도달한 Ss랭크의 능력치들.
김현우가 그렇게 무신의 정보창을 보고 있자. 그에게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등반자는 아니지. 그래, 아직은 말이야."
"……뭐?"
"허나, 나는 머지않아 등반자가 될 거다. 이곳에서 올라가 좌를 벗어나 그 끝에 닿기 위해-"
그러니-
팟-
"!!"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서 이미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무신의 모습과 동시에, 그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
"너는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무신의 주먹이 휘둘러지고, 그 순간 김현우는 자신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무신의 주먹은 무척이나 빠르게 다가온다.
그에 비해 반응이 늦는 자신의 몸.
'미친……!'
고속화된 사고 속에서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무신의 주먹을 보며 김현우는 온몸에 마력을 돌렸다.
몸 안에 저장되어 있던 마력들이 혈도를 타고 몸을 돌기 시작하고, 무신의 주먹이 점점 지척에 다가옴에 따라, 김현우의 몸이 고속화된 사고에 반응할 수 있도록 바뀌어 나간다-
그리고-
꽝!
김현우는, 그 찰나의 순간 무신의 주먹을 피하고, 오히려 그의 몸에 주먹을 박아 넣는 것에 성공했다.
연회 홀에 울려 퍼지는 폭음 소리와 함께, 마치 탄환처럼 날아가 외벽에 처박히는 무신.
김현우는 온몸에 검붉은 마력을 태우며 저 멀리 날아간 무신을 향해 몸을 움직였고, 곧 그의 머리에 다리를 꽂아 내리려 했을 때-턱!
무신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김현우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
"그러고 보니 너도 무공을 익혔다고 했던 것 같은데."
김현우를 바라보는 무신의 눈이 붉게 물들고, 김현우가 다른 쪽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한번-"
구경해 보도록 하지.
무신은 이미 김현우의 몸을 망치 삼아, 외벽을 때렸다.
꽈가가강!
한순간 굉장한 소리와 함께 김현우의 몸이 연회홀 밖으로 튕겨 나가고 미령인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튀어나가려 했지만-
"어이쿠! 어딜 가시나! 너는 내가 놀아주마 꼬맹아."
그녀는 곧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탱크와 키네시스 덕분에 김현우를 쫓아 나가려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연회 홀 안에서 싸움이 시작될 때, 홀 밖으로 튕겨 나간 김현우는 다른 건물을 부수고 들어가 바닥을 갈아버리고 나서야 제자리에 설 수 있었다.
쾅!
그리고 곧바로 따라 들어온 무신의 모습에 김현우는 타이밍을 맞춰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쿵!
김현우의 정권이 무신의 팔에 막히고 그의 발이 김현우의 옆구리를 노린다.
쿵!
김현우가 다리를 들어 올려 공격을 막아내고 무신의 다리를 부여잡기 위해 손을 움직였으나, 이미 무신의 다리는 회수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시작된 박투.
마력을 사용한 김현우가 몇 배는 고속화된 사고회로로 무신의 움직임을 쫓는다.
오른 주먹이 옆구리를 향하고, 그 차선이라는 듯 무신의 왼발이 이미 제자리에서 움직여 마치 철퇴처럼 휘둘러진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연계기.
'이런 씨발! 등반자 아니라며!'
김현우는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무신의 손발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런데도 현재 무신의 공격을 받는 김현우는 마치 등반자를 상대할 때와 같은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처음 만났던 천마(天魔)처럼 물 흐르듯 빠른 연계를 취하면서도 순간순간 날아오는 공격은 마치 괴력난신(怪力亂神)처럼 패도 적인 괴력을 내뿜고 있었다.
꽝! 콰가가각!
그의 일 권이 김현우의 정면을 때리고, 그 힘을 전부 상쇄시키지 못한 김현우의 몸이 뒤로 밀린다.
그 상태에서 다시금 행해지는 일격-김현우가 계속해서 방어만 한 덕분에 은근히 동선과 시간이 낭비되는 긴 정권을 사용하려는 무신이 눈에 보이자 김현우는 그의 공격이 행해지기 직전, 이형환위를 사용했다.
순식간에 무신 앞에서 사라지는 김현우의 몸.
무신의 주먹이 허공을 때리고, 그의 시선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김현우를 파악해 뒤로 향했지만-
"이미 늦었어."
-그러게 방심하지 말았어야지……!
김현우는 이미 그의 몸 깊숙이 파고들어 기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천마(天魔)-"
일권(一拳).
김현우의 검붉은 마력이 마치 증기기관처럼 사방으로 마력을 토해내고, 김현우가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던 천마의 무공이 무신의 등을 가격한다.
꽈아아앙!
폭음보다도 극심한 소음이 건물 내에 터지고, 무신의 몸이 건물 내벽을 뚫고 잔디밭을 향해 날아간다.
물론, 김현우는 그곳에서 끝낼 생각은 추오도 없었다.
"흡!"
콰지지직!
김현우의 몸이 주변의 지박을 박살내며 무신에게로 날아가고, 이제 막 자세를 바로잡은 그의 모습에 김현우는 그대로 다리를 움직였다.
다리를 힘껏 차올리지마자 튀어나오는 검붉은 용은 무신의 몸을 강타하기 위해 움직였고-
"그걸 설마 이형환위(異形換位)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미 무신은 김현우의 위를 점하고 있었다.
꽝!
"큭!"
김현우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내리꽂힌 주먹에 곧바로 몸을 비틀었으나 그의 주먹을 전부 피할 수 없었고, 결국 땅바닥에 처박혔다.
순식간에 터져 나오는 흙먼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흙먼지 속에서 무신의 주먹이 다리가 한 번 더 떨어져 내렸지만 이미 김현우는 무신의 공격 범위에서 빠져나갔다.
잠시간의 소강상태.
그리고, 무신이 입을 열었다.
"무술을 배웠다길래 무엇인가 했다만……실망이로군."
"……."
무신의 노골적인 말투에 김현우의 인상이 꿈틀했고, 그런데도 무신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지금 네가 쓰고 있는걸 무술(武術)이라고 칭하는 건가? 그렇다면 어처구니가 없군."
"뭐라고?"
"설마 본인도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그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그를 바라봤다.
무신의 표정은 어느새 무표정에서, 조금은 찌푸린 표정이 되어 그 붉은 눈으로 김현우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만약 네 녀석이 그걸 진짜로 무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너는 무술(武術)을 우롱하는 것과 다른 바가 없다."
"어쩌라고. 네가 무슨 상관-"
김현우는 그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무신은 오히려 김현우의 말을 끊고 오히려 더 인상을 찌푸린 채-
"너는 진짜 그걸 무술(武術)이라고, 그리고 또 무공(武功)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아니다.
"네가 지금 무술이라고 사용하고 있는 것들은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무공이라고? 어째서 그것들이 무공이지? 네게는 무공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
김현우의 무(武)를 부정했다.
"네 무술(武術)에는 구결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다."
당연, 구결이 없으면 묘리 따위가 만들어질 리 없다.
"그 넘쳐나는 마력도 그저 혈도를 타고 흐르기만 할 뿐, 단전조차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아 무공이 완성되지 않는다."
그저 네 자기만족을 위해 주변을 화려하게 장식할 뿐이지.
무신의 신랄한 독설.
그 말에 김현우의 표정이 굳는다.
그리고-
"그래? 그렇다 이거지?"
"?"
"그렇다면-"
김현우의 몸이 순간적으로 무신의 앞에 도달한다.
그마저도 순간 멈칫했을 정도로 빠른 이동속도.
서로의 시선이 부딪히고, 무신이 입을 열기도 전에 김현우는 그에게 뇌까렸다.
"네가 직접 맞아보면 되겠네."
진짜인지, 아닌지.
그리고,
"……!"
-김현우의 등 뒤에 세 개의 만다라(曼茶羅)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 97
097화. 무신(武神)은 진짜인가?(3)
---
[국제헌터협회,
'큰일 났다. 단체 학살극.']
미국 워싱턴 현지시각 14시부터 주최예정이었던 TOP50 연회가 현 시각 학살극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어 굉장히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원래 년마다 주최하는 TOP50 행사는 상위 헌터들에게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사교의 장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모임이다.
게다가 이번 년도의 TOP50 연회에는 그동안 사석에는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던 '무신'이 참여했기에 세간의 관심을 더더욱 받고 있는 중이었다.
TOP50 연회는 연회 개최시각인 17시에는 맞추어서 진행되었지만, 현재 시각 15시 12분, 국제헌터협회에 근무하고 있던 협회원에 의해 현재 연회장에서 학살극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졌다.
(중략)
---
한석원의 차 안.
저녁 약속이 있는 이서연을 데리러 가기 위해 아랑 길드로 가고 있던 김시현은 인터넷을 뒤지던 중 갑작스레 올라온 뉴스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왜?"
"아니, 지금 좀……이상한 뉴스가 뜬 것 같아서……."
'오보인가? 어그로?'
김시현은 눈앞에 떠 있는 뉴스를 보며 진지하게 이 글이 어그로나 오보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헌터업계쪽 기사던, 다른 곳의 기사던, 가끔가다 기자들이 어떻게든 조회수를 벌어보겠다고 어그로나 오보를 내보내는 일이 있는 만큼 김시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찬찬히 글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이내 뒤로가기를 누른 김시현은 혹시 이에 관련된 뉴스가 떴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있잖아?"
곧, 김시현은 네이버 메인에 떡하니 올라와 있는 나머지 하나의 기사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다 이내 네이버메인을 끄고 미국 저널앱을 실행시켰다.
그리고-
"……이런 미친,"
"아니, 뭔데 그래?"
김시현은 자신이 평소 애용하는 국제 저널앱이 온통 조금 전 봤던 '학살극'이야기로 가득 차있는 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이곳에서는 어느정도 사진 정보도 확보한 듯 여기저기서 찍혀 있는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고, 번역 반지 덕분에 읽는데 불편함이 없는 김시현은 서둘러 기사를 눌렀다.
제목을 누르자 순식간에 로딩되어 떠오르기 시작하는 로그들, 김시현은 분명 아까 전 미국으로 향한다고 했었던 김현우를 떠올리며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고,
"아니……."
"아니 뭐냐니까!"
김시현은, 한석원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멍하니 사진 속에 찍혀있는 한 사진을 바라봤다.
상공에서 찍힌 것을 확인된 뷰에는 두명의 남자가 찍혀 있었다.
한 명은 추리닝을 입고 있는 남자.
그리고 다른 한명은 그런 남자의 맞은 편에 서 있는, 넝마조각이 된 상의를 입고 있는 남자.
넝마조각이 된 상의를 입고 있는 남자는 알 수 없었으나 김시현은 이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중 한명을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사진에 추리닝을 입고 찍힌 남자.
그것이 두말할 의심이 여지가 없는 김현우라는 것을 김시현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니, 석원이 형."
"그래서! 뭐 때문에 그러는데?"
한석원의 조금 뿔이난 것 같은 물음에도 아랑공 하지 않은 김시현은 로그를 내리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현우 형, 학살극에 연관이 된 것 같은데요?"
"무, 뭐라고?"
***
김현우의 뒤에 생긴 세 개의 만다라(曼茶羅).
마치 붕우리를 터지기 직전처럼 검붉은 마력을 머금고 있는 검붉은 색의 만다라가 만들어지고, 흘러나온 마력들이 김현우의 등으로 움직여 마력으로 만들어진 팔을 만든다.
검은색의 팔.
무신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
"그냥 가면 섭하지-"
무신은 어느새 자신 주변에 있는 마력들이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맨 처음, 김현우가 괴력난신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었던 수라 무화격은 이렇지 않았다.
그때에는 오롯이 마력을 만다라 뒤에 담고, 괴력난신의 일보를 막기 위해 만다라에 채워 넣었던 마력들을, 오롯이 한 번의 공격에만 때려 박는 기술이 되었다.
허나 그렇게 해서 기술을 만들고 나니 기술 자체는 한번 들어가면 강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너무나도 딜레이가 큰 기술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이 결점을 보완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이내 괴력난신의 십보멸살(十步滅殺)에서 그 방법을 찾았다.
그 방법은 바로 마력의 팽창.
괴력난신처럼 일보를 내디딜 때마다 곱절에 곱절을 곱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김현우 주변의 마력을 일시적으로 팽창시키는 것은 만다라에 담은 마력이라면 가능했기에 떠올린 방법.
씨익-
팽찬된 마력으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는 무신을 보며 김현우의 입가가 올라가고, 그와 함께 검은 만다라가 폭주하며 그 꽃잎을 개화한다.
콰아아아아-
꽃잎이 개화하자마자 검붉은 마력이 사방으로 요동치며 무신의 몸을 더더욱 압박한다.
그리고-
마침내 기술의 최종장을 알리듯, 김현우의 등 뒤에 만들어졌던 검은색의 팔들이 김현우의 오른손에 밀집되듯 모이기 시작했다.
검은 마력이 쌓이고 쌓여, 빛도 투과하지 못할 것 같은- 그야말로 흑색의 팔이 되어버린 김현우의 손이 몸을 속박한 무신에게로 쏘아지고-
"수라(修羅)"
-무화격(武和擊)
김현우가 새롭게 보완한 수라무화격이, 무신의 심장에 닿았다.
──────삐
순식간에 잡아먹히는 시야,
김현우의 뒤로 감당하지 못한 검붉은 마력이 사방으로 튀어나오며 땅을 헤집고, 무신이 잡혀있던 주변의 지형이 순식간에 바뀌어 나간다.
그런 상황 속에서 김현우의 등 뒤에 있던 만다라는 마치 김현우의 추진제라도 되는 듯 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검은 만다라를 모조리 먹어치워 버린 김현우는-
콰────
자신의 몸 안에 들어왔던 만다라들의 마력을 그 한 주먹에 담아 발출했다.
시야에 잡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검붉은 어둠으로 물들어 버린 세상.
김현우의 마력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겠다는 듯 난폭하면서도 사납게 주변을 터트리기 시작했고, 이내 모든 게 끝났을 때.
"멋지군."
"뭐-?"
무신(武神)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물론 그로서도 그 공격을 피해 없이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는지, 안 그래도 헤진 도복상의가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그것뿐이다.
그래, 그것뿐이었다.
"이런 미친……."
분명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죽였을 때 사용했던, 아니- 그때보다도 훨씬 보완했다고 생각했던 수라 무화격은, 무신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 공격을 받아낸 무신의 반응은 김현우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는 조금 전까지 찌푸려져 있던 인상을 펴고 흥미로운, 그러나 역시나 하는 눈빛으로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설마 그 공격으로 내가 쓰러질 줄 알았나?"
무신의 물음에 김현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맞았으니까.
김현우는 만약 이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고 해도 무신에게 어느 정도의 피해를 줄 수 있을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김현우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무신은 말했다.
"양심이 없군. 고작 이딴 기술로 내게 이기려 한 것인가?"
그 짧은 말과 함께 무신은 몸을-
"!"
움직였다.
순식간에 김현우의 뒤에 나타난 무신의 속도에 놀란 김현우.
곧바로 뒤쪽을 향해 발을 쳐들었지만, 그의 발은 무신을 맞추지 못하고 허공을 돌았다.
빡!!
"끅-!"
순식간에 머리통을 때린 무신의 팔에 김현우의 시야가 비틀린다.
돌아가는 시야.
김현우는 자세를 잡았으나,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 전에 들어오는 그의 발차기에 다시 한번 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꽝! 꽈가가강!
흙바닥을 구르며 겨우 자세를 잡은 김현우.
무신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흥미롭기는 하나 실망이군, 정말로 실망이야. 정말 그런 하찮은 기술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하찮은…… 기술이라고?"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자, 무신은 무심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기술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지? 아무것도 없다. 무공의 구결도, 그리고 구결에 따른 묘리도."
심지어 삼재검법에만 있는 기본적인 조화도, 네 기술에는 없다.
"그것이 무공이라고? 웃기지 마라 잡놈. 네가 쓰고 있는 기술들은 그저 겉만 그럴듯하게 보이게 만들어 놓은 잡기술일 뿐이다."
무신의 폭언에 김현우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무신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수라무화격? 천마일권? 무형환위? 아니, 틀렸다. 네가 쓰는 기술들은 그저 '마력파동'이라고 불리는 게 어울릴 정도로 단순한 마력의 발출물일 뿐이다."
요행으로 운 좋게 몇 가지 묘리를 깨달은 것 같으나.
"고작 그딴 수준으로, 수백 년에 걸쳐 무(武)를 수행해 온 나를 쓰러뜨리려는 생각은 접어라."
"수백 년이라고……?"
"그래, 수백 년이다."
"……너는 분명히……!"
인간이 아니었나?
그렇게 말하려던 김현우의 입가가 멈추었다.
그의 입가가 멈춘 이유.
그것은 바로, 김현우가 조금 전에 볼 수 있었던 그 정보창 때문이었다.
김현우는 그의 정보창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누가 봐도 말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높은 능력치들과 함께, 그 아래에는 하나의 스킬이 존재했다.
S등급 세계랭킹 1위의 정보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빈약해 보였으나, 그런데도 그 정보창에 새겨져 있는 그 글씨.
'아이템 기억 회귀'라는 무신의 스킬은, 김현우의 기억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틀림없는 시간의 흐름에 거스르지 못하는 '필멸자'이다. 허나-"
무신은 처음으로, 자신의 입꼬리에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내게 생긴 스킬은, 아이템 속이기는 하지만 일시적으로나마 그 '필멸자'의 삶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무공을 배울 수 있었다.
"맨 처음,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의 신공인 북천신공(北天神功)은 대성하기까지 92년이 걸렸다."
무신(武神)은-
"그다음, 마교(魔敎)의 교주이자 살아 있는 천(天)의 신공인 천마신공(天魔神功)을 대성하기까지는 108년이 걸렸지."
자신이 배웠던 무공들의 이름을-
"백팔마귀(百八魔鬼)중에서도 일(一)이었던 '무형괴공(無形怪功)'을 대성하기 까지는 42년이 걸렸고-"
-말했다.
그의 입에서, 김현우조차도 모르는 수많은 무공의 이름들이 나왔다가 사라졌다.
무림에서 최강이라고 칭송받던 태양인(太陽神人)의 무공이, 무림에서 최악이라고 두려워하던 마귀악신(魔鬼惡神)의 무공이.
그 이외에도 무공에서 한때, 업적을 세우고 하나의 역사로 남겨진 수많은 무공들이, 무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역사의 발자취를 확인하듯, 조용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의 신공인 '혈마신공(血魔神功)'을 대성할 때까지는 30년이 걸렸다."
무신은, 어느새 달라진 기세를 풍기며,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느 것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김현우는 자신의 눈에 비추는 무신의 모습을 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무엇도 느끼지 못했던 무신의 몸에서는, 형형색색의 기운들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붉은 홍안은 그 어떤 감정의 편린 없이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가 어느새 뿌리고 있는 검은색의 마력은 온 세상을 잡아먹을 듯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신은 김현우를 보며-
"그러니, 무술의 껍데기만을 고집하고 있는 네게 보여 주도록 하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진짜' 무술(武術)이라는 것을."
# 98
098화. 무신(武神)은 진짜인가?(4)부스러진 흙바닥에 오연하게 서 있는 무신(武神).
"-!"
그의 모습이 일순간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다.
김현우는 무신이 사라진 것이 아닌, '이동'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
"천마일권(天魔一拳)이라 했던가."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
"!!!"
김현우가 인지하지 못했을 때, 그는 이미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급하게 돌아간다.
조건반사적으로 몸을 뒤튼 김현우는 곧바로 주먹을 쥐고 뒤에 서 있는 무신을 후려치기 위해 마력을 격발했으나-
"이런 미-"
"진짜 천마일권(天魔一拳)은 이런 것이다."
이미 무신의 주먹은 김현우의 심장을 가격하고 있었다.
"끄학!"
김현우의 입가에 피가 터져 나오고, 무신의 주먹이 김현우의 몸을 뚫어버릴 듯 깊게 파고들어간다.
마치 활시위를 당긴 활처럼 꺾인 김현우의 몸.
콰아아앙!
김현우의 몸이 총알처럼 튕겨져 나가 흙바닥을 구른다.
이리저리 어지러운 시야.
그 상황 속에서도 김현우는 치미는 격통에 이를 악물고 시야를 바로잡았다.
고속으로 움직이는 사고.
스스로가 흙바닥에서 튕기고 있는 것도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느껴지는 그 고속화된 사고 속에서 김현우는 겨우 자세를 바로 잡는 듯했지만-
"청룡각(靑龍脚)."
"크헉!"
이미 그의 앞에 나타난 무신은, 자신의 오른 발에 검은 흑룡(黑龍)을 머금고 김현우의 머리를 차올렸다.
순식간에 공중으로 솟아오른 김현우의 몸.
그리고-
"극-유성각(流星脚)"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김현우의 몸은, 다시 한번 흙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꽈아아앙!!
협회 부지를 전부 울릴 정도로 거대한 소음.
김현우는 연속으로 맞은 공격에 슬쩍 정신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본능적으로 무신의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 이형환위를 사용했다.
순식간에 흙먼지가 가득한 곳을 벗어난 김현우.
"진짜 이형환위(異形換位)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럴듯하게 잘 따라 한 모조품 정도는 되는군."
"이런 씨발!"
쾅!
허나 김현우가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순식간에 날아온 무신의 주먹.
김현우는 기적적으로 팔을 올려 방어해 냈지만, 무신의 공격을 막아낸 손에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지독한 격통이 몰려왔다.
그리고-
콰아앙!
"끕!"
김현우의 몸은, 잠시의 휴식도 없이 또 한번 하늘을 날았다.
"혈풍권(血風拳)"
김현우의 등에 거대한 자상이 생긴다.
"마룡일권(魔龍一拳)"
무신의 등 뒤에서 일렁거리는 룡이 김현우의 몸을 꿰뚫는다.
"천룡과야(天龍過野)"
땅바닥에 처박힌 김현우의 몸 주변의 땅들이 모조리 부서지고, 그 지반 속에 김현우가 파묻힌다.
그 이외에도 그의 몸에서 펼쳐지는 수십, 수백 가지의 무공이, 김현우의 몸을 난자했다.
김현우의 몸이 하늘을 날고, 바닥에 처박힌다.
마치 공성추처럼 사방을 날아다니며 국제 협회의 건물들을 깨고 다니는가 하면, 멀쩡한 잔디밭을 갈아버리기도 한다.
그 끝에서.
"대단하군. 진짜 무(武)를 보여준다고 말하기는 했어도, 그 수많은 무공을 맞고도 온전히 서 있을 줄이야."
김현우는 서 있었다.
"……."
그래, 말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씨발-"
"호, 아직 입을 열 기력도 남아 있나?"
김현우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이미 그가 입고 있던 추리닝은 더 이상 추리닝이라고 부르지 못할 정도로 넝마가 되어 있었고, 그가 신고 있던 슬리퍼는 어디로 갔는지 그는 맨발로 서 있었다.
그런 넝마가 된 추리닝 사이로 보이는 수많은 자상과 피멍.
김현우는 오롯이 서 있는 무신을 보며 생각했다.
'강하다.'
김현우는 탑에 들어가고 나서 지금껏, 딱히 누군가에게 지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같은 헌터들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재앙'을 상대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천마, 괴력난신, 복제자,
그 세 명의 등반자를 상대할 때도 김현우는 위기를 겪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나름대로 훌륭하게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등반자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무신은, 한 번도 지겠다는 생각을 해본적 없는 김현우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진다'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와 더불어 그가 쓰는 무공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공들.
김현우의 내구 등급이 S++가 아니었다면, 아마 무신의 공격을 받고 서 있는 것은 불가능 했을 정도로, 무신(武神)의 무공은 그 하나하나가 굉장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필멸자라면 그 누구도 견디지 못했을 공격들을 견뎌냈습니다. 내구 등급이 올라갑니다!]
"하."
김현우는 시야를 가리며 떠오른 로그를 보며 짧은 웃음을 내뱉고는 무신을 바라봤다.
그는 마치 김현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기다려보겠다는 듯,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오연하고도 오만한 무신의 태도.
허나 그런 무신의 태도 덕분에 김현우는 욱신거리는 온몸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싸울 생각이라니, 대단하군."
김현우는 다시 자세를 잡기 시작하는 김현우를 보며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랄하고 있네."
"아직도 그런 식으로 욕설을 내뱉을 수 있는 기개도 인정해 주도록 하지."
무신의 말에, 김현우는 웃었다.
맨 처음, 무신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을 때, 김현우는 무신과의 전투를 회피하려 했었다.
김현우에게는 '출입'이라는 스킬이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에는 방법이 없으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서 무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려 했었다.
하지만, 김현우는 출입을 사용하지 않았다.
왜?
그것은 바로 아직 이 연회홀 안에 자신의 제자인 '미령'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김현우가 이곳에서 출입스킬을 사용해 전투에서 이탈해 버리면 무신의 다음 타깃은 미령이 될 것이 뻔했기에. 김현우는 무신과의 전투를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기회로 삼았다.
"뭐, 네 그런 기개를 인정해서, 더 이상 고통스럽게 만들지는 않겠다."
단 한 번에, 편하게 보내 주도록 하지.
무신의 말과 함께 그의 손에 검은 마력들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마치 손안에 폭풍이 있는 것처럼 휘몰아치는 검은 마력.
허나 김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무신(武神)의 모습을 보며, 마치 와보라는 듯 그 자리에 서서 공격을 기다릴 뿐이었다.
무신은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고 자세를 잡고 있을 뿐, 더 이상 저항 의사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며 김현우의 앞으로 이동했고,
"괴룡폭격(怪龍爆擊)."
꽈────가가각!!!
자신이 여러 가지 무공들을 합쳐서 만든 필살의 무(武)를 김현우에게 펼쳐 보였다.
검은 마력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김현우가 자리한 곳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우고-
"!!!"
"놀랐냐?"
김현우는 어느새 무신(武神)의 옆에 서 있었다.
무신은 갑작스레 옆에서 나타난 김현우의 모습에 당황하며 자신이 펼친 괴룡폭격을 회수하려 했다.
허나- 곧 무신은 김현우의 팔에 모여드는 검붉은 마력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김현우에게 아직 마력이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해 놀란 것이 아니었다.
"무슨-!"
무신은 김현우의 팔에서 펼쳐지고 있는 무공(武功)을 보며, 기함했다.
"야-"
김현우의 기세가 달라졌다.
이전처럼 사방으로 흩뿌려지던 검붉은 마력들은, 이제 제대로 통제되고 절제되어 김현우의 팔 안쪽에만 모여들고 있었고-
"천마일권(天魔一拳)은-"
그저 껍데기를 따라 해 마력만 가득 때려 넣어 발출했을 뿐인 그는, 어느새 제대로 된 무공(武功)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쓰는 거라며?"
꽈아앙!
"큭!?"
무신은 자신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온 김현우의 주먹에 처음으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금강형신공(金剛形神功)'을 운용했다.
그 어떤 공격이라도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낼 수 있는 금강형신공.
김현우가 처음 무신을 죽이기 위해 사용했던 수라무화격을 막아낸 것도 금강형신공 덕분이었다.
"끄으으윽!!"
허나, 무신은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저 마력을 박아 넣어 발출할 때와는 달랐다.
지금 김현우가 무신에게 내지른 일권(一拳)에는, 분명 틀림없는 묘리와 이치가 담겨 있었다.
그저 마력을 발출할 때와는 다른, 압도적인 파괴력을 가진 공격을 받은 무신의 몸이 크게 기울고, 김현우는 입가를 비틀어 올린 채,
"똑같이 갚아 주지."
발에, 검붉은 용이 머금어지기 시작하고,
"!!!"
무신은 그것이 바로 자신이 사용했던 청룡각(靑龍脚)임을 깨달았다.
콰아아아아아-!
김현우의 발에서 만들어진 검붉은 용이, 무신의 머리통을 후려친다.
순식간에 하늘로 떠오른 무신.
"쯧,"
그러나 아쉽게도 무신은 이미 정신을 차리고 땅바닥에 착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땅바닥에 착지한 무신은 자신의 옆구리를 한손으로 부여잡으면서도 말도 안 된다는 듯 김현우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내가 정말로 아무것도 못 하고 맞기만 하는 줄 알았어?"
"뭐라고?"
김현우가 무신에게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하고 몸을 내준 이유.
그것은 바로 김현우가 몸을 지키는 것을 제외한 모든 마력을 오로지 '눈'에 때려 박았기 때문이었다.
김현우의 모든 마력을 담은 눈은, 그를 콤마단위 조차도 인식할 수 있는 경지로 이끌었고, 그 곳에서 김현우는 무신(武神)을 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신의 몸 안에서 요동치고 있는 마력들을, 김현우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관찰했다.
극도로 정제되어 무신의 통제대로만 흘러나오는 마력덕분에 김현우는 무척이나 쉽게 그의 마력이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유동하고 있는지 볼 수 있었고, 깨달을 수 있었다.
무신이 말하는 무공(武功)이라는 것을.
'……물론 대가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치르기는 했어도.'
물론 김현우는 무신의 무공을 훔쳐보기 위해 그 대가를 확실하게 치렀다.
모든 마력을 눈에 집중한 터라 무신의 공격에는 전혀 반응할 수 없었으니까.
'만약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승산은 없었다.'
김현우는 아까 무신이 수라무화격을 막았을 때를 떠올리며 생각을 일축했다.
애초에 그 무공들을 모두 막아낸다고 해도 결국 김현우의 공격이 통하지 않아서야 그의 패배는 예견된 것이기에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선택했고, 그 선택은 성공했다.
"말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내 무공을 본 것만으로 따라 했다고?"
허나 김현우의 자신만만한 표정과 다르게 무신의 표정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적어도 그의 상식에서 '무공(武功)'을 본 것만으로 따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무신의 의문은 정당했다.
마력을 눈에 집중해 혈도의 방향을 보는 것은 간단했다.
하지만 '보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천하제일인도 무공을 잘못 운용하면 주화입마에 빠져 죽는 경우가 있었고, 그것은 다른 무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외에도 혈도를 움직이는 마력에는 각 무공의 묘리가 축적되어 있기에 아무리 혈도가 움직이는 방향을 알아낸다고 해도 그것을 따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허나 김현우는 해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들과, 김현우의 폭발적인 마력을 버티며 넓어지고 단단해져 있는 김현우의 혈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무섭게 굳어져 있는 무신(武神)의 모습을 보며.
"자, 어디 한번-"
씨익 웃곤-
"배운 것들을 써먹어 볼까?"
그에게 달려들었다.
# 99
099화. 무신(武神)은 진짜인가?(5)
"왜, 이대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나?"
평범한 연회장이었다가 이제는 선혈이 난무하게 된 그곳에서, S등급 세계랭킹 3위 이자 탱크라는 이명으로 불린 그는 미령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S등급 세계랭킹 6위인 키네시스가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고.
'……큰일이다.'
그 맞은편.
이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남자 리암은 이 절망적인 상황에 속으로나마 탄식을 내뱉었다.
모든 헌터들은 전부 다 죽거나 전투불능인 상황이었고, 그나마 아직 죽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에단과 라일리도 그들에게 패해 정신을 잃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까지 전투가 지속가능한 사람은 연회시간에 늦게 맞춰온 김현우와, 그의 제자라고 칭하고 다니는 '패룡'뿐.
'이대로라면 틀림없이 진다.'
김현우는 이미 무신(武神)과의 싸움을 위해 장소를 밖으로 이동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남은 것은 패룡뿐.
"……."
그리고 패룡은, 정말 유감스럽게도 그녀를 가로막고 있는 저 두 명을 이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S등급 세계랭킹 5위라는 자리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천외천(天外天)의 자리가 맞았으나, 문제는 상대편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S등급 세계랭킹 3위 '탱크'.
S등급 세계랭킹 6위 '키네시스'.
패룡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저 두 명도 그녀와 같은 천외천의 자리에 있는 이들 중 하나.
특히 탱크의 경우는 패룡보다도 순위가 높았다.
'만약 패룡보다 순위가 낮은 이들을 두 명 상대한다고 하면 어떻게든 승산을 볼 수 있었겠지만…….'
이런 경우에 승산은 확실히 희박했다.
0
5위와 3위,6위가 싸운다면 그 누가 보더라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리암이 거듭되는 탄식을 내뱉고 있을 때쯤, 드디어 침묵을 깨고 미령이 입을 열었다.
"비켜라."
짧은 한마디.
미령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탱크는 비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 비키라고? 내가 왜 그래야하지?"
"그렇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뭐? 죽는다고?"
푸하하하하!!
탱크의 쩌렁거리는 웃음이 연회홀을 가득 채운다.
허나 그런 탱크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미령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끊임없이 웃음을 내뱉고 있는 탱크와 그 뒤에서 애초에 싸움에 참가할 의사도 없다는 듯 느긋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키네시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노골적인 조롱이 섞인 행동과 몸짓이었다.
"그래, 네가 날 죽일 수 있다고? 네가 나를?"
"못할 것 같나?"
"못할 것 같은데? 오히려 내게 죽도록 맞고 울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 같군."
탱크의 조롱.
미령은 짧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뭘 어쩔 수-"
탱크는 입을 열다 말고 순식간에 사라진 미령의 신형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꽈직! 꽝!!!
그와 함께 탱크의 뒤쪽에서 들리는 굉음에 그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그곳을 바라봤고.
"!!"
그곳에서, 탱크는 자신의 동료의 머리가 땅바닥에 처박혀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부서진 조각 위에 기대고 있던 S등급 세계랭킹 6위, 키네시스는. 부서진 대리석 조각에 붉은 피를 장식하며 죽어 있었다.
그와 함께 탱크의 몸속에서 울리는 깊은 경고.
'내가, 움직이는 걸 제대로 깨닫지도 못했다고?'
탱크는 키네시스의 몸을 짓밟고 있는 미령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 탱크가 무슨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이미 미령은 그의 뒤로 돌아가 키네시스를 죽여버렸다.
그것도 깔끔하게,
다시금 살아날 여지 따위는 없이, 깔끔하게 키네시스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미령의 모습.
그러나 굳어 있는 탱크의 표정과는 다르게, 그녀는 자신이 한 일이 별것도 아니라는 듯 땅바닥에 박혀있는 키네시스의 몸을 그대로 밟았다.
콰득! 콰드드득! 우드드드득!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 대리석 바닥과 하나가 된 키네시스의 신체를 흥미 없다는 듯 내팽개친 미령은 이내 걸음을 옮기며 탱크를 바라봤다.
그리고- 미령이 입을 열었다.
"사실, 네가 나를 보내준다고 말했더라도 너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뭐라고……?"
"네 녀석은 잘못을 범한 것들이 너무 많아."
미령의 말에 탱크는 이미 그녀의 몸 주변에서 붉은 마력이 새어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의 스킬인 금강불괴(金剛不壞)를 시전했다.
미사일마저도 막아주고, 자신을 여기까지 끌어 올려 주었던 고유스킬.
그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하지만-
'왜……이렇게 불안한 거지……?'
탱크는 불길하게 일렁이고 있는 마력들을 보며 스스로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인상을 찌푸렸다.
허나 탱크가 어떤 생각을 하든, 미령은 그저 담담하게 말했고-
"그러니, 지금부터 너는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이미 탱크의 앞에 나타나 발을 휘둘렀다.
쾅!
"큭!?"
순식간에 이뤄진 미령의 공격에 그는 당황하면서도 팔을 들어 올려 공격을 막아냈다.
쾅! 쾅! 쾅! 쾅!
미령의 몸이 순식간에 움직인다.
절대 체공하면서 움직인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발기술.
"큭! 끅! 끄윽!"
그리고 그 공격을 받아내고 있는 탱크는 그녀의 발에서 느껴지는 힘에 경악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한 방 한 방이 말도 안 되게 강하다!'
무신이나 김현우처럼 피부를 뚫고 때리는 공격들은 아니었다.
미령의 공격은 그저 어디까지나 순수한 외부타격.
그런데도 불구하고 탱크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고 방어에 전념하고 있는 이유는, 미령의 공격이-
"커-억!"
그의 금강불괴를 뚫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쾅! 콰지지직!
탱크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가 피 묻은 조각상에 처박힌다.
우르르 무너지는 조각상, 그로 인해 가려진 시야.
탱크는 빠르게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 위로 떨어지는 돌무더기를 파헤쳤지만-
"극-(極-)"
그의 시야가 확보되었을 때, 이미 미령은 그의 머리 위에서,
"패왕신각(?王神脚)"
이미 붉은 마력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
꽝!
순식간에 무신과 김현우의 신형이 겹친다.
무신의 발이 어지럽게 놀리며 김현우의 급소들을 노리고, 김현우는 그런 무신의 공격들을 피하며 다음 공격을 준비한다.
유성각(流星脚)-!
김현우의 발에서 검은 유성이 떨어져 내린다.
콰아아아!
주변의 지반을 모조리 박살 낼 정도로 강대한 공격.
분명 이전에 사용했던 김현우의 공격보다도 몇 배는 강력해진 유성각.
쾅! 꽝!
부서지고 있는 지반 사이를 오가며 김현우와 무신의 전투가 지속된다.
겨우 십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벌어지고 있는 수십 수백 합의 공방.
땅이 터지고 건물이 부서진다.
공기가 터져나가고, 흙먼지가 시야를 가린다.
일반인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콤마 단위의 전투가 계속해서 지속된다.
"큭!"
그리고 그 사이에서 먼저 신음을 터트린 것은 바로 무신(武神).
그는 자신의 아래에서 떨어져 내리는 김현우의 주먹을 막아내며 인상을 찌푸렸고, 반대로 김현우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꽝!
김현우의 다리가 무신의 신체를 그대로 지반에 처박아 버리고, 그 여파로 흙이 터져나간다.
이미 '국제헌터협회'라고 부르는 것보다 몇 십 년을 방치해 둔 폐허라고 부르는 게 맞을 정도로 완전히 박살 나 있는 협회.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그런 협회의 부지 안에서, 무신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김현우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고.
"왜? 자기가 수십 년 배운 걸 이런 식으로 빼앗기니까 좀 배알이 꼴리나?"
김현우는 아까와는 반대로 무신을 조롱하며 입가를 비틀어올렸다.
'이 새끼……!'
그리고 무신은 그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초조하게 이를 악물었다.
'점점……발전하고 있다!'
무신이 초조해하고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김현우가 싸우고 있는 지금도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반복해서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 김현우와 주먹을 부딪쳤을 때, 무신은 당황하기는 했으나 자신이 이길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무공(武功)의 기술들을 복사했다고 해도 그것은 말 그대로 무공의 기술(奇術)을 복사한 것뿐 이였으니까.
허나 시간이 지나고 지금 여기까지 왔을 때,
'무공(武功)마저도……!'
김현우는 정말 어설펐으나, 무공(武功)을 따라 하고 있었다.
수십, 수백 년을 수련해 깊은 깨달음을 얻어 그가 얻었던 무공들을, 김현우는 그저 싸우면서 본 것만으로도 어설프게나마 따라 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재능.
김현우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범인(凡人)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천재(天才)의 영역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무(武)를 진정으로 통달한 자들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무신(武神)은 결단했다.
"지금부터-"
김현우를 죽이는데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붓겠다는 결단을.
"전력을 다하겠다."
콰아아아-
그와 함께, 무신(武神)의 주변으로부터 검은 색의 마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의 그의 주변을 잠심해 들어간 검은 마력들은 이질적으로 움직이며 무신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내 무신의 형상을 바꾸었다.
분명 헤진 도복만을 입고 있었던 무신의 모습이 검은 마력에 물들어가며 바뀌기 시작한다.
손발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자라나고, 몸의 피부는 빛조차 투과하지 못할 것 같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바뀐다.
사람의 얼굴이었던 무신의 머리는 어느새 굉장히 흉해 보이는,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악마의 얼굴처럼 변해간다.
그리고 양 이마에 자라나기 시작한 뿔과 함께, 무신(武神)은, 아니-
"마신강림(魔神降臨)."
마신(魔神)은 중얼거렸다.
"……이게 등반자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악마처럼 변해버린 무신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어디를 봐도 평범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로, 무신의 모습은 이질적이었고, 그의 몸에서 나오는 기운은 압도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강대했다.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마신은 말했다.
"……천마신공과 혈마신공, 그리고 일월신교의 명황신공을 대성하고 나서 얻어 낸, 나의 전력이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것을 따라 할 수는 없겠지."
확실히, 이제 막 어설프게 무공(武功)을 따라 할 수 있는 김현우는 마신강림을 따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 따라 할 수는 없는데……."
김현우는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나도 비슷한 걸 할 수는 있지."
"뭐……?"
김현우의 말에 마신은 인상을 찌푸렸고, 그와 함께 김현우의 기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에 몰려드는 검붉은 마력.
김현우는 이전에 한번 무신(武神)과 같이 무공을 쓰는 등반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스스로를 뇌신(雷神)이자 천(天)이라고 불렸던 남자.
천마(天魔).
김현우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처음 싸움을 겪으며 마력을 깨우쳤고, 그를 죽이기 위해 처음 무공(武功)을 만들었다.
그렇기에-
"……무슨-!"
김현우는 아직도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천마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그만의 무공을, 김현우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 할 수 있나?'
아니, 예전에는 따라 할 수 없었다.
김현우는 천마를 이겼으나 그가 보여주었던 무공(武功)은 전혀 따라 하지 못했다.
허나 지금은?
무신에게서 수많은 혈도의 흐름을 깨우치고, 무공의 원리를 알아낸 지금이라면?
김현우의 검붉은 마력이 점점 진해진다.
파직- 파지직!
그와 함께 그의 몸 주변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검붉은 색의 번개.
파지지직직!
그와 함께, 검붉은 정전기가 김현우의 몸 주변을 감싸기 시작한다.
쾅! 콰강! 쾅!
그리고-
김현우의 몸 주변에, 검붉은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변이하기 시작한 김현우의 몸.
넝마가 되었던 몸에는 붉은 빛이 머금어지고, 엉망진창이었던 머리는 마치 정전기가 일어난 듯 하늘로 솟아올라 있다.
파짓! 파지지직!
그와 함께 김현우의 등 뒤에 만들어져 있는 검붉은 흑원은 파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그렇게-
"2차전이다."
김현우는 뇌신(雷神)이 되었다.
# 100
100화. 무신(武神)은 진짜인가?(6)
"끅-"
꽝! 콰드드득!
"크학!"
연회 홀 내부,
아니, 이제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 더 이상 내부라고도 부를 수 없는 그 곳에서, 탱크는 미령에게 그야말로 '먼지 나게 맞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맞고 있었다.
"이런 젠-"
꽝!
"빌어 먹-"
꽝!"
"끄아아아아악! 끅-!"
꽝!
탱크는 단 한 번도 미령을 때릴 수 없었다.
아니, 때리기는커녕 그 옷깃조차, 탱크는 잡을 수 없었다.
"끄악!"
조각상에 처박힌 탱크의 얼굴에 날려지는 발차기에 그는 이젠 새된 비명까지 터트리며 그 공격을 막지도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탱크는 공격을 받으면서도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이 자리까지 끌어올려 주었던 금강불괴는 무신과 김현우 같은 녀석이 쓰는 특이한 기술이 아니라면 적어도 방어부문에서는 최강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스킬이었다.
'그런데 저년은 어떻게!"
꽝!
'어떻게에에에!!!!'
콰드드득! 콰직!!
탱크의 몸이 대리석 바닥에 처박힌다.
상상을 뛰어넘는 고통!
분명 탱크의 몸은 금강불괴가 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령의 공격에 고통을 느꼈다.
그야말로 끔찍한 고통을-
콰지지지직!!
"끄아아아악!!"
탱크는 자신의 짓밟힌 오른팔에 느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지만, 미령은 그런 그를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런 모습에 탱크는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된다는 것처럼,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 그는 발작하듯 외쳤다.
"도대체! 도대체 어째서 내게 공격이 통하는 거냐!!!!"
그런 발작에도 미령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저-
콰직!
미령은 그의 비명을 지르듯 외쳐대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향해, 다리를 내리찍었을 뿐이었다.
탱크의 머리가 대리석 바닥에 박히고, 부서진 대리석조각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누가 볼 것도 없이 완벽한 죽음.
S등급 세계랭킹 3위의 죽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볼품없는 최후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암은 숨을 삼켰고, 미령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리곤 하늘을 바라봤다.
파지직! 쾅! 콰가강!
때마침 내리치고 있는 검붉은 색의 뇌전을 보며,
'……스승님'
미령은 자신의 스승인 김현우가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
쾅!
검붉은 번개가 땅바닥에 내리꽂히자, 그 둘은 마치 약속했던 것처럼 제자리에서 튀어나갔다.
콰직! 콰지지지직!
김현우의 몸에서 튀어 오른 붉은 전류가 허공을 수놓고, 무신의 뒤에 검은색의 마력이 유영한다.
콰아앙!
단 한 번의 일격.
서로의 힘을 가늠하듯 상대의 주먹을 후려친 간단한 탐색의 의미가 담겨 있는 주먹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먹이 맞부딪히며 나는 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검붉은 전류가 방전하듯 사방으로 튀어나가고, 검은 마력이 전류를 뒤덮는다.
그야말로 일개 인간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엄청난 광경.
그 속에서도 김현우와 무신은 오롯이 서로만을 노려본 채 다음 공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공격을 막아내고 공격을 가하는,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단순할지도 모르는 일련의 움직임.
그러나 그 공방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콰가가가각-!
1분, 1초, 0.1초, 아니, 그 이하의 시간 속에서, 김현우와 무신은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왼팔로 정권을 지르고,
오른 다리로 공격을 막아내고,
오른 주먹은 상대의 급소에-
왼 다리는 다음 공격에 대한 준비를, 압축되고 압축된 극한의 시간 속에서, 그들은 다른 이들은 제대로 보지조차 못 할 전투를 연속해서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꽝!
단 한 번의 일격은, 그들의 전투 장소를 바꾸어 놓았다.
그저 단 한 번의 일격을 허용한 것만으로도 김현우와 무신의 장소는 시시각각 바뀌었다.
어떨 때는 하늘에 체공하며 전투를 하기도 했고, 그 어떤 때는 바닥에,
그 어떤 때는 폐허에서,
꽝! 꽝!
콰지지지직! 쾅!
"큭!"
공격을 막아내던 무신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검붉은 번개에 맞고 순간 멈칫한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얼굴에 날아오는 오른발.
빡! 파지지직!
"끅!"
무신은 얼굴에 김현우의 오른 발을 정통으로 맞고 몸을 비틀거렸고, 그 틈을 노린 김현우가 또 한번 공격을 먹이기 위해 움직였지만-
"윽!"
자세가 무너지는 상태에서도, 무신은 자신의 검은 팔을 길게 늘여 김현우의 심장에 일권을 박아 넣었다.
순식간에 양쪽으로 밀리는 김현우와 무신.
"후……."
김현우는 이미 악마처럼 변해 버린 무신에게 달려들며 사고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이상 시간을 끌면 힘들다.'
이미 무신에게 무공을 사용하는 법을 배운 김현우였으나 무공을 배우기 위해 치른 대가가 너무나도 컸다.
그나마 내구 등급이 올라서 버티고 있는 것뿐이지,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김현우가 유지하고 있는 이 상태는 분명 천마(天魔)의 '뇌령신공'이 맞았으나 도대체 어느 부분이 잘못되어 있는 것인지 소모하고 있는 마력의 소비가 엄청났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마력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던 김현우조차도 슬슬 마력의 고갈을 신경 써야 할 정도.
그렇기에, 김현우는 길게 시간을 끄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김현우와 공격을 맞부딪히고 있는 무신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되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강해진다니!!!'
무신은 사용하면 어느정도 자신에게 부담이 되는 '마신강림(魔神降臨)'을 사용하면서까지 김현우를 빨리 죽이려 했었건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맨 처음이라면 김현우를 그대로 압살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무신의 앞에서 같이 공방을 주고받고 있는 그는-
'내 전력으로도……전혀 밀리지 않고 싸운다고……?'
더 이상, 무신에게 밀리지 않고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성장.
이 짧은 전투의 한순간에서도 몇 번이고 성장하는 그의 모습에 무신은 본능적으로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든 걸 쏟아부어서 끝을 낸다……!'
무신은 김현우를 죽이기 위한 일격(一擊)을 준비했다.
"?"
김현우는 공방을 이어가던 중 갑작스레 바뀐 무신의 기세를 느꼈고, 곧 불길한 예감을 느낌과 동시에 무신과의 거리를 벌렸다.
콰아아아아!!
그리고 그와 함께 무신의 주변에 퍼져나가는 검은 마력들.
"!"
그리고 김현우는 무신의 주변에 퍼진 검은 마력들이, 결코 평범한 마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게 뭐야?'
무신이 주변으로 흩뿌리기 시작하는 마려들은 아까 전 무신이 뿌렸던 마력들과는 다르게 주변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분명 갈색의 토양을 가지고 있었던 흙이 회색빛으로 메말라 비틀어지고, 그 주변에 남아 있던 잡초더미들도 시커멓게 변색된다.
"……!"
무신의 몸에서 퍼져 나온 검은 마력들은, 주변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구그그그그그긍!!!
김현우는 곧 무신의 주변에 뭉쳐지기 시작하는 거대한 마력들을 보며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신의 주변에 뭉쳐 있는 무지막지한 마력.
허나 김현우는 그 무지막지한 마력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무신의 모습을 바라본 이유.
그것은 바로 그가, 무공(武功)을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무신의 손에 뭉쳐지기 시작하고 있는 마력은 그저 순수한 마력을 집합체였다.
그것에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공에 대한 묘리도.
무공에 대한 이치도.
무공을 사용하는데 중요한 심기체도.
본인이 가장 욕하고 비웃던 짓을 그대로 하고 있는 무신의 모습에, 김현우는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그렇게 시간까지 들여서 준비하고 있는 게 '아까'의 나랑 똑같은 급수라는 거, 알고 있지?"
김현우의 비웃음 어린 조소에 무신은 입을 열었다.
기괴하게 끓는 듯한 목소리.
"상관없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네가 이 '마력'을 받아 낼 수는 없을 테니!"
끓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무신은 김현우에게 도약해 지나간 모든 것을 죽여 버리는 마력을 자신의 온몸에 둘렀다.
악마를 넘어, 마치 이 세상에 재해를 뿌리는 재앙(災殃)처럼 변해버린 그는,
"마신-(魔神-)"
도망치지 않는 김현우에게 정권을 꽂아 넣었다.
멸겁(滅劫)-
콰아아아!
그와 함께 들리는 기괴한 소음.
기괴한 소음은 국제헌터 협회를 모조리 뒤덮었고, 김현우를 넘어 사방으로 폭사된 마력은 보이는 모든 것을 죽이기 시작했다.
평범한 흙바닥부터 시작해서 화단에 있는 식물까지.
살아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죽여 버리는 끔찍한 마력.
그 모습을 보며 무신은 이 공격을 받아낸 김현우가 확실히 죽음을 맞이했을 거라 확신했다.
무신이 사용한 것은 김현우가 말한 것처럼 순수한 마력을 발출 한 것이었으나, 그가 흩뿌린 것은 일반적인 마력이 아닌 사기(死期)가 담긴 마력이었으니까.
그것도 일반적인 사기 따위가 아닌, 닿기만 해도 모든 것을 죽여 버릴 정도의 지독한 사기(死期).
그렇기에 이 마력은 파할 수도 없고, 또한 막아낼 수도 없다.
'그런데- 그랬을 텐데─!'
무신은 경악한 표정으로 분명 죽어야 했을 김현우를 바라봤다.
"어떻게-!"
기괴한 무신의 음성이 김현우의 귓가를 강타했지만, 그는 대답하는 것 대신 슥 웃음을 짓는 것으로 무신의 말에 대답했다.
파직! 파지지지직!
그와 함께, 김현우의 몸에서 퍼져나가는 뇌전.
그 모습을 보며 무신은 김현우가 어떻게 자신의 공격에서 살아남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뇌전으로…… 사기(死期)를 막아 냈다고!?'
김현우의 주변을 반격으로 퍼진 검붉은 뇌전들은 주변에 부유하던 검은 마력들을 잡아먹기 시작했고,
"아까는 네가 나를 알려줬으니-"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그에게 선고하듯-
"이번에는 내가 네게 가르쳐주도록 하지."
입을 열었다.
"!!"
그와 함께 사방으로 퍼졌던 뇌전이, 김현우의 주변으로 한순간 빨려들 듯 모이기 시작했다.
쿠그그그그그그긍!!!!
순식간에 그의 손에 모여든 뇌전이 파지직 거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무신이 뒤늦게 그를 알아채고 몸을 빼려 했으나 이미 김현우의 주먹은 무신의 명치를 때리고 있었다.
"반극천격(反極賤格)-"
"크하악!?"
꽈가가가가각!!!
김현우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뇌전 안에 가두어 두었던 마신의 사기가 일제히 무신의 몸을 강타한다.
순식간에 저 멀리 날려지는 무신.
그는 복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비틀리는 시야를 잡기 위해 애를 썼지만-
"아직 안 끝났다."
이미 김현우는, 무신의 뒤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으극!?"
무신의 몸이 허공에 멈췄다.
마치 그 상태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무신.
그러나 그런 무신과는 반대로, 김현우는 이미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까 그랬지?"
이 공격은 막아 낼 수 있다고-
김현우의 주변으로 검붉은 뇌전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땅에서.
하늘에서,
허공에서,
파지직 거리는 스파크가 사방에서 튀어 오르며 공간 일대를 점령하고, 김현우의 등 뒤에 펼쳐진 검붉은 뇌전의 흑원에서 아까와 같은 검은 연꽃이-만다라(曼茶羅)가 개화한다.
아까와는 다르게, 뇌전을 머금은 검은색의 만다라는 김현우의 뜻대로 허공을 유영하는 뇌전들을 팽창시켜 무신의 몸을 고정하고 있었고, 무신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껴 몸을 뒤튼다.
"그래서 나름대로 바꿔 봤으니."
이번에도-
세상이 검붉은 뇌전으로 물들었다.
하늘에서는 번개가 내리치고,
땅바닥에서는 내리쳐진 번개들이 김현우의 주변으로 몰려든다.
"한번 막아 봐."
그리고-
"뇌신재림(雷神再臨)."
천지에 검붉은 번개가 내리쳤다.
# 101
101. 무신(武神)은 진짜인가?(7)검붉은 번개가 세상에 내리쳐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그 위.
김현우는 무신(武神)이 '있었던' 자리를 말없이 바라보고는, 이내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로그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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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등반을 시작하려던 '등반자'를 잡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위치: 미국 워싱턴
[예비자 '무신(武神)' '악천'을 잡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악천의 등반자 등급을 설정하는 중입니다.]
[정보 권한의 실적이 '중하위' → '중위'로 변경됩니다!]
[현재 정보 권한은 중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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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면 당신은 부름을 받아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3일 3시간 8분 1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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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랐던 로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곧 로그에서 시선을 돌려 그가 있었던 곳에 떨어져 있는 흑색의 천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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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악천의 원천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없음
-정보 권한-
9계층에서 무신(武神)이라 불렸던 남자 '악천'은 자신을 가르친 첫 스승인 그가 향했다는 '위'를 향해 가고자 -권한부족-의 말을 따라 '등반자'가 되려 한다.
그는 -권한부족-의 도움으로 아티팩트 속에 있는 여러 무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그들의 무공을 대성할 수 있었고, 그는 나중에 들어서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명칭인 '무신'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무(武)'를 얻을 수 있었다.
허나 그는 '등반자'가 되지는 못했기에 원천이 불안정해 그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등반자'들이 자연스레 계층을 건너오며 쌓는 '미궁'의 힘을 얻어야 한다.
미궁석 게이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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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를 제치고 단숨에 눈앞을 장악한 로그를 읽어본 김현우는 이내 악천의 원천을 추리닝 주머니에 넣으려다 츄리닝이 넝마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내 한숨을 내쉰 뒤-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스승님!"
그와 함께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린 김현우는 이내 곧 저 멀리서 미령이 열심히 뛰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주저앉은 상태로 한숨을 길게 쉬었다.
"후."
'존나 힘드네.'
정말로 이겼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물밀 듯 몰려오는 피로.
그래도-
"이겼다."
김현우는 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땅바닥에 누워 밀려오는 피로에 몸을 맡겼다.
***
그다음 날.
전 세계는 난리가 났다.
세계에서 50위권 내로 들어와 있는 헌터들 50명이 1년에 한 번 모여 친교를 갖는 친교회의 성경을 띄고 있는 연회에서 일어난 학살극 때문에.
TOP50에 참여했던 헌터 42명 중 33명이 사망하고 그나마 살아 있는 9명 중에서도 4명은 더 이상 헌터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다.
그 덕분에 전 세계의 매스컴들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이 엄청난 먹잇감을 먹어치우기 위해 국제 헌터 협회로 걸음을 옮겼고, 그것은 각 나라의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헌터들의 힘이 나라의 국력으로 치환되기도 하는 상황에서 세계권에서 50위 안에 들어가는 이들이 학살극에 희생되었다.
한마디로 엄청난 전력 손실을 떠맡게 된 각 나라들.
그들은 무신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도대체 누가 무신을 데리고 이런 일을 꾸몄는지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겠다고 말하며 각 나라에서 공조수사를 벌일 것이라는 입장도 발표했다.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일이 터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이슈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김현우'에 대한 이슈.
정말 전 세계에의 뉴스토픽 어디를 찾아봐도, 김현우의 이름 석 자가 걸리지 않은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전 세계에서 진귀한 기삿거리가 되고 있었다.
이유?
간단했다.
그가 바로 이 모든 학살극을 벌였던 '무신(武神)'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단순히 그 사실로 김현우의 이름 석 자가 전 세계 이슈에 떠돌게 된 것은 아니었다.
김현우가 정말로 전 세계에서 거론되게 된 이유는 바로 그와 무신이 싸웠던 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사방으로 뿌려졌기 때문이었다.
국제 헌터 협회 내부에 있는 CCTV카메라를 포함해, 협회에서 신고를 받고 긴급해서 날린 드론.
그 이외에 망가진 CCTV의 데이터는 그 자료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현우와 무신의 전투 영상은 삽시간에 유튜X와 SNS를 통해 전 세계에 퍼져나가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김현우와 무신의 영상이 퍼져나간 것도 50명의 헌터가 학살되었다는 것을 굳이 과장시키지 않기 위해 협회에서 손을 쓴 것이었고, 그 언플은 확실하게 먹혀 들어갔다.
사람들은 김현우와 무신의 영상을 보며 열광했으니까.
물론 대부분 영상에 김현우와 무신이 보이는 영상은 극도로 적었다.
그저 카메라에 찍힌 영상들은 대부분이 무엇인가가 터지고, 부서지는 영상뿐.
하지만 그런데도 네티즌들은 그 영상만으로도 뜨겁게 달궈졌다.
분명 김현우와 무신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후반에 가서 보여주는 김현우와 무신의 모습은 '엄청나다'라는 표현을 아낄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검붉은 전류를 머금고 있는 김현우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천지에 붉은 번개가 내리치고.
악마와도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무신이 움직일 때마다 검은 마력이 폭류한다.
마치 인간들이 아닌, 신들의 싸움을 찍어놓은 것 같은 영상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전 세계가 TOP 50으로 인해 뜨거운 불판위에 올려놓은 듯 뜨겁게 달궈지고 있을 때-
"스마트폰 좀 튼튼한 거 없냐?"
"좀 튼튼한 게 아니라 형이 가지고 있으면 합금으로 만들어도 찌부러질 것 같은데요?"
김현우는 국제 헌터 협회가 관리하는 VIP 병실에 누워 김시현에게 스마트폰을 받아들고 있었다.
"벌써 4대째네,"
김현우는 자신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켜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내 김시현의 뒤에 있던 이서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왔어?"
"어떻게 오긴 어떻게 와요, 순간이동 마법을 이용해서 왔죠. 몸은 괜찮아요?"
"넌 이게 괜찮아 보이냐?"
그의 말대로, 이불을 덮지 않고 병상에 누워 있는 김현우의 몸은 분명 치료 능력자에게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다친 부분이 많았다.
온몸에는 붉은 피멍들이 여기저기 보였고, 양손은 미묘하게 푸른 반점들이 돋아 있는 모습.
"……확실히 그 모습을 보면 그렇게 괜찮지 않아 보이기는 해도 그냥 예의상으로 물어본 거예요."
"굳이 물어볼 필요 없어, 네가 안 물어봐도 몸을 살짝 움직일 때마다 아프니까."
무신과 싸움에서 얻었던 상처들과 더해서, 김현우는 천마(天魔)의 무공을 따라 한 것에 대한 대가를 절찬리에 받는 중이었다.
'쯧, 아직도 몸 움직이기가 힘드네.'
분명 무신과의 싸움을 통해 김현우는 조금이나마 제대로 된 무공(武功)의 기본적인 원리에 대해서 깨우칠 수는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김현우가 무신을 따라 제대로 된 무공을 쓸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김현우가 천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무수한 시도를 해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혈도가 단련되어 있고 마력이 넘쳐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주화입마에 걸려 죽을 수 있는 상태에 빠져도 김현우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무신의 무공을 어떻게 쓸 수는 있었으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부작용.
그때의 김현우는 그것을 배웠다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배운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따라 한 것에 가까운 것.
물론 그 덕분에 김현우는 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되긴 했어도, 김현우가 사용하는 무공에는 결정적으로 부족한 점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세세한 부분들.
어느 혈도의 어떤 식의 마력이 어떻게 배분되어야 하는가부터, 어떤 혈도를 어떻게 해서 무슨 묘리를 사용해야 하는가까지.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이 김현우에게 새로운 걸림돌이 되었다.
당장에 '천마(天魔)'가 사용했던 뇌령신공을 사용했을 때도, 김현우는 분명 천마가 보였던 그때의 뇌령신공을 완벽하게 사용하긴 했다.
그래, 겉으로는.
그러나 그 안으로 김현우는 뇌령신공을 사용한 대가로 엄청난 마력 소비와 더불어, 그 단단했던 혈도가 다시 한번 망가져 버렸다.
'쯧,'
김현우는 움직일 때마다 천마와 싸울 때 느꼈던 끔찍한 고통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제대로 무공을 익히는 게 좋겠어.'
사실 지금까지만 해도 김현우는 등반자를 만나오며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딱히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허나 다른 등반자의 전투를 포함해 무신(武神)과의 전투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한순간, 그에게서 느꼈던 압도적인 기운, 질 수도 있겠다는 그 느낌은 아직도 김현우의 뇌리에 남아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결심했다.
다시 한번 제대로 된 수련을 하기로- 그리고-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그는 자신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는 '불완전한 악천의 원천'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이게, 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테지.'
***
넓은 공동.
흑백을 조화롭게 맞춰 놓은 타일이 깔린 그 공동의 한가운데, 무척이나 거대한 원탁이 있었다.
족히 50명 정도가 둘러앉아도 제대로 들어차지 않을 것 같은 원탁.
그 원탁에, 그가 앉아 있었다.
외모를 제대로 묘사할 수 없이, 검은 오오라를 뿜고 있는 그는, 여전하게도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원탁을 둘러보며 앉아 있었다.
침묵- 그리고 침묵.
그 침묵이 어느 정도 지속되었을 때, 형체가 보이지 않는 그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9계층은 아직도 버티고 있나?"
형체가 없는 이가 느긋한 말투로 입을 열자, 그의 뒤에 있던 남자는 서서히 나타났다.
마치 존재감을 지웠던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그는 그렇게 나타나 이전과 같은 자세로 남자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9계층에 숨어들었던 등반자도, 그리고 탄생하려던 '예비자'도 격퇴당했습니다."
남자의 말에 형체가 보이지 않는 자는 몇 번이고 흥미롭다는 듯 자신의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그 짧은 사이에 2명을 격퇴했나?"
"그렇습니다."
"대단하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거대한 원탁을 두들기며 빈 책상을 바라보았다.
준비된 수십 개의 의자.
그곳에 앉아 있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형체가 없는 자는 그 주변을 스윽 둘러보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
위기가 없다고-
"모든 생물은 위기가 없이는 진화하지 않지, 당장 계층인들만 봐도 그렇지 않나? 위기가 닥쳐오면 어떻게든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그렇게 위기에서 발버둥 치다가 살아남게 되면, 그 녀석은 점점 발전하는 거지."
"……."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를 알겠나?"
"…그가, 등반자들의 위기가 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니지. 정확히는 위기가 된다기보다는 될 수'도' 있다가 맞는 말이지. 9계층의 그가 상위 등반자를 만난 적이 있나?"
그의 물음에 남자는 대답했다.
"없습니다. 원래라면 '예비자'가 상위에 필적할 뻔했으나 '등반자'가 되기 전에 죽어버렸기에……."
"그래?"
"하지만, 아마 수호자가 상위 등반자를 만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남자의 단언에 그는 슥 고개를 돌려 고개를 숙인 남자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왜지?"
"구신좌(久神座)들이, 이제 8계층을 뚫고 있습니다."
"호,"
남자의 말에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버리며 소리를 내고는, 이내 재미있겠다는 듯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렇다면 정말 그렇겠군."
-9계층의 수호자는, 정말로 상위 등반자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겠어.
그는 조용히 독백했다.
# 102
102. 떡밥 회수(1)
3일 뒤.
"……몸은 괜찮은 거예요?"
"뭐, 이제 그럭저럭 움직일 수는 있지. 그보다…… 여기는 왜 이러냐?"
아브가 머무는 시스템 룸에 들어온 김현우는 묘하게 바뀌어 있는 주변을 보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분명 이전에는 넓은 방 하나 크기 정도였던 방은 이제는 이전보다도 훨씬 넓어져 있었다.
다만 김현우가 어색함을 느끼는 이유는 방은 분명 넓어졌는데 비해 가구는 예전과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벽과 딱딱 붙어 있지 않고 다들 널찍하게 떨어져서 위화감을 조성하는 가구들.
"가디언의 정보등급이 중위로 올라서 등급에 따라 시스템 룸이 상향조정 된 거예요."
아브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린 김현우는 곧바로 책상 위에 있는 붉은 버튼을 들어 올렸다.
딸깍-
김현우가 버튼을 누르자마자 김현우의 생각대로 깔끔하게 배치되기 시작하는 가구들.
깔끔하게 정리된 방을 보고 만족감을 느낀 김현우는 이내 자신의 앞에 배치되어 있는 소파에 앉았고, 아브도 그런 김현우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김현우는 아브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S등급 세계랭킹 1위인 무신이 사실은 예비자였다는 사실부터 시작해서.
그에게서 '악천의 정수'를 얻은 것까지.
김현우의 이야기를 들은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저도 TV랑 인터넷을 확인하면서 가디언이 무신이라는 사람이랑 싸웠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보 권한의 등급이 올라가서 당황했었거든요."
"그래?"
"네, 그도 그럴게 정보 권한 중위부터는 이제 웬만한 정보들은 전부 열람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 그러면 나를 탑에 가둔 놈도 알 수 있어?"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뇨, 아직 그건……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거기까지 갈려면 정보권한이 상위까지 올라가야 해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혀를 찼다.
사실 저번에도 그 정보를 듣기 위해서는 상위 이상의 정보권한이 있어야 한다고 한번 들었기에 그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막상 이렇게 들으니까 또 아쉽네.'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다 이내 그 아쉬움을 털어내고는 이내 주머니에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아무튼 그럼 이것 좀 봐봐."
"……그건, 천?"
아브는 김현우가 주머니에서 꺼내 올린 검은색의 띠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로그 보이지?"
"네, 아……! 이게 그 예비자가 남겼다는 '악천의 정수'라는 건가요?"
"맞아."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 아래에 보이지? '미궁석 게이지'라고."
김현우가 묻자 아브는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리더니 이내 아래쪽에 써져 있는 글을 발견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쓰여 있네요."
"이 게이지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잠시만요, 한번 찾아볼게요."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곧바로 대답하며 슬쩍 눈을 감고는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아브는 눈을 떴다.
"네, 방법에 대해서 정확히 나와 있는 건 아니지만, 관련된 단서를 찾기는 했어요."
"그래?"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이 정보 권한을 이용해 검색한 내용들을 김현우에게 전해주기 시작했고, 곧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미궁에 사는 몬스터들에게서 '미궁석'이라는 물건이 나올 거라 이거지?"
"네, 솔직히 저도 '미궁석'이 미궁에 있는 몬스터의 '마석'을 뜻하는 건지, 아니면 미궁 내에 있을 또 다른 무언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보 권한에서 검색된 것을 그대로 읽어서 추측해 보면-
"등반자들은 미궁을 통해 다음 계층으로 이동한다는 소리가 있으니 어쨌든 답은 '미궁' 안에 있을 것 같아요."
아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이내 악천의 정수를 자신의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고,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정보 권한이 중위로 올라갔는데 새로 생긴 스킬 같은 건 없어?"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뇨, 하나 있어요. 게다가 덤으로 다른 스킬도 모두 업그레이드될 거고요."
"그래?"
"우선 정보창을 열어보시겠어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보창을 띄웠다.
그와 함께 새롭게 떠오르는 로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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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현우 [9계층 가디언]
나이: 24
성별: 남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S
민첩: S+
내구: Ss
체력: S-
마력: A+
행운: B
SKILL -
정보 권한 [중위]
알리미
출입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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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올랐군.'
김현우는 이번에도 눈부신 능력치 상승을 거둔 정보창을 바라봤다.
분명 김현우가 무신과 싸울 때 들었던 것은 내구 등급이 올랐다는 소리뿐이었으나, 이번에도 딱히 알림창이 뜨지 않은 다른 능력치들은 내구와 함께 상승 되어 있었다.
체력부터 시작해서 마력까지.
거의 모든 등급이 한 단계씩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본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내려 아래쪽에 만들어져 있는 새로운 스킬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심리? 이게 새로운 스킬이야?"
"네."
"이건 뭐 하는 스킬인데?"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곧바로 답했다.
"심리라는 스킬은 하루에 두 번, 정보 권한을 확인할 수 있는 대상에 한에서 그 생각을 30초 동안 읽을 수 있어요."
"……그래?"
김현우는 정보창에 만들어져 있는 심리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좋은 건가?'
아니, 확실히 생각해 보면 스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하루에 두 번이라는 제한이 있기는 해도 상대의 생각을 30초 동안 읽을 수 있다는 건 전투에 있어서 절대적인 이점으로 자리하니까.
이미 날아올 공격을 피하기는 쉽지 않은가?
'다만…….'
김현우가 이 스킬을 미묘하게 보는 이유.
그것은 바로 아브가 말한 제한 사항 때문이었다.
심리라는 스킬은 '정보 권한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에 한해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다는 말은 곧, 등반자와의 전투에서 이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등반자들에게는 정보권한이 먹히지 않으니까.
'……뭐,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생각을 정리한 뒤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른 건?"
"나머지는 이제 기존 스킬에 대한 내용이에요. 우선-"
아브는 그렇게 말을 시작해 김현우에게 스킬의 업데이트 내용에 대해 전해주기 시작했고,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알리미는 이제부터 거의 완벽하게 등반자의 등장 시간을 예고할 수 있다는 거지? 위치까지."
"네."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아브.
'……애초에 이제야 제대로 작동하는 게 좀 어처구니없기는 하지만.'
뭐, 이제라도 제대로 작동하는 게 어딘가?
예전에는 시간만 알려주고 아무것도 안 알려줬었다.
그때보다는 낫겠지.
"그리고 정보권한은……."
"정보권한은 말 그대로예요, 이제 하위 등반자라면 정보 권한을 열람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건 또 나쁘지 않네."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하위 등반자라고 하더라도 정보 권한이 먹힌다는 것은 김현우가 이번에 얻은 스킬인 심리를 조금이나마 전투에 사용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소리니까.
"그럼 이제 알려줄 건 전부 끝?"
"네, 전부 끝났고, 이제부터는 또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개인적인 이야기?"
김현우는 우물쭈물하는 아브의 표정을 보더니 이내 떠올렸다는 듯 아! 하더니 말했다?
"플라이스테이션?"
"아뇨! 그거 아니거든요!"
"그거 아니야?"
"아니에요! 저 그렇게 놀기만 하는 거 아니거든요?"
맞다.
김현우가 오지 않는 그 시간 동안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아브는 게임에 열중했다.
어느 정도로 열중했냐고 하냐면 아브는 현재 플라이스테이션에서 제일 인기 있는 대전 게임의 랭킹 1위를 고고하게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게임에 열중했다.
김현우는 도대체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사적으로 자신이 놀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아브를 보고 그러려니 하며 어깨를 으쓱인 채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결국, 그 다른 일이 뭔데?"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슬쩍 고민하는 듯하며 말문을 텄고.
"이건 제가 이번에 정보 권한이 중위로 올라가고 난 뒤, 알아낸, 아니- 어떻게 보면 그냥 추리해 본 사실인데-"
김현우는 아브의 말을 경청했다.
***
[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스승님─]
"?"
"?"
국제 헌터 협회 외곽에 있는 병원.
김현우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미령의 위에, 마치 MMORPG의 대화창처럼 그녀의 머리위에 반투명하게 떠오르고 있는 대화창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할 말을 잃었다.
"스승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스승님이 어디 편찮으신가? 몸의 상태는? 위급한가? 의사가 제대로 고치지 못한 건가? 이 의사를 죽여 버려야 하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스승님의 표정이 안 좋아지고 있는데 아무래도 의사가 제대로 스승님을 치료하지 못한 것 같으니 스승님 몰래 의사를 죽여-]
"아니, 불편한 곳 하나도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라."
"네,"
[정말 괜찮은건가? 사실 몸이 아직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패도 길드 내에 전문 치료사는 있는가? 아티팩트는? 아무튼 스승님의 몸이 조금이라도 망가진다면 스승님의 몸에 손 댄 이들은 전부 내 손에 죽는-]
"……."
이번에 시스템 룸에서 정보 권한이 중위로 올라가며 새로 받은 스킬 '심리'.
김현우는 시스템 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앞에 있는 미령에게 그 스킬을 시험 삼아 사용해 봤고.
"제자야."
"예, 스승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는 인생을 너무 편하게 살려는 경향이 있구나."
김현우는 왜인지 봐서는 안 되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본 순간 굉장히 부담스러워지는 미령의 '안'을 들여다본 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역시 상태가 안 좋으신 게……."
"아니, 괜찮다 제자야."
'너 때문에 그런 거다.'
정확히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었으나, 김현우는 말을 아끼며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화제를 돌렸다.
"서연이랑 시현이는?"
"그 둘은 스승님이 퇴원한다는 소리를 듣고 아까 전 미리 마법진을 통해 돌아갔습니다."
"그래?"
"그보다 스승님, 괜찮으시겠습니까? 현재 1층에는 스승님을 불편하게 하려는 머저리들이 모여 있습니다."
"……기자들?"
"예. 말씀만 해주신다면 제가 녀석들을 전부 치우도록 하겠-"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다."
김현우는 미령의 말을 잘랐다.
어차피 기자들을 회피해 봤자 녀석들은 어떻게든 한 자라도 더 들으려고 김현우에게 달라붙을 것이었다.
'그럴 바에는 그냥 시원하게 기자회견 하고 마는 게 낫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병실 밖으로 빠져나오며 가면무사들이 미리 열어놓은 엘리베이터를 탔고, 곧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가 다시 열렸을 때.
"김현우 헌터! 반갑습니다! AAC의 존 마이클이라고 합니다!"
"김현우 헌터! 헌터 사이클의 티미 렉스라고 합니다!"
"이번 일에 대해 제대로 한 말씀 듣고 싶습니다!"
김현우는 몰려드는 기자를 볼 수 있었다.
순식간에 몰려드는 기자들.
김현우는 엘리베이터로 몰려드는 기자들을 향해 진정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지만, 기자들은 오히려 그런 김현우의 손짓을 잘못 이해했는지 마이크를 들이밀었고-
"다 아가리좀 해라 씨발! 좀 나가자고!!"
김현우는 자신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어진 마이크에 크게 소리쳤다.
# 103
103. 떡밥 회수(2)
김현우의 외침에 엘리베이터로 몰려들던 기자들이 마이크를 쥔 채로 멈추었다.
기자들이 멍한 얼굴로 김현우를 바라보았으나, 오히려 김현우는 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기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들을 밀치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툭-
자신의 어깨를 툭 밀어내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 모습에 AAC의 기자 존 마이클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있는 김현우와 그의 제자를 바라봤다.
S등급 세계랭킹 5위- 아니, 이번 학살극으로 인해 4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미령을 보고는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김현우의 인터뷰 매너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인터뷰 매너는 한국 기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해외로까지 많이 뻗어 나갔으니까.
그 이외에도 김현우의 인터뷰를 알 수 있는 영상들이 유튜X나 다른 영상 사이트에는 많이 올라와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아 좀 비키라고! 엘리베이터에서 좀 나가자니까?"
막무가내로 다른 기자들을 밀치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빠져나오는 김현우를 보며 존은 인상을 찌푸렸다.
헌터들은 기본적으로 안하무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긴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인터뷰에서까지 그 인상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전 S등급 세계랭킹 3위인 탱크처럼 이미 공공연하게 소문이 퍼져 있지 않는 이상, 헌터들은 기본적으로 이미지 관리를 하기에 기자들을 상대할 때는 보통 예의 있는 척을 하게 마련이었다.
"김현우 헌터! 이번 무신(武神)과의 전투에서 보여주었던 그 모습은 대체 무엇입-"
"길 막지 말라고!"
그런데 존 마이클 앞에 보인 김현우의 모습에는 그런 가식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딱 보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모습에 존은 허, 하고 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막 나가는군.'
존 마이클 인상이 찌푸려짐과 동시에 김현우는 이미 엘리베이터를 감싸고 있는 기자들 사이를 빠져나와 좀 많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병원 대기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치 따라올 거면 따라오고 말 거면 말라는 듯 자기 갈 길을 가는 김현우의 모습에 존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이곳이 일반적인 기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기자들은 하나같이 전 세계 각국의 주요 방송사나 각국의 헌터 업계 속에 녹아 있는 주요 매거진의 기자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이곳에서 인터뷰를 요청하고 있는 기자들의 눈에 좋지 않게 보인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깎아 먹는 짓과 다름없었다.
'특히 나에게는 말이야.'
미국 AAC의 기자 존 마이클, 그는 방송사 내에서도 상당한 입지를 가지고 있는 기자로서, 상당히 많은 이슈와 특종을 물어 방송사 내에서도 주력으로 밀고 있는 현장 기자 중 한 명이었다.
'뭐, 딱 보니까 그런 건 전혀 신경 안 쓰는 타입인 것 같은데…….'
존은 조금 전 자신의 어깨를 밀치고 간 김현우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 한번 당해봐라.'
존은 그렇게 생각하며 우르르 몰려가는 기자들을 따라 김현우에게로 걸음을 옮겼고, 곧 모여 있는 기자들을 전부 수용할 수 있는 병원 대기실 쪽에서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자, 뭐……여기저기 여러 곳에서 오신 것 같은데, 제가 몸이 조금 안 좋으니 질문 몇 개 정도만 받고 좀 쉬러 가겠습니다."
인터뷰 방법은-
"여기는 또 다들 새로운 나라에서 오신 분들인 것 같으니 설명해 드리자면 그냥 제가 지목하고, 그분이 질문을 해주시면 됩니다."
일일이 질문을 받으려니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요.
김현우는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곧바로 손가락을 들어 올려 누군가를 지목하려 했고, 그 순간 존 마이클은 기다렸다는 듯 김현우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김현우 씨! 무신(武神)과의 전투 전에 연회장 내에서 일어났던 학살극 때 김현우 헌터가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헌터를 죽였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순간 조용했던 병원에 울러 펴지는 존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김현우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을 지목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상관없습니다. 질문에 답해주세요."
"……혹시 또라이세요?"
김현우의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튀어나온 욕설에 그는 걸렸다는 듯 입가를 씨익 올리며 대답했다.
"어이쿠, 그렇게 욕설을 내뱉으신 걸 보니 혹시 세간에 돌고 있는 제가 아는 소문이 사실인겁니까?"
존 스미스의 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존은 내심 김현우를 비웃으며 생각했다.
'이건 처음이지?'
김현우의 인터뷰 매너가 좋지 않지만, 딱히 그 이외에 나쁜 논란이 번진 적이 없는 이유.
그것은 바로 김현우가 논란이 생길 만한 질문 자체를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김현우는 자신이 대답하고 싶은 질문만 대답했고, 조금이라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은 단칼에 잘라냈다.
그렇기에 그의 인터뷰매너가 어느 정도 논란이 되기는 했으나, 그 이외에 다른 논란은 딱히 이슈가 되지 못하고 시들었다.
김현우가 지목해 질문권을 가지게 된 기자는 자극적인 질문보다도 김현우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만한 질문을 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식으로, 김현우가 질문을 커트하기 전에 질문한다면?
'김현우는 어떻게든 대답해야 한다.'
만약 김현우가 여기에서 이 질문을 그대로 넘겨 버리면 만약 자신이 질문했던 논란거리가 애초에 '없는'논란 이었다고 해도 불타오를 확률이 높았다.
어찌 됐든, 공식 석상에서 한 질문에 김현우는 발언하지 않은 것이니까.
'나를- 아니, 기자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존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고, 곧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존을 바라보더니-
"야,"
"왜 그러시죠?"
"꺼져."
"……?"
이내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존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인상을 찌푸렸지만, 김현우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안 들려? 꺼지라니까?"
"그, 그렇다면 지금 김현우 헌터는 제가 한 질문에 긍정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김현우의 축객령에 잠시 당황한 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다 뒤늦게 말했고 그 모습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좆까지 마세요."
"뭐, 뭐?"
"아, 좆까지 말라는 말은 제대로 번역이 안 되나 봐? 그럼 네 거시기나 까 잡수라고 말해줘야 하나?"
공식 선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욕을 내뱉는 김현우의 모습에 기자들은 술렁거린다.
'이 새끼 뭐야?'
그리고 존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예상과는 너무 다른 김현우의 모습에 당황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보통 기자들의 인터뷰 대상이 되는, 조금이라도 자신이 공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자신에게는 관계없는 민감한 주제가 나왔을 때는 소극적이게 될 수밖에 없었다.
존이 노린 것도 그것.
김현우가 아무리 안하무인으로 나온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히 그가 이미 사전에 질문을 차단해서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어느 나라를 가나 너 같은 놈들은 진짜 없을 수가 없구나? 세계 만국 공통이냐?"
아니었다.
존은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고, 김현우는 존을 바라본 채로 입을 열었다.
"뭐? 내가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였다는 논란이 있다고? 네가 그런 논란을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저는 어디까지 논란이 되고 있-"
"어디서 그런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응?"
"그건 인터넷-"
"인터넷 어디?"
김현우의 말에 존의 입이 턱 막혔다.
맞다.
아까 말했듯이 존의 질문은 말 그대로 김현우를 곤란하게 만드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딱히 어딘가에서 논란이 된 이슈를 들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런 존의 모습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어디서 뇌내망상으로 떠오른 생각을 논란이랍시고 가져오냐? 네가 기자야? 응?"
기레기 새끼가 아니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병원 가장자리에 앉아 존과 주변 기자들을 한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30초 줄 테니까, 30초 안에 저 기레기 안 내보내면 오늘 인터뷰는 없습니다."
인터뷰는 한국에서도 할 수 있으니 거기서 하도록 할게요. 여기 보니까 한국 사람도 꽤 있는 것 같은데, 나머지는 거기서도 얼굴 한번 보겠네요.
김현우의 말과 함께 술렁이는 기자들은 이내 시선을 돌려 존을 바라보았다.
한순간에 수많은 사람 중 1인에서, 김현우와 같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위치에 올라온 그.
다른 기자들은 벌써 이 일을 기사라도 되는 양 한쪽에서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었고, 저 멀리에서는 김현우가 느긋한 표정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이제 20초 남았다."
툭-
김현우의 말과 함께 누군가가 존의 등가를 밀었다.
"거, 사람들한테 피해 주지 말고 나갑시다."
그와 함께 들리는 목소리.
그제야 존은 자신이 이 짧은 시간 동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원망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내 자신을 비웃으며 초를 세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허나 그런 모습도 잠시, 이제 10초대로 넘어가기 시작한 김현우의 타이머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존을 노려봤고, 그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김현우는 그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고-
"……1호."
"예,"
미령은, 조용히 자신의 심복을 부르며 신경질적인 느낌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 남자, 존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
[김현우, 무신과의 전투 이후 부상회복 기간을 가진 1주일,]
[국제헌터협회 소속의 병원 내에서 진행된 인터뷰]
---
방송국 AAC, 김현우에게 도발을 가하다?
'TOP 50 학살극'이 끝나고 1주일, 학살극을 벌인 장본인인 무신(武神)을 상대한 헌터 김현우는 오늘 오후 1시, 외곽 병원에서 퇴원함과 동시에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허나 국제 헌터 협회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은 제대로 진행되기도 전에 막히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AAC의 메인기자 중 한 명인 '존 마이클'이 학살극을 멈춘 주범인 김현우에게 굉장히 무례한 질문을 했기 때문이었다.
'무신(武神)과의 전투 전에 연회장 내에서 일어났던 학살극 때 김현우 헌터가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헌터를 죽였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존이 김현우에게 한 질문 덕분에 기자회견장은 굉장히 정적에 휩싸였고 김현우는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정중하게' 그의 퇴장을 권했지만, 그가 말을 듣지 않고 안하무인으로 나오자 김현우는 그에게 욕설을 가했다.
(중략)
결국 존 마이클의 퇴장으로 병원에서 열린 기자회견은 매우 깔끔하게 끝났고, 김현우는 그날 현지시각 3시를 기준으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 하루, AAC 방송사 쪽에서는 자신들의 메인 기자인 '존 마이클'을 어제부 뉴스 메인 토픽에 출현시키지 않았다.
---
서울 길드 길드장실.
"……매우 정중하게?"
김시현은 자신의 눈앞에 쓰여 있는 기사를 보며 저도 모르게 앞에서 스마트폰을 하는 김현우를 바라봤다.
'……형을 보고 있으면 '매우 정중하게'라는 단어가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김현우를 바라보다 이내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아직 몸도 성하지 않은데 여기는 왜 왔어요?"
"왜기는 왜 와? 좀 해야 할 일 생겼으니까 왔지."
"해야 할 일?"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미궁에 내려가 봐야 할 것 같다."
"……미궁에요?"
김시현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 104
104. 떡밥 회수(3)
"갑자기 미궁에요?"
확실히 S등급 세계랭킹 내에 있는 헌터 중에서 미궁에 가지 않은 헌터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모든 헌터들은 일정 이상 올라가면 그 이상 올라가지 않는 능력치를 어떻게든 끌어올리기 위해 아티팩트를 필요로 하고, 그렇기에 대부분의 헌터들은 미궁에 들어간다.
'하지만 형은…….'
김시현은 김현우를 바라봤다.
검은색 추리닝에 검은색 삼선 슬리퍼.
아티팩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손에 낀 번역 반지뿐이고, 그 이외에 다른 아티팩트는 일절 끼지 않은, 그냥 입고 있는 옷만 보면 그냥 일반인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게다가 딱히 던전이나 등반자를 상대할 때라고 다른 장비를 끼지도 않고, 그냥 추리닝 차림 그대로 싸운다.
한마디로 아티팩트의 힘을 전혀 빌리지 않는다는 소리.
"아티팩트 얻으러 가는 거예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김시현이 물었으나, 김현우는 고개를 절레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다른 것 때문에. 잠깐 확인해 볼 게 있어서."
"……?"
김시현은 그런 김현우를 보며 슬쩍 의문을 띄웠지만 이내 김현우는 그런 김시현의 시선을 익숙하게 받으며 말했다.
"아무튼, 너 길드 애들이랑 미궁 탐험 간다고 했지?"
"뭐, 그렇죠?"
"그럼 그때 나도 따라가자."
"같이요?"
김시현의 되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원래는 그냥 미령이나 데리고 들어갔다 나오려고 했는데 미궁은 지도 없이 들어가면 밖으로 빠져나오는데 개고생한다며?"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그제야 아, 하고 탄성을 내뱉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죠."
미궁.
그것은 던전과 튜토리얼 탑이 생김과 동시에 전 세계에 만들어진 알 수 없는 구멍.
헌터들이 아티팩트를 위해 탐험을 하고 있음에도 세계에 있는 수백 개의 미궁 중 어느 곳도 탐색을 100% 완료한 곳이 없을 정도로 미궁은 정체불명의 공간이었다.
게다가 미궁의 내부는 굉장히 넓기에 아무리 강한 헌터라도 무작정 들어가면 미궁 내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미궁 내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곧 죽음과 다름없는 상황으로 직결된다.
헌터 개인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인간'이고, 인간은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에 반해 미궁은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고 봐도 될 정도로 몬스터가 득실거린다.
그나마 미궁의 초입에는 가벼운 몬스터들이 나오긴 한다.
그러나 미궁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오는 몬스터들은 점점 더 강해진다.
한마디로 어느 정도 깊게 들어간 미궁에서 길을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헌터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다는 소리였다.
"아무튼, 그럼 미궁 탐험을 할 때 형도 같이 낀다는 소리죠?"
"그렇지."
"그럼 다음 주에 있을 미궁탐험에 같이 가면 되겠네요, 일정은 3일짜리기는 한데 이번에는 미궁 초입을 도는 것보다는 깊은 곳을 좀 길게 둘러보려 했거든요."
김시현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미궁에서 무엇을 하던 김현우로서는 그저 미궁석 게이지를 채우기만 하면 될 뿐이니 우선 미궁에 들어가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럼 미궁건은 끝났고,"
김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시현은 물었나.
"점심 안 먹으려고요?"
"먹어야지."
"그럼 같이 먹어요."
"아니, 갈 데가 있어."
"이번에는 또 어디를 가요?"
김시현의 물음에 김현우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던전 받으러 가야지."
"아,"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근 무신이 학살극을 벌인 것 때문에 어쩌다 보니 김시현의 기억에 잊혔으나, 김현우와 아레스 길드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현우는 아레스 길드의 길드장에게 한국에 있는 독점 던전의 40%를 달라고 말했고, 아레스 길드장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것을 수락한 상태.
"오늘이 양도권 받는 날이에요?"
"아니, 정확히는 오늘 결착이 나겠지."
'원래라면 조금 더 일찍 만났어야 했는데.'
김현우는 아레스 길드에게 딜을 친 이후로 계속해서 바쁜 상태였던 터라 이제야 카워드와 만날 시간이 생긴 것이었다.
김현우는 마치 습관처럼 옆에 서 있는 미령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는 이내 김시현을 보며 말했다.
"그럼 아레스 길드장을 만나봐야 하니 먼저 가본다."
"알겠어요."
김현우의 말에 대답한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현우는 이내 미령과 함께 서울 길드를 나섰다.
"흠……."
"우읏……."
서울 길드를 나서 차에 탈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생각 없이 기묘한 목소리를 내는 미령을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김현우.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문득 홍조를 띠고 있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그 녀석도, 잘 있으려나?
김현우는 문득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은 선명하게 떠오르나, 이제는 아주 약간 희미해지기 시작한 탑에 있을 때의 기억.
은거기인 컨셉을 버리며 미령을 올려보낸 김현우는 그녀를 올려보내고 난 뒤, 또 한 명의 제자를 더 들였었다.
물론 그때 당시 이미 은거기인 컨셉을 거의 내던진 김현우로서는 딱히 제자를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미령을 제자로 들였다고 볼 수 있다면.
'그 녀석은…….'
정말 어쩌다보니, 그것도 본인이 원해서 녀석을 제자로 거두었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이미 그때의 김현우는 은거기인 컨셉을 이미 전부 벗어던졌던 터라 딱히 그녀에게 미령처럼 자신의 무공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현우는 그녀의 강해지고 싶다는 바람에 따라 나름대로 훈련을 시켜주기는 했었다.
'솔직히 도움이 됐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득 미령을 쓰다듬다 보니 떠오른 과거의 생각을 한차례 재생시키던 김현우는 이내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뭐, 잘살고 있겠지.'
김현우가 탑에서 빠져나온 지도 이제 꽤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딱히 그 녀석에 관한 소문이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뭐, 나름대로 잘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짧게 생각을 축약한 김현우는 이내 다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리며 스마트폰을 바라보다 문득 눈에 걸린 기사를 바라봤다.
[AAC 기자 존 마이클, 메인기자 자리에서 내려온 뒤 오늘 밤 12시, 갑작스레 실종.]
"……?"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그 기사를 클릭했고 곧 글과 함께 떠오르는 한 남자의 사진을 보고 곧 그가 얼마 전 자신과 말싸움을 벌였던 그 기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실종?'
김현우는 그림 아래에 있는 글을 읽어나가는 중, 그가 AAC 메인기자 자리를 박탈당한 지 불과 12시간 만에 갑작스레 모습을 감췄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김현우는 기사를 읽다 말고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던 미령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김현우의 손길을 받으며 기분이 좋다는 듯 미소 짓고 있느라 김현우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
그 모습에 결국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을 끝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스승님, 도착했습니다."
"그래?"
김현우는 몇 번 정도 들락거렸던 아레스 길드 한국지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김현우가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을 때.
"……."
아레스 길드 한국지부 꼭대기 층에 있는 지부장 집무실.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은 이번에 새로 임명한 한국지부장이 아닌, 아레스 길드의 길드장인 카워드였다.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김현우가 이제 막 아레스 길드의 정문을 통과했다는 길드원의 보고를 받은 뒤 김현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
그리고 그 상황에서 카워드는 괜스레 초조해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생각했다.
'독점 던전의 지분을 빼앗기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은 지켜야 한다.'
뜻밖의 도움으로 아레스 길드가 당장 내부분열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간 벌이.
카워드, 그가 이렇게 비틀거리고 있는 길드를 어떻게든 바로 잡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확장'보다는 '안전'에 힘을 쏟아부어야 할 때였다.
'게다가, 이제 메이슨의 도움은 바랄 수 없다고 보는 게 좋으니…….'
카워드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TOP50 학살극 전까지 자신을 도와주었던 그.
국제 헌터 협회에서 단 두 명뿐인 최고의원 중 한 명이자 거의 무소불위라고도 불릴 수 있는 권력을 휘두르던 남자 메이슨을 떠올렸다.
그러나 메이슨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말 그대로 옛날.
현재 그는 TOP50에서 일어났던 학살사건 덕분에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가 위기에 처한 이유.
그것은 바로 이번 학살극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전부 메이슨의 손을 들어주던 헌터였기 때문이었다.
S등급 세계랭킹 1위인 무신부터 시작해서, 인성이 안 좋기로 소문난 탱크와 6위를 차지하고 있는 키네시스까지.
이번 학살극을 벌인 헌터들은 전부 메이슨쪽에 있던 인물들이기에 메이슨은 정치적으로 굉장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물론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이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해도 메이슨은 아직 건재해 보이기는 했다.
'허나 이번 일로 리암, 그 양반이 국제 헌터 협회의 정권을 잡았으니.'
메이슨의 힘이 약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게 카워드가 대략 1주일 전에 일어난 학살극에 대해 생각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끼이익-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카워드는 뻔뻔한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않고 들어오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김현우는 앞에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그를 보며 피식 웃은 뒤, 이내 열려 있는 문을 제대로 닫지 않고 카워드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거만한 자세로 앉았다.
그 누가 보더라도 거만해 보이는 김현우의 모습.
허나 카워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김현우가 자리에 앉고, 미령이 그의 옆에 선 순간부터 시작된 짧은 침묵.
"그래서-"
그곳에서-
"대답을 듣고 싶은데?"
먼저 말문을 튼 것은 바로 김현우였다.
김현우는 건들건들한 자세로 다리를 툭툭 떨며 카워드를 도발하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으나 카워드는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
"우선…… 자네의 말대로 독점 던전을 넘길 의향은 있-"
"잠깐,"
-려 했으나, 김현우는 곧바로 카워드의 말을 막았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자 김현우는 미안하다는 듯 가볍게 손짓을 하고는 말했다.
"아, 내가 좀 길게 이야기하는 걸 싫어해서 말이야. 너도 그렇지? 나도 그래. 나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랑은 길게 얼굴 보고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거든."
김현우는 마치 카워드를 조롱하듯 낄낄 거리더니 이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러니까 우리 간단히 하자."
"그게 무슨……."
"말 그대로의 이야기야 너도 취미로 아레스 길드장 자리를 따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말 그대로 간단하게 하자는 거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검지와 중지를 펴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자, 이제부터 네 대답은 네, 아니면 아니오야. 알았지?"
"그게 무슨-!"
카워드는 김현우가 협상권을 빼앗아 가려는 것을 깨닫고 반발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으나-
"자, 네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부터 다시 한번 내가 제시했던 내용을 말해줄게, 알겠지?"
김현우는 카워드의 말을 끊고는.
"저번에도 말했지만 내 제안은 네가 아레스 길드의 한국 독점 던전 지분을 40% 내놓으면 일을 깨끗이 없던걸로 해주겠다는 제안이야. 그리고 너는-"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웃음을 지으며-
"'예', '아니오'로 대답만 하면 돼. 어때?-"
그에게 선택을 종용했다.
"-참 쉽지?"
# 105
105. 떡밥 회수(4)
"왜, 선택 못 하겠어?"
김현우의 말 뒤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는 아레스 한국지부의 집무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굳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카워드를 보며 피식 웃더니 이내 말을 이어나갔다.
"너무 욕심부리지 마~ 이 정도면 나름대로 합리적인 거라니까? 응?"
김현우의 말에도 불구하고 카워드는 그런 김현우를 죽일듯 노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김현우는 입가에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아니, 뭐가 그렇게 억울해? 누가 보면 내가 너를 괴롭히려고 작정하고 있는 줄 알겠다?"
'이 개새끼가……!!'
카워드는 저도 모르게 그리 입을 열고 싶었으나 그 말은 그저 카워드의 속 안에서만 맴돌 뿐 김현우에게 전달되지 못했고, 그는 억울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 그를 보며 말했다.
"아니, 왜 그렇게 억울해해? 시작은 전부 너희들이 해놓고."
"……."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아니잖아?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에도 말했고, 지금 또 말하는 거지만 모든 시작은 너희들이 한 거야. 가만히 있는 나한테 먼저 시비를 건 것도 너희들이고, 나를 죽이려 했던 것도 너네라고."
응?
김현우는 알아들었냐는 듯 의문형으로 말하다 이내 뭔가를 떠올린 듯 짧게 탄성을 내뱉더니 말했다.
"아, 빼앗아 본 적은 많은데 이런 식으로 빼앗겨 본 적은 없어서 그래?"
"……!"
김현우의 비아냥거리는 어조에 카워드의 눈에 치욕이 자리한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카워드는- 아니, 아레스 길드는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손해를 본 적은 없었다.
그 이유?
간단했다. 아레스 길드는 세계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거대한 대형 길드였으니까.
그들이 각 나라에 가지고 있는 독점 던전의 권한만 해도 수천 개가 넘어가고, 아레스 길드에서 당장 가용할 수 있는 헌터만 수만이 넘어간다.
그런 상황에서 아레스 길드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빼앗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아레스 길드는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을 정도로 강대한 길드였으니까.
허나-
"그럼 지금부터 경험해 보면 되겠네!"
"……."
카워드의 앞에 있는 김현우는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손해를 보지도 않았던 아레스 길드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었다.
물론 이 상황은 아레스 길드가, 정확히 말하면 '마튼 브란드'가 자초한 일이다.
굳이 건드려 봤자 좋을 것이 없을 김현우를 건든 것부터 시작해서 김현우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내어주고만 마튼 브란드의 실책.
'젠장……!'
게다가 '마튼 브란드'가 실종되며 길드 내외부적으로 자체적인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탓에 카워드는 선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무조건 손해를 봐야 할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당한다.
그렇기에 카워드는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독점 던전의 40%…….'
아레스 길드 한국지부는 다른 지부보다도 월등하게 성장해 있는 아레스 길드의 주요한 요지였다.
그러나 카워드의 그런 고민은 얼마 가지 않았다.
"!!"
[살려주세요……! 저, 전부 말한다니까요! 제발…… 제발 빛을 보게 해주세요!]
[제발! 제발! 아아아아악! 다시 가둬놓지 마요! 창고 안에 가두지 말아주세요…….]
[가……가면! 시……싫어! 싫다고!]
김현우는 자신의 스마트폰 녹음기에 녹음된 소리를 틀어놓다가 이내 버튼을 눌렀다.
끊기는 소리.
김현우는 스마트폰을 보며 슬쩍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스마트폰을 흔들며 말했다.
"너도 잘 아는 목소리지?"
'6번……!'
그는 마튼 브란드의 비밀 공방을 담당하고 있는 기사단 중 한 명이었다.
카워드가 생각을 이어나가기도 전에 김현우는 스마트폰을 흔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슬슬 너도 감이 오지? 그렇게 고민해 봤자 네가 빠져나갈 수 있는 선택지는 없어. 뭣하면 내가 친절하게 패널티까지 설명해 줄까?"
김현우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피식 웃었다.
"만약 네가 내 제안을 그대로 받아서 40%의 독점 던전 지분을 내놓는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 더 이상 아레스 길드와 나의 원한 관계는 없는 거야. 잘 알아들었어?"
너를 괴롭히던 일이 한 번에 끝난다니까?
김현우는 과장되게 양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근데 만약 네가 내 제안을 거절한다면…… 뭐, 내가 해야 할 일이 하도 많아서 자세하게 나열하지는 않을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김현우는 얼굴을 굳혔다.
"아레스 길드가 적어도 지금 같지는 못할 거야."
김현우의 중얼거림에 순간 카워드의 등에 소름이 돋았으나 김현우는 어느새 표정을 다시 바꾸어 웃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자, 그럼 다시 한번 물어볼게."
내 제안을 받고 이렇게 끝낼래 아니면-
"끝까지 한번 가볼래?"
김현우의 물음에, 카워드는 고개를 푹 떨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잘 생각했어."
김현우의 입가가 비틀어 올라갔다.
***
하남시에 지어진 거대한 장원의 중앙.
연무장의 바로 앞에 지어져 있는 거대한 궁전에서 미령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한 남자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하여, 이번 잔존세력을 모조리 없애는 것으로 더이상 중국에는 패도 길드와 적대하는 길드가 없습니다."
검은색 가면을 쓴 남자의 말에 미령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지금껏 미령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던 남자.
패도 길드의 부길드장이자 지금껏 중국에서 이런저런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던 남자 '천영'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미령을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미령님이 저리 화사하게 웃음을 지으신다니.'
현재 보여주고 있는 미령의 모습, 그것은 불과 몇 개월 전 천영이 기억하고 있던 미령의 모습과 상당한 괴리를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자신의 주인이자 패도 길드의 길드장인 그녀는 감정을 그다지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녀의 얼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항상 무표정이었으며, 가끔가다 보이는 지루한 표정만이 미령이 짓는 표정을 전부였다.
허나 지금을 보아라.
"후후……."
'……도대체 뭐지.'
천영은 불과 2개월 만에 만난 자신의 길드장이 진지하게 다른 사람으로 바뀐 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미령은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을 때는 웃음이 헤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풀어진 표정을 짓고 있는 미령.
그 모습에 천영은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지만, 다행히 가면을 쓰고 있던 터라 미령에게 표정을 들키지는 않았다.
그렇게 미령이 중앙 궁전에 앉아 있을 무렵.
천영의 뒤쪽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천영과 마찬가지로 검은색의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는 이내 그의 뒤에 부복했고, 미령은 갑작스레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도 당황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잘 처리했나?"
미령의 물음.
그녀의 말에 검은 가면을 쓴 남자는 가면을 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
천영의 뒤에 부복한 남자, 줄곧 미령의 뒤를 따라다니던 1호는 용서를 구했고, 그제야 웃고 있던 얼굴을 푼 미령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실패했나?"
"그렇습니다."
"왜?"
미령의 물음에 1호는 고개를 땅에 처박을 정도로 가깝게 대더니 입을 열었다.
"저희 측 무사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누군가가 먼저 그를 납치했습니다."
"……뭐?"
미령은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는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저희 측에서 그를 납치하기 위해 잠입했으나, 이미 그의 집에는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
가면 무사의 말에 미령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미령은 불과 며칠 전, 자신의 스승에게 싸가지 없이 입을 놀린 그를 개인적으로 '처벌'하기 위해 휘하의 가면 무사들을 보냈다.
미령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그를 보며 물었다.
"단서는?"
미령의 물음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품속에 있던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이건?"
1호가 그녀에게 건네준 것은 바로 어느 한 문양이었다.
삼각형의 형태에, 가운데에는 '눈'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문양.
미령이 대답을 구하는 표정으로 1호를 바라보자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그의 집에 찾아갔을 때, 다른 흔적은 없었지만, 그가 있었던 책상에 그런 문양이 찍혀 있었습니다."
"……찍혀 있었다고?"
"예, 마치-"
자신들이 그 남자를 납치하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말에 미령은 1호가 준 문양을 바라봤다.
상당히 기묘한 문양.
미령은 그것을 1호에게 던져주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너는 이 문양을 조사해 봐라."
그녀의 말에 1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고, 이내 한동안 침묵이 가득한 궁전 안에서 미령은 몸을 일으키며 천영을 바라봤다.
"너도 돌아가 보거라."
"예, 알겠습니다. 헌데……."
"?"
"혹시, 언제까지 자리를 비울 생각이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천영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미령은 그런 천영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중국에 가실 때 같이 가도록 하겠다."
그동안 관리는 맡기도록 하지.
"!!"
'나를…… 인정해 주셨다고?'
미령의 중얼거림에 천영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한 번도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표현을 한 적 없던 그녀.
천영이 처음 그녀를 동경해 패도 길드에 들어가 그녀의 눈에 띄어 직접 무(武)를 가르침 받았을 때도.
자신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 다른 이들을 누르고 그녀의 바로 아래인 부길드장의 자리에 올랐을 때도.
미령은 천영에게 전혀 그런 내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녀가 다른 이들에게 보여준 모습들은 하나뿐이었다.
'압도적인 강함'
그래, 그녀는 그것 이외에 그 어느 것도 다른 이들에게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인정해 주었다는 사실에 순간 멍한 기분을 느낀 천영은 이내 다시없을 만족감을 느끼며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천영이 소리 칠 때쯤, 천호동에 있는 저택.
"그래서,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냐?"
"뭐 사람이 일찍 퇴근할 때도 있는 거죠. 그보다 형은 미령이 만들어 준 장원으로 이사 안 가요?"
김시현의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키면, 지금은 여기가 더 편하거든."
김현우의 말에 그와 마찬가지로 어깨를 으쓱한 김시현은 이내 소파에 앉아 말했다.
"그래서, 아레스 길드랑 교섭은 어떻게 됐어요?"
"뭐, 잘됐지."
"진짜요?"
"이제 2주 뒤에 양도권 받으면 아레스 길드가 가지고 있던 독점 던전 중 40%는 이제 내 게 된다 이 말이지."
뭐, 그 전에 잠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지만.
김현우의 중얼거림에 김시현은 일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해결해야 할 일이요?"
"응, 뭐 대단한 건 아니야."
김현우는 그렇대 대답하며 아까 전, 아레스 길드의 한국지부에서 카워드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의 대답을 듣던 중, 혹시 그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지 않나 확인하기 위해 사용했던 '심리'.
그 스킬로 인해 김현우는 그가 내심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말풍선처럼 떠오르는 그의 생각 중에서, 아직도 김현우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고 있는 생각이 다시 한번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타격을 주기 위해 메이슨이 말했던 대로 그걸 던전에다 집어넣는 수밖에는…….'
그의 머릿속에 스쳐 가던 생각 중 하나.
그 한 가지의 생각으로 김현우는 그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거기에 덤으로 그가 꾸미는 일에 국제 헌터 협회의 최고의원인 '메이슨' 껴 있는 것까지.
하지만 그런 카워드의 생각을 들었음에도, 김현우는 딱히 그것에 관해 내색하지 않았다.
그 이유?
간단하다.
'아직 증거가 나한테 없으니까.'
증거가 생기면-
김현우는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생각했다.
'다 뒤졌다.'
# 106
106. 언령사(言?辭)(1)
강남에 있는 아레스 길드 한국지부의 꼭대기 층.
지부장의 집무실 안에는 한 명의 남자. 카워드가 자리에 앉아 조용히 고민에 빠져 있었다.
"……."
의자에 앉아 있는 그는 조용한 침묵 속에서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하듯 한순간도 움직이지 않은 채 두 눈만을 깜빡거렸고, 이내 곧 자신의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달그락.
카워드의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바로 자그마한 하얀색 포켓.
담배 한 갑 크기도 되어 보이지 않은 작은 포켓을 열자 그곳에는 검은색의 마정석이 담겨 있었다.
빛조차도 제대로 투과하지 못해 정말 시커멓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정도로 칙칙한 마정석들.
"후……."
그것은 바로 이전, 카워드가 메이슨을 만났을 때 그에게서 받을 수 있었던 마정석 조각이었다.
한동안 손에 포켓을 쥐고 있던 카워드는 이내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때 메이슨에게 들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이걸, 김현우에게 내줘야 하는 독점 던전에 심으라는 말씀입니까?'
'맞네, 말 그대로 자네는 이 검은 마정석 조각들을 김현우에게 내줘야 하는 독점 던전에 심기만 하면 되네. 그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지.'
'……이게 대체 뭐길래?'
기억 속의 카워드는 의심이 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고, 메이슨은 변함없는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기폭제지.'
'기폭제……말씀입니까?'
'그래, 자네 혹시……몬스터 웨이브라고 아나?'
'몬스터 웨이브라면…….'
몬스터 웨이브.
그것은 바로 튜토리얼 탑과 함께 던전이 등장했을 초기. 아직 사람들이 던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때 주로 나타났던 재앙 중 하나였다.
지금이야 길드들이 던전의 독점권을 주장하던 시기였으나 옛날, 처음 던전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는 그 던전을 관리할 헌터들이 무척이나 적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헌터들이 미처 공략하지 못하고 남는 잉여 던전들이 있었고.
만약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날 동안 던전 내부에 리젠되는 몬스터들을 청소하지 않을 경우, 던전 안의 몬스터가 밖으로 튀어나와 버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헌터가 이 세상에 생기고 나서 크레바스와 같이 생긴 재앙 중 하나인 '몬스터 웨이브'였다.
'알고는 있습니다만…….'
카워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억 속의 메이슨은 숨길 생각도 없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자네가 들고 있는 마정석은 바로 그 '몬스터 웨이브'를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마정석일세.'
"……."
메이슨의 마지막 말과 함께 카워드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그만두고 포켓 안에 담겨 있는 검은색의 마정석을 만지작거렸다.
'몬스터 웨이브를 만들어내는 마정석이라.'
메이슨은 카워드에게 이 검은 마정석의 출처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카워드도 마찬가지로 딱히 메이슨에게 이 검은 마정석의 출처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왜냐고?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니까.'
이 세상에는 알아서 좋은 것이 있고, 또 몰라서 좋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카워드는, 자신의 포켓에 놓여 있는 검은 마정석의 출처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오히려 출처를 알아서는 안 되는 종류의 물건이라고.
그렇기에 카워드는 그 검은 마정석의 출처는 듣지 못했지만 그 대신, 메이슨에게 달콤한 유혹들 들었다.
'……몬스터 웨이브를 인위적으로 일으킨 다음에 독점 던전을 다시 빼앗아 온다……라. 거기에다 덤으로 아레스 길드를 통제할 방법까지 알려준다고 했었지.'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만약 메이슨의 말대로 정말 이 검은 마정석이 '몬스터 웨이브'를 임의로 유발할 수 있는 거라면 김현우는 갑작스레 일어난 몬스터 웨이브에 대처하지 못할 것이었다.
아레스 길드가 김현우에게 넘겨줘야 할 던전의 숫자는 일백을 가볍게 넘어가니까.
만약 기적적으로 수많은 몬스터 웨이브에 대처한다고 하더라도, 크고 작은 사고까지는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곧 김현우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겠지.
아무리 수많은 업적으로 이름을 빛낸 영웅의 자리에 서 있는 김현우라고 해도.
오히려 그런 위치에 서 있는 김현우이기에 자그마한 흠 하나는 시민들이나 언론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고, 만약 그렇게만 되어 준다면-
'독점 던전을 다시 찾아오는 것은 쉬운 일이 된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면 독점 던전을 양도했던 아레스 길드에게도 화살이 돌아올 수 있겠지.
허나 그건 결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요점은 욕을 먹더라도 독점 던전을 되찾아 올 수 있냐 없냐니까.
게다가 만약 아레스 길드가 독점 던전을 다시 찾아오지 못하더라도 좋다.
그래도 최소한의 복수는 한 셈이니까.
'하지만…….'
그런데도 카워드가 지금까지 망설이고 있는 이유.
'너무 조건이…… 아니, 상황이 좋다.'
그것은 카워드가 본능적으로 받은 기묘한 느낌 때문이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일차적으로만 생각해 보면 카워드에게는 전혀 손해가 될 것이 없는 것들이었다.
김현우를 끌어내리고, 독점 던전을 되찾고, 거기에 덤으로 메이슨에게 아레스 길드를 통제할 방법까지도 들을 수 있게 된다.
겉보기에는 정말로 먹음직스러운 상황.
그러나 그렇게 먹음직스러운 상황 뒤를 좀 더 깊게 파보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는 어딘가 뒤틀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이 뒤틀려 있는가?
전부다.
우선 첫 번째로, 메이슨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그는 '마튼 브란드'와 친구였지만, 딱 거기까지의 관계였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메이슨이 자신에게 검은 마정석을 주었을 때, 그는 '김현우'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메이슨은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이었다.
아레스 길드를 통제할 방법을 알려준다는 것을 구실로.
그것은 카워드에게 무척이나 나쁠 것이 하나 없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제안이었으나 그렇기에 오히려 이상했다.
이상하다 못해 수상하기까지 했다.
카워드는 지금까지 아레스 길드의 부길드장 자리를 맡아오며 이 세상의 냉정함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으니까.
'달콤한 독사과.'
그렇기에 현재 카워드는 포켓 안에 놓여 있는 검은 마정석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카워드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 단순히 메이슨과 자신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1%의 가능성 때문에.
더 정확히는-
'이제 이것밖에는…….'
정말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수단이 이것밖에 남지 않았기에, 그는 고민하는 것이었다.
카워드가 그렇게 손안에 쥔 마정석을 바라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달칵-
카워드는 결국 선택을 내렸고.
"……."
그런 카워드의 모습을, 칠흑빛의 가면을 쓴 무사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의정부 민락동 근처에 있는 A급 던전 '역귀 하수도'.
아레스 길드가 독점 던전으로서 관리하는 던전의 안쪽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으스스하군."
그는 금방이라도 몬스터가 튀어나올 것 같은 던전 내부를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혼자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도…….'
그 남자 '오석현'에게는 이 던전 안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 구슬만 제대로 심고 나온다면, 다음 인사이동 때 무조건 인사부장의 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까……!'
그 이유는 바로 오늘, 김현우와의 협상을 위해 한국에 방문한 아레스 길드의 길드장인 카워드가 자신에게 했던 매력적인 제안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검은 마정석을 넘겨주며 그리 말했다.
이걸 아무도 모르게 던전 안쪽에 심고 돌아온다면 다음 인사부장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그 누가 들어도 매력적인 제안에 오석현은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 누가 봐도 뒤가 구린 일이라는 건 안다.'
이미 '관리부'에서 활동하던 그로서는 이런 구린 일을 하는 것은 그다지 감흥이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관리부에서 이것보다 더한 일들도 얼마든지 해봤으니까.
'도대체 이 구술이 뭔지, 또 어떤 이유로 이 구슬을 묻으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구슬'이 대체 무엇인지가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카워드의 제안을 성공적으로 수락해서 얻을 수 있는 '인사부장'의 자리.
'이건 기회야.'
흑선우의 라인을 타지 못해 변변찮은 자리 하나 없이 5년 동안을 관리부에서 버텨왔던 오석현 에게 이것은 '위험한 일'이 아닌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부장의 자리를 얻고, 아레스 길드장인 카워드의 라인을 탈 수 있는 기회.
"후……."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결의를 다진 뒤, 던전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크륵…… 크륵-
A급 던전 답게 하수도 내에는 구울과 각종 언데드들이 들끓었지만, 그는 자신의 고유스킬인 '은신'을 이용해 몬스터와는 전투를 치루지 않은 채 던전 안에 진입했다.
'흙에, 흙에 묻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카워드에게 들었던 말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받은 구슬은 무조건 어딘가 파묻을 수 있는 곳에 묻어야 한다는 카워드의 말.
그렇기에 그는 점점 깊은 던전까지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내-
'찾았다……!'
그는 구슬을 묻을만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오염된 폐수와 토양이 섞여 있는, 약간은 끈적거리는 토양이 있는 그곳에서 오석현은 슬쩍 발을 이용해 토양을 들어내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구슬을 묻을 수 있겠어.'
그는 곧바로 구슬을 손에 쥔 채 땅을 헤집기 시작했고-
"?"
그는 곧, 땅을 파고 있던 자신의 시야에 보이는 슬리퍼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바탕에, 하얀색 선이 그어져 있는 삼선 슬리퍼.
오석현의 시야가 그것을 바라봄과 함께-
"안녕?"
빡!
"끄악!"
오석현은 턱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오석현은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검은 구슬을 놓쳤고, 이내 급하게 시선을 돌려 놓친 구슬을 찾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야, 분명 내가 왜 인사했는데 인사를 안 해?"
기분 나쁘게.
"기, 김현우……!?"
오석현은 순간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김현우를 보며 저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그는 삼선 슬리퍼에 검은 추리닝을 입은 채, 한 손에는 그가 흘린 검은 구슬을 집은 채로 오석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순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으나-콰득!
"끄아아아악!!"
그는 순간 자신의 발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고, 김현우는 그의 앞에 앉아 신음을 흘리는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빠져나가려고 눈알 굴리는 게 너무 잘 보이는데 그러지 마라?"
이미 전부 다 알고 왔으니까.
"그, 그게 무슨."
그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김현우는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는 나한테 물어보면 안 되지, 네가 알고 있잖아? 내가 지금 무슨 일 때문에 여기에 있는지."
너도 대충 감이 오지?
김현우의 이죽거림에 그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기 시작한다.
본능적으로 떠오른 생각
'좆됐다.'
지금 이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난 건지 최소한의 인과관계도 파악 할 수 없었지만, 그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좆됐다는 걸.
그런 오석현의 표정을 제대로 캐치했는지 김현우는 여유롭게 말하며-
"자, 그럼 하나하나 전부 다 말해볼까? 카워드에게 뭘 들었는지부터 시작해서 어떤 지시를 받았는지까지. 만약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자신의 주머니에서 짱돌을 꺼내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정의봉(正義蜂) 2호의 참맛을 보여주지."
# 107
107. 언령사(言?辭)(2)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카워드는 오늘, 무척이나 피곤했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휴식을 취하기 위해 최소한의 명령만을 끝내두고 자신이 예약해 놓았던 5성급 호텔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예약을 잡아 놓은 5성급 호텔의 방 안에는-
"끅- 끄으윽."
"이야~ 좀 늦었네? 우리 6시간 만이지?"
"무-슨,"
김현우가 있었다.
정확히는, 김현우와 미령, 그리고 그 앞에는.
"사, 살려……주십쇼! 길드장님!"
그야말로 피떡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처참하게 박살 나 있는 남자, 오석현이 대리석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카워드는 정말 웃기게도, 피떡이 되어 있는 오석현과 같은 생각을 머리에 담았다.
'좆됐다'는 생각을.
카워드는 순식간에 눈알을 굴렸다.
그의 심장의 고동이 커지며 일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씨발 같은 길드라고 어떻게 하는 짓이 그렇게 똑같냐? 너희들은 단체로 세뇌 같은 것도 받냐?"
김현우의 욕설 한마디에, 카워드의 집중은 깨져 버리고 말았다.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김현우의 모습, 그리고 그런 뒤에 서 있는 미령.
그리고-
"……."
그 주변에 서 있는 가면무사들을 보며, 카워드는 저도 모르게 문고리를 놓고 뒷걸음질을 쳤으나-툭-
"!!"
"야, 이미 끝났다니까? 너 못 도망간다?"
이미 카워드의 뒤에는 가면 무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조금 전만 해도 카워드의 뒤에 따라붙어 있던 두 명의 보디가드를 별다른 소리 없이 제압한 듯 각각 한 손에는 보디가드의 머리를 부여잡은 채 카워드를 보고 있었다.
"……."
이어지는 침묵도 잠시.
툭-
꿀꺽-
카워드는 김현우의 오른손의 짱돌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 번 더 뒷걸음질을 쳤고-
"-!"
빠아아악!
"끄아아아악!"
김현우는 그와 함께 그의 머리통에 짱돌을 내리 꽂았다.
인간의 머리와 짱돌이 아닌, 마치 짱돌과 짱돌이 부딪힌 것 같은 격한 소리와 함께 그의 비명이 사방으로 터져나갔으나,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야, 살살 쳐서 안 죽으니까 괜히 오버하지 마라."
"끄악! 끄아아악!"
"……."
"끄아아아아악!!"
"야, 너 짱돌에 진짜 제대로 대가리가 깨지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여줘?"
"끄으윽…… 끄윽…… 끕……!"
김현우의 협박에 순식간에 입을 틀어막는 카워드를 보며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은 뒤 입을 열었다.
"야, 누가 보면 아주 내가 개쓰레기처럼 보이겠다."
"끄윽-!"
확실히 그냥 겉으로만 봤을 때, 이 상황은 김현우가 나쁜 놈처럼 보이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석현은 이미 피떡이 되어 있었고, 카워드도 이매 짱돌에 맞아 머리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으니까.
마치 도망치다가 사채업자에게 잡힌 것 같은 꼴을 하고 있는 카워드를 보며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말했지? 우리 그냥 편하게 끝내자고, 응?"
너도 동의하고 나도 동의했잖아?
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카워드의 얼굴을 마주보며 말했다.
"그런데 왜 계속 구질구질하게 약을 쳐? 응?"
김현우의 말에 카워드는 이를 악물면서도 눈알을 굴렸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김현우가 알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메이슨의 말에 따라 일을 벌이려 한다는 것을.
'어디서?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간 거야?'
그렇게 카워드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자 김현우는 짱돌을 들었다 받으며 말했다.
"왜, 이제는 도대체 내가 어떻게 알았나를 생각해보고 있냐? 응?"
"……."
"에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김현우를 보는 카워드의 모습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 새끼들은 자기들이 좆됐다는 걸 알았으면 우선 용서부터 빌어야지 어떻게 하나같이 반응이 똑같냐."
응?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짱돌을 말아 쥐자 카워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으나-
"마, 만약 지금 그걸로 나를 친다-"
"야, 진짜 그 이상은 말하지 마라 진짜 대가리를 쪼개 버리고 싶으니까."
김현우는 얼굴을 굳히며 카워드의 말을 끊었다.
"너희들은 진짜 만나고 또 만나도 어떻게 변화라는 게 없냐. 다들 아주 그냥 판박이야. 왜? 네가 어떻게든 목숨 부지하려고 협박하려는 거 모를 줄 알았어?"
어떻게 알았는지 알려줄까?
빡!!
"끄악!"
"네 길드 새끼들이 하나같이 그 방법 써먹더라, 병신아."
김현우는 카워드의 얼굴을 후려치고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 확실히 말해두는데 이제부터 나한테 예의를 기대하지 마."
애초에 네가 먼저 뒤통수를 몇 번이고 쳤는데, 나한테 예의를 기대하는 게 양아치 짓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카워드를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네가 알고 있는 거 전부 토해내라, 이 검은 구슬부터 시작해서 도대체 네가 무엇을 꾸미고 있었는지 전부 말이야."
만약 네가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김현우는 정의봉(正義蜂) 2호를 들어 올렸다.
"짱돌에 대가리가 깨진다는 게 진짜 어떤 건지 손수 보여주도록 하지."
물론 네 몸으로 말이야.
그런 김현우의 협박에 카워드는 두려움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이내 곧 그는 카워드에게 '진실'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
이제 막 오후를 맞이하고 있는 미국 워싱턴 외곽의 고급저택.
평수만 500평이 넘고, 집 안에 정원까지 딸려있는 이 저택은 바로 국제 헌터 협회의 최고의원 중 한명이자 최근 TOP50 학살극으로 인해 구설에 올라 있는 메이슨의 저택이었다.
그런 고급스러운 저택의 지하 공간에서-
"쯧."
메이슨은 자신의 앞에 있는 검은 마정석들을 보며 짧게 혀를 차고는 손에 쥐고 있던 양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이야.'
줄곧 입안으로 양주를 들이켜고 있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메이슨의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며칠 전까지, 그의 기분은 누가 말을 걸지도 못할 만큼 성나 있었다.
세간에서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터무니없는 오해' 때문에 메이슨의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은 상황 같다고 보도했으나, 그것은 잘못된 보도였다.
메이슨은 '터무니없는 오해' 따위로 기분이 나빠져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무신(武神)이 실패하다니……."
그가 기분이 나빴던 이유.
그것은 바로 '원래'는 성공했어야 할 TOP50 학살극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메이슨은 손에 들린 양주를 몇 번이고 흔들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맨 처음, 그가 '등반자'로서 9계층에 올라왔을 때, 그는 분명 이 계층도 얼마 가지 않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등반자인 '하수분(河水盆)'이 올라왔을 때 더욱더 확고해졌고, 화수분과 메이슨은 상당한 시간을 들여 이 세상을 차근차근 무너트릴 준비를 했다.
'하위' 등반자들은 가지고 있는 무력만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로 그 힘이 강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준비했다.
이 세상을 깔끔하게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리고 최근까지만 해도 그 준비는 무척이나 빠르고 차근차근 진행되어 이제 최종단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화수분은 원래의 계획대로 길드를 이용해 전 세계의 독점 던전들을 어느 정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메이슨은 자신의 '능력'을 통해 무신(武神)과 다른 몇몇 헌터들을 회유하고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멸망한 8계층에서 가져온 이 '기폭제'를 아레스 길드가 독점으로 먹어치웠던 던전 안에 집어넣고, 무신(武神)이 학살극을 일으킴과 동시에 터트리면 계획은 끝이었다.
그래.
그 계획이라면 메이슨은 분명 다음 계층으로 손쉽게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호자- 아니, 김현우가 나오기 전까지는.
"쯧……."
수호자가 나오자마자 '문'이 열렸고 기다렸다는 듯 등반자들이 올라왔지만, 그들은 모두 수호자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천마(天魔)도.'
'괴력난신(怪力亂神)도,'
심지어 자신과 함께 이 계층의 멸망을 준비하던 '하수분(河水盆)'까지.
모두가 수호자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
사실 그때만 해도 메이슨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하수분이 죽었다고 해도 그가 이뤄놓은 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고, 그가 부길드장에 올려놓은 남자는 사리 분별을 잘 하기는 해도 똑똑하지는 않았으니까.
한마디로 그를 잘 조종하기만 하면 됐다.
그래, 무신(武神)이 수호자에게 지기 전까지는.
'도대체 어떻게 무신이 수호자에게…….'
메이슨은 단 한 번도 무신(武神)이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했고, 그의 강함은 순수한 무력으로 따졌을 때 상위 등반자와도 주먹을 맞댈 수는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무신(武神)은 졌다.
수호자에게.
그리고 그 직관적인 사실은, 곧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이 이 계층에 올라와 쌓아 올렸던 몇 년간의 결실이 말이다.
그렇기에 메이슨은 분노했고, 비교적 최근까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 최근까지는.
'아직 방법은 있다.'
무신(武神)이 김현우에게 죽음을 맞이한 지 거의 1달이 다 되어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는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아니, 정확히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다른 길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것은 자신과 정보를 공유했던 하수분에게 조차 알리지 않았던 두 번째 플랜.
그가 생각한 두 번째 플랜은 바로 그가 '뒤'에 키워 놓은 '조직'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원래 그가 키워 놓았던 '조직'.
그것은 메이슨이 탑에 올라오고 나서 처음, 이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짜 놓았던 첫 번째 플랜의 핵심 세력이었다.
물론 메이슨이 무신(武神)이라는 인재를 보고 난 뒤에 그가 무신을 키우는 데 집중하며 '조직'은 그저 혹시 모를 두 번째 플랜이 되었었다.
그렇기에 메이슨은 딱히 몇 년 동안 '조직'을 관리하지 않았다.
어차피 약한 '절대다수'보다는 압도적으로 강한 '한 명'이 그에게는 더욱 관리하기도 쉬웠고, 더욱 효율도 좋았으니까.
그러나 무신(武神)이 죽고 그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팽개쳐 놓은 조직을 확인했을 때-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해지다니.'
조직은 커져 있었다.
그가 무신(武神)을 만난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번째 플랜으로만 남겨두었던 '조직'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말 '플랜'을 실행해도 될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메이슨은 환희했고, 곧바로 멈추었던 마무리 준비를 끝마쳤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좋아……."
바로 그의 저택 지하에, 쌓여 있는 수백, 수천 개는 되어 보이는 검은 구슬이 알려주고 있었다.
메이슨은 만족스러운 눈으로 그 구슬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좋냐?"
"좋……!?"
그는 어느새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다 기함을 토해냈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검은색의 추리닝을 입고, 발에는 삼선 슬리퍼를 신은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하 내부를 둘러보는 남자.
김현우가 있었다.
그는 한쪽 구석에 넘칠 정도로 만들어져 있는 검은 구슬을 보며 감탄하듯 허, 소리를 내고 이내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야, 어떻게 아브 걔는 다 자기 추론이라면서 생각을 내놓는데 어떻게 하나하나가 백발백중이냐."
"김현우……! 도대체 여기에는 어떻게!"
메이슨의 입에서 놀란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목소리.
그는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김현우는 그와 반대로 입가에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그건 알 거 없고, 너는 뒤질 준비나 해라."
그저 일방적인 통보를-
"쥐새끼야."
내렸다.
# 108
108. 언령사(言?辭)(3)
[확인 불가.]
정보창 대신 떠오르는 단순한 문장 하나로 김현우는 그가 '등반자'인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사실 그가 등반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심하고 있기는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무신(武神)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도 아브가 그를 지목했다.
그래, 아브가 시스템 룸에서 자신의 이야기와 중위가 된 정보 권한을 뒤져본 뒤, 그저 추론일 뿐이라며 들려준 이야기.
그것은 바로 하나의 의심론이었다.
어쩌면 메이슨이라는 남자가 '등반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론.
허나 그녀가 제시하는 의심론은 김현우가 듣기에도 굉장히 합당한 의심이었다.
김현우가 탑으로 나오기 전 일어난 세 번의 크레바스 사태.
하수분을 상대하고 나서 딱히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나, 크레바스 사태 중 '구멍'이 닫히지 않은 것은 두 개였다.
그것은 아직 남아 있는 등반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때 타이밍 좋게 터진 게 바로 무신(武神)의 학살극.
그러나 무신(武神)은 '등반자'가 아닌 '예비자'였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등반자도 아닌 그가 이 세계의 '진실'에 대해서 알고 있나?
'누군가가 무신에게 진실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래, 그것 말고는 답이 되지 않는다.
허나 거의 모든 증거가 메이슨이 등반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고, 아브의 의심론을 들었을 때도 김현우는 딱히 메이슨을 찾아가지 않았다.
이유?
별거 없다.
그냥 그때의 김현우는 아직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그의 몸은 가볍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되었으나, 아직 등반자를 상대할 정도까지는 회복되지 않았다.
하물며 무신(武神)을 동료로 삼고 있는 녀석이다보니 어중간한 녀석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기다렸다.
몸의 회복이 다 될 때까지.
그리고-
꽝!
"크학!"
메이슨의 순식간에 지하 천장을 뚫고 하늘로 날아간다.
포탄처럼 쏘아지는 신형.
김현우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팟!
"!"
사라진 김현우의 신형이 순간 메이슨의 뒤쪽에 나타난다.
그는 서둘러 김현우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몸을 뒤틀었지만.
"극청-유성각(極靑-流星脚)"
이미 김현우의 다리에서 펼쳐진 푸른색의 유성은 그의 등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또 한번 떨어져 내려 이번에는 잘 가꾸어진 정원에 떨어져 내리는 신형.
쿵!!!
주변의 식물과 화단이 모조리 박살 나며 메이슨의 신형이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힌다.
"이런 씨- 컥!"
땅바닥에 박힌 메이슨은 급하게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김현우는 그보다 빨랐다.
빡!
그의 손이 메이슨의 머리를 후려치고, 땅바닥에 처박힌 메이슨에게 더 이상 길게 끌 것 없이 최후의 공격을 준비한다.
"극-(極-)"
김현후의 온몸에 검붉은 마력이 소용돌이친다.
그 누가 보더라도 섬뜩해 보이는 마력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근처로 몰려 들어가고, 검붉은 마력이 등 뒤에 거대한 흑원을 만들어낸다.
그와 함께 펼쳐지는 검은 흑익(黑翼)김현우는 다리를 한계까지 당겼다.
그리고-
"[멈춰라!]"
"!"
김현우가 멈췄다.
말 그대로였다.
김현우의 몸은 마치 처음부터 멈춰 있었던 것 마냥 그 자리에서 멈춰 있었고, 땅바닥에 몸을 처박고 있던 메이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간편한 가운을 입고 있던 메이슨의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가운 대신 그의 몸에 걸쳐져 있는 것은 붉은색의 성해포였고, 그의 손에는 검붉은색의 책이 들려 있었다.
그 상태에서 그는 몇 번이고 고통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김현우를 향해 발을 휘둘렀다.
"이 개새끼!"
쿵!
조금 전까지 멈춰 있던 김현우의 몸이 바로 앞에 화단에 처박히고, 그는 어느새 노란색으로 빛나고 있는 눈으로 화단에 박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를 보았다.
잠시간의 침묵.
그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이제야 살겠다는 듯 자신의 몸을 툭툭 털더니 이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멍청한 녀석."
"뭐?"
"멍청하다고 했다, 설마 나에 대해 제대로 모르면서 이렇게 함부로 집 안에 침입하다니,"
메이슨의 말에 김현우는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 뒤지게 처맞던 놈이 아가리는 잘 터네?"
김현우의 욕설.
허나 메이슨은 그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넘겼다.
"지금도 네놈이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래 뭐…… 인정하지, 자네의 강함은 상상 이상일세."
자네는 1200년 동안 무(武)에 모든 것을 바친 괴물마저도 이겨 버렸으니.
"하지만,"
적어도 내가 만들어 놓은 이 권역 안에서, 자네는 나를 이길 수 없지.
메이슨의 비릿한 웃음과 함께 그의 손에 잡혀 있던 검붉은 마법서들이 펄럭이며 넘어가기 시작했고, 그의 주변으로- 아니, 정확히는 그의 저택 주변으로 붉은색의 장막이 쳐지기 시작했다.
김현우는 말없이 하늘을 덮는 붉은 장막을 바라보고 있었고, 메이슨은 이내 펄럭거리는 책을 허공에 띄워 놓은 채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네놈을 죽이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녀석에게 맡길 예정이었지만, 네가 내 권역 안에 들어온 이상 내가 직접 해도 상관없을 것 같군."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내 소개를 하지."
나는 세상의 목소리를 설파하는 자.
"'언령사(言令使[)'다."
그리고-
"네가 발을 들인 이곳은 바로 내가 이 계층에 올라오고 나서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나만의 '권역'이지."
자랑스럽다는 듯 말하는 메이슨의 모습에 김현우는 화단에 처박힌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대충 이해했는데 이 권역 안에 있을 때만 힘을 쓸 수 있다 그거지?"
"그래,"
"아주 자기 약점을 사방에다 뿌리고 다니는구나?"
김현우의 빈정거림에 그는 오히려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왜냐니? 지금 이렇게 자기 단점 다 말해주고 있잖아?"
"어차피 죽을 놈한테 베푸는 선행이라고 하지."
"붉은 장막 하나 쳤다고 자신감이 터지시네?"
김현우의 물음에 메이슨은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확실히, 그는 현재 다음 계층으로 올라가기가 훨씬 쉬워졌다고 내심 생각할 정도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메이슨은 자신의 권역 안에서 펼칠 수 있는 '언령'의 힘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제 발로 걸어와 주다니……!'
원래라면 김현우는 자신으로써는 절대 잡을 수 없는 수호자였다.
아니 애초에 그는 8계층까지 올라오며 마주쳤던 모든 수호자들을 자신의 무력보다는 지략으로 해결했다.
자신의 능력인 '언령'은 그 권역 안에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지만, 자신이 만든 '권역'이 아닌 밖에서는 그 힘이 무척이나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탑을 오르기보다는 무엇인가를 지키는 데에 더 활용성이 높은 능력 덕분에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한 적이 없었다.
아니 활용하지 못했다.
그의 권역은 아무리 크게 만들어 봤자 반경 200m를 넘지 못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이번 계층에서도 딱히 자신의 능력을 통하기보다는 다른 등반자들과의 협동과 지략으로 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나?"
김현우는 생각도 없이 자신의 권역 내로 들어왔다.
그래, 자신의 언령을 최강의 능력으로 만들어주는 '언령의 서'의 권역 안으로.
그렇기에, 메이슨은 뜻밖에 잘 풀리고 있는 일에 환희를 느꼈고-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됐고, 뭐 하나만 물어보자."
-메이슨은, 자신이 이겼다는 생각 덕분인지, 생각 이상으로 여유로워 보이는 김현우의 표정을 캐치하지 못했다.
김현우의 물음에 거만해진 메이슨이 대답했다.
"답해주도록 하지."
"너희들, 도대체 몇 명이나 있냐?"
"뭐?"
"말 그대로, 너 같은 '등반자'가 몇 명이나 있냐고."
김현우의 물음에 메이슨은 키득거리며 말했다.
"어차피 죽을 놈이 쓸데없는 것을 물어보는군."
"그래서, 말 안 해줄 거야?"
김현우의 말에 그는 답했다.
"아니, 말을 안 해준다기보다는 못 해준다고 보는 게 옳겠군."
"……뭐?"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대답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등반자'는 생겨나고 있으니까."
메이슨의 말에 김현우는 김이 샌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씨발 그건 결국 모른다는 소리잖아?"
김현우의 욕설에 메이슨의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김현우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럼 뭐 하나만 더 물어보자. 이게 마지막이다."
김현우의 물음에 메이슨은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
"마지막 자비다."
메이슨의 말에 김현우는 욕설을 하려다 결국에는 입을 닫은 채 질문했다.
"'재등반자'에 대해 뭔가 아는 거 있냐?"
김현우의 말에 메이슨은 입을 열었다.
"그들은 좌에서 떨어진 자들을 말한다. '권한'을 잃고 '좌'에서 밀려나, 다시 권한을 얻기 위해 탑을 오르는 이들이지. 대표적으로는…… 그래-"
구신좌(舊神座)들이 있군.
"……구신좌?"
김현우가 한 번 더 되묻자 메이슨은 그 이상 대답해 줄 생각은 없는지 이내 그를 바라보며 씩 하고 웃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이 새끼 정보 주는 거 존나 짜네."
메이슨의 말에 김현우는 욕설로 화답했으나,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곧 죽을 놈에게 이 정도의 자비는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의 물음에 김현우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뭐, 그래…… 어차피 죽을 놈한테 솔직히 이 정도의 자비는 사치지."
파직-
"!"
"그렇지?"
그리고, 메이슨은 거기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것은-
"무-슨!!"
김현우가 움직였다.
메이슨은 김현우가 움직이는 것을 보며 순간 자신의 권역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그리고 자신의 권역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도 확인했다.
"어……어떻게!!"
그렇기에- 메이슨은 저 말도 안 되는 현상을 보며 경악 어린 비명을 토할 수밖에 없었고, 김현우는 그를 보며 말했다.
"왜? 궁금해?"
김현우가 메이슨이 자신하는 권역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이유.
그것은 그가 바로 이 권역의 특징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메이슨의 '사기'를 파악했다.
그는 '언령'을 내뱉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마력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잖아?"
김현우의 말에 메이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메이슨의 권역에 숨겨진 비밀.
그것은 바로 마력이었다.
그의 권역 내에 있는 마력들은 정말 메이슨의 말뜻에 따라 동결되고 서기를 반복했다.
당장 지금만 해도-
"[멈춰라!]"
"[숨 쉬지 마라!]"
"[스스로 목을 졸라라]"
"[자해해라!]"
권역 안에 있는 말들은 다급해진 메이슨의 말에 따라 그의 몸에 달라붙었다.
억지로 그의 몸에 달라붙은 마력들은 신기하게도 메이슨의 뜻을 이루기 위해 김현우를 조종한다.
그의 발에 달라붙어 마력을 동결시킨다.
그의 코와 입에 달라붙어 김현우가 숨을 쉴 수 없도록 기관지를 막는다.
그의 왼손을 조종해 목으로 가져간다.
그의 오른손을 조종해 심장으로 가져간다.
하지만-
-파직!
"!!!"
그것은 김현우의 간단한 동작 하나로, 모조리 박살 났다.
"어떻게……!!"
간단히 오른손을 쳐내는 것만으로 자신의 온몸에 달라붙어 있는 붉은 마력을 쳐낸 김현우.
그것은 김현우가 무신(武神)과 싸울 때 터득한 것이었다.
무신(武神)이 수라 무화격을 막았을 때 썼던, 김현우는 이름조차 모르는 그 무공을 이용해, 자신의 혈도 전체로 마력을 돌려 자신의 몸에 침투하고 있는 마력들을 쳐냈다.
물론 무공이 완벽하지는 않은 탓에 김현우의 몸은 평소와는 다르게 느릿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나-
"자, 기술 들어간다."
김현우의 오른발에 검붉은 마력이 터져 나온다.
메이슨의 말에 따라 검붉은 마력을 막기 위해 붉은 마력들이 달려들지만, 김현우의 마력은 마치 붉은 마력을 연료로 삼는 듯 더더욱 그 세를 불려 나갔다.
그와 함께 김현우의 뒤에 만들어진 흑원과 흑익(黑翼).
그것으로-
"극(極)-"
쥐새끼를 죽이기에는-
"패왕(?王)-"
충분했다.
괴신격(怪神?).
콰아아아아아────!
검붉은 마력이 메이슨의 권역을 잡아먹었다.
# 109
109. 언령사(言令使)(4)
국제 헌터 협회 3층의 연합실.
그곳에는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연합실의 문 쪽에 앉아 있는 남자는 바로 김현우였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바로 국제 헌터 협회의 상위의원 중 한 명인 리암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지 않고 김현우의 뒤에 서 있는 미령을 한번 바라보곤 이내 김현우가 내어 준 스마트폰의 영상을 재생시켰다.
그리고-
[무신(武神)이 실패하다니…….]
익숙한 목소리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김현우의 뒤를 따라갔던 미령이-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수하인 가면 무사가 김현우의 명령을 받고 그와 함께 들어가 찍은 영상이었다.
영상 안에는 메이슨이 홀로 독백을 하는 것부터 나중에는 김현우의 힘에 대적하는 힘을 내보이는 것까지, 영상 자체는 이동이 많아 흔들림이 많았지만 상세하게 찍혀 있었다.
[나는 '언령사(言令使)'다.]
메이슨이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붉은 마력장이 전개되는 것으로 영상은 끝이 나 있었고, 한동안 영상 재생이 끝난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던 리암은 김현우를 바라봤다.
"이게, 진짜인가?"
김현우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리암은 멍하니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오늘 오후.
현재 미국은 난리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 이유는 바로 세간의 집중을 받고 있던 메이슨의 집에서 일어난 강렬한 마력 폭발 때문.
메이슨의 집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마력폭발이 몇 번이고 일어났고, 그로 인해 메이슨의 집은 마치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처럼 전소되었다.
갑작스레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에 기자들은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그 사건을 사방으로 퍼다 날랐고, 그로 인해 메이슨의 집에서 일어난 마력폭발사건은 현재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
현재 리암의 손에는, 이 국제 헌터 협회의 정권을 확실히 잡을 수 있는 영상이 손에 들어왔다.
사실 TOP50 학살극이 실패하고 무신(武神)이 죽었을 때부터 이미 승기는 기울어져 있었다.
다만, 메이슨이 구설에 올랐다고 해도 그를 밀어내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이슨에게는 아직 그를 지지하는 고위 정부 관계자들이 있으니까.
이미 메이슨과 정치적으로 엮여 있는 그들은 메이슨을 버리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정치적으로 엮여 있는 메이슨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신의 정치 생명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기에 그들은 오히려 메이슨이 '진짜'잘못을 했다고 해도 그를 감싸고돌 이들이었다.
허나 이 스마트폰에 들어 있는 영상은, 메이슨을 감싸고도는 이들을 완전히 침몰시킬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리암은 그 스마트폰을 꾹 쥐며 김현우를 바라봤다.
"자네가 이걸 내게 가져왔다는 것은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맞는가?"
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역시 말이 통해서 좋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곤 리암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뭐, 사실 내가 원하는 건 별거 아니고…… 그냥 그걸로 적당히 언론 좀 만져달라 그거죠."
"……언론을 만져달라고?"
"네, 물론 제가 해도 별 상관없는 일이기는 한데."
또 기자들이 옘병하는 걸 들어주고 싶지는 않아서요.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리를 꼬았다.
"한마디로 서로서로 좋은 걸 가져가자 이거죠. 우리 의원님은 메이슨이랑 그 세력들을 깔끔하게 쳐낼 수 있어서 좋고, 나는 쓸데없는 귀찮아지지 않아서 좋고."
김현우의 말에 리암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스마트폰의 영상을 공개하는 것은 김현우로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메이슨.
그는 현재 많은 구설수에 올라있긴 해도 아직 그의 옆에 붙어 있는 정치인들은 많다.
그렇기에 만약 김현우가 홀로 정보를 공개한다면 그들은 어떻게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김현우를 타깃으로 한 각종 음모와 찌라시 뉴스들을 뿌릴 것이다.
그로 인해 김현우가 여러 가지 구설수에 휘말리게 될 것은 자명한 일.
'그래, 만약 김현우 혼자 정보를 공개한다면 그렇게 되겠지.'
허나 최고의원 자리를 맡은 자신이 정보를 공개한다면?
'사정이 많이 달라진다.'
물론 자신이 타깃이 되어 조금 귀찮아지기는 하겠지만, 메이슨의 잔당들을 확실하게 협회 내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면 그 정도의 귀찮음은 당연히 감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리암은 메이슨 정도는 아니었으나, 학살극이 일어난 뒤 협회 내외로 지지세력들을 모았기에 김현우 보다도 확실히 여론전에서 화력을 낼 수 있었다.
한마디로 김현우의 제안은 서로에게 윈윈인 셈이었다.
리암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 안에 스마트폰을 집어넣더니 이내 김현우를 보며 물었다.
"그럼 언론을 어떻게 만져달라는 건지는 이따 더 자세히 들어 보는 것으로 하고, 혹시 뭐 하나만 물어도 되겠나?"
리암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고, 곧 리암은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결국 메이슨은 죽은 건가?"
리암이 스마트폰 영상에서 봤던 것은 그가 스스로를 메이슨이 아닌 '언령사'라고 부른 부분까지였다.
물론 김현우가 찾아 온 것으로 봐서 그가 어떻게 됐는지는 대충 유추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유추일 뿐.
리암은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는 김현우에게 대답을 구했고.
김현우는-
"아니, 아직 안 죽었죠."
리암에게 아직 메이슨이 살아 있음을 알렸다.
그 말에 리암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진다.
이어지는 질문.
"……자네와 메이슨은 싸운 게 아닌가?"
"그렇죠?"
"……그런데 죽지 않았다고?"
리암은 그렇게 질문하며 자신이 아까 전 확인했던 뉴스를 떠올렸다.
저택이 한 방에 사라질 정도로 거대한 마력폭발.
그런 마력폭발이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터졌기에 분명 리암은 메이슨이 김현우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고 내심 추론하고 있었다.
리암이 멍하니 있자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도망갔거든요."
"……도망가다니 그 마력폭발 속에서?"
"네."
김현우는 그리 대답하며 슬쩍 인상을 찌푸리고는 아까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메이슨에게 공격이 명중했을 때만 해도 김현우는 메이슨이 죽을 거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
갑작스레 메이슨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김현우의 공격을 맞고 있던 메이슨은 갑작스레 사라졌고 패왕괴신격은, 그의 저택을 날려 버렸다.
무엇 하나 없이 깨끗하게.
그리고 김현우는 그곳에서 메이슨을 찾지 못했다.
처음에는 마력폭발에 휘말려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그건 아니었다.
'……알리미가 뜨지 않았어.'
등반자가 죽으면 알림이 뜬다.
그를 죽였고, 정보권한이 누적된다는 알림이.
허나 메이슨의 집을 날려 버렸을 때 김현우의 눈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곳 메이슨이 김현우의 공격을 빠져나와 도망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쯧."
거기까지 생각을 도달시킨 김현우는 짧게 혀를 찼다.
'뭐, 녀석이 다시 등장해 봤자 사회적으로 귀찮아지는 일은 없겠지만.'
어차피 등반자는 찾아서 죽여야 하는 게 김현우의 입장이니만큼 또 그를 찾으러 돌아다닐 생각에 김현우는 머리가 아파지는 것 같았다.
'이참에 메이슨을 수배하는 것도 같이 말해놔야겠네.'
김현우는 이어지는 생각 속에서 비밀리에 메이슨을 수배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고-
"……응?"
"무슨 일인가?"
곧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알리미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로그를 바라봤다.
"뭐야……?"
***
멕시코시티 지하에 위치해 있는 거대한 공동.
"크으윽!"
그곳에는 메이슨이 있었다.
성해포는 이미 붉은 피로 물들어 있고, 입가에서는 끊임없이 피를 토해내고 있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메이슨'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다……다행이다.'
메이슨은 달라진 주변 풍경을 보며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비틀거리듯 주저앉았다.
메이슨이 김현우의 공격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그의 언령에 있었다.
메이슨의 능력은 자신의 권역 내에 있는 마력을 자기 뜻대로 다루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김현우의 공격이 닿기 전, 그에게 능력을 사용한 것이 아닌 자신에게 능력을 사용했다.
'……텔레포트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죽은 목숨이었다.'
그는 김현우의 다리가 자신의 몸에 닿기 전, 스스로의 몸을 텔레포트시켜 그 상황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쿨럭."
'그 덕분에 몸은 완전히 망가졌지만-'
제대로 된 마법진도 없이 그저 순수한 언령에만 유지한 터라 내부적으로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메이슨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우선은 살았으니 됐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거대한 중세풍의 성 내부의 모습.
그가 있는 곳은 틀림없는 지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지하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 공간은 넓고 거대했다.
메이슨의 양옆에는 기다렸다는 듯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거대한 공동의 앞에는 거대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어찌 보면 장엄하다고 느껴질 것 같은 그곳을 보며 메이슨은 미소를 지었다.
'이 조직만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가 아주 예전, 두 번째 플랜을 가정하고 만들어 놓은 '조직'.
물론 메이슨은 이 조직을 사용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은 터라 그저 조직을 만들어만 놓고 거의 관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관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은 거대해졌다.
그냥 거대해진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 멕시코 지하에 만들어져 있는 조직 '일루미션'은 멕시코 전역을 넘어, 유럽의 암흑가를 전부 지배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만큼 거대한 흑막조직이 되어 있었다.
메이슨 본인조차도 이 조직을 확인하러 오고 나서야 알았을 정도로, 그들 철저하게 음지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오셨습니까?"
피를 흘리며 주저앉아 있는 메이슨의 앞으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정장을 입고 있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온몸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운 외투를 입은 그녀.
그녀는 언뜻 날갯죽지까지 내려오는 머리가 아니었다면 남자로 착각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빈틈없이 가리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어깨에는-달그락.
누가 보기에도 낡아 보이는 나무 가면이 달려 있었다.
그런 그녀의 등장에 양옆에 도열해 있던 정장을 입은 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였고.
그녀는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지우지 않고 메이슨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좋지 않아 보이시는군요."
그녀의 물음에 메이슨은 힘겨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일이 좀 있었네,"
"일이라면……?"
"김현우, 그가 방해로군."
메이슨의 입에서 나온 말.
그의 말에 순간 그녀는 눈을 슬쩍 크게 뜨는 듯하더니, 이내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호오, 그렇습니까?"
"그래, 그 덕분에 우리가 '암약'해야 하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다네."
"그것, 참 유감이군요."
그녀의 유감.
허나 메이슨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걱정하지 말게, 내 '오른팔'인 자네 덕분에 조직이 이 정도까지 세를 키웠으니 조금만 더 있으면 이 세계를 손에 넣는 것도 문제는 아니지."
그와 함께 메이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번을 봐도 웅장한 내부.
그렇게 메이슨이 내부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니, 그게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
-푹
"……커-억?"
그는 자신의 심장을 뚫고 나온 한 자루의 검을 보며 저도 모르게 피를 토해냈다.
그와 함께 메이슨의 고개가 돌아가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을 때-
"내가 유감을 표한 건-"
그녀는-
"멍청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네게-"
비틀린 웃음을-
"유감을 표시한 거야."
-짓고 있었다.
# 110
110. 미궁에 좀 가보자(1)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해진 공동.
"커헉!"
메이슨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그의 혈색이 빠르게 창백해진다.
털썩-
힘들게 일으켰던 메이슨의 몸이 다시금 주저앉고, 메이슨의 눈가에 급격하게 생명의 빛이 꺼져나간다.
허나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메이슨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도열해 있는 정장을 입은 이들은 메이슨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저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메이슨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은 그녀는 비틀린 웃음을 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슨은 그런 그녀를 올려다봤다.
의문, 배신감, 분노,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들이 꺼져가는 메이슨의 눈빛에서 흘러나왔지만 그녀는 그런 아랑곳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봐?"
"네가……네가 어떻게……!"
메이슨의 말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내가 뭘?"
"네가 어떻게 배신을……!"
피를 토하며 입을 여는 메이슨.
허나 그녀는 여전히 비틀린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내가? 배신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라고?"
"저기 말이야, 배신이라는 단어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애초에 배신이라는 건 너랑 내가 한 배를 타고 있을 때 성립하는 거 아닌가?"
그녀의 노골적인 비아냥에 메이슨의 눈이 붉게 충혈된다.
그 누가 봐도 지독한 분노가 담겨 있는 눈빛.
허나 그 눈빛을 마주 보고도 그녀는 오히려 안쓰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뭐, 사실은 이렇게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어, 그래 조금 전까지는 말이야. 그래도 내가 도움 받은 게 있잖아?"
뭐, 그렇다고 해봤자 극히 초반에 자금유통을 받은 것 빼고는 전부 나 혼자서 해온 일이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숨을 헐떡이고 있는 그를 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무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점점 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가관이네? 양심은 있는 거야?"
그녀는 슬쩍 표정을 바꿔 메이슨을 혐오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주저앉아 있는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끅-"
"지금 네 눈앞에 보이는 조직은 내가 다 만들어 놓은 건데…… 네가 내 '오른팔'? 장난쳐?"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잇는 그녀.
"내가 고작 너 같은 놈한테 바치려고 이 조직, '일루미티'를 여기까지 키운 줄 알아?"
아니, 아니지.
그녀는 부정과 함께 칼을 밀어 넣었고-푸드득-
"크-학!"
메이슨의 입가에서는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검은색의 대리석을 더럽히는 검은 피들.
"만약 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고 있던 거야. 그도 그럴게 '일루미티'를 가질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그녀의 말과 함께 메이슨의 눈가가 커졌다.
"크학-그게……대체……무슨……!"
피를 토해내며 말을 내뱉는 메이슨.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 그대로야, '일루미티'의 '보스'를 맡을 사람은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어. 아니, 애초에 이 조직 자체가-"
그 사람 때문에 만든 조직인걸?
그녀의 말에 메이슨은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입가를 크게 열었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나오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크-학!"
그곳에서 나오는 것은 이미 죽어버린 검은 피.
끈적끈적한 피가 메이슨의 입가를 타고 떨어지고, 그녀는 가만히 메이슨을 바라보다 떠올랐다는 듯 짧게 탄성을 내뱉고는 말했다.
"아, 그래도 가기 전에 네가 죽는 이유는 말해줘야겠지?"
"끄르륵……!"
"원래는 나도 죽일 생각은 없었어, 정말이라니까? 원래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푸화악!
"끄륵!"
칼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메이슨의 심장을 찌르고 있던 칼이 그의 심장을 완전히 반으로 쪼개버렸고, 메이슨의 눈이 크게 떠졌을 때, 그녀는 여태까지 짓고 있던 표정들이 거짓말이라는 듯 얼굴에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네가- 일루미티의 보스를, 아니-"
그저 담담하게-
"'사부님'을 해하려 하는데."
입을-
"내가 가만히 있어야겠어?"
열었다.
그 말과 함께 커졌던 메이슨의 눈가에 생명의 빛이 꺼져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녀는 곧 힘없이 축 늘어지는 메이슨의 모습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리해."
그녀의 입가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마치 석상 마냥 가만히 서 있던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녀가 몸을 돌리자마자 정갈한 정장을 입은 남자는 그녀의 뒤에 따라붙었다.
"보스."
"보고해."
"오늘 5시경, 메이슨의 저택에서 일어난 마력의 색을 보고 몇몇 기자들이 '그분'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를 기재하는 게 포착되었습니다."
남자의 말에 그녀는 답했다.
"로든."
"예."
"내가 저번에 뭐라고 했지?"
"……."
남자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슬쩍 시선을 돌려 뒤에 따라붙은 남자를 바라보고는-
"사부님을 조금이라도 까 내리려는 녀석들이 보이면, 모조리 입을 닫게 해."
담담히-
"말을 안 듣는다면 죽여서라도 말이야."
명령을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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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은신해 있던 등반자를 찾아 처치했습니다!
위치: 멕시코시티
[등반자 '언령사' '그란트'를 잡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정보 권한의 실적이 누적됩니다!]
[현재 정보권한은 중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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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없어요. 알리미가 이렇게 뜬 거라면 등반자는 죽은 게 맞아요."
시스템 룸.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진짜?"
"진짜요. 게다가 확실히 등반자가 죽어서 정보 권한의 누적치도 올라가 있는걸요?"
"……도대체 뭐지?"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어리둥절하며 알리미를 이용해 불러왔던 로그를 집어넣었다.
하루 전, 그가 리암을 만나 거래를 하고 있던 도중 갑작스레 떠오른 로그.
그것은 바로 자신이 놓쳤던 등반자인 메이슨이 죽었다는 로그였다.
'도대체 뭐지.'
김현우는 순간 머릿속에 여러 가지 가정을 해보았다.
'……공격을 제대로 회피하지 못하고 도망쳤나?'
그랬을 수도 있었다.
만약 메이슨이 자신의 공격을 회피하지 못하고 살짝이라도 맞고 나서 도망을 친 것이라면 어느 정도 이 상황이 납득이 가기도 했다.
허나 김현우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건 좀 이상한데…….'
만약 그가 도망친 뒤 곧바로 죽었다면, 이 가설도 상당히 믿을 만했으나 그는 김현우가 리암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죽었다.
한마디로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늦게 죽었다.
'게다가, 분명 그때 다리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어.'
게다가 거기에 하나 더.
김현우는 메이슨에게 기술을 먹일 때 그를 때렸다는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메이슨이 공격을 제대로 맞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설령 맞았다고 해도 극히 미미한 피해를 보았을 것이라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메이슨을 죽였나?'
그것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기는 했다.
……솔직히 '등반자'가 피해를 입고 도망쳤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걸려 죽는 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아무튼 가능성은 있기는 했다.
'……1%라도 가능성이기는 하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을 이어나가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다.'
메이슨의 죽음이 이해가 가지는 않았으나, 결국 요점은 결국 메이슨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찾아가서 죽일 판이었는데 혼자 뒤졌든 누가 죽였든 알게 뭐야.'
결론적으로 김현우는 아무 피해 없이 그 녀석을 잡았으니 그것으로 된 것 이었다.
"아브."
"네?"
"이제 숨어 있는 다른 등반자들은 없겠지?"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애초에 제가 말했듯 가디언이 나오기 전에 생긴 3개의 크레바스 중 닫히지 않은 크레바스는 2개뿐이고, 아마 제 생각이 맞다면."
이제 더 이상 암약하고 있는 등반자는 없을 거예요.
아브의 깔끔한 결론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려고요?"
"응, 이제 해야 할 일도 있거든."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아브는 그런 김현우를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기……."
"왜?"
"그럼 가기 전에 저 뭐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뭔데? 아,"
김현우는 슬쩍 시선을 돌려 TV 모니터에 연결 되어 있는 플라이스테이션을 바라봤다.
"게임 CD?"
그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거 말고……."
"그거 말고?"
김현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브는 김현우의 소매를 잡고 이내 플라이스테이션 옆에 있는 컴퓨터로 잡아끌더니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거요."
김현우가 아브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자-
"……VR기기?"
"이게 해보고 싶어요."
그곳에는 요즘 최신 유행중인 VR기기가 있었다.
김현우는 VR기기의 모습을 바라보고 이내 무엇인가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브의 눈빛을 본 뒤, 피식 웃으며 붉은 버튼을 눌렀다.
딸깍-
그렇게 아브가 원하던 VR기기를 만들어 준 김현우는 시스템 룸 밖으로 나왔고-
"오셨습니까."
"엉."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인 미령의 인사를 받은 뒤, 곧바로 저택 밖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다른 애들은?"
"미궁 쪽으로 가서 미리 준비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저택 밖으로 나가자마자 김현우를 기다리듯 멈춰 있는 차량에 탑승한 김현우와 미령.
곧 차량이 출발하고 미령은 입을 열었다.
"스승님."
"왜?"
"미궁에 들어가시는데 다른 이들은 따로 준비시키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미령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필요 없다. 너만으로도 충분해."
김현우가 별생각 없이 내던진 말에 미령은 아앗, 하는 소리와 함께 슬쩍 시선을 돌리며 미소를 지었고, 김현우는 그런 미령을 신경 쓰지 않고 스마트폰을 조작해 뉴스란에 들어갔다.
[메이슨, 그는 사실 '재앙'중 한 명이었다!]
[충격 공개! 무신(武神)의 학살극, 사실 메이슨과 관계가 있었다!?]
[무신(武神)과 메이슨은 사실 동맹관계였다!]
[메이슨! 김현우를 은연중 초대해 암살하려다 도망, 현재 수배 中-]
[메이슨과 친했던 미국 고위관계자T, '나는 그와 그 어떤 관계도 없다']
'일 열심히 하네.'
뉴스란에 떠오른 기사들을 보며 김현우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리암에게 언론을 만져달라고 부탁한 게 바로 어제였다.
한국 시간으로 따지면 12시간이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만에 리암은 착실하게 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는 김현우가 넘겨주었던 영상을 적당히 편집해 퍼트리고는 메이슨을 감싸기 위해 부리나케 모여든 고위 관계자들을 추가적으로 쳐내고 있었다.
뉴스는 메이슨 옹호 발언을 한 고위관계자와 메이슨의 범죄를 계속해서 터뜨리고 있었으니까.
김현우는 한동안 뉴스를 보다 이내 스마트폰을 끄며 생각하고는-
'이제 이 일은 더 이상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고.'
이내 자신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검은 천을 꺼내 들었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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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악천의 원천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없음
-정보 권한-
9계층에서 무신(武神)이라 불렸던 남자 '악천'은 자신을 가르친 첫 스승인 그가 향했다는 '위'를 향해 가고자 -권한부족-의 말을 따라 '등반자'가 되려한다.
그는 -권한부족-의 도움으로 아티팩트 속에 있는 여러 무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그들의 무공을 대성할 수 있었고, 그는 나중에 들어서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명칭인 '무신'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무(武)'를 얻을 수 있었다.
허나 그는 '등반자'가 되지는 못했기에 원천이 불안정해 그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등반자'들이 자연스레 계층을 건너오며 쌓는 '미궁'의 힘을 얻어야 한다.
미궁석 게이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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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김현우는 악천의 원천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111
111. 미궁에 좀 가보자(2)
'미궁'
의정부 가능동 외곽 쪽에 있는 거대한 동굴.
헌터들에게는 미궁(迷宮)이라고도 불리는 그곳의 10계층.
서울 길드와 아랑 길드, 그리고 고구려 길드는 각자의 팀을 짜 '미궁 탐험'을 위해 아직 개척되지 않은 심연 계층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이미 개척이 되어 있는 20계층까지는 어차피 탐색을 시작해 봤자 길드의 목적인 '아티팩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찾을 수 없는 게 아닌, 이미 먼저 계층을 탐색한 길드들이 전부 다 들고 나가버린 것이었지만.
그렇기에 그들은 아직 다른 길드의 손이 닿지 않은 21계층 너머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고-
"키에에에-크엑!!"
꽈직!
"뭐가 이렇게 많아?"
김현우는 그런 길드 연합의 앞에서, 끝을 모르고 달려드는 트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키에에엑!
동료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라는 게 없는 것처럼 달려오는 트롤.
콰드득!
김현우는 달려오는 트롤의 머리를 발로 차 머리통을 으깨 버린 뒤.
쾅!
이어 달려오는 트롤의 몸을 걷어차 몰려드는 트롤들을 제지했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에!!!!
동료의 몸에 맞아 통로에서 이리저리 얽힌 채 허우적거리는 트롤들을 보며 김현우는 짧게 혀를 찼다.
"진짜 더럽게 많네."
김현우가 트롤들이 허우적거리는 통로 너머로 동굴의 입구가 미어터질 정도로 밀어닥치는 트롤들을 보며 중얼거리자 그의 옆에 있던 미령이 입을 열었다.
"정리할까요?"
그녀의 짧은 물음.
"됐어."
김현우는 고개를 젓고는 슬슬 다시 몰려들 기미를 보이는 트롤들을 보며 자세를 잡고 사고를 가속했다.
순식간에 주변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그의 두에 있는 길드연합이 잔류하고 있는 트롤들과 싸우고 있는 소리도.
김현우의 옆에서 다가오는 트롤의 머리를 깨고 있는 미령의 움직임도.
모든 것이 느려진 그 짧은 사고 속에서 김현우는 입구를 가득 채우고 있는 트롤을 한 번에 말소시켜버리기 위한 기술을 떠올렸고-씨익.
그는 그 찰나의 시간에 트롤로 들어찬 이 공간을 깔끔하게 비워버릴 수 있을 만한 공격을 떠올렸다.
생각함과 동시에 김현우의 몸이 움직인다.
탓-!
날카로운 소음.
결코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김현우의 도약음.
하지만 그 짧은 도약은 김현우의 몸을 순식간에 허우적대고 있는 트롤들의 앞으로 도달시켜 주었고.
"흡-!"
그는 그 상태로 자세를 잡으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김현우가 사용하려는 기술은 바로 다리로 몰려드는 수만의 몬스터 대군을 막아내기 위해 사용했던 어느 한 영웅의 기술.
그는 영지로 가는 협곡의 다리에서, 자신의 영지민들 지키기 위해서 이 필사(必死)의 기술을 사용했다.
쿠그그그긍-
그것은 500년이라는 가문의 역사 속에서, 오로지 가문을 계승하는 공작에게만 내려오는 가문의 비전.
김현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마력이 그의 오른손을 감싸고, 마치 검과 같이 날카롭게 벼려지기 시작했다.
분명 검이 아닌 마력임에도 불구하고 기이할 정도의 예기를 흩뿌리는 마력.
트롤들은 김현우의 마력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허우적거리는 트롤을 밀어내고 김현우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Hell-"
이미-
"Diver-"
김현우의 오른 손에 만들어져 있는 검붉은 마력의 창날은 마주 달려오는 트롤들의 몸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콰지지지지직!!!
그가 쏘아 보낸 마력의 창날은, 마치 자신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듯, 트롤들의 몸을 관통하며 쏘아져 나갔다.
귓가에는 날카로운 절삭음이 들리고.
그 날카로운 절삭음 위로 트롤들의 괴성과 비명이 섞여 들려온다.
땅바닥으로 떨어진 트롤의 시체가 붉은 피를 토해내고.
마침내-
꽈아아앙-!
트롤들을 관통하며 나아가고 있던 검붉은 창날은, 던전의 벽에 막혀 그대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반으로 잘려 있는 트롤들의 시체를 사방으로 날려버릴 정도의 강려한 폭발과 동시에 일어난 흙먼지.
그 끝에 남아 있는 건.
"쯧."
입에 흙이 들어가 짧게 혀를 차는 김현우와, 그의 뒤에 쓰러져 있는 엄청난 수의 트롤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연합을 짜 김현우의 뒤를 따라오던 김시현과 이서연, 그리고 한석원은 혀를 내두르며 입을 열었다.
"진짜 대단하군."
한석원을 감탄에 이서연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주 대답했다.
"그러게요…… 진짜 항상 오빠가 저 정도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알고 있는데 보다보면 정말……."
"안 믿기지."
김시현의 말에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인 힘.
물론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 저 정도 숫자의 트롤을 잡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없었다.
그래, 김시현이든 이서연이든 한석원이든,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저 정도의 트롤을 잡을 수 수 있었다.
'그래도, 형처럼 저렇게 단시간에 잡을 수는 없겠지.'
그래, 그게 바로 김현우와 그들이 다른 이유였다.
그들은 그 정도의 트롤을 잡을 수는 있지만, 혼자 저 정도 숫자의 트롤을 잡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비할 것이었다.
거기에 덤으로 김현우처럼 저리 느긋한 표정을 보여주지도 못하겠지.
'진짜 아무리 봐도 말도 안 된다니까.'
그렇게 김시현이 김현우에 대한 감상을 또다시 내뱉고 있을 때-
[에라드래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번에는 또 뭐냐? 대박사건]
[집에가고싶어요: 이얔ㅋㅋㅋㅋㅋㅋㅋㅋ이거 실화냐? 김현우 이제 보니까 정육점 사장님이었자너~~~~~~~]
[양가야가고: 거의 뭐 프로 도축장인이죠? 트롤 들고 가기 힘드니까 상체 따로 하체 따로 분류한 거 봐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대박이자너~]
[인생을날로먹고싶다: 아 진짜 김현우 능력 어느 정도냐? 5계층부터 10계층까지 김현우가 혼자 보스 다 때려죽이면서 다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개쩐다.]
'대박! 대박!!'
박가문은 자신의 얼굴 앞에 보이는 수많은 채팅을 보며 간만에 입가가 찢어질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다.
최근 헌터 일이라고는 다른 이들의 '부산물 짐꾼'으로밖에 활동하지 않던 박가문.
그는 김현우가 미궁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김시현에게 부탁해 짐꾼으로서 같이 미궁을 내려 올 수 있게 되었고.
'초대박이다!'
박가문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의 실시간 시청자 수가 금세 21만 명을 돌파하고 그 위에 있는 엄청난 금액의 후원금을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물론 후원금의 8할은 고스란히 김현우의 통장으로 가게 되지만 박가문으로서는 남은 2할만 먹어도 무척이나 많은 돈을 먹는다.
게다가-
'구독자수도 다시 떡상한다!'
최근, 고인물에 대한 영상이 없었던 터라 떨어지기 시작했던 구독자수가 실시간으로 차오르고 있는 것을 보며 박가문은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 11계층부터는 인터넷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동영상을 촬영하는 것은 무리기에 순수하게 짐꾼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5계층부터 모든 몬스터를 자신의 손으로 전부 때려잡고 있었으니까.
그 덕분에 길드연합은 힘을 보전하며 올라갈 수 있었고, 박가문은 김현우의 영상을 찍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앙기모리: 아 솔직히 김현우도 이명 고인물이 아니라 무신(武神)칭호 붙여줄 때 되지 않았냐? 김현우가 무신 이겨 버렸자너ㅋㅋㅋ]
[로열패밀리: ㅋㅋㅋㅋㅋㅋㅋ 무신은 이미 쓰던 이름이니까 무신 말고 그냥 뇌신이 나을 것 같은데 ㅇㅈ? ㅇㅇㅈ.]
[비둘기: 꾸르구르륵 꾸륵 꾸르구르륵 꾸륵꾸르구르륵 꾸륵꾸르구르륵 꾸륵꾸르구르륵 꾸륵꾸르구르륵 꾸륵꾸르구르륵 꾸륵꾸르구르륵 꾸륵]
- 비둘기 님이 채팅방에서 강제 퇴장 당하셨습니다. -
[오롱이: ㅋㅋㅋ 관종 칼벤 ㄱㅇㄷ]
[카르톤9220: 아 솔직히 12층이면 방송 끝나는 거 진짜 ㅈㄴ 아쉽다.]
그 이외에 채팅방에서 쏟아져 내리는 수백 수천 개의 채팅을 보며 박가문이 흐뭇해하고 있는 와중, 김현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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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악천의 원천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없음
-정보 권한-
9계층에서 무신(武神)이라 불렸던 남자 '악천'은 자신을 가르친 첫 스승인 그가 향했다는 '위'를 향해 가고자 -권한부족-의 말을 따라 '등반자'가 되려 한다.
그는 -권한부족-의 도움으로 아티팩트 속에 있는 여러 무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그들의 무공을 대성할 수 있었고, 그는 나중에 들어서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명칭인 '무신'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무(武)'를 얻을 수 있었다.
허나 그는 '등반자'가 되지는 못했기에 원천이 불안정해 그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등반자'들이 자연스레 계층을 건너오며 쌓는 '미궁'의 힘을 얻어야 한다.
미궁석 게이지: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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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찼는데?"
꽤나 차오른 미궁석 게이지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맨 처음, 김현우는 이 미궁석 게이지를 어떻게 해야 채울 수 있나 상당히 고민했으나, 그 고민은 얼마 가지 않아서 해결되었다.
그 해결법은 바로 몬스터를 잡는 것.
김현우가 몬스터를 잡을 때마다 미궁석 게이지는 차오르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그 사실을 확인한 뒤부터 닥치는 대로 몬스터를 잡고 있었다.
그 결과.
'이거, 다 안 내려가고 조금만 더 있다가 다시 올라가도 되겠는데?'
김현우는 5일짜리 미궁 탐험에서 빠른 복귀각을 세워보고 있었다.
어차피 김현우의 목적은 이 미궁석 게이지를 전부 채우는 것이었으니까.
그는 은근슬쩍 고민에 빠졌다.
***
"후욱……후욱……."
아레스 길드 한국지부.
지부장실의 집무실에서, 카워드는 초췌한 표정으로 어지러운 책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끝에 위치에 있는 노트북에는 '메이슨'의 수배 관련 뉴스가 떠올라 있었고, 책상 위에는 아레스 길드가 독점으로 가지고 있는 던전 서류가 어지러져 있었다.
"젠장."
꽝! 우지지직!
나지막한 음성과 달리 카워드의 주먹은 그대로 책상을 내리치는 것으로 모자라 완전히 박살을 내버렸고, 그 때문에 책상 위에 있던 서류와 노트북이 박살 났으나.
"씨발……."
그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 전의 기억.
김현우가 자신이 묵던 호텔로 와 메이슨의 정보에 대해서 알아갔던 그때에 느꼈던 압도적인 무력감.
김현우가 사라지고 난 뒤, 그제야 그는 깨닫고 후회를 했다.
그에게 40%의 던전 지분을 내어주는 것이 최소한의 피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에게 애초에 덤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후회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그러나, 카워드는 알고 있었다.
지금 와서 깨닫고 후회해봤자 더 이상 되돌릴 방법은 없다는 것을.
메이슨을 죽인 김현우는 이제 자신에게 와 지금보다도 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것이었고, 그때부터 자신의 길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카워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딸깍-
카워드는 자신의 포켓 안에 남아 있던 검은 마정석을 보았다.
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겨두었던 5개의 검은 마정석.
'이렇게 됐으니…….'
카워드는-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겠다……!'
조용히 결심하며, 땅바닥에 흘러내린 서류 중 하나를 바라봤다.
아레스 길드가 독점하고 있었던 던전 중 하나인 S등급 던전, '지옥 사마귀'.
던전을 바라보고 있는 카워드의 입가에 비틀린 광기의 미소가 자리 잡았다.
# 112
112. 미궁에 좀 가보자(3)
의정부 미궁의 14계층.
"야, 나 올라간다."
"엥?"
이제 막 15계층을 향해 내려가고 있던 김시현은 갑작스레 입을 연 김현우의 말에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짓다 말했다.
"올라간다고요?"
"응."
김현우의 담담한 긍정에 옆에 있던 이서연도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니, 같이 내려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이서연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거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검은 천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마자 김현우의 앞에 떠오르는 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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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석 게이지: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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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김현우는 자신이 원래 미궁의 내려온 목적인 미궁석 게이지를 20계층에 내려가기도 전에 전부 채워버렸기에 미궁에서의 볼일이 끝난 셈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빨리 찰 줄은 몰랐는데.
김현우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악천의 원천을 보며 생각했다.
처음 미궁석 게이지가 차는 것을 봤을 때는 꼼짝없이 며칠 동안 미궁에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건만, 몬스터를 몰아 잡다 보니 하루 만에 게이지를 전부 채워버렸다.
물론 그것은 김현우가 미궁 안에 있는 몬스터를 혼자서 싹 쓸어버렸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아무튼, 나는 올라간다."
김현우의 머릿속에는 딱히 그 계산까지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게이지가 빨리 차서 편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사실 저희로서도 형 덕분에 아무런 피해 없이 와서 좋기는 좋았는데……형 올라갈 수 있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말했잖아요. 미궁 안은 너무 복잡해서 지도가 없으면 돌아다니기 힘들다고요."
물론 제가 여분으로 가지고 있는 지도가 있기는 한데-김시현은 슬쩍 시선을 움직여 김현우와 미령을 바라봤다.
"……둘이서 올라갈 수 있겠어요?"
아니, 지도는 볼 줄 알아요?
그의 물음에 김현우는 짧게 고민하다 슬쩍 시선을 돌려 미령을 바라봤다.
"제자야."
"예, 스승님……."
"……."
김현우의 부름에 누가 봐도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라는 느낌으로 고개를 숙이고 슬쩍슬쩍 눈치를 보는 미령.
……마치 강아지한테 '목욕하자' 라고 말하면 나오는 것 같은 반응을 똑같이 보여주고 있는 미령의 모습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아니다."
"예, 스승님."
왠지 굉장히 살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미령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김현우는 짧게 혀를 차며 미궁에 따라 내려가야 하나를 생각했고-
"제가 같이 올라갈까요? 제가 지도를 볼 줄 아는데."
그렇게 고민하던 중 슬쩍 입을 여는 박가문의 모습에 김현우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뭐, 딱히 상관없기는 한데……."
김시현은 슬쩍 허락을 구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박가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박가문 이외에도 짐꾼은 많으니까.
"그래도 지금 내려가면 일급은 오늘 걸로 끝이다?"
김시현의 말에 박가문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박가문의 입장에서는 김현우의 영상을 찍으러 오는 게 주목적이다 보니 일급은 받지 않아도 괜찮았다.
김현우는 김시현이 박가문에게 지도를 넘겨주는 것을 보며 몸을 돌려 올라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스승님,"
"응? 왜?"
김현우는 갑작스레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미령의 모습에 그녀에게 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아무래도-"
김현우는 흥미로운 사실을 들었다.
***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S등급 던전 '지옥 사마귀'.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는 멘티스들이 나오는 그곳은 S등급이 괜히 매겨진 것이 아니라는 듯 굉장히 어려운 던전 중 하나였다.
던전 안에는 사람을 한 대만 제대로 맞춰도 즉사시킬 수 있는 벌레들이 숲 곳곳에 퍼져 있었고, '지옥 사마귀'의 메인 몬스터라고 할 수 있는 멘티스는 굉장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외피는 굉장히 단단한 장갑과 같아서 엔간한 공격으로는 제대로 뚫리지도 않았고, 반대로 공격력은 매우 높아서 어지간한 방어구로는 3방 이상을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이 던전의 보스인 '헬티스'는 온몸이 시뻘건 화염으로 뒤덮여 있어 공격하기도 힘들고 방어를 하기도 힘든, 굉장히 성가신 보스였다.
그런 끔찍한 해충과 몬스터가 많은 지옥 사마귀의 숲지 안.
"……후."
숲지의 한가운데에는 카워드가 서 있었다.
평소처럼 정장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방어구를 모두 갖춰 입은 카워드는 몰려드는 해충들을 깔끔하게 처리하고는 이내 주머니 안에서 검은 마정석을 꺼냈다.
흑색의 빛을 띠고 있는 5개의 검은 마정석.
'이걸 심으면, 일정 시간 뒤에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다.'
그는 이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메이슨의 말을 한번 떠올리고는 이내 자신이 밟고 있던 흙을 가볍게 눌렀다.
쿠그극-
마치 두부를 밟듯 가볍게 파이는 흙.
발하나가 완전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무기를 판 카워드는 이내 검은 마정석을 떨어뜨렸고 곧바로 마정석을 묻기 시작했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작업.
허나 그 짧은 작업을 하며 카워드의 입가에는 비틀린 미소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제 이 검은 마정석이 몇 주 뒤에 터지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후후……."
카워드는 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자조적이기도 한 미소를.
허나, 곧 그는 결심을 다잡았다.
'그래, 이게 최선이다.'
맞았다.
현재 카워드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되돌릴 수 없고, 아레스 길드- 아니, 자신의 몰락은 거의 확실시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김현우가 입을 열던, 아니면 메이슨이 잡히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은 편하게 끝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선택했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혼자 죽는 것이 아닌, 김현우에게 조금이라도 더 피해를 입히고 죽는 쪽으로.
'혼자 죽기는-'
억울하니까.
그래.
억울했다.
애초에 일을 시작한 게 카워드 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억울했다.
억울한 이유?
당연하지 않은가.
'김현우에게 당하기만 했다.'
그래, 당하기만 했으니까.
이미 카워드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이 일을 먼저 벌였다는 생각 따위는 들어 있지도 않았다.
이 '지옥 사마귀'에 오고 나서- 아니, 저번에 호텔에서 있었던 일 때부터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은 그저 김현우에 대한 비틀린 억울함과 증오뿐.
꾹-꾹-
카워드는 마정석을 심어 둔 발을 몇 번이고 꼼꼼히 밟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된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3일 뒤 김현우에게 던전을 넘기고 나서 몬스터 웨이브가 터져주기만 한다면 김현우는 결국 어찌 됐든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 일이 터지고 나서 자신도 무사하지 못하겠지만.
그것은 상관없다.
'어차피 사회적으로 매장당해서 죽나 김현우에게 죽나의 차이일 뿐이다.'
그 두 가지의 차이일 뿐이었으니까.
카워드는 어째서인지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던전의 출구로 향했다.
그리고-
"안녕?"
"헉……!"
카워드는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김현우를 볼 수 있었다.
"어, 어떻게?"
그는 자신의 눈이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감았다 떴지만 입구에 서 있는 김현우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하기는 했다.
분명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던 김현우의 미소는, 어느덧 눈을 한번 깜빡할 사이에 무척이나 악의가 가득한 미소를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워드는 떨리는 눈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도……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어떻게는 씨발아, 혹시나 해서 붙여놨더니 어떻게 이렇게 예상을 안 빗나가냐?"
김현우가 이곳에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메이슨을 잡은 뒤에도 그의 뒤를 미행하고 있었던 가면무사 덕분이었다.
미령은 메이슨을 잡은 뒤에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가면무사에게 카워드를 계속해서 감시하라 명했고.
오늘 미령은 '전음(傳音)'을 통해 카워드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
카워드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입가를 버리며 말했다.
"말도, 말도 안 된다! 분명 너는 미궁탐험을 내려갔다고!"
"그래, 내려갔었지. 근데 너 잡으려고 다시 올라왔다니까?"
실제로는 이미 미궁석을 전부 채웠기에 올라온 것이었지만 김현우는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툭!
카워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막혀 있는 벽을 보며 이제는 확연한 공포의 눈빛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김현우는 주변을 찾더니 이내 던전 입구 쪽에 위치한 테이블에서 무엇 하나를 집어 들었다.
"너는 좀 맞자."
김현우가 집어든 것.
"뭐, 그래도-"
그것은 키보드였다.
"내가 맨손으로 때리면 또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를 테니까-"
그는 키보드를 한 손으로 쥔 채 한번 휘둘러보고는 이내 만족한 미소를 지은 채 카워드에게 다가 와-
"너는 이 '정의봉(正義棒)'3호로 때려줄게."
어느새 주워든 키보드에 정의봉이라는 이름을 붙인 채-
"이 악물어라?"
빠아아악!
"끄아아악!"
그에게 키보드를 휘둘렀다.
***
"끄아악!"
AAC의 메인 기자 존 마이클은 자신의 배에서 올라오는 끔찍한 고통에 몸서리치며 몸을 덜덜 떨었다.
'대체……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김현우와의 정치질 싸움에서 패배한 뒤로, 최근 존 마이클은 최악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씨발! 씨발!'
다른 기자들은 김현우와 존 마이클의 이야기를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 각색시켜 기사로 올렸고.
그 기사들에서 존 마이클은 하나같이 학살극을 저지했던 영웅인 김현우를 끌어내리려 하는 쓰레기 기자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 덕분에 그가 소속된 미국 방송사인 AAC는 큰 타격을 입고 존 마이클을 메인 기자 자리에서 빼 버렸고, 그는 얼마 뒤 있을 인사이동에서 잠재적으로 해고가 확정된 인물이었다.
한순간에 나락을 내려가는 존 마이클의 인생.
분명 어제 혼자 양주를 마시며 이 이상 내려 갈 곳에 없다고 한탄하고 있던 존 마이클이었으나-빡!
"끄악! 제발! 제발 그만! 끄아악!"
존 마이클은 유감스럽게도 그 아래에 더 아래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빡!
"제……제발! 제발 그만! 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제가 뭘 했다고! 제가 대체 뭘!!!"
머리를 발로 차인 존이 양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이미 이마의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는 그는 필사적으로 남자의 발을 붙잡으며 놓아주지 않았고, 그런 존의 모습에 처음으로 남자의 입이 열렸다.
"나도 몰라."
"예……?"
"나도 모른다고,"
남자의 말에 존은 어처구니없는, 망연함이 섞인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봤고,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아, 그래도 이유라고 할 만한 건 있네."
"그……그게 무슨……."
덜덜 떨리는 존의 물음에 남자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네가 우리 '보스'를 화나게 했다는 거지."
빠아아악!
"끄아악!"
남자의 무자비한 폭행이 존의 머리를 후려쳤고, 그는 그 어두운 독방에서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멈추지 않는 폭행.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살려달라고 애처롭게 비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폭행이 얼마만큼이나 지속되었을까.
그의 정신이 희미해지기 직전, 그에게 가해지고 있던 폭행이 멎었다.
그와 함께 들리는 발걸음 소리.
뚜벅- 뚜벅-
존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고 초점을 맞췄고.
그곳에는-
"너야?"
무감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소녀가-
"내 사부님을 곤란하게 한 녀석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113
113. 천마(天魔)의 제자(1)
"사……사부님이라니 그게 무슨……!"
존 마이클은 고통스러운 격통에 시달리면서도 본능적으로 그녀의 말에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왜? 맞잖아? 응? 네가 건드렸잖아?"
존 마이클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그녀에게서, 정확히는 무감정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눈빛 안에서 그녀의 악의를 엿보았다.
증오와 분노로 점철된 그녀의 악의를- 그렇기에, 그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똑바로 붙잡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죽는다.'
그녀의 눈빛을 본 존 마이클은, 여기에서 까딱 실수하는 그 순간, 그녀에 의해 죽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끊임없이 대답을 찾았다.
'그녀가 말하는 사부님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를 건드린 것인가.'
생각해라, 생각해라, 생각해라.
고통으로 희미해진 의식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사고를 가속하던 존 마이클의 생각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생각.
하지만 시기상으로 떠져 봤을 때는 맞을 수도 있는 그 사건.
그렇기에 존 마이클은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호, 혹시……김현우 헌터를……말하시는 겁니까?"
존 마이클의 물음.
그에 무표정했던 그녀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을 지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콰직!
"끄-?"
존 마이클은 자신의 손등 위에 자그마한 단검이 박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푸화악!
"아아아아아악!!"
그의 비명과 함께 붉은 피가 사방으로 솟구친다.
순식간에 바닥을 더럽히는 붉은 피.
그녀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네?"
그녀의 긍정.
그에 존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제일 최악의 가정이 맞았다는 것에 절망하며 자신의 피로 흥건해져 있는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의 비명 같은 발악에 그녀는 씩 웃으며 땅바닥에 박은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러게, 누가 그러라고 했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는 정말……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제발…… 제발!"
"아무것도 몰랐다고?"
"네! 네! 저는 정말로……!"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고?"
"정말, 정말로…… 아무것도,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제발……."
생존이라는 목표를 위해 자신이 만든 피 웅덩이에 고개를 처박는 존, 허나 그녀는 그의 애처로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저 무감정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지."
"……예?"
"아니야, 아니잖아?"
콰직!
"끄아아아아아악!"
그와 함께 오른손에 또 다른 단검이 꽂힌 존 마이클은 비명을 질렀고, 그 모습에 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는 알고 있었잖아? 사부님에 관한 기사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었다는 걸."
"그, 그게 무슨!"
그녀의 말에 그는 답하면서도 순간.
"어?"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존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그녀의 외투.
정확히는 그녀의 외투에 달린 문양.
삼각형에, 하나의 눈이 그려져 있는, 누가 보기에도 기묘해 보이는 그 문양.
'설마…… 설마……!'
존은 그 문양을 보자마자 고통조차 잊은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봤고, 그녀는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아……."
그 짧은 탄성과 함께, 그는 언젠가 자신과 같은 AAC 기자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존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낸다.
기억하는 장소는 AAC 기자들의 공동휴게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두 명의 사람이었다.
한 명은 존 마이클.
또 다른 한 명은 그의 동료이자 같은 AAC의 메인 기자인 로드릭. 그 둘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 김현우에 대한 이야기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야, 그러고 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냐?'
김현우에 대한 의문을. 그들은 이야기 하고 있었다.
존 마이클의 머릿속에서, 그 기억들이 재생된다.
'뭐가 이상한데?'
'김현우 말이야. 어떻게 된 게 전부 이렇게 영웅담뿐이지?'
존 마이클의 물음에 그의 동료인 로드릭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긴 왜야, 칭찬받을 일 했으니까 영웅담이 퍼지는 거지. 이번에 헌터를 학살하던 무신을 잡았잖아?'
'그래 그건 맞는데…… 그렇다고 해도 너무 깔끔하지 않냐?'
그때 당시에 존은 그 사실이 분명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원래 옳은 정보를 취재하고 편집해 올리는 '언론인'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99%의 기자들은 올바른 정보보다는 조회수, 조회수보단 돈을 쫓고, 그렇기에 올바르고 옳은 정보보다는 거짓되고 자극적인 기사를 더 좋아한다.
그렇기에, 존은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음모론이나 자극적인 기사가 하나도 없지?'
조회수를 위해서라면 없는 기사도 만들어내는 것이 기자들이었다. 대형 언론사는 그나마 조절을 하는 편이지만 소형 언론사는 그런 것도 없다.
당장 자신도 AAC 메인기자의 자리를, 그리고 시청률을 위해 일부러 기사를 날조해 뿌린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형 언론부터 소형 언론까지 올라와 있는 뉴스는 전부 김현우에 대한 영웅담과 미담뿐.
거짓 기사나, 음모론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이상할 정도로.
물론 그런 그의 고민이 무색하게,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동료인 로드릭은 그에게 말했다.
'뭐, 너무 그렇게 깊게 파고들려 하지 마.'
'깊게 파고들지 말라니?'
'말 그대로지, 대세를 따르라 이거야. 지금은 김현우의 음모론이나 다른 '추문'보다는 그의 순수한 미담이 더 조회수가 높게 나온다 이거지.'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커피를 전부 마시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괜히 한번 눈에 띄어 보겠다고 혹시나 이상한 짓 하지 말라고.'
동료의 말에 로드릭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으나, 그는 할 일이 있었는지 종이컵을 버리고는 휴게실 밖을 향해 몸을 움직였고.
그때 존은 볼 수 있었다.
'어? 너…….'
'왜?'
'너, 몸에 뭐 그리는 건 야만적이라고 하더니, 왜 문신을 했냐?'
그의 오른 팔뚝에 그려져 있는 문신을-눈의 형태를 띄고 있는 문신.
그는 마이클의 지적에 자연스럽게 거둬 올렸던 소매를 내리곤 말했다.
'뭐, 기분전환이지.'
그 말과 함께. 존 마이클의 회상이 끝났다.
"기억했어?"
나지막하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존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입가를 덜덜 떨며 그녀를 올려다볼 뿐.
그러다 그는 입을 열었다.
"도……대체……."
"?"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 정도의 정보 통제를……."
덜덜 떠는 입에서 나오는 그의 의문.
분명 온몸은 끔찍한 고통으로 인해 금방이라도 정신줄을 놓을 것 같았으나, 그런데도 존은 그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도대체 왜?'
정보의 통제.
그것은 굉장히 힘든 작업이었다.
아주 기본적인 정보를 통제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드는 돈은 천문학적이고, 들여야 하는 시간도 길다.
하물며 그것은 기본적인 정보가 아닌 '김현우' 같은 유명인의 정보라면, 그 난이도는 몇 십 배로 높아진다.
정보를 통제하기 위해 소모되는 금액은 엄청나고.
정보를 통제하기 위해 소모되는 인력도 엄청나다.
그리고, 자신을 납치한 이 집단에서 하고 있는 '김현우'의 정보 통제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음모론도 없다.
추문도 없다.
그 이외에도 부정적인 기사들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존은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그녀가 점점 더 두려워지고 있었다.
미국의- 아니, 전 세계의 언론을 이 정도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이가 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고-
"그야 당연하잖아? 사부님의 제자인 내가-"
존은 그녀가 순수하게 내보이고 있는-
"사부님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걸 놔둘 리가 없잖아-?"
광기가 뒤섞인 미소에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메어져 있던 나무가면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림과 동시에, 그녀는 그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자, 그럼-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지?"
"히익! 사……살려주세요!"
그녀의 말 한마디에 차오르는 공포.
허나, 그녀는 그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마, 죽이지는 않을 거야."
너처럼 끌려온 녀석들을 전부 '처음'부터 죽이지는 않았거든.
"다만-"
그녀의 뒤로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도열하기 시작했다.
언뜻 봐도 5명은 되어 보이는 남자들.
"교육은 해야겠지?"
"으……으아아아악!"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는 존을 보며, 그녀는 웃었다.
***
그로부터 5일 뒤. 천호동에 있는 단독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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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스 길드장 '카워드' 알고보니 메이슨과 동맹? 충격-]
지난 3일, 국제 헌터 협회에서 아레스 길드장인 '카워드'와 무신을 이용해 TOP50 학살극을 벌였던 메이슨이 동맹관계였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현재 마튼 브란드의 갑작스러운 실종으로 인해 길드장의 자리에 앉게 된 카워드는 현재 마튼 브란드가 실종된 것이 아닌 카워드가 죽인 게 아니냐는 의문을 받고 있다.
그 의문이 시작된 것은 바로 3일 전, 카워드가─(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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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해외 뉴스 메인에 대문짝만하게 떠오른 기사를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5일 전, 김현우는 지옥 사마귀에서 카워드를 잡고 난 뒤, 그가 심었던 검은 마정석을 회수하고 더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를 국제협회에 넘겨 버렸다.
어차피 김현우가 카워드를 일일이 조지려면 불편하기도 할뿐더러,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리암쪽이 더 잘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국제헌터협회를 차지 해 열심히 지지기반을 쌓아 올리고 있던 리암은, 안 그래도 슬슬 새로운 장작을 넣어야 했기에 카워드를 달갑게 여겼고 그 결과가 이 상황이었다.
'뭐, 잘하고 있나 보네.'
뉴스에서는 연일 아레스 길드와 메이슨의 관계를 세상에 퍼뜨리기에 여념이 없었고-
"스승님"
"왜?"
"우선 이번에 넘겨받은 독점 던전의 기본 인원 배치는 모두 끝났습니다."
"잘했다."
김현우는 어제부로 아레스 길드에게서 독점지분의 40%를 빼앗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그 덕분에 관리해야 할 던전이 많아졌으나, 가디언 길드의 인원을 다시 뽑을 필요도 없이 미령을 도움을 받았다.
그는 왠지 기분 좋은 듯 헤실거리는 미령의 모습을 한번 바라보곤. 이내 시선을 돌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검은 천과 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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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악천의 원천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없음
-정보 권한-
미궁석 게이지: 100%
■■■■■■■■■■
[미궁석 게이지를 모두 채웠기에, '한 번'에 한에서 악천의 힘을 한정적으로 발휘할 수 있습니다.]
[원천의 주인이 등반자가 되려다 실패했기에, 원천의 효과가 변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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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로그.
김현우의 입에 미소가 지어졌다.
준비가 끝났으니까.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김시현에게 받아왔던 천마의 검에 시선을 돌리곤, 망설임 없이 그 두 개의 물건을 집어 들었다.
갱신되는 로그-
[악천의 원천을 '천마검(天魔劍)'에 사용하시겠습니까? Y/N]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제자야."
"예, 스승님."
"나 잠깐 어디 좀 갔다 올 테니까 그동안 던전 관리 잘하고 있어라."
"어디를……?"
미령의 물음에 김현우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를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좀 볼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한 김현우는 악천의 원천을 사용했고-
"……!"
곧, 세계가 일변했다.
바뀌어 나가는 배경.
분명 김현우가 있던 곳은 작은 거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어느새 굉장히 넓은 장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바닥에는 잘 깔아놓은 흙이.
그 주변에는 고풍스러운 중국풍의 담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변한 세상의 가운데-
"……,"
김현우는 장원의 가운데에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한 남자를, 아니-
"후-"
-천마(天魔)를 볼 수 있었다.
# 114
114. 천마(天魔)의 제자(2)
드래곤(Dragon)에 대해서 아는가?
흔히 세계를 균형을 지키는 수호자로서 묘사되고 있는 그들은 다른 종족들보다 압도적인 강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지며 하사 받았던 '용언(龍言)'부터 시작해.
다른 종족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강한 힘과 마력까지.
그들의 위에 그 누구도 군림할 수 없기에 '드래곤'은 수호자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있었다.
그래, '그들'이 올라오기 전까지는-
[쿨럭-]
모든 것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
분명 푸른색의 색감을 가지고 있었던 하늘의 색깔은 마치 칠흑을 칠해놓은 것처럼 어두워져 있었고, 그런 어두침침한 하늘 아래-드래곤이 있었다.
[후욱……후욱]
힘없이, 금방이라도 그 생명을 꺼뜨릴 듯, 위태롭게 숨을 내쉬고 있는 드래곤.
등 뒤에 달려 있는 거대한 날개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푸른색의 비늘 사이에는 쉴 새 없이 용혈(龍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계의 최강자로서 균형을 맞추는 수호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볼품없어 보이는 그 모습.
그 앞에.
"아직도 살아 있네?"
한 명의 수인(?人)이 있었다.
인간과 비슷한 크기였으나, 그 누가 보기에도 인간과는 달라 보이는 생김새를 한 그는, 자신의 머리에 놓인 '금관'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오히려 장난기가 가득해 보이는 표정으로 드래곤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이내 자신의 긴 꼬리를 갑주의 허리띠처럼 감으며 말했다.
"고작 이 정도야? 수호자라며? 응?"
더 잘 싸워야 하지 않겠어?
노골적인 조롱.
수인의 말에 드래곤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괴물…….]
그의 말에 수인은 웃었다.
"괴물? 내가? 내가 볼 때는 나보다도 네가 더 괴물인 것 같은데?"
[도대체 네 녀석은 누구냐? 고작 그런 수인(?人)의 몸으로 그 정도의 힘을 손에 넣다니-!]
너는 도대체-!!
드래곤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발악까지 해가며 그를 부정했으나 수인은 오히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쯧, 명색이 하나밖에 없는 수호자라는 놈이 고작 외견만을 보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군.
수인의 비난에 드래곤이 눈이 커졌으나, 이내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쿠구구구궁-
"내가 특별히 외견만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네 눈을 개안(開眼) 시켜주도록 하지."
수인의 몸에서 뿜어지는 오오라 때문에.
그 누가 봐도 눈부실 정도로 찬란한 황금빛의 오오라.
"잘 봐라. 멍청한 도마뱀 새끼야."
나는 네가 생각하는 수인(?人)같은 미물이 아니다.
"나는 하늘을 다스리는 성인."
-그의 손에서 무엇인가가 만들어진다.
"제천대성((齊天大聖)-"
-손에 만들어지는 것은 황금색의 '도경(道經)'이 적혀져 있는 봉.
"미후왕(美?王)이다."
그 말과 함께-
"미개한 도마뱀아."
그는 여의봉(如意棒)을 휘둘렀다.
***
거대한 장원의 한가운데 서 있는 천마(天魔).
그의 모습은 예전과 같았다.
몸에는 적당한 크기의 흑의(黑衣)를 걸친 채, 오른손에는 검을 들고 있는 그 모습.
그것은 김현우가 일본에서 보았던 천마의 모습과 완전히 같았다.
그리고 한 번에 천마를 알아본 김현우와 마찬가지로-
"도대체 네가 어떻게 여기에?"
천마(天魔)또한 김현우를 알아본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런 천마의 표정을 보며 김현우는 생각했다.
'뭐지?'
분명 저 반응은 천마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분명 악천의 능력은…….'
아이템 과거 회귀.
그가 등반자가 아니었기에 확인할 수 있었던 정보창에서, 그는 악천의 고유스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세한 설명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악천이 가지고 있었던 아이템 과거 회귀는 그 이름만 봐도 대강 스킬의 효과를 파악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말 그대로 업적이 담겨져 있는 아이템의 과거로 가, 그 무기의 주인에게 무술을 배운다.
김현우이 이해한, 그리고 아브가 정보 권한을 찾아보고 이해한 '아이템 과거 회귀'는 그런 스킬이었다.
하지만 지금 천마의 반응은 어떤가.
"……."
그는 어느새 그 무심한 눈빛에 슬쩍 적의를 얹어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그런 천마의 시선으로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대체 뭐야 시발?'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혹시 떠오른 로그가 있나 확인해 봤으나 떠오른 로그는 없었다.
그렇게 김현우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때, 그를 바라보고 있던 천마가 물음을 던졌다.
"네 녀석, 어떻게 허수 공간에 들어왔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생소한 단어.
"……뭐? 허수 공간?"
"네 녀석도 뒤진 건가?"
"뭐? 내가 뒤지기는 왜 뒤져?"
김현우가 즉각적으로 대답하자 천마(天魔)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더니 혼자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하긴, 네 녀석이 뒤졌다면 이곳에 오지는 않았겠지."
천마는 자기 혼자 납득했다.
"?"
그 모습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야."
"왜 그러지?"
"너만 알지 말고 나도 알려줘."
"내가 왜?"
"……."
이런 시발새끼, 라는 말이 김현우의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그는 굳이 그 말을 내뱉지 않았다.
'후, 진정하자.'
김현우는 들끓고 짜증나던 마음을 한 번에 진정시키고는 스스로 상황 정리에 들어갔다.
우선 처음으로, 김현우가 처음에 생각하고 있던, '악천의 원천'을 써서 천마를 만나는 데까지는 아무래도 성공을 한 것 같았다.
문제는 그다음.
김현우의 생각대로라면 절대 자신을 기억하고 있어선 안 되는 천마는 무엇 때문인지 자신을 잘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미궁석을 다 모았을 때,'
로그 옆에 떠 있던 '원천의 효과가 변질됩니다'라는 로그를 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천마가 나를 기억하는 건 '스킬 효과가 변질되었다.'문구 때문인 것 같은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변질된 거지?
허수 공간은 뭐야?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머릿속에서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풀다 이내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천마를 바라봤다.
'에이 씨팔 모르겠다.'
스킬 효과가 변질돼서 천마가 자신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결국 그렇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천마에게 무공을 배우러 왔고-
'무공을 가르쳐줄 천마는 이곳에 있다.'
그러므로 딱히 문제 될 건 없다.
복잡하게 생각하길 싫어하는 김현우는 스킬 효과의 변질로 일어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이상현상들을 깔끔하게 일축해 버리곤 천마를 바라보곤-
"야."
"왜 그러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
"나 무공 좀 알려줘라."
"지랄하지 마라."
그리고 1초도 안 되서 거절당했다.
천마의 거절을 끝으로 침묵이 감도는 장원 안.
김현우는 다시 말했다.
"무공 좀 알려 줘."
"지랄하지 말라고 했다."
"무공 좀 알려-"
"지랄 마라."
"무공-"
"지랄."
또다시 침묵.
"……."
"……."
'……참자, 참아야 한다.'
김현우는 기본적으로 상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천마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이유?
당연하지 않은가.
'누가 자기를 죽인 놈한테 무공을 알려주나?'
그렇다.
천마가 김현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천마가 김현우의 공격에 당해 죽은 기억도 있다는 소리였다.
김현우는 자신이 부탁하는 데 있어서는 굉장히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는 걸 알았기에 입가에 억지 미소를 지었다.
부탁이라는 건 최대한 공손하게 해야 하는 거니까.
"그↘르지 믈↗고 므긍즘 알→려즈믄 안들끄↗?"
그러지 말고 무공 좀 알려주면 안 될까?
무조건 공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채 이를 악물고 억지로 웃으며 부탁하는 김현우.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천마는-피식-
"좆 까라."
이내 누가 봐도 확연한 비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뭐? 씨발새꺄?"
김현우는 핀트가 끊김과 동시에 5초 전의 생각을 그대로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순간적으로 바뀐 김현우의 태도에도 천마는 당황하지 않고 비웃음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좆 까라고 했다. 저번에 그 어처구니없는 마력으로 나를 찍어 눌러서 죽일 때는 10초 스승이니 그 개지랄을 떨지 않았나?"
그 10초 동안 배운 걸로 열심히 마력이나 쏘고 다녀라.
천마의 말에 김현우의 입가가 비틀어져 올라갔다.
"그래? 개지랄? 그럼 그 개지랄 맛 좀 다시 볼래 이 새끼야?"
쿠그그그그긍!!!
그와 함께 김현우의 마력이 사방으로 폭사하기 시작했다.
검붉은 마력이 장원을 가득 채울 정도로 퍼져나가자 천마의 표정이 슬쩍 굳어졌다.
"그 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마력은 여전하군, 아니- 오히려 더 올라갔나?"
"그래, 내가 너 말고 조진 등반자가 몇 명인데? 응?"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내가 지금 여기서 너를 개 박살 못 낼 것 같아?"
"아, 협박이었나?"
여유로운 표정의 천마.
김현우는 비틀린 웃음을 지은 채 금방이라도 천마에게 달려들 준비를 하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도 나한테 개털려서 뒤진 새끼가 굉장히 여유롭다?"
이미 뒤져서 또 뒤져도 상관없냐?
김현우의 물음에 천마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죽으면 안 되지, 이 허수 공간에서 죽으면 기회가 없거든."
"그러면 뒤지면 안 되겠네?"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하냐? 너 이제 곧 뒤질 건데?"
김현우의 협박에 천마는 피식 웃곤 대답했다.
"내가?"
"응."
"내가 왜 죽지? 아! 설마 지금 네가 나를 죽이겠다고 하고 있는 건가? 그런데 어쩌지? 미안하지만-"
지금 너는 나를 못 죽여.
천마는 예전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김현우를 도발했고, 김현우는 잔뜩 증폭된 악의를 한아름 안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확인해 보면 되겠네-!!"
쾅!
그와 함께 김현우의 몸이 사라졌다.
지반이 터져나가지도 않고, 말 그대로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처럼 사라진 김현우의 모습.
탓-
그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 것은 천마의 맞은편이었다.
"이전보다 빨라졌군."
천마는 바로 앞에 나타난 김현우의 신형에 감탄했으나, 김현우는 답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향해 전력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김현우의 분노로 인해 별다른 묘리는 들어 있지 않았으나 그 근력과 속도만으로도 압도적인 살상무기가 되는 김현우의 주먹.
허나-
턱.
"!!"
분명 이전에 천마(天魔)를 상대 했을 때보다도 강력해진 그의 주먹은, 천마의 얼굴을 맞히지 못했다.
그저 그의 손에 막혔을 뿐.
순간적으로 일어난 상황에 김현우의 인상이 찌푸려지고, 천마는 입을 열었다.
"왜, 놀랐나? 네 공격을 막아서?"
공격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뻑!
"끅!?"
순식간에 그의 몸을 때린 천마의 주먹.
그와 함께 김현우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고, 김현우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꽝!
순식간에 장원의 외벽을 부신 김현우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천마(天魔)의 모습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보이지 않았다.'
그래, 공격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예전, 일본에서 싸웠을 때, 김현우는 천마의 공격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천마의 공격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래, 아예.
그렇기에 김현우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그는 오연한 표정으로 장원에 처박혀 있는 김현우를 바라보며-
"더 해볼 테냐?"
-비웃음을 지었다.
# 115
115. 천마(天魔)의 제자(3)
꽝!
바닥에 처박힌 김현우의 몸이 용수철처럼 천마를 향해 튀어 나간다.
그것은 그야말로 콤마의 단위가 되어야 찾을 수 있는 짧은 한 장면.
빡! 콰드득! 팍!
김현우의 오른손이 천마의 오른 어깨를 향해 휘둘러진다.
막힌다.
막힌 손을 지지대 삼아 오른발을 휘두른다.
그 또한 막힌다.
이미 두 번의 공격이 막힌 상황에서 김현우는 그 짧은 체공의 시간에 남은 왼손을 움직였지만-빠악-
"끅!"
이미 천마는 그의 얼굴을 향해 검집을 내밀고 있었다.
검집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김현우는 고통에 이를 악물면서도 천마의 신형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발을 휘둘렀다.
허나 이미 김현우가 발을 휘둘렀을 때, 천마는 다른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형환위(移形換位)는 이렇게 쓰는 거다."
너처럼 형태만 그럴듯하게 따라 해서는 그저 네 마력을 소모할 뿐이지.
천마(天魔)의 꼰대질에 김현우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꼰대질할 거면 무공 좀 알려주던가!"
"지금 그 대화만 몇 번째인 줄 아나? 내 대답은 언제나 같다."
지랄하지 마라.
천마의 대답에 김현우가 욕을 박았다.
"아니 이런 썅, 도대체 왜 이렇게 그때랑 차이가 나는 거야!?"
김현우는 도무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맨 처음 등반자로 만났던 천마는 강하다고 해도 이렇게 강하지 않았다.
공격을 해도 눈에 보였기에 피할 수 있었고.
그가 전력을 드러내더라도 어느 정도는 맞으면서 버틸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그 이전과는 모든 게 달랐다.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천마를 바라보자, 그는 여전히 비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않나? 그때는 '제약'을 받고 있었으니."
"뭐?
'제약?'
."
김현우의 되물음에 천마는 대답했다.
"그래, 제약이다. 나는 너와 싸울 때에는 '등반자'였으니까."
천마의 말에 김현우는 도대체 뭔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말했다.
"아니 뭔 개소리야?"
천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으나 정작 김현우는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그런 표정을 지은 김현우를 보며 슬쩍 고민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 그대로다. 너와 싸울 때는 내가 '등반자'라는 틀에 갇혀 있었기에 전력을 내지 못했을 뿐이다."
"뭐? 틀?"
"그래, 너는 등반자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천마의 물음에 김현우는 슬쩍 눈을 찌푸렸다.
등반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그들이 왜 탑을 오르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허나 그 이외의 것은?
김현우가 침묵하자 천마는 그런 김현우를 말했다.
"너는 알지 모르겠지만, 등반자에는 등급이 나뉜다."
하위, 중위, 그리고 상위.
"이 등반자들의 기준이 무엇으로 나뉘는지 알고 있나?"
천마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민하는 듯하다 대답했다.
"개개인의 강함?"
김현우의 대답에 천마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틀렸다."
"……."
"답은 바로 업적이다."
"업적?"
"그래, 업적. 물론 다른 것들이 등반자의 등급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 기본적으로 모든 등반자들은 '업적'에 의해 그 등급이 결정된다."
"업적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그래, 이 탑에서는 '업적'이 중요하지."
천마는 말을 이었다.
"그 업적이 세계를 구한 영웅이든, 오히려 반대로 세계를 파괴한 악당의 업적이든 흑백논리와 선악의 차별 따위는 없다."
또한 다른 도덕적 가치 따위도 업적에는 포함되지 않지.
"오롯이 탑에서는 그 등반자의 업적을 계산해, 그에게 합당한 등급을 내린다."
그리고 곧 김현우는 천마의 말을 듣고 떠오르는 하나의 가정을 머릿속에서 떠올렸고 곧 그 가정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중위급 등반자'가 되고 나서는 오히려 그 힘이 제약되었다는 소리야?"
김현우의 물음에 천마는 선뜻 놀라는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답했다.
"멍청한 줄 알았는데 잘 추론했군."
"……."
그의 과장에 김현우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으나 천마는 계속해서 말했다.
"맞다. 내 전투력은 순수하게 따졌을 때, 상위급 등반자와 맞먹을 정도지만."
이 '탑'안에서는 전투력을 감당할 만한 '업적'이 있지 않다면 그 힘에는 제약이 걸리게 되지.
"네가 나와 싸웠을 때의 그 모습을 봤던 것처럼 '등급'이라는 제약이 말이야."
천마의 말에 김현우는 그제야 지금의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는 약했으나, 지금의 그가 강한 이유를.
물론 그럼에도 김현우의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궁금한 건 많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허수 공간'은 어디인지부터 시작해서.
분명 '등반자'로서 죽은 '천마'는 왜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지까지.
허나.
"뭐, 잡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천마는 김현우에게 이 이상 이야기를 해줄 마음이 없는 듯 입을 다물고는 이내 자신의 검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무공(武公)을 배우고 싶다고 했나?"
나도 마침 이 공간에서 시간을 때우느라 심심했던 차니-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알려주지."
그 말에 김현우의 눈가가 기묘하게 떠졌다.
'조금 전까지 지랄 말라고 하던 놈이?'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을 읽은 듯, 천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단, 네가 지금의 나를 죽일 수 있다면 말이야."
"그럼 그렇지 씨발."
개과천선 한 줄 알았네.
김현우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욕을 내뱉자, 천마는 그런 김현우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왜, 하지 않을 텐가?"
"지랄. 누가 안 한다고 했어?"
그와 함께 김현우는 검붉은 마력을 사방으로 내뿜기 시작했고, 천마(天魔)는-
스르릉-
이제껏 뽑지 않았던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시퍼런 날을 세우고 있는 천마의 검.
김현우가 말했다.
"죽이면 무술을 배울 수가 없으니 죽기 직전까지만 후드려 패주마."
그의 말에 천마는 웃으며 답했다.
"걱정하지 말고 전력으로 덤벼라, 어차피 이곳에서는 아무리 죽어도 죽지 않을 테니까."
"뭐?"
김현우가 그건 또 뭔 소리냐며 입을 열었으나- 천마는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
천마는 김현우조차 인식하지 못할 속도로 그의 앞에 다가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알고 있나?"
망설임 없이 김현우의 심장에 그 칼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크-학!"
그것이 김현우의 첫 번째 죽음이었다.
***
천호동에 있는 김시현의 단독 주택에서 김시현은 미령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현우형이 갑자기 천마의 검이랑 같이 사라졌다고?"
"그렇다고 하지 않았나."
미령의 대답에 김시현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였다.
미궁 탐험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밖으로 나온 지가 이제 하루, 김시현은 어제 미궁에서 나오자마자 '천마의 검'을 빌려갔던 김현우를 떠올리곤 머리를 긁적였다.
'이번에는 또 뭘 하고 있는 거지…….'
뭐, 김현우라면 이제 무슨 일을 해도 그다지 걱정이 들지는 않는 김시현이었으나 그래도 뭔가를 할 때 말을 좀 해줬으면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당장 보면 미령도 김현우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한 듯,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그가 있었던 소파를 멍하나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그녀의 머리 위에 동물의 귀가 있었다면 푹 죽어 있지 않았을까.
김시현이 그렇게 미령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무감정한 눈으로 김시현을 마주봤다.
"뭘 보나?"
미령의 물음.
"아니, 뭐……그냥."
'살벌하구만.'
그 냉정하고 무감한 목소리에 김시현은 저도 모르게 대답하며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 보면 미령은 김현우의 옆에 있을 때만 얼굴이 풀어져 있고 여러 가지 표정을 짓지, 김현우가 없다면 소름 끼치는 무표정을 유지한다.
'아니, 무표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적의를 팍팍 내풍기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저번에 김현우와 미령이 잠깐 떨어져 있을 때, 그녀와 최소한의 말을 텄다고 생각하는 김시현에게도 미령은 별다른 행동의 변화가 없었다.
'뭐,'
사실 지금까지 들려온 그녀의 소문이나 그녀가 혼자 있을 때를 생각해보면 미령이 김현우 옆에서 하는 행동은 순수하게 '내숭'인 것 같지만.
김시현은 그렇게 생각해 놓고는 제법 그럴듯한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곤 이내 시선을 돌리다 문득 들어온 물건을 보며 미령에게 물으려다-
"……쩝."
이내 몸을 돌렸다.
'역시 아직 어색하네.'
만약 김현우가 옆에 있다면 말을 거는 게 조금 수월했겠으나, 김현우가 옆에 없고 무엇보다 미령의 기분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형이 있을 때랑 없을 때랑 차이가 너무 큰데.'
그렇기에 김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가려다-
"!"
2층의 나무천장 위, 슥 사라지는 가면을 보며 순간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
'다음주면 아파트 전부 재건한다고 하던데-'
"……재건되자마자 그냥 그곳으로 돌아가야지."
……형은 빼고.
물론 김시현이 딱히 김현우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미령도 서로 어색하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다.
하지만-
"……."
천장에서 스윽 사라지는 저 미령의 호위무사들은 불편했다.
물론 자신의 방까지는 안 들여다보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불편하다.
그렇기에 그는 은근히 그렇게 다짐하며 자신의 방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 시간에도 미령은 김현우가 사라진 그 자리를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
미령은 김현우가 있던 곳에 그대로 놓여 있는 주머니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검은색 외형을 가지고 있는 가죽 주머니였다.
김현우가 천마의 검과 함께 사라짐과 동시에, 그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던 물건.
그건 바로 김현우가 이전에 복제자를 잡을 때 얻었던 '하수분의 아공간 주머니'였다.
그리고 미령이 바로 그 가죽 주머니를 보고 있는 이유는 바로-
[내 목소리가 들리고 있구나, 계층인아]
그 주머니 속에서 들리고 있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전음?'
미령은 짧게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전음이 아니었다.
만약 전음이라면 아주 짧게나마 마력의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미령의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마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마력이 깃든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대로 입을 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허나 그럼에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이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는 저 주머니에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 주머니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미령이 혼자 생각을 이어나가는 와중에도 목소리는 제멋대로 미령의 머릿속에서 떠들고 있었다.
[그래,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구나, 너 정도면 내 힘을 어느 정도 품을 수 있겠어.]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미령의 생각은 애초부터 필요 없다는 듯 혼자서 결론을 내리는 목소리.
미령이 입을 열기도 전에, 목소리는 한 번 더 물었다.
[아이야. '힘'을 가지고 싶지 않느냐?]
갑작스러운 제안.
미령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는 누구지?"
그녀의 경계 어린 물음.
그에 목소리는 가볍게 웃는 듯한 느낌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너무 경계하지 말거라, 어차피 네가 선택하는 게 아니면 나는 네게 그 무엇도 하지 못하니까.]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미령의 머릿속에-
[나는 이매망량(?魅??)의 주인-]
자신의 이름을-
[괴력난신(怪力亂神)이다.]
말했다.
# 116
116. 천마(天魔)의 제자(4)
천마(天魔)의 뒤로 도약한 김현우가 망설임 없이 주먹을 꽂아 넣는다.
꽝!
길게 울리는 소음.
허나 김현우는 만족하지 않은 채 다음 공격을 이어간다.
꽝!
왼발이 천마의 옆구리를.
꽝!
이어서 들어간 오른발이 천마의 머리통을 후려치기 위해 움직이지만-턱-
"이런 씨발."
"내가 말하지 않았나? 네 공격은 너무 단조롭다. 하긴, 애초에 무술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놈이 어떻게 다채로운 공격을 하겠냐만-"
푸욱!
"크악!"
차가운 천마의 조소와 함께 김현우의 심장에 칼이 박혀 들어가고-쾅! 콰드드드득!
힘을 잃은 김현우의 육체가 천마의 발길질에 의해 장원의 바닥을 구르며 나가떨어진다.
그 누가 보더라도 치명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천마의 일격.
그런데도-
"야 이 개새끼야!"
"왜 지랄이지?"
"훈수 둘 거면 무공 알려주고 지랄하라고!"
"그래서 알려준다고 하지 않았나? 나를 이기면 말이다."
-김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조금 전 천마에게 심장을 공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허수 공간'의 특성은 그의 몸에 상처를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추리닝은 그렇지 못했으나.
"이런 썅."
천마에게 수십 번을 차이고, 베이고, 찔린 김현유의 추리닝은 더 이상 옷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걸레라고 부르는 게 맞을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99번 정도 죽었나? 이제 원시인이 돼가는군."
"99번이 아니라 100번이야 개새끼야."
이 공간은 시간이 없는 듯 밤낮조차 존재하지 않았기에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사실 하나를 김현우는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00번.
천마가 자신을 이기면 무공을 알려주겠다는 그때부터 전투를 지속해온 김현우는 조금 전 심장에 칼을 맞은 것을 끝으로 100번의 죽음을 채웠다.
"뭐, 이만하면 내 화도 슬슬 풀렸으니,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떤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돌아간다면 막지 않도록 하지.
마치 스트레스를 풀어서 기분이 좋다는 듯 무척이나 여유롭게 비아냥거리는 천마.
그 모습에 김현우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즌쯔 지를흐즈 므르."
"아직 할 생각인가? 너라면 알고 있을 텐데? 넌 나를 못 이긴다는 걸."
김현우는 그 말에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왜냐?
지금 있었던 100번의 전투와 100번의 죽음을 통해, 그는 깨달았으니까.
천마(天魔)가 강하다는 것을.
그래, 강하다.
그에 대한 설명은 그 하나면 충분할 정도다.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다른 등반자들과 그는 달랐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은 정말로 강했으나, 그 특유의 빈틈이 존재했다.
하수분(河水盆)은 온갖 무기를 자신의 것으로 사용했고, 그 효과를 이용해 거의 모든 종류의 공격을 다뤘으나 그에게는 심오한 묘리가 없었다.
무신(武神)은 가장 근접하고 강한 무(武)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는 결국 마지막에 자신의 무(武)를 내버렸다.
허나 김현우의 앞에 서 있는 천마는 어떤가?
빈틈 따위는 없다.
그가 머리와 몸에 체득하고 있는 수십 수백 가지의 묘리는 지금도 이 전투를 지배하고 있고.
그의 무(武)는, 무신처럼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못하는 반쪽짜리 무(武)가 아닌 '진짜'였다.
그렇기에 강했다.
그렇기에 김현우의 공격은 그의 몸에 닿지 않았다.
그래, 아직.
-아직은.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냐?"
"뭘 말하는 거지?"
"내가 말 했잖아?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고."
김현우의 말에 천마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고, 김현우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당장은 네가 이길 수도 있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언제까지 영원히 지속 되지는 않잖아?"
김현우의 말에 천마의 눈썹이 꿈틀했다.
"또 허풍 시작이군."
천마의 말에 김현우는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허풍인지 아닌지는 직접 경험해 보면 알겠지."
그러니까-
"간다."
짧은 한마디.
쾅!
김현우의 몸이 튀어나간다.
그와 함께 가속되는 그 둘의 사고.
허나 그 차이는 엄청나다.
김현우가 앞으로 튀어나와 공격을 준비할 때.
천마는 이미 김현우의 얼굴에 칼을 박아 넣었으니까.
다른 때와는 다르게 순수한 1합으로 결정 난 싸움.
천마는 입을 열었지만-
"네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지금까지 나는 너를 봐준-!"
쾅!
말을 전부 끝내지는 못했다.
김현우의 내리찍기를 피해낸 천마가 몸을 비틀어 칼을 횡으로 움직인다.
카측!
반으로 갈라지는 김현우의 몸.
허나 허수 공간의 특성에 따라 김현우의 몸은 또다시 재생된다.
그리고-
꽝!
또 한번, 전투가 일어난다.
꽝!
이전과는 다르게 김현우의 죽음이 순식간에 그 숫자를 쌓아나간다.
120번.
150번.
200번.
300번.
죽는다.
또 죽는다.
촤악!
베여서 죽고.
콰드득!
차여서 죽고.
파삭!
머리가 터져서 죽는다.
죽는다.
계속해서 죽는다.
죽음의 횟수가 마치 가속하듯 그 숫자를 쌓는다.
500번.
600번.
700번.
마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쌓이듯, 김현우의 죽음은 그 숫자를 쌓는다.
그리고 김현우의 죽음의 숫자가 늘어감과 동시에- 그의 무술은 천마(天魔)의 앞에서 빠르게 무너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742번째.
"극-(極)-"
김현우의 등 뒤에 흑원과 함께 검은 흑익(黑翼)이 생겨난다.
-패왕(?王)
그의 마력이 마치 기관 열차의 엔진처럼 힘차게 마력을 토해내며 주변을 검붉게 채워나간다.
'괴신각(怪神脚)-'
그와 함께 휘둘러진 김현우의 발.
검붉은 마력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장원을 좀먹었으나-
"그딴 기술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콰드드득!
821번째
"수라(修羅)-"
그의 뒤에 검붉은 만다라(曼陀羅)가 개화한다.
금방이라도 그 꽃망울을 터뜨릴 듯 기이하게 펴져 있는 망울 사이로 검붉은 마력이 증폭한다.
증폭, 그리고 또 증폭.
검붉은 마력이 사방으로 증폭해 천마의 움직임을 제한하지만-
"무화-(武華-)"
"이런 마력 증폭 따위로 내 움직임을 묶을 수는 없다."
꽝!
974번째.
"반극(反極)-"
오른팔을 버리고 천마의 공격을 받아낸 김현우가 이화접목의 묘리를 이용해 천마의 공격을 자신의 왼팔에 담는다.
그와 함께 내질러지는 회심의 일격-허나-
"태극(太極)의 무공조차 익히지 못한 네가 따라하는 묘리는-"
없는 것보다 못하다.
꽈드드드득!!!
1000번째.
콰가가가강!
맑은 하늘에 검붉은 번개가 사방으로 내친다.
그 어디든 천마가 도망칠 곳을 만들지 않겠다는 듯 쉴 새 없이 내리치는 검붉은 번개.
김현우의 몸에 검붉은 전격이 몰아치고, 그의 머리가 삐죽거리며 솟아난다.
그의 뜻에 따라 재현된 천마(天魔)의 뇌령신공(雷令神功)이 모습을 드러냈으나-
"내 앞에서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는 내 무공을 사용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김현우의 검붉은 번개는 천마가 검을 휘두름으로 인해 만들어 낸 단 하나의 번개에 의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꽈득!
1211번째.
"유성각(流星脚)-"
"그건 무술이 아니다."
콰득!
1422번째.
"청룡-(靑龍-)"
"못 봐주겠군."
와드드득!
1624번째.
"백-(白-)"
꽈득!
1824번째
1911번째
2142번째
2522번째
……
……
……
……
……
.
2992번째.
꽝!
천마(天魔)는 장원에 처박히자마자 달려 나오는 김현우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미친놈이군.'
망설임 없이 발을 차올리는 김현우.
천마는 볼 것도 없다는 듯 그의 공격을 막아내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야.'
이곳은 '허수 공간'이었다.
허수 공간.
그곳은 '탑'에 전부 오르지 못하고 실패한 '등반자'들이 이번 기회를 박탈당하고 다음 기회까지 머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누구도 죽지 않는다.
아니, 죽을 수 없다.
이 공간은 삶과 죽음이라는 개념을 시스템에게 빼앗긴 곳이었으니까.
쾅!
그리고 그중에서도 이 장원은, 바로 '천마'가 가지고 있는 허수 공간이었다.
아무도 없고.
오로지 천마만이 있을 수 있는 허수 공간.
그렇기에 맨 처음, 이곳에 김현우가 나타났을 때, 천마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애초에 등반자들만이 올 수 있는 허수 공간에 김현우가 들어왔으니까.
허나 놀라움도 잠시, 천마는 김현우의 말을 듣고 더욱 놀랐다.
그는 자신에게 무공을 알려달라 말했으니까.
그것도 자기가 죽인 사람한테.
처음에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고, 저 녀석이 과연 제정신일까에 대한 의구심도 품었으나, 결국 천마는 김현우의 부탁에 응했다.
'나를 또 한번 이기면'이라는 조건을 붙이고.
허나, 천마는 김현우에게 무(武)를 알려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김현우의 조건을 수락했냐?
그 이유는 별거 없었다.
무료했으니까.
그리고 김현우가 자신을 죽일 때 했던 말이 무척이나 가소로웠으니까.
그렇기에 조금 손을 봐줄 생각이었다.
그래, 처음에는.
김현우를 100번 죽였을 때, 천마(天魔)는 꽤나 괜찮은 만족감을 느꼈다.
그의 눈빛에는 가소로움이 사라지고 경외감이 들어차 있었으니까.
허나 그 만족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현우의 입에서 나온 광오한 말 때문에.
그때부터, 천마는 진심으로 김현우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200번을 죽였을 때.
일합도 겨루지 못하고 죽는 모습이 퍽이나 즐거웠다.
400번을 죽였을 때.
3초를 버티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비웃었다.
700번을 죽였을 때.
김현우의 무(武)를 무너뜨리는 것은 썩 나쁘지 않은 즐거움이었다.
1000번을 죽였을 때.
천마는 그가 쌓아 올린 무(武)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때 김현우의 무(武)를 무너뜨리며 천마는 저도 모르게 확신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당한 그는 일어나지 못할 거라고.
하지만.
-김현우는 일어났다.
1200번을 죽였을 때.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김현우는 이제 몇 초식을 버티기는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1500번을 죽였을 때.
그는 자신의 본능 속에 차오르는 기묘한 감정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2000번을 죽였을 때.
이상했다.
김현우는 계속해서 몇 초식을 버티지 못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본능을 자극하고 있는 이 감정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 감정은 더더욱 커졌다.
2200번에는 의심을 가졌다.
2500번에는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2900번이 돼서야-
천마는 자신의 본능 속에 느껴지는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너무 오래전에 느꼈고.
등반자가 되고 나서는 단 한 번밖에 느끼지 못했던 그 감정.
"큭!"
'위기감'이라는 그 기묘한 감정을 천마는 느끼고 있었다.
천마의 주먹에 맞은 김현우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가 장원의 외벽에 처박힌다.
흙먼지가 사라지기도 전에 튀어나오는 김현우.
이번에도 천마는 움직였다.
저도 모르게 조급해진 마음에, 조금이라도 김현우를 잔인하게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한 번의 일검(一劍)
허나 그것은 한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의 휘두름에 수십, 수백의 날카로운 검기가 김현우의 몸을 찢기 위해 날아가고-천마의 일검은 저번에도 그랬듯이, 김현우의 몸을 찢어발길 것이었다.
그래.
그랬어야 한다.
허나-
"!!"
김현우는 피했다.
수십, 수백의 보이지도 않는 천마의 참격.
그것을 김현우는 피해냈다.
그 짧은 순간에 놓친 김현우의 모습.
천마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에 의지해 쥐고 있던 검을 뒤로 휘둘렀지만-
"틀렸어-"
꽝!
"큭!?"
김현우는 천마의 뒤가 아닌, 그의 아래에서 손을 뻗어왔다.
천마의 몸에 묵직하게 꽂히는 김현우의 주먹.
그리고-
"내가 말했지?"
2995번째-
"영원한 건 없다니까?"
김현우는 마침내 천마에게 일권(一拳)을 먹였다.
# 117
117. 천마(天魔)의 제자(5)
싸움은 계속된다.
이 허수 공간에서 싸움이나 날짜는 셀 수 없다.
그저 김현우와 천마가 세고 있는 하나의 숫자만이 유의미한 시간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는 기준이 될 뿐.
뻑!
"큭!"
천마의 얼굴이 굳어지고, 김현우의 발이 망설임 없이 그의 오른발을 후려찬다.
짧은 순간 중심을 잃고 기우뚱한 천마의 신체 위로 깊숙이 파고든 김현우의 팔꿈치가 들어선다.
쾅!
허나- 김현우 나름의 공격은 천마에게 닿지 않았다.
먼저 닿은 것은 천마의 검집.
그리고-
꽈강!
그의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푸른 뇌전.
뇌전이 김현우를 삼키고, 그의 몸이 검게 타오른다.
그러나-
꽝!
"후읍!"
전투는 지속된다.
검게 타오른 피부를 가진 김현우가 천마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 꽂는다.
막아내는 천마.
그 뒤로도 수많은 타격기가 그의 몸 여기저기를 노린다.
마찬가지로 막아낸다.
꽈가가강!
비틀 듯, 김현우의 몸을 사선으로 긁고 지나간 천마의 검에서 또 한번 번개를 만들어내고-
"큭!"
재생되는 김현우의 몸을 또 박살낸다.
그와 함께 결국 무너지는 김현우의 몸.
그것이 바로 5000번째의 죽음이었다.
5000번.
5000.
"이런 미친 새끼."
천마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오고-
"그러게 미친 새끼한테 내기를 걸지 말았어야지."
신체를 재생한 김현우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포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듯, 또 다시 달려드는 김현우를 보며, 천마는 이제 이를 악 물고 그를 상대했다.
가속하는 사고와 함께 천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도대체 뭐지?'
그것은 순수한 의문.
'도대체 뭔데-'
이 녀석은 이렇게 까지 할 수 있는 거지?
천마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5000번.
천마가 김현우를 죽인 횟수가 5000번이었다.
그리고 그를 5000번이나 죽이는 그 긴 시간 동안, 천마와 김현우는 계속해서 전투를 벌여왔다.
단 한순간의 낭비도 없이.
오로지 전투만을 지속하며.
그리고 그 긴 전투에서, 김현우는 아직도 천마와 싸우고 있었다.
게다가 심지어, 김현우의 죽음은 지금도 늘어나고 있었다.
5001번.
그가 3200번 죽었을 때부터 운용하기 시작한 뇌령신공 덕분에, 김현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절망감을 맛봐야 했을 것이었다.
천마가 뇌령신공을 운용한 뒤부터, 김현우는 다시 그의 옷깃을 건들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런데도-
빡!
"큭!"
천마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온다.
"이번에도 따라잡았네?"
"이 새끼!"
꽈가강!
5002번째에, 김현우는 다시 천마(天魔)의 몸에 타격을 주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그 뒤, 김현우는 천마의 뇌령신공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하여 5003번째에 들어선 김현우.
천마는 그에게 물었다.
"네 녀석은 진정 미친 건가?"
"아까 말했잖아? 미친개라고,"
몰랐어?
비웃듯 미소를 짓는 김현우의 모습.
그 모습에 천마는 저도 모르게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지었다.
5000번이 넘게 죽음을 맞이했는데도, 김현우의 눈은 아직 죽지 않았다.
오롯이 투쟁을 위해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눈.
그런 김현우의 모습에 그는.
천마(天魔)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래, 진짜 광견(狂犬)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돌아버렸군."
"칭찬 고맙다."
개새끼야.
욕설까지 섞어가며 여유롭게 받아치는 그의 모습에 천마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천마는 깨달았다.
어느새 김현우에게 느꼈던 위기감은 사라져 있었다.
아니, 짐작해 보면 그 위기감은 이미 뇌령신공을 사용할 때부터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 '위기감'이 사라진 곳에는 다른 감정이 들어차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경외감'.
감정을 착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천마(天魔)는 분명 그에게, 김현우에게 경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김현우는 약하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는 천마와 제대로 된 싸움을 성립시키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천마는 그에게 경외감을 느꼈다.
딱히 어느 것 때문에 경외심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김현우 그 자체.
김현우라는 그 사람에게, 천마는 경외심을 품었다.
천마는 그간 김현우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암천의 거렁뱅이로 시작해, 결국 그 끝에 천(天)이라는 자리에 올랐던 그는 스스로 만들어낸 업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오로지 권력에 미친 탐관이 있는가 하면.
권력보다는 돈을 중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의와 협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고.
그런 허울 좋은 도덕적 잣대보다는 개인의 영달을 중요시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이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천마의 족적과 천마의 업적 사이사이에 남아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그의 족적 속에 남아 있는 사람 중에서도 천마는 김현우 같은 이를 처음 만나 보았다.
그래.
'의지가 꺾이지 않는 사람'을, 천마는 처음 보았다.
자신에게 처음 죽임을 당했던 '낭인(浪人)'부터.
천(天)이 된 자신에게 죽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까지.
천마가 상대했던 자들은 모두 그 의지를 꺾였다.
그들 중에서는 천마가 다음을 기약하며 살려주었는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도 있었고.
무(武)를 버리고 도망친 자들도 있었다.
이유?
무(武)가 꺾였기에.
천마는 철저하게 그들의 세월을 짓밟았다.
그들이 배운 무공을 짓밟고.
그들이 쌓아 올린 역사를 부정했으며 그들이 만든 모든 것을 짓눌렀다.
죽이지도 않았다.
그저 짓눌렀을 뿐이다.
압도적인 힘으로, 그저 짓눌렀을 뿐이었다.
고작 그뿐이었다.
허나 고작 그뿐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살했고, 도망쳤으며, 문파를 폐쇄했고, 검(劍)을 놓았다.
그런데 김현우는 어떤가?
죽어도 일어난다.
분명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데도 달려든다.
100번을 죽어도 일어나고, 1000번을 죽어도 일어난다.
그가 쌓아올린 모든 무(武)를 그 앞에서 부정했는데도 그는 일어났다.
일어나고.
일어나고.
또 일어난다.
2000번을 죽어도.
3000번을 죽어도.
그는 마치 포기라는 개념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듯 달려든다.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게 몇 번이고 부정당했는데도, 그의 얼굴은 웃음을 머금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의 부정당했는데도 그 의지가 부서지지 않았기에-천마(天魔)- 아니, 그는 김현우에게 경외를 느꼈다.
꽝!
천마를 공격하던 김현우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돌아간다.
어색한 이형환위(移形換位).
마력의 움직임은 맞으나, 그 모든 것은 전부 틀린- 말 그대로 이제야 형태만을 잡고 있는 그의 기술.
턱-!
김현우의 기술이 천마의 팔에 막힌다.
찌푸려지는 그의 인상.
그래도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김현우는 자연스럽게 날아올 천마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양손을 들어 올렸고, 천마는-
"이형환위(移形換位)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크게 세 가지의 구결이 필요하다."
그에게 자신의 무(武)를 전하기 시작했다.
***
멸망한 세상 가운데에서, 그는 서 있었다.
머리에 쓰고 있는 금고아(緊?兒)는 잿빛 세계에서도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고, 그가 입고 있는 붉은 갑주는 잿빛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색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여의금고봉(如意金?棒)에는 금빛으로 새겨진 도경(道經)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늘을 다스리는 큰 성인, 제천대성(齊天大聖)이자.
"흠……."
미후왕(美?王)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는, 자신의 꼬리를 의자 삼아 제자리에 앉아 멍하니 아무것도 없는 잿빛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벌써 끝냈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제천대성의 뒤로, 누군가가 걸어 나오며 말을 걸었다.
어두운 잿빛 세상 속에서 말을 걸어온 이.
그것은 바로 사자였다.
푸른색의 털을 가지고 있는 사자.
제천대성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청사(靑獅)를 보며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너처럼 늦는 줄 아냐?"
제천대성의 이죽거림에 청사는 피식 웃더니 답했다.
"거, 투정이 심하구만."
"너 같으면 안 그러겠냐? 내가 벌써 저 도마뱀 대가리를 깬 지가 3달이다."
제천대성의 말에 푸른 사자는 머리만 사라지고 썩지 않고 있는 드래곤의 시체를 한번 보더니 이내 답했다.
"거참 빨리도 깨버렸군."
"됐고, 너는 일 끝났으니까 이쪽으로 온 거지?"
"당연히 그렇소."
청사의 말에 손오공은 이어 말했다.
"다른 놈들은?"
"다른 놈?"
"네 의형제들 말이다, 백상(白象)과 대붕(大鵬)은 어디에 있어?"
제천대성의 물음에 청사가 답하려 할 때쯤.
"좀 늦었군."
말을 주고받고 있는 손오공과 청사의 뒤로 두 인영이 보였다.
한 명은 회색의 도복을 입은 여성으로 분명 쇄골이 자리해 있어야 하는 곳에는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상아(象牙)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붉은 도포를 입고 있는 남자로, 그의 몸 뒤에 나 있는 홍익(紅翼)은 마치 그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었다.
청사(靑獅)는 그들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잘 끝냈나?"
"서부는 깔끔하게 멸망시켰소."
"동부도 마찬가지."
멸망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담는 그들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청사, 허나 제천대성은 그런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핀잔을 주었다.
"지랄, 이미 한번 좌(座)에 올랐던 놈들이 구역 하나 멸망시키는데 5달이나 걸리냐?"
그의 말에 청사는 사자인데도 불구하고 얼굴을 기묘하게 비틀더니 이야기했다.
"자네는 모든 업적을 인정받아 '상위'로 배정받지 않았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저 '사타동의 세 마왕'의 업적만을 인정받았지 않은가."
사타동의 세 마왕.
그것은 아주 오래전 그가 제천대성으로 불렸을 때, 그의 업적 속에 잔재하고 있던 요괴들이었다.
단 한 번의 포식으로 10만에 이르는 천병잡아 먹었다는 청사(靑獅).
그 어떤 것이라도 휘감는 코와 뿔로, 신화속의 신수를 잡아먹은 백상(白象).
한 나라를 침략해 그 나라의 임금과 신하, 백성을 모조리 먹어 치운 대붕(大鵬).
손오공이 그들을 나무랐지만, 그들은 고작 세 마왕의 업적을 인정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중위' 등반자의 판정을 받은 괴물들이었다.
그렇게 제천대성이 짧게 혀를 차자.
쿠구그그그그긍-!
불현듯, 멸망한 세계의 땅이 거대한 소음과 함께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해, 종래에는 귀를 먹을 정도로 거하게 울리는 소음.
허나 그런 소음에도 손오공과 그들은 아무런 말없이 떨림의 근원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고.
콰가가가각!!!
곧, 그들의 앞에 탑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땅 속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탑은 순식간에 하늘을 뚫었고, 탑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솟아오르는 것을 멈췄다.
그와 함께 보이는 탑의 입구.
그 입구를 한번 바라본 제천대성은 이내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와 함께 요괴들도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제천대성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탑에 오르기 전에 작전 한번 짜자."
"그래 봤자 이번에도 똑같은 거 아니오?"
대붕(大鵬)의 말.
허나 제천대성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 무시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이번에도 남쪽을 맡는다. 청사는 북부, 백상은 동부 대붕은 서부를 맡는다."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제천대성, 아니 손오공은-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2달 안에 끝내라."
일이 있으니까.
-웃음을 지으며 그리 말하고는 제일 먼저 탑 안으로 뛰어들었다..
# 118
118. 천마(天魔)의 제자 (6)
꽝!
"무공(武功)이란 겉멋만을 위한 화려한 기술이 아니다. 그보다 좀 더 본질에서 봐야 하지. 네가 지금 하는 건-"
쾅!
"경공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경공을 쓰는 데에 우선 돼야 할 세 가지는-"
쿵!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지랄하지 말고 세 가지 기본에 신경 써라."
콰드드드드득!
"본디 뇌령신공(雷令神功)이란 다른 무공과는 그 차이가 심하지. 그렇기에 언뜻 보면 따라 할 수 있지만 그 진리(眞理)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싸움, 전투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김현우가 달려들고, 천마(天魔)는 그런 그에게 망설임 없이 검을 내지른다.
죽음의 횟수도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올라간다.
꾸준히, 마치 시간의 흐름을 재는 것처럼 일정한 주기를 두며 계속해서 올라간다.
8002번째.
"뇌전(雷電)을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네 몸속의 마력들이 돌아 그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뇌기(雷氣)가 깃들어야 한다."
8423번째.
"뇌기(雷氣)가 마력 자체에 깃들었다면 그 형(形)을 만들어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은 네 기본이 될 테니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김현우는 자신의 죽음을 세는 것도 잊은 채 천마가 한 말들을 따라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맨 처음, 어떻게든 천마를 죽여 버리겠다는 그 일념은 이미 희석되어 있었다.
그 대신 그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바로 배움의 욕구였다.
"흡!"
쾅!
뇌기가 담긴 김현우의 마력이 언젠가 천마가 보여 주었던 그 수많은 형(形)을 따라한다.
자세를 잡은 순수한 직선타.
반보(半步)에서만 쓸 수 있는 수십 가지의 타격기.
일보(一步)의 거리에서만 사용 할 수 있는 급살기.
그가 보여주었던 수많은 형(形)이, 몇 천 번의 죽음을 대가로 해 김현우의 몸 안쪽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0821번째.
"이제 만들어 낸 형(形)을 부숴라."
11242번째.
"이미 네 몸 안에 충분히 깃들어 있는 그 기술과 기혈들은 이제 네가 무슨 움직임을 하더라도 따라올 테니까."
12853번째.
"아직 네 뇌령신공에는 그저 뇌기가 깃들어 있을 뿐이다, 네가 뇌령신공의 진정한 묘리를 깨우치려면-"
14242번째.
천마(天魔)의 모습이 개변한다.
분명 흑발이었던 그의 머리가 푸른빛으로 밝게 빛나기 시작하고, 그의 등에 거대한 광원이 만들어진다.
그와 함께 장원에 내리치는 푸른색의 번개.
극-뇌령신공(極-雷令神功)
천마가 보여주고 있는 극-뇌령신공의 모습은 이전, 김현우가 일본에서 보았던 그 뇌령신공과 같았으나, 또한 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천마(天魔)의 뇌령신공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
그 천마의 뇌령신공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의 눈이었다.
3000번의 죽음으로 그에게 제대로 된 '뇌령신공(雷令神功)'을 배우고.
또 다시 3000번의 죽음으로 그 신공의 '형(形)'을 익혔다.
그리고, 또 다시 3000번의 죽음을 끝으로 그 '형(形)'조차 '파(破)'한 그는.
"자, 마지막이다."
뇌령신공(雷令神功)을 극성으로 사용한 천마를 볼 수 있었다.
일본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그의 신공.
온몸의 혈도에서는 마력이 가지런하게 흐르며 자연적으로 뇌기(雷氣)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신공(神功)에 결합한 수십 가지의 묘리는 마력을 일정 이상 사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극성의 뇌령신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의 최종적인 무(武)의 형태에 김현우는 감탄했고-
"이제 네가 할 일은 나를 꺾는 것이다."
곧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너는 뇌령신공의 형을 익혔고, 또한 부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네 녀석만의 무(武)를 만드는 것이다."
"……!"
"모방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베끼라는 것도 아니지. 너는 오롯이 너의 것을, 누가 뭐래도 '너의 무(武)'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래-"
나처럼 말이다.
천마(天魔)의 말에 김현우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이전과 같았으면 김현우는 천마에게 물었을 것이다.
나의 무(武)가 무엇이냐고.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지금까지 써온 기술들은 거의 모든 것이 웹소설 속에 나오는 기술들을 따라하고 모방한 것이었으니까.
모방(模倣)
모든 시작은 모방에서 시작하지만, 김현우는 딱히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나아가지 않은 이유?
그에게는 더 이상 앞이 없었으니까.
그래, 그거였다.
그에게는 스승이 있었으나, 없었다.
웹소설 속에 존재하는 모든 주인공은 그의 스승이었으나, 그에게 진정한 무(武)를 알려주지는 못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무공(武功)들은 그에게 형태를 주었지만, 그 묘리를 알려주지는 못했고.
만화 속에 나오는 모든 기술(奇術)은 그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새로운 것을 주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앞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아갈 수 없었고.
그렇기에-
"……!"
김현우는 자신 스스로가 천마(天魔)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일만 번이 넘는 죽음.
그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의 몸을 고양시켰고.
파직- 파지지직!!!
"와라."
그의 한마디에,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다.
작지 않은 장원에 거대한 번개가 내리친다.
수백, 수천 번의 번개가 어지럽게 내리치며 천마를 보호하고, 김현우의 몸이 그런 번개의 사이를 망설임 없이 지난다.
그와 함께 이뤄지는 격돌.
꽝!
김현우의 주먹과 천마의 검이 교차한다.
꽝! 콰드드드득!
일 초를 넘어 십 초.
콰드드드득! 파지지직!
십 초를 넘어 백 초.
백 초를 넘어 천 합.
몇 초 만에 그런 공격이 오갔는지는 인지하지 못한다.
이곳은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허수 공간이니까.
유일하게 이곳의 시간을 알리던 죽음의 숫자 또한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천마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지 않았으니까.
시간마저도 제대로 셀 수 없는 그 짧은 의식의 가속 속에서, 그들은 싸움을 벌였다.
그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오롯이 전력을 다해서.
쪼개진 시간 속에서 천마의 검이 10번의 움직임을 취하고, 김현우의 몸이 맞춰 반응해 10번의 합을 맞춘다.
이미 시각은 마비되었다.
내리치는 번개 때문에.
다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저 손과 발이 따르는 곳으로 움직여 전투를 벌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어느 순간-
파직-!
장원을 뒤덮고 있는 푸른 번개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땅바닥에 내리꽂히는 푸른 번개가 검붉게 변하고, 천마의 검을 받고 있는 김현우의 몸에 마찬가지로 변화가 일어난다.
김현우의 몸에 검붉은 마력이 흘러나오고, 그 뒤에 검은 흑익(黑翼)이 생겨난다.
그와 함께 나타나는 흑원(黑圓).
파지지직! 파지지지지직!!!!
흑원이 공명하며 검붉은 번개가 방전하며 주변을 장악한다.
한순간 밀리는 푸른 번개.
그 모습을 보며 천마는 실소를 터트리며 생각했다.
'벌써 도달한 건가.'
김현우의 뒤에 나타나 있는 흑익과 흑원. 그것은 분명 그가 언젠가 자신에게 한참 죽임을 당할 때 보여주었던 모습이었으나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괴물이로군.'
그때, 김현우의 뒤에 자리 잡은 흑익과 흑원은 그저 어설픈 마력의 집합체일 뿐이었다.
그 어떤 묘리를 담지도 못한, 그저 순수하게 '멋'을 위해 만들어 낸 마력의 집합체.
러마 지금 그가 만들어 낸 저것들은?
'두 개로 나누었나.'
흑익(黑翼)에는 반(反)의 묘리를.
흑원(黑圓)에는 극(極)의 묘리를 집어넣어 형상화 시킨 그 모습을 본 천마는 순수하게 감탄했고.
콰가가가각!!
곧 다시 시작된 김현우의 공격에 검을 휘둘렀다.
허나, 전투의 양상은 아까와는 달랐다.
백 번의 합이 이뤄지면 그중 다섯 합이 어그러진다.
그 이유는 바로 천마 때문.
"큭……!"
김현우의 공격에 천마의 공격이 따라오지 못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검붉은 번개는 뇌신(雷神)이라고 추앙받았던 그의 번개를 먹어치우며 주변 공간을 방전시켰고.
천마는 점점 더 불리해지는 상황이었음에도-피식.
웃음을 지었다.
글쎄, 왜일까?
천마는 밀리고 있는 자신 스스로도 왜 미소를 지었는지 알지 못했으나, 그는 무엇인가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인가 아쉬우면서도 씁쓸한 무언가를.
카챵!
그리고, 천마가 그 생각을 느낌과 동시에, 그의 칼이 튕겨져 나갔다.
짧은 순간 무방비가 된 천마(天魔).
그것은 말 그대로 굉장히 짧은 콤마단위의 시간이었으나, 김현우와 천마에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천마는 김현우와 눈을 마주쳤다.
일만 번을 죽었음에도 자신감에 차 있는 그 눈빛.
그의 뒤에는 거력(巨力)이 담겨 있는 주먹이 천마의 몸을 꿰뚫기 위해 움직였고.
천마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파짓!
"……?"
-번개가 멎었다.
천마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김현우의 주먹이 아닌 뒤돌아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에 천마는 입을 열었다.
"왜 죽이지 않았지?"
천마의 물음.
그에 김현우는 슬쩍 천마를 돌아보더니 이내 슬쩍 뜸을 들이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제자가 스승을 죽이지는 않잖아?"
그의 말에 천마의 눈이 저도 모르게 휘둥그레 떠지며 입을 벌렸으나, 이내 천마는 '허'하는 웃음을 짓고는 답했다.
"지랄하지 마라, 광견(狂犬). 내가 언제 너를 제자로 받았지?"
천마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 김현우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에이 씨발, 왜 살려줘도 지랄이야?"
"누가 살려달라고 했나?"
"진짜 뒤져볼래?"
"해 봐라."
천마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들었으나-
"아오, 진짜."
이내 그는 올렸던 주먹을 내리고는 혀를 찼다.
그 모습에 천마는 여전히 피식거리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그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장원 내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검을 집어 들고는 말했다.
"이제 볼 장 다 봤으면 빨리 꺼져라, 너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니까."
천마의 타박에 김현우의 눈에 짜증이 들어찼다.
"걱정하지 마라 새끼야, 네가 가지 말라고 지랄해도 갈 거니까."
거 씨발 정이라고는 좆도 없네.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이내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고, 천마도 마찬가지로 김현우의 반대편으로 움직여 장원의 끝에 있는 목제 의자에 몸을 뉘인 채 김현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장원의 끝, 김현우가 처음 천마가 있는 곳으로 들어왔던 그곳에 선 김현우는 뭔가를 혼자 중얼거리다 이내-
"야!"
천마를 불렀다.
그에 천마가 김현우를 바라보자, 김현우는 '씨발'하고 짧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지랄하지 말고 좀 꺼져라."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 천마.
그에 김현우는 마찬가지로 오만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이내 그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장원 내에서 먼지처럼 사라지기 시작하는 그의 몸.
그 마지막-
김현우의 거의 다 사라졌을 때.
불현듯 김현우는 우물쭈물하다 한숨을 내쉬더니-
"고맙다! 이 스승 개-!"
그렇게 소리쳤고.
천마는 그 말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린 김현우를 보며 잠시 묘한 표정을 짓다, 이내 읊조렸다.
"미친놈."
천마의 짧은 욕설과 함께 그는 옆에다 자신의 검을 비스듬히 세워 둔 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사후(死後)의 제자라- 뭐,"
이내 피식 웃으며-
"나쁘지 않군."
그렇게 중얼거렸다.
# 119
119. 황금 원숭이의 재림(再臨)(1)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제헌터 협회의 지하 별관.
그곳은 마치 군대의 작전 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방 정면에는 벽 한 면을 덮을 정도로 거대한 디스플레이가 걸려 있었고, 그 디스플레이에는 지도와 함께 이런저런 상황판이 띄워져 있었다.
그 아래에 놓여 있는 수십 개의 책상 위에서는 컴퓨터와 서류가 어지럽게 놓여 있고 그사이로는 협회원들이 돌아다니며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혼잡한 상황실의 맨 뒤.
"……."
불과 2달 전, 김현우의 도움으로 국제 헌터 협회의 실세를 완전히 거머쥔 남자 리암은, 조금 전 들어온 협회원에게 현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4개라고?"
"예, 지금으로부터 31시간 전, 미국 몬타나 주에서 첫 '재앙(災殃)'이상이 감지되었고, 그 뒤로부터 24시간 전과 17시간 전에 각각 태국과 멕시코 지역에서 재앙이 감지되었습니다."
"……그래, 그것까지는 들어서 알고 있지. 그런데 또 하나가 추가되었다고?"
"예. 이번에는 한국에서 이상이……."
"돌겠군."
협회원의 말에 리암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이틀 전에 나타났던 첫 재앙(災殃)경고.
사실 그때만 해도 리암은 그리 큰 걱정을 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리암에게는 김현우가 있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으나, 김현우는 평소 행보와는 다르게 재앙이 벌어지는 상황에 한해서 재앙을 처리해 준다.
물론 재앙을 처리한 뒤 그에게 지급되는 보상액은 상당히 거대했으나 그럼에도 상관없었다.
도시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는 것보다는 김현우 개인에게 보상을 지급하는 게 더 싸게 먹혔으니까.
물론 김현우를 믿는다고 해서 재앙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으나 김현우 덕분에 걱정거리가 확실히 줄어 있기는 했다.
그런데-
"……4곳에서, 연속으로?"
지금 디스플레이에 띄워져 있는 4개의 재앙경고는 그의 머리를 무척이나 복잡하게 했다.
"각 나라 상황은?"
"우선 사전에 재앙 경고를 받은 태국과 멕시코에서는 대형 길드와 상위권 S등급 헌터들을 초빙해 재앙(災殃)을 막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뜸을 들이며 서류판을 바라보던 협회원은 계속해서 말했다.
"저희 쪽에서는 '에단 트라움'과 '라일리', 그리고 몬타나 주의 대형 길드인 이클립스 길드가 재앙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재앙 출현시간은?"
"추정 예정시간은 이제 10분 내외입니다."
그의 대답에 리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는 우선 몬타나 주에 있는 재앙을 제일 우선으로 생각한다.'
어차피 현재 베트남과 멕시코는 재앙경고를 일찍 접할 수 있었기에 나름대로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재앙경고가 조금 늦게 발령이 난 한국이 원래라면 걱정이었겠지만, 한국에는 김현우가 있다.
공식적으로 재앙을 혼자서 2번이나 물리친 그.
그렇기에 리암은 한국에 대한 걱정을 슬쩍 지워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지도 위에 실시간으로 촬영되고 있는 영상에 시선을 주었다.
그렇게 리암이 이제 막 영상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몬타나 주의 거대한 상급 미궁의 입구에는-
"……."
침묵이 가득했다.
S등급 랭킹 4위인 '에단 트라움'은 자신의 투핸디 소드를 쥔 채, 긴장한 표정으로 떨림이 멈춘 미궁 앞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것은 라일리도 마찬가지였다.
이 미궁 앞에 서 있는 수백의 이클립스 소속의 헌터들도 각자의 무기를 쥔 채 미궁의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조준, 준비."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지원을 받은 탱크와 각종 화력무기도 미궁 안에서 빠져나올 재앙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에단 트라움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시스템에 각인되어 있는 자신의 스킬을 사용하고 있을 때.
"저건-"
그는, 아니 수인은 빠져나왔다.
머리에 쓴 금고아.
분명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등 뒤에 있는 망토는 마치 바람이 부는 것처럼 펄럭였고,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여의봉(如意棒)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
그래.
그 남자, 아니 그 수인(?人).
하늘을 다스리는 큰 성인이자-
"이번에는 저번 계층이랑은 다르게-"
제천대성 미후왕 (齊天大聖 美?王)이라고 불리는 그는-
"환영 인사가 거한데?"
장난스레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는 많은 헌터들을 보며 중얼거렸고.
툭!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여의봉을 어깨춤에 짊어진 제천대성은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빨리 위로 올라가야 해서 전부 분신술(分身術)로 쓸어버릴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나를 환영해 준다면 또 마음이 흔들리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그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에단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좋아, 정했다."
이내씩 웃으며 대답했다.
"분신술 말고 내가 직접, 너희들을 상대해 주도록 하지."
그의 오만하고도 광오한 말.
이 압도적인 숫자의 차이를 보고서도 무척이나 느긋하게 그런 말을 내뱉은 수인.
그 모습에 몇몇 이큽립스 길드 소속의 헌터들은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으나, 에단과 라일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몇몇 헌터를 제외한 대부분의 헌터도 그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냐?
그들은 이미 학습을 했으니까.
재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일본에서 일어났던 재앙도 있었고.
독일에서 일어났던 재앙도 있었다.
두 번의 재앙.
그 두 번의 재앙 속에서, 적어도 이곳에 있는 헌터들은, 미궁 속에서 걸어 나온 저것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강함을 가졌는지 간접적으로 학습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런 제천대성의 느긋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굳은 표정을 유지하며 명령을 기다렸다.
그리고, 에단이 입을 열려던 그 순간-
"자, 그럼 너희들을 전부 상대하기 전에 말이야. 그래도 약한 놈은 걸러야겠지?"
제천대성은 그리 말하며 자신의 어깨춤에 대고 있던 여의봉을 집어 들었다.
"일일이 상대하려면 좀 많잖아? 그러니까-"
도경(道經)이 적혀 있는 여의봉.
"우선 좀 거르고 시작하자."
그것을 들어 올린 제천대성은 이내-
"커져라, 여의(如意)"
"!!!"
꽈아아아아아아────!!
아파트와 비견해도 될 정도로 거대해진 여의를, 에단의 머리 위로 찍어 내렸다.
***
태국 방콕 외곽의 중급 미궁의 주변.
"살려줘! 살려줘! 제발…… 제발 살려줘! 꺽-!"
등 뒤에 붉은 홍익(紅翼)을 달고 있는 대붕(大鵬)은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헌터의 몸을 그대로 부숴 버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인 주변.
중급 미궁의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던, 방콕 특유의 헌터 거리는 완전히 무너진 공사판처럼 박살이 나 있었고, 그 주변으로 사람들의 시체가 보였다.
수많은 시체들이.
대붕은 자신이 만들어 낸 그 처참한 광경을 아무런 감흥도 없이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과 함께 몸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전 계층보다는 괜찮긴 한데. 그래도 미개하군.'
대붕은 죽어 있는 헌터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처음 자신이 미궁에서 빠져나올 그 아주 잠깐의 타이밍이 9계층인들은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달려드는 이들 중에는 대붕 입장에서는 나름 이 정도면 괜찮다는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 전 계층인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지 대붕의 힘을 막기에 헌터들의 힘은 역부족이었다.
아니, 역부족을 넘어서 절망적이었다.
태국에서도 나름 제일간다는 헌터들이 모여 일제히 그를 공격했지만, 정작 그는 단 하나의 상처도 입지 않았으니까.
'뭐, 나쁘지 않군.'
대붕은 만족했다.
자신은 다른 형제처럼 동등한 상대와 싸움을 벌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약자들을 학살하는 데 더 재미를 느끼는 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나름대로 즐길 수 있겠어.'
대붕은 쓰러져 있는 헌터들의 시체를 보며 조금 전을 회상했다.
그가 휘두른 날갯짓 한 번에 불타오르거나, 몸이 절단 되어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죽어나가던 그 모습들.
대붕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 분위기가 좋단 말이야.'
그는 아까 전 헌터들이 비명과 절망으로 만들어낸 기억을 떠올리며 낄낄거렸고, 곧 그가 그렇게 걸음을 옮긴 지 얼마나 되었을까.
"……?"
대붕은 곧, 아무도 없는 거리에 홀로 서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은 듯 이리저리 뻗쳐 있는 삐죽머리.
옷은 도대체 몇 년이나 입은 것인지 완전히 넝마가 되어 있는 옷을 입고 있는 남자.
그 누가 봐도 거렁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너덜거리는 옷을 입고 있는 그는, 묘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대붕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정적.
그리고-
"넌 또 뭐야?"
남자의 입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한순간 들린 목소리에 대붕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거렁뱅이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오히려 대붕의 얼굴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귀 먹었냐? 너 뭐냐고!"
거렁뱅이의 말에 대붕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미친 건가?'
그의 머릿속에서 잠시간 떠오른 생각.
대붕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짓고는 거렁뱅이의 말에 대답했다.
"나는 대붕(大鵬)이다."
"뭐? 대붕이? 뭐 이름이 그따위야?"
거렁뱅이의 말.
분명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말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대붕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저런 놈일수록 죽이기 전에 보이는 모습이 더 간절하지.'
그렇기에 대붕은 딱히 인상을 찌푸리지 않은 채, 그가 죽음 직전에 보일 모습을 생각하며 거렁뱅이에게 다가갔고-활짝! 콰드드드드득!!!
거렁뱅이에게 다가간 대붕은 이내 그의 앞에서 자신의 홍익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 그와 함께, 거렁뱅이의 앞에 수십, 수백 개의 깃털이 일제히 김현우를 노리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조금 전 미궁에 모여 있던 헌터들을 모조리 죽였던 그 기술이 다시 한번 그의 날개에서 재현되고, 대붕은 이제 곧 변할 거렁뱅이의 표정을 기대하며 입가를 비틀었지만-
"뭐하냐?"
거렁뱅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붕에게 대꾸했다.
"뭐, 뭐?"
그제야 대붕은 당황했고, 그는 자신에게 겨누어져 있는 수십, 수백 개의 불타는 깃털들을 보며 짧게 읊조린 뒤-
"뭐 하냐고-"
그의 얼굴에 망설임 없이-
"이 씹새끼야!"
꽈아아앙!!!
"끄게에에!"
일권을 내질렀다.
마치 폭음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튕겨져 나가는 대붕의 몸, 그는 콘크리트에 처박힐 때까지 본인이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고-
"헉!"
온몸에 거적때기를 입고 있는 거렁뱅이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뒤에야 자신이 맞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반격을 준비했으나-
"이미 늦었어."
병신아.
이미 거렁뱅이, 아니-
파지지지직!!!
김현우의 발은 그의 심장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검붉은 뇌기가 서린 김현우의 발이 그 어떤 헌터도 제대로 건드리지 못했던 그의 심장을 뚫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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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등반자 사타동의 세 마왕 '대붕(大鵬)'을 잡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위치: 태국 방콕
[등반자 '상상의 새' '대붕(大鵬)'을 잡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정보 권한의 실적이 누적됩니다.]
[현재 정보 권한은 중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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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눈앞에 떠오른 로그를 바라보고는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썅 내가 왜 태국에 있어?"
# 120
120. 황금 원숭이의 재림(再臨)(2)한국, 의정부 미궁의 앞.
"큭!"
이미 그곳은 아수라장이 된 지 오래였다.
"일검(一劍)-!"
김시현의 손에서 무섭도록 빠르게 빠져나오는 발도가 청사(靑獅)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간다.
콰득!
그대로 옆구리의 직격한 김시현의 일검.
허나-
"고작 이런 걸로 내 가죽을 뚫을 수 있다 생각하는 거냐?"
"끅!?"
조금 전까지 한석원을 한입에 씹어 삼키려던 청사는 곧바로 몸을 돌려 김시현에게로 몸을 틀어 거대한 앞발을 들어 올렸고.
꽝!
"큭!"
이내 푸른 사자는, 바로 앞에서 나타난 미령의 일격을 맞고 자신의 몸을 뒤로 뺐다.
그런 미령의 뒷모습과 함께 보이는 정경.
"하……."
김시현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3시간 전에 헌터 협회를 통해 내려진 재앙(災殃)경고.
그 재앙 경고를 듣고 서울 길드와 고구려 길드, 그리고 아랑 길드는 재앙을 막기 위해 의정부 미궁 앞에 모였으나, 그 결과는-
"끅-"
-처참했다.
김시현은 허망한 표정으로 주변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당장 보이는 눈앞의 한석원은 완전히 박살 나버린 자신의 방패를 든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저편의 부서진 건물 근처에는 건물 더미에 처박혀 정신을 잃고 있는 이서연이.
그리고 그 주변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도 가지 않을 만큼 많은 헌터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콰드드득!
"큭!"
"크하하하! 네 녀석은 여기에 있는 떨거지들과는 다르구나! 하지만-"누가 보아도 처참해 보이는 그 정경 속에서, 미령은 미궁 속에서 나타난 푸른 사자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겉으로 봤을 때일 뿐.
너도 결국에는 다른 놈과 마찬가지다."
-!"
꽝!
미령은 순간적으로 거대해진 청사의 꼬리를 막아내기 위해 양손을 지켜 들었으나, 결국 그녀는 청사의 꼬리를 전부 막아내지 못했다.
불품없이 튕겨나가는 미령.
"아……."
그 모습을 보며 김시현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으며 미령이 날아간 곳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
그 상황 속에서 김시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며 한 사람을 생각했다.
'현우 형은 도대체 어디에……!'
김현우.
불과 1달 전, 갑작스레 천마의 검을 들고 사라져버린 김현우는 지금 이 상황이 될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그렇기에 김시현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오지 않는 김현우를 살짝 이긴 해도 원망했다.
물론 김시현 스스로도 깨닫고 있기는 했다.
애초에 지금 상황이 김현우를 원망할 상황도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원망해야 하는 것은 언제까지나 현실에 안주해 힘을 키우지 않았던 본인이라는 것을, 김시현은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눈앞의 광경을 눈에 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고.
후드드득…….
그런 상황에서 콘크리트 바닥에 박혀 있던 몸을 일으킨 미령은 붉은 피가 스며 나오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청사를 바라보며 힘겨운 한숨을 내뱉었다.
"……."
그녀는 청사를 마주보며 자세를 잡으면서도 끊임없이 생각을 이어나갔다.
'기술이 전부 통하지 않아.'
기술이 통하지 않는다.
기본인 박투술부터, 마력을 사용해야만 사용 할 수 있는 패왕류의 모든 기술들.
미령이 자신의 스승인 김현우에게 전수받은, 그녀의 자신감의 원천이 되는 기술들은, 저 푸른 사자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래, 전혀.
그 어떤 기술도 푸른 사자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없었다.
'……왜?'
미령은 그 이유를 생각했다.
저 사자에게 유효타가 먹히지 않은 이유.
그 주제와 함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
허나 그 생각들은 얼마 가지 않아 하나로 일축했다.
'……내가 약해서.'
그래, 그 하나로.
미령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 청사의 미소를 보며 자신의 스승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패왕류는 약하지 않다. 만약 네가 배운 무(武)가 다른 사람에게 통하지 않거든, 그것은 네가 배운 무(武)가 약한 것이 아니라 네 배움이 아직 부족한 것이다.'
그녀가 한참 탑에서 스승님에게 무(武)를 배우고 있을 때 들었던 말.
미령은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탄식했다.
'역시 나는 아직 약하다.'
미령 스스로가 강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강함의 기준은 스승님이고, 자신보다 약한 이들은 미령의 눈에는 그저 한심한 머저리로 보였을 뿐이었으니까.
허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이 더 나약해졌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강함을 동경(憧憬)하기만 했기에,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었다는 것을, 그녀는 청사와 싸워보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자, 이제 충분히 즐겼으니 깔끔하게 먹어치워 주도록 하지."
그런 깨달음과 함께 들리는 청사의 목소리.
미령이 청사의 모습을 바라보고, 청사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영광으로 알아라.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은 십만 천병(天兵)을 먹어치운 나의 업적이니까."
그와 함께, 그의 아가리가 벌려지기 시작했다.
크게, 더 크게.
마치 하늘을 삼켜버릴 듯 크게 발려지는 청사의 아가리.
김시현은 그 모습을 보며 절망감을 느끼며 고개를 떨궜고.
한석원은 망연하게 거대해지는 청사의 아가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것 같구나.]
"-!"
미령의 귓가에.
[그렇지?]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미령이 한 달 전에 들었던 목소리.
그녀는 어렵지 않게 이 목소리가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김현우가 천마의 검과 함께 사라질 때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였다.
이 급박한 상황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무척이나 여유로운 느낌으로 미령에게 속삭였다.
[자, 내가 도와주마. 너는 내 힘을 받기만 하면 된다.]
목소리의 속삭임.
허나 미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에, 목소리는 의문이 가득 찬 느낌으로 물었다.
[어째서 힘을 받지 않는 것이냐?]
그 물음에 미령은 자신의 머릿속 깊은 곳에 새겨져 있는 말을 꺼냈다.
"대가 없는, 힘은 없으니까."
그것은 언젠가 김현우가 미령에게 했던 말이었다.
대가 없는 힘은 없다.
시간을 투자하든, 그 어떤 것을 희생하든, 힘의 대가는 존재한다는 스승님의 말.
미령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목소리의 말을 거절했다.
그에 목소리는 재미있다는 듯 답했다.
[그래서, 그 대가가 무서워서 힘을 받지 않겠다. 그 말이냐?]
미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목소리와의 대화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청사의 입은 실시간으로 커져, 이제 이 근처를 한 번에 집어 삼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해 졌다.
눈으로 보고 있지만, 비정상적인 풍경.
그리고-
[좋다.]
구우우우우!!
그와 함께 미령의 뒤에 묶여 있던 주머니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으로 빛을 퍼트리는 주머니.
미령은 곧 자신의 몸 안으로 침투해오는 이질적인 마력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열었으나-
"무슨-!"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이번에는 대가를 받지 않겠다. 그래, '이번에는']
그와 함께 미령이 무엇을 할 새도 없이 푸른 마력은 미령의 몸 아래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고 -
[이번에는 한번 느껴보기만 하거라.]
그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이매망량(?魅??)의 정점이자-]
분명 칠흑 같은 흑발이었던 그녀의 머리가 새하얀 백발로 변하고. 그녀의 홍안이 핏빛처럼 짙어진다.
[또한 백귀야행(百鬼夜行)의 두목인-]
계속해서 피를 흘리고 있던 옆구리는 마치 처음부터 상처가 없었다는 듯 재생되기 시작했고-
[나-]
그녀의 오른쪽 이마에는 붉은색의 뿔이 솟아났다.
그와 함께-
[괴력난신(怪力亂神)의 힘을 말이다.]
씨익-
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시스템 룸.
"지금 전 세계에서 등반자가 나타나서 개판을 벌이고 있다 이 말이야?"
"네, 맞아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고민하다 말했다.
"좋아, 대충 상황은 이해했어."
김현우는 아까 전, 태국에서 대붕을 죽인 뒤 시스템 룸에 들어와 아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정리하곤 이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좀 이상한데?"
"네? 뭐가요?"
"아니, 보통 등반자가 이렇게 4명이나 한 번에 올라올 수 있어?"
김현우의 의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까지 나타난 등반자들은 모두 개인이었다.
맨 처음 만났던 적귀(赤鬼)도 몬스터를 끌고 왔으나 혼자였고.
천마(天魔)도 혼자였다.
괴력난신(怪力亂神)도 휘하의 부하들이 있기는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답했다.
"아뇨, 그건 불가능해요. 엄청난 우연이 겹치면 모르겠지만……."
"그럼 이 상황은 뭔데?"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슬쩍 고민하는 듯하다 답했다.
"아마 이건 '본체'가 있을 확률이 높아요."
"……본체가 있다고?"
"제가 저번에 한번 말씀해 드린 적 있죠? 등반자는 자신의 업적에 따라 다른 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다고."
"……설마."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아브가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고,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마, 지금 미궁에서 빠져나온 4명 중 이 집단을 이끄는 본체가 있을 거예요."
"……등반자를 4명이나 끌고 다닌다고?"
허.
김현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자 아브는 굳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답했다.
"상위 등반자라면 가능해요. 그들의 힘은 말도 안 되는 재앙 수준이니까요."
아부의 말에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안 그래도 갑자기 태국으로 나와서 혼란스러운데'
김현우는 슬쩍 그 의문을 뒤로 집어넣었다.
지금은 의문을 풀 때 보다는 당장 앞에 있는 일들을 해결해야 할 때였으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을 일축하곤 곧바로 아브에게 질문했다.
"그럼 그 본체만 잡으면 나머지 등반자는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거야?"
"예.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럼 그 본체로 보이는 놈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슬쩍 허공을 보는 듯하다 답했다.
"제가 볼 때 본체로 보이는 등반자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나타난 등반자예요."
"그래? 그런 그곳에 있는 놈을 잡으면 나머지 등반자들이 전부 사라진다 이거지?"
"네, 맞아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민했다.
"미국, 미국이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가디언의 입장에서는 미국에 있는 본체를 잡아 빨리 다른 등반자를 없애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그래.
가디언의 입장으로만 생각해 보면.
'하지만-'
김현우의 입장으로 생각해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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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통로를 통해 새로운 '등반자'가 9계층에 도착했습니다.
남은 시간 [ 00: 00: 00 ]
위치: 미국 몬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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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위치: 멕시코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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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위치: 한국 경기도
'……한국에 등반자가 출현했다.'
지금 미국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는 김현우의 동료들이 있으니까.
'미령이 있기는 해도-'
그래도 안심이 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분명 강했지만, 김현우가 생각하기에 그녀는 '등반자'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 로그를 번갈아 보며 고민했고-
"어?"
곧, 자신의 앞에 떠오르는 로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멍한 소리를 냈다.
# 121
121. 황금 원숭이의 재림(再臨)(3)거대해지고 있던 청사의 아가리가 돌연 팽창을 멈춘다.
"무슨-?"
아니,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입은 팽창을 멈춘 것이 아닌, 다 이상 팽창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주변에 갑작스레 흩뿌려진 마력 때문에.
갑작스런 상황에 청사의 눈가가 찌푸려지고, 그의 시선이 마력의 근원을 찾아나간다.
그리고-
"너는……뭐지?"
그는 볼 수 있었다.
아까 전, 자신과 싸움을 벌이던 그 계층인을.
허나 모순되게도, 그 소녀는 이전과는 달랐다.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핏빛처럼 진하게 바뀌어 있는 홍안(紅眼)도.
백발처럼 새 하얗게 변해 있는 그 머리칼도.
이마 위에 나 있는 붉은 뿔도.
그리고-
"이 마력은 대체-!"
자신의 업(業)을 누를 정도로 기이한 이 마력까지도, 아까 전의 그 계층인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완전히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청사는 당황했으나, 이내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미 거대해진 자신의 아가리를 벌렸다.
순식간에 이 세상을 혼자 집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게 벌려지는 아가리.
이빨 하나하나가 소형 빌라와 같은 크기를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상황.
그에 청사는 찌푸리던 인상을 피고는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막는 방법을 알았다고 해도 늦었다!"
이미 청사의 능력은.
그의 업(業)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혼자서 10만 명의 천병(天兵)을 먹어치운 그만의 업은, 완벽하지는 않아도 완벽에 가깝게 그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청사는 자신만만하며 아가리를 들이밀었고.
자신에게로 들이밀어진 아가리를 본 미령은, 이내 상어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이빨을 드러내며-크구구구궁!
-일 보를 걸었다.
"!"
그와 함께, 청사는 무엇인가가 본능적인 무엇인가를 감지했다.
순간적으로 청사의 눈이 다시 찌푸려지고, 그의 가슴이 크게 한번 두근거린다.
청사가 그 본능적인 감정을 떠올리기도 전에, 그녀는 또 한 보를 내딛었다.
-이 보
주변의 대기가 변화한다.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세상. 허나 청사는 느낄 수 있었다.
그 무언가, 저 자그마한 한 걸음으로 인해 바뀌어 나가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더욱더 크게 입을 벌렸고.
저 소녀를 조금이라도 빨리 먹어치우기 위해 조금 더 빠르게 나아갔다.
-삼 보
소녀가 한 걸음을 더 움직였다.
그리고- 그제야 청사는 자신의 머릿속에 본능적으로 떠올랐던 감정의 실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위기감'.
그래, 그것은 틀림없는 위기감이었다.
-사 보
그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
그는 움직임이기를 그만두었다.
아니, 움직임을 그만둔 것이 아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움직이는 것을 제지당했다.
당장이라도 소녀를 집어삼키기 위해 쩍 벌려졌던 입은 그 상태로 고정당했고, 그의 몸은 그녀의 사 보를 기점으로 이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별 볼 일 없는 업(業)을 가지고 그렇게 무게를 잡아서야 되겠느냐?"
그녀는 입을 열었다.
"뭐- 라고?"
청사는 벌려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려가며, 목소리로서 그 활자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최선.
그 모습을 보며 그녀는 깔깔거리더니 말했다.
"보아하니, 제대로 입을 열 수조차 없는 모양이구나, 우둔한 괴이(怪異)야."
그녀의 말에 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괴이(怪異)라고? 웃기지 마라! 나는 괴이(怪異)가 아니라 사타동의 세 마왕 중 한 명인 청사(靑獅)다!"
이전과는 다른, 사자의 포효 같은 말.
허나 그럼에도 그녀는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사타동의 세 마왕이라, 고작 내 기술 하나조차 막지 못하는 네가, 마왕(魔王)이라는 이름을 쓸 자격은 없다고 보인다만."
비웃음을 잔뜩 머금은 그녀가 한 보를 더 내딛었다.
-다섯 보
그와 함께, 청사(靑獅)의 아가리가 닫히기 시작한다.
소형빌라와 같은 크기인 거대한 이빨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고, 청사의 몸이 마치 짓눌리듯, 그 피부가 찌그러지기 시작한다.
그에, 청사(靑獅)는 화가 난 듯 또 한번 포효했다.
"네-녀석-! 내 업적만 제대로 인정되었다면 네 녀석 따윈-!"
그녀에게 막힌 것이 천추의 한이라는 듯 이제는 그 푸른 눈까지 붉게 충혈 된 청사의 모습.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더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네가 이 '탑'에게 나머지 업적을 인정받으면 나를 이길 수 있다고?"
그녀는 한 보를 더 내디뎠다.
-여섯 보
꾸드드드득!!
청사의 몸이 찌그러진다.
마력의 팽창으로 인해 찌그러진 피부에는 이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창사의 몸은 팽창한 마력을 견디지 못하듯 여기저기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이제 말조차도 하지 못하게 된 그에게 말했다.
"네가 설령 네 모든 업적을 인정받는다고 해도 나를 이길 수는 없다. 왜냐?"
왜냐하면-
"나도 너와 같거든."
-일곱 보
우드득! 우드드드득!
삐거덕거리던 청사의 뼈가 부서진다.
순식간에 부서지고 갈려진 그의 몸은 넝마가 된 채 차가운 땅바닥에 몸을 뉘이고, 그녀는 어느새 청사의 앞까지 다가가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 업적을 인정받지 못한 등반자가 너만 있을 줄 알았나?"
-여덣 보
청사의 눈알이 터져나간다.
그의 몸은 이미 완전히 찌부라져 살아 있는 게 의심이 될 정도로 심각해 보였다.
그녀는 완전히 박살이 난 청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만약 내가 모든 업적을 인정받았다면, 아마 나는 네게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 소개하지 않았을 거다. 만약 내가 모든 업적을 인정받았다면-"
-아홉 보
주변의 세상이 터져나간다.
하늘도.
땅도.
주변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이 하얀 빛을 발광하며 터져나간다.
"나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이 아닌-"
그 속에서, 청사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한줄기 정신을 통해, 그녀의 목소리를-열 보(十 步).
"모든 괴이(怪異)들의 신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우매한 짐승아.
-들을 수 있었다.
***
미국 몬타나 주 중심지에 위치한 도시 빌링스.
아니, 그것은 이제 도시라고 말할 수 없었다.
분명 찬란한 인류 문명의 꽃을 피우고 있던 그것들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폐허.
높은 고층빌라들은 이미 완전히 박살 나 조금이라도 세월이 지나면 그 마모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것만 같았고.
그것은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집, 차, 나무, 그 이외에 도시 내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부서져 더 이상 제 기능을 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래.
단 한 사람.
아니, 단 한 명의 수인 때문에.
"흐음."
그는 거대한 고층빌라에 앉아 있었다.
'이클립스'라는 영문 표기가 멋들어지게 장식되어 있었던 그 고층빌라 위에. 그는.
제천대성(齊天大聖)은 앉아 있었다.
그는 아직도 완전히 박살 난, 그리고 실시간으로도 계속해서 박살 나고 있는 도시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그가 만든 총 300기의 분신.
그것들은 분명 본체인 자신보다는 못했으나, 9계층의 도시를 부수기에는 한없이 적격했다.
상위등반자인 그의 분신은 못해도 하위 등반자와 비슷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자신이 이 도시를 파괴하기 위해 풀어놓은 분신들의 숫자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서히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불현듯 갑자기.
이 도시에 온 지 이제 하루가 살짝 지나는 시점부터, 그의 분신은 줄어들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순식간에 150기가 사라진다고?'
기본적으로 자신의 분신은 자신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 시비가 붙어 한두 명이 사라지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허나 이렇게 빨리, 그것도 150에 달하는 분신이 사라지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상황을 의문스럽게 생각했고.
"네가 본체냐?"
"!"
-그 상황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순식간에 자신의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제천대성(齊天大聖)은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였고, 그 위로 살벌한 바람이 지나갔다.
그와 함께 시작된 갑작스러운 싸움.
제천대성이 몸을 숙인 상태로, 뒤고 있던 여의를 위로 올려치며 자세를 바로 잡는다.
공격과 방어가 순식간에 이뤄진 제천대성의 한 수.
그러나-
"큭!?"
이미 제천대성이 그 여의봉을 제대로 사용하기도 전에 그는 제천대성의 반보(半步)앞에 서 있었다.
그는 뒤늦게 반응이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뒤틀었으나.
씨익-
그의 앞에 서 있는 김현우는 곧바로 주먹을 비틀어 올리며 자신의 주먹을 그의 앞에 가져다 대었다.
영거리(零距離)-
꾸우우웅?!
'-극살(極殺).'
김현우의 주먹이 제천대성의 배를 후려치자마자 마치 포탄처럼 쏘아져 나간 그는 부서진 빌라들을 뚫고 땅바닥에 처박혔고-쿠구구구구구구궁!
제천대성이 뚫고 들어간 빌라들은, 그 충격을 끝으로 모든 내구도가 마모되었는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린 것처럼 무너져 내리는 대형빌라들.
그 사이로.
"커져라, 여의."
제천대서의 거대한 봉이 무너지고 있는 빌라의 잔해를 밀어 올리며 나타나고-쿠그그그그그그가가각!!!
"!"
그와 함께 거대한 봉은 김현우의 머리통을 깨트려 버릴 기세로 내리쳐지기 시작했다.
그에 김현우는 곧바로 몸을 움직여 거대한 여의봉을 피해냈고-콰가가가가강!!
그 대신, 그가 서 있던 빌라는 거대해진 여의에 의해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그리고-
"이 새끼."
제천대성(齊天大聖)이 걸어 나왔다.
그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한 것이 무척이나 거슬렸는지 흉신악살(凶神惡殺)처럼 인상을 찌푸리곤 마주 본 김현우를 노려봤고, 김현우는 씩 웃으며 말했다.
"새끼는 너 같은 놈들 아들딸을 새끼라 하는 거고. 나는 사람인데?"
그의 장난 어린 말투에 그의 표정이 더더욱 찌푸려졌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제천대성의 이어지는 말.
그의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외형은 볼품없어 보였다.
온몸에는 완전히 찢어져 옷이라고도 보기 힘든 거적때기를 입고 있었고, 신발은 어디다가 팔아먹었는지 맨발이었다.
그런 모습으로 제천대성의 앞에 서 있는 남자, 김현우는 말했다.
"뭘 굳이 그걸 물어보고 그래?"
김현우는 그렇게 혼자 말하고 낄낄거렸으나 제천대성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고,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뭐, 진짜 모르겠다면 알려줄게."
"……."
"나 사육사야."
"뭐라고?"
"사육사 몰라? 동물 키우는 사람? 응? 너처럼 동물원에 갇혀 있다가 도망쳐서 세상에 민폐 끼치는 짐승들 키우는 사람이라고."
김현우의 말에 그는 한순간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멍한 표정을 짓다, 이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이 새끼가 계층인 주제에 한번 일격을 먹였다고 간댕이가 부어올랐네?"
"간댕이는 내가 부은 게 아닐라 니가 부은 거지, 어디서 원숭이 주제에 사람처럼 옷 입고 다니면서 깝쳐?"
제천대성의 말에 오히려 더 세게 받아치는 김현우.
"네 녀석, 죽여 버리겠다."
그에 제천대성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여의를 들어 올렸고-
"그래 빨리 와라, 나도 원숭이는 처음 패보는데,"
손맛이나 한번 보자.
김현우는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 122
122. 황금 원숭이의 재림(再臨)(4)완전히 부서진 멕시코시티의 외곽.
사람 한 명도 제대로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화마가 덮친 폐허 속.
그곳에는 한 명의 여성이 서 있었다.
회색의 도포를 입고, 손에는 채찍을 들고 있는 여성.
그녀의 쇄골이 있어야 하는 부분에는 마치 코끼리의 상아와도 같은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역곡선으로, 마치 그녀를 감싸듯 나 있었다.
"……."
그녀는 바로 휘감는 코와 뿔로, 신화 속의 신수(神獸)를 잡아먹는다는 업적을 가지고 있는 '백상(白象)'이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불타는 도시를 바라봤다.
그래.
움직이지 않은 채.
정확히는-
'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거야?'
움직이지 못한 채, 그녀는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처음 미궁에서 빠져나와 이 도시를 파괴할 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의 몸을 뜻대로 움직였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아니.
정확히는 어느 한 목소리가 들린 뒤부터, 그녀는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도대체 왜!!!'
쿵!
순간 그녀의 몸 주변으로 백색의 마력이 퍼져나간다.
그와 함께 슬쩍 움직여지는 그녀의 몸.
허나, 그것이 끝이었다.
그래.
고작 그것이, 몸을 슬쩍 움직이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너무 화려하게 한 거 아니야?"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듣고,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눈알로 목소리가 들려온 정면을 보았다.
그리고-
완전히 불타기 시작한 화마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온몸에는 자신의 몸을 가릴 수 있는 두꺼운 외투를 입은 채.
어깨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가면을 달고 있는 여자.
백상은 그녀를 노려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조금 전 들려준 목소리는-
'아까 전의 그-!!'
아까 전, 자신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던 그 목소리였으니까.
백상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는 듯 그녀의 앞으로 걸어와서는 말했다.
"설마 지금 말도 못 하나?"
"-!"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걸 보니까 맞나 보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슥 웃더니 이내 말했다.
"그러면, [입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해 줄게.]"
"이-!!?"
그녀의 말과 함께, 턱 막혔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백상은 경악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그녀는 만족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어때? 이제 말할 수 있지?"
그녀의 물음에 백상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네년,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백상의 앙칼진 대답.
도시를 파괴할 때 지었던 미소하고는 썩 다른 모습이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
"간단한 실험."
"뭐라고?"
"말했잖아? 실험이라니까? 실은 내가 얼마 전에 꽤 괜찮은 '능력'을 얻어서 말이야."
"이런 미친년-"
백상의 욕설에 그녀는 바로 답했다.
"글쎄, 갑자기 미궁에서 나타나더니 이 도시를 전부 박살 내버린 괴물한테는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말인데 말이야. 뭐 그래도-"
씨익-
"네 덕분에 얻을 게 좀 많으니까, 나는 고맙다고 말해둘게."
"뭐라고……?"
그녀의 말에 백상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현재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 여자의 반응은, 백상이 여태껏 보아왔던 계층인들의 반응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니까.
대부분의 계층인들은 자신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그것은 굉장히 당연한 이치와도 같은 것이었다.
탑을 올라가기 위해 계층인들의 세계를 멸망시키는 등반자들.
계층인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그렇기에 백상은 계층인들의 여러 마이너스적인 감정들이 담긴 시선을 받아왔고, 지금껏 그것을 무척이나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어떤가.
그녀의 눈에는 딱히 분노라고 할 만한 것은 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은 가벼운 웃음마저 띄고 있었고, 그녀의 입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진심으로, 이 도시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그녀는 가벼운 표정으로 이 참극을 일으킨 백상을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소름이 돋았다.
다른 계층인들하고는 전혀 다른 그녀의 반응에.
그리고 그렇게 백상이 소름을 느끼고 있을 때, 그녀는 입을 열었다.
"얻을 게 정말 많았어. 우선 당장 내가 이번에 처리하려고 했던 녀석들이 이번 습격으로 죄다 죽어버렸거든,"
게다가-
"마침, 이 '능력'에 대해 제대로 된 실험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잖아?"
그녀의 말에, 백상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그녀의 눈가에는 얼핏 광기가 엿보였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백상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때, 그녀는 말했다.
"자 그럼 말은 여기까지 했으니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고. 이번에는 실험을 해볼까?"
"실험이라고?"
"그래, 실험이야. 솔직히 사부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압도적으로 줄여줘서 너무 고맙기는 한데-"
그와는 별개로 이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실험해 봐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낄낄거린 그녀- 아니.
"자 그래도 실험체가 실험의 내용을 모른다는 건 좀 불쌍하니까 내가 특별히 실험의 내용을 알려줄게."
S등급 세계랭킹 2위-
"실험의 내용은 네가 이 언령에 얼마나 충실하게 잘 따르냐야. 알았지?"
-'암중비약(暗中飛躍)'은.
"자 그럼"
웃으며-
"두 눈부터 시작하자?"
백상에게 언령(言?)을 내뱉었다.
***
제천대성의 여의가 김현우의 대가리를 쪼개기 위해 내리쳐진다.
그러나-
꽝! 꽈가가가강!
휘둘러진 여의는 김현우의 머리 대신 애꿎은 땅을 때렸다.
그 여파로 주변의 지반이 모두 다 드러났으나, 김현우와 제천대성은 그런 지형의 변화에 신경 쓰지 않고 연속으로 공격을 주고받았다.
꽝!
김현우의 발이 제천대성의 오른발을 건다.
여의를 지지대 삼아 공격을 피한 제천대성이 역으로 다리를 휘두른다.
쿵!
휘두른 다리를 피해낸 김현우는 그가 지지대로 사용한 여의의 끝부분을 발로 차 그의 균형을 흩트리려 했으나-씨익-
"!"
"커져라, 여의!"
김현우가 여의의 다리를 후려치자마자 거대해지는 여의봉에 김현우의 공격은 그대로 힘을 잃었고-콰드득! 꽝!
그의 몸은 제천대성의 주먹에 맞아 저 멀리 날아갔다.
순식간에 주변의 빌라들을 망가뜨리며 땅바닥에 몸을 굴리는 김현우.
"!"
몸을 굴리는 김현우의 앞에 나타난 제천대성이 또 한번 여의를 휘두르지만-
"속았지?"
"!!"
조금 전까지 땅바닥을 구르고 있던 김현우는 제천대성이 여의를 내리치는 그 순간, 자연스럽게 자세를 바로 잡으며 그의 턱을 올려쳤다.
턱이 들리는 제천대성.
한순간 체공하는 제천대성의 몸에, 김현우는 곧바로 돌려차기를 먹였다.
꽝! 콰드드득!
포탄처럼 날아가는 제천대성.
그리고-
"!"
김현우는 곧 눈 깜짝할 새에 길이가 늘어나 자신의 몸을 찔러오는 여의를 피했다.
지속되는 싸움.
꽝!
김현우의 주먹이 제천대성의 갑옷을 찌그러뜨리고.
콰드드드득! 콰지지직!
제천대성의 여의봉이 그나마 남아 있던 주변 도시를 완전히 박살 내놓는다.
그야말로 공격 한 번에 도시가 들린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파괴적인 제천대성과 김현우의 싸움.
그리고-
"끅!"
그 힘의 균형에서 밀리기 시작한 것은-
"후읍!"
꽝!
바로 제천대성이었다.
그는 여의봉으로 주르륵 밀려나가는 자신의 몸을 부여잡고 이내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로 김현우를 마주봤다.
'이 녀석, 도대체 정체가 뭐지?'
제천대성은 여의를 잡고 있는 손이 저릿한 것을 느끼며 김현우를 바라봤다.
자신과 어느 정도 싸움을 이어갔음에도 별다른 무리가 없어 보이는 그를 보며 제천대성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1계층부터 이전 계층인 8계층까지, 제천대성은 별다른 무리 없이 탑을 올랐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라면 지금 그가 오르고 있는 9계층부터 시작해서 12계층까지, 자신은 별다른 무리 없이 탑을 오를 수 있어야 했다.
그래, 별다른 무리 없이.
순조롭게 탑을 오를 수 있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맨 처음 탑을 오를 때도 별다른 위기 없이 탑을 오를 수 있었고.
그로서, '손오공' 으로서의 모든 업적을 인정받은 지금은 더 탑을 오르기 쉬워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래, 그게 정상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저놈은 대체-'
제천대성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의 힘은 9계층에서 볼수있는 힘이라기에는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했다.
그래, 대부분의 업적을 인정받은 자신이 밀릴 정도로.
제천대성이 끊임없이 김현우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쯤, 김현우는 조용해진 제천대성을 보며 이죽였다.
"왜 갑자기 조용해졌어? 쫄았냐?"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자세를 바로잡는 김현우의 모습.
"건방진 새끼."
그 모습에, 제천대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리곤 자신의 여의를 고쳐 쥐었다.
"조금 강하다고 해서 안하무인으로 날뛰는구만."
"그건 내가 아니라 너지, 너 때문에 도시 박살 난 거 안 보이냐 이 원숭이 새끼야?"
김현우의 받아침에 제천대성의 인상일 찌푸려졌으나 이내 그는 말했다.
"후회하게 해주마."
"지랄."
김현우의 이죽거림을 들으며 제천대성은, 자신의 여의봉(如意棒)을 붙잡고 그를 노려보며- '9계층에서 '개방' 하기에는 조금 자존심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짧게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네 녀석에게 보여주기는 아까운 기술이나, 보여주도록 하지."
"보여주기 아까운 기술이 아니라 지금 보여주지 않으면 오지게 털려서 그런 게 아닐까?"
김현우의 이죽거림에도 제천대성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입을 많이 놀려두는 게 좋을 거다, 더 이상 그 입도 열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업적 개방"
쿠그그그그그긍!!!
제천대성의 몸에, 황금빛 오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의 그의 주변에서 퍼지기 시작한 황금빛 오라가 부서진 도시에 뿌려지고, 황금빛 오라에 파직거리는 전류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바뀌는 제천대성의 외형.
머리에 쓰고 있던 금고아의 위로 거대한 금원이 만들어지고, 분명 흑안이었던 그의 눈동자는 밝디 밝은 금안(金眼)이 되어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쥐고 있는, 도경(道經)이 새겨져 있는 여의봉은 붉은색과 황금색이 뒤섞여 이전에 들고 있던 일반적인 여의봉과는 다르게 변했다.
순식간에 변해 버린 제천대성의 모습.
"네 녀석에게 내 모든 업(業)을 보여줄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됐으니 잘 봐두도록 해라."
그는-
"나, 하늘을 다스리는 큰 성인-"
그렇게 말하며-
"제천대성 미후왕(齊天大聖 美?王)의 진정한 힘을 말이다!"
완벽하게 개화한 자신의 무기인 금강여의봉(金剛如意棒)을 땅바닥에 내리 꽂고는 외쳤다.
"쳐라!"
"!"
그와 함께, 대기가 변했다.
순식간에 김현우의 위에 몰려들기 시작하는 먹구름.
김현우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먹구름은 김현우의 주변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고.
그가 기선을 하늘로 올렸을 때.
쾅! 콰쾅!
제천대성이 불러낸 황금빛 번개는, 김현우의 몸을 내리치고 있었다.
반응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내리친 번개를 맞은 김현우, 제천대성은 곧바로 땅에 박아 놓았던 자신의 금강여의봉을 들고 조금 전 번개가 내리 친 그곳을 향해 달려 들어갔고-곧 그 흙먼지 사이에서 아무런 대처도 취하지 못하고 서 있는 김현우를 보며 여의봉을 휘둘렀다.
그리고-
쾅!
"!!!"
검붉은 번개가, 제천대성의 움직임을 막아냈다.
그와 함께 사방으로 걷히기 시작하는 흙먼지.
그 흙먼지 속에서, 김현우는 모습을 드러냈다.
검붉은 흑원과, 검은 흑익(黑翼)을 가진 채로.
경악하는 제천대성.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그거,"
-말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파직…… 파지지지직!! 쾅 콰광!!!!
그 말과 함께, 검붉은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 123
123. 황금 원숭이의 재림(再臨)(5)국제헌터협회 지하의 상황실.
"……."
"……."
"……."
그곳에 있는 협회원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게 떠들며 혼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전 세계에 일어난 4개의 재앙 때문에 무척이나 바빴으니까.
국제 협회로부터 오는 수십, 수만 가지의 보고는 업부 과부하를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 와중에도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도시의 파괴는 그들의 일손을 부족하게 만들었다.
미국 몬타나 주에 나타난 재앙을 막으려다 사망한 헌터들의 신원을 제대로 파악할 새도 없이 그들은 업무에 집중했다.
그래.
그랬을 텐데.
"……."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전화를 받으며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 협회원.
서류를 받아들며 컴퓨터에 이런저런 전산정보를 입력하던 협회원.
상황실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종합적인 명령을 내리는 팀장.
그리고 상황실의 끝부분에 앉아 있는 '리암.L.오르'까지.
그들은 누구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모든 업무를 멈춘 채 상황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상황판.
분명 아까 전만 해도 전 세계의 지도 상황과, 일반인이라면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할 수십 가지 어려운 전산 정보가 쓰여 있던 그곳.
그 상황판에는 한 가지의 영상이 띄워져 있었다.
그래, 그것은 바로 헌터의 전멸로 인해 급하게 등반자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날려 보냈던 무인 드론.
그 드론은 성공적으로 몬타나 주의 도시에 도착해 자신이 보고 있는 것들을 영상으로 만들어 국제헌터협회의 메인 데이터베이스에 보냈고.
협회원들은 그 장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도저히 도시라고는 부를 수 없게 되어버린 그 모습에 협회원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으나, 그들이 입을 다문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꽝! 꽈가가가강!
그들이 숨을 멈추고 그 영상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싸움 때문이었다.
그 영상에 찍혀,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는 싸움 때문에.
-파직! 파지지지직!
영상에서는 그 싸움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영상에 찍혀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황금빛 번개가 수시로 내리치며 폐허가 된 건물을 아예 박살나는 것과, 검붉은 번개가 사방으로 내리치는 것.
그 이외에는 가끔가다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한 여의봉(如意棒)이 주변을 박살 내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협회원들이 그 상황을 전투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전투를 시작하기 전, 흑익을 달고 있는 한 남자와, 온몸을 황금빛 오라로 두른 수인을.
-쾅! 콰아아아아아──────
드론에서 제대로 출력하지 못하는 음량이 나는 듯, 상황실에 기분 나쁜 기계음이 들렸으나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
그저 숨을 죽인 채로 그들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상황실이 드론이 송출하는 영상으로 인해 조용해져 있을 때.
"커져라 여의-!"
"유성각(流星脚)-!"
이미 도시가 아니라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에서는, 멈추지 않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천대성(齊天大聖)의 여의봉이 김현우의 몸을 터트리겠다는 듯 거대해지지만, 김현우는 그 공격에 당황하지 않고 제천대성의 앞으로 이동해 발을 차올렸다.
그와 함께 만들어지는 검붉은 유성.
제천대성은 그 살벌한 유성을 가소롭다는 듯 피하며 비어 있는 오른손으로 김현우의 얼굴을 후려치기 위해 움직이고, 김현우는 그것을 받아친다.
꽝!
주먹과 주먹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귀가 울릴 정도의 소음이 터져 나오고, 그럼에도 전투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매우 쳐라!"
하늘에서 황금의 번개가 내리치지만-
"흡!"
김현우는 검은 흑익(黑翼)으로 황금의 번개를 막아내곤 제천대성의 앞에 또 한번 도달해-
"한 방 가지고 되겠어?"
쾅! 꽝! 우르르르 쾅!
검붉은 번개를 제천대성의 머리 위로 내리 꽂았다.
황금빛 번개에 전혀 밀리지 않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수많은 붉은 번개의 폭격에 제천대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여의를 휘두른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검붉은 번개들.
그리고-
"!!"
"번개에 신경 쓰면-"
제천대성은 아차 했을 때-
"내 공격은 어떻게 하려고?"
김현우는 이미 제천대성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있었다.
꽝!
깔끔한 타격.
"끅!"
제천대성의 입가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고, 김현우의 입가에는 비틀린 웃음이 진해진다.
쾅! 콰그그극! 쾅!
순식간에 바닥을 구르는 제천대성.
김현우는 곧바로 따라 붙었다.
제천대성은 자신의 몸을 지킬 요량으로 바닥에 누운 채 금강여의봉(金剛如意棒)을 굵게 만들어 그의 공격을 차단했으나-
"왜? 또 예전처럼 돌부처 안에 갇히고 싶어?"
"!!!"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김현우는 제천대성의 몸을 방패처럼 막은 여의봉을 힘차게 내리 찍었다.
꽝!
"칵!"
김현우의 공격한번에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파고 들어가는 제천대성의 몸, 그가 뒤늦게 이 선택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고 여의봉을 줄였으나.
"이미 늦었어."
"─!"
김현우는 어느새 자신의 흑원 뒤에, 세 개의 만다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개화하기 직전의 연꽃은 주변으로 농밀한 마력을 흩뿌리고, 제천대성은 뒤늦게 일어나려 했으나 일어날 수 없었다.
'마력팽창!?'
자신의 몸과 피부를 짓누르고 있는 마력팽창 덕분에.
김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제천대성이 반대로 인상을 찌푸렸을 때-만다라(曼陀羅)는- 개화하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검붉은 뇌기를 만들어내며 개화한 만다라는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치는 붉은 마력을 내뿜으며 제천대성의 몸을 그 팽창 속에 완전히 가두는 데 성공했고-
"수라(修羅)-"
김현우는 어느새 등 뒤에 만들어져 있는 여섯 개의 팔을 한 손에 뭉쳐-
"무화격(武和?)-!"
바닥에 처박혀 있는 제천대성의 명치에 꽂아 넣었다.
콰아아아아아아──────!
그와 함께 터져 나가는 주변, 검붉은 마력이 시야와 청각을 빼앗고, 이 도시에 남아 있는 문명의 이기를 완전히 지워버린다.
그래,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히- 그리고-
"이……개새끼……!"
그 엄청난 폭발 속에서 문명의 이기가 전부 지워져 버렸을 때, 제천대성은 거친 숨을 내쉬며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멀쩡했다.
변한 게 있다면 누더기 같은 거적때기 중 상의가 날아가 상체가 훤히 보인다는 것뿐.
그에 반해 제천대성의 상태는 아까와는 달랐다.
분명 푸른 윤이 나 어느 흠집도 나지 않을 것 같던 그의 갑주는 일그러지고 망가져 마치 패잔병의 그것처럼 찌그러져 있었고.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른 황금빛 링은 제한시간이 다되었다는 것처럼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제천대성은 자신의 금강여의봉을 꾹 쥐며 생각했다.
'말도 안 된다, 내가 진다고?'
패배.
'고작 계층인에게?'
제천대성은 아직도 여유로워 보이는 김현우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여유가 느껴지는 표정으로, 마치 제천대성의 다음 수를 기다리듯 팔짱을 끼고 있는 그 모습에 제천대성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했다.
"감히-!"
"감히 뭐?"
"그 누구도 나, 칠성왕 제천대성(齊天大聖)를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의 노성(怒聲).
김현우는 웃었다.
"좆 까고 있네. 나한테 있어서 너는 그냥 말 안 듣는 원숭이 새끼일 뿐이야."
-이 머저리 새끼야.
노골적인 비아냥과 욕설.
그에 제천대성은 이를 악물었지만, 이내-
"끅-"
"?"
"끅끅끅-!"
끅끅 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제천대성을 바라봤을 때, 그는 이내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오냐, 이 개새끼. 내가 이 이상 탑을 오르지 못하더라도 네 녀석은 반드시 데리고 가겠다……!"
그와 함께, 제천대성의 몸에서 또 한번 황금빛 오오라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에 황금색 번개가 사방으로 내리치고, 그의 머리 위에 불투명했던 링이 다시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
제천대성의 몸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분명 하나였던 그의 분신은, 순식간에 둘이 되었고, 그것은 점점 수를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둘이 넷으로.
넷이 여덟으로.
여덟이 열여섯으로.
순식간에 제천대성의 분신(分申)이 늘어나고, 분신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문명의 위를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이거 원숭이 밭이네?"
김현우는 제천대성에게 둘러싸였다.
백을 넘었을 때부터 순식간에 불어나기 시작한 제천대성의 분신은 어느새 김현우를 둘러쌓고 있었고.
제천대성은 일제히 입을 열었다.
"죽여 버리겠다!"
그와 함께, 수천은 되어 보이는 제천대성들이 김현우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 거대한 황금색 번개와, 검붉은 번개들이 내리친다.
그 사이에서 움직이는 김현우의 신형.
여의봉을 내리치는 제천대성의 움직임을 피하고 동시에 전방위로 공격하는 제천대성의 공격을 막아낸다.
미처 막아내지 못한 제천대성의 공격은 등 뒤에 달린 흑익으로.
외부에서 여의를 길게 늘이는 것으로 공격하려 하는 이들은 번개로 요격한다.
끊임없는 전투
그 짧은 시간을 또 조각내, 그 속에서 김현우는 사고하고, 명령하고, 움직인다.
천마(天魔)와 함께 하면서 느꼈던 그 시간의 압축 속에서, 김현우는 그의 분신이 얼마 남았는지 조차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오로지 분신들을 없애나갔다.
없애고.
없애고.
또 없앤다.
그리고-
"금강(金剛)-"
어느 순간 김현우의 시선이 슬쩍 위로 들렸을 때-
"십팔(十八)-"
김현우는 자신의 머리 위로, 말도 안 될 정도의 거대한 여의들이 떨어져 내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뇌격(雷擊)-!"
주변의 공격을 막느라 눈치채지 못한 그 사이, 제천대성의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해진 여의봉은 김현우를 노리고 내리쳐지고 있었다.
거대한 여의가 제공권을 막고-
수많은 제천대성이 그의 움직임을 막는다.
검붉은 번개를 내리쳐도 수많은 제천대성들이 전부 막아낸다.
그야말로 모든 공격이 막히고, 오롯이 그의 공격을 받아쳐야 하는 상황.
'이걸로 끝이다!'
그 최후의 상황에 제천대성은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김현우를 바라보았고-
"!"
씨익-
김현우는 웃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미소였다.
김현우는 하늘에서 내리쳐진 금강여의봉(金剛如意棒)을 보며 천마(天魔)의 말을 떠올렸다.
'정말 올바른 반(反)의 묘리는 '겉'이 아닌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올바른 반(反)의 원리-
그리고-
황금색의 뇌전이 잔뜩 깃든 여의봉이 김현우의 위로 떨어져 내린 그 순간-꽈아아아앙!
거대한 소리가, 청력을 잡아먹었다.
여의봉이 떨어짐과 동시에 바닥에 내리치는 수만 줄기의 황금빛 번개가 이어서 시력을 잡아먹고.
주변의 지반이 모조리 사라짐에 따라, 공감각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
제천대성은 보았다.
그의 등 뒤에 달려 있던 시커먼 흑익(黑翼)이, 마치 성운처럼 밝게 빛나는 것을-그와 함께-
"무-"
그 감각이 없어진 공간 속에서, 김현우의 신형이 제천대성의 앞에 나타난다.
수만 줄기의 번개를 아무렇지도 않게 피해내며 그의 앞에 도달한 김현우.
말도 안 된다는 듯 그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제천대성을 보며, 김현우는 또 다른 천마의 말을 떠올렸다.
'극(極)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쏟아 붙는 것이 아니다-'
성운처럼 빛나는 그의 날개가 넓게 펴진다.
'극(極)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절제하고 계산해-'
그와 함께 성운처럼 빛나는 황금의 빛이 그의 뒤에 있던 흑원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그 심(心)마저도 모조리 통제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발광하던 흑원이 김현우의 몸속으로 마치 녹아들 듯 사라지고-
'그것이, 바로-'
김현우의 몸이 움직인다.
'진짜 극(極)이라는 것이다.'
제천대성이 방어를 위해 금강 여의봉을 치켜든다.
순식간에 커지는 여의가 김현우와 제천대성의 사이의 벽을 만들었으나-
"멸(滅)-"
김현우는 그런 벽 따위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격(?)-.
-금강여의봉(金剛如意棒)을 향해 황금빛 일격을 휘둘렀다.
────────!!!
세상이 빛으로 물들었다.
# 124
124. 황금 원숭이의 재림(再臨)(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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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등반자를 찾아 처치했습니다!
위치: 미국 몬타나 주 빌링스
[등반자 '제천대성(齊天大聖)' '손오공'을 잡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정보 권한의 실적이 누적됩니다!]
[정보 권한의 실적이 '중위' → '중상위'로 변경됩니다!]
[현재 정보권한은 중상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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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이기라고 불리던 고층빌라는 이미 사라졌고, 그런 도시를 잡아먹고 있던 진득한 화마도 사라졌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무언가도.
자연이 만들어낸 무언가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마치 지도에서 깔끔하게 지워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 빌링스.
그저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만 알려주는 검은색의 재와 문명의 이기였던 '것'만이 남아 있는 그곳에서 김현우는 앞에 떠오른 알림창을 바라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파직- 파지직- 파직-
김현우가 한숨을 내쉬자마자 그의 몸에서 일어나던 검붉은 전류가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하고, 그의 몸에서 전류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후우-"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 뒤 몇 번이고 자신의 몸을 움직여본 뒤, 이내 만족스러움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별 피해 없이 등반자를 꺾었다.'
그동안 김현우는 등반자를 한번 상대하고 난 뒤에는 2, 3일 정도 굉장한 휴우증을 앓았다.
처음 적귀와 싸울 때는 아니었지만, 그다음인 천마(天魔)와 싸웠을 때는 온몸의 혈도 덕분에 개고생을 해야 했고.
괴력난신(怪力亂神)때에는 혈도의 고통에 더불어 전신 타박상까지 당했다.
그 뒤를 이어서 상대했던 하수분이나 무신에게도 김현우는 한 명 한 명을 상대할 때마다 죽을 고비를 넘겨왔다.
김현우가 상대하는 등반자들은 그 정도로 강했으니까.
허나 지금은 어떤가?
'마력도 잘 돈다. 게다가 상처가 있기는 해도 예전처럼 심하지 않아.'
제천대성과 싸워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력은 아직도 상당히 남아 있었고, 그의 몸에 나 있는 상처는 이전의 싸움에서 얻었던 상처에 비교하면 굉장히 사소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거듭 느꼈던 만족감을 느꼈다.
천마(天魔)와 했던 수련들이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는 그 하나의 사실.
그것들이 김현우에게 더 큰 만족감을 주었고, 한동안 그는 나쁘지 않은 만족감에 취해 괜스레 실실거리는 웃음을 만들어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김현우는 이내 만족감을 마음 한편으로 미뤄두고 그가 있던 곳에 널브러져 있는 하나의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바로 제천대성이 사용했던 여의봉.
김현우가 여의봉을 주워들자 그의 위로 로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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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봉(如意棒)
등급: Ss
보정: 없음
스킬: [봉인 해제] [반응]
-정보 권한-
제천대성 미후왕 (齊天大聖 美?王)이자, 하늘을 다스리는 큰 성인 이라고도 불렸던 '손오공'이 사용하던 무기다.
여의봉은 손오공이 용궁에서 자기가 쓸 무기를 달라고 하면서, 다른 무기들은 가볍고 손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으며 깽판을 치다가 가지고 나온 것으로서 처음에는 그저 신물이었으나 손오공이 -권한부족-을 하게 되며 무기(武器)로 바뀌었다.
여의봉(如意棒)은 사용자의 명령에 반응해 자신의 몸을 길어지거나 짧아지게, 혹은 커지거나 매우 작아지게 할 수 있으며, 그 한계는 제대로 측정되지 않았다.
또한 여의봉(如意棒)은 -권한부족-과 -권한부족-, -권한부족-이 총족 될 경우 일시적으로 봉인을 해제해 '금강여의봉(金剛如意棒)'으로 개화시킬 수 있다.
여의봉을 개화시킬 경우, 모든 보정이 올라가며 등급의 추가와 본체인 제천대성의 힘을 빌려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허나 -권한부족-과 -권한부족-, -권한부족-중 단 하나라도 총족되지 않는다면 능력을 사용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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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앞에 떠오른 로그들을 차근차근 읽어보고는 이내 여의봉을 들어 올렸다.
일반적으로 보이는 봉 치고는 상당히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게.
후웅!
김현우는 봉을 몇 번 휘둘러보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 이내 로그의 설명과 아까 전 제천대성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길어져라 여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현우의 말에 따라 순식간에 길어지기 시작하는 여의.
"오!!"
그것을 보며 김현우는 외마디 감탄사를 토해내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줄어라 여의!"
그가 입을 열자마자 순식간에 줄어들어 원래의 크기로 바뀌는 여의를 보고 김현우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뒤쪽에 있던 주머니를 향해 손을 내뻗다가 깨달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나 주머니 사라졌지.'
생각해보면 처음 천마(天魔)가 있던 허수 공간에 들어갔을 때 김현우는 자신의 허리춤에 달아 놓았던 주머니가 사라졌었던 것을 깨달았다.
뭐, 굳이 찾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게 들어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수분의 주머니나 거검 기간토마키아, 그리고 괴력난신의 정수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 버린 김현우는 잠시 생각했다.
'어쩔까.'
우선 제천대성을 죽이면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난 상태였다.
남은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
"스읍"
김현우는 괜스레 주변을 돌아보며 침을 삼키다 문득 자신의 손에 쥐어진 여의봉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얼마쯤 지났을까.
"괜찮겠는데?"
갑작스레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린 김현우는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여의봉을 꾹 붙잡았다.
'우선은 당장 연락이 되는 곳으로 가야 하니까. 이 도시를 벗어나자.'
김현우는 그렇게 짧게 생각하고는 곧바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앞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하고, 그의 신형이 한순간 제대로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다.
그와 함께, 김현우는 여의봉을 고쳐잡기 시작했다.
도경이 새겨져 있는 여의봉의 끝 부분을 양손으로 부여잡는 김현우.
곧 그는 입가에 진득한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여의봉을 들어 올리고는-꽈아아앙!
자신이 들고 있던 여의를 그대로 땅바닥에 찍어 내렸다.
그리고-
"길어져라-"
그의 신형이-
"여의-!!!"
-순식간에 길어지는 여의를 타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팡! 파아아아앙!!!
마치 소닉붐 같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여의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른 김현우는 순식간에 멀어지기 시작하는 지상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국제헌터협회의 외각 쪽에 있는 별관.
"고마워요, 잘 입을게요."
김현우는 자신에게 옷을 내어준 리암에게 짧은 감사를 전했고, 그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김현우의 모습을 바라봤다.
'허…….'
리암은 이제 막 검은색 추리닝으로 갈아입은 김현우를 보며 불과 1시간 전, 기가 헌터 협회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가 국제 헌터 협회에 온 것은 여러모로 충격이었다.
아니, '김현우'가 국제헌터 협회에 온 것이 충격이 아니라, 그 먼 몬타나 주에서 이 워싱턴 주까지 온 방법이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여의봉(如意棒)'을 타고 국제 헌터 협회에 도착했으니까.
"허……."
리암은 말없이 그가 책상 옆에 세워둔 여의봉(如意棒)을 바라보자 아까 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미확인 비행물체가 날아온다는 소리에 또 다른 등반자인가 싶어 긴장하던 협회원들.
순식간에 협회 내에 있던 모든 헌터들이 소집되었다.
그렇게 소집되어 있는 헌터들 사이에서 떨어져 내린 김현우.
그때의 그 느낌을, 아직도 리암은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
"정말, 대단하군."
리암이 멍하니 내뱉은 말에 김현우는 문득 그를 바라보다 이내 어깨를 으쓱 하더니 대답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김현우의 대답에 리암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는 딱히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딘가 크게 다친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정도의, 도시 하나를 전부 날려버릴 정도의 격한 싸움을 벌였으면서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리암의 앞에 앉아 있었다.
'……인간이 맞는 건가?'
그렇기에 문득 리암은 그런 생각을 했다.
아까 전, 상황실에서 드론을 통해 봤던 그의 전투는 '재앙'이 보여주는 전투, 그 이상이었으니까.
"그래서,"
리암은 한동안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이내 김현우의 말에 정신을 차리곤 대답했다.
"응?"
"지금 상황은 어때요?"
"지금 상황?"
"예. 등반자들은 전부 사라졌어요?"
김현우의 물음에 리암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현재 상황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태국과 한국,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의 등반자가 전부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그 이외에 추가적인 이야기들.
"그러니까 한국은 별 피해가 없었다는 소리에요?"
"정확히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일세. 당장 미국만 하더라도 도시 하나에 대형 길드 중 하나인 이클립스를 잃었지, 그나마 '에단'과 '라일리'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에단과 라일리?"
"아, 자네도 무신(武神)사건 때 봤던 이들일세."
리암의 설명에 김현우는 곧 에단과 라일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리암의 설명을 모두 들은 김현우는 이제 돌아가는 상황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
"혹시 자네가 아까 타고 온 것 말일세."
"타고온 것……?"
김현우는 그의 말을 되묻다 곧 리암이 여의봉을 말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벽에 기대두었던 여의봉을 흔들거렸다.
"아, 이거 말하는 겁니까?"
"그래 맞네."
"네, 그런데요?"
"그건, 재앙에게서 나온 아이템인가?"
리암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죠."
그의 대답에 리암은 또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물었다.
"그럼 혹시, 자네는 지금 한국에 돌아가기 위해 이곳에 온 거겠지?"
"그렇죠?"
김현우가 굳이 국제 헌터 협회에 온 이유.
그것은 리암에게 대충 현재 상황을 듣기 위해서이기도 했으나 정확히는 이 국제헌터협회에 새겨놓은 아냐의 마법진을 때문이었다.
마법진만 있다면 김현우는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김현우의 대답에 리암은 잠시간 무엇을 고민하는 듯하다 말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봉을 좀 두고 가 줄 수 있겠는가?"
"뭐라고요……?"
리암의 물음에 순간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고, 리암은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닐세."
그는 그와 함께 김현우에게 그 이야기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잠시간 인상을 찌푸린 채 리암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되물었다.
"그러니까, 우선 절차 때문에 과정이 꼬이지 않으려면 이곳에 두었다가 찾아가는 게 낫다는 말이에요?"
"짧게 요약하면 그러네."
리암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물론 이건 절대 협박할 생각으로 말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절차를 밟는 게 자네가 별문제 없이 쉽게 보상금을 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네."
"……만약 제가 여의봉을 들고 가면요?"
김현우의 말에 리암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달라지는 건 없네, 좀 시간이 걸리긴 해도…… 보상금은 받게 될 걸세. 말 그대로 결국 절차상의 문제니까."
리암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했다.
결국 상관은 없으나 결국 리암이 해야 하는 일이 좀 귀찮아진다는 느낌인 것 같았다.
"흐음,"
한동안 고민하던 김현우는 이내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을 열었다.
"뭐, 그런 거라면야 그냥 두고 갈게요."
"오, 그래주겠는가?"
눈에 띄게 반색하는 리암을 보며 김현우는 피식 웃은 뒤 말했다.
"그 대신 보상금은 잘 챙겨주세요."
# 125
125. 백십팔살 김현우(1)
※이 글은 베스트 게시물로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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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금 기점으로 2일 전에 일어난 의정부 재앙부터 해서 싹 정리해 준다 ㄱ.
글쓴이: 원스틸러트
지금 헌터킬 이슈 게시판 하루에 이슈가 수십 개씩 올라와서 지금 내가 다른 건 모르겠고, 팩트 정리만 오지게 해준다.
자 첫 번째로, 3일 전에 4지역에 재앙이 나타남.
지역은 각각 한국 경기도, 태국의 방콕, 미국 몬타나 주, 멕시코시티임.
그 4지역에서는 각각 재앙이 나와서 도시를 개때려부숨.
그리고 지금 현재 존나 불타고 있는
'도대체 어디가 가장 많이 피해를 봤는가?'
에 대한 건데.
제일 많이 좆된 곳은 미국임, 미국은 그냥 도시 하나가 통째로 날아감, 물론 도시가 날아간 만큼의 인명피해는 안 났는데, 아무튼 피해는 심각하다고 들었음그다음이 멕시코시티임, 멕시코시티는 그냥 수도가 전부 불바다가 됨, 주요 길드들도 모조리 다 박살 났고, 협회도 박살 남.
그다음은 태국방콕, 근데 얘들은 좆될 만했던 게 미궁 근처에 상업권을 형성해 놓은 데다가 대피 발령 나도 꿋꿋하게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인명피해가 좀 많이 낫다고 들었음.
그리고 제일 마지막이 우리 한국이다.
우리 한국은 의정부 시에서 재앙이 나타났는데 그냥 3대 길드가 전부 막아버림, 정확히는 3대 길드가 막은 게 아니라 S등급 세계랭킹 5위, 아니 지금은 3위인 패룡이 막았지.
www.youtube.com/dwrdgwetwd232 << 여기가서 패룡 싸우는 거 봐라 괜히 김현우 제자라고 말하고 다니는 거 아니더라 미쳤음 ㅋㅋㅋㅋㅋ.
아무튼 패룡의 빛나는 활약으로 한국은 인명피해가 다른 곳에 비해서는 그리 크게 없었음, 헌터 피해도 마찬가지고.
여기까지가 이제
의 팩트.
그리고 이다음은 그거임.
'그렇다면 저렇게 엄청난 피해를 입힌 재앙들은 결국 누가 막았냐?'
지.
너희들도 알고 있을 거임, 생각해보면 지금 헌터들은 다 뒤졌잖아?
한국은 아니더라도 태국, 미국, 멕시코는 전부 미궁을 막던 헌터가 죽어버려서 답이 없던 상황이었음.
그럼 누가 막았을까?
답은 '김현우가 막았다'다.
못 믿겠다고?
www.youtube.com/eoiwttertww42 <<< 들어가서 확인해라.
솔직히 이 오피셜 3시간 전부터 떠 있었는데 아직도 다들 재앙이 지들끼리 쳐싸우다 뒤졌니 뭐니 하는 거 보면서 어처구니 터지더라 ㅎㅎ…….
사실 이거 올리려고 팩트 정리글 쓴 거다.
자,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주모! 국뽕 한 사발 추가요~~~~~~~~~~~~(펄럭)(펄럭)ps. 아, 멕시코는 빼고, 보니까 멕시코는 아직 누가 그 재앙을 막았는지 모른다더라.
추천 11125 반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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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3523
S등급헌터: 키야아아아아아 주모!!!!!!!!!!!! 여기 국뽕 하나추가요! 국뽕 도랏누!!!!!!!
ㄴ 호고고곡: ㄹㅇ국뽕 좆된닼ㅋㅋㅋㅋㅋㅋㅋㅋ어떻게 김현우 혼자 재앙 막아보더니 이제 두 명을 혼자막누ㄴ 주모123: 으어어어어이것이 뭐시여!? 뭔데 계속 들어오는 겨!
ㄴ 경기도안양의이창연: 아아, 그것이 바로 '국뽕'이라는 것이다.
기모리모리앙기모리: 야 근데 진짜로 신기한 게 김현우는 결국 한국 말고 미국이랑 태국을 지켰네, 이거 머냐 시발 ㅋㅋㅋㅋㅋㄴ 아롱이: ㄴㄴ 이번에 인터뷰 한 거 보니까 김현우가 태국에 볼 일 있어서 잠깐 갔다가 막은 거라고 하더라, 그 뒤에 곧바로 미국 달려간 건 패룡이 한국 이미 막아서 ㅇㅇㄴ 기모리모리앙기모리: 아 ㄹㅇ? 몰랐네 알려주셔서 ㄱㅅ내인생이유머: 와 씨발 지금 김현우 싸우는 거 영상 보고 온 사람? 이거 유튜X 1위인 게 괜히 1위가 아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ㄹㅇ 초대박이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싸우지?
ㄴ 오롱이: 솔직히 사람이 저렇게 싸운다는 게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저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ㄴ 리샛하고싶다: 설마 김현우가 아직도 인간이라 생각함 ㅋㅋㅋㅋ? 그는 'KING GOD' 현우다.
ㄴ 아슬로테: ㅋㅋㅋㅋㅋㅋㅋ 킹갓, 네이밍 센스 ㅆㅎㅌㅊ인거 실화냐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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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외에도 복잡하게 댓글이 달려 있는 글들을 스마트폰으로 보고 있던 김시현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옆에 있던 김현우를 바라봤다.
"형,"
"응? 왜?"
소파에 느긋하게 늘어져 있는 김현우.
그리고 그렇게 늘어져 있는 김현우의 팔에 인형처럼 껴안겨 있는 미령그녀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져 있는 것을 잠시 감상한 김시현은 이내 시선을 돌려 김현우에게 물었다.
"그래서, 진짜 태국에는 왜 있었던 거예요?"
"나도 모른다니까?"
"아니, 진짜로요?"
"진짜로, 내가 말했잖아? 네 검 빌려서 수련하러 들어갔다 나와보니까 태국이었다니까?"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그럼 미국은 어떻게 간 거예요?"
"미국?"
"네, 제가 어제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미국에 간 거예요? 태국이랑 미국 몬타나 주랑 차이 엄청 나는 건 알죠?"
"아~ 그거?"
"네, 그거요."
"뛰었어."
김현우의 별것 아니라는 듯한 말.
김시현은 그의 자연스러운 말에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려다가 멈칫했다.
"뭐라고요?"
"뛰었어."
"뭐라고요?"
"뛰었다고."
"뭐라고요……?"
"에이 씨, 뛰었다니까? 이 새끼가 등반자한테 쳐맞더니 고막 나갔냐."
"읏-!"
김현우가 슬쩍 짜증을 내며 미령을 끌어당기자 묘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붉히는 미령. 김시현은 마치 돌처럼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는 미령을 뒤로한 채 이어 말했다.
"아니, 뛰었다고요?"
"그래."
"대체 왜……?"
"왜긴 왜야? 한국에는 등반자를 잡았다고 해서 나머지 다른 등반자를 막으러 가야 하는데 미국에 뭘 타고 갈 만한 여건이 안 되더라고. 아니 뭐 있기는 있었지."
그런데-
"그런 거 타려면 또 절차고 뭐고 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더 늦을 것 같아서 그냥 뛰었지."
"……."
분명 엄청난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김현우를 보며 저도 모르게 할 말을 잃은 김시현은 이내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
이내 김시현은 다른 화제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형."
"왜?"
"그 검 안에 들어가서 수련한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김시현이 퇴원한 어제, 그는 집에 돌아온 김현우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김현우가 어디 있었는지부터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까지.
물론 어제에는 김시현도 김현우도 피곤해서 대부분의 이야기를 그냥 스르륵 넘기고 말았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형."
"왜"
"그럼 거기에서 천마(天魔)를 만나서 수련을 하고 온 거예요?"
"뭐, 그렇지…… 그걸 수련이라고 하기에는-"
김현우는 말을 하다 말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수련이라고 치자."
김현우의 긍정에 김시현은 곧바로 말했다.
"그럼."
"……?"
"저도 거기 들어갈 수 있어요?"
김시현의 물음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들어갈 수 있냐고?"
"네."
"갑자기?"
"네."
"……아니, 왜 갑자기?"
김현우의 물음에 김시현은 약간 우물쭈물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좀,"
"좀?"
"너무 무력해서요."
김시현이 김현우에게 그런 물음을 던진 이유.
그것은 그가 2일 전 있었던 전투에서, 극도의 무력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초반에 마법을 사용하다 리타이어 당한 이서연은 그저 안 좋은 추억 정도로 여기는 듯했으나, 청사와의 전투를 모두 본 김시현은 압도적인 무력감을 느꼈다.
청사에게도 그렇고.
'……패룡에게도'
김시현은 슬쩍 시선을 돌려 미령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김현우의 손길 덕분에 정신을 못 차리는 듯 어버버거리고 있었으나 그녀가 그때 청사를 죽이며 보여주었던 압도적인 무력은, 김시현에게 압도적인 무력감을 선사해 주었다.
그렇기에,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해.'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한다고.
예전에는 그저 김현우가 비이상적으로 강한 것이라며 스스로에게 되지도 않는 위로를 했으나 재앙을 겪어보고 나서 김시현은 그렇게 생각을 달리했다.
결국 최후에 있어서 자기가 생각한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그런 결심을 담은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그를 보다 말했다.
"뭐, 가능하기는 하지."
"진짜요?"
"근데……."
'천마(天魔)가 제자를 제대로 가르쳐 주기나 할까?'
김현우는 자신이 보았던 천마를 떠올렸다.
말하는 싸가지라고는 자신과 뒤지지 않는데다가, 허수 공간이라고 사람을 망설임 없이 죽이는 천마(天魔)의 모습.
"……."
김현우는 멍하니 천마의 모습을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지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차피 이런 건 생각해 봤자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슬쩍 저으며 말했다.
"아니, 뭐 내가 갔던 곳에 갈 수는 있어."
불안전한 악천의 원천의 미궁석게이지는 이미 전부 떨어져 버렸지만, 그거야 미궁을 잠깐 내려갔다 오면 다시 채울 수 있다.
김현우는 자신의 주머니, 정확히는 어제 미령에게 돌려받은 주머니 안에서 악천의 원천을 김시현에게 내주려다-
"어차피 당장 갈 건 아니지?"
"……그렇죠?"
"그럼 내가 언제 한번 미궁석 게이지 다시 채워서 줄게."
"……게이지요?"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가 들고 있는 천마의 검속으로 들어가려면 미궁에서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거든."
"아, 그래서 그때 미궁에 같이 내려간다고."
그의 말에 김시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김현우는 느긋하게 앉아 있다 떠올랐다는 듯 탄성을 터뜨렸다.
"아."
"왜요?"
"그러고 보니까 나 원숭이 새끼 패주고는 정보창을 본 적이 없어서."
김현우는 그렇게 답하며 이참에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 정보창을 띄웠고-
-----------
이름: 김현우 [9계층 가디언]
나이: 118
성별: 남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S+
민첩: S++
내구: Ss
체력: S+
마력: S+
행운: B
SKILL -
정보 권한 [중상위]
알리미
출입
심리
-----------
멍하니 시선을 내려 능력치를 바라보다.
"?"
자신의 나이를 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야 씨발?"
그의 욕설이 퍼져나갔다.
***
"……제천대성이 당했나?"
형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게다가-"
"……게다가?"
"아무래도 그가 허수 공간(虛數空間)에 갔다 온 것 같습니다."
남자의 말에 형체 없는 그가 일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툭- 툭- 툭-
들려오는 것은 그가 손가락으로 소파를 치는 소리뿐.
그런 침묵이 얼마정도 지속되었을까.
형체조차 존재하지 않는 그는 이내-
"이건, 좀 심하군. 그래도-"
약간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은 이것대로 나쁘지 않군. 이제는 오히려 어지간한 어중이떠중이보다는 저 이레귤러에게 눈이 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거대한 공동 안에 보이는 김현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느긋해 보이는 김현우의 모습.
그것을 보며, 형체 없는 그는-
"과연 너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조용히 읊조렸다.
# 126
126. 백십팔살 김현우(2)
김현우가 정보창에 표기된 자신의 나이를 묻기 위해 들어온 시스템 룸은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여기 왜 이래?"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답했다.
"이번에 3명의 등반자를 잡아서 가디언의 정보권한이 '중상위'가 됐거든요. 그 덕분에 다시 이 방의 크기가 넓어졌어요."
"……아니, 뭐 넓어진 겉 같기는 한데-"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넓어진 공간을 바라봤다.
"……좀 많이 넓어진 것 같은데?"
그렇다.
시스템 룸은 김현우의 말대로, '상당히'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굉장히 넓어져 있었다.
분명 중하위에서 중위로 오를 때만해도 방의크기가 1.5배정도 밖에 안 늘었던 것 같은데-
"이건,"
최소 2배…… 아니 3배?
아무튼 엄청나게 넓어져 있었다.
김현우가 멍하니 넓어진 시스템 룸을 바라보고 있자 아브가 답했다.
"저도 잘 몰랐는데, 중위 이상부터는 시스템 룸의 크기가 비약적으로 커지는 것 같아요."
"……그래?"
김현우는 넓어진 시스템 룸을 한동안 바라보고, 붉은 버튼을 눌렀다.
딸깍-
붉은 버튼을 누르자마자 예전의 시스템 룸처럼 가구의 끝부분이 배치되기 시작했으나.
"……너무 휑해 보이네."
방의 크기가 너무 커져서 그런 것인지, 이제는 방이 휑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
한동안 방을 어떻게 꾸밀까 생각하던 김현우는 아브의 부름에 시선을 돌렸고, 아브는 이어 말했다.
"혹시 지금 이 방을 어떻게 꾸며야 할지 걱정이라면, 저렇게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있는 것은 컴퓨터.
김현우는 말없이 걸어가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것을 보았고.
"……."
"어때요……?"
이내 피식 웃으며 모니터 화면 안에 보이는 방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굉장히 꽉꽉 들어차 있는 방의 모습.
사진을 찍을 걸로 봐서 분명이 방 자체는 넓어 보였으나, 그 방안은 온갖 게임 용품으로 인해 무척이나 꽉꽉 들어 차 있었다.
기본적으로 플라이스테이션부터 시작해서 김현우가 듣도보도 못한 게임용품들이 이리저리 늘어져 있었고, 한 쪽에는 VR기기와 최신 휠컨트롤러가 놓여 있었다.
그 이외에도 벽장에는 게임 CD가 빽빽할 정도로 들어 차 있는 방.
"네 취향이 아주 적나라하게 반영된 집이구나."
"안 될까요……?"
은근히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아브의 모습에 김현우는 피식하며 대답했다.
"뭐, 이 정도야."
딸각.
"와!"
김현우가 버튼을 누르자마자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하는 주변 풍경.
10초조 지나지 않아 시스테룸은 조금 전 모니터에서 보았던 방 안의 모습이 되었고, 그에 아브는 굉장히 기뻐하며 주변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한동안 피식하며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아."
자신이 시스템 룸 안에 들어온 이유를 상기하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리하여 시작된 이야기.
아브는 김현우의 이야기를 전부 다 듣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이가 118살로 표시된다고요?"
"그래,"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정보창을 띄우자 아브는 새삼 신기하다는 듯 정보창을 보며 고민하다는 듯하더니 이내 답했다.
"저번에 가디언은 죽였던 천마(天魔)를 만나셨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그리고 허수 공간에도 갔다 오셨다고."
"그것도 맞아."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답했다.
"그럼 아마 정보창은, '허수 공간'에 있던 가디언의 나이도 센 것이 아닐까요?"
"……허수 공간에 있던 내 나이?"
김현우가 묻자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이상하다는 듯 재차 물었다.
"아니, 그건 좀 이상한데? 분명 여기에서는 내가 들어갔다 나왔을 때 지난 시간이 1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
"제 생각에는 그 허수 공간과 실제 탑의 시간과 괴리가 있는 거 아닐까요?"
"괴리?"
"네, 그러니까…… 이쪽에서의 하루가 저쪽에서는 1년이라던가, 그런 거 있잖아요?"
"그게 말이 돼?"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가디언이 갑자기 팍 늙어버- 아니, 나이가 늘어버린 이유를 설명하려면 그것밖에……."
아브가 슬쩍 눈치를 보며 말을 바꾸자 김현우는 흠, 하며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쯧 하고 혀를 차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거기에서 100년을 있었다는 거야?'
100년.
'사람 한 명이 태어나서 죽을 수도 있는 그 시간까지 천마와 치고 박고를 반복했다고?'
솔직히 김현우는 아직도 본인이 그 허수 공간에서 100년 가까이 지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멈춰 있었으니까.
그나마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것은 본인의 죽음뿐이었다.
한동안 그 허수 공간에 대해서 고민하던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지워냈다.
'뭐 어때.'
나이상으로 118살이 찍혀 있기는 했지만 자신의 몸은 아직 24살 그대로였다.
'아무렴, 나는 틀딱이 아니야.'
혼자 그렇게 생각한 김현우는 이내 답했다.
"그래, 그건 됐고, 이제 정보권한이 중상위가 되었다 그랬지?"
"네, 가디언이 제천대성을 죽인 뒤부터 정보권한이 중상위로 올라갔어요."
"그래서, 튜토리얼 탑에 대한 건 뭔가 알아냈어?"
김현우의 물음.
그 물음에 아브는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 그거!"
"왜? 뭔가 알아낸 게 있어?"
"안 그래도 그에 관해서 새롭게 알아낸 사실이 하나 생겼어요."
"진짜?"
"네."
"뭐야, 그럼 왜 안 불렀어?"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답했다.
"저는 또 저번처럼 등반자를 처리한 뒤에 곧바로 오실 줄 알았거든요, 가디언은 정보권한이 오르면 상당히 빨리 오니까요."
"뭐, 그건 맞는 말이지만."
사실 제천대성을 죽인 직후 정보권한이 중상위로 오른 것을 알고 있기는 했으나, 일이 바쁘다보니 오지 않았다.
……정확히 일이 바쁜 것은 어제였고 오늘은 잊어버린 것이었으나 김현우는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무튼, 그 알아냈다는 게 뭔데?"
"튜토리얼 탑의 제작자에 대해서예요."
"튜토리얼 탑의 제작자?"
"예, 제가 말했다시피 가디언이 원하는 거의 대부분의 정보는 정보권한이 상위가 돼서야 열람 할 수 있는데 이 정보는 끝자락이나마 열람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게 뭔데?"
김현우의 되물음.
아브는 답했다.
"튜토리얼 탑을 제작한 제작자는, '제작자'예요."
"오! 그래?"
"네!"
"그래서?"
"네?"
"그래서?"
"……?"
"?"
"?"
김현우와 아브가 서로를 마주보기를 잠시, 김현우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끝?"
"네, 끝인데요?"
"……그게 정보냐?"
김현우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묻자 아브는 당황한 듯 눈을 돌리다 말했다.
"아, 아니 그냥 저는 가디언이 튜토리얼 탑에 대해 너무 궁금해 해서 어떻게든 정보를 쥐어 짜낸 건데."
아브가 뒤늦게 변명하듯 입을 열자, 김현우는 이내 무어라 하려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됐다."
김현우의 노골적인 실망이 서린 모습에 아브는 괜히 당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 말했다.
"5일!"
"?"
"저한테 5일에서 1주일 정도만 주시면, 그 탑의 제작자가 어디에 있는 것까지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뭐라고……?"
김현우가 아브를 돌아보자 그녀는 답했다.
"물론 저도 확신할 수 없는데, 이건 그냥 이제부터 제가 정보권한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짜맞추고 추론하려는 거라,"
아브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만약 잘되면 그 '제작자'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굉장히 흥미가 동한다는 표정으로 아브를 바라보았다.
***
김현우가 아브에게 그 말을 들은 다음 날.
2층 저택 구석에 만들어져 있는 서재에서, 김현우는 미령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
이름: 미령 [계승자]
나이: 21살
성별: 여
상태: 양호
-능력치-
근력: S++
민첩: S++
내구: S++
체력: S++
마력: S++
행운: A++
성향: 절대 헌신 주의 성향
SKILL -
[정보 권한이 부족해 열람할 수 없습니다.]
-----------
"그러니까, 이 괴력난신의 정수가 너한테 말을 걸었고, 네게 힘을 빌려줬다고?"
"예 스승님."
김현우가 미령의 정보창을 열어보며 묻자 미령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고, 그는 미묘한 표정으로 정보창을 바라봤다.
'……계승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 대충 상황상으로 봤을 때 '계승자'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김현우는 어제 아브의 말과 더불어, 미령이 청사와 싸울 때 짤막하게 찍혀 있는 영상들을 보았으니까.
그녀의 이마위에 돋아났던 붉은 뿔과 새하얀 백발이 되어버린 그녀의 머리를 봤을 때 짐작 할 수 있는 녀석은 한 명밖에 없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의 계승자……라는 건데,'
김현우는 반대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또 아브가 했던 말이랑 좀 연결되지를 않는데.'
그는 어제, 아브에게 나가기 전 들었던 대화를 상기했다.
탑을 만든 녀석의 이름이 '제작자'라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깨닫게 된 뒤, 김현우는 아브에게서 그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소리를 더 들었다.
그것은 바로 등반자의 관한 내용.
아브는, 김현우에게 아직 이 세계에 등반자의 힘이 남아 있다는 말을 했다.
그 이유는 바로, 제천대성이 데려온 4명의 힘 이외에도 9계층에서 다른 등반자의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한국에서.
그리고 또 하나는 멕시코에서.
아브의 말에 의하면 멕시코에서 느껴진 힘도 김현우가 제천대성을 잡기 전에 아브는 느꼈다고 말했다.
'아마, 아브가 한국에서 느낀 등반자의 힘은 미령이 사용한 괴력난신의 것인 것 같은데, 그럼 멕시코는?'
그는 슬쩍 시선을 좌우로 돌리며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멕시코와 등반자가 관련이 있나?'
그렇게 고민을 하던 중-
'아, 그러고 보면.'
문득, 김현우는 언젠가 자신이 보았던 알리미의 문구를 떠올렸다.
더 정확히는 천마(天魔)를 만나기 직전 김현우의 손에서 빠져나간 등반자.
'언령사 메이슨, 생각해보면 그 녀석이 멕시코시티에서 죽었다고 떴던 것 같은데.'
김현우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본능적으로 메이슨의 죽음과 아브가 느꼈다는 그 등반자의 힘이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김현우는 슬쩍 시선을 돌려 왠지 굉장히 시무룩해 있는 미령을 보았다.
혼날까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
김현우는 피식 웃은 뒤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턱-
"!"
"잘했다 제자야."
"!!"
"너 없었으면 다 죽을 뻔했단 거 아니야? 그러니까-"
잘했어.
김현우의 한마디에 대번에 얼굴이 밝아지는 미령.
그녀를 바라보며 머리를 몇 번 쓰다듬은 김현우는 이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짧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알아봐야 하는 건 '계승자'에 대해서,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멕시코 쪽에 한번 들러서 등반자의 힘을 쓴 녀석을 찾아보는 것 정도인가.'
순식간에 끝난 정리.
허나, 김현우는 곧바로 아브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에게는 당장 정리한 일 말고도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으니까.
김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스마트폰 화면에서 나오고 있는 헤드라인을 바라봤다.
[김현우, 어째서 한국은 구하지 않았나? '논란']
[정부, 이번 김현우의 대처에 굉장한 유감 표명.]
"그래, 제대로 일을 하기 전에는-"
귀찮은 것들부터 전부 치워 버려야지.
김현우는 쓱 웃으며 스마트폰의 전원을 껐다.
# 127
127. 여의봉은 내 거다(1)
[김현우는 영웅이다.]
[의정부의 재앙을 막은 것은 바로 김현우의 제자!]
[소문만 무성하던 패룡, 정말로 김현우의 제자였다?]
---
[중국 패도길드의 길드장이자 S등급 세계랭킹 5위 '패룡'은 김현우의 제자다?]
지난 4일 전 세계에서 일어났던 4개의 재앙(災殃)은 4개의 국가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미국의 경우 도시 하나가 사라졌으며 태국의 경우 방콕이 초토화되었다. 멕시코의 경우 멕시코시티가 완전히 화재로 전소되고, 한국도 만만찮은 피해를 보았다.
일어난 4개의 제앙(災殃)중 김현우는 무려 두 개의 재앙을 막아냈으나 그것은 한국의 재앙이 아닌 태국과 미국의 재앙.
한국의 재앙은 유감스럽게도 김현우가 아닌, 패도 길드의 길드장 '패룡'이었다.
그에 누리꾼들이 나름대로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도중, 의정부 재앙을 막은 패룡이 김현우의 제자라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
……
.
[후략]
---
"뭐지?"
명동의 한 일식집.
어제, 이서연의 퇴원을 끝으로 간만에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한 김현우와 동료들은 코스요리가 나오는 독방에 자리를 잡았고.
김현우는 어제와는 전혀 달라져 있는 이슈들을 보며 묘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왜 그래요?"
어제 퇴원한 것 치고는 상당히 멀쩡해 보이는 이서연이 김현우의 그런 표정을 보며 질문하자 김현우는 곧바로 답했다.
"아니, 이슈가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서."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말했다.
"아, 저도 그거 느꼈는데."
"뭘 느껴?"
이서연이 궁금하다는 듯 묻자 김시현이 대답했다.
"너는 어제 퇴원해서 모를텐데, 분명 어제만 해도 좀 악의적인 뉴스가 많이 퍼졌거든."
"……악의적인 뉴스?"
"그거 말하는 거지? '김현우가 왜 한국을 먼저 구한 게 아닌 태국과 미국을 구했냐라고 언론에서 떠들었던 그거?"
한석원의 말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서연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그거라면 나도 병원에서 봤었어, 덕분에 오빠가 또 한번 TV나가서 깽판치나 생각했는데."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맞아 원래 진짜로 그러려고 했는데……."
김현우는 뉴스의 헤드라인을 쭉 내려 보았다.
아무리 내려도 어제 김현우의 눈에 거슬리던 뉴스들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거의 대부분이 자신을 찬양하거나 미령을 찬양하는 뉴스뿐.
"뭔가 이상한데."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어제 보았던 뉴스들은 어제에만 떠 있던 헤드라인들이 아니었으니까.
김현우가 제천대성을 잡고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기자들은 자극적인 기사를 위해 또 김현우를 팔아먹기 시작했다.
거기에 정부는 무슨 생각인지 오피셜로 김현우에게 유감까지 표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김현우는 먼저 자신이 정한 일을 해결하기 전에 이것부터 정리를 시작하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사라졌다고?'
적어도 김현우의 지금까지 경험상 기자들이 이렇게 맛있는 기삿거리를 이렇게 내릴 리가 없었다.
오히려 어제처럼 이슈가 한참 뜨거워지고 있을 때 어떻게든 그 화제를 조금 더 불태우려 장작을 넣는 게 기자들이다.
게다가 정부의 대형 장작도 들어왔으니 오늘은 더더욱 불타는 게 맞다.
아니, 그냥 확실하게 불타야 한다.
그렇기에 이상했다.
'……이거 뭐 있는 거 아니야?'
김현우는 그렇게 스마트폰을 보며 고민하자 옆에 있던 김시현도 그런 김현우의 뜻에 동조한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좀 이상하긴 하죠."
그렇지?"
네, 기자들이 보통놈들이 아니잖아요? 제가 볼 때 몇몇 기자들은 자기 목숨이랑 자기 기사 조회수랑 바꾸자 그러면 바꿀 정도잖아요."
……맞아, 그렇지."
한석원이 맞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대형 길드의 길드장이라 기자들에게 이런저런 이슈로 시달려본 게 한두 번이 아니라 기자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김시현은 스마트폰을 통해 이것저것을 검색하는 듯하더니 이내 진짜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근데…… 진짜 뉴스가 밀린 게 아니라 아예 여론이 그냥 물갈이 된 것처럼 조용해졌네요?"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음, 혹시 그 패도길드장이 그랬을 확률은?"
한석원이 묻자 김현우는 조금 전까만 해도 같이 있다가 잠시 볼일이 있다며 하남쪽으로 간 미령을 떠올렸다.
"확실히……."
미령이 은근슬쩍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기는 한데, 미령은 어제 자신과 떨어진 적이 없었다.
'아니, 어제가 조금 더 뭔가 질척했던 것 같은데.'
평소에는 옆에 있는 정도였다면 어제는 기묘할 정도로 김현우의 옆에 붙어 있었다.
뭐, 딱히 불편하지는 않아서 놔뒀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미령은 어제 김현우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했다.
잠시간의 침묵.
"……에이 시발,"
문이 열리고 음식이 들어오기까지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스마트폰을 집어넣으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뭐, 뭔가가 있겠지.'
솔직히 찝찝하기는 했으만 또 왜 기사가 안 떴는지 알아보는 것도 조금 웃긴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김현우는 이내 하루 만에 바뀐 기사들을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뭐, 나한테는 좋은 거니까.'
뭐 지랄하는 데 힘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귀찮았다.
김현우는 그리 생각하며 이제 막 애피타이저로 나온 디저트를 입에 가져갔고, 곧 김시현이 물었다.
"아, 형."
"왜?"
"그건 그렇고, 그건 어떻게 할 거예요?"
"그거?"
"그, 손오공? 아니, 제천대성의 전유물로 나온 여의봉이요. 보니까 국제 헌터 협회에서 소유자는 김현우에게 있다고 공표했던데."
"아, 그러고 보니까."
김현우는 김시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당시에 제천대성을 처리 한 뒤, 그 녀석이 죽고 나서 남긴 여의봉(如意棒)을 가져오려다 리암의 말 때문에 잠시 협회에 여의봉을 맡겨두었었다.
"그것도 찾으러 가야 하네."
어째…… 할 일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은데?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미국에 찾아가는 것을 머릿속에 체크해 두며 마지막 한 입 남은 디저트를 입가에 집어넣었다.
***
국제헌터협회의 메인 홀.
이전, 무신(武神)과 김현우의 싸움으로 완전히 반파되었던 메인 홀은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이전과 달리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흡사 뉴스에서는 백악관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하는 국제 헌터 협회의 메인 홀 건물.
그런 건물의 3층 홀에는 두 명의 남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국제 헌터 협회의 한 명밖에 없는 상위의원이자 현 헌터협회의 정권을 잡고 있는 남자 '리암.L.오르'.
그리고 다른 한 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바로-
"여의봉(如意棒)은 몬타나 주의 소유라고 말하지 않았나?"
미국 몬타나 주의 의원인 '아탈렉 포트'였다.
리암은 이틀 전부터 헌터 협회에 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하는 아탈렉 포트를 보며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부여잡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새끼가 의원인거지?'
리암은 복잡한 눈으로 당당하게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말쑥한 느낌의 의원을 바라봤다.
미국 몬타나 주의원 '아탈렉 포트', 그는 정계에서도 그리 좋은 취급을 받는 의원은 아니었다.
'아니 좋은 취급 정도가 아니라 그냥 떨거지지'
정치당의 떨거지.
적어도 리암의 머릿속에서 그의 이미지는 그 정도였다.
허나 그런데도 그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굉장한 자본 때문이었다.
대형 길드까지도 혼자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자본.
그것이 그에게는 있었다.
물론 그 자본은 그가 직접 일궈낸 것이 아닌 그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었으나, 이미 말도 안 될 정도의 자본을 가지고 있는 그의 힘은 미국 내에서 꽤 상당했다.
몇몇 고위국회의원들과 대형 길드들 중에서 그의 스폰을 받지 않은 이들은 없을 정도였으니까.
리암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이번 미국 몬타나 주에서 나타난 재앙(災殃)을 처리한 것은 '김현우'입니다."
"그래서?"
"……의원님도 아실텐데요...? '크레바스'나 이번 '재앙'같은 경우 그 사건을 처리한 사람에게 모든 소유권이 이전 되게 되어 있습니다."
리암의 설명에 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자네 말은 몬타나 주에서 차출되었던 이클립스 길드가 재앙의 처치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이 말인가?"
그의 물음에 리암의 입이 멈췄다.
사실 정말 명확한 사실대로라면, 이클립스 길드원들은 재앙을 막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허나, 그 사실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마음속으로 그것을 가지고 있기만 한 것과 밖으로 내뱉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처럼.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말은 포트가 해야 할 말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딱히 재앙이 나왔을 때 한 것도 없었고, 이클립스 길드와 접점이 있기는 했으나 그건 말 그대로 그저 외부적으로 보여주기 식의 접점일 뿐이었다.
한마디로 포트가 이클립스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들의 죽음을 그저 리암을 압박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리암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포트는 슥 웃더니 이어서 말했다.
"뭐, 나도 이클립스 길드가 그리 '큰'공헌을 세웠다고는 말하지 못하겠군. 그래 어디까지나 작은 부분정도겠지."
"……."
"그러니까, 말하고 있는 걸세, 어느 정도의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그건 제 선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요."
"그러니 말했지 않은가? 자네는 그저 '김현우'와 나를 독대시켜 주게. 그렇다면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지랄하고 있네, 미친 영감새끼.'
그의 당당한 말에 리암은 욕설을 내뱉었다.
김현우를 만나게 해주는 것?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도 리암이 포트와 김현우를 연결시켜주지 않으려는 이유는 순전히 김현우가 두렵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김현우의 성격이, 리암은 두려웠다.
그의 성격은 불과 같았다.
어디서든 자기가 생각한 말은 꼭 하는 편이고, 당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게다가, 한번 꼭지가 돌면 앞뒤를 가리지 않는 것으로 김현우는 유명했다.
당장 아레스 길드와 김현우가 싸운 흔적들만 쫓아가 봐도 그가 얼마나 노빠꾸로 인생을 살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체험 할 수 있었다.
아레스 길드 한국지부의 헌터들을 전부 뿅망치로 박살 내고, 어떨 때는 짱돌로도 박살 낸다.
기자들한테도 세간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욕이란 욕은 전부 다 박는다.
그게 무엇인가의 '권력'이나, 눈앞의 의원처럼 '자금'을 기반으로 한 자신감이라면 리암도 그를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나 그의 자신감의 근원은 달랐다.
힘.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말아먹어 버릴 수 있는 재앙(災殃)을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이 그의 기반이라는 것이, 리암을 두렵게 했다.
그의 성격상 그를 수틀리게 하면 앞뒤 안보고 달려들 테니까.
누군가는 설마 미국의 의원, 더 나아가서 미국을 적으로 돌릴 짓을 하겠냐? 라고 생각하겠지만 리암의 생각에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가 아직 신인일 때도, 그는 헌터 업계에서는 TOP5 안에 드는 아레스 길드를 적으로 만들고 시작했으니까.
'더 강해진 지금은…….'
굳이 미국이라고 해서 사정을 볼까?
적어도 리암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렇기에 리암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다시 한번 입을 열기 위해 입가를 움직이려 했으나-
"저 빼고 무슨 이여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합니까?"
"……헉."
-곧, 리암은 거대한 방문 앞에 있는 김현우를 볼 수 있었고.
"다시 한번 말해봐요,"
김현우는-
"내 여의봉
"(如意棒)을, 뭐 어쩌겠다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 128
128. 여의봉은 내 거다(2)
공기가, 얼어붙었다.
리암.
적어도 그은 마치 정말로 공기가 얼어붙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폐부에 들어찬 공기들이 급속 냉각된 듯 그의 몸을 차갑게 만들었고, 그런 상황에서 김현우는 물었다.
"저기요, 제 말 안 들려요?"
김현우의 입가에 웃음이 더해진다.
리암은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멈췄던 사고를 이어나감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니, 이건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급한 수습을 위한 리암의 목소리-
"오! 마침 잘 왔네. 자네가 김현우인가?"
그러나 리암의 앞에 앉아 있던 '아탈렉 포트'는 그의 말을 끊고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김현우를 돌아보았다.
김현우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포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내가 김현우가 맞기는 한데, 당신은?"
"나는 아탈렉 포트라고 하는 사람이지, 몬타나 주의 의원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의 말에 김현우는 피식 웃더니 이내 걸음을 옮겨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탁- 탁-
그가 신고 있는 삼선 슬리퍼가 대리석 바닥을 때리고, 마침내 김현우는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도달에 옆에 있는 의자를 하나 빼내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요?"
김현우의 물음.
포트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가져온 재앙의 물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아~ 그래요?"
무척이나 당당하게 입을 여는 포트의 말에 김현우는 재미있다는 듯 말을 늘이며 대답했고, 포트는 이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재앙(災殃)인 제천대성을 자네가 잡은 것은 맞지, 허나 그 재앙은 몬타나 주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요?"
"우리 몬타나 주는 큰 피해를 봤지, 게다가 자네도 알다시피 몬타나 주에 속해 있는 거대 도시 빌링스는 완전히 궤멸했네."
"그래서?"
"거기다 덤으로 자네는 혼자 재앙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몬타나 주의 '이클립스' 길드는 자네가 오기 전 그의 힘을 어느 정도 빼 놓았지."
"그건-!"
리암은 급하게 포트의 말을 듣고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려 했으나, 김현우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은 채 반박하려는 리암을 제지하듯 손을 올리곤 말했다.
"뭐, 재미있네. 계속 말해봐, 아니- 내가 맞춰볼까?"
어느새 존댓말에서 반말로 바뀐 김현우.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아무튼 재앙을 잡은 건 나지만 자기들이 피해도 봤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딜을 조금이라도 넣기는 넣었으니까. 너희들에게도 소유권이 있다-"
뭐 이런 말 하려고 하는 거지?
김현우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포트는 만족한 듯 입가에 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도 잘 알고 있군."
그의 말에 김현우는 그런 포트를 보고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여의봉 내놓으라고 하는 거야?"
"아니지, 물론 그냥 맨입으로 내 놓으라는 것은 아닐세, 당연히 우리 쪽에서도 소정의 보상금을 지급할 예정이지."
"그래?"
"물론일세."
"만약 내가 싫다면?"
"?"
"만약 내가 여의봉을 넘기기 싫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거지?"
김현우의 물음.
그에 포트는 이내 김현우를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만약 자네가 우리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또 손을 써야 하지 않겠나?"
포트의 대답에 리암의 표정이 굳어졌고, 오히려 김현우의 입가는 더더욱 올라갔다.
"어떻게 손을 쓸 건데? 응? 너도 아레스 길드처럼 암살자 보내려고?"
김현우의 말에 포트의 눈이 일순 슬쩍 떠졌으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렇게 격조 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네."
"그럼 어떻게 하게?"
그의 물음에 포트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글쎄, 어떻게 할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포트.
그 모습을 보며 리암은 망연한 한숨을 내쉬었다.
'끝이군.'
김현우와 포트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허나 그 웃음의 의미가 철저하게 뒤틀려 있다는 걸을, 리암은 알고 있었다.
'저런 멍청한 새끼.'
포트는 현재 김현우를 압박할 수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이겼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포트의 저 말에도 설설 길 사람들이 많지만.'
그는 몬타나 주의 의원이다, 거기에 더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자금은 엄청날 정도였고, 곧 그 엄청날 정도의 자금이 있다는 것은 그와 연결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의 의원들부터 시작해 대형 길드들, 거기에 언론까지.
그는 자신의 자본금을 기반으로 미국뿐만 아니라 타국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헌터라면 포트의 말에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포트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그와 연관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기반이 있었기에, 포트는 김현우의 웃음을 '억지웃음'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 자신이 졌다는 것을 숨기기 위한 '억지웃음'으로.
애초에 그와 협상을 할 때 '거부'라는 단어를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그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김현우의 '웃음'의 의미를.
방 안에 침묵이 돈다.
리암은 시선을 돌려 김현우를 바라보았다.
김현우의 입가에 지어져 있는 웃음, 그것은 순수한 웃음이 아닌 어딘가가 비틀려 있는 웃음이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미소에서 분노로 변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표정.
리암은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몇 번이고 다른 말을 하려 했으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왠지 이곳에서 괜히 입을 열었다가는 불똥이 튈 수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다만 그는 굉장히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포트를 바라보았다.
김현우의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아왔을 때, 리암은 절대 포트가 오늘 정상적으로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찍어 누르는 식으로 밖에 협상을 해보지 않은 포트는 자기가 그런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뭐, 리암 본인이라도 저 정도의 위치에 서 있으면 그런 걱정을 안 할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리암의 생각과 함께 침묵이 지속되고 있을 때쯤-짜악-!
건물 안에 경쾌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리의 진원지는 김현우의 손.
그리고-
"무-슨?"
포트의 뺨이었다.
짜아악-!
"끄아아악!"
그와 함께 한 번 더 경쾌한 소리가 터져나간다.
그와 함께 뺨에서 고통을 느낀 포트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김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걷어찼다.
와장창!
순식간에 저 멀리 날아가 박살 난 의자.
김현우는 답했다.
"이 새끼가 봐 주니까 기어오르네?"
"지, 지금 이게 무슨 짓-"
짜악-!
"끄아악!"
우당탕탕!
포트는 입안에서 터져 나오는 피를 보며 곧바로 입을 열려 했으나 김현우는 다시 손을 휘둘러 그의 뺨을 후려쳤다.
얼마나 세게 후려쳤는지 순간적으로 허공에 몸이 떠오른 포트는 테이블 위에 처박혔고, 김현우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무슨 짓이기는 씨발아, 너는 강도한테 손속 두는 거 봤어?"
"가……강도라고?"
"왜? 아니야?"
"그게 무슨 개소리-!"
"지랄 좆까고 있네, 남이 가지고 있는 물건 빼앗으려고 협박하는 게 강도 아니야? 응? 아니냐고 이 씨발아!"
빠아아아악!
이번에는 손바닥이 아닌 주먹으로 포트의 머리를 후려친 김현우.
그의 몸이 테이블에서 굴러떨어져 마치 만화처럼 대리석 바닥을 몇 번이고 빙글빙글 돌았다.
포트는 얼굴과 머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악을 쓰기 시작했다.
"네 녀석! 나는 분명 합당한 보상을 제안했을 텐데!?"
"뭐라고 씨발아?"
살벌한 김현우의 말에 그는 움찔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나는 분명히 말 했다! 부산물을 넘기면 우리 쪽에서도 나름대로 사례를 하겠다고?"
"뭐? 사례? 돈으로?"
"그래!"
아주 당당하게 눈깔을 치켜뜨고 말하는 포트를 보며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맞네."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갑작스레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김현우.
"……?"
그에 포트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고, 김현우는 이내 그가 굴러 간 곳까지 다가와-
"!!"
그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김현우는 포트의 얼굴을 자신에게 가까이 대고는 말했다.
"그래 맞아, 내가 아주 대단한 착각을 했네. 아주 대단한 착각을 했어."
"그……그게 무슨."
"나는 분명 아까 강도인줄 알았거든? 근데 이제 보니까 강도 새끼가 아니라 그냥 양아치 새끼였네?"
"야……양아치라고?"
쫘아아악!
"끄아아아악!"
"씨발 새끼야, 네가 문방구 뒤에서 초딩들 삥뜯는 일진들이랑 뭐가 달라 이 개새끼야."
쫘아아악!!!
어? 초딩 지갑에서 5000원 빼간 다음에 지갑 돌려주는 새끼들이랑 뭐가 다르냐고 이 씹새끼야!!!"
빡! 와장창창!
끄에에엑!!"
또 한번 테이블로 날아가 이번에는 테이블을 박살 내 버리는 포트.
김현우는 또 한번 포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고, 리암은 완전히 개박살이 난 포트의 모습을 보며 서둘러 김현우에게 입을 열었다.
이, 이 이상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걸세! 이러다가 죽이라고 하면-!"
리암이 어떻게든 포트를 살리기 위해 김현우를 설득하려 했으나-"
네 녀석! 이번 일이 밖으로 새나가면 어떻게 될지 알고 이런 짓을 하는 거냐-!!"
Aㅏ……."
리암은 부서진 테이블 너머에서 들려온 포트의 소리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 일이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그, 그리고!"
그리고 뭐?"
그……네, 네 가족들도! 네 가족들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뭐?"
김현우가 살짝 멈칫하자 포트는 곧바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과연 이 일이 새어 나가고도 네가 정상적으로 헌터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나? 천만에! 너는 헌터 생활은 제대로 못 할 거다! 게다가 네 가족도 마찬가지야!"
순식간의 포터의 입에서 나온 악의가 가득 찬 말들.
그에 김현우는 한동안 포트를 멍하니 바라봤고, 포트는 힙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바라봤다.
짧은 침묵.
곧-
"나, 부모님 없는데?"
"무……뭐?"
"나 부모님 없다고."
포트는 김현우의 입안에서 나온 말에 저도 모르게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망연하게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는 포트를 보며 김현우는 입가에 진득한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많이 벌어서 헌터질 더 이상 안 해도 돼!"
이 개새끼야!!
빠아아악!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이제야 일어난 포트의 몸을 발로 후려 차 버렸고, 이내 그는 대리석 바닥을 훑고 날아가 외벽에 처박혔다.
"끄학!"
그와 함께 땅바닥에 처박히는 포트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고 쯧 하고 혀를 찬 뒤,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포트를 바라보고 있는 리암을 향해 말했다.
"걱정마요 안 죽었으니까."
"아니……."
'안 죽었다고 걱정 안 할 그런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리암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포트의 모습을 보며 짧게 생각했고, 이내 김현우에게 물었다.
"아니……그,"
"왜요?"
"수습을 어떻게 하려고……."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 리암의 걱정 어린 말투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그건 신경 쓰지 마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보다-"
김현우는 추리닝 바지에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제 여의봉(如意棒)이나 돌려주세요."
미국의 주 의원을 개 박살 내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김현우의 모습에 리암은 저도 멍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 봤다.
# 129
129. 여의봉은 내 거다(3)
그다음 날.
"이 개새끼!"
워싱턴의 주립 병원의 특 VIP실.
병실의 크기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넓고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는 방 안에서, 포트는 성을 내며 자신의 손에 잡히는 것을 모조리 집어 던지고 있었다.
깡! 쨍그랑!
철제 수납장과 접시가 벽에 맞아 찌그러지고 깨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으나 포트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몇 번이고 거친 숨을 내뱉고는 침대를 내리쳤다.
쿵!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는 헌터에게 치료받은 덕분에 어제의 심각했던 상황에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까지 빠르게 호전된 포트는 두 눈을 부릅뜨며 이를 갈았다.
'나를 가지고 놀아?'
포트는 자신이 기억을 잃기 전, 그러니까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씩씩 거렸다.
'또라이 새끼……!'
포트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턱이 얼얼한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턱을 몇 번이고 움직였다.
다그락- 다그락-
치유능력이 있는 헌터에게 치료받았다고 해도 아직 후유증이 전부 가시지 않은 것인지 달그락 거리는 미세한 소음을 느끼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포트는 김현우에 대한 분노가 계속해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물론 엄연하게 잘못을 따져본다면 애초에 헌터 협회에서 정식적으로 정해놓은 규정을 깨려 한 '아탈렉 포트'의 잘못이었다.
그가 김현우에게 하려던 일은 어떻게 보면 정말 김현우가 말했던 '강도'나 '양아치'짓에 가까웠으니까.
"으으으……!!"
허나 포트에게 딱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것이 아닌, 김현우가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었다는 것.
거기에 더해서 자신에게 엄청난 상해를 입혔다는 것.
자신이 잘못한 일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는 오로지 자신이 당한 것만을 생각한 포트는 김현우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소리쳤다.
"밖에 아무도 없나!?"
그의 외침에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문을 열며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의원님."
"에반인가?"
"그렇습니다."
그 남자의 이반은 에반으로, 포트가 처음 정계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쭉 그를 보좌하고 있는 보좌관중 한 명이었다.
또한 그는 포트가 긴 시간 동안 알고 지내며 상당히 믿고 의지할 수 있을 정도로 신뢰가 쌓인 사람이기도 했다.
에반이 정중하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자, 그는 입을 열었다.
"현재 상황은?"
"우선, 의원님이 깨어나시기 전이라 딱히 지시를 내리진 않았습다만 준비는 전부 시켜 놨습니다."
에반의 말에 그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뭘 시킬 줄은 알고 있겠지?"
"뿌리면 되겠습니까?"
"아니, 그냥 뿌려대서는 안되지, 자금도 전부 가져다 써. 김현우에 대한 추문과 논란, 만약 만족할 만한 게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전부 뿌려 버려!"
"알겠습니다."
포트의 말에 에반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고,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길드 쪽이나 김현우에게 피해를 입은 녀석들을 조사해 봐, 김현우에 관해서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곳은 전부 조사해!"
"의원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에반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포트는 이빨이 부스러질 정도로 입을 다문 채 부서진 접시를 보며 생각했다.
"나를 건든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게 해주마, 김현우……!"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포트 의원을 한동안 바라보던 에반은 이내 그에게 허락을 구하고 병실을 나섰다.
그는 병실을 나서고 고급스러운 병실의 복도로 나오자마자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고풍스러운 건물의 복도에 그의 발걸음 소리가 울리고, 그는 이내 엘리베이터를 탑승한 채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14층에서 시작된 엘리베이터가, 기이하게도 에반은 버튼을 누르지 않았음에도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병실이었던 상층을 지나.
카운터였던 1층을 지나고.
주차장이 있는 지하 4층에 멈춰 선 엘리베이터.
에반은 곧 주차장에 나오자마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이내 정말로 익숙하다는 듯 바로 앞에 주차되어 있는 한 밴 앞에 멈춰 섰다.
밴 앞에 멈춰서자마자 말없이 열리는 문.
에반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차 안에 올라탔고, 그 차에 앉자마자-
"그래서, 이야기는 어떻게 끝났지?"
운전석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반은 남자의 목소리에 조금의 지체도 없이 답했다.
"명령을 받았습니다."
"명령?"
"김현우에 대한 추문을 뿌리라는 명령입니다."
에반의 말에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추문이라고?"
"예, 김현우에 관련해서 논란이 되는 것들은 모조리 찾아서 언론에 뿌려 버리라는 명령을 하더군요."
에반의 담담한 고백.
"추문…… 추문이라……."
남자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에반은 곧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에반의 물음.
그에 남자는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당연하게 입을 열었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 '보스'는 굉장히 김현우 성애자인 거 아시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 모를 리가 없지, 김현우 그 작자 덕분에 우리가 미국에서 작업 친 게 몇 개인데 말이야."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키득키득 거리곤 에반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너는 생각해 둔 거라도 있어?"
그의 물음에 에반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처리할까요?"
"오우, 그렇게 빠르게 결단하는 거야? 네가 10년 동안이나 옆에서 보좌했던 사람인데?"
그의 물음에 에반은 시니컬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10년동안 보좌했어도 그에게서 받은 건 단 하나도 없군요. 제가 이곳에서 받은 것에 비하면 말이죠."
에반의 말에 그는 씩 웃었다.
"그래, 뭐 네 말대로 처리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래서야 오히려 일을 키우는 꼴이지."
"그렇다면?"
"우선 그냥 뿌리는 척만 해."
"……뿌리는 척만?"
"그래, 말 그대로 추문과 논란을 찾아서 뿌리는 척만 하라고,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남자는 핸들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슥- 처리하는 거지, 응? 그 편이 더 낫지 않아?"
"물론, 가능합니다. 어차피 그의 권력은 제가 통제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요."
에반의 말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이내 시선을 앞으로 돌리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우리의 보스를 위해, 또-"
그리고, 두 남자는-
"우리의 조직-"
각각 자신의 오른 팔뚝과 목 뒤에 있는-
"-'일루미티'를 위해."
-삼각형 안에 눈이 들어 있는 기묘한 문신을 서로에게 보이며 조용히 자신들만의 구호를 읊조렸다.
***
다음 날.
"자,"
"이게, 그거예요?"
하남에 위치한 거대한 장원, 김현우는 김시현에게 불완전한 악천의 원천을 넘겨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천을 천마의 검에 가져다 대면 시스템 창이 뜰 거야."
그 안에 들어가면 천마를 만날 수 있지.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마치 소중하다는 듯 자신의 주머니에 챙겨 넣었고.
이내 그는 시선을 돌리던 그는 장원 한쪽의 1층 건물 안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는 아냐를 보고는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멕시코에 간다고요?"
"그래, 확인할 게 좀 생겼거든."
"확인할 것이요?"
"그래."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말했다.
"형."
"왜?"
"거기 다 박살 난 건 알죠?"
김시현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
"그런데 거기에 확인할 게 있다고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는 김시현.
물론 그의 물음은 더없이 합당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김현우가 현재 가려고 하고 있는 멕시코시티는 그가 얼마 전 제천대성과 싸움을 벌였던 빌링스와 비슷한 처지였으니까.
물론 빌링스보다는 낫다.
빌링스는 그냥 존재 자체가 지도에서 사라진 것처럼 깔끔하게 없어졌고.
멕시코시티는 건물의 흔적이라도 조금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절대로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지금 가봤자 볼 수 있는 것은 수많은 헌터들과 인력들이 합쳐서 멕시코시티를 재건하는 모습뿐일 것이다.
아니, 애초에 벌써 재건 작업을 시작하고 있기는 할까?
오히려 그대로일 수도 있었다.
그런 김시현의 여러 가지 생각이 담긴 물음에 김현우는 심플하게 답변했다.
"있어."
"……그래요?"
김시현은 그 확인할 게 뭐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딱히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아 그 이상 묻지는 않았다.
"흐음,"
한편, 김현우는 아냐가 건물 한쪽에서 열심히 마법진을 그리는 것을 보며 어제 아브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여의봉'을 찾아 온 뒤, '계승자'에 대해서 묻기 위해 시스템 룸에 들어갔던 김현우는 그가 원하는 대로 계승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라.'
다만, 아브가 준 정보는 굉장히 미묘했다.
아브가 기록을 뒤져본 결과 계승자는 꽤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는, 딱히 계승자들은 딱히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등반자'는 탑을 오른다.
'가디언'은 탑을 오르는 등반자를 막는다.
두 개의 역할은 이렇게 정해진 역할이 있다.
그러나 계승자는 아니었다.
아브의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탄생되고 기록되어 있는 계승자들은 모두 제각각의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어느 계승자는 가디언처럼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 했고.
또 어느 계승자는 등반자가 되어 탑을 올랐다고 한다.
또 누구는 계승자가 되고서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녀석들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계승자가 되어 자신의 세계에 군림하던 녀석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야말로 제각각.
'뭐, 아무튼 결국 계승자라는 게 나쁜 건 아니라는 건데.'
김현우는 슬쩍 미령을 바라보았다.
요즘 부쩍 거리가 가까워져 예전에는 분명 뒤에 서 있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바로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서 있는 그녀.
그는 살짝 고민하는 듯하다 이내 미령을 불렀다.
"제자야."
"예, 스승님?"
"받아라."
그와 함께 김현우는 미령에게 괴력난신의 정수를 넘겨주었다.
그녀는 잠시 자신의 손 위에 올라온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듯하다 이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 이건……!"
"이제 네 거다."
계승자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미령에게 정수를 넘기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이번처럼 세계 전국에서 등반자가 올라올 때를 생각해보면 무조건 등반자를 막을 사람이 많은 게 이득이지.'
게다가 자신의 제자인 미령은 갑자기 힘을 얻었다고 날뛰지는 않을 것 같다는 계산이 들어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정수를 넘길 수 있었다.
"저……저는,"
"마법진 전부 다 완성됐습니다. 길드장님!"
미령이 더듬거리며 김현우에게 입을 열려는 도중 들려온 아냐의 목소리-그는 그 목소리에 걸음을 옮기면서도 미령에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믿는다."
"!!"
김현우의 말 한마디에 한순간 숨을 삼킨 채 홍조를 띄우는 미령.
"그럼, 내가 다녀올 때까지 잘 기다리고 있어라."
"네에에……."
힘없이 쫑알거리는 미령의 목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던 김현우는 이내 마법진 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아냐를 향해 걸어가다 이내 고개를 돌려 김시현을 바라봤다.
"시현아."
"왜요 형?"
"너 바로 들어갈 거지?"
김현우의 물음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예, 아마 그럴 것 같아요."
그의 대답에, 김현우는 말했다.
"그럼 그 안에 들어가면 천마(天魔)에게 전해줘라."
"네? 천마한테요?"
"그래, 그 녀석한테 좀 전해줘."
"어떻게요?"
그의 물음에 김현우는 순간 말을 멈추고 무엇인가 고민하는 듯하다, 이내 피식 웃곤 이야기 했다.
"댁이 가르쳐 준 무술 아주 잘 써먹고 있다고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김현우는 아냐가 만들어 놓은 마법진 위에 섰다.
# 130
130. 두 번째 제자도 제정신이 아니다(1)
"후……."
김현우가 아냐의 마법진을 타고 사라진 뒤, 김시현은 나름대로 준비를 끝낸 채, 며칠 전을 기점으로 다시 지어진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가구가 하나도 없어 적적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생활 가전 정도는 들여져 있는 아파트 집 안.
그 아파트의 거실 한가운데에서, 김시현은 앞에 떠오른 로그를 보고 있었다.
[악천의 원천을 '천마검(天魔劍)'에 사용하시겠습니까? Y/N]
단출한 한 줄짜리 로그.
'혹시나 싶어서 만날 사람은 전부 만나고 왔다.'
게다가 이미 이곳에 이미 들어갔다 나온 김현우에게 이런저런 이야기와 더불어 주의점 아닌 주의점을 듣기도 했다.
'천마(天魔)의 성격이 개차반이니까 되도록 안 개기는 게 좋다……라.'
그리고 그중에서도 김현우가 몇 번이고 강조한 말을 떠올리며 김시현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였다.
'……현우 형이 개차반이라고 말할 정도의 성격이면, 도대체 어느 정도인거지?'
딱히 동료들에게 그러지는 않긴 해도, 김현우의 성격은 확실히 개차반이 맞기는 했다.
당장 그가 걸어온 행보는 절대로 평범한 일반인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김현우가 천마의 성격을 비유해 개차반이라고 한다면-
'현우 형 이상의 개차반…….'
김시현은 저도 모르게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다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큰 한숨과 함께 김시현은 로그의 버튼을 눌렀고-
"!"
세상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그러지기 시작한 세상은 그가 제대로 공간을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 바뀌어 있었다.
"이건-"
김시현의 눈에 거대한 장원이 눈에 보였다.
땅바닥은 잘 깔아놓은 흙바닥이, 그리고 그 주변으로 고풍스러운 중국풍의 담들이 늘어서 있다.
순식간에 일변한 세상.
김시현은 고풍스러운 문양을 가진 중국풍의 담들을 바라보다, 이내 장원 대문에 만들어져 있는 대문 위에 써져 있는 문패를 읽었다.
天魔殿(천마전)이라는 한자가 거대하게 써 있는 문패의 아래에 있는 목재의자에-
"네 녀석은 또 뭐냐?"
그는, 앉아 있었다.
무료한 표정으로 장원 가운데에 서 있는 김시현을 바라보고 있는 그.
검은색의 흑의를 입고, 자신의 검을 의자에 걸쳐 놓은 채 앉아 있는 그는 갑작스레 나타난 김시현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곤 말했다.
"네 녀석은 또 뭐냐고 물었을 텐데?"
천마(天魔).
그의 물음에 김시현은 순간 생각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김현우에게 소개를 받고 왔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런 말없이 그냥 순수하게 무공을 배우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김시현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져가고, 천마의 얼굴에 슬슬 주름이 잡힐 때쯤.
"무공을 전수 받고 싶습니다!"
김시현은 생각을 마쳤다는 듯 고개를 숙였고-
"넌 또 뭐하는 새끼지?"
"……."
곧 그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천마를 바라봤다.
그는 뭔가 묘하게 심기가 거슬린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짜증을 냈다.
"도대체 너 같은 새끼들은 어디서 오는 거냐?"
"그……아티팩트를 통해서 왔는데요."
천마의 물음에 무엇이라고 답할까 하다 이내 사실대로 말하는 김시현.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 아티팩트?"
"예, 지금 당신이 옆에 두고 계시는 천마의 검 덕분에 이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
김시현의 말에 그는 잠시 사색에 빠지더니 이내 말했다.
"설마 네 녀석, 김현우와 관련되어 있나?"
천마의 물음에 김시현은 순간 대답을 망설이다 이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런 개새끼."
김시현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욕을 내뱉으며 인상을 찌푸린 천마, 김시현은 그런 천마의 모습에 놀랐고 천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 개새끼가 오가고 난 뒤, 잠에 들지 못해서 이제야 겨우 잠에 빠져들었는데. 또 이런 식으로 나를 엿 먹여?"
굉장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천마의 모습에 김시현은 저도 모르게 김현우의 말을 떠올렸다.
'천마의 성격은 개차반이다'라는 김현우의 말을.
김시현은 은근슬쩍 눈치를 보며 한동안 중얼거리는 천마를 보며 순간 김현우가 자신에게 전했던 말을 떠올렸다.
'댁이 가르쳐 준 무술 아주 잘 써먹고 있다고 전해줘.'
라고 말했던 김현우.
하지만 김시현은 그런 김현우의 말을 조용히 묻어두기로 했다.
적어도 지금 굉장히 심기가 나빠져 있는 천마에게 김현우가 전해달라는 말을 하면 딱히 뒤가 좋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천마가 혼자 짜증을 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천마는 김시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꺼져라."
"예?"
"꺼지라고,"
"아니 그게……."
"내 말 못 들었나? 어차피 네 녀석은 내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다."
천마의 막말에 김시현은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천마를 바라봤으나, 그는 완강한 듯 김시현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 김시현은 김현우에게 들었던 또 하나의 말을 기억해 냈다.
'만약 천마가 안 가르쳐 준다고 뻐기면 그냥 그 자리에서 무공 배우고 싶다고 계속 밀어 붙여라.'
김현우는 김시현에게 그렇게 말했다.
무공을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포기하는 게 아니라 그가 허락해 줄 때까지 밀어붙이라고.
'그래,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지.'
게다가 김시현은 이전의 무력감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기에 망설임 없이 김현우의 말을 떠올리고-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알려주십쇼!"
실행했다.
"꺼지라고 했을 텐데?"
"제발!"
"꺼져라"
"제발!"
"꺼져."
"제발!"
"꺼-"
"제발요!"
김시현의 말에 일순 천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김시현은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있다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천마의 목소리에 슬쩍 시선을 올렸고-
"헉!"
천마는 어느새 김시현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하는 꼬라지가 그 또라이 새끼의 지인이라고 할 만하구나. 그러니까 내 그놈과 똑같이 대해주마."
"네- 네?"
"나를 이겨봐라, 그럼 네게 무(武)를 전수해 주지."
천마는 그렇게 말하며 망설임 없이 김시현의 얼굴을 발로 후드려 찼고-빠아아아악!
"께에에에엑!"
그것이, 김시현의 첫 번째 죽음이었다.
***
"……진짜 아무것도 없네."
김현우는 멕시코시티의 전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냐의 마법진을 타고 멕시코로 넘어온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멕시코시티를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있기는 있다.
분명 조금 전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는 헌터 협회가 임시로 세워져 있었으니까.
물론 건물이 아니라 텐트였지만.
근데 그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
보이는 것은 그저 시커멓게 불탄 흔적들.
저 멀리로는 그나마 검게 불탄 콜로세움이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고, 또 어디는 그나마 서 있기는 한 빌라들이 눈에 보였다.
뭐, 그래봤자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남아 있는 건물들은 그 내구성이 위태로워 보였다.
김시현의 의문대로, 도대체 이곳에서 무엇인가를 확인한다는 게 웃긴 상황 속에서 김현우가 머리를 긁적이는 도중.
"?"
"안녕하십니까? 김현우 님."
그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저편에서부터 그가 이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김현우는 그가 협회원인줄 알았다.
실제로 이 불타버린 멕시코시티 곳곳에서는 협회원과 헌터들이 혹시 모를 생존자 구출작업을 펼치고 있었으니까.
남자를 바라봤다.
모든 게 전소되어 버린 도시에서 어울리지 않게 검은색의 양복을 입고 팔자 좋게 검은색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는 그의 모습.
게다가 마치 김현우를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여는 모습에 그는 물었다.
"넌 뭐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뭐? 나를?"
"그렇습니다."
"……."
남자의 말에 김현우는 요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으나 남자는 이내 답했다.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시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게다가 저도 '혹시' 김현우 님이 오실지도 모르니 대기하고 있으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선글라스를 낀 그의 말에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누가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는데?"
"저희 보스입니다."
"뭐? 보스?"
"예."
김현우의 말에 담담하게 대답하는 남자.
그는 김현우가 이어서 질문을 하기도 전에 제안했다.
"이곳에서 이야기를 하려면 좀 길어 질 것 같은데, 제가 안내를 좀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안내?"
"예, 허락하신다면 저희 보스가 있는 곳으로 김현우 님을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의바르게 슬쩍 고개를 숙이는 남자의 모습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 말했다.
"싫다면?"
"만약 거절하시겠다면 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기에, 우선 보스에게 새로 연락을 드려 명령을 하달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
남자의 대답에 김현우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곤 물었다.
"그 보스가 누구인데?"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게 아니라, 직접 김현우 님이 가셔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김현우는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따박따박 존댓말을 하고 있기는 했으나 결국 그 내용의 요지는 여기서는 딱히 어느 정보도 알려줄 수 없다는 소리였다.
'따라가 봐야 하나?'
뭐, 사실 따라간다고 해도 자신에게 피해를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자신을 공격한다고 해도.
'내가 이 녀석들에게 당할 것 같지는 않고, 게다가-'
김현우는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저놈의 보스라는 놈이 아마 아브가 말한 그 녀석일 수도 있다.'
아니,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적어도 김현우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
그것은 곧 김현우가 가디언이거나, 혹은 등반자와 관계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좋아."
잠시간 고민을 끝낸 김현우의 대답에 남자는 굉장히 만족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몸을 돌렸고, 김현우는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건?"
"저희 기지와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는 엘리베이터입니다."
김현우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의 지하에서, 멀쩡하게 기동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엘리베이터를 볼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뭐라고 흑요석을 여기저기 박아 넣은 사치스러운 엘리베이터의 모습.
김현우는 곧 그 남자와 함께 열린 엘리베이터에 탔고.
-위이이잉
문이 닫힘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
김현우는 엘리베이터가 어느 정도 내려가자마자 엘리베이터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분명 지하로 내려가고 있던 엘리베이터의 밖.
"이게 뭐야?"
그곳에는 거대한 외성이 있었다.
그래.
마치 지하 세계의 왕궁을 연상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외성이.
김현우가 멍하니 거대한 외성을 바라보고 입을 벌리고 있을 때.
띵-!
경쾌한 소리를 낸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곧-
"……."
김현우는 엘리베이터 앞에 좌르륵 도열해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어딘가 영화에서 나오는 조폭의 등장 씬처럼, 양쪽에 서서 도열해 있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런 그들의 앞에.
"……어?"
그녀가 있었다.
두꺼운 외투를 뒤집어 쓴 채, 어깨에는 이미 낡을 대로 낡아버린 가면을 달고 있는 그녀가, 무척이나 환한 웃음을 지은 채 서 있었다.
김현우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고.
그녀, 어나 S등급 세계랭킹 2위이자 '암중비약(暗中飛躍)'이명을 가지고 있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현우의 두 번째 제자는-
"사부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온 김현우를 보며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 131
131. 두 번째 제자도 제정신이 아니다(2)김현우에게는 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
한 명은 바로 김현우가 탑 안에서 한참 은거기인(隱居伎人)이라는 컨셉 플레이를 하며 무술을 가르쳤던 '미령'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그러니까, 메이슨을 네가 죽였다고?"
"네 사부님, 원래라면 사부님한테 해를 끼치기도 전에 죽이고 싶었는데, 그때는 아직 힘이 조금 모자라서요."
바로 그의 앞에서 요염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그녀, '하나린'이였다.
김현우는 스읍- 하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고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이내 자신이 앉아 있는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판타지 세계에 나오는 왕성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 놓은 것 같은 내부, 고풍스러운 바닥 타일과 머리 위에는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건, 이 왕성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 놓은 거대한 건물이 전부 '지하'에 있다는 것이었다.
김현우는 몇 번이고 주변을 돌아보다가 갑작스럽게 든 궁금함에 물었다.
"그런데."
"말씀하세요. 사부님."
"왜 이 지하에다가 거대한 왕성을 지어놓은 거냐?"
김현우의 물음에 하나린은 웃으며 말했다.
"사부님이 탑에 있었을 때 말씀하셨잖아요?"
"뭘?"
"지하 왕성 같은 게 있으면 멋질 것 같지 않냐고-"
"……."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김현우가 일순 기억의 혼란을 겪고 있는 와중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내뱉었다.
"그 이외에도 사부님이 원하시는 것은 전부 준비해 두었어요."
"……뭐? 내가 원하는 거?"
김현우는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으나 그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미국에 땅이 5만평 정도 있으셨으면 한다고 하셔서 준비해 두었습니다."
"뭐?"
"거기에 유럽 쪽에 별장을 가지고 싶다고 하셔서 우선 유럽이라고 규정되어 있는 모든 나라에 별장을 하나씩 만들어 두었습니다."
"……."
"그 밖에도 평생 써도 마르지 않을 돈도 이미 준비되어 있고, 카지노에 꼭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기에 카지노를 하나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것 말고도-"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
김현우는 그녀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내가 정말로 그런 이야기를 했나?'
그는 하나린과 만났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그가 아직 탑에 있었을 때.
정확히는 그가 탑에서 은거기인 놀이를 그만두고 미령을 밖으로 내보냈을 때, 김현우는 그녀를 만났다.
물론 좋은 만남은 아니었다.
김현우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같이 탑을 오르고 있던 낙오자들에게 강간을 당하기 직전의 상황이었으니까.
낙오자.
그들은 튜토리얼 탑에 들어왔으나 탑을 오르는 헌터들과는 다르게 탑을 오르는 것을 포기한 녀석들을 일컬어 부르는 말이었다.
그런 낙오자들에게 강간당하려던 것을 구해주었던 것이 그녀와 김현우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 이미 은거기인 컨셉을 그만둔 지 한참 된 김현우는 더 이상 제자가 필요 없었기에 그녀를 탑을 오르고 있는 헌터들 사이에 던져두려 했었다.
허나 그녀는 오히려 김현우에게 붙어 있기를 원했고, 어쩌다보니 김현우는 그녀를 다시 제자로 받게 되었다.
사실 말이 제자지 그녀와의 관계는 좀 기묘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냥 말동무 같은 느낌이었을까?
'뭐, 결국 훈련을 할 때면 후드려 패긴 했지만.'
물론 미령 때처럼 은거기인 컨셉을 잡으려고 멀쩡한 제자를 잡은 게 아닌, 말 그대로 정말 잘 알려주려다 보니까 사용하게 된 어쩔 수 없는 폭력이었다.
어쩔 수 없는 폭력……이었을까?
'…….'
아무튼, 처음 말했다시피 그녀와의 관계는 수련할 때를 제외하고는 말동무의 느낌이 강했다.
사실 처음부터 말동무의 느낌이 강했다기보다는 그녀가 김현우를 따라 탑에서 도저히 나가지를 않다보니 자연스럽게 나누는 이야기가 많아졌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때 당시로 계산했을 때, 하나린은 자그마치 1년 반 동안이나 탑을 나가지 않고 김현우를 따라다녔으니까.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김현우에게 있어서 이미 5년차가 넘었을 때 탑의 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결국 그런 식으로 김현우와 1년 반 가까이 탑 생활을 지속하고 있던 하나린은 결국 그다음 회차의 헌터들이 왔을 때, 그들과 함께 탑에서 빠져나갔다.
원하는 것을 모두 준비해 놓겠다는 말을 남기고.
'아.'
김현우는 거기까지 생각한 뒤, 문득 시간의 움직임 속에 묻혀 있던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하나린이 김현우를 떠나기 얼마 전의 기억.
'사부님.'
'왜?'
'사부님은 밖에 나가면 뭘 하고 싶나요?'
'나가면 하고 싶은 거?'
'예.'
'존나 많지, 우선 잠도 좀 퍼질러 자고 싶고, 잠 좀 다 퍼질러 자고나면 일 안 하면서 살고 싶네. 재벌의 삶? 그런 거 있잖아?'
'돈이 많은 것을 원하시는 건가요?'
'그렇지, 게다가 별장도 좀 있었으면 좋겠네.'
'별장?'
'그래, 재벌들처럼 일은 조또 안하고 맨날 여행가서 별장에서 신나게 놀고,'
'예.'
'거기에 좀 특별하게 지하 별장 같은 것도 있으면 좋겠네, 막 왕궁 같은 느낌으로다가.'
'그렇군요.'
'또, 카지노도 한번 가보고 싶네, 라스……라스베이거스? 거기 카지노에 가서 한번 도박도 해보고 싶어.'
그 이외에도 그냥 망상으로 치부해도 될 법한 어이없는 소리들을 그저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던 예전의 기억.
'미친-'
그저 망상으로 점철되어 있었을 뿐인 허언들을-
"사부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의 대부분 준비해 놓았답니다?"
그녀는, 실제로 재현해 내고 있었다.
"……."
김현우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 '심리'스킬을 사용했다.
그리고-
[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사부님]
'얘도 제정신은 아니군.'
김현우는 곧 그녀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말풍선을 보며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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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하나린 [계승자]
나이: 24살
성별: 여
상태: 매우 환희 중
-능력치-
근력: S-
민첩: S++
내구: S+
체력: S+
마력: Ss
행운: A+
성향: 절대 헌신 주의 성향
SKILL -
[정보 권한이 부족해 열람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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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확인한 하나린의 정보창.
'……어째 미령의 능력치와 비슷한 것 같은데'
어디서 본 것과 굉장히 흡사해 보이는 그녀의 정보창을 보며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하나린을 바라봤다.
온몸을 두꺼운 외투로 가린 채, 어깨에는 그녀가 기념품으로 가져가겠다던 김현우의 가면을 달고 있는 그녀.
김현우는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다 이내 그녀의 이름 옆에 있는 [계승자]라는 글자를 보고는 짧게 생각했다.
'궁금한 건 많지만, 우선 해야 할 일 먼저 하자.'
뭐, 하나린이 계승자인 것을 봐서는 대충 전후 상황을 짐작할 수 있기는 했으나, 역시 짐작보다는 본인에게 말을 듣는 게 확실하니까.
"야."
"네 사부님."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너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맞지?"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어요."
그녀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하나린은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그녀가 메이슨을 죽였을 때부터 시작해.
그녀가 메이슨을 죽인 뒤 그의 품에서 나온 '책'을 통해 계승자로 각성했다는 이야기까지.
"……그럼 네가 그 등반자를 죽인 거야?"
"예. 계승자의 능력을 실험해 보기에는 딱 알맞은 상대였어요."
농익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미소.
"흠……."
그녀의 설명으로 대충 확인은 끝났다.
아브가 느낀 멕시코시티에서 일어난 힘은 김현우의 제자인 하나린의 힘이었다.
문제는 이제 이다음.
김현우는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예?"
"네가 가지고 있는 힘 말이야. 어떻게 쓸 거지?"
본질적인 문제는 이것이었다.
이제 계승자가 된 그녀가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계승자는 딱히 목적의식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등반자도 될 수 있고, 가디언도 될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성향이나 심리로 그녀의 생각을 읽었을 때, 그녀가 김현우에게 반하는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으나 모든 지 만약이라는 게 있었다.
정보창은 완벽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쓸 거냐니……."
"말 그대로의 질문이야."
김현우의 물음에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 하나린은 이내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그야 당연히 제 모든 능력은 사부님을 위한 것이니, 사부님을 위해 쓸 거예요."
"아…… 그래."
아무래도 만의 하나라는 가정은 없었던 것 같았다.
"……."
'이걸로 끝인가?'
끝이었다.
이제 궁금증은 풀렸고, 이로써 멕시코에 있을 이유도 없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멕시코에 와서 새로 생긴, 말 그대로 개인적인 용무.
"야."
"네 사부님."
"너는 근데 대체 왜 여기 있냐?"
그것은 바로 그녀의 과거에 대해 듣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여기에 있는 것은 좀 이상했으니까.
그런 김현우의 물음에 하나린은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짓더니-
"안 그래도 지금부터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내 그녀는 꽤 긴 이야기를 풀어나기기 시작했다.
맨 처음 이야기의 시작은 바로 그녀가 김현우의 품을 떠나 탑 밖으로 나왔을 때부터 시작했다.
그때부터 주르륵 이어진 그녀의 이야기는 흔하다면 흔했으나 중반부터는 그렇지 못했다.
"……네가 2위라고?"
"예, 어쩌다 보니 그 순위에 올라있었거든요."
─
"……그래서, 메이슨이 너한테 '조직'을 키울 힘을 준거고?"
"그렇죠? 뭐, 사실 저는 동조하는 척하면서 지원만 좀 받았어요."
─
그렇게 그녀의 이야기가 막바지를 향해 흘러갈 때쯤.
"결국 재앙(災殃)을 잡은 건 순수하게 그 능력을 사용해서 잡은 거야?"
김현우는 묻자 그녀는 슬쩍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정확히는 제 고유능력인 '중첩'을 같이 사용해서 잡았어요. 지금 제가 계승한 이 능력은 좋기는 하지만 그 출력이 약하거든요."
"그럼 싸우는데 힘 좀 들었겠네?"
"아뇨?"
"별로 안 힘들었어?"
김현우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어요. 그 재앙은 제 언령에 꼼짝도 못 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멕시코가 개판이 된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그녀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고는 대답했다.
"제가 일부러 늦게 잡았거든요."
"……뭐?"
김현우의 반문에 하나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사부님이 저번에 원하셨잖아요? 돈만 많으면 아예 도시 하나를 통째로 사서 도시를 제멋대로 만들어보고 싶으시다고."
"설마……."
"네, 돈도 있고, 자원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사부님이 원하시는 대로 심시티를 하시면 돼요."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빡!
"꺄읏!?"
'이거 이제 보니까 초기의 미령보다 미친년이네!?'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후려치며 소리 없는 경악을 내질렀다.
# 132
132. 두 번째 제자도 제정신이 아니다(3)
"쯧,"
그 뒤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김현우는 하나린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뒤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는 자신의 이마를 만지작거리더니 중얼 거렸다.
"그러니까. 뭐 지금까지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던 이유는-"
"저는 되도록 사부님이 원하는 걸 전부 준비한 뒤에 뵙고 싶었거든요."
"거기에 나에 대한 음모론이나 험담이 거의 나오지 않았던 것도-"
"어느 정도 제가 컨트롤 하고 있었어요."
어때요? 저 잘했죠? 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린의 표정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도대체 이 조직은 얼마나 큰 거야? 비밀결사라며?"
"네 맞아요, '일루미티'는 오로지 제가 사부님을 위해 만든 조직이니까요. 딱히 외부에 알려질 필요는 없잖아요?"
"왜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는데?"
"그럼 은밀한 일은 잘 못하게 되잖아요? 요컨대 뭐-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을 죽인다든가."
하나린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불법적인 이야기에 김현우는 한 번 더 확신했다.
'역시 얘도 제정신은 아니다.'
짧은 한숨.
'도대체 왜 내 제자들은 이런 거지?'
김현우는 자신의 남은 제자 중 한 명인 미령을 떠올렸다.
'어째서 나는 멀쩡한데 제자들은 멀쩡한 녀석들이…….'
끼리끼리 논다고, 애초에 김현우 본인부터가 '멀쩡하다'라는 의미와는 크게 동떨어져 있었지만 본인은 전혀 그것을 파악하지 못한 듯 한참이나 그 생각을 이어나갔다.
허나 그것도 잠시.
한참이나 하나린이 자신이 거대하게 키운 조직을 이야기 하고 있을 때 김현우는 이내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됐어."
"어디 가시나요?"
하나린의 물음에 그는 대답했다.
"어딜 가기는 어딜 가, 이제 볼 일 다 봤으니까 돌아가야지."
"돌아가신다고요?"
"그래, 계승자의 힘이 누구한테 나온지도 알았고, 딱히 위협이 안 된다는 것도 알았으니까."
"제가 준비해 놓은 것들은 언제 즐길 생각이신지……?"
"그건 나중에,"
대충 대답하는 김현우의 모습에 하나린은 잠시 뚱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밖으로 안내해 드리면 될까요?"
하나린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면서도 하나린을 바라보았다.
'……더 달라붙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무척이나 깔끔하게 자신을 보내주는 하나린의 모습에 김현우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내 그 생각을 지우고 하나린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뒤를 따라 지하 왕성을 지난 김현우는 또 한번 일자로 도열해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이내 그들을 넘어 자신이 타고 왔던 엘리베이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위이잉-
하나린과 탑승하자마자 기계음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올라가기 시작한 엘리베이터는 김현우와 그녀를 순식간에 지상으로 올려 주었고.
김현우는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협회의 임시캠프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야."
"예 사부님."
-하나린과 함께.
김현우는 슬쩍 하나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너는 왜 따라오냐?"
김현우의 물음에 하나린은 답했다.
"당연한 소리를, 제가 있을 곳은 예전처럼 사부님의 옆뿐이잖아요?"
"아니, 네가 이끄는 조직은?"
"이미 많이 키워놔서 저 없어도 알아서 돌아간답니다."
"……."
'……데자뷰인가,'
김현우는 분명 이런 대화를 어디선가 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하나린에게 입을 열려다 이내 후, 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나도 모르겠다.'
어차피 하나린이 따라온다고 해도 뭔가가 바뀌지는 않을 테고.
거기에 더해서 하나린은 계승자니 전력 면에서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결국 그렇게 생각을 일축한 김현우는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하나린을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긴 뒤, 이내 마력진 위에 올라서며 말했다.
"마법진 중앙에 서야 하니까 붙어 있어라."
그와 함께 김현우의 검붉은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아냐가 직접 수동으로 마력을 조작해야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었으나.
아냐가 마법진을 개조한 뒤로는 마력을 지정된 곳에 흘려 넣는 것만으로도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우우웅-
검은 마력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함과 동시에 반응한 마법진은 이내 큰 공명음을 내며 검붉은 빛을 내뱉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점멸하기 시작하는 시야를 보며 눈을 감았다.
***
하남에 지어 놓은 거대한 장원,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건물 안쪽-
[이 보거라.]
"……."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기는 한 것이냐?]
자신에게 실시간으로 말을 거는 붉은색의 뿔과 함께.
[아이야, 설마 지금 안 들리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이냐?]
자신의 괴이라고 소개한 괴력난신의 물음에 미령은 답했다.
"아니."
[그럼 왜 이 몸의 말을 들은 체하지 않는 것이지?]
"생각 중이다."
미령의 말에 괴력난신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네가 내게 건 조건에 대해서."
[제안? 그거야 들어볼 필요도 없이 네게 유리한 조건일 텐데?]
괴력난신의 말에도 미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정수를 바라봤다.
김현우가 아냐의 마법진을 타고 멕시코로 날아간 지 이제 9시간째, 한국은 이제 늦은 오후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대.
스승인 김현우가 그녀에게 정수를 주었을 때부터, 미령은 괴력난신에게서 들었던 제안을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네 제안이 뭐라고 했었지?"
미령의 몇 번째인지 모를 질문에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혹시 내 진을 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냐? 아이야.]
"아니,"
[…….]
괴력난신의 깊은 한숨.
그녀는 곧 계약의 조건을 말했다.
[첫 번째, 너와 계약하는 순간, 나는 너와 모든 시야와 감각을 공유하겠다.]
"그리고?"
[둘째, 네가 나와 계약하는 동안에 만약에라도 '괴신(怪神)'을 만난다면 몸의 통제권을 '그때'에 한정해서 나에게 넘겨라.]
"……흐음."
미령의 모습에 그녀는 빡이 친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도대체 여기서 어디에 고민할 구석이 있다는 것이냐!!"
……전부?"
[전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지금 이게 얼마나 좋은 조건인지 모르는 것이냐!?]
"아니, 알고 있기는 한데-"
[그러면 도대체 왜!]
괴력난신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비명어린 샤우팅을 질렀으나 미령은 담담하고도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도대체 어디에서 그 만약이라는 게 나오는 것이냐!]
"예를 들면 맨 첫 번째에서."
[첫 번째?]
"시야와 감각을 공유한다는 건, 내 몸을 언제라도 빼앗을 수 있다는 소리 아니야?"
[불가능하다! 내가 말했을 텐데? 계약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걸 어떻게 어기겠느냐!]
"만약에 그렇게 되면?"
[?]
[아니, 그러니까 만약이라는 게 불가능하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만약의-"
[야 이 개새-]
미령의 말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쌍욕을 내뱉으려다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고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큰 호흡을 했다.
허나 그런 괴력난신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령은 계속해서 괴력난신이 내건 조건들을 생각해 보고 있었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야'
괴력난신이 내건 조건이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는 것은 미령도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허나 그녀가 고민을 하고 있는 이유.
'너무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문제야…….'
그것은 바로 괴력난신이 내건 조건이 너무나 좋기 때문이었다.
옛날 김현우의 가르침 중에서도 '대가 없는 힘은 없다'라는 말을 항상 가슴 속에 새겨두고 사는 미령에게 있어서 괴력난신의 조건은 너무나도 좋았고, 또 수상했다.
'이 정수 안에 있는 힘은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힘이다.'
그녀는 괴력난신의 힘을 실제로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일반적인 인간의 몸으로서는 절대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압도적인 강함이, 이 정수 안에는 있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힘이 있기에 미령은 지금까지 그녀의 조건 받는 것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야-]
우웅──
"!"
괴력난신이 다시 말을 꺼내려는 그 순간, 마법진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검붉은색의 마력을 토해내기 시작한 마력진은 순식간에 주변의 대기를 잠식하기 시작했고.
곧-
쿵-!
무엇인가 땅에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김현우가 나타났다.
어렴풋이 보이는 김현우의 모습에 미령은 저도 모르게 밝아진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어-?"
곧, 미령은 같이 순간이동을 한 것이 자신의 스승인 김현우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그녀의 움직임이 멈추고, 사방으로 튀어 올랐던 검붉은 마력이 잠잠해지기 시작했을 때, 미령은 볼 수 있었다.
"!!"
김현우와 팔짱을 낀 채 마법진에서 나타난 한 여자를.
"무슨……?"
그 모습을 봄과 함께, 순식간에 밝았던 미령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마력이 전부 그친 후에야 미령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뭐야 기다리고 있었어?"
"스, 스승님,"
"응?"
"그, 옆에…… 여자는?"
김현우는 갑작스레 굉장히 무감정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은 미령을 보며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고.
"너는 왜 그러고 있냐?"
"하지만 사부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꼭 붙어 있으라고."
"꼭 붙어 있으라는 소리가 이렇게 붙어 있으라는 소리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김현우가 하나린을 보며 말하자 그 모습을 확인한 미령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떠, 떨어져라!"
"사부님, 이 애는 누구?"
"애…… 애라고!?"
"……?"
평소와는 다르게 굉장히 격하게 반응하는 미령의 모습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내 입을 열었다.
"뭐, 이렇게 됐으니 서로 인사해라. 이쪽은 내 첫 번째 제자, 미령. 그리고 얘는 내 두 번째 제자 하나린이다."
"두……두 번째 제자!?"
"사부님, 저 애가 제자에요?"
"사부님!?"
미령은 김현우와 하나린의 말을 들으며 소리 없는 경악을 내질렀고, 이내 김현우는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령을 보며 물었다.
"……제자야, 갑자기 왜 그러냐?"
"아, 아니. 그게……그…… 스승님에게 다른 제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해서."
미령이 슬쩍 하나린을 보며 이야기하자 하나린은 실풋한 웃음을 짓고는 미령을 마주봤다.
그리고-
"!!!"
하나린은 미령에게 보란 듯 김현우 팔을 끌어안았다.
"야, 하지 말라니까?"
"오랜만에 사부님을 만나서 좋아서 그래요."
김현우의 타박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응답한 하나린의 모습에 미령은 저도 모르게 멍하게 있다.
"하-"
이내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명백한 도발의 감정을 느끼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괴력난신-"
[왜 그러느냐.]
"조건을 받아들이겠다."
[!?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더- 아니, 이게 아니라!!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것이냐!?]
괴력난신의 물음에 미령은 분노하는 것인지 웃는지 모를 표정으로 하나린을 바라보고는 조용히-
"그냥,"
이제 힘을 쓸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중얼거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
그리고 괴력난신은, 자신이 한나절이 넘도록 설득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미령을 몸짓 몇 번으로 움직이게 한 하나린을 보며 소리 없는 감탄을 터트렸다.
# 133
133. 두 번째 제자도 제정신이 아니다(4)다음 날, 하남에 있는 장원.
김현우에게 볼일이 있어 찾아온 이서연은-꽈아아아아앙!!!
"오빠."
"왜."
꽝! 쾅! 꽈가가가각!!!
"저기-"
"……."
꽝! 꽝! 꽝! 콰지지지지직!
"도대체 저거, 뭐 하는 거예요?"
-연무장을 손가락질 하며 김현우에게 물었고.
그런 이서연의 물음에 김현우는 왠지 깔끔하게 포기한 것 같은 얼굴로 멍하니 연무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련."
"대련!?"
"자기들 말로는 대련이래."
김현우의 말에 이서연은 멍하니 입을 벌리며 김현우가 바라보고 있는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꽈지지직!
"이 개년이!"
"말하는 싸가지가 없구나?"
"네년, 분명히 스승님의 첫째 제자는 나다!"
"그거랑 이거랑 뭔 상관이라는 거야? 이 꼬맹아!"
"으아아아아─!!"
그곳에는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니, 전투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어감이 미묘했다.
지금 저 모습에는 전투보다도 더 강렬한 어감이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래, 저건 그냥 순수하게 전투라고 칭하기 보다는-
"생사결(生死結)……?"
-생사결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정도로 굉장히 험악한 싸움이었다.
꽈가가가강!
머리를 새하얀 백발로 물들이고, 왼쪽 이마에는 붉은 뿔을 단 미령이 망설임 없이 하나린의 머리에 발차기를 꽂아 넣고-
"[멈춰라]"
"큭!"
검은 책으로 발차기를 막아 낸 그녀가 입을 열자 순간적으로 경직된 미령의 몸이 땅으로 낙하한다.
꽈드득! 우지지지직!
그 찰나의 순간에 미령의 명치에 내리꽂히는 거대한 일격.
그와 함께 지반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져나가고, 이미 반쯤 무너져 있는 장원의 담을 전부 무너뜨린다.
콰드드득 우당탕탕!!!
장원의 입구까지도-
"아니, 저기 패룡과 싸우고 있는 헌터는 누구……? 그보다 이거 말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서연은 장원이 실시간으로 공사판이 되는 것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으나 김현우는 에휴, 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말을 하면 뭐 하냐, 안 들어 처먹는데."
그랬다.
그들은 지금, 김현우가 몇 번이고 멈추라고 했음에도 그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개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대련을 허락했으면 안 됐나?'
김현우는 짧게 탄식했다.
하나린을 데리고 온 그다음 날, 갑작스레 하나린과 미령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이 대련을 해보겠다고 말했고, 김현우는 별생각 없이 그것을 허락했다.
뭐, 그냥 대련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데-
꽝!
지금 그녀들은 진심으로 서로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했다.
하나하나가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공격을 열심히 주고받고 있는 둘의 모습.
괴력난신의 힘을 계승 받아 말도 안 되는 완력으로 주변을 죄다 때려 부수고 있는 미령을, 하나린은 메이슨의 언령과 자신의 고유능력을 합쳐 받아내고 있었다.
꽈아아아아아앙!
미령의 일격에 하남시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거대한 지진이 느껴지고.
"아니 오빠! 저거 안 막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진짜 서로 죽이겠는데요!?"
"안 그래도 슬슬 말릴 거야."
이서연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김현우의 귓가에 꽂히자 그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그리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아무래도 이 이상은 좀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김현우가 둘을 말리기 위한 행동을 취하기 직전에도, 하나린과 미령의 싸움은 멈출 줄을 몰랐다.
꽈득!
하나린의 칼을 막아낸 미령이 이를 앙 다문 상태로 말했다.
"갑자기 어디서 너 같은 년이 튀어나와서……!"
"너 같은 년이 아니라 사부님한테 잘 맞는 한 짝이 튀어나온 거겠지!?"
"지랄하지 마라! 스승님은 내 거다!"
꽝!
"지랄하지 마! 이 땅딸보 같은 년이!"
콰드드득!
몇 번의 공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벽과 흙먼지들, 미령과 하나린은 서로에게 데미지를 입힌 채 밀려났으나-
"이이익!"
곧바로 서로를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아아아아악!
"꺄악-!?"
"끄아아앗!?"
"그만해 이 미친년들아!"
그대로 놔뒀으면 장원을, 아니 하남시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격한 싸움은, 김현우에 의해 저지당했다.
김현우의 주먹질에 의해 머리를 부여잡고 땅바닥을 구르는 미령과 하나린을 보며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너희들 눈에는 이게 대련으로 보이냐?"
김현우는 주변을 돌아봤다.
보이는 것은 거대한 장원이 아니라 웬 공사판.
그나마 이 둘이 의식하면서 싸웠는지 김현우의 주변은 별 피해가 없었으나 그 이외의 주변은 아니었다.
폐허.
그냥 폐허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장원은 완전히 작살나 있었다.
'좀 빨리 말릴걸.'
아니, 말리기는 조금 더 빨리 말리기는 했다, 다만 제자들이 말을 안 들었을 뿐.
'어째 내 제자들 중에 제대로 된 놈이 없지?'
김현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어차피 부서진 장원도 김현우의 돈으로 지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부서진 장원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
그는 한동안 부서진 장원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의 제자들을 돌아봤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것인지 풀이 죽은 채 시선을 흘끔흘끔 돌리고 있는 미령과, 은근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하나린.
마치 개와 고양이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그 행동거지에 김현우는 허 하는 웃음을 짓고는 이내 말했다.
"야, 너희들 조용히 하고 본궁 안에 들어가서 내가 올 때까지 반성하고 있어."
""예……."
그래도 잘못한 것은 아는지 김현우의 말에 조용히 대답한 그녀들은 슬쩍 김현우의 눈치를 보다가 본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빠."
그렇게 일을 처리하고 한숨을 돌리려니 들리는 이서연의 목소리.
"왜?"
"저 사람은 누구예요?"
"뭐? 누구?"
"저 사람이요? 아까 전 패룡이랑 싸웠던 그 여자요."
"걔는 왜?"
김현우의 물음에 이서연은 대답했다.
"아니, 조금 전 저 여자 패룡이랑 싸웠잖아요? 게다가 그, 등반자를 죽였을 때의 모습을 하고 있는 패룡이랑요. 저 사람은 대체 누구에요?"
이서연은 그때 당시에 기절해 있었으나, 영상을 통해 패룡과 등반자가 싸우는 것을 보았다.
자신은 제대로 된 한 방조차도 먹이지 못했던 등반자를 압도적인 무력으로 찍어 누르는 패룡의 모습을 보았기에, 그녀는 깜짝 놀란 것이었다.
그런 패룡과 비슷하게 싸울 수 있는 헌터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담은 이서연의 물음에 김현우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두 번째 제자."
"……네?"
"내 두 번째 제자라고, 조금 전까지 미령이랑 싸우고 있던 녀석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
시스템 룸 안.
"……개판이네."
"아, 오셨나요?"
바닥에 이리저리 널려져 있는 게임팩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주변을 풍경을 바라봤다.
저번 시스템 룸에 왔을 때, 김현우는 그녀의 바람에도 거대한 시스템 룸을 그때 모니터에서 봤던 게임폐인의 방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 결과.
"정리 좀 하지? 또 없애버린다?"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 버튼만은 제발!"
김현우는 완전히 더러워진 주변을 볼 수 있었다.
저번에 만들어줬던 그 게임폐인의 방은 뭐가 정신없이 많았지만 그래도 더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방은?
우직-
"……."
김현우는 자신의 발에 밟힌 게임 소프트를 한번 보고는 쯧 하고 혀를 찬 뒤 아브를 향해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그래서, 찾았어?"
"예? 찾았다니 뭘-"
-딸깍
"아, 아아아아아아!! 아니 찾았어요! 찾았다고요! 제작자에 대해 말하시는 거죠? 네?"
아브의 비명 어린 말투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현우가 오늘 시스템 룸에 들어온 이유.
그것은 바로 아브가 얼마 전 김현우에게 말해 주었던 '튜토리얼 탑'의 제작자의 정보를 듣기 위해서였다.
"찾아봤어?"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찾아봤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아브는 슬쩍 시선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
"그?"
"그러니까, 제작자의 위치에 대해서 저도 나름대로 찾아 봤거든요?"
"못 찾았지?"
"아니, 그-"
-딸깍
"아니! 아니라고요! 못 찾은 건 아니라니까요!? 정말로요! 애초에 게임도 이제 막 켠 거란 말이에요! 가디언이 오기 직전까지 저 계속 정보 찾고 있었어요! 정말이에요!"
아브의 필사적인 변명에 김현우는 마뜩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곤 물었다.
"정말?"
"정말이에요! 진짜 게임 켠 지 2시간도 안됐어요!"
"그럼 바닥이 이렇게 난장판인 이유는 뭔데?"
"그건 제가 원하는 게임 소프트를 찾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방이 좀 어질러져서."
슬쩍 눈치를 보는 아브를 한동안 바라보던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빨간 버튼을 이내 내려두었다.
"후……."
그제야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브를 보며 김현우는 질문했다.
"그래서, 정보는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건 지금부터 말씀드릴게요."
아브는 김현우의 말에 그렇게 답한 뒤 할 말을 정리하는 듯 잠시 고개를 위로 들었다가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유감스럽게도 제작자의 현 위치는 찾지 못했어요. 아무리 찾아보려고 해도 '제작자'라는 이름 석 자만 있을 뿐이지 나머지는 전부 '권한 부족'이 걸려 있더라고요."
"……그럼 못 찾은 거 아니야?"
김현우의 맥빠진듯한 말투에 아브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제작자'의 위치는 결국 권한 부족으로 찾지 못하기는 했지만, 그 대신 다른 단서를 찾았어요."
"다른 단서?"
"네."
"그게 뭔데?"
그의 물음에 아브는 슬쩍 뜸을 들이는 듯한 느낌으로 눈치를 보다 말했다.
"솔직히 확신한다고는 말 못 하긴 하는데, '제작자'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해줄 만한 '아티팩트'의 위치를 찾았어요."
"……제작자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해줄 만한 아티팩트?"
"네."
"그 아티팩트는 또 어디에 있는데?"
"8계층에요."
"뭐?"
"제작자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있을 만한 아티팩트인 '진실의 구'은 8-35계층에 있어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8-35계층? 그건 뭐야? 8계층이란 소리야?"
"네. 이건 저도 정보 권한이 중상위에 오르고 나서야 알게 된 건데-"
아브는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에게 자신이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그러니까, 1계층부터 9계층까지의 생김새가 다 다르다고?"
"네, 기본적인 골자, 그러니까 계층마다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 똑같지만, 그 구조가 달라요."
"예를 들면?"
"제가 조금 전 말했던 8계층을 예로 들면, 8계층은 다중 차원이라는 걸로 나누어져 있고, 1계층부터 3계층은 '문명'이 정착되어 있기는 해도 그 대지가 턱없이 적어요."
아브는 그 뒤로 김현우에게 다른 계층을 설명해 주었고, 한동안 그 설명을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대충 이해했어. 그런데 지금 요점은 그게 아니잖아?"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앗, 하고 짧은 신음을 터트렸다.
"그렇네요."
"……그래서 내가 그 8계층에 갈 수는 있는 거야?"
다시 한번 나온 본론.
그 말에 아브는 답했다.
"결론만 말하면, 가능해요."
# 134
134. 제자 경쟁(1)
"그러니까, 이 아티팩트들이 필요하다고?"
"네."
아브의 긍정에 김현우는 그녀가 스크랩 해 놓은 기사들을 바라봤다.
"이거 총 몇 개야?"
"대충 다섯 개 정도 되는 것 같아요."
"……다섯 개?"
김현우가 마뜩찮다는 듯 아브를 돌아보자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 그래도 찾는 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다섯 개나 되는데?"
"그렇기는 한데, 여기 보면 다섯 개중 세 개는 한 사람이 들고 있고, 나머지 두 개도 소재지가 명확하거든요. 여기 보세요."
아브는 그렇게 말하곤 손가락으로 50인치 모니터의 한쪽을 가르쳤고, 이내 김현우는 아브가 손가락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 기사를 읽어 나갔다.
[이번 국제 헌터 협회 주최의 프랑스 경매장에서 나온 '거인의 심장'은 약 500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거인의 심장을 낙찰한 사람은 바로 몬타나 주의원인 '아탈렉 포트'로, 그는 헌터는 아니나 평소에도 아티팩트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그 이외에도 아브가 스크랩 해 놓은 기사들을 하나하나 슥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마치 확인한다는 듯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말한 아티팩트를 전부 모으면, 다른 계층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이거지?"
그 물음에 아브는 대답했다.
"방금 말했듯이 8계층으로 내려가는 건 지금도 가능해요. 다만, 길을 잃지 않고 정확히 8-35계층으로 가기 위해서는 제가 말씀드린 아티팩트들이 필요해요."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거리곤 다시 한번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그리고-
"어?"
김현우는 아브가 스크랩 해 놓은 기사에서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 아직 김현우의 머릿속에도 선명하게 기억되어 있는 익숙한 얼굴.
그는 피식한 웃음을 지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아티팩트 전부 모아서 올게."
"네, 시간은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은가요?"
"글쎄다……. 근데, 뭐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망설임 없이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렇게 김현우가 시스템 룸에서 빠져나오고 있을 때.
미령과 하나린에 의해 반쯤 작살이 나 있는 장원의 본궁에서는-
"네가 어떻게 스승님의 가면을!?"
"이거? 사부님이 내게 탑을 빠져나갈 때 선물로 내게 준 건데?"
"뭐라고!?"
미령과 하나린이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어머? 너는 설마 탑에서 나올 때 선물 하나 받지 못한 거야?"
"이이익……!!"
하나린의 노골적인 놀림이 섞여 있는 말에 미령은 그녀가 꺼내든 나무 가면에 애써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나는 스승님에게 무(武)를 배웠다!"
"그래? 좋겠네? 너는 평생 가르침이나 받으면서 제자로 남으면 되겠는데?"
"이년이 정말……!"
그녀의 말에 미령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으나, 하나린은 그런 미령을 도발하듯 김현우가 예전에 썼던 나무 가면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고.
"죽여 버릴-!"
미령의 손이 다시 한번 나아가려 하는 그 순간-
"반성하고 있으랬더니 또 싸우려고 하냐?"
들린 김현우의 목소리에, 미령은 재빨리 하나린에게 휘두르려던 손을 멈추고 면목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하나린은 슬쩍 변명할 타이밍을 찾는 듯 김현우의 눈치를 보는 듯했으나, 김현우의 한심하다는 눈빛에 시선을 내렸다.
그 모습에 김현우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나린을 데려오면 안 됐나.'
어째 행동하는 게 서로 비슷해서 잘 맞을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니었다.
김현우는 그녀를 데려오고 나서부터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쉰 뒤 서로 보기도 싫은 듯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그녀들을 보다 말했다.
"너희들이 해줬으면 하는 게 있다."
"말씀하세요, 사부님."
"하명하십시오, 스승님."
찌릿.
'대답하면서 눈싸움은 왜 하는 거야.'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곤 이내 시스템 룸에서 적어왔던 종이를 꺼낸 뒤 입을 열었다.
"미령은 홍콩쪽에 가서 '취안'이라는 녀석이 가지고 있는'맹인의 나침반'좀 가지고 와."
"예."
"그리고 하나린은 멕시코 쪽에 무슨…… 무슨 카르텔? 카르텔인지 마피아 보스인지 하는 놈 중에 한 명이 '은색 시침'이라는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다니까 그것도 좀 가지고 오고."
"그것만으로 충분하시나요?"
하나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이내 입을 열었다.
"아, 말해두는데 뭐 내가 가져오라는 게 그냥 일방적으로 뺏어 오라는 소리가 아니라 최대한 예의를 지켜서 가져오라는 거 알지?"
김현우의 말에 그녀들은 명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시간이 되면 '아탈렉 포트'에 대해서도 좀 조사해 봐."
***
몬타나 주, 헬레나에 있는 거대한 3층 저택.
돈을 얼마나 처바르면 이런 저택에 살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할 정도로 굉장히 럭셔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저택 안쪽.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거지!?"
고풍스러운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 아탈렉 포트는 자신의 손에 쥔 스마트폰에 열심히 소리를 치고 있었다.
"내가 말했을 텐데!? 자본이 모자라나!? 얼마든지 내주도록 한다고 했지 않나!!"
그의 고함에 스마트폰 너머의 목소리는 답했다.
-그래 그 말을 듣기는 했지.
"그래! 듣지 않았나!"
-그래도 그건 불가능하네.
남자의 말에 포트는 인상을 구기고는 외쳤다.
"불가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군! 미국 최대 방송국으로 손꼽히는 'TCN'의 국장이 불가능하다는 소리를 한다고?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현재 아탈렉 포트가 스마트폰 너머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남자.
그는 바로 미국 방송계에서도 최고로 크다고 할 수 있는 'TNC' 방송국의 국장인 '아틀 론' 이었다.
-미안하지만 내 대답은 변하지 않을 것 같군.
뿌득.
그의 정중한 거절에 포트의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났고, 곧 포트는 스마트폰을 향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자네! 지금 나를 등지겠다는 건가!? 어! 이 나 '아탈렉 포트'를!? 네가 나에게 얻어먹은 것들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건가! 어!?"
아틀렉 포트의 협박에 일순 스마트폰 너머는 조용해졌지만--자네가 협박을 하더라도 내 대답은 마찬가지일 것 같군.
-그에게서 나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 말에 크게 역정을 내려던 아탈렉 포트는 어느새 충혈까지 된 눈으로 이빨을 갈고는 마치 말을 짓이기듯 뱉어냈다.
"나를 등지다니, 무조건 후회하게 해주지……!"
포트의 말에 한순간 조용해진 스마트폰 너머, 허나 목소리는 곧 다시 말을 내뱉었다.
-미안하네, 허나 그 일은 내게는 불가능한 일일세. 그리고-
"……."
-이건 자네라서 해주는 말이네만, '그'에 관해서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 게 자네에게도 무조건 좋은 일이───빡! 빠드드득! 퍽!
폰 너머로 들려오는 말이 전부 끝나기도 전에, 그는 신경질을 내며 스마트폰을 허공에 집어 던졌다.
그와 함께 개박살이 나 땅바닥을 구르는 스마트폰을 보며 한동안 씩씩 거리던 아탈렉 포트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와인을 마시려다-
"이런 씨발!"
쨍그랑!
이내 땅바닥에 와인잔을 던지며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씨발 그 같잖은 헌터 새끼가 도대체 왜!'
으득!
그는 시선을 내려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완전히 박살 난 스마트폰.
'도대체 왜 아무도 그 녀석을 공격하려 하지 않는 거야!'
아탈렉 포트가 분노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김현우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김현우를 공격하기를 두려워하는 언론들 때문이었다.
"씨발."
처음, 그가 김현우에게 맞은 그다음 날.
포트는 자신의 보좌관인 에반에게 김현우를 조지라고 명했고, 에반은 그 말에 충실히 따라 그와 연이 닿아 있는 각 언론사에 포트의 바람을 전달했다.
허나 돌아온 것은 철저한 무관심.
"내가 너희들한테 뿌린 돈이 얼마인데……!!"
그렇기에 처음 포트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으나, 이내 어느 정도 그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직접 마주한 김현우는 정말 미친놈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세상을 지 멋대로 사는 놈이었으니까.
그것을 바로 앞에서 느꼈던 포트이기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고, 그것 또한 충분히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높은 직위에 올랐다 싶은 이들 중 포트의 '호의'를 받지 않은 이들은 없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대형 저널들이나 방송국의 국장들도……!"
포트가 직접 전화를 해도 그들의 마음은 돌릴 수 없었다.
그들은 분명 포트에게 호의라는 약점이 잡혀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는 듯 포트의 요청을 완벽하게 거절했다.
김현우를 사회적으로 말살시켜 달라는 포트의 요청을.
'도대체 그 새끼가 뭐길래……! 그 새끼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일개 헌터일 뿐이라고!'
그가 그렇게 혼자 지랄을 하고 있을 때쯤.
"의원님."
저택의 문이 열리며 그의 보좌관인 에반이 들어오자 포트는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왜 그러지? 혹시 헌터들 중에는 내 제안을 받을 녀석들이 있나?"
포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에게 물었으나 에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아무래도 김현우를 건드리려고 하는 길드는 없는 것 같습니다."
"뭐? 없어?"
"예."
"단 한 명도?"
"예."
그의 말에 포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았고, 그런 포트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에반은 말했다.
"의원님."
"왜?"
짜증이 잔뜩 묻어 있는 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에반은 평온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
"현재 밖에 만나실 분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물음에 포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
에반의 말에 순간 포트는 잡은 약속이 있나 생각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오늘, 그에게 약속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포트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무슨 소리야? 오늘 약속 같은 건 잡은 적이 없을 텐데?"
"아,"
그의 말에 에반은 그걸 말하지 않았다는 듯 짧게 탄성을 내지른 뒤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까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뭘?"
"이건 약속이 아닙니다."
에반의 한마디.
그에 포트는 그 눈가에 짜증 대신 노기를 드러내며 에반을 나무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약속이 아니라니, 지금 나랑 말장난 치는 거야!?"
순식간에 노기를 들러낸 포트.
그러나 그런 포트의 모습에도 에반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은 채 그저 담담하게 입을 열었고-
"이건, 일방적인 통보입니다."
"이 새끼가 진짜 무슨……."
포트가 마저 입을 열기도 전에-
"!!!!"
꽈아아아앙!
저택의 한쪽이 터져나가며, 그 잔해가 포트를 덮쳤다.
"끄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일어난 일.
포트는 순간 쏟아지는 잔해를 맞으며 비명을 질렀고, 이내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포트의 앞에-
"왜 이렇게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냐? 귀청 떨어지게, 응?"
"기, 김현우……!!"
김현우가 나타났다.
# 135
135. 제자 경쟁(2)
취안.
그는 이전 IT업계 쪽에서도 상당히 유명했으나 지금에 와선 헌터 업계의 마석 정제 사업으로 상당히 많은 돈을 혼자 쓸어 담고 있는 부호 중 한 명이었다.
딱히 재벌들하고 비교해도 그리 꿀릴 것이 없기에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그, 취안은-
"'맹인의 나침반'을 내놔라."
"예……?"
꽈직!
"히익!"
오늘 낮, 불현듯 자신의 자신을 찾아온 이에게 고개를 90도로 수그리는 중이었다.
취안은 자신 앞에 놓인 사치스러운 테이블이 반으로 쪼개진 것을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시선을 올렸다.
그곳에는 소녀가 있었다.
한 쪽 머리를 사이드로 내린 채, 붉은 홍안으로 냉정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소녀.
허나 그녀가 바로 패도 길드의 길드장인 '패룡'이라는 것을 취안은 알고 있었기에 그는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아, 알겠습니다. 이른 시일 내로 준비하겠습니다……!!"
"이른 시일?"
"예, 예! 3일 정도만 주시면 곧바로-"
취안의 말에 미령은 입을 열었다.
"3시간."
"예?"
"3시간 내로 가져와라."
미령의 말에 취안은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맹인의 나침반'은 자신이 들고 있기는 했지만 '홍콩'에 있는 것이 아닌 광저우의 비밀 별장에 전시해 놨기 때문이었다.
거리가 있기에 지금부터 당장 찾으러 간다고 해도 절대 3시간 내에 가져 올 수는 없었다.
"그, 3시간 내는 조금 힘들- 히익!"
그렇기에 취안은 조금만 더 말미를 달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 했으나, 그는 곧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미령의 이마에, 붉은색의 뿔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기에.
그녀가 극도로 분노한 게 눈에 보이자마자 취안은 고개를 푹 숙이며 외쳤다.
"조……죄송합니다! 지, 지금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취안은 그렇게 말하며 순식간에 차오른 공포에 미령의 답을 듣지도 않고 자신의 집무실에서 뛰쳐나갔고, 미령은 입을 열었다.
"1호."
"예,"
"저놈을 따라가서 도와라."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가면무사.
미령은 사라진 가면무사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이내 아까 전 마법진을 통해 사라진 하나린의 말을 떠올렸다.
넉넉잡아 다녀오라는 김현우의 격려에 3시간 내로 아티팩트를 들고 오겠다고 답한 하나린의 말.
'무조건, 그년보다는 일찍 가져가야 한다……! 반드시!!'
그녀는 조용히 다짐했다.
***
"왜? 반가워?"
실실거리며 쪼개는 김현우의 모습을 본 포트는 입을 뻐끔뻐끔 거리며 그를 쳐다보다 이내 경악하며 소리쳤다.
"네가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왜? 나 여기에 있으면 안 돼?"
김현우의 실실거리는 말투에 포트는 저도 모르게 하던 것처럼 역정을 내려 했으나-
"네 녀석!!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내 얼마 전 김현우의 주먹맛을 뼈가 시릴 정도로 경험했던 포트는 저도 모르게 음량을 줄였다.
그 모습에 삼선 슬리퍼에 들어가 있는 흙을 털어내고 있던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소파에 앉고선 물었다.
"내가 여기에 왜 왔을 것 같아?"
"무, 무슨……."
"에이~ 모르는 척하지 말자, 나도 알고 있고 너도 짐작하고 있으면서 왜 슥 빼려고 해? 응?"
김현우의 말에 포트의 얼굴에 두려움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이 새끼……!'
그것은 바로 김현우의 입가에 지어져 있는 비틀린 웃음 때문이었다.
그가 국제 헌터 협회에서 김현우에게 맞을 때, 그는 그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렇기에 포트는 두려움을 느끼기는 했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는 생각했다.
'이건 가택침입죄야. 엄연한 불법이라고!'
마치 자기 암시를 걸 듯 몇 번이고 그 생각을 반복한 포트는 이내 소파에 앉아 있는 김현우와 그 뒤에 완전히 박살 나 뻥 뚫려 있는 저택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자네가 하는 일은 엄연한 불법이라는 걸 알고는 있나……!"
그럼에도 이전처럼 크게 고함을 칠 깡은 없는지 조심스레 말을 내뱉은 포트.
김현우는 같잖다는 듯 답했다.
"불법?"
"그래, 지금 네가 저지른 일은 엄연한 불법이다. 법률 상에도 명시되어 있는 범죄라고……!"
"지랄하고 있네, 아주 세상 좋다고 지 좆대로 날뛰던 새끼가 어디서 불법을 들먹여?"
김현우는 소파에서 일어나 땅바닥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는 포트의 앞에 쭈그려 앉아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럼 네가 한 짓은 불법이 아닌가 보지?"
"뭐라고?"
"당장 저번에도 내 여의봉 빼앗으려고 강도- 아니, 양아치짓 했잖아?"
"그건 결국……!"
"이 씨발새끼야, 네가 그것만 그랬어? 찾아보니까 뒷돈 처먹이고 길드랑 헌터, 그리고 경매장에서 빼앗은 아티팩트가 한가득이더만? 그건 양아치짓 아니냐?"
김현우의 으르렁 거리는 말투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 포트.
그런 포트의 모습에 김현우는 포트의 머리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그래, 뭐 사실 그건 그럴 수 있어. 사람이 양아치 짓 좀 할 수 있는 거지, 안 그래?"
"……."
"근데 문제는 말이야."
꽈악.
"……끄……아아아아악!!!"
포트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던 김현우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마자 그는 비명을 질러댔지만, 김현우는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그 양아치 짓을 아무한테나 했다는 게 문제야."
"제발, 제발 이것 좀!! 끄아아아악!!"
꽝!
김현우는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는 포트의 머리를 그대로 바닥에 박아버리곤 들어올렸다.
"끄아아악!!"
억눌린 신음을 흘리는 포트.
김현우는 말했다.
"그러니까 상대를 잘 봐가면서 양아치 짓을 했어야지, 응?"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가……!"
"뭐? 너한테 왜 이러냐고?"
김현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문하자 포트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소리쳤다.
"그래! 결국 양아치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네게는 피해가 없지 않았나! 나는 네게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고 쫓겨났을 뿐이란 말이다!"
포트의 필사적인 변명에 김현우는 멍하니 그 말을 듣다, 이내 피식 하고 웃더니 말했다.
"그래, 잘 알고 있네."
"그럼 대체 왜!"
"뭐, 나도 네가 그걸로 일을 깔끔하게 끝냈다면 이렇게 올 일도 없었어. 나도 그렇게 뒤끝 있는 성격은 아니거든. 그런데-"
사실 그 누구보다도 뒤끝이 강한 그였으나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한 김현우는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다.
"-설마 아까도 경고했지만, 진짜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대체 뭘……!"
포트의 반문에도 김현우는 그의 머리를 놓아 준 뒤, 자신의 추리닝 바지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더니 말했다.
"미국 헌터 업계 저널 중 제일 큰 메인저널인 '킬링 데이'."
"!!"
"공중파 방송국 'AAC'"
"무……무슨……!"
김현우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
그에 포트의 입이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김현우가 종이를 보며 내뱉고 있는 것은-
"미국 동부 신문사 '오웬.TW"
-전부 포트가 김현우를 조지려고 도움을 요청한 곳이었으니까.
"자, 잠깐!"
포트가 뒤늦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김현우는 그런 포트의 반문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미소까지 지어가며 목소리를 내뱉었고.
"이야, 더럽게도 많네? 1주일 동안 쎄빠지게 전화만 했냐?"
이내 종이에 적혀져 있는 글을 모두 내뱉은 김현우는 이내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포트를 바라봤다.
그리고 포트는 현재 일어난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최대치로 굴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어떻게 알아챈 거지? 도대체 어떻게……!'
설마 자신의 '호의'를 받은 언론사가 전부 김현우와 엮여 있다는 말인가?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탈렉 포트만 자신만 해도 언론과 이런 식으로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걸린 시간은 엄청났다.
거의 자신의 인생의 절반을 쏟아 넣었다고 무방했다.
그런데 이제 막 탑에서 나온 헌터가 자신과 비슷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의 무력이 강하고, 그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하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그렇다면 대체 누가……!'
포트는 머리를 처박은 채 끊임없이 고민했다.
자신이 김현우를 까내리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정보를 고스란히 김현우에게 넘겨 줄 수 있는 사람을.
그리고-
"……!!"
포트는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자신의 옆에 있는 김현우를 향해서가 아니었다.
포트가 시선을 돌린 것은 바로 그의 뒤 쪽.
"설마……설마……!!"
바로 자신과 10년을 넘게 함께하고 있는 보좌관이 있는 쪽이었다.
"……!"
그리고 에반이 있는 쪽을 바라본 포트는, 곧 조금 전 그가 말했던 말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이건 약속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통보입니다.'
김현우가 들어오기 직전, 에반이 그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린 포트는 이내 치솟아 오르는 배신감에 외쳤으나-꽝!
"에반! 어떻게 네가-! 끄에에엑!"
"왜 갑자기 나랑 이야기하는 도중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그는 소리를 지르지도 못한 채 김현우에 의해 땅바닥에 얼굴이 처박혔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에단은 조용히 김현우의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무언가를 건넸다.
"이건?"
"이자가 김현우님을 음해하기 위해 섭외한 길드들입니다."
"얼씨구. 길드까지 준비했어? 아레스 길드처럼 만들어 주려고?"
김현우의 비아냥거리는 발언.
허나 포트는 그런 김현우의 비아냥에 답하지 않고 그저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미 모든 게 전부 까발려진 마당에 이 이상 변명할 거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무력감.
아탈렉 포트로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무력감이 그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만약 김현우가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헌터라면 말이나 회유를 통해 어떻게 할 수 있었겠지만, 적어도 포트가 보기에 김현우는 이미 한참 전에 정상의 범주를 뛰어 넘었다.
그는 적어도 법에 속박되기보다는 법 위에서 놀고 있었으니까.
인류가 만들어 놓은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깨부수는 그에게 있어서 포트의 권련의 무의미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포트가 절망할 무렵.
"야."
김현우의 부름에 포트는 그를 돌아봤다.
그리고, 김현우는 얼굴에 비틀린 웃음을 띄운 채 입을 열었다.
"솔직히 원래라면 이 사실을 온 동네방네에 뿌린 다음에 완전히 너를 사회적으로 죽이고 그 외적으로 죽여 버리고 싶은데, 그럼 좀 너무 냉정하지?"
"……?"
"응? 아니야?"
"마, 맞네……."
대답을 촉구하는 김현우의 말에 화들짝 대답하는 포트.
김현우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는 입가에 미소를 더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거래를 하자."
"거, 거래?"
"그래, 거래. 내가 여기저기서 좀 듣다보니까, 네가 그렇게 아티팩트 수집에 환장한다며?"
"마, 맞네,"
"그 아티팩트 중 내가 원하는 것들 나한테 넘겨. 그럼 내가 이번 일은 아주 깔끔하게 묻어주도록 할게."
어때?
비틀린 웃음이 비릿하게 바뀌고, 김현우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지기 시작할 때, 그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자기가 지금까지 남에게 해온 짓들을.
거부권한 따위는 없는, 손해를 보더라도 무조건 수락해야 하는 '거래'를.
그리고-
"어때, 정말 평화적인 해결 방법이지?"
"……."
김현우의 물음에, 포트는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거래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 136
136. 제자 경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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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의 나침반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탐색(-)
-정보 권한-
맹인이었으나 능력으로 인해 모든 것을 꿰뚫어본 남자 -권한부족-이 자신의 동료를 위해 능력으로 만들어 냈던 물건이다.
허나 사용자가 원하는 목적지라면 어느 곳이라도 찾을 수 있는 '맹인의 나침반'은 -권한부족-에 의해 계층이 멸망할 때 분해되어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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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걸 전부 이틀 만에 모아온 거예요?"
시스템 룸.
아브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네 개의 아티팩트를 보며 깜짝 놀랐다는 듯 김현우를 바라보며 물었고.
"뭐,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김현우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바라보고 있던 아티팩트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래도 생각보다 모으는 속도가 빠른데요? 저는 최소 1주일 정도는 걸릴 줄 알았는데……."
아브의 중얼거림.
"뭐, 사실 나도 그 정도는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이 좀 잘 풀렸지."
말 그대로, 김현우가 이 다섯 개의 아티팩트를 이렇게 빨리 모을 수 있었던 말 그대로 아다리가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아탈렉 포트가 아티팩트를 세 개나 가지고 있어 준 덕분에 쉽게 빼앗을 수 있었지.'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별다른 양심의 가책 없이 빼앗을 수 있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김현우라고 해도 자신에게 별짓을 저지르지도 않은 녀석들에게 강제로 무엇인가를 뜯는 싸이코 같은 짓은 내키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대상이 김현우와 어느 정도 악연이 있는 인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졌고.
그 대상이 김현우가 찾아가는 그 시점에도 김현우를 엿 먹이기 위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다면 이야기는 더더욱 달라졌다.
'하나린 덕분에 일이 좀 쉽게 풀렸지.'
김현우는 하나린을 생각하며 피식 하는 미소를 지었다.
아탈렉 포트에 대해 묻자마자 김현우는 그녀에게서 아탈렉 포트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가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부터 시작해, 아탈렉 포트가 현재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까지.
그 덕분에 김현우는 간을 볼 필요도 없이 아탈렉 포트의 집 안으로 쳐들어가 그를 협박에 아티팩트를 뜯어 올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김현우는 아브의 말을 듣고 밖으로 나온 그 날 세 개의 아티팩트를 휙득할 수 있었고, 그날 밤, 자신의 제자들에게서 나머지 두 개의 아티팩트를 받을 수 있었다.
'솔직히 3일 정도는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하나린은 김현우가 아티팩트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뒤 1시간도 걸리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에게 아티팩트를 가져다주었고.
미령의 경우는 하나린보다는 약간 늦었으나 마찬가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나머지 한 개의 아티팩트를 가져다주었다.
그 뒤에 마치 승부라도 벌이듯 서로의 모습을 노려본 두 제자를 생각하던 김현우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무튼, 이걸로 준비는 끝난 거지?"
김현우의 물음에 하나린은 고개를 끄덕 거리며 긍정을 표했다.
"네 이제 준비는 끝났어요. 남은 건 이걸 조립하기만 하면 돼요."
"응? 조립?"
"네, 조립이요."
"아티팩트도 조립이 돼?"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네, 모든 아티팩트가 조립이 가능한 건 아니지만, 애초에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들이 나누어져 있는 경우는 조립할 수 있어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뚱한 표정을 짓다 조금 전 보았던 '맹인의 나침반'의 설명을 떠올리고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조립은 어떻게 하는데?"
"아, 간단해요. 그냥 하면 되는 거예요."
"……그냥?"
그의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아브는 이윽고 허공으로 시선을 들어 무언가를 검색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 뒤 테이블 위에 있는 맹인의 나침반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오……!"
아브는 마치 이 일을 몇 번이라도 해본 듯 맹인의 나침판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분명 드라이버나 다른 공구들이 필요할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아브는 아티팩트의 여기저기를 가볍게 만지작거리는 것만으로도 '맹인의 나침반'을 아무렇지도 않게 분리했다.
"……아티팩트가 원래 그렇게 쉽게 분리되는 거야?"
"아니에요. 이 아티팩트가 상당히 특이한 거죠."
"……그런 거야?"
"네."
아브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분해된 '맹인의 나침판'에 김현우가 가져왔던 나른 아티팩트들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 아브가 집어 든 것은 '사계의 톱니바퀴,'
투르르륵 탁!
아브가 사계의 톱니바퀴를 맹인의 나침반에 가져다 대자, 무척이나 신기하게도 아브가 들고 있던 사계의 톱니바퀴는 그대로 나침반에 빨려 들어가 스스로 조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브가 그다음으로 집어 든 '은색 시침'도 마찬가지였고.
탁! 촤르르르륵! 다그락!
김현우가 가지고 온 모든 아티팩트들은 그저 아브가 손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제멋대로 움직여 자동으로 맞춰지고 조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아티팩트들이 맹인의 나침반안으로 들어가자, 아브는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아티팩트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의해 분해되었던 부품들이 하나둘 다시 제자리를 찾아 맞춰지고, 곧 그녀의 손에서 또 한번 조립을 끝마친 맹인의 나침판은-화아아악!
새하얀 마력을 흩뿌리며 그 외관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30초쯤 되었을까?
"다 됐어요!"
새 하얀 빛이 서서히 점멸하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본 아브는 이내 김현우에게 맹인의 나침반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아까와는 다르게 떠오르는 나침반의 정보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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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의 나침반 [완성형]
등급: Ss
보정: 없음
스킬: 길찾기[+] 탐색[+] 감지[+]
-정보 권한-
맹인이었으나 능력으로 인해 모든 것을 꿰뚫어본 남자 -권한부족-이 자신의 동료를 위해 능력으로 만들어 냈던 물건이다.
'맹인의 나침판'은 -권한부족-이 자신의 능력과 더불어 다른 이들의 능력을 자신의 숙련된 솜씨를 발휘해 집어넣었고 -권한부족-으로 그 능력을 더더욱 극대화시켰다.
그렇기에 '맹인의 나침판'은 사용자가 원하는 목적지라면 그 어느 곳이든 자동으로 찾을 수 있게 해주고, '시침'을 이용해 항상 사용자가 원하는 목적지를 가리킨다.
또한 '맹인의 나침판'은 '톱니바퀴'와 '시침소리'를 통해 사용자의 등급에 맞추어 위협이 될 만한 것들을 감지해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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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랑은 설명이 완전 바뀌었네?"
분명 김현우가 처음 볼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는 아이템 설명에 아브는 왠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맹인의 나침반'의 진짜 능력이에요."
"이것도 정보권한에서 얻은 정보야?"
"네."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또 한번 나침반을 바라봤다.
분명 이전에는 어딘가가 망가진 낡은 나침반으로 보였던 맹인의 나침반은 조금 전을 기점을 그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밋밋한 외형에는 고급스러운 물결 나무 모양이 음각되어 있고, 나침반의 안쪽은 마치 회중시계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은색 시침 아래에서 딱히 어떠한 동력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
'…….'
분명 나침반이라는 아티팩트 이름이 붙어 있기는 했으나 어째서인지 회중시계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린 '맹인의 나침반'.
"그럼, 이제 이것만 있으면 그 8-35계층으로 갈 수 있는 거야?"
"네, 이제 이곳에서 나간 다음에 길 찾기 능력을 사용하시면 아마 나침반이 8-35계층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줄 거예요."
"정리하면, 내가 이제 8-35계층으로 넘어가서 '진실의 구'를 가져오기만 하면 끝난다 이거지?"
"네! 아마 그것만 있으면 튜토리얼 탑을 만든 제작자의 위치도 알 수 있을 거예요. 덤으로 제작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요."
아브의 확신 어린 말에 김현우는 맹인의 나침반을 추리닝 바지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나곤-
"그럼 좀만 기다리고 있어봐."
바로 갔다 올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시스템 룸의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미궁에 내려가기 전 잠깐 들른 가디언 길드 사무실이 있는 빌라 내부.
"야."
"네?"
"여기-"
8계층으로 내려가기 전 너무 오래 들리지 않아 한번 들리기라도 할 겸 찾아왔던 가디언 길드의 사무실은-
"왜 이렇게 변했어?"
커져 있었다.
그래.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아니, 뭔데?"
분명 김현우가 처음 가디언 길드의 사무실을 구할 때, 길드 사무실은 빌라 전체가 아니라 한 층이었다.
그래, 딱 한 층.
게다가 사무실의 크기도 그렇게 넓지 않았다.
애초에 김현우는 딱히 가디언 길드를 거대 길드로 만들고 싶은 욕심도 없었을 뿐더러 그가 길드를 만들었던 이유는 말년을 대비한 던전의 고정수입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김현우의 눈에 보이는 길드 사무소의 모습은 어떤가?
이미 이건 길드 사무소가 아니라 엄연한 대형 길드의 본거지라고 해도 될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분명 가디언 길드는 한 층만을 사용했었는데 지금은 그 자그마한 빌라가 사라지고 무척이나 거대한 빌딩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빌라 위에 거대하게 박혀 있는 가디언이라는 이름.
김현우가 뭔가 찝찝한 표정으로 아냐에게 묻자 아냐는 되레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 그게……."
"그게 뭐?"
"길드장님이 시키셨다고……."
"뭐? 내가?"
김현우의 물음에 아냐는 고개를 끄덕 거리더니 말했다.
"네, 몇 달 전에 패도 길드와 관련된 길드원들이 오셔서 건물을 새롭게 리모델링했었는데……그때 듣기로는 분명 길드장님이 허락했다고……."
"……."
아냐가 은근슬쩍 눈치를 보며 말하자 김현우는 곧 멍하니 생각하다 이내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분명 몇 달 전, 그러니까 미령과 막 같이 다니게 되었을 쯤에 그녀가 대충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었으나 어렴풋이 나는 기억에 김현우는 기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곤 왠지 자괴감을 느꼈으나-
'생각해 보면 내가 길드장인데, 처음 만들 때를 제외하고는 들르지도 않았었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 그래도 상관없지. 애초에 내가 길드 제대로 운영하려고 만든 것도 아니고…….'
꽤나 가볍게 자괴감을 털어버린 김현우는 이내 아냐의 너머로 시선을 돌려 이것저것 꾸며져 있는 집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을 때쯤.
"응?"
아냐의 책상 옆에 있는 검은 흑도(黑劍)를 보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분명 상당히 눈에 익어 보이는 흑도의 모습에 김현우는 이내 슬쩍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냐에게 물었다.
어차피 오늘 목적은 그냥 길드가 잘 돌아가고 있나 적당히 물어보러 온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요즘 길드 상태는 어때?"
"아, 요즘은-"
아냐는 김현우의 묻자마자 그가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은 것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설명하기 시작했고 잠차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현우는-
'……뭐, 잘 돌아가고 있나보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길드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아냐와의 이야기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를 때쯤.
"저기, 길드장님."
"응?"
불현듯 아냐는 김현우에게 물었다.
"저기,"
"왜?"
"그……."
물어보기가 좀 꺼려진다는 듯 눈을 여기저기 돌리는 아냐의 모습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했고, 아냐는 그런 김현우의 눈치를 보다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김시현 길드장님은 언제 돌아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
# 137
137. 할 일만 하고 온다(1)
호주, 캔버라에 외각에 위치한 상급 미궁 지하 심계층S등급 헌터들도 아직 제대로 뚫지 못했던 그곳에서-꽈드드드득!
-김현우는 미궁 안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를 학살하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언데드 중에서도 상위 10%이내에 드는 몬스터 중 하나인 '데스나이트'가 일제히 김현우를 향해 칼을 내지른다.
순식간의 연격.
죽은 자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빠른 기동력에 김현우는 순간 눈을 크게 떴으나-씨익.
-그것뿐이었다.
꽝!!
전후좌우에서 김현우를 향해 칼을 뻗고 있는 그 찰나의 시간에, 김현우는 힘껏 땅을 박찼다.
그로 인해 부서지는 미궁의 바닥.
그 짧은 한순간, 중심을 잃어 칼의 방향이 비틀린 데스나이트들의 사이에서 김현우의 신형이 쏘아졌다.
쾅! 꽈지지지직!
순식간에 데스나이트 앞에 나타난 김현우가 리치의 우위를 점하며 그의 철갑을 박살 내 버린다.
촤작!
뒤늦게 중심을 잡은 다른 데스나이트들은 김현우를 잡기 위해 급하게 도약했으나-꽝!
이미 바로 앞에 다가온 김현우를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꽈드드득!
순식간에 또 하나의 데스나이트가 철갑이 빠그라져 기동을 중지한다.
그 짧은 시간 사이, 콤마로 나누라면 제대로 나눌 수 있을까 싶은 짧은 시간에, 그의 주변을 점하고 있던 데스나이트들이 진정한 안식을 맞이한다.
구워어어어어어!!
데스나이트들이 쓰러짐에 따라 그 뒤를 따라오던 거대한 체구의 '플래시 골렘'이 김현우를 짓누르기 위해 다가왔지만-
"패왕격(?王?)"
플래시 골렘이 김현우를 짓누르는 것보다, 김현우가 그의 배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버리는 것이 먼저였다.
미궁을 가득 울릴 정도로 거대한 소음을 내며 쓰러진 플래시 골렘을 슥 바라본 김현우는 이내 자신이 팔에 감고 있던 '맹인의 나침반'을 흔들었다.
화아아악!
맹인의 나침반을 흔들자마자 순식간에 터져 나온 빛은 그대로 나침반의 밖으로 빠져나와 마치 가야 되는 곳은 이쪽이라는 듯 저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김현우는 곧바로 빛이 있는 쪽으로 움직이며 허리춤에 묶어 놨던 하수분의 아공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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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분(河水盆)의 아공간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아공간
소지 할 수 있는 물품 14/15
-거검 기간토마키아
-여의봉(如意棒)
-이터널 플레이백 대용량 가방
-정보 권한-
하수분(河水盆)은 '전설'의 구전으로 삶을 시작했다. 그는 이지를 가지기 시작할 때부터 모든 물건의 골자를 탐하고 성분을 분석하려는 욕망을 가졌던 그.
시간이 지나 하수분은 마침내 자신의 계층에 있는 모든 물건들의 골자와 성분을 파악하는 데 성공해, 물건을 보는 것만으로도 복제할 수 있는 '눈'을 얻게 된다.
허나 그의 이지(異志)가 죽음으로서, 그는 다시 '전설'의 구전으로 돌아가 본연의 능력을 잃고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그는 '기만자'를 탐구하기 위해 -권한부족-에 오르게 되었고 -권한부족- ?권한부족--권한부족-,의 -권한부족- 좌를 위해, -권한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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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하수분의 로그를 들여다본 뒤 아무것도 없는 미궁의 주변을 돌아봤다.
보이는 것은 그저 차가운 흙바닥과, 도대체 무엇 모르겠으나 은근히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는 미궁 내부뿐.
그나마 미궁 내부가 파랗게 빛나고 있기에 시야에 불편함이 없어서 나쁘지 않았으나.
"도대체 언제까지 내려가야 하는 거야?"
그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는 길을 보며 혀를 찼다.
"쯧."
김현우가 벌써 이 미궁 안에 들어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물론 미궁 안에 들어온 뒤부터는 제대로 날짜를 셀 수가 없어 정확히 며칠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건 시간이 꽤 지났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준비해 놓은 대용량 백팩의 식량 중 하나를 전부 까먹었기 때문이었다.
'뭐, 식량은 여유롭지만…… 위가 걱정이네.'
김현우는 미궁에 들어오기 전, 마지막까지 자신을 따라왔던 미령과 하나린을 떠올렸다.
'불안한데.'
끝까지 자신을 따라오겠다고 하는 것을 말리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여기에 남아 있으라고 말해두긴 했으나…….
'그럼 저만 데리고 가시면 되겠네요?'
'뭐?'
'그렇지만 그렇죠? 우리 '사저'가 자랑스러운 스승님의 첫째 제자니까 저보다는 더 강하지 않을까요?'
''사매'야, 그 아가리를 닫거라, 모름지기 스승의 보조를 맞출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제자인 나뿐이다.'
'어머~ '사저.' 분명 스승님이 이곳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지 않나요? 그러니 아주 '강한' 사저께서는 여기서 집 지키는 개……가 아니라 이곳을 지키셔야죠?'
'사매야 지금 당장 네 몸을 찢어버리고 싶은데, 그리 해도 되겠느냐?'
"……."
김현우는 미궁에 내려가기 직전,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그 둘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호주에 있는 미궁에 도착하기 전, 서로 싸우지 말라고 말해 놨더니 갑자기 그녀들은 서로를 사매와 사저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 문제는 그것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냥 서로를 사매와 사저로 부를 뿐, 어째서인지 말투는 이전보다 조금 더 격앙되어 있었다.
미령은 살기를 풀풀 내뿜으며 입을 열고, 하나린은 그런 미령을 조롱하며 화를 부추긴다.
'잘못된 선택을 했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김현우는 괜히 8계층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분명 그 둘을 남겨 둔 것은 김현우가 아래 계층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 다른 등반자가 올라 와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는데…….
'어째 올라가 보면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도시를 박살내고 있는 거 아니야?'
"……."
왠지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에 김현우는 괜스레 나오는 한숨을 막지 않고 들고 있던 맹인의 나침반을 흔들었다.
그와 함께 번쩍이며 또 한번 길을 제시하는 새하얀 빛.
김현우는 그 빛을 따라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계속.
계속-
눈앞에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분쇄하면서 나침반에서 나오는 빛을 따라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김현우는 어느 순간부터 약한 등급의 몬스터가 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우거'가 김현우의 앞에 튀어나오고.
그다음에는 '트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내려가면 내려 갈수록 김현우의 앞에 나타나는 몬스터의 등급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고.
케륵! 케르르륵! 케륵!
김현우의 앞을 막은 것이 수십, 수백은 넘어 보이는 고블린 무리가 되었을 때.
"거의 다 왔네."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고블린에게로 달려 나갔다.
***
아틀란테 제국의 수도인 '타틀란' 앞에있는 '괴수의 숲'.
"끄아아악!"
그곳에는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컥-!"
숲 사방에는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다.
머리가 깨져 죽은 병사도 있었고.
두 팔이 사라지고 가슴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죽은 기사도 있었다.
또한 시체 자체가 성하지 않게 죽은 이도 있는가 하면-뼈가 피부를 뚫고 나와 죽음을 맞이한 병사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조금 전 미궁에서 빠져나온 한 남자에 의해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 도끼를 쥐고 있는 한 남자에 의해.
"살려주세요! 살려-!!!!!"
파삭!
창을 들고 있는 병사의 머리가 어느 한 남자의 발에 의해 수박 깨지듯 터져나가고,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병사들이 몰려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마치 충혈된 듯 보이는 붉은 자 위로 보이는 검은 망막이 두려움에 떠는 병사들을 스캔하고, 그가 쥐고 있는 거대한 도끼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병사들의 앞에서 검을 들고 있는 남자.
아틀렌테 제국의 제 일 검이라고 불리고, 변방의 야만족들에게는 '심판자'라고 불리기도 하는 제국의 공작-검(劍)을 통달했다고 전해지는 경지 '소드 마스터'에 올라있는 그, '스윌로츠'는 앞에 보이는 남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괴물이다.'
괴물.
그는 괴물이었다.
'여태까지 봤던 녀석들 중 제일가는 녀석이야……!'
그동안 제국에서는 저 미궁에서부터 올라오는 상상 이상의 강함을 가진 괴물들을 3차례 이상 쓰러뜨렸다.
눈알이 하나밖에 없는 괴물도.
비대한 몸을 이끌고 나타난 거인도.
그 이외에 미궁에서 빠져나온 다른 괴물들도, 제국에서는 막아냈다.
'시스템의 축복' 덕분에.
10년 전, 그들에게 불현 듯 찾아온 시스템의 축복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그들에게 많은 힘을 선사해 주었고.
특히 스윌로츠나 다른 몇몇은 인간으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르기도 했다.
일검으로 태산을 가르고, 한 번의 도약으로 영지를 횡단할 수 있는 괴물 같은 경지를 가지게 해준 시스템의 축복.
물론 그런 경지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누구든 '시스템의 축복'을 받은 이들은 다른 일반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고, 제국은 그렇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시스템의 축복'을 받은 이들을 이용해 만든 군단은, 그리고 그런 군단을 이끌고 있는 제국의 삼검은, 적어도 제국이 있는 대륙 내에서는 상대할 수 있는 적수가 없었으니까.
"큭큭, 이게 전부냐?"
"……."
비아냥거리며 웃음을 짓는 남자.
그가 입고 있던 붉은 장포가 붉은 피로 물든 것을 보며, 그는 이 참담한 광경을 눈에 담았다.
눈알이 하나밖에 없는 괴물의 몸을 묶어 놓을 수 있었던 병사들은 그의 장난과도 같은 손짓에 전부 목숨을 잃었고.
거인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 있었던 '기사'들은 그의 도끼질에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올라온 괴물들을 언제나 같이 죽여 왔던, 제국의 이 검(二 劍)과 삼 검(三 劍)도 마찬가지로, 그의 백 합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그에게 목숨을 내주었다.
'스윌로츠'는 슬쩍 시선을 돌려 아직 살아 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으……으으……."
"……."
그들의 눈에 들어차 있는 확연한 공포감.
병사들은 이 검(二 劍)과 삼 검(三 劍)의 죽음으로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그렇기에 스윌로츠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봤으나,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 공격한다?
쓸데없는 사상자를 늘릴 뿐이었다.
만약 후퇴한다면?
'만약 저 괴물이 이 '괴수의 숲'에서 빠져나간다면…….'
제국의 수도는 물론이고 이 세계가 완전히 개박살이 나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어느 것을 선택해도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는 그 속에서 스윌로츠가 고민하고 있을 때.
"아무래도 재롱은 전부 끝인 것 같군."
그가 입을 열었다.
남자는 거대한 도끼를 몇 번이고 슥슥 휘두르더니 이내 입가에 짓한 웃음을 지으며 병사들에게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나, '아귀(餓鬼)'가 너희들에게 재미있는 걸 보여주도록 하마."
내 포식(飽食)을 말이야.
아귀의 중얼거림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도끼가 고도를 높이고 병사들이 겁먹을 표정으로 몸을 주춤거린다.
그 모습에 아귀가 입가를 찢으며 도끼를 내리 찍으려 할 때-콰아아아아───앙!
거대한 봉(棒)이- 떨어져 내렸다.
# 138
138. 할 일만 하고 온다(2)
시간의 흐름이 멈춘 허수 공간.
하늘에는 언제나 기분 좋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고.
나선의 하늘은 유유자적하게 떠다니는 것이 아닌 그저 그 장관인 풍경만을 만들어 낸 채 멈춰 있다.
그 이외의 다른 생물이나 벌레 또한 존재하지 않는, 그 모든 것인 멈춰 있는 세상.
그곳에서-
"끄-학!"
김시현은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몇 번째일까?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그런 객관적인 물음에, 김시현은 답을 내릴 수 없는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시현은-
"쯧, 이래서야 지체아가 따로 없군."
"크흐으으윽!"
입에서 짐을 질질 흘린 채 멍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분명 검을 들어 올리고 있기는 했으나, 그의 손에는 힘이 없었고, 또 그 의지 또한 없었다.
시간으로 환산되는 수백, 수천 번의 죽음은 그의 정신을 어그러뜨렸고, 그 결과 그는 이런 상태가 되었다.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딱 그뿐인.
마치 좀비 같은 김시현의 모습.
"쯧."
천마는 그런 김시현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처음 그가 처음 수십 번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는 스스로에게 의지를 불어 넣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 공간이라는 것은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는 그의 의기를 채워주었다.
그가 수십 번을 넘어 수백 번에 달하는 죽음을 맞이했을 때, 김시현은 스스로에게 집념을 불어 넣었다.
언제까지고 버티란 말을 하던 김현우의 말을 따라, 김시현은 어떻게든 천마를 이기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수백 번을 넘어 수천 번에 달하는 죽음을 맞이했을 때, 김시현은 그저 집착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 불어넣었던 용기와 의기는 없다.
그 뒤에 따라붙었던 집념도 없다.
좀비처럼 일어나 천마에게 다가오는 김시현에게는 오로지 집착만이 남아 있었다.
공허한 집착.
마치 좀비처럼 허우적거리며 검을 휘두르는 김시현의 모습에 천마는 혀를 차며 김시현의 배를 걷어찼다.
뻥!
마치 축구공이 날아가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처박히는 김시현.
그럼에도 또다시 기어 나와 검을 쥐는 김시현의 모습을 보며 천마는 허 하는 웃음과 함께 생각했다.
'그 새끼의 지인 아니랄까 봐 저 새끼도 미친 건 똑같군.'
그가 보았던 김현우는 괴물이었다.
그는 수백, 수천, 수만 번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마에게 덤볐으니까.
아무리 허수 공간이라고 해도 정신 데미지가 쌓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고통은 똑같이 느껴지고, 죽음의 그 순간은 어떻게 미화에도 좋게는 표현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도 김현우는 그 수만 번의 죽음을 통한 싸움을 이어가는 동안 오로지 무(武)에 광적인 집중력을 드러내며 결국에는 그의 무(武)를 배웠다.
천마(天魔)의 뇌령신공(雷令神功)을.
허나 그의 지인은 어떤가?
그도 김현우와 마찬가지로 집념이 강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쯧."
집념뿐이었다.
그의 정신은 이미 힘을 잃었고, 눈가 또한 흐리멍덩하다.
그렇기에 천마는 말했다.
"이제 그만해라 머저리, 너는 나를 못 이긴다는 것을 알 텐데?"
수천 번의 죽음 속에 흘러나온 천마의 목소리에, 김시현의 눈가가 돌아온다.
"아직, 아니야……."
"뭐가 아직 아니라는 거지? 지금 네 꼴을 봐라, 지금 네 꼴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거냐?"
"그건, 해봐야 아는 거 아니야?"
김시현의 어리석은 말에 천마는 혀를 찼다.
"헛소리하지 마라. 그건 단 1%나마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걸 모르나?"
천마의 한마디.
그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김시현은 수천 번의 죽음을 겪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천마와 1합을 제대로 겨루지도 못했으니까.
누가 봐도 승률이 제로라는 것인 싸움.
그것은 천마도 잘 알고 있었고.
김시현 또한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공을 배우기 전까지는, 절대 안 가"
김시현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검을 부여잡았다.
"허……."
그런 김시현의 모습에 천마는 어처구니없는 듯 웃음을 짓다가, 이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 미친 새끼의 지인 아니랄까 봐'
-완전히 또라이 새끼가 따로 없군.
그는 그렇게 평가하면서도, 어느새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김시현에게 답했다.
"그래, 그럼 와 봐라."
천마의 한마디.
"흡!"
그에, 김시현은 또 한번, 자신의 죽음과 같은, 수천 번째의 검을 휘둘렀다.
***
아귀(餓鬼)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바로 탐욕에 빠진 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재화욕에 빠진 자.
권력욕에 빠진 자.
살육에 빠진 자.
강함에 빠진 자.
그 수많은, 인간에게서 일어 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부정한 탐욕을 극한까지 추구한 이들.
그들은 생전(生前)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그 누군가는 손가락을 흔드는 것만으로도 경제를 일변시킬 수 있는 거상(巨商).
그 누군가는 한 제국의 황제.
또 어떤 이는 정체불명의 '연쇄살인마'라고 불렸고.
어떤 누군가는 전쟁의 투신(鬪神)으로 불리기도 했다.
허나 그렇게 생전에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사후(死後)모두 같은 이름을.
아니- 명칭을 부여받는다.
아귀(餓鬼)라는 명칭을.
남의 재산을 탐내는 '확신아귀(?身餓鬼)'부터 시작해 침구아귀(針口餓鬼), 식법아귀(食法餓鬼), 식혈아귀(食血餓鬼), 식육아귀(食肉餓鬼)……그 외의 수많은 명칭.
그것들은 생전(生前)에 그들이 쌓아 온 업적들을 먹어 치우고, 그들을 일개 아귀로 전락시킨다.
1000명을 죽인 살인마도.
전쟁에서 무패를 하던 투신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거상도.
권력으로 세상을 아래 두던 황제도.
모두가, 사후(死後)에서는 그저 아귀가 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모두가 빼앗긴 자신의 업적을 뒤돌아보며 피눈물과 실의, 좌절을 느끼고 있을 때.
그 아귀는 나타났다.
그는 이들과 똑같이 모든 업적을 빼앗기고, 그저 불우하고 불완전한 아귀(餓鬼)가 되어버린 남자였으나-딱 하나.
그는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탐욕(貪慾)이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것.
그렇기에 그는 그 사라지지 않은 탐욕을 원동력 삼아, 그곳에서 빼앗긴 업적을 다시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아귀밖에 없는 아귀도(餓鬼道)에서.
자신과 같은 아귀(餓鬼)들을 먹어치우며.
그는 '업적'을 만들어 냈다.
식육아귀(食肉餓鬼)를 먹어 치워 빼앗긴 전투의 업적을 채워 넣고.
확신아귀(?身餓鬼)를 먹어 치워 빼앗긴 전쟁의 업적을 채워 넣었으며.
식법아귀(食法餓鬼)를 먹어 치워 빼앗긴 자신의 이름을 다시 새겼다.
그래, 그렇게 해서-
"……."
-한때, 투신(鬪神)이라고 불렸던 그는 자신이 새롭게 쌓은 업적으로, 탑을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아귀도에 있는 모든 아귀들을 학살해, '탐식(貪食)의 아귀(餓鬼)'라는 이름을 인정받아서-
"……!"
그리고-
그, 아귀(餓鬼)는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섬찟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무언가가 떨어져 내린 자신의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탑을 오르면서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피부를 찌르는 듯한 가시감.
그는 저도 모르게 자신이 쥐고 있던 도끼를 그쪽으로 돌렸고.
곧, 아귀의 뒤에 박힌 거대한 봉(棒)이 사라짐과 함께-
"이건 또 뭐야?"
흙먼지 속에서, 김현우가 걸어 나왔다.
몸에는 검은색의 추리닝을 걸친 채 주변을 돌아 본 김현우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맹인의 나침반을 흔들어보았고.
화아아악!
맹인의 나침판에서 나온 빛은 이 이상 어딘가로 가지 않은 채 제자리에서 하얀 빛을 터트리고는 사라졌다.
'제대로 온 것 같네.'
김현우는 맹인의 나침반을 보며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바로 아까 전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고블린 군단을 학살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보인 환한 빛.
김현우는 그곳이 출구임을 믿어 의심치 않은 채 힘차게 미궁 밖으로 뛰쳐나왔고.
'씨발, 출구가 하늘일 줄이야.'
김현우는 그 상태에서 고공낙하를 경험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고도에서 제대로 생각할 시간도 없이 자유 낙하를 경험한 김현우는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그것은 잠시뿐.
김현우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 뒤로 그는 곧 자신의 몸이 땅과 게 가까워 질 때쯤, 하수분의 주머니에서 여의봉(如意棒)을 꺼내 들어 그대로 여의봉을 길게 만들어 안전하게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래서, 우선 도착을 하기는 했는데…….'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잔인하게 죽어 있는 인간들의 시체.
앞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도끼를 든 거구의 남자.
그리고 그런 거구의 남자 뒤로, 마치 중세시대의 기사같이 갑옷을 입고 있는 남자들이 눈에 보인다.
그리고 그 짧은 한 번의 눈짓과-
[확인 불가.]
눈앞에 떠오르는 로그 하나로 김현우는 이 상황을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거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그렇기에, 김현우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중얼거렸고.
팟-!
김현우는 순식간에 자신의 앞으로 달려 나온 아귀(餓鬼)를 눈으로 쫓았다.
한순간.
그를 상대하고 있던 병사와 소드마스터조차 따라가지도 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짧은 찰나의 순간도약.
허나 김현우만은 그런 아귀의 도약을 단 하나도 빠짐없이 '보았다.'
그가 무릎을 굽히고, 땅을 박차고, 손에 쥔 도끼를 짧게 쥐고, 어깨를 뒤틀고, 오른 다리를 이용해 도약하고, 자신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조준하는 그 모든 모습을.
김현우는 하나도 빠짐없이 보았고, 파악했다.
그렇기에-
빡!
"끅-!"
도약한 것은 아귀(餓鬼)였으나-
꽈아아아앙!
맞는 것 또한 아귀(餓鬼)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아귀가 김현우의 머리 위로 도끼를 내리 찍을 때, 김현우는 몸을 가볍게 옆으로 훑는 것만으로도 그의 도끼를 피해냈다.
그때 이어진 한 번의 단타.
천마에게 배웠던 반보(半步)의 박투술은 아귀의 안면을 뭉개 버렸고-그 뒤, 자세가 흐트러진 아귀의 명치에 박아 넣은 일격은, 그의 몸을 날려 버렸다.
콰드드드드드득!
사방으로 흙먼지가 튀어 오른다.
포탄으로 변한 아귀를 막지 못한 나무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그의 머리와 몸에 터져나간 지반들이 나무의 뿌리들을 드러낸다.
한순간 지도에 일자를 그려야 할 정도로 개 박살이 난 '괴수의 숲'
그 모습을 바라보던 병사와 스윌로츠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지고.
꽈아앙!!
무너진 나무들을 박살 내며 아귀가 나타난다.
지형을 이렇게 만든 것 치고는 딱히 별다른 상처도 입지 않은 아귀의 모습에 김현우는 완전히 박살 난 괴수의 숲을 보며 말했다.
"자연을 좀 아껴야 되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비아냥거림에 아귀의 인상이 찌푸려졌으나, 그는 섣불리 김현우에게 다가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거대한 도끼를 양손으로 잡고 김현우의 움직임을 신중하게 관찰하듯 몸을 낮추었다.
아귀(餓鬼)의 본성은 지금 당장 김현우의 머리를 쪼개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나, 투신(鬪神)으로써의 이성은 김현우를 주의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런 신중한 아귀의 모습에 김현우는 슬쩍 놀랐다는 듯 눈을 치켜떴으나, 이내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왜? 안 될 것 같으니까 한번 각 좀 재보려고?"
김현우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등 뒤에 있는 소드마스터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에게 집중하는 아귀의 모습.
그리고-
"그럼-"
김현우는, 순식간에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는 표현은 이상했다.
아귀(餓鬼)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까.
"이제-"
그래, 김현우는,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자세로-
"-내가 가야겠네?"
-아귀의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 139
139. 할 일만 하고 온다(3)
가디언 길드 꼭대기 층의 집무실.
원래라면 길드장이 써야 하는 집무실에는 아냐와 이서연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뭐 도와줄 건 없고?"
"네, 괜찮아요,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거든요."
아냐의 물음에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내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서연이 오늘 가디언 길드에 온 이유는 바로 던전 문제 때문이었다.
김현우가 아레스 길드의 던전을 잔뜩 빼앗은 뒤 가디언 길드는 길드원보다도 던전의 숫자가 더 많아지게 되었다.
물론 아냐가 김현우의 명령에 따라 길드원을 꾸준히 뽑고 패도 길드가 도와주고 있다고는 해도 그것은 딱히 계약상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기에 주먹구구식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아냐는 가디언 길드의 던전 중 몇몇 던전의 보스를 아랑길드를 포함한 고구려 길드와 서울 길드와 공동으로 운영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우선 그렇게 만들어 두면 쓸데없이 놀리는 던전이 줄어들 테니까.
한마디로 서로에게 그다지 나쁠 것 없는 이야기였기에 이야기는 매우 잘 풀렸다.
그렇기에 이서연은 만족하며 커피를 마셨고, 곧 자신이 이곳에 올 때부터 품었던 궁금증에 대해 물어볼 기회를 잡았다.
"그래서,"
"네?"
"지금 양옆에는 무슨 공사를 하고 있는 거야?"
"공사……요?"
이서연의 물음에 아냐는 슬쩍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아, 지금 저희 건물 양쪽에 공사하는 거요?"
"그래, 그거."
아냐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와보니 분명 이 사무실의 양 건물은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식 빌라였을 텐데도 불구하고, 새롭게 건물을 올리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높게.
그렇기에 이서연은 궁금증을 느꼈고, 아냐는 그런 이서연의 궁금증에 답했다.
"아마 왼쪽은 패도길드의 한국지부일거고, 오른쪽은 이번에 새로 만든 신생 길드……의 사무소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아냐의 말, 이서연은 패도 길드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뒤에 나온 신생 길드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신생 길드에서 저렇게 건물을 올리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굳이 가디언 길드와 패도 길드가 건물을 짓고 있는 이곳에 말이다.
"……아,"
그렇기에 한동안 그 신생 길드에 대해 생각하던 그녀는 문득 하남의 장원에서 봤었던 여자를 떠올렸다.
오빠의 두 번째 제자라고 말했던 그 여자.
'설마…….'
그녀는 슬쩍 시선을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미 창문에서 공사현장이 보일 정도로 건물이 높게 올려지고 있는 것을 보며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정말, 대단하네……."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
꽈아앙!
김현우의 일격이 아귀(餓鬼) 명치를 후려치기 위해 움직였으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주먹은 아귀의 도끼를 후려쳤다.
찰나의 순간에 이뤄진 방어.
김현우는 명치로 들어오는 공격을 방어한 아귀를 보며 놀랐다는 듯 그를 바라보곤 공격을 이어나갔다.
오른 다리를 짧게 차 아귀의 정강이를 노리고.
왼손을 비틀어 그의 얼굴을 노린다.
반보도 남지 않은 초 단거리에서 이뤄진 두 번의 격투술.
천마(天魔)에게 배운, 군더더기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움직임이 그의 머리와 다리를 노렸으나-꽝!
꽈드드득!
그의 공격은, 또 한번 아귀에 의해 막혔다.
'또?'
김현우는 다시 한번 막힌 공격에 이상함을 느끼며 거대한 도끼 너머로 서 있는 아귀를 바라봤다.
분명 그의 눈은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자신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어느 정도.
이런 초를 단위로 쪼개야 하는 싸움 속에서, '어느 정도'라는 말은 지극히 효용성이 없는 말과도 같았다.
김현우의 공격이 이어진다.
왼쪽 팔.
오른쪽 정강이.
명치.
머리.
김현우의 몸이 그 잔상을 남기며 움직인다.
콤마 단위의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4번의 연격.
허나 아귀는 막아낸다.
왼쪽 팔을 노리는 공격은 도끼의 대부분을 이용해 막아내고, 오른쪽 정강이는 도끼의 면을 이용해 막아낸다.
명치와 머리도 마찬가지.
아귀는 그 짧은 시간 내에 도끼를 움직여 막아냈다.
"허."
그 모습에 김현우가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 새끼 봐라?"
그와 함께 또 한번 이어진 김현우의 연격.
그의 공격이 아귀의 몸을 노리고 순식간에 쏘아져 나간다.
빈틈이 있는 곳이라면 유감없이 김현우의 주먹과 발이 들어갔고, 빈틈이 없는 곳이라도 허초를 위해 그곳을 후려친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지만, 김현우의 공격은 이미 가볍게 수십 합을 넘어서고 있었고, 초침이 열 번을 까딱였을 때, 김현우의 공격은 백번을 가볍게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
김현우는 그 짧은 시간, 아귀를 때리며 그가 어떻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아귀는 김현우의 움직임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다.
그것은 맞다.
허나 아귀는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김현우의 움직임을 볼 수는 있었다.
그리고 아귀는 놀랍게도 그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는 김현우의 움직임을 특정해서 공격을 막고 있었다.
저 자세를 통해서.
김현우는 그가 취하고 있는 자세를 바라봤다.
양발은 언제라도 전방위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게 자연스럽게 펴 놓고, 양팔은 자신의 몸을 가볍게 가릴 수 있는 도끼를 역수로 잡고 있었다.
언뜻 보기만 해도 도끼로 몸의 절반을 가리고 있는 아귀.
그는 일부러 저 거대한 도끼를 자신에게 밀착시킴으로써 도끼를 움직이는 동선을 최대한으로 자제함으로써 김현우의 공격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움직임을 보고, 최대한 짧은 동선으로 도끼를 움직이며.
"……."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도끼를 쥔 채 여전히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아귀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현우는 생각했다.
'어디로 공격해도 저 도끼에 막힌다라…….'
김현우는 조금 전, 그의 사각이 있는 곳에는 망설임 없이 공격을 때려 넣었다.
도끼가 방어하지 못하는 앞부분은 당연하고, 그가 제대로 대비하고 있지 못하는 뒤는 더더욱 당연했다.
허나 아귀는 그가 몸을 돌리자 자신도 마찬가지로 귀신같이 몸을 돌리며 움직임을 쫓았기에 김현우는 결국 일격을 맞출 수 없었다.
그야말로 놀라운 방어능력에-
'그렇다면-'
김현우는 입가의 웃음을 머금으며-
'그 방어를 부숴버리면 될 뿐이지.'
자신의 마력을 사방으로 흩뿌리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지직-!
검붉은 마력이 김현우의 의지에 따라 혈도를 달린다.
그와 함께 밖으로 내뿜어지는 검붉은 마력.
대기를 타고 허공을 유영하는 마력들 사이에 검붉은 스파크가 튀어나간다.
천마에게 뇌령신공을 배우고 난 뒤부터는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스파크.
순식간에 바뀌어 나가는 모습에 아귀는 눈을 휘둥그레 떴으나 이내 눈가를 굳히며 자신의 도끼를 잡았다.
지금 자세를 풀지 않겠다는 듯, 오히려 몸의 근육을 경직시키는 아귀의 모습.
파지지직! 꽝!
내리 떨어지는 번개와 함께, 김현우는 또 한번 아귀에게 달려들었다.
아귀는 순식간에 달려오는 김현우의 모습에 긴장하며 도끼를 들어 올렸으나, 그가 긴장하고 있었던 김현우의 연격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촤아아아악!
흑익(黑翼)이, 그 날개를 드러냈다.
아귀의 눈이 크게 뜨여지고, 김현우의 입에 미소가 지어진다.
검붉은 마력이 폭발적으로 증폭하며 사방에 붉은 번개를 떨궈대고, 검은 날개가 그 사이에서 위용을 과시하듯 날개를 펼친다.
그리고-
"우선 한 방-!"
김현우는 당황한 눈빛이 역력해 보이는 아귀를 향해, 아니-
"패왕(?王)-"
정확히는, 그가 자신의 몸을 방어하고 있는 도끼를 향해, 자신의 일격을-
"괴신격(怪神格)-!"
내질렀다.
콰────아!!!
검붉은 번개가 사방으로 떨어지며 순간 마력이 폭사한다.
김현우의 다리가 도끼의 면을 후려치고, 그 뒤를 이어 김현우의 뒤에 펼쳐져 있던 날개가 그의 마력으로 치환되어 김현우의 발에 몰려든다.
마치 기관열차가 연료를 녹여 힘을 내는 것처럼, 김현우의 다리가 검은 마력을 연기처럼 토해내고-꽈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지반이 부서진다.
아니, 부서진다는 말은 옳지 않았다.
지반이 사라지고.
나무가 사라진다.
괴수의 숲을 조성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검붉은 마력에 먹혀 사라진다.
그리고-
"크-하악!"
아귀는, 그 검붉은 재앙 속에서 살아남았다.
이미 그의 몸은 여기저기 화상을 입은 듯 그을린 자국이 있었고, 김현우의 공격을 받아냈던 도끼는 이미 도끼의 날 부분이 박살 나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아귀가 부서진 자신의 도끼를 확인하며 소리 없는 경악성을 내뱉었다.
아귀가 쥐고 있는 도끼는 아귀도(餓鬼道)를 지키는 지천대군(支天大君)을 죽이고 빼앗은 무기였다.
'그 도끼가…… 한 방에?'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대만 남은 도끼를 쥐고 있을 때.
"야."
김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아귀의 시선이 김현우를 향해 돌아갔고, 그는 곧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너 뭐하냐?"
"무, 무슨-!"
그곳에는 김현우가 있었다.
등 뒤에 세 개의 만다라(滿茶邏)를 가진 채.
그 모습에 아귀가 입을 벌리며,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큭!?"
아귀의 몸은,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당황하는 아귀의 모습에 김현우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그 한 번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김현우의 말에도 아귀는 그의 말에 관심 따위는 없는 듯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비틀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아귀의 몸은 이미 마력팽창의 영향권 내에 들어가 있었다.
김현우의 등 뒤에 검은 만다라가 개화하기 시작한다.
"크하아악!"
그와 함께 사방으로 뿌려지기 시작하는 검붉은 마력.
검붉은 스파크가 사방으로 방전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고, 김현우는 어느새 아무 움직임도 취하지 못하는 아귀의 앞으로 다가와 여유롭게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에 아귀의 눈에 다급함이 깃든다.
그의 근육이 팽창하듯 부풀어 오르고, 그의 붉은자위가 붉은 것을 넘어 검게 물들어 나간다.
그런 상황에서, 김현우는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이제 한번 제대로 맞아 봐."
마치 선고하듯 중얼거렸다.
"안 돼에에에에에!!!!"
그와 함께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아귀의 입에서 비명 같은 괴성이 튀어나왔으나, 이미 김현우는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 빙그르 돌던 연꽃들이 완전히 개화하기 시작하고, 그와 함께 검붉은 마력을 전방으로 쏘아댄다.
그와 함께-
"수라(修羅)-"
김현우는 등 뒤에, 자신의 마력을 먹어치우고 만들어 낸 6개의 팔을 한곳으로 모았고-
"무화격(武和?)-"
삐───────!!
곧 아귀는, 이번에야말로 검붉은 재앙에 먹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검붉은 재앙이 끝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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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등반자를 찾아 처치했습니다!
위치: 타틀란 제국 괴수의 숲
[등반자 '탐식(貪食)의 아귀(餓鬼)' '개의'을 잡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정보 권한의 실적이 누적됩니다!]
[현재 정보권한은 중상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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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어김없이 떠오르는 로그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자네는……누구지……?"
김현우는 문득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이내 그곳에서 김현우는 무척이나 긴장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스윌로츠 공작을 볼 수 있었다.
# 140
140. 할 일만 하고 온다(4)
'진실의 구'
그것은 바로 타틀란 제국의 황궁 창고에 있는 진귀한 아티팩트 중에서도 그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아티팩트였다.
그도 그럴 것이 타틀란 제국이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진실의 구'때문이기도 했으니까.
대가만 지불하면 그 어느 진실이던 알 수 있는 '진실의 구'의 힘은 딱히 외적인 힘은 없으나, 잘만 사용한다면 한 제국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건 불가능한 말이다."
타틀란 제국의 7대 황제, '아클라스 타틀란'은 스윌로츠 공작의 말에 반대했다.
"허나-!"
"공작,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 타틀란 제국에게 있어 진실의 구는 마치 구심점과도 같은 것일세.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아클라스의 말에 스윌로츠는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스윌로츠는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진실의 구는 제국을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아티팩트가 맞았다.
허나 단 한 가지, 스윌로츠가 아클라스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 하나.
'그건 예전일 뿐……!'
그것은 바로 '진실의 구'가 제국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은 바로 예전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어째서 예전인가?
그것은 바로 스윌로츠의 앞에 앉아 있는 황제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말은 안 될 말이지."
지금 황좌에 앉아 스윌로츠와 대면하고 있는 아클라스 타틀란.
그 때문에 '진실의 구'는 이이상 제국의 성장을 돕지 않고 있었다.
맨 처음, 선대들이 제국을 세웠을 때, 1대를 포함한 6대의 왕들은 모두 현명하게 '진실의 구'를 사용했다.
그 어떤 누구는 제국의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진실의 구'를 사용했고.
그 누군가는 제국을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 '진실의 구'를 사용했다.
그 이외에도 아틀란 제국의 화좌에 오른 이들은 그 누구라도 제국의 안녕과 번영만을 위해 그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그러나 지금 타틀란의 왕좌에 앉아 있는 7대 왕, 아클라스는?
타틀란 제국의 6대 황제인 '오트록스 아틀란' 갑작스레 별세한 뒤, 갑작스럽게 그 자리에 앉게 된 그는 '진실의 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진실의 구'를 제국이 아닌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아르반테 공작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그자에게 '진실의 구'를 사용해 봐야겠군."
"폐하, 말씀드렸지만 '진실의 구'는 그렇게 사용하는 것보다는 이번 북방에서 일어날 일을 조사해 보시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스윌로츠의 말에도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북방에는 이미 방위군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도 최근 북방의 야만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진실의 구'를 사용해 그들의 전력을 가늠하고 인원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게-"
"그것보다는 짐의 안위가 더 중요하지 않겠나?"
그 발언이 부끄러운 발언인 줄도 모르고 단호하게 단언하는 아클라스.
그 모습에 스윌로츠는 고개를 숙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멍청한……!'
황제로 제위하고 있는 아클라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반동분자들을 뿌리 뽑겠다는 말도 안 되는 명분을 앞세워 '진실의 구'를 어처구니없는 곳에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그 덕분에 '진실의 구'를 사용해 큰일에는 항상 한 수 앞을 내다보던 제국은 아클라스가 제위 하면서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이젠 정말로 위험하다.'
괴물을 막는 전투로 제국의 중심을 잡고 있던 자신의 포함한 세 구심점 중 두 명이 이번 전투에서 전사함으로써 상황은 크게 악화될 예정이었다.
'허…….'
허나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하는 황제의 모습.
제국의 기둥 중 두 명이 전사하고, 괴물에 의해 병사와 기사들이 억소리 날 정도로 쓸려나갔음에도 그는 심드렁했다.
거기에 더해서-
'분명 말을 했는데도……!'
스윌로츠는 오늘, 제국의 이 검과 삼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자신의 목숨을 위협했던 아귀(餓鬼)를 죽인 그를 떠올렸다.
제국의 이 검과 삼 검이 죽고 난 뒤, 이제 패배하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그.
그는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만 같던 아귀를 손쉽게 죽여 버렸다.
그야말로 '압도적'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은 무력으로.
"……."
스윌로츠는 문득 아까 전 김현우가 보여줬던 무력들을 떠올리며 한차례 소름을 느꼈다.
압도적인 무력.
일 권에 지반과 나무가 사라지고.
그가 사용한 기술에 괴수의 숲이 일부분 날아가 버릴 정도로, 그의 능력은 강대했다.
허나 스윌로츠가 황제에게 아무리 그에 대해 설명하고 그가 '진실의 구슬'을 원하는 것을 알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황제는 그 일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아니, 애초에 진실의 구를 넘겨주는 것에 대해서는 애초에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흐를 때쯤.
"아, 그리하면 되겠군."
아클라스가 문득 탄성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무엇을……?"
그의 탄성에 왠지 본능적으로 그가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스윌로츠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고.
"북방의 야만족들이 날뛴다고 했지?"
"……."
"그렇다면, 제국을 구해준 그에게 부탁하는 건 어떤가?"
"그게 무슨……!!"
"진실의 구를 원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것으로 그를 이용하자 그 말일세."
스윌로츠는 자기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절망 어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
타틀란 제국의 황궁 외부의 별채.
------
아귀의 탐욕
등급: S++
보정: [특수 조건 만족시 발동]
스킬: 탐식
-정보 권한-
생전(生前), 수많은 전쟁에 참가해 수천의 목숨을 벤 투신(鬪神)은 사후(死後) 아귀(餓鬼)가 되었으나 그는 아귀가 되었음에도 힘에 대한 탐욕을 잃지 않고 다른 아귀들을 잡아먹으며 힘을 길렀다.
다른 아귀들을 먹어치우며 그들의 탐욕까지 모조리 흡수한 그, 탐식의 아귀는 -권한부족-에게 인정받아 탑을 오를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고, 아귀는 -권한부족-에 탐욕을 느꼈기에 탑을 올랐다.
아귀의 탐욕을 사용할 경우, 사용자는 일정시간동안 탐식(貪食)의 아귀(餓鬼)의 능력을 그대로 계승하게 되며 그 상태에서 누군가를 먹어치울 시, 그의 능력치 중 일부를 자신에게로 가져온다.
허나, 아귀의 탐욕을 제대로 사용한 시점에서, 사용자는 아귀와 같은 탐욕을 느끼게 되어, 종래에는 아귀와 다를 바 없게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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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입니다."
자신을 안내하는 시녀를 따라 앞에 연못이 있는, 고풍스럽다 못해 사치스럽게 지어진 2층 저택을 나서며 김현우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아귀의 탐욕의 로그를 읽었다.
마치 눈알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는 아귀의 탐욕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은 김현우는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8계층에 내려오자 등반자를 마주쳤던 것부터 시작해, 등반자를 죽이고 난 뒤 처음으로 이세계인과 만나게 되었을 때.
'솔직히 말이 안 통하면 어쩌나 했는데.'
김현우가 끼고 있던 번역 반지의 힘은 위대했다는 말로 언어 통역 부분은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가 통했기에 김현우는 그들에게 곧바로 진실의 구의 출처를 물었고, 김현우는 기가 막힌 아다리로 진실의 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다리 잘 맞아서 좋네.'
솔직히 아무것도 모른 채 여기에 떨어졌으면 진실의 구를 찾는 것도 꽤 힘들었을 것이고, 설령 진실의 구를 찾았다고 해도 가져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 마음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뭐, 딜은 최대한 쳐보겠지만.'
만약 그 딜을 다 쳐내고 그를 배척하면 김현우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에게는 진실의 구가 필요했고, 최대한 빨리 9계층으로 돌아가야 하기도 했다.
'뭐 미령이랑 하나린을 세워두고 오기는 했어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김현우가 볼 때 미령과 하나린은 계승자가 되어 분명히 인외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나 상위 등반자와 비교해 보면 빛이 바랜다.
한마디로 세상일이라는 게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 최대한 빠르게 진실의 구를 챙겨서 돌아가는 것이 김현우의 목적이었다.
'뭐 지금 와서는 그 걱정을 할 필요는 없지.'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아무도 막지 못한, 제국을 멸망시킬 뻔한 괴물을 잡아 주었고.
그것으로 어느 정도의 조건은 만들어진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쯤.
"이곳입니다."
시녀의 말에, 김현우는 자신이 어제 보았던 거대한 황성 내부로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중세시대의 드라마나 만화처럼 각 기둥에 병사들이 서 있고, 김현우의 앞에는 사치스러운 장식이 가득한 문이 있었다.
끼이이익-
이윽고 문이 열린 뒤, 김현우는 그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곳에서 두 명의 남자를 볼 수 있었다.
한 명은 보기에도 굉장히 사치스러운 옷을 걸치고, 사람 한 명이 앉기에는 무척이나 넓어 보이는 황자에 앉아 있는 남자.
또 다른 한 명은 그 아래에서 왠지 낙담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어제 봤던 그 남자였다.
'뭐, 예법이라도 지켜야 하나?'
김현우는 머릿속에 일순 그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예법은 알지도 못할뿐더러, 어색하게 해봤자 더 이상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당당히 걸음을 옮겨 딱 봐도 황제로 보이는 이의 앞에 섰고, 황제, 아클라스는 그런 김현우를 보며 물었다.
"자네인가? 제국을 위협하던 괴물을 잡아 줬다던 자가."
황제의 물음.
김현우는 순간 말투를 어찌해야 하나 생각하다 그냥 말했다.
"그래."
단답.
그런 김현우의 대답에 아클라스의 인상이 슬쩍 찌푸려졌으나, 그는 이내 인상을 피고는 슬쩍 생각하는 듯하다 말했다.
"우선, 감사하도록 하지."
아클라스의 감사 인사.
허나 김현우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이내 아클라스는 슬쩍 김현우의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스윌로츠 공작에게 자네가 원하는 것을 들었네. 자네는 '진실의 구'를 원하는 것 같더군."
"맞아. 내가 원하는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거지."
김현우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말했다-
"그러나 정말 유감스럽게도, 우리 제국에서는 자네에게 '진실의 구'를 넘겨 줄 수 없네."
"……뭐?"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으나, 아클라스는 자신의 페이스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진실의 구가 제국의 귀중한 아티팩트인 것부터 시작해서, 제국의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 지까지.
별다른 이야기 없이 그냥 '아 우리 아티팩트는 무지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길게 펼쳐서 말하고 있는 아클라스를 보며 김현우의 인상이 찌푸려질 때쯤.
"그렇기에 자네의 공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나, '그것만'으로는 우리 제국의 수호자와도 같은 아티팩트를 넘길 수는 없네."
아클라스의 입에서 나온 결론에 김현우는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한마디로 등반자를 잡은 것만으로는 아티팩트를 못 넘겨주겠다는 황제의 말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를 황제를 바라봤고-
"하지만, 만약 자네가 북방의 일을 해결한다면, 또 모르겠군."
아클라스의 추가적인 요구에 김현우는 어처구니를 넘어 저도 모르게 얼 탄 표정을 짓다, 문득 시선을 돌려 낙담한 표정으로 슬쩍 눈을 돌리고 있는 스윌로츠 공작을 볼 수 있었고--그런 그의 모습에 김현우는 문득 이상함을 느끼곤 황제에게 자신의 '스킬'인 심리를 사용했다.
그리고 떠오르기 시작한 로그에-
"야 이 씨발 새끼야 양심 뒤졌냐?"
김현우는 황제에게 욕을 박았다.
# 141
141. 할 일만 하고 온다(5)
영물(靈物)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영험한 기운과 능력을 가진 것들을 말한다.
하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하늘의 선택을 받아 죽지 않고 오랜 시간을 지상에서 살아남은 그것들은 오랜 시간을 살아가며 자신의 안에 영기를 쌓는다.
그렇게 해서 영기를 쌓는 영물들은 곧 동물로서의 본성을 억누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그와 함께 스스로 이성을 만들어낸다.
이성을 만들어낸 그들은 스스로가 누구인지 학습하고 배워 나가며 점점 인간들과 필적하거나 그보다 높은 지성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해서, 오랜 시간토록 살아남은 동물들은 결국 영물(靈物)이 된다.
그리고-
"후─"
지금 당장 탑을 오르고 있는 한 마리의 '여우'는 장장 1800년이라는 세월을 살며 영물(靈物)의 경지에 올라선 케이스 중 하나였다.
그녀가 푸르게 빛나는 바닥을 걸을 때마다 엉덩이 뒤에 달려 있는 9개의 꼬리가 요사스럽게 흔들렸고.
그런 그녀의 꼬리 위에 만들어져 있는 9개의 푸른 불은 침침한 어둠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9개의 꼬리를 가지고 있는 여우이자, 탑을 오르기 전에는 세상에서 구미호(九尾狐)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녀는 이제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9계층의 입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9계층'
9계층을 포함해 탑의 꼭대기로 가는 계층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녀는 절로 자신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자신의 목적에 대해 상기했다.
'올라가서 좌(座)를 받기만 한다면 내 목적을 이룰 수 있어.'
아직 9계층을 전부 클리어 하지도 않았건만 그녀는 벌써 꼭대기 층에 올라가 목적을 이루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구미호는 지금까지 계층을 올라오며 딱히 어려움을 겪고 올라온 계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구미호는 다른 계층들과도 마찬가지로 이번 9계층도 간단하게 클리어 하고 다음 계층으로 올라 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곧 9계층의 입구에 다다르자-
찌르르-
"!!!!"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털을 곤두서게 할 정도로 엄청난 마력이 9계층의 입구 쪽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이……무슨……!'
1800년 동안 살아온 그녀가 품기만 해도 숨이 버거울 것 같은 마력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이 말도 안 되는 마력은 뭐야!?'
그야말로 소름이 끼치는 마력이 외부에서 부딪히고 있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연속으로.
그에 구미호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으나, 그렇다고 9계층으로 나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구미호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아가리 닥쳐라 이 개년아!"
"뭐라는 거야? 키도 조그만한 찐따가!"
그곳에서, 그녀는 그녀들을 볼 수 있었다.
오른쪽 이마에 붉은 뿔을 달고 있는 소녀와.
검은 책을 든 채 그녀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한 여자를.
"너는 저기 찌그러져 있어! 등반자는 내가 잡을 테니까!"
"웃기지 마라 이 요망한 계집아! 보나마나 등반자를 잡고 스승님에게 그 어쭙잖은 가슴을 비벼대려 하려는 걸 다 알고 있다!"
"너는 사부님에게 비빌 가슴도 없어서 좋겠다 꼬맹아!"
"이 썅년이 진짜!"
꽝!
미령의 발이 하나린의 머리를 후려갈기고, 하나린의 발이 그녀의 얼굴을 후려친다.
콰가가가강!
양쪽으로 날아가 서로 벽에 처박히는 미령과 하나린.
구미호가 멍하니 그 상황을 바라보고 있을 때, 미령은 어느새 상어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이를 드러내곤 입을 열었다.
"정했다, 내가 스승님한테 미움받는 한이 있어도 네년은 지워버리고 말겠다!"
"우연이네…… 나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이 꼬맹아!!!"
사매와 사저라는 표현은 이미 어디다가 갔다 버린 건지 악의적으로 외치며 서로를 부른 그 두명은 곧바로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하다-
"……!"
"헉……!"
그녀들은 미궁 밖으로 빠져나온 구미호를 볼 수 있었다.
한순간의 어색한 대치.
미령과 하나린이 구미호를 바라보고, 구미호는 어찌 할 바를 모른 채 눈알을 여기저기로 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거!"
"내 거다!"
"히이이익!"
마력을 모으고 있던 미령과 하나린은 곧바로 몸을 돌려 왠지 공포의 눈빛을 띄고 있는 구미호에게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김현우의 욕설에 한순간 적막감이 감돈 황궁 내부.
스윌로츠 공작은 얼빠진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은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것은 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애초에 문화부터 다른 그들이 9계층에서나 사용하는 김현우의 욕설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김현우의 번역반지는 매우 훌륭하게 김현우의 욕설을 번역해 그들에게 들려주었고-
"무- 무슨……!"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아클라스가 노기를 띈 얼굴로 분노하려 했으나 김현우는 그런 그의 말을 듣기도 싫다는 듯 잘라버렸다.
'이 새끼들이 봐라……?'
김현우가 분노한 이유.
그것은 바로 황제가 어처구니없이 김현우의 요구를 거절한 것도 있었다.
김현우는 제국을, 더 미래를 보면 이 대륙을 위협하는 등반자를 처리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저 황제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스윌로츠와 황성 내부로 오며 들었던 나눴던 말에 의하면 제국에서 가장 강했던 이들도 등반자의 100합을 버티지 못했다고 들었으니까.
누가 봐도 김현우가 등반자를 죽이지 못했으면 멸망할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클라스는 오히려 그 사실을 뻔뻔하게 넘기고 오히려 자신을 이용하려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의 심리가 김현우에게 읽힐 수 있다는 것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이 녀석을 사용해 북방의 야만인들을 처리하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 진실의 구를 원한다고 했으니 그걸 미끼로 하면 잘 넘어오겠군.]
[그렇게 해서 저 녀석을 북방 야만족을 토벌하면 그때는 직위를 주도록 하자, 신분상승을 시켜서 제국에 묶어두는 거야.]
[만약 그게 싫다고 한다면 진실의 구에게 물어 저 녀석을 죽일 방법에 대해 알아볼 수도 있겠지.]
[지금 뭐라고 말한 거지?]
[감히 내게 그런 망발을 해???]
[이런 개새-]
황제의 옆에 떠 있는 말풍선.
그 위에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는 로그를 바라본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이거 완전 빡대가리 새끼 아니야?'
그것도 그냥 빡대가리가 아니라 개빡대가리라 김현우는 기가 찼다.
"허-"
아클라스는 누가 봐도 조금만 자세히 보면 뻔히 보이는 수로 김현우를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쓸 만해 보이면 작위를 내려 제국에 묶어둔다는 생각은 심리를 통해 읽기는 했지만 정말 병신 같은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뭐 극단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세계 사람들, 그러니까 8계층 사람들에게는 먹힐 수 있는 전략이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중세시대는 계급이 제일 우선이 되는 시대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김현우에게 이 8계층에서의 계급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아직도 어버버 거리는 황제를 시선에 두고는 입을 열었다.
"저기, 너희들이 지금 나랑 말이 통해서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지금 너희들이 나한테 그런 식으로 조건을 걸 처지라고 생각해?"
김현우의 오만한 발언.
그런 그의 말에 아클라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격분하며 고함쳤다.
"뭐라고!? 지금 아틀란의 황제를 겁박하는 것이냐!!"
"지랄 좆 까고 있네. 지금 너 하는 짓을 봐라, 네가 황제냐? 내 눈에는 그냥 빡대가리로밖에 안 보이는데?"
"네……네 녀석!"
이제는 개 거품을 문 것 같이 발광하는 아클라스.
허나 김현우는 그런 아클라스의 모습을 즐기는 듯 더욱더 노골적으로 그를 비아냥거렸다.
"왜, 맞잖아? 이곳에서는 죽이지도 못하는 괴물을 죽인 놈한테 뻗대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응? 아,"
아니면 그거야?
"설마, 그냥 막연하게 말이 통하니까 과격한 짓까지는 하지 않을 거다, 뭐 그런 믿음이 있는 거야?"
"근위병! 근위병은 당장 저놈을 잡아 죽여라!"
김현우의 팩트 폭력에 개거품을 문 아클라스는 곧바로 삿대질을 하며 손가락질을 했고, 그와 함께 황성 내부로 근위병들이 들이 닥쳤지만-꽝! 콰가강!
"헉!"
마른하늘에 갑작스레 떨어져 내린 검붉은 번개는 문을 열고 들어오던 근위병들의 움직임을 막았고, 김현우의 주변으로 검붉은 마력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지직!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는 검붉은색의 마력.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아클라스와 그 옆에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검을 빼어든 스윌로츠를 바라봤다.
"솔직히 나도 여기까지 와서 너희들이랑 굳이 싸우고 싶진 않거든? 그러니까 내가 선택지를 줄게."
파직!
파지지직!
"으아앗……!?"
김현우의 주변을 유영하는 마력들 사이에서 위협적인 스파크가 터져 나와 사치스러운 황궁 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스테인드 글라스가 박살 나고.
사치품들이 그 가치를 잃고 검게 그을린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번개는 천장을 부셨고.
벽에 새겨져 있는 벽화는 검게 타 사라진다.
그 상황에서, 김현우는 주먹을 한번 쥐었다 피곤 말했다.
"첫 번째는, 나한테 그냥 '진실의 구'를 넘기고 이대로 아주 스무스하게 끝나는 거지, 아무런 피해도 없이 말이야."
"……."
"그런데 만약 첫 번째가 싫다? 그럼 두 번째는…… 뭐, 너도 알지? 아무리 빡대가리라도 자신의 제국의 멸망이 앞으로 다가와 있는데 모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
아무렇지도 않게 제국의 멸망을 입에 담는 김현우.
그 모습에 스윌로츠는 검을 뽑았으면서도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제국 멸망.
일개 귀족의 입에서 나왔다면 당장 능지처참을 면치 못할 말이었고, 어느 농민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면 그것은 그저 한낱 웃음거리로 치부될 만한 말이었다.
허나.
스윌로츠는 김현우가 정말로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바로 눈앞에서, 김현우가 아귀(餓鬼)를 때려죽이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그리고 그의 옆에 있던 황제 아클라스도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사방으로 검붉은 스파크를 튕겨대는 김현우의 모습은 가히 위협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위협적'이라는 단어가 새겨지자, 아클라스는 아까 전 스윌로츠 공작이 자신에게 했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가 '진실의 구'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제국의 이검과 삼검이 동시에 덤벼들어도 쓰러뜨리지 못한 것을 그는 혼자서 쓰러뜨렸습니다.'
'저희로서는 그를 컨트롤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중하게 거절하는 편이-!'
'폐하! 말씀드렸지만 그는 괴물을 쓰러뜨린, 괴물보다 강한 자입니다!'
우려하는 공작의 말들.
아클라스는 어리석게도 스윌로츠 공작의 조언을 실제로 겪고 나서야 제대로 깨달을 수 있게 되었으나-파직! 쾅!
-이미 후회하기에는 너무나도 늦었다.
위협적인 번개를 내리친 김현우는, 이제 비틀린 웃음을 지은 채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에게-
"자, 빨리 선택해. 나도 시간 없으니까."
선택을 강요했다.
# 142
142. 할 일만 하고 온다(6)
김현우는 자신의 손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진실의 구의 로그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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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구
등급: Ss
보정: 없음
스킬: 권한 접속
다음 사용 기간까지 남은 시간: 28일 11시간 22분 31초
-정보 권한-
-권한 부족-의 진리를 깨달은 마법사가 시스템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 부족-을 알아차리고 -권한 부족- 몰래 만들어낸 아티팩트.
진실의 구는 사용자의 마력을 대가로 사용자가 알고자 하는 진실을 그 무엇이든 알려준다. 허나 -권한 부족- 때문에 진실의 구는 사용자가 묻는 진실의 등급에 따라 재사용 대기시간이 결정된다.
재사용 대기 기간은 등급에 따라 최소 100일부터 3200년까지 정해져 있으며, 이 재사용 대기시간은 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줄이거나 늘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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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를 확인 한 김현우는 만족한 웃음으로 하수분의 주머니에 진실의 구를 집어넣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것은 바로 침통해 보이는 황제 아클라스의 얼굴.
'그래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나보네.'
만약 아클라스가 거기에서 앞뒤 상황도 모르고 김현우를 적대했으면 김현우는 정말로 아클라스를 박살 내고 진실의 구를 가져갈 생각이었다.
'뭐, 아마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진짜 제국을 멸망시키지는 않겠지만.'
김현우는 어디까지 자신을 막는 놈들만을 전부 박살 낼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게 딱히 제국민이 김현우에게 뭔가를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잘 생각했어. 처음부터 이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아? 다른 사치품들도 멀쩡하고 말이야."
김현우의 비아냥에 아클라스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고, 김현우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실의 구를 얻은 이상 8계층에 볼 일은 없으니까.
김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흠칫 떠는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은근슬쩍 김현우의 눈치를 슬쩍슬쩍 보는 아클라스의 모습에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아, 정말 혹시나 해서 말인데."
"……?"
"만약 나한테 추적자를 붙이거나 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다? 나는 꼭 당한 건 갚아주는 성격이라서, 내가 이 정도로 봐줬는데 또 덤비면, 대충 알지?"
김현우의 물음에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고, 한동안 그렇게 눈을 마주치던 김현우는 이내 황제의 시선을 내려간 걸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그렇게 가려던 중.
"아,"
김현우는 조금 전 자신이 진실의 구를 집어넣기 위해 꺼내 놓은 여행용 가방을 황제쪽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이건 니들 가져라."
"이, 이건?"
아클라스가 김현우를 바라보며 묻자, 그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맛있는 거."
"맛있는……?"
황제의 말이 전부 끝나기도 전에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근위병들이 있는 곳 사이를 지나갔고.
곧 김현우가 사라진 그곳에는 진실의 구를 빼앗긴 황제와, 그 옆에서 이게 잘 된 건지 안 된 건지 감을 못 잡고 있는 스윌로츠 공작.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둘의 눈치를 보고 있는 근위병들과-
"이건……."
-김현우가 하수분의 아공간에서 남는 칸이 없어 두고 간 거대란 여행용 식량가방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한동안 반 박살이 나 있는 황궁 안에서 슬슬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정리하기 시작 할 때쯤.
김현우는 한 번의 도약으로 황성을 벗어나 그가 어제 떨어졌던 '괴수의 숲'으로 몸을 움직이며 '맹인의 나침반'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화아아악!
맹인의 나침반을 사용하자 나침반에서 사용한 빛이 괴수의 숲을 향해 쏜살같이 나아가고, 김현우는 그 빛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역시,"
김현우는 어제, 아귀와 싸웠던 미궁의 입구 앞에서, 그를 인도해 주고 있던 빛이 갑작스레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화아아악!
맹인의 나침반을 한 번 더 흔들어 빛을 만들어봤으나, 여전히 하늘을 가리키는 나침반에 김현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어제 올 때 하늘에서 떨어졌으니까 당연히 입구가 하늘에 있다는 건 알았는데…….'
김현우는 짧게 혀를 차곤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주 푸르게 빛나는 하늘.
'……점프해서 닿으려나?'
김현우는 순간 그런 생각을 해봤으나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면 고작 점프로는 미궁의 입구에 닿지 못할 것 같았다.
"흐음,"
김현우가 그렇게 고민하기를 몇 분.
"아."
그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 여의봉(如意棒)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어제도 썼었는데…….'
아무래도 아티팩트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다 보니 계속 잊어버리고 있었다.
김현우는 몇 분 동안 입구를 어떻게 뛰어서 올라갈까 고민했던 스스로가 약간 바보 같아져 괜히 머리를 긁적이고는 주머니 안에서 여의봉을 꺼내들었다.
봉 사이사이에 작은 글씨로 도경(道經)이 새겨져 있는 여의봉(如意棒).
김현우는 맹인의 나침반을 한번 흔들어 보고 그 빛이 정확히 어느 쪽으로 날아가는지를 확인 한 뒤, 곧바로 여의봉의 머리 부분을 잡고 외쳤다.
"길어져라 여의!"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는 김현우의 몸.
김현우는 단 한순간에 지면이 멀어지고 주변의 풍경이 바뀌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이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치솟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뒤. 그곳에서 또 한번 나침반을 흔들었다.
또 한번 하늘로 치솟는 빛.
김현우는 여의봉을 타고 그 빛을 두 눈으로 쫓기 시작했고, 이내-
"!!"
맹인의 나침반에서 나온 빛이 어느 한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망설임 없이 여의봉을 멈추고 구름 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케륵! 케르르륵! 케륵!
김현우가 한창 줄어들고 있는 여의봉을 쥐고 미궁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를 환영해 주는 고블린들을 보며 자신이 9계층 미궁의 입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웃음을 짓곤-
"크게에에엑!"
빠아아악!
자신에게 달려드는 고블린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
"미친 새끼."
"칭찬으로, 받을게."
허수 공간 내에 있는 장원에서, 천마(天魔)는 또 한번 일어나는 김시현을 보며 감탄했다.
"슬슬 포기해도 될 것 같지 않나?"
"아직은 더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미 존댓말을 그만둔 김시현은 천마가 질린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망설임 없이 검을 쥐었다.
다시 한번 천마를 향해 쥐어진 김시현의 검.
그 모습에 천마는 인상을 찌푸리곤 생각했다.
'이제 보니 이 녀석은 그놈보다 더한 또라이로군.'
수천 번의 죽음 이후 또 한번 정신을 차리고 달려든 김시현은, 이제 그의 죽음으로 숫자를 세는 게 당연해질 정도로 많은 죽음을 겪었다.
죽고.
죽고.
또 죽는다.
달라지는 건 없다.
김현우처럼 압도적인 성취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성취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래, 그냥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그냥 죽고 있었다.
정말 미련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냥 죽기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발에 치여서 죽고 손바닥에 맞아 죽고, 검에 찔려죽고, 손가락 하나에 죽고, 얼굴이 터져 죽고, 몸이 박살 나 죽고…….
그 많은 죽음이 그의 육체를 몇 번이고 박살 냈건만-빠아아악!
"아직-! 껙!"
툭!
"흡! 끄악!"
빠직!
"흐아아악!"
뚜두둑-!
-그의 정신은 수천 번의 죽음을 겪고 아집만 남은 예전과는 다르게 멀쩡했다.
분명 수천 번 이상, 이미 '일만' 단위의 죽음을 겪었는데도, 그는 멀쩡하게 천마(天魔)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천마는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김시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거 아나?"
김시현이 고개를 돌리자, 천마는 말했다.
"김현우는 이미 네가 이 정도 죽었을 때쯤, 어느 정도 발전을 거듭해 나와 합을 겨룰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너는 어떻지?"
김시현은 말이 없었으나, 천마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발전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발전이 너무나도 더디다."
"……."
"네가 여기에 들어오고 나서 그만큼의 죽음을 겪고, 너는 무엇을 얻었지?"
천마의 물음, 역시 김시현의 대답은 없었고. 천마는 이야기를 이었다.
"네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너는 여기서 뒤졌을 뿐이다."
천마의 냉정한 말.
그에 김시현은 멍하니 천마를 바라봤다.
그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천마는 최후의 통첩을 하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한마디로, 너는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 말이다. 김현우처럼 발전을 거듭한 것도 아니고, 그저 죽기만 하며 아까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는 것이다."
천마의 말에 김시현의 고개가 숙어졌다.
그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김시현은 이곳에서 숱한 경험을 겪으며 발전했지만, 그 발전은 무척이나 더디고 느렸다.
그가 소모한 일만 번이 넘는 죽음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보상.
허나-
"그래서?"
"……뭐?"
"결국 발전하고 있다는 이야기 아니야?"
"……."
고개를 숙인 김시현은 어느덧 다시 검을 쥐었다.
"……내 말을 듣지 못한 거냐?"
"아니, 잘 들었는데?"
"그럼 왜?"
천마가 진심으로 이상하다는 듯 묻자 김시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결국 어찌됐든 발전하고 있다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너는 너무 성장이 더디-"
"한 십만 번 정도 죽으면 어떻게 비슷하게 갈 수 있지는 않을까?"
천마의 말을 끊고 말을 내뱉은 김시현을 보며 그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김시현을 바라봤다.
마치 예전에 자신을 찾아왔던 그 녀석과 같은 미소를 입가에 짓고 있는 김시현.
천마는 처음에는 멍한 표정으로 김시현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하-"
웃음을 지었다.
"……?"
갑작스러운 천마의 웃음에 김시현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고.
"그 또라이 새끼의 지인이 아니랄까 봐 그 행동마저도 판박이로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김시현을 바라보곤 말했다.
"네게 뇌령신공(雷令神功)은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 지금부터 배운다고 해도 네가 내 신공을 대성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넌 내가 볼 때 끈기 빼면 머저리인 녀석이니."
천마의 독설.
김시현은 뭐라 말하려 했으나 천마는 그런 김시현의 말을 씹고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뭐- 걱정하지 마라. 이 세상에는 너 같은 끈기밖에 없는 머저리에게 어울리는 무공도 분명히 있으니까."
천마의 말에 김시현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 이내 엇!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게 무공을 알려준다는 소리……?"
김시현의 물음에 천마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아니, 나는 네게 무공을 알려주진 않을 거다. 그 대신-"
"……?"
"나는 네게 기술을 하나 알려줄 거다."
"기술……?"
"그래."
김시현의 물음에 대답하며, 천마는 예전을 떠올렸다.
자신이 탑에 오르기도 전.
아니, 애초에 자신이 천마(天魔)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전, 만났던 한 남자의 기억을.
그 남자는 참으로 미련한 자였다.
하지만 그는 미련하기에 강했다.
"나는 네게-"
그렇기에-
"천명검(天明劍) 일식(一式)을 가르칠 거다."
-천마는 어딘가 모르게 그와 닮은 김시현에게 그의 초식을 가르치기로 했다.
# 143
143. 등반자를 잡았다고?(1)
호주를 주 무대로 삼고 활동하는 대형 길드인 '사우스' 길드.
-끼에에에에엑!-
아티팩트의 파밍을 위해 미궁 18계층에 들어선 그들은 현재 기묘한 상황을 보고 있었다.
"저게 도대체 뭐죠……?"
길드원의 멍한 물음, 그에 사우스 길드의 길드장이자 S등급 세계랭킹 23위라는 순위를 가지고 있는 남자 할리오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잘 모르겠군……."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지극히 기묘한 현상이었다.
-크에에에에엑!
몬스터가 길드 쪽으로 몰려온다.
물론, 그것은 기묘한 현상이 아니었다.
애초에 미궁에 진입할 때부터 층계를 이동할 때면 거의 모든 몬스터들은 미궁에 진입한 길드원들을 배제하기 위해 달려든다.
그렇기에 몬스터가 사우스 길드 쪽으로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할리오가, 아니- 사우스 길드원 전체가 이 상황을 기묘하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길드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몬스터 무리 때문이었다.
사우스 길드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몬스터들은 '레드 스킨'들이었다.
일반적으로 그린 스킨과는 다르게 조금 더 상위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흉포함이 그린스킨과는 남다르게 강하다.
거기에 덤으로 레드 트롤이나 레드 오우거는 일반적인 그린 스킨의 트롤, 오우거보다 몇 배 정도는 강하기에 상대하기도 굉장히 까다로운 몬스터들 중 하나였다.
분명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봐도 저건, 겁먹은 표정이지……?"
"네, 아마……."
할리오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리자 그 옆에 있는 길드원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기묘함을 느끼는 이유.
그것은 바로 수많은 레드 트롤들이 겁을 먹은 표정으로 그들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몬스터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할리오는 달려오는 몬스터를 막기 위해 대형 명령을 내리면서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사고를 이어나갔다.
그가 탑에서 빠져나와 본격적으로 헌터일을 시작한지도 7년 째.
'하지만 몬스터의 저런 모습을 본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그의 기억 속에 몬스터들은 이지를 상실하고 오로지 파괴를 일삼는 괴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할리오는 이 상황을 신기해하면서도 기이함을 느꼈다.
겁을 먹은 채로 그들의 주 무기인 거대한 몽둥이도 버려둔 채, 얼굴과 그 눈빛에는 확연한 공포의 눈빛을 띄우며 다가오는 트롤들을, 그는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마법사들은 캐스팅을 준비한다, 플랜은 C-1으로!"
허나 사고를 이어가는 중에도 할리오의 입은 끊임없이 길드원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고 길드원들도 그런 할리오의 말에 따라 대형을 맞추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무투계 헌터들이 앞으로 나와 진형을 맞추고, 그 뒤를 따라 마법계열 헌터와 원거리 계역 헌터가 기준을 맞춰 스킬을 준비한다.
그리고, 겁먹은 트롤들이 그들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공-!"
꽈아아앙!
-할리오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껙!
그것은 사우스 길드에 어느 정도 접근했던 트롤들이, 그 움직임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들에게로 달려오던 트롤들의 심장에, 길쭉한 무엇인가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할리오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도 전에-
"커져라, 여의-"
뿌득! 뿌드드득! 파드드드드득!!!!
트롤의 심장을 뚫었던 그것은 순식간에 그 몸집을 불려나가며 미궁의 입구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길드원들의 앞에 펼쳐지는 그로테스크한 광경.
트롤들의 몸이 산채로 뚜드득 뜯어지는 모습에 경악하는 것도 잠시, 달려오던 트롤들을 모조리 박살 내 버린 거대한 무엇인가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다시 크기를 줄이기 시작했고.
"?"
할리오는, 저 앞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이 미궁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추리닝을 입은 채 아까 전 보았던 봉을 만지작거리며 걸어오는 남자.
"어……?"
그는 김현우였다.
할리오의 멍한 탄성에 김현우는 시선을 돌리다 이내 할리오의 모습을 보며 놀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 뭐야?"
그와 함께 일어난 잠시간의 정적.
그 뒤, 김현우는 어쩌다 보니 미궁에서 만난 할리오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탑에 계속 있다가 올라가는 중이신겁니까?"
할리오의 정중한 말투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죠."
김현우의 심플한 대답에 그는 할리오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고인물이 이 미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는데…….'
할리오가 그 소식을 들은 지는 이제 2주가 훨씬 넘었기에 그는 분명히 김현우가 미궁에서 볼 일을 마치고 빠져나갔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있다고?'
할리오는 그의 차림새를 다시 바라보았다.
역시 아까와 달라진 게 없는 복장.
여전히 그는 검은색 추리닝을 입고, 그저 한쪽 손에 아까 전 그가 트롤을 사용할 때 잡았던 봉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추리닝이 좀 많이 더러워진 것만 빼면 도저히 이 상급 미궁 안에서 2주를 버틴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행색은 깨끗했다.
'그런데, 도대체 2주 동안 이 안에서 뭘 한 거지?'
할리오가 그에 대해 사고를 이어나갈 무렵.
"저기, 지금 몇 계층이에요?"
"아, 지금 이 기점이 18계층일겁니다."
할리오는 김현우의 물음에 생각을 끊고 대답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더 내려가실 거죠?"
"네, 저희는 23계층 이상까지는 내려갈 생각입니다."
"그럼 여기서 헤어지죠. 저는 이미 이 미궁에 볼일이 끝나서요."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더니 곧 가벼운 표정으로 인사를 한 채 그들을 지나치기 시작했고.
사우스 길드는 완전히 개박살이 난 트롤들의 시체와 자신들의 뒤를 스쳐 지나가는 김현우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과 별개로 김현우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맹인의 나침반을 흔들며 걷고 있었다.
'드디어 거의 다 와 가네.'
김현우가 다시 미궁에 진입하고 6일째.
처음 미궁에 들어갈 때는 8계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으나 진실의 구를 얻고 난 뒤.
그는 진실의 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통해 미궁 안에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확인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제야 침대에서 자겠구나.'
김현우는 이전까지 피곤하면 딱딱한 돌에 자빠져 잤던 것들을 포함해, 여러 가지로 불편했던 미궁행을 떠올리며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자기는 자야 하는데 딱딱해서 자기가 힘들었고, 음식을 먹기는 먹는데 너무 똑같은 것만 가방에 욱여넣다보니 금세 질렸다.
거기에 덤으로 이 미궁의 파란빛이 침침하다보니까 시력이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서 어떨 때는 맹인의 나침반을 계속 흔들어서 빛을 만들어내기도 했었다.
뭐, 그래도 굳이 괜찮았던 점을 억지로 뽑아보자면 끊임없이 몰려오는 몬스터들 덕분에 여의봉을 조금 더 익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도일까.
뭐, 그래 봤자 봉술을 익혔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저 여의봉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기는 했다.
……아무튼, 장점보다는 그 이외의 불편한 점들이 더 많았기에, 김현우는 9계층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굉장히 달가웠기에.
'빨리 가서 쉬자.'
이전보다도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미궁을 오르기 시작했다.
***
하남의 장원은 개판이었던 2주 전과 다르게 완벽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미령의 발차기 한 방에 폭삭 무너졌던 집들은 어느새 전부 멀쩡하게 재건되어 있었고, 하나린이 구덩이를 만들어냈던 바닥들도 깔끔하게 마감되어 있었다.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장원.
그 장원의 중심부에서, 김현우는 굉장히 오묘한 표정으로 한 아티팩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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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九尾狐)의 영기 구슬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강화 파생 흡수 방출 심화 교환 회복(약)
-정보 권한-
1800년 동안을 수련을 반복한 영물(靈物), 구미호(九尾狐)가 자신의 힘을 담아낸 구슬. 그 안에는 그녀가 줄곧 1800년을 모아온 영기를 보관하고 있다.
영물인 구미호는 도술을 수련하기 위해 자신의 영기를 배제해 놓는 도중에 영기 구슬을 만들게 되며, 이 영기구슬은 구미호가 모든 수행을 마치고 나면 각 개체의 반신이 된다.
그렇기에 구미호는 자신의 영기구슬을 잊어버리면 대부분의 힘을 잃어버리게 되며 각 개체는 영기 구슬을 목숨보다 소중히 한다.
구미호의 영기 구슬은 사용자가 굳이 시전 하지 않아도 몸에 이로운 보정을 걸어주고 추가적으로 구슬이 손상되지 않는 한 영구적인 반 회복능력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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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정확히 말하면, 김현우의 손에 들려 있는 영기구슬 앞에, 온몸이 무엇인가에 칭칭 감긴 채 처량한 표정으로 잡혀 있는 구미호(九尾狐)를 보았다.
"그러니까."
"예, 스승님."
"저게 등반자라 이거지?"
"네 사부님, 제가 직접 잡았-"
"어머, 사매님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분명 붙잡은 건 저 같은데……?"
"……."
"……."
찌릿.
김현우를 사이에 두고 벌써부터 서로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미령과 하나린을 보며 김현우는 멍한 표정으로 정수와 구미호를 바라봤다.
영롱한 보랏빛으로 빛나는 영기구슬.
그 앞에서 도대체 뭔지 모르는 검은 사슬에 온몸이 칭칭 묶여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구미호.
잔뜩 위축된 탓인지 숙여져 있는 귀와 푹 죽어 있는 아홉 개의 꼬리가 굉장히 특징적이었다.
"……어떻게 잡았어?"
"그러니까!"
"제가!"
김현우의 물음에, 서로를 째려보고 있던 미령과 하나린이 동시에 말했고,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미령이 말해봐. 등반자를 만나게 된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김현우의 말에 하나린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미령은 승자의 미소를 지은 채로 김현우가 없을 때 벌어졌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한동안 미령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국제 헌터협회에서 미리 등반자가 나타난 걸 알아채고 도움 요청을 보냈고, 너희 둘이 가서 등반자를 잡았다?"
"예, 그 와중에서 조금 피해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
미령의 말에 김현우는 간만에 잡아보는 스마트폰을 조작해 인터넷을 켰고, 검색을 하자마자 나오는 뉴스를 헤드라인을 읽어 나갔다.
[패룡, 말레이시아에서 행패?]
[패룡과 미궁 앞에서 싸움을 벌였던 헌터, '암중비약'으로 밝혀져]
[패도길드中
"그건 어디까지나 등반자를 잡기 위한 조치. 못 믿겠다면 길드 앞으로 와라, 물론 아무 일도 없을 것.]
"……."
뉴스의 헤드라인만 읽어도 말레이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김현우는 스마트폰을 끄고 그들을 돌아봤다.
"……."
"……."
김현우가 돌아보자 슬쩍 시선을 돌리는 그녀들.
"쩝……."
김현우는 그녀들에게 뭐라고 말하려다 이내 입맛을 다시며 말을 줄였다.
'뭐, 결국 별 피해 없었으면 됐지…….'
그렇게 생각하며 괜히 복잡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를 넘겨버린 김현우는 이내 물었다.
"그래서,"
"예."
"쟤는 왜 살려뒀어?"
"아, 그건-"
김현우의 물음에 하나린이 곧바로 입을 열며 대답하려 하자.
"제발 살려주세요!!!"
그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구미호는 불현듯 시선을 올리고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 144
144. 등반자를 잡았다고?(2)
"제발! 살려주세요! 저 진짜 아무런 힘도 없다니까요!? 영기구슬 없으면 저 진짜 아무것도 못해요!"
"……."
"진짜요! 정말이에요! 저 그냥 지금은 그냥 꼬리 아홉 개에다가 그냥 도술만 조금 쓸 줄 아는 여우라고요!"
"……."
"제발! 살려주세요!"
"……."
"살─려───줘──!!!!!"
"……."
생존의 욕구가 눈앞까지 훅훅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거?"
"죽일까요?"
"살려주세요! 저 잘해요!"
"지금 당장 죽일게요."
구미호의 말에 순식간에 몸을 돌린 미령과 하나린이 구미호를 향해 다가가려 했으나 김현우는 그 둘을 말리곤 그녀를 바라봤다.
애처로운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는 구미호.
그 생존의 욕구가 명확하게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김현우는 또 한번 물었다.
"그래서, 쟤는 왜 살려둔 거냐니까?"
"살──려─!!"
"한 번 더 소리 지르면 당장 여우탕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한 번만 더 소리 질러라?"
"히익!"
김현우의 말에 소름이 끼친다는 듯 깜짝 놀란 구미호는 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아래로 수그렸고, 그는 하나린을 보며 대답을 촉구했다.
그 모습에 하나린은 대답했다.
"사저가 죽이는 걸 막았습니다."
"무슨 소리! 네가 막았잖아!"
"어머? 분명히 제가 죽이려고 했는데 사저가 그 발로 저를 차버리지 않았나요?"
"그전 이야기는 왜 안 하지? 이 개─ 아니, 분명 너는 그전에 나한테 언령을 걸었을 텐데?"
"그건 그냥 사저님 편하게 쉬시라고 한 거였죠."
시작된 말싸움.
김현우는 그 대화를 듣고 짧게 추리한 뒤에 답했다.
"그러니까, 둘이서 자기가 먼저 죽이겠다고 하다 결국 못 죽인 거야?"
"……."
"……."
또 다시 슬쩍 김현우의 눈을 피하는 그 둘.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두 명을 바라보았다.
'얘들 분명히…… 나름 좀 대단한 애들이었던 것 같은데…….'
미령은 중국 전체를 손아귀에 집어넣은 패도 길드의 길드장이었고.
하나린은 멕시코시티로 심시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세계의 '뒤'에 깊이 관여되어 있는 조직의 보스였다.
"너희들은 어째 하는 짓이 어린애 같냐……."
김현우의 탄식에 그녀들은 면목이 없는 듯 푹 고개를 숙였고, 김현우는 그 둘의 모습을 번갈아 본 뒤 이내 구미호를 봤다.
생존 욕구가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의 바라보는 구미호를 보며 김현우는 웃음을 지었다.
그 둘이 서로 싸우다가 등반자를 죽이지 않았다는 탄식 어린 사실과는 별개로 등반자가 생존 욕구가 가득한 채 살아 있다는 것은-
'정보를 뽑아먹을 수 있다는 소리니까.'
'물론 지금에 와서는 아브에게도 나름대로 이런저런 쓸모 있는 정보를 얻을 수는 있긴 하지만.'
등반자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또 다를 수도 있으니까.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살고 싶냐?"
그의 물음에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구미호.
그에 김현우는 입가의 미소를 진하게 지으며 물었다.
"그럼 정보 좀 불어봐."
"……네?"
"정보 말이야 정보. 몰라?"
"아니, 그러니까 알기는 아는데……."
"아는데?"
"……무슨 정보를 말해야……?"
슬슬 김현우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구미호의 모습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탑에 관한 거라면 전부, 네가 알고 있는 건 전부 말해봐."
"그, 탑에 대한 정보라고 하시면 너무 방대해서 정확히 어느 것을 말해야 할지……."
김현우의 말에 구미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듯 말을 우물거리자 김현우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왜 대답하기 싫어? 그럼 죽어야지."
"아니, 아니아니아니아니, 대답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네! 네! 알겠습니다 그냥 제가 아는 거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씀드릴게요! 네! 전부요! 전부 말할게요!"
구미호의 비명 어린 긍정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그는 구미호에게서 그녀가 알고 있는 탑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입 밖으로 내뱉는 이야기 중에는 김현우가 이미 아는 내용도 있었으나 그가 모르고 있던 다른 정보들도 있었다.
"이 정도가…… 우선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의 전부인데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구미호는 한참이나 입을 열다 곧 입을 다물었고, 김현우는 물었다.
"그걸로 정말 끝이야?"
"정말이에요! 더 아는 거 없어요!"
"……그래?"
"네! 정말 이게 끝이에요!"
진실이라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구미호를 본 김현우는 이내 그녀에게서 들은 내용을 정리했다.
'대략 알고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얻을 수 있었던 정보는 '좌(座)'에 대해서인가.'
그 밖에 다른 이야기도 듣긴 했지만, 김현우가 명확하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등반자들이 탑을 오르는 정확한 이유.
물론 그들이 좌(座)를 위해 탑을 오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허나 그들이 어째서 좌(座)를 얻으려 하는지, 김현우는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뭔가가 있겠구나, 하고 넘어갔을 뿐.
김현우는 물었다.
"네 말대로라면 등반자들이 탑을 오르는 이유는, 업적을 받기 위해서라는 말이야?"
"네! 맞아요. 탑에 올라 주인의 인정을 받고 좌(座)에 앉은 이들은 그 무엇이던, 하나의 업적을 손에 넣을 수 있거든요."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물었다.
"그 하나의 업적이라는 건 정확히 어떤 건데?"
"어……그러니까. 제가 아까 설명해 드렸잖아요? 이 탑의 '등반자'들은 모두 업적을 인정받음으로써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그래 들었지."
그건 이미 예전, 천마에게 들어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해석해서 말씀드리면 탑에 오른 등반자들은 무엇이던 원하는 힘을 하나 가질 수 있다 이거죠."
"힘을 하나 얻을 수 있다……라."
'알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니 좀 미묘하게 이해가 안 되네.'
우선 확실하게 이해는 했다.
이 탑에서 탑을 오르는 등반자들은 기본적으로 '업적'이 '힘'인 녀석들이고, 그들이 탑을 오르는 이유도 결국 '업적'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다만 거기에서 김현우가 이해하지 못한 건.
"굳이?"
"예……?"
"아니, 그러니까 말 그대로의 질문이야. 왜 굳이 업적, 그러니까 힘 하나를 얻자고 그 개고생을 하면서 탑을 오르는 건데?"
김현우의 물음에 구미호는 곧바로 답했다.
"제가 쉽게 표현해서 살짝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으신 것 같은데……'업적'은 그렇게 단순한 힘이 아니에요."
"뭐?"
"업적은 사기적인 소원과도 같은 거라고 할까…… 불가능을 이뤄주는……?"
그녀는 약간 예로 들 만한 것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 하는 느낌으로 박수를 치고 입을 열었다.
"고블린은 아시죠?"
"뭐, 알지."
고블린은 그린스킨 중에서도 제일 약한 하급 몬스터다.
F등급 헌터 혼자서 20마리는 넘는 고블린을 혼자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한 몬스터.
구미호는 입을 열었다.
"만약, 정말로 만약에 '고블린'이 탑을 올라 좌(座)에 앉아 '검신(劍神)'의 업적을 얻게 되면-"
"검신(劍神)의 능력을 쓸 수 있다?"
김현우의 말에 구미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정도가 아니에요."
"그럼?"
"검신(劍神)의 업적을 가져온다는 것은 그의 모든 것을 가져온다는 것과 다름없어요."
구미호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검신의 능력부터 시작해서, 그의 태생, 그의 생각, 그의 습관, 그가 걸어온 모든 기억들과 모든 인연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받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그 고블린은 그저 '힘'을 얻은 고블린이 아닌, 진짜 검신(劍神)이 되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확실히 그렇게 듣고 보니. '업적'을 얻는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김현우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천마의 힘을 그냥 업적을 통해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다면…….'
김현우는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김현우는 천마의 뇌령신공을 깨닫기까지 약 100년이라는 시간을 그 허수 공간 안에서 보냈다.
그냥 보내기만 했는가?
김현우는 그곳에서 계속해서 죽었다.
죽고.
죽고.
또 죽었다.
일만 번이 넘는 끔찍한 죽음 속에서, 김현우는 겨우 그의 발자취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천마의 업적을 얻을 수 있다면?
김현우의 100년이라는 시간을 쏟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업적을 받는 그 행위 하나만으로, 업적을 받은 누군가는 천마의 모든 것을 받을 테니까.
그의 무공부터 시작해서, 그가 걸어왔던 모든 발자취와 기억들을.
오히려 김현우가 100년을 투자해 따라잡은 것보다도 훨씬 완벽하고도 선명하게.
김현우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와 함께 침묵이 시작되었다.
구미호는 슬쩍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어-기."
"왜?"
"그래서…… 저는 그, 사실대로 전부 말했는데……."
"그래서?"
"그…… 저 좀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제는 어색하게 눈치를 보며 미소를 흘리는 구미호.
김현우는 그제야 떠올렸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그랬지?"
그의 새삼스러운 감탄사에 구미호는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고는 최대한 비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저는 분명히 다 말했거든요……? 제발…… 살려주세요. 저 나쁜 짓 하나도 안했다니까요……."
애처롭게 중얼거리는 구미호를 보며, 김현우는 어쩔까 하는 고민의 제스쳐를 취하다-
"우선은 보류."
"네……?"
"우선은 보류라고,"
김현우의 어중간한 대답에 구미호는 실망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으나.
"왜? 그냥 편하게 죽여줄까?"
"아뇨! 너무 좋아요! 와! 살아 있는 건 아름다워!"
김현우의 살벌한 한마디에 눈물을 머금으며 웃음을 지었다.
***
"그래?"
거대한 공동.
몇 십 명이라도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는 형체 없는 자는 남자의 말을 듣고 대답했다.
"예. 아마 곧 그가 진실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검은색 후드를 쓴 남자의 대답.
남자는 심각한 듯 얼굴을 굳히고 있었으나 형체 없는 자는 오히려 목소리에 여유를 담아 말했다.
"흐음, 그것 참 흥미롭군."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엇이 말인가?"
"……이레귤러에 대해서입니다. 아마 이대로 가면 그는 정말 탑을 오르게 될 겁니다."
남자의 말에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가죽 의자를 툭툭 치며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것에 문제가 있는가?"
"예? 하지만 등반자가 아닌 이레귤러가 탑을 올라봤자 저희는-"
남자는 그렇게 입을 열다 문득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알면 됐네. 그보다 뭐…… 그 의견도 딱히 이상한 의견은 아니야. 이레귤러가 올라와 봤자 딱히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니……."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사실 원래라면 그 '이레귤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보고 싶었는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역시 어쩔 수 없지.
형체 없는 자는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곤-
"한 명."
"예."
"정복자를 내려 보내라."
이내 남자에게, 그렇게 명령했다.
# 145
145. 등반자를 잡았다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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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구
등급: Ss
보정: 없음
스킬: 권한 접속
다음 사용 기간까지 남은 시간: 21일 8시간 19분 31초
-정보 권한-
-권한 부족-의 진리를 깨달은 마법사가 시스템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 부족-을 알아차리고 -권한 부족- 몰래 만들어낸 아티팩트.
진실의 구는 사용자의 마력을 대가로 사용자가 알고자 하는 진실을 그 무엇이던 알려준다. 허나 -권한 부족- 때문에 진실의 구는 사용자가 묻는 진실의 등급에 따라 재사용 대기시간이 결정된다.
재사용 대기 기간은 등급에 따라 최소 100일부터 3200년까지 정해져 있으며, 이 재사용 대기시간은 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줄이거나 늘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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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이게 제가 말한 진실의 구에요."
시스템 룸.
아브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진실의 구를 김현우에게 넘겨주었다.
"이걸로 정말 알 수 있는 거야?"
"네. 이제 재사용 대기시간이 지나고 나면 진실의 구를 이용해 '튜토리얼 탑'을 제작한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거예요."
"……근데 생각해 보니까 이러면 제작자에 관해서 물어볼 필요가 없는데?"
"네?"
아브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김현우를 보며 묻자 그는 진실의 고를 공처럼 들었다 놨다 하며 말했다.
"아니, 내가 결국 찾는 건 나를 그 튜토리얼 탑에 가둔 놈이었으니까."
"아……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김현우가 그동안 튜토리얼 탑을 만든 사람을 찾았던 것은 자신을 그 탑에 가뒀던 사람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물론, 왜 그딴 쓰레기 같은 탑을 만들었냐고 몇 대 때려주는 건 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실의 구로 그냥 자신을 탑에 가둔 사람을 알려달라고 한다면?
딱히 제작자에 대해서 알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김현우는 진실의 구를 하수분의 주머니에 넣고는 말했다.
"아, 그리고. 물어볼 게 있는데."
"네? 물어볼 거요?"
아브의 되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 거린 뒤 말했다.
"혹시 9계층에 올라온 등반자를 살려둬도 되나?"
"……네?"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슬쩍 시간차를 두고 대답했고, 그에 김현우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김현우가 8-35계층에 갔다 왔을 때 9계층에서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그리고 아브는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다가도 어색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등반자를 잡았다 이거죠?"
"그렇지."
"……서로 죽이려다가 못 죽여서?"
"……."
"……."
아브는 황당한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이내 말했다.
"아니, 뭐 저도 등반자가 왔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응? 어떻게?"
"정보권한이 올라가면서 9계층 쪽의 마력을 어느 정도 탐지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저번에도 제가 멕시코 쪽에 힘이 느껴진다고 말했잖아요?"
"아,"
"게다가 그것도 그거고-"
아브는 손가락으로 컴퓨터를 가르쳤다.
"저것도 있다 보니까, 대충 9계층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었어요."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말했다.
"뭐야, 그럼 등반자가 살아 있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게…… 좀 애매하게는?"
"애매하게?"
"네, 분명 처음에는 등반자의 힘이 나름 저한테 느껴질 정도로 컸는데, 싸움이 끝난 뒤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거든요."
"아……."
"그때는 이해가 안 됐는데, 설명을 듣고 나니까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아브는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그 등반자는 이미 자신의 힘의 근원을- 그러니까 영기구슬을 빼앗긴 상태라 이거죠?"
"그렇지. 거의 힘을 못 쓴다고 하던데?"
"그럼 아마 정말로 그 힘이 약해졌을 거예요. 실제로 저한테 걸리는 마력도 그렇게 짙지 않고 미묘할 정도로 약하니까요."
"그래? 그럼 살려둬도 되는 건가?"
"음, 사실 살려둬도 별문제는 없어요. 애초에 제가 느꼈던 마력등급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아마 하위에서 강해봤자 중위정도일거고. 그나마도 원천을 빼앗겼으니……."
아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남아 있는 힘은 턱없이 적을 테니까요. 그냥 정보 셔틀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정보 셔틀?"
"네,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9계층까지 올라왔으면 이것저것 쓸 만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브는 추가로 이어 말했다.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낙인이라도 박아 놓을까요?"
"낙인?"
"네, 저도 지금 와서야 알았는데 9계층에는 '합치면' 쓸 만한 아티팩트들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합치면……? 아, 저번에 그 맹인의 나침반처럼?"
"네, 그것처럼 합치면 쓸 만한 것들이 꽤 많아요."
"네가 말한 낙인이라는 것도 그 합칠 수 있는 아티팩트중에 하나야?"
"네. 낙인 같은 경우는 정보 권한으로 알아봤을 때…… 그냥 한마디로 목줄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대충 알 만하네."
김현우는 그렇게 끄덕거리곤 말했다.
"그래서, 또 그걸 만들려면 뭘 구해 와야 하는데?"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낙인' 아티팩트를 만들기 위한 재료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대충 재료는 다섯 가지 정도 돼요."
"다섯 가지 정도면 더럽게 많은 거 아니야?"
김현우가 살짝 불만이라는 투로 말하자 아브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래도 아마 다섯 가지 재료를 모으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왜?"
"그 아티팩트들은 모두 한 사람이 들고 있거든요."
아브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이내 컴퓨터로 다가가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이 사람이에요!"
김현우는 굉장히 익숙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얘야?"
"네, '아탈렉 포트'라는 몬타나 주의원인데, 이 사람이 필요한 재료 다섯 가지를 모두 들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번처럼 굳이 여러 사람과 협상할 필요는 없다 이거죠."
"그래, 그건 편해서 좋네,"
김현우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러던 중.
"응?"
그 앞에 떠오르는 알리미 로그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얘들, 요즘 좀 많이 올라오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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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9계층의 통로로 새로운 '등반자'가 등반을 시작합니다.
위치: 이탈리아 베니스
남은 시간 [ [01]: 12: 7: 18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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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툴툴거렸다.
***
드넓은 장원 안에서.
천마(天魔)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김시현을 보았다.
그는 외견으로 봤을 때는 이 장원에 들어왔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조금 달라진거라면 김현우와 달리 혹시 몰라 입고 왔던 방어구들이 전부 박살 나서 지금은 천마전 안에 있는 무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허나.
"이제야 조금 쓸 만하게 변했군."
천마(天魔)의 입에서 나온 보기 드문 칭찬의 말에 김시현은 고개를 숙였다.
"모두 스승님 덕분입니다."
"지랄, 항상 말했듯이 나는 너 같이 약한 제자를 둘 생각은 없다."
천마의 욕설 섞인 말에도 김시현은 그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웃을 뿐이었고, 천마(天魔)는 그런 김시현을 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더니 말했다.
"헛소리 하지 말고 배울 거 다 배웠으면 꺼져라, 더 이상 네 녀석에게 알려줄 기술 같은 건 없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몸을 돌리는 천마.
허나 그럼에도 김시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천마전의 목제의자 쪽으로 걸어가는 천마를 바라보았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가르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고 있었기에.
김시현의 죽음으로 시간을 세는 것을 그만둔 뒤.
천마는 그에게 하나의 초식을 알려주었다.
무공(武功)이 아닌 단 하나의 초식.
천마는 쉬지 않았다.
김시현도 마찬가지였다.
천마는 끊임없이 김시현에게 그 단 하나의 초식을 사용하는데 필요한 구결과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고-김시현은 쉼 없이 그런 천마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의 초식을 연마했다.
그리고 그 초식의 기틀이 잡힌 그 순간부터.
몇 년, 몇 십 년이 지났는지도 모를 그 긴 시간 동안, 김시현은 끊임없이 그 초식을 반복했다.
베고.
베고.
베고.
베고.
무한정으로 그 한 동작만을 반복했다.
장원의 한가운데에서.
느긋하게 떨어지는 햇살을 맞고.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그 초식만을 반복했다.
어떨 때는 천마에게 꾸지람과 비슷한 깨달음을 얻어가며.
또 어떨 때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가며.
그는 베었다.
계속해서.
그리고 그렇게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지나-
"빨리 꺼져라, 그 또라이 새끼와 네 녀석 때문에 내 잠을 두 번이나 방해받았다."
그의 핀잔에 김시현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다 몸을 돌려 장원의 문쪽으로 움직였다.
장원의 문쪽으로 움직이자 나오는 것은 그로서도 정말 오랜만에 보는 로그.
김시현은 로그의 Y버튼을 누르기 전, 시선을 돌려 천마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담백한 감사 인사.
천마(天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김시현은 망설임 없이 Y버튼을 눌렀다.
그와 함께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김시현.
천마는 김시현이 사라진 뒤에야 그가 조금 전 서 있었던 문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첫째보다는 둘째가 예의 면에서는 낫군."
그렇게 아무도 없는 허수 공간에서 천마가 중얼거릴 때쯤.
"네가 첫 제물이냐?"
허수 공간을 빠져나와 9계층으로 이동한 김시현은, 눈앞에 서 있는 기이한 형태의 괴물을 바라봤다.
검붉은 피부.
양 이마 위에는 붉은 뿔이 나 있고, 그 아래의 송곳니는 마치 드라큘라처럼 길게 자라 있었다.
허리에 두르고 있는 호피무늬와 그가 어깨에 걸치고 있는 자신의 몸만 한 뼈방망이, 그의 터질 것 같은 근육은 괴물의 야만성을 더해주었고.
곧 그는 키히히힛 이라는 괴악한 웃음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뭐! 너무 나쁘게는 생각하지 마라! 너는 9계층에서 처음 이 시즉오니에게 죽임을 당하는 거니까 말이다!"
괴물은 그리 말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괴물의 마력.
그것은 김시현이 이전에 '등반자'를 만났을 때 느꼈던 마력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보다 더 심한 압박감을 주는 패도적인 마력.
허나-
김시현은 그저 아무런 감상 없이 검을 쥐었다.
"발악이라도 할 생각이냐?"
오니의 물음에도 그는 그저 자세를 잡았다.
그가 몇 만, 몇 십만 번을 반복했던 그 자세를-그 모습에 오니의 눈가가 꿈틀거리고, 이내 어깨에 쥐고 있던 방망이를 김시현에게로 쳐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김시현은 천마(天魔)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가 일초식을 거의 완성할 때쯤, 천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태생부터 무(武)에는 제대로 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던 남자.
그렇기에 사문에서도 버림받았고, 무(武)를 계속해서 배울 수 있는 입장도 아니게 되었으나 그는 그만두지 않았다.
스스로 무술에는 아무런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배운 무공을 연마했다.
아니, 그것은 무공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것이었다.
왜냐면 그는 자신이 배웠던 무공의 초식 중에서도 단 하나를 연습했을 뿐이었으니까.
50년이 넘는 그 세월 동안, 그는 무공의 다른 초식들을 배운 적이 없기에 오로지 그것만을 수련했다.
경신법도 배우지 않았다.
소주천을 하는 법도 몰랐다.
무공에 대해서는 그냥 무지하다고 보는 게 옳을 정도로, 그의 지식은 형편없었다.
그렇기에 그것만을 수련했다.
자신이 사문에서 버려지기 직전, 그들에게서 배운 일 초식을.
그리고.
"천명검(天明劍) 일식(一式)"
그는-
"극참(極斬)-"
무림에서 일검무적(一劍無敵)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 146
146. 등반자를 잡았다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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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등반자를 성공적으로 처지했습니다!
위치: 이탈리아 베니스
[등반자 '시즉오니' '우귀'를 잡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정보 권한의 실적이 누적됩니다!]
[현재 정보권한은 중상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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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뭐야?"
김현우는 미궁이 있는 쪽으로 향해 가던 중, 갑작스레 떠오른 로그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죽었다고……?"
김현우는 몇 번이고 떠오른 로그를 다시 읽었지만, 로그에서 말해주고 있는 내용은 등반자가 죽었다는 내용이 확실했다.
혹시 숨어 있던 다른 등반자가 아다리 맞게 죽었나 싶어 위치를 확인해 봤으나, 위치도 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김현우가 가기 전에 누군가가 등반자를 죽였다 이 말이었다.
그것도 아직 출현시간이 20분이 남은 등반자를.
'미령이나 하나린은 아닐 텐데?'
그도 그럴 게 미령과 하나린과는 조금 전 헤어진 데다 그녀들에게는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을 맡겨 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김현우가 싸움을 하는 데 있어서 굳이 제자들을 데려갈 필요는 없었으니까.
'누구지?'
그렇기에 김현우는 이상함을 느끼며 미궁이 있는 쪽을 향해 몸을 움직였고,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미궁의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 형?"
"뭐야? 너 언제 나왔냐?"
-그곳에서, 김현우는 상단과 하단이 분리된 채 죽어 있는 오니와 그런 오니의 시체 옆에서 각종 매스컴 단체에게 둘러싸여 있는 김시현을 볼 수 있었다.
그 뒤로 잠시.
몰려 있는 취재진들에게 인터뷰는 다음으로 미루겠다고 말하며 급히 자리를 뜬 김현우와 김시현은 이탈리아에 박혀 있는 마법진을 이용해 한국으로 돌아 올 수 있었고.
"그래서?"
"죽었죠."
"……몇 번?"
"……모르겠는데요? 뭐, 근데 아무리 못해도 일만 번 정도는 죽지 않았을까요?"
김현우는 그에게 허수 공간에서 있었던 일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일만 번 죽은 뒤부터는 천마가 안 죽이고 무술수련을 시켜줬다고?"
"네. 오히려 죽는 것보다 무술수련을 했던 게 좀 더 길었을 걸요?"
"이런 씨발……."
"왜요?"
김시현이 묻자 김현우는 천마를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계속 뒤지면서 배웠거든……."
"아……."
"이 새끼 사람 차별하나……!"
김현우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래서, 너도 뇌령신공 배웠냐?"
"아뇨, 저는 못 배웠어요."
"못 배웠다고?"
"네, 저는 애초에 너무 차이가 나서 못 배울 거라던데요?"
"……차이가 나서?"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천마 말로는 몇 합이라도 겨룰 수 있어야 가르칠 수 있을 텐데, 저는 일반 번 죽을 때까지 일합을 못 버텼거든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으나 김시현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래서 저는 그 대신 초식을 하나 배웠어요."
"……초식? 무공이 아니라?"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묻자 김시현은 답했다.
"뭐, 엄연히 따지면 무공(武功)이 맞기는 해요. 다만 저는 좀 특이하게 배운 거라 일반적인 무공이랑은 좀 달라요."
"……뭐가 다른데?"
"우선 무공구결이 없어요."
"……엥?"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구결이 없다고?"
"네."
"아니, 그게 무공이야?"
"그래서…… 무공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는 거죠. 제가 천마에게 배운 건 초식 하나뿐이거든요."
"……뭐? 초식 하나?"
"네."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다 이내 그의 얼굴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뭐, 네가 그걸로 만족한다면야 그걸로 됐지."
"저는 이걸로 만족해요."
김시현의 대답과 함께 찾아온 짧은 침묵.
김현우는 다시 물었다.
"아, 그리고 내가 천마한테 전해주라는 말은 잘 전해줬냐?"
"아."
김현우의 물음에 짧게 탄성을 터트린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뭐, 처음부터 말하지는 못했는데 결국 그 말을 전해주기는 했어요. 그리고 답변도 듣고 왔고요."
"뭐라 그러디?"
김현우가 묘한 기대감이 어린 표정으로 김시현을 보자 그는 슬쩍 눈치를 보는 듯하다 말했다.
"그……."
"그?"
"좆까래요."
"……뭐?"
"좆까라고……."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좆까라고?"
"네."
"진짜 그렇게 말했어?"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하면서 확실하게 전해주라고 하더라고요."
"이런 개새-"
김현우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간의 침묵.
"그래도."
"……뭐?"
"제가 처음에 형 말 전하니까, 뭔가 좀 부끄러워하던 눈치던데요? 아마 괜히 쑥스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쑥스러워?"
"네. 괜히 얼굴 슥 돌리고 하던데."
"씨발, 뭔 츤데레야?"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고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래 뭐…… 말 전해줬으니까 됐다. 그 양반 인성이 그런 건 원래 알고 있었으니까."
김현우는 김시현의 뒷말을 그냥 못 들은 거로 치부하려고 했지만, 김시현은 분명 천명검을 배우고 돌아가기 직전 김현우의 말을 전했을 때 보였던 천마의 반응을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억지로 막고 있었지.'
나중에는 입꼬리를 보이지 않으려고 슬쩍 고개를 돌리는 모습도 보였으나, 김시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김현우도 내심 알아채고는 있는 것 같았기에.
"그래서 형."
"응?"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저건 뭐에요?"
"……저거?"
김현우는 김시현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그곳에는 그녀가 있었다.
"……."
검은 사슬에 온몸을 칭칭 감은 구미호가.
"……아, 저거?"
"네."
"등반자야."
"……아하……등반자요?"
"그래."
"그렇구나……."
김시현은 멍하니 답하며 내궁 한쪽에 묶여 있는 구미호를 바라보며 시선을 돌리려다-
"응? 등반자라고요?"
"응."
이내 이상하다는 듯 김현우를 보며 물었다.
김현우의 긍장에 김시현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등반자와 김현우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니,"
"왜?"
"그럼, 죽여야 되는 거 아니에요? 등반자라면서요?"
"살───려───ㅈ!!!"
"여우탕."
"……."
김시현이 묻자마자 비명을 지르려는 구미호를 단 한마디로 재운 김현우는 이내 말했다.
"그냥 등반자를 애완동물로 키워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참에 하나 잡은…… 건, 농담이고 정보셔틀."
"……정보 셔틀이요?"
"그래, 알고 있는 게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으니까 두고두고 써먹으려고."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검은 사슬에 칭칭 묶여 있는 구미호를 바라봤다.
흑발의 머리칼과 같은 흑색 귀가 축 쳐져 있고, 검은 꼬리도 마찬가지로 축 처져 있는 모습.
"아니, 그래도…… 그냥 저렇게 방치하면 안 되지 않아요?"
"힘은 거진 다 잃었어. 게다가 당연히 그냥 저대로 방치해 두지는 않을 거야."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쿵!
"?"
궁의 문 쪽으로부터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승님 다녀왔습니다!"
"사부님! 다녀왔어요!"
"……왔냐."
김현우는 가방 하나를 서로의 손에 쥔 채 열심히 달려온 미령와 하나린을 보며 이제는 별 감흠도 없다는 듯 입을 열었고.
"……응? 사부님?"
김시현은 미령의 옆에 있는 여성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듣고는 김현우를 쳐다봤다.
김시현이 그를 쳐다보자, 김현우는 잠깐 무엇인가를 떠올리는 듯하더니 이내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너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구나?"
생각해 보니 김시현이 악천의 원천을 이용해 탑 안에 들어갔을 때는 김현우아 하나린을 만나기 직전이다 보니 김시현은 하나린을 본 적이 없었다.
김현우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고.
"그래서, 쟤는 누구…….?"
김현우는 곧바로 답했다.
"쟤는 내 두 번째 제자야."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김시현은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
그곳은 음울한 곳이었다.
바닥은 검은색의 구름 바닥으로 되어 있고, 검은 하늘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비가 내리고 있는 팔각정 안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여유롭고 유유자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
그는 요사스러운 보랏빛 장포를 몸에 걸친 채 자신이 들고 있는 거대한 봉을 휘적거리며 앉아 있었다.
그 남자는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감상하듯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고 있다, 이내 불현듯 자신의 손가락을 부딪쳤다.
딱-
그러자. 하늘에서 내리고 있던 빗줄기가 놀라운 속도로 걷히기 시작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쉴 새 없이 내리꽂히고 있던 비는 금세 사라졌으며, 어두웠던 구름은 금세 맑은 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지?"
봉을 제대로 쥔 그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 나타난 후드를 쓴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검은 후드를 써 그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남자는 이내 말했다.
"이곳에서는 업적의 사용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드렸을 텐데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는 정당하게 탑을 올라 그 보상으로 '청룡(靑龍)'의 업적을 받았지 않나?"
"……."
그의 여유로운 반박에 남자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지그시 쳐다보았으나 이내 남자는 말했다.
"지금부터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
"예."
"내가 왜?"
장포를 입은 남자의 삐딱한 태도 덕분에 한 번 더 도래한 침묵.
허나 그것도 잠시. 곧 후드를 쓴 남자는 이내 개의치 않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9계층에 내려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9계층?"
"예."
"거기는 또 왜?"
남자의 대답에, 후드를 쓰고 있는 남자는 대답했다.
"거기서 당신이 직접 처리해야 할 이레귤러가 생겼습니다."
"……이레귤러?"
"예."
"굳이 지금 처리해야 하는 녀석이야?"
팔각정에 앉아 있는 남자는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으나, 후드를 쓴 그는 별다른 음성의 고저 없이 계속해서 말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아마 당신이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처리한다면, 그분께서도 당신에게 또 하나, 업적을 수여한다고 하시더군요."
후드를 입은 남자의 말에 장포를 두른 남자의 눈이 일순 휘둥그레 커졌다.
"정말로?"
"그분께서 직접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남자의 대답에, 그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히죽-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이내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꽝!
그와 함께,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방에서 내리치기 시작한 번개는 검은 구름을 뚫으며 공간을 없애기 시작했고, 그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좀 전해 줘,"
입가에 기분 나쁜 웃음을 지은 남자.
한때는 도사(導師)라 불렸고-
-또 신선(劍仙)이라 불릴 수도 있었으나 업(業)에 물들어 괴선(怪仙)이 되어버린 그 남자는.
"금방 처리하고 올라가겠다고."
자신의 애검인 봉(棒)을 쥐고 번개가 내리쳐 뚫린 구멍을 향해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런 마선이 내려간 자리를, 후드를 쓴 남자는 지켜보다 몸을 돌려 사라졌고-이내 그 공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 147
147. 알려줄 거면 다 알려줘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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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구
등급: SS
보정: 없음
스킬: 권한 접속
다음 사용 기간까지 남은 시간: 0일 0시간 5분 31초
-정보 권한-
-권한 부족-의 진리를 깨달은 마법사가 시스템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 부족-을 알아차리고 -권한 부족- 몰래 만들어낸 아티팩트.
진실의 구는 사용자의 마력을 대가로 사용자가 알고자 하는 진실을 그 무엇이던 알려준다. 허나 -권한 부족- 때문에 진실의 구는 사용자가 묻는 진실의 등급에 따라 재사용 대기시간이 결정된다.
재사용 대기 기간은 등급에 따라 최소 100일부터 3200년까지 정해져 있으며, 이 재사용 대기시간은 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줄이거나 늘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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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3주하고도 며칠.
천호동에 위치한 저택에서, 김현우는 진실의 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안방의 벽을 바라보았다.
고롱-
"……."
벽 아래.
김현우의 시선이 멈춘 그곳에서는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검은 여우 한 마리가 몸을 둥글게 말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고로롱-
세상 세상 편히 자고 있는 여우의 모습.
목에는 목줄이 걸려 있고, 검을 털 위로는 기이한 모양의 낙인이 찍혀 있었으나 여우는-아니, 3주 전, 김현우에게 강제적으로 낙인이 찍힌 구미호는 불안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평온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흠……."
3주 전, 미령과 하나린이 나름대로의 협상(?)을 통해 포트에게서 아티팩트를 공수해 온 뒤, 김현우는 곧바로 아브에게 가서 아티팩트를 합쳐 '낙인'을 만들어내었다.
김현우는 여우 뒤에 박혀 있는 낙인을 바라보다, 이내 자신의 오른 손목에도 똑같이 그려져 있는 기묘한 문양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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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속 낙인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간섭 명령 생각
-정보 권한-
사람들을 제대로 부리고는 싶지만, 태생적인 인간불신으로 인해 배신당하길 두려워한 '황제'가 자신의 능력을 통해 만들어 낸 귀속 낙인이다.
귀속 낙인은 총 5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낙인을 사용하는 방법은 시전자가 피시전자의 동의를 얻고 귀속 낙인 계약을 하는 시점부터 명확하게 이루어진다.
계약을 한 시점에서 피시전자는 시전자에게 모든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하게 된다.
시전자는 계약을 한 피시전자의 행동을 강제하거나, 그 생각을 훔쳐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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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을 바라보자 떠오르는 로그를 읽으며 김현우는 몇 번이고 정보권한에 써져 있는 노예계약의 내용에 감탄했다.
'진짜 노예계약서랑 다를 게 없네…….'
정보권한에 나와 있는 설명을 읽어보면 인간을 못 믿는 황제가 신하에게 쓰기 위해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황제는 인간불신증이 아니라 그냥 노예를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뭐, 결국 황제가 이런 각인을 만들어 준 덕분에 김현우나 등반자나 윈윈인 상황이 되었지만.
'이 각인이 없었으면 무조건 죽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무리 힘을 잃었고 그렇게 강한 등반자가 아니더라도 최소의 위협 요소는 없애는 게 좋다는 김현우의 생각이었으니까.
김현우는 아홉 개의 꼬리를 모은 채 느긋하게 자고 있는 구미호를 빤히 바라봤다.
'그래도 각인이 있어 준 덕분에'
구미호는 자기 뜻대로 살 수 있었고, 김현우는 나름대로 박식한 구미호에게서 정보를 뽑을 수 있게 되었다.
김현우는 진실의 구를 한번 바라보고, 다시 한번 구미호를 바라본 뒤, 이내 낙인의 스킬인 생각을 사용했다.
생각을 사용하자 마치 김현우의 스킬 중 하나인 '심리'와 마찬가지로 허공에 둥둥 떠오르는 말풍선.
[아~ 편해! 이거 좋아! 좋다고!]
[아~~~~좋다~~~늘어진다~~~]
[최고! 너무 좋아! 너무 좋다고!!]
[꿀잠이야~ 꿀잠- ZZZZzzzzz……]
"……."
주르륵 떠오르는 말풍선을 보고 있자니 김현우는 도대체 왜 구미호가 탑에 들어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김현우가 각인을 사용한 뒤, 줄곧 구미호의 생각을 엿봤을 때, 그녀의 생각 대부분은 대강 이런 식이었으니까.
너무 편해서 좋다, 꿀빠는 인생 최고!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구미호는 얼마 전까지 '업적'을 얻기 위해 탑을 오르고 있던 녀석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분명 다른 등반자들과 마찬가지로 탑을 오르며 수많은 생명을 빼앗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뭔가가 좀 다른 것 같았다.
마치 좀 이질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김현우는 문든 자신이 그녀의 목적을 물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 구미호가 탑을 오르는 목적.
'언제 한번 물어봐야겠네.'
김현우는 그렇게 다음에 할 질문을 생각해 두고 있을 무렵.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는 시선을 돌렸고, 김현우는 곧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서연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김현우를 보며 물었다.
"어? 있었네요?"
"그럼 어디 갔겠냐."
"아니, 오빠 분명 오늘 분명 어디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서연의 물음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이제 곧 가려고. 너는 왜 왔는데?"
김현우의 심드렁한 물음에 이서연은 들고 있던 핸드백을 식탁 위에 올려두곤 말했다.
"왜긴 왜에요 오늘도 마법, 아니 도술(道術)배우러 왔죠."
이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구미호에게로 다가갔고, 구미호는 이서연이 걸어오는 소리를 듣자마자 귀를 쫑긋 세우더니-휘리릭- 화악!
이내 그 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안녕하세요!"
뭐,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곤 해도 등반자 때처럼 귀와 꼬리가 있는 것은 똑같았지만.
"네 안녕하세요. 오늘도 괜찮을까요?"
"네 괜찮아요!"
구미호의 예의 바른 인사에 이서연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고, 이서연은 곧바로 그녀의 동의를 얻고 그 앞에 자신의 공책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어제 알려줬던 오행(五行)의 흐름에 대해서-"
"그것보다는 천(天) 과 지(地)의 이치부터 깨달으시는 게-"
"저는 목(木)행에 대해서-"
"지금 이 시점에서는 목(木)행에 대해 공부하기 보다는 기본적인 것들은 먼저 선행으로-"
"아, 그렇다면 지축오행(地軸五行)을 먼저-?"
순식간에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지기 시작한 그들을 보며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그 둘을 바라보았다.
김시현이 천마(天魔)에게 무공을 배우고 빠져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이서연은 구미호로부터 도술(道術)을 배우기 시작했다.
뭐, 제대로 배우고 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김현우는 서로에게 존댓말을 하며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묘리에 대해 열심히 말을 하고 있는 그 둘을 바라보다 진실의 구를 바라봤다.
---
다음 사용 기간까지 남은 시간: 0일 0시간 0분 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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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초기화된 진실의 구의 사용시간.
"출입."
김현우는 곧바로 스킬을 사용했고, 곧바로 시스템 룸 안으로 이동했다.
언제나 똑같은 풍경의 시스템 룸 안.
책장에는 여러 가지 게임기들이 꽂혀 있고, 테이블에는 이런저런 게임팩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분명 아브가 게임을 하면서 반겨줘야 하는데-
"오셨어요?"
"오늘은 무슨 일로 게임을 안 하고 있냐?"
김현우의 예상과는 다르게 아브는 게임을 하지 않고 김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나름대로 중요한 날이니까요. 저도 저 나름대로 '검색'하느라 좀 바빴거든요."
"오, 믿음직스러운데?"
도대체 뭘 검색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자신을 위해 이것저것 검색했다는 소리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아브를 칭찬했고, 그녀는 말했다.
"진실의 구는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진실의 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자, 그럼 시작할게요?"
"응? 뭘 시작해?"
"진실의 구를 사용하려면 고대어를 외워야 하거든요."
"그래……?"
'준비했다는 건 이거였나?'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고, 아브는 곧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
김현우의 번역 반지로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아브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화아아악!
진실의 구가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
하얗게 빛나기 시작한 진실의 구는 아브의 말에 따라 이리저리 다른 색이 떠오르며 제각각의 색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
곧 아브가 마지막 말을 외치자마자 진실의 구는 새하얀 빛을 발하며 김현우의 앞에 로그를 띄우기 시작했다.
[아티팩트의 숨겨진 힘 개방]
[진실의 구의 사용 효율이 500% 증가합니다.]
[진실의 구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100% 증가합니다.]
"이건……?"
"진실의 구를 '진짜'로 사용하는 방법이에요."
김현우가 묻자 아브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원래라면 그냥 스킬을 발동하는 것으로 진실의 구를 사용할 수 있기는 한데, 이렇게 진실의 구에 입력되어 있는 고유 언어를 말하면 구의 효율을 최대로 끌어 올릴 수 있거든요."
"……그것도 정보권한에서 얻은 정보야?"
"네, 중상위쯤 되니까 이제 슬슬 락에 걸린 정보들이 전부 풀리더라고요. 안 풀린 것들도 슬쩍 다른 정보를 우회해서 돌아가면 볼 수 있고."
"……무슨 인터넷 사이트 같은 거야?"
"음, 그런 느낌……? 살짝 다른데, 약간 인터넷이랑 비슷한 느낌은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한번 보고 싶긴 하네."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대답하더니 이내 앞에 펼쳐진 진실의 구를 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말하면 되는-"
[지금부터 진실의 구에 들리는 말을 '질문'으로 간주하고 대답합니다.]
김현우가 말을 전부 끝내기도 전에 앞에 나타난 로그는 절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고, 이내 입을 다물고 있는 아브를 한번 바라본 김현우는 묘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뭐니 뭐니 해도 결국 김현우의 최종목표는 자신의 튜토리얼 탑에 가둔 놈을 찾아내는 것이었으니까.
찾아낸 다음에는?
똑같이 해주거나 죽도록 패는 게 목표였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나를 '튜토리얼 탑'에 가둔 새끼는 누구지?"
-화아아아악!
그의 물음에 순식간에 찬란한 빛으로 빛나기 시작하는 진실의 구.
그리고-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순간적으로 찬란한 빛을 내뿜다가 순식간에 조용해 진 진실의 구는 더 이상 발광하지 않은 채 평범한 구체가 되어 있었고.
"아니 씨발 뭐야……?"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짓다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스으으으으─!
"!!!"
진실의 구에서 순식간에 튀어나온 어둠에, 김현우의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순식간에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주변 풍경에 김현우는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그곳에는 어둠뿐이었다.
어둠.
어둠.
어둠.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김현우가 위협을 느끼고 자신의 검붉은 마력을 사방으로 돌리기 시작했을 때.
"유감스럽지만 자네와는 오랜 대화를 나누기에는 힘들 것 같군."
김현우는,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덩그러니 나타난 한 남자를 보며 눈을 떴다.
# 148
148. 청룡(靑龍) 전우치(田禹治)(1)어두운 공간 안에서 우두커니 선 채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는 그것은 자세히 보니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사람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 검은 무언가.
어둠 속에서 '검은 것'이 구분되는 이 기이한 공간 안에서, 김현우는 그것의 형태를 확인하고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파직- 파지지직!
그의 주변으로 튀기 시작하는 검붉은 스파크.
김현우는 물었다.
"넌 뭐야?"
그의 물음에 그 어두운 무언가는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제작자'다.]
"……뭐? 제작자라고?"
[하지만 말했듯이 나는 너와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적어도 지금 이곳에서는 말이야.]
허나 제작자는 그의 되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했다.
[게다가 애초에 나는 네 이야기에 답할 수 없으니 이제부터 나는 네게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하기만 하도록 하겠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런 씹-"
김현우는 이내 인상을 찌푸렸으나, 제작자는 그의 이야기 따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내가 만든 '탑'을 찾아라, 그리고 네가 얻은 '악천의 원천'으로 나를 찾아와라. 그렇다면 네게 엮인 모든 진실에 대해 말해주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냥 여기서 말해 이 개새끼야!"
[너를 탑에 가둔 건 '나'다.]
제작자의 말과 함께, 김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상을 찌푸린 채, 사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
제작자는 입을 다물고 자신을 바라보는 김현우를 똑바로 마주 본 채 말했다.
[그러니까, 나를 찾아와라. '가디언']
파드득-!
"야! 잠깐-!"
그와 함께 파드득 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지기 시작하는 제작자의 육체.
김현우는 다급한 마음에 그를 불러보았으나 그는 이미 그 어둠 속에서 부서지기 시작했다.
마치 흙처럼 뭉그러지기 시작한 그의 육체는 순식간에 무너져서 어둠 속에 동화되기 시작했고.
파직! -파드득!
어둠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대체 뭐야!?"
마치 유리조각처럼 사방에서 깨어져 나가는 어둠을 보며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곤 입을 열었으나, 이미 그가 소리를 지를 때 김현우를 감싸고 있던 어둠은 모두 깨져 버렸다.
그리고-
"헉!"
"가디언 괜찮아요!?"
김현우는 아브의 얼굴이 눈앞에 있는 것을 보며 벌떡 일어났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아브가 말했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가디언이 푹 쓰러져서 저는 깜짝 놀랐다구요!?"
"내가 쓰러졌다고?"
"네! 갑자기 진실의 구를 바라보다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아서 깜짝 놀랐어요!"
아브의 호들갑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조금 전을 떠올렸다.
자신을 집어 삼킨 어둠 속에서 만난 그 형체조차 어물쩍하게 만들어진 제작자에게 들었던 말들.
그리고 거기에서 들었던 진실.
'그 새끼가 나를 가뒀다고?'
김현우는 분명 그가 했던 이야기를 똑똑히 들었다.
분명 그 목소리로, 제작자는 자신을 가두었다고 말했다.
"이런 썅……."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린 것은 그에게서 들은 다른 이야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엮인 모든 진실은 또 뭐야?'
그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여기서는 말할 수 없는 모든 진실을 알려줄 테니까 자신을 찾아오라는 제작자의 말을.
"아니 뭐 떡밥을 뭐 이렇게 좆 같이 뿌려……?"
한동안 그의 말을 곱씹던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 거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실의 구를 바라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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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구
등급: Ss
보정: 없음
스킬: 권한 접속
다음 사용 기간까지 남은 시간: 6399년 364일 23시간 55분 31초
-정보 권한-
-권한 부족-의 진리를 깨달은 마법사가 시스템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 부족-을 알아차리고 -권한 부족- 몰래 만들어낸 아티팩트.
진실의 구는 사용자의 마력을 대가로 사용자가 알고자 하는 진실을 그 무엇이던 알려준다. 허나 -권한 부족- 때문에 진실의 구는 사용자가 묻는 진실의 등급에 따라 재사용 대기시간이 결정된다.
재사용 대기 기간은 등급에 따라 최소 100일부터 3200년까지 정해져 있으며, 이 재사용 대기시간은 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줄이거나 늘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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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이 썅."
역시 아니나 다를까 재사용 대기시간이 풀차징 되어 있는 진실의 구를 보며 혀를 찼다.
그렇게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무렵. 그를 줄곧 관찰하고 있던 아브는 조심스레 물었다.
"……진실에 대해서 답은 얻은 거예요?"
아브의 물음에 김현우는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찾기는 찾았지."
"정말요!? 그런데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할 일이 생겼거든. 게다가 새롭게 풀어야 하는 문제도 말이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내 저도 모르게 입술을 혀로 핥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나를 탑에 가둔 범인은 알았다.'
자신을 12년 동안 튜토리얼 탑에 가둬놓은 진범은 제작자였다.
물론 참으로 좆같게도 그가 왜 나를 가뒀는지, 그리고 무슨 이유로 그곳에서 나를 12년 동안 방치했는지는 모른다.
'씨발 좀 다 알려주고 사라지면 덧나나.'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느끼고는 한숨을 내쉰 채 감정을 조절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명확히 잡혔다는 것.'
지금까지처럼 정확한 목표도 없이 등반자를 잡아 족칠 때와는 달리, 이제는 확실한 목표가 생겼다.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우선 진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진실의 구'에서 원래 얻으려고 생각했던 정보는 모두 얻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무튼 조금만 기다려라-'
김현우는 조금 전 자신에게 말했던 그를 떠올리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그는 분명 '모든 진실'을 말해주겠다고 했으나, 그가 말하는 '모든 진실'에 무엇이 담겨 있다고 하더라도, 제작자가 자신을 튜토리얼 탑 안에 쳐 박은 건 사실이었다.
틀림없는 사실.
그렇기에-
'넌 뒤졌다.'
김현우는 제작자를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하곤 이내 아브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아브"
"네 가디언."
"혹시, '제작자'가 만든 탑을 찾을 수는 있을까?"
"제작자가 만든 탑이요……?"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허공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정보 권한으로 락이 걸려 있기는 한데……우선 우회해서 어떻게든 찾아볼게요."
아브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이내 그녀에게 제작자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 달라고 요청한 뒤.
"우선 쓸 만한 정보를 얻으면 곧바로 불러, 알았지?"
"네, 알겠어요."
김현우는 문을 통해 시스템 룸의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렇게 하루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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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에서 정식으로'가디언'이 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면 당신은 부름을 받아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0일 0시간 0분 5초
김현우는 앞에 떠오르는 알림 로그와 함께 시스템 룸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아브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물었다.
"어떻게, 쓸 만한 정보는 구했어?"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답했다.
"아뇨……."
"응? 그럼 왜 불렀는데?"
그의 물음에 아브는 심각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보며 말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왜?"
"정복자가 내려오고 있어요."
"정복자? 그건 또 뭔 소리야, 걔들은 또 뭔데?"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고. 아브는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
"등반자는 좌(座)를 얻기 위해 탑을 오르잖아요?"
"그런데?"
"그런 등반자들이 탑을 올라서 좌(座)를 얻으면, '정복자'가 돼요."
"……."
그제야 김현우는 정복자가 어떤 존재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고, 곧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정복자와 붙어보지는 않았으나, 구미호에게 들었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절대로 '등반자'보다 약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정복자중 한 명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9계층으로 내려오고 있어요."
***
도사(導師)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신선(神仙)이 되기 위해 수행을 반복하는 이들이었다.
이 세상에 이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고, 자연의 이치를 깨달으며 스스로의 명상을 통해서 이 세상 오행(五行)의 진리를 깨달아 신선(神仙)이 되려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철저한 자기 절제를 통해 화기가 깃든 음식이나 탁기가 가득한 음식을 피하고. 오롯이 자연의 정기를 통해 자라는 음식과 무공(武功)을 통해 신선(神仙)이 되려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위해 수행하는 모든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이치를 지키고 살생(殺生)을 멀리했다.
허나-
도사(導師) 중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탁-
홍콩의 고층 건물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상공에서, 그는 있었다.
보랏빛 장포를 펄럭이고, 자신의 애병인 봉(棒)을 들고 있던 그는 평화로운 하늘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서 있다가.
"쯧."
이내 가볍게 혀를 차고는 지상을 바라봤다.
그가 혀를 차는 이유.
'그러고 보니 누굴 처리해야 하는지도 듣지 않고 왔네?'
그것은 그가 너무 빨리 내려온 나머지 9계층의 누구를 처리해야 하는지도 듣지 않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조금 귀찮아도 전부 죽여야 하나?'
가벼운 생각에서 나온 무거운 주제.
그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듯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정했다는 웃음을 지었고-딱!
-곧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구그그그그긍!
먹구름이 몰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푸른 하늘을 좀먹기 시작하는 어두운 먹구름은 도저히 자연 현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했다.
홍콩 전역에 펼쳐진 거대한 먹구름.
세상에 빛을 없애버린 먹구름은 순식간에 그 몸을 불리며 홍콩에 비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홍수를 낼 것처럼 홍콩 전역에서 세차게 내리치기 시작하는 폭우.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것처럼 시야를 좀먹는 빗속에서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지었고, 또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리고-
꽝! 콰광! 꽈아아아아앙!
홍콩 전역에, 뇌우(雷雨)가 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방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뇌우(雷雨)는 그 대상을 정하지 않고 떨어져 내렸고, 홍콩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붉은 화마가 고개를 들고, 지상에서는 사람들의 비명이 하나둘 들리기 시작했으나, 그런 비명들은 뇌우(雷雨)에 의해 먹히고 말았다.
그렇게 뇌우가 쏟아지고 있는 홍콩의 상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
아니.
탑을 오르는 것으로 도사(導師)의 수행을 뛰어넘은 자이자-수행을 통해 신선(神仙)이 된 것이 아닌, 이교의 방법을 사용해 괴선(怪仙)이 되어버린 망나니.
"뭐-"
전우치(田禹治)는-
"나쁘지 않네."
-청룡의 업(業)을 펼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149
149. 청룡(靑龍) 전우치(田禹治)(2)비치는 영상 속으로 사람들의 비명과 개판 오 분 전의 홍콩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돼! 안돼!!!
-야! 거기! 거기 사람 잡아줘!!!
-엄마! 엄마아아아!!
흘러나오는 영상에서는 사람들의 비명 어린 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들려오지만, 곧 그들의 비명소리는 쏟아지는 뇌우(雷雨)에 의해 전부 묻혀 버렸다.
영상이 일순 점멸할 정도로 지상에 떨어지는 수많은 뇌우들은 빗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을 전부 먹어치운 채 자신을 과시했고.
화르르륵!
뇌우가 떨어진 뒤의 홍콩의 모습은 불과 10초 전 영상에 찍히고 있던 홍콩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라져 버렸다.
폭우가 내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상에서는 뱀처럼 날카로운 화마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붉은 뱀들은 검은 먹구름을 붉게 물들인다.
폭우가 세차게 내리치고 있음에도 꺼지지 않은 붉은 화마.
그런 비이상적이고 괴이한 광경을 영상으로 담고 있던 남자는 영상을 종료하려는 듯 카메라를 아래로 내리려다 다시 카메라를 올렸다.
그리고 영상은 그런 비이상적이고 괴이한 광경의 한 가운데에 있는 남자를 찍음과 동시에-꽈아앙!
거대한 번개가 떨어짐과 함께 끝이 났다.
-아니, 끝이 나는 듯했다.
카메라의 화면은 거대한 번개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암전했으니까.
허나 빗소리를 계속해서 들려주고 있던 카메라는 꺼지지 않았고, 카메라는 세차게 비와 뇌우가 떨어지는 하늘에서, 시점을 바꾸어 한 남자를 찍기 시작했다.
보라색의 장포를 입은 남자.
그는 몇 번이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1시간 줄게."
남자의 짧은 한마디.
그 말과 함께 스마트폰은 완전히 박살 나 버렸고, 영상은 거기에서 정말로 끝이 났다.
그리고 그렇게 끝난 라이브 방송의 아래에서는 실시간으로 댓글이 미친 듯이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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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2335
오로로롱옹: 와, 이거 뭐냐 진짜로? 이거 뭐 CG 같은거냐? 진짜임 가짜임? 홍콩 사는 애들 등판 안하나? 등판 좀 해봐라.
ㄴ 아트록티스: 홍콩에 살고 있진 않고 그 옆에 살고 있는데 아무래도 진짜 맞는 것 같다. 홍콩 쪽에서 번개 떨어지는 거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실시간으로 보임, 근데 굉장히 신기한 게 홍콩 쪽에만 검은 구름 잔뜩 있고 다른 곳은 그런 게 없다.
ㄴ 희태락: 아니 시발 저 새끼 뭐야? 조금 전에 하늘 날고 있다가 우리한테 인사한 거임? 시발 대체 뭐냐???
홍보홍콩홍보: 아, 진짜 지금 개 무섭다. 나 지금 홍콩에 있는데 너무 무서워, 귀는 막 청력 사라진 것처럼 멍하고 정신을 못 차리겠다, 그나마 나는 지하로 어떻게 대피해서 살았는데 아직도 사람 눈앞에서 터지는 게 아른거려.
ㄴ 오토로크: 뭐야 이새끼 컨셉이냐 진짜냐? 시발 먼데?
ㄴ 헬헬헹헬렝헹수식이: 딱 봐도 컨셉 ㅅㄱ, 지금 홍콩 영상 못 올라올 정도로 개박살 나고 있는데 바로 컨셉충 하는 거 존나 역겹죠? ㅋㅋㅋㅋ 그만해라 병신아. 지금 심각한 거 안 보이냐? 이래서 관종들은 ㅉㅉ헌터가인생이다: 이거 봐라, 아무래도 뉴스까지 뜬 것 보니까 보통 일 아닌 것 같은데.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90&oid=214&aid=0000956511ㄴ 인생을살아주세요: 아니 뉴스 안 떠도 지금 상황 좆된 건 누가 봐도 알 것 같긴 한데 솔직히 ㅋㅋㅋㅋ, 그런데 문제는 지금 저 상황이 그냥 심각한 게 아닌 것 같아서 문제라는 거임. ㅇㅈ?
ㄴ 칼튼90: 야 근데 뉴스 보니까 헌터 협회는 그냥 초반에 박살 나서 아무것도 못 하는 모양인가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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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천호동의 저택.
이서연이 스마트폰에 주르륵 떠오르는 댓글들을 보고 있을 무렵, 저택의 문이 열리며 김시현이 들어왔다.
"현우 형은!?"
현관 안쪽으로 들어온 김시현은 곧바로 고개를 돌리며 김현우를 찾았으나 이서연은 답했다.
"없어."
"어디에 갔는데?"
김시현의 물음에 이서연은 조금 전까지 구미호와 자신이 보고 있던 스마트폰을 휙휙 휘두르며 말했다.
"이거 막으러. 너도 그거 말하러 온 거 아니야?"
이서연의 물음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긴 한데…… 벌써 갔어?"
김시현의 물음에 이서연은 그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냥 간 수준이 아니라 어디서 튀어나오더니 곧바로 나한테 스마트폰을 맡기기만 하고 달려 나가던데?"
"뭐라고 했는데?"
"중국에 갔다 온다고."
"아……."
이서연의 말에 김시현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주저 앉았고, 이내 이서연은 꽤 급하게 달려온 것으로 보이는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뭐 때문에 그렇게 뛰어 온 거야?"
이서연의 물음에 김시현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국제 헌터 협회에서 전화가 왔거든."
"국제 헌터 협회에서……?"
"현우 형이 전화를 안 받는데, 당장 현우 형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하니까 급하게 나한테 연락한 것 같더라. 현우 형 좀 불러달라고."
그제야 이서연은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고는 김현우가 소파 위에 두고 간 스마트폰을 집어서 확인했다.
그리고-
-부재중 통화(42)
"그러네……."
이서연은 스마트폰에 잔뜩 와있는 부재중 통화를 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는 그렇게 전화가 왔는데 모른 거야?"
"오빠가 스마트폰 소리를 무음으로 해 놨는데 알 리가 있나."
김시현의 물음에 이서연은 괜스레 투덜거리며 그의 스마트폰을 바라보았고,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뒤 자신의 스마트폰을 이용해 국제 헌터 협회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김시현의 스마트폰에 수신음이 울릴 때쯤.
국제 헌터 협회 에서는-
"……허"
헌터 협회 메인홀의 3층에서, 현재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영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1시간 줄게.
그 말을 끝으로 완전히 꺼져 버린 영상.
잠시간 침묵이 가득하던 회의실의 정적을 깬 것은 바로 회의실의 상석에 앉아 있던 리암 최고의원이었다.
"그래서, 이게 언제 게시된 영상이라고?"
"불과 30분도 되지 않았습니다."
협회원의 보고에 리암은 중얼거렸다.
"홍콩 지부와 연락은 닿는가?"
협회원은 고개를 저으며 즉답했다.
"맨 처음 홍콩 지부로부터 걸려온 긴급전화 한 통을 제외하고, 그 뒤부터 홍콩 지부와는 완전히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
협회원의 말에 따라 리암은 또 한번 침묵했고, 이내 그는 슬슬 아파오기 시작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갑자기 저런 괴물이-'
그는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국제 헌터 협회에 미리미리 위협을 알려주었던 재앙(災殃) 탐지기는 당장 홍콩에 내리칠 때까지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으니까.
'재앙(災殃)이 아니란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무언가?'
리암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굴렸으나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지금 당장 국제 헌터 협회에 있는 정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사실 그것보다 더 문제는.
"……."
홍콩이 지금 실시간으로 박살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암은, 아니- 국제 헌터 협회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국제 헌터 협회에서는 저 괴물을 막을 방법이 없었으니까.
"……."
"……."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마치 입을 열면 그 누구라도 책임을 지어야 하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보며 리암이 아무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쯤, 회의실의 쪽문을 통해 리암의 비서가 들어왔다.
그는 회의실에 있는 이들에게 살짝 목례를 하곤 곧바로 리암에게 다가와 말하기 시작했다.
"김시현 헌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리암의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는 물음에 그는 답했다.
"김현우 헌터는 이미 홍콩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조금 전 들은 소식입니다."
비서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안도 어린 한숨들, 물론 그들 중에는 리암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무능하다니…….'
리암은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대처도 취할 수 없는 국제 헌터 협회의 무능함이 뼈아팠으나, 이내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괴물은…… 일반적인 헌터는 절대 막을 수 없다.'
딱 봐도, 조금 전 영상에 찍힌 그 남자는 괴물이었다.
하늘에서 뇌우를 떨어뜨려 홍콩 전역을 박살 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치 인간과는 그 종족부터 달라 보이는 그의 능력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리암은 자조적인 마음을 한편으로 미뤄놓고, 김현우를 응원했다.
***
계속해서 내리치던 뇌우(雷雨)가 그치고, 지상에는 붉은 화마가 만들어진 그곳에서.
전우치(田禹治)는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을 흥미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폭우.
그 사이로 고개를 들이미는 화마.
완전히 박살 나 있는 도시들과 자동차들.
불과 몇 십 분 전만 해도 활발하게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던 홍콩이라는 도시는 내리치는 뇌우로 인해 유령도시처럼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쯧, 나쁘지는 않았는데, 너무 자잘하네."
-정작 그 끔찍한 광경을 만들어낸 전우치는 정작 그 광경에 대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하고는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완전히 지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마치 일반적인 인간과는 전혀 생각이 다른 것 같은 중얼거림이 하늘에 울려 퍼지고-
"이런 개-"
"……!"
"새끼가-!!"
-김현우는 그의 앞에 나타났다.
쏟아지는 폭우(暴雨)를 뚫고, 전우치(田禹治)의 앞에, 그는 나타났다.
전우치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시선을 위쪽으로 돌려 여의봉을 탄 채 자신에게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김현우를 바라보며 몸을 움직였다.
짧은 찰나.
전우치는 내리쳐지는 그의 공격을 회피하려는 듯 몸을 비틀어 김현우의 일격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김현우는 그의 지척에 다가온 상태였고-후우우욱!
김현우의 주먹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려는 그 순간-씨익.
그는 전우치의 입가에 만들어지는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츳-!
전우치는, 순식간에 김현우의 눈앞에서 사라져, 그의 공격이 닿지 않는 뒤쪽에서 나타났다.
그는 여의봉을 타고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김현우를 보며 비웃음이 가득 실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사, 아니 신선(神仙)이란 무릇 하늘도 접어 걸을 수 있는 법이지."
축지법(縮地法)을 사용한 전우치의 비웃음 서린 목소리에 김현우가 일순 멍한 표정으로 공격 범위 뒤로 물러나 있는 그를 바라보았으나.
피식.
"!"
전우치는 피식 웃으며 떨어져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굳혔고, 이내 전우치는-
"좆까-"
자신의 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는 거대한 거검(鉅劍)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다시 한번 축지법을 시도하려 했으나, 그는 이미 자신의 머리 위에 '나온' 거검을 피할 수 없었고.
"병신아-!"
꽈아아앙!
기간토마키아는, 전우치의 머리를 후려쳤다.
# 150
150. 청룡(靑龍) 전우치(田禹治)(3)꽈아아앙! 콰드드득!
전우치(田禹治)의 신형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의 몸이 부서진 건문 잔해 속에 처박힌다.
쿠그그그긍─!
그 여파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건물들.
김현우는 그를 후려친 기간토마키아를 집어넣고 곧바로 땅을 딛고 있던 여의를 원래의 크기로 돌렸다.
그의 명령에 따라 순식간에 줄어져 원래의 크기로 돌아오는 여의봉.
땅을 딛고 있던 여의봉이 원래의 크기로 돌아오며 일순 체공상태에 돌입한 김현우는 곧바로 몸을 틀어 전우치가 떨어진 곳을 바라보곤 그대로 여의를 휘둘렀다.
"길어져라, 그리고-"
김현우의 말에 따라 순식간에 길어진 여의는 단 한순간 만에 전우치가 떨어진 건물잔해를 타격할 수 있을 정도로 길어졌고.
이어 여의봉이 가속력을 가지고 잔해에 가까이 도달했을 때쯤.
"커져라. 여의(如意)-"
여의봉은 그 크기를 불리며 전우치가 떨어졌던 그 건물잔해를 타격했다.
콰────아앙!
거대한 폭음.
마치 미사일 수백 개가 떨어진 것처럼 땅이 울리고, 미처 파괴되지 못한 건물 잔해가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쏟아지던 폭우는 일시적인 충격파로 인해 비를 땅으로 떨어뜨리지 못했고.
여의봉의 공격이 통한 그 반경 안에는 빗방울 대신 흙먼지가 가득 차올랐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파괴적인 일격.
김현우는 타이밍에 맞게 여의를 줄이고 지상에 착지했다.
쿵! 쏴아아아아!
그가 땅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일시적으로 멈추었던 폭우가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고, 김현우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뇌령신공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파직-파지지직!
그의 주변에 검붉은 스파크를 일으키며 깨어나기 시작하는 뇌령신공.
김현우는 곧바로 흙먼지가 걷히지 않은 잔해를 향해 뛰어 들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신형.
흙먼지가 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임에도 김현우는 마력을 이용해 전우치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고.
"흡!"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이동해 그의 머리에 발을 휘둘렀으나-
"쯧."
그의 발은 전우치의 머리에 닿지 않았다.
김현우의 공격이 빗나감과 함께 걷히는 흙먼지.
그는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폭우 속에서도 전우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기간토마키아에 맞고 그 뒤에 여의봉의 일격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옷에 조금 흙탕물이 튄 것 말고는 바뀐 게 없었다.
별 피해가 없어 보이는 전우치의 모습에 김현우가 혀를 차고, 전우치는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떻게 찾나 고민했는데, 네가 그 이레귤러구나?"
"뭐?"
김현우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지만, 전우치는 그런 그의 물음에 답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듯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이야, 이거 또 어떻게 찾나 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와주니까 다행이네."
그는 정말로 다행이라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 거리며 김현우를 바라봤고-
"아니 이런 씨발새끼야, 니들은 무슨 정신 이상자들만 모였어? 물으면 대답을 해 이 개새끼야!"
김현우는 진심으로 짜증내는 표정으로 전우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에 일순 멍한 모습으로 김현우를 쳐다보던 전우치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네.
"성질이 개차반이구나? 하긴 듣기로 이레귤러들은 대부분 조금 모난 놈들이 된다고 하던 것 같기는 하던데."
"그럼 등반자들은 죄다 너네 같은 정신이상자 새끼들만 되냐? 어? 씨발새끼야 대화하는 법 몰라?"
그의 욕설에 슬쩍 얼굴이 굳는 전우치.
김현우는 밀어붙이듯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뱉었다.
"씨발 새끼야 '이레귤러'가 뭔데? 내가 물어봤잖아 이 좆같은 새끼야, 어? 다들 니들 잘난 맛에 살았어? 어?"
"잠깐-"
"시발 정신이상자 새끼들아 물어보면 대답을 해! 혼자서 쳐말하고 낄낄거리지 말고, 니들이 자폐증환자야? 어떻게 만나는 새끼마다 안 그러는 새끼들이 없어. 어? 아냐고 개새끼야!"
"……."
김현우의 외침에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던 전우치의 표정이 굳었으나 이내 그는 굳어 있던 얼굴을 피고는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이해한다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역시, 상놈이라 그런지 입이 험하구나."
전우치의 한마디, 허나 김현우는 받아쳤다.
"뭐래 딱 봐도 개찐따같은 새끼가."
쩌적.
김현우의 공격에 전우치의 입가에 지어졌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그에 김현우는 또 한번 입을 놀리려 했으나-
"뭘 봐 씨발-"
"이 좆같은 새끼가 진짜!"
"?"
그는 전우치의 입에서 나오는 욕설에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이 개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도를 모르네? 어? 야 이 개새끼야 내가 만만해 보여?"
"뭐?"
"씨발 새끼가 진짜, 나 몰라? 나 전우치야 전우치(田禹治)! 조선 제일의 망나니 전우치(田禹治)라 이 말이다! 어디서 내 앞에서 아가리를 놀려?! 뒤지고 싶냐!"
발악하듯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전우치의 모습에 김현우는 멍하게 그를 바라봤고, 전우치는 계속해서 욕을 내뱉었다.
"……."
"이런 거지발싸개같은 놈이 진짜, 안 그래도 도 닦으려고 바르고 고운 말 쓰니까 내가 그리 우스워 보이디? 응? 너희 집 애미는 안녕하시냐?"
"뭐? 애미?"
"왜? 애비도 써줄까? 네 애비 어제 저잣거리에서 경씨댁 마당에 있더라? 응?"
"이런 미친……."
'이거 개 또라이새끼 아니야?'
갑작스레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 그의 욕설과 패드립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이 전우치를 바라보다 물었다.
"입 걸레인거 봐라?"
"내 입이 걸레면 네 애미는-"
김현우의 한마디에 또 한번 패드립을 치기 위해 입을 여는 전우치를 보며 김현우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나 애미 없어 이 개새끼야."
"그럼 애비-"
"애비도 없는데?"
김현우의 탈룰라 선언에 잠시 입이 막힌 전우치.
그는 순간 멈칫한 전우치를 향해 순식간에 도약했다.
탓!
한순간의 도약으로 순식간에 전우치의 면전 앞에 나타난 김현우는 그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말했다.
"난 고아야 이 씨발아."
뻑!
둔중한 소리.
마치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폭우 속에 울려 퍼졌으나, 유감스럽게도 김현우의 주먹은 전우치의 얼굴에 닿지 못했다.
"!"
그 대신, 김현우는 자신이 후드려 패려고 했던 것이 건물의 잔해라는 것에 눈을 크게 떴고, 곧-
"이런-!"
콰아앙!
김현우는 사각에서 날아오는 전우치의 봉을 막아내었다.
순식간에 주르르륵 밀려나는 김현우의 몸.
그는 곧바로 자세를 정비하며 전우치를 바라봤고, 이제 그의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아까 전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던 보라색의 장포는 애초에 처음부터 입고 있지 않았다는 듯 없어져 있었고, 대신 그 위에는 밋밋한 장포를 두르고 있었다.
그와 함께 머리에 쓴 양반 갓.
아까랑은 다르게 신선(神仙)같은 분위기라고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전우치는 이내 자신의 봉을 어깨 뒤로 넘기고는 오만하게 말했다.
"선(仙)이 된 내게 다시 이 모습을 보이게 했으니, 너를 쉽게 죽이지는 않겠다."
그의 말에 김현우는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너야말로 이런 짓 해놓고 편하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서로에게 주고받은 짧은 한마디 말.
그 말과 함께-
꽝!
전투는 시작되었다.
파지지직!
김현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빗방울을 때리고, 전우치의 신형이 사라진다.
셀 수 없는 짧은 한순간.
그 찰나에, 이미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공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김현우의 발이 전우치의 오른팔을 노리고 휘둘러지고, 전우치가 봉을 이용해 그의 일격을 막아낸다.
쿠우우웅!
그저 한 번의 공격을 주고받았음에도 느껴지는 심후한 무게.
허나 움직임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
그의 공격을 막은 전우치가 그 짧은 틈으로 봉을 돌려 김현우의 어깨를 노리고, 김현우는 마찬가지로 그 봉을 피하며 전우치의 몸에 유효타를 노린다.
단순하게는 서로의 공격하고 피하는 싸움.
허나 조금 더 세밀하게 들어가 보면 그들은 그 짧은 시간 안에서 무한한 사고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자세에서 나올 수 있는 수많은 움직임을 예측하고, 그 찰나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다음 행동을 이어나간다.
순식간의 김현우와 전우치의 합이 쌓여 나간다.
십 합을 넘어서 백 합.
백 합을 넘어서 천 합.
분명 맞붙기 시작한 시간은 조금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합의 숫자는 말도 안 될 정도로 그 세를 불려나간다.
그리고-
"!"
그 합이 끝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김현우의 사방에서 나타난 총 4명의 전우치.
그가 어떤 반응을 할 시간도 없이 사방에서 나타난 4명의 전우치는 그에게 제각기 다른 공격을 시도했다.
오른 쪽에 위치한 전우치는 그의 발을.
왼쪽에 위치한 전우치는 그의 머리를.
앞에 위치한 전우치는 그의 심장을 노리고.
뒤에 있던 전우치는 그의 오른 팔을 노렸다.
거의 동시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빠르게 내리쳐지는 전우치의 공격에, 김현우는 사고를 더더욱 빠르게 회전했고.
"흡!"
깡!
그는 공격이 자신의 몸에 닿으려는 그 순간, 점프를 하는 것으로 그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허나-
"아까의 답례는 이걸로 하도록 하지."
"씨-"
전우치는 이미 김현우의 머리위로 봉을 후려치고 있었다.
꽝!
거대한 폭음.
뒤늦게 그의 공격을 막은 팔에 격통이 느껴지고, 그의 몸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 순간에서도 김현우는 곧바로 몸을 움직이며 뛰어 올랐으나-
"무릇 신선(神仙)이란- 그저 심(心)으로 도술을 부릴 수 있어야 한다."
"!"
김현우는 어느새 자신의 주변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마법진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로서는 처음 바라보는, 일반적인 마법진보다도 더욱 난해한 도식이 있는 마법진이 김현우를 기점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그는 이형환위를 이용해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허공을 박차려 했으나, 이미 발동하기 시작한 마법진은 김현우의 몸을 구속했다.
그리하여 발동되기 시작한 마법진은-
"오행(五行) 심기구속진(心器拘束陣)."
전우치의 말에 따라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완성되었고, 그 순간 마법진에서 나온 5개의 제각기 다른 빛을 가진 사슬은 김현우를 구속했다.
그와 함께-
"용 좋아하나?"
"이런 썅-"
김현우는, 전우치의 말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쿠오오오오───
전우치가 가리키고 있는 하늘에는, 마치 동양의 신화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두 마리의 용이 폭우를 뚫고 이곳으로 내리치고 있었으니까.
전우치는 이쪽으로 떨어지는 두 마리의 용에게서 시선을 뗀 채 김현우를 바라보고는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뇌룡(雷龍)과 수룡(水龍)은 그 궁합이 잘 맞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곧바로 몸을 피했고, 그와 함께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는 거대한 뇌룡과 수룡은 김현우의 몸을 먹어치웠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수룡이 김현우의 몸을 집어 삼키고, 뇌룡이 수룡의 몸 안에 섞여 들어가 거대한 번개를 불러들인다.
그와 함께 순식간에 퍼지는 황금빛의 스파크는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에게로 연쇄작용을 일으켰고-삐───────!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찬란한 황금빛으로.
그리고 그 순간-
"넌 진짜 좆됐다."
검붉은 번개가, 황금빛으로 물든 세상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 151
151. 청룡(靑龍) 전우치(田禹治)(4)꽝!
황금빛으로 물든 세계를 검붉은 번개가 찢어발긴다.
한 갈래가 떨어져 내렸을 때는 황금빛 세상이 양분되었고, 두 갈래가 떨어져 내렸을 때에는 황금빛 세상이 분할되었다.
그 뒤로 수십 갈래가 떨어졌을 때, 황금빛 세상은 깨진 유리파편이 되었고.
그리고-
"극─"
수백 갈래의 검붉은 번개가 내리쳤을 때, 전우치가 뇌룡과 수룡을 이용해 만들어 낸 황금빛 세상은 완전히 박살 나고 말았다.
완전히 파훼된 기술.
전우치는 비틀고 있는 입가에 미소가 살짝이나마 사라져 있었고, 김현우는 어느새 흑익(黑翼)과 흑원(黑圓)을 만들어 낸 채 전우치의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패왕-"
"!!"
전위치의 눈이 순간 크게 떠진다.
그것은 신호였다.
그가, 김현우의 모습을 이제야 인지했다는 신호.
전우치가 급하게 축지법을 사용하기 위해 다리를 접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너무-
"괴신각-!"
늦었다.
꽈아아아아────앙!
느리게 반응해 이제야 축지법을 사용하려는 전우치의 배에 김현우의 다리가 꽂힌다.
"크악!?"
그 어떤 회피도 하지 못하고, 순수하게 전우치의 배에 정통으로 꽂히는 김현우의 다리는 증기기관처럼 자신을 과신하며 그의 허리를 양분해 버릴 듯 검은 마력을 뱉어냈다.
마치 검은 연기처럼 그의 다리를 통해 터져 나오는 마력들.
전우치는 그 순간에서마저도 김현우에게 반격하기 위해 자신의 특기인 환상을 만들어 냈으나-
"!!"
증기기관처럼 뿌려진 김현우의 마력은 그것을 막아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사이에 섞여 있는 검붉은 번개가, 전우치가 만들어 내려는 환상을 전부 없애버리고 있었다.
그에 전우치가 이를 악무는 순간.
파아아앙─!
전우치의 몸은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총알과 미사일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간 전우치가 지상에 처박히고-
꽈아아아아아아────
도시가 박살 난다.
대로 쪽을 향해 처박힌 전우치의 몸이 도로를 박살 내며 콘크리트를 사방으로 드러내고, 그것에 영향을 받은 건물들이 전우치 쪽을 향해 무너져 나간다.
대형 빌라들이 사방으로 무너지며 먼지를 만들어 내고 김현우의 귓가에서는 거대한 폭음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지반이 부서지며 건물이 무너지고, 콘크리트가 터져나가며 길이 사라진다.
허나 그런 일반인이 당한다면 필연적인 죽음을 확정지어도 될 만한 공격을 하고서도, 김현우는 곧바로 그 흙먼지 속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죽여주마!"
김현우는 콘크리트 먼지가 걷힘에 따라,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수많은 그를 볼 수 있었다.
적어도 수십에서 수백은 되어 보이는 전우치는 기다렸다는 듯 콘크리트에 앉아 있다 기습적으로 김현우를 향해 달려든다.
그 수백의 움직임은 모두 전우치와 같았다.
마찬가지로 그 속도도 전우치와 같았다.
그들이 펼치는 봉술(棒術)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하나가 기묘한 수를 담고 있는 봉술.
그들이 그 짧은 사이의 시간을 도약해 김현우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 들어온다.
그 누가 봐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모습.
허나 김현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해 달려드는 수백의 전우치를 보고도, 그는 위협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 채 그들의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알고 있었으니까.
파직-
전우치들이 지척에 다가오는 그 순간을 기점으로, 김현우의 몸에 자그마한 검붉은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그리고 전우치가 봉을 휘두를 때- 김현우는 비웃음을 지으며 흑원에서 검붉은 번개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파지지지직-!
순식간에 김현우의 주변을 타고 흐르는 검붉은 색의 스파크.
그 스파크는-
"큭!"
전우치의 수많은 환술(幻術)속에서 진짜를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김현우가 수많은 전우치를 보고서도 당황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지금 이것이 환술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전우치와 싸움을 벌일 때, 그는 한 번 이 수법에 당했었으니까.
"똑같은 수법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냐. 이 빡대가리야?"
"이런 씨-"
전우치가 입을 열기도 전 그의 얼굴을 후려친 김현우가 공격을 이어나간다.
뻐어억!
"크악!"
짧은 비명.
얼굴을 맞은 전우치의 몸이 날아가고, 김현우는 그런 전우치의 뒤를 따라 공격을 이어나갔다.
꽝!
한 방.
꽝!
또 한 방.
전우치는 급하게 축지법을 쓰는 것으로 몸을 피하려 했으나 김현우는 그 짧은 한 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김현우는 그가 축지를 쓰려하면 기적같이 파고들어 그의 몸을 후드렸고, 혹시라도 반응이 조금 늦었다 싶으면 번개를 사용해 그의 몸을 구속했다.
그야말로 일반적인 린치.
그들의 장소가 순식간에 바뀌어 나간다.
어떤 때는 하늘에서,
또 어떤 때는 지상에서,
그 어떤 때는 지하에서 싸울 때도 있었고-또 어떤 때는-
"크아아악! 이런 씨발 새끼가!!"
빌라 안의 벽을 뚫으며 날아다니던 그.
전우치는 비명을 지르듯 발악하곤 마주 달려오는 김현우를 향해 잃어버린 봉 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봉술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는 주먹질.
"컥!"
김현우는 당연하게도 그 짧은 주먹을 피하고 그의 얼굴에 정권을 먹였다.
순식간에 저 멀리 날아가 구석에 처박히는 전우치.
'최대한 빨리 끝낸다.'
허나 전우치가 떡이 될 때까지 팼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빠른 단타를 멈추지 않고 전우치에게 달려들었다.
'시간을 줘서는 안 돼.'
기본적으로 등반자들이라는 놈들은 허영심(虛榮心)에 젖어 있어 초반부터 자신의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전우치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게다가 등반자가 아니라 이미 탑을 오른 정복자라고 했으니'
그 숨겨진 수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것이 바로 김현우가 큰 공격을 사용하지 않고 단타로 전우치를 때려눕히고 있는 이유였다.
대기시간이 큰 기술을 사용하면 전우치는 금방이라도 2페이즈에 돌입할 것 같았기에, 그 2페이즈에 돌입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끅!"
김현우의 주먹이 전우치의 얼굴을 후려치고, 이어서 잠시 체공하는 그의 배를 후려 차 하늘로 날려 보낸다.
하늘로 붕 떠오르는 전우치의 몸.
김현우는 곧바로 튀어나갔고-
툭-
"……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까를 기점으로 멈추었던 비가 다시금 떨어지기 시작한다.
분명 전우치를 차올린 시점에서는 김현우의 얼굴에 떨어졌던 한 방울의 빗방울은, 그가 전우치의 앞에 섰을 때 다시 폭우(暴雨)가 되어 있었다.
그에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이 이상으로 시간을 끄는 게 좋지 않다는 판단을 했으나-김현우는 그 순간, 하늘에서 순식간에 불어나기 시작하는 전우치를 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늘어나는 전우치.
눈을 교란하려는 목적이 확실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김현우의 인상이 찌푸려졌고, 그는 곧바로 스파크를 터트렸으나-팡! 콰가가강!
김현우가 스파크를 터트림과 동시에, 전우치의 몸은 그대로 폭발했다.
마치 전기에 닿으면 폭발하는 것처럼, 터져나가는 전우치의 몸.
김현우는 폭발에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무기가 있었다."]
곧 허공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 전우치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사방으로 스파크를 돌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지상에 내리는 폭우를 막을 정도로 많아진 전우치의 분신이 김현우의 스파크에 의해 터져나간다.
["그것은 용(龍)이 되었다."]
김현우의 몸이 가속한다.
그는 떨어지고 있는 전우치의 수많은 분신들을 발판 삼아 다른 분신들을 찢어발긴다.
["용(龍)이 된 그것이 자그마치 일천 년의 수행을 시작했다."]
김현우의 속도가 빨라진다.
사방에서 나타나는 분신들을 몸으로 깨부수기 시작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김현우.
["용(龍)이 된 그것이 자그마치 이천 년 동안 도술을 공부했다."]
"이런 씨발!!"
없앤다.
없앤다.
계속해서 없앤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전우치를 없앤다.
사방에서 번개를 터트리고, 일권을 내지르는 것으로 전우치의 분신을 없애지만, 그의 분신은 그야말로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비처럼-그래, 비처럼-
"!"
김현우의 시선이 순식간에 먹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전우치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용(龍)이 된 그것이 자그마치 일만 년의 공덕을 쌓았다."]
마치 누군가의 업(業)을 확인하듯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목소리.
김현우는 생각할 것도 없이 하수분의 주머니 안에서 여의봉(如意棒)을 꺼내 들었다.
주머니 안에서 꺼내 든 여의봉은 김현우가 외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에 따라 길어졌고,.
곧 길어진 여의봉은 이곳 전체를 타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범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여의봉을 시계방향으로 휘두르며-
"흡!"
여의봉에 번개를 흘려 넣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여의봉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번개는 곧바로 사방으로 펼쳐지며 사방에서 떨어져 내리는 전우치의 몸을 없애기 시작했다.
["용(龍)이 된 그것이 자그마치 일만 오천 년의 신성을 쌓았다."]
여의봉의 봉에 흘려 넣은 번개는 떨어져 내리는 전우치를 완전히 없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모조리 전소시켜 버렸다.
전우치가 아까 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하고 나서야.
"!"
김현우는 전우치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아까와 같은 모습이었다.
얼굴에는 피를 질질 흘리고 있고, 갈색 장포는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오른쪽 짚신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있었고, 양반갓은 이미 오래전에 벗겨져 그는 상투만을 하고 있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정확히 김현우를 내려다보며 다음 말을 머금었다.
["용(龍)이 된 그것이 자그마치 삼만 오천 년의 시간을 쌓았을 때."]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살짝 멀어지기 시작하는 전우치를 바라봤다.
아니, 전우치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하늘을 날 수 없었고, 발판으로 쓰던 분신을 모조리 박살 내 버렸기에, 더 이상 하늘에 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허나,
"줄어라!"
김현우는 곧바로 여의봉을 줄인 뒤, 그 여의봉을 세로로 세워 다시 길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길어져 땅에 박힌 여의봉은, 곧 김현우를 하늘로 끌어다 올려 주었고-
["용(龍)은 옥황(玉皇)에게 인정을 받았고-"]
그는 거의 마지막 말을 내뱉기 시작한 전우치에게 뛰어 들었다.
엄청난 속도.
지금까지의 속도보다도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빠르기로 전우치의 근처에 도달한 김현우가 전우치와 시선을 마주 하고 주먹을 휘둘렀을 때-씨익-
"!"
["그것은 청룡(靑龍)이 되었다."]
이미 전우치는 말을 끝맺었고.
콰가가가가가강!
"큭!?"
김현우의 주먹은, 그의 주변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번개로 인해 전우치에게 닿지 못했다.
그의 신형이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고, 웃음을 짓고 있는 전우치의 모습이 확연히 변해가기 시작한다.
피를 흘리고 있던 얼굴이 말끔하게 고쳐지고, 상투를 틀고 있던 머리가 풀리며 긴 장발이 드러난다.
그와 함께 이마에서 자라나는 청룡의 뿔.
마치 사슴의 뿔과도 같은 그것이 자라나며 파란색의 전격을 사방으로 흩뿌리고-그의 몸에 푸른색의 갑주가 덧입혀진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전우치는 청룡(靑龍)이 되었다.
# 152
152. 청룡(靑龍) 전우치(田禹治)(5)
[온탕마사지: 와 씨발 저거 뭐냐? 용이냐?]
[편집자님살려주세요: 와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저거 뭐야 씨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바로회장님이다: 와 검은 구름 용 모양으로 변하는 거 봐라, 우리 조만간 멸망하는 거 아니냐???]
[오트밀좋아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앙 멸망 ㅇㅈㄹ 하고 있네, 걱정하지 마라 멸망할 일 없으니까.]
[호고고곡: 멸망 씹가능한 부분, 존나 쎄네 진짜 저런 놈 어디서 나온 거냐? 재앙이나 그런 거 하나도 안 떴다는데,]
홍콩에 있는 카메라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 유튜X 의 실시간 라이브 영상.
현재 전우치와 김현우의 모습을 전 세계에 중계하고 있는 실시간 스트리밍 영상의 제목은 바로 '내셔널지오그래픽 ver.Hongkong' 이었다.
그렇다.
현재 홍콩 전역이 쏟아지는 뇌우로 인해 개박살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타임랩스와 동시에 야경을 찍기 위해 만들어 둔 카메라는 손상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분명 카메라에 어느 정도 영향이 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카메라는 조금은 힙겹게 자신이 담은 것들을 전 세계에 송출하고 있었다.
[에바에바에바: 야 근데 씨발 이거 카메라 안 돌아가냐? 진짜 아까부터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김현우랑 전우치 얼굴 본거 10초쯤 되냐 ㅋㅋㅋ]
[삼진에바: 병신아 카메라가 어떻게 돌아가? 타임랩스용 카메라 몰라? 씨발 찐따새끼야?]
[나는기각충이다: 채팅방 개 시끄럽네. 걍 ㄷㅊ고 보자 애들아.]
[개가조아요: 기부니가너무좋은거있쬬기부니가너무좋은거있쬬기부니가너무좋은거있쬬기부니가너무좋은거있쬬기부니가너무좋은거있쬬기부니가너무좋은거있쬬기부니가너무좋은거있쬬기부니가너무좋은거있쬬기부니가너무좋은거]
[-개가 조아요님이 잦은 채팅도배로 인해 자동 강퇴 당하셨습니다.]
[호로로록: 캬~ 사이다~]
그야말로 전 세계 사람들이 전부 들어와 보는 통에 수십 개로 나누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돈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시끄러운 채팅방.
그럼에도 카메라 렌즈는 묵묵히 김현우와 전우치를 찍고 있었고-
"끅!?"
김현우는,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전격을 맞고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뇌가 울릴 정도로 저릿한 일격에 김현우의 시선이 일순 새하얗게 점멸하다 돌아오고-
"!"
김현우가 시야를 회복하고 여의봉을 뒤틀었을 때, 그는 전우치가 자신의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그.
분명히 인간의 손과 발이 달려 있었던 그곳에는 푸른 용의 팔과 다리가 달려 있고. 그가 처음 입고 있었던 갈색의 장포 위에는 그 누가 보아도 고결해 보이는 푸른 동양갑주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손에 잡혀 있는 청아검(淸雅劍)은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예기로 번개를 쏘아 보낼 것 같았다.
그 짧은 시선교환.
그것을 끝으로 김현우는 곧바로 정권을 내질렀다.
자세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음에도 김현우는 위협적인 위력의 정권을 그에게 꽂아 넣었고-꽝!
전우치는 주먹을 휘두르는 그의 주먹을 막지 않고 오롯이 받아 내었다.
그리고-
콰지지직!
"끅!?"
오히려 피해를 입은 것은, 전우치를 공격했던 김현우였다.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안 김현우가 재빠르게 여의봉을 회수하며 몸을 뒤로 뺐으나, 전우치는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가소롭다는 듯, 청아검을 쥐고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
김현우는 바닥에 착지하고는 아직도 저릿저릿한 오른 주먹을 쥐었다 피며 전우치를 바라봤고, 그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뭐?"
["이제 네가 행하는 모든 공격은 나에게 먹히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청룡(靑龍)의 업(業)을 등에 업었으니까."]
전우치의 오만 섞인 말에 김현우는 이죽였다.
"지랄하고 있네, 용이랑 합체했다고 네가 용이 되는 줄 아나?"
김현우의 비아냥에도 전우치는 얼굴을 굳히지 않았다.
마치 재롱을 부리는 아이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만만하게 그를 바라본 전우치는 이내 씩 웃으며 말했다.
["뭐, 굳이 믿지 못하겠다면-"]
팟!
"!"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좋겠군."]
꽝!
김현우의 시야가 순식간에 반전한다.
갑작스레 하늘로 뒤바뀌는 시야.
그는 그제야 자신이 맞았다는 것을 인지했고 곧바로 몸을 뒤틀었으나, 전우치의 공격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순식간에 김현우의 시선이 상하좌우로 바뀐다.
꽝!
꽝!
꽝!
꽝!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
김현우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이를 악물며 고통을 버티다, 자신이 땅에 내리 꽂히는 그 순간,
"이 개새끼야!"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위쪽에서 나타난 전우치의 몸을 올려 찼다.
파지지지지직! 콰가가강!
김현우의 발이 전우치의 명치에 닿자마자 그의 발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전류가 김현우의 몸을 경직시켰다.
두 눈을 휘둥그레 떠지게 할 정도로 끔찍한 고통.
허나 김현우는 뇌령신공을 돌리며 고통을 참아내고는 공격을 강행했다.
그리고-
꿍!
그는 김현우의 공격에 당해 하늘로 떠올랐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김현우는 곧바로 자세를 바로 잡았고, 곧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봤다.
애초에 공격을 맞은 것 같지도 않다는 듯 그저 오연하게 하늘에 떠 있는 전우치.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드려 맞기만 했던 전우치가 업(業)을 등에 업고 나닌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렸다,
'공격하는 것도 어느 정도의 피해를 본다니, 분명 뇌령신공을 극성으로 돌렸는데도…….'
김현우는 저릿거리는 오른발을 느끼며 눈을 찌푸렸다.
그는 분명 전우치의 명치를 차올리는 순간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뇌격을 막기 위해 뇌령신공을 극성으로 운용했으나, 그는 흘러들어오는 전우치의 전격을 단 하나도 막을 수 없었다.
'씨발.'
그는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잠시간의 대치상황을 이용해 최대한 체력을 회복했다.
잠시간의 침묵.
["32번"]
"……?"
그것을 깨뜨린 것은 바로 전우치였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내가 너를 죽일 수 있던 횟수다."]
"……."
["청아검(淸雅劍)을 사용했다면 너를 죽일 수 있었겠지."]
"어쩌라고 이 씨발새끼야."
그의 말에 김현우가 날 선 반응을 보였으나 전우치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까 말했지? 편하게 죽이지는 않는다고."]
그와 함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은 이내 순식간에 폭우(暴雨)로 변하기 시작했고, 그는 이내 자신의 뿔 위로 번개를 모으기 시작하며 말했다.
["비와 번개, 그리고 하늘을 다스리는 청룡(靑龍)의 업을 가지면, 이런 것도 할 수 있더군."]
한번 받아봐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자신의 뿔 위로 모아진 뇌전을 향해 손가락을 움직였고, 곧 손가락에 자그마한 뇌전의 구를 올려 둔 그는 쏟아져 내리는 비에 손가락에 만들어져 있는 뇌전의 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파치지직! 쾅!
"크학!?"
김현우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튀어 오르다 자신의 옆구리에 느껴진 통증에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고, 그 뒤로 전우치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꽝! 꽝! 꽝! 꽝!
그가 자연스럽게 손가락에 있는 번개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폭우 속에 섞여 있는 물방울을 탄 그의 공격은 김현우의 사방을 노렸다
"위"
"아래."
"옆"
"위…… 아니, 오른쪽이네?"
츠츳! 쾅!
빗방울을 타고 흐르는 번개가 김현우의 몸을 몇 번이고 후려친다.
김현우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대한 몸을 움직이며 여의봉(如意棒)을 이용해 그를 공격하려 했으나 김현우의 공격은 단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그저 당하기만 할 뿐인 일방적인 공격.
전우치의 손짓이 사방으로 움직이고 그에 따라 빗방울에 튀어 오른 번개가 김현우를 노리고 날아들고.
막지도, 피하지도 못하는 공격들이 끊임없이 김현우의 급소를 타격한다.
그 고통 속에서 김현우는 어떻게든 탈출구를 생각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으나-
"아까처럼 증발시키려고? 미안하지만 지금 떨어지는 이 빗방울들은 영기(靈氣)가 섞인 것들이라 내 의지에 따라서만 움직여."
김현우의 시도는-
"이 공간 전체에는 이미 내 번개가 머금어져 있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나를 따라오기 힘든데, 괴연 지금의 네가 내게 공격을 먹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모두-
"여의봉(如意棒)으로 나를 맞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설령 맞추더라도 너는 내 공격을 막을 순 없어."
-실패했다.
실패.
실패.
실패.
김현우가 하려던 그 모든 행동들은 실패한다.
만다라(滿茶邏)를 개화해 움직임을 막아보려고 해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번개는 그의 연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고.
그의 흑익(黑翼)에 들어차 있던 반(反)의 원리는 사방으로 날아오는 번개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다못해 시스템 룸으로 도망치기 위해 출입을 외칠 그 짧은 시간도 김현우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꽝!!
"끅……."
김현우는 순식간에 나타나 주먹을 휘두르는 전우치에게 맞아, 흙탕물이 가득한 땅바닥을 굴렀다.
["이제야 상놈에게 조금 어울리는 모양새가 됐네."]
김현우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이미 추리닝이 사라진 상체에는 지속된 번개 폭격으로 인해 여기저기 성한 곳이 없었고, 그것은 하반신도 마찬가지였다.
김현우의 눈에는 아직도 이지가 담겨 있었으나 그 눈빛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약했다.
지금 그에게서 멀쩡한 것을 찾으라면 그가 한 방을 위해 꾹 붙잡고 있었던 여의봉(如意棒)뿐.
전우치는 입조차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 김현우를 보며 말했다.
["그 정도나 맞고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 신기하군, 아니- 애초에 탑조차 오르지 못할 소모품이 청룡의 번개를 이 정도나 버틴 게 대단한 건가?]
김현우는 그런 그의 말에 이죽이고 싶어 입을 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전우치는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쓱 웃은 뒤 선고했다.
["
뭐, 원래라면 청아검(淸雅劍)으로 죽일까 했는데, 내 공격을 이 정도나 버텨서 내가 힘을 시험할 수 있게 해줬으니. 내 나름대로 감사의 의미로-]
-너는 보지 못할 최고의 기술을 보여주지.
그와 함께, 하늘에 있던 먹구름이 뭉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뭉치기 시작한 먹구름들은 점점 밀도를 높이며 무엇인가의 형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
김현우는 먹구름의 형상이, 용과 같이 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홍콩 전역을 덮고 있던 먹구름은 순식간의 용의 형상으로 변하며, 그저 기상이변에 불과했던 먹구름 전체는.
고오오오오-
어느새 거대한 용이 되어 김현우를 노려봤고-파지지지지직!!!
전우치의 머리 위에 나 있는 뿔에서 터져나간 전격은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만들어진 용 속으로 들어가 먹구름으로 만들어진 용(龍)을-파지지지지직!!!!
새파란 번개가 솟구치는 청룡(靑龍)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청룡출두(靑龍出頭)."
전우치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홍콩 전역에 똬리를 틀 듯 부유해 있던 청룡은, 오로지 하나의 목표물을 노리며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비대한 크기의 청룡이 떨어져 내리며 주변의 모든 것을 갉아먹고, 그나마 남아 있던 고층빌라들을 재로 되돌린다.
그리고 떨어지는 청룡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어?"
이내 자신의 앞에 있던 청룡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이동했어?'
풍경이 바뀌었다.
조금 전 모든 것이 박살 나버린 그곳이 아닌, 숲속으로.
그리고-
"에휴 병신아, 저런 뱀새끼한테 당하냐?"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서 들린 목소리에 그를 바라봤고.
"!"
"뭘 봐 병신아."
그 자리에는, 제천대성(齊天大聖)이 서 있었다.
# 153
153. 청룡(靑龍) 전우치(田禹治)(6)김현우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 쓰고 있는 금고아(金?兒)는 반짝이고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붉은 갑주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있었고.
갑주를 입지 않은 주변으로 나 있는 갈색 털은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제천대성?"
"쯧."
그래, 김현우의 앞에 서 있는 것은 분명 제천대성(齊天大聖)이 맞았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제천대성을 바라본 뒤, 이내 시선을 돌려 아까 전과는 전혀 다르게 바뀐 풍경을 확인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거대한 나무들, 그리고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그런 나무 너머로 보이는 산들과 높은 절벽들이었다.
절벽 사이사이에 자라있는 소나무와, 그런 절벽 끝에 지어져 있는 정각.
마치 옛날 중국 그림의 '무릉도원'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으면 이런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풍경은 경이로웠다.
잠시간의 침묵.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김현우였다.
"여기는, 아니- 나는 어떻게 된 거야?"
그는 풍경을 전부 확인했다는 듯 고개를 돌려 제천대성을 바라봤고, 그는 쯧 하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여기는 네가 쥐고 있는 여의봉(如意棒)의 안이다. 뭐,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심상세계정도라고 보면 되지."
"뭐? 심상세계?"
"설명해 달라는 표정으로 보지마라, 너 같은 빡대가리는 어차피 설명해 봤자 이해하기도 힘들 테니까."
제천대성의 뜬금없는 딜링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그는 화내지 않고 물었다.
"여기는 허수 공간이랑 비슷한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그를 한번 바라본 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허수 공간이랑은 다르다. 여기는 말 그대로…… 뭐라고 해야 할까."
제천대성은 말하지 않고 고민하는 듯 고개를 푹 숙였고, 김현우는 그런 제천대성을 한동안 바라봤다.
이내 슬쩍 눈치를 보는 제천대성을 보며 김현우는 짜게 식은 눈으로 말했다.
"너도 제대로 설명 못하지?"
"아니야!"
"그럼 설명해 보라니까?"
또 한번 묻는 김현우.
제천대성은 인상을 팍 찌푸리곤 일갈하듯 소리쳤다.
"그냥 심상세계라고 새끼야! 그냥 편하게 네 정신이 여의봉(如意棒)안에 구축해 둔 내 세계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
'결국 제대로 설명 못한다는 거잖아?'
김현우는 마찬가지로 인상을 찌푸리곤 제천대성을 바라보다 이내 그냥 넘어가자는 생각과 함께 물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지금 네 상황은 변한 게 없어. 이 심상세계 밖에서 너는 여전히 그 뱀한테 최후의 일격을 당하기 직전이지."
"그럼 내가 여기에 와 있는 동안 그쪽의 시간이 멈췄다는 거야?"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이 심상 세계에 들어온 동안 네 인지가 초 가속하고 있다는 게 맞겠지. 일부러 내가 그렇게 만들기도 했으니까."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이쪽의 시간과 저쪽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다는 말이겠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곤 이내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힘 빌려주려고 불렀냐?"
"뭐?"
"?"
"?"
김현우와 제천대성은 서로를 빤히 바라봤다.
침묵.
"아니, 힘 빌려주려고 이 심상세계인가 뭔가 하는 곳으로 부른 거 아니야?"
그가 이상하다는 듯 묻자 제천대성은
'이게 뭔 개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아닌데?"
"뭐?"
"그냥 네가 나보다 못한 저 병신한테 후드려 맞는 게 웃겨서 부른 건데?"
"……뭐라고?"
김현우가 팍 인상을 찌푸리자 제천대성(齊天大聖)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마 내가 너를 심상 세계에 불렀다고 해서 너한테 무언가를 알려줄 줄 알았어? 천만의 말씀이라 이거야!"
"이런 썅-"
"네가 나한테 그때 뭐라고 그랬지? 뭐? 원숭이? 너는 사육사~?"
김현우가 욕을 내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김현우를 놀리기 위해 갖은 말들을 내뱉은 제천대성.
김현우는 이내 욕을 내뱉으려다 잠자코 입들 다물었고, 제천대성은 신나서 입을 털기 시작했다.
"병신, 그때 그 패기는 어디 갔냐? 어? 나를 그냥 원숭이라고 하더니, 그 원숭이보다 못한 뱀한테 처 맞는 거 실화야? 응?"
제천대성은 그 뒤를 이어 김현우를 놀리기 위해 계속해서 입을 털었다.
뭐, 정작 그런 제천대성의 말을 듣고 있던 김현우는 그런 제천대성의 말에 딱히 화나는 기색도 없이 그의 말을 경청했다.
"꼴좋다~! 고작 저런 사방(四坊)의 신수(神獸)에게 털리다니, 응? 그렇게 털리고 나서 내가 놀리려고 부르니 힘 빌려주려고 불렀냐고?"
히죽.
"그래~ 힘이 필요해? 솔직히 말해서 나라면 줄 수도 있지. 어차피 저 녀석 따위는 내게 있어서 한주먹거리도 안되니까~"
그런데-
"딱히 너에게 빌려주고 싶지는 않은데~? 뭐, 만약 정 필요하다고 빌기라도 하면 빌려줄 수도 있지만."
제천대성(齊天大聖)은 줄곧 깐족거리는 느낌으로 김현우의 심기를 건드리려 애를 썼으나 그는 딱히 별 심경의 변화가 없는 표정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흠……."
이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듯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런 김현우의 제스처에 제천대성은
'응?'
하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고-김현우는 이내 결정했다는 듯 말했다.
"됐어."
"……뭐?"
"됐다고."
김현우의 담담한 말에 제천대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힘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 이 말이야?"
"응, 괜찮은데?"
"너 지금 그 상태로 나가면 그 뱀새끼한테 뒤지는데?"
제천대성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입을 열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그렇기는 한데."
당장 이 심상세계에서 김현우의 몸은 깨끗하게 회복되어 있었으나, 밖은 아니었다.
그의 몸은 지속된 공격으로 전혀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상처를 입었고, 거기에 덤으로 지금 김현우의 위에는 완전히 회복된 김현우의 몸으로도 피하기 힘든 일격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김현우는 무슨 생각인지 그렇게 말했다.
"너, 나한테 개발렸잖아?"
"……뭐?"
"왜? 틀린 말 했어? 나한테 개발렸잖아?"
김현우의 팩트폭행에 제천대성이 일순 어벙한 표정을 지었고. 김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한테 찍소리도 못하고 개처발린 놈 힘을 빌려봤자 이기기야 하겠냐? 그냥 편하게 뒤지고 말지."
김현우이 씩 하고 웃으며 말하자 제천대성은 반대로 인상을 팍 찌푸리며 대답했다.
"내가 무슨 개처발렸다고 그래!"
"개처발렸는데? 나한테 제대로 힘도 못 쓰고 당했는데? 업적개방도 했는데 개처발렸잖아?"
이어지는 팩트의 향연.
제천대성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말했다.
"그건 내가 손오공(孫悟空)의 업적을 제대로 전부 얻지 못하고 제천대성의 업적만을 인정받아서-!"
"어쩌라고, 그래도 결국 처발린 건 맞잖아? 응?"
"이런 썅……!"
제천대성이 이를 악물자 김현우는 쓱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게 진짜 팩트잖아? 자기보다 강한 사람한테 힘을 빌리지 자기보다 약한 사람한테 힘을 빌리지는 않잖아."
개미 손이라도 빌려야 할 때가 있다는 말을 무시하고 마치 자신의 말이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김현우의 말에 제천대성은 소리를 빽 질렀다.
"야! 내 힘만 있어도 그냥 개처바를 수 있다고!"
제천대성의 악바리 고함에 김현우는 슥 웃으며 말했다.
"그럼 줘봐."
"뭐?"
"힘 줘보라고, 진짜로 네 힘 빌리면 이길 수 있는지 확인이나 해보게."
"아니 잠깐,"
"왜, 후달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줘보라니까? 왜 네 말에 책임을 못 지냐?"
김현우가 피식하고 웃자 제천대성은 그제야 당했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김현우가 제천대성에게 강짜를 부린 이유.
그것은 제천대성이 자신에게 힘을 빌려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확신은 없었지만.'
김현우는 제천대성이 은근슬쩍 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고, 그가 단순히 자신을 놀리기 위해 이곳에 데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놀리는 거라면 내가 한창 처맞을 때 놀렸겠지.'
물론 자세히 생각해보면 맞지 않을 수도 있었던 김현우의 짐작이었으나, 적어도 지금 그의 짐작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고.
제천대성과 동등한 관계로 올라설 수 있었다.
무언가를 빌려주는 갑을 관계에서 동등한 관계로.
그리고 굳이 김현우가 그를 자극해서 동등한 관계를 만든 이유는 결국 '계약' 때문이었다.
'계약이란 건 항상 중요하니까.'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다.
기본적으로 받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는 게 세상의 이치라는 것을 무척이나 확연하게 믿고 있는 것이 김현우.
그렇기에 그는 힘을 받는 대가를 최대한으로 최소화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빌려줄 거야 말 거야?"
김현우의 말에 제천대성은 당했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있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녀석은 대가리에 뇌 대신에 구렁이 굴이 들어차 있는 게 분명하다."
"칭찬 고맙다."
"……."
제천대성은 김현우를 한번 째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 힘을 빌리는 계약의 대가부터 정하도록 하지."
제천대성은 진지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
홍콩의 상공에서, 전우치는 청룡(靑龍)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며 김현우에게로 내려가는 것을 보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역시 청룡(靑龍)의 업(業)은 대단해……!'
그동안 전우치가 도사로서, 그리고 선(仙)으로서 쌓아온 업보다도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청룡의 힘.
'저 녀석을 죽이고 올라간 뒤에는 무슨 업(業)을 얻을까……!'
이미 전우치의 머릿속에 김현우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도 그럴 게 이제 그는 몇 초 뒤면 자신이 만들어 낸 청룡에게 그 존재를 완전히 소멸 당할 터였으니까.
그래,
완벽하게 소멸당할 터였는데-
파직!
"……?"
전우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이유는 바로 김현우를 향해 내리 꽂히고 있는 청룡 때문.
분명 지상으로 향한 청룡은 그 거대한 빛을 터트리며 홍콩을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되돌리고 있었다.
빌라가 터지고, 인간이 만든 문명들이 깨끗하게 없던 것으로 돌아가고 있는 그 모습.
허나, 기이하게도 전우치는 그곳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
투툭-
전우치는 그 이상함의 근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무슨……!"
지상에 내리꽂힌 청룡은, 홍콩을 지우고 있는 것이 맞았다.
투투투투툭───!!
허나, 자세히 보면.
지상으로 내리꽂힌, 그가 만들어 낸 청룡은-콰지지지지지직!!!!!!
어느새 터져나가고 있었다.
땅에서 시작된 자그마한 금이 순식간에 거대한 용을 집어삼키고, 용의 몸을 부숴 버린다.
순식간에 터져나가기 시작하는 청룡의 몸에 전우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지상을 바라보고, 이미 그가 손을 쓸 새도 없이 모조리 터져나간 용이 있던 곳에는-
"무슨-!"
김현우가 있었다.
허나,
그의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 황금빛으로 빛나는, 마치 천사의 링처럼 그의 머리 위에 금고아(金?兒).
전우치를 똑바로 바라보는 김현우의 눈은 황금 같은 금안(金眼)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잘 있었냐?"
-씹새야.
그는 전우치를 바라보며 입가를 비틀었다.
# 154
154. 청룡(靑龍) 전우치(田禹治)(7)마치 중국 화풍에나 등장할 것 같은 그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제천대성은 조금 전 김현우가 사라진 그곳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쯧."
제천대성은 조금 전까지 자신의 앞에 있었던 김현우를 생각했다.
다소 정신머리가 이상한 그와 손쉽게 '계약'을 맺기 위해 기회를 보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불러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전우치의 공격으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유일한 동아줄인 제천대성에게 배짱을 부렸다.
마치 '공포'라는 장치가 빠진 것처럼.
"……미친 새끼."
피식.
제천대성은 자신을 도발하던 김현우의 모습을 생각하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만약 제천대성이 힘을 주지 않았다면 전우치의 일격에 그저 한 줌 흙으로 돌아갈 녀석이었을 텐데도 오히려 자신을 도발하는 그의 모습이 제천대성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야말로 일반적인 지성체가 본다면 또라이 같다는 말을 아끼지 않을 수밖에 않는 그런 모습.
허나 그런 모습이기에-
'그놈을 고른 거지.'
제천대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넓은 도원을 보았다.
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곳.
'뭐, 결국 계약을 조금 더 유리하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여의봉의 안에서 전우치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현우가 '이레귤러'라는 소리를.
'만약에 정말로 그렇다면-'
제천대성은 심오한 눈빛으로 도원을 바라보았다.
그 경치는 다른 일반인들이 보면 무척이나 감탄할 만한 것이기도 했으나, 제천대성이 보기에는 죽은 곳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천대성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도원은 완전하지 않은, 그가 겨우 탑을 한번 올라 되찾은 '공간'이었을 뿐이니까.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동료도.
자신의 부하도.
그렇기에 그 도원은 완벽했으나, 완벽하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제천대성은 그 금안으로 텅텅 비어버린 도원을 보고는-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중얼거렸다.
***
완전히 박살 난 홍콩의 한가운데에, 김현우는 서 있었다.
머리 위에는 찬란한 금고아를 쓰고, 몸에는 완전히 누더기가 되어 있던 추리닝 대신에 동양풍의 고풍스러운 붉은 갑주를 입은 김현우는 별다른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하늘에 있는 전우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씨익.
"!?"
"왜 또 너를 팰 줄 알았어?"
김현우는 그대로 전우치를 지나쳐 하늘로 치솟았다.
휘둥그레 떠지는 전우치의 눈.
"안 돼!"
전우치가 뒤늦게 입을 열며 김현우를 쫓아 축지법을 시전했으나, 이미 김현우는 여의봉의 도움으로 아직 남아 있는 먹구름의 위쪽으로 올라갔고.
"얼씨구?"
김현우는 볼 수 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먹구름 위에 펼쳐진 엄청난 크기의 마법진을.
하나하나가 복잡한 수식을 가지고 그려져 있는 마법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발동되고 있는 듯 빛을 내뿜고 있었고.
김현우는 곧 그 마법진의 한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마봉석을 보며 제천대성의 말을 떠올렸다.
'먹구름 위로 올라가 봐. 그 뱀 대가리, 아니- 청룡(靑龍)의 업적은 무척이나 고상하고 대단한 것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필시 그 위에-'
-그 야바위꾼의 장난질이 있겠지.
"빙고."
김현우는 제천대성의 말대로 먹구름 위에 마법진이 있는 것을 보며 웃음을 지었고.
"이 자식!"
그런 김현우의 뒤를 따라 온 전우치는 곧바로 그를 막기 위해 몸을 움직였으나, 이미 김현우는 마법진의 정중앙에서 기다렸다는 듯 그를 바라보곤-
"아주 야부리 잘 털더라?"
"이런 씨-"
쩌저저적-!
그대로 여의봉을 이용해 먹구름 위에 가려져 있던 마법진을 깨부쉈다.
순식간에 박살이 나기 시작한 마법진, 사방으로 푸른 마력이 튀어나가고, 먹구름 위에 있던 마법진이 붕괴하기 시작한다.
"마법진을 부순다고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전우치는 그가 마봉석을 파괴하는 그 순간을 노려, 무방비한 김현우를 죽이기 위해 청아검을 들고 달려들었으나-챙!
"응."
"!!"
김현우는 들고 있던 여의봉으로 청아검을 막아낸 뒤-씨익-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꽝!
전우치의 명치를 차 날렸다.
"크엑!"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먹구름을 뚫고 추락하는 전우치를 보며, 김현우는 그를 후려쳤던 자신의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피고는 확신했다.
'아까 전과는 다르다.'
분명 아까 전에는 전우치의 몸을 공격하기만 해도 그 공격을 타고 들어오는 뇌격 때문에 본인이 타격을 입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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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쇄자갑(黃金鎖子甲) -가-
등급: Ss
보정: 없음
스킬: 차단
-임시적으로 불러 온 아티팩트입니다.-
-정보 권한-
과거 제천대성이 용왕들에게 깽판을 쳐 얻어낸 황금쇄자갑은 -권한부족-에 의해 새로 설정되기는 했으나 아직 그 권능이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본디, 모든 공격을 막아낸다는 황금쇄자갑은 -권한부족-으로 인해 모든 속성의 공격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게 설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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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에 눈을 가져가자 주르륵 떠오르는 로그를 바라본 김현우는 자그맣게 감탄했다.
'이게 바로 템빨인가.'
그는 피식 하고 웃은 뒤 곧바로 시선을 돌려 전우치가 추락한 곧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중력의 가속도로 인해 빠르게 고도를 줄이는 김현우의 몸.
그는 저 멀리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전우치의 모습을 보곤 씨익 웃은 채 마력을 개방했다.
김현우가 마력을 개방하자마자 그의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검붉은 마력들이 대기를 잡아먹고, 그의 뒤에 익숙한 흑익과 흑원이 생겨난다.
그리고-
"사기꾼은 맞아야 고쳐진다더라?"
"이 새-!"
김현우는 떨어지는 그 상태로, 청아검을 휘두르려는 전우치의 얼굴을 잡고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꽈─────앙!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폭음소리를 낸 그 근원지에서.
꽝!
싸움은 시작되었다.
김현우의 몸이 순식간에 움직이며 전우치의 얼굴을 후려친다.
그는 어떻게든 제정신을 유지하며 대충 짐작하며 청가검을 휘두르지만-
"칼질을 왜 그렇게 못해?"
"칵!"
김현우는 그런 전우치의 칼질을 가볍게 피해내며 그의 몸을 후려쳤다.
순식간에 붕 뜨는 전우치.
김현우는 그런 전우치의 옆구리를 또 한번 후려쳤다.
쩌엉-!
마치 갑옷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처박히는 그.
"크아아악!"
전우치는 열이 받는다는 듯 잔뜩 성을 내며 칼을 휘둘렀으나 김현우는 그의 검을 모두 피해냈다.
아니, 그건 피했다고도 할 수 없었다.
"이걸 검술이라고 쓰고 있냐?"
꽝!
그의 검술(劍術)은 적어도 김현우가 봤을 때에는 수준 이하의 쓰레기였으니까.
물론 그의 검술(劍術)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은 있다.
그는 착실하게 거리를 재며 검을 내리긋고, 또 벤다.
어쩔 때는 찌르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검은 빨랐다.
김현우조차도 찌르는 그 순간의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우치가 일방적으로 김현우에게 맞고 있는 것은-
"32번? 지랄하고 있네. 이런 검술로 나를 죽일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
그가 놀라울 정도로 검(劍)을 잘 다루는 누군가와 100년 이상의 시간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는 천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김현우는 천마의 검을 떠올렸다.
베었다하면 찔려 있고, 찔려 있다 하면 베여 있는 그의 검술.
검끝을 쫓다보면 그 끝은 항상 자신의 심장이 되었고.
검날을 쫓다보면 그 끝은 결국 암전이었다.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는 수많은 묘리를 숨긴 채 검을 휘두르는 천마.
김현우는 그런 천마의 검을 100년 동안이나 마주보아 왔다.
그렇기에-
꽈아앙!
"끄에에엑!"
김현우는 전우치의 검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보는 것을 넘어서 그의 움직임만 보고도 검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들어올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저 멀리 날아가 겨우 몸을 일으키는 전우치를 보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야, 나도 똑같이 봐줬다. 원래 100번은 죽일 수 있었는데 좀 봐줬어."
"이 개씨발 새끼가!"
"어이구? 청룡의 업을 업고 이지랄저지랄 하더니 다시 욕을 시작했네?"
-좀 후달렸나 봐?
키득키득 웃는 김현우를 바라본 전우치는 이를 악물고는 입을 열었다.
"죽여 버리겠다!"
그와 함께 그의 주변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마법진.
전우치는 곧바로 마법진을 발동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오행(五行)-"
"오행은 씨발아!"
빡!
"크하악!"
"내가 너처럼 마법진 쓰는 걸 일일이 기다려 줄 것 같아?"
빠득!
"컥!"
"병신새끼야!"
빠드드득!
"끄아아악!"
김현우는 전우치의 몸을 그대로 높게 차올렸고, 전우치는 기다렸다는 듯 하늘로 날아가며 다시 먹구름을 모여들게 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비.
전우치는 상처를 입은 상태로 곧바로 자신의 손가락에 번개를 묻히고, 김현우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을 때.
"이런-"
"이 개새끼!"
전우치는 곧바로 또 떨어지는 빗물 사이로 자신의 번개를 쏘아 보냈다.
"아까처럼 개 박살을 내주지!"
순식간에 여기저기로 튀는 번개.
전우치는 손가락으로 번개를 움직여 김현우의 등을 노렸고-쾅! 콰직! 틱-!
"……!"
"무……뭐라고?"
전우치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김현우의 등을 때린 번개는-
"이야-"
"이……이럴 리가?"
김현우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마법진이 없다고는 해도 청룡의 업(業)은 그대로인데 어째서……!!'
전우치는 자신을 바라본 채 비틀린 웃음을 짓는 그를 보며 경악했고-
"역시 템빨이 좋기는 해? 그치?"
김현우는 입을 쩍 벌린 그를 놀리고는 그대로 전우치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거리.
전우치는 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내뺐으나-
"어딜 가려고?"
"!?"
김현우는 이미 금강 여의봉을 이용해 그의 앞에 와 있었고-꽈아아앙!
그대로 여의봉을 휘둘러 그를 지상에 꽂아버렸다.
빗속임에도 거대하게 날리는 흙먼지.
바닥에 처박힌 전우치는 괴악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흙먼지가 거칠 때쯤-
"청룡출두(靑龍出頭)라고?"
"!!"
전우치는 볼 수 있었다.
검붉은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대한 흑룡을.
마력으로 만들어진 흑룡은 주변의 대기를 잡아먹으며 괴악하게 성장하고 있었고, 그 흑룡을 실체화시킨 그는, 아까 전 전우치가 있던 모습 그대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무-"
파지지지직!!!!
전우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어느 정도 몸을 불린 흑룡이 검붉은 번개를 사방으로 내뿜는다.
그리고-
"필살기가 하나 더 생겼네-?"
전우치는 그 흑룡이 자신에게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허나-
"!!"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는 몸.
그것은 바로 주변에 팽창하고 있는 김현우의 마력 때문이었다.
"크아아아악!"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주변으로 청룡의 번개를 방출했다.
순식간에 방출된 번개는 푸른색의 스파크를 튀기며 김현우의 마령 팽창을 중화했고.
그로 인해 전우치의 몸은 자유를 찾고 몸을 움직일 수 있었으나.
"아-"
이미-
"흑룡출두(黑龍出頭)-"
-흑룡은 전우치의 앞에서 그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세상이 검붉은 번개로 물들기 시작했다.
# 155
155. 다섯 명 이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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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탑의 끝에서 내려온 정복자를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위치: 중국 홍콩
[정복자 괴선(怪仙) '전우치(田禹治)' 잡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정보 권한의 실적이 누적됩니다!]
[현재 정보권한은 중상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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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박살 난 홍콩의 한가운데에서, 김현우는 그 로그를 보며 털썩 주저앉아 주변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완전히 박살 난 홍콩의 모습.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문명의 이기조차도 완전히 쓸려가 버린 허한 풍경이 보였고,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그나마 도시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뭐, 그래 봤자 멸망한 세계처럼 보인다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윽!?"
김현우는 멍하니 반파되어 버린 도시를 보다, 저도 모르게 느껴지는 고통에 깜짝 놀라 자신의 몸을 확인했고.
"아……."
자신의 몸에 입혀져 있던 붉은 갑주가 사라져간다는 것을 보고 '힘'의 사용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쯧."
그와 함께 몸에서 느껴져 오는 아릿한 고통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그는 전우치가 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려 그 곳에 홀연히 놓여 있는 영롱한 푸른 보석을 확인하곤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와 함께 눈앞에 떠오르는 로그.
허나 김현우는 곧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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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의 업(業)
등급: ??
보정: ??
스킬: ??
-정보 권한-
사신(四神) 중에서도 중에서 가장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이며 다른 용들의 수장이라고도 불리는 청룡(靑龍)의 업(業)을 농축해 담아놓은 보석이다.
청룡(靑龍)은 4개의 방위 중에서도 동쪽을 수호하는 수호신이며 비와 구름, 바람과 천둥번개를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청룡은 탑에 올라 -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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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이게 뭐야?"
김현우는 주르륵 떠오르는 정보권한을 읽다 제일 밑에 떠오르는 로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보권한이 중상위에 오르고 나서는 이런 식으로 권한부족이 뜬 적은 단연코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심하게 권한부족이 나온 적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어미나 접두사 같은 것은 보여 권한부족에 막히지 않았으니까.
허나 이 아티팩트는 그냥 문장 전체가 블라인드 처리된 것처럼 권한부족이 붙어 있었다.
"에휴 모르겠다."
-나중에 아브한테 물어보지 뭐.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짜증을 낼 힘도 없는지 한숨을 내쉬며 청룡의 업을 주머니에 넣고 그 자리에 대자로 누워 버렸다.
온몸에 아릿하게 느껴지는 고통.
"에휴……."
전우치를 처리하고 나니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인지 몸이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으나 김현우는 태평하게 먹구름이 개기 시작한 하늘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리곤-
"누가 구하러 오겠지."
김현우는 눈을 감았다.
***
그로부터 정확히 3일 뒤.
[고인물 헌터 김현우, 밝혀지지 않은 미상의 재앙(災殃)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다.]
[김현우 헌터 이번에는 중상이다? 3일 전 병원으로 긴급히 옮겨지는 김현우 헌터의 모습]
[그의 강함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패도 길드장 패룡, 김현우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몰려든 기자들에게 폭언 '뒤지기 전에 전부 꺼져라.]
……
…….
……
.
"스승님, 한번 드셔보십시오."
"그건 뭐냐?"
"스승님이 육류를 드시고 싶다기에 준비해 봤습니다."
대학병원의 VVIP 병실 안.
분명 일반적인 병실과는 2배 이상의 크기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방 안에 가득 펼쳐져 있는 음식들을 보며, 김현우는 말했다.
"제자야."
"예, 스승님."
"내가 저번에도 말했듯이 모든 건 너무 과하면 안 좋아."
"……죄송합니다."
김현우의 말에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미령.
그런 그녀의 너머로 하나린은 비웃음과 흡사해 보이는 미소로 미령을 보며 말했다.
"어머, 사저.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무엇이든지 과한 건 좋지 않다고. 게다가 사부님은 현재 입원 중이신데 육류를 드시겠어요?"
하나린은 그렇게 말하곤 김현우를 향해 다가서며 유명 메이커의 죽을 꺼내며 말했-
"자 사부님 시장하실 텐데 죽을 좀-"
"스승님. 저년…… 이 아니라, 사매는 대학병원 앞에 있는 죽집을 사들여서 판을 벌리고 있습니다."
"……."
순간 찌릿하며 서로를 노려보는 미령과 하나린.
하나린은 슬쩍 김현우의 눈치를 보며 시선을 피했고, 미령은 쌤통이라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물론 김현우가 전혀 보지 못할 만한 각도에서.
"……에휴."
뭐,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각도라고 생각하는 건 그 둘뿐이었고, 김현우에게는 그런 제자들의 싸움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쟤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분명 하나린과 미령이 만난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물론 '엄청 많은'시간은 아니었으나 대충 시간을 재보면 약 2달 정도는 된 것 같은데, 아직도 제자들은 친해지지 못하고 있었다.
"사저, 상식적으로 스승님에게 육류를 드리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응? 뭐라고? 저번에 스승님이 치킨이 먹고 싶다고 해서 고급 닭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프렌차이즈 닭집들을 사들인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사부님은 그런 '평범한' 치킨을 드시고 싶어 하는 거라고요!"
"스승님에게 그런 저급한 닭을-"
점점 이야기가 산으로 가기 시작하는 그 둘.
원래 처음에 어버버 거리며 화를 내기만 하던 미령은 하도 하나린과 말다툼을 해서 그런지 제법 꼬투리를 잡는 방법이 늘어난 게 느껴졌다.
뭐, 그게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둘 다 나가."
"……옙."
"네……."
"저기 가지고 온 스테이크랑 죽은 두고."
김현우의 축객령에 시무룩해졌던 그녀들은 이내 그의 말에 다시 표정을 바꾸며 그에게 스테이크와 죽을 가져다주었다.
'얘들 진짜 조울증 아니야?'
어째 기분이 저렇게 왔다 갔다 해?
김현우는 웃었던 그녀들이 금세 서로를 째려보며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곧 그는 죽을 떠먹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됐고.'
전우치를 처리한 지 3일.
김현우는 아브에게도 가지 않고 미령과 하나린의 호들갑에 따라 세계최고의 힐러 헌터에게까지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
'확실히 돈을 쓰면 좀 다르구만.'
홍콩에서 실려 올 때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던 김현우는 3일 만에 몸을 평범하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할 수 있었다.
경이로운 회복속도.
전우치와의 싸움은 김현우가 그동안 싸움을 하며 가장 많이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바르니 이전보다 훨씬 빨리 나았다.
그렇게 김현우가 멍하니 죽을 먹고 있을 때쯤.
끼이익-
문을 열며 김시현이 들어왔다.
"어 왔어?"
"네 그런데……."
"?"
"형, 쟤들 또 싸우는데요?"
"놔둬."
김시현이 슬쩍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자 김현우는 간단하게 일축하고는 이번에는 아직 따끈한 스테이크를 입에 집어넣었다.
"오……!"
역시 미령이 가져온 거라 그런지 굉장히 맛있었다.
김시현은 말없이 스테이크를 집어 먹는 김현우를 보고는 이내 그의 옆에 앉아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몸은 어떠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굉장히 멀쩡하시네요?"
"그럼 안 멀쩡했으면 좋겠냐?"
"그런 뜻이 아니란 건 알죠? 그냥 돈의 힘이 굉장히 위대한 것 같다고 생각한 거죠."
김시현은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를 바라봤다.
환자복 너머로도 보였던 시퍼런 멍과 뼈가 보일 정도로 파였던 살들은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뭐, 상처는 남아 있는 것 같지만.'
김시현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형."
"왜?"
"유튜브에 찍힌 영상 말인데요."
"……유튜브에 찍힌 영상……? 아."
김현우는 얼마 전 스마트폰에서 보았던 영상을 떠올렸다.
그것은 도대체 어떻게 찍혔는지 모를 전우치와 김현우의 전투 영상이었다.
비록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고 김현우와 전우치의 이동속도가 너무나도 빨라 제대로 된 영상은 찍히지도 않았으나 그래도 몇몇 개 찍힌 것들이 있기는 있었다.
"그게 왜?"
"그 영상에서 보면 형이 추리닝 말고 다른 옷을 입고 있잖아요?"
"아……그거?"
"네. 근데 그거…… 저번 등반자인 제천대성이 입고 있었던 옷 아니에요?"
김시현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정확히는 황금쇄좌갑이라고 하는데, 그게 왜?"
"형은 그걸 갑자기 어디서 들고 나와서 입은 거예요?"
김시현의 물음에 김현우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계약을 했거든."
"계약이요?"
"그래."
김현우는 곧바로 김시현에게 전우치와 싸울 때 제천대성의 심상세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주었고, 김시현은 멍한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다 말했다.
"그러니까.
'힘을 빌릴 때마다 감각을 공유한다.'
랑……."
"한 달에 한 번 감각 공유해서 맛있는 거 먹기. 그리고-"
"……그리고?"
"뭐, 그건 선택사항이라고 했으니 됐고. 아무튼 대충 걸린 제약은 이 정도지."
"그것밖에 안 된다고요?"
김현우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제천대성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 그에게 계약사항을 들었을 때 김현우는 김시현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김현우는 괴력난신과 계약한 미령을 본 상태였고, 계약이라는 게 얼마나 많은 힘을 가져다주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제천대성이 다른 수를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했으나 결국 시간이 그렇게 많이 있지는 않았으나 결국 그는 제천대성이 업을 걸고 맹세를 하고 나서야 계약을 했다.
'사실 뭔가 적당한 구실로 나와 계약한 것 같지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김현우는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제천대성이 뭔가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서 자신과 계약했다는 그 느낌.
'……뭐, 결국 내가 피해를 보는 것은 없으니까.'
김현우는 좀 한정적이기는 하지만 결국 이번으로 제천대성의 힘을 빌려 쓸 수 있게 되었고.
제천대성은 뭔가 노리는 바가 있는 것 같기는 했으나 제천대성이 김현우와 맺은 계약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김현우가 손해를 볼 만한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계약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힘을 거의 공짜로 얻는 압도적인 이득이 있을 뿐.
물론 제천대성이 '선택사항'으로 해달라는 일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계약 내용이 아닌 부탁이었기에 그리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해줄 수 있으면 해주고,
못 해주면 어쩔 수 없다 정도의 내용.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약에 대한 생각을 다른 한 곳으로 밀어 넣으며 김시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봤어?"
"아, 그거 말인데요."
그의 물음에 김시현은 곧바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무엇인가를 검색하기 시작했고.
조금의 시간이 걸려, 김시현은 그에게 스마트폰을 보여 주었다.
"이것 때문에요."
"그게 뭔데?"
김현우는 김시현의 스마트폰을 가져가며 안에 써져 있는 내용을 확인했고, 이내 한동안 스마트폰 속에 있는 기사를 읽던 김현우는.
피식.
"또 지랄병이 도졌어?"
웃음을 지으며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 156
156. 다섯 명 이론(2)
어느 명대사가 있다.
사람이 다섯 명이 모이면 그중 한 명은 병신이라는 명대사.
김현우는 어디선가에서 들었던 그 대사를 나름대로 굉장히 잘 만든 대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탑에서 그 명대사에 부합하는 상황을 정말 많이 보았으니까.
김현우가 처음 탑에 들어갔을 때도 그는 그런 상황을 본 적이 있었고. 그가 탑에 갇히고 난 뒤에도 몇 번이고 그런 상황을 본 적이 있었다.
팀원 한 명의 트롤로 인해 전부가 피해를 입는 그런 병신 같은 사례를.
그리고, 김현우가 그때 떠올렸던 명대사를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바로 김시현의 폰 안에 나온 한 기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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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 몬타나 주에 속해 있던 빌링스를 파괴한 재앙(災殃) 제천대성과 연관이 있다!?]
지난 3일, 전 세계의 이목을 한눈에 끌고 있는 '고인물'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헌터 김현우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재앙(災殃)을 막기 위해 홍콩으로 향했다.
그리고 김현우는 홍콩에 일어난 재앙을 막는 도중, 우리들의 눈에 굉장히 익숙한 갑옷을 사용했다.
[자료 사진]
위의 사진은 김현우가 몬타나 주에 나타난 재앙을 죽이기 전, 재앙을 막기 위해 미궁 앞에 대기해 있었던 고 이클립스 길드원의 영상에 찍혀 있는 재앙의 모습이다.
……
…….
……
.
(중략)
.
……
…….
…….
그리하여 유튜브에 전우치와 김현우의 전투장면이 찍혀 있는 1분 50초가량에 김현우는 위 자료사진에 나왔던 재앙의 갑옷과 무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통해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한 축에서는 '김현우'와'재앙(災殃)'에 관한 음모론 설이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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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어디에 있는 기사야?"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김시현은 말했다.
"어젯밤부터 갑작스레 팍 뜬 기사에요. 분명 찌라시지만 갑작스레 팍 떠올라서 저도 형한테 물어본 거거든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피식 웃음을 짓고는 중얼거렸다.
"이건 왜 기자 이름도 안 써져 있어?"
"올리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이야, 우리 기레기들 진짜 어그로 끄는 재주가 거의 천부적이다 못해 감탄이 나올 지경이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인터넷 기사의 스크롤을 왔다 갔다 하며 무엇인가를 읽고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감탄했다.
'진짜 이런 걸 볼 때마다…….'
'기자'들이 아닌 '기레기'들은 그 다섯 명 중 한 명의 병신을 모아 놓은 녀석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현우는 그렇게 스마트폰을 쥐고는 입을 열었다.
"애들아-"
"부르셨습니까! 스승님!"
"네 왔어요! 사부님!"
김현우가 부르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와 그의 앞에 서는 그녀들에게 스마트폰을 넘겨주며 물었고.
미령과 하나린은 머리를 맞대고 스마트폰을 보더니-뿌드드득-
"아, 내 스마트폰-"
"죽여 버리고 오겠습니다."
"죽일까요?"
"……."
'어째 그렇게 사이가 안 좋으면서도 특정 질문에 대답할 때는 저렇게 나사가 빠진 것 같은 대사를 똑같이 칠 수 있을까.'
김시현이 스마트폰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 목소리를 냈으나, 김현우는 그 둘을 보며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죽이라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그냥 정도껏…… 음, 뭐라고 해야 해? 잘 통제하라?, 아니 이건 좀 아닌 것 같고……."
김현우는 혼자 중얼거리더니 다시 말했다.
"죽이지 말고, 좀 잘 타이르라 이거지. 이런 거 쓰지 말라고…… 응?"
"이해했습니다."
"이해한 거 맞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여는 김현우는 의문이 서린 듯 다시 물었으나 미령은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이해했다는 것을 어필했다.
"그래, 그러면 뭐……."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넘어가려 했으나-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쪽은 분명 사저께서 통제하고 계신다고 하길래 제가 굳이 나서지 않았는데…… 후……."
"……."
-하나린은
'이때다!'
라는 표정으로 꼬투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역시 사부님을 보좌하는 건 역시 저에게 어울릴 것 같아요."
"이건 어쩌다 보-"
"어쩌다 보니라니, 설마 변명을 하실 생각? 하긴, 애초에 무력밖에 그다지 자랑 할- 어머 실수, 무력만 강하신 사저께서는 이런 부분에서는 다소 서투를 수 있죠."
씨익.
"-이해해요."
으득.
"……이게 진짜……!"
김현우는 또 한판 붙으려는 그 둘을 보며 말했다.
"나가서 싸워라."
그의 말 한마디에 순한 양처럼 변해 문 밖으로 나가는 미령과 하나린.
김현우는 그 둘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다가 물었다.
"지금 기자들 1층에 몰려 있냐?"
그의 물음에 김시현은 완전히 박살 난 채 돌아온 자신의 스마트폰에 대해 말하려다 이내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네. 아주 진을 치고 있더라고요."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병원 1층을 생각했다.
어째 병원 소속 환자보다 김현우가 언제 나올까를 고대하며 그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이 훨씬 많은 상황.
분명 병원에서 통제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떠한 핑계를 대고 들어와서 시즈를 박고 있는 기자들의 모습을 떠올린 김시현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김현우는 그런 김시현의 모습을 보곤 말했다.
"야, 그럼 조금 이따 갈 때 내려가서 말 좀 해줘라."
"네? 무슨 말이요?"
"내일 기자회견 열거니까 오늘은 다 편하게 쉬고 내일 와서 기자회견이나 하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죽을 먹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기레기들 다시 쿨타임이 돈 것 같으니까 또 적당히 말을 해둬야 하지 않겠어?"
***
올해 나이로 33세의 나이를 가진 남자 엄석대는, 작은 중소규모 포털 사이트의 메인기자다.
물론 한국에서 중소규모 포털사이트는 제대로 살아남지도 못하는 볼모지와도 같은 곳.
그렇기에 사실 이미 그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는 '포털 사이트'보단, '뉴스 사이트'라고 보는 게 옳았다.
더 정확히는 자극적인 찌라시 기사를 만들어내는 '찌라시 기사 사이트'라 칭하는 게 옳을 정도로 그 사이트에는 정상적인 기사가 올라오지 않았다.
올라오는 기사라고는 하나같이 네티즌들의 어그로를 끌기 위해 만들어진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기사뿐.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런 기사를 쓰는가?
이유는 바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잘 쓴 기사라도 어차피 중소규모의 기사다보니 사람들이 봐주지를 않고 메인에 올라가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이 선택한 것은 조금이라도 어그로를 끌어서 사회적으로 이슈를 얻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근 그 사이트에서 엄석대는 무척이나 성공적으로 어그로를 끌었다.
정확히는 김현우를 이용해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그의 기사 하나만으로 사이트의 접속자수가 전일에 비해 32배나 폭증했으니까.
거기에다 덤으로 이슈 게시판 여기저기에 퍼지면서 그의 기사는 인터넷 전체에 퍼졌다.
그것도 순식간에.
그렇기에 엄석대는 인센티브제로 운영되는 기자들 중에서 이번에 가장 큰 급여를 받을 수 있겠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물론 사람들 사이에서 '김현우'에 대한 안 좋은 기사를 쓰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를 듣기는 했으나 그는 별로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돈이었으니까.
그래,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성공적인 어그로를 자축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끄아아아악! 살려줘! 살려줘!!!"
엄석대는 온몸에 달라붙어 자신의 몸을 씹어대는 고통에 몸부림쳤으나 그의 팔과 다리는 의자에 묶여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까짓 까짓-
"끄악!!"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몸 깊숙이 파고들어 그의 몸을 갉아먹는 식인 쥐들을 보며 비명을 지르며 어제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기분이 좋아서 같은 기자들과 룸에 가서 술을 마시고, 오랜만에 기분 좋게 취한 채로 집으로 귀가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는 식인 쥐가 있는 이곳에서 눈을 떴다.
"끄아아아아악! 누구 없어요!? 누구 없냐고요!!!"
그는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이는 어둠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찾았으나 들리는 목소리는 없었다.
아니-
"고통스럽나?"
있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엄석대는 그 소녀의 목소리가 자신의 앞에서 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크게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여기서 죽기는 싫어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걱정하지마라 죽지는 않을 테니."
비명을 지르듯 크게 외치는 엄석대와 달리 소녀, 미령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건조했다.
"그……그게 무슨!"
"네 목에 내구를 올려주는 목걸이를 걸어 놨다. 일반인 상태에서도 ST+는 적용되니 아마 식인쥐가 너를 죽이는 일은 없을 거다. 뭐 좀 아플 수는 있겠지만."
소녀의 중얼거림에 엄석내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발작하며 물었다.
"대체 왜! 대체 왜에에에에!!!"
"설마 이유를 묻는 것이냐? 네가 지금 왜 이런 꼴을 당하는지?"
"살려줘! 살려줘!!! 나는 이런 일을 당할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단 말이야!"
엄석대의 비명에 미령은 짧게 혀를 차곤 말했다.
"……스승님이 옳았군."
"끄아아악!"
"너는 깔끔하게 죽이는 게 아니라 네가 이곳에서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 깨우치는 게 우선인 것 같군."
"살려줘!!!!!"
"걱정 마라, 스승님은 무척이나 호의가 넘치시는 분이라 쓰레기 같은 짓을 한 네게도 그리 과한 처벌을 내리진 않으셨으니까. 아마-"
3일 정도만 버티면 될 거다.
"제발! 안 돼!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으아아아아악!!!"
미령은 그 말을 끝으로 비명을 지르는 그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렸고, 그렇게 미령이 고작 하루도 안 되는 시간에 그를 패도길드의 본궁으로 데리고 갔을 때.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대학병원에서는-
"저기 나온다 저기!"
"김현우 헌터다!"
이제 막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타난 김현우를 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허나 그렇게 시끌벅적하고 웅성거림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그 누구하나 김현우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김현우가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질문을 하다 참변을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김현우는 몰려들지 않고 적당히 선을 지키며 일정이상 다가오지 않는 기자들을 보며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여기는 사람 다니는 곳이라 민폐니까 우리 밖으로 이동해서 하도록 합니다."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움직이자마자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터주는 기자들을 보며 그는 주변을 돌아봤다.
'기자들이 아주 판을 깔고 앉았구만.'
어째 1층의 로비에 환자보다 기자들이 더 많은 것 같다는 감상을 남기며 김현우는 병원 밖으로 몸을 옮겼고, 기자들은 그런 김현우를 따라 병원 밖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대충 기자회견을 할 곳을 찾다 적당히 기자들이 모여 있을 수 있는 미니 광장을 발견한 김현우는 곧 그쪽으로 움직였고.
기자들은 곧 광장에 도착해 그의 주변으로 둘러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회견장.
김현우는 제각각 패드나 노트북, 그리고 녹음기를 들고 있는 기자들을 보며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우선 저번처럼 서로 불쾌해질 일이 없어서 참 좋았네요. 드디어 다들 예의를 배우신 것 같아서 참 보기 좋습니다."
어쩌면 싹수없어 보일 수 있는 발언에도 기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자, 그럼 오늘은 질문은 받기 이전에 한 가지만 좀 짚고 넘어가 볼게요."
이내 잠시의 침묵 뒤에,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 157
157. 다섯 명 이론(3)
김현우는 작은 광장 안에 모여든 기자들을 한번 쭉 돌아 본 뒤 이내 스마트폰을 꺼내들며 말했다.
"제가 어제 뉴스를 좀 보다 보니까, 좀 재미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스마트폰을 조작하기 시작하는 김현우.
그는 어제 자신의 스마트폰을 이용해 미리 캡쳐해 놓은 기사를 기자들에게 보였다.
"여기에 써져 있는 게 제 음모론이던데, 어제 이것 때문에 활활 타오르더라고요."
뭐-
"뭐, 다들 기자이니만큼 어느 기사가 돌아다니고 있는지는 전부 아시죠?"
김현우의 말에 기자들이 답하지 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그는 이내 슬쩍 시선을 내려 녹음기를 들고 있는 기자를 가리켰다.
"거기."
"예?"
"거기요. 녹음기 들고 있으신 분. 알고 계시죠?"
김현우의 물음에 기자는 왠지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듯했으나 이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고 있기는 합니다."
그의 말에 김현우는 다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자, 이렇게 기자랑 사람들한테 다 알려질 정도로 소문이 퍼졌는데, 뭐 '당연히' 여기 있는 모두가 아시겠지만 제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게 낫겠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하수분의 주머니 속에서 여의봉을 꺼냈다.
"저게 그……."
"여의봉(如意棒) 인가."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한 기자들을 둘러보며 김현우는 말을 이었다.
"우선 맨 처음으로, 지금 인터넷에 뿌려져 있는 음모론은 말 그대로 '음모론'일 뿐이고 저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료에 나온 저 옷은 여의봉의 스킬 중 하나로, 저는 여의봉의 스킬을 사용한 겁니다."
김현우의 말과 함께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 사례.
기자는 너나 할 것 없이 노트북에 손을 올리고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타자를 치기 시작했고, 그는 여의봉(如意棒)을 집어넣고 기자들에게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이게 사실 제일 중요한 거니까 손가락은 제 이야기를 마저 듣고 놀리세요."
김현우의 말에 거짓말처럼 키보드에서 손을 넣는 기자들.
물론 개중에서는 계속해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이들도 있었으나 김현우는 딱히 제지하지 않은 채 입가에 미소를 지었고.
"자, 제가 이번에는 이렇게 음모론이 돌아서 직접 이렇게 나와 해명을 하기는 했는데,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정말 만약에-"
이내-
"제가 이렇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나면-"
김현우는 이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진짜 뒤집니다."
"헉……."
김현우가 말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기자들.
그의 말을 무시한 채 키보드를 치고 있던 기자도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멈춘 채 그를 바라봤고, 김현우는 곧 다시 미소를 짓곤 장난스럽게 이야기 했다.
"물론 진짜로 제가 찾아가서 죽여 버린다는 소리는 아니라는 거 아시죠?"
씨익-
"어떻게 일반인이라고는 한 번도 때려보지 않은 제가 그러겠습니까? 예? 아셨죠? 저기요, 아셨어요?"
"예? 아, 예예……."
뜬금없이 김현우가 묻자 그는 어리둥절하게 대답하면서고 곧바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 모습을 만족했다는 듯 바라본 김현우는 이내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기자회견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자회견 방법은 알죠? 그냥 제가 지목하면 질문해 주시면 됩니다. 우선 거기 아까 제가 가리켰던 기자분."
"아, 예!"
"질문하세요."
김현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자가 입을 열며 기자회견은 시작되었다.
기자들이 질문하고, 김현우는 그 물음에 답한다.
"김현우 헌터, 이번에 갑작스레 홍콩에 나타난 재앙을 상대할 때 매우 크게 다치셨는데, 지금 상태는 어떠십니까?"
"거의 다 회복 됐습니다. 다음."
"김현우 헌터! 이전에 김시현 헌터와 추가적인 기자회견을 진행하신다고 했는데, 그 기자회견은 언제쯤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아,"
'생각해 보면 그런 것도 있었지.'
김시현이 허수 공간에서 빠져나왔을 때 김현우는 대충 한번 모여서 기자회견을 한다고 말한 이후에 기자들을 회피한 적이 있었다.
"뭐, 그건 조만간 하겠습니다. 근데 어차피 제가 아니라 시현이하고 해야 하지 않나? 다음."
"김현우 헌터! 이번에 김현우 헌터가 길드장으로 있는 가디언 길드 사무소의 양쪽에 패도길드 지부와 이번에 신생으로 생긴 '암중(暗中)'길드가 터를 잡은 건 알고 계신가요?"
"……그래요? 제가 길드에 잘 가지를 않아서."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인데도 불구하고 길드를 잘 가지 않는다는 소리를 당당하게 하는 김현우.
허나 기자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가디언 길드 옆에 자리를 잡은 신생 길드, 암중(暗中)길드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모르겠네요."
"네?"
"제가 그 길드랑 딱히 관련이 없는데 어떻게 압니까?"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기자는 당황한 듯 했으나 이내 슬쩍 물었다.
"그, 최근 3일 간 패도 길드장 패룡과 함께 김현우 헌터의 병실을 들락날락 거린 사람이 암중 길드의 길드장인 하나린 헌터로 알고 있어서……."
기자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말꼬리를 흐렸고, 김현우는 응?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어? 혹시 모르고 계셨던-"
기자는 괜히 질문하려다가 멈칫하며 김현우의 눈치를 봤고, 그는 기자의 시선을 느끼곤 짧게 말했다.
'길드는 언제 만들었어?'
자신의 제자인 하나린에게는 아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기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그는 말했다.
"뭐, 그 길드하고는 관계없고 나린이 하고는 관계가 있네요."
"혹시 무슨 관계인지 여쭤도 될까요?"
"제자요."
"네?"
"제자요."
"……네?"
"아니, 말 못 들었어요? 내 제자라니까? 탑에서 인연이 있었던 두 번째 제잡니다."
김현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순간 정적이 일어난 기자들은, 이내 어느 한 명의 키보드 소리를 기점으로 순식간에 시끄러워지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기자회견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자 그럼 기자회견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김현우는 기자회견을 끝내며.
"그리고 제가 거듭해서 말하지만 제 음모론을 날조해서 올릴 생각을 아직도 하고 계시는 기자가 있다면, 진짜 조심해요. 진짜 걸리면-"
-알죠?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광장에 몰려 있는 기자들을 놔두고 홀연히 병원 밖으로 걸음을 옮겨-
"바로 집으로 갈까요?"
김현우는 병원 너머에 곧바로 차를 준비해 대기하고 있는 하나린의 물음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했다.
"아니, 집이 아니라 다른 데로."
"다른 곳이라고 말씀하시면?"
"오랜만에 길드사무소에 좀 들리자."
생각해 보니까 저번에도 마찬가지고 이번에는 이계에 갔다 온 뒤로 한 번도 길드 사무소를 들린 적이 없었다.
'내가 만든 길드인데 조금은 관심을 가져야지.'
조금 늦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뒤로 채우고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박아 넣은 김현우는 이내 하나린이 대기시켜 놓은 차에 탑승했고 하나린은 그의 옆에 탑승하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 꼬맹이년도 없으니…….'
하나린은 슬쩍 시선을 돌리며 옆자리에 앉은 김현우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김현우의 옆에 붙어 있던 미령 덕분에 그녀는 그의 옆에 제대로 서 있어 본적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미령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렇기에 하나린은 이 시간을 무척이나 소중이 할 생각이었다.
'이미 운전수한테는 일부러 시간을 끌라고 말을 해놨으니까…….'
그동안은 사부님과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
어쩌면 그다음도……?
하나린은 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막지 않고 김현우를 바라봤고, 곧 그녀가 문을 닫자마자 세단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린이 제대로 입을 열기도 전에-
"아,"
"……?"
"나 잠깐 어디 좀 갔다 올게."
"네? 사부님 어디를……."
그녀의 물음에 김현우는 답했다.
"차는 계속 운전하고 있어도 돼. 잠깐 저쪽에 갔다 오는 거니까."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더니 갑작스레 무엇인가를 중얼거렸고, 하나린이 제대로 묻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
"……."
한순간 사라져 버린 김현우의 모습에 하나린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그가 있던 자리를 바라봤고, 그것은 앞에 있던 운전수도 마찬가지였다.
잠시간의 침묵.
운전수는 사라진 김현우의 모습을 보곤 말했다.
"저기…… 출발할까요?"
운전수의 물음에 그녀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천천히 출발해요, 물론 목적지에 도착하지 말고 그냥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요."
"네……?"
'절대로 사부님과 데이트를 즐기고 말겠어.'
그렇게 결심하며 오기 어린 눈빛을 불태웠다.
***
그렇게 하나린이 김현우와의 카 데이트를 결심하며 길드사무소에는 도착하지 않고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쯤.
"으음……."
시스템 룸에서는 아브가 자신의 손에 들린 청룡의 업(業)을 보고는 말했다.
"이거-"
"뭔가 알아냈어?"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말했다.
"아뇨, 실질적으로 정보권한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없었어요. 사실 어느 정보가 되었든 '권한'근처를 우회하면 정보를 끄트머리라도 볼 수 있는데……."
아브는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건 그런 것도 찾기 힘들어요. 그나마 알아내 것은 있지만 그렇게 유효한 정보는 아니고요."
"무슨 정보인데?"
"말 그대로 이 보석 안에 진짜로 청룡의 업(業)이 들어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이 보석 자체에 엄청난 힘이 들어 있다는 것 정도예요."
아브는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보석을 넘겨주었고,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보석을 넘겨받은 뒤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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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권한-
사신(四神) 중에서도 중에서 가장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이며 다른 용들의 수장이라고도 불리는 청룡(靑龍)의 업(業)을 농축해 담아놓은 보석이다.
청룡(靑龍)은 4개의 방위 중에서도 동쪽을 수호하는 수호신이며 비와 구름, 바람과 천둥번개를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청룡은 탑에 올라 -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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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생길 줄 알았는데…….'
정보권한 마저도 굉장히 이상하게 떠오르는 통이라서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고 있기는 했으나 역시나였다.
'뭐, 그래도 이건 메인이 아니니까.'
김현우는 청룡의 업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다른 건 어때."
"다른 거요?"
"그래, 내가 저번에 말해 뒀잖아? '제작자'가 만든 '탑'에 대해서."
"아 그건……."
"그건……?"
김현우가 묻자 아브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결국 찾기는 찾았어요. 찾기는 했는데…… 이게 좀 뭐라고 해야 하지? 확실하지 않다고 해야 하나?"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정보의 정확성이 조금 떨어져요. 조금 애매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우선 그거라도 말해봐."
아브의 말에 감현우는 물었고.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제가 조사한 바로, '제작자'가 말한, 그 탑이라는 건 아마 이 바로 윗계층에 있는 탑인 것 같아요."
# 158
158. 너희들 뭐 하니?(1)
"……이 윗계층에 있는 탑이라고?"
김현우가 묻자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번에 말씀드린 적 있잖아요? 튜토리얼 탑을 만든 사람은 '제작자'라고."
"그래, 네가 그 말을 해줘서 그놈 위치 파악하려고 8계층까지 내려갔다 왔지."
김현우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아브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사실 이건 조금 더 파악해 봐야 하는 문제지만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작자가 만든 탑은 '튜토리얼 탑'말고도 다른 탑도 있는 것 같아요."
"다른 탑?"
"예, 정확히 그 탑이 무엇에 쓰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탑은 튜토리얼 탑과는 다르게 이 윗계층에 겉면이 실존하는 것 같아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민하다 말했다.
"그럼 내가 윗계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 말이야?"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고 김현우는 말했다.
"뭐야, 그럼 거의 다 조사한 거 아니야? 어차피 나는 직접 탑에 들어가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우선 탑의 소재에 대해서는 전부 조사가 끝나긴 했는데…… 문제는 위치예요."
"뭔가 문제야? 윗계층에 있다며?"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말했다.
"네, 윗계층에 있기는 한데……."
"그런데?"
"정확히 어디에 있는 줄 모르겠어요."
"……응?"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웠고, 아브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제작자가 만든 '탑'이 위에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정확히 몇 계층에 그 탑이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를 못했어요."
"……."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그러니까, 정확히 탑이 몇 계층에 있는지 모른다는 거지?"
"네. 아마 이건 조금 더 권한을 뒤적이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것 같긴 해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다 말했다.
"대충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은데?"
"음…… 이번에는 정보권한이 거의 안 풀린 정보를 찾는 거라서…… 대충 2주에서 3주 정도는 걸릴 것 같아요."
"뭐, 알았어. 그럼 그때쯤이면 대충 알 수 있다 이 말이지?"
"네."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올라가고 싶지만'
역시 정보는 확실한 편이 좋았다.
게다가 '악천의 원천'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미궁게이지를 채워야 하는 만큼 어느 정도의 준비시간도 필요했다.
뭐 그래 봤자 그건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이내 몸을 돌리려다, 어? 하는 생각에 아브를 돌아보았다.
"야."
"네?"
"생각해 보니까 그건 그거고…… 청룡의 업(業)있잖아?"
"네."
"여기다가 악천의 원천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어? 하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요? 만약 그럴 수 있으면 굳이 제가 해석을 하지 않아도 청룡의 업(業)에 대해서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길드 사무소에 들르고 나면 곧바로 미궁부터 들러야겠네."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그렇게 아브와의 이야기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오셨어요? 사부님."
"아직 도착 안 했어?"
"예. 길이 조금 막혀서 생각보다 조금 늦어지고 있어요."
김현우는 아직도 시내를 돌고 있는 차량을 보며 하나린에게 물었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김현우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 보이는 하나린을 슬쩍 바라봤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시선을 돌렸고.
곧 김현우는 대충 30분정도의 시간이 걸려 가디언 길드사무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 병원에서 총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를 1시간 30분 동안 이리저리 꼬아서 운전해야 했던 운전사는 기진맥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흐흥~!"
하나린은 굉장히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김현우는 그런 하나린을 보며 말했다.
'원래 차 타는 걸 좋아하나?'
맨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맨날 미령과 치고받고 하는 모습을 보느라 저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거의 못 보았기에 김현우는 묘한 의문을 느꼈다.
"들어가자."
그러나 생각도 잠시.
김현우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고, 하나린은 그런 그를 따라 같이 사무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엘리베이터를 탑승해 꼭대기 층에 있는 집무실로 향하는 김현우와 하나린.
띵-
엘리베이터의 소리와 함께 마침내 꼭대기 층에 도착한 김현우는 곧바로 몸을 움직여 바로 앞에 있는 문을 열며 말했고-
"나왔다."
"힉!"
"헉!"
"?"
김현우는 멍하니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뭐, 집무실의 풍경은 나쁘지 않았다.
이전번과 달라진 것도 거의 없었고, 그냥 깨끗한 집무실 정도?
허나 김현우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
"……어머."
김현우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오지 않는 그를 대신해 이 집무실을 사용하고 있는 아냐와-
"아니, 형? 그러니까 이게……."
어째서인지 분명히 이곳에 있는 게 굉장히 어색해 보이는 김시현이 아냐를 끌어안은 채 어색하게 김현우를 돌아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
"……."
"……."
"……."
정적.
김현우는 멍하니 아냐와 김시현을 차례대로 둘러보고, 그 둘을 관찰했다.
마치 불륜을 들킨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
김현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는 이내 옆에 있는 하나린을 슬쩍 뒤로 밀고는 말했다.
"어."
"……."
"……."
"미안."
분명 이 사무실은 김현우의 것이 맞았건만, 김현우는 왠지 그런 말을 해야 할 것 같았기에 짧게 중얼거리곤 곧바로 열었던 문을 스르륵 닫으며 말했다.
"5분 뒤에 올게."
그리고-
딸칵.
그렇게 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 뒤로, 정확히 5분이 지난 시점.
"그러니까, 둘이 언제부터 사귀었다고……?"
김현우가 집무실의 테이블에서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아냐와 김시현을 보며 입을 열자 김시현은 머쓱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한번 바라보곤 말했다.
"대충…… 형이 국제헌터협회에 가기 직전쯤……?"
"뭐야? 시간도 꽤 됐네?"
"……."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아무런 말도 없이 슬쩍 시선을 돌렸고, 아냐도 마치 죄를 지은 것 같은 느낌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 둘을 보며 김현우는 왠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뭔데 이게 갑자기 취조 현장처럼 변한 거지……?'
물론 집무실에서 물고 빠는 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긴 해도 김현우는 김시현과 아냐가 왜 저렇게 위축되어 있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근데 너희들 왜 이렇게 위축되어 있냐? 뭔 죄지었어?"
그렇기에 김현우는 물음을 던졌고 김시현은 괜히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근데 왜?"
"뭔가, 괜히 숨긴 게 찔려서……?"
김시현이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거리자 김현우는 흐음, 하는 표정으로 그 둘을 바라보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실 뭐 굳이 내가 알아야 할 일은 아니긴 하지. 게다가……."
김현우는 슬쩍 아냐를 보았다.
괜히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움츠리는 아냐.
지금이야 그녀는 김현우 밑에서 충실하게 일해주고 있긴 했으나 아냐는 원래 김현우를 죽이러 왔던 용병이었다.
그녀의 움츠림에 김현우는 한동안 아냐를 바라보다 이내 말했다.
"뭐, 아냐도 이제 딱히 적은 아니니까."
"길드장님……!!"
김현우의 심드렁한 말에 조금 전까지 얼굴을 굳히고 몸을 움츠리고 있던 아냐는 곧바로 얼굴을 밝게 피고 감동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아냐의 시선을 제대로 신경 쓰지도 않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집무실에서 물고 빠는 건 좀……."
"흠, 흠흠……"
"……."
김현우가 말하자마자 멋쩍어지는 집무실 안.
"아니, 뭐 하지 말라는 건 아닌데 이렇게 걸리면 좀 그렇잖아? 내가 예산 좀 만들어 줘? 차임벨 만들 수 있게."
-요즘 그런 거 있잖아? 엘리베이터 타면 딸랑딸랑 거리는 거.
"형…… 그만……."
김현우가 장난스럽게 중얼거리자 아냐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얼굴을 붉혔고, 김시현도 마찬가지로 시선을 돌리며 김현우를 말렸다.
그렇게 잠시간 김현우는 그 둘을 놀린 뒤에야 본론을 꺼냈다.
"아 맞아 시현아."
"왜요 형?"
"그러고 보니까 너 기자회견 언제 하느냐고 그러던데. 기자회견 할 거냐?"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네요."
김현우의 물음에 김시현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회견하려고?"
"네, 사실 안 해도 되기는 하는데, 제가 없는 동안 제 길드에서도 일이 좀 있어서 그거 의견표명 하려면 해야 될 것 같아요."
김시현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김현우는 이내 아냐를 보며 말했다.
"원래는 별일 없냐고 물어보러 올 예정이었는데, 별일 없지?"
"아, 네. 딱히 길드 내에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일은 없어요."
"그래 그럼 됐네."
"그런데……."
아냐가 슬쩍 눈치를 보며 말꼬리를 늘이자 김현우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왜?"
"그…… 이건 길드 내 문제가 아니라 길드장님한테 오퍼가 들어온 게 하나 있기는 해요."
"오퍼가 들어왔다고? 무슨 오퍼인데?"
김현우의 물음에 아냐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몸을 움직여 자신의 책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금세 그 사이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김현우에게 넘겨주었다.
"이거 뭔데?"
"이번에 길드장님한테 들어온 오퍼예요."
아냐의 말에 김현우는 슬쩍 시선을 내려 서류를 보았고, 이내 제목을 보았다.
[아디스 트레이닝복 전속 광고모델 제안]
"뭐야 이게?"
"그, 아디스 아시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포츠 브랜드요."
"알지. 내가 입고 있는 옷도 아디스 거 아닌가?"
김현우는 슬쩍 시선을 내려 자신의 가슴팍에 박혀 있는 로고를 한번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박혀 있는 아디스 로고.
김현우가 다시 시선을 돌리자 아냐는 말했다.
"네, 지금 제가 드린 게 바로 아다스 쪽에서 길드장님한테 보낸 제안서예요."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꽤나 두꺼워 보이는 서류를 읽지도 않는 것 같이 슥슥 넘기더니 물었다.
"……나보고 모델을 해달라는 거지?"
"네, 맞아요."
"귀찮을 것 같아서 싫은데."
김현우는 입맛을 다시며 제안서를 바라봤다.
뭐, 디자인 모델이 특별히 하기 싫은 건 아니지만 귀찮았다.
게다가 돈을 보고 하기에도 그런 게, 김현우는 돈이 '매우'라는 소리가 부족할 정도로 많았다.
김현우가 길드를 굴리며 들어오는 돈 이외에도 그가 재앙(災殃)을 막으면서 들어오는 돈은 억소리 날 정도.
김현우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아냐는 말했다.
"그, 제가 길드장님께 말씀드린 이유는 그쪽이 제시하는 조건이 좋아서예요."
"……조건이 좋다고?"
"네. 제안서를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아다스 쪽에서는 모델만 되어주시면 길드장님이 홍보를 하신 트레이닝복 상품에 한정해서 매출의 15%를 지급한다고 해서……."
"15%?"
"네."
"그 정도면 얼마야?"
김현우가 감이 안 잡힌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냐는 말했다.
"저도 그쪽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 좀 많지 않을까요?"
아냐의 말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아다스의 제안서를 바라봤다.
# 159
159. 너희들 뭐 하니?(2)
서울 길드 사무소의 앞.
"아무튼 이번 사안에 대해서 저희 서울길드는 더 이상의 입장 표명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찰칵 찰칵 찰칵!!
김시현이 그렇게 입을 열자마자 순식간에 그의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하는 기자들을 훑은 김시현은 미련 없이 단상에서 내려와 길드사무소로 돌아왔고.
"에휴."
"아주 고생이 많네?"
김시현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한 마리의 여우를 데리고 느긋하게 앉아 있는 이서연을 슥 보고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고생은 무슨, 한번 교통정리는 해줘야 하니까."
"뭐, 그렇긴 하지."
김현우 길드가 아레스 길드를 완전히 눌러버리고 거의 대부분의 독점던전을 가디언 길드의 소유로 가져온 이후.
한국 헌터 업계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아레스 길드에게 박해받아 제대로 던전을 돌지 못한 헌터들은 가디언 길드의 합리적인 입장권 책정 가격에 만족하며 던전을 이용했고.
그 결과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소규모 길드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독과점 체계가 사라지고 나니 천천히, 그러나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하는 헌터업계에 김시현과 이서연, 그리고 한석원은 발 빠르게 대처했다.
그것은 바로 소유한 독점던전을 가디언길드와 마찬가지로 소정의 입장료를 받고 입장할 수 있게 바꾸는 것이었다.
'물론 중요한 보스들은 여전히 소유 길드에서 챙기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면 소형 길드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달가운 일일 것이다.
그저 마정석이나 기타 잡 물건들을 파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이익과 함께 입장권 값은 충분히 나오니까.
"너랑 석원이 형도 전부 독점 없앴지?"
"당연하지, 나랑 석원 오빠는 애초에 네가 그…… 허수 공간? 거기 들어갔을 때 이미 전부 끝냈어."
이서연의 말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내 그녀의 무릎에 앉아 무엇인가를 앞발로 붙잡고 먹고 있는 여우를 보았다.
"걔는…… 저번에 형 집에 있던 구미호 아니야?"
김시현의 물음에 이서연은 곧장 고개를 끄덕거리며 긍정했다.
"맞아."
"……뭘 먹고 있는 거야?"
"아, 이거? 쵸르라고, 요즘 고양이 간식인데 혹시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서 사줬는데 잘 먹더라고."
이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구미호는 슬쩍 김시현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슬쩍 고개를 까딱이곤 쵸르를 핥아먹었다.
"거…… 예의도 바르네."
김시현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리자 이서연은 구미호의 동감한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귀엽지 않아?"
"그래, 뭐…… 귀엽네. 그런데 어떻게 데리고 나온 거야?"
"아, 요즘 내가 이 구미호한테 도술(道術)수련을 받고 있어서, 계속해서 현우 오빠 집에서만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니까 아랑 길드 수련실에서 수련하려고 데리고 나왔지."
"데리고 나와도 되는 거야? 위험한건 둘째 치고 외형이……."
김시현은 구미호의 외모를 바라봤다.
크기는 일반적인 개 크기지만 문제는 꼬리.
열심히 쵸르를 핥아먹고 있는 여우의 뒤에는 절대로 감출 수 없어 보이는 꼬리가 9개나 달려 있었다.
이서연도 그런 김시현의 질문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소파 오른 쪽으로 손가락질을 했고.
김시현이 그녀의 손가락을 쫓아 시선을 내린 곳에는-
"케이지……?"
"여기에 넣어 놓으면 꼬리가 아홉 개인 건 제대로 안 보이잖아? 설령 보인다고 해도 그냥 털이 풍성하다고 생각하지."
"아니, 뭐…… 그건 맞긴 한데."
김시현은 여우를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쵸르를 먹고 있는 구미호의 모습.
그는 구미호가 인간 형태일 때의 모습을 잠시 생각한 뒤에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케이지를 한번 바라봤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중얼거렸다.
"뭐…… 딱히 신경 쓰진 않는 것 같네."
"뭐라고?"
"아니, 그냥 혼잣말 한 거야."
김시현은 그렇게 말을 넘기고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현우 형은 지금 촬영하러 갔어?"
"촬영? 아,"
이서연은 그의 물음에 순간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짧은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응, 아마 이제 슬슬 촬영 중반쯤 되지 않았을까?"
"응? 벌써? 지금 3시밖에 안됐는데……? 보통 겁나 오래하지 않나?"
김시현은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몇 번 정도 회사의 오퍼를 받아 모델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돈 때문이라기보다는 서울 길드의 이미지 때문에.
그리고 그때 김시현은 몇 번 정도 오퍼를 받아 본 뒤로는 엔간해서 좋은 오퍼가 아닌 이상 더 이상 모델일은 거절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었다.
이유는 바로 오퍼가 생각보다 빡셌기 때문이었다.
그냥 빡센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드는 컷이 안 나오면 아주 죽을 때까지 촬영만 하다 보니 시간도 시간이고 정신력 소모도 엄청났다.
"으, 싫어."
김시현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괜히 몸을 부르르 떨면서 질색을 했고 이서연은 대답했다.
"너는 현우 오빠가 그렇게 오래 할 거라고 봐?"
"그건- 아니겠지?"
김시현은 김현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형이라면 계약하고 갔음에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다 개박살을 내놓고 돌아올 사람이었다.
"나도 자세히 들은 건 아닌데 현우 오빠가 대충 시간에 제한을 걸었나 봐. 오빠 말로는 5시쯤 되면 집에 올 거라고 하더라고."
이서연의 말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하긴, 형이 괜스레 귀찮아질 만한 일에 아무런 대비 없이 가지는 않았겠지."
"바로 그거지."
"그래도, 좀 묘하기는 하다."
"뭐가?"
"현우 형이 모델 일 하는 거. 좀 어색하다고 생각하거든."
김시현의 말에 이서연은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미묘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현우 형이랑 모델 일은 좀 뭐가 안 맞는 느낌이기는 하지."
"잘하고 있으려나?"
김시현과 이서연이 그렇게 촬영을 하러 간 김현우를 떠올리고 있을 때--여의도에 있는 거대한 촬영 세트장에서는-
"네! 이곳 한 번만 봐주시고요! 좋습니다!"
찰칵!
"예, 이 부분에서는 조금 야성미가 느껴지는 그런 느낌으로 한번 자세 잡아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분위기로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의 사진을 촬영하러 나온 사진작가는 미리 김현우의 성격을 조사라도 해 온 듯 굉장히 저자세로 김현우를 대했고.
김현우도 돈을 받기로 하고 하는 일이기에 엔간해서는 별 불만 없이 사진작가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게다가 딱히 촬영에 있어서 딱히 불편한 점도 없었다.
아니, 뭐…… 정확히 말하면 불만인 점은 한 가지 정도 있었지만.
"예! 이번에는 살짝 걸터앉아서 좀 다정하게 누구를 쳐다보는 듯한 느낌으로 자세를 취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현우의 불만은 바로 가끔 나오는 사진작가의 이상한 자세요청이었다.
분명 김현우가 모델을 맡기로 했던 것은 스포츠 트레이닝복의 모델이었다.
그리고 스포츠 트레이닝복은 기본적으로 좀 활동적인 포즈가 위주가 되지 않는가?
그런데도 사진작가는 김현우에게 스포츠 모델에게 요청한다고 보기에는 이상한 자세를 요구했다.
가령 누군가를 다정히 보는 모습이라거나.
무슨 팔짱을 끼거나.
아니면 누워서 누군가를 바라보거나 하는…….
"이번에는 약간 등 뒤에 기대서 약간 건방진 포즈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금방 찍겠습니다!"
그래도 뭔가 헛짓거리를 하는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이런 걸로 일일이 태클을 거는 것도 귀찮았기에 김현우는 묵묵히 촬영을 지속했다.
그렇게 김현우가 몇 번 정도 트레이닝복을 바꾸고 사진촬영에 임했을까-
"예. 이걸로 전부 끝내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사진작가는 김현우가 요구한 시간의 딱 1시간 전에 촬영의 끝을 알렸고. 그와 함께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은 기자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야, 오늘 정말로 수고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현우가 그렇게 주변을 돌아보고 있으려니 오늘 김현우의 촬영을 맡은 작가가 다가와 너스레를 떨었고.
"아뇨 뭐,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김현우는 별 감흥이 없다는 듯 사진작가의 말에 대답하고는 말했다.
"근데,"
"예."
"이거 입고 가도 되요? 또 벗고 갈아입기가 귀찮아서."
사진작가는 김현우의 말에 살짝 당황한 듯 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말했다.
"네, 괜찮습니다, 어차피 김현우 헌터 촬영을 위해서만 쓰일 트레이닝복이라 입고 가셔도 무방합니다."
"아, 그래요?"
"예."
사진작가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네, 그럼 저는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사진작가한테 고개를 한번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끝내고 망설임 없이 세트장에서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사진작가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생각했다.
'완전히 개 또라이 같다고 하더니, 또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그는 아다스측에서 연락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김현우 헌터는 성격이 개 같으니 무조건 최대한으로 맞춰서 찍으라는 아다스 쪽의 말.
물론 작가 본인도 그동안 김현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당연히 아다스의 의견을 수용해 찍었는데 김현우는 그의 생각처럼 성격이 지랄 맞지 않았다.
'오히려 연예인으로 치면 굉장히 준수한데?'
조금 저자세로 나가기는 했으나 사진작가의 요구에는 군말 없이 따라주고, 어느 정도 촬영을 지속했는데도 불구하고 불평도 없었다.
오히려 생각해 보면 예쁘다고 설치는 진상 연예인보다 훨씬 더 멀쩡했다.
그렇게 사진작가가 김현우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평가를 상향조정 하는 사이에, 김현우는 벌써 세트장을 나와 미령이 준비시켜놓은 차량에 탑승했고-
"사저야, 이건 3인용이니 꺼지거라."
"어머? 그럼 이 조수석은 뭘까요?"
"그건 네가 앉으라고 만들어 놓은 자리가-"
"조용, 빨리 집에나 가자."
그는 무척이나 익숙하게 둘의 말싸움을 말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김현우의 말에 별말 없이 출발하는 차.
그는 후, 하고 늘어지는 듯한 한숨을 내쉬곤 다음 일정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트레이닝복 촬영은 끝났고, 내일은 미궁에 내려가서 악천의 원천이나 가득 채워야겠네.'
아직 아브가 말한 시간까지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기는 했으나 굳이 일정을 빡빡하게 피곤하게 하는 것보다는 느긋할 때 하나씩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청룡의 업에도 한번 사용해 봐야 하니…….'
그는 로그를 볼 때마다 정보 권한이 오류를 일으키는 그 물건을 생각하면서 대충 다음 행선지를 정하곤 슬쩍 시선을 돌려 미령과 하나린을 바라봤다.
'얘들은…… 데려가지 말자.'
어차피 악천의 원천은 직접 들고 있는 사람이 몬스터를 잡아야만 채워지기 때문에 굳이 미령과 하나린을 데려갈 필요는 없었다.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눈을 감았고, 곧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차는 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그가 집 안으로 들어가고 그다음 날.
기자재가 모두 정리된 세트장에 붙어 있는 작업실.
"흐음……."
그곳에서 김현우의 사진을 촬영했던 사진작가는 오늘 찍었던 사진을 돌려보고 있었다.
딸깍 딸깍- 끼이익-
키보드를 탁탁 두들기는 그의 손가락 너머로 들려오는 자그마한 문소리.
그에 사진작가는 시선을 뒤로 돌렸고. 이내 그 곳에서 가면을 쓴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검은색의 가면을 쓰고 있는 가면 무사를-
# 160
160. 나랑 바꾸지 않을래?(1)
의정부 미궁 지하 14계층.
"커져라. 여의"
끄게에에엑!
순식간에 몸이 터져서 죽는, 곰의 형상을 취허고 있는 '그레이트 킬러'들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여의봉(如意棒)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아니, 넌 왜 지금까지 말 안 하다가 갑자기 나와서 훈수질이야?"
김현우의 말에 그 목소리, 아니 제천대성은 대답했다.
[네가 이전에 전우치와 싸웠을 때를 봤으니까. 네 주먹은 충분히 대단하지만 내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여의봉(如意棒)을 어느 정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제대로 사용할 생각 없는데? 그냥 능력만 어느 정도-"
[그러니까, 그 능력을 올바르게 전부 사용하려면 어느 정도 여의봉(如意棒)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나한테 봉술(棒術)을 배우라는 소리야?"
[아까부터 말했을 텐데?]
"아니, 그걸 또 언제 배워?"
김현우가 투덜거리며 여의봉(如意棒)을 원래 크기로 돌리자 제천대성은 말했다.
[전부 다 배우라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기본만 배우라는 거지.]
"그 기본만 배운다고 해서 내가 그걸 싸움에 써먹을 수나 있겠어? 보나마나 좆밥들 패는 데에나 쓰겠지."
게다가-
"그런 허접 팰 때 굳이 네 힘을 빌릴 일도 없으니까 결국 따지고 보면 필요 없는 거잖아?"
김현우의 결론에 제천대성은 묘한 한숨을 내뱉는 듯하더니 말했다.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너는 내 힘을 빌리는 의미를 알고 있나?]
"……힘을 빌리는 의미?"
김현우의 되물음에 제천대성은 설명했다.
[네가 힘을 빌린다는 것은 내 업(業)을 어느 정도 빌린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감 안 오나?]
"……뭔 소리야?"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하자 제천대성은 말했다.
[이 빡대가리 같은 새끼.]
"뭐?"
[네가 내 힘을 빌리면 내 봉술(棒術)을 빌려 쓸 수 이 말이다.]
제천대성이 그렇게 말하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럼 네 봉술을 그냥 빌려 쓰면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봉술을 조금이라도 연습해야 한단 말이다 이 머저리야! 제로에 백을 곱해봤자 하나 인 것처럼, 네 능력이 일정 이상이 안 되면 내 봉술도 무쓸모라 이 말이다!]
빼애액 소리를 지르는 제천대성.
김현우는 인상을 썼다.
"그 원숭이새끼가 더럽게 끽끼대네 진짜!"
[뭐? 원숭이새끼? 너 뒤질래!?]
"지랄, 나한테 개처맞다 소멸한 주제에!"
"뭐!?"
그와 함께 김현우는 14계층에 멈춰 여의봉(如意棒)안에 있는 제천대성과 서로 입을 털기 시작했고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그래, 내가 졌다 졌어."
[흥!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김현우는 결국 제천대성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여의봉을 집어 들었다.
확실히 제천대성의 말은 싸가지가 없기는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김현우는 제천대성과 계약을 함으로서 그의 업을 빌려 올 수 있었고, 확실히 제천대성의 봉술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게다가 그냥 봉술도 아니고 이 여의봉(如意棒)을 사용하는 봉술이니…….'
확실히 봉술을 어느 정도만 배워두면 전력상승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주먹 하나를 다룰 수 있는 것보다는 다른 것도 다룰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결국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천대성의 말을 수긍했고. 이내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래서, 봉술은 어떻게 배우는데?"
[이곳에 딱 좋은 훈련용 몬스터들이 많지 않나? 그 녀석들에게 대충 봉이나 휘둘러 봐라. 그럼 내가 지적해 주지.]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옮기다 15계층으로 내려가는 통로쯤에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그러나?]
"너 원래 말할 수 있었냐?"
김현우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답했다.
[계약한 시점부터 계약자들끼리는 서로 대화가 가능하지.]
"그건 계약 내용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건 원래 기본베이스다. 계약서 못 봤나? 원래 모든 계약서는 기본 베이스를 깔고 특약사항을 넣지 않나.]
"아니 뭐……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지금까지는 왜 말 안하고 있었냐?"
[굳이 당장 일도 없는데 말을 걸기는 싫으니까.]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무엇인가를 말할까 하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15계층에 도착했고-그에에에엑!!
김현우가 15계층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맞이하는 수많은 몬스터.
다른 헌터였으면 혼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을 느낄만한 숫자의 몬스터가 달려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평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의봉 능력은 안 쓰고 그냥 순수하게 봉으로 때려 죽여보라는 거지?"
[그래, 세부적인 조정은 네가 말해주도록 하지.]
제천대성의 말을 끝으로 김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미소를 지으며 여의봉을 휘둘렀다.
빠드드드득!!!
그렇게 김현우가 미궁에서 봉술을 그럭저럭 익히려는 때, 하남에 있는 거대한 장원의 본궁의 안.
미령은 본궁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용좌에 앉아 있었다.
물론 김현우가 이상한 데에 돈을 붓지 말라고 해서 패도길드의 본성에 있는 용좌보다는 그 크기가 작았으나, 그럼에도 미령이 앉아 있는 용좌는 이렇게 불릴 만했다.
'황금을 치덕치덕 처바른 의자'라고.
그리고 그런 사치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는 미령은 왜인지 조금은 초조한 표정으로 괜스레 용 좌를 툭툭 손가락으로 건들고 있었다.
그렇게 미령이 용좌를 툭툭 건드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슥-
불현듯, 아무도 없던 미령의 앞에 검은색 가면을 쓴 무사 한 명이 나타났다.
그에 미령은 슬쩍 놀란 표정으로 가면무사를 보고는 이내 말했다.
"가져왔느냐?"
미령의 묘하게 떨리는 말투.
그런 처음 보는 미령의 모습에 가면무사는 순간 말을 잃었으나 이내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전해주었다.
미령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서류 봉투를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었고. 이내 봉투를 받은 뒤 말했다.
"전부 잠시 나가 있거라."
미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눈앞에 있던 가면무사는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추었고, 그녀의 주변에 숨어 있던 호위무사들도 그 기척을 감췄다.
"후우-"
몇 번이고 마력을 돌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미령은 이내 덜리는 손으로 서류 봉투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귀엽구나-]
"흐갹!?"
이내 자신의 머리에서 울리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는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너무하지 않느냐 아이야, 그래도 평소에는 말을 걸어도 된다고 하더니-]
"이건 평소가 아니니까 말 걸지 마랏!"
드물게도 굉장히 드센 표정으로 말한 미령의 모습에 목소리는 흐흥, 하는 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뭐, 그렇게 부끄러워하니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도록 하겠다.]
괴력난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 이상 미령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에 다시 미령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서류 봉투를 바라봤다.
그리고-
찌이익.
미령은 서류봉투의 윗부분을 찢고,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서류 봉투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무엇인가를 잡아 꺼냈다.
"!!"
그것은 바로 사진이었다.
그것도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
미령은 드물게 얼굴에 터질 듯한 홍조를 그리며 조심스럽게 꺼내 든 사진의 앞장을 바라보았고.
"헛……!"
사진의 앞장을 바라보자마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입을 막았다.
미령이 보며 입을 막은 사진.
그것은 바로 김현우가 무척이나 다정한 표정으로 팔에 턱을 괴고 찍은 사진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그냥 지루해 보이는 표정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미령은 그것만으로도 세차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사진을 넘겼다.
"우아아아……."
사진을 넘기고, 또 넘긴다.
미령은 터질 것 같이 붉어진 얼굴로 거의 사진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고, 그렇게 몇 십 분간. 사진 한 장 한 장을 몰두해서 바라보고 있던 미령은-
"하아아아……."
이내 마지막 사진 한 장을 끝으로 굉장히 만족했다는 듯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안고는 눈을 감았다.
굉장히 거칠어진 숨을 한동안 고른 미령은 이내 무척이나 만족하면서 사진을 서류 봉투에 집어넣었고-끼이이익!
"어머? 역시나 했더니."
"?!"
미령은 곧 문이 열리며 들어온 하나린을 보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시선을 슥 돌리자 그녀의 뒤에는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가면무사들이 보였고, 미령은 그녀가 능력을 사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아니, 사저를 만나려고 왔는데 절대로 못 들어간다고 막아서…… 그냥 좀……?"
그녀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미령은 인상을 팍 찌푸리곤 괴력난신(怪力亂神)의 힘을 이끌어냈고 그 모습에 하나린은 말했다.
"잠깐."
"……?"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야."
"지금 내 부하들에게 능력을 썼으면서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미령이 장난치냐? 라는 표정으로 하나린을 째려보자 하나린은 정말이라는 듯 두 손을 여유롭게 올리곤 말했다.
"내가 너를 죽이러 왔다면 내 조직원들 전부를 데리고 왔겠지? 아주 풀무장을 해서 말이야."
"네 조직원들이 떼로 몰려와도 나한테는 안 된다."
미령이 으르렁 거리며 말하자 하나린은 쯧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아무튼, 싸우러 온 거 아니라니까?"
하나린의 말에 미령은 그녀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보다 이내 힘을 거두며 말했다.
"왜 왔지?"
"조금 할 말이 있어서."
그녀의 말에 미령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으나-
"난 너하고 할 말이-"
"지금 네가 들고 있는 사진에 관해서인데?"
"……!"
그에 미령은 번개 같은 속도로 고개를 제자리로 돌려 하나린을 바라봤고, 그녀는 슥 웃더니 자신의 품 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건!"
"아, 오해하지 마? 너랑 똑같은 건 아니니까. 나도 그 사진작가한테 부탁했거든. 너도 그렇지? 사부님의 사진을 얻고 싶어서."
"……."
미령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자 하나린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그 사진작가한테 네가 부탁한 사진까지 받을 수 있었으면 찾아오지도 않았을 텐데 어째 절대로 안 주려고 하더라고?"
"다른 사람한테 사진을 넘길 경우 죽여 버린다고 했으니까."
"아, 그래서 우리 조직원이 죽여 버린다고 해도 내가 주문한 것 외에는 주지 않았구나?"
왠지 사진작가의 현재 상태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말을 내뱉은 미령과 하나린.
하나린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뭐, 그래서 결국 그 사진작가 녀석이 사진을 전부 깨끗이 지워버린 덕분에 추가적으로 사진을 구할 수 없어서 여기까지 온 거야. 이쯤 되면 내가 왜 온 건지 알겠지?"
"설마-"
"그 설마가 맞아."
하나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품에 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는 김현우가 느긋하게 누워서 혼자 팔베개를 하고 있는 사진.
"이 사진, 가지고 싶지 않아?"
그 사진을 보이며 하나린은 미령에게 제안을 했고.
"……."
미령은 그녀가 들어 올린 사진을 보며 조용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 161
161. 나랑 바꾸지 않을래?(2)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거대한 고원 중 한 곳.
"허."
그곳에서, 제천대성은 앞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봉을 이용해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
"흡!"
김현우가 바로 앞에 있던 구울의 머리를 발로 터트려 버리고, 순식간에 중단으로 잡고 있던 봉을 휘둘러 뒤를 노리던 데스나이트의 머리를 터트린다.
데스나이트의 머리를 터트린 봉의 끝부분은 크게 원을 그리며 휘둘러지는 것으로 김현우에게 달려들었던 몬스터들을 모조리 날려 버렸고.
빠드드득!
김현우는 그 뒤로 곧바로 봉을 길게 잡고 저 멀리서 달려오는 좀비 독의 대가리를 깨버렸다.
그 뒤로 곧바로 봉을 짧게 잡으며 사방으로 몰려드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김현우를 보며 제천대성은 감탄하며 생각했다.
'이 새끼, 잘 다루잖아?'
물론 신체 능력이 뒷받침돼서 나온 거지만 김현우의 봉술은 그 자체로 나쁘지 않았다.
'분명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는데.'
제천대성은 처음 김현우가 봉으로 몬스터를 팰 때를 생각했다.
그냥 대가리를 까고 순전히 힘에 의존하기만 했던 김현우의 봉술.
그리고 그런 김현우의 모습에 제천대성은 무척이나 단순한 몇 개의 첨언을 했을 뿐이었다.
그래, 그저 단순한. 봉술(棒術)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해줄 수 있는 첨언을.
그리고 그 결과는 제천대성으로서는 상당히 놀랄 정도의 결과물이었다.
'봉의 리치를 파악하고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고, 순간순간 발걸음을 조절하며 몬스터와의 거리를 일정 이상으로 떼어두다니.'
거리.
모든 무기가 그렇지만 특히 봉술은 적을 상대할 때 가장 고려할 것이 많은 무기였다.
이유?
그것은 봉이 긴 거리와 짧은 거리,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만능 무기이기 때문이었다.
봉을 길게 드는 것만으로도 창과 비슷한 사거리를 가질 수도 있고, 봉을 짧게 드는 것으로 일반적인 검과, 극단적으로 말하면 매우 짧은 단검을 상대할 수도 있었다.
허나, 그렇기에 봉은 사용하기 힘든 무기였다.
봉술(棒術)은 고려할 것이 많은 무기니까.
그 시작은 봉을 짧게 잡느냐, 아니면 길게 잡느냐부터 시작해서.
조금 더 심화적인 가정으로 까지 나가면 봉을 어떤 식으로 잡느냐에 따라 만들어낼 수 있는 변초가 많아지고.
적들을 상대하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그 변수는 굉장히 많았다.
한 마디로, 봉술은 깊이 배우려면 다른 무기들보다도 상당히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는 무술이었다.
그런데 김현우는?
빠드드득!
김현우는 언데드들의 사이로 들어가 사방으로 봉을 휘두르며 남김없이 언데드들의 대가리를 깨버리고 있었다.
언데드 중에서 제일 약한 좀비도 김현우가 휘두르는 여의봉에 대가리가 깨지고, 데스나이트도 딱히 좀비와 다를 것 없이 그가 휘두르는 여의봉에 대가리가 깨졌다.
허나 그렇게 한 마리 한 마리 확실하게 대가리를 깨면서도 김현우는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격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시간차로 들어오는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살짝 봉을 뒤로 빼는 것만으로도 봉쇄해 버리고, 위쪽으로 날아오는 구울은 다른 공격을 하며 리치가 남은 뒷부분으로 제지한다.
그러면서도 사방으로 다가오는 몬스터들과의 거리를 기가 막히게 재고 있었다.
그저 몇 가지 첨언을 해준 것만으로도 김현우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봉을 통제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용하고 있다.
마치 처음부터 봉을 배웠던 것처럼.
"……천재(天才)인가?"
제천대성이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김현우는 하늘 높이 뛰어올라 누더기를 기워 붙인 것 같은 플래시 골렘의 골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또 한번 이어지는 전투.
물론 김현우는 제천대성이 생각하는 것 같은 천재(天才)는 아니었다.
그가 봉을 잘 사용하는 이유.
그것은 김현우가 천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천마(天魔)와의 수련에서, 그가 천마의 비기인 뇌령신공(雷令神功)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냥 수련이 아닌, 천마와 싸움이라는 형태를 이용해 뇌령신공을 배운 김현우는 기본적으로 싸움에서 발걸음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것뿐인가? 김현우는 천마와 수련을 하면서 얻은 것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기본적으로 걸음을 옮기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사방에서 오는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까지.
그는 거의 1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것만을 배웠다.
-천마한테 뒤지게 맞으면서.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이미 봉술(棒術)에 제일 중요한 '거리'의 중요성과, '공격 경로'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던 김현우.
그렇기에 그는 제천대성의 첨언 몇 번으로 봉술을 이 정도까지 다룰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빠드드득!
"후……."
그리고 그렇게 제천대성이 묘한 착각을 하는 동안, 김현우는 자신들에게 달려들었던 마지막 데드 리빙 아머의 갑옷을 박살 내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보이는 것은 푸른 동굴과 그 사이로 보이는 언데드들뿐.
그는 자신의 몸 주변에 튄 체액을 혀 차는 소리와 함께 털어낸 뒤 말했다.
"또 지적할 거 있어?"
[아니, 이 정도면 더 이상 지적할 건 없는 것 같군.]
"……그래?"
제천대성의 조금은 멍해 보이는 목소리에 김현우 그렇게 대답하곤 슬쩍 어깨를 으쓱인 뒤 이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악천의 원천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눈앞에 주르륵 떠오르는 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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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악천의 원천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없음
-정보 권한-
9계층에서 무신(武神)이라 불렸던 남자 '악천'은 자신을 가르친 첫 스승이 향했다는 '위'를 향해 가고자 언령사의 말을 따라 '등반자'가 되려 한다.
그는 언령사의 도움으로 아티팩트 속에 있는 여러 무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그들의 무공을 대성할 수 있었고, 그는 나중에 들어서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명칭인 '무신'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무(武)'를 얻을 수 있었다.
허나 그는 '등반자'가 되지는 못했기에 원천이 불안정해 그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등반자'들이 자연스레 계층을 건너오며 쌓는 '미궁'의 힘을 얻어야 한다.
미궁석 게이지: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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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천의 원천의 로그는 이제 권한 부족이라는 말이 뜨지 않은 채 읽기 편하게 개방되어 있었다.
그러나 딱히 로그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김현우는 그 아래에 써져 있는 게이지를 보았고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이대로 올라가면서 몬스터를 죽이면 딱 100% 채우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원천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김현우는 제천대성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여의봉으로 애들 대가리 깰 필요는 없는 거지?"
[그래, 이 정도면 내 힘을 빌렸을 때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하기에는 충분하다.]
제천대성의 말에 그는 씩 웃으면서 여의봉을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고.
"자, 그럼 올라갈 때는 어디 한번…… 빡세게 가볼까?"
김현우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미궁을 오르기 시작했다.
***
그다음 날.
[청룡의 업(業)에 악천의 원천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엥?"
김현우는 악천의 원천을 청룡의 업에 가져대자마자 떠오르는 로그에 인상을 찌푸렸고, 다시 한번 악천의 원천을 가져갔지만-
이전과 똑같이 나오는 로그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쩌면 이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김현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제 미궁에서 올라 올 때 제천대성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청룡의 업(業)은 어떠한 수를 써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했었지?'
그리고 그때에, 제천대성은 김현우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전우치가 소멸하면서 남기고 간 청룡의 업은 아마 일반적인 아티팩트로 깔 수는 없을 거라는 말을.
뭐, 사실 결국 그렇다고 해도 악천의 원천은 원래 채워 놔야 했던 것이다 보니 쓸데없는 짓을 한 건 아니었으나-
'왠지 사기당한 기분이네…….'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청룡의 업을 자신의 주머니 안에 집어넣곤 시선을 돌려 자신을 찾아온 아냐를 바라봤다.
"그래서, 오늘은 왜?"
김현우의 물음에 아냐는 입을 열었다.
"저, 오퍼가 하나 더 들어왔어요."
"뭐? 오퍼……?"
"네. 원래라면 가져오지 않으려 했는데…… 이번에는 저번보다 훨씬 더 계약조건이 좋아서요."
"음……. 그래?"
아냐의 말에 김현우는 아냐가 테이블에 놔두었던 서류를 보기 위해 손을 움직였고, 곧 확인했다.
"이번엔 남성복이야?"
"네. 그쪽에서는-"
아냐는 곧바로 그쪽 회사에서 김현우에게 제시한 것에 대해 하나하나 나열하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그런 아냐의 말을 들으며 서류를 넘겼다.
그러기를 한참.
김현우는 아냐의 말을 전부 다 듣고, 조금 더 서류를 확인하다 말했다.
"뭐, 확실히 제안은 매력적이긴 한데."
"네."
"거절해."
"예?"
"거절하라고, 계약조건이 좋기는 한데, 딱히 그거 안 찍어도 돈 들어올 곳은 많으니까."
김현우의 심드렁한 대답에 아냐는 슬쩍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곧 김현우가 들고 있던 서류를 넘겨받기 위해 손을 움직-
"사부님."
-이려 했다.
"왜?"
김현우는 아냐에게 서류를 넘겨주려던 도중 자신의 오른편에 서 있던 하나린의 말에 대답했고.
"촬영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곧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물론 제가 사부님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이 제안은 굉장히 메리트가 있는 제안이에요."
"아니, 내가 귀찮-"
"사부님 보세요? 이 제안은 매출의 25%를 그대로 사부님한테 주겠다는 건데 이 정도의 메이커 회사는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큰 메이커이고 또 전체적인 매출이 아다스보다도 훨씬 높아요."
"아니, 돈은 충분히-"
"원래 돈은 많이 벌어둬야 하는 것이라고 사부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물론 제가 사부님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단순히 계산을 해보면 이건 사부님이 3시간 정도 투자하기에는 적절한 것 같다고 판단돼요."
"……."
'얘 갑자기 왜 이래?'
김현우는 무척이 당당하게 말하는 하나린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의 왼편에 서 있는 미령을 바라봤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김현우의 눈치를 몇 번이고 보는 듯하더니 이내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저도, 그…… 찍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스승님."
"……."
'쌍으로?'
김현우는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양편에 있는 하나린과 미령을 바라보았다.
하나린은 무척이나 당당하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고, 미령은 왠지 홍조를 띈 얼굴로 '아으으' 같은 입모양을 만들어 내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묘한 사실을 발견했다.
'생각해 보니까 얘들 분명 미궁 갔다 오기 전까지 맨날 싸우지 않았나?'
생각해 보면 오늘 그녀들이 김현우와 같이 있었을 때 미령과 하나린은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게다가 며칠 전보다 양옆에 선 간격도 조금이지만 짧아져 있었다.
"……뭐야?"
김현우가 묘한 표정으로 그 둘을 돌아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는 이내 제자들에게 입을 열려고 했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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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면 당신은 부름을 받아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0일 0시간 4분 59초
이내 자신의 앞에 떠오르는 로그에 입을 다물었다.
# 162
162. 나랑 바꾸지 않을래?(3)
시스템 룸 안에 소환된 김현우는 엉망진창이 된 주변을 바라보았다.
피자 판이 여기저기 쌓여 있고, 근처에는 콜라병이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다니고 있는 방.
어째 예전에 한번 봤던 시스템 룸의 모습에 김현우는 말없이 쌓여 있는 피자판을 바라보다 이내 그 뒤에서 줄곧 눈을 감고 있는 아브를 보며 물었다.
"집이 왜 이렇게 개판이야?"
"아……."
그의 말에 슬쩍 눈을 뜬 아브는 이내 주변을 풍경을 보고는 짧게 탄성을 터뜨리곤 슬쩍 김현우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게, 가디언이 말해준 정보를 찾으려고 밤낮없이 정보검색을 하다 보니 먹고 나서 치우는 것을 잊고 있었네요……?"
아브의 어색한 웃음에 김현우는 붉은 버튼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게임을 하다 그런 것도 아니고, 내가 말한 정보를 찾다가 그랬다니까.'
그 정도는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한 김현우는 문득 쌓여 있는 피자판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피자는 어디서 가져온 거냐?"
"아, 냉장고에서요."
"냉장고? 피자가 그렇게 많아?"
언뜻 쌓여 있는 피자의 판수만 봐도 대충 10판은 넘어 보이는데?
김현우가 그렇게 의문을 가지며 묻자 아브는 곧바로 대답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이 시스템 룸은 한번 만들어두면 만들어 두는 것에 한해서 제가 마음대로 재생성할 수 있거든요."
"그래……?"
아브의 말에 가볍게 수긍한 김현우는 이내 테이블 위에 있는 피자판을 옆으로 밀어 둔 뒤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정보는 찾은 거야?"
"네, 물론 이번에도 조금 부족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찾기는 했어요."
"그래?"
"그러니까-"
김현우가 좋다는 듯 웃으며 대답하자 아브는 곧바로 지금까지 자신이 조사했던 것들에 대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작자의 탑을 조사하기 위해 여기저기 정보를 우회해서 알아낸 사실들과 아브의 추론을 더해 만든 이야기를 한동안 듣던 김현우는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자가 만든 탑은 12계층에 있다고?"
"네. 아마 제 추론이 맞다면 '제작자'가 튜토리얼 탑을 제외하고 만든 또 다른 탑은 12계층에 있을 거예요."
"12계층이라……."
김현우는 짧게 중얼거리더니 물었다.
"그럼 12계층에 가면 곧바로 탑을 볼 수 있겠네?"
"그것도 맞아요. 제가 찾아본 결과 12계층은 '애초에' 탑이 전부로 구성된 것 같거든요."
"탑이 전부로 구성되어 있다고?"
"네. 이건 단순히 추론이지만요. 저도 추론인 데다가 그곳을 보지 않아 제대로 확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 12계층에 올라가는 순간 곧바로 탑이 보일 거예요."
"그래? 그건 좀 괜찮네."
혹시나 또 12계층에 가서 뭔가를 찾아야 하나 생각했던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곤 이어 말했다.
"그래서, 12계층에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저번처럼 맹인의 나침반을 쓰면 되나?"
"어……."
"왜 그래?"
"아뇨 그, 아마 맹인의 나침반으로 길을 찾는 것까지는 가능할 거라고 봐요. 네……."
"그런데 뭔가 문제야?"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슬쩍 김현우의 눈치를 보고는 이야기했다.
"우선 제가 12계층에 제작자의 탑이 있다는 것까지는 알아냈잖아요?"
"그렇지?"
"게다가 맹인의 나침반만 있으면 길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뭐가 문제야?"
그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자 아브는 바로 말했다.
"시간이요."
"……시간?"
"네, 시간이요. 시간이 문제예요."
"그게 무슨……."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대답하려다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고, 아브는 그의 얼굴을 보며 대답했다.
"가디언이 9계층에서 8계층으로 내려갔다가 오는 데 대략 걸린 시간은 대충 2, 3주 정도예요. 그렇죠?"
"……그렇지."
김현우가 수긍하자 아브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건 말 그대로 9계층에서 8-35계층을 가는 데 걸린 시간이지 다른 계층을 가는 데 걸린 시간이 아니에요."
"……계층간의 거리가 다르다는 소리지?"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아브.
"그러니까 간단하게 예를 들면, 가디언이 12계층에 올라갔다가 내려 올 수 있는 시간이 몇 주 내로 짧을 수도, 아니면 오히려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소리예요."
"……몇 년은 오버 아니야?"
"그러니까 말 그대로 예를 든 거예요. 아무튼, 가디언이 탑을 올라 12계층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그 정도라면-"
"조금 문제가 있지."
조금, 정도가 아니라 많이 있다.
'그러면 곤란한데…….'
김현우는 기본적으로 이 계층을 지키는 가디언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김현우 본인이 '가디언'이라는 직업에 의무를 지고 있다기보다는 정보 권한을 얻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등반자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현우가 12계층에 가기위해 9계층을 등지고 탑을 오른다면?
'쯧'
9계층은 곧바로 위험에 빠진다.
물론 지금 당장에는 김현우 말고도 9계층을 지킬 만한 이가 두 명이나 있었다.
미령과 하나린, 그녀들은 분명 각각 괴력난신(怪力亂神)과 언령사와 계약을 하며 그들의 힘을 얻게 되었다.
허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9계층을 미령과 하나린에게 맡기고 탑을 오를 수는 없었다.
김현우가 보기에 아직 자신의 제자들은 약했으니까.
물론 둘이서 힘을 합해 등반자들을 막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상위급 등반자들까지도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허나 문제가 되는 건-
'정복자…….'
김현우는 바로 얼마 전, 자신과 홍콩에서 싸움을 벌였던 전우치를 떠올렸다.
청룡의 업(業)을 등에 업고 완전체가 되어 김현우를 박살 내려 했던 그.
김현우는 아직도 그 모습이 상상되었다.
청룡의 업을 등에 업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던 전우치의 그 모습이.
그가 자신에게 내리치려 했던 청룡(靑龍)이-물론 그 뒤에 김현우는 제천대성의 도움을 받아 그와 계약을 해 전우치를 죽이는 데에 성공했으나 결국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김현우 혼자의 힘으로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곧 그렇다는 것은-
'미령과 하나린은, 정복자를 막아낼 만한 힘은 없다.'
물론 제자들의 힘을 테스트해 본 것은 아니었으나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지.
"흠……."
거기까지 생각이 끝난 김현우는 눈가를 찌푸리고는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했고, 아브도 마찬가지로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간의 침묵.
그러던 중, 아브는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찾아볼까요?"
"뭘?"
"여러 가지로요. 예를 들면 9계층에서 12계층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거나, 아니면 또 다른 방법 같은 거요. 솔직히-"
-이런 것들은 찾아도 제대로 나올 것 같지 않긴 한데…….
아브가 확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떨며 고민하곤 이내 슬쩍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아니 제작자 이 개새끼 찾아오라고 했으면 어떻게 편하게 갈 수 있는지 정도는 말해줘야 할 거 아니야?"
-이런 융통성 없는 새끼.
김현우는 그렇게 짜증을 내며 괜히 피자 판을 툭 쳤고, 그와 함께 와르르 쏟아져 내린 피자판을 본 그는-
"어?"
"……왜요? 혹시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났어요?"
갑작스레 반색한 김현우의 모습에 궁금한 듯 그를 올려보는 아브.
김현우는 순간 멍하니 있다 그런 아브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라기보다는, 물어볼 사람이 있어."
"네?"
"물어볼 사람이 있다고, 이 '탑'에 대해 잘 아는 사람 말이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고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가운데.
"그래서,"
"그래서기는 뭐가 그래서야, 그거 물어보려고 말 걸었다니까?"
김현우의 물음에 줄곧 소나무의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손오공은 곧 그 자리에서 내려와 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알고 싶은 건, 9계층에서 12계층으로 올라가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리냐 같은걸 물어보고 싶은 거야?"
"그렇다니까? 뭐 사실 그것도 그렇고 대충 탑에 대해서 알려 줄 수 있으면 뭐든 알려주는 게 좋기는 하지."
김현우가 말하자 제천대성은 어깨를 으쓱이곤 대답했다.
"그런데 그건 뭐 하러 알려고 하는 건데?"
"너 못 들었냐? 내가 밖에서 누구랑 말하는지 들을 수 있다며?"
그 물음에 제천대성은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네가 보기에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냐?"
"한가해 보이는데? 너 아무것도 안 하잖아?"
"……."
제천대성은 인상을 쓰며 반박하려 했으나, 분하게도 김현우의 말이 맞았다.
육신이 소멸하고 그의 남은 업(業)으로 인해 정신만이 여의봉 내에 살아남아 있는 그가 하는 일이라곤 명상을 하거나 김현우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끄응-"
그는 무척이나 당당해 보이는 김현우를 짜증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봤으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래, 뭐 그 정도야 알려줄 수 있지. 그런데 너 그거 알고 있냐?"
"?"
"내가 탑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건 아주 한정적이라는 거 말이야."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건 또 뭔 개소리야?"
"말 그대로의 이야기야. 내가 탑에 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부분은 극히 드문 부분들이라는 거지."
"……혹시 아무것도 모르는 거 아니지?"
김현우가 슬쩍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하자 제천대성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적어도 너보다는 많이 알고 있겠지. 나는 이미 한번 탑을 전부 올랐다가 내려온 재등반자니까."
"그럼 도대체 왜 드문 부분이라는 건데?"
"제한이 있거든."
"제한?"
제천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들리나?"
"당연히 들리니까 대답을 하고 있겠지?"
"그럼 탑 최상위계층에 있는 ────────────────── 들리나?"
"?"
김현우는 순간 일어난 인지의 부조화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분명 말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리와 봐."
제천대성이 뒤이어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김현우를 부르더니 이내 땅바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
김현우는 그 곳에서도 이상한 것을 느꼈다.
"뭐야……?"
분명 제천대성의 손가락은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글자로 보이는 무엇인가를.
허나 제천대성이 쓰고 있는 글자가-
"……안 보인다고?"
-김현우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
그냥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김현우의 눈이 거부하는 것처럼, 제천대성이 쓴 글- 아니 그냥 제천대성이 무슨 글자를 쓰는지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거다."
"이런 썅-"
이내 글쓰기를 멈춘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욕을 내뱉었고, 그런 그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제천대성은 뒤이어 말했다.
"아무튼, 내가 아는 건 많아도 너한테 내가 알고 있는 정보 모두를 알려줄 수는 없다는 거지."
"……그럼 알 수 있는 정보가 하나도 없단 말이야?"
김현우가 짜증을 내며 제천대성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또 아니지."
"……나랑 장난쳐?"
김현우가 인상을 팍 찌푸리자 제천대성은 곧바로 답했다.
"장난치는 게 아니라 지금 차근차근히 알려주고 있는 거 아니야?"
-거 성질 더럽게 급하네.
그는 김현우를 보며 그렇게 말하곤-
"아무튼, 이런 식으로 탑에 어느 정도 '중요'로 취급되는 내용을 내가 말하지 못하지만 간단한 정보는 가능하지, 예를 들어 네가 물어봤던 9계층서 12계층까지 가는 시간 같은 건 말이야."
-이내 본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 163
163. 이산대성(移山大聖)과 근두운(1)탑의 최상층.
다른 계층보다도 그 크기가 무척이나 작은 최상층의 공동에는 그가 앉아 있었다.
'형체 없는 자'
애초에 그 존재조차도 명확하지 않게 주변에 검은 안개가 흩뿌려지고 있는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허공이 아니었다.
분명 그가 보고 있는 곳은 그저 장식물이 있는 허공일 뿐이었으나, 형체 없는 자의 두 눈에는 분명히 무엇인가가 보이고 있었다.
그래, 바로 제천대성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있는 김현우를.
그렇게 그 모습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가 입을 열었다.
"전우치가 소멸했다고?"
형체 없는 자의 물음.
분명 그밖에 없는 공동이었음에도, 대답은 무척이나 빠르게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그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분명히 없었건만, 후드를 쓴 남자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무릎을 꿇고 있었고.
"소멸이라……."
형체 없는 자는 묘한 숨을 쉬며 허공을 계속해서 바라보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저 녀석이 전우치를 소멸시켰다 이 말인가?"
"예, 주(主)도 보신 것처럼, 전우치는 도망치지도, 숨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소멸했습니다. 비록 그는 제천대성의 업(業)을 빌리긴 했지만……."
"결국 소멸시켰다 이거군, 일개 이레귤러가 탑을 전부 오르고 내 업(業)까지 받아 챙긴 정복자를."
"……."
형체 없는 자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도래했다.
조용한 공동.
후드를 쓴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형체 없는 자는 어느새 보고 있던 김현우의 모습을 망막에서 지운 채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씨익-
그의 입가의 안개가, 진하게 웃는 모습을 만들어냈다.
"멋지군."
"예?"
형체 없는 자의 말에 남자는 한순간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고 형체 없는 자는 말을 이었다.
"멋지지 않은가? 고작 시험을 위해 만들어진 '이레귤러'가 시험을 끝낸 자를 죽인다는 건 멋진 일이지. 아주 멋진 업적이야!"
처음에는 조곤조곤 말하다 나중에는 격앙된 억양으로 말을 내뱉은 그는 입가에 맺힌 진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고, 이내 말했다.
"놔둬라."
"예……?"
"놔두라고 했다."
정복자의 물음에 남자는 처음에는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으나 거듭되는 그의 말에 그는 이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이레귤러를, 그냥 놔두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남자의 물음에 형체 없는 자는 대답했다.
"그래 '지금은' 놔두어야지."
"……'지금은'이라니……."
남자는 굳은 얼굴로 형체 없는 자를 바라봤으나 형체 없는 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시선을 돌려 거대한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는 테이블.
남자는 또 한번 말했다.
"주(主)여, 그를 놔두면 저희의 계획에도 차질이 빚어질 겁니다. 그럴 바에는 빠르게 그를 처리하는 게-"
"아니, 아니다. 기다려야 해."
"도대체 왜……?"
그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형체 없는 자를 바라봤으나 그는 여전히 안개 너머로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저번에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기대했지. 허나"
"……."
"녀석은 이미 내 기대를 넘어섰다. 그래, '이레귤러'로서는 말이야."
"……!"
"이제는 궁금해, 그가 얼마만큼이나 자신의 발아래 자신의 것을 쌓아 올릴 수 있는지. 그러니까-"
그는 웃으며.
"이번에는 아주 약간의 '시간'을 주도록 하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공동에 적막이 가득해지기 시작할 때쯤.
"-정도 걸리지."
무릉도원에서 제천대성에게 정보를 전해들은 김현우는 이내 그의 말을 전부 듣고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9계층부터 12계층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라고?"
"500일"
"500일?"
"그래, 500일."
"아니 씨발, 그게 말이 돼?"
김현우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답했다.
"말이 안 되는 이유는 또 뭔데?"
"내가 너 조지고 8-35계층인가 하는 곳에 내려갔다 올 때는 1달이 채 안 걸렸는데?"
김현우의 말에 제천대성은 말했다.
"그건 네가 그렇게 겪은 거고, 9계층부터 12계층까지 한 번에 쭉 뚫고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는 걸릴 거라니까? 게다가- 아 너는 아니지."
"뭔데?"
"너는 '등반자'가 아니니까. 아마 길만 제대로 찾으면 각 계층의 클리어 퀘스트를 완료하지 않아도 위로 올라갈 수 있겠지."
"클리어 퀘스트라면…… 설마 계층을 멸망시키는 거?"
김현우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했다.
"뭐, '9계층'의 클리어 퀘스트는─────지만."
순간 일그러지는 제천대성의 목소리.
"안 들렸는데?"
"뭐야? 이것도 제한이야?"
제천대성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찬 뒤 말했다.
"그냥 계층마다 클리어 조건이 다르다는 것만 알아둬, 이건 온전하게 전부 들리지?"
그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내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니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럼 12계층까지 가는데 500일이나 걸린단 말이야?"
"뭐, 네가 신나게 달려가고 거기에다 길도 바로바로 찾을 수 있다면 시간을 줄일 수 있겠지."
"어느 정도?"
"200일 정도?"
"이런 미친, 그것도 너무 긴데?"
김현우의 말에 제천대성은 답했다.
"아니, 애초에 거기에 왜 가려는 건데? 생각해 보니까 딱히 가야 하는 이유를 들은 것 같진 않은데."
제천대성의 물음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현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고 제천대성은 그런 김현우의 말을 한동안 듣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12계층에 있는 탑이 '제작자'가 만든 탑이고, 너는 그놈을 만나려고 그 탑에 간다 이거지?"
"그래, 정확히는 그 탑에 이걸 사용하는 거지만."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제천대성에게 '불완전한 악천의 원천'을 건네줬고, 그는 김현우가 내민 그것을 받아들고는 로그를 확인한 뒤 말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매개체'만 있으면 이 아티팩트를 사용해서 그 매개체의 주인을 만날 수 있다 이거지?"
"맞아."
김현우의 끄덕거림에 제천대성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지금 네 문제는 12계층에 가야 하는 데 오래 걸리는 게 문제라는 거지?"
"그렇지, 아무리 시간을 줄여도 300일이면 12계층에는 못 올라가는 거나 다름없지."
김현우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그의 중얼거림에 제천대성은 말했다.
"솔직히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이걸 가지고 있다면 12계층에 빨리 갔다 올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진짜?"
김현우가 깜짝 놀라며 묻자 제천대성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 방법이 뭔데?"
그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 근두운(?斗雲)이라고 아냐?"
***
천호에 있는 저택.
"그래서, 모델 촬영은-"
"안 나간다고 해."
"예."
아냐의 말에 곧바로 대답한 김현우의 말에 실망한 표정으로 슬쩍 시선을 돌리는 하나린과 미령을 보며 그는 묘한 표정으로 그 둘을 돌아보았다.
'대체 뭐야?'
어째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싸우지도 않고 묘하게 가까워 보이던 그 둘을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리고 제천대성에 대해 떠올렸다.
아브의 시스템 룸에서 빠져나간 뒤 곧바로 여의봉 안에 들어갔던 김현우는 제천대성에게서 자신이 원하던 정보와 동시에 그 정보의 해결법을 들을 수 있었다.
"근두운(?斗雲)이라……."
김현우는 제천대성의 입에서 나왔던 그 이름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제천대성의 말에 의하면 만약 근두운이 있을 경우 9계층에서 12계층까지 가는 데에 걸리는 200일이라는 시간을 고작 5일 정도로 줄여 줄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제천대성도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탑'을 클리어하며 올라갔기에 제대로 시험해보지는 않았다고. 그렇기에 대략적인 시간 단축을 이야기한 것뿐이라고.
'그래도'
만약 제천대성이 말한 근두운이 정말로 12계층까지 가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다면 김현우는 거의 무조건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근두운을 얻어야 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제작자'를 만나고 싶었으니까.
'……존나 패버려야지.'
……만나서 존나 패버리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나름대로 짧은 생각을 마친 그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자들을 바라봤다.
"……."
하나린은 그렇게 티가 나진 않았으나 왠지 생긋거리던 미소가 슬쩍 사라진 느낌이고 미령은 굉장히 아쉬워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둘 다 굳이 티를 내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김현우가 보기에 그들의 행동은 너무 티가 났다.
'……도대체 뭐지.'
김현우는 순간 둘에게 말을 걸려던 입을 다물고 그녀들의 표정을 관찰한 뒤, 이내 뭔가가 집히는 듯한 느낌에 슬쩍 사무소로 돌아가려던 아냐를 바라봤다.
어느새 서류를 정리하고 일어날 준비를 마친 아냐.
김현우는 슬쩍 시선을 돌려 아냐와 제자를 번갈아보곤 이내 아냐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예?"
"그 서류 좀 다시 줘봐."
"서류요?"
"그 전속 모델 서류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아냐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가방 안에 넣었던 서류철을 꺼냈고-
"……!"
김현우는 그와 함께 갑작스레 표정이 살아나기 시작한 제자들을 보고 순간 피식 하는 웃음을 지으려다 참았다.
'…….'
그 짧은 행동 변화로 김현우는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제자들이 대충 이것과 관련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내 슬쩍 고민하던 그는-
"그냥 하겠다고 해."
"예?"
"그냥 하겠다고 하라고, 다만 촬영시간은 5시간…… 아니 내가 가고 나서 2시간 내로 끝내는 걸로."
김현우의 말에 아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수긍했고, 이내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환하게 바뀌어 있는 제자들의 표정을 보았다.
하나린은 미미하지만, 미소가 올라가 있었고.
반대로 미령은 알기 쉽게 밝아져 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표정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그래 뭐, 어울려 주지 뭐.'
뭘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자신에게 손해가 나는 것은 아닐 테니 김현우는 제자들이 노리는 것에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그래."
이윽고 서류를 챙긴 아냐가 자리에서 일어나 김현우에게 인사를 하곤 저택의 현관쪽으로 몸을 돌리고, 김현우는 곧 시선을 돌려 제자들에게 입을 열었다.
"애들아."
"예, 스승님."
"네, 사부님."
김현우가 입을 열자마자 동시에 입을 연 제자들.
그는 말했다.
"아티팩트를 하나 찾고 있는데, 찾을 수 있을까?"
"스승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그 무엇이든."
"사부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이 세상 전부를 뒤져서라도 찾아서 가져올게요."
"그럼 말이야-"
만족스러운 제자들의 대답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김현우가 말을 이어나가려고 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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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9계층의 통로로 새로운 '등반자'가 등반을 시작합니다.
위치: 인도 뉴델리
남은 시간 [ [01]: 04: 08: 12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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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갑작스레 자신의 앞에 나타난 문구를 보며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 164
오로바스.
164. 이산대성(移山大聖)과 근두운(2)그는 솔로몬의 72악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악마 중 한 명이며, 그 이명은 지옥의 위대한 귀공자라 불리는 악마였다.
"후후후후……."
그는 푸른빛이 감돌고 있는 미궁을 걷고 있었다.
온몸에는 그가 미궁을 올라오며 죽인 다른 몬스터들의 피와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고, 그런 피가 진득하게 묻어 있는 그의 창은 미궁의 길을 몬스터의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인간의 머리라기보다는 말을 머리라고 보는 게 어울리는 그의 얼굴에는 분명 말의 형태임에도 미소가 걸려 있었고.
몸을 지탱하고 있는 발에는 신발 대신 말의 말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고블린을 또 한번 창으로 찔러 죽이곤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미궁의 입구를 바라봤다.
'드디어 9계층인가.'
씨익.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던 입가가 쭈욱 찢어진다.
그와 함께 보이는 이빨은 외관상으로 보기에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으나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생각했다.
'순조롭군.'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중간에 꼬꾸라지는 다른 등반자들보다도, 오로바스는 무척이나 순조롭게 탑을 오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오로바스의 무력이 강한 이유도 있었으나 더 정확하면 오로바스의 능력 때문이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는'오로바스의 능력은 그가 탑을 오르며 있을 수 있는 모든 곤란한 상황을 배제해 주었고, 그렇기에 그는 탑을 순조롭게 오를 수 있었다.
별다른 위기 없이, 순조롭게.
그렇기에 오로바스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번 9계층에서도 자신은 별다른 문제없이 성공적으로 10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촤아악! 촤르륵!!
오르바스가 창을 한번 털어내자 창 끌에 떨어지던 몬스터들의 피가 한 번에 털어진다.
미궁의 입구에 튄 몬스터의 피.
오르바스는 이내 밝은 빛이 비치고 있는 9계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왔어?"
"……?"
주변의 풍경은 숲지였다.
약간은 색이 바랜 나무들이 여기저기 심어져 있었고, 하늘은 이제 막 해가지고 있는 듯 석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냥 광경으로만 보면 상당히 아름다워 보이는 그 풍경.
그리고 그 풍경 한가운데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갈색 가죽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응?"
김현우는, 조금 전 미궁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짓은 오르바스를 보며 물었다.
"아, 설마 환영해 주는 애들이 없어서 실망한 건 아니지?"
"네 녀석은…… 뭐하는 놈이지?"
미궁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다짜고짜 자신에게 헛소리를 하는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던 오르바스는 그렇게 물었고.
그에 김현우는 웃으며 말했다.
"에이, 너도 알고 있으면서 뭘 그렇게 물어봐? 아니면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거?"
마치 친구와 농담 따먹기를 하듯, 가볍게 입을 놀리는 그의 모습에 오르바스는 순간 머릿속에 하나의 단어를 떠올렸다.
'또라이인가?'
그동안 계층을 오르며 자신을 막기 위해 미궁 앞에 누군가가 있었던 적은 몇 번 정도 있었다.
어떻게 자신이 올라오는 것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전 계층인 8계층만 해도 오르바스가 미궁을 빠져나오자마자 자신을 공격했었고.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3계층도 그랬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적은…….'
적어도 오르바스의 기억에 이런 적은 없었다.
수백의 병사가 몰려 있는 것도 아니고, 앞에 있는 남자가 딱히 강해 보이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남자는 딱히 긴장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느긋하게 어디에선가 가지고 온 가죽 의자에 앉아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적어도 오르바스가 지금까지 경험해 왔던 이들과는 완전히 반대로 행동하고 있는 모습에 그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김현우를 보았으나-
"뭐-"
오르바스는 이내 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 같이 이상한 계층민이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멍청한 계층민의 행동을 보는 건 나름대로 유희 거리가 되거든."
오르바스의 입에서 나온 말.
그것은 김현우를 완전히 개 무시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와 함께 자신의 창을 들어 올린 오르바스는 그것을 어깨춤에 걸쳤고, 김현우는 자신감이 넘치게 행동하는 오르바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자신 따위는 이길 수 있다는 듯 오히려 김현우보다도 건들거리는 오르바스의 모습.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다.
적어도 오르바스는 지금까지 탑을 오르며 '위협적인'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가 알고 있기로, '9계층'에는 위협적인 존재가 없었다.
'적어도 먼저 올라간 그 녀석의 말에 의하면 말이야.'
오르바스는 자신보다 먼저 탑을 오른 솔로몬의 72악마 중 한 명을 생각하며 김현우를 바라봤고.
"지랄, 유희거리?"
김현우는 이내 멍한 표정을 지우고 그와 마찬가지로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유희거리지. 탑을 오르면서 너 같은 놈은 본 적 없거든. 내가 창을 휘두르면 계층인들은 전부 비명을 지르거나-"
오르바스는 그렇게 말하는 중 자신의 창을 한차례 휘둘렀고-파아아악!!! 콰가가가각!
그와 함께, 미궁 주변을 가리고 있던 오른편의 나무들이 부채꼴의 형상을 그리며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나무들을 박살 내고 그 뒤에 있는 절벽에 거대한 상흔을 남긴 오르바스.
그는 무척이나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창을 쥐며 뒷말을 이었다.
"-도망칠 뿐이었거든."
마치 가볍게 무력을 보여주는 듯 창을 휘두른 오르바스의 모습에 김현우는 그쪽을 바라보았고, 그에 오르바스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변해가는 김현우의 표정을 감상했다.
"……."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감상하려 했다.
보통의 계층인들은 이 정도의 힘만 보여주면 곧바로 전의를 잃어버리거나 굳은 얼굴을 지으니까.
허나-
"나랑 장난 치냐?"
김현우는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이 오르바스를 보며 피식 웃음을 짓고는 비아냥거렸다.
"뭐?"
"나랑 장난 치냐니까? 이 정도밖에 못 해?"
김현우의 물음에 오히려 당황한 듯 눈을 떠는 오르바스를 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정말로 만약 네가 진짜 이 정도밖에 못하는 놈이면 말이야, 아무래도 유희거리는 내가 아니라-"
팟-
"!!"
"네가 될 것 같은데?"
순식간에 오르바스의 앞에 나타난 김현우의 모습에 그는 깜짝 놀라며 창을 바로 잡으려 했으나-꽈아아아앙!!!
"크악!?"
-이미 김현우는 오르바스의 명치를 후려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자신이 빠져나왔던 미궁 안으로 날려진 그의 모습에 김현우가 비웃음을 머금으며 오르바스를 따라갔고-미궁 구석에 처박힌 오르바스는 배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말도 안 된다는 듯 자신에게 걸어오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았다.
마치 사신이 걸어오는 것 같은 김현우의 모습에, 오르바스는 본능적으로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뒤늦게야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읽는'자신의 능력을- 그리고-
"허……."
그는 곧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볼 수 있었던 수많은 미래를 보며 저도 모르게 멍한 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게-
"자,"
오르바스가 자신의 능력을 통해 본 수많은 미래의 거의 대부분, 아니 전부는-
"판이 바뀌었는데-"
오르바스가 김현우를 만난 시점부터-
"-이제는 누가 유희거리일까?"
-모두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
그다음 날.
[인도
"김현우 헌터에게 보상금"
무척 빠르고 신속한 대처에 감사하다. 표현]
[고인물, 또 한번 세상을 구하다?]
[지난 일 18시에 있었던 짧은 재앙(災殃)경보, 종합 정보 (中)]
지난 이틀, 갑작스레 인도의 수도인 뉴델리 외곽에서 재앙(災殃) 경보가 일어남에 따라 뉴델리 지역의 인구가 긴급하게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허나 재앙(災殃)경보 예고 시간인 18시, 뉴델리 지역에서 대피했던 인도인들은 대피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멀쩡한 도시에 다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번 재앙(災殃)경보에 발 빠르게 나선 한국의 헌터, 고인물이라는 이명으로도 불리는 김현우 덕분이었다.
김현우는 재앙 경보가 일어나자마자 인도에 도착했고, 별다른 보상 협상도 하지 않고 곧바로 인도에 나타난 재앙(災殃)을 처리해 주었다.
김현우는 18시를 기점으로 미궁에서 빠져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재앙을 약─(중략)
이에 인도 정부와 국제 헌터 협회에서는 김현우에게 '감사를 담은 보상을 하겠다'라는 말과 함께 적절한 보상안을 준비하는 중이다.
"흐음-"
김현우가 스마트폰에 주르륵 떠오르는 기사와 그 아래에 적혀 있는 댓글들을 한차례 훑어보고 있을 무렵-쾅!
"스승님!"
"사부님!"
어째서인지 저번에 보았던 것과 매우 흡사한 모습으로 김현우가 있는 방에 들어온 하나린과 미령은 한 숨을 돌릴 세도 없이 그의 앞에 동시에 상자를 내려놨다.
"찾아왔습니다!"
"찾아왔어요!"
"……그래."
얼굴을 앞으로 들이밀고 말하는 제자들이 부담스러워 슬쩍 그들을 밀어낸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려 상자를 바라보았다.
한 손에 집어 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상자.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상자를 열었고, 곧 그는 상자의 안에서 하나의 목걸이를 볼 수 있었다.
그가 목걸이를 들어 올리기도 전에 주르륵 떠오르는 로그.
------
이산대성(移山大聖)의 목걸이
등급: B-
보정: 없음
스킬: 곰방대
-정보 권한-
산을 옮기는 큰 성인이라고 전해지는 자, 이산대성 사타왕(移山大聖 獅駝王)이 걸고 있던 목걸이다.
평소 흡연을 중요시 생각하는 이산대성(移山大聖)이 자신의 끝없는 게으름을 떨치고 지하 깊숙한 곳에 살고 있는 이무기를 협박해 만들어 낸 것으로, 사용자의 생각에 따라 곰방대로 변한다.
곰방대로 변한 목걸이는 별다른 재료를 넣지 않아도 끝없이 잎을 태울 수 있으며, 그 맛도 자동으로 시전자의 입맛에 맞춰지게 된다.
------
김현우는 로그를 읽고 조금은 투박해 보이는 이산대성의 목걸이를 주워들었다.
등급은 B-에 스킬은 곰방대라는, 흡연을 즐겨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만 굉장히 의미 있어 보이는 스킬을 달고 있는 목걸이.
"이게 맞습니까?"
"그래, 이게 맞다."
혹시 몰라 조심스러운 물음을 던진 미령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준 김현우는 이내 제천대성의 말을 떠올렸다.
'이산대성(移山大聖)을 찾아가서 그 녀석에게 내 근두운을 받아라'라고 말했던 제천대성.
김현우는 자신의 주머니 안에 있던 악천의 원천을 꺼내들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나 잠깐 다녀올게."
김현우의 말.
"……어디를?"
그에 하나린은 순간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며 입을 열었으나, 미령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미령의 말에 김현우는 말했다.
"아마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건데, 잘 지키고 있어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목걸이와 악천의 원천을 한곳에 모았고- [악천의 원천을 '이산대성(移山大聖)의 목걸이'에 사용하시겠습니까? Y/N]
곧 떠오른 로그에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Y를 눌렀다.
그리고-
"!"
세상이 일변하기 시작했다.
# 165
165. 이산대성(移山大聖)과 근두운(3)────
"스, 스승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스승인 김현우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고, 그도 마찬가지로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한 침묵 속에서.
한참이나 그런 침묵 속에 빠져 있던 그 둘.
"!"
허나 그 둘의 침묵은 김현우가 먼저 행동을 시작하는 것으로 깨지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미령의 앞으로 다가오고, 미령은 그런 스승의 얼굴을 물기 띤 눈으로 바라보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짐에 따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둘의─────────────……
…….
…….
…….
……
.
────
툭-
"……."
아랑 길드 사무소 꼭대기층에 있는 집무실.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스크롤을 내리고 있던 스마트폰을 끄고 저도 모르게 묘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뜨지 않은 빈 액정을 바라보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게 뭐야……?"
불과 지금으로부터 대충 한 시간 전.
이서연은 김현우의 집에 있는 구미호에게 도술(道術)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러 가기 전, 길드 서류 문제와 오늘 길드 관련 문제로 찾아오는 김시현을 만나기 위해 아랑 길드에 왔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문제는 시작되었다.
분명 어느 정도 쌓여 있다고 생각한 서류가 이서연의 생각보다도 빨리 처리되었기에 그녀는 김시현이 올 시간 동안 잠시 시간을 때울 거리가 필요했고.
그녀는 평소처럼 시간을 때우기 위해 웹서핑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의 앞에는 조금 전 서류처리를 하던 컴퓨터가 남아 있었으나 이서연은 컴퓨터보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웹서핑하는 것을 선호했기에 폰을 만지작거렸고.
그렇게 폰을 만지작거리며 인터넷을 돌아다니던 그녀는 문득 실시간 검색어 키워드 90위 즈음에 걸려 있는 묘한 제목을 보았다.
'스승과 제자의 밀애'
딱 봐도 실시간 검색어에 걸려 있는 게 굉장히 부담스러워 보이는 소설 제목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검색어를 클릭했고, 곧 그녀는 그 검색어가 '소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서연은 평소에 소설을 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상황에 딱히 할 것도 없었기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
그녀는 소설을 보기 시작한 지 20분 정도가 돼서야, 무료로 풀리고 있고, 또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있는 이 소설이 '팬픽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자신이 아는 사람이 등장인물로 나오는 팬픽션, 더 정확히는 김현우와 그의 제자인 미령이 나오는 팬픽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등장인물들을 그, 혹은 그녀로 표현하거나 말 그대로 스승님과 제자로만 표현했기에 그저 그런 로맨스 소설인 줄 알았는데-
"어째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왜인지 익숙한 이름이 나온다 싶긴 했지만……."
-팬픽션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서연이 이곳에서 더 충격을 먹은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이 아는 등장인물, 게다가 그게 하필이면 김현우와 미령인 것도 분명 굉장한 충격이었으나 그것보다 더 충격이었던 것은-
'……뒷내용이, 궁금해……!'
-바로 지금 이 상황에서 뒷내용을 궁금해하는 이서연 본인 때문이었다.
물론 팬픽션을 보는 게 죄는 아니다.
애초에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를 통해 올라오고 있는 글이었고, 게다가 통합 검색에서 그저 연재되고 있는 블로그만 누르면 곧바로 이어서 볼 수 있는 글이었다.
그런데도 왠지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찔림은 이서연이 스마트폰의 전원부를 다시 누르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
한참동안이나 스마트폰과 눈싸움을 하던 이서연은 이내 저도 모르게 짧게 호흡을 한 뒤, 곧바로 자신의 검지 버튼을 이용해 스마트폰의 버튼을 눌렀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잠금화면.
이서연은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터치해 잠금화면마저 풀어버렸다.
그와 함께 보이는 아직 읽지 못한 다음 부분.
이서연은 왠지 금기를 벌이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에 휩싸이며 스마트폰을 향해 시선을 가져갔고, 곧 그녀가 그 다음 내용일 읽으려는 그 순간-벌컥!
"나 왔다."
"흐꺄아악!?"
이서연은 집무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김시현의 목소리에 놀라 저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던지고 말았다.
파드드득! 퍽!
순식간에 김시현의 머리 옆으로 날아가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난 이서연의 스마트폰.
이서연은 왠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얼굴로 김시현을 바라봤고, 김시현은 그런 이서연을 표정을 보다-
"……아니, 나 뭐 잘못했어?"
-허망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
악천의 원천을 사용하자마자 김현우가 보고 있던 세계가 일변하기 시작했다.
분명 김현우의 눈에 담겨 있던 저택안의 풍경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소파와 벽이 사라지고, 하나린과 미령의 모습이 마치 먼지처럼 사라진다.
그와 함께 부드러웠던 땅의 감촉이 까슬까슬하게 변해가기 시작하고, 마침내 김현우의 앞에 마치 그림이 그려지듯 세상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땅이 그려지고, 하늘이 그려진다.
그렇게 해서 김현우의 눈앞에 나타난 세상은-
"……뭐야?"
산중(山中)이었다.
앞에 보이는 것은 나무 나무 나무, 시선을 위로 올려 그 뒤를 바라보면 보이는 것은 오로지 산뿐, 그 이외의 다른 것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
마치 파란색과 초록색으로만 이루어진 세상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김현우는 몇 번이고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다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슬쩍 시선을 돌려 시스템창을 바라보니, 김현우는 성공적으로 악천의 원천을 이용해 이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럼 분명 이곳이 이산대성(移山大聖)이 있는 곳이라는 소리인데.'
가만히 생각하며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던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흡!"
-이내 높게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허공을 향해 도약한 김현우는 땅에 있을 때와 달리 한 번에 주변의 풍경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곧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썅-"
보이는 것은 오로지 산뿐이었으니까.
산.
산.
산.
그리고, 산.
오로지 녹색의 숲으로만 잔뜩 이루어진 그곳을 보며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 내가 이 근처에 소환되었다면 이산대성(移山大聖)도 이곳에 있다는 소리인데…….'
김현우는 그런 생각을 없애지 않으며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추진력을 다해 올라가는 것을 멈추고, 잠시간의 체공시간을 가지는 동안에도 김현우는 끊임없이 시선을 돌렸고--그가 떨어지기 시작할 때쯤, 김현우는 그 높은 하늘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
그것은 동굴.
분명 수십 채의 산과, 수십만 그루의 나무 사이에 숨겨져 있기는 했으나, 김현우는 산 절벽 아래에 만들어져 있는 동굴을 찾아낼 수 있었다.
꿍! 쾅!
동굴을 찾아내자마자 찌푸렸던 인상을 핀 김현우는 하늘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또 한번 뛰어올라 동굴이 있는 쪽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분명 김현우가 소환된 곳과는 꽤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약 한 번에 꽤 줄어드는 거리.
결국 김현우는 몇 번의 도약 끝에 자신이 찾은 동굴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는 뻥 뚫려 있는 동굴 내부를 관찰했다.
보이는 것은 잔잔한 푸른빛.
마치 미궁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푸른빛은 동굴 안을 비추고 있는 모습에 김현우는 모종의 확신을 가지고 동굴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동굴의 크기는 상당히 넓었다.
대충 사람 6, 7명 정도가 일렬로 걸어도 문제가 없을 정도.
그렇기에 김현우는 별다른 불편함 없이 동굴을 이동할 수 있었고, 곧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동굴 너머에 있는 출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김현우는 미궁의 출구로 빠져나가자마자 또 하나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절벽.
마치 산 한가운데를 뚫어서 만든 곳인 듯, 하늘에서는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으나 주변은 마치 원형 경기장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나무.
허나 김현우가 처음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빽빽한 수백 그루의 나무가 아닌, 무척이나 거대한 나무 하나였다.
그 나무 주변으로 절벽 사이사이에 자라나 있는 다른 나무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넌 뭐야……?"
김현우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뚝뚝하고 조금은 거친 느낌이 드는 목소리.
김현우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다, 이내 거대한 나무의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산대성(移山大聖)?"
"?"
김현우는 그곳에서 사자를 볼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수인(獸人)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까?
몸에는 누런색의 삼베옷을 입고 있는 그 수인은 날카로운 송곳니가 나 있는 그 바로 옆에 곰방대를 껴 놓고는 팔에 기대 누운 채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곧 사자 수인, 아니 이산대성은 말했다.
"나를 아직도 칠대성으로 부르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너는 누구지?"
귀찮음이 잔뜩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와 함께 느껴지는 궁금증이 담긴 물음.
김현우는 그 대답에 그가 이산대성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고, 그는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짧게 고민하다 우선 결론부터 말했다.
"제천대성이 네게 맡겨 둔 근두운을 찾으러 왔다."
"……아, 그래?"
김현우의 말에 순간 눈을 약간 떴으나 이내 고저 없는 말투로 대답한 이산대성.
뻐끔.
그는 자신의 공방대를 한번 빨아들여 짙은 회색의 연기를 뱉어냈고, 김현우는 그런 이산대성의 모습을 보며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유는 바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이산대성 때문.
그는 그 질문 이유로 별다른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뻐끔뻐금 곰방대를 피웠고, 곧 한동안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저기?"
김현우의 물음에 이산대성의 눈이 돌아가 김현우를 바라본다.
"근두운 가지러 왔다니까?"
"알고 있다."
이산대성의 대답, 김현우는 다시 물었다.
"아니, 알고 있다며? 그럼 뭔가 답을 해줘야 할 것 아니야?"
"그래."
김현우의 물음에 이산대성은 슬쩍 김현우를 바라보곤 그렇게 대답했다.
또 침묵.
그가 혹시나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 김현우는 기다렸으나 이산대성은 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곰방대를 피웠고, 그는 이산대성에게 곧바로 욕을 박으려 했지만-
"알았다."
이어서 나오는 이산대성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뻐끔.
이산대성은 김현우를 바라보고, 또 한 번 입에서 연기를 내뱉은 뒤 줄곧 누워 있던 자세를 바꿔 앉았다.
마치 나무늘보처럼 느릿느릿한 이산대성의 움직임에 김현우는 굉장히 답답하다는 듯 그를 보며 한마디를 내뱉으려 했으나-
"하지만 그전에-"
또 기가 막히게 김현우가 말할 타이밍의 끝에 입을 여는 이산대성.
김현우는 굉장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이산 대성을 바라봤고, 이내 그는 김현우를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제천대성, 아니- 아우가 그 탑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나 좀 들어보고 싶은데, 대충 근황이나 말해주지 않겠나?"
이산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화를 내야 할지 다른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은 표정으로 이산대성을 바라보다,
"후-"
이내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 166
166. 이산대성(移山大聖)과 근두운(4)
"흐음……."
산 한가운데가 뻥 뚫려 햇빛이 들어오는 산 안쪽.
뻐끔.
거대한 나무가 있는 그곳에서, 이산대성(移山大聖)은 김현우의 말을 듣고 회색연기를 내뱉었다.
그가 내뱉은 연기가 하늘 위로 올라가고.
"그래서, 내 아우는 탑을 오르다 네게 죽었다?"
이산대성(移山大聖)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허."
김현우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이산대성은 허 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나무에 기댔고, 이내 털이 수북한 손으로 곰방대를 잡고는 그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
"후─"
그와 함께 그의 입에서 빠져나오는 진한 회색빛의 연기들.
마치 생각을 정리하듯 시선을 내리고 있던 이산대성은 이내 고개를 들어 말했다.
"그래서, 제천대성은 지금 자신의 여의봉(如意棒)에 들어가서 너와 계약을 한 거고?"
"그것도 맞지."
"쯧, 미련한 놈."
김현우의 말에 대놓고 혀를 찬 이산대성은 이내 자신의 머리, 아니- 갈기를 긁적거리며 한숨을 내쉬곤 중얼거렸다.
"형들은 전부 포기했거늘 녀석은 물질로 '혼(魂)'을 옮겨 아직도 혼자 탑을 오르려 한단 말인가."
이산대성은 탄식인지 뭔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복잡한 눈으로 김현우를 보곤 물었다.
"그래서, 내 아우가 있다는 여의봉(如意棒)은 어디 있지?"
그의 물음에 김현우는 답했다.
"지금은 없어."
"지금은?"
이산대성의 되물음에 김현우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 그에게 '악천의 원천'을 사용할 때에는 다른 아티팩트를 들고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설명했고-
"……쯧, 그거 아쉽게 됐군."
이산대성은 아쉬워하며 다시 곰방대를 피워 올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말은 뭐야?"
"무슨 말을 말하는 거지."
"모두 포기했다는 말말이야. 형들은 포기했는데 아우 혼자서만 탑을 오르느니 뭐니 말했잖아?"
"아, 그거 말인가?…….뭐, 상관없겠지."
김현우의 물음에 답한 이산대성은 순간 이걸 말해줘도 되나? 하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아까 말 그대로의 이야기다. 칠대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칠대성?"
김현우의 되물음에 그는 간략히 칠대성에 대해 설명했다.
칠대성(七大聖).
그들은 현재 김현우가 사용하는 여의봉(如意棒)안에 있는 제천대성(齊天大聖)과 의형제를 맺은 요괴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한 명 한 명이 전성기에는 하늘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요괴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리고 그런 그들의 무력을 알고 있는 하늘은, 의형제를 맺은 그들을 칠대성(七大聖)이라고 불렀다.
"칠대성에 대해서는 대충 이 정도로 설명해 두면 될 것 같고, 아까의 말을 이어보자면 말 그대로의 이야기다."
뻐끔.
"칠대성은 그 누구도 더 이상 탑을 오르고 있지 않다. 그 우둔한 아우 제천대성(齊天大聖)을 빼고는 말이야."
"그럼 나머지는……?"
"뭐? 나머지는 뭘 하고 있냐고 물어보는 건가? 그야 당연히 나를 포함한 다른 녀석들은 죄다 이 눈물 나게 작은 허수 공간에 묶여 무료하게 생활하고 있지."
뻐끔-
분명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탄식이 느껴지는 그의 말투에 김현우는 이상함을 느꼈고, 그렇기에 물었다.
"어째서?"
"?"
"어째서 제천대성 이외에는 탑을 오르지 않고 있는데?"
김현우의 물음.
그것은 현재 김현우에게 있어 하등 쓸모없는 정보를 물은 것과 마찬가지였으나, 김현우는 문득 궁금함을 느꼈기에 물음을 던졌다.
그런 그의 물음에 이산대성은 의외로 무척이나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사실을, 어찌 보면 무척이나 당연한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실을 깨달았다고?"
"그래, 고작 그것뿐인 이야기지. 그냥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야."
뻐끔.
이산대성은 그렇게 말하고는 담배를 한번 피운 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가 아무리 탑의 위를 향해 달려들어도, 절대로 빼앗긴 업(業)을 온전히 찾을 수 없다는 진실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그 녀석의-"
이산대성은 입을 열려다, 슬쩍 시선을 돌리곤 말했다.
"아니, 말이 과했군."
"……?"
뻐끔.
"아직 아우가 분투하고 있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도 골 때리니 더 이상 말하지는 않겠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
갑작스레 말을 끊어버린 이산대성.
'이 새끼들은 말하다 마는 게 기본 베이스야?'
그렇기에 김현우는 은근슬쩍 불만을 느꼈으나 그는 딱히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어차피 그것은 어디까지나 김현우가 궁금증을 가지고 물어본 것들 중 하나였으니까.
이내 김현우는 대화 주제를 바꾸어 말했다.
"그래서, 이제 당신이 궁금한 건 전부 해소한 것 같은데."
"뭐 그렇지."
"……뭐 그렇지가 아니라, 이제 궁금증 해소 다 했고 더 이상 들을 말 없으면 근두운이나 좀 줬으면 좋겠는데?"
김현우의 요구.
그에 이산대성은 문득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뭐, 나도 듣고 싶은 이야기는 전부 들은 것 같고. 네 말이 딱히 거짓말인 것 같지도 않으니 근두운을 넘겨주긴 할 건데…… 네가 가져 갈 수 있겠나?"
"……가져 갈 수 있겠냐고?"
이산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고. 이산대성은 곧바로 말했다.
"뭐, 오해하지 마라 너한테 '근두운'을 주지 않겠다는 소리가 아니니까. 괜히 쓸데없이 싸우는 건 싫어하는 편이거든, 게다가 귀찮고."
"그럼 그게 무슨 소리야? 가져갈 수 있겠냐니."
"뭐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아우가 내게 맡기고 간 근두운은 분명 내 허수 공간에 있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넘겨 줄 수는 없다."
"뭐? 그게 뭔 소리야?"
김현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산대성은 짧게 고민하는 제스쳐를 취하곤 이내 말했다.
"업(業)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업?"
"그래, 이 탑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이전에 쌓아 온 업(業)을 힘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이지."
이산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김현우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도 그럴게 그는 뇌련신공을 전수받았던 천마(天魔)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
"내가 조금 전에 말했지? 근두운의 업(業)이 내 '허수 공간'에 있다고."
"……그렇지?"
"그리고 기본적으로 자신이 쌓은 것이 아닌 남의 업(業)은 본인의 것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다. 업(業)이라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족적을 바탕으로 해 만들어지는 거니까."
뻐끔-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것도 아닌 업(業)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뭐-"
-탑의 최상층에 있는 그놈이 관여한다면 달라지겠지만.
짧게 혀를 차며 입을 여는 이산대성.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자신이 얼마 전에 상대했던 전우치를 떠올렸다.
분명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던 청룡의 업(業)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던 그의 모습.
김현우가 전우치의 모습을 짧게 생각하며 이산대성을 바라보자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무튼, 탑의 최상층에 있는 그놈이 손을 쓰는 것이 아니라면 남의 업(業)을 손쉽게 얻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썅."
이산대성의 말에 욕설로 탄식을 내뱉는 김현우.
뻐금-
허나 그런 김현우의 욕설에도 이산대성은 느긋하게 곰방대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뭐, 그래도 결국 내 허수 공간 안에 근두운의 업이 있는 이상 네가 업(業)을 가지고 갈 방법이 있기는 하다."
"그게 뭔데?"
"간단하다. 그냥 단순히 네가 아우의 업(業)을 그대로 따라하면 되는 거다."
"뭐라고?"
"아, 이건 좀 어폐가 있군. 정확히는 아우가 저 근두운을 얻었을 때의 업(業)을 그대로 따라 해 네가 근두운의 업(業)을 네 것으로 만들면 된다."
무척이나 평온하게, 마치 남일처럼 입을 여는 그의 말에-
"이런 씨발-"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
서울 성내 쪽에 지어져 있는 3체의 거대한 빌라.
가운데에 있는 가디언 길드를 필두로, 왼쪽에는 패도길드지부가 설치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이번에 새롭게 만들어진 길드인 암중(暗中)길드 사무소가 세워져 있었다.
성내에 갑작스레 위치하게 된 3개의 길드.
그리고 그 덕분에 그 세 개의 길드 사무소가 세워져 있는 근처는 뜻밖의 경제 활성화가 되고 있었다.
분명 가디언 길드 사무소가 들어서기 전에는 없었던 높은 빌딩들이 세 개의 사무소를 중심으로 여기저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패도길드와 암중길드가 터를 잡은 뒤 그 뒤로 몰려들기 시작한 인구는 자연스럽게 주변 경제 활동을 촉진 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분명 김현우가 터를 잡기 전에는 서울에서는 비교적 그리 높은 땅값이 아니었던 김현우의 사무소 근처 지역은, 지금 현재 무척이나 높은 땅값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높은 땅값이 된 주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현우의 제자들은.
"……."
"……."
그가 원천을 사용해 떠난 뒤 얼마 되지 않은 시간대에 암중(暗中)길드의 집무실에서 거대한 판 하나를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미령과 하나린, 분명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쯤.
"그래서, 할래요?"
먼저 말을 건 것은 바로 하나린이었다.
하나린은 미령에게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을 툭툭 쳤고, 그와 함께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 판 위에는 거대한 지형이 떠올랐다.
마치 어딘가의 지형을 만들어낸 듯한 그 지형.
그것은 바로 예전, '백상(白象)'이 박살을 내놨던 멕시코시티의 모습이었다.
하나린은 테이블 위에 그 거대한 지형을 띄워놓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 하지 않더라도 상관은 없어요. 외부인력을 좀 빌리긴 하지만 결국 제 손으로 전부 커버 할 수 있는 거니까."
"흐음……"
그녀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
그것은 바로 반파된 멕시코시티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몇 달 전 백상의 공격으로 무엇 하나 남아난 것 없이 깨끗하게 지도상에서 지워진 멕시코시티는 이제야 사후처리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다시 건물을 올리는 것뿐.
그리고 그 단계까지 와서 하나린은 미령에게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함께 손을 잡고 멕시코시티를 올리자는 제안'을.
'솔직히, 혼자 하고 싶긴 하지만.'
지금부터 하나린이 하려는 것은 자신이 키운 조직의 힘만으로는 조금 위태로운 감이 있었다.
분명 예전, 백상이 멕시코시티를 완전히 박살 냈을 때만 해도 하나린은 충분히 그것들을 조종할 힘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그때에 멕시코시티는 대 혼란 상태였으니까.
허나 시기가 지나고 멕시코시티의 복구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부터, 이미 '뒤'에서는 너도나도 숟가락을 올리고 있었다.
물론 그것들이 하나린에게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중요한 것은 그 녀석들 때문에 쓸데없는 시간이 소모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전부 깔끔히 죽이자니'
그놈들을 다 죽이고 나면 각지에서 또 다른 문제가 터져 나올 것이 자명했기에 하나린은 차선책으로 미령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와는 저번에 각자가 만족할 수 있는 '거래'를 해 본 적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분명 중국을 통째로 손아귀에 넣고 있는 그녀라면 지금보다도 수월하고 빠르게 그 녀석들을 쳐내고 멕시코를 복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김현우가 원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도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린은 곰곰이 고민하는 미령을 잠자코 기다렸고, 이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미령이 입을 열었다.
"절반."
"?"
"그 땅의 절반은 내가 원하는 건물을 짓도록 하겠다."
미령의 말에 하나린은 순간 인상을 찌푸렸으나-
'……아니, 생각하면 그리 나쁜 건 아닐지도.'
어차피 '뒤'가 숟가락을 올리려 했던 땅들을 미령에게 전부 다 몰아준다고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좋아요."
그렇기에 계산을 끝낸 하나린은 그 조건을 수락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렇게 절반을 가르지."
"아뇨, 이 부분에서는 지형의 고저차도 있으니 이렇게 가르는 게 조금 더 형평성에 맞는다고 생각해요."
-그녀들은
"아니, 아니다. 이건 이렇게-"
"카지노는 한 곳만 있어도 충분하니 그쪽에서는 다른 건물을-"
김현우만을 위한-
"그럼 인력에 대해서는 이쪽에서 어느 정도 손을 쓰도록 하지, 아 이참에 스승님이 말했던 10단 격투장을 만들어 보는 것도-"
"사부님은 이전에 하늘위에 떠 있는 풀을 가지고 싶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신데, 이번 기회에-"
-광란의 현실 심시티를 시작했다.
# 167
167. 이산대성(移山大聖)과 근두운(5)제천대성(齊天大聖)의 업(業)인 근두운은 정확히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맨 처음, 제천대성이 사용하던 술법의 이름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근두운술(?斗雲術)'로, 제천대성은 그 술법을 만들어 구름을 탈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잠자코 이산대성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현우가 묻자 그는 재주 좋게 곰방대를 입에서 떼어 놓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간단하다, 이제부터 너는 이곳에서 '근두운술(?斗雲術)'을 익히면 된다. 내 아우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근두운술을 익히라고?"
"그래. 네가 내 아우와 같이 '근두운술'을 배우는 것으로 업(業)을 만들라 이 소리다. 만약 네가 성공적으로 업(業)을 만들어 내면 이곳에 있는 근두운을 가져갈 수 있겠지."
이산대성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 김현우는 이내 짜증을 내듯 물었다.
"아니, 정말로 나보고 배우라고? 그 근두운술인가 뭔가 하는 걸?"
"그럼 설마 아무런 힘도 안 들이고 업(業)을 가져갈 수 있을지 알았나?"
너무나도 당연하게 대꾸하는 이산대성.
"에라이 썅, 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그의 말에 김현우는 괜히 궁시렁대며 에꿎은 땅을 발로 찼고, 곧 제천대성을 떠올렸다.
'이 새끼…….'
분명 근두운을 가져오라고만 했지 직접 근두운술을 배워야 한다는 소리는 처음부터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에휴…….'
허나 지금 와서 짜증만 내봤자 되는 게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김현우는 짜증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이산대성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근두운술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글쎄."
"글쎄라니?"
"뭘 그렇게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거지? 혹시 몰라서 말해두겠지만 나는 근두운술에 관련해서는 전혀 모른다. 나는 도술(道術)에는 영 잼병이거든,"
-뭐, 그 대신 칠대성 중에서 순수한 무력만큼은 으뜸이지만.
괜히 자랑하듯 말하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 이산대성을 바라본 김현우는 이내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하며 물었다.
"그럼 설마."
"설마?"
"설마, 나 혼자 알아서 근두운술을 익히라는 건 아니지?"
"잘 알고 있군."
"이런 씨발 진짜!"
꽝!
김현우가 신경질을 내며 땅을 발로 차자 순식간에 박살이 나는 주변 지형.
순간 땅이 푹 거지는 광경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무척이나 대단해 보일 만한 것이었으나 정작 이산대성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도술에 대해 몰라서 알려줄 수 없지. 하지만, 만약 내가 도술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해도 너를 도와주지는 않았을 거야."
"뭐라고?"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린 얼굴로 그를 돌아봤으나 이산대성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도 그럴게 업(業)이라는 건 똑같이 수행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똑같이 수행이라니?"
"자네는 아우가 근두운술을 누군가에게 배웠다고 생각하나? 유감이지만 아우는 그 누구에게도 근두운술을 배우지 않았네. 그러니까-"
"……나도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똑같이 스스로의 힘으로 근두운술을 익혀야, 제천대성의 업(業)을 들고 갈 수 있다?"
"그렇지. 아우와 똑같은 고행을 하면 그것은 업(業)으로 인정될 테니까."
이산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고. 이산대성은 그런 그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이내 가볍게 점프해 내려앉은 땅 밖으로 빠져나와 말했다.
"뭐, 그럼 열심히 해보도록 해, 나는 늘어지게 한숨이나 잘 테니."
뭐-
"좀 시끄럽게 굴어도 상관은 없네. 어차피 나는 한번 잠들면 잘 깨어나지 않는 성격이거든."
이산대성은 그렇게 말하며 그대로 몸을 돌리고는 밖으로 빠져나가려다 깜빡한 게 있다는 듯 나지막하게 탄성을 터트렸다.
"아."
"?"
"그리고 자네가 찾고 있는 근두운은 저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이니 잘 해보도록 하게."
이산대성은 그 말을 끝내고 곧바로 몸을 움직여 저 멀리로 움직였고.
김현우는 숲속으로 사라지는 이산대성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푸른 하늘 사이에 껴 있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김현우는 이상함을 깨달았다.
"움직이네……."
이곳은 허수공간이다.
모든 것이 그럴듯하게 장식되어 있으나, 그 시간은 완전히 멈춰 있는 곳.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도.
그 위에 떠 있는 햇빛도.
모든 것이 멈춰 있어야 하는 곳일 텐데-
"……."
-이 허수공간의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은 마치 시간이 멈추지 않은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그리고,
"니기미-"
그때부터 도술(道術)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김현우의 근두운술(?斗雲術) 독학이 시작된 지 정확히 3년이 지났다.
어떻게 그때부터 정확히 3년이 지났는지 알 수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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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현우 [9계층 가디언]
나이: 121
성별: 남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S++
민첩: S++
내구: Ss
체력: S++
마력: S++
행운: B
SKILL -
정보 권한 [중상위]
알리미
출입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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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백십팔 살이던 김현우의 정보창이, 오늘을 기점으로 백스물한 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
멍하니 자신의 눈앞에 떠 있던 정보창을 바라본 김현우는 이내 멍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봤다.
구름은 아직까지도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고, 푸른 숲은 그 자태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
똑같았다.
3년 전과.
"이런 개씨발!"
꽝!
제자리에 앉아 있던 김현우가 저도 모르게 신경질을 내며 주먹을 휘두르자 순식간에 전방의 나무들이 터져나간다.
허나 그것도 잠시.
분명 김현우의 주먹에 부서져 나갔던 나무들은 놀라운 속도로 제자리를 찾아 순식간에 원래대로 수복되었고, 그 모습을 질렸다는 듯 바라본 김현우는 하늘을 바라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시발 어떻게 하냐."
햇수로 따지면 3년.
일수로 따지면 1093일.
시간으로 따지면 26280시간이라는 더럽게 긴 시간 속에서, 김현우는 도술(道術)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도술(道術)비슷한 무언가였다.
애초에 김현우가 진짜 도력(道力)을 얻을 수는 없었으니까.
뭐 그래도 그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당장 자신을 괴선(怪仙)이라고 불렀던 전우치도 조금 신묘하기는 했으나 결국 '마력'을 사용했었고, 그것은 원래 근두운의 업(業)을 가지고 있던 제천대성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무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시작한 3년 동안의 독학.
물론 처음부터 잘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김현우가 천마(天魔)의 뇌령신공을 수련하는 데만 해도 걸린 시간이 약 100년이었고, 거기에 지금 김현우가 수련해야 하는 것은 그가 처음 접해보는 도술이었으니까.
게다가 천마(天魔)때보다 상황이 안 좋은 것은 바로 그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도술을 독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술을,
그저 독학으로.
"하."
그의 메마른 한숨을 터져 나온다.
그는 저도 모르게 유영하는 하늘을 보며 3년 동안 했던 개지랄을 떠올렸다.
맨 처음 1년째,
김현우는 구미호와 이서연의 이야기를 언뜻언뜻 들었던 것을 기억해 오행진(五行陣)을 그려 무언가를 해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뭐, 당연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오행진을 그린다고 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다음으로 김현우가 행했던 것은 바로 무작정 구름 위로 뛰어올라 보는 것이었다.
물론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 방법은 실패했다.
김현우는 뇌신(雷神)의 형태로 변해 구름 위까지 올라가는 것에는 것은 성공했으나, 구름을 탈 수는 없었다, 물론 한 번만으로 끝내지는 않았다.
구름 위까지 뛰어올라 마력을 이용해 구름을 묶어보기도 했고.
마력을 구름 속에 집어넣어 그 밀도를 높게 유지하려고도 해봤다.
허나 모두 실패.
웃긴 것은 그 과정에서 김현우는 '근두운술'에 대해서는 전혀 감을 잡지는 못했으나 어처구니없게도 묘리 하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허공답보(虛空踏步)의 묘리를.
그는 자그마치 2년 동안이나 구름 위로 올라가기 위해 도약했고, 또 그 상태에서 어떻게든 하늘 위에서 버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그는 자연스럽게 허공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소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에 김현우는 좋아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근두운술 대신 허공답보를 얻었을 때가 김현우가 도술을 독학한 지 딱 2년 차가 된 날이었고.
그 뒤부터 지금까지, 김현우는 적어도 자신이 머릿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았다.
마력을 강제로 형상화시켜 구름에 접목해 보기도 하고, 오히려 마력을 구름처럼 만들어서 타보기도 했다.
그게 아니면 허공에 떠 있는 구름을 모으기 위해 마력을 사방으로 퍼트려 보기도 했고.
나중에는 그냥 아무런 생각도 없이 구름 위에 서 있기도 해봤으나 되는 것은 없었다.
물론 이것도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는 있었다.
김현우가 구름을 타기 위해 개지랄을 하는 동안 그는 저도 모르게 마력을 이전보다 섬세하게 운용하는 법을 알았고, 또 마력을 실질적으로 형상화하는 법까지도 깨달았다.
이전과는 다른, 김현우의 전력에 보일 수 있는 유의미한 진화.
허나, 결국 근두운술을 깨닫지는 못했다.
"……."
김현우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냥 제천대성에게 가서 물어봐야 하나."
수십 번이고 했던 생각.
김현우는 이곳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나갈 수 있었고 미궁에서 몬스터를 잡아야 하기는 해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곳에서 홀로 수련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산대성의 말 때문이었다.
제천대성과 같이 홀로 근두운술을 깨달아야 한다는 이산대성의 말.
김현우는 그의 말 때문에 수십 번이나 밖으로 나갔다 오는 것을 고려했으나 결국 나가지 않았다.
'솔직히 마음만 같아서는 밖으로 나가서 제천대성에게 이것저것 전해 듣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만약 그렇게 해서 근두운술을 배우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근두운을 다루지 못하면?
그건 그것대로 낭패였다.
이건 엄연하게 따지고 들어보면 결국 일종의 시험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후……."
김현우는 몇 번이나 쉬었는지 모를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바라봤다.
분명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본 것 같았다.
마력을 이용해 구름을 만들어보기도 했고, 또 그 마력을 이용해 구름 최대한 밀집시켜 가두어 둔 뒤 그 위에 타올라 보기도 했다.
뭐, 결국 그대로 구름을 통과해 떨어져 버렸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김현우는 구름을 보았다.
정처 없이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
"씨발 구름이랑 같이 붕뜨라는 소리인가."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렸고.
"이제 시도할 방법이라고는 단 하나도……?"
곧 자신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김현우는 다시 한번 고개를 쳐들었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구름.
허나 김현우는 아까 전과 달리 인상을 찌푸리지 않은 채 허공을 보며-
"있네……?"
그렇게 중얼거렸다.
# 168
168. 이산대성(移山大聖)과 근두운(6)하늘나라와 지상에서 칠대성(七大聖)이라 불렸던 요괴.
뻐금-
산을 옮기는 큰 성인, 이산대성 사타왕(移山大聖 獅駝王)으로 불렸던 그 수인은, 자신의 입가에 물려져 있는 곰방대를 한 모금 빨아들이곤 길게 내뱉었다.
"후우-"
그와 함께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잿빛 연기.
이산대성의 입가에서 흘러나온 잿빛 연기가 일순 그의 눈앞을 가리고, 이내 연기가 사라졌을 때.
"흐음……."
그는 허공에서 실시간으로 지상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김현우를 볼 수 있었다.
뻐금-
또 한번 이산대성의 입가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올 때쯤에는 김현우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가 한 번 더 연기를 내뱉을 때는 김현우의 모습이 보인다.
하늘에서 추락하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이.
'도대체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셈이지……?'
그리고 이산대성은 여태까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텅 비어 있던 머리에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주입했다.
김현우가 이 허수공간에 있던 시간동안 이산대성은 틈틈이 김현우가 무엇을 하는지 확인했었다.
뭐 굳이 확인한다는 표현보다는 그저 잠을 자다 문득 눈을 떴는데 김현우의 모습이 보였다고 하는 게 맞을까?
허수공간 내에 누군가가 있을 때는 진짜 '수면'에 빠질 수 없기에 이산대성은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뜨며 김현우의 모습을 확인했고.
이산대성이 한번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그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떨 때는 발광을 하며 주변의 숲을 모조리 날려버리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았고, 또 어떨 때는 하늘에 진득하게 검붉은 마력을 내뿜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때에는 하늘을 뛰어 올라가는 그의 모습을 봤을 때도 있었고.
가장 최근에는 하늘을 유영하고 있는 제천대성의 근두운을 자신의 마력으로 한 곳에 모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김현우는 이산대성이 눈을 한번 감고 뜰 때 마다 새로운 시도를 했고, 이산대성 입장에서 봤을 때 나름 나쁘지 않은 재밋거리가 되어주었다.
허나 지금은 어떠한가?
'……세 번째, 아니 네 번째인가?'
이산대성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김현우가 하는 일이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뜨면 그는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고.
또 눈을 감았다 뜨면 그는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눈을 감았다 떴을 때도 마찬가지.
그는 계속해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만 그런 행위에서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처음에는 허공에서 떨어졌고, 두 번째부터는 구름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지.'
바로 그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위치였다.
뻐끔-
맨 처음 김현우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을 때, 그는 맨 하늘에서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산대성이 한 번 더 눈을 감았다 떴을 때부터, 그는 구름 사이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산대성이 네 번 정도 눈을 감았다 뜨면서 보았던 김현우의 차이점은 그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정신이 나가 버린 건가?'
이산대성은 그의 정신이 반쯤 나가 버렸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분명 어떻게든 근두운술을 배우기 위해서 이것저것을 시도했던 반면에, 지금의 김현우는 시간이 지나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말고는 보여주지 않고 있었고.
그 모습은 적어도 이산대성에게는 그가 정신을 놔버린 채 요행(僥倖)을 바라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쯧"
그렇기에 이산대성은 짧게 탄식했다.
물론 이산대성이 탄식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김현우와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으니까.
그가 이곳에서 실패하든, 실패하지 않든 딱히 이산대성에게는 바뀔 것이 없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이산대성은 더 이상 희망이라는 것을 품지 않았으니까.
단지 그가 혀를 찬 이유는, 자신의 아우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녀석에게 '희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깨달았냐고?
만약 제천대성이 그에게 희망을 품고 있는 게 아니면, 아마 자신의 업(業)을 얻을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기에 이산대성은 짧게 탄식하며 김현우의 모습을 바라보았고, 이내 아직도 별다른 변화 없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김현우를 보며 눈을 감으려-
"……?"
-했었다.
그래, 조금 전에 보였던 묘한 변화가 아니었다면.
감기려던 이산대성의 눈이 다시금 떠지고, 그는 또 지상을 향해 떨어지는 김현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의를 벗은 채 떨어지는 김현우의 모습을.
"……?"
이산대성은 갑작스레 상의를 벗어 던진 채 땅으로 추락하는 그를 보았고, 잠시 뒤 몇 번이고 상의를 벗은 채 솟아오르고 추락하기를 반복하던 그는-
"……??"
이번에는 하의까지 탈의해 검은색 팬티만을 입은 채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김현우를 바라봤다.
"진짜로 미쳤나."
멍하니 중얼거리는 이산대성.
그리고-
"……어?"
이산대성은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그의 모습에, 어떤 이변을 발견했다.
무척이나 자그마한 이변.
분명 평범한 사람이라면 제대로 느끼지도 못할 이변이었으나, 이산대성은 그 이변을 확실하게 느꼈다.
"……!"
김현우는 느려지고 있었다.
분명히 아주 조금이지만, 그는 이전보다도 확연히 느리게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이산대성이 담배를 뻐끔거리는 것도 잊고 김현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김현우는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며 생각했다.
'잘하면, 될 수도 있다.'
김현우의 머릿속에는 무척이나 다양한 소설들이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무공은 그저 슥 읽고 넘어가서 김현우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거나, 그게 아니라면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지만.
그런데도 김현우가 인상 깊게 읽은 명작 소설의 장면들은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읽은 수많은 명작 중 하나에서 김현우는 구름을 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읽었던 무협소설의 명장면 중에서는 그런 장면이 있었다.
모든 것을 통달한, 진정한 무신(武神)이라고 불린 주인공의 스승이 주인공에게 자신의 무공을 전수하고 선계(仙界)로 떠나는 장면.
그 장면은 어찌 보면 멋진 장면이었으나, 독자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아쉬운 장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책은 거의 5권에 달하는 권수 동안 스승과 제자의 수련 이야기를 빼면 그 무엇도 나오지 않으니까.
그렇게 5권에 달하는 분량을 투자했기에 김현우는 주인공의 스승이 선계로 떠나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고.
주인공도 김현우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선계로 떠나려는 스승을 붙잡았다.
허나 스승은 자신을 붙잡는 주인공에게 단 한마디 말을 남긴 채 그대로 하늘을 거닐어 선계(仙界)로 떠났다.
'네가 몸을 가볍게 할 수 있을 때, 너는 다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과 함께.
누구에게는 무척이나 아쉽고 슬픈 명장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장면.
거기에서, 그는 실마리를 찾았다.
김현우는 곧바로 그 글을 생각하자마자 허공에서 뛰어내리기를 반복했고, 그렇게 허공에서 뛰어내린 뒤에는 유영하고 있는 구름 쪽으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김현우는 곧 이 허수공간에 떠 있는 구름에 아주 약간의 물리력이 섞여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보통 수증기와 먼지로 만들어진 구름에는 있을 수 없는 물리력이.
그것을 확인한 것을 끝으로, 김현우가 찾았다고 생각한 실마리는 급속도로 발전해 진짜가 되었다.
'지금 이 상태로 구름을 탈 수 없다면, 내 무게를 가볍게 하면 된다.'
분명 소설 속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었으나 김현우는 기적같이 실마리를 찾아 드디어 나아갈 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바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가 천마(天魔)에게 싸우면서 본능적으로 배웠던 경신법을 운용해 구름 위를 걷자, 그는 결국 추락하긴 했으나 아주 잠시, 자신의 발에 부력을 느낄 수 있었다.
술법(術法)이라고 생각해 미련하게 무공을 사용하지 않을 때와는 달리 순식간에 얻어지는 성과.
그에 김현우는 스스로가 뻘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짜증을 내기에는 그 시간이 아까웠으니까.
그 뒤부터, 김현우는 순식간에 성과를 이뤄내기 시작했다.
천마(天魔)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쌓아 올리기 시작한 김현우의 경신은 순식간에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그와 함께 처음에는 1분에 한 번 꼴로 떨어졌던 김현우의 체공시간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3초라는 아주 짧은 시간 정도.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구름 위에서의 체공시간은 늘어간다.
5초를 넘어 10초.
10초를 넘어 20초.
20초를 넘어 40초.
40초를 넘어 80초.
어느 순간 1분 대를 가볍게 넘은 김현우의 체공시간.
허나 김현우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하늘에 올라 끊임없이 경신을 연구했고. 거기에서 김현우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또 하나 깨달았다.
'내가 예전에 얻었던 허공답보(虛空踏步)는 진짜가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허공을 '밟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허공답보를 얻었다고 생각했으나, 경신법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김현우는 그 생각을 수정했다.
그가 예전에 땅을 박찼던 것은 허공답보라기보단 그저 압도적인 마력으로 공기를 터트려 허공에 뜬 것이 맞았다.
허나 지금은?
스윽-
김현우가 가볍게 발을 차올린다.
대단한 마력이 실리지 않은 가벼운 움직임.
허나 그 한 번의 움직임만으로도 그는 무척이나 가볍게 하늘로 떠올랐고.
그제야, 김현우는 착각이 아닌 진짜 허공답보의 묘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모든 것이 멈춰 있는 그곳에서 또 한번 가속하기 시작하는 김현우의 시간.
김현우는 계속해서 하늘 위로 올라 구름 위를 거닐었다.
바닥으로 추락하고, 몸이 구름에 묻혀도 그는 계속해서 그 행동을 계속했다.
계속.
계속.
계속.
멈춰 있는 그 허수공간 속에서, 김현우의 시간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되었을까.
툭-
김현우가 땅에 있는 시간보다 하늘에 있는 시간이 처음과는 완전히 뒤바뀌었을 때.
"……!"
그는 하늘을 밟을 수 있었다.
발이 구름에 꺼지지도 않고.
발이 구름 위에 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김현우의 발은 분명 땅을 밟고 있는 것처럼 구름을 밟고 있었고.
씨익-!
그가 미소를 지었을 때, 구름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수공간에 넓게 펼쳐져 의미 없이 유영만을 반복하던 구름들이 갑작스레 움직이기 시작한다.
서로서로 떨어져 있던 구름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뭉치기 시작했고, 뭉쳐지기 시작한 구름들은 김현우가 첫 발을 내디딘 그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불과 몇 십 초도 되지 않은 그 짧은 시간에, 구름은 그 밀도를 겹치고 겹쳐 김현우의 주변에 모여들었고.
김현우가 숨을 한 번 삼킬 때.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구름은 그 크기를 압축해 김현우의 발아래에 모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겹겹이 층을 쌓아 모이는 구름들이 겹쳐지고 겹쳐지면 밀도 높은 구름을 만들어 내고, 그에 따라 김현우의 자세가 점점 안정되게 변해간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이 전부 끝났을 때.
"성공이다……!"
김현우는 오롯이 두 발을 구름 위에 붙이고, 구름이 갠 맑은 하늘을 보며 입가를 찢어질 듯 비틀어 올렸다.
# 169
169. 이산대성(移山大聖)과 근두운(7)김현우가 웃음을 지으며 텅 빈 허수공간의 하늘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는 어느 순간 정말 자연스럽게 자신이 타고 있는 근두운을 조종해 지상으로 몸을 움직였다.
분명 근두운을 처음 움직여 보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김현우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지상과의 거리.
그는 지상을 향해 내려가는 도중, 팔베개를 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산대성의 모습을 보며 이내 방향을 그쪽으로 꺾었고.
이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순식간에 그와 가까워지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이산대성은 말했다.
"성공했군."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김현우에 비해 묘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그.
그에 김현우가 슬쩍 의문 어린 눈빛으로 이산대성을 쳐다보자, 그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말했다.
"대단하군. 솔직히 마지막에 계속 하늘에서 추락하는 것만 반복했을 때는 그저 요행(僥倖)을 바라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야. 그런데-"
이산대성은 갑자기 말하다 말고 슬쩍 뜸을 들이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우선 옷을 입는 게 어떤가? 그렇게 내보일 만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말에 김현우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아."
현재 자신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
그는 알몸이었다.
그래, 무엇 하나 제대로 걸치지 않은 그냥 알몸.
김현우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머리를 긁적이고는 곧바로 근두운을 놔두고 자신의 옷이 있는 곳으로 도약했다.
이전과는 다른 부드럽고 빠른 도약을 보여주며 김현우는 생각했다.
'깜빡하고 있었네.'
맨 처음, 경신법을 본격적으로 연마하기 시작할 때, 김현우는 옷을 벗으면 무게가 조금이나마 줄어든다는 것을 생각해 옷을 벗었다.
물론 옷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겠냐만 그때 당시 이제 막 경신법을 연마하기 시작한 김현우에게는 0.01kg 중량 추가도 아까웠으니까.
뭐, 지금에 와서는 옷을 입고 있는 게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했지만…….
김현우는 자신이 옷을 벗어 놓은 곳을 향해 달려가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옷들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
그리고 옷을 다 입은 뒤, 그는 왠지 묘하게 느껴지는 불편함에 김현우는 괜스레 추리닝을 옷매무새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다.
'……내가 옷을 벗고 있던 시간이 꽤 지났나?'
몇 번이나 옷매무새를 만지작거려도 느껴지는 불편함에 김현우는 기묘한 감정을 느끼곤 정보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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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현우 [9계층 가디언]
나이: 131
성별: 남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S++
민첩: S++
내구: Ss
체력: S++
마력: S++
행운: B
SKILL -
정보 권한 [중상위]
알리미
출입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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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곤 그는 순간 '김현우'라는 이름 밑에 보이는 131살이라는 나이를 멍하니 바라보다, 눈을 감고 다시 떴다.
역시나 보이는 것은 나이가 131살로 표기되어 있는 정보창.
"이거 실화야?"
'내가 틀니딱딱을 넘어서 해골딱딱이 됐단 말이야?'
사실 121살이나 131살이나 이미 일반인의 나이를 넘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은근히 거기에 신경 쓰고 있었던 김현우에게 10살 차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컸다.
허나 김현우가 그것보다 놀란 이유는-
'아니, 내가 10년 동안이나 그 지랄을 했다고?'
바로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김현우가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나이가 121살이었고, 그가 문득 깨달음을 얻은 것도 정보창의 나이가 121살이 된 그때였다.
그러니까 계산해보면 김현우는 자그마치 10년하고도 알파의 시간 동안 경신법을 연마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시간의 흐름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물론 이 허수공간에 특성상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는 언제나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으니까.
밤과 낮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런가 하면 날씨의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구름을 제외하고, 이 세계는 언제나 그 상태 그대로였다.
푸른 숲은 사시사철 변하지 않고, 빽빽한 나무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10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해 근두운술을 익혔고, 어차피 이 허수공간과 밖의 시간차이는 엄청나기에 여기에서 10년을 지내도 밖에는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을 거라 괜찮긴 했다.
'괜찮긴 한데…….'
김현우는 뭔가 착잡한 표정으로 나이에 써져 있는 131이라는 숫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으며 정보창을 끈 뒤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왠지 아까와 다르게 분위기가 좀 죽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이야."
이산대성은 추리닝을 입고 묘하게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김현우에게 물었으나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젓다 이내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근두운은 어디 있어?"
"여기."
"?"
그의 물음에 이산대성은 그에게 하나의 반지를 넘겨주었다.
도경(道經)이 그려져 있는 밋밋한 느낌의 반지를.
김현우는 반지를 받아들였고, 곧 여지없이 로그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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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대성(齊天大聖)의 근두운(?斗雲)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실체화 , 해제
-정보 권한-
하늘을 다스리는 큰 성인이라고 불리던 제천대성이, 산을 옮기는 큰 성인 이산대성 사타왕(移山大聖 獅駝王)에게 맡겨 놓았던 근두운이다.
제천대성은 처음, 자신의 몸을 가볍게 하는 근두운술을 이용해 그저 구름을 부리는 것뿐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의 근두운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하나의 업(業)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근두운은 제천대성의 업(業)이 있는 사람에 한해서 실체화를 사용할 수 있고, 실체화를 사용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근두운은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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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앞에 뜬 로그를 다 읽고는 물었다.
"근데 왜 갑자기 반지로 변한 거야?"
"나도 모르겠군. 네가 간 뒤로 갑자기 혼자 응축돼서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산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반지를 보며 슬쩍 고개를 갸웃했고 이내 스킬에 써져 있는 단어를 말했다.
"실체화."
김현우의 입에서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뭉글뭉글하게 변해가기 시작한 반지는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곧 아까와 같은 구름의 형태를 취했다.
"해제"
김현우가 다시 말하자 순식간에 쪼그라들어 반지의 형상으로 변하는 근두운.
그제야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던 이산대성은 이내 김현우에게 물었다.
"이제 갈 건가?"
"뭐, 당연히 그래야겠지?"
근두운을 얻었기에 이 이상 이곳에서 볼 일이 없어진 김현우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이산대성은 말했다.
"그럼 아우에게 이 말 한마디만 전해다오."
"……말을 전해달라고?"
김현우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이산대성은 곧 입을 열었다.
####
쾅! 콰르르르륵 쾅!
멕시코에 있는 멕시코시티.
그중에서도 몇 달 전, 백상(白象)에 의해 완전히 개 박살이 나버린 멕시코시티의 동부는 시민들에게 볼모지의 땅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유?
멕시코시티의 동부는 재건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박살이 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백상(白象)을 재앙으로 취급한 국제헌터협회나 다른 세계기관에서 도움을 줘 멸망한 세계처럼 보이는 멕시코 동부를 깨끗하게 청소하긴 했으나 문제는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돈.
멕시코에서는 동부전체의 거대한 땅덩어리를 재건할 만한 재정적 여유가 뒷받침되지 못했기에.
게다가 그 뒤에도 겹치기 시작한 이런저런 문제 덕분에 국가 정부는 멕시코시티의 동부를 치우고 나서도 적극적으로 건물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분명 '가면'은 제가 짓겠다고 한 것 같은데?"
"무슨 소리냐? 분명 말했을 텐데? 가면은 내가 짓겠다고."
이번에 암중(暗中)이라는 신생길드를 만들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뒤에서 멕시코를 은연중에 주무르고 있는 '일루미티'의 수장인 하나린과,
"그럼 둘 다 지으면 되겠군."
중국 전역을 제패한 패도길드의 길드장인 미령이었다.
사실 그 둘은 도움의 손길이라기보다는 김현우에게 조금이라도 뭔가를 더 해주고 싶은(?) 마음에 멕시코시티를 재건하고 있는 것이었고.
사실 멕시코 정부의 일각에서는 그들이 동부를 재건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뭐, 그들은 얼마 있지 않아 무슨 일인지 전부 하나린과 미령이 동부를 재건하는 것에 대해 찬성했지만.
아무튼, 그런 식으로 멕시코시티의 재건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지 불과 이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이좋게(?) 도시 건축을 토론했던 그녀들은 멕시코시티를 본격적으로 건축하기 전, 제일 먼저 올린 장식품을 보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툭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 미령은 먼저 하나린의 바로 뒤에 있는 장식물을 보며 말했다.
"고작 저런 조그만한 장식으로 스승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하나린의 뒤에 있는 장식물.
그것은 대충 보기에 5M정도 되어 보이는 그라데이션 장식물이었다.
마치 파도가 치는 것 같은 물결을 보기만 해도 매끄러워 보이는 세라믹으로 표현해 놓고, 그 중간에는 김현우가 옛날 탑에 있었을 때 썼었던 가면을 위트 있게 넣어 놓은 그것.
하나린은 피식 웃곤 오히려 미령의 뒤에 있는 장식물을 삿대질하며 말했다.
"제 생각에는 저것보다 나은 것 같은데요?"
"뭐……?"
미령의 뒤에 있는 장식물은 그 크기가 거대했다.
척 보기만 해도 10M는 가볍게 넘어가는 크기.
장식물의 외형은 간단하게 김현우가 탑에서 쓰고 있던 가면을 초대형으로 만들었다고 묘사하면 될 정도로, 그것은 김현우가 쓰고 있던 가면과 똑같았다.
"아니다! 스승님은 그런 것보다는-!!"
"무슨 소리! 이 세상은 트렌드를 따라야 한다는 걸 몰라요!? 저런 거대하기만 한-!!"
곧 그 공사현장에서 말싸움을 시작하던 그녀들.
그리고-
후우우웅!!! 쿵!
"!!"
"!?"
그렇게 말싸움을 하던 그녀들 사이로, 그것은 갑작스레 떨어져 내렸다.
순간적으로 그녀들 사이에 떨어진 무언가에 그녀들은 하던 말싸움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긴장했으나.
"뭐야?"
"응? 스승님?"
"사부님?"
갑작스레 그들 사이로 떨어져 내린 것은 다름이 아닌 이제 막 이산대성의 목걸이에서 빠져나온 김현우였다.
여기서는 고작 며칠이었겠지만 김현우는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밖의 모습과 제자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고-
"……?"
곧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유?
그것은 바로.
"제자…… 아니, 애들아."
"예 스승님!"
"네 사부님!"
김현우의 눈에 보이는 두 개의 장식물 때문이었다.
10M를 넘을 정도로 거대한 장식물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누가보아도 김현우가 흑역사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 가면이었고.
그 오른쪽에 있는 가면도 여기저기 장식을 해놓기는 했어도 결국 한가운데에는 가면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 그가 분명 잊고 싶어 하던, 그리고 분명히 흑역사라고 생각했던 그 가면이.
그렇기에, 김현우는 양쪽에 있는 가면들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저것들은 대체 뭐야!!!!"
-이내 저도 모르게 빼애액 하는 비명을 질렀다.
# 170
170. 개고생이 아니라고 해줘(1)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요?"
"할 말이 있어서."
"흐음, 할 말이라."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의 말에 보기만 해도 시릴 것 같은 푸른색의 무복을 무의를 입은 그 남자는 쥐고 있던 창을 회수하며 말했다.
"그분이 전하는 말이오?"
"아니다."
"흐음?"
남자의 대답에 무의를 입은 남자는 잠시 기묘한 표정을 짓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흑색의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는 '그분'의 명이 아니면 굳이 누군가를 보러 오지 않는 이였으니까.
그렇기에 무의를 입은 그는 살짝의 흥미를 느끼며 자신의 창을 꾹 쥐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허공에 앉았다.
툭-
그리고, 그와 함께 연무장이었던 그곳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분명 수백을 넘어 수천 명은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연무장은 순식간에 먼지처럼 화해 사라지고, 그 남자의 중심으로 공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은 누가 봐도 고풍스러운 목재 바닥.
그다음으로 생성된 것은 새하얀색의 벽이었다.
그다음으로 생성된 것은 가구였고.
또 그다음으로 생성된 것은 가구 위의 식기와 벽지 근처에 있는 장식품들이었다.
그와 함께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것은 푸른 무의를 입은 남자의 손에 잡힌 찻잔과, 그의 뒤쪽 벽에 나타난 거대한 걸패였다.
북해빙궁(北海氷宮)이라고 큼지막하게 써 있는 걸패.
"제대로 사용하게 되었군. 북천신공(北天神功)."
"'그들'중에서는 마지막이지만 나도 올라온 지 꽤 시간이 되지 않았소?"
북천신공이라 불린 남자는 후드를 쓴 그의 말에 답하며 손에 만들어져 있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잠시의 침묵.
그 속에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북천신공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
북천신공의 망설임 없는 질문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해줘야 할 일이 생겼다."
"해줘야 할 일?"
"그래."
후드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북천신공은 말없이 그 남자를 바라보더니 아까처럼 길게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분이 직접 지시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맞소?"
"그래."
"……신기하군."
"무엇이?"
"당신이 그분이 명령한 것 외로 움직이는 건 처음 봐서 말이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또 한차례의 침묵.
이번에는 북천신공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해줘야 할 일이란 건 무엇이오?"
"9계층에 있는 이레귤러를 죽이는 것."
그의 말에 북천신공은 응? 하고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이레귤러?"
"그래."
"……설마하니, 전우치가 당했소?"
북천신공의 말에 이번에는 후드를 쓴 남자가 이색을 표하며 물었다.
"알고 있었나?"
"조금 전까지는 전우치가 웬 이물 하나를 처리하러 간다는 것만 알고 있었소만."
-반응을 보아하니 전우치는 죽은 것 같군.
북천신공은 말에 후드를 쓴 남자는 말했다.
"네 예상이 맞다. 전우치는 이레귤러에게 소멸했다."
"허,"
후드를 쓴 남자의 말에 북천신공은 허,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한차례 내뱉더니 고개를 절레거렸다.
"선(仙)에 올랐다고 나불거리더니, 결국 사(士)에서 벗어나지 못했군."
"아무튼, 그렇기에 네가 나서줬으면 한다."
그는 그렇게 쯧쯧거리며 찻잔을 들이켰고, 곧 후드를 쓴 남자는 말했고-
"거절하도록 하겠소."
북천신공의 거절에 그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지?"
"그분의 명도 아닌데, 쓸데없이 힘을 쓸 필요는 없지 않소?"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건 그분의 뜻은 아니잖소."
"……."
북천신공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찻잔을 내려놓은 뒤 말했다.
"아무튼, 나는 거절하는 것으로 하지. 어째서 당신이 그분의 시키지 않은 일을 '몰래' 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거기에 끼고 싶지 않소.
북천신공의 말과 함께 다시 뒤바뀌는 주변의 풍경.
주변의 장식물들이 사라지고 다시금 아까의 장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남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신의 손에 있는 창을 이용해 기수식을 취하는 북천신공.
그리고-
"만약 자네가 이 일을 성공시킨다면 위업(偉業)을 내주도록 하지."
"……!!"
급작스레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북천신공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이오?"
####
"뭐? 너 그럼 설마 근두운술을 익힌 거야!?"
무릉도원.
마치 화폭의 그림처럼 예쁘게 그려진 소나무 앞에서 김현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천대성은 깜짝 놀라며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곤 물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김현우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니…… 왜?"
제천대성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물음.
그에 김현우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당연히 네가 말한 대로 근두운을 가지고 오기 위해서잖아?"
"뭐라고?"
"?"
"?"
서로 이야기가 맞물리지 않고 겉을 도는 듯한 느낌에 김현우와 제천대성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곧 제천대성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곤 물었다.
"혹시, 설마 해서 하는 말이지만 이산대성, 아니- 형님이 가르쳐 주지 않았어?"
"뭘 가르쳐 주는데?"
김현우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말하자 제천대성은 허, 하는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근두운을 가지고 올 방법 말이야."
제천대성의 물음.
김현우는 슬쩍 느껴지는 묘한 불안감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처럼 똑같은 일을 행해서 업(業)을 만드는 것 말고는 없다고 들었는데……."
"……."
"설마 그것 말고도 가져올 방법이 있는 거야……?"
왠지 허망해 보이는 김현우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방법이 그것뿐이었다면 내가 너를 그곳으로 보내지 않았겠지. 아니, 설령 보냈다고 해도 최소한의 설명을 해줬겠지."
"이런 씨발."
김현우가 욕을 하자 제천대성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형님은 도대체 왜 말을 안 해준 거지? 분명 맡기고 갔을 때 떠다니는 구름이 귀찮으면 반지형태로 만들라고 했는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중, 그때의 기억을 회상했다.
그것은 꽤 오래된 기억.
아직 칠대성중 이산대성을 제외한 모두가 탑을 오르고 있을 때.
제천대성은 한번 탑을 오르고 더 이상 탑을 오르기를 그만둔 이산대성에게 자신의 업(業)하나를 맡겼다.
'형님, 맡겨도 됩니까?'
'그래'
'혹시라도 구름이 하늘을 유영하는 게 보기 싫으면 구름 정중앙에 대성진을 그리면 반지로 변할 겁-'
'그래.'
'……제대로 듣고 있는 거 맞아?'
'당연하지. 제대로 듣고 있다.'
귀찮다는 듯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는 이산대성의 마지막 모습.
제천대성은 조용히 확신했다.
'하나도 안 듣고 있었군.'
솔직히 그때의 제천대성도 그가 '정확히' 들었다고는 확신하지 않았다.
이산대성은 칠대성 중 가장 게을렀으니까.
그 무력(武力)은 분명 칠대성 중에서도 최상위권이었으나, 그는 너무나도 게을렀다.
그냥 게으른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게을렀다.
'그래도 설마 그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제천대성은 자신의 실책을 탓하며 고개를 저었고, 그러는 와중 김현우는 잠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더니 이내 희망적인 관측을 꺼냈다.
"그래도. 미리 배워놔서 괜찮은 거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보니까 어차피 근두운을 사용하려면 근두운술을 익힐 수 있어야 한다며?"
"그런……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결국 내가 거기서 나왔더라도 근두운술을 수련해야 했다는 거 아니야?"
김현우는 제천대성이 입을 열기 전에도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 네가 있었으면 근두운술을 조금 더 빨리 얻을 수는 있었겠지만, 나도 나름대로 혼자 근두운술을 수행하면서 얻은 게 있으니 나쁘지 않았다 이거지."
마치 '나는 손해 보지 않았다'라는 생각을 스스로에게 주입하고 싶은 듯 입을 여는 김현우의 모습.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제천대성은 이 말을 할까 말까 하는 표정으로 합리회로를 돌리는 김현우를 바라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아닌데."
"?"
"아니라고,"
"뭐가 아닌데?"
"애초에 너는 근두운술을 배울 필요가 없었어."
"그게 뭔 소리야? 분명 근두운을 활용하려면 근두운술을 익혀야 한다고-"
김현우가 말을 줄이자 제천대성은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 네 말대로 근두운술을 사용하려면 근두운을 해야 하는 게 맞는 말이기는 해. 근데 요점은 네가 나와 계약을 한 상태라는 거지."
"그게 왜?"
"내가 저번에 말했지? 계약이라는 건 내 힘을 나눠주는 거라고. 그리고 힘을 나눠준다는 건-"
"……업(業)을 나눠준다?"
"그렇지. 그러니까 한마디로 너는 내가 힘을 빌려주면 근두운을 그냥 탈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이 말이지."
"……이런 씨발."
제천대성의 팩트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며 진한 한숨을 내쉬었고, 제천대성은 '괜히 말했나'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
"에휴, 뭐 됐다 치자."
허나 김현우의 말에 의해 그 침묵은 얼마 가지 않았다.
'나도 나름대로 얻은 건 있었으니까…….'
10년 동안 근두운술을 익히며 그는 나름대로 얻은 것들이 있었고. 그것은 생각해 봤을 때 10년이라는 시간은 절대 아깝지 않았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짧게 마음을 정리하곤 말했다.
"그래서."
"?"
"근두운을 가져오기는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해?"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반지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 근두운을 바라봤다.
그가 이산대성에게 가 10년 동안 개고생을 하며 근두운을 가져온 이유는 12계층을 빠르게 왕복할 수 있다는 제천대성의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얻은 근두운에는 그런 능력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빠르기는 했다.
허나 '빠르기'만 했다.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살펴본 로그에도 딱히 어떠한 특수 능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빠르게 가는 게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긴 한데…….'
김현우는 그가 오르고 내렸던 미궁을 떠올렸다.
물론 미궁의 넓기는 상당히 컸으나 그 안에 우글대는 몬스터는 김현우의 움직임을 방해했고, 어느 부분에 한해선 길이 상당히 꼬인 곳도 있었다.
한 마디로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면 아무리 빨라도 길을 잃어버린다 이것이었다.
'맹인의 나침반을 흔들면서 가면 되지만.'
맹인의 나침반에서 나오는 빛을 따라가려고 순간순간 멈추며 나침반을 흔들다보면 자신이 달리는 것과 또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김현우가 그렇게 질문을 던져놓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잠시.
"그럼 이제 올라가야지."
그는 제천대성의 말에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대답했다.
"어떻게? 설마 미궁을 통해서 올라가려는 건……."
김현우가 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제천대성을 바라보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곤 대답했다.
"왠지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그건 절대로 아니다. 애초에 그 자그마한 미궁에서 근두운을 어떻게 사용하려고 하는 거야?"
"그럼 다른 길이 있다는 소리야?"
"당연하지."
제천대성의 확답에 눈을 휘둥그레 뜬 김현우.
"너는 미궁을 통해 12계층을 가는 게 아니라-"
그는 김현우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통로'를 통해 12계층으로 올라갈 거다."
-미소를 지으며 새로운 정보를 꺼내놓았다.
# 171
171. 개고생이 아니라고 해줘(2)넓디넓은 장원.
그곳에 멀거니 서 있던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는 조금 전 자신과 함께 있었던 북천신공이 서 있었던 곳을 바라봤다.
몇 번이고 확답을 받은 뒤에야, 그리고 그 나름대로 설득을 들은 뒤에야 납득하며 이레귤러를 처리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간 북천신공.
'이번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는 영상으로 보았던 이레귤러, 김현우의 모습을 떠올리며 후드 속에 감춰져 있는 얼굴을 굳혔다.
'솔직히 마음만 같아서는 직접 죽이러 가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후드를 쓴 남자는 그럴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이곳에 '묶여'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이곳에서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지켜봐야 할 뿐.
그는 북천신공이 있는 곳을 보며 조금은 후련한 듯, 그러나 조금은 답답한 듯한 표정을 짓고는 이내 생각을 바꾸어 얼마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지금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主)와 했던 대화를.
'주는 이레귤러를 놔두라고 했어도-'
주는 분명 남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당장은 그를 건드리지 말라고.
물론 맨 처음에는 주가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 대화가 끝나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남자는 어째서 주가 그에게 시간을 주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리고-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그 이레귤러는 당장 죽여 버려야 한다.'
그는 후드 속에 가려져 있는 굳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주가 생각한 것이 정말 자신이 생각한 '그것'이 맞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있어서는 '파멸'을 불러올 테니까.
'그래서는 안 되지.'
그렇기에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는 북천신공에게 부탁을 하러 온 것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위업(偉業)까지 조건으로 걸면서.
한동안 그가 사라졌던 곳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와 함께 그의 주변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마법진.
마법진이 생김에 따라 서서히 지워져 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생각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북천신공에게 부탁을 해 놓았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고 불리고, 또한 스스로 만든 자신의 무공을 이름 삼아 다니는 그.
북천신공(北天神功).
사실 그렇게 늘어놓고 봤을 때, 그의 업(業)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이유?
이 '탑'에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는 호칭을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이명으로만 사용하던 이들도 있을뿐더러, 애초에 인(人)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난 초월자들도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천하제일인이라는 타이틀도, 혹은 그가 사용하는 북천신공이라는 무공도, 그리 대단한 업(業)은 아니었다.
그리고 고작 그렇게만 놓고 본다면 이 넓은 연무장에서 자신의 창을 들고 끊임없이 무(武)를 연마하고 있는 그는 전우치보다도 쌓은 업(業)이 작았다.
그래, 고작 그것 하나만을 놓고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검은 남자는 어느새 자신의 몸을 반절 이상 먹어치운 마법진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탑에 올라 주(主)의 앞에서 보였던 그의 본모습을 떠올렸다.
어둠으로 둘러싸여, 주(主)에게 업을 구하던 그의 본모습을-남자의 생각과 함께, 그가 만들었던 마법진은 마침내 몸을 전부 먹어치웠고, 이윽고 거대한 장원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
"정복자의…… 통로라고?"
김현우가 슬쩍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제천대성은 기다렸다는 듯 다음 설명을 이어나갔다.
"뭐, 정복자들 사이에서는 그냥 통로라고 부르지만, 그곳은 정복자가 아니고는 사용할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정복자의 통로가 맞지."
제천대성의 대답에 김현우는 곧바로 물었다.
"그곳을 이용하면 네 말대로 이틀 만에 12계층에 도착 할 수 있는 거야?"
"그렇지, 솔직히 지금 시점이면 하루도 가능할걸?"
"저번에는 이틀이라며"
김현우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어깨를 으쓱 거리며 말했다.
"저번에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잖아?"
"상황이 달라져?"
"그래, 저번에는 네가 내 계약으로 업(業)을 빌려서 근두운을 타는 것을 가정하고 시간을 계산한 거거든. 업(業)을 빌리는 데는 시간제한이 있는 건 알지?"
"아."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천대성의 업을 빌릴 수 있는 것은 그 제한시간이 존재했다.
물론 그의 힘을 빌린 것은 전우치와 싸울 때뿐이기에 정확히 어느 정도의 시간제한이 걸려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아무튼 시간제한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김현우가 상황을 파악한 듯하자 제천대성은 설명했다.
"아무튼,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휴식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전속력으로 통로를 오른다면 하루 안에도 도착할 수 있지."
-애초에 통로는 일직선으로 쭉 뚫려 있어서 막히는 게 없거든.
"하루……!"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고작 24시간 정도로 12계층에 갔다 올 수 있다면 그로서는 굉장히 좋은 일이었다.
12계층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24시간이라는 건 왕복으로는 고작 이틀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리였으니까.
'정 오래 걸릴 것 같으면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가려 했는데…….'
김현우는 미령과 하나린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물론 지금의 그녀들은 아마 김현우를 빼고는 막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강했으나, 저번에도 생각했듯이 아직 그녀들은 정복자를 막을 만한 힘이 없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방비라도 해 놓으려 했건만.
'이 정도면 굳이 제자들을 굴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김현우는 혼자 흡족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느껴지는 이상함에 입을 열었다.
"잠깐."
"왜 그러지?"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까 좀 이상한데?"
"뭐가?"
"분명 네가 아까 말할 때, 정복자의 통로라고 그랬잖아."
"그렇지?"
"정복자의 통로는 정복자밖에 쓸 수 없다며? 나도 사용할 수 있는 거야?"
"아,"
김현우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그제야 쟤가 왜 저러나 하는 표정을 치우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탄성을 내뱉었다.
"확실히, 그걸 설명하지 않았네. 뭐, 우선 대답해 주면 네 말이 맞아. 내가 아까 말했듯이 거기는 정복자만 이용할 수 있는 통로가 맞아."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그럼 내가 그 통로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소리야?"
"만약 원래의 너라면 사용하지 못했겠지. 근데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김현우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하자 제천대성은 답해주었다.
"너는 이미 통행권을 가지고 있잖아?"
"통행권?"
"그래, 저번에 9계층에 내려왔던 전우치를 잡고 나왔던 것 말이야."
"전우치를 잡고 나왔던……?"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이내 하수분의 주머니 안에 고이 잠들어 있는 그것을 떠올리고는 말했다.
"청룡의 업?"
"빙고."
제천대성이 피식 웃으며 대답하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청룡의 업은 정복자가 되고 나서 얻을 수 있는 힘이기도 하지만, 또한 증표가 되기도 하지."
"그러면……."
"그 청룡의 업만 가지고 있다면 너는 그 통로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이야."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제천대성은 말했다.
"그래서. 바로 갈 거냐?"
그가 묻자 김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달려갈 것처럼 말하더니 왜?"
"나도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가고 싶은데."
김현우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악천의 원천을 흔들며 말했다.
"미궁석 게이지가 전부 떨어져서 채워야 하거든."
"아……."
그의 말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제천대성.
"뭐, 그래도 미궁석 게이지가 채워진 뒤에는 곧바로 올라갈 거야. 하루라도 빨리 그 면상을 보고 싶으니까."
####
그로부터 3일 뒤.
"여기 맞아?"
[맹인의 나침반을 흔들어 봐.]
여의봉에서 들리는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곧바로 주머니 속에서 맹인의 나침반을 꺼내 흔들었다.
화아아악!
맹인의 나침반을 흔들자마자 터져 나온 빛은 김현우의 위로 솟아올랐고, 김현우는 한 번 더 확인하듯 나침반에서 흘러나온 빛을 보곤 중얼거렸다.
"이곳은 맞는 것 같은데……."
김현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모래뿐.
지도로 찾아보지도 않고 맹인의 나침반을 쫓아와보니 보인 풍경을 보며 김현우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
시리도록 푸른 하늘.
딱히 별다른 특이점도 없이 그저 사막의 하늘이 펼쳐져 있을 뿐인 이곳에서 김현우는 물었다.
"그냥 하늘 위로 올라가면 되는 거야?"
[그래, 나침반이 여기를 가르쳤다면 근두운을 탄 뒤에 청룡의 업을 쥐고 올라가기만 하면 돼.]
-그러면 길이 보일 거다.
제천대성의 말에 알았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근두운의 위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부유하기 시작한 김현우의 몸.
그는 하늘로 올라가기 전 슬슬 멀어지는 지상을 바라보며 지난 3일 동안 했던 일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이미 말은 전부 해놨고.'
김현우는 몇 시간 전,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다는 말에 자신들도 따라가겠다고 아우성을 치던 제자들을 떠올리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뭐, 잘하겠지.'
게다가 애초에 9계층을 아무리 오래 비워도 5일 이상이 걸릴 것 같진 않았기에 김현우는 가벼운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미 아까부터 그가 조종함에 따라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던 근두운은 어느새 꽤 높은 곳까지 고도를 높였다.
그리고-
씨익.
김현우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근두운을 조종했다.
파아아아앙!!!
근두운을 조종하자마자 순식간에 소리를 잡아먹는 엄청난 공기소리.
분명 서서히 멀어지고 있던 지상이 말도 안 될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멀어지고, 그와는 대비되게 하늘이 가까워졌다.
순식간에 구름을 뚫고 날아가는 김현우의 신형.
하늘이 푸른 것을 넘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김현우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곧-
파지지직!
김현우가 쥐고 있던 청룡의 업에서, 푸른색의 스파크가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으로 터져나가기 시작한 푸른 스파크는 순식간에 김현우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고, 순간적으로 김현우의 시야가 푸르게 물들었을 때-!
"!"
[혹시나 못 들어오면 어쩌나 했는데, 잘 들어왔군.]
김현우는 자신이 거대한 구멍 속에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위와 아래는 뚫려 있고, 벽은 마치 예전 중세 탑에서 볼 수 있는 투박한 느낌으로 만들어져 있는 성벽.
김현우는 시커멓게 칠해져 있는 아래와, 빛이 새어나오는 것 같은 하늘을 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여기는……?"
[저번에 내가 말해 준 대로, 이곳이 바로 내가 말했던 그 통로다.]
-이곳을 이용해 12계층까지 올라가면 빠르게 탑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거다.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주변을 구경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
망설임 없이 근두운을 조종해-
"가볼까!"
정복자들이 '재등반'을 위해 사용하는 '통로'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 172
172. 지금 만나러 갑니다(1)
성내동에 있는 가디언 길드 건물 꼭대기 층의 집무실.
그곳에는 아냐가 차분한 표정으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 있는 정장을 입은 남자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서류를 검토하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사락- 사락-
그저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차분하게 울리고 있는 집무실 안.
그렇게 얼마 정도의 침묵이 흘렀을까.
툭-
아냐는 마침내 자신이 읽고 있던 서류를 그대로 놔두며 말했다.
"유감이지만 저희 쪽에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네요."
"아……."
그녀의 말에 망연하게 멍한 소리를 내는 남자, 하지만 곧 그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분명히 이 조건은 다른 곳에서도 제시하지 못할 만큼의 조건입니다."
그의 말에 아냐는 고개를 젓고는 대답했다.
"확실히 서류에 읽어 본 조건은 잘 봤어요. 누가 보더라도 확실히 좋은 조건임이 분명해요."
"그렇다면 왜……?"
"저희 길드장님은 이번에 받은 모델 제안을 끝으로 더 이상 다른 모델 제안은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셨거든요."
"어떻게 설득을……."
남자의 말에 아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길드장님을 설득할 힘이 없어요."
"그, 그럼! 혹시 김현우 헌터께 이 서류를 보여 드리기라도 하면 안 되겠습니까?"
남자의 끈질긴 노력.
아냐는 그런 남자에게 다시 한번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다 이내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네, 그럼 이제 슬슬……."
그녀가 슬쩍 눈치를 주자 그 남자는 혹시라도 아냐가 다른 말을 할까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아, 예. 제가 너무 시간을 뺏었군요. 귀한 시간을 사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말을 내뱉은 뒤 곧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가는 남자.
그를 가만히 보고 있던 아냐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평소 서류를 처리하는 책상으로 가 털썩 앉았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보이는 것은 아직까지 처리하지 못한 서류더미들.
'솔직히 볼 것도 없는 것들이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조작해 현재 실시간 검색어를 차지하고 있는 검색어들을 바라봤다.
1. 김현우 모델.
2. 김현우가 입고 있는 옷
3. 고인물 패셔닝
4. 고인물 스크레칭 추리닝.
……
…….
……
.
보이는 것은 전부 김현우의 이야기뿐.
아냐가 스마트폰을 조작해 뉴스를 눌러봤으나, 역시 보이는 것은 김현우의 이야기였다.
"엄청나네……."
이렇게 그가 실시간 검색어 순위권을 3일 동안 연달아서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3일 전, 김현우를 모델로 한 콜라보 상품이 판매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다스는 김현우의 인지도를 이용해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척이나 충실히 사업 아이템을 홍보했고, 그 결과는 초대박이었다.
하루 만에 미리 만들어 둔 옷의 재고가 모조리 털릴 정도의 초대박.
분명 김현우의 이름값을 생각해 아다스가 가지고 있는 공장을 거의 다 돌렸는데도 불구하고 하루 만에 동난 재고량에 아다스는 기쁨의 비명을 지르며 공장을 풀가동했고.
그렇게 3일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김현우가 모델로 나선 추리닝은 재고가 없어 아직도 실시간 검색어 1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분명 깔끔한 스포츠용품으로 내놓았던 트레이닝복을 김현우가 싸울 때 입고 있는 트레이닝 복처럼 일부러 리메이크 해 '스크레쳐 추리닝'을 만드는 이들도 있었다.
그 덕분에 김현우가 모델로 발탁된 추리닝은 현재를 기점으로도 끊임없이 팔려나가고 있었고.
"……."
덤으로 김현우의 몸값도 하늘을 뚫고 우주에 진입할 정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에휴……."
아냐는 스마트폰을 놔두고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엄청난 양의 서류들을 바라봤다.
있는 것은 길드에 관련한 서류가 아닌, 오로지 김현우를 영입하기 위해 아냐에게 보내온 사업 제안서들.
그중에서는 오히려 제안을 보내는 회사가 손해를 볼 수 있겠다 싶은 정도의 제안서도 많았으나 아냐는 그것을 김현우에게 가져가진 않았다.
김현우는 삼 일 전 아냐에게 들려 지금 받은 제안서 이후에 자신이 메인이 되는 모든 사업 제안서들은 거절하라고 들었으니까.
물론 조금 전 나간 남자에게는 꼭 제안서를 김현우에게 보여주겠다고 말했으나, 당연하게도 그건 거짓이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계속 귀찮게 하니까.'
아냐는 그렇게 생각하며 책상 위에 한가득 쌓인 서류를 그대로 들어 거대한 쓰레기통에 통째로 쓸어 넣었다.
분명 처음 집무실에 있던 것은 자그마한 쓰레기통이었건만 자동으로 버릴 서류가 많아짐에 따라 아냐는 그냥 거대한 쓰레기통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잘 꾸며져 있는 사무실에 유일하게 어울리지 않는 파란색의 대용량 쓰레기 통.
그 안에 차곡차곡 싸여 있는 서류를 본 아냐는-
부우우웅-
아니나 다를까 쉴 시간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고- 그렇게 아냐가 일에 치이고 있을 때, '통로'에서는-
"아직이야?"
[아직이다.]
김현우가 근두운을 이용해 통로를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멍멍한 청력을 느끼며 김현우는 끊임없이 뚫려 있는 구멍 위를 바라봤다.
분명 근두운의 속도는 엄청나다.
당장 지구에서만 해도 고작 30초도 되지 않은 시간에 구름 위를 넘어 하늘에 검게 보일 정도로 치솟아 오를 정도로 빠른 속도.
게다가 통로 안에 들어와서 김현우는 단 한 번도 근두운을 멈추지 않고 조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보이는 빛이 새어 들어오는 구멍뿐.
이제는 마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이제 하루 정도는 지나지 않았나?"
[아마 아직 하루가 되기에는 시간이 좀 남았을 거다.]
"시계나 가져올걸."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짧게 혀를 찼다.
처음에는 딱히 별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이 통로를 오르는 것은 김현우로서는 상당히 고역이었다.
왜?
이유는 당연히 '지루해서'였다.
김현우는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위쪽을 제외한 다른 곳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그가 처음 통로에 들어왔을 때 본 거대한 성벽들뿐.
게다가 그마저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 보니 자세히 볼 수도 없었다.
'뭐,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은 없긴 한데…….'
요컨대 요점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지루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빛이 들어오고 있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그게 아니면 시선을 땅바닥으로 내리꽂아 어두운 바닥을 보는 것뿐.
'어째 이산대성의 공간에 있을 때 보다 훨씬 더 오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냐.'
그렇게 김현우가 짤막한 감상을 남기며 멍하니 통로를 거슬러 오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슬슬 도착이다.]
"!"
지루한 표정으로 근두운에 앉아 있을 때 들린 제천대성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지루하게 떴던 눈을 감았다 떴고-
[지금-!]
김현우는 머릿속에서 들리는 제천대성의 목소리에 곧바로 근두운을 멈추었다.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그의 의지에 따라 순식간에 멈추는 근두운.
그리고-
"이건……."
김현우는 이 통로 안에서 처음으로 투박한 성벽 말고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문?"
그것은 거대한 문이었다.
별다른 특별한 장식은 되어 있지 않은, 그저 무척이나 굳건해 보이는 철문이 김현우의 앞에 있었다.
"이곳이야?"
철문을 구경하는 김현우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답했다.
[그래, 이제 그 철문에 청룡의 업을 가져다 대 봐.]
그의 말에 김현우는 별다른 반론 없이 하수분의 주머니에서 청룡의 업을 꺼냈다.
푸른빛으로 영롱이 빛나고 있는 청룡의 업.
김현우는 청룡의 업을 들어 그대로 두꺼운 철문에 가져다 댔고-쿠그그그그긍-!
무척이나 굳건히 닫혀 있던 철문은 청룡의 업이 닿자마자 곧바로 거대한 울림을 내기 시작했다.
구멍 전체를 울리는 것 같은 거대한 소음.
그와 함께, 거대한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끼기긱 거리는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하는 철문.
그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빛에 김현우는 이내 집어 들었던 청룡의 업을 집어넣고 망설임 없이 하얀 빛 안으로 근두운을 조종했다.
순식간에 잡아먹히는 김현우의 시각.
공기 터지는 소리에 익숙해져 있던 청각이 다시 이명을 내뱉고.
그의 시야가 하얗게 빛난다.
그리고-
"오……."
김현우는 곧 자신의 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탑이었다.
정확히는 탑인지 기둥인지 모를 정도로 검게 칠해져 있는 그것.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런 검은 탑을 감싸고 있는 자줏빛의 풍경이었다.
9계층, 그러니까 지구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은 자주색빛의 풍경이 김현우의 눈을 어지럽혔고-
"달도 두 개야?"
이내 그는 시선을 돌리다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을 보았다.
하나는 보랏빛을 띠고 있고, 다른 하나는 푸른빛을 띠고 있는 달.
9계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외부의 풍경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봤고.
[제대로 찾아왔군. 이곳이 12계층이다.]
곧 김현우는 머릿속에서 들리는 제천대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검게 칠해진 탑을 바라보곤 곧바로 탑의 외부를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제작자'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저 탑 때문이었으니까.
탑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김현우는 조금 더 선명하게 탑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저 멀리서 볼 때는 검게 칠해져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탑은 김현우가 가까이 감에 따라 그 형태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벽에 기이한 문양들이 이리저리 그려져 있는 탑의 외형.
허나 그렇게 문양들이 장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탑의 내부를 확인할 수 있는 창문이나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일반적인 탑의 외형보다는 아까 처음 본 것처럼 기둥이라고 말하는 게 어울릴 것 같은 탑의 모습.
'뭐, 탑의 모습이 어떻든 간에 나하고는 상관없지만-'
허나 김현우는 그런 외형을 가진 탑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곧 탑 가까이에 다가가-콰직!
망설임 없이 쥐고 있던 여의봉을 탑에 박아 넣었다.
분명 힘이 들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쉽게 탑을 박살 내고 안쪽으로 파고들어간 여의봉.
김현우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자신의 허리춤에 걸어둔 하수분의 아공간에 지금까지 들고 있던 아티팩트를 넣어 놓은 뒤 그대로 여의봉에 걸어두었다.
[뭐 하는 거냐?]
"악천의 원천을 사용할 때는 아티팩트를 못 들고 가니까 미리 묶어둬야지."
김현우의 말에 제천대성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여의봉에 하수분의 주머니를 걸어 둔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악천의 원천을 집어 들었다.
[악천의 원천을 '원망의 탑'에 사용하시겠습니까? Y/N]
악천의 원천을 탑에 가져다 대자마자 떠오르는 로그.
그에 김현우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잠깐 다녀올게."
[그래.]
제천대성의 짧은 대답.
그것을 끝으로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떠올라있는 로그의 Y표시를 눌렀고-
"!"
-김현우가 보고 있던 세계는 일변하기 시작했다.
# 173
173. 지금 만나러 갑니다(2)
아랑길드 지하의 훈련장.
"그러니까 이럴 때는 기본적인 오행(五行)술식을 역으로 짜면 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네, 맞아요."
몇 십 명의 헌터가 개인 훈련을 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이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는 그곳에는 이서연이 구미호에게 진법(陣法)에 대해서 강의를 받고 있었다.
땅 바닥에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 오행의 진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이서연은 이내 시선을 돌려 옆에 있던 구미호를 바라봤다.
맨 처음에는 항상 인간 모습으로 의태할 때 한복을 입고 있었던 구미호는, 어느 순간부터 한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기 시작했다.
주로 입는 옷은 반팔과 돌핀팬츠.
'진짜 옷을 다르게 입는 것만으로도 확 차이가 나는구나.'
분명 맨 처음 한복을 입은 걸 봤을 때만 해도 옛날 사람이라는 생각이 팍팍 났었는데, 지금 구미호를 보면 아홉 개의 풍성한 꼬리를 제외하고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그러세요?"
"아니야, 잠시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렇게 멍하니 구미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서연은 그녀의 물음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구미호는 슬쩍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이렇게 역행해서 진법을 짜고 나면 여러 방식으로 응용할 수 있게 돼요."
"예를 들면?"
"음, 굳이 예를 들자면 여러 가지가 있기는 한데, 보통은 '억제'에 많이 사용하죠. 그다음에는 '천기' 정도? 사용법이 많기는 한데 보통은 이 두 가지를 사용해요."
"억제는 뭐야?"
"말 그대로 마력을 억제하는 거예요. 저번에 보여 드렸잖아요? 오행의 술식은 기본적으로 순리에 따라 진을 그리면 마력을 증폭해 줘요."
구미호의 말에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그러니까 즉 오행 술식을 역으로 돌리면……."
"네, 그냥 심플하게 반대의 효과가 나온다고 보면 되죠. 물론 진 자체에는 이런저런 반작용이 일어나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하는데."
-그걸 일일이 설명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니까요.
구미호의 말에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그럼 천기는 뭐야?"
"그건 음…… 말 그대로 '미래'를 훔쳐보는 기술인데, 사실 마력상의 한계로 '미래'를 훔쳐보는 건 오행술식을 사용해도 불가능해요. 그 대신 운을 보는 형식으로 사용하죠."
"……운을 보는 형식?"
"네. '천기'를 보기에는 너무 드는 마력 량이 많으니까 그냥 단순하게 미래의 일을 '점친다' 정도로 마력을 최소화 시키는 거죠. 뭐 이것도 보통 마력으로는 좀 힘든 일이기는 한데……."
-시험 삼아 한번 보여 드릴까요?
구미호의 물음에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고. 그에 구미호는 곧바로 손가락으로 인을 맺으며 무엇인가를 외우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그와 함께 공명하기 시작한 마법진.
역으로 그려놨던 오행의 구멍에 마력이 채워지고, 진법 전체가 환하게 빛나며 한가운데에 거대한 마력구체가 생긴다.
그쯤에서 인을 맺는 것을 그만둔 구미호는 입을 열었다.
"천기를 가동했으니 이제 기다리면 하늘에 떠 있는 마력구체가 '미래'의 운을 보여줄 거예요."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오행의 위에 떠오른 한자.
대길
길
평
흉
대흉
그리고, 한참을 웅웅거리며 중앙에서 공명하던 마력 구체는-
"……응?"
"어……?"
-대흉(大凶)을 가리켰다.
####
세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분명 김현우의 눈에 보였던 자줏빛 하늘이 마치 이 세상에서 없었던 것처럼 무너지기 시작하고, 그가 여의봉을 박아 놓았던 탑도 마찬가지로 무너진다.
이전에 악천의 원천을 사용할 때처럼 한 번에 바뀌는 것이 아닌 주변이 무너지면서 바뀌기 시작하는 그 모습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무엇인가가 다르다 생각했고.
쿠그그그그긍!
그 와중에도 김현우가 보고 있던 세계는 무너지고 있었다.
무너지고, 무너지고, 무너진다.
마치 데이터가 삭제되는 것 마냥 먼지가 되어 하늘로 날리는 모습.
그가 처음 보았던 두 개의 달이 먼지처럼 사라지고, 자줏빛의 풍경이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그것은 김현우가 조금 전까지 묻어 있던 작은 탑도 마찬가지였고.
그가 조금 전까지 매달려 있었던 여의봉(如意棒)도 마찬가지였다.
서서히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 불어나기 시작하는 그 공간에서 김현우가 위협을 느끼기 시작할 때쯤.
"!!"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무엇인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물체를 재구성하는 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그것은 처음에는 형태를 특정할 수 없었다.
허나 점점 앞에 있는 것이 올바른 형태를 가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김현우는 만들어지고 있는 그것의 형체를 특정할 수 있었다.
김현우의 바로 앞에 만들어 지고 있는 그것은-
"……배?"
바로 '배'였다.
그것도, 김현우의 몇 백, 몇 천 배는 우습게 넘을 것 같은 거대한 나무배가 김현우의 앞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골조가 만들어지고.
그 위로 둥근 유선형의 나무가 차곡차곡 쌓아서 만들어진다.
특색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그저 밋밋하기만 할 뿐인 나무가 쌓아올려짐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압도적인 크기에 질려,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현우가 바라보는 와중에도 배는 계속해서 만들어진다.
구성되고, 구성되고, 구성된다.
골조가 잡히고,
틀이 잡힌다.
그 위로 목재가 쌓여 올라가고.
마치 마감질을 하듯 사방에서 추가적인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
김현우는 그 자리에 얼마 있지 않아 그의 앞에 만들어져 있는 완전한 '배'를 볼 수 있었다.
그를 압도할 정도로 거대하게 만들어져 있는 배를 말없이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드드드드득!
"……!"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있는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서히 열리는 나무문.
마치 김현우를 기다렸다는 듯 열리는 문의 모습에 김현우는 멍하니 그것을 지켜보았고, 이내 문이 완전히 열렸을 때.
턱-!
-그는 배를 향해 도약했다.
"후……."
한 번의 도약으로 무척이나 간단하게 배 위에 올라선 김현우.
그는 문이 열린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곧-
"!"
그는 배의 안쪽에 들어가자마자 또 하나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이건……."
분명 별다른 문양이나 특징도 없이 거대하기만 해서 밋밋했던 외부와는 다르게, 배의 내부는 무척이나 혼잡했다.
김현우의 눈에 처음 보이는 것은 오크통이었다.
마치 중세시대에서나 나올 것 같은 크기를 가지고 있는 수십 개의 오크통은 배 사방에 배치되어 있었고.
그의 눈에만 해도 보이는 수십, 수백 개의 오크통에는 돌돌 말아 놓은 종이들이 난잡하게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김현우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거대한 구체였다.
비눗방울이라 해야 할지, 그게 아니면 구슬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그것들은 무척이나 넓은 배의 위를 여기저기 유형하며 떠다니고 있었고.
하늘에 떠다니는 구슬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곧 하늘을 떠다니며 빛을 내고 있는 구슬 안에 무엇인가가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풍경?"
김현우는 얼마 가지 않아 구슬 안에 보이고 있는 것들이 풍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 배 위를 유영하고 있는, 적어도 수천 개는 되어 보일 듯한 구체들은 저마다 각각 다른 풍경을 담고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김현우가 당장 처음 봤던 것은 보기만 해도 평화로운 나무와 초원이 있는 풍경이었고.
그다음으로 본 것은 거무칙칙한 동굴 안의 풍경이었다.
또 어떤 것은 중세시대의 거대한 영주성의 풍경을 재현한 것도 있었고.
또 다른 것은 마치 지옥을 표현한 듯 끊임없이 마그마가 쏟아져 내리는 풍경을 만들어 낸 것도 있었다.
그렇게 구체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풍경을 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왔는가."
하늘에 떠 있는 구체를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어느새 들리는 목소리에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고. 곧 그곳에서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마치 중세시대에 나오는 '연금술사'처럼 검 푸른색의 로브를 두르고, 그 안쪽에는 갈색의 가죽옷을 덧대 입은 남자.
김현우는 직감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제작자……."
김현우가 저도 모르게 흘린 조용한 중얼거림.
그에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이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솔직히 조금은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보다도 빨리 찾아왔군."
김현우의 예상이 맞다는 듯 그의 말을 긍정한 제작자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아무튼,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직책의 명칭이 아닌 진짜 이름으로 다시 한번 내 소개를 하도록 하지."
"……직책?"
"그래, '제작자'라는 직책이 아닌 진짜 내 이름 말일세. 허나 그 전에 환영하도록 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치 김현우를 환영한다는 듯 양손을 펼치곤-
"이 배, '노아의 방주'에 온 것을 말이야."
-그렇게 말했다.
####
노아의 방주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히브리 경전, 혹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설화에 등장하는 거대한 배였다.
세상이 홍수로 멸망하기 전, 문명의 이기를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해 세상 만물을 전부 쓸어담아 유지한 배.
그것이 바로 노아의 방주였다.
"노아의 방주…… 라고?"
김현우가 저도 모르게 반문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고.
"그래, 지금 자네가 타고 있는 배는 바로 이 '탑'에 있는 모든 것이 들어 있는 노아의 방주 안쪽이지. 그리고 나는-"
털썩-
이내 그는 자신의 뒤쪽에 있던 목재의자에 앉고는 이어서 말했다.
"이 '노아의 방주'의 주인인 '노아흐'라고 하네. 물론 자네를 여기로 부른 것 또한 나지."
남자,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노아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침묵이 가득 찬 배 안.
"그러니까- 네가 '제작자'가 맞다는 소리지?"
거기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바로 김현우였다.
마치 처음부터 되짚듯 입을 여는 김현우의 모습에 노아흐는 살짝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말했다.
"그래, 이 탑의 직책에서 나는 '제작자'라고 불리고 있지."
"그럼 튜토리얼 탑을 만든 것도 너고?"
"맞다, 튜토리얼 탑은 내가 만들었지. '계층민'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말이야."
"그럼 나를 탑에 12년 동안 박아 놓은 것도 네가 맞다는 소리네?"
"……그렇지?"
노아흐가 슬쩍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긍정하자 그제야 김현우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찾았네."
"뭘 찾았다는 거지?"
"뭘 찾기는 뭘 찾아? 당연히 나를 탑에 가둔 놈이지."
우드드득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목을 좌우로 움직여 몸을 풀었다.
그의 몸에서 나는 우드득 소리에 노아흐는 왠지 모르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그러지?"
"갑자기 왜 그러냐니?"
"그러니까…… 왜 갑자기 그렇게 몸을 풀고 있냐 이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뭐가 당연하다는-!?"
그는 김현우의 말에 전부 답변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김현우는 노아흐의 앞에 와 있었으니까.
때릴 수 있는 한계치까지 주먹을 뒤로 당기고 있는 김현우.
노아흐의 눈이 크게 뜨여지고-
"지금부터 너를 줘패야 하니까."
-김현우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향해 빨려 들어가듯 쏘아졌다.
# 174
174. 지금 만나러 갑니다(3)
이 세상의 모든 보고를 담고 있다고 알려진 노아의 방주에서는-꽈아아앙!
갑작스런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콰드드득!
김현우의 주먹이 노아흐의 얼굴을 향해 쏘아져 나가고, 그는 손을 한번 흔드는 것만으로 방어막을 만들어 김현우의 공격을 막아낸다.
그야말로 찰나지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순식간에 쌓여나가는 공방.
허나 한 가지 특징이라고 한다면-
"왜 이러는 겐가!!"
"왜긴 왜야!? 내가 이럴 줄 몰랐어?"
김현우와 노아흐의 공방은 지극히 일방적이라는 것이었다.
노아흐는 오로지 김현우의 공격을 막는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었고.
김현우는 그런 노아흐의 방어를 뚫는 데만 집중이 되어 있었다.
파드드득 까지직!
"자네와 나는 적이 아닐세!!"
자신이 급작스럽게 만들어 낸 방어막이 깨지려 하자 노아흐는 곧바로 김현우의 얼굴을 마주보며 그에게 말했으나-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
-김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며 노아흐의 방어막을 후려쳤다.
꽈아앙!
더 큰 균열이 생긴 노아흐의 방패.
"그럼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짓을!!"
노아흐가 발작하듯 외치자 김현우는 주먹을 휘두르며 외쳤다.
"그건 그거고, 네가 날 탑에 가둔 건 따로니까……!"
"뭣!"
꽈지지직!
노아흐의 경악 어린 외침과 함께 줄곧 그가 유지하고 있던 방패가 사라지고, 김현우는 그의 방패가 깨지자마자 곧바로 그이 멱살을 쥐어 잡았다.
"헉!"
깜짝 놀라는 노아흐.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입가를 비틀어 올리고는 대답했다.
"방어막이 깨졌네?"
"이 무슨-!!"
"뭐,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죽이지는 않을 거니까. 다만-"
김현우는 그렇게까지 말하고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검붉은 마력이 유형화되어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는 김현우의 주먹.
그리고-
"-우선 좀 맞고 시작하자."
"끄어헉!"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노아흐의 배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
"……폭력적이군."
"이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아는 게 어떨까?"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자신의 머리 위에 누가 보더라도 확연히 거대해져 있는 혹을 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짜고짜 때리다니."
"때릴 만하니까 때린 게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말도 듣지 않고 사람을 마구잡이로-"
"……."
김현우의 반복된 말에 결국 묵묵히 입을 다무는 것으로 그를 바라보던 노아흐.
"후……."
그렇게 시작된 침묵.
김현우와 노아흐는 서로를 마주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노아흐는 조금 전까지 김현우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았으니까.
물론 김현우는 처음에 날린 일격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힘을 조절해 노아흐를 두드려 팼기에 그는 머리에 난 혹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상처를 입지는 않았으나-방주 내의 분위기는 분명 처음과는 다르게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바로 노아흐의 앞에 앉아 있는 김현우뿐.
"……."
"……."
긴 침묵이 조금씩 그 시간 초를 늘려가고 있을 때쯤.
"그래서,"
먼저 입을 연 것은 김현우였다.
"이제 슬슬 진실을 듣고 싶은데. 언제 이야기할 거야?"
무척이나 뻔뻔하게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오히려 헛웃음을 짓고는 대답했다.
"자네는 뻔뻔하기까지 하군."
가시가 돋친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뻔뻔하다니 그건 좀 말이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상하다는 겐가?"
"말 그대로야, 지금 자기만 생각하고 있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오히려 뻔뻔한 건 당신 쪽 아니야?"
"뭐라고?"
"생각해 봐, 그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끝없이 몬스터만 리젠되는 탑에 나를 12년 동안이나 가둬놓고, 이 정도 맞은 거로 징징거리는 게 이상하지 않아?"
-오히려 이 정도만 맞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심드렁하게 입을 연 김현우.
그에 노아흐는 반박했다.
"조금 전에도 말하려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네!"
굉장히 억울해 보이는 표정으로 김현우에게 반박하는 노아흐, 허나 김현우는 대꾸했다.
"그래서?"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든 어쩔 수 있는 일이든 결국 네가 나를 12년 동안 탑에 가둔 건 팩트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기에.
결국 노아흐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김현우를 탑 안에 12년 동안 가둬놓은 장본인은 바로 그가 맞았다.
노아흐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김현우는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 잘난 진실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보라 이거지. 그걸로 차후를 결정할 거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차후라니."
김현우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한 노아흐.
"말 그대로인데? 이야기를 들어보고 너를 더 쥐어 팰지, 아니면 이 정도로 봐줄지 결정한다 이거지."
"……."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 뒤, 아까 전 자신을 두들겨 팼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곤 입을 열었으나-
"쯧…… 이건 넘어가도록 하지."
이내 노아흐는 짧게 혀를 차는 것으로 입을 다물었고, 곧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느 것부터 듣고 싶은가?"
노아흐의 질문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말 그대로, 자네가 알고 싶은 것 중 무엇을 먼저 듣고 싶으냐 물어본 걸세. 자네에게는 차근히 설명하는 것보다는 질문을 받아 설명해 주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김현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흐.
그에 김현우는 살짝 고민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으나-
"그럼 나를 탑에 가둔 이유부터."
-이내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노아흐에게 물었다.
엄연히 말하면 김현우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그 하나의 이유를 듣기 위해 온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어느덧 웃음을 지우고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 김현우의 모습에 노아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했다.
"역시 그걸 먼저 물어볼 줄 알았네. 솔직히 자네를 탑에 가둔 이유를 말하려면 전반적인 이 탑의 상황에 관해 설명해야 하네만, 우선 다 빼고 결론만 말하면-"
노아흐의 말이 끊김에 따라 김현우는 그의 입이 움직이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자네가 제일 독한 놈이기 때문일세."
"……?"
"?"
고개를 갸웃거리는 김현우.
노아흐도 마찬가지로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뭐라고?"
김현우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자.
"못 들었나? 이 9계층에서, 자네가 가장 독했기 때문일세."
"……아니 이게 뭔 좆 같은 소리야?"
인상을 팍 찌푸리는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조금 더 제대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구만."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봤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면 그대로 개 박살을 내버리겠다는 의지가 확연하게 담겨 있는 그 눈빛을 바라본 노아흐는 김현우의 모습을 질려 하면서도 말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사는 계층, 그러니까 9계층은 이번으로 21번째 회귀를 하는 중일세."
"……뭐? 회귀?"
"그래, 윤회일세. 자네는 알고 있지? 이 탑에 각 계층에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말일세."
노아흐는 김현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중에서도 자네가 사는 9계층의 특징은 '회귀'일세. 회귀의 지점은 9계층이 등반자에 의해 멸망당했을 때지."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뭔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대답했다.
"그러니까, 내가 회귀를 했다고?"
"그래 물론 회귀를 한 그 시점부터 모든 기억은 사라지지만 자네는 9계층의 특징에 의해 총 21번째 회귀를 경험하고 있지. 그리고 내가 자네를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 21번의 회귀 때문일세.
"……."
노아흐의 말이 김현우는 그저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고,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21번의 회귀에서 보여준 자네의 행동이 나를 선택하게 했지."
"그게 무슨-"
김현우가 묻자 노아흐는 마치 예전의 이야기를 꺼내듯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하더니 이내 말했다.
"내가 자네를 주시하기 시작한 것은 9계층이 여섯 번째 회귀를 맞고 있을 때였네."
"여섯 번째……?"
"그래, 그때 당시의 자네는 9계층에서 조금 강하기만 한 계층민 중 한 명이었지. 허나, 자네는 굉장히 특이했네."
"……특이했다고?"
"그래 자네는 그때 중위급 등반자를 죽였거든."
"……?"
노아흐의 말에 순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그를 바라본 김현우는 물었다.
"그게…… 특이한 일이야?"
"뭐, 지금 자네의 처지에서 봤을 때 등반자 한 명을 죽인 게 뭐가 그리 특이한 일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그것은 굉장히 특이한 일로 다가왔지."
"어째서?"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검지와 중지를 피며 말했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네. 우선 첫 번째로, 지금의 자네는 모르겠지만 회귀하기 이전의 자네는 말 그대로 '평범한 헌터'였었네. 아니, 오히려 다른 녀석들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았지."
-자네는 남들은 가지고 있는 '고유 능력'이 없었으니까.
"고유 능력?"
노아흐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런데 그런 고유 능력도 없는, 그저 시스템의 축복을 받은 녀석이 중위급 등반자를 죽인 게 놀라워서 자네에게 시선이 끌렸었지."
그리고-
"그것보다 내가 자네에게 관심이 가게 만든 더 큰 이유는, 바로 자네가 분명히 멸망해야 하는 9계층의 운명을 비틀었기 때문이었네."
"……운명을 비틀어?"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도 알겠지만, 이 탑은 등반자들이 일종의 '시험'을 치르기 위해 만들어 놓은 탑일세. 그렇기에 각 탑의 계층마다 난이도가 나누어져 있지. 그리고,"
그중에서도-
"자네가 있는 9계층은, '중위'급 등반자 이상은 감당할 수 없도록 조형된 계층일세."
"……그 말은."
"한 마디로, 9계층은 멸망이 원래는 예정되어 있던 계층이라 이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아무런 복잡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를 바라봤으나, 그는 김현우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자네는 그 공식을 보기 좋게 깨버리고 중위급 등반자를 잡는 것으로 9계층의 멸망을 막았지."
-비록 그 뒤에 찾아온 등반자는 자네의 부상이 너무 심해서 막지 못했지만.
노아흐는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그때 자네가 보여준 모습은 내게 흥미를 일으켰고. 자네는 그 뒤로 회귀를 할 때마다 계속해서 9계층의 멸망을 지연시켰네. 각 회차 간 차이는 있었으나 그건 명백했지."
그리고-
"자네가 열여덟 번째 회귀를 했을 때쯤에, 나는 등반자를 막아내는 자네의 모습을 보며 미묘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네."
"무슨 확신을……?"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그를 바라보며-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렇게-
"-자네가 정말 이 '탑'을 다시 바꿀 수 있다는 미묘한 확신을, 나는 가질 수 있었네."
-말했다.
# 175
175. 만 년 동안 얼어 있던(1)
"잠깐 기다려 봐."
한참이나 노아흐의 이야기를 듣던 중 나온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그는 그제야 슬쩍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김현우의 원래 성격대로라면 이런 복잡한 것들은 그저 이런저런 잡설을 치고 원인과 결과로 딱딱 나누어 생각하는 것을 선호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더럽게 꼬여 있네.'
아까 전의 말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김현우가 들었던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게 꼬여 있었으니까.
"쯧."
머리가 아프다는 듯 혀를 찬 김현우는 그때부터 노아흐가 해주었던 말을 천천히 복기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의 침묵.
노아흐는 꽤 긴 시간 동안 입을 열지 않는 김현우를 보면서도 그저 묵묵히 기다렸고. 곧-
"우선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그는 그렇게 말하며 노아흐를 바라보곤 말을 이었다,
"우선, 네가 나를 탑에 가둔 이유는 분명 중위급 등반자에게 멸망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9계층에서 '등반자'를 막았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거지?"
"정확히는 등반자를 죽이기 위해 자네가 행했던 일을 본 것이 더 크지만, 결론으로 보면 그게 맞군."
"내가 등반자를 죽이기 위해 어떻게 했는데?"
조금 전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듣지 못한 이야기에 김현우가 묻자, 노아흐는 답했다.
"여러 가지 회차가 있지만 내가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열두 번째 회차로군. 그때의 자네는 거의 독보적이었지."
"내가 어떻게 했길래?"
"자네는 그때 당시 탑을 오르던 역귀(疫鬼)를 죽이기 위해 세계가 멸망하는 걸 방관했다."
"……뭐?"
김현우가 되묻자 노아흐는 상세하게 설명했다.
"정확히는 작전이었지, 그때의 자네는 역귀에게 팔을 잃었고 자네와 함께하던 다른 동료들을 모두 잃었거든."
그 상황에서-
"자네는 역귀가 세계를 멸망시킬 때까지 '준비'를 하다 녀석을 동쪽 섬에 있는 핵기지로 끌어들여서 수백 개의 디버프 아티팩트와 함께 자폭했네."
-그때는 정말 대단했지.
마치 그때를 회상하듯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던 노아흐는 이내 또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면 열네 번째 회귀도 기억나는군, 그때는 '악제(惡制)'라는 등반자가 9계층에 올라왔을 때인데, 그때 자네는 악제의 몸속으로 들어가 하반신이 잘린 상태로 그를 죽였지."
"……."
"또 열여섯 번째는-"
"대충 알았으니까 그만 설명해도 돼."
"뭐, 알겠네. 아무튼,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내가 자네를 탑 안에 가둔 이유는 자네가 내가 만든 튜토리얼 탑 안에 장기간 체류하며 충분한 경험을 쌓길 바랐기 때문일세."
"그것도 알았어."
노아흐의 말에 대답한 김현우는 물었다.
"결론적으로 네가 나를 가둔 이유는-"
"자네에게 조금이라도 더 큰 힘을 주기 위해서였네, 고작 '독기'만으로는 이 '탑'을 바꿀 수 없으니까."
그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그런데, 애초에 탑 안에 오래 있다고 해서 능력이 강해져?"
튜토리얼의 탑은 1층부터 100층까지 무척이나 다양한 몬스터가 있기는 했으나 결국에 그 탑 안에 있는 몬스터는 정해져 있고, 그 몬스터들의 강함도 정해져 있다.
말 그대로 처음 헌터가 되기 위해 들어가는 탑은 조금 어렵기는 해도 결국 '튜토리얼'이라는 이름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런 의문을 가진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강해진다."
"어떻게?"
김현우의 반문에 노아흐는 물었다.
"이 탑은 '업적'으로 인해 그 힘을 인정받고, 또한 강해진다. 그건 자네도 알고 있지?"
"그거야, 알고 있지."
그의 긍정.
노아흐는 말했다.
"그렇다면 설명하기는 편하겠군. 튜토리얼 탑은 유일하게 계층민이 '업적'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공간 중 하나다."
"뭐라고……?"
김현우의 되물음에 노아흐는 추가로 설명을 하듯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의 이야기다. '튜토리얼 탑'에서는 계층민이 '업적'을 만들 수 있다 이 말이다."
노아흐의 이야기에 김현우는 문득 아주 예전, 김시현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마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의 한계치는 튜토리얼 탑에서 정해진다고 했던 김시현의 말.
그때 당시에는 그저 그렇게 이해만 하고 넘어갔었으나 김현우는 노아흐에게 설명을 듣고 나서야 왜 '한계치'가 존재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튜토리얼 탑 밖으로 나가면 성장이 완전히 멈추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세, 다만 튜토리얼 탑에 있을 때보다 업(業)이 느리게 쌓일 뿐일세. 애초에 튜토리얼 탑은……."
그는 어떻게 비유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그래, 자네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를 하자면 마치 게임 내에서 경험치가 곱절로 인정되는 공간과 같은 것이지."
노아흐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곧바로 말했다.
"그럼 곧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서, 나를 탑에 가둔 이유는 '탑을 바꾸기 위해서'라고 말했지?"
"그러네."
긍정하는 노아흐.
"네가 말한 탑을 바꾼다- 라는 소리는 뭐지?"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입을 열려다가 슬쩍 고민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이건 좀 사전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괜찮겠나?"
그의 물음에 김현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노아흐는 말해야 할 것을 정리하는 듯 슬쩍 고개를 까딱까딱 거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이런저런 이야기가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그걸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지니 간단명료하게 말하도록 하지. 지금 탑은 '잘못' 사용되고 있네."
"잘못 사용되고 있다고?"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내가 이 탑의 제작자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김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아흐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이 탑을 만든 것은 나뿐만이 아닐세."
"뭐?"
"이 탑은 원래 총 다섯 명의 힘을 합쳐서 만들어졌지."
"다섯 명?"
그의 물음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이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탑을 처음 설계하고 구상한 '설계자'.
탑의 중추가 되는 시스템을 만든 '기술자'.
탑의 세부적인 조형 시스템을 만든 '조율자'.
그렇게 만들어진 시스템을 이용해 탑을 만들어낸 '제작자'.
"그리고, 완벽하게 만들어진 '탑'을 조정하는 '통괄자'까지. 총 다섯 명의 힘으로 인해 자네가 살고 있는 그 곳은 만들어진 걸세."
노아흐의 말에 왠지 대충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지금 여기서 굳이 그 다섯 명의 이야기를 했다는 건, 그 다섯 명 중에 누군가가 배신이라도 해서 탑을 날로 먹은 거야?"
"!"
김현우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뜬 노아흐는 이내 답했다.
"……감이 좋군. 자네의 말대로, 처음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탑은 '조율자'와 '기술자' 그리고 '설계자'가 변심하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됐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녀석들은 애초부터 그럴 생각으로 나와 통괄자를 이용했던 것 같네. 녀석들은 탑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나를 죽이려 들었으니까."
"죽이려 들었다고?"
"그래, 녀석들은 탑이 완성되자마자 이 시스템을 총괄하기로 한 '통괄자'의 능력을 강제로 강탈하고, 그 뒤에는 곧바로 탑을 만든 나를 죽이려 들었네."
노아흐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물론 나는 있던 힘을 거의 대부분 사용해 숨을 수 있었고, 통괄자도 능력만을 강탈당했을 뿐 어떻게는 숨은 것 같지만- 아무튼 탑은 그 녀석들에게로 넘어갔지."
그리고-
"그렇게 우리 둘을 처리한 그 뒤부터, 그들은 이 '탑'을 각자의 탐욕을 위해 이용하기 시작했네."
"탐욕을 위해서?"
"그래, 정확히는-"
순간 말을 끊는 노아흐, 김현우는 잠자코 기다리다 조금 길게 지속되는 그의 침묵에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그래?"
김현우의 물음에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노아흐는, 이내 시선을 돌려 김현우를 바라봤다.
"큰일이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말에 김현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노아흐를 바라봤으나, 곧 김현우는 노아흐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에-
"정복자가 9계층으로 내려가고 있네."
"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이탈리아 로마에 지어져 있는 콘스탄티누 개선문.
분명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그 거대한 역사적 건물의 위에는-
"흐음……."
한 남자가 자신의 창을 쥔 채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상당히 오랜 세기를 지나서도 아직까지 무너져 있지 않은 건축물들, 그 아래로는 수많은 사람이 무리를 지어 관광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일련의 모습들을 아무런 흥미도 없다는 듯 바라본 남자- 아니, 북천신공은 자연스레 주변에 아주 미세한 마력을 흩뿌렸다.
'죽여야 하는 건 이레귤러뿐.'
그의 생각과 함께 작게 뿜어진 마력이 사방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고, 남자는 이내 개선문 위에 앉았다.
아무런 감흥도 없이 하늘을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
분명 북천신공의 아래쪽은 어느새 개선문 위에 올라간 그 때문에 인파가 몰려들고 있었으나 그는 몰려드는 인파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감고 자신이 퍼트린 마력에 집중했다.
그리고, 개선문 아래에 상당한 인파가 몰리고, 어느새 경찰차가 등장했을 때, 북천신공은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기감이 잡히지 않는다고?'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감.
게다가 전우치를 처리할 정도의 능력자라면 당연하게도 느껴져야 할 기감이 느껴지지 않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부러 기감을 숨긴 건가?'
"경찰이다! 당장 그곳에서 내려와라!"
다급하게 차에서 내린 경찰이 개선문 위에 앉아 있는 그에게 소리쳤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을 뿐.
'그런 게 아니면 내가 기감을 눈치채지 못했다거나?'
"이봐 내려오라니까!"
거듭되는 경찰의 호통소리.
허나 역시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얼마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경찰들은 개선문 위에 올라가 있는 남자가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판단해 그를 직접 끌어내리기 위해 개선문의 위쪽으로 올라가려 했고.
투둑-
그와 함께, 북천신공이 움직였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원래 귀찮은 건 싫어서 그 녀석을 죽이고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기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군.'
북천신공은 시선을 내려 개선문 아래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자신에게 기묘한 물건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툭-쩌저적-!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게 떠들며 북천신공에게 스마트폰을 들이대던 이들은 그 상태 그대로 파란 얼음에 갇혔다.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개선문 근처에 있던 철창들.
건물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던 경찰.
더 나아가서 넓게는 개선문 근처에 있는 콜로세움과, 작게는 그 잔디밭 안에 살고 있던 벌레들까지.
모조리 얼어버렸다.
그리고-
후덥하던 공기가 어느새 얼음의 영향을 받아 차갑게 식어가고.
북천신공의 창이 자연스럽게 횡을 그릴 때-쩌저저적!─────와드드드드득!!
얼어 있던 모든 것들이,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람.
건물.
풀.
벌레.
얼음 속에 갇혔던 것들이 사방으로 깨져나가며 파편을 만들어내고, 그 모습을 보며-
'직접 날뛰어서 부르는 수밖에.'
-북천신공은 무감정하게 걸음을 옮겼다.
# 176
176. 만 년 동안 얼어 있던(2)
[재앙(災殃)출현! 빠르게 전복되고 있는 이탈리아]
[이탈리아 재앙(災殃)에 의해 주요 수도인 '로마'전복]
[재앙 출현 15시간째, 전혀 대항하지 못하는 헌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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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 나타난 재앙, 고작 15시간 만에 수도 붕괴]
이탈리아 현지시각 오후 7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재앙(災殃)이 시작되었다.
그때 당시, 재앙(災殃)탐지에도 걸리지 않았던 그는 푸른색 무의를 입은 채 개선문에서 나타났고, 재앙은 개선문 위에 나타난 지 약 30분이라는 시간 뒤, 시민들과 역사적인 가치를 지는 건물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당장 로마쪽에서는 당장 집계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자가 나왔고, 역사적 건물 중,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콜로세움, 판테온과 같은 건물이 훼손되었고- (중략) 이외의 역사적 건물이 무척이나 크게 훼손되었다.
그렇게 엄청난 인명피해와 역사적 건물을 훼손한 재앙은 불과 4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로마를 전복시키고 현재 플로렌스 쪽으로 행선지를 정해 움직이고 있다.
국제 헌터 협회는 이번 일에 대해 빠를 대처를 취한다곤 말했으나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는 않고. 그 덕분에 세간에서는 국제 헌터 협회가 이 일에 더 이상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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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랑 길드 꼭대기층의 집무실에서 한동안 스마트폰에 출력되어 있는 기사를 바라보고 있던 이서연은 이내 스마트폰을 내려두곤 시선을 돌려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구미호를 바라봤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고는 무언가를 열심히 분석하는 듯한 구미호의 모습.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모니터 안에는 로마가 실시간으로 얼어붙고 있는 모습이 몇 번이고 재생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줄곧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구미호는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일 것 같은데요……."
"어느 정도길래……?"
"어느 정도가 아니라, 그냥 저희는 만나면 아마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 죽을 거예요."
"그 정도로……?"
구미호의 말에 이서연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구미호가 김현우나 그의 제자들보다 못하다는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었으나 그녀는 등반자였다.
예전에 일본을 박살 냈던 천마(天魔)나, 독일을 부셔버렸던 괴력난신(怪力亂神)과 같은 등반자.
물론 천마나 괴력난신보다 그 급은 떨어지나 어찌됐든 '등반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이서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등반자가 1초도 못 버틴다고?'
그렇게 이서연이 생각하고 있을 때, 구미호는 화면 안에 나오고 있는 영상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빙토(氷土)는 절대 평범한 게 아니야.'
구미호가 보고 있는 건 그저 영상일 뿐이기에 정확히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단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이건 '마력'을 이용한 게 아니야.'
바로 이 영상 속에 나오는 빙토가 마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
기본적으로 마력을 이용한 성질 변화에는 눈으로 보기에도 마력이 은은하게 형상화되는 것이 정상이었다.
허나 영상에 보이는 빙토는?
'아예 보이지 않아.'
마력의 형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저런 거대한 빙토를 만들 때 마력의 형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꿀꺽-
'저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빙토를, 마력 사용도 아닌 그저 '자연능력'으로 만들었다고?'
도시의 한 부분을 완전히 덮을 정도의 거대한 빙토가 마력을 소모하지 않는, 오로지 '자연능력'으로 만들어졌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다시 말해 그 소리는-
'저 정도의 빙토를 자연능력으로만 만들어 낼 수 있는 녀석의 업(業)은 아마도-'
구미호는 다음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상황판단을 하고 있을 뿐.
그렇게 해서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가고 있을 때-꽈아아앙!!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의 플로렌스 외각에서는,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후우-"
한번 숨을 내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 차오르는 냉기.
분명 지금 시간대면 뜨거운 태양으로 인해 상당히 높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할 플로렌스는 지금 영하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유는 바로 플로렌스 외각 주변을 점령하고 있는 거대한 빙토(氷土)때문.
외각에 만들어진 거대한 빙토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리며 나타났다.
건물, 나무, 토지, 식물, 동물-
그 모든 것의 생명활동을 한순간 사그라뜨린 빙토는 지금도 끊임없이 자신의 영역을 늘려가는 중이고-
"호오."
그 빙토를 만든 장본인이자, 김현우를 처리하기 위해 탑에서 내려온 북천신공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두 명의 '계승자'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계승자인가, 그러고 보면 내가 탑을 오를 때도 몇 번 본 적이 있었지."
그의 웃음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북천신공과 싸움을 벌이고 있던 미령과 하나린은 굳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미령의 이마에 나 있는 붉은 뿔과, 하나린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 고서는 그녀들이 능력을 개방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으나 그런 상황임에도 북천신공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를 잃은 것은 미령과 하나린.
그 중에서도 미령은 인상을 찌푸리며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마력이-'
미령과 하나린은 플로렌스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북천신공에게 달려들어 짧은 전투를 이어나갔다.
순식간에 주변의 공간을 얼리며 공격을 준비하는 북천신공과 곧바로 계약한 힘을 끌어내 일격을 날린 미령.
그리고, 그녀는 그 짧은 한순간의 전투에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경험했다.
'얼어붙다니-'
그것은 바로 마력의 동결.
분명히 미령의 의지대로 모였다가 팽창해야 할 그녀의 마력은 북천신공의 근처에 가자마자 제 일을 마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것으로 끝.
얼아 붙은 마력은 순식간에 잘게 분해되어 깨졌고, 미령은 그 뒤로 날아오는 북천신공의 공격을 피해 몸을 뒤로 뺐고-
"속박"
그와 함께 하나린은 언령을 외쳤으나, 그녀의 언령도 마찬가지로 북천신공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마치 미령의 마력과 마찬가지로 얼어붙었을 뿐.
북천신공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자세를 잡는 그 둘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래도 상당히 신기하군, 고작 9계층에 이 정도의 힘을 가진 계승자가 2명이나 있다니. 이것도 이레귤러가 생긴 탓인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원래라면 살짝 시험해 보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당장은 그럴 시간이 없으니 빨리 끝내도록 하지."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을 끝으로 여유롭게 창을 쥐는 그의 모습에 미령은 인상을 찌푸리며 곧 다가올 공격에 대비했고.
곧-
[아래다 아이야!]
순간 다급하게 외친 괴력난신의 말에 미령은 아래를 볼 필요도 없다는 듯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와 함께 미령의 아래쪽에서 솟아오르는 날카로운 얼음 송곳들.
미령의 시선 끝으로 아래에서 올라오는 얼음 송곳을 깨부수는 하나린의 모습이 눈에 보이고, 미령이 인상을 찌푸릴 때-
"!!"
어느새 그녀 위에 나타난 북천신공은 이미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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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아아────!!!
김현우는 탑의 통로를 일직선으로 내려가며 귓가에 들려오는 괴기스러운 소음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몇 시간 전 노아흐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복자가 9계층으로 내려갔다고?'
그것은 바로 정복자에 관한 이야기.
김현우는 정복자가 9계층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야기를 듣던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곧바로 9계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9계층까지 얼마나 남았어!?"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썅……! 도대체 왜 나 없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수분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탑의 조각을 떠올렸다.
노아의 방주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노아흐에게 들었던 말에 따라 김현우는 방주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부서진 탑의 조각을 일부분 챙겼다.
그것으로 굳이 12계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도 노아흐를 만나러 갈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으나 지금 당장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김현우는 자신이 자리를 뜬 지 하루 만에 정복자가 내려왔다는 것에 대해 사정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9계층에 정복자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혹시 모르니까 정복자한테 달려들지 말라고 말이라도 해두고 왔어야 했나.'
그가 묘하게 초조해지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을 이어나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멈춰라!]
제천대성의 말에 따라 순식간에 근두운을 멈춘 김현우는 곧 자신의 앞에 있는 철문을 향해 이전에 했던 것처럼 청룡의 업을 들이밀었다.
쿠그그그그긍!
업을 들이밀자마자 열리기 시작하는 철문.
김현우는 철문이 전부 열리기도 전에 몸을 움직여 하얀빛 안으로 뛰어들었고.
"후……!"
그는 9계층에 도착했다.
12계층과는 다르게 푸른 풍경을 가지고 있는 하늘을 모습을 한번 바라본 김현우는 곧바로 물었다.
"어디야?"
김현우의 물음.
허나 그 물음뿐인 질문에도 제천대성은 알아들었다는 듯 대답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북쪽이다. 최대 속도로 가면 10분 내외로 도착할 것 같군.]
그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근두운을 움직였다.
콰─────아아아!!!
순식간에 주변에 소닉붐을 터트리며 날아가는 근두운이 김현우의 청각을 잡아먹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제천대성의 요구에 따라 근두운을 조종했다.
그리고-
"!"
김현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복자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바라본 곳에는 거대한 빙토(氷土)가 만들어져 있었으니까.
얼음들이 마치 수정처럼 여기저기에 나 있고, 거대한 얼음들이 주변의 온도를 억지로 끌어내린다.
하늘에서는 분명 태양이 떠있음에도 불구하고 냉기를 뿜어내는 얼음은 녹지 않고 있었고, 걔 중에는 마치 건물이나 탑처럼 높게 만들어진 얼음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렇게 빙토의 위를 날아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우는 정복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
괴력난신으로 각성한 미령의 목을 잡아채고 있는 정복자의 모습을.
"이런 씹-"
김현우의 몸이 순식간에 근두운 위에서 사라진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사라진 김현우의 신형.
그의 신형이 다시 나타난 것은,
"-새끼야!"
"!"
바로 창을 휘두르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북천신공의 앞이었다.
김현우의 발이 크게 횡을 그리며 북천신공의 머리를 노렸으나, 북천신공은 그 찰나의 순간 놀란 표정을 지우고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가볍게 땅을 박차 김현우의 사거리에서 벗어났다.
그와 함께 내던져진 미령.
김현우는 곧바로 북천신공을 공격하던 땅을 박차 가볍게 도약해 하늘에 날려진 미령을 받아낸 뒤 시선을 돌렸고.
"자네가 이레귤러로군."
-곧 여유롭게 입을 여는 북천신공의 모습에 김현우는 굳은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는 입을 열었다.
"이 개새끼가……!"
# 177
177. 만 년 동안 얼어 있던(3)
김현우는 입가로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빠르게 시선을 돌려 주변의 상황을 파악했다.
당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한구석에 처박혀, 입가에는 피를 줄줄 흘린 채 고서를 잡고 쓰러져 있는 하나린.
그리고 자신의 품 안에서 정신을 잃어버린 미령이었다.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풍경.
분명 태양이 내리쬐고 있는 맑은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이 주변에는 얼음이 치솟아 올라 있었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건물이나 동식물을 먹어치운 얼음들은 태양 빛을 가리듯 높게 솟아올라 있었고, 그 주변에는 조금 전까지 싸움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 박살 난 얼음 파편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신기하군, 조금 전까지는 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한순간에 나타나다니. 역시 계승자들은 이레귤러와 관련이 있었군."
-그 얼어버린 세상 한가운데에서 창을 들고 있던 그, 북천신공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듯 창을 어깨에 걸치고는 웃음을 지었다.
위기감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그 여유로운 표정.
김현우는 인상을 굳혔으나 곧바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이 주변에는 자신의 제자인 미령과 하나린이 쓰러져 있었으니까.
"쯧……."
그렇기에 김현우는 북천신공에게 눈을 떼지 않고 곁눈질을 해 미령과 하나린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상처가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물론 어디까지나 정복자와 싸움을 벌였을 때를 기준으로 상태가 심각하지 않았을 뿐이었으나 그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근두운으로 제자들을 이동 시킬 수 있어?"
김현우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묻자 제천대성은 곧바로 대답했다.
[가능하다. '근두운술'을 배운 시점부터 너는 네가 원하는 이라면 근두운에 태울 수 있다.]
제천대성의 대답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아직 반지로 바꾸지 않고 하늘에서 유형중인 근두운을 움직였다.
그리고, 공기를 터트리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김현우의 앞에 나타난 근두운은 그의 의지에 따라 미령과 쓰러져 있는 하나린을 주운 뒤 곧바로 하늘 위로 올라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호오."
그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북천신공은 짧게 감탄했다.
"근두운이라, 특이한 물건을 사용하는군."
자그맣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입을 여는 그.
김현우는 근두운이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주변으로 마력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근처를 장악하는 검붉은 마력.
"호오, 나쁘지 않은 마력이군. '탑'에서 나타났다기에는 말도 안 될 정도의 마력이야 그런데-"
파짓-!
북천신공의 말과 함께, 김현우의 주변으로 퍼지던 검붉은 마력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퍼지는 것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쩌적- 쩌저저적!
그의 마력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분명 제대로 된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마치 형상을 가지고 있는 듯 얼어붙기 시작한 마력.
"!"
그것을 바라보며 김현우가 놀라고 있을 때, 북천신공은 말했다.
"고작 이 정도로 전우치를 죽였다기에는 조금 이상하군, 녀석이 정복자 중에서는 그저 그런 놈 중 한 명이기는 했어도. 고작 이 정도에 소멸당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노골적으로 그를 무시하는 발언.
그에 김현우는-
"걱정 마."
"?"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작 이 정도는 아니거든."
그 말과 함께, 본격적인 힘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
파직! 파지지직!
그의 주변으로 검붉은 번개가 요동치기 시작하고, 북천신공의 자연능력에 의해 얼어붙던 김현우의 마력이 마치 폭죽처럼 터져나가며 냉기를 잡아먹는다.
순식간에 사방으로 뻗어나간 검붉은 마력.
쿵!
그것은 이내 자그마한 전류로 변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그 상황에서 김현우는 곧바로 제천대성의 업(業)을 빌렸다.
꽝!
그와 함께 하늘에서 내리치는 거대한 번개.
그와 함께 검붉은 전류를 감싸고 있던 김현우의 머리위에 마치 천사의 링과 같은 거대한 금고아가 만들어진다.
김현우의 추리닝 위에는 붉은색의 갑옷이 자리를 잡고, 그의 손에 잡혀 있던 회색빛의 여의봉은 갑옷과 마찬가지인 붉은색과 금색으로 물들어 완전히 다른 무기로 탈바꿈 했다.
"무슨……!"
그리고, 고작 몇 초 사이에 급작스럽게 변한 김현우의 모습에 북천신공은 순수하게 감탄하는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아직 감탄하기는 이르지."
"!"
-김현우는 그 찰나의 순간에 북천신공의 앞에서 주먹을 앞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꽝!
순식간에 날아드는 김현우의 주먹을 창대로 막아 낸 북천신공은 곧바로 창대의 앞으로 기울여 김현우가 있던 곳을 향해 휘둘렀다.
휘익!
허나 들리는 것은 빈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고. 보이는 것은 바로 그의 어깨에 도달한 붉은색의 금강여의봉이었다.
깡!
허나 이번에도 창을 휘두르는 것으로 여의봉을 막아낸 북천신공은 곧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김현우에게 창을 찔러 넣었다.
능숙하게 피해내는 김현우.
그와 함께 공방은 시작되었다.
북천신공의 창이 어지럽게 휘날리며 김현우의 몸을 노린다.
창날이 김현우의 어깨를 노리고, 그 공격을 피해냈다 싶으면 창대가 김현우의 오른발을 노린다.
창날로 공격하는 것뿐만이 아닌 창 전체를 이용해서 김현우를 공격하는 북천신공.
김현우는 창의 범위를 생각하며 그의 공격을 제한하기 위해 그에게 붙었으나, 북천신공은 초근접에도 익숙하다는 듯 창을 짧게 들어 김현우의 대처를 무산시켰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공방.
"!"
파직!
북천신공의 창을 피해낸 김현우가 곧바로 오른발을 기준 삼아 그의 얼굴에 발을 차올린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기적 같은 속도로 창을 들어 올리는 북천신공.
허나 김현우는 곧바로 방어 자세를 취하는 북천신공을 보며 기다렸다는 듯 여의봉을 그의 오른쪽 다리에 조준한 채 찔러 넣었다.
뻑!
"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른 다리가 풀려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한 북천신공.
김현우는 그의 자세가 무너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공격을 감행했던 여의봉을 축으로 삼아 그의 왼쪽 다리를 후려 차려 했으나.
"!"
김현우는 자신의 사방에서 갑작스레 솟아난 얼음 송곳을 보았다.
허나-
순식간에 그의 몸을 꿰뚫겠다는 듯 솟아나는 얼음 송곳을 보고서도 김현우는 그 자리를 피하지 않고 북천신공의 왼다리에 일격을 먹였다.
양다리에 힘이 풀려 북천신공의 자세가 무너지고, 동시에 김현우를 노리던 얼음 송곳들이 그의 몸을 꿰뚫으려 했지만--파지지지직!
그의 몸을 노리던 얼음 송곳들은 어느새 김현우의 등 뒤에 나타난 흑익에 의해 모조리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
인상을 찌푸리는 북천신공을 보며, 김현우는 그의 명치를 향해 주먹을 가져간 뒤-
"영거리-"
-그대로 북천신공의 명치에 자신의 무공을 때려 박았다.
"-극살!"
꽈아아아앙!!
북천신공의 명치에서 터져 나오는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폭음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포탄처럼 날아가 얼을 벽에 처박힌다.
쩌저저적! 쩌저적!
벽에 처박힌 북천신공을 중심으로 생기는 거대한 크레이터와 함께 박살나기 시작하는 얼음들.
김현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여의봉을 이용했다.
"길어져라! 여의!"
콰가가가가각!!
그의 의지에 따라 순식간에 길어진 여의봉이 크레이터의 중심을 타격하고, 그와 함께 거대한 얼음벽이 무참히 깨져 나간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얼음.
햇빛에 반사된 얼음 파편들이 찰나의 시간 동안 주변의 풍경을 일순간 밝게 물들인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도, 김현우는 얼음 파편과 함께 체공하고 있는 북천신공의 앞으로 도약했다.
깡! 카가가가각!
김현우가 도약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창을 휘두르는 그.
분명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의 창에 실린 기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 짧은 체공시간에 공방이 이루어진다.
북천신공의 창이 그의 어깨를 향해 날아들고.
김현우의 여의봉이 그의 창을 봉쇄한다.
이어지는 반격.
허나 북천신공은 여의봉과 손발을 전부 사용하는 김현우의 공격을 그저 창으로 받아냈다.
파자자자작!
그들의 주변으로 튀어 오른 얼음파편이 그들의 공격으로 인해 잘게 부수어지고, 그들의 체공이 끝날 때쯤.
"!"
김현우는 곧바로 자신의 아래에 있는 빙토에서 솟아올라오는 거대한 얼음기둥을 바라봤다.
조금 전, 얼음 송곳이 치고 올라오던 속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속도.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북천신공의 창을 피한 채 오른손에 쥐고 있던 여의봉을 아래쪽으로 조준했다.
콰드드드득!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늘어난 여의봉은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얼음을 그대로 박살 냈다.
또 한번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얼음 파편.
그 속에서 또 한번 공방을 주고받는다.
오른팔을 머리를 향해 쏘아 보내고, 그와 함께 왼다리를 올려 찰 준비를 한다.
공격이 시도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막힌 것을 가정하고 다음 공격을 준비한다.
이미 당장의 공격을 맞춘다기보다는 몇 수 앞을 예상할 수 있는가에 따라 공격을 맞출 수 있게 되어버린 지금의 공방.
그렇기에 그 둘은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
순간순간 빙벽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얼음 송곳들은 김현우의 흑익에 의해 깨어져 지속해서 얼음 파편을 만들어냈고.
그들의 싸움은 근처에 만들어져 있던 빙벽들을 모조리 깨부쉈다.
그리고-
"큭!?"
-씨익
형세가 기울었다.
그것은 아주 자그마한 실수.
"이런-!"
김현우의 근접 박투를 견제하기 위해 창을 짧게 잡은 북천신공은 그의 주먹을 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바로 오른쪽으로 찔러 들어오는 여의봉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그 결과로 인해 자세가 무너진 북천신공.
김현우는 그는 제빨리 창을 다시 쥐려 했으나 김현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만다라를 개화했다.
순식간에 그의 등에 만들어지는 만다라-파지지지직!
만들어진 만다라는 검붉은 번개를 사방으로 내려치며 주변의 마력을 팽창시키기 시작했고-쩌저저적!
만다라가 얼어붙었다.
"!?"
순식간에 일어난 일.
김현우는 순간 일어난 이상을 눈치채고 곧바로 시선을 내려 북천신공을 바라봤고. 그는 당황한 모습을 가진 조금 전과는 달리 평온한 눈으로 김현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확실히, 전우치가 소멸당한 게 그냥은 아니었군."
그가 말을 하는 중에도 만다라의 꽃잎은 얼어붙는다.
"쯧……!"
꽝! 콰가가강! 쾅!
김현우는 얼어붙는 만다라를 보며 그의 주변으로 번개를 내리쳤으나 얼기 시작한 만다라는 녹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얼기 시작하는 그의 마력.
"나를 이 정도까지나 밀어붙였으니, 내 이름 정도는 알려주도록 하지."
그와 함께 북천신공의 몸이 움직였다.
분명 아까와 같은 움직임.
그런데도 김현우는 반응할 수 없었다.
왜냐?
"미친-"
그 짧은 시간에, 그의 몸은 얼어붙었으니까.
마치 끊을 수 없는 속박에 걸린 것처럼 몸이 얼어붙은 김현우.
허나 김현우가 몸이 얼어붙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함에도 그는 김현우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저 북천신공은 그렇게 얼어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
그리고 곧, 그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북해빙궁(北海氷宮)의 초대 가주이자-"
그저 담담하게-
"영겁(永劫)에 가까운 시간을 홀로 버티고 버틴 신화(神話)."
자신의 이름을-
"만년빙정(萬年氷精)이다."
-김현우에게 알렸다.
# 178
178. 만 년 동안 얼어 있던(4)
"흐음."
거대한 크기를 지닌 노아의 방주 안쪽.
오크통에 꽂혀 있는 설계도와 하늘 위를 떠다니는 수많은 구슬 사이에 앉아 있던 노아흐는 아까 전 방주 밖을 빠져나갔던 김현우를 떠올렸다.
9계층에 정복자가 가고 있다는 말에 이야기를 멈추고 곧바로 빠져나간 그.
'걱정이군.'
노아흐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목제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전우치를 잡은 건 알고 있지만.'
그는 아까 전 김현우에게 정보를 전달했을 때 자신의 머릿속으로 전송된 내용을 떠올리며 인상을 굳혔다.
자신이 제작자로서 이 탑을 만들 때 탑 이곳저곳의 데이터베이스를 얻기 위해 설치해 놓은 마법진은 아직도 멀쩡하게 기동했고. 그가 만들어낸 마법진에 오류는 없다.
그것은 만든 이는 바로 노아의 방주의 주인인 자신이었으니까.
허나 그렇게 봤을 때.
'위험할 확률이 높다.'
지금 9계층으로 내려간 정복자의 힘은, 지금의 김현우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위협적이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필이면 신화체(神話體)인가, 게다가 정복자가 되면서 받은 업(業)도 있을 테니-'
노아흐는 마치 홀로 고민을 하듯 여기저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으나 확실한 답이 나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나.'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자신은 다른 이 몰래 김현우를 탑 안에 가두느라 이미 대부분의 힘을 쏟아부은 상태라 큰 도움은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뭐, 그래도 도움이 될 만한 아티팩트를 하나 넘겨줬으니…….'
그 대신, 노아흐는 방주를 떠나는 그에게 아티팩트를 하나 넘겨주었다.
'물론 그게 확실한 해결방법이 되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위급할 때 당장은 도움이 될 것이다.
노아흐는 그렇게 한참이나 묵묵히 생각을 이어나가다 이내 지쳤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고, 그가 그렇게 걱정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쯤.
파지지지직!!
김현우는 자신의 몸에 번개를 떨어뜨려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얼음을 깨뜨렸다.
그 모습을 본 북천신공- 아니, 만년빙정은 흥미롭다는 듯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자신의 몸에 직접 번개를 내리쳐서 얼음을 깨뜨리다니, 대단한 용기로군."
그의 이죽임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주변을 기점으로 덧씌워지기 시작한 얼음들을 보았다.
푸르다 못해 하얗게 세기 시작하는 얼음들.
"미친."
분명 그와 붙어 있던 시간은 10초 남짓.
허나 김현우는 그 10초 남짓한 시간 동안에 몸을 구속당했다.
거기에 덤으로 마력을 흩뿌리기 위해 나타난 만다라도 얼음 속에서 깨져버렸고, 그가 뇌령신공을 운용해 내리친 번개도 마찬가지로 얼어버렸다.
'다행히 제천대성의 업(業)을 빌려 내리친 번개는 얼지 않아서 움직임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차이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황금쇄자갑이 번개를 상쇄한다고 해도, 결국 최소한의 데미지는 들어온다.
한마디로 현재 상황에서 김현우는 어느 쪽으로든 리스크를 끌어안고 싸워야 한다 이 말이었다.
그렇게 김현우가 생각을 이어나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럼 이제 슬슬 싸움을 재개하도록 하지, 이 정도면 충분히 네 힘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도 했으니-"
"!!"
만년빙정은 곧바로 창을 휘둘러 김현우에게로 쇄도했다.
"이제 그만 자네를 처리하도록 하지."
순식간에 찔러들어오는 창을 보며 김현우는 여의봉을 움직였다.
까아아앙!
거친 쇳소리.
곧바로 시작되는 싸움에 김현우는 여의봉을 휘두르며 그의 공격을 방어했으나-드드드득-!
"!!"
여의봉을 휘두르는 그 순간, 관절에서 나는 얼음이 깨지는 소리에 김현우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꽝! 꽝! 까아앙!
온몸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흘러나오지만, 김현우는 그것을 확인할 틈도 없이 계속해서 만년빙정의 공격을 막아냈다.
분명 속도는 이전과 같을 텐데도 조금 전보다도 훨씬 반응하기가 힘들어진 그의 창.
'움직이는 게 힘들어……!'
단위를 쪼개서 세야 할 만큼 찰나의 시간에 몸을 움직이는데도 불구하고 만년빙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김현우의 몸을 지속적으로 얼렸다.
그리고-
빡!
"끅!?"
김현우는 오른쪽 위에서 들어오는 만년빙정의 창대를 맞고는 그대로 튕겨져 날아갔다.
그 뒤를 따라 기다렸다는 듯 창을 휘두르는 만년빙정.
그에 김현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번개를 떨어뜨렸다.
꽝!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빙설.
김현우는 바로 앞에서 창을 내리찍으려 하는 만녕빙정앞에 여의봉을 던지며 외쳤다.
"커져라 여의!"
콰가가가가강!!!!
그의 말이 울려 퍼지자마자 그의 뜻대로 부피를 벌리며 커지기 시작한 여의는 순식간에 주변에 있던 빙벽들까지 깨며 그 크기를 늘렸고, 그 찰나의 시간에 김현우는 외쳤다.
"야! 저놈 정복자가 되면서 받은 업(業)이 뭐야!?"
[모른다. 아까 말했다시피 나는 탑을 오른 뒤 곧바로 내려와서-]
"그럼 전우치는 어떻게 알고 있었는데?"
[그 머저리는 내가 오자마자 깝죽거렸다.]
"쯧!"
그 말에 김현우는 혀를 찼고-
"잔재주로 얼마나 시간을 벌거라고 생각했나?"
"썅!"
깡!
그는 곧바로 자신의 위에 나타나 창을 내리찍는 그의 모습에 여의봉을 원상태로 돌려 공격을 막아냈다.
순식간에 뒤로 밀려나 아직 남아 있는 빙벽에 처박힌 김현우.
그는 곧바로 자세를 잡으려 했으나 빙정은 더 이상의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김현우를 밀어 붙였다.
빠득! 빠드드득! 빠직!
이어지는 공격에 김현우가 기대고 있던 빙벽이 박살 나고, 그의 몸이 빙토로 추락한다.
콰드드드득!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깨지고 박살 나는 지반.
김현우는 한참이나 땅을 갈고 나서야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내리쳐지는 번개가 그의 몸에 있던 얼음들을 또 한 번 녹였고.
"제법 버티는군."
만년빙정은 자리에서 일어난 김현우를 보고 입을 열었다.
"지랄."
그에 답해준 김현우의 욕설. 하지만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해도 굉장히 초조해 보이는군."
"그래? 아직 할 만한데?"
김현우가 답하자 빙정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그래 아직은 할 만해 보이는군, 그럼 이번에는 어떨까?"
그와 함께 빙정 주변에 있던 빙벽으로부터, 얼음 송곳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빙정의 주변을 감싸듯 만들어진 얼음 송곳은 그가 손을 한번 까닥이는 것을 시작으로 김현우를 향해 쇄도했다.
김현우는 뒤로 간격을 벌리는 것으로 송곳들을 피해냈으나-꽝!
"!"
-피해내지 못했다.
"이건……!"
분명 닥쳐오는 송곳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냉기는 바치 빙정의 옆에 있을 때처럼 그의 몸을 얼게 만들었다.
그 순간-
"헙!"
김현우는 다시 시작된 빙정의 공격을 막기 시작했다.
빙정의 공격이 그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빙토 어디에서든 튀어나오는 얼음 송곳과 빙벽들이 김현우의 동선을 방해한다.
까가가가각!
"끄윽!?"
아까보다 몇 배는 복잡하고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김현우는 결국 어깨에 빙정의 창을 허용했다.
황금쇄자갑에 막혀 어깨가 잘려나가는 일은 없었으나 김현우의 어깨는 순식간에 새하얀 얼음으로 뒤덮였고, 빙정이 기회라는 듯 창을 찔러 넣은 순간-
"천뢰(天雷)-!"
김현우는 제천대성의 업(業)을 빌려 지상에 뇌우(雷雨)를 재현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붉은 번개가 주변의 빙벽들을 마구잡이로 박살 내고, 마찬가지로 그의 주변에 있던 송곳들을 박살 낸다.
그 상황에서 김현우는 곧바로 몸을 틀어 빙정이 찔러 온 창을 붙잡았다.
일순간이지만 동결상태가 풀려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된 김현우는 그의 창을 붙잡은 채로 앞으로 뛰어들었고, 빙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 사태에 대응하려 했으나.
"컥!?"
창을 쥐지 못한 그는 김현우의 공격에 대처할 수 없었다.
"왜? 창을 못 쥐면 공격도 못 해?"
들려오는 김현우의 이죽임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빙정은 그 뒤에 만들어진 세 개의 만다라에 눈을 휘둥그레 떴고.
곧 만다라가 개화하며 사방에 뿌리는 마력에 더더욱 놀람을 내비쳤다.
"어떻게……!"
빙정이 놀란 투로 김현우를 보며 묻자 그는 씨익 웃으면서 대답했다.
"뒤지기 싫으면 잘 막아봐라!"
파지지지직!
얼어붙지 않은 김현우의 마력이 순식간에 공명하며 방전이 일어나고, 그의 의지와 함께 검은 마력들이 팽창한다.
그리고 마력의 팽창이 최대치에 도달했을 때.
"수라(修羅)-"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무화격(武化?)-"
그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검붉은 마력이 빙토를 먹어치우고 부서진 빙벽을 먹어치운다.
시각과 청각도 마찬가지.
그저 모든 것이 검붉은 색으로 변해진 그곳에서 김현우의 주먹에서는 끊임없이 마력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후욱!"
김현우가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을 때.
"……."
빙정은-
"정정하지."
-서 있었다.
다만 그 모습은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전에 보였던 빙정의 모습은 푸른색의 무의를 입고 한 손에는 창을 쥐고 있던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 빙정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얼굴에는 마치 흑사병 의사들이 쓴 것 같은 가면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의 몸에는 조금 전에 있던 동양풍의 무의와는 달리 까마귀의 깃털로 만들어진 코트를 입고 있었다.
분명 짚신과 비슷한 무언가를 신고 있던 그의 발에는 가죽 장화가 신겨져 있었고, 그의 손에는 조금 전 보았던 창의 중심에 둥그런 구체가 박혀 있었다.
마치 마법 지팡이처럼 바뀌어버린 그의 무기.
마지막으로-
까악- 까악-
-어느새 그의 주변에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까마귀들이 그의 주변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 모습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끝끝내 꺼내게 만드는군."
그가 입을 열었다.
김현우는 순식간에 빠져나간 마력과 천뢰를 사용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제한시간을 느끼며 그에게 물었다.
"그게 네 두 번째 업(業)이냐?"
"잘 알고 있군. 이게 바로 내 두 번째 업이다. 바로 역병군주의 업(業)이지."
그와 함께 그의 주변에 있던 까마귀가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고,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냉기를 흩뿌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얼어붙는다.
그가 서 있는 곳.
까마귀가 지나는 곳.
그가 만들어낸 것들이 존재하는 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얼어붙는다.
얼음이 얼어붙고, 또 얼어붙는다.
"허."
검붉은 뇌우가 쳤던 곳들이 순식간에 재구성되고, 그저 몇 마리만 날아다니던 까마귀의 숫자가 늘어난다.
10마리
20마리
40마리
80마리-
마치 제곱을 하듯 순식간에 늘어나기 시작한 까마귀는 어느새 이 빙벽근처를 꽈 채울 정도로 늘어났고, 김현우는 어느 한순간, 자신의 몸이 얼어붙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콰드드득!
몸을 움직여서 얼음을 깨부순 뒤 굳은 표정을 짓는 김현우를 보며, 빙정은-
"그만 올라가 보도록 하지."
-마치 선고를 하듯 김현우를 향해 지팡이를 휘두를 준비를 시작했다.
빙정이 지팡이를 휘두를 준비를 시작하자마자 주변에 있던 얼음까마귀들이 저마다 날개를 휘적거리며 주변을 날아다니기 시작했고-김현우는 그런 까마귀를 바라보며 굳은 표정을 짓다-씨익-
"!"
미소를 지었다.
빙정은 한순간 미소를 짓는 그의 표정에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그가 순간적으로 지팡이를 멈췄을 때, 김현우는-
"정보-"
그렇게 말하며-
"고맙다-"
자신의 주머니 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이 빡대가리 새끼야."
# 179
179. 만 년 동안 얼어 있던(5)
빙정은 순간 김현우의 입가에서 튀어나온 미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
그것은 바로 그가 이 상황에서 전혀 빠져나갈 구멍이 없기 때문이었다.
빙토(氷土)는 자신이 뒤집어쓴 역병 군주의 업으로 인해 그 범위가 더더욱 늘어났고, 머리 위에 날아다니고 있는 수천에 가까운 까마귀들은 자신의 '자연 능력'을 흩뿌리며 날고 있었다.
심지어 김현우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중에도 까마귀들이 흩뿌리는 자연 능력에 의해 몸이 얼어붙고 있었다.
그렇기에 빙정은 도망을 칠 곳이라고는 그 어디에도 없는 상황에서 김현우가 웃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뭐?"
"정보 고맙다고, 이 빡대가리 새끼야."
비웃음을 머금은 김현우의 입가를 보며 빙정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무엇인가에 재빨리 자신이 집고 있던 지팡이를 휘두르려 했으나-깡!
"!?"
그는 지팡이를 휘두를 수 없었다.
"무슨-!"
이유는 바로 그의 오른손에 채워진 족쇄 때문.
"!?"
빙정은 어느 순간 자신의 오른손에 채워진 수갑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고-깡! 깡! 깡! 깡!
그의 몸에 차례대로 거대한 족쇄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왼손.
오른발.
왼발.
허리.
목.
순식간에 그의 몸 전체를 채운 족쇄는 순식간의 그의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빙정은 격앙된 목소리로 일을 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뭐긴 뭐야 봉인 장치지."
"뭐!? 봉인!?"
"그래."
대답을 하면서도 키득키득 거리는 웃음을 잃지 않는 김현우.
빙정은 '당했다'라는 표정으로 뒤늦게 족쇄를 끊기 위해 몸을 비틀었으나, 그의 몸에 채워진 족쇄는 그 어떤 행동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
그의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일그러짐은 순식간에 그를 빨아들이기 시작했고, 빙정은 괴성을 지르며 김현우를 바라봤다.
"이 자식…… 이 자식!!!"
좀 전의 여유를 찾아볼 수 없는 모습.
김현우는 그런 그의 모습에 올렸던 입가를 더더욱 올리고는 오른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가~!"
누가 보면 굉장히 싸가지 없어 보인다는 소리를 절로 할 정도로 띠꺼운 얼굴을 한 김현우의 모습에 빙정은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발악을 했으나-
툭-
이내 그는 그 일그러짐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와 함께 찾아온 정적.
그 뒤에는-
툭- 투두두두둑!
그가 만들었던 까마귀들이 그 본연의 힘을 잃고 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마치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일대를 퍼붓는 빗줄기를 맞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의 손에 쥐어진 족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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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의 구속 장치
등급: ??
보정: 없음
스킬: 구속(한정)
-정보 권한-
노아의 방주의 주인이자 이 탑을 만들어낸 제작자가 만들어낸 구속 장치.
그가 혹시 모를 추격을 대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그 구속 장치는 제작자의 남아 있던 힘을 소모하며 만들어졌다.
그 덕분에 만들어진 제작자의 구속 장치는 '탑'안에 있는 이들이라면 그 누구든 '일시적'으로 그를 가둬 놓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피시전자의 능력에 따라 구속 장치가 그를 가둬놓을 수 있는 한계 시간이 정해진다.
한계 시간은 48시간을 최소, 최고 시간을 36000잡는다.
구속 장치에 잡힌 피시전자는 갇힌 시간동안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속박당하게 되며, 피시전자는 속박당한 공간 안에서 생각하는 것 이외에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 피시전자가 풀려나게 된다면 제작자의 구속 장치는 그 능력을 잃어버리고 평범한 족쇄가 된다.
피시전자가 풀려나기까지 남은 시간: 119시간 59분 3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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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로그를 읽고는 한숨을 내쉰 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비로인해 축축해진 흙이 추리닝을 더럽혔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고, 얼마의 시간이지나 김현우의 머리 위에서 빛나던 금고아가 사라졌을 때,
"쓰벌……."
김현우는 자신의 몸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업(業)을 빌려오면 근육통이 오는 건 덤이구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아티팩트의 로그를 보았다.
'남은 시간은 119시간…… 5일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인가.'
길다고 하면 길다고도 볼 수 있지만 짧다고 생각하면 짧다고 볼 수도 있는, 조금은 애매한 시간.
"그래도 정보는 얻었으니."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조금 전에 사용한 것은 바로 9계층에 다시 내려오기 전, 노아흐에게서 받은 아티팩트였다.
그가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건네주었던 아티팩트.
분명 5일이라는 시간뿐이기는 하지만 제작자의 구속 장치는 확실하게 도움이 되었다.
'이것 덕분에 마음 놓고 빙정을 시험해 볼 수 있었으니까.'
김현우는 애초에 이번 싸움에서 빙정을 이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이번에 하려고 했던 것은 9계층에 내려온 정복자의 분석.
'물론 여력이 된다면 곧바로 모든 힘을 쏟아부어 때려 죽였겠지만.'
김현우의 생각대로 빙정은 지금 당장의 김현우로는 이길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그가 본격적으로 만년빙정의 이름을 밝혔을 때까지는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쯧,"
그가 한 번 더 업(業)을 뒤집어썼을 때, 김현우는 지금 당장은 빙정을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장 공격이라도 통하면 모르겠지만'
그가 두 번째 업을 뒤집어쓴 게 아니라면 상대할 수도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가 역병 군주의 업을 개화하고 나서부터는 공격이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마력이 전부 얼어붙었으니까.'
물론 그때 김현우는 이미 그를 가둘 생각을 하고 빙정이 숨겨둔 마지막 한 수를 보려고 일부러 거의 모든 마력을 때려 박은 것이었으나.
그래도 분명 제천대성의 업(業)을 유지할 정도의 마력은 남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도, 빙정이 역병군주의 업을 개화했을 때, 김현우는 그 이상 자신의 마력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을--정확히는 마력이 외부에 나가자마자 얼어버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나 그런 상황임에도 김현우는 딱히 무력감을 느끼지 않았다.
'뭐, 그래도 녀석이 어느 정도까지 힘을 쓸 수 있는지는 알았으니까. 우선 기본 목적은 달성했네.'
어차피 그의 목적은 빙정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었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지.'
-그는 목적을 확실히 완수했으니까.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탈리아 플로렌스에 있는 주립병원.
순간 희미한 시야에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령은-
"!"
어느 한순간을 기점으로 두 눈을 휘둥그레 뜬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이는 것은 척 보기에도 상당히 고급스러운 가구와 장비들이 놓여 있는 병실.
"일어나셨습니까."
그리고 그런 미령의 옆에 있는 이는 바로 패도 길드의 부길드장인 천영이었다.
미령은 잠시 상황파악을 하는 듯 병실 내의 풍경을 보곤 이내 시선을 돌려 물었다.
"설명해라."
그녀의 무미건조한 말투에 천영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현 상황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해 말하기 시작했다.
미령이 김현우에게 구해져 이곳으로 온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그로부터 이제 막 하루가 지난 시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가서 쉬어라."
"예."
한참이나 천영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던 미령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고, 천영은 그녀의 말에 따라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로 인해 조용해진 병실 안.
미령은 물었다.
"등반자는 어떻게 됐지?"
[네 스승이 와서 등반자를 상대한 것까지는 느낄 수 있었다만 그 이상은 모르겠구나.]
"모른다고?"
[그래, 좀 이상하거든.]
"그게 무슨 소리냐."
미령이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그 이야기에 답해주던 그녀, 괴력난신은 정리하는 느낌으로 입을 열었다.
[분명 네 스승이 그 녀석을 상대한 건 맞아, 게다가 중반까지는 상당한 마력폭발까지 일어나며 격렬한 싸움을 벌였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느껴졌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정복자의 마력이 사라지더구나.]
"마력이 사라져?"
[그래,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마치 어디로 이동한 것처럼 말이야.]
"……."
괴련난신의 말에 미령은 짧게 생각했고,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마저 이야기를 이었다.
[아무튼, 이건 네 스승한테 물어보지 않으면 정확히 알 수 없는 문제구나.]
괴력난신의 이야기를 끝으로 만들어진 침묵.
미령은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을 회상했다.
'전혀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미령의 공격은 무엇 하나 통하지 않았다.
분명 괴력난신의 업을 빌려 그 자리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빙정에게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그것은 자신과 함께 비정을 막으러 갔던 하나린도 마찬가지.
그의 앞에서 미령과 하나린의 마력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고, 그와 함께 보이는 그의 창술은 그녀보다도 몇 단계 위에 있었다.
그로 인해 느껴지는 압도적인 무력감.
지금까진 느껴보지 못했던 무력감이 미령의 몸 위를 스멀스멀 기어 다녔고.
[아이야, 낙심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무력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 녀석은 네가 이기지 못할 녀석이었으니까.]
괴력난신의 말에도 미령은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꾹 쥐고 있을 뿐이었고, 곧 잠시간의 침묵 끝에-
[아이야, 더한 힘을 원하느냐?]
"!"
-괴력난신은 말했다.
그렇게 미령이 크게 눈을 떴을 때, 노아의 방주 안쪽에서는.
"쯧-"
노아흐의 앞에 있던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어깨를 돌리고 있었다.
"아직 피해가 남은 것 같군."
그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어제, 만년 빙정을 구속 장치에 가둬 놓은 뒤 김현우는 쉴 틈도 없이 곧바로 플로렌스로 넘어가 간단한 치료를 받고 미궁으로 내려갔다.
이유는 바로 마정석을 모아 노아의 방주로 오기 위해서였다.
노아흐는 정복자와의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노아의 방주에 들르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그 녀석은 어떤 녀석이었나?"
노아흐의 물음.
그에 김현우는 답했다.
"너도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물론 내가 곳곳에 설치해 놓은 마법진을 통해 어느 정도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 정복자가 이동했다는 건 알 수 있지만 세세한 건 알 수 없네."
그의 말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 김현우는 곧 자신이 보았던 것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가 9계층에 내려가 만년빙정을 만난 것부터 시작해, 그의 능력이나, 그가 나중에 개화한 업까지.
김현우는 자신이 추측한 것과 동시에 보았던 것을 전부 노아흐에게 말했고, 이내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신화체인가."
"신화체? 그건 또 뭐야?"
"자네 같은 인간이 아닌, 말 그대로 설화나 신화에 자연스럽게 이지가 생겨 만들어지는 녀석들을 말하는 걸세."
"……그러니까 그냥 강한 놈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적어도 자네가 상대했던 도사보다는 강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군."
"쯧."
김현우는 노아흐의 말에 바로 혀를 차고는 질문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오라고 한 걸 보면 뭔가 해결방안이 있어서인 거 아니야?"
"맞네."
"그게 뭔데?"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자네도 그 녀석이 사용하는 것과 동급의 업(業)을 얻으면 될 일이지."
"뭐……?"
# 180
180. 만 년 동안 얼어 있던(6)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어둠뿐인 공간.
허나 모순적인 것은 그런 어둠 속의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린의 몸은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기묘한 인지.
'꿈인가?'
한동안 이 어둠뿐인 공간을 몇 번이고 돌려보던 하나린은 속으로 그런 판단을 내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하나린은 그 어둠뿐인 공간을 응시하다 문득 자신이 마지막으로 쓰러지기 전 보았던 풍경을 떠올렸다.
"……."
보였던 것은 찰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린의 머릿속에 톡톡히 각인되어 있는 그 기억.
그녀는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마력이 얼다니.'
마력의 동결.
하나린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처음에만 해도 그녀가 '언령사'를 죽이고 얻은 그 능력은 하나린의 의지를 충실하게 실현시켜 주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하나린의 언령은 먹히지 않았다.
그가 조금이나마 김현우에게 배웠던 무술도 마찬가지.
모든 공격은 느긋한 미소를 짓던 그에게 전부 파훼당했다.
단 하나도 빠짐없이.
그렇게 모든 공격을 파훼당하고 난 뒤 하나린의 그의 창에 몸을 직격 당한 뒤부터 정신이 끊어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죽은 거야?'
하나린의 머릿속이 생각을 이어감에 따라 서서히 현실감을 가지게 되고, 그녀의 눈에 초조함이 깃들기 시작한다.
'정말로?'
아직 사부님이랑 제대로 썸을 타지도 못했는데? 정말로 내가 죽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도중-
[죽지 않았으니 걱정 마라.]
"!"
-갑작스레 들려온,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대답한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에 하나린은 사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고서(古書)?"
하나린은 조금 전에는 없었던 검은 고서가 허공에 둥둥 떠져 있는 것을 바라봤다.
아티팩트의 이름에도 그저 고서(古書)라고만 써져 있고, 자세한 설명이나 보정, 스킬이 일체 존재하지 않는 고서.
그것이 하늘에 떠 있었다.
그 모습에 하나린은 저도 모르게 책의 정체를 맞추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메이슨?"
그것은 그녀가 능력을 계승하기 전, 원래 이 능력을 가지고 있던 남자의 이름이었고, 그에 고서는 답했다.
[틀렸다. 나는 그 녀석이 아니다.]
명백한 부정.
"그럼 너는 뭐야?"
그렇기에 그녀는 물었고, 하나린의 앞에 떠 있던 고서는 순간 촤르륵 펼쳐지며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나는 '언령의 서'다.]
"……언령의 서?"
[그래, 너는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네게 언령의 힘을 넘겨준 것 또한 나다.]
"무슨?"
하나린은 예전, 메이슨을 죽이고 그의 품 안에 있던 것을 빼앗음으로써 자동으로 계승자가 되었었다.
"……메이슨이 주인이었던 게 아니라고?"
[주인?]
-피식.
책인데도 보이는 노골적인 비웃음.
[그 녀석은 주인이 아니다, 오히려 내게 머리를 조아리고 힘을 받아갔던 필멸자일 뿐이지. 내 능력은 그 머저리가 쓰는 것처럼 약하지 않다.]
"……."
마치 화를 내는 것 같은 고서의 말에 하나린은 잠시 말을 멈춘 뒤 하늘에 떠 올라 있는 고서를 바라봤고. 그녀는 침묵을 유지하다 물었다.
"나는 죽은 거야?"
[아니다.]
단호하게 대답한 고서.
그에 하나린은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여기는 어디인데?"
"여기는 나의 내면세계다."
"내면세계?"
"그냥 편하게 꿈속이라고 생각하는 게 이해하기 쉬울 거다. 지금 현실의 너는 병실에 누워 있으니."
하나린은 그의 말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그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가 지금 나타난 이유는 뭐야?"
"전에 나를 쓰던 놈보다는 훨씬 능력을 잘 사용하기에 어디까지 하나 지켜볼 생각이었다만, 아까 전 싸움을 보니 너는 힘의 이해도가 너무 낮더군."
"……힘의 이해도?"
"그래. 그래서-"
촤르르르륵-!
언령의 서는 자신의 종이를 촤르륵 넘겨대며-
"-내가 친히 너를 가르치러 온 거다. 조금이라도 고서장이 될 확률이 있는 널 말이야."
-그렇게 말했다.
####
"업(業)은 업(業)으로 지운다?"
노아의 방주 안, 오크통에 앉아 있는 김현우가 되묻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래, 알다시피 지금 자네는 매우 불리한 상태일세."
"……내 업(業)이 부족해서?"
그의 물음에 노아흐는 고개를 절레 거리며 대답했다.
"업이 '부족'하다고 하기보단 등급 차이가 난다고 보면 되지. 저번처럼 게임으로 예를 들면 그 녀석은 유니크 아이템인데 비해 자네는 레어 정도밖에 안 된다는 비유로 설명하는 게 좋을까?"
"……거 기분 묘하네."
김현우가 뚱하게 중얼거리자 그는 답했다.
"기분이 묘할 만하네, 이건 자네와 그의 경험적인 차이보다는 태생적인 차이와 같은 부분이니까."
"……재능충이랑 비슷한 거야?"
"그래, 그런 거지."
"재능충 새끼들 진짜."
김현우가 탄식하듯 말하자 노아흐는 대답했다.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돌린 김현우를 슬쩍 바라보고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차피 자네에게 설명해 봤자 설득시키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니 그만두도록 하지."
"무슨-"
"아무튼,"
그의 말을 끊은 노아흐.
김현우는 슬쩍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노아흐를 보았으나 이내 별 이야기를 하진 않았고 노아흐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말해준 대로, 자네가 그 정복자를 잡아 죽이려면 할 수 있는 것은 그와 비슷한 등급의 업을 습득하는 수밖엔 없네."
"……그걸 이 짧은 시간에 어디서 얻어?"
김현우가 말하자 노아흐는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있지 않은가? 얻을 수 있는 곳이."
"?"
"자네가 전우치를 죽이면서 얻은 청룡의 업(業)은 장식품이 아닐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고.
"응?"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하수분의 주머니를 집어 들다 저도 모르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아니, 분명 악천의 원천을 사용 할 때 아티팩트는 들고 올 수 없었는데……?"
김현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악천의 원천을 확인해 봤으나 딱히 변한 것은 없었다.
똑같은 이름과 똑같은 로그.
"???"
그렇기에 김현우가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노아흐는 말했다.
"그거라면 놀라지 말게. 내가 아티팩트를 이곳으로 들고 올 수 있게 '허용'한 거니까."
"뭐? 그게 돼?"
"방법만 알면 가능하다. 게다가 지금 자네가 와 있는 곳은- 아니, 이것까지 말하면 설명이 길어지니 그만두도록 하지."
그렇게 말을 끊은 노아흐.
"아무튼, 이 공간에 한해서는 내가 '허용'함에 따라 아티팩트를 가지고 올 수 있네."
그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 자신의 하수분의 주머니에서 청룡의 업을 꺼내들었고.
------
청룡의 업(業)
등급: ??
보정: ??
스킬: ??
-정보 권한-
사신(四神) 중에서도 중에서 가장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이며 다른 용들의 수장이라고도 불리는 청룡(靑龍)의 업(業)을 농축해 담아놓은 보석이다.
청룡(靑龍)은 4개의 방위 중에서도 동쪽을 수호하는 수호신이며 비와 구름, 바람과 천둥번개를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청룡은 탑에 올라 -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권한 부족----@#$@#^#$^#@^@#$@#%@^#$
------
"이거, 정말로 쓸 수 있기는 해?"
김현우는 청룡의 업을 꺼내들자마자 떠오르는 기괴한 로그를 보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노아흐는 그런 김현우의 표정을 한차례 훑어보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청룡의 업을 가져가며 말했다.
"당연히 사용할 수 있네."
"어? 정말?
"그래, 이건 내가 만든 거니까."
"뭐? 네가 만들었다고?"
김현우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묻자 노아흐는 뭘 그리 놀라냐는 듯 말했다.
"뭘 그리 새삼스럽게 놀라나? 나는 이 탑을 만들어 낸 '제작자'일세. 당연히 이 업(業)을 압축하는 장치 또한 내가 만들었지."
-원래 이렇게 쓰는 물건은 아니지만 말일세.
노아흐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기다리게, 아티팩트는 없지만, 어차피 '업(業)'을 푸는 것 정도는 쉬우니까."
그 말과 함께 노아흐의 손에서 마법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큰 마법진이 다섯 개.
작은 마법진이 네 개.
만들어진 마법진은 이내 어지럽게 섞이기 시작했고, 곧 저들끼리 공명하며 푸른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
분명 푸른 보석의 형태를 띠고 있던 보석이 이내 카드득 거리는 소리를 내며 분해되기 시작했다.
분명 보석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짓한번에 기계처럼 바뀌기 시작하는 업의 모습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무척이나 정교하게 이루어지는 작업.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김현우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러나?"
작업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별로 힘든 기색 없이 대답하는 노아흐.
"같은 등급의 업(業)을 얻어서 덮는다는 소리는 알겠는데, 그럼 상성 같은 건 없는 거야?"
상성.
불이 물을 이기지 못하듯 그 차이가 현저하게 나지 않는다면 기본적으로 모든 속성에는 상성이라는 게 있었다.
만년빙설은 빙결계.
그리고 지금 노아흐가 만지고 있는 청룡의 업은 뇌전계라고 분류할 수 있었기에 김현우는 물었고 그에 노아흐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럼 왜?"
"이 청룡의 업 말고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나 자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
그러네.
김현우는 노아흐의 말을 들으며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파직!
노아흐가 쥐고 있던 청룡의 업에서 푸른색의 번개가 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노아흐는 곧바로 마법진을 만들어냈던 손을 곧바로 다른 쪽으로 휘둘렀다.
휙-!
그가 손을 휘두르자마자 마치 명령을 받은 것처럼 그의 오른손에 잡힌 구슬.
그리고-
파지지지직!!!
노아흐는 자신의 손에 잡힌 구슬을 확인할 것도 없다는 듯 그대로 손에 쥐고 조금 전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던 청룡의 업을 구슬 안쪽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푸른빛의 전류가 방주 이곳저곳을 사납게 울렸으나 노아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고-
"끝이네."
-이내 그는, 김현우에게 조금 전까지 들고 있던 구슬을 들이밀며 말했다.
"……뭐가?"
"말 그대로, 자네가 업(業)을 쌓을 수 있는 준비는 전부 끝이 났다 이걸세. 이제 남은 건 자네가 하기에 따라 달려 있지."
김현우는 노아흐의 말을 듣고 무엇인가가 비추기 시작하는 구슬 안쪽을 바라보곤,
"……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구슬 안쪽 풍경의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거대한 용을 보며 물었고-
"저 녀석에게 인정을 받거나, 아니면 네가 저 녀석을 때려눕히면 되지."
"썅……."
-이내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 181
181. 청룡의 업(業)(1)
노아의 방주의 주인인 노아흐.
그는 조금 전 자신이 청룡의 업을 풀어 놓은 곳으로 들어간 김현우를 생각하며 구슬을 바라보았다.
구슬에 비치는 것은 어느 한 풍경.
분명 청룡의 업이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맑은 하늘에 푸른 초원이 그려져 있던 그곳은, 지금에 와서는 재해가 일어나는 곳이 되어 있었다.
초원 사이사이에 심겨 있던 나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맑았던 하늘에는 폭우와 뇌우가 번갈아 가며 떨어지고 있는 그곳.
'할 수 있을까.'
그것을 보며 노아흐는 슬쩍 걱정이 들었다.
업(業)을 인정받는 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런 식으로 이미 본체는 소멸하고 그 의식만이 남아서 지금처럼 존재하고 있는 녀석의 업(業)을 흡수할 수 있는 방법은 총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 방법은 바로 의식체로 존재하는 청룡을 이기는 것.
아직 육체가 소멸하지 않은 등반자는 죽여서 그 업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나 이처럼 의식체, 그러니까 그 업만이 남아 있을 때는 의식체를 이기는 것으로 업을 얻는 것이 가능했다.
허나 고작 의식체를 이기는 것만으론 모든 업(業)을 가져갈 수 없었다.
잘 가져가 봤자 절반 정도나 흡수할 수 있을까?
'만약 청룡의 수행을 그대로 따라한다면 전부 얻을 수도 있겠지만.'
업을 온전하게 얻는 그 두 번째 방법.
그것은 남아 있는 의식체, 청룡이 했던 수행을 김현우가 그대로 다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상황에서 불가능한 이야기나 다름이 없었다.
청룡의 업(業)을 그대로 따라 하라면 엄청난 시간이 걸리니까.
이 공간 내에서는 노아흐가 시간비를 고치는 것을 '허용'해 흐르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한마디로, 이제 4일을 넘어 3일 정도가 남은 시점에서 김현우가 청룡의 업을 그대로 따라하는 건 불가능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한 개.
'의식체의 인정을 받는 것인가.'
만약 김현우가 청룡의 인정을 받는다면 두 번째 같은 수고로움을 들이지 않고도 청룡의 업을 온전히 흡수하는 게 가능했다.
게다가 걸리는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으니 지금의 김현우로서는 청룡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가장 베스트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의식체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힘들었다.
이유?
'방법을 제대로 모르니까.'
의식체를 무력으로 때려눕히거나 의식체의 수행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확실한 방법이 존재한다.
허나 의식체의 인정을 받는 것은?
그것은 확실한 방법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의식체들은 전부 제각각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긴 사고를 이어나가던 노아흐는 어차피 고민해 봤자 더는 나오는 게 없다는 사실에 사고를 일축한 뒤 자신이 예전에 만들어 놓은 '공간'에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지켜보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렇게 노아흐가 구슬 안을 들여다볼 때, 김현우는 날아갈 것 같은 자신의 몸을 천근추의 묘리로 잡아두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용(龍)이 있었다.
이 공간 전체를 홀로 차지할 수도 있어 보이는 거대한 길이를 가지고 있는 용이, 먹구름 사이를 돌아다니며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쉼 없이 빗줄기가 떨어져 내렸고 그 사이사이로 푸른색 번개가 녹색의 잔디를 검게 태우고 있었다.
마치 예전, 전우치가 청룡의 업(業)을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풍경.
그리고-
[너는 이전번의 필멸자로군.]
어느새 하늘을 유영하던 청룡이, 김현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몸에는 파직 거리는 푸른 번개를 머금은 채 기백을 내뿜으며 머리를 내밀고 있는 그의 모습에 김현우는 감탄하면서도 말했다.
"이전번이라니?"
[내 업(業)을 제멋대로 휘두르던 머저리와 싸우지 않았나?]
"……아."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전우치를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고, 청룡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그때 네 모습을 보았지, 한때 옥황(玉皇)의 머리를 남아나지 않게 했던 원숭이의 업을 사용하더군.]
[웃기지 마라 뱀대가리 새끼야! 나는 원숭이가 아니라 제천대성이다!]
청룡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지 곧바로 하수분의 주머니에서 입을 여는 제천대성.
그에 청룡은 겉모습은 아니지만 말투로는 꽤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있었나?]
[여기 있다! 이 뱀대가리 새끼야!]
[흠, 너무 화를 내는군. 어차피 네가 원숭이라는 태생은 변하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원숭이가 아니라 제천대성이라고!]
[누가 아니라 그랬나? 그냥 태생이 원숭이라는 거다.]
[크아아아아아앙악!!!]
원숭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듯 힘껏 비명을 지른 제천대성.
한동안 그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여의봉을 꺼내 들며 물었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악연으로 묶여 있지.]
김현우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청룡이었다.
[인연을 악연으로 만든 건 너잖아, 이 뱀대가리 새끼야-!]
[그러니까 왜 굳이 옥황의 말을 듣지 않고 그렇게-]
점잖게 말하는 청룡과, 금방이라도 분노를 쏟아 부을 것처럼 방방 뛰며 말하는 제천대성.
그 둘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짜증을 내며 제지했다.
"그만 좀 해 시끄러워서 머리 아프니까."
[……흥!]
그의 말에 짧은소리를 내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은 제천대성.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청룡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이 폭우 좀 멈춰주면 안 되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볼 수가 없는데."
김현우의 말에 청룡은 말했다.
[굳이?]
"?"
[어차피 지금부터 싸울 것 아닌가.]
"……아직 말도 안 했는데?"
김현우가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청룡은 이어서 입을 열었다.
[어째서 내 의식만이 이렇게 남아 이 공간 안에 배치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만약 네가 나를 이 공간 안으로 인도한 거라면 내 업을 얻기 위한 공작일 확률이 높다 생각했다.]
"어째 잘 알고 있네."
[뭘, 대충 상황을 보면 바로 예측할 수 있는 문제지.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지?]
"……어떻게 하고 싶냐니?"
[싸움에도 종류가 있지 않은가? 순수하게 나를 쓰러뜨려서 조금이나마 내 업을 찬탈할 생각인가? 그게 아니라면 내 인정을 받고 대부분의 업을 가져갈 생각인가?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나와 똑같이 수행을 할 생각인가?
청룡의 물음에 김현우는 답했다.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아서 수행은 못 할 것 같은데."
[그럼 남은 건 두 가지로군, 내 업을 찬탈할 생각인가? 아니면 내 인정을 받을 생각인가?]
"그게 무슨 차이야? 싸워서 빼앗든, 인정받아서 받아가든 똑같은 거 아니야?"
[다르다. 만약 네가 나를 쓰러뜨리고 업을 찬탈할 경우, 너는 내 업의 절반도 채 가져가지 못할 거다.]
"……업이 그렇게 나누고 할 수 있는 거야?"
[아니,]
"그럼 어떻게 업(業)을 절반 정도 가져 갈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거야? 다 가져가면 다 가져가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김현우의 의문어린 질문에 청룡은 답했다.
[네가 나를 쓰러뜨리고 얻은 업적은 내 것이 아니라 네 것이니까.]
"??"
[말 그대로다, 만약 네가 나를 쓰러뜨렸을 때, 너는 '청룡을 잡았다'는 업적을 가져가는 거지. 그렇기에 네가 얻을 힘이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럼 만약에 인정을 받는다면?"
[그런 말 그대로 '청룡의 업(業)'을 가져가는 거다. 물론 내 업을 네가 얼마만큼 자유롭게 사용 할 수 있을지는 네 실력 여부지만.]
"그럼 고민할 것도 없이 후자를 선택해야 하는 거잖아?"
[내 업을 온전히 가져가고 싶다면 그래야겠지.]
청룡의 긍정.
김현우는 스읍, 하고 괜히 크게 숨을 내쉬곤 말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다, 아까 말했듯이 내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면 나와 싸우면 된다.]
"응?"
[대신, 그 어느 외부적인 도움 없이 순수한 자신의 힘으로 싸워라.]
"그러니까, 템빨로 이기지 말란 소리지?"
[대충 어감상 맞는 느낌인 것 같군.]
청룡의 대답에 김현우는 볼 것도 없다는 듯 여의봉을 집어넣었다.
"싸워서 이기면 되는 거야?"
[아니, 만약 네가 나를 이긴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 네 상태로 나를 이기기에는 힘들 것 같군.]
"……너 제천대성이랑 비슷한 급 아니야?"
[흐음, 그 원숭이와는…… 뭐, 그다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아마 비슷할 정도의 업이 쌓여 있기는 하겠군. 뭐, 그래봤자 내가 더 위겠지만.]
[깝치지 말라고 했지 뱀대가리?]
"나는 제천대성을 이겼는데?"
순간 다시 튀어나온 제천대성의 발언을 무시하며 김현우가 답하자 청룡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건 '탑' 안에서 아닌가?]
"……그건 그렇지?"
[유감이지만 지금 원숭이에게서 느껴지는 힘을 대충 계산해 볼 때, 너는 진짜 원숭이를 쓰러뜨리진 못한 것 같군.]
"?"
[지금 원숭이에게 느껴지는 업의 힘은 2분의 1? 아니, 3분의 1정도인 것 같으니.]
"……진짜?"
[내가 저번에 말해줬잖아! 내 힘은 온전하지 않다고.]
'……그런 말 했었나?'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안 들었던 것 같기도 한 사실에 김현우는 슬쩍 고민했으나 청룡은 그가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의식체이긴 해도 모든 업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나를 자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으니, 이렇게 하도록 하지.]
꽝!
청룡의 말과 함께 주변으로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멈춰 있던 청룡의 몸이 스물스물 움직이기 시작하고, 조금 얕아지지 않았나 싶었던 폭우가 다시금 내리친다.
그 상황 속에서 청룡은 말했다.
[5분.]
"?"
[내 공격을 5분 버텨봐라.]
"뭐?"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공격만 한다는 건 아니다. 너도 나를 공격해도 좋고, 네가 자신만 있다면 나를 쓰러뜨려도 좋다.]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그것뿐?"
[그래, 그것뿐이다.]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그제야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빨리 인정하게 됐다고 후회하지 마라?"
[자신감이 넘치는군. 물론 네 생각처럼 내가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다. 나는 그저 네가 내 업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를 시험해 보는 것뿐이니까.]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뇌령신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순식간에 그의 주변으로 퍼져 나오는 검붉은 마력.
그와 함께 튀어 오른 검붉은 전류들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맞아 사라지고, 그의 등 뒤에 검은색의 흑익이 펼쳐진다.
그 위로 떠 오르는 검은색의 흑원.
조금 전까지 젖어 있던 김현우의 머리가 마치 정전기가 닿은 것처럼 삐죽거리며 서기 시작하고-파지지지직-!!
김현우는 자신을 감싸고 있던 검은색의 마력을 크게 방전시키는 것으로 주변에 내리고 있던 빗방울들을 모조리 방전시켰다.
그와 함께 드는 생각.
'왠지 너무 간단하게 풀리는 것 같은 감이 있기는 한데.'
솔직히 김현우는 청룡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어쩌나를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뭐 이렇게 잘 풀리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김현우는 곧바로 시선을 위로 올리며 청룡에게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는 거로?"
[나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으니 한번 움직여봐라, 그때부터 시간을 재도록 하지.]
"그래? 그럼-"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사양은 안 할게!"
곧바로 청룡의 머리가 있는 곳을 향해 힘차게 도약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쾅! 콰가가가강! 쾅!
-먹먹한 하늘에서 뇌우(雷雨)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 182
182. 청룡의 업(業)(2)
크고 작은 사슬.
마치 세계 자체를 '사슬'로만 조형한 것처럼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사슬이 뭉치고 뭉쳐 있는 그곳에서-쩌저저적-쩍-!
사슬들이 얼어붙고 있었다.
분명 윤택이 나는 철의 외관이 푸른 얼음에 뒤덮이고, 그 뒤에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투명한 얼음으로 뒤덮인다.
어느 한 곳을 중심으로 역병이 퍼지듯 확장하고 있는 냉기.
허나-
빠직-
"!"
빠지지지지직!!!
순조롭게 사슬을 얼리고 있던 냉기는 어느 곳을 기점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마치 벽에 막힌 듯 일정 이상은 나아가지 못하는 냉기.
그리고-
파챵-!
쇠사슬을 타고 빙토를 만들어가던 얼음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분명 아무런 조치가 없었음에도 자연스럽게 깨지기 시작한 빙토는 이내 영역을 확장하지 못하고 완전히 사라졌고.
"……젠장!"
쾅! 철그럭!
빙토가 만들어졌던 그 중심, 수많은 사슬들이 엮여 거대한 기둥이 만들어져 있는 그곳에서 빙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비틀었다.
촤라라라락!!
그가 몸을 한번 비틀거릴 때마다 거대한 사슬기둥이 흠칫흠칫 떨렸으나 그저 그뿐, 사슬은 끊어질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고, 빙정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린 곳은 그가 묶여 있는 맞은편의 기둥.
[[02] 22: 32: 51]
그곳에 쓰여 있는 시간과 자신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꽉 틀어잡고 있는 사슬들을 보며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건 대체 무슨…….'
이레귤러가 꺼내든 아티팩트에 의해 이 이상한 공간에 갇힌 지 이제 3일이 지나는 시점.
그동안 빙정은 이곳에서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해 보고 있었다.
허나 결과는 모두 실패.
빙정이 지금까지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시도했던 모든 행동을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완벽 차단이라니…….'
빙정은 이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사슬을 바라봤다.
그냥 보기에는 그냥 일반적인 쇠사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 허나 빙정은 이것이 일반적인 쇠사슬이 아닌 '능력 차단'이 가미되어 있는 사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증거로 지난 3일간 빙정이 아무리 능력을 사용해 쇠사슬을 끊어내려 해도 사슬은 멀쩡했으니까.
오히려 쇠사슬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가 아예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철그럭!
그렇기에 빙정은 그 안에서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이 그저 자신의 몸을 몇 번이나 비틀며 서서히 내려가고 있는 시간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다려라, 내가 이곳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다짐했다.
####
꽝!
"크악!?"
하늘에서 내리친 번개가 김현우의 머리 위에 꽂히고, 그와 함께 김현우의 시야가 시커메진다,
그리고-
[처음의 자신감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군.]
"이런 미친!"
김현우는 시야가 회복됨에 따라 곧바로 몸을 일으켜 폭우 속 하늘에 떠 있는 그를 바라봤다.
고고하게 떠있는 청룡.
"이게 개사기 아니야?"
[도대체 뭐가 개사기라는 거지?]
"도망칠 수도 없잖아!"
[내 인정을 받는 게 그렇게 쉬울 거라고 생각했나?]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청룡 주위에 파직거리고 있는 푸른 번개를 바라봤다.
'이전이랑은 완전히 다르잖아……!'
솔직히, 김현우는 하늘에 떠 있는 청룡을 얕보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김현우는 하나의 착각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 게 옳았다.
'생각해 보면 전우치를 상대할 때도…….'
김현우는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전우치를 상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도 나는 제천대성의 힘을 사용했지.'
김현우는 그때 제천대성의 업을 빌려 전우치를 죽이는 데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김현우는 청룡이 내건 조건으로 인해 제천대성의 업을 사용할 수 없었고.
심지어 청룡이 사용하고 있는 번개는, 전우치가 사용했던 모든 공격들은 그 위력이 전우치의 공격과 궤를 달리했다.
분명 전우치의 번개는 몇 번 정도는 맞더라도 괜찮았으나 청룡이 직접 꽂아 내리는 번개는 단 한 번 만에 정신이 꺼질 정도였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위력.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건-
'번개가 안 보인다.'
청룡이 내리치는 번개가 김현우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보이기는 했다.
번쩍!
하고.
하지만 뇌령신공을 극성으로 운용하고 인지를 최대한 확장한 김현우의 눈에서마저, 청룡의 번개는 그저 한순간의 번쩍일 뿐이었다.
공격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지정되어 어떻게 끝나는지조차 모른다.
그냥 번쩍.
그것이 청룡의 공격을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김현우의 평가였다.
"이런 썅!"
[왜 그러지?]
"이건 사기야. 도대체 5분을 어떻게 버티라는 거야! 번개가 떨어지는 걸 봐도 그냥 번쩍거리고 끝인데!"
[호, 그래도 그 정도면 대단하군, 다른 녀석들은 자신이 맞았다는 것조차 모르고 죽는데 말이야.]
"……."
청룡의 감탄에 김현우는 그저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고, 그에 청룡은 물었다.
[그래서, 포기할 텐가?]
"어떻게 포기해!"
[그럼 다시 시작하지.]
그와 함께 또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 그 속에서 김현우는 고작 30초를 버티지 못하고 또 한번 재가 되었다.
"이런 씹-!"
재가 되자마자 순식간에 복구되는 신체.
김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또다시 번개를 내리찍기 시작하는 청룡을 보곤 이를 악물었고,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청룡은-
[야.]
[왜 그러지?]
곧 자신의 귓가에 들려오는 제천대성의 목소리에 왠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다른 놀람 없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묻는 제천대성.
[너,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라니?]
[왜 네 녀석의 업을 저 녀석한테 알려 주려는 건데?]
[그게 궁금한 건가?]
청룡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대답했다.
[당연하지, 업 하나 뺏겼다고 지랄발광을 해서 그 안에 갇힌 놈이 다른 놈한테 업을 넘겨준다? 그것도 자의로?]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제천대성은 청룡의 과거를 들먹이며 명백히 이상하다는 듯 물었고.
[흠…….]
그리고 그런 제천대성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룡은 슬쩍 할 말을 찾는 듯 잠시간 입을 다물다 대답했다.
[네가 붙어 있으니까.]
[뭐?]
[원숭이, 설마 모른다고 생각한 건가? 빼앗긴 업을 되찾으려고 뭐 빠지게 탑을 왔다 갔다 하는 놈은 나와 연관된 놈 중에는 네 녀석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네가 저 녀석에게 자기도 다 모으지 못해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제천대성의 업을 빌려줬다는 건, 네가 저 녀석에게 뭔가를 봤다는 거겠지?]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제천대성.
청룡은 이어 말했다.
[뭐, 아무튼 나도 투자라는 걸 한번 해볼까 한 거다.]
[투자를 한다고?]
[그래, 네 녀석이 생각한 그 가능성에 대한 투자 말이다.]
[…….]
그렇게 청룡과 제천대성이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김현우는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보며 생각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처음 청룡을 때려눕히겠다는 생각은 이미 버린 지 오래.
한 번이라도 허공을 밟는 순간 그 자리를 향해 기적같이 내리꽂히는 번개 덕분에 김현우는 청룡을 공격하겠다는 생각보다는 5분간 최대한 번개를 피해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그럼에도 버티는 시간이 30초를 넘지 못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다시 한번 떨어져 내리는 번개에 김현우의 생각이 끊긴다.
재생되는 신체.
몇 번이고 죽음을 반복한다.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한 채 그저 청룡이 떨어뜨리는 번개에 죽을 뿐인 김현우.
그렇게 몇 번의 죽음을 반복했을까.
어느 순간, 김현우의 눈에 또 한번 떨어지는 번개가 보였다.
번쩍-!
이전과 별다른 바 없는, 그저 한순간의 번쩍임이라고 봐도 될 정의 빠른 번개.
허나 그곳에서 감현우는 차이점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차이점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김현우에게 일어난 하나의 변화라고 봐도 좋았다.
'기분 탓인가?'
꽝!
떨어져 내리는 번개.
'왠지-'
꽝! 꽝! 꽝! 꽝!
그의 신체가 수복되고, 김현우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연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번개를 보며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었고.
'조금, 느려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는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미세하지만 느려진다- 아니, 내가 오히려 적응하고 있는 건가?'
자신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번개의 속도에 서서히 적응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맨 처음 죽었을 때, 김현우는 그저 번쩍임만을 느꼈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물론 대처를 하지 못하는 것은 똑같았으나 지금의 김현우는 그 한순간의 번쩍임을 쫓을 수 있었다.
한순간의 번쩍임 이후 떨어져 내리는 번개.
그 찰나를, 김현우는 서서히 눈에 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 청룡의 번개를 눈에 익히던 김현우는-꽝!
[호오……!]
어느 순간, 번개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김현우가 번개를 피하는 방법 또한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번개를 피하려고 했던 김현우는 이제 사방팔방 뛰어다니기보다는 제자리에 서서 그저 한 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번개를 피했다.
'설마 이렇게 단시간에 번개를 피할 수 있게 될 줄이야.'
꽝!
오른 쪽으로 한걸음.
꽝!
다시 오른쪽으로 한걸음
꽝!
앞으로 한걸음.
꽝!
왼쪽으로 한걸음.
모든 것이 한 걸음으로 끝나는 움직임.
그 모습에서 청룡은, 그가 벌써 번개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내심 감탄을 터트렸다.
그와 함께 김현우가 지금까지 넘지 못했던 30초의 벽이 깨졌고, 60초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현우가 버티는 시간이 마침내 120초를 넘었을 때-꽝! 콰가가가강!
김현우는 갑작스레 두세 발씩 내리치기 시작하는 번개에 당황하다 결국 동시에 떨어져 내리는 번개를 피하지 못하고 재가 되었다.
"이런 썅! 조금 전 그건 뭐야!?"
신체가 수복되자마자 외치는 김현우.
그에 그는 말했다.
[풀코스다]
"뭐? 풀코스?"
[그래, 그렇게 찔끔찔끔 내리는 번개를 피할 수 있다 해서 내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이런 씹- 그럼 진작 말해주든가!!"
[애초에 자네는 30초도 못 버티지 않았는가?]
청룡의 말.
그 말은 분명히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굉장히 배알이 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제천대성이 왜 청룡을 싫어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그리고-]
"?"
[꼬우면 안 하면 된다.]
마치 모바일 과금형 게임에 몇 백을 쏟아붓게 만든 다음에 꼬접 하실? 이라고 묻는 듯한 느낌.
김현우는 청룡에게 지랄을 떨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지랄을 떨어봤자 바뀌는 것은 없으니까.
"시작이나 해!"
'이 뱀대가리 새끼야!'
혹시 몰라 뒷말은 생각만으로 중얼거린 김현우는 청룡을 재촉했고, 그는 번개를 떨궜다.
이제 60초까지는 가볍게 넘는 김현우.
죽음이 쌓이는 횟수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허나-
"……."
[더 하겠나?]
2분 28초.
그가 30초를 넘었을 때부터 번개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던 132번 동안 김현우가 달성해 낸 결과물이었다.
김현우는 움직임에 따라 또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는 번개를 보며 또 한번 고민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또 어떻게 피하나.'
분명 그냥 떨어지는 번개는 조금씩 피할 수 있게 되었다.
허나 시간이 지나고 2분이 넘어갔을 때 떨어지기 시작하는 두세 줄기의 번개를, 김현우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그의 인지는 번개에 익숙해졌어도, 아직 동시에 번개를 인지하는 결과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이번엔 오히려 아까 전처럼 사방으로 뛰어다녀야 하나?'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다 고개를 절래 거렸다.
그렇게 뛰어다니면 오히려 신체의 제어권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번개를 피하지 못할 확률이 높으니까.
'어떻게 해야-'
김현우의 생각과 함께 넘은 2분-쾅! 콰가가강! 쾅!
불과 1초 전과는 다르게 그의 주변으로 빠르게 번쩍이기 시작하는 번개들을 보며 김현우는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른쪽으로 한 걸음, 그 뒤에는 곧바로 뒤로 백스텝 후, 바닥에 멈추는 것이 아닌 공중에서 공기를 밟으며 왼쪽으로 이동-그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번개를 피하기 위한 노선도가 생겨나지만, 결국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는 연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번개를 피하지 못했다.
꽝!
또 한번 재가 되었다고 수복하는 육체.
허나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은 채 묵묵히 번개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김현우의 눈에 또 한번 변화가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까와 같이 미묘하지만, 김현우로서는 조금씩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는 변화.
그리고-
꽝!
김현우가 번개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 횟수가 242번이 되었을 때.
카지지지직!!!
[!]
김현우는-
"후-"
-번개를 쳐낼 수 있게 되었다.
# 183
183. 청룡의 업(業)(3)
노아의 방주 안.
"아……."
그곳에서 묵묵히 구슬을 응시하고 있던 그는 조금 전 재가 되어 스러진 김현우를 보며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고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어렵겠군.'
물론 업(業)을 얻는 게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 정도일 줄이야.'
노아흐는 봉인되어 있는 청룡의 업을 풀며 내심 자신이 만든 보석 안에 있는 청룡의 업이 온전치 못한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아흐는 자신이 처음 업을 압축하는 장치를 만들었을 때 그 장치는 통상적인 업의 절반을 제대로 담지 못했으니까.
허나 지금 보이는 청룡의 의식체는 어떤가.
'90%? 아니, 이렇게 보면 거의 만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노아흐의 시선으로 본 청룡의 의식체는 그 업을 온전히 전부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 온전히 전부.
그리고 그렇다는 건-
'……내가 만들어 놓은 걸 개량하는 데 성공한 건가.'
노아흐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들을 떠올렸다.
탑을 지을 때까지만 해도 같은 이상을 꿈꾸던 이들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하루아침에 자신이 만들었던 모든 것을 빼앗았고, 노아흐를 죽음으로 몰아갔었다.
이유는 오롯이 자신들만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그래도 오히려 그런 상황이라 잘 됐을 수도.'
만약 노아흐가 옛날에 만들어 놓았던 장치를 개량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면 지금 당장 김현우가 힘을 얻기는 편했겠지만 아무래도 불안한 감이 있었다.
허나 장치를 개량해서 업의 대부분이 이 공간 안에 들어 있다면?
'그가 잘해주기만 한다면.'
오히려 김현우는 노아흐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아마 안정적으로 9계층에 내려온 정복자를 상대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돌린 노아흐는 이내 시선을 돌려 한참 번개가 떨어지고 있는 구슬 안을 바라보았다.
####
[호-]
번개를 받아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번개를 받아치는 것 자체가 '정상적인'일이 아니다.
그 일순간의 번쩍임.
그 뒤에 떨어지는 번개.
그리고 울리는 소리.
인공적으로 만든 번개나 마력으로 만들어진 번개는 모르겠지만, '진짜' 번개는 너무나도 빠른 덕분에 이 세 개의 과정이 엇박자로 나타난다.
시각적으로 제일 먼저 보이고.
그 뒤에 번개가 떨어지고-
번개가 이미 목표물을 타격한 뒤에야 그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번개를 쳐내다니…… 아니, 정확히는 번개를 옆으로 흘려 낸 건가?'
청룡은 조금 전 떨어지는 번개를 실질적으로 조정한 김현우를 감탄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피하는 데 들인 죽음의 횟수가 580번, 번개를 쳐내는데 죽은 횟수가 305번이라.'
이 공간이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공간임을 생각해 봤을 때라고 생각해도 김현우의 깨달음은 청룡마저 감탄할 정도로 빨랐다.
그래, 이상할 정도로.
'도대체 뭐지?'
그렇기에, 오히려 청룡은 그 시점부터 그가 얼마나 번개를 잘 피하냐보다는 김현우 그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청룡은 잘 알고 있다.
당장 그에게 당해서 육체를 소멸당한 자신을 다시 이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것만 해도 그는 이미 평범이라는 범주와는 살짝 떨어져 있었고.
게다가 그가 시험을 시작하기 전 보여줬던 마력폭발과 동시에, 그 근처에 떨어지는 검붉은 번개는 이미 그가 인간의 한계를 벌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벗어났을까?
수행?
'……그렇게 오랜 시간 도를 쌓거나 지혜를 쌓은 것 같지는 않은데.'
청룡의 눈에 비치는 김현우는 그리 오랜 시간을 살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외관으로는 이제 20대 초중반, 허나 청룡 본연이 가지고 있는 과거시를 통해 슬쩍 그를 엿봤을 때, 그는 이제 130년이 살짝 넘는 세월을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정도의 마력은.'
허나 고작 130년 동안 수련을 했다고 해서 평범한 인간이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여러모로 신기했다.
'아니, 오히려 그 이전에 보여줬던 모습만 보면 납득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단시간에 번개를 본다?
그건 적어도 청룡의 상식선에서는 '불가능'이라는 프레임이 단단하게 씌워져 있었다.
청룡이 김현우에게 관심을 가지는 와중에도 김현우의 죽음은 계속되었다.
그가 번개를 처음으로 흘려낸 뒤로 김현우는 내리 50번 정도를 가만히 서서 죽음을 맞이했다.
버티는 시간이 다시 30초 내외로 떨어진 김현우.
허나 그의 죽음이 100번이 넘고 200번에 도달하기 시작할 때쯤, 줄어들었던 김현우의 시간이 다시금 늘어나기 시작했다.
분명 30초를 넘지 못했던 시간이 다시 한번 30초를 넘어 60초를 향해 달려 나가고, 60초를 넘었던 시간이 가볍게 120초를 달성한다.
120초를 지나자 연속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번개들.
허나 김현우는 이전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자리에서 서서 그저 번개가 떨어질 곳인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쾅! 콰가가가가강!
그는 번개를 쳐내기 시작했다.
한 곳에서만 연속으로 내리치는 번개를 쳐내고, 엇박자로 내려오는 번개를 쳐낸다.
허나-
쾅!
그렇게 번개를 쳐내는 것도 잠시, 김현우는 이내 번개에 집어 삼켜졌다.
재로 변하는 그의 몸.
허나 그 시점에서 이미 김현우가 버틴 시간은 180초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 뒤로, 김현우는 끊임없이 도전했다.
도전.
도전.
도전.
번개를 흘리고, 슬쩍 몸을 뒤튼다.
피할 수 있는 건 피하고, 쳐낼 수 있는 건 쳐내는 김현우.
수많은 죽음을 경험한 뒤, 이제는 번개가 보인다는 듯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청룡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렇군.'
-김현우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점을.
그 순간에도 김현우는 내리치는 번개를 막아내지 못했다.
버틴 시간은 이제 243초,
찔끔찔끔 올라가던 예전과는 다르게 한 번의 도전으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버티는 그.
청룡은 묵묵히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며 집중하는 김현우를 보고, 조금 전에 확신하던 가설을 또 한번 확실하게 확인했다.
'눈인가.'
눈.
청룡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번개를 흘려내는 그를 보며 그렇게 단정지었다.
물론 다른 장점도 있긴 했다.
그건 바로 엄청난 집중력.
김현우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그저 죽고 살기를 반복하며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떤 투정도 없고.
그 어떤 불평도 없다.
그는 그저 번개에 맞아 신체를 수복한 뒤에는 말없이 고개를 하늘로 올리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손을 하늘로 들었다.
마치 그것만을 생각한다는 듯.
그야말로 엄청난 집중력.
분명 계속해서 죽음을 맞이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죽음마저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묵묵히 떨어져 내리는 번개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집중력에 더한 플러스 요소를 넣어주고 있는 것은, 바로 김현우의 눈이었다.
청룡마저도 맨 처음에는 김현우가 다른 방법으로 번개를 쳐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쾅!
한 번의 번쩍임 뒤떨어져 내리는 번개를 쳐내는 김현우.
그의 눈은 정확히 번개를 보고 있었다.
매우 정확히.
'찰나를 볼 수 있는 눈인가.'
그렇기에 청룡은 거기에서 알 수 있었다.
그가 '찰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물론 평범한 인간도, 혹은 그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들도 그 찰나를 인지할 수는 있었고, 혹은 끝없는 수행으로 그 찰나를 엿볼 수도 있었다.
허나 그렇게 해서 얻은 인지 능력은 결국 한계가 있다.
범인은 넘을 수 없는 한계.
그러나 김현우는 그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고도의 집중력과 자신의 눈을 이용해서.
청룡에게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의 1초가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으나.
'아마 지금 저 녀석의 1초는-'
찰나의 찰나, 그러니까 마치 일 초를 또 수백 초로 나눈 것 같은 흐름 속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청룡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런 청룡의 말대로-
쾅!
'지금-!'
김현우는 분명, 남들과는 다른 시간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그것은 확정된 일 초였으나, 김현우의 의식 속에서 그것은 이미 쪼개지고 쪼개져 무척이나 긴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젠 제대로 보인다.'
-김현우는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번개를 무척이나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김현우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빛과 함께 떨어져 내린 번개를 쳐낸다.
그의 손가락에 걸려 순식간에 다른 쪽으로 움직이는 번개.
그 일련의 과정을, 김현우는 직감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정상적인 인지능력으로 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떨어져 내리는 번개와 함께, 시간은 흘렀다.
60초.
김현우의 손이 번쩍임을 만들고 하늘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번개를 쳐낸다.
120초.
한 줄기씩 떨어져 내리던 번개들이 이제는 동시에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미세하지만 번개의 범위 자체도 조금은 커져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아무런 무리 없이 위로 떨어져 내리는 번개들을 쳐냈다.
김현우의 손가락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사실 번개를 흘리는 데는 손가락보단 손 자체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부담이 덜했으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김현우의 손은 아직 그의 인지를 제대로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손 전체를 사용하는 것 대신 손가락을 사용했다.
아무리 부담이 되더라도,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은 김현우를 따라 올 수 있었으니까.
쾅! 쾅! 쾅! 쾅
시간이 지나기 시작한다.
쾅 콰르르르르!!
계속해서-
쾅! 콰가가가가가각!
-시간은 흐른다.
흐른 시간은 어느새 김현우가 바로 저번에 버텼던 243초를 넘어 250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그에 비례해 번개는 끊임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버티는 시간이 270초가 넘었을 시점에-삐──────────────이미 김현우의 귀에는 번개소리대신 긴 이명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먹먹했던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새하얀 빛이 몇 번이고 밝게 점멸하는 장면뿐.
그의 얼굴을 적시던 빗방울도 느껴지지 않는다.
떨어지는 뇌우(雷雨)로 인해 빗방울들은 모두 증발해 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김현우는 두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떨어져 내리는 수많은 번개들.
허나 김현우의 눈빛에 이전과 같은 초조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평온한 눈빛으로, 고작 순간의 단위를 쪼개 시간차로 내려오는 번개들을 보며 손가락을 움직일 뿐.
움직이고.
움직이고.
움직인다.
아주 미세한 손가락의 움직임.
그 한 끗의 움직임에 번개가 다 흘러나가고, 한 끗의 움직임에 동시에 내려오고 있던 번개가 번개를 만나며 터져나간다.
막아내고, 막아내고, 막아내는 그 찰나의 순간.
그리고-
쏴아아아아아아──────
번개가 멎었다.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을 혼란시키는 번쩍임은 멎었다.
그렇게 얼마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
김현우는 어느 순간 자신의 위쪽으로 번개가 떨어지지 않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대단하군. 300초를 채우다니.]
"뭐?"
[합격이다.]
김현우는 청룡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 184
184. 청룡의 업(業)(4)
조금 전과는 다르게 맑아진 하늘.
먹먹한 하늘에 폭우가 쏟아져 질척거리는 땅을 사라졌다.
보이는 것은 푸르른 구름과 그사이를 여유롭게 유영하고 있는 청룡뿐.
그곳에서, 김현우는 청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그 짧은 침묵 뒤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게 끝?"
[그럼 뭘 더 바라는 거지?]
청룡의 물음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분명 조금 전 김현우가 청룡에게 인정을 받은 것과 함께 구름이 걷히고 이 먹먹하기만 하던 풍경이 바뀌긴 했다.
그런데-
"아니, 뭔가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김현우는 특별히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말했다.
'분명 뭔가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에게는 딱히 이렇다 할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몸 안에 마력을 돌려봐도 딱히 변한 것은 없었고.
뜬금없이 위로 떠오르는 시스템 로그가 생성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고, 청룡은 그의 멀뚱멀뚱한 시선을 보곤 이내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아, 왜 업을 사용하지 못하냐고 묻고 있는 거냐?]
"맞는데?"
[그야 당연히 너는 아직 배우지 않았잖나?]
"?"
[?]
"????"
[????]
또 한번 침묵.
"아니, 네가 인정해 주면 네 업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며?"
[그건 맞다.]
"그럼 지금 한 말은 무슨 소리인데?"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질문하자 청룡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제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
[설마 해서 묻는 건데, 설마 너는 내 업을 받았다고 바로 내 능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줄 알았나?]
"애초에 업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야?"
슬쩍 드는 안 좋은 예감을 느끼며 김현우는 물었고 청룡은 답했다.
[네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봤을 때 네가 한 말은 맞긴 하지. 실제로 지금 너는 내 인정을 받음으로써 내 업의 대부분을 받았다.]
"내가 이미 업을 받았다고?"
[그래, 이미 하늘이 개기 시작했을 때, 너는 내 업을 받았다.]
"……아니, 진짜로?"
[그럼 거짓말을 치겠나?]
왠지 특유의 말투가 합쳐져 띠껍게 느껴지는 청룡의 발언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 느껴지는 게 하나도 없는데?"
[당연하지, 너는 배운 게 없으니까.]
"뭐? 배운 게 없어?"
김현우의 물음에 청룡은 그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고민하는 듯,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간 생긴 침묵.
[음.]
그리고 곧 생각을 끝낸 청룡이 입을 열었다.
[이미 원숭이와 계약해서 너도 알고 있겠지만 업을 얻는다는 것은 그 생명이 일평생을 쌓아오며 얻은 것들을 얻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이건 알고 있나?]
"그래서?"
[하지만 여기서 네가 간과한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바로 업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업 속에 존재하는 힘뿐이라는 소리다.]
"……?"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청룡을 바라봤고.
[……힘의 사용방법은 얻을 수 없다 이 소리지.]
"……아."
뒤늦게 이어서 나온 청룡의 말에 납득했다는 듯 탄식하는 김현우.
생각해 보면 옛날 제천대성에게도 봉을 사용하는 연습을 조금이라도 해두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봉술을 조금이라도 사용할 수 있으면 업을 빌리는 시간 동안은 자신과 비슷하게 봉술을 사용 할 수 있을 거라는 제천대성의 말을 떠올리며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청룡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인정을 함으로써 이미 내 업은 네게 깃들었다. 허나 네가 그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이 힘을 다루는 방법을 전혀 몰라서?"
[그래, 뭐- 너랑 계약한 그 원숭이는 기본적으로 분류를 하자면 무투계라고 불리기에 너랑 어느 정도 맞는 면이 있어서 곧바로 업을 받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겠지만.]
"너는 아니라고?"
김현우의 물음에 청룡은 그 거대한 머리를 위아래로 한번 흔들고는 말했다.
[네가 신통력을 쓰는 법을 조금이라도 알지 못하면 내 힘을 온전히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아마 신통력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네가 내 힘을 온전히 다루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낮은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래 거렸고, 이내 물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네가 원한다면 내 힘을 잘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도록 하지.]
"쓰벌……."
들려오는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사슬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그곳에서 빙정은 자신의 몸을 묶고 있었던 사슬이 하나씩 풀려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분명 처음 그를 묶고 있었던 그 두꺼운 사슬기둥은 어느새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고, 그의 손발을 구속하고 있었던 사슬들도 상당히 많이 사라졌다.
허나 빙정은 사슬이 사라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고 그저 시선을 위로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00] 0: 5: 21]
풀려나기까지 5분이 채 남지 않은 시간.
게다가 이 사슬이 연결되어 있는 이상 절대로 밖에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 챈 빙정은 그저 묵묵히 저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을 묶고 있었던 사슬들은 그 힘을 잃어버리고 사라졌으니까.
빙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3일 전만 해도 이 주변에는 크고 작은 사슬을 제외하고는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건만 지금은 그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사슬들은 부분부분이 사라지며 검은 공간이 들어나 있었고, 바닥을 이루고 있던 사슬도 마찬가지로 없어진 상태였다.
마치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한, 버그가 가득한 게임 속 세상의 모습과 같은 풍경.
그 속에서 빙정은 웃음을 지었다.
진짜로 기뻐서 짓는 웃음이 절반.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이곳에서 빠져 나가기만 하면 그 녀석을 곧바로 죽여 버리겠다.'
-복수를 다짐하고 기다리는 웃음이었다.
빙정은 이 안에 갇혀 있는 5일 동안 어떻게 하면 김현우를 조금 더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우선 힘을 전부 빼놓은 다음에 차근차근 얼려 죽일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이미 처음에 생각했던, '이레귤러를 빨리 죽이고 위업을 얻겠다'는 생각은 배제해 버린 듯 김현우를 어떻게 해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는 빙정의 모습은 언뜻 광기가 느껴졌다.
고작 5일.
빙정이 이곳에 갇힌 시간은 고작 5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게 유의미한 시간도 아닌, 오히려 정복자에게는 찰나와도 비슷한 5일인데도 불구하고, 빙정은 자신을 가둔 김현우에게 적의를 태우고 있었다.
왜?
'고작 인간 따위한테……!'
그것은 정복자인 자신이 한낱 인간에게 이런 꼴을 당했기 때문에.
게다가 김현우가 이곳에 갇히기 전 그에게 보여주었던 일련의 제스처는 빙정을 분노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기에 빙정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며 저 시간이 흘러가기를 조용히 고대했고.
철그럭- 철그럭-
쩌적- 쩍!
이내 시간이 10초대로 줄어듦과 동시에, 빙정의 손발을 구속하고 있던 구속구가 깨지기 시작했다.
마치 나무가 쪼개지듯 절로 쩌적거리는 소리를 내는 구속구들은 기둥에 떠 있던 숫자가 0이 되자마자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고.
"후-"
그와 함께 자유가 된 빙정은 자신의 앞에 생긴 문을 바라보곤 망설임 없이 문쪽으로 걸음을 옮겨 두꺼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캉스는 잘 갔다 왔어?"
"……."
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빙정은 볼 수 있었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는 그곳에서, 의자에 앉아 마치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앉아 있는 김현우의 모습을.
빙정은 아무런 말도 없이 김현우를 바라봤고, 그는 빙정과 잠시 눈을 마주치다 물었다.
"뭐야? 바캉스 갔다 오더니 벙어리가 됐네?"
김현우의 이죽거림.
그 뒤에도 한참이나 입을 열지 않던 빙정은 말했다.
"용케 도망치지 않았군."
빙정의 말. 그에 김현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망쳐? 내가?"
"죽고 싶지 않았다면 도망치는 게 좋았을 텐데- 뭐, 네가 도망치더라도 나는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널 죽일 생각이었다만."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빙정의 모습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걱정 하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뭐?"
"네가 말했지? 살고 싶으면 도망치라고, 그런데 내가 왜 안 도망갔을까?"
"……고작 5일 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 말과 함께 빙정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창이 마법봉처럼 변화하고, 그의 주변으로 빙토(氷土)가 늘어난다.
그와 함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는 빙벽들과.
그 주변으로 만들어지는 까마귀들은 그 주변에 냉기를 뿌리기 시작했고, 조금 전까지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던 빙정은 까마귀 가면을 썼다.
여지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듯 간을 재지 않고 곧바로 두 번째 업을 개화한 그의 모습.
그와 함께 의자에 앉아 있던 김현우의 주변으로 냉기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가 앉아 있던 의자의 다리를 얼리기 시작하는 냉기들.
김현우는 그런 상황에서도 무척이나 여유롭게 앉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고-
"못 이겼으면 네 말대로 오지 않았겠지?"
"……!"
김현우는 그 말과 함께 마력을 끌어 올렸다.
검붉은 마력이 김현우의 주변을 타고 흐르고, 그의 머리 위에 붉은 전격이 튀어오른다.
그와 함께 만들어지는 흑익(黑翼)과 흑원은 김현우의 등 뒤에 위치했고, 그런 김현우의 모습에 한번 더 변화가 일어난다.
"후-"
머리 위에는 천사의 링처럼 보이는 금고아가, 그리고 김현우의 몸에는 붉은색과 황금색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는 황금쇄자갑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게 끝인 줄 알았지?"
"!"
얼음 까마귀를 만들어내고 있는 빙정에게 그렇게 이죽인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그 상태로 또 다른 힘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김현우가 현실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했던, 도력(道力).
물론 도력이라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수행을 쌓지 않으면 모이지 않는 힘이기에 김현우의 도력은 그 상태에서 그리 큰 힘이 되지 않았으나, 김현우가 쓰려는 것은 자신의 도력이 아니었다.
투드드드득!
김현우가 얼마 쌓이지 않은 미세한 도력을 자신의 머리 위로 움직이자마자, 그의 머리 위에 뿔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도깨비의 뿔같이 뾰족한 것이 아닌.
마치 사슴의 뿔처럼 자라나는 뿔.
그리고 그와 함께-
"!!!"
김현우의 몸에 푸른 번개가 휩싸이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저적!
그의 몸을 얼리기 위해 다가왔던 냉기들이 번개를 뚫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김현우의 몸을 조금이나마 얼렸던 냉기들이 없어진다.
그와 함께 세를 늘리기 시작한 번개는 순식간에 저변에 있는 빙토를 없애버리고, 김현우의 이 머리 위에 있는 뿔을 매개체 삼아 그 크기를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그건-! 네가 어떻게!?"
그 모습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란 빙정의 모습.
그것을 보며 김현우는 씨익 하는 웃음을 짓고는-
"내가 말했지? 나는 내가 이기는 싸움이 아니면 안 한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빙정에게 달려들었다.
# 185
185. 청룡의 업(業)(5)
쾅!
단 일순간의 찰나에 김현우의 몸이 빙정의 앞으로 이동한다.
"!"
5일 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달라진 속도에 빙정은 눈을 휘둥그레 떴으나 그것은 찰나뿐.
그는 곧 노기 어린 표정으로 김현우의 주먹을 지팡이로 쳐내곤 곧바로 들어 올렸던 지팡이를 크게 밑으로 내리 그었다.
그와 함께 반응하는 까마귀들.
어느새 태양이 내리쬐는 하늘을 완전히 막아버릴 정도로 늘어난 얼음 까마귀들이 순식간에 김현우에게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냉기-
허나,
파직- 파지지직-! 꽝!
"무슨……!!"
얼음 까마귀가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자마자 김현우의 머리 위로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한 줄기의 번개는, 냉기를 흩뿌리던 까마귀들을 소멸시켰다.
말도 안 된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짓는 빙정.
'역병 군주의 업으로 인해 만들어진 까마귀들이 번개 한 방에……!?'
그의 주변에 만들어져 하늘을 날고 있는 까마귀들은 바로 '역병 군주'의 업에 의해 만들어 낸 까마귀였다.
역병군주의 역병을 옮기고, 그 역병에 죽지 않기 위해 역병군주가 재생력을 높이고 죽여도 죽지 않는 좀비로 만든 것들이 바로 지금 하늘을 날고 있는 까마귀들이었다.
그런데-
'단 한 방에……!?'
김현우는 역병 군주의 업이 담겨 있는 까마귀들을 단 한 방으로 없애버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빙정은 김현우가 휘두르고 있는 저 번개가 누구의 것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건 전우치가 가지고 있던 청룡의……!"
씨익.
"이제 알았어?"
어느새 집어 든 여의봉을 휘두르는 김현우의 공격을 막아내며 빙정을 인상을 찌푸리곤 또 한번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와 함께 빙벽 안에서 솟아나기 시작한 얼음들.
그 길이를 늘려 순식간에 김현우의 근처로 쇄도한 수많은 얼음 쐐기들을 보며 김현우는 기다렸다는 듯 여의봉의 크기를 늘린 뒤-
"흐읍!"
빠지지지지지직!
그 상태 그대로 여의봉을 한차례 크게 휘둘렀다.
그와 함께 터져나가는 얼음들.
김현우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길이까지 늘린 여의봉을 또 한번 크게 휘둘렀고, 그 결과로 내리쬐는 태양빛을 막고 있던 빙벽들은 박살이 났다.
이전이라면 애초에 얼음을 제대로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해 하지 못했던 방법.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솔직히 조금 걱정했는데.'
김현우는 당황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빙정을 보며 청룡에게 기본적인 도술을 배웠을 때를 떠올렸다.
'아니, 그건 도술도 아니긴 하지.'
엄밀히 말하면 자신이 청룡에게 배운 것은 도술이 아닌 도력을 움직이는 방법이었다.
그래, 도술(道術)이 아닌, 도력(道力)을 움직이는 방법이었다.
왜 그것밖에 배우지 않았나?
이유는 간단했다.
'쯧.'
김현우는 도술(道術)에 관해서는 거의 최악이라고 칭해도 될 만큼 그 재능이 없었다.
아니, 도술뿐만이 아니라 김현우는 그냥 기본적으로 머리를 써야만 발동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마법이나 술법에 최악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김현우는 도력을 모으는 데 까지는 어찌어찌 따라갔지만, 모은 도력을 어느 정도 마음대로 사용하기까지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그래, 그냥 도력을 움직이는 데만 걸리는 시간이 그 정도였다.
물론 도술을 가르쳐준 청룡에게는 '도력'을 사용할 수만 있으면 기본적인 업을 사용하는 데 그리 큰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는 했으나 그래도 걱정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김현우의 기억 속에 있는 빙정의 냉기는, 그야말로 자신에게는 극상성의 능력이었으니까.
공격을 하려면 가까이 붙어야 하는데 빙정 같은 경우는 능력 자체가 가까이 붙는 것만으로도 지속적인 전투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냉기가 나를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
김현우는 자신이 서 있는 주변에만 빙토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던 빙정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그는 5일 전 김현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도 이 9계층에 있는 계층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속으로 선뜻 대답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 빙정은 이를 악물고는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푸른 번개를 바라봤다.
'도대체 청룡의 업(業)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 거지!?'
청룡의 업.
그것은 분명 그분이 전우치에게만 허락한 업이었다.
'그런 업을 어떻게 저 녀석이……!'
빙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지팡이를 꾹 쥐었으나, 이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명상하냐?"
"!"
어느새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자신의 뒤를 점하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기함하며 몸을 돌렸다.
꽝!
"칵!?"
허나 이미 그가 몸을 돌리기 시작한 시점에 김현우는 그를 향해 발을 휘둘렀고, 뒤늦게 자신의 몸을 돌렸던 빙정은 김현우의 발에 채여 날아가기 다시금 생기기 시작하는 빙토를 향해 날아갔다.
쾅! 콰지지지지직!
순식간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빙토.
허나 김현우는 곧바로 일어서기 위해 고개를 드는 빙정의 앞에 나타난 이죽이듯 말했다.
"내 공격을 피하려면 앞으로 가야 하지 않았을까?"
꽝!
김현우의 주먹이 빙정의 지팡이를 피해 그의 얼굴에 처박히고, 그와 함께 생겨나던 빙벽이 깨져나간다.
얼음파편과 함께 허공에 떠오른 빙정.
거기에서도 그는 얼음 파편 사이로 오른 발을 찍어내리는 김현우를 보고 대응했으나-꽈아아아아아-앙!
그는 김현우의 공격을 미처 막지 못하고 땅바닥에 처박혔다.
빙토에 그려지기 시작한 거미줄, 거미줄의 위로 마치 잔가지가 친 것처럼 지반들이 갈라지고, 그 뒤로는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지반들이 뒤집어 지며 폭음소리를 낸다.
마치 폰탄을 터트린 것처럼 연속으로 터져나가는 지반.
그리고-
퍼석-
부서지던 지반이 얼어붙었다.
거미줄이 치고 무너지던 지반이 얼어붙고, 잔가지를 치며 터져나가던 땅이 얼어붙는다.
촤악!
그와 함께 김현우쪽으로 쏘아지는 두 개의 얼음 송곳.
그는 곧바로 공기를 차는 것으로 자신에게 쏘아진 얼음 송곳을 피해냈다.
콰아아아아아!
그 순간 지반의 중심에서 터져 나오는 냉기.
그러나 김현우는 그것을 그냥 볼 생각은 없다는 듯 곧바로 자신의 손을 하늘로 올렸다.
도력을 움직이는 방법을 배운 직후, 청룡에게 추가 적으로 배웠던 기술.
그가 손가락을 올리자마자 분명 맑게 빛나고 있었던 하늘에 어두운 먹구름이 끼고 그 먹구름의 주변으로 푸른색의 뇌전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불과 몇 초가 지나지도 않은 시간에 순식간에 만들어진 먹구름.
그런 상황에서-
"뇌진(雷震)-!"
김현우는 힘차게 손을 아래로 내리 그었고-삐─────!!!
이윽고 하늘 위에서 내리쳐진 번개는 김현우의 청각을 일시적으로 잡아먹었다.
그리고-
"정했다."
그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과는 확연하게 바뀐 그의 모습이.
분명 평범했던 까마귀 가면은 마치 얼음을 깎아 조각해 놓은 것처럼 변해 있었고,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까마귀 로브는 날개처럼 펼쳐져 있었다.
마치 그 자체로 까마귀가 되어 버린 것 같은 모습이 된 그는 말했다.
"네 녀석은 내가 힘을 전부 쓰는 한이 있더라도 죽여 버리고 말겠다."
그의 선언과도 같은 말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뭐야? 3단 변신이야? 근데 3단 변신이면 점점 진화해야하는 거 아니야? 왜 1단계랑 2단계는 인간이었다가 갑자기 까마귀로 변신해?"
-자기가 빡대가리라는 건가?
키득키득
웃기지도 않은, 그저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조롱하기 위해 내뱉은 말에 입가밖에 보이지 않는 빙정의 입이 꾹 다물어지고-촤자자자작!
그의 손에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이 쥐어졌다.
"얼음으로 만들어서 쓸 만하겠어? 아까 여의봉에 다 부서지던데."
"……걱정하지 마라, 내 '본질'은 그 원숭이가 들고 다니는 것보다 약하지 않으니까."
[이 새끼들이 지금 다들 나를 호구로 보나……!]
제천대성의 목소리가 들림과 함께 빙정이 그 자리에서 창을 크게 휘둘렀다.
그와 함께 그의 주변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까마귀들, 신기하게도 창을 한번 휘두르자마자 주변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까마귀는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증식했다.
그리고-
"흡!"
빙정이 김현우를 향해 창을 찔러왔다.
파드드득!
순식간에 그가 있던 곳을 찔러 들어가는 창-그와 함께.
"……!"
김현우는 자신의 몸이 조금씩이지만 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5일 전 빙정과 싸울 때처럼 단 한순간 만에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얼어붙는 것은 아니었으나, 확실히 그의 몸은 얼어붙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된다.
그의 창술은 그대로, 허나 거슬리는 것은 바로 김현우의 주변으로 날아드는 얼음 까마귀들과 빙정의 날개에서 쏘아지는 얼음이었다.
분명 이전에는 김현우의 몸에서 솟아나는 푸른 전격에 없어졌던 얼음과 달리, 지금 그의 공격들은 확실히 김현우의 몸에 피해를 누적시킬 수 있게 되었다.
콰직!
"쯧!"
쾅!
순간 뒤쪽에서 날아온 까마귀에 대응하지 못한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번개를 내리찍는다.
순식간에 소멸하는 까마귀.
하지만 까마귀가 소멸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주변을 빽빽하게 채우는 얼음 까마귀들을 보며 김현우는 생각했다.
'이제 슬슬 끝을 봐야 한다.'
온몸에서 주변의 공기마저도 얼려 버리는 냉기를 뿜는 빙정도 지금의 모습을 그리 오래 유지 할 수는 없는지 서서히 신체능력이 떨어져 가고 있었지만.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쯧,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제천대성의 업이나 청룡의 업을 사용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제한시간이 존재했으니까.
물론 정확한 제한시간이 얼마정도인지는 김현우도 몰랐으나 대충 짐작을 할 수는 있었다.
파직! 파지직! 파직-!
조금 전까지는 빙정의 공격에 스쳐도 그다지 피해가 없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조금씩 빙정의 공격이 유효타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이 싸움을 끝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끝냄과 동시에-콰득!
"!"
김현우는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창을 찔러 넣는 빙정의 창을 잡았다.
창이 잡혔다는 것에 빙정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그는 이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실수했군."
그와 함께 창을 잡았던 김현우의 손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분명 번개가 사방으로 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빙정의 얼음은 묵묵히 김현우의 손을 타고 올랐고, 빙정은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가 언제 창에서 손을 놓을까 지켜봤지만-
"!"
김현우는 손을 놓지 않았다.
어느덧 손목이 얼어붙고 있음에도 김현우는 창을 놓지 않았고-꽝!
"껙!?"
빙정은 그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땅바닥에 처박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빙정은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우를 바라보았고.
그때- 김현우는 인지능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확장하고.
확장하고.
또 확장해서, 그 찰나의 순간의 시간을 느낄 수 있게 된 김현우는 도술을 알려주었던 청룡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찰나의 인지 속에서 손가락을 활용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임시방편이고, 네가 그 찰나의 한순간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 시간 속에서도 네 몸을 움직여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김현우의 주먹이 땅바닥에 처박힌 빙정을 조준한다.
그의 머릿속으로 끝없이 흘러들어오는 회상 속 청룡의 목소리.
[나를 이용해라.]
[내가 쌓아온 업적을 이용해라.]
[이 청룡의 업(業)이자 옥황(玉皇)에게 받은 '번개'를 이용해라.]
그의 몸에서 순간 푸른 스파크가 튀어나간다.
검은 마력이 흩뿌려지는 것도 아니고, 흑익이 넓게 펼쳐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그마한 푸른 스파크.
그리고 그 찰나의 인지 속에서-
[네가 '번개'를 네 몸에 이용할 수 있을 때, 너는-]
파지지지지직?!!!!
[그 찰나의 시간 속에서-]
"순(瞬)-"
-빙정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뢰각(雷脚)!"
빙토가 터져나갔다.
# 186
186. 아무튼, 선택해야 한다(1)
서울의 대학병원 앞 광장.
"-그래서, 이제 슬슬 기자회견 끝내고 싶으니까 이걸로 끝내도록 하고, 나머지 궁금한 점은 뭐…… 다음에 시간되면 또 하는 걸로 할게요."
광장 위에 서 있던 김현우가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옮기자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들리는 키보드 소리.
김현우는 순간 소란스러워진 기자들을 슬쩍 보고는 그대로 광장 안으로 내려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차에 탑승했다.
"이번에는 빨리 끝냈네요?"
차에 탑승하자마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김시현이 입을 열었고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딱히 할 이야기가 없으니까. 예전처럼 깝치던 놈들도 없고 말이야."
"뭐, 사실 이쯤 되면 아무도 안 건들 만하죠."
"그런가?"
"당연하죠."
김시현이 그렇게 단언하자 그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그럼 바로 스시집으로 가나?"
"네. 안 그래도 서연이랑 석원이 형은 미리 가 있겠다고 했으니까요."
김시현은 그 말과 함께 차를 몰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멀어지는 병원을 보며 5일 전의 일을 회상했다.
5일 전,
김현우는 결국 그 자리에서 만년빙정을 잡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로 정보 등급을 상위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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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탑의 끝에서 내려온 정복자를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위치: 이탈리아 로마
[정복자 북천(北天) '빙정(氷晶)' 잡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정보 권한의 실적이 중상위 → 상위로 변경됩니다!]
[현재 정보 권한은 '상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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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스킬을 키자마자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로그들.
분명 로그 속에서는 김현우의 정보 권한이 상위가 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다만 정보 권한이 상위로 올라오고 나서 생긴 문제는-
"출입-"
[입장이 불가능합니다.]
-바로 아브가 있는 시스템 룸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
"뭐라고요?"
"아냐."
김현우는 김시현의 물음에 가볍게 대답하고 나서 한동안 앞에 떠 있는 로그를 바라봤다.
'입장이 불가능하다……라.'
정보 권한이 상위가 되고 난 뒤 갑작스레 떠오르기 시작한 로그.
김현우는 몇 번이고 출입을 사용해 봤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그저 입장이 불가능하다는 로그가 떠오르고, 김현우는 시스템 룸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혹시나'를 가정해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가정을 해보려 했으나 딱히 아브에 대해서는 가정할 수 있는 상황이 없었다.
그가 생각해 봤을 때, 아브는 딱히 누군가에게 위협을 받을 수 있는 곳에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시스템 룸…….'
아브가 있는 곳은 시스템 룸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만들어져 있는지도 모를, 김현우도 그저 출입에 의지해서 갈 수 있는 곳.
그렇기에 아브에 대해서는 딱히 특별한 가정을 해볼 수가 없었다.
그저 '무슨 일이 있다' 정도만 생각해 볼 수 있을 뿐.
'……노아흐 그 녀석이라면 이게 대충 무슨 일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겠지.'
김현우는 노아의 방주에서 만났던 노아흐를 떠올렸다.
이야기를 하던 도중 빙정이 내려오는 바람에 모든 이야기를 듣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이 탑에 제대로 된 비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은 그.
김현우는 분명 그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쯧, 바로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악천의 원천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지난 5일간, 그는 만년빙정과 싸운 후유증 덕분에 병실에 누워 있었다.
물론 회복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헌터의 지속적인 치료를 받긴 했으나.
'순뢰각…….'
김현우가 마지막 순간 빙정을 끝내기 위해 사용한 순뢰각은 그의 몸에 엄청난 부하를 주었고, 그 후유증은 엄청났다.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게 되다니.'
물론 정복자를 단 한 번에 보내버릴 정도의 파괴력은 있었으나 그 여파로 김현우는 거의 4일정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기에 그는 그동안 병실신세일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을 시킬까 했지만.'
김현우는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자신을 찾아왔던 제자들을 떠올렸다.
굉장히 착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제자들.
그가 어느 정도 제자들을 위로해 주기는 했으나 그녀들의 굳은 표정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렇기에 김현우는 제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휴식시간을 주었다.
'사실 나를 따라다니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는데…….'
아무튼, 자신의 말 때문에 당장 제자들도 쉬고 있기에 결국 김현우는 자신의 몸이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그 이외에도 물어볼 게 있으니.'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수분의 주머니 속에서 이번 빙정과의 싸움에서 얻었던 것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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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군주의 가면
등급: ??
보정: ??
스킬: ??
-정보 권한-
역병 의사이자 'Doktor Schnabel von Rom' 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민의 역병을 치료하기 위해 애썼던 그는, 역병으로 인해 세상이 멸망하고 난 뒤 홀로 살아남아 역병을 받아들였다.
시민들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던 그는 세상이 멸망하고 난 뒤 역병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멸망시켰던 역병을 다룰 수 있게 되었고, 그는 -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권한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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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꺼내자마자 주르륵 떠오르는 로그.
정보 권한이 상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권한부족 표시에 김현우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도 까마귀 가면을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뭐, 이것도 노아흐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지.'
어차피 물어볼 것을 포함해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진실을 듣기 위해선 노아흐를 만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 문밖을 바라봤다.
####
"왔나?"
"?"
노아의 방주 안.
김현우는 이전과는 다르게 변해 있는 방주 내의 풍경을 보며 슬쩍 갸웃거렸다.
"문제라도 있나?"
"아니, 그냥 좀 바뀐 것 같아서."
분명 김현우가 마지막으로 봤던 방주 안은 굉장히 난잡한 상황이었다.
뭐, 위생적으로 봤을 때 더럽다기보다는 오크통에 꽂혀 있는 설계도면이 여기저기 삐져나와 있고, 그중에는 땅바닥에 굴러다니던 도면들도 여럿 보였기 때문이었다.
허나 지금 김현우가 보고 있는 노아의 방주는 무척이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분명 여기저기 놔두었던 오크통은 한편에 곱게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을 돌아다니던 도면은 전부 한쪽에 잘 포개놓았다.
'이렇게 정리해 놓으니까 오히려 좀 압박감이 드네.'
김현우가 방주 한쪽 끝으로 끝없이 보이는 오크통과 설계도면을 보며 생각하고 있으려니 노아흐가 말했다.
"뭐, 이참에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말일세. 우선은 앉도록 하게."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며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의자를 김현우에게 권했고, 곧 의자에 앉은 그는 기다릴 것 없다는 듯 주머니 안에서 역병군주의 가면을 꺼내 노아흐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빙정이 소멸하고 난 뒤에 남은 건데…… 보통은 청룡의 업처럼 보석 같은 게 남아야 하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굳이 그런 건 아닐세, 보통 업을 담는다는 것은…… 아니, 이걸 또 설명하려면 길게 설명해야 하니 결론적으로 봤을 때 업의 모양 같은 건 그리 크게 상관이 있는 건 아니네."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에게 받은 역병군주의 가면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고, 한동안 그 가면을 바라보고 있던 노아흐는 김현우에게 가면을 돌려주었다.
"아무래도 이건 그냥 가지고 다니는 게 나을 것 같군."
"청룡의 업처럼 힘을 빼앗는 건 못 하는 거야?"
"물론 가능하기는 하겠지만, 딱히 자네가 이 역병 군주의 업을 얻는다고 해서 사용할 곳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군. 게다가 이 역병군주의 업은 자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업일세."
"그건 왜?"
"뭐, 단순히 이 외부에 서려 있는 업의 잔상만을 본 것뿐이네만, 이 업은 기본적으로 '마법'을 잘 사용해야만 활용할 수 있는 업인 것 같군. 한마디로 자네처럼 도력을 움직이는 데만-"
"OK 거기까지."
김현우는 노아흐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그의 말을 끊은 뒤 말했다.
"아무튼 배우지 않는 게 좋다 이거지?"
"자네 나이가 1000대를 뚫을 각오를 한다면 배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미련 없이 까마귀 가면을 하수분 안에 집어넣곤 말했다.
"그럼 이건 됐고, 우선 저번에 하던 이야기를 마저 듣기 전에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이든 물어보게,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대답해 주도록 하지."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곧바로 아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정보 권한이 상위가 된 것부터 시작해서, 아브를 만나기 위해 시스템 룸에 들어가려 했는데 시스템 룸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려 노아흐에게 물어볼 것을 설명한 김현우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래서, 대충 이런 상황인데 무슨 방법 없을까?"
그의 물음에 노아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김현우는 뭔가가 잘못되었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내 설명이 좀 이상했나?"
"아니, 그건 아닐세."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살짝 멈칫하는 듯했으나 이내 그렇게 대답하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시스템 룸에 있는 '아브'라는 소녀에게 지금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 말인가?"
"맞는데?"
김현우의 긍정에 노아흐는 알 수 없다는 듯 슬쩍 인상을 찌푸리곤 말했다.
"우선 잠시만 기다려 주겠나? 뭘 좀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그는 잠시만 기다려 보라는 말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러기를 잠시.
김현우가 끊임없이 모여 있는 오크통과 저 하늘에 모여 있는 구슬들의 풍경을 보고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쯤, 노아흐가 돌아왔다.
왠지 묘한 표정으로 김현우의 앞에 앉는 노아흐.
김현우는 물었다.
"그래서 확인할 건 확인했어?"
그의 물음에 고개를 조용히 끄덕인 노아흐는 아무런 말도 없이 의자에 앉았고, 잠시간 입을 다물고 있던 그는 김현우가 슬슬 지루한 표정을 지을 때가 돼서야 입을 열었다.
"……흠흠, 다시 한번 정리하도록 하지."
그 말고 함께 노아흐는 자신이 김현우에게 들었던 것을 차근차근 나열했고 그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게 뭔가 심각한 일인 거야?"
노아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고, 잠시간 고민하던 그는 말했다.
"심각한 일은 아닐세. 다만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조금 당황했을 뿐이지."
"생각지도 못한 상황?"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지."
노아흐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이내 김현우를 보며-
"아마 자네가 지금까지 만났던 그 '아브'라는 소녀는 아마 '통괄자'일 확률이 높네."
"뭐?"
-그렇게 말했다.
# 187
187. 아무튼, 선택해야 한다 (2)
"그게 뭔 소리야?"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그는 대답했다.
"자네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계층의 가디언은 자네만 있는 게 아니라네, 그건 알고 있나?"
"그건…… 제대로 들은 적은 없지만 대충 알고 있기는 하지."
물론 김현우가 각 계층의 수호자, 그러니까 자신과 같은 가디언에 대해 제대로 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등반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른 계층에도 수호자가 있다는 건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김현우가 긍정하며 묻자 노아흐는 대답했다.
"각 계층의 가디언들에게는 자네도 알다시피 정보 권한이 생기네. 그리고 그 정보 권한을 자신의 등급에 따라 열람할 수 있게 되기도 하지."
"그것도 알고 있어. 애초에 너를 찾은 것도 정보 권한의 등급을 올려서 찾을 수 있던 거니까. 그런데 그게 '통괄자'랑 무슨 관계라는 거야?"
"아니, 정보권한 자체는 문제가 없네. 애초에 그것은 맨 처음부터 '조율자'가 각 계층에 세미 보스를 만들기 위해 조형한 내용이니까. 다만-"
"다만?"
"시스템 룸이 '통괄자'랑 관계되어 있다는 것일세."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을 들어올렸다.
그와 함께 노아흐의 손 위로 생기기 시작하는 마법진.
김현우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곧 그의 손 위로 복잡한 마법진이 중첩돼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겹.
두 겹.
세 겹.
네 겹.
네 겹까지 겹친 마법진은 더 이상 중첩되지 않았고,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노아흐의 손 위로 반투명한 로그가 나타났다.
"이건?"
흡사 인터넷의 검색 사이트처럼 보이는 불투명한 창을 보며 김현우가 묻자 노아흐는 대답했다.
"검색이라는 스킬일세."
"검색?"
"그래, 보통 각 계층의 가디언들은 보통 가디언이 된 뒤 이 스킬을 받게 되지."
"그런 스킬을 받게 된다고? 나는 전혀 못 받았는데?"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노아흐는 자신의 손 위에 만들어져 있는 검색 스킬을 지우곤 말했다.
"그래서 그 말을 꺼낸 걸세. 원래 보통이라면 가디언들은 모두 '검색'이라는 스킬을 받네. 애초에 나와 조율자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노아흐는 김현우를 손짓했다.
"자네는 다르지, '검색'스킬 대신에 '출입'이라는 스킬이 생겼으니까. 게다가 애초에 시스템 룸이라는 건 없는 말이네. 허수공간은 몰라도 그런 공간은 애초에 만든 기억조차 없지."
"……."
"그렇다면 남은 가정은 한 개 정도인데, 제작자인 내가 탑을 전부 만든 뒤 누군가가 그 소녀가 있는 시스템 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미 탑을 지배한 놈들이 그렇게 비밀스러운 공간을 만들 리 없으니 남은 건……."
"통괄자뿐이다?"
노아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김현우는 그런 노아흐의 추측을 들으며 아브의 모습을 떠올렸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브가 그런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는 녀석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김현우가 아브와 만난 지 몇 번 안 되었을 때 그녀가 머리를 맞고 울먹거리는 모습을 떠올리고는 말했다.
"솔직히, 아브가 통괄자라는 게 이해가 안 가는데."
"왜 그러지?"
"통괄자라면 좀…… 뭐라고 해야 할까 똑 부러지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내가 본 아브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애 같은 느낌인데.'
김현우가 뒷말을 삼키며 생각하자 노아흐는 말했다.
"뭐 나도 자네가 뭘 본 건지는 알 수가 없으니 제대로 뭐라 말은 못 하겠네만, 아무튼 내 생각은 그렇다 이걸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아브를 떠올렸다.
도저히 무엇을 숨기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김현우에게 보여주었던 모습이 굉장히 어벙했다.
그 뒤로 이어진 고민.
허나 김현우는 얼마 있지 않아서 하던 고민을 그만두었다.
"뭐, 아무튼 그건 알았고, 시스템 룸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어차피 이렇게 고민해 봤자 나오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김현우는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나서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확실하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을 일축했고, 노아흐는 곧바로 대답했다.
"우선 지금 당장 가는 건 어렵겠지만 그 시스템 룸이 어디에 만들어져 있는지 찾아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군."
"기간은 어느 정도 걸리는데?"
"글쎄, 확신은 못 하겠군.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걸세."
그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건 그렇게 끝내는 거로 하고, 지금부터는 저번에 정복자 때문에 못 들은 이야기나 들어보자."
김현우가 말하자 노아흐는 잠시 멈칫한 느낌으로 김현우를 바라본 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네."
그와 함께 노아흐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흑백의 타일이 조화롭게 깔린 넓은 공동.
"왜 그랬지?"
가죽의자에 홀연히 앉아 있는 형체 없는 자는 자신의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허나 형체 없는 자의 물음에도 후드를 쓴 남자는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왜 그랬냐고 묻지 않나."
형체 없는 자의 목소리가 또 한번 검은 공동을 울렸으나 후드를 쓴 남자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을 뿐.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형체 없는 자가 한 번 더 입을 열려 할 때가 돼서야-
"그를 살려둬선 안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다."
후드를 쓴 남자는 입을 열었다.
"살려둬선 안 된다고?"
"예."
남자의 말에 형체가 없는 자는 가죽의자를 돌렸다.
분명 회전의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의 의지에 따라 무척이나 자연스레 돌아가는 그의 의자.
후드를 쓴 남자는 더더욱 고개를 숙였고, 형체가 없는 자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예?"
생각과는 다른 대답이 나와서일까.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는 자신이 생각해도 얼빠진 것 같은 소리를 냈다.
허나 형체가 없는 자는 그런 남자의 얼빠진 소리에 신경 쓰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그렇지 않은가? 너와 내가 원하는 것은 처음부터 다르지 않나?"
형체 없는 자의 말에 남자의 눈이 커졌다.
"무슨-"
"설마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말았으면 좋겠군. 애초에 우리는 전부 원하는 게 다르지 않았나? 당장 이 탑의 하층에 있는 놈도 말이야."
"……."
그의 말에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고 형체가 없는 자는 이내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그러니 네 마음대로 해봐라."
"예?"
"말 그대로다. 네가 그 녀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녀석을 죽여봐라. 나는 네게 아무런 제재도 취하지 않겠다."
형체 없는 자의 말에 고개를 쓰고 있던 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모든 것이 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그의 모습.
후드를 쓴 남자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곤 말했다.
"정말입니까?"
"그래."
"……대체 왜?"
후드를 쓴 남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형체가 없는 자를 바라봤다.
물론 그가 한 제안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좋은 제안이었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왜……?'
그를 죽이는 것을, 분명 형체가 없는 자는 막았다.
바로 자신이 이득을 위해서.
'그런데 갑자기?'
후드를 쓴 남자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올리자 형체 없는 자는 그런 남자의 뜻을 알았는지 말했다.
"단, 여기에 조건을 걸도록 하지."
"조건……입니까?"
"그래, 조건이다."
"무슨?"
"한 달."
"……한 달?"
"그래, 지금부터 저 9계층 기준의 시간으로 딱 한 달 이후부터, 나는 네가 저 녀석을 죽여도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도록 하겠다. 이유는-"
그는 자신의 안개로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 편이 더 '맛'을 보는데 훌륭할 테니까……."
"……."
"만약 네 모략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린다면, 그건 그저 그 정도뿐인 맛이라는 거겠지. 허나 만약 그 녀석이 네 모략을 모두 버텨내고 내가 있는 곳까지 오면-"
씨익-
'그건 정말이지 최고의 만찬이 될 것 같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어때-
"이 정도면 대답이 됐나?"
형체 없는 자의 기묘하게 일그러진 웃음소리를 들으며, 후드를 쓴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
노아의 방주 안.
노아흐의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
"아무튼, 당장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것 같군."
그런 노아흐의 말을 끝으로 노아의 방주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런 잠시간의 침묵 속에서, 김현우는 노아흐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흐음……."
그는 노아흐에게 저번에 마저 듣지 못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이 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시작해서, 이 탑에서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당장 이 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세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대략 정리를 해보면-"
그렇기에 잠시간 노아흐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정리한 그는 이내 확인을 받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탑은 원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변질되어 등반자들의 시험 장소가 되었다는 거고."
"그렇지."
"거기에 등반자들도 억지로 탑을 오르고 있다 이 말이야?"
"전부는 아닐세, 분명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탑을 오르는 이들도 있을 테니. 하지만 이 탑을 오르는 등반자 중 거의 절반은 억지로 탑을 오르고 있지."
"……업을 되찾으려고?"
"정확히는 그 녀석이 박살 내거나 빼앗은 업을 되찾으러 올라가는 이들이 많지."
-물론 분명히 다른 의도를 가지고 탑을 오르는 이들도 있을 테지만 말일세.
노아흐의 긍정에 김현우는 '허'하는 웃음을 지었다.
김현우가 노아흐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 그것은 바로 탑을 오르는 등반자들 중 거의 절반 정도는 '자의'가 아닌 '타의'를 가지고 탑을 오르고 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탑을 오르게 하려고 살던 곳을 박살 냈다라……."
"그냥 박살 낸 것도 아니고 악질적으로 업을 빼앗아 가 탑을 오르지 않고는 못 버티게 만들었지."
"……미친, 그거 완전 싸이코 아니야?"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노아흐는 대답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 녀석들은 정상이 아니네. 애초에 이 탑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부터 말일세."
"애초에 그냥 오르는 놈들도 있다며?"
"그 녀석들은 아주 조금이라도 힘을 더 모을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을 걸세-"
-등반자든 이 계층에 살던 생명들이든, 그들은 그저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한 소모품으로 생각할 테니까.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고, 노아흐는 이어서 말했다.
"그렇기에, 자네는 여기서 선택을 해야 하네."
"……선택?"
"그래, 선택이지. 애초에 나는 이것을 제안하기 위해 자네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준 거니까."
"그 제안이란 건 뭔데?"
김현우가 묻자 노아흐는 올곧은 눈빛을 지었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묵직한 기운.
허나 얼마 가지 않아-
"나와 함께 탑 정상에 있는 녀석들을 끌어내리지 않겠나?"
-노아흐는 김현우에게 자신의 제안을 밝혔다.
# 188
188. 아무튼, 선택해야 한다(3)
천호동에 있는 자택에서, 김현우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평소보다도 조용한 저택.
그도 그럴 것이 김시현은 어느 순간부터 다시 자신의 고급 아파트로 돌아가 버렸고, 항상 자신의 뒤에 붙어 있던 두 제자는 빙정에 당한 후유증으로 인해 휴가 중이었다.
'뭐, 내가 거의 억지로 쉬게 한 거지만.'
아무튼, 그렇기에 지금 이 저택 안은 사람이 없었다.
'아니, 한 명 있긴 하지.'
김현우는 슬쩍 시선을 돌려 소파 옆 아래를 바라보았다.
"흠냐-"
"……흠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소파 옆 아래 깔려 있는 거대한 쿠션.
그곳에는 자신에게 귀속되어 있는 구미호가 몸을 둥글게 말고 자고 있었다.
"……."
김현우는 멍하니 구미호를 바라봤다.
분명 예전에는 인간의 모습보다는 여우의 모습으로 집 안을 많이 돌아다닌 것 같았는데, 요즘에는 오히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이 많은 것 같았다.
'다만 거슬리는 건-'
그녀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도 동물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물론 어디 영화 속에 나온 늑대소년처럼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왜 땅바닥에서 자는 거야.'
쿠션이 깔려 있기는 했어도 소파 옆에 있는 조그마한 쿠션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김현우는 마치 자신이 학대범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Zzz……."
느긋하게 고로롱 소리까지 내며 자고 있는 구미호.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제츠쳐를 취하다 입을 열었다.
"야."
"Zzz……."
"야!"
"히엑!?"
김현우가 언성을 높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난 구미호.
딱히 크게 소리를 지른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마치 불호령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곧바로 일어나는 그녀는 급하게 시선을 돌리다 자신의 옆에 있는 김현우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언제 오셨어요?"
그리곤 자연스럽게 나오는 존대.
분명 예전에도 존댓말을 하긴 했으나 굉장히 어색했는데 지금은 무척이나 당연한 듯 존대를 쓰는 구미호를 보며 김현우는 대답했다.
"조금 전에."
"아, 그렇구나……."
그렇게 대답하며 슬쩍슬쩍 눈치를 보는 구미호.
"뭐, 별건 아니고 물어볼 게 좀 있어서 깨웠어."
"네? 물어볼 거요?"
"그래, 물어볼 거."
"네, 제가 알고 있는 거라면 전부 말씀드릴게요."
김현우의 말에 구미호는 슬쩍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귀를 쫑긋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그런 반응을 보고 난 뒤 곧바로 질문했다.
"네가 탑을 오른 이유는 뭐야."
"네? 제가 탑을 오른 이유요?"
"그래."
"어…… 그건 갑자기 왜? ……가, 아니라 말할게요!"
그녀는 이유를 물으려다 슬쩍 인상을 찌푸리는 김현우의 모습에 곧바로 말을 바꾸며 말했고, 이내 슬슬 그의 눈치를 보던 구미호는 대답했다.
"그러니까, 제가 탑을 오르는 이유는, 제가 살 곳이 사라져서요."
"……살 곳이 사라졌다고?"
"네, 그래서 탑을 오를 수밖에 없었어요."
김현우의 되물음에 구미호는 그렇게 대답했고, 김현우는 이내 그녀의 답을 듣고는 살짝 생각하는 듯하다 말을 이어나갔다.
"그 이야기 자세히 해봐."
"자세히요?"
"그래, 왜 네가 사는 곳이 사라졌는지부터 시작해서 왜 탑을 올랐는지까지."
그의 진지한 물음에 구미호는 슬쩍 당황하는 듯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으나 이내 그녀는 잠시의 시간을 들여 생각을 정리한 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가 살던 세계가 박살 났다고?"
"네, 정확히는 세계를 부섰다기보다는 그 세계의 업(業)을 빼앗아가서 구심점을 박살 내 버린 거죠."
"……."
구미호의 말에 김현우는 입을 다물고 있다 말했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면 그냥 너는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나타나서 갑자기 네 세계의 업이랑 네 업을 빼앗아 간 다음에-"
"탑을 올라오면 다시 돌려주겠다고 한 거나 다름없죠."
"이거 완전 사채업자보다 더한 양아치네?"
김현우의 말에 구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양아치 짓을 해도 업을 빼앗긴 거의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탑을 올라야 해요. 어차피 ────── 하니까요."
순간 들리지 않는 구미호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익숙하다는 대충 그 안에 들어갈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갑작스레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이미 제천대성에게도 겪어봤다.
'아마 들리지 않는 말은 이 탑에서 자체적으로 필터링 하고 있는 거겠지.'
정보 권한이 드디어 상위에 오르기는 했어도 아직 그의 귀를 침묵으로 만드는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필터링이 먹히지 않는 노아의 방주 내에서 김현우는 이미 어느 정도 등반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왔기에 그녀의 말에 필터링이 걸려도 대충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한동안 구미호의 말을 정리하던 김현우는 이내 구미호에게 물었다.
"그런데-"
"네?"
"너는 이제 더 이상 탑을 오르지 않아도 되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구미호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이내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어…… 괜찮지 않을……까요?"
"……네가 확신을 못 하면 어떻게 해?"
"아니 그…… 생각해 보면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사는 곳이 날아가 버려서 엉겁결에 탑을 오르게 된 거라…… 사실 저는 제 업이랑 살 수 있는 곳만 찾으면 됐거든요."
구미호는 그렇게 말한 뒤 슬쩍 텀을 두고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곳에서의 삶은 업을 찾지도 못하고 구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삶인 것 같아서……."
-게다가 애초에 저는 도망치지도 못하고요.
그녀는 슬쩍 눈치를 보며 말소리를 줄이며 뒷말을 끝냈고, 김현우는 그런 구미호를 바라보다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무튼 이야기는 잘 들었어."
"별말씀을요."
그 말에 답한 구미호는 그렇게 말하더니 슬쩍 그의 눈치를 봤고, 잠시간 눈치를 보는 그녀의 모습에 김현우는 물었다.
"왜?"
"그럼, 저 부탁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
구미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부탁이요. 좀 먹고 싶은 게 있는데."
"먹고 싶은 거라고?"
"네, 찬장에 있거든요?"
"……찬장에 있다고? 그럼 네가 그냥 꺼내 먹으면 되잖아?"
김현우가 알 수 없다는 듯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자 구미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내 그 말과 함께 곧바로 부엌을 향해 달려갔다.
우당탕탕.
신이 난 듯 뛰어가는 구미호.
김현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이거예요!"
구미호는 어느새 부엌에서 어느 통 하나를 가져와 김현우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그, 제가 먹고 싶은 거요!"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통을 열려다 말고 통 옆에 써져 있는 글씨를 확인했다.
-하루에 한 개만 줄 것.
"……?"
김현우는 그 글씨를 멍하니 바라보다 곧 이 글씨가 이서연의 글씨체라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통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튜르?"
-튜르라는 간식이 있었다.
마치 생긴 건 짜 먹는 요플레 같이 생긴 튜르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 본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내리다 그 아래 써져 있는 글을 읽었다.
'고양이용?'
고양이용.
김현우는 표지에 써져 있는 글을 읽고는 구미호에게 물었다.
"이거 먹고 싶다고?"
"네."
"그럼 그냥 직접 가져다가 먹으면 되잖아?"
그의 물음에 구미호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마자 쫑긋하고 세워져 있던 귀가 푹 숙여짐과 동시에 굉장히 애처롭게 변하는 분위기.
"그게, 자기 몰래 꺼내먹지 말라고, 서연이가 말해서요."
"?"
"먹으면, 주인님한테 말한다고……."
"……."
구미호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고 김현우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아주 훌륭한 억제력으로 작용하는 것 같네.'
김현우는 살살 눈치를 보는 그녀를 보며 그렇게 생각한 뒤-
"이거 다 먹어?"
"어……어어? 네?"
"다 먹기 싫어?"
-통 안에 있던, 대충 10봉은 되어 보이는 튜르를 구미호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구미호는 일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괜스레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아니 그건 아닌데요……. 그……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될지……."
구미호의 말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원하면 말해. 더 사줄 테니까."
김현우의 말에 구미호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복잡한 표정을 짓다 이내 굉장히 환한 웃음을 지으며 튜르에 손을 가져갔다.
덜덜 떨리는 손.
'무슨 마약을 하나.'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튜르를 전부 넘겨줬고.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구미호는 김현우가 앉아 있던 옆의 쿠션에 않아서 튜르를 까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튜르를 까먹기 시작하는 구미호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 나갔다 온다."
"네! 다녀오세요!"
어디까지고 무척이나 활발하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지은 김현우는 이내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하수분의 주머니 속에 있는 여의봉을 꺼내 들었고-
"야, 있냐?"
김현우가 입을 열자마자 그의 의식은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뱀대가리 새끼야! 깝치지 말라고 했지!?"
"흐음, 나는 가만히 있었다만?"
"뭘 가만히 있어! 너 때문에 소나무가 박살이 났잖아!"
"어차피 다시 복구되지 않나?"
"야! 그럼 너 대가리 대봐! 뿔도 잘리면 다시 재생되니까 뿔이나 좀 자르자!"
"그건 싫군."
김현우는 중국 화풍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무릉도원 안쪽에서 서로를 향해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청룡과 제천대성을 볼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야 너 그냥 꺼져! 내 여의봉 안에서 나가!!"
빼에에엑!!!!
제천대성이 악에 받친 고함을 내뱉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즈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아기자기하게 변한 청룡은 유들유들한 말투를 이용해 제천대성의 말을 넘겨 버렸다.
그렇게 그들의 말싸움을 바라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김현우는 말했다.
"야, 이제 그만 싸워봐."
그의 말에 불편한 듯 혀를 차면서도 그 이상 입을 열지 않는 제천대성.
김현우는 느긋하게 하늘에 떠 있는 청룡과 짜증을 내며 부러진 소나무의 밑동에 가서 앉는 제천대성을 보았다.
정복자를 상대하기 직전.
김현우는 청룡에게 그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법을 어느 정도 배울 수는 있었으나 전부 배울 수는 없었기에 고민하던 도중, 청룡의 제안에 따라 그의 의식체를 여의봉 안으로 옮겼다.
'물론 제천대성은 발광했지만-'
우선 그 당시에는 어떻게든 납득시키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 상황을 봤을 때 역시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한동안의 침묵.
"그래서, 여의봉 안에는 왜 들어왔지?"
그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로 청룡이었고. 김현우는 말했다.
"이참에 너희들 이야기도 좀 들어놓으려고."
"무슨 이야기 말이지?"
청룡의 슬쩍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현우는 그와 제천대성을 한 번씩 번걸아 본 뒤-
"너희는 왜 탑을 오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게 말했다.
# 189
189. 아무튼, 선택해야 한다 (4)무릉도원.
조금 전까지 탑에 들어온 계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던 제천대성은 이야기가 끝난 뒤 불현듯 궁금증이 도진 것인지 김현우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갑자기 탑 이야기는 왜 물어보는 거야?"
그의 물음에 김현우는 슬쩍 고민하는 듯한 제츠쳐를 보이다 대답했다.
"뭐, 그냥 궁금해서."
"……궁금해서? 그래 봤자 대부분이 필터링에 걸렸을 텐데."
제천대성의 말이 맞았다.
구미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는 다르게 제천대성과 청룡이 해준 이야기는 이미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있는 김현우가 들었음에도 이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필터링이 걸렸다.
허나 그것은 김현우에게 있어서 그리 큰 상관은 없었다.
김현우가 듣고자 하는 것은 세부적인 이야기보다는 그들이 무슨 의도로 탑을 올랐는지에 대해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이유?
'이왕이면 서로 목적이 같은 편이 좋을 테니까.'
김현우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룡과 제천대성을 보았다.
제천대성의 경우는 일방적인 갑을의 관계가 아닌 서로의 필요에 따라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계약관계였고.
청룡의 경우는 이미 대부분의 업을 내가 흡수하긴 했으나 아직 그에게 배울 것들이 많았다.
한마디로 아직 이 둘과는 불협화음이 나는 것은 그다지 김현우가 생각한 목적을 이루는 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뭐, 아무튼 그런 점에서 다행인 것은-
"그러니까 결국 둘 다 탑 위에 있는 그놈을 조지려 했다 이 말이지?"
"그래,"
"내가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의식체만 이렇게 남아 있지도 않았겠지. 뭐, 옆의 원숭이는 아닌 것 같지만-"
"뭐? 오히려 멍청한 건 너 아니냐? 왜 ─────────했는데 거기서 ───────해가지고 결국 ─────── 하냐고! 차라리 나처럼 ──────────────"
-적어도 이 앞에 있는 둘은 아마 내 목적에 호응해 줄 만한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김현우의 앞에 있는 그들은 탑 위에 있는 그 녀석에게 업(業)과 세계를 모조리 빼앗긴 이들이었으니까.
'뭐, 사실 확인하기 전에도 내심 이럴 것 같기는 했다만…….'
그래도 확실히 확인하는 편이 좋았기에 김현우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고, 이것으로 확실하게 그들이 아군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애매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보다는 확신이 나았으니까.
김현우는 아니나 다를까 또 다시 말싸움을 시작하려는 그 둘을 보던 그는 이내 어제 노아흐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거기서 들었던 이 탑의 진실.
그리고 그 탑의 진실을 전부 깨닫게 된 뒤에 들었던 노아흐의 제안.
김현우는 노아흐가 자신에게 한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이대로 있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분명히 현실이기는 하지만 결국 이 탑에 소속되어 있는 9계층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결국 이 탑이 어떻게든 바뀌지 않는 이상 등반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9계층을 멸망시킬 때까지 올라온다는 소리였다.
다들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탑을 오르기 위해서.
'게다가 최근에는 위에서도 나를 죽이기 위해 정복자를 보내니까…….'
김현우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탑의 정상에 서 있는 놈들을 끌어내리고 이 탑의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것을 인지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시작은…… 하층에 있는 '조율자'를 잡는 것.'
김현우는 노아흐의 제안을 수락한 뒤 곧바로 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우선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이 탑의 지하 계층에 있는 '조율자'를 처리해야 하는 걸세.'
'조율자?'
'그래, 내가 전에도 자네에게 말했듯이 그녀는 나와 함께 탑을 만들었던 5명 중 한 명일세. 그녀는 이 탑의 실질적인 밸런스를 조절하지. 게다가 정말 만약이네만 내 생각이 맞다면-'
'…….'
'아마 자네가 조율자를 성공적으로만 처리한다면 그녀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 걸세.'
그렇게 노아흐와의 대화를 회상한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려 아직도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제천대성과 청룡을 제지했다.
"야, 이제 말싸움은 그만 좀하고, 혹시 너희들 지하계층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뭐? 지하계층?"
김현우의 물음에 청룡은 슬쩍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으나 제천대성은 김현우를 돌아보며 물음을 던졌다.
"갑자기 지하계층은 왜?"
"아무래도 그곳에 가야 할 것 같아."
"……지하계층에 간다고?"
제천대성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조율자를 처리해야 할 것 같거든."
김현우의 말에 제천대성은 자신의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율자를?"
"알고 있어?"
그 물음에 제천대성은 얼굴에 팔자주름을 만들었다.
"알고 있기는 하지. 지금이야 너한테 잡혀서 탑을 오르는 데 실패하긴 했어도 나는 이미 탑을 한번 올랐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별안간 진지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조율자를 처리하러 간다는 건, 그 녀석들이랑 적대한다는 뜻이지?"
제천대성의 물음에 김현우는 별다른 제스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니, 생각해 보면 노아의 방주에 있을 때 같이 듣지 않았어?"
"네가 그곳 안에서 들어갔던 공간에서는 모르겠지만 노아의 방주 안에서는 연결이 불안정해서 이야기를 듣다 포기했지. 게다가-"
-대충 들리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아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말이야.
제천대성은 그렇게 말하곤 어느새 자라나기 시작한 소나무에 기대어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결국 조율자를 처리해야 한다 이거지?"
"맞아."
김현우의 말에 제천대성은 슬쩍 팔짱을 끼고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린 뒤 말했다.
"뭐, 사실 조율자를 처리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내 생각에 그 녀석은 그렇게 강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
"뭘 그렇게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봐?"
"아니, 뭐 이 탑을 만든 다섯 명 중 한 명이라고 하길래 나는 분명 좀 더 강할 줄 알았지."
김현우의 대답에 제천대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뭐, 솔직히 나도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그리 강한 녀석은 아니었어. 다만 조금 성가신 건……."
"성가신 건?"
"……지하계층까지 가는 것과, 조율자를 만나러 갈 때 마주쳐야 할 것들이 좀 골치 아플 것 같은데."
"……조율자를 만나러 갈 때 마주쳐야 할 것들?"
제천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너도 알다시피 이 탑은 총 15계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에서 지하계층은 그 15계층에 포함되지 않은 번외 계층이야."
"그런데?"
"한 마디로 지하계층은 그 통로로는 갈 수 없다 이 말이야."
"……그럼 어떻게 가는데?"
김현우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지?"
"……뭐?"
"그건 나도 모른다고."
"아니 다 아는 것처럼 말해놓고 모른다고?"
"내가 그곳에 가본 적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건 아니니까, 그냥 들었을 뿐이지."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스읍 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 안에 조심해야 할 것들은 또 뭔데?"
"시체들."
"시체?"
"정확히는 등반자들의 신체라고 해야 하나?"
"이건 또 뭔소리야?"
김현우의 물음에 대답한 제천대성은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듯 자신의 금고아를 툭툭 치더니 이야기했다.
"내가 기억하기론 지하계층은 탑을 오르다 소멸한 등반자의 신체가 모이는 곳이라고 들었거든, 대충 지옥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될걸?"
-물론 그곳에는 껍데기가 모일 뿐이지만.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떠오르는 궁금함을 뱉어냈다.
"그럼 허수공간은 뭔데?"
"허수공간? 그건 의식체들이 있는 곳이지."
-대충 이렇게 생각하면 편해.
"그냥 탑에서 죽으면 별 볼 일 없는 놈들이 의식체마저도 소멸하는 거고, 나름 쓸 만한 이들은 몸체는 지하계층에 버려두고, 의식체는 허수공간에 두는 거지."
"그렇게 의식체만 놔둬서 뭘 하는데?"
"글쎄? 듣기로는 ───── 한다고 하긴 하는데, 그건 잘 모르겠네."
갑작스레 들리는 필터링에 김현우는 주름을 좁혔으나-
'애초에 지금 신경 쓸 건 아니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럼 우선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건 1계층에 내려가야 하는 거네? 1계층까지 내려가면 시간은 어느 정도 걸려?"
"근두운 최고속으로 내달리면 대충 10일 정도 걸릴 것 같은데."
"거기다가 지하계층에서 조율자를 처리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지하 계층에서 며칠이 걸릴지는 나도 모르지. 애초에 가본 적이 없다니까?"
"그럼 대충 10일 정도로 잡고…… 다시 근두운을 타고 9계층까지 돌아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한 달……."
-시간이 좀 걸리네.
김현우가 고민하는 듯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자 제천대성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1계층까지 갔다 오는데 1달이면 아주 빠른 건데? 양심 있어?"
"알기는 아는데 내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단축하는 게 좋으니까."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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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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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악천의 원천
등급: S+
보정: 없음
스킬: 없음
미궁석 게이지: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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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동의 저택.
김현우는 사방에 깔려 있는 튜르 봉지 옆에 행복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구미호를 한번 바라보곤 이내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악천의 원천을 보며 혀를 찼다.
'귀찮아 죽겠네.'
사실 처음 악천의 원천을 쓸 때만 해도 이렇게 자주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를 않아서 딱히 불편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용빈도가 늘어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다시 악천의 원천을 채우려고 미궁에 내려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이 미궁게이지 좀 다른 걸로는 대체 못하나……?'
김현우는 손에 쥐여진 띠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으나 딱히 해결법은 없었다.
결국 미궁석 게이지를 채우려면 몸으로 뛰어야 하는 것뿐.
'쯧, 그냥 무신이 등반자가 된 다음에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김현우는 말도 안 되는 투덜거림을 내뱉으며 미궁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사실 애초에 준비할 것도 없었기에 악천의 원천만 들고 곧바로 문밖으로 향하던 김현우는 문득 문 앞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느꼈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인기척.
곧-
"휴가 줬더니 왜 왔어?"
문이 열림과 함께 들어온 것은 바로 얼마 전 휴가를 주었던 그의 제자인 미령이었다.
김현우는 문을 열고 들어온 미령을 보며 입을 열었으나, 곧 그녀에게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
이유는 바로 그녀의 외모 때문.
집 안에 들어온 그녀는 무척이나 이상하게도 괴력난신의 힘을 빌릴 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눈을 원래의 홍안보다 좀 더 짙게 변해 있고, 이마 위에는 붉은 뿔이 자라나 있었다.
그와 함께 보이는 것은 마치 상어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이빨과 마치 괴력난신처럼 새하얀 백발로 변한 머리카락이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곧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이구나."
미령에게서 나온 목소리건만 그것은 '미령'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보다는 조금 더 하이톤의 목소리.
김현우는 그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었기에 슬쩍 얼굴을 굳혔고, 이내 자신에게 말을 건 그녀-
"……괴력난신(怪力亂神)?"
"잘 아는구나."
괴력난신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 190
190. 괴력난신 (1)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자 미령, 아니 괴력난신은 입가에 씨익 하는 미소를 지으며 김현우를 보고는 말하려 했으나-
"우선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텁.
"-?"
괴력난신은 갑작스레 손을 뻗어 자신의 이마 위에 나 있는 붉은 뿔을 잡아 챈 김현우를 보며 이상함을 느꼈고.
"지금 무엇을 하려고…… 끄약!?"
"이게 본체지?"
"자, 잠깐!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적이 아니다! 아니라고!"
툭-
"끄야아아아악!"
김현우는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괴력난신의 뿔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와 함께 비명을 지르는 괴력난신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김현우가 뿔을 당기고 있는 왼 손을 잡으며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놔줘라! 놔달란 말이다! 못 들었느냐? 못 들었냐고! 적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진짜다! 진짜라고!"
투둑!
"끄꺄아아아악! 부러져! 부러진다! 진짜로 부러진다! 부러지면 큰일 난다고!"
"너만 큰일 날 것 같은데?"
"아니다! 아니라고! 지금 뿔이 부러지면 네 제자도 큰일 난다! 큰일 난다고?"
"협박하는 거냐?"
우둑!
"소리 났어! 소리 났단 말이네! 진짜로 부러진다! 진짜로 부러진다고!!"
괴악한 비명을 지르는 괴력난신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망울망울 맺혀 있는 것을 보곤 이내 뿔을 쥔 손을 놓았다.
"이……익! 분명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데!"
그와 함께 이마 위에 있는 뿔을 소중하다는 듯 감싼 그녀는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김현우를 바라봤고 그는 후 하는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그걸 어떻게 믿는데?"
"말하고 있지 않았느냐!"
"그러다가 뒤통수치면?"
"이 백귀야행(百鬼夜行)의 두목인 괴력난신(怪力亂神)이 뒤통수를 친다고!? 그럴 일은 없다!"
"그래도 치면?"
김현우가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괴력난신은 이내 굉장히 억울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후……."
이내 가볍게 한숨을 내쉰 김현우는 손에 들고 있던 악천의 원천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말했다.
"우선 따라 들어와. 이야기는 안에서 들을 테니까."
"도대체 왜 이 아이는 저런 이상한 놈을……."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조금 전에 있던 방 안으로 들어갔고, 괴력난신은 그렇게 방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투덜거리고는 뒤늦게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
괴력난신은 곧 쿠션 아래에서 자고 있는 구미호를 한번 멍한 표정으로 바라본 뒤 이내 고개를 저으며 김현우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왜 미령 대신에 네가 미령의 몸을 컨트롤 하고 있냐?"
그녀가 앉자마자 곧바로 질문하는 김현우.
그에 괴력난신은 살짝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계약한 아이는 지금 나름의 수련을 위해 내면세계에 있다."
"내면세계?"
김현우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인격이 잠시 내면세계로 들어가 있는 동안 아이의 몸을 내가 맡게 되었지."
괴력난신의 말에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고 싶었던 김현우는 그녀에게 '심리'스킬을 사용했으나-
[스킬 사용이 불가능한 대상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에게는 스킬 사용이 불가능했다.
"쯧."
짧게 혀를 찬 김현우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초반에 보여줬던 여유로운 모습과는 다르게 아까 전 뿔을 잡아당긴 탓인지 그를 향해 내내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괴력난신.
김현우는 물었다.
"무슨 꿍꿍이지?"
"무슨 꿍꿍이라니?"
"왜 미령한테 붙어 있냐 이 말이지."
사실 김현우는 미령이 괴력난신의 힘을 얻고 나서부터 줄곧 그게 궁금했었다.
당장 미령이 강해진 것은 나쁘지 않았고 그녀가 괴력난신의 힘을 잘 다루고 있기에 은연중에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미령 대신 괴력난신이 나와 있는걸 보니…….'
묘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런 김현우의 물음에 괴력난신은 김현우를 빤히 바라보다 그제야 불퉁한 표정을 지우고는 말했다.
"걱정 마라. 딱히 꿍꿍이 따위는 없으니……. 뭐, 그래도 굳이 알고 싶다면야 그냥 파장이 잘 맞았다는 것 정도일까."
"……파장이 잘 맞았다고?"
"그래, 나는 그저 거기에 흥미가 생겼을 뿐이다. 이 아이…… 그러니까 미령의 영혼은 나와 비슷하게 성장할 수 있는 파장을 가졌거든. 다시 말해서 그건─"
괴력난신은 이어서 말하려다 슬쩍 김현우의 눈치를 보며 말을 돌렸다.
"-뭐, 그건 나중에 말해두도록 하지."
"그게 뭔데?"
"아니다, 이건 그저 내 희망 사항일 뿐이니 딱히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구나."
괴력난신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고, 김현우는
'무력을 써서 알아낼까?'
라는 생각을 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보니까 딱히 미령에게 피해를 입힐 것 같진 않고-'
생각해 보니까 그녀의 몸을 탐할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에 그는 더 이상의 무력행사를 하는 것은 그만뒀다.
"그래서 미령이 내면세계에서 수련하고 있다는 건 또 뭔 소리야?"
"말 그대로다. 그녀는 빙정에게 진 뒤부터 내 제안에 따라 수련을 하고 있다. 뭐, 정확히 말하면 내 백귀야행(百鬼夜行)의 업을 얻기 위해서-"
-내면 속에 있는 업(業)속의 부하들과 신나게 싸움을 벌이고 있지.
괴력난신은 그렇게 말했고, 김현우는 곧 미령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내가 근두운술을 배울 때처럼.'
미령도 아마 내면세계에서 괴력난신의 업(業)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으로 없을 얻으려고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뭐, 나로서는 당장 미령이 강해지면 나쁘지는 않은데.'
전력적인 의미로도, 그리고 자신을 지킨다는 의미로도 힘을 키우는 것은 좋다.
9계층에서는 끊임없이 등반자가 올라오고, 당장 미령은 등반자를 상대할 수 있기는 해도 결국 목숨의 위협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니까.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니 괴력난신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부탁을 하나 하기 위해서다."
"부탁?"
"그래, 뭐 정확히 말하면 나 스스로라기보다는 이 몸에 영향을 받은 덕분에 일어나게 된 일인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김현우가 묻자 괴력난신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했다.
"말 그대로 미령의 인격체는 지금 내면세계 속에 들어 있긴 하다만 결국 따져보면 이건 그 아이의 몸이지 않느냐?"
"……그렇지?"
"그러니까 내 인격이 들어가 있어도 그녀의 몸짓이나 행동…… 뭐 그 이외에 기본 베이스는 바뀌지 않았다 그거지."
"……그래서 부탁할 건 뭔데?"
"아, 별건 아니다. 그냥 나랑 하룻밤 정도만 자주면 된다."
"?"
괴력난신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
노아의 방주.
"왜 그런 표정이지?"
노아흐는 자신의 앞에서 왠지 좋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김현우를 보며 물었다.
"아니, 그냥 좀……."
"?"
"좀, 그런 게 있어."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그를 보면서도 어깨를 으쓱였고, 김현우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 괴력난신이 했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곤-
"쯧"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아흐는 의자에 앉아서 찜찜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진지하게 고심하고 있는 김현우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고, 곧 잠시 뒤.
"에휴."
생각을 전부 정리한 듯,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할 건 전부 끝냈나?"
노아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곧 그에게 물었다.
"혹시 이곳으로 바로 올 수 있는 물건 같은 건 없어?"
"이곳으로 바로 올 수 있는 물건?"
"그래, 아티팩트 같은 거."
"그건 왜?"
"왜긴 왜야, 이곳에 올 때마다 몬스터를 잡는 게 불편해서 그렇지."
"몬스터를 잡는다고?"
노아흐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악천의 원천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 이야기를 잠시간 듣고 있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그런 식으로 계속 이곳에 들어왔던 거면 확실히 불편하겠군."
"그러니까 이 아티팩트를 좀 보강해 주든가, 아니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아티팩트 같은 걸 만들어 줄 수 있냐는 이야기지."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대답했다.
"흠, 아마 그 악천의 원천은 내가 손대지를 못할 것 같으니 이곳으로 넘어 올 수 있는 아티팩트를 따로 만들어 주도록 하지, 다만 시간은 좀 걸릴 것 같군."
"얼마 정도나 걸리는데?"
그는 고민하는 티를 내다 말했다.
"아마 얼마 걸리진 않을 걸세. 9계층의 시간으로 따지면 대충 2주에서 3주 정도 될 것 같군."
"뭐, 한두 번만 더 올 것도 아니고 그 정도면 됐어."
김현우는 노아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이어서 그가 이곳에 다시 들어온 진짜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이게 진짜 본론인데."
"말해보게."
"지하계층까지 빨리 가는 법은 없어?"
"……지하계층까지 빨리 가는 법이라?"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저도 모르게 되물은 뒤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내 입을 열었다.
"빨리 가는 방법이라면 자네가 했던 것처럼 그 통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네만…… 자네가 나한테 그걸 물어본다면 더 빠르게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걸 원하는 거겠지?"
"맞아. 만약 나 말고도 등반자나 정복자를 막을 수 있는 녀석이 있다면 좀 느긋하게 다녀와도 되겠지만, 그게 아닌 이상은 빨리 갔다 와야 하잖아?"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그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김현우가 떠날 경우 9계층을 지킬 수 있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물론 미령과 하나린이 있기는 했으나 그녀들도 정복자가 오면 이전처럼 당할 수밖에 없을 테니 되도록 일을 빨리 끝내고 와야만 했다.
"흐음……."
노아흐는 김현우의 말을 듣고 작게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뭐,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네만."
"무슨 방법인데?"
"조율자의 물건을 찾는 거지."
"……조율자의 물건이라고?"
"그래. 자네가 내 탑을 이용해 노아의 방주에 온 것처럼 아마 지하계층도 조율자의 물건을 사용하기만 한다면 바로 갈 수 있을 걸세."
"조율자의 물건은 어디서 얻을 수 있는데?"
"잠깐 기다려 보게. 한번 찾아보도록 하지."
노아흐는 그렇게 말한 뒤 곧바로 자신의 손을 올려 김현우에게 전에 보여주었던 마법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노아흐의 앞에 켜진 반투명한 창.
"검색 스킬?"
"그렇지."
노아흐는 김현우의 물음에 답하며 곧바로 검색스킬을 활용해 무엇인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가 검색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김현우는 그저 반투명한 로그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살짝 하품했고. 그가 슬슬 지루함을 느끼고 있을 때쯤.
"흠."
지금껏 정보를 조사하고 있던 노아흐가 짧은 신음성을 흘렸다.
"왜?"
"없군."
"뭐?"
"정보 권한으로 아무리 찾아봐도 각 계층에 조율자가 남겨 놓은 물건들이 존재하질 않는군."
"……그럼 그냥 통로를 통해 내려갈 수밖에 없는 거야?"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노아흐는 짧게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말했다.
"아닐세."
"그럼 다른 방법이 있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확실치 않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확실치는 않네만, 만약 내가 생각한 것이 가능하다면 자네는 곧바로 1계층으로 갈 수 있을 걸세."
# 191
191. 시체 팔이 잡으러 간다 (1)노아의 방주 안.
"그러니까, 네가 탑을 만들 때 사용했던 비밀 통로가 있는데 거기로 갈 수만 있다면 빠르게 이동하는 게 가능하다 이거야?"
"그렇네."
"그럼 바로 실험해 보면 되잖아?"
"그게……."
"왜? 문제라도 있어?"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당장 확인된 문제는 없네. 이렇게-"
그가 말을 하다 말고 손을 뻗자, 그의 위로 하나의 구체가 끌려와 노아흐의 손에 안착했다.
"-그 쪽으로 갈 수 있는 아티팩트까지 있지."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에게 아티팩트를 넘겨주었고, 김현우는 그 둥그런 버튼을 받자마자 떠오르는 로그를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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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의 위치이동 장치
등급: ??
보정: 없음
스킬: 위치이동.
-정보 권한-
노아의 방주의 주인이자 이 탑을 만들어낸 제작자가 만들어 낸 위치이동 장치.
그가 처음 이 탑을 만들기 위해 극초기에 제작했던 위치이동 장치는 제작자가 만들어 낸 공간 안이라면, 그리고 그가 지정해 놓은 공간이라면 어디든지 이동이 가능하게 만들어졌다.
위치이동 장치는 연속으로 사용할 수 없으며 한번 사용할 때마다 제작자의 마력을 채워 넣지 않는 이상 총 24시간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가진다.
허나 제작자가 마력을 일정이상 집어넣었을 때는 제작자가 마력을 집어넣은 양에 비례해 재사용 대기시간을 1%부터 100%까지 감소시킬 수 있다.
현재 상태: 사용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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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나오는 로그를 주르륵 읽어 본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딱히 이상한 점은 없어 보이는데?"
"말했지 않나? 당장 확인된 문제는 없다고."
"……그럼 문제가 있는 곳은 어딘데?"
"바로 자네가 이동하게 될 곳일세."
"내가 이동하게 될 곳?"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내가 아까 전 설명에서 말했네만, 그 위치이동 장치는 이 탑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특정하게 지정한 곳만 이동할 수 있네."
"……그러니까 네가 특정하게 지정해 놓은 공간이 문제다?"
"그렇네."
"무슨 문제인데?"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대답했다.
"노후화 문제일세."
"……노후화 문제?"
"조금 웃길 수도 있네만 진짜일세."
"아니, 텔레포트로 지정해 놓은 공간이 노후화 때문에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건 무슨 소리야?"
김현우가 묘하게 따지듯 말하자 노아흐는 곧바로 이유를 설명했다.
"만약 내가 위치이동을 지정해 놓은 것이 계층 안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내가 위치이동을 지정해 놓은 곳은 탑의 외부쪽일세."
"탑의 외부?"
"정확히 말하면 탑의 밖은 아니고…… 굳이 비유를 하자면 탑의 외벽쯤일까?"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야? 한번 가서 확인해 보면 되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하네."
"왜?"
"만약 내가 지정해 놓은 그 곳이 조금이라도 무너져 있다면 자네는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뭐?"
"내가 그 건물을 만들어 놓은 탑의 외벽쪽에는 허수공간들이 있거든."
"허수공간이라면 그……."
김현우가 말을 꺼내려 했으나 노아흐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네만 자네가 생각하는 그 허수공간은 아닐세. 탑의 외벽에 있는 허수공간은 아무런 손도 쓰지 않은, 말 그대로의 허수공간일세."
-혹시라도 거기에 떨어졌다간…….
"떨어졌다간……?"
"그곳에서 되돌아오기가 쉽지 않을 걸세. 손도 대지 않은 허수공간에 빠진다면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천운이 따라 밖으로 나올 수 있을 때까지 공간 안을 맴돌아야 하거든."
노아흐의 말에 그는 눈가에 주름을 만들었다.
"도대체 왜 그딴 곳에다가 허수공간을 만든 거야?"
"원래 그곳에는 허수공간이 없었네, 그 허수공간은 내가 탑을 만들고 난 뒤에 나를 쫓아낸 그 녀석들이 채워 넣은 거지."
"그런 걸 채워 넣을 수도 있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가 있었네."
"거 듣기만 해도 개사기 능력 냄새가 풀풀 나네."
김현우가 투덜거리자 노아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지금 이 상황에서 결국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 정도일세. 당장 이 장치를 사용해서 위협을 무릅쓰고 빠르게 이동하던가, 그게 아니면 통로를 통해 내려가던가."
-둘 중 하나지.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위치이동 장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건 사용하면 어디로 가는데?"
"아마 그 장치를 사용하면 1계층의 외벽 쪽으로 순간이동을 하게 될 걸세."
"그럼 그렇게 순간이동을 한 뒤 지하세계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계층에서 숨겨진 공간을 찾기만 하면 금방 지하계층으로 갈 수 있겠지. 뭐 그래 봤자 지하계층으로 가는 길은 내가 알고 있으니 우선 1계층에 도착하기만 하면 지하계층까지는 금방일세. 다만-"
노아흐는 김현우의 손에 들린 장치를 보며 말했다.
"내가 처음 자네에게 제안하고도 이 선택지를 말하지 않았던 것은 어느 정도 위험부담이 있기 때문이네."
"……."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눈빛을 마주봤고, 김현우는 시선을 내려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장치를 바라봤다.
결정을 해야 할 때.
이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통로를 통해 탑을 내려가면 9계층을 비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이 장치를 사용해 위험 부담을 안으면 잘 풀리 때는 괜찮겠으나 만약 노아흐의 말처럼 공간이 노후화 되어 있다면 큰일 날 확률이 있었다.
"……혹시 그냥 1계층으로 갈 수 있는 장비를 만들 수는 없어?"
"지금 그걸 만들어 낼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 장치는 보여줄 필요도 없었겠지."
그의 대답에 짧게 한숨을 내쉰 김현우는 또 한번 장치를 내려다본 뒤-
"뭐, 어쩔 수 없지."
이내 결정을 내렸다.
####
가디언 길드 옆에 있는 암중길드 사무소.
신생인데도 불구하고 패도 길드와 비슷할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암중 길드 사무소의 지하 집무실에는-
"-그런고로 우선 언론들은 잠재웠습니다."
며칠 전 김현우에게 표정이 안 좋아 보인다는 이유로 휴가를 받은 그녀, 하나린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남자를 보며 슬쩍 손짓을 해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그에 하나린 앞에서 현 상황을 보고하고 있던 그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그 방에서 빠져나갔다.
남자가 빠져나간 뒤의 정적.
하나린은 묘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검은색의 고서를 만지작거렸다.
분명 '능력'을 사용할 때만 하나린에게 나타나던 이 검은색의 책은 이제 평상시에도 그녀가 쥐고 있게 되었다.
"흐음……."
하나린이 그렇게 언령의 서를 멍하니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정했나?]
순간 언령의 서가 펼쳐지며 들려오는 말에 하나린은 슬쩍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돌아와 대답했다.
"아니."
[정말 이상하군.]
"뭐가?"
[뭘 그리 고민하는 거지? 오히려 다른 인간들은 이 몸이 직접 언령에 대해서 서포트해 준다면 영혼을 팔아서까지 받으려 하는데 말이야.]
"그래?"
[당연하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 머저리가 쓰던 언령보다는 낫지만, 네가 쓰는 언령은 아직 반쪽짜리다.]
언령의 서의 말에 하나린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언령의 서를 바라봤다.
"뭐, 사실 고민하는 건 아니야. 이미 배우는 걸로 답은 정해뒀어."
[그럼 뭘 어물쩍 거리는 거냐?]
확실히 하나린은 자신의 부족함을 상기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헌터들 중에서는 사부님을 제외하고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이가 없다고 자부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부님이 말한 이 9계층에 해당한 일.
김현우에게서 미령과 함께 이 세계의 진실을 어느 정도 엿들었던 하나린은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다.
'등반자…… 그리고 정복자.'
정복자는 비교적 최근에 김현우에게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아무튼 요점은 현재 자신의 힘으로는 상대하기에 부족한 이들이 있다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하나린은 이미 언령을 제대로 배우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언령을 배우는 것을 지금까지 어물쩍 넘긴 이유는.
"좀 걸리는 게 있어서."
[걸리는 거라니? 그건 무슨 소리냐?]
하나린은 며칠 전 자신에게 들려왔던 소식을 떠올렸다.
김현우의 첫째 제자이자, 자신과 함께 정복자에게 쪽도 못 쓰고 당한 미령이 수련상태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그렇다면 아주 잠깐이기는 해도 사부님의 옆이 비었다는 건데…….'
그렇다.
그녀가 지금까지 수련을 안 하고 애매하게 각을 재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김현우의 옆(?)이 비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그동안 하나린이 적극적으로 김현우에게 대시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미령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사부님을 꼬시려 하면 곧바로 이를 드러내는 미령.
'차라리 내가 조금이라도 더 강하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심지어 둘이 치고받아도 실력이 거의 동수에 가깝다 보니 지금까지는 상황이 상당히 애매했다.
허나 지금은 어떤가?
'그 꼬맹이가 수련 중이니…….'
지금 김현우의 옆에는 아무도 없다 이 말이었다.
물론 하나린 본인도 김현우의 강제 휴가 덕분에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으나 휴가가 끝난다면 적어도 그 꼬맹이의 수련이 끝나는 동안에는 김현우의 옆에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나름대로의 기정사실(?)을 만들 수 있다면……?'
이득이다, 라고 하나린은 생각했다.
애초에 그녀가 이 멕시코를 넘어 서부를 꿀꺽하려던 이유도 전부 사부님을 위한 것이었고, 이곳에서 나와 힘을 기른 것도 전부 사부님을 위한 것이었다.
모든 것은 사부님을 위해.
그리고 사부님과 맺어질 자신을 위해서였다.
"흐흐-"
[……왜 갑자기 미친 거지?]
잠시 묘하게 헤벌쭉한 표정을 지은 하나린을 본 언령의 서가 떨떠름하게 묻자 그녀는 뒤늦게 표정을 고치며 대답했다.
"잠시, 좋은 일이 생각나서."
아무튼, 하나린에게 있어선 '강해진다'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사부님과의 '기정사실'이었기에 지금까지 나름의 고민을 한 것이었고.
그렇기에-
"역시, 아직은 아닌 것 같아."
하나린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도대체 그게 뭔 소리야! 아까는 이미 배우기로 생각했다며!]
그런 결론에 언령의 서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치자 하나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지금 당장 수련에 들어가면 도중에 못 그만둔다고 했잖아?"
[언령은 내면세계에 들어가 수련을 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터라 중간에 수련을 끊으면 수련효율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은 싫다고 한 거야."
[왜!?]
"당장 휴가기간이 끝나는 다음 주에 할 게 있거든."
하나린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는 듯 입가에 싱글벙글한 미소를 지은 채 이야기 하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언령의 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지금보다도 압도적인 힘을 준다는데 그것보다 중요한 게 뭐라고…….]
"내게는 그따위 힘보다는 다음 주에 할 일이 더 중요하거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언령의 서의 말에 반박하는 하나린의 모습에 언령의 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그럼-]
"?"
[-당장 네가 원하는 날에 빠져 나올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수련을 할 수도 있나?]
언령의 서의 말에 하나린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언령의 서를 바라봤다.
# 192
192. 시체 팔이 잡으러 간다 (2)천호동에 있는 저택 내.
"자."
"잘 받았다."
김현우의 손에 있던 악천의 원천을 받아 든 미령- 아니 괴력난신은 이내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으며 악천의 원천을 자신의 손에 감았고.
그는 그런 괴력난신의 행동을 보며 질문했다.
"그런데 악천의 원천은 왜 필요하다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괴력난신은 입가를 씨익 올리며 대답했다.
"수련 때문이다."
"수련?"
"그래, 이 아이가 내면세계에서 수련을 하고 있다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면'속일 뿐이고, 그 아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내 업을 그대로 얻어가기 위해서는-"
괴력난신은 손에 감고 있는 아티팩트를 한번 드는 것으로 말을 끝냈고 김현우는 그럼에도 슬쩍 못 믿음직스럽다는 표정으로 괴력난신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에 괴력난신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렇게 내가 못 미더운 게냐?"
"솔직히, 그렇지?"
"그래서 아까 그 아이도 잠깐 부르지 않았느냐?"
"뭐, 그것도 그렇지만."
사실 김현우가 처음부터 괴력난신에게 곧바로 악천의 원천을 넘겨주려던 것은 아니었다.
허나 김현우가 노아의 방주에서 나와 무릉도원에 가서 나름대로 상의를 거친 뒤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김현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괴력난신이 아닌 김현우의 제자 미령이었다.
'……굉장히 급해 보였지.'
그녀는 김현우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왜인지 김현우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며 정중하지만 애틋함이 느껴지는 얼굴로 악천의 원천을 빌리고 싶다 부탁했고.
그렇기에 김현우는 지금 괴력난신에게 악천의 원천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했던 거지.'
혹시 괴력난신에게 협박을 당하나?
김현우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괴력난신을 바라봤으나, 그녀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악천의 원천을 바라보다 이내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아."
"왜?"
"그러고 보니 사과를 해야겠구나."
"……무슨 사과?"
김현우가 어리둥절하게 반문하자 괴력난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네가 이 원천을 써서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했던 말은 잊어주거라."
"……네가 했던 말?"
"그래, 말했지 않느냐 나와 교……가 아니라 하룻밤만 같이 자자고."
"……."
김현우가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자 괴력난신은 에휴, 하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이 아이가 다시 몸을 차지하자마자 나에게 그렇게 역정을 내더구나, 그동안 들었던 적 없을 정도로 끔찍한 비명소리였다."
"……아, 그래."
"결국에는 사과하라고 울부짖길래 사과는 한다만…… 솔직히 뭐가 잘못된 것인지 나는 전혀 이해를 못 하겠구나."
괴력난신은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김현우는 물었다.
"……그런데, 미령은 내면세계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만."
"근데 아까의 기억을 어떻게 기억해? 그때 나와 대화했던 건 너잖아?"
김현우가 묻자 괴력난신은 아, 하고 가볍게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거라면 별거 아니다. 지금은 당장 내가 이 몸 밖에 나와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 몸의 주인은 그 아이니, 내가 이 몸을 조종할 때의 일도 자연스레 기억하는 것이지."
"……그런 거야?"
"그런 게다."
괴력난신은 그렇게 대답하곤 이내 볼일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야기 이어나갔다.
"아무튼, 이것으로 볼일은 끝이구나."
"이제 가게?"
"더 남아 있을 필요는 없지. 뭐…… 너도 어디를 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조심하도록 해라."
"갑자기 웬 덕담이야?"
김현우가 떨떠름하다는 듯 묻자 괴력난신은 현관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물론 네가 걱정돼서 하는 덕담은 아니다. 네가 사라지면 이 아이가 벌일 일이 걱정돼서 말한 게지."
"……?"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걸어가는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고, 괴력난신은 피식하곤 현관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아."
그와 함께 기억났다는 듯 탄성을 내뱉은 그녀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무기- 아니, 그 푸른 뱀에게도 내 안부 좀 전해주거라."
"……이무기?"
김현우가 물었으나 괴력난신은 씨익 하는 웃음과 함께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달칵! 띠리링-♪
닫힌 뒤 자동으로 잠긴 자동문.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바라보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뒤, 하수분의 주머니 속에서 여의봉을 꺼내려 했고-
[그…… 그녀가 왜 저기 있나!?]
"그게 무슨 소리야?"
여의봉을 꺼내려 하자마자 들리는 청룡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물음표를 띄웠다.
그리고 조금 뒤-
[……잠시 흥분했군.]
조금 전까지 흥분해 연신 그녀의 이름을 외쳤던 청룡의 사과에 김현우는 골이 아픈 듯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도대체 괴력난신이 누구길래?"
[그녀가 괴력난신으로 불린다고……?]
"그래."
[……그런가, 그녀도 마찬가지로 업을…….]
청룡이 혼자서 납득하듯 중얼거리자 김현우는 궁금증이 도진다는 듯 물었다.
"아니 괴력난신이 대체 누구길래?"
[나도 설명해 주고 싶지만 어떤 말을 해도 필터링이 걸리는군.]
김현우가 궁금증이 도진 이유.
그건 바로 청룡이 그녀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필터링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들어선 안 된다는 듯 바로바로 필터링이 걸리는 청룡의 목소리.
'아니 대체 누구길래?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필터링이 걸려?'
김현우는 그녀의 진명이 궁금했기에 고개를 갸웃갸웃 거렸으나-
[확인해 볼 거면 빨리 하자. 지금 당장 하는 게 낫지 않겠어?]
이내 여의봉 안에서 들려온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궁금해해 봤자 필터링 때문에 알지도 못 하는데.'
애초에 지금 알 수 없는 것을 궁금해해봤자 어차피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김현우는 괴력난신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곤 노아흐에게 받았던 위치장치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린 위치장치.
"정말로 네가 생각한 방법이 될까?"
김현우가 묻자 제천대성은 대답했다.
[만약 내 예상대로라면 당연히 가능하지. 솔직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는 하지만 말야]
그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스읍 거리며 침을 삼켰다.
김현우가 묘하게 긴장한 이유.
그것은 바로 조금 전 무릉도원에 들어갔을 때 제천대성에게 들었던 이야기 때문이었다.
"근두운을 보내자 이거지……?"
[그래, 네가 위치 이동장치를 이용해 근두운을 보낸 뒤, 내 업을 사용하면 근두운이 있는 곳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확인하는 게 안정성은 높겠지.]
"가능한 거 맞지?"
[가능하다니까, 내 업을 사용하면 근두운이 그 어디에 있다고 해도 간접적으로 그곳이 어디인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어.]
물론-
[-그곳을 자세히 보는 건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그곳이 멀쩡한지 아닌지만 확인하면 되잖아?]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만약 그러다 근두운이 허수공간에 빠져 버리면?"
[솔직히 그 경우에는…… 뭐, 목숨을 부지했다는 걸 위안 삼을 수밖에는 없겠지.]
-어쩔 수 없잖아?
제천대성의 이어진 말에 김현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목숨을 거는 것보단 근두운을 잃어버리는 게 나았다.
뭐, 당장 타고 갈 이동수단을 잃는다고 해도 목숨보단 아깝지 않으니까.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쉰 김현우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근두운을 꺼냈다.
근두운을 꺼내자마자 순식간에 주변에 풀려져 집 안을 자욱하게 감싸기 시작하는 근두운.
김현우는 근두운을 한곳으로 모으며 그와 함께 제천대성의 업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마력을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에 튀는 번개와 함께 김현우의 머리 위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금고아가 제천대성의 업을 빌려왔음을 알게 해 주었고, 그와 함께 김현우는 위치이동 장치를 내려두고 그곳에 근두운을 모이게 하기 시작했다.
김현우의 의지에 따라 순식간에 모이기 시작하는 근두운들.
그 모습을 본 김현우는 곧바로 위치이동 장치의 범위 밖으로 자신의 몸을 빼냈고.
"위치이동."
-파직!
김현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함께, 순간 그 자리에서 빛을 내던 위치이동 장치는 이내 파직거리는 빛 한 번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긴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왜인지 허무한 느낌-허나 지금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걸 김현우는 잘 알고 있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는 내 말을 잘 들어, 내 업(業)까지 중첩되어 있으니 네가 근두운을 조종하기는 편할 거야.]
동시에 들려오는 제천대성의 목소리.
그는 곧바로 김현우에게 근두운을 느낄 수 있는 술법을 그에게 알려주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분명 술법에 재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제천대성이 알려주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김현우의 정신이 한층 더 심연으로 빠져들었을 때-
"있다……!"
-김현우는 근두운이 텔레포트 된 곳을 보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그곳의 풍경은 너무나도 기괴했다.
한쪽에 쌓여 있는 그 생김새가 다른 시체들은 보기만 해도 괴리감을 느끼게 해 주었고.
그런 시체더미 아래로 진득하게 흐르는 진흙들은 꿉꿉하고도 질척한 소리를 내 그 음산한 곳의 습기를 더하고 있었다.
빛조차 들어오지 못하고 그저 은은한 붉은 조광만이 자리한 곳에는 보기만 해도 기괴한 버섯들이 한데 자라나 있고-그 주변에는 생명체라고 보기에는 굉장히 애매한 '그것'들이 그저 망령처럼 그 꿉꿉한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세계의 중간.
무척이나 어둡고, 검은 이끼가 잔뜩 껴 폐성의 모습조차도 유지하지 못하는 그 공간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아니,
그것을 여자라고- 아니, 인간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은 말일까?
그것의 왼쪽 팔은 두 개였다.
그것도 평범한 인간의 팔이라기보단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을 주워서 사용하는 것처럼 괴악한 모양이 팔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몸통, 손, 다리, 팔뚝, 허벅지-
그 어디 하나 전혀 인간이라는 표식이 남아 있지 않고, 오로지 다른 것들을 이어붙이고 또 이어 붙여 만들어져 있는 그것은 자신의 오른 팔에 달려 있는 벌레의 다리를 움직였다.
따그라라락
귓가를 가르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성벽 안에 울려 퍼지고- 그녀의 손 안에 하나의 보석이 걸려 나왔다.
영롱한 빛을 띄우고 있는 보석.
마치 시각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 같은 영롱한 검은색 보석을 바라보던 그것은 이내 왼손에 들러붙어 있는 늑대의 팔로 그것을 붙잡았고 이내 씨익 하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구구구궁────!!
그와 함께 그녀의 성 주변에 있던 늪에서 시체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시체는 세계를 구했던 영웅의 시체였다.
그 시체는 하늘을 호령했던 위대한 신수의 시체였다.
그 시체는 지상의 대지를 호령했던 위대한 황제의 시체였다.
그 시체는 오롯이 한 가지의 길로 달려가던 불패의 시체였다.
그 수를 셀 수 없는 수많은 시체들이 늪 밖을 향해 기어 나오기 시작했고, 그 성벽 안에서는 그것이-
"준비는 끝났어, 그러니-"
아니-
"이제, 아주 조금이야……!"
-조율자는 유일하게 남은 인간의 얼굴에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193
193. 시체 팔이 잡으러 간다 (3)그곳은 어느 한 거대한 동굴이었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이 동굴을 유지하고 있는 거대한 돌뿐이었고. 그 이외에 보이는 것이라고는-끼리리리리릭-!
피.
콰지지직!
-벽 주변에 붙어 있는 알록달록한 혈흔과 시체와 아직 그 형체를 유지하고 한 여자에게 달려들고 있는 괴이들뿐이었다.
툭, 투툭!
그녀의 손아귀 힘에 완전히 목이 부서진 천수관음이 힘을 잃고 바닥을 향해 쓰러지고, 그 뒤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벼른 축생귀가 달려든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미령.
분명 기수식을 취하고 있던 그녀의 몸이 허리를 비틂과 함께 앞으로 튀어나가 축생귀의 머리와 명치를 후려친다.
뻐엉-!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명치가 훤히 뚫린 축생귀가 먼지와 함께 소멸한다.
허나 그럼에도 끝없이 미령을 향해 달려드는 괴이들.
미령의 몸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움직이며 달려드는 괴이들을 후려친다.
뒤를 노리는 우산귀의 머리를 발로 차 터트리고 그와 동시에 움직여 아래쪽으로 튀어나오는 토굴귀를 때려죽인다.
이때다 싶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어둑새는 두 날개를 찢어버리는 것으로 생을 마감시키고.
정면으로 달려드는 오니의 명치에 그녀는 스승에게 배운 패왕권을 먹인다.
미령의 귓가에서는 파육음이 멈추지 않고.
괴이들의 몸에서는 파육음이 멈추지 않는다.
마치 끝나지 않을 것처럼, 미령의 손은 달려드는 괴이들을 부서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
미령의 끝없는 살육은 그를 가로막는 거대한 손 하나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손.
미령은 순간 멈칫했으나 이내 피할 것 없다는 듯 거대한 손의 앞으로 다가가 주먹을 휘둘렀고-
"케흑!?"
오히려 그곳에서 튕겨져 나온 것은 미령이었다.
콰가가강!
순식간에 튕겨 나와 벽에 처박힌 미령.
그 주변으로 아직 남은 괴이들이 달려들기 시작하고, 그 순간에-
"유감이구나-"
-괴이들은 사라졌다.
벽을 장식하던 형형색색의 혈흔들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지고, 미령을 공격하던 괴이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진다.
마치 이곳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사라지는 괴이들.
그 속에서-
"끄아아아아아아아아!!!!!!"
조금 전까지 벽에 처박힌 미령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야수와도 같은 비명을 질렀고.
그녀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바라봤다.
"……왜……왜!"
화가 난 것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부끄러운 것인지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은 채 괴력난신을 바라보는 미령.
그의 모습에 괴력난신은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 흐흥- 하는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역시 대단하구나. 지금껏 중간까지밖에 못 왔는데, 그거 한번 했다고 여기까지 오다니. 역시 분노의 힘은……."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라! 왜 그랬나!"
그에 괴력난신은 가볍게 대답하려는 듯 어깨를 으쓱였으나 이내 무척이나 굳어 있는 미령을 보며 이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이야. 네가 사과하라 하도 성화를 부려서 해주긴 했다만, 그게 그리 못 잡아먹어 안달일 정도로 잘못한 일이더냐?"
"뭐……뭐라고!?"
"기왕 같이 쓰는 몸이니 유지보수 좀 거들어준 것뿐이니라. 매일 밤마다 그리 신호를 보내니 이젠 내가 다 몸이 달아서……."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우렁찬 사자후로 그녀의 목소리를 날려 버리는 미령.
괴력난신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가여운지고."
"스……스승님이다! 스승님이라고!"
"그래도 좋아하지 않느냐?"
"그래도 스승님이!"
"사랑하지 않느냐?"
"스승-!"
"밤마다 신-"
"제발 좀 닥쳐! 제발!"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진 미령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자 괴력난신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더니 대답했다.
"아이야. 부끄러운 건 알겠지만, 그리 용써봐야 너만 피곤할 뿐이니라."
"……."
고집 많은 얼굴로 입을 다문 미령.
괴력난신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쯧, 정 끝까지 고집을 부리겠다면야 내 더 참견하진 않으마."
그 대신-
"그렇다면 내 큰 맘 먹고 알려주려 했던 '필살기'도 쓸모가 없겠구나."
"……필살기?"
"뭐, 적이 아니라 수컷의 이성에 일발필중하는 필살기인데…… 보아하니 알려줘도 써먹지도 못할 것 같고. 잊어버려라."
"……나한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지 마라!"
순간적으로 버퍼링이 걸린 미령의 대답에 괴력난신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과연 헛소리일까?"
"……뭣?"
"아이야. 내가 대체 몇 해를 살아왔다고 생각하느냐?"
"그게 무슨……."
"거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긴. 내 남자 경험이 과연 얼마나 될까?"
"……!"
분명 헛소리를 하지 말라고 해놓고, 지금 당장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나 그 눈빛만은 흥미로운 무언가를 찾은 것 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는 미령을 보며 괴력난신은 피식 웃었다.
그런 웃음에 미령은 뒤늦게 아차 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그, 그딴 헛소리에 내가 속을까 보냐!"
"한 방."
"뭐가 한 방이냐?!"
"한 방에 넘어올 수 있다. 네 스승."
"뭣……?!"
미령이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자 괴력난신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이야. 대체 무엇을 그리 의심하느냐? 내 장담하는데 하늘 아래 나만한 요녀가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꼬셔온 남자들이 얼마나 굉장한지 감히 상상할 수 있겠느냐?"
"꼬, 꼬셔……."
"고매한 고승도 내 웃음 한번에 평생 수행이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온 땅을 호령한 제국도 내 몸짓에 홀려서 무너졌다. 그야말로 경국지색! 여자의 무기는 잘만 다루면 100만 대군에도 필적하는 법이니라."
"100만 대군…… 100만……."
"물론 네 스승이 무뚝뚝하기가 목석같아 보기 드문 난적이긴 하나, 사지 건강한 사내가 여인의 유혹에 아주 무덤덤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법. 요는."
음흉하게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괴력난신이 속삭였다.
"내 알려주는 대로만 하면, 한 방에 함락이란 것이다!"
"오, 오오……!"
"아이야. 복 받은 줄 알거라. 남녀상열지사에 애태워 목메는 청춘들의 사연이 천하를 가득 메울진대, 이리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인연인 줄 아느냐? 심지어 그 스승이 수천 년 묵은 요녀라니. 기연도 이런 기연이 따로 없을 것이다."
"기연…… 음. 기연, 기연…… 핫?!"
괴력난신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는 것도 잊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기 시작하던 미령은 또 한번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그래봤자 사술이겠지!"
"난 사술 같은 사특한 방법은 모른다. 그런 건 자기 매력에 자신 없는 사기꾼들이나 쓰는 잡기술!"
"……!"
"물론 알려달라면야 못 알려줄 건 없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건 아무래도 네 자존심이 허락 못할 것 같고…… 어쩌겠느냐?"
미령이 눈을 크게 뜨자 괴력난신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대답이 늦는 걸 보니 필요 없다는 뜻이렷다?"
"읏……나……나는 그런 건 필요 없……!"
인내와 망설임이 뒤섞인 표정으로 입을 여는 미령의 모습.
괴력난신은 그런 미령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은 뒤 말했다.
"아, 그래도 네가 내 업을 온전히 익힌 뒤에는 그 필살기에 대해서 이야기는 해주도록 하마. 뭐, 순수하게 궁금할 수도 있으니까."
"!"
눈을 뜨는 휘둥그레 뜨는 미령.
"뭐, 말했듯이 네가 내 업을 얻기 위해 백귀야행(百鬼夜行)을 모두 처리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녀의 말에 미령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
탑의 1계층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바닥에는 탑을 상징하는 거대한 문양이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에는 한 남자, 아니 한 늑대 수인이 묵묵히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월랑.
그는 1계층의 주인이자, 탑을 오르는 등반자들의 자질을 평가하기 위해 내려와 있는 늑대 수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너……너는 뭐냐?"
"뭐긴 뭐야, 열쇠 내놓으라니까?"
갑작스레 탑 위에서 떨어져 내린 김현우를 보며 당황 어린 말을 내뱉었다.
"열쇠……? 설마 지하계층으로 통하는 열쇠를-"
"그래, 말 잘 알아들어서 기분 좋다 야 나 빨리 지하계층으로 내려가 봐야 하는데 빨리 좀 줘."
월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내밀며 귀찮다는 듯 열쇠를 내놓으라고 말하는 김현우의 모습에 월랑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헛소리하지 마라. 내가 출처도 제대로 모르는 놈한테 지하 계층으로 갈 수 있는 열쇠를 내줄 것 같나?"
월랑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톱을 꺼내들었다.
날카롭게 벼려져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벨 수 있을 것 같은 손톱.
김현우는 뚱한 표정으로 월랑을 바라보았다.
"진짜 안 줄 거야?"
"네가 누군지 알고?"
"진짜로?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재미있다는 듯 피식 거리는 김현우의 말에 늑대는 순간 묘하게 당황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내가 모르는 위쪽 사람인가?'
갑작스레 월랑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평소라면 이런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겠으나 김현우의 당당한 말투에 월랑은 저도 모르게 위축되어 조심스러운 말투를 물었다.
"그, 혹시……."
"뭐?"
"위쪽……분이십니까?"
갑작스레 공손해진 월랑의 태도.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그렇다고 이야기하려 했으나.
[그만 놀리고 빨리 가자. 여기서 시간 끌 필요 없지.]
제천대성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니?"
"그럼-"
"뭐……."
월랑이 제대로 말하기도 전에 김현우는 순식간에 그의 앞쪽으로 이동했다.
적어도 그저 이 탑을 오를 수 있는 최소의 자질만을 평가 하는 월랑에게는 눈으로 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김현우의 움직임.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그의 배에 주먹을 가져다 댔다.
"이런 소리지-"
꽈아아아앙!
그와 함께 월랑의 몸이 튕겨져 나가 1계층의 벽에 처박혔다.
1계층의 벽에 거대한 거미줄을 만든 채 바닥에 쓰러져 리타이어 된 월랑.
"뭐야 엄청 약하네?"
의외라는 듯 김현우가 말하자 제천대성은 대답했다.
[당연하지, 저 녀석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자질을 테스트 하는 녀석이니까. 그보다 빨리 저 녀석에게 가 봐라.]
"그래야지."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가볍게 대답하며 차가운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월랑에게로 다가갔고, 이내 그의 몸을 뒤집었다.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채 개거품을 물고 있는 월랑.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그의 가슴을 향해 손을 집어넣었고.
"……진짜네."
곧 털로 수북한 월랑의 가슴 속에서, 김현우는 하나의 열쇠를 찾을 수 있었다.
동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하나의 열쇠를.
마치 중세시대에서나 볼 수 있던 간단한 모양의 열쇠를 바라보던 김현우는 이내 늑대의 품 사이에 있던 열쇠를 줍고는 월랑에게서 몸을 돌렸다.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김현우.
그는 곧 이 넓은 공동의 동쪽 벽에 섰다.
마녀가 지팡이를 들고 웃고 있는 형상이 그려져 있는 벽 앞.
김현우는 자신이 쥔 열쇠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생각했다.
'고깔모자 중심에 박혀 있는 보석에 틈이 있다고 했지?'
그는 곧바로 고깔모자 형상을 눈으로 훑기 시작했고, 곧 그 모자 사이에 있는 흠을 찾을 수 있었다.
김현우가 들고 있는 열쇠가 들어 갈 수 있을 정도의 틈.
그는 망설임 없이 열쇠를 집어넣었고-쿠그그그그그그긍────!
열쇠를 집어넣자마자 벽화는 곧바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 지팡이를 들고 웃고 있던 마녀는 문의 잠금장치가 풀림과 함께 기괴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고.
곧 기괴한 표정을 짓던 마녀가 반으로 갈라지며 거대한 터널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대신 심연처럼 어두워 보이는 터널.
"여기가 입구인가."
[아마 그렇겠지. 그 영감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김현우는 청룡의 말을 들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잠시 보다 이내 그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시각이 어둠에 잡아먹히고. 김현우의 발걸음 소리만이 조용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김현우가 걸음을 옮긴 지 얼마나 지났을까?
척 척-
김현우의 걸음이 질척거리는 소음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점점 그 안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점 더 질척거리기 시작하는 땅.
그는 내심 인상을 찌푸렸으나 내색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고. 그렇게 또 걸음을 옮긴 지 어느 정도 시간이 되었을 때 김현우는 그 어둠 속에서 은은한 붉은빛을 볼 수 있었다.
'저곳인가?'
어둠 속에서 급작스레 보이기 시작한 붉은 빛을 본 김현우는 이내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질퍽- 질퍽-
곧 그의 바짓단이 질퍽한 무언가로 인해 젖어가기 시작할 때쯤-
"-도착했다."
-김현우는 온 세계가 붉게 물들어 있는 지하세계에 도착할 수 있었다.
# 194
194. 시체 팔이 잡으러 간다 (4)눈에 보이는 것은 마치 도서관과 같은 풍경이었다.
땅바닥에는 딱 봐도 고풍스러운 카펫이 넓게 깔려 있고, 가운데에 새겨진 고풍스러운 책 문양을 중심으로 거대한 도서관이 재현되어 있었다.
그래, 말 그대로 거대한 도서관.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것은 책밖에 없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
벽을 이루고 있는 것도 책장이었고.
장식물로 이뤄져 있는 곳도 책장이었다.
책장 책장 책장.
책 책 책.
오로지 그것뿐인 공간.
그곳에 유일하게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고풍스러운 책 문양 위에 있는 거대한 샹들리에 하나뿐이었다.
딱 하나만 달려 있는 샹들리에.
허나 그럼에도 그 샹들리에에서 나오는 빛은 이 거대하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웅장한 도서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후……."
하나린, 그녀는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 앞에 있는 검은 책이 조금밖에 찢어지지 않은 것을 보곤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책장으로 쓰이고 있는 의자에 앉았다.
누가 보더라도 짜증이 난 모습.
그에 샹들리에 오른쪽, 펼쳐진 테이블에 놓여 있던 언령의 서는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훌륭하군.]
"뭐가?"
[3단계까지 진행하지 않았나?]
"……."
언령의 서의 칭찬에도 하나린은 굳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에 언령의 서는 왜 그녀의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내 혹시나 하는 가정을 떠올리며 물었다.
[혹시, 그자 때문인가?]
"……그자?"
[그래, 네가 사부라고 부르던 그 녀석 말이다. 그러고 보면 2단계 훈련을 끝마치고 밖에 나갔다 왔을 때부터 기분이 안 좋았던 것 같군.]
언령의 서의 물음에 그녀는 인상을 팍 찌푸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하나린의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
그것은 바로 자신의 휴가가 풀리는 그날, 그의 집에 찾아갔을 때 들었던 소리 때문이었다.
'사부님이 장기로 자리를 비우시다니…….'
하나린은 저택에서 배를 까뒤집은 채 자고 있던 구미호에게 들었던 소리를 떠올리며 괜스레 자신의 어깨에 메고 있는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그와 함께 살짝 진정되는 기분.
허나 역시 기분이 꿀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회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기회는 그녀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 꼬맹이가 딱 빠져 있는 틈이었는데……!'
"으으으으~"
하나린은 저도 모르게 칭얼거리는 목소리를 내며 괜스레 의자 아래에 꽂혀 있던 책을 뒤꿈치로 후려쳤다.
콰드드득!
박살이 나버리는 책들.
분명 입에서 나온 소리는 칭얼거리는 소녀의 목소리였건만, 그 과정에서 이뤄진 것은 상당히 과한 무력이 만들어낸 무엇인가였다.
그렇게 기분이 꿀꿀해 보이는 하나린의 모습에 언령의 서는 대충 현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비록 책이었으나, 그와 함께 있던 수백, 수천 대를 넘은 고서장들 중에는 분명 이런 비슷한 상황을 겪던 이들이 있기는 했었다.
'저렇게 맹목적이진 않았지만.'
언령의 서는 그런 하나린을 관찰했다.
3단계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그녀의 칭얼거림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지금에 와서는 사소한 것 하나에도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러면 좋지 않은데.'
-그 모습을 보며, 언령의 서는 저도 모르게 초조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언령의 서는 하나린에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한시라도 빠르게 '고서장'을 찾아야 했으니까.
물론 당장 그녀가 고서장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이 위태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고서장이 공석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이 도서관의 힘은 점점 쇠퇴한다는 것을 언령의 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조급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고서장을 찾는 게 힘을 보전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잠시간의 침묵이 지난 뒤, 언령의 서는 하나린을 떠보았다.
[그 사부라는 자를 꼬시려 하는 거냐?]
언령의 서의 말에 휙 돌아가는 하나린의 고개.
그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생각과 함께 다음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그렇게 짜증을 낼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하나린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언령의 서는 말했다.
[지금 네가 배우고 있는 건 언령이다. 한 마디로 네가 언령을 최종단계까지 배워 고서장이 되면-]
"사부님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언령의 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한 그녀를 보며 그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그리고, 그 대답과 함께.
"지금 나한테 사부님의 마음을 가지고 놀라고 말하는 거야?"
곧바로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적의에 언령의 서는 당황하며 말을 바꿨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의도가 뭐야?"
[…….]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하나린의 모습에 언령의 서는 저도 모르게 없는 입을 벌리곤 하나린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녀와 같이 있던 시간이 길지 않았으나 언령의 서는 나름대로 하나린에 관해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명 일처리를 하는 그녀의 스타일은 상당히 냉철했고. 그녀는 일이 복잡해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언제나 일 처리를 빠르고 간단하게.
타인의 시선에서 보면 냉철하고 가차 없게 한다는 것을, 언령의 서는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사부님'이라 하는 그 남자에게 어느 정도 헤픈 면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이야.'
언령을 사용하라고 말하자마자 노골적인 적의를 들어낼 정도일 줄은 몰랐다.
'쯧.'
솔직히 언령을 가르쳐준다고 해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적의를 내뿜는 것에 대해 언령의 서는 불만을 품었다.
하지만 결국 지금 상황에서 갑은 그녀였고 을은 본인이었기에 언령의 서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입을 열었다.
[내 말은, 그러니까-]
"뭔데……?"
[……그, 그래 그렇지! 네가 방해된다고 하던 그 꼬맹이라고 하던 애 있지 않나? 그 녀석에게 언령을 사용하라는 소리였다.]
"……꼬맹이한테?"
[그래!]
언령의 서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한 본인의 상황 대처능력에 감탄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하나린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언령의 서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괜찮은데……?"
[그렇지?]
"그런데 언령을 전부 배우려면 5단계를 전부 배워야 하는 거 아니야?"
[맞다. 전지전능의 단계까지 다가가려면 5단계는 습득해야겠지. 허나 네 언령이 5단계에 도달하기만 하면 너는 분명 그 꼬맹이를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
언령의 서의 말이 끝나고 하나린이 또 한번 고민하기 시작했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 후.
"뭐, 좋아."
그제야 짜증을 내던 얼굴을 핀 하나린은 그렇게 대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에 따라 그녀는 자신의 언령을 연습하던 책 앞에 섰다.
언령의 다섯 단계.
그중에서도 무생물에게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3단계를 연습하고 있었던 하나린은 이내 1단계와 2단계에서 했던 것처럼 '언어'에 힘을 담았다.
그녀가 이전에 했던 '마력'의 움직임을 조종하는 것이 아닌.
언령의 서에게 배웠던 진짜 '언령'.
그리고-
"반으로 갈라져서 죽어."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또 한 번 책이 찢기기 시작했다.
####
모든 것인 진흙으로 질척한 세계.
"이런 썅!"
꽝!
그 속에서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거대한 괴물을 죽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피를 터트리며 죽는 뱀 괴물.
그 거대한 육체가 일순간 하늘을 향해 붕 떠오르고, 이내 질퍽한 늪에 처박힌다.
-철퍽!
그 거대한 체구가 떨어졌다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자그마한 소리.
그와 함께 뱀의 시체가 늪지대에 먹혀들어가는 것을 보며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머리를 긁적거리며 주변의 풍경을 돌아봤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기괴하게 생긴 버섯들.
그 아래로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삼키고 있는 듯한 늪지대가 꿀렁거리며 움직이고 있었고, 그 위에는 절벽들이 무분별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게다가 그런 풍경이 어디서 새어 나오는지 모를 붉은 광원에 은은히 비추고 있는 덕에 김현우가 보고 있는 지하세계는 상당히 기괴했다.
허나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씨발…… 냄새 존나 구리네!'
-김현우의 후각을 자극하는 시체 썩은 내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분명 김현우는 이 지하세계에 내려온 지 4일이 지났고, 그렇기에 후각도 어느 정도는 마비되었으나 가끔가다 느껴지는 이 시체 썩은 내는 그야말로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하세계를 이동하다 보면 가끔가다 몰려나오는 기괴한 괴물들은 김현우의 기분을 더더욱 좆같이 만들어 주었다.
어느 특정한 때 없이 거의 반영구적으로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들은 그 종류도 굉장히 다양했다.
기본적인 동물의 모습부터 시작해서 거대한 곤충까지.
물론 그 괴물들이 김현우에게 별로 위협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이 나타날 때마다 풍기는 악취는 김현우의 기분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엔 충분했다.
거기에 덤으로 김현우의 기분이 기본적으로 마이너스 이유는-
"대체 조율자 이 새끼는 어디에 있는 거야!?"
그가 이 지하계층에서 조율자를 찾기 위해 표류한 지 4일이라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이곳은 무언가를 찾기에는 골치 아프게 되어 있군. 하늘이 막혀 있다 보니 날아서 찾아보는 것도 불가능하고.]
인상을 찌푸린 김현우의 머릿속에 들려온 제천대성의 목소리.
김현우는 탄식하며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율자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살고 있는지도 정보를 좀 모아볼걸.'
허나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김현우는 이미 이 지하 계층에서 4일째 표류 중이었고, 이 지하계층의 중심부를 돌고 있었으니까.
크에에에엑!
사고를 이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곧바로 땅바닥에서 튀어나오는, 마치 늑대의 형상을 한 진흙덩어리의 모습에 김현우는 곧바로 늪에서 튀어나온 늑대의 머리를 후려찼다.
쾅! 파사사삭!
머리가 터져 쓰러진 늑대.
아니, 형상이 늑대일 뿐이지 정확히는 늑대의 형태를 하고 있는 무언가를 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한숨을 내쉰 뒤 시선을 돌리곤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곳에 있어봤자 지속적으로 저런 괴물이 나타난다는 것을 김현우는 알고 있었으니까.
쿵!
김현우의 몸이 순식간에 동굴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이 날아오르며 그나마 보이는 주변의 풍경을 관찰한다.
허나 특별한 것은 없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진흙과 사이사이에 올라 있는 절벽.
그리고 이끼가 잔뜩 껴 있는 폐성뿐.
"응?"
'폐성?'
순간 김현우의 시선이 빠르게 되돌아간다.
"……!"
김현우의 시선이 멈춘 그곳.
그곳에는 폐성이 있었다.
물론 누군가가 산다고 하기에는 이끼가 끼고 성의 윗부분이 날아가 있어 주거 공간으로는 부적합해 보였으나.
김현우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실질적인 것보다도 이 지하계층의 똑같은 풍경에서 처음으로 다른 건물을 봤다는 것이었다.
한동안 짜증을 내포하고 있던 김현우의 표정이 슬쩍 변하고, 그의 움직임이 한층 빨라진다.
순식간에 이끼가 낀 성쪽으로 몸을 움직인 김현우.
그리고-
"!?"
김현우는 어느 순간, 자신의 앞에 나타난 수많은 괴물들을 보았다.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척 보기만 해도 일백은 가볍게 넘을 것 같은 괴물들.
괴물이라고 하기에는 사람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것도 있었고, 김현우가 지금까지 본 진흙괴물과는 다르게 제대로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김현우는-
'이렇게 몰려 있는 거 보니까, 이 안에 뭐가 있기는 있나 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 195
195. 시체 팔이 잡으러 간다 (5)김현우의 시선이 돌아간다.
보이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본 괴물들이 아닌, 어느 정도 제대로 된 형상을 갖추고 있는 괴물들.
확실하게 각각의 형태를 잡은 채 김현우의 눈에도 확연히 구분 될 정도로 세밀하게 만들어진 무기를 들고 그를 견제하고 있는 괴물들.
그중에는 당연히 인간도 있었고, 또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는 괴물들도 있었다.
인간부터 시작해 동물 , 곤충 , 식물 등등. 척 보기만 해도 그 외양이 전혀 달라 보이는 수많은 괴물들이 오로지 김현우만을 바라본다.
마치 성을 지키듯 뭉쳐 있는 괴물들을 보며 미소를 짓는 김현우.
그가 달려들기 직전-
[조심해라.]
불현듯, 제천대성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지금까지 상대한 그 괴물들은 모르겠는데, 저것들은 평범한 시체가 아니야.]
"뭐?"
[그렇군, 내가 봐도 저건- 평범한 시체처럼은 보이지 않는군.]
그의 머릿속에 차례대로 울리는 제천대성과 청룡의 목소리에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릴 때쯤-
"!"
먼저 달려든 것은 한 남자였다.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제대로 들기 힘들 정도의 거대한 대검을 쥐고 있는 남자.
그는 김현우의 머리통을 쪼개 버릴 듯 거대한 대검을 내리치고, 김현우는 살짝 놀라면서도 몸을 뒤틀었다.
꽝!
단 한순간의 차이로 땅을 찍어 내린 남자의 대검.
김현우는 그가 대검을 땅에서 뽑아내기 전에 그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 일권을 날렸다.
뻥!
북 터지는 소리가 지하계층에 울려 퍼지고 순간 저 멀리로 날아가는 남자.
그와 함께-
"!"
쾅!
김현우를 향해 괴물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김현우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 그들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그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뭐야 얘들?'
그리고 그렇게 달려드는 괴물들을 보며 김현우는 살짝이긴 하나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조금 다를 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분명 그들이 가지고 있는 외형을 볼 때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다를 것은 예상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쾅!
김현우의 오른쪽에 새의 발톱이 들어오고, 그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비트니 기다렸다는 듯 등 뒤에 공격이 들어온다.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연계.
분명 일백이 넘는 숫자인데도 불구하고 공격의 겹침 없이 순차적으로 공격을 넣는 괴물들, 거기에다가-
'신체능력도 상당하다.'
이전에 만난 괴물들은 김현우의 주먹 한 방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건만 조금 전 그의 일격을 맞은 남자는 어느새 다시 일어나 이 대열에 합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들리는 목소리.
[이 녀석들, 전부 등반자인 것 같은데?]
"뭐? 등반자?"
[뭐 그래봤자 업은 전부 빠져버리고 그저 행동만이 남아 있는 찌꺼기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것들은 등반자의 시체를 모아 만들어낸 것 같은데? 뭐 그래도-]
제천대성의 공격이 끝남과 함께 그의 명치를 향해 찔러드는 하나의 단검.
김현우는 단검을 쳐낸 뒤,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네 상대는 아니야.]
그와 함께 달려들던 괴물들이 마력의 폭풍에 휘말려 날아간다.
파직! 파지지지직!
김현의 몸에 붉은 번개가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김현우의 머리가 삐죽하게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만들어지는 흑익과 흑원.
쾅!
지하 세계에 일순 검붉은 번개가 내리치고, 김현우의 뒤에 만들어져 있던 흑익이 넓게 펴진다.
그와 함께 사방으로 떨어지는 붉은 번개.
그 속에 휘말리기 시작하는 괴물들을 보며 김현우는 도약했다.
츠팟!
순식간에 사라지는 신형.
그의 모습이 조금 전 옆구리를 노렸던 새의 앞에 나타난다.
김현우가 나타나자마자 그것은 곧바로 대응하기 위해 발톱을 내밀었으나-빠아아악!
그것의 발톱은 김현우의 몸에도 닿지 못한 채 잘게 부수어져. 늪지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것을 기점으로 달려들기 시작하는 괴물들.
플레이트를 입은 남자의 대검이 김현우의 옆구리를, 늑대의 형상을 한 그것이 날카로운 이빨로 김현우의 오른발을.
등 뒤와 동남쪽에서 날아오는 단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호랑이 수인.
그 이외에도 시간차로 쏟아질 것을 미리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각자의 무기를 들고 김현우의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하는 그들.
다른 사람이라면 눈앞이 깜깜해질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주변을 돌아봤다.
그리고, 괴물들이 멈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멈춘 것처럼 보일 뿐.
오로지 김현우가 보는 그 인지 속에서, 그 괴물들은 거의 멈춘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한 것은 바로 인지의 극대화.
예전에는 김현우 자신도 모르게, 그저 위급한 순간에나 본능적으로 사용 할 수 있었던 기술을, 김현우는 청룡에게 받은 수련으로 인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상태에서 몸을 인지에 맞게 움직이는 건 몸에 부하가 걸려서 하지 못하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하지.'
그와 함께 김현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몸을 옮긴 곳은 바로 대검을 든 남자가 있는 곳.
무표정한 얼굴로 대검을 휘두르고 있는 남자의 품속으로 파고 들어간 김현우가 그의 몸을 살짝 밀어 올리는 것으로 그의 공격을 무효화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몸을 방어한다.
그 남자의 몸은 김현우의 몸을 가볍게 가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으니까.
그 한 번의 행동으로 인해 오른쪽에서 김현우에게로 들어오던 공격이 모조리 상쇄된다.
남은 것은 왼편을 향해 들어오는 공격들.
단검을 밀어 넣는 도적.
하늘에서 떨어지는 호랑이 수인.
발을 노리고 달려드는 늑대.
김현우는 곧바로 다음 행동을 개시했다.
제일 처음 한 것은 명치를 향해 찔러 넣고 있는 도적의 손을 붙잡는 것.
단검이 김현우의 명치에서 얼마 남지 않은 타이밍에 멈추어지고, 그는 곧바로 단검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푹!
단검을 끌어내리자마자 타이밍 좋게 달려들던 늑대의 머리에 단검이 꽂히고, 김현우는 오른 발을 움직여 머리에 단검이 꽂힌 늑대를 차낸다.
도적은 잡히지 않은 왼손을 활용하려 했으나, 이미 그녀의 몸은 김현우의 의지에 의해 허공에 붕 뜬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쿠드드드득!
하늘에서 떨어지는 호랑이 수인의 손에 몸이 이등분된 도적.
김현우는 남자를 어깨로 미는 것과 함께 자리를 이탈해 호랑이 수인의 손톱을 피하고 곧바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펑!
터져나가는 그의 머리.
그것을 끝으로, 김현우의 인지가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느려졌던 괴물들이 원래의 속도로 돌아오기 시작하고, 허공을 날고 있었던 괴물들의 파편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그리고, 김현우는 계속해서 움직인다.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을 검붉은 번개로 떨어뜨리고-병장기를 들고 달려오는 괴물의 머리를 주먹으로 깨부수며-빠른 속도로 그의 몸을 노리는 동물들의 몸을 발로 터트린다.
그리고-
"후-"
김현우의 근처에 떨어지는 검붉은 번개가 사그러들기 시작했을 때, 그의 곁에 남아 있는 괴물은 없었다.
다만 파편들이 절벽 곳곳에 흐트러져 있을 뿐.
[역시 등반자의 시체이기는 해도 그저 시체일 뿐인가.]
[저기서 뭘 더 바라? 보니까 그냥 기억을 유지한 신체만 되돌려 놓은 수준이구만]
짧게 중얼거리는 청룡의 중얼거림에 제천대성이 대답하고, 김현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성을 바라봤다.
성의 80%가 이끼에 감싸여 있는 폐성.
멀리서 볼 때는 몰랐으나 가까이서 보니 그 특유의 기괴한 느낌이 더더욱 잘 와닿았다.
정말 이런 곳에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기괴한 모습.
그런 폐성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김현우는 이내 걸음을 옮겨 완전히 박살이 나 있는 폐성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쯧."
입구의 근처에 다가오자마자 코를 찌르는 알싸한 냄새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뭔 냄새야?'
마치 중세시대에 있었다던 알싸한 시약 냄새가 이것과 비슷할까?
자신의 코를 뻥 뚫는 듯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린 김현우는 곧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불이 켜져 있지 않은지 상당히 어두운 성 내부.
그럼에도 김현우는 한 번의 막힘없이 걸음을 옮겨나갔고, 곧 어느 정도 걸음을 옮겼을 때, 그는 성의 내부에 들어 올 수 있었다.
"……."
성의 내부는 말 그대로 김현우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펫은 이미 닳고 찢어져 제대로 된 행색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고, 성 가운데에는 샹들리에가 박살 난 채 떨어져 있었다.
그 이외에도 보이는 세월의 흔적들.
박살 나 있는 외벽.
여기저기 훼손된 벽화.
그 어느 것도 정상이 아닌 그곳에서 김현우가 조용히 감상을 하고 있을 때.
"밖이 소란스럽다고 생각했더니, 손님이 왔네?"
미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나 김현우가 그 목소리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을 때-
"이런 미친"
그는 욕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지하 계단에서 걸어 나온 그것의 모습은 그가 지하계층에 오고 나서 보았던 모습 중 제일 역겨운 모습이었으니까.
[……저건 좀]
[심하군.]
제천대성과 청룡도 떨떠름한 말투로 중얼거렸고.
그녀는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피식거리다니 입을 열었다.
"이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는 것 같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질색한다는 표정으로 대답한 김현우.
적어도 그가 보기에 그녀의 몸은 괴악한 것을 넘어 끔찍했다.
그래.
그냥 그 단어 하나로 정의가 가능했다.
'괴악하다 못해 끔찍한'
김현우의 부족한 어휘력으로 그녀를 표현하기에는 그게 최적의 선택이었다.
허나, 그런 김현우의 질색하는 듯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는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다그그그륵-!
그녀는 자신의 팔쪽에 달려 있는 곤충의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물었다.
"뭐,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뭐야?"
그녀의 물음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물었다.
"네가 '조율자'냐?"
그의 물음에 그녀는 스윽 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분명 얼굴만 보면 상당히 미형임에도 불구하고 얼굴 빼고는 모조리 뒤바뀌어 있는 신체는 미형의 얼굴을 1차원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했다.
"맞아, 내가 조율자가 맞아."
"……조율자가 왜 그딴 꼴이야?"
김현우가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묻자 그녀는 대답했다.
"이게 가장 아름다운 몸이거든-"
"……뭐?"
"말했잖아? 이게 가장 아름다운 몸이라고, 아-"
-고작 필멸자인 네게는 조금 어려운 말이었을까?
그녀는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거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고마워?"
"뭐?"
"마침 실험체가 필요했거든, 전부 완성이 되기는 했는데 아직 실험을 할 실험체를 못 구했단 말이야? 게다가 너도 이곳까지 와봤으면 알겠지만 여기는 '살아 있는 것'이 없거든."
"……그게 뭔 개소리야?"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인상을 찌푸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뭐, 그래서 이제 내 실험체가 될 거니까 감사 인사는 제쳐두고 내 소개부터 제대로 하는 게 좋겠지?"
"저기요, 갑자기 이야기하다가 급발진하시는데 돌았습니까?"
그는 그렇게 비아냥거리며 노골적인 적의를 표했으나 그녀는 여전히 김현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 얼굴에는 미소를 만들며-
"나는 손에 들어온 것들을 조율하고, 관리하며 만들어내는-"
그렇게.
"군락(群落)이라고 해."
-미소를 지었다.
# 196
김현우의 말은 애초에 듣지도 않는다는 듯, 자신을 군락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곤충의 팔을 움직였다.
196. 시체 팔이 잡으러 간다 (5)
따그라락-
그녀의 모습과 함께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긴장시키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침묵-
조금 전까지 자기 멋대로 떠들고 있던 그녀의 입가가 다물어지고, 다리 사이로 흘러나온 어떤 곤충의 다리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어찌 보면 그로테스크하고,
또 어찌 보면 굉장히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그곳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그녀의 공격이 언제 날아올지 몰랐기 때문에.
꾸드드득-!
마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에 김현우의 눈가가 찌푸려지고, 그에 반에 그녀의 입가는 가볍게 호선을 그린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조율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는 네가 조율자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김현우의 노골적인 조롱.
허나 그녀는 그런 그의 말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유감이지만 너는 이 몸의 '진짜'를 보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진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 몸이 멀쩡하다고 생각하냐? 내가 볼 때는 완전히 걸레가 따로 없는데?"
삐그르륵-
김현우는 그녀의 팔 위에서 여기저기로 움직이는 곤충 다리를 보고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하자 그제야 군락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웃고 있던 입가가 슬쩍 다물어지는 모습.
분명 얼굴만 보면 틀림없는 미형임이 분명하나,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괴악한 신체는 그런 미형의 얼굴을 오히려 역겹게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 이상의 이야기는 불필요한 것 같구나."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입을 열며 하며 자신의 몸 여기저기서 곤충의 다리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쿠득- 쿠드드득!
맨살에서 곤충의 다리가 뽑아져 나오는 모습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고.
"!"
그와 함께 군락의 몸 안에서 튀어나온 벌레의 다리들이 순식간에 김현우에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에 김현우의 앞까지 도달한 다리들.
분명 처음 살을 뚫고 나왔을 때만 해도 그리 길어 보이지 않았던 곤충의 다리는 순식간에 늘어나 그의 급소를 노렸다.
그러나-
"-"
김현우는 기습적으로 쇄도하는 곤충의 다리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쾅! 콰가가각!
"!"
김현우는 지금 쇄도하고 있는 곤충의 다리보다도 빠른 공격을 이미 몇만 번이고 맞닥뜨려 보았으니까.
머리.
심장.
오른쪽 허벅지.
왼팔.
김현우는 제각각 다른 곳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그것들을 단 한 걸음을 내딛는 것으로 피해냈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마자 그의 몸을 기가 막히게 피해 성벽을 공격하는 다리들.
그와 함께-
팟!
-김현우는 곧바로 그녀를 향해 도약했다.
"!!"
순간적으로 나타난 김현우의 모습에 군락의 눈이 커졌으나 그는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꽝!
"끄아아악?!"
-그녀는 전투 불능이 되었다.
"?"
"끄아아아악!"
순식간에 일어난 일.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저만치 날아가 자신의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러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현우에게 날렸던 벌레의 다리는 이미 이리 꺾이고 저리 꺾여 더 이상의 제대로 된 활용이 불가능해 보였고.
김현우에게 맞은 몸통 쪽은 어깨 쪽이 완전히 날아가 버려 검은색의 진흙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 누가 봐도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태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군락의 상태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
"끄아아아악!"
여전히 비명을 지르는 군락.
김현우는 그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긴장을 놓지는 않았다.
이유?
'이렇게 가볍게 끝날 리가 없는데?'
김현우는 지금까지 그가 겪어왔던 일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그가 맨 처음 등반자인 천마를 상대했을 때부터 시작해서 가장 최근에 상대한 빙정까지.
김현우가 상대했던 등반자나 정복자들은 이렇게 쉽게 끝나는 경우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군락을 보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나를 끌어들이려 하나?'
평소 같았으면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고 마지막 일격을 내기 위해 달려갔을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방에 눕는다고?'
김현우는 단 한 방을 내질렀을 뿐이었다.
마력을 이용해 친 것도 아니었고.
묘리를 이용한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기본적인 전투력을 알아보기 위해서 휘두른 빠른 잽.
그런데 이런 끔찍한 지하계층에 사는 그녀가 그 잽 한 방에 누울 정도로 약하다?
'……밖에 있는 괴물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김현우는 이 성 밖에 있는 괴물들을 떠올렸다.
당장 지하계층의 초입에서 봤던 녀석들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성 근처에서 보았던 그것들은 적어도 저기에 쓰러져 있는 그녀보다 전투력이 높았다.
"……."
"아파! 아프다고!"
김현우가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도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트는 군락.
그녀의 몸에서 흐른 검은색의 진흙이 대리석을 땅바닥을 적신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던 김현우는 잠깐의 고민을 끝낸 뒤,
'……우선은 끝낸다.'
그렇게 생각하며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김현우의 몸이 순식간에 그녀의 앞에 도달하고, 그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군락의 몸에 발을 내리찍었다.
꽝! 꽈드드득!
"끄아아아가아아아악!!"
묵직한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군락의 비명.
완전히 박살 나버린 군락의 몸이 여기저기로 터져 나오고, 그는 곧바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군락의 머리통을 잡아챘다.
콰득!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만드라고라의 비명처럼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는 군락.
김현우는 일체의 망설임 없이 주먹을 움켜쥐어 그녀의 머리를 터트렸다.
"…."
그것으로 끝.
"……."
김현우는 군락이 쓰러지고 난 뒤,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에 대비하며 주변을 돌아봤으나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말 그대로 그것으로 끝.
"…도대체 뭐야?"
김현우는 군락의 흩어져 있는 몸 조각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이렇게 쉽게 끝난다고?"
[……그러게?]
김현우가 중얼거리자마자 동감이라는 듯 대답한 제천대성은 완전히 박살 나버린 군락의 시체를 보곤 대답했다.
[……좀 이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너는 어떤 부분이 이상한데?"
김현우가 의견을 묻자 제천대성은 슬쩍 고민하듯 말을 줄이다 이내 생각을 정리한 듯 말을 이었다.
[저 몸 말이야.]
"……저 몸?"
[그래 네가 죽인 몸.]
"그게 왜?"
[아무래도 저 몸은-]
쿠그그그긍-
제천대성의 말이 전부 끝나기도 전에 울리기 시작하는 땅.
그에 김현우는 제천대성과의 말을 멈추고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땅을 바라보았고-콰가가가가각!!!!
무언가가 지하에서 터져 나옴과 함께 김현우가 있던 성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너지기 시작한 폐성의 잔해들이 김현우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시야가 흙먼지에 더렵혀진다.
허나 김현우는 간단하게 도약하는 것만으로도 무너진 성벽들을 뚫고 그 위로 올라올 수 있었고.
"……이런 썅."
김현우는 하늘 위에 떠 있는 거대한 사룡(死?)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것을 사룡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분명 몸체와 얼굴은 마치 청룡과 비슷한 몸체였으나, 그 몸체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곤충의 다리는 분명 지하 계층의 윗벽을 붙잡고 있었다.
그래, 저건 마치 사룡이라 기보다는-
"……지네?"
-지네라고 표현하는 게 맞아 보였다.
[미친-]
[……허.]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곧바로 들려온 제천대성과 청룡의 목소리.
그리고-
"네 녀석. 보통 인간이 아니구나……!"
곧바로 들린 괴악한 목소리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군락의 목소리는 이전에 들려줬던 미성과는 완전히 다르게 괴악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치 칠판을 긁는 것 같은 목소리.
김현우는 대답했다.
"그럼 보통 인간이면 이곳까지 오겠냐? 이거 완전 빡대가리 아니야? 진짜 조율자 맞냐?"
"뭐, 뭐라고?"
"진짜 조율자 맞냐고. 어떻게 너 같은 놈이 계층을 조율했지? 그냥 자기 몸 조합해 놓은 것을 봐도 완전히 개판인데."
김현우의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 조금 전까지 땅을 붙잡고 있던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지하계층의 땅을 부수기 시작했으나 김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선 도발해서 무슨 능력인지 확인이나 해야지.'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남기며 노골적인 조롱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조롱을 얼마쯤 지속했을 때.
[위다!]
"!"
청룡의 발작적인 외침에 김현우는 순간적으로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공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몸을 뒤틀었고-꽝!
조금 전 자신이 서 있던 곳에 떨어져 내린 시커먼 번개를 보며 인상을 굳혔다.
'뭐야?'
[또 온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기도 이전 순식간에 주변에 뿌려지는 번개들을 보며 그는 또 한 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콰드드득!
"!?"
김현우는 자신의 몸을 얼리기 시작하는 냉기와 동시에-
"이건 또 뭐야!"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번개가 투명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이외에도 갑작스레 벌어지기 시작하는 이상 현상.
그에 김현우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제천대성의 업을 빌렸다.
콰가가가가강!
김현우의 몸에 달라붙던 냉기가 떨어져 나가고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이지 않는 번개가 그대로 소멸해 사라진다.
그리고 일순 모든 공격을 무효화 하는 데 성공한 김현우는 금강여의봉을 자하계층의 전장에 매달려 있는 지네에게 조준한 뒤-
"후읍!"
그대로 쏘아 보냈다.
쐐에에엑-!
김현우의 명령에 따라 지네의 몸체만큼 거대해진 여의봉이 지네를 향해 날아간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여의봉.
그런 속도임에도 불구하고 지네는 거대한 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빠른 몸놀림으로 여의봉을 피해 어느 절벽에 안착했다.
콰드드드드득!
지네의 다리에 의해 갈리는 절벽.
'뭐 하나 쉽게 끝나는 법이 없네.'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가 혀를 차고 있을 때, 청룡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녀석,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군.]
잔뜩 굳어 있는 청룡의 목소리.
"뭐?"
그의 말에 김현우가 설명을 해보라는 듯 되물었고, 곧 청룡은-
[업을 기워 붙였다.]
-그렇게 답했다.
"뭐? 업을 기워 붙여?"
"흐흐흐, 필멸자 주제에 그래도 보는 눈은 있구나."
김현우가 청룡에게 했던 말을 들었는지 무척이나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그녀는 마치 과시하듯 자신의 몸을 펼쳤고, 그에 제천대성은 청룡의 말을 이어받아 설명했다.
[그래 내가 전에 말했지? 이곳은 소멸한 시체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그랬지."
[지금 저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소멸해 이쪽으로 떨어진 등반자들의 시체를 자신의 몸에 기워 붙인 거야. 당장 뱀 대가리의 시체도 있군.]
"뭐? 저게……?"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벌레의 다리가 달려 있는 몸체를 바라보았다.
분명 용의 형상을 하고 있기는 하나 뿔이나 이전에 보여줬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완전히 다른 시체인 줄로만 알았다.
김현우가 그렇게 지네를 관찰하고 있자 청룡은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건 내 동료 중 하나인 현무의 것.]
[……우 형의 것도 들어 있군.]
[당장 내가 보기에도 기워 붙인 시체의 수가 다섯은 되어 보이는군. 하지만 그것보다 문제인 건-]
청룡은 잠시 말을 끊은 뒤,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지금 저 녀석은 기워 붙인 등반자들의 업을 일부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뭐?"
김현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벌리자, 제천대성은 청룡의 말에 긍정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해, 아까 너한테 떨구던 번개는 분명 뱀 대가리의 번개다.]
"……그럼 설마 조금 전 내 몸을 얼어붙게 했던 그건-"
[아마 빙정의 냉기겠지.]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허 하는 표정을 지으며 지네를 바라봤고, 군락은 이내 끼리릭 거리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말했다.
"나를 다시 소개하도록 하마. 깨달은 불멸자야."
그와 함께 그녀의 주변으로 아까 보았던 검은색의 번개를 떨어뜨리며-
"나는 영락한 모든 것들을 합치고, 그들의 힘을 받아들인 자. 그렇기에 나는-"
그렇게-
"여왕(Queen Ant)이라고 한다."
-자신을 소개했다.
# 197
197. 시체 팔이 잡으러 간다 (7)아까와는 달라진 자기소개.
그녀는 끼리릭 거리는 소리를 내며 둥그런 절벽을 휘감은 상태로 김현우를 쳐다봤다.
그런 '군락' 아니, 여왕의 모습에 김현우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금붕어야? 무슨 말을 5분도 안 돼서 바꿔?"
그의 노골적인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여왕은 이전처럼 굳은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 오히려 즐겁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필멸자야, 아까 전의 그 미약한 육체와 이 육체가 같다고 보는 거냐?"
"똑같은데? 둘 다 걸레짝이잖아?"
"그렇게 해서 내게 감정을 끌어내려 해도 소용없단다. 아주 미약하나 '부동심(不動心)'의 업도 가지고 있으니-"
-고작 그 정도로는 내 마음을 흔들 수 없다.
마치 재롱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짓는 여왕의 모습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지랄하고 있네, 아까 좀 비아냥거리니까 곧바로 죽일 듯 달려들더니만."
김현우의 비아냥.
순간 여왕의 몸이 멈칫했으나 그녀는 마치 대인배를 연기하듯 김현우에게 달려들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네가 아까 전의 봤던 그 몸은 틀림없는 나, '조율자'이자 '군락'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몸은 '군락'이 아니지."
그와 함께 지네로 변했던 그녀의 몸이 절벽을 타고 기어오르며 자신의 입을 쩌억 벌렸다.
그 사이로 떨어지는 검은색의 진흙.
"지금의 나는 이곳에 떨어진 모든 등반자의 업을 짊어지고, 그들의 업을 하나도 빠짐없이 조화롭게 휘두를 수 있는 여왕(Queen Ant)이다!"
마지 자아도취를 하듯 순간 높게 올라가는 그녀의 목소리.
그녀는 김현우의 굳은 인상을 보고는 마치 놀리듯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 거라 불멸자야, 원래 하려던 실험은 못 하게 되었으나 나는 마음이 넓으니까."
특별히-
"네 육체를 사용해 '군락'의 몸을 다시 구성하는 것으로 네 죄는 없애주도록 하겠다. 나는 아직 계속 연구를 해야 하니까."
"지랄."
그녀의 비릿한 웃음이 느껴지는 말투에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하며 자신의 손에 쥔 여의봉을 꽉 움켜잡았다.
그와 함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청룡의 목소리.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으나 지금 저 몸에는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수의업이 느껴지는군.]
"어느 정도인데?"
[적어도 수백이다.]
"미친, 혹시 약점 같은 건 없어?"
[약점이라. 아직은 저 녀석을 제대로 파악하지-]
[그만 떠들고 피해!]
짧은 대화 중 갑작스레 끼어든 제천대성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몸을 움직였다.
그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하는 녹색의 포자.
김현우가 그것을 유심히 쳐다보기도 전에, 녹색의 포자가 터졌다.
그와 함께 사방으로 터져 나오는 날카로운 무언가.
특정하지 않은 상대를 정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사방에 쏘아지를 피하기 시작하던 김현우는 여의봉을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포자를 날렸으나-
[아래!]
제천대성의 목소리와 함께 김현우는 생각할 틈도 없이 위로 뛰어올랐다.
그와 함께 김현우가 있던 땅을 뚫고 솟아난 가시.
허나 그녀가 퍼드린 업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니 이런 썅-"
김현우는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거대한 운석을 바라봤다.
분명 천장이 벽으로 막혀 무엇인가가 떨어질 수 없는 구조인데도 불구하고 운석은 김현우에게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몸을 붙잡는 냉기와-
"……!"
-자신의 몸을 붙잡는 마력팽창.
그 뒤로도 김현우조차 모르는 수십의 업이 그의 몸에 디버프를 걸기 시작했다.
냉기가 그의 발을 붙잡고, 붉은색의 무엇인가가 김현우의 눈 앞을 가린다.
귀(鬼)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령이 그의 생각을 조종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롯이 하늘 위로 떨어지는 운석을 맞을 수밖에 없도록 김현우의 몸과 정신을 막는 수많은 업.
허나-
"흡!"
일순 멍해진 김현우의 눈에 약간의 초점이 돌아오는 것으로 김현우는 청룡의 업을 꺼냈다.
콰아아아아!!
그와 함께 붉은색의 광원이 도는 지하계층에 퍼지기 시작한 푸른색의 광원.
그 사이로 수십 줄기의 번개가 내려치고, 그 번개 사이에서 튀어나온 한줄기의 번개가 운석에게로 쏘아져 나간다.
그리고-
콰아아아아─!!
김현우를 향해 떨어져 내린 운석은 그가 쏘아낸 번개에 의해 반으로 갈라졌다.
그와 함께 만들어지는 수백 조각의 파편이 사방으로 떨어지고, 그 상황에서 김현우는 또 한번 여의봉을 휘둘렀다.
휘두르며 그 크기와 길이가 커진 여의봉은 곧바로 여왕이 휘감고 있는 절벽을 때렸으나, 이미 그녀는 다른 절벽으로 몸을 옮긴 상황이었다.
"왔냐?"
"!?"
그러나 휘둘러지던 여의봉을 바라보며 웃음을 짓고 있던 여왕은 곧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가시나귀의 업을 펼쳤다.
순식간에 지네의 몸을 빽빽하게 덮은 날카로운 가시들.
도망치는 것보다는 오히려 방어를 택하는 여왕의 모습에 김현우는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주변으로 마력을 발산했다.
그와 함께 퍼지는 마력팽창.
"이건!"
여왕의 당혹스러운 감성이 잔뜩 묻어 있는 목소리에 김현우는 비아냥거리며 주먹을 활처럼 꺾었다.
그와 함께 그의 주변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여섯 개의 팔.
등 뒤에는 흑원 대신 세 개의 만다라가 자리하고 있고.
"부동심(不動心)은-"
수라(修羅)-
그 여섯 개의 팔이 활처럼 휘어진 김현우의 주먹과 일치했을 때, 김현우는 주먹을 휘둘렀다.
"-어디에 팔아먹었냐?"
-무화격(武和?).
그와 함께 개화한 만다라가 이 세상을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김현우의 주먹이 지네의 등 위로 흘러나와 있는 가시를 박살 내며 그녀의 몸을 후려쳤다.
콰아아아─삐──────!!!
검붉은 색의 마력이 지하계층을 잡아먹고, 끝을 모르고 터져나가는 마력에 의해 청력이 우악스럽게 잡아먹힌다.
마치 지하계층이 통째로 무너질 정도의 거대한 지진.
그 끝에서-
"이 녀석-"
여왕의 몸체는 반으로 찢겨 있었다.
정확히 김현우에게 공격당한 등 부분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고, 그로 인해 여왕의 몸은 두 개로 나뉘게 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 같은 여왕.
김현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공격을 이어가려 했으나-크화아아아악-!
"!"
여왕은 김현우가 달려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몸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분명 반절로 잘려 진흙을 질질 흘려대던 그녀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콰르르르륵! 투드드드드득!!
그녀의 몸이 마치 시간을 돌린 듯,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간다.
엄청난 재생력.
분명 김현우가 공격을 하기 위해 도약한 시간은 몇 초가 채 안 됐지만, 어느새 그녀의 몸은 거의 완벽할 정도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와 함께 떨어져 내리는 검은 번개.
"쯧-"
김현우는 그녀의 주변을 보호하듯 떨어지는 번개를 여의봉으로 쳐내며 지네에게 접근하려 했으나-
"어딜!"
조금 전 일격으로 위협을 느낀 것인지 그녀는 자신의 주변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김현우도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인지해 여의봉을 휘둘렀으나-
"!"
김현우가 휘두른 여의봉은 그녀의 주변에 쳐져 있는 벽을 뚫을 수 없었다.
"저건 또 뭐야……?"
그렇기에 그는 곧바로 여의봉을 회수한 뒤 그녀에게서 거리를 벌렸고, 그와 함께 김현우의 머릿속에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건 아마 현무(玄武)의 토벽(土壁)일 것이다.]
"토벽이라고? 안 보이는데?"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서는 토벽이 확실하다…… 다만, 아마 저기에 다른 업을 섞어서 벽을 투명하게 만든 것 같군.]
"이런 썅."
[그것도 그렇지만, 저건 그야말로 괴물 같은 회복력이군.]
[내가 볼 때 우리가 느끼는 업의 대부분을 저 재생력에 꼬라박은 것 같은데?]
[내가 봐도 그렇군.]
"그건 또 어떻게 알아?"
그 둘의 대화에 끼어 김현우가 묻자 청룡은 곧바로 대답했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저 녀석의 업은 적어도 수백이라고, 허나 그 업은 모두 기워 붙인 업이다.]
[한 마디로 정상적인 업은 아니라는 소리지.]
제천대성의 부연 설명에 더해 청룡은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가지고 있는 업은 많으나 다 그 힘이 본래의 업처럼 강하지는 않다. 한 마디로-]
"……잡캐?"
[잡캐의 뜻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여러 가지 업을 사용할 수 있어도 그 하나하나의 업이 강하지는 않다는 거다. 다만 유용성 면에서는…….]
[뭐, 압도적이지.]
"……."
김현우가 입을 다물고 여왕의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할 때도 청룡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허나 내가 말했듯 기워 붙인 업으로 저 정도의 재생속도를 내는 것은 힘들다, 그녀가 조금 전 보여준 그것은 백호가 가지고 있는 재생력보다도 강해보이니.]
"……그러니까 네 말은 공격에 치중한 업보다는 재생에 관련한 업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거지?"
[그래, 아마 전투에 관련된 업은 아마 몇 개의 레퍼토리 외에는 나오지 않을 것 같군. 그건 틀림없이 좋은 일이다. 다만-]
"다만?"
[그녀의 전투와는 무관하게 아마 네가 저 녀석을 죽이기에는 여러모로 피곤할 것 같군. 그녀의 재생력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이상적이니까….]
"에휴, 어떻게 쉽게 가는 게 단 하나도 없냐."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고. 이내 그녀를 보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는 짧은 탐색시간.
허나 그 짧은 탐색시간으로 김현우는 청룡에게 여왕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얻을 수 있었던 건 죽이기가 더럽게 힘들다는 내용뿐이었지만.'
그래도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르니, 김현우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어떻게 죽여야 할지 감도 오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절벽 여기저기를 휘감으며 자신의 빈틈을 노리는 지네를 바라봤다.
분명 수라무화격을 맞았을 때를 떠올려 보면 그녀의 방어력은 김현우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공격은 통하나 압도적인 재생력이 문제라는 것.
그럴 때의 해결책은 단 하나였다.
'재생하기도 전에 재생할 수 없을 정도로 박살 내는 것.'
물론 이게 무슨 해결책이냐고 할 수 있겠으나 재생력이 엄청난 여왕을 상대로는 이 방법이 가장 유효했다.
그리고 김현우가 그렇게 결심한 순간-
"……!"
검은색의 진흙에서 김현우가 상대했던 그것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각각의 형태와 제각각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그것들은 늪지대에서 자신의 몸을 꺼내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여왕은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네 몸을 되도록 온전하게 보존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네."
"지랄, 어쭙잖은 변명하지 마라."
김현우의 비아냥에도 여왕은 대답하지 않곤-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도록 하겠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몸을 변화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절벽을 둘러싸고 있었던 여왕은 마치 스스로를 먹어치우듯 자신의 몸을 구의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지네의 몸에서 순식간의 기괴한 형태의 구로 변화한 여왕.
그리고-
"찢어 죽여주마-"
동그란 구의 형태에서, 거대한 눈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198
198. 시체 팔이 잡으러 간다 (8)푸른 불꽃.
그 세계에는 푸른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절대 일반적인 불로는 보이지 않는 푸른 불꽃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에 가만히 타오르고 있었고.
그 불길은 이 잿빛의 세계를 비추고 있었다.
잿빛의 세계.
제대로 된 건축물은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전부 타다 남은 나무들뿐.
남아 있는 문명 또한 없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전부 타버려 문양을 알 수 없게 된 휘장뿐.
그 무엇도 제대로 된 것을 확인할 수 없는 잿빛의 세계 속에서, 진달래가 수놓아진 검은색 지파오를 입고 있던 그녀-
"……."
미령은 눈을 떴다.
"이번으로 정확히 일천 번이 넘었구나."
"……."
들리는 목소리에 미령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고, 그곳에는 괴력난신이 있었다.
검은색 재로 뒤덮인 나무조각 위에 걸터 앉아 미령을 바라보고 있는 괴력난신의 모습.
미령은 주변을 돌아보고 왠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또 실패인가."
미령의 조용한 중얼거림.
"그래, 또 실패구나."
괴력난신은 그녀의 중얼거림에 답하며 다 타버린 잿빛의 나무를 만졌고, 미령은 그런 괴력난신을 보며 물었다.
"나는…… 어디까지 버텼지?"
"혈귀(血鬼)를 죽일 때까지는 버티더구나. 허나 그 녀석을 먹어치운 뒤부터 폭주하기 시작했지."
"……."
괴력난신의 말에 미령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듯 고개를 숙였고, 괴력난신은 그런 그녀를 보며 내심 감탄했다.
'고작 일천 번을 반복했을 뿐인데 벌써 혈귀를 담을 그릇이 되다니.'
현재 미령과 괴력난신이 있는 곳은 바로, '괴력난신(怪力亂神)'이 거주하는 허수공간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올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괴력난신은 악천의 원천을 이용해 미령을 이곳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미령은 이곳에서 진짜 수련을 시작했다.
내면세계에서처럼 몰려드는 백귀야행을 처리하는 것이 아닌, 백귀야행에 속해 있는 요괴들을 마주하고 그들의 힘을 자신의 그릇에 담은 수련을.
물론 자신의 내면세계 안에서 괴력난신이 풀어놓은 백귀야행을 붙잡는 것으로도 미령은 증명을 끝냈다.
백귀야행(百鬼夜行)에 있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강하다는 증명을.
하지만 그 증명만으로 미령은 백귀야행을 완벽하게 다룰 수 없었다.
왜냐?
그것은 말 그대로 '증명'일 뿐이니까.
미령은 백귀야행을 찍어 누름으로써 그들의 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지, 아직 스스로가 완전하게 백귀야행을 다룰 수는 없었다.
자신을 증명하는 것과 백귀야행(百鬼夜行)이라는 거대한 집합을 이끄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수련하고 있었다.
자신이 백귀야행에 속해 있는 모든 요괴를 자기 뜻대로 부리고 다룰 수 있도록.
"……."
그런 상황에서 괴력난신은 가만히 미령을 바라보았다.
생각을 끝냈는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미령은 어느새 자세를 잡고 있었고, 곧 그녀가 마력을 일으키자 그의 머리 위로 붉은색의 뿔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바뀌기 시작한 미령의 몸.
머리카락은 마치 나무에 앉아 있는 괴력난신처럼 백발로 변하기 시작했고, 안 그래도 붉은빛이던 홍안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런 미령의 변한 모습과 함께, 이 세계를 밝히고 있던 푸른 불빛의 아주 조그마한 불씨에서 요괴들이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괴력난신의 내면세계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순수한 영체의 상태로 미령의 앞에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 요괴들.
마치 괴력난신의 뒤에 모여 있던 그 옛날처럼 모이기 시작한 요괴들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꽝!
지반을 박차며 미령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시작된 전투.
거대한 지네가 땅으로 파고 들어가 미령의 발밑을 노리고, 천수관음이 자신의 손을 이용해 미령의 시야를 막는다.
그와 동시에 천수관음의 뒤에서부터 미령의 양옆으로 달려드는 요괴들까지.
그런 상황에서도 미령은 굳은 표정으로 달려드는 요괴들을 바라봤고, 이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직!
맨 첫 상대는 바로 앞에서 달려오고 있던 아귀.
미령은 아귀를 한 손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터트렸다.
몸체가 터짐과 동시에 육체를 잃고 미령의 몸 안으로 흡수되는 아귀.
그녀는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요괴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아직 나오지도 않은 거대한 지네의 움직임을 파악해 그저 진각을 밟은 것만으로 지네의 머리통을 깨버리고, 천수관음의 뒤에 있는 '축귀'의 움직임을 예측해 그를 제일 먼저 처치한다.
마치 이 장면을 몇백 번이고 재생한 것처럼, 그녀는 망설임 없이 주먹과 발을 휘둘렀다.
그러나-
"끗……!"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가지런하게 정돈된 미령의 움직임에 변질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깔끔한 일직선으로 주먹을 휘두르던 미령의 주먹은 어느새 깔끔하기보다는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그녀의 움직임 한 번에 주변의 지반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명백해 보이는 변질.
날카롭던 마력은 거칠게 변하고, 무술을 사용하던 그녀는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미령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한 변화.
분명 흰자위였던 눈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고, 날카롭던 송곳니가 입 밖으로까지 튀어나와 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마에 난 뿔은 더더욱 자라나 거대해지고, 다물고 있던 입은 히죽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누가 보더라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보이는 미령의 모습.
허나 눈에 띄게 바뀐 미령의 모습에도 괴력난신은 그녀를 제지하지 않은 채 그저 지켜보았다.
'어차피 저것도 과정 중 하나니까.'
백귀야행(百鬼夜行)을 수하에 둔다는 것.
그것은 백귀야행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요괴의 마력과 이지를 감당해야 한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리고 지금 미령이 겪고 있는 것은 바로 요괴의 이지를 버티지 못해 그녀의 정신이 요괴들에게 물들고 있다는 방증 중 하나였다.
그러나 괴력난신은 그 모습을 보고 있음에도 딱히 미령을 제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은 허수공간이었고, 무엇보다-
'아주 미약하기는 하나 정신을 유지하고는 있구나.'
정신을 완전히 잡아 먹혀 버린다면 수련을 하는 의미가 없기에 곧바로 괴력난신이 나섰겠으나 그녀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요괴들과 싸움을 이어나가는 미령을 보며 괴력난신은 또 한번 감탄을 했다.
'역시 대단한 아이로구나.'
보통 평범한 인간은 요괴들의 이지를 감당할 수 없다.
인간의 이지와 요괴들의 이지는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본 베이스가 다르니까.
만약 미령이 다루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것이라면 그녀는 지금보다도 간단하게 그들을 다룰 수 있겠지만, 지금 그녀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요괴들의 영혼이었다.
그녀와는 다른 가치관과 다른 이지를 가지고 있는 요괴들의 영혼.
그것도 단 한 마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수백은 되는 요괴들의 이지를 단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의 몸 안에 담고, 또 다룰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백귀야행(百鬼夜行)'을 다루기 위한 제일 기본적인 덕목이니까.
허나 그렇다면 어째서 괴력난신이 정신의 끝자락을 겨우 붙잡고 있는 미령을 보고 놀라는가?
그것은 바로 그녀가 겪은 숫자 때문이었다.
'천 번.'
1000.
누군가에게는 많을 수도 있는 숫자였으나, 그것은 괴력난신에게 있어서는 하잘 것 없는 숫자와 다름이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일천이라는 숫자는 일수로 따지던 그 무엇으로 따지던 그리 큰 숫자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놀랐다.
'고작 천 번에…… 백귀야행의 7할을 담을 수 있게 되다니.'
백귀야행(百鬼夜行).
그것은 그가 이 탑에 들어오기도 전에 거의 몇백 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한 그녀만의 군대이고, 또 그녀의 동료이기도 했다.
헌데 지금 미령은?
고작 1000번의 반복.
그 반복 속에서 미령은 괴력난신이 몇백 년을 거쳐 이뤄온 백귀야행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런 미령의 모습을 보며, 괴력난신은 생각했다.
'원래부터 가능성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아주 자그마한 가능성.
그것 때문에 괴력난신은 이 허수 공간으로 돌아오기를 거절하고 미령과 계약했다.
자신이 그 찰나에 보았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이 정도라면, 진짜 가능할지도 모르겠구나.'
-괴력난신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눈에 확신을 가졌다.
그녀가 '그것'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크르르륵-!"
그렇게 괴력난신이 자신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미령은 슬슬 옅어지기 시작하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으며 힘겨워하고 있었다.
이미 미령이 보는 세상은 붉게 물들었다.
귀가에는 둔탁한 전투의 소음 대신 요괴들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머릿속에는 자신이 지금까지 수련해온 무공의 초식이 아닌, 저열한 파괴 충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미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놔버리고 싶다.'
이 파괴충동에 몸을 맡기고 싶다. 라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으니까.
이 파괴충동에 몸을 맡기면 자신의 귓가에 울리는 요괴의 목소리는 사라질 것이고, 심장이 터질 듯 답답한 마음은 해방감을 넘어 극상의 쾌감을 느낄 거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놓고 싶다──────끊임없이 그녀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면 잘 버텼다.'
'혈귀를 잡았으니 이번에는 쉬고 다음에 또 나아가면 되잖아?'
'그래, 이 정도면 이전번보다는 진보했다. 이제 놔버리자.'
그와 함께 시작되는 자기합리화.
자기합리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미령의 눈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괴력난신은 미령을 죽이기 위해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렇게, 미령이 정신을 놓으려 하는 그 순간-
'자신의 뜻을 꺾고 인형처럼 살아가려 하느냐.-'
그녀는 목소리를 들었다.
아주 옛날, 들었던 목소리.
그것은 바로 자신이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약했을 때 들었던 목소리였다.
'-제자야?'
그와 함께, 미령의 세계가 정지했다.
미령의 눈에 비추던 붉은 세계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고.
그녀의 귓가로 끊임없이 들려오던 요괴들의 비명은 그녀의 파괴 충동과 함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대신에 들린 것은 바로 예전에 들었던 스승의 목소리였다.
또렷해진 동공의 위로 언젠가 그녀가 탑에서 보았던 김현우의 모습이 비친다.
낡아빠진 복장에 자신의 등에 새긴 문신과 똑같은 가면을 그대로 쓰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
"스승……님?"
분명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의 잔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령은 그를 불렀고.
생각 속의 김현우는 그런 그녀의 말에 대답하듯 입을 열었다.
'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지? 어째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나? 너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부모 때문에? 아니면 네가 살아온 삶은 애초부터 그랬으니까?'
미령의 눈이 점점 또렷해지기 시작하고-
'만약 그렇다면 잊어라.'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왜인지 더- '모든 걸 잊어라. 네 출생 출신부터 시작해서 이름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려라. 네가 바깥세계에서 재벌이었든 거지새끼였든 간에 '밖'에 있었던 일은 모조리 지워라.'
-선명해졌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시작하는 거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부모와 돈의 꼭두각시 노릇이 아닌, 오롯이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삶을.'
그 말과 함께 미령의 시야에 요괴들이 비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자신의 몸을 찢어발기기 위해 손을 내미는 요괴들.
그 와중에도 김현우의 말은 미령의 귓가에 재생되고 있었다.
'그래도, 그 짱ㄲ- 가 아니라, 이름이 없으면 부르면 힘들 테니 이 스승이 네게 이름을 붙여주도록 하마.'
그리고-
'그래, 네 이름은-'
그녀는 귓가에 들리는 김현우의 말을 새기며-
'-미령, 미령으로 하는 게 좋겠다.'
콰지지직!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은 절대로 뜻을 꺾지 마라. 미령아.'
-자신만의 백귀야행(百鬼夜行)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199
"!"
199. 시체 팔이 잡으러 간다(9)
꽝! 카가가가가각!
김현우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하고, 동그란 구체가 된 여왕의 근처에서 뽑혀 나온 곤충의 날카로운 발들이 김현우의 신형을 따라 쏘아진다.
마치 날카로운 비가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김현우의 눈을 어지럽게 하는 벌레의 다리들.
허나 김현우는 자신에게로 떨어지는 수많은 곤충의 다리들을 전부 자신의 두 눈으로 정확히 보고, 또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수백 개의 다리들 중에서, 자신에게 유효타로 들어올 수 있는 공격들만을, 김현우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신형이 앞으로 움직인다.
단 한 번의 행동.
허나 그것만으로 김현우를 노리던 수많은 다리들은 목표를 잃은 채 다른 곳을 향해 쏘아져 나간다.
그리고-
"흡!"
-모든 공격이 끝난 뒤의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생긴 빈틈을, 김현우는 정확히 파악하고 도약했다.
수많은 다리들이 회수되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
그 찰나의 시간에 이미 김현우는 여왕의 앞에 도약해 있었다.
그와 함께 이뤄진 일격.
허나-
콰직! -키이이잉!
김현우의 일격은, 여왕의 앞을 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방벽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꽝!
그와 함께 하늘 위에서 떨어진 검은 번개.
김현우는 흑익을 이용해 검은 번개를 막아낸 채 공격을 이어나갔다.
"흡!"
극(極)의 원리를 이용해 그 찰나의 시간에 자신의 다리에 마력을 끌어모은 김현우는 여왕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방벽을 깨부수기 위해 다리를 휘둘렀다.
패왕괴신각(?王怪神脚)-!
마치 증기기관처럼 김현우의 다리로부터 검붉은 마력과 동시에 푸른 마력이 터져 나오고, 뒤 늦게 회수된 다리들이 김현우를 공격하려 했으나-쾅! 꽝! 콰가가강!
-김현우는 자신에게로 쏘아지는 다리들마저도 모조리 격추하고는 더더욱 마력을 끌어넣었다.
콰지지직!
그와 함께 마치 유리가 짓이겨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부서진 방벽.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짓곤 그대로 여왕를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쾅! 콰득! 콰드드득!
거대한 폭음과 함께 들리는 무엇인가가 터지는 소리.
김현우는 멈추지 않고 공격을 이어나가기 위해 터져나가고 있는 여왕의 몸에 추가적으로 몇 번의 공격을 더 가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김현우는 자신의 주변에 쏘아지기 시작한 수십 가지의 업을 느끼고 혀를 찼다.
분명 몸이 터져나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빠른 속도로 업을 쏘아내는 여왕.
그는 결국 몸을 뒤로 내뺄 수밖에 없었다.
"이이이익! 네녀서어억! 감히!"
"부동심(不動心)같은 소리하고 있네. 엿 바꿔 먹었냐?"
"닥쳐라!"
몸이 수복되자마자 곧바로 노호성을 터트리는 여왕을 비아냥거리며 다시 그녀가 쏘아내기 시작한 다리를 피해내기 시작한 김현우는 생각했다.
'어쩔까.'
현재 여왕과의 전투는 상당히 길어지고 있었다.
애초에 자세한 시간을 재면서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니라 실질적으로 얼마 정도가 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느낌상 30분 정도는 족히 지난 것 같았다.
30분.
누군가에게는 짧다고 느껴질 수 있었으나 이런 일대일 상황의 전투에서 30분은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게다가 짧은 시간을 캐치 할 수 있는 김현우의 경우에 30분이라는 시간은 적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쏘아져 내리는 벌레들의 다리와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업들을 피해내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이제 공격을 피하는 건 문제가 없다.'
실제로, 처음 여왕의 공격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김현우는 짜증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공격은 너무나도 다채로웠으니까.
사방에서는 벌레의 다리가 쏟아져 내리고, 그중에는 계속해서 여왕이 사용하는 업(業)이 김현우를 괴롭혔다.
심지어 업의 종류도 어느 정도 다양했기에 김현우는 처음 그녀의 공격을 피할 때 굉장한 애를 먹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현우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의 공격을 쉽게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유?
그것은 바로 김현우가 그녀의 공격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단하고 허를 찌르는 공격이라고 해도 그 공격을 몇 번이나 보게 되면 파훼법을 마련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왕은 그 전투 센스가 '거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없었다.
'이다음에는 오른쪽.'
김현우의 말대로 오른쪽에 떨어져 내리는 벌레의 다리.
'여기서는 아래에 냉기가, 그리고 하늘에서는 포자가 나오는 타이밍.'
그가 생각하는 대로 바닥에는 그의 움직임을 둔하게 하기 위한 냉기가 깔리고, 하늘에는 그가 도약하는 것을 막기 위해 포자가 만들어진다.
그 이외에도 마치 예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전부 예상하는 김현우.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여왕의 전투 센스가 안 좋은 것을 넘어 '최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공격이 익숙하면 바꿔야 한다.
그것은 상식이다.
익숙해진 공격만큼 피하기 쉬운 공격은 없고, 공격이 익숙해졌다는 것은 곧 역공을 당할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소리였으니까.
허나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전투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
언제나 김현우에게 오는 것은 이미 몇 번이고 봤던 똑같은 공격뿐.
'뭐, 사실 고집보다는 그것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크지.'
놀라울 정도로 비이상적인 재생력을 믿고 전투 스타일을 안 바꾸나?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김현우에게 역공을 당할 때마다 조금 더 거칠게 공격을 감행했으니까.
팡! 키이이잉!
찰나의 틈을 노린 김현우가 또 한 번 여왕의 방어막을 뚫고 그녀의 본체에 공격을 먹인다.
구체의 절반이 뭉텅 잘려나갈 정도로 강력한 일격.
허나 그런 공격이 무색하게 그녀는 그 심각한 상처를 놀라울 정도의 재생력으로 복구한다.
"아오……!"
여왕의 주변을 부유하자마자 그의 추가적인 공격을 제지하기 위해 사방에서 펼쳐지는 업 때문에 다시 몸을 뒤로 뺀 김현우는 짜증스러운 음성을 내뱉었고.
[이제 슬슬 결착을 지을 때가 온 것 같군.]
[그래, 이대로 시간만 끌어봤자 불리해지는 것은 우리다.]
"나도 알아……! 그리고-!"
곧 김현우의 머릿속에 들려오는 제천대성과 청룡의 물음에 김현우는 짜증이 담긴 대답과 동시에 또다시 날아오기 시작한 그녀의 공격을 피하며 질문했다.
"너희들도 그렇게만 말하지 말고 약점이나 좀 찾아봐!"
김현우의 말에 짧은 침음성을 흘리던 청룡은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게 보이지 않는군.]
[나도 마찬가지야.]
마치 동감하듯 말하는 제천대성.
"뭐!?"
[네가 가장 잘 알겠지만, 그녀의 재생력은 이미 재생력을 넘어서 불사(不辭)의 경지에 올라있을 정도로 사기적이다.]
"그래서?"
[한 마디로 죽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이 말이지.]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여기서 그냥 뒤지라고?"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지금 현 상황을 파악했을 때 그렇다는 것뿐이지.]
"그럼 그 암담한 이야기 말고 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보란 말이야!"
그런 김현우의 말에 대답한 것은 청룡은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고, 그 대신 대답한 건 바로 제천대성이었다.
[솔직히 이건 약점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닌데, 좀 이상한 점이 있긴 해.]
"뭔데!"
김현우가 자신에게로 떨어지고 있는 벌레의 다리들을 피하며 입을 열자 제천대성은 곧바로 이야기를 이었다.
[지금 저 녀석이 사용하고 있는 업 말이야 지금까진 저 녀석이 뿜어내는 업의 크기가 너무 커서 모르고 있었는데, 자세히 확인해 보니 지금 저 녀석이 사용하고 있는 업은 저 몸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게 아니야.]
"뭐?"
[처음에는 청룡의 말마따나 저 녀석이 갈아탄 몸체에 다른 등반자의 시체를 억지로 기워 붙여서 특이한 방법으로 업을 쓴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지.]
쾅!
김현우는 자신의 주변에 깔리기 시작하는 보랏빛의 안개 지대를 피하며 외쳤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이건 그저 가정 중 하나일 뿐이지만 저 녀석을 죽이려면 저 본체를 처리하는 그것보다는 저 녀석에게 업(業)의 힘을 공급해 주고 있는 근원을 부수는 게 더 빠를 거야.]
제천대성의 말과 함께 김현우의 귓가로 깨질 듯한 파공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썅."
그것은 바로 김현우의 머리위에 떨어지고 있는 운석 때문.
김현우는 떨어져 내리는 운석과 자신의 정신을 갉아먹기 위해 쏘아지는 업들을 본능적으로 피해내며 자리를 옮겼다.
[확실히 아까 전까지만 해도 집중을 하고 있느라 몰랐는데, 정말 그렇군.]
[이제 알았냐, 뱀대가리?]
[흐음, 잔머리 굴리는 원숭이가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군.]
[잔머리를 굴리는 게 아니라 관찰력이 좋은 거겠지. 하긴 네 녀석 같이 힘으로 몰아칠 줄밖에 모르는 뱀 대가리가 전략을 알 리가 없으니까 넘어가 주도록 할게.]
[헛소리 하지 ㅁ-]
"야 그만해 봐 좀! 지금 급한 거 안 보여?!"
갑작스레 머릿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말싸움을 제지시킨 김현우 곧 그들에게 물었다.
"그렇게 싸울 시간에 그럼 저 힘이 어디서 흘러나오는지나 알아봐!"
김현우는 그렇게 외치며 조금 전 쏘아진 다리를 피해 또 한번 여왕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분명 눈알 하나만이 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왕에게서 느껴지는 분노는 도대체 그녀의 업에 부동심이라는 업이 진짜로 있는 건지 궁금하게 할 정도였다.
"흡!"
키이이이잉! 꽝!
김현우의 손이 크게 휘둘러지며 여왕의 앞에 있는 방어막을 박살 낸다.
그와 함께 들리는 청룡의 목소리.
[업의 힘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하나 깨달았다!]
"뭔데!"
[이 기둥 절벽들! 사이사이에 있는 절벽에 묘하긴 하지만 업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자세하게 느끼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시선을 돌리며 여기저기 만들어져 있는 기둥 절벽을 바라봤다.
'절벽이라고?'
김현우의 눈에 보이는 대다수의 기둥 절벽들은 여왕과의 전투로 인해 완전히 개박살이 나 있었다.
그리고-
'어?'
거기에서, 김현우는 무엇인가 이상한 점을 찾았다.
'왜 몇몇 곳은 저렇게 멀쩡해?'
그것은 바로 자신과 여왕이 날뛴 것에 비해 몇몇 절벽들이 매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분명 몇몇 절벽들은 아예 형체 자체가 바뀔 정도로 박살이 나 있는 데에 비해서, 특정한 몇몇 절벽 기둥은 무척이나 깨끗했다.
마치 '일부러 깨지 않은 것'처럼.
'설마……?'
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여왕을 한번 바라보고는 그대로 공기를 차 도약했다.
목적지는 일부러 깨지 않은 것 같은 절벽.
탁!
김현우는 경쾌한 발걸음을 내며 그 절벽의 위에 착지했고-쩌저저적! 쩌적!
곧 자신의 몸이 얼어붙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몸을 움직였다.
냉기를 피해 몸을 움직이자마자 날아오는 수많은 벌레의 다리들.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멍하니 날아오는 벌레의 다리들을 보았고 이내 몸을 움직여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가정을 실험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번의 실험 끝에 김현우는-
"이제야 알았다."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200
200 . 시체 팔이 잡으러 간다(10)어느 순간, 여왕의 공격을 피하던 김현우가 돌연 태세를 바꾸기 시작함과 동시에, 여왕은 하나밖에 없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소리쳤다.
"네 녀석!"
"왜 천년만년 안 걸릴 줄 알았어?"
그것은 바로 김현우가 무척이나 깨끗한 절벽 기둥을 향해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콰드드드득! 콰가가강!
김현우가 발을 가볍게 찍어 내리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부서지기 시작하는 절벽 기둥, 오버 마인드는 무척이나 다급한 듯 제대로 조준도 하지 않고 다리들을 내리 찍었으나-쾅! 콰가가각!
-김현우의 진각에 당한 기둥은 이미 그 형체를 잃고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저것이다!]
그렇게 무너지기 시작한 절벽 사이에서, 청룡은 그 무너진 절벽 사이에 숨겨져 있었던 검푸른 보석을 보며 외쳤고.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검푸른 보석이 떠 있는 곳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안 돼!!"
그와 함께 들리는 여왕의 괴악한 목소리.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표현하는 듯 여왕이 움직이는 다리들이 앞다투어 검푸른 보석을 지키기 위해 쏘아졌다.
허나-
"늦었어."
이미 김현우는 외마디와 함께 검푸른 보석 앞에서 힘차게 다리를 휘두르고 있었다.
쾅! 파직! 파지지지직!
그의 다리에 맞자마자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박살이 나버리는 보석.
그리고-
"으아아아아아악! 이 우매한 필멸자가! 내가 애써 빼돌린 업(業)을!!!"
여왕은 검푸른 보석이 깨짐과 동시에 분노를 토해내며 김현우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쏘아 보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
그의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냉기.
하늘 위로 만들어지는 포자.
김현우의 주변을 향해 둘러지는 화염.
마지막으로 그의 주변을 향해 매섭게 내리꽂히는 다리.
그야말로 총공격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다양하게 김현우의 주변으로 발현되는 업과 공격.
업과 업이 합쳐져 모순적인 결과가 일어나고, 그녀가 쏘아 보낸 다리가 김현우가 있던 곳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겠다는 듯 주변을 먹어 치운다.
마치 거대한 아귀가 절벽을 통째로 삼키는 듯한 비주얼을 보여주는 그녀의 공격.
그러나-
"안 맞으면-"
"!"
"그만이지-!"
김현우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정확히는-
"안 돼!"
-바로 또 다른 절벽 기둥 위에, 김현우는 이미 이동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여왕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으나 김현우는 그런 그녀의 다급한 표정을 보곤 이내 피식 웃으며 소리쳤다.
"돼!"
콰지지지직!
그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하는 절벽 기둥.
김현우는 무너지기 시작하는 절벽 기둥을 전부 기다리지도 않고 그 가운데를 향해 힘껏 다리를 내리찍었다.
꽝! 콰지지직! 쩌적!
무너지기 시작하던 절벽 기둥은 김현우의 거듭된 공격으로 인해 폭음소리를 내며 그 파편을 사방으로 내보냈고, 그의 공격으로 인해 안에 있던 보석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끄카아아악!"
그와 함께 들리는 그녀의 비명.
자신의 몸이 절반 이상 날아갈 때도 비명을 지르지 않던 여왕이 진심으로 고통스럽다는 듯 거대한 눈을 찡그리며 비명을 지르고-
[확실해, 이 절벽 사이사이에 숨겨둔 보석이 바로 저 괴물이 사용하는 업의 본체다.]
-그런 여왕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천대성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이제 해결법은 찾았네."
김현우가 한결 편하다는 표정으로 분노에 찬 여왕의 공격을 피하자 청룡은 입을 열었다.
[허나 너무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은 없다. 지금 네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으니까.]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마."
청룡의 말대로, 김현우에게 이제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당장 제천대성의 업도 사용기한이 슬슬 끝나가고 있었고, 그것은 청룡의 업도 마찬가지.
'아니, 청룡의 업은 무리를 하면 조금 더 사용 할 수는 있겠지만.'
문제는 지금의 김현우가 청룡의 업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기에 굉장한 리스크를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이곳에서 체력이 고갈되면 끝이야.'
당장 저 커다란 눈알을 찡그리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여왕도 그렇지만-
'저 녀석을 처리한 뒤에도…….'
아마 지하계층에 있던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0 그렇기에 지금 김현우에게 내려진 과제는 업의 사용시간이 끝나기 전, 최대한 빠르게 여왕을 쓰러뜨리는 것.
그리고, 김현우는 지금 이 상황에 잘 어울리는 기술을 이미 알고 있었다.
쾅! 콰가가각!
그는 자신을 노리고 쏘아지는 여왕의 공격을 피해 하늘로 뛰어올랐다.
마치 유도기능이라도 달린 것처럼 자신을 따라오는 여왕의 업.
허나 김현우는 자신을 노리며 행해지는 업들을 모조리 피했다.
공간을 지배하는 업은 공간 자체를 피해버리는 것으로 회피했고, 자신의 몸을 공격하기 위해 쏘아낸 업들은 모조리 쳐내거나 막아냈다.
그리고-
툭-투툭---툭!
"이건 무슨!"
하늘이라고는 없는 지하계층에 먹구름과 동시에-쏴아아아아아아────!!
-폭우(暴雨)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왕은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당황한 듯, 그 거대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으나, 그런 와중에도 김현우는 자신의 마력을 사방으로 퍼트린다.
퍼트리고, 퍼트리고, 퍼트린다.
그렇게 해서 퍼져나간 검붉은 마력은 그대로 먹구름이 되어 지하계층의 천장을 먹어치우기 시작했고.
김현우의 마력이 지하계층의 주변 천장을 완벽하게 먹어 치웠을 때.
그는-
-우우우웅!
자신의 손가락 끝에 도력(道力)을 모았다.
그의 마력과는 본질적으로 달라 보이는 푸른색의 도력이 그의 손가락에 머물고, 곧 그의 손에 머물렀던 푸른 도력은--파직! 파지지직!
-뇌전의 성질을 띠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김현우는 자신의 손가락에 머금은 번개를 먹구름 위로 쏘아 보냈고 동시에-쾅! 콰가가강! 쾅!
푸른 번개는, 만들어졌다.
여왕은 푸른색의 번개가 내리치자마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은 채 김현우에게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구형에서 나온 벌레의 다리가 거친 폭우를 뚫고 김현우에게로 쏘아져 나간다.
또 한번 발현된 냉기가 김현우의 주변에 펼쳐지기 시작하고, 그의 주변으로 초록색의 포자가 만들어진다.
그 이외에도 존재하는 것 자체가 모순인 업들이 제각각 얽히고설켜 김현우에게 피해를 주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안고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허나 그런 상황임에도, 김현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자신의 주변에 만들어진 업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 자리에서 피하지 않은 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후우우우-"
숨을 크게 내쉼과 함께,
그의 인지는 확장하기 시작했다.
김현우는 일전 청룡에게 도술의 가르침을 받던 그때를 떠올렸다.
도력을 제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하지 못했던 그때.
김현우는 청룡에게 전우치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번개를 튕긴다?]
전우치가 청룡의 업을 등에 업고 사용했던 기술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청룡은 김현우에게 도력의 운용법을 가르치는 것도 잊은 채 그의 이야기를 한동안 듣고 있었고 김현우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쯤 청룡은 어처구니없어하며 물었다.
[설마 그게 내가 만든 기술이라고 생각하나?]
"아니야?"
[……그건 좀 위신이 상하는군, 고작 그런 허접한 기술을 내가 만들 거라고 생각했나?]
"……허접하다고?"
적어도 김현우에게 있어서 전우치가 사용했던 그 기술은 전혀 허접한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떤 술수를 부린 것인지 모르겠으나 번개를 빗물 사이로 튕겨 보낸 전우치의 그 공격은 김현우가 전혀 막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김현우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으려니 청룡은 말했다.
[그건 내가 만든 기술을 따라한 어처구니없는 모조품이다.]
"……모조품? 그럼 네가 만든 게 아니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런 모조품과 진짜 내가 만든 도술(道術)을 동급으로 취급하지 마라.]
청룡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때부터 전우치가 사용했던 기술의 원판을 김현우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자세하고, 또 선명하게.
"후우우우-"
[맨 처음에는 뢰(雷)의 기운을 하늘로 이끌어라.]
느려진 인지 속에서, 청룡의 목소리가 김현우의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김현우의 마력.
[그렇게 해서 하늘에 뇌전의 기운을 이끈 뒤에는 공간을 장악해라. 마치 투명한 물에 검은색의 먹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그의 마력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사방에 퍼져 나간다.
아까 전의 마력들은 사방으로 흩어지자마자 먹구름으로 바뀌었으나 이번에는 다르다.
놀라운 속도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검붉은 마력은 넓게 퍼짐과 동시에 마치 이 세계와 동화된 것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너무 완벽하게 장악하려 하지 마라. 그저 구름이 퍼져 나간 곳까지 네 손이 닿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와 함께 김현우는 자신의 인지 범위가 대폭 늘어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맨 처음에는 당장 자신의 시선이 닿는 곳까지였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의 주변에 깔려 있는 수십 가지의 업(業)이 느껴지고, 폭우(暴雨)를 뚫고 날아오는 다리의 개수까지도 김현우의 머릿속에 제대로 파악된다.
먹구름이 퍼져 있는 모든 곳이, 김현우의 인지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현우는
[네 인지가 닿는 그 모든 곳에, 번개를 뿌려라. 그게 바로-]
망설임 없이 하늘에 올려두었던 뇌전의 기운을 끌어 내렸고-
[내가 만든 진짜 기술.]
콰지지지지지지지직!
하늘에는 시력을 멀게 할 정도로 거대한-
[뢰목(雷木)이다.]
푸른 나무가, 만들어졌다.
####
"하아아-"
모든 것이 잿빛인 세계.
그곳에 미령은 서 있었다.
잿빛뿐인 세상을 밝게 비추던 푸른 불꽃은 이미 사라졌고, 있는 것은 오로지 미령과 전부 다 타버린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괴력난신뿐.
그렇게 얼마간의 침묵이 지났을까.
"……후!"
화아아아악!
미령이 깊은 한숨을 쉼과 동시에 세계가 변하기 시작했다.
회색밖에 존재하지 않던 잿빛의 세계에 푸른 광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그녀의 주변으로 요괴들이 행렬을 만들기 시작한다.
아주 작은 아귀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등 뒤에 자리 잡은 천수관음과, 축생귀는 깔깔 거리며 기괴한 웃음을 토해냈고.
카가가각!
그녀의 뒤를 따르는 거대한 지네는 잿빛의 세계에 거대한 소음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지상과 하늘을 꽉 채우기 시작하는 요괴들의 행렬.
"흐응."
괴력난신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미령의 뒤에 길게 늘어서 있는 백귀야행(百鬼夜行)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완벽해.'
그녀는 미령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요괴들에게 이지를 빼앗기지 않아 무척이나 깨끗했으나, 그녀의 모습은 평범한 인간을 탈피해 있었다.
이마에 나 있는 거대한 뿔과, 상어처럼 자라나 있는 날카로운 이빨.
뿔은 예전에는 티가 나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 누가 보더라도 확연히 거대해져 있었고, 그것은 이빨도 마찬가지였다.
괴력난신은 푸른 광원으로 주변을 내뿜고 있는 미령을 바라봤고, 한동안 백귀야행을 유지하던 미령은 이내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백귀야행을 집어 넣기 시작했다.
잿빛의 세계에 푸른 광원이 사라지고, 하늘과 지상을 나돌아다니던 요괴들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사라진다.
완벽한 제어.
미령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요괴들은 단 하나도 없이. 그들은 그녀의 통제에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따랐다.
"후우우……."
미령은 백귀야행이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고는 시선을 돌려 괴력난신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훌륭하구나 아이야, 솔직히 이렇게 빠르게 백귀야행을 다룰 수 있을 지는 나도 몰랐다."
"……."
"뭐, 그럼 이 곳에서 더 이상 볼 일은 없으니 슬슬 나가보도록 하자꾸나."
괴력난신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자신의 마력을 움직였다.
후우우웅-!
그와 동시에 만들어진 거대한 포탈.
괴력난신은 말했다.
"이곳으로 나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먼저 나가거라."
"……."
허나 그녀의 말에도 불구하고 미령은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괴력난신을 바라봤고, 그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뭔가 잘못된 것이라도 있느냐?"
괴력난신의 물음에 미령은 괜히 슬쩍 시선을 이리저리로 돌리며 괴력난신의 눈치를 보았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녀를 바라본 괴력난신.
그리고-
"……그."
"……그?"
"필살기……는, 안 알려주나?"
미령의 망설임이 듬뿍 섞인 물음에 괴력난신은 일순 멍한 표정을 지었다.
# 201
201화.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1)
"필살기……?"
괴력난신(怪力亂神)이 멍한 표정으로 미령을 바라보며 묻자 그녀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곤 이내 소리가 들릴 정도로 팩 하고 고개를 돌리곤 말했다.
"……가겠다."
누가 봐도 토라진 듯한 제스쳐를 취하며 괴력난신이 만들어 놓은 포탈 안으로 뛰어들려는 미령.
그녀를 보며 괴력난신은 급하게 말했다.
"잠깐! 거 성질 한번 급하구나. 아직 필살기 알려주지도 않았다!"
"애초에 알려줄 생각도 없지 않나!"
미령은 괴력난신이 자신을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괴력난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장난을 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잊고 있었던 것뿐이지."
그녀의 말에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미령.
괴력난신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필살기도 꼭 알려주마. 그게 약속 아니더냐?"
"그, 그래……. 약속이지, 약속."
괴력난신이 자기 합리화를 할 수 있는 거리를 던져줘서 그런 걸까, 미령은 조금 전의 불쾌감을 드러내던 얼굴을 지우고 마치 자기 자신을 세뇌하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솔직히 먼저 필살기를 물어 본 시점에서 아웃이다만.'
괴력난신은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 미령을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이미 그녀는 맨 처음 필살기에 관해 이야기할 때부터 자신의 스승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인정했으나 꿋꿋이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무마하기 위해.
괴력난신이 한동안 묘한 미소를 지으며 미령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흠……흠……."
그녀는 그제야 자기합리화가 완성되었는지 괜스레 입가에 손을 가져가며 목을 가다듬었고, 이내 괴력난신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필살기는 무엇이지?"
미령의 물음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어떤 걸 알고 싶지?"
"……그게 무슨 소리냐?"
미령이 이상하다는 듯 묻자 괴력난신은 씨익 웃었다.
"설마 내가 가지고 있는 필살기가 고작 한 가지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그럼……."
"나는 굉장히 긴 시간을 살아왔다. 그러니 가지고 있는 필살기도 무척이나 많지. 감히 헤아릴 수조차도 없을 정도로."
"……."
저번에는 그냥 딱 하나라고 하지 않았나? 라고 생각하는 듯한 미령의 표정이 일순 지나갔으나 곧 미령은 괴력난신이 내뱉는 말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이게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니라. 남자의 성격, 지위, 관계에 따라 전략을 달리해야 하지. 우선 네 스승의 경우에는-"
괴력난신의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던 미령이 점점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고.
그녀들은 그 잿빛이 되어버린 세계 속에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자, 그럼 기본적인 설명은 끝난 것 같고. 이제 선택할 때가 되었다."
"……정하라니?"
"당연히 필살기지. 병사에게도 병과라는 게 있는 법! 이제 기본은 다 이해했으니, 이제 네 스승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필살기를 쓸지를 정해야 한다. 요부면 요부, 청순이면 청순, 백치미면 백치미!"
"오, 오오……! 혹시 추천하는 거 없나?"
"이거저거 있지만 아무래도…… 일단 두 가지 중에서 고르는 걸 추천한다."
괴력난신은 그렇게 말하며 중지와 검지를 펴고는 이내 중지를 먼저 접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첫 번째. '약하지만 꾸준하게 조금씩 함락시키는 필살기'다."
"……그건 필살기가 아니라 평타라고 하는 거 아닌가?"
무척이나 진중한 표정으로 되묻는 미령.
괴력난신은 입가에 지어진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함락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필살기의 진짜 기술은 '꾸준함'이지."
"……꾸준함?"
"그래, 은근히. 그리고 은밀하게 네 스승을 꼴- 흠흠, 네 스승에게 묘한 감정을 심을 수 있지."
"……묘한 감정이라면?"
"요컨대 여자와 남자 사이가 진전하기 시작하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분위기?"
"……이건 뭐 세 살배기 애들한테 설명하는 게 더 쉽겠구만."
미령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괴력난신을 바라보자 그녀는 미령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고민하다 이내 말했다.
"그냥 한마디로 말해서 스승님에게 자연스럽게 어필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보면 된다. 그럼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둘의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이지."
괴력난신의 말에 미령은 우선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괴력난신은 펴져 있던 나머지 검지를 접고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 '한 방으로 일발승부'다."
"……한 방으로?"
"그래, 게다가 이 방법은 무척이나 쉽지. 또한, 파괴력도 죽인다. 다만-"
"다만……?"
미령이 굉장히 중요한 내용을 듣는 듯한 표정으로 괴력난신에게 귀를 기울였고. 그녀는 곧 입을 열려다 말했다.
"뭐, 자세하게 말하기는 좀 그렇고, 위험부담이 조금 있다."
"……위험부담?"
"그래, 뭐 그렇다고 해도 한정적인 위험이기도 하고, 어차피 먹히면 그 때부터 스승은 네 것이니까 위험 따위는 별 볼 일 없는 것이긴 하지."
아무튼-
"어설프게 둘 다 배워갔다간 아무것도 성공 못할 것 같으니, 확실하게 하나만 알려주마."
괴력난신은 그렇게 말하며 미령을 똑바로 바라봤다.
"오래 걸리지만 확실한 쪽. 한 방에 끝나지만 조금 위험한 쪽."
"!"
"어느 쪽으로 하겠느냐?"
무척이나 진지하게 묻는 괴력난신의 말에 미령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고, 이내 미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하고,
고민한다.
"……."
처음 그녀가 백귀야행(百鬼夜行)의 업을 얻기 위해 노력했을 때보다도 심각해 보이는 미령의 표정.
괴력난신은 그런 그녀를 보채지 않은 채 조용히 시간을 주었고.
"……나는-!"
미령은 입을 열었다.
####
콰지지지직!
"끄에에에엑!"
김현우의 발에 맞은 여왕의 몸이 터져나가고 그녀의 거대한 몸이 볼품없이 지상에 처박힌다.
옆구리가 터진 채 꿈틀거리는 지네의 모습.
이미 아까와 같은 눈알의 모습이 아닌, 김현우가 처음 보았던 거대한 지네의 형태로 돌아가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담아 그녀를 조롱했다.
"어이구? 제대로 움직여야지 왜 이렇게 힘이 약해졌어?"
"아파! 아파!!"
김현우의 조롱처럼 구의 형태에서 지네의 형태로 돌아온 여왕의 모습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공격당했던 옆구리는 확실히 이전처럼 재생하고 있기는 했으나 굉장히 느릿하게 재생되고 있었고,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다리는 이리저리 꺾여 볼품없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박살 났다'라는 표현이 옳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
김현우는 더 이상 조금 전과 같이 재생하지 않는 여왕의 모습을 보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역시 그게 답이었어.'
김현우가 조금 전에 펼친 '뇌목(雷木)'은 그의 생각대로 이 근처에 퍼져 있는 절벽 기둥들을 모조리 박살 낼 수 있었다.
'솔직히 이 기술이 이렇게 잘 맞을 줄은 몰랐는데.'
그가 청룡에게 뇌목을 배운 뒤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지금까지 이 기술을 사용할만한 상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뇌목은 굉장한 범위와 넓은 공격력을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한 번 사용을 하는 데 쓰이는 마력의 소모량도 그렇고 결국 광범위하기 때문에 마력이 많이 들어도 결국 떨어지는 건 일반적인 번개보다 조금 강한 정도였다.
한 마디로 절대다수에게 유효했던 기술.
항상 개인을 상대했던 김현우는 뇌목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생각 이상이다.'
그는 주변을 바라봤다.
보이는 것은 잘게 부스러진 돌조각들.
분명 늪지가 있던 곳들 사이사이에는 거대한 돌조각들이 드문드문 늪지를 좀먹고 있었고,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절벽 기둥들은 완전히 박살 나 그 형태가 없어져 버렸다.
보이는 것은 그저 산산이 부서져 있는 대지뿐.
김현우는 완전히 박살 나 있는 지상을 바라보곤 이내 힘겹게 상처를 재생하고 있는 여왕에게 도약했다.
"오지 마!"
김현우가 다가오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업을 쏟아내기 시작하는 여왕.
그러나-
씨익.
"그러니까 좀 멀리멀리 만들어 두지 그랬어?"
여왕의 업은 김현우의 몸에 일체의 피해도 주지 못한 채 스러져 내렸다.
아까 전과는 다르게 눈에 띌 정도로 약해진 여왕의 업.
분명 발현되는 업들은 이전과 비슷할 정도였으나, 그 출력은 예전과 비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자신을 옥죄어 오기 위해 재현되기 시작하는 여왕의 업을 무시한 채-
"깝치지 말고 이거나 처먹어."
"!!"
자신이 들고 있던 금강여의봉을 여왕의 입가에 들이댔다.
그와 함께 여왕은 본능적으로 김현우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듯 그 몸을 비틀었으나 김현우는 이미 금강여의봉의 길이를 늘였다.
파직! 파지지직! 파직!
순식간에 쏘아져 나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빠르게 그녀의 입안을 파고들기 시작한 금강여의봉.
"크에에엑!"
그것은 여왕의 몸을 마치 꼬챙이처럼 꿰뚫었고, 그에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여왕을 바라봤다.
비명이 지나간 한순간의 정적.
"!"
그리고-
김현우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던 여왕은 곧 깨달았다.
그가 지금부터 무슨 짓을 할지를-쿵! 쿠구구궁! 쿵!
지네처럼 뒤틀리기 시작한 여왕의 몸이 금강여의봉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치기 시작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이미 그녀의 몸을 꼬챙이처럼 꿰뚫은 금강여의봉은 제자리를 유지했고.
"자, 그럼 어디 한번 이것도 버티는지 볼까?"
"안 돼! 안 돼!!"
여왕의 비명.
"커져라-"
그러나 김현우는 자신의 귓가에 걸려 있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여의.
-자신이 들고 있는 금강여의봉을 조절했다.
"크에에-!"
콰직! 콰지지지직! 콰직!
김현우의 명령에 따라 순식간에 그 크기를 키우기 시작한 금강여의봉은 곧 여왕의 몸 안에서 커지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콰득!
그와 함께 여왕의 몸이 마치 종이 찢기듯 찢어지기 시작하고, 그녀의 괴악스러운 목소리도 거대해지고 있는 금강여의봉에 비례해 점점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콰득! 콰드드드득!
마침내, 그녀의 몸은 자신의 몸 안에서 거대해지고 있는 여의봉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터져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복구가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위아래로 찢어진 여왕의 몸.
그렇게 개 박살이 난 뒤에도 김현우는 여의봉을 회수하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약해졌다곤 해도 결국 '재생력' 자체는 남아 있었으니까.
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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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탑의 끝에서 내려온 정복자를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위치: 지하계층
[조율자를 잡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정보 권한의 실적이 상위에서 누적됩니다!]
[현재 정보 권한은 '상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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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곧 눈앞에 떠오른 로그를 보며 들고 있던 여의봉을 놓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와 함께 바뀌기 시작하는 김현우의 몸.
그의 머리 위에 있던 금고아가 사라지고, 마찬가지로 그의 머리 위에 나 있던 사슴과도 같은 뿔이 자취를 감춘다.
김현우의 몸에 깃든 무력감.
"쯧."
그는 자신의 몸속 깊이 자리 잡은 피로와 무력감을 느끼며 혀를 찬 뒤 여왕의 몸이 박살 난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건 뭐야?"
김현우는 허공에 떠 있는 검은색의 보석을 볼 수 있었다.
# 202
202.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2)김현우는 형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완전히 걸레짝이 된 여왕의 몸 위로 떠 있는 검은 보석을 바라보곤 이내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텁.
별다른 저항 없이 김현우의 손아귀에 잡힌 검은 보석.
그는 곧 눈 위에 떠오른 로그를 바라봤다.
------
저장소의 열쇠
등급: Ss+
보정: ??
스킬: 출입(出入)
-정보 권한-
탑의 전체적인 밸런스를 조율하고 이치를 만들어내는 '조율자'이자 세상의 관리하고 만들어내는 그녀, 군락이 만들어낸 열쇠.
그녀는 -권한부족- 의 말로 이 탑을 새롭게 조율하고 난 뒤, 그에게 원래 받기로 했던 권한인 -권한부족-을 받게 된다.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
그렇기에, 그녀는 그에게 받은 -권한부족-의 능력을 이용해 지금껏 그녀가 해오지 못한 여러 가지 실험들을 시작하기 시작했으며 그중에서도 그녀는 -권한부족-에게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 ?권한부족-를 하기 위해, 그들의 눈을 피해 이 공간을 만들어 냈다.
이 공간은 조율자가 -권한부족- 모르게 만들어 낸 그녀만의 비밀 요새이며, 이 공간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그 누구든 30분으로 한정한다.
열쇠에 붙어 있는 출입의 재사용 대기시간은 24시간이며, 재사용 대기시간은 시전자가 출입 스킬을 사용할 때를 기점으로 시간을 체크한다.
재사용 대기시간: 22: 49: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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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떠 있는 아티팩트의 설명을 보며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 정보 권한이 상위가 되도 어떻게 못 읽는 게 이렇게 많냐.'
정보 권한은 만년빙정을 죽인 뒤 상위로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아티팩트에 권한부족이 뜨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했으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저었다.
한동안 로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
'대충 이야기를 해석해 보면 뭔가를 하려고 만든 것 같은데…….'
사실 그거야 생각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나오는 결론이다.
"에라이,"
결국 한동안 열쇠인지 보석인지 모를 그것의 로그를 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지금 상황에서는 제대로 알 수 있을 만한 정보가 없기에.
"……."
김현우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열쇠를 한번 바라본 뒤 하수분의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분명 노아흐가 조율자를 잡으면 얻을 만한 게 있을 거라는 말을 하기는 했는데.'
그게 이건가?
하수분의 주머니에 열쇠를 집어넣으려던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려 돌을 한번 바라보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직 재사용 대기시간도 전부 지나지 않았으니.'
솔직히 마음만 같아서는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 곧바로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재사용 대기시간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빨리 돌아가야지.'
우선 할 일도 다 끝났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얻었으니 확인은 돌아가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김현우가 없는 9계층은 아무리 생각해도 위태위태하니까.
'게다가…….'
솔직히 당장 들어가 보지는 않더라도 느낌상 이 아티팩트는 나름 나쁘지 않은 수확일 확률이 높았다.
'저장소의 열쇠니까.'
정확히 뭐가 있을지는 김현우 본인도 몰랐으나 적어도 쓰잘머리 없는 건 들어 있진 않을 것 같으니까.
"후."
그렇게 결론을 내린 김현우는 완전히 박살 나 버린 주변을 바라보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고아와 뿔이 사라지며 느껴지는 지독한 탈력감을 억지로 무시한 김현우는 곧바로 하늘로 뛰어 올라 자신의 손에 끼워져 있는 근두운을 펼쳤다.
후우우우우-!
순식간에 김현우의 손가락에서 벗어나 마치 안개가 뭉치는 것처럼 만들어지는 근두운.
처음 지하계층에 들어올 때야 조율자가 있는 곳을 세심하게 찾기 위해 근두운을 타지 않았으나 조율자를 처치한 지금 근두운을 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언제라도 준비가 되었다는 듯 허공을 떠 있는 근두운 위에 앉아 곧바로-
"……어?"
-출발을 하려 했다.
김현우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박살이 나 있는 절벽 기둥들과 점점 멀리 볼수록 멀쩡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절벽 기둥들.
다른 쪽을 봐도 마찬가지.
동서남북, 그 어디를 봐도 보이는 풍경은 마찬가지였다.
"……."
그렇기에-
"어…… 길이 어디였더라?"
김현우는 길을 잃고 말았다.
그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자 그의 머릿속에 청룡이 입을 열었다.
[흠, 내 생각에는 남쪽으로 가면 되었었던 것 같군.]
"정말?"
[그래……가 아니라…… 아니군, 서쪽인가? 동쪽?]
김현우가 묻자 갑작스럽게 말을 바꾸는 청룡.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냥 북쪽까지 말하지 그래? 동서남북 한 번씩 다 말하게."
[흐음, 분명 처음에는 남쪽이었던 것 같은데, 솔직히 확신은 못 하겠군.]
[그냥 근두운 타고 벽쪽으로 한번 쓱 훑으면 되잖아? 아마 네가 여기서 조율자 찾을 때보다는 빨리 갈걸?]
청룡의 확신 없는 말투 뒤로 나온 제천대성의 제안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냥 그렇게 하는 게 낫겠다."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곧바로 근두운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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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에 가는 차 안.
"흥~흥~!"
이서연은 자신의 옆자리에서 꼬리를 살랑거리며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는 구미호를 한번 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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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카야: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 좋다 이거 단행본 같은 건 안 나오나요? 솔직히 단행본 나오면 혼자서도 10부는 가볍게 살 수 있을 듯.
ㄴ오타쏠림: 단행본 10부는 무슨ㅋㅋㅋㅋㅋㅋ나는 100부도 산다, 작가님 어떻게 이렇게 글을 잘 쓰시지? 진짜 너무 현실 같아요~~!
안드로레다: 와 솔직히 말해서 이정도면 꼴잘알 인정이다 ㄹㅇ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 좋자너~~~ 완결날 때까지 쭉 따라갑니다~~~~~~ 할 거 다 했는데 이다음은 바로 결혼편으로 달려 나가나요!?
ㄴ 프로러버: ㄴㄴㄴㄴ 결혼 바로 나오면 노잼이고 솔직히 꽁냥거리는 거 2권 정도는 더 진행해도 되지 않을까요? 저는 둘이 꽁냥거리는 거 너무 보고 싶네요ㅎㅎ……
ㄴ 가라보리: 222222222222222222222222222ㄴ 수엉이: 333333333333333333333333333초고토: 후 19금 외전은 없습니까? 이분이 19금 외전 써 주시면 후원 씹가능한 부분인데 ㅋㅋㅋㅋ 월급 중 50% 투자 가능ㄴ 최강전성기: 나도 씹가능, 한 달 월급 0원 중에 반절 투자가능.
ㄴ 초고토: 머임? 장난? 난 진심인데;;
ㄴ 최강전성기: 나도 진심임, 근데 내가 백수라ㅎㅎ; ㅈㅅ;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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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연은 복잡한 표정으로 '스제밀'의 최신화 댓글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제밀,
정확히는 '스승과 제자의 밀애'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팬픽션 소설.
여기서 더 정확히 말하면 이 글은 현재 고인물이라고 불리는 '김현우'와 그런 그의 제자인 '미령'을 엮어서 만든 팬픽션 소설이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 글을 최신화까지 보게 됐지?'
이서연은 복잡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물론 그녀가 처음부터 이 글이 팬픽션임을 알고 본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우연.
그저 그때 당시에 잠시 시간이 남았고, 딱히 그녀의 이목을 끄는 뉴스도 없는 와중에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길래 본 것뿐이었다.
허나 그렇게 스제밀을 발견하고 난 뒤부터 이서연은 하루마다 한 편씩 올라오는 스제밀을 꾸준히 보는 구독자가 되었다.
"후……."
복잡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는 이서연.
물론 팬픽션을 보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으나 팬픽션을 다 보고 나면 이런 종류의 현자타임이 오곤 했다.
'……현실도 아닌데.'
이서연은 문득 이 팬픽션에 메인으로 나오는 김현우와 미령을 떠올렸다.
뭔가 할 게 없으면 이 세상이 귀찮다는 듯 소파에 앉아서 하릴없이 잠을 자거나, 그것도 아니면 TV를 보며 멍하니 하루를 때우는 것이 바로 김현우의 일상.
그렇다면 미령의 일상은 어떨까.
"……."
뭐, 어떻게 보면 미령은 마치 팬픽션에 나온 것처럼 항상 김현우에게 붙어 있긴 했다.
다만 팬픽션과 다르게 미령은-
'굉장히 무표정이지.'
김현우와 꽁냥거리는 팬픽 속의 미령과는 다르게 이서연이 본 현실의 미령은 무척이나 차가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 더 다른 것에 빗대어 묘사를 하자면 이서연이 직접 봤을 때, 미령은 중국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패도 길드의 길드장이라는 자리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냉철한 사람이었다.
'뭐, 현우 오빠 앞에서는 얌전해지지만…….'
김현우가 같이 있는 곳 외에는 거의 사람이 바뀐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한없이 냉정한 표정을 유지한다.
특히, 김현우가 없을 때 그의 두 번째 제자인 하나린과 싸우는 모습을 볼 때면 그녀의 성격이 얼마나 포악(?)한지까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서연은 자신이 보고 있는 팬픽이 완전한 허구란 것을 알고 있다.
'……뭐 애초에 허구라는 걸 알고서도 즐기는 거지만.'
게다가-
'이 사람 너무 글을 잘 쓰잖아……!'
스제밀의 작가는 팬픽션을 쓰는 게 아니라 그냥 장르소설을 쓰면 바로 데뷔할 수 있을 정도로 글을 잘 썼다.
"후우……."
이서연은 그렇게 스제밀이 켜져 있는 스마트폰을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폰을 껐고.
"도착했습니다."
"이제 내리면 되는 건가요?"
"네."
곧이어 들린 운전사의 말에 이서연은 차에서 내려 앞을 바라봤다.
보이는 것은 거대한 장원.
"이곳에 순간이동 마법진이 있는 건가요?"
"네,"
"그럼 제가 어제 말씀드렸던 대로 그 순간이동 마법진을 토대로 육행합진에 대해 알려드리면 될 것 같네요!"
구미호의 말에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와 함께 보이는 것은-
"……응?"
검은색의 가면을 쓰고 있는 꽤 많은 숫자의 가면 무사였다.
그들은 장원 한쪽의 그늘진 곳에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렬로 줄을 맞추며 서 있었다.
'……검은색 가면이면, 미령을 지키는 사람들 아닌가?'
대외비지만 김현우와 미령이 함께 있을 때 종종 패도 길드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가면의 색이 대략 무엇을 표하는 것인지는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바라봤고.
흠칫.
까닥.
까닥.
이서연은 자신을 향해 슬쩍 고개를 까딱거리는 가면무사들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거린 뒤 시선을 돌렸다.
'어…… 막지 않으니까 가도 된다는 소리겠지?'
애초에 김현우에게 장원을 사용할 일 없으면 그냥 부담 없이 사용하라는 말을 듣고 온 것이기에 슬쩍 가면무사의 눈치를 보던 그녀는 이내 장원 내로 걸음을 움직였고.
"……마법진이 어디 있었더라?"
"저도 따로 돌아다니면서 찾아볼까요?"
이서연은 구미호와 떨어져서 장원 내에 그려져 있는 순간이동 마법진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
그녀는 마법진을 찾기 위해 장원 내의 건물을 돌아다니던 중-
"스승님~♥"
그것을 보고 말았다.
# 203
203.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3)슈텐도지(酒呑童子).
그는 모든 요괴 중에서도 파괴욕구와 성격이 포악한 오니(鬼)의 우두머리이자, 또한 그 세대에 존재하는 이들 중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고 전해지던 괴물이자.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마을과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대요괴였고-
"흐음-"
-종래에는 그의 힘에 취해 찾아온 요괴들과 유령들을 모아 한 영지에 비견될 정도로 많은 요괴의 두목을 자처하기도 했었다.
"……이곳인가?"
그리고, 그런 업(業)을 가진 채 이제 막 탑 안에 입성한 슈텐도지는 탑의 1계층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3미터는 가볍게 넘어가는 그의 몸에 칠해져 있는 붉은색 피부가 거칠게 맥동하고, 그의 머리에 달린 여섯 개의 눈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변을 확인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슈텐도지는 기묘한 것을 볼 수 있었다.
"……?"
그것은 바로 쓰러져 있는 늑대인간과 전체적으로 비슷해 보이는 탑의 외벽에 열려 있는 거대한 문이었다.
'뭐지?'
그의 머리로는 살짝 이해되지 않는 상황.
아니, 정확히 말하면 슈텐도지가 탑 밖에서 듣고 온 상황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그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탑의 1계층에서는 늑대인간이 기본적인 시험과정을 거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한동안 쓰러져 있는 늑대인간을 바라보고 있던 슈텐도지.
툭툭.
그는 곧 쓰러져 있는 늑대인간에게로 다가가 그의 몸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허나 아무리 몸을 툭툭 쳐봐도 늑대인간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쓰러져 있었다.
"어이, 일어나 봐."
툭툭-
"어이,"
퍽-
"어이……!"
퍽퍽!
늑대인간이 일어나지 않음에 따라 슈텐도지가 점점 타격의 강도를 올리며 그를 깨우려 했으나 역시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슈텐도지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가 죽지 않았나 확인했으나 특이하게도 늑대인간의 심장은 멀쩡하게 뛰고 있었다.
두근두근
'……도대체 뭐야?'
그렇게 슈텐도지가 이상함을 느끼며 쓰러져 있는 늑대인간을 저 멀리 차기 위해 발을 높게 드는 그 순간-
"이건 또 뭐야?"
그는 탑 한 켠에 열려 있던 문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김현우와 마주쳤다.
슈텐도지는 탑에서 빠져나온 김현우를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늑대인간을 차버리려던 다리를 내리고는 물었다.
"네 녀석은 뭐지? 늑대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슈텐도지의 물음에 김현우는 뭔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슈텐도지를 바라보곤 말했다.
"늑대인간은 네 밑에서 아직도 고개 처박고 있는 그놈이고, 눈알도 6개면서 파악도 제대로 못 하냐?"
갑작스레 날아든 김현우의 노골적인 조롱에 슈텐도지는 눈을 크게 뜨곤.
씨익-
이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탑 안에는 재미있는 놈들이 그렇게 많다고 하던데, 거짓은 아닌 것 같군."
"지랄하고 있네."
김현우는 오만하게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피식하는 웃음을 지었으나 슈텐은 얼굴을 굳히지 않곤 그동안 팔짱을 끼고 있었던 자세를 고쳐 잡았다.
콰아아아아아-!
그와 함께 슈텐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지독할 정도로 강력한 마력.
슈텐은 자신의 입가에 찢어질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좋다! 기껏 탑에 입성했는데 처음부터 이런 재미라니, 훌륭하다! 훌륭해!!"
슈텐은 마력을 사방으로 퍼트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를 향해 자세를 잡았다.
육중한 몸이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 자세를 잡고, 그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마력이 증기기관처럼 탑 안에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그 누가 보더라도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슈텐의 모습.
그러나 금방이라도 터질 듯 사방으로 뿌려지는 마력과 살기를 정면에서 받고 있던 김현우는 아무런 흥미도 없다는 표정으로 슈텐을 바라봤다.
허나 그런 김현우의 모습에 슈텐의 입가는 더더욱 올라갔다.
"좋아! 그 오만함이 좋다! 이 정도의 마력을 느꼈음에도 그렇게 오만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숨겨진 한 수가 있다는 거겠지!"
"지랄."
"지금부터 싸움을 시작하자! 나를 재미있게 해달라 이 말이다!"
그의 욕을 들었음에도 그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할 말만을 하며 전투 준비를 하는 슈텐의 모습.
"어째 낮은 계층에서 만난 놈들은 하나같이 액셀을 밟냐? 찐따들이야?"
그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슈텐을 노려봤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슈텐은 김현우에게 달려들었다.
꽈아아앙!
엄청난 소음과 함께 탑의 바닥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기고, 그의 둔중한 몸이 순식간에 김현우의 앞에 나타난다.
제사까지 잡은 채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수 있도록 팽팽하게 당겨놓은 슈텐의 주먹이 크게 휘어졌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활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슈텐의 주먹으로 붉은 마력들이 감응하듯 모여들고, 김현우는 그런 그의 행동을 바라본다.
그리고 마침내 슈텐이 활처럼 당긴 주먹을 휘둘렀을 때-꽈아아아아아앙!!!!
-슈텐의 머리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가 휘두르던 팔은 힘을 잃은 채 축 늘어졌고, 슈텐의 머리통에서 나온 붉은 피가 부서진 탑의 돌조각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공격하던 슈텐조차 인지하지 못한 그 한순간에 이뤄진 공격.
[겁도 없이 깝치더니 신고식 한번 거하게 치렀군.]
[확실히, 이제 탑 안에 들어와 자신의 업(業)도 제대로 정착하지 않은 놈이 마력만 믿고 설치는 건 좀 골 때리는군.]
제천대성과 청룡이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슈텐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한마디씩 중얼거리고, 김현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정신을 잃은 슈텐을 바라봤다.
"……진짜 뭐 하는 새끼야?"
[1계층에 있는 걸 보면 이제 막 탑에 들어온 놈인 것 같은데 신경 쓰지 말고 다시 올라가기나 하자.]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단 한 방에 땅바닥에 처박혀 정신을 잃은 슈텐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곤 이내 시선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직도 쓰러진 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늑대.
"야, 쟤 안 죽는다고 하지 않았냐?"
[그랬지, 지금도 살아 있다.]
"……그래?"
[이 탑에서 계층민이 아닌 등반자나 정복자, 그리고 탑에 관련된 이들은 탑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몸이 소멸한다.]
"아."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알고 있던 사실을 새삼스레 재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는 노아흐가 몰래 만들어 놓았던 공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하남에 있는 거대한 장원.
"흐음,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이렇게?"
"……."
"……엉덩이를 조금 더 들라고? 옷도 조금 더……? 그건 좀…… 아니,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아, 알았……??"
"……."
"……."
이서연은 멍한 표정으로 눈앞에 일어난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충 20평은 넘어 보이는 거대한 방 안.
바닥에는 미령의 등에 그려진 문신과도 같은 거대한 가면이 대리석으로 멋들어지게 조각되어 있고, 벽지는 마치 옛 동양풍의 분위기를 고풍스럽게 재현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이서연은 보았다.
"……."
"……."
동양풍의 고풍스러운 전신 거울을 앞에 있는 미령을.
"어……."
-정확히는 고풍스러운 전신 거울 앞에서 무척이나 간드러진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연습하고 있는 미령의 모습을.
그녀는 조금 전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연습할 때 짓고 있던 어색한 웃음을 가진 채 그대로 뒤를 돌다 이서연을 마주치곤 그대로 굳어버렸고.
이서연은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 채 미령을 바라봤다.
"……."
"……."
정적.
긴 정적.
허나 그런 긴 정적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그녀의 머릿속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뭐지?'
'지금 이 상황은 뭐지?'
'요즘 내가 팬픽을 너무 많이 봤나? 이게 바로 공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아니라 미령이 맛이 가버린 건가? 혹시 술이라도 한잔한 것인가?'
'왜 저런 야릇한 표정으로 옷까지 약간 흘리면서 저렇게 말하고 있던 거지?'
'그보다 대체 뭘 연습하고 있는 것이지?'
물론 빠르게 돌아가기만 할 뿐 이서연은 마치 현실을 부정하듯 머릿속에서 자신이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끝없이 쏟아내고 있었고.
"……."
미령의 얼굴은 이서연이 본 그 어느 때보다도 붉게 달아오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봤……나?"
기나긴 정적 끝에 미령의 입에서 먼저 흘러나온 목소리에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미령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깊은 수치심과 살의.
"아니……."
그에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부정을 표하려 했으나 미령의 눈빛은 분명히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서연이 자신의 모습을 봤다는 그 확신을.
"그……그러니까."
그에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입가를 다물며 우물쭈물하자 미령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떨궜고.
"아……."
이서연은 그제야 장원 근처에 서 있던 검은 가면무사들을 떠올리곤 이야기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뒤늦게 얻은 깨달음.
그러나-
화아아아악-!
"꺅!?"
-이미 늦었다.
이서연은 순식간에 미령의 이마 위로 자라나는 뿔을 바라봤고, 그 뒤에 나타나기 시작한 거대한 호랑이를 바라봤다.
분명 일반 호랑이와 그리 생김새는 다르지 않았으나 붉은색의 동공을 가지고 있는 호랑이.
미령은 터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냉정을 가정하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의 동료이기도 하니 죽이지는 않겠다."
"그……그럼?"
이서연이 불안하다는 듯 묻자, 미령은 타오를 듯한 홍안으로 이서연을 쏘아보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스승님에게만 보일 수 있는 치부를 남한테 보였으니, 그 기억은 가져가도록 하겠다."
"뭐……뭐? 기억을 어떻게……?"
"걱정 마라. '바쿠'에게 한 방만 물리면 네가 오늘 가지고 있었던 기억은 모두 사라지게 될 테니까."
으르르릉!
고양잇과 특유의 깊은 울음소리를 내며 이서연의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호랑이 요괴 '바쿠'.
이서연은 식은땀을 흘리곤 손을 슬쩍 올리며 진정하라는 제스쳐를 취한 뒤 입을 열었다.
"저……저기 나……나는 아무것도 못 봤거든……? 지, 진짜라니까?"
"설마 내가 그런 거짓말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아니 진짜 못 봤어! 진짜 못 봤다니까!?"
이서연은 자신의 앞으로 슬슬 걸어오기 시작한 바쿠를 보며 자신의 등 뒤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호랑이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더욱 거리를 좁혔다.
"저, 저기!? 진짜라니까!?"
"안심해라. 아까도 말했듯이 스승님의 동료이니만큼 절대로 죽이지는 않는다. 다만 기억을 회수할 뿐이다……!"
미령은 조금 전의 행동을 남한테 들켰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끄러운 것인지 살짝 맛이 가 있는 눈으로 이서연을 바라봤고 그와 함께 바쿠가 이서연의 사정거리 내로 든 그 순간에-
"뭐……?"
미령은 갑작스레 중얼거렸다.
그에 따라 이서연에게로 다가오던 바쿠가 걸음을 멈추고, 이서연은 질끈 감은 눈을 슬쩍 떠서 미령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 여자가 내 수치스러운 기억들을…… 뭐? 그건 그때?"
갑작스레 혼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듯 입을 열기 시작하는 미령.
"그래도 그건 좀……."
그렇게 누군가와 한참 동안 이야기를 시작한 미령은 이내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이서연을 바라봤고.
"……기억을 지우는 건 그만두도록 하지."
"어……정말?"
"그 대신!"
"그……대신?"
이서연이 괜스레 침을 꿀꺽 삼키며 되묻자 미령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으나-
"나를 좀 도와라."
이내 그렇게 말했다.
# 204
204.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4)고풍스러운 도서관.
바닥에는 붉은색의 카펫이 깔려 있고, 그 주변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책장이 밝게 빛나는 샹들리에를 기점으로 열을 맞춰 들어서 있다.
그 외에도 보이는 것은 오롯이 책장뿐이다.
벽을 봐도 책장.
천장을 봐도 책장.
그 어디를 보아도 보이는 것은 책과 책장뿐이었다.
어딘가로 통하는 출입구도 없이, 오롯이 책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그 공간 안에서-
"후……."
그녀, 하나린은 서 있었다.
슬쩍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책장이 아닌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말했다.
"시작해."
가벼운 한마디.
허나 그런 하나린의 한마디와 함께, 그 공간에서는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후두두두둑!
하나린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머리 위에 있던 책장에서 책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하나린의 머리 위뿐만이 아니라, 이 공간 전체에 수많은 양의 책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종이를 날리며 떨어지기 시작하는 책들.
하나린은 시선을 위로 올려 자신에게로 떨어지는 책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그리고 그렇게 해서 가장 먼저 떨어지기 시작한 책이 하나린의 머리 위에 도달했을 때-
"[멈춰]"
-하나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던 책이 멈췄다.
마치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듯, 하나린의 머리 위에 떨어져 내리고 있는 책이 멈춰서고, 그와 함께 이 공간 전체에 떨어지고 있던 책들이 멈춰서기 시작했다.
멈추고,
멈추고,
멈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책들이 멈춘다.
마치 이 공간에 중력의 법칙이 통째로 사라진 것처럼, 하나린의 말 한마디에 멈춰 버린 책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하나린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제자리로 돌아가.]"
그녀의 한마디.
분명 평범한 말일 텐데도 불구하고 불가사의한 힘이 느껴지는 하나린의 한마디에 줄곧 허공에 멈춰 있던 책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웅웅거리던 책들이 순식간에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해 이번에는 중력의 법칙을 반대로 적용한 듯 서서히 되올라가기 시작했고, 떨어져 내린 책들은 하늘에 있는 빈 책장들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마치 정리를 하는 것처럼 깔끔하게 꽂히기 시작하는 책들.
그러나-
"읏."
하나린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신음성과 함께, 책장에 정리되고 있던 책들은 갑작스레 그 힘을 잃고 다시금 허공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빡!
"꺅!?"
하나린은 자신의 머리에 떨어져 내린 책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공간 전체에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책들은 순식간에 붉은 카펫이 깔려 있던 바닥을 없애기 시작했고.
[사라져라-]
떨어져 내린 책들이 공간을 완전하게 덮을 무렵 들려온 '언령의 서'의 목소리에-
"……."
-바닥을 덮고 있던 책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떨어져 내린 책들은 없었다는 듯 완전히 사라져 버린 책들.
비정상적인 일이 몇 번이고 일어난 그 공간 안에 무거운 정적이 들이차고, 줄곧 하나린의 옆에 있는 책상위에 펼쳐져 있던 언령의 서는 입을 열었으나- [역시 4단계는 아직 좀 버거운 것 같군. 하지만 너무 걱정 마라, '공간 제압'을 이렇게 빨리 습득한 건 너밖- 끄악!?]
-곧, 언령의 서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터트렸다.
이유는.
"왜 바로 안 없앴어?"
바로 하나린이 언령의 서를 반으로 찢어버리겠다는 듯 양쪽으로 집어 당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무슨 소리인가!]
"왜 내가 책을 머리에 맞고 나서야 없앴냐니까?"
[무……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난 전혀 너를 엿 먹이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럼 뭔데?"
[떨어지는 그 순간에 공간 장악이 조금 더 유지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자……잠깐 찢지 마! 찢지 말라고!]
언령의 서의 비명에 책을 집고 있던 하나린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언령의 서를 책상에 던져두었고, 이내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이게 도움이 되긴 해?"
[도움이 되긴 하냐니, 뭘 당연한 걸 묻는 건가?]
언령의 서의 꼬운 말투에 하나린이 팍 인상을 찌푸리자- [흠……흠, 전에도 말했지만, 언령의 단계 중 4단계인 '공간 장악'은 지금 네가 배우는 언령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그래봤자 결국 마력으로 공간을 장악하는 거잖아? 그거라면 너를 만나기 전에도 그런 식으로 언령을 사용했는데. 게다가 너도 우선은 그렇게 하라며?"
하나린은 며칠 전, 그녀가 막 '언령'으로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3단계를 마쳤을 때 그가 했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선은 마력으로 이 공간 전체를 장악해 보라고."
그녀의 물음에 언령의 서는 곧바로 대답했다.
[맞다.]
[……그럼 내가 원래 사용하던 거랑 뭐가 다른 건데?]
[우선 첫 번째로 지금 네가 훈련하고 있는 것은 네가 이전에 언령을 사용했던 방법과 크게 다르진 않다, 다만 이다음에 배울 것이 다른 거지.]
"……이다음에 배울 것?"
하나린의 되물음에 언령의 서는- [그래, 지금 내가 시키는 대로 해서 공간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법을 알게 되면-]
그렇게-
[그다음에는 공간 안에 있는 인지를 장악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되니까.]
말했다.
####
자신에게 깝죽거리던 슈텐을 단 한 방으로 보내버리고 노아흐가 만들어 놓은 방으로 걸음을 옮긴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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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의 위치이동 장치
등급: ??
보정: 없음
스킬: 위치이동
-정보 권한-
노아의 방주의 주인이자 이 탑을 만들어 낸 제작자가 만든 위치이동장치.
그가 처음 이 탑을 만들기 위해 초기 제작했던 위치이동장치는 제작자가 만들어 낸 공간 안이라면, 그리고 그가 지정해 놓은 공간이라면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위치이동장치는 연속으로 사용할 수 없으며 한번 사용할 때마다 제작자의 마력을 채워 넣지 않는 이상 총 24시간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가진다.
허나 제작자가 마력을 일정이상 집어넣었을 때는 제작자가 마력을 집어넣은 양에 비례해 재사용 대기시간을 1%부터 100%까지 감소시킬 수 있다.
현재 상태: 사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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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눈 위로 떠오르는 로그의 마지막 부분을 확인한 뒤 이내 위치이동을 사용했다.
파직- 파지지직!
입을 염과 동시에 파직 거리기 시작하는 위치이동 장치.
그리고-
화아아아악!
위치이동 장치에서 터져 나오는 새하얀 빛에 잠깐 눈을 감았던 김현우는-
"……."
-무척이나 익숙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바로 김현우가 처음 위치이동 장치를 썼던 저택 내의 풍경.
"후……."
멍하니 바뀌지 않은 저택 내의 풍경을 한번 바라본 김현우는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빈 소파에 늘어지듯 몸을 뉘였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느껴지는 피로감.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천대성과 청룡이 말했다.
[갑자기 사오정처럼 변했네.]
[뭐, 우선은 쉬어 두는 게 좋을 것 같군.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한데다가 그 괴물을 상대하느라 몸을 혹사시키기도 했으니.]
확실히 청룡의 말대로 김현우의 몸은 상당히 피로를 느끼는 중이었다.
그는 지하계층으로 내려간 뒤로는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고, 여왕을 상대한 뒤에도 짧은 휴식 없이 곧바로 9계층에 올라왔다.
휴식 없는 강행군.
그렇기에 김현우는 들리는 청룡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리곤-
"맞아, 오늘은 좀 쉬어야겠어."
-곧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김현우는 곧바로 노아의 방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벌써 온 건가?"
"왜?"
"아니, 내 생각보다도 빨리 온 것 같아서 말일세."
"뭐, 그냥 빨리빨리 끝내고 왔지."
노아의 방주에 들어오자마자 살짝 놀라며 입을 여는 노아흐의 말에 대꾸한 김현우는 그의 앞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 그러니까 조율자는 어떻게 됐나?"
노아흐의 물음.
김현우는 아무런 말도 없이 노아흐에게 저장소의 열쇠를 내밀었고, 노아흐는 그가 내민 흑색의 보석을 받아들이며 물었다.
"이건?"
"조율자가 가지고 있던 열쇠야. 근데, 그 녀석 진짜 조율자 맞아?"
"……그게 무슨 소리인가?"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자신이 지하계층에 내려가서 보았던 조율자의 모습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치 키메라처럼 자신의 몸에 다른 종족의 몸을 붙여 놓은 그녀의 모습부터 시작해, 나중에는 거대한 지네로 변해 자신을 공격했던 그녀의 모습까지.
김현우의 이야기를 잠시간 듣고 있던 노아흐는 혀를 쯧쯧 차며 대답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더니, 결국 그 사단을 내고 말았군."
"무슨 욕심?"
그의 물음에 노아흐는 대답했다.
"저번에도 내가 말했듯이 자네도 알고 있는 내용이네만, 이 탑을 만든 다섯 중 세 명, 그러니까 '설계자'와 '기술자', 그리고 '조율자'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우리를 이용했네."
그리고-
"그중에서도 조율자의 욕심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업을 만드는 것이었네"
"……전지전능?"
"그래, 그 무엇이든 알 수 있고,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지전능에 다다르는 게 바로 그녀의 욕심이었네- 뭐, 자네가 해준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 그녀는 딱히 자네가 손대지 않았더라도 자멸했을 것 같군."
제작자의 말에 김현우는 물었다.
"자멸했다고? 왜?"
"말 그대로의 이야기일세, 그녀처럼 등반자의 몸을 기워 붙여 신체 자체에 남아 있는 '업(業)'을 특수한 방법으로 끌어 쓴다고 하더라도, 그건 한계가 있지."
아마 그녀가 그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업의 개수를 늘려 전지전능을 노렸다면-
"아마 전지전능에 도달하기 전에, 그녀는 자신이 모은 업을 버티지 못하고 몸이 부서졌을 걸세. 아무리 특수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말일세."
"……몸이 부서진다고?"
"그래, 아무리 몸을 기워 붙인다고 해도 그 육체에 들어 있는 미약한 업은 엄연히 남의 것, 자신이 경험하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은 업은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될 뿐이지."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며 넘겨받은 보석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다 무엇인가가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왜 그러나?"
"그렇게 말했었잖아? 조율자를 처리하면 뭔가 얻는 게 있을 거라고, 그게 그거야?"
김현우가 노아흐의 손 위에 있는 열쇠를 가리키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네,"
"그게 뭐길래?"
그의 물음에 보석을 관찰하고 있던 노아흐는 이내 김현우에게 그것을 돌려주며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아티팩트의 로그를 읽어서 알 것 같네만 그것은 바로 그녀의 저장고일세. 그러니까- 음……."
노아흐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역시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는 자네가 한번 들어갔다가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훨씬 편할 것 같군."
"한번 들어갔다 나오라고?"
김현우는 노아흐의 말에 대답하며 시선을 내려 저장소의 열쇠를 바라봤다.
"그래, 자네가 한번 들어갔다 나온 뒤에 설명하는 게 훨씬 편할 것 같으니 말일세."
"그래? 그렇다면야……."
'사실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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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소의 열쇠
등급: Ss+
보정: ??
스킬: 출입(出入)
재사용 대기시간: 0
[사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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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루가 지나서인지 지하계층에서 봤을 때와는 다르게 초기화되어 있는 재사용 대기 시간을 보며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출입."
부르르르르-!
김현우의 입이 열리자마자 그의 손안에서 부르르 떨기 시작한 보석.
그는 짐짓 손에서 떨어져 나갈 정도로 부르르 거리는 보석을 꾹 쥐었고, 이내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
김현우는 자신의 눈앞이 새카맣게 변해가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어쩌지도 못한 그 순간에 새카맣게 물들기 시작한 그의 시야.
처음 접하는 상황에 김현우는 일순 동요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마음을 진정시키기 시작했고.
곧 그의 시야가 검게 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우는 새카맣게 물들었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
김현우는 그곳에서-
"이게……뭐야?"
군단을 볼 수 있었다.
# 205
205.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5)아랑 길드의 꼭대기 층에 있는 집무실에서는-
"네, 오늘은 이걸로 끝내면 되겠네요!"
구미호가 이서연이 그린 술법진을 보고는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이서연은 허공에 그리고 있던 마법진을 유지하지 않고 날려 버린 뒤, 이제야 살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죽겠네……."
이서연의 앓는 소리.
"그래도 이 정도면 굉장히 빠른데요? 시스템의 보조를 받는다고 해도 이렇게 빠르게 마력 고착화를 배우기는 힘들거든요."
"……그래?"
"네! 갑자기 최근 들어서 성장도 눈에 띄게 빨라지신 것 같아요!"
구미호의 말에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집무실 책상 한편에 놔둔 쵸르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감사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이서연이 넘겨 준 쵸르를 받아든 구미호.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짓던 이서연은 자신의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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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서연
나이: 28
성별: 여
상태: 매우 양호
-능력치-
근력: A
민첩: S+
내구: A++
체력: S+
마력: S++
행운: B
SKILL -
세분화 염화 마력분쇄 집중 치중 강화 한정강화마법개화 마법진 고속영창 기억회로 마력속독유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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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주르륵 떠오르는 이서연의 능력창.
자신의 능력치 창에 '고착'이라는 스킬이 새롭게 추가된 것을 확인했으나 이서연이 상태창을 열어본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상태창을 열어 본 이유는-
'……마력이 올랐어.'
-바로 자신의 능력치를 보기 위해.
이서연은 자신의 능력치가 올라간 것을 확인하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헌터는 튜토리얼 탑에서 자신의 한계 능력치를 기르고 나온다.
물론 탑 밖으로 나온다고 해서 성장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성장은 튜토리얼 탑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확연히 느려진다.
게다가 다들 재능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A등급이나 S등급에 도달하면 그 능력치는 더 이상 오르지 않는다.
그래, '아예'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오르지 않는다.
물론 탑 밖으로 나와 깨닫는 '마력'은 조금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어느 한계를 기점으로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이서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불과 2주 전부터…….'
이서연의 능력치가 오르고 있었다.
당장 2주 전만 하더라도 이서연의 마력 능력치는 'S+'였다.
헌데 지금은?
'S++라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2주 전에 S-였던 민첩은 S가, A+였던 내구 능력치는 A++가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멈춰 있다가 갑작스레 오르기 시작한 능력치.
처음에는 오르기 시작한 능력치가 달갑게만 느껴졌는데, 2주 동안 오른 능력치를 생각해 보면 역시 뭔가가 이상했다.
이미 성장한계치에 다다른 이서연의 능력치가 이렇게 빨리 오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
그렇게 이서연이 묵묵히 고민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저기,"
"……?"
이서연은 곧 고민을 하던 도중 구미호의 말에 의해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그녀가 준 쵸르를 전부 먹어 치우고 이서연의 앞에 앉아 있는 구미호.
그녀는 이서연이 자신을 바라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응? 아직 시간 여유로운데?"
"그, 주인님한테 뭘 물어봐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구미호의 말에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을 내뱉으며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애교 어린 목소리로 스승님을 부르던 미령의 모습을 봄과 동시에 그녀의 뒤에서 나왔던 붉은 동공의 호랑이를.
그리고 마지막에 들었던 미령의 제안까지.
그것을 멍하니 생각하던 이서연은 왠지 머리가 아파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저었고,
"……생각해 보니 그랬었지."
이내 천호동으로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김현우는 눈앞의 풍경을 멍하니 자신의 눈 안에 담았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무척이나 거대해 보이는 공동.
마치 동굴을 개조해서 만든 듯 외벽은 굉장히 불규칙했으나 그런 불규칙한 벽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빛나는 돌은 거대한 동굴 내부를 환하게 비추어 주었다.
그리고 어둡지 않은 동굴 내에서-
"이건……."
-그는 그 넓은 공동 안에 있는 그것들을 보았다.
"뭐야……?"
김현우는 '그것'들이 서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분명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김현우는 동굴 내부를 꽉꽉 채우고 있는 그것이 군대 인 줄로만 알았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것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곧-
"……조각상?"
김현우는 이 동굴 내에 세워져 있는 것들이 딱딱한 무엇인가로 만들어진 조각상인 것을 깨달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누군가의 모습을 정확하게 카피해 놓은 조각상.
그는 눈앞에 보이는 조각상을 찬찬히 감상했다.
김현우의 앞에 있는 조각상은 어떤 남자의 조각상이었다.
머리는 말총머리를 하고 있었고, 입고 있는 옷은 조각상이라 색이 뚜렷하지는 않았으나 무복인 듯했다.
그와 함께 오른손에 들려 있는 것은 검은색이 친숙한, 어디에선가 보던 익숙한 검.
"……응?"
거기까지 확인한 뒤, 김현우는 눈앞의 조각상이 누구를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누구지?'
김현우는 또 한번 조각상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봤다.
은근히 굳세 보이지만, 어째서인지 김현우의 눈에는 굉장히 띠꺼워 보이는 표정.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검은색으로 만들어져 있는 게 있는데, 친숙해 보이는 검이었다.
그래, 검은색의 검이었다.
검은색의-
"……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김현우는 불현듯 자신의 머리에 스쳐지나간 한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내며 조각상을 바라봤다.
굳건한 인상이지만 자신의 눈에는 굉장히 띠껍게 보이는 표정과, 익숙한 흑도를 들고 있는 남자.
"……천마(天魔)?"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고, 그와 함께-
[……이건, 평범한 조각상이 아니군.]
"평범한 조각상이 아니라고?"
줄곧 조용히 있던 제천대성의 말에 대답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에 있는 곳이라곤 오로지 무엇인가로 만들어진 조각상뿐.
그렇게 김현우가 주변을 돌아보고 있자 제천대성은 슬슬 이곳에 세워져 있는 조각상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한 듯 입을 열었다.
[이건 시체야.]
"……뭐?"
[못 들었어? 시체라니까?]
"아니, 이게 시체라고?"
김현우가 자신의 앞에 있는 조각상을 보며 중얼거리자 제천대성은 대답했다.
[그래, 겉으로 보기에는 딱딱하게 굳어 있지만, 이건 등반자들의 시체야.]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이는 것은 대충 세어도 수백의 단위는 넘을 것 같은 조각상들, 어쩌면 수백이라는 단위를 넘어 천이라는 단위까지 넘볼 수 있을 것 같은 숫자.
"이게 정말 등반자의 시체라고?"
[확실해, 업은 사라졌지만 시체에 업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아마 너랑 싸웠던 그 괴물이 뭔가 조치를 취한 것 같은데? 게다가-]
"……게다가?"
[이곳에는 등반자의 시체만 있는 게 아니야.]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앞으로 가 봐라.]
김현우는 제천대성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의 말에 따라 앞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이는 수많은 조각상들.
그가 그렇게 수많은 조각상을 살펴보며 앞을 향해 걸음을 옮긴 지 얼마나 되었을까?
"……!"
김현우는 어느 한순간 자신의 앞에 만들어져 있는 무척이나 익숙한 조각상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금고아, 그 아래로는 분명 황금쇄자갑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 갑옷이 입혀져 있었고, 그의 손에는 김현우의 눈에도 무척이나 익숙해져 있는 여의봉을 들고 있었다.
"……이거, 네 시체야?"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이 묘하긴 한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그 옆에는 너한테 뒤진 놈들도 차례차례 박제되어 있네.]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와 함께 보이는 것은 바로-
"……전우치랑, 만년빙정?"
[맞아.]
바로 9계층에 내려와 김현우에게 소멸당했던 전우치와 만년빙정의 시체였다.
김현우에게 박살 났던 모습과는 다르게,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전우치와 만년빙정의 모습.
[그냥 탑에서 죽은 놈들은 죄다 모아다가 시체를 복원해 놨네.]
[뭐, 내 시체도 있는 걸 봐서는 그런 것 같군.]
"네 시체는 어디 있는데?"
청룡의 말에 김현우가 입을 열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대로 고개를 올려봐라.]
곧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올린 김현우는 공동의 위쪽에서 또 다른 조각상들을 볼 수 있었다.
"저것들은 또 뭐야……?"
[아무래도 종족별로 개체까지 친절하게 나누어 놓은 것 같군.]
지상이 인간과 비슷한 등반자와 정복자를 모아놨다면, 하늘에는 청룡과 같은 신수종 등반자들의 시체를 모아 놓은 듯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거대한 육체를 둥글게 말고 있는 청룡의 모습.
'……아까 봤던 동굴의 하늘이 청룡의 신체였어?'
분명 아까 봤을 때는 동굴의 천장이겠거니, 하고 넘어갔던 것이 사실은 청룡의 몸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김현우는 슬쩍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른 곳을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린 곳은 바로 청룡 주변에 만들어져 있는 다른 영물과 신수들.
한동안 하늘에 만들어져 있는 조각상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조율자…… 이거 완전 또라이 같은 년이네?"
김현우의 중얼거림에 제천대성과 청룡은 동의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동감.]
[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한동안 시체들이 장식 되어 있는 조율자의 저장고를 둘러보던 김현우는-
[제한 시간이 끝났습니다.]
"어?"
"왔군."
눈앞에 떠오른 로그와 함께 노아의 방주 밖으로 빠져나왔다.
일순 멍한 표정을 짓는 김현우와 이제 올 줄 알았다는 듯 표정의 변화 없이 그를 맞이한 노아흐.
김현우가 순간 멍하게 있자 노아흐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저장고 안은 들여다보고 왔는가?"
김현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자 노아흐는 확인하듯 되물었다.
"그 안에는, 등반자들의 시체가 있지 않던가?"
"맞아. 도대체 어떻게 이걸 예상하고 있던 거야?"
그의 물음에 노아흐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사실 예상하기도 했네만, 내가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네가 조율자의 모습을 알려줬기 때문이지."
노아흐의 말에 무엇인가를 더 물어보려던 김현우는 이내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질문을 멈추고 다른 것에 관해 물었다.
"그래서, 이 저장고 안에 있는 시체들이 어떻게 나한테 도움이 된다는 거야? 제천대성과 청룡에게 들어보니 딱히 업(業)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빈껍데기던데?"
"확실히, 그녀가 남겨둔 것은 그저 시체일 뿐이지. 허나-"
노아흐는 자신의 품을 뒤적거리며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건……?"
그가 꺼낸 것은 바로 청룡의 업(業)이 담겨 있던 보석청룡의 업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푸르른 빛을 흩뿌렸으나 그가 청룡의 업을 꺼낸 뒤로는 칙칙한 회색빛이 되어 있는 보석을 꺼내든 노아흐는-
"그 시체를 우리 편으로 다시 살릴 수 있다면 어떨까?"
"……!"
-웃으며, 그렇게 입을 열었다.
# 206
206.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6)
"그러니까, 네가 말한 대로 하면 등반자들을 아군으로 살릴 수 있다 이 말이야?"
"뭐, 확실하게 아군으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네만, 가능성은 있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확실하게는 불가능하다고?"
"그래."
"……그건 또 왜?"
김현우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노아흐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자네의 역량 문제니까."
"뭐? 내 역량 문제?"
"그래, 등반자들을 아군으로 쓰는 건 순수하게 자네의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하네. 등반자들이 아군이 되는 건 자네가 얼마나 등반자들을 잘 설득하냐에 따라 다른 거니까."
"엥……?"
"왜 그러나?"
"아니, 잠깐…… 내가 설득한다고?"
"그래."
"……그러니까, 화술 말하는 거지?"
"그럼 뭔가 있을 거라 생각했나?"
노아흐가 그렇게 묻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대답했다.
"아니, 네가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처럼 말하길래 나는 너한테 뭔가 다른 능력이 있는 줄 알았지."
김현우의 대답에 노아흐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나도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네만, 유감스럽게도 내겐 그런 능력이 없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저장고의 열쇠 안에 있는 등반자를 살릴 방법을 알려주는 것뿐이지."
# 207
207화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7)
"흐으음."
이전과는 달리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노아의 방주 안.
그곳에 앉아 있던 노아흐는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앞에 있는 마법진을 만지고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열 개는 넘어 보이는 진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마법진.
그것은 바로 노아흐가 김현우의 부탁을 받아 이 '탑'안에 존재하고 있는 시스템 룸을 찾기 위해 임시로 만든 탐색기였다.
'뭐, 그래 봤자 예전에 만들어 놨던 물건들을 재사용하는 거지만.'
옛날이라면 이 탑 전체를 탐색할 수 있는 탐색기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허나 지금의 노아흐는 자신의 힘을 대부분 잃은 상태였기에 자신이 예전에 만들어 놓았던 것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체 왜……."
탐색이 늦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
노아흐는 마법진을 가동하고 있는 오른손을 세밀하게 움직였다.
검지가 살짝 굽혀지고 약지와 새끼가 반대로 펴진다.
고작 그 살짝의 움직임만으로도 마법진은 그 즉시 반응해 그 술식을 바꾸어 나간다.
그가 손가락을 한번 까닥할 때마다 바뀌어 나가는 마법진.
그리고 한동안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직이던 노아흐는, 이내 마법진이 하나의 홀로그램을 띄우게 되었을 때 손가락을 멈췄다.
검은색만을 비추고 있는 거대한 홀로그램.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노아흐는 새끼손가락을 조심스레 움직였고, 이내 그와 함께 홀로그램 속에서 어느 한 벽이 나타났다.
눈으로 볼 때 굉장히 가시감이 느껴지는 벽.
상하좌우는 전부 칠흑 같은 검은색인데 비해 노아흐의 눈앞에 보이는 벽은 하얀색이었다.
허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닌 그 벽 한가운데에 적혀 있는, 노아흐가 읽을 수 있는 글자 때문이었다.
[때가 되면 알아서 찾아갈 테니 가디언에겐 말하지 마세요.]
마치 자신이 올 것이라는 것을 훤히 예측했다는 듯 쓰여 있는 글자.
이 글자를, 노아흐는 이미 김현우가 찾아오기 전에 발견했었다.
허나 김현우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가 이미 올 것이라는 걸 예측한 그녀가 써 놓은 이 글자 때문.
"……."
노아흐는 순간 머릿속에서 가지를 올리며 뻗어나가는 생각에 집중했다.
'도대체 왜?'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노아흐는 시스템 룸 안에 있을 그녀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후……."
결국 한참이나 머리를 굴리고 있던 노아흐는 딱히 이거다 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어차피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생각해 봤자…….'
확실하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 대충 지금 상황으로 따져 봤을 때 그녀가 누구인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녀가 현재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자신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까닥 후우우웅!
결국, 한참 동안이나 그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노아흐는 엄지를 크게 까닥이는 것으로 손 위에 지탱하고 있는 마법진을 없애버렸다.
마법진이 사라지자 글자를 표시하고 있던 홀로그램은 사라졌고, 그는 곧바로 다음 작업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계속 이곳에 신경써 봤자 자신이 그녀의 뜻을 존중하는 이상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노아흐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품속에 있던 회색빛의 보석을 꺼내들었다.
청룡의 업(業)을 담아두는데 사용했던 보석.
'나 때만 해도 이 정도는 만들지 못했는데.'
노아흐는 회색빛의 보석을 관찰하듯 여기저기 뜯어보았다.
벌서 김현우가 오기도 전부터 몇십, 몇백 번이고 반복되고 있는 행위.
허나 그는 질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인지 끊임없이 칙칙한 회색빛 보석에 눈을 가져갔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
"……뭐라고?"
천호동의 자택.
줄곧 고민하고 있다 들려온 이서연의 말에 김현우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약간의 텀을 두고 다시 한번 물었고, 그에 이서연은 괜스레 말을 더듬으며 한 번 더 물었다.
"그, 그러니까, 좋아하는 여자 취향이요."
"……."
어? 뭐야? 원래 이런 이야기였던가?
라는 생각이 김현우의 머릿속을 한껏 스쳐 지나가고, 그 뒤로 수많은 생각이 김현우의 머릿속에 폭풍처럼 몰아친다.
허나 그건 단 한순간.
김현우는 무척이나 빠르게 결론을 냈다.
"나 좋아하냐?"
"개소리하지 마세요. 오빠."
"……."
그가 입을 열자마자 우물쭈물하던 표정을 바꾸고는 입을 여는 이서연, 김현우는 왠지 당황한 듯한 감각을 느끼며 말했다.
"그럼 내 취향은 왜 물어봐?"
"그럴 일이 있으니까 물어보죠."
"……이제 TV방송사 인터뷰 취재도 받냐?"
"엥?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요?"
"니들 전에 빈자리 빵꾸 메꾸겠다고 니들 미궁 탐험간 사이에 나 속여서 앉혔잖아?"
"어, 음…… 뭐, 그건 자리도 마련해 줄 겸, 뭐 오빠한테도 나름 나쁘지 않은 기회다 생각돼서 제안한 거죠."
이서연의 말에 김현우가 반쯤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다급하게 입을 열며 주제를 원래로 돌렸다.
"아무튼! 좋아하는 여자 취향은!?"
"인터뷰 취재야?"
"인터뷰 취재 같은 거 아니라니까요!? 그냥 어쩌다 보니 물어볼 일이 생겨서 그래요. 아무튼, 빨리요!"
"아니, 내가 왜 갑자기 그런 걸 말해야 해?"
"말 안 할 거예요?"
"별로 안 하고 싶은데?"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턱을 괴고 멍하니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취향이라…….'
좋아하는 이성의 취향.
'……딱히 그런 게 있었나?'
김현우가 그렇게 스스로의 질문에 또 다른 의문을 던지고 있을 때, 그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역시 여자라고 하면 칠선녀 아니냐? 솔직히 다들 예쁘긴 한데 넷째가 그렇게 야-]
[어허, 원숭아, 칠선녀를 그렇게 욕보이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또, 또 시작이네, 야 어디서 보면 너는 아주 이 세상 저 세상 깨끗해 보인다?]
[당연하다! 이 몸은 사방의 수호신인 몸! 하늘에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아녀자를 희롱한 네 녀석보다는 낫지 않겠나?]
[지랄하지 마라 뱀 대가리야, 네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후리고 다닌 게 아니라 걔들이 쫓아온 거거든? 왜 나한테 지랄이야!?]
[네가 하늘에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니까 그런 거 아닌가!]
[응 아니야~ 특히 넷째는 자기가 직접 자기 발로 나한테 찾아왔거든?]
갑작스레 일어난 제천대성과 청룡의 설전.
[그렇다고 해도 감히 옥황의 딸인 칠선녀 중 한 명을……!]
[응~ 다음 옥황상제가 가장 아끼는 막내딸인 직녀랑 놀아나다가 업도 뺏길 뻔한 청룡 나와주시고요~]
[뭐, 뭣!?]
[왜? 모를 줄 알았어? 너도 솔직히 쓰레기 아니냐? 어떻게 견우랑 결혼한 애를 그렇게 홀려서 맛있게 호로록 해버리냐?]
[그, 그게 무슨! 헛소리 하지 마라!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잘 몰랐-]
[개소리하지 마시고요. 사방신 중에 청룡은 아녀자를 제물로 받는다는 소문도 있었죠?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여?]
[이 자식이!]
[한번 해볼래? 업도 없는 놈이 까부는 거야??]
[내가 업이 없어도 너 같은 원숭이는 처리가능하다!]
[한번 해봐!]
순식간에 말싸움에서 전투로 진입했는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둘의 목소리.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 둘의 이야기를 듣던 것을 끝내며 생각을 이어나갔으나 역시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러던 중,
"아."
"대충 생각나는 게 있어요?"
불현듯 탄성을 터트린 김현우의 모습에 이서연은 뭔가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에 김현우는 이서연을 보며 잠깐만 기다려보라는 듯 손짓을 한 뒤에 스마트폰을 뒤지기 시작했고. 이내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클릭한 김현우는 이서연에게 스마트폰의 화면을 보여주었다.
"이건…… 뭐예요?"
이서연의 질문.
그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하남에 있는 거대한 장원.
그 안에 있는 궁궐과도 같은 공간 안에서 그녀, 미령은 앉아 있었다.
"……."
침묵.
숨 쉬는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짙은 침묵이 자리한 그곳이었으나 그런 외부의 침묵과는 다르게 미령의 내부는 상당히 시끄러운 상태였다.
[아이야, 도대체 왜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거지?]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할 뿐이지.'
[흐응, 신중한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 아니냐?]
'뭐라고?'
[내가 보기에는 두려운 것 같은데 말이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돼서 스승과의 관계가 틀어질까 걱정되는 것이 아니더냐? 허나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알려준 필살기는 실패 따윈 없다.]
'…….'
[혹시 내 말을 못 믿는 것이냐? 만약 그렇다면 네 몸을 내게 조금만 빌려주거라.]
'뭐?'
[얼마 걸리지 않는다. 10시간 정도면 충분하지. 그 안에 네 스승님을 홀려주겠느니라.]
괴력난신의 말에 미령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건 좀…….'
[……이것저것 원하는 주문이 많은 아이로구나. 게다가 조금 답답하고.]
'윽, 시끄럽다!'
[그렇지 않느냐? 누가 들어도 박수를 탁 칠 만한 필승전법을 들어놓고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간을 질질 끌다니…….]
'그, 그래도 그 녀석에게 조금이라도 조언을 구해 들으면 조금 더 확률이 높아질 수-'
[내가 필살이라고 말했지 않느냐? 그녀를 가지고 네 스승의 이상형을 알아내봤자 딱히 지금과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 뭐…… 정을 나눌-]
"그만! 거기까지!"
상상이라도 했는지 슬쩍 붉어지는 미령의 얼굴을 보며 괴력난신은 '어떻게 저렇게 맹물인지'라고 중얼거리며 혀를 찼고, 그에 미령은 반박하려 했으나.
"이서연 님이 도착했습니다."
곧 미령은 불현듯 나타난 남자의 말에 저도 모르게 열려던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이서연.
이서연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짧게 인사를 했고, 미령은 그런 이서연의 모습을 한번 바라보고는 곧바로 목을 슬쩍 움직였다.
그것은 현재 이 궁궐 내에 있는 가면무사에게 내리는 축객령.
가면무사들은 미령의 말뜻을 알아듣고 곧바로 궁궐 내에서 빠져나갔고, 미령은 가면무사들이 모조리 궁궐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입을 열었다.
"들었나?"
한마디.
그녀의 물음에 이서연은 미령의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들었어요. 듣기는 들었는데……."
이서연이 말끝을 흐리자 미령은 슬쩍 머리를 갸웃거리며 이서연을 바라봤고 그녀는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머리를 이리저리로 굴렸다.
잠시간의 침묵.
미령이 다시 말했다.
"……스승님의 취향을 제대로 들었다는 게 맞겠지?"
확인 차 물어본 미령의 말에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듣기는 들었는데……."
"들었는데?"
"그게 좀…… 음, 뭐라고 해야 하지."
딱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이서연.
허나 그녀는 곧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스마트폰을 꺼냈다.
"우선, 현우 오빠가 말했던 것을 보여 드릴게요."
이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스마트폰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거예요."
이서연은 어느 한 화면을 켠 채 미령에게 스마트폰을 넘겼고, 미령은-
"……응?"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 208
208.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8)그날 저녁.
천호동 저택 내의 방 안에서 김현우는 청룡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말하려 했던 방법이 그거라고?"
[그래.]
"……그게 돼?"
김현우가 미심쩍다는 듯 청룡을 바라보며 묻자 청룡은 곧바로 대답했다.
[가능하다. 다만 여러모로 리스크가 있을 뿐이지.]
"그럴 줄 알았지."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탄식하며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허나 네 생각대로 우리를 실질적인 아군으로 사용하고 싶다면 그렇게 사용하는 수밖에는 없다.]
"뭐, 또 굳이 따지면 그렇기는 한데……."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고민했고, 이내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근두운술을 배웠을 때처럼 너희들의 업을 그대로 똑같이 따라하라는 거잖아?"
[맞다. 다만 내가 거기서 제안한 것은 그 수련의 시간을 획기적으로 빠르게 줄일 수 있는 술법진을 알려준다는 거지.]
"그 술법진이 뭔데?"
[시공진(時空)이다.]
"……시공진?"
[그래, 아까도 말했듯이 이 시공진을 이용하면, 네 수련 속도를 빠르게 줄일 수 있다. ]
"……그게 가능해?"
[가능하다.]
"도대체 무슨 원리인데?"
[말 그대로 술법진의 이름처럼 시공을 이용하는 거다.]
"그거, 그렇게만 들어보면 굉장히 위험하고 강력한 것 같은데?"
김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자 청룡은 부정했다.
[위험하고 강력했으면 좋겠다만, 유감스럽게도 그 술법진은 공격에 사용할 수 있는 술법진은 아니다.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이름만 거창하다는 소리를 듣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시공진으로 어떻게 수련시간을 줄인다는 건데?"
그의 질문.
[너를 나눌 것이다.]
"……뭐?"
[물론 네 본체를 반으로 갈라 나눈다든가 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정신을 나눈다 이거지.]
"정신을…… 나눈다고?"
[그래, 만약 시공진을 이용해 네 정신을 다섯 개로 나눈다고 하면 그 다섯 개의 정신으로 각각의 업을 수련하게 시키는 거지. 대충 감이 오지 않나?]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분산처리를 시킨다는 거지?"
[어감을 보니 대충 이해한 것 같군.]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만약 그게 된다면…….'
확실히 나쁘지 않다.
그냥 나쁘지 않은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리스크는 뭔데?"
청룡이 아까 김현우의 질문에 답했듯, 이 기술에는 리스크가 있었다는 것을 김현우는 빠르게 떠올렸고. 그 리스크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캐치하고 있었다.
원래 이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라는 것을 김현우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가진 김현우의 물음에 청룡은 답했다.
[네 정신이 망가질 위험이 있다.]
"내 정신이?"
[그래, 비교를 하자면…….]
청룡이 리스크의 위험을 설명해 주려는 듯 고민하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뱀 대가리는 멍청해서 그런지 비유할 거 생각하는 데만 해도 더럽게 오래 걸리는 것 같으니까 그냥 내가 비교해 줄게.]
제천대성은 청룡이 시간을 끄는 것을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와 대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선, 그냥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보자면 시공진은 배수를 늘리는 거라고 보면 되지.]
"배수를 늘린다?"
[그렇지, 대충 수련을 한다고 가정 할 때, 네가 하루에 할 수 있는 수련의 양이 대충 1이라고 쳐보자. 시간적인 이유랑 이것저것을 고려해서 말이야.]
"알았어."
[그랬을 때 시공진은 네 정신을 나눠서 네가 하루에 할 수련의 양을 늘릴 수 있다는 거지, 예를 들어 네가 정신을 다섯 등분으로 나누면 5배만큼의 일을 할 수 있다 이거야.]
그리고-
[그 소리는 곧 네 정신력도 5배만큼의 피로가 쌓인다는 이야기지.]
"……아."
제천대성의 설명에 김현우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고, 제천대성은 그 탄성을 듣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애초에 몸을 쓰지는 않아서 몸의 피로가 누적되지 않겠지만 네 정신력은 네가 시공진을 사용하는 그 순간부터 꾸준히 피로가 쌓이게 될 거야. 기본적으로 정해진 양보다 많은 양을 일하게 되니까 그건 당연한 거지.]
[……원숭이의 말이 맞군.]
청룡의 긍정.
그에 김현우는 정리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요점은 방법이 있기는 한데, 내 정신력이 얼마나 버텨줄지가 리스크라 그 이야기네?"
[그렇지. 네 정신력이 버텨준다면 정신을 다섯 개 정도가 아니라 열 개, 어쩌면 그 이상으로 나눠도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내가 볼 때 그렇게 말도 안 될 정도로 정신을 늘릴 수는 없다.]
"...그럼?"
[두 개.]
"...엥? 두 개?"
[그래, 두 개다.]
"너무 작지 않아?"
김현우가 묻자 청룡은 대답했다.
[그건 어쩔 수 없다. 만약 네가 하는 일이 단순히 육체나 도력을 수련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상관없겠지만, 네가 하려는 것은 우리의 업(業)을 얻는 일이니까.]
"...대충 분산처리 맡기는 내용이 너무 빡센거라서 여러 개로 나누면-"
[네 정신이 망가질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뭐, 사실 네가 정신을 나눈다는 시점에서 정신이 망가질 리스크는 계속 지고 가는 게 되는 거지만.]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괜스레 입맛을 다시며 고민하는 듯하더니-
"뭐, 그것도 우선 생각은 해둬야겠네."
이내 그렇게 말하곤 두통이 찾아오는 듯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와 함께 찾아온 잠시의 정적.
[그보다 그건 진짜야?]
잠이나 잘까 하고 눈을 감던 김현우의 귓가에 들려온 제천대성의 목소리에 그는 다시 눈을 떴다.
"뭐가?"
[아까 말했던 거 말이야.]
"아까 말했던 거?"
[그래, 네 취향의 여자 말이다.]
"……아, 그거?"
김현우는 아까 전 이서연에게 보여주었던 사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제천대성은 왠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흐음, 솔직히 취향이라는 것은 백이면 백 다들 로망이 있어서 이해는 하지만…….]
왠지 말을 줄이는 제천대성.
"뭐야? 왜 갑자기 그런 식으로 말해?"
김현우의 말에 대답한 것은 제천대성이 아닌 청룡이었다.
[흐음, 뭐- 나 때만 해도 인간들은 열넷 정도면 시집을 갔으니-]
[그렇다고 해도 너무 유녀 아니야?]
"아니 잠깐, 너희들 무슨 이야기 하는 거야?"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이야기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열었고, 그에 제천대성은 말했다.
[무슨 이야기라니, 당연히 네 취향의 여자에 대해 이야기 중인데?]
"아니, 그건 알겠는데 왜 갑자기 거기서 유녀라는 이야기가 나와?"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제천대성과 청룡은 어리둥절하게 답했다.
[아까 네가 그 여자한테 보여줬던 사진이 그랬잖아?]
[맞다.]
그들은 아까 전, 이서연이 김현우에게 여자에 대한 취향을 물어봤을 때 그가 보여줬던 사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김현우가 보여줬던 사진은 딱 봐도 이제 막 중고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가 굉장히 판타지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보여준 뒤로 몇 번이고 이게 정말 취향이냐고 물어보던 이서연에게 대답까지 해주던 김현우의 모습을 제천대성과 청룡의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천대성과 청룡이 그렇게 김현우에게 아까의 일을 설명하자, 그는 설명할 것 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그냥 둘러댄 거지."
[뭐? 둘러대?]
"그래, 딱 봐도 없다고 대답하면 계속 들러붙을 것 같아서 그냥 내가 하던 게임 켜서 보여준 거라고. 누구를 범죄자로 보는 거야?"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슬쩍 인상을 찌푸리는 김현우를 보며 제천대성은 대답했다.
[뭐…… 그런 거라면야.]
[진짠가?]
"그럼 왜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야, 생각해 보면 너는 이성에게는 굉장히 무감정하면서도 네 제자한테는 꽤 잘 대해주지 않나?]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네 제자들, 자세히 보면 아슬아슬하게 네가 보여줬던 그 사진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나?]
[흐음? 그런가?]
청룡의 말에 제천대성이 불현듯 추임새를 넣었고, 김현우는 쯧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니까 헛소리하지 마, 나 이제 잔다."
그 말과 함께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다는 듯 눈을 감는 김현우를 보며 청룡과 제천대성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
거대한 공동과 그 가운데에 넓게 만들어져 있는 책상.
그리고 그 책상의 상석에서 가죽 소파에 앉아 있는 그, '형체 없는 자'는-
"……뭐라고?"
무척이나 드물게, 목소리에 부정적인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런 형체 없는 자의 목소리에 그의 뒤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후드를 쓴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계층'이 닫혔습니다."
"……계층이 닫혔다고?"
"예. 정확히는 12계층과 13계층이, 갑작스레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형체 없는 자의 물음. 그에 후드를 쓴 남자는 한 순간 말을 잇지 못했으나 이내 잠시의 침묵이후 그는 대답했다.
"아직 정확한 이유는 밝히지 못했습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계층을 차단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건……."
후드를 쓴 남자가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숙이자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형체 없는 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인가?"
"아무래도……."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가 말을 줄이자 형체 없는 자는 소파를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정적.
후드를 쓴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고, 흑백이 조화롭게 깔려 있는 공동은 정적에 감싸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번에 지하에 있던 녀석이 죽었다지?"
"……조율자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후드를 쓴 남자의 말에 형체 없는 자의 안개가 기묘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분명 사람의 얼굴이 아닌 안개임에도 불구하고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지는 안개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기괴해 보였다.
그렇게 자신을 감싸고 있는 안개로 미소를 지은 그는 이내-
"뭐, 지켜보도록 하지."
"……예?"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런 형체 없는 자의 말에 당황한 듯 후드를 쓴 남자는 입을 열려 했으나.
"만약 저번에 처리했던 거로 생각했던 그녀가 살아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 해도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할 거다. 게다가-"
형체 없는 자가 줄곧 소파를 두드리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이 움직임에 따라 그를 따라 움직이는 연기들은, 형체 없는 자가 손을 까딱이자 이내 어디론가 쏘아지기 시작했고-파지지직-!
공동의 벽 한쪽으로 쏘아진 연기는 '무언가'를 부셨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임에도 들려오는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에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곳을 바라봤고 이내 그 연기가 형체 없는 자의 손에 돌아왔을 때-
"그녀가 그 녀석에게 붙어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
"그게 무슨……!"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이제 그 녀석이 이곳에 도달할 때까지 그 어떤 수도 쓰지 않을 거다. 저번에 말했듯이 말이야."
"……그렇다고 해도!"
후드를 쓴 남자가 찌푸린 인상을 숨기지 않고 말하자 형체 없는 자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그렇게 말해도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정복자들한테 그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을 거고, 여기서 기다리기만 할 거다."
하지만-
"뭐…… 그래도 '그 녀석'에게 그녀를 포함한 잔챙이가 붙은 것 같으니, 나도 이번 한 번 정도는 도움을 주도록 하지."
"도움, 이라면?"
"그녀는 아마 네가 내려가려는 것을 알고 시간을 끌기 위해 잠시나마 계층을 막아 놓은 것 같으니-"
형체 없는 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다른 곳을 움직이면 될 일이지."
# 209
209.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9)명동에 있는 고급아파트.
호록-
그 꼭대기 층에서, 만들어져 있는 뷰를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이고 있던 이서연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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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게 무슨……."
"저는, 저는……."
짜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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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스마트폰에 커져 있는 것은 하나의 소설.
그것은 바로 이번에 올라온 '스승과 제자의 밀애'의 최신화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이서연은 그 부분을 아래에 있는 -다음 화에- 라는 글자를 보며 아, 하는 탄성을 내뱉고는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호록-
다시 커피 한 입.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그리고 커피를 또 한번 입에 댄 시점에서, 이서연은 자기 자신에게 가벼운 자괴감을 느끼며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이서연이 딱히 별다른 제스쳐를 취하지 않았기에 아직도 화면은 스제밀의 최신화를 띄우고 있었고,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이서연은 문득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취향……이라."
김현우의 취향.
구미호와 함께 마법진을 수련하러 갔을 때 의도치 않게 본 장면으로 인해 이서연은 미령의 작전을 도와주게 되었다.
'무슨 작전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이서연에게 부탁하면서도 '작전'을 위해 필요하다고만 말할 뿐 그것이 무슨 작전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
이서연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려져 있는 순간이동 마법진을 찾기 위해 장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도중 보게 된 미령의 모습을.
"……흠."
적어도 그때 보여주었던 미령의 모습은 이서연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쇼킹했다.
'그 뒤에 보여준 반응을 보면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그렇기에 그때 보여준 갭은 엄청났다.
어느 정도냐고 한다면, 어째 그날의 기억은 다 지워졌고 미령이 자신 등에 있는 문신을 은근슬쩍 보이면서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만이 뇌리 속에 박혀 있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거기다 그 기억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왠지 팬픽이랑 상황이 조금 겹치는데……?'
-바로 이서연이 그때 보았던 장면이, 그녀가 최근에 보고 있던 팬픽과 상황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스제밀에서도 은근히 무뚝뚝함을 표명하는 주인공을 꼬시기 위해 그 제자인 미령이 혼자 뭔가를 연습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으니까.
"……."
아무튼 그 상황을 봐버린 덕분에 이서연은 미령을 도와 김현우의 여자 취향을 알아보게 되었다.
'……뭐, 솔직히 그 호랑이한테 물어뜯기는 것보다는 낫긴 했는데……정말로 괜찮으려나?'
이서연은 어제, 미령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김현우를 찾아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가 여성의 취향에 대해서 물어봤는데도 별거 없다는 식으로 대답했던 김현우.
결국 지속된 닦달로 이서연은 김현우의 여성 취향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있었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회피용 답변이었지.'
이서연은 어제 김현우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스마트폰 화면을 떠올렸다.
그 곳에서 이서연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게임 캐릭터.
그래,
바로 스마트폰 게임에서 볼 수 있는 게임 캐릭터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이서연은 김현우가 대충 답변을 얼버무리려는 것을 깨닫고 계속해서 물었으나 김현우는 스마트폰 속의 게임 캐릭터를 보여줄 뿐 또 다른 답변을 내주진 않았다.
그렇기에 결국 이서연은 미령에게 그것을 그대로 전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말해두기는 했는데…….'
물론 미령에게 가서 정보를 말할 때도 이서연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는 했었다.
아무래도 오빠가 대충 대답을 한 것 같으니 그렇게 믿을 건 아닌 것 같다고.
허나 그런 이서연의 말에도 불구하고 미령은 이미 그녀가 보여준 게임 속 캐릭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그때 이서연은 미령이 자신의 말은 듣지도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찮겠지?"
사실 이서연의 입장에서는 딱히 잘못된 정보를 전해준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왠지 묘하게 불안했다.
커피잔을 든 채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이서연, 그러나-
"……모르겠다."
이내 이서연은 정적을 깨고 고개를 저으며 커피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어차피 난 해 달라는 건 다 해줬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자신의 머릿속에서 고민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이서연이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을 때, 천호동에 있는 김현우의 저택에서는.
"……제자야?"
"왜 그러십니까, 스승님."
"……."
"?"
김현우는 눈앞에 나타난 미령의 모습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바로 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 덕분에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김현우의 앞에는.
"……이건 또 다 뭐냐?"
"술입니다."
"아니, 그건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그가 이상하다는 듯 물음을 던지며 슬쩍 인상을 찌푸리자 미령은 드물게도 김현우의 물음을 회피하며 묵묵히 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좀 과하게.
……그러니까, 좀 많이……
"……."
거실의 책상과 식탄, 그리고 안방의 절반을 채울 정도로 굉장히 많은 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뭐지? 대체 뭐지?'
김현우는 미령을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까 처음 저녁에 집에 들어오고 나서 하는 짓이 묘해서 인지하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그녀가 입고 있던 옷도 바뀌어 있었다.
검은색의 옷은 어디로 갔는지 왠 게임 속의 모험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
'……저건,'
김현우는 그녀가 입고 있는 저 옷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저건 분명 김현우가 어제 이서연의 닦달에 못 이겨 대충 보여줬던 게임 캐릭터가 입고 있던 가죽 갑옷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도대체 왜 쟤가 저걸 입고 있어?'
그리고, 그렇기에 김현우는 이 상황에 더더욱 혼란을 느꼈다.
적어도 김현우 입장에서 이 상황은 지금 굉장히 뜬금없이 전개되고 있는 무언가와 같았으니까.
맨 처음, 갑자기 이서연이 오더니 별로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여성 취향을 물어보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 되니 이제 막 수련이 끝난 것으로 추정되는 미령이 자신이 대충 찍어준 게임 캐릭터의 옷을 입은 채 자신의 앞에 열심히 술을 깔고 있었다.
'…….'
그리고 적어도 지금 이 일련의 상황은 김현우로서는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그렇게 김현우가 멍하니 미령의 모습을 본지 얼마나 되었을까.
툭-! 쪼르르르-
미령은 어느새 거실 바닥에 술을 가득 전시해 놓고는 김현우의 옆 소파에 앉아 혼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척 보기에도 상당히 값이 나가 보일 것 같은 양주.
미령은 빈잔에 양주를 한가득 채우고는-
"드시지요."
"……뭐?"
-김현우에게 들이댔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지 이야기나 좀 해보라니까?"
"드시지요."
"제자야?"
"드시지요."
"……."
김현우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묻기 위해 대화를 이어가려고 해도 미령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뿐 대화를 이어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저 굉장히 불안하고도 뭔가를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김현우를 향해 술잔을 들고 있을 뿐.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런 미령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술잔을 받아들였다.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짓는 미령.
그리고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는-
[… 내 설마설마 했는데 설마 진짜로 이럴 줄이야.]
'술을 드시게만 하면 된다고 말했지 않나!? 우선 목표는 달성했다!'
괴력난신이 미령에게 차가운 질책을 하는 중이었다.
[아이야. 대체 넌 친교라는 걸 무엇으로 생각하는 거냐? 무작정 마주앉아서 술잔만 들이대면 해결이 될 줄 알았느냐? 그리고 애초에 술을 그렇게 권해서야 어느 천 년에 약빨을 보겠느냐?]
'그게 무슨……?'
[내가 말했을 텐데? 요점은 네 스승이 취할 때까지 술을 먹이는 것이다. 고작 한잔으로는 어림이 없다는 소리지-]
'뭣……!'
머릿속에서 나누는 괴력난신의 대화에 시시각각 변해가는 미령을 표정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우선 들고 있던 술을 입에 가져다 댔다.
꿀꺽-꿀꺽-
'으…….'
허나 소주와는 다르게 상당히 독한 양주의 맛에 김현우는 미령이 잔에 따라준 양주를 전부 마시지 못했다.
그에 따라 더더욱 안 좋아지는 미령의 얼굴.
[내 몇 번을 말해야 알겠느냐? 분위기다. 분위기! 일단 술잔 내밀고 아양 떨고 꼬리쳐라! 아주 그냥 불여시 마냥 꼬리를 홱홱 쳐라! 홱홱!]
'그……그건……!'
[그게 힘들면 차라리 말이라도 살갑게 걸어보아라. 어깨가 굳어 있다느니 뭐니 뭐 변명이야 많…… 하아, 내가 말을 말자. 이런 게 될 리가 없지.]
'그렇다면 어떻게……해야…….'
[지금이라도 내가 인수받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야 네 스승이 의심할 게 뻔하고…… 어쩔 수 없다. 아이야. 선택을 해야 할 때다.]
'……선택?'
[둘 중 하나다. 첫 번째. 그냥 여기서 그만두는 것.]
'…….'
[그리고 두 번째는, 네 스승한테 술을 먹이는 것이 아닌, 네가 술을 먹는 것이다.]
'그게 무슨?'
[남자를 자빠뜨릴 자신이 없으면 그냥 자기가 자빠져버리는 게 차선책이다. 거기에 가벼운 암시 하나라도 걸어주면 충분하지.]
'잠깐……만약 그렇게 됐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미령은 그렇게 생각하며 괴력난신의 말에 슬쩍 부정의 제스쳐를 내비추려 했으나-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이냐? 아이야. 생각 잘해야 한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라.]
'무슨……?'
[다른 제자 중 한 명이 지금 없지 않느냐?]
'!'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나. 선택 잘 하려무나.]
미령은 괴력난신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고.
'아니, 대체 뭐야?'
김현우는 그런 미령이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을 보며 점점 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화를 하려고 해도 딱히 대답을 하지도 않는데다가, 술을 따르고 난 뒤부터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는 미령의 모습.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고는 슬쩍 인상을 찌푸린 채 말하려-
"제자야 지금 나랑 장난-"
"스승님."
-했으나, 이내 김현우는 갑작스레 소파에서 일어난 미령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고.
미령은 갑작스레 일어난 상태에서 조금 전 테이블 위에 깔아둔 양주병을 양손으로 집은 뒤 김현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대단한 결정을 한 듯 결심이 서려 있는 얼굴을 한 미령은 이내 김현우에게 말했다.
"스승님,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
"5분…… 아니, 3분이면 됩니다."
굳건한 의지를 내보이듯 김현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하는 미령의 기세.
"뭐, 그래라 그럼."
"감사합니다."
그런 그녀의 기세에 김현우는 화를 내려던 것도 다시 밀어 넣은 뒤 떨떠름하게 대답했고, 그에 미령은 고개를 숙인 뒤 양손에 거대한 양주 두병을 쥔 채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김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런 미령을 바라보고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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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면 당신은 부름을 받아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0일 0시간 0분 2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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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앞에 뜬 무척이나 낯익은 로그를 보았다.
# 210
210. 통괄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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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시간: 0일 0시간 0분 0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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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가 시스템 로그의 남은 시간이 0초가 된 것을 인지하자마자 그의 시야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그가 보고 있던 광경이 온갖 양주와 술로 가득했던 거실이었다면, 그 한순간의 개변으로 인해 김현우가 보게 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어쩌면 굉장히 익숙한 공간이었다.
상당히 넓은 방 안에는 창문이 제대로 보이는 곳 없이 빽빽하게 책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런 책장들에는 게임팩들이 꽂혀 있었다.
여러 가지 알록달록한 게임팩들.
그 주변의 바닥에는 척 보기에도 게임용품으로 보이는 것들이 이리저리 어질러져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는 컴퓨터와 TV가 제각각 화면을 송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셨어요?"
상당히 난잡하다고도 볼 수 있는 그 공간 안에, 그녀는 있었다.
"……아브?"
그녀의 모습은 이전과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몸이 성숙해지지도 않았고, 그 이외에 옷이 바뀌었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네?"
분명 바뀌지 않은 것 맞는데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그녀가 바뀌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깨달았다.
그렇기에-
빡!
김현우는 아브의 머리를 슬쩍 때렸다.
머리를 맞자마자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는 아브는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김현우를 바라보다 이내 소리를 질렀다.
"꺅!? 무, 무슨! 갑자기 왜 때려요!?"
"아니, 좀 갑자기 의심돼서."
"네!? 무슨 의심이요!? 제가 왜 의심이 들어요!?"
아브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빼액 지르자 김현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분명 분위기가 바뀌긴 했지만.'
그녀는 아브가 맞았다.
"아니 뭐, 너도 알고 있다시피 출입 스킬이 막혀 있는 와중에 네가 나를 부른 거니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따지듯 말하는 아브에게 대충 '미안'이라는 단답을 내뱉은 김현우는 이내 자리에 앉았고.
아브는 그런 김현우를 불만스럽다는 듯 쳐다보았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그와 함께 김현우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질문하기보다는 설명을 듣고 쭉 들어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후, 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오늘 당신을 부른 이유는 설명을 쭉 하기 위해서예요, 지금까지는 설명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요."
"……설명하지 못했던 것?"
김현우가 되묻자 아브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인 뒤 말했다.
"우선 잠시만요…… 뭐부터 말하는 게 좋을지 정리 좀 해볼게요."
그런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아브는 음, 하는 짧은 신음과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장시간의 고민.
허나 김현우는 고민하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녀를 재촉하기보단 느긋하게 기다려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후."
줄곧 입을 열지 않았던 아브는 이제 되었다는 듯 숙였던 고개를 들며 크게 한숨을 내뱉었고, 이내 김현우는 그런 아브의 모습에 집중했다.
"우선."
그리고, 아브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 소개부터 다시 할게요."
"네 소개를 다시 해?"
"예. 아마 '제작자'가 유추한 제 정체를 들으셨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제가 한 번 더 소개하는 게 괜찮을 것 같으니까요."
아브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목을 가다듬듯 큼큼 하는 기침을 내뱉고는 그렇게-
"저는 본디 모든 평행의 세계를 지켜보고 그 관리해 균형을 맞추던 관리자이자, 또한 이 탑의 모든 계층과 계율을 담당하고 있는 5인 중 한 명, '통괄자'예요."
-자기를 소개했다.
####
1계층.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있는 것이라고는 벽에 그려져 있는 벽화밖에 없는 그 무감하고도 무던한 곳에서, 월랑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처음 눈을 떴을 때는 흐린 세상이.
두 번 눈을 깜빡였을 때는 선명한 세상이 월랑의 눈에 들어오고, 그는 곧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언제나 그가 지켜보고 있었던 1계층의 모습.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자신이 누워 있는 땅에는 일정한 문양이 파여 있다.
그리고 마치 잔가지처럼 갈라져 있는 지반도……
'……뭐?'
월랑은 멍하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저 멀리서 보이는 1계층의 바닥을 보며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월랑은 그 텅텅 비어버린 것 같은 머릿속에 심해에 묻혀 있던 기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가 쓰러지기 직전 있었던 기억들을.
분명 여느 때와 같이 탑에 들어올 자를 기다리며 1계층을 수호하고 있던 자신.
그렇게 1계층을 수호하며 자기 일을 다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도중, 그는 갑작스레 어디에선가 나타난 남자를 보았고.
그리고-
"!!"
월랑은 그 다음 기억을 떠올린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이제 막 군대에 전입 온 이등병과 같은 속도로 제자리에서 일어난 월랑은 조건반사적으로 자신의 손톱을 빼내며 주변을 둘러보았고.
"……?"
곧 그제가 돼서야 지금 1계층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게……뭐야?"
월랑의 눈에 보인 1계층은 엉망이었다.
아니, 엉망이라는 소리를 넘어서 개판이라고 보는 게 맞을 정도로, 1계층은 심하게 박살이 나 있었다.
당장 깨끗하기만 했던 1계층의 벽화는 곳곳의 부분들이 박살 나 있었고, 벽화의 한 부분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벽이 생겨 있었다.
무엇보다도-
"……."
1계층의 한가운데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거대한 오니가 만들어 낸 거대한 크레이터는 1계층을 완전한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 일련의 상황을 멍하니 돌아본 월랑은 저도 모르게 질문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체……."
월랑은 신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면 멍하니 이 상황을 바라봤다.
분명 해결해야 할 건 많은데 도대체 뭐부터 해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뒤에 만들어져 있는 구멍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고, 얼굴을 처박고 있는 오니는 뒤졌는지 살았는지조차 몰랐다.
그렇게 월랑이 망연한 표정으로 1계층을 바라보고 있을 때-쿵-쿠구구궁-!
"!!"
1계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별다른 전조도 없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하는 1계층 덕분에 월랑은 저도 모르게 인장하며 주변을 둘러봤고.
곧 그는 박살이 나 있는 지반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1계층에 진동을 만들어 내며 솟아오른 제단과도 비슷한 물체.
"엇……!"
월랑은 곧 땅바닥에서 튀어나온 제단이 제일 위 계층과 이어져 있는 '통신수단'이라는 것을 자신의 머릿속 한편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을 인지한 월랑은 아직 흔들림이 멎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제단쪽으로 몸을 옮겼고, 곧 월랑은 A4 용지 한 장 정도의 크기에 적혀 있는 글자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제단에 써져 있는 글씨를 읽은 월랑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도 그럴 것이 땅에서 솟아 나온 제단에서는 그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명령이 써져 있었으니까.
"……지금 시간을 기점으로 1계층 시험은 없애고, 또한 등반자는 9계층부터 시험을 시작해라……라고?"
그 뒤로도 월랑은 자신이 소리 내어 읽은 글을 몇 번이고 더 읽어본 뒤에야 제단에 써져 있는 문장을 이해했다.
그리고 곧, 그는 이 제단에 써져 있는 글을 의심했다.
"정말로……?"
그도 그럴 것이, 월랑은 지금까지 이런 경우를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물론 사소하고 자잘하게 바뀌는 내용들은 분명이 이전에도 몇 번 있었다.
허나 지금 위에서 내려온 공문은?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탑의 규칙을 완전히 개박살 내버리다 못해 시궁창에 처박는 공문이었다.
그렇게 월랑이 자신에게 내려온 공문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때.
툭- 투두두둑
"……!"
조금 전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1계층의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오니-
"이런 개자식……!"
슈텐이 입을 열었다.
그와 함께 슈텐의 주변으로 폭사 되는 붉은 마력에 조금 전까지 제단을 보고 있던 월랑이 긴장한 표정으로 슈텐을 바라보고.
그는 이내 제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앞에 있는 월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개자식은 어디 있지?"
-곧 슈텐은 흉신악살처럼 찌푸린 인상을 펴지 않은 채 월랑에게 질문했다.
그런 슈텐의 모습에 월랑은 긴장하면서도 대답했다.
"……그 개자식이라고?"
"그래! 그 개자식! 그 빌어먹을 자식은 어디 있냔 말이다……!!!"
슈텐의 말에 따라 붉게 유형화 되는 마력.
월랑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발광을 하기 시작하는 슈텐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문득 걸리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하던 그 개자식이라던 놈이, 혹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말하는 거냐?"
"그래! 그 개자식! 그 새끼는 지금 어디에 있지!?"
금방이라도 그를 찾아가 죽여 버리겠다는 듯 붉은 마력을 유형화 하는 슈텐의 모습에 월랑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대답했다.
"그 녀석이라면 여기에는 없다."
"그럼 어디에! 그 개자식은 어디 있나!"
쾅! 쾅!
분노하듯 부서진 지반을 거대한 주먹으로 내리치는 슈텐.
그로 인해 안 그래도 부서졌던 지반이 더 박살 나기 시작했고, 월랑은 자신의 근처에서 발광하기 시작하는 슈텐을 보며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마 위에 있을 거다!"
"위라고?"
"그래, 그 녀석은 탑 위에 있을 거다……!"
월랑의 말에, 슈텐은 시선을 위로 올렸다.
####
"그러니까, 내 정보권한이 상위에 오르기 전까지, 너는 네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 말이지?"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아브의 모습에 김현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아브가 김현우에게 자기소개를 한 뒤, 그는 그녀에게 설명을 듣기 전 생긴 한 가지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아브에게 질문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어째서 자신에게 거짓말을 쳤는가에 대해서였다.
분명 그녀는 처음 자신을 소개할 때 스스로를 '시스템의 관리자 중 한 명'이라고 소개했다.
그 외에도 그녀는 지금까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들을 김현우에게는 모른다고 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아브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그것을 질문했고,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스스로 기억에 리미트를 걸었다 이거야?"
"그렇죠."
"……왜?"
"음, 제가 스스로 리미트를 건 이유는 좀 복합적인 이유가 있긴 해요, 근데 이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어차피 현 상황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꺼내야 하는 이야기니까요."
"뭐, 알았어."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고, 이내 그는 그녀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본 아브는 묘하게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그럼, 우선 제일 먼저 현 상황에 대해서 말해드릴게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211
211. 통괄자 (2)
천호동 저택의 적막한 방 안.
-꿀꺽 꿀꺽 꿀꺽.
누가 보더라도 상당히 고급진 라벨이 붙어 있는 양주병을 통째로 집어 들어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을 입안으로 털어 넣고 있던 미령.
그녀는 양주병 안에 있는 내용물을 전부 비우고 난 뒤에야 양주병에서 입을 뗐고.
"하…… 딸꾹-!"
그녀는 망연한 표정으로 방 안을 바라보았다.
미령이 보고 있는 방 안의 풍경은 그야말로 개판이라고 부르는 게 어울릴 정도로 난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가 세워놓았던 값비싼 양주들은 책상 위에 마음대로 어질러져 있었고, 개중에는 책상 아래로 떨어진 것인지 병이 깨져 줄줄 세는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반대로-
[아이야, 그만 마시는 게 어떻겠느냐?]
미령의 뒤에는 이미 내용물이 남지 않은 양주병들이 자그마한 산을 이루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저렇게 마셨다면 병원에 실려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삼도천을 건넜을 정도로 많은 양주병들을 비운 미령은 알딸딸하게 올라오는 취기에 맞지 않는 초점으로 대답했다.
"내가……자빠져야……."
그런 미령의 중얼거림에 괴력난신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에휴, 아이야……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네 스승은 도망쳤다.]
괴력난신의 말에 미령은 망연한 표정으로 허공을, 정확히 말하면 김현우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곳을 응시했다.
"하……."
미령은 저도 모르게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불과 10분도 되지 않았던 그 짧은 시간에 일어났던 일을 미령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직접 자빠지기 위해 양주 두 병을 들고 밖으로 나갔던 것부터 시작해서, 괴력난신의 말에 따라 양주 두 병을 통으로 원샷하고 들어왔을 때 자신의 스승이 어디론가로 사라지는 것까지.
"……."
물론 김현우의 입장에서는 전혀 도망칠 생각도 없이 갑작스레 나온 시스템의 초대에 끌려갔을 뿐이었으나 미령에게는 그가 도망친 것으로 보였기에 미령은 침울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먹먹한 기분.
분명 조금 전까지는 알딸딸해서 기분이 괜찮았건만 생각을 하자마자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에 미령은 책상 위에 어질러져 있던 양주 중 하나에 손을 뻗었다, 분명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괴력난신이 계속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미령은 신경 쓰지 않고 양주의 꼭지부분에 손을 가져갔고.
그렇게 또 한번 양주를 딴 그 순간-
"뭐냐……?"
미령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가면 무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심히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을 지은 미령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가면 무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고, 그에 가면무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등반자가 나타날 것 같습니다."
"……등반자? 딸꾹!"
술을 얼마나 들이부었는지 볼에 홍조가 그득하게 난 상태로 딸꾹질을 하는 미령.
그러나 가면무사는 표정의 흐트러짐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예, 정확한 오차범위는 알 수 없으나 앞으로 2시간 내로 서울 의정부쪽에 있는 미궁에서 등반자가 출현할 것 같다고 합니다."
가면 무사는 그렇게 말하면 자료의 출처에 대해 미령에게 해설하기 시작했고, 미령은 그런 가면 무사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다-
"그래, 그렇다 이거지?"
"예."
-이내 비틀린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아주 좋아……."
비틀거리면서 자리에 일어난 미령은 자신의 오른 손에 쥐고 있던 양주병을 꾹 쥔 채-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았으니 마침 잘됐다."
으득-
이를 악물며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
"네가 계층을 막았다고?"
"네."
"그게 가능한 거야?"
"가디언의 정보권한이 상위가 되기 전에는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한정적이나마 가능하게 됐어요.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이 탑의 '통괄자'니까요."
-물론 지금은 그 힘이 좀 미약하긴 해도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그녀가 해주었던 설명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정복자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 9계층으로 올 판이었고."
"네."
"네가 그동안 연락이 안 되었던 이유는 정복자들이 9계층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계층을 단절하느라 연락이 안 되었던 거고?"
"그것도 맞아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정복자'가 아닌 '정복자들'이 몰려들면 그는 아마 굉장히 힘겨운 싸움을 하게 될 것이었다.
지금 그에게는 아직 등반자 개인은 몰라도 그 다수를 상대할 만한 힘은 없었으니까.
"그럼 네가 계층을 단절했다는 건 언제까지 유지가 되는 건데?"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처음으로 좀 애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그건 확정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왜?"
"여러 가지 변수가 있는 것 때문인데, 뭐 그래도 대충 기간을 말해보자면……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좀 미묘하게 짧네."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생각하면 짧은 것 같은 기간에 김현우가 짧게 중얼거리자 아브는 마치 변명을 하듯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어요. 애초에 지금 계층 단절도 제가 그동안 모아놓은 힘을 전부 빼다 박은 거니까요."
"……모아놓은 힘?"
"네. 아까 제가 말씀드린다고 했잖아요? 제 기억에 리미터를 건 이유요. 그게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이것 때문이라면…… 그러니까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네."
아브는 김현우의 말에 긍정하며 설명을 이어나가려고 했으나, 그는 한발 빠르게 이야기했다.
"……뭐 대충 어림짐작해 보면 기억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는 힘을 모을 수 없어서 약간 절약모드 비슷한 상태로 있었다…… 이런 이야기지?"
"어, 좀 다르긴 한데 그렇게 이해하면 확실히 좀 편할 것 같네요."
-힘을 모으려고 제 기억을 봉인한 것도 맞으니까요.
김현우의 예측에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물었다.
"그런데 왜 힘을 모으는데 기억을 봉인할 필요가 있는 거야?"
"음, 그건 좀 설명이 길어지긴 하는데, 그냥 간단하게 생각하면 기억을 봉인하는 건 부차적인 거라고 할 수 있어요."
"부차적인 것?"
"네. 이미 제작자에게 들어서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있으시겠지만, 저는 설계자와 기술자, 그리고 조율자한테서 도망치기 위해 힘의 대부분을 소모한 채였어요."
"그래서?"
"제가 소모했던 힘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음, 그냥 제가 평소에 사용하는 힘이 100이라고 치면, 그 힘을 10 정도로 낮출 필요가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힘을 10 정도로 낮추는 것 중에는 네 기억에 리미트가 걸려 있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거지?"
"그렇죠."
아브의 긍정에 김현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살짝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솔직히 아직 궁금한 게 많기는 한데, 그걸 일일이 다 풀기에는 좀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그냥 넘어가고."
솔직히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김현우는 아브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할 생각하고 있었다.
제일 처음으로는 어떻게 그녀가 내 옆에 붙어서 '시스템의 관리자'역할을 했는지부터 시작해서 그 이외의 자잘한 것까지 김현우는 전부 물어볼 생각이었다.
허나-
'많으면 두 달, 짧으면 한 달이라…….'
그걸 일일이 물어보기에는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아브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한두 달 뒤에는 정복자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9계층으로 몰려온다는 소리였으니까.
김현우는 짧게 생각을 정리하곤 말했다.
"요점은, 정복자들이 9계층으로 내려오기 그 녀석들을 상대할 만한 수단을 만들어야 한다 이거지?"
"예. 거기에 덤으로 지금 당장 9계층을 지킬 사람도 필요해요."
"9계층을 지킬 사람? 정복자는 못 내려온다며?"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네, 정복자는 못 내려오죠. 하지만 등반자는 올라올 수 있어요. 게다가 제가 예상하기론 아마 이제 곧 9계층에 올라오는 등반자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거예요."
"뭐? 그건 또 왜?"
"지금 제 권한까지 빼앗아서 이 탑을 강제로 조정하고 있는 설계자가 조금 전 탑의 구조를 바꿨으니까요."
"……탑의 구조를 바꿨다고?"
아브는 김현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조금 전, 1계층과 9계층을 연결했어요."
-그렇게 말했다.
####
콰직! 콰지지직!
"죽인다. 죽인다. 반드시 죽여 버린다……!"
약간의 푸른빛이 도는 동굴 안에서, 조금 전 동굴 안으로 진입했던 슈텐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고블린을 손쉽게 죽여 버리며 걸음을 옮겼다.
뿌드드둑! 콰직!
슈텐의 발에 밟힌 고블린의 머리가 하릴없이 터져나가고, 그의 손에 달린 고블린의 머리가 가볍게 튕겨져 나감에도 불구하고 슈텐은 그런 고블린의 시체 따위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신경은 이 탑에 들어온 뒤부터-
"이 개자식……!"
-정확히는 '김현우'를 만난 뒤부터 오로지 그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끼에에에-! 콰드드득!
슈텐은 비명을 질러 대는 고블린의 머리통을 짓밟으며 그 한순간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김현우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
그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어 김현우의 머리통에 주먹을 휘두르기 직전까지, 슈텐은 그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또한 보지 못했다.
그래, 자신의 정신이 끊기는 그 순간까지도 슈텐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한마디로, 슈텐은 김현우가 무엇을 했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고,
"그 자식……!"
그렇기에 슈텐은 김현우가 그가 모르는 미지의 힘을 사용했다고 어림짐작해 이를 악물었다.
김현우가 사용했던 것이 자신과 같은 순수한 무력이라고는 애초에 생각에서 빠져 버린 채, 슈텐은 그가 자신에게 미지의 힘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 분노를 쌓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을 너무나도 초라하게 패배시킨 김현우에게 분노를 쌓고 있는 것이었지만.
슈텐은 그 뒤로도 그에게 몰려드는 오크와 고블린들을 정리하며 나아갔다.
슈텐이 한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몰려들던 고블린들은 붉은색의 길이 되었고, 그와 함께 몰려들던 오크들은 쌓이고 쌓여 던전 한켠에 자그마한 산을 만들었다.
그렇게 그가 김현우에게 복수를 불태우며 걸음을 옮긴지 얼마나 되었을까.
"……."
그는 곧 푸른 던전의 끝에 출구가 있는 것을 확인했고. 더 이상 몬스터들이 몰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 한 뒤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미궁의 밖으로 나왔을 때.
"!!!!"
화아아악!
슈텐은 느껴지는 거대한 압박감에 저도 모르게 붉은 마력을 사방으로 내뿜었다.
이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푸른 마력을 힘겹게 밀어내는 슈텐의 붉은 마력.
'이건 대체……!?'
슈텐은 자신의 존재를 짓누를 정도로 농밀하게 퍼져 있는 푸른 마력에 당황해 하며 그 근원지를 찾았고, 곧 얼마 있지 않아 슈텐지는 푸른 마력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너는……?"
그곳에는 소녀가 있었다.
머리 위에는 붉은 뿔을 단체, 자신의 몸에서 끝도 없이 푸른 마력을 내뿜고 있는 미령이.
그리고 슈텐이 푸른 마력에 눌려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미령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슈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래 버텨라."
그녀에게서 나온 말.
"뭐라고……?"
그것은 이제 막 위에 올라온 슈텐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허나-
"헉!"
"그래야 내 화를 조금이라도 풀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 찰나에 가까운 다음 순간, 슈텐은 자신의 앞에서 마귀같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미령을 보며 경악 어린 탄성을 내뱉었다.
# 212
212. 통괄자 (3)
여기저기 게임팩이 늘어져 있는 시스템 룸 안.
"1계층과 9계층을 연결했다는 건…… 지금 당장 위험해진다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원래는 2계층과 8계층을 지나며 대부분의 등반자들은 걸러졌지만 이렇게 나머지 계층을 통하지 않고 등반자들이 9계층에 오게 되면……."
"개판이겠네?"
그의 말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아요…… 조금 이해하기 쉽게 비교하면 원래 여과기를 통해 들어오던 물이 여과기를 통하지 않고 들어오게 된다고 보면 될 것 같네요."
"한마디로 원래 약한 놈은 어느 정도 걸러졌는데, 이제는 약한 놈이든 강한 놈이든 죄다 몰려온다 이 말이지?"
"네."
"쯧."
아브의 긍정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보다 강하다는 등반자가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나 결국 그나마 다행인 점일 뿐.
"……등반자의 숫자가 늘어난다라."
그것은 적어도 김현우에게 있어서는 나쁜 소식이었다.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그들은 결국 등반자고, 지금 9계층에는 등반자를 막을 수 있는 이들이 얼마 없었다.
'……당장 등반자를 막을 수 있는 건 3명, 아니 4명 정도인가?'
우선 김현우의 두 제자는 정복자까진 아니더라도 등반자를 막을 수 있는 힘은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덤으로 천마(天魔)에게 수련을 받은 김시현도 등반자를 막을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집에 누워 있는 구미호도 마찬가지.
'뭐, 가지고 있는 힘 자체는 그리 강하진 않지만.'
그녀도 등반자였던 만큼 강하지 않은 등반자는 상대가 가능할 것이다.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브에게 질문했다.
"얼마나 늘어나?"
"네?"
"등반자의 숫자 말이야, 분명 이전처럼 걸러져서 9계층으로 올라올 때보다는 많이 올라올 거 아니야?"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슬쩍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지만 얼마나 올라올지는 모르겠어요."
"대충 예상도 못해?"
거듭된 질문.
그에 아브는 으음, 하는 침음성을 흘리곤 대답했다.
"이건 그저 가설일 뿐이지만 아마 하루에 8명에서 10명 정도가 9계층으로 올라올 것 같네요. 첫날에는 그것보다 훨씬 많이 올라올 거고요."
"……하루에 8명 정도라, 그렇게 많이? 게다가 첫날에는 그것보다 더 많이 올라온다는 건 또 무슨소리야?"
"아마 지금 2계층부터 8계층을 오르고 있는 이들도 있을 테니까요. 그 등반자들도 분명 9계층으로 올라올 수 있게 될 거예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나지막한 탄성을 터트렸고, 아브는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에요."
"그나마 다행이라니?"
"아마 당신이 조율자를 죽이지 않았으면 아마 사태가 지금보다 심각해졌을 테니까요."
"뭐? 그건 또 왜?"
"당신도 알고 있다시피 탑을 등반하다 실패한 이들은 육체를 잃고 이 탑 안에 있는 허수공간에 갇히게 돼요."
"그건 알고 있어, 그런데 그게 왜?"
김현우가 묻자 아브는 기다릴 것 없다는 듯 마저 이야기했다.
"만약 당신이 조율자를 죽이지 않았으면, 아마 그는 조율자의 시체를 토대로 등반자들을 소생시켰을 거예요."
"뭐? 그건 또 뭔 소리야?"
그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입을 열자 아브는 곧 지하계층에 있던 조율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것을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원래 이 탑은 일정한 주기가 되면 등반에 실패했던 등반자들을 순차적으로 살린다…… 이 말이야?"
"네. 다시 탑을 오르게 하기 위해서요."
"……도대체 왜?"
확실히 언젠가 한번 김현우는 '허수 공간'이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분명 천마에게 듣기로 허수 공간은 탑의 외부에 있는 공간이라고 했고, 천마는 왜 여기에 있느냐는 김현우의 물음에 그저 기다리고 있다는 답변을 했었다.
물론 그 뒤로는 천마와 수련을 하느라 허수공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고 어느 순간에는 그냥 허수공간을 당연하다는 듯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아브의 말을 듣고 보니 어째서 허수공간이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됐다.
다만-
'도대체 왜 등반자들을 살리지?'
김현우는 그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등반자들을 살리는가?
쓸 만한 인재를 찾기 위해서?
아니, 쓸 만한 인재를 찾기 위해서라면 등반자를 굳이 살릴 이유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15계층까지 올라가지 못했던 등반자를 다시 살려봤자 그것은 분명 똑같이 반복될 테니까.
물론 몇 번의 죽음 끝에 깨달음 같은 것을 얻어 조금 더 위의 계층으로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결국 어찌 보면 그것은 낭비였다.
이미 한번 실패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째서?'
그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의 답을 찾기 위해 고민을 하길 잠시, 그의 옆에 있던 아브는 입을 열었다.
"그가 등반자들을 살려서 다시 탑을 오르게 하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대충 짐작가는 게 있긴 하지만, 솔직히 그게 맞을지도 잘 모르겠고요."
아브는 그렇게 자신이 없다는 듯 중얼거렸고, 한동안 고민을 계속하던 김현우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민을 털어버렸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요점은 내가 조율자를 미리 죽여 놔서 그나마 상황이 호전된 상태라 이거지?"
"맞아요."
요점은 그것.
김현우가 조율자를 죽였기에 상태가 호전된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다만 호전된 상황이라도 해도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후……."
김현우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해야 할 일을 간단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
꽝!
"크엑!"
꽈드드드드득!
"끄에에엑!"
뿌드드득!
"으아아아아악! 그만……그만해! 그만해! 으갸아아아악!!!"
의정부 미궁의 근처.
나무들이 뜯겨나가고 부서진 지반이 세차게 날리는 그 곳에서, 슈텐은 괴물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어떤 것으로 명칭을 생각해 보려고 해도 나오는 것은 오로지 두 글자.
'괴물'이라는 단어뿐.
슈텐은 어느새 이를 악물고, 자신의 오른팔이 재생될 때까지 기다리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눈에 보이는 체구만으로는 자신의 절반도 못 오는 자그마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 소녀.
허나 그 실상은-
"어서 재생해라.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끄으윽! 젠장…… 젠장!!"
-피도 눈물도 흐를 것 같지 않은 싸이코패스였다.
미령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슈텐의 몸이 재생하기를 기다렸고, 곧 그의 몸이 재생되자마자 곧바로 달려들었다.
슈텐의 눈으로는 쫓을 수도 없는 순간의 빠르기.
허나 슈텐도 이번만큼은 당하지 않겠다는 듯 붉은 마력을 사방으로 폭사하며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그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미령의 주먹.
그 찰나의 모습을 보며 슈텐은 그녀의 주먹을 피했다는 것에 미소를 지었으나-
"그래, 그렇게 한두 번은 피해야 재미가 있지."
"!!"
-미령은 어느새 그의 앞에 있었다.
'어떻게!?'
슈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그녀는 분명 자신의 아래를 노리고 있었다.
허나 단 한순간.
슈텐마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그 한순간에 이미 미령은 슈텐의 머리통에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꽈드드득!
"끄게에에엑!"
머리통의 뼈가 통째로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슈텐의 입가에서 괴악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그의 몸이 주변의 나무와 지반을 갈아버리며 꼬꾸라진다.
우드득거리는 나무들이 머리통이 터져 날아간 슈텐의 몸 위로 쏟아져 내리고 그 모습을 보며 미령은 짧게 혀를 찼다.
'……벌써 망가졌나.'
'벌써'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이미 미령과 슈텐의 전투시간이 한 시간을 넘겼기에 올바르지 않은 단어였으나 미령은 개의치 않고 슈텐이 처박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이야, 이제 슬슬 술이 깼느냐.]
그와 함께 들리는 괴력난신의 목소리에 미령은 팍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말 걸지 마라.'
차갑게 쏘아내는 그녀의 말.
허나 괴력난신은 계속 입을 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토라져 있는 것이냐?]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냐?'
금방이라도 보이지 않는 괴력난신에게 이를 들어 낼 듯 으르렁 거리기까지 하는 미령의 모습.
괴력난신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아이야, 정말 아까도 그렇지만 솔직히 나는 지금 네가 이해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은 오히려 좋아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더냐?]
'뭐? 좋아해야 하는 상황?'
미령이 인상을 찌푸리며 노기를 터트리려 했으나 괴력난신은 그런 미령이 말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그래, 아이야 지금 너는 무척이나 좋아해야 하는 상황 아니냐? 네 스승이 너를 신경 쓰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뭐?'
미령은 곧 괴력난신의 이야기에 무슨 소리냐는 듯 의문을 던졌다.
[쯧쯧, 설마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냐?]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
[잘 보거라 아이야, 그 동안 네 스승은 네게 무관심했다. 그건 알고 있느냐?]
'……그건,'
미령은 자신의 스승을 생각해 보았다.
분명 다른 이들보다는 자신을 어느 정도 챙겨주기는 했으나 말 그대로 그건 챙겨주는 것이었을 뿐, 딱히 자신을 특별히 대우해 준다거나 한 건 없었다.
한마디로 스승과 제자의 사이라면 몰라도 다른 관계로 봤을 때 김현우는 미령에게 무관심 했다.
'그렇긴 한데, 그게 지금 상황이랑 뭔 상관이란 말이지?'
[후. 이렇게나 무지할 줄이야…… 답답하구나.]
그런 미령의 물음에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괴력난신은 설명해 주었다.
[보거라, 너는 분명히 어필을 했다. 그게 조금 어색하기는 했어도 너는 확실히 네 스승에게 기본적인 어필은 했다 이 말이다.]
'……그러면 뭐하나? 스승님은 도망쳤는데.'
[하아, 아이야…… 도망쳤다는 게 중요한 거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도망쳤다는 게 중요한 거라니.'
[아이야, 네 스승이 만약 이전처럼 너를 신경 쓰지 않았으면, 과연 네 스승은 도망쳤을까?]
"……!"
괴력난신의 말에 미령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이제 이해한 것 같구나.]
'그……그렇다는 건.'
[그래, 비록 도망치기는 했으나, 네 스승은 지금 너를 '신경'쓰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너를 의식하고 있다 이 말이지!]
"!!!!"
'스승님이…… 나를 신경 쓰고 있어?'
괴력난신의 말에 굳어져 있던 미령의 얼굴이 빠르게 풀어지기 시작하고, 괴력난신은 이어서 말했다.
[그래! 그 돌부처 같은 스승은 너를 이성으로서 신경 쓰게 되었다 이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좋아해야 할 일이 아니지 않느냐?]
'그, 그건…… 확실히……!'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거리며 턱을 만지작거리는 미령의 모습.
물론 괴력난신의 추측은 굉장히 편향적인 추측이었건만 미령은 그런 괴력난신의 생각에 이견을 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어느새 싱글벙글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이 나를 의식한다……스승님이 나를 의식해……!'
콰가가각!
"죽어라!"
꽈드득!
미령이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을 하는 도중 나무에 처박혀 있던 슈텐이 재빠르게 기습을 감행했으나 미령의 얼굴은 슈텐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주먹만을 한 번 휘둘렀을 뿐.
허나 그 가벼운 한 번의 주먹질만으로도 슈텐의 머리통은 마치 폭죽터럼 터져나갔고-
"후후후…… 스승님이 나를……."
-슈텐을 피를 뒤집어 쓴 미령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수련을 갔다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등반자가 올라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뒤늦게 의정부로 찾아온 서울 길드의 길드장 김시현은 피를 뒤집어 쓴 채 웃고 있는 미령을 보며-
"……수련의 부작용으로 미친 건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 213
213. 사전 준비 (1)
그다음 날.
[……안 그래도 그 건에 관해서 자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연락을 취하려 했네.]
"그래요?"
천호동의 자택에서 그는 국제헌터협회의 상위의원인 리암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자네가 먼저 전화를 걸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네만 상황이 심각하네.]
"어떤 상황이길래?"
김현우의 물음에 리암은 한 치의 막힘도 없이 현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선 자네가 제천대성을 처리했을 때보다 그 상황이 심각하네, 당장 국제헌터협회 측에서 뿌려놓은 레이더에 걸리는 반응만 일곱일세, 게다가 여기서 더 중요한 건 재앙 출현 조짐이 보이는 곳도 훨씬 많다는 것일세.]
"재앙 출현 조짐?"
[그렇네, 당장 확정적으로 재앙이 출현하는 곳을 일곱이지만 그 사이사이 '조짐'만을 보이는 곳도 일곱은 되네.]
"……일곱씩이나?"
[그렇네.]
"그럼 당장 등반자들의 출현 예정 시간은 어떻게 되는데요?"
[다 다르지만 제일 빠른 건 지금으로부터 4시간 이후일세.]
"예정 시간도 더럽게 빠르네."
김현우가 골치 아프다는 듯 혀를 차자 리암은 대답했다.
[그래도 그나마 나은 상황은 우리가 지금 이 상황에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세.]
"……이 상황을 대비할 수 있다고요?"
의외라는 듯 김현우가 묻자 리암은 살짝 긍정적인 느낌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 혹시 기억하고 있나? 국제헌터협회에 배치되어 있는 S등급 랭킹을 매길 수 있는 구슬 말일세.]
리암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기억하고 있죠. 더럽게 큰 구슬 말하는 거죠? 근데 그게 왜요?"
[사실 이번에 우리 국제헌텨협회 측에서 이전에 얻은 아티팩트와 S등급 헌터의 랭킹을 만들어주는 그 구슬을 합칠 수 있게 됐거든. 그 덕분에 지금 협회 내에서는 재앙의 능력 정도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네.]
"등반자, 아니- 재앙이 올라오지 않아도요?"
그의 물음에 리암은 답했다.
[그렇네. 우리가 이전에 만들어 놓은 재앙 탐색 장치에 박혀 있는 '오돌라의 장치'를 통해서───────]
갑작스레 시작된 리암의 아티팩트 강의에 김현우는 잠자코 그 설명을 듣고 있다 적절한 타이밍에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요점은 지금 국제헌터협회에서는 재앙이 출현하기 전에 그 녀석들이 얼마 정도의 강함을 가졌는지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이죠?"
[맞네. 게다가 여기서 조금 더 좋은 소식은 지금 올라오고 있는 일곱의 재앙 중 셋은 S등급 랭킹의 헌터들이 모이면 상대가 가능하다는 걸세.]
"……헌터들이 등반자를?"
김현우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리암은 짐짓 묘하게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네, 자네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네만 최근 S등급의 헌터들, 아니- 전 세계적으로 헌터들의 성장치가 크게 증가되기 시작했네.]
"……성장치가 증가하고 있다고요?"
이 내용은 그의 동료 중 한 명인 이서연에게도 들었던 이야기였다.
[맞네, 사실 아직까지는 확실하지 않아서 제대로 공표되고 있지는 않네만 협회 쪽에서는 S등급을 포함한 전체적인 헌터들의 성장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크게 상승했다는 것을 알았네.]
"……그래요?"
김현우는 그 말을 들으며 슬쩍 머릿속으로 헌터들의 성장치가 증가한 이유를 떠올려 봤으나 유감스럽게도 당장 떠오르는 건 없었다.
'뭐, 이것도 겸사겸사 물어봐야겠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리암에게 대답했다.
"우선 그건 알겠고, 지금부터 저희 쪽도 등반자를 막으러 돌아다닐 테니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정보만 넘겨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금은────]
리암은 곧 이어서 김현우에게 자잘한 보상 내용을 말해주기 시작했고, 이내 그 보상안들을 건성건성 넘긴 김현우는 그것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
"……."
"……?"
"……."
"……??"
김현우는 어째 어제를 기점으로 자신의 옆에서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미령을 보며 묘한 부담을 느꼈다.
굉장히 싱글거리고, 혹여라도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 미령의 모습.
분명 어제와는 지나치게 달라진 미령의 모습에 김현우는 당황했다.
'아니, 분명 어제부터 이상하기는 했는데…….'
수련을 끝내고 와서 갑작스레 거실에 술병을 깔기 시작할 때만 해도 분명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정도가 심했다.
'얘 도대체 왜 이래?'
김현우는 묘한 부담감을 가지며 미령에게서 시선을 돌린 뒤 이내 김시현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미령을 바라보고 있는 김시현.
김현우는 어제 시스템 룸에서 나와 노아의 방주에 부탁할 것이 있어 잠시 갔다 오고 난 뒤, 저택에 홀로 찾아온 김시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형 제자가 미친 것 같아요.'
어제는 그 말을 듣고 도대체 김시현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건만 지금은 왜 그가 그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흠흠……."
김현우가 쳐다보자 괜히 목을 가다듬으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미령.
그는 결국 알 수 없는 부담감에 고개를 돌리곤 한숨을 내쉰 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총 4명으로 김시현과 구미호, 그리고 미령과 아냐였다.
원래라면 두 번째 제자인 하나린도 있어야 했으나 그녀는 아직 수련이 끝나지 않은 듯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없을 때 혹시라도 조직을 사용할 일이 있으면 사용하라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봐도 그녀의 소식은 찾을 수 없었기에 김현우는 지금 당장은 하나린을 찾는 것을 그만뒀다.
지금 할 말은 느긋하게 기다릴 수 없었으니까.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
노아의 방주 안,
"그렇군, 그랬었나."
김현우는 노아흐에게 아브를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당장 그녀가 어제 자신을 부른 것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정복자들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12계층을 단절한 것까지.
노아흐는 그런 김현우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듣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자네는 그 남은 시간 동안 수련을 할 생각인가?"
"우선은 그럴 생각이야."
"그렇다면 그동안 9계층은 누가 막나?"
"걱정하지 마, 그것도 나름대로 해결하고 왔거든."
"……나름대로?"
노아흐의 되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지금 9계층에는 정복자는 몰라도 등반자라면 단신으로 막을 수 있는 녀석들이 몇 명 정도 있거든, 뭐 그것도 등반자의 능력에 따라 또 다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한 달 정도 없다고 해서 9계층이 멸망하진 않을 거야."
사실 예전만 했어도 불안했겠으나 지금은 그리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김현우의 생각보다도 9계층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으니까.
뭐, 하나린을 만나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기는 했으나 아마 그녀가 빨리 수련을 끝내고 나온다면 그녀도 합류할 것이었고.
사실 하나린이 당장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버틸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당장 국제헌터협회에서는 그 나름대로 등반자를 판별하는 기술을 익혔고, 헌터들의 성장치가 올라감에 따라 능력이 약한 등반자라면 상대할 수 있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그렇게 해서 미령과 김시현, 그리고 구미호가 상대해야 하는 등반자는 총 넷.
'물론 그 뒤에도 등반자들이 더 몰려오기는 하겠다만…….'
등반자들이 한 번에 올라오지 않는 이상에야 막는 건 가능할 것 같았다.
'게다가, 대비책으로 그것만 준비해 놓은 건 아니니까.'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그래서, 수련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아, 그건-"
노아흐의 물음에 그는 곧 이곳에 들어오기 전 미리 제천대성과 청룡에게 이야기해 놨던 수련 과정을 짤막하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한동안 김현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노아흐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공진……이라, 만약 그 수련이 제대로만 된다면 괜찮겠네만…… 괜찮겠나?"
"뭐가?"
"자네가 말해준 시공진의 부작용은 상당히 큰 것 같은데, 잘하면 정신이 붕괴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노아흐의 말대로 시공진의 리스크는 상당히 거대한 편이었다.
만약 나누어진 정신을 감당하지 못하면 정신이 붕괴할 수도 있는 거대한 리스크.
"뭐, 어쩔 수 없지. 솔직히 단기간에 강해지려면 그 정도의 리스크는 어쩔 수 없으니까. 뭐, 리스크를 줄이고 힘을 조금 모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야 제천대성과 청룡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지금 상황은 더 이상 뺄 수 없는 상황이 맞긴 하네."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이야기했다.
"뭐 그건 그렇고, 내가 부탁했던 건 준비됐어?"
그의 말에 노아흐는 어제 잠깐 노아의 방주에 들렀던 그가 자신에게 부탁하고 갔던 물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곤.
"우선 자네의 말대로 준비를 해놓기는 했네."
이내 그는 자신의 품 안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 지하실에 묵었던 것 같은 양피지였다.
그리고 곧 김현우가 그 양피지를 받아들자 그의 눈 위로 로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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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약의 증서
등급: 없음
보정: 없음
스킬: 맹약 이행
-정보 권한-
노아의 방주의 주인이자 탑의 제작자인 노아흐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생활 증서'를 임의로 개조해 만든 증서이다.
노아흐가 개조한 맹약의 증서는 생활 증서와 달리 시전자와 피시전자가 서로의 행동에 대해 계약을 맺고 행동을 제약할 수 있다.
맹약의 증서는 증서의 '맹약'스킬을 이용해 서로의 행동이나 갖가지 상황에 제약을 걸 수 있고, 시전자와 피시전자가 동의함에 따라 맹양의 증서는 그 효력을 발휘한다.
맹약의 증서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뒤부터 시전자와 피시전자는 맹약의 증서에 따라 증서에 적힌 내용대로 일정한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 있고. 그들은 절대 행동의 제약을 거스를 수 없다.
혹여나 증서에 적혀 있는 제약에 반해 위반행위를 할 경우 시전자나 피시전자는 '이행'이라는 스킬을 이용해 맹약의 증서를 통해 걸었던 시전자나 피 시전자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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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를 차근히 읽어본 김현우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노아흐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수련을 들어가기 전에 갑자기 그런 물건은 왜 필요로 하는 겐가?"
노아흐의 물음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수련을 할 때 쓰려는 건 아니고, 그 전에 쓸데가 있어서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전에 쓸 곳이라니, 혹여나 해서 묻는 거지만 자네와 계약했던 제천대성이나 청룡에게 그걸 쓸 생각인가?"
노아흐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 둘한테 뭐 하러?"
"그럼 왜 그런 게 필요한 겐가?"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대비 플랜이 필요해서 말이야."
"대비 플랜?"
"내가 아까 말했잖아? 당장 9계층을 막을 만한 녀석들을 배치해 놨다고, 근데도 혹시 모르잖아? 나도 미처 모르는 피해가 있을지 말이야."
그러니까-
"한 명 더, 믿음직한 사람을 9계층에 남겨두고 싶어서 말이야."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맹약의 증서를 집어 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 214
214. 사전 준비 (2)
책장과 책으로만 이루워져 있는 그 거대한 공간 안.
"[멈춰]"
그곳에서, 하나린은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것처럼 하늘에 떠 있는 책들을-아니, 그 책들을 넘어 하늘에서 유형하고 있는 책장들을 바라봤다.
"……."
책장과 책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 넓은 공간은 무척이나 어질러지다 못해 난장판이라고 부르는게 나을 정도로 더러워져 있었다.
하늘에는 떨어져 내리던 책장들이 그 법칙을 무시한 채 허공에 떠 있고, 그것은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접힌 채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 책부터 시작해.
책장이 펼쳐져 종이가 나풀거리는 책들.
그 이외에도 수많은 책들이 떨어지는 한순간을 유지하며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었다.
그리고-
"[돌아가]"
하나린의 입에서 나온 '말'과 함께,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책장과 책들은 그 중력을 법칙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 모습은 중력의 법칙을 역행한다기보다, 시간을 역행하는 것과 같았다.
무거운 소음을 내며 떨어져 내린 책장들이 마치 자신의 자리를 찾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풀거리며 떨어지던 책들이 접혀지며 떨어져 내린 책상으로 돌아간다.
그와 함께 보이던 여러 가지 형태를 유지하던 책들도 조금 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마치 시간을 역행하듯 접힌 상태로 돌아와 책장에 꽂힌다.
마치 하늘에 거대한 흡착기가 있듯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책장과 책들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탁-
"후-!"
하나린은 허공에 떠 있던 책이 마지막 책장의 빈 공간에 들어가 있는 것을 끝으로 진한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았고-
[성공했군!]
그녀가 의자에 주저앉자마자 언령의 서는 입을 열었다.
그는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하나린을 보며 감탄하듯 입을 열었다.
[대단하다, 대단해! 벌써부터 4단계의 중반까지 올 수 있게 되다니!]
언령의 서는 만약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했다면 입가에 환한 웃음을 짓고 있을 거라 예상되는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며 하나린을 바라봤다.
'역시 그녀는 적성이 높아……!'
물론 그녀가 3단계에서 4단계로 넘어왔을 때도 언령의 서는 그의 적성이 무척이나 높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다른 고서장들보다도 빠르게 언령을 배워나갔으니까.
'이게 진짜 재능인가?'
언령의 서는 그동안 이 고서장의 주인이 되었던 이들을 떠올렸다.
사실 그들의 재능을 낮게 폄하할 수 없었다.
이 고서장의 주인이 된 이들은 적어도 그 시대에는 하나같이 이름을 날리던 이들이었으니까.
그들 중에서는 어느 마탑주의 주인도 있었고, 세기의 발명을 한 발명가도 있었으며, 또 그 누구 중에서는 위대한 왕국의 왕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고의 주인 중에서는 '인간'이라는 종족을 초월한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인간을 초월한 '초월자'부터 시작해 거의 영겁의 세월을 살아 갈 수 있다는 '드래곤'까지, 서고장의 주인이 된 이들은 하나같이 그 재능이나 능력이 특출난 이들이었다.
허나, 그렇게 역사속이나 인간의 역사 정도는 우습게 볼 수 있는 그들이라고 해도, 언령을 이렇게 빠르게 배우지는 못했다.
1단계와 2단계까지는 그녀와 비슷하게 배우는 이들이 많았다.
당장 그녀 전에 멋대로 자신을 이용한 녀석도 2단계의 근처까지는 다가갔었고, 드래곤이나 초월자들, 그리고 어느 일국의 황제도 2단계까지는 빠른 진척을 보였다.
허나 3단계부터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간들의 경우에는 아무리 언령을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을 마법진으로 하여금 만들어줘도 대부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오히려 드래곤 같은 경우는 그 특유의 느긋함으로 1000년이 걸린 적도 있었다.
허나 그녀는 어떤가?
그녀가 언령을 배우는 데 걸린 시간은 길기는 했으나 그들처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물론 4단계에 와서는 상당히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그것도 잠시-
'공간 장악을 이렇게 빨리 습득할 줄이야.'
그녀는 공간 장악을 무척이나 빨리 습득했다.
드래곤도 거의 몇천 년의 시간을 투자해서야 겨우겨우 얻을 수 있었던 것을, 그녀는 아직 절반이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습득했다.
'물론 이다음부터도 계속해서 그 난이도가 어려워지긴 하지만-'
언령의 서는 이상하게도 그리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린이 보여주는 그 재능과 잠재력은 엄청났으니까.
그렇게 언령의 서가 하나린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하나린은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언령의 서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이다음을 배우면 되는 거야?"
[맞다. 하지만 이다음을 배우는 건 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배우도록 하지.]
"그건 또 왜?"
하나린의 물음에 언령의 서는 생각을 전부 정리한 듯 뜸을 들이지 않고 이야기 했다.
[지금 네게는 휴식이 필요하다.]
"……휴식?"
[그래, 지금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너는 실질적으로 이 공간 안에 꽤 오랜 시간동안 있었다.]
"……그게 문제가 돼?"
[그렇게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이제부터는 '공간 장악'보다 훨씬 더 어려운 수련을 해야 할 테니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라 이거다. 거기에 덤으로 준비할 것도 있으니까.]
"준비할 것?"
[그래, '공간 제압'이후의 언령을 수련하려면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야 한다.]
언령의 서의 말에 그녀는 한동안 언령의 서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았어."
[그럼 밖으로 내보내 주도록 하지.]
하나린의 대답에 언령의 서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몸인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하나린의 앞에 푸르게 빛나는 차원문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 파란색의 차원문을 보며 하나린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문 안으로 들어갔고, 곧, 하나린은 자신이 언령의 서가 만들어 둔 공간으로 이동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인 멕시코시티의 빌라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뭐야?"
그 공간에서 돌아오자마자 하나린은 창밖으로 날아다니는 수천 마리의 박쥐들을 볼 수 있었다.
구름을 먹어치우고, 멕시코시티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게 해주는 창문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굉장히 많은 수의 박쥐.
하나린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수많은 박쥐들이 이 도시에 몰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창문 쪽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보인 모습-
"……이건 또 뭐야?"
하나린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린이 내려다본 모습은 그녀가 지시를 내린 건물들이 아닌 그저 시커먼 박쥐떼들이 보일 뿐이었으니까.
"……."
하나린은 신상을 찌푸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보이는 것은 박쥐 떼들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다른 곳에는 아마 지금 만들어져 있는 박쥐 떼를 사냥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헌터들이 도시 내에 있었다.
……물론 박쥐의 숫자에 비해 헌터들의 숫자는 너무나도 적어서 저게 도움이 될까 하는 수준이었지만.
하나린은 멕시코시티 주변을 완전히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는 박쥐들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딱히 무서워 놀라워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그저 한편의 귀찮음이 서려 있을 뿐.
그리고 그렇게 한동안 무리를 지어 하늘을 날아다니던 박쥐들은 이내 하나린을 눈치챘는지 빌딩의 옥상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열 마리도 아니다.
백 마리도 아니고, 천 마리도 아니다.
척 보기만 해도 수천, 어쩌면 일만을 넘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흑룡이라도 된 것처럼 뭉쳐서 하나린에게 돌진하는 박쥐들의 모습.
허나 박쥐들이 점점 자신에게 가까워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먼저 공격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었고, 어딘가를 향해 도망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달려드는 수만 마리의 박쥐들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박쥐들이 하나린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드디어 하나린은 행동을 취했다.
허나 그 행동이라는 것은 딱히 방어의 자세나 공격의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모두-]"
-말했을 뿐이었다.
"[-찌부러져서 죽어.]"
그녀는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중얼거린 것뿐이었다.
그 어떤 행동울 취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목소리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뿌직!
그것은 단 한 마리의 박쥐에게서부터 시작했다.
하나린에게로 제일 먼저 날아들기 시작한 박쥐.
그 박쥐는 하나린의 눈앞에 도달함과 동시에 말 그대로 찌부러졌다.
유리에 처박혀서 찌부러진 것이 아니었다.
그냥.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박쥐는 찌부러졌다.
그 피박이 사정없이 우그러지고, 흡혈을 하기 위해 날카롭게 자라 있던 이빨이 사정없이 깨지며 그 파편을 사방으로 흩뿌린다.
가죽이 찌부러져 내장을 찌부러트리고, 찌부러트린 내장에서 붉은색의 피가 터져 나온다.
그리고 그 한 마리의 박쥐를 기점으로, 다른 박쥐들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두 마리,
네 마리,
여덟 마리.
열여섯 마리,
마치 감염이 되듯 박쥐들은 거대한 물결을 타고 찌부러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 마치 흑룡과도 같던 박쥐떼는-뿌드드드득!!!
-적룡이 되었다.
####
넓은 초원과 동시에 푸른 하늘이 퍼져 있는 '공간'
"후……."
그 풍경을 잠시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조금 전 자신이 그린 거대한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서서 들어가면 50명 정도는 거뜬히 들어 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마법진.
"제대로 그린 것 맞지?"
[적어도 지금 내가 보기에 이상한 점은 없어 보이는군.]
술법진을 보던 김현우가 묻자 청룡은 그렇게 대답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뭐, 설령 네가 잘못 그렸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왜?"
[애초에 이 시공진은 잘못 그리면 이상하게 발동되는 것이 아니라 술법진 자체가 기동을 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사고가 날 일은 없다는 거네?"
[그렇지.]
청룡의 대답에 김현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술법진을 바라봤다.
넓은 초원에 딱 보기에도 복잡한 술법진을 바라본 김현우는 곧 아까 시공진을 그릴 때 청룡에게 물어보았던 것을 확인할 겸 입을 열었다.
"이곳에 들어가서 제대로 시공진이 발동하기만 하면, 내 정신이 두 개로 나뉘는 거야?"
[그렇다. 시공진에 들어간 직후 네 정신은 술법에 따라 두 개로 나누어질 거고, 나누어진 정신은-]
"……각각 청룡의 업이랑 제천대성의 업을 수련한다?"
[그래. 솔직히 한두 달 정도로는 조금 부족하긴 하다만, 업(業)을 쌓는 행위는 마구잡이로 달라붙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하니.]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제일 좋을 것 같군.
[거기에다 덤으로.]
"?"
[아마 시공진 안에서는 어느 정도까지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그래, 확실히 어디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우선 늘리는 것 자체는 가능할 거다.]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곧바로 시작해."
# 215
215. 청룡의 제자와 제천대성의 제자 (1)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다른 술법 진은 몰라도 이 시공진은 제대로 발동하기까지 네가 도력으로 컨트롤해야 하니까.]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청룡은 시공진을 가동시키는 방법을 차근차근 풀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제일 처음 할 일은 네 손에 도력을 머무르게 하는 거다. 그걸로 기본적인 술법진을 가동하는 거지.]
청룡의 말에 따라 김현우는 자신의 도력을 손으로 옮겼다.
옅지만 은은하게 푸른빛이 나는 김현우의 왼손.
그와 함께 청룡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기 시작하고, 김현우는 오롯이 그의 목소리에 집중에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손을 움직였을까.
[이제 끝이다.]
쿠우우우웅!!
청룡의 명령이 끝남과 함께, 조금 전까지 빛을 내뿜고 있던 시공진은 크게 웅웅거리며 푸른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시공진으로부터 뿜어내는 빛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지고, 그 빛이 김현우의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그리고-
김현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새하얀 공간과.
"……!"
"……!"
'또 다른 나'였다.
김현우 자신과 똑같은 머리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
"……."
또한, 똑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자신.
"……."
"……."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김현우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들은 서로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확실히 미묘하네.'
마치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딱히 신기하지도 않고, 반대로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 복잡하고 미묘한 기분에 그들이 침묵을 지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성공했군."
"그러게."
두 명의 김현우 앞으로, 각각 제천대성과 청룡이 나타났다.
청룡은 무릉도원에서 봤던 것처럼 원래의 크기가 아닌 작은 크기를 가진 채 허공에 떠 있었고, 제천대성은 꽤나 신기한 표정으로 두 명으로 나누어진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그 잠시의 침묵을 깬 것은 청룡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이 시공진에서 해야 할 일을 알려주도록 하지."
그의 말에 두 명의 김현우는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똑같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이내 청룡은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시공진에서 두 명으로 나누어진 김현우가 해야 하는 일을.
"……대충 여기까지다, 이해했나?"
나누어져 있는 두 명의 김현우는 그런 청룡의 말에 대답하려다 이내 슬쩍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음……."
이내 그는 자신 옆에 있는 또 다른 김현우를 슬쩍 바라보곤 이야기했다.
"정리하자면…… 이곳에서 찢어지고 난 뒤에 서로 다른 업을 배우고, 그 뒤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면 끝이라는 소리지?"
"그래, 아까도 말했듯, 너희들은 이제부터 서로 다른 업을 배우게 될 거다. 한 명은 바로 내 업,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바로 제천대성의 업이지."
"그렇게 해서 서로 전부 업을 배우고 나면?"
"이 시공진의 중립지대에서 만나 둘 다 다시 본체로 돌아가면 되는 거지."
청룡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그 옆에 서있던 다른 김현우가 입을 열었다.
"그 과정에서 정신이 붕괴할 수도 있다는 거지?"
그의 질문에 청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다. 게다가 너희들이 만나는 때는 각각 자신이 얻기로 한 업(業)을 전부 얻었을 때니까, 두 정신을 합치는 과정에서 붕괴가 일어날 수도 있지.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
-시간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청룡은 그렇게 말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게다가 굳이 만나는 때가 아니더라도 정신붕괴는 일어날 수 있다."
"뭐?"
"너희들이 각각 업을 수련할 때 제대로 버티지 못해도 정신붕괴는 일어날 수 있다 이거지."
""이런 썅."
청룡의 말에 저도 모르게 답한 두 명의 김현우.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와 함께-
-후우우우웅!
아무것도 없는 하얀색의 공간 안에, 또다시 두 개의 문이 생겨났다.
하나는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는 동양풍의 문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가죽으로 박음질을 한 듯 동물의 가죽으로 덧대어져 있는 문이었다.
딱 봐도 누구의 업을 배울 수 있는지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문의 모습을 보고 있자 청룡이 말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각자 문을 하나씩 골라서 들어가면 된다."
그의 말에 멍하니 문을 바라보고 있던 두 명의 김현우는 이내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터벅 터벅.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들은 의견도 교환하지 않은 채 각자의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왼쪽에 서 있는 김현우는 왼쪽에 만들어져 있는 동양풍의 문을 향해.
오른쪽에 서 있는 김현우는 가죽이 덧대어져 있는 문을 향해.
두 명의 김현우가 그렇게 걸음을 옮기자 청룡은 이내 그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제 들어가면 업(業)이 시작될 거다."
그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고리를 잡은 뒤, 슬쩍 시선을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김현우.
"잘해라."
"너야말로."
그들은 그렇게 말한 뒤, 각자 앞에 있는 문의 문고리를 힘차게 당겼다.
####
처음 김현우가 문고리를 열고 그 안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심연이었다.
그래,
어두운 심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시각을 잃은 것처럼, 그 어디를 둘러봐도 새카만 칠흑만이 가득한 그곳.
그곳에서-
콰직!
-끼에에에엑!
김현우는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주먹에 맞은 무엇인가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가고, 그와 함께 김현우의 몸에 질척거리는 무엇인가가 튄다.
김현우의 기분을 거스를 정도로 질척하고 끈적한 무언가.
하지만 김현우는 그것에 신경을 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다음 자세를 잡았다.
그와 함께 김현우의 귓가로 들리는 미세한 소리.
스륵- 스륵-
무언가가 땅을 쓰는 듯한 소리에 김현우는 이를 악물었다.
"후우……후우……."
'이런 씨발…….'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거칠어지는 숨을 느끼며 어지러워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몇 시간이나 지났지?'
정신을 부여잡자마자 드는 생각은 바로 그것.
그러나 김현우는 그 생각을 이어갈 수도 없이, 또 한번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무언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콰직!
본능적으로 주먹을 휘두르자마자 터져 나가는 무언가.
그러나 자신의 손에 맞아 터져 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김현우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의 시각은 이 칠흑 같은 어둠에 들어오고 난 뒤부터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후."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김현우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그의 무기라고도 할 수 있는 마력도 이 심연에 들어온 뒤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력이 없어……?'
김현우의 몸에는 애초에 마력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처럼 깔끔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흡!"
빡!
지금 상태에서, 김현우는 오로지 귓가에 들리는 소리와 촉각에 의존해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는 무언가를 죽이고 있었다.
허나-
콰직!
"이런 썅……!"
시각이 봉인된 상태에서 달려드는 무언가를 막기에는 마력도 사용하지 못하는 김현우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투둑!
김현우는 자신의 옆구리를 물어뜯은 무언가를 거칠게 뜯어내며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처음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 지금까지.
김현우는 도대체 몇 마리나 있는지 모를 무엇인가를 상대로 끊임없이 방어를 계속하고 있었다.
허나 끊임없이 방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마치 자신이 벼랑 끝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에게는 아무런 정보도 없으니까.
이 심연에 들어오고 나서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몰랐다.
자신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주변에 얼마만큼이나 많은 그것들이 있는지도, 김현우는 알 수 없었다.
그래,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김현우를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것은 바로 단 하나의 사실 때문이었다.
정보가 없었기에 김현우는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았고, 말 그대로 어둠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빠드득!
김현우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사방에서 달려드는 무언가.
"씨발!"
그것들을 쳐내며 김현우는 혹시나 청룡이 해준 말에 단서가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분명 청룡은 수련에 관해서 자신에게 이런 저런 말을 해주기는 했다.
허나 그뿐.
그는 수련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저
'가면 해야 할 게 무엇인지 알게 될 거다.'
라는, 애매한 대답을 통해 김현우의 물음을 회피했다.
그런 아리송한 말만 그에게 해댔던 청룡의 모습이 떠오르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짜증을 내려다-
'어……?'
-단서를.
'단서가, 있다?'
-찾았다.
김현우가 생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수많은 그것이 달려들어 그의 생각을 흩어 놓으려는 듯했으나,콰직! 콰드드득!
김현우는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그것들을 쳐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청룡에게 들었던 말을 정리하는 것이 아닌, 왜 자신이 이 수련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그리고 자신이 '청룡'이 했던 이 수련에서 자신이 지금 무엇을 얻어가야 하는지도, 김현우는 생각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현우는 곧 '정답'을 찾았다.
사실 그것을 정답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좀 어려운 면이 있긴 했다.
그것은 오로지 김현우의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일 뿐이었으니까.
허나 그런데도 김현우의 정신은 초조했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침착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빠르게 뛰던 심장이 가라앉고, 작게 들렸던 그것들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김현우의 주변을 돌고 있는 그것들의 소리.
그 상태에서, 김현우는 또 한번 자신의 몸 안을 관조했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마력의 부재로 인한 지독한 허무감.
하지만 김현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조금 더 깊게 관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았다.'
김현우는, 마력하나 없이 텅텅 비어버린 자신의 몸 안에서, 아주 미약하게 남아 있는 '도력(道力)'을 찾을 수 있었다.
분명 마력은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개고생을 하며 만들어냈던 도력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렇기에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그것을 움직였다.
우우웅-
마력과는 다르게 마치 자신의 몸처럼 움직이는 도력은 순식간에 김현우의 인도에 따라 몸 여기저기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곧 그 자그마한 도력을 자신의 눈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와 함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연이었다는 게 거짓말이라도 되는 듯 트이기 시작하는 그의 눈.
그리고 곧-
"후……."
-김현우는 서서히 트이기 시작한 자신의 눈을 통해, 자신에게 달려들었던 수백의 귀(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216
216. 청룡의 제자와 제천대성의 제자 (2)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그곳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두 개의 문을 바라보고 있던 청룡은 이내 자신의 도력을 움직였다.
분명 예전의 청룡의 모습이 아닌, 마치 데포르메를 거친 듯 작게 변해 있는 청룡이었으나 그는 상당한 양의 도력을 자신의 몸에서 뽑아냈고.
"……이 정도인가?"
"뭘 하고 있는데?"
제천대성이 궁금한 듯 묻자 청룡은 대답했다
"이 시공진의 시간을 조정했다."
"……시공진의 시간?"
"그래."
"뭐, 아까도 된다는 소리를 듣기는 한 것 같은데, 네 마음대로 시간 설정을 할 수는 없다며?"
그의 물음에 청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시공진 내의 시간은 마음대로 설정하는 건 가능하다."
다만-
"내가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이곳이 시공진으로 만들어진 곳이긴 하나, 그 근원은 김현우의 의식을 일부 연결해 만든 곳이기 때문이다."
"그게 상관이 있어?"
제천대성의 물음에 청룡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내가 김현우의 정신을 무시하고 시공진의 시간의 흐름을 극한으로 늘려버리면 아마 김현우의 정신은 붕괴할 거다."
청룡의 말에 제천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김현우의 정신 상태에 따라서 이 시공진 내의 시간도 늘이거나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네?"
"맞다."
"그럼 지금 당장은 어떻게 조정해 놨는데?"
"비율로 따지면 1:10 정도일 것 같군."
"1:10 라는 건, 하루에 10일이라는 소리지?"
"정답이다."
"……그 이상 늘리는 건 불가능?"
"전에도 말했고 지금도 말했고 전에도 말했다만 이 수련은 최대한의 효율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 리스크가 상당히 큰 수련법이다. 솔직히 여기서 늘리려면 더 늘릴 수는 있겠지만."
"굳이 이 이상 리스크를 늘릴 필요는 없다 이거지?"
청룡은 고개를 끄덕였고 제천대성은 그런 청룡의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
"괜찮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의 시간으로는 좀 힘들 것 같은데."
제천대성의 은근한 걱정.
그것은 분명 타당한 걱정이었다.
청룡의 업과 제천대성의 업은 절대 가볍지 않은 업이었다.
청룡의 경우는 거의 만 단위에 가까운 생활을 수련해 그 자리에 오른 것이었고, 그것은 제천대성의 업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 김현우에게 주어진 시간은 분명 상당했으나 청룡의 업이나 제천대성의 업을 배우기에는 지극히 촉박한 시간이었다.
"……."
그런 제천대성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는 청룡.
그러나 이내 청룡은 입을 열었다.
"뭐, 괜찮을 거다."
"……뭘 근거로?"
"김현우는 우리와 시작점이 다르니까."
"시작점이 다르다고?"
"그래, 물론 김현우가 우리의 업을 미리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만, 이미 그는 처음부터 업을 쌓았을 때의 미숙한 우리보다는 어느 정도 다른 경험이 있지 않나?"
"……그건 확실히 그렇지?"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의 업(業)은 과정도 과정이긴 하지만 결국 만들어지는 업은 결과로 인해 만들어지지."
"……한 마디로, 이미 김현우는 경험이 있으니 미숙했던 우리처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 이거야?"
제천대성의 말에 청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과정도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보니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업의 질에 좀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정도만 해도 이 수련은 완전히 성공한 거라고 볼 수 있지."
청룡의 말에 제천대성은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
끼릭- 끼리릭- 끼릭- 끼릭-
"더럽게도 많네."
김현우는 짧은 감상을 남기며 자신의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도력을 이용해 심연을 볼 수 있게 된 그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그로서도 처음 보는 괴물들이었다.
기본적으로 회색빛의 피부를 취하고 있는 괴물들은 다들 제각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또 어떤 것은 동물의 형태를.
그것도 아니면 김현우가 보던 몬스터의 그것과 같은 형태를 취한 것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곤충의 형태를 취한 것도 있었다.
허나 그런 여러 가지의 특성 중에서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회색빛의 피부였다.
그것도 그냥 피부가 아닌-
끼리리릭-!
"쯧."
마치 녹아 흘러내린 것 같이 흉하게 변해 있는 회색빛 피부.
김현우는 그들을 바라보다 자신의 몸에 들러붙어 있는 회색빛의 체액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눈이 보이지 않을 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빠르게 안정되는 심신.
그 상태에서 김현우는 곧바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깨달았다기보다는.
'우선 이 새끼들부터 깔끔하게 정리하자.'
-결정했다.
우선은 자신의 앞에 더러운 면상을 내밀고 있는 망자들을 제일 먼저 정리하는 쪽으로.
팟-!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행동을 재빠르게 이뤄졌다.
콰직!
"크엑!"
김현우의 신형이 한순간 바로 앞에 있던 인간형 망자의 앞에 나타나고, 그가 주먹을 휘두름에 따라 망자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깔끔한 한 방.
마치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되는 양, 망자들은 그 행위를 인지함과 동시에 김현우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물량.
숫자의 폭력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겠다는 듯, 김현우에게로 밀고 들어오는 망자들은 얼핏 보면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였으나.
-피식!
김현우는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허공을 향해 도약했다.
순식간에 허공에 체공하는 김현우의 몸과 빈 땅을 향해 달려드는 망자들.
자신의 마력을 사용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의 입가에는 여유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상대하고 있는 망자들은 약했으니까.
당장 도력을 이용해 앞을 보지 못할 때만 하더라도 김현우는 보이지 않는 앞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하지 못해 허투루 움직일 수 없었으나 지금은 그 상황이 달랐다.
김현우는 이미 자신에게 달려드는 그것들의 전투력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마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더라도-콰지지직!
"끄에에엑!"
-김현우는 애초에 튜토리얼 탑에서 12년간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몬스터를 때려잡은 전적이 있었다.
콰드드득!
허공에 체공한 그 짧은 시간에 자세를 바꾼 김현우는 그대로 망자들이 몰려 있는 곳을 향해 발을 휘둘렀다.
쾅!
도저히 인간이 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소리가 어두운 심연을 가득 채우고, 그와 동시에 망자들의 신형이 폭죽처럼 하늘을 향해 터져 나간다.
동시에 터져 나가는 지반.
그에 따라 달려오던 망자들의 자세가 무너지고, 김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쾅!
김현우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타나며 망자들을 처리한다.
어떤 때는 하늘에 나타나 허공에 떠 있는 망자를 차 날리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지상에 나타나 몰려 있는 망자들을 일격에 분쇄하기도 한다.
신출귀몰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김현우의 모습.
게다가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흡!"
꽈아아앙!
김현우의 공격은, 다수의 망자들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이제는 숨 쉬는 것처럼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김현우라고 하더라도, 그가 탑에서 쌓아왔던 기술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후우……!"
패왕경-!
-김현우의 기술은 탑에 있을 때보다 더더욱 위력적이게 진화했다.
콰아아아아아아!!
자세를 잡은 김현우의 몸에서 보인 한순간의 절제된 움직임이, 그의 앞에 있는 망자들을 통째로 쓸어버린다.
마치 거대한 미사일이라도 맞은 것처럼 풍비박산이 나는 망자들.
한 번의 공격으로 심연의 대지를 일순 깨끗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인 기술이 연달아 망자들을 청소한다.
콰드드득!
절대다수.
숫자의 폭력이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힘의 격차.
허나 그럼에도 망자들은 끊임없이 김현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달려들고,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다.
지상에서.
하늘에서,
땅에서,
김현우의 신체가 노출되는 곳이라면 망자들은 끊임없이 그에게 달라붙었다.
끝나지 않은 전투.
그에 따라 시간은 흐른다.
흐르고,
흐르고,
흐른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른다.
김현우가 주먹을 휘둘러 망자들을 찢어죽일 때도 마찬가지고.
망자들이 김현우에게 달려들 때도 마찬가지.
그리고-
콰직!
그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투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그 끝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끝에 다다른 쪽은 어느 쪽인가?
"……후."
"그에에에-!"
그것은 바로 망자들 쪽이었다.
시간의 흐르고 김현우가 끊임없는 전투를 지속함에 따라 망자들의 숫자는 자신들이 유한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점점 줄어갔다.
김현우에게 달라붙던 망자들이 심연 속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 있던 심연의 지반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확실하게 줄어들기 시작한 망자들.
물론 줄어드는 망자에 비해 김현우의 표정은 평범했지만.
'……이제 슬슬 끝인가.'
김현우는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도력을 느끼며 내심 혀를 찼다.
물론 그의 몸속에 있던 도력은 청룡의 업을 불러올 수 있을 정도의 적은 양이었고.
그런 적은 도력을 지금까지 유지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것이었으나 김현우는 그것이 내심 아쉬웠다.
'도력(道力)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허나 아쉬움도 잠시, 김현우는 서서히 끝을 드러내고 있는 도력을 느끼며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도력이 완전히 떨어져서 망자들을 확인하지 못하게 되면 귀찮아지는 것은 김현우 자신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이전보다 빠르게 그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흡!"
팟!
김현우의 몸이 순식간에 쏘아져 나가 망자들을 처리한다.
이제 남아 있는 망자는 얼핏 확인해 봤을 때 일백 정도.
꽈드드득! 콰득!
한 번을 움직일 때마다 한 명씩.
김현우는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에도 최대한 조급해하지 않고 망자들을 처리한다.
그리고,
"끄에에에에엑!"
김현우는 자신의 눈이 완전히 어둠에 물들기 직전, 자신을 향해 괴성을 지르는 망자의 모습을 보았고, 김현우는 곧 자신을 향해 괴성을 질러대던 망자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콰득! 파악!
그와 함께 김현우의 눈에 찾아온 암전.
그러나- 암전이 찾아옴과 동시에-
"후……."
김현우는 연옥에 있던 망자들을 모두 처리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
-김현우는 자신의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밝아지기 시작하는 시야.
어두운 심연 속에서 눈앞이 하얗게 물드는 상황을 경험한 김현우는 곧 얼마 있지 않아 시야를 회복할 수 있었고.
김현우는 어느새 자신의 눈에 보이는 새하얀 공간을 볼 수 있었다.
그 어느 곳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새하얀 공간.
"……."
김현우는 그곳이 자신이 처음 서 있었던 시공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축하한다. 꽤나 빠르게 망자 소탕의 업(業)을 얻었군."
-김현우는 곧 자신의 뒤에 떠 있는 청룡을 바라봤다.
# 217
217. 청룡의 제자와 제천대성의 제자 (3)
"망자 소탕의 업(業)이라고? 청룡의 업(業)이 아니라?"
김현우와 청룡을 제외하면 동양풍의 문 한 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인 시공진 안에서 김현우는 조금 전 청룡이 했던 말을 되물었고.
"그래, 조금 전에 네가 얻은 업은 망자 소탕의 업이다."
"아니, 왜 갑자기 청룡의 업이 아니라 망자 소탕의 업을 얻게 하는데?"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따지자 청룡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애초에 '망자 소탕의 업'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청룡의 업'과 똑같은 거니까."
"뭐?"
"김현우, 너는 업(業)이 어떻게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지?"
"……업이 어떻게 만들어지냐고?"
김현우의 되물음에 청룡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별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말 그대로 위대한 업적이나 이야기, 그런 거 아니야?"
"정답이다."
"……그런데 그걸 갑자기 왜…… 아."
김현우가 입을 열다말고 그제야 알았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청룡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대로, 내 '청룡의 업(業)'은 하나의 업이지만, 하나의 업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내 업은 수많은 수십, 수백의 업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업(業)이지."
"그럼 내가 했던 '망자 소탕의 업은-"
"청룡의 업을 구성하는 수많은 업들 중에서도 제일 기초가 되는 업이라고 할 수 있지."
그의 말에 김현우는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청룡은 이내 김현우에게 시공진을 조정한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 시공진에서의 십 일은 밖에서 하루라는 소리지?"
"그렇다."
"……조금 더 못 늘려?"
제천대성과 똑같은 물음을 던지는 김현우를 보며 청룡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원숭이와 똑같은 질문을 하는군."
청룡은 그렇게 대답하며 김현우에게 이 이상 시간을 조정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고.
거기에 더불어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김현우에게 조금 전 제천대성에게 말했던 내용을 다시금 설명해 주었다.
"이해했나?"
"대충은 이해했어."
청룡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곤 곧 시선을 청룡의 주변으로 돌리더니 물었다.
"그런데, 제천대성은 어디 간 거야?"
"그 녀석이라면 지금 또 다른 네가 있는 곳에 있을 거다."
"또 다른 나라면…… 제천대성의 업(業)을 이어나가고 있는 나를 말하는 거지?"
"그래."
"……그럼 이 공간은 아까 있던 그 공간이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청룡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은 시공진의 공간이 맞기는 하다만 아까 네가 있던 공간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종의 휴식 공간 같은 느낌으로 생각하면 된다."
"……휴식 공간?"
"그래, 지금 너는 청룡의 업(業)을 수행하고 있지 않나?"
"그렇지."
"너도 알다시피 내 청룡의 업은 수많은 업이 모여 만들어진 업이다. 한마디로 네가 얻어야 하는 업의 개수가 상당히 많다는 소리지."
"그럼 여기는……."
"네가 아무리 대단하고 정신이 강하다고 해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업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만든 공간이다."
-이다음 업부터 너는 24시간마다 한 번씩 이곳에 나와 휴식을 취하면 된다.
"24시간에 한 번씩? 휴식시간은 어느 정도나 되는데?"
"그건 네 마음대로 하면 된다. 하루를 쉬고 싶으면 하루를 꼬박 쉬어도 되고, 반대로 곧바로 들어가고 싶다면 다시 들어가도 좋다."
"언제 들어가든 내 마음이라는 거네?"
"그렇다."
청룡의 긍정에 잠시 생각하던 김현우는 물었다.
"그럼 저쪽의 나도 이렇게 업을 수련하고 있는 거야?"
"그건 모르겠군, 뭐, 물어볼 수야 있겠다만 애초에 제천대성의 업은 내 업과는 기본적으로 좀 다른 업이다보니 아마 지금 네가 수행하는 방식과는 좀 다를 것 같군."
"그래……?"
"그게 궁금하나?"
"아니, 그게 궁금하다기보다는 저쪽의 내가 잘하고 있는지가 좀 궁금하긴 한데."
그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하던 김현우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니 뭐, 딱히 물어볼 정도는 아닌 것 같네."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자신이 걱정된다고 해도 결국 저쪽에 있는 녀석은 또 다른 '나'라는 것을 김현우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으므로 이내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짧은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서, 이다음 업은 뭔데?"
그의 물음에 청룡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고행(苦行)의 업(業)이다."
"……고행의 업?"
"그래, 그리고 이제부터 네가 얻어야 하는 이 고행의 업은, 내 업의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봐도 좋다."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물음을 던졌다.
"또 이번처럼 싸움질하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청룡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말했듯이 망자 소탕의 업은 내 업을 시작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초석이라 행한 것뿐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은 싸움이 아니다.]
"그럼?"
"수행."
"……수행 이라고?"
"그래, 너는 지금부터 내 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고행(苦行)의 업(業)을 수행해야 한다."
"그건 또 어떻게 얻어야 하는 건데?"
"간단하다, '깨달음'을 얻기만 하면 되지."
"뭐?"
"말 그대로다. 너는 이제부터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된다."
"……깨달음을 얻는다……?"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물었다.
"뭐, 무슨 무협지에 나오는 도사나 신선들이 얻는 그런 걸 말하는 거야?"
"무협지, 라는 말은 잘 모르겠다만, 도사나 신선이 얻는 깨달음과 그 유사성이 있기는 하지."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그의 이야기를 점검하듯 가만히 턱을 괴고는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이다음부터는 이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 이거지?"
"그렇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으면 고행의 업을 얻을 수 있는 거고?"
"맞다. 내가 '너와 나의 차이'에 대해 말했듯, 네가 나와 같은 시간을 쏟지 않아도 네가 '결과'에 도달한다면 고행의 업(業)은 끝이 난다. 사실 이론상이면 당장 지금이라도 깨달음을 얻는다면 고행의 업을 끝낼 수 있다만,"
-너도 알다시피 그건 불가능에 가깝지.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슬쩍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곤.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플 것 같네."
이내 자신이 말한 것처럼 골치가 아플 것 같다는 듯 두 눈가를 눌렀다.
지금 청룡이 그에게 말해준 고행의 업.
그것은 이론상으로 보면 단기간에도 클리어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봤을 때는 이미 해야 하는 일이 정해져 있는 업과는 그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다.
시험문제로 따지면 객관식과 주관식의 차이일까?
객관식은 이미 답이 준비된 상태다.
허나 주관식은?
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
객관식은 찍은 다음에 틀리면 재도전을 했을 때 정답과 맞출 확률이 올라가기라도 하지, 주관식은 자신이 고심 끝에 답을 적어 넣어도 그것이 틀리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게다가 머리를 쓰는 것을 싫어하는 김현우에게 있어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굉장히 까다로운 것이었기에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으나-
'어쩔 수 없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더 물러날 곳은 없었다.
그는 당장 한 달 뒤에 몰려오는 정복자들을 막아야 했고, 그러려면 자신 이외에도 업을 사용할 수 있는 동료가 필요했다.
그것도 상당히 강한 동료가.
그렇기에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혹시 깨달음에 힌트 같은 건 있어?"
"힌트 말인가?"
"그래, 힌트."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말해줄 힌트는 없군. 자네도 알다시피 깨달음이라는 것은 스스로 얻는 것이 중요하니까. 뭐-"
-그래도
"때가 오면 한 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군."
"……그래 뭐."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하며 청룡의 말을 넘겼고, 곧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럼, 다음 업을 수행하려면 바로 이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야?"
[네가 휴식을 전부 취했다고 생각한다면 저 문을 향해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청룡이 슬쩍 고갯짓을 하며 문을 가리키자 김현우는 동양풍의 문을 한번 바라보고는,
"뭐, 그럼. 기다릴 필요는 없네."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
뉴욕 멘헤튼.
S등급 세계 랭킹 21위 크리스 톤은 자신의 무기를 꾹 쥐며 오니시스 호수 쪽으로부터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인간형 재앙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것은 말이 인간형 재앙이지 실질적으로는 이미 인간은 한참 전에 벗어난 괴물이었다.
기본적으로 그 체구는 평범한 인간의 몇 배는 되는 거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입가는 기괴할 정도로 거대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상어이빨.
톤은 그 날카로운 상어이빨 사이에 끼어 있는 붉은 피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칼리와 숀이 저 이빨에…….'
S등급 세계 랭킹 28위 빅텀 숀.
S등급 세계 랭킹 41위 이터널 칼리.
크리스는 조금 전만해도 자신과 농담 따먹기를 하며 재앙을 막을 준비를 하던 그들을 떠올리며 마른 입가를 억지로 축였다.
'도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이미 2차례나 올라온 재앙을 막을 수 있었기에 상당히 여유로워진 것이 여유였을까?
크리스는 조금 전, 아니- 조금 전이라고 하기도 무색한 몇 분 전의 일을 떠올렸다.
몇 분 전, 칼리와 숀, 그리고 자신은 2차례나 연속으로 재앙을 막는 데 성공해 상당히 풀어져 있었고, 결국 그것이 화근이었다.
저번에 올라왔던 재앙처럼 느긋하겠지, 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던 칼리는 미궁에서 빠져나온 재앙에게 제대로 된 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고.
그것은 숀도 마찬가지였다.
손을 쓸 틈도 없이, 그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입에 썰려 나간 칼리와 숀.
순식간에 전력의 60%가 당했기에 그들의 옆에 붙어 있던 보조헌터들은 속수무책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이것이었다.
그리고-
"킥킥킥킥- 이정도면 낙승이로군. 낙승이야!"
크리스는 무기를 들고 있는 자신 앞에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광폭한 웃음을 짓고 있는 재앙을 보며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고 이내-
"그럼 이제 편하게 만찬을 즐겨보실까?"
그는 본능적으로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신을 도와줄 이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기 시작했으나,
'……없어.'
지금 당장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당장 강한 재앙을 처리하러 다니는 그들은, 미국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고, 적어도 이 근처에는 자신과 같은 랭커급의 헌터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딱-딱-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앞에서 들려오는 재앙의 목소리에 체념한 표정을 짓고는 두 눈을 꾹 감았고.
곧이어 딱딱거리는 재앙의 이빨 소리와 함께 그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그의 앞으로 다가 올 때쯤.
"꺼져라."
"!"
-그 목소리는, 들려왔다.
# 218
218. 청룡의 제자와 제천대성의 제자 (4)크리스의 머리로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너무나도 빨리 일어났으니까.
크리스가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 전에 그 일련의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던 재앙(災殃)이 비명을 지르며 잘린 오른팔을 부여잡고, 그 기이하게 큰 이빨을 몇 번이고 딱딱거린다.
깡! 깡!
마치 강철이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에 크리스의 정신이 한순간에 돌아온다.
허나 그럼에도 크리스는 그 재앙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멍하니 그의 모습을 관찰했다.
미궁에서 올라온 재앙.
그는 올라오자마자 s등급 세계랭킹 중에서도 상위 등급에 위치하고 있는 두 명의 랭커와 다른 보조헌터들을 무참하게 죽여 버린 괴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괴물이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한 채, 오른팔이 잘려나갔다.
"……."
그 상황에 대한 괴리.
절대 쓰러질 것 같지 않던 재앙의 몸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치명상을 입은 그 상황에 크리스는 괴리를 느꼈고.
"끄으으으윽!!"
등반자가 자신의 비명을 꾹 참고 어딘가를 노려볼 정도가 되자, 크리스는 고개를 돌려 등반자의 몸에 치명상을 입힌 장본인을 볼 수 있었다.
"……."
그의 모습은 크리스에게는 어째서인지 굉장히 익숙했다.
분명 어디서 많이 봤다고는 할 수 없으나,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 모습.
그가 봤던 수많은 사람들 중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을 착각한 게 아니냐? 라는 질문을 던지기에도,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굉장히 특이했다.
우선 머리부터가 그러했다.
그는 지금 시대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말총머리를 하고 있는 남자였다.
또한 그가 입고 있는 옷도 지금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양풍의 무의였다.
혹시 미궁에서 나오는 아티팩트나 사람들이 만든 아이템의 종류일까? 라는 생각을 찰나 해보기는 했으나 저런 동양풍의 옷이나 갑주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렇기에 크리스는 정체조차 제대로 모르는 그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이내 재앙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개자식! 죽고 싶은 거냐!?"
카챵! 캉!
재앙은 자신의 잘린 오른 팔을 부여잡은 채 핏발이 선 눈으로 그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물어 죽이겠다는 듯 날카로운 이빨을 계속해서 부딪치고 있는 재앙.
그 모습을 보며 남자는-
"같잖지도 않군."
"뭣?"
"머저리."
"!!"
-무엇인가를 했다.
그래, 무엇인가를 했다.
그는 분명 자신의 오른손에 들고 있는 칼에 자신의 왼손을 가져다댔고, 그와 함께 무엇인가가 일어났다.
허나, 일어난 그 일련의 과정을, 크리스는 볼 수 없었다.
그래, 볼 수 없었다.
그 과정을.
허나-
"끄게에에에엑!"
-그 결과는 확인 할 수 있었다.
크리스는 다시 시선을 돌려 비명을 지르는 재앙을 바라봤고, 곧 그의 왼팔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잘려 있는 것은 양 다리.
왼팔을 잘렸던 아까와 다르게 이번에는 기동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재앙의 모습에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고, 그와 함께 재앙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냐! 대체 뭐냔 말이다! 뭐냐고! 뭐!!!"
고통에 정신이 마비된 듯 여유로운 아까 전과 다르게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대는 재앙.
그런 하울링에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분명 양팔과 양 다리가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의 하울링은 크리스의 무엇인가를 자극하고 그를 움츠리게 했다.
그러나 그런 하울링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그저 묵묵히 비명을 지르고 있는 재앙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고.
마침내 재앙이 하울링을 멈췄을 때.
"내가 뭐냐고?"
그는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그런 남자의 물음에 재앙이 대답하려는 찰나-촤아아악!
남자는 그의 머리통을 깔끔하게 베어버렸다.
날카로운 이빨이 달려 있는 머리통이 한순간 하늘을 날고, 재앙의 눈이 이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듯 휘둥그레 떠져 있다.
그리고 그때가 돼서야.
"본좌는-"
그 검은 무의를 입은 남자는-
"천마(天魔)다."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그렇게 천마가 뉴욕에 등장한 등반자를 잡아 죽였을 때, 두 개의 문밖에 없는 새하얀 공간 안에서는-
"이제 99일인가."
"나름 시간이 흐르기는 했는데, 그쪽은 어떻지?"
-청룡과 제천대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뭐, 이쪽은 시작부터 막힘없이 올라가는 중이야, 벌써 만악산(萬惡山)의 초입까지 올랐지."
"나쁘지 않군."
"그쪽은?"
"이쪽도 첫 시작은 무난하게 끊었다, 다만 문제는 지금부터지."
청룡의 말에 그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고, 그와 함께 찾아온 잠깐의 침묵 뒤에-
"그러고 보면 호랑이는 왜 김현우의 청을 거절한 거지?"
"……응? 아, 저번 말이야?"
"그래 김현우가 그냥 수련하러 가기에는 걱정이 된다면서 이산대성을 영입하러 가지 않았나."
김현우가 시공진에 들어와 수련을 시작하기 전.
그는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 김현우가 미리 정해놓은 4명과 함께 9계층으로 몰려드는 등반자를 막아줄 이를 찾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처음 찾아갔던 사람이 바로 제천대성과 같은 칠대성에 있는 이들 중 한명인 이산대성이었다.
청룡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모르겠는데? 내가 형님 마음을 알 리가 있나."
"……정말?"
"그럼 거짓으로 말하겠나? 애초에 그 형은 같이 지냈을 때도 속을 알 수 없었다고……뭐, 굳이 김현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추론해 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다만."
제천대성은 그렇게 말하며 으음, 하는 침음성을 흘리더니 대답했다.
"아마 형님이 김현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꽤 높은 확률로 귀찮아서일 거다."
"……뭐?"
청룡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묻자 제천대성은 말했다.
"귀찮아서 라니까?"
"진짜로……?"
"아마도, 애초에 그 형님은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아닌 일에 대해서는 상당히 귀찮아하거든. 뭐-"
-김현우가 제대로 설득을 못 한 탓도 있었겠지만.
제천대성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고, 청룡은 그런 제천대성을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말했다.
"뭐, 사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 인간……그러니까 뭐라고 했더라? 천마(天魔)라고 했든가?"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네."
"그자도 딱히 그리 나빠 보이는 것 아니었지만."
청룡의 말에 제천대성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작 인간의 몸으로 시스템의 도움도 받지 않고 순수하게 무력만을 수련해 거기까지 경지를 올린 녀석은 몇 없긴 하지."
"아마 그가 탑에 오르지 않고 계속 수련을 했다면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엿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동감."
제천대성은 청룡의 말에 짧게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침묵이 자리했을 때,
"그래서, 지금부터 문제라는 건 뭐야?"
제천대성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했던 말을 말하는 건가?"
"그래, 그쪽. 지금 이쪽은 나름대로 잘 풀어나가고 있거든."
제천대성이 슬쩍 시선을 돌려 가죽을 덧댄 문을 가리키자 청룡은 흠, 하는 짧은 신음을 흘리는 듯하더니 이내 이야기했다.
"뭐, 말 그대로 이쪽의 김현우는 지금부터가 진짜다."
"지금부터?"
제천대성의 되물음에 청룡은 고개를 끄덕거렸고.
"망자 소탕의 업 이후부터 내 업은 네 업과 다르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종류의 것이니까 말이야. 깨달음을 얼마나 빨리 얻는지는-"
청룡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묵묵한 눈동자로 굳게 닫혀있는 동양풍의 문을 바라봤다.
"-그 녀석의 몫이지."
####
시리도록 차가운 설산.
세찬 눈보라 덕분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캄캄한 설산의 한운데에 김현우는 있었다.
마치 도인처럼 양반다리를 한 채 무엇인가에 집중한 듯 눈을 감고 있는 김현우.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그의 몸 주변으로 새하얀 눈을 쌓아 올리고 있었으나, 김현우는 자신의 몸에 눈이 쌓이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자신의 몸 내부를 관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도력(道力)을 쌓는 속도가 빠르다.'
김현우는 자신의 몸에 쌓이고 있는 도력을 느끼며 차근차근 도력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맨 처음, 김현우가 연옥을 클리어 하고 고행의 업을 쌓을 수 있는 초석을 다진 뒤부터 김현우가 시공진을 넘어 도착 할 수 있던 곳은 바로 설산이었다.
모든 것을 얼려버릴 정도로 차가운 설산.
그저 몇 초 정도 가만히 서 있는 것 만으로도 몸에 동상이 올 정도로 시린 냉기가 몰아붙는 그곳에서, 김현우는 자신 나름대로 하나의 목적성을 두고 수련을 시작했다.
물론 김현우가 설정한 목적이 정말 고행의 업을 끝낼 수 있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나, 김현우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깨달음'은 지극히 주관적인 문제였고, 청룡에게 혹여나 힌트를 얻어보려 했으나 그것도 불가능했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가 처음으로 행한 방법은 바로 청룡의 힘이 근원이 되는 도력(道力)을 쌓는 것이었다.
청룡(靑龍)의 모든 힘의 원류는 도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이 시린 설산에서 도력을 쌓기 시작했고.
수행을 시작하자 도력은 그의 생각보다도 빠르게 쌓이기 시작했다.
청룡과 함께 수행을 쌓을 때는 드럽게도 오르지 않았던 도력이 이 설산에서는 무척이나 빠르게 모였고, 그것은 시공진을 빠져나올 때마다 가속화되었다.
그저 정신을 옮겨 수련을 한 것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도력은 허수 공간에 있는 그의 몸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 그는 예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도력(道力)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력을 쌓고 있는 그가 지금 시도하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파직!
-이렇게 쌓은 도력에 청룡과 같은 뇌(雷)의 성질을 집어넣는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잡은 목표는 바로 최대한 청룡과 비슷해지도록 스스로를 수련시키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이것이 정답일지는 김현우 본인도 몰랐으나, 지금 당장 김현우의 머리로 생각해 봤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었다.
애초에 '깨달음'과 같이 진부한 것을 철학적으로 파고 들 정도로 김현우는 똑똑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가장 심플하면서도, 가장 청룡에 가까월 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것이었다.
물론 지금 김현우가 시도하고 있는 것도 실제로 청룡이 이런 식으로 수련을 했는지는 몰랐다.
허나 청룡이 말했듯이 이 고행의 업(業)에서는 결국 도달하는 결과만 똑같으면 된다고 들었기에, 김현우는 자신의 생각대로 청룡과 최대한 비슷해지기 위해 수행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수행을 지속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파직!
김현우의 몸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푸른 전류가 파직거렸다.
마력이라고는 한 줌도 없어서 뇌령신공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몸에 순간 나타난 푸른 색의 전류.
허나 그 전류는 한 찰나의 순간만 나타났을 뿐 이내 사라져버렸고. 이내 또다시 시간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점차 흘러감에 따라.
파직-!
김현우의 몸에 또 한번, 푸른 전류가 튀어올랐다.
물론 그 순간은 이번에도 찰나였지만 김현우의 몸을 가로질렀던 그것은 분명히 전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파직……! 파지지직!
김현우의 주변에, 서서히 푸른색의 번개가 튀어오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김현우는 눈을 감은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몸에는 새하얀 눈이 어느새 그의 몸을 먹어치울 기세로 가득 쌓여 있었고, 그의 손 발은 금방이라도 동상에 걸릴 것처럼 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파직!
그리고 그 순간에 또 한번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간 전류.
파직!
한번.
파직!
또 한번.
푸른 전류는 분명 이전과 별다를 바가 없는 크기였으나 그 전류가 만들어지는 시기는 서서히 빨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전류가 만들어지는 시기에 점점 가속이 붙었을 때-파직- 파지지직! 파지지지지직!!!!
김현우의 몸에서, 푸른 전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219
그날, 김현우는 자신의 도력에 뇌(雷)의 성질을 집어넣는 것에 성공했다.
219. 청룡의 제자와 제천대성의 제자 (5)파지지직!
청룡의 업이 없이도 뇌(雷)의 성질로 바꿀 수 있게 된 김현우의 도력은 눈 위에 쌓여 있던 눈들을 녹여주었고, 그 수련이 끝날 동안 김현우를 괴롭히는 냉기를 밀어내 주었다.
그리고-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
휴식공간에 돌아온 뒤,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청룡의 대답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그게 무슨 애매한 대답이야?"
[말 그대로다. 솔직히 도력의 성질을 이렇게 빨리 바꿀 수 있게 된 것은 굉장히 놀랍긴 하다만,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말은 딱 이것뿐이다.]
"왜 이것뿐인데?"
아직 고통이 가시지 않은 듯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김현우가 묻자 청룡은 딜레이 없이 대답했다.
[결국, 그 의미는 너 스스로 찾아야 하는 거니까.]
"……뭐?"
[내가 말 하지 않았나? 지금 네가 걷고 있는 것은 고행의 업(業)이다.]
"그건 알고 있어.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이게 나한테 도움이 되는 건지 말이야."
김현우의 물음에 청룡은 잠시간 고민을 하는 것인지 말을 멈추었고, 곧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기에 네가 하는 질문은 더더욱 너 스스로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왜 의미가 없는데?"
[생각해봐라. 너는 고행의 업(業)에서 무엇을 얻어야 하지?]
"무엇을 얻어야 한다니……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며?"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했고, 청룡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 깨달음이다, 네가 수련을 하는 이유는 기술을 얻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 이 말이지.]
"……그러니까 지금 한 일은 쓸모없는 일이었다?"
[만약 네가 느끼기에 그것이 쓸모없다고 느끼면 그것은 '쓸모없는 것'이 되는 거다만, 또 의미를 부여하면 달라지겠지.]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두통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찌푸린 인상을 펴지 않았다.
"아니 씨발, 그게 뭔 선문답같은 소리야?"
그의 짜증에도 청룡은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내가 네 수행에 대해서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다고.]
청룡의 결론에 김현우는 뭔가를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무슨 철학이나 넌센스 퀴즈를 내는 것 같은 청룡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김현우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이럴 거면 물어보지 말 걸 그랬나?'
'아니야, 그래도 결국 뭔가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김현우는 청룡의 말에 대해 한동안 계속해서 고민을 해봤으나, 결국 김현우가 특별하게 정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결국,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잡념뿐.
김현우는 청룡에게 한 번 더 깨달음에 관해서 물어볼까 하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창룡에게서 나올 대답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쯧."
짧게 혀를 찬 김현우는 머릿속에 들어찬 잡념들을 모두 털어내고는 이내 또 한 번 목적을 정했다.
'최대한 청룡의 업(業)과 비슷해질 정도로 수련한다.'
어차피 청룡에게 물어도 명확한 답을 낼 수 없는 상태에서 김현우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가 얻으려고 하는 것은 청룡의 업이었으니까.
"후……."
그렇게 잠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자신의 목적을 명확하게 한 김현우는 별다른 휴식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동양풍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렇게, 김현우의 몸이 문 안으로 들어서고, 그의 시야가 하얀빛에 휩싸였을 때.
"……!"
김현우는 자신이 이전과는 다른 곳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은,"
그는 시선을 돌렸다.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과 쨍쨍한 태양.
그리고-
"……사막?"
그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황토색의 모랫바닥이었다.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벌써 습한 공기가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에 김현우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곧 입가에는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소'가 바뀌었으니까.
'그래도 조금씩 깨달음에는 가까워지고 있다.'
물론 장소가 바뀐 그것만으로 무엇인가를 추론하기에는 여러모로 모호한 것들이 많았고 딱히 청룡에게 '장소'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김현우는 '고행의 업'을 수련하는 장소가 바뀐 이유를 내심 확정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몇십 일 동안 반복되던 설산이 아닌 사막이었으니까.
'내가 업을 얻는 것에 가까워지지 않았다면, 장소가 바뀔 일도 없었겠지.'
그렇기에 김현우는 확신했고. 그 사막에서 또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최대한 청룡의 업(業)에 가까워지기 위한 수련을.
그리고 그와 함께, 김현우의 시간은 본격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막지대에 들어가고 나서 처음 10일.
김현우는 그 사막의 지형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설산지대와 사막지대는 그 차이가 너무나도 심했으니까.
설산은 당장에 가만히 있으면 그 몸이 빠르게 동사해 조금이라도 도력을 이용해 몸을 보호해야 했으나 사막은 달랐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몸에 있는 수분이 전부 마를 것 같은 끔찍한 더위는 설산의 냉기와는 또다른 방식으로 김현우를 괴롭혔다.
그 이외에도 그늘 없이 장시간 태양에 노출된 김현우의 몸은 금세 탈수 상태에 도달하게 했고, 뜨겁게 덥혀진 모래는 조금 닿는 것만으로도 그의 피부를 붉게 익혔다.
분명 김현우의 몸은 '마력'을 빼면 죄다 원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막의 환경은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마치 네 몸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나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김현우는 결국 11일째가 되는 날, 그곳에서 수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수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된 이유?
그것은 별거 없었다.
그저, 김현우가 그 혹독한 사막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었다.
설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곳에 적응했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몸에 수분이 전부 마르는 것 같은 끔찍한 탈수감을 억지로 버티고.
뜨거운 모래에 피부가 타는 것을 악으로 버틴다.
그런 최악의 상황을 버티며 수행을 시작하게 된 것이 11일째.
그리고 그런 기행이 20일째가 될 때부터, 김현우는 서서히 사막에서의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사막에서 도력을 이용해 자신에게 내리쬐는 태양을 비껴내는 법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피부를 조금 더 강하게 만드는 법을 깨달았고, 거기에 덤으로 그의 폐부로 들어오는 뜨거운 숨을 식히는 법 또한 깨닫게 되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니었다.
굳이 가르쳐준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혹독한 사막의 환경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김현우가 사막의 환경에 적응해 수행을 시작한 지 200일째가 되던 날.
"……."
김현우가 수련해야 하는 장소는 '사막'이 아닌 '늪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자신이 수련하는 장소가 사막에서 늪지로 바뀌자마자 내심 쾌재를 불렀다.
물론 사막의 수행에 익숙해지기는 했으나 그것은 엄연히 말하면 편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상황에 익숙해지고, 어떻게든 그 상황에 대처할 방법을 찾은 것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내심 이 늪지가 설산이나 사막보다 편할 거라 생각했으나 그것은 김현우의 착각일 뿐이었다.
"썅!"
김현우가 수행을 시작하게 된 늪지는, 그가 수행하기 위해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그 순간부터 그의 몸을 늪 아래로 끌어들였다.
잠시라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도록.
그리고 그것은 김현우에게 있어서 굉장히 짜증나는 일이었다.
설산이나 사막 같은 경우는 어떻게든 버티기만 한다면 수행을 할 수는 있었으나 이곳은 아예 수행할 수조차 없었다.
혹시나 하고 주변을 둘러보지만 보이는 것은 수행을 시작하면 자신을 끌어들이는 늪지 바닥뿐.
그렇기에 김현우는 또 한번 그곳에 적응하기 위해 30일의 시간을 투자했다.
그렇게 해서 늪지에서 수행한 지 300일이 되었을 때.
장소는 또 한번 바뀌었다.
이번에는 동굴 안,
그러나 역시 이 장소도 일반적인 동굴과는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낙석.
수행하지 않는 와중에도 보이지도 않는 천장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낙석 덕분에, 김현우는 또 적응하는 시간을 소모했다.
적응하는 데까지 걸린 기간은 38일.
그곳에서 수행을 하는데 걸린 기간은 182일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도, 그것은 끊임없이 이어져 나갔다.
나무뿌리가 끊임없이 올라오는 초원에서 18일.
끊임없이 홍수가 일어나는 계곡에서 92일용암이 들어찬 동굴의 지하 아래서 75일.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가시로 만들어져 있는 정글에서 102일눈앞이 보이지 않은 시커먼 어둠 속에서 24일.
……
..
.
김현우는 그 이외에도 수많은 시간을 그저 바뀐 장소에 적응하기 위해 사용했고-산소 농도가 부족한 것인지 한번 숨을 쉬기조차도 힘든 절벽 끝에서 205일.
발 디딜 곳이라고는 단 한 곳밖에 없는 산의 꼭대기에서 300일.
중력의 차이 때문인지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는 어두운 곡경에서 240일.
금방이라도 온몸을 태울 것 같은 불길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붉은 산지에서 380일.
몸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굉장히 자그마한 동굴 속에서 510일.
……
..
.
-그 이외에도 김현우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오로지 청룡의 업(業)에 가까워지기 위해 계속 수행을 이어나갔다.
수행을 잇고.
잇고
잇는다.
그에 따라 흘러가는 시간.
분명 시간은 틀림없이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그 시간을 세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시간을 세는 것도 잊은 채 수행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자신이 처음에 생각했던 목적인 '청룡의 업'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그는 끊임없이 수행을 이어나갔다.
…….
…….
……
..
.
아니,
사실 아니다.
아니었다.
그것이 아니었다.
사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김현우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목적성이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청룡의 업(業)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가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 깨닫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저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그저 그냥.
그는, 수행하고 있었다.
자기가 청룡의 업에 가까워지기 위한 수련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를 가지고 하는지에 대한 목적의식도 희미해진 채 그는 수행을 지속하고 있었다.
"……."
그가 가지고 있는 목적성이 희미해진 이유.
그것은 바로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 믿음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청룡의 업을 따라 한다고 해도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김현우는 어렴풋이 깨달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뒤늦게 인정하고 포기해 버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기에, 김현우는 그 사실을 억지로 시야 밖으로 내보내며 묵묵히 수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저 계속해서 바뀌는 장소에, 그래도 자신이 어느 정도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허나-
"……."
-그런 김현우의 믿음은 깨지고 말았다.
"……하."
수행을 마치고 다음 장소로 도달한 김현우의 앞에는-
"이런 씨발……."
-그가 맨 처음으로 수행을 시작할 때 보았던, 설산이 있었으니까.
# 220
220. 청룡의 제자와 제천대성의 제자 (6)
[지난 3주 전을 기점으로 재앙(災殃)출현 횟수 압도적, 통계 비율 1024%로 뛰어…]
[국제 헌터 협회 관계자 '등반자 중 거의 대부분, 랭커 헌터들이 막을 수 있다. '자신감'.]
[패도 길드의 '미령'과 암중 길드의 '하나린'을 비롯한 김현우의 측근들은 대활약 중-]
[꼬리가 9개? 구미호
'저는 주인님의 팻입니다.'
기묘한 논란.]
[김현우,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재앙 급증이 일어난 3주 전을 기점으로 서서히 불안이 고조되고 있는 전 세계]
지난 3주 전, 새벽 2시를 기점으로 갑작스레 재앙의 출현 횟수가 갑자기 증가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것은 3주 뒤가 이어진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재앙의 증가는 3주 전을 기점으로 무려 1024%로 뛰어 올랐고, 3주 전부터 하루 평균 재앙의 출현 숫자가 8.4명까지 치솟아 올랐다.
물론 갑작스러운 재앙 급증 현상에도 국제 헌터 협회는 체계적으로 준비단계를 거쳐 S등급 세계랭킹 헌터들과 협약을 맺어 재앙을 처리하고 있었고.
그것은 김현우의 두 제자를 포함한 그들의 측근도 마찬가지였다.
국제 헌터 협회와 김현우의 측근들의 활약으로 현재 전 세계에서 마구잡이로 일어나고 있는 재앙 출현은 이전의 사건처럼 도시에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닌 경미한 피해를 입히는 선에서 끝나고 있으나 그와는 별개로 전 세계 시민들의 불안감은 고취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국제 헌터 협회는……
……
……
…
---
"후."
하남에 있는 거대한 장원.
이서연은 줄곧 보고 있던 스마트폰을 집어넣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장원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이서연이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양쪽에 서서 문을 열어주는 가면무사들.
그녀는 슬쩍 인사를 한 채 곧바로 장원내로 걸음을 옮겼다.
이서연이 오늘 장원에 온 이유.
그것은 바로 아냐의 도움 요청 때문이었다.
'도대체 뭘 도와달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냐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피곤한 듯해 우선 바로 간다고 말을 하기는 했으나 이서연은 대충 자신이 도와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대충 짐직하고 있었다.
'아마 등반자에 관련된 일이겠지.'
등반자,
지금 전 세계에서 재앙(災殃)이라고 부르는 그것들은 불과 3주 전을 기점으로 갑작스레 출현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였냐 한다면 등반자를 직접 본 적이 지금까지 2번 정도밖에 없던 이서연도 한국에 나타난 등반자를 지금껏 3번 보았다.
그 정도로 등반자의 출현 횟수는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였다.
'……설마 전투는 아니겠지?'
길을 인도해 주는 가면무사를 따르며 이서연은 혹시나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물론 이서연은 구미호가 알려주는 도술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실력이 상당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실력만이 아니라 도술을 배우면서부터 이서연은 스텟 등급은 조금씩이지만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서연은 분명 강해졌지만-
'그래도 전투는 좀…….'
이서연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의정부 미궁에서 올라왔었던 호랑이의 형태를 한 등반자에게 당했던 때의 기억을.
굉장히 무력하게, 제대로 된 공격도 한번 해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을 때의 그 기억 덕분에 이서연은 등반자와 싸우는 것이 내심 꺼려졌다.
그렇게 마음 속 한 구석에 미묘한 짐을 가지고 가면무사를 따라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가면무서는 곧 중간 크기의 문 앞에 멈춰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이서연은 그런 가면무사에게 슬쩍 인사를 하며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서연이 문을 열었을 때-
"지랄하지 마라. 잡종."
"뭐엇!? 잡종!? 내가 왜 잡종이야!"
"딱 관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답이 나오는군."
"이게 진짜 죽으려고!! 너 나 무시해?! 나 무시하냐고!"
"잡종을 무시해야 할 이유조차도 없는데 왜 무시를 해야 하지?"
"나 구미호야 구미호! 어디서 한낱 인간 주제에 나한테 덤벼!? 너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닥쳐라 잡종."
"……좋아! 나와! 나오라고! 지금 당장 나와! 지금! 당장!!!"
"제자한테 구속당해 있는 노예주제에 입만 살았군."
-이서연은.
"분명히 내가 말했을 텐데? 너는 인도쪽으로 가라고 하지 않았나?"
"뭐라는 거야 꼬맹아 잘 안 들리는데? 그리고 왜 내가 네 말을 따라야 하는데?"
"당연히 네가 내 밑에 있으니까."
"뭐? 밑에 있어? 꼬맹아, 미안한데 내가 왜 네 밑에 있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설마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당연하지 않나? 게다가 이미 나는 스승님과도…… 흠흠."
"너,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무슨 소리기는, 설마 네가 없을 때 내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했나?"
"이 개년 설마 너……!"
금방이라도 개판이 일어날 것 같은 방 안의 분위기를 보고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서연은 자신의 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천마……!'
물론 이 곳에 천마가 있다는 것은 이서연도 대충 짐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서연은 뉴스를 통해 천마가 등반자들을 잡으러 돌아다닌다는 뉴스를 몇 번이고 접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이서연은 묘하게 섬찟한 느낌이 들었기에 이내 필사적으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시선을 돌렸고.
곧, 이서연은 곧 한 구석에 있는 김시현과 자신을 부른 아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것 같은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딱히 별 트러블이 없어 보이는 아냐와 김시현의 모습에 이서연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괜찮아?"
"나 너무 힘들어 자기야."
"……."
곧 이서연은 그 둘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거부감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칫하고는 이내 주변을 돌아봤다.
"깝치지 마라, 너 같은 건 일검(一劍)으로 충분하니까."
"웃기고 있네! 현혹술 한 번이면 헬렐레 거릴 녀석이!!"
천마와 구미호는 서로에게 독설을 날리고 있고.
"아, 이제 필요 없어…… 여기서 네년을 죽여 버릴 거야……!"
"흐응, 패배한 개의 발악인가, 싸움을 걸어오겠다면 받아주마."
미령과 하나린은 어째 평소의 둘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욕설을 주고받고 있었으나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자기야, 나 조금만 더 안아줘."
"이렇게?"
어째 저 상황을 중재해야 할 것 같은 둘은, 세상에 자신 둘만이라도 남은 듯 개판 오 분 전이 된 주변 환경은 신경 쓰지도 않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펼쳐가고 있었다.
'……실화인가?'
과연 김현우가 있다면 이렇게 개판이 되었을까? 라는 생각이 슬쩍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 이서연은 이내 이 자리에 없는 그를 떠올리며 슬쩍 수심 깊은 표정을 지었다.
####
설산.
일반적인 사람이 서 있다면 자신의 몸을 금방이라도 얼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차가운 냉기를 발산하고 있는 그곳에서, 김현우는 허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았다.
김현우의 머리와 어깨 위로 눈이 쌓이기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자신의 손발이 붉은 것을 넘어 푸르게 변해가고 있음에도 김현우는 도력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는 한 가지 생각만을 머릿속에 채웠다.
'왜, 설산으로 돌아온 거지?'
설산은 분명 김현우가 처음 수행을 끝낸 장소였다.
온몸에 동상이 걸릴 정도로 세찬 한기를 내뱉던 설산.
김현우는 혹시나 이곳이 자신이 처음 왔던 그곳과는 다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떠올렸지만 역시 그것은 아니었다.
몇 번을 다시 확인해도, 이곳은 김현우가 맨 처음 수련을 시작할 때 왔던 설산이 맞았다.
"허……."
그리고 그렇기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설산을 바라봤다.
'……왜?'
김현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
그의 생각대로라면 장소가 바뀜에 따라 자신은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또한 분명 청룡의 업(業)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는 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엿 같은 장소에서 수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김현우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
설산(雪山).
그가 처음에 봤던 설산이었다.
"이런 씨팔……."
마치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고, 그와 함께 도력을 끌어 올렸다.
파직! 파지지직! 콰가가가각!
처음 이 설산에 왔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전류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터져 나가 일순 몰아치던 눈보라를 거둬내고, 주변에 뜨거운 열기를 만들어낸다.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기행.
그것만으로도 김현우가 기술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별다를 여지를 줄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확정되었으나,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뭔데 씨발……!"
아무리 그 기술이 발전을 이루었다고 해도, 결국 김현우는 '깨달음'에 대해서는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아니, 오히려 이 설산을 보며 김현우는 혹시 지금까지 해 온 것들이 사실 '깨달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결국 24시간이 끝날 때까지 수행을 하지 않고 휴식공간으로 빠져나왔고.
"왜 갑자기 다시 설산으로 돌아온 거야?"
휴식공간으로 빠져나온 김현우가 묻자 청룡은-
[네가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말했다.
"……뭐라고?"
[말하지 않았나? 아마 네가 다시 설산으로 돌아간 이유는 네가 '깨달음'을 얻지 못해서일 확률이 매우 크다는 소리다.]
"이런 썅……! 그럼 내가 지금까지 한 짓이 다 개 허튼짓이었다고?!"
김현우가 괜스레 성질을 내며 소리를 질렀으나 청룡은 그런 김현우와 달리 무척이나 평온한 말투로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작열사막'으로 넘어가기 전에도 말했을 텐데? 뭐, 만약 네가 그 수행들이 전부 하릴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될 뿐이지.]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팍 쓰곤 말했다.
"야 이 뱀 대가리 새끼야! 제발 넌센스 퀴즈좀 그만 내고 제대로 좀 이야기해줘 봐! 씨발 힌트라도 줘야 할 거 아니야!?"
그의 역정.
그러나 청룡은 변함없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없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도움을 주는 그 순간 네가 오르고 있는 고행의 업(業)은, 그 업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못 하게 될 거다.]
"결과만 똑같으면 된다며!"
[그러니까 더더욱 알려줄 수 없다는 거다. 내가 그것에 대해 알려주는 순간, '결과'는 변질할 테니까.]
"도대체 왜!"
김현우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내심 그의 말을 이해했다.
결국 고행의 업이라는 것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비로소 '완성'이 된다.
허나 누군가가 그 깨달음에 대해 결정적인 힌트를 준다면, 그것은 결국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다기보단 남에게 '들어서' 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같은 결과에 도달하더라도, 그 '결과물'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깨닫고 있기에 김현우는 더 입을 열지 않은 채 그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고, 청룡도 마찬가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침묵.
그 침묵 속에서-
[돈안지유돈(豚眼只有豚) 불안지유불(佛眼只有佛).]
-침묵을 깬 것은 바로 청룡이었다.
머릿속에 울리는 그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청룡을 바라보았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청룡은-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니.]
그에게-
[김현우, 네 눈에는 도대체 무엇이 보이지?]
-질문을 던졌다.
# 221
221. 청룡의 제자와 제천대성의 제자 (7)새하얀 공간.
"야."
이전까지와 변함없는 청룡의 평범한 말투.
제천대성은 물었다.
"그래서, 진짜 그걸 그렇게 알려줬다고?"
"무엇을 말이지?"
"정보 말이야."
"정보?"
청룡이 자신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제천대성은 그제야 시선을 돌려 청룡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래 정보, 아까 김현우에게 이야기해 줬다며?"
제천대성은 그렇게 질문하며 청룡에게 들었던 소리를 떠올렸다.
멘탈이 가루가 돼 버린 것인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세상이 끝난 듯 긴 한숨을 내쉬고 있는 김현우에게 청룡은 정보를 던져주었고.
그 말을 듣고 멍을 대리던 김현우는 그제야 '깨달음'을 얻은 듯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김현우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허나 그것이 다른 이의 도움으로 인해 얻은 것이라면, 지금 당장은 몰라도 그것은 김현우에게는 결코 좋은 일이 되지 못한다.
결국, 누군가에게 전해 들어 쟁취한 업은 결국 변질될 테니까.
그렇기에 제천대성은 우려를 담아 물었으나 정작 그 이야기를 가장 심각하게 한 청룡은 그의 말을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설마, '돈안지유돈(豚眼只有豚) 불안지유불(佛眼只有佛)'의 예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거 말하는 거야. 나야 그런 건 잘 모르긴 하는데 그 녀석이 그 이야기를 듣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며? 그럼 결국 그게 힌트가 된 거 아니야?"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만 그건 힌트가 아니다."
"……힌트가 아니라고?"
"그래, 오히려 내가 말한 것은 지금 이쪽의 김현우가 수행하는 '고행의 업(業)'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이야기다."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제천대성의 말에 청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게다가, 나는 그에게 굳이 힌트를 준 것도 아니야. 그저 질문한 거지."
"뭐?"
"그래, 그냥 그건 질문이었다. 너무나도 간단한 것에 대한 질문이지. 뭐 그걸로 그가 뭔가를 깨달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고행의 업(業)의 '깨달음'을 얻을만한 답은 아닐세, 오히려 힌트는 더더욱 아니지.
"뭐, 그래도."
"……?"
"정말 어쩌면, 그가 내 보잘것없는 질문 하나로 나름대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군."
청룡의 말에 제천대성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청룡의 말은 제천대성의 귀에는 미묘한 괴변으로 들렸기에.
그러나 그는 잠시 그 시선을 유지했을 뿐 이내 시선을 돌려 빛나는 시공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에라 모르겠다.'
제천대성 본인도 사실 도력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청룡과 같은 수행해서 나온 도력이라기보다는 그가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쌓인 업들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제천대성은 애초에 청룡이 말한 깨달음이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기에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상황을 관망했다.
어차피 자신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봤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없을뿐더러-
'-지금 이쪽도, 조금 위험한 상태니까.'
제천대성은 그렇게 생각하곤 가죽이 덧대어진 문을 바라봤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착실하게 제천대성의 업을 얻고 있었던 김현우.
허나, 김현우가 제천대성의 업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그에게서 미묘한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주 미묘한 변화.
'우선 당장은 눈에 드러나지 않지만-'
제천대성은 최근에 보여준 김현우의 변화를 떠올리며 짐짓 얼굴을 굳혔다.
####
"……."
설산은 이전과 똑같았다.
김현우가 도력으로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설산에서 흩뿌려진 냉기는 김현우의 몸을 잡아먹었고, 몸의 열기를 빼앗아 먹었다.
허나 그런 상황임에도 김현우는 딱히 자신의 몸에 쌓인 눈을 치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전에 시공진에 들어올 때와 같이 별다를 바가 없는 똑같은 상황.
허나 그럼에도 무엇인가 달랐다.
분명 아까 전이나 지금이나 김현우의 행동은 변한 것이 없었다.
도력을 사용하지 않고.
외부로 오는 냉기를 막지 않으며.
그저 두 눈을 감고 생각한다.
그것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존재하지 않았다.
허나, 달랐다.
무엇이?
'…….'
김현우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 이전과는 달라졌다.
그 자세나 행동은 똑같았으나, 지금 김현우의 머릿속은 이전과는 다르게 놀랍도록 깨끗하고, 또한 정갈했다.
그리고 김현우는 그 속에서 조금 전 청룡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니.
김현우, 네 눈에는 도대체 무엇이 보이지?'
청룡의 말.
사실 김현우는 처음 청룡에게 들었을 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룡의 그 한마디는 김현우에게 생각의 단초를 넣어주었다.
무엇인가를 특별하게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김현우는 생각할 수 있는 하나의 단초를 얻었다.
그것은 분명 평소의 김현우라면 질색을 할 정도로 싫어하는 넌센스와도 같았으나, 신기하게도 김현우는 청룡이 말한 그 구절이 짜증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구절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김현우의 머릿속은 어떻게 보면 점점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라…….'
김현우는 몇 번이고 그 말을 되뇌었다.
자신의 몸이 실시간으로 눈에 덮이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몸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계속해서 그 말을 생각하고, 떠올리고, 고뇌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지?'
무척이나 간단한 자문.
그 질문에 김현우는 잠시 스스로 침묵을 지키다 자답을 이어나갔다.
'나는, 청룡과 가까워지고자 했다.'
그래, 김현우는 청룡의 업(業). 그러니까 청룡과 가까워지고자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고행을 통해 김현우가 얻어야 하는 것은 결국 청룡의 업이기에, 김현우는 수행을 하는 동안 최대한 청룡과 비슷한 수련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곳에서 청룡이 무엇을 얻었을지 생각했고.
이곳에서 청룡이 어떤 수행을 했을지 생각했다.
그래,
김현우는 청룡을 보고자 했다.
그리고-
"……!"
그렇기에, 김현우는 불현듯, 자신이 무엇인가를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조차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으나, 분명 김현우는 그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시작한 자문자답.
김현우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마치 누가 보면 정신병자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김현우는 스스로 질문을 하고 스스로의 질문에 답변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던 그 어느 순간.
"!"
김현우는 문득, 깨달았다.
사실, 그것이 진짜 맞는 깨달음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착각인지 그는 전혀 알 길이 없었으나.
'……나는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 순간 김현우는 자신이 생각한 그것이 하나의 정답이 될 수 있다는, 일종의 확신을 가졌다.
"……."
김현우는 지금껏 청룡과 최대한 가까워지기 위해 수행을 계속했다.
그가 했던 자문자답의 내용대로, 그는 청룡이 했을 만한 수련을 했고, 청룡이 했을 만한 수행을 했으며, 청룡의 주된 성질인 뇌(雷)의 성질을 수련했다.
허나 그것이 아니었다.
'……청룡을 따라 해야 하는 게 아니었어.'
김현우는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청룡은 처음 김현우에게 이 시공진에서 할 수행을 '고행의 업(業)'이라고 표현했고, 그곳에서 깨달음을 얻으라고 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최대한 청룡을 따라하다 보면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것은 잘못되어 있었다.
'……고행의 업(業)은, 애초부터 청룡의 업(業)을 수련하는 데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소한 무지.
또는 사소한 실수에서 태어난 오해였다.
그저 김현우는 고행의 업(業)이 청룡의 업(業)을 얻는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오해였다.
'……모든 업은 다르다.'
청룡의 업(業)은 다른 업과는 다르게, 수많은 업이 모여서 만들어낸 하나의 업이었다.
김현우가 처음 한 '망자 소탕의 업(業)'부터 시작해서, 지금 하는 '고행의 업(業)', 그리고 앞으로 김현우가 치러야 할 수많은 업들이 모여, 그것들이 결국 청룡의 업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행의 업은, 수많은 청룡의 업을 포함하는 구성 중 하나고, 애초에 그곳에서 김현우가 찾아야 했던 것은 청룡의 업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그가 똑바로 마주봐야 하는 것은?
'바로 나.'
그래.
그것이었다.
이 고행의 업(業)에서, 김현우가 똑바로 마주 봐야 하는 것은 청룡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를 다시 한번 되돌아 봤어야 했다.
조급하게 청룡의 업(業)을 얻기 위해 탐욕을 부리는 것이 아닌, 이 고행의 업(業)에서는 청룡 보다는 스스로를 돌아봤어야 했다.
"……."
물론, 지금 김현우가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이전보다 더한 오답일 수도 있고, 또한 전혀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허나 그럼에도, 김현우는 이전과는 달랐다.
그저 막연히 청룡의 업을 따라하며 확실하지 않은 확신을 억지로 끌고 갈 때와 비록 스스로가 틀렸을 지라도 틀림없는 확신을 가진 김현우의 모습은 분명 달랐다.
그리고 김현우가 그것에 틀림없는 확신을 가진 순간.
"……."
김현우의 세상이, 변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가운 눈보라가 내리던 설산은 김현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야를 가리던 차가운 눈보라도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그의 몸을 먹어치우는 새하얀 눈도 자취를 감추었고, 분명 파랗게 얼어 동상이 걸렸던 김현우의 손발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대신 김현우의 눈에 비춘 것은 새하얀 공간이었다.
티 없이 새하얀 공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고, 마치 새하얀 빛만이 가득했던 공간이, 김현우의 눈앞에 나타났고, 곧 그 공간은-
"……허."
-사막으로 바뀌었다.
순식간에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김현우가 태양을 올려다보기도 전, 그 장소는 또 바뀌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늪지였다.
"……."
그 뒤로도 새 하얀 공간은 몇 번이고 자신의 공간을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동굴.
초원.
계곡.
지하.
정글.
절벽.
곡경.
산지.
……
..
.
그 이외에도 수많은 장소가, 정확히는 김현우가 수행을 했던 장소들이 연속으로 바뀌고, 바뀌고, 바뀌어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동시에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참……."
김현우가 수행을 하고 있는 장소는 분명히 달랐으나 모두 같았다.
그래,
다른 곳은 없었다.
모두 똑같이, 김현우는 이 공간 안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
조급하게 청룡의 업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버린 것만으로도 김현우의 머릿속에 밀려들어오는 깨달음.
김현우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짜릿함에 웃음을 지었고.
그가 수행했던 마지막 공간을 봤을 때 그는-
[축하한다. 고행의 업(業)을 얻었군.]
-고행의 업(業)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 222
222. 청룡의 제자와 제천대성의 제자 (8)하남에 있는 거대한 장원.
그 안에 있는 상당히 거대한 건물 안에서 이서연은 설명을 듣고 있었다.
"보조를 맞춰달라 이거지?"
김시현의 말을 듣고 있던 이서연은 이내 고개를 돌리며 그렇게 물었고, 그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아냐 혼자서 이 수많은 순간이동 마법진을 전부 관리하기는 좀 힘들거든."
그의 말에 이서연은 아냐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녀의 얼굴은 이전에 봤던 것보다는 퀭하고 초췌해 보였다.
마치 회사에서 퇴근 없이 2주 정도는 구른 것 같은 모습에 이서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엄청 힘들어 보이는데?"
이서연은 떨떠름한 물음에 줄곧 초췌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던 아냐는 이서연을 보며 대답했다.
"사실 처음에는 괜찮았어요. 최근에는 저도 어느 정도 깨달음을 얻어서 순간이동진 자체에 마력을 상시 저장하는 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개조해 놔서 들어가는 마력이 적었거든요."
아냐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깐 말을 멈춘 뒤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점점 재앙 출현률이 올라가고 나서부터, 그동안 저장해 놨던 마력이 바닥나기 시작하더라고요."
"……아."
이서연이 짧게 탄식하는 와중에도 아냐는 왠지 조금 더 어두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뒤부터는 순수하게 제 마력을 사용해서 마법진을 가동했는데, 이게……."
"이게……?"
"마치, 끝날 것 같듯, 끝나지 않는 야근 같더라고요."
"……야근 같다고?"
"네……그냥 애초에 한순간에 마력을 많이 사용하고 쉴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등반자들이 그렇게 몰려서 오지는 않고 차근차근히 올라오더라고요."
슬쩍 격앙되는 아냐의 목소리.
"마력이 앵꼬가 나서 이제야 좀 쉬다가 마력이 10%쯤 차면 곧바로 재앙이 올라온다는 보고가 올라고……그렇게 해서 다시 사용해서 마력을 0%로 맞추고 좀 쉬고 있으면 딱 순간이동이 다능한 타이밍에 재앙이 올라오고……."
……마치, 끝나지 않는 야근 같은……
아냐는 그렇게 말하더니 왠지 현자타임이 온 것 같은 표정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고, 이서연은 그런 그녀를 어색하게 바라보곤 대답했다.
"그렇게 힘들면 좀 더 일찍 말하지 그랬어."
"……이게 딱 그 선을 유지하더라고요. 약간 누구에게 도와달라고 하기에는 어떻게든 혼자서 처리가 되는데, 그렇다고 혼자 하자니 힘들고……그런데 처리가 되기는 하고."
아냐의 멍한 목소리를 들으며 이서연은 왠지 그런 그녀의 말에 슬쩍 공감했다.
가끔 가다 보면 그런 일이 있지 않은가?
혼자하면 더럽게 빡셀 것 같은데,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굳이 도움을 구해야 할 건 아닌 것 같은 애매한 일.
"아무튼, 지금부터는 나도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이서연의 말에 아냐는 힘없이 감사 인사를 표했고, 이내 슬쩍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이내 김시현에게로 시선을 돌려 말했다.
"그래서."
"?"
"저쪽 분위기는 왜 이렇게 험악해?"
이서연은 손가락으로 바로 옆 건물에 있는 미령과 하나린, 그리고 구미호와 천마를 가리키며 묻자 김시현은 찝찝한 표정으로 짧은 침음성을 흘리다 말했다.
"그게, 살짝 핀트가 다들 안 맞아서……."
"핀트가 안 맞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김시현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듯 괜스리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몇 번이고 눈썹을 꿈틀거렸고, 곧 이서연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서연은 이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한 마디로, 결국 저렇게 된 원인은 본질적으로 현우 오빠한테 있다는 거네?"
"사실 현우 형 때문인 건 아닌데, 어떻게 보면 현우 형 때문인 거지."
김시현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리자 이서연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바로 김시현에게 들었던, 그녀들의 사이가 안 좋은 이유였다.
"정리해 보자면, 구미호와 천마는 등반자의 등급 자체는 비슷한데, 현우 오빠와의 관계에서는 너무 양극이다 보니까 싸움이 난 거고."
"맞아, 구미호는 중급등반자고, 사실 스승님…… 아니, 천마도 결국 등급으로 따져보면 중급이니까."
"그리고…… 패룡이랑 암중비약, 그러니까 미령이랑 하나린은 원래 사이가 안 좋기는 했는데, 하나린이 돌아오고 나서부터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거지?"
"정확히는 미령이 하나린을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야."
"……미령이 하나린을?"
이서연이 되묻자 김시현은 곧바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알다시피 원래 둘이서 싸움을 하면 보통 놀림 당하는 쪽은 미령이었잖아? 하나린이 먼저 은근히 성질을 긁어서 시비를 걸고 말이야."
김시현의 말에 이서연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비록 이서연이 그 둘을 본 적은 얼마 없었으나 그것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이유는.
'……항상 그러니까.'
적어도 이서연이 봤을 때 미령과 하나린은 한결같이 서로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래, 항상.
이서연이 없는 곳에서는 또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서연이 봤을 때 미령과 하나린은 김현우만 없었다면 이미 사생결단을 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래도 최근에는 조금 나아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좀 달라?"
그녀의 물음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오히려 요즘에는 미령이 하나린의 성질을 툭툭 긁는 것 같더라고."
"미령이……?"
"응, 뭐 대충 들리는 이야기로 보면 미령이랑 현우 형이랑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 그걸 가지고 은근히 하나린을 갈구더라고."
"미령이랑 현우 오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그런 것 같던데? 뭐 나도 자세하게 들은 건 아니지만."
김시현의 말에 이서연은 멍한 표정을 짓다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설마 그다음 날,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몇 주 전, 이서연은 미령의 피치 못할 부분을 본 대가로 그녀를 도와준 적이 있었고, 그녀는 굉장히 결연한 표정으로 그날 밤 김현우의 집에 찾아갔다는 것까지만 이서연은 알고 있었다.
'설마…… 진짜로?'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낯부끄러운 상상을 하다 저도 모르게 '헉'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팬픽을 너무 많이 봤어.'
이서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에 떠오른 쓸데없는 생각을 날려버린 뒤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괜스레 이곳에 없는 김현우를 떠올렸다.
분명 다른 중요한 일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는 것은 김시현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결국 지금 일어나는 분쟁은 김현우가 오면 전부 깔끔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었기에-
"에휴."
이서연은 괜스레 김현우에 대한 원망을 살짝 담아 한숨을 쉬었다.
####
새하얀 공간에서, 김현우는 조금 전 들은 말을 되물었다.
"뭐?"
어리둥절한 물음.
그에 청룡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것으로 끝이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이유.
그것은 바로 청룡이 김현우에게 수련의 끝을 고했기 때문이었다.
김현우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청룡을 바라보자 그는 대답했다.
[불만인가?]
"아니, 불만이고 뭐고, 여기서 끝인 게 좀 어리둥절하니까 그렇지."
적어도 김현우가 듣기론 청룡의 업은 개인의 업이 아닌 수많은 업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업이었다.
물론 청룡이 말한 대로 고행의 업은 청룡의 수많은 업들 중에 꽤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고 들었으나 그래도 고행의 업은 말 그대로 고행의 업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라고?'
김현우가 그런 의문을 가지고 청룡을 쳐다보자 그는 말했다.
[어리둥절할 거 없다, 너는 어차피 고행의 업(業)을 풀어나가는 와중에 모든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응?"
[너도 알다시피 고행의 업은 네 스스로를 깨닫는 업이다, 마음의 탐욕을 버리고 온전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업이지.]
-한 마디로.
[고행의 업은 정신을 수행하는 곳이지, 기술을 '수련'하는 곳은 아니라 이거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했나?]
"……나는,"
김현우는 고행의 업에 있을 때의 자신을 떠올렸다.
아직 고행의 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자신은 그 안에서 최대한 청룡과 비슷해질 수 있게 노력했다.
"아, 설마?"
김현우는 문득 생각하던 중 떠오른 가정에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런 그의 표정을 보았는지 청룡은 곧바로 대답했다.
[아마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
"……설마 내가 그다음에 얻을 깨달음들을 모두 미리 클리어해 버렸다는 거?"
[그래, 원래라면 네가 수행하던 기술들은 고행의 업을 넘어서부터 수련해야 하는 것들이었다만, 너는 고행의 업을 수행하면서 그 기술들에 대한 깨달음을 전부 얻지 않았나?]
"……그래?"
[그래.]
청룡의 긍정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현우는 내심 자신이 했던 그 수련들이 살짝은 아깝다고 생각했으니까.
허나, 그 수련들은 전혀 아까운 것이 아닌, 그에게 유의미한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나? 네 수행이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반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유의미해진다고.]
"아,"
김현우는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김현우의 침묵을 지켜보고 있던 청룡은 이야기를 이었다.
[아무튼, 더 이상 네가 내 업을 수행할 필요는 없다. 네가 내 업을 수행하지 않더라도, 너는 이미 모든 깨달음을 얻은 상태니까.]
"……."
마치 자신을 인정해주는 듯한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묘한 감각을 느꼈다.
뭔가 제대로 말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감각.
그렇기에 김현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묘한 감각에 대한 여운을 즐겼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야, 다들 좀 처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산통을 깨서 미안하긴 한데."
휴식공간에서 여운을 즐기고 있을 때 들린 제천대성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시선을 돌리고는 이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겁나 오랜만이네."
"……뭐 나는 저쪽의 김현우를 계속 보고 있어서 그렇게 오랜만이라는 기분은 못 느끼겠다만."
"나는 아니니까."
김현우의 말에 제천대성은 어깨를 으쓱했고,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청룡은 이내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청룡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왠지 곤란한 일이 생겼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야, 좀 문제가 생겼어."
"갑자기?"
"……뭐, 갑자기는 아니긴 해, 사실 이전부터 어느 정도의 변화가 보이기는 했거든, 근데 딱히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변화한 건 아니라 그러려니 했는데……."
제천대성이 말을 슬쩍 줄이자 김현우는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고.
"뭐야? 무슨 일인데?"
그에 제천대성은 말하기가 껄끄러운 듯 몇 번이고 입맛을 다시더니.
"내 업을 수행하고 있던 김현우가 요괴로 변이했다."
이내 그렇게 말했다.
# 223
223. 요괴(妖怪) 김현우 (1)
"……뭐라고?"
순간, 김현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묻자 제천대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김현우, 그러니까 또 다른 네가 요괴로 변이했다고."
"그건 또 뭔 개소리야……? 왜 갑자기 내가 요괴로 변이하는데?"
김현우가 따지듯 묻자 제천대성은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리며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마……."
"아마……?"
"내 업에, 네가 너무 잘 맞아서 그런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업에 잘 맞는다니?"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제천대성은 김현우를 한번 바라보고는 짧음 침음성을 흘리더니 말했다.
"음……그러니까 이걸 예로 들면, 일종의 '과몰입'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을 하면 맞을라나?
"우선 그렇게 중얼거리지만 말고 어떻게 된 건지 상황을 말해줘 봐."
김현우의 말에 제천대성은 슬쩍 고개를 끄덕인 뒤 제천대성의 업을 수행하러 들어갔던 또 다른 김현우에 관한 이야기를 그에게 하기 시작했고.
이내 제천대성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현우는.
"……진짜로?"
제천대성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제천대성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마치 핑계를 대듯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도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어. 오히려 생각보다 내 업을 빨리 습득하기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어째 중후반부터 조금씩 이상해지더니-"
-결국 마지막에 와서는 요괴로 변이해 버리더군.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조금 전 그가 자신에게 말해주었던 설명을 떠올리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러니까, 또 다른 내가 요괴로 변한 이유가."
"나, 그러니까 '제천대성의 업'과 그 상성이 무척이나 잘 맞았기 때문이다."
제천대성의 확답에 김현우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으로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으나.
"아니, 그게 가능한 이야기야?"
"뭐, 확률적으로는 굉장히 낮지만,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만약 또 다른 네가 제천대성의 업을 저 원숭이가 한 것과 같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똑같이 따라했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김현우의 물음에 답한 것은 청룡이었다.
"아니, 똑같이 따라한 것만으로도 종족이 바뀐다고?"
"그래, 본래 제천대성의 업(業)은 바로 대요괴중 한 명인 저 원숭이의 업이다. 만약 또 다른 네가 제천대성의 업을 거의 똑같을 정도로 완성시켰다면, 또 다른 네가 요괴로 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저 녀석은 요괴니까 말이다.
청룡은 턱짓으로 제천대성을 가리켰고, 제천대성은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내심 잘 맞겠다는 생각은 했어도 이렇게 될 줄이야……."
"원숭이 녀석, 계속 옆에 붙어 있었으면 요괴로 변이하지 않게 막았어야 할 것 아닌가? 역시 지능이 떨어져서 그 생각까지는 못한 건가?"
"하, 뭔 개소리야!? 업을 얻는 후반까지 증세를 보이지 않다가 갑작스레 나타난 증세를 내가 어떻게 막냐고!"
"처음부터 잘 봤으면 될 일 아닌가?"
"아니 그러니까……! 처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니까!!"
제천대성과 청룡이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말렸다.
"다 조용히 좀 해봐, 지금 싸울 때는 아니잖아?"
"……."
"쯧."
김현우의 말에 탐탁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청룡과 제천대성.
그는 거듭되는 한숨을 내쉬며 그 둘에게 물었다.
"아무튼. 문제는 또 다른 내가 제천대성의 업을 전부 수행하기는 했는데…… 요괴가 되어버렸다는 거잖아?"
"맞아."
"……그럼 우선 정신이 붕괴된 건 아니잖아?"
김현우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묘한 침음성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어떻게 보면 정신이 붕괴한 건 아니지."
"……그럼 당장 문제는 없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다."
김현우의 물음에 답한 것은 제천대성이 아닌 청룡이었고, 그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물론 정신붕괴만큼의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건 이거대로 문제가 심하다."
"무슨 문제가 있는데?"
"바로 인격의 문제지."
"……인격?"
김현우의 되물음에 청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격의 문제다. 사실 정신체 상태인 김현우가 요괴로 변했다고 해서 시공진에 있는 네 몸까지 요괴로 변이하는 건 아니지만 네 정신에 요괴인 김현우의 인격이 섞인다면?"
"……내 인격이 변한다?"
"그래, 물론 네 인격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만 기본적으로 요괴의 인격은 굉장히 포악하고 탐욕적이다. 그걸 상상해 봤을 때-"
"그 녀석이랑 합쳐지면 내가 인성 파탄자가 된다는 소리군."
"……인성은 지금도 그리 좋은 편이라고 보이진 않는다만, 적어도 지금 네 상태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안하무인격으로 변한다고 봐도 되겠지."
"이런 썅……."
그의 말에 김현우는 짙은 짜증을 표현하며 욕을 내뱉었고, 이내 김현우는 청룡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래도 뭔가 좀 다르지 않아?"
"뭐가 다르다는 거지?"
"또 다른 내가 요괴가 된 건 그렇다 쳐, 근데 제천대성의 업이라며? 그 업을 완벽하게 익힌 거면 그 녀석도 제천대성의 업을 따라 변이가 일어났다는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러면 그 녀석의 인격도 그렇게 심하게 바뀐 건 아닐 거 아니야? 당장 우리 눈앞에 있는 제천대성만 해도 조금 성격이 사나울 뿐이지 멀쩡하잖아?"
김현우가 제천대성을 가리키며 물었으나 청룡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지만 그건 아니다."
"왜 아닌데?"
"너는 설마 저 원숭이가 고작 '제천대성'이라는 업 하나로 저런 인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나?"
"……그럼 아니야?"
"당연히 아니다, 지금 저 녀석의 성격은 저 녀석이 가지고 있는 업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성격이라는 거다."
"그렇긴 하지……."
제천대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자 김현우는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또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는 일이 하나 없냐."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멍하니 아무것도 없는 하얀색의 공간을 올려다봤고, 곧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그래서, 해결책은 있어?"
"해결책?"
"그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까 우선 어떻게든 수습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요괴로 변한 나랑 같이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김현우의 물음에 제천대성과 청룡은 무엇인가를 짧게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였고.
"……완전한 해결 방법이라고 하기는 그렇다만, 하나 정도 있을 것 같기도 하군."
김현우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바로 청룡이었다.
"뭔데?"
그의 물음에 청룡은 고개를 돌려 제천대성에게 물었다.
"변이된 김현우는 어디에 있지?"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우마왕과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니까…… 아마 이제 밖으로 나왔을 것 같은데."
제천대성의 말에 청룡은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김현우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 녀석을 죽이면 된다."
-그렇게 말했다.
####
정복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통로.
하늘과 지상을 향해 끝을 모르고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통로에서, 검은색의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벙 뚫려 있는 땅을 바라본 뒤-쿠우우웅!
-망설임 없이 다리를 들어 허공을 후려쳤다.
허공을 후려쳤는데도 불구하고 거대한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울리는 굉음.
허나 후드를 쓴 남자는 그 굉음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발에 뚫리지 않는 '벽'을 직시했다.
허공을 투명하게 반사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벽을.
"……쯧."
후드를 쓰고 있는 남자가 한동안 경계를 바라본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는 자신이 밟고 있는 투명한 벽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툭툭 내리치며 생각했다.
'단절 기간을 이만큼이나 늘리다니, 어지간히도 힘을 모았나 보군.'
후드를 쓴 남자는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벽을 직시했다.
이것은 바로 얼마 전, 분명 예전에 처리했던 것으로 깨닫고 있었던 '통괄자'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며 만들어낸 벽이었다.
'정확히는 김현우를 해칠 것을 미리 예견하고 만들어낸 경계.'
그는 경계가 만들어져 있는 12계층까지 내려오며 혹시 '통괄자'이외에 다른 요소가 끼어들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봤으나 그런 가능성은 현저하게 낮았다.
이것은 분명 탑을 조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그녀와 이 탑의 위에 있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툭- 툭-
몇 번이고 자신이 밟고 있는 경게를 툭툭 찬 남자는 이내 한숨을 크게 내쉬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
통괄자가 살아 있다고 해도 그녀는 이전번에 거의 대부분의 힘을 소실했을 테고, 그 때문에 남자는 지금 만들어 놓은 경계도 그리 오랜 시간 유지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이 짧은 시간 사이에 그 녀석이 힘을 키울 수도 있겠지만.'
분명 이 경계가 유지되는 시간은 그에게 있어서는 아주 짧은 시간.
허나 그 시간 사이에도 그 녀석, 김현우는 계속해서 성장을 반복해 왔다.
제천대성을 이기고.
그다음에는 업을 가진 전우치를.
그다음에는 만년빙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분명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란 듯이 성장을 거쳐 그들을 처리했고, 그렇기에 남자는 분명, 이 짧은 시간 사이에도 김현우가 성장하고 있을 거라는 것을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남자는 시선을 닫혀있는 경계의 한쪽 구석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도대체 언제 내려가지?"
"그러게. 좀 빨리 끝냈으면 좋겠는데."
"배고프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빨리 먹어치우고 싶은데 말이야."
-그들이 있었다.
남자가 자신의 위업(偉業)을 미끼로 이용해 데려온 정복자들.
'비록 제일 위에 있는 사천(四天)을 끌어오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남자는 그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녀석이 정복자를 이길 수 있다고 해도.'
한 손으로 열 개의 손을 막을 수는 없듯, 숫자의 폭력은 절대로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김현우의 성장력을 생각해 봤을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숫자의 폭력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분명히 있었다.
다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그게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는 것.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는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위업을 이용해 데려온 정복자들을 이용하면, 틀림없이 10할에 가까운 확률로 김현우를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우선은 침착하게 기다린다.'
남자는 경계의 한쪽 면에 붙어, 금방이라도 9계층으로 내려가기를 희망하고 있는 세 명의 정복자를 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고.
파직-!
"……!"
그 순간, 후드를 쓴 남자는 자신이 밟고 있는 경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 224
224. 요괴(妖怪) 김현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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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災殃)의 지속 출현, 과연 국민들은 이대로 괜찮은가?]
지난달을 기점으로 급속하게 늘어나기 시작한 재앙 출현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들고 있다.
국제헌터협회가 최선을 다해 사태 진압에 총력을 다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속된 재앙출현은 각 개국 국민의 불안도를 점점 더 높이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지난 달 재앙 출현도가 가장 높았던 독일에서는 대부분의 시민이 독일 외부로 피신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며─────
[중략]
─────현 상황에서 각 개국의 정부는 국민들의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하고 있으나 국민들의 불안은 쉽게 해소되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인터넷에서는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재앙(災殃)'에 관한 팬카페나, 재앙을 추종한다며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자극하는 영상을 지속적으로 인터넷상에 업로드 하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기에 각 국가들의 국민 불안 해소는 어려운 난제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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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928
십일단뇌절 : 이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러다가 진짜 세계 멸망당하는 거 아니냐? 내가 볼 때는 딱 봐도 예쁜 각이 보이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함?
ㄴ 윤탁이 : 뭔 각이 보여 병신아 ㅋㅋㅋ너도 재앙 팬카페 소속이냐? 요즘 이 새끼들 자주 출현하는데 네이버는 이런 새끼들 차단 안 하고 뭐하냐. 이런 새끼들 차단 좀 해라ㄴ 십일단뇌절 : ??????????? 이 새끼 그냥 댓글 쓴 거 가지고 갑자기 시비 오지게 터네 너야말로 재팬아니냐?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생사람을 잡아서 마녀사냥을 시작하려 하네.
이럴때야말로기도 : 야 ㅋㅋㅋㅋㅋ이제 딱 보니까 세계도 멸망할 것 같고, 솔직히 너희들 무섭지 않냐? 그러니까 딱 예수 믿어라, 솔직히 안 믿다 뒤졌는데 예수 있으면 개씹손해잖아 인정?
ㄴ 호롱이 : 개독 아가리하고 전파는 같은 교인한테만 전파해라, 여기서 물흐리지 말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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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에 있는 거대한 장원의 건물 안에서.
"으에에-"
"죽겠다……."
이서연은 마법진이 가득 들어찬 방 안의 소파에 앉아 조금 전까지 바라보던 스마트폰의 전원을 끄며 한숨을 내쉬었다.
'등반지 출현이 지속된 지도 35일째.'
그녀는 극도의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국제 헌터 협회에서 보내준 힐러가 꾸준히 마력을 사용해 상태를 회복시켜 주고 있기는 하다.
'이러다 말라 죽겠어.'
그래도 사람이 물컵처럼 물을 채우면 곧바로 채워지는 간편한 것이 아닌 만큼, 그녀의 몸 상태는 꾸준한 마력 사용으로 인해 상당히 피곤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난 늦게라도 들어왔지.'
이서연은 시선을 돌려 자신의 옆에 쓰러져 있는 아냐를 바라봤다.
무척이나 피곤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아냐.
그녀는 이서연보다도 일찍 마법진을 다루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잘 버텨주고 있었다.
사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지고 있는 실정이기는 했다.
분명 하루에 여덟에서 심하면 열까지 나타나던 등반자들은 최근 들어서 그 숫자가 줄어들었고, 거기에 덤으로 등반자들의 등급도 서서히 낮아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미령을 필두로 한 하나린과 천마, 그리고 김시현이 상대하는 게 아니면 처리할 수 없는 등반자들이 나왔으나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헌터들의 희생이 조금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 지구에 등장하고 있는 등반자들은 헌터들이 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뭐 그래 봤자 우리가 움직이는 건 마찬가지…….'
자그마한 희생이라도 결국은 희생.
불필요한 희생은 최대한 줄여야 했으니까.
"후……."
그래도 피곤한 것은 피곤한 것.
이서연이 그렇게 한숨을 쉬며 피로한 표정을 지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우우우웅!
책상위에서 울리는 스마트폰에 이서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특별한 장식이 되어 있지 않은 밋밋한 모양의 스마트폰.
그것은 바로 국제 헌터 협회와 직통으로 연결이 가능한 스마트폰이었다.
이서연은 또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몇 번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내 결국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
"……죽인다고?"
김현우의 되물음에 청룡은 대답했다.
"뭐, 생각해 보면 죽인다는 말에는 조금 오류가 있긴 하군. 음 좀 정확하게 말하자면-"
청룡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민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의 인격을 소거하는 거다."
"인격을 소거해?"
"그래, 지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제천대성의 업을 얻으면서 변이가 된 또 다른 김현우의 '인격'이다."
"그렇지."
"그렇다면 제천대성의 업을 배운 또 다른 김현우를 죽여 버리면, 문제는 그것으로 끝난다는 소리지."
-이렇게 말하니 결국 또 다른 너를 죽이라는 소리와 별다른 차이는 없군.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내 걸리는 것이 있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근데 만약 내가 그 녀석을 죽이면, 그 녀석의 업도 같이 사라지는 거 아니야?"
김현우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 시공진에 들어오고 나서 두 개로 나누어진 김현우는 제각각 다른 업을 수행했다.
한 명은 청룡의 업을.
또 다른 한명은 제천대성의 업을.
그런데 만약 지금 상황에서 제천대성의 업을 가진 김현우를 죽여 버리면 그 녀석의 인격만이 아닌, 그가 배운 제천대성의 업까지 같이 소멸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 김현우의 걱정이었다.
그런 걱정을 가진 김현우의 물음에 청룡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다."
"그럴 일이 없다고?"
"이미 너나 또 다른 김현우가 업을 얻었을 때부터 이미 그것은 '얻은 것'이 된다. 단지 시공진으로 인해 나누어진 정신체가 사라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럼 내가 그 녀석을 죽이기만 하면 우선 내 인성이 박살 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지?"
"그렇다, 네가 그 인격을 처리하면 적어도 네 인성이 요괴처럼 박살나는 일은 없을 거다, 문제는 다른 거지."
"또 문제가 있어?"
김현우가 슬슬 짜증이 올라오는 듯 안 그래도 찌푸렸던 인상을 더 찌푸리자, 청룡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입을 열었다.
"이미 저 원숭이가 관리하던 네가 요괴로 변이한 순간부터 문제가 없을 수는 없게 되었다."
"아니, 그건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문제-"
"아니 됐고, 그 문제가 뭔데?"
급히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제천대성을 제지한 김현우는 곧 청룡에게 물음을 던졌고, 청룡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네 문제다."
"내 문제?"
"그래, 네가 제천대성의 업을 가지고 있는 김현우를 죽이게 되면, 그 녀석이 얻었던 제천대성의 업은 그대로 남아 있는 정신체인 네게 들어가게 될 거다."
"……그게 문제야?"
김현우가 묘한 듯 물음을 던지자 청룡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문제다."
"어떤 면에서?"
"네 정신 면에서."
"……내 정신 면? 설마 나도 그 녀석과 똑같이 요괴로 변이할 수 있다는 이야기야?"
김현우가 묻자 청룡은 고개를 젓고는 대답했다.
"그게 아니다. 김현우 너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겠지만 제천대성의 업을 얻은 김현우도 네 녀석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오랜 수행을 거쳤다."
"……그렇겠지."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하며 자신이 거쳤던 수행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쯧."
막상 마지막에 도착해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쾌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으나 다시 하라 그러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것 같은 고행의 업.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청룡은 말했다.
"분명 제천대성의 업을 얻은 김현우도 그 정도의 수련을 했을 것이고, 네가 그 녀석을 죽였을 때 네 머릿속에는 그 녀석의 수련과정이 그대로 들어오게 될 거다. 그것도 단 한 번에."
"……아."
김현우는 그제야 청룡이 말하는 바를 깨닫고 나지막한 탄식을 터트렸고, 김현우가 생각을 이어나가기도 전에 청룡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만약 거기서 네가 버티지 못하면, 정신이 붕괴될 거다."
"아오 썅, 왜 진짜 되는 일이 없어!?"
청룡의 확언에 김현우는 짜증을 내며 괜스레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저도 모르게 후려 차고는 그에게 물었다.
"아니, 잠깐만…… 그렇게 생각하면 애초에 제천대성의 업을 수련한 내가 요괴로 변이하지 않았다고 쳐도 그 리스크는 그대로 있는 거 아니야?"
"아니다, 만약 네 정신과 그 녀석의 정신이 멀쩡했으면 시공진 안에서 충분히 시간을 들여 기억을 조정할 수 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 녀석의 인격을 없애야 하니 그게 불가능 한 거지."
"이런 개씨발."
김현우는 청룡의 말에 결국 욕을 내뱉고는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한번 찾아온 침묵.
청룡은 가만히 김현우가 할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제천대성은 자신도 짜증이 난다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박박 긁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이 지속된 뒤.
"그 녀석, 지금 어디 있다고?"
김현우는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제천대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
요괴들만이 살아남아 약육강식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그 잔혹하고도 혹독한 만악산(萬惡山).
그 끝에는-
"……네 녀석은 대체 뭐지?"
-한 명의 수인이 있었다.
양쪽 머리에 거대한 소뿔을 달고 있는 수인.
그는 아래서부터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자신의 다리를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은 우마왕의 눈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분명 느껴지는 것은 요기인데…….'
그의 외견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다.
보이는 것은 파충류와 같은 붉은색의 동공, 그 아래는 도대체 누구의 것인지 모를 포유류의 가죽을 걸치고 있었다.
물론 인간의 모습을 한 요괴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요괴들은 사술에 능통하거나, 방심을 유도하지 못하면 인간을 잡아먹지 못하는 약한 요괴들뿐이었다.
그렇기에 우마왕은 의문을 느끼고 또 한번 물음을 던졌다.
"네 녀석은 누구냐고 물었다."
우마왕의 두 번째.
"나?"
그제야 우마왕의 사라지고 있는 몸을 보며 웃음을 짓고 있던 그 남자는 마치 상어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이빨을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고작 기억 쪼가리인 네게 알려줄 이름은 없어."
남자의 대답에 우마왕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 했으나, 곧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우마왕의 입부분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내 우마왕은 끝까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을 때.
"……이건 또 웬 원시인이 되어 있어?"
그 남자의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들린 목소리에 비릿한 웃음을 지운 남자는 곧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고, 그곳에서 남자는.
"……이곳에는 뭐 하러 왔지?"
"뭐 하기는 뭐 하러 와."
자신과 같은 '김현우'를 볼 수 있었다.
"네가 뇌절을 3단 4단 5단을 넘어 6단까지 하고 있길래 찾아온 거지. 병신아."
# 225
225. 요괴(妖怪) 김현우 (3)
알래스카 주.
인간의 두 눈에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산맥이 연달아 펼쳐져 있는 그곳에서는-콰드득!
"끄에에에엑!"
"쯧-"
-천마가 자신의 발아래에 깔려 있는 괴물에게 칼을 박아 넣고 있었다.
그가 칼을 박아 넣자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몸을 뒤트는 물고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괴물.
그는 자신의 목 뒤에 칼이 박히자마자 자신의 몸을 사방으로 버둥거리며 천마의 구속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애를 썼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천마를 떼어놓지 못했다.
"이럴 수는 없다! 나 멀로크가! 나 멀로크가!!"
물고기의 형상을 비슷하게 취하고 있는 그 괴물은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애병인 삼지창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푸화아아악!
"끄하아아악!"
"……목에 비해서 팔은 가볍게 잘리는군."
어떻게든 애병을 잡기위해 뻗었던 멀로크의 팔은 천마가 휘두른 칼에 깨끗하게 잘려나가 버렸다.
허공을 나는 멀로크의 팔에서 인간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녹색의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고,툭! 투두두두둑!
곧 중력의 영향을 받아 떨어진 멀로크의 팔 주변은 눈은, 녹색빛으로 물들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모처럼 이런 좋은 기회를……! 모처럼 이런 좋은 기회를 얻었는데에에에에!!!!"
그와 함께 비명을 지르는 멀로크.
하지만 천마는 그런 멀로크의 모습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그의 목에 박힌 칼을 빼내 한 번 더 치켜들었고-화르르륵!!
"!"
천마는 자신의 검이 땅으로 내리쳐지기도 전에 갑작스레 발화하기 시작한 멀로크의 시체를 보며 급하게 몸을 뒤로 뺐다.
"풋."
그와 함께 들리는 미성의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에 천마는 단박에 인상을 찌푸린 채 시선을 돌렸고, 그곳에는 아홉 개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구미호가 천마를 보며 일말의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네년……!"
구미호의 미소에 한순간 격분한 표정을 지은 천마는 곧바로 멀로크에게 휘두르려던 검로를 틀어 그녀에게로 쏘아 보내려 했으나-
"저는 분명 도와주려고 했는데 설마 같은 팀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생각이에요? 설마? 설마?"
"네년을 죽여 버리겠다."
"헤엥~ 그래요? 그럼 해봐요."
천마가 잔뜩 살기를 담고 입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미호는 어디 할 테면 해보라는 제스쳐를 취하며 천마를 도발했고.
빠직!
그와 함께 인상을 팍 찌푸린 천마는 그녀에게 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왜요? 못하는 건가요?"
"……아가리 닥쳐라, 여우. 네 녀석은 계약만 아니었어도 사지를 찢어발긴 다음에 몸 전체를 태워버렸을 테니까."
-천마는 그녀에게 휘두르려던 검을 집어넣고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시선을 반대로 돌렸다.
"흐응, 역시 말만 가득했을 뿐인가요? 그런 건가요? 후후후……역시 제게 덤비기에 일개 필멸자는 좀 약하긴 하죠."
"닥쳐라 버러지년!"
'……계약만 아니었으면……!'
천마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성질을 최대한 가라앉히며 이곳으로 나오기 전, 허수공간에서 했었던 김현우와의 계약을 떠올리며 성질을 죽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이 계약만 끝나면 곧바로 저년 모가지부터 따버리겠다.'
천마는 일부러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는 구미호를 보며 그렇게 생각하고는 이내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여기는 왜 온 거냐 버러지, 분명 나 혼자도 충분하다고 말 했을 텐데?"
천마의 물음에 구미호는 대답했다.
"물론! 저도 당신이 있는 곳에는 오기 싫었어요~ 당신보다는 오히려 시현 씨가 있는 곳이 제게는 더 편하거든요."
"그럼 그쪽으로 꺼지지 그랬나?"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이쪽이 좀 더 위험해 보인다고 해서 이곳으로 왔네요?"
빠직-!
물론 아냐가 구미호에게 했던 말은 알래스카에 나타난 등반자의 등급이 꽤 높은 축이니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같이 가달라는 것이었으나, 구미호는 천마를 도발하기 위해 그 내용을 날조했다.
구미호가 그렇게 천마를 놀리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그녀가 얼마 전에 알게 된 천마와 김현우의 계약 내용 때문이었다.
물론 구미호도 김현우와의 계약 내용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그녀가 확실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 주인님과 무슨 약속을 해서 아군에게 피해를 줄 수 없는 상황인 게 확실하죠.'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구미호는 그것을 깨닫자마자 천마를 놀리기 시작했다.
천마는 처음 파티에 합류할 때부터 구미호를 업신여기며 비웃었으니까.
물론 구미호도 그런 천마의 비웃음에 같이 반격하기는 했으나 천마의 계약을 모르던 상태에는 그가 상당히 강해 보였기에 제대로 입을 털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을 헤칠 수 없는 확신이 있는 지금 마음을 놓고 천마의 속을 긁고 있는 것이었다.
"후……."
천마는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는 구미호를 한번 바라보고는 또다시 올라오기 시작하는 살인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이러다가 우화등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최근 들어 버러지 같은 여우한테 욕을 먹은 뒤에 참고 있는 자신을 보면 인내심을 길러 우화등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천마는 이내 그녀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돌린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섬찟!
"!!!"
천마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기감에 잡힌 말도 거대한 기운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분명 한순간이지만 느껴졌던 소름 끼치는 감각.
천마는 자신의 목전을 스쳐 지나갔던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고-
"……이건 대체……?"
조금 전까지 천마를 놀리기 위해 얄미운 웃음을 짓고 있던 구미호는 천마와 마찬가지로 느낀 소름끼치는 느낌에 천마의 시선이 돌아간 곳과 같은 곳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분명 아무것도 없었던 그곳에는-
"안녕?"
히죽.
-설인(雪人)이 있었다.
####
만악산(萬惡山)의 꼭대기, 다른 주변의 경관이 모조리 점으로 보일 정도로 높은 그 산맥의 끝에서.
"옷은 왜 또 그렇게 거지처럼 입고 있어?"
김현우는 요괴로 변이한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동공 위로 마치 파충류처럼 찢어져 있는 눈가는 누가 보더라도 굉장히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이질적이었고.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닐 텐데?"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사이한 기운은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요괴라는 것을 다시 자각시켜 주는 것 같았다.
제천대성의 업을 수행하러 가기 전 봤을 때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달라진 그의 모습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고.
곧, 자신을 찾아온 김현우의 모습을 보고 있던 그는, 입가를 비틀며 웃음을 지었다.
입가를 비틀어 올리자마자 드러나는 날카로운 이빨.
"나 죽이러 왔냐?"
그의 물음에 김현우는 마찬가지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냐?"
"어떻게 알긴, 제천대성이 개지랄을 떨었으니까 알지."
"그래?"
"그래, 아주 개지랄을 떨더라고, 이대로 가면 인격이 완전히 박살 난다나 뭐라나…… 뭐, 귀찮아서 대충 넘겼는데 네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거 보니 딱 답이 나오네?"
김현우가 찾아온 것만으로도 몇몇 정황을 떠올려 추론하는 그.
그 모습에 김현우는 어쩐지 익숙한 느낌을 받으며 대답했다.
"그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네. 알지?"
김현우의 말에 그는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그럼, 알고말고. 그냥 저항하지 말고 빨리 죽어달라는 소리를 하려는 거지?"
"그래도 한때나마 같은 놈이어서 그런지 대화 통하는 게 나쁘지 않네."
"너랑 내가 똑같은 놈이라는 걸 알면 이다음에 나올 대답도 알고 있을 텐데?"
"씨발, 나쁘지 않다는 말은 취소다."
인상을 찌푸리는 김현우를 보며 그는 키득거리며 웃더니 이내 이야기 했다.
"그리고 말이야, 애초에 내 인격을 죽이고 네가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것도 좀 이해가 안 되는데."
"뭐?"
"그도 그럴 게, 지금 필요한 건 강한 놈이잖아? 응? 강한 놈."
"너, 나랑 똑같은 놈 아니었냐? 왜 갑자기 헛소리를 하기 시작해?"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이게 왜 헛소리야? 엄연한 팩트지. 내 말이 틀렸어? 지금 필요한 건 강한 놈이잖아?"
"강한 놈도 강한 놈 노릇이지, 지금 네 꼴을 봐라."
"내 꼴이 어때서?"
"딱 봐도 일반인에서 원시인으로 강등당했는데 퍽이나 강해졌겠다, 거기다 인성도 일반인에서 원시인으로 강등당했잖아?"
김현우의 노골적인 비난.
"큭큭큭-"
허나 그럼에도 그는 큭큭 소리는 웃음소리를 내곤 대답했다.
"뭐, 애초에 우리 인성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잖아? 안 그래?"
"지랄, 나는 멀쩡하니까 나까지 같이 끌어내리려 하지 마라. 원시인 새끼야."
"큭큭, 너는 이제 곧 그 원시인한테 죽임을 당할 텐데, 그렇게 말해서 되겠어?"
"……이 새끼 논리비약하는 스킬이 아주 대단한 새끼네? 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왜? 아닐 것 같아? 적어도 나는 내가 이길 것 같은데?"
"자신감이 넘치는 것 봐라? 너만 수행했냐?"
"물론 너랑 내가 비슷한 등급의 업을 수련한 것은 맞아. 너는 청룡의 업을 수련했고, 나는 제천대성의 업을 수련했지. 근데 말이야-"
피식.
"너,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방구석에 처박혀서 오지게 명상만 했다며?"
"뭐?"
"제천대성이 신나서 떠들더군, 내가 만악산의 중간에 다다랐을 때쯤이었던가? '저쪽의 김현우는 아직 초입의 깨달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이야."
"……."
"그게 비해 나는 어떻지?"
그는 도마뱀과도 같은 붉은 동공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너처럼 방구석에 처박혀 수련을 한 게 아니라 이 만악산에서 투쟁을 벌였다! 생긴 것만 해도 좆같이 생긴 요괴들의 뚝배기를 깨면서 업을 얻었다 이 말이지!"
-한 마디로 네가 방구석에서 명상이나 하고 있을 때 나는 계속해서 전투를 벌였다 이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명상만 한 나보다는 만악산에서 열심히 요괴 뚝배기를 깬 네가 더 강할 거다?"
"당연한 거 아니야?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인생을 실전이라는 걸."
당연하다는 듯 말을 내뱉는 그.
그 말에 김현우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 또한 그저 비틀린 입가를 들어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허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넌 안 되겠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김현우.
그는 자신의 몸을 낮추며 입을 열었다.
"좀 맞자."
"과연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까?"
"이 새끼 정말 나 맞아? 왜 이렇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
김현우의 지적에 그는 피식하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이내 김현우와 같은 자세로 몸을 숙였다.
누가 보더라도 비슷한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똑같아 보이는 전투 준비 자세.
그리고-
팟!
전투가 시작되었다.
# 226
226. 요괴(妖怪) 김현우 (4)
새하얀 공간 안.
동양풍의 문과 가죽으로 덧대어진 문이 같이 공존해 있는 그곳에서 제천대성과 청룡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도와주면 안 되나?"
"무슨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거지? 몇 번이고 말해두지만 우리는 그들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 설령 우리가 이 시공진 안에서 힘을 쓸 수 있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청룡의 말에 제천대성은 반박했다.
"아니, 네 말대로라면 이미 김현우는 모든 업을 다 얻은 상태인데도?"
"그래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우리가 이곳에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고, 또 김현우가 모든 업을 얻은 상태라고 해도 그를 돕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그러니까 불가능한 이유가 뭔데?"
청룡은 그런 제천대성의 물음에 그를 슬쩍 째려보며 말했다.
"더럽게 많다. 당장 김현우의 정신세계를 중심으로 구축해 놓은 이곳에서 그저 도우미로 온 우리가───아니다, 됐다."
제천대성이 김현우를 도우면 안 되는 이유에 관해서 설명하려던 그는 제천대성이 딱 봐도 자신의 설명을 알아듣고 있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하기는."
"멍청한 게 아니라 애초에 이런 걸 배운 적이 없어서 못 알아듣는 거라고! 너는 처음부터 배운 것도 척척 해낼 수 있냐?! 어!"
"알았으니까 시끄럽게 굴지 마라. 그리고 너도 혹시 김현우가 변이한 김현우에게 질 거라고 생각해서 걱정을 하고 있다면, 그 걱정은 넣어둬라."
"……왜?"
제천대성의 물음에 청룡은 입을 열려다가 제천대성을 한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설명하기 귀찮으니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어라."
####
김현우가 달려듦과 함께 싸움은 시작되었다.
"흡!"
달려든 김현우가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휘둘러 머리를 노린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
텁!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일격을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주먹을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듯 막아냈다.
그와 함께 들어오는 반격.
그의 오른발이 날아든 김현우의 옆구리를 가격하기 위해 휘둘러지고.
김현우는 붙잡힌 오른손을 축으로 삼아 옆구리를 피해낸다.
그와 함께 시작된 정신없는 공방.
김현우의 주먹이 느려진 인지 속에서 어떻게든 그를 공격하기 위해 움직이고, 그도 마찬가지로 김현우에게 공격을 먹이기 위해 움직인다.
멈추지 않는 움직임.
콰득! 콰드드득! 콰드드드득!
보이지 않는 그들이 장소를 옮길 때마다 주변의 지반이 부서지고 가지만 남아 있던 나무들이 부서진다.
허나 그런 장소적 요인과는 상관없이, 김현우와 그는 오롯이 서로만을 보고 손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렇게 공방이 되고 있을 때.
"!"
김현우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없었으나, 한순간 느껴지는 기묘한 위화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고.
이내-
꽝!
"크학!"
-김현우는 그에게 일권을 허용했다.
조금 전의 팽팽함이 마치 거짓말이라도 된 것처럼 순식간에 부서지고, 김현우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들어간다.
우지지직! 쾅!
그와 함께 날려지는 김현우의 몸은 순식간에 앙상한 나무들을 부수며 땅바닥에 처박혔고, 그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
"내가 말했지? 넌 나를 못 이긴다니까?"
"!"
김현우는 자신의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으나.
빡!
"끅!?"
김현우는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느껴지는 격통에 인상을 찌푸렸고, 곧바로 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허공을 향해 발을 차올렸다.
허나 느껴지지 않는 타격감.
김현우는 그 순간 곧바로 흙에 파묻혀 제대로 보이지 않던 시야를 확보하며 하늘로 도약했으나.
"왔어?"
"!!"
김현우는 곧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뒤에서 붉은 마력을 모으고 있는 그를 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그는-
"자기 기술은 한 번도 안 맞아 봤지?"
패왕(?王)-
"이런 미친!"
"그러니까, 한번 맞아봐."
-괴신각(怪神脚)
망설임 없이 붉은 마력이 몰려 있는 다리를 휘둘렀다.
김현우는 곧바로 몸을 틀어 그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몸을 막았으나-꽈아아앙!
"끄으으윽!"
김현우는 결국 그의 공격을 전부 막지 못했다.
우지지지직! 콰드드드득!
도약하자마자 다시 땅바닥에 처박힌 김현우는 곧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그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뇌령신공을 끌어올렸다.
파직! 파지지지직!
그와 함께 터져 나가는 김현우의 주변 지반.
그에게로 떨어지던 나뭇가지가 검붉은 번개에 의해 박살 나고, 김현우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를 바라본다.
허나-
"너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파지지직!
그는 김현우가 뇌령신공을 끌어올리자마자 자신도 뇌령신공을 끌어올렸다.
김현우의 검붉은 전류와는 다르게, 완전히 사뻘건 번개가 사방으로 튀어오르고, 그 전류가 튀어오르는 한순간에도-꽝!
-싸움은 시작되고 있었다.
꽈가가가강!
아까 전과는 다르게 한번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와 지반을 포함해 그곳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터져 나가는 파괴력.
허나 속도는 이전보다도 빨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이 새끼, 확실히 다르다.'
-김현우는 그에게서 느꼈던 위화감을 깨달았다.
콰드드득!
기본적으로 눈앞에 요괴로 변이한 김현우는, 결국 요괴로 변하니 어쩌니 해도 결국 자기 자신이다.
그렇기에 처음 주먹을 부딪쳤을 때만 해도, 김현우는 그를 상대하기가 편했다.
그는 자신이었고.
김현우는 스스로가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허나 시간이 흐르자, 그의 전투 스타일은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투 스타일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다만-
빡!
"끅!"
그의 전투 스타일에는 변칙스러움과 동시에 굉장히 광폭한 느낌이 녹아들어 있었다.
분명 몸을 빼야 할 생각에 오히려 한 걸음을 더 들어오고.
그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공격을 치고 들어온다.
마치 지금처럼.
"!"
분명 김현우는 찰나의 순간 그의 빈틈을 파고들어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피할 방법은 없었고, 오로지 막는 것만이 허락된 공격.
하지만 그는 오히려 공격을 막는 것이 아닌, 같이 공격을 가하려고 하고 있었다.
빠아악!
"윽!"
"큭!"
그의 머리통에 깔끔하게 들어간 김현우의 공격.
허나 그것은 김현우도 마찬가지였다.
김현우는 공격이 들어간 찰나 그가 차올린 발에 턱을 맞고 고개를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에-
빠아아악!
"끅!"
김현우는 명치쪽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또 한번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격변하기 시작한 김현우의 시야.
순간 하늘이 보이고 그다음에는 부서진 나뭇조각이 보인다.
그리고 거대한 폭음 소리와 함께, 김현우의 몸은 다시 땅바닥에 처박혔다.
"이런 씨발……!"
그 상태에서 김현우가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김현우의 앞에서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너랑은 경험치 차이가 다르다니까? 애초에 기본 베이스가 똑같은데 방구석에서 명상만 한 너랑 나랑 당연히 차이가 나지 않겠어? 응?"
김현우를 조롱하는 그.
"못 배워 처먹은 새끼들 대가리 따고다니더니 좆 같은 것만 배워왔네."
그러나 김현우는 그런 그의 조롱에 욕설로 화답하고는 그를 마주 바라봤다.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고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제안 하나 할까?"
"뭐? 제안?"
"그래, 너한테도 꽤 나쁘지 않은 제안일걸?"
그의 말에 김현우는 들어볼 것도 없이 대답했다.
"지랄."
망설임 없는 대답에 그는 마치 과장되게 한 번 더 어깨를 으쓱 거리고는 이야기 했다.
"이것 참 아쉽네,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네 인격도 아주 잠깐은 더 인격을 유지 할 수는 있었을 텐데."
"아이고 그러셨어요?"
김현우의 비아냥.
허나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듯 그 말을 가볍게 넘겨버리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뭐, 그럼 제안도 거절당했고 하니, 슬슬 좀 빨리 끝내볼까?"
"뭐? 슬슬 빨리 끝내?"
"그래, 사실 원래는 격차를 보여 준 뒤에 안정적으로 몸에 안착할 생각이었거든."
"지랄, 설마 내가 그걸 수락할 거라 생각했다고?"
"그렇지? 나도 사실 '나'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긴 했는데…… 또 그렇게 골방에 틀어박혀서 수행만 하다 보면 나처럼 성격이 어느 정도 변화가 있을까 싶어서 말이야."
-근데 역시 아니었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자신의 몸 주변으로 붉은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귓가에 공명음이 들릴 정도로 순식간에 그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붉은 마력.
김현우는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고, 이윽고 자신의 몸으로 붉은 마력을 계속해서 빨아들이기 시작한 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붉은 전류로 인해 삐죽삐죽 솟아오른 머리위로 만들어지는 붉은색의 금고아.
그 아래에는 마치 사냥꾼들이 입을 것 같은 두터운 가죽옷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김현우의 흰자위가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줄곧 인간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던 그의 손과 발은 마치 요괴의 그것처럼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진짜 요괴새끼가 따로 없네."
"뭐, 너무 걱정하지 마. 금방 끝내줄 테니까."
마치 자신이 무조건 이길 거라고 확신하는 듯 입가에 한껏 비웃음이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며 김현우는 피식하는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야."
"?"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
김현우의 물음에 그는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뭘 착각하는데?"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잖아? 지금 나를 이기는 걸 말이야."
김현우의 물음에 그는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야 지금까지의 상황만 충분히 되돌아봐도 유추할 수 있는 거잖아? 너는 계속 나한테 얻어맞기만 한데다가 네가 수련한 업은 전투 경험치를 전혀 쌓을 수 없는 업이었잖아?"
아 물론-
"네가 얻은 청룡의 업(業)이 지금 내가 얻은 제천대성의 업(業)보다 강할 수도 있지. 그도 그럴게 이쪽은 '제천대성의 업' 단 한 개지만, 네 녀석은 청룡의 업 자체는 얻은 거니까. 그렇지만-"
허나 그것을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전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는 김현우의 앞에 도약했다.
"!"
조금 전에 봤던 이동속도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빠른 속도로 김현우의 앞으로 도약한 그는 입가에 비웃음을 짓고는 주먹을 휘둘렀다.
"네가 청룡의 업을 쓰기도 전에 죽인다면, 그것도 아무런 소용없는 이야기지."
들리는 목소리와 동시에 김현우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의 주먹.
그러나 그 상황에서.
피식!
"!"
김현우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꽈가가강!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떨어져 내린 푸른 번개는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그의 몸을 덮쳤고,
"이-건!?"
"미안해서 어쩌냐."
파지지직! 파지직!
그가 순간적으로 떨어져 내린 번개에 감전되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때.
"나도 네가 마력을 모을 때 놀고만 있던 건 아니거든."
김현우는 미소를 지었다.
# 227
227. 요괴(妖怪) 김현우 (5)
미국 하와이주의 도심 동부는, 고작 1시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수천에서 수조를 들여 지어놓은 고급 리조트와 빌딩들은 이미 무너지고 부서져 그 쓰임새를 다 할 수 없게 되었고.
그것은 도시 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든 마찬가지였다.
도로부터 시작해서, 가게까지.
도심의 동부는 마치 거대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완전히 개박살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박살 난 도시의 가운데.
완전히 무너져 버린 빌라의 잔해 위에, 그는 앉아 있었다.
"귀찮아 죽겠네, 진짜로 위업(偉業)만 아니면 안 오는 건데."
한 손에는 제대로 들기도 힘들 것 같은 거대한 해머를 한 손에 든 채, 만사가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인상을 찌푸린 남자는 이내 주변을 정경을 훑었다.
완전히 박살이 나, 보이는 것은 붉은 화마와 잿빛 연기밖에 없는 그 정경을.
씨익.
그리고 그 정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정경이 퍽 마음에 든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모든 건 부서지고 난 뒤부터 예쁘단 말이야."
마치 세기말에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정경을 보며 괜스레 혼자 중얼거리는 그는 이내 자신에게 주어진 목표를 떠올렸다.
"눈에 보이는 건 전부 부숴라……였지?"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한 목표.
뭐 사실 그것 말고 다른 목표가 있는 듯 했으나, 남자는 굳이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 남자가 무엇을 하는지보다는 그가 자신에게 준다고 했던 위업(偉業)에 있었으니까.
'위업(偉業)을 받을 수만 있다면…….'
애초에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이용하든 딱히 상관없었다.
'뭐 좀 재미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일이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가 자신에게 의뢰했던 '파괴'를 계속하기 위해 걸음을 움직였고.
"……?"
-그 남자가 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
꽝!
그는, 자신의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일격을 바라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
꽝!
"크학!"
푸른 번개에 맞아 감전되었던 그의 몸이 김현우의 발에 맞아 총알처럼 쏘아져 나간다.
주변의 나무들을 박살 내며 마른 나무들이 모여 있는 숲속으로 처박히는 그의 몸.
그러나 김현우는 그런 그를 따라가지 않고 그가 날아간 곳을 지켜보고 있었고.
"흡!"
그는, 숲속으로 날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김현우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전과는 다르게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달려드는 그는, 곧바로 발을 휘둘러 김현우의 종아리를 노렸다.
하지만-
파지지지직!
"!?"
그의 공격은 그의 공격경로로 내리치는 번개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공격을 시도했던 발을 회수하면 왼발을 이용해 턱을 노리는 그.
텁!
"!"
"왜, 너만 할 수 있었는데 나도 할 수 있어서 놀랍냐?"
허나 김현우는 자신의 턱을 노리고 날아오는 발차기를 붙잡았다.
"컥!"
그와 함께 시작된 반격.
김현우는 발을 휘둘러 그의 머리통을 후려 찼다.
한순간 허공에 뜬 그의 몸.
김현우는 멈추지 않았다.
빠악!
"끅!"
김현우의 오른손이 허공을 유영하고 있는 그의 옆구리를 후려치고,
"!"
빠드드득!
"끄학!"
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김현우는 그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꽝!
그대로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그는 태세를 재정비하기 위해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우리 성격이 참 좆같기는 해, 그치?"
"!"
파지지직! 콰아아아앙!
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푸른색의 번개를 맞고 말았다.
푸른색의 전류가 지반을 타고 흐르며 한순간 감전 상태가 된 그.
김현우는 히죽 웃으며 다리를 크게 들어 올렸다.
그와 함께 김현우의 뒤로 자리하기 시작한 푸른색의 연꽃.
연꽃이 만들어지자마자 마력이 팽창하여 주변의 공간을 빈틈없이 채워나가기 시작하고.
"그래도 처음에 좀 승기가 있는 것 같으면 방심 먼저 하게 되잖아. 그치?"
수라(修羅)-
그것을 느낀 그는 붉은 마력을 사방으로 뿜어내 자신의 몸을 속박하는 마력팽창을 없애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어."
-무화격(無和擊).
이미 그가 마력을 뿜어내던 그때-키이이이이이잉!
푸른색의 연꽃은, 푸른 마력과 함께 개화하고 있었다.
꽈아아아아아─────────삐이이이이이!!
그에게로 내리꽂힌 김현우의 발과 함께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공간.
푸른빛에 닿은 모든 나무들이 그 형체를 잃고 바스라지고, 김현우의 시야와 청각이 일시적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씨발."
"욕하는 거 보니까 슬슬 초조해졌나 보네?"
김현우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마른 초원'에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그를 보며 말했다.
조금 전 자신만만해 보이던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욕지거리를 하며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그.
붉은색의 금고아는 딱히 큰 변화가 없었으나, 그가 입고 있던 가죽옷은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이죽였다.
"그러니까 업을 좀 잘 얻어보지 그랬어? 제천대성이 얻었던 것처럼 '황금쇄자갑'이라도 얻었으면 공격 한 방에 그렇게 박살 날 일은 없었잖아?"
김현우의 이죽임에 더더욱 인상을 찌푸리던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분명 업을 얻는 기간은 똑같았을 텐데."
"그래, 업을 얻는 기간은 똑같았겠지. 근데 말이야, 애초부터 너와 나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지?"
"뭐?"
"설마, 요괴로 변이했다고 그것까지 망각하고 있던 거야?"
김현우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 그.
파직!
푸른 번개를 두른 채, 김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
"잘 생각해 봐, 네가 지금까지 하고 있던 수련은 '제천대성'의 업이야, 그리고 내가 수련했던 건 바로 '청룡'의 업이지, 대충 여기까지 말해줬으면 알겠지? 너도 '나'니까."
김현우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던 그의 얼굴이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막연한 탄성으로 바뀌어나간다.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알겠어? 내가 수련한 건 '청룡'의 업, 그 자체야. 오롯이 완성되어 있는 하나의 업이지, 하지만 네가 수련하고 있는 '제천대성'의 업은?"
김현우의 말에 그는 이를 악 물었고, 그 모습을 보면서도 김현우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제대로 완성되지 않는, 그 녀석의 조각 중 하나일 뿐이지."
제천대성의 업.
그것은 제천대성이 가지고 있는 업 중의 하나였고, 그렇기에 그것은 청룡 자체를 담고 있는 청룡의 업보다는 그 등급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파지지지직!
김현우의 주변으로 또 한번 푸른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처럼 청명한 푸른빛을 담고 있는 김현우의 전류.
김현우는 피식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편하게 가자. 나도 네가 말했던 것처럼 편안하게 보내줄게."
"지랄, 내가 그 말을 수락할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데 또 혹시 모르잖아? 네가 말했던 것처럼 업을 수행하던 중 심경의 변화가 생길 수도 있는 거니까."
김현우의 능글맞은 대답.
그는 찌푸리던 인상을 피곤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대답했다.
"유감이지만 심경의 변화는 없어."
"그것 참 유감이네."
김현우가 대답하자 그는 동시에 붉은 마력을 또 한번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콰가가가가가가-!
마치 급류의 물살처럼 이전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그의 몸속을 향해 빨려들어가는 마력.
그는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외쳤다.
"오히려 네게 도움이 될 바에는, 최대한 네가 개고생을 하게 해주지!!"
"……진짜 성격 좆 같은 건 아주 똑같이 닮았네."
그의 말에 김현우는 짧게 탄식을 하며 그가 마력을 끌어모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크에에에엑!"
꽝!
이미 김현우가 달려든 순간, 그곳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얼씨구."
김현우의 눈앞에 보이는 것.
그것은 인간이 아닌 괴물, 더 나아가서 요괴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붉은색의 금고아는 이미 붉은색을 넘어 짙은 핏빛으로 변해 있었고, 그의 몸은 짙은 붉은색의 피부로 변해 있었다.
동시에 바뀐 외관.
"……진짜 원시인으로 돌아가 버렸네?"
그는 영락없는 원숭이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꽝!
동시에 시작된 공격.
김현우가 감상을 뱉을 순간도 주지 않고 거대한 주먹을 휘둘러오는 요괴를 보며 김현우는 짧게 혀를 차곤 공격을 피하기 시작되었다.
꽝! 꽝! 꽝! 꽈가가가각! 꽝!
한 방 한방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한 요괴의 공격.
'거기에다가.'
확실히 조금 전과 다르게 요괴는 조금 더 빨라져 있었다.
보통 몸집이 거대하면 느리다는 말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듯, 요괴는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김현우의 허점을 파고들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괴물의 주먹.
그에 맞춰 김현우의 신형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마침내-
꽈드드득!
"크엑?!"
김현우는 그의 괴물의 얼굴에 정타를 먹였다.
크게 돌아가는 괴물의 얼굴.
그와 함께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지.'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완전히 변이한 그는 분명 이전보다 모든 면에서 강해져 있었다.
순수한 근력도 마찬가지였고, 속도도 마찬가지. 거기에 덤으로 제천대성의 업을 얻었던 김현우 특유의 변칙적인 공격법도 더더욱 두드러졌다.
허나 중요한 것은, 그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이 겨우 그것뿐이라는 것이었다.
콰드드득! 빡!
김현우의 발이 요괴의 옆구리를 후려차고, 그와 함께 김현우의 주변으로 푸른 전류가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괴물은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며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그렇게는 안 되지."
"크엑!"
꽝! 콰가가강!
괴물은 몸을 빼려는 그 찰나의 순간, 또 한번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에 맞아 움직임을 멈췄다.
물론 움직임을 멈춘 그 순간은 불과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것은 김현우에게 있어서 무척 충분한 시간이었고.
"바쁘니까 빨리 끝내자."
괴물이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순간, 김현우의 인지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마치 주변의 공간을 잡아먹듯, 순식간에 확장하기 시작한 그의 인지.
그 모든 것이 느려진 세상 속에서, 김현우는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도력을 돌리기 시작했다.
느려진 인지 속에서 순식간에 김현우의 몸을 빠져나온 도력은 그의 주변으로 푸른색의 뇌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푸른색의 뇌전이 김현우의 몸 주변에 가득히 만들어졌을 때.
김현우는 자신의 몸속에 있는 마력을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확장되어 있는 김현우의 인지 속에서, 느리기만 했던 김현우의 몸이 제 속도를 되찾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느려진 그인지 속에서 혼자서만 제 속도를 찾게 된 김현우.
그 속에서 그는 입가를 비틀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파사사삭 파삭!
다리에 힘을 주자마자 박살 나 느린 속도로 허공에 날아오르는 흙, 그와 함께 김현우는 땅을 박찼고-
"후읍-!"
순(瞬)-
그는 이내-
-뢰각(雷脚)!
-한 줄기 번개가 되었다.
# 228
228. 지금부터 친구를 불러볼까 합니다 (1)팔한지옥(八寒地獄)은 무엇인가.
그곳은 바로 이승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 원죄를 형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여덟 개의 지옥 중 하나였다.
이승에서 아무리 그 직위나 신분이 높은 귀인이나 위대한 업적을 세운 무인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영혼이 이승을 떠나는 그 순간, 그는 하늘에서 지은 율법에 따라 죄의 엄중을 판별했고.
죄를 지은 이들 중에서도 지독한 원죄에 해당하는 이들이 팔한지옥(八寒地獄)에 떨어지게 되었다.
하늘에서 정한 율법을 어기고 지독한 원죄를 지은 이들만이 가는 팔한지옥에는 단 한 명, 원죄를 지게 된 죄인들을 관리하는 장군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팔한성군(八寒星君)으로, 하늘의 뜻에 따라 억겁의 세월 동안이나 극한의 냉온이 지속되는 팔한지옥에서 죄수들을 관리했다.
그 덕분에 팔한성군은 그 극한의 냉온을 견디기 위해 몸을 몇 겹이나 되는 두꺼운 갑옷으로 겹쳐 입고, 냉기를 차단하기 위해 온몸에 자신의 털을 덮었다.
마치 설인(雪人)처럼.
까드드드득!
"큭!"
천마(天魔)의 일검이 펼쳐짐과 함께 들리는 시끄러운 쇳소리.
그 괴성에 천마는 자신의 공격이 먹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인상을 찌푸렸으나 곧바로 다음 공격을 이어나갔다.
깡 까드드드드드드득!!!
고작 1초가 지나지도 않는 시간에 시끄럽게 울리는 철 소리가 주변을 울렸으나-
"쯧……!"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천마의 검은 그의 갑옷을 뚫지 못했다.
그렇기에 천마는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그렇게 둘 것 같나?"
그런 천마의 모습을 보고만 있던 팔한성군은 순식간에 자신의 등에 손을 가져가-스르릉!
-그의 등에 메고 있던 거대한 곡도를 꺼내들었다.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푸른 도깨비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곡도를 쥔 팔한대성은 순식간에 천마의 머리를 향해 곡도를 내리쳤고.
콰드드득!
"큭!"
천마는, 팔한대성의 공격을 미처 전부 받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나갔다.
쾅! 콰르르륵!
튕겨나간 천마의 몸이 눈밭에 처박히고, 그 상태로 몇 미터를 더 굴러나간다.
주르르륵!
결국, 그 상태에서 천마는 검을 땅바닥에 박아 넣은 뒤에야 자신이 굴러가는 것을 멈출 수 있었고.
"뭐, 칼질 자체는 나쁘지 않구나."
이내 들리는 목소리에 천마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천마와 공격을 주고받는 중인데도 팔한성군은 무척이나 여유로운 몸짓으로 자신의 어깨에 기형적일 정도로 거대한 곡도를 올려두고 천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천마는 빠르게 생각을 이어나갔다.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제일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그것.
팔한대성이 갑작스레 자신들의 앞에 나타나고 나서 시간이 꽤 흘렀고, 그동안 천마는 계속해서 팔한대성을 베기 위해 검을 휘둘렀으나 그는 결국 베지 못했다.
팔한대성의 몸을 감싸고 있는 갑옷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단단하고, 또한 딱딱했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을 사용하기를 그만두고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의 묘리를 이용해 권법을 사용해보기도 했으나 역시 그에게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마치 무적의 존재처럼, 그는 천마의 공격을 전부 무로 되돌렸다.
"……."
침묵.
천마가 그와의 전투에서 정답을 내지 못하고 생각을 계속하고 있자 팔한대성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것뿐인가?"
"……."
"아무래도 정말 이것뿐인 것 같군, 이럴 줄 알았으면 저 요괴도 같이 살려둘 걸 그랬어, 저 녀석은 사용할 수 있는 기술도 좀 많을 텐데 말이야."
팔한대성의 말에 천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곁눈질을 했다.
곁눈질한 천마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입가에서 피를 흘린 채 눈 바닥에 처박혀 있는 구미호.
맨 처음 팔한대성이 나타났을 때, 그가 휘두른 불의의 일격으로 인해 구미호는 여태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천마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팔한대성은 입가를 씩 올리며 어깨에 걸치고 있던 곡도를 쥐고는 말했다.
"아무튼, 슬슬 끝내도록 하지. 어차피 네 녀석도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준 것 같으니."
마치 천마의 무위를 재롱거리 보듯 여기는 말투에 수치심이 차올랐으나 천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공격은 그에게 일절 먹히지 않았고, 그것 이외에도 천마는 지금까지의 전투로 깨닫고 있었으니까.
'…….'
그가 적어도 자신보다 몇 수나 위에 있는 강자라는 사실을.
"그럼, 움직이는 놈 말고 기절한 놈부터 끝내놓도록 할까?"
천마가 바로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한 대성은 마치 그를 병풍 취급하듯 시선을 돌렸고, 이내-
"!"
그는 천마가 제대로 인지하기도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구미호의 앞에 도달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팔한대성은 구미호의 앞에서 거대한 곡도를 쳐들었고, 천마는-깡! 카르르륵!
"!"
-그가 거대한 곡도를 내리치는 순간 그의 곡도를 빗겨냈다.
파직!
그와 함께 천마의 주변에서 흘러나온 전류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팔한대성의 눈을 혼란시켰고, 그 찰나의 순간 천마는 자신의 뇌령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파직! 파지지지직! 꽝!
팔한성군에게 떨어져 내리는 푸른 번개.
천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두르려 했으나-빡!
"크학!?"
-천마는, 미처 검을 휘두르기도 전 자신의 배에 느껴지는 격통에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춰야 했다.
콰드드득! 꽝
"끅!?"
배에 느껴진 격통 직후, 등 쪽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함께 땅바닥에 처박힌 천마.
"힘을 숨기고 있었나? 뭐, 이번 것도 제법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내 몸에 상처를 낼 수는 없었지만 말이야."
팔한대성은 땅바닥에 처박힌 그의 등을 짓누르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고, 천마는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팔한대성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팔한대성은 자신이 휘둘렀던 곡도를 들어 올림과 동시에-
"너부터 먼저 죽여주지."
"할배한테 받은 직위로 떵떵거리는 주제에 약한 놈 괴롭히니까 재미있냐?"
"!"
-어디선가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그는 자신의 눈을 휘둥그레 뜨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빡!
"끄악!?"
조금 전까지 의기양양하던 팔한대성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얼굴에 느껴진 격통에 비명을 질렀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고통에 팔한대성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급하게 얼굴을 가렸고,
"나 기억 안 나냐?"
그와 동시에 들리는 목소리와 손으로 시야 사이로 보이는 황금색의 갑옷을 보며 팔한대성은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이, 이 목소리는……! 설마!"
"기억나지?"
"천도의 망나니!"
경악성을 내지르며 입을 열었다.
"'천도(天桃)의 망나니'가 아니라."
그리고 그런 팔한대성의 말에 반박하며.
"제천대성 미후왕(齊天大聖 美?王)이다."
제천대성은-
"이 멍청아."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채 그 모습을 드러냈다.
####
하남에 있는 장원.
"끄아아아악!"
그곳은 때 아닌 지옥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어느 순간 불현듯 장원에 침입한 두 명의 남자 때문이었다.
다른 한 명은 검은 로브로 몸 전체를 가린 정체불명의 느낌을 주는 남자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와드득!
"끄아아악!"
가면 무사의 목을 물어뜯고 있는 한 남자다.
마치 시체와 같은 회색빛의 피부를 가지고, 앙상한 몸으로 가면 무사의 목을 뜯어먹는 남자.
가면무사의 몸에서 붉은 선혈이 터져 나온 순간, 그의 아래로 겹겹이 겹친 마법진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마법진이 새겨지고, 순식간에 제각각의 빛을 발하며 공명하기 시작한 마법진.
"지금이에요!"
발동되는 마법진을 확인 한 아냐가 소리치자 그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장원 곳곳에서 숨어 있던 가면무사들이 튀어나와 남자에게 제각각의 병장기를 휘둘렀다.
단검부터 시작해서 거대한 언월도까지.
가면무사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자의 급소를 향해 각각의 무기를 찔러 넣었고-푸화아악!
가면 무사들의 병장기는 성공적으로 남자의 몸을 뚫고 들어갔다.
허나 남자의 몸에서 나오는 것은.
"……검은 피?"
가면 무사 중 누군가가 중얼거린 대로, 남자의 몸에서 나오는 것은 붉은색의 선혈이 아닌, 검은 피였다.
"벌써 끝이야?"
쩝-쩝-
온몸이 벌집이 되었음에도 남자는 무척이나 태평한 얼굴로 자신의 몸에 병장기를 박아 넣은 그들을 보며 쩝쩝거리며 웃음을 지었고.
그에 본능적인 무엇인가를 느낀 가면 무사들은 남자의 몸에서 자신의 무기를 빼려 했으나.
"!!"
남자의 몸에 박힌 병장기는, 더 이상 빠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
"잠-!"
"끄악!?"
-그들은 오히려 손에 쥔 힘을 풀기도 전에 남자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떤 이들은 뒤늦게라도 병장기에서 손을 놓는 것으로 남자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었으나, 미처 그러지 못한 가면무사들은 남자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까득! 까드드득! 콰득 쾨지지직! 꽈드드득!
이내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여기저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남자의 피부에서 흘러나오는 검 붉은색의 피에 아냐와 이서연의 얼굴이 혐오감으로 찌푸려지고, 한동안 몸이 부풀어 있던 남자는.
"이제야 좀 살 만하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먹어치우고 있던 가면무사를 자신의 몸으로 집어넣었다.
꽈드드드득!
다시 한번 들리는 기괴한 소리.
그 소리에 남자의 손에서 살아남은 가면무사들은 전부 주춤한 채 걸음을 뒤로 물렸고.
"다시 한번 묻겠다."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남자는 아냐와 이서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김현우는 어디 있지?"
남자의 말.
이서연은 아까 전에 그들에게 해주었던 대답을 한 번 더 내뱉었다.
"우리도 모른다니까!?"
즉각적으로 나온 이서연의 대답에 로브를 쓴 남자는 대답했다.
"내가 말했을 텐데, 여기서 거짓말을 해봤자 너희에게 좋을 건 없다고."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이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로브를 쓴 남자를 노려봤다.
그는 몇 분 전 갑작스레 장원 내에 나타나서 그려진 마법진을 작살내고 김현우의 위치에 대해서 캐묻기 시작했다.
물론 김현우가 어딘가로 갔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는 이서연은 그런 남자의 대답에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알고 있어도 모른다고 답했겠지만.'
이서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풍경을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곳곳이 부서져 있는 건물들이었고, 그 사이로는 검붉은 혈흔들과, 어느 한 군데가 박살 나 쓰러져 있는 가면 무사들이 보였다.
적군의 피해는 없이, 아군의 피해만이 노골적으로 보이는 상황.
'마법진이 박살 나서 누군가 도움을 줄 수도 없는 상황이야.'
이서연은 돌파구가 없다는 사실에 인상을 구겼고.
"……아무래도 곱게 말해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로브를 쓴 남자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이서연에게로 조준하며,
"-그냥 죽이는 게 낫겠군."
"!"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손가락에서 무엇인가를 쏘아냈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무엇인가는 순식간에 이서연의 지척까지 다가와 그녀의 심장을 노렸고.
"안-!"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아냐가 소리를 지르며 이서연에게로 시선을 돌렸으나, 이미 남자가 쏘아 보낸 보라색의 무언가는 그녀의 지척에 도달해 있었다.
절체절명의 한순간.
이서연은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손톱만 한 무엇인가를 보며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고.
곧 그녀는 이다음을 인지하는 순간,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렇게는 안 되지."
이서연은 하늘에서 내리치는 푸른색의 번개를 보았고.
"이 깡패새끼들아."
곧, 그녀는 그 푸른 번개 사이에서 나타난 김현우를 볼 수 있었다.
# 229
229. 지금부터 친구를 불러볼까 합니다 (2)하와이.
꽈아아앙!
남자의 손에 들린 거대한 망치가 미령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으나, 미령은 남자의 망치를 재빠르게 피하곤 오른쪽으로 돌아-빠각!
"큭!"
-남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얼굴에 온 타격으로 인해 중심이 흐트러진 남자는 곧바로 자세를 잡으려 했으나 미령은 그가 미처 자세를 잡기도 전에 그의 앞으로 다가왔고.
꽝!
그의 면상에,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둘렀다.
총알처럼 쏘아져 나가는 남자의 몸.
미령은 날아가는 남자의 몸을 쫓아 달려 나갔고.
"!"
그녀는 곧 조금 전까지 날아가고 있던 그가 놀랍도록 빠르게 자세를 회복하고 도약하고 있는 자신을 향해 망치를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허나 미령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남자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이 쥐고 있던 망치를 있는 힘껏 휘두르려 했-
"[멈춰]"
-었다.
"!"
남자는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자신의 몸이 순간 멈춘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몸이 찰나지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이런-"
빠아아악! 꽈아앙!
남자의 몸은 다시 허공을 날아 무너지고 있던 고층빌딩에 처박혔다.
그와 함께 미령은 남자가 처박힌 고층빌라를 향해 자신의 손을 들어 올린 채 마력을 끌어모았고.
쿠구구구구구구구궁!!!!
이내 빌딩 주변에 있는 마력을 팽창시킨 미령은 남자가 처박힌 빌딩을 통째로 무너뜨렸다.
순식간에 귀를 터트릴 것 같은 소음이 들리고, 거대한 빌딩이 무너져 내리며 먼지와 잔해가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그런 상황에서도 미령은 마력팽창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조금의 시간이 흘러 거대한 빌딩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때가 돼서야, 미령은 마력팽창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년들, 잘도 해줬겠다?"
그 빌딩의 잔해 속에서, 달라진 모습을 한 남자는 걸어 나왔다.
가죽옷에 거대한 망치를 들고 있던 남자.
허나 잔해 속에서 그가 걸어 나왔을 때, 남자의 모습은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제일 처음 보이는 변화는 검게 변한 피부와 미령의 콧속으로 들어오는 비릿한 냄새였다.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전체적인 외형.
분명 남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던 그의 모습은 마치 요괴의 그것처럼 바뀌어 있었다.
인간의 머리에는 물고기, 그중에서도 마치 '메기'와 엇비슷한 머리통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칠흑 같은 검은색의 요로이 갑주를 입은 요괴.
"나 재앙의 신 '나마즈에(?繪)'를 현신하게 하다니……!"
그는 그렇게 말하며 붉게 변해 있는 자신의 망치를 크게 한번 내리쳤다.
쿠그그그긍! 화르르륵!
망치를 후려치자마자 갈라지는 땅과 그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강렬한 화염, 그 속에서 걸어 나온 그는 이내 미령과 하나린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으나.
"곱게 죽을 생각을 하지 마라,"
"……인간에서 물고기로 강등당한 메기가 헛소리를 하는군."
"어머 옳은 소리를 할 때가 있네."
미령과 하나린은 그런 나마즈에의 모습을 보며 태평하게 입을 열었고.
"허, 이년들이……!"
그 모습을 본 나마즈에는 처음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짓다가 이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붉은 망치를 들어 올렸고.
그 순간-
남자는 붉은 망치를 들어 올린 그 찰나의 순간에 미령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점점 바뀌어져 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미령의 머리가 하얀색으로 변하고, 홍안이 핏빛 같은 작안으로 변한다.
그와 동시에 머리위에 나기 시작하는 뿔.
이빨은 마치 상어의 그것과도 같은 날카로운 이빨로 변모하고.
그녀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음과 동시에 나마즈에 에게 달려들었다.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는 빠른 속도.
허나 그것은 나마즈에도 마찬가지였고, 이제 그는 미령의 움직임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미령이 달려오는 타이밍에 맞춰 망치를 들어 올렸다.
아까와 똑같은 상황
"[멈춰]"
나마즈에는 망치를 휘두르려는 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피식하는 웃음을 지었다.
아까 전 들려왔던 언령은 그에게 충분한 구속력을 선사했으나 나마즈에로 지금, 조금 전의 구속 정도는 간단하게 벗어버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
나마즈에는 곧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내 그는-
"[움직이게 둘 줄 알았어?]"
사서복을 입고, 요사스러운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는 하나린을 보며.
꽈드드득!
다시 미령에게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
김현우는 떨어져 내리자마자 주변의 상황을 파악했다.
뒤에는 망연한 표정으로 서 잇던 이서연과 아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바로 앞에는 부서져 있는 장원과 가면 무사들의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다.
"쯧."
'너무 늦었나.'
김현우는 쓰러져 있는 가면 무사들을 한번 바라본 뒤,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가면무사의 시체들 사이에 서 있는 두 남자를 바라봤다.
한 명은 피가 없는 것처럼 창백해 보이는 피부를 가지고 있는 남자.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검은색의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남자였다.
"……."
김현우가 도착하고 나서부터 지속된 침묵.
"드디어 만났군."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바로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였다.
"뭐? 드디어 만나?"
"그래, 나는 너와 만나기를 무척이나 고대하고 있었다. 김현우."
"지랄."
그런 남자의 말에 김현우는 욕설을 내뱉었으나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김현우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고.
그런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랑 만나기를 고대했으면 그냥 찾아와서 가만히 기다리면 될 것이지 왜 깡패 새끼처럼 행패를 부리고 지랄이야?"
"어차피 멸망할 세계인데 깽판 좀 부린다고 뭐가 달라지지는 않잖나?"
"뭐? 멸망할 세계?"
"그래, 이제 네 세게는 멸망할거다."
무척이나 당당하게 선언하듯 말하는 남자의 말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누구 마음대로?"
"당연히 내 마음이다."
"얼씨구, 이제 보니까 깡패 새끼들이 아니라 정신이상자들이었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럼 가짜로 그렇게 생각하겠냐? 이 또라이 새끼야?"
김현우의 가감 없는 말투.
허나 남자는 김현우의 욕설에도 발끈하지 않은 채 그저 담담한 미소만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아무리 날뛰어도 소용없다. 어차피 너는 여기서 죽을 테니까."
"지랄, 너 그거 아냐? 지금까지 아래서 올라온 놈이던 하늘에서 내려온 놈이던 나한테 그 말 안 했던 놈이 있을 것 같아?"
-어떻게 너희들은 그렇게 세세한 곳까지도 디테일이 비슷하냐?
남자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말을 꼬투리 잡아 비아냥대는 김현우.
"그렇다고 해도 이번엔 다를 거다."
"뭐가 다른데?"
"지금 이 9계층에는 정복자가 나를 포함해 4명이나 있으니까."
"아, 혼자 힘으로 안 되니까 친구를 불러왔다 이거지?"
김현우의 일관된 비아냥.
허나 남자는 그렇게 말하는 김현우의 모습이 마치 복어의 모습과도 같다고 치부해 버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네가 아무리 혼자서 정복자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해도, 다수를 상대할 수는 없겠지."
"그래서 4명이나 데려오셨어요?"
김현우가 묻자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라, 네 녀석을 상대하는 건 나와 여기에 있는 '식시귀(食屍鬼)'일 테니까, 나머지 녀석들은 빨리 일을 끝내고 올라가기 위해 이 세계를 정리 중이다."
"아이고 고마워라, 아주 정보를 가감 없이 뿌리시네? 자신 있나 봐?"
"어차피 네가 알아봤자 제대로 대처할 수도 없는 정보니 알려주는 것뿐이다."
"그래? 그것 참 고맙네."
남자의 말에 가볍게 대답하는 김현우.
"……?"
그렇기에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는, 거기에서 일련의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분명 지금 상황은 김현우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김현우의 얼굴에서 보이는 것은 조급함이나 초조함이 아닌 여유로움.
'설마, 그 짧은 한 달 사이에 뭔가를 준비해 왔나?'
그는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고작 한 달이다.'
한 달.
분명 길다면 긴 시간이었으나 한 달이라는 시간은 정복자와의 격차를 좁히기에는 지극히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남자는 자신의 머릿속에 드는 위화감을 억지로 해소하기 위해 김현우에게 최후통첩을 하려 했으나.
"야."
남자는 김현우의 말 덕분에 자신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정말로 너희들이 올 걸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
"뭐?"
김현우의 질문.
툭- 투둑.
그와 함께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봤고, 어느새 그는 조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남자는 어째서 지금 이 상황에 위화감이 드는지 그 이유를-
"네가 '기술자'지?"
"!!"
-깨달을 수 있었다.
남자, 아니 '기술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내가 내 이름에 대해 말한 적이 있던가?'
아니, 없었다.
기술자는 김현우를 이곳에서 맨 처음 만났고, 그 어디에서도 자신이 기술자라는 것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애초에 그가 기술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는 사람은-
"……."
"뭐야?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설마 자기의 존재가 까발려져서 부끄러운 건가?"
김현우의 비아냥을 들으며 기술자는 그제야 어째서 그가 자신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어째서 그가 자신이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통괄자인가……!'
통괄자.
생각해 보면 김현우가 자신이 내려오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기술자와 설계자는 통괄자가 계층을 단절시킴으로서 그녀가 김현우쪽에 붙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실책이군.'
그렇게 당연한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애초에 김현우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당연한 것 중 하나였기에 기술자는 짧게 탄식했다.
'너무 초조했어.'
계층이 단절되고 나서 어떻게든 빨리 9계층으로 내려와 김현우를 처리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술자는 조금 전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없애고 김현우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게 결국 김현우가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다.'
-변하는 건 없었으니까.
그에게 주어졌던 시간은 길어봤자 한 달이라는 시간일 뿐이었고, 아무리 김현우라도 고작 한 달이라는 시간만으론 이 압도적인 전력 차를 줄일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기술자는 김현우를 마주 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쩔 거지? 네가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어봤자 네가 여기서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네가 과연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기술자의 물음에 김현우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니."
"잘 알고 있군."
"하지만 내가 혼자가 아니라면 어떨까?"
김현우의 말.
"뭐라-"
그에 기술자는 저도 모르게 김현우의 말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고-꽈아아앙!
-곧 그는, 자신의 위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푸른 번개를 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네가 친구를 잔뜩 데리고 온다길래 나도 질 수 없겠다 싶어서 친구를 좀 데려와 봤는데,"
어느새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속에서,
"어때? 마음에 들어?"
기술자는, 하늘 위에 떠 있는 푸른 용을 보며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 230
230. 지금부터 친구를 불러볼까 합니다 (3)팔한성군(八寒星君)은 팔한지옥(八寒地獄)의 관리인이자, 어찌 보면 팔한지옥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도 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팔한지옥을 관리하는 자는 팔한성군 혼자였고, 그는 팔한지옥에 한해서는 하늘에서 받은 힘 덕분에 '절대'에 가까운 힘을 부릴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깡!
"윽!"
두 번, 팔한성군은 자신의 홈그라운드라고도 할 수 있는 팔한지옥에서 치욕스러운 패배를 맛본 적이 있었다.
"이야, 갑옷을 몇 겹이나 둘둘 말고 있는 거야?"
"이익!"
-바로 제천대성에게.
꽝!
팔한성군이 들고 있는 거대한 곡도가 제천대성을 노렸으나, 그는 무척이나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팔한성군의 곡도를 피해내곤 여의봉을 휘둘렀다.
분명 사거리가 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천대성이 휘두르는 순간 그 길이가 늘어나 팔한성군의 옆구리를 후려치는 여의봉.
까아아앙!
"큭!"
"아주 단단하네? 저번에 갑옷 깨진 게 그렇게 서러웠어?"
"이 자식!!!!"
팔한성군은 천마를 상대할 때와는 다른 격앙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들고 있는 거대한 곡도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팔한성군.
분명 거대한 몸집에 비해서는 무시 못 할 속도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건만 제천대성은 그런 팔한성군의 곡도를 가볍게 피했고.
쩌저저저적!
"어이쿠!"
그가 곡도를 휘두르는 순간 사방으로 터져 나온 수십 개의 얼음송곳마저도, 제천대성은 여의봉의 길이를 조절해 가볍게 피해냈다.
그것으로 잠시 만들어진 짧은 대치 시간.
제천대성은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대답했다.
"어째 너는 꽤 지났는데도 실력이 그대로냐? 아니, 오히려 더 떨어진 것 같은데?"
"닥쳐라 천도의 망나니!"
"어이쿠! 그렇게 화내지 마! 설마 예전에 팔한지옥에서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그렇게 화내는 건 아니지?"
"장난!? 장난이라고!?"
팔한성군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게 만들고는 소리쳤다.
"이 개자식! 내가 그때 네 녀석 때문에 얼만큼의 수모를 당했는데!"
그의 외침에 제천대성은 피식 하는 웃음을 짓고는 이내 어깨를 으쓱인 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 때문에 수모를 당해? 말은 똑바로 하자, 애초에 네가 수모를 당한 이유는 따지고 보면 너 때문이잖아?"
"뭐……뭐라고!?"
"틀려?"
"헛소리하지 마라! 네 녀석이 팔한지옥에 들어와서 네 친우를 살리겠답시고 지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지 않았나!"
팔한성군의 분오에 찬 음성에 제천대성은 질린다는 듯 혀를 차고 말했다.
"야, 아주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내가 천하의 몹쓸놈이 된 것 같은 소리 좀 그만해라. 애초에 내가 팔한지옥에 간 건 천도로 올라오던 내 친우를 네가 죽여 버려서 그런 거잖아?"
그렇다.
제천대성이 팔한지옥에 내려와서 팔한성군을 때려눕히고 지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이유.
그것은 바로 옥황의 부름을 받고 잠시 하늘에 올라왔던 팔한성군이 천도로 올라가던 제천대성의 친우를 죽여 지옥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네가 죽이지 않았으면 내가 너를 쥐어팰 일도 없었을 거고, 네가 제때 입을 열었으면 지옥도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겠지?"
"궤변! 궤변이다! 애초에 하늘에 더러운 요괴가 올라온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 그건 내가 엄연히 행해야 할 일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윽박을 지르는 팔한성군을 보며 제천대서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은?"
"뭐?"
"다음은 왜 그랬냐?"
그렇다.
팔한성군이 제천대성에게 치욕의 패배를 맞본 적은 한 번이 아닌 두 번이였다.
첫 번째는 바로 제천대성의 친우를 지옥으로 끌고 가서 일어난 일이었고.
두 번째는-
"옥황한테 지옥을 어지럽힌 죄로 백 년형을 받은 게 그렇게 원통했냐?"
바로 지옥이 엉망진창이 된 덕분에 형벌을 받게 된 팔한성군이 제천대성을 조롱한 게 원인이었다.
"다, 닥쳐라! 그건 네 녀석 때문에……! 네 녀석 때문에 하늘에서 가장 신임을 받고 있던 내가……!"
팔한성군은 곧바로 제천대성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어물쩡거리며 입을 열었으나 딱히 제대로 반박할 것이 없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고.
제천대성은 팔한성군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봐, 생각해 보니까 애초에 원인은 네가 맞지?"
"이, 이익!"
"사실이잖아? 애초에 네가 내 친우를 건들지만 않았어도 네가 나한테 두 번이나 복날 개처맞듯 맞을 일도 없었을 것……이 아니라, 아 전투라고 해줄까?"
"으드드득!!"
"그래, 전투에서 치욕스러운 패배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고, 네가 나를 조롱하지만 않았어도 백 년이었던 형벌이 오백 년으로 늘어나지는 않았겠지. 안 그래?"
"닥쳐!!"
꽈아아앙!
제천대성의 말에 두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곡도를 내리찍는 팔한성군.
그와 함께 주변의 공간이 푸른 냉기에 장악되기 시작하고, 설산에 내려앉아 있던 눈이 시퍼런 얼음으로 바뀌어 나가기 시작한다.
쩌저저저적!
갈라진 벽들 사이로 올라오는 올음 송곳들과, 지면에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송곳들을 한차례 바라본 제천대성은 그럼에도 여유로운 표정을 잃지 않았다.
"아니 사실을 말한 건데 괜히 찔리니까 화내는 것 봐라?"
제천대성의 비아냥에 팔한성군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여의봉을 들고 있는 제천대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을 여기서 반드시 죽여주마!"
"네가? 나를? 할 수 있겠어?"
-네 홈그라운드에서도 복날 개패듯 맞았으면서?
제천대성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팔한성군은 분노가 끓어오르는 듯 자신이 쥔 곡도를 부들부들 떨었으나 이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나는 이 이상 네가 알고 있던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 말과 함께 팔한성군은 자신의 품속에서 거대한 언월도를 꺼내 들었고-화륵!
새하얗게 얼어가던 세상이, 붉게 일변하기 시작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얀 김이 서리는 것을 넘을 정도로 냉기로 가득 찼던 공간에 후끈한 공기가 올라오고, 팔한성군이 손에 쥐고 있던 언월도에서 시뻘건 불꽃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절반의 공간은 그대로 차가운 냉기를 유지하고 있으나.
나머지 절반의 공간은 뜨거운 열기 때문에 눈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제천대성은 과장되게 입가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대체 뭘 받았나 했는데, 받은 게 그거냐?"
제천대성의 물음에 팔한성군은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받은 것은 바로 팔열성군(八熱星君)의 업이지, 더 이상 나를 예전의 나로 보는 게 좋지 않을 거다……!"
"업 하나 얻었다고 너무 기고만장한 거 아니야?"
"흥! 너는 나를 못 이길 테니까 당연하다!"
"내가 너를 못 이길 거라고?"
"그래! 내가 모를 것 같나? 지금 네 녀석은 본래의 업을 전부 가지고 있지 않지 않나? 그에 반해 나는 본래의 업에 더불어 팔열성군의 업까지 가지고 있다!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팔한성군의 말에 제천대성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뭐…… 확실히 지금으로는 너를 이기기가 힘들지. 이 더러운 탑은 '업(業)'을 힘의 근원으로 삼게 만드는 곳이니까."
그런 제천대성의 인정과도 같은 말에 그의 입가가 올라가려 했으나-
"그래서."
"?"
-팔한성군은 곧, 제천대성의 손 위에 있는 그것을 보며 경악했다.
"나도 하나 가져왔어."
"그……그건!!"
팔한성군은 저도 모르게 경악성을 내뱉으며 제천대성의 손 위에 있는 수정을 바라보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왜 말이 안 돼? 이렇게 내 손 위에 있는데."
제천대성의 말에 팔한성군은 이를 악물고는 그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자, 그럼 한번."
이미.
"신나게-"
"!!!"
팔한성군의 머리 위에는-
"-놀아볼까?"
-수십 마리의 검은 까마귀가, 날고 있었다.
####
"왜, 설마 친구를 데려올 줄은 몰랐어?"
김현우의 말에 기술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는 먹구름이 낀 하늘 위에는 성남의 하늘을 전부 덮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용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룡……!"
[오랜만에 보는 군 '기술자']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김현우의 물음에 청룡은 별것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이 나를 가둔 녀석이다.]
"어이쿠, 악연이네?"
[그런 셈이지.]
김현우와 청룡의 대화를 보며 그는 기술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청룡을 불러냈지?'
물론 기술자는 김현우가 청룡의 업을 사용하는 것을 자세히는 아니었으나 어렴풋이 알고 있기는 했다.
허나 그가 청룡의 업을 사용하는 것과 김현우가 직접 청룡을 부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
"쯧."
일이 틀어진 것을 깨달은 기술자는 9계층에 같이 내려왔던 다른 정복자들을 부르기 위해 미리 준비해 놓았던 통신 아티팩트를 사용했으나.
'어째서 답이 없지?'
어째서인지 다른 곳에 보내놨던 정복자들은 그 누구 하나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기술자는 곧 상황이 꼬였다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구겼으나.
"어쩔 수 없군."
-그는 이내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며 김현우를 바라보았다.
"이제 당황할 건 다 당황했냐?"
김현우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담으며 입을 열자 기술자는 입을 열었다.
"……준비를 많이 했군."
"당연하지, 다구리치러 올 거라는데 혼자서 놀고 있었겠어?"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네가 여기서 죽는 건 여전히 변함없으니까."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네?"
김현우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기술자는 대답했다.
"내가 다른 정복자를 데려온 것은 그저 '혹시나'하는 요소 때문이었다. 그게 뭔 소리인 줄 아나?"
"그게 뭔 소린데?"
"애초부터 너를 상대하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는 소리다."
기술자의 말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그의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창백한 피부를 가진 남자를 바라봤다.
"다구리치려고 친구 데려온 놈이 그런 말 하니까 그냥 변명하는 걸로밖에 안 들리는데?"
"어떻게 듣던 상관없다, 내가 몇 번이고 여기서 선언했듯, 너는 여기서 죽을 테니까."
기술자는 그렇게 말하곤 이내 시선을 돌려 남자를 바라곤 이야기했다.
"청룡을 맡아라."
"저 위에 떠 있는 거?"
기술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별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듯 하늘에 떠 있는 청룡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그동안 눌러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와 함께 보이는 기술자의 얼굴.
그리고,
"뭐야 이건?"
기술자를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로브 속에 보인 그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술자는 머리에 기괴할 정도로 이상한 가면을 쓰고 있었으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인상을 찌푸려지는 가면.
김현우가 그 가면을 보고 인상을 구기며 싸울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
"나는 이 세상을 조형하고 창조한 자이자 이 세상의 이치를 만들어내는 자이자-"
기술자는-
"홀로 이 세상에 진리를 깨우친 자."
-자신의 이름을 이 공간에 선언했다.
"범천(梵天)(Brahma)이다."
# 231
231. 범천(梵天)의 연꽃은 누구에게로 향하는가 (1)비를 맞은 채 멍하니 범천의 선언을 지켜보고 있던 이서연과 아냐.
"!?"
"꺅!"
그녀들은 불현듯 무엇인가가 날아와 자신을 잡아채는 것을 느끼며 깜짝 놀란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으나.
"움직이지 마 떨어지니까!"
곧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들은 자신을 잡아챈 이 구름과도 같은 무엇인가가 김현우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움직이던 몸을 멈췄고.
"눈 감아!"
김현우의 말과 함께 이서연과 아냐는 근두운을 타고 순식간에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너희들도 지금부터 한강 쪽 말고 다른 쪽으로 열심히 뛰어라. 가는 김에 하남에 있는 시민들 대피도 시키면 좋고."
이어지는 김현우의 말에 가면무사들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제각각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 그럼-"
김현우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기술자, 아니 '범천'에게 달렸 들었다.
그의 신형이 보이지 않는다.
팟!
그저 원인과 결과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김현우는 정말 단 한순간에 범천의 앞에 도달했다.
그와 동시에 내뻗어지는 주먹.
그러나.
콰직!
분명 단 한순간, 어쩌면 찰나라고도 부를 수 없는 그 짧은 시간에 공격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의 공격은.
"?"
땅바닥에서 솟아올라온 거대한 나무들에 의해 막혔다.
그 순간 김현우에게로 쏘아지는 나뭇가지들을 보며 김현우는 횡으로 몸을 움직여 그 공격을 피한 뒤 곧바로 범천을 공격하려 했으나-쿵!
"쯧!"
김현우가 위치를 바꾸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측면을 막는 나무를 보며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쾅! 콰르르륵!
그와 함께 김현우에게로 쏘아져 나오는 나무를 보며 김현우는 빠르게 혀를 찬 뒤 몸을 뒤로 내빼며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가지를 쳐내기 위해 발을 휘둘렀으나.
콰득!
분명 자신의 발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부서지지 않는 나뭇가지를 보며 김현우는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이것이 보통 나뭇가지가 아니라는 확신을 내렸다.
그와 함께 시작된 고민.
'당장 전력을 꺼내야 하나?'
힘을 먼저 내보이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힘을 먼저 내보인다는 것은 자신의 패를 먼저 까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물론 자신보다 약한 녀석을 상대할 경우에는 처음부터 힘을 개방해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이 녀석은 아니야.'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범천을 보며 깨닫고 있었다.
지금 앞에 있는 그는 적어도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할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전력을 파악하려고 간만 봐 봤자-'
지금 상태로는 오히려 범천의 전력을 알아내기보다는 자신의 체력만 깎아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여러 가지 상황을 파악해 빠르게 종합한 김현우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고, 곧 또 한번 범천을 향해 땅을 박찼다.
쾅!
아까 전과는 다르게 김현우의 진각에 땅이 터져 나가고, 범천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어느새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나뭇가지를 이용해 김현우를 노렸으나-파직!
"!"
분명 조금 전까지 앞으로 달려 나오고 있었던 김현우의 모습을, 범천은 어느 순간 놓치고 말았다.
보이는 것은 그 자리에 남은 검붉은 색의 전류뿐.
그리고 범천이 그의 움직임을 놓친 그 찰나의 순간에.
우지지지직! 콰드드득!
범천은, 자신의 몸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나무가 박살 난 것을 깨달았다.
부서진 나무 사이로 튀어나온 손.
텁.
김현우의 손은 곧바로 소환된 나무 안에 있었던 범천의 멱살을 잡았고, 곧 그를 끌어내었다.
"큭!?"
나무에 부딪혀 범천에게서 터져 나오는 신음과 함께 딱딱한 나무가 마치 종이 부서지듯 박살 나며 범천을 밖으로 끌어내었다.
졸지에 멱살을 잡힌 채 나무 밖으로 끌려나온 범천은 인상을 찌푸리며 김현우를 바라보려 했으나.
빠아아악!
이내 곧바로 날아오는 김현우의 주먹에 대응하지 못하고 얼굴을 맞았다.
"자신 있다면서 왜 갑자기 나무 안으로 기어들어가?"
김현우는 신음을 흘리는 범천을 향해 그런 말을 하며 그의 멱살을 잡은 채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
"그, 그만!"
"너 같으면 그만 패겠냐!?"
멱살이 잡힌 채 계속해서 머리를 때리는 김현우 덕분에 범천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소리를 질렀으나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고.
"으아아아악! 이 개자식!!"
콰드드드득!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한 채 연속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범천은 이내 열이 받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의 지반을 전부 없애버릴 수많은 나무줄기를 뽑아냈으나.
"장소 좀 옮기자."
"!"
이미 나무줄기들이 지반을 뚫고 나올 때.
"먼저 가 있어라."
패왕(?王)-
김현우는 이미 그의 몸을 집어 던진 채 한계까지 다리를 뒤로 당기는 중이었다.
한계까지 뒤로 당긴 다리에 푸른 마력과 검붉은 마력이 섞여 들어가고, 그와 함께 김현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 모습을 보며 범천은 본능적으로 나무줄기와 양팔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감싸려 했으나.
"늦었어."
-괴신각(怪神脚).
김현우의 다리는 이미 범천의 배를 후려차고 있었다.
푸른 마력과 검붉은 마력이 마치 증기기관의 연료로 배출되듯 사방으로 뿌려지고, 김현우의 다리에 맞은 범천이 마치 포탄처럼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다.
쉬이이이이익-!!
허공을 가르는 범천.
순식간에 하남의 하늘을 가로지른 범천은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몸을 뒤틀어 자신의 몸을 가누려 했으나.
퍽! 퍽! 퍽! 퍼어엉!
결국 물에 떨어질 때까지 자세를 잡지 못한 그는 한강에 물수제비처럼 몇 번이고 물에 튄 다음이 돼서야 물속에 처박히고 나서야 자신의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이야, 아주 잘 튀네? 돌멩이 해도 되겠어."
범천이 몸을 가누자마자 그의 뒤를 뒤쫓아온 김현우는 씩 웃으며 비아냥 섞인 말을 내뱉었다.
"이 새끼……!"
그 말에 분노를 느낀 범천은 일순 분노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봤으나, 이내 억지로 화를 가라앉혔다.
전투에서 지나친 흥분은 독이 되니까.
범천은 김현우의 비아냥거림을 억지로 무시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뒤, 아까 전 찰나의 순간 이후로 볼 수 없었던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파직-파직!
김현우의 모습은 맨 처음 보았던 모습과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바로 머리 위에 떠 있는 황금색의 금고아,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그의 몸에 파직거리고 있는 각기 다른 색의 전류였다.
한쪽은 검붉은색의 전류,
또 다른 한쪽은 푸른색의 전류가 김현우의 몸 주변에서 파직거리며 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적 같은 옷을 입고 있군."
"뭐 네가 입은 그 칙칙한 로브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김현우의 몸에는 원래 제천대성이 입던 황금쇄자갑 대신, 제천대성의 업을 얻었던 김현우가 입고 있던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 김현우의 모습에 범천은 억지로 화를 가라앉혔으나, 이제는 상당히 딱딱한 느낌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원래 네 녀석을 그냥 죽이려 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뭐? 마음이 바뀌어? 개 처맞듯 맞더니 갱생한 거야?"
키득키득.
김현우가 피식 웃으며 농담을 던지자 범천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을 곱게 죽이지는 않겠다."
"그 말도 몇 번을 들었는지 이제는 질리는 걸 넘어서 아무렇지도 않다 야."
"걱정 마라 후회하게 해줄 테니."
"그래? 근데 어쩌냐 아마 넌, 나를 후회하게 만들-"
팟!
"!"
"-시간도 없을 것 같은데!"
꽝!
범천의 앞으로 도약한 김현우가 주먹을 휘둘러 그의 몸을 후려치고, 이어서 다리를 휘두른다.
꽈드득!
"크윽!"
아까 전과는 다르게 속수무책으로 김현우의 공격에 당하는 범천.
허나 자신이 일방적으로 승기를 잡고 있는 상황에도 김현우는 끊임없이 범천에게 달려들어 공격을 퍼부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바로 범천이 힘을 개방하는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
김현우는 지금까지 많은 정복자와 싸워왔고,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힘을 개방하지 않은 채로 자신과 마찬가지인 탐색전을 벌인 뒤 본격적으로 전투에 임한다.
그런 상황에서 김현우는 범천보다 먼저 힘을 개방했고, 그 이득을 최대한으로 취하기 위해서는-
'힘을 개방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범천이 힘을 개방할 시간도 주지 않고 최대한 그의 힘을 빼놓는 것이었다.
빡!
"이 자식!"
김현우의 생각이 맞았는지, 범천은 어떻게든 김현우의 공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피하려 했으나 김현우는 그때마다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얼굴을 후려치고, 재빨리 뒤로 빠지려 하는 범천의 다리를 붙잡아 억지로 근거리전을 유도하는 김현우.
빡!
절대로 변할 틈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듯 최소한의 단타만을 써가며 범천의 체력을 깎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텁!
"!"
줄곧 김현우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고 있던 범천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범천의 손에 잡힌 김현우의 주먹.
그와 함께 한강의 물속에서 나무줄기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곧 터져 나온 나무줄기는 김현우를 향해 쏘아졌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려야만 나무줄기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상황.
허나 김현우는-
"내리쳐라!"
범천과의 거리를 벌리는 것보다는 직접 솟아 올라오는 나무줄기들을 요격하는 쪽을 선택했다.
꽝! 콰가가강! 꽈강!
김현우가 입을 열자마자 순식간에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는 번개는 그에게로 날아오는 번개를 요격했으나-
"쯧-!"
이미 한강을 가득 채울 정도로 불어난 나무줄기의 양은 김현우가 전부 쳐내지 못할 정도로 그 양을 불려 나갔고, 결국 김현우는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콰르르르륵!!!
순식간에 김현우가 있던 자리로 몰려드는 나무줄기,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도력을 모아 비가 내리고 있는 하늘에 쏘아 보냈다.
그와 함께 퍼지기 시작한 김현우의 도력은 순식간에 한강 근처에 있는 구름들에게로 스며들었고.
"뢰목(雷木)."
김현우의 한마디에, '푸른 나무'가 한강에 떨어져 내렸다.
푸른색의 나뭇가지들이 솟아올랐던 나무줄기들을 태워 없애고, 범천을 방어하고 있던 거대한 나무를 없애 나간다.
그와 함께 푸른빛으로 물드는 세상 속에서 김현우는 범천의 앞을 막고 있던 나무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앞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늦었군."
"……씨발."
그곳에, 지금까지 김현우가 봐오던 범천은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남자는 어느새 누가 보더라도 굉장히 성스러워 보이는 새하얀 성의를 입고 있었고.
그 오른손에는 이제 막 개화하기 시작한 연꽃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곧 자신의 앞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김현우가 바라보고 있는 그곳.
그곳에서는 나무의 줄기가 줄기를 타고-
"-썅."
-거대한 여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 232
232. 범천(梵天)의 연꽃은 누구에게로 향하는가 (2)베트남 호이안의 헌터 협회.
-뚜─전화를 받을 수 없어.
김시현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안 받는 거야?'
불과 4시간 전, 김시현은 베트남에 등반자가 온다는 소식과 함께 마법진을 타고 이곳으로 넘어왔고.
지금은 등반자를 처리한 뒤 다시 하남의 장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헌터 협회에 그려놓은 마법진 앞에 도착해 있었다.
'……마법진 발동만 하면 되는데.'
이상하게 마법진의 발동이 되지 않기에 전화를 걸어봤으나,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아냐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것은 아냐를 돕고 있는 이서연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레 끊긴 연락.
김시현은 자신이 건 전화가 또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혹시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인터넷에 접속했고.
"……?"
김시현은 곧 인터넷에 들어가자마자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하고 있는 검색어를 보고.
[1. 하남에 나타난 거대한 용!]
"뭐야 이건……?"
그렇게 중얼거렸다.
***
"미친……!"
김현우는 범천의 뒤에 만들어지고 있는 거대한 여래를 바라보았다.
나무줄기가 나무를 타고 거대한 여래의 형상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여래의 뒤로 수십, 수백은 넘어 보이는 거대한 손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손에 잡히기 시작한 제각각의 무기.
기본적인 창과 칼부터 시작해, 김현우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무기들이 여래의 손에 쥐어지고 있을 때.
"김현우, 왜 내가 정복자의 여부와 상관없이 너를 죽일 수 있다고 말했는지, 그 이유를 알려줄까?"
"……."
김현우가 아무런 말도 없이 범천을 바라보자, 그는 자신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분홍빛의 연꽃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다섯 장의 꽃잎과 그 밖에 작은 꽃잎들이 펴 있는 연꽃.
그것을 보여주며 범천은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애초에 '창조'를 담당하는 만큼 그 전투능력은 그리 높지 않다. 또한 '창조'외의 능력은 크게 존재하지 않지."
허나 그럼에도-
"네가 무조건 내 손에 죽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범천의 손 위에 있는 연꽃잎 중의 하나가 떨어져 나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여래에게로 날아간다.
분명 세찬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음에도 마치 빗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 살랑살랑 날아간 꽃잎은 범천의 뒤에 있는 여래의 조각상을 향해 날아갔고.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게 여래에 닿으면 안 된다는 것을-팟!
그렇기에 김현우는 순식간에 도약했다.
그가 도약하자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오는 나무줄기.
꽝!
허나 김현우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나무줄기에 번개를 떨어뜨리며 더더욱 도약하는 속도를 높였다.
떨어져 내리던 비가 일순간 멎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돌진한 김현우는 마침내 범천을 넘어 여래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꽃잎 앞에 도달했고.
망설임 없이 꽃잎을 잡아챘으나-
"!!"
-분명 살랑거리며 날아가고 있던 꽃잎은, 그대로 김현우의 손을 통과해 여래의 몸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지금 이 상황에서도, 너는 정복자의 힘에 필적하는 다수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범천의 말이 끝나는 그 순간.
쿠구구구구구구궁!!!
"!!!"
김현우는 자신의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여래의 손을 볼 수 있었다.
꽈아아앙!
거대한 몸집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빠르게 날아온 여래의 주먹에 김현우는 뒤늦게 방어 자세를 취했으나-
"미친!"
마치 거대한 돌기둥을 막아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듦과 함께, 김현우는 그대로 한강에 처박혔다.
파아아앙!
주변으로 터지고 있는 거대한 물보라와 함께 김현우는 한강 바닥에 처박혔고, 곧바로 자신을 속박하기 위해 튀어나온 나무줄기들을 끊어내며 수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와 함께 보이는 풍경.
"……이런 양아치 같은 새끼."
김현우는 거대한 여래의 주변에 만들어지고 있는 두 개의 형상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고.
"설마 여래 한 명만을 상대할 거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내 여래의 좌우에는 각각 한 명의 장군들이 제각각의 무기를 쥐고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는 자신의 몸만 한 거대한 검을 들고 있었고, 그와 반대로 오른쪽에 서 있는 이는 삼지창과 함께 왼손에는 보탑을 들고 있었다.
"북방(北方)의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서방(西方)의 광목천왕(廣目天王)이다. 한 명 한 명이 네 녀석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바로 친구 부르는 인성 봐라?"
범천의 말에 김현우는 조금이라도 그의 신경을 건들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친구가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나, '범천'의 손에서 태어난 창조물이지."
그는 오히려 김현우의 말을 들으며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결국 네가 직접 상대하지 않는 건 똑같잖아?"
"굳이 내가 너를 직접 상대해야 한다는 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쯧."
어떻게라도 말꼬리를 잡아 성질을 긁어보려 했건만 범천은 틈을 주지 않았고, 이내 그는 김현우를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게다가, 애초에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뭐?"
"고작 필멸자의 업(業)이, 내가 만든 위업(偉業)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위업(偉業)이라고……?"
김현우는 그렇게 되물었으나 범천은 더 이상 김현우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은 없는 듯 곧바로 연꽃을 들고 있는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고.
"여래이천경(如來二天經)의 힘, 한번 겪어보아라."
그와 함께 거대한 여래와 그의 양쪽에 있던 두 장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현우와 여래이천경의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식시귀(食屍鬼)치고는 몸집이 꽤 거대해졌군."
하남의 하늘에서, 청룡은 자신과 같이 하늘에 떠 있는 식시귀를 보며 묘한 감탄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청룡과 싸움을 하기 전 보였던 식시귀의 모습은 분명 평범한 남자의 그것이었다.
허나 지금은?
"너를 먹으면 충분히 배가 부를 것 같아."
그는 거대한 고래의 모습을 한 채, 하늘을 부유하고 있었다.
검은색의 불길한 마력을 사방으로 퍼뜨리며 하늘을 부유하고 있는 고래.
"흑경(黑鯨)의 업인가?"
청룡이 그렇게 묻자 식시귀는 상당히 놀라워하며 되물었다.
"어떻게 내 업의 이름을 알고 있지? 이 업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식시귀의 물음에 청룡은 자신의 몸을 움직여 구름 위를 유영하며 대답했다.
"뭐, 조금 인연이 있었지."
"그래? 그렇다면 이 업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고 있겠군."
식시귀, 아니 흑경의 말에 청룡은 대답했다.
"확실히 본 건 몇 번 없었으나 연옥에서 길을 잃은 망자와 마귀들을 끝없이 먹어치우고 다니는 모습을 봤을 때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의 말에 흑경은 마치 웃음을 짓는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잘 알고 있군. 이 몸은 무척이나 편해. 원래 내 몸으로는 제대로 먹을 수 없는 것들을 먹을 수 있게 해주니까, 게다가 이 몸으로 변하면 끊임없이 먹을 수 있어."
"식시귀는 먹으면서 강해지던가?"
"그래, 나는 상대를 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진다. 아니, 강해지는 것 정도가 아니라 한 단계 위로 진화하지,"
"너와 상성이 좋군."
청룡의 물음에 흑경은 대답했다.
"그래, 나와는 매우 상성이 좋아. 특히 너 같은 길쭉한 몸을 가지고 있는 녀석도 이렇게 변해 있는 상태라면 한 번에 전부 먹어 치울 수 있지. 머리부터 꼬리까지, 전부 말이야."
흑경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입가를 벌렸다.
그 안에 보이는 것은 어둠.
이빨이나 혀, 분명 신체기관이라고 할 만한 게 보여야 했으나, 흑경의 입속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아무것도 없는, 한 치 앞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것 같은 칠흑 같은 어둠뿐.
꽈아앙!
그 순간, 청룡은 입을 벌리고 있는 흑경의 위로 한 줄기의 번개를 쏘아냈다.
평범한 사람, 아니 헌터가 와서 맞더라도 순식간에 먼지만 남을 정도로 강력한 번개.
푸른색의 번개가 흑경을 강타하고, 그의 등짝이 순식간에 터져 나간다.
사방으로 처져나가는 검음 체액들,허나.
"기습이야? 유감이지만 데미지가 전혀 없는데?"
흑경의 상처는 순식간에 치유되었다.
아예 처음부터 번개를 맞은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순식간에 상처를 치유하고 느긋하게 허공을 유영하는 흑경.
그 모습을 보며 청룡은 말했다.
"호,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렇군. 확실히 식시귀의 업과 합쳐지니 순식간에 몸을 회복해 버리는군."
"흐흐흐, 유감이네?"
"아니, 좋은 걸 알았다. 확실히 이렇게 빨리 회복한다면 확실히 '한 발'로는 힘들 것 같군."
"그게 무슨-"
꽈아앙!
흑경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시 떨어져 내리는 번개.
허나, 이번에는 한 발이 아니었다.
꽝!
두 발.
꽝!
세 발.
꽝! 꽝! 꽝!
여섯 발.
콰르르르르꽝! 꽈광!
수십 발.
출력이 줄어들지 않은 거대한 번개가 몇십 번이고 흑경의 머리 위에 떨어져 내리고, 흑경의 몸이 순식간에 박살 나기 시작한다.
지져지고, 찢어지고, 터지는 흑경의 몸.
"크아아악!?"
흑경은 갑작스레 하늘에서 떨어진 수십, 수백 발의 번개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비명을 질렀으나, 번개는 계속해서 내리쳤다.
그리고-
"호, 최대출력으로 정확히 일백 번을 내리쳤는데도 '핵'에 도달하지 못하다니, 확실히 식시귀와 흑경의 조합은 더 단단하군."
"너……! 어떻게 '핵'에 존재에 대해서!?"
흑경은 상당한 고통이 남았는지 몸을 세차게 좌우로 흔들며 물었고, 청룡은 그런 흑경의 주위의 구름근처를 느긋하게 유영했다.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뭐라고……?"
"네가 가지고 있는 흑경의 업은 보잘것없는 업이 아니다, 그 업은 무려 연옥에서 이천 년을 머물며 망자와 마귀들을 잡아먹고 만들어진 업이니까. 그런데-"
-왜, 그 녀석의 업은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청룡의 질문에 흑경은 조금 전과 같은 웃음 대신 경계심을 보이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뭐, 별거 아니다. 너도 나한테 우쭐대며 진실을 알려줬으니, 나도 나름 재미있는 걸 알려 줄 생각이지."
청룡의 말에 따라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비가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고, 청룡은 다시 입을 열었다.
"첫 번째로, 이천 년 동안 연옥을 헤매던 흑경이 자신이 잡아먹던 이들과 같은 망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흑경의 업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청룡의 말이 시작되자 흑경은 본능적으로 청룡의 근처에서 모이기 시작하는 번개를 바라보았다.
분명 이전에 떨어트렸던 번개보다도 압도적인 출력을 낼 것 같은 뇌전의 기운.
그것이 전부 모인 순간-
"-바로 내가, 망자가 된 흑경을 죽였기 때문이다."
-흑경은, 먹구름이 끼었던 하늘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233
233. 범천(梵天)의 연꽃은 누구에게로 향하는가 (3)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푸른 번개가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여래의 위로 떨어진다.
꽈르릉!
청각을 일시적으로 빼앗을 정도로 거대한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가는 여래의 몸.
그러나,
'공격이 안 먹힌다고?'
분명 김현우의 번개를 정통으로 맞았던 여래의 머리 부분은 그저 나무가 터져 나간 흔적만 있을 뿐 별다른 데미지가 보이지 않았다.
김현우는 여래에게 어느 정도까지 공격이 먹히는지 실험해 보기 위해 다시 번개를 모으려 했으나.
"!!"
어느새 여래의 옆에 있던 지국천왕이 김현우의 바로 앞에서 들고 있던 거대한 검을 힘차게 아래로 내리 꽂고 있었다.
피해내는 김현우.
꽝!
한강 한가운데 꽂힌 검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물보라를 일으키고, 김현우는 그 상태에서 검을 내리꽂은 지국천왕을 향해 발을 휘둘렀으나.
콰아앙!
곧바로 옆에서 찔러 들어오는 광목천왕의 삼지창 덕분에 김현우는 공격에 실패했다.
짧게 혀를 차며 물보라 밖으로 빠져나온 그.
허나-
쿠그그그그그그긍!!!!
아직 그들의 공격은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검……!'
척 보기에도 고층 빌딩의 크기 정도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검이 김현우의 머리 위를 노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김현우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 위해 공기를 박차려 했으나.
"이건 또 뭐야, 씨발!"
그는 자신의 두 발목을 감싸고 있는 새하얀 광휘를 보며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고, 곧 그는 광목천왕이 들고 있는 보탑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보며 이를 악물고 하늘을 바라봤다.
마치 운석이 떨어지듯 주변의 공기를 터트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는 거대한 검.
'이미 도망치기는 늦었다.'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떨어져 내리고 있는 거대한 검 아래에서 자세를 잡았다.
'도망치는 게 늦었다면.'
부순다.
김현우는 자신의 마력을 폭발시켰다.
파지지지지직!
한강의 물줄기를 달리는 검붉은 전류.
김현우는 그와 동시에 인지를 확장시켰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검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하고, 김현우의 주변을 맴돌고 있던 푸른 전류가 순식간에 김현우의 몸속으로 들어온다.
그와 함께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고, 오직 김현우에게만 허락된 그 찰나의 시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래의 검이 김현우의 머리 위에서 아예 멈춰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하게 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것은 다른 거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면을 타고 흐르는 검붉은 전류도.
물결치고 있던 한강도.
하늘에 내리고 있던 비도.
모든 것들이 김현우와는 다른 시간에 존재하듯, 느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김현우는 바로 자신의 머리 위에 멈춘 여래의 검을 향해 자세를 잡고는,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삐────────!!!!
창각을 빼앗김과 동시에, 한강에 거대한 물보라가 후려쳤다.
한강에 운석이 떨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물보라는 분명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한강을 마치 두 개로 나누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해주었고.
"……후."
김현우의 머리를 노리고 내리쳐진 여래의 검은,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그는 여래의 검을 박살 냄과 동시에 몸을 움직여 그들 사이를 빠져나왔고, 지국천왕과 광목천왕은 김현우가 거리를 벌리자 곧 여래의 동쪽과 서쪽에 자리 잡았다.
잠시의 대치상태.
김현우는 여래의 뒤에 있는 거대한 광배 옆에 자리를 잡고 있는 범천을 보며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아직은 괜찮다.'
제천대성과 청룡의 업을 빌려 쓸 때는 단 한 번만 써도 며칠을 요양해야 했던 기술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 상태는 아직 나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김현우가 제천대성과 청룡의 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괜찮다고 해도…….'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봤다.
여래의 검이 부러졌으나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무기 중 하나일 뿐, 아직 그의 손에는 수많은 무기들이 들려 있었고.
지국천왕과 광목천왕은 별다른 피해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그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
물론 지금 김현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장 좋은 생각은 바로 여래의 광배 옆에 있는 범천을 제일 먼저 죽이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래와 저 두 명의 장군을 살린 것은 바로 범천이었고, 범천이 죽으면 자동적으로 그가 살린 힘들은 사라질 테니까.
'문제는 그게 안 된다는 건데…….'
조금 전을 포함한 총 다섯 번의 격돌.
그 격돌에서 김현우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 여래와 두 장군을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래를 무시하고 들어가면 광목천왕과 지국천왕이, 반대로 두 장군을 무시하고 들어가면 여래가 나를 막아선다.'
게다가-
'지국천왕이나 광목천왕이 조금이라도 약하면 어떻게든 뚫어보겠는데…….'
여래를 포함한 두 장군은 김현우에 비해 약간 약하기는 했으나 그가 무시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공격할 때는 오히려 두 명이 한 몸처럼 김현우를 공격하다 보니 한 놈씩 처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김현우가 언제 올지 모르는 공격에 몸을 긴장시키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는 범천(梵天)도 마찬가지로-
'괴물이로군.'
-그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연꽃을 바라봤다.
다섯 장 중, 이제는 두 장밖에 남지 않은 연꽃잎.
'……내 업(業)을 세 개나 소모했는데.'
김현우는 업을 소모해 만들어 낸 여래이천경((如來二天經)과 서로 밀리지 않을 정도로 박빙의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저렇게 강해진 거지?'
범천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김현우를 바라봤다.
애초에 만년빙정을 여유롭게 죽일 수 있었다고 해도, 여래이천경은 정복자들보다도 한층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살아나 있는 여래와 두 장군은 바로 자신이 억겁을 세월 동안 모아온 칼6파의 기운을 끌어다 쓴 것이었으니까, 허나 그런 기운을 끌어다 썼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그들과 대등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도-'
딱히 범천은 현 상황에 대해 그리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김현우는 여래이천경과 대등하게 싸울 수는 있어도, 어떻게 하더라도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그가 그렇게 확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김현우가 가지고 있는 체력이었다.
김현우가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사이에 눈에 보일 정도의 성장을 이뤄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필멸자의 신세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필멸자다.'
그리고 필멸자의 체력은 결코 무한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필멸자는 점점 지쳐가게 되고, 본연의 힘을 잃게 된다.
'그에 비해.'
범천은 자신이 생명으로서 창조한 여래와 장군들을 바라보았다.
영목(靈木)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명령만을 따르기 위해 창조된 생명들.
그들은 살아 있기는 하나, 절대 지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칼파의 연꽃은 '창조'의 과정에서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버리게 만드니까.
한 마디로, 그들은 지칠 수 있으나 스스로가 지친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결국 질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범천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지켜보고 있기만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겠지.'
이내 그는 여래의 광배에서 일어나 김현우를 바라봤다.
결국 이긴다고 하더라도 여유를 부리면 상황이 어느 순간 반전될 확률은 있었다.
'뭐, 그래봤자 1% 정도지만.'
범천은 혹시 모를 1%의 상황을 맞이해 곤욕을 치르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나서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결심을 했을 때.
'……어차피 지금 계속해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소모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김현우도 나름대로의 결심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이 상황이 쓸모없는 소모전이 되고 있다는 것은 김현우도 알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이 불리해진다는 것 또한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에 끝낸다.'
김현우는 여래의 광배에서 일어난 범천을 보며 그렇게 결심했다.
그리고, 김현우가 그렇게 결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흡-!"
김현우와 여래이천경, 범천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이동하고, 지국천왕과 광목천왕이 그런 김현우를 맞이하러 나온다.
그리고 두 장군이 김현우의 가까이에 왔을 때-
"……!"
김현우는 인지를 확장시켰다.
순식간에 느려진 시간.
김현우에게만 허락된 그 시간 속에서, 김현우는 빠르게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보이는 것은 검을 횡으로 휘두르는 지국천왕과, 자신을 향해 보탑을 들이미는 광목천왕.
느려진 인지 속에서 하얀색의 광휘가 느릿하게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시선을 위로 올려 여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창인가.'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의 여래는 거대한 창을 김현우에게 찔러 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범천은-'
아무래도 움직이기로 결정한 것인지 여래의 광배 근처에서, 처음 말고는 보지 못했던 나무줄기를 끌어 올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움직였다.
꽈아아아아아앙!!!
제일 처음, 김현우의 주먹이 보탑을 들고 있는 광목천왕을 노렸다.
광목천왕의 얼굴을 후려침과 동시에 인지가 풀리고, 광휘를 내뿜고 있던 보탑이 빛을 잃음과 동시에 그의 몸이 한강에 처박힌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흡!"
김현우는 한 번 더 인지를 확장시켰다.
다시금 느려지는 주변.
허나.
'빡센데……!'
김현우는 자신의 몸에 느껴지는 부하를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상태로 달려드는 게 가능할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범천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으나, 유감스럽게도 자신에게로 검을 들이밀고 있는 광목천왕을 치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앙!
또다시 풀린 인지.
그와 함께 검을 휘두르던 광목천왕은 거대한 여래의 몸통으로 날아가 부딪혔고, 그 상태에서 김현우는 이전에 이 기술을 쓸 때 느꼈던, 온몸의 격통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아직 연속은 안 되나……!'
한 번이라면 김현우도 여유롭게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으나 역시 연속으로 두 번 이상 사용하는 것은 몸의 부담이 컸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김현우는, 인지를 확장했다.
"끅-!"
그리고 인지를 확장하자마자 느껴지는 끔찍한 격통.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곧 범천을 바라봤고.
'눈치챘나?'
그는 곧 나무줄기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감싸기 시작하는 범천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어.'
범천은 아직 자신의 몸을 충분하게 보호하지 못했다.
그가 만들어낸 여래도 마찬가지로 뒤늦게 범천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있었으나 여래의 움직임은 너무 느렸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잡았고 그에게 튀어나간 순간-
"!"
그는 상상할 수 없는 격통과 함께 확장되었던 인지가 풀리는 것을 깨달았다.
'안 돼!'
동시에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시간.
김현우는 이를 악물며 앞으로 도약해 범천에게 주먹을 휘둘렀으나-꽈아아앙!
"늦었군."
"큭!"
김현우의 주먹은 어느새 그의 몸을 감싼 거대한 나무줄기에 막히고 말았고.
"!!"
그와 동시에 김현우의 주먹을 막았던 나무줄기가 그의 팔을 감싸기 시작했다.
김현우는 당황하며 자신의 팔을 뒤늦게 떼어내려 했으나 이미 나무줄기는 그의 어깨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고.
쿠그그그그그긍!
"이런 씨발!"
그는 자신의 머리 위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창을 보며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거대한 창이 김현우의 머리 위까지 다가온 그 순간-
"왜 이렇게 맞고 있어?"
-까마귀가, 날았다.
# 234
234. 범천(梵天)의 연꽃은 누구에게로 향하는가 (4)하남에 있는 아직 완공 전인 아파트의 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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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최남: 와, 이제 보니 헌터 싸움이 아니라 고질라 싸움이었네.]
[지금내가최고: 고래 오지게 쳐맞네ㅋㅋㅋㅋㅋㅋ]
[딱대: 그런데 지금 누가 우리 팀임? 푸른 용임 고래임?]
[최고가되고싶다: 저 뒤에 건물 사이로 보이는 여래는 머임?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일 정도면 더럽게 큰 거 아니냐?]
[게임하고싶다 ;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여래 겁나 큼, 여기 하남 아님? 지금 하남 좆된 거 아니냐? 보니까 개박살 각인데.]
[내인생레전드: 안 그래도 지금 전국 헌터들 전부 모여서 시민 구출한다고 뉴스 오지게 뜨던데, 게다가 지금 패도 길드 장원밖에 피해가 없어서 구출 순조롭다고 뉴스 떴더라.]
[방구석김씨: 지금 여래랑 싸우는 거 김현우지? 지금 싸우는 거 보고 싶은데 가까이 스트리밍하는 애 없나?]
[호로록: 그게 있겠음? 보니까 저기는 지금 터지는 게 장난 아니던데, 사실 이거 영상 송출하는 사람도 좀 미친 것 같음.]
[우에에에에에엑: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애초에 김현우가 싸우고 있는 곳 송출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음, 지금 헌터킬에 올라온 글 보니까 한강 근처에서는 핵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는데ㅋㅋㅋㅋㅋ]
[딱대: 그래서 누가 우리 팀이냐니까? 이 새끼들 채팅 치는 놈들은 많은데 도무지 제대로 대답하는 놈이 하나도 없누]
[세최남: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 병신아ㅋㅋㅋㅋ 여기 채팅치고 있는 놈들도 다 이제야 스트리밍 보고 있는 애들인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간나야.]
[내인생레전드: ㅇㅈ 또 ㅇㅈ]
[딱대: 이 새끼들 갑자기 욕 박는 거 봐라??? 인성파탄자 새끼들 왤케 많누 ㅋㅋㅋㅋㅋㅋㅋ 그냥 물어본 거 가지고도 화를 오지게 내네, 평소에 화가 많으신 분들인가;
……
……
……
.
------
쥬르륵 올라가고 있는 채팅방을 보며, 하남의 아파트 옥상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방송을 송출하고 있는 B급 헌터 '홍종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박, 이건 초대박이야!'
그는 주르륵 올라가고 있는 채팅에 더불어, 이 실시간 스트리밍 방송의 숫자가 10만 명을 가뿐이 넘어가고 있는 것을 보며 미소 지었고.
'이 영상이 그대로 유튜브에 올라가기만 하면.'
그는 몇만밖에 없는 자신의 구독자 수가 한 번에 백만까지 뛰어오르는 상상을 하며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위험하기는 하다만.'
홍종태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바라봤다.
다행히 하남 전체에 거대한 피해가 일어나고 있지는 않았으나 세차게 내리는 비는 거의 홍수를 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수준이었고.
꽈르르릉! 꽝!
하늘에서 수시로 내리치는 번개는 혹시 자신이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무척이나 자주, 그리고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저런 괴수들 싸움을 가까이서 찍고 있으면 당연히 위험하지 않을 리 없지.'
하지만 그런 위험성을 알고 있다고 해도, 홍종태는 영상을 찍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돈이 되니까!'
-지금 찍고 있는 영상은 분명 엄청난 돈이 될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상당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영상을 찍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곧 그는-
"……어?"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신기한 것을 보았다.
"저건……."
그가 본 신기한 것.
그것은 바로.
"……까마귀?"
까마귀였다.
세찬 빗속을 뚫고 날아가고 있는 까마귀.
허나 그가 그 상황을 특이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바로-
"……저게, 몇 마리야?"
하늘을 새카맣게 덮을 정도로 많은 까마귀가, 어느 한곳을 향해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B급 헌터가 세찬 빗속을 뚫고 날고 있는 까마귀를 보고 있을 때, 김현우가 있는 그곳에선.
"……무슨!"
범천은 김현우의 최후를 장식하려는 그 순간 나타난 제천대성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고.
"왜 그렇게 놀라?"
그런 범천의 모습을 바라본 제천대성은 이내 씩 웃으며-꽝! 과드드득!
아직 나무줄기를 두르고 있지 않은 범천의 얼굴을 발로 후려쳤다.
나무줄기를 부수고 날아가는 범천, 그와 함께 제천대성은 김현우의 목덜미를 잡은 채 그대로 점프를 뛰었고.
"멍청하긴."
꽝!
이내 제천대성은 자신의 어깨를 찌른 여래를 보며 비웃음 남긴 채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거리를 벌리고 나서야, 김현우는 제천대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그의 모습은 이전에 보았던 모습과는 확실히 바뀌어 있었다.
우선 제일 처음 보인 것은 그의 몸에 입혀져 있는 칠흑색의 갑주.
딱히 모양은 변하지 않았으나 그의 황금쇄자갑은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제천대성의 뒤에는 없었던 검은 망토가 생겼다.
그다음은 바로 제천대성이 목에 걸고 있는 가면이었다.
예전 만년빙정이 역병군주의 업을 사용하면서 썼던 가면을, 제천대성은 얼굴에 쓰지 않고 목에 걸고 있었다.
"왜, 나 간지나냐?"
김현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제천대성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고. 그는 이내 대답했다.
"업이 좀 쓸 만했나 봐?"
"뭐,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구색 맞추기 정도는 되더라고?"
제천대성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잘 사용했네? 처음 넘겨줄 때는 이런 걸 어떻게 쓰냐고 없는 투정은 다 부리더니."
"나라서 잘 사용한 거야, 애초에 근접전을 주로 하는 애들한테 이 업을 주면 제대로 사용도 못할걸?"
"하긴."
김현우는 이전, 만년빙정이 역병군주의 업을 사용했을 때를 떠올렸다.
분명 그의 본연의 능력인 냉기는 김현우의 몸을 순식간에 얼려버릴 정도로 강력해졌으나 그의 전투능력 자체는 오히려 떨어졌었다.
"사용할 만해?"
그것을 떠올리며 김현우가 묻자 제천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도술을 쓸 수 있어서 그런가? 그래도 활용할 만은 하더라고. 뭐, 이 녀석의 지팡이는 아예 못 써먹을 정도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등에 있는 지팡이를 가리켰고, 이내 제천대성과 김현우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시선을 돌려 범천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제천대성……!"
그리고 그곳에는 제천대성의 발에 후려 맞았던 범천이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구? 이름도 기억하고 있엇네?"
"잊을 리가 없지! 정복자의 힘을 거부하고 자신의 힘을 되찾겠다면서 탑을 다시 오르기 시작한 멍청이를 어찌 잊을 수 있겠나?"
범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제천대성은 피식 웃으며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기는 한데, 그건 알고 있냐?"
"……그건!!"
제천대성이 꺼내 든 것,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을 붉게 태워버릴 정도로 빨갛게 물들어 있는 언월도였다.
"네가 데려온 놈, 나한테 뒤지게 처맞다가 죽었는데?"
제천대성이 비릿하게 웃으며 붉은 언월도를 자신의 어깨에 들쳐 매자 범천은 그제야 진상을 파악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연락을 받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것이었나?'
확실히 제천대성이 들고 있는 팔열도(八熱刀)는 바로 팔한성군이 가지고 있던 것이 맞았다.
'그렇다면 내가 데려온 다른 녀석들도 현재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건가?'
그는 자신이 데려왔던 또 한 명의 정복자를 떠올리며 생각을 이어나가기 시작했으나 이내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하던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지금 생각해 봤자 이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선은 이 상황을 끝낸다.
그렇게 생각한 범천은 이내 똑바로 자신을 마주 보고 서 있는 김현우와 제천대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래? 그건 참 유감이네. 근데, 감당되겠어? 보니까 일 대 삼으로도 아주 뒤로 구르고 앞으로 구르고 지랄을 떨더만."
제천대성의 이죽임.
범천은 말없이 연꽃을 들고 있는 손을 한번 휘적였고, 곧 그와 함께 김현우의 공격에 맞고 떨어져 나갔던 광목천왕과 지국천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걱정 마라, 이번에는 나도 같이 움직일 테니까. 게다가-"
그와 함께 말한 범천은 곧 어디에선가 나무줄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곧 범천이 꺼낸 나무줄기에서 무엇인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았다.
지국천왕과 광목천왕과 비슷한 크기로 그 외형을 만들어가는 두 개의 형상.
"너까지 포함해도 안 될 것 같으니까 또 친구 만드냐?"
김현우가 이죽거림에도 불구하고 범천은 묵묵히 나무줄기를 이용해 두 개의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곧 얼마의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증장천왕(增長天王)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범천은 남아 있던 두 장의 꽃잎을 소모해 원래 만들어 놓았던 두 장군과 같은 형상의 장군들을 만들었다.
여래의 머리 위에 위치한 장군은 창과 비슷해 보이는 비파를 들고 있었고.
여래의 아래쪽에 위치한 장군은 각각 왼손과 오른손에 창과 칼을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제천대성은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거, 진짜 여래도 아닌 꼭두각시랑 마찬가지로 꼭두각시 사천왕을 만들었다고 가오는 오지게 잡네."
"꼭두각시가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내 위업(偉業), 칼파의 연꽃을 이용해 창조한-"
"뭔 소리인지 모르겠으니까 아가리 안 털어도 돼."
제천대성의 말에 빈정이 상했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범천.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거들었다.
"진작 나도 그렇게 말 좀 끊을 걸 그랬네."
그의 비웃음에 범천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나 지켜보지."
"다구리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나 보네?"
제천대성이 미소를 지으며 금강여의봉을 자신의 손에 쥐자, 범천은 말없이 손을 휘둘렀고.
촤아아아악!
"!"
"어이쿠."
그와 동시에, 한강의 수면 아래에서는 수백, 적어도 수천은 되어 보이는 나무줄기들이 튀어나왔다.
미관상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모습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고, 범천이 움직이려는 그 순간-쿠그그그그그그그극!!!!!
거대한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공기를 찢는 소리에 김현우와 제천대성, 그리고 범천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하늘로 돌렸고.
곧 그곳에서, 김현우와 제천대성은 한강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운석, 아니 고래를 볼 수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거대한 고래는 윗부분이 완전히 터진 채 여래사천경과 김현우가 마주보고 있는 가운데에 떨어졌고-우지지직! 꽈아아아아앙!!!
김현우는 곧 수면 위에 빠져나왔던 나무줄기가 산산이 박살 나며 거대한 고래가 한강에 처박히는 것을 목격했다.
일순 여래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치솟아 오르는 물보라.
그리고-
"별거 아니군."
김현우는 곧 자신의 하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번에는 감히 천존의 형상을 따라 하는 죄인을 벌하면 될 차례인가?"
-하남 전체에 깔린 먹구름을 유영하고 있는 청룡이, 푸른 번개를 모으며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235
235. 범천(梵天)의 연꽃은 누구에게로 향하는가 (5)조금 전까지의 싸움으로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한강.
그곳에서 범천(梵天)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청룡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어디서 일개 하찮은 사방신(四方神)이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범천의 노기가 서린 어투.
허나 그런 범천의 말에도 청룡은 오히려 그런 그를 조롱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설마 너는 너 자신이 정말 범천(梵天)이라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비웃어주고 싶군."
"뭐라고!"
"네 녀석은 그분이 아니다, 아무리 다른 인격을 죽이고 그분의 위업(偉業)을 탈취해 창조를 손에 넣었다고는 하나 결국 네 본질은 하찮은 조각 중 하나다."
"네 녀석……!"
범천이 분개하는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말했다.
"쟤들 뭔 소리하냐?"
"나도 잘 몰라."
"너는 왜 몰라?"
김현우가 제천대성을 돌아보자 그는 여의봉을 든 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하늘의 이야기를 어떻게 알아? 애초에 나는 그 꼰대한테 직함을 하나 받기는 했어도 딱히 하늘에서 생활한 건 아니었다고."
-거기에 덤으로.
"애초에 저런 역사 같은 이야기는 잘 모르지."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뭐……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네."
"……무슨 의미야? 왠지 좀 기분 나쁘게 들리는데."
제천대성이 떨떠름하게 김현우를 바라봤으나 이내 그는 가볍게 여의봉을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김현우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렸고, 이내 범천의 주변에 있는 사방신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와 별개로, 저것들은 무엇을 모티브로 창조했는지 좀 알 것 같긴 해."
"그건 또 알고 있어?"
김현우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지금 저 범천이란 녀석이 모방한 저 거대한 조각상의 실체에는 진 빚이 조금, 아니 너무 많아서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쯧 하고 혀를 찼고, 김현우는 그런 제천대성을 보며 입을 열었으나-
"아무튼 나는 조각 따위에게 굳이 존대를 사용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김현우와 제천대성의 대화는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범천에 의해 끊기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싸움.
여래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사방신들이 순식간에 날아올라 제천대성과 김현우에게로 도약하고, 거대한 여래가 쥐고 있던 거대한 도와 창을 하늘에 있는 청룡에게 겨눈다.
그것을 기점으로 시작된 싸움.
'아직은 움직일 수 있어.'
김현우는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지국천왕과 광목천왕을 보며 빠르게 자신의 몸을 체크했다.
아까 전 연속으로 순뢰격을 사용한 덕분에 몸 상태가 만전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아직은 괜찮았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달려드는 지국천왕과 광목천왕을 보며 마주 달려들었고.
꽈아아아앙!
청룡이 내리치는 거대한 번개와 함께, 지국천왕은 자신이 들고 있던 거대한 칼을 휘둘렀다.
오른쪽 사선으로 내리긋는 칼.
김현우는 몸을 비트는 것으로 지국천왕의 칼을 피해냈으나, 그 옆에는 광목천왕이 김현우를 향해 삼지창을 내찌르고 있었다.
허나 그런 상황에서 김현우는 몸을 빼는 것이 아닌, 오히려 자신의 몸을 광목천왕의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콰드드득!
김현우는 자신이 순뢰격의 묘리를 이용해 후려친 광목천왕의 명치를 후려 쳤다.
우지지직!
선명하게 들려온 소리.
김현우는 그의 몸을 후려치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데미지는 있었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자리를 잡는 두 장군을 보며 김현우는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은 건 아닌지 고민했었다.
허나 조금 전의 파열음은 분명 광목천의 내부에서 들려온 소리였고, 그렇기에 김현우는 이 장군들에게도 내구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치를 맞은 광목천왕이 저 멀리 날아가고,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보탑을 들어 올리는 광목천왕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삼지창을 양손으로 잡아 그 대를 이용해 김현우의 주먹을 막아내는 광목천왕.
김현우는 그 틈을 노리고 발을 휘둘렀으나-
"!"
콰득!
김현우의 발은 광목천왕에게 닿지 못했다.
"쯧!"
그것은 바로 자신의 발을 붙잡은 나무줄기 때문.
김현우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미 범천의 뜻대로 움직이는 나무줄기는 한강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광목천왕에게 하려는 공격을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그의 삼지창을 피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싸움.
제천대성은 자신에게 다가온 증장천왕과 다문천왕을 상대했고, 청룡은 자신을 노리며 무수히 많은 손을 휘두르는 여래를 상대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
"큭!"
범천은 인상을 찌푸리며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밀리게 될 줄이야!'
물론 지금 당장 전황 자체가 엄청나게 밀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범천은 분명 자신이 아주 조금씩이지만 밀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고.
'고작 위업(偉業) 하나 가지지 못한 녀석들에게……!!'
그렇게 격분했다.
분명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 급이 미묘한 이들이었다.
한 명은 설계자에게 몸을 빼앗겨 한낱 업으로써 존재하던 이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자신의 업을 찾기 위해 정복자의 직위를 버리고 계속해서 탑을 오르던 이였으며.
마지막 한 명은, 애초에 이 탑 안에서 자신의 '업'을 쌓은 필멸자였다.
'이런 놈들에게 밀린다고? 이 내가?'
그렇기에 범천은 이를 악물며 창조물들을 상대하고 있는 그들을 바라봤고. 이내 망설임이 느껴지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왼손에 놓인 연꽃을 바라봤다.
이제는 큰 꽃잎은 없고, 자잘한 꽃잎들이 남아 있는 연꽃.
그는 망설였으나 이내 곧 굳은 표정을 지으며 결심했다.
'어차피 지금 이 순간에 저 녀석을 죽이지 못한다면 계획이고 거사고 뭐 하나 제대로 이뤄낼 수 있는 게 없다……!'
그렇게 생각한 범천은 이를 악물고는 자신의 왼쪽에 있는 연꽃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연꽃잎.
그리고 그렇게 퍼져나간 연꽃잎은 바람에 날리듯 살랑살랑 움직여 나무줄기에 닿기 시작했고-
"저건 또 뭐야……!?"
곧 바닥에 닿은 연꽃들은 천군(天軍)이 되었다.
연꽃잎에서 태어나기 시작한 창과 칼을 꼬나쥔 병사들은 자신의 외형이 전부 만들어짐과 동시에 전투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한강의 일부분을 덮을 정도로 증식한 천군.
허나-
"진짜 숫자 싸움으로 가 보자 이거지!?"
-제천대성은 자신에게 붙은 증장천왕을 밀어내며 그렇게 말하곤 이내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마치 범천에게 대답하듯 소리쳤다.
"물량전은 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마!"
그와 함께 제천대성은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까마귀 가면을 일순 올려 썼고-까악! 까아아악!
-그와 함께, 분명 보이지 않던 까마귀들이 하늘에 생기기 시작했다.
수 마리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수십을 넘어 수백까지 불어나기 시작한 까마귀들.
그 까마귀들은 하늘을 날았고-
"쳐라!"
-곧 까마귀들은 제천대성의 명에 따라 만들어진 천군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곧 천군을 상대하기 위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수백, 수천의 까마귀들은.
씨익!
모두 일제히-
"놀아보자!"
-제천대성이 되었다.
이미 한강의 수면을 덮고 있는 나무줄기를 밟고 맞은편에 자리한 제천대성들은 일제히 천군에게 달려들어 전투를 시작했고.
"고작 이런 가짜에게 당할 정도로, 나는 무르지 않다!"
꽈르르릉!!!!
먹구름에서 떨어져 내린 수십 발의 번개가, 칼을 휘두르고 있는 여래의 손을 박살 냈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
김현우는 자신에게 달라붙는 장군들을 떼어내고 여래의 근처에서 나무줄기를 조종하고 있는 범천을 바라봤다.
'역시 이 싸움을 끝내려면 범천을 끝내야 한다.'
계속해서 이 난전을 이어나가 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김현우는 제천대성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야! 좀 도와줘!"
김현우의 외침에 다문천왕을 떼어내고 자신을 바라보는 제천대성.
분명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짧은 눈빛을 교환했을 뿐이었건만 제천대서은 김현우의 뜻을 잘 알았다는 듯 입가를 비틀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길어져라 여의!"
이내 자신이 손에 들고 있던 여의봉을 길게 만들어 크게 휘둘렀다.
그와 함께 제천대성이 휘두른 여의봉에 맞아 한강을 향해 날아가는 증장천왕.
그러나 제천대성은 거기에서 끝내지 않고 여의봉의 길이를 더 늘려 김현우에게로 향하고 있는 지국천왕과 광목천왕을 후려쳤고.
김현우는 자신에게 붙어 있던 두 장군이 떨어지자마자 범천을 향해 도약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
그 찰나의 도약.
허나 그렇게 빠른 움직임에도 범천은 김현우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범천은 다가오는 김현우를 보며 인상을 구긴 채 자신의 손을 크게 휘둘렀고, 그와 함께 제천대성을 상대하고 있던 천군들이 그를 막기 위해 그에게로 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되지!"
천군을 상대하던 수많은 제천대성의 분신들은 김현우에게로 쏘아져 나가는 천군들을 막아냈다.
숫자를 숫자로 제압한다는 말을 그대로 재현한 듯, 제천대성의 분신들은 쏘아져 나가려는 천군들을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고, 김현우는 순식간에 여래의 근처까지 다가올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다가갔음에도 아직 김현우를 방해하는 요소는 많았다.
"!"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바로 김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치솟아 오르는 나무줄기가 있었고, 그 위로는-쿠그그그그긍!!!
김현우가 가는 길을 차단하기 위해, 여래의 손과 무기들이 김현우와 범천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하나의 손만 움직였다면, 지금은 여섯 개의 손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여래의 모습.
그렇기에 김현우는 이곳에서 인지를 확장해야 하나 했으나.
"천재(天災)-"
그 생각을 제대로 이어나갈 시간도 없이-
"-멸진(滅盡)"
-그는, 청룡의 말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수백, 수처발의 번개에 여래의 팔이 박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방해물을 모두 제거하고 나서야 범천의 앞에 도달한 김현우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이미 자신을 저지하는 것은 포기한 채 나무줄기로 자신의 몸을 감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인지를 확장시켰다.
순식간에 느려지는 세계.
김현우만 들어올 수 있는 그 아주 짧은 찰나의 세계에서, 김현우는 욱신거리는 육신을 다잡으며 자세를 잡았다.
허나 그 자세는 그동안 김현우가 순뢰격을 사용할 때 쓰던 자세가 아니었다.
'순뢰격으로는 범천을 죽일 수 없다.'
그가 잡은 자세는 바로 수라무화격을 쓸 때 잡는 자세.
범천의 앞으로 다가간 김현우의 몸이 자세를 잡고, 그와 동시에 남아 있는 마력과 도력을 끌어 올렸다.
일순 몸에 느껴지는 격통을 느끼며 김현우는 이를 악물었으나, 그럼에도 도력과 마력의 순환을 멈추지 않았고, 김현우는 느릿하게 움직이는 범천의 앞에서, 드디어 정권의 자세를 잡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들과 금방이라도 쏘아져 나갈 것 같은 팔.
한없이 느려진 시간 속이기에 외부로 뻗어 나가는 마력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임계점에 다다른 김현우의 주먹이 범천의 몸을 노리고 뻗어져 나간 그 순간 인지는 풀렸고-삐────────────!!!!
분명 개판 오 분 전이었던 세상은, 푸르게 물들었다.
# 236
236. 범천(梵天)의 연꽃은 누구에게로 향하는가 (6)세상이 푸른빛에 물든다.
거대한 여래도 마찬가지로 푸른빛에 잡아먹히고, 개판 오 분 전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던 한강도.
그리고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유영하고 있는 청룡도, 푸른빛에 물들어 일순 고요한 상태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일순간의 빛이 사라졌을 때.
"……."
김현우는 자신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범천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래,
자신의 주먹에 의해 상체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범천의 모습을.
김현우에게 의해 뚫린 구멍에서는 선혈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은 하얀 광휘뿐.
"……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현우의 귓가에 들린 소리에 그는 시선을 돌려 범천의 얼굴을 바라봤고.
"내가, 지다니."
범천의 말.
그 목소리를 들으며 김현우는 이내 입가를 비틀며 대답했다.
"내가 말했지? 나한테 그런 말 하고 제대로 살아 있는 놈이 없다니까?"
김현우의 말에 그는 무엇인가가 허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이내 입을 열려는 듯 몇 번이고 자신의 입을 오물거렸으나 쉽사리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 마침내 굳어 있던 범천의 몸은 뚫린 구멍을 중심으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른 정복자들과는 달리 새하얀 광휘를 뿌리며 사라지기 시작하는 범천의 몸.
그렇게 돼서야 그는 김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
김현우는 범천의 말을 듣고 순간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누굴 이겨?"
"탑."
범천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고? 탑?"
김현우의 되물음.
허나 범천이 말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 범천의 몸은 순식간에 새하얀 광휘에 둘러싸여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는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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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위치: 지하계층
[기술자를 잡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정보 권한이 '상위' → '최상위'로 변경됩니다!]
[현재 정보 권한은 '최상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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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떠오른 로그를 보며, 이제야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사라지기 시작하는 범천의 군세.
제천대성의 분신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던 천군(天軍)들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지고, 제천대성을 상대하고 있던 네 명의 장군도 마찬가지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엇?"
김현우가 밟고 있던 거대한 여래도, 새하얀 광휘를 뿌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지는 범천의 창조물들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여래의 어깨 위에서 범천이 있던 자리에 남아 있는 하나의 연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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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파의 연꽃
등급: ??
보정: ??
스킬: ??
-정보 권한-
모든 이들의 하늘(天)이라고도 불리는 자이자 세상 만물을 창조했다고 알려진 브라흐마에게서 떨어져 나온 조각 중 하나인 범천(梵天)이 가지고 있던 연꽃이다.
이 연꽃은 범천(梵天)이 자신을 고행의 업으로 밀어 넣어 스스로를 혹사하고 끝없는 고통의 수행과 인내의 노력 끝에 피울 수 있는 연꽃으로. 한 장 한 장의 꽃잎에 '칼파의 업(業)'이 깃들어 있다.
칼파의 업(業)은 범천이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버려가며 만든 고행의 결과물로, 한 장 꽃잎을 이용해 '창조'를 행할 수 있으며 그 외에 나 있는 작은 꽃잎은 큰 꽃잎과는 다르게 비교적 작은 창조를 행할 수 있다.
칼파의 꽃잎을 얻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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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김현우는 주워든 연꽃의 로그를 읽다가 갑작스레 깨지기 시작하는 문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고, 이내 그는 눈앞에 떠 있는 로그를 뒤로 하고 범천이 남긴 연꽃을 바라봤다.
그 꽃잎이 전부 사라져 버려, 봉오리만이 위태롭게 남아 있는 칼파의 연꽃.
김현우는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 이내 하수분의 주머니에 칼파의 연꽃을 챙겨놓고 뒤를 바라보았다.
"……."
그제야 제대로 보이는 개판 오 분 전인 풍경.
천군과 제천대성의 분신은 사라졌으나, 이상하게도 범천이 한강에 꺼내놓은 엄청난 양의 나무줄기는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개판이 나 있는 한강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에휴 씨발 모르겠다."
-이내 자신의 몸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대 자로 누워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김현우가 제천대성과 청룡의 업을 얻었다고 해도 그 업을 모두 얻은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은데다가, 무엇보다도-
'아직도 머리가 띵하네.'
시공진에서 빠져나올 때, 김현우가 느꼈던 두통은 그야말로 상상 초월이었다.
차라리 발끝부터 몸을 살살 갉아먹는 고통이 더 참을 만한 정도.
아무튼 그런 고통을 느낀 뒤에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김현우는 싸움을 벌인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이곳이 한강 한가운데라는 것도 기억 저편으로 날려버린 채 그대로 본능에 몸을 맡겨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김현우가 범천을 완전히 처리했을 때, 하와이에서는-
"허억-! 허억-!"
-나마즈에가 거친 숨을 내쉬며 눈앞에 있는 두 명의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명은 괴력난신(怪力亂神)의 모습으로 변모한 미령이였고, 또 다른 한 명은 그런 미령의 뒤에서 몇 권의 책을 허공에 띄워놓고 있는 '하나린'이었다.
딱히 큰 피해가 없어 보이는 둘.
허나 그런 두 사람에 비해 나마즈에는.
"이런 젠장!"
상당히 깊은 피해를 입었다.
당장 그의 오른팔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가 입고 있던 갑옷은 이미 미령의 공격에 몇 번이고 박살이나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와 함께 온몸의 상처에서 뿜고 있는 붉은 선혈은 그의 모습을 조금 더 초췌하게 만들어 주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년들이……!!'
나마즈에는 자신의 눈가를 가리는 붉은 선혈을 억지로 털어내며 그녀들을 바라봤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러나 방심의 틈은 보이지 않은 채 나마즈에를 바라보고 있는 둘.
'차라리 개인으로 상대했다면……!'
나마즈에는 미령과 하나린을 한차례씩 바라봤다.
한 년은 자신보다는 조금 떨어지기는 하나 분명 이곳이 9계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무력이 있었고, 그 뒤에 있는 년은 앞에 있는 년만큼 압도적인 무력은 없지만-
'이상한 마법을 쓰다니……!'
-오히려 앞에 있는 년보다 더 성가시게 자신이 대응하지 못하는 종류의 마법을 사용했다.
정확히는 언령(言?)을.
만약 그녀들을 개개인으로 상대하면 나마즈에는 충분히 그녀들을 상대할 수도 있고, 오히려 그녀들을 압도적으로 깔아뭉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들이 개인이 아닌 페어라는 것.
나마즈에에게 달려드는 미령이 빈틈을 찾아 공격을 시도하면 하나린이 언령을 이용해 막아내고, 반대로 그가 하나린을 먼저 처리하려 들면 미령이 그의 뒤통수를 쳤다.
분명 나마즈에는 처음 그것을 성가신 정도로 여겼으나-
'상황이 이렇게까지 몰릴 줄이야……!'
-점점 자신이 밀리기 시작하고 사태가 심각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미 그는 자신의 오른팔을 미령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완전히 뒤바뀐 판.
그런 상황이기에 나마즈에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뚫어보려 했으나.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물고기."
"뭐?"
미령은 그런 나마즈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넌 여기서 죽는다."
"!!!"
그와 함께, 나마즈에의 몸이 멈췄다.
그는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보려 했으나 그의 몸은 마치 무거운 무엇인가에 짓눌린 듯 아예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그에 나마즈에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미령의 뒤에 있는 하나린을 바라봤다.
책을 펼친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마즈에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입가를 씩 올리며 대답했다.
"설마 내가 쉬는 시간을 주고 있던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재미있다는 듯 입가를 비틀어 올린 하나린의 표정을 보며 나마즈에는 당했다는 생각에 악물었고, 그와 함께 미령은 나마즈에의 앞으로 와 자세를 취했다.
미령의 주변의 모이는 붉은색의 패도적인 기운.
나마즈에는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고-
"살려줘!"
-이내, 자세를 잡고 있는 미령을 보며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는 미령이 입을 열기도 전에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다.
"제발…… 제발 살려줘! 지금 날 여기서 살려주면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이곳에서 꺼질게! 그리도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겠어! 나 재앙신 나마즈에의 이름을 걸고 약속까지 할게!"
나마즈에의 입에서 나온 목숨 구걸.
'여기서 죽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아무것도!'
나마즈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난, 나는 반드시 위에 올라가야 해! 탑의 위에! 반드시!'
목숨의 구걸은 치욕스러웠으나 나마즈에는 꼭 이뤄야 할 일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업(業)까지 내놓으며 자신의 목숨을 구걸한 것이었으나.
"유감이군."
그럼에도, 미령의 몸에 모인 패도의 기운은 오히려 더더욱 거세지며 주변의 지반을 뒤집어 놓기 시작했다.
"왜……! 살려줘! 살려달라고!"
나마즈에의 필사적인 외침.
조금 전까지 그녀들을 필멸자라고 깔보던 모습과는 너무 상반되는 모습은 그야말로 웃음거리와 같았으나 나마즈에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나마즈에게 아무리 그런 모습을 보이더라도 미령은 묵묵히 붉은 마력을 자신의 채내에 쌓기 시작했고.
마침내.
쿠그그그그그긍!!
그녀의 주변에 모인 마력이, 주변을 완전히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거대한 마력의 양에 지금까지 목숨을 구걸하던 나마즈에의 표정이 뒤바뀌고 미령은 그때가 돼서야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을 살려 줄 수는 없다."
"왜! 왜!!"
나마즈에게 비명을 지르듯 외치자 미령은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듯 나마즈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도 그럴 게"
미령은 걸음을 옮겼다.
무척이나 가벼운 한 걸음.
그러나-
"크에에에엑!!!"
-미령이 단 한 걸음을 걷는 그 순간, 나마즈에의 몸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닌, 심각할 정도의 압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마즈에의 피부가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찢어지고, 그의 작은 눈이 터질 듯이 튀어나온다.
몸이 부풀어 올라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비명만 지르는 나마즈에,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미령은 무감정한 표정으로 또 다음 한걸음을 옮겼다.
"이건-"
이제 나마즈에의 몸은 부풀다 못해 사방에서 붉은색의 피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극도의 압축을 버티지 못하고 피부를 뚫고 나온 피가 사방으로 향해 터져 나가고, 미령의 주변으로 몰아치던 붉은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이제는 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압축되어 괴상한 생물체가 되어 있는 나마즈에를 보며 미령은-
"스승님이-"
삼보(三步)
-마지막 걸음을 옮겼다.
"내게 친히 하명해 주신 일이기 때문이다."
-멸살(滅殺)
그리고, 나마즈에는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 237
237. 지금 나한테 뭐 한 거야? (1)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의 1층에서,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빽빽하게 앉아 있는 기자들을 보며 심드랑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그동안 김현우를 많이 상대해 봐서인지, 그가 먼저 말하기 전에는 입을 열지 않고 있는 기자들의 모습.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병원에 환자보다 기자가 많은 건 말이 안 되니까 그냥 심플하고 간단하게 질문 몇 개만 받겠습니다."
그의 말에 기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김현우는 대충 주변을 둘러보다 바로 앞에 있는 기자에게 손가락을 가져갔다.
김현우가 손가락을 가리킨 기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소개는 필요 없고 간단하게 질문만 합시다."
그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던 기자는 이내 슬쩍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리 준비해 놓은 질문을 꺼냈다.
"혹시 최근 유튜브에 화제가 되고 있는 김현우 헌터 본인의 전투 영상을 알고 계신가요?"
"네,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간땡이가 큰 놈이 그 재해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신과 청룡, 그리고 나중에는 제천대성이 합류에서 싸우는 장면을 찍었다.
김현우가 얼마 전에 스마트폰을 이용해 보았던 영상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 영상에서 봤을 때, 김현우 헌터는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청룡과, 추정하기로는 김현우 헌터가 예전에 싸움을 벌였던 제천대성과 같이 팀을 맺고 싸우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게 맞습니까?"
기자의 다음 물음에도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보면 알만한 걸 굳이 물을 필요가?"
그의 대답에, 기자는 살짝은 흥분한 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지금 혹시 그 건으로 인해 네티즌이 열띤 토른을 벌이고 있는 것도 알고 있으신가요?"
"열띤 토론?"
김현우의 되물음에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토론의 주된 내용은 김현우 헌터와 같이 싸웠던 제천대성과 같이 팀을 짜고 싸운다는 것에 대해서 많은 토론이 오가고 있는데요, 그중에서는 혹시 김현우가 등반자와 판을 짠 게 아니냐는 의혹도-"
"아, 또 선 넘네."
기자의 물음에 김현우는 인상을 팍 찌푸렸고, 기자는 굉장히 당황한 듯 마이크를 가지고 있던 손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아, 아니 제가 그런 게 아니라 요즘 인터넷 여론에서 그런 의견도 종종 등장한다고 말씀드리려-"
"그러니까 애초에 그 말을 꺼낸 것 자체가 문제라는 소리야. 어떻게든 자극적인 기사 뽑아먹고 싶어서 지구 지키려고 개고생한 사람한테 그딴 질문을 질문이라고 하냐?"
김현우가 인상을 팍 찌푸리자 기자는 슬쩍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던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거랑 별개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개소리 까지 마시고 발 닦고 자라'입니다. 제가 이 개소리 들으려고 다 박살 나던 지구 구한 게 아닌데 갑자기 겁나 후회되네요."
김현우의 말에 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노트북과 각각의 전자제품 등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고, 그는 그런 기자들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으며 곧바로 다음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김현우 헌터! 이번에 김현우 헌터가 상대한 거대한 여래가 사라지고 나서 갑작스레 급증한 재앙들이 돌연 그 모습을 감췄는데 무엇인가 관계가 있나요?"
"그걸 제가 알고 있으면 이미 말하지 않았을까요?"
"김현우 헌터님! 현재 일어나고 있는 헌터들의 전체적인 능력향상 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
"별생각 없습니다."
"김현우 헌터! 1주 전 여래를 처리하고 난 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영목이 아이템을 만드는데 매우 좋은 S급 재료로 쓰인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 전 세계에서 영목을 구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한번 사람 보내서 저한테 딜…… 아니, 패도 길드랑 암중 길드에 사람 보내서 딜 한번 쳐보라고 하세요. 그쪽에서 알아서 할 겁니다."
그 뒤로도 김현우는 몇몇 기자의 말에 대답했고.
김현우가 한번 입을 열 때마다 기자들은 정신없이 노트북과 각자의 전자기기를 두들겨 나갔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질문은 여기까지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궁금한 거 못 물어봤으면 다음에 한 번 더 기자회견 같은 거 열 테니 그때 하도록 하시고, 다 나가세요."
김현우는 별다른 인사 없이 그 한마디만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를 향해 이동했고, 그 모습을 보며 기자들은 제각각 노트북을 열심히 두들기기 시작했다.
평소 기자들 같았으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인터뷰 대상에게 달라붙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나,
'김현우는 아니지.'
김현우에게 만약 그렇게 했다가 혹시라도 찍히는 날에는 굉장히 좋지 않은 일을 당한다는 소문(?) 덕분에, 기자들은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 그에게 달라붙지 않았다.
그렇기에 굉장히 편하게 엘리베이터를 탄 김현우는 자신의 병실로 향하기 전 이 병원에 같이 입원해 있는 천마의 병실로 걸음을 옮겼고.
"달라붙지 마라."
"앙~♥ 왜 그러실까~!"
"……."
자신의 반대편 병실에 누워 있는 천마에게 있는 힘껏 아양을 떨고 있는 구미호를 보며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김현우의 표정을 본 것일까, 천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구미호의 머리를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달라붙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왜? 무월도 좋잖아?"
천마의 본명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구미호.
"개소리!"
천마는 차갑게 일갈했으나 구미호는 억지로 그의 몸을 비집고 들어와서 몸을 부벼댔고, 김현우는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고는 말했다.
"천마는 이상성욕자라……."
"그게 뭔 개소리냐! 아니다! 아니라고!"
다급한 천마의 변명, 김현우는 그런 천마를 보며 마치 그를 놀리듯 어깨를 으쓱인 뒤 병실을 빠져나와 자신의 병실로 향했고.
"형."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김시현을 만날 수 있었다.
"왔냐?"
"방금요. 형은요?"
"저번에 말했던 기자회견 갔다가 천마의 병실에 갔다 왔지."
김현우가 아까 그 장면을 떠올리며 괜히 웃기다는 듯 피식거리자 김시현은 그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왜 둘이 알콩달콩 하고 있는 거예요? 생각해 보니까 그 싸움이 끝났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김시현의 물음에 김현우는 곧바로 대답했다.
"뭐,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는데 대충 그 녀석에게 물어봤더니 천마가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줬다나? 뭐 대충 그렇게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우와, 진짜요?"
"왜 그렇게 놀라?"
김현우의 물음에 김시현은 대답했다.
"아니 뭐, 대충 저도 그럴 거라고는 예상했는데 사실 상상이 안 돼서요."
"뭐가?"
"천마가 구미호를 구해줬다는 게 좀."
"왜?"
김현우가 묻자 김시현은 뭘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듯 김현우를 바라봤으나 이내 그가 예전 천마와 구미호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내 간략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잠시 김시현의 말을 듣고 있던 김현우는.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어?"
"형이랑 무슨 계약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입에 달고 사는 게 '계약만 아니었으면'이었어요."
"……그 정도?"
"게다가 구미호도 그런 천마를 가만 놔두지 않고 계속해서 갈궜고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아까 전의 풍경을 떠올렸다.
꽤 큰 부상을 입어 병상에 누워 있는 천마를 간병해 주는 구미호의 모습.
……물론 천마는 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으나 아주 꿀이 질질 흐를 것 같은 모습으로 천마를 간호했던 구미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김현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좀, 상상이 안 되긴 하네."
"저는 오히려 지금 상황이 더 상상이 안 돼요. 분명 직접 보고 있는데도 이물감이 들 정도라니까요."
김시현의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하며 병실 침대에 누웠고.
"그래서, 이제 슬슬 퇴원할 거예요?"
"그래야지."
곧 김시현의 물음에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범천을 상대하고 일주일,
그동안 김현우는 병원에서 최대한의 안정을 취하며 체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 결과, 김현우는 오늘을 기점으로 자신의 몸을 거의 완벽하게 회복할 수 있었다.
'……천마는 조금 더 요양을 해야겠지만.'
김현우는 천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괜찮았으나, 실제로 그는 팔한성군을 상대하느라 얻은 내상이 굉장히 심했다.
'뭐, 어차피 당장 급한 일은 없어서 천마가 힘을 쓸 일은 없지만'
범천이 죽고 난 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제일 먼저 변화가 생긴 것은 바로 재앙의 출현 빈도.
분명 범천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재앙의 출현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져 있었다.
그러나 그를 죽이고 난 뒤, 재앙의 출현 빈도는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1주가 지난 지금에 와서 재앙의 출현 빈도는 하루에 한 건 정도로 줄어들었다.
'…….'
아무튼, 현실은 그런 상태였고, 김현우도 아직 밀린 일을 전부 처리하지 못했기에 당분간은 움직일 일도 없었다.
'……녀석들이 다시 쳐들어오지만 않는다면.'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1주일 전과는 다른 푸른 하늘을 바라보곤-
"자 그럼 이제 슬슬 퇴원해 볼까?"
-밀린 일을 끝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대학병원의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후우-"
그곳에서 두터운 가죽 옷을 입고 있는 그녀, 하나린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곤 가만히 올라가고 있는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바라보며 자신의 작전을 다시 상기했다.
'상황 자체는 완벽해.'
자신이 수련을 하고 있던 사이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던 꼬맹이는 오늘 자신이 '몰래' 일으킨 일 덕분에 결국 잠시 중국으로 떠났고.
'사부님의 동료도 전부 떼어놨다.'
이서연은 오늘 한석원과 암중 길드에서 제안한 독립 던전 관련 회의에 참여해 세부적인 사한을 조절하고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곳에는 사부의 동료 중 한 명인 김시현이 있지는 않았으나, 하나린은 그것까지도 이미 준비를 끝내 놨다.
'김시현은, 이제 곧 아냐의 연락을 받고 나갈 거야.'
그녀는 아냐에게 기한이 오늘밖에 남지 않은 강남에서 제일 분위기가 좋다고 소문난 라운지 레스토랑의 초대권을 넘겨주었다.
물론 초대권은 어디서 받은 것이 아닌 그녀가 직접 만들었다.
그 초대권의 사용기한까지도.
'현재 시각은 오후 1시 23분.'
아마 김시현이 사부님을 만나러 왔다 하더라도, 지금쯤 그는 아냐에게 가 있을 것이었다.
만약 안 간다면 아냐에게 바가지를 긁힐 테니까.
'완벽해.'
그렇게 한번 김현우의 주변 인물에 대해서 점검을 마친 하나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지금 사부님을 찾아갔을 때,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최소 한 시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둘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후……."
하나린,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지난 한 달간 시종일관 자신이 이겼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 미령 때문이었다.
'분명 뭔가를 한 게 분명해……!'
그 진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으나 미령이 그토록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자신을 놀리는 것을 봤을 때, 하나린은 그녀가 분명 자신의 사부와 어느 정도 진도를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렇기에-
'나는 오늘, 진도를 나갈 거야……!'
하나린은, 김현우와의 진도를 빼기 위해. 이 작전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적어도 그 꼬맹이보단 더!'
# 238
238. 지금 나한테 뭐 한 거야? (2)게임 팩으로 온통 어질러져 있는 방 안.
"게임 팩 좀 치우고 살아라."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아브를 보며 그리 말했고, 아브는 괜스레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눈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말했다.
"그럼 이제 상처는 어느 정도 완치된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그래서, 별일은 없었고?"
김현우의 물음.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디언이 생각하는 별일은 딱히 없었어요. 위쪽에서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고, 범천이 죽은 뒤로 붙어 있던 1계층과 9계층이 떨어져서 다시 예전처럼 돌아왔어요."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온 것 빼고는 딱히 별일 없었다는 거지?"
"네."
아브의 끄덕거림에 김현우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왜 움직이지 않았지?'
솔직히, 김현우는 범천이 죽고 난 다음 아브에게 찾아오기 전까지 위쪽에서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죽였던 '범천'은 이 탑을 지배하고 있는 '설계자'와 같이 행동하고 있는 '기술자'였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범천을 잡고 난 뒤,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도 미리 아브를 찾아와 그녀에게 위의 동태를 살펴달라는 부탁을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분명 기술자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 네가 눈치 못 챈 건 아니고?"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묘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리더니 이내 대답했다.
"음, 생각해 보면 그럴 확률도 전혀 없는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통괄자'인 제가 이 탑에서 등반자가 내려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어요."
-설령 설계자가 직접 내려온다고 해도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묵묵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범천의 죽음이 아직 위에 알려지지 않았을 확률은?"
아브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확률은 없어요."
"……그렇게 단언할 수 있을 정도야?"
"네, 저는 이 탑의 '통괄자'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건 이 탑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설계자'도 마찬가지니까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쯧 하고 혀를 찬 뒤 물었다.
"그럼 왜 위쪽에서 움직이지 않는지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대답했다.
"솔직히, 몇 개 정도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한데, 다들 너무 애매하네요."
"……뭐가 그리 애매한데?"
그의 물음에 아브는 으음, 하는 침음을 흘리며 자신의 턱을 검지로 툭툭 두들기고는 이내 말했다.
"우선, 그건 좀 더 조사를 해볼게요. 아무래도 그냥 답변을 하기엔 너무 불확실해서, 차라리 어느 정도 조사를 해서 최대한 확률이 높은 쪽으로 대답해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런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그렇게 해."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위에서 움직임을 취하느냐 움직임을 취하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애초에 위에서 움직이지 않기만 하면…….'
준비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짐한 뒤 이내 아브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혹시라도 위에서 움직이면 바로 말해줘."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바로 말해드릴게요,"
아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문득 무엇인가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
"나 이번에 정보권한이 최상위가 되었는데, 좀 달라지는 건 없어?"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자신도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있어요. 뭐…… 사실 이미 제가 '통괄자'로 각성하면서부터 정보권한 자체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게 되어버렸지만요."
"……그래?"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아마 이제부터 '필터'가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필터?"
"네, 혹시 제천대성이나 청룡, 그것도 아니면 노아흐와 대화할 때 갑작스럽게 말이 들리지 않거나 했던 경우가 있지 않나요?"
"아."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브는 대답했다.
"네, 이제 정보 권한이 최상급이 되었으니 아마 그런 필터는 모조리 사라졌을 거예요."
"그건 좀 괜찮네."
김현우는 이전, 제천대성과 청룡의 이야기에 필터가 낀 것을 떠올렸다.
좀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으면 곧바로 귀에 걸리는 필터에 짜증 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 이외에는?"
"제가 지내는 공간이 더 커졌어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주변의 공간을 돌아봤다.
보이는 것은 수많은 게임팩들이 꽂힌 책장과 바닥에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게임팩.
"……어째 별로 늘어난 것 같지가 않은데?"
김현우가 입을 열자 아브는 대답했다.
"아뇨, 분명히 늘어났어요. 좀, 이것저것 많아서 딱히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 뿐이지……."
아브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시선을 피하자 김현우는 슬쩍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게요?"
아브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하다-
"응, 이제 몸도 회복했으니 슬슬 다시 준비를 시작해야지…… 아 참, 그전에 그걸 물어봤어야 했는데."
"?"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이제 최상급 정보 권한이 풀려서 필터가 걸리지는 않는다며?"
"아, 뭐 그렇죠?"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고, 그는 이내 아브를 바라보며.
"그럼, 그 '설계자'에 대해서 아는 것 좀 이야기 해봐."
그런 질문을 꺼냈다.
***
중국 홍콩의 패도길도 지부.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미령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 앞에 고개를 조아린 남자.
그는 바로 패도 길드 홍콩지부를 관리 하는 패도 길드 홍콩지부의 지부장이자, S등급 세계랭킹 42위인 '오룡'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앞에 서 있는 미령을 바라봤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미령의 모습을.
침묵만이 감도는 장소.
미령의 주변에 붙어 있는 가면 무사들은 전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섬뜩한 분위기가 잔뜩 풍기고 있는 그곳에서.
"……다시 한번, 사건의 진위를 말해보거라."
-미령은 입을 열었다.
"그……그것이……!"
미령의 말에 덜덜 떨며 고개를 처박는 오룡.
허나 미령은 그런 오룡의 애달픈 떨림 따위는 일체의 관심도 없다는 듯,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그녀의 시리도록 차가운 말에, 오룡은 이가 덜덜 떨리는 공포를 느끼면서도 결국 두 눈을 꾹 감으며 입을 열었다.
"그……그것이! 저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은 바로 어제 갑자기 어떤 여자가 제가 있는 곳에 침입해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뭐라고 했지?"
'내일 12시에 정확히 전화를 걸어 네 길드장을 김현우를 미끼로 사용해 홍콩으로 불러 와라.'
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그리고는 그 여자는 갑자기 사라졌고 저는 그 뒤 오늘 저도 모르게- 길드장님께……!"
오룡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깨버리겠다는 듯 땅바닥에 대가리를 처박으며 입을 열었다.
"저……저는! 분명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모……몸이 멋대로 움직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쇼. 제발……!"
그는 고개를 처박은 채 미령에게 처박았고, 미령은-까득-!
-자신의 이를 부러뜨릴 정도로 악문 채 입을 열었다.
"그 여자의 외형이 기억나느냐?"
"예?"
"외형이 기억나느냔 말이다!"
미령의 윽박에 그는 마치 계집애 같은 소리를 내뱉고는 몸을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자, 자세하게는 아니지만 분명 기…… 기억하고 있습니다!"
"외형을 말해봐라!"
"그……그것이, 허리까지 올 정도로 긴 장발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옷은 온몸을 가릴 정도의 가죽 옷을 입고 있었고-"
까드드득!
"히익! 사……살려주십쇼!"
오룡은 입을 열던 도중 들린 이 갈리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처박고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미령은 이내 시선을 돌려 순간이동 마법진을 보며 저도 모르게 외쳤다.
"이 개 같은 년이……!!"
그렇게 한참 미령이 이 장난이 하나린의 장난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서울에 있는 대학 병원에서는-
"사부님?"
"응? 무슨 일이야?"
하나린이, 김현우의 병실을 찾아와 있었다.
그녀는 병실에 엉거주춤 앉아 있는 김현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혹 어디 가실 생각이셨나요?"
"……뭐, 잠깐 들를 데가 있긴 한데,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병실의 침대에 앉았고,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하나린은 미소를 지은 뒤 김현우의 앞에 앉았다.
"후우."
그와 함께 내쉰 한숨.
하나린은 슬쩍 시간을 바라봤다.
현재 시각은 이제 1시 28분, 시간은 언제나 말했듯이 충분했다.
김시현을 포함한 사부님의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꼬맹이가 걱정이기는 했으나 그녀가 지금부터 열심히 달려온다고 해도 시간은 많았다.
허나 그럼에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녀는 김현우의 앞에서 언령의 서를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녀, 하나린은 언령의 서를 4단계까지 각성했고, 그녀는 5단계의 초입에서, 조금이지만 사람의 인지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언령을 배웠다.
물론 사람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을 정도의 인지는 아니었으나, 사람의 행동을 유도하는 정도의 언령이라면, 지금의 하나린은 충분히 가능했다.
허나 가능한 것과는 별개로 하나린은 이 상황 자체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는 했으나 달갑지는 않았다.
'역시 사부님을 언령으로 유도하는 건 좀…….'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상황 때문.
미령은 분명 하나린이 수련을 하고 있을 때 사부님과 어느 정도 진도를 뺀 상태였고, 그것을 그녀에게 가감 없이 자랑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본능적인 위기의식을 느껴 김현우와의 진도를 빼기 위해 이 상황을 만든 것이었으나,
"……."
"……?"
역시 내키지 않았다.
'아니, 아니야'
허나 그것도 잠시, 하나린은 내키지 않는 그녀의 감정을 억지로 한편으로 눌러두고 느긋하게 병상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적어도 그년에게 사부님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무조건 해야 해!'
미령은 분명 사부님과 진도를 나갔고, 하나린은 그녀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분명히 진도를 빼야 했다.
그렇기에, 하나린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김현우를 바라봤고.
이내 그녀는-
"[사부님은 이제부터 제 말을 들어야 해요.]"
-김현우에게, 언령을 사용했다.
# 239
239. 지금 나한테 뭐 한 거야? (3)병실 안.
김현우는 뜬금없이 부탁을 하는 하나린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고, 그와 함께 자신의 몸속으로 침투한 마력을 느끼며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물론 그의 몸속으로 침투한 마력은 체내에 침투하자마자 김현우의 마력에 잡아먹혀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뭘 하려고?'
김현우는 곧 하나린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굉장히 진중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린.
김현우는 하나린이 자신에게 무엇을 하려 했는지 물으려 했으나-
"뭐, 좋아."
"!"
굉장히 진중한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하나린을 보며, 김현우는 우선 그녀에게 한번 어울려 줘 보기로 했다.
"돼……됐어!"
그런 김현우의 대답에 하나린은 진중한 표정을 한 순간 밟게 핀 뒤 미소를 지으며 저도 모르게 파이팅 포즈를 취했고, 김현우는 연속에서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하나린의 모습을 보며 피식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게 하나린이 한동안 혼자 쌩쇼를 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흠…… 흠흠……."
하나린은 자신이 너무 오버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괜스레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가다듬었고, 이내 처음의 진중한 표정으로 돌아와 김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암시에 걸렸나요?"
하나린의 물음.
김현우는 어떻게 대답할까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의 대답에 다시금 환한 미소를 지으려던 하나린은 다시 표정을 바꾸고는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분명 은은한 미소만을 보여주던 하나린의 표정이 1초마다 수시로 바뀌는 것을 보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리고-
"꼬맹이…… 아니, 그리고 미령과의 진도는 어느 정도까지 나갔죠?"
곧, 하나린은 김현우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진도?"
"네 진도요."
"무슨 진도를 말하는 거야?"
김현우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묻자, 하나린은 으, 하며 침음을 흘리더니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성적인 진도요."
"이성적인?"
"그, 그러니까 있잖아요? 스킨십의 진도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거요!"
보기 드문 하나린의 격앙된 어조.
김현우는 그런 그녀의 물음에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라는 말을 하려 했으나, 이내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암시에 걸린 척을 해야겠지?'
뭐, 처음에야 그녀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단순히 궁금해서 암시에 걸린 척을 해주고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 그녀를 보고 있으니 상당히 재미있었기에 김현우는 우선 암시에 걸린 척을 계속했다.
"없는데?"
"네?"
"그런 건 없다고."
김현우의 말에 일순 하나린은 김현우를 바라보며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다시 물어봤다.
"그러니까…… 미령과 딱히 이성적인 진전이 없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건가요?"
거듭되는 하나린의 질문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없어."
김현우의 대답에 하나린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없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지난 한 달, 미령은 틈만 나면 하나린에게 은유적으로 김현우와 진전이 있었다는 것을 어필했고, 하나린도 그런 미령의 어필 덕분에 이런 식의 작전을 짤 수 있었다.
그런데 미령과 사부님이 진도를 나간 전적이 없다고?
'……도대체 뭐지?'
하나린은 그렇게 한동안 생각했으나-
'뭐 그렇게 되면 오히려 좋아.'
-그녀는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시작은 미령에게 사부님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런 작전을 짠 것이기는 했으나 만약 미령과 사부님이 전혀 진도를 나가지 않은 상태라면-
'오히려 내가 앞서는 것도 가능해!'
하나린은 미소를 지으며 김현우를 바라보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뒤.
"흠…… 흠흠……."
목까지 가다듬고 나서야 김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저기……."
살짝, 말을 더듬거리는 하나린, 김현우는 슬쩍 답답함을 느꼈으나 크게 내색하지 않고 하나린을 바라봤고.
그녀는 후, 하는 한숨을 내쉬며 이내 굳건한 결심을 다진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사부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그, 이성적으로."
하나린의 말.
그 물음에 김현우는 순간 묘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린을 바라봤고, 하나린은 그런 김현우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있을-"
김현우의 말이 들림에 따라 하나린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미소를 지으려다.
"-까 없을까?"
"네?"
이내 이어지는 김현우의 말에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김현우의 얼굴을 보며 멍한 소리를 내는 하나린을 보며,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다시 한번 말했다.
"있을까 없을까?"
피식.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자 하나린은 순간 묘한 표정을 짓다 뒤늦게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서, 설마…… 사, 사부님…… 그, 암시가…… 안 걸리신?"
"뭐? 네가 첨 내게 보냈던 마력? 그냥 없애니 없어지던데?"
김현우의 말에 사색이 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하나린.
김현우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린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
"맨날 열심히 한 표정만 짓고 있길래 그 표정밖에 못 짓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말괄량이 느낌이 잘 나던데?"
"으……."
"그렇게 얼굴 표정 많으니까 좀 재미있더라."
"으꺄아아아아악!!"
김현우가 피식피식하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하나린을 놀리듯 말하자, 그녀는 이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내 김현우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피식한 뒤, 이내 하수분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그것을 꺼내 들었다.
***
"너도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그렇다네."
노아의 방주 안, 김현우는 노아흐의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 같이 탑을 만들었다며? 그런데 설계자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다는 게 말이 돼?"
김현우의 말을 듣고 있던 노아흐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뭐, 확실히 어떻게 보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네만, 유감스럽게도 사실일세. 애초에 '설계자'는 그의 정체를 밝힌 적이 없었으니까."
"아예?"
"그래, 아예일세. 내가 전에 자네에게도 설명해 줬다시피 우리는 각각 탑에서 맡고 있는 명칭으로 서로를 불렀을 뿐이지 서로를 자세하게 알고 있지는 않았네."
-뭐, 나와 통괄자를 제외한 세 명 정도는 통성명을 나눴을 수도 있겠지만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노아의 방주에 도착해서 그와 제일 처음으로 나누었던 대화.
그것은 바로 설계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보권한이 최상위로 올라가며 김현우는 더 이상 필터효과를 듣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기에 그는 아브와 노아흐에게 설계자에 대한 정보를 듣기 위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이건 뭐, 정보 권한이 최상위로 풀려도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구만."
아브와 노아흐에게서 김현우는 설계자와 관련된 정보를 단 하나도 제대로 얻을 수 없었다.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툴툴거리자 노아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몇 번이고 말했듯이 설계자에 대해서 대외적으로 뿌려져 있는 정보는 없네. 그나마 알 수 있는 거라고는 몇몇 추측을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들인데 이건 너무 신뢰성이 떨어지지."
"쯧."
"뭐, 그래도 좀 기다려 보게, 듣기로는 통괄자가 좀 자세히 알아본다고 하지 않았나?"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 김현우가 시스템룸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한 질문에 아브는 나름대로 확실한 정보를 알아보겠다는 대답을 그에게 해주었다.
"남은 건 또 기다리는 것뿐인가."
김현우가 쯧 하며 한숨을 내쉬자 노아흐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이참에 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걸세. 애초에 위에서는 움직이지 않고 있고 어차피 자네가 설계자를 처리하려면 준비를 해도 보통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는 힘들 걸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답했다.
"뭐, 나도 쉽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는데, 그 정도야?"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네만 우선 범천보다는 몇 배 정도 상대하기 까다로울 걸세."
"……그것 참 안 좋은 소식이네."
"게다가 그의 밑에 있는 녀석들을 처리하는 것도 골치 아프지."
"……밑에 있는 녀석들이라면, 정복자들을 말하는 거지?"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물량이 좀 있나 보네?"
그의 물음에 노아흐는 슬쩍 고민하는 듯한 티를 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 물량이 좀 있는 건 잘 모르겠네만, 사실 그 물량보다도 그 녀석의 바로 아래에 있는 정복자들이 문제일세."
"……바로 아래에 있는 정복자들?"
"뭐, 나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닐세, 다만 탑 곳곳에 남겨 놓은 통신 아티팩트들로 정보를 수집한 것이지."
-그 결과.
"지금 설계자의 밑으로는 4명의 정복자를 필두로 해 몇 명 정도 다른 정복자들이 있다고 하더군."
"……거참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 받네……."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자 노아흐는 입을 열었다.
"그렇지, 허나 그렇기 때문에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해야 하네, 아까도 말했네만 그들은 지금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잠시 고민하듯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던 김현우는 이내 말했다.
"뭐, 네 말은 알아들었어. 근데 그럼 뭐부터 해야 할지를 정해야겠는데? 지금 준비를 해야 하는 게 좀 광범위하잖아?"
그가 그렇게 말하자 노아흐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작은 탄성소리를 내곤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뒤적거리기 시작하며-
"그러고 보면 안 그래도 자네에게 그걸 말하려고 했었는데 까먹고 있었군."
-이내 그에게 연꽃을 넘겨주었다.
------
칼파의 연꽃
등급: ??
보정: ??
스킬: ??
-정보 권한-
모든 이들의 하늘(天)이라고도 불리는 자이자 세상 만물을 창조했다고 알려진 브라흐마에게서 떨어져 나온 조각 중 하나인 범천(梵天)이 가지고 있던 연꽃이다.
이 연꽃은 범천(梵天)이 자신을 고행의 업으로 밀어 넣어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끝없는 고통의 수행과 인내의 노력 끝에 피울 수 있는 연꽃으로. 한 장 한 장의 꽃잎에 '칼파의 업(業)'이 깃들어 있다.
칼파의 업(業)은 범천이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버려가며 만든 고행의 결과물로, 한 장 꽃잎을 이용해 '창조'를 행할 수 있으며 그 외에 나 있는 작은 꽃잎은 큰 꽃잎과는 다르게 비교적 작은 창조를 행할 수 있다.
칼파의 꽃잎을 얻기 위해서는──────────@#%@#%@#%@#^!@$^@!%@#%@##$%@#$^#@^@#$@#%@%@#$@#$@#$@#$@#$@#$@#$@#$@#$@$─────
------
그가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칼파의 연꽃의 로그.
김현우가 이걸 왜 보여주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시선을 돌려 노아흐를 바라보자, 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이걸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네."
그렇게 말했다.
# 240
240. 지금 나한테 뭐 한 거야? (4)
"……잠깐,"
"왜 그런가?"
노아흐가 김현우의 물음에 대답하자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설마, 또 나한테 수련을 하라던가, 뭐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니지?"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대답했다.
"뭐, 그건 이야기를 들어보고 자네가 정하는 거지. 뭐, 사실 이 연꽃을 사용하려면 수행을 치러야 하는 건 맞지만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는 말했다.
"또?"
김현우는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불과 1주일 전, 김현우는 청룡의 업과 제천대성의 업을 얻기 위해 수련을 했었다.
그래, 불과 1주일 전이었다.
1주일 전!
게다가 이곳에서 지났던 시간은 고작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으나, 실질적으로 그 한 달 반 동안 김현우가 수련을 했던 시간은 굉장히 길었다.
아마 제천대성의 업을 수련한 것까지 포함하면 연 단위가 가볍게 만 단위는 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김현우는 시간을 녹여 수련을 계속했다.
그것뿐인가?
김현우는 청룡의 업과 제천대성의 업을 얻기 전에도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 수련했었다.
제일 처음 했던 수련은 바로 악천의 업을 이용해 천마(天魔)에게 수련을 받았을 때였고, 그다음으로는 청룡에게 수련을 받았었다.
물론 그 두 번의 수련도 최근에 한 것 정도는 아니었으나 상당히 만만치 않은 시간을 소비했었다.
"또 수련을 하라고?"
그렇기에, 김현우는 노아흐의 이야기를 듣고 자연스레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김현우도 이 세상의 법칙을 알고 있기는 했다.
기브 앤 테이크.
투자하는 것이 있어야 분명 얻는 게 있다는 건 김현우가 처음 탑에 들어와서 얻은 진리와도 같은 것이었고, 그 생각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렇기는 해도…….'
김현우는 괜스레 올라오는 거부감을 누르고는 노아흐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우선은 말해봐."
어차피 그가 아무리 싫어하더라도 결국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 했기에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했고.
"뭐, 그럼 우선 말하도록 하지."
곧 노아흐는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한번 확인하고는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긴 뒤 말했다.
"우선 이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말하기 전에 말해둬야 할 게 있네."
"뭔데?"
"이 칼파의 연꽃은 확신할 수는 없네만, 만약 내 생각대로 이것을 사용할 수 있다면 자네는 아마 '위업(偉業)'을 얻을 수 있을 걸세."
"……위업?"
"그래, 위업일세."
김현우는 노아흐의 말을 듣고 순간 범천이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위업(偉業)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이길 수 있겠느냐고 소리를 쳤던 범천의 말.
김현우는 그것을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확실히, 범천을 상대할 때 위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위업(偉業)은 뭐야? 그냥 듣기로는 일반적인 업의 상위호환 같은 느낌인데."
그의 물음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간단하게 이해하면 자네의 말이 맞네."
"……간단하게 이해하면?"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노아흐를 쳐다보자, 그는 흠, 하며 잠시 침음을 흘리더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업(業)과 위업(偉業)의 차이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은 하네만,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꽤 길어질 걸세."
노아흐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을 듣던 김현우는 이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뭐, 그런 거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그냥 업보다 조금 더 강한 거로 생각하고 있으면 되지?"
그의 말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맞네, 위업마다 차이는 있지만, 그냥 그 정도로 이해하는 게 가장 편할 걸세."
노아흐의 말에 그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거린 김현우는 이내 주제의 본제로 돌아왔다.
"그래서, 이 칼파의 연꽃을 사용하는 방법이 뭔데?"
"정확히 내가 알아낸 방법은 이 칼파의 연꽃의 업(業)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네."
"……업(業)을 얻는 법?"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러하네, 자네가 아는지 모르겠네만 '기술자'가 가지고 있던 이 칼파의 연꽃은 그 물건 자체로 상당한 양의 업(業)을 가지고 있지."
"……보통 업은 본체가 가지고 있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대답했다.
"원래라면 그렇지. 사실 애초에 그게 맞는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 칼파의 연꽃을 들고 있던 범천은 좀 다르네."
"……뭐가 다른데?"
"이것도 좀 설명하는 데 오래 걸릴 것 같네만, 어차피 이건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으니 우선 간단하게 설명하겠네."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김현우에게 설명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현우는 정리하듯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그 범천(梵天)이 진짜 범천이 아니었다…… 뭐 그런 이야기?"
"뭐 대충 정리해 보면 그 말이 맞네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여러 인격의 범천 중 한 명이라고 보면 되네."
"……몇 인격 중 하나였다고?"
"그러니까, 원래 범천(梵天)의 인격은 하나가 아니네, 원래 그의 본체는 기본적으로 3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지,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또 시작된 이야기.
김현우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노아흐의 말을 듣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정리해 보자면, 원래 범천은 3개의 인격이 있어야 완벽한 본체인데 한 인격, 그러니까 내가 전에 만났던 그 범천은 그 인격 중 하나라 이거지?"
"그렇지."
"근데 걔가 들고 있던 이 칼파의 연꽃은 그 녀석처럼 떨어진 인격이 아닌 '진품'이라서 상당히 강한 업이 들어차 있는 거고?"
김현우의 정리에 노아흐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네, 잘 이해한 것 같군, 지금 자네가 들고 있는 칼파의 연꽃에는 업(業)을 넘어 위업(偉業)에 다다르는 힘이 깃들어 있네."
김현우는 자신이 들고 있는 칼파의 연꽃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야기했다.
"종합해 보면 지금 네 말은 위업(偉業)에 다다르는 연꽃의 업을 얻을 방법을 찾았다 이거지?"
"그렇네."
"그리고 그 방법은 수련이고?"
"그것도 맞는 말이지."
"이런 썅."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욕을 내뱉자, 노아흐는 그런 김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나 너무 그렇게 화낼 것 없네. 자네가 수련이 하기 싫다고 하면-"
"안 해도 상관없다고 말하려고?"
김현우가 말하자 노아흐는 슬쩍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듣게, 내가 말하려는 건 그런 말이 아닐세. 애초에 내가 '설계자'를 잡으려면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설마 그런 어정쩡한 답을 하겠는가?"
"그럼 뭔데?"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자네가 칼파의 연꽃을 흡수하는 걸세."
***
어두운 공동.
흑백의 타일이 조화롭게 깔려있고, 거대한 공동의 위에는 검보라색 빛을 내뿜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는 곳에, 그 남자는 앉아 있었다.
온몸에서는 자신을 정체를 감추는 듯한 검은 안개가 뿌려져 있는 남자.
그, '형체 없는 자'이자 '설계자'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는 가죽 소파에 앉아 넓은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분명 수십 명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테이블은 형체 없는 자와 함께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이전과 달라진 점은.
"왜 불렀어?"
분명 지금까지 아무도 앉아 있지 않던 테이블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형체 없는 자를 제일 상석으로 해 양옆에 앉아 있는 네 명.
형체 없는 자는 자신의 근처에 모인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글쎄, 왜 불렀을까."
그의 말에 조금 전 질문을 했던 검은 뿔을 달고 있던 남자는 괜스레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뭔 소리야? 갑자기 다 모이라고 해서 왔더니 퀴즈하는 거야?"
검을 뿔을 달고 있는 남자의 말투에 그 옆에 있던 '삿갓을 쓴 남자'는 입을 열었다.
"망발하지 마라 양아치, 가만히 있으면 되지 어디서 아가리를 놀리나?"
"뭐? 양아치? 그 양아치한테 뒤지게 처맞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냐?"
검을 뿔을 달고 있는 남자와 삿갓을 쓴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묘한 기류를 풍기자 바로 그 맞은편에 있던 비단 옷을 입고 있는 여자는 그 둘을 보며 타박했다.
"그만하세요. 이분 앞에서까지 그렇게 싸우셔야겠어요?"
"쯧, 시끄러운 건 질색이군."
여자의 말과 동시에 옆에 있던 꼬리를 가지고 있는 남자가 말하는 것을 끝으로 조용해진 공동.
형체가 없는 자는 그들을 한번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뭐, 내가 너희들을 부른 건 별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저 하나의 사실과 또 하나의 선물을 주기 위해서지."
"……그건 또 뭔 소리야?"
검은 뿔을 가진 남자가 형체 없는 자를 돌아보며 입을 열자, 그는 딱히 지체할 것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기술자가 죽었다."
형체 없는 자의 말에 일순 조용해진 공동.
허나 얼마 있지 않아-
"뭐야, 그 양반 죽었어?"
검은 뿔을 가진 남자는 기술자의 죽음을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기며 말했다.
"애초에 본체도 아닌 놈이 온전히 자기 것도 아닌 위업(偉業)을 가지고 창조 운운하는 게 좀 웃기기는 했는데. 이참에 꼴까닥 했나 보네?"
낄낄거리며 웃음을 지는 검은 뿔을 가진 남자, 옆에서 그것을 한심하게 보고 있던 삿갓을 쓴 남자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그 녀석을 뭐라 할 건 아닌 것 같은데?"
"뭐?"
"네 녀석도 마찬가지잖냐? 네 누이의 것을 빼앗아서 뻔히 한자리 차지하고 있어놓고는-"
"뭐? 개소리하지 마라! 내가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한 승부로 그년의 것을 빼앗은 거야!"
피식-
"뭐, 그래.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지."
"이 새끼가……!"
마치 화학반응이라도 일으키는 듯 말만 섞었다 하면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둘을 보고 있던 여자는 형체 없는 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 기술자는 '창조'이기는 해도 제대로 된 위업(偉業)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누구한테 죽은 건가요?"
그녀의 물음.
형체 없는 자는 대답했다.
"9계층의 필멸자에게 죽었다."
"……9계층의 필멸자?"
"이야~ 필멸자한테 죽은 건 또 무슨 개 쪽이야?"
"……머저리로군."
형체 없는 말에 제각각의 반응을 보이며 입을 여는 그들.
그런 그들의 모습을 한동안 보고 있던 형체 없는 자는 이내 계속해서 의견을 주고받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끊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사실과는 다르게 너희들에게 줄 것이 있다."
"……줄 것?"
꼬리가 달린 남자가 형체 없는 자를 돌아보며 말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검은 안개에 가려져 있는 자신의 몸을 향해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품속에서 4개의 보석을 꺼내들었다.
아니,
그것은 보석이라 하기에는 그저 광석으로 보는 게 좋을 것 같은 돌맹이었다.
그리고-
"너희들 전부에게, 위업(偉業)을 주마."
형체 없는 자는,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241
241. 필요한 게 뭐라고? (1)
"위업(偉業)이라고요?"
어두운 공동에서, 형체 없는 자의 근처에 앉아 있던 비단옷을 입은 여자는 그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원석들을 보며 말했고.
"갑자기?"
머리에 검은 뿔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바닥 위에 있는 원석을 바라봤다.
"시킬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대화상으로 파악해 보면 기술자를 죽인 그 녀석을 죽이고 오면 되는 건가?"
그 뒤로 들려오는, 삿갓을 쓴 남자와 흰 꼬리를 달고 있는 남자의 물음에 형체 없는 자는 어두운 안개 사이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아니, 내가 이 선물을 주는 건 기술자가 죽었다는 이야기와는 별개다."
"……별개라고요?"
"그래. 아예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별개의 일이지."
형체 없는 자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짓자, 그의 주변에 앉아 있던 그들은 저마다 그를 보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레 자신들에게 이걸 왜 주는지 이해를 못 하는 표정.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삿갓을 쓴 남자는 말했다.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만, 이건 정말로 기술자의 일과는 별개의 일입니까?"
"그래, 별개의 일이지."
"그럼 이건 처음 말했던 것처럼 '선물'의 의미로 받아도 된다는 겁니까?"
삿갓을 쓴 남자의 물음에 형체 없는 자는 연기를 움직여 피식 거리는 표정을 만들어내곤 이야기 했다.
"너를 포함해 다른 이들도 의심이 있는 것 같으니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해두도록 하지. 이 위업을 받고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없다."
그는 그렇게 말하곤 삿갓을 쓴 남자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한 대로 순수한 '선물'의 의미로 받을 수 있다는 거지. 게다가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이 위업(偉業)들은, 내가 원래 '위'에 보내놓기 위해 만들어둔 것들이니만큼 그 업의 질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지."
"……어째서?"
형체 없는 자의 말에 비단옷을 입은 여자는 자신이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형체 없는 자가 자신들에게 한 제안은 무척이나 달콤한 제안이었으니까.
그래, 너무 달콤한 제안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적어도 그녀가 봐온 바로, 그는 굉장히 탐욕스러운 자였으니까.
그녀가 그런 의미를 담아 형체 없는 자를 바라보니 그는 여전히 안개로 피식하는 듯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그들을 바라봤다.
"이유를 알고 싶은가?"
형체 없는 자의 물음.
""……."
그의 물음에 그곳에 있던 네 명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체 없는 자는 웃음을 짓고는-
"자네들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미식가일세."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자네들에게 '기술자'가 죽은 것을 말해준 것도, 지금 이 상황에서 자네들을 불러 '위'에 올릴 위업을 내준 것도, 모두 내 '미식'을 위해서일 뿐이라는 거지. 딱히 자네들을 위해서가 아니야."
-알겠나?
"자네들은 이걸 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네. 구석에 틀어박혀도 되고, 새로운 힘을 시험하려 하층에 내려가도 좋네,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평소에 하던 것처럼 느긋하게 퍼질러 있어도 된다네. 어차피-"
씨익.
"자네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전부 나를 위해서가 될 테니까."
형체 없는 자는 그리 말하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
"이렇게 한다면, 자네는 이 칼파의 연꽃을 수련하지 않고서라도 이 연꽃에 있는 업을 먹어 치울 수 있게 되지."
방주 안, 한참이나 노아흐의 말을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생각을 정리하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을 끄덕거리다 마침내 입을 뗐다.
"……그게 돼?"
"물론 해보지는 않았네만, 뭐 시간만 주어진다면 그렇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김현우에게 '칼파의 연꽃'에 담겨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제안한 것.
그것은 바로 김현우가 업이 담겨 있는 칼파의 연꽃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러니까, 네가 저 연꽃을 흡수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든다고?"
"못할 것 같나? 나는 '제작자'일세. 충분한 시간과 힘이 주어진다면 '창조'까지는 불가능하더라도 업을 떼어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그래?"
김현우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노아흐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힘이 있었으면, 생각해 보니까 청룡의 업을 얻을 때도 그렇게 줬으면 되는 거 아니야?"
"무슨 당연한 것을 묻는 겐가? 당연히 그때는 힘이 아예 없었네."
"그럼 그때랑 지금이랑 달라진 게 뭔데?"
김현우가 묻자 노아흐는 턱짓을 하며 한쪽을 가리켰고, 김현우가 시선을 돌린 그곳에는-
"아."
-김현우가 가져왔던 정복자들의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저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거대한 흑색의 망치,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붉은 도신을 가지고 있는 기이한 언월도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거대한 육각형의 보석.
"자네가 내게 가지고 왔던 정복자의 업들이지."
"……저걸 네 힘으로 사용할 수 있어?"
"불가능하지는 않네."
노아흐는 그렇게 대답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저것들을 연료로 사용하는 것은 조금 아까운 짓이기는 하네만, 애초에 사용하지 않을 거면 사용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일세."
노아흐의 이야기를 들은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그가 가져왔던 무구들을 한 번씩 쳐다보며 생각했다.
'……재활용 할 수 있는 무기가 있나?'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 무기들을 그냥 연료로 써버리기에는 노아흐의 말대로 조금 아까운 느낌이 있었다.
"여기 중에서 몇 개 정도 빼가도 돼?"
"……뭐, 그래 봤자 세 개밖에 없네만 두 개 정도 빼가는 건 큰 상관은 없을 것 같군. 나야 '제작'할 수 있을 정도의 힘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려 업이 담긴 무기들을 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시선이 간 곳은 거대한 망치.
'우선 망치는 제외.'
김현우는 '곧바로'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빠르게 망치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망치는 김현우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이가 없으니까.
물론 업 자체가 중요하기는 했다.
그러나 만년빙정 때를 생각해보면 아무리 '업'이 중요하다고 해도 최소한 그 업이 본인에게 시너지를 줄 수 있는 업이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망치를 제외하고 곧바로 다음 물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음에 보이는 것은 바로 붉은색의 언월도.
허나 그냥 아티팩트의 로그가 언월도라고 이야기를 할 뿐, 김현우의 눈에 그것은 그냥 거대한 도처럼 보였다.
김현우가 보고 있는 언월도의 손잡이는 마치 일반적인 검처럼 작았으니까.
'이것도 좀…….'
현재 자신과 함께 싸우는 이들 중에서 검을 쓰는 이는 딱 한 명, 김시현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시현이 사용하는 검은 이렇게 기이할 정도로 크지 않았다.
애초에 김시현은 발도(拔刀)를 주로 쓰니까.
'그래도 생각해 보면 또 시현이는 들고 있는 업(業)이 아예 없기는 한데.'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이나 붉은 언월도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육각형의 보석을 바라보았다.
"……흠."
잠시간의 생각.
김현우는 고민을 이어가다 이내 입을 열었다.
"우선 언월도랑 저 흑경의 업은 놔두는 걸로."
"알았네. 말했듯이 내 힘의 연료로 사용하는 것은 이것 하나면 되니까."
김현우의 말에 그렇게 대답한 노아흐는 검은 망치를 집어 들었고, 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시간은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아?"
"흠."
김현우의 물음에 시간을 재듯 살짝 고민을 시작하는 노아흐.
그는 무엇인가를 셈하듯 손가락을 접더니 대답했다.
"우선은 2주 정도 필요할 것 같군. 다만 자네도 달다시피 이 일은 처음 해보는 일이니만큼 내가 정한 기간이 어긋날 수도 있네."
"뭐, 그건 알았어."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노아의 방주 밖으로 향하려다-
"잠시만 기다리게."
곧 들려온 노아흐의 말에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왜?"
"2주 뒤에 찾아올 때는 그 원숭이 친구…… 그러니까 제천대성도 같이 데려오도록 하게."
"……제천대성?"
"그래, 아마 그에게도 줄 수 있는 선물이 있을 것 같으니 말일세."
***
천호동에 있는 김현우의 저택.
"역시 펜타클은 지나지."
"흐음, 에바로군. 역시 펜타클은 슈아다."
"슈아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네가 예전에 바람났던 직녀랑 똑 닮아서 마음에 들었냐?"
"뭐? 헛소리하지 마라!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모르고 했다고 말했을 텐데?! 게다가 오히려 네 녀석의 난봉꾼 기질을 생각하면 내 편이 더 낫다!"
"응 아니야~ 나는 미혼녀들이었고 너는 유부녀였어~!"
상당히 큰 벽걸이 TV 앞에서 요즘 유행하는 걸그룹을 감상하고 있던 제천대성과 작게 데포르메 된 청룡의 모습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서연을 바라봤다.
"쟤들 또 왜 저러냐?"
"……계속 지루하다고 하고 틈만 나면 은근히 싸움을 하려고 들길래 시선도 다른 데로 돌릴 겸 취미를 가져보라는 의미에서 TV를 추천했는데…… 보시다시피 저런 상황이……."
이서연은 턱짓하며 걸그룹을 틀어놓고 금방이라도 쌈박질을 하려는 둘을 가리켰고, 김현우는 어이없다는 듯한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야, 쌈박질 좀 그만해라."
"언제 왔어?"
"이 원숭이와 싸우느라 미처 온 줄 모르고 있었군."
"야, 너 계속 선 넘는다? 그러다 진짜 언제 한번 제대로 간다?"
"애초에 업이 하나밖에 없는 네가 나를 이기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 같은데, 깝치지 마라."
김현우가 제지한 지 3초도 지나지 않아 입만 열면 험악해지는 분위기.
물론 김현우야 저 둘이 그렇게 말싸움을 계속할 뿐 그 이상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도대체 왜 저러나 싶었다.
'저게 무슨 우정표현 같은 건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말을 주고받는 제천대성과 청룡을 본 김현우는 이내 그들의 싸움을 말리는 것을 포기하며 소파에 앉아 이내 이서연을 돌아봤다.
"그래서, 아까 할 이야기 있다며 뭔데?"
김현우는 조금 전 퇴원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올 때 이서연이 통화로 전했던 말이 떠올라 그렇게 질문했고.
"아, 그거요?"
이서연은 김현우가 질문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뭔데?"
김현우는 서류를 받아들고 시선을 위로 돌렸고.
"……하남강에 있는 나무줄기? ……영목 관련 서류야?"
그의 물음에 이서연은 대답했다.
"네, 정부쪽에서 준 서류예요."
"내가 분명히 인터뷰 때 패도길드나 암중 길드한테 문의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김현우가 별 흥미 없다는 느낌으로 서류를 슥 던진 뒤 이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넌 왜 이런 걸 나한테 가져다 줘?"
"으,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만빵이었어요."
"왜?"
"계속 내가 줘봤자 의미 없다고 하는데 좀 친분이 있는 정부쪽 사람이 어떻게든 서류만 한번 올려달라고 밀어붙여서…… 뭐 그런 거죠."
이서연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자 김현우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인생 참 힘들게 산다."
"오빠가 인생을 편하게 산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이서연의 말에 그녀와 마찬가지로 어깨를 으쓱인 김현우는 물었다.
"그런데, 저 한강에 있는 나무줄기가 아주 짭짤한가보지? 생각해 보면 인터뷰에도 그거 관련 내용만 꽤 많이 나왔는데."
"아주 짭짤한 정도가 아니라 저 영목이라는 재료 자체가 지금 상위 던전을 들어가야 희귀하게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자원이라 너도나도 손이 근질거려서 그럴 거예요. 거기다가 최근엔-"
이서연의 이어진 설명.
그 설명을 줄곧 듣고 있던 김현우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슬쩍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 242
242. 필요한 게 뭐라고? (2)
그것은 굉장히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분명히 겉모습은 일반적인 동굴의 모습이었으나, 동굴을 이루고 있는 벽의 색은 칠흑 같은 검은색이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냥 동굴 전체가,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휩싸여 있었다.
게다가 그곳이 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어두운 동굴의 시야를 밝히고 있는 것이 검은색의 불꽃이라는 것이었다.
지극히도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공간그곳에서 네 명의 정복자 아니, 정확히는 사천(四天)이라 불리는 그들은 동양풍의 팔각정에 앉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이 들어차 있는 공간.
그런 침묵이 얼마나 지났을까.
"흐음."
이 공간의 주인인 삿갓을 쓰고 있는 남자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뭘?"
"그분이 우리에게 준 위업(偉業)에 관한 것을 말하는 거다."
삿갓을 쓴 남자의 물음에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흰 꼬리를 가진 남자는 그의 질문을 듣고 고개를 숙였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던 검은 뿔을 가진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뭘 그렇게 고민해? 위업(偉業)을 그냥 준다잖아? 그럼 그냥 넙죽 받으면 되지."
"멍청하기는."
"뭐? 멍청해?"
검은 뿔을 가진 남자가 순간 눈을 부라리며 삿갓을 쓴 남자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래, 멍청하지. 아주 멍청하다 못해 네가 나와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지성체라는 게 신기할 지경이군. 아, 역시 조악한 괴이 새끼들 사이에서 나온 놈이라 그런가?"
"뭐라고? 이 개 잡배새끼가-!"
언뜻 비웃음을 내뱉으며 말하는 남자의 말에 검은 뿔을 가진 남자는 크게 반응해 곧바로 주먹을 들어 올렸으나-
"그만 좀 하세요. 둘 다 뭐하는 짓이에요?"
-비단옷을 입은 여자의 말에 그 둘은 서로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쏘아보며 그대로 혀를 차고는 시선을 거뒀다.
그녀는 서로에게서 고개를 튼 둘을 바라보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들도 알고 있겠지만 저희가 싸움을 벌인다고 해서 이득이 없는 건 알고 있겠죠? 게다가 그렇게 티격 댈 시간이 있다면 그의 의도나 생각해 봐요."
여자의 말에 검은 뿔을 달고 있던 남자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진짜 답답하네, 애초에 그 의도가 뭐라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데? 애초에 그 녀석이 전부 말했잖아? '이건 우리한테 주는 선물'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 안 하면 어쩔 건데?"
검은 뿔을 가진 남자의 말에 일순 침묵을 지킨 다른 이들.
남자는 그들을 한번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지.
"봐, 다들 할 말 없지? 애초에 그렇잖아? 그 녀석이 뭘 생각하는지 의도를 알든 모르든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너희들도 알잖아?"
-애초에.
"지금 여기 있는 놈 대부분이 그 녀석 못 이겨서 따까리나 하고 있는 판인데, 그 녀석이 고맙게도 원래 위에 올려야 하는 위업을 우리한테 줬네? 그럼 감사하게 먹으면 되잖아?"
"그 위업을 준 의도가 대체 뭔지 모르니까 이렇게 모여 있는 거 아니에요? 귀(鬼),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요? 그의 탐욕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여자의 말에 검은 뿔이 달린 남자, 귀는 대답했다.
"그 녀석 탐욕이 보통이 아닌 건 그냥 이 탑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기만 해도 소름끼칠 정도로 잘 알 수 있지."
"그럼 당신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겠네요. 그가 그저 선물로 이 위업을 준 게 아니라는 걸."
"애초에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 녀석이 마지막에 한 말 기억 안 나? 그 녀석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도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고 말했잖아."
"그걸 알고 있으면서 왜?"
"애초에 우리가 뭔 지랄을 해도 그 녀석을 이길 수 없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야. 지금 여기서 머리 싸매고 그 녀석의 의도를 파악하든, 파악하지 못하든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지. 그러니까-"
귀는 피식하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주먹을 꾹 쥐었다.
"그냥 생각 안 하겠다 이거지, 어차피 대가리 존나게 굴려도 그 녀석 손바닥 안이라는 소리니까."
검은 뿔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쏠리는 시선.
"어디 가는 거죠?"
"놀러."
"……눌러?"
"그래, 그 녀석이 내 좆대로 하라고 했으니까 나는 그냥 진짜 좆대로 움직여서 새로 얻은 위업의 힘이나 실험해 볼까하고 말이야."
귀는 그렇게 말하더니 여자가 말릴 새도 없이 순간 자신의 몸 주변으로 보랏빛의 마력을 뿜어내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남은 세 명.
"……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았고, 그와 함께.
"확실히 귀의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하군."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얀 꼬리를 가지고 있는 남자, 백(白)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뭐라고?"
백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삿갓을 쓴 남자, 선(仙)의 물음에 백은 대답했다.
"확실히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
"네 녀석까지 저놈이랑 머리가 같이 비어 버린 거냐?"
"그건 아니다, 단순히 저 녀석의 생각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거지,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알고 있지 않냐고?"
"그래, 귀의 말대로 그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 자신의 이득이 될 거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 말은 결국 우리가 이렇게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도 그가 상정하고 있는 상황 안쪽이라는 소리지."
"……."
"그리고 그 소리는 결국 이 위업을 가지고 우리가 뭘 어떻게 하든 결국엔 그가 상정하고 있는 일에 끼어들게 된다는 거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이렇게 머리를 맞대고 그의 의도를 알아내겠다고 하는 건 별의미가 없는 게 맞는 거지."
"……."
백의 말에 아무런 말도 없이 인상을 찌푸리는 선과, 그 옆에 있는 그녀.
백은 그 둘의 모습을 보다 이야기했다.
"다만-"
"?"
"대충 짐작할 수는 있군."
"……뭘 말이지?"
선의 물음에 백은 딱히 거를 것 없다는 듯 대답했다.
"우리에게 위업(偉業)을 준 이유 말이야."
"……기술자, 그러니까 범천을 죽인 그 녀석을 말하고 있는 건가?"
선의 물음에 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뭐 우리 모두 대충 짐작하고는 있겠지만 아마 그가 우리에게 위업을 준 이유는 범천을 죽인 그 녀석과 관련이 높을 거야. 그리고 거기에 그가 '미식'을 좋아한다는 걸 떠올리면."
백은 그렇게까지 말하고 선과 그녀를 바라봤고, 곧 선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설마."
"나도 짐작일 뿐이지만, 그가 한 말을 종합해 보면 그런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군."
백의 말에, 남아 있던 선과 비단옷을 입은 여자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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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
"영목(靈木)은 이렇게 할 겁니다."
좋은 쪽인가 나쁜 쪽인가.
지난 1주일 전, 김현우는 이전 인터뷰 때 말한 내용인 '패도 길드와 암중 길드에 연락하라'는 말을 정정하고 본인이 영목의 처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 밝혔습니다.
김현우 헌터는 하남강을 거의 채울 정도로 빽빽하게 자라있는 영목의 구매 우선권을 지난 한 달간 일어났던 재앙 사태 때 '재앙'을 먼저 잡을 수 있었던 S등급 헌터들에게 우선적으로 구매권을 주고, 그 이후에는 경매의 형태를 띄워 영목을 처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런 김현우의 발언에 재앙을 잡았던 헌터와 그 헌터가 속한 길드들은 시간을 앞다퉈 패도 길드와 암중 길드에 연락을 넣는 중이고, 그런 상황에서 협회는 (중략)──────…….
……
…….
……
.
허나 그렇게 영목의 판매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와중에 고인물 김현우에 대한 실망감을 비추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쟁아을 잡지 못한 중소규모의 길드들로, 그들은 '이미 영목 정도의 재료를 수급할 수 있는 헌터들에게 영목을 우선적으로 넘기는 것은 헌터들의 부익부 빈익빈을 늘릴 뿐이라며 김현우에게 중소규모의 길드에서도 영목의 구매권을 넘겨달라는 의사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 그런 김현우의 행보를 보고 있는 네티즌들의 반응은 각각 크게 나누어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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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진짜 개판이네요."
"왜?"
천호동의 저택.
"뉴스 좀 봐요."
줄곧 소파에 앉아 뉴스를 읽고 있던 김시현은 그에게 스마트폰을 이용해 읽고 있던 뉴스를 보여주었고, 슬쩍 시선을 돌려 스마트폰 화면에 떠 있던 뉴스를 본 김현우는.
"그걸 뭐 하러 봐? 어차피 내용이 하나같이 비슷하더만."
-이내 가볍게 시선을 돌려 김시현이 보여준 뉴스에서 시선을 뗐다.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본 김시현은 이내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뿌린 거예요?"
"뭘?"
"영목이요. 어차피 그냥 경매로 판다고 해도 전부 달려들었을걸요?"
김시현의 물음에 김현우는 답했다.
"뭐, 그렇겠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그 녀석이 놔두고 간 나무줄기는 상급 던전에서도 구하기가 좀 빡센 등급의 재료라며?"
"그쵸."
"그래서 그런 거야."
"네?"
김현우가 재앙을 잡은 이들에게 영목을 우선 적으로 판매한 이유.
그것은 바로 그들이 '재앙'을 잡은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제 상황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물론 지금 상황은 괜찮았다.
1계층과 9계층이 붙어 있던 곳은 모두 원래대로 돌아왔고, 더 이상 범천이 오기 전처럼 등반자가 많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허나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김현우가 준비를 시작하고 설계자를 죽이러 탑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또 9계층이 같은 상황에 빠진다면, 9계층은 또다시 위태위태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물론 등반자가 올라오는 상황도 대비를 하긴 하겠지만…….'
등반자가 올라오는 숫자가 어느 정도가 될지 모를 만큼, 김현우는 재앙을 막은 헌터들을 조금이라도 더 키우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다.
뭐 그런 생각을 김시현에게 일일이 설명하기는 귀찮았기에-
"그냥 그런 거라고만 알아둬."
"……그런 게 뭐예요?"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입을 다물었고, 김시현은 그런 김현우를 슬쩍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김현우가 그렇게 앉아 있던 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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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면 당신은 부름을 받아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0일 0시간 0분 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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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김현우는 갑작스레 눈앞에 떠오른 로그에 저도 모르게 멍한 소리를 냈고.
그가 멍한 소리를 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시스템 룸의 한가운데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 이건 확실히 편리하군, 괜히 귀찮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던 것 같네."
"그렇죠?"
"……노아흐? 왜 네가 여기에 있어?"
김현우는 시스템 룸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노아흐를 볼 수 있었다.
# 243
243. 필요한 게 뭐라고? (3)
김현우는 시선을 돌렸다.
보이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시스템 룸.
게임팩이 사방에 깔려 있어 방 안은 어질러져 있었고, 아브는 그런 어질러져 있는 게임팩 사이에 놓여 있는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그래, 뭐 거기까지는 딱히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노아흐?"
"1주일 만이군."
분명 아브만 있을 수 있다고 알고 있는 시스템 룸에는 노아의 방주 안에 있어야 할 노아흐가 있었다.
김현우는 아브와 노아흐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의 물음에 노아흐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뭐, 좀 사정이 있어서 아브를 만나기 위해 따로 길을 뚫었네. 뭐 사실 예전에도 이 공간의 위치는 이미 특정했으니까 말일세."
"……무슨 일인데?"
"여러 가지가 있지, 그리고 사실 내가 이곳을 뚫은 이유 중 하나는 자네를 부르기 위한 것도 있네."
"나를 부르기 위한 거라고?"
"그래, 막상 설명할 것이 생겨서 자네를 부르려고 했더니 마땅히 부를 방법이 없더군. 그러자고 가만히 있자니 아직 9계층의 시간으로는 1주일이나 남아 있었으니까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서,"
그는 노아흐와 아브가 앉아 있는 소파에 맞은편에 앉아 대답했다.
"이야기할 건 뭔데?"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자네가 한번 갔다올 곳이 있네."
"……갔다올 곳?"
"맞네."
"거기가 어딘데?"
"12계층일세."
"……12계층?"
김현우가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노아흐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마 자네도 한번 가본 적이 있을 걸세."
"나도? ……아."
노아흐의 말에 되묻던 김현우는 머릿속 한편에 떠오르는 기억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확실히 김현우는 예전, 노아흐를 찾기 위해 12계층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보랏빛의 하늘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을 생각해 낸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가본 기억이 있긴 하네."
김현우의 대답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래, 자네가 가줘야 할 곳은 그곳일세."
"갑자기 12계층은 왜?"
"그곳에 있는 재료가 필요해져서 말일세."
"……재료?"
김현우가 되묻자 노아흐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렇네, 원래 처음에는 딱히 재료가 필요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만들다 보니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재료가 필요하더군."
"……무슨 재료인데?"
"'이석(異石)'일세."
"……이석(異石)?"
"그렇네. 자네도 알다시피 12계층에는 거대한 탑이 있지. 그리고 그 탑의 최상층에는 구슬 크기 정도의 그것이 있을 걸세."
"요컨대 그게 필요하다 이거지?"
"맞네."
고개를 끄덕이며 단언하는 노아흐를 본 김현우는 이내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뭐, 알았어. 그냥 최상층에 있는 이석인가 뭔가를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는 거 아니야?"
"맞네, 게다가 아마 지금 자네의 힘 정도라면 그 이석을 어렵지 않게 가져올 수 있을 걸세."
"뭐, 그렇다면야 다행인데, 그럼 그 탑 안쪽부터 걸어 들어가야 하는 거지?"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살짝 애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애매하군, 애초에 12계층에 만들어져 있는 탑은 등반자들이 부수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 단단하긴 하네만 지금 자네의 실력으로 그 탑을 타격한다면 또 모를 것 같네."
-뭐 사실.
"안쪽으로 들어가서 올라가는 것도 딱히 상관없네만. 아마 자네가 좀 귀찮아질 걸세."
"왜?"
"탑 안쪽에는 '악마'들이 사니까 말일세."
"……악마?"
"물론 탑 밖에 있는 악마를 메이킹해 만든 피조물들에 불과하네만, 확실히 탑을 오르는 데에는 불편할 걸세."
-그 녀석들은 떼로 몰려들거든.
그의 말에 김현우는 대충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그럼 지금부터 바로 가면 되는 거야?"
"뭐 자네가 빨리 가준다면 나로서는 일이 빨리 진척돼서 좋을 것 같긴 하군."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고, 이내 그는 아브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이외의 이유는 뭔데?"
"응? 뭐가요?"
"아까 말했잖아? 나를 만나는 것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다며?"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노아흐를 바라봤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바로 제천대성 때문일세."
"……제천대성?"
"그래, 내가 1주일 전에 말하지 않았나? 다음에는 제천대성을 데리고 오라고 말일세."
"뭐, 확실히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
김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노아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말했다.
"뭐 사실 이 말은 자네가 2주 뒤에 오면 하려고 했네만, 이렇게 된 거 미리 알려주도록 하겠네."
"?"
그의 말에 김현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노아흐는 이내 입을 열었다.
"제천대성, 그가 가지고 있는 온전한 업을 되찾을 방법을 알아냈네."
***
하남에 있는 거대한 장원.
분명 범천을 처리했을 때만 해도 완전히 박살이 나 있던 그곳은 고작 얼마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도 벌써 제 모습을 되찾았다.
분명 박살이 나 있던 건물들은 온전하게 제 모습을 찾고 있었고, 마치 전쟁터처럼 터져 나갔던 지반들도 마찬가지로 제 모습을 찾았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옛 모습을 되찾은 장원.
그렇게 완성되어 있는 건물 중 하나에서.
"아아앙~♥"
"둘이 잘 사귀네."
"……."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깨가 떨어지도록 달라붙어 있는 천마와 구미호를 보며 피식 하는 웃음을 지었다.
"무월~ 쓰다듬어 줘."
"지랄하지 마라."
"앙~!"
"오우, 그사이에 벌써 새로운 취향도 공유한 거야?"
김현우가 노골적인 웃음을 지으며 웃음을 짓자 천마는 팍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닥쳐. 그리고 너도 좀 닥…… 아니, 조용히 해라.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무월이 그렇게 말한다면~!"
천마가 말하자 이내 헤실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천마에게서 떨어지는 구미호,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잃지 않은 채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오, 그래도 이제 병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항상 욕만 쓰지는 않나 보네?"
"……그래도 막말을 안 하면 적당히 선을 지키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해주는 것뿐이다."
인상을 찌푸린 채 휙 고개를 돌리며 말하는 천마.
김현우는 그 옆에 있던 구미호의 헤실거리는 미소가-
씨익-
일순간 묘한 미소로 바뀌어 나가는 것을 알고 순간 웃음을 잃었다.
묘한 웃음을 지은 채로 김현우를 바라본 구미호, 그녀는 천마가 시선을 돌리자마자 다시 헤실 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김현우는.
"조교하고 있던 게 아니라 조교 당하고(?) 있었던 건가……?"
천마를 보며 슬쩍 불쌍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짜증나는 시선은 뭐냐?"
"아니, 뭐 아니야……."
"……?"
이상한 표정을 짓는 천마.
김현우는 말을 돌렸다.
"그보다, 내가 가져다준 건 잘 쓰고 있어?"
"……그 뒤지게 크기만 한 언월도 같지도 않은 걸 말하는 거냐?"
"그래 그거."
1주 전.
김현우는 이제 막 병실에서 퇴원한 천마에게 '팔열성군의 언월도'를 넘겨주었었다.
물론 맨 처음 팔열성군의 언월도를 주려고 한 상대는 천마가 아니라 김시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시현은 가지고 있는 업이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김시현은 팔열성군의 언월도를 받지 않았다.
이유는 바로 무기 자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것 같아서.
팔열성군의 언월도는 사실 언월도라기보다는 거대한 도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기에 발도(拔刀)를 주공격으로 사용하는 김시현에게는 에로사항이 많았다.
그렇기에 김시현은 팔열성군의 언월도를 받지 않았고, 김현우는 언월도를 결국 천마에게 주었다.
"역시 원래 무기가 아니라서 좀 불편한가?"
김현우의 말에 천마는 흥 하고는 말했다.
"더럽게 크기만 한 무기도 다루는 것에 그리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만, 그래도 효율이 떨어질 것 같긴 하더군."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돌려서 하는 천마는 김현우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도 이 탑을 전부 오르려면 어쩔 수 없지……. 아니, 애초에 네 녀석을 돕기로 한 시점부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만."
천마는 그렇게 말하며 쯧 하는 소리와 함께 그를 바라봤다.
"확실한 거 하나는 알아둬라."
"……탑에 올라서 업을 가질 수 있게 되면 업 하나는 무조건 내놓으라고?"
"업 하나가 아니다, 내가 말한 건 검신(劍神)의 업이지."
천마가 김현우에게 협력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김현우와 천마에게 했던 약속 때문이었다.
"뭐, 걱정하지 마, 그 새끼를 조지면 무슨 업이든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데?"
"검신의 업은 왜 얻으려 하는 거야? 네가 먹어치우려고?"
김현우의 물음에 천마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예전에 너를 교육했을 때도 말했을 텐데? 애초에 자신의 힘도 아닌 것을 얻어서 휘둘러 봤자 그것은 추할 뿐이다,"
그리고 역겨울 뿐이지.
"편하게 얻은 강함에는 무슨 의미가 있지? 그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스스로의 정신을 갉아먹는 병으로만 작용할 뿐이지. 솔직히 이 팔열성군인가 뭔가 하는 녀석의 업을 사용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천마의 말에 김현우는 물었다.
"그럼 네가 쓰려는 게 아니라고?"
"당연히 아니다."
천마의 당당한 대답에 김현우는 그 이유에 대해 물으려 했으나 딱히 천마가 답을 해줄 것 같지는 않았기에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아무튼 그건 알겠고, 그럼 대충 몇 주 정도는 그 언월도에 있는 업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노력해 봐. 어차피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다."
천마의 말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한 뒤 빠져나왔고, 이내 하늘을 한번 바라봤다.
상당히 맑은 하늘.
"……다 했나?"
김현우는 슬쩍 머리를 굴려 혹시나 하지 않았을 일을 떠올리려다 이내 쯧 하고 혀를 찬 뒤 그 생각을 돌렸다.
'뭐 안 한 게 있어도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 게다가 여유도 어느 정도 있고.'
김현우는 생각이 복잡해지려는 것을 그렇게 넘겨 버리곤 곧바로 근두운을 만들어냈다.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가 순식간에 안개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하고, 그 안개는 순식간에 김현우가 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변했다.
그리고 그곳에 망설임 없이 올라탄 김현우는 이내 하수분의 주머니에서 맹인의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파아앗!
맹인의 나침반을 흔들자마자 쏘아져 나가는 빛줄기.
김현우는 곧바로 그 빛줄기를 쫓아 근두운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다시 왔네."
김현우는 하늘과 땅이 끝도 없이 연결되어 있는 정복자의 통로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자, 그럼 이제 곧바로 움직여 볼까?"
김현우의 신형은, 순식간에 통로의 위쪽을 향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 244
244. 필요한 게 뭐라고? (4)
하남에 있는 장원의 거대한 건물 중 하나.
"흐음."
그곳에서, 청룡은 자신의 앞에 있는 거대한 육각형을 보며 묘한 침음성을 흘렸다.
"아직도 그거 가지고 그러고 있냐?"
청룡이 그렇게 제자리를 맴돌며 보석을 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줄곧 그의 뒤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제천대성이 입을 열었고, 청룡은 곧바로 대답했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물론 업을 얻어서 힘을 키우는 건 좋은 일이지만 만약 그게 자신이 사용할 수 없는 업이면 없느니만 못하다는 걸."
청룡의 대답에 제천대성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 확실히 그렇기는 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흡수하지 않을 건 아니잖아?"
제천대성이 턱짓으로 흑경의 업을 가르치자 청룡은 흑경을 업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이야기했다.
"솔직히 말하면, 고민 중이다."
"응? 왜?"
"너무 장단점이 명확해."
"장단점?"
청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당장 흑경의 업을 받아들여 내 것으로 한다면 확실히 전투력은 지금까지보다도 강해질 거다. 다만-"
"다만?"
"약점이 명확해지겠지."
"약점?"
"그래, 약점이다. 흑경은 틀림없이 강하다. 그리고 그 녀석이 남긴 업에 담긴 힘 또한 방대하지, 아마 흑경의 업을 먹어치우면 내 몸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존재는 그렇게 많지 않을 거다."
게다가-
"수만 아니, 수십만에 달하는 망자들을 먹어치우며 강해지던 그를 생각해 보면 이 업은 아마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내 성장에 길을 만들어 줄 것이다."
청룡의 말에 제천대성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그럼 대체 왜 고민하고 있는 거야? 그냥 먹어치우면 되잖아?"
"말했을 텐데? 단점 때문이라고."
"아니, 그럼 단점 먼저 이야기를 하던가, 대체 단점이 뭔데?"
제천대성이 답답하다는 듯 묻자 청룡은 대답했다.
"이것 때문이다."
"이것?"
"그래, 이 보석, 이게 바로 흑경의 약점이지."
"……?"
그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청룡을 돌아보자 그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흑경의 업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이 거대한 보석은 내 몸 어딘가에 박힐 거다. 그리고 이 보석이 공격당하게 되면-"
"그 보석이 급소만큼의 약점이 된다 그거지?"
제천대성의 말에 청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론 흑경처럼 체내에 보석을 숨기고 다닐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약점이 그 누구에게도 확실하게 보일 정도로 만들어진다는 게 문제겠지."
청룡의 말에 제천대성은 잠시 생각하는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근데 방어력은 더더욱 올라간다며?"
"확실히 그렇다만 앞으로 우리가 싸울 녀석들 중에 내 방어력을 뚫을 수 있는 놈은 무조건 존재할 거다."
"뭐, 듣다 보니 그것도 그러네."
제천대성은 그렇게 말하곤 잠시 생각하는 듯 턱을 만지작거렸으나 이내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명확히 장단이 있어서 삼키기가 고민된다는 소리 아니야?"
"너 치고는 이해가 빠르군."
"……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못 들은 걸로 하고, 뭐 확실히 그런 장단점이 있는 것 같긴 해. 나도 전에 김현우한테 받은 역병군주의 업을 쓰고서 느끼기는 했으니까."
제천대성이 자신의 품속에 있는 역병군주의 업을 꺼내 들자 청룡은 말했다.
"원래 순수하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업이 아니면 남의 업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지."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제천대성은 역병 군주의 업을 괜히 던졌다 받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맞아, 확실히 이 녀석의 업을 좀 사용하면 출력이 올라가서 편하기는 한데, 딱 거기까지고 오히려 이상하게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져서 피곤해진다니까."
"애초에 우리의 업을 계약만으로 전부 사용했던 김현우가 신기한 거지."
청룡의 말에 제천대성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하긴 그것도 그래, 생각해 보면 그 녀석은 그냥 계약한 것만으로도 내 업이랑 네 업을 잘만 사용했지?"
"그래."
"……어? 생각해 보니까 어떻게 우리 업을 자기 마음대로 잘 사용한 거야?"
"그 의문을 지금에서야 가지는 건가?"
청룡이 한심하다는 듯한 느낌으로 타박을 주자 제천대성은 묘하게 억울하다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아니, 걔가 처음 계약을 하고 내 업을 사용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사라지게 되어 있다니까? 마치 자기 것처럼 내 업을 사용하는데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어?"
"……뭐, 그렇다고 해두지."
청룡의 말에 제천대성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청룡을 슬쩍 째려보더니 이내 소파에 길게 늘어지며 말했다.
"아~ 몰라!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된 거야?"
그렇게 괜스레 소리를 지른 제천대성은 이내 더 이상 청룡과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듯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고.
"……."
청룡은 다시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앞에 놓인 거대한 흑경의 업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12계층.
9계층과는 달리 보랏빛의 하늘이 항상 베이스로 깔려 있는 그곳에서-
"후……."
김현우는 보랏빛에 물들어 있는 구름들 사이에서, 근두운을 타고 12계층의 풍경을 잠시 감상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보랏빛의 풍경.
마치 사람의 눈을 몽환으로 홀리는 것 같은 하늘과 태양인지 달인지 모를 것들이 하늘에 떠 있고.
"……."
그것들의 아래에는 마치 풍경을 인위적으로 조형이라도 한 듯, 거대한 탑이 있었다.
보랏빛의 풍경에 물들어 시커멓게 보이는 탑.
그 풍경을 모두 확인하고 나서야, 김현우는 살겠다는 듯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역시 통로를 올라오는 건 눈이 피곤하다니까.'
물론 그 통로 덕분에 김현우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12계층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통로를 몇 번 정도 사용하다보니 상당히 힘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힘이 드는 것보다는 지루했다.
'……계속해서 똑같은 풍경이니까.'
탑을 올라올 때 보이는 것은 계속해서 똑같은 풍경이었다.
중세의 성벽처럼 쌓아올려진 탑에, 가끔 가다 뚫려 있는 구멍.
빛은 어디로 새어 들어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쪽은 계속해서 밝게 빛나고 있고, 아래쪽은 그와 반대로 어두워져 있다.
한마디로 모순적인 공간 그 자체에서 달라지는 풍경도 없이 계속해서 올라가야 하는 건 김현우로서는 굉장히 지루하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쯧."
허나 그것도 잠시, 김현우는 혀를 차는 것으로 그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한 뒤, 곧바로 탑을 향해 다가갔다.
탑에 다가가자 탑의 시커먼 표면이 김현우의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곧 김현우는.
"……이건?"
무척이나 익숙한 흔적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검은색의 탑 외면에 동그랗게 만들어져 있는 흔적.
김현우는 곧 그것이 자신이 예전 12계층에 왔을 때 아티팩트의 분실을 막기 위해 여의봉을 꽂아놨던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만 약한 건가?'
그리고 여의봉이 꽂혀 있던 흔적을 보며, 김현우는 노아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등반자들이 쉽게 뚫고 나가지 못하도록 굉장히 튼튼하게 지어놨다고 하지 않았어?'
김현우는 잠시 의문을 가졌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탑을 쉽게 뚫리는 건 김현우로서는 좋은 소식이었으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탑의 끝을 향해 움직였고, 곧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는 시커먼 탑의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치 탑이라기보다는 기둥처럼 끝 부분이 뾰족하게 되어 있는 모습을 잠시 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기다릴 것 없다는 듯 탑을 향해 뛰어들었고.
"흡!"
김현우는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꽈아앙!
그의 주먹이 탑을 때리자마자 들리는 거대한 굉음.
순식간에 검은 벽돌이 사방으로 터져나가고, 영롱한 보랏빛에 젖어 있던 검은색의 탑에 희뿌연 먼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보이는 것은-
"……응?"
검은 벽돌의 너머로 보이는 단단한 재질의 무언가다.
검은색으로 되어 있는 외벽과는 다르게, 마치 철판처럼 맨들맨들한 재질을 가진 벽.
김현우는 그것을 한번 만져본 뒤,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으나-까아아앙!
김현우가 전력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먹이 닿은 철판에는 살짝 구겨진 자국만이 남았을 뿐, 아무런 이상도 생기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짧게 혀를 찼다.
'역시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여의봉이 박혀 있던 자국을 봐서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으나 역시나 모든 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김현우는 괜스레 한숨을 내쉬고는-
"후-"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파지지지직!
그와 함께 김현우의 주변으로 튀어 오르기 시작한 검붉은색의 스파크.
그 뒤를 이어 푸른색의 스파크가 김현우의 주변으로 솟아오르고, 그의 머리가 마치 번개에 맞은 것처럼 삐죽거리며 서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당겨지기 시작하는 김현우의 주먹으로 모이는 마력들.
콰가가가가가!!
분명 무언가를 후려치지 않았는데도 주변의 공기를 잡아먹으며 패도적으로 그 기운을 키우고 있는 김현우의 마력은 곧 그의 팔 전체를 감쌌고-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 보자-!"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아앙!
이전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굉음이 순식간에 김현우의 고막을 때리고, 그와 함께 주변에 남아 있던 외벽들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박살 난다.
그리고-
"후-"
김현우는 순식간에 자신의 앞에 만들어진 거대한 구멍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의 앞을 막는 것은 없었다는 것처럼 시원하게 뚫려 있는 구멍.
물론 거대한 구멍 주변에 있던 검은 외벽들이 모조리 박살 나 있는 것을 보며 김현우는 조금 심했나? 하는 생각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리기는 했으나.
'모르겠다.'
짧게 생각을 정리한 뒤 망설임 없이 구멍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곧 그는 내부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
그리고, 곧 김현우는 이상함을 느꼈다.
내부는 온통 칠흑 같던 탑의 외부와는 다르게 나름대로 푸른색의 조명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볼 수 있던 내부.
탑의 내부 안에서는…….
"뭐야?"
시체들이 가득했다.
보이는 것은 온통 시체.
물론 그 시체는 김현우가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했던 외형의 시체였으나 그는 적어도 그 시체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 이외에도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시체들.
어느 것은 상반신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고, 또 어떤 것은 팔다리가 없기도 했다.
그런 시체들의 산과 함께 보이는 것은 푸른색의 외벽에 흩뿌려져 있는 검붉은색의 피.
김현우가 아닌 그 누가 보았더라도 이곳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주변에 완전히 널려 있는 시체를 보며 슬쩍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그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상기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김현우는 이석(異石)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너는 또 뭐 하는 새끼야?"
김현우는 이석과 함께, 자그마한 돌멩이를 들고 있는, 검은 뿔을 가진 남자를 볼 수 있었다.
# 245
245. 너는 또 뭐야? (1)
김현우의 시선이 일순 그 남자와 마주쳤다.
제일 먼저 보이는 특징은 머리 위에 나 있는 검은 뿔.
마치 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살갗을 파고 올라온 검은 뿔이었다.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눈.
붉은색의 동공에 분명 흰자위여야 할 주변 부분이 검게 칠해져 있었다.
마치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
그 뒤로 보이는 것은 그의 몸 곳곳에 묻어 있는 붉은색의 선혈과 그의 손 위에 놓여 있는, 푸른색 빛을 내뿜고 있는 이석이었다.
"너, 뭐 하는 새끼냐니까?"
입을 여는 남자.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긴장시키며 입을 열었다.
"내가 뭐 하는 새끼인지는 알아서 뭐 하게?"
대답과 함께 김현우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하는 생각.
'분명 12계층에는 절대 나보다 강한 녀석이 있을 수 없다고 했는데?'
노아흐와 아브는 분명 김현우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적어도 12계층의 내부에 들어갔을 때 자신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이는 없을 거라고.
그런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쯧.'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직접 마력을 발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것은 그의 모습과, 아마 그가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살육의 풍경.
물론 이 풍경은 원한다면 김현우 본인도 만들 수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앞에 있는 남자에게서 본능적인 무언가를 느꼈다.
그렇게 만들어진 침묵.
검은 뿔을 가진 남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고, 맞은편에 선 김현우는 그런 남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기운이나 마력은 느껴지지 않지만, 무조건 나와 비슷하다.'
도대체 어디서 나온 확신인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우는 머릿속에서 떠오른 직감에 의존해 몸을 긴장시켰고, 그의 입가는 반대로 호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왜 대화는 먼저 시작해 놓고 갑자기 입을 다물어? 가만 생각해 보니까 존댓말을 써야 할 것 같아서 그래?"
김현우의 어그로에 그 남자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허' 하는 소리를 내며 그를 바라봤다.
"이건 또 어디서 기어 나온 놈이야?"
"네가 기어 나온 게 아니고?"
"뭐? 내가 기어 나와? 하! 간만에 힘 좀 얻어서 실험이나 좀 해볼까 하고 내려왔더니 별 또라이가 다 있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으나, 이미-
"!"
김현우는 남자의 말에 대답하는 것 대신, 땅을 박차고 있었다.
순식간에 앞으로 튀어나가는 김현우의 신형.
그와 함께 순간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 떠지고, 김현우는 그가 당황하는 그 찰나의 시간에 자신의 마력을 모았다.
순식간에 끌어모아지는 마력.
허나 김현우는 순식간에 모아지기 시작한 마력을 끊고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의 반응속도는 굉장히 빨랐으니까.
콰득-!
김현우의 주먹이 남자의 명치를 노리고, 남자의 팔이 뒤늦게 가드를 올렸으나-꽈아앙!
-이미 김현우의 주먹은 그의 명치에 틀어박힌 상태였다.
꽝! 콰드드득! 꽝!
순식간에 시체들이 가득한 전방에 쏘아져 나간 남자는 탑의 바닥에 몇 번이고 몸을 부닥치고 난 뒤에야 자신이 만들어 놓았던 시체 사이에 몸을 처박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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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異石)
등급: 없음
보정: 없음
스킬: ????
-정보 권한-
악마들이 사는 12계층.
그중에서도 모든 최상급의 악마들이 살고 있다는 12계층의 최상층에 존재하고 있는 물건이다.
이석은 12계층의 최상층에 있는 보물로 여겨지며, 최상층에 있는 악마들은 기본적으로 이성이 없으나 그 누군가가 이 '이석'을 손에 쥐게 되면 오로지 그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만 움직인다.
그렇기에 이석은 8-11계층의 사람들에게 '악마를 다루는 보석'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었다.
또한 한정적인 상황에 변화를 일으킨 이석은 순간적으로 다변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지만 정확히 이 이석을 사용하는 방법은 너무나도 많기에 일정하게 설명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 이외에도 이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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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남자가 들고 있던 이석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찾던 것임을 확인하고 곧바로 하수분의 주머니에 챙긴 김현우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남자가 처박힌 시체 쪽을 바라봤고.
"이 새끼 봐라?"
남자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시체 더미에서 나와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보며, 김현우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도 12계층에 있는 녀석은 아니다.'
제일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물론 평범한 녀석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긴 했으나 조금 전 자신의 주먹을 맞고도 멀쩡하게 일어나는 것을 봤을 때 김현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
그는 분명 아까 그렇게 말했다.
'새롭게 얻은 힘을 실험해 보려고 내려왔다.'
만약 저 녀석이 정말 12계층에 살고 있는 녀석이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지금 이곳은 탑의 최상층이었으니까.
김현우가 그렇게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며 남자를 바라보자, 그는 여전히 입가에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혼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뭐 좋아, 한번 해보자 이거지? 애초에 도망가려고 해도 쫓아가서 죽였겠지만 말이야."
"지랄."
김현우의 한 마디에 남자의 미소가 더더욱 진해지고, 오히려 그는 감탄했다는 듯-
"대단해. 아주 그냥 간이 배 밖으로 흘러나온 것 같아! 근데,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면-"
팟!
"그렇게 아가리 털 만한 힘은 충분히 갖추고 있는 거, 맞지?"
"!!"
김현우의 앞에서 손을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
그는 곧바로 몸을 뒤로 내빼며 남자의 손을 피했으나, 그는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더더욱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나, 두억신(斗億神)을 건들고 그렇게 빠져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김현우의 명치에 조금 전과 같은 정권을 먹였다.
***
12계층의 중간층.
그곳에는 한 남자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명의 악마가 존재했다.
"흐음."
허나 그의 모습은 분명 악마임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질적인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형을 하는 그 악마는, 마치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생각.
이성이 있는 이들이라면 그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
허나 그럼에도 그런 악마의 모습이 굉장히 이질적으로 보인 이유는 바로-
"역시, 나쁘지 않아."
-12계층은 원래라면 '이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12계층,
그곳은 '밖'의 악마들을 본 따 만든 장소였으며, 거기서 만들어지거나 태어난 이들은 처음부터 '본능'이 앞서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에 그런 본능이 앞서는 악마들의 공간에서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악마의 모습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고, 마치 인간처럼 변해 있는 외모도 이질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허나 정작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악마 '라쿨'은 자신의 그런 모습이 이질적이지 않은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걸로 3000마리째.'
그 말과 함께 라쿨은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아래에 깔려 있는 악마들을 바라봤다.
모두 제각각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악마들의 시체.
라쿨은 분명히 이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이걸로 남은 건 다섯 마리.'
악마는 선혈이 묻어 있는 자신의 입가를 혀로 한번 날름거리며 끝없는 우월감에 취했다.
맨 처음 그가 태어났을 때, 라쿨은 어째서인지 '지성'이 있었다.
그래, 자신과 같은 동족들에게는 없었던 지성과 이성이 라쿨에게는 있었고.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악마를 먹으면 자신이 강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금까지 동족들을 먹어치우고 자신의 힘을 키워왔다.
바로 이 탑 전체를 자신이 먹어치우기 위해서.
물론 라쿨은 자신이 왜 그런 목적을 가지게 되었는지 스스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으나 그는 오롯이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동족을 죽이고 자신의 힘을 키웠다.
그리고-
'이제 다섯 마리만 더 잡으면.'
라쿨은 이제 곧 자신이 탑의 상층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다섯 마리.
다섯 마리만 죽이면 자신의 몸에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먹잇감이 될 또 다른 동족을 찾았고.
……!
"?"
곧, 슬쩍 흔들리기 시작하는 지반을 느끼며 순간 땅을 내려다봤다.
아주 약하지만, 분명 조금씩 떨리고 있는 지반.
쿵……쿵……쿵……
"……?"
그리고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 지반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떨림을 더해가고 있었다.
'뭐지?'
쿵-!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커지는 소리.
그리고-
쿵! 쿵! 쿵!! 쾅!!!
"!!"
-라쿨은 그 소리가 천장에서 들린다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꽝! 꽈가강! 꽈아아앙!
라쿨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이전보다도 선명하고 거대하게 들리는 굉음.
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 순간 그 굉음이 바로 자신의 머리 쪽에서 울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꽈아아아앙!!
"끄에에엑!"
-유감스럽게도, 라쿨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예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니,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넘어서서 라쿨의 몸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바로-
"후읍!"
꽈아아아앙!
아래층으로 떨어지며 서로에게로 난타전을 벌이고 있는 두억신과 김현우에 의해서.
꽈드드득!
"쯧"
김현우의 무릎이 두억신의 다리를 막아내고, 오른손이 거침없이 휘둘러져 그의 머리를 노린다.
몸을 뒤틀어서 피하는 두억신.
김현우는 그때를 노리고 곧바로 다리를 휘둘렀으나-텁!
"똑같은 거에 두 번은 안 당하지!"
"!"
두억신은 김현우의 발을 잡고는 그대로 추락하고 있는 지층을 향해 힘차게 내리찍었다!
꽈아아아아앙!
"크학!"
저도 모르게 터진 신음과 함께 들리는 거대한 폭음.
"이거 놔 이 개새끼야!"
김현우는 정신을 차리고는 두억신을 떼어내기 위해 잡히지 않은 오른 다리를 그에게 휘둘렀으나-빠아아악!
자세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힘이 약했던 탓인지, 분명 두억신의 얼굴을 후려찼음에도 불구하고, 두억신은 또 한번 김현우의 몸을 휘둘러 던전의 지층을 깨부쉈다.
등 쪽으로 몰려오는 끔찍한 고통.
두억신은 이제 시작이라는 듯 다시 한번 김현우의 몸을 휘두르려 했으나 김현우는 이대로 당하지는 않겠다는 듯 두억신 쪽으로 몸을 붙여.
"이-"
빠아아악!
"개새끼야!"
"큭!?"
그의 입을 향해 머리를 박았다.
순간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리를 잡았던 손을 느슨하게 푸는 두억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김현우는 곧바로 두억신의 몸을 찬 뒤, 곧바로 그의 사정거리 내에서 벗어났고-쾅!
그 둘은, 12계층의 하층에 오고 나서야 추락하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쯧……!"
떨어져 내리는 게 멈추자마자 뒤늦게 몰려온 고통에 인상을 찌푸린 김현우는 자신의 반대편에 처박힌 두억신을 바라봤고.
"이제야 뻐근한 게 좀 풀렸어."
곧 완전히 박살이 난 잔해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그를 보며,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246
246. 너는 또 뭐야? (2)
'이거 좀 빡센데.'
김현우는 자신과 마주 보고 있는 두억신을 보며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조금 전에 있었던 짧은 격돌.
시간으로 치자면 몇 분이 흐르지 않은 짧은 전투 사이에서 김현우는 눈앞에 있는 두억신이 자신의 예상대로 12계층에 있는 녀석이 아니라 '정복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도 자신과 동급, 어쩌면 그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정복자.
"왜 그렇게 조용해? 한번 싸워보고 나니까 금세 마음이 바뀌었어? 응?"
두억신의 도발.
허나 김현우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생각을 이어나갔다.
'조금 더 싸워볼까?'
물론 김현우는 이곳에서 저 녀석과 끝장을 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지금 상태에서 그가 잃을 것은 없으니까.
등반자나 정복자가 자신이 사는 지역인 9계층, 그러니까 지구로 내려왔을 때는 이를 악물고 싸워야 하겠으나, 여기서는 그러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이곳은 김현우가 딱히 지킬 필요가 없는 12계층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김현우가 두억신에게서 '이석'을 빼앗은 다음에도 굳이 한번 맞붙어본 이유는 상대방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김현우는 그가 '정복자'라는 것을 확신했으니까.
"생각이 좀 바뀌기는 했지."
"그래? 어떻게?"
그러나 아직 김현우는 두억신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분명 그와 전투를 치르기는 했으나 자신과 두억신은 본격적으로 싸움을 하진 않았으니까.
김현우는 아직 대부분의 힘을 숨기고 있었고.
그것은 두억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좀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을 것 같더라고."
-네가 너무 머저리 같아서 말이야.
씨익-
김현우는 두억신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엿보기 위해 그를 도발했다.
"뭐?"
"못 들었어? 너 개허접이라니까? 아직 나는 내 힘의 10%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거의 비등비등하잖아? 응?"
계속되는 김현우의 도발.
물론 김현우의 입에서 나오는 도발은 삼류 잡배들이나 동네 초등학생들이나 할 것 같은 싸구려 멘트였으나-
"이 새끼 봐라……?"
-김현우의 예상대로, 두억신은 그런 김현우의 싸구려 삼류멘트에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반응했다.
분명 웃음을 짓고 있는 두억신.
허나 김현우는 그 미소가 즐거워서 짓고 있는 미소가 아닌, 빡쳐서 짓고 있는 미소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 이거지? 너도 힘을 숨기고 있었다고?"
"그래, 힘만 개방하면 너 같은 머저리는 그냥 박살 낼 수 있다 이거야."
그런 두억신의 표정을 보고 띠꺼운 표정을 지으며 도발하는 김현우.
두억신은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고 있다, 이내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한차례 혀로 핥고는,
"설마 그런 애새끼 같은 장난에 어울려 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이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두억신의 반응을 보며 새삼스레 놀란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뭐야, 안 걸리네?"
놀랐다는 듯 묘하게 두 눈을 크게 뜨고 말히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두억신은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대답했으나-
"그딴 애새끼 장난에 걸릴 리가 없지."
"아, 그래? 나는 또 네가 너무 멍청해 보여서 이 정도만 해줘도 바로 넘어올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네?"
"……."
이어지는 김현우의 말에 두억신의 표정에서는 마침내 미소가 사라졌다.
그런 두억신의 모습을 보며 묘하게 깐족대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김현우.
"뭐야? 설마 빡친 거? 조금 전까지는 애새끼 같은 장난에는 안 걸린다더니, 설마 진짜로 빡친 거야?"
킥킥 거리면서 말하는 그.
그에 두억신은-
"……애새끼 장난 같은 그 도발과는 별개로, 네 녀석의 아가리는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군."
"그래서 어쩌려고?"
"살짝 손을 봐줘야겠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주변으로, 무엇인가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마력이라기에는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도력이라기에는 선하지 않은 그 무엇인가가, 두억신의 주변에 모여드는 것을 보며 김현우는 겉으로는 얼굴을 굳히면서도 내심 미소를 지었다.
쿵- 쿠구구궁- 쿵!!
그저 무엇인가를 자신의 주변으로 모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떨리기 시작하는 지반, 그와 함께 두억신의 주변으로 검은색의 안개와도 같은 것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내, 그의 몸이 변이하기 시작했다.
우득, 우지지직 우득!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하는 두억신의 몸.
조금 전까지는 뿔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던 두억신의 모습이 안개가 모여드는 것을 기점으로 바뀌어 나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바뀌기 시작한 것은 그의 머리에 나기 시작한 6개의 뿔.
양쪽 이마에 세로로 세 개씩, 도합 여섯 개의 검은 뿔이 자라나기 시작하고, 그의 손발이 마치 요괴의 그것처럼 바뀌기 시작한다.
아니,
손발뿐만이 아닌, 몸 전체가 거대하게 바뀌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늘어나기 시작한 검은 연기와도 같은 그것은 순식간에 김현우가 서 있던 근처를 먹어치웠고.
그 상태에서 두억신은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그 입, 찢어주마."
-두 눈을 부라린 채, 어느새 자신의 손에 쥔 거대한 도깨비 방망이를 어깨에 걸치며 그리 말했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변이한 두억신의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피부로 느껴지는 저릿한 기운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이게 전부야?"
"네 녀석의 아가리를 찢는 건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군."
"그럼 더 사용할 수 있는 힘은 없다 이 소리네?"
"이번에 새로 얻은 '위업'이 있기는 하다만, 네 녀석에게 사용하기에는 아까운 힘이지."
두억신의 말에 김현우는 이곳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자신도 힘을 내보이고 좀 더 전력을 알아보느냐.
그게 아니라면 이 정도에서 그의 전력을 알아낸 것에 만족하고 그만두느냐.
'……위업이 있다고 했으니 이게 완전한 전력은 아니겠지만…… 그보다, 어째서 저 녀석이 위업(偉業)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거지?'
……위업(偉業)이 그렇게 흔하게 돌아다니는 건가?
아니면 자신을 상대로 페이크를 치는 건가?
김현우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에 의문을 떠올렸으나 그는 아주 잠깐 두억신과 대화를 한 것만으로도 그가 페이크를 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고민했으나 곧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 근데 이거 정말 유감인데 어쩌지?"
"?"
"나는 너랑 별로 싸울 생각이 없는데."
이 이상 두억신과 싸우지 않는 쪽으로.
김현우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는 순간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조롱하듯 말했다.
"뭐야, 도망치는 거냐?"
"응, 생각보다 훨씬 강해서 안 될 것 같네?"
넉살 가득한 김현우의 미소에 두억신의 표정일 일순 묘해졌으나 이내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네가 선택할 것은 순순히 죽는 것밖에는 남지 않았군."
두억신의 말에 김현우는 그와 마찬가지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아닌데? 도망쳐야지?"
"……이곳에서 도망친다고? 응?"
두억신은 피식 웃으며 주변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사면은 막혀 있다. 뚫려 있는 건 천장뿐이지. 그런데 어디로 도망치겠다는 거지? 거기에다가 네가 나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 나에게서?
두억신이 절대적인 자신감을 내비치며 비틀린 웃음을 짓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도망칠 수 있지."
"그래?"
사실 김현우도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본격적으로 싸우고 싶었으나 이곳에서 힘을 보이는 것은 하책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힘을 보이게 되면 본격적으로 견제를 받게 될 테고, 그것은 결국 김현우 본인에게 주어진 시간을 줄이는 것이 될 테니까.
'아쉽지만 적당히 전력을 알아낸 것으로 만족하자.'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금방이라도 이겼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못 도망갈 것 같아?"
김현우의 자신감 어린 말투.
너무나도 확신이 어린 그의 표정과 말투에 일순 두억신이 묘한 표정을 짓자,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병신, 다음에 보자."
-이내 그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올렸다.
그 모습에 일순 멍한 표정을 지은 두억신.
물론 그는 김현우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으나 그것이 곧 좋지 않은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곧바로 김현우를 향해 뛰어들었다.
꽝!!
이전과는 다르게 지반을 완전히 박살 내며 김현우의 앞으로 도약한 두억신.
허나 김현우는 그의 움직임을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았고, 이내 두억신의 주먹이 자신의 얼굴에 가까워졌을 때.
"출입."
김현우는, 두억신의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
시스템 룸.
"……그래서, 두억신이라는 정복자랑 만나고 왔다고요?"
"그래."
김현우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거린 뒤로 아브에게 12계층에서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알려주기 시작했고,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하셨어요. 저로서도 설계자와 그들을 감시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그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지 않은 것은 좋은 판단이었다고 봐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애초에 그 녀석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출입 때문이었으니까."
김현우가 두억신과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도 그를 마음껏 도발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김현우가 가지고 있었던 출입 스킬 때문이었다.
출입 스킬이 있다면 김현우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출입 스킬이 만능은 아니었다.
원래라면 출입 스킬을 사용해 그 자리에서 벗어낫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김현우는 다시 그곳으로 빠져나가야 하니까.
그래, 원래라면 말이다.
"근데 말이야."
"네?"
"정말로 9계층으로 갈 수 있는 거야?"
"당연하죠, 제가 저번에 제작자와 있을 때 말했듯이 제 능력은 이미 모두 풀린 상태라서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왜 9계층에서 12계층으로 곧바로 올라가는 건 안 되는데?"
"……그것도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능력의 봉인이 전부 풀렸다고 해도 아직 그렇게 마음대로 전이를 시킬 수 있을 만한 힘은 없어요. 뭐, 말했듯이 지정된 곳으로 사람을 전이시키는 건 가능하지만요."
김현우가 진짜 여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아브의 풀린 힘 때문이었다.
그녀의 힘이 풀린 뒤로는 출입을 사용하더라도 12계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9계층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이렇게 기다리면 되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어차피 제 봉인도 풀렸고 정보 권한 자체가 최상위가 되어서 여기에 오래 있어도 상관없으니까요. 대충 5시간 정도만 되면 충분히 힘이 모일 것 같아요."
"그래?"
그런 아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김현우.
"아."
그는 갑작스레 떠올랐다는 듯 탄성을 내지르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이참에 시간이 난 김에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물어보고 싶은 거요?"
아브의 되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뭔데요?"
그녀의 물음에 김현우는-
"위업(偉業)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렇게 이야기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아브를 바라봤다.
# 247
247. 위업(偉業) (1)
시스템 룸 안에서, 아브는 김현우를 바라보며 살짝 고민하는 느낌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위업(偉業)에 관해서 말하는 거죠?"
"그래. 저번에 노아흐에게 말하니까 굉장히 긴 시간을 들여서 설명해야 한다고 해서 안 듣고 넘어갔거든. 근데 이번에 만났던 두억신도 위업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하길래 말이야."
-혹시 위업이 그렇게 흔한 건가 싶어서 말 꺼낸 거지.
김현우의 대답에 아브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말했다.
"확실히 제작자의 말대로 위업을 전부 설명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긴 해요. 다만 좀 편하게 설명할 방법이 있기는 해요."
"편하게 설명할 방법?"
"네. 좀 복잡한 이야기긴 한데 좀 비유를 해서 설명하면 편하거든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럼 비유 좀 해서 말해줘 봐, 어차피 설명이 너무 길면 제대로 못 들을 것 같으니까."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노아흐의 말대로 그냥 업(業)과 위업(偉業)의 차이는 좀 짚고 넘어가려면 여러 가지 요인을 설명해야 해서 오래 걸리는데, 이걸 간단하게 설명하면 그냥 격의 차이로 보시면 돼요."
"……격의 차이?"
"네. 격이요. 물론 굉장히 추상적이기는 한데, 이것만큼 업과 위업의 차이를 잘 나눌 수 있는 건 없거든요."
"……뭐, 신격…… 이런 거야?"
"네, 뭐 그런 거죠?"
"가만있어 봐, 그럼 청룡도 위업을 가지고 있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럼 뭔데?"
"음…… 그러니까."
아브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몇 분정도 고개를 갸웃갸웃 하고 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예를 잘못 들었네요."
"……그럼 격의 차이는 아닌 거야?"
"아뇨 그건 맞기는 해요. 다만 격의 차이 중에서도 그 기준을 제대로 말씀드려야 했어요."
"기준?"
"네, 뭐…… 간단히 예를 들자면 인간과 신선 정도만 되도 격의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는 거잖아요?"
"……뭐 그렇지?"
"그런 것처럼 당장 가디언의 동료로 있는 청룡도 사방신 중의 한 명이라는 업을 가지고 있기는 해도, 그건 위업의 범주에는 들지 못해요."
"……왜?"
"그건 결국 누군가가 '인정'한 업이거든요."
"……인정한 업?"
"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청룡이 용이 된 것, 그리고 용이 된 그가 청룡이 되기까지는 본인의 수행도 있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는 옥황상제가 그를 인정했기 때문이에요."
다른 업들도 마찬가지죠.
"당장 가디언과 같이 있는 손오공이나 천마도 마찬가지에요, 그 이외에 지금까지 만났던 적들도요."
그들은 모두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은, 혹은 설화 같은 것에서 인정된 업이에요.
"……그럼 위업은?"
"위업은 태생적인 거죠."
"……태생?"
"음, 그러니까. 지금 청룡이나 제천대성, 그리고 가디언이 보았던 다른 등반자들은 모두 살아오면서 업을 쌓은 거잖아요?"
"……그렇지?"
"근데 위업(偉業)이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타고 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태생적으로?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어…… 이것도 비교를 하면…… 아, 그러니까 이거예요. 청룡이나 제천대성은 맨 처음 시작이 어땠죠?"
"……청룡과 제천대성의 시작?"
"네."
"……청룡은 이무기였고, 제천대성은 원숭이였지?"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곧바로 대답했다.
"바로 그것에 차이가 있는 거예요."
"……이거에 차이가 있는 거라고?"
김현우의 되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한 마디로 위업(偉業)이라는 건 평범하게 태어나 업을 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태생적으로 '업(業)'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거예요."
***
흑백이 조화롭게 인테리어 되어 있는 공간.
그곳에는 두 명의 인영이 있었다.
한 명은 검은 안개로 온몸을 가린 '형체 없는 자'
그 모습을 제외하고는 생김새를 알 수 없는 그는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다른 한쪽은 바로 사천(四天)중 한 자리를 가지고 있는 비단옷을 입은 여자, 비(妃)였다.
그 두 사람을 기점으로 흐르는 침묵.
형체 없는 자는 느긋하게 그녀의 말을 기다리듯 앉아 있을 뿐이었고, 비는 그런 형체 없는 자와는 다른 느낌으로 뭔가를 고민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유가 뭐죠?"
그런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바로 비였다.
그녀의 질문에 형체 없는 자는 느긋하게 질문했다.
"이유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지?"
"……어째서 저희에게 위업(偉業)을 주셨냐 이 말입니다."
"흐음, 그 이야기는 내가 전에도 분명 말했던 것 같은데. 혹시 제대로 듣지 못한 건가?"
형체 없는 자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제대로 들었어요."
"그렇다면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고 보면 될 것 같은데, 무슨 이유를 묻는 거지?"
형체 없는 자의 물음에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이해할 수가 없다?"
형체 없는 자의 되물음에 비는 잠시 고민하는 듯 고개를 숙이다 입을 열었다.
"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한 일은 지금까지 당신이 보여왔던 행동과는 너무 모순적이에요."
"모순, 모순이라……. 어떤 면에서?"
형체 없는 자의 물음.
그 물음에 그녀는 또 한번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결심한 듯 두 눈을 곧게 뜨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모아온 모든 업들을 '위'로 보낼 최소한의 것만을 빼고 모두 자신이 먹어치웠죠."
-아주 자그마한 업이라도 말이에요.
"그래서?"
"……그래서,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저희에게 하나의 업을 주는 것도 아니고 자그마치 위에 올릴 위업(偉業)을 주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다니……."
비는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형체 없는 자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는-
"흐음, 그걸 굳이 내게 물으러 왔어야 했나?"
"……네?"
"너희도 짐작하고 있지 않나? 내가 왜-"
-너희들에게 위업(偉業)을 주었는지 말이야.
그 말과 함께 검은 안개가 미소를 짓는 듯한 표정을 만들어내고, 그 모습을 본 비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등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확실히, 그녀는 얼마 전 선(仙)의 공간에서 형체 없는 자가 사천에게 위업을 나누어 준 이유를 대충 추론해 보기는 했었다.
또한, 그 추론에 관한 결과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허나, 그녀는 백(白)의 추론이 그래도 조금은 잘못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의 추론은 어찌 보면 합당할 수도 있었으나, 오히려 다른 측면에서 봤을 때 백의 추론은 형체 없는 자가 기본적으로 손해를 보는 구조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형체 없는 자가 사천인 자신들에게 업을 준 이유 중에는 또 다른 것이 있을 거라고.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는데-
"확실히 호랑이기는 해도 영물이라서 그런지 똑똑해, 확실히 그런 면에서는 머리가 잘 굴러가는군."
비는, 형체 없는 자의 말을 들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정말로?"
비의 말에 형체 없는 자는 검은 안개로 피식 웃는 듯한 표정을 만들어내며 대답했다.
"비, 자네는 확실히 머리가 잘 돌아가지, 그리고 영리해. 제일 마지막으로 사천(四天)에 들어왔어도 몇 번밖에 보지 않은 내 성격을 잘 알고 있지."
그는 말을 멈추지 않고 이어나갔다.
"자네의 말대로 나는 탐욕스러운 게 맞네, 뭐든지 나는 손해 보는 게 없는 법이지. 맨 처음 이 탑을 만들 때도 그랬고, 위와 협상할 때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말이야.
"그거 아나?"
씨익-
"자네는 나에 대해서 잘못 파악하고 있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덜' 파악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덜…… 파악하고 있다고요?"
"그래, 내가 말했지 않나? 나는 탐욕스럽다고. 허나 나는 그 이상으로 '미식'을 즐긴다네."
형체 없는 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입가를 핥았다.
츄릅.
분명 어두운 안개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들리는 소리.
그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만약 자네의 말대로 내가 탐욕스럽기만 하다면 아마 이런 상황까지 오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겠지. 안 그런가?"
"……설마, 당신은 진짜로 그럴 생각으로."
"몇 번이나 묻지 말게, 자네도 이미 전부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호랑이가 전부 이야기 했을 텐데?"
형체 없는 자의 말에 그녀는 입을 다물고는 이내 굳어진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자가 과연 저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녀의 질문.
형체 없는 자는 대답했다.
"모르지."
"……뭐라고요?"
"말하지 않았나? 나는 그자가 자네들을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네. 아니, 오히려 생각해 보면 그 녀석이 자네들을 이긴다는 것 자체가 살짝 어불성설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군."
-자네들은 이제 위업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그럼 대체 왜?"
비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형체 없는 자를 바라봤으나,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투자지."
"투자라고요……?"
"그래, 투자야. 어떻게 단 하나의 손해도 보지 않고 미식을 즐길 수 있겠나?"
씨익-
"자네도 알다시피 세상은 친절하지 않아, 이 탑뿐만이 아니지. 이 위도 마찬가지고, 반대로 아래도 마찬가지일세. 원하는 것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게 정말로 많지."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일세. 어떻게 아무것도 잃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미식도 마찬가지일세. 만약 자네들에게 위업을 주지 않았다면 그 녀석은 분명 평범하게 내 앞에 섰을 걸세."
그런데-
"만약 내가 자네들에게 위업(偉業)을 준다면?"
"……."
"그래, 좀 달라지겠지. 아니 조금이 아니야, 아주 많이 달라지겠지!"
형체 없는 자는,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아주 많이 달라질 거야! 그에게 닥칠 평범한 시련은 그의 목줄을 틀어쥘 정도로 거대한 시련이 되어 그를 덮칠 거야. 아주 힘든 일이 되겠지. 오히려 거기서 쓰러져버릴 수도 있네."
그래, 사실 그럴 확률이 더 높지.
"그러면 굉장히 안타까울 걸세, 자네 말대로 나는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는 거지. 그런데, 그런데 말일세."
"……."
"그가 만약에라도 그 시련을 넘는다면 어떨 것 같나? 응? 자네들을 모두 처리하고, 그가 만든 동료들을 데리고 내게 오면? 응?"
"당신은…… 대체……."
그녀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형체 없는 자를 바라봤으나, 그는-
"그래, 그건 최고의 미식이 될 거야! 모든 역경을 딛고 자신의 동료들을 데리고 나를 죽이기 위해 올라온 그는…… 그래, 굉장히-"
히죽거리며-
"-굉장히, 맛있을 거라고."
-그렇게 말했다.
# 248
248. 위업(偉業) (2)
그렇게 한동안 아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짧게 혀를 차며 대답했다.
"거참 더럽게 파악하기 힘드네."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짧게 침음성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말했듯이 일반적인 업과 위업을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제일 편해요. 다만 예외가 많아서……."
아브가 그렇게 말하며 슬쩍 말을 흐리자 김현우는 쩝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뭐, 대충 알았으니까 됐어."
사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았으나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했다.
'어차피 들어봤자 이해도 못 할 것 같고.'
아니, 사실 어느 정도 이해하기는 했다.
"……그러니까 네 비유에 의하면, 그냥 태생적으로 업을 타고난 녀석들의 업을 위업이라고 하는 거잖아?"
"네, 그렇죠……?"
"근데 또 그렇게 설명하기에는 몇몇 예외가 있는 거고?"
"……그것도 맞죠."
아브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김현우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생각했다.
'뭐, 확실히 이렇게 놓고 보니 노아흐가 했던 말이랑 그리 다를 바가 없긴 하네.'
노아흐는 위업을 일반적인 업보다 더 강한 업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해줬었는데 이렇게 보니 그 비유가 김현우가 이해하기는 편했다.
'……그래도 좀 더 정확하게 알기는 했으니까.'
김현우는 아브가 해주었던 설명을 복잡할 것 없이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반적인 업(業)이 '노력'으로 쌓을 수 있는 업이라면.
위업(偉業)은 그냥 타고난 재능으로만 쌓을 수 있는 업이라고 이해하면 편했다.
물론 그중에도 예외가 있기도 하고 김현우가 정리한 표현이 맞지 않을 수도 있으나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사실 업이고 위업이고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중요한 건 앞으로 김현우가 상대할 녀석들의 전력.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업이 일반 업인지 위업인지는 상관없다.
김현우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들의 강함이었으니까.
그렇게 한동안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던 생각을 차근차근히 정리한 김현우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하수분의 주머니를 꺼내 그 안에 넣어놓았던 이석을 꺼냈다.
분명 평범한 돌일 텐데도 불구하고 묘한 푸른색으로 발광하고 있는 이석을 보며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그보다, 노아흐가 가져오라고 한 건 이거 맞지?"
김현우가 아브에게 이석을 보여주자 그녀는 그로부터 이석을 받아들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네, 이게 바로 그게 맞을 거예요."
"그럼 이제 이걸 가져다주기만 하면 되는 건가?"
"음, 불편하면 제가 가져다드릴까요?"
"어떻게?"
김현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아브는 곧바로 대답했다.
"힘의 봉인이 풀린 뒤부터는 어느 정도 제한이 걸리기는 하지만 이 공간 말고도 다른 곳으로도 이동할 수 있게 됐거든요. 애초에 저는 '통괄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기도 하니까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저번에 힘을 다 썼다고 했나?"
"……저번이라면, 범천 때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그때."
"네, 그때 당시에 그가 오는 걸 막으려고 12계층을 단절하느라 거의 모든 힘을 써버리기는 했죠."
아브의 대답에 김현우는 슬쩍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럼 저번처럼 이곳에 못 오게 계층을 단절하거나 하는 건 못하는 거지?"
"네, 그건 아마 좀 힘들 것 같아요……. 만약 하라 그러면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제가 가진 힘으로는……."
"네가 가진 힘으로는?"
"……한 시간?"
"한 시간 정도가 한계라고?"
"아마 그럴 것 같아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좀 짧기는 하네. 그런데 계층을 단절한다는 게 그렇게 많은 힘을 소모하는 일이야?"
김현우의 물음에 묘하게 고민하는 느낌으로 고개를 두어 번 정도 갸웃거리더니 이내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많을 힘을 소모할 정도의 일은 아니에요, 다만 지금은 '설계자'가 이 탑의 권한 대부분을 쥐고 있거든요."
"……설계자가?"
"네, 그 덕분에 원래 통괄자는 저라고 하더라도 탑을 조종하는 데 많은 힘이 들어요."
"한 마디로 효율이 별로 좋지 않다 이거지?"
"네. 그 말이 맞겠네요."
아브의 끄덕거림에 김현우는 쯧 하며 한 번 더 혀를 차고는 머리가 복잡한지 두 눈을 감으며 소파 쪽으로 몸을 뉘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아브는 이내 김현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이번에 만난 그 정복자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김현우는 인중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더니 대답했다.
"뭐, 대충 그것도 있기는 하지. 결국 어그로를 끌지는 않았어도 혹시나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사실 김현우는 지금 상황 자체도 굉장히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설계자의 입장에서 지금 이 상황은 당연히 좋지 않은 상황이었을 테니까.
당장 그의 동료인 기술자는 이미 자신의 손에 죽었고, 그가 데려왔던 다른 정복자들도 마찬가지로 청룡과 제천대성, 그리고 미령과 하나린에게 죽임을 당했다.
명백히 자신의 전력이 줄어든 상황.
허나 그럼에도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 마치 자신에게 시간을 주는 것처럼, 설계자는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역시, 좀 이상하단 말이야."
"……정복자를 만난 거요?"
"그것도 포함해서, 설계자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좀 궁금해서 말이야."
"설계자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요?"
"그래, 솔직히 너도 알고 알겠지만 지금 이 상황은 오히려 설계자에게는 좋지 않은 상황이잖아? 상대의 전력은 늘어나고 있고 반대로 자신의 전력은 깎이고 있으니까."
"그건 그렇죠."
아브의 긍정에 김현우는 곧장 대답했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인다 이거지, 자신의 전략이 깎여 나가는 상황에도 딱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까."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고민하듯 고개를 아래로 숙였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던 아브는 이내 망설이는 듯 입을 우물 거렸으나 이내-
"아마도."
"……아마도?"
"그냥 예상이기는 해도, 아마 제 예상대로라면, 설계자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녀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
천호동에 있는 자택 내.
"……내 업을 되찾을 수 있는 법을 알았다고?"
소파에 앉아 자신을 향해 얼굴을 들이미는 그를 보며 김현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천대성을 밀어내며 대답했다.
"뭐, 나도 자세하게 설명을 들은 건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게 가능할 거라고 하긴 하던데?"
김현우의 말에 제천대성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로?"
"……그러니까, 나도 듣기만 한 거라서 잘 모른다니까? 자세한 건 1주일 뒤에 가보면 알겠지."
김현우의 말에 제천대성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갸웃거렸고, 옆에서 김현우와 제천대성의 대화를 지켜보던 청룡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사실인가?"
"뭐가?"
"업을 되찾아 올 수 있다는 말 말이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그냥 들은 거라니까? 자세히는 나도 모르고 1주일 뒤에 가보면 알게 되겠지."
"……확실히 제작자의 말이라면 뭔가 방법을 찾은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제작자가 업을 찾을 수 있을 리가────"
김현우의 거듭된 대답에 청룡은 허공에 뜬 채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청룡.
그는 드물게 흥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제천대성과 청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그게 그렇게 못 미더울 정보야?"
그의 물음에 청룡은 생각을 이어나가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좀 믿기가 어려운 정보기는 하지."
"왜?"
"너도 알겠지? 저 녀석의 업은 이 탑에, 정확히 말하면 '설계자'에게 빼앗긴 상태다."
"응? 잠깐, 설계자한테 빼앗겼다고?"
김현우의 되물음에 청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정확히 말하면 이 탑에 빼앗긴 거라고 보는 게 맞지만, 어차피 이 탑에 있는 업들은 모두 그 녀석에게 흘러갈 테니 설계자에게 빼앗기는 게 되는 거지."
아무튼-
"그런 시점에서 봤을 때, 제작자가 제천대성의 업을 온전히 찾을 수 있는 법을 발견했다고 하면, 좀 제대로 믿기는 힘들지 않나?"
"……확실히, 그건 그러네."
사실 김현우는 지금까지 제천대성이 업이 없는 상태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가 쥐고 있던 업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제천대성은 원래의 업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
한동안 청룡의 말을 듣고 짧게 생각을 이어나가던 김현우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무튼, 지금 우리끼리 이야기해 봤자 딱히 나오는 답은 없을 것 같으니까 1주일 뒤에 찾아가 보자고."
"일주일 동안 잠이나 자고 있을까?"
"……갑자기?"
김현우가 제천대성을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원래 잠을 자면 시간이 빨리 가거든."
"그건 동감한다, 사실 옛날에 수행할 때도 잠을 참는 게 참 고역이었지, 토굴에 들어가 수행하다 깜빡 잠이 들면 백 년 정도는 우습게 지나가니까 말이야."
갑작스레 시작된 청룡과 제천대성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김현우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그 둘의 대화를 끊고는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물어볼 게 있었는데."
"물어볼 거?"
"그래, 혹시 너희들 두억신이라고 알아?"
"……두억신?"
청룡의 되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혹시 알아?"
"갑자기 그 이름은 왜 나와?"
제천대성의 물음.
그에 김현우는 조금 전 아브에게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다시 하기 시작했다.
노아흐의 부탁으로 이석을 구하러 12계층에 간 것부터 시작해서, 12계층에 먼저 도착해 있던 두억신을 만난 것까지.
"……두억신, 두억신이라."
김현우의 이야기가 끝나자 소파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제천대성은 입을 열었다.
"뭐, 알기는 알지."
"알고 있다고?"
"그래, 뭐 물론 잘 알고 있는 건 아냐."
"……뭐야 그건? 뭐…… 그냥 이름만 들어봤다, 뭐 그 정도라는 거야?"
"그렇지?"
"너는 어떻게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게 없냐? 어떻게 들어보면 다 한 다리만 걸치고 있네."
김현우가 괜스레 제천대성을 타박하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그럼 어떻게 해? 그리고 애초에 나는 원래 하늘에 있든 땅에 있든 딱히 소문 같은 건 듣고 다니는 타입도 아니었다고."
제천대성의 반박을 들은 김현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 근처를 빙빙 도는 청룡을 보며 물었다.
"청룡, 넌 아는 것 좀 있어?"
김현우의 물음에 청룡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원숭이보다는 조금 더 잘 알고 있기야 해도 자세하게 설명할 정도는 안 되는군. 다만-"
"다만?"
"두억신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알고 있다."
"……두억신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
"그래."
"그게 누군데?"
김현우의 물음.
그에 청룡은 망설임 없이 김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제자."
"……내 제자?"
"그래, 정확히는 네 제자 안에 있는 그녀가 두억신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다."
# 249
249, 위업(偉業) (3)
멕시코시티.
이전에 등반자의 습격을 받아 크게 피해를 입은 게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수복되어 있는 멕시코시티의 동부 중앙에는 거대한 고층빌딩이 세워져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지상에서는 고개를 수직으로 꺾어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거대한 빌딩.
그리고 그 빌딩의 꼭대기 층에서는-
"……."
"……."
김현우의 두 제자.
미령과 하나린이 서로를 마주본 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굉장히 사치스러울 정도로 꾸며 놓은 빌딩의 꼭대기 층에서 아무런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둘.
"분명 제가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요?"
그중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로 하나린이었다.
"뭘 말하는 거지?"
"사부님의 집은 제 쪽에서 짓는다고 했을 텐데요?"
"언제 내게 그런 소리를 했지?"
미령의 말에 하나린은 슬쩍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계약서 확인은 안 하나 보네?"
슬쩍 반말로 바뀌기 시작하는 하나린의 말투, 허나 그런 그녀의 말투에도 미령은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계약서? 계약서가 뭐 어쨌다는 거지?"
"분명 그곳에는 사부님이 지내실 집은 이쪽에서 짓겠다고 명시되어 있을 텐데…… 그것도 제대로 못 보다니, 눈깔이 삔 건 아니지?"
슬쩍 거칠어지기 시작하는 하나린의 말투.
허나 미령은 그런 하나린의 말에 대답하는 것 대신 조용히 손을 뒤로 내밀었고.
텁-
이내 미령은 자신의 손에 잡힌 계약서를 하나린에게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여기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다는 거지?"
"그건 계약서를 잘 읽어보면 나올 텐데?"
"그래? 설마 10페이지 여덟 번째 문단 아래에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글씨로 써 놓은 글자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어머, 글자가 작게 나왔나? 인쇄하는 데 실수가 있었나 보네?"
미령의 말에 오히려 별것 아니라는 듯 유연하게 입을 여는 하나린.
"이 개년이 진짜……!"
미령이 여유로운 표정에서 한순간 인상을 팍 찌푸리며 하나린을 바라봤으나, 그녀는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 대답했다.
"흐음, 왜 그렇게 화를 내지? 그건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 탓 아닌가?"
하나린이 묘하게 약을 올리듯 말하자 미령은 곧바로 튀어나갈 듯 다리에 힘을 주었다.
콰드드득!
그와 함께 미령이 밟고 있던 땅이 우그러졌으나, 이내 그녀는 후, 하는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화를 참는 듯하더니 이내 인위적인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뭐 좋다…… 애초에 네년이 만들 집에 스승님이 주무시지도 않을 테니."
"뭐라고?"
"그렇지 않나? 네년 스스로 한번 생각해 봐라, 저걸 보고도 그 지역에 스승님이 편하게 쉴 곳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나"
미령의 말에 하나린은 시선을 돌려 뒤에 펼쳐진 뷰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바로 하나린이 만들어낸 구역이었다.
수많은 고층빌딩이 여기저기에 만들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각종 시설이 자리하고 있는 곳.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거대한 카지노와 극장이 한눈에 보이고, 그 옆에는 도심지 내에서 있는 게 어색하다고 느껴질 만큼 거대한 레이싱 서킷이 있기도 했다.
하나린이 그 모습을 보고 있자 미령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더럽게도 복잡하게 만들어 놨군, 마치 애새끼들 놀이동산 같이 말이야. 그런데 저렇게 시끄러운 곳 한가운데 스승님의 집을 짓겠다고?"
미령이 비웃음을 지으며 하나린을 바라보자 그녀는 슬쩍 입술을 깨물었으나 이내 평정심을 가장하고 일부러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어머, 지금 혹시 사부님의 취향을 욕한 거야?"
"……뭣?!"
"지금 내가 만든 이 구역은 오로지 사부님이 제게 '탑'에 있을 때 해주신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곳인데? 근데 그런 스승님의 취향을 '애새끼들 놀이동산'으로-"
"날조하지 마라! 분명 스승님이 저 공간을 조형했다면 네년보다 몇 배는 더 잘 만들었을 거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네년의 그 어처구니없는 센스다!"
"그것 참 웃기네, 그럼 네가 만든 공간은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딴 말을 내뱉는 걸까?"
"적어도 네년보다 몇 배는 낫지!"
"저게?"
하나린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턱짓을 하며 미령이 만든 구역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곳에 보이는 곳은-
"여기가 무슨 300년 중국인 줄 아니? 하긴, 몸이 미숙아니까 정신도 미숙아처럼 변하는 거겠지?"
-동양풍의 거대한 중세 마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중세 마을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현대적이었으나, 건물의 외향은 분명 옛날 동양풍 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했다.
"오히려 그쪽이 더 지내기 힘들어 보이는데? 설마 사부님한테 그딴 구식 동네에서 지내게 할 셈?"
"흥! 네년이 지랄을 떨어도 스승님이 딱히 불편한 건 없을 거다. 어차피 스승님의 옆에는 내가 계속 붙어 있을 테니까."
"그래 봤자 불편하다는 건 다른 바 없지."
"네년이 있는 쪽에서는 소음이 심해서 스승님이 편하게 쉬지도 못 할 거다 버러지."
"쯧, 이래서 저능아는, 설마 진짜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만약 그렇다면 네 지적 능력을 본격적으로 의심해 봐야 하는-"
"너야말로-"
그것을 시작으로 말다툼을 하기 시작하는 미령과 하나린은 서로를 헐뜯으며 쉴 새 없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싸움을 한 지도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 당장 죽여주마."
"어머 나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잘됐네!? 사부님의 근처에 쓰레기가 있다는 건 참지 못할 정도로 역겨우니까."
그들은 금방이라도 싸움을 벌이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구구구구구궁!!!
순식간에 떨리기 시작하는 공간.
동시에 미령의 이마 위에 뿔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하나린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마법서가 촤르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펼쳐진다.
그리고-
탁!
그 둘의 싸움은, 갑작스레 미령의 뒤에 나타나 그녀의 귓가에 소곤거리는 가면 무사 덕분에 저지 되었다.
미령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가면무사를 바라봤으나, 이내 가면무사의 말을 듣던 미령은.
"……스승님이?"
가면무사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고,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령의 귓가에 무엇인가를 더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쯧, 운 좋은 줄 알아라."
-미령은 전투태세를 거두었다.
"어머, 꼬맹이답게 쫄아서 도망치는 거야?"
"웃기지 마라, 스승님이 부르시는 것만 아니라도 네년은 지금쯤 내가 밟고 있는 땅바닥과 인사를 하고 있을 테니까."
미령의 말에 슬쩍 인상을 찌푸리는 하나린.
"……사부님이 불렀다고?"
그녀의 물음에 미령은 하나린을 도발하기라도 하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스승님이 나를 급하게 찾았다는군."
"……익!"
분명 별다른 싸움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승패가 정해진 듯한 기분에 하나린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고.
"그럼 나는 가보도록 하지. 스.승.님이 급하게 부르셔서 말이야."
미령은 그런 하나린에게 자랑을 하듯 특정 단어를 강조하며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스승님,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왔어?"
하남에 있는 거대한 장원의 건물 중 하나.
김현우는 소파에 누워 있다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오는 미령을 보며 몸을 일으켰고, 그녀는 굉장히 기분이 좋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앞에 섰다.
"……?"
그리고 그런 미령의 표정을 바라본 김현우는 괜스레 묘한 표정을 지었으나.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내 그는 미령의 표정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물었다.
"혹시 지금 괴력난신이랑 이야기 좀 할 수 있나?"
김현우의 물음.
"괴력난신…… 말입니까?"
조금 전의 표정과는 다르게 슬쩍 흐려지는 표정에 김현우는 슬쩍 의문을 띄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뭣 좀 물어 봐야 할 것 같아서."
김현우의 대답에 미령은 무엇인가가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으나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알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미령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눈을 감은 뒤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시.
"스승님?"
"뭐래?"
미령의 말에 김현우가 대답하자, 그녀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음, 괴력난신이 스승님을 초대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를 초대한다고?"
"예."
"……어떻게 초대한다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미령은 괴력난신의 이야기를 듣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더니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잠시, 그 자리에 앉아 계시기만 하면 알아서 초대한다고 하시는데……."
미령의 말에, 김현우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럼 알아서 해."
'……왜 굳이 초대를 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소파에 앉았고, 이내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미령은.
"그게 무슨-!"
"?"
"아, 아니 그러니까…… 왜 갑자기-!"
갑작스레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김현우가 미령을 묘한 표정으로 쳐다봤으나 그녀는 그런 김현우의 시선을 인지하지 못한 듯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며 누구와 말을 주고받고 있었고.
'……뭐하는 거야?'
그런 미령의 모습을 바라보던 김현우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미령은 왜인지 묘하게 붉어진 얼굴로 김현우의 앞에 다가왔다.
"그,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스승님."
굉장히 긴장한 듯 그를 바라보며 말하는 미령의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의문이 생겼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래."
김현우의 허락에 미령은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는 왠지 슬슬 떨리는 손을 움직여 김현우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어……?"
김현우는 다른 공간에 와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완전히 박살 나 있는 폐허의 풍경.
지반은 여기저기가 갈라져 음습한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하늘은 우중충했으며, 그 주변에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로 보이는 것들이 마구잡이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쯧, 내 그렇게 멍석을 깔아줘도 기회를 발로 차다니…… 정말이지."
-그런 폐허의 잔해더미에 앉아 누군가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고 있는 괴력난신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잠시 어딘가를 바라보며 혀를 차더니 이내 김현우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그래, 뭐…… 오랜만이기는 하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있다고 들었는데?"
괴력난신의 인사에 김현우는 왠지 떨떠름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그는 그녀의 물음에 다른 말을 할 것도 없이 본론을 꺼냈다.
"맞아.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물어보고 싶은 것?"
"혹시 두억신에 대해서 알아?"
"두억신이라고……?"
김현우의 말에 순간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는 괴력난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
그런 김현우의 대답에 괴력난신은 그렇게 고민하는 듯하더니-
"두억신…… 두억신이라, 알고 있지. 알고말고! 애초에 내가 그 녀석을 모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라. 그도 그럴 게-"
-이내
"-그 녀석은 내 동생이니까."
그렇게 입을 열었다.
# 250
250. 위업(偉業) (4)
"……뭐?"
"두 번 물을 필요 없이 그 우매한 놈은 내 동생이니라."
괴력난신의 말에 순간 멍한 표정을 지은 김현우는 이내 멍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동생이라고……."
"그래."
"……그 녀석이?"
김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괴력난신을 바라보자 그녀는 뭔가 잘못되었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무언가 불만이라도 있는 것이냐?"
괴력난신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왜 그렇게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게냐?"
"음, 뭐 그렇지……. 굳이 이런 표정을 지을 만한 건 아닌데, 그래도 뭔가 좀 당황스러워서……."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괴력난신을 바라보았다.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물론 애초에 닮은 점을 찾는 것 자체가 좀 웃기기도 했다.
애초에 같은 배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얼굴이 꼭 닮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굳이 닮은 점을 찾으라면 한 가지 정도 찾을 게 있긴 했다.
'색이 다르긴 하지만…….'
김현우는 괴력난신의 머리위에 달려 있는 뿔을 바라봤다.
두억신에게도 검은색이긴 했으나 뿔이 있긴 했다.
"그보다, 갑자기 내 동생에 관한 이야기는 왜 꺼낸 것이냐?"
그렇게 그녀의 뿔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하던 중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이번에 필요한 물건을 찾으려다가 그 녀석을 만났거든."
"……그 녀석을 만났다고?"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괴력난신에게 12계층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고, 그 이야기를 전부 들은 괴력난신은 이내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듯하다,
"그래, 그 녀석이 새로운 위업(偉業)을 얻었다고 했다고?"
"……나한테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뭐 그렇게 말했지."
그의 긍정에 괴력난신은 한 번 더 물음을 던졌다.
"그 녀석의 머리 위에 나 있는 뿔 색은 어땠느냐?"
"……뿔의 색깔?"
"그래."
"검은색이었어."
"머저리 같은 놈."
대답하자마자 곧바로 노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찌푸리는 괴력난신.
김현우는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볼까 하는 생각을 했으나 워낙 심각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괴력난신을 보며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괴력난신은 이내 찌푸린 표정을 정리하곤 김현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머저리는 지금 어디 있느냐?"
"……두억신이라면, 나와 만났을 때는 12계층에 있긴 했는데, 아마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가령?"
"뭐, 아무래도 제일 예상이 가는 건 제일 위 계층이겠지? 그 녀석은 정복자인 것 같았으니까."
"……제일 위 계층이라."
괴력난신은 혼자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빠지는 듯했으나, 이내 그녀는 김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 나를 살리지 않겠느냐?"
"뭐라고?"
"나를 살라지 않겠냐고 물었다."
괴력난신의 말에 순간 김현우가 입을 열려 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이전번에 한번 보니 분명 네 안에 있던 제천대성과 청룡이 그 본신의 모습 그대로 현현해 있더구나. 그 말은 네가 곧 등반자를 살릴 수 있다는 소리겠지."
-틀리느냐?
그렇게 묻는 괴력난신의 말에 김현우는 슬쩍 고민했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맞아."
김현우의 긍정에 괴력난신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살려라."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괴력난신.
김현우는 대답했다.
"……내가 뭘 믿고?"
"흠, 나를 못 믿는 게냐?"
김현우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괴력난신을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그런 의심 정도야 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잘 생각해 보거라. 과연 내가 네 적이라면 과연 이런 식으로 평화롭게 말했겠느냐?"
"……."
"아마 내가 네 적으로 행동하려 했다면 이미 이 아이의 몸을 무기로 삼아 네게 협박을 가했을 것이니라, 뭐 내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 이외에도-"
괴력난신은 곧 김현우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적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했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네가 믿지 못하겠다면 '맹약'을 해도 나쁘지 않겠지."
"맹약?"
김현우의 되물음에 괴력난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맹약에 대해 설명하려 했으나.
"……지금 네가 육체를 얻으려는 이유는 두억신 때문이지?"
이내 튀어나온 김현우의 질문에 괴력난신은 순간 말을 멈추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예상대로 내가 육체를 얻으려 하는 것은 바로 그 머저리 같은 동생놈 때문이다. 너는 알지 모르겠다만, 애초에 이 아이랑 계약하게 된 계기도 그 머저리 때문이다."
"……그 머저리 때문에 미령이랑 계약을 했다고?"
그의 물음에 미령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네 탓도 있겠구나, 탑을 올라가던 나를 네가 멈춰 세웠으니 말이다."
김현우가 그것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괴력난신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애초에 내가 탑을 오른 이유가, 그리고 이 아이와 계약한 이유가 모두 그 머저리 동생을 만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니라."
"두억신을 만나기 위해?"
괴력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알지 모르겠다만 이 아이는 특정한 적과 마주쳤을 때 내게 한번 몸을 내주기로 했느니라."
"……그게 두억신이라는 거야?"
"그렇다. 그 상대가 바로 두억신이니라."
"미령의 몸을 빌려 받기로 했다는 것은, 그 녀석과 척을 졌다는 소리지?"
"그럼 달리 무엇이 있겠느냐?"
괴력난신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조금 전에도 말했듯 이 탑을 오른 이유는 그 머저리 동생놈이 내 업을 빼앗아 겁도 없이 탑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업을 빼앗았다고?"
"그래, 게다가 일반적인 업을 빼앗긴 것도 아니지."
"업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빼앗을 수 있는 거야?"
"물론 아니다. 남의 업을 빼앗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남의 인생을 통째로 도려내는 것과 똑같은 것이니라. 절대 그리 쉽게 될 리가 없지."
다만-
"그 녀석은 약간의 꼼수를 이용해 내 업을 빼앗을 수 있었을 뿐이니라."
괴력난신의 말에 김현우는 조금 더 이 사실에 대해 캐물어 볼까 했으나 이내 그녀의 심기가 심히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대신 질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데, 지금 상황으로 가능하겠어?"
"뭐가 말이냐?"
"……뭐, 당장 맹약까지 하고 나서 너를 부활시키면 두억신을 이길 수 있겠냐는 소리지."
김현우는 얼마 전 만났던 두억신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힘을 전부 개방한 상태의 김현우로도 상대하기가 상당히 빡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그런 두억신을, 아직 업도 제대로 깨치지 못했던 시기에 이길 수 있었던 괴력난신이 잡는다?
김현우가 조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괴력난신을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네 그런 반응은 어떤 면에서는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이니라. 그러나 굳이 그럴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까 말이다."
의미 모를 말을 하는 괴력난신.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그 말에 김현우가 슬쩍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묻자 그녀는-
"그냥 너는 나를 살려주기만 하면 되느니라, 그럼 머저리 같은 내 동생은 무조건 처리해 주마."
-그렇게 웃으며 대답했다.
***
그로부터 1주일 뒤.
"오, 왔…… 헉!?"
"내 업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진짜야!?"
김현우는 노아의 방주에 들어서자마자 노아흐의 멱살을 잡고 탈탈 터는 제천대성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날뛰어라 원숭이."
김현우가 하고 싶은 소리를 대신 하는 듯 입을 여는 청룡.
허나 제천대성은 그런 청룡의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아흐를 바라보며 물었다.
"진짜야? 응? 진짜냐고!"
"우선 흔들지 말고 좀 앉게! 나도 설명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제천대성의 물음에 그렇게 답한 노아흐는 자신의 옷을 잡고 있던 제천대성의 손을 떼고는 이제야 살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제천대성의 뒤에 있는 청룡과 김현우에게도 말했다.
"우선 자네들도 와서 앉게, 어찌 되었든 설명할 게 생겼으니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근처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았고.
"……."
이내 제천대성과 김현우, 그리고 청룡을 한 번씩 돌아본 노아흐는.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이것부터 주고 시작하도록 하지."
이내 김현우에게 보랏빛을 가지게 된 구슬을 넘겨주었다.
"……이건?"
김현우가 구슬을 넘겨받으며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 노아흐를 바라보자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게 바로 칼파의 연꽃일세."
"이게?"
"그래, 정확히는 꽃잎을 버리고 그 아티팩트에 담긴 위업(偉業)만을 자네가 가져온 이석에 가공시킨 거지."
"그럼 이제 이걸 먹으면 나도 위업을 얻게 되는 거야?"
그의 말에 노아흐는 대답했다.
"뭐, 자네가 그걸 복용하는 것은 맞네만 자네가 그것을 복용하기 전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네. 다만 그건 우선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노아흐는 무척이나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제천대성을 보더니.
"내가 저번에 말했듯 제천대성의 업을 온전히 돌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먼저 말하도록 하지."
이내 자신의 손에 있는 또 하나의 구슬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이건?"
거무튀튀한 검푸른색의 빛깔을 띠고 있는 구슬을 보며 김현우가 중얼거리자 노아흐는 그에게 구슬을 넘겨주었고.
"응?"
조금 전 노아흐가 주었던 구슬과 다르게,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하나의 로그가 떠오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
?????????
등급: 없음
보정: 없음
스킬: 공간이동
-정보 권한-
노아의 방주의 주인이자 이 탑을 만들어낸 제작자가 만들어 낸 공간이동 장치이다.
이 공간이동 장치의 좌표는 @#^#$^???!@#! 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만약 공간이동 좌표에서 @#^@#^@#$@#에 도달할 경우 !@#!@%#%%@???♬──────────…….
……
.
------
-분명 노아흐가 만들었다고 들은 아티팩트 로그가 김현우의 눈에 무척이나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오류인가?"
그리고 그것은 제천대성과 청룡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들은 노아흐가 가져온 아티팩트를 보며 각자 말을 내뱉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노아흐는 이내 김현우가 설명을 요구하듯 고개를 들자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티팩트 로그가 제대로 보이나?"
"……로그가 보이기는 하는데. 설명이 굉장히 이상하게 뜨는데?"
"걱정 말게 그게 정상이니."
"……그게 정상이라고?"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곤 이내 김현우가 들고 있던 구슬에 대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래, 그게 정상일세. 애초에 지금 내가 자네들에게 넘겨준 것은 바로 이 탑의 허수공간에 있는 '컬렉터'의 좌표니까 말일세."
"……컬렉터?"
제천대성의 물음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의 업은 현재 그곳에 있네."
# 251
251. 방법을 찾았다 (1)
이질적인 검은 동굴의 정자 안에서, 네 명의 인영은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모임에 뒤늦게 합류한 귀에게 한 가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상한 녀석을 만났다고?"
삿갓을 쓴 선의 물음에 머리 위에 검은 뿔을 달고 있는 귀는 느긋한 표정으로 정자 뒤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래, 분명 12계층에 사는 계층민은 아니었단 말이지."
"그걸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고 자시고 간에, 애초에 12계층에 내 공격을 버틸 수 있는 놈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귀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그때를 회상하곤 말을 이었다.
"근데 그 녀석은 다르더라고, 애초에 생긴 것부터 12계층에 있는 쓰레기들과는 달랐고, 전투 능력 자체도 아까 말했듯 쓰레기들과는 달랐어."
"그래서, 어떻게 했지?"
"어떻게 하긴? 본격적으로 싸우려고 몸을 푸니 곧바로 욕 몇 마디하고 도망가던데?"
"……그걸 놓쳤나?"
선이 탐탁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귀를 바라보자 그는 대답했다.
"그럼 그걸 어떻게 잡아? 그냥 도망간 것도 아니고 애초에 텔레포트로 도망가 버렸는데."
귀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고,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비는 이내 자신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와 함께 생겨나기 비의 손 위에서 생겨나는 보라색의 마력은 순식간에 어떤 남자의 얼굴을 만들어냈고, 곧 비는 물었다.
"귀, 혹시 당신이 만난 그 남자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나요?"
비의 물음에 귀는 마력을 통해 이루어진 남자의 얼굴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마력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어? 이 새끼 맞는데? 네가 어떻게 이 새끼를 알고 있어?"
귀의 물음에 비는 진득한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손을 내저으며 마력을 없애버렸고, 이내 비는 지금까지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겠다고 12계층에 내려갔다온 귀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비가 형체 없는 자에게 간 것부터 시작해서, 그가 품고 있는 진심을 들은 것까지.
"……이게 당신이 없었을 때 제가 모은 정보예요."
비가 그렇게 말하며 입을 다물자, 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멍을 때리고 있다 이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나랑 싸웠던 놈이 지금 '형체 없는 자'가 기대를 품고 있는 놈이라 이거지?"
"맞아요."
"그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
귀의 물음에 순간 물음표를 띄운 비는 그를 바라봤고.
그에 귀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바로 조지러 가면 되는 거 아니야?"
"……9계층을 향해 내려가자는 건가요?"
"그럼 여기서 나올 말이 그거 말고 뭐 있겠어? 아니, 애초에 그 정보를 들었으면 바로 내려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그 녀석이 그 인간한테 기대를 걸고 있다며?"
씨익.
"그럼 당연히 개 박살을 내주러 가야지, 안 그래?"
귀의 말에 맞은편에서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선은 대답했다.
"멍청하긴, 생각이 정말 거기까지밖에 안 닿는 것이냐?"
"……넌 또 왜 시비야?"
귀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으나 선은 그런 귀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봐라, 결국 그분이 원하는 것은 그 인간에게 우리 모두가 당하는 미래다."
"우리가 당할 리가 없잖아? 애초에 저번에 싸워봤을 때도 나를 상대하지도 못하고 도망갔는데 지가 어떻게 하겠다고?"
"멍청하긴, 그건 당연히 실력을 숨긴 거겠지, 애초에 범천을 죽였는데 범천을 죽인 놈이 그렇게 약하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란 걸 모르나?"
선의 말에 귀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럼 안 갈 거야? 그 새끼가 무서워서 그냥 여기에 처박혀 있겠다고?"
"그게 아니다 멍청아, 내가 전제를 말해주었지 않나? 애초에 그분은 우리가 그놈에게 전멸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네 녀석 말대로 가능성은 희박하겠지. 다만 문제는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가능성?"
"그래, 0.00000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게 문제지. 그렇다면 그 가능성을 없애버리면 그만이다."
선의 말에 귀는 그게 뭔 소리냐는 듯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 옆에 앉아 있던 백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마디로, 그냥 싸워주지 않으면 된다?"
"맞다. 그렇게 하면 그분의 기대를 없애는 것이 되지, 한마디로 우리에게는 제일 좋은 선택지다."
선의 끄덕거림, 허나 비는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싸우지 않으려고 해도 과연 우리 뜻대로 될까요?"
"……왜 안 된다고 생각하지?"
"그는 분명 저희가 어떠한 짓을 해도 결국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의 성격상 절대로 우리가 그렇게 하게는 두지 않겠죠."
"……."
"……."
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입을 다무는 선.
결국, 그들은 한동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 몇 시간 동안 의견을 나누고 나서야-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
노아의 방주 안.
"컬렉터라는 방에 내 업이 있다는 거지?"
제천대성의 물음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맞네, 그리고 지금 내가 준 그 구슬은 단 1회에 한정하지만 그 컬렉터 룸에 들어 갈 수 있는 열쇠일세."
그런 노아흐의 답변에 이번에는 김현우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 컬렉터 룸이라는 건 또 뭐야?"
그의 질문에 노아흐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라고 중얼 거리더니 이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우선, 나도 컬렉터 룸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네. 처음 그 방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것은 자네의 요청 때문이었지."
"……내 요청?"
"그래, 저번에 갑작스레 통괄자와 연락이 끊겼다고 할 때가 있지 않았나?"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긍정했다.
"내가 컬렉터 룸의 존재를 알아챈 것은 그때일세, 자네의 요청으로 한창 통괄자가 만들어 놓았다는 방의 위치를 찾고 있을 때, 나는 허수공간에서 심상치 않은 방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지."
"심상치 않은 방?"
"그래, 사실 그 방을 조사하기 전만 해도 나는 그 허수공간 사이에 숨겨져 있는 그 방을 바로 통괄자의 시스템 룸이라고 생각했네."
-허나 내 생각과는 달리 통괄자의 방은 그곳이 아니었지.
"통괄자의 방은 오히려 그 허수공간과는 다른 위치에 있었네, 그러므로 나는 그 허수공간에 있었던 방이 무척이나 궁금해지기 시작했네."
-애초에 그 허수공간에 방이 있어서는 안 되었으니까.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흠흠, 하고 자신의 목을 한번 가다듬은 뒤,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그 방의 존재를 안 뒤부터 그 방의 내부를 관찰하기 위해 한 일들을 들었고.
그다음에는 노아흐가 어렴풋이 그 방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알아냈을 때의 일을 들었다.
"그 방의 용도를 알아낸 건 우연이었네."
"우연으로 알아낸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네, 아까 말했듯이 나는 그 방의 내부를 파악하기 위해 그때 당시에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을 다 해봤으나 그 방의 용도를 파악할 수 없었네."
-너무 가드가 단단했거든.
"그런 상황에서 슬슬 포기할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무렵에, 나는 그 방에 만들어져 있는 틈을 보았네."
"틈이라고?"
"그래, 뭐 추상적인 의미의 틈이 아닌, 진짜 그 공간에 만들어져 있는 틈이었네. 다만 그 틈은 공간 자체가 오래 돼서 생긴 균열이 아닌 이미 처음부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틈이었지."
"……그럼 처음에는 그 틈을 왜 못 발견한 거야?"
"그렇네, 설마하니 허수공간 내에 만들어져 있는 공간에 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으니 말일세."
아무튼-
"나는 결국 그 틈 사이로 은근슬쩍 그 공간에 침입하는데 성공했고, 결국 아주 찰나이기는 했으나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네."
"그게 제천대성의 업이었다?"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곳에 있었던 것은 제천대성의 업뿐만이 아니었네."
"제천대성의 업뿐만이 아니라고?"
"그래, 내가 미처 세지도 못할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업이 그저 그 공간 안에서 날뛰고 있었네."
"공간 안에서 날뛰고 있다고?"
"그래, 설계자가 만든 틀에 들어가 있지 않고, 수백 수천 개의 업이 엉망진창으로 섞여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사방으로 뿌리고 있었네."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짧게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아무튼 결국 결론은 그 안에 제천대성의 업이 있고, 지금 이 구슬은 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물건이라 이 말이지?"
"맞네. 솔직히 그 구슬을 만드는 건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네, 허수공간에는 공간이동 좌표를 찍을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통괄자, 그녀의 도움을 조금 받았네, 이 탑의 전체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녀다 보니 허수공간 내의 좌표를 맞추는 데에 많은 도움을 받았지."
노아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김현우는 문득 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왜 그러지?"
"생각해 보니까 너는 그 공간 안에 들어가 있었다며?"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긍정했다.
"그렇네만?"
"그럼 네가 제천대성의 업을 가져오면 되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불가능하네."
"왜?"
"애초에 나는 내 본체를 가지고 그 공간에 간 것이 아닌, 탑을 처음 제작할 때 임의로 만들어두었던 아티팩트로 탑 안을 탐색한 거니까."
-거기에다가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엄청난 숫자의 업이 뭉친 상태로 그 안에서 날뛰고 있다고."
"그랬지."
"그렇게 업이 따로 분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가봤자, 그 곳에 있는 업을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네."
"그럼 제천대성이 가도 똑같은 거 아니야?"
"그건 또 아닐세, 본디 업은 아무리 떨어져 있더라도 자신의 원주인에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힘이 있지. 그 성질을 이용하면-"
그 뒤로 이어지기 시작하는 노아흐의 복잡한 설명에 김현우는 그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말을 이었다.
"한 마디로 제천대성이 그 공간 안에 들어가면 자신의 업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거지?"
"정답일세."
"근데, 그렇게 업이 많은 공간이면 그냥 하나가 아니라 다 들고 나와도 괜찮은 거 아니야?"
"그건 아니다."
이어지는 김현우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바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룡이었다.
"왜?"
"애초에 자신의 업이 아닌 타인의 업을, 게다가 그의 말대로 사용할 수 있게 정제되지도 않은 업은 오히려 독이 될 거다."
김현우는 그런 청룡의 말에 궁금증이 생겨 물어보려 했으나, 더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제천대성이 들어가서 자신의 업을 찾은 뒤 빠져나오면 되는 거야?"
"맞네, 이제 남은 건 그것뿐이지. 물론 혹여나 허수공간에 빠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네, 적어도 그곳에 들어갔다 나오는 10분 동안 자네는 내가 만든 아티팩트에 의해 보호될 테니까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고개를 알았다는 듯 긍정한 제천대성.
그는 김현우가 넘겨준 구슬을 한번 바라보다 이내 노아흐에게로 시선을 돌려 말했다.
"이 안에 들어가면 수많은 업이 있다고 했지?"
"그렇네만. 무슨 문제라도 있나?"
노아흐의 긍정에 잠시 구슬을 바라보던 제천대성은.
"아니, 잠깐 머릿속에 꽤 괜찮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252
252. 방법을 찾았다 (2)
모든 것이 재가 되어버린 세계.
"그 사실을 알려주러 온 것은 고맙지만 딱히 나는 찾을 없이 없으니 상관없느니라."
그곳에서 앞에 앉아 있던 괴력난신은 김현우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래, 상관없느니라."
"정말로?"
그의 물음에 괴력난신은 되레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렇게 상관이 있었으면 좋겠느냐?"
"아니, 그건 아닌데…… 솔직히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해가 안 돼서 말이야."
"무엇이 말이냐?"
괴력난신의 말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너는 저번에 두억신을 이길 수 있다고 말했잖아?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네 힘으로는 그 녀석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데?"
김현우의 말에 괴력난신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 걱정인 게냐?"
괴력난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
"그렇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녀석과 지금 너의 힘 차이는 압도적이니까 말이야."
그가 깔끔하게 말하자 괴력난신은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뭐, 그래. 네가 보기에 당연히 그 녀석과 내 힘 차이는 압도적으로 보일 것이니라. 그건…… 나도 인정하겠다."
그러나-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나? 그 녀석이 아무리 쎄도 결국 '결과'는 정해져 있다는 것을."
"……그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야?"
"설명하라면 설명할 수 있겠다만, 굳이 설명하기에는 너무 길어지는구나, 너는 이곳에 앉아서 내 탄생과 일생을 모두 듣고 싶은 것이냐?"
-뭐, 내가 빠르게 중점만 짚고 넘어간다면 대충 20일 정도면 충분하겠구나.
괴력난신의 뒷말에 김현우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들어야 되는 거면 조금……."
"그렇지? 그러면 그냥 믿고 있는 게 좋으니라. 게다가 네 입장에서는 딱히 손해 볼 입장도 아니지 않느냐? 애초에 맹약으로 전부 제약까지 건 상태인데 말이다."
"……뭐, 그렇긴 하지."
지금으로부터 3일 전, '창고'에 들어가 괴력난신의 몸을 찾은 김현우는 괴력난신을 꺼내기 전에 그녀와 맹약을 나누었다.
그녀가 몸을 얻고 나오는 그 순간부터, 그녀가 절대로 김현우와 그 측근들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맹약을.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며 괴력난신을 보고 있으려니, 그녀는 자그마한 손으로 자신의 볼을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아."
"……?"
"그럼 단순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되겠구나."
"단순하게……?"
"그래, 어차피 그 녀석이 가지고 있는 '업'은 결국 나를 이기지 못한다고 말이다."
괴력난신은 정말 좋은 생각이라는 듯, 언뜻 보면 우쭐거리는 듯한 모습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이야기했으나.
"어…… 그래."
정작 김현우는 그런 괴력난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자기가 어떻게든 하겠지.'
그리고 결국 그렇게 생각하며 괴력난신에 대한 걱정거리를 치워버린 김현우는 이내 그녀에게서 이어지는 질문을 들었다.
"그나저나 그 제작자라는 녀석은 솜씨도 좋구나. 어떻게 그런 방을 찾아낸 것이냐?"
"아, 그거?"
김현우가 오늘 온 괴력난신을 찾아 온 이유.
그것은 바로 그녀에게 컬렉터룸의 존재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노아흐의 말대로라면 제천대성이 쥐고 있는 구슬은 일회용이기는 하지만 한번 사용할 때 제한 인원이 없다고 했으니까.
게다가 제천대성도 당장 가지는 않는다고 했기에 겸사겸사 괴력난신을 데려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김현우의 제안을 거절했다.
"흠, 그렇구나."
그리고 한참이나 그에게 컬렉터룸에 대해 듣고 있던 괴력난신은 퍽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현우는 문득 질문했다.
"근데 말이야."
"왜 그러느냐."
"넌 왜 계속 여기에 있어?"
"그게 무슨 소리더냐?"
"아니, 맹약까지 전부 끝냈고 네 몸까지 돌려줬잖아?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왜 미령의 내면세계에서 계속 자리를 잡고 있냐 이거지."
김현우의 궁금증은 바로 그것이었다.
분명 노아흐를 찾아가지 3일 전, 김현우는 이미 그녀와 맹약을 끝냈고, 창고에 들어가서 그녀의 몸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아직까지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령의 내면세계에 남아 있었다.
"그게 궁금한 것이냐?"
"당연하지. 애초에 자기 몸 돌려줬는데 여기 계속 있는 것도 이상하잖아?"
김현우의 말에 그녀는 대답했다.
"뭐, 사실 당장만 해도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다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당장 빠져나가서는 안 되느니라."
"왜?"
"음, 사냥감을 놓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라."
"그게 무슨 소리야?"
김현우는 그렇게 말했으나 괴력난신은 '뭐, 보고 있어라'라는 말로 그의 질문을 끊어버렸고.
"후."
이내 김현우는 그녀의 대답에 대해 물어보기를 포기하고 그 공간에서 나왔다.
어찌되었든 그도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
그리고, 그렇게 내면세계에서 빠져나온 김현우가 처음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으그그그극─!! 이거───놔!"
"떨어져 이 미──친 년아────!!"
바로 자신의 앞에서 서로의 얼굴을 서로의 손으로 밀어내고 있는 미령과 하나린의 모습이었다.
미령은 김현우의 손을 놓지 않고 오른손으로 하나린의 얼굴을 밀어내고 있었고.
하나린은 김현우의 반대 손을 잡고 마찬가지로 미령의 얼굴을 밀쳐내고 있었다.
자신의 양쪽에 앉아서 보이고 있는 추태에 김현우는 멍한 표정으로 그 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희들 뭐하냐?"
김현우의 물음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린 듯 핫! 거리는 소릴 낸 둘은 순식간에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밀어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곧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잇던 김현우는 이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이년 때문에!!"
그의 물음에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곧바로 입을 여는 둘의 모습에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쉰 김현우는 주변을 바라봤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바로 박살 나 있는 주변의 가구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서 있던 가구들이 반으로 쪼개져 박살 나 있거나 다리가 부러져 있기도 했고. 또 어떤 것은 완전히 재가 되어버렸는지 가루만 남은 것도 있었다.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여기저기 갈려 있는 벽지들과, 그 사이로 보이는 금이었다.
그리고.
빡!
"꺅!"
"끅!?"
그는 결국 양손을 들어 서로의 얼굴을 밀어내고 있는 미령과 하나린의 머리를 때리는 것으로 둘의 행동을 제지했고, 그제야 미령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스승님."
"그래."
"그보다 혹여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혹시 저 개ㄴ……아니, 사매를 부르셨습니까?"
미령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어차피 괴력난신을 만나고 나서 하나린에게 따로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겸사겸사 불렀지."
"큭……!"
"훗."
김현우의 말에 분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미령과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짓는 하나린.
김현우는 어째 최근 좋아지기 시작했다가 다시 슬슬 나빠지고 있는 둘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언제 한번 자리를 제대로 한번 마련해 줘야 하나.'
뭐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자리나 한번 잡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김현우는 이내 자리에 앉아 어느새 자신의 앞에 선 하나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너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
탑에 위치한, 정복자들이 이용하는 '통로'
그 어디에도 다른 부분이 없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것 같은 거대한 통로의 끝에는 벽돌이 있었다.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듯, 끝없이 이어져 있던 길을 막고 있는 벽돌.
그것의 의미는 바로 지금 있는 곳이 바로 이 끝없는 통로의 끝, 즉 최상층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고.
그 최상층에는-
"정말로 갈 생각인가?"
네 명의 인영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사천(四天)이자. 각각 비, 선, 백, 귀, 로 서로를 부르는 이들이었고. 선은 이곳에 온 것 자체가 탐탁찮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끝이 보이지 않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선비라 그런지 벌써부터 쫄았군."
그런 선의 탐탁찮다는 듯한 표정에 귀는 그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표정을 지으며 키득거렸으나 옆에 있던 비는 곧 귀의 행동을 제지했다.
"서로 분쟁을 조장할 만한 이야기는 지양해요. 저희들이 지금 시점에서 싸워봤자 남는 게 없다는 건 둘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녀의 말에 백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그런 비와 백의 모습에 귀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했다.
"아니, 도대체 그놈이 뭐라고 다들 그렇게 조심성이 많아? 애초에 네가 그렇게 듣고 왔다며? 그 녀석이 우리를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진 않았잖아요?"
비의 말에 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 자그마한 0.1%의 확률 때문에 이렇게 벌벌 떠는 거야? 위업까지 전부 냅다 처먹었으면서 왜 이렇게 쫄아?"
"쫀 게 아니에요. 최대한 조심하자는 취지죠."
비의 말에 백은 동감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도 동의한다. 가능성이 1%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는 그 녀석에게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 아닌가?"
"그게 뭐?"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그 가능성을 깨부수는 거다. 애초에 우리가 수많은 의견 속에서 결국 9계층으로 내려가기로 한 것도 바로 그 녀석을 죽여 가능성을 아예 없애기 위해서였잖나."
그러니까-
"우리가 비록 99%그 이상의 확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가능성의 씨앗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방심하지 말라 이거다."
즉 싸우지 말라는 말을 빙 돌려서 하는 백의 모습에 귀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대답했다.
"알았수다."
누가 봐도 묘하게 빈정거린다는 느낌이 드는 듯한 대답.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은 주변에 있는 선과 비를 보며 말했다.
"이 통로에 온 김에 다시 말하도록 하지. 목표는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그가 가능성을 본 계층민 '김현우'다."
선과 비, 그리고 귀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보며 백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다들 잘 기억해 둬라, 특히 귀. 너도 말이야."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귀.
허나 백은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9계층으로 가자마자 곧바로 비의 능력으로 김현우를 찾아내 죽인다. 그 과정에 분명 방해자가 있겠지만 그건 전부 최대한 무시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물론 우리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녀석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무조건 우리는 네 명이 떨어지는 일 없이 한 번에 모여서 김현우를 죽여 그가 보고 있던 가능성을 파괴하는 거다."
다들 기억해라.
백의 말에 비와 선, 귀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백은-
"그럼 출발하자."
이내 자신의 뒤에 달려 있는 백색의 꾀를 한번 살랑이고는, 곧바로 통로의 아래쪽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 253
253. 방법을 찾았다 (3)
노아의 방주 안.
"왔나?"
"엉."
"얼추 이야기는 전부 끝낸 모양이군."
노아흐가 입을 열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하나린한테 추가적인 지시 사항 정도만 내리고 온 것 말고는 딱히 할 게 없었으니까."
그의 말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대답했고. 이내 그의 맞은편에 앉은 김현우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되었나?"
"그녀?"
"괴력난신 말일세, 자네가 물어본다고 하지 않았나?"
노아흐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봤는데 딱히 필요 없다고 하더라."
"필요 없다고?"
김현우가 괴력난신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해 주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했다.
"뭐, 나야 그녀의 정체가 뭔지 모르니 특별히 뭐라 하지 못하겠네만…… 뭐,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렇게 말했겠지."
"그렇지?"
노아흐의 말에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하면 되나?"
"자네가 전할 말이 끝났다면 시작해도 될 걸세. 뭐-"
노아흐는 슬쩍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자네가 그 제자에게 말을 끝내놨다면 '준비'는 충분히 끝난 거니까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하수분의 주머니 속에서 그에게 받았던 구슬을 꺼내들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구슬.
"그러니까, 이걸 삼키면 되는 거지?"
"그렇네, 삼키면 되네."
"……그럼 이 구슬에 담겨 있는 위업이 내게 흡수가 된다?"
"그렇네. 다만 내가 전에 말했듯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네."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김현우는 이 칼파의 연꽃을 먹어치우는 데에 대한 부작용에 대해서 들었다.
"……위업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오히려 다른 업이 잡아먹힐 수도 있다 이건가?"
"그렇네, 만약 자네가 그 칼파의 연꽃을 전부 흡수하지 못한다면, 자네는 오히려 그 칼파의 업에 잡아먹히게 되겠지."
"그럼 내가 아니게 된다…… 이거지?"
"그걸 설명하는 건, 조금 난이도가 높은 문제군. 하지만-"
노아흐는 슬쩍 고민하기 시작하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결론적으로 생각해 보면 자네는 자네인 게 맞네. 결국, 그 업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다고 해도 자네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
다만-
"만약 자네가 그 업을 흡수하지 못한다면 자네의 인격이나 가치관이 그 업에 의해 변질될 거라는 게 문제지."
'내'가 바뀌는 건 아니지만 '스스로'의 인격이나 가치관이 변질된다.
"……그냥 다른 사람이 되는 거잖아?"
"그렇다고 해도 자네의 인격이 소멸했다가 다시 생겨나는 건 아니니까 말일세, 자네의 기억이나 이전 생각은 온전히 존재할걸세, 다만 앞으로의 가치관 생각 행동이 전부 바뀔 뿐이지."
"그게 인격 교체당한 거랑 무슨 차이야."
괜스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짧게 중얼거린 김현우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구슬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이번에는 편하게 가나 싶었다."
"원래 편한 건 없네. 게다가 이번에는 진짜로 편한 게 맞지 않나?"
"노력보다 얻을 수 있는 게 커서?"
"정답일세."
확실히, 위업(偉業)이라는 것을 아직 직접 경험해 보지는 않았다만 일반적인 업보다는 좋은 것이 자명했다.
'확실히, 청룡의 업이나 제천대성의 업을 얻을 때처럼 수련으로 개고생을 하지 않아도 돼서 그런 참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김현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구슬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질문했다.
"야 근데……."
"이번엔 또 뭐지."
"이거, 삼켜야 한다고 했잖아?"
"그러네만, 문제라도 있나?"
"아니, 내 목구멍이 이 정도로 커질 것 같진 않아서 말이야, 애초에 이거 삼킬 수 있긴 하냐?"
김현우가 그렇게 묻자 노아흐는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어차피 그 구슬은 자네의 체내에 진입한 순간 삼킬 생각도 없이 사라져 버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준비가 되면 삼키도록 하게.
"어차피 자네가 그것을 먹고 당장 무슨 일이 있어 전투 불능 상태가 된다고 해도 신경 쓰지 말게, 어차피 그러기 위해 자네의 제자까지 불러서 준비한 게 아닌가?"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 준비.
그것은 바로 어제, 제천대성과 청룡, 그리고 김현우가 컬렉터룸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아브에게 들었던 하나의 소식 때문이었다.
"……뭐, 그렇겠지."
그것은 바로 탑 위에 있던 정복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리였다.
'움직일 줄은 내심 알고 있기는 했는데.'
되도록 움직이지 않았으면 했으나, 역시 세상만사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듯 김현우가 제일 취약해질 만한 타이밍에 그들은 9계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뭐, 그래서 준비를 한 거지만.'
김현우는 조금 전 하나린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이내 후, 하는 한숨을 내쉰 뒤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구슬을 그대로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와 함께 드는 이물감.
입안에 거대한 구슬이 느껴지는 듯한 느낌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입안에 느껴졌던 이물감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김현우의 입 안에 들어갔던 구슬이 그의 입안에서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
김현우는 순간 자신의 눈앞에 하얀색 섬광이 번쩍이는 듯한 착각을 받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음, 시작됐나?"
그렇게 의자에 조용히 몸을 눕힌 김현우의 모습을 봄과 동시에.
"벌써 간 건가요?"
노아흐는 자신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와 있었나?"
그곳에 서 있던 것은 바로 아브였다.
그녀는 노아흐와 마찬가지로 의자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김현우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괜찮은 거예요?"
"뭐가 괜찮다고 묻는 겐가?"
"그야 당연히 가디언이죠, 뭐 저도 위업을 먹는 것만으로도 온전하게 흡수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아브가 말을 흐리자 노아흐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말했지 않나. 위업을 흡수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세. 뭐 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패널티를 줄여놓기는 했으나 그래도 위업을 흡수하는 건 벅찬 일이지."
그의 말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그렇겠죠?"
"뭐,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애초에 지금 이 일 자체는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말일세."
애초에-
"지금 시작한 게 다행이지."
"지금 시작한 게 다행이라고요?"
아브의 물음에 노아흐는 손짓을 이용해 방주 위에 떠 있는 거대한 구슬 중 하나를 끌어왔다.
구슬 안에 비치고 있는 것은 김현우가 이전에 시공진을 수련했을 때 쓰였던 장소.
노아흐는 앉아 있는 김현우의 몸에 구슬을 가져다 대었고, 그와 동시에-팟!
김현우는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 그 거대한 구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래, 늦게 시작한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지금도 좀 늦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브가 말하자 노아흐는 곧바로 대답했다.
"뭐, 자네와 김현우의 제자라면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한데, 오래 끌 수는 없어요."
"그건 나도 알고 있네, 내가 말했지 않았나? 어차피 김현우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어날 걸세. 자네는 그때까지 막아주기만 하면 되지."
그의 말.
아브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움직였다.
"그 녀석의 제자를 만나러 갈 생각인가?"
"뭐, 그렇죠. 아마 그들이 작정하고 9계층으로 내려온다면 꽤 빨리 내려올 테니 지금부터 미리 준비를 해야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곧바로 푸른색의 포탈을 만들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힘이 없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잘 다루는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런 아브의 모습을 보며 외마디 말을 남긴 노아흐.
하지만 노아의 방주는 조용해지지 않았다.
"도착!"
그도 그럴 것이 혼자가 된 노아의 방주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천대성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순차적으로 오는군."
노아흐의 말.
"이미 누가 들렀어?"
그에 제천대성이 질문을 하자 그는 곧바로 답했다.
"처음에는 김현우가 들렀지."
"아, 시작한 거야?"
"그렇네."
"그다음으로는?"
"통괄자가 들렀네."
"통괄자?"
"그래, 자네도 어제 들었다시피 그 녀석들이 내려오고 있거든."
노아흐의 말에 제천대성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천(四天) 말하는 거지?"
"그래. 통괄자들은 그들의 행보를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잠시 이곳에 들렀다 다른 곳으로 이동했네."
그의 말에 제천대성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흠, 그래?"
"그렇네."
"뭐, 사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린가?"
노아흐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제천대성을 바라보자 그는 씨익 웃더니 노아흐의 맞은편에 앉아서.
"그도 그럴 게-"
자신이 가져온 그것들을-
"내가 좀 좋은 걸 들고 왔거든."
-꺼내 들었다.
***
"어우 썅."
김현우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어지러움에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며 눈을 몇 번이고 깜박였다.
눈앞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을 때 느껴졌던 끔찍한 울렁증.
그 울렁증을 해소하기 위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숨을 쉬던 그는 이내 어지럼증이 슬슬 가시는 느낌에 따라 주변을 파악했고.
"이곳은 또 뭐야?"
김현우는 자신이 굉장히 특이한 공간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은 굉장히 거대한 신전이었다.
그것도 새하얀 백색으로 지어져 있는 신전.
주변으로는 조각이 되어 있는 기둥들이 거대한 천장을 받치고 서 있었고, 새하얀 대리석에는 스스로의 얼굴이 비칠 정도로 깨끗했다.
"……."
그리고 그것은 벽면도 마찬가지였다.
땅바닥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타일로 이뤄져 있는 그 벽면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마구잡이로 조각되어 있었다.
마치 그림과도 같은 상형문자.
그리고 그렇게 시선을 돌려.
[반갑다.]
김현우는 거대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
아니, 그것은 거대한 무엇인가가 아니었다.
분명 그것은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다만, 평범한 인간과는 조금 달라 보이는 모습이라는 것이 문제였다만.
김현우 자신보다 수십, 어쩌면 수백 배는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그 남자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고, 그 위에는 여섯 개의 팔과, 세 개의 얼굴이 달려 있었다.
허나 조금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세 개의 얼굴 중 오른쪽의 얼굴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는 것이었고, 여섯 개의 팔 중에서도 양쪽 하단에 나 있는 두 개의 팔이 검게 칠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지우개로 그 부분만을 지워낸 것처럼.
김현우가 그렇게 멍하니 자신의 앞, 정확히는 신전의 중앙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그의 입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김현우가 알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자, 거대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래, 김현우. 나는 내 인격 중 하나를 처치한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 254
254. 방법을 찾았다 (4)
"인격 중 하나……?"
김현우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구를 올려다보자,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는 이전에 범천(梵天)을 소멸시키지 않았나?]
그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고, 그에 거구에 달린 두 얼굴 중 왼쪽에 있는 얼굴은 이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네를 기다렸다네.]
거체의 얼굴, 아니- 자신을 범천이라고 칭하는 거체의 말에 김현우는 순간 슬쩍 귀찮아질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설마……."
'나한테 자신의 인격 중 하나가 당했으니 복수하려고?'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들을 올려다보자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범천은 너나 할 것 없이 김현우의 생각을 읽은 듯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 두 인격은 네게 딱히 해를 입힐 생각은 없으니까! 오히려 도와줬으면 도와주었겠지!]
담담하고 지혜로움이 느껴지는 왼쪽 얼굴과 다르게, 굉장히 우렁차고 용맹해 보이는 가운데 얼굴은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 범천들의 모습에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곤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다행인데, 그럼 나를 기다린 이유는 뭐야?"
김현우의 물음.
그에 왼쪽에 있는 얼굴은 입을 열었다.
[자네를 기다린 이유는 개인적으로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지.]
"……내가 그 인격을 죽인 게 감사를 받아야 할 정도의 일이야?"
김현우는 슬쩍 시선을 돌려 범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세 개의 얼굴 뒤에는 거대하게 빛나는 광배가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여섯 개의 손은 각각 특이한 모양의 제스쳐를 취하고 있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묘한 신성함이 느껴질 정도로 위엄 있는 모습.
다만 그런 범천의 모습에 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오른쪽의 얼굴과 두 개의 팔이었다.
마치 검은색의 크레파스로 칠한 듯 더럽게 지워져 있는 범천의 오른쪽 얼굴과 두 개의 팔은, 김현우에게 일종의 모순을 주었다.
그렇게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범천의 왼쪽 얼굴은 마치 김현우의 생각을 읽기라도 생각한 것처럼 발언했다.
[우선 자네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궁금증을 먼저 풀어주자면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공허'는 원래라면 자네가 처리한 그 녀석이 있을 곳일세.]
"……내가 처리한 그 범천…… 아니, 그 녀석을 말하는 거지?"
[맞네. 그리고 자네가 했던 질문에 답해주자면 우리 둘은 자네가 그 어리석은 인격의 폭주를 막은 것에 대해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음, 대충 무슨 스토리 인지는 알 것 같은데."
김현우는 범천의 입에서 나온 폭주라는 말과 지금 자신이 만난 범천의 모습을 보며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대충 원래 너희들은 세 인격이었는데 그 녀석이 너희들 멋대로 힘을 들고 나가서 폭주한 거지?"
그의 어림짐작에 가운데에 있는 얼굴은 감탄했다는 듯 오! 하는 탄성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상당히 똑똑하군!]
왼쪽의 얼굴과는 다른 우렁찬 목소리가 신전 안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김현우는 슬쩍 귀가 먹먹해짐을 느꼈으나 이내 그는 왼쪽의 얼굴이 하는 말에 집중했다.
[자네의 말이 거의 맞네. 우리는 원래 세 인격에서 하나인 존재였네만 사실상 제일 늦게 연꽃에서 빠져나온 그는 우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외도를 걸어버렸지. 사실 그것까지만 해도 별상관은 없었네만 그가 다음에 행한 행동은 충분히 문제가 있었네.]
"……?"
[우리의 오른쪽이기도 한 우(右)는 '그'의 도움을 받아 나, 좌(左)와 정(正)을 봉인하고 우리의 힘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네. 그게 문제였지.]
좌가 말을 마치자 이번에는 정이 입을 열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신성(神性)을 잃고 영락했지. 그 우매하고 어리석은 녀석 하나 때문에 말이야.]
"그런데 그 상황에서 내가 그 녀석을 처리했고."
[자네의 생각대로, 우리는 이 이상 불필요한 신성의 영락을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네.]
"음, 그럼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김현우의 질문에 좌는 고개를 슬쩍 좌우로 휘젓고는 말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하네. 영락되어 버린 신성은 돌아오지 않지. 다만 우리가 연꽃 안에 들어가 수행을 하는 것으로 우리들은 다시 연꽃을 피워 개화할 수 있겠지.]
"……."
대충 수행을 해서 땜빵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잠깐."
[왜 그러나?]
"아니,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희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거지?"
김현우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는 바로 범천의 위업(偉業)을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잘 알고 있네. 자네는 아마 칼파의 연꽃 안에 들어 있는 위업(偉業)을 흡수하러 온 것이겠지?]
"……맞는데, 네 말을 들어보니까 지금 내가 너희들의 업을 흡수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의 질문에 곧 두 얼굴은 김현우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하하하! 그런 것 같군!]
-이제야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좌와 정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이내 정이 물음을 던졌다.
[지금 네가 생각하는 건 혹시 네가 지금 이 위업을 흡수하면 혹시 우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겠지?]
"맞아."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 없다. 애초에 네가 지금 이 업을 흡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본체는 어차피 탑 외부에 있으니까.]
"……그런 것도 되는 거야?"
김현우가 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좌는 대답했다.
[자세히는 설명하기 어렵다만, 확실한건 '우' 덕분에 이런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걸세.]
아무튼-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위업을 흡수하더라도 우리는 딱히 제지할 생각이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우리의 입장에서는 칼파부터 시작해 처음부터 업을 쌓아 올리는 게 더 낫네.]
한 번이라도 영락한 업은, 언제고 다시 영락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
좌는 그렇게 말하며 입을 다물었고. 이내 정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를 한번 보고는 이내 네 개의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무거운 중압감이라도 느껴질 것 같았던 손이 조용히 움직이고, 그렇게 모인 네 개의 손에서는-우우우웅───!
-황금빛의 광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바닥으로 가려질 정도로 작았던 광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이내 김현우의 몸 전체를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커진 광휘를 만들어낸 정은.
[자, 이것이 바로 '나'의 업이다.]
이내 김현우의 앞에 빛나는 광휘를 놔두었다.
파직-!
그와 함께 거대한 금이 가기 시작하는 범천의 몸.
"뭐, 뭐야?"
김현우가 갑작스레 박살 나기 시작하는 범천의 몸을 보며 당황했으나 오히려 두 얼굴은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로 설명했다.
[그 광휘에 '나'의 업을 모두 담았으니 우리는 이제 이 탑에서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와 함께 범천의 주변을 근처로 거대한 신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상형문자가 쓰여 있는 벽은 금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바닥도 마찬가지였다.
무너져가는 신전 속에서도 범천은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부터 '우리'에게 질문을 하지 말고 듣고만 있게, 업을 준 뒤부터 우리는 더 이상 자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니까 말일세.]
[우선 '내'가 준 그 업에 손을 가져가면 너는 지금부터 우리의 업을 흡수할 수 있을 거다. 거기에 노력은 딱히 필요 없다.]
[다만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할 걸세. 우리는 최대한 자네에게 온전하게 업을 꺼내 주었으나 자네의 육체가 그 업을 흡수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
[네가 나의 업을 어떻게 쓸 건지는 대충 예상이 가는군, 아마 너는 '그 녀석'을 죽이러 가는 거겠지?]
[그러니까 우리 나름대로 업을 제외한 하나의 조언을 해주도록 하겠네.]
그와 함께 들려오는 말에 김현우는 집중했고, 이내-
[그럼 나는 행운을 빌도록 하지.]
[그럼 우리는 행운을 빌도록 하겠네.]
김현우는 범천의 작별인사와 함께 자신의 앞에 있는 광휘에 손을 뻗었다.
***
끝없는 통로.
그중에서도 9계층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철문 앞에 서 있는 네 명의 정복자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열리지 않는군요."
그것은 바로 정복자들이 아무리 신호를 보냈음에도 열리지 않는 9계층의 철문 때문이었다.
비가 아무리 마력을 흘려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열리지 않는 문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백은 이내 선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선, 혹시라도 열 수 있는 방법은 없나?"
백의 질문에 선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이 문 자체에 '특수한 마력'이 걸려 있는 거라면 모르겠다만, 이 문은 특수한 마력이 걸려서 열리지 않는 게 아닌 것 같군."
"……그런가."
백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젓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귀가 괜스레 비아냥거렸다.
"그냥 열기 싫어서 안 여는 거 아니야?"
"……지랄하지 마라, 괴이."
"귀, 분란조장은 그만 두라고 했을 텐데요?"
"어이쿠 그럼요."
선과 비의 말에 괜스레 비꼬는 듯한 음색으로 고개를 끄덕거린 귀.
비는 그런 귀의 모습을 보곤 이내 다른 곳을 돌아보며 의견을 냈다.
"다들,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나요?"
"글쎄, 딱 봐도 9계층에서 우리가 오는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있는 걸 봐서 이 문이 쉽게 열릴 것 같지는 않으니……."
"뭘 그렇게 고민해? 그냥 10계층으로 올라가서 내려가면 되잖아?"
귀가 무슨 고민을 하냐는 듯 입을 열자 선은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정신인가? 10계층에서 9계층으로 내려가는 과정이 쉬울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설마 멍청해서 자기가 탑을 걸어 올라왔던 기억을 까먹은 건가?"
선의 말에 귀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이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럼 어쩔 건데? 여기서 문열어주세요!! 하고 철문이나 꽝꽝 내리치고 있으려고?"
하-
"퍽이나 잘도 열어주겠다."
"……."
선은 그런 귀의 말에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9계층에서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는 와중.
그그그그그극─!!!!
"응……?"
그들은 뒤쪽에서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누구 할 것 없이 고개를 돌렸고.
"뭐야?"
"왜 열려?"
갑작스레 뒤쪽에서 열리기 시작하는 철문을 보며 저도 모르게 묘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들이 그런 표정을 짓든 말든 이미 완전히 열린 철문은 하얀빛을 내뿜고 있었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자 그럼 바로 가 보실까?"
"잠깐!"
"왜? 또 이게 무슨 함정일까 이곳에서 지루하게 토론이라도 하려고?"
"그게 아니라 최소한의 위험은-!"
비가 먼저 나아가려는 귀를 막으려 했으나 그는 듣기 싫다는 듯 하얀 빛 앞으로 가며 입을 열었다.
"최소한의 위험이고 뭐고, 문이 열리면 그냥 들어가면 되지 뭘 그렇게 걱정해? 어차피 여기서 계속 고민해 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는 걸 뻔히 알고 있잖아?"
아무튼,
"나는 여기서 지루하게 서 있을 생각 없으니까 너희들이 안 가겠다면 먼저 간다."
귀는 그 말과 함께 곧바로 하얀 빛을 향해 뛰어들었고, 이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비는 이내 진한 한숨을 내쉬었고.
"……우리도 가도록 하지."
이내 입을 연 백의 말에 비는 왠지 찜찜한 느낌을 떨치지 못하며 철문 안쪽을 향해 몸을 움직이는 백과 선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그들이 하얀 빛을 빠져나갔을 때.
"야, 너무 늦는 거 아니야?"
그들은 원숭이를 만날 수 있었다.
# 255
255. 다구리는 이렇게 치는 거다 (1)시스템 룸의 방 안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김현우가 올 때만 해도 땅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게임팩 때문에 발 디딜 곳이 없었던 아브의 시스템 룸은 신기하게도 매우 깨끗해져 있었다.
물론 벽장에 박혀 있는 게임팩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벽 한쪽에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게임팩들이 쌓여 있었으나 정리를 한 것만으로도 굉장히 깨끗해 보이는 시스템 룸의 풍경은 조금 어색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이 구조 만드느라 3일 동안 잠도 안 자고 개고생을 했는데."
-시스템 룸 안쪽에서 하나린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자 하나린의 주변에 둥둥 떠 있는 수많은 책이 그녀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 좌우로 촤르르륵 넘어가고.
"음…… 그래도 좋게 생각하는 건 어떨까요?"
그런 하나린의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아브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자 하나린은 불퉁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좋게 생각하라고요?"
"네. 사실 저와 당신이 이렇게 노력하면서까지 정복자를 막으려고 한 것은 어떻게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지게 된 거니까 오히려 좋은 게 아닐까요?"
아브의 말에 하나린은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렇기는 하네요."
3일 전, 하나린은 김현우에게서 하나의 명령을 하달받았다.
그것은 바로 지금 옆에 있는 아브와 함께 9계층으로 들어오려는 정복자를 막으라는 명령.
그렇기에 하나린은 아브를 도와 '언령'이 아닌 자신의 서고의 능력을 이용해 아브와 함께 9계층의 출구를 막아 놓았으나-
"그냥 놔두면 되지."
"……뭐, 나름대로 생각이 있지 않을까요?"
-하나린과 아브가 3일에 걸쳐 '서고'의 도움까지 얻어가며 만들었던 철저한 시스템상의 봉인은 몇 시간 전, 갑작스레 찾아온 제천대성과 노아흐에 의해 얼마 써먹지도 못하고 폐기했다.
하나린은 어색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 아브를 한번 바라보곤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한번 펼쳤고.
촤르르르륵!
분명 하나린의 근처로 넓게 퍼져 있던 책들은 마치 환상이라도 된 듯 하나린이 옆에 메고 있는 책을 향해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아브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정말 도움이 됐어요. 역시 '서고의 주인'이 있으면 일이 편하다니까요?"
"……그런가요? 제가 한 일은 당신이 말하는 적당한 책을 소환해서 그 능력을 사용한 것밖에는 없는데."
하나린의 기본적인 능력은 언령의 서에서 배운 언령이긴 했으나 그녀는 서고의 주인으로서 서고 안에 있는 책들의 능력을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문제는 하나린도 그 넓은 서고에 정확히 무슨 책이 있는지 전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일까.
하나린이 그렇게 말하자 아브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었어요. 마력 없이 룰의 구동을 일시적으로 멈추려면 그 능력들이 꼭 필요했으니까요."
아브의 말에 하나린은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아까 전에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러면 뭐 하나요. 결국 저는 사부님한테 도움이 되지 못했는데……."
"……네?"
"맞잖아요? 힘들게 만들긴 했어도 결국 사용하지는 못했으니까요."
하나린이 묘하게 우울해 있는 이유.
아브는 조금 전까지 그녀가 우울해 하는 이유가 분명 3일 동안 제대로 된 잠도 자지 않고 노력한 결과물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에서 비롯한 우울함인 줄 알았으나.
"……."
그녀는 곧 하나린이 우울해 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닌 가디언- 그러니까 김현우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에서 흘러나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아브는 하나린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움이 되지 않은 게 저렇게 우울할 일인가?'
적어도 아브의 머릿속 알고리즘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린의 모습.
그도 그럴게 아브도 당장 열심히 구축해 놓은 것들이 쓸모없게 된 것에 대해서는 살짝 짜증이 날 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우울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나린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아브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으나,
"후……."
"……."
이내 하나린의 얼굴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을 확인하곤 그녀를 위로하기로 했다.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희는 충분히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아무것도 한 게 없잖아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결국 지금 저희가 만든 물건은, 사용할 수 없게 되긴 했어도 결국 저희들이 안정성을 담당한 건 맞으니까요."
"안정성……?"
"네, 만약-"
그 뒤로 아브는 대충 우리들이 김현우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괜스레 길게 늘여 하나린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물론 김현우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들었을 때는 이게 뭔 소리야? 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객관성이 부족한 내용이었으나-
"……정말로 그럴까요?"
"그럼요! 게다가 이건 애초에 저희 잘못이 아니라고요. 애초에 갑자기 저희에게 찾아와서 문을 열라고 했던 제천대성과 제작자 탓이죠!"
-아브는 객관성 없는 사실과 더불어 조금 전에 찾아온 제천대성과 노아흐를 떠올렸다.
밖에 당장에 네 명의 정복자가 도착해 있는 것을 알고서도 그냥 문을 열어달라고 청하던 제천대성.
사실 거기까지만 해도 도대체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가 싶어서 아브는 그의 청을 거절했겠지만, 그 부탁을 한 것은 제천대성뿐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왜?'
노아흐, 그는 제천대성과 함께 시스템 룸에 들어와 아브에게 문을 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을 꺼냈다.
'……뭐 결국 노아흐의 말에 힘들게 씌워놨던 것을 다시 풀어놓기는 했지만.'
물론 그도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었고, 실질적으로 아브는 노아흐와 제천대성에게 현재 9계층에 내려온 사천(四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듣고 나서 봉인을 푼 거긴 하지만.
'……그럴 거면 좀 빨리 말해주지,'
아브는 슬쩍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며 노아흐가 두고 간 수신용 통신 구슬을 바라봤다.
***
온 천지가 거대한 산과 숲으로 도배되어 있는 중국의 한 산지에서, 제천대성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사천의 모습을 쭉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쪽에서 왕 놀이를 가장한 개새끼 놀이는 잘 즐기고 있나?"
9계층의 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들리는 제천대성의 비아냥거림에 귀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뭐야? 이제 보니까 옛날에 자기 업을 되찾겠다고 내려간 모지리 원숭이 아니야?"
귀는 이미 9계층에 제천대성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오로지 그의 성질을 긁기 위해 그런 식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귀의 예상과는 달리 제천대성은 짐짓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아쳤다
"너처럼 그 새끼 뒤나 빨고 있는 놈보다는 낫지 않을까? 응?"
제천대성의 말에 귀는 씩 웃고는 말했다.
"역시 원숭이라 그런지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무슨 상황? 설마 지금 이 상황 말하고 있는 거야? 지금 너와 내가 대치하고 있는 지금 이 상황? 그럼 오히려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은 네가 더 떨어지는 것 같은데?"
"뭐?"
'갑자기 열리지 않는 문이 열려서 들어와 봤더니 제천대성과 만났다.'
딱 이 한 줄만 객관적으로 봐도 대충 감이 오지 않아?"
-아, 멍청해서 그것도 잘 모르려나?
제천대성의 대답에 귀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을 하려 했으나 그는 곧 옆에 서 있던 비 덕분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9계층 문에 걸려 있던 봉인을 푼 겁니까?"
"역시 저 멍청한 새끼 빼고 몇 명은 상황 파악을 빨리빨리 하네."
낄낄 거리며 웃음을 짓는 제천대성.
그녀는 개의치 않고 물었다.
"혹시나의 가정입니다만, 저희에게 협력할 생각은 있-"
"조금 전에 했던 말 취소할게, 이제 보니까 쟤도 쟤지만 너도 멀쩡한 건 아니네."
제천대성의 말에 비는 귀와 마찬가지로 슬쩍 인상을 찌푸리곤 대답했다.
"당신이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희를 9계층으로 인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도 아실 텐데요?"
"뭘?"
"저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요."
비의 말에 제천대성은 피식 하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네?"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무슨."
"그러니까 어쩌라고? 너희들이 만만치 않고 지금 나랑 싸워봤자 결과는 뻔하니까 너희들이 찾는 김현우나 내놔라- 뭐 이런 거야?"
제천대성의 말에 백은 대답했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지랄하고 있네, 너는 아가리 털 자격도 없어 머저리 같은 새끼야, 네 친구들 뒤통수치고 혼자 거기서 꼬리 살랑거리고 있으니까 기분 좋냐?"
-이 개새끼야.
그러나 백은 곧 제천대성의 말 덕분에 열었던 입가를 굳게 닫을 수밖에 없었다.
"어이구 표정 굳은 거 봐라? 진실 좀 말하니까 바로 표정 변하네."
"……제천대성,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지금 네 녀석이 우리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아질 게 있다고 생각하나?"
백의 말에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던 제천대성은-
"심기? 시이임기!?"
-이내 미친 듯이 웃으며 백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미친 듯이 웃는 제천대성과 그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 네 명의 정복자.
백의 시선이 점점 찌푸려질 무렵.
"야,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뱀대가리?"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군."
갑작스레 질문한 제천대성의 물음에,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사천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고, 곧 그곳에서-
"……청룡!"
"오랜만이구나, 백호."
하늘을 유영하고 있는 청룡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몸체가 새하얀 구름 사이를 떠다니고, 청룡의 거대한 얼굴이 아래에 있는 정복자들을 바라본다.
그 압도적인 모습.
허나 그 거대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백호는 곧 이상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느껴지는 기운은 두 개뿐.'
백호는 이곳에 느껴지는 기운이 두 개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그가 느끼고 있는 기운은 바로 앞에 있는 제천대성과 청룡의 기운뿐이었고, 다른 기운은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설마 둘이서 우리를 막으려고 드는 건가?'
백호의 사고가 일순 어지럽게 회전하며 여러 가지의 변수를 만들었다 지우기를 반복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들만으로는 우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본인들도 충분히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대체-'
"원숭이 새끼가 나대기는 오지게 나대고 있네?"
계속해서 생각하던 백호.
허나 그런 그의 생각을 끊은 것은 바로 귀의 목소리였다.
"……."
그는 굉장히 짜증이 나 있는 듯 어느새 자신의 몸 근처에 검은색의 기운을 두른 채 제천대성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원숭아, 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팟!
분명 비의 옆에 서 있던 귀의 신형이 한순간 제천대성의 앞으로 이동하고.
"우선 좀 맞자 이 원숭이 새끼야!"
귀의 거대한 주먹이 제천대성의 얼굴을 노리고 쏘아졌다.
그리고-
"지랄하네 병신이."
"!!!"
귀는, 제천대성의 몸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기운을 확인할 수 있었다.
# 256
256. 다구리는 이렇게 치는 거다 (2)
"!"
김현우의 정신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볼 수 있었던 것은 칠흑과 같이 어두운 공간.
"……."
본능적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 주변의 환경을 파악하려고 해도 상황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시커먼 공간에 김현우는 일순 혼란을 느꼈으나 이내 침착하게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범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 이름.
김현우는 노아흐가 '칼파의 연꽃'을 이용해 만들어 놓았던 구슬을 삼켰고, 그는 그 덕분에 진짜 범천을 만날 수 있었다.
범천의 두 얼굴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한번 차분하게 생각한 김현우.
이내 그는 범천이 있던 신전이 무너짐과 동시에 그가 자신에게 주었던 새하얀 광휘를 만짐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디야?'
그렇게 해서 떠오른 생각은 바로 그것.
김현우는 분명 범천에게서 '몸'이 적응 할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그동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럼 여기는 어디지?'
결국 자신이 정신을 차렸다는 것은 범천의 업을 성공적으로 흡수했다는 소리였고. 그렇다면 김현우가 깨어나야 하는 곳은 이곳이 아닌 노아의 방주 안이어야 했을 터.
하지만 김현우가 보고 있는 것은 칠흑과도 같은 어둠뿐이었다.
어디인지 제대로 구분이 가지 않는 어둠.
하지만 그 어둠속에서 김현우는 모순을 느꼈다.
'……분명 주변에 보이는 건 전부 어둠인데 내 몸은 잘 보인다고?'
분명 눈앞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어둠인데 이상하게 자신의 몸은 어둠에 물들어 있지 않았다.
마치 이 어둠과는 따로 분리된 것처럼 형체가 보이는 몸에 김현우가 스스로 의문을 품기 시작할 무렵.
"이제야 일어났네."
"?"
김현우는 곧 그 어둠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안녕?"
"……뭐야?"
김현우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눈'이 있었다.
그래, 그것은 단순한 눈이었다.
그냥 칠흑 속에 떠져 있는 검은색의 눈.
김현우는 순간 자신의 몸 전체보다도 거대한 눈알을 보며 흠칫했고, 곧 눈동자는 초승달 모양으로 휘며 대답했다.
"꽤 놀랐나 보네?"
눈동자의 말.
김현우는 대답했다.
"여긴 뭐야? 넌 또 뭐고?"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눈동자는 설명했다.
"딱 보면 모르겠어? 여기는 허수공간이야."
"뭐? 허수공간?"
노아흐에게서 허수공간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던 김현우는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으나 눈동자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뭐, 그렇게 인상 찌푸릴 필요는 없어, 어차피 네 몸은 제작자가 만들어놓은 공간 중 하나에 들어가 있고 나는 네 정신만 쏙 빼서 여기로 부른 거니까."
"……정신만 빼?"
"그래, 정신만. 솔직히 예전부터 한번 얼굴이나 보려고 빼오려고 했는데 이번에 네 몸이 범천의 업을 소화하고 있을 때 시간이 될 것 같아서 잠깐 뽑아온 거지."
검은색 눈동자에 의미 모를 말에 김현우는 찌푸린 인상을 펴지 않은 채 머리를 긁적거리곤 말했다.
"……그러니까, 넌 또 뭔데?"
"글쎄에-"
김현우의 말에 괜스레 눈매를 초승달처럼 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눈동자.
그를 보며 굳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그냥 간단한 것만 물어보자."
"뭔데?"
"너는 내 적이냐 아군이냐? 그것도 아니면 중립?"
그의 말에 눈동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아군이지."
"……당연히 아군이라고?"
"그래, 애초에 지금 네가 누구 때문에 거기까지 올라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 거야?"
"……누구 때문이라니?"
김현우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눈동자는 초승달처럼 휜 눈매를 원래대로 돌리고는 괜스레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거 충격이네, 솔직히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긴 했는데."
"아니 뭘 몰라? 애초에 설명해 준 것도 없는데 당연히 모르지."
눈동자의 말에 따지듯 말하는 김현우.
"그래도 최소한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아니면 대충 짐작 가는 거라던가."
"……그러니까 애초에 설명도 안 해줬는데 뭘 알길 바라냐니까?"
갑작스레 서로 평행을 달리는 이야기를 시작한 김현우와 눈동자.
그렇게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뭐 네가 네 신원을 제대로 밝히고 싶지 않았다는 건 알 것 같고, 그래서 결국 너는 왜 나타난 건데?"
"내가 왜 나타나냐니?"
"너도 뭔가 나한테 말할 게 있으니까 나타난 거 아니야? 애초에 할 말도 없었으면 딱히 나타나지도 않았겠지."
이야기가 평행을 달리자 억지로 이야기를 진행 시키는 김현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는 이내 평행이 된 눈매를 만들고서는 말했다.
"뭐, 그렇지."
"그럼 본론만 말해."
김현우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눈동자는 순간 말을 멈췄다. 이내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네. 어차피 '지금' 네게 해줄 말은 몇 개 없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눈동자는 이내 김현우가 '지금'에 대해 물어보기도 전에-
"곡 '위'로 와."
"……뭐?"
-그렇게 말했다.
***
귀(鬼) 아니- 두억신의 주먹이 제천대성의 얼굴 앞까지 다가간 그 순간 그는 제천대성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한순간이지만 후려치고 있는 주먹이 저릿해질 정도로 소름 돋는 투기.
허나 이미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두억신은 이를 악문 채로 휘두르던 주먹에 더욱더 힘을 주었고.
빠아아악!
"칵!?"
그 다음 순간, 두억신은 자신이 제천대성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 하늘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꽝!
거대한 폭음 소리와 함께 두억신이 튕겨져 나가고-
"내가, 진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너희들을 부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백은 곧 조금 전 그 자리에 서 있던 제천대성이 아까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설마."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붉은 기운 사이로 빛나고 있는 쇄자갑, 허나 그 갑옷은 이전처럼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이 아닌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의 머리 위에 있던 황금색의 금고아는 어디로 갔냐는 듯 사라졌다.
"……."
그 대신 그 자리를 위치하고 있는 것은 제천대성을 비추고 있는 거대한 광배(光背).
부처에게 인정을 받고 그의 인정에 따라 직위를 받아야만 주어지는 광배가, 그의 뒤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백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투전승불(鬪戰勝佛)……!"
"왜, 오랜만에 이 모습으로 마주 보니까 벌써부터 오싹하냐?"
입가가 찢어질 듯 즐거운 미소를 짓는 제천대성- 아니, 투전승불의 모습을 보며 백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생각했다.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업을 전부 찾았을 줄이야.'
그것은 바로 처음에는 손(孫)이라는 이름 하나를 가지고 시작한 원숭이가 '손오공'이라는 이름을 얻고 '제천대성'이라는 이름을 얻은 끝에 도달한 진정한 완성형의 업이었다.
또한, 부처로부터 직접 인정을 받은 그의 '완성'은, 어떻게 보면 만들어진 위업(偉業)으로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도대체 어떻게……?'
백은 순간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과 동시에 찌푸린 얼굴로 그를 바라봤으나.
투전승불의 업을 되찾은 그는 오랜만이라는 듯 자신의 손과 완전히 붉어져 있는 자신의 여의봉(如意棒)을 쥐며 자신의 힘을 가늠하고는 이내 여의봉을 어깨춤에 걸치곤 이야기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네? 왜? 너희들은 못 찾은 업을 나는 다 찾았으니까 살짝 후달리냐?"
손오공의 발언.
백은 굳은 인상을 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확실히, 본래의 힘을 전부 찾은 것 같지만 네가 그렇게 소리를 칠 정도는 아니다. 화과산의 원숭이. 아무리 네가 본래의 업을 다 찾았다고 해도,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아, 숫자가 딸려서 못 막을 것 같아 보여?"
손오공이 피식거리며 이야기하자 그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그의 앞에서 자신의 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새하얀 기운이 한순간 광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그의 근처로 모여들고.
순식간에 그의 몸이 변하기 시작한다.
인간형이었던 그의 신체에 하얀색의 털이 자라나고, 동시에 덩치가 커지기 시작한다.
커지기 시작한 덩치는 순식간에 주변에 있는 정복자들을 짓누를 정도로 거대해졌으며, 동시에 거대해진 하얀색 기운 속에서 제일 먼저 빠져 나온 것은-
"고양이로 변신한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데?"
-바로 푸른색의 눈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얼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푸른 동공이 야성을 가지고 제천대성을 노려봤고.
"너희 둘이 아무리 원래의 힘을 되찾았다고 해도, 우리를 이길 수는 없을 거다."
이내 하얀 빛이 걷히고 난 뒤 보이는 것은 고층빌딩의 크기는 가볍게 넘을 것 같은 거대한 호랑이.
백호(白虎)였다.
그와 함께 백호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기운들.
분명 비단옷을 입고 있었던 비(妃)는 하얀색의 비단옷 대신 보라색 빛으로 빛나는 옷과 동시에 오른 손에는 거대한 창을 든 모습을 바뀌어 있었고.
삿갓을 쓰고 있던 남자는 어느새 푸른빛이 모여 있는 검을 든 채 손오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날아갔던 두억신은-
"이 새끼, 반드시 반으로 뜯어죽여 주마……!"
검은 기운을 가지고 있었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변한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패도적인 기운 때문에 주변의 공기가 쉼 없이 진동하는 그 곳에서 손오공은 입을 열었다.
"어이구, 검선(劍仙)에, 꼰대 딸내미……그리고 괴이(怪異)라? 아주 다양하게 준비해서 왔네?"
그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백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우리의 힘이 이것뿐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장 우리는 그에게 또 다른 위업(偉業)까지도 받았다."
"아, 개새끼 노릇 열심히 해서 간식 하나 받은 거 가지고 기고만장하는 거야 지금?"
"……아니, 딱히 자랑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네 녀석과 내 옛 '친우'는 우리가 그에게 받은 위업을 개방하지 않고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니까."
"아, 다굴빵으로 어떻게 한번 조져보겠다 그거지?"
전투 직전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손오공.
그에 백호는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말했다.
"애초에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 너희들이 우리에게 이길 거라는 생각 자체가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나?"
"뭐, 솔직히 그렇긴 하지."
"?"
갑작스러운 긍정.
그에 백호가 순간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자 손오공은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맞잖아? 원래 싸움은 아무리 실력 좋은 놈이 해도 기본적으로 일 대 다수는 힘들지. 아무리 나라도 그건 알아."
그래서 말이야-
"나도, 친구를 좀 데려왔거든."
"……친구라고?"
"그래, 혹시-"
씨익
"칠대성(七大聖)이라고, 알아?"
그 말과 함께, 그들은 나타났다.
# 257
257. 다구리는 이렇게 치는 거다 (3)김현우를 죽이기 위해 내려온 4명의 정복자는 다들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들 중 한 명은 원래 이 세상의 사방(四方) 중에서도 서쪽을 수호하던 백호(白虎)이고.
적어도 한때, 천하(天下)의 아래에서 검으로서 상대할 자가 없고, 선(仙)이 되어서도 그 위치를 공고하게 잡고 있는 검선(劍仙) 여동빈(呂洞賓)도 있었다.
그 옆에는 탁탑천왕(托塔天王)의 딸이자, 모든 깨달음을 얻고 비사문천을 얻어낸 나타태자(??太子).
또 그 옆에는 이 세상의 모든 괴이를 제압하고, 또 누르고 올라온 두억신(頭抑神)까지 있었다.
허나 그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야, 이 동네 개새끼 오랜만이네? 저번에 된장 처발라서 보신탕을 해 먹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거대한 갈기를 가지고 있는 사자 수인.
그는 마치 마실을 나온 듯 느긋한 발걸음을 가지고 자신의 하얀색 삼베옷을 만지작거리며 등장했다.
그 뒤를 이어 등장하는 새 수인.
"너무 그러지 마라, 안 그래도 저번에 거북이랑 같이 처맞아서 자존심 상했을 텐데 자존심 좀 치켜세워 줘야지?"
그는 자신의 날개를 만지작거리며 사자수인, 이산대성(移山大聖)에게 말했고, 그는 옆에 선 혼천대성(混天大聖)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고거는 또 그렇구만? 이번에도 된장 발릴 건데 벌써부터 쪽을 줄 필요는 없지?"
"그래, 바로 그거야."
그 둘이 키득거리며 입을 열자 그 뒤를 따라 걸어나온 원숭이, 구신대성(驅神大聖)은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 피며 말했다.
"세 명에서 후드려 패면 이번에는 진짜 된장 바를 수 있나?"
"당연하지!"
"잘됐네, 저 호랑이 새끼는 영 맘에 안 들었거든."
그 이야기를 하면서 등장한 그들 뒤로도, 대성(大聖)의 이름을 가진 그들은 말을 이으며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하늘을 평정하는 큰 성인이자 소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평천대성 우마왕 (平天大聖 牛魔王)
"어? 저 여자, 예전에 바다에 있던 내 친구 모가지 비튼 그 여자잖아?"
바다를 뒤엎는 큰 성인이자 상어 수인인 복해대성 교마왕 (覆海大聖 蛟魔王)
"아, 무슨 여자한테 친구가 죽임을 당해? 좀 너무한데?"
바람을 꿰뚫는 큰 성인이자 제천대성과 같은 원숭이인 통풍대성 미후왕 (通風大聖 ??王)제천대성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그들의 모습에 백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칠대성(七大聖)……."
"왜,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 너도 거북이랑 같이 신나게 처맞았잖아?"
"……그때랑 지금이 똑같다고 생각하는 건가?"
백호가 그렇게 말하며 으르렁거리자 손오공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때의 너랑 지금의 너는 다르겠지. 그런데 어째?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때랑 지금은 다른데?"
"……숫자로 우리를 찍어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조금 전까지 숫자빨로 밀어보려 했던 놈들이 한 말 치고는 좀 코믹하다는 건 알고 있지?"
그리고-
"그건 대보면 알겠지. 안 그래?"
손오공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에 쥔 여의봉을 가볍게 한번 휘두르려다.
"아."
이내 떠올랐다는 듯, 두억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말 안 한 게 있었네?"
손오공의 시선에 금방이라도 인상을 찌푸리며 달려들 것 같은 자세를 취하는 두억신, 허나 그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품속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야, 너는 니 누이의 것을 빼앗아서 그 자리에 오른 게 쪽팔리지 않냐?"
"!!!"
두억신은 곳 제천대성의 손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그건-!"
"선물이야, 받아라."
두억신이 인상을 찌푸리며 피하려 했으나 이미 손오공이 던진 검은색의 보석은 두억신을 향해 정확히 쏘아지고 있었고.
쾅! 콰아아아아아!!!
"무-슨!"
두억신은 검은 보석을 뒤늦게 후려치기 위해 손을 휘둘렀으나 이내 그는 검은 보석이 자신의 품에 닿는 순간 자신의 몸이 어디론가 빨려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
그에 나타는 빨려 들어가는 두억신을 잡기 위해 몸을 움직였으나 이내 그의 몸은 검은 보석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툭- 쩌적!
두억신을 전부 흡수하자마자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리는 검은 보석.
그에 백호는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그를 어떻게 한 거지?"
"뭘 그렇게 걱정해? 그냥 잠깐 그 친구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 준 거야, 뭐-"
그렇다고 해서 살아 돌아올 거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손오공은 그렇게 말하며 키득거리더니 이내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여의봉을 크게 휘둘러 어깨에 걸쳤다.
"자 그럼 이제 여덟과 셋의 대결이네?"
손오공의 뒤에 있는 여섯의 대성들이 제각각의 무기를 챙기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고, 구름을 유영하는 청룡의 몸에 푸른 번개가 모이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동시에 내리는 것은 비.
"자, 그럼 어디 한번-"
씨익-
"얼마나 잘 싸우는지 구경이나 해볼까?"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김현우를 죽이기 위한 정복자와 손오공을 비롯한 칠대성과 청룡이 싸움을 시작했을 때.
순간 손오공이 날린 검은 보석을 피하지 못했던 그, 두억신은.
"오랜만이구나. 머저리 같은 동생아."
"……이런 씨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오랜만에 보는 누이에게 싸가지 없이 욕부터 내뱉다니, 여전히 그 아가리는 알아줄 만하구나."
"네가 어떻게 여기에?"
"반말까지 찍찍 지껄이는 걸 보니 당장이라도 대가리를 뽑아버리고 싶구나, 동생아."
두억신의 물음에 담담하게 서 있는 여성.
그는 바로 조금 전까지 미령의 내면세계에 자리하고 있었던 괴력난신(怪力亂神)이었다.
"후……."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두억신에게 차가운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 네게는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 있으니까 말이다."
괴력난신은 그렇게 말한 채 자신의 자그마한 손을 쥐었다 피며 두억신을 바라봤고.
"윽……!"
그런 그녀의 모습에 두억신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한 발자국 뒤로 움직였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두억신의 모습.
김현우를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모든 업을 되찾은 투전승불의 앞에서도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던 두억신.
허나 지금, 두억신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한 발자국 뒤로 움직였다.
딱히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능.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친 두억신은 이내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깨닫고 이를 악물고서는 그녀를 바라봤다.
두억신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괴력난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참 어처구니가 없었느니라."
"……."
"기나긴 동면을 취하기 위해 잠시 등을 맡기고 잠에 들었더니 그 새에 누이의 본질이 되는 업을 훔쳐가고, 내가 쫓아오지 못하도록 탑 위로 도망치다니 말이야."
"……!"
"거기에 더불어서 천산(千山)까지 모조리 박살을 내버리고 도망갔더구나, 아주 재기가 불가능하게 말이야."
괴력난신은 여전히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 하고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두억신은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점점 묘한 공포감을 느꼈고.
그렇기에-
"닥쳐라!"
그는 소리를 질렀다.
"……."
순간의 적막.
그에 두억신은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그랬다. 네년의 업을 빼앗은 것도 바로 나. 네가 재기하지 못하게 천산을 완전히 박살 내버린 것도 바로 나다. 그래서 어쩌란 거지?"
"……."
"네가 내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딱히 변할 것은 없다! 너는 이제 자그마한 업 하나 남아 있는 찌그러기일 뿐이고 나는 네 업과 그 녀석에게 위업(偉業)까지 받은 진짜 괴이(怪異)가 되었단 말이다!"
콰아아아아!!!
그는 마치 자신의 내면에 있는 공포를 떨치듯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자신의 주변으로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전에 모았던 검은색의 기운과는 상반되는,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빛을 내뿜는 하얀 기운을.
"잘 보고 있어라! 이제 나는 네년이 쉽사리 무릎 꿇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새하얀 광휘와도 같은 그것을 끝없이 자신의 몸속으로 집어넣으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는 두억신.
허나 그런 심상치 않은 기운이 유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괴력난신은 아무런 대처도 없이, 그저 미소만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고-
"봐라! 이게 바로 내가 이번에 얻은 위업이다!"
두억신은 다시금 바뀐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두 개의 검은 뿔은 변하지 않았으나, 그 분위기는 확연히 변했다.
분명 검은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던 그의 피부는 찬란한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의 몸 뒤에는 언뜻 보면 투전승불과 같은 광배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광배의 뒤로 떠 있는 것은 황금색의 보탑.
"……비사문천(毘沙門天)의 업이라,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다니 역시 멍청한 건 알아줘야 하는구나."
괴력난신의 힐난.
허나 두억신은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네년이 아무리 뭐라고 한들 상관없다. 이미 나는 비사문천의 위업을 받았고, 어차피 이제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할 테니까!"
"흐응, 그러느냐?"
"안 그러면, 네년이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어림도 없는 소리다! 네년이 가지고 있는 그런 하찮은 업으로는 지금 상태의 나를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그렇게 말하며 크게 발을 구르는 두억신.
허나 그런 모습임에도 괴력난신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확연하게 미소 짓고 있는 괴력난신.
"……!"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며 덩달아 두억신의 표정은 찌푸려지고, 이내 괴력난신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매하고 멍청한 동생에게 설명을 해주고 싶지는 않다만, 그래도 정이 있으니 최소한의 설명을 해주마."
-동생아
"네가 뭘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네가 아무리 대단한 업을 먹어치운다고 해도,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그와 함께, 괴력난신의 몸이 움직였다.
그녀에게 느껴지는 것은 순식간.
허나 그에게 느껴지는 것은 아주 지루하고 느린, 기나긴 시간이었다.
괴력난신의 모습이 보인다.
땅을 박차고, 자신에게로 도약하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느리게,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보인다.
그래.
너무나도 잘 보인다.
그런데-
'반격할 수가…… 없다고?'
반격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 괴력난신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주먹을 움직여 그녀를 막을 수도 있었고, 또한 카운터를 날릴 수도 있었다.
허나,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몸 전체의 관절이 얼어붙은 것처럼, 두억신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찰나의 시간에 괴력난신은 이미 두억신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
요사스럽게 빛나는 붉은색 눈동자.
입 안쪽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
괴력난신의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두억신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도 그럴 게, 어찌 한낱 괴이(怪異) 따위가 내 업을 흡수했다고 해도."
콰드드득!
"크학!?"
"어찌 그런 너희들을 직접 만들어 낸 야차(夜叉)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괴력난신은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258화. 다구리는 이렇게 치는 거다 (4)
백호의 거대한 동체가 움직인다.
쿠우웅!
동체를 한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진동과 소음이 산을 울리고, 일제히 새들이 날아오른다.
허나 한 걸음으로 산에 진동을 울리게 하는 동체는 그 몸집에 비해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손오공의 앞에 도달했다.
콰아아앙!
발을 내리찍는 것만으로 터져 나오는 엄청난 굉음.
그러나-
"!"
손오공을 노리고 떨어져 내렸던 백호의 발은 그를 맞히지 못했다.
곧바로 백호의 얼굴을 향해 튀어나오는 손오공을 보며 백호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곧바로 몸을 뒤로 내뺐으나-
"어딜!"
"!"
백호가 몸을 뒤로 빼기 위해 몸을 든 그 순간, 손오공이 들고 있던 여의봉이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곧 백호의 머리통을 후려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해진 여의봉은 순식간에 움직여 몸을 세운 백호의 머리통을 내리쳤으나.
"큭!"
손오공의 여의봉은 백호의 머리통이 아닌 오른쪽 어깨를 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백호는 그대로 오른발을 휘둘러 손오공을 후려쳤다.
퍼어엉-!
거대한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백호의 일격을 맞은 손오공은 순식간에 산 한곳에 처박혔으나 곧바로 그의 앞으로 복귀해 싸움을 이어나갔다.
순식간에 터져 나가는 지반들.
거대한 동체가 산과 숲을 엉망진창으로 박살 내고.
손오공의 여의봉이 땅에 거대한 도랑을 만든다.
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지던 싸움은 우열이 가려지지 않았다.
분명 압도적인 동체를 가지고 있는 백호는 손오공과는 다른 압도적인 질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를 압도하지는 못했다.
손오공을 후려친 백호의 시선이 일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움직였으나.
"어딜 그렇게 한눈을 팔아!?"
백호에게 다른 이들의 전투를 파악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가다가는 괜히 체력만 소비하겠군……!'
-백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위업을 개방했다.
콰아아아아!!
백호의 몸에서 거대한 광채가 흘러나온다.
순간이지만 그를 상대하고 있는 손오공마저도 눈을 가릴 정도로 눈부신 광채.
그와 함께 조금 전까지 수세에 몰리고 있었던 백호의 외견이 변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동체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갑주.
백호의 팔다리에 쓰이기 시작한 순백의 장갑과 그 위를 타고 관절마다 만들어지기 시작한 순백의 갑주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여덟 개의 푸른 보주를 보며 손오공은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면서도 곧 비아냥거렸다.
"뭐야, 설마 그 늙은 찐따의 업을 위업이라고 사용한 거야?"
손오공의 조롱 어린 말에 백호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여덟 개의 보주를 주변으로 띄우기 시작하며 대답했다.
"광목천왕(廣目天王)의 위업이지. 과연 일개 요괴인 네가 그 상위존재인 광목천왕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백호의 말.
손오공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설마 이 몸이 그런 말에 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애초에 업이 완성되기 전에도 하늘과 지옥을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던 내가?"
손오공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여의봉을 어깨 위로 올리며 씨익 웃더니 대답했다.
"그래, 뭐 만약에라도 내가 널 막지 못한다고 쳐보자. 근데 아마 그때쯤이면 이미 네 친구들은 전부 뒤져 있지 않을까?"
그의 말에 백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검선(劍仙) 여동빈의 모습.
그는 자신이 받았던 사문천왕의 업을 개화해 본격적으로 싸우고 있었으나-
"역시 산속에 처박혀 있던 신선이라 그런지 싸움은 더럽게 못하네!"
"야 이것도 막아봐라 찐따야!"
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세 명의 대성 덕분에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도 못한 채 몸의 상처를 늘려가고 있었다.
여동빈이 검을 휘두르려 하면 귀신같이 초근접으로 붙어 아예 검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 세 명의 대성들.
"큭!"
여동빈은 몰려드는 세 명의 대성들을 피해 일순 거리를 벌려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 했지만-꽝!
"끅!?"
여동빈은 곧 거리를 벌리자마자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번개를 받아치느라 다시 거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산대성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가격하기 위해 휘둘러지고, 그것을 막은 순간 뒤쪽에 나타난 평천대성이 위에서 아래쪽으로 그의 몸을 내려친다.
콰아아아!
뒤늦게 검을 들어 막았으나 그 힘까지 모두 흘리지 못한 여동빈은 순식간에 땅을 향해 처박히고-
"왔어?"
"!!!"
-구신대성은 땅바닥에 처박히는 순간까지도 검을 놓지 않는 여동빈의 몸에 주먹을 휘둘렀다꽈아아아앙!
거대한 폭음.
그 모습을 보며 백호는 침음성을 흘렸다.
검선 여동빈.
그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탑에 올라와서 자신의 업을 모두 되찾았으며, 그가 받은 위업은 자신과 같은 사천왕의 업 중 하나였으니까.
사실 지금 위업까지 개방한 상태의 여동빈이라면 저기에 있는 세 명의 대성을 상대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공격을 전혀 시도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연계라니.'
여동빈이 제대로 된 힘을 사용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연계 때문이었다.
여동빈이 제대로 검을 휘두를 시간조차 주지 않고 초근접으로 달라붙어 공격을 퍼붓는 이산대성과 평천대성.
조금이라도 떨어져 검을 휘두르려 하면 하늘에서 대기하던 청룡이 기다렸다는 듯 번개를 쏘아내 그의 움직임을 막고, 그 뒤에는 구신대성이 마무리를 한다.
그야말로 숫자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그들의 연계.
"……."
백호는 곧 나타가 있는 곳도 별다를 바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인상을 찌푸렸고.
"쯧."
이내 그는 여동빈과 나타가 밀리고 있는 가장 큰 이유를 찾았다.
'청룡……!'
그것은 바로 하늘에서 지원을 하고 있는 청룡 덕분이었다.
여동빈과 나타는 분명 조금의 피해를 감수하며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대성과 거리를 벌린 뒤 조금의 여유를 틈타 본격적으로 싸움을 주도 하려 한다.
허나-
꽝!
-현재 하늘을 유영하고 있는 청룡은 어느 한 곳의 싸움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하늘을 유영하며 결정적인 순간순간에 중요한 번개를 때려 넣고 있었다.
'청룡을 먼저 처리해야……!'
백호는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아서라, 얼굴에 생각이 다 보인다,"
"!"
그 순간만을 기다린 것인지. 손오공은 이미 백호의 앞에 도착해 여의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커져라 여의!"
작아진 여의봉이 순식간에 거대해지며 찰나의 무방비에 놓인 백호의 턱을 무자비하게 올려친다.
거대한 동체가 한순간 허공을 향해 튀어 오르고, 그와 함께 손오공의 오른손이 인을 맺는다.
그와 함께 나타나기 시작하는 수많은 손오공.
하늘 여기저기 어디에든 할 것 없이. 그냥 '많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손오공이 하늘을 가리고.
"자, 그럼 네가 얼마나 더 강해졌는지-"
금강(金剛)-
손오공들이 들고 있던 여의가 일제히 거대해져-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십팔격(十八?)!
-하늘을 가렸다.
***
"……!"
그다음 순간 김현우가 정신을 차렸을 때 본 것은 푸른 하늘이었다.
새하얀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푸른 하늘.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금세 상체를 일으켜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파악했고.
곧 그는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이 노아흐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지역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
그와 함께 몸속에서 느껴지는 생소한 느낌에 김현우는 그것이 범천의 업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이내 당장 자신에게 흡수된 범천의 업이 아닌 다른 곳으로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갔다.
'도대체 그놈은 뭐야?'
김현우는 조금 전, 아니 조금 전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그 순간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수공간에서 깨어나, 자신을 주시하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을.
"……."
그는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킨 뒤 차분하게 그 눈동자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은 적이 아니다.
오히려 네가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는 게 좀 당황스럽다.
내가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위로 올라오라는 말뿐이다.
눈동자는 분명 김현우와 이런저런 선문답을 주고받았으나 결국 그 모든 선문답을 간출하게 요약하면 그가 자신에게 말한 내용은 네 가지 정도였다.
그리고 그 네 가지의 답변에서도 두 개는 쓸모없는 답변이었다.
아니, 어쩌면 네 가지 중에서 세 가지가 쓰레기였던 것 같다.
'그 새끼는 대체 또 뭐 하는 새끼야?'
적군은 아니라는데 알려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냥 한 말은 위로 올라오면 어련히 다 알아서 알게 될 테니 위로 올라오라는 말만 하다니.
그 덕분에 한동안 고민을 하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짧게 탄식하며 욕을 내뱉었다.
"이런 썅."
어떻게 된 게 자신에게 1차적으로 온 정보는 확실하게 완성된 정보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김현우는 짜증스레 자신의 머리를 헝클었으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
궁금증은 아직도 많았다.
그 눈동자가 누구인지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 사색에 잠겨 눈동자가 무엇인가에 대해 파악하기에는 김현우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장 김현우가 범천의 업을 흡수하기 위해 들어갔을 때 이미 정복자들은 내려오는 도중이었고, 그가 아무리 정복자들을 막아 놓으라고 말해놨어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모르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을 머릿속 한 구석에 억지로 구겨 넣은 뒤 몸을 움직였다.
"……."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확인하자 김현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초원 한가운데 만들어져 있는 포탈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나마나 노아흐가 깨어나면 넘어오라고 만들어 놓은 포탈이 분명했기에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고 포탈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와 함께 하얗게 점멸했다가 보이기 시작하는 방주 내의 모습.
"오. 왔나? 생각보다 빨리 일어났군."
김현우는 방주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반기는 노아흐의 목소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아흐를 바라보며 물어봤다.
"얼마나 지났어?"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대답했다.
"자네가 범천의 업을 흡수하러 들어가고 난 뒤로 9계층의 시간으로는 이제 3일 정도가 흘렀군."
"3일?"
"그렇네."
"생각보다 얼마 안 걸렸네?"
의외라는 듯 입을 여는 김현우를 보며 노아흐는 대답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수련과는 다를 거라고……. 뭐, 이번에는 수련을 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네만."
"?"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히려 빨리 나오면 내려오는 정복자들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어서 좋은 거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일리가 있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가려 했으나-
"……음, 그냥 자네가 직접 보는 게 좋을 것 같군."
"?"
-이내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의 앞에 포탈을 하나 만들어주었고.
"……엥?"
김현우는 그 포탈 속에 보이는 의외의 상황에 저도 모르게 멍한 소리를 냈다.
259화. 다구리는 이렇게 치는 거다 (5)
"……?"
김현우는 벌어져 있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개 박살이 나 있는 풍경.
앞에 보이는 전투지역 외의 풍경은 이곳은 원래 숲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드문드문 녹색의 풍경이 보였지만 그것은 극소수일 뿐이었다.
녹색의 숲보다 많이 보이는 것은 마치 달의 표면처럼 뻥뻥 뚫려 있는 크레이터였으며, 그 사이사이에는 격렬한 싸움의 흔적을 보여주듯 부서진 지반들이 보였다.
어쩌면 개판 오 분 전이라는 수식어보다는 전쟁터 한복판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그곳.
허나 김현우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백호?"
그가 집중하는 것은 그런 거대한 숲지 사이에 있는 거대한 크기의 백호였다.
하얀색의 털을 가지고 있고, 보기만 해도 위엄이 넘칠 것 같은 갑옷을 입은 채, 어쩌면 숲에 존재하는 산과 맞먹을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백호의 모습.
물론, 김현우는 그런 백호의 크기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백호 정도 되는 크기는 이전에 범천이 소환했던 거대한 여래와도 비슷하니까.
'……저 백호가 더 크려나?'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하릴없는 생각이 끼어들었으나 그 생각은 곧 있어 김현우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김현우는 현재 백호가 한 존재하게 복날 개 패듯 처맞고 있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중이었으니까.
꽝!
거대한 몸체를 가지고 있는 백호의 머리가 순식간에 뒤로 젖혀지고, 그와 함께 뒤로 젖혀진 백호의 배에서 거대한 여의봉이 나타나 그의 몸을 허공으로 날려 버린다.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제천대성?"
"이제는 투전승불이지."
"……투전승불?"
"그래, 자네가 범천의 업을 흡수할 때 그는 자신의 업을 다시 되찾았네, 거기에 덤으로 자신들의 동료들을 모조리 데려왔다네."
그 말에 김현우 문득 백호와 제천대성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그 주변에 청룡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칠대성?"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그 머리가 다른 모습에 김현우는 무척이나 쉽게 그들을 존재를 유추할 수 있었고, 거기에 더해서 김현우는 현재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저 백호는 위에서 내려온 정복자지?"
혹시나 하는 확인 절차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저 녀석을 포함해서 총 네 명의 정복자가 9계층으로 내려왔다네."
"네 명?"
"그래, 네 명. 자네가 저번에 말했던 그 두억신도 포함해서 말이야."
그 말에 김현우는 포탈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곤 말했다.
"……내가 보기에 지금 싸우고 있는 건 제천대성밖에 없는데?"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다 죽었네."
"?"
"아, 이렇게 말하기 보다는 소멸했다고 표현하는 게 좋겠군."
"……소멸?"
"그래, 자네가 범천의 업을 흡수하고 있을 때, 백호와 함께 내려왔던 네 명의 정복자는 이미 소멸했네."
그가 데려온 동료들한테 다굴을 처맞아서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으며 포탈을 바라보려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까 말실수를 했군."
"?"
"아직 두억신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을 못했다네. 그는 애초에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손오공이 괴력난신이 있는 곳으로 날려 보냈으니까 말일세."
근데 아마 두억신이 이곳으로 되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그쪽도 나름대로 해결이 된 것 같군.
노아흐의 중얼거림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묘한 느낌을 받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여지없이 백호가 허공에 뜬 채 손오공의 분신들에게 집단린치를 받고 있는 장면이었다.
거대한 몸이 허공에 떠서 거대한 여의봉 세례를 받는다.
백호는 어떻게든 그 공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악하며 사방으로 팔을 휘두르고 자신의 몸에서 솟아나온 강철의 무엇인가들을 사방으로 흩뿌렸으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손오공에게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한 듯했다.
맞고.
맞고.
맞는다.
별다른 특별한 기술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심리 싸움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김현우가 보고 있는 것은 압도적인 폭력의 현장이었다.
어떻게 보면 적인 백호가 불쌍해 보일 정도로 그는 손오공에게 맞고 있었고, 그런 상황이 얼마나 지났을까-
"……죽었군."
"죽었네……."
-김현우는 손오공의 린치에 신나게 두들겨 맞고 있던 백호의 몸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거대한 몸체가 순식간에 빛이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김현우.
그는 중얼거렸다.
"……이건 좀 기분이 묘한데?"
"뭐가 기분이 묘하다는 건가?"
노아흐의 물음에 김현우는 지금 이 심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왠지 파티 시작 시각에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왔는데 이미 파티가 막바지였던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
그런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가 되레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설명을 붙였다.
"물론 내가 치고 박고 싸우고 싶다는 건 아닌데, 원래 지금까지는 나한테 이렇게 쉽게 일을 해결할 기회가 거의 오지 않았잖아?"
"……뭐, 그건 그렇지?"
그의 말에 노아흐는 동의했다.
적어도 노아흐랑 만나기 전에도 김현우는 당장 앞에 닥친 위기는 무조건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상황이 주를 이루었으니까.
"근데 위업을 얻는 것도 그렇고 지금 이렇게 정복자를 쉽게 처리한 것도 그렇고, 내가 이렇게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꿀을 빠니까……."
"빠니까?"
"……뭔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
정말로 석연치 않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 김현우를 보며 노아흐는 순간 묘한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김현우를 바라봤다.
"아니, 별 고생 안하고 꿀 빨면 좋은 거 아닌가?"
"아니, 그거야 두말할 것 없을 정도로 당연히 좋은 건데."
"좋은 건데?"
"뭔가 내가 갑자기 이렇게 꿀을 빠니까 기분이 묘하다 이거지."
김현우가 석연찮다는 듯한 중얼거림에, 노아흐는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으며 김현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죽여버릴 거야! 네 년을 반드시 죽여버릴 거라고!"
두억신의 팔이 힘차게 움직여 괴력난신의 머리를 노리고, 괴력난신은 자신에게로 날아올 것이 뻔히 보이는 그 공격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마주봤다.
0.1초, 아니, 콤마 단위로는 제대로 셀 수 없을 정도의 짧은 시간에 그의 주먹이 괴력난신의 머리에 다가간다.
그러나-
"왜 그러느냐 동생아, 때려 보거라."
"익! 이이이익!!"
두억신은 괴력난신의 몸이 닿기 직전, 그 몸체를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꽈앙!
"크학!"
괴력난신의 주먹이 두억신의 명치를 후려쳤다.
작은 주먹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무력에 두억신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오고, 그의 몸이 땅바닥을 구른다.
콰가가각! 쾅!
그로 인해 공간 안에 생긴 또 하나의 흔적.
이제 그 공간에 멀쩡한 구역은 없었다.
지반은 완전히 갈려 더 이상 이곳에 평범한 땅이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박살 나있었고, 그것은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그 속에서, 괴력난신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네가 몇 번을 내게 달려들어도 마찬가지다 동생아.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느니라."
괴력난신이 마치 그를 놀리듯 히죽이며 입을 열자, 두억신은 이를 악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지랄하지 마 개년아!"
두억신이 발작적으로 외쳤으나 그의 눈에 새겨져 있는 공포를 바라본 괴력난신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럼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정말로?"
유감스럽지만-
"너는 절대로 나를 이기지 못한다. 내가 아까부터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느냐? 네가 아무리 내 업을 가졌다고 해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너는 그저 한낱 내 힘을 '받았던' 괴이고. 나는 그런 너를 만들어낸 존재이니라.
"그런데, 과연 네가 나를 정말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네가 우매한 것을 넘어서 무지한 것이다."
까드드득!!!
괴력난신의 말에 두억신은 두 눈을 부릅떴으나 이내 자신의 이빨이 박살이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으니까.
두억신은 아주 옛날, 이 탑이 생기고 났을 때 자신의 누이인 그녀의 업을 훔쳤다.
이유?
별것 없었다.
그저 항상 자신을 아래로 내려다보던 그녀를 오히려 자신이 내려다보고 싶기에, 두억신은 그녀가 동면에 들어 있는 사이 그녀의 업을 훔쳤고.
그녀를 피해 도망치고, 또 그녀를 완벽하게 찍어 누를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탑을 올랐다.
하지만 탑을 전부 오르고 나서도 그는 그녀를 찍어 누를 자신이 없었다.
분명 모든 업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는 자신의 누이인 '그녀'를 찍어 누르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가 설계자에게 위업을 받았을 때.
그리고 그 업을 사용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누이를 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감정을 머릿속에 품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받게 된 것은 바로 사천왕의 업이었고, 네 방향을 수호하는 그들의 업은 괴이들에게 치명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힘을 얻었기에 두억신은 자신의 약점이 사라졌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누이를 발아래에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어째서.'
그는 자신의 누이를 꺾지 못했다.
아니, 꺾지 못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아예 괴력난신의 몸에 단 하나의 상처를 낼 수조차 없었다.
애초에 두억신은 그녀를 공격할 수조차 없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공격을 했으나 그녀의 몸에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행동을 했을 때 그의 몸은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두억신은 그녀가 피해를 입기 전에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고, 괴력난신은 그런 그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그를 때려눕혔다.
그 상황의 반복.
그렇기에-
"나는, 네년을 반드시 이기고 말 테다!"
두억신은 핏발 선 눈으로 괴력난신을 바라보며 자신의 뿔을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보며 괴력난신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멍청한 것, 시간을 주었더니 결국 생각해 낸 것이 '괴이'를 포기하는 것이냐?"
"그래! 내가 괴이를 포기한다면 더는 네 본질에 묶여 있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지금 나는 사천왕의 업도 가지고 있는 몸!"
카드드득!!!
두억신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양손에 힘을 주었다.
그와 함께 들리는 무엇인가가 깨져나가는 소리.
"나는 괴이를 포기하고 '사천왕'의 업으로 네 년을 때려잡을 거다!!!"
빠드드득! 콰아아아아!!!
그 말과 함께 두억신은 자신의 양 뿔을 부서트렸다.
그와 함께 두억신의 몸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검은색의 기운.
두억신은 느껴지는 해방감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분명 그의 몸에서는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으나 그건 두억신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힘을 잃어버리긴 해도 두억신은 이제부터 괴력난신을 마음대로 두들겨 팰 수 있을 테니까.
'이 괴이의 본질만 없애면 저년은 '괴력난신'의 업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등반자지!'
그렇기에 두억신은 일순 희열까지 느껴지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고.
"……!"
"멍청한 것."
곧 두억신은, 괴력난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희열이 가득한 미소를.
260화. 다구리는 이렇게 치는 거다 (6)완전히 개박살이 난 중국의 산중에서.
"오, 네가 아우가 그렇게 말하던 그 인간이냐?"
"뭐, 제천대성이 말하는 거면 내가 맞기는 하지."
"늘어져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말하는 데 거침이 없군!"
"……뭐?"
김현우가 미처 불만을 표하기도 전에 소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그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반갑다! 내 이름은 평천대성 우마왕이라고 한다! 평천대성의 뜻은 하늘을 평정하는 큰 성인이라는 말이지!"
"아, 그래."
자신이 내밀기도 전에 손을 끌어 잡고 위아래로 크게 휘두르는 우마왕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곧 그런 우마왕의 옆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
"이산대성?"
"거참 대단하군. 잠 한번 자고 빠져나오니까 저번에는 별것 아닌 것 같던 놈이 이렇게 성장해 있다니……!"
"형님, 내 말이 맞지? 이 녀석의 성장력은 진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라니까?"
"그래, 솔직히 보기 전까지만 헤도 좀 안 믿겼는데 이렇게 보고 나니 확실히 느껴지는군, 확실히 성장 속도가 빨라!"
"오! 어디보자, 이야~ 이 녀석이 진짜 몇 달 전에는 근두운도 제대로 못 타는 녀석이었다 이거지?"
"그렇다니까?"
"역시 아우랑 같이 다니는 놈들은 뭐가 하나씩 있는 것 같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대단하다는 듯 웃음을 짓는 이산대성의 뒤로, 다른 대성들이 몰려와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애초에 인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건이 있어 포탈을 넘어온 김현우는 왠지 싸우지는 않았으나 갑작스레 피곤해지기 시작하는 육신을 느끼며 제천대성의 동료들인 칠대성의 인사를 차례차례 받아나갔다.
그리하여 그렇게 개 박살이 난 산중에서 때 아닌 수많은 악수 요청을 받게 된 김현우는 한참이 되어서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저기, 제천대성."
"왜?"
김현우의 물음에 대답한 그.
"우선 지금 너희들이 잡은 놈들을 제외하고, 남아 있는 정복자는 과력난신이 상대하고 있는 녀석밖에는 없는 거지?"
그의 물음에 제천대성은 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럼 도와주러 가야 하는 거 아냐?"
"도와주러 간다고? 그녀를?"
제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 했고.
"뭐, 전에 무조건 자기가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소리를 듣기는 들었는데, 좀 긴가민가해서 말이야."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런 김현우의 말에 답변한 것은 바로 하늘에 떠 있던 청룡이었다.
"왜?"
"그녀가 너한테 한 말대로, 그녀는 절대 그 녀석에게는 지지 않을 테니까."
"……?"
"뭐, 보고 있어라. 아마 그녀는 조만간 이 곳으로 올 테니."
청룡의 확신 어린 말.
그에 김현우는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으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
두억신은 자신의 업을 버렸다.
하지만 두억신이 자신의 본질인 괴이(怪異)로서의 업을 버린 것은 충동적으로 저지른 것이 아닌, 전부 철저한 계산 하에 놓인 일이었다.
괴이의 업을 버리는 것으로 두억신은 자신의 본질을 버리기는 했으나 '괴력난신'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두 뿔을 부숴버렸기에 그는 더 이상 괴이로서의 힘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본질을 상징인 '뿔'을 파괴함으로 버렸으니까.
그러나 두억신은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내게는 사천왕의 업이 있다……!'
어쩌면 일반적인 괴이로서는 감히 대적할 수 조자 없는 사천왕의 위업(偉業)을 두억신은 가지고 있었고.
'저 눈엣가시 같은 괴력난신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위업만으로도 두억신은 충분히 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모자란 업이야 그 녀석의 개새끼 노릇을 좀 더 하는 것으로 충당할 수 있을 테니까.
아무튼, 그 여러 가지 계산이 머릿속에 맞아떨어져 그는 뿔을 부수고 '괴이'에 담겨 있던 업을 모두 소실시켰다.
그렇게 소실된 업은 바로 두억신 자신의 업도 있었고, 그가 맨 처음 이 탑을 오르기 전에 자신의 누이에게 훔쳐 나온 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저년은 더 이상 업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다……!'
분명히 그럴 터다.
자신의 뿔은 분명 그녀의 업을 담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박살 냈으니까.
그런데.
분명 그럴 텐데-
'어째서, 웃는 거지?'
두억신은 자신의 앞에서 미소를 짓는 괴력난신을 보며 광소를 짓던 얼굴에 금을 만들었다.
두억신의 미소에 금이 가면 갈수록 괴력난신의 미소는 짙어졌다.
처음에는 입가가 비틀어 올라가고.
그다음에는 두 눈이 초승달 모양을 그리며 휘어진다.
또 그다음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두억신의 앞에 드러날 정도로 환한 웃음이 지어지고.
그녀의 입에서 광소가 흘러나온다.
그렇기에 두억신의 표정은 그와 반대로 점점 굳어갔다.
광소하던 얼굴에 금이 가고.
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진다.
사라진 미소에는 순간적인 혼란이 가득해지고.
이내 그 혼란 뒤에 두억신의 얼굴에 자리 잡은 것은 바로-탓!
-초조함이었다.
초조함.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적어도 지금 두억신의 머릿속에서 지금 이 상황은 그가 초조함을 느껴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조함을 느낀다.
왜?
이유는 모른다.
그냥.
두억신은 본능적으로 초조함을 느꼈기에 괴력난신의 앞으로 달려 나갔다.
괴이의 힘이 빠져나가서일까? 두억신의 몸은 이전처럼 빠르지 않았다.
이전에는 그저 눈 깜짝할 새, 라고 표현하기가 모호할 정도로 빨랐다면, 지금은 그의 속도를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속도는 느려졌다.
허나 그렇다 해도 두억신의 속도는 괴력난신보다는 빨랐고.
그렇기에 그는 괴력난신이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분명 괴력난신으로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짧은 시간일 텐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은 두억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와 함께 팽창하는 두억신의 근육.
두억신의 뒤에 있는 광배가 더더욱 큰 원을 향성하며 주변을 밝게 비추고, 그는 그 찰나의 순간 속에서 혹시나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혹시 이렇게까지 했는데 공격을 하지 못하면 어쩌지?'
갑작스레 생긴 불안감.
허나 두억신은 그 생각을 거둬버렸다.
이미 그는 자신의 본질을 버리고 사천왕의 업만으로 존재를 유지하고 있고, 그렇기에 그는 괴력난신을 공격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까득!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확신이 들어차지 못한 주먹을 억지로 꾹 쥐었고, 이내-꽈아아앙!
그의 주먹은, 정확히 괴력난신의 머리를 후려쳤다.
'역시!'
그와 함께 느껴지는 쾌감.
이전까지 두억신은 단 한 번도 그녀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녀가 아무리 압도적으로 약하다고 해도 두억신의 공격은 결국 그녀의 몸에 닿기 전에 멈출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그는 계속해서 반격을 당했다.
절대로 반격당할 리 없는 그녀에게.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맞았어!'
두억신의 공격은 무척이나 깔끔하게 들어갔고, 그 증거로 그가 휘두른 주먹에는 괴력난신을 후려친 감각이 남아 있었다.
무척이나 짜릿한 감각이.
왼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에 환호하는 두억신.
허나 그는 그다음 순간 무엇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무엇인가가 이상하다고.
"……."
두억신은 분명 괴력난신의 얼굴을 후려쳤고, 그의 주먹은 무척이나 깔끔하게 그녀의 얼굴을 뭉개는 걸로 모자라 그녀의 몸을 허공에 몸을 날려야 했다.
그래, 자신의 위업과 그녀의 업의 차이라면 응당 지금 상횡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졌어야 했다.
그러나-
"……재롱은 전부 끝났느냐?"
"……!!"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두억신은 여전히 괴력난신의 머리를 후려치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두억신의 주먹을 맞은 채였다.
허나 분명 그 주먹을 정면으로 얻어맞은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괴력난신에게는 딱히 이렇다 할 피해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녀는 멀쩡했다.
아니, 멀쩡하다 못해, 그녀의 이마에는 원래 달려 있는 두 개의 뿔과는 관계없는 또 다른 뿔이 생겨나 있었다.
"무-"
콰드드드드드득!!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무슨?'
이라고 물으려던 두억신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괴력난신에 의해서.
"카학!"
괴력난신의 주먹에 땅바닥에 처박힌 두억신의 입가에서 숨이 막히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오고.
뻐어엉!
괴력난신의 발차기로 인해 두억신의 몸이 일순간 포탄처럼 쏘아져 나가 처박힌다.
주변의 사물을 모조리 박살 내며 땅바닥을 구르는 두억신.
그를 보며 괴력난신은 웃음을 짓고 입을 열었다.
"멍청한 아우야, 설마 네가 뿔을 부수면 네가 흡수한 내 업이 같이 날아갈 거라 생각했느냐?"
괴력난신의 질문에 두억신은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
그는 그러지 못했다.
양손은 금방이라도 숙인 몸을 일으키기 위해 몸을 지탱하고 있었으나,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탁- 탁-
그리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두억신의 귓가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척이나 짧은, 그러나 느긋하게 걸어오는 듯한 발소리.
아주 옛날, 그가 수천 수만 번을 들어왔던 그 발소리.
"도대체 어떻게!!"
두억신은 순간 격분하며 입을 열었으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땅에 박힌 상태였고, 그는 그 상태 그대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니지. 그 생각은 틀렸다, 아우야. 너는 내 업을 완전히 소화한 게 아니지 않으냐?"
"그……그게 무슨!"
"그게 무슨 소리냐고?"
꽈득!
"크악!?"
괴력난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건만, 두억신은 자신의 몸이 점점 죄여오는 무엇인가를 느끼며 피를 토했고, 그 와중에도 괴력난신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너는 내 업을 훔치고, 내 업을 마음대로 사용했지. 허나 너는 내 업을 사용할 뿐, 완전히 흡수하지는 않았더구나."
아니- 애초에 흡수할 수조차 없었던 게 더 맞는 말이겠지.
괴력난신이 말을 지속하면 지속할수록 두억신은 자신의 몸이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짓눌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짓눌리고 짓눌리고 짓눌린다.
팔다리가 수축하고, 그의 몸이 수축한다.
"그런데, 감히 내 업을 제대로 흡수하지도 않고 휘두르기만 했던 네가 내 업을 네 의지로 완전히 소멸 시킬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두억신은 이제 그녀의 말에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괴상한 형체가 되어 있었다.
뿌득- 뿌드드득! 뿌드드드드득!!
그의 몸에서 나는 기이한 소리.
그러나 괴력난신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고.
"아니, 아니지. 네가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한 업을 스스로 버리면, 그 업은 그대로 내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 멍청한 녀석아."
그 말을 기점으로, 두억신의 몸은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들리는 소리는 그의 몸을 구성하는 골격이 부서지는 소리였고.
그다음으로 들리는 소리는 수많은 파육이 터지는 소리였다.
그다음으로는 피부가 짓이겨지고, 그다음으로는 그 몸 위에 걸쳐져 있던 갑옷과 광배가 박살 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은 괴력난신은 완전히 박살 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살아 있는 두억신을 보며-
"자, 그럼 어디 그 두 눈으로 다시 한번 똑똑히 보거라."
-그렇게 말했다.
"나, 야차(夜叉)의 재림을 말이다."
261화. 이제는 올라가야 할 때 (1)끝났다.
"……."
물론 모든 일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은 아니었다.
"흐음."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네 개의 아티팩트를 바라봤다.
그러자 다시금 떠오르는 생각.
"……흠."
끝났다.
분명 김현우 스스로는 개고생을 할 거라고 여겼던 네 명의 정복자 침입은, 김현우가 미처 힘을 제대로 내보이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힘을 내보이기는커녕 이제 싸우려고 밖에 나와 보니까 완전히 끝나 있었다.
그것도 이미 9계층에 쳐들어온 정복자 두 명은 소멸해 있는 상태였고, 한 명은 복날 개 맞듯이 맞고 있는 상태였으며 다른 한 명은 괴력난신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
김현우는 완전히 찌그러져 있는 갑옷(아티팩트)를 들고 복귀했던 괴력난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예전에는 소녀의 티가 강하게 났었던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그곳에는 꽤 성숙해진 한 여자가 있었다.
……뭐, 성숙해졌다고 해도 고등학생 정도였지만.
"쩝."
아무튼, 그런 식으로 9계층에 찾아온 사천(四天)은 김현우가 미처 새로운 위업을 실험해 볼 새도 없이 허무하게 끝났다.
'뭐, 내가 안 싸우고 끝난 건 좋은 일이지만.'
분명 처음에야 이렇게 꿀 빤 적이 없어서 일순 찜찜한 느낌까지 들었으나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역시 나쁘지 않았다.
게임으로 치자면 약간 보너스 스테이지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생각해 보면 범천의 업 자체도 그렇게 힘들게 얻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고.
"뭘 그렇게 끄덕거리나?"
"아니,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곧 그는 자신의 옆을 지나 맞은편에 앉는 노아흐를 향해 그렇게 답했다.
노아흐는 그런 김현우를 잠시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더니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우선, 요 1주일간 위쪽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상태일세."
"……또?"
"그래, 분명 그쪽에서는 사천이 모조리 우리에게 씹혔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군."
"……뭐 병력이 없거나 그런 건가?"
"그럴 확률은…… 뭐, 조금 낮다고 본다네."
"……낮다고?"
"그래, 뭐 나도 설계자의 모든 능력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니네만, 적어도 그 능력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이곳에 보낼 하수인을 수급하기에는 충분할걸세."
거기에 덤으로-
"만약 그가 당장 제재를 가하려 했다면 이전처럼 했겠지."
"이전처럼?"
"그래, 요컨대 1계층과 9계층을 한 번에 이어버리면 되니까."
"……아."
물론 지금 이 9계층에는 1계층의 등반자가 올라온다고 해봤자 큰 피해 없이 막을 수 있는 이들이 많았으나 그와는 별개로 귀찮게 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탑의 최상층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침묵만을 유지하는 최상층.
'뭐 저러다가 언제 또 지금처럼 정복자를 내려 보낼지 모를 일이지만.'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노아흐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뭐, 아무튼 그쪽에서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나쁘지 않을 일일세."
"뭐 결국 준비하는 시간이 생기는 거니까."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다음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이 아티팩트에 관한 이야기일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자신의 바닥에 깔려 있는 네 개의 아티팩트를 바라봤다.
각각 창과 검, 그리고 외팔 견갑과 건틀렛의 형태를 하고 있는 아티팩트.
그것들은 전부 일주일 전 칠대성을 포함한 청룡과 괴력난신이 최상층에서 내려온 정복자들을 잡고 얻은 것들이었다.
김현우가 그것을 바라보자 노아흐는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좀 아쉽더군, 분명 내가 봤을 때도 그들이 '위업(偉業)'을 휘두르고 있길래 분명 위업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네만……유감스럽게도 이것들은 위업이 아니네."
"위업이 아니라고?"
"그래, 지금 이 아티팩트들은 모두 이곳에 내려온 사천의 업일세. 각각 나타와 검선, 여동빈, 그리고 백호와 두억신의 것이지."
"쯧, 그럼 업을 먹어치워 봤자 눈에 띌 정도로 크게 힘을 모으지는 못하겠네."
노골적인 아쉬움을 드러낸 김현우.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만약 그들이 전부 위업을 떨어뜨렸다면 자네가 무리해서라도 그 위업들을 전부 흡수하도록 도왔을 테지만, 일반적인 업은 더 이상 자네에게 도움이 되진 않지."
그의 말에 김현우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아티팩트를 바라보곤 말했다.
"……역시 개수가 많다고 강해지는 건 아니겠지?"
"뻔히 알고 있는 걸 물어보는군, 위업 정도가 되면 그 업의 크기만으로도 자체적인 능력이 몇 배로 껑충 뛰지만 일반적인 업은 흡수해 봤자 자신이 그 업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잼병이 되는걸세."
한마디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업을 가지고 있어봤자 힘을 키우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힘이 더 떨어질 수도 있다는 소리지."
노아흐의 확언에 김현우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한 번 더 날로 먹을 수 있으려나 했는데 그게 안 되네.'
일주일 전 김현우는 정복자들이 하나같이 위업을 들고 온 것을 보며 그것들을 전부 먹어치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칠대성들이야 제천대성 때문에 자신의 업을 되찾았으니 다른 녀석들의 업은 굳이 필요 없다며 자신들이 잡은 아티팩트의 소유권을 모두 김현우에게 넘겨버렸고 그것은 괴력난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김현우는 실망했으나, 이내 그 감정을 오래 가져가진 않았다.
어차피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봐도 딱히 나오는 것은 없으니까.
"뭐, 그럼 그냥 다른 애들 나눠줘서 전력을 조금이라도 더 올리는 게 맞겠네."
"그게 좋을 것 같네."
김현우는 빠르게 미련을 털어버리고 입을 열었고. 노아흐도 그런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현우는 마침내 일주일 전 노아흐에게 말했던 마지막 부탁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전에 부탁했던 그 눈동자에 대해서는 좀 알아봤어?"
"아, 그것 말인가?"
김현우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한 노아흐.
그가 일주일 전 노아흐에게 부탁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김현우는 범천의 업을 얻고 아직 몸이 제대로 깨어나지 않았을 때, 그가 허수 공간에서 만났던 '눈동자'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했었다.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어?"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잠시 고민하는 듯 짧은 침음성을 냈고.
"……확실한 건 아니지만, 짚이는 것이 있기는 하네."
곧 노아흐는 입을 열었다.
***
하남.
거대한 장원의 건물 중 한 곳.
그곳에서 김시현은 어색한 표정으로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곳 중에서도 TV가 틀어져 있는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 존나 커!"
"실화냐?"
"내가 용궁에 있을 때도 저런 크기는 본 적이 없는데……!"
그곳에 보이는 것은 소파에 앉은 채 저마다 개성 있는 옷을 입은 채로 TV 속에 나오는 영화배우를 평가하고 있는 세 수인, 아니 대성들이었다.
소의 머리를 하는 우마왕은 감탄했다는 듯 손뼉을 탁치며 TV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고.
"와, 얘는 더 큰데?"
"실화?"
그것은 바로 옆에 있던 북해대성과 구신대성도 마찬가지였다.
"야, 내가 말했지? 개쩐다고."
그리고 그런 그들의 뒤에서 제천대성이 그들과 함께 TV를 감상하며 입을 열고 있었고. 그들은 TV에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왠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제천대성은 입을 열었다.
"자 봐라, 이제 한 3분 뒤에는 진짜 완전 초미녀가 나오거든?"
"초미녀라고?"
"그래, 거의 미모가 그 꼰대놈 딸 막내쯤 되는 여자가 나온다 이거야."
"미친……!"
제천대성의 말에 저마다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으며 집중하고 있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김시현은 이내 시선을 돌려 그 옆을 바라봤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뿌연 연기와 매캐한 냄새.
누가 봐도 그 연기의 정체가 담배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김시현이었으나 그는 매캐한 냄새에 미처 코를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쪽을 바라봤다.
뻐끔-
"와, 쥑이네. 이게 그 현대 기술의 발전이라는 건가?"
"그러게 말이야, 옛날에는 잿대 갈아서 털고 개지랄을 해야 겨우 한 대 필까말까 했는데 요즘에는 그냥 다발로 팔아버리네."
그 매캐한 연기 사이에서는 이산대성과 혼천대성이 서로 마주 앉아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다만 피우는 담배는 이산대성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던 곰방대식 담배가 아닌, 한국에서 팔고 있는 국산담배와 외산 담배들이었다.
"……이야! 이거 죽이네. 담배맛이 막 이리저리 바뀐다? 이거 뭐라고?"
이산대성의 질문에 그 옆에 있던 청룡은 대답했다.
"몰X다"
"뭐? X라? 뭘 모른다는 거냐?"
"아니, 그러니까 몰라라고."
"아, 너도 모른다고?"
"……그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대화를 이어나가는 이산대성과 청룡, 혼천대성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별반 관심이 없는 듯 빨간색 곽을 잡고 자신의 입에 담배를 몇 까치 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과 함께 땅바닥에 잔뜩 버려져 있는 수많은 담배곽들을 바라본 그는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건물의 문을 닫았다.
"……개판이네."
물론 김시현도 일주일 전 김현우를 통해 칠대성의 존재를 전달받기는 했다만 김현우의 호출로 인해 그를 찾던 중 보게 된 풍경은 그로서 좀 멍한 느낌을 받게 해주었다.
'……마치 동네 아저씨들이 노인정에 모여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지.'
김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으나 이내 시선을 돌려 다른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늘 그가 이 장원에 온 이유는 애초에 김현우가 잠시 볼 일이 있으니 한번 와보라고 한 것 때문이었으니까.
김시현은 멍해진 정신 속에서 다시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떠올리며 김현우가 있을 만한 다른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긴 뒤 문고리를 잡았고.
"……그, 그러니까, 이렇게?"
"역시 너는 너무 나약하구나.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네 스승은 목석보다도 더한 놈이라 철저하게 들이밀어야 한다, 이말이다!"
"그, 그래도……."
"그래도고 자시고! 내가 저번에 노골적으로 자리를 만들어줬는데도 제대로 써먹지를 못하지 않았느냐! 설마 이대로 네 스승을 빼앗길 생각이느냐?"
"무, 무슨? 스승님을 누구한테 빼앗긴다는 거냐!"
"당연한 것을 물어보는구나, 네가 이렇게 어물쩡거릴 동안 아마 네 적인 그 풍만한 체형을 가진 그 녀석의 또 다른 제자는 금방이라도 네 스승한테 들이밀 거다."
"그, 그게 무슨!"
"그러니까 빼앗기고 싶지 않으면 빨리 제대로 따라하거라. 내가 지금까지 본 결과, 빈약한 네 몸으로 네 스승을 유혹하려면 이것밖에 없다."
"무슨 개소리를! 비, 빈약하지 않다! 아직 나는 성장기라는 말이다!"
"……."
김시현은 자신이 문고리를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감사하며 쥐었던 문고리를 조심스레 놓았다.
262화. 이제는 올라가야할 때 (2)
"왔어 형?"
"오셨습니까, 스승님."
"오셨어요, 사부님?"
"어, 그래. 다들 빨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네?"
하남에 있는 거대한 장원.
김현우는 장원으로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각각 미령과 김시현, 그리고 하나린이 차례대로 앉아 있었다.
김현우는 자신이 노아흐에게 들어가기 전 김시현을 포함한 그녀들을 불렀다는 것을 상기하며 자리에 앉았고.
"?"
이내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그는 이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그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
"……."
"……."
-왠지 그들은 서로 불편한 듯 얼굴을 돌리고 있었으니까.
김시현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는 왠지 굉장히 불안한 표정으로 미령과 하나린을 슬쩍슬쩍 바라보고 있었고.
미령과 하나린은 아니나 다를까 김시현의 시선이 쏘아지자마자 굉장한 살기를 내뿜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김현우가 자신에게 시선을 옮길 때가 되면 기적같이 그 살기를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으나 그것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
"……."
"……."
김현우가 말을 꺼내지 않자 지속되는 침묵.
'하나린과 미령이 별 시답잖은 이유로 싸우는 거야 수도 없이 봐오긴 했는데…….'
그런 두 제자 사이에 김시현이 저렇게 사이에 껴 있는 경우는 처음 봤기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봐야 하나 고민했으나.
"……."
김현우는 곧
'절대로 묻지 말아주세요.'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인 뒤 입을 열었다.
"우선 다 온 것 같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내가 오늘 너희를 부른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뒤에 달아놓은 하수분의 주머니를 꺼냈고, 이내 그 하수분의 주머니 안에서 네 개의 물건을 꺼냈다.
각각 건틀릿과 검, 견갑과 검을 밖으로 꺼내 놓은 김현우.
당연하지만 그것들은 바로 얼마 전 9계층으로 쳐들어왔던 사천이 남긴 아티팩트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모인 것을 확인한 김현우는 곧바로 말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지금 내가 꺼내 놓은 건 얼마 전 우리가 있는 9계층으로 내려왔던 정복자들의 아티팩트다. 그리고 이걸 꺼낸 이유는 너희에게 아티팩트를 하나씩 나눠주기 위해서야."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살짝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아티팩트를 하나씩이요?"
그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 이곳에 있는 아티팩트들은 더 사용할 일이 없었으니까.
칠대성들은 딱히 아티팩트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고,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업을 되찾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제천대성도 마찬가지였고 청룡도 저번에 받은 흑경의 업 이외에 더는 필요가 없다는 소리를 김현우에게 전했다.
한마디로 지금 김현우가 내놓은 아티팩트들은 지금 시점에서 당장 딱히 쓸데가 없었고.
그렇기에 김현우는 남은 아티팩트를 김시현을 포함한 일행에게 넘겨주려 한 것이었다.
김현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티팩트를 바라보고 있는 김시현을 보며 책상에 있는 검을 집어들었다.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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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선(劍仙)
등급: SS
보정: 없음
스킬: 없음
-정보 권한-
검(檢) 하나로 신선(神仙)의 자리에 올라 다른 이들에게 검선(劍仙)이라는 이명을 받게 된 남자. 검선(劍仙) 여동빈(呂洞賓)이 사용했던 애검이다.
검선(劍仙)은 여동빈이 사용했던 애검으로서 그가 열 번의 유혹을 물리치고 얻어낸, 초자연적인 힘이 깃든 검이며.
그 초자연적인 힘은 일반적으로 검을 휘둘러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여동빈이 사용하는 검법인 천둔검법(天遁劍法)을 사용해야만 그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아티팩트는 만약 사용자가 천둔검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경우 특이하게 보정과 스킬이 변화하며 천둔검법의 이해도와 습득 차이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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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그 로그를 한 눈으로 훑으면서 김시현에게 내밀었다.
"자, 너 저번에 천마 나오고 나서 다시 옛날 무기 사용했었지?"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그렇죠, 애초에 본 주인이 나왔는데 제가 계속 들고 있는 것도 좀 웃기니까요. 근데."
"?"
"이건 차라리 스승님- 그러니까 그냥 천마를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김시현이 슬쩍 김현우의 눈치를 보자 김현우는 곧바로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다고요?"
"그래. 이미 그 녀석에게는 물어봤거든."
"어? 벌써요?"
"그래, 필요 없다더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어제 천마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또 다른 무기는 필요 없다, 라고 했었나.'
김현우는 어제 노아의 방주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천마가 있길래 바로 그에게 여동빈의 검을 넘겨주려 했으나. 그는 김현우의 검을 거부했었다.
그 이유는 이미 저번에 주었던 팔열성군의 언월도를 잘 다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튼, 그래서 이 검은 딱히 쓸데도 없으니까 네가 가져도 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검을 넘겨주었고. 그에 김시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검을 받아들었다.
그 뒤에 김시현의 입가에 지어지는 은은한 미소를 보며 피식 거린 김현우는 이내 양옆에 앉아 있는 미령과 하나린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도 하나씩 골라, 업을 하나씩 더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스승님의 선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잘 받을게요, 사부님."
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며 눈여겨보았던 물건들을 챙겨가는 미령과 하나린.
미령의 경우는 두억신에게서 나온 건틀렛을 골랐고. 하나린의 경우에는 김현우가 꺼내놓았던 물건 중에서 제일 긴 창을 손에 쥐었다.
아름다운 연꽃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창을 몇 번이고 만족스럽게 본 하나린과 자신의 쥔 건틀렛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미령.
조금 전과 다르게 은은한 화기가 넘치기 시작하는 그들을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던 김현우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탄성을 내뱉으면 조금 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왜요 형?"
"?"
"?"
"너희들 내가 오기 전까지 무슨 일 있었냐?"
"……."
"……."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나온 김현우의 질문에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다시금 급속하게 냉동되었다.
"……."
"……."
"……."
또다시 침묵을 지키는 김시현을 포함한 그녀들.
김시현은 김현우를 보며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윽!"
곧 김시현은 주변에서 느껴지는, 김현우조차도 확실하게 느낄 만한 살의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미령과 하나린을 슬쩍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일도 없었습니다."
"……?"
김시현의 입에서 나온 딱딱한 존댓말에 저도 모르게 질문을 할 뻔한 김현우였으나, 그는 김시현의 죽을 것 같은 표정을 눈치채고 결국 더 이상 묻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좀 궁금하긴 하지만…….'
나중에 따로 김시현을 볼 일이 있다면 그때 물어보자고 생각한 김현우는 이내 더 이상 그에게 자신이 보지 못한 일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김현우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무렵.
"?"
------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면 당신은 부름을 받아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0일 0시간 2분 00초
------
김현우는 자신의 눈앞에 뜬 로그 덕분에 그들에게 짧게 인사를 건네고는 시스템 룸으로 소환되었다.
그렇게 김현우가 떠나가고 난 뒤, 남아 있는 안.
"……."
"……."
김시현은 자신의 양옆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들을 보며 식은땀을 흘리며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들이 김시현에게 살기 어린 눈빛을 보내는 이유는 바로 그가 이 방에 오기 조금 전, 그들의 부끄러운 헛소리를 전부 그 귀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빠앙? 그거면 충분해요?'
'흠, 그래요? 서고에는 그렇게 써 있다라…….'
'오빠앙♥'
"헉!"
김시현은 급작스레 아까 전 하나린이 했던 말들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눈을 떴고, 이내 옆에서 살기 어린 시선을 보내오는 하나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살기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는 미령.
'……귀엽……게 말인가?'
'무……뭐? 고양이 소리? 그건 좀,'
'……아니, 해야지……빼앗기지 않으려면…….'
"……."
미령을 보자마자 떠오르는, 30분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기억.
김시현은 거기서 '이때는 대략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라는 상태로 미령의 어색한 고양이 울음소리를 멍하니 들어버렸고.
결국 그녀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
김시현은 김현우가 그녀들에게 나누어준 아티팩트를 한 번씩 흘끔 바라보았다.
딱 봐도 맞으면 아플 것 같은 거대한 건틀렛과 자신의 키만큼 되는 거대한 창.
김시현은 왠지 그 두 개의 무기가 자신을 향하는 상상을 하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입 다물고 있을 테니까 살려주세요."
그런 김시현의 말에도 그녀들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김시현을 바라보았고.
결국 그날, 김시현은 그녀들 개인에게 각각 각서를 쓰고 난 뒤에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
아브의 시스템 룸은 여전히 똑같았다.
그녀의 기억이 해제되고 나서 그녀 마음대로 빨간 버튼을 사용해 방 내부를 바꿀 수 있으면서도 그녀는 항상-
"……바닥 좀 치워라."
"앗, 그러게요 좀 치워둘걸."
-이 엄청난 양의 게임팩들이 가득한 방 안에서 살고 있었다.
김현우는 빨간 버튼을 누르며 방을 정리하는 아브를 보고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상당히 넓어진 자리를 향해 이동해 앉았다.
"넌 어째 계속 방이 바뀌지를 않는다?"
김현우의 질문.
그러자 아브는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여기가 게임할 때는 가장 안정되는 곳이거든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슬쩍 뜬 눈으로 대답했다.
"아직도 게임하냐? 이 시국에?"
그런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슬쩍 기분이 상했다는 듯 말했다.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당연히 이런 시국에 게임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저도 나름대로 목숨이 걸린 일인데요."
그녀의 볼멘소리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곤 곧바로 질문에 대답했다.
"그래서, 부른 이유는 눈동자 때문이야?"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고, 김현우는 그 소리를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어제 '눈동자'에 관련해 노아흐에게 물어봤을 때 그는 나름대로 김현우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허나 그 정보들은 김현우가 듣기에도 조금 모호한 정보들이 많았고, 결국 노아흐는 '눈동자'와 그가 말했던 '위'에 관한 내용을 아브에게 말해 놓겠다고 했었다.
노아흐와의 대화를 잠시 상기한 김현우는 이내 아브를 바라봤고.
아브는 곧바로 '눈동자'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263화. 이제는 올라가야 할 때 (3)아브의 시스템 룸.
게임팩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는 그곳에서 한동안 아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현우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한 정체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솔직히 너무 정보가 부족해요."
그런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고는 왠지 김이 샜다는 듯 말했다.
"조금 전에는 그렇게 굳게 고개를 끄덕거리길래 뭔 대단한 거라도 알아냈나 싶었더니."
"그래도 몇 개 알아낸 건 있어요."
"……알아낸 거?"
"네. 제가 말씀드렸죠? 애초에 그 눈동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지금 상황에서는 거의 불가능해요. 당신이 그 눈동자를 아무리 설명해도 정보가 이렇게 부족한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정보를 찾을 수 없었거든요."
다만-
"그와는 별개로 '위'에 대한 정보는 조금 찾을 수 있었어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답했다.
"위?"
"네. 그 눈동자가 언급했던 '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검색해 보니까 이런저런 결과가 나오더라고요."
아브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을 움직이자마자 아브 앞으로 떠오른 로그는 이내 그녀의 손가락에 의해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 뭐."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아브의 말에 동의하며 생각했다.
'역시, 너무 정보가 적었나.'
김현우가 생각해도 노아흐나 아브에게 말해주었던 정보는 너무나도 빈약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그 공간 속에서 눈동자를 마주쳤을 때 그가 보았던 것은 칠흑같은 허수공간뿐이었고, 거기에 그가 눈동자에게 들었던 유의미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무엇을 물어도 아직 이야기해줄 때가 되지 않았다느니 하면서 대답을 회피했으니까.
'그나마 얻을 수 있었던 건 '위'라는 정보뿐이지.'
김현우는 그가 했던 말을 상기했다.
'위로 와라.'
라고 말했던 그 눈동자의 말을.
김현우는 그런 말을 하는 눈동자를 보며 추가적인 정보를 요구했으나 그는 결국 위로 오라는 말을 반복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정보를 던져주지 않고 결국 사라졌었다.
"다 됐어요."
그는 눈동자와 만났던 기억을 다시금 상기하던 중 들린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고.
"눈앞에 떠다니는 그 수많은 로그들은 뭐야?"
김현우는 자신이 잠시 한눈을 판 그 사이에 아브의 앞에 떠오른 수많은 로그창들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찾아 놓은 정보들이에요. 사실 제대로 정리하지를 못해서요."
아브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검지를 까딱했다.
그와 함께 아브의 주변에 떠 있던 로그들은 순식간에 뭉쳐지기 시작했고, 곧 아브는 자신의 앞에 하나로 만들어져 있는 로그를 읽어 내리곤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제가 찾은 정보로 아마 '눈동자'가 말하는 '위'라는 건, 탑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계속 말해봐."
김현우는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아브에게 계속해보라는 제스쳐를 취했고, 그에 그녀는 자신이 찾은 정보들을 훑으며 김현우에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얼마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우선 지금 상황에서 찾을 수 있는 정보는 이 정도예요."
김혀우는 아브의 말을 끝으로 자신이 들었던 말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그 눈동자가 말한 '위'라는 곳은 이 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
"네, 사실 저도 처음에는 이 탑의 최상층을 말하는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보를 찾으면 찾을수록 저도 모르는 정보들이 더 나오더라고요?"
"……너도 모르는 정보?"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 애초에 이 탑에 관계되지 않은 이야기라서 정보를 찾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찾으니까 나오긴 나오더라고요. 대충 찌라시 정도로요."
"찌라시……?"
"네. 제가 찾은 정보에서도 딱히 장소에 관해 설명되어 있지는 않고 '위'라고 표기한 것들이 있더라고요. 뭐, 정보 사이사이에 나온 단어라서 저도 좀 파악하기가 어렵긴 하지만……."
아무튼,
"물론 제가 그 눈동자와 대화를 하지 못해서 정말 확실하게 이렇다! 라고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 눈동자가 '위'라고 말했다면, 아마 그 위는 이 탑의 최상층이 아니라 다른 '위'를 말했을 확률이 높아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김현우는 괜스레 복잡하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리며 생각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결심했다.
'우선 넘기자.'
김현우는 눈동자에 관한 일을 잠시 잊어버리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눈동자에 관한 일은 지금 '설계자'를 잡는 것이 최종목표인 김현우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우선 설계자를 잡고 생각하자.'
김현우는 자신의 최종 목표가 설계자를 잡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리며 머릿속에 들어차있는 눈동자에 대한 생각을 치워버리곤 대답했다.
"뭐, 아무튼 알았어. 아무래도 우선은 넘겨야 할 것 같네."
"음……."
김현우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듯 고개를 숙인 아브.
"왜?"
"아, 아뇨. 저도 순간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살짝 고민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이건 또 좀 아닌 것 같아서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가 묻자 곧바로 고개를 절레 거리며 대답한 아브를 보며 김현우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위쪽의 상태는 어때?"
"위쪽이라면 아직까지 움직임은 없어요."
"……전혀 없는 거지?"
"네, 전혀요. 저번이랑 똑같아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입을 열었다.
"거 아무리 생각해도 존나 이상하네. 아니면 그 설계자라는 새끼 대가리가 빡대가린가?"
김현우의 중얼거림에 아브는 대답했다.
"왜요?"
아브의 물음에 김현우는 줄곧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입장에서 지금 그 설계자라는 놈이 하는 짓은 이해가 안 되거든."
김현우는 곧바로 이야기를 이었다.
"생각해 봐, 당장 내가 등반자들과 싸울 때는 그렇다 치고, 위쪽에서는 최소 그 설계자라는 녀석이 전우치를 9계층에 보냈을 때부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거잖아?"
"그렇죠."
"근데 그 새끼 행동이 이상하단 말이야. 분명 정복자를 보낸 건 나를 죽이려는 의도가 있었을 거고, 솔직히 '만년빙정'을 혼자 보냈을 때까지는 이해가 되긴 해."
근데-
"그 만년빙정까지 털리고 자기 동료인 조율자까지 죽여 버린 시점이면, 나 같으면 직접 내려와서 죽여 버릴 것 같거든."
"……확실히 그게 맞죠."
아브가 호응하자 김현우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놈은 자기가 직접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계속 자기 따까리만 보내더라고? 그래서 저번에는 범천이 내 손에 뒤졌잖아? 이번에는 사천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와서 뒤졌고."
"그렇죠?"
"노아흐에게 듣기로는 분명 전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김현우의 고민어린 말에 아브는 그와 마찬가지로 잠시 고민하는 낯을 띄웠으나 이내 그녀는 결심한 듯-
"가디언."
"응?"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아마 설계자가 이런 식으로 등반자를 보내는 이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
그다음 날.
"냥- 냥! 냥~ 냥! 우리 꼬마 고양-"
"닥쳐라 이 썅년!"
"어머, 우리 고양이가 벌써 그렇게 화가 난 걸까?"
천호동에 있는 김현우의 저택.
김현우가 노아의 방주 안에 일을 보러 들어간 그 짧은 사이에 미령과 하나린은 기다렸다는 듯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냥~냥~냥~냥!"
그녀를 놀리려는 듯,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일부러 하이톤의 목소리를 내는 하나린을 보며 이를 악 문 미령은 곧바로 그녀의 놀림에 반격했다.
"그래도 그 역겨운 목소리로 '오빵~'이라고 짖는 네년보다는 낫군."
"……뭐?"
"그렇지 않은가? 액면가로만 보면 스승님보다 분명 몇십은 더 처먹었을 것 같은 얼굴로 오빵~이라니, 설마 스승님을 만나기 전에 화류계에서 열심히 엉-"
"이 미친 꼬맹이년이?"
"뭐야, 설마 찔리는 건가? 대단하군."
"뭔 개소리야 이 땅딸보 같은 년아!"
조금 전과는 다르게 바뀐 상황.
허나 미령과 하나린은 서로를 보며 인신공격……어쩌면 패드립보다도 더한 인신공격을 하며 서로의 역린을 건드렸다.
"50년은 쳐 늙은 할매 같은 액면가 주제에! 아니, 오히려 그 나이 대 할머니한테 사과를 해야 할 정도로 나이를 처먹은-"
"어쩌라고 이 땅딸보 같은 년아! 사부님이랑 같이 돌아다니면 이성 사이도 아니고 개 쪼끄만한 ㅈ-"
점점 심해지는 욕설.
하나린과 미령은 어느새 진한 마력을 퍼트리며 각각 어제 김현우가 내주었던 아티팩트를 꺼내들기 시작했고, 그녀들의 싸움이 시작하기 직전-
"어머 오셨어요?"
"……."
"……."
미령과 하나린은 구미호를 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구미호와 함께 현관문 안으로 들어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있는 천마의 모습까지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응?"
한순간 그녀들의 머릿속에 일어난 인지부조화.
그녀들은 순간 이 인지부조화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으나,
"아, 서방님 먼저 방 안에 들어가 계실래요? 저도 금방 들어갈게요!"
"그러도록 하지 낭자."
"……!!"
이내 그녀들은 그 인지 부조화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마와 구미호의 관계였다.
분명 몇 달 전,
아니, 몇 달 전이라고 하기에도 짧은 시간에 미령과 하나린은 천마와 구미호의 관계를 본 적이 있었다.
천마는 노골적으로 들이미는 구미호를 무척이나 질색한다는 듯 밀어냈고.
구미호는 그런 천마에게 빠진 것처럼 그에게 계속해서 구애를 했었다.
물론 미령과 하나린이 그 상황을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나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천마와 구미호의 관계는 그랬다.
구미호가 구애하고, 천마는 그걸 질색한다는 듯 받아치는 전개.
하지만 지금은?
천마는 구미호의 말에 별다른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에 들어갔고, 예전과는 다르게 싫은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 오히려 은은한 미소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게다가 천마가 마지막에 붙였던 말을, 미령과 하나린은 똑똑히 들었다.
낭자.
그래,
천마는 분명 구미호에게 낭자라고 했다.
세상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만나기만 하면 '꺼져라'를 입버릇처럼 말하던 천마는, 분명 구미호에게 그렇게 말했다.
"……."
"……."
예전과는 눈에 띄게, 아니- 눈에 띄는 것을 넘어 그냥 상식 개변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모습에 그녀들은 천마를 방 안으로 들여보내고 흥흥거리며 거실 안으로 들어온 구미호를 바라봤고.
평소처럼 서로를 헐뜯으며 싸우고 있는 그녀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웃음을 지으며 무엇인가를 뒤적거리기 시작하던 구미호는.
"……?"
문득 조금 전까지 풍겼던 살벌한 마력과 그녀들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미령과 하나린을 바라봤다.
"……???"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린과 미령의 모습에 구미호는 순간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을 하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지만.
"……어떻게 한 거지?"
"어떻게 한 거죠?"
"……네?"
이내 곧 구미호는 하나린과 미령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질문을 듣고 저도 모르게 어리둥절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264화. 구미호는 죽고 싶지 않다 (1)김현우가 노아흐와의 대화를 위해 진입한 방주 안.
"갑자기 왜 이렇게 더럽혀져 있어?"
김현우는 고개를 돌리며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방주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물론 평소에도 노아의 방주 안은 상당히 복잡했다.
그 공간은 일반적인 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넓고 방대했으나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의 양 때문에 실질적으로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면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천장에는 각 장소를 담아 놓은 것 같은 구슬이 천장을 이루고 있는 나무를 전부 가릴 정도로 많았고.
번대로 아래는 이런저런 설계도면을 꽂아놓은 오크통들이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예전에는 오크통이 복잡하게 놓여 있기는 해도 분명 길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었는데.
"완전 개판이네."
김현우는 그런 길이라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설계도가 가득 담긴 오크통이 어지럽게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 자네 왔나?"
그렇게 어질러진 오크통을 뛰어넘어갈까 생각한 도중 들리는 목소리에 김현우는 곧바로 노아흐를 찾을 수 있었고, 곧 그는 노아흐의 인도에 따라 작게나마 자리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김현우는 자리에 앉으며 어질러져 있는 오크통들을 보곤 물었다.
"도대체 왜 여기는 이렇게 개판인 상태야?"
그의 물음에 노아흐는 답했다.
"뭐, 어쩔 수 없었다네. 잠깐 찾고 있던 것이 있었거든."
"……찾고 있던 거?"
"그래. 뭐 다행히 자네가 왔을 때쯤에 겨우 찾을 수 있어서 이제 남은 건 정리뿐이긴 한데-"
노아흐는 주변을 돌아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설계도 찾는 것보다 정리하는 게 더 빡셀 것 같군."
노아흐는 자신의 손에 있는 몇 장의 양피지를 보며 자조 어린 중얼거림을 내뱉었고, 김현우는 궁금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설계도는 뭔데?"
"순간 이동진을 만드는 설계도일세."
"……순간 이동진?"
"그래, 자네에게는 말하지 않았네만 이 탑의 최상층은 '통로'를 통해 이동할 수 없을 걸세."
"진짜?"
"그래, 물론 확인해 본 건 아니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탑의 최상층은 '설계자'가 독자적으로 관리하는 지역일 테고, 그렇다면 우리의 출입을 그다지 반기지는 않을 것이지 않겠나?"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양피지를 슬슬 휘둘렀다.
"그래서 '통로'를 통하지 않고 최상층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을 때 이 방법이 제일 괜찮을 것 같더군."
"……그게 순간이동진이고?"
"맞네. 이 순간 이동진은 필요한 재료들이 많은데다가 일회용이기는 하네만 우선 만들기만 하면 최상층에 올라갈 자네와 자네들의 동료가 딱히 힘을 빼지 않고도 올라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
-뭐, 사실 자네를 포함해 그 동료들 정도만 돼도 몇 주 정도 움직이는 걸로는 그리 큰 피로가 쌓일 것 같진 않지만 말야.
"흐음-"
그렇게 말한 노아흐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슬쩍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중얼거렸다.
"글쎄."
"……?"
"아니, 만약 내가 아브에게 들은 이야기가 진짜라면, 또 그 녀석이 그렇게 할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무슨 말을 들었길래?"
김현우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노아흐는 궁금증을 표시하며 입을 열었고. 이내 그는 어제 아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제 김현우가 아브에게 들었던 이야기.
그것은 김현우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충격적이고, 또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던 이야기였다.
'……나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업을 먹어치우려 한다라.'
김현우는 아브의 말을 다시금 상기하고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엔, 설마 하는 생각에 아브의 말을 들어봤으나. 이상하게 아브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녀의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만약 설계자가 하는 생각이 '진짜' 그런 거라면 김현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전부 이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
말을 전부 들은 노아흐가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자 김현우는 말했다.
"뭐, 그래도 순간이동진을 만들 수 있으면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네."
그의 말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네. 만약 아브의 생각처럼 설계자가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통로를 통해 올라오는 것도 막지는 않겠네만, 역시 최대한 체력을 보존하는 게 좋겠지."
노아흐는 그렇게 하곤 이내 김현우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어떻게 할 생각이라니?"
"우선 이 순간이동진을 전부 만들기까지는 꽤 시간이 소요될 걸세.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이지."
-사실 그것도 빠른 것이네만.
"아무튼 지금 자네에게는 최상층에 가기 전,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빈다는 소리지."
한 달이라는 시간.
그것은 분명 짧다면 짧고 길다면 충분히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흠……."
잠시 고민하던 김현우는 대답했다.
"뭐 이번에도 수련이지."
"……역시 수련인가?"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절대로 누군가에게 처먹힘 당하고 싶지는 않거든. 게다가 오히려 지금은 예전보다 더 빡쳐."
"……더 빡친다고?"
"그래, 결국 그 새끼는 결국 나를 '키운 거' 아니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브의 생각대로라면 결국 설계자는 김현우의 생각대로 그를 키우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노아흐의 끄덕거림에 김현우는 자신의 입가를 혀로 핥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그 새끼한테 보여주려면 수련을 해야지. 다만-"
"……다만?"
"이번에는 한번 실전식으로 수련을 해보려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렇게 김현우가 나름대로의 다짐을 하고 있을 때.
"……."
흑백이 조화롭게 깔려 있는 방 안.
그곳에는 무엇 하나 바뀐 것이 없었다.
언제나와 같이 흑백이 조화롭게 깔려 있는 그 방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고.
넓은 식탁의 상석에는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형체 없는 자'가 별다른 자세의 변화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와 똑같이.
언제나와 같은 자세로.
물론 그곳에도 분명 변한 것은 있었다.
항상 그의 뒤에서 그와는 다른 것을 노리고 있던 '기술자'가 없었고.
그에게 항상 이런저런 진위를 물어보러 오던 비(妃)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분명 그 방 안에는 무엇인가가 바뀌었으나, 형체 없는 자는 그것을 딱히 느끼지 못했다.
"……흠."
어차피 형체 없는 자에게 그것들은 별다른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형체 없는 자는 딱히 지금 이곳에 변화가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애초에 그의 머릿속은 그런 것들보다도 다른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나.'
그가 집중하는 것은 바로 9계층에 있는 한 필멸자.
정말 유감스럽게도 이번 싸움에 그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형체 없는 자의 표정은 딱히 실망한 표정이 아니었다.
"……."
오히려 그는 그 어두운 안개로 가벼운 미소까지 지어가며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한 눈치로 자신이 앉아 있는 가죽소파를 툭툭 건드렸고.
"……그래도 왔을 때 환영인사 정도는 해주는 게 좋을 것 같군."
이내 그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을 때, 그의 몸에서는 미증유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천호에 있는 김현우 소유 저택의 거실.
"……."
"……."
그곳에서, 구미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미령과 하나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이이이-
어쩌면 얼굴이 뚫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령과 하나린의 모습에 그녀는 일순 불편함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거리곤 그녀들의 시선을 바라봤다.
"저……기."
돌아가고 싶은데, 그냥 놔주시면 안 될까요? 라는 말을 했다가는 그대로 그녀들에게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구미호는 억지로 그 말을 삼키고는 억지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니까……그…… 지금 두 분이 알고 싶으신 건…… 남자를 꼬시는 법……인 거죠?"
조심스러운 구미호의 물음에 미령과 하나린은 언뜻 서로를 바라봤으나, 이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을 표시했다.
그래, 아주 살짝.
구미호의 시력이 좋지 못했다면 제대로 보지 못했을 정도로 아주 살짝만 고개를 까딱거린 그들을 보던 구미호는 이내 불편하다는 듯, 말을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솔직히…… 내 전문이기는 한데.'
그녀는 구미호였다.
그래.
구미호.
물론 어딘가 신화에 나온 구미호처럼 엄청난 명성을 떨친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구미호로 변이하며 남자를 홀릴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술을 본능적으로 깨우치고 있었고 또한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남자 후리기는 구미호의 전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목석이다 못해 사회에다 내놓으면 반사회적 싸이코패스라고 부를 수 있는 천마를 꼬신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구미호는 자신의 앞에 있는 그 둘을 쳐다봤다.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령과 하나린.
"으……."
솔직히 말해 구미호는 남자를 후리는 것에는 거의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재능이 있었고, 그 재능을 다른 이들에게 기부하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줄 수 있었다.
구미호에게 있어 그건 그다지 특별한 기술이 아니니까.
오히려 구미호는 자신과 평소 친하게 지내는 이서연과 아냐에게는 슬쩍 거들먹거리면서까지 이런저런 기술을 전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미령과 하나린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이야 동료가 되었으나 구미호는 본능적으로 그녀들과 만날 때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9계층을 두 눈으로 본 순간에 자신에게로 다가왔던 두 괴물을.
그리고 그 괴물들에게 느꼈던 공포를.
으으-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공포는 구미호의 머리에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
"……."
"……."
"……."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길어진 침묵.
미령과 하나린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구미호가 벌써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 않은 지 3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건만 그녀들은 군말 없이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더 무서워……!'
오히려 그런 미령과 하나린의 초인적인 인내심을 보고 있는 구미호는 오히려 점점 더 그녀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후-"
그렇기에 구미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내 저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쉬었다.
미령과 하나린이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큰 한숨.
그렇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이내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깜빡거리더니.
"……알겠어요. 알려드릴게요."
"!"
"!"
이내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고, 이내 구미호는 미령과 하나린에게 아주 기초적인 방법부터 하나하나 자신의 지식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265화. 구미호는 죽고 싶지 않다 (2)그다음 날, 하남에 있는 거대한 장원의 정문에 도착한 김현우는 기다렸다는 듯 대문 앞에 있는 미령과 하나린을 바라봤다.
"오셨습니까, 스승님."
"오셨어요, 사부님?"
"어, 그래……."
평소라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방 앞에 대기하고 있는 두 제자들이 장원의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슬쩍 의아함을 느꼈으나.
"근데-"
"예?"
"네?"
사실 김현우가 의아함을 느낀 것은 그녀들이 자신의 방문 앞에 서 있는 것 대신, 이 장원의 정문에 서 있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분명 그녀들은 평소에는 방 앞에 대기하다가도 자기 일이 있을 때면 슬쩍 자리를 비우기도 하니까.
그렇기에 지금 김현우가 그녀들을 보며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닌-
"……너희, 안 춥냐?"
그녀들의 옷차림이였다.
"별로…… 춥지는 않습니다."
"저도요 사부님."
김현우야 딱히 어느 순간부터 날씨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터라 춥고 더움을 딱히 몸으로 느끼지는 못하나 분명 어제 대충 돌려보던 뉴스에서 오늘 온도가 상당히 낮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래, 다른 사람들은 슬슬 코트를 입을 정도로 쌀쌀한 날씨라는 걸, 김현우는 분명히 들었다.
"……."
그런데 분명 김현우가 그렇게 들은 것과는 반대로, 그녀들의 옷차림은 무척이나 가볍기 그지없었다.
미령의 경우에는 분명 검은색 치파오를 고집하면서 최근에는 그 위에 간단한 옷을 덧입고 있는 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흠."
그녀는 마치 한창 여름에 입었던 것으로 기억한 무척이나 단이 짧은 치파오를 입고 있었다.
거기에 다시 만났을 때부터 안 좋은 일의 후유증으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온몸을 가죽옷으로 똘똘 둘러매고 있던 하나린도 가벼운 옷을 입고 있었다.
짧은 탱크탑에 딱 봐도 공기가 슬슬 통할 것 같은 반팔을.
"……."
두 달, 아니 한 달 전에 이렇게 입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 갈 수 있을 정도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날씨에 저 옷을 입고 있는 건 굉장히 특이해 보였다.
"……아니, 뭐."
그렇기에 김현우는 순간 그녀들에게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 했으나, 이내 자신의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까 제자들 옷차림 가지고 일일이 지적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들의 복장은 너무 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김현우는-
"……날씨도 추운데 옷 좀 적당히 입고 다녀라."
-그저 그렇게 한마디 하는 것을 끝으로 장원의 정문을 통과해 들어갔고.
김현우는 자신이 장원의 정문을 통과해 들어가자마자 그녀들이 파이팅 포즈를 취하는 것을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제자들을 뒤로하고 장원의 건물 중 하나로 들어간 김현우.
"다 모였나?"
하남에 있는 장원의 건물 중 하나에서,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모여 있는 이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위로 올라가게?"
그리고 그런 김현우의 말에 그와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손오공은 그런 물음을 던졌고 그에 김현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지금 당장 위로 올라갈 수는 없어."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을 하곤, 그가 어제 노아흐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달하며 시선을 돌렸다.
현재 장원의 건물에는 상당히 많은 이들이 소파나 바닥에 앉아 김현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당장 김현우와 가장 가까운 소파에는 손오공과 청룡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 뒤에는 괴력난신이, 그리고 그 주변으로 칠대성과 천마가 차근차근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결국에는 한 달 뒤쯤이 돼야 최상층으로 올라간다는 이야기네?"
"그렇지."
손오공의 말에 깔끔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이내 다른 이들을 보며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뭐,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 사항에 불만 있는 사람?"
뭐, 사실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겠나 싶었으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김현우는 그렇게 질문했고.
"뭐, 딱히 불만은 없지."
"나도 마찬가지니라."
"오히려 '밖'을 그렇게 망가뜨리면서 까지 업을 모았던 새끼 얼굴이나 좀 보고 싶네."
곧 김현우의 앞에 모여 있던 그들은 한마디씩 거들며 그의 의견에 별 불만이 없다는 것을 피력했다.
그리고 그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김현우는 곧바로 정해둔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튼 그런고로 대충 최상층에 갈 때까지 한 달 정도 시간이 남는데, 그 한 달 동안 너희들이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제천대성을 포함한 다른 이들은 김현우에게로 시선을 집중했고, 그는 곧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고, 나랑 좀 박 터지게 싸워주면 되는 거야."
"너랑 박 터지게 싸우자고?"
손오공의 뒤에 있던 평천대성이 되묻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봐주는 거 없이 전력으로 한번 싸워보자 이거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9계층에서 싸우지는 않을 거고 싸울 장소는 따로 만들 거야."
적어도 이곳보다는 편하게 날뛸 수 있는 곳에서 말이야.
그런 김현우의 말을 잠시간 듣고 있던 청룡은 말했다.
"흠. 한마디로 수련을 도와달라는 건가?"
"정답이랄 것도 없이 맞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우.
그는 어제 노아흐에게 나름대로 수련을 하겠다고 말해둔 뒤 자신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옳을지 생각했었다.
그렇게 해서 처음 생각했던 것이 바로 수련.
김현우는 범천의 업을 얻었으나 그 업을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했고, 제대로 사용하는 법도 몰랐다.
분명 노아흐나 아브는 자신에게서 범천의 업이 느껴진다고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사용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저번 청룡의 업을 수련했을 때처럼 고행을 해볼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뭐, 그래 봤자 수련에 대한 생각은 아주 잠깐뿐이었지만.
아무튼, 그런 식으로 수련에 대한 생각을 한 뒤 바로 했던 생각이 그냥 마구잡이로 누군가랑 붙는 식으로 전투경험을 쌓는 것이었다.
애초에 청룡의 업을 얻으며 김현우는 스스로가 절대로 그런 수행이나 고행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고, 거기에 덤으로.
'……분명 전투를 하면 잡히는 실마리가 있을 것 같다는 말이지.'
김현우는 왠지 본능적인 직감으로 수련보다는 전투를 하는 쪽이 범천의 업을 깨우치기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뭐, 그것은 그저 김현우의 직감일 뿐이었지만.
아무튼 그런 김현우의 말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손오공은 두말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안 그래도 그냥 TV만 보고 있는 것도 지겨웠는데 이 정도는 도와줄 만하지."
그의 대답에 김현우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괴력난신이 입을 열었다.
"나도 도와주도록 하겠느니라. 어차피 네가 말한 다른 공간이라는 것은 허수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뭐 그렇지?"
"그렇다면야 사실 이렇게 의견을 물어볼 것도 없이 다른 이들은 다 너를 도와줄 것 같구나."
"?"
괴력난신의 말에 김현우가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가 그녀의 말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나쁘지 않지. 나도 우리 아우를 오지게 털어버린 놈과 한번 싸워보고 싶었거든."
"아니, 그때는 완벽한 상태가 아니었다니까!?"
평천대성의 말에 반박하는 손오공.
허나 그는 그런 손오공의 말을 흘려듣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었고.
"생각해 보면 그때는 딱히 상대해 줄 만도 못했던 것 같은데, 새삼 지금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긴 하군."
"그러고 보면 그 범천의 인격 중 하나도 개박살을 내버렸다며?"
"신선도 여럿 부쉈다는데."
평천대성의 말을 시작으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긋하게 앉아 있던 칠대성들은 저마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번에 한번 붙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그래 나도 개인적으로 궁금하구나, 솔직히 네가 싸우는 건 봤지만 이렇게 업을 다 되찾고 나서 맞붙으면 또 재미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칠대성 외에도 그 옆에 있는 천마나 괴력난신도 한마디씩 거들며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김현우는 일순 가벼운 압박을 느꼈으나-
"다들 참가하는 거 같아서 좋네."
-이내 김현우는 긴장을 풀고는 건물 내에 모여 있는 이들을 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뒤로 김현우가 제일 먼저 싸울 상대를 나름대로 정하고 있을 때쯤.
아랑 길드의 꼭대기 층에서는 구미호와 이서연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후릅.
자신이 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은 이서연은 이내 구미호를 보며 그녀가 꺼냈던 주제를 이야기했다.
"그래서…… 어제 장장 5시간 동안 하나린과 미령을 붙잡고 연애 강좌를 했다?"
"그렇다니까요, 정말……."
그녀의 말에 구미호는 불만이 잔뜩 있는 듯 괜스레 들고 있던 잔을 조금 큰 소리로 땅바닥에 내려놓더니 이내 자신의 불만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되었다니까요? 도대체 그 두 명 다 어디서 연애지식을 배웠는지 모를 정도로 괴팍해요!"
"예를 들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이야기하기도 힘들어요…… 다만 제일 충격적인 대사는……."
"……대사는?"
이서연이 궁금하다는 듯 구미호를 바라보자 곧 입을 열려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충격적인 대사도 너무 많아서 딱히 하나를 꼽을 수가 없네요. 다만 확실한 건 그 둘의 연애 능력…… 아니, 그냥 공감 능력 자체가 굉장히 떨어진다니까요?"
구미호의 하소연에 이서연은 슬쩍 시선을 올려 김현우의 제자인 미령과 하나린을 떠올렸다.
'……확실히.'
김현우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미령과 하나린은 지나치게 마이웨이적인 성격이 강했다.
뭐, 하나 정도 다른 점이 있긴 했다.
'현우 오빠는 본인을 위해서지만, 그 둘은 오히려 현우 오빠를 위해서 움직이니까.'
이서연은 그녀들이 지금까지 했던 이런저런 행각(?)들을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미묘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미령이야 말할 것도 없이 김현우를 위해 중국을 통째로 바치겠다고 선언했었고, 하나린은 김현우가 탑 안에 있을 때 상상했던 도시를 그대로 만들어주겠다고 멕시코시티를 통째로 심시티로 만드는 중이었다.
당장 하는 것만 봐도 도저히 일반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녀들의 행각에 이서연은 쓴웃음을 지었고.
그렇게 쓴웃음을 짓는 도중에도 구미호는 불만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아무튼, 그 둘은 뭔가 문제가 있다니까요?"
그리고-
"구미호는 여기에 있나!?"
구미호는 곧 아랑길드 길드장 사무실 문을 거칠게 열면서 들어온 미령과 하나린을 보며 저도 모르게 불만스럽게 열려 있던 입을 다물었다.
"……미, 미령 님……? 하……하나린 님?"
구미호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중얼거렸고, 이내 자신이 조금 전에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난 피살이다……!'
그녀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으나-
"빨리 다음 강의를 들려줘라!"
"빨리요!"
"……네?"
-그다음에 들려오는 소리에 구미호는 이내 저도 모르게 멍한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266화. 구미호는 죽고 싶지 않다 (3)푸른 초원.
"……신기한 곳이군. 분명 허수 공간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데 전혀 다르다니."
조금 전 들어선 천마는 신기한 듯 주변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고, 그런 그의 뒤에 서 있던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수련할 때는 자주 써먹어."
김현우의 말에 천마는 슥 시선을 돌리고는 이내 새삼스러운 것을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네 녀석은 허수 공간을 그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군."
"허수 공간을 그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김현우의 물음에 천마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의 이야기다. 애초에 '등반자'들은 허수 공간을 수련 공간으로 활용할 수는 없으니까."
"응……?"
천마의 말에 김현우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시선을 보내자 천마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부수적인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한동안 부수적인 설명을 이어나간 끝에 김현우는 천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천마의 말인 즉, 이 탑을 오르다 죽어도 정신체를 남길 정도로 강한 등반자들만이 허수 공간에 자리를 잡게 된다.
허나 그들의 업은 이미 대부분이 완성되어 있거나 완성되어 있어도 업을 빼앗긴 자들이 대부분이기에 허수 공간을 수련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각자 개인마다 처한 형태가 달라 그중에는 수련을 할 수 있는 이들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대부분의 사례는 나와 비슷하거나 내가 말한 사례 중 하나일 확률이 높다."
"그건 또 처음 알았네."
그런 천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김현우는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천마를 바라봤고. 그는 그런 김현우의 눈빛을 느끼곤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그딴 표정을 짓는 거지?"
왠지 새삼스러우면서도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천마가 입을 열자 김현우는 슥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야."
네가 생각보다 똑똑해 보인다. 같은 말을 한 순간 천마의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챈 김현우는 이내 슬쩍 대답을 회피했고.
"……."
천마는 그런 김현우를 미심쩍은 표정으로 보았으나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짤막한 침묵.
김현우는 그 침묵이 지속되기 전에 곧바로 자신의 몸을 풀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들어왔으니까 곧바로 시작하자."
김현우가 이야기를 꺼내자 천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허리에 있던 검이 아닌, 자신의 등에 메고 있던 거대한 언월도를 꺼냈다.
마치 도신 자체가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언월도.
그리고 그렇게 천마가 쥐고 있던 언월도를 보고 있던 김현우는 언월도에서 느낀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왜 그러지?"
"그 언월도, 왠지 크기가 좀 줄지 않았나?"
김현우는 위화감의 정체를 말한 뒤 곧 천마가 쥐고 있던 팔열성군의 언월도가 자신이 예전에 봤던 때보다 작아져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김현우가 처음 천마에게 그것을 넘겨주었을 때, 팔열성군의 언월도는 천마의 키를 가볍게 넘을 정도로 거대했다.
헌데 지금 그가 쥐고 있는 언월도는?
"언젠가부터 내 손에 맞게 변하더군."
"……변했다고?"
팔열성군의 언월도는 변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크기가 일반적인 무기에 비해서 거대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가 쥐고 있는 언월도는 똑바로 세워도 그의 머리를 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이외에도 저번에는 언월도라는 느낌이 들었다면 이제는 그저 상당히 큰 양손검 같은 느낌으로 변한, 이제는 언월도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검을 보며 김현우는 물었다.
"원래 무기라는게 사용자 맞춰서 자동 변환도 되고 그런 건가?"
"나도 모른다."
김현우는 혹시 하는 생각에 그가 예전에 보았던 언월도의 로그를 생각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내용은 읽어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결국 천마의 언월도에서 신경을 끄기로 한 김현우는 곧 천마와 조금 떨어진 맞은편으로 이동해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김현우가 가벼운 느낌으로 자세를 잡고, 천마도 마찬가지로 그런 김현우를 보며 쥐고 있던 언월도를 비스듬하게 쥔다.
"그래서, 언제까지 싸울 거지?"
그리고, 김현우가 튀어 나가기 위해 준비할 무렵 들려오는 천마의 물음에 그는 대답했다.
"응?"
"네 녀석이 다른 이들과도 싸울 거라고 하지 않았나?"
"뭐, 그랬지?"
확실히 김현우는 천마와 함께 이곳에 들어오기 전 다른 이들과 일정을 따로 잡지 않고 천마만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
"그럼 대충 정해야 하지 않겠나? 너랑 싸울 순서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돌려면 말이다."
천마의 말에 김현우는 일순 이해를 하지 못하다 이내 천마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천마답다면 천마다운 오만한 발언.
허나 김현우에게 있어서 그런 오만한 발언은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금방 끝날 테니까."
이번에는 김현우의 발언.
그에 천마는 피식 웃으며 언월도를 들어올렸다.
"네가 예전에 나와 동수를 이룰 때까지 걸린 시간을 기억하고 있기는 하나?"
"그건 옛날이야기고, 지금은 다르지?"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건 너만이 아니지."
천마는 그런 김현우의 말에 대답하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기수식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건 지금부터 확인하면 될 문제고, 싸울 상대를 바꾸는 건-"
-이내 김현우도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내가 너를 한번 쓰러트릴 때로 하면 되겠네."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에게 뛰어들었다.
####
흑백이 조화롭게 이뤄져 있는 공동 안.
꾸륵- 꾸륵-
그 공동 안에 있는, 적어도 수십 명은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탁상의 의자에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무엇인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각 의자에 놓여 있는 것은 그 어떤 빛도 침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검은색의 무엇인가였다.
수시로 외부의 형태가 변하며 이리저리 튀는 검은색의 무언가.
허나 그것들은 분명 무엇인가로 변하고 있었다.
의자 위에 놓여 있는 그 어떤 검은 무언가는 이미 두 개의 발로 보이는 무엇인가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상태였고.
또 다른 의자에 놓여 있는 검은 무언가는 분명 어떤 것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검은 무언가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보며 그 식탁의 상석에 앉아 있던 '형체 없는 자'는 자신을 감싼 검은 안개에 미소를 만들어낸 채로 그것들을 보고 있는 상태였다.
끝없이 꾸물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공동 안.
그곳에서-
"오랜만이군요."
형체 없는 자는 어느 순간 자신의 앞에 나타난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분명 아무도 없던 빈 식탁 위에 나타난 한 남자.
하얀색의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검은색의 옷을 입고 있는 그는 형체 없는 자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형체 없는 자는 그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단답형의 대답.
그리고 그와 함께 공동은 침묵으로 물들었으나, 남자는 그런 침묵을 아무렇지도 않게 깨며 말을 이어나갔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무슨 생각이냐니? 그게 무슨 소리지?"
심드렁한 느낌으로, 허나 여유로운 특유의 분위기를 간직한 채 말을 내뱉는 형체 없는 자.
그 모습을 바라본 남자는 슬쩍 말을 끊었으나 이내 계속해서 말했다.
"어째서 위쪽에 주시기로 한 위업(偉業)을 제때 상납하지 않았던 겁니까?"
"위업? 위업이라…… 뭐, 그런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군."
형체 없는 자의 능청스러운 대처에 남자는 순간 표정을 굳혔으나, 이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라니, 분명 이건 저희와 그쪽이 사전에 미리 약속을 했던 것 같은데…… 그 약속을 저버리시겠다는 겁니까?"
남자의 말에 형체 없는 자는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약속이라…… 약속, 그래 약속 좋지. 자네들이 멋대로 해놓고 대가를 요구하는 그게 약속이라면 말이야."
형체 없는 자의 말에 남자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것은 엄연한 약속이죠. 당신도 그 덕분에 편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에 형체 없는 자는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그래, 편하기는 했지."
"그렇다면 대가를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은 줄 수 있는 위업이 없군. 보다시피 전부 나눠준 상태라-"
형체 없는 자가 괜스레 자신의 양손을 슥 들면서 말하자 남자는 주변을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위업은 아니어도, 그걸 대체할 것들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무엇인가로 변형되고 있는 검은 무언가를 바라보았고, 형체 없는 자는 그런 그의 눈빛을 보고는 이야기했다.
"유감스럽네만 그건 불가능할 것 같군."
"어째서죠?"
"맞이해야 할 녀석들이 있거든."
"……맞이해야 할 녀석들?"
"그래, 지금 이곳에 있는 건 그 녀석들을 위해 내가 준비한 것들이네."
"그 녀석들을 위해 준비해 둔 것들이라니……."
남자는 형체 없는 자의 말을 되물었으나 그는 그 이상은 이야기 해줄 생각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고, 이내 남자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 형체 없는 자를 바라봤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이야기했다.
"……그 말은 당장 위쪽에 업을 상납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말했지 않나? 당장 내 줄 수 있는 업이 없어서 그런 거지."
그의 말에 남자는 한 번 더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입을 우물거렸으나, 이내 그는 곧 이 대화가 별 의미 없는 평행선을 달리게 될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남자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두 달입니다. 두 달 뒤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부디 저희들과의 약속을 지켜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형체 없는 자는 어두운 안개로 웃는 얼굴을 만들며 대답했다.
"만약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할 생각인가?"
형체 없는 자의 물음.
남자는 그 물음이 진심이 아닌, 그저 의미 없는 간보기에 불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대답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때 알게 되실 겁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고, 이내 식탁 위에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굉장히 아이러니한 모습.
허나 다음 순간, 남자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남자의 모습에 형체 없는 자는 피식하는 웃음을 짓고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 남자가 사라졌어도 의자에 놓여 있는 검은 무엇인가는 계속해서 형태를 바꾸며 각각의 다른 형태로 변하고 있었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형체 없는 자는 분명히 예정되어 있을 만찬을 떠올리고는 상상만으로도 좋다는 듯 그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267화. 구미호는 죽고 싶지 않다 (4)국제 헌터 협회.
후릅-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목조 장식으로 무척이나 잘 꾸며져 있는 국제헌터협회의 2층 총실에는 한 남자가 협회의 넓은 경치를 보며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후……."
그는 바로 국제헌터협회의 최고 권력자라고도 할 수 있는 리암이었다.
후릅-
그는 총실 내의 풍경과 그 밖으로 보이는 평화로운 뷰를 보며 다시금 자신의 손에 쥐여진 커피를 홀짝였고,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가죽 의자에 편안하게 등을 댔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평화인지 모르겠군.'
그는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물론 그가 처음 이 국제헌터협회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의 인생은 전투의 연속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기 위해 실적을 쌓았고, 인맥을 관리하며 자신과 성향이 반대되는 자라면 거침없이 쳐내어 최고위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최고위원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한가해졌던 것은 아니었다.
최고위원에 오르고 난 직후에 그는 또 다른 최고위원인 메이슨의 견제를 받으며 성장해야 했었고. 메이슨이 재앙으로 분류되어 죽임을 당하고 난 뒤에도 그는 바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당장 그가 정권을 잡았을 때, 국제 헌터 협회는 그 힘이 굉장히 약해져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메이슨과 짜고 친 무신이 S등급 세계랭커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덕분에 세계 이곳저곳에서는 길드끼리의 암투가 성행했다.
'뭐…… 그가 있던 한국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지만.'
아무튼,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리암은 정권을 잡았고, 그 정권을 잡은 상태에서 연속으로 터져나가는 몇 개의 일을 감당하며 국제 헌터 협회의 예전 위상을 끌어올렸다.
그중에서 국제 헌터 협회의 위상을 예전처럼 끌어올릴 수 있었던 사건은 바로 몇 달 전 일어난 재앙 급증 상태.
인류에게는 그야말로 삐끗하면 멸망까지 도래할 수도 있겠다는 경각심을 심어주는 그 일에서, 국제헌터협회는 무척이나 성공적으로 재앙들을 막아냈다.
'뭐, 그것도 그의 도움이 컸지만.'
거기에 덤으로 갑작스레 능력치 제한이 해제되어 헌터들의 강함이 예전 S등급 세계랭커들을 빠르게 쫓아온 것도 무척이나 큰 이유 중 하나였다.
"후……."
아무튼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국제헌터협회는 협회 소속의 랭커 헌터들을 빠르게 모집해 나가며 예전의 위상을 되찾았고. 재앙 급증사태가 끝나고 나서는.
후릅-
상당히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되고 있었다.
물과 몇 달 전만에도 밤을 새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일이 다반사였던 리암은 편안하게 자고 일어나 커피를 마실 수 있었고.
하루 종일 이런저런 회의에 끌려 다녀 시간이 없던 그는 지금에 와서는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남았다.
'아주 좋아.'
리암은 이런 상황에 몇 번이나 느꼈는지 모를 만족감을 또다시 느끼며 커피를 마셨고.
달칵! 끼이이익!
그는 곧 노크도 없이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의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전에도 말했다만 항상 노크를 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에단."
리암은 시선을 전부 돌리기도 전에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고.
"급한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리암의 생각대로 벌컥 열린 문에서는 느긋한 표정을 지은 에단이 걸음을 옮겨 들어오고 있었고,
"에휴."
그는 그런 에단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S등급 세계랭킹 3위 에단.
무신과 다른 이들을 죽고 나서, 현재 이 방에 들어온 그가 가지고 있는 위명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김현우를 포함한 이서연과 김시현, 거기에 덤으로 미령과 하나린까지 한다면 그의 순위가 밀리는 것은 당연했으나 김현우의 경우는 랭킹에 잡히지 않았고, 이서연과 김시현 같은 경우는 딱히 랭킹을 갱신하러 오지 않고 있었다.
그 덕분에 에단은 3위라는 위명을 가지고 있었고, 리암 또한 그 위명을 정치적 쇼에서 무척이나 잘 사용해 먹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일인데?"
리암은 자신의 바로 앞 소파에 앉는 에단을 보며 이내 들고 있던 커피잔을 놔둔 채 그렇게 물었고, 이내 에단은 조금 전까지 짓고 있던 느긋한 표정을 지우고 이내 조금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그게?"
"아니, 그전에…… 애초에 지금까지 이상한 것도 못 느낀 거야?"
갑작스럽게 이상하다는 듯 입을 연 에단.
그에 리암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소리지?"
리암의 되물음에 에단은 말없이 손가락을 치켜들어 국제헌터협회에 뻥 뚫린 뷰를 가리켰고, 리암은 에단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을 바라봤다.
보이는 것은 변함없는 풍경.
"……?"
리암은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에단을 바라봤으나 그는 별말 하지 않고 손가락을 한번 휘적일 뿐이었고. 그에 그는 다시 한번 풍경을 자세하게 바라봤다.
풍경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넓게 펼쳐진 화단에는 초목들이 가꾸어져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그래, 그것뿐이다.
"……그것, 뿐일 텐데?"
리암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는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풍경은 그대로였는데도 불구하고, 리암은 분명 무엇인가가 다른 점을 느꼈다.
묘하게 다른 점.
"……어?"
그리고 그 어느 순간, 리암은 해가 쨍쨍 내리쬐고 있는 국제 헌터 협회에, 거대한 그늘이 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국제헌터협회를 전부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그늘이.
"……무슨?"
리암이 저도 모르게 반문하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본능적으로 걸음을 옮겨 뷰가 보이는 테라스의 창문을 열었고.
"……헉!"
에단은 이 거대한 그늘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저건 대체."
그것은 운석이었다.
거대한 운석.
그것도 존나게 큰 운석.
어느 정도냐 하면, 이 국제 헌터 협회 메인 홀의 햇빛을 혼자서 전부 가릴 정도로 거대한 운석이, 협회의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미친……."
에단이 그 운석을 보며 저도 모르게 나지막한 욕설을 터트리자 에단은 이제야 리암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제 내가 보고했던 거 기억하지? 패도 길드의 패룡한테 연락이 왔다고."
"그래, 그런 보고를 들었었지."
리암은 그렇게 말하며 어제 에단에게 들었던 보고를 떠올렸다.
맨 처음 랭킹 갱신을 할 때와 그 뒤에 김현우를 따라올 때를 빼고는 단 한 번도 국제헌터협회에 이렇다 할 연락을 주지 않았던 패룡.
그런 그녀가 연락을 했었다.
"……향수 때문이라고 했나?"
이유는 바로 향수 때문.
물론 그것은 평범한 향수가 아닌 미국 워싱턴 쪽에 있는 미궁을 탐사하다가 나온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딱히 보정이나 등급도 제대로 없는데다가, 있는 효과라고는 '좋은 냄새'가 난다거나, '페로몬'을 증가시킨다. 정도밖에 없는 딱히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향수.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 아티팩트고 국제헌터협회에서 탐사를 하다 나온 것이다 보니 분배 문제 덕분에 경매장에 내놓지는 않고 있었고.
'패룡은 어떻게 알았는지 다짜고짜 전화를 해서 그걸 내놓으라고 했었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패룡이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향수를 가져가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엄청 과분할 정도의 제안을 했었지.'
그 덕분에 리암은 떨떠름해 하면서도 이 아티팩트를 주워온 헌터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그들의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락 덕분에 그 향수는 패룡에게로 양도될 예정이었다.
그래, 조금 전까지는.
하늘에 떠 있던 거대한 운석을 멍하니 보고 있던 리암은 에단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위에 떠 있는 운석이…… 암중비약 때문이라 이거지?"
"그래. 걔는 자기가 아닌 패룡에게 향수를 넘길 경우 어떻게 될지 기대하게 해주겠다고 하더니……."
"다짜고짜 저 운석을 하늘에 띄웠다?"
"정답."
"……방금 전에?"
"……이제 대략 한 시간 정도 된 것 같은데."
에단의 말에 리암은 저도모르게 이마를 탁 치터니 이내 눈을 가리며 망연한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그는 입을 열었다.
"……패룡한테 잘 이야기해서 암중비약한테 향수를 넘기면?"
리암의 물음에 에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테라스로 나와 오른쪽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에단의 손가락을 따라 간 곳에서, 그는-끼긱- 기기기기긱! 끼기기기기! 긱!
-헌터 협회에서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은 그 어두운 공간에 있는 기괴한 모양의 손을 볼 수 있었다.
"……저건?"
"네 말대로 패룡한테 전화를 하자마자 저게 선물로 생기더군."
"……."
에단의 말에 그는 멍한 표정으로 하늘 위에 떠있는 운석과 협회 옆에 만들어져 있는 검은색의 구멍을 바라보곤-
"향수 하나 때문에 지랄났군……."
-그렇게 망연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
넓은 초원.
그곳에는 김현우와 천마가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꽝! 꽈가가가각!
김현우와 천마가 한번 격돌할 때마다 주변의 땅이 터져나가고 살벌한 굉음과 함께 공기가 찢겨나가는 그 상황 속에서.
"오, 이번에는 좀 쎄게 들어갔군."
"그러게 말이야."
그 넓은 초원에는 그 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 다른 이들의 목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저게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고?"
"인간 치고는 상당히 강한데? 어떻게 필멸자가 저기까지 힘을 키웠지?"
그들은 바로 원래 김현우와 싸움을 준비하고 있던 칠대성을 포함한 전체였다.
김현우는 그들에게 때가 되면 부를 테니 적당히 놀고 있으라고 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그가 딱히 부르지 않았음에도 먼저 와 천마와 김현우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당장 보기에는 그야말로 막상막하라고 볼 수 있는 싸움.
그 모습을 보며 칠대성은 감탄한 듯 말을 주고받았고.
"확실히 업을 받기는 했어도 결국 필멸자가 등반자로 격상해 저기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군."
"확실히 그렇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마 저 녀석의 생이 조금이라도 더 길었다면 아마 필멸자의 틀을 벗어났을지도 모르겠군."
제천대성과 괴력난신, 청룡도 그렇게 말을 주고받으며 천마에게 감탄 어린 눈빛을 보냈으나.
그들은 본능적으로 이 싸움의 승패를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이 하릴없이 둘의 싸움을 관람할 때도, 김현우와 천마는 끊임없이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으나-꽝!
"큭!"
상황은 조금씩 김현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천마는 이미 뇌령신공을 극성으로 운용해 뇌신화를 꺼낸 상태로 끊임없이 김현우에게 검을 휘둘렀으나, 김현우는 무척이나 가볍게 천마의 움직임을 피하고 있었고.
또한, 그의 공격들을 전부 받아내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현우가 그렇게 천마의 공격을 받아내던 그 어느 순간-
"끝났군."
누군가의 말을 기점으로, 그 둘의 싸움은 무척이나 빠르게 종지부를 찍었다.
268화. 상승 효과 (1)
김현우와 천마의 싸움이 끝났다.
승자는 그 누구도 예견할 수 있었듯 김현우였다.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졌군.'
그리고 조금 전의 일격으로 더 이상 땅을 밟지 못하고 일순 허공을 날았던 천마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언월도를 바라본 뒤, 이내 시선을 돌려 김현우를 바라봤다.
천마는 허수 공간에 오랜 시간을 머물고 있던 터라 정확히 그와 만났던 것이 얼마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허나 그것은 오롯이 자신의 시간관념일 뿐이고, 그는 김현우가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긴 세월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수 공간과 이 9계층의 시간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다르게 돌아가니까.
'예전에는 이 상황이 정반대였던 것 같은데.'
천마는 자신의 언월도를 붙잡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분명 처음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왔을 때 이 상황은 정확히 반대되어 있었다.
천마는 땅을 오롯이 밟고 서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자신처럼 땅바닥을 나뒹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
천마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자신이 졌다는 것에서 나온 허탈한 웃음도 아니었고.
반대로 인정에서 나온 체념의 웃음도 아니었다.
'……오랜만이군.'
다만, 천마는 그렇게 웃음을 터트리고 난 뒤에야, 자신이 아주 간만에 무엇인가를 느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랜만이군, 이렇게 전의가 솟는 건.'
전의(戰意).
천마는 자신이 아주 오래 전에 잃어버린 그 감정이 다시금 자신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는 느낌을 받았다.
"……."
맨 처음, 그가 탑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그에게 전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탑을 오를 때부터 이 탑이 이미 자신과 같은 등반자들의 등급이 정해진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다른 감정을 느끼면서도 전의는 느끼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도, 결국 이 탑에서 정해진 것은 절대로 뒤바꿀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허나 눈앞에 한때 자신의 제자로 뇌령신공을 전수받은 김현우는 어떤가?
그는 끊임없이 올라가고 있고, 지금에 와서는 자신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김현우가 자신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도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는 딱히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외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천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현우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천마는 그런 김현우를 보며 생각했다.
그와 정확히 얼마의 시간 동안 싸웠는지 천마는 딱히 세지 않았으나 그 시간 동안 천마는 분명 김현우가 자신에게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결과로 천마는 이번 싸움에서 자신이 아직도 더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
'탑 안에 들어와 등급이 정해진 것으로 더 이상의 성장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자신은, 이 탑의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도, 아직 더 강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려준 것은 조금 전까지 손속에 사정을 두며 이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미약하게나마 자신을 성장시켜 준 자신의 제자 덕분이었다.
'자신의 위해서라고 하더니, 오히려 나를 위해서였나.'
일순 김현우와 천마의 시선이 한번 마주쳤다.
그럼에도 김현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에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천마는-
'내가 제자 하나는 잘 둔 것 같군.'
이내 피식 웃으며 그렇게 생각하곤, 이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겨 김현우를 지나 포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김현우가 자신을 스쳐지나간 천마를 바라 봤을 때, 천마는 이미 이 초원을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리고-
'……뭐야, 설마 삐진 거야?'
조금 전, 천마가 아무런 말도 없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던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최근에 구미호한테 잡혀 사는 것 같더니 성질머리는 전혀 안 죽었군.'
김현우는 이 자리를 빠져나가 버린 천마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단적인 김현우의 생각만으로도, 천마가 김현우에 대해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뭐지.'
김현우는 애초부터 천마가 생각한 것처럼 깊은 생각을 가지고 천마와 싸움을 벌였던 것이 아니었다.
'분명 전투를 하면 본격적으로 깨닫는 게 있었을 것 같은데-'
그가 천마와 싸움을 벌일 때 긴 시간 동안 천천히 손속에 사정을 둬가며 싸운 이유는 바로 범천의 업 때문이었다.
애초에 김현우가 칠대성을 포함한 다른 이들과 싸우려고 했던 것도 범천의 업을 다루는 법을 깨닫기 위해서였고.
김현우는 직감상 분명 싸움을 하다 보면 본능적으로 범천의 업을 깨달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애초에 자신에게 업을 줬던 범천마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다'같은 말을 했었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천마와 싸울 때 일부러 손속에 사정을 두며 길게 전투를 이끌어나갔지만 결국 그는 딱히 무엇인가를 얻지는 못했다.
……물론 김현우가 아무것도 얻지 못한 반면에 그와 전투를 치렀던 천마는 큰 깨달음을 얻었으나, 그는 그 사실 또한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쯧."
아무튼, 그렇게 한동안 생각을 이어나가던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조급하게 생각해 봤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김현우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후우-"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느새 잔디밭에 앉아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김현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다음 상대를 정할 수 있었다.
"내 차례가 상당히 빨리 왔군."
김현우가 그다음으로 고른 상대는 바로 이산대성이었다.
그는 김현우가 지목하자마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빠져나왔고, 김현우는 그를 보며 자연스레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이번에는 전력으로 간다.'
조금 전 김현우는 천마를 상대할 때 그와 최대한 오랫동안 싸움을 이어나가기 위해 손속에 사정을 뒀었으나, 이번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미 적당히 손속에 사정을 두며 깨달음을 얻으려 노력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런 생각이 김현우의 머릿속에 스쳐감과 동시에 싸움은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시작되었다.
김현우의 신형이 이전과 변함없는 속도로 튀어나가고, 조금 전까지 곰방대를 물고 있던 이산대성이 입가에 미소를 만든 채 자신의 주먹을 들어올린다.
그렇게 시작된 격돌.
꽈아앙!
이산대성은 강했다.
천마보다는 그 강함의 우열이 당연히 높았고, 언뜻언뜻 김현우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의 공격을 선보였다.
그러나-
"졌군."
-결국 종래에 나온 승패는 이산대성의 패배.
이산대성은 분명히 강했으나, 이미 김현우는 이산대성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허나 이산대성을 뛰어넘은 상태에서도 김현우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와의 전투를 완전히 끝내고 다음 사람을 불렀다.
그다음 사람은 구천대성.
또 그다음 사람은 북해대성.
그다음.
그다음.
그다음.
……
……
어느 순간부터 김현우는 별말을 하지 않고 칠대성과 싸움을 이어나갔고,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채 모든 칠대성을 이겼다.
허나 모든 칠대성을 이겨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전과는 다르게 그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꽈아앙!
칠대성의 마지막 주자인 평천대성 우마왕이 김현우에게로 쏜살같이 달려든다.
압도적인 거구가 말도 안 될 정도의 속도로 움직여 그의 얼굴을 후려치려 들었으나 김현우는 그런 평천대성의 공격을 몸을 옆으로 빼는 것으로 피하곤 곧바로 다리를 휘둘렀다.
빡!
누가 들어도 굉장히 소름끼치는 소리가 초원에 울려 퍼진다.
그러나 정작 사신의 몸에 발차기를 맞은 평천대성은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은 채 김현우의 얼굴을 향해 그대로 머리를 휘둘렀다.
뻑!
마찬가지로 초원을 울리는 거대한 소음.
허나 그 소음이 또 다른 시작점이라도 된 듯, 김현우와 평천대성은 다시금 템포를 올려가며 서로를 공격해 나가기 시작했다.
파지지지직!
김현우의 몸에서 터져 나온 검붉은 스파크가 일순 그의 몸을 타고 대기로 퍼져나가고, 그와 마찬가지로 평천대성의 몸 주변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붉은 열기가 퍼져나갔다.
쿠그그그그그긍!
흔들리기 시작한 주변의 지반이 마구잡이로 박살 나기 시작하는 그 순간, 김현우와 평천대성은 여지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고-꽈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터진 이후에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 김현우였다.
그 누가 보더라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소름 끼치는 접전.
"하하핫! 좋다! 역시 아우가 인정한 실력답게 대단하군!"
싸움에서 진 평천대성은 딱히 분하다는 느낌 없이 정말로 만족했다는 듯 웃음을 짓고는 그대로 포탈을 향해 들어가 버렸고,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초원을 돌아봤다.
초원은 맨 처음 천마와 싸울 때처럼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단 한 명만 빼고.
"흐응, 이제 끝났느냐?"
"다른 애들은?"
김현우가 묻자 괴력난신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말했다.
"네 두 친우는 서로 할 일이 있다고 하더니 전부 밖으로 나갔고, 너와 싸운 다른 이들은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싸움이 끝나고 난 뒤에는 모두 나갔느니라."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도대체 왜 안 느껴지지?'
김현우는 천마와의 싸움 뒤로, 칠대성을 상대할 때는 모두 전력으로 그들을 상대했다.
그는 범천의 업을 의식하지 않고, 칠대성을 상대했으며 그 누구 한명을 상대할 때도 무조건 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어떻게든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범천의 업은, 오히려 그 사용법을 더더욱 모르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렇기에 애초에 범천의 업을 사용하는 법이 전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순 머릿속을 맴돌았다.
허나, 그런 김현우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 그럼 시작하자꾸나."
그 이유는 바로 기다렸다는 듯 김현우의 앞에 마주 선 괴력난신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극히도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김현우를 응시하고는 입을 열었다.
"싸우지 않을 것이냐?"
"아니, 그건 아닌데."
김현우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괴력난신은 묘하게 샐쭉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녀석들과 싸울 때도 머릿속으로 온통 생각을 하고 있더니, 지금도 마찬가지로구나."
"……내가?"
"그래, 아마 네 녀석과 싸웠던 다른 이들도 전부 느꼈을 거다."
"그건 좀 미안하네."
김현우의 말에 괴력난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니라."
"……왜?"
"어차피 너는 그들은 전부 이겼지 않았느냐? 그렇기에 그들도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탓하고 넘어간 것이니라."
다만-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만, 내 앞에서도 그렇게 전력을 내지 않고 어영부영할 싸움을 할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괴력난신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입을 열었고-
"그게 무슨-"
콰아아아아아아!!
-그와 함께, 김현우는 자신의 온몸에 느껴지는 섬짓한 기운에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 어디 한번, 다른 이들은 제대로 구경하지 못한 것을 한번 구경해 보자꾸나."
그리고-
"네 전력을 말이다."
괴력난신은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269화. 상승 효과 (2)
하남에 있는 장원에서 손오공은 느긋하게 앉아 이전처럼 TV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던 TV프로그램은 바로 한 주의 마지막인 금요일마다 하는 뮤직프로그램으로, 그는 최근 자신이 빠져 있는 걸그룹인 펜타이스의 무대를 보고 있었다.
펜타이스가 무엇이냐고 하면 지금으로부터 9개월 전에 만들어진 신생 걸그룹으로서 맴버로는총 8명이 있고 그중 세-삑-!
"아 씹!"
손오공은 흐뭇하게 웃으며 TV속에 나오는 무대를 바라보던 중 갑작스레 꺼지는 화면에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며 시선을 돌렸고.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야! 왜 TV를 꺼!?"
곧 그는 자신의 뒤에 청룡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팍 찌푸린 채 소리를 질렀다.
허나 그런 손오공을 보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청룡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냐고 물었다."
"보면 몰라? TV보고 있잖아?"
손오공이 짜증난 듯 입을 열자 청룡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왜 여기에서 TV를 보고 있냐 이 말이다,"
"그럼 뭘 해야 하는데?"
"김현우랑 싸우지 않을 건가?"
청룡의 말에 손오공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그게 아니면 내가 왜 물어봤겠나?"
청룡의 물음에 손오공은 소파에 앉아서 입을 열었다.
"아니, 어차피 나보다 더 좋은 녀석이 거기에 있는데 굳이 내가 왜 거기에서 자리 잡고 서 있냐? 괜히 시간만 날리는거지."
"……그게 무슨 소린가?"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청룡을 보며 손오공은 한숨을 내쉰 뒤 짧게 설명을 했고, 한동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청룡은 이내 대답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에서 김현우는 전력으로 싸울 사람이 필요하다 이거 아닌가?"
"그래, 뭐 나도 전력으로 붙는 건 당연히 할 수 있는 거긴 한데 애초에 지금 거기에는 나보다도 더 끗발 높은 사람이 버티고 있잖아?"
"……그녀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러니까 굳이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이거지, 애초에 지금 김현우한테 필요한 건 숨도 못 쉴 정도로 집중해서 전력을 낼 수 있는 상대니까."
제천대성은 그렇게 말하고는 청룡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내 말 알겠지? 빨리 리모컨이나 줘, 이거 생방이라 놓치면 또 몇 시간 기다렸다 봐야 한단 말이야."
'확실히 전력으로 부딪혀야 할 상황이라면 이 녀석보다는 그분이 훨씬 낫겠지.'
손오공의 말에 청룡은 그렇게 생각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허공에 띄우고 있던 리모컨을 넘겨 주었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 TV를 틀었다.
-당신과 함께 하는 펜타리움♪
TV에서는 이제 막 하이라이트 훅 부분을 부르고 있는 펜타이스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고, 손오공은 청룡과의 대화가 언제 있었냐는 듯 곧바로 나오고 있는 하이라이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 이건 또 뭐야!?"
-그것도 잠시. 손오공은 음악 프로그램이 방송되다 갑작스레 하단에 뜨는 뉴스 박스에 인상을 찌푸렸고, 그가 미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아 이런 썅-!!!"
손오공은 여지없이 펜타이스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넘겨 버리며 나오는 뉴스를 보며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안녕하십니까 KKV뉴스의 아나운서 '한상군'입니다. 부득이하게 긴급히 전할 뉴스가 생겼습니다.
허나 손오공이 뭐라고 떠들던 화면 안에 나온 아나운서는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고, 곧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손오공은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뉴스를 노려봤다.
"대체 뭐야! 대체 어떤 새끼들 때문에 이런 거냐고!"
몸의 실체를 찾은 뒤부터 TV와 컴퓨터 등등을 이용해 온 손오공이었기에 이 긴급뉴스가 나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 줄 알았고.
손오공은 지금 이 순간 혹여라도 등반자 때문에 이 뉴스가 흘러나온 것이라면 반드시 그 등반자를 찾아 철저하게 찢어죽일 것이라 다짐하며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 곧 얼마 있지 않아 화면에 비춘 것은.
"……."
하남의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운석과, 그 운석이 터져나가고 있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손오공은 곧 그 운석 위에서 누군가가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재들은 또 저기서 뭐해?"
손오공이 그 운석 위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이 김현우의 두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팟-!
"!"
괴력난신의 모습이 사라진다.
김현우의 눈으로도 제대로 쫓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
그러나 그는 어렵지 않게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를 깨닫고 곧바로 몸을 앞으로 숙였고-쿠우우우-!
곧바로 뒤통수에 느껴지는 소름끼치는 풍압에 그는 곧바로 몸을 띄우며 뒤로 발을 후려쳤다.
턱!
분명 손오공을 제외한 모든 칠대성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김현우의 발길질이 무엇인가에 막히고-꽝!
"칵!"
-김현우는 자신의 공격이 막힌 순간 자신의 배에 꽂히는 거대한 일격에 저도 모르게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나가 떨어졌다.
콰가가가가각!
그의 몸이 마치 쇄빙기처럼 주변을 땅을 완전히 갈아버리며 날아갔으나, 김현우는 빙글빙글 돌고 있는 그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몸에 중심을 잡았다.
"아직 안 끝났느니라-!"
"!!"
하지만 몸의 중심을 잡자마자 보이는 것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앞에서 다리를 내리찍고 있는 괴력난신.
파지지직-!
그녀의 다리가 머리를 노림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터져나오는 검붉은 번개.
그와 함께 김현우는 찰나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청룡이 알려주었던, 그만이 인지할 수 있는 그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 속으로.
그곳에서 김현우는 느릿하게 내려오는 괴력난신의 내려찍기를 볼 수 있었고.
"흡!"
그는 그녀의 공격을 오른쪽으로 피해내곤 곧바로 괴력난신의 머리를 조준해 주먹을 크게 당겼다.
찰나의 시간 속에서 김현우의 몸만이 마치 자유를 찾은 듯 자유롭게 움직여지고, 그의 팔이 일순 말도 안 되는 마력을 담으며 휘몰아친다.
드드드득-!
그의 근육도 마력에 호응하듯 한계까지 응축되고, 김현우의 주먹이 괴력난신의 머리를 노리고 날려진 순간-!
휙-!
"!!!"
김현우는 그 찰나의 순간에, 분명 움직일 리 없었던 괴력난신의 눈이 자신을 향한 것을 깨달았다.
그와 함께 미소가 지어지는 입가.
허나 김현우는 그런 괴력난신의 모습에도 망설임 없이 뻗어나가던 주먹에 힘을 실었고-콰아아아아아──────────삐───!
터져나온 소음이 김현우의 청각과 시각을 먹어치웠다.
오로지 남아 있는 것은 촉각뿐.
'맞았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자신의 손끝에 닿은 찰나의 감촉을 떠올리며 그녀가 자신의 공격을 맞았음을 확신했고.
턱-!
"이런 씹-!"
김현우는 이내 시야가 잡아먹힌 상태에서 자신의 멱살을 쥔 그녀의 손을 보고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려 했으나.
빠아아악!
"크악!?"
김현우가 미처 말할 새도 없이, 그는 괴력난신이 자신에게 전력으로 박치기를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빡!
그 후속타로 오는 괴력난신의 발길질.
김현우는 명치에 그 공격을 후려 맞았으나 이내 이를 악물고 멱살을 쥐고 있는 괴력난신이 있는 곳에 주먹을 날렸다.
빠아악!
슬슬 돌아오기 시작한 청각과 촉각이 괴력난신의 몸을 정확히 후려쳤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동시에 김현우는 계속해서 주먹을 날렸다.
애초에 시야가 보이지 않는 입장에서 피할 수는 없었으니까.
빡! 빡! 빡! 빡!
그렇기에 김현우와 괴력난신은 서로의 멱살을 붙잡은 채 난타전을 이어나갔다.
주먹으로 머리를 후려치고.
다리로 옆구리를 찬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 같은 순간에는 곧바로 머리를 휘둘러 한순간이라도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며,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아예 그녀의 몸을 끌어들여 서로가 아예 공격을 못 하도록 거리 자체를 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그냥 개싸움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정도로, 김현우는 이전의 전투에 비해 신나게 흙탕물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난타전이 시작된 지 얼마나 되었을까.
"흐으읍!"
꽈아앙!
그는 자신의 시야가 회복되자마자 괴력난신의 몸을 크게 차 날리는 것으로 그녀를 자신에게서 떼어냈다.
"헉-! 헉-!"
그와 함께 터져나오는 거친 숨.
시간을 찰나로 멈춘 그 순간부터 쉴 새 없이 움직인 대가로 김현우는 자신의 폐에 공기를 주입해 주었고.
"흐응, 이게 끝이느냐?"
김현우는 곧 저 멀리 날아갔던 괴력난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존나 쎄잖아?'
김현우의 심플한 감상.
허나 그 감상 이외에는 딱히 별다른 미사여구가 필요 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강했다.
'도대체 얼마나 싸웠지? 오 분? 그것도 아니면 삼 분?'
그는 본능적으로 괴력난신과 자신이 싸운 그 찰나의 시간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불과 오 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허나 그 오 분밖에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싸움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상당한 피로를 느꼈다.
칠대성과 싸울 때는 전혀 못 느꼈던 피로.
김현우가 이를 악물자 그녀는 슥 미소를 지었다.
"설마, 원래의 업을 되찾은 내가 그런 꼬마들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느냐?"
"솔직히 말하면 그랬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쎄진 거야?"
그가 괜히 불퉁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괴력난신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거야 당연히 내 원래 업(業)은 괴력난신(怪力亂神)같은 업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니까 그런 것이니라."
그녀의 말에 그는 얼마 전에 들었던 그녀의 진짜 이름을 떠올리고는 중얼거렸다.
"야차(夜叉)……."
모든 요괴를 포함하고.
모든 괴이한 것들을 포함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현상을 지배하고 다루는 왕.
야차(夜叉).
"쯧."
그녀의 진명을 떠올리며 김현우가 저도 모르게 혀를 차자 괴력난신- 아니 야차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래, 그것이 바로 내 진짜 이름이다. 머저리 같은 아우 덕분에 아주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있던 나의 이름이지."
야차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는 김현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전력을 내라. 너는 지금보다도 더 잘할 수 있지 않느냐?"
"뭐……?"
"악을 쓰고 덤비라 이 말이다. 네 전력을 담아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역전시키라 이 말이니라."
뭐-
"사실 아무리 네가 전력을 낸다고 해도, 나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씨익-
야차의 미소.
그녀의 입 사이로 새빨간 혀가 튀어나와 날카로운 이빨을 훑고 지나가고, 김현우는 그런 괴력난신의 모습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정말, 그렇게 생각해."
김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야차를 마주 보았다.
물론 그는 조금 전 야차의 행동이 누가 봐도 뻔히 보일 정도의 도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뻔해 보이는 도발이기에 김현우는 야차의 도발에 응해 다시 자리를 잡았고, 그 모습을 보던 그녀는-
"잘해봐라. 이번부터는 나도 전력으로 가도록 하마-"
-이내 본격적으로 자신의 마력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270화. 상승 효과 (3)
어느 순간 하늘 위에 갑자기 나타난 운석 덕분에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었던 하남지역의 소동.
그것은 긴급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사람들의 혼란을 가중시켰으나 그들이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은 채, 하남의 하늘에 떠 있던 운석은 나타난 지 두 시간 만에 그 정체를 감췄다.
그 대신-
"……."
"……."
하남의 장원에는 냉랭한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근원지는 바로 어느 한 병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는 미령과 하나린 때문.
그런 그들을 보며 구미호는 도대체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고, 제천대성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김현우의 두 제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그 녀석이랑 관련된 녀석 중에는 멀쩡한 녀석이 없는 것 같지?'
두 시간 전.
손오공은 펜타이스의 방송 도중 나온 긴급뉴스에서 운석 위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들이 김현우의 두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 즉시 그녀들을 막기 위해 운석으로 뛰어 올라갔으나 그녀들을 말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고 두야-"
누가 그 녀석의 제자가 아니랄까봐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죄다 쌍욕을 넘어선 인류의 해악이 될 것 같은 단어들을 남발하고 있고.
한 명을 말리면 다른 한 명 덕분에 또다시 싸움이 터지는 조금 전의 기억.
물론 손오공이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한 뒤에는 그 둘을 말릴 수 있었으나.
'얘들은 또 왜 이렇게 쎄?'
손오공은 그들을 말릴 때 쓴 힘을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그녀들이 손오공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것도 아니었고, 김현우와 맞먹을 정도의 강함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들은 강했다.
그래, 그녀들은 손오공의 입장에서 어쩌면 '필멸자 치고는 분에 넘친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했다.
"후……."
'아무튼, 그렇게 말린 덕분에 어째 이곳으로 데려오기는 했는데.'
그녀들의 싸움은 금방이라도 재발할 듯 서로를 향해 죽일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시작된 말싸움.
"쓰레기 같은 년, 내가 분명히 먼저 의사를 밝혔다."
"그래서요? 결국 얻는 사람이 승자 아닐까요, 이 땅딸보년아?"
"땅딸보? 어디서 이 멍청한 년이-!"
"그래도 당신처럼 키 작은 땅딸보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그냥 이참에 향수도 넘겨주시는 게 어때요? 당신의 그 빈약한 몸으로는 향수를 아무리 뿌려서 페로몬을 높인다고 해도 딱히 사부님이 봐줄 것 같진 않은데요."
"이 대가리만 빈 년이 아가리는 잘도 놀리는구나-"
말싸움을 시작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육체의 대화를 시작하는 그녀들.
벌써 싸움을 말리고 난 지 몇 번째일지 셀 수도 없이 다시 일어나려는 싸움에 손오공은 그냥 포기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살짝 흔들었고.
금방이라도 부딪힐 것 같은 미령과 하나린을 보고, 마침내 포기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제천대성을 본 그녀는 이내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
"……."
"힉!"
평소 같으면 곧바로 욕설이 튀어나왔을 텐데 무슨 일인지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미령과 하나린을 본 구미호는 이내 말을 슬쩍 우물거리다,
"그……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기는 한데…… 한번 들어나 보실래요?"
그렇게 말문을 텄다.
####
빡!
김현우의 시야에서 야차가 사라진 것과 동시에.
"끅!"
그의 턱밑에서 소름끼치는 타격음이 터져나왔다.
순간적으로 돌아가는 턱에도 김현우는 이를 악물며 최대한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눈알을 굴렸으나.
빠아악!
유감스럽게도 그의 눈알은, 야차보다도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씨발!"
거친 욕설을 내뱉는 김현우.
그러나 야차는 그런 그의 비명은 애초부터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그의 몸을 날카롭게 타격했다.
야차의 주먹이 김현우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김현우가 뒤늦게 팔꿈치를 들어 야차가 있는 곳을 향해 후려쳤을 때, 이미 그녀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빡! 빡! 빡! 빡!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괴력난신의 공격에 김현우는 발악이라도 하듯 그녀의 공격에 대응했으나, 그는 항상 괴력난신의 비해 한 템포가 느렸다.
팔꿈치로 후려칠 때도.
주먹을 내지를 때도.
혹은 발을 내리찍을 때나 옆으로 후려칠 때도.
김현우는 괴력난신보다 한 템포 느리게 움직였다.
'이래서는 안 돼……!'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지금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김현우는-콰아앙!
-자신 스스로에게 번개를 내리쳤다.
"!"
그것을 의식했는지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빼는 야차.
그 덕분에 잠깐의 여유가 생긴 김현우는 곧바로 차리지 못했던 정신을 부여잡으며 푸른 마력을 흘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야차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상대가 되었던 아까와는 다르게, 지금의 야차는 김현우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분명 당장 아까 전에는 한 템포가 늦어 그녀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했으나, 김현우는 그 한 템포의 차이를 느끼며, 그녀가 지금보다도 힘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강함.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김현우는 딱히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그그그극────!!!!
번개를 스스로에게 내리친 덕분에 만들어진 짧은 시간에, 김현우는 또 한번 마력을 끌어모았다.
파지지직-!
아까 전부터 튀어오르던 스파크가 그런 김현우의 마력에 반응하듯 크게 튀어오르기 시작하고, 그의 머리가 곳곳 삐죽삐죽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그런 검붉은 스파크와 함께 튀어오르는 것은 파로 푸른색의 스파크.
마력과 함께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도력까지 이끌어낸 김현우는 마치 자신을 기다려주듯 여유 있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야차를 보곤-
"이제야 진짜 전력인 것 같구나."
-한순간, 야차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허나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의 도약을 보여주었음에도 야차는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지우지 않았고.
그와는 반대로, 김현우는 여태껏 보여주지 않았던 진지한 얼굴로 야차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꽈아앙-!
주먹을 한번 휘두르자마자 터져나오는 폭음소리.
그러나 그 폭음소리가 미처 전부 울려퍼지기도 전에 김현우는 곧바로 다음 공격을 시작했다.
왼 주먹으로 그녀의 머리를 노린다.
고개를 뒤로 젖혀 피하는 야차.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김현우는 오른 주먹을 아래로 꽂아 내린다.
그러나 그런 김현우의 두 번째 후속타마저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저어 회피한 그녀는 곧바로 붕 떠 있는 오른발을 휘둘러 김현우의 몸을 노렸다.
콰아앙-!
엄청난 중량감과 함께 김현우의 팔에 느껴지는 고통.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곧바로 다음 공격을 이어나갔다.
허나 그런 야차와 김현우의 전투에는, 기술이라는 것이 딱히 보이지 않았다.
야차는 그 본능적인 직감으로 순간순간 김현우의 공격에 반응해 주먹과 발을 휘둘렀고, 김현우도 마찬가지로 그런 야차의 공격에 직감적으로 반응해 공격을 이어나갔다.
꽝! 콰아아앙! 쾅!
쉴 새 없이 터지는 폭음소리 덕분에 김현우와 야차의 청각은 이미 그 용도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쉴 새 없이 야차의 공격을 막아낸 그의 팔다리는 이미 제대로 된 통각을 잃어버렸다.
공기 또한 마찬가지.
단 한숨을 돌릴 틈 없이 계속해서 공격을 주고받은 덕분에, 김현우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런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 속에서, 김현우는 이전과는 다른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김현우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이전이라면 보지 못했던 야차의 주먹과 발을 인지하는 그 상황.
그러나-
꽈아앙!
"크학-!"
-결국 그런 초인적인 집중력에도 불구하고, 김현우에게 한계는 찾아왔다.
아주 짧은 찰나.
고작 아주 짧은 한숨을 쉬는 그 한 번의 시간에, 잠깐의 빈틈을 보인 김현우는 그 대가로 박살 나 있는 지반에 처박혔다.
콰드드드드득! 꽈드득!
지반을 갈아버리며 땅바닥에 처박힌 김현우.
야차는 더 이상의 기다림은 없다는 듯 곧바로, 김현우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머리통에 다리를 내리찍었으나-콰악-!
"!"
괴력난신은 자신의 다리가 순간적이지만 멈추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 그와 동시에 김현우의 주먹이 자신의 앞에 도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꽈아앙!
그와 함께 터져나오는 굉음.
야차는 김현우의 주먹에 맞아 허공을 날았고, 그런 상황에서 그는 또 한번 '찰나'의 세계에 자신의 몸을 들이밀었다.
"큭-!"
연속으로 찰나의 세계에 몸을 들이밀자 온몸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으나, 김현우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앞에서 날아가고 있는 야차를 보고 몸을 숙였다.
'이번에 끝내야 한다.'
그와 함께 머릿속에 드는 하나의 생각.
이미 범천의 업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어떻게든 눈앞의 야차를 이기겠다는 일념을 가진 김현우는 뿌득거리는 두 몸을 지탱한 채 몸을 숙였고-
"으그그극-!!"
섬(閃)-
-곧바로 허공을 날고 있는 야차에게 힘차게 도약했다.
-뢰각(雷脚)
그와 함께 풀린 찰나의 공간.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그 상황에서 김현우는 이미 야차의 앞에 도착한 상태였고, 그는 이미 생각하고 있었던 끝을 내기 위해 자신의 다리를 힘껏 휘두-
"!!"
-르려 했다.
그래, 그는 틀림없이 허공을 날고 있는 야차의 몸에 마지막 일격을 박아 넣으려 했다.
."
허나.
"내 기술도 나름 잘 써먹는구나
김현우의 다리는, 그녀의 볼 끝에서 멈춰버렸다.
"으으윽!"
김현우는 지금 자신의 몸을 완전히 가둬버린 이 현상을 충분히 그 머리고 이해하고 있었다.
'마력팽창……!'
조금 전 그녀의 방심을 이끌어 내 야차의 허술한 공격을 만들기 위해 썼던 마력팽창은, 지금 자신의 몸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그녀는 슥 하고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디 한번, 이번에도 예전처럼 버틸 수 있나 보도록 하마."
그 말과 함께 김현우는 순간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자신의 마력을 사방으로 방출했으나-일 보.
"큭!?"
그런 김현우의 반항은, 야차의 단 일 보로 인해 완전히 깨졌다.
"이런- 미, 친……!"
단 한 걸음.
그러나 그 한걸음은 김현우의 몸을 금방이라도 찢어버릴 듯 짓누르기 시작했다.
가히 온몸이 박살 날 것 같은 끔찍ㅎ한 고통에 김현우는 비명을 지르며 그 팽창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력을 뿜어내 봤으나, 그것은 이어진 괴력난신의 다음 걸음에 점점 막힐 뿐이었다.
야차는 마치 김현우를 놀리기라도 하듯, 그가 대처를 하려 하면 또 한보를 내딛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걸음씩 걷던 야차의 발걸음이 마침내 여덟 보가 되었을 때-
"끄아아아악?!"
김현우의 육체는, 팽창된 압력으로 인해 부숴지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는 마치 괴성과 같은 비명이 터져나왔고, 그에 동조하듯 김현우의 몸은 빠르게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부서진다.
"네 전력은 잘 봤다. 잘 싸우긴 했다만 역시 나를 이길 순 없는 모양이구나."
그 와중에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김현우의 온몸에서 피가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응?"
곧, 자신이 어딘가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71화. 상승 효과 (4)
김현우는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을 바라봤다.
언제고 그가 몇 번 정도는 비슷하게 본 적이 있었던,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컬러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긴현우는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야차의 십보멸살에 걸려 박살 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무척이나 말끔했다.
완전히 넝마가 된 츄리닝도 말끔하게 복구되어 있는 상황.
그렇기에 김현우는 이곳이 어디인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내면세계?"
혹시나 해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김현우.
"잘 아네."
그러나 대답은 무척이나 빠르게 돌아왔다.
"!"
김현우는 순간 들린 대답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고, 거기에서-
"……범천(梵天)?"
"아직 기억하고 있군."
-범천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는 김현우가 이전에 만났던 것처럼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이전처럼 삼두육비 또한 아니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사람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그는 인간의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김현우는 그가 범천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
일견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 그의 몸 근처에는 김현우가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새하얀 광휘가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김현우를 한번 마주보곤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를 이곳으로 불렀다."
"이유는……."
김현우의 물음에 범천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도 알다시피 위업에 관한 이야기지."
김현우는 범천이 나온 시점부터 대충 이 대화의 흐름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슬쩍 끄덕이고는 이내 불만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니, 도대체 위업은 어떻게 사용하는 거야? 당장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업의 사용법을 깨달을 수 있을 거라며?"
김현우의 노골적인 불만 어필에 그는 대답했다.
"이전의 내가 했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뭐?"
"아마 네가 조금 시간의 텀을 여유롭게 가지고 업을 억지로 사용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 아마 지금쯤 너는 더 빠르게 내 업을 사용 할 수 있었을 거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범천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는 슬쩍 고민하는 듯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간단하게 설명해 주도록 하지. 내가 네게 남겨 준 업은 네가 보아왔던 다른 업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범천은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김현우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현우는 마침 결론이라도 내리듯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업은 한 번의 공정을 거친 터라 일일이 사용을 해야 하는 방식이라 이거야?"
"그래, 너도 본 적 있겠지? 자신의 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는 이들을 말이다."
그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정복자랑 싸우기 시작할 때부터 김현우는 줄곧 그런 녀석들이랑 싸워왔었다.
청룡의 업을 가지고 있는 전우치.
역병군주의 업을 가지고 있던 만년빙정.
그 이외에도 그가 만났던 수많은 정복자들은 자신의 업 이외에도 타인의 업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한 번의 공정을 거친 것들이다. 너도 알겠지만 애초에 업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히 타인에게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게다가 넘긴다고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마치 네가 수련을 통해 청룡의 업이나 제천대성의 업을 얻은 것처럼 말이야."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어?"
"나는 네가 쌓은 업이 고스란히 느껴지니까 자연스럽게 알게 됐을 뿐이지."
범천의 말을 잠시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아무튼, 결국 의견을 종합해보자면, 네가 나한테 넘겨준 업은 내가 제천대성과 청룡의 업을 얻은 것처럼 공정을 거치지 않은 업을 내줬다는 소리지?"
"……뭐, 그 두 개의 업과는 좀 엄연하게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결국 결론적으로 네가 말한 게 맞다."
그의 긍정.
그에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니, 그래서 결국 내 업은 일일이 공정을 거치지 않는 업이라는 소리라는 건 알겠는데, 결국 이 위업은 어떻게 사용하는 거야?"
사실 지금 김현우에게 중요한 것은 업의 사용법이었다.
애초에 지금 김현우가 칠대성을 포함해 야차와 싸우고 있는 이유도 바로 자신의 안에 있는 범천의 업을 끌어내기 위해서였으니까.
김현우의 말에 그는 대답했다.
"그걸 굳이 물을 필요는 없다."
"뭐?"
"이미 너는 위업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엥?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김현우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자 범천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너를 이 내면세계로 데리고 온건 나라고."
"뭐, 그랬지?"
"그리고 네가 나하고 만났다는 건 네 안에 잠들어 있던 내 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아니, 그게 뭔 소리야?"
김현우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팍 찌푸렸으나 그는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너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겠지만 나는 진짜 범천이 아니다, 그저 나는 진짜 내가 너에게 위업을 넘겨줄 때 같이 딸려온 사념이지."
그리고-
"그런 위업과 같이 딸려온 사념과 현재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소리는, 곧 네가 범천의 업을 각성했다는 것이지."
"……그럼 지금 내가 범천의 업을 각성했다고?"
김현우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래라면 업이 몸에 완전히 정착하고 난 뒤에야 네가 범천의 업을 조정할 수 있게 됐겠지만, 아무래도 그녀와의 싸움 덕분에 꽤 빠르게 각성한 것 같군."
"……야차와의 싸움 덕분에?"
"그래, 아마 네가 그녀와 싸움을 하며 있는 대로 힘을 끌어다 쓰고 전부 소모해버리니 자연스럽게 원래 있던 마력들이랑 합쳐져야 할 위업이 빈 곳을 대신 차지하면서 각성을 촉진시킨 거다."
-뭐.
"대충 그런 현상이라는 거다."
"……대충 그런 현상이라는 건 또 뭐야?"
"말 그대로다, 실질적으로 네가 범천의 업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조금 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이거지. 그러나 그걸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더럽게 많이 걸리니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으란 이야기다."
그의 말에 김현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파지직-!
새하얀 방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래?"
"호들갑 떨지 마라. 범천의 업이 완전히 네게 흡수되면서 내 사념도 너한테 흡수되는 중일 뿐이니까, 아마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너는 다시 '밖'에서 눈을 뜰 거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게 되면,
"너는 내 위업을, 본격적으로 느낄 수 있을 거다."
####
괴력난신(怪力亂神), 아니- 이제는 야차(夜叉)라는 자신의 본명을 되찾은 그녀는 자신의 마력에 가둬져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않는 김현우를 무표정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허나, 그런 무표정한 얼굴과 다르게 야차의 머릿속은 감탄으로 들어차 있었다.
'생각보다 더 굉장한 아이로구나.'
맨 처음.
야차가 처음 김현우를 상대할 때만 해도 그녀는 진심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
진심을 다하지 않은 것뿐만이 아니라, 그녀는 여유롭게 김현우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주며 공격을 이어나갈 정도로 느긋했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어지는 전투에 야차는 점점 자신의 전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분명 평범한 사람, 아니- 생물이라면 그 누구도 전투를 지속하면 지속할수록 약해진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힘을 소모하는 전투는 정말 당연하게도 전투의 피로도를 불러오고, 그 피로도는 몸에 즉각적인 피드백을 주어 전투능력을 조금씩 상실 시킨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허나 그런 당연한 상식을, 김현우는 깨버렸다.
이상하게도 그는 전투를 하면 할수록 강해졌다.
힘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 김현우는 매순간 전력을 다하며 야차에게 달려들었으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강해졌다.
마치 전투를 실시간으로 경험하고 성장하는 것처럼.
그렇기에 야차는 결국 최후에 가선 자신의 힘을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 드러낸 채로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고. 김현우는 결국 대부분의 힘을 드러낸 야차에게 패했다.
그것도 온몸이 완전히 걸레짝이 된 채로.
'……뭐, 어차피 이곳은 허수 공간이다 보니 목숨을 잃으면 자연스레 몸이 원상태로 복구되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김현우의 근처에 있던 마력들을 회수했다.
털썩-
그녀가 마력을 거둬들이기 무섭게 땅바닥에 몸을 처박는 그.
야차는 어깨를 으쓱이곤-
'뭐, 그래도 이 몸을 상대로 이 정도나 버텼으면 대단한 것이겠지.'
-이내 마력을 완전히 거둬들이고는 김현우가 회복하기를 기다렸다.
"……."
얼마나 기다렸을까.
김현우의 몸은 야차가 생각했던 대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기괴하게 뒤틀려 있던 팔 다리가 다시 원래의 자리를 되찾으며 재생하기 시작하고,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있던 뼈들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야차는-
"……!?"
곧 이상함을 느끼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명 김현우는 자신의 예상대로 재생하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놀라는 것은 바로 김현우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 때문.
'……죽어서 재생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허수 공간에는 죽음이 없다.
그렇기에 아무리 허수 공간 안에 있는 이가 죽음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다고 하더라도 그 몸은 다시 원래대로 재생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재생'이라기보다는 '되돌린다'고 말하는 게 더 어울렸다.
그런데 지금 김현우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이 허수 공간의 재생인 '되돌린다'와는 다르다. 되돌린다고 하기엔 많이 어폐가 있어 보였다.
우드득- 우드드드득!
야차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김현우의 몸에서 일어나는 재생은 더더욱 빠르게 박차를 가했다.
뒤틀려 있던 온몸의 뼈가 제자리를 찾고, 찢어지고 벌어져 있던 상처들이 순식간에 혈관과 피부를 만들어내며 재생한다.
마치 재생이라기보다는 몸을 다시 창조하는 것 같은 느낌의 회복.
그리고-
"!!"
그녀가 눈을 한번 깜박임과 동시에, 김현우는 그녀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언제 몸을 전부 회복했는지도 보지 못했고.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도 그녀는 보지 못했다.
마치 원인이라는 과정이 지워지고 결과만 남은 것 같은 그 상황에 야차의 눈이 일순간 커졌고.
"무-"
이내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으며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고 있는 김현우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물음에 돌아오는 것은 대답이 아닌 들어 올려지는 김현우의 주먹.
"!!"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야차는 그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김현우가 주먹을 들어 올리는 순간 야차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섬뜩함에 회피가 아닌 방어를 택했고-
"방심하면 안 되지 않겠어?"
양팔을 들어 올린 야차의 귓가에, 너무나도 익숙한 김현우의 목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
야차는 거대한 폭음소리와 함께, 자신이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272화. 상승 효과 (5)
콰드드득!
한참을 날아가고 나서여 주변을 지반을 박살 내며 야차의 몸이 멈춰 선다.
'이게 무슨-'
그리고 그 와중에 야차는 자신의 두 팔이 일순 움직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저릿거리는 것을 느끼며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다가와 있는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으나-
"……!"
-변했다.
외견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입고 있는 추리닝은 넝마가 되어 이것을 옷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전히 걸레짝이 된 상태였다.
산발이 된 머리도 마찬가지다.
몸이 회복된 것을 빼면 그의 모습은 이전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력난신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이유.
그것은 바로.
'이 기운은 대체……?'
김현우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새하얀 광휘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터져 나오는 광휘를 제대로 제어하고 있지 않았기에 그것들은 그저 무분별하게 밖으로 퍼져나가고 있을 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야차는 그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차는 곧 그 기운의 정체를 깨닫고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온종일 생각하고 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구나."
"그럼 내가 뭐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뭐, 필시 네가 고민하는 게 '힘' 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않았구나. 그래, 생각해 보면 너는 그 녀석의 위업을 흡수했다고 했지."
분명 김현우는 야차가 자신의 원래 업을 되찾기 전 범천의 업을 얻는다고 했던 이야기를 뒤늦게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내 덕에 제대로 흡수한 모양이구나?"
"……뭐, 결국 내가 노력한 거지만 네 덕도 일정 부분 있기는 하지."
야차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꾸한 김현우.
잠시간의 침묵 뒤, 그 둘은 그 이상의 잡담은 필요 없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며 자세를 잡았다.
괴력난신의 몸에서 짙은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그와 함께 김현우의 몸 근처에서 새하얀 광휘가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꽈아아앙!
그 둘은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도약했다.
다시 한번 시작된 싸움.
김현우의 왼팔이 직선으로 뻗어나가 야차의 얼굴을 후려친다.
꽝!
얼굴을 후려 친 것만으로도 들리는 거대한 폭음.
허나 야차는 그런 김현우의 주먹을 맞으며 그의 품속으로 들어와 팔꿈치로 그의 턱을 올려쳤다.
빠아아악!
김현우와는 다른 경쾌한 타격음.
일순 그의 턱이 올라가며 야차의 모습을 시야에서 잃었으나 김현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상황은 아까도 똑같이 있었으니까.
그는 턱이 올라간 상황에서도 곧바로 몸을 돌려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발을 휘둘렀고-빡!
"읏!?"
김현우의 뒤로 몸을 이동했던 야차는 거의 동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빠르게 들어오는 피드백에 저도 모르게 약한 신음을 흘리며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어지는 김현우의 공격.
야차는 그런 김현우의 공격을 막아내며 팍 인상을 찌푸렸다.
'……나와 동수를 이룰 정도라고……!?'
맨 처음, 불시의 공격을 받았을 때부터 이미 야차는 자신의 힘을 완전히 개방한 상태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현우는 그녀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꽝!
"큭!?"
-시간이 지날수록 야차는 그에게 아주 조금씩 밀려, 이제는 기울어져 있던 균형추가 정상으로 맞아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공격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매서워지고 있었다.
마치 본능적으로 그녀의 약점을 찾는 듯, 김현우는 그녀가 미처 막기가 어려운 곳들만을 골라 공격을 이어나갔고.
동시에 그의 주변에 아무렇지도 않게 흩뿌려지고 있던 새하얀 광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꽝!
"큭!"
그런 상황 속에서 야차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모든 전력을 낸다……!'
김현우는 실로 비이상적이었다.
아까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비이상적이다.
그는 싸움을 하면 할수록 강해지고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단 한순간에 모든 힘을 끌어모아 이 상황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꽝!
행동은 빨랐다.
쉴 새 없이 김현우의 공격을 받고 있던 야차는 이내 지반을 터트려 일순 김현우의 시선을 교란시키고는 몸을 뒤로 내뺐다.
허나 곧바로 야차가 뒤로 빠진 것을 인식하고 쫓아오는 김현우.
그러나 이미 김현우가 다시금 그녀를 쫓아왔을 때, 야차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뤘다.
"!"
사방에 뿌려진 야차의 마력들이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김현우의 몸을 묶기 시작하는 야차의 마력들.
허나 김현우도 이전처럼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그그그그극-!!
김현우의 몸에서 터져나온 새하얀 광휘가 잔뜩 팽창하기 시작하는 야차의 마력들을 밀어내기 시작하고, 전보다는 느려졌으나 그는 확실히 야차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김현우가 야차의 앞에 도달한 그 순간-
"왔느냐?"
"!"
그는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는 야차의 모습을 보고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허나 김현우가 위협을 감지한 순간, 야차는 이미 늦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도 완전히 전력을 낸 것 같으니."
일보(一步)-
그녀의 한마디.
그리고-
"!!"
-팽창했던 마력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득하니 팽창을 반복했던 마력들이 이번에는 역으로 수축하기 시작한다.
수축하고, 수축하고 수축한다.
마치 밀도 높은 벽을 만들어내듯 끊임없이 수축되어 빈 공간을 단 하나도 만들지 않겠다는 듯 오밀조밀하게 파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이런-!"
김현우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봉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다루는 광휘를 이용해 끝을 모르고 압축되고 있는 야차의 마력을 밀어냈으나 그런 김현우의 노력에도 김현우는 그 공간 사이에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정도에 그쳤다.
그렇게 이동이 제약된 김현우의 앞으로.
"!"
야차는 자신의 다리를 들어올리고.
"-나도 내 전력을 보여주마."
-멸살(滅殺)
그대로 아래로 내리찍기 위해 발을 휘둘렀다.
그와 함께, 김현우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김현우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찰나의 공간에 들어오고, 그와 함께 발을 당으로 내리찍는 야차의 모습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만으로도 김현우는 야차가 무엇을 하는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고.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순간 김현우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
공격을 피해야 하나?
불가능하다. 그녀의 마력은 이미 잔뜩 밀집해서 이 공간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수많은 생각이 김현우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사라진다.
그리고 결국 김현우가 선택한 것은.
'나도 끝장을 본다.'
바로 정면돌파였다.
김현우는 이제 가슴께를 넘어 땅바닥을 향하는 야차의 발을 바라보고는 곧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갈 곳을 잃고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광휘를 제대로 컨트롤하는 것이었다.
김현우가 본격적으로 신경 쓰자마자 새하얀 광휘는 마치 수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의 광휘는 김현우의 뒤쪽에 새하얀 광배를 만들었다.
그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은 바로 한 송이의 연꽃이었다.
그동안 김현우가 만들어온 검은 연꽃과는 다르게 새하얀 광휘를 품고 있는 하얀 연꽃은 모든 것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는 세계에서도 금방 그 몽우리를 피웠고.
김현우의 등 뒤로 새하얀 팔들이 생겨난다.
그렇게 등 뒤로 생겨난 새하얀 팔들은 김현우의 왼팔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그 동작을 모조리 끝냈을 때. 그는 야차의 발이 이제 허리를 넘어 무릎 아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아주 예전, 그녀가 야차가 아닌 괴력난신일 때 싸움을 벌였던 때를 떠올리고는 이내 웃음을 머금었다.
'그때도 이런 상황이었지.'
그때도 마찬가지로 김현우와 괴력난신의 서로가 가진 최후의 한 방으로 승패를 결정했었고.
아마, 그 최후의 결과 또한 같을 것이라고,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삐─────────────!
새하얀 광휘가, 초원을 빠짐없이 채워나갔다.
그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부서져서 흙색을 보여주고 있던 지반도.
아직 남아 있던 녹색의 잔디들도.
심지어 얼마 남아 있지 않던 나무들까지.
새하얀 광휘에 가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허나 시간이 지나 공간 전체를 뒤덮은 새하얀 광휘가 사라졌을 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후-"
김현우가, 모든 것이 깔끔하게 지워져 있는 그 공간에 홀로 서 있는 장면뿐이었다.
####
노아흐는 조금 전 빠져나온 야차와 김현우를 한번 훑어보고는 이내 놀랍다는 듯 이야기했다.
"자네, 설마 벌써 위업을 사용 할 수 있게 된 건가?"
그의 물음.
김현우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어떻게 알았어?"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본질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이다."
곧 이어지는 김현우의 질문에 답한 것은 노아흐가 아닌 옆에 서 있던 야차였고. 그런 그녀의 말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녀의 말이 맞네. 지금 자네가 풍기는 분위기는 이전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군."
그의 말에 김현우는 아리송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는 별로 큰 차이가 느껴지진 않는데."
물론 김현우는 야차와의 싸움 끝에 그녀의 도움으로 범천의 업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나 딱히 자신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은 딱히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뭐, 딱히 상관없지 않느냐? 그저 내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구나~ 정도로 넘어가면 되는 것이니라."
"그렇겠지?"
슬쩍 고민하던 김현우는 이내 옆에서 들린 야차의 말에 자신이 별 대수롭지 않은 고민을 한다는 생각을 하며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노아흐에게 물었다.
"내가 저기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어?"
"9계층의 시간으로 치면 대충 2주 정도가 지났군."
"……2주?"
"뭔가 문제라도 있나?"
"아니, 그건 아닌데."
'생각보다 오래 있었는데?'
물론 허수 공간에 있다 보면 시간 감각이 조금 이상해지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오래 지났을 줄은 몰랐다.
'나는 대충 일주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내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노아흐는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아직 이동진을 만들려면 2주 정도는 시간이 더 필요하니 우선 쉬고 있게나."
"안 그래도 그러려고."
노아흐의 말에 그렇게 대답한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순간이동 장치를 집어 들고는 곧바로 노아의 방주에서 빠져나왔고.
이내 새하얀빛이 김현우의 눈앞을 가린 뒤.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상당히 익숙한 장원의 건물 안이었다.
그리고 곧 그곳에서 김현우는.
"오셨습니까, 스승님!"
"오셨어요, 사부님?"
"……너희들, 뭐하냐?"
자신의 앞에서 묘한 포즈를 잡은 채 서 있는 그 두 제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273화. 상승 효과 (6)
노아의 방주 안.
"잘 만들어지고 있나요?"
한참이나 손가락을 움직이며 복잡한 마력을 배열을 조절하던 노아흐는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자네 왔는가?"
곧 노아흐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아브를 보며 조금 전까지 만들고 있었던 이동진에서 손을 떼고 아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런 노아흐를 보며 이내 빈 나무 의자에 앉고는 곧바로 근황을 묻기 시작했다.
"어때요? 준비는 잘돼가나요?"
아브의 물음에 노아흐는 익숙한 듯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
"우선은 나쁘지 않게 진행되고 있네. 힘도 아직 남아 있고 재료도 충분히 남아 있지. 이 정도라면 앞으로 2주 정도만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이동진을 완성 시킬 수 있을 걸세."
노아흐의 대답에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번에는 그가 질문은 던졌다.
"그래서, 최상층의 정보는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었나?"
그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전혀요."
"……전혀?"
"네, 저도 나름대로 힘을 발휘해서 최상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했는데, 최상층에는 아예 간섭할 수가 없어요."
-마치 처음부터 제가 관리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닌 것처럼요.
아브가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노아흐는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으나 이내 말했다.
"너무 실망하지 말게, 최상층의 상황을 모르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노아흐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아브.
"그래도 뭔가 도움이 안 돼는 느낌이라 조금 분하기는 하네요."
그녀의 말에 노아흐는 곧바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지금까지 충분히 도움이 되었으니, 당장 저번에도 자네가 탑에서 내려오는 정복자들을 제때 막지 않았으면 상당히 큰일이 일어났을 걸세."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며 풀이 죽어 있는 아브를 어느 정도 위로해 주었고, 한참이나 노아흐의 위로를 들은 아브는 이내 기운을 차렸다는 듯 조금은 힘이 난 얼굴로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고는 이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그보다 가디언은 어떻게 됐나요? 저번에 위업을 수련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브의 물음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게 김현우는 확실하게 자신이 이전번에 받은 범천의 업을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일세."
게다가-
"그 녀석의 수련 덕분에 다른 몇몇 이들도 새롭게 수련을 하고 있는 이들이지."
"……다른 이들이요?"
아브의 물음에 노아흐는 대답하는 것 대신 손을 하늘로 올려 가볍게 손짓했고, 곧 그녀는 몇 개의 구슬이 하늘에 떠 있다 내려오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건?"
"그 녀석의 동료들일세. 김현우와 싸우고 나서 무언가를 얻었는지 나한테 개인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련공간을 요구하더군."
-아브는 각자의 구슬에서 무엇인가를 하는 수인들과 한 인간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탑에 있는 사람이 아니지 않던가요? 지금 이곳에서 수련을 해봤자 그렇게 성과가 있을 것 같지는……."
곧 그 구슬을 보고 있던 아브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닐세."
"아니라구요?"
"그렇네. 만약 그들의 업이 처음 탑에 들어왔을 때처럼 완벽하지 않거나 쪼개진 상태였다면 모르겠다만, 그들은 다르지 않은가?"
노아흐의 말에 아브는 깨달았다는 고개를 끄덕였고.
노아흐는 그런 아브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녀와 함께 수련을 계속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
그다음 날, 천호동의 저택.
"그래서 그런 거라고?"
"네. 아마도요."
저택의 거실에는 이서연과 김시현, 그리고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는 한석원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김현우는 조금 전 이서연의 이야기를 통해 어제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었다.
'뭐, 사실 사건이라고 하기에도…….'
김현우는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그가 어제 야차와의 싸움을 끝내고 난 뒤, 범천의 업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되고 난 뒤 돌아왔을 때 김현우는 자신의 제자들을 볼 수 있었고.
그는 자신들의 제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은 이제 막 돌아온 김현우의 앞에서 어디 모델에서나 나올 것 같은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들도 바보는 아닌지라 마치 포즈인 것 같은, 그러면서도 왠지 아닌 것 같은 미묘한 느낌의 자세를 잡고 있었고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김현우는 별생각이 없었다.
또 둘이서 이상한 내기나 했나 생각했을 뿐.
허나 곧바로 그 뒤, 김현우는 은근히 자신의 양옆으로 붙으며 몸을 비비적거리기 시작하는 제자들 덕분에, 결국 그는 제자들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씩 쥐어박고 나서야 장원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결국 모든 일은 구미호 때문이다?"
김현우가 묻자 이서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어- 굳이 문제점을 딱 집어보자고 하면 그렇게 되네요……. 뭐 미령과 하나린이 거의 반협박으로 알아낸 것 같긴 한데……."
이서연이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를 바라보자, 그는 물었다.
"그래서, 구미호는 지금 어디에 있어?"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애초에 오늘은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이서연의 대답에 잠시 흠, 하고 말을 줄인 그.
그 모습을 보며 김시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아까 보기는 했는데……."
"보기는 했는데?"
"아까 형이 일어나기 전에 도착했었는데, 보니까 가면무사들하고 어디 가고 있던데요?"
"……가면무사들하고?"
김현우의 되물음에 김시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거기에 덤으로 양복 입은 친구들도 같이 붙어 있던데. 구미호는 뭔가 체념하면서 끌려가는 느낌이더라고요."
-뭐, 딱 봐도 패도길드랑 암중길드에서 데려가는 것 같아서 딱히 제지는 하지 않았는데-김시현은 뭔가 애잔한 표정으로 구미호가 빠져나갔던 현관문을 보며 탄식했다.
"좀, 말려줄걸 그랬네요."
그런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슬쩍 생각하는 듯하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생각을 그만두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그 한마디로 생각을 일축한 김현우는 이내 한석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형은? 요즘 아예 얼굴을 못 봤는데 뭘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어?"
그의 물음에 한석원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바쁜 게 아니라 네가 바쁜 거 아니냐?"
"어…… 그런가?"
김현우가 슬쩍 말을 흐리자 한석원은 바로 앞에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뭐, 나도 나름대로 바쁘기는 했지, 이 둘 때문에 말이다."
한석원이 자신의 양옆에 앉아 있는 김시현과 이서연을 가르쳤다.
"이 둘 때문에?"
"그래, 뭐 대부분의 사건에 네가 관여해 있어서 알겠지만 최근 전 세계 헌터업계는 좀 바쁘거든."
한석원의 말대로 현재 전 세계의 헌터 업계는 무척이나 큰 격변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상황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고, 첫 시작은 무신이 국제헌터협회에 모여 있던 다른 상위권 헌터들을 죽였던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로 일어난 갖가지 일들.
헌터들의 침체되었던 성장이 다시 뚫리기 시작한 것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일어났던 재앙급증 사태.
그 이외에도 이런저런 던전의 추가 덕분에 전 세계는 한동안 굉장히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고, 그것은 당연히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쪽에서도 좀 이런저런 일이 많았단 말이지? 근데 한국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길드의 길드장 중에 두 명이 너를 따라다니고 있으니 혼자 수습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거야."
한석원이 짧게 현 상황을 정리해서 말해주자 김현우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한석원은 그동안 할 말이 많았다는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을 이어나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무튼 지금은 한시름 돌릴 정도는 됐지. 이런저런 터질 만한 일들은 이미 전부 해결했으니까 말이야."
한석원이 그것을 끝으로 말을 끝내자 김시현과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잠시 찾아온 조용함.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침묵은 깨졌다.
"그런데 오빠."
그것은 바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 이서연 때문이었다.
"왜?"
"아니,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물어보고 싶은 거? 왜, 이번에도 내가 좋아하는 취향 같은 거 물어보게?"
"그런 거 아니거든요?"
김현우가 피식하며 묻자 정색하며 대답한 이서연은 이내 슬쩍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결심했다는 듯 김현우를 보며 물었다.
"오빠 솔직히 알고 있죠?"
"뭘 알고 있어?"
"……하나린이랑 미령, 그러니까 오빠 제자들이요."
"……아니 뭐, 알고 있겠지?"
김현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이서연은 하, 하며 답답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곤 이내 똑바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 제자들의 마음을 말하는 거잖아요. 네?"
"제자들 마음?"
"네! 알고 있죠!?"
왠지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김현우를 노려보기 시작한 이서연을 보며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슥 뺐다가 이내 대답했다.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봐?"
김현우의 되물음에 이서연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말 돌리지 말고요!"
"거참, 여기서 그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
"설마 진짜 왜 제가 이 이야기를 물어보는지 모르고 그렇게 대답하는 건 아니죠?"
그녀의 진지한 표정.
김현우는 그런 이서연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일순 말을 멈췄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뭐 대충 알고 있기는 하지."
김현우는 바보가 아니었다.
또한, 어느 양판소에 나오는 아무것도 모르는 둔감한 멍청이들 또한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제자들이 자신에게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무척이나 대략적으로는 짐작하고 있었다.
"근데 왜?"
그런 김현우의 답변을 들은 이서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김현우를 바라보며 물었고, 이번에는 옆에 있던 김시현까지 굉장히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형 알고 있었어요?"
"뭘?"
"아니, 형 제자들이 형한테 은근히 마음 있다는 거요."
이서연과는 다르게 확실히 직구로 던지는 김시현.
김현우는 고개를 조금 전과는 다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알고 있기야 했지."
"아니 근데 왜……?"
김시현이 이서연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하자 김현우는 스읍, 하고 괜스레 입맛을 다시고는 이야기했다.
"아니, 이 이야기를 꼭 해야 돼?"
"뭐 사실 꼭 듣-"
"전 너무 궁금해서 듣고 싶어요."
이서연의 말에 김현우는 슥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넌 네 일도 아니면서 뭐가 그렇게 궁금해?"
"뭐 사실 그렇게 말하면 딱히 제 일이 아니기는 한데……."
"그런데?"
어떻게든 김현우에게 어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미령과 하나린의 모습을 보면 조금 안쓰러워 보인다- 라고 이야기하려던 이서연은 잠시 말을 삼키고는 대답했다.
"그건 나중에 설명하고, 우선 이야기나 좀 해주세요. 도대체 제자들 마음을 은근히 알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관심도 안 주는 거예요?"
이서연의 물음에 김현우는 귀찮게 되었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곤, 이내 입을 열었다.
"그건 말이야-"
274화. 최상층 (1)
목동에 있는 유명한 일식집의 독방.
그곳에서 이서연과 김시현, 그리고 한석원은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멍하니 자신의 앞에 놓인 초밥을 먹고 있는 세 명.
그런 한동안의 침묵 끝에 멍한 표정으로 초밥을 먹고 있는 이서연과 김시현을 바라본 한석원은 이내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둘 다 왜 그렇게 멍때려?"
그의 물음에 김시현은 한석원을 바라보고는 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멍때리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을 좀."
"생각? 아까 현우가 말해 줬던 거 말하는 거야?"
한석원의 물음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긍정했다.
"그게 아니면 뭐겠어요."
김시현은 자신들에게 이유를 말해주고는 조금 더 잠을 자겠다는 이유로 자신의 방인 저택의 2층으로 올라가 버린 김현우를 떠올렸고.
"뭐…… 솔직히 나도 의외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또 생각해 보면 그렇게 멍을 때릴 정도야?"
한석원은 여전히 의문이라는 듯 말했다.
"솔직히, 좀 충격이라서요."
"충격이라고?"
그의 말에 대답한 것은 이서연이었다.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그러나 아직 충격이 풀리지 않은 것 같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좀, 현우 오빠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충격이라고 해야 하나……."
이서연이 약간 말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시현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확실히, 나도 좀 충격이네."
그 둘의 반응에 한석원은 이 일식집에 오기 전, 김현우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한참이나 이걸 말해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던 김현우는, 이내 드문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그렇게 대답을 했었다.
"분명히 현우가…… '그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라고 했었나?"
한석원이 그렇게 말하자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렇게 말했죠."
"그런데 그게 그렇게 충격받을 일이야?"
한석원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그 둘을 보며 말했다.
뭐 자신은 김현우와 계속해서 같이 다니지 않기는 했으나 이런 저런 매체를 통해 그의 강함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강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는 어렴풋이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김현우의 과거를 생각해 봤을 때 한석원은 그가 충분히 그런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한석원이 알고 있는 그의 인생은 딱히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인생이 아니었으니까.
한석원이 김현우 본인에게 직접 들은 과거에 의하면 그는 고아였고, 쓰레기만도 못한 고아원 원장 밑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다가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곧바로 고아원에서 빠져나왔고, 그 이후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다가 군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그렇게 군대에서 개고생을 하다 전역을 했을 때-
'……탑에 들어왔다고 했지.'
그야말로 김현우의 과거는 정말 불우했다.
게다가 그의 불우한 과거는 거기에서 끝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게 1회차를 모두 깨고 탑의 정상에 선 김현우는 자신들과는 다르게 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곳에서 10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으니까.
"……."
아무튼, 그의 불우한 과거를 생각해 봤을 때 김현우의 입에서 나왔던 그 소리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이기는 했다.
애초에 그는 그런 이성간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는 전혀 해보지 못했을 테니까.
한석원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가만히 있던 이서연이 이미 입을 열었다.
"아니 오빠의 과거를 들어보면 그리 충격적인 일은 또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또 형이 그런 말을 하니까, 뭔가 안 어울려서…… 맞지?"
"그치? 그게 좀 크지."
마치 서로의 동의를 구하듯 말하는 이서연과 김시현.
한석원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뭐……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네."
확실히 탑 밖에 빠져나온 김현우는 특정인들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대부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 왔으니까.
게다가 김현우는 자기가 하고 싶다면 한다, 라는 말을 지키듯 그 무엇이든 자신이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했다.
"……."
뭐, 아무튼 탑에 나오고는 줄곧 그런 모습만을 보여주던 김현우가 그런 말을 하다 보니 한석원 자신도 처음에는 조금 신기한 느낌이 들기는 했었다.
"뭐, 그래도 사실 저희가 이렇게 충격 먹을 일은 아니긴 하죠."
그렇게 이서연이 멍을 때리고 있자 이내 생각을 정리한 듯한 김시현이 뒤늦게 입을 열었고 이서연도 마찬가지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기는 하지."
"근데, 사실 또 이렇게 되니까 좀 궁금해지기는 하네."
"……뭐가 궁금해?"
김시현의 말에 이서연이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결국 현우 형의 본심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그렇게 행동했다는 거잖아?"
"……그런데?"
"한 마디로, 형은 그냥 걔들 마음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던 것뿐이니까, 아마 제자들 쪽에서 지금까지처럼 미적지근하게 덤비는 게 아니라 돌직구로 덤비면 거의 무조건 결과가 나올 것 같은데."
-뭐, 무슨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김시현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하자 이서연은 생각하는 듯하더니-
"확실히…… 그렇게 밀어붙이면 오빠 입장에서는…… 답을 줄 수도 있겠네."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한석원은 이내 피식 웃으며 자신의 앞에 있는 초밥을 집어 먹고는 입을 열었다.
"뭐, 남의 연애 사업에 그렇게 관심주지 말고 밥이나 먹자, 너희들이 뭔가를 해줄 것도 아니잖아?"
"뭐…… 그렇기는 하죠. 사실 저희들이 끼어들 입장도 아니긴 하고요."
"그런 그렇지."
이서연과 김시현이 차례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한석원은 그 둘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아, 참"
"?"
"뭐, 이건 내 생각이다만, 역시 결혼은 될 수 있으면 안 하…… 아니, 되도록 굉장히 늦게 하는 게 좋다고 본다. 결혼하기 전에 되도록 전부 다 즐기는 게 좋다 이거지."
갑작스레 왠지 인생의 무게가 훅 담긴 것 같은 한석원의 말에 김시현과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그로부터 정확히. 2주 뒤.
노아의 방주 안에서 아브와 김현우, 그리고 노아흐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부적인 조절은 끝났네. 이제 내일이 되면 이동진도 완벽하게 작동할걸세."
"바로 최상층으로 갈 수 있는 건 맞지?"
"그렇네. 아마 내일 이 이동진을 탄다면 아마 자네들은 바로 이 탑의 최상층에 도달할 수 있을걸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아브를 보며 물었다.
"혹시 알아낸 정보는?"
"유감이지만 별로 없어요. 이 한 달 동안 어떻게든 그 안에 침투해서 조금이라도 안을 보려고 했는데, 불가능하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는 아브.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우선 최상층에는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거지?"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추측이기는 하지만 대략이나마 안에 뭐가 있을지 추론해 보자면…… 아마 정복자들이 있을 거예요."
"……정복자들?"
"네."
"……뭐야, 정복자들은 저번에 내려온 그 녀석들로 전부 끝인 거 아니었어?"
김현우의 되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니에요…… 아직 최상층에는 내려오지 않은 정복자들이 있으니까요……물론 이전번에 내려왔던 사천이나 기술자보다는 약하지만요."
거기에-
"이건 정말 추측성이 다분하지만, 아마 설계자가 만든 무엇인가가 있을 확률이 높아요."
"……설계자가 만든 무언가?"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지난 한 달간 최상층의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 주변을 돌았어요."
-물론 확인은 할 수는 없었지만요.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최상층의 외벽을 탐색하던 도중, 안쪽에서 익숙한 힘을 느꼈어요."
"익숙한 힘?"
"설계자의 힘인 겐가?"
노아흐의 말에 아브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냥 기운이나 힘이 터져나간 거면 안쪽에서 뭔가를 했구나 하면서 넘어갈 수 있을 텐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아니라고?"
"네, 저도 처음 느껴보는 기운의 움직임이었는데…… 자세히 느껴보니 그건 바로 설계자의 힘이 여러 개로 나뉘고 있던 거였어요."
"……설계자의 힘이 여러 개로 나뉘어?"
노아흐는 아브의 말을 듣더니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리고는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라도 제가 잘못 느꼈나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그런 노아흐의 모습을 보던 아브는 마치 확인사살을 하듯 그렇게 말하며 수심 깊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그들의 대화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지금 그 위에서 설계자가 무슨 짓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네, 우선 기운이 여러 개로 나눠진 걸로 봐서는 아마 이쪽에서 다수가 올라가는 것을 알고 준비한 것 같기는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군."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뭐가 그렇게 이해가 안 되는데?"
"생각해 보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에서는 굳이 일부러 자신의 기운을 나눠주면서까지 다수를 상대할 만한 물량을 만들지 않아도 충분할걸세."
-적어도 내가 아는 설계자는 상당히 강하니까 말일세.
"그런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저도 그것 때문에 불안한 거예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노아흐와 아브가 수심 깊은 얼굴로 고만에 빠지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대답했다.
"그냥 자신감이 더럽게 넘쳐서 그런 거 아니야?"
"……자신감?"
"그래, 아브 네 예상대로라면 그 녀석이 나를 키워먹으려고 지금까지 이딴 식으로 정복자를 내려 보냈다 이거잖아. 아니야?"
"네…… 그렇죠. 그리고 아마 그 예상은 거의 빗나가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면 간단하지. 그냥 우리를 물로 보고 있다, 이 정도로 해석하면 편할 것 같은데?"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그리 쉽게 생각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김현우는 이어서 말했다.
"게다가,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는 제대로 된 정보를 구하지도 못한다며?"
"……그건 그렇네만."
"그럼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잖아?"
그는 이어서 말했다.
"어차피 제대로 알 수도 없는 걸 고민해 봤자 별 특별한 의미는 없잖아? 우리가 열심히 고민한다고 해서 하늘에서 최상층 정보가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닐 거고,"
"그것도 맞는 말일세."
노아흐의 긍정.
그에 김현우는.
"그러니까 고민하지 말라고, 어차피 최상층에 올라가야 하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고,"
최상층에 올라가서-
"설계자인가 뭔가 하는 건방진 새끼 대가리를 깨버려야 하는 것도 분명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마치 다짐하는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위로 향했다.
275화. 최상층 (2)
그다음 날.
"다 모였지?"
하남의 장원의 중심 건물.
"다 모인 것 같네."
"아마도 다 모이지 않았을까요?"
손오공과 김시현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을 차례차례 바라봤다.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며칠 전까지 보이지 않다 어제 돌아온 칠대성들이었고, 그다음에는 그런 칠대성과 마찬가지로 하루 전쯤 돌아온 천마였다.
그다음에 보이는 것은 건물 한쪽에 있는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는 야차,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청룡이다.
"?"
어째서 야차와 청룡이 같이 있지? 라는 생각이 찰나 김현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딱히 내색하지 않고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는 이들을 체크했다.
"뭐, 우선 모일 사람은 다 모인 것 같네."
이서연과 구미호를 포함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두 제자에게까지 시선을 돌린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이내 잠시 말을 정리하듯 입가를 우물거리더니 가볍게 말했다.
"다 모인 것 같으니까 지금부터 간단하게 브리핑한다. 다들 불만 없지?"
김현우의 말에 아무런 말없이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하는 이들을 보며 그는 곧바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뭐, 다들 알겠지만 다시 설명하자면-"
그 뒤로 김현우는 현 상황을 다시금 간단하게 그들에게 설명했고, 이내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아무튼 오늘 이동진이 완성돼서 올라갈 건데, 혹시 올라가는 게 싫은 사람?"
김현우의 물음에 돌아온 것은 침묵.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슬쩍 고개를 끄덕이곤 다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근데 너희도 알다시피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갈 수는 없어."
"왜지?"
평천대성의 물음에 김현우는 답했다.
"우리가 위로 올라간 동안 혹시라도 그 녀석이 저번처럼 행동할 수 있거든."
"저번처럼……?"
"아."
평천대성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현우는 그제야 평천대성이 최근에서야 깨어났다는 것을 상기하고 그에게 예전 이야기를 간단하게 들려주었다.
정복자가 내려오는 것을 막으니 설계자가 1계층과 9계층을 한 번에 연결해버려 곤란했을 때를.
"흠. 확실히 그런 거라면 이 계층을 지킬만한 이들은 몇 명 정도 남아야겠군."
그렇게 김현우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평천대성은 그의 생각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아무튼 그래서 이곳에 남길 사람을 4명 정도 구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원래라면 조금 더 많이 남겨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김현우는 이번에 완전히 끝장을 보러 탑의 최상층에 가는 것이기는 했으나 그러다 본진털이라도 당해서 9계층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다면 오히려 본말전도가 되어버린다.
설계자를 죽이고 왔더니 9계층이 파괴돼서 터전이 사라지면 허무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리저리 생각해본 결과 김현우는 9계층의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기는 것으로 생각을 끝마쳤다.
그도 그럴 것이 설계자가 예전처럼 1계층과 9계층을 이어 붙여도 우선 이 9계층에는 등반자의 등급이 높지 않다면 자력으로 처리할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상황이면 내가 굳이 이곳에 많은 인원을 남겨두지 않아도 되지.'
김현우가 이곳에 남겨둬야 하는 것은 다른 헌터들이 미처 죽이지 못할 만큼 강한 등반자를 처리할 수 있는 이들을 몇 명 남기는 것이었다.
"뭐, 애초에 서연이랑 아냐는 전력외의 사무전력이니까 제외하도록 하고…… 내 생각에는 김시현이랑 구미호, 그리고 미령이랑 하나린이 남는 게 좋은 것 같네."
-불만 있는 사람?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이름을 부른 당사자들을 바라봤다.
김시현은 원래부터 이럴 것을 예상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구미호는 뭔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김현우의 두 제자인 미령과 하나린은 그의 말에 애초부터 반론할 생각은 없었다는 듯 고개를 숙였으나, 그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김현우는 곧 그녀들이 자신을 보고 지은 묘한 표정을 보고 슬쩍 생각하다 이내 그것이 걱정이 담긴 표정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
"!!"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뜬 두 제자.
김현우는 그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가볍게 손을 내젓고는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바라봤다.
여전히 이무 말이 없는.
그러나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그들을 보며 김현우는-
"자, 그럼 한번 최상층으로 가보자."
마주 웃었다.
그렇게 김현우가 칠대성을 포함한 최상층에 올라가기 위한 인원들을 모두 데리고 노아흐에게 돌아갔을 때.
"후."
"왜 그러세요, 언니?"
아냐는 이서연의 한숨을 보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뭐, 좀 걱정이 돼서."
"……걱정이요?"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생각했다.
물론 9계층이 멸망하니 뭐니 하는 소리야 예전에도 많이 들었고 김현우의 강함은 그동안 옆에서 봐온 이서연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이상하게 좀 걱정이 된단 말이야…….'
이서연은 왠지 들기 시작하는 걱정에 인상을 슬쩍 인상을 썼으나 그 옆에 있던 아냐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솔직히, 저도 좀 걱정이 되기는 하는데, 그렇게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아요."
"……왜?"
"그도 그럴 게…… 사실 그분이 그동안 싸운걸 봐 와서 그런가…… 그분이 지는 게 상상되진 않더라고요."
아냐의 말.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멍을 때린 이서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렇게 걱정해 봤자…….'
어차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서연은 이제 최상층에 갈 김현우를 걱정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다짐을 했고.
"……."
이내 이서연은 말없이 김현우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두 제자를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짓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
"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바로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거야?"
노아의 방주 안.
김현우는 방주 한가운데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마법진과 자신의 손에 쥐여져 있는 기묘한 장치를 보며 물었다.
"그렇네. 그 버튼을 누르는 순간 자네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네."
김현우의 물음에 답한 노아흐는 이내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모두 김현우의 근처로 모이는 게 좋을 걸세. 이 이동진은 한번 발동하고 나면 사력을 다해 충전해도 하루 정도는 너끈히 걸리니까."
그의 말에 손오공과 야차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곧바로 김현우의 주변으로 슬쩍 간격을 좁혀 달라붙었고, 그는 손에 쥔 장치를 보며 말했다.
"한번 버튼을 누른 순간 끝장을 봐야 한다 이거지?"
"맞네. 한번 버튼을 누른 순간부터는 돌이킬 수 없네, 물론 자네가 최상층의 통로를 통해 빠져나올 수도 있겠네만-"
-아마 설계자가 그렇게 하게 놔두지 않을 테지.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김현우는 도망칠 생각이 없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도망칠 생각이 없다기보다 도망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이번에 설계자를 끝장내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애초에 지금 당장 그 녀석을 죽이지 못하면…… 아마 높은 확률로 내가 9계층에 문제가 생길 공산이 크다.'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크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노아흐는 이내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마법진의 밖으로 빠져나왔다.
"잘 다녀오세요."
노아흐가 빠져나오자마자 인사를 건네는 아브.
김현우는 장치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아브에게로 시선을 돌리곤 이내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그래."
꾹-
대답과 함께 버튼을 누른 김현우.
키이이이잉-!
그가 버튼을 누르자마자 무엇인가가 날카롭게 갈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동시에 마법진 아래에 있는 마력들이 스물스물 기어 올라와 그들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이이잉-!!
더욱더 심하게 들리는 무엇인가 갈리는 소리.
그에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가 인상을 찌푸린 그 순간-
"!"
김현우는 자신이 서 있던 곳이 바뀌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김현우의 귀를 긁던 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고 있었고, 마력에 의해 가려졌던 시야는 서서히 사라지며 자신이 서 있는 곳을 파악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했다.
그리고-
"……무슨?"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우는 이 바뀐 공간에 홀로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살짝이나마 펴지려던 김현우의 얼굴이 다시금 찌푸려지고 그는 곧바로 이곳저곳을 향해 시야를 돌렸으나 그의 동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보이는 것은 이 공간의 풍경.
김현우가 바라보는 곳에는 흑백으로 조화되어 있는 거대한 공동이 있었다.
아니, 이걸 공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거대한 공동에 고풍스러운 성의 일부분을 빼다 박은 것 같은 기묘한 모습.
흑백으로 나누어져 있는 타일은 이곳이 공동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있는 긴 식탁에는 족히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
-그 식탁의 끝에 있는 상석에서, 김현우는 볼 수 있었다.
"왔군."
그를.
"……."
김현우는 그에게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었으나, 이내 대답하지 않고 상석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저것을 어떻게 표현하는 게 좋을지, 김현우는 평가를 내리지 못했다.
결국 김현우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시커먼 마력이 그의 모습을 마치 안개처럼 가리고 있는 장면뿐이었으니까.
허나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를 휘감고 있는 안개는 그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를 파악하기 위해 몇 번이고 집중해서 그 안개 속에 있는 실체를 확인하려 했으나.
"……."
김현우는 결국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인상을 찌푸렸고.
그 모습을 줄곧 보고 있던 그는 안개로 미소를 만들어내고는 입을 열었다.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 다시 한번 말하도록 하지.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어?"
김현우는 그렇게 되물으며 아브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설계자가 자신을 키우고 있다는 소리를.
"그래,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것도 내 입장에서는 꽤 오랫동안 말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을 뒤덮고 있는 안개를 이용해 더더욱 찢어질 듯한 미소를 만들어 냈고, 그 미소를 본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 처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단 소리지?"
그의 물음에 그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는.
"아니, 아니지 너를 처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뭐라고?"
"그래, 처먹으려던 게 아니지. 설마 내가 너를 그렇게 허접하게 대할 것 같은가?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나는-
"너로 하여금 아주 황홀한 미식(美食)을 행할 거다."
그렇게 대답했다.
276화. 최상층 (3)
"이거 완전 또라이 새끼 아니야?"
김현우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줄곧 상석에 앉아 있던 그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그저 네 잣대로만 그렇게 판단하는 건가?"
"당연히 내 잣대지 그럼 네 잣대겠냐 이 식인종 새끼야."
"큭큭, 확실히 입이 험하기는 하군,"
그와 함께 그 '형체 없는 자'는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그의 근처에 있었던 식탁들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자신의 형체를 안개로 감싼 그는 김현우에게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네 입이 아무리 구대기와 같더라도 지금의 나는 관대하다. 전부 이해할 수 있지."
-너는 내게 있어서 굉장히 특별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 그.
김현우는 그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고는 자신의 몸을 긴장시키며 자세를 잡았다.
한순간 김현우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생각.
지금 당장 달려드는 게 좋을까?
아니면 기다렸다가 그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맞춰서 대응할까?
아니, 애초에 그렇게 했다가는 당할지도 모르니 처음부터 최고 출력으로 때려 박는 건?
아니 애초에 나와 같이 왔던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됐나?
이렇게 되면 나 혼자 다구리를 맞을 수도 있나?
그의 머릿속에 노아흐와 아브가 해주었던 말이 복잡하게 얽히고, 그 위로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다 사라져간다.
허나 김현우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은 이내 형체 없는 자의 몸에서 빠져나온 검은 기운 하나에 완전히 멈췄다.
그러나 형체 없는 자는 김현우가 언제라도 달려들 수 있게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정말 느긋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뭐, 우선 걱정하지 말게. 나는 내 미식(美食)에 굳이 다른 찌꺼기들을 초대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일세."
그 말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검은 기운은 어두운 벽을 뚫어 아래로 내려갔고, 그 모습을 보던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뭐지?"
"자네가 뭣 모르고 데려온 친구들을 데리고 놀아줄 물건이지, 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나 말고 다른 이들은 아래에 있는 건가?'
형체 없는 자의 말에 김현우는 조심스레 자신과 같이 온 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허나 김현우는 이내 그곳에서 자신과 같이 온 이들에 대한 생각을 끊어버렸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한 마디로, 지금부터 그는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 순수한 혼자의 힘으로 상대해야 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게다가 김현우는 어쩌면 내심 이런 상황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자신의 머릿속 한 켠을 채우고 있는 당황스러움 이라는 감정을 내버리고는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그에게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타각- 타각- 타각-
그가 한번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구두가 바닥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김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다.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눈앞에 있는 설계자가 만만치 않은 이라는 것을 기류를 통해 깨닫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조심스레 그를 관찰했고.
탁-!
결국 어느 순간, 설계자는 김현우의 앞에 마주서서 그를 바라봤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가 끊임없이 그의 몸을 가리는 상황.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리며 앞으로 일어날 전투에 대해 대비했고, 곧 설계자의 입이 열렸다.
"역시, 아무리 봐도 너무 훌륭하군……! 감탄이 나올 정도야!!"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김현우와 반대로 그는 굉장히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쳐다보았다.
분명 형체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따끔한 시선.
"솔직히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속으로 수많은 고뇌를 했지. 과연 이 탑을 망치게 놔두면서 까지 너를 키우는 게 맞을까? 라는 생각을 여러 번이나 했었다."
그리고-
"내 생각은 틀렸지. 너는 너무 훌륭했어. 제대로 된 업(業)도 쌓을 수 없는 이곳에서, 고작 일개 시험의 NPC와도 같은 존재였던 주제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업을 쌓았지."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등반자의 업을 먹어치우고, 정복자의 업을 먹어치웠지. 그 외에도 너는 이 탑을 만드는데 일조한 녀석들의 업도 먹어치웠으며 지금에 와서는-"
-위업(偉業)까지도 그 몸에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너는 대단한 거다. 그야말로 걸작이지! 탑 밖에 있다 올라오는 녀석들하고는 완전히 다른 미식이라 이거다!"
마치 자아도취에 빠진 듯, 입을 열 때마다 목소리 톤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하는 그.
그는 자신이 한 소리에 자신이 매료된 듯 기묘하게 숨을 떨기까지 했으나 김현우는-
"지랄하고 있네, 미친 새끼. 이 새끼 진짜 말하는 거 들으면 들을수록 또라이 같은 새끼네."
-이전보다도 짜게 식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김현우의 표정에도 그는 애초부터 표정이나 말투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말이 험하군, 하지만 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내 기대는 식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기대되기 시작했다. 탑 밖에서 쌓은 업이 아닌- 내가 만든 이 탑 안에서 쌓은 업은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독특한 미식이 될까-?"
-너무나도 궁금해
"그러니까."
그는 김현우가 존재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양팔을 좌우로 들어 올렸다.
그로 인해 그 범위를 넓혀가는 검은 연기.
그 상태에서-
"한번 보여다오. 내가 본격적인 미식을 시작하기 전에, 네가 지금까지 쌓아 온 업을 내 눈앞에서 직접 보여봐라!"
형체 없는 자는 그리 말하며, 펼쳤던 양팔을 크게 휘둘렀고-
"!"
그가 팔을 휘두른 동시에 터져나오는 폭발적인 검은 기운과 함께, 김현우는 자신의 몸에 돌던 마력을 사방으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
어두운 공간.
"이곳은 뭐지?"
그곳에서 천마(天魔)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어둠.
허나 눈에 마력을 집어넣었을 때, 천마는 이곳이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 아닌, 어느 한 거대한 방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
그에 천마는 입을 열지 않고 이 방의 출구를 찾기 위해 시선을 돌렸으나.
'출구가 없어……?'
곧 천마는 자신의 주변에 딱히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이는 것은 온통 벽밖에 없는 그곳.
천마는 그 뒤, 곧바로 자신의 앞에 서 있던 김현우와 자신과 함께 탑의 최상층으로 올라왔던 다른 이들을 찾았으나,
'……마찬가지로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군.'
천마는 곧 자신과 함께 있었던 이들이 모두 근처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그의 머릿속.
'……아무래도 이곳으로 올라왔을 때 다들 떨어진 것 같군.'
천마는 자신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 중에 가장 신빙성이 높은 가능성 중 하나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그는 미처 다음 생각을 하기도 전에-
"!"
-자신의 등에 있는 검에 손을 대어야 했다.
까가가강!!!
정적이었던 천마의 움직임이 한순간 압도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등 뒤에 있는 검을 붙잡았고, 그와 함께 들리는 쇠가 깨질 듯한 소음에 천마는 크게 몸을 돌려 자신의 뒤를 기습한 이에게 발을 휘둘렀다.
후웅-!
허나 아무것도 없이 허공을 가르는 그의 발.
그리고 곧 천마는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을 공격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 참, 한 방에 죽이질 못해서 안타깝군."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머리를 뒤로 묶은 남자.
그는 조금 전 천마를 공격했던 것으로 보이는 검을 크게 한번 휘두르곤 이내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듣기로는 제일 약한 놈이라 해서 간단하게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래도 어느 정도 기본은 되어 있는 놈인가 보군."
남자의 말에 순간적으로 천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라고?"
"어이쿠, 기분이 상했나 보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진실일세. 확실히 다른 곳에 갇혀 있는 네 동료들은 적어도 너보다는 강해 보이더군."
그 말로 하여금 천마는 자신이 생각하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갑작스레 기습을 걸곤 아가리를 나불대다니, 정파 놈들이나 할 짓을 해대는군."
그는 자신의 가설이 맞는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팔열성군의 검을 횡으로 휘두르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런 천마의 표정과는 다르게 그와 마주 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아니, 오히려 그는 금방이라도 공격을 가할 것 같은 천마의 앞에서 여유를 부리며 입을 열고 있었다.
"역시 자네가 들고 있는 것은 팔열성군의 검이로군. 그런데 설마 고작 그 팔열성군의 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건 아니겠지?"
아니, 뭐 그럴 수도 있나?
혼자 질문하고 혼자 결론을 내리는 남자의 모습.
천마는 더더욱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는 그런 천마의 모습을 보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봐, 힘 빼도록 하게. 어차피 자네는 나를 이기지 못하니까 말일세."
"……너를 못 이긴다고?"
"당연한 것을 묻는군, 설마 자네 같은 등반자가 그런 검 하나 쥐었다고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이 몸을?"
피식.
"물론 자네와 같이 온 다른 이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자네는 나를 이길 수 없네. 그래서 원래 내게 할당되었던 업보(業報)들도 전부 너와 같이 온 녀석들을 처리하는데 넘겼지."
"……아가리가 뭣 모르고 미친 듯이 널뛰는군."
"그건 오히려 자네 스스로에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안 그런가?"
그의 말에 천마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탓!
땅을 박찬 천마의 신형이 일순간 흐릿해지고, 전혀 무방비 상태인 남자를 향해 튀어나간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거리.
남자의 지척에 다다른 천마는 그를 한 번에 베어버리려는 듯 손에 쥐어진 검을 휘둘렀으나-까아앙-!
"!"
천마의 검은 무방비한 자세를 잡고 있던 그 남자에게 막혔다.
"말했지 않은가?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이 무가자(無可者)를 이길 순 없네."
무가자(無可者), 검선(劍仙) 김광택(金光澤)남자- 아니 한 세대에서는 자신 스스로를 무가자라고 불렀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검선으로 칭송을 받던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으나 천마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을 들이대지 마라."
"내 자를 듣지 못했다니 그것참 안타깝군. 허나 그렇다면 지금부터 기억해 두도록 하게. 어차피 자네의 마지막은 내 손에서 이뤄질 테니 말일세."
"헛소리하지 마라……!"
깡!
천마의 말과 동시에 무가자는 곧바로 지척까지 밀고 들어왔던 그의 검을 쳐냈으나, 천마는 그를 이렇게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앞으로 들어가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무가자가 검을 튕겨낸 그 짧은 순간-
"내 말이 헛소리라고 생각한다면-"
"!!"
"-어디 한번, 막아보도록 하게."
-그의 검무(劍舞)는, 이미 시작되었다.
277화. 최상층 (4)
천마가 한참 무가자와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탑의 최상층의 또 다른 곳에서는-
"이건 또 뭐 하는 새끼들이야?"
손오공이 자신의 앞에 몰려들고 있는 이들을 보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네 목숨을 거두러 왔다, 오만방자한 원숭아."
그리고 그렇게 웃음을 짓고 있는 손오공의 앞에 있는 한 노인은,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옛 도인들나 입을 것 같은 긴 백의를 입은 노인은 가슴 아래까지 자라 있는 자신의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원숭이? 원숭이라고?? 이 노친네가 오랫동안 이곳에 있다 보니 노망이 났나?"
노인의 물음에 손오공이 비아냥거리자, 노인은 답했다.
"여전히 너는 하늘에서 보았던 대로 경거망동하는구나."
"하늘에서 보았던 대로 경거망동 하는게 아니라 네 앞에서만 경거망동했던 게 아니고?"
키득키득거리며 비아냥을 멈추지 않는 손오공.
노인은 일순 말을 멈추고 그를 노려봤으나, 이내 자신이 들고 있던 낡은 서책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마음대로 떠들거라, 원숭이. 어차피 오늘을 끝으로 네 경거망동한 그 입은 더 이상 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의 말과 함께 노인은 자신이 들고 있던 서책을 한차례 털 듯이 움직였고,
"……이건 또 뭐야?"
손오공은 그가 서책을 털자마자 그의 주변에 나오는 무엇인가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손오공을 포위하듯 나타난 다섯 개의 검은 무언가.
아니, 그것을 무언가라고 보기에는 제법 확정적인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셋은 인간, 둘은 동물인가.'
그러나 손오공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손오공을 포위하고 있는 그것들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딱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마치 그림자처럼, 그 외형만을 꺼내온 듯한 모습.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오공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을 전혀 무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 두 개의 업을 가지고 있는 건가?'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에게서는 굉장히 비옥한 업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손오공은 다시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거 봐라……? 꼰대를 가장 옆에서 보필하던 사람이 이렇게 뒤가 구린 놈들을 마음대로 부려도 되는 거야?"
"흥! 어차피 그분은 이미 돌아가신 상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새로운 분을 모시고 있지. 그분의 힘을 빌려 쓰는 게 뭐가 부끄러운 것이지?"
무척이나 당당하게 입을 여는 노인.
손오공은 웃으며 말했다.
"돌아가셨다? 아니지,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이 노친네야. 너희들이 팔았잖아?"
"……."
"응? 아니야? 너희들이 팔아서 꼰대 소멸시켜 놓고는 아닌 척하고 있어?"
-역겹게시리.
손오공이 그렇게 말하며 노인을 바라보자.
그,
한때는 옥황의 아래에서 그의 최측근으로써 하늘의 일을 다스리던 그, 지천(地天)은 팍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원숭이 녀석, 더 이상 입을 못 놀리도록 잡아다 천벌산에 가뒀던 것처럼 영겁의 고통을 느끼게 해주겠다……!"
지천의 말에 따라 손오공의 주변에 만들어져 있는 그림자는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 준비를 하듯 전투자세를 취했고.
손오공은 명령이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자신에게 도약할 것 같은 그들을 보며 피식 웃고는 말했다.
"어이 노친네, 설마 진짜 이걸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네가 과연 위업에 가까운 업을 축약시켜 놓은 그분의 잔재를 상대할 수 있다고 보느냐?"
노인의 자신만만한 어투.
손오공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손오공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손오공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들을 한번 돌아보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어이 노친네, 네가 잘 기억을 못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그그그극-!
"……!"
"네가 나를 잡으려고 오만천군을 이끌고 왔을 때 기억해?"
말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짙은 투기에 지천은 혀를 차며 곧바로 자신의 서책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투기를 노출하고 있는 제천대성에게 달려드는 검은 무언가들.
그러나-
"!"
이미 손오공은 그들이 달려든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그때 말해줬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지천은 눈을 부릅뜨고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으나.
"네가 아무리 강한 놈들을 데리고 와서 지략을 펼쳐도."
이미-
"넌 날 못 이겨, 이 틀딱 새끼야-!"
-늦었다.
빠아아아악!
####
검은 기운이 마치 김현우를 잡아먹을 듯 폭사해 나가고, 김현우는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땅을 박찬다.
탓-!
가벼운 움직임과 함께 한 순간의 움직임으로 검은 기운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는 그의 몸.
스으으으-!
그러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이미 폭사하듯 터져 나왔던 검은 기운들은 순식간에 범위를 넓혀 김현우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고, 그곳에서-파지지직!
-김현우는 이미 생각을 끝내고 자신의 전력을 드러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새하얀 전류가 튀어나온다.
그것은 김현우가 야차를 상대하면서 범천의 업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뒤 일어난 변화였다.
마력을 쓴다면 검붉은색의 전류가 터져 나왔고.
도력을 사용한다면 푸른색의 전류가 터져 나왔다.
물론 김현우의 몸에 있는 두 개의 마력을 동시에 사용한다고 해도 마력과 도력은 서로 섞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김현우가 마력을 사용하든, 혹은 도력을 사용할 때든, 범천의 업을 얻고 난 뒤 그의 마력과 도력의 색은 새하얀색으로 통일되었다.
파지지지지직!!!!
그의 몸에서 튀어나온 하얀 번개가 한순간이지만 김현우를 향해 뻗쳐온 기운에 저항하고, 곧바로 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마치 까치집을 지은 듯 간간히 위로 솟는 머리.
흑원 대신 그의 등 뒤에 자리 잡은 거대한 광배(光背).
불과 시간으로 따지면 찰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에 전력을 끌어낸 김현우의 모습에 '형체 없는 자'는 검은 연기로 찢어질 듯한 미소를 만들어내곤 입을 열었다.
"멋지군!"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과 동시에 올라가 있는 입꼬리.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쾅!
지반을 박참과 동시에 따라오는 폭음소리.
그의 몸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정면으로 다가오는 검은 기운을 회피하고, 그 뒤에 서 있는 형체 없는 자를 향해 달려 나간다.
그 찰나의 시간.
형체 없는 자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몸에서 검은 기운을 꺼내 김현우의 정면을 향해 쏘아 보냈으나-
"호오?"
-그가 정면을 향해 검은 기운을 쏘아 보낸 순간, 김현우의 신형은 이미 그의 뒤를 점하고 있었다.
"흡!"
힘껏 발을 휘두르는 김현우.
꽈아앙!
김현우가 휘두른 발은 정확히 그의 등을 때렸고, 그의 몸은 마치 포탄처럼 쏘아져나가 넓은 공동의 벽 구석에 처박혔다.
꽝!
그의 몸이 벽 구석에 처박힘과 동시에 나는 또 한번의 폭음소리.
김현우는 곧바로 그의 몸이 처박힌 곳으로 달려 나가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으나 공동의 벽이 무너지며 생긴 연기 사이로 검은 기운이 튀어나와 김현우를 막기 시작했다.
그 찰나에 드는 짧은 시간.
'어떻게 할까?'
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사라졌다가 떠오른다.
그냥 돌파해서 끝장을 내는 게 좋을까?
그게 아니면 다시 그가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조금 전처럼 빈틈을 노려서 공격할까?
생각하는 와중에도 무척이나 빠르게 확산하는 검은 기운.
그는 얼마 있지 않아 답을 정했다.
'돌파한다.'
검은 기운을 돌파하기로.
물론 김현우조차도 저 검은 기운에 닿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김현우는 설계자에 대한 정보를 단 하나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부딪혀야 한다.'
그래도 김현우는 바로 자신의 지척까지 다가온 검은 기운을 보며 그런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지금 이 상태로 검은 기운을 피해 다니기만 해선 절대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파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김현우는 이미 처음 설계자와 싸움을 시작할 때부터 모든 전력을 꺼냈다.
예전처럼 상대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가늠해 보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동안 만났던 적과 자신의 앞에 있는 설계자는 엄연히 달랐으니까.
지금까지 만났던 다른 등반자나 정복자는 아무리 강하더라도 분명 최소한의 정보를 들을 수는 있었다.
허나 눈앞의 설계자는?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이 불명이었다.
게다가-
'저쪽은 이미 내 정보를 알고 있다.'
설계자가 말하는 것을 들어봤을 때, 그리고 그동안 그가 해온 행적들을 생각해 봤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한 정보를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설계자의 수를 가늠해 볼 생각도 없이 초반부터 자신의 전력을 쏟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차피 정보전을 하는 것은 자신의 체력만을 깎아먹는 지극히 불합리한 일이었으니까.
"흡!"
검은 기운 앞에서 잠시나마 느려지나 싶었던 김현우의 몸이 또 한번 폭발적인 스피드를 내고, 그 순간 그의 몸이 활처럼 휘며 검은 기운을 뚫었다.
그와 동시에 보이는 것은 처박힌 벽에서 일어나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설계자의 모습.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로 다가가 주먹을 휘둘렀다.
꽈아아앙-!
그와 함께 들리는 폭음.
그는 자신이 처박혔던 벽 안에 다시 한번 처박혔고, 김현우는 무방비한 그를 향해 연속에서 공격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왼손이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꽈앙!
오른 무릎으로 그의 배를 찍어 올린다.
꽈아앙!
오른손으로 앞으로 쏠린 그의 턱을 후려치고, 빠아아아악!
왼발로 그의 심장을 찍어 눌렀다.
꽈아아앙
그 이외에도 김현우의 손발에서는 끊임없이 공격이 터져 나온다.
꽝! 꽝! 꽝! 꽝!
고작 몇 초나 될까 싶은 그 찰나의 사이에 설계자에게 꽂힌 공격은 족히 수십 번을 가볍게 넘어섰고, -콰가가가가가각!!!
김현우가 뚫고 나왔던 검은 기운이 다시금 모여들어 그의 지척으로 향했을 때 이미 김현우가 설계자에게 가한 공격의 횟수는 가볍게 수백 번을 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검은 기운이 마치 김현우를 포위하듯 둘러싸기 시작했을 때.
김현우는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찰나의 순간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거의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세계.
김현우에게로 다가오고 있던 검은 기운은 마치 그 상태에서 멈춘 것처럼 아주 느릿하게 범위를 좁혀오고 있었고.
그에게 수백 번에 달하는 공격을 맨몸으로 후드려 맞은 설계자는 벽에 처박혀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있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그런 설계자에게 자신의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키이이이잉-!
그의 몸에 마치 엔진이 돌 듯 기묘한 소리가 나며 새하얀 마력이 사방으로 뿜어진다.
그와 함께 보이는 것은 소름 끼칠 정도로 새하얀 연꽃.
김현우의 뒤로 생긴 연꽃은, 그 순간이 마치 찰나라는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 그야말로 순식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개화했고.
"후-"
동시에, 김현우의 등 뒤에는 새하얀 네 개의 팔이 나타났다.
마치 신화에 등장하는 아수라처럼 김현우의 등 뒤에 자라난 네 개의 팔은 그 찰나의 순간 속에서도 새하얗게 빛나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고.
"-읍!"
김현우의 주변에 만들어진 네 개의 팔은 이내 그가 크게 휘두르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왼팔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수라(修羅)-
김현우는 마침내 주먹을 내질렀다.
-무화격(武和擊)
278화. 최상층 (5)
새하얀 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검은 기운이 만연해져 있던 형체 없는 자의 주변도.
흑백이 조화롭게 인테리어 되어 있는 공동도.
그리고 그 공격을 내지른 김현우 자신까지도.
새하얀 빛에 먹혀 들어갔다.
시각과 청각을 먹어치운 새하얀 빛.
허나 그 속에서 김현우는 알 수 없는 확신을 가졌다.
'분명 먹혔다.'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자신이 주먹은 그에게 닿았고, 그의 몸이 분쇄되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으니까.
물론 김현우는 지금 이 한 방으로 형체 없는 자를 처리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에게 느껴지는 기운은 지금까지의 다른 정복자나 등반자들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김현우는 지금 자신의 공격이 분명 제대로 된 유효타였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래, 분명.
굉음과 함께 그의 시야를 빼앗았던 새하얀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회복되는 시야.
귀에서는 전자음 소리가 줄어들며 동시에 청각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그렇게 돌아온 감각 속에서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형체 없는 자를 바라보고는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꼴이 말이 아닌데?"
김현우의 이죽임대로 형체 없는 자의 몰골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김현우를 감쌀 듯 사방으로 덮쳐오던 검은 안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김현우에게 압박감을 주던 형체 없는 자의 몸은 박살이 나 있었다.
왼발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오른손은 덜렁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검은 안개가 그의 외견을 가리고 있었으나, 김현우의 공격이 치명상이 되었다는 것은 누가 봐도 고개를 끄덕이고 인정할 정도로, 그의 몰골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멋지군."
형체 없는 자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서는 변함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모습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릴 뻔했으나 이내 비틀어 올렸던 입가를 지우지 않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멋져? 아, 박살 나버린 네 몸이 멋지단 이야기?"
"감정의 동요가 눈에 보이는군."
"너는 개박살 난 몸이 눈에 보이네."
김현우의 말대답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본 형체 없는 자는 이내 말했다.
"그래서, 다음은 없는가?"
"……뭐?"
"아직 보여줄 것이 남지 않았는가? 적어도 내가 알기로 자네가 가지고 있는 업들은 고작 이정도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
씨익-
"더 보여주는 것은 어떤가?"
그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비틀린 웃음을 없애고 얼굴을 굳혔다.
분명 지금 당장 보이는 상황적 우위는 누가 보더라도 김현우에게 있다.
형체 없는 자는 당장 보기에도 전혀 여력이 없어 보였다.
'아니, 아니겠지.'
분명 숨기는 것이 있기에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이라고,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설마, 더 이상 보여줄 수 있는 게 없나?"
김현우가 생각하는 그 찰나에 그의 상념을 깨는 형체 없는 자의 비아냥.
그는 수많은 생각의 파도를 억지로 틀어막고는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어.'
그것은 지금부터 전력을 쏟아붓는 것.
처음부터 김현우는 자신의 전력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형체 없는 자는 애초부터 김현우의 전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그것은 변함이 없다.
형체 없는 자는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여력을 숨기며 김현우를 도발하고 있었으나, 어차피 그런 상황에서 전력을 이미 드러내고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전력으로 개박살을 내주지."
그것은 바로 형체 없는 자가 자신을 무시하며 전력을 내고 있지 않을 때 몰아쳐서 그를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탓-!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림과 함께 이어지는 김현우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빠악-!
그의 신형이 바로 앞에 있는 형체 없는 자에게로 나타나 망설임 없이 그의 머리를 후려친다.
누가 들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굉장한 소음.
그러나 김현우는 그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어온 기술들을 형체 없는 자에게 선보이기 시작했다.
꽈아아앙-!
형체 없는 자의 몸이 김현우의 발에 맞아 벽에 처박힌 뒤 그 반동으로 튀어나온다.
애초에 반항할 생각도 없이 공격을 계속해서 맞고 있는 그의 모습에 김현우는 자신의 다리를 크게 오므렸다.
그와 함께 김현우의 다리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모이기 시작하고, 종래에 들어서는 김현우의 종아리 뒤쪽으로 마치 증기기관처럼 하얀색의 연기가 가득하게 쏟아져 나온다.
"후-!"
패왕(?王)-
그리고 형체 없는 자의 신형이 아래로 쓰러질 때와 맞닿게, 새하얀 연기를 뱉어내던 김현우의 다리가 힘껏 쳐올라갔다.
"-!"
-괴신각(怪神脚)
콰가가가가가가각──────!!!!
형체 없는 자의 머리에 정통으로 들어간 패왕괴신각과 함께 그 주변에 있던 벽들이 두부처럼 바스라지기 시작한다.
벽들은 마치 껍질이 깨어져 빛으로 산화하듯 사라졌고, 지반에는 마른 나무들이 그 형상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허나 그 사이에도 김현우는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아까 전보다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그에게 김현우는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간다.
패왕괴신각이 끝난 뒤에는 제천대성을 상대할 때 사용했던 멸격을 사용한다.
이미 형체 없는 자의 몸은 걸레조각이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박살이 난 상태였다.
하반신은 날아가고, 상반신만이 남아 있는 그의 몸.
그러나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공격을 이어나간다.
꽈아아아앙!
그의 손끝에서 지금까지 그가 싸워오면서 얻었던 모든 깨달음과 업들이 한데 어우러져 형체 없는 자의 신체를 부숴나간다.
그나마 남아 있던 왼팔이 사라지고.
덜렁거리던 오른팔이 그다음으로 날아간다.
몇 번이고 김현우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낸 그의 몸은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없는 편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 정도로 박살 나 있고.
꽈아앙-!!!!!!!
김현우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일격에는, 그나마 멀쩡하게 남아 있던 그의 머리가, 처참하게 함몰되어 땅바닥에 처박혔다.
"허억-허억-!"
그제야 터져 나오는 숨소리.
김현우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그에게 공격을 감행했는지 그 시간을 깨닫지 못했다.
허나 김현우는 자신의 아래에 처박힌 머리를 보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고.
이내 김현우는-
"멋지군."
-아까와 비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비틀었던 웃음을 없애고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김현우는 그 목소리가 들려온 이상 다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 대신, 김현우는 몸을 움직였다.
꽈아앙!
김현우의 다리가 순식간에 움직여 땅바닥에 박혀 있던 형체 없는 자의 머리를 내리찍는다.
그 누가 보더라도 무자비한 일격.
그러나-
"!!!"
김현우는 다음 순간 땅에 박힌 자신의 발을, 무엇인가가 붙잡았다는 것을 느끼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싹-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협.
김현우는 곧바로 왼발을 움직여 자신의 발을 붙잡은 무엇인가를 후려쳤고, 곧 그는 자유로워진 오른발을 느끼며 그곳에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동시에, 김현우는 머리가 처박혔던 그 땅에, 하나의 손이 자라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 기운을 흩뿌리고 있는 손.
그것은 마치 자신의 기운을 사방으로 뿌리는 듯하더니, 이내 하나의 몸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발이 만들어지고, 손이 만들어진다.
걸레짝이 되어 사라졌던 몸이 처음부터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듯 재생되고, 그 뒤를 이어 땅바닥에 처박혔던 머리가 원래대로 재생된다.
"이런 개씨발."
그렇게 돼서 김현우가 미처 무엇인가를 하기 전 완벽하게 재생된 형체 없는 자.
그의 입가에는 변함없는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역시 너는 대단하다."
가히 칭찬해 줄 만하다.
그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으나 김현우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모습을 관찰했다.
정말 처음과 같이 변한 형체 없는 자의 모습.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기세가 완전히 죽었었는데……도대체 어떻게?'
김현우가 그에게 공격을 퍼부었을 때, 그의 기세는 분명 신체가 훼손될 때마다 깎여나갔다.
확실히 죽음으로 도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헌데 지금은?
'……완전히 처음과 똑같잖아.'
김현우는 형체 없는 자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그 특유의 압박감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고, 그가 미처 다음 생각을 하기 전 형체 없는 자는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충분히 맛을 봤으니, 나도 너를 미식하기 전 아주 간단하게나마 네게 재미있는 걸 보여주마."
"……뭐라고?"
김현우의 되물음.
그러난 형체 없는 자는 그런 김현우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그저 자세를 잡았다.
어디에선가 봤었던 것 같은 자세.
"……!!"
탓-!
그리고 형체 없는 자가 바로 자신의 앞에 왔을 때, 김현우는 아주 오래전 기억 속에서 형체 없는 자가 취하고 있는 자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천마의-!'
그래, 조금 전 형체 없는 자가 취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얼마 전에도 전투를 치른 천마(天魔)의 기수식이었다.
김현우의 앞으로 날아온 형체 없는 자가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손을 움직인다.
어느 사이엔가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검.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형체 없는 자의 발도를 피해냈으나-
"!"
그 다음 순간, 김현우는 자신의 몸이 허공에 뜬 상태로 멈추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 이상함을 느끼고 김현우가 눈을 돌린 순간.
"그다음은 이것이로군."
"!!"
김현우는 형체 없는 자가 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반적인 걸음이 아닌-
시작이 될 일보(一步)를-
쿠구구구구-!
형체 없는 자가 걸음을 옮기자마자 본격적으로 김현우의 몸을 압박하기 시작하는 마력들.
그사이에 김현우의 머릿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으나, 그 생각을 깊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흡!"
곧바로 김현우의 몸에서 일으켜진 광휘가 팽창하는 마력들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점점 걸음을 옮기며 자신을 짓누르는 마력들은 새하얀 광휘들을 밀고 들어왔고-마침내 형체 없는 자의 걸음이 십보를 걸었을 때-
"이런 썅!"
콰가가가가가가가각────!!
김현우가 있던 주변의 공간은 검은색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지워질 것 같은 소름 돋는 폭발.
김현우는 그런 대폭발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온몸으로 광휘를 내뿜어 자신의 몸을 보호했으나 그 대가로 인해 상당히 많은 양의 마력을 써버렸다.
그리고- 김현우가 그 공격을 전부 막았을 때.
"하……!"
-김현우는 어느 샌가 보았던, 아주 익숙한 장면을 보며 이를 악 물었다.
"마신강림(魔神降臨)이라, 나쁘지 않군."
"도대체 어떻게……?"
형체 없는 자의 모습은 분명 그가 이전, 무신과 싸웠을 때 보았던 그 마신강림의 모습을 그대로 취하고 있었다.
괴물 같은 외형.
그러나 그런 괴물 같은 외형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얼굴에 걸려 있는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고, 형체 없는 자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가 아니다. 당연한 것이지."
"뭐?"
그에 되묻는 김현우.
그에-
"이 '탑'이 대체 누구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형체 없는 자는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279화. 최상층 (6)
형체 없는 자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김현우의 앞에 나타난다.
분명 그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김현우가 이전에 보았던 그 기술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도는-
"칵!"
-이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빨랐다.
순간적으로 눈에 신형이 맺혔다. 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속으로 이동해 공격을 가한 형체 없는 자의 공격에 김현우는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배를 내어주었다.
배에서 치미는 끔찍한 고통.
김현우는 신음했으나 곧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곧바로 다음에 들어올 공격을 쳐내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
김현우는 그 순간 여러 개로 나뉜 형체 없는 자를 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모습을 바라봄과 동시에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하는 김현우의 머리.
생각을 하는 그 짧은 와중에도 형체 없는 자의 신형은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고. 그 수는 어느 순간 이 거대한 공동을 느슨하게 채울 정도로 많아졌다.
'설마……!'
그리고 그렇게 꽉꽉 채워지기 시작하는 형체 없는 자의 신형을 보며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이다음 무슨 공격이 나올지를 깨달았고.
"이런 씹-!"
김현우는 곧 수없이 생겨난 형체 없는 자의 손에 봉이 생긴 것을 보며 욕을 내뱉으려 했으나, 뒤이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봉을 보며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꽝! 콰가가가강! 꽝!
순식간에 김현우의 위쪽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는 파괴적인 크기의 봉.
김현우는 하늘에서 아군과 적군 구분 없이 무자비하게 떨어져 내리는 봉을 피하기 시작했으나-쩌적-!
"!"
그는 곧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자신의 몸이 둔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마침내 그는 머리 위에 검은 여의봉이 떨어져 내리는 순간, 이 일대가 차가운 냉기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꽈아아아아앙-!
-이미 늦었다.
이미 여의봉이 하나 떨어져 내리는 것으로 시작한 형체 없는 자의 무자비한 폭격은 멈추지 않았고, 김현우의 움직임을 제한한 냉기는 그런 무자비한 폭격 속에도 은은히 살아남아 그의 몸을 구속했다.
이어서 김현우에게 들어오는 끔찍한 고통.
오른팔이 뭉개지고 왼 다리가 박살난다.
시야가 막혀오고 동시에 숨이 막힌다.
어떻게든 그의 공격을 막기 위해 김현우는 있는 대로 마력을 쏟아부었으나, 그는 결국 막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형체 없는 자의 폭격이 끝났을 때.
"끄으으으-!"
김현우는 조금 전과 다른 멀쩡한 몸을 가진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형체 없는 자는 굉장히 드물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호오, 조금 전에 몸이 박살 났는데도 재생하다니, 그건 '기술자'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능력인데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그의 물음.
김현우는 끅끅 소리를 내며 멀쩡하게 재생한 자신의 몸을 한차례 만지작거리곤 이내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려 대답했다.
"왜, 너는 해도 되고 나는 하면 돼서 물어보냐 새끼야?"
적의가 다분한 김현우의 대답.
그러나 형체 없는 자는 그의 대답에 신경 쓰기는커녕 오히려 슬쩍 고민하는 듯하더니 금방 답을 찾았다는 듯 입가의 미소를 다시금 만들어냈다.
"그렇군, 기술자처럼 조각이 아닌 원천의 업을 얻은 것인가? 이것 참 대단하군! 기술자는 '조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업을 얻지 못했는데 자네는 그 업을 떡하니 자기 것으로 만들다니."
-역시 자네는 대단하군, 파보면 파볼수록 계속해서 더한 욕구가 들게 만들다니……!
"……개 또라이 새끼 진짜."
혼자서 환희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여는 형체 없는 자를 보며 김현우는 자신의 몸을 체크했다.
그의 몸은 야차와의 싸움으로 얻었던 범천의 업에 의해 완전히 재생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새롭게 창조되었다고 보는 게 옳을 정도로, 그의 몸은 박살 나기 이전과 달리 깨끗해졌다.
그러나.
'……이대로 질질 끌다가는 금방 한계가 올 것 같은데.'
그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은 결코 무한하지 않았고, 지금 당장은 다시 싸울 수 있어도 결국 어느 순간에는 한계가 올 것이었다.
그러나 저 녀석은?
"……."
형체 없는 자는 처음과 비교했을 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느껴지는 압박감은 아직도 건재했으며,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기운은 아직까지 사그라들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완전 개사기네."
그 생각이 끝나자마자 김현우의 입가에서 튀어나온 한마디.
형체 없는 자는 그 중얼거림을 듣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기? 무엇이 사기라는 거지?"
김현우는 입을 다물었으나 형체 없는 자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혹시 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힘을 말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즉사 직전까지 가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회복할 수 있는 재생력? 그것도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네게 보여준 업들을 말하는 건가?"
그는 즐겁다는 듯 자신이 보여주었던 능력들을 하나하나 말하며 김현우를 바라봤으나,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김현우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이 짧은 시간 내에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최대한 몸 안쪽으로 마력을 돌리는 중이었다.
물론 형체 없는 자도 그런 김현우의 행동을 눈치채고 있는 듯했으나, 그는 그런 것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문자답을 계속해 나갔다.
"만약 그것들을 생각하는 거라면 자네는 뭔가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거지.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당연한 것'이니까."
"……당연한 거라고?"
"그래, 모든 것은 당연한 것이지. 내가 아무리 네 공격을 받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재생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끊임없이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게다가 내가 사용 한 업들까지 합치면-"
-그건 당연하다는 말을 넘어서 필연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왜냐고?
김현우는 묻지 않았다.
오히려 지독히도 냉정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
그런데도 형체 없는 자는 혼자 연극을 하듯 자랑스럽게 양팔을 쫙 펼쳐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이 '탑'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니까!"
"……뭐?"
그 말에, 김현우는 처음으로 반응했고 형체 없는 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김현우, 너는 어째서 이런 구조의 탑이 있다고 생각하지?"
"……."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나? 탑을 오르며 퀘스트를 클리어해 최상층까지 오르면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는 이 탑이 정말로 이상하지 않나?"
-물론 탑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탑은 지극히 이상적이지. 소원을 들어주니까.
"하지만 이 탑에서 보면?"
"……이 탑에서?"
"그래, 탑을 오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탑은 지극히 이상적인 탑이다, 그러나 탑에서 봤을 때, 이 구조는 굉장히 모순적이지."
-얻는 게 없거든.
"오히려 잃는 게 더 많다. 그렇지 않나? 올라오는 녀석들에게 업을 나누어 주고, 이 탑을 계속해서 보수해야 한다."
-그래, 언제까지고 계속. 하지만,
"그렇게 비효율적이기에, 나는 당연한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당연한 것들을?"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문득 깨달았다는 듯 두 눈을 형체 없는 자에게로 향하며 말없이 입을 벌렸다.
"……설마"
확실히 이 탑은 지극히 모순적이었다.
등반자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이상적인 탑이었으나.
탑을 만든 입장에서 보면, 이 탑은 굉장히 비효율적인 탑이었다.
결국 이 탑의 구조를 보았을 때, 탑을 만든 이가 얻는 이득은 없었으니까.
그래, 겉으로만 보면.
"그래!"
김현우의 표정을 읽은 듯, 형체 없는 자는 더 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너희들에게 '이상적인 꿈'을 제공하는 대신, 이 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업을 가지게 되는 거지."
그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김현우는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번 정도 해본 적 있었고, 실질적으로 아브나 노아흐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렇게 던진 질문에 아브나 노아흐는 답변을 내놓지 못했고, 김현우 또한 그런 진실보다는 당장 앞에 일어날 일을 풀어나가는 것에 급급했기에 그렇게 큰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알겠나? 이 탑에서 일어난 모든 상황은 내 업으로 만들어지고,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이 말이다!"
"하……."
마치 대단한 사실을 공개하듯 환희에 차서 말하는 형체 없는 자의 모습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김현우의 머릿속에선 지금까지 오랫동안 기억 한켠에서 꺼내지 않았던 그 단어가 떠올랐다.
그 단어는 바로 '패배'라는 단어.
왜인지는 몰랐다.
애초에 김현우는 아무리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있더라도 '패배'라는 단어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고아원에서 생활을 이어나갔을 때도 그랬으며, 고아원을 나와 군대에 갔을 때도 그랬고, 군대를 전역해서 탑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 탑 밖에 나왔을 때도, 김현우는 항상 패배에 가까운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어떻게든 발악해 다가오는 패배에 순응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승리를 향해 달려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눈앞의 상황에 지독하리만치 선명하게도 '패배'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갑자기……?'
어째서지? 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그 상황에 관해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본능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의 뇌리 속에 박힌 단어였으니까.
김현우는 형체 없는 자를 바라봤다.
조금 전의 말을 끝낸 뒤로는 마치 행동을 감상하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자신을 지켜보기만 하는 그.
"……."
그와 눈을 마주친 김현우는 한순간 자신의 눈을 내리깔려다 말고 이를 악물고서는-
"그래서, 어쩌라고?"
-이내 씹어뱉듯이, 형체 없는 자에게 말했다.
"어쩌라고라니? 나는 네 질문에 대답해 줬을 뿐이다."
"질문에 대답은 씨발. 중간부터 아무 말도 안했는데 지 좋다고 좆대로 떠들어 대곤 갑자기 아닌 척하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머릿속에 떠오른 패배라는 단어를 억지로 지워버렸다.
이상하게도 패배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떠올랐으나, 김현우는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래, 계속해서.
그로 인해 김현우의 눈빛이 날카로워진 것을 확인한 것일까.
형체 없는 자는 유쾌한 듯이 미소를 짓곤 말했다.
"네 머릿속에 든 생각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있는 중이로군."
"네가 뭘 안다고 지랄이야?"
"당연히 잘 알지 않겠나? 결국 어찌 보면 너는 내가 만든 피조물 중 하나지 않나?"
"지랄도 정도껏 해야 개성이라고 받아주는 건 아냐?"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김현우.
그에 형체 없는 자는 김현우의 답변을 유쾌하다는 듯 받아넘기곤.
"그래 뭐…… 사실, 이 정도로 꺾이면 나도 살짝 풀이 죽을 뻔했군. 나쁘지 않아. 정말로 자네는 미식을 즐기기에는 아주 최적의 음식이야."
-그러니까.
"이제 나도 슬슬 에피타이져를 맛봤으니, 본격적으로 미식을 한번 즐겨보도록 하겠네."
이내 그렇게 말하며-
"!!!"
-김현우의 앞에 도달했다.
280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에게 있는가 (1)그 순간의 움직임에, 김현우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반응할 수 없었다.
꽝!
다음으로 느껴지는 건 끔찍한 고통과 함께 날아가는 자신의 몸.
김현우는 곧바로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며 곧바로 다음 일격을 준비하고 있는 형체 없는 자에게 대응하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마치 소닉 붐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주변의 공기를 터트리며 날아오는 주먹.
그것을 보며 김현우는 자신만이 인지할 수 있는 그 찰나의 순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
꽈아앙!
김현우가 찰나의 순간에 들어갔음에도 형체 없는 자의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김현우의 얼굴을 후려쳤다.
김현우의 몸이 벽에 박히며 마른 나뭇가지를 수십 개 뭉쳐 놓은 듯한 스크래치를 만들어낸다.
'도대체 어떻게……!?'
그와 함께 박살 나는 김현우의 몸.
허나 그런 끔찍한 고통이 덮친 와중에도 김현우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생각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발견한 그 찰나는 분명 자신만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니, 공간이라고 하기에도 미묘했다. 그것은 그저 짧고 짧은, 그저 콤마 단위의 시간을 인식하는 것이었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그 콤마 단위의 시간에 제대로 관여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인식한 사람은 있었으나, 그 찰나의 시간을 인식하고 행동까지 같이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 단 한 명도.
꽝!
"크악!?"
이어지는 일격에 김현우는 단말마를 내질렀다.
이제 형체 없는 자는 딱히 기술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순수한 신체능력으로 김현우를 상대하고 있었다.
마치 이전까지 보여주었던 그의 업들은 모두 몸 풀기였다는 듯, 형체 없는 자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력으로 김현우를 마치 장난감 가지듯 놀고 있었다.
꽝!
방어하려 했으나 방어하지 못했고.
꽝!
반격하려 했으나 반격하지 못했다.
김현우가 조금이라도 찰나의 틈을 노려 공격을 하려 해도 형체 없는 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의 몸이 끊임없이 재생한다.
계속해서.
팔이 부서지면 팔이 재생하고
다리가 부서지면 다리가 재생한다.
순간 시야가 안 보였다 싶으면 그 시야는 다시 재생했고.
그것은 청각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몸은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김현우는 형체 없는 자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뭔……!'
김현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팔다리가 박살 나고 순간적으로 시야가 막힌 상황이 오더라도, 김현우는 포기하지 않고 형체 없는 자에게 일격을 먹이기 위해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점점 더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거지?'
형체 없는 자의 린치를 맞으면 맞을수록, 김현우는 그의 손발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맨 처음, 그가 달려들었을 때만해도 김현우는 그의 공격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찰나의 순간에 들어왔을 때는 아주 잠깐이긴 해도 그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분명 일방적으로 구타에 가까운 폭행을 당하고 있더라도 그 찰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형체 없는 자의 공격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익숙해진 그때의 기회를.
모든 공격은 그렇다.
처음 볼 때는 아무리 경악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계속해서 보고 나면 분명 익숙해지고, 또 익숙해진 만큼 대처법이 떠오른다.
김현우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기다리고 있었다.
허나-
꽈아앙!
"끄윽-!"
아무리 형체 없는 자와 싸움을 억지로 유지해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형체 없는 자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게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마치 처음부터 잡을 수 없는 존재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꽝!
이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은 형체 없는 자의 주먹이 김현우의 심장을 정확히 후려친다.
그에 따라 함몰된 김현우의 가슴 부분.
그 가슴은 서서히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으나, 그 재생 속도는 분명 처음만 하지 못했다.
그 뒤로도 얼마나 공격이 계속되었을까?
이미 김현우가 있었던 곳에는 벽보다는 여기저기 거대한 바위와 잔해가 훨씬 많아 보이는 공간이 되어 있었고.
그와 형체 없는 자가 처음 싸움을 시작할 때 있었던 고풍스러운 성의 인테리어는, 지금에 와서는 그냥 공동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망가진 공간 속에서.
"오래 버텼군."
형체 없는 자는 박살 나기 직전인 벽돌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있는 김현우를 보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역시 자네는 대단해, 그리고 또한 엄청나군.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자네는 이 탑 전체의 공격을 맞고도 지금까지 버틴 거야."
고작 탑에서 만들어진, 등반자의 힘을 시험하기 위한 일개 부품인 자네가 말이야.
형체 없는 자의 어찌 보면 모욕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김현우는 현재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상반신은 형체 없는 자의 마지막 일격으로 인해 완전히 개박살이 나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의 몸은 분명히 재생하고 있었으나 이전보다는 확연히 느린 상태로 서서히 재생되고 있었고.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고 있던 형체 없는 자는 이내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아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스으으으으-
손을 들어 올리자마자 형체 없는 자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는 이내 검은 기운을 움직여 김현우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김현우는 뒤늦게 뼈가 재생되어 억지로 시선을 올려 형체 없는 자를 바라봤으나.
"그럼, 편하게 가도록하게. 뭐, 이 탑 안에 있던 자네가 죽어봤자 결국 이 탑 안에서 또 소모품으로 쓰일 테지만, 그래도 '지금'의 자네는 내 감탄을 자아내게 할 만했네."
형체 없는 자는 더 이상의 놀이는 끝이라는 듯 자신의 손에서 나온 검은 기운으로 그의 몸을 덮어 나가기 시작했다.
김현우는 습관적으로 검은 기운들을 떼기 위해 자신의 손을 휘적거리려 했으나, 더딘 상반신의 회복력 때문에 양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고개뿐.
김현우는 그렇기에 망연한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형체 없는 자를 바라보았고.
"그럼, 미식을 즐기도록 하겠네."
이내 들려온 그의 목소리와 함께, 김현우의 몸은 완전히 검은색의 기운으로 덮여졌다.
형체 없는 자의 검은 기운에 몸이 둘러싸이자마자 김현우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이 재생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리고 그때가 돼서야, 김현우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 한 단어를 생각하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패배.
형체 없는 자와 싸우며 김현우의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떠올랐으나 그가 억지로 지워버렸던 그 단어가, 김현우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아니 이 새끼, 위로 올라오라니까 여기서 누우려고 하네?]
김현우는 눈을 보았다.
####
캉! 카가가가각!
천마는 자신의 앞에서 쉴 새 없이 검무를 추는 무가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깡!
그의 검이 크게 위로 올라 천마의 머리를 노리며 휘둘러졌으나.
-까가각!
천마는 그다음 순간 그의 검이 자신의 하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짜증나는군."
그리고 한동안 그런 검무를 받아낸 천마는 무가자의 검술에 담백한 평가를 남겼다.
그래,
그의 검무는 같은 검사로서 굉장히 상대하기 힘든 류의 무엇인가였다.
검무는 기본적으로 빈틈이 없었다.
천마가 아무리 틈을 파고들려고 해도 그는 절대 틈을 내어주지 않았고, 그가 원거리에서 일방적으로 검격을 날려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허나 성가신 것은 그런 방어뿐만이 아닌, 정작 그 검무에서 쏟아져 나오는 공격 때문이었다.
깡!
"개지랄을 떠는군."
천마는 중단을 노리던 검이 갑작스레 자신의 머리를 노리는 찰나의 순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검술이 짜증나는 이유.
그것은 바로 검로 때문이었다.
까가가각!
그것은 어떻게 보면 검사가 배우고 있는 검술의 기원을 알아 챌 수 있게도 해주었고.
깡!
그것은 또 어떻게 보면 그 검사의 개성을 표현한다고 해도 될 정도로 수많은 검사들에게는 제각각의 검로가 있다.
그것이 이제 막 검을 잡은 이든, 수십, 수백 년을 살아 검을 휘두른 검사든.
그것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눈앞의 검로는?
"쯧."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다.
아니, 뒤죽박죽이라는 말보다는, 그의 검로는 없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정도로, 그의 검은 무척이나 자유분방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검은 무척이나 훌륭하게도 공방일체(攻防一體)를 만들어 내 천마의 공격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공격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고, 무가자 또한 그런 천마를 보더니 추고 있던 검무를 멈춘 뒤 그를 바라봤다.
"포기한 건가?"
"지랄하지 마라. 잠깐 생각중이니까."
천마의 대담에 무가자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아서라, 너는 나를 못 이긴다. 물론 내 검을 읽고 막는 실력을 보아하니 어디서 제법 검을 휘둘렀던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그의 말에 천마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노인네가 노망이 났군,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 네 검은 지금까지 내게 한 번도 닿지 않았다."
"그건 네 검도 마찬가지 아닌가. 게다가-"
무가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품 안에서 하나의 검을 더 꺼냈다.
"나는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검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의 검을 꺼낸 무가자는 이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천마를 바라보았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천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그게 네 전력이냐?"
"우스워 보이나?"
"그래, 우스워 보이는군."
"과연 이후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나?"
무가자가 두 개의 검을 쥐며 본격적으로 자세를 취하자 천마는 그와 마찬가지로 검을 바로 쥐고는 말했다.
"역시 노인네가 노망이 나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군."
"뭐라고?"
무가자의 되물음에 천마는 피식하는 웃음을 짓고는-
"내가 우스운 건 네 녀석이 검을 두 개 꺼내서가 아니라-"
"!!"
이내 무가자의 앞으로 움직였다.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찰나의 순간에 자신의 앞에 도달한 천마의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두 개의 검을 이용해 검무를 돌기 시작했다.
캉!
무가자의 검무에 의해 그의 몸에 닿기 전에 튕겨져 나간 천마의 칼날.
그에 무가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천마를 바라봤고.
"!!"
이내 그는 천마가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지지직-!
그것은 그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찌르기의 자세였다.
양발을 앞뒤로 벌리고 오른손을 뒤로 당긴 찌르기 자세.
허나 그런 간단한 찌르기의 자세에서 순간 튀어나온 푸른 전격을 본 무가자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며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바로 네 녀석만 전력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무지가 우습다는 거다."
-이미 천마는 푸른 전격으로 이뤄진 일격을, 무가자에게 내지르고 있었다.
281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에게 있는가 (2)딱히 인테리어라고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어두운 공간에서, 지천은 전투를 시작하기 전과 확연하게 바뀐 풍경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저 밋밋하게 아무런 인테리어도 되어 있지 않은 그 풍경은 전쟁터와 같이 변해 있었다.
허나 고작 밋밋하게 있던 풍경이 전쟁터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지천은 놀라지 않았다.
"……하!"
그는 시선을 똑바로 해 손오공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등 뒤에는 광배를 달고,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붉은 투기를 뿌리며 그 자리에 서 있는 손오공.
그 발아래에는 지천이 데려온 '그분'의 잔재들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잔재'라기보단, 형체 없는 자가 수십 개의 업을 뭉쳐 만들어낸 '존재'라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렸다.
그런데-
"……."
지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오공과 발아래에 쓰러져, 이제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는 잔재들을 바라봤다.
그 모든 일들은 손오공이 한 것이었다.
그래, 그저 자신의 업을 전부 되찾았을 뿐인 손오공이, 형체 없는 자의 잔재를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다수를.
그리고 거기에서 지천이 더 놀란 이유는, 바로 손오공이 형체 없는 자의 잔재를 처리한 방법 때문이었다.
"……분명, 분명히 그건."
지천은 아까 전 자신이 보았던 풍경을 상기했다.
맨 처음, 그가 잔재를 상대할 때 내뿜었을 때의 압도적인 존재감.
지천에게 있어서 그것은 상정 내였다.
그는 형체 없는 자에게 손오공이 자신의 업을 다 찾았을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그렇기에 그것은 상정했었고, 그가 잔재를 세 명 데려온 것도 손오공이 업을 다 찾았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다음에 일어날 일을, 지천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그건, 대체……."
잔재와 손오공이 싸움을 시작하려는 직전.
지천은 그 직전의 순간에, 거대한 산을 보았다.
그래 거대한 산을.
분명 이곳에서는 없어야 할 거대한 산.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천은 갑작스레 주변의 풍경이 변화하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거대한 산이 보였고,
그 옆으로 나무가 만들어졌다.
분명 차가운 벽돌바닥이었던 것은 흙내음이 나는 갈색의 토지로 바뀌었고, 그 주변에는 온갖 나무들과 바위, 그리고 산이 들어섰다.
한 마디로, 손오공이 싸움을 시작하려는 순간, 지천은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전이했었다.
아니,
그것을 전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까?
그때 일어난 일을 전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이상했다.
그도 그럴 게 주변의 풍경이 산으로 변할 때도, 그리고 완전히 변하고 나서도 그는 전혀 마력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조금 전, 손오공이 잔재들을 전부 처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지천이 상상했던 것을 상회하는 압도적인 힘으로 잔재들을 모두 처리하고 난 뒤 그 공간에서 다시 지금의 풍경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마력을 움직임을 체크하지 못했다.
그리고 곧 그것은 손오공이 전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좀만 더 생각해 보면 이곳은 형체 없는 자가 지배하고 있는 공간으로 애초에 전이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것은 원래부터 불가능한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지천은 그 말도 안 되는 풍경을 떠올리며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도 못했고.
"내가 말했지 틀딱아? 넌 날 못 이긴다니까?"
"……!"
지천은 곧 사라져가는 잔재들을 넘어 자신의 앞에 도달한 손오공을 보며 허탈한 표정을 짓고는 물었다.
"도대체, 그건 무엇이지?"
"그거?"
"……네 녀석이 보여주었던 그 풍경 말이다. 분명 그것은 전이가 아니었다. 그래, 그건 전이가 아니었어……! 도대체 뭐냐! 도대체 넌 무엇을 한 거냐……!"
평소보다 격앙된 목소리로 입을 여는 지천.
그에 손오공은 피식 웃으며-
파삭-!
"쿠학?!"
그의 심장에 여의봉을 박아 넣었다.
순식간에 길어 늘어난 여의봉은 단숨에 지천의 심장을 뚫어 그의 생명을 앗아갔고,
"어이 틀딱, 내가 그걸 알려줄 것 같아?"
"이, 이런 원숭이 새끼……!"
지천은 그 말과 함께 급격하게 그 눈동자에서 생명의 빛을 잃어갔다.
지천은 뒤늦게라도 자신의 몸에 박혀 있는 여의봉을 빼기 위해 몸을 비틀었으나, 그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이미 제천대성의 손에 쥐고 있는 여의봉은 길어져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거기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있는 여의봉을 힘겹게 붙잡는 것뿐이었다.
지천의 눈빛에 서서히 생명이 꺼져가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제천대성은 이내 선심이라도 쓰듯 입을 열었다.
"뭐, 그래도 내가 네놈처럼 마음이 밴댕이 소갈딱지인 것도 아니니, 알려주도록 하지."
"!"
일순 커진 지천의 눈.
손오공은 말했다.
"네가 본 것은 화과산(花果山)이다."
"화과……산?"
지천은 생명의 빛이 꺼짐과 함께 서서히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정신을 억지로 위로 떠올리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분명 그것의 이름을 지천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니, 들어본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했을 때 그 산의 이름은 굉장히 낯이 익었다.
그렇게 얼마나 생각을 이어나갔을까.
지천은 자신의 정신이 수면에 완전히 잠기기 전, 자신이 생각했던 그 이름을 어디서 그렇게 많이 들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고.
"어떻-게……?"
지천은 의문이 어린 마지막 말을 남김과 조금 전 잔재와 같이 재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사라질 동안 그 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있던 손오공은, 이내 지천의 시체가 모두 사라짐과 동시에 가볍게 여의봉을 원래의 크기로 줄이고는 주변을 돌아봤다.
그리고-
"?"
손오공은 곧 이 넓은 공동의 끝에 하나의 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있었던가?'
그는 순간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전의 기억을 떠올렸으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런 문을 발견한 기억이 없었던 것 같았다.
결국 그렇게 한참이나 생각을 이어하던 손오공은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문으로 다가갔다.
'뭐 있었으면 어떻고 없었으면 어때?'
길이 없었다면 문제였으나 길이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길이 있다면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손오공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별다른 고민 없이 벽에 만들어져 있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흐음, 좀 늦지 않았나?"
"……야차?"
손오공은 곧 그 안에 마련되어 있는 자그마한 원형 공간 가운데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야차를 볼 수 있었다.
####
김현우는 어둠 속에서 생겨난 눈을 보았다.
자신의 몸에 절반 정도 크기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눈.
[뭐야, 설마 정신까지 같이 날아갔냐?]
한심하다는 듯 김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여는 눈동자를 보며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는……?"
[뭐야? 아직 정신은 안 날아갔네? 그러면서 왜 말은 씹어? 게다가 설마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
마치 속사포 같이 터져나오는 눈동자의 말.
김현우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 말했다.
"저번에 부를 때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더니 왜 이럴 때 나타나서 지랄이야?"
[뭐야 기억하고 있네?]
눈동자의 말대로 김현우는 그 거대한 눈동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범천의 업을 얻었을 때…….'
눈동자는 분명 범천의 업을 얻고 그가 자신의 몸에 범천의 업이 제대로 정착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만났었다.
그것도 원래 김현우가 있던 곳이 아닌 허수 공간에서.
그렇게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눈동자는 김현우에게 이런 저런 쓸데없는 말을 하고는 결국 마지막에 '위로 올라와라'라는 말 한마디만을 남긴 채 사라졌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넌 또 어떻게 튀어나온 거야?"
김현우는 분명 자신의 시야가 어두워지기 직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애초에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이었으니까.
자신은 분명 형체 없는 자의 싸움에서 졌고, 결국 그가 내뿜는 검은 안개에 갇혔었다.
김현우가 자신의 처지를 상기하며 눈동자를 바라보자 그는 별 대단한 것 없다는 듯 눈을 느슨하게 뜨며 대답했다.
[어떻게 튀어나오긴? 나는 내가 원하면 그 어디에든 나타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실제로 지금 실시간으로 업을 빨리고 있는 네 앞에 나타났지.]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업을 빨리고 있다니?"
[말 그대로, 너는 그 녀석한테 한 끼 식사로서 네가 모아왔던 업을 하나하나 내주고 있다 이 소리야. 이대로 가면…… 대충 10분 정도면 모든 업을 꿀꺽하고 너는 소멸당하겠네.]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눈동자.
그에 김현우는 답했다.
"그래서 방법은?"
[무슨 소리야?]
"방법 물어보고 있잖아. 여기를 빠져나갈 방법 말이야."
그의 물음에 눈동자는 순간 어처구니없다는 눈동자로 김현우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그럼 네가 아니면 누구한테 물어봐? 애초에 뭐 알려주려고 내 앞에 나타난 거 아니었어? 아까도 나한테 올라오니 마니 했잖아?"
[아니, 그렇긴 한데……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니까 뭔가 좀……]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며 어이가 없다는 눈동자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확실히 눈동자가 지금 김현우의 앞에 나타난 이유는 지금 상황에 의해 조금의 해답을 담아주기 위해서였으나 막상 김현우가 당당하게 요구하니 왠지 모를 떨떠름함이 느껴졌다.
눈동자가 떨떠름함을 덜기 위해 가벼운 한숨을 내쉬자 김현우가 툴툴거렸다.
"안 알려줄 거야?"
[알려줄 거니까 조금만 조용히 하는 게 어때? 솔직히 지금 안 알려주고 그냥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는 중이거든?]
눈동자가 짐짓 협박 가득한 어조로 김현우를 보며 이야기 하자, 김현우는 말했다.
"진짜?"
그의 되물음에 김현우를 째려보는 눈동자.
허나 이내 그 눈동자는 자신이 졌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당당한 성격을 조금만 유하게 바꾸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눈동자는 이내 자신의 눈동자를 한번 좌우로 움직이고는 입을 열었다.
[근데 뭐,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 해봤자 간단한 것밖에 없어.]
"……그건 또 뭔 소리야?"
[의미 그대로의 이야기야. 뭐, 당장 내가 여기에 와 있다고 해도 너한테 힘을 주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거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간단한 말뿐이야.
[이제 내 말을 어떻게 알아듣느냐에 따라 네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이 말이지.]
"아니, 뭘 그렇게 도움이 될 듯 말듯하게 알려줘? 내가 위로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니야?"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눈동자는 곧바로 답했다.
[그건 맞지. 근데 내가 지금 이 시점에서 해줄 수 있는 도움은 조언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를 마주 보곤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오물거리더니 이내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그 조언이라는 건 뭔데?"
그리고 그런 김현우의 물음에-
[거짓에 현혹되지 마.]
-눈동자는 그렇게 말했다.
282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에게 있는가 (3)
"……거짓에 현혹되지 말라고?"
[그래, 정확히 말하면 의심 없이 진실을 마주 보라 이 말이지.]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또 뭔소리야?"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돼. 거짓에 현혹되지 말고, 진실을 마주보라 이거지. 아니, 이 경우에는 진실을 꿰뚫어보라고 말해야 하나?]
자신의 눈꼬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고민하는 듯한 눈동자.
그에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곰곰이 생각을 해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니까 말이야.]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좀 제대로 된 도움 없어?"
[예를 들면?]
"그런거 있잖아? 사실 지금 저 연기 빽빽 피워대는 놈의 약점은 어디고, 어떤 공격 같은 걸로 때려박으면 효과가 있고…… 뭐 그런 거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눈꼬리를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게임인 줄 알아?]
"말 그대로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거지. 한 마디로 내 말은 좀 직관적이게 도움을 줄 수는 없냐 이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노골적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불가능해.]
"왜?"
[사실 지금 내가 말해준 것보다 직관적인 조언은 없거든.]
"……뭐?"
[왜 너는 똑같은 걸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게 하는거야? 내가 말 했잖아? 지금 내가 해준 조언보다 더 직관적인 건 없다니까?]
"……거짓에 현혹되지 말고 진실을 마주보라는 소리가 직관적이라고?"
[그 정도면 충분히 직관적이지, 지금 네가 상대하는 녀석의 약점에는 말이야.]
"이게 어떻게 직관적이 돼?"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이자 눈동자는 대답했다.
[충분히 직관적이거든? 오히려 이 이상 말해주면 오히려 너한테 독이 될 정도로 직관적이야.]
"이 이상 독이된다는 소리는 또 뭐야?"
[말 그대로 이 이상 더 근접해서 내가 진실을 말해주게 되면 지금 당장 몇 할 되지 않는 네 승률은 한방에 0%가 될 거거든.]
김현우의 물음에 그는 저도 모르게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는 이야기했다.
"지금 네가 하는 말 때문에 머리가 더 복잡해지고 있다는거 알지?"
[그래도 어떻게 상대할지 몰라서 머리가 텅텅 빈 채 꼬라박기만 하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아?]
"……맞는 말이기는 하네."
눈동자의 말에 무엇이던 대답하려고 했던 김현우는 이내 입을 오물거리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눈동자의 말이 백번 옳았으니까.
"……그럼 해줄 수 있는 조언은 그게 끝이라는거야?"
[맞아, 이게 끝. 뭐 그리고 여기에 조금 더 첨언을 덧붙이자면, 애초에 '믿지 않으면'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거야.]
"……믿지 않는다고?"
[이걸로 정말 끝. 어차피 이 상태로 질문만 계속해서 받아봤자 제자리를 빙빙 맴돌뿐이니까 나는 다시 사라지도록 할게.]
아참-
[그리고, 좀 급하긴 해도 생각할 시간은 느긋하게 있어. 지금 이곳은 '순간'속이니까, 충분히 고민하고 난 뒤에 다시 시작해 봐.]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며 서서히 눈꺼풀을 감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그런 눈동자를 부르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 말대로 어차피 이 이상은 시간만 소모하고 이야기가 맴돌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눈동자가 완전히 눈을 감을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마침내 그 눈동자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가 돼서야,
"……."
김현우는 이 안이 눈동자의 말처럼 찰나의 시간처럼 느리게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 자신의 몸에서 은은하게 무엇인가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업이 흡수당하고 있는 건가?'
눈동자의 말을 상기한 것으로 김현우는 자신의 안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 형체 없는 자가 자신의 업을 흡수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최대한 생각해 보자.'
어차피 그를 제대로 상대할 만한 생각이 나지 않으면 그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고, 어차피 당장 힘이 흡수당하더라도, 이 찰나의 순간에서는 무척이나 작은 힘만이 그에게 흡수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생각했다.
'거짓에 현혹되지 말고, 진실을 마주보라는 소리가 대체 뭐지?'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바로 눈동자가 자신에게 말해주었던 조언.
김현우는 그가 말했던 것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중얼거리며 생각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거짓에 현혹되지 말라는 소리는 뭘까?
그와 반대로 진실을 마주보라는 소리는?
이 이상 알려주면 내 승률이 0%가 된다는 소리는 또 뭐였을까?
믿지 않았으면 애초에 이럴 일도 없었다는 소리는??
수많은 생각이 김현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났으나 김현우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눈동자가 말한 그 의미에 대해서.
'분명 그 녀석이 내게 쓸데없는 정보를 주진 않았을 거야.'
물론 김현우가 그 눈동자를 만나 것은 기껏해야 두 번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현우가 그 눈동자를 믿는 이유는 바로 눈동자의 행동 때문이었다.
'애초에 내가 죽기를 바랐으면 조언 따위는 해주지도 않았겠지. 아니, 애초에 내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거야.'
그렇기에 김현우는 눈동자가 말해준 그 두 개의 조언 안에 분명 형체 없는 자를 이길 수 있는 종류가 있다고 생각했고-
"……!"
김현우는 문득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분명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없는 생각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었으나, 만약 이렇게 생각했을 경우 눈동자의 조언이 맞아 떨어졌다.
허나 그것은
'설마?'
라는 생각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김현우에게 있어서 너무 어처구니없는 상상과도 같았으니까.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사기적이였기 때문에.
김현우는 그 설마라는 생각에서 나아가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저울질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실제의 시간으로는 아직 1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허나 김현우의 의식은 이미 가볍게 며칠을 지나고 있었다.
물론 그조차도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으나, 그는 계속해서 그 한 가지의
'설마?'
를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이전에는 수많은 가능성중 하나를 찾느라 시간을 소모했다면.
이번에는 가능성 중 하나에 확신을 부여하기 위해 소모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후"
그 깊은 고뇌의 끝에서, 김현우는 결국
'설마?'
라는 하나의 가설을 하나의 확신으로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었고.
"자, 그럼-"
김현우는 새카만 어둠을 향해 힘껏 손을 뻗었다.
콰지지직!
그리고- 어둠이 깨져나갔다.
####
완전히 부숴진 공동.
그곳에서 형체 없는 자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어둠에 감쌓여진 김현우를 바라보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역시 내 예상대로야! 최고로군!'
형체 없는 자는 자신의 손에 흘러들어오는 김현우의 업을 빨아들이며 이 1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몇 번이나 탄성을 터트렸다.
그가 김현우에게서 흡수하는 업은 그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흡수한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업이었으니까.
"후…… 후우……."
엇박으로 숨을 쉬어가며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오는 업을 느끼는 형체 없는 자는 아주 옛날, 자신이 처음으로 다른 이의 업을 흡수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맨 처음으로 타인의 업을 빼앗았을 때.
그때 느꼈던 고양감은 그야말로 최고를 넘어 극상이라고 표현하는게 맞을 정도로 달콤했었다.
비록 그가 얻었던 업은 그저 한 톨 정도의 작은 업이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달콤한 쾌감을 느꼈었다.
그것은 분명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었으니까.
물론 시간이 지나고 그가 서서히 남의 업을 흡수하는 빈도가 늘어나게 되며 그가 처음에 느꼈던 쾌감은 점자 사그라들었다.
정확히는 그 쾌감이 사그라든 것이 아닌, 그가 쾌감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형체 없는 자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더욱 많은 업을 탐냈고, 또 질이 좋은 업을 탐했다.
하지만 그가 이 탑을 만들고, 결국 수시로 이 탑에서 올라오는 업을 흡수하게 되었을 때, 그는 문득 자신이 느꼈던 쾌감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많은 업을 한 번에 흡수한다고 해도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쾌락을 느낄 수 없었고.
그의 능력 또한 정체되었다.
그렇기에 그는 고민했고, 곧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깨달았다.
뭐, 그 정답이야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것이었다.
한번의 많은 양의 업을 흡수하는데 익숙해졌고.
질 좋은 업을 흡수하는 데 익숙해졌다위업을 흡수하는 것도 담담해졌고.
탑에서 뽑아낸 업들을 흡수하는 것에도 담담해졌다.
분명 끊임없이 업을 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에 너무나도 담담해졌기에, 그리고 항상 흡수하던 것만을 흡수했기에 이렇게 정체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이 정체되어 무료한 상태에서 나타난 그.
'김현우'의 존재는 형체 없는 자에게 무척이나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번도 흡수하지 못했던, 새로운 업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기대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편하게 업을 흡수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곳에서 나타난, 어찌보면 단순한 이레귤러였으니까.
허나 그가 등반자들을 처리하고, 내려 보낸 정복자를 처리했을 때부터 그는 김현우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거의 마지막에 와서는 그의 업을 흡수하기 위해 '위'와의 약속까지 어겨가며 그를 최상층에 초대했다.
그리고, 지금 김현우의 업을 흡수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졌다.
아니, 확신을 가진 것을 넘어 이런 선택을 한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로, 형체 없는 자는 김현우의 업을 흡수하며 느끼는 쾌감에 젖었다.
그래서 형체 없는 자는 일부러 그의 업을 흡수하는 속도를 줄였다.
원래라면 형체 없는 자에게 이 정도의 업은 3분 정도만 있어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업이었지만, 그는 이 순간을 그렇게 빨리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형체 없는 자는 일부러 김현우의 업을 흡수하는 속도를 극도로 줄였다.
최대한 오랫동안 김현우의 업을 흡수하며 쾌감을 느끼기 위해.
물론 형체 없는 자는 이 어둠속에 갇혀 있는 김현우가 깨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깨어나 봤자 그가 자신을 이길 일은 없었으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는-
"……!"
형체 없는 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만들어 놓았던 어둠을 뚫고 나온 손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김현우의 손.
허나 그의 손은 완벽하게 재생되어 있지 않았다.
뼈는 붙어 있는 것 같았으나 외견은 아직도 상처로 가득했고, 특히 팔뚝에는 크게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어 굉장히 위급해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큰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체 없는 자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고.
형체 없는 자는 이내 어둠을 뚫고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현우의 눈을 보고.
"……!!"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283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에게 있는가 (4)어두운 공동.
"제발…… 제발!"
이산대성((移山大聖)은 자신의 앞에서 빌고 있는 여성을 바라보며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에 여성은 혹시 모를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그의 삼베바지를 붙잡고는 말했다.
"살려줘! 나는 애초에 이러고 싶지 않았다니까? 나는…… 나는 그냥 시켜서 이렇게 한 거라고! 응? 제발!"
상체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하체는 뱀의 형상을 그대로 딴 것 같은, 긴 꼬리를 가지고 있는 그 여성은 마치 애원을 하듯 그에게 달라붙어 목숨을 구걸했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산대성은-빠아아악! 파삭!
-이내 자신의 바지를 붙잡고 있는 그녀의 머리통을 그 상태 그대로 터트려 버렸다.
푸화아악! 털썩-
이산대성이 주먹을 휘둘러 머리를 터트려 버리자 그의 바지를 붙잡고 있던 여성의 몸은 힘없이 쓰러졌고.
-스으으으
이내 천천히 소멸하기 시작했다.
곧 자신을 나가라고 소개했던 정복자의 시체를 바라본 이산대성은 이내 어깨를 한번 으쓱인 뒤 자신의 몸을 뒤적거렸고-
텁- 스으-
곧 그녀와 함께 자신에게 달려들었던 '잔재'를 한번 바라본 이산대성은 이내 입에 문 곰방대를 길게 빨아들였다.
-뻐끔.
그와 함께 이산대성의 입에서 퍼져 나오는 담배연기.
그는 순간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산대성은 차근차근 기억을 맞췄다.
분명 처음에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이동진 위에서 함께 이동했다.
그런데 이동진을 타고 왔더니 자신과 함께 왔던 동료들은 없었고, 그의 앞에는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이상한찌꺼기 한 명과 여자가 있었다.
그래서 죽였다.
그게 지금 이산대성의 상황이었다.
-뻐끔
'……길을 좀 물어보고 죽일 걸 그랬나.'
그는 순간 아쉬운 눈빛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나가의 시체를 보았으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느긋하게 곰방대를 빨아들였다.
뻐금-
또 한 모금.
이산대성은 곰방대를 연달아 들이키며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다.
'길 찾기는 완전히 잼병인데.'
그는 길 찾기에 대해서는 그냥 극악이라고 해도 될 만큼 엄청난 길치였기 때문에.
그렇기에 그는 연신 곰방대를 피며 고민했고, 이내 그렇게 시선을 돌리다-
"……."
-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 문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이산대성은 그 문을 한번 바라보고는 왠지 느껴지는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였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문 앞에 도달한 그는 곧바로 문을 열었고.
"왔군."
"이걸로 다 온 건가?"
"……?"
이산대성은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손오공과 자신들의 형제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뭐야, 나만 저기에 떨어진 거였어?"
그는 시선을 돌려보더니 자신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들이 전부 모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리 물었고, 그에 손오공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아니, 우리도 다 따로 떨어졌지."
손오공은 그리 말하며 원형 경기장에 붙어 있는 수많은 문을 손가락질했고, 이산대성은 손오공의 손가락을 따라 주르륵 붙어 있는 문을 한번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마지막으로 온 거야?"
"맞아."
"이번에도 길 찾느라 늦었냐?"
평천대성이 씨익 웃으며 장난을 치자, 이산대성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곰방대를 한 모금 빨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번엔 저번처럼 늦지는 않았잖아?"
"그래, 그래도 그때보다는 빨리 왔구나."
이산대성이 오래 전, 평천대성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몸을 옮기다 저도 모르게 길을 잘못 들어 천계 일주를 했을 때를 떠올리며 말하자 평천대성은 유쾌하게 웃으며 동의했고.
"그래서,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설마 이미 전부 끝난 거?"
이산대성이 입을 열며 주변을 돌아보자 이번에는 야차가 대답했다.
"물론 끝난 게 아니니라.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겠구나. 애초에 우리가 상대했던 것들은 전부 그 녀석의 장기말이었던 것 같으니 말이다."
야차는 덤덤한 표정으로, 허나 자세히 보면 노골적인 불쾌함이 담긴 표정으로 자신이 앉아 있는 돌기둥을 툭 쳤다.
우드득-!
분명 그녀의 몸 둘레의 몇 배는 될 것 같은 돌기둥에 금이 갔으나 야차는 신경 쓰지 않고 혀를 찼고, 이내 이산대성은 주변을 한 번 더 돌아보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니 김현우가 보이지 않는군."
그의 물음에 이번에는 청룡이 답했다.
"아마 지금 그 녀석은 싸움을 벌이고 있을 거다."
"싸움?"
"뭐…… 보나마나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아마 우리가 쓰러뜨리려고 왔던 형체 없는 자와 싸우고 있을 확률이 높지."
청룡의 말.
그에 손오공은 짜증이 나는 듯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정말로 위로 가는 방법은 없어?"
"아까부터 몇 번을 물어보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처음부터 말했듯이 김현우와 형체 없는 자가 싸우고 있는 위층으로 향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김현우와 그 녀석이 싸우고 있는 곳이 위층인가?"
"우선 느껴지는 바로는 그렇다."
이산대성의 물음에 대답한 청룡.
그는 가만히 고민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만약 그 녀석이 이 위에 있다면 부수면 되는 거 아닌가?"
이산대성의 말에 야차는 말했다.
"이미 네가 오기 전, 여기에 도착한 이들은 전부 한 번씩 해봤느니라."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이어 말했다.
"아예 꿈쩍도 안 하더군. 내 힘으로도 말이다."
야차의 말에 이산대성은 아쉽다는 듯 자신의 곰방대를 입에 물고는 뻐끔뻐끔 피워댔다.
그도 지금 이 곳에 모인 이들 중 제일 강한 이가 돌기둥에 앉아 있는 그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헌데 그녀가 천장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그녀와 비슷한 자신의 아우인 손오공이나 다른 이들도 천장을 뚫지 못한다는 것이 되었다.
그렇기에 이산대성은 괜스레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에 담배를 뻐끔뻐금 피는 것밖에 할 수 없었고.
"거, 잘하고 있을라나 모르겠네."
손오공은 마찬가지로 김현우의 기운이 느껴지는 하늘을 보며,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들이 한참이나 그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
-우우우웅!
그들은 갑자기 원형 경기장의 한쪽 끝에서 나타난 타원형의 구체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이 방 안을 환하게 비출 정도로 새하얀 빛을 내뿜고 있는 하얀 구체.
그리고 곧 그 구체를 바라보고 있던 손오공은 그 안에서 나타난 이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뭐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
형체 없는 자는 조금 전 자신의 검은 기운을 뚫고 나온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이미 업을 일부분 흡수당한 탓인지 신체의 재생은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공격당했던 그의 상체는 당장 치료가 보일 정도로 위급해 보였다.
한 마디로, 지금 형체 없는 자의 눈에 보이는 김현우의 모습은 전혀 그에게 위협이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형체 없는 자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입을 열 수 없다기보단 그는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바로 그가 보고 있는 다른 것.
그건 바로 김현우의 눈동자였다.
그의 눈은 분명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흑안.
그래, 김현우의 눈동자는 분명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고, 특별한 외관상의 변화나 안쪽의 변화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체 없는 자는 김현우의 눈 속에서 지독하리만치 심각한 위화감을 느꼈다.
정확히는 위화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것은 그가 분명 오래 전에 느꼈던 감정, 허나 그는 그 감정을 순간 정확히 정의할 수 없었다.
그는 그 감정을 느낀 것이 무척이나 오래 전의 일이였으니까.
그렇기에 형체 없는 자가 갑작스레 느낀 감정을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야,"
김현우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어 보였다.
분명 본인은 자신감 있는 목소리를 내려고 했던 것 같았으나, 상체가 완벽하게 재생되지 않은 덕에 그의 목에서는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조금 전 일어났던 몸도 살짝이지만 비틀거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좋아 보이진 않는 상황.
그럼에도 형체 없는 자는 위화감을 느꼈고.
"얼굴이 굳었네? 왜 그렇게 굳어 있어?"
김현우의 이죽거리는 말투에 형체 없는 자는 저도 모르게 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굳어 있다니? 무슨 소리지?"
그의 물음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야, 표정이 굳어 있다고. 분명 조금 전만해도 미친 새끼처럼 실실 쪼개고 다니더니 왜 갑자기 그렇게 표정이 굳었냐 이 말이지."
"……."
김현우의 말에 형체 없는 자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이상했다.
'어째서 이러지?'
형체 없는 자는 분명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우의 업을 최대한 오랫동안 즐기기 위해 그는 업을 최소한으로 빨아들였다.
그래, 그저 상정했던 상황이 일어난 것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상정하던 상황 중에서도 지금 김현우의 모습은 가장 위협이 적었다.
그는 몸을 회복시키지 못한 채로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그래.
분명 그럴 터다.
근데…….
'근데 왜?'
김현우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형체 없는 자는 문득 굳어 있던 자신의 표정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함께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서 조급함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도.
어째서 갑자기?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했으나 그 안에서 대답이 되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한동안 김현우를 보며 대치상태를 이어나가던 형체 없는 자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기 시작하는 조급함을 억지로 잠재우고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쓸데없는 저항 같은데…… 그냥 편해지는 게 좋을 것 같지 않나?"
노골적인 비아냥이 섞인 형체 없는 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분명 이전과 같았으나 오히려 김현우에게 그 목소리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뭘 편해져?"
"그렇게 열심히 저항해도 네 최후는 똑같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러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니까?"
그렇게 말하며 입가를 비틀어 올리는 김현우.
그 모습을 보며 형체 없는 자는 한 번 더 자신의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분명 그가 검은 기운에 둘러싸이기 전만 하더라도 형체 없는 자는 김현우의 웃음을 그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비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금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느껴지는 위화감.
그리고 점점 강하게 드는 조급함.
그에 형체 없는 자는 결국-
"그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면 될 일이로군."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를 향해 튀어나갔다.
그 속도는 가히 찰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빨랐다.
어쩌면 멀쩡한 상태의 김현우가 그 순간의 공간 안으로 들어갔어도 형체 없는 자의 공격을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빠른 형체 없는 자의 속도.
그는 순식간에 몸을 비틀거리고 있는 김현우의 앞에 도달해 다시 한번 그의 심장부를 향해 주먹을 꽂아 넣었다.
키이이이이이잉-!
주변의 공기가 갈려나가는 소리와 함께 쏘아져 나가는 형체 없는 자의 주먹.
그는 김현우가 주먹을 내지르는 그 순간까지도 반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입가를 비틀어 올렸으나.
텁-
"!!!"
형체 없는 자는 곧 그 뒤에 일어난 일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시 한번 뭘 깨닫게 해주겠다고?"
-김현우는 형체 없는 자가 내지른 주먹을 붙잡고 있었으니까.
284화. 심마(心魔) (1)
"무슨-!"
형체 없는 자는 자신의 주먹을 막아내곤 미소를 짓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김현우.
만약 그가 형체 없는 자의 공격을 피했다면야 어느 정도 운으로 치부하고 넘길 수도 있었으나 김현우는 그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 아닌 실제로 막아냈다.
그것도 엉망진창인 몸으로.
그의 몸은 멀쩡하지 않다.
물론 아주 미세하게 재생되고 있었으나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그의 몸은 좋지 않았다.
형체 없는 자가 이를 악물며 김현우를 바라보자 김현우는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름이 느껴지는 비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왜? 더 해봐? 설마 주먹 한 방 막혔다고 포기하는 거야?"
김현우의 도발.
형체 없는 자는 참지 않았다.
꽝!
그의 비어 있던 오른손이 곧바로 움직여 이번에는 김현우의 머리를 향해 날아간다.
이번에도 그 속도와 파괴력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번에는 그 속도와 파괴력이 더더욱 올라갔다.
키이이이이잉-!
이번에 내지른 형체 없는 자의 공격은 애초에 그 소리가 뒤따라왔을 정도로 빨랐으니까.
허나-
"힘자랑하냐?"
"!"
김현우는 어느새 형체 없는 자의 뒤에 서 있었고, 형체 없는 자의 주먹은 그가 서 있었던 벽을 때리고 있었다.
쾅-콰지지지직! 쿠구구구구궁-!
때맞춰 무너지기 시작하는 벽.
형체 없는 자는 벽에 박혀 있는 자신의 주먹을 빼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김현우를 바라봤다.
형체 없는 자의 안개에서는 더 이상 표정을 나타내는 안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만 붉게 빛나는 두 눈이 김현우를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콰가가가각-!
아무런 말도 없이 형체 없는 자는 곧바로 김현우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주먹이 순식간에 김현우를 노리고 쏘아진다.
무섭도록 빠른 속도.
분명 이전이라면 김현우는 그 속도에 대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형체 없는 자의 주먹에 몇 번이고 후려 맞았을 것이었다.
그랬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김현우는 형체 없는 자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머리를 노리고 내지를 주먹을 오른쪽으로 고개를 비틀어 피해내고, 다리를 노리고 휘두른 발을 한 걸음 물러서는 것으로 피한다.
동시에 심장을 노리고 쏘아진 주먹은 가볍게 허리를 옆으로 비틀어 피해낸다.
분명 이전이라면 해내지 못할 회피를, 김현우는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점점…… 익숙하게 피해내고 있다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김현우 형체 없는 자의 공격을 한 끗 차이에서 조금씩 여유롭게 피해 나가기 시작했다.
쾅! 콰가가가각! 쾅!
소름끼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며 김현우의 청각을 빼앗고, 사이사이에서 터져나오는 돌조각과 잔해들이 그의 눈을 가린다.
허나 그럼에도 김현우는 형체 없는 자의 공격을 피해냈다.
아니, 오히려 어느 순간-
빠아아악!
"큭!?"
김현우는 형체 없는 자의 머리에 박치기를 하는 것으로 그의 공격을 끊었다.
눈이 핑그르르 돌 정도로 고통.
형체 없는 자로서는 굉장히 오래간만에 느껴봤던 고통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고, 그는 곧 인상을 찌푸리며 김현우에게 시선을 옮겼으나-꽝!
그는 김현우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몸을 벽 한구석에 몸을 처박을 수밖에 없었다.
또 한번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형체 없는 자의 입이 벌어지고, 그렇게 벽에 처박히고 나서야 형체 없는 자는 김현우의 눈에서 느낄 수 있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형체 없는 자가 아주 옛날에 느낄 수 있었으나 지금은 잊어버렸던 '위기감'이었다.
허나 형체 없는 자는 그 위기감을 깨달은 뒤, 지금 일어난 일 덕분에 그보다 더한 감정을 떠올리고 말았다.
정확히는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준 김현우 덕분에, 머릿속에 떠오른 또 하나의 감정.
허나 그는 머리 위로 떠오르는 그 감정을 억지로 밀어 넣은 채 곧바로 벽 밖으로 걸어나가 자신을 바라보는 김현우를 마주 봤다.
여전히 그의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허나, 형체 없는 자의 눈에 김현우는 더 이상 우습게 보이지 않았다.
"네 녀석…… 대체 어떻게……!"
형체 없는 자가 이를 악물며 입을 열자,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뭘 어떻게?"
"어떻게 알아차린 거냐! 도대체 어떻게……!!"
형체 없는 자의 서슬 퍼런 고함.
그에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글쎄, 어떻게 대답해 줄까?"
김현우가 조금 전과 다르게 형체 없는 자와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이유.
그것은 그가 바로 눈동자의 조언 속에서 형체 없는 자가 숨기고 있는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뭐, 네 능력의 진실을 알았다고 답해주면 되려나?"
그래, 김현우는 형체 없는 자가 숨기고 있는 능력을, 눈동자의 조언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맨 처음, 김현우는 눈동자가 만들어 준 그 찰나의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눈동자가 해준 조언에 대해서 생각을 이어나갔었다.
김현우는 맨 처음 눈동자가 말해주었던 조언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난 뒤, 김현우는 곧 눈동자가 해주었던 조언을 '형체 없는 자'에게 대입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중에서 그는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물론 그것은 스스로 생각하고도 그저 '설마'라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치부할 만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떠올린 형체 없는 자의 특성은 바로
'내 마음가짐에 따라 그 강함이 바뀌는 게 아닐까?'
라는, 그냥 생각해 보기에도 어처구니없는 능력이었으니까.
사실 누구에게 이야기하더라도, 김현우의 그 생각은 어처구니 없는 생각 그 이상 또는 이하로 취급될 만했다.
애초부터 그것은 지극히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으니까.
물론 김현우도 처음에는 그 하나의 가능성을 그저 '설마'로 생각할 뿐, 그 이상의 가능성을 점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점점 김현우의 생각이 깊어지게 되자 그는 '설마'라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 가설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왠지 자신이 세워 놓은 그 어처구니없는 가설이 왠지 모르게 눈동자가 했던 말들과 맞아 들어간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맨 처음 김현우가 형체 없는 자를 만났을 때.
형체 없는 자의 기운은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었다.
그 이후 그는 김현우와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닌 대화를 했었고, 곧 김현우는 형체 없는 자의 말을 듣고는 인상을 찌푸렸었다.
그는 굉장히 광기 넘치고, 또한 오만한 말투로 김현우를 깔봤으니까.
그리고 그때, 아주 미세하기는 했으나 김현우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깨달았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김현우는 그저 형체 없는 자가 고의로 기운을 더 내뿜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생각했던 결과 어쩌면 형체 없는 자는 자신이 그를 강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더 강한 힘을 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맨 처음 김현우가 업을 개방했을 때, 그는 형체 없는 자를 압도했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받은 피해를 회복을 했을 때.
그의 기세는 변함이 없었고, 오히려 더더욱 늘어나 있었다.
그 이후에는 어땠는가?
그가 다른 사람의 업을 사용 할 수 있다며 자신에게 보여주었을 때, 김현우는 분명 조금 힘들기는 했으나 그가 보여주었던 다른 이들의 업을 버텨내기는 했다.
하지만 형체 없는 자의 말을 듣고 나서, 그가 본격적으로 자신을 깔보며 전투에 돌입했을 때,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강함을 보여줬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그 녀석은 그 상태에서 계속해서 강해졌다.
끝없이 공격을 할 때도 그의 공격은 점점 강해졌고.
거의 마지막에 와서 형체 없는 자는 아예 김현우가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그리고 그때의 생각을 여러 번 떠올리는 것으로, 김현우는 그 혹시나 하는 가능성을 미약한 확신으로 만들 수 있었다.
분명 그때 당시에 김현우는 그가 자신을 가지고 놀며 서서히 힘을 끌어 올리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김현우가 약한 생각을 할 때마다 점점 강해진 것이었다.
그가 끝없이 끝나지 않는 린치를 억지로 버티며 분명 익숙해져야 할 공격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했을 때 그의 공격은 더 강해졌고.
김현우가 머릿속에서 패배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도 그는 더욱더 강해졌다.
그것을 깨달은 김현우는 결국 눈동자에게 들은 조언까지 합쳐 하나의 확신을 만들어 냈고, 그 다음에는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형체 없는 자를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김현우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럴 것이, 분명 어둠에 둘러싸이기 전 느꼈던 형체 없는 자의 그 살이 떨릴 정도로 소름 끼치던 기운은 느껴지기는 했으나 더 김현우를 압박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현우에게 느껴지는 형체 없는 자의 기운은 그의 주먹을 막은 그 순간부터 더 이상 김현우를 위협할 수 없었다.
"네 녀석이 갑자기 무슨 제주로 내 능력을 깨달았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해도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김현우가 자신만만하게 형체 없는 자를 바라보고 있자. 그는 이제 이전에 썼던 그 여유로운 가면을 벗어 던지고는 상당히 격앙된 어조로 입을 열고는 그대로 김현우에게 달려들었다.
탓-!
형체 없는 자의 속도는 빨랐다.
그러나-
텁-!
"아닐걸?"
"!!"
-그의 속도는 분명 이전과 같지 않았다.
그의 주먹을 받아낸 김현우가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짓자, 형체 없는 자는 눈을 부릅뜨고는 이내 자신의 발에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의 다리에서 증기처럼 터져 나오는 검은 마력.
그 모습을 본 김현우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씨익 웃으며 형체 없는 자와 똑같은 자세를 잡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래 자신의 사용하던 기술의 자세를 잡았다.
서로의 다리에서 증기기관처럼 마력이 터져 나온다.
형체 없는 자에게서는 시커먼 기운이 마치 이 세상의 대기를 어둡게 물들이겠다는 듯 터져 나오고, 김현우의 다리에서는 새하얀색의 광휘가 그런 검은 기운에 대항해 터져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한계점이 도달했을 때, 김현우와 형체 없는 자는 너나 우선할 것 없이 서로를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아앙────삐──────!!!!
그와 함께 터져 나오는 것은 엄청난 폭발.
그러나 김현우는 그 새하얀 광휘 속에서도 시야를 빼앗기지 않은 채 형체 없는 자의 다음 행동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형체 없는 자의 뒤에는 마치 어디에선가 보았던 시커먼 색의 만다라(曼陀羅)가 피어 있었으니까.
허나 김현우는 그렇게 피어난 연꽃을 보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김현우는 준비를 시작했다.
자신이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냈던, 유일무이한 기술을 사용하기 위한 준비를.
그리고 그렇게 김현우가 자세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키이이이잉-!!
-그의 위에, 새하얀 만다라(曼陀羅)가 개화했다.
285화. 심마(心魔) (2)
형체 없는 자의 뒤에 생겨난 시커먼 만다라가 개화한다.
그와 함께 떨리는 주변 공기는 마치 망가진 라디오처럼 심한 소음을 만들어내며 주변 대기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김현우도 마찬가지.
그의 뒤에서 개화한 새하얀 만다라는 광휘와도 같은 빛을 내뿜으며 주변으로 퍼져 나오려는 검은 기운들을 막아낸다.
그리고 그 순간,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은 서로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삐──────!!
그 다음으로 들리는 것은 지독한 전자음의 소리뿐.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에도 김현우와 형체 없는 자는 곧바로 다음 공격을 주고받기 위해 움직인다.
콰아아아아아-!!
부딪히고-
꽈가가가가가각-!!!
부딪히고-
삐─────────!!
부딪힌다.
형체 없는 자는 김현우의 앞에서 계속해서 어디에선가 보아왔던 기술들을 사용하고, 김현우는 그런 형체 없는 자에게 맞춰 자신이 만든 유일무이한 기술들을 연속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찰나'의 순간에, 김현우는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형체 없는 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야는 정확히 김현우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김현우는 이 찰나의 순간에 들어온 형체 없는 자가 딱히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형체 없는 자가 우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네가 아무리 여기까지 따라와도."
"!!"
-김현우는 더 이상 형체 없는 자가 강하게 보이지 않았으니까.
"날 이길 수는 없어."
꽈아아아앙!
그 말과 함께 김현우는 형체 없는 자의 얼굴에 일격을 먹였고 동시에, 찰나의 순간은 풀렸다.
그와 함께 들리는 굉음과 땅바닥이 터져 나가는 소리.
허나 김현우는 굳이 형체 없는 자를 쫓지 않았다.
지금 당장 김현우는 조급해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김현우는 이미 마음속으로 확신했으니까.
"이 새끼……!"
-투드득!
김현우가 연기가 올라온 곳을 바라보자, 그 곳에는 오른팔이 날아간 형체 없는 자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의 표정이 악귀처럼 찌푸려져 있다는 것 또한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 김현우는 웃으며 되물었다.
"왜, 자기 약점이 까발려져서 불리해지기 시작하니까 슬슬 두려워?"
-나한테 질까봐?
그의 노골적인 놀림에 형체 없는 자는 화가 잔뜩 나 있는 어투로 이야기했다.
"자만하지 마라……!"
"무슨 자만? 이건 자만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사실이잖아? 애초에 이미 능력이 까발려진 시점에서 너는 나를 못 이긴다니까?"
김현우의 이죽거림.
형체 없는 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다. 그건 그냥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야……!"
"그래,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너를 못 이기는거야. 그렇게 당연한 말을 왜 하는 거야?"
"……!!"
그의 말에 형체 없는 자는 분노한 듯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을 사방으로 내뿜었으나 이미 그것은 김현우에게 아무런 위압을 주지 못했다.
아니,
"대체 무슨-!"
형체 없는 자의 그런 행동은 오히려 그의 힘을 역으로 더더욱 약하게 만들었다.
김현우에게 있어 형체 없는 자가 하는 일들은 그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강하기 위해 발악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런 형체 없는 자를 바라보며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김현우는.
"!"
곧바로 형체 없는 자의 앞에 나타나,
"그냥 편하게 있는 게 어떤가? 어차피 자네는 나를 못 이기니까."
씨익-
형체 없는 자의 말투를 따라하고는 그대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김현우의 주먹을 막기 위해 남아 있는 한쪽 손을 들어 올린 형체 없는 자.
그러나 김현우는 주먹의 궤도를 바꾸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우의 주먹은-
"크에에엑!"
형체 없는 자의 손을 그대로 부수고 들어가, 그의 몸을 후려쳤다.
콰가가각-!
순식간에 땅바닥에 처박혀 듣기에도 웃긴 신음을 터트리는 형체 없는 자.
김현우는 웃음을 짓고는 땅바닥에 처박힌 형체 없는 자에게 다음 일격을 때려 박았으나.
"오?"
형체 없는 자는 김현우의 일격을 땅바닥을 굴러 피했다.
볼품없이 굴러 급하게 자세를 잡는 형체 없는 자.
불과 몇 분 전에 보여주었던 그의 행동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김현우는 웃음을 지었고. 형체 없는 자는 자신을 내리 보는 그 모습에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네가. 네가 나를 무시해!? 나를!? 모든 이들의 '심마(心魔)'라고 불렸던 나를 무시한다고!!!"
그와 함께 형체 없는 자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사하듯 터져 나왔다.
"나는, 나는 네가 무시해도 될 녀석이 아니다……! 그런 녀석이 아니라고!!! 도대체 내가 지금까지 누구와 싸움을 해왔다고 생각하는 거냐? 도대체 누구를 상대했다고 생각하는 거냔 말이다!!"
사방으로 검은 기운을 폭사하는 형체 없는 자는,
"나는 그 어디에도 있었다……! 자기가 잘난 줄 알고 날뛰었던 그 머저리 같은 상제에게도 내가 있었고, 윤회의 고리를 만든 부처에게도 내가 있었다!"
-그것뿐인 줄 아느냐!?
"망자에게도, 세계 안을 구르는 수많은 요괴들도……! 하다못해 아직 필멸자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에게도 내가 있었다. 내가 있었다고!!"
형체 없는 자의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주변을 잡아먹는다.
마치 어둠으로 모든 것을 잡아먹겠다는 듯.
"그런데, 그런데 뭐라고? 네가……? 네가 나를 내려다본다고? 나를? 나를? 나르으으을? 이 나르으으으으으을!!!!"
형체 없는 자의 몸에서 흐르던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어둡게 덧칠된 세상을 겹겹이 감싼다.
그와 함께 슬쩍, 긴장된 표정을 짓기 시작하는 형체 없는 자.
그 모습을 보며 형체 없는 자는-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네 녀석을 죽여 버리겠다."
'됐다……!'
-분노하고 있는 그 모습과는 다르게, 마음속으로는 묘하게 긴장한 표정이 된 김현우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형체 없는 자가 이런 식으로 연기를 한 이유는 모두 김현우가 저 표정을 짓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심마(心魔)였으니까.
그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굉장히 수많은 사람들의 안에 뿌리내렸었다.
그는 윤회의 고리를 확립하고 만들었던 부처의 곁에서 끝없이 유혹의 속삭임을 토해내 그에게서 고난을 몰고 오게 한 자이기도 했고.
그는 광야를 전전하며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던 남자의 곁에서도 끝임 없이 유혹의 속삭임을 토해내 결국 그의 주변을 망가뜨리고 그 땅에 암운을 만들어낸 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윤회의 고리를 만들던 자에게 그는 '마라'가 되었고.
광야를 전전하던 이에게 그는 '사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외에도 그는 수많은 이들에게 그들이 가장 넘기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이름으로 불렸고.
몇몇의 특별한 이들을 제외하고, 그들은 전부 심마에게 패배해 그 본디의 업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래, 고작 몇 명을 빼고는.
'네 녀석의 정신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고작 인간일 뿐이지……!'
심마는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를 보곤 생각했다.
자신의 힘은 그가 생각하는 것으로 그 힘의 총량이 정해진다.
상대방이 자신을 이길 수 없는 존재로 여기면 여길수록 자신의 능력은 강해졌고, 상대방이 자신을 얕잡아보면 얕잡아볼수록 그는 약했다.
물론 그 덕분에 심마는 아무리 업을 흡수해도 본인의 특성 덕분에 업들 대부분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제약이 따르기는 했으나 그는 거기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애초에 어느 순간부터 심마는 스스로를 얕잡아볼 수 없는 위치에 올려 두었으니까.
'이미 녀석은 살짝이지만 동요하고 있다……!'
김현우는 분명 심마를 상대하는 법을 깨달았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심마를 상대하는 법을 깨달았다고 해도, 그것은 백퍼센트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심마라는 것은 아주 잠깐 사이에 든 그 찰나의 틈만으로도 곧바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정말 굳건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초인이나 다른 이들이라면 모르겠으나, 김현우는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인간.
그 인간이 분명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마인드 컨트롤한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본능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그 찰나의 본능을.
'좋아, 힘이 돌아오고 있어……!'
심마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은 김현우를 보며 마음속 깊은 곳으로 미소를 지었다.
분명 그는 스스로가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겠지만 인간의 마음은 무척이나 연약해 단 한 번이라도 틈을 만들어 두면 그 안에 의혹을 집어넣는 것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그렇기에 심마는 조금 전의 연기를 하는 것으로 김현우의 마음의 틈새를 넓혔다.
'지금 이 시점의 전투에서 동수를 이뤄내는 것으로 의혹을 더더욱 키운다……!'
"죽여 버리겠다-!!!"
그래.
씨익-
그렇게 생각했다.
"!!!"
형체 없는 자는 자신의 몸집을 키워 거대한 주먹으로 김현우가 있는 곳을 내리쳤다.
그 누가 보더라도 그 주먹에 눌리면 찌부러질 만큼 강력해 보이는 주먹.
특히 그 주먹 주변으로 뿌려지는 검은 기운은 그런 거대한 주먹을 더더욱 거대하게 보이게 해주었었다.
하지만-
"뭐해?"
"무슨-!"
김현우는 자신의 머리 위로 내리찍어지는 형체 없는 자의 주먹을 그저 손바닥을 피는 것으로 받아냈다.
분명 받아내는 것은커녕 누른 힘과 함께 짜부가 될 것 같았던 김현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서 있었고, 형체 없는 자를 보며 서 있었고.
형체 없는 자는 김현우의 표정을 바라봤다.
조금 전의 긴장한 표정이 아닌, 아까 전의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는 김현우의 표정을.
그리고, 그 표정을 보고나서야 심마는 자신이 김현우에게 농락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악을 질렀다.
"김현우 이 새끼가아아아!!!"
마치 비명과도 같은 소음이 이 방 전체를 진동시켰으나-
"설마 내가 진짜로 쫄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응?"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고작 내가 만든 한낱 피조물이 어떻게 마음의 틈새를 자기 멋대로 조절할 수 있냐는 말이다!!"
마치 발악과도 같은 심마의 말.
허나 그럼 심마의 말에, 김현우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파스스스-!!
"큭!"
그가 만들어낸 거대한 주먹을 가벼운 손놀림 하나로 없애버린 김현우는 이내 심마의 앞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오지 마! 다가오지 말란 말이다!!!"
심마는 그런 김현우에게 어떻게 공격을 해보고자 했으나, 이미 그의 공격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의 기운은 김현우의 앞에 다가서면 거짓말처럼 흩어졌고, 그의 주먹도 전혀 김현우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다.
계속해서 몸을 뒤로 빼며 공격을 이어나가도, 김현우는 아무런 피해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 마지막 순간.
심마는 그 순간, 이미 확신에 차 있는 그에게 공격을 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고.
씨익-
"네 탑, 잘 받아간다."
"안 돼에에에에-!!!"
김현우는 심마의 머리 위에, 검지를 올렸다.
286화. 심마(心魔) (3)
김현우의 손가락이 심마의 머리에 닿았다.
이 공간을 굉음으로 가득 채울 소름 끼치는 타격음도 아니었고.
이 공간의 광휘로 뒤덮어 시야를 빼앗을 정도로 거대한 마력의 방출도 아니었다.
툭-
그래,
그저 그것뿐이었다.
자신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뒷걸음질 치는 심마의 머리에 올린 것.
그 간단한 일련의 동작을, 김현우는 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츠츠츠츠--!!
그 결과는, 김현우가 지금껏 보여주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아……안 돼!!"
심마의 몸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연기로 감싸였던 그의 몸이, 제대로 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연기처럼 사라진다.
제일 먼저 사라진 것은 발.
심마는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깨닫고 뒤늦게 김현우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으나, 그의 몸은 계속해서 천천히 붕괴해 나가기 시작했다.
"멈춰……! 멈추란 말이다!!"
심마가 비명과도 같은 괴성을 지르며 김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으나, 그의 주먹은 이미 너무나도 느려졌다.
그리고 또한 약해졌다.
툭!
심마의 주먹이 김현우의 얼굴을 후려쳤으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붕괴는 계속된다.
무릎이 있는 곳까지 사라져, 이제 허벅지 근처까지 진행되고 있는 붕괴.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이죽였다.
"왜? 아까 전에는 뭐 하나 무서울 것 없이 신나게 나댔으면서, 당장 죽음이 앞에 다가오니까 무서워?"
허나 심마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김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두를 뿐.
물론 그 주먹에 김현우는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심마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나약한 놈으로 찍혀 있었고, 그것은 이제부터 영원히 변하지 않을 내용 중 하나였으니까.
툭! 툭! 툭!
심마의 주먹이 몇 번이고 주먹을 이용해 김현우의 몸을 후려친다.
허벅지가 사라지고, 허리가 사라져 나간다.
툭! 툭!
물론 그렇게 사라지는 동안에도 심마의 반항은 계속되었다.
"안 돼……! 안 돼!!!"
자신의 사라지는 몸을 보며, 심마는 끊임없이 김현우의 귓가에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네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나? 나는 심마다! 나는 심마라고! 여기서 죽더라도 다시 살아난 다 이 말이다!"
그의 몸이 가슴께까지 사라졌음에도 심마는 저주의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김현우의 마음의 틈을 넓혀 조금이라도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발악하는 그의 모습.
그러나 김현우의 생각은 딱히 변하지 않았고, 그의 몸이 마침내 거의 다 사라져 머리만 남았을 때쯤.
"나를! 나를 죽인다고 해도 다음이 있다! 다음이 있다고! 게다가 내가 죽으면 당장 일어날 일도 무척이나 많단 말이다!"
텁-
김현우는 이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지 횡설수설하던 심마의 머리 부분을 붙잡고는.
"야."
"그래! 이제 대화가 좀-"
"원래는 그냥 느긋하게 사라지는 거 보려고 했는데 존나게 시끄럽네."
"무슨-!"
"무슨은 무슨이야, 그냥-"
파삭!
"-뒤지라고."
그대로 심마의 머리통을 꾹 쥐어 터트려 버렸다.
그는 끝에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으나 김현우의 손은 그것보다 빨랐고, 그에 따라 완전히 연기로 변해버린 심마는.
스으으으으-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심마를 완전히 죽여 버린 김현우는.
"후……."
털썩.
이내 진한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주저 않고는 주변을 돌아봤다.
보이는 것은 그저 엉망진창인 잔해뿐.
그가 처음 왔을 때 보았던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는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문득 들기 시작하는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했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위화감의 정체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로그가 안 뜨네.'
항상 등반자나 정복자를 처리하고 나면 떠오르던 로그가 지금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설마……?'
심마가 완전히 죽지 않아서 그런가? 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으나, 이내 김현우는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부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더 이상 이곳에서 심마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아니, 느껴지지 않은 게 아니라 그 녀석이 완전히 소멸했다는 것을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근데 왜 로그창은 안 나오는거야?'
한 동안 멍하니 생각하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그 생각을 저 멀리 치워 버렸다.
어차피 김현우가 아무리 고민한다고 하더라도 왜 로그가 안 나오는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돌아가면 물어봐야겠네.'
결국 그렇게 생각을 마친 김현우는 이내 온 몸에 힘을 빼고 잔해에 몸을 뉘였다.
부서진 돌 부스러기 덕에 등이 따끔거렸으나 그렇다고 다시 등에 있는 잔해들을 치우자니 힘이 부족했기에 김현우는 땅바닥에 누웠다.
'금방이라도 뒤져버릴 것 같네.'
김현우는 심마와의 싸움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몸 상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그의 몸은 심마를 죽이는 그때에도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으나 이미 초반에 너무 많은 마력을 소모한 덕분에 그의 재생력은 낮아질 대로 낮아진 상태였다.
살점이 파인 것 같은 오른손에 새살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김현우.
'우선 조금만 쉬자.'
그는 조금만 쉬자는 생각으로 눈을 감았으나.
쾅! 꽈가가강!
김현우는 자신의 생각을 실행 할 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 다시 눈을 떠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린 김현우는.
"도와주러 왔다!"
"이야, 여기도 개판이네?"
"그놈은 어디 있어? 그 개새끼 얼굴이나 한번 보자!"
"괜찮으세요, 가디언!?"
한쪽 벽을 부수며 나타난 자신의 동료들을 볼 수 있었다.
무척이나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부서진 잔해들 주변을 보며 금방이라도 싸울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그들.
"그래서 설계자는 어디에 있어? 보니까 김현우의 기운밖에 안 느껴지는데?"
"뭐야, 벌써 끝난 거?"
"……흠, 확실히 내가 기운을 느끼려 해봐도 그의 기운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구나."
벽을 부수고 들어온 그들은 제각각의 이야기를 나누며 부서진 잔해들을 바라보았고, 그런 그들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거참,"
괜스레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타박했다.
"빨리도 온다."
####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그 잔해의 한가운데에서, 김현우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뒤늦게 올라와서 애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거라 이거지?"
"그 말대로예요."
아브의 말을 듣던 김현우는 간단하게 그녀가 했던 말을 정리했다.
처음, 김현우가 다른 이들과 올라가고 난 뒤, 아브는 탑의 최상층의 보안이 풀리며 자신이 최상층 내부를 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했고.
그 상태에서 아브는 자신이 형체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 다른 방에서 이 방으로 넘어 올 수 없는 동료들의 존재를 하고는 바로 최상층으로 올라왔고.
그리고 그 뒤에는 곧바로 다른 방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심마와 김현우가 있던 방에만 걸려 있던 봉인을 풀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한차례 정리한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최상층에는 어떻게 빨리 올라왔어? 전에 노아흐 말로는 이동진은 한번 사용한 뒤에 시간이 걸린다고 하지 않았어?"
"네 그건 맞아요, 근데 저는 통괄자의 권능을 일부 가지고 있다 보니 이 최상층의 락이 풀리면 이동할 수 있었거든요."
아브의 말에 고개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곧바로 아까 전 떠올랐던 의문을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보니 설계자를 완전히 죽이기는 했는데 로그가 안 떠올랐는데, 이건 왜 이런 거야?"
"로그요……?"
김현우의 말에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는 아브, 그녀는 곧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탁 치더니 말했다.
"아, 그건 마지막 과정을 아직 전부 끝내지 않아서 그래요."
"마지막 과정?"
"네, 지금 일어설 수 있으신가요?"
"뭐, 그거야 가능하지."
그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터라 몸이 조금 회복된 김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고, 이내 아브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폐허 속을 걷기 시작했다.
그에 김현우는 아브를 따라 걷기 시작했고, 그런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던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김현우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이에요."
"……뭐야? 이런 곳이 있었나?"
김현우는 아브의 앞에 있는 계단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위로 향하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는 공간.
물론 그가 심마와 싸우면서 이런 걸 일일이 확인하진 않긴 했으나 적어도 이 공동 근처에 이런 공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뭐, 못 봤나 보지.'
뭐, 그것도 잠시 뿐이고 이내 그렇게 간단히 생각을 정리한 김현우는 곧바로 아브가 올라간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상당히 길게 이어져 있는 계단.
"아이 썅, 여기 왜 이렇게 좁아?"
"거 형님, 갈기가 계속 머리를 치는데 갈기 좀 자르면 안 되겠소?"
"내가 갈기를 왜 잘라?"
"형님 갈기 때문에 앞이 제대로 안 보이는데 어쩌라는 거요?"
"그냥 여의봉으로 구멍 크게 뚫어버리면 안 되나? 더럽게 답답하게도 만들어 놨네."
"흐응, 역시 예나 지금이나 큰 몸집은 그리 좋지 않구나."
"생각해 보니 야차께서는 옛날에 태산을 눌러보겠다고 몸집을 하늘의 반만큼이-"
"쉿- 더 이상 이야기 하지 말거라. 내 손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없을 것 같구나."
그렇게 뒤따라오는 이들의 말을 들으며 몇 분 정도를 걸어 올라갔을까?
김현우는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계단의 출구를 볼 수 있었고.
"저거예요."
곧 출구에 끝에 도달한 김현우는 아브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있는 구체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저게 뭔데?"
"이 탑의 권한을 담아 놓은 복합…… 아니,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서 권한 같은 느낌이에요."
"권한?"
"네. 아마 로그가 뜨지 않은 이유는 가디언이 저 권한을 전부 회수하지 않아서 아직 이 탑의 주인이 심마로 설정되어 있어서 그럴 거예요."
"그럼 저걸 부수면 로그가 뜬다 이거지?"
"아니…… 부수는 게 아니라 그냥 손만 가져다 대시면 아마 로그가 뜰 거예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구체를 향해 다가갔다.
굉장히 신기한 느낌으로 발광하고 있는 새하얀 구체.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별다른 거부감 없이 구체에 손을 내밀어 만졌고, 이내 새하얀 구체는 순간 하얗게 발광하는 듯하더니 이내 김현우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저거 위험한 거 아냐?"
"그냥 권한 이식을 위해 있는 일일 거예요."
손오공의 말에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하는 아브.
김현우는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이내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것을 중단했고, 얼마간 김현우의 몸을 맴돌던 빛은 어느 순간 다시 구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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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탑주 '심마'를 처리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심마가 가지고 있던 탑주의 권한이 이전됩니다!]
[축하드립니다! 탑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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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떠오르는 로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287화. 내가 저질렀다 (1)
김현우가 탑주의 자리를 차지한 지도 3일.
천호동에 위치한 김현우의 집 안은 굉장히 북적였다.
아니, 북적이는 것보다는 사람이 꽉꽉 차 있다고 말하는 게 맞을 정도로, 그의 집에 거실은 빈자리가 없어 보였다.
'그냥 장원에서 만나는 게 나을 뻔했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슬쩍 시선을 돌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확인했다.
제일 먼저 보이는 모습은 바로 왼쪽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칠대성의 모습들.
넓은 장원의 건물에서야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만 아무래도 사람이 주거하는 거실에 와보니 이들의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뭐, 손오공을 제외하곤 다들 키도 기본 2m는 훌쩍 넘는 데다가 몸집도 장난이 아니니까……'
느긋하게 누워 있는 것도 아니고 점잖게 앉아 있는 데도 왼쪽 공간을 먹어치운 칠대성을 본 그는 이내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 자리에 앉아 있는 천마와 구미호를 보았다.
그다음으로는 소파 걸이에 걸터앉아 있는 야차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두 제자, 그리고 김시현과 이서연이 서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한번 쭉 바라본 김현우는 이내 입을 열었다.
"다 모여 있지?"
"……."
아무 말도 없는 그들.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김현우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뭐, 너희들도 알겠지만, 오늘 내가 너희들을 부른 이유는 바로 귀환 문제 때문이야."
귀환 문제.
현재 김현우의 앞에 모여 있는 이들 대부분은 애초에 이 탑에서 태어난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원래 이 탑의 외부에서 생활하다가 '등반자'로서 탑에 들어온 이들, 한 마디로 이 탑 안과는 다른 고향이 따로 있는 이들이었다.
김현우는 잠자코 자신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지켜보고 있는 이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뭐, 귀환 문제라고 해봤자 별거 없고, 그냥 지금 탑에서 나가고 싶은 사람 있어?"
"탑 밖이라……."
김현우의 물음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바로 평천대성이었다.
그는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이산대성을 돌아보며 물었다.
"야, 아우야, 네가 이 탑에 들어올 때 밖은 어땠냐?"
"글세…… 형님도 알다시피 나는 딱히 밖에 신경 쓰지를 않아서, 그냥 다들 들어왔다길래 나도 늘그막하게 들어오긴 했는데…… 밖이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네."
"그러게, 나도 마찬가지로 다들 들어갔다길래 빼앗긴 업이나 되찾을까 하고 같이 들어왔었으니까……. 나도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던 것 같은데."
"너희가 들어왔을 때가 그때 맞지? 하늘이 박살 나 있었을 때."
"아마 그때쯤인 것 같은데……."
이것저것 고민이 되는 것인지 말을 주고받는 칠대성.
잠시 고민하고 있던 평천대성은 이내 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뭐 청룡이야 하늘이 무너진 직후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우리보다는 빠르게 들어온 것 같고, 그쪽은 어떻지?"
"나 말인가?"
천마의 말에 평천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자네는 언제쯤 들어왔지? 하늘이 무너지고 나서 들어온 건가?"
평천대성의 물음에 천마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확실히, 하늘이 내내 검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나서 탑에 들어올 수 있었지, 하지만 그 뒤는 나도 모른다."
"……그래? 하긴…… 그럼, 야차께서는 혹시 하늘이 어지러워진 뒤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아십니까?"
평천대성의 이어진 질문.
그에 야차는 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뭐, 나도 대략적인 상황밖에는 알지 못하느니라, 애초에 동면에 들었다가 곧바로 일어나서 이곳으로 들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천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더구나. 뭐 그도 그럴 만하지만 말이다. 애초에 옥황이고 그 아들들이고 죄다 탑에 업을 빼앗기거나 탑에 굴복해 힘을 받아먹었으니 말이지."
야차가 한심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차자 김현우는 잠시 생긴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탑에 업을 빼앗겼다는 건 무슨 소리야?"
김현우의 물음에 야차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나는 동면에 들어 있어 잘은 모르겠다만, 듣기로는 네가 상대했던 '설계자'가 옥황을 쓰러뜨리고 세계 전체의 천기를 모두 흡수해 도망쳤다는 소리를 들었느니라."
"……천기? 그건 또 뭔데?"
"음, 자세히 설명해 주기는 어렵다만…… 그냥 한마디로 에너지라고 생각해라,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
"……에너지?"
"그래, 천기가 있어야만 세계가 유지되는데 그 녀석은 옥황을 쓰러뜨리고 그 천기를 모조리 훔쳐 달아났느니라."
야차의 말에 김현우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놈은 천기를 흡수해서 원래 세계를 박살 낸 다음에 억지로 등반자들을 올라오게 한 거?"
김현우의 물음에 야차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않고 순수하게 힘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탑을 오르는 이들도 있었을 것 같다만, 적어도 여기에 있는 대부분은 박살 난 천기를 원래대로 돌리기 위해 탑을 오른 이가 대부분이니라."
뭐어-
"나는 내 업을 가지고 도망간 건방진 동생놈을 훈계하기 위해 올라왔지만 말이다."
야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그녀에게 들었던 말을 짧게 일축했다.
'이 새끼 알고 보니 그냥 씨발놈이 아니라 그레이트씨발놈이었네.'
물론 원래부터 그가 쓰레기라는 건 지금 이 탑이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김현우라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나 그가 이렇게 쓰레기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흐음……."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을 일축하고 있을 때도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가던 그들.
"뭐, 난 나가도록 하지."
거기에서 제일 먼저 대답을 한 것은 바로 처음부터 고민을 시작했던 평천대성이었다.
"애초에 그 녀석을 조졌으니 천기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을 테고. 아마 밖의 균형도 서서히 돌아올 테니까 말이야."
"뭐, 그럼 나도 가볼까."
"나도 마찬가지. 밖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북해궁을 오래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평천대성의 말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귀환의사를 밝히기 시작하는 칠대성.
마침내 손오공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귀환에 동의하자 평천대성은 그를 보며 물었고.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나는 여기에 좀 더 남을 거야."
손오공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여기에 더 머물겠다고?"
"뭐…… 그렇지? 애초에 지금 시점에서 밖에 나가봤자 나한테 남은 것도 없을 테니까."
"남은 게 없기는 무슨, 또 걸그룹 흔들거리는 거나 보면서 신나게 즐-"
"아니라고!"
북천대성의 농담 어린 말에 갑작스레 비명을 지르는 손오공.
평천대성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이내 천마와 구미호, 그리고 야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네들은 돌아가지 않을 건가?"
그 말에 먼저 대답한 것은 천마였다.
"나는 아직 돌아갈 생각이 없다. 아직 조사해야 할 것도 있고."
무엇보다-
천마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구미호의 손을 꾹 잡았다.
"이젠 아무래도 홀몸이 아니다 보니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군."
"욱- 손가락이-"
천마의 말에 순간 이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구미호는 그런 천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꾹 껴안더니 말했다.
"저는 실이라서요! 바늘이 있는 곳에 항상 실에 따라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 말과 함께 금세 달달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둘.
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쟤 천마 맞지?"
"아마도?"
김현우는 김시현의 대답을 들었으나 떨떠름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고, 이내 그는 자연스레 시선을 옮겨 야차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는 흠, 하는 제스쳐를 한번 취하고는 이내 말했다.
"나도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전부 얻었다만, 좀 남을 생각이니라."
"……야차께서도?"
평천대성이 슬쩍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야차는 김현우를 보며 슥 웃더니 말했다.
"그래, 남을 생각이니라."
"왜……?"
그런 야차의 모습에 김현우가 알 수 없는 오한을 느끼자 야차는 그런 그를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맛보고 싶은 게 생겨서 말이다."
"맛……?"
평천대성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야차의 시선이 있는 곳에 김현우가 있는 것을 발견하더니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뭐가 과연인데? 라고 김현우는 묻고 싶어졌으나 이내 왠지 자신의 제자들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투기에 입을 다물었다.
잠시 어색해진 공기.
"그럼 청룡은?"
김현우는 뒤늦게 분위기를 쇄신시키며 이내 청룡을 바라봤다.
한순간 자신에게로 시선이 모이자 청룡은 잠시 고민하는 티를 내며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으나 이내 말했다.
"나도 여기에 남도록 하지."
"너도?"
"그래."
청룡의 단호한 대답에 평천대성은 말했다.
"……자네는 오히려 나가야 하는 쪽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애초에 자네들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업을 받은 이들 아닌가."
평천대성의 말에 청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확실히 자네의 말이 맞기는 하네만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는 별 의미가 없네. 어차피 하늘이 이미 일그러진 상태에서 내가 가봤자 별 도움이 안 된다 이 말이지."
게다가-
"이 탑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게 한두 개정도 생겼네. 우선 그걸 전부 확인하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갈 일은 없을 것 같군."
청룡의 말에 평천대성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야차는 조용해진 분위기를 한번 둘러보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충 일도 정리 된 것 같은데, 연회를 한번 여는 것은 어떠하느냐?"
"연회?"
김현우의 되물음에 야차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했다.
"그래, 연회이니라. 보통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그간의 회포를 푸는 느낌으로 연회를 여는 법이지. 어떻겠느냐?"
야차의 물음에 김현우는 잠시 생각했으나.
'뭐, 별 상관 없나?'
확실히 야차의 말대로 모든 게 끝나기는 했다.
심마는 이미 자신의 손에 죽었고, 김현우는 마탑의 권한을 습득해서 지금 현재 탑을 오르고 있는 모든 등반자를 퇴출시켰다.
애초에 김현우가는 심마처럼 업을 끌어모을 생각도, 또한 그런 이유조차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생각한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연회를 수락했고.
"자 그럼 여기는 좁으니까 다시 하남으로 가자!"
평천대성의 말에,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그전에 잠깐."
"?"
"연회 시작 전에 잠깐 갔다 와야 할 곳이 있거든. 우선 먼저 가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곤 곧바로 하수분의 주머니에 있는 이동장치를 이용해 노아의 방주로 이동했고.
"오, 왔나?"
"너무 늦었어요, 가디언!"
"……그래서, 무슨 일인데?"
김현우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브와 노아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당장 탑주의 권한을 얻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라구요."
김현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여는 아브.
그는 알았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곤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뭘 해야 하는데?"
미적지근한 김현우의 태도에 아브는 순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말했다.
"오늘은 딱히 무얼 정할 일이 아니에요. 오히려 앞으로의 방침에 대한 이야기죠."
"방침?"
"네."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곤.
"가디언은 이 탑을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그렇게 말했다.
288화. 내가 저질렀다 (2)
하남에 있는 장원.
그중에서도 거대한 건물에서,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는 호화로운 뷔페를 바라봤다.
사방에는 김현우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던 음식이 꽉곽 채워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칠대성과 다른 이들이 어울려-
"마셔라 마셔!"
"이 탁주는 좀 약한데 맛이 썩 괜찮구만!? 이게 뭐라고?"
"아아, 이것은 '막걸리'라는 것이다."
"막걸리? 캬하하핫! 진짜로 먹을 만하군."
-신나게 개판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
어째 하나린과 미령이 미리 전화를 해두어 준비해 둔 것 같은 음식들은 전혀 먹지 않고 계속해서 지급되고 있는 막걸리를 연달아 퍼마시고 있는 그들.
물론 그중에는 천마와 구미호가 반대쪽에 만들어진 바에서 기묘한 칵테일 마시고 있기도 했고, 또 청룡 같은 경우는 양주를 마시고 있었다.
"크, 괜찮군."
다만, 김현우의 입장에서 청룡이 양주를 마시는 방법은 조금-
"최고야-"
아니, 꽤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기, 이거랑 똑같은 걸로 한 병 더 가져다주면 좋겠군."
청룡이 입을 열자마자 바의 앞에 있던 바텐더는 곧바로 고풍스러워 보이는 양주를 병째로 따 그의 앞에 내려다 놓았고.
"역시 향이 끝내주는군."
청룡은 그 병 앞에서 조용히 그 냄새를 음미하는 듯 싶더니,퐁당!
이내 그 양주 안으로 들어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
물론 아주 자그마한 손이 있는 청룡에게 있어서 그것이 술을 마시기에 가장 편안한 느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청룡이 저렇게 양주병 안에 있는 것을 보니 마치 TV에서나 보던 뱀술 같은 느낌이 났다.
뭐, 김현우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청룡 본인은 지금 그렇게 술을 마시는 게 굉장히 만족스러운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고, 김현우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뒤에 보이는 것은 김시현과 아냐.
그들은 뭐…… 그들의 관계만큼이나 서로 슬쩍슬쩍 장난을 치며 술을 마시고 있었고, 이서연은 뷔페 한쪽에 마련된 식탁에서 자신의 제자인 미령과 하나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상당히 드문 조합이네. 라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오를 정도로 의외인 조합.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알기로 이서연은 딱히 자신의 제자들과는 그리 친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서연은 미령이나 하나린이 불편하다는 듯한 뉘앙스를 몇 번 정도 풍기기도 했고.
'……금세 친해졌나?'
결국 한동안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그 셋이 무척이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이내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고.
"뭘 그렇게 보고 있느냐?"
"응?"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너는 여기서 뭐해?"
"그냥 이야기나 해볼까 해서 왔느니라."
그곳에 있는 것은 바로 야차였다.
그녀는 상당히 술을 마셨는지, 꽤나 붉어진 얼굴로 스탠드바에 앉아 있던 김현우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야기?"
"그래, 네가 아까 탑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
"아."
야차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는 아까 전 장원에 도착하기 전에 잠시 아브와 노아흐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었고, 장원으로 돌아와 연회를 시작하기 전 그들에게 간단하게 아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했었다.
"……탑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라."
아브는 김현우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탑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뭐."
확실히 아브의 질문은 합리적이였다.
김현우는 심마를 이기고 결국 이 탑의 주인인 탑주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김현우 본인은 딱히 자신이 탑주에 오른 것 자체는 애초에 별 감흥도 없었으나 그가 탑주에 오른 것은 사실이고, 그가 이 탑의 방침에 대해 정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분명 아까 이야기한 것도 그런 말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하느냐?"
김현우가 고민하고 있자 야차가 물었다.
"내 생각?"
"그래, 네 생각 말이다. 아무래도 네가 탑의 주인이 되었으니 네 생각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그렇긴 한데……."
김현우는 슬쩍 복잡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좀 복잡해서."
"무엇이 말이냐?"
"이것저것, 아브한테 들어보니까 아직 탑에 대해서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있어서 그것도 따로 조사를 해봐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또 무엇인데 말이냐?"
야차의 질문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몰라."
물론 김현우는 아브에게 그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듣기는 했다.
그래, 듣기만 했다.
듣기만.
'……하나도 안 와닿는단 말이야.'
김현우는 분명 오늘 아브가 말했던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당장 이 탑을 유지하고 있는 동력에 대한 부분부터 시작해서, 이 탑의 중간부분을 감싸고 있는 허수 공간까지.
그 설명을 다 듣고서야 아브는 한번 생각을 해보라는 말과 함께 김현우를 내보냈으나.
'……이런 데는 쥐약인데.'
그는 딱히 별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가 아무리 탑주의 자리를 먹었다고 해도 애초에 뭔가를 관리하거나 하는 일에는 굉장히 무지했으니까.
거기에다가 신경도 쓰기 싫다 보니 김현우는 아브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는 자연스레 한 귀로 흘리며 들어버렸다.
'……뭐 결국 결정은 내가 내려야 하니 생각을 해보기는 해야 하는데.'
김현우가 벌써부터 피곤한 표정으로 슬쩍 인상을 찌푸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야차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죽상이로구나."
"생각할 게 좀 많아서 말이야."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야차를 바라보다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무슨 일이느냐?"
"생각해 보니까 너도 좀 윗사람 아니야?"
"……윗사람이라니?"
"보니까 칠대성이나 청룡도 너를 가볍게 못 대하는 것 같던데, 아니야?"
김현우의 말에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야차는 이내 그가 무엇을 물어 보는지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유감이지만 내게 무엇인가를 얻어가기는 조금 힘들 것이니라."
"왜?"
"뭐, 네 생각대로 나는 저들보다도 위에 있는 이가 맞기는 하다만…… 애초에 나는 전혀 그런 것을 신경써본 적도…… 또 뭔가를 관리해 본 적도 없느니라."
한마디로, 내게는 너를 도와줄 만한 지식이 없느니라.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김이 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쩝,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네."
김현우의 탄식에 야차는 이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뭐, 그렇게 빨리 생각하려 하지 말거라, 이미 모든 게 끝난 판에 뭐 그리 빠르게 고민하고 있느냐?"
확실히 야차의 말이 맞기는 했다.
사실 이미 모든 것을 해결한 시점에서 김현우가 급할 것은 없으니까.
"확실히 그것도 그렇긴 하네."
결국, 고민을 끝낸 김현우는 이내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전 바텐더에게 달달한 술로 달라고 해서 받아 둔 칵테일을 쭉 들이켰다.
달달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입안에 느껴지는 것을 음미하고 있자, 그 옆에 있던 야차는 슥 웃으며 말했다.
"잘 마시는구나, 혹시 이것도 마셔 볼 생각이 있느냐?"
"이거라니?"
김현우가 야차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미소를 짓더니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허리춤에 갈려있는 호리병을 꺼내들었다.
"바로 이거다."
"……이게 뭔데?"
"천살주(天殺酒)."
"천살주?"
김현우의 되물음에 야차는 씩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하늘에서는 구하지를 못해서 먹지 못하는 매우 귀하디귀한 술이지, 아마 전 세계에 있는 술을 전부 다 합치더라도, 이 천살주 한 모금보다 못할 것이다."
-여러 가지로 말이다.
야차는 그렇게 말하며 키득거리더니 이내 김현우에게 천살주를 건네며 물었다.
"어떠냐, 한번 마셔 보겠느냐?"
야차의 물음.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그 정도로 귀한 술이라면 감사하게 받아먹어야지."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무릇 사내라면 그렇게 이야기해야지."
"……?"
왠지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어떤 위화감을 느꼈으나 곧 어깨를 으쓱이며 어느새 그녀가 준 자그마한 술잔을 받아들었고.
이내 그녀는 김현우가 받아든 술잔에 호리병을 가져다댔다.
쪼르르르─
그와 함께 호리병 안에서 흘러나오는 투명한 액체.
김현우는 별다른 감흥 없이 호리병 안에서 흘러나오는 천살주를 받았으나, 이내-
"어?"
곧 천살주에서 나기 시작하는 무척이나 향기로운 냄새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천살주를 바라봤고.
"향만으로도 느껴지지 않느냐?"
곧 김현우의 잔에 천살주를 전부 따라낸 야차는 이내 자신의 잔에도 남은 천살주를 따라내며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김현우는 잔을 가까이 하고서 냄새를 한번 맡고는 감탄하며 대답했다.
"그러네……. 완전 대박인데?"
그의 말대로 야차가 따라준 천살주는 정말 향기로운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정말이게 술일까? 싶을 정도로 코를 자극하는 향기로운 냄새.
김현우가 몇 번이고 천살주의 향기를 맡으며 감탄을 하자 야차는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냄새만 맡지 말고 한번 마셔보거라, 이 천살주는 향도 향이지만 그 맛 또한 훌륭하지."
야차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들고 잇던 천살주를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고.
"!"
김현우는 곧 자신의 입안에서 느껴지는 향긋한 맛과 동시에 느껴지는 달달함에 깜짝 놀라며 다 마신 천살주를 내려다보곤 탄성을 내뱉었다.
"와……."
분명 조금 전의 칵테일도 달달했기에 김현우의 입맛에는 딱 맞았건만 그것도 분명 입안이 살짝 결리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 김현우가 마신 천살주는?
그런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이 그저 단 한 번 만에 그의 목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대박인데?"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잔을 내려놓은 뒤 시선을 돌려 야차를 바라봤고.
"어?"
그는 곧 이상함을 느꼈다.
"왜 그러느냐?"
"아니, 갑자기 네가 두 개로 나뉘어서 보이는데?"
갑작스레 야차가 둘로 나뉘어 보이는 상황에 김현우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물어보자 야차는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그건 당연한 것이니라."
"당연한 것?"
"그래, 천살주가 왜 천살주라고 불리겠느냐?"
야차의 물음.
김현우는 그에 천살주가 무슨 뜻인지에 대해 생각했으나 이내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는 야차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으로 눈을 감았다 뜬 순간-짹-짹!
"!"
-김현우는 자신이 넓은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윽!"
그와 함께 그의 머리를 깨버릴 듯 들어오는 고통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고, 곧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기억, 즉 필름이 끊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름이 끊긴 시기는 야차가 준 천살주를 마신 순간부터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까지.
"아……."
김현우는 왠지 모르게 당했다는 생각과 함께 깨질 듯한 머리와 느글거리는 속을 참으며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응……?"
이내 자신의 양팔을 무엇인가가 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
곧, 김현우는 자신의 양팔을 누르고 있는 것이-
"……??"
-자신의 두 제자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89화. 내가 저질렀다 (3)
"오! 나왔나?"
"……설마 지금까지 술을 마시고 있던 거야?"
장원의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들리는 평천대성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그와 그 옆에 있는 손오공을 바라보았고,
"무얼!"
그에 평천대성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원래라면 사흘 밤낮을 새고도 웃으면서 술을 마실 수 있지!"
"그것 참 대단하네."
평천대성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소파에 앉은 김현우.
어젯밤의 소란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는 듯, 어제 그의 주변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다른 칠대성들은 손오공을 빼고는 모조리 사라져 있었고,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양주병 안에 들어가 잠을 자고있는 청룡뿐이었다.
'왜 양주 병 안에 들어가서 자고 있는 거야.'
말 그대로 소주만 채워 넣으면 그 상태로 훌륭한 술이 될 것 같은 그 모습에 김현우가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이내 그는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다른 애들은 다 자나?"
김현우의 물음.
그에 손오공은 들고 있던 막걸리를 원샷하고는 말했다.
"뭐, 형님들은 전부 시간 좀 지나니까 주변에 있는 양주 벌컥벌컥 들이켜다 다 들어갔고, 내 친구들도 때 되니까 다 알아서 들어가던데?"
"그래?"
김현우는 그의 말에 대답하며 이내 물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댔고.
"그래서, 어땠냐?"
"……."
김현우는 손오공에게서 흘러나오는 다음 말에, 저도 모르게 물을 마시려는 행동을 멈춰 버렸다.
왜 본인이 이렇게 찔리는지 김현우는 인지하지 못했으나, 그는 짐짓 평온한 표정으로 입가에 가져다댄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대답했다.
"어땠냐니?"
"당연히 네 제자들 이야기지! 그동안 살랑살랑 눈길도 안주더니 어제는 왜 갑자기 그렇게 급발진한 건데?"
"……급발진?"
김현우가 되묻자 이번에는 평천대성이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봤다는 듯한 눈으로 씨익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래, 정확히 언제쯤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갑자기 자네가 한참이나 야차와 이야기를 하더니 갑작스레 일어나서 술을 마시고 있던 제자들을 그대로 보쌈하더군."
"……뭐? 보쌈? 내가 보쌈했다고?"
김현우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하자 손오공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야? 설마 기억 안 나는거야?"
"……."
"정말로?"
손오공이 불길한 표정으로 낄낄거리며 묻자 김현우는 왠지 머리가 더더욱 아파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나 계속해 봐."
그의 말에 손오공은 어제의 일을 기억하듯 슬쩍 인상을 찌푸리는 듯하더니 이내 가벼운 미소를 짓고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내 기억으로는 갑자기 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네 동료랑 이야기하고 있던 제자들을 갑자기 양 허리에 끼우더라고."
"그걸 끼운 거라고 해야 하나?"
"끼운거 맞지, 마치 물건처럼 다루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뭐, 여자를 다루는 것으로 보면 조금 어떨까 싶었지만…… 박력은 합격점이었지."
전혀 여자에 대해서는 모를 것 같은 평천대성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손오공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무튼 네가 그렇게 갑자기 두 제자를 들쳐메고 나가려고 하는거야?"
"그래서?"
"그래서긴 뭘 그래서야, 당연히 내가 갑자기 제자 들춰메고 어디가냐고 물어봤지. 근데……."
"근데?"
"풉."
"……?"
손오공은 말을 하려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는지 끅끅거렸고, 평천대성도 마찬가지로 웃긴 생각이 났다는 듯 손오공과 함께 끅끅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뭔가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여기서 내색하면 더한 놀림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뭐길래 그래?"
"뭐라고 했더라? 뭐? 키운 수확물을 걷으러 간다고 했나?"
"푸하하하하하핫!!"
손오공의 말에 박장대소를 하는 평천대성.
김현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웃겨?"
적어도 김현우 본인에게 있어서는 별로 웃기지 않은 이야기였기에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묻자 손오공은 피식피식 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뭐, 푸흡, 그냥 그 말만 들어서는 별로 안 웃기지."
"근데 왜 웃는데?"
"네가 겁나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거든…… 큭큭. 거기에 덤으로 상황도 웃겼고."
"……."
그 말에 김현우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평천대성은 피식 거리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손오공을 툭툭 치더니 말했다.
"그때 기억나냐? 나는 무슨 이제야 결전을 치르러 가는 줄 알았다니까?"
"큽."
"거기다 더 웃긴 건 제자놈들이었지, 딱 술도 얼마 안 취했으면서 자기 스승한테 물건처럼 잡히더니 바로 술 취한 척하던데?"
"푸하하하하핫!"
손오공은 그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또 한번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터트렸고, 대충 그 이후로 손오공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던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탁치며 싶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있던 손오공은 씨익 웃더니 말했다.
"아쉽냐?"
"또 뭐가?"
"아니,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수확하러 간다고 했었는데 기억이 없잖아? 이것 참 아쉬운 일이지."
낄낄-!
김현우가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다르게 금세 그를 놀리는 것을 술안주로 대신하기 시작한 손오공과 평천대성.
김현우는 뭐라 말할까 순간 생각했으나 여기에서 괜히 반응하면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았기에 그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말을 대신하고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렇게 정신을 부여잡고나자 김현우는 진지하게 어제를 떠올리며 생각해 봤다.
'아니, 내가 그렇게 한 방에 간다고?'
물론 김현우는 그동안 술을 많이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술을 배울 기회는 거의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없었으니까.
그는 학생일 때도 딱히 일탈을 할 만한 시간이 없었고, 20살이 되고 나서는 곧바로 군대에 갔었다.
물론 군대에 가서 동기나 선후임들과 나가서 그들에게 몇 번 정도 술을 얻어먹어 보기는 했으나 말 그대로 딱 그정도뿐.
허나 그렇다고 해도 김현우는 당시 술고래라고 불리던 선임과 술대작을 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술에 강했다.
그렇기에 딱히 필름끊김 현상도 느껴본 적이 없었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던가 하던 숙취도 마찬가지로 그는 느껴보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탑에 나와서도 마찬가지.
김현우가 탑 밖에 나오고 나서도 몇 번 술을 먹을 때는 있었으나 이렇게 필름이 끊길 정도로 먹어본 적은- 아니, 애초에 취할 정도로 마셔본 적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서 술은 그냥 쓰기만 한 음료 느낌이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기억이 안나네."
그렇기 때문에 김현우에게 있어서 이 필름끊김 현상은 정말이지 신기하고 답답했다.
정말 단 하나의 기억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평천대성과 손오공이 헛소리를 할 리가 없을테니 분명 기억이 나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김현우의 기억은 야차가 준 술을 마신 시점에서 끝났다.
그 뒤로는 자신이 야차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또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두 제자들을 데리고 나갔는지.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 하나의 기억도 나지 않았다.
"……."
그렇게 얼마간 있었을까.
"후……."
김현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모두 털어냈다.
'뭐, 어차피 기억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생각해 봤자 뭐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는 그냥 제자들이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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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의 저택.
"……밤사이에 아주 친근해지신 것 같네요."
김시현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숙취 해소제를 앞에 놓고 김현우를 바라봤고.
"좀, 친해졌지."
김현우는 그런 김시현의 말에 답하며 자신의 양 옆자리를 차지하고 딱 붙어 있는 두 제자를 보며 평범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평범한 표정을 지은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은 모습.
허나 김시현은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고 이내 그에게 숙취 해소제를 넘겼고, 김현우가 그것을 받으려는 순간-탁-!
그 옆에 있던 미령은 무섭도록 빠른 손놀림으로 김시현이 넘겨준 숙취해소제를 챙긴 뒤, 단 한 손만으로 곽안에 담겨 있던 숙취해소제의 알약을 빼낸 뒤,
"여기 있습니다 스승님."
굉장히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김현우의 입 근처에 알약을 내밀었다.
"물도 여기에 있어요 사부님."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김현우의 앞에 물을 들이미는 하나린.
김현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앞에 들이민 알약과 물을 집으려 했으나.
"드세요."
"빨리요."
"……."
김현우의 손이 움직임과 무섭게 그의 손을 피해 조금 더 앞으로 가져다 대는 미령과 하나린.
그는 결국 떨떠름한 표정으로 미령과 하나린의 손에 있는 숙취약을 받아먹었고, 김시현은 그런 김현우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완전히 잡힌 것 같은 느낌이네.'
물론 두 제자와 김현우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으나 당장 김시현 앞에 일어난 일을 보면 약간 그런 느낌이 있었다.
어색하게 약과 물을 받아먹는 김현우의 양옆에 있는 미령과 하나린.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생글생글 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령과 하나린을 보며 김시현은 굉장한 위화감을 느꼈으나-
'역시…….'
그녀들의 손이 김현우가 보이지 않은 뒤에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며 김시현은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으로 그 둘을 바라봤고.
"……."
해소제를 먹고 나서도 자신의 양옆에서 은근히 자신의 시야를 넘어 수를 쓰고 있는 두 제자를 보던 김현우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둘 다 그만 좀 싸워라, 너희들이 싸운다고 서로 자리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아앗."
"죄송합니다……."
김현우의 말에 금세 얼굴을 붉히며 은밀한 손짓을 그만두는 미령과 하나린, 물론 평소라면 거기서 끝났겠으나 그녀들은 자연스레 은밀한 싸움에 쓰고 있던 손을 김현우의 팔을 껴안는데 썼다.
"……."
양팔이 묶인 김현우.
그 모습을 보며 김시현은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김현우를 바라보고는 이내 양옆에 있는 미령과 하나린을 바라봤다.
그녀들로서는 지금 상황이 더없이 행복한 것인지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김시현은 분명 어제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야차가 미령과 하나린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과, 또 이서연이 미령과 하나린을 데려다두고 굉장히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물론 그도 아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으나 대충 일의 인과관계를 봤을 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건지는 알 수 있었다.
특히 김현우가 마지막에 취해 미령과 하나린을 들고 갔을 때 취한 척하고 그대로 끌려나갔던 제자들의 술잔.
그 술잔은 연회 시작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새롭게 따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김시현은 눈치채고 있었다.
찌릿-!
김시현이 그 생각을 하며 묘하게 씁쓸한 웃음을 지음과 동시에 느껴지는 눈빛.
"……."
그곳에는 미령과 하나린이 조금 전이 보여주었던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아주 자그마한 움직임으로 김시현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고.
"……."
꼴깍-
김시현은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작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290화. 딱 대라 (1)
그다음 날.
탑 최상층.
김현우는 주변을 보며 감탄했다.
"와, 그새 다 청소한 거야?"
그는 완전히 새롭게 인테리어되어 있는 최상층을 몇 번이고 둘러보았고, 옆에 있던 아브는 자랑스레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제가 힘 좀 썼죠!"
"그래, 진짜 열심히 인테리어했네."
김현우는 주변을 바라봤다.
완전히 달라진 최상층.
그가 최상층에서 내려가기 직전에 봤던 모습은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의 난잡한 공간이었다.
사방에는 전쟁이 터진 듯 구멍이 뚫려 있었고, 한쪽 벽은 아예 산이 만들어진 것처럼 곡면이 져 있었다.
그것뿐이었나?
바닥에는 편하게 누울 수 있는 곳이 없었고, 반대로 일어나 있다고 해도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아브가 새로 인테리어한 공간은?
"야,"
"왜 그래요 가디언?"
"근데, 이 성 어디서 좀 본 것 같다?"
거대한 성이였다.
그래, 말 그대로 영화나 만화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무척이나 거대한 성.
도대체 공동이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성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넓은 성이 그의 앞에 있었다.
그리고 멍하니 그 성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
문득 그 성에 위화감을 느꼈다.
"어?"
"……왜그러세요?"
아브의 물음.
김현우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멍하니 세워져 있는 성을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아니, 뭔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몇 번이고 갸웃갸웃하다 이내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이 위화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깨닫고는 말했다.
"아, 이거 그 윅소울인가 뭔가 하는 그 게임에서 봤던 것 같은-"
"빨리 들어오세요!"
김현우가 말을 하기 무섭게 그의 말을 끊고는 입을 열며 앞으로 나가는 아브.
그는 그런 아브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고, 이내 성의 안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
성의 안쪽은 외견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바닥타일과 기둥. 그리고 대리석으로 조각된 것 같은 벽들이 만들어져 있고 무엇보다 천장이 굉장히 높았다.
마치 어딘가의 게임에서 본 것은 성의 모습.
김현우는 그렇게 주변을 바라보다 곧 왕성 근처에 앉아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는 노아흐를 볼 수 있었다.
"자네 왔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간단히 대답한 김현우는 이미 노아흐가 앉아 있는 목제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
다른 건 전부 다 굉장히 어울리는데 노아흐의 근처에 있는 책상과 의자만이 조금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는 아브의 말에 의해 곧 그 생각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은 해보셨어요?"
아브의 말.
김현우는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 탑을 어떻게 할 것인지 대해서 말이지?"
"네. 뭐 근데 사실 그 전에 이야기할 게 있기는 해요."
"이야기할 것?"
"네.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이 탑의 동력원…… 그러니까 이 탑을 유지하는 에너지에 대해서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번에 아브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는 뭐 좀 알아낸 게 있어?"
그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뭐 알아냈다기보다는 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찾은 게 맞다고 해야 하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또 뭔데?"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흠흠, 하고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가디언도 제가 저번에 말해서 알고 있겠지만, 제가 저번에 이야기했었잖아요? 이 탑의 동력원에 대해서."
"그랬지."
"사실 저는 맨 처음 이 탑이 계속해서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신기했어요."
"……탑이 유지되는 게 신기하다고?"
"네, 가디언도 대충은 알고 있겠지만 이 세상에 대가가 없는 것은 없어요. 모든 것은 대가를 지급해야 하죠. 그리고 그건 이 탑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이 탑을 유지하는데 드는 소비량이 많은가?"
"당연하죠? 당장 이 탑의 각 계층에는 서로 제각기 다른 구조의 마력진이 복잡하게 설치되어 있고, 원래 가디언이 있는 9계층 같은 경우는 이 탑에서 제일 거대한 마력진인 '재생'진이 깔려 있어요."
"……아, 그건 대충 알고 있지."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노아흐는 분명 내게 9계층에는 세상이 멸망하면 일정 부분 이전으로 회귀하는 특성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물론 각 계층마다 상시 발동하는 마력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마법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유지하는 마력이 들어가요."
아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
"그러니까 정확한 문제는 지금 이 탑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이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동력원에 대해서는 탑을 처음 만들때에도 설계자가 알아서 해결한다는 식으로 말해서…… 그냥 저희도 그려려니 했거든요."
"참 너희도……."
대충대충이었네. 라는 말을 하려다 다시 집어넣은 김현우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원래 처음에는 설계자가 모은 업들을 이 탑을 돌리는 데 소비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럼?"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차근차근 설명을 해나가기 시작했고, 곧 한동안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김현우는 이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네 말을 정리해 보면, 조사한 결과 결국 이 탑을 유지하는 마력은 최상층에서 흘러나오고 있는데, 그 최상층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다 이거지?"
"그거죠!"
아브의 긍정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그럼 별 신경 쓸 필요 없는 거 아니야? 그냥 탑 위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받아 쓰고 있는 거잖아?"
"맞아요, 사실 당장 별다른 문제가 없긴 한데-"
김현우의 대답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석연찮은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으나-
"아니죠. 별다른 문제가 없진 않습니다."
곧 아브의 말은 옆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저도 모르게 끊길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뭐야?"
담담한 남자의 목소리에 곧바로 시선을 돌린 김현우.
그는 그 곳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백발의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그와는 상반되는 검은 옷을 입은 채 나타난 남자를.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남자를 보며 김현우가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찰나, 그는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이것 참. 그 짧은 사이에 탑의 주인이 바뀌어 있을 줄이야, 놀랍군요."
남자의 말, 김현우는 슬쩍 시선을 돌려 아브와 노아흐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고, 이내 그들이 남자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눈치인 것을 깨닫고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넌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놈이야?"
김현우의 말.
그에 남자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오, 이런 탑의 주인이 바뀌어서 인사를 드리는 게 늦었군요. 반갑습니다, 탑주. 저는 이 탑과의 계약을 담당하고 있는 자, 헤르메스라고 합니다."
"……헤르……뭐?"
"헤르메스입니다."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답하는 헤르메스를 한차례 바라본 김현우.
허나 헤르메스는 탐탁찮아 보이는 김현우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곳에 찾아온 것은 전대 탑주의 부채를 받으러 방문한 겁니다만…… 아무래도 새로운 탑주님이 계시니 따로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군요."
헤르메스의 말.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곧 그의 앞에 나타난 헤르메스는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하남에 있는 장원의 안쪽 건물.
다른 곳에 있는 건물들과는 다르게 가면무사들이 지키고 있는 안쪽 건물에서는 네 명의 인영이 원형 식탁에 앉아 있었다.
미령과 하나린이 마주보고, 야차와 이서연이 마주보고 있는 그 공간.
그곳에서 야차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 보거라, 내가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야차의 말.
그에 이서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으음…… 솔직히 저도 오빠가 술에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쉽게 될 줄은 몰랐네요."
"이 몸에 대한 믿음이 너무 부족한 게 아니더냐? 이 몸이 도대체 얼마나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 정도의 연륜을 가지고 있으면 취한 남정네 하나를 조종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니라.
그렇게 말하며 자신감을 표출하는 야차.
그 모습을 보며 이서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많은 이(?)들은 아니지만 적은 몇몇의 예상대로, 제자들이 김현우와 성공적으로 관계를 진척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서연과 야차가 은밀하게 뒤에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뭐…… 은밀하게 움직인 것도 아니었고 사실 야차가 혼자 판을 전부 만든 거지만.'
이서연은 살짝 감탄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야차를 바라봤다.
솔직히 맨 처음 이서연은 야차가 미령과 하나린을 보고 그런 작전을 제시했을 때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사실 그녀에게 있어서 이 작전은 딱히 별다른 이득이 되거나 하는 것이 없었으니까.
물론 그렇기에 이서연은 뒤에서 그녀에게 은근히 돌려 묻는 식으로 그녀의 진위를 확인하려 했으나 야차는 웃음을 지으며 그런 게 있다고 답할 뿐, 별다른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 하나린과 미령을 꼬셔서 사이좋게 김현우의 품 안에 들어가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야차가 김현우를 어쩌면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김현우는 그때 야차가 가지고 있는 천살주라는 매우 독한 술을 먹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김현우를 뜻대로 움직인 것은 굉장히 신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그와 함께 탑에서 생활했던 이서연마저도 김현우가 어디로 튈지 아직도 제대로 감을 못 잡으니까.
그렇기에 이서연은 문득 생긴 궁금증을 곧바로 입에 담았다.
"근데,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무얼 말이냐?"
"현우 오빠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얼마 전까지는 떠듬떠듬거리던 오빠가 술 한잔 마셨다고 그렇게 상남자가 된 거냐 이거죠."
이서연의 물음.
그에 야차는 피식 웃고는 이내 양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미령과 하나린을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뭐, 그리 특별한 기교는 아니었다. 다만-"
"다만-?"
이서연이 저도 모르게 생겨나는 궁금함에 야차의 뒷말을 따라하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건 나중에 알려주도록 하마."
"……."
"뭐, 너무 그런 표정을 짓지 마라, 이야기 하나만 들으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줄 테니까."
"……이야기 하나요?"
"그래."
야차는 그렇게 대답하며 이내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내 씨익 웃은 그녀는-
"그래서, 어땠느냐?"
-본격적으로 제자들에게 경험담을 듣기 위해 관전모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291화. 딱 대라 (2)
"이 정도면 설명이 되었겠습니까?"
탑의 최상층에 만들어진 성의 내부에서, 김현우는 자신을 헤르메스라 소개한 이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심마가 지금까지 진 빚을 받으러 왔다 이거야?"
"그렇습니다. 이해가 빠르시군요."
"……."
헤르메스의 말에 김현우는 슬쩍 고민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왜 그러십니까?"
"왜 그놈의 부채를 왜 나한테 찾고 지랄이야?"
다짜고짜 나온 김현우의 욕설에 헤르메스는 순간 웃고 있던 미소를 경직시킨 채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말 그대로인데? 그건 내가 진 빚이 아니라 그놈이 진 빚이잖아? 근데 그걸 왜 나한테 찾느냐 이거지."
무척이나 당당하게 말하는 김현우.
그에 헤르메스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김현우를 바라보다 이내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야기했다.
"……죄송합니다, 제 설명이 부족해 이해를 잘못하신 것 같군요."
"뭐?"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제가 부채를 받으러 온 것은 당신이라는 개인이 아닌 '탑의 주인'에게 부채를 받으러 온 겁니다."
한마디로-
"애초에 저는 심마에게도 부채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이 탑의 주인, 그러니까 한마디로 '탑주'에게 받아야 할 부채를 받으러 온 겁니다. 이제 이해가 좀 되십니까?"
실실거리는 웃음을 지운 채 말하는 헤르메스.
김현우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젓더니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지 고개를 숙였다.
잠시간의 침묵.
"쯧."
곧 짧게 혀를 참과 동시에 고개를 든 김현우는 물었다.
"그래서 뭘 갚아야 하는데?"
"별것 아닙니다. 소모한 만큼의 마력을 업으로 치환해 주시면 됩니다."
"……소모한 만큼의 마력을 업으로……?"
그가 인상을 찌푸리자 헤르메스는 자신의 옷 안에서 돌돌 말려있는 종이 하나를 꺼내들어 김현우의 옆에 있던 책상에 놓았다.
"자세한 것은 이 안에 써져 있으니 확인해 보시면 될 것 같군요. 그리고-"
헤르메스는 김현우의 옆에 있던 노아흐와 아브를 돌아봤다.
"아무래도 제가 여기에 있는 건 여러분께서 이야기를 하는데 방해가 될 테니, 저는 삼 일 뒤에 다시 오는 것으로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계약이 잘 이행되기를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사라진 헤르메스.
마치 처음부터 여기에 없었다는 듯 느껴지던 기운과 마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김현우는 허 하는 웃음을 지었고, 그 옆에 있던 아브는 헤르메스가 두고 갔던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이건 무슨……."
종이를 보자마자 터져나오는 아브의 중얼거림에 김현우는 물었다.
"왜 그러는데?"
"……이건 그냥 빚 정도가 아닌데요?"
그와 함께 시작된 아브의 설명.
김현우는 그 설명을 한동안 가만히 듣고 있다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한 마디로, 그냥 간단하게 정리해서 해석하자면 설계자가 돈을 한계까지 끌어다 쓴 상황이라 이거야?"
그의 말에 아브는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이 맞아요. 게다가 더 중요한건 그 계약기간의 만기가 바로 2주 전에 지났다는 거죠."
"……이 새끼 존나 쎈 척하더니……."
그냥 빚쟁이였네?
김현우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심마의 존재가치가 더더욱 낮아지는 것을 느끼며 두통이 일어난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곤 말했다.
"그냥 배 째면 안 되나?"
그의 말에 아브는 설명했다.
"……솔직히 저도 지금 종이에 쓰여 있는 내용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게 바르다고 생각돼요.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게 사실이라면……."
조금 전 사라졌던 헤르메스.
그는 김현우에게 빚에 관한 이야기 말고도 새로운 탑주가 된 것을 축하한답시고 이 탑과 무슨 계약을 어떻게 맺고 있는지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었다.
"뭐라고 했더라……? 관리기관?"
"네, 관리기관이요."
이 탑, 그러니까 맨 처음 설계자이자 심마가 자신의 탐욕을 위해 만들었던 이 탑은 '관리기관'이라는 곳과 계약을 해 이 탑을 움직일 수 있는 마력, 그러니까 에너지를 얻는 대가로 일정 부분의 업을 지불하기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심마 이 새끼는 초반 빼고는 계속해서 업 지불을 미루면서 지가 다 처먹은 거고. 그치?"
"……그렇네요. 적어도 이 양을 보면 그냥 처음부터 안 낼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요?"
"이 새끼 처음부터 노리고 그냥 나한테 뒤진 거 아니야?"
-막상 호의호식하다 보니 빚이 감당이 안 돼서 그냥 뒈져 버린 거 아니냐고.
김현우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자 아브가 마찬가지로 한숨을 내쉬며
"……애매한 상황이네요. 만약 정말로 배를 째버리면 그쪽에서 더 이상 마력 공급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마력 공급이 없으면 안 되나?"
"네?"
"아니, 생각해 보면 어차피 마력이 사용되는 이유는 각 계층에 문제가 있을 때 원래대로 돌리기 위한 마법진이 움직이는 거라며?"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대답했다.
"가디언의 말대로 그것뿐이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 이외에도 마력이 사용되는 부분은 많아요."
"공급이 없으면 안 될 정도로?"
"당연하죠. 만약 지금 이 상황에서 마력공급이 끊긴다고 치면…… 아마 이 탑 전체가 멸망할 거예요."
"……뭐? 멸망?"
"네, 멸망이요."
"아니……마력 공급이 안 된다고 이 탑에 있는 계층들이 모두 멸망한다고?"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디언은 잘 모르겠지만 이탑은 무조건적으로 마력이 유통돼야만 제대로 탑의 기능이 돌아가도록 설계되고 또 만들어졌어요. 만약 그렇게 만들어진 탑에 마력이 제대로 유통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탑에 있는 계층들이 멸망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아니, 어떻게 멸망하는데?"
"그건 저도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어요. 다만 확실한 건 '마력'이 끊긴 순간부터 이 탑에 존재하는 계층은 멸망을 위해 달려갈 거예요."
무겁게 중얼거리는 아브.
김현우는 허, 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결국 선택지가 없다는 거 아니야?"
"그렇……죠? 저희 중에는 이 탑을 유지할 정도로 거대한 마력을 뽑아 낼 수 있는 기관이 없으니까요."
"……그럼 탑을 얻으려면 빚을 갚아야 하는데, 그건 또 너무 비싸다며?"
"그것도 맞아요."
"심마 이 개새끼."
아브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심마 욕을 하는 김현우.
그렇게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할지 한참 동안이나 턱을 톡톡 두들기던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려 아브를 보곤 물었다.
"야."
"네?"
"생각해 보니까, 너희들은 저 위에 있는 그 뭐냐…… 관리기관에 대해서는 아예 모르고 있던 거야?"
그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애초에 이 탑의 위가 있다는 건 전혀 들어보지 못했어요. 그건 처음 제가 통괄자로서 이곳에 왔을 때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으니까요."
아브의 단호한 대답.
노아흐는 살짝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아주 어렴풋이 위에 뭔가가 있다는 것은 깨닫고 있었네."
"깨닫고 있었다고?"
"그래, 애초에 나는 이 탑을 제작한 제작자이니까 말일세, 물론 그 위에 있는 게 사실 관리기관이나 저런 사람인지는 몰랐네만……."
노아흐의 말을 들은 김현우는 쯧 하고 혀를 차곤 말했다.
"이거 완전 개판이 따로 없네."
이 탑의 탑주인 심마를 죽이고 이제 좀 평화롭게 살아보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설계자는 알고 보니 개 병신 빚쟁이 새끼였고, 또 다시 보니 그냥 갑을 관계에서 을을 담당하고 있는 병신이었다.
"에휴 씨발."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욕설.
김현우는 그 상황에서 목재 탁자를 툭툭 두드리며 생각을 이어나가는 듯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려고요……?"
갑작스레 일어선 김현우를 보며 조심스레 묻는 아브.
그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야, 위에 아직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제대로 모를 길이 있다고 했지?"
"네, 그렇긴 한데……."
김현우가 탑주의 자리를 얻고 아브와 노아흐가 최상층을 새롭게 지을 때, 아브는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모를 문을 하나 발견했었다.
"나 잠깐 어디 갔다 올 테니까 하던 거 하고 있어."
그녀의 긍정에 김현우는 곧바로 말하고 움직이는 김현우.
"아, 아니 가디언! 갑자기 가셔서 어쩌시려고요!? 거기가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도 모른다니까요?!"
그에 아브는 그런 김현우를 만류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그는 아브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빚을 지고 살아? 그것도 거의 평생?'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김현우는 누군가한테 빚지는 것은 뒤져도 싫었고, 그것이 일방적인 을에 가까운 관계라면 그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아브의 만류를 무시한 채 탑의 위로 연결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문득 그는 아주 예전,
그는 자신이 '탑주'가 되기 이전을 생각했다.
최하층의 구더기 소굴에서 살면서 아직 제대로 전투라는 것을 제대로 치르지도 못했을 때의 기억.
그때의 그는 '구더기'라고 불렸으며,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저 쓰레기에 불과한 인생이었다.
허나 그가 살고 있는 세계에 탑이 생기고 나서, 그는 본격적으로 바뀔 수 있었다.
알량한 힘으로 탑에 들어간 그는 구더기라는 신분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힘을 키울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는 탑을 오르며 자신의 힘을 더욱더 키울 수 있었다.
그래, 더욱더.
층계를 오르면 오를수록 그는 더더욱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고 그가 탑의 중앙층을 넘었을 때, 더 이상 그를 얕보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상태에서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탑을 올랐다.
오르고, 오르고, 또 올랐다.
계속해서.
이미 자신의 신분은 완전히 세탁이 끝났고, 더 이상 구더기로 부르는 일은 없어졌으나,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탑을 올랐다.
수많은 이들이 혐오했고.
수많은 이들이 평범하게 보는 것을 넘어서.
수많은 이들이 자신을 경외하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기에 그는 끊임없이 탑을 올랐고, 마침내 탑의 주인에게 도달해 그를 죽이고 자신이 직접 탑주가 될 수 있었다.
모두에게 칭송받고, 그 누구에게도 두려움의 존재로 남을 수 있는 탑주가.
그렇기에 그는 탑주로서 지내며 굉장한 만족감을 느꼈고, 자신이 구더기일 때의 시절을 기억하지 않았다.
"……."
그래,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네 녀석은 뭐냐?"
최하층에서는 '구더기'라 불렸고.
중층에서는 '걷는 자'라고 불렸으며.
탑주의 자리를 계승한 지금에는 '계승한 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자신의 왕좌에 앉아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자는 굉장히 느긋해 보였으나, 한 편으로는 굉장히 짜증이 난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이내 그- 아니 김현우는.
"너, 관리기관에 소속된 놈이냐?"
그렇게 말하며 계승한 자를 바라봤다.
292화. 딱 대라 (3)
"내가 관리기관에 소속되어 있다고?"
김현우의 물음에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는 계승한 자.
그는 자신의 애검을 불쾌하다는 듯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헛소리하지 마라. 광견."
"뭐? 광견?"
김현우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찌푸려지자 계승한 자는 입가에 조소를 만들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너를 표현하기에 이토록 좋은 단어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지? 이 탑에서 올라온 것도 아닌, 다짜고짜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와 이 탑의 탑주인 나에게 그 차이도 느끼지 못하고 무례하게 입을 놀리고 있지 않은가?"
계승한 자의 말.
김현우는 그 말에 피식 웃고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곧 무엇인가가 생각난 듯 살짝 고개를 저은 그는 원래 하려던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너는 관리기관은 알지도 않고 딱히 뭔가 관계가 있지도 않다 이거네?"
김현우의 되물음.
그에 계승한 자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너 같은 광견에게 정보를 공유할 생각은 없다."
"정보를 공유할 생각이 없어? 뭐야, 그럼 조금은 알고 있다는 거네?"
"그게 네 녀석과 무슨 상관이지? 내가 어느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있든 이 정보가 네게 넘어가는 일은 없을 텐데? 아니-"
스르릉-
"오히려 네 녀석은 다른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뭘 걱정해야 하는데?"
"그야 당연히 네 목숨이지. 설마 왕의 어전에 그딴 흙발로 들어왔으면서 멀쩡하게 살아나갈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계승한 자의 몸에서 마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용오름을 하듯 웅장한 소리를 내며 터져 나오기 시작한 마력.
곧 그의 몸에 터져 나온 마력은 순식간에 계승한 자의 몸을 감싸며-
"갑웃?"
-검은색의 갑옷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빛도 투과할 수 없을 것 같은 칠흑의 갑옷이 평상복 상태의 그의 모습을 덮어나가며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몇 초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온몸에 갑옷을 뒤덮은 그는,
"네 녀석이 어디서 온지는 모르겠지만,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광견."
이내 김현우에게로 검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마치 검은 색의 마력이 망토처럼 휘날리고 있는 계승한 자의 모습.
그에 김현우는 피식 하는 웃음을 짓고는 이야기했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뭐긴 뭐야, 쓸데없이 힘 빼기 하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거지.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정보 하나도 제대로 못 듣고 너만 신나게 쥐어 패주고 가는 건 내 에너지 손실이 너무 크잖아?"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고.
"자 그럼-"
"!!"
"좀 맞고 시작해 보자."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그의 갑옷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
그곳은 무척이나 신기한 곳이었다.
보이는 것은 그저 새하얀 공간.
어디가 위인지, 혹은 또 어디가 아래인지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그곳은 확연한 백색의 공간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백색의 빛으로 꽉 차 있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그곳이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라면 이 안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건물은 처음부터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
그 새하얀 공간에는 관저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하얀색의 인테리어를 위주로 만들어진 관저.
그 관저를 기준으로 마치 새하얀 공간이 만들어져 있는 착각에 빠질 것 같을 정도로 그 관저는 위아래가 제대로 구분가지 않는 그곳에서 확실히 경계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관저의 안쪽.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새하얀 관저 깊숙한 방에는 두 명의 남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한 명은 상석에 앉아 있는 남자.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도착했습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김현우의 앞에서 그가 처한 상황을 설명해 주었던 헤르메스였다.
그는 백색으로 넘긴 올백의 머리를 한번 만지며 슬쩍 고개를 숙였고, 그에 상석에 있던 남자는 손짓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의자를 권했다.
슬쩍 고개를 숙이며 남자의 앞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은 헤르메스.
그는 이내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최후통첩을 전했습니다."
"잘했네. 처음에 조금 과하게 상납을 한 것 때문에 너무 오래 보고 있기는 했지."
남자의 말에 헤르메스는 슬쩍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헌데, 조금 상황이 바뀐 것 같습니다."
"상황이 바뀌다니?"
그의 물음에 헤르메스는 조금 전 자신이 보았던 상황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고, 그 말을 담담히 듣고 있던 남자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예, 아무튼 말씀하신대로 최후통첩을 전하긴 했지만."
"뭐, 그렇겠군. 그쪽에서도 날벼락을 맞은 상황일 테니……."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턱을 몇 번 정도 쓰다듬고는 곧 특이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좀 특이하군. 분명 오랫동안 연체가 밀린 탑은 이번에 마지막으로 추가된 51번 탑이 아니었나?"
"맞습니다."
"그런데 51번 탑의 탑주가 바뀌었다고? 그것도 계승이 아니라 소멸로?"
"정확한 정황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인가관계를 따져봤을 때 그럴 확률이 농후합니다."
헤르메스의 막힘없는 대답.
그에 남자는 몇 번이고 턱을 문질거리며 생각하곤 이내 피식 웃었다.
"신기하군."
"……무엇이 말씀입니까?"
"51번 탑주가 죽은 게 말일세, 자네도 알지 않는가? 애초에 51번 탑주는 다른 탑주와는 다르다는 걸."
남자의 말에 헤르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가 생각하기에도, 51번 탑의 탑주는 다른 탑주들과는 그 시작점이 아예, 라는 말을 붙여도 될 정도로 완전히 달랐다.
'……완전히 예외이기는 하지.'
애초에 1번부터 50번까지 모든 번호가 붙어 있는 탑은 맨 처음부터 만들어진 탑을 '분양'한 것에 비해 51번 탑은 51번의 탑주가 직접 만들고 난 뒤 마력 공급 계약만을 따로 딴 곳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생각해 보면 51번 탑주는 절대로 바뀔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51번 탑을 담당하고 있는 탑주가 다른 탑주들보다도 월등히 강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헤르메스는 전투원이 아닌, 남자의 통신을 주로 맡고 있는 통신원이었으나 51번 탑주가 어느 정도 강한지는 그를 몇 번 만나는 것으로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확실히, 그 강함은 규격외라고 지정할 만하지.'
헤르메스는 홀로 생각하고는 남자를 바라봤다.
아직도 무엇인가를 고민하듯 턱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남자.
그에 헤르메스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다면 뭔가 따로 조치를 취하실 겁니까?"
"조치 말인가?"
"그렇습니다."
헤르메스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는 듯한 남자.
허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지. 애초에 그가 잘 갚기만 한다면 말일세. 애초에 우리 일이 그렇지 않은가? 마력을 빌려주고, 그에 합당한 값을 받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일 아닌가?"
남자의 물음에 헤르메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맞긴 합니다만……."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는 겐가?"
"……이번에 새로 바뀐 51번 탑주는 이전 탑주의 부채를 자신이 값는 것을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더군요."
헤르메스의 말.
남자는 그의 생각을 읽듯 이어 말했다.
"그런데 게다가 기존 51번 탑주를 소멸시킬 만큼의 무력도 있으니 문제가 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는 겐가?"
"……어찌 보면 너무 깊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들긴 합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네. 확실히 혹시 모를 미래에 대비하는 건 좋은 일이지. 하지만 애초에 자네가 생각하는 일은 그 친구가 아주 조금의 생각이라도 있다면 저지르지 않을 일일세."
-아주 간단한 상식선의 문제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와는 반대로 그가 최후통첩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오히려 우리가 제재를 가해야 하겠지만…… 그거야 원래 있던 매뉴얼대로 행하면 되는 내용 아니겠나?"
남자의 말에 헤르메스는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했다.
####
50번 탑의 최상층.
마치 거대한 왕궁처럼 꾸며놓은 50번 탑의 최상층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굉장히 깨끗했다.
조화롭게 만들어놓은 인테리어는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았으며, 성 밖의 조경들은 보기만 해도 왕의 권위를 자연스레 올려 줄 정도로 훌륭했다.
그래, 조금 전까지는.
"크악!"
계승한 자의 몸이 크게 붕 뜨며 잘 왕국의 외벽을 박살 내고, 그 뒤를 이어 조경해 놓은 꽃밭을 등으로 시원하게 갈아버린다.
그에 계승한 자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완전히 개박살이 난 꽃밭에서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야, 너무 느린 거 아니냐?"
"!!"
계승한 자는 자신이 몸을 미처 전부 일으키기도 전에 바로 앞에 도착해 있는 김현우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꽈아아앙!
"끄에엑!"
그와 함께 또다시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다.
배에 묵직한 일격이 들어가 계승한 자의 갑옷이 사정없이 찌그러지고, 이미 그가 쓰고 있었던 멋진 투구는 개박살이 난 채 왕궁 어딘가를 맴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계승한 자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린치를 가하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뭐냐! 이 녀석은 대체!'
"끄악!"
계승한 자는 분명 처음 김현우를 만났을 때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양을 느꼈었다.
분명 상당하지만 자신과 비교했을 때는 어느 정도 흠이 있는 마력.
그렇기에 계승한 자는 그의 실력이 그렇게 높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미친. 잠깐! 크하아악!!"
김현우는 그의 예상을 가볍게 넘어 설 정도로 강했다.
빠아악!
"끄아악!"
김현우에게 머리채를 잡혀 꽃밭 한가운데에서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잡게 된 계승한 자가 어떻게든 김현우의 손아귀에서 떨어지기 위해 발악을 해보려 했으나-빠악!
그의 머리에 들어오는 니킥에 그는 몸을 비트는 것 대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빠악! 빠아악! 빠아아아악!
"자……잠깐! 잠깐!!!"
계속되는 김현우의 린치에 계승한 자는 그의 주먹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몸을 비틀었으나.
"어? 어어? 야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더 아파."
빠아아악!
"끄아아악"
"아니, 움직이지 말라니까? 일부러 적당히 아픈 데만 때리는데 움직이면 한 방에 골로 간다니까 그러네."
"제발 그만……! 그만해!!"
계승한 자의 비명.
그러나 김현우는 그저 피식 하는 웃음을 지으며 계속해서 주먹을 휘두를 뿐이었고,
"그……그만! 그만해! 그만해!! 다 말해줄 테니까 제발 그만!"
마침내 참다못한 계승자의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오는 순간.
"그래! 그렇지! 진작 그렇게 말하면 너도 얼마 안 맞고 나도 힘 조금 덜 쓰고, 얼마나 좋아?"
김현우는 조금 전까지 계승한 자를 패고 있었다는 게 거짓말이었다는 듯 그를 잡고 있던 손을 풀고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계승한 자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고.
"자, 그럼 이야기를 들어 보실까?"
이내 김현우는 그런 계승한 자를 보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293화. 딱 대라 (4)
탑의 최상층에 있는 거대한 성.
노아흐와 아브는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성 2층에 있는 문을 바라보고 있었고.
"……에휴."
이내 한동안 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아브는 진한 한숨을 내쉬며 노아흐를 바라봤고, 이내 그 옆에서 그녀와 별반 다를 것 없던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걱정이로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둘이 바라보고 있는 문.
그것은 바로 아브가 얼마 전에 발견했던, '출구가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는 문'이었다.
물론 출처를 알 수 없는 것이 최상층에 존재해 봤자 별로 좋을 것이 없었기에 아브는 그 문을 보자마자 없애버리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그 문은 아브가 없앨 수 없었고, 그렇기에 놔둔 것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들어가 버릴 줄이야."
아브는 몇 번이나 내쉬었는지 모를 한숨을 다시금 내뱉으며 아까 전의 장면을 회상했다.
헤르메스가 찾아오고 나서 이야기를 몇 번 나누더니 정보를 얻어오겠다고 말한 김현우는 아브와 노아흐가 말릴 시간도 없이 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도대체 출구가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모를 저 문으로.
"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막상 그렇게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는군."
"네……?"
"뭐, 결국 아무리 걱정해도 김현우는 우리 중에서는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뭐, 그건 사실이지만."
"물론 나도 걱정이 전혀 안 되는 건 아니네만, 그래도 너무 마음을 졸일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하군……."
-뭐 애초에 그가 죽는다는 것 자체가 제대로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게 더 맞는 말이네만.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사실 그것보다도, 나는 이 '위'에 대한 존재가 더 충격적이군."
"……'위'의 존재?"
"그렇네. 자네도 자네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보다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네."
-나는 상당한 세월은 살아서 세계의 변화를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말일세.
"그런데 이 세계를 제외하고도 다른 세계가 있다라……."
노아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복잡한 표정으로 마력이 흘러들어오고 있는 성 중앙의 동력구를 바라봤고, 아브는 그런 그를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저도 좀 충격이네요. 뭐, 저 나름대로 한때 지금 제가 존재하는 차원 말고 다른 차원이 존재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지만 정말 있을 줄은……."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브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대답했다.
"아, 그런데 제작자는 이미 맨 처음 탑을 만들 때 위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뭐, 짐작하는 것과 실제로 확인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이지 않나? 내 경우에도 그런 것이지."
노아흐와 아브는 그렇게 김현우가 들어간 문 안에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그렇게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50번 탑에서는.
"……."
"……."
김현우와 계승한 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왕궁의 천장은 부서져 있었고, 왕성의 뷰를 통해 볼 수 있었던 조경도 완전히 개 박살이 나있었으나 계승한 자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고.
"흐음……."
김현우는 반쯤 부서진 탁자에 손을 올리고서 곰곰이 생각을 하는 듯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몇 번이고 고개를 혼자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자, 그럼 우리 한번 해보자, 지금부터 나는 내가 들었던 말을 쭉 정리해서 말할 건데 내가 이해한 게 틀렸으면 보충설명을 해주면 되고, 그게 아니면 그냥 넘어가면 되는 거야. 오케이?"
"……알겠다."
김현우의 말에 힘없이 대답하는 계승한 자.
'도대체 왜 내가 이런 꼴을…….'
물론 대답하는 와중에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괴감이 흘러넘쳤으나, 그는 곧 김현우가 하는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안 맞으려면 제대로 대답해야 했으니까.
"자, 우선 맨 처음으로 너는 관리기관에서 관리하고 있는 총 51개의 탑 중에서 50번의 탑주를 맡고 있고. 본명은 '계승한 자'가 아니라 '지크프리트'라 이거지?"
"맞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김현우의 말에 긍정하는 지크프리트.
김현우는 곧바로 다음 질문을 이어나갔다.
"관리기관이랑은 마력 공급 계약을 맺었고?"
"맞다. 하지만 그건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가 맺은 게 아닌 전의 탑주가 관리기관과 맺었던 계약이다."
"탑을 돌리기 위해서?"
"맞다."
지크프리트의 대답에 김현우는 또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채점표 하나에 동그라미를 치곤 이어 말했다.
"그렇게 마력 공급 계약을 해서 탑을 돌리는 이유는? 다들 제각각이라 이거지?"
"맞다."
"어떻게 제각각인 걸 알지?"
마치 범인을 심문하는 것 같은 김현우의 말투에 지크프리트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말을 이어나갔다.
괜히 한마디 했다가 더 맞는 건 싫었기 때문이었다.
"……탑주 회의가 있기 때문이다."
"……탑주 회의?"
"그래, 나도 탑주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실제로는 두 번 정도밖에 얼굴을 내비친 적이 없긴 하다만 대충 1년 기준으로 한 번씩 관리기관에서 탑주 회의를 연다. 뭐, 실제로는 회의라기보다는 연회의 성격이 더 강한 것 같지만……."
그렇게 말하며 말을 줄이는 지크프리트.
"그럼 거기에서 대충 정보를 얻었다 이 말이지?"
"그렇다. 뭐 몇몇 탑주들은 참여하지 않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회의가 있다고 하면 꼭 참여하는 편이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김현우는 물었다.
"이유는?"
"……이유라니?"
"탑주들이 회의에 참여하는 이유 말이야."
"그게 딱히 중요한 부분인 것 같지는-"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말하려다 김현우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마 대부분이 정보교류와 친목회…… 그리고 대충 파벌 나누기 같은 느낌이 조금 강한 것 같군."
"파벌 나누기? 그건 또 뭐야?"
"……나도 잘 모른다."
"……정말?"
"저, 정말이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애초에 나는 탑주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냥 서로 편을 가르고 견제하고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지크프리트의 말에 김현우는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거리곤 말했다.
"그 외에 네가 말했던 게 또 뭐가 있었지?"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선에서의 대답은 전부 다 해준 것 같은데. 유감이지만 내가 이 이상 알고 있는 것은 없다."
지크프리트는 자신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듯 양손을 들어 올렸고, 그 모습을 본 김현우는 앞서 말했던 내용을 정리하곤 말했다.
"지금 말해준 것 외에는 또 말해줄 거나 그런 건 없냐?"
"……없다.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나는 애초에 원래 탑주를 밀어내고 탑주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기관에 대해서는 딱히 아는 게 없다. 애초에 관리기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도 없고 말이다."
"왜?"
"어차피 이야기해 봤자 좋을 게 단 하나도 없으니까."
"이야기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건 무슨 소리야?"
김현우의 물음에 지크프리트는 김현우를 한번 바라보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말 그대로의 이야기다. 관리기관은 탑주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갑의 위치다. 애초에 탑을 돌리기 위해서는 관리기관에서 공급해 주는 마력이 필요하니까."
"아, 한마디로 괜히 흉봤다가 밉보이면 뭔가 불이익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말 못한다, 뭐 이런 거야?"
"……."
지크프리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김현우는 그것을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이고는 중얼거렸다.
"완전 독과점 형태로 지들 내키는 대로 해 처먹고 있나 보네."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문 김현우.
그에 지크프리트는 김현우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왜?"
"너는 대체 누구지? 도대체 어디서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거냐? 적어도 내가 느낀 마력으로 너는 내가 있는 탑을 올라온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지크프리트의 물음.
그에 김현우는 별것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나도 탑주야."
"……탑주라고?"
"그래."
김현우의 긍정에 지크프리트는 내심 자신이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의 싸움에서 봤던 그의 힘은 확실히 규격 외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곧 또 다른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김현우의 무력에 대한 의문.
지크프리트는 분명 탑주의 자리를 차지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의 무력은 그래도 탑주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정도는 됐다.
그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마치 자신을 애 다루듯 가볍게 가지고 놀았다.
그야말로 엄청난 무력.
그렇기에 지크프리트는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온 탑주지?'
그는 저번에 열렸던 탑주 회의를 생각하며 그때 보았던 얼굴을 하나둘 기억해 봤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김현우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탑주인가?'
아니, 그렇다고 해도 조금 이상했다.
그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탑주가 갑작스레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서 이렇게 관리기관에 대해서 일일이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이상하니까.
애초에 관리기관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이들은 맨 처음 탑을 받았던 탑주들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잠시 고민을 거듭하던 지크프리트는 이내 자신의 의문을 풀기 위해서 또 한번 질문을 시작했다.
"……혹시 탑주가 된 게 최근인가?"
"이제 일주일 좀 안 된 것 같은데?"
"……혹시 네가 탑주가 되기 전 탑주의 이름을 알 수 있겠나?"
지크프리트의 물음에 김현우는 일순 귀찮음을 느끼기는 했으나 그의 얼굴을 슥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심마다."
"……심마?"
"아, 다른 애들을 그놈을 형체 없는 자라고 하던데, 원래 알고 있는 놈이냐?"
김현우의 물음.
그에 지크프리트는 두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뜨며 말했다.
"네, 네가 소유하고 탑의 전 탑주가 혀……형체 없는 자라고?"
깜짝 놀란 것 같은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는 지크프리트.
그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계승받은 건가? 아니면 소멸시킨 건가?"
"계승은 또 뭐야? 그런 건 잘 모르겠고 당연히 조지고 빼앗은 거지. 그 이외에도 탑을 빼앗을 방법이 있나?"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여는 김현우.
그에 지크프리트는 떠억 소리가 날 정도로 입을 벌리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네가 형체 없는 자를 죽였다 이거냐?"
"……똑같은 걸 몇 번이나 물어봐? 그놈이 그렇게 대단한 놈이야?"
몇 번이나 계속되는 똑같은 물음에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지크프리트는 당연하다는 듯-
"당연한 것 아닌가? 그는 적어도 탑주 회의에 나오는 탑주들 중에서는 거의 최상위권의 무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다."
"……뭐?"
-그렇게 대답했다.
294화. 너희들…… 대체 누구? (1)
"……그놈이 그렇게 쎈놈이었어?"
김현우의 물음에 지크프리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 게다가 그가 가지고 있는 51번째 탑은 관리기관에서 분양한 것이 아닌 본인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그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지."
"……탑을 만든다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무슨 그런 당연한 것을 물어보느냐는 듯 띠꺼운 표정으로 되묻는 지크프리트.
김현우는 순간 손이 올라갈 뻔했으나 참았다.
"뭐."
확실히 심마는 강했다.
애초에 지금 심마를 이긴 시점에서 생각해 봐도 그의 능력은 개사기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물론 그 진실을 알고 있다면 상대하기가 아주 조금은 편해지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심마를 이기는 것은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잠시 그와의 싸움을 회상하던 김현우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짧게 혀를 차고는 잠시 생각했다.
'이제 물어볼 수 있는 건 전부 물어봤나.'
사실 김현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리기관의 위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지크프리트는 그곳으로 가는 방법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뭐…… 회의에 갈 때도 헤르메스가 포탈을 열어줬다고 하니까…….'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건가?"
은근히 기대되는 눈동자를 담아 김현우를 바라보는 지크프리트.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상 알고 있는 정보도 없잖아?"
"……그렇긴 하다."
"그럼 더 이상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지."
김현우는 그렇게 대화를 끝내고는 가볍게 손을 흔든 뒤, 자신이 빠져나왔던 지하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
김현우는 그야말로 삽시간에 지크프리트의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것도 무척이나 깔끔하게.
"……."
김현우가 걸어갔던 지하를 잠시 멍하니 보던 지크프리트는 멍하니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조경은 이미 옛날 옛적에 개박살이 나서 더 이상 조경으로서의 가치가 없었고, 그것은 성도 마찬가지였다.
그 풍경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지크프리트는 이내 자신의 안에서 깊은 자괴감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또 한번 시선을 돌려 김현우가 내려갔던 지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대체."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묘한 자괴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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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번 탑의 최상층.
노아흐와 아브는 보란 듯이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돌아온 김현우에게 질문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9계층의 시간으로는 이제 하루 정도가 지난 것 같아요."
"하루? 하루나 지났다고?"
"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저쪽에 오래 있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가 지날 정도로 오래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가 지크프리트와 싸우고 그에게 정보를 캐내는 시간은 아무리 잘 쳐줘도 두 시간을 넘지 않았던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하루나 있었다라…….'
오고 가는 시간이 길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그 생각을 집어넣었다.
사실 지금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저 문 너머는 다른 탑에 연결되어 있는 문이라는 거군요?"
아브의 질문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저쪽으로 쭉 나가다 보니까 나 말고도 다른 탑주를 만날 수 있었어."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곤 이내 그가 50번 탑에서 얻어 온 정보를 아브와 노아흐에게 알려주기 시작했고.
"……."
"……."
그 둘은 김현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집중했다.
그렇게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김현우의 설명이 전부 끝났을 때 노아흐는 상당히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러나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놀랍군. 탑이 이것 말고도 50개나 더 있다고?"
"거기에다가 탑이 만들어진 곳이 제각각의 차원이라니……."
"이것 참…… 그동안 알고 있는 게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나는 우물 안 개구리랑 별다를 바 없는 신세였군."
"그러게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한숨을 내쉬는 둘.
그 둘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 중 지금 당장 우리한테 유의미한 정보는 관리기관의 위치인데…… 듣기로는 그냥은 갈 수 없는 것 같더라고."
"그냥은 갈 수 없다고요?"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크프리트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했고, 그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관리기관은 마법진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거네요?"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그쪽으로 가는 마법진을 만들 수 있을까?"
김현우의 질문에 아브는 자신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어요."
"그렇군, 나도 마찬가지일세."
"왜?"
그의 말에 노아흐는 고민하는 기색을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이 탑이 소속되어 있는 차원 내에서의 이동이라면 나도 어디든 데려다 줄 수 있네. 자네가 탑주의 자리를 먹어치운 뒤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지."
하지만-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마법진은 전혀 다른 문제일세. 애초에 위험성이 너무 많지."
"위험성이?"
"맞아요. 애초에 이 차원 내에 있는 위치라면 저희가 어떻게든 특정해서 최대한 안정적으로 마법진을 만들어 보겠지만…… 차원 밖이라면 상정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곧바로 대답했다.
"우선 위치 좌표 이론부터 다시 짜야겠죠? 그 뒤에는 형상학 이론을 다시 정립해야 하고…… 그 뒤에 자잘한 이론들을 다시 처음부터 재정립해서 위쪽의 차원과 에러가 없는지 대조해 보면-"
"……그렇게 신경 쓸 게 많아?"
"당연하죠. 마법은 그냥 마력만 있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는 아브.
거기에 노아흐는 덧붙였다.
"확실히…… 뭔가 기준이 될 만한 마법 지표 같은 게 있다면 모르겠다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곳으로 가는 마법진을 만들어도 위험도가 높아서 힘들 것 같네."
"쩝."
노아흐의 말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김현우는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김현우의 생각으로는 당장 그 관리기관이라는 곳에 가서 깽판을 치고 싶은 생각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김현우로서는 아무리 '탑주'와 관리기관의 마력 공급 계약을 설명해 줘도 그냥 이렇게밖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모르겠고, 네 전 탑주가 이만큼이나 집세가 밀렸으니 네가 내라.'
그야말로 김현우에게 있어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상황.
'그러자고 계약을 끊자니 계약을 끊을 수도 없고…….'
아브에게 들었을 때, 만약 더 이상 마력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9계층이 멸망할 확률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외에도 다른 계층들까지 전부.
"흐으음……."
김현우가 다른 계층에 가본 거라고 해봤자 8계층을 비롯한 몇몇 계층뿐이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묘한 부담감을 느꼈다.
당연하지 않은가? 당장 마력을 끊는다면 수억의 생명이 사르르 사라져 버리는 건데.
물론 자신과 관계되어 있지 않다면 딱히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문제는 이미 김현우가 탑주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게 문제였고, 그 선택을 자신 스스로 한다는 것도 문제였다.
"으으음."
그렇게 얼마나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었을까.
"……답이 안 나오네."
[뭐가 그렇게 답이 안 나오는데?]
"?"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떠 있는 눈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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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멕시코시티 여행 갔다 왔는데 진짜 시설 개 좋아진 거 실화냐? ㅋㅋㅋㅋㅋㅋㅋㅋ
글쓴이 : 토라바리
우선 아래에 세 줄 요약 있으니까 바쁜 사람들 세 줄 요약 보러 가고.
ㅎㅇㅎㅇ, 원래 여기서 놀던 헌붕이인데 저번 일 이후로 멕시코시티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들어서 한번 갔다 왔는데, 진짜 존나 바뀌어서 ㄹㅇ 깜짝 놀랐다.
우선 내가 예전에 갔던 멕시코시티의 모습은 그냥 평범한 도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무슨…… 가보면 라스베이거스랑 관광도시 여러 개 합쳐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조금 소름 돋는 건 멕시코시티 이번에 개편한 부분은 정확히 절반을 갈라서 각각 패도 길드랑 암중 길드에서 만들었잖아?
그 덕분에 한 곳에서 전혀 다른 두 곳을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 개쩜 ㅋㅋㅋㅋㅋ패도 길드가 만든 곳은 무슨 고대 전통 벽화나 동양 중세 체험 온 것 같은 관광을 즐기게 해주고 암중 길드가 만들어 놓은 곳은 그냥 라스베이거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ㅇㅇ.
그리고 이건 좀 국뽕 요소이기는 한데ㅋㅋ, 너희도 알다시피 패도 길드랑 암중 길드 길드장이 김현우 제자라고 하잖아?
그래서 그런지 관광지 곳곳에 김현우 동상 ㅈㄴ 많이 세워져 있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딱히 세 보지는 않았는데 내가 볼 때 최소 5개는 될 것 같더라 ㅋㅋㅋㅋ거기에 덤으로 김현우가 모델 나와서 선전한 추리닝도 오지게 많이 팜, 이번에 나온 스페셜 에디션도 계속 생산하고 있고 ㅇㅇㅇㅇ암튼 그러니까 한번 두 여행지 여행해 보고 싶다 하는 사람은 한번 가봐라.
세줄 요약.
1. 멕시코시티 바뀜.
2. 하나는 동양품 관광지, 하나는 그냥 라스베이거스.
3. 국뽕 개지림.
댓글 4423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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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스마트폰으로 그 게시글을 읽고 있던 이서연은 슬쩍 시선을 들어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구미호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여행을 가고 싶다고?"
"네! 여행 가고 싶어요!"
"천마 씨…… 아니, 무월 씨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사람이랑 가는 거지?"
"그럼요! 거기에다가 손오공님이랑 청룡님도 같이 간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네!"
기대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구미호.
그에 이서연은 대답했다.
"뭐…… 별것 아니긴 하지, 애초에 비용이 그렇게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와!"
확실히 한 대형길드를 이끌고 있는 이서연에게 여행 비용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초호화로 보내줄 수도 있다.
다만 문제는…….
"오공 씨랑 청룡 씨는…… 좀 그렇지 않을까?"
이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그 둘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 명은 인간과 가깝기는 하지만 결국 동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수인이었고, 청룡의 경우에는 누가 보더라도 일반인의 기준에서는 몬스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그런 이서연의 걱정을 알아챈 것일까, 구미호는 후후 하는 미소를 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마 외모에 대해 걱정하고 계신 거라면 안 하셔도 될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두 분 들어오세요!"
구미호는 이서연의 말에 대답해 주는 것 대신 입을 열었고.
"……엑?"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295화. 너희들…… 대체 누구? (2)
"저……저게 무슨?"
이서연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두 명의 남자를 바라봤다.
한 명은 피부가 까무잡잡하게 탄 호쾌한 남자였고.
다른 한쪽은 보기에도 신비해 보이는 푸른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서……설마."
그것은 바로 앞에 서 있는 두 명이 이서연의 눈으로 봤을 때는 한국 1%…… 아니, 전 세계 0.1%급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보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개성을 가지고 있는 두 명의 남자.
"그 설마가 맞아요. 바로 손오공 님이랑 청룡 님이에요!"
이서연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멍하니 그 둘을 바라보고 있자, 구미호는 마치 자랑을 하듯 가슴을 펴며 그녀에게 말했고.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하는 건 처음이지만…… 굉장히 불편하군."
"그래? 나는 뭐, 그냥 살짝 시야가 줄어서 조금 불편하다는 생각은 드는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손오공과 청룡은 각자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에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손오공 씨랑 청룡……씨?"
"그럼 내가 누구로 보이냐?"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손오공이 뭘 그리 물어보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그 옆에 있던 청룡도 마찬가지로 팔짱을 끼고는 대답했다.
"뭐…… 인간형의 모습이라 우리 모습이 조금 바뀌기는 했으나 그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나?"
청룡의 물음에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구미호를 바라봤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
그에 구미호는 짧게 지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어…… 둔갑술을 가르쳐 줬다 이 말이지?"
"그렇죠!"
"……그거,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는 거야?"
"물론 쉽게 쓰기는 힘들어요. 애초에 제 둔갑술은 '요술'에 분류되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그거야 당연하지, 당연히 내가 똑똑해서 아니겠어?"
"그런 간단한 술법 하나 정도야…… 옆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면 익히는 건 순식간이다. 여차하면 이 모습으로 백년 만년도 살아 갈 수 있지."
새삼스럽다는 듯 자랑하듯 말하는 둘.
구미호는 이서연의 귓가에 슬쩍 입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확실히 두 분은 전부 예전에 이미 도술이나 요술을 다뤄본 적이 있으셔서 그런지 가르쳐 드린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모두 둔갑술에 성공하셨어요."
그래도-
"아직 완벽하진 않아서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둔갑할 수밖에 없지만요."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둔갑한다는 건 뭐야?"
"말 그대로예요. 저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습마저도 자유롭게 변할 수 있는데 비해 손오공 님이랑 청룡 님은 변신을 해도 자신의 모습을 가져오게 된다 이거죠."
으음…….
구미호는 그렇게 말하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알맞은 비유가 떠올랐다는 듯 박수를 한번 치고는 말했다.
"그냥 한마디로 손오공 님과 청룡 님이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딱 저런 모습으로 태어날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 말에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그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여자들한테 보여주면 취향 상관없이 무조건 '미남이다'라는 대답을 받을 것 같은 두 명.
손오공과 청룡은 이서연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우리가 그렇게 신기한가?"
그 둘의 모습에 이서연은 슬쩍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야."
"?"
"아무튼, 그러니까 결론은 오공 씨와 청룡 씨도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게 되었으니 멕시코시티에 가고 싶다는 말씀이시죠?"
"뭐, 그렇지. 저번에 인터넷으로 뒤져봤는데 거기의 바가 굉장히 멋지다고 하더군."
"나는…… 뭐, 그냥 궁금해서?"
"궁금하기는 개뿔, 펜타이스 공연 보러 거 아닌가?"
"아, 아니거든!"
"아니기는 개뿔이."
"아무튼 아니야! 분명 이번에 구미호가 갈 때 펜타이스가 원정 공연을 하기는 하지만 목적은 그게 아니라-"
갑작스레 말싸움을 하기 시작하는 둘.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더니 말했다.
"뭐, 알았어요. 사실 그 모습이라면 문제 될 것도 없을 것 같으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오, 정말인가?"
"그거 잘됐네."
"와! 성공!"
그녀의 말에 청룡과 손오공, 구미호가 차례대로 입을 열며 미소를 지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서연은 말했다.
"그 대신."
"??"
"저도 같이 가요."
"같이?"
"뭐, 나야 별로 상관없긴 한데."
"같이 가시게요?"
구미호의 물음에 이서연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저번에는 분명 한동안 바빠서 여행 같은 건 못 갈 거라고……."
"아 그랬는데, 일이 전부 해결됐거든, 이참에 한번 쉬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어 진짜요? 언제 끝났어요?"
"20초 전에 전부 해결됐어."
"……네?"
"……아, 네."
구미호는 이서연의 무엇인지 모를 기백에 눌려 저도 모르게 그 이상 묻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자 그럼 준비해 볼까?"
"……."
그녀의 눈에 차 있는 기묘한 열망과도 같은 무언가를.
####
'내가 이동했나?'
김현우는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검은 눈을 보며 시선을 돌렸으나 자신의 주변은 그대로였다.
아브와 노아흐는 아직 자신의 앞에 앉아있었고, 주변의 인테리어도 무엇 하나 변한 것은 없었다.
다만 조금 달라진 점이라고 하면…….
'시간이…… 멈춘 건가?'
이렇게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아브와 노아흐는 마치 제자리에 멈춘 것처럼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 정도일까.
[이것 참 오랜만이네.]
김현우가 그렇게 주변에서 달라진 점을 찾고 있자 들려오는 목소리.
"오랜만이기는, 이제 2주도 안 지난 것 같은데?"
[그래도 오랜만인 건 맞지.]
"……."
[아, 그리고 딱히 네 친구들은 걱정 안 해도 돼. 애초에 우리 둘은 찰나의 세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내 생각도 읽을 수 있어?"
[읽을 수 있는 것만 읽을 수 있지.]
"그런 애매한 대답은 또 뭔데."
[그런 게 있어.]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며 마치 장난을 치듯 눈꼬리를 짓궂게 꼬았다.
[아무튼, 탑주까지 된 걸 보니 내가 저번에 해준 조언이 상당히 도움이 됐나 보네?]
"뭐 그렇긴 한데."
[좋아! 아주 좋아! 솔직히 믿고 있기는 했지만 내심 걱정이 되기는 했거든, 네가 죽어버리면 내 입장에서는 좀 아쉬우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실시간으로 눈꼬리를 왔다갔다 거리는 눈동자.
어째 이전보다 더 활발해진 것 같았다.
'……분명 예전에는 조금 잠잖았던 것 같은데.'
[뭐 그거야 그렇지, 애초에 나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녀석한테 정을 줘봤자 그놈이 죽어버리면 나만 손해잖아?]
"그럼 지금은?"
[지금은 나를 만날 수 있는 조건이 거의 대부분 총족되었으니까 그냥 편하게 마음 놓고 말하고 있는 거지.]
"너를 만날 수 있는 조건?"
[그래 나랑 만날 수 있는 조건.]
"그건 또 무슨-"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려다 이전, 눈동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런 두서도 없이 '위'로 올라오라고 했던 눈동자의 말.
그것을 떠올린 김현우는 물었다.
"위로 올라오라는 게 이 소리였어?"
[그럼 이 소리 말고 뭐가 있겠어?]
이제는 눈동자를 주변으로 왔다갔다 움직이며 즐겁다는 듯 눈꼬리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곧 입을 열었다.
"그보다, 여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또 할 말이 있어서 나타난 거지?"
[딩 동 댕! 정답!]
"……너 너무 바뀐 거 아니야?"
[이게 원래 내 성격인데 뭐.]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왔다 갔다 움직이는 눈동자.
'분명 처음에 만났을 때는 굉장히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는데.'
거기에 더해서 불가사의한 느낌도 같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눈동자가 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완전 애 같네.'
김현우는 그 생각을 내뱉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무튼, 네가 여기에 나타났다는 건 내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소리 같은데……그럼 이번에도 조언 같은 거 해주려고 온 거지?"
[맞아. 마음만 같아서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도와주고 싶은데…… 너도 알다시피 당장은 불가능하거든.]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며 그 뒤부터 잔잔한 침음을 내며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내 그는 말했다.
[우선 회의에 참가해.]
"……회의?"
[너도 들어서 알고 있잖아? 탑주회의가 있다는 거 말이야.]
"아, 그건 듣기는 했는데 그것도 계속 계약 유지가 돼야 갈 수 있는 거 아니야?"
[그건 맞지.]
"지금 나한테는 그놈들한테 줄 만한 업이 없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 그 녀석들한테 줄 업은 여기 있으니까.]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며 눈꼬리를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고, 이내 그런 눈동자의 앞으로 무엇인가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가 마치 압축되듯 모여들며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무언가는 순식간에 형태가 이뤄졌고.
툭-
이내 김현우의 앞에 있는 식탁에 떨어졌다.
"이건……?"
식탁에 떨어진 것은 붉은색의 돌이였다.
그래, 어찌 보면 보석이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맨들맨들하게 생긴 돌.
김현우가 그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눈동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넘겨줘.]
"이게 뭔데?"
[업이야. 아마 그 정도만 되어도 걔들은 충분히 만족할걸?]
"만족한다고?"
김현우의 물음에 눈동자는 자신의 눈꺼풀을 슬쩍 파르르 떠는 것으로 대답하곤 슬슬 눈을 감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렇게 회의에 참석하고 나면 데블랑이라는 녀석을 찾아봐. 그놈을 찾으면 대충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점점 눈을 감는 눈동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야 잠깐만, 이렇게 나온 김에 의문이나 조금 해결해 주고 가!"
처음에야 아니었으나 김현우는 두 번 정도 눈동자에게 도움을 받은 뒤로 그에게 어느 정도 궁금한 것들이 생긴 상태였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눈동자를 불렀으나 눈동자는 스스륵 감는 눈을 멈추지 않은 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어차피 조만간 또 만날 테니까 말이야.]
아.
[그리고, 그 녀석을 만나게 되면 지금 너한테 있는 관리기관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줄게. 네가 그놈들한테 속하지 않고 마력을 얻을 방법도 말이야.]
-그렇게 자신의 할 말을 하고 완전히 눈을 감아버렸다.
그와 함께.
"응? 이건 뭐죠?"
찰나의 시간에 있던 세계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아브는 갑작스레 식탁 정중앙에 떨어져 있는 붉은 돌을 보며 중얼거렸고, 그런 그녀의 반응에 노아흐도 마찬가지로 떨어진 돌에 관심을 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브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돌을 확인하고는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엑!? 이거 뭐예요! 이 안에 대체 얼마만큼의 업이 담겨 있는 거예요?!"
"……가, 갑자기 이런 게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순식간에 돌에 시선이 집중된 아브와 노아흐.
그러나 김현우는 그 둘의 모습보다는 조금 전 눈동자와 만났던 그때를 떠올렸다.
"쯧."
어차피 조만간 만날 테니 그때 보자고 했던 눈동자의 말을.
"도대체 이놈은 뭔지……."
김현우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허공을 바라봤고-얼마의 시간이 지나.
"그럼, 준비는 되셨습니까?"
김현우의 앞에 헤르메스는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296화. 너희들…… 대체 누구? (3)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헤르메스.
김현우는 그런 헤르메스의 모습을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봤으나 이내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붉은 돌을 꺼내 헤르메스에게 던져주었다.
김현우가 던진 붉은 돌을 무척이나 익숙하게 잡은 헤르메스.
그는 순간 김현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파악하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와 자신의 손에 잡힌 돌을 바라봤고.
"확인해 봐."
그의 말에 이내 헤르메스는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붉은 돌을 확인했다.
그리고-
"……!"
헤르메스는 이 붉은 돌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양의 업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물론 전 탑주가 얻었던 빚을 전부 갚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업만 해도 분명 엄청난 양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정도의 업을 어디서 구한 거지?'
순간 헤르메스의 머릿속에 든 생각.
그가 51번 탑으로 내려왔을 때, 딱히 탑이 어떠한 변화를 거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말은 곧 탑을 허물어서 업을 뽑아낸 건 아니라는 소리인데.'
허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이것 정도로 큰 업은 얻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렇게 얼마나 고민했을까.
"아직도 확인 안 끝났냐?"
들려오는 김현우의 목소리에 헤르메스는 자신이 생각보다 깊게 고민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고선 그에게 받은 돌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것 참 죄송합니다."
"그래서 확인은?"
"이 정도면 전부 갚을 정도는 아니어도 상당 부분 저희한테 지신 부채를 없앨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것 같군요."
헤르메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들을 지워 버렸다.
'나야 원래 받으려던 업만 받고 그분의 통신책 역할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니까.'
애초에 탑주들이 업을 어디서 가지고 와 자신들에게 바치는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탑주들이 관리기관에게 충분하게 업을 지불할 능력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였으니까.
"그럼 당장 채무는 상당 부분 사라지셨으니, 곧바로 다음 일정을 안내드리도록 하죠."
"……안내?"
김현우가 되묻자 헤르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 관리 기관에서는 대충 돌아오는 주기마다 시간을 정해서 총 51분의 탑주들을 모셔 회의를 진행합니다."
뭐-
"회의라고는 해도 거창한 건 아닙니다. 그저 친목회 정도의 느낌이죠."
헤르메스는 말을 한번 끊고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는 듯하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원래 51번 탑주님께서는 부채 문제로 인해 이번 탑주 회의에서는 참가명단에서 제외되어 있었는데-"
"부채를 어느 정도 갚아서 회의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죠, 아! 그리고 회의에 만약 불참하시더라도 불이익은 존재하지 않으니 원하시는 대로 선택하시면 될 것 같군요."
하지만-
"같은 신분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친분을 만드시려면, 되도록 참가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할 말을 마치고는 이내 김현우를 바라보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럼, 더 이상 말씀드릴 이야기는 없는 것 같으니 저는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
"아니, 뭘 그렇게 가려고 하고 있어? 탑주 회의가 언제인지는 알려주고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빈정거림.
허나 헤르메스는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보통 탑주님들은 딱히 시간에 관해서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음 탑주 회의가 있는 시간을 알려주고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더니.
"……사라졌네요."
아브의 말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굉장히 신기하군, 마력의 유동이나 별다른 특별한 장치를 사용한 것도 아닌데 마치 사람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다니."
노아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헤르메스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으나, 그는 결국 이렇다 할 결과를 찾지 못한 채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헤르메스가 해주었던 말을 다시금 중얼거렸다.
"3일 뒤라."
헤르메스는 김현우에게 이 탑의 시간 기준으로 3일이라는 시간 뒤에 탑주 회의가 열린다는 것을 알려주고는 가버렸다.
'……그리고 거기에서 데블랑이라는 놈을 찾으면 되는 건가?'
얼마 전 김현우는 눈동자를 만났고, 그 눈동자는 김현우에게 붉은 돌과 줌과 함께 그런 말을 했었다.
'……이름만 딱 알려주고 찾아가라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는데.'
김현우로서는 결국 탑주 회의에 가서 데블랑을 찾아 볼 수밖에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눈동자에게 어느 정도의 관심이 상태였고, 무엇보다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김현우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관리기관을 통하지 않고 마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
사실 김현우가 데블랑을 찾으려는 이유의 거의 대부분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관리기관 없이 마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
당장 지금은 몰라도 김현우는 관리기관에서 마력을 받아먹을 생각은 없었다.
그곳에서 마력을 받아먹으려면 업이 있어야 하고, 업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는 결국 이전의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애초에 그 새끼처럼 업 처먹는 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김현우는 심마처럼 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그가 생각을 이어나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무래도 외부적인 장치를 쓴 것 같은데……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군."
"그러게요. 혹시나 싶어서 저도 최상층 전체를 탐지하고 있었는데 그 어디에서도 마력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어요."
김현우는 문득 아브와 노아흐가 헤르메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는 슬슬 이곳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금 상태에서 고민해 봤자 이렇다 하고 나올 것도 없으니까.'
애초에 고민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주어져 있는 뭔가가 있을 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정보도 없고 뭣도 없는데 고민하는 건…….'
그냥 쓸데없는 고민에 불과했다.
애초에 정보 같은 건 아무리 고민한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직접 부딪혀 봐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니까.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아……."
곧 있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초의 간격을 두고 다시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본 아브가 이상하다는 듯 물어오자 김현우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니, 이제 저녁이라서."
"네?"
"저녁이라서."
"……음, 지금 나가면 안 되는 이유가 저녁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건가요?"
"그치, 저녁이 지나면 심야잖아?"
아브의 말에 나름대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김현우.
그 말에 아브는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며 그가 저녁을 껄끄러워 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해 봤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아브의 의문은 한 시간 뒤.
"모시러 왔습니다, 스승님."
"잠자리에 드셔야죠, 사부님~!"
도대체 이 탑의 최상층에 누구의 도움을 받고 왔는지 모를, 피부가 굉장히 윤택해져 있는 김현우의 두 제자들이 올 때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다만-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군."
왠지 같이 가는 게 아닌 미묘하게 끌려가는 것 같이 보이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고, 노아흐는 대충 사실을 짐작했을 뿐이었다.
####
멕시코시티의 일부분은 각각 패도 길드와 암중 길드가 지어진 곳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두 개는 서로 다른 관광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허나 그 두 개의 관광지를 그나마 하나로 합쳐 보이게 해 줄 만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동상이었다.
그래, 동상.
"……와, 이거 꼰대가 부러워 하는 거 아냐?"
"그 정도로군."
"이건 좀……."
"……제가 생각해도 이건 좀 과한 것 같아요."
불과 3시간 전, 휴가를 겸해 4박 5일의 일정을 잡고 단체로 멕시코시티로 놀러온 구미호와 무월, 그리고 이서연과 청룡, 손오공은 공항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보이는 동상을 보며 할 말을 잊었다.
"엄청-."
그들의 시선이 가 있는 곳에는 무척이나 거대한 김현우 동상이 있었다.
그래, 김현우 동상이.
몸에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무사복을 입고 있는 김현우가 무척이나 당당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동상.
다만 문제는-
"-크네."
바로 동상의 크기였다.
"빌라 10층 정도 될 것 같은데요?"
천마의 팔에 팔짱을 끼고 있던 구미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동상의 크기를 쟀고.
"……근데, 공항 근처에 이런 거 지어도 되나?"
이서연은 동상을 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그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9계층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건 이 파티 중에서 이서연뿐이었으니까.
그들은 공항에 나오자 한동안 그것을 보며 멍을 때렸으나 이내 이서연은 가볍게 정신을 차리고는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우, 우선 묵을 호텔로 갈까요? 거기서 우선 짐 좀 풀고 움직여요. 안 그래도 이 근처에 호텔에서 보낸 픽업 서비스가 있을 거예요."
이서연의 말에 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일행.
그녀는 곧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호텔 차량을 발견해 일행과 함께 차량에 탑승했고.
"……저기도 있네."
"저기도요."
그들은 호텔에 가는 동안 수많은 김현우 동상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수많은 김현우 동상을…….
"……여기는 북한인가."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리며 차창 밖으로 보이는 김현우 동상을 봤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무복을 입은 김현우가 아닌, 평소처럼 추리닝을 입고 있는 김현우였다.
"옆에도 있네요."
구미호의 말에 따라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도 마찬가지로 김현우 동상이 보였다.
다만 이번에는 김현우가 지금도 입지 않을 것 같고 앞으로도 절대 입을 일이 없어 보이는 양복을 입고 있다는 것일까.
'……대통령 앞에서도 양복을 안 입고 추리닝을 입고 나가는 오빠인데 뭐…….'
이서연은 문득 옛날 생각을 하며 한번 피식 웃고는 호텔로 가는 도중 보이는 김현우 동상을 멍하니 감상했다.
마치 컬렉션별로 정리를 해 놓은 것인지 동상을 볼 때마다 김현우에게 입혀져 있는 옷은 각각 달랐다.
무복부터 시작해서 양복까지.
사실 우상화를 한다기보다는 입힐 수 있는 것을 입혀보고 싶다는 욕구에서 시작된 것 같은 동상들을 보며 얼마나 달렸을까.
"도착했습니다."
"오……!!"
이서연 일행은 차량기사의 도착했다는 말과 함께 차량에서 내렸고, 곧 굉장히 거대한 호텔의 광경을 보며 감탄했고.
"OH……."
곧 일행은 그 거대한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호텔 중앙에 있는 거대한 김현우 동상을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탄성을 내뱉었다.
ㅁ로 지어져 있는 호텔의 구조 가운데에, 문을 열면 그 어디에서라도 김현우의 모습이 보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호텔.
"북한보다 더한 것 같은데."
그 모습을 보며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297화. 시비 걸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줌 (1)김현우의 자택에서, 김시현은 그와 마주보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눈에 띄게 피로해 보이는 기색은 없었으나 이전과는 다르게 조금 지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현우.
"괜찮아요?"
"뭐가?"
"아니, 뭔가 좀 피곤해 보이시길래요."
김시현의 물음에 김현우는 잠시 말없이 자신의 앞에 있는 커피잔을 쥐고는 입가로 가져갔다.
호록.
아주 약간의 커피가 입가로 넘어가고 나서야 알 수 없는 묘한 한숨을 내쉰 김현우는 말을 이어나갔다.
"저기 말이야."
"네."
"역시 튜토리얼 탑을 갔다 왔으니까 체력이 강한 거겠지? 그, 전체적으로 말이야."
김현우의 물음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시현은 곧 얼마 있지 않아 김현우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깨닫고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그렇죠? 튜토리얼 탑을 갔다 오면 기본적으로 스테이터스가 생기다보니…… 아무래도 일반인들과는 좀 다르죠. 근데 갑자기 그건 왜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무엇인가 해탈한 웃음을 짓고는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요즘, 좀 피곤해서 말이야."
"아……."
"맨날 침대에 누우면 꼭 아침해를 뜨고 나서야 눈을 감을 수가 있거든."
호록.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커피를 머금는 김현우를, 김시현은 왠지 아련한 표정으로 보았다.
아마 김현우의 수면부족은 최근 그의 제자들의 피부가 한껏 더 뽀송뽀송해진 이유와도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
그렇게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커피를 마신 지 얼마나 지났을까?
김시현이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커피를 머금는 김현우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커피만을 들이켜고 있을 때, 김현우는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아, 그게."
김현우의 말에 김시현은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찬스라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자신이 준비해 왔던 말을 꺼냈고.
"……국가……뭐?"
"국제연합이요."
"그게 뭔데?"
김현우의 물음에 김시현은 현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해 김현우에게 알려주었고, 그의 이야기를 한동안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 마디로, 지금 네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국제연합에서 나를 초대하고 싶다…… 뭐 그런 거 아니야?"
"그렇죠. 정확히는 형을 포함한 가디언 길드를 국제연합에 넣고 싶다는 소리에요."
"그거, 들어갈 필요가 있나?"
"아뇨, 사실 저희 입장에서는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죠. 애초에 국제연합에 들어가서 얻을 수 있는 건 압도적인 지원금이랑……."
"지원금이랑?"
"명예……인데, 애초에 형은 이미 두 개 다 넘칠 정도로 가지고 있잖아요?"
"……뭐, 명예는 잘 모르겠지만 돈은 좀 많긴 하지."
"그냥 많은 게 아니잖아요?"
사실 김현우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그의 계좌로 들어오는 돈은 무엇이라고 특별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이제 곧 그의 양옆을 차지하게 될 와이프들을 생각하면 김현우는 지금 당장 백만 원짜리 수표를 산처럼 쌓아놓고 매일 밤마다 불을 질러도 돈이 마르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명예도.'
……김시현은 멍하니 생각하며 최근 관광도시로 부쩍 이름이 높아진 멕시코시티를 떠올렸다.
물론 멕시코시티 전체가 관광지로 부상한 것이 아닌, 이전 재앙 사태 덕분에 멕시코시티의 일부분이 깨끗하게 밀려나갔고, 그 밀려 나갔던 부분이 패도길드와 암중길드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지며 관광도시로 자리 잡게 된 것이지만…….
'그 덕분에 지금 이 지구에서 형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간첩일 정도지.'
그 이유는 바로 멕시코시티 곳곳에 세워놓은 동상 때문이었다.
그래, 멕시코시티 근처에 세워놓은 김현우 동상.
그 둘이 만든 시티 내에서만 세워 놓은 동상만 총 50개가 넘어가며, 건물 안에 자잘하게 세워놓은 김현우 동상만 생각하면 수백 개가 넘어갈 것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멕시코시티는 그 이명으로 김현우 시티로 불릴 정도였다.
게다가 관광지 곳곳에 김현우의 동상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이 동상이 많다고 사방 커뮤니티에 뿌리는 덕분에 김현우의 얼굴은 사방으로 팔리는 도중이었다.
'뭐, 사실 그게 아니라도 이미 충분히 유명한 얼굴이지만.'
김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무튼 저를 포함해서 가디언 길드에도 이런 제안이 왔다고 하길래, 형은 어떻게 하고 싶나 생각해서 한번 물어보려 왔죠."
-얼굴이라도 볼 겸해서요.
김시현이 그렇게 말을 끝마치자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 흠, 하며 침음성 흘리다-
"뭐, 나는 잘 모르겠는데."
"네?"
"그냥 아냐한테 정하라고 해. 어차피 내가 뭘 아는 것도 아니고."
-이내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것도 그렇긴 한데 사실 결국 길드장은 형이잖아요?"
"뭐, 그것도 그런데…… 사실 지금까지 관리는 내가 한 게 아니라 아냐가 했잖아? 사실 가디언 길드원들도 내가 아니라 아냐가 길드장인 것처럼 느끼지 않을까?"
"그건-"
맞았다.
김시현이 아냐의 집무실에 항상 가보면 길드원들이 항상 아냐를 길드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는 몇 번 정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물론 아냐는 자기는 사무직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낮추지만…….'
아무튼 김현우를 길드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슬프지만 없는 게 맞긴 했다.
김시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김현우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제부터 길드 관련은 다 아냐가 알아서 하라고 해, 물론 나와 관련돼서 길드에 오는 건 당연히 안하겠지만."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식은 커피잔을 들어 올렸고. 김시현은 이내 그를 보곤 대답했다.
"……뭐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갈까요. 점심 안 드셨죠?"
김시현의 물음.
"뭐, 아직 안 먹었지."
"목동에 덮밥집이 생겼거든요."
"덮밥집?"
"네, 장어덮밥집이요."
"장어 덮밥?"
"네. 들어보니까 장어덮밥이 자양강장에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덮밥집이나 갈래요? 오늘은 제가 쏠게요."
"……자양강장에 좋다고?"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김시현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 김현우는 이내 말했고.
"그럼 두 개 먹을래."
"빨리 가죠."
그 둘은 대화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51번 탑의 최상층.
"아, 오셨어요?"
"왔군."
아브와 노아흐는 조금 전까지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다 김현우가 오자마자 그를 반겼고, 김현우는 무척이나 익숙하게 왕좌 옆에 마련되어 있는 목제 테이블 근처로 와 앉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노아흐와 아브 둘 다 자신의 앞에 무엇인가를 켜놓고 있는 모습.
김현우는 물었다.
"그건 또 뭐야?"
"이 탑의 구조예요."
"탑 구조? 그건 왜 보고 있는데?"
그가 반문하자 이번에는 노아흐가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지금 이 탑은 마력으로 움직인다고."
"뭐, 그렇게 말했지?"
"근데 더 이상 자네는 이 탑에 등반자를 들일 생각도 없다고 했으니, 그에 맞춰서 쓸모없는 마법진을 파악하고, 그것을 줄이기 위해 구조를 만지고 있는 중일세."
"……마법진의 숫자를 줄인다고? 그러면 마력 소모가 좀 많이 줄어들어?"
"뭐, 획기적으로 마력의 소모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네만 그래도 지금 탑에서 소모하는 마력을 최대한으로 줄일 수는 있을 걸세."
뭐-
"그래도 우선 마력이 필요한 것은 변함이 없지만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한번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녀석은? 아직 안 왔어?"
"그 녀석이라면…… 헤르메스를 말하는 건가?"
"그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오늘이 3일째 맞지 않나?"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날짜대로 세보면 오늘이 딱 3일째가 맞아요."
"근데 이 새끼 왜 안 오는 거야?"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자 아브는 어……하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3일째라고는 말하긴 했는데 언제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아직 시간이 덜 된 것 아닐까요?"
그녀의 말에 김현우가 저도 모르게 혀를 찼으나.
"안녕하십니까."
김현우가 혀를 차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고.
"뭐야?"
"이제야 최상층으로 올라오신 것 같아 이렇게 왔습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헤르메스를 볼 수 있었다.
하얀색의 올백머리를 한 채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헤르메스.
김현우는 그런 그의 모습을 뚱하게 바라보고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회의는 지금 바로 가면 되는 건가?"
"예, 51번 탑주님을 빼고 이미 참가할 만한 탑주님들은 전부 참가한 상태입니다."
헤르메스는 그렇게 말하며 흰 장갑을 끼고 있는 자신의 손을 한번 휘저었고, 그와 함께 김현우는 그의 옆에 하나의 문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보기만 해도 돈을 치덕치덕 처발랐을 것 같은 고풍스러운 백색의 문.
"이곳으로 들어가시면 곧바로 회의장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옵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곤 곧바로 백색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거리는 소리조차 없이 말끔하게 열린 문.
김현우는 그 안에 하나의 통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아브와 노아흐를 한번 바라본 뒤 곧바로 문 안으로 들어갔고.
"……."
그는 곧 아무것도 없고 일자로만 이어져 있는 백색의 통로를 보았다.
아무런 장식이나 흔한 조각물 하나 없이, 말 그대로 길이라는 목적에만 최선을 다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 밋밋한 통로.
김현우는 그 통로 속에서 눈동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
그리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우는 통로의 끝에서 조금 전 헤르메스가 자신의 앞에 소환해준 것과 같은 백색의 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까보다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문.
김현우는 곧바로 백색의 문 앞에 도달했고, 이내 별다른 고민 없이 곧바로 문을 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잡소리 없이 깔끔하게 열리는 문.
그리고-
"……!"
김현우는 곧 거대한 문을 열자마자 그 안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문을 열자마자 본 것은 거대한 연회장이었다.
그래, 딱 보더라도 엄청난 사치를 부린 것 같이 번쩍거리는 연회장.
조금 전 보았던 통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조각물이 사방에 배치되어 있고, 벽에는 고풍스러운 벽화들이 하나하나 조각되어 있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조각품들과 벽화들이 눈에 보였고 심지어 천장에도 스테인드글라스와 샹들리에로 멋들어지게 꾸며놓은 모습이 보였다.
그야말로 돈을 오지게 꼴아박은 것처럼 보이는 그 거대한 연회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수많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생명이라고 하는 게 옳은 것 같았다.
연회장 안에는 인간으로 보이는 이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니까.
"……."
그렇게 김현우가 문에 서서 연회장 안의 풍경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환영합니다."
김현우는 곧 들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고.
"이곳에 오신 것은 처음이신 것 같군요. 새로운 51번 탑주님……. 아니, 김현우 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곧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서서 비스듬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성을 볼 수 있었다.
298화. 시비 걸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줌 (2)
"내 이름을 알고 있어?"
김현우의 물음에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채 정장을 입고 있는 여성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희 관리기관과 계약을 맺고 있는 51번 탑주님이시니까요."
그 말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인사를 한 이유는?"
"저는 이곳을 처음 방문하신 탑주님들께 이 탑주회의가 대충 어떤 식으로 주최되고 있는지 안내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간을 내어주시면 처음 이 탑주회의에 참석하신 김현우님께 대략적인 정보를 알려드릴까 합니다. 괜찮으신지요?"
그녀의 물음.
그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그럼 감사히 탑주님의 시간을 받아 탑주회의에 대한 유래와 주최 의도에 대해 설명을…… 예?"
"필요 없다고."
김현우의 말에 슬쩍 놀란 듯 눈을 뜨는 여성, 그녀는 침착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필요 없어."
김현우는 딱 잘랐다.
애초에 김현우는 이다음부터 딱히 탑주회의에는 참가하고 싶지도 않았고, 어차피 그는 이 자리에서 친목을 얻자고 온 것이 아닌 사람을 찾으러 왔을 뿐이었으니까.
'데블랑이라고 했나?'
김현우는 시선을 돌렸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딱 봐도 평범하게 보이는 인간,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적어도 인간의 형상을 갖추고 있는 수인 같은 모습.
-구워어어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그냥 괴물.
'딱 보기만 해서 데블랑이라는 녀석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역시 그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김현우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시선을 돌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를 향해 손을 휘적거렸다.
"여기 계속 있을 필요 없어, 설명 안 들을 거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의 손짓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리는 여성.
"아."
그러나 여성은 몸을 돌리기 직전 김현우의 입가에서 터져나온 탄성에 다시금 그를 돌아보았고.
"야,"
"혹시 여쭈실 거라도?"
"너 탑주들 이름 다 알고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저는 이 탑주회의의 관리대행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 참 잘됐네."
"네?"
"너 혹시 데블랑이라는 이름 가지고 있는 탑주가 누군지 좀 알려줄 수 있어?"
"데블랑……?"
여성이 김현우의 말을 듣고는 되묻고는 그가 말했던 데블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탑주를 생각하고 있을 때쯤.
"……이건."
관리기관의 안쪽에서는, 헤르메스와 남자가 붉은 돌을 놔두고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도무지 어디에서 이런 것을 구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이 붉은 돌 안에 담겨 있는 업은 진짜 업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몇 번이고 붉은 돌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아무리 봐도 맞는 것 같긴 하군."
그러나 석연찮은 표정으로 붉은 돌을 바라보는 남자.
헤르메스는 석연찮아 보이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그가 말하기를 차분하게 기다렸고, 그사이에 남자는 몇 번이고 붉은 돌을 만지작거리며 확인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신기하군."
문득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헤르메스는 슬쩍 고개를 갸웃했다.
"신기……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신기해, 무척이나 신기하군. 굳이 무엇이? 라고 물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전부 다 신기하군."
"……."
그의 말을 가만히 듣는 헤르메스.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우선 이 돌의 출처부터가 굉장히 신기하군. 자네도 느꼈겠지? 이건 세공한 상태의 업이 아니야."
"……그것은 저도 가지고 오면서 슬쩍 확인하는 것으로 느꼈습니다."
사실 헤르메스도 그 부분을 굉장히 신기하게 여겼다.
분명 돌 안에서 느껴지는 업의 기운은 세공을 한 것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저 붉은 돌은 탑주인 김현우가 따로 세공한 돌이 아닌, 원래부터 저 작은 돌멩이 하나에 저런 엄청난 업이 들어 있었다는 소리였다.
"……절대로 탑에서 이런 업을 만들지는 못하지.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경우의 수를 상정해 봐도…… 탑주가 그 짧은 시간에 이 돌을 얻는 것 자체도 신기하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몇 번이고 붉은 돌을 바라보았고,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헤르메스는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한번 뒤를 캐볼까요?"
"뒤를 캔다……."
"예, 맡겨주시기만 하면……."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그렇습니까."
"그래, 어차피 뒤를 캐서 그가 어디서 업을 얻었는지 알아서 무엇을 하겠나? 결국 우리야 그에게 대금을 넘겨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거지."
"뭐, 그 말이 맞기는 합니다만."
"명심하게 헤르메스. 우리가 움직여야 할 상황은 딱 두 가지뿐이야. 처음 한 가지 상황은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대금을 한계기일까지 받지 못했을 때, 그리고 두 번째 상황은 탑주 중에 우리 관리기관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할 때뿐일세."
"명심하겠습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남자.
그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붉은 돌을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확실히 궁금하기는 하군. 도대체 이제 막 탑주가 된 자가 어디서 이런 돌을 구했는지.'
물론 남자의 머릿속에는 은근히 걸리는 곳이 한두 곳 정도 있기는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막 탑주가 된 51번 탑주가 그들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상했다.
'……뭐,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의할 필요는 있겠군.'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주머니에 붉은 돌을 집어넣었고, 이내 헤르메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번 탑주회의는 어떻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총 51명의 탑주 중 참가한 이들은 45명으로, 저희가 주시하고 있는 '탐왕'을 포함한 여섯 명은 회의에 불참했습니다."
"……이번에도 그 여섯 명은 불참인가."
"그렇습니다."
"뭐, 별수 없지, 그들은 신경 쓰지 말도록 하게. 어차피 탑주회의에 나온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보다 새로운 탑주는 회의에 참가했나 보지?"
"예, 이번 탑주회의에 참가했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주최자에게 회의에 대한 가벼운 내용을 소개 받은 뒤, 각 파벌에서 그에게 밑밥을 깔고 있을 겁니다."
"흐응, 그런가?"
"예. 그도 그럴 것이 51번의 전 탑주는 어느 파벌에도 속해 있지 않아 파벌의 힘이 동등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는 아직 어디다 뜻을 둘지 모르는 놈이 들어왔으니 밑밥을 깔 것 같습니다."
"그쪽도 정말 쓸데없는 파벌싸움에 힘을 사용하는군."
한심하다는 듯한 뉘앙스가 깃들어 있는 남자의 말.
그에 헤르메스는 대답했다.
"뭐, 그래도 탑주의 신분인 그들에게 파벌싸움은 중요합니다. 자신들의 파벌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들이 상대편을 찍어 누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상대편을 찍어 누를 수 있다면 이득을 볼 수 있으니 그들 입장에서 파벌은 굉장히 중요한 무기가 되지 않습니까."
헤르메스의 말에 남자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창문을 봤다.
창문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어디가 위인지도, 혹은 아래인지도 모르는 무(無).
그 공간을 바라보며 남자는 무엇을 표현하는지 모를 눈빛으로 한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
"데블랑……말씀이십니까?"
"그래."
김현우의 긍정에 그녀는 순간 머릿속을 뒤져 탑주 중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
조금씩 흐르기 시작하는 시간. 허나 시간이 상당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뭐야 모르는 거야?"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김현우가 결국 기다리지 못하고 질문하자 여성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혹시 그 데블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를 탑주 중에서 찾으시는 건가요?"
"조금 전에도 말했잖아? 탑주 중에서 찾는다고."
김현우의 긍정에 여성은 또 한번 머리를 굴렸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머릿속에 데블랑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탑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나?'
그녀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탑주회의를 대리로 주최하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당장 이 회의에 참가하는, 혹은 참가할지도 모르는 탑주들의 이름을 빠짐없이 모두 외우고 있었다.
그뿐이랴? 그들이 탑에서 어떻게 불려왔는지도 알고 있었고, 또 그 이전에는 어떤 별명으로 불렸는지 까지도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김현우가 말했던 '데블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를, 여성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여성이 은근히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김현우는 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손짓을 했다.
"거, 딱 봐도 모르는 것 같구만, 뭘 그렇게 고민해?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되지."
"그게 아니라…… 저는 분명히 탑주분들의 이름과 별명을 모두-"
"그럼 데블랑이 누구냐니까?"
김현우의 물음에 다시 입을 닫는 그녀.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
김현우는 연회장에 있는 탑주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무슨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지 모를 표정으로 마치 탐색을 하듯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들.
그것은 인간도 마찬가지였고.
인간과 비슷한 수인도, 그리고 그보다 더한 괴물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하나같이 얌체 같은 눈을 하고는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쯧."
김현우는 그 시선을 느끼며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는 본능적으로 피곤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김현우의 경험상 눈치를 보며 당장의 득실을 구분하는 놈들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삶을 통계로 알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그런 놈이 한둘도 아니고 이 연회장에 있는 이들 거의 전부라는 것도 문제였다.
그렇게 연회장 내에 불편한 침묵이 오가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한참이나 탑주들을 보며 고민하던 김현우는 이내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의 입장에서 당장의 득실을 얻기 위해 열심히 눈치를 보고 있는 이들과 대화해 봤자 피곤해질 거라는 것을 곧바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곧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탑주들을 보며 불현듯 왼손을 번쩍 올렸다.
그와 함께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는 탑주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현우는 이내 피식 하고 미소를 지은 채 이야기했다.
"지금 여기에서 나는 '데블랑'이라는 이름이나 별명을 가지고 있거나 혹시 아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손 좀 들어봐."
그런 김현우의 말과 함께 찾아온 연회장의 침묵.
아까 전과는 다르게 분위기가 싸해질 정도로 조용해진 연회장속에서-
"이것 참 당돌한 놈이네."
-목소리가 들렸다.
299화. 시비 걸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줌 (3)퇴근 시간대의 천호 사거리.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비싼 스포츠카 차량에 탑승해 있는 김시현은 꽉꽉 막혀 있는 사거리를 보고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조수석이 놔둔 상자를 바라봤다.
그것은 바로 오늘 점심 때 김현우가 가져다 달라고 했었던 보약이었다.
물론 김현우가 처음부터 보약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다분히 정보를 흘린 티가 나는 덮밥집의 매니저 덕분이었다.
'뭐, 나도 한번 먹어본 적 없으니 효과(?)는 잘 모르겠지만.'
상자 속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한번 훑어본 결과, 저도 모르게 마음에 자신감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기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자를 열자마자 김시현의 눈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아이템 로그였고.
아이템 로그에는 무엇인지는 몰라도 조금 기묘한 스킬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내가 먹을 건 아니긴 하지만…… 나도 한번 부탁해서 사볼까?'
그렇기에 김현우의 집으로 가며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나가던 김시현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꽉꽉 막힌 사거리를 지나 그의 집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스를 집어든 김시현은 이내 저택의 불이 켜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뭐, 애초에 형 집이야 있을 만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김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갔고.
"어?"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명 몇 시간 전에 밥을 먹어 아직 배가 고프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냄새를 맡자마자 허기가 느껴질 정도로 맛있는 냄새.
그에 김시현은 저도 모르게 냄새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와."
김시현이 부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 차려져 있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당장 제일 처음 눈에 보이는 것은 김시현이 오늘 김현우와 함께 먹었던 장어덮밥.
하지만.
'다……다른데?'
달랐다.
그래, 우선 김현우와 김시현이 먹었던 장어와 이곳에 차려져 있는 장어는 그 차이가 억 소리 날 정도로 달랐다.
우선 크기부터 달랐고, 무엇보다 지금 상위에 차려져 있는 장어에서는 잘잘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음식들도……!'
김시현은 식탁에 차려져 있는 다른 음식을 보면서도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하나하나가 굉장히 아름답고 먹음직스럽게 꾸며져 있는 진수성찬.
당장 먹을 것에 욕심이 없는 김시현마저도 그냥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오셨습니까, 스승……!"
"딱 맞춰서 오셨습니다, 사부……."
김시현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미령과 하나린을 바라봤고.
이내 그녀들은 한껏 미소를 짓다 부엌에 들어온 사람이 김현우가 아닌 김시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쯧."
"……이제 보니 동료분이시군요."
곧바로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한순간에 노골적으로 변해버린 미령과 하나린의 태도에 김시현은 왠지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한 것 같은 기분에 빠졌으나, 이내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박스를 한번 흔들었다.
"미안, 형이 이것 좀 집에 가져다 달라고 해서 말이야."
"그게 뭐지?"
미령의 물음.
그에 김시현은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라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가듯 했고, 이내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형이 그냥 가져다 달라고만 해서 말이야."
아,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고도 하더라고.
김시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이 들고 있던 박스를 식탁 옆의 박스에 놔두었다.
그에 따라 시선을 옮기는 미령과 하나린.
그 모습을 어색하게 바라보고 있던 김시현은 이내 어색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그럼 이제 나는 전해줄 건 다 전해줬으니 돌아갈게."
물론 그런 김시현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그 둘은 김시현이 가져온 김현우의 박스를 보는 데만 집중이 되어 있을 뿐.
그 모습을 보던 김시현은 이내 어색한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몸을 돌려 김현우의 자택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후."
그는 이내 저택 밖으로 나와 아까 전 음식이 차려져 있던 식탁을 생각하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은 애초에 걱정할 필요도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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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자연스레 목소리가 돌린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응?"
"쯧."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노골적으로 시선을 돌리는 남자. 지크프리트였다.
김현우는 순간 지크프리트에게 시선을 주었으나 그의 기억상 지크프리트는 저런 둔탁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고.
그는 곧 자신에게 입을 연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서 있는 지크프르티의 옆에서 마치 왕처럼 앉아 하얀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남자.
특이점이라면 온몸의 피부가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척이나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더니 이내 샴페인을 한입에 원샷하고는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키의 차이.
'꽤 큰데……?'
저 멀리 앉아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곧 김현우는 그가 꽤 거대한 장신인 것을 알아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가까이 오자마자 김현우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봐야 했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해서 김현우는 그에게 위압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다.
"네가 알고 있냐?"
"뭐?"
"내가 말했잖아? 데블랑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으면 손 좀 들어보라고, 근데 손도 안 들고 직접 내 앞까지 찾아본 걸 보면 뭔가 좀 아는 게 있나 보지? 아, 혹시 네가 데블랑이라던가?"
김현우는 귀찮음을 감수하기 싫었기에 무척이나 희망적인 관측을 내봤으나 슬쩍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을 보자니 아무래도 그의 추축은 틀린 것 같았다.
"당돌한 게 아니라 건방진 거였군."
곧바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가 건방져?"
"네 말투 말이다."
남자의 말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순간 입을 다물더니-
"이거 완전 또라이 새끼네?"
별다른 고민을 할 것도 없이 곧바로 그의 안면에 욕을 박았다.
"또라이……?"
"그럼 또라이 아니야? 이 새끼가 지금 어디서 처음본 사람 앞에서 건방지니 마니 개지랄을 떨어? 뒤지고 싶냐? 어?"
"뭐……? 나보고 뒤지고 싶냐고?"
"그럼 너한테 말하지 누구한테 말해 이 씨발새끼야, 설마 너 이 새끼 설마 짐승처럼 서열정하고 그런 거야 응? '내가 크니까 내가 가장 대빵이당~' 뭐 이지랄 하는 거야?"
김현우의 쉴 새 없는 욕설.
그에 남자가 순간 어벙한 표정을 지었으나 김현우는 멈추지 않았다.
"뭘 그렇게 쳐다봐, 머저리새끼야! 피부도 붉은 게 꼭 꽃게처럼 생겨가지고 대가리를 무두질 해 버릴까보다."
"허."
김현우의 쉴 새 없는 말에 순간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은 그는 이내 말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아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병신 같은 새끼야."
"분명 설명을 들었을 텐데……?"
"뭐? 설명? 아~ 그 여자? 아니? 내가 왜 설명을 들어야 하지? 애초에 내가 여기 자주 올 것도 아니고 그냥 나는 데블랑이라는 사람만 찾으러 온 건데?"
그의 말에 뭘 말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는 남자.
그 얼굴에는 여러 가지 표정이 담겨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당혹, 그다음으로는 분노와 수치심.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감정이 그의 얼굴 속에 생긴 것을 김현우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가 있던 주변 또한 그런 분위기가 적잖이 풍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김현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딱히 지금 이 상황이 위험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51번 탑주를 죽였다고 해서 어느 정도 규격 외가 탑주로 합류한다는 건 알았다만……이건 그 녀석 이상으로 또라이로군?"
"또라이면 어쩔 건데?"
"하!"
김현우의 말에 그는 크게 코웃음 치더니 이내 몸을 숙여 그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말했다.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네가 51번 탑주를 소멸시키고 탑주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51번 탑주처럼 너를 가만히 놔 둘 거라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니까."
"어이구? 이제 보니까 그 새끼도 못 이겨서 빌빌거렸던 새끼가 다짜고짜 와서 시비를 거는 거야? 응?"
"……."
"너희들 머리 나쁘다는 소리 많이 듣지?"
김현우가 피식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툭툭 두들기며 비아냥거리자 남자는 순간 자신의 안에서 무엇인가가 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야말로 순간의 분노가 끓어오르다 팍 식은 듯한 느낌.
'……원래라면 딱 보는 것만으로도 건방져 보여서 적당히 누른 뒤에 이야기를 시도하려 했건만.'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 영악하던 새끼와 다르게 이놈은 상종도 못할 정도의 또라이 새끼로군.'
남자는 예전 이 또라이 같은 새끼가 탑주가 되기 이전 만났던 51번 탑주를 떠올렸다.
자신의 모습을 안개로 가려 본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입을 놀려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줄타기를 했던 그를.
'그때는 너무 상대하기가 귀찮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당시의 51번 탑주인 '형체 없는 자'는 자신에게 조금만 피해가 온다면 다른 파벌에 들어가겠다는 식으로 다른 파벌들을 압박해 파벌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뿐인가? 그는 입을 털어 다른 파벌들과도 은근히 거리를 조절해 애초부터 자신이 공격을 당할 만한 상황을 완전히 없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새로운 탑주는 어떤가?
'완전히 또라이 새끼.'
그래, 그는 완전히 또라이 새끼였다.
주최자가 전하는 간단한 설명도 듣지 않고 이 회의장에 발을 들인 것부터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증명되었다.
김현우가 한 짓은 전쟁터에서 제일 중요한 정보를 듣지 않고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남자는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렇게 심하게 격돌하는 상황이 아닌, 간단한 언쟁이 오고 갔어야 했으나, 김현우의 욕설로 인해 이미 지금 상황에서는 무조건 적으로 분쟁이 필요한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허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분쟁이 좀 커지기는 했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라면 잘됐군.'
이렇게 되면 그에게는 김현우와 싸울 명분이 생긴다.
거기에 덤으로 그를 찍어 누르고 그에게 자신의 능력인 '낙인'을 찍을 명분도 같이 생겨난다.
그렇기에 남자는 냉정하게 끓어오르던 분노와 함께 시커먼 웃음을 지었으나, 겉으로는 무섭도록 냉정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내려다보곤 말-빠아아아악!
-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들어 올려진 남자의 고개가 샹들리에를 바라본다.
상황 인지를 하지 못하는 머리.
그러나-
꽝!
"끄엑!?"
그다음, 남자는 자신의 배에 무엇인가가 꽂혔을 때, 자신이 또라이에게 맞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뭘 꼬라봐 씹새끼야."
남자는 연회장의 벽에 머리가 처박혔다.
300화. 맞아야지 (1)
"이런 개-"
빠아아악!
난장판이 된 연회장에서 흩날리는 먼지를 사방으로 털어내며 남자가 몸을 일으켰으나, 그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끄악!?"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는 남자의 앞에는 김현우가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
일어나는 와중에 얼굴을 얻어맞은 남자의 목이 꺾인다.
그러나 거기에서 김현우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곧바로 움직이는 오른발이 남자의 옆구리를 후려차고, 이어지는 오른 주먹이 그의 옆머리를 후려친다.
분명 무척이나 짧은 시간 안에 이뤄지고 있는 빠른 공격.
허나 어느 순간,
텁!
"막아?"
"이 개새끼!"
화르르륵!
김현우는 자신의 주먹을 막아낸 붉은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에게 맞아서 입고 있던 양복은 걸레짝처럼 찢어져 처량한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처량한 옷과는 반대되게 지독하리만치 끓어오른 분노를 터트리고 있었다.
"제대로 버릇을 고쳐주마!"
그 말과 함께 남자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붉은 피부가 더더욱 붉어지기 시작하고, 이윽고 그의 몸 전체에서 연기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물론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남자의 변화해도 김현우는 퍽이나 흥미롭다는 듯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마침내 어느 순간.
화르르르륵!!!
남자의 피부에서, 불꽃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남자의 몸을 감싸고 사방을 향해 터져나가는 불꽃.
김현우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이내 그 끝에서.
"이제 장난은 끝이다."
김현우의 손에 신나게 줘터지고 있던 남자는 온몸이 시뻘건 불꽃으로 감싸여 있는 괴물로 변이했다.
아니, 변이라기보다는 그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을 생각해 봤을 때, 김현우는 저 모습이 남자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 모든 불을 통제하는 자이자 염제(炎帝) 이프리트의 본모습을 꺼내게 하다니."
"그게 본모습이야? 존나 멋대가리 없게 생겼네."
물론, 이프리트가 본모습으로 변이한다고 해도 김현우는 별다른 감정의 변화 없이 그에게 비아냥거렸다.
물론 김현우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상당히 무거운 위압.
거기에 더해 불꽃으로 치환되어 있는 마력은 사방으로 뿌려지며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
그런 이프리트의 모습에 김현우는 그에게서 슬쩍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이 회의장에 모여 있는 다른 탑주들.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은 이 싸움을 즐기고 있는 듯 자신과 이프리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이프리트가 욕을 처먹을 때부터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보이는 이들이 있기는 했으나 그들의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은 그저 흥미로운 눈빛만을 보내고 있었다.
'이것 참.'
김현우는 문득 피곤하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그냥 좀만 참을 걸 그랬나.'
김현우는 귀찮은 게 싫었고, 그렇기에 여성이 이곳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준다는 것도 듣지 않고 들어왔던 것이었다.
어차피 그는 이곳에 섞일 생각도 없었고 그저 '데블랑'을 찾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근데 저 새끼가…….'
갑작스레 시비를 걸어서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다 보니 이런 상황이 되어 버렸다.
"쯧."
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기는 했다.
이미 이프리트는 김현우의 선 넘은(?) 인신공격으로 인해 분노를 저 끝까지 풀차징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왜 아까부터 입을 다물고 있지? 설마 내 본모습을 보고 꼬리를 말아버린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들린 이프리트의 도발.
김현우는 허, 하고 웃곤 이내 이프리트의 뒤에 있는 지크프리트를 보고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째 같이 있는 새끼들은 다 하는 말이 비슷비슷 했는데, 그건 탑이나 위나 똑같구나?"
"뭐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김현우는 그렇게 질문을 하며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쿠그그그그극극-!!!!
그의 뜻에 따라 사방으로 퍼지는 마력이 순식간에 이프리트의 불꽃을 찍어 누르고 공간을 점거한다.
파츳!
그다음에 보이는 것은 순간 터져 나오는 새하얀색의 전류.
김현우를 중심으로 해 하나둘 터지기 시작하는 새하얀 전류는 이내 파직거리며 김현우가 뿌려놓은 마력을 타며 사방을 달리기 시작했고.
"이 악물라고, 아 너 같은 괴물들한테는 이가 없나?"
이내, 등 뒤에 새하얀 만다라를 만들어낸 김현우는 씨익 웃음과 동시에 그에게 달려 나갔다.
####
어두운 공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어떠한 화려한 형태도 그 모습을 뽐낼 수 없고.
그 어떠한 눈을 가진 자도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없는 어두운 공간.
그곳은 아는 사람들이 흔히 '허수공간'이라고 부르는 공간이었다.
그 무엇도 없고,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
그렇기에 한번 발을 들이면 절대 출구를 찾을 수 없으며, 자신마저도 어둠에 동화되어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심연.
그런 여러 가지 관용구와 수식어가 붙는 그곳에.
"흐응."
하나의 집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척이나 자그마한 방이 하나 있었다.
그저 정육각형으로 만들어져 있는 하나의 방.
분명 무엇인가가 존재할 수 없는 허수공간에 만들어진 정육각형의 방 안에는 무엇인가가 앉아 있었다.
그 형태는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또한 그 형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형체 없는 자처럼 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 그것은 방 안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의자를 뒤로 넘길 듯 말 듯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렇게 모습이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장난을 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것의 앞으로 하나의 눈동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보다는 자그마하지만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눈동자.
허나 그것은 평소 김현우가 보던 눈동자가 아닌, 푸른색의 동공을 가지고 있는 눈동자였다.
[인사올립니다.]
푸른 눈동자는 그것의 앞에 나타나자마자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말했고, 그에 그것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지금 상황은?"
그와 함께 그것에서 나온 목소리.
그것은 상당히 신기한 목소리였다.
마치 목소리 자체에 에코를 넣은 것처럼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 거기에 더해서 무슨 이팩트를 넣었는지 그것이 낸 목소리에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합쳐져 있는 듯했다.
[현 상황은…… 저희가 의도하는 상황과는 좀 많이 틀어졌습니다.]
"응? 어떻게?"
[그러니까…….]
그것의 물음에 눈동자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듯 잠시 침묵을 지켰으나 이내 결론을 냈는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선 그가 예정대로 저를 찾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좀…… 상상 이상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며 침착하게 자신이 보고 있는 상황을 차근히 설명하기 시작했고, 그 이야기를 잠시간 듣고 있던 그것은.
"하하하하핫!"
이내 쾌활하게 웃음을 흘렸다.
여러 가지 소리가 중복돼서 에코처럼 울리는 그것의 목소리는 어찌 들었을 때 굉장히 소름이 끼쳤으나, 푸른 눈동자는 아무런 말없이 그저 웃음이 끝날 때를 기다렸고.
"그래 뭐…… 대단하네! 역시 김현우는 그럴 줄 알았지. 음음!"
이내 그것은 김현우의 지금까지의 행적을 생각한 듯 슥 웃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럼 지금 김현우가 정령 파벌을 개 박살 내고 있다는 거지? 거기에 악마랑 천사는 가만히 있고?"
[맞습니다.]
"다들 어쩌고 있는데?"
[악마와 천사 파벌은 김현우가 상당히 또라……아니, 거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그를 도와서 점수를 따는 것보다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그래?"
[예.]
푸른 눈동자의 말에 그것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뭐, 그럼 이번에는 그냥 놔둬."
[예?]
"그냥 놔두라고, 어차피 김현우는 네가 어떻게 해보겠다고 해서 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니까."
[……그렇군요.]
"당연하지, 누가 찍은 사람인데?"
그것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푸른 눈동자가 있는 쪽을 바라봤고 눈동자는 그런 그것의 시선을 가만히 받고 있다 이야기했다.
"그보다…… 정령쪽도 보는 눈이 없나 보네? 굳이 김현우한테 시비를 거는 걸 보면 말이야."
[아, 그건 아무래도 김현우가 일부러 힘을 숨기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힘을 숨겨?"
[……솔직히 잘 모르겠으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현우는 전혀 자신의 힘을 밖에 내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눈동자의 말에 그것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설마 벌써 거기까지 오른 건가?"
[……거기까지라뇨?]
그것의 혼잣말을 듣고 입을 연 눈동자. 그러나 그것은 눈동자한테 설명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그럴게 좀 있어.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원래라면 이 회의에서 은밀하게 그와 접촉해 대충 현 상황을 알려줄 생각이었습니다만.]
눈동자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그것.
허나 이내 그것은 별다른 막힘없이 눈동자에게 어느 일을 지시했고.
[알겠습니다. 그럼 뜻대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의 말을 전부 들은 눈동자는 처음 나타났을 때와 다르게 눈을 감고는 어느 순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그것은 이내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김현우, 어떻게 점점 만날 때를 기대하게 해주는 거야?"
홀로 중얼거렸다.
####
꽝!
이프리트의 몸이 순간 하늘로 붕 떠오른다.
"큭!"
신음을 흘리며 사방으로 불꽃을 뿜어내 김현우의 접근을 경계하는 그.
이프리트가 뿌린 화염이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와 사물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으나.
"그걸로 나는 못 막지!"
빠악!
사방으로 뿌린 불꽃을, 김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뚫고 나오며 이프리트의 얼굴을 후려쳤다.
하늘에 떴다 순식간에 땅바닥에 처박히는 이프리트.
꽈아앙!
"끄아아악!"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프리트의 몸을 친절히 땅바닥 끝까지 박아 버리는 김현우의 내리찍기에 이프리트는 비명을 질렀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 한번 다리를 내리 찍었다.
꽝!
꽝!
꽝!
한 번 내리 찍을 때마다 이프리트의 몸이 연회장의 바닥을 파고 들어가고, 이프리트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이를 악물면서도 등 뒤에 느껴지는 고통 직후 곧바로 몸을 일으켜 김현우가 있는 곳을 향해 불꽃을 쏘아 보냈다.
"!"
순간적으로 짓쳐들어오는 공격에 몸을 옆으로 움직여 회피한 김현우.
이프리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이 박혀 있던 바닥에서 빠져나와 김현우를 노려보며 자신의 몸 근처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화르르륵!
순간 약해졌던 화력이 다시 이프리트의 주변을 채워 넣으며 마치 전설 속에나 나오는 불사조처럼 재생했으나 김현우는 딱히 그런 이프리트의 모습을 보고도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야, 이제 슬슬 계속 처맞는 것도 질릴 것 같은데, 그냥 빨리 끝내줄게. 불만 없지?"
-김현우는 다시금 재생한 이프리트를 보며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또 한번 그에게 달려들었고.
꽈아아아앙!!!
그의 몸이 다시 땅바닥에 처박히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01화. 맞아야지 (2)
'이런 미친…….'
지크프리트는 완전히 개 박살 난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프리트 님이…… 밀리고 있다고?'
염제(炎帝) 이프리트.
다른 말로는 정령왕 이프리트라고 불리고 있는, 모든 불의 정령들의 왕좌에 앉아 있던 그는.
꽈아앙!
"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실시간으로 김현우에게 구타를 당하는 중이었다.
그래, 저건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구타로 보는 게 더 가까울 정도로 김현우와 이프리트의 싸움은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어찌 보면 전투 패턴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지금의 싸움은 단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프리트가 김현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사방으로 불꽃을 내뿜으면 김현우가 달려가 이프리트의 죽탱이를 후려갈겨 방어를 무효화시키고.
이프리트가 공격을 날리려 하면 김현우가 미리 이프리트의 죽탱이를 쳐서 공격을 무효화시킨다.
그 이외에 이프리트가 김현우와의 싸움에서 그 무엇을 하려고 해도, 그 결과는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다.
"꺼어억!"
꽝!
바로 김현우에게 맞는 것으로.
부우웅
김현우의 발에 맞은 이프리트의 몸이 허공에 떠오른다.
물론 이프리트는 그의 공격을 이어서 맞아 줄 생각은 없는지 곧바로 사방으로 불꽃을 흩뿌려 자신의 몸을 방어하려 했으나 몇 번이나 결과가 나왔듯.
"안 통하는 기술을 계속 쓰고 있네?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
빠아악!
"크학!?"
김현우는 이프리트의 불꽃을 뚫고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야말로 그냥 보고서는 절대로 믿기지 않을 광경.
'도대체 저 녀석은 어떻게 이프리트의 불꽃을 뚫고 일격을 먹일 수 있는 거지?'
이프리트의 불꽃은 열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뜨겁게 타오르고, 한번 불이 붙은 이상 이프리트 본인이 끄거나 불이 붙은 대상을 모조리 태우기 전까지는 꺼지지 않는다.
그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 때까지는 말이다.
허나 분명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프리트의 불꽃은 김현우에게 통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프리트의 공격은 통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지크프리트는 김현우의 싸움을 지켜보며 그가 도대체 이프리트의 불꽃을 막아내는지 확인하려 했으나 아무리 봐도 그가 어떻게 불꽃을 막아내는지를 짐작할 수 없었다.
애초에 불꽃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면 불을 방어하거나 피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현우가 불꽃을 뚫어낼 때, 불꽃은 분명 김현우의 주변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봤으니까.
그렇기에 지크프리트는 도대체 김현우가 무슨 수로 불꽃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
곧 또 한번 김현우가 이프리트의 불꽃을 뚫는 것을 보며, 지크프리트는 그가 어떻게 이프리트의 불꽃을 피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흘리고 있다고……!?'
물론 자세히 본 것도 아니고 그저 찰나의 순간을 본 것뿐이었으나 그는 그 찰나의 순간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이프리트가 불꽃을 사방으로 비산하는 순간 김현우의 손이 미약하게 움직이고, 그와 함께 사방으로 퍼지던 불꽃들이 그 경로를 잃고 허공으로 비산하는 모습을.
'……괴물!'
그 모습을 지켜본 지크프리트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고.
그가 그런 감상을 남김과 동시에-꽈드드드득!
승부는 이미 결정 난 듯했다.
화려한 불꽃을 내뿜던 이프리트의 불꽃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약해졌고, 그렇게 약해진 그는 이미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구덩이에 빠져 있었다.
누가 봐도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한 승패.
'허.'
별다른 특별한 기술 같은 것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무력으로 이프리트를 팬 김현우를 보며 지크프리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저건 그냥 괴물이 아니었다.
'……재앙이로군.'
그야말로 재앙(災殃)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할 정도의 무력.
지크프리트는 어느새 시선을 돌려 자신과 같은 파벌에 속해 있는 이들을 바라봤고, 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은 당혹감이었고, 그 다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분노였다.
허나 그다음을 넘어 느껴지는 마지막 감정.
"……."
그것은 바로 '공포'였다.
정말로 미약하기는 했으나, 자신과 같은 파벌에 속해 있는 그들은 쓰러져 있는 이프리트의 앞에 당당히 서 있는 김현우를 보며 그런 감정을 받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지크프리트를 포함한 정령 파벌쪽이 김현우에게 그런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흐음"
김현우는 사방으로 흩뿌렸던 마력을 갈무리 하며 바닥에 처박힌 이프리트를 바라봤다.
머리는 땅바닥에 처박히고 몸만 밖에 나와 있어서 그런지 굉장히 꼴사나운 모습이 되어 있는 이프리트.
그는 이프리트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느껴지는 것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시선.
물론 그중에서 느껴지는 몇 가지의 호승심 섞인 눈빛도 보였으나 거의 대부분은 놀라움과 경계심이 섞인 눈빛을 보내고 있었고.
'저쪽은…….'
이프리트가 기어나왔던 저쪽은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으나 종합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불편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은 김현우가 행동하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다.
허나 그럼에도 김현우는 딱히 두렵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얘들 다 허접인데?'
김현우에게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은 결코 강하지 않았다.
……뭐, 물론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니었고 반대로 김현우가 이 곳에서 비정상적으로 강한 것이었으나 김현우는 자신이 '비정상적으로 강하다'라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김현우가 위를 향해 움직일 때는 항상 강적이 등장하지 않았는가?
당장 자신의 동료가 되어 구미호와 꽁냥거리고 있는 천마도 처음에는 김현우의 적이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무척이나 당연할 정도로 '위로 올라간다=강적이 등장한다'는 것을 거의 반 공식처럼 가지고 있던 김현우는 이 상황이 묘하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한 놈이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까 말이다.
'뭐…… 그래도…….'
강한 놈이 없다는 건 좋을 일이지.
그렇게 생각한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내려 이프리트를 바라봤다.
'끝낼까 말까?'
김현우는 지금 이 상황에서 이프리트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릴 수 있었다.
간단하다, 저녀석들이 오기 전에 혼신의 힘을 다한 내려찍기 한 방이면 눈앞에 미약한 불꽃을 토해내는 이프리트는 죽는다.
허나.
"쯧."
김현우는 그러지 않도록 했다.
뻑!
"어……어어어!!"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이르피트의 몸을 그대로 올려 차 그가 처음 걸어왔던 곳에 내던졌다.
'저놈을 죽이면 앞에 있던 놈들이 죄다 달려올 것 같으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그 이유는 바로 귀찮아서.
김현우는 저들이 다 달려들어도 웃으면서 죽빵을 한 대식 갈겨 줄 수 있었으나 그러기에는 너무 귀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현우는 여기서 싸움질을 하러 온 것이 아닌 데블랑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그 관리기관에 속한 놈이었으면 한 번쯤 대가리를 쥐어박고 싶긴 하지만.'
애초에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생각을 깔끔하게 접어버리고는 다시-
"자 그럼 다시 묻는다. 여기서 데블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거나 데블랑이라는 별명이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아는 사람?"
손 좀 들어봐.
-그렇게 말하며 회의장 내부에 있는- 아니, 회의장이 아닌 개박살 난 폐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
"……그래서, 회의장이 개판이 되었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허."
백색의 공간 안에 있는 거대한 관저.
헤르메스의 말을 들은 남자는 허, 하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저번에도 51번 탑주는 대단했건만…… 이번에도 51번 탑주는 대단하군."
다른 의미로 말일세.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헤르메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현재 회의 상황은 어떤가? 보통은 한번 회의를 열면 2, 3일 정도는 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긴 합니다만…… 이번에는 그런 일이 생겨서 그런지 회의가 5시간도 되지 않고 끝나버렸습니다."
"……뭐, 각 파벌이 연합하지 않고 서로를 계속 견제했으면 해서 만든 탑주회의인데…… 이번에는 너무 빨리 끝나버렸군."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탑주회의의 숨겨진 목적을 중얼거리자 헤르메스는 가만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렇군요. 분명 낮은 확률이기는 하지만 김현우가 계속 저 상태로 날뛰면 파벌쪽에서 은근슬쩍 '연합'을 할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희박한 가능성이긴 해도 말입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잠시 고민에 빠진 남자.
그는 몇 번번이고 자신의 턱을 문질거리더니 이야기했다.
"우선 조만간 탑주회의를 한번 더 여는 것으로 하지."
"……탑주회의를 말씀입니까?"
"그래, 마력이 조금 들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그건 맞습니다만."
"……혹시나 모를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보다는 처음에 조금 투자를 하더라도 그런 가능성을 아예 막아버리는게 좋네. 아,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51번 탑주가 '데블랑'이라는 자를 찾았다고?"
"예. 맞습니다."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헤르메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 데블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도 한번 찾아보도록."
"알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헤르메스는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금세 사라진 헤르메스가 있던 곳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렇게 헤르메스와 그가 이야기를 나눴을 때.
"그래서, 그 데블랑이라는 사람을 찾지 못한 건가요?"
51번 탑의 최상층에서는 김현우와 아브, 그리고 노아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이새끼 진짜 제대로 알려준 거 맞는지 의심이 든다니까."
김현우가 은근히 짜증을 내며 한숨을 내쉬자 아브는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신기하기는 하네요. 눈동자라니…… 물론 저번에도 말씀해 주신 적이 있기는 한데."
아브는 저번에도 김현우에게 눈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그런 신비한 존재가 과연 이름을 잘못 알려주거나 하는 실수를 할까요?"
약간은 심통이 나 있는 김현우의 모습에 아브가 말하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는 생각 안 하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이전에 굉장히 상쾌한 느낌으로 말했던 눈동자의 말투를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흠, 하고 입을 열었다.
"왠지 그럴 것 같기도 한데?"
"네?"
김현우의 말을 듣고 아브가 고개를 갸웃거리길 잠시.
"응?"
노아흐는 갑작스레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지금 무언가가 이곳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다네."
"무엇인가가……? 그게 무슨 소리야?"
김현우의 물음.
허나 노아흐는 그런 김현우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한쪽으로 모았고.
치지지직! 치지지직-!
곧 그는 자신의 앞에서 푸르른 전류가 생기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리고 김현우가 무슨 행동을 취하기 전에, 중앙에 퍼지기 시작했던 전류는 일순간 크게 확장하며 세를 넓혔고.
"……."
곧 그곳에는 푸른 눈을 가진 한 남자가 나타났다.
302화. 처음부터 나와라 (1)
멕시코시티에 있는 대형 카지노에 따로 붙어 있는 스탠드형 바.
"……."
그곳에서, 이서연은 입가에 칵테일을 가져다대며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진짜 어디를 가든, 있는 것 같네.'
카지노 한가운데에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김현우 동상을 보며 탄식 아닌 탄식을 내뱉었다.
카지노 안에 만들어져 있는 김현우 동상은 한쪽 손에는 포커 카드를 집고 다른 한쪽에는 달러 지폐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요상하게도 그 모습은 굉장히 잘 어울렸다.
'마치, 졸부의 모습 같다고 해야 하나.'
그도 그럴 것이 차라리 양복이나 다른 옷을 입혀 놓았다면 좀 괜찮았을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라 츄리닝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보니 그 모습이 더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서연이 김현우의 동상을 보며 칵테일을 마시고 있자.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청룡 씨?"
이서연은 자신에게 다가와 입을 여는 청룡을 볼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굉장히 비싸 보이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채 다른 한 손에는 칵테일 잔을 들고 있는 그 모습은 이서연의 눈에는 굉장히 멋지게 보였다.
'아니, 굳이 내가 아니라도.'
그 누가 보더라도 지금 청룡의 모습은 굉장히 멋져 보일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청룡의 모습일 때는 몰랐으나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청룡은 그야말로 박수를 한껏 쳐 줄 정도로 굉장히 잘생겼다.
그래, 잘생겼다.
잘생겼다.
중요했기에 세 번 강조했다.
청룡은 세계적인 배우나 아이돌들의 뺨을 수십 대는 그냥 후려칠 정도로 완벽한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 계란 한 판을 넘겨 그 이상으로 가고 있는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청룡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으나, 이내 급하게 시선을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뭐…… 그냥 구경이나 하고 있었어요. 카지노를 해보려 하니까 저는 운이 별로 없는 것 같더라고요."
이서연이 우스갯소리로 이야기 하자 청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이런 도박장은 어느 정도 운의 요소가 필요하기는 하지. 뭐, 그런 의미에서 저쪽은 굉장히 재미를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청룡이 그렇게 말하며 한 곳을 바라보자 이서연은 그의 시선을 따라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크하하하핫! 봤지!? 다 내 거다!"
그곳에는 청룡과는 조금 다르지만 굉장히 호쾌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손오공이 사방에 엄청난 수의 방청객들을 두고 딜러에게 돈을 따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돈을 쓸어 담는다는 게 맞을 정도로 손오공의 주변에 쌓인 칩.
이서연은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오공 씨는 도박을 엄청나게 잘하나 봐요?"
"아니, 엄청 잘하는 건 아니지. 자네도 알다시피 도박은 '잘한다'는 개념이 없지 않나?"
"아…… 뭐, 그건 그렇죠."
그렇다.
도박은 '잘한다'는 개념이 없다.
물론 도박판에서 밑장 빼기 같은 걸 하는 타짜들 사이에서야 잘한다는 개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적어도 일반인의 입장에서 도박을 잘한다, 라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는 말이 맞았다.
이서연이 그렇게 긍정하자 청룡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칵테일을 한번 마셔보고는 쥐고 있는 칵테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슬쩍 인상을 찌푸리곤 말했다.
"저 녀석은 그냥 자신의 운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 거야."
"운……?"
"그래, 내 기억으로 저 녀석은 천계에 금돈(金豚)이라는 놈에게 금전에 관한 업을 빼앗은 적이 있거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재신(財神) 이라고 이야기 하지.
청룡의 말과 함께 다시 다음 도박을 시작하는 손오공.
물론 이번에도 여지없이 손오공은 돈을 땄고, 이서연 그런 그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업으로 얻은 운…… 뭐 그런 건가요?"
"그래, 재물에 관련된 운이지."
그렇지 않으면-
"생각 하나 깊이 하는 것도 싫어하는 저놈이 저렇게 많이 딸 수 있을 리 없지 않나?"
청룡의 말.
"……그런 업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요."
이서연은 그새 또 돈을 따 자신이 있는 쪽으로 칩을 모으기 시작하는 손오공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는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손오공이 자신에게 끌어다 놓은 칩은 딱 보기만 해도 평범한 수준을 넘어섰으니까.
그렇게 청룡과 이서연이 손오공이 돈을 따는 모습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응?"
이서연은 청룡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나게 돈을 따고 있는 손오공의 뒤로 검은 정장을 입은 카지노의 보안요원들이 다가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어? 어어? 야! 내가 뭔 사기를 쳐!?"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손오공과 가드들이 싸우기 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야! 나 진짜 사기친 거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저희와 같이 잠시만 저쪽으로 이동해 주시면-"
"아니! 갑자기 사람을 사기치는 걸로 딱 정해놓고는 곧바로 끌고가려 하는데 지금 기분 안 상하게 생겼어? 어!? 게다가 뭐,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조금 전의 웃는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곧바로 보안요원들을 향해 소리를 빽빽 지르며 으름장을 놓는 손오공.
그 모습을 보던 이서연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어째 오공 씨가 저렇게 말하니까 정말로 사기를 친 것 같네요."
"……."
물론 이서연이야 조금 전 옆에 있던 청룡에게 오공이 어떻게 해서 저렇게 많은 양의 돈을 딸 수 있는지 들었으나 확실히 다른 이들을 보면 의심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저건 조금 심해 보이는군."
그도 그럴 것이 손오공의 자리에는 코인 칩이 산처럼 쌓여 있었으니까.
딱히 비유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로 손오공의 주변에는 칩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래, 도저히 저 모든 칩을 하루 만에 땄다고 하면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정도로, 손오공의 자리에는 엄청난 숫자의 칩이 놓여 있었다.
"어!? 잡아!? 나를 잡는다고!?"
"그냥 우선 따라와 주세요! 이야기는 저쪽에 가서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 새끼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나 못 참아! 더 못 참는다고!!"
***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선 한 남자를 바라봤다.
푸른 눈을 가지고 있고 눈에 띌 정도로 찬란한 백금발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최상층에 나타나자마자 김현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허나 그런 침묵도 얼마가지 못했고, 김현우는 이내 갑작스레 나타난 그 남자를 보며 슬쩍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넌 또 뭐야? 헤르메스랑 같이 관리기관에서 온 녀석이야?"
김현우의 물음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절래 거리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틀렸다."
"그럼 뭔데?"
"나는 데블랑이다."
"……뭐?"
"왜 그렇게 놀라지……? 그분에게 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남자, 아니- 자신을 데블랑이라고 소개한 그의 물음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심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에 데블랑은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아니, 네가 말하는 그분이라는 게 눈동자 맞지?"
"……너한테는 그 모습으로 나타난 것 같군."
"……나한테는?"
김현우가 되묻자 데블랑은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털고는 이야기했다.
"그리 신경 쓸 필요 없는 이야기다. 그분의 모습은 누가 보는지에 따라 다르니까."
그보다-
"왜 그런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지? 지금 이야기를 나눠보니 나를 찾으라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은데 말이다."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무엇인가를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회의장에서 찾았을 때 회의장에 없었던 거야?"
"아니, 나는 회의장에 있었다만?"
"뭐야? 그럼 내가 너 찾는 소리도 들었겠네?"
김현우의 질문.
그에 데블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그가 무슨 말을 할지를 깨닫고서는 이야기했다.
"당연히 네가 데블랑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기는 했다만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그래, 대외적으로 나는 데블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 않으니까. 만약 네가 조용히 회의장에 들어왔다면 오히려 네가 가만히 있더라도 내가 네게 다가갔을 거다."
한 마디로-
"네가 그렇게 대놓고 내 이름을 부른 덕분에 못 간 거다, 이 말이다."
데블랑의 말.
그에 김현우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그럼 그냥 회의장에 가라고 하지 이 새끼는 왜 회의장에 가서 데블랑을 찾으라고 한 거야?"
김현우의 투덜거림.
그에 데블랑은 김현우가 말하고 있는 '이 새끼'가 '그분'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을 조심해라!"
"뭔 말을 조심해?"
"그분을 그렇게 칭하다니!"
"그분? 아, 눈동자? 그게 어때서?"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할 것 아니냐!"
"예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걔 때문에 일어난 일 못 봤어? 애초에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만 했었어도 내가 그럴 일은 없었잖아?"
물론 모든 잘못의 원인은 애초에 김현우였으나 그는 역으로 굉장히 당당한 표정을 지었고, 그에 데블랑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데블랑은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이야기를 돌렸다.
"그래, 뭐 그냥 그런 것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뭘 넘어가? 내 말이 맞구만. 애초에 그 녀석이 널 찾으란 소리를 안 했으면 이럴 일이 없었잖아? 애초에 내가 그 멍청한 정령왕인가 하는 놈과 싸울 일도 없었을 거고 말이야."
"……."
김현우의 이어지는 말에 데블랑은 한 번 더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네가 그렇게 난리만 안 쳤어도 정말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데블랑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에.
애초에 김현우가 그렇게 어그로를 끌어서 이프리트를 자극하지만 않았어도, 하다못해 거기서 이프리트한테 욕만 박지 않았어도 상황이 이렇게 될 일은 없었으나 데블랑은 반박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자네도 그분이 왜 나를 만나라 하셨는지 궁금할 거라고 생각되는데, 이야기부터 하는 게 어떤가? 시간도 많지 않으니까."
"시간이 많지 않은 건 또 뭔 소리야?"
"자네는 모르겠지만 나는 관리기관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몰래 이 탑으로 왔다. 하지만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내가 자네가 있는 곳으로 왔다는 게 들킬 확률이 높다 이 말이지."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순간적으로 질문을 하려는 듯 입을 오물거렸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비어 있는 의자를 향해 목짓했다.
'……우선 들어야 할 걸 듣기는 해야지.'
시간이 없다는 소리는 이 녀석이 언제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는 소리였으니까.
김현우의 모습에 슬쩍 고개를 끄덕인 데블랑은 곧바로 그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고 이내 그의 양옆에 있는 아브와 노아흐를 한번 바라보곤 물었다.
"이들은 믿을 만한 이들인가?"
그 물음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
그 모습을 바라본 데블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럼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이야기하고 사전 설명을 하도록 하지."
-곧바로 자신의 본론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303화. 처음부터 나와라 (2)
"그분의 뜻대로 '관리기관'을 부수는 데 동참해 줬으면 한다."
데블랑의 입에서 나온 말.
그에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라고?"
"말 그대로의 뜻이다."
"……관리기관을 부순다고?"
"그래."
데블랑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
그곳에 보이는 것은 묘하게 삐뚤어진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
데블랑은 성급하게 답변을 바라지 않고 기다렸다.
'성급하게 답변을 재촉하는 것은 마이너스가 될 수 있으니까.'
당장 그에게 시간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애초에 김현우가 탑주회의에서 일을 크게 벌인 덕분에 그는 김현우와 자연스러운 만남을 취하게 되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으니까.
게다가 아직 지금으로서는 관리기관에게 '수상하다'라는 낌새를 보여주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 아직은.
허나 그렇게 시간이 없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블랑이 침착하게 김현우를 재촉하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서 최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분'의 뜻대로라면 이 녀석은 관리기관을 박살 내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데블랑은 그리 생각하며 김현우를 바라봤다.
아직도 별말은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고민 중인 그.
허나 데블랑은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이제 막 탑주의 자리에 올라왔는데 다짜고짜 이런 말을 들으면 좀 그렇겠지.'
관리기관에 존재하는 총 51개의 탑.
그 51개의 탑주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든 부귀영화를 전부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걸 뜻한다.
그것도 노력 하나 들이지 않고 완벽히 무상으로 말이다.
힘을 얻고 싶다면?
얻으면 된다.
절세미녀를 얻고 싶다면?
얻으면 된다.
최강의 군단을 얻고 싶다면?
얻으면 된다.
끝도 없이 쏟아내 버릴 수 있는 재화를 얻고 싶다면?
얻으면 된다.
탑주에게는 그 모든 것이 허용되었고, 그 무엇 하나 불가능한 게 없었다.
그래, 애초에
'어떻게?'
라는 전재라는 것을 빼고, 그냥 얻고 싶으면 얻고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탑주는 자신이 관리하는 탑에 한해서는 전지전능한 신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이들이니까.
물론 그 전지전능한 신의 위치에서 머물기 위해서는 관리기관에 '업'을 올려 보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탑주들에게 있어서 그것들이 크게 상관있는 것은 아니었다.
관리기관에서 가져가는 업은 어찌 보면 지나치게 과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탑주들이 내지 못할 정도로 빡빡한 것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탑주의 자리에 오른 그 순간부터 업을 모으는 것은 그들의 노력 여부가 아니었다.
탑주들은 그 무엇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전지전능한 위치에 서서 즐겁고도 무료한 생활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탑주가 내야 하는 업은 모두 '탑'에서 자동으로 만들어지니까.
'확실히…… 탑주회의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이 일반적인 다른 탑주들하고는 다르다고 해도.'
……뭐, 그냥 다른 게 아니라 진짜 정신이 살짝 맛이 갈 정도로 이상한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무것도 안 해도 자연스럽게 꿀을 빨 수 있는 탑주의 자리를 그냥 놔버리기에는 참 힘들겠지.'
그렇기에 데블랑은 조금이라도 김현우에게 긍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입을 열지 않고 차분히 그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현우의 입이 열렸다.
"그것 참 좋은 제안이네."
"그래 나도 이해한다. 탑주의 자리라는 것은 그냥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해도 온갖 부귀……뭐라고?"
"좋은 제안이라고."
"……혹시 비꼬는 건가?"
"아닌데?"
"그런가?"
"그런데."
김현우의 대답에 말을 하다말고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는 데블랑.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미친 건가?"
"……이 새끼가 갑자기 시비를 터네?"
김현우가 인상을 팍 찌푸리자 뒤늦게 핫, 하고 정신을 차린 데블랑은 이내 미안하다는 듯 손을 잠깐 올리고는 이야기했다.
"음…… 미안하군. 솔직히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라서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와 버렸다."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무슨 대답을 하기를 원했는데?"
"보통 탑주에 자리에 앉은 자는 자신이 쥔 것을 놓지 않으려고 하지 않나? 적어도 탑 안에서라면 딱히 힘을 들이지 않고도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탑주니까 말이지."
그의 말에 김현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곤 대답했다.
"딱히 다른 탑주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어째서지?"
"관리기관인지 뭔지 존나게 마음에 안 드니까."
"……?"
"왜 그런 표정이야?"
"아니, 좀 신기하긴 한데…… 그럼 좀 물어보도록 하지. 뭐 때문에 관리기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여러 가지로 마음에 안 들어."
"여러 가지로……?"
데블랑이 되묻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대답했다.
"우선 여기에 업 부채 있으니까 내놓으라는 찾아오는 올백 머저리 새끼 쌍판부터가 더럽게 맘에 안 들어."
"……그렇군."
"그다음으로는 내가 지지도 않은 빚을 빚 갚으라고 하는 것도 좆같고."
"……그런가?"
"업 안내겠다고 했더니 자기들은 그럼 마력 끊으면 그만이니까 알아서 기어라라고 하는 것도 존나 마음에 안 들어."
"……그런 말을 했다고?"
데블랑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헤르메스를 떠올려봤다.
확실히 얼굴이 좀 야비하고 싸가지 없이 생기기는 했으나 탑주들에게 그런 식으로 노골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런 말은 안 했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그냥 느낌이, 그러니까 어투가 그랬다는 거지."
"……그, 그렇군."
김현우의 말에 데블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김현우에 대한 평가를 상세하게 고치기 시작했다.
'또라이'에서 '상태가 짐작이 가지 않는 개또라이'로.
그리고 그와 동시에 데블랑은 자신의 시선에서 김현우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당장 지금까지의 대화만 하더라도 나름대로 사람을 잘 파악한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예상이 모두 빗나갔으니까.
물론 김현우는 데블랑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신경 쓰지도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계속했고.
"아무튼, 대충 그런 이유 때문에 네 제안이 그리 나쁘지 않은 거라는 건 알겠다 이 말이지."
거기에 덤으로-
"그 눈동자를 떠올려보면, 너희들이 별생각 없이 그렇게 움직이는 건 아닌 것 같고…… 나름대로 계획한 방법이 있는 것 같은데. 맞아?"
김현우의 날카로운 말에 데블랑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완전히 또라인 줄 알았더니 나름 치밀한 점도 있는 것 같군.'
"맞다. 하지만 우선 내가 조금 전에 말했듯이 지금 이 관리기관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가볍게 설명을 하도록 하지."
"시간도 별로 없다며?"
"그래도 이건 들어 놓는 게 좋을 거다. 적어도 현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야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불합리한 상황인지 알게 될 테니까."
데블랑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 녀석한테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가긴 했으나 그는 곧 가볍게 고개를 털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관리기관이 은근히 숨기고 있는 뒷이야기에 대해서.
김현우는 처음에는 심드렁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데블랑의 이야기가 시작됨에 따라 흥미롭게 그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의 양옆에 앉아 있던 아브와 노아흐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여기까지가 관리기관이 탑주들에게 숨기고 있는 뒷내용이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데블랑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와……. 이 새끼들 봐라?"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감탄을 하고 있었고, 아브는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정리하는 듯하더니 데블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음, 잠시 제가 들은 내용이 맞는지 확인을 좀 해도 될까요?"
"좋다."
"……그러니까 원래 '관리기관'이 저희에게 업을 대가로 나눠주고 있던 마력은 원래라면 자연히 모든 차원에 나눠져야 할 마력이라 이건가요?"
"맞다. 내가 한 이야기는 조금 길기는 하지만 사실 그게 제일 중요한 핵심이지."
데블랑이 꽤 오랜 시간을 걸려 그들에게 전해준 '관리기관'의 진짜 뒷사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원래 자연스럽게 전 차원에 나눠줘야 할 마력을 그들이 자신 멋대로 업을 받고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바꾸어 버린 것.
"……정말 그게 가능한 건가요?"
아브가 자신이 말해놓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데블랑은 이야기했다.
"물론 나도 어떻게 그들이 마력과 업이 순환하는 그곳을 뒤틀어서 그렇게 써먹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들은 지금 그렇게 해서 탑주들에게 모으지 않아도 될 업을 모으게 만들고 있다 이 말이지."
데블랑의 말에 아브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으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것은 노아흐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건 이 세상의 이치와도 같은 것 같은데…… 그걸 마음대로 뒤틀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니."
노아흐의 중얼거림.
데블랑은 심각하게 고민을 이어나가기 시작하는 둘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이런 반응이 정상이지.'
자신도 처음 들었을 때는 그 말이 진실인지조차 생각하지 않고 그저 충격을 받았을 뿐이었으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김현우에게로 돌렸고.
"허, 이런 개새끼들 봐라? 진짜 물장사를 하고 있었네?"
데블랑은 거침없이 욕을 뱉어내는 그를 보며 물었다.
"물장사라니……?"
"아니, 그냥 이거 딱 봐도 물장사잖아, 물장사 몰라? 이 새끼들은 그냥 아무나 퍼마실 수 있는 물에 갑자기 가게 하나 짓고는 무료로 먹을 수 있던 물을 팔고 있는 거잖아?"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다."
데블랑의 대답에 김현우는 몇 번이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탄식을 하며 대답했다.
"심마가 빚을 진 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이 새끼들 자체가 완전 질이 나쁜 개쓰레기들이었네?"
슬슬 살의가 깃드는 목소리.
데블랑은 왠지 여기서 조금만 더 그를 놔둔다면 그가 제멋대로 관리기관으로 뛰어들 것 같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딱히 어쩔 노릇이 없었다."
"왜?"
"그분이 기다리라고 하셨으니까."
"그분……? 눈동자 말하는 거야?"
김현우의 말에 데블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그분은 지금 당장 관리기관에 반기를 들어봤자 어차피 그들을 관리기관에서 끌어내리기 힘들 거라고 말씀하셨다."
"……왜?"
"관리기관은 뒤에 숨기고 있는 게 많다고 하셨으니까. 당장 이 정도의 전력으로는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이라고 하셨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분의 말대로 마지막 카드인 네가 왔으니까 말이다."
"……내가 마지막 카드라고?"
"물론 그 뜻은 나도 제대로 모른다. 하지만 그분은 네가 온 시점부터 이제 슬슬 계획을 진행시켜도 될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뿐이다."
데블랑은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고, 그 모습을 본 김현우는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그래,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하면 되겠네?"
그렇게 대답했다.
304화. 바가지 잘 긁는 법 (1)
탑의 최상층.
"그럼, 이만 나는 돌아가 보도록 하지."
"벌써?"
"말하지 않았나? 지금 여기서 대외적으로 친분 관계를 맺지 않은 너와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게 관리기관에 걸린다면 괜한 의심을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뭐-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좀 많긴 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 걸릴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길게 이야기하는 것도 웃기니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
"아니, 다음이 언제인데?"
김현우의 물음에 데블랑은 이야기했다.
"다음 탑주회의다. 듣기로는 네가 오늘 그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탑주회의가 너무 빨리 끝나서 조만간 다시 연다고 하더군."
"……그래?"
"그래. 그러니까 우선은 조용히 있어라.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음 탑주회의에서 대외적인 명분을 만들고 난 뒤로 하고 말이야."
데블랑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 이상의 이야기는 끝이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파지지직!
파직거리는 전류와 함께 데블랑은 김현우의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거, 이 새끼들은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 방법이라도 알고 있는 건가?"
그렇게 사라진 모습에 잠시 투덜거린 김현우.
그도 그럴 게 김현우는 관리기관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아직 그가 궁금해하던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질문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관리기관 말고도 눈동자의 정체가 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것뿐인가?
김현우가 묻고 싶었던 것은 상당히 많았으나 데블랑은 김현우가 미처 질문을 하기도 전에 '우선은 기다리는 게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가버렸다.
'관리기관 이 새끼들이 개 씹 양아치 새끼들이라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나…….'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며 데블랑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자 노아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단하군."
"갑자기 뭐가?"
"조금 전에 우리 앞에 나타난 남자 말일세. 데블랑이라고 했던가? 그자가 대단하다고 말하고 있는 걸세."
"뭐…… 탑주니까 당연히 어느 정도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기는 하겠지."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게 아닐세."
"그게 아니라고?"
"그래, 정확히는 그가 사용하고 있는 아티팩트들이 대단하다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이었네."
"아티팩트?"
"그래, 물론 처음에야 나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가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나서 알 수 있었네."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걔가 이곳에 와서 뭘 했다는 거야?"
"결계를 쳤네."
"결계?"
"그래,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라면 아예 눈치도 채지 못할 정도로 티가 나지 않는 굉장히 세밀한 결계."
"아니 그건 또 뭔 소리야?"
"아까 그가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 자네와 만나는 것을 관리기관에 들키는 순간 의심을 사게 된다고."
"그 녀석이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
김현우의 긍정.
그에 노아흐는 대답했다.
"한마디로 그는 우리가 모르는 그 짧은 순간에 관리기관의 눈을 속일 만한 결계를 쳤다는 말일세. 거기에 덤으로 결계를 친 흔적조차 남기지 않다니."
노아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굉장히 놀라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감탄했으나.
"……."
정작 김현우는 도대체 어디에서 감탄해야 할 부분을 찾아야 할지 모를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아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건데? 라는 물음을 던지려 했던 김현우는 이내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번에 노아흐에게 이동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처럼 그가 질문을 해봤자 또 알 수 없는 소리를 할 것이 뻔할 뻔 자였기 때문이다.
'또 무슨 이동법칙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겠지.'
결국 아브와 함께 결계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노아흐를 한번 바라본 김현우는 아까 전 데블랑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우선은 다음 회의가 있을 때까지 조용히 있어라……인가.'
사실 기다리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반대로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당장 정확히 알고 있는 정보가 없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허리를 의자에 기대며 생각했다.
'그럼, 조금 정도는 기다려 주도록 할까.'
애초에 혼자서 날뛰는 것보다는 같이하는 게 더 편할 테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휴식을 취할 겸 슬쩍 눈을 감았고, 이내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가디언, 편지가 왔는데요?"
"……편지?"
-김현우는 어느새 허공에서 나타난 편지를 보며 되물었다.
####
그다음 날.
멕시코시티에 위치한 최고급 호텔 내부의 레스토랑.
"……그래서 카지노를 통째로 날려 버리신 거예요?"
구미호의 물음에 이서연은 벌써부터 골이 아프다는 듯한 말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그래도 어제 SNS에 너나 할 것 없이 올라오는 사람 얼굴이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오공 님이었다니."
"사상자가 나지 않아서 다행이지. 만약 사상자라도 났으면 일이 엄청 복잡하게 돌아갈 뻔했어……."
이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어제, 청룡과 함께 보았던 그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의 자리에 돈을 쌓아 둔 채 보안 요원과 티격태격 하며 싸움을 하고 있는 손오공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구경하는 구경꾼들.
물론 실랑이가 거기에서 끝났다면 그때의 일은 여행을 와서 생긴 간단한 해프닝 정도로 넘어갈 것이었으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설마…….'
시작점은 바로 보안 요원이 억지로 손오공의 몸을 잡아채 끌고 가려 한 것이 문제.
손오공은 자신을 끌고 가려는 보안 요원을 떼어내는 데 성공했으나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바로 뒤에 있던 김현우 동상을 팔꿈치로 세게 후려쳐 버렸고.
'동상이 쓰러질 줄이야.'
손오공의 그 행동 덕분에 분명 상당히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던 동상은 그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다리 부분이 깨져 뒤로 기울어졌다.
가볍게만 봐도 7M정도는 되어 보이는 동상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에 사람들은 대경실색을 하며 피했고, 그것을 손오공이 급하게 막느라 딱히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 장면은 현재 SNS를 타고 전 세계에 퍼지는 중이었다.
물론 그것뿐이라면 그저 손오공이 그냥 SNS 스타가 돼버렸네? 정도로 어찌어찌 힘들게 넘길 수 있을 정도였으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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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베스트 게시물로 선정된 글입니다! ]
제목 : 야 지금 여기서 나오고 있는 거 아무리 봐도 아랑길드 이서연 길드장 아니냐?
글쓴이 ㅁㄴㅎㅎㅎ
야 지금 멕시코시티에서 퍼지고 있는 카지노 영상에서 김현우 동상 깨고 튄 사람이랑 같이 다니는 사람 이서연 길드장이랑 존나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냐?
아니 비슷한 걸 넘어서 완전히 똑같던데 본인 아니냐? ㅋㅋㅋㅋㅋ킹리적 갓심 ON 인 부분 ㅇㅈ?
댓글 772
마실나왔다 : 이거 나도 씹동감, 처음에는 그냥 대충 봐서 몰랐는데 나중에 그 남자 도망칠 때 같이 뛰어가는 여자 보니까 이서연 길드장 맞는 것 같던데?
지금부터집갈준비함 : ㅇㅇ 그거 이서연 길드장 맞는 걸로 아는데? 지금 헌터킬 베스트 올라가봐라 저기에 있는 여자랑 이서연 길드장 비교해 놓은 거 있음 거기 가보면 그냥 빼박 이서연 길드장인 거 나온다 ㅋㅋ카미사마 : 와 이서연 돈 존나 많이 벌었다고 호스트 양옆에 끼고 멕시코시티에서 놀고 있었누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존나 잘생겼네 ㄹㅇ. 나도 돈 많으면 이서연처럼 양쪽에 여자 끼고 놀고 싶다 시발 ㅋㅋ;
ㄴ 호로록 : 이서연 길드장 양옆에 있는 애들 존나 잘 생긴 건 킹정인데 쟤들이 뭔 호스트임 ㅋㅋ 딱 봐도 헌터들인 것 같은데. 어떻게든 잘나가면 음해하고 보는 킬붕이 클라스 딱나왔죠?
ㄴ 카미사마 : ㅈㄹ 작작 해라 병신아 딱 봐도 그냥 팩트인 걸 말하고 있고 이미 다 링크에서 확인된 걸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추하게 붙잡고 늘어지네;;; 혹시 이서연 팬이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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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X손수건 : 이서연 취향 확고하네 ㅋㅋㅋㅋ 원X 뺨따구는 열 대 정도 때릴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취향이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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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바로 SNS에 퍼진 영상에 손오공과 함께 도망치는 이서연의 모습이 찍혔다는 것이었다.
사실 화질이라도 좀 흐릿하면 어떻게든 자신이 아니라는 식으로 둘러대며 은근히 상황을 넘길 수도 있었으나.
"에휴."
지금 SNS에 퍼지는 영상의 화질은 영상에 찍힌 것이 이서연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좋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 이서연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실시간으로 새로운 밈과 유명세를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히 좋은 쪽이 아닌 나쁜 쪽으로 말이다.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던 이서연이 저도 모르게 이마를 탁 치며 한숨을 내쉬자 구미호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이서연을 위로했다.
구미호도 오늘 아침 SNS에 이서연에 관한 썰이 어떻게 돌고 있는지 대충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쉬러 온 건데…… 어떻게 더 머리 아픈 일이 일어나는 거야 대체…….'
그렇게 이서연이 자신에게 당장 닥친 일에 대해 짙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쯤 이제 막 다음 날 저녁을 맞이하고 있는 한국.
"……."
김현우의 자택에는 세 명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다인용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은 바로 미령과 하나린이었고, 그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왠지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야차였다.
그녀는 왜인지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둘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이내 재미있다는 듯 쿡쿡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정ㄹ- 이, 아니라 네 서방의 몸을 보신시켜 줄 만한 약을 원한다고 했느냐?"
야차의 질문.
그에 미령과 하나린은 슬쩍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이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맞다."
"맞아요."
그 대답에 재미있다는 듯 날카로운 이빨을 더더욱 드러내는 야차.
그녀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확실히 최근 그 녀석을 보고 있으려니 상당히 몸이 허해 보이기는 하더구나. 은근히 피로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같고 말이다."
"……."
"……."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각각 반대로 돌린 그녀들.
야차는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더니 이내 자신의 품속을 뒤적거려 어느 한 작은 병을 꺼내들고는 이내 식탁 아래에 내려놓았다.
호리병을 작게 축소시켜 놓은 듯한 병.
"이건……?"
"신옥수라고 하는 물건이다. 원래라면 고작 남자의 정- 이 아니라 몸을 보신시키는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조금 아까운 영수이기는 하나 너희들이 원한다고 하니 주도록 하마."
야차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는 둘.
그러나 그 둘의 손은 식탁에 놓여 있던 신옥수를 가져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야차는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신옥수를 다시 집어 들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의미냐는 듯 고개를 올린 김현우의 제자들.
그들을 보며 야차는 씨익 웃고는.
"그 대신, 너희도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겠다."
-이내 그렇게 말했다.
305화. 바가지 잘 긁는 법 (2)
굉장히 아름다운 조경이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공간.
사방에는 나무와 풀이 자리를 잡고 조경에 방해가 되지 않게 자라나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곤충과 동물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야말로 인류가 훼손하지 않고 자연이 쭉 발전되었으면 이런 모습을 간직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순수한 상태의 자연.
그리고 그런 순수한 상태의 자연 중심에는 거대한 나무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냥 거대한 것이 아닌, 마치 이 공간 전체를 혼자 떠받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나무.
그것은 바로 정령들이 '세계수'라고 부르는 조형물이자 이프리트가 거주하고 있는 3번 탑의 최상층이었다.
그리고 그런 세계수의 안쪽의 거대한 원형 탁자에는 이프리트를 포함한 4명의 정령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도대체 왜! 도대체 왜 가만히 있었던 거지!?"
그 원형 탁자에 앉아 있던 이프리트는 자신과 마주 앉은 다른 정령왕들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며 성질을 내고 있었다.
얼마나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그가 한번 입을 열 때마다 주변으로 불꽃이 터져 나왔으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그 누구도 이프리트의 말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더욱더 탐탁찮게 느껴졌던 것인지 이프리트는 이제는 주변에 뜨거운 열기까지 발산하려 했으나-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이내 오른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프리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뭐. 뭐라고?"
"당연한 거 아니냐고 했어요. 이프리트."
말을 더듬거리는 이프리트한테 쐐기를 박아 넣은 것은 바로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였다.
그녀는 자신의 투명한 피부 사이로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거기서 나서봤자…… 아니, 저를 포함한 다른 정령왕들이 달려들었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달라질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그게 무슨……!"
"말을 돌리지 마세요, 이프리트. 저는 분명히 질문을 드린 것 같습니다만? 만약 당신과 저를 포함한 4대 정령이 그에게 달려들었다고 해서 지금 상황에서 달라지는 게 있을 것 같냐고 물었습니다."
나이아드의 물음에 순간 이를 악물고 그녀를 째려보는 이프리트.
"……큭!"
허나 그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짧게 혀를 차고는 훽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보고 있던 나이아드는 조심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신도 그와 싸워봐서 잘 알고 있겠지만, 그건 저희들이 끼어든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분하지만 맞아요, 이프리트."
"그는 규격 외야."
나이어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긍정하는 땅의 정령왕 오리에드와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
이프리트는 그들의 동의에 기분이 상한 듯 불꽃을 뿜어냈으나 그가 거기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나이어드가 한 말 중에서 틀린 말은 없었으니까.
'어디서 그런 괴물 새끼가 튀어나왔지?'
물론 그 또라이 새끼가 아닌 전 51번 탑주도 심상찮은 무력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프리트는 절대로 51번 탑주에게 자신이 진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무력은 딱 그 정도였으니까.
태생적으로 마력에 민감한 정령들은 상대의 힘을 파악하는 데는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프리트는 자신의 직감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현우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처음에는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프리트가 처음 탑주회의에 모습을 드러낸 김현우를 보았을 때, 그는 결코 김현우가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적어도 이프리트의 직감으로 느껴진 김현우의 마력은 형체 없는 자와 비슷했으니까.
아니, 오히려 형체 없는 자보다도 조금 더 작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맨 처음에는 분명 그를 찍어 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
싸움을 시작한 뒤로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마력.
그것은 분명 이프리트의 예상보다도 강력했고, 보다시피 그 결과는 자신의 패배로 매듭지어졌다.
아니, 패배를 넘어서 굴욕적인 패배였다.
이프리트는 그에게 목숨을 빚진 상태나 다름없게 되었으니까.
"크으으으……!"
이프리트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불꽃을 내뿜자 나이아드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는 이야기 했다.
"그만 좀 하세요 이프리트, 지금 오히려 당신은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물론 그쪽도 당신의 목숨을 취하고 나면 일어날 일 때문에 그만둔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만……."
그런 나이아드의 말에 이프리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그럼, 그놈이 보여준 힘 때문에 꼬리를 말고 찌그러져 있어야 한다고? 우리 파벌의 위신이 크게 떨어질 거다!"
"당신도 아실 텐데요 이프리트? 파벌의 위신은 그리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저들도 김현우의 힘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는 것을 알 것이고, 무엇보다 우리가 관리기관쪽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을 아는 이상 저희를 깔보지는 않겠죠."
거기에 무엇보다-
"그들도 김현우를 끌어들여서 발언권을 얻는 것 보다는, 오히려 현 상황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랄 거예요. 어차피 저희 '탑주'들은 잃을 것이 없으니까요."
나이아드의 말에 그 말을 듣고 있던 오리에드와 에리얼은 그녀의 말에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쯧!"
이프리트도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래도, 이대로 당하면 역시 체면상의 문제가 있기는 하죠. 저희 파벌에 속한 다른 탑주라면 모르겠지만 저희 파벌 쪽에서 '우선'은 제일 무력이 강한 이프리트가 당했으니까요."
허나 그는 다시 들린 나이아드의 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그러니까, 저희도 나름대로 답례는 해줘야겠죠."
이내 나이아드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3번 탑의 최상층에서 정령왕들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쯤, 2번 탑의 최상층.
"어디를 갔다 온 거지?"
보는 것만으로도 암울해질 것 같은 검은색의 구름이 하늘에 떠 있고, 바닥에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를 붉은 돌이 대지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자그마한 식물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기는 했으나 그곳에 나 있는 식물들은 척 보더라도 일반적인 식물들과는 많이 다른, 조금은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붉은 대지 위에 솟아 올라있는 거대한 성 내.
그곳에는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한 명은 한쪽 눈이 붉게 물들어 있는 남자였고, 그 반대편에 있는 이는 바로 머리 위에 붉은색의 뿔이 나 있는 남자였다.
"그가 죽었습니다."
"……그, 라고 한다면?"
"그 녀석입니다. 당신이 이곳에 오르기 전, 당신을 끝없이 시험하고 심마에 들어 괴롭혔던 녀석 말입니다."
남자에 말에 놀랐다는 듯 슬쩍 눈을 뜬 남자는 이내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사탄이 죽었다는 건가?"
남자의 말에 붉은 눈을 가진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따라 남자의 눈에는 조그마한 이채가 감돌기 시작했다.
####
천호동의 저택.
"……이게 다 뭐야?"
김현우는 식탁에 가득 차려져 있는 음식의 양을 보고 저도 모르게 압도되었다.
"각국에서 초빙한 요리사들을 불러들여 만든 음식입니다."
"……오늘 누구 오냐?"
"저희뿐이에요."
미령과 하나린이 기다렸다는 듯 티키타카로 대답을 하는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식탁에 차려져 있는 음식을 바라봤다.
장어 덮밥부터 시작해서 굴을 이용해 만든 음식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그 뒤에도 이것저것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져 있는 음식들.
'왠지…… 어디서 본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는 것 같은데.'
특히 인터넷에서 흘러가다 보던 몸보신 위주의 음식들이 여기저기 차려져 있는 것을 확인한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둘을 바라봤다.
한 치의 찔림도 없다는 듯 올곧게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미령과 하나린.
"……뭐, 그래 먹자."
그 모습에 김현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고,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슥.
"?"
미령은 기다렸다는 듯 김현우에게 물을 건넸다.
"물을 먼저 드시고 식사를 하시는 게 더 몸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미령의 정중한 말.
"뭐, 그래……."
그 말에 김현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령이 내민 물컵을 받아들었고, 그대로 물컵 안에 있는 물을 먹어치웠다.
"……?"
그리고 그와 함께 느껴지는 청명한 느낌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빈 물컵을 바라봤다.
물을 한 입 삼킴과 동시에 느껴졌던 청명한 기운은 계속해서 그의 몸속을 돌고 있는 듯했고. 놀랍게도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건강해진다는 느낌보다는 실시간으로 몸에 각성제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또렷해진다고 해야 할까?
그와 함께 돋기 시작하는 식욕.
김현우는 그와 함께 미령이 준 물컵에 무엇인가가 섞여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열려고 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뭐, 나를 위해 뭔가를 준비한 것 같은데 그냥 넘어가지 뭐.'
분명 피로함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육체가 미령이 준 물 한컵에 깔끔하게 사라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을 일축해 버리고는 은근히 눈치를 보고 있는 미령과 하나린을 보고 피식 하는 웃음을 지은 뒤 식탁에 차려져 있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 식탁에 놓여 있는 음식을 볼 때만 해도 이걸 어떻게 세 명에서 다 먹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혼자서도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점점 숟가락과 젓가락을 움직이는 속도를 늘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폭풍같이 자신의 입안에 음식들을 쓸어담는 김현우의 모습.
그는 스스로가 음식을 먹으면서도
'내가 이렇게 빨리 먹을 수 있었나?'
를 생각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그는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고 이내 얼마 있지 않아 식탁 위를 빼곡하게 채웠던 음식들은 모조리 김현우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평소 먹던 양에 비하면 확실히 과식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은 양을 혼자 먹어치운 김현우.
그러나.
'……이상하다? 왜 과식한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신기하게도 김현우의 속이 더부룩하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과식을 했다기보다는 굉장히 든든하게 속을 채웠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고 속이 불편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이외에도.
'오히려 뭔가 조금 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상하다는 듯 몇 차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시선을 돌려 이제야 밥을 전부 먹어치운 두 제자들을 볼 수 있었고.
"올라가자."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놀랐으나, 이내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두 제자들과 함께 저택의 2층으로 올라갔다.
그날.
저택은 좀 시끄러웠다.
……좀 많이 시끄러웠다.
306화. 바가지 잘 긁는 법 (3)
그로부터 일주일 뒤.
천호동에 있는 김현우의 자택.
[이서연 길드장님, 이번 멕시코시티에서 두 명의 호스트와 카지노에서 밀회를 즐긴 게 사실인가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김현우는 TV에 나오고 있는 아랑 길드의 길드장 이서연의 기자회견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오빠는 제가 힘든 게 그렇게 웃겨요?"
"아니……. 킥킥…… 근데 좀 기자회견 하는 주제가 좀 웃기잖앜……!"
"저건…… 좀 그렇지."
김현우와 김시현이 차례대로 대답하며 TV를 바라보고 있자 이서연은 성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진짜 호스트 두 명과 밀회를 즐겼다고 믿고 있는 거야 뭐야!?"
이서연의 분노 어린 말.
그에 김시현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곤 말했다.
"저기, 밀회를 즐겼다고 믿고 있는 게 아닌데?"
"뭐?"
"밀회를 즐겼다고 믿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럼 뭔데?"
"확신하고 있지."
김시현은 그렇게 말하며 턱짓으로 아직 계속되는 방송을 보라는 듯 턱짓을 했고, 그렇게 계속해서 나오는 방송의 화면은 어느새 이서연이 나오는 기자회견 영상이 아닌 뉴스 캐스터의 영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랑 길드의 길드장인 이서연은 이 뒤에도 연달아 이어져 온 질문에 모두 부정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뉴스 캐스터의 옆으로 떠오른 거대한 사진, 그것은 바로 얼마 전 SNS에서 퍼진 카지노 영상의 일부분이었고.
뉴스 캐스터의 옆에 올라온 사진은 그중에서도 카지노에 있던 사람이 이서연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 사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카지노에서 찍힌 영상에 나오는 이는 틀림없이 이서연 길드장이 맞았습니다.]
"아니 쟤들은 도대체 뭔데 저런 걸 일일이 분석해서 저렇게 올리냐고!!!"
이서연의 빡침이 담긴 샤우팅에 큭큭거리며 웃는 김현우와 애잔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는 김시현.
"뭐……. 그럴 만도 하지, 우리 서연이가 왈가닥을 넘어선 무엇인가라고 해도 벌써 계란 한판을 넘었으니까. 나는 이해한다."
"으하하하핰!!"
김시현의 드립에 더더욱 크게 웃는 김현우.
그녀는 짜증 어린 표정으로 그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야……. 내가 분명히 말했다? 지금 저기에 나랑 같이 있는 거 청룡 씨랑 오공 씨라고! 내가 어제도 말해줬잖아!!"
이서연의 비명 어린 말.
그러나 김현우와 김시현은 딱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녀를 놀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김현우와 김시현, 아니 그냥 애초에 김현우와 관련이 되어 있는 이들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김현우와 김시현은 하루 전에 이서연과 청룡, 그리고 손오공에게서 멕시코시티에서 일어났던 일을 들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서연을 노골적으로 놀려먹고 있는 이유는 바로-
"야! 하지 말라고!"
"여! 흐지믈르그~"
"푸하하핳!"
바로 그녀의 리액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야!!"
"얘~!"
김시현이 이서연을 놀리고, 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며 미친 듯이 웃는다.
뉴스에서는 그렇게도 할 이야기가 없는지 계속해서 이서연과 관련된 뉴스를 메인으로 내보내고 있었고, 급기야 이서연은 폭력으로 이 사태를 잠재우려는 노력을 해봤으나-
"이익!"
"후후후, 내가 예전의 나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이미 김시현은 그녀의 상상보다도 훨씬 강해져 있었기에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김현우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
"……."
그곳에는 김현우의 두 제자, 아니 이제는 두 와이프로 완전히 전직한 미령과 하나린이 그의 옆에 착 달라붙어 이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어쩔 건데? 우리 서방님 건들 거야?'
마치 한 명이 대답하듯 눈빛으로 말하는 그녀들.
이서연은 쯧 하는 표정을 짓고 그녀들을 바라봤다.
'쟤들도 분명 제자일 때는 서로가 엿 같니 뭐니 하면서 맨날 치고받고 싸우더만……!'
그날을 기점으로 김현우의 품 안으로 들어가게 된 두 제자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로 싸우는 빈도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더 이상 싸우지 않게 되었다.
그래,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물론 이서연은 그녀들이 싸우지 않고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어느 정도 알고 있기는 했다.
'혼자서 감당이 힘들다고…….'
물론 그녀들에게 들었던 것은 아니고 그녀들과 최근 자주 만남을 가지던 야차에게 들었던 내용이었으나, 아무튼 그 덕분에 맨날 싸우기만 하던 그녀들의 관계가 조금 진전되었다는 사실을 듣기는 했었다.
"으으……."
분한 표정으로 김현우와 김시현을 바라보고 있던 이서연의 눈빛이 이내 휙 돌아가 뒤에서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손오공에게로 돌아간다.
"그게 넘어가요!?"
"큽!?…… 켁!"
갑작스레 자신을 향한 악의의 눈빛을 받은 손오공은 바나나 아이스크림이 걸렸는지 켁켁거리고 있었으나 이서연은 그런 손오공을 봐줄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그를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저기요! 그게 넘어가냐구요!!"
"아니, 나는 그냥……."
"네? 뭐가 그냥인데요!?"
"아니……."
"지금 오공 씨 때문에 저 유명인 된 거 몰라요!?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요!! 그런데 아이스크림이 넘어가요? 넘어가!?"
"……."
쉴 새 없이 쏘아붙이는 이서연.
그에 손오공은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입맛을 다시며 숟가락을 내려놨다.
물론 손오공이 숟가락을 내려놨다고 해서 이서연이 손오공을 갈구는 것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쉴 새 없이 손오공을 갈구는 이서연.
물론 손오공은 억울하다는 듯 이서연을 바라보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손오공이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더더욱 아래로 숙이는 것뿐이었다.
'……나,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갑작스레 찾아온 현자타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서연이 손오공을 갈구는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고. 어느새 이서연을 놀리고 있던 김시현과 김현우는 애잔한 표정으로 바가지를 긁히고 있는 손오공을 바라봤다.
그 와중에 김시현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했는지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고, 김현우는 마치 아내한테 갈굼을 받는 것 같은 손오공의 모습에 순간 생각했다.
'설마…… 나도?'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시선을 돌려 자신의 양옆을 차지하고 있는 그녀들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피식 웃으며 시선을 거뒀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에 떠올랐던 불길한 생각을 금세 치워 버렸고, 이내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래서 오빠는 안 갈 거예요?"
한참이나 손오공을 갈구고 있던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슬쩍 긴장하며 대답했다.
"어디를?"
"어제 말하지 않았어요? 오늘 최상층에서 무슨 회의인가 뭔가를 한다고……."
이서연의 말에 김현우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곤 말했다.
"아참, 그랬었지."
지금으로부터 8일 전, 김현우는 편지를 통해 다음 탑주회의가 언제 시작할지에 대해 미리 언질 받아 놓은 상태였고, 탑주회의가 시작되는 날이 오늘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가면 되려나?"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자 그의 양쪽에서 자그마한 탄성이 튀어나왔고, 김현우는 두 제자들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곧바로 하수분의 주머니 속에서 최상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아티팩트를 손에 쥐었다.
"그럼 다녀올게."
별다른 인사를 할 것도 없이 단 한마디 말을 남긴 김현우는 곧바로 버튼을 눌렀고, 누가 무슨 말을 전할 새도 없이 김현우는 저택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저기요! 또 숟가락 드는 거예요? 그거 먹을라고?"
김현우로 인해 끝났다고 생각했던 갈굼은 그가 사라지자마자 계속 되었다.
####
탑의 최상층.
"아, 오셨어요?"
김현우가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인사하는 아브.
"왔나?"
그 옆에는 노아흐가 무엇인가를 만지작거리며 인사를 했고, 김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 녀석은 아직 안 왔어?"
"헤르메스를 말하시는 거라면 아직 오지 않았어요."
아브의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인 이내 노아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노아흐는 뭘 하고 있는 거야?"
"탑의 마력진을 본격적으로 수정하고 있네."
"수정?"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 더 이상 탑을 기동할 일이 없으니 필요 없는 마력진을 모두 빼서 마력의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여보겠다고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이전번 아브와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오셨군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들리는 목소리에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디서 관음하고 있냐?"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바로 김현우가 조금 전 오지 않았냐고 물어봤던 헤르메스였다.
"그럴 리가요. 다른 이들의 사생활을 일일이 감시하는 취미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오는 건 그렇게 잘 알고 있어?"
"저번에도 말씀드렸던 것 같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마력의 감지를 통해서 알았던 것뿐입니다."
"……그게 감시하는 거랑 뭐가 달라?"
"다릅니다. 마력을 탐지하는 것은 말 그대로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체크를 하는 것뿐이니까요."
잠시도 더듬지 않고 이어지는 헤르메스의 말에 김현우는 이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한번 가볍게 털었고.
우우웅-
곧 그의 옆에는 일전에 김현우가 보았던 문이 생겼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이곳으로 들어가시면 회의장이 나옵니다."
그와 동시에 말하며 슬쩍 고개를 숙이는 헤르메스.
김현우는 그런 그를 슬쩍 보고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이내 문고리에 손을 올려두는 모습을 바라본 헤르메스는 입을 열었다.
"다만, 이번에는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주의?"
"예. 이번에 연 탑주회의는 기억하시다시피 저번에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회의가 생각보다도 너무 빠르게 끝나 추가적으로 열게 된 것이니까요."
"아니, 그걸 내가 왜 주의를 해? 시비를 건 놈은 그 불덩이새끼인데."
"물론 이프리트 님에게도 따로 주의를 드렸습니다. 아무쪼록 회의장 내부에서는 되도록 폭력 사용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싫은데?'
라는 말이 목구멍 끝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꼈으나, 이내 간신히 그 욕구를 참았다.
'……우선은 조용히 있자.'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이번 회의장에서 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말을 참고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그 안쪽으로 들어갔고, 이내 그의 몸이 완전히 문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언제 봐도 신기하군."
헤르메스는 회의장으로 갈 수 있는 문만을 남겨두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헤르메스가 만든 문에 들어가 회의장에 도착한 김현우는.
"……."
회의장에 들어오자마자 수많은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307화. 누구??? (1)
새하얀 공간.
"그래서."
헤르메스와 남자는 언제나의 그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 본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데블랑에 대해서는 알아낸 게 없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슬쩍 고개를 숙인 헤르메스.
그에 남자는 자신의 손으로 턱을 톡톡 두들기며 마치 생각을 떠올리려는 듯 중얼거렸다.
"데블랑…… 데블랑이라……."
잠시간의 침묵.
그저 남자가 자신의 턱을 툭툭 때리는 규칙적인 소리만이 그 공간에 조용히 울려퍼졌고, 그 끝에-
"역시 짐작 가는 게 없군."
-남자는 슬쩍 한쪽 눈을 찌푸리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이내 헤르메스에게로 시선을 돌려 질문했다.
"51번 탑을 감시했을 때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나?"
"예, 분명 계속해서 51번 탑을 주시했지만 김현우가 찾던 데블랑이라는 자에 대한 이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좀처럼 이상함이 가시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뭐지?'
물론 김현우가 '데블랑' 이라는 자를 찾았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곰곰이 생각해야 할 정도로 큰일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탑주회의에서 날뛰며 누구를 찾든 말든 그는 탑주들에게서 업을 받기만 하면 될 뿐이었으니까.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데블랑'이라는 이름에 대해 신경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가 걸린다는 말이지…….'
무엇인가가 걸린다.
그것이 바로 남자가 이전 헤르메스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데블랑'이라는 이름에 대해 조사해 보라고 했던 이유였다.
물론 말 그대로 무엇인가가 걸린다는 것은 그 어떤 근거도 없이 그저 본능적인 직감에 의존한 감각일 뿐이었으나 그런 불확실성을 제치고서라도 남자는 그 데블랑이라는 이름이 걸렸다.
"흐음."
침음.
'……신경을 꺼도 되는 것일까?'
51번 탑주 김현우.
물론 그는 상당히 특이했다.
애초에 처음 탑주회의에 참가해 정령 파벌의 수장급인 이프리트를 거의 소멸 직전까지 몰고 간 것부터 그가 평범한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그는 바로 51번 탑을 직접 만들었던 형체 없는 자를 처리하고 탑주의 자리를 차지한 이였다.
한 마디로 평범함과는 절대적으로 먼 거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그런 건가?'
그 자리에서 한참이나 생각을 이어나가던 남자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뭐, 우선은 알겠네."
어차피 이렇게 생각해 봤자 더는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다다른 남자는 결국 머릿속에 든 생각을 일축했다.
"우선 감시는 계속해서 하는 것이 좋겠군."
남자의 말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헤르메스는 이야기를 이었다.
"그리고, 드릴 말씀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무엇이지?"
"정령 파벌 쪽에서 아무래도 김현우에게 복수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복수?"
"예, 물론 곧바로 복수를 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나름대로의 대화를 거친 뒤에 보복을 할지 말지에 대해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자기들의 뜻을 이곳에 전하는 이유는?"
"그쪽에서 조금 힘을 빌려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힘이라……. 뭐, 그쪽도 나름 제대로 된 판단은 하는 것 같군."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이내 어느 정도 생각을 마친 남자는 씨익 하는 웃음을 짓곤 이야기했다.
"그렇게 되면 나쁘지 않겠군."
"……예?"
"네게 한 말이 아니다. 뭐, 우리는 기본적으로 마력을 파는 일을 하기는 하지만, 사실 '업'만 제대로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면 다른 일도 해 줄 수 있기는 하지."
"……그렇게 전하면 되겠습니까?"
"51번 탑주와의 대화가 잘 이뤄지지 않게 된다면 다시 한번 말을 전하라고 해라. 그 뒤의 일은 그때 말하도록 하지."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고, 헤르메스는 그런 남자의 모습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하고는 이내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
탑주회의가 열리는 회의장은 사실 회의장으로 불리는 것이 아닌 연회장으로 불리는 것이 어울렸다.
그도 그럴 것이 회의장이라고 불리는 그곳에는 회의장이라고 불러야 할 만한 요소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고.
주변의 벽과 기둥들은 전부 고풍스러운 예술작품을 방불케 하는 데다가, 무엇보다 연회장처럼 테이블도 나누어져 있고 한쪽에는 요리들도 배치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회의장이 아니라 연회장이라고 불러야 하는 셈.
그리고 그런 회의장의 한가운데서.
"저번에는 사방으로 불꽃을 뿜던 멍청한 놈이 사방에 민폐를 끼치더만…… 이번에는 물둥둥이 오셨네?"
김현우는 자신이 회의장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앞에 나선 나이아드를 바라봤다.
피부 자체가 물로 되어 있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신비로운 모습이었으나 김현우는 딱히 그 신비로움에 이끌리지 않았다.
뭐, 이끌리지 않았다기보단 벌써부터 그녀가 시비를 걸 것 같다는 예감이 씨게 오기 때문이었지만.
김현우가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이아드를 바라봤으나 그녀는 처음 등장할 때와 같은 냉막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그와 눈을 마주치곤 이야기했다.
"……반가워요. 51번 탑주. 저는 11번 탑의 주인이자 이 세상의 가장 중요한 생명을 다루고 있는 나이아드라고 해요."
"그래서?"
심플하게 대답한 김현우.
허나 나이아드는 그의 태도를 전혀 지적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은 이전 저희 정령 파벌의 수장 중 한 명인 이프리트와 싸움을 벌여 그가 소멸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행사했어요."
"그래서?"
"물론 저희도 그 일을 가지고 더 이상 크게 일을 키우고 싶지는 않아요. 애초에 저희 쪽의 잘못도 일부분 있으니까요. 다만, 저희는 사과를 받고 싶군요."
"……뭐?"
김현우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나이아드를 바라봤으나 그는 꿋꿋이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이번 일은 어느 정도 저희 파벌에 속해 있는 '이프리트'의 실수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소멸 직전까지 몰아붙인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만약 51번 탑의 탑주께서 저번에 있었던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해주신다면 저희는 더 이상 탑주님께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으려고 해요. 그게 당신의 입장에서도 좋지 않으신가요?"
합리적인 요구를 했다고 생각하는지 무척이나 당당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며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이 새끼들 봐라?'
완전 양아치 새끼들이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사과를 해라?"
"맞아요. 그렇게 되면 저번에 있었던 일은 없는 걸로-"
"저기요. 뒤질래요?"
"……뭐라고요?"
"아, 존댓말로 말하면 못 알아듣나? 그럼 뒤질래?"
"……."
"이거 완전 어처구니없는 새끼들이네?"
저번 탑주회의 때, 김현우는 이프리트와 싸움을 벌였고, 그를 거의 죽기 직전까지 팼다.
그래, 그건 맞았다.
근데 그 원인제공자는 누구다?
"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네 친구가 먼저 시비를 건 건 알고 있지?"
바로 이프리트였다.
김현우는 그 전까지 그저 순수하게 질문을 했을 뿐이고, 먼저 시비를 건 것은 이프리트였다.
그 뒤에 그에게 계속해서 도발을 건 것도 이프리트.
말싸움에 져서 먼저 힘으로 찍어 누르려던 것도 이프리트였다.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이아드를 쳐다보자 그녀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저희 쪽에도 책임을 질 '부분'이 있다고 말이에요."
"책임을 질 부분이 아니라 그냥 전부 너희들 책임 아니야? 맨 처음에 아무런 감정 없이 사람 찾던 놈한테 시비를 건 것도 그 불쟁이새끼고, 먼저 무력을 사용한 것도 그 불쟁이새끼잖아?"
물론 무력적인 선빵을 친 건 김현우였으나 그건 아무튼 넘어가도록 했다.
"……아무래도 사과할 마음은 없으신 것 같군요."
"내가 피해자인데 대체 누구한테 사과를 하라는 거야? 아, 너희들이 그 불쟁이 데려와서 나한테 사과시켜 주게?"
김현우가 노골적으로 그녀를 째려보며 비웃음을 흘리자 나이어드는 흠칫 입을 다물고는 김현우를 조용히 응시했다.
그 뒤에 흘러나오는 말.
"당신의 뜻은 잘 알았어요, 탑주. 조용히 일을 덮을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니 그거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군요."
"왜, 여기서 당장 또 뒤지게 맞고 싶어서 덤비려고?"
물론 그에게 찾아왔던 데블랑은 조용히 있으라는 소리를 하긴 했으나 이렇게 대놓고 거는 시비를 무시할 정도로 김현우의 인내심은 깊지 못했다.
그러나-
"아뇨. 대화가 끝났으니 저는 이만 자리로 돌아갈 거예요."
"……뭐?"
김현우의 예상과는 반대로 나이아드는 김현우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닌 몸을 돌리는 것을 택했다.
"다만, 저희와 척을 지게 되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51번 탑주."
그녀는 몸을 돌린 뒤 고개만을 돌려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자신의 파벌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김현우는 어느 순간엔가 벌써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나이아드를 한번 확인하곤 이내 주변을 돌아보며 짜증스럽게 인상을 썼다.
'저 새끼 때문에 온 세상 시선은 다 끌었네.'
물론 김현우가 처음 들어왔을 때도 그에게 시선이 몰리기는 했으나 지금은 아예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졌다.
"쯧."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짧게 혀를 찬 김현우는 이내 대충 시선을 돌려 구석진 자리에 빈 테이블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김현우가 그렇게 걸음을 옮겨 테이블에 앉자마자 그에게로 닿았던 시선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다시금 조곤조곤하게 들리기 시작하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
그제야 김현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고.
털썩-
"응?"
이내 그는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앉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시선을 올렸다.
"……?"
시선을 올린 곳에 보이는 것은 한 남자였다.
종족은 아마 흔히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마족처럼 보였다.
물론 그렇게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남자의 양 머리 위에 나 있는 무척이나 거대한 뿔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보이는 것은 창백해 보이는 회색빛 피부와 검은자위에 적안의 동공을 가지고 있는 눈동자.
그 남자는 김현우를 보며 자그마한 웃음을 짓더니-
"반갑네, 51번 탑주. 자네의 소문을 들어서 이번 탑주회의에 참가했는데 역시 생각 이상이로군."
-이내 무척이나 반갑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
다짜고짜 자리에 앉아 인사부터 건네는 남자의 모습에 김현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남자를 바라봤고, 이내 그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 물론 나는 저들과는 다르게 딱히 별생각이 있어서 자네에게 다가온 게 아니니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네. 애초에 나는 자네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온 거거든."
"……감사 인사?"
"그래, 감사 인사말일세. 자네가 사탄을 죽이지 않았나?"
"사탄?"
김현우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남자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고는 이야기했다.
"자네에게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사탄'보다는 '심마'라고 표현하는 편이 좋겠군."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김현우에게 손을 내밀며-
"아무튼 감사인사를 하기 전에 우선 통성명부터 하지. 나는 위대한 그분의 아들이자 다른 이들에게는 구세주라고 불리던 자,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 라고 하네."
-그렇게 말했다.
"……네?"
뭐라고요?
308화. 누구??? (2)
국제헌터협회의 절대적인 3명의 권력자를 알고 있는가?
그들 중 한 명은 최근에 새로 상위위원으로 올라 선 '오트슨'이 있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이제 막 정식 루트를 밟아 이제야 상위위원에 적합한 커리어를 세운 '미샤'도 있었다.
허나 그중에서 가장 많은 권력을 쥐고 있고, 또한 헌터 협회 내의 일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자기 혼자서 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는 바로 '리암'이었다.
그래.
그 수많은 일 속에서 헌터 협회를 어떻게든 굴려, 떨어진 위신을 회복한 그 남자 '리암'은, 이 국제헌터협회의 실질적인 권력자였다.
이제 막 상위위원으로 올라선 오트슨도 그는 절대로 건드리지 못했고, 이제 막 상위위원이 될 준비를 하는 미샤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절대권력.
허나 그 누구라고 해도 리암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대해 토를 달거나 할 수는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그는 이 국제헌터협회의 떨어지던 위신을 다시 세운 사람이었고, 그것을 넘어 국제 전략 병기 '김현우'라인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덕분에 국제헌터협회 내에서는 물론 다른 정부들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위신을 가지게 된 리암은-
"……저기, 뭐라고 하셨는지?"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거냐. 지금 사방에 터지고 있는 아랑길드 길드장의 사건 좀 조용히 만들라 이 말이다.]
스마트폰 너머로 들리는 차가운 미령의 목소리에 리암은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 했으나-
[그럼 서양쪽은 다음 주까지 알아서 해 놓기를 바란다.]
뚝-
-이내 리암이 뭔가를 더 말하기도 전에 자신의 할 말만을 끝낸 채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리는 미령.
그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조금 전까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던 스마트폰을 바라봤으나.
"휴……."
이내 그는 힘없는 한숨을 내쉬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탑주 회의가 이뤄지고 있는 연회장.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서 느긋하게 와인을 먹고 있는 남자.
"……."
더 정확히는 자신을 '예수'라고 소개한 남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김현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슬쩍 갸웃거리는 예수.
그 모습에 김현우는 짧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예수시라고요?"
"나는 굳이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네. 사람의 거짓이란 무릇 좋은 선행도 있기 마련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사람을 기만하는 행위이지."
담담하게 말하며 손에 쥔 와인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예수.
"……."
김현우는 자신을 자애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김현우라고 해도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보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살고 있는 한국에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를 신봉하는 종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냥 많은 것도 아니고 앞에 '무척이나'를 붙여야 할 만큼, 한국에 존재하는 교회의 숫자는 많았다.
거기에 더불어 김현우가 예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유는 그가 바로 고아원 생활에서 아주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 사람이 예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감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정확히 해보자면 사실 그가 감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를 믿는 신자였고 그 감사한 마음은 그 당시 피자x쿨에서 나왔던 토핑 없는 5000원짜리 피자 한 쪼가리에서 생긴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교회에서 퍼다 주는 음식을 먹기 위해 매일같이 고아원에 찾아오는 교회 사람들에게 들러붙었던 김현우는 그들에게서 예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접했고.
'아무튼 그래서 대충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는 한데…….'
김현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예수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건…… 아무리 좋게 쳐줘도 예수의 모습 같지는 않은데.'
실제로 김현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보더라도 자신을 예수라고 소개한 그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예수의 모습은 구세주의 모습보다는 세상을 혼돈에 빠뜨리고 파괴하는 악마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니까.
"……."
아니,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악마의 모습 그 자체였다.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며 예수를 바라보고 있자니 예수는 슬쩍 고개를 갸웃하고는.
"아."
이내 김현우가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깨닫고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혹시 이 모습 때문에 그런가?"
"……뭐, 그렇죠?"
김현우의 긍정.
예수는 그런 김현우의 시선을 이해한다는 듯 자신의 머리위에 나 있는 뿔을 만지작거리고는 이야기했다.
"뭐, 나와 관련된 구전을 아주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확실히 이런 내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할 만하지. 이해한다네."
-하지만
"이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걸세. 뭐…… 그렇다고 자네에게 일일이 풀어놓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일세."
예수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내 와인잔을 쥐고는 이야기했다.
"아무튼, 조금 놀랍군."
"……?"
"자네가 사탄, 그러니까 심마를 죽인 것을 말하고 있는 걸세. 사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서 그를 소멸시킬 수 있는 이는 실제로 몇 없으니까 말일세."
심지어, 그 몇 명도 어느 정도의 출혈을 감수해야만 그 녀석을 소멸시킬 수 있지.
예수의 말에 김현우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 새끼 능력 자체가 좀 사기적이기는 하죠."
"그렇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나조차도 한때는 그에게 말도 안 될 정도로 농락을 당했으니, 갑작스레 그때 생각을 하니 절로 머리가 아파지는군."
그는 그때의 일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거리더니 이내 김현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면에서 조금 놀랍다는 걸세. 나조차도 잠시 그를 물리치는 정도였는데 자네는 아예 그를 소멸시켜 버리지 않았나?"
"……뭐, 그렇기는 하죠."
담담한 긍정.
어떻게 보면 굉장히 겸손함이 없는 모습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는 긍정이었으나 예수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와인잔을 입가를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솔직히 많이 고민을 했네만, 역시 내 선택이 옳았던 것 같군."
"……뭐가 옳아요?"
"사실 나는 탑주 회의에는 자주 나오지 않는다네, 오히려 나는 파벌의 수장을 맡고 있긴 하네만 실질적으로는 딱히 외부의 일에는 신경 쓰지 않거든."
개인적으로 할 일이 많아서 말일세.
"그런데 이번에 나와서 자네를 보기로 한 건 굉장히 잘한 선택인 것 같네."
혼자서 긍정하며 또 한번 와인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예수.
김현우는 그런 그의 모습을 미묘하게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으나 이내 그는 예수가 꺼낸 다른 이야기에 대답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쯤-
"이런, 이제 슬슬 가봐야겠군. 조금 시간을 내서 나온 거다 보니 시간이 없어서 말일세."
-예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와인잔을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아, 하는 작은 탄성을 내뱉고는 김현우를 바라봤다.
"혹시 말해서 미리 말해두는 것이네만, 정령들을 조심하도록 하게."
"정령들이요?"
"그래, 내 제자들에게 자네가 한 행동을 들었네. 게다가 오늘 나이아드와 자네가 하는 말을 듣기도 했지."
"걔들 별거 없던데요?"
김현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예수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묘한 표정을 짓고는 이야기했다.
"뭐…… 자네의 무력에 비하면 뒤처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머릿속에 넣어두도록 하게."
그들은 꾸미는 것을 잘하는 이들이니 말일세.
"그럼, 이만 나는 진짜로 가보도록하지."
예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김현우가 미처 그를 잡을 새도 없이 걸음을 옮겼고, 곧 그의 주변으로 하나둘 몰리기 시작하는 악마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진짜 저렇게 보면 그냥 악마들의 수장이랑 별다를 바가 없는데…….'
물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자신이 알고 있던 진짜 예수라는 사실을 알았고, 또한 그가 외견과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까지는 알았다.
알기는 했는데…….
'역시 저 모습은…….'
예수의 근처에 모여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 모습이 괴악한 이들뿐이었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양팔이 날카로운 칼처럼 연결되어 있는 이들이 있었고.
심장이 뻥 뚫려 있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얼굴 전체가 괴물처럼 변해 있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외모로 인격체를 판단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긴 하지만…….'
김현우는 적어도 그런 상식에 한해서는 아직 일반인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그가 멀어지고 있는 예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너, 원래 예수랑 알던 사이였나?"
"……응?"
김현우는 어느새 예수가 앉아 있던 자리에 어떠한 천사가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 위에 달려 있는 것은 분명 노란 천사의 링.
하지만 그는 그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어봤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 그의 눈을 봤을 때. 김현우는 그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름은 말하지 마라. 결계를 쳐놓기는 했어도 좀 불안하니까."
"……결계?"
"당연하다, 다른 놈들이야 그냥 시시덕거리러 와서 입 터는 거지만 너랑 내가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밖으로 새나가면 그리 좋을 것들이 없는 이야기지 않나?"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내 슬쩍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근데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 치고 오히려 이런 식으로 노골적이게 결계를 치면 더 의심받는 거 아니야?"
"걱정 마라, 여기 있는 이들 중에서는 가끔 탑주들과 개인적으로 대화할 때 이렇게 결계를 치는 이들도 있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너와 대화했던 예수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예수도?"
"모르고 있었던 건가? 예수도 너와의 대화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주변에 결계를 쳤지 않나."
"……그래?"
김현우는 예수가 결계를 펼쳤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의 주변에서 마력이 일어나는 느낌도 받은 적이 없었을 뿐더러 그가 딱히 특이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
뭐, 사실 김현우가 그가 무슨 행동을 취하냐를 유심하게 보지 않고 그의 외관만을 더 집중해서 봤던 게 이유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기는 했지만.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했나?"
순간 김현우는 이 이야기를 해도 되나? 라는 생각을 했으나 이내 별로 걸리는 것도 없었기에 데블랑에게 예수와 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차분히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전 탑주에 관한 이야기라……."
"뭐, 그건 그거고. 이제 저번에 못다 한 이야기나 좀 해주지?"
"아,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 애초에 오늘 이렇게 널 찾아온 것 중에는 친분 형성을 포함해 대충 탑주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도 말해주기 위해서였으니까."
김현우의 물음에 데블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자, 그럼 이 탑주들의 세력구도부터 간단하게 설명해 주겠다."
이내 그는 김현우에게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본격적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309화. 누구??? (3)
"……그 찐따가 정령 파벌 수장이었다 이 말이지?"
"그래, 저번에 너랑 싸울 때도 혼자 나불거리지 않았나?"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슬쩍 생각해 보곤 대답했다.
"워낙 개소리가 많아서 다 슥슥 넘기느라 제대로 듣지를 않았어."
"아…… 뭐, 그럴 수도 있겠군."
그의 떨떠름한 긍정.
김현우는 이어서 입을 열었다.
"근데, 정말로 그 찐따 같은 새끼가 정령 파벌의 수장이라고?"
"그래."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파벌의 수장은 대빵을 말하는 거지? 제일 쎈놈 말이야."
"뭐 그렇지. 물론 무력이 파벌의 수장을 정하는데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분명 어느 정도 필요한 건 사실이지."
데블랑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추가로 말을 이었다.
"아마 네가 상대했던 이프리트는…… 그쪽 파벌 중에서는 나름 상위권일 거다."
"……애들 수준이 다 그 정도라고?"
"……그 정도라니?"
"너도 거기에 있었잖아? 내가 그 새끼 대가리 박살 낼 때."
김현우의 물음에 데블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야 약 일주일 정도가 지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긴. 나도 이프리트가 그런 식으로 어처구니없이 처맞은 걸 보는 건 또 처음이군.'
사실 이프리트가 처맞는 걸 처음 본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는 탑주들이 연회장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건 처음 봤다.
그도 그럴 것이 탑주들은 개인적인 분쟁은 서로의 탑에서 해결하는 편이고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잃을 것이 좀 많다보니 싸움을 벌이지는 않는다.
그 덕분에 그때의 모습은 데블랑의 머릿속에 매우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냥 처맞은 것도 아니었지.'
말 그대로 복날 개패듯, 이라는 뜻을 그대로 옮겨와서 비유를 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이프리트는 진짜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
그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제 그건 탑주간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구타로 명명하는 게 더 어울렸다.
'그러니까 나이아스도 직접 나서서 조금이라도 명예회복을 해보려 한 거고.'
뭐 아까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결국 그런 나이아스의 행동은 수포로 돌아가 버린 것 같지만 말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을 줄이고는 대답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다만, 이프리트 정도면 지금 탑주들 정도에서는 꽤 수위에 드는 강자다."
"……정말로?"
"내가 굳이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어보는군."
"그런 의도로 물어본 건 아닌데, 좀 믿기지 않아서 말이야"
"뭐가 믿기지 않는다는 거지?"
"……지금 네 말대로라면 이프리트가 그래도 나름 상위권이라는 소리 아니야?"
"그렇다."
"그럼 여기에 있는 애들 대부분은 다 이프리트보다 못한 허접들이라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말에 데블랑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는 저도 모르게
'이프리트가 약한 게 아니라 오히려 네가 상대적으로 더럽게 쎈 거다.'
라는 말을 하려 했으나, 이내 그는 말을 참았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계속 말하고 있는 것 같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네 기준인 거고 원래 이프리트가 가지고 있는 무력 정도만 해도 이 탑 안에서는 실력자다."
거기에다가-
"이프리트가 약하다고 해서 정령파벌을 무시하지는 마라, 그놈들은 이프리트 말고도 그와 비슷한 녀석들이 3명은 더 있으니까."
"……3명 더 있다고?"
"그래, 너도 아까 전 이야기하지 않았나?"
"아, 그 물둥둥?"
"그래."
"……3명이라고 말한 걸 보니까 속성별로 있나 보네? 물 불 바람 땅, 뭐 이런 거야?"
"설명해 주지 않았는데도 잘 알고 있군."
"거참 식상한데도 정도가 있지 이거 좀 너무하는구만."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는 김현우.
데블랑은 그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으나 굳이 그가 했던 말을 되물으려 하지는 않았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김현우는 '이해하려 해봤자 머리만 아픈 녀석'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했으니까.
"……그래도 그 세 명이 전부 덤벼도 그 불덩이랑 비슷하거나 약하다고 치면 나를 이길 것 같진 않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넘어가도록 하지, 내 생각에는 자네가 딱히 저들과 싸워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일세."
"그래? 말하는 걸 들어보니 어떻게든 한 방 먹여주려고 하는 것 같던데?"
"만약 네게 정말 한 방 먹여주려 한다면…… 관리기관의 손을 빌릴 수도 있겠군."
"관리기관?"
"내가 말했듯이 지금 이 탑주들의 세력은 네 가지로 분류된다. 맨 처음은 우리가 조금 전까지 말하던 정령 파벌, 그다음은 바로 내가 속해 있는 천사 파벌. 그리고 마지막은 자네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악마 파벌이지."
"……악마 파벌?"
"그래, 조금 전에 이야기한 '예수'가 그 악마 파벌의 수장이지."
"……."
"뭔가 이상한 것이라도 있나?"
데블랑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슬쩍 저었다.
이상한 것이야 굳이 따져보면 조금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으나 김현우는 굳이 그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독실한 신자도 아니니까.'
게다가 내가 물어본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예수가 저런 모습인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데블랑에게 물어봤자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는 못할 것 같았다.
"아니, 계속 말해줘."
"……뭐, 아무튼 지금 탑주의 세력구도는 그렇게 큰 세 개의 파벌로 나누어져 있다. 물론 그 세 파벌 중에서도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는 이들이 있기도 하지."
"무소속 말하는 거지?"
"뭐…… 무소속이라기보다는 그들은 '관리기관'의 아래에 있다고 보는 게 맞지. 두 명을 빼고는 말일세."
"……두 명?"
데블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이후로도 탑주들 간의 세력구도와 그곳에 어떻게 관리기관이 끼어 있는지 설명해 주었고, 곧 그 설명을 전부 들은 김현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진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관리기관 말하는 거지?"
"그래, 뭐 본론이라고 해도 지금 당장 네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번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조금 더 세밀하게 우리가 어떤 작전을 짜고 있는지부터 알려주지."
데블랑은 그렇게 말하며 곧 김현우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한참이나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을 때.
"……."
나이아드는 차가운 눈을 빛내며 데블랑과 이야기를 하는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접점이 있는 거지?'
그녀는 분명 하루 저번 탑주회의 때만 해도 아무도 다가가지 않으려 했던 주변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아드가 분명 김현우와 명백하게 적으로 돌아섰다는 뉘앙스를 풍겼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양측 파벌에서 그에게 접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나이아드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은연중에 결계가 쳐져 있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으나 그들의 표정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첫 번째는 악마 파벌의 수장인 '예수'와 이야기를 하더니…… 이번에는 천사 파벌의 머리라고도 불리는 녀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
"쯧."
나이아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짧게 혀를 찼고, 이내 곧바로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관리기관에 연락을 넣도록 해. 지금부터 조금 만나봐야 할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나이아드의 말에 그녀의 뒤에 있던 정령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빨리 눌러놔야겠어.'
나이아드는 진중한 얼굴로 데블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조금 전까지 찌푸리지 않았던 미간을 찡그렸다.
####
그곳에는 황금이 있었다.
황금.
그 특유의 광택으로 사방을 밝히며 스스로를 밝히는 황금이 무척이나 많이 있었다.
어느 정도냐고 하면, 탑의 최상층을 전부 채우고도 모자라 사이사이에 어마어마한 황금의 산이 생길 정도로 많은 황금이 최상층의 대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이 황금으로 이뤄져 있는 그 한가운데의 궁전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구릿빛의 피부를 가지고 있고 신기하게도 무릎까지 닿는 황금색의 허리갑주만을 입고 있는 그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옥좌에 앉아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황금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보이는 것은 황금의 산.
물론 그 사이사이로 껴 있는 보석들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그곳에 쌓여 있는 황금에 비하면 마치 자그마한 모래로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그렇게 황금을 구경하고 있는 남자의 앞으로 헤르메스가 나타났다.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나타난 헤르메스.
그러나 그 남자는 딱히 놀란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느긋하게 헤르메스에게로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지금 짐은 이 대지에 쌓인 보화를 보며 안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거늘."
"휴식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히 전해드려야 할 일이 있기에 결례를 무릅쓰고 먼저 찾아 왔습니다."
헤르메스의 정중한 말투.
그에 남자는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지? 한번 말해보라."
남자의 허락에 헤르메스는 슬쩍 고개를 숙이곤 현재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고, 이내 그 설명을 한동안 듣고 있던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짐이 그 천둥벌거숭이를 직접 벌해주었으면 한다?"
"그렇습니다. 우선 그쪽에서 요구한 것은 적당히 손을 봐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만, 원하신다면 죽이셔도 상관없습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남자는 호오, 하는 소리와 함께 뜬눈으로 헤르메스를 바라봤다.
"소중한 고객을 죽이라는 소리는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조금 위험한 놈인가 보구나."
"위험한 놈이라기보단, 나름대로 노리는 바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노리는 바?"
"그렇습니다. 지금 정령 파벌에서 손을 봐달라 요구한 이는 바로 이번에 새로 부임한 51번 탑주입니다."
"51번 탑주?"
"그렇습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슬쩍 시선을 돌리는 남자.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는 듯 피식 하는 웃음을 짓더니 이야기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는 것 같구나."
"……."
헤르메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슬쩍 고개를 숙였고, 남자는 더 이상 시선을 끌 것 없다는 듯 씨익 웃고는 말했다.
"그래, 뭐 이쪽도 나름대로 받고 있으니 해온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지."
"그럼, 언제쯤에 움직이실 예정이십니까?
"기한은 딱히 없느냐?"
"기한은 딱히 없지만 되도록 빠른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시면 어느 정도 이득도 있으실 겁니다."
"호, 이득이라. 그것 참 나쁘지 않구나."
헤르메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은 남자는 이내 가볍게 몸을 풀 듯 자신의 고개를 좌우로 꺾었고.
"그럼, 조만간 바로 움직이도록 하겠다. 이 태양신이 말이다."
이내 그렇게 말하며 자신만만한 웃음으로 그에게 선언했다.
310화. 우선 좀 조용히 있으려 했는데 (1)
[아, 그럼 그때 카지노에서 같이 계셨던 분은 바로 이서연 길드장의 연인이었던 건가요?]
천호동의 저택.
"쟤들 저기서 뭐하냐?"
"글쎄요……."
저녁시간대에 늘그막하게 나오고 있던 TV를 보고 있던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TV에 실시간으로 나오고 있는 익숙한 두 얼굴을 바라봤다.
한 명은 바로 김현우의 동료이자 동생인 이서연.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성화에 못 입어서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손오공이랑 이서연이?"
"그런 거 아니에요?"
"……실화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멍 때리며 TV속에 나온 이서연과 손오공을 바라봤고, 이내 시선을 돌려 거실 뒤편에 어느새 만들어져 있는 바에서 술을 들이켜고 있는 청룡을 바라봤다.
같은 남자가 봐도 멋지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잘생긴 외모를 지닌 청룡.
"야, 저거 진짜야?"
김현우가 입을 열자 청룡은 슬쩍 고민하는 듯 했으나 이내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다."
"네가 왜 몰라? 맨날 같이 다니면서."
"……뭐, 그것에 대해서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다만…… 최근에는 같이 다닌 적이 없었기에 저 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른다."
"……최근에는 같이 다니지 않았다고?"
"네 동료의 잔소리는 내 부동심을 망가뜨리더군……."
한 마디로 바가지를 오지게 잘 긁는다는 소리였고, 청룡은 비겁하게 손오공을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는 말이었다.
"뭐…… 저번에 보니까 그런 것 같긴 하더라."
그러나 김현우는 딱히 청룡을 욕하지는 않은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적어도 김현우가 지금까지 봐온 이서연의 바가지 긁는 실력은 분명 결혼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디테일하고 자연스러웠으니까.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김현우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저 상황이 대충 어떻게 만들어진 상황인지 대충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물론 확증은 없다.
그러나 대충 이해가 되었다.
[……그 이외에 암중 길드와도 동상에 관한 문제는 어느 정도 잘 해결을 봤습니다. 추가로 그 부분에 있어서 어느 정도 말씀을 드리자면-]
곧 기자들 앞에서 신나게 떠드는 이서연.
김현우는 그 모습을, 정확히는 신나게 떠들고 있는 이서연의 옆에 수척해진 모습으로 조용히 서 있는 손오공을 바라보다 이내 TV를 끄고는 소파에 기대 눈을 감았다.
"으어어-"
저도 모르게 좀비 같은 소리를 낸 김현우.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그래?"
"요즘에도 많이 힘든 편이에요?"
"요즘에도 많이 힘든 편이 아니라 원래도 힘들었어."
"Aㅏ……."
김시현의 입가에서 나오는 깊은 탄식.
"뭐, 그건 그거고 지금 머리가 복잡한 건 그것 때문이 아니지만."
"그 문제가 아니라고요?"
"너는 내가 평생 그 문제로만 고민하는 것 같아 보이냐?"
"……아니, 최근에는 그 고민밖에 없지 않았나?"
"……."
그건 그렇긴 했다.
"아무튼, 그 고민은 아니야."
"그럼 뭔데요?"
"위쪽 이야기야. 내가 전에 대충 말해줬잖아?"
"아, 그…… 무슨 탑 위에 뭐가 또 있고…… 또 뭐가 있다는 그 이야기요?"
"그래, 그 이야기."
김현우가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자 김시현은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피곤하겠네요. 어째 분명 끝이라고 했던 상황에서 또 해야 될 일이 나왔으니까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현우는 딱히 그들에게 탑 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탑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야차를 비롯한 손오공과 청룡, 그리고 자신의 두 제자들뿐이었다.
'어차피 알려줘 봤자 쓸데없는 걱정만 밀어 넣을 뿐이니까.'
조금 슬픈 이야기지만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 보자면 김현우의 동료들은 지금 그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탑에서는 더 이상 등반자를 만들어내지 않았고, 허수공간에 갇혀 있던 다른 등반자들도 이미 아브와 노아흐가 풀어줘 버린 지 오래였다.
한 마디로 이 탑에서 9계층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외하고는 딱히 위험할 일이 없다.
'……만약 도움이 된다면 조금이라도 현 상황을 제대로 알려주겠지만.'
지금 그들의 무력으로는 김시현을 비롯한 동료들이 자신과 함께 탑 위에 올라가 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김현우는 딱히 자신의 동료들을 위협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탑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동료들에게 도움을 바랄 수 없고 자신 혼자서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뭐. 그래도 야차나 다른 녀석들은 무력으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을 해 놓은 거지만.'
김현우는 야차와 손오공, 그리고 청룡의 무력을 떠올렸다.
분명 자신보다는 약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코 무시할 만한 무력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게 김현우의 직감으로는, 정령 파벌의 수장이라고 하던 이프리트가 야차와 비등하거나 그보다 약했으니까.
뭐…… 손오공과 청룡을 이프리트에 비교한다면 또 잘 모르겠지만.
"으음……."
아무튼, 그가 고민하는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좌표를 찾아라……라.'
좌표.
그것이 바로 며칠 전 있었던 연회에서 데블랑이 그에게 처음으로 말해주었던 작전의 내용이었다.
'정확히는 찾아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지.'
그때, 데블랑은 그에게 탑주들의 세력 구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에게 자세한 관리기관 내부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관리기관이 억지로 끊어놓은 좌표를 찾아야 한다라…….'
데블랑은 맨 처음 김현우를 만났을 때, 그에게 관리기관이 탑주들에게 숨기고 있는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때 그는 관리기관이 자연히 탑주들에게로 가야 할 마력을 관리기관에서 억지로 붙잡아 놓고서는 장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전 대화에서, 김현우는 관리기관이 '어떻게' 자연스레 사방으로 흘러가는 마력을 관리기관이 붙잡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좌표를 끊었다고 했었지?'
데블랑의 말대로라면 원래 관리기관에서 현재 가지고 있는 마력은 처음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닌, 전 차원에 쌓인 업을 그대로 마력으로 치환해 다시 전 세계에 뿌리는 것이 기본원리였다.
조금 더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냥 '윤회'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편할 것 같았다.
전 세계에 통틀어서 만들어진 업은 '탑'이 있기 이전에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어느 곳'에 모여들었고, 그 어느 곳에 모여든 업은 일제히 마력으로 치환되어 다시 전 세계로 뻗어 나간다.
한 마디로 세계가 거대한 유회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보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관리기관은 세계의 뿌리내린 그 윤회를 끊어버리고 그 '어느 곳'으로 가야 할 업을 '탑'을 만들어 자신들에게 들어오게 만든 것이었다.
그 '어느 곳'에 대한 좌표는 더 이상 업이 흘러갈 수 없게 끊어버리고 말이다.
'진짜 이 새끼들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탄만 나오네……?'
가만히 하는 행세를 하나하나 알아가고 있으려니 이건 완전 시골에 있는 계곡 가지고 물장사 해먹는 놈들이랑 다를 게 없었다.
분명 누구의 소유도 아닌 땅에 공신력 없는 깃발 하나 꼽아놓고 장사하는 새끼들이랑 도무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진짜 개새끼들.'
김현우는 짧게 생각했다.
"으음……."
아무튼 그런 상황이기에 결국 김현우는 그 어느 곳의 좌표를 찾으라는 소리를 들었다.
듣기는 들었는데.
'시발 내가 좌표를 어떻게 찾냐고……!'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씨발, 준비 다 되어 있다며?'
처음 데블랑이 말하기로 분명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했었다.
그런데 막상 준비되고 있는 작전을 들어보니 준비된 것들이 단 하나도 없었다.
맨 처음 이 일의 골자가 되는 '좌표'는 애초부터 찾아져 있지도 않았고 자신이 탑주가 되기 전부터 좌표를 찾고 있지만 아직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뭐, 그래도 슬슬 짐작 가는 곳을 찾았다고 말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시발, 결국 좌표 찾을 때까지는 또 대기해야 한다는 소리잖아.'
물어보니 딱히 단서 같은 것도 없고 그냥 뒤져야 한다는데 생각만 해도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무엇을 그렇게 고민하고 있느냐?"
김현우가 그렇게 혼자 고민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들리는 목소리.
"?"
그에 김현우는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고, 그곳에 야차가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언제 왔어?"
김현우의 되물음에 야차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 왔느니라.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응? 혼자?"
야차의 말에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보자 분명 조금 전까지도 방 안에 함께 있었던 김시현과 청룡이 보이지 않았다.
"아."
그렇게 고개를 돌리던 김현우는 곧 거실에 걸려 있는 시계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곤 지금 상황을 납득한 뒤 야차를 바라봤다.
"그래서, 너는 또 무슨 일이야?"
김현우의 질문.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애초에 야차는 기본적으로 미령이 만들어 놓은 장원 내에서 생활하고 있고, 그녀는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장원 주변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뭐, 실제로 김현우가 보기에도 그녀가 어딘가로 돌아다니거나 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나온 질문에 야차는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를 좀 만나러 왔느니라."
"……미령이랑 하나린 만나러 왔어?"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 둘은 지금 각자의 일 때문에 각각 미국과 중국에 가 있지 않느냐?"
"……그래?"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불현 듯 어제 잠시 어디를 갔다 오겠다고 하고 사라졌던 자신의 두 제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생각해 보니까 어제 그래서 일찍 잘 수 있었구나.
김현우가 새삼스러운 개달음을 얻고 있을 때, 야차는 이어서 말했다.
"너를 만나러 온 것이다."
"나를?"
"그래, 너를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입가를 슬쩍 끌어올리는 야차.
날카로운 이빨이 슬쩍 보임과 동시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그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나를? 왜?"
물론 야차가 그를 찾아올 이유야 어느 정도 있기는 했다.
어느 때는 술 상대를 해달라거나, 혹은 밖의 문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도 가끔 이야기를 하곤 했으니까.
다만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이번에는 무엇인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만 분명 무엇인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굳이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김현우의 조금 떨떠름해하는 질문에 야차는 재미있다는 듯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곤 그를 바라봤다.
붉은 홍안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요염함.
'……이거, 어디서 봤던 눈빛인 것 같은데.'
김현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야차가 보여준 그 눈빛을 도대체 어디서 봤는지 떠올리려 했으나 그가 미처 그런 생각을 이어나가기도 전에 야차는-
"내 생각에는 네가 이유를 짐작하고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날카로운 이빨을 붉은 혀로 핥았다.
311화. 우선 좀 조용히 있으려 했는데 (2)무척이나 풍요롭고 비옥한 토지 위에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세계수.
그런 거대한 나무의 안쪽에서 아름다운 조경을 바라보고 있던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에리얼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물'쪽은 어떻게 처리하셨나요?"
그녀의 물음에 주변이 잔잔한데도 불구하고 긴 생머리가 슬쩍슬쩍 펄럭이는 에리얼은 별다른 표정 없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이전처럼 처리했어요. 올라온 이들 중 제일 강한 이는 저희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세계수의 중앙에 밀어 넣고, 나머지는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냈죠."
에리얼의 말에 만족했다는 듯 미소를 짓는 나이아드.
"별 특이사항은 없었나요?"
"아시다시피 별 특이사항이 일어날 만한 상황은 아니잖아요?"
"그것도 그렇긴 하군요. 아래쪽은 이미 저희가 조성해 놨으니 말이에요."
"다만 조금 걱정되는 거라면."
"걱정이요?"
"네, 이번에 올라온 이들은 아무래도 저번보다는 업이 조금 덜 쌓인 것 같더군요."
점잖이 말한 에리얼.
나이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건, 확실히 조금 문제인 것 같네요. 분명 저번부터였나요? 슬슬 쌓이고 있는 업이 줄어드는 건."
"예. 아무래도 조만간 새로운 녀석들을 넣어야 할 것 같더라고요."
"확실히, 점점 상황이 좋지 않게 변해가고 있다면 그 수밖에는 없겠죠. 타이밍이 나쁘지는 않네요."
"나쁘지 않다고요?"
"네, 원래라면 이럴 때마다 어떤 식으로 새로운 녀석을 잡아넣어야 할지 고민했었는데, 이번에는 그것들을 공수할 만한 곳이 있으니까요."
나이아드가 그리 말하며 부드럽게 웃자, 에리얼은 슬쩍 고개를 갸웃 거렸고.
"아, 마침 오는 것 같군요."
에리얼이 미처 질문을 하기도 전에, 나이아드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정령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녀들의 앞에 나타난 이는 바로 물의 중급정령인 닉스였다.
닉스는 나이아드의 앞에 나타나자마자 고개를 숙이고는 이야기했다.
"정령왕을 뵙습니다."
정중한 목소리.
나이아드는 그 인사를 받지 않고 곧바로 물었다.
"그래서, 지시한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차분하지만 냉소적인 나이아드의 목소리.
허나 닉스는 그런 나이아드의 태도에도 별다른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곧바로 그녀에게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관리기관쪽에서 나이아드님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조건은 어떻게 되나요?"
"원래 올리던 '업'의 2배를 지불하면 된다고 합니다."
"……원래 올리던 '업'의 2배라……."
나이아드는 슬쩍 짜증이 난 표정으로 닉스의 말을 똑같이 중얼거렸으나 이내 곧바로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그쪽에서는 누구를 보내겠다고 하나요?"
"관리기관쪽에서 제게 전해준 말로는 27번 탑의 '태양신'에게 이미 부탁을 해 놓은 상태라고 합니다."
"태양신이라면…… 확실히 일은 깔끔하게 처리되겠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태양신이라면 혹시의 상황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나이아드는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닉스를 바라봤다.
"그래서, 일은 언제쯤 치를 생각이라고 하나요?"
"듣기로는 시간을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처리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 또한 반가운 소리네요."
나이아드는 그리 말하며 슬쩍 턱짓을 했고, 닉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물로 변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다시 나이아드와 엘리얼만 남게 된 상황.
나이아드는 자신의 앞에 선 엘리얼을 보며 가볍게 미소 지은 뒤 입을 열었다.
"해주실 일이 있어요."
"할 일이요?"
"네. 에리얼의 말대로 슬슬 오물에서 나오고 있는 업의 질이 점점 떨어지고 있잖아요? 그리고 그에 따라 저희는 새로운 것들을 그 오물 안에 넣어 주어야 하고요."
나이아드의 말에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얼.
그에 그녀는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엘리얼, 51번 탑에서 '오물'에 사용할 재료를 구해와 주시겠어요?"
"51번 탑에서요?"
"네. 어차피 이제 저희 파벌에 속한 이들에게서는 더 이상 그것들을 꺼내 올 수 없는 것을 알고 계시겠죠?"
"그렇죠? 이미 이곳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 부분 저희가 협조를 받았으니까요."
엘리얼의 끄덕거림.
나이아드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니 51번 탑에서 가져오자는 이야기에요. 어차피 태양신이 51번 탑에 들어가서 난동을 피우기 시작하면 김현우 그자는 정신을 차리지도 못할 테니-"
저희는 그때-
"-그 탑에서 오물에 넣을 만한 적당한 '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몇 명만 고르면 된다 이거죠. 게다가 모든 바람과 공기를 다루는 당신은 그런 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요."
그렇죠?
나이아드의 물음.
그녀의 말에 엘리얼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천호동의 자택 안.
김현우는 어느새 자신의 옆에 앉아 요염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야차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밀어내려 했으나.
'……안 밀린다고?'
야차는 놀랍게도 김현우의 힘에도 밀리지 않은 채 오히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김현우의 표정을 보았는지 더더욱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은 야차는 입을 열었다.
"정말 모른다고 할 것이냐?"
그녀의 물음.
그에 분명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등 뒤에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히 힘은 내가 더 강한데.'
이미 그는 일전에 야차를 이긴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녀가 야차로서의 업을 각성하기 전에도 때려 눕혔고, 그녀가 업을 각성한 이후에도 한번 때려 눕혔다.
그것뿐인가?
이미 김현우는 심마를 처리함으로서 이미 야차를 뛰어 넘었다.
그래.
분명히 그럴 텐데.
'뭐지……? 이 압박감……!'
김현우는 왠지 스스로가 고양이 앞에 놓인 쥐 같은 느낌이 들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느낌이 들고 있는가? 에 대해 물음표를 던져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
"왜, 왜 이래?"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과 함께 나온 목소리.
"후후후후-"
그에 야차는 날카로운 이빨을 그대로 드러내는 미소를 지었고, 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또 한번 그녀를 밀어내려 했으나.
"아니 힘이 왜 안 들어가?"
"당연하지 않느냐? 내가 피워 놓은 향 때문이니라."
"향?"
"환상향이라는 물건이지. 걱정하지 말거라, 딱히 몸이 큰 문제가 있는 향은 아니고 이 향을 흡수하는 동안 잠시 온몸의 근육이 느슨하게 풀리는 정도니까 말이니라."
야차의 말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도대체 그딴 물건들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저번에 천살주인가 뭔가 하는 것도 그렇고!"
"내가 누군지 잊었느냐? 나는 야차(夜叉)니라. 애초에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도 많았을 뿐더러 당연히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은 하나하나가 최상품이다."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
김현우의 비명 어린 목소리.
그러나 그녀는 올라간 입가를 지우지 않은 채 김현우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후후후, 이렇게 보니 꽤 귀엽구나."
"귀엽기는 미친, 아니 갑자기 약을 처드셨나 왜 이러는 거야?!"
야차가 자신의 허벅지에 앉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여는 김현우.
그러나 야차는 그런 김현우의 화난 표정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화난 얼굴도 마음에 드느니라."
"아니 진짜 돌아버린 거야?"
"돌아버리다니? 나는 지극히 정상이니라, 다만 너와 함께 있으면서 살짝 관심이 생긴 것뿐이다."
"뭐? 관심?"
"그래, 관심이니라. 뭐, 정확히 말하자면 네 제자의 내면에 거주할 때부터 생긴 관심이니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이 몸을 얻기 전까지는 그 아이의 몸에 있지 않았느냐?"
야차의 말에 김현우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가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고 이 앞으로 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당연히 예측할 수 있었다.
김현우는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뭐,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우선은' 그냥 관심일 뿐이니까 말이다."
"아니 관심이 있으면 우선 처음부터 이야기를-"
"미안하지만 그 아이들처럼 찔끔찔끔 진도를 나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다. 게다가 내 성격적으로도 맞지 않고 말이니라."
왠지 점점 다가오고 있는 야차의 얼굴.
그에 김현우는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여기서 더 정색을 할까?
아니면 차분하게 그녀를 설득할까.
고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니까? 우선 잠시 진정하고 향부터 끄는 게 어떨까?"
야차의 얼굴이 거의 가까이 다가오기 전 김현우의 입가에서 터져나온 말.
그러나-
"뭐, 우선은 가만히 있어 보거라, 우선은 '맛'만 한번 보도록 하겠느니라?"
"뒤에 물음표는 뭔데?"
"맛이 있으면 좀 먹어볼 수도 있으니까……?"
"이거 생각 이상으로 선 넘고 있는 거 알지? 응? 감당할 수 있어? 우선 나는 그렇다 치고 내 제자들은 어떻게 하려고?"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김현우.
그러나 야차는 피식하는 웃음으로 입을 열었다.
"네 제자들과 너를 이어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게냐? 게다가 최근 네가 먹었던 그게 어디서 났는지는 생각해 보았느냐?"
야차의 말.
김현우는 그것으로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를 진실을 깨달아 버렸고, 야차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김현우의 두 얼굴을 도망치지 못하도록 콱 잡았다.
"야…… 잠깐! 잠깐만!!"
"너무 날뛰지 말거라, 잠시 '맛'만 보겠느니라."
그렇게 말하며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는 야차.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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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스템 옆에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면 당신은 부름을 받아 초대됩니다.
남은 시간: 0일 0시간 0분 5초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떠오른 로그를 보며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
야차의 얼굴이 김현우의 얼굴에 닿기 그 직전에, 김현우는 시스템의 초대에 따라 저택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눈앞에 뜬 로그 덕분에 목숨(?)을 구제받은 김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봤고.
"……뭐야?"
곧 김현우는 앞에 벌여져 있는 참상에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우선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브가 만들었던 거대한 성인 것을 보면 이곳이 탑의 최상층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전부 박살이 나있지?"
-그 거대한 성이 모두 박살이 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탑의 꼭대기는 이미 박살이 나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고, 중간중간 반파되어 있는 성벽들은 성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끔 했다.
"끄악!"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김현우는 성 안쪽에서 들리는 익숙한 비명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성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그곳에서-
"오, 이제야 온 건가?"
김현우는 부서지고 있는 상의 안쪽에서 아브의 목을 붙잡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312화. 우선 좀 조용히 있으려 했는데 (3)
"꺄흑"
김현우가 도착하자마자 그쪽으로 날아오는 아브의 몸.
그는 급하게 날아오는 아브의 몸을 받아들고는 이내 그녀가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 곧바로 시선을 돌려 그녀와 함꼐 있던 노아흐를 찾았다.
"끄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우는 한쪽 구석에 쓰러져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는 노아흐를 발견했다.
더더욱 굳어지는 김현우의 표정.
허나 그런 그의 표정과는 달리 조금 전까지 아브의 몸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있었던 남자는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이것 참 잘됐군. 짐이 굳이 찾으러 갈 필요가 없어서 말이야."
"……뭐?"
"네 녀석한테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말이야. 이 녀석들을 처리하면 짐이 손수 너를 찾으러 탑을 돌아다닐 생각이었는데…… 고맙게도 눈앞에 직접 나타나주니 이 얼마나 편한가?"
그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려다가 다물었다.
저 녀석과 말싸움을 하는 것 보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탓-
김현우는 아브를 안아든 채 순식간에 몸을 놀려 저만치에 쓰러져 있는 노아흐의 몸을 챙겼다.
'정신을 잃었나.'
쓰러져 있어서 내심 걱정했으나 막상 보니 외적으로는 크게 상처 입은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기에 김현우는 안심하고 그들을 성 밖으로 옮겼다.
그리고-
"도망칠 줄 알았더니 다시 돌아왔군. 용기는 칭찬해 줄 만하다."
-아브와 노아흐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돌아오자마자 그 남자는 마치 대견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가를 굳히고는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볼일이 있다고?"
"그래. 짐은 네게 볼일이 있기에 이렇게 직접 찾아왔느니라."
"무슨 볼일?"
"유감이지만 친우에게 네 녀석의 태도를 조금 교정해 주라는 부탁을 들었지."
"뭐? 태도 교정?"
"그래, 자네가 그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뛴다지?"
남자의 말에 김현우는 곧 그가 어디에서 부탁을 받고 온 것인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정령 파벌 쪽인가.'
물론 그쪽 말고도 관리기관 쪽에서 움직였을 수도 있으나 그 가능성은 턱없이 낮다고 김현우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정령 파벌쪽.
"뒤지게 처맞고 혼자서 언플하더니 결국 생각해낸 게 친구 부르기였어?"
"말했을 텐데? 동등한 친구관계가 아닌 부탁을 받아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 이 빡대가리 새끼야."
말을 정정하려는 남자에게 평소처럼 욕을 처박아준 김현우.
"역시 소문대로 태도 교정이 필요한 쪽인 것 같구나. 이 태양신에게 그런 무례한 말을 내뱉다니 말이다."
그에 태양신은 슬쩍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리 말했으나 김현우는 별다른 동요를 드러내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무례하기는 씨발새끼야, 지금 네가 더 무례한 거 아니냐? 왜 갑자기 남의 집 쳐들어와서 다 쳐부수고 지랄이야 지랄이? 거기다가 애먼애들은 또 왜 건드리는데?"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탑주의 잘못은 그 탑주 밑에 있는 이들에게도 자연스레 적용되는 것이다."
"지랄도 풍년이다 미친년아, 네 애미가 그렇게 가르쳤냐?"
"뭐…… 애, 애미?"
"아, 미안 애비가 그렇게 가르쳤어? 캬~ 시발 고건 몰랐네~"
김현우가 극도로 분노할 때만 나오는 패드립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태양신, 그러나 곧 그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네 녀석! 정말로 정도를 모르는 녀석이로구나!"
태양신의 분노 섞인 외침.
허나 김현우는-
"정도를 모르기는 씨발아 네가 더 모르고 있는 거지 이 좆같은-"
빡!
"-새끼야!"
곧바로 그의 앞으로 날아가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김현우의 죽빵에 순식간에 뒤로 밀리는 그의 몸.
허나 그뿐이었다.
텁!
"!"
김현우의 주먹을 붙잡은 그, 태양신은 분노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는 입을 열었다.
"감히 짐에게 선공을 가하다니, 네 녀석이 그러고도 무사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라."
그의 말에 김현우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며 그에게 붙잡힌 팔을 빼려 했으나.
'안 빠진다고?'
마치 무척이나 거대한 철판에 박혀 들어간 듯, 김현우의 손은 빠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 주먹을 날린 태양신.
김현우는 급하게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주먹을 피해내고 몸을 뒤틀어 그의 얼굴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라는 듯 그의 발을 막기 위해 남은 손을 들어 올리는 태양신.
그러나 김현우는 그 상태에서 마력을 담았고.
"!"
빠아악!
마력으로 강화된 김현우의 발차기는 손쉽게 태양신의 가드를 뚫고 그의 얼굴에 박혔다.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는 그의 몸.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김현우는 곧바로 그에게 잡혔던 손을 빼내곤 그를 발로 차 저 멀리로 날려버렸고, 그 즉시 마력을 끌어 올렸다.
파직- 파지지짓!
그의 혈도를 타고 도는 마력이 순식간에 몸 전체로 흩어지고, 김현우의 주변으로 스파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김현우의 마력에 반응하듯.
사아아아악-!
태양신의 주변으로도 마력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제껏 보지 못한 모래빛의 마력이 성벽에 처박힌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이윽고 그의 마력이 마치 모래바람처럼 주변으로 퍼져나가며 주변 환경을 모래로 덮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태양신은.
"맨 처음에는 죽이라고 했어도 부탁받은 게 있으니 가볍게 태도만을 교정해주려고 했거늘, 선은 네가 넘은 것이니 후회하지 마라."
이내 김현우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굳은 표정으로 손을 휘둘렀다.
그와 함께 그의 주변으로 몰아치기 시작한 모래빛 마력은 순식간에 어느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해골?"
곧 김현우는 모래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곳에서 해골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그냥 해골이 아닌, 몬스터와 같은 스켈레톤.
그러나 그것은 김현우가 9계층에서 보았던 스켈레톤과는 본질적으로 달라보였다.
고대 시대에나 쓸 것 같았던 장식품을 주렁주렁 달고 김현우의 앞에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 스켈레톤들은 이내 저마다의 무기를 김현우를 향해 겨누고 있었으며.
그들이 본질적으로 다른 스켈레톤과 다르다고 느낀 점은 마력이었다.
언뜻 느껴지는 것만 하더라도 지금 이 근처의 스켈레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굉장한 마력을 머금고 있었다.
거기에 그 숫자는 지금에 와서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고.
쿠구구구구궁-!!
"지랄났네."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스켈레톤의 뒤로 뼈로 만들어진 거대한 코끼리들까지 나타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지금부터 너는 네가 한 일을 후회할 것이다! 나 태양신 라(Ra)의 철퇴를 받아봐라!"
태양신은 위엄 있게 선포했다.
####
거대하게 자라 있는 세계수의 나무 꼭대기.
그곳에서 에리얼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조경이 구성되어 있는 대지를 바라보고는 아까 전 나이아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51번 탑에서 '오물'에 집어넣을 생명을 찾아야 한다……라.'
물론 나이아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들에게는 분명히 오물 안에 집어넣어야 하는 이들이 필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오물에서 올라오고 있는 업의 질은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으니까.
'거기에다 이다음에 관리기관에 지불해야 할 업도 상당히 많은 양이야.'
그렇기에 나이아드가 자신에게 부탁한 일은 분명히 필요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는 에리얼이 일을 하기 더더욱 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51번 탑에서는 태양신이 찾아가 김현우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들었고, 그렇다는 것은 곧 51번 탑에 에리얼을 방해할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51번 탑주가 대비를 해놓았다면 모르겠지만.'
51번 탑주를 몇 번밖에 보지 못했으나 그가 이런 혹시나의 상황에 대비를 해놓았을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설령 대비를 해놓았다고 해도.'
그들이 탑주인 자신을 처리할 수는 없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며 이내 몸을 돌렸다.
우우웅-
몸을 돌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새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는 포탈.
그것은 바로 나이아스가 땅의 정령왕인 오리에드와 합작해 만든 51번 탑과 연결되어 있는 텔레포트 포탈이었다.
물론 다른 탑으로 이동하는 포탑이다보니 그녀가 탑 어디 좌표로 소환 될지는 몰랐으나 에리얼에게 있어 그런 것은 딱히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녀의 몸은 바람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본적으로 바람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그녀는 그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마친 에리얼은 곧바로 자신의 몸을 포탈 안으로 밀어 넣었고, 이내 그녀는 곧 자신의 몸이 포탈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는 그녀의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수에서 사라져 버렸고 그녀가 다시 시야를 회복했을 때.
"……."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곳이 51번 탑 안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보이는 것은 위아래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통로와, 그 통로를 만들어주고 있는 성벽.
그녀는 잠시 위아래를 한 번씩 훑어보고는 곧바로 자신의 특기를 이용해 이 탑 내에서 '오물'의 안에 들어갈 만한 이를 찾았다.
잠시 흐르기 시작하는 시간.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찾았다."
-그녀는 곧 이 통로에서 바람을 통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탑 내에서 '오물'에 밀어 넣을 만한 이들을 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다른 곳으로 나뉘어 있지도 않고, 51번 탑에는 단 한 구간에 꽤 질 좋은 '연료'가 많이 모여 있었다.
그것에 에리얼은 잠시 신기함을 느꼈으나 이내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몸을 바람에 동화시켜 자신의 감이 잡힌 곳을 향해 몸을 움직였고.
바람으로 바뀐 에리얼은 탑의 '통로'에서 순식간에 9계층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별다른 문제없이 김현우가 탑의 꼭대기 층에서 싸우는 동안에 연료들이 있는 곳에 도착한 에리얼은-섬찟-!
"……!!"
-도착하자마자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에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이마 나 있는 두 개의 붉은 뿔.
날카로운 입매는 까득까득 거리는 소리를 내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핏빛처럼 붉은 눈빛은 이제 막 나타난 에리얼을 소름끼치도록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네년이냐?"
그와 함께 나온 목소리.
"무…… 무슨."
에리얼이 한순간에 느껴지는 소름끼치는 소음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자 야차는 마치 짓씹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 왠지 이상하다 싶었느니라, 어떻게 된 게 이제야 애들 좀 달래놓고 '맛'을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사라지는 건 좀 이상하다 싶었지. 그 녀석이 멋대로 도망칠 놈은 아니니까."
그래서-
"분명 뭔가 일이 생겼다 싶었는데, 그 원인이 이렇게 앞에 와주니 정말로 감사하구나. 응? 아주 감사해."
"……자, 잠깐."
에리얼은 자신이 탑주 중 한명이라는 사실도 순간 잊어버린 채 압도적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야차의 살기에 뒤늦게 손을 내저었으나-
"내 맛보기(?)를 방해한 죄가 얼마나 큰지, 내 지금 직접 느끼게 해주마……!"
-이미 야차는 일보(一步)를 내디뎠다.
313화. 우선 좀 조용히 있으려 했는데 (4)태양신의 선포에 맞춰 그의 마력을 머금고 태어난 스켈레톤들이 일제히 김현우를 향해 달려든다.
맨 앞에 있던 스켈레톤들이 그에게 일제이 창을 찔러 넣고, 창을 찔러 넣은 스켈레톤의 등을 타고 뛰어 든 다른 스켈레톤들이 김현우에게 검을 휘두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김현우의 머리 위를 노리고 쏘아지기 시작하는 화살들.
일백을 넘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스켈레톤이 오롯이 김현우 한 명을 처리하기 위해 쏟아낸 공격.
언뜻 보면 약간의 엇박 타이밍으로 인해 피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스켈레톤들의 공격은 치밀했다.
탓!
서둘러 몸을 뒤로 내뺀 김현우의 앞으로 스켈레톤들이 달려들어 검을 휘두른다.
분명 김현우보다 느리지만 스켈레톤이라고 보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빠른 속도.
검을 내리친 스켈레톤이 다시 몸을 가누는 그 순간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창을 찔러왔던 스켈레톤들이 이번에는 창을 던진다.
당연하게도 목표는 김현우.
물론 그는 또 한번 바닥을 박차는 것으로 스켈레톤들의 투창을 피한다.
허나 그다음에 김현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
-하늘을 수놓고 있는 수많은 화살들.
하나하나가 진득한 마력을 담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맞으면 영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화살비가 김현우의 주변을 폭격하듯 쏘아져 내리고 있었다.
타다다다다닥!
땅바닥에 꽂혀 나가는 화살.
그러나 김현우는 그 수많은 화살들을 단 한 대도 맞지 않고 피해냈다.
머리를 노리는 화살을 고개를 꺾는 것으로 피하고, 오른팔과 왼 다리를 노리는 화살을 몸을 뒤로 미는 것으로 피한다.
그 살짝의 엇박을 노려서 오는 화살은 붙잡았고.
미처 피할 수 없는 화살들은 붙잡은 화살로 튕겨낸다.
그야말로 신위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 김현우의 몸에서 벌어졌으나 스켈레톤들은 그런 김현우의 신위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다음 공격을 이어나가기 위해 준비하고.
그런 스켈레톤들의 앞으로 코끼리의 뼈를 가진 스켈레톤이 김현우를 밀어버릴 듯 달려온다.
짧게 숨을 쉴 틈도 없이 벌어지는 연계.
하지만 김현우도 언제까지고 당하고 있지 않았다.
"흡!"
파지직!
그가 짧게 기합을 지르자마자 그의 주변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전류.
자신의 온몸에 마력을 두른 김현우는 곧바로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코끼리를 향해 달려들었고-콰지지지직!!
김현우의 돌진은 자신에게 마주 달려오고 있는 코끼리의 뼈를 산산조각으로 부숴 버렸다.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코끼리의 뼈.
허나 김현우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 막 정비를 끝내고 자신에게 달려들 준비를 시작하는 스켈레톤들에게로 뛰어 들어갔다.
물론 스켈레톤들은 김현우가 일정 거리로 접근하자마자 도저히 뼈라고는 믿을 수 없는 움직임으로 그의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창을 휘둘렀으나.
씨익-
김현우는 그들이 내민 창을 가볍게 뛰어넘어 그대로 제일 앞 열에 있는 스켈레톤의 머리를 찍어내렸다.
꽈아아앙!
거대한 폭음 소리와 함께 박살 나는 스켈레톤.
스켈레톤들은 위로 뛰어오른 김현우를 노리기 위해 창을 돌렸으나, 이미 그들이 창을 돌렸을 때 김현우는 그들의 몸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그의 주먹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다섯의 스켈레톤이 무더기로 터져나가고.
진각을 한번 밟으면 스켈레톤들이 자세를 잃고 쓰러진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자세를 잃지 않고 뛰어오는 스켈레톤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김현우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아무리 일반적인 스켈레톤이랑 다르고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결국 김현우에게 그 차이는 '고작' 그 정도의 차이였을 뿐이니까.
까가가강! 꽈아앙!
김현우의 몸이 일제히 달려드는 스켈레톤들에게 마주 달려가 순간적으로 땅을 밟는다.
쿠우우웅!
지진이 일어난 듯 크게 흔들리는 지반.
그 찰나에 스켈레톤들 사이엔 틈이 생겼고,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달려오던 스켈레톤들을 모두 박살 내 버렸다.
그야말로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스켈레톤을 박살 내는 김현우.
'……근데 어째, 줄어드는 것 같지가 않은데?'
허나 이상하게도 스켈레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느 시점에서는 더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카르르륵!
꽈득!
'분명 처음에는 스켈레톤이랑 코끼리 정도만 있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김현우의 앞에 나타나는 종류가 점점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는 인간형 스켈레톤과 코끼리.
그다음에는 몬스터로 보이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또 그다음에는 분명 일반적인 사람의 크기와는 다른 거인형의 스켈레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다채로워지는 스켈레톤들.
콰가가가강!
이미 거대한 스켈레톤이 나타났을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성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것을 확인하며 김현우는 짧게 혀를 차고 이내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은 바로 스켈레톤들이 지키고 있는 원형 안에 분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태양신 라.
김현우는 어렵지 않게 이 싸움을 끝내는 법을 깨달았고 곧바로 몸을 틀어 그를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꽝!
꽈가가강!
꽝!
꽝!
김현우가 태양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나가자마자 스켈레톤들이 이전보다 더더욱 격렬하게 그의 진로를 막아서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에는 무기를 쓸 조금의 반격을 남겨두고 달려들었다면 지금은 그냥 김현우가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수준으로.
허나 그렇다고 해서 김현우의 돌진은 멈춰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김현우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향해 마력을 쏘아 보냈다.
하늘 위를 향해 마력을 쏘아 보내자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먹구름.
분명 조그맣게 만들어진 먹구름은 이내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순식간에 주변의 푸른 하늘을 잡아먹을 정도로 그 기세를 넓히기 시작했고.
툭-투두두둑!
그와 함께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는 비가 김현우의 몸을 적시기 시작하고, 스켈레톤의 몸 또한 부지불식간에 적시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어두워진 먹구름 속에서-쿠……쿠르르르르-!
거대한 소리와 함께 하얀색의 전류들이 먹구름의 사이를 유영하기 시작했고, 곧 그렇게 점점 수를 불려가던 새하얀 전류들은-꽈아아아아─────!!!
새하얀색의 거대한 나무로 개화해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얀 번개에 집어삼켜진 스켈레톤들이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지워지고, 땅을 타고 지반을 달린 전류들이 스켈레톤들의 몸을 좀먹는다.
김현우를 막기 위해 격렬히 움직였던 그들의 육체가 볼품없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김현우는 마치 그 한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높게 뛰어올랐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인상을 찌푸린 채 김현우를 정확히 노려보고 있는 태양신과 그를 호위하기 위해 창을 들고 김현우를 노려보고 있는 스켈레톤들.
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며 입가를 살며시 끌어올려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이내 '찰나'를 향해 들어갔다.
그와 함께 느리게 흐르기 시작하는 주변.
모든 것이 마치 멈춘 것처럼 느리게 돌아가고, 김현우 스스로의 몸조차도 점점 느려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의 순간 속.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이제는 무척이나 익숙해진 이 공간 속에서, 김현우는 뛰어오른 상태 그대로 자신의 발을 크게 들어올렸다.
파직! 파지지직!
그와 함께 터져나가는 하얀색의 전류.
다른 모든 것이 느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의 몸 안에서 터져나온 하얀색의 전류는 그 속도를 잃지 않고 그의 발에 모여들었고.
콰지지지지직!
이내 김현우는 자신의 발에 모여 있는 거대한 마력을 자신의 몸으로 다시 끌어들였고, 그 순간 그의 몸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멈춰 있는 그 곳에서, 혼자만이 멀쩡하게 움직이는 몸.
그리고-
섬뢰(閃雷)-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태양신을 향해 자신이 들어 올렸던 다리를--각(脚).
-그대로 찍어내렸다.
꽈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
그 뒤로 들려오는 전자음소리.
그 뒤에는 새하얀색의 폭발이 김현우의 시야를 가렸으나 김현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김현우의 다리에는 분명 태양신의 대가리를 쪼개 버렸다는 그 감각이 남아 있었으니까.
김현우의 귓가에 몇 번이고 중첩된 전자음소리가 시끄럽게 울렸으나 그는 이미 몇 번이고 경험한 상황에 당황하지 않았고 자신의 감각이 회복되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김현우의 시야가 복구되었을 때.
"끄으윽-!"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서 반으로 갈라져서 죽어가고 있는 태양신 라를 볼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흉측하게 몸이 반으로 갈라진 태양신은 분명 죽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으로 갈라진 입에서 비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뭐야 안 죽었네? 목숨도 즐기다 못해 그냥 바퀴벌레 수준이네?"
김현우의 노골적인 한 마디.
허나 태양신은 김현우가 말을 걸자마자 찌푸렸던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큭큭큭-"
"뭐야, 반갈죽 당하니까 뇌에도 이상이 생겼나? 지금이 쳐 웃을 상황이야?"
김현우가 피식 거리며 온몸이 박살 나 있는 태양신에게 말을 건네자 그는 대답했다.
"짐이 고작 이걸로 죽으리라 생각한 거냐?"
"뭐?"
그 순간 벌어진 일.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앞에 무엇인가가 날아온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젖혔고, 무엇인가가 자신의 옆을 지나간 순간.
"……뭐야?"
"큭큭큭-"
분명 반으로 갈라져 있던 태양신의 육체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말 그대로 그냥 돌아와 있었다.
그것도 그냥 멀쩡하게.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태양신을 바라보자 그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짐이 비록 고통을 느낄지언정 네 녀석의 공격에는 죽지 않는다. 짐은 황제이자 신이니까."
"뭐? 안 죽는다고?"
"그래! 네가 어떻게 공격을 하던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까! 네가 그 어떤 공격으로 나를 죽이려 하든, 나는 죽지 않는다 이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너는 나와는 다르게 점점 지쳐가겠지. 원래 모든 필멸자들은 그러니까. 나는 그런 이들을 무척이나 많이 보아왔다."
큭큭-
"처음에는 마치 자신이 이긴 양 행동하며 나를 비웃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차이는 현저하게 벌어지고 그런 이들은 나중이 되어서야 자신이 원래부터 질 싸움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군."
태양신 라는 그렇게 말하더니 무척이나 당당한 표정으로 김현우의 앞에 서서는 그를 내려다보겠다는 듯 비웃음을 담으며 소리쳤다.
"알겠나? 알겠냐 이 말이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를 이길 수는 없느니라!"
그의 선언.
그러나-
"그냥 간단하게 말해서 안 죽는다 이거지?"
"……뭐?"
"그러니까, 그냥 안 죽는다 이 말 아니야? 계속해서 처맞아도 무조건 계속 재생한다며?"
김현우가 별 흥미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라는 순간 당황했으나 이내 톤을 높이며 말했고.
"그, 그래! 그렇다!"
"그거 참 잘됐네."
"뭐라고?"
"그거 참 잘됐다고, 사실 이거 한 방으로 편하게 보내주는 건 좀 아까웠는데 아무리 열심히 패도 살아난다고 하면 좀 말이 다르지 응?"
"잠깐, 그게 무슨-!"
"무슨은 씨발새끼야 바로 이런 소리다!"
빠아아아악!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라의 머리통에 주먹을 꽂아 내렸다.
314화. 이걸 안 도와주네? (1)
천호동 근처에 있는 한강 고수부지.
"꺄아아악!"
에리얼은 자신을 덮쳐 온 압도적인 마력의 파도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굴렀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일격.
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에리얼은 급하게 자신의 몸을 바람으로 되돌리려 했으나-
"어디를 가려 하느냐?"
"끄으윽-!?"
-그녀는 자신의 몸을 바람으로 바꾸지 못했다.
'움직일 수가 없어……!?'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몸을 강제로 유지시키게 만들고 있는 마력 때문.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이상이 없던 마력은 그녀가 몸을 바람으로 돌리려 하자마자 급격하게 팽창하기 시작하며 그의 바람화를 막아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서 빠져나가려 해도 이미 팽창하기 시작한 마력은 끝없이 자신의 몸을 불렸고.
"이……이게……. 무……슨!!!"
에리얼은 아예 몸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땅바닥에 처박힌 채 꼴사납게 몸을 포박당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야차는 스윽 웃더니 입을 열었다.
"아까 뭐라고 했느냐? 일개 오물의 연료?"
"끅……."
"이것 참, 이런 상황이여서야, 누가 누구에게 오물의 연료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노골적인 비웃음을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야차를 보며 에리얼은 이를 악물고 야차를 노려봤다.
'……어떻게 이런 존재가 이런 곳에……!'
탑주에 자리에 올라 있는 에리얼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한 탑의 탑주의 자리를 맡고 있었고, 지금 눈앞에 있는 야차는 한 탑주도 아닌, 그냥 탑 안에 있는 이들 중 한 명.
자신의 탑으로 들어올 수많은 오물의 연료 중 하나였을 뿐이니까.
그래, 분명 그녀는 수많은 오물의 연료 중 하나일 뿐이어야 했다.
'그런데…….'
에리얼은 자신의 몸을 터트릴 듯 심하게 압박하는 마력을 느끼며 식은땀을 느꼈다.
'말도 안 되게 강해……!'
그래, 그녀의 강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녀는 탑주가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곧 그녀가 탑에서 흘러나오는 업의 수혜를 단 하나도 임지 않았다는 소리와 똑같았다.
그리고 곧 그렇다는 건-
'아무런 업도 얻지 않고…… 이렇게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이가 있다고……?'
그녀라는 존재 자체가 이렇게 강하다는 소리가 되었다.
그 어떤 수혜도 입지 않고, 차원에서 태어날 때부터 그런 힘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컥-!"
에리얼은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다 곧 자신의 목을 붙잡고 들어 올리는 야차 덕분에 생각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온갖 악의가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야차.
"응? 다시 한번 말해보거라, 누가 연료라고?"
"끄으으"
에리얼은 입을 열기 위해 입을 움직이려 했으나, 그녀의 몸을 압박하고 있는 마력은 그녀가 입을 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야차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짧게 혀를 차더니 이야기했다.
"이것 참 약골도 이런 약골이 따로 없구나. 네 녀석은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 탑으로 들어온 거지? 응?"
까드드득-
"끄으으으으윽!?"
야차의 손이 조금 웅크려지자마자 그녀를 옥죄이는 마력.
에리얼이 온몸으로 마력을 뿜어내더라도 절대 쳐내지 못할 정도의 진득한 마력이 그녀의 몸을 터트릴 듯 죄여 왔으나-
"꺅!?"
-이내 에리얼은 자신의 몸을 억죄던 마력이 급작스럽게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볼품없이 쓰러지는 그녀.
에리얼은 곧바로 의문을 가지고 위를 올려다봤고.
"자, 다시 한번 발버둥치거라."
"뭐……라고?"
"못 들었느냐? 다시 한번 발버둥치라고 했다. 고작 한 번의 발버둥으로 죽임을 당하기에는 너무 흥이 없지 않으냐?"
"!!"
"아 이번에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 기묘한 기술을 사용해도 허락하겠느니라, 이미 이 주변에는 내 마력이 가득 깔려서 도망 갈 수도 없을 테니까."
그 말에 에리얼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향해 바람을 흩뿌렸고.
"……세상에"
그녀는 곧 야차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사방을 뒤덮고 있잖아.'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이미 야차의 마력은 거대한 반원의 형태로 에리얼과 야차를 가두고 있었다.
마치 원형 경기장처럼.
그것을 깨달은 에리얼의 눈빛에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정말 간만에 느껴보는 감정.
간만에 느껴보는 것이라 더더욱 주체가 되지 않는 감정.
"왜 그러느냐? 설마 벌써 두려움에 떠는 것이냐? 응?"
핥짝-
자신의 입가를 혀로 한번 핥은 야차는 이내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 했다.
"안 되지, 지금 그러면 아니된다. 어서 아까의 패기를 보여주거라! 고작 다섯 보에 벌써 쓰러져 버리면 내가 너무 안쓰럽지 않느냐?"
네년 덕분에 망가져 버린 계획도 말이다. 응?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서 어떻게든 발버둥치거라. 도망가기도 해보고 아까처럼 패기 좋게 공격도 한번 쏘아 보거라! 아까처럼 말이다!"
야차의 광기 어린 말투.
그에 에리얼의 눈에는 두려움을 넘어 또 하나의 감정인 공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
51번 탑의 최상층의 풍경은 누가 봐도 이곳이 51번 탑의 최상층인가 싶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맨 처음 51번 탑에 오면 보이는 것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성이었고, 그 주변에 조형되어 있는 자그마한 정원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것은?
빠아아악!
사막.
그 무엇도 없는 사막이었다.
땅바닥에는 대리석과 흙대신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모래만이 존재할 뿐이었고, 싱그러운 나무 조형이 있던 곳은 메마른 나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래 한가운데에서-빠각!
"끄아아아아악!"
"아프지? 야, 내가 저번에 영화에서 이렇게 하는 거 보는데 더럽게 아파 보이더라. 만족해?"
"이……이 개새끼야!"
"뭐? 개새끼?"
빠각!
"끄에에에엑!!"
"아니지, 개새끼가 아니라 김현우라고 해야지, 내가 이름 알려준 지 좀 된 것 같은데 이 새끼 대가리는 사람인데 뇌는 닭대가리였나 보네?"
-김현우는 태양신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폭력……아니, 폭력을 넘어선 무엇인가였다.
김현우는 비틀린 웃음을 지은 채, 라를 바라봤다.
그야말로 싸이코 패스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비틀려 있는 웃음.
태양신 라는 고통에 차 있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몸이 회복되자마자-
"흡!"
-곧바로 모래 속에서 창을 만들어 내 김현우를 향해 찔러 넣었다.
기습적인 일격!
그러나.
"어? 선 넘네?"
김현우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라가 야심차게 준비한 일격은 무척이나 허무하게 김현우의 손에 잡히며 끝이 났고.
"한 대 추가."
푹!
"끄아아아악!"
김현우는 곧바로 라에게서 창을 빼앗아 그에게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비명을 질러대는 라와 상쾌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김현우.
그는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이야, 이거 진짜 안 죽으니까 완전 샌드백이네?"
"개새끼야! 개새끼야!!!! 감히 짐에게! 감히 짐에게 이런 개짓거리를!!!"
"뭐? 짐으로 만들어 달라고? 아까 전에 해줬잖아? 아까 전처럼 또 팔다리 접어서 캐리어처럼 만들어 달라 이거지?"
"뭐!? 잠깐 그런 말은-"
"이미 늦었어 씹새야."
까드득! 까드드득! 까득!
"으아아아아악 이런 개새끼야!!!"
김현우의 손놀림에 의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그.
"지금 나, 끄아아악!"
"뭐라고?"
"이런 개,"
빠득!
"안 들려~"
그리고 이어지는 고통 속에서 라는 공포에 절어버린 눈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새끼…… 제정신이 아니다!'
미친놈? 또라이? 싸이코패스?
아니다.
고작 그런 언어적인 표현으로 그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현재 김현우가 보여주는 모습은 광기에 차 있었다.
"끄아아악!!!"
"야, 이건 만화에서 나온 건데 만화가 현실고증을 잘 몰랐네."
김현우가 라의 두 팔을 들고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그 모습을 보며 라는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잘못 걸렸다.'
그래, 잘못 걸린 게 확실했다.
'진짜 좆됐어. 이러다 진짜 뒤지겠어……!'
물론 라의 몸은 불로불사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의 몸은 늙지 않고, 몸은 그 어떤 상처나 독이 침투해도 다시 원래대로 재생한다.
하지만 몸이 그렇다고 해서 정신까지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다.
'조…… 좆됐다, 이러다가 진짜 미쳐 버리겠어……!'
몸이 아닌 정신이 미쳐 버리면 방법이 없었다.
불로불사는 정신까지 챙겨주지는 않았으니까.
물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라의 머릿속에는 아직 자존심이라는 게 남아 있었으나, 조금 전의 캐리어형(?)을 시작으로 그는 더 이상 그 자존심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는 말했다.
"자……잠깐만!"
"응? 뭘 잠깐만이야?"
김현우가 그렇게 대답하며 라의 두 다리를 잡아들자, 라는 비명을 지르며 양손을 겹쳤다.
"죄…… 죄송합니다!!!"
태양신 라의 입에서 나온 사죄.
그 모습에 김현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
"아, 그래?"
뚜두두둑!
정작 자신이 하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끄아아아아아악!! 왜…… 왜! 잘못을 빌었는데 왜!"
"잘못해 한마디로 모든 죄가 사라지면 내가 부처님 아니냐? 응?"
그렇게 대답하며 라의 두 팔을 붙잡는 김현우.
라는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으아아아악! 제발 살려줘! 이 이상 하면 진짜 죽어! 진짜 죽는다고!"
"그거 잘됐네, 너도 나 죽인다며?"
"아니야! 살려줘!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제발! 제발! 시키는 거 다 할게요!"
라의 비명.
그에 김현우는 그의 두 팔을 쭉 당기려다 멈칫했고, 그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은 라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진짜로! 시키는 거 다 할게요!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조금 전 자신을 왕이라고 소개한 것 치고는 무척이나 애절하고 간절한 외침.
"아는 것도 전부 말해주고?"
"아……아는 거?"
우드드득-
"아…… 아아아!! 당연히 전부 말씀해 드려야죠! 그렇고 마구요! 진짜 다 말씀해드릴게요 저 거짓말 안 치거든요? 진짜요!"
라의 간절한 비명, 그에 김현우는 스읍- 하고 라를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흐음…… 시키는 거 다 하고…… 아는 것도 전부 말한다 이 말이지?"
"그, 그럼요! 진짜죠!"
헤헤-
태양신 라는 언제 자신이 욕하던 간신배처럼 웃고 있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으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치심보다는 생존이 앞서 있었기에 그는 더 비굴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런 라의 모습을 본 김현우는 한동안 그를 의심스럽게 보는 듯하다,
"그래, 뭐 좋아."
"가……감사!"
"그래도 우선 받던 벌은 전부 받아야 하지 않겠어?"
"섿……?"
빠드드득!
"끄아아아악!"
라는 지금까지 지른 비명 중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315화. 이걸 안 도와주네? (2)
"……정령쪽에서 너한테 사람을 보냈단 말이지?"
"그렇……네, 맞습니다. 제게 사람을 보냈죠."
근엄하게 말하려다 그의 눈치를 보며 금세 꼬리를 내리는 라를 보며 김현우는 곧바로 다음 말을 내뱉었다.
"한마디로 청부를 받았다는 거네?"
"그렇……게 되겠죠?"
"너한테 직접?"
"……그렇죠?"
라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무방비 상태의 라에게 다가가 그의 다리에 턱- 발을 올려놨다.
"아……아니 왜!?"
"왜기는 왜야, 거짓말 하는 것 같으니까 그렇지."
"아니 제가 무슨 거짓말을 합니까……! 진짜 저는 사실대로-"
우직-
"으악! 으악! 으아아아악!"
"미친 새끼야, 아직 밟지도 않았어!"
슬쩍 힘을 준 것 만으로도 온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는 라에게 소리를 친 그는 이내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라를 바라봤다.
진심으로 고통스럽다는 듯 온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는 라.
"으아아아아아아악!!!!!!!!!"
"안 닥치면 그냥 밟을-"
"……."
"이거 진짜로 황당한 새끼네."
김현우가 입을 열자마자 입을 다무는 라.
아까 전에 보여줬던 왕의 위엄은 이미 하늘나라에 가져다가 버리고 왔는지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정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를 보며 어처구니없어 한 김현우는 생각했다.
'아닌 것 같은데.'
물론 정령 파벌 쪽에서 청부 의뢰를 해서 라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맞는 것 같았다.
애초에 자신에게 별다른 원한이 있는 곳은 정령 파벌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김현우가 의심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바로 정령 파벌의 청부에 태양신만 끼어 있냐는 것이었다.
'데블랑의 말을 듣기론…… 파벌이 없는 녀석들은 대부분 관리기관 소속의 탑주들이라고 했는데.'
김현우가 태양신을 의심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
정령 파벌이 그냥 개인적으로 청부를 부탁한 것이라면 딱히 상관이 없었으나 여기에 관리기관이 껴 있으면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아무튼 김현우는 지금 당장 관리기관 쪽에 어그로를 끌어서 좋을 것이 없는 위치였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태양신에게 '관리기관'이 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었다.
"야."
"예?"
"나도 탑주가 된 지 얼마 안 되긴 했는데 우선 알고 있을 만한 건 전부 알고 있으니까 속이지는 말자. 응?"
"그게 무슨……."
"너 관리기관 소속이잖아? 응?"
"……저, 오해하신 것 같은데 무소속에 있는 헌터들은 딱히 위치가 없습니다."
"그래? 진짜 없어?"
우드드득-!
한순간 힘이 들어가는 김현우의 발.
라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뇨! 당연히 있죠! 있고말고요! 근데 진짜 이건 관리기관이랑은 별 상관없는 이야깁니다! 이건 진짜예요! 제 모든 걸 걸 수 있습니다."
"……정말로?"
"네! 그럼요! 정말입니다! 관리기관은 여기에는 별다른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개인적으로 일을 받은 겁니다!"
"흐음……."
라의 말에 고민을 하듯 침음을 흘리는 김현우.
그 모습에 라는 슬쩍 눈치를 보며 생각했다.
'제발, 제발 걸리지 마라.'
이곳에서 라가 관리기관에서 청부를 받고 오게 되었다는 소리를 인정하게 되면 상당히 큰 소란이 일어나게 된다.
물론 한번 소란이 일어나게 되면 김현우는 관리기관에 의해 어떤 식으로라도 피해를 받거나 혹은 은연중에 사라질 수도 있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만약 내가 제대로 일처리를 못해서 소란이 일어나게 되면.'
그중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받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라는 인지하고 있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관리기관과의 관계를 부정했다.
그렇게 라가 김현우를 바라보며 마음을 졸인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래, 한 마디로 그냥 관계가 없다 이거지? 너는 그냥 정령 파벌에 개인적으로 일을 받은 거고?"
"바로 그겁니다!"
과하게 행동하는 라.
그 모습이 지극히 이상해 보였으나 김현우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당장 일이 크게 벌어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 데다가, 관리기관이 여기에 끼어 있다고 해도 김현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적어도 지금 당장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뭐, 그렇다고 해도-
"안내해."
"네?"
"안내하라고."
"그, 어디로 안내하면 되겠습니까?"
"어디긴 어디야. 너한테 청부 사주한 새끼 앞으로 안내하라고? 설마 그거 못한다고 하지는 않을 거지? 응?"
김현우가 조금 전의 싸이코 패스 같은 웃음을 흘리자 라는 그 모습을 보며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고. 김현우는 그런 라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턱짓했다.
"자, 그럼 앞장서. 그 찐따들이 있는 곳으로 말이야."
-정령파벌을 가만히 놔둘 생각은, 적어도 김현우에게는 없었다.
####
하얀 공간의 관저 내.
"아마 지금쯤 한참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을 겁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남자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거리곤 이야기했다.
"그것 참 즐거운 소식이군."
"예,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51번 탑주는 태양신과 싸운 것을 후회하게 될 테죠."
"그래, 51번 탑주 같은 육체파 탑주들에게 태양신은 상당히 골치아픈 상대지……. 뭐, 사실 그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생각한다면 그는 누구에게도 굉장히 꺼려지는 상대겠지만 말이야"
"그렇습니다……. 무엇도 아니고 그는 진정한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헤르메스가 끄덕거리며 동의를 표하자 남자는 이야기했다.
"죽여도 된다고 말은 확실히 해 놓았나?"
"예. 정령 파벌쪽의 의뢰를 전하며 말씀하셨던 첨언도 확실히 전해 놓았습니다."
"좋아……. 무척이나 좋아."
남자는 기분 좋은 웃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고는 이야기했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바로 기회가 오게 될 줄은 몰랐어."
"기회 말입니까……?"
"그래. 알다시피 51번 탑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51번 탑주의 전 탑주인 형체 없는 자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그 통제권이 아직 완벽하게 우리 쪽으로 귀속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만약 이참에 태양신이 김현우를 죽인다면 51번 탑에 새로운 탑주가 뽑히기 전에 통제권을 확보해 놓을 수 있지 않나?"
남자의 말에 헤르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게 되면 51번 탑도 포함해서 전체를 조종하는 게 가능하게 될 테니…… 저희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 되겠군요."
"바로 그거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은 뒤 이내 그를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싸움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 같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저번에 조용히 처리했던 34번 전 탑주 같은 경우에는 5일이 걸렸습니다."
"흠, 애매한 시간이로군."
"뭐, 아마 그가 빨리 끝내려 한다면 빨리 끝낼 수도 있었겠지만 사실 그는 적을 빨리 끝내는 것보다는……."
"가지고 노는 걸 더 좋아한다지?"
"그렇습니다."
"역시 취향 한번 독특하군."
아니, 사실 태양신 라의 취향은 다른 탑주들에 비해서는 평범한 축에 속하기는 했다.
오히려 어쩌면 조금 점잖은 편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을 정도.
"그럼 이번에는 언제까지 싸움이 지속될 것 같나?"
"……현 51번 탑주가 강하다는 것은 탑주회의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10일을 넘길 것 같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왜지?"
"조금 정보가 부족하기는 해도, 결국 육체 위주의 업을 사용하는 탑주들은 대부분 다른 탑주들 보다 전투를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태양신과의 싸움에 한해서는 전 51번 탑주가 훨씬 더 잘 버틸 것 같습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고.
"우선 그쪽으로 돌아가서 51번탑을 주시하도록."
그에 헤르메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
거대한 세계수 나무의 안쪽에서 나이아드는 자신의 앞에 놓인 과일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집어넣자마자 나이아드의 입안에서 녹아버린 과실은 그녀에게 무척이나 달콤한 쾌락을 선사함과 동시에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녹아 없어졌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업이 불어났다.
물론 이미 탑주급의 업을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 불어난 업의 양은 그리 큰 양이 아니었으나 나이아드는 그 정도로 만족하고 시선을 내려 나무 그릇에 담겨 있는 과실을 바라봤다.
그릇 속에 담겨 있는 것은 바로 '세계수의 과실'.
그것은 바로 세계수가 아래에 있는 오물에서 만들어진 연료와 다른 탑에서 오는 업을 양분 삼아 맺는 열매이며, 이 열매를 먹으면 '업'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도 그냥 업을 얻는 것이 아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업을 강화할 수 있는 종류의 과실.
물론 이 과실은 거대한 세계수에서도 소량밖에 나지 않아 상급 정령들에게까지 돌아가지는 않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녀는 정령왕의 네 자리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자리는 이 과실을 일부 차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자리였으니까.
그렇게 자신의 그릇 위로 올라 있는 나머지 과실을 모두 먹어치운 나이아드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릇을 치우고는 이내 51번 탑에 가 있는 에리얼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면, 이제 슬슬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물론 에리얼이 51번 탑으로 향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녀는 바람의 정령이다.
한마디로 그녀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가 있다면 차원을 넘나들지 않은 선에서 그 어디에든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에리얼이 간 시점에서 그녀가 이 시간까지 안 돌아오는 것은 나이아드로서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우우웅-!
그녀의 앞에 마법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히 이동마법진으로 보이는 것.
그에 나이아드는 슬쩍 의문을 느꼈으나-
'……세계수 위에 있는 포탈을 놔두고 굳이?'
-이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어깨를 으쓱하곤 자신의 앞에 마법진이 생기는 것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변에 마력이 퍼지기 시작하며 둥그런 구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이내 마력으로 만들어진 둥그런 구체는 큰타원형으로 변하며 포탈이 만들어졌다.
그와 함께 곧바로 입을 여는 나이아드.
"조금 늦게 오셨네요, 에리얼."
"어? 이년 봐라? 이제 보니까 다른 애도 보냈나 보네?"
"……!?"
허나 그녀는 에리얼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 곳을 바라봤고.
"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네……? 그게 저도 잘……."
"이번에는 상자형으로……?"
"아뇨! 저는 진짜 모른다니까요! 그냥 저는 이곳으로 포탈을 연결하라는 말에 그냥 포탈만 연결한 것뿐인데."
"그건 잘 모르겠고 너는 혹시라도 9계층에 문제 있으면 상자형 10번 이상 만들어준다."
"그……그런! 저는 정말로! 정말로 억울합니다!!"
이내 나이아드가 본 그곳에는 기죽은 표정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태양신 라와-
"내일 병풍 뒤에서 향냄새 맡아야 하는데, 만찬은 잘 즐기고 있었냐?"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현우를 볼 수 있었다.
316화. 이걸 안 도와주네? (3)
세계수의 안쪽.
나이아드는 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태양신이 졌다고……?'
그냥 말만 들어보면 그것은 당연히 믿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무리 51번 탑주가 날고 긴다고 해봤자 그는 아직 탑의 수혜를 제대로 보지 못한 이 중 한 명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은?
"야. 억울해?"
"진짜로 억울합니다! 진짜요! 저는 저런 소리를 단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옆에서 자세를 숙인 채 비굴하게 부르짖는 태양신의 모습.
분명 일신의 무력이 강했기에 그 어디의 세력에도 들어가지 않고 관리기관의 아래에서 느긋하게 살고 있었던 탑주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행동은 비굴했다.
'도대체 어떻게?'
'태양신 라'가 불로불사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탑주의 자리를 오래 지속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죽여도 소멸당할 염려조차 하지 않아도 되는 그가 저렇게 저자세를 취한다?
그것도 김현우에게?
'이프리트를 가볍게 처리한 걸 봤을 때부터 당연히 평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건 상상이상이었다.
그렇게 나이아드가 슬슬 현 상황을 파악하고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을 때, 김현우는 점점 굳어지기 시작하는 나이아드의 표정을 보고는 이야기했다.
"얼굴 좀 펴라. 왜 그렇게 심각해 응?"
"……상황을 심각하게 만든 당사자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우습다고 생각하기는, 지금 이 상황이 정말 나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김현우가 피식 웃으며 대답하자 입을 다문 나이아드는 이내 뭔가를 생각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당신이 그때 제 말을 들었다면-"
"어어? 헛소리 또 시작해? 그러지 마라. 안 그래도 화나 있는 사람 더 빡치게 하지 말고."
"……."
"아, 아니네. 뭐…… 더 해도 돼. 어차피 네가 나를 더 빡치게 하든 말든 내가 지금부터 할 일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스윽 웃는 김현우.
나이아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남의 탑에 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얘가 우리 탑에 왔던 거랑 똑같은 짓, 내가 또 나름대로 지성인이라서 말이야? 나는 딱 당한 만큼만 갚아줄 거야."
참 괜찮지?
그렇게 뒷말을 붙이며 씨익 웃는 김현우를 보며 나이아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설마, 당신 혼자서 이곳에 온 건가요?"
"얘 있잖아?"
김현우가 손가락질로 태양신을 가리키자 움찔하는 그.
나이아드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고는 이내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과연, 저 남자를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
물론 당장 이 세계수에는 정령 파벌쪽의 탑주들이 많이 상주해 있다.
당장 51번 탑에 간 에리얼을 제외하더라도 이 세계수에 머물고 있는 탑주는 4명, 그 이외에 호출 요청을 한다면 시간 소요는 조금 걸리겠지만 10명 정도의 탑주를 더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다른 탑주들이 올 동안 버틸 수 있을까?'
고민을 시작한 나이아드.
그리고 그런 그녀의 시선 끝에 들어온 것은 바로 김현우의 뒤에 있는 태양신 라였다.
"……."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비굴해 보이는 표정으로 수치를 감내하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을 한차례 확인한 나이아드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결론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응? 뭐라고?"
"죄송합니다. 이건 변명할 여지가 없군요. 저희 쪽의 잘못이 맞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나이아드.
그녀는 김현우에게 직접 맞서 싸우는 것 보다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이유?
그야 물론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그녀가 이런 결정을 내리도록 도움을 준 것은 바로 김현우의 옆에 있는 태양신 때문이었다.
'태양신을 이렇게 빠른 시간에 상대할 정도라면.'
적어도 지금 당장 있는 다섯 명의 탑주로는 그를 막는 데 부족할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당장 다섯의 탑주가 합공을 하면 동수를 이룰 수도 있겠으나 동수를 이루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리고 동수를 이룬 다는 것은 결국 어느 정도 피해가 나온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그녀는 당장 사과를 하는 것으로 현 상황을 넘기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허리를 90도로 숙인 채 인사를 하는 나이아드.
김현우는 물었다.
"얼씨구? 지금 뭐하냐?"
"저희가 잘못했으니, 마땅히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사과를 드린 겁니다. 저번은 모르겠으나 이번에 한해서는 저희 쪽이 부당한 청탁을 해 51번 탑주를 해하려고 했던 게 맞았으니까요."
"시원하게 인정하네?"
"……다만, 태양신께서도 알고 계시듯 저희는 절대로 당신의 목숨을 취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저-"
"태도 교정을 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김현우의 물음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고,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그는.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사과하는 자세는 꽤 마음에 드네. 어째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놈은 자기 잘못을 알아도 끝까지 자기 잘났다고 뻗대던데."
"……그렇다면."
"근데 그건 그거잖아?"
"무슨……."
"말 그대로의 이야기야. 네가 사과한 건 사과한 거고, 잘못을 한 건 잘못을 한 거잖아? 그러니까-"
씨익-
"-딱 네가 한 것만큼만 맞자."
####
한강 고수부지.
"끄학-!"
에리얼은 이번에도 여지없지 자신의 목을 부여잡은 야차를 보며 고통스럽다는 듯 자신의 목에 닿은 팔을 떼어내려 했으나 그녀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익!"
그렇기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바람의 칼날을 형성해 야차에게 쏘아냈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그 어느 공격도 야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흐음, 숨을 못 쉬게 공기를 빼앗아 버린 것이냐? 허나 유감이로구나, 고작 그 걸로는 나를 막을 수 없느니라."
그녀의 숨을 빼앗아도 야차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고.
"정말 원시적이다 못해 질이 떨어지는구나. 너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분이라 고작 이것밖에 못하는 것이냐?"
아무리 바람을 이용해 다양한 방법으로 그녀를 공격하려고 해도, 야차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마치 불사신처럼.
빡!
"큭-!"
에리얼은 배를 걷어차는 것으로 또 한번 자신을 풀어준 야차를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감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야차.
"왜 그러느냐? 설마 이렇게 빨리 포기할 생각은 아니지 않느냐?"
"윽……!"
야차의 물음에 더더욱 두려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에리얼.
허나 그녀의 말대로 에리얼은 고작 이런 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허무하게 날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목숨을 허무하게 날리지 않는 방법 또한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에리얼은 야차의 시선에는 보이지 않는 오른손을 뒤로 가져가 자신의 품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고.
"!"
이내 자신의 몸속에 있는 자그마한 구슬을 찾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쥐고 있는 것은 바로 귀환 구슬로, 나이아드가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을 때 사용하라고 건네줬던 것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바로 사용 하는 것만으로도 차원을 넘어 세계수로 돌아갈 수 있어……!'
하지만 그녀가 굳이 귀환 구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돌아가지 않은 것은 바로-
'……지금 저 괴물을 데려가면 과연 우리가 처리할 수 있을까?'
-야차를 자신들의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힘은 강했다.
그것도 말도 안 될 정도로.
차라리 김현우가 탑주가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괴물이 탑주라고 말하는 게 어울릴 정도로,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마력과 무력은 에리얼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렇기에-
'만약 저걸 연료 안으로 집어넣기만 한다면……!'
-에리얼은 그녀를 연료로서 오물에 집어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탑주보다도 압도적으로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연료가 오물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최근 겪고 있는 업에 관한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 할 수 있을 테니까.
에리얼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손에 쥐어진 구슬을 만지작거렸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야차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뭔가 꾸미는 게 있는 것 같구나."
"!"
"혹시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행동이 의심스러워서야 전부 의심하느니라."
키득거리며 재미있다는 듯 말한 야차.
그에 에리얼은 아차 싶은 마음에 표정을 컨트롤 하려 했으나 이미 별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어디 한번 해 보거라."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디 한번 해보라는 식으로 팔짱을 낀 야차.
그에 에리얼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으나 이내 그녀는 결심한 듯 야차의 앞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바람'의 정령왕답게 에리얼의 돌진 속도는 무척이나 재빨랐다.
야차마저도 아주 순간이기는 했으나 제대로 움직임을 잡지 못할 정도.
그러나 에리얼이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온 시점에서 야차는 다시금 그녀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고, 이내 시선을 돌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야차.
'무슨 꿍꿍이지?'
에리얼은 야차의 지척에 다가설 때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는 야차를 보며 의문을 표했으나 이내 그녀의 입가에 있는 웃음을 확인하고는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야차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에리얼의 공격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으니까.
에리얼이 자신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가만히 서 있는 야차를 본 그녀는 이내 바람에 날리고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래, 차라리 이러면 훨씬 편하지……!'
그녀는 이내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구슬을 떠올리며 침착함을 유지하곤 야차의 앞에 다가섰고.
"!"
이내 에리얼은 지금껏 자신의 품안에 숨겨두고 있는 구슬을 야차의 앞에 내밀고는 그대로 사용했다.
화아아악!
순식간에 터져 나오는 빛.
그와 동시에 야차의 얼굴빛이 슬쩍 바뀌는 것을 본 에리얼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과연 네가 정령계에 있는 이들 전부를 상대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
에리얼의 외침을 끝으로 그녀와 야차는 새하얀 빛에 빨려 들어갔고, 에리얼은 곧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세계수로 다시 되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으며 환희에 젖은 표정으로 세계수를 바라봤다.
"……."
바라봤다.
"……?"
바라봤다?
"……어?"
에리얼은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으로 세계수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분명 그녀가 바라본 곳에는 무척이나 거대하고 아름다운 가지를 사방에 뻗어 만물을 지켜주듯 감싸고 있는 세계수가 그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물론 그 뒤에 따라오는 조경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건 또 뭐야?"
지금 에리얼의 앞에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세계수가 아닌, 자신과 같은 정령왕인 나이아드의 멱을 붙잡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이었다.
317화. 이걸 안 도와주네? (4)
"어…… 어어?"
에리얼의 사고가 순간적으로 정지한다.
그도 그럴 게 현재 에리얼이 보고 있는 장면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일이 풀려야 이런 장면이 펼쳐지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지? 이게 대체…… 뭐야?'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의문.
에리얼은 그 의문을 끊임없이 떠올리며 조금이라도 머릿속에 정보를 수급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렇게 고개를 돌리기 시작하자, 에리얼은 곧 눈앞의 상황 이외에 다른 상황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프리트……?'
그리고 그렇게 시선을 돌린 곳에서 제일 먼저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나이아드의 근처에 머리부터 처박혀 있는 이프리트.
분명 몸에서는 아직도 불꽃이 새어나오기는 했으나 그 불꽃은 평시에 비하면 무척이나 약해 보였다.
굳이 표현해 보자면
'죽기 직전이지만 아무튼 죽지는 않았다.'
정도라고 보는 게 좋을까?
"……."
에리얼은 이프리트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른 이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땅의 정령왕인 오리에드가 나무에 처박혀 정신을 잃고 있는 모습이었고.
"……세상에."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같은 정령 파벌의 탑주 2명이 이프리트 근처에서 사이좋게 고개를 처박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냥 전멸했다. 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같이 전투불능 상태에 빠져 있는 그들.
거기에 덤으로…….
"숲이……."
에리얼은 아름다운 조경을 너머서 이 세상의 혼돈 그 자체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변해버린 숲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아름답게 자라나고 있었던 나무들은 여기저기 이프리트의 흔적으로 인해 불에 타고 있었고.
오리에드가 무분별하게 땅을 건드린 탓인지 세계수 곳곳에는 한눈에 들어올 정도의 거대한 구멍이 파여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 있는 다른 정령들은 덤.
그렇게 에리얼이 망연한 표정으로 자신 앞에 일어난 일을 바라보고 있을 때, 조금 전까지 나이아드의 멱살을 붙잡고 있던 김현우는 에리얼과 그 뒤에 나타난 야차를 바라보곤 이야기했다.
"……야차? 네가 왜 여기 있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리얼의 뒤쪽에 서 있는 야차에게 묻는 김현우.
그에 에리얼은 이 상황을 이해하느라 풀로 돌아가고 있던 머리를 긴급하게 정지시켰다.
'그, 그러고 보니 나는 분명……!'
에리얼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해가는 와중에도 야차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없는 동안 9계층에 침입한 이 여자를 막고 있었느니라."
"……그러던 와중에 쟤가 뭔가 수를 써서 너를 이곳으로 끌고 온 거야?"
"대충 그런 상황이니라."
야차의 대답에 김현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시선을 돌려 에리얼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내가 태양신인가 뭔가 하는 놈이랑 싸우고 있을 때 저 녀석이 9계층에 침입했다 이 말이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연료를 찾으러 왔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던데."
"뭐? 연료?"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에리얼과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나이아드를 바라보고는 이내 피식 웃으며 이야기 했다.
"이것들 봐라? 야 물둥둥 일어나봐. 너 기절한 척 하는 거 다 알거든?"
탈탈탈!
"왜…… 왜 그러시죠?"
김현우가 멱살을 잡고 탈탈거리자 슬쩍 눈을 뜨며 입을 여는 나이아드.
그는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물둥둥, 저 소리는 또 뭐야?"
"그…… 그게……."
"아, 우선 변명할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을 거야. 알지? 그냥 생생하게 팩트로만 이야기해. 알았지?"
"……."
"어? 뭐야? 못 말하겠어? 그럼 네가 한번 말해볼래?"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야차와 함께 온 에리얼을 바라봤으나, 그녀는 김현우와 눈을 마주친 순간 시선을 아래로 내려버렸다.
이유?
별다를 것 없었다.
나이아드가 김현우와 이야기하는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에리얼은 지금 이 공간에서 일어난 일을 모조리 파악했으니까.
물론 순수하게 파악한 것뿐이기에 에리얼 스스로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 오히려 솔직히 말하면 에리얼은 나름대로 빠르고 정확한 자신의 판단이 이번에 한해서는 좀 빗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게 결국 그녀가 파악한 최종적인 상황은-
'……괴물이다.'
-바로 나이아드의 멱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고 있는 김현우가 이곳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이었으니까.
당장 이 세계수에서 생활하는 탑주는 에리얼을 포함해 다섯이었다.
그리고 에리얼이 빠지더라도 남은 탑주의 숫자는 네 명.
네 명이라고 하면 그리 많은 숫자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그들 한 명 한 명이 전부 탑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네 명의 탑주를 전부 박살 낸다?
그것도 혼자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이 상황은 그렇게밖에 결론이 나오지를 않아.'
에리얼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내리깔았고, 이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현우는 야차를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얘 말고 같이 간 다른 녀석도 있었어?"
"아니, 적어도 내 기감에 잡힌 녀석은 그녀밖에는 없었느니라."
야차의 대답.
그에 김현우는 짧게 입맛을 다시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 몰래 9계층에 있는 애들을 납치해서 뭔지는 모르겠지만 연료로 사용하려 했다 이거지?'
물론 연료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이 없을 때 몰래 9계층에 있는 지인들을 빼가 연료로 사용하려고 했다는 사실.
김현우는 고민했다.
'이 새끼들을 어떻게 하지?'
처음에는 그냥 이 새끼들 모두를 조져버리고 대충 으름장을 놓고 끝내려 했다.
김현우는 데블랑이 한 말을 지킬 필요가 있으니까.
……뭐, 사실 지금 시점에서도 이미 데블랑이 말한 '조용히 지내기'를 뒤엎어 버린 것은 똑같았으나 아직 김현우의 머릿속에서는 나름대로 약간의 선은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지금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내 김현우는 한참의 고민 끝에.
"하, 진짜 나 너무 착한 거 아니야?"
김현우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멱살을 붙잡고 있던 나이아드를 저쪽으로 던져 버리더니 이내 에리얼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그 모습에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람으로 만들려던 에리얼은 이내 무척이나 익숙한 마력이 자신의 바람화를 방해하는 것을 깨달았고.
"땡큐."
"별걸 다 고맙다고 하는 구나, 우리 사이에 말이다."
"……아, 그래."
김현우는 야차의 말을 듣고 순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시선을 돌려 에리얼을 붙잡고는.
"우선 다른 애들도 전부 맞았는데 너만 안 맞고 가는 건 좀 그렇지?"
살벌한 표정과 함께 주먹을 쥐는 김현우.
그에 에리얼은 자신의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이야기했다.
"자, 잠깐! 저는 이미 아까 전에 저분한테 맞았는데요……?"
에리얼은 폭력을 피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그 표현이 너무나도 없어 보였다는 것을 상기하며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나-
"뭐, 그건 그거고."
"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쟤가 내 몸 일부도 아니고. 한마디로 이거랑 저거랑은 별개다 이 말이야."
씨익.
"그러니까 변명하지 말고 우리 깔끔하게 몇 대만 맞자."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
세계수의 나무 안.
완전히 개판이 되어 있는 내부 공간을 둘러보던 태양신 라는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무 너머로 일어나고 있는 풍경을 바라봤다.
불과 1시간 전. 이곳에서 바라본 세계수 밖의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나, 지금 태양신의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지옥이군.'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제 싸움은 끝났는지 이 이상 추가적으로 풍경이 바뀌지는 않았으나 이미 아름답던 세계수의 조경은 박살났다.
'거기에 덤으로 이 세계수에 있던 정령들까지 죄다 전투불능 상태라니……'
이곳에 오기 전에도 느꼈던 김현우의 소름 돋는 전투능력을 또 한번 상기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김현우가 싸움을 시작했을 때 태양신은 이때가 기회가 아닌가 싶어 냉큼 정령쪽에 붙어 그를 처리하려 했다.
허나 무척이나 다행이었던(?) 것이, 태양신이 김현우의 뒤통수를 치려는 그 순간 김현우는 말 그대로 눈 깜짝 할 사이에 나이아드를 제압해 버렸다.
아니, 제압이라기보다는 장난감처럼 다뤘다는 게 맞는 말일까?
아무튼, 나이아드가 김현우의 발에 맞고 밖으로 튕겨나갔을 때 태양신은 김현우를 공격하는 것을 순간적으로 멈출 수밖에 없었고.
그 뒤에 뒤늦게 따라 붙은 정령 파벌들이 김현우의 공격 몇 방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며 그의 뒤통수를 때리려는 생각을 아주 깔끔하게 지울 수 있었다.
'……도대체 저런 괴물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날뛰는 김현우를 막을 수 있는 이를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당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사람은 두 명.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다 뿐이지 정말로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확실하게 막을 수 있는 탑주가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그 녀석은 움직이지를 않으니 저 녀석이 먼저 시비를 거는 게 아니면 가만히 있을 테고.'
태양신은 그렇게 생각하며 완전히 박살 난 세계수의 조경을 보며 생각을 이어나갔고.
그가 어느 정도 생각을 이어나가기 시작할 때쯤.
꿍!
"……!!"
태양신은 자신의 몸에 느껴지기 시작한 엄청난 마력을 느끼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허나 그가 놀란 것은 그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느껴지고 있는 마력이 김현우의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었다.
'……이건 또 무슨?'
몇 번이고 느껴봐도 김현우의 마력이 아닌 다른 이의 마력이 느껴지는 것에 태양신은 의문을 가졌고.
그것보다도 태양신이 더더욱 큰 의문을 느낀 이유는 바로-
"……지금 이 마력도 엄청난데?"
-지금 누군가가 내뿜었는지 모를 마력이 엄청난 질과 밀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양신마저도 순간적이지만 깜짝 놀랄 만큼의 마력을 세계수 근처에 흩뿌리는 존재.
순간 태양신은 정령 파벌쪽에서 지원군을 불렀나 싶었으나.
꽈아아아아-!!
"!!"
곧 태양신은 이 소름끼치는 마력을 내뿜는 장본인이 정령파벌의 지원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뿜어지고 있는 마력은 지금 세계수의 근처를 흔적도 없이 밀어버리고 있었으니까.
꽈아아아앙!
큰 폭음이 한번 울릴 때 마다 눈에 확연하게 보일 정도로 갈색의 토지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꽈아아앙!
꽈아아앙!
꽈아아아앙!
그 상태에서 세 번 정도 큰 폭음이 들리자 태양신이 바라보고 있었던 조경은 이미 맨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듯 사라져 버렸다.
그래.
애초에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나무나 풀도 없이 깔끔하게 사라져버린 그곳에는 그저 갈색의 토지만이 남아 있었고.
꽈아아아아아아앙!!!!!
우지끈!
"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태양신은, 문득 자신이 밟고 서 있는 이 거대한 세계수에서 난 소름끼치는 소리를 들었다.
무엇인가가 확실하게 부러지는 듯한 소리.
그리고 그 뒤로 세 번의 폭음 뒤.
"으아아아아악!!! 이런 미친!!"
정령 파벌의 상징과도 같은 세계수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318화. 나 몰래 뭐해? (1)
어두워진 밤.
축축하게 젖은 땅바닥을 짚으며,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는 멍한 표정으로 앞에 일어난 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그녀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화마에 휩싸인 숲.
그리고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세계수가……."
완전히 박살이 나버린 세계수였다.
"……."
세계수.
그들이 탑주의 지위에 올라 지금의 세계수를 만들 때까지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세계수는 모든 정령들이 뜻을 모아 만들어낸 정령들을 위한 안식처이기도 하고.
그래,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오랜 시간이, 저 세계수를 만들어 내는 데 걸렸다.
그런데.
그런 세계수가.
"단…… 하루아침에……."
나이아드는 허망하게 중얼거리며 아까 전의 기억을 상기했다.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막지 못했던 김현우의 모습.
'도대에 어디서 그런 괴물이…….'
나이아드가 그와 싸우고서 느낀 생각은 딱 그것뿐이었다.
괴물.
그는 나이아드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괴물이었다.
물론 그녀는 세계수에 거주하고 있는 탑주들이 달라붙어도 김현우와 동수를 이루거나 밀릴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김현우와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고 사과를 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싸워보니 그녀는 자신이 판단이 전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도 머리가 아닌 그 몸으로 직접.
처음 한 대를 맞았을 때, 나이아드는 자신이 공격을 받았는지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땅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소름이 돋았던건 탑주들의 숫자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양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탑주들이 모여들어 그들에게 달려든다.
나이아드는 수분을 끌어모아 그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둔하게 만들고.
오리에드는 땅을 움직여 김현우를 가두기 위해 움직였다.
드라이어드는 나무를 이용해 김현우를 공격했고.
이프리트는 뜨거운 불꽃을 사방으로 내뿜으며 김현우에게 달려들었다.
허나 문제는 그 모든 행동들이 김현우의 앞에서는 전혀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것이었다.
분명 그와 제대로 싸우기 시작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정령왕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무엇을 당했는지도 모른 채 쓰러졌다.
이프리트는 악!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땅바닥에 처박혔고, 그것은 오리에드도 마찬가지.
자신은 괘씸죄가 추가됐다고 하면서 계속 멱살을 잡고 질질 끌려 다녔고, 뒤늦게 51번 탑에서 복귀했던 에리얼도 자신과 같은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그렇게 몰려드는 정령들까지 모두 정리한 김현우는 세계수를 박살 내 버렸다.
허나 그것은 김현우가 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수를 박살 낸 것은 바로 김현우의 옆에 있던 어떤 여자.
마치 악마 같이 이마에 두 개의 뿔을 가지고 있던 백발의 소녀는 김현우의 요구에 따라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가볍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마자, 놀랍게도 공간이 박살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원리인지 그 백발의 소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정령계는 개박살이 나버렸고, 결국 그 소녀가 정확히 열 발자국을 내디뎠을 때.
"이익……."
세계수는 박살 났다.
그것도 회생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회생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세계수는 그냥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박살난 세계수의 근처로는 이프리트가 뿌려놓은 불이 사방으로 번져 화마가 일어나 있었고.
무엇보다 그 세계수의 중심에서는 자신들이 '오물'에 넣어놓은 연료들이 하나둘씩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이아드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는
'반드시…… 반드시 복수할 거야……!!'
그녀는 김현우를 생각하며 개 박살이 난 세계수를 바라봤다.
####
그로부터 일주일 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정령 파벌 쪽 구역에 쳐들어가서 개판 오 분 전을 만들고 나왔다 이건가?"
데블랑의 물음.
그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의외라는 듯 이야기했다.
"벌써 소문났어?"
"그냥 소문만 난 것 같나? 지금 관리기관과 탑주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네 이야기다."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뒷통수를 긁적거리더니 이내 말했다.
"그래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냐?"
"뭐? 문제가 없어?"
"그래. 내가 깽판을 좀 치기는 했어도 걔들을 죽이지는 않았잖아?"
김현우의 당당한 말에 데블랑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적어도 데블랑이 듣기에 김현우의 말은 '우선 살려는 줬는데, 살려만 주면 문제 없는 거 아니냐?' 정도로 들렸으니까.
그에 데블랑은 김현우에게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으나 이내 그만뒀다.
'……그랬지, 이 녀석은 좀 생각이 달랐지.'
그냥 다른 것도 아니고 좀 많이 다르지만 데블랑은 굳이 이해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후-"
깊은 한숨을 내쉰 데블랑.
그는 이내 김현우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차라리 네가 그 녀석들을 싹 죽였으면 일이 더 편해졌을 수도 있겠군."
"진짜?"
"……그냥 말해본 거다. 아마 네가 정령쪽에 있는 녀석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면 지금쯤 탑주들 사이에서는 거대한 파벌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거다."
"파벌전쟁?"
"그래, 네가 정령 파벌 쪽에 있는 탑주들을 죽여 버렸으니 자리가 남지 않나? 그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 치고받고 싸우겟지……. 뭐, 그래 봤자 악마 쪽은 참전하지 않을 테니 천사쪽의 일방적인 공격이 되겠지만."
"악마쪽은 왜?"
김현우의 물음에 데블랑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그쪽은 싸움을 싫어한다. '악마'라는 파벌 이름을 가진 것 치고는 말이지."
"그럼 천사쪽은?"
"이쪽?…… 이쪽은 반대로 조금 투쟁적인 편이군…… 아니, 이걸 말하려던 게 아닌데."
데블랑은 쯧 하고 짧게 혀를 차더니 이야기를 원래로 되돌렸다.
"아무튼, 지금 네가 벌인 일 때문에 탑주 쪽은 난리가 났다. 당장 오늘만 해도 정령파벌 쪽에서 개최한 회의에 천사파벌과 악마파벌을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것 같더군."
"뭐. 나 좀 같이 조져달라…… 뭐 그런 거 말하는거야?"
"아마 그렇겠지."
"아니, 이렇게 갑자기? 저번에 네가 말하기로는 각 파벌은 서로 견제를 오지게 한다면서? 그럼 서로 도와주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원래라면 그래야 한다. 각 파벌들은 서로를 견제하니까."
다만-
"지금 같은 상황은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슨 상황?"
"내가 미처 설명을 못했다만 지금 정령파벌쪽은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였다고?"
"그래, 한 마디로 자신들의 이권을 포기한다는 선언을 했다 이거지. 이걸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지금 정령 파벌쪽은 너를 조지기 위해서 자신들이 가진 이권을 조금 내놓고 다른 이들의 힘을 빌리고 있다 이 말이다."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지금 좀 위험한 상황이라 이거네?"
"그냥 위험한 상황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시점에서는 관리기관도 너를 주목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관리기관? 걔들이 왜?"
"네가 말했지 않았나? 태양신 라가 움직였다고."
"그랬지. 나도 걔가 관리기관에 속해 있는 탑주라고 듣기는 했는데, 또 그 녀석이 하는 말을 듣기로는 정령 파벌에 개인적으로 일을 받은 거라고 하던데?"
"그럴 리가 있나?"
"……그럼 관리기관이 끼어 있다는 소리?"
김현우의 물음에 데블랑은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두말하면 입 아픈 소리지. 기본적으로 7번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있는 탑주들이 움직이면 무조건 관리기관이 움직였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그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애초에 내가 몸을 사리고 말 것도 없이 관리기관에서는 이미 날 노리고 있었다는 소리 아니야?"
"뭐, 그렇게 되는군."
대체 왜? 라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며 데블랑은 또 한번 설명해 주고 싶은 욕구에 휩싸였으나 이내 그것을 참아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무튼, 내가 지금 여기까지 와서 네게 이 말을 해주고 있는 건,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 네게는 상당히 안 좋게 돌아가고 있기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온 거다."
데블랑이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 하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 이제 주의를 한다는 게 의미가 있기는 해?"
"……뭐,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군. 모든 건 정령 파벌 쪽에서 모은 회의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지만…… 그래도 아마 지금 이 상황이 더 호전될 것 같지는 않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김현우의 물음에 데블랑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안 그래도 그게 문제라 머리가 아프군……. 원래라면 좌표를 찾을 때까지 조용히 있다가 좌표를 전부 찾고 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근데 일이 이렇게 되버렸으니-"
데블랑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쉬자, 김현우는 그런 그를 보고는 잠시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요컨대 포인트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이거지?"
"……방법이 있나?"
데블랑의 물음.
그에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당연히 있지. 있고말고."
이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데블랑은 김현우의 입가에 지어져 있는 미소를 보며, 왠지 께름칙한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
어두운 공간.
가운데에는 그 공간을 비출 만한 랜턴 하나만이 켜져 있었고, 또 그런 랜턴 아래에는 거대한 원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는 원탁.
그중 한 명은 바로 이번 김현우에게 세계수를 파괴당한 정령 파벌의 나이아드가 앉아 있었고, 그런 나이아드의 양옆으로는 각각 천사 파벌과 악마 파벌의 수장이 나이아드를 보며 앉아 있었다.
악마 쪽 파벌에는 얼마 전 김현우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예수가 뚱한 표정으로 나이아드를 보며 앉아 있었고.
"흐음."
그 옆에 있는 천사 파벌에는 그 동안 탑주 회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탑주이자 천사 파벌에서는 대천사라고 불리우는 루시퍼가 자리에 앉아 나이아드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나이아드는 자신의 앞에 앉은 두 파벌의 수장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다 모이신 것 같으니 이야기를 시작해도 될까요?"
나이아드의 물음.
그에 루시퍼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그래, 어디 한번 이야기나 들어보도록 하지. 어차피 정령 파벌 쪽에서 하는 이야기는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그에 나이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맞아요. 각 파벌의 수장께서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제가 여러분들을 이 회의에 초대하게 된 이유는 바로 김현우 때문입니다."
"……."
"……."
나이아드의 말에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아무런 말도 안하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퍼와 예수.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저희 정령 파벌쪽에서는 51번 탑주인 김현우를 여러분들과 함께 소멸시켰으면 합니다."
곧 나이아드는 빙 둘러앉아 있는 양쪽 파벌의 수장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319화. 나 몰래 뭐해? (2)
천호동 하남에 있는 거대한 장원의 건물 안.
"와 진짜 인형같다! 너 왜 이렇게 귀엽니?"
"저, 저기 잠깐, 저좀 놔주-"
"와! 이 머리색 봐봐! 대박이다!"
"이서연 씨,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남의 머리카락을 그렇게 만지는 것은 실례입…… 제발 말을 좀 듣고 나서 움직여 주세요!"
아브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서연을 은근슬쩍 밀어내려 했으나, 이서연은 그런 아브의 움직임 따위는 가볍게 힘으로 제압한 뒤 그녀를 마치 인형처럼 끌어 안았다.
확실히 아브는 9계층에서는 절대로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희귀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백발부터 시작해서 인형 같은 눈코입.
거기에 자그마한 체구까지 더하니 그 외모는 가히 무척이나 잘 만들어진 인형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그렇기에 이서연은 김현우가 일주일 전 아브와 노아흐를 데려왔을 때부터 줄곧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고.
"제발 그만-"
아브는 어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격해지는 애정표현(?)에 기가 눌린 듯 이서연을 밀어내며 그 뒤에 서 있는 제천대성을 향해 애절한 시선을 보냈다.
그 누가 보더라도 '당장 도와주세요!' 라는 의미가 담긴 눈빛.
허나-
"흠……."
손오공은 유감스럽게도 그런 아브의 소리 없는 외침을 그저 조용히 외면했다.
그런 손오공의 모습에 크게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아브.
허나 손오공으로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저번 일을 기점으로 손오공은 더 이상 이서연을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손오공은 당연히 이서연을 물리적으로 이길 수는 있었으나, 이길 수 없었다.
이유?
"……."
그런 건 없다. 그냥 아무튼 이길 수 없었다.
그래, 그런 거다. 그저 막연히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손오공의 머릿속에서 맴돌았을 뿐이었으나 그는 굳이 그것을 치우려 하지 않았다.
뭐…… 정확히는 치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라기보단 그 나름대로 바가지를 긁히지 않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냈다고 보는 게 옳았으나.
아무튼 그렇기에 손오공은 이서연의 품에 끌어 안겨져 있는 아브의 눈빛을 애써 무시한 채 시선을 돌려 노아흐와 청룡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아아, 이것은 '스마트폰'이라는 것이다."
"오오. 이것 참 대단하군. 아무리 봐도 이 계층에서는 나올 수 없는 첨단의 기술일세!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빨리 이곳에 들러볼 걸 그랬네!"
"그런가? 스마트폰 외에도 꽤 둘러볼 것들이 많이 있다."
"오! 조금 더 소개시켜 주게!"
스마트폰 하나를 가지고 거의 몇 시간을 넘게 대화하고 있는 청룡과 노아흐.
어찌 그리 죽이 잘 맞는지 청룡은 최근 손오공과 거의 말을 섞는 일이 없이 노아흐와만 말을 섞고 있었다.
'…….'
뭐, 사실 그것도 그렇고 애초에 손오공이 이서연의 뒤를 따라다니게 될 일이 자연스럽게 많아진 것도 있었으나, 아무튼 손오공은 묘한 소외감을 느끼며 진득한 한숨을 내쉬고는 건물 한켠에 비치되어 있는 소파에 앉고는 이내 사색했으나.
'어쩌다 투전불승의 직위를 가졌던 이 몸이 이러고 있는 건지 원.'
"오공! 빨리 좀 와봐."
"으, 응?"
"빨리!"
"알았으니까 소리 좀 지르지 마, 간다 가……."
이내 손오공의 사색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는 자신을 부르는 이서연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
새하얀 공간 속.
상석에 앉아 있는 남자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들기며 이야기했다.
"상황이 신기하게 돌아가고 있군."
"……."
그에 헤르메스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남자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현재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남자의 심정이 내심 어떤지를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남자의 한마디 이후로 침묵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이내 그 묵직한 침묵은 남자에 의해서 깨졌다.
"태양신은 무엇을 하고 있나?"
"……그는 1주일 전 김현우를 만난 뒤부터 더 이상 탑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거야 원래도 그러지 않았나?"
"……그게, 이번에는 탑에 틀어박혀서 아예 제대로 된 의사도 전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들었던 건 '더 이상 51번 탑주와는 엮이지 않겠다'는 말뿐이었습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턱을 두들기던 손가락을 멈춘 남자.
그는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생각 이상이었나 보군."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헤르메스.
남자는 괜찮다는 듯 손을 한번 휘적거리며 이야기했다.
"아니. 네가 사죄할 상황은 아니다. 그저 태양신을 이긴 정도였다면 또 모르겠다만…… 이번에는 그 녀석이 정령 파벌에 있는 세계수마저 날려 버렸다지?"
"……예."
"정령 쪽은 이쪽에게 따로 연락 같은 것을 넣지는 않았나?"
"예. 그들은 세계수가 날아간 이후부터 이쪽에는 전혀 이렇다 할 연락을 취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헤르메스의 대답에 남자는 가만히 생각했다.
정령 파벌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계수.
남자도 그 세계수가 정령들에게 어떤 의미인 줄은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처음 탑주들을 포섭했을 때 정령을 포함한 관계자들을 회유하는 데 사용했던 것이 바로 세계수에 관한 내용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세계수를 51번 탑주가 개 박살을 내놓았다, 라…….'
남자는 짧게 독백하고는 이야기 했다.
"……오늘 파벌들끼리 따로 회의를 열었다지?"
"예, 정령 파벌 쪽에서 각각 천사 쪽과 악마 쪽을 섭외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제는 아마도-"
헤르메스는 굳이 뒷말을 하진 않았으나 남자는 자연스럽게 그 뒤에 나올 단어를 이해하고 있었다.
"……연합을 만들 생각인가."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
헤르메스는 곧바로 답했다.
"아무래도 그럴 생각인 것 같습니다만……."
헤르메스는 남자가 제일 경계하고 있는 것이 탑주들의 연합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긍정했다.
그에 다시 찾아온 침묵.
이번에는 처음의 침묵보다 몇 배는 긴 침묵이 지속되었고, 마침내 그 침묵의 끝에서 남자는 결정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선은 지켜보도록 하지."
"……우선은, 입니까."
"그래.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각 파벌들의 수장이 모인 회의는 열리지 않았나?"
"맞습니다."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김현우를 처리하기는 늦었지. 어차피 지금 처리해 봤자 연합이 만들어지는 것이 결정나는 것은 '오늘'일 테니 말이야."
그의 말대로 지금 관리기관에서 김현우를 죽인다고 해봤자 연합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 우선은 한번 이후를 보도록 하지. 파벌들이 김현우 때문에 연합을 만드는지, 아니면 만들지 않는지 말이야."
뭐-
"그와는 별개로 생각 이상으로 탑주들의 물을 흐리는 김현우에게는 따로 제재를 가해야 할 것 같지만 말이야."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
"안녕?"
50번 탑의 최상층.
그 탑의 주인인 지크프리트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악몽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환한 웃음을 지은 채 마치 친구 집에 놀러오듯 손까지 슬슬 흔들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
그에 지크프리트는 인상을 쓴 표정으로 김현우가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문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분명 막았는데 어떻게 이곳으로 온 거지!?'
예전, 김현우가 한번 50번 탑에 와서 깽판을 치고 난 뒤, 지크프리트는 또다시 그런 상황을 겪을 것을 대비해 그 문이 있던 곳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마음만 같아서는 아예 개박살을 내버리고 싶었지만……!'
정말로 이상하게 50번과 51번 탑을 잇고 있는 통로는 지크프리트가 그 무슨 짓을 해도 부서지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는 통로를 부수는 것 대신 통로를 막아버리는 것을 차선책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 표정이 살짝 안 좋아 보이네?"
김현우가 슬쩍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자 지크프리트는 뒤늦게 찌푸린 인상을 피며 입을 열었다.
"아, 아니다."
지크프리트의 뒤늦은 변명.
물론 그것이 변명이라는 것은 김현우도 무척이나 잘 이해하고 있었으나 그는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김현우는 지금부터 지크프리트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으니까.
김현우는 굳혔던 얼굴에 다시 미소를 그리며 지크프리트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옴에 따라 저도 모르게 앉아 있던 왕좌에서 일어나는 지크프리트.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 내가 다름이 아니라 오늘은 너한테 좀 부탁이 있어서 왔는데, 부탁 좀 들어줄 수 있지?"
"……부, 부탁?"
"그래, 부탁."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채 입을 여는 김현우.
그 모습에 지크프리트는 알 수 없는 소름을 느끼면서도 대답했다.
"무……무슨 부탁이지?"
"내가 저번에 보니까 네가 정령 파벌에 있더라?"
"그……그건."
"아, 변명할 필요 없어. 네가 정령 파벌이라고 지금 와서 뒤지게 패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애초에 나는 나한테 덤빈 놈이 아니면 안 때리는 주의거든."
나 알지?
그렇게 말하며 웃는 김현우의 얼굴에 지크프리트는 금방이라도 죽빵을 날리고 싶었으나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참았고.
'이 또라이 같은 새끼.'
그는 그저 속으로 김현우의 욕을 전부 때려 박으며 그의 말에 대답 할 수밖에 없었다.
"뭐…… 내가 정령 파벌에 속해 있기는 한데."
그것뿐이랴? 거기에 덤으로 얼마 전 그는 무너진 세계수 앞에서 다른 정령 파벌의 탑주들과 함께 김현우를 소멸시키겠다는 맹세까지 했다.
지크프리트가 그 생각을 상기하며 대답하자 김현우는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내가 너한테 부탁해야 할 게 좀 있어서 말이야."
"부탁해야 할 거……?"
떨떠름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는 지크프리트, 그러나 그는 애초에 그의 표정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곧바로 자신의 본론을 말했다.
"너희들, 오늘 각 파벌끼리 모여서 회의한다며?"
"회, 회의라고?"
'이놈이 어떻게 그걸 알고 있지?'
물론 세계수가 박살 나고 정령파벌에서 천사파벌과 악마파벌을 초대한 것은 무척이나 유명한 이야기다.
아니, 애초에 탑주 거의 대부분이 파벌에 속해 있다 보니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수순이고, 딱히 알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는 정보기는 한데.
'……얘는 대체 왜?'
김현우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애초에 김현우는 파벌에 속해 있지도 않을뿐더러, 딱히 그와 친하게 지내는 탑주들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친하게 지낼 시간조차도 없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는 하루가 멀다고 사건을 몰고 다녔으니까.
"그래, 회의한다며?"
지크프리트는 생각을 이어나가려다 들리는 김현우의 말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그런 그의 긍정에 김현우는 웃음을 지으며.
"그럼 나 좀 거기로 데려다주라."
"……뭐?"
-그렇게 말했다.
320화. 나 몰래 뭐해? (3)
황금의 산이 가득한 그 곳에 세워져 있는 신전.
그 신전 안에는 항상 그래왔듯 태양신 라가 황금으로 만들어진 황좌에 앉아 있었다.
풍경도 변하지 않고, 사람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변한 것은 태양신 라의 앞에 한 노인이 앉아 있다는 것뿐.
"……."
태양신 라의 앞에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의 수염은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은 듯 아무렇지도 않게 나 있었고, 그가 입던 옷은 무척이나 낡아 조금만 힘을 주면 찢어져 나갈 것 같으니까.
그뿐이랴?
노인의 남은 팔에는 무척이나 낡은 검이 한 자루 쥐어져 있기는 한데, 그 검은 겉보기에도 상당히 녹이 슬어 노인의 힘으로는 꺼내는 것이 어려워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노인이 초라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한쪽 팔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팔이.
그것이 바로 노인을 매우 초라하게 만드는 이유였으나.
"오셨습니까."
놀랍게도 그런 초라한 노인에게, 태양신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어떤 마력도 느끼지 않고, 그 어떤 기백도 느껴지지 않은 노인의 앞에서 태양신은 매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노인은 그런 태양신을 마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이 죄인에게 왕이 항상 고개를 숙이는군."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노년기 특유의 숨이 찬 듯한 목소리.
그에 태양신은 고개를 들어 이야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당신이 죄인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태양신의 말에 노인은 짧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새 언변이 조금 늘었군. 맨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말이야."
노인의 말에 태양신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이야기했다.
"……항상 당신을 만나면 이것저것 깨달음을 얻으니까요. 거기에다가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태양신의 말에 노인은 슬쩍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내 생각이 났다는 듯 이야기 했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 그 녀석을 죽이고 탑주의 자리에 오른 이와 맞붙었다고 듣기는 했네. 여기 저기 소문이 돌더군. 탑 안에 박혀 있는 나라도 들을 정도로 말이야."
노인의 말에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인 태양신.
"그렇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저는 나름대로 또 한번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역시 스스로가 왕이고, 스스로가 '절대'의 위치에 올라있다고 해도, 기본적인 예는 지켜야 한다는 깨달음입니다."
태양신의 말.
확실히 태양신은 김현우를 만난 이후부터 그 깨달음을 평생 마음에 새기고 가기로 했다.
물론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노인에게 말한 것처럼 '누구에게라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자' 가 아닌, '딱 봐도 미친 또라이 새끼한테는 접근하지 말자'였지만.
'……그게 그거지 뭐.'
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찰나 떠오른 생각을 지워버렸다.
"허……."
아무튼, 그런 태양신의 말에 노인은 순간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허허 하는 웃음을 터트리며 이야기 했다.
"그 친구가 자네보다 강했나 보군."
"예. 그냥 강한 것이 아니라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했습니다."
"……그 정도로?"
"예.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상상 이상.
태양신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노인은 또 한번 이채가 섞인 눈빛을 띄었고.
"자네에게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니, 아마 조만간 그 친구와 한번 얼굴을 마주 볼 것 같군."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녹이 슨 자신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
어두운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원형 탁자.
그곳에서 나이아드의 말을 들은 루시퍼는 이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연합을 해서 지금 너희 본거지를 개박살 낸 51번 탑주를 힘을 합쳐 소멸시키자, 뭐 이런 말인 거지?"
"맞아요. 제대로 이해하셨네요."
"그럼 이다음에 내가 무엇을 질문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맞아?"
루시퍼의 물음에 나이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미 답변도 준비해 놨구요."
"그럼 내가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어디 한번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할까?"
루시퍼의 물음에 나이아드는 곧바로 대답했다.
"저희 정령 쪽에서는 두 파벌의 수장분께서 51번 탑주의 소멸을 도와주신다는 전제하에, 앞으로 200년 동안 저희 본 탑에서 나오는 업을 각 파벌과 균등이 분배하겠습니다."
"……균등 분배라면 엔빵 하자는 소리지?"
루시퍼의 말에 나이아드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와, 이거 생각보다 조건이 매력적인데?"
루시퍼의 말대로 나이아드가 내건 조건은 파격적이기 그지없었다.
물론 정령쪽의 본거지가 개 박살이 난 상황이라 지금 상태로는 아무리 정령 파벌이 업을 나누어 준다고 해도 그 업들은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가공되지 않은 업은 탑주들이 사용 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하지만 그것은 본거지가 파괴 된 지금뿐이고, 무엇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바로 정령의 땅이 비옥하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령 파벌은 다른 파벌의 탑주들과는 다르게 세계수가 있는 본탑에 다른 탑에서 모으는 업들을 모조리 몰아넣기 때문이었다.
물론 정령 파벌에 속해 있는 전부가 그런 식으로 업을 세계수 쪽으로 연결해 놓지는 않았으나, 파벌에 속해 있는 이들 중 50% 정도는 자신의 탑에서 나오는 업을 세계수에 붙여 놓았다.
정령 파벌의 인원 중 대부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령'들에게 있어서 세계수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업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나는 세계수의 과실은 다른 방식으로 업을 가공하는 것은 다른 방법에 비해 약할지 몰라도, 그 효능이 압도적이었다.
세계수의 과실은 먹기만 하면 '남'의 업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공을 들이지 않고 자신의 업을 더더욱 높은 경지로 끌어 올릴 수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몇몇 정령들은 그 과실을 얻기 위해 자신의 탑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업을 세계서의 양분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수가 있는 본탑에서 나오는 업이 얼마나 질 좋은 것인지를 알려주었다.
"……끌리네. 끌린단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루시퍼.
하지만 그는 확실한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를 중얼중얼 거리며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내 조금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런데, 좀 이상한데?"
그는 생각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루시퍼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는 나이아드.
"뭐가 이상하죠?"
"아니, 뭐 사실 우리야 준다니까 받으면 되기는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하단 말이지."
"……?"
"너희들, 관리기관이랑 친하잖아? 애초에 너희 파벌 중에서 정령들 대부분은 관리기관 녀석들이 알선해서 탑주 자리를 맡게 된 거고 말이야."
"그건 맞아요, 그리고 확실히 관계 면에서도 다른 파벌보다는 확실히 좋은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나는 그게 이상하다 이거지, 사실 너희들이라면 그냥 관리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면 되지 않나? 저쪽에 있는 악마들처럼 관리기관이랑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실실거리며 묻는 루시퍼.
나이아드는 살짝 고민하는 듯 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확실히 관리기관과 저희의 사이는 좋아요. 다만, 이미 저희는 관리기관에 한번 의뢰를 했었습니다."
"뭐,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지. 실패했잖아?"
안 그래?
루시퍼는 실실거리며 예수를 바라봤으나, 그는 그저 자리에 앉아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에 어울려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루시퍼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나이아드를 돌아봤다.
"그런데 사실 관리기관에는 다른 녀석들도 많잖아? 뭐……이를태면 검신(劍神)도 있을 테고……또 보면 탐왕도 있잖아? 오히려 우리보다 그놈들이 더 강할 텐데?"
뭐, 당연히 우리 전체가 달려든 것만큼은 못하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뒷말을 붙이는 루시퍼.
나이아드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건 당신의 말이 맞아요. 확실히 관리기관에 속해 있는 탑주 중 검신과 탐왕은 우리 모두에게 규격 외로 통하는 이들이죠. 하지만 관리기관에서는 섣불리 그들을 보내주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
"관리기관과 저희가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결국 남남. 아마 기관쪽에서는 어떻게든 저희 파벌에게 한계까지 빚을 지우게 할 거예요."
"그걸 순순히 다른 파벌에게 이야기해 줘도 되는 거야?"
"어차피 전부 알고 계신 거 아니었나요?"
나이아드의 말에 루시퍼는 그저 가만히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온 침묵.
허나 그 침묵은 루시퍼의 실실거리는 웃음에 의해 곧바로 깨어졌다.
"뭐, 좋아 우리 천사 쪽은 51번 탑주를 소멸시키는 것에 총력을 다 해서 도움을 주도록 할게,"
그 말에 나이아드는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슬쩍 숙였고, 이내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던 예수를 바라봤다.
"흐음……."
한동안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던 예수는 이내 검은자위가 보이는 홍안을 뜨고는 이야기했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참가하지 않도록 하겠네."
예수의 거절.
나이아드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이내 예수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이야기했다.
"……혹시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건가요?"
"그건 아닐세. 확실히 자네가 해준 제안은 무척이나 매력적일세."
"그렇다면 어째서?"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표정을 굳히자 예수는 곧바로 입을 열려고 했으나-
"내가 맞춰볼까?"
-루시퍼는 예수의 말을 끊고는 대화에 난입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루시퍼를 바라보는 예수.
그와 상반되게 루시퍼는 실실 거리는 웃음을 여전히 지우지 않은 채 짐짓 놀랐다는 듯 과장되게 양손을 우스꽝스럽게 활짝 피고는 이야기했다.
"어이쿠! 그렇게 노려보면 내가 좀 무서운데 말이야."
"……."
무표정으로 바라보는 예수.
루시퍼는 슬쩍 손을 내리고는 이야기 했다.
"왜 그렇게 화나 있어? 뭐 우리가 지금에 와서 이렇게 갈려지기는 했지만 우리도 결국 한 핏줄인데 말이야.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정색하면 좀 섭섭한데?"
"……."
여전히 침묵하는 예수. 그러나 그의 얼굴 한편에는 슬쩍 핏대가 올라와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루시퍼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려 했고-
"자 거기까지!!"
-루시퍼가 입을 열려는 그 순간, 그 검은 공간에는 목소리가 울렸다.
순간적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셋은 순간 의문을 표했으나 곧 시간에 지남에 따라 자리에 앉아 있던 세 명은 그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실실거리며 웃던 루시퍼는 묘한 표정을 지었고.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예수는 의구심 넘치는 표정을 지었으며.
오늘, 양쪽 파벌의 수장을 이 자리에 초대한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는-
"다……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분노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기묘한 감정을 가지고 검은 공간 너머로 슬슬 걸어오기 시작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왜? 내가 여기 오면 안 되나? 다들 내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 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리고-
"나도 좀 껴주라."
김현우는 수장들이 앉아 있는 원탁에 모습을 드러냈다.
321화. 나 몰래 뭐해? (4)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경악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는 나이아드.
허나 그녀는 곧 그의 손에 무엇인가가 잡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크프리트……."
"나, 나이아드 님."
김현우의 오른쪽 팔에 붙잡혀 끌려온 남자는 바로 정령 파벌에 속해있는 50번 탑주, 지크프리트였다.
그는 나이아드의 표정을 보며 '나는 좆됐다.'라는 표정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재현하며 고개를 푹 숙였고, 김현우는 그런 지크프리트와 나이아드를 한 번씩 바라보곤 이야기했다.
"야, 너무 구박하려고 각 잡지 마, 이놈은 그냥 내가 부탁해서 여기로 오는 길을 터준 것뿐이니까."
그렇지?
씨익 웃으며 자신의 팔에 붙잡혀 있는 지크프리트를 바라본 김현우.
그 모습에 지크프리트는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죽통을 빠개 버리고 싶었으나 참았다.
뭐, 정확히는 그런 짓을 할 용기가 없었던 것뿐이었고, 각 파벌의 수장들이 전부 모여 있는 상황에서 개쪽을 당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이미 그의 팔에 질질 끌려 온 것부터가 개쪽이지만.
지크프리트의 눈에 순간 스쳐 지나가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보며 피식 웃은 김현우는 이내 그를 놔 주었다.
"자, 그럼 이제 가도 돼. 내가 말했지? 이곳이 진짜 회의장이면 풀어 주겠다고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슬쩍 눈치를 보는 지크프리트.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도 김현우가 자신을 놔 주었다는 사실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고.
"……."
지크프리트는 나이아드의 눈빛을 보고는 이내 몸을 돌려 곧바로 어둠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렇게 해서 침묵이 돌기 시작한 공간 속에서 김현우는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야,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었어? 나도 좀 제대로 알려 주라. 응?"
김현우의 물음에 나이아드는 도대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을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눈살을 찌푸렸고.
"궁금한 게 많나 보네?"
그런 나이아드 대신 대답한 것은 바로 루시퍼였다.
"당연히 많지. 내 이야기 하고 있었다며?"
"잘 아네? 그렇게 잘 알면서 뭐가 또 그렇게 궁금해? 내가 볼 때는 이미 다 알고 찾아온 거 같은데."
"어느 정도는 알고 찾아왔지. 근데 또 어디 가서 들은 거랑 직접 이렇게 와서 듣는 건 다르잖아?"
루시퍼와 같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김현우.
"뭐, 그건 그렇긴 하지. 그런데 어쩌나? 적어도 나는 딱히 네 질문에 대답해 주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저 옆에 네 친구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친구?"
"예수 말이야, 저번에 탑주 회의에서 둘이 따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눴다던데, 응? 둘이 친구 먹은 거 아니야? 아, 그러네? 그러고 보니까 둘이 친구 먹어서 동참 못 하겠다고 한 거야?"
루시퍼는 그렇게 말하며 침묵을 지킨 채 앉아 있는 예수를 손가락질하며 낄낄거렸고,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거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정보를 주시네?"
"무슨 정보?"
"네가 해 준 말로 지금 딱 나뉘었잖아?"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질로 예수를 가리켰고.
"적이 아닌 사람."
이내 나이아드와 루시퍼를 번갈아 한 번씩 가리켰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조져 놔야 할 사람."
김현우의 말에 나이아드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김현우에게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했고, 그 이야기를 듣고 일순 멍해 있던 루시퍼는-
"푸하하하하핫!"
-이내 폭소를 흘리며 원형 탁자를 쳤다.
이 정도면 정신병자가 아닐까? 싶은 수준으로 폭소를 흘려 대는 루시퍼.
김현우는 그런 그의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그의 물음에도 루시퍼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이내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살짝 웃음기를 없앤 루시퍼는 이야기했다.
"그럼 안 웃긴가? 자기 실력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멋대로 입을 여는 벌레를 보는 게?"
"벌레?"
"그래, 벌레. 자기 실력도 제대로 파악 못 하고 입을 놀리는데, 사실 벌레도 그런 섭리는 자연스럽게 파악하지 않을까?"
루시퍼의 말에 김현우는 피식 웃고는 맞받아쳤다.
"지랄하고 있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네가 그런 것 같은데?"
"과연 그럴까?"
여전한 웃음을 지우지 않고 김현우를 바라보는 루시퍼.
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곤 곧바로 걸음을 옮겨 루시퍼의 앞으로 다가갔고.
"그럼 그렇게 앉아 있지 말고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네?"
이내 김현우는 그 말과 함께 주먹을 휘둘렀다.
어떠한 준비 동작도 없이 내질러진 일격.
그러나 그 일격은 준비 없이 내질러진 일격이라고 보기에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했다.
그러나-
"어이쿠!"
콰드드득!
김현우의 주먹은 루시퍼의 몸통을 그대로 통과했다.
루시퍼의 몸을 통과해 그대로 그가 앉아 있던 의자를 박살 낸 김현우.
그에 김현우는 의문을 느꼈으나 곧 루시퍼의 몸에 닿아 있는 자신의 팔 근처로 마력의 잔류가 흐르는 것을 깨닫고 중얼거렸다.
"환영……?"
"반만 정답! 그래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은 것 같네."
낄낄거리며 대답한 루시퍼는 김현우의 팔을 그대로 통과해 자리에서 일어난 뒤 이내 자리에 선 상태로 스윽 웃었다.
그와 함께 사라지는 루시퍼의 몸.
다리 아래서부터 서서히 사라져 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본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도망치네? 후달리냐?"
"어설픈 도발은 안 하는 게 좋을걸? 어차피 그런 저급한 단어 몇 개를 나열한 걸로 내 화를 이끌어 낼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뭐? 느금마 이미 하늘나라 가셨다고?"
"……."
"아! 하늘나라가 아니라 지옥이지? 느금마 지옥 가셨다고?"
김현우의 갑작스러운 패드립.
그에 루시퍼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굳힐 뻔했으나 겨우 실실거리는 웃음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고작 정령 쪽을 조금 밟았으면서 자신감이 넘치네?"
"너희들 다 비슷하다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별다른 말도 없이 깔끔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우.
그에 루시퍼는 팔짱을 끼고는 이야기했다.
"그럼 계속 그렇게 생각해,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생각을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일이 생겨날 테니까 말이야."
루시퍼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지었고 이내 김현우가 다른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그럼, 오늘은 여기서 퇴장해 보도록 하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김현우가 나타나자마자 고작 10분도 지나지 않아 떠나 버린 루시퍼.
그는 쯧 하고 혀를 참과 동시에 시선을 돌려 나이아드가 있는 곳을 바라봤고.
"뭐야? 얘는 또 어디 갔어?"
김현우는 루시퍼가 사라진 동시에 나이아드가 이미 도망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현우가 한 마디 말을 걸어 볼 새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나이아드가 있던 곳을 쳐다보던 그는 이내 예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이없는 표정과 더불어 살짝 웃음을 더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던 예수는 이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언제나 내 상상을 뛰어넘는군."
"칭찬으로 들을게."
그렇게 말한 김현우는 조금 전 나이아드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 예수를 바라봤고, 그는 곧 입을 열었다.
"설명이 필요한가? 내가 알기로는 이미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뭐, 대강은 듣고 있었지."
루시퍼의 예상대로, 그리고 예수의 말대로 김현우는 모습을 드러내기 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대강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지크프리트가 이 악물고 장소를 말하지 않는 바람에 좀 늦게 오기는 했으나 그가 늦게 왔다고 하더라도 제일 중요한 것에 대한 상황 판단은 끝난 상태였다.
'정령 쪽과 천사 쪽이 손을 잡고 나를 조지려 한다.'
뭐, 본의 아니게 생각보다 이곳에 참석하는 것이 늦었다 보니 깽판을 쳐서 회의를 무마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세 파벌 중에 두 파벌만 참여했으니까 좀 달라지려나?'
김현우는 예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말이야."
"왜 그런가?"
"왜 나를 단체로 조지는 데 참가하지 않았어?"
"그게 궁금한가?"
"뭐, 아주 궁금해 뒈지겠다, 이런 건 아니긴 한데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맞지. 말하기 싫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자 예수는 흠, 하고 짧은 신음성을 내더니 이야기했다.
"뭐,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긴 하네만……."
투툭-
"아무래도 이 공간이 곧 있으면 무너질 것 같아서 모든 이유를 말해 주지는 못할 것 같군."
예수의 말과 함께 금이 가는 듯 이곳저곳에서 쩌적 하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 공간.
그는 슬쩍 당황한 표정을 지은 김현우를 보며 이야기했다.
"아무튼 그럼에도 큰 이유를 두 개 정도 들어 보자면 첫 번째는 바로 그들이 현재 탑을 가지고 행하고 있는 행위가 너무나도 내 뜻과는 맞지 않기 때문일세."
"……탑을 가지고 행하고 있는 행위?"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려 놓고, 문득 얼마 전 정령 쪽에서 들었던 '오물'과 '연료'라는 키워드를 떠올렸다.
허나 그런 김현우의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그는 곧바로 다음 이야기를 했다.
"그리도 두 번째는 자네가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세."
"그것참 고맙네."
쩌저저적! 쩌적!!
말이 끝남과 동시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공간을 보며 김현우는 곧바로 몸을 빼기 위해 몸을 돌렸고.
"혹시라도 자네가 조금 더 정보를 알고 싶다면 33번 탑으로 찾아오도록 하게."
김현우는 예수의 말을 들으며 곧바로 자신이 왔던 곳을 향해 걸음을 북돋아 튀어 나갔다.
와르르 무너지는 공간과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는 포탈.
그러나 김현우는 포탈이 일그러지기 전에 자신의 몸을 그 안으로 욱여넣을 수 있었고.
"후, 뒈지는 줄 알았네."
김현우는 가뿐한 표정으로 포탈 밖으로 나온 뒤,
"하…… 시발."
그 앞에 앉아 있는, 세상이 끝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지크프리트를 볼 수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금방이라도 자살할 것 같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지크프리트.
그 모습을 보며 피식거린 김현우는 말했다.
"야,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냐?"
"지금 진심으로 그렇게 물어보는 건가? 아니면 엿을 먹이려고 그렇게 물어보는 건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는 분명 내가 정령 파벌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지. 네가 저번에 그 불덩이랑 같이 있던 걸 봤으니까 말이야."
"그럼 그걸 알면서도 지금 나한테 그 질문을 하고 있는 건가? 응?"
지크프르트의 떨리는 목소리.
그는 김현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끄아아아아아악! 이런 빌어먹을!!"
-갑작스레 혼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끝났다! 다 끝났다고! 아까 나이아드 님 표정 봤어!? 표정 봤냐고!! 이제 말살령이 떨어지면 네가 먼저 죽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죽게 생겼다 이 말이야!! 응!? 알아들어!? 내가 먼저 죽게 생겼다고!"
"……."
"으아아아 시발…… 시발시발시발!!! 내가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뒈지게 된다고!? 꿈이지? 그래 이건 꿈이어야 해! 꿈이어야 한다고! 왜 이런 좆같은 일이 나한테 벌어지는 거야! 으아아아아악!"
발광하기 시작하는 지크프리트.
김현우는 한동안 발광하는 지크프르트의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한 마디로 그냥 정령 업계에서 팽 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거네?"
"이게 무슨 소리로 들리나!? 응!?"
"그럼 나랑 팀 하면 되겠네?"
"그게 무슨 개소리……!"
"어차피 내가 이미 그쪽에 데려가서 정령 파벌에서 팽 당하는 건 시간문제라며? 그렇다고 걔네랑 척진 너를 다른 파벌에서 받아 줄 것 같지는 않고, 그럼 그냥 나랑 팀 하는 게 좋지 않아?"
"……!"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말하는 김현우에게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결국 그가 한 말은 틀린 게 없었으니까.
"하……."
그리고 그렇기에, 지크프리트는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고 있는 김현우를 보곤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322화. 나 몰래 뭐해? (5)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공간.
그곳에서 푸른 눈동자, 데블랑은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슬쩍 눈을 내리까는 것으로 인사를 했다.
"좌표는 찾았어?"
그러자 들려오는 목소리.
데블랑은 이야기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죄송합니다.]
"뭐 괜찮아. 솔직히 너희가 빨리 찾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혹시 다른 쪽에서는 좀 진전이 있으셨습니까?]
"악마 쪽은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던 모양이지만 아직도 찾기에는 좀 오래 걸리는 것 같네."
[…….]
"뭐, 그래도 너무 급하게 찾을 필요는 없어. 이미 김현우가 탑 위로 올라온 것만으로도 우선 기본적인 것들은 모두 갖춰졌으니까 말이야."
김현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만족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 그것.
그 말에 데블랑은 슬쩍 눈치를 보고는 다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안 그래도 그것에 대해 조금 보고드릴 것이 생겼습니다.]
"보고할 거?"
[예.]
"뭔데?"
[그것이…….]
데블랑은 살짝 말을 길게 늘이는 것으로 뜸을 들이는 듯하더니 이내 김현우가 지금까지 벌인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나이아드와 척을 지기 시작한 것부터 시작해서 정령 파벌의 세계수를 박살 내 버렸고, 그 덕분에 정령파벌은 다른 파벌들과 손을 잡고 김현우를 소멸시키려 한다는 것까지.
[거기에 더해서, 아무래도 김현우를 처리하는 데는 정령 파벌 말고 '관리 기관'도 움직임을 보일 것 같습니다.]
"응? 걔네들은 또 왜? 뭐 접촉한 게 걸리기라도 했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제 능력은 그럴 가능성을 0%로 만드니까요.]
"하긴 그건 그렇지, 그럼 도대체 왜 그런 예측을 하는데? 그냥 정령 쪽에서 의뢰했기 때문에 보낸 거 아니야?"
[솔직히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그것의 질문에 데블랑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이야기했다.
[아닙니다. 이건 아직 정보가 부족하니 조금 더 관리 기관 쪽의 행동을 보고, 보고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눈을 슬쩍 내리깔고 이야기하는 데블랑.
그에 그것은 흐음, 하는 짧은소리를 내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그러도록 해. 그렇다고 해서 네 정체가 들통 날 정도로 움직이면 안 되는 거 알지?"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확실히 그런 상황이면 조금 문제가 되긴 할 것 같네. 아무리 김현우라고 해도 탑주 전체가 덤비면 조금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도 제가 차후 정보를 수집한 이후 한 번 더 보고하겠습니다.]
데블랑의 말.
허나 그것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을 유지한 뒤 이내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예?]
"이참에 잠도 좀 자서 다시 마력도 회복했겠다. 이참에 얼굴도 볼 겸 본인한테 들어보지 뭐."
[본인에게…… 말입니까?]
"왜? 안 돼?"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데블랑이 말을 줄이며 그것의 눈치를 보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자, 그것은 피식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말했다.
"만약 관리 기관에 걸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거라면 쓸데없는 걱정인거 알지?"
[……알겠습니다.]
데블랑은 그것의 말에 조용히 대답하고는 눈을 감았고, 이내 얼마 있지 않아 그 공간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그렇게 데블랑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던 그것은-
"자, 그럼 한번 나타날 타이밍을 노려 볼까?"
-그렇게 중얼거렸다.
####
그로부터 하루 뒤, 51번 탑의 최상층.
"자, 이제부터 내 동료가 될 사람이야."
김현우의 말에 그의 옆에 있던 지크프리트는 온갖 감정이 담겨 있는 눈빛으로 김현우를 쳐다보았으나 이내 어쩔 도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슬쩍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지크프리트라고 한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그는 노아흐와 아브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분명 그의 인생은 투쟁과 전투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맨 처음 이성이라는 것이 생겼을 때부터 그는 죽지 않기 위해 투쟁했고, 끝없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위치를 위해 싸움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것이 바로 이 탑주의 자리.
오로지 투쟁만이 존재했던 세상에서 지크프리트는 결국 홀로 탑의 정상에 올라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깨고 평온한 삶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 성공했었다.
탑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난 뒤부터 더 이상 지크프리트에게 투쟁이라는 것은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그가 탑주 회의에 참가해 정령 파벌에 들었던 그 순간부터 지크프리트에게 투쟁이라는 것은 먼 이야기가 아닌,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탑주의 자리는 평온했으니까.
그리고 그 평온함에 지크프리트는 항상 만족했다.
불만족스러워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의 삶은 투쟁뿐인 삶이었고, 그렇기에 이 평온함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불과 얼마 되지도 않은 그 짧은 시간에 지크프리트에게 주어졌던 평온함은 깨지고 말았다.
깨진 것뿐이 아니라 아예 상상조차도 못 할 정도로 개박살이 나 버렸다.
'이 새끼 때문에……!'
맨 처음 갑작스레 탑에 나타났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탑에 나타난 김현우는 상상 이상으로 강했으니까.
'그때 건드리지 말걸.'
지크프리트는 내심 그때의 일을 후회했다.
만약 저 녀석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다면 이런 사달이 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
슬쩍 눈동자를 굴려 김현우를 째려본 지크프리트.
그러나 김현우는 그런 지크프리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브와 노아흐에게 지크프리트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지크프리트는 한숨을 내쉬며 결심했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확실하게 노선을 바꿔야 한다.'
어차피 어제 김현우를 그 회의장에 데리곤 간 것으로 지크프리트는 정령 파벌에서 탈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그냥 탈퇴한 것이 아니라 척을 지고 탈퇴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크프리트는 정령 파벌의 본거지인 세계수를 개박살 내 버린 김현우와 손을 잡은 것과 다름이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초에 지금부터 찾아가서 변명을 한다고 해도…….'
살아남을 확률이 아주 조금은 있기는 했다.
아주 조금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렇게 빌어서 살아남는다고 해 봤자 이미 그는 내놓은 놈 취급당할 것이 뻔했기에 결국 지크프리트는 노선을 갈아타기로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폭주기관차 김현우의 노선으로.
'……솔직히 이게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에게는 남아 있는 선택지가 '전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없었다.
지크프리트가 그렇게 홀로 결심을 다지고 있는 사이, 김현우에게 이야기하던 아브와 노아흐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하기 시작했다.
"잘 부탁해요, 저는 아브라고 해요."
"나는 노아흐라고 하네. 앞으로 잘 부탁하지."
"잘 부탁한다."
아브와 노아흐의 손을 차례로 잡으며 인사하는 지크프리트.
김현우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고, 이내 지크프리트는 그들과의 인사를 끝내고 김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뭘?"
"정령계를 말하는 거다. 어제 네게 듣기로 정령과 천사들이 힘을 합친다고 하지 않았나?"
"뭐, 그렇지? 우선 듣기로는 그렇게 들었어."
"그럼 뭔가 대책이 있는 거 아닌가?"
"대책?"
"그래, 나름대로 생각한 대책은 없나?"
지크프리트의 물음에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없는데?"
"……?"
"왜 그런 표정으로 봐?"
"없다고?"
"……없어."
"……정말로?"
"그럼 가짜로 말하겠냐? 애초에 어제 그런 말을 들었는데 무슨 대책을 짜?"
김현우의 당당한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은 지크프리트.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지 아예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는 건가?"
"그렇지. 지금부터 그 대책이란 걸 생각해 보려고 너를 부른 거잖아?"
김현우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지크프리트.
'……또라이인 데다가 대책까지 없을 줄이야.'
그는 짧게 감탄하고는 입을 열려 했으나.
"……."
이내 지크프리트는 김현우의 양손을 보고는 본능적으로 튀어 나오려는 말을 참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스스로의 입을 달랬다.
그렇게 자신을 진정시킨 지크프리트는 입을 열었다.
"알겠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생각해 보는 게 좋겠군."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자 시작해 보지."
"그래, 수고해."
그리고 곧 지크프리트는 자신의 귓가에 들린 목소리에 의심을 품고 김현우를 바라보았다.
"?"
"?"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수고하라고. 뭔가 잘못됐나?"
"당연히 참가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왜?"
"???"
지크프리트는 그 말에 대답하는 것 대신 기이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김현우의 손이 약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 눈빛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그런 지크프리트의 모습을 탐탁지 않게 바라본 김현우는 이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뭐, 그 말은 당연히 농담이고, 우선 당장은 내가 어디 한번 가 볼 데가 있거든, 우선 그전까지는 그 녀석들이랑 이야기하고 있어 봐."
"……갈 곳?"
"그래, 갈 곳이 있어서 말이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몸을 돌리려다-
"아, 깜박했다."
-이내 탄성을 내지르고는 이내 몸을 돌려 지크프리트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레 몸을 돌리는 김현우의 모습에 지크프리트는 의문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노아흐, 그것 좀 줘 봐. 내가 어제 말했지? 만들어 놓으라고."
"아, 그거 말인가?"
"그래."
"알겠네, 좀 기다려 보게나."
노아흐는 김현우의 말에 곧바로 자신의 품 안에서 어느 한 종이를 꺼냈다.
"그건…… 뭐지?"
노아흐의 품에서 나온 종이를 빤히 바라보며 묻는 지크프리트.
그에 김현우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그의 앞에 두고는 말했다.
"아, 뭐 별건 아니고 그냥 계약서 같은 거야."
"……계약서?"
"그래, 굳이 네게 일일이 설명하기는 조금 귀찮으니까 그냥 여기에 사인만 하면 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지크프리트 앞에 있는 종이의 하단을 가리켰고.
"아, 사인은 마력으로 하면 된다?"
"아…… 아니 잠깐, 이게 무슨 계약서인지는 알려 줘야……."
"별거 아니라니까? 그냥 너는 여기에 가볍게 손가락만 휘적거리면 돼."
"그러니까 이게 무슨 계약서인지-."
"사인하고, 그냥 편하게 대책 회의 할래? 아니면 질질 끌다가 몇 대 맞고 대책 회의 할래?"
"……."
김현우가 웃으며 주먹을 쥐자 지크프리트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와 계약서를 번갈아 바라보다-
"나……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그렇게 소리쳤다.
"뭐?"
"나를 못 믿는 거냐고 물었다! 너도 알다시피 이미 나는 정령 쪽과는 완전히 척을 졌다!"
"그래?"
"그렇다!"
"그럼 하면 되겠네."
"?"
"그럼 하면 되잖아? 어차피 여기 말고는 다른 데 갈 곳도 없는 거 아니야?"
"아니, 그게……."
"야."
"……."
그날,
지크프리트는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계약서의 끝에 사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323화. 이 탑주들 실화냐? (1)
하얀 공간 속에서 그는 입을 열었다.
"정령과 천사가 손을 잡았다……라."
"그렇습니다."
헤르메스의 긍정에 남자는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고는 입을 열었다.
"애매하군. 두 곳만 연합을 했다라……."
툭. 툭.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는 남자.
헤르메스는 언제나 그렇듯 남자가 입을 열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그렇다면 놔두도록 하지."
"……놔두시겠습니까?"
헤르메스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이야기했다.
"어차피 세 파벌이 전부 연합을 한 것만 아니라면야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지. 우리가 굳이 탑주들을 수정해야 할 일이 오지 않는다면 어디까지나 탑주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비즈니스 관계 정도로만 인식되는 게 좋아."
"그건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만."
"뭐 그와는 별개로 51번 탑주는 나름대로 처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하지 않았나. '우선은' 지켜만 보도록 하지.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움직이면 아무래도 다른 탑주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
게다가-
"어차피 탑주들이 연합한 시점에서 제대로 처리를 하지 못했을 때가 돼서야 우리가 나서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여기서 51번 탑주가 기껏 만들어 놓은 이 상태를 완전히 부숴 버리는 짓만 또 안 한다면 말이야."
남자의 말에 헤르메스는 대답하는 것 대신 고개를 숙였고, 한동안의 침묵 뒤에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래서, 데블랑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찾아보았나?"
"예. 저번에 말씀하셨던 대로 데블랑에 대해 조금 더 조사를 해 봤습니다."
"누구인지 알아냈나?"
"정확히 그 이름을 사용한 게 누구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만, 대충 짐작이 가는 내용이 있습니다."
"……대충 짐작 가는 내용?"
"예."
"뭐지?"
헤르메스는 자신이 조사해 온 것에 대해 남자에게 보고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그 보고를 듣고 있던 남자는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정말인가?"
"아직 정확히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제 추론이라기보다는 '고서장'의 추론이기도 합니다."
헤르메스가 이야기하자 남자는 중얼거렸다.
"데블랑…… 데블랑이라……."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중얼거린 남자는-.
츠츳-
"!"
순간 섬뜩한 마력을 발산했다.
그 앞에 서 있던 헤르메스가 숨을 삼킬 정도로 섬뜩한 마력은 그들이 앉아 있는 방을 넘어 순식간에 새하얀 공간 전체로 퍼져 나가며 그 하얀 공간에 있는 관저를 울렸다.
그야말로 압도적이라는 말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섬뜩한 마력.
그 상태에서 남자는 입을 열었다.
"그 데블랑이라는 자가 정말 네가 말한 대로 '그 녀석'과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있다는 말이지?"
"화……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확률은 있다고 들었습니다."
억지로 숨을 내뱉으며 말하는 헤르메스.
분명 마력을 발산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을 비틀어 버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에 헤르메스는 인상을 찌푸렸고.
그렇기에 헤르메스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남자가 마력을 다시 회수한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또 한번의 침묵이 도래한 방 안.
"……."
헤르메스가 조금 전 주변을 금방이라도 먹어치울 듯 움직였던 남자의 마력을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릴 때 그는 말했다.
"조금 더 확실한 정보를 알아 오도록."
"……예?"
"확실한 정보 말이야. 너도 알고 있겠지? 만약 정말로 그 녀석의 잔재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다면 반드시 없애야 한다."
남자의 말에 헤르메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 부분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확실한 정보를 조사해 오도록, 솔직히 마음만 같아서는 그 녀석과 관련될 가능성만 있다고 생각하면 51번 탑주고 뭐고 전부 날려 버리고 싶다만."
쯧.
"기껏 만들어 둔 지금의 시스템을 저번에 만들었던 '양식장'처럼 박살을 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번에도 저번처럼 그 녀석의 잔재가 나타났다고 다짜고짜 날려 버렸다가는 목표하는 일이 점점 뒤로 밀릴 테니까 말이야."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짧게 혀를 찼고, 헤르메스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꼭 말씀하신 대로 추가적인 정보를 모아 오겠습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남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고.
"……아직도 남아 있을 줄이야. 끈질기군."
남자는 여태껏 볼 수 없었던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책상 서랍을 열어 하나의 돌을 꺼냈다.
"……."
그것은 바로 헤르메스가 51번 탑주에게 '비용'으로 받아 온 물건.
남자는 그 돌을 자신의 손 위에 굴리며 바라봤다.
'……아무리 마력을 집어넣어 봐도 그 녀석의 잔재는 아예 느끼지 못했다. 아니, 잔재는커녕 이건 51번 탑에서 만들어진 게 명확한 업이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돌멩이를 몇 번 굴리곤.
"이상하군…… 이상해."
이내 그렇게 중얼거리곤 눈을 감았다.
####
51번 탑의 최상층.
김현우는 주변의 모든 것이 천천히 멈춰 나가기 시작하는 '찰나'가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 곧바로 입을 열었다.
"눈동자냐?"
[정답.]
김현우의 말에 곧바로 그의 앞에 나타난 검은 동공의 눈동자는 눈꼬리를 기묘하게 치켜뜨면서 이야기했다.
[내가 오는지 용케 알았네?]
"몇 번이나 만났는데? 이제 네가 올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쯤은 체크하고 있지."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묘하게 다시 봤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고, 그는 그런 눈동자를 보며 이야기했다.
"그보다 마침 잘됐네. 물어볼 것도 좀 있었는데."
[물어볼 거? 우연이네, 나도 너한테 물어볼 게 좀 생겨서 온 거였는데.]
"나한테 물어볼 거?"
[응. 듣기로는 너를 죽이려고 탑주들이 연합했다면서?]
"왠지 알고 있을 것 같기는 했는데 진짜로 알고 있네?"
김현우의 물음에 눈꼬리를 살살 흘리는 눈동자.
[당연하지, 나도 내 나름대로 정보책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진짜야?]
"사실이야. 뭐, 그래도 세 파벌이 전부 연합을 한 게 아니라 천사랑 정령 쪽만 연합한 것 같지만 말이야."
[응? 천사랑 정령 쪽만? 악마 쪽은 아니고?]
눈동자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엉, 내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있었는데 악마 쪽은 나를 소멸시키는 데 참가하지는 않았어.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됐다고 해야 하나?"
[도움이 되는 존재?]
"그래, 아무래도 그쪽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이걸로 질문은 끝이야?"
[응? ……뭐, 그렇긴 한데. 애초에 내가 나타난 건 그걸 물어보기 위해서였으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두 파벌이면 걱정할 필요도 없겠네?]
"세 파벌이면 걱정하고?"
[그렇지. 만약 두 개 파벌이 아니라 세 개 파벌이 전부 움직이면 관리 기관도 너를 처리하려고 움직였을 테니까 문제가 조금 있지.]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관리 기관이 왜 움직여?"
[그거야 당연히 관리 기관에서는 세 개로 나누어진 파벌이 다시 뭉치는 것을 원치 않아 하니까?]
눈동자의 말에 순간 김현우는 뇌정지가 온 것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복잡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 새끼들은 도대체 뭔데 그렇게 구조가 복잡해? 도대체 뭘 기준으로 하고 움직이는 건데?"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자 눈동자는 이야기했다.
[별거 없어. 그 녀석들은 그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안정적인 공급처가 파괴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거지.]
"……공급처가 파괴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래,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고 싶긴 한데 아마 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내가 다시 눈을 감기 전까지는 이 이야기를 계속해야 할 것 같거든, 그러니 우선 네가 하고 싶은 말부터 해 봐.]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곧 자신이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열었다.
"33번 탑에 가는 법 좀 알려 줘."
[33번 탑?]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까 말했지? 악마 쪽에 볼 만한 사람이 있다고 말이야. 근데 막상 가려니 각 탑에서 탑으로 어떻게 이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의 말에 눈동자는 눈꼬리를 슬쩍 위아래로 움직이고는 이내 대답했다.
[확실히, 너는 아직 제대로 '본 적'은 없으니까. 게다가 기본적으로 마법은 쓸 생각도 안 해 본 것 같고 말이야.]
"그렇지, 저번에 들어보니까 마법 한번 쓰려면 머리 엄청나게 굴려야겠더구만?"
김현우는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절대 못 하지."
그런 김현우의 표정에 재미있다는 듯 눈웃음을 지은 눈동자.
[그렇다면야 이번에 한해서는 내가 33번 탑으로 보내 줄 수도 있어.]
"그래? 그건 또 좋은 소리네."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완전히 도와줄 수는 없어,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는 관리 기관 쪽에 모습을 들키면 안 되니까 말이야.]
"그럼 어떻게 보내 준다는 건데?"
[이렇게.]
눈동자는 그 말과 함께 김현우의 앞에 무엇인가를 떨어뜨렸다.
"……이건?"
그것은 바로 푸른색의 수정이었다.
[거기에 마력을 집어넣으면 33번 탑으로 이동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로 그 수정에 마력을 집어넣으면 돼.]
-뭐, 갈 때 올 때 한 번씩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1회용이기는 해도 말이야.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금세 피곤해졌다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역시 이야기 안 듣기를 잘했네. 이야기를 일일이 다 들었으면 도움을 못 줄 수도 있었겠어.]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기 시작하는 눈동자.
"뭐야 이번에도 벌써 가는 거?"
[아직도 눈치 못 챘어? 나는 여기에 마력을 사용해서 잠깐 현현한 거라구. 네게 그 수정을 넘겨주느라 마력을 사용했으니 조금 쉬어야 해.]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절대로 관리 기관의 이목을 끌지 마. 아마 지금 이번 일로 더 관심이 끌렸을 테니까.]
눈동자는 그 말과 함께 이내 김현우의 말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눈을 감아 버렸고.
이내 눈동자가 눈을 감음과 동시에 김현우는 자신이 찰나에서 빠져나온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 김현우는 괜스레 머리를 긁적이고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푸른 수정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이제 막 회의를 시작한 이들을 바라봤다.
죽상을 지으며 입을 열고 있는 지크프리트와, 그의 정보를 빠짐없이 챙기는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는 아브와 노아흐.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려 푸른 수정을 바라보았고, 이내 눈동자의 말을 떠 올리고는 그 안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우우웅-.
마력을 집어넣자마자 순식간에 발광하기 시작하는 수정.
김현우는 그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마력을 밀어 넣었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우는 자신의 눈앞에 새하얀 빛으로 감싸이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야?"
김현우는 33번 탑의 최상층.
다른 탑주들에게는 '지옥'이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324화. 이 탑주들 실화냐? (2)
모든 것이 새하얀 세상.
하지만 관리 기관이 있는 관저와 이곳은 본질적으로 다른 곳이었다.
관리 기관이 있는 곳은 모든 것이 새하얀 게 아닌, 그냥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이었고, 이 공간은 그와는 다르게 여러 가지 사물들이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보기만 해도 부드러워 보이는 하얀색의 구름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그러한 구름 위에 만들어져 있는 수많은 건물.
마치 법칙을 무시하기라도 한 듯 새하얀 하늘 위에 있는 수십 개의 구름들의 위에는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것 같은 중세 시대의 신전과도 같은 건물들이 지어져 있었고.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중에서도 그 공간 한가운데 지어져 있는 거대한 공간에서는 4명의 천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대천사라는 것을 의미하듯 화려하게 빛이 나고 있는 3쌍의 날개.
그중에서도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붉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루시퍼를 바라보며 묻자, 루시퍼는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한차례 훑고는 말했다.
"당연히 죽일 생각이야.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폭언을 들어서 말이야."
루시퍼의 간단명료한 대답.
그 대답에 이번에는 루시퍼의 오른쪽에 있던 금발 머리칼의 남자, 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천사들과 소속 탑주들을 집결시킬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렇다면……?"
"너무 그렇게 총력전으로 가려고 하지 마. 사실 죽여 버린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인력을 소모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루시퍼의 말에 지브리엘은 순간 고개를 갸웃하고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인력 소모라니요……? 물론 51번 탑에 총력전을 펼치면 천사들이 하늘의 곁으로 돌아갈 수는 있겠으나 저를 포함한 대천사들과 탑주들은 전혀 피해가 없을 겁니다."
그런 지브리엘의 말에 루시퍼는 그를 한번 바라보고는 슬쩍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보였고.
"혹시."
루시퍼가 그런 표정을 짓는 순간,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백금발의 남성, '우리엘'은 입을 열었다.
"……루시퍼 님께서는 51번 탑주를 저희가 총력전을 벌이더라도 어느 정도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강자로 보고 계시는 건가요?"
그녀의 말에 루시퍼는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우고 슬쩍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정답. 역시 한 번 정도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해서 그런지 대충 감을 잡고 있는 것 같군."
"……정말입니까?"
지브리엘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루시퍼는 가볍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이야기했다.
"뭐, 우리도 총력전을 펼치면 51번 탑주를 소멸시키는 거야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녀석은 확실히 강해."
-분명 우리도 그대로 총력전을 벌이다가는 쓸데없는 손실을 입게 될 거야.
루시퍼의 말에 입을 다문 지브리엘, 그 옆에 있던 가브리엘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그가 이프리트와 싸움을 벌이는 것을 볼 때부터 심상치 않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강할 줄이야."
"뭐, 마력만을 보낸 터라 그 아래까지 꿰뚫어 보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루시퍼는 그렇게 말하며 회의 때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분명 마력을 이용해 사념만으로 대화를 했음에도 눈에 들어오는 진득한 투기.
거기에 더불어.
'그때의 그 공격.'
그 어떤 준비 동작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내질러져 있었다는 듯 루시퍼의 사념체를 파고든 그 공격은 그로서도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비록 사념체로 가서 전체적인 감각 정밀도가 떨어진다고 하지만 루시퍼는 김현우의 공격을 꿰뚫어 보지 못했으니까.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루시퍼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자 들려오는 가브리엘의 목소리.
그에 루시퍼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바로 움직이지는 않을 거야. 솔직히 마음만 같아서는 그냥 총력전으로 가고 싶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무조건적으로 피해가 일어날 테니까."
"그렇다면……."
"알다시피 우리가 먼저 나설 필요는 없어. 우리가 굳이 먼저 나서지 않더라도 정령 쪽에서 움직임을 보이거나 할 테니까."
그러면-.
"우리는 적당히 눈치를 보다 51번 탑주가 제일 약할 때 그 녀석을 건들면 되는 거야. 만약 그 녀석이 정령 쪽을 혼자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뒤에도 힘이 빠지지 않으면 녀석을 이 천국으로 초대해도 되겠지."
"천국으로요……?"
"그래, 그 보잘것없는 나무와 다르게 우리는 이 천국에서 가장 많은 힘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안 그래?
루시퍼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
그렇게 루시퍼가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우리엘, 아니 '데블랑'은 자신의 푸른 동공을 슬쩍 감았다.
####
"여기가 맞나?"
김현우는 앞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보이는 것은 검디검은 하늘.
분명 저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하늘과 구름은 김현우에게 기묘한 인상을 남겨 주었고, 그것은 김현우의 발아래에 있는 붉은 대지도 마찬가지였다.
툭툭-.
모래도 아닌, 딱딱한 돌이 이리저리 엉켜서 만들어진 붉은 대지.
그리고 그 붉은 대지 위로 솟아올라 있는 거대한 고성.
물론 고성의 주변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 고성의 하늘은 다른 곳과 변함없이 어두웠고, 그것은 고성을 지탱하고 있는 땅도 마찬가지였다.
"……."
혹시나 다른 것들은 없나 하고 살펴보자 고성의 주변으로 몇몇 개의 식물류들이 자라나는 것을 확인했으나.
'못 먹게 생겼네.'
자라나는 식물들은 척 보기에도 먹으면 어떻게든 탈이 날 것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에 김현우는 깔끔하게 시선을 돌려 고성을 바라보려 했다.
"51번 탑주님이십니까?"
자신의 앞에 한 악마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누구?"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갑작스레 나타난 악마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예수와는 다르게 온몸에 갑각류의 껍질을 달고 있는 악마는 언뜻 보기에 굉장히 흉측하게 생겼으나 그런 외형과는 다르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예. 듣기로는 스승님께서 손님이 한번 찾아오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승님이라고 하면…… 예수?"
김현우의 물음에 갑각류를 뒤집어쓴 악마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
분명 미소를 지은 것일 텐데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든 김현우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다 표정을 고쳤고.
"그럼 따라오시죠."
악마는 그런 김현우의 실례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으로 곧바로 몸을 돌려 고성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에 김현우는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그의 뒤를 따라 고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메마른 대지에 단 하나밖에 없는 고성을 향해.
"……."
고성을 향해 걷는 동안 김현우와 갑각류의 악마는 단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김현우는 문득 고성으로 가는 길이 조금은 멀다고 생각했다.
"……?"
분명 그가 걸은 시간은 꽤 된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고성까지 남은 거리는 자신이 걸어온 것보다도 한참 남아 있는 것 같은 기현상.
하지만 길을 안내해 주고 있는 악마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걸음을 옮길 뿐이었고, 그렇기에 김현우는 딱히 질문하지 않았고 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후……."
김현우는 분명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기는 했으나 고성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제야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는 고성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고성의 여기저기는 제대로 유지, 보수가 되지 않았는지 외벽이 부서지거나 상해 있었고, 심지어 그 문마저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고성을 넘어 '폐성'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았다.
"……놀랍군요."
"응?"
그렇게 김현우가 고성을 구경하고 있을 때 들린 목소리에 그가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갑각류의 악마가 그를 놀랍다는 듯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고행의 길을 이렇게 빨리 통과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고행…… 뭐?"
"고행의 길입니다. 설명을 해 드리고 싶지만 우선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이 나면 차차 설명해 드리도록 하고……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스승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악마는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가 미처 무슨 질문을 하기도 전에 곧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뭐야……?"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김현우는 묘하게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했으나 이내 그 악마를 따라 고성 안으로 들어갔다.
고성의 내부는 외부와 별다를 바 없었다.
물론 외부보다는 풍화가 심하지 않았으나 내부도 그 상태가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여기저기 이가 나가고 부서진 돌계단을 한참이나 올랐을 때.
"왔군."
김현우는 고성의 꼭대기 층에서 기다렸다는 듯 원형 탁자에 앉아 있는 예수를 볼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내려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김현우를 예수에게 데려다준 제자는 스승에게 인사를 받고는 슬쩍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 이내 자취를 감추었고, 예수는 김현우를 보며 가벼운 웃음을 짓고는 손짓했다.
"우선 앉게."
예수의 말에 김현우는 우선 별다른 말없이 그의 앞에 앉았다.
툭.
앞에 앉자마자 예수는 김현우의 앞으로 쇠잔에 담겨 있는 포도주를 넘겨주었고, 이내 이야기했다.
"그래,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다른 정령과 천사들에 대해 알고 싶다는 거겠지?"
"그것뿐만이 아니라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정보들은 전부 알고 싶은데? 거기에 더해서 '관리 기관'에 대한 정보까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고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예수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기했다.
"뭐, 사실 자네가 이곳에 온 시점에서 내가 해 주지 못할 이야기는 없지. 그러니 우선 맨 처음부터 이야기해 주도록 하겠네."
"맨 처음?"
"그래, 내가 그때 약속하지 않았나? 이곳까지 오면 내가 그들과 손을 잡지 않은 이유를 말해주겠다고 말이야."
예수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 말고도, 그 녀석들이 탑을 사용하고 있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었나?"
"뭐, 정확히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네만…… 자네의 말이 맞네."
예수의 말에 김현우는 자신의 머릿속에 야차에게 들었던 정보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그거지? '오물'이나 '연료' 말이야."
"분명 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어떻게 알고 있는 겐가? 그건 그 녀석들이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하는데 말이지. 뭐, 전부 알음알음 알고 있지만 말일세."
"나도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야. 그냥 그 녀석들과 싸움이 났을 때 언뜻 들었던 것뿐이지."
"그런가."
"그래서, 도대체 그게 뭔데?"
김현우는 그렇게 물으며 팔짱을 꼈다.
생각해 보면 이 주제에 관해서는 데블랑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계속 어긋나서 물어보지 못해 상당히 궁금증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예수를 바라보는 김현우의 모습에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령들이 말하는 '오물'은 바로-."
325화. 이 탑주들 실화냐? (3)
부서진 세계수의 아래의 지하.
세계수의 뿌리들이 가득히 자라 만들어 낸 하나의 방 안에서 네 명의 정령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로 나이아드.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지크프리트, 설마 그가 우리를 배반할 줄이야……! 기껏 소멸시키려고 한 것을 참아 주었는데……!"
나이아드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 옆에 있던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는 입을 열었다.
"쯧, 정말로 배반한 건가? 내 생각으로는 그 미친 또라이에게 협박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프리트의 말에 나이아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이프리트, 자신이 소멸을 반대한 탑주라고 해서 편을 들려고 하지 마세요. 그는 틀림없이 저희를 배반하고 김현우의 편에 붙었습니다."
나이아드의 말에 이프리트는 입을 다물고는 곤란하게 되었다는 듯 침음성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한동안 침묵이 가득해진 방 안.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리얼이었다.
그녀는 나이아드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우선 천사 파벌의 도움을 받는 것은 확정이 되었으니 저희도 해야 할 일을 정해야 하지 않겠어요?"
"해야 할 일이라면…… 설마 그 또라이를 다시 한번 상대하자는 건가?"
"당연한 거 아닌가요?"
무슨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 이프리트를 쳐다보는 나이아드.
그에 이프리트는 끄응 하는 침음성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끼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그의 말에 에리얼과 오리에드는 얼마 전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단 한 번을 제대로 된 반항을 해 보지도 못한 채 김현우에게 모조리 개박살이 나 버리고, 거기에 더해서 세계수까지 박살이 나 버린 그때의 기억.
그 모습을 떠올리며 다른 정령왕들이 슬쩍 몸을 떨자 나이아드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이야기 했다.
"아무리 저희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꼬리를 말아서는 안 돼요. 당신들도 보셨을 텐데요? 그가 세계수의 무슨 짓을 했는지……!!"
파바방!!
나이아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사방으로 물보라를 뿜어내고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게다가, 천사 쪽에서 도움을 주기로 했다고 해도 그들은 저희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 이상 절대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그건 다들 아실 텐데요?"
나이아드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정령왕들.
그도 그럴 것이 나이아드가 한 말은 굉장히 그 신뢰도가 높은 말이었다.
아무리 보상을 걸고 도움을 주겠다고 해도 천사 파벌은 결코 먼저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익을 끔찍하게 계산하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러니 다들 준비하세요. 저희는 무조건 그 녀석과 싸워야 하니까요."
그렇기에 다른 정령왕들에게 뜻을 전한 나이아드는 적개심 어린 눈빛으로 부서진 세계수를 바라보곤 중얼거렸다.
"거기에 우리를 배반한 그 개자식도 반드시 소멸시켜 버리겠어요."
####
"바로 탑 아래에 있는 계층인들을 말하는 것일세."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예수를 보며 김현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
"……음?"
"왜?"
"아니, 생각보다 별로 놀라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말일세. 역시 알고 있었나?"
예수의 물음에 김현우는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 말했듯이 오물이나 연료라는 키워드를 알고 있기는 했는데 대충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몰랐어. 다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을 뿐이지."
"예상했다고?"
예수의 되물음에 김현우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물'이니 '연료'니 해도, 결국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정령들이 한 이야기는 51번 탑에 빗대어서 생각해 보면 굉장히 비슷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니까.
51번의 전 탑주였던 '형체 없는 자', 그러니까 심마는 계층인들을 자신의 업을 모으기 위한 소모품 취급을 했었다.
한 마디로 김현우에게 있어서 정령들이 말하는 '오물'은 최상층을 제외한 다른 탑으로 인식할 수 있었고, '연료'는 탑을 오르고 있던 '등반자'들로 해석할 수 있었기에 예상하는 것 또한 편했다.
애초에 비슷하다곤 했지만 심마와 정령들이 한 짓은 그 단어만 바꾸면 똑같은 짓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렇지, 애초에 내가 탑주가 되기 전에도 대충 그런 느낌이었는데?"
"……뭐라고?"
김현우의 말에 이번에는 도리어 자신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 예수.
그는 순간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더니 이내 이야기했다.
"……괜찮다면 혹시 자네가 탑주가 되기 전의 이야기를 좀 해 줄 수 있겠는가?"
"……갑자기?"
"정확히는 자네의 옛 이야기가 듣고 싶다기보다는 탑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네만, 가능하겠나?"
예수의 말에 김현우는 왠지 서로의 위치가 은근하게 바뀐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탑에 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하기 시작했다.
탑에 계층이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탑을 만든 다섯 명의 존재가 있는 것까지.
물론 그 이외의 것도 김현우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대충 정도는 이야기해 주었다.
뭐, 애초에 김현우의 머릿속에 있는 내용들이야 실질적인 탑의 구체적인 내용이라기보다는 아브나 노아흐에게 들었던 내용을 대충 짜깁기하여 이야기해 주는 것뿐이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대단하군."
그러나 고작 그런 짜깁기의 내용을 설명해 준 것 만으로도 예수는 무척이나 충격적인 듯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런 예수의 모습을 본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게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이야?"
"당연히 놀랄 만한 일일세.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탑은 자네가 가지고 있는 51번 탑처럼 생기지 않았네."
"51번 탑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김현우의 되물음에 예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는 아마 51번 탑에서 나와 탑주가 되었기에 다른 탑도 그렇게 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네만, 실상은 전혀 다르네."
예수는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김현우에게 51번 탑을 제외한 다른 탑들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그 탑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던 김현우는.
"……그 말 진짜야?"
"내가 굳이 자네에게 이런 것으로 거짓을 전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지 않나?"
"아니, 그건 맞긴 한데."
김현우는 묘하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이야기 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존재하고 있는 탑들은 51번 탑을 제외하고는 계층이 전부 두 세 개뿐이라는 말이야?"
"그렇네."
"그리고 거기에 업을 수급하는 방법도 다르고?"
"맞네."
예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했다.
"우선 기본적으로 다른 탑주들은 자네가 이야기해 준 것처럼 외부인 '등반자'를 사용하지 않고, 철저히 계층인들만을 사용해 업을 만들어 낸다네."
"……내부인들로만?"
"그래, 게다가 업을 만들어 내는 방법은 탑을 소유하고 있는 탑주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지지."
"예를 들면?"
김현우의 말에 예수는 잠시 고민하고는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자네가 비슷하게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정령들을 예로 들도록 하지,"
예수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말해 두자면 정령들은 자네의 예상과 조금 비슷하게 계층인들을 서로 싸우게 해 그 업을 얻고 있네."
"……계층인들끼리 싸움을 붙인다고?"
"그래, 바로 그것일세. 한 마디로 '전쟁'을 일으켜 그 업보들을 가지고 오는 거지. 사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들이 싫네만 내가 진짜로 그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의 추악함 때문이지."
"그들의 추악함 때문이라고?"
"그렇네, 그들은 자신들의 계층민을 싸움 붙이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네."
"그러면?"
"그들은 신앙을 만들지."
"……신앙?"
김현우의 물음과 함께 예수는 정령 파벌에서 관리하고 있는 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이런 미친."
곧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진짜로 그런 좆같은 짓거리를 하게 한다고?"
"그래, 자네도 알겠지? '업'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를 표방할 수 있네만 전체든 개인이든 결국에는 하나의 '역사'일세."
그리고-.
"그 역사는 강렬하고 다른 이들에게 기억되면 기억될수록 질 좋은 업이 되지."
예수의 말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고작 조금이라도 더 질 좋은 업을 얻기 위해서 인신 공양을 시킨다 이거네……? 그것도 다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그렇네. 불의 정령인 이프리트의 경우에는 포로들을 불태우는 것으로, 물의 정령인 나이아드는 포로들을 단체로 익사시키는 것으로 인신 공양을 시키지,"
그것은 다른 정령들도 마찬가지일세.
"다른 탑주들도, 다들 제각기의 방법으로 계층민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죽여 버리고 있지."
"……."
"거기에 정령 파벌 쪽이라고 말은 했네만, 결국 다른 탑주들도 업을 모으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네."
"……이것과 다르지 않다고?"
"천사들의 경우는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면에서 봤을 때 정령들보다도 질이 나쁜 이들이지."
"……그 새끼들은 또 무슨 짓을 하는데?"
"그들은 묵시록을 일으키네."
"……묵시록?"
"그래. 그들은 자신들이 관리하는 세계에 일정한 기준을 두고 묵시록을 일으키지. 그렇게 해서 계층민의 대부분을 죽여 절망의 업을 뽑아내고, 거기에 남은 10%를 선심 쓰듯 구해 주며-."
"허."
김현우는 예수의 말을 더 듣지도 않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 새끼들…… 완전히 사이코패스 새끼들이었네?"
물론 김현우는 예수에게 들은 그 계층민들과 별다른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냥 그것과는 별개로 탑주라는 새끼들이 하고 있는 짓에 대해서 열불이 터졌다.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은 인간 백정도 하지 않을 쓰레기짓 그 이상이었으니까.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예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 같은 경우는 그저 신앙을 만든다네."
"……신앙?"
김현우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것이네만 나를 포함한 내 제자들은 계층인들에게 그런 부당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네."
"……그럼?"
"우리는 그저 우리의 신앙을 만들 뿐이네. 자네도 나를 알고 있다면 알겠지?"
"……성경?"
"그렇네. 우리는 그저 그것만으로 신앙을 모으고 있네. 물론 그리하여 우리가 모을 수 있는 업은 적어서 탑을 유지하기도 힘드네만……."
예수는 검게 변색되어 악마의 팔처럼 변해 있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선은 어떻게든 해 내고 있지."
"……설마, 외형이 그렇게 변한 이유도?"
김현우의 말에 예수는 웃음을 짓고는 이야기 했다.
"자네는 모를 수도 있을 것 같네만, 영혼은 놔두고 육신을 타락시키는 것만으로도 들어오는 업은 상당하지. 특히 나 같은 성자는 말일세."
"……."
"너무 그렇게 보지 말게. 육신은 이렇게 타락했어도 내 영혼은 아직 그분을 품고 있으니 말일세."
예수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지었고, 그 웃음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뭐, 그래."
분명 처음 봤을 때는 굉장히 껄끄럽게 느껴지는 그 미소가, 더 이상 그렇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326화. 이 탑주들 실화냐 ? (4)
"……근데, 그 방법으로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예수는 대답했다.
"그렇네. 육신을 타락시킴으로서 얻는 업은 지속적으로 쌓이니까 말일세. 그 덕분에 탑을 맡고 있는 내 제자들도 그런 식으로 탑을 유지하고 있지."
그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김현우는 이내 살짝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근데. 지금 그렇게까지 해서 탑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어? 지금 보니까 너희는 오히려 탑을 유지해서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훨씬 많은 것 같은데."
김현우가 예수를 보며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바로 그것이었다.
만약 예수가 자신에게 숨기지 않고 진짜 자신의 육체를 타락시켜서까지 이 탑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가 현재 탑을 유지함으로써 얻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게다가 예수의 제자들도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 탑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손해밖에 되지 않는 일이었다.
지금 김현우가 들은 것으로 보았을 때 예수를 포함한 그들은 탑주로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전혀 얻지 않고 있었으니까.
"확실히, 자네의 말대로 우리가 탑주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손해일세."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예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뭘 어쩔 수 없는데?"
"만약 탑주의 자리를 손에서 놓게 된다면 분명 우리는 다시 이전처럼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걸세.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그분의 뜻에 따를 수 있겠지."
"그치?"
"하지만 그것은 우리뿐일세."
"……우리뿐이라고?"
"그래, 만약 우리가 탑을 포기하면 계층인들은 어떻게 되겠나?"
"그야……."
예수의 질문에 김현우는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만약 그들이 탑주의 자리를 그만두게 되면 그 자리들은 공석이 될 것이었고, 관리 기관에서는 그 공석을 분명히 메꾸려고 할 것이다.
'그럼 그렇게 새로운 탑주가 들어선 뒤에는…….'
똑같은 일의 반복.
김현우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결론을 떠올리며 예수를 바라봤고, 그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탑주들은 그들을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지."
"……."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그들은 살아 있는 생명일세. 생명의 가치는 그 누구에게나 평등하지."
"그럼 결국 계속 탑주의 자리에 있는 이유는……."
"나는, 아니 나를 포함한 제자들은 계층인들의 가치를 그분의 뜻에 따라 지키고 싶네. '그분'은 그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를 주니 말일세."
예수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예수가 하는 일은 너무나도 지나친 자기희생으로 보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예수에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결국 그것은 가치관의 차이니까.
김현우는 그 짧은 시간의 침묵 속에서 그렇게 결론을 내린 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아무튼, 대충 설명해 준 건 이해했어."
"그런가?"
"그냥 몇몇 탑주들 빼고는 죄다 제정신이 아닌 새끼들뿐이구만?"
그의 험담에 예수는 씁쓸하게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했고, 이내 김현우는 잠깐의 고민 끝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럼 이제부터 질문해도 되는 거지?"
"그렇군. 우선 내가 처음 자네에게 설명해 준다고 한 것들은 전부 설명했으니, 이젠 자네의 질문을 받아줄 차례인 것 같군."
예수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무엇이든 물어보게, 우선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최대한 정보를 전달해주도록 하겠네."
그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 우선 관리 기관에 대해서 아는 대로 이야기 해줄 수 있어?"
이내 예수에게 질문했다.
####
51번 탑의 최상층.
"……이번에는 집이야?"
김현우가 자신의 앞에 지어져 있는 거대한 저택을 바라보며 묻자 아브는 입을 열었다.
"네. 역시 거대한 성은 멋지기만 할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역시 9계층에 있는 집들이 훨씬 괜찮거든요."
밝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아브.
그에 김현우는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야기했다.
"기분이 꽤 좋아 보이네?"
"응? 그래 보이나요?"
"어."
김현우의 말대로 아브의 기분은 상당히 좋아 보였다.
물론 그녀의 경우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가 많이 없기는 했으나 지금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밝았다.
아니, 그냥 밝은 것도 아니라 얼굴에서 후광이 반짝반짝하게 빛나고 있었다.
"……?"
그 모습에 김현우가 묘한 표정으로 아브를 바라봤음에도 그녀는 그런 그의 시선에 대답하지 않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갔고.
"쟤 왜 저래?"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그 여자를 보지 않게 돼서 그런 것 같군."
"그 여자?"
"그…… 이서연이라고 했나?"
"……서연이? 서연이가 아브에게 뭔가 했어?"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슬쩍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이야기했다.
"사실 무엇인가를 하지는 않았네. 다만…… 인형 같다고 장난감 취급을 했을 뿐이지."
"……장난감 취급?"
"나중에는 옷 갈아입히기 놀이를 하는 것 같더군."
"……아니, 저번에 올라왔을 때는 그냥 평범했는데 갑자기 오늘 저런다고?"
"뭐, 저번에는 자네가 지크프리트를 소개해 준다고 바로 끌고 와서 실감이 안 났던 모양이더군."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김현우는 즐거운 리듬을 타듯 총총 뛰어가 저택의 문을 열고 있는 아브를 보며 잠시 생각했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뭐, 기분이 좋다면 그걸로 된 거지.
그가 그렇게 납득하고 있자 노아흐는 김현우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정보는 얻었나?"
"뭐,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얻었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예수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딱히 시계 같은 것이 없어서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체감으로는, 상당히 오랫동안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거 같았다.
'뭐, 그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얻은 정보치고는 이렇다 할 정도로 좋은 정보가 몇 개 없기는 하지만.'
다만 아쉬운 것은 그것.
예수와 이야기는 오래 나누었으나 김현우는 정작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들을 얻는 데에는 실패했다.
'……예수도 알고 있는 게 거의 없을 줄이야.'
물론 김현우보다야 이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알고 있는 듯했으나 관리 기관에 대해서는 예수도 그리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럭저럭?"
"그래. 쓸 만한 정보를 많이 얻지는 못했어도 몇 개 정도는 얻을 수 있었지."
그래도 그나마 위안인 것은 예수가 했던 말 중 한두 개 정도가 지금 김현우의 상황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우선 자세한 정보들은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 줄게."
김현우는 생각을 멈추고는 노아흐에게 그렇게 말한 뒤 아브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그럼 한번 말해보도록 하게."
이내 어디선가 본 저택을 쏙 빼닮은 거실의 소파에 앉고 난 뒤가 돼서야,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우선 처음으로, 관리 기관이 나를 노리는 이유에 대해 대충 알 수 있었어."
"……자네를 노리는 이유? 그건 저번에 듣기로는 자네가 회의라는 곳에 가서 깽판을 친 것 때문 아닌가?"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는데 예수의 말을 들어보니까 아니더라고."
"그럼 도대체……?"
"그 녀석들은 내가 아니라 '이 탑'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아."
"……이 탑? 51번 탑을 말하는 건가?"
노아흐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수에게 들었던 내용을 노아흐와 아브에게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탑주들이 가지고 있는 탑이 어떤지, 그리고 어째서 관리 기관에서 51번 탑을 노리는지에 대해서.
"한 마디로 지금 1번부터 50번의 탑은 실질적으로 관리 기관의 통제를 받고 있다 이거군요?"
"맞아."
"거기에 더해서 자신들이 만든 탑이랑은 다르게 51번 탑은 그 계층수부터 차이가 나니 노리고 있는 건가?"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합당하긴 하지."
"그렇다면 왜 이전에는 노리지 않은 건가?"
"그때는 설계자, 그러니까 심마가 51번 탑주였잖아?"
"……그렇군."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다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심마의 능력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굉장히 불가사의하고 상대하기 꺼려지는 능력이었다.
애초에 상대가 강하게 생각하면 강해지는 것이 바로 심마였으니까.
"한 마디로 지금 나는 대충 회의 때도 사고 한번 치고 아무리 심마를 이기고 왔다고 해도 조금 만만해 보이니까 툭툭 건든다는 느낌이 있지."
김현우의 말에 아브와 노아흐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할 생각인 겐가?"
"뭐 별수 있나, 우선은 알아도 지금 상황을 유지하는 수밖에. 듣기로 관리 기관은 탑주들의 시선을 은근히 의식한다고 하니 특정한 일이 아니면 대놓고 간섭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하더라고."
"……그럼 지금 당장은 저번의 상황이 되지는 않을 거란 말인가?"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관리 기관의 탑주가 와서 깽판을 치는 일은 적어도 당분간은 없을 것 같은데? 뭐, 사실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결국 김현우가 예수에게 그런 정보를 듣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경험에 의거한 정보다 보니 100%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 말에 노아흐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던 아브는 이내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야기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데요?"
"뭐가?"
"그럼 관리 기관에서는 가디언이 아니라 저희가 만든 탑을 빼앗으려고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렇다면 어째서 맨 처음에 탑을 빼앗지 않았을까요? 당장 탑주가 바뀌었을 때, 부채를 빌미로 바로 탑을 빼앗으려고 하면 됐을 텐데."
아브가 제시한 의문.
그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도 그렇네? 막상 빼앗으려고 했으면 그때부터 트러블이 일어났어도 될 것 같긴 한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슬쩍 고민에 빠져들었으나, 이내 노아흐는 그 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단순히 간을 본 것 같네만."
"간을 봤다고?"
"그렇네. 만약 관리 기관에서 심마의 까다로운 능력 탓에 51번 탑을 완전히 차지하지 않은 거라면 순수하게 간을 본 것일 수도 있을 것 같군."
노아흐의 의견을 가만히 생각하던 김현우는 이내 그 말도 꽤 합리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내 쯧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뭐, 이건 굳이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김현우에게 중요한 것은 관리 기관이 지금 당장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뿐이었으니까.
게다가 어차피 그들이 무슨 이유로 탑을 공격하는지 고민해봤자 관리 기관쪽에서 제대로 된 야욕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김현우가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확실하지 않은 추측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노아흐와 아브의 말을 끊고는 다음 정보를 이야기하려 했고.
파지지직-!
"응?"
입을 열려는 그 순간,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만들어진 스파크를 볼 수 있었다.
327화. 이 탑주들 실화냐 ? (5)
붉은 대지 위에 만들어져 있는 고성.
"……."
예수는 얼마 전까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던 그를 떠올리며 철제 잔에 들어있는 포도주를 머금었다.
씁쓸한 맛.
그 맛을 조용히 음미하며 예수는 김현우를 떠올렸다.
'신기해…….'
예수는 처음 자신의 제자에게 사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김현우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했었고, 오늘이 되어서야 그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기대와는 달랐지.'
허나 실질적으로 이야기를 어느 정도 나눠본 김현우는 예수의 예상과는 많이 다른 이였다.
그것도 상당히 여러 가지 의미로.
'굉장히 신비했어.'
예수가 느끼기에 김현우는 분명 어떤 종류의 수행을 쌓았다.
물론 그것이 김현우의 말투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말투는 어찌 보면 굉장히 가볍고, 또 특정한 이들은 굉장히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말투였으니까.
허나 그런 말투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어떤 종류의 수행을 쌓았다는 것을.
그것뿐인가?
"스승님."
"그래, 무슨 일이냐?"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에 대해 정확하게 관측을 해봤습니다."
"어떻게 되었느냐?"
"……한 시간입니다."
"한 시간?"
"예. 조금 전 탑을 방문하신 51번 탑주는 단 한 시간 만에 고행의 길을 완벽히 걸었습니다."
"확실히 빠르다고는 생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빠르구나."
고행의 길.
그것은 바로 예수가 살고 있는 탑 전체에 깔려 있는 특수한 금제였다.
'고행의 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사람을 심마에 들게 하지, 그리고 그 심마가 마음속에 자리 잡는 동안 그 사람은 절대 이 성에 도착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금제 덕분에 이 33번 탑은 관리 기관의 감시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탑 중 한 곳이었다.
'아버지의 힘을 얄팍한 짓으로 빼앗은 루시퍼조차 3일이 걸렸거늘.'
예수는 그리 셍각하며 김현우를 떠올렸다.
말투에서는 자유분방함이 묻어나오는데 비해 그 눈 속에서는 수백 수천 년을 기본으로 수행한 것 같은 선기가 느껴지는 이질적인 모습.
"……과연"
예수는 탑 밖의 붉은 대지를 바라봤다.
그 무엇도 없는 붉은 대지.
"어떻게 될는지."
예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뀌지 않는 붉은 대지를 바라봤다.
물론 지금 당장 이 탑을 넘어선 모든 것들은 전부 바뀌지 않고 제자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예수는 그를 만나고 나서 하나의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지켜보도록 하지."
그것이 좋은 길이 될지, 아니면 나쁜 길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김현우는 분명히 무엇인가를 바꿀 것이라고, 예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눈을 감았다.
#####
파지지직!
"무슨-"
김현우의 앞으로 흐르는 푸른 전류.
그에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움직였으나.
카지지직!
"!!"
이내 몸을 뒤로 빼는 그 순간 터져나온 전류는 김현우의 몸을 뒤덮었고, 그에 김현우는 곧바로 푸른 전류에 대응하기 위해 마력을 뽑아내려 했지만-
"……응?"
-그가 마력을 뿜어내려는 순간, 김현우는 자신이 지금까지 앉아 있던 소파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왔군."
곧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데블랑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자신이 예전에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
"……날개?"
물론 외형은 거의 변함이 없었으나 그의 등 뒤에 있는 3쌍의 날개는 그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도록 만들어 주었다.
김현우가 데블랑의 등에 있는 날개를 보며 중얼거리자 데블랑은 슬쩍 불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천사쪽에 있다고 설명만 했었지 이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것 같긴 하군."
데블랑의 말.
그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곤 중얼거렸다.
"……신전?"
"맞다. 지금 이 곳은 '우리엘'의 이름을 사용 하고 있는 내가 지내고 있는 신전이다. 또한 이곳은 천사파벌의 집결지이기도 하지."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 천사들의 집결지?"
"그래, 하지만 너무 걱정할 건 없다. 애초에 내가 마음먹고 결계를 펼친 이상 네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루시퍼라도 모를 테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기는 한데, 갑자기 왜 이런 식으로 부른 거야?"
김현우는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김현우의 앞에 스파크가 생기더니 이내 순식간에 김현우를 집어삼켰던 상황.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이는 김현우의 얼굴을 확인한 데블랑은 말을 이어나갔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너 때문에 천사쪽은 굉장히 날이 서 있으니까. 나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그래."
데블랑은 그리 말하며 김현우에게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간단히 피드백을 하기 시작했고.
그 피드백을 가만히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대답했다.
"……한 마디로 이제 이 일이 어떻게 해결되기 전까지는 나를 만나기가 힘들겠다는 소리네?"
"맞다. 거기에 더해서 네게 도움을 주는 것도 어렵게 됐다."
"그래?"
담담한 김현우의 대답.
그에 데블랑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한번 부여잡더니 이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니, 도대체 너는 무슨 짓을 한 거냐?"
"갑자기? 뭘 무슨 짓을 해?"
"루시퍼에게 말이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 녀석이 그렇게 이를 갈고 있는 거지?"
"……응? 이를 갈고 있다고?"
"그래,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너를 찢어발기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리는 모양이더군."
데블랑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김현우는 이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야, 그냥 안 빡친 척한 거였어?"
"뭐?"
"아니, 회의장에 갔었을 때 잠깐 말싸움을 했는데 패드립을 쳐도 별로 안 빡친 척하더라고, 그래서 내심 멘탈이 대단하다 싶었는데 또 그게 아니었나 보네?"
김현우가 씨익 웃으며 이야기 하자 데블랑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니…… 회의장에서 말싸움을 했다고?"
"응."
"……루시퍼랑?"
"맞아."
"……미쳤군."
데블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김현우가 또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아니, 그냥 또라이도 아니고 이 새끼는 그냥 개 쌍 또라이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데블랑인 인상을 찌푸린 표정으로 바라보자 같이 인상을 찌푸리는 김현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말싸움을 한 거지? 분명 너는 그 자리에서 되도록 평화롭게 세 파벌의 연합을 막아야 했다."
"막기는 막았잖아?"
"……확실히 그건 그렇다만."
"그럼 된 거 아냐?"
"……."
데블랑은 더 이상 김현우와 대화를 하는 것이 그저 쓸데없는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고는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지금 이 시점부터 내가 네게 찾아가는 일은 '좌표'를 찾은 게 아니라면 굳이 찾아가진 않을 거다."
아니, 찾아가지 않는 게 아니라 못 찾아가는 거지.
데블랑은 스스로 했던 말을 정정했다.
그 말에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던 김현우는 이내 슬쩍 물린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좌표는 도대체 언제쯤 찾는 거야? 그거 찾기 시작한 지 좀 됐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아직 제대로 된 정보가 없어서 좌표를 언제쯤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거참 정해진 게 단 하나도 없네."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리고는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
"……무엇을 말하는 거지?"
"지금 상황 말이야. 우선 네가 움직임이 제약되는 건 알았는데,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하냐 이 말이지. 이제 슬슬 정령이랑 너희랑 연합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싸움을 걸어 올 거 아니야?"
"……생각해 보면 그것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말을 전해놓는 편이 좋겠군."
데블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김현우에게 현 상황에 대한 피드백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의 목표는 전에도 말했다시피 관리 기관이 눈치채지 못하게 좌표를 찾는 거다. 그건 기억하고 있겠지?"
"……이미 끝난 거 아니야? 어차피 관리 기관은 나를 주시하는 것 같던데."
"그건 너 혼자일 뿐이고 아직 우리는 관리 기관의 시선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자랑하는 거야?"
김현우의 말에 데블랑은 대답하지 않고 살짝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너도 이제 어느 정도 알겠지만 관리 기관은 정말로 큰 일이 아닌 이상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거다."
"그 큰일이라는 게 대체 뭐야?"
"솔직히 그 기준은 나도 잘 모르겠군, 애초에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네가 벌인 '이 정도'로는 관리 기관이 직접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군."
-지금 당장도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데블랑은 그렇게 뒷말을 잇고는 이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너는 적절하게 선을 지키면 된다."
"선?"
"그래. 관리 기관이 너를 주시하고 있음에도 자신들이 이 상황에 딱히 관련되지 않으려고 하는 건 아직 선을 넘지 않았다는 거니까."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그러면 싸우지 말라는 건가?"
"사실 그게 가장 좋겠지. 애초에 싸움이 없다면 시선을 끌 만한 일들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테니까. 다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불가능하지."
그러니-
"죽이지 마라."
"……뭐?"
"말 그대로의 이야기다. 탑주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탑주들을 죽이지 말라고?"
"그래, 네가 탑주들을 소멸시키지만 않으면 관리 기관은 먼저 나서지 않을 것 같군."
"……진짜로?"
"……솔직히 100% 장담은 못 하겠군. 그러나 지금 정황상 봤을 때 그렇지 않나?"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민하다 이내 짧게 혀를 차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거참, 신경 써야 할 거 한번 더럽게 많네."
"……."
'네가 처음부터 일을 키우지 않았다면 신경 쓸 일이 하나도 없이 않았을까?'라는 말을 내뱉으려 했던 데블랑은 입을 다물고는 또 다른 추가적인 사항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다음으로, 아마 천사쪽과 정령쪽은 동시에 너를 공격하지는 않을 거다."
"그건 또 왜?"
김현우의 물음에 데블랑은 루시퍼가 한 이야기에 대해 가볍게 설명해 주었다.
"뭐야 쫄기까지 했어?"
"……그렇다기보다는 손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생각인 것 같더군."
데블랑의 말.
그 이후로 한참이나 데블랑에게 이런 저런 정보를 들은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뭐, 아무튼 알았어. 한 마디로 요점은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 이거지?"
"그렇지. 탑주가 죽으면 관리 기관 입장에서는 고객이 사라지는 것이지만 탑주가 죽지 않는다면 결국 관리 기관 입장에서 고객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렇단 말이지……?"
이내 그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왠지 언젠가 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는 김현우를 본 데블랑은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혹시나 싶어서 말해두는 거다만 눈에 띌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지.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며?"
"그렇긴 한데……."
"그럼 걱정 마, 이 이상 어그로를 끌면 상황이 안 좋아진다는데 그 정도는 지켜야지."
데블랑은 자신 있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우.
"……."
그는 왠지 조금 불안해졌다.
328화. 죽이지만 않으면 되잖아? (1)
50번 탑주 지크프리트.
그의 인생은 실시간으로 예쁘게 조져지는 중이었다.
아니, 당장 실시간으로 조져지는 중은 아니었으나 이제 곧 그렇게 될 예정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51번 탑의 최상층.
지크프리트가 슬쩍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브와 노아흐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혹시 모르니까 9계층에서 도움이 될 만한 이를 데려올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탑주들이 이제 막 쳐들어올지도 모르니까 9계층에 내려가서 도움이 될 만한 계층인들을 데리고 오겠다. 이 말로 해석해도 되나?"
"맞아요."
지크프리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브.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는 중얼거렸다.
"제정신인가……?"
"네?"
"혹시 너희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해두지만 우리가 싸워야 할 이들은 탑주다. 알겠나? 일반 계층인들이 아닌 탑주라는 말이다."
지크프리트의 말에 아브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런데 계층인들의 도움을 받겠다고? 고작 계층인들의?"
"……어, 그러면 안 되나요?"
"그러면 안 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51번 탑의 계층인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다만 그들은 결국 일개 계층인일 뿐이란 말이다!"
나중에는 슬쩍 격앙된 말투로 입을 여는 지크프리트.
적어도, 그의 의견은 맞는 말이기는 했다.
그래. 1번부터 50번 탑에 한해서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1번부터 50번 탑에 있는 계층인들은 지크프리트 같은 이레귤러가 아닌 이상 절대로 탑주보다 강해질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무엇보다도, 탑주는 일정 이상의 업을 관리 기관에 항상 내놓기는 하지만 결국 탑주에게 돌아가는 업은 그대로 그의 힘이 된다.
그것이 바로 계층인들이 탑주를 이길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였다.
애초에 경험치를 흡수하는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계층인들은 끊임없이 살육을 저질러 10의 경험치를 쌓는데에 비해 탑주들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으로 100의 경험치를 쌓으니까.
압도적인 불합리함.
그렇기에 지크프리트의 어이없음과 의문은 굉장히 합당했으나 정작 아브와 노아흐는 슬쩍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군, 저번에 야차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딱히 탑주들이 강한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냐? 아니면 정말로 이해를 못 한 건가!?"
지크프리트의 말에 아브와 노아흐는 얼마 전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태양신 라가 탑의 최상층에 들어왔을 때, 9계층에 바람의 정령왕이 들어왔을 때를.
물론 노아흐와 아브는 그때 기절해 있었으나 야차를 통해 그날 일을 짤막하게 들을 수 있었고, 그 이후의 일까지 어느정도 들을 수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브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연 지크프리트는 이내 반론을 하려다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
그것은 바로 문득 생각난 기억 때문이었다.
세계수가 무너진 그날, 지크프리트는 세계수가 있던 공간에 같이 있지 않았다.
그가 그 공간에 가게 된 것은 세계수가 무너지고 난 그다음 날.
다음 날에 세계수가 있는 공간에 찾아간 지크프리트는 세계수가 그대로 반으로 쪼개져 무너져 있고, 주변의 공간이 완전히 박살 나 있는 것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었다.
그리고 그때, 지크프리트는 조금 이상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력.
하루가 지나서도 여전히 세계수의 남아 있는 마력의 잔재는 상당했다.
허나 이상했던 것은 바로 그 마력의 잔재가 김현우의 것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거기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물어봐도 그 당시 세계수에서 싸움을 벌였던 이들은 그날 세계수에서 있었던 일을 전혀 말하지 않고 그저 김현우를 소멸시키겠다고 이를 악물 뿐이었었다.
"……."
지크프리트가 거기까지 생각하며 입을 다물고 있는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브 있냐……?"
그는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엇? 오공님?"
"자네가 왜 여기에 있는가?"
지크프리트의 시선에 비춘 것은 한 남자였다.
구릿빛으로 탄 피부를 가지고 있는 남자.
그러나.
"!!!"
곧 지크프리트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무슨??'
그것은 바로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마력 때문.
'뭐지……? 저 녀석은 대체 누구길래 저런 엄청난 양의 마력을……?'
그것도 그냥 마력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그 마력 속에서 느껴지는 폭발적인 잠재력.
"아, 그게 말이야…… 아브, 너 시간 좀 되냐?"
"응? 할 말이라도?"
"다름이 아니라 사실-"
게다가 조금 더 지켜보고 있자 지크프리트는 현재 남자가 마력을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마디로, 지금 은연중에 풍기는 마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
물론 마력을 총량만을 가지고 그가 얼마나 강한가를 생각하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 지크프리트의 눈앞에 보이는 남자는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마력양을 가지고 있었다.
"엑!? 싫어요!"
"그, 어떻게 좀 안되겠냐?"
"절대로 싫어요! 저를 또 노리개로 쓰실 생각인가요?!"
"……그건 아닌데 내가 요즘 바가지를 너무 긁혀서 힘들어…… 제발 살려줘."
"안 돼요! 그렇게 해줄 생각 없어요! 돌아가요!"
아브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우울한 표정을 짓는 손오공.
지크프리트는 그런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노아흐에게로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지금 저 남자는 누구지……?"
"응?"
그에 반응한 것은 노아흐가 아닌 손오공.
그는 지크프리트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녀석이네? 얘는 또 누구야?"
손오공의 말에 아브는 입을 열었다.
"아, 이분은 저희 탑 바로 옆에 있는 50번 탑주님이세요."
"응? 50번 탑주?"
"네! 안 그래도 일 때문에 조만간 소개시켜 드리려고 했었는데 잘 됐네요!"
아브는 그렇게 말하며 손오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지크프리트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고.
"뭐,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잘 부탁해. 탑주라고?"
"……."
지크프리트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신의 정보들이 처참히 분쇄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색한 인사.
그 인사를 바라보고 있던 아브는 이내 떠올랐다는 듯 오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오공 씨. 혹시 지크프리트님과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나요?"
"……?"
####
무너진 세계수의 뿌리 안.
그곳에는 정령파벌에 속해 있는 이들이 모두 모여 둘러 앉아 있었고, 그 중앙에는 4대 정령왕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침묵이 가득한 방 안.
그곳에서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였다.
"그럼 지금부터 의견을 받도록 하겠어요. 혹시라도 발언하실 거라면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해주시길 바랄게요."
회의의 시작을 알리는 그녀의 말.
그와 동시에 방 안에 빙 둘러 앉아 있던 탑주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역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천사쪽과 되도록 협동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
"흠, 저는 오히려 그 생각에 반대입니다. 천사 쪽에 기대는 것보다는 저희가 총력전을 펼쳐서 그를 소멸시키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정말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고 발언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죠? 김현우가 쳐들어 왔을 때 저희 측에는 고작 다섯 명의 탑주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지금 있는 전체 인원이 몰려간다면 그도 고전을 면치 못할겁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저희가 피해를 입지 않겠습니까?"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피해가 없는 전쟁은 없으니까요."
"그것보다는 지금 저희의 세력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으면서 그들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나로 모이는 의견 없이 여러 갈래로 퍼져서 제각각의 의견을 내는 탑주들.
그 모습을 보며 나이아드를 포함한 다른 정령왕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현재 탑주들이 내고 있는 의견들은 모두가 틀렸다고는 할 수 없는 의견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던 것은 그때 세계수가 무너지는 것을 직접 본 탑주들.
"……."
지금 다른 탑주들이 총력전으로 김현우를 처리하자고 말하는 이유는 그 때당시 세계수에 있던 탑주들이 사실관계를 제대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것은 김현우 혼자가 아닌, 김현우와 필적할 만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제대로 말하지 않았기에 생긴 일.
하지만 지금에 와서도 그들은 그 사실을 제대로 이야기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만약 지금 와서 그걸 이야기했다가는…….'
안 그래도 겨우 끌어 올려 놓은 사기를 완전히 바닥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천사화의 협동이 제일 유효한 방법이야…….'
그렇기에 나이아드는 지금 당장 유효한 방법은 천사와의 협동을 통해 김현우를 소멸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생각해 보면 손쉽게 이뤄지기는 힘들지.'
나이아드는 천사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부탁을 받았다고 해도 그들은 절대 먼저 움직이지 않을거다.
설령 김현우를 적은 피해로 잡을 수 있는 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쪽에서 우선 그의 힘을 어느 정도 빼놓기를 기다릴 것이다.
천사쪽은 자신들의 이익을 굉장히 중시하니까.
'만약 우리가 협동으로 김현우를 잡기를 요청하면…….'
아마 그들은 지금 나이아드가 제시한 보상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었다.
"쯧."
'이래서 악마파벌쪽에서 같이 합류를 해줬으면 했던 건데……!'
물론 나이아드도 악마파벌이 기본적으로 싸움을 싫어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들이 이렇게까지 싸움에 소극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어느 정도 김현우가 접점이 있는 것까지도.
"……."
그렇게 나이아드가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방 안에서는 여러 개의 의견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다.
"제정신인가? 만약 그러다가 김현우를 소멸시키지 못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한 손으로 열 손은 막지 못한다는 말을 모르십니까? 게다가 조금 피해가 있더라도 천사쪽의 도움을 받기 전에 소멸시키면 그것을 이용해 천사쪽에 보수를 지불하지 않고 저희들의 회복을 위해 사용해도 되는 일입니다."
"설마 천사가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우십니까?"
한쪽에서는 서서히 과열된 목소리가 오가고 있는 회의장.
"그만! 조용히 해라!"
이프리트가 뒤늦게 중재를 하려 했으나 탑주들은 이미 불이 붙었는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흐응, 이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혹시 김현우의 공격 한방에 소멸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군요. 나약하게 말입니다."
"무…… 뭐가 어쩌고 저째!?"
이제 대놓고 싸우기 시작하는 탑주들.
그런 고성의 끝에.
"모두 그만하세요!"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나이아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329화. 죽이지만 않으면 되잖아? (2)
"우선, 저희는 배반자 지크프리트를 먼저 처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나이아드의 말에 순간적으로 조용해진 탑주들.
허나 얼마 있지 않아 나이아드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리얼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크프리트를 제일 먼저……?"
"네. 저희는 지크프리트를 제일 먼저 처리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나이아드의 거듭된 긍정에 이번에는 그들의 뒤에 있던 탑주 중 한 명이 일어나 질문했다.
"어째서 지크프리트를 먼저 처리하는 겁니까, 나이아드 님?"
"간단해요. 그는 저희를 배반하고 정령의 목숨과도 같은 세계수를 부숴 버린 그 미친놈에게 붙었어요. 그것만으로 처단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요?"
"그건 분명 타당한 말씀입니다만, 차라리 그럴 바에는 총력전으로 움직여 지금 당장 혼자 있는 김현우를 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지크프리트, 그 녀석이 거기에 붙는다고 해도 그쪽의 전력은 여전히 열세입니다."
"확실히 그렇긴 하나 혹시라도 모를 전력은 미리 줄여 놓는 게 낫겠죠."
나이아드가 그렇게 말하며 뜻을 굽힐 의도가 없다는 것을 밝히자 다시 한번 입을 열려던 탑주는 이내 입을 다물고는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이아드 님의 뜻이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은 탑주를 슬쩍 바라본 나이아드는 이내 시선을 돌려 다른 탑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또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은 없으신가요?"
나이아드의 질문에 침묵하는 탑주들.
그에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걸로 됐다.'
그녀가 지크프리트를 김현우보다 먼저 처리하려고 한 이유는 바로 퍼포먼스 때문이었다.
'우선은 우리가 먼저 움직인다는 것을 천사쪽에게 보여준다.'
물론 지금 상황에 있어 퍼포먼스가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결국 정령쪽에서 보상을 지급한다고 해도 천사쪽은 결국 김현우와 척을 진 것이 없기에 처리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어디까지나 천사들에게 정령들의 부탁은 강제가 아닌 부탁이니까.
'물론 김현우가 그때 찾아와 루시퍼와 마찰을 빚기는 했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루시퍼가 나설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안일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나이아드는 우선 아주 작은 퍼포먼스를 보이기로 한 것이었다.
천사쪽에게 우리가 먼저 움직일 테니 움직여 김현우를 조금이라도 같이 압박해 달라는 작은 메시지를.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혹시 김현우와 같은 편이 되는 것을 고려할 수도 있는 악마쪽에게 자신들이 김현우를 소멸시키는데 진심으로 하고 있다는 메시지까지.
'만약 거기까지 했는데도 천사쪽이 '아예'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면.'
나이아드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또 다른 작전을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만약 정말로 최악의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그때가 되어서야 사용할 만한 작전이었다.
"후."
그렇게 머릿속의 정리를 끝낸 나이아드는 눈을 뜨고는 본격적으로 정령파벌의 배반자인 지크프리트를 처리할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새하얀 공간에 있는 관리 기관의 관저.
그곳의 좌표를 아는 이들은 탑주 중에서도 관리 기관 소속의 탑주들밖에는 없었고.
우우우웅-!
그 관리 기관의 관저 지하에 있는 거대한 공동은 남자와 그의 수족인 헤르메스만이 알고 있는 공간 중 하나였다.
"……."
그 공동은 굉장히 특이했다.
우선 거대한 공동은 절반을 기준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남자가 있는 쪽에는 그저 칙칙하고 어두운 공동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을 뿐이었으나, 그 반대편은 달랐다.
지이잉-!!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반대편의 공간은 무척이나 밝은 빛을 비추고 있었다.
딱히 그 색이 어떤 색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어떨 때는 새하얀색의 빛이 비출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시커먼색이 비출 때도 있었다.
또 어느 때는 무채색, 또 어느 때는 일반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기묘한 색이 되기도 하는 그 빛들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남자는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의 옆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헤르메스를 바라봤다.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정령과 천사쪽이 연합을 해 김현우를 소멸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다만 천사쪽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저번에 말했던 정보에 대해서는 어떻게 됐지?"
"……죄송합니다."
남자의 질문에 헤르메스는 이런 저런 말을 하는 것 대신 고개를 숙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
남자의 눈은 일순간 찌푸려졌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또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불편한 침묵만이 헤르메스와 남자 사이를 가를 뿐.
그런 침묵 속에서 남자는 얼마 전 자신이 들었던 이름을 떠올렸다.
'데블랑……이라.'
그 이름을 떠오르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으나,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쉼으로서 자신의 몸속에 차오르는 무언가를 꾹 누르고는 헤르메스를 바라봤다.
"……."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모습.
남자는 잠시 헤르메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나?"
"서고장에게 접근해 이 이상의 정보를 들어보려 했지만, 더 이상 찾을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김현우가 말한 데블랑이 누구인지는 찾았고?"
"……그것 또한 찾지 못했습니다."
헤르메스의 말.
그에 남자는 또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됐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 아니지. 사실은 아니야. 솔직히 나는 지금 굉장히 화가 나."
남자의 말과 함꼐 스멀스멀 주변으로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마력.
아주 조금의 마력이 그의 주변에 흩어졌을 뿐이지만 그로 인해 보이는 변화는 가히 엄청났다.
쿠그그그그긍-
대지는 떨리고, 그들이 있는 지하는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려 그대로 매몰될 것 같은 진동이 만들어졌다.
"사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김현우 그 자식을 직접 소멸시켜 버리고 그 김에 그 녀석의 잔재로 보이는 녀석도 같이 찾아서 깨끗하게 죽여 버리고 싶다."
남자의 말과 함께 진동이 멎었다.
조금 전까지 무너질 것 같았던 천장은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조용해졌고, 그와 함께 남자는 말을 이어나갔다.
"알고 있겠지만 지금은 내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시기야. 알고 있겠지? 그 녀석의 끄나풀이 있는 것 때문에 저번 '양식장'을 소멸시키며 모아온 업조차 날려버린 일 말이야."
"……그렇습니다."
"저번에는 사정이 그나마 괜찮았지. 어차피 그때는 모은 업이 얼마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남자의 말에 헤르메스는 슬쩍 시선을 돌려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는 공간을 바라봤다.
"거의 도달했군요."
"그래,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나는 목표한 바에 도달하게 되지.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야. 이제 아주 조금만 더 업을 모으면 된다."
"……."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을 거의 완성한 마당에 그런 파리 새끼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고 또 일을 그르친다? 아니, 안 되지. 절대로 안 될 상황이야."
"……."
"나는 너무 많이 기다렸어. 알고 있겠지? 내가 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이 일 하나 때문에 기다려온 세월을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 보상 받으실 겁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 보상받아야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도 업의 수급이 필요해. 적어도 2주기 정도는 필요하지. 내가 얻는 업이 아닌, '다른 사람' 얻는 업이 말이야."
"그렇다면……?"
"……조금만, 나는 아주 조금만 더 참도록 하지."
"……."
남자의 말에 헤르메스는 고래를 숙였다.,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탑주들과 비즈니스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해. 그것은 그 망나니라도 마찬가지야. 탑은 내가 만들었지만, 내가 손을 뻗지 않아야만 내게 필요한 '업'이 모이니까."
"……."
"게다가 그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탑주들의 눈치도 봐야 하지. 혹여나 그들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면 그렇게 모이는 업은 이 이상 내가 원하는 업이 아니게 되니까."
하지만-
"결국 그렇기에 지금 당장은 그 녀석을 처리하지는 못하지만……."
만약-
"그 녀석이 아주 조금이라도 선을 넘는다면. 그렇게 해서 우리가 나서야 하는 상황이 아주 자연스럽게 연출되기만 한다면……."
남자는 거기까지만 말하고는 헤르메스를 바라봤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남자의 표정.
그것을 보며 헤르메스는 남자가 자신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고.
"……."
그렇기에 헤르메스는 고개를 굳게 끄덕이는 것으로 남자의 묵언에 답했다.
####
세계수의 뿌리 위.
그곳에는 네 명의 탑주가 모여 있었다.
숲의 정령 드라이어드.
폭풍의 정령 스토로펠.
화산의 정령 볼칸.
분노의 정령 퓨리.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 빛나는 타원형의 차원문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고작 그런 새내기 한 명을 포획하자고 탑주가 네 명이나 동원 되다니…… 너무 과잉전력 아닌가?"
폭풍의 정령 스토로펠이 슬쩍 불만이 느껴지는 말투로 말하자 그에 동의하듯 화산의 정령 볼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김현우'라면 탑주 전체가 몰려가도 모르겠지만 고작 그딴 새내기 한명을 붙잡자고 우리가 이렇게 가야 한다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는 볼칸.
그에 드라이어드는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시지 말고 가도록 하죠. 솔직히 저도 소멸을 시키는 거라면 혼자 가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의 목적은 포획이에요. 아시잖아요?"
"그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드라이어드의 말과 함께 들려오는 분노의 정령 퓨리의 말.
그에 볼칸과 스토로펠은 슬쩍 불만인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긍하며 부러진 나무 위에 있는 타원형의 포탈을 향해 몸을 들이밀었고.
"역시 그 생명이 다하시더라도 세계수님의 능력은 엄청나군."
그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지크프리트가 탑주로 있는 50번 탑에 들어올 수 있었다.
보통 다른 탑으로 이동하는 것은 원래라면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도 그럴 것이 탑주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탑에 다른 탑주들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 자신의 마력으로 보안을 해 놓으니까.
하지만 세계수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이 포탈은 그런 보안을 완전히 무력화 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무런 제한도 없이 50번 탑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탑의 최상층에 도착한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탑의 왕좌에 앉아 있는 지크프리트를 볼 수 있었다.
그래.
피부가 살짝 구릿빛으로 타 있는 50번 탑주 지크프리트……
"……가 아니야?"
분노의 정령 퓨리는 저도 모르게 왕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며 순간 고개를 갸웃했고, 이내 퓨리가 바라보고 있던 왕좌에는.
"뭐야? 온다고 하더니 진짜로 이상한 놈들이 왔네? 그것도 네 명이나?"
"……저들이 그 탑주인가 뭔가 하는 이들인가 보군."
손오공과 청룡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330화. 죽이지만 않으면 되잖아? (3)
탑의 최상층.
"……괜찮을까?"
지크프리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으며 아브를 바라보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갸웃 거리더니 이야기했다.
"음, 괜찮지 않을까요? 지크프리트 씨도 오공 님과 청룡 님의 강함을 어느 정도 느끼셨다면서요?"
아브의 물음에 지크프리트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그렇기는 한데……."
"거기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게, 만약 위험하다면 가디언이 준 수정을 쓰면 되는 거니까요."
"……뭐, 그것도 그렇지."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가 손오공과 청룡에게 넘겨준 수정은 정말 놀랍게도 마력을 불어넣는 그 순간 그곳이 어디든 마력을 불어넣은 시전자를 이 탑으로 오게 만드는 형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세계수의 마력으로 만든 포탈과도 비슷한 능력.
'도대체 그런 것을 어디서 구해온 거지?'
물론 그 수정이 '눈동자'가 주었다는 것을 모르는 지크프리트는 김현우를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으나 이내 그 수정의 출처에 대해서는 단서를 얻을 수 없었다.
뭐, 지금 그 단서를 얻어봤자 이미 김현우와 한 배를 탄 셈이라 어차피 써먹을 곳도 없겠지만.
지크프리트가 그렇게 잡스러운 생각을 흘려내고 있을 때, 아브는 김현우에게 말했다.
"가디언."
그녀의 물음에 감았던 눈을 뜨고 아브를 바라보는 김현우.
"저도 지크프리트 씨가 물어서 다시 떠올린 건데, 그 수정 정말로 괜찮은 거죠?"
아브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물론 괜찮지."
"그쵸?"
"응, 아마도."
"……?"
"아마도 안 썼으니까 괜찮을 거야. 갈 때는 사용했지만 올 때는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김현우의 말에 순간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아브.
허나 김현우는 당당했다.
'눈동자가 그리 말했으니까 잘 작동되겠지.'
눈동자는 김현우에게 수정을 주며 그렇게 말했다.
이 수정은 마력을 넣으면 딱 한번은 예수가 있는 33번 탑으로 이동을 시켜주고, 그 뒤 수정에 또 한번 마력을 넣게 되면 51번 탑으로 이동을 시켜준다고.
그리고 김현우는 33번 탑에서 51번 탑에 올 때 수정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유는 바로 그가 수정을 사용하기도 전에 예수가 그를 51번 탑으로 돌려보내 줬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지금 김현우가 손오공과 청룡에게 준 수정은 '가는 것'은 사용한 상태였으나 '오는 것'은 사용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었다.
'뭐 잘 작동되겠지. 거기다가…… 어차피 한번은 싸움을 붙여봐야 했으니까.'
김현우는 수정을 가지고 간 손오공과 청룡을 떠올렸다.
어차피 김현우의 적들이 꽤 많아진 시점에서 그에게는 이전과 같은 동료들이 필요했다.
싸움은 혼자 하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아무리 큰 한 손이라도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것처럼, 김현우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탑주들 전체가 몰려오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뭐, 사실 정령 같은 놈들만 몰려오면 딱히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절대 방심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김현우는 잘 알고 있기에 이참에 아브의 말을 듣고 나름대로의 시험을 준비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손오공과 청룡이 이후에 일어날 전투에 도움이 될지 알아보는 것.
물론 야차 같은 경우는 이미 에리얼을 상처 하나 없이 박살 내버리는 것으로 그 진가를 증명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조금 시달리지 않았는가.
"쯧……."
"왜 그러세요, 가디언?"
김현우가 혀를 차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브.
"아니, 아니야."
김현우는 세계수를 박살 낸 뒤 아직 두 와이프가 도착하지 않았을 때 야차와 생긴 일(?)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는 원 생각을 이어나갔다.
'……천마는 안 돼. 마찬가지로 구미호도 만찬가지고 미령과 하나린도…… 가능할 것도 같지만 애매하다.'
분명 천마나 구미호, 그리고 미령과 하나린도 강하기는 하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탑주들을 처리하기에는 그 실력이 모자라.'
그들은 현재 김현우가 상대하는 탑주들을 상대하는 데는 그 실력이 약간 모자라다.
물론 김현우는 자신에게 덤벼오는 탑주들은 예외 없이 박살을 내버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김현우라서 가능한 이야기다.
김현우의 강함은 그 누가 생각에도 굉장히 비이상적인 강함이었으니까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결국 김현우 같은 비이상적인 강함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 봤을 때, 탑주가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소리였다.
한 마디로 탑주들은 약하지 않다는 소리.
물론 대부분의 탑주들은 김현우에게 쪽도 못쓰지만, 아무튼 그들은 약하지 않다.
'뭐, 그렇다고 해도 손오공과 청룡 정도라면…… 나름대로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에다-
'생각해 보면 지크프리트가 자신이 있는 곳에 먼저 탑주들이 올 거라고 해도 실제로 녀석들이 올지는 모르는 이야기니까. 게다가 수정까지 있으니 위험할 상황은 없겠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던 생각을 끝내버리고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 우선 집중 좀 해봐.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니까."
그의 말에 일제히 시선을 모으는 지크프리트와 노아흐, 그리고 아브.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인 것을 확인한 김현우는 이내 한번 목을 가다듬고는.
"탑에서 업을 생산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내 자신이 생각하던 주제를 그들에게 던졌다.
####
50번 탑에 도착한 네 명의 정령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두 남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제일 먼저 질문한 것은 화산의 정령 볼칸.
"너희들은 누구지?"
볼칸이 노골적인 적의를 담아 입을 열었으나 손오공과 청룡은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것에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볼칸은 인상을 찌푸렸고, 드라이어드는 슬쩍 찌푸린 얼굴로 빠르게 머리를 회전했다.
'도대체 저들은 누구지?'
그들은 정말 당연하게도 지크프리트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크프리트가 수하로 데리고 있는 이들도 아니었다.
현재 저 둘에게 느껴지고 있는 마력은 일반적인 탑주의 수하들이라고 하기에는 그 격이 달랐으니까.
'……혹시 악마쪽?'
드라이어드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으나 마찬가지로 슬쩍 고개를 저었다.
악마쪽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관리 기관에 내야 할 업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의 육체를 타락 시켜 그 업을 충당하고 있었다.
허나 그들의 외형은?
악마와 연관성이 1%도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악마파벌에 있는 이들도 아니었다.
'설마 그렇다면…….'
드라이어드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머리에 떠오른 가정을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고, 그녀가 미처 생각을 이어나가기도 전에 손오공은 입을 열었다.
"야, 너희들 탑주 맞지?"
약간 의심이 간다는 목소리로 입을 연 손오공.
그에 볼칸은 노골적으로 찌푸린 얼굴을 더더욱 흉측하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우리가 먼저 물었을 텐데? 도대체 어디서 온 놈들이지? 지크프리트는 어디 있나?"
연속해서 질문하는 볼칸.
그러나 손오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아니, 너희들 탑주 맞냐니까?"
너희들이 말하기 전까지는 대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듯한 손오공의 질문에 볼칸은 결국 으르렁거리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보인다는 거냐……! 그보다 어서 말해라! 지크프리트는 어디 있나!"
"와, 진짜 탑주라고?"
이번에도 답하지 않고 자그마한 감탄을 하는 손오공.
그 옆에 있던 청룡도 볼칸의 말에 무엇을 느꼈는지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진짜 탑주들인 것 같군."
"이야, 얘들이 진짜 탑주라고?"
"그런 것 같군."
"……흐음."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제일 앞에서 화내고 있는 볼칸을 바라본 손오공은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청룡을 바라봤다.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너는 어때?"
"뭐가 어떻다는 거냐?"
"아이 거참, 딱 말하면 딱 알아들어야지. 어때 보이냐는 거잖아?"
손오공의 질문에 청룡은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강하군."
"그렇지……?"
"그런데, 생각처럼 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청룡의 이어지는 말에 얼굴이 굳는 정령들.
손오공은 그런 청룡의 말에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했다.
"그치? 진짜 쟤들이 탑주들이라고? 진짜 심마랑 붙으면 다들 쪽도 못 쓸 것 같은데?"
"뭐, 김현우가 말해준 대로군. 탑주라고 해서 모두 심마와 같은 것은 아니었어."
마치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는 듯 서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들을 보며 정령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이내 분노로 바꾸며 입을 열었다.
"네 녀석들, 죽고 싶나?"
그 중에서도 단연 분노를 가장 크게 끌어올린 것은 볼칸이었다.
쿵……! 쿵……!!
그는 어느새 자신이 서 있는 주변의 땅을 모조리 갈라버리며 손오공과 청룡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것은 드라이어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화산이 닿지 않는 벽에 자신의 능력의 원천인 나무를 만들어내며 조금 전과는 다른 냉정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지크프리트가 있을 곳에 대신 서 있는 두 명.
'느껴지는 마력양은 심상치 않아. 하지만……!'
지금 드라이어드에게 느껴지고 있는 마력양은 저번에 느꼈던 그 괴물만큼은 아니었다.
저번에 드라이어드가 봤었던 그녀는 괴물이라고 말하기에 적합한 이였다.
그녀의 몸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고, 그녀의 발걸음에 세계수는 무너졌다.
'그래, 탑주도 아니면서 그런 괴물 같은 녀석들이 또 있을 리는 없어……!'
그렇기에 드라이어드는 자신의 마음속에 물씬 올라오려고 했던 혹시나의 마음을 억누르고는 전투를 준비했고.
"뭐, 이 정도면 우선 한번 해볼 만하겠는데? 너는 어때? 쫄?"
"……또 이상한 유행어를 가져와서 쓰는군, 요즘 인터넷을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닌가?"
"인터넷을 많이 하기는, 요즘 저번에 일어난 사건 때문에 히스테리 받아주느라 펜타이스 직관도 잘 못 가거든?"
"그래 알겠다. 그런 것으로 해두지."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라니까? 요즘 나 계속 바가지 긁히는 거 보면서도 그런 말을 해? 응?"
"알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것으로 해둔다고-"
"……이 새끼들이 진짜!"
청룡과 손오공이 또 자신들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자 볼칸은 더 이상 기다릴 생각이 없다는 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둘에게 달려들었다.
쾅! 콰가가강!
볼칸이 몸을 움직임에 따라 그 주변의 땅이 갈라지면서 시뻘건 화산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화산의 정령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용 넘치는 장면.
볼칸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끼리 열심히 떠들고 있는 손오공을 향해 자신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산을 터트렸고.
꽝!
그와 동시에-
331화. 죽이지만 않으면 되잖아? (4)
"탑에서 업을 생산하지 못하게 하려면요……?"
아브가 되묻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무슨 방법 없으려나?"
김현우의 물음에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아서 말이야."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지크프리트는 김현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되묻다.
"……아!"
이내 깨달았다는 듯 김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설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오, 지금까지 봤을 때는 그냥 돌대가린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머리도 잘 돌아가나 보네?"
"도, 돌대가리?"
지크프리트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자 김현우는 피식 하고 웃더니 그를 안심시키듯 이야기했다.
"농담이니까 너무 그렇게 집중할 필요는 없고, 아무튼 괜찮은 방법이 생각나는 사람 없어?"
데블랑과의 대화 이후 김현우가 고심 끝에 생각해낸 결론.
그것은 바로 정령들이 더 이상 업을 생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복잡하게 가는 것보다는 그냥 정령쪽 탑주들을 모조리 소멸시키는 게 훨씬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관리 기관의 표적이 된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데블랑과의 대화 이후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탑주들을 소멸시키지 않고 지금 상황을 깔끔하게 타개할 수 있을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연합을 한 그들의 힘을 약화시켜 최소한의 피해로 넘어갈 수 있을지 김현우는 계속해서 생각했고,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
'데블랑한테 듣기로 정령들은 세계수에서 나오는 업을 천사들에게 일정기간 지불하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지?'
지금 정령파벌과 천사파벌이 연합하게 된 것은 바로 정령쪽에서 천사파벌에 일정 이상의 보상안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김현우를 소멸시키는 데 도움을 주면 세계수에 나오는 업을 일정이상 넘겨주겠다는 보상안을.
물론 야차가 세계수를 박살 내버린 판에 도대체 어떻게 업을 수급할까라는 생각을 했으나 사실 그 이후의 관계는 김현우가 깊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정령과 천사가 연합을 맺었어도 결국 그것은 서로의 사상으로 이뤄진 연합이 아닌, 그저 기브 앤 테이크의 선에서 만들어진 연합이라는 거니까.
그리고 기브 앤 테이크로 만들어진 연합을 깨는 법을, 김현우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정령들이 줄 수 있는 보상을 박살 내면 끝이지.'
정령들은 세계수에서 만들어진 업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 세계수의 업을 만들 수 없어진다면?
'연합은 끝이다.'
물론 김현우가 루시퍼에게 패드립을 꽤나 날려 좀 빡쳐 있는 것 같기는 했으나, 데블랑의 말에 의하면 천사들은 철저한 이익집단으로 루시퍼는 사소한 감정 따위로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연합은 그대로 스러진다.
관리 기관이 은근히 신경을 곤두세울 수 있는 연합은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결국 정령파벌밖에 남지 않게 된다.
남은 것은 그저 정령파벌에서 미쳤다고 돌진하는 놈들을 조지기만 하면 된다.
'……뭐, 사실 이 방법도 결국 탑주들이 업을 생산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봤다.
고민에 빠져있는 아브와 노아흐.
지크프리트는 멍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다 이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네 생각과 일치한다면…… 지금 만들어진 연합은 완전히 힘을 잃을 것 같군. 확실히 그렇긴 한데……."
지크프리트는 슬쩍 뜸을 들이더니 이내 김현우를 보며 이야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탑주와 탑을 끊는 방법은…… 생각할 수가 없군."
"혹시라도 생각나는 거 없어?"
김현우의 물음에 지크프리트는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묘한 아쉬움이 담긴 표정으로 입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업의 생산을 중지시키는 방법은 없는 것 같은데…… 탑주를 소멸시켜서 죽이면 모르겠지만……."
지크프리트가 곰곰이 생각에 빠지기 시작할 때쯤, 아브는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업의 생산을 중지시키는 방법은…… 잘 모르겠어요. 마력은 모르겠지만 업이라는 건 솔직히 말해서 없애려고 한다고 해서 없앨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아브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고개를 저었고,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려 마지막까지 고민을 이어가는 노아흐를 바라봤다.
그는 지크프리트와 아브의 시선을 쏠림에도 묵묵히 고민을 했고, 그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무렵이 되었을 때.
"……업의 생산을 중지시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네만-"
노아흐는 그렇게 대답했다.
"……역시 너무 좋을 대로 생각했나?"
노아흐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김현우.
"-그 비슷하게는 할 수도 있을 것 같군."
"?"
허나 그는 곧 노아흐의 이어지는 말에 곧바로 찡그린 인상을 풀고는 노아흐를 바라봤고, 그는 조금 더 생각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이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확인을 좀 해야 할 것들이 있네."
"확인해야 할 것?"
"우선 자네가 그분의 아들에게 갔다 온 뒤, 대충 다른 탑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감을 잡았네만……."
노아흐는 조금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정말로 내가 생각한 것이 가능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직접 탑에 가서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네."
"직접 가서?"
"물론 탑 전체를 돌아봐야 하는 것은 아닐세. 탑의 구조를 파악하기만 하면 되니 딱 한곳에만 가면 되지."
"탑을 확인 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아, 마침 딱 있네요?"
"어? 있나?"
김현우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말하다 이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약한 탄성을 내뱉으며 이야기했다.
"아, 생각해보니까 얘 탑주였지?"
"……??"
뜬금없는 김현우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왜인지 모르게 마음에 자그마한 스크래치가 난 기분이 들기 시작했고.
"그럼 곧바로 가면 될까요?"
"아니."
"그럼 뭔가 하실 일이 있으신가요?"
"지금 탑을 비우니까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려 봐."
이내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꽈아앙!
거대한 폭음이 50번 탑의 최상층을 때려 부술 듯 울렸다.
이미 조경이고 황성이고 뭐고 사이좋게 박살 난 50번 탑의 최상층은 개판 오 분 전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냥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이라고 소개하는 게 좋을 정도로 파탄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땅은 모조리 쩍쩍 갈라져 시뻘건 화산을 내뿜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아직 타지 않는 나뭇가지들이 화산에 타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개판이라고 부르기 충분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으나.
쿠그그그그극-!!!
거기에서 화룡정점은 바로 그렇게 엉망진창이 공간 속에 만들어진 거대한 폭풍이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사방으로 퍼지는 폭풍을 쉴 새 없이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며 자신의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파탄난 공간 속에서.
"끅!?"
"벌써 지친 거 아니지!? 바로 다음 일격 들어간다!"
손오공은 볼탄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심마와의 전투를 끝으로 들지 않았던 여의봉이 오랜만에 들려 있었고, 머리 위에는 황금빛의 금고아가 새하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손오공의 몸은 투전승불(鬪戰勝佛)이라는 업에 맞게 붉은 기류가 끝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빠아아악!
"크악!!"
손오공이 휘두른 여의봉에 그대로 머리통을 후려맞은 볼칸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떼어내기 위해 화산을 만들어 내려 했다.
그러나-
"그걸 몇 번씩이나 하면 도대체 누가 당해주겠냐 이 말이야!"
빠아악!
"껙!?"
볼칸이 화산을 끌어올리는 순간 그의 뒤에 자리를 잡은 손오공은 곧바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 쳤다.
꽝!
그대로 자신이 만든 화산에 처박히는 볼칸.
손오공은 땅바닥에 처박힌 볼칸의 머리통을 다시 한번 후려치기 위해 몸을 움직였으나, 그의 몸은 이내 순식간에 액체처럼 변해 용암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 새끼 또 도망을- 끅!?"
그리고 그 순간, 손오공은 자신의 오른 편에서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분노의 정령 퓨리의 주먹에 본능적으로 여의봉을 들어 올렸지만-
'존나 무식한 힘이네 진짜!'
-손오공은 퓨리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뒤로 튕겨나갈 수밖에 없었고.
파드드드득!
곧 튕겨나간 손오공을 노리듯 화산 속에서 불타는 나무가 솟아 올라왔으나 손오공은 손에 쥔 여의봉을 가볍게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그 나무들을 모조리 치워내고 자리에 착지했다.
"후……!"
그와 함께 내뱉는 거친 한숨.
'이 새끼들 은근히 빡세네……!'
손오공은 은근히 자신의 몸에 누적된 피로를 느끼며 하늘을 바라봤다.
꽝! 콰르르릉!!
지상과 마찬가지로 실시간으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하늘.
청룡이 구름 사이를 유영하며 계속해서 폭풍을 만들어내고 있는 정령을 견제하고 있었고, 스토로펠은 어떻게든 손오공을 방해하기 위해 이 주변으로 계속해서 폭풍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청룡이 번개를 내리쳐 폭풍 자체를 없애버려도,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폭풍을 만들어내는 정령.
'조금이라도 지원이 오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손오공은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앞으로 몸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볼칸과, 주변의 나무들이 슬금슬금 자라는 것을 보았다.
분명 맨 처음 청룡의 지원이 있었을 때만해도 싸움은 꽤 괜찮게 흘러갔으나, 그들이 본격적으로 청룡의 지원을 막기 시작하면서 싸움은 급속도로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손오공을 상대하는 세 명은 볼칸을 선두로 해 그의 시선을 끌었고, 그가 방심할 때마다 분노의 정령인 퓨리가 몸을 투명하게 한 채 보이지 않는 일격으로 계속 데미지를 축적하고 있었다.
게다가.
"쯧!"
손오공이 조금이라도 쉬려고 하면 주변으로 자라기 시작하는 나무는 그의 회복을 계속해서 방해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확실한 정령들의 연계.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순간이나마 정령 한 명을 처리하고 다른 녀석들을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정령들은 철두철미하게 그 모습을 감추며 손오공을 공격했다.
'일대일로 붙으면 뒤지게 쳐맞을 것들이…….'
분명 일대일로 맞붙는다면 손오공은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지금 그들은 그저 연계가 대단할 뿐이지 고작 한 명 한 명을 놓고 본다면 딱히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어떻게 하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손오공의 희망사항일 뿐이었고, 정령들은 절대로 연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손오공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했고.
쿠그그긍-!
손오공이 다시 한번 볼칸이 튀어오르는 것을 보며 여의봉을 휘두르려는 준비를 마치는 그 순간-
"뭐야? 설마 이렇게 빨리 왔다고?"
-손오공은 굉장히 낯익은 목소리가 자신의 귓가에 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332화. 죽이지만 않으면 되잖아? (5)
50번 탑의 최상층.
"내, 내가 혼신의 힘을 들여 만들어놓은 공간이……!"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망연한 표정으로 자신이 만들어 놓은 공간을 바라봤다.
"와……."
"이건 좀…… 심하군."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포칼립스가 세 번 정도 일어난 것 같은 세상의 모습.
땅은 제대로 걸어가기 힘들 정도로 쩍쩍 갈라져 화산을 뱉어내고, 그 부서진 벽 틈 사이사이로 보이는 불타는 뿌리는 메케한 매연을 만들어 하늘로 올려보내고 있다.
거기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번개.
쿠그그그그긍-!
그리고 그 번개를 있는 대로 흡수하고 있는 폭풍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포칼립스를 넘어선 무언가를 재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디제스터 모음전 같은 느낌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네."
노아흐와 아브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그 옆에 있던 지크프리트는 더더욱 처참한 마음이 되어 멍하니 개판이 난 공간을 바라봤다.
'처음 탑주가 되고 나서 이 편안함을 주던 풍경을 조형하기 위해 도대체 얼마가 걸렸는가.'
물론 예전에도 김현우가 찾아왔을 때 한번 개판이 나기는 했었으나 그것은 금방 고칠 수 있었다.
그저 꽃밭이나 성이 약간 맛이 간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건?
'……회생불능이야.'
남아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보기 좋게 조형해 놓은 나무나 꽃, 식물은 일체 찾아볼 수 없었고, 성도 마찬가지다.
아브의 말처럼 진짜 대재앙이 일어난 싹쓸이를 해버린 것 같이 박살 나 있는 공간.
"……하."
그것에 지크프리트가 짙은 현자타임을 느끼며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기, 김현우!"
"뭐야, 저번에는 이름 몰라서 이 새끼 저 새끼 하더니 이름도 다 외웠나 보네?"
김현우는 손오공의 옆에 서서 갑작스레 볼칸의 옆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드라이어드를 보며 피식 하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웃음을 보며 드라이어드는 더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이렇게 시간을 오래 끌어서는 안됐어!'
그녀는 분명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나이아드에게 그런 충고를 받았었다.
전투가 불가피하면 무조건 하되, 절대로 시간을 오래 끌지는 말라는 소리를.
물론 그 이유는 바로 김현우 때문이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해 봤을 때 정령쪽에서는 그가 다구리를 당하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구하러 오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으나 혹시나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나이아드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진짜로 지원을 올 줄이야……!'
드라이어드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려 퓨리와 볼칸을 바라봤다.
다들 나이아드의 당부를 떠올렸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
드라이어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려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
그것은 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를 뒤에서 공격하기 위해 다가가고 있는 분노의 정령 '퓨리'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섣불리!'
드라이어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허나 그런 드리이어드의 생각과는 다르게 퓨리는 순식간의 김현우의 뒤를 잡으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역시 나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상태로 위치를 파악하기는 어렵겠지.'
분노의 정령 퓨리.
그는 다른 정령들과는 다르게 큰 특징이 없다.
볼칸처럼 화산을 내뿜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드라이어드처럼 나무를 계속해서 재창조 해낼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다만 그는 다른 정령들과는 다르게 '감정'에 속한 정령이기 때문에 자신이 그 본 모습을 일부러 유지하지 않는 이상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와 함께 분노라는 특성상 순간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압도적인 힘을 낼 수 있는 공격.
퓨리는 자신을,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특징과 능력을 믿고는 김현우에게 크게 휘두른 일격을 휘두-
꽈드드드득!
-르지 못했다.
"크하악!?"
"왜, 보이지만 않으면 눈치 못 챌 줄 알았냐?"
퓨리가 김현우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그 순간, 그는 가볍게 몸을 앞으로 숙이는 것만으로 공격을 피해냈고, 곡바로 퓨리의 목을 붙잡아 땅바닥에 꽂아버렸다.
곧바로 김현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퓨리.
"너무 발광하지 마, 안 그래도 풀어주려고 했으니까."
김현우는 씨익 웃곤 곧바로 몸을 움직여 곧바로 그의 몸을 들어 올리곤 드라이어드가 있는 곳을 향해 집어 던졌다.
마치 대포를 던진 것처럼 드라이어드에게 날아가는 퓨리의 몸.
그녀는 날아오는 퓨리의 몸을 받기 위해 나무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고작 그런 나무 몇 그루로 제대로 받을 수나 있겠어?"
"!!"
"네 몸으로 직접 받아야지, 안 그래?"
빠아아악!
"꺄아악!"
이미 김현우는 드라이어드의 뒤에서 그녀의 몸을 퓨리가 있는 곳을 향해 후려찼다.
우당탕탕!!
그대로 날아가 앞서 날아오던 퓨리와 몸을 박은 두 정령은 사이좋게 몸을 뒤엉키며 땅바닥을 굴렀고.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볼칸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에 제대로 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옆에 선 김현우를 바라봤다.
마치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볼칸의 모습.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쫄지 마, 너는 내가 안 후드려 팰 거니까."
"뭐…… 뭐라고?"
"그나저나 계속 나를 보고 있어도 괜찮겠어?"
"무……무슨……?"
"앞에를 봐."
김현우의 말에 따라 바보같이 앞을 바라본 볼칸.
그는 곧 김현우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대가리 딱 대."
그곳에는 손오공이 있었다.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황금색으로 변한 여의봉을 들고서.
"이……이런 젠-"
입을 열며 자신의 몸을 용암으로 바꾸려는 볼칸.
"이 개새끼야!"
그러나 그의 몸이 액체로 미처 전부 바뀌기도 전에, 빛나는 오공의 여의봉은 그대로 볼칸의 머리 위에 내리꽂혔다.
그렇게 지상이 김현우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정리 되었을 때.
"크윽!"
스트로펠은 점점 자신을 감싸고 있는 폭풍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떻게든 자신의 폭풍을 더더욱 끌어 올리려 했으나.
"이만하면 충분하군."
스트로펠이 폭풍을 조종하려는 순간, 줄곧 하늘에서 느긋하게 구름 사이를 유영하던 청룡이 부지불식간에 폭풍에게로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스트로펠은 깜짝 놀라며 폭풍을 조종하려 했으나.
"이런 미친……!"
이미 청룡은 그 거대한 동체를 움직여 스트로펠이 만든 폭풍을 뭉그러뜨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스트로펠은 망연한 표정으로 황망하게 사라지는 폭풍을 바라봤고.
"각오해라."
곧 그는, 하늘에서 모이기 시작하는 거대한 번개를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꽈아아아앙!
-끔찍한 고통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
"그렇게 하면 도망치지 못할 거라고?"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만약 일반적인 등반자 정도라면 이정도로 충분히 구속이 가능할 것 같네만…… 이들은 탑주다 보니 내 아티팩트가 잘 먹힐지 모르겠군."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며 정령들을 동그랗게 묶어놓은 밧줄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바로 노아흐가 얼마 전 탑의 마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탑의 마법진을 지우는 작업을 하던 도중 뜻밖의 발견으로 만들게 된 제작품이었다.
"저기에 묶여 있으면 실시간으로 마력을 빨아들인다 이거지?"
"맞네. 거기에 저들을 우리가 있는 탑에 옮겨서 야차한테 데려가기만 하면…… 아마 도망칠 생각은 하지 못할 것 같군."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 혹시나의 상황에 대비해 탑 위로 불러 놓은 야차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시선을 돌려 손오공와 청룡을 바라봤다.
상당히 피곤한 표정으로 그나마 남아 있는 의자 쪼가리에 앉아 몸을 뒤로 젖히고 있는 그 모습을 본 김현우는 이내 입을 열었다.
"할 만해?"
"할 만하기는 개뿔이."
김현우의 말에 즉답으로 튀어나온 말.
손오공은 불만 어린 말투로 이야기했다.
"솔직히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수정 쓸 뻔했다."
"왜? 막상 보니까 잘 싸우고 있는 것 같더만."
"만약 일대일이였으면 잘 싸우는 정도가 아니라 한 명 한 명 박살을 내버릴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아무튼 빡세더라."
"……그래?"
김현우는 슬쩍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그들이 상대한 탑주들이 총 네 명이라는 것을 상기하고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야."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던 손오공은 이내 김현우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너는 근데 어째 더 강해졌냐?"
"강해졌다고?"
"그래, 너 분명히 심마랑 싸울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손오공은 그렇게 말하며 옛날의 김현우가 어땠는지를 상상했다.
'그때도 나보다 강하기는 했는데…….'
그때의 김현우는 지금 이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물론 아까 정령들을 처리한 것을 보면 그 녀석들이 연계를 멈추고 한 명이 튀는 짓을 해서 순식간에 제압당한 거지만.'
사실 그렇다고 해도 김현우의 강함은 분명 그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아까 전 김현우가 보여준 반응속도와 이동속도는 손오공이 제대로 쫓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기에 묘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던 손오공은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모르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목을 뒤로 꺾으며 이야기했다.
"에이~ 잘 모르겠다."
"뭐야? 갑자기 말하다가."
김현우는 그런 손오공의 반응에 조금 김이 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청룡은 왠지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했다.
"확실히,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만 분명 이전과 다른 느낌이 들기는 하는군."
"……이전과 다른 느낌? 그게 뭔데?"
"으음, 이게 마땅히 설명하기가 좀 힘들 것 같다."
청룡의 말에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청룡을 바라보는 김현우.
"뭐, 아무튼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 같네. 솔직히 지금처럼 네 명이면 좀 빡셀 것 같은데 한두 명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김현우의 뚱한 표정을 보고 답한 손오공은 이내 의자 쪼가리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이야기했다.
"그래서, 이제 볼일도 끝났으니까 다시 51번 탑으로 돌아가면 되나?"
손오공의 물음에 김현우는 뚱한 표정을 지우고는 이야기했다.
"너랑 청룡은 저 녀석들 데리고 우리 탑 최상층으로 가서 대기 좀 해줘."
"너는 어쩌게?"
"나는 여기에서 좀 할 일이 생겨서, 우선 먼저 가 있어. 어차피 뭐만 확인하고 곧바로 갈 테니까."
김현우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한 손오공.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룡과 함께 51번 탑으로 가는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와, 근데 이건 좀 대단한 거 아니냐? 어떻게 여기만 딱 안 무너지고 버티고 있냐?"
그 와중에 나온 손오공의 감탄.
청룡은 피곤한 말투로 말했다.
"알았으니까 빨리 들어가라. 좀 쉬고 쉽군."
"거 더럽게 틱틱거리네."
그들은 그렇게 티격거리며 문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그들이 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려 지크프리트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아래 계층으로 갈 수 있는 문이다."
김현우는 이내 지크프리트의 아래에 있는 계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333화. 불쾌한 진실 (1)
51번 탑의 최상층.
김현우의 집과 똑같이 지어져 있는 자택 안에는 야차가 느긋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었다.
노곤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탁자에 발을 올려놓은 야차는 뒤꿈치로 탁자를 톡톡 치며 멍하니 있다가-
"풋."
-이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저도 모르게 자그마한 미소를 지으며 키득키득 거렸다.
그 미소 사이에 보이는 기대감.
그녀는 김현우가 자신을 이곳으로 부를 때 걸었던 조건을 떠올리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역시 조건을 걸기를 잘했느니라.'
물론 처음에는 김현우의 부탁을 그냥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김현우 혼자만을 위한 일도 아니었거니와, 무엇보다 야차에게 그것은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김현우가 탑 밖에 나간 이상 야차가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현우가 왔을 때 야차는 그의 부탁을 바로 들어주겠다고 말하기 보다는 조건을 거는 것을 택했다.
이유?
'맛을 봤으니, 이제는 진짜로 시음할 차례가 아닌가?'
그것은 바로 야차가 다음 레벨로 진출하기 위해 부린, 별것 없는 자그마한 꾀였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기분이 좋은 이유는 바로 김현우의 반응 때문.
'분명 그녀 석은 내가 꾀를 부린 것을 알고 있을 테지.'
허나 김현우는 분명 그녀가 꾀를 부린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요구를 승낙했다.
'그건 한마디로 그녀석도 은연중에 이 관계를 은근히 바랐다는 소리!'
……뭐, 물론 착각은 자유라고, 김현우는 그저 50번 탑에서 할 일이 신경 쓰여 야차의 부탁을 제대로 듣지 않고 그저 건성건성 넘겼던 것뿐이었지만…… 아무튼 야차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음~♬"
어느 정도냐면,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좋아져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저택에서 기다렸을까?
야차는 곧 자신의 감지하는 공간 안에 다른 이들이 들어왔음을 깨닫고는 김현우가 돌아왔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흠, 아니구나."
그녀는 곧 자신의 기감에서 느껴지는 것이 김현우의 마력이 아니라는 것에 아쉬워하며 저택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 뒤.
"……야차님?"
"왔느냐?"
야차는 문을 연 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손오공과 청룡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는 이내 그들과 함께 딸려 들어온 정령들을 바라봤다.
"이것들은 또 무엇이냐?"
그녀의 질문.
손오공은 50번 탑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요약하기 시작했고, 그 이야기를 한동안 듣던 야차는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 했다.
"한마디로 포로들인 게로구나?"
"맞습니다."
청룡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들고 있던 정령들을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깩!"
개중에는 다른 정령에게 깔려 기묘한 소리를 내는 정령도 있기는 했으나 묶여 있는 정령들을 깔끔하게 무시했고, 그 모습을 보던 야차는 손오공과 청룡을 보며 이야기했다.
"상당히 마력을 많이 소진했구나. 게다가 지쳐 보이기도 하고."
"말도 마십쇼."
야차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투덜거리는 손오공.
"그냥 개 빡셌습니다. 이 새끼들 세 명에서 연계를 오지게 하는데…… 도무지 이길 방법이 보이지를 않더라구요. 그 와중에 저놈은 폭풍 만들어내는 놈이랑 놀고 있고."
"정말로 놀고 있다고 생각한건 아니겠지? 나도 내 나름대로 그 녀석과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혈전 같은 소리하고 있네. 폭풍 주고받기 하는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데?"
"하아, 앞만 보고 뒤는 보지를 못하는군. 도대체 네게 가는 견제들을 누가 받아내 줬다고 생각하는 거지?"
"야, 그거 초반만이잖아?"
"초반 같은 소리하지마라, 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공간 전체를 보아가며 네게 오는 위협들을 모두 쳐냈다! 네 주변으로 나무들이 얼마나 많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기는 한가?"
"아니 그거야 나도 당연히 알고 있었고 엄연히 따지면-"
야차에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하다 갑작스레 두 사람의 설전으로 변해버린 모습을 보며 야차는 한동안 웃음을 지은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손오공은 곧 자신이 야차에게 말을 하다 청룡과 말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뒤 이내 괜스레 큼큼 거리며 목을 정리하고는 이야기했다.
"아무튼, 살짝 힘들었습니다."
"그러느냐? 그래도 대단하기는 하구나, 저들은 분명 탑주들일 텐데 둘이서 나름대로 버틴 것 아니더냐?"
"솔직히 일대일이면 전부 다 이겼을 것 같기도 한데."
"웃기는군, 아마 두 명 정도 잡다가 제풀에 지칠 것 아닌가?"
"또 헛소리를 해? 내가 세 명이랑 싸우는 거 못 봤어?"
"그러니까, 그건 내가 계속 뒤에서 어느 정도 보조를 해줬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건가?"
다시금 발동을 걸기 시작하는 둘.
야차는 한동안 그들의 모습을 보다 입을 열었다.
"아무튼, 결국 상대하기는 조금 힘들었던 것 같구나."
"……뭐. 그렇죠. 근데 솔직히……."
"상대하기는 조금 어려웠다만, 상대할 만하다고 생각했느냐?"
"예."
손오공의 긍정.
확실히 청령과 손오공이 이번에 탑주들과 싸우면서 느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탑주들이 자신들의 생각만큼 강하지 않았다는 것.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탑주의 존재는 '심마'와 비슷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이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청룡과 손오공이 본 탑주는 심마밖에 없었고, 그 이외의 탑주라고 해봤자 김현우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50번 탑주라는 지크프리트를 처음 보고, 바로 그 뒤에 탑주들을 봤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탑주들은 강했지만, 맞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손오공과 청룡에게는 은근히 아쉬운 마음이 들게 했다.
"솔직히 조금만 더 강했으면 그 녀석들도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을 것 같았는데……."
아주 조금.
손오공과 청룡은 자신들이 지금 상황에서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 있었다면 탑주들을 제압하는 것은 무리일지라도 '처리'하는 것을 무난하게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기에 더욱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미 그들에게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곳이 없으니까.
정확히는 앞으로 나갈 수 있어도, 그 기간이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오래 걸린다.
"흐음."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는 청룡과 손오공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야차는 이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부족한 힘을 채워야겠구나."
"……부족한 힘을?"
"그래. 힘이 조금 부족했다면 채우면 되지 않겠느냐?"
야차의 말에 손오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확실히 그거야 당연한 말이긴 한데…… 저희는 이미 본래의 업을 전부 다 찾은 상태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곳에서 더 앞으로 나가려면……."
손오공의 물음.
그에 야차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거라, 너희가 새로운 힘을 얻을 방법은 당연히 준비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심마가 했던 것처럼 남의 업을 빼앗아 쓰는 방법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게 대체 무슨 방법입니까?"
그녀의 말에 관심이 간다는 듯 묻는 손오공과 청룡.
그에 야차는 씨익 하고 웃더니-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것이 있다."
"……무엇입니까?"
"우선-"
-이내 그렇게 말했다.
"9계층에 내려가서 이서연을 진정시키는 게 좋을 것 같구나."
"……?"
"?"
한순간 멍한 표정을 짓는 손오공과 청룡.
그러나-
"아…… 좆됐다."
-손오공은 저도 모르게 허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김현우 일행은 지크프리트가 열어 놓은 지하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지상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으로 물드는 지하실 안쪽.
김현우는 자신의 마력을 가볍게 퍼트리는 것으로 시야를 확보한 뒤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고, 도대체 언제쯤 돼야 이 계단이 끝날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쯤.
"문이네요?"
김현우 일행은 거대한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하실에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상당히 거대한 문.
김현우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물었다.
"여기가 탑 안이야?"
"맞다. 이제 이 문을 열면 그때부터 이 50번 탑의 '굴'이 보일 거다."
"……굴?"
"나…… 아니, 이곳에 사는 이들은 모두들 자신들이 사는 이곳을 굴이라고 불렀다."
"……뭐, 우선 한번 열어봐."
김현우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문을 향해 걸어갔고, 그가 가볍게 문을 한번 미는 것으로 탑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끼기기긱-끼기기기기긱!!!
마치 몇 년이나 열리지 않은 것처럼 심한 쇳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그리고-
"윽……!?"
"으엑……!"
"큼……."
문이 열리자마자 김현우는 곧 자신의 코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악취에 저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씨발, 이건 무슨 냄새야?"
순간적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지크프리트를 바라보는 김현우.
허나 정작 지크프리트는 이런 것은 별것 아니라는 듯 오히려 김현우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했다.
"만약 냄새를 맡기 힘들다면 마력으로 코를 보호하는 게 좋을 거다."
지크프리트의 말에 김현우는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마력을 코로 흘려보내 후각을 마비시켰고, 노아흐와 아브도 그렇게 하고 나서야 코에 대고 있던 손을 풀 수 있었다.
"아니 진즉에 이야기를 해줘야 할 것 아니야?"
"미안하군. 애초에 나는 이 냄새에는 익숙해져 있어 미처 그런 반응이 나올 줄 몰랐다."
사과하는 지크프리트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까딱였다.
"가자."
김현우의 말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기는 지크프리트.
그를 따라가며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노아흐에게 물었다.
"어때?"
"잠시만 기다려보게. 지금 당장 정보를 수집하는 중일세."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며 쉴 새 없이 오른손을 허공에 놀렸다.
그 모습을 본 김현우는 이내 다시 시선을 돌려 지크프리트를 따라 어두운 동굴을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굴의 모습은 어둡고 신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조금 낯익은 모습이었다.
지금 그들이 걷고 있는 동굴은 마치 51번 탑에서 보던 미궁의 모습과 굉장히 흡사하게 닮아 있었으니까.
특히 마력을 퍼뜨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지 모를 은은한 파란빛이 주변을 밝혀주는 모습이 무척이나 흡사했다.
"……."
시선을 돌려 아브를 보니 그녀도 지금 이 풍경이 낯설지 않은 듯 묘하게 신기한 표정으로 동굴을 여기저기 바라보고 있었고.
"다 왔다."
이내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김현우는 지크프리트의 안내에 따라 50번 탑의 아래에 있는 계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50번 탑의 계층의 풍경을 확인했을 때.
"아니 썅 이건 또 뭐야?"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334화. 불쾌한 진실 (2)
김현우가 내려다본 곳에는 지하세계가 있었다.
지하세계.
주변이 뻥 뚫리지 않은 지하세계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해가 들어오는 곳은 없었고, 또한 다른 빛이 들어오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 공간은 김현우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으나, 적어도 그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 태양 빛이 들어오는 곳은 없었다.
마치 51번 탑에 존재하는 미궁에 사람 사는 주거지를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김현우가 그것보다 더 충격을 받았던 이유는.
"……."
바로 김현우가 내려다보고 있는 곳 아래에 엄청난 양의 오물이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개쌍욕이 나오고 비위가 약한 사람은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김현우가 보고 있는 장면은 더러웠다.
"욱-"
아니나 다를까, 아브가 아래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부여잡았고, 지크프리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거니 그러려니 해라. 이곳은 원래 이런 곳이니까."
"뭐? 원래 이런 곳이라고?"
"그래."
김현우는 그 대답을 들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넘쳐나는 오물 외에도 보이는 것들이 있기는 했다.
그것은 지붕들.
물론 만들어진 지붕들도 현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잘 만들어진 지붕이 아니었다.
김현우가 보고 있는 것은 대충 잔가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른 풀로 위를 덮어놓은 지붕들.
그런 지붕들 사이로 나 있는 길에서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은 현대적으로 재단된 옷이 아닌, 마른 가죽이나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넝마를 입고 있었다.
그저 집과 사람들의 옷을 본 것만으로도 이곳의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
김현우는 계속해서 시선을 돌려 지상을 바라봤다.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칼과 창을 든 채 몬스터와 싸움을 하는 인간들이 보였다.
51번 탑에서도 볼 수 있었던 고블린과 오크와 싸우는 인간들.
그리고 또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자, 이번에는 자신들끼리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인간들도 볼 수 있었다.
"허."
김현우는 그저 이곳에 와서 고작 몇 번 정도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으나 곧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빠르게 깨달을 수 있었다.
무질서.
완벽할 정도의 무질서.
그것이 바로 이곳을 표현 할 수 있는 한 가지 단어이자 문장이었다.
"아니…… 시발 이건 그냥 완전 개판이네."
김현우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지크프리트는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했다.
"확실히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군."
"뭐? 네 눈에는 저게 그럼 뭘로 보이는데?"
김현우가 아래를 가리키자 지크프리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무슨 답을 원하는지 모르겠다만 내 입장에서는 그냥 평범하게 보인다."
"뭐?"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원래부터 탑주였던 게 아니라 애초에 이곳에서 살다가 탑을 올라와 탑주의 자리를 빼앗은 케이스다."
한마디로,
"이 풍경은 내가 맨날 보던 풍경과 다름이 없다는 말이지. 오히려 나는 탑주가 되고 나서 파벌 같은 개념이 더 신기하고 골치 아프게 느껴지더군."
뭐, 편안한 삶을 살려면 참여해야 하기에 결국 공부를 했지만.
지크프리트는 왠지 아련한 과거를 회상하듯 시선을 위로 올렸다가 이내 묘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뭘 봐?"
"……아니다."
김현우의 한마디에 다시 시선을 돌리는 지크프리트.
그는 잠시 목을 가다듬듯 흠흠 거리더니 이야기했다.
"아무튼,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저 위보다 이곳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긴 하다."
"……진짜요?"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었다는 듯 말하는 아브.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당연히 위와 아래 중 선택을 하라 그러면 위로 올라가겠지만 당시에는 아니었다."
"어째서?"
"배울 게, 그리고 참을 게 너무 많았거든."
"아……."
아브는 지크프리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너희들이 보시다시피 이곳은 애초에 지켜야 할 규칙이나 질서 같은 건 없다. 말 그대로 무질서지."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여기가 더 편하다.
"애초에 이곳에서 누구한테 눌리지 않을 정도의 힘만 있다면, 애초에 그런 규칙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지크프리트의 말에 아브는 질색하며 이야기했다.
"그래도 이건 좀……."
"?"
"너무…… 생활수준이 떨어지지 않나요?"
아브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이야기했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탑주가 됐다고 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
"?"
"?"
"……뭐, 뭐야? 왜 그런 표정으로 보지?"
지크프리트가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노아흐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탑주가 탑을 관리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고?"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애초에 탑주들은 탑을 관리 할 수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럼 업은 어떻게 모으는데?"
"그거야, 이곳에서 뽑힌 업이 최상층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곳이 있다. 거기에서 업을 수급하는 거지."
"그럼 그 이외의 관리는 전혀 안한다고?"
김현우의 물음에 지크프리트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정령파벌의 몇몇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신격화해서 업을 추가로 벌어들인다고 하기는 하는데…… 나는 그런 건 아예 안 하는 편이다."
"아니, 그건 관리가 아니라 또라이 짓이잖아?"
"……그런 게 아니라면 대체 뭘 관리한다는 거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질문하는 지크프리트.
그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탑주들이 탑을 관리하는 게 아니라고?'
51번 탑.
그러니까 김현우가 탑주로 있는 탑의 경우에도 엄연히 말하면 계층을 관리하기는 꽤 힘들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기가 힘들다고 할 뿐이지, 우선 관리를 한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할 수 있었다.
물론 직접 계층인들의 생활수준에 끼어들어서 뭔가를 만지지는 못하지만 아브나 노아흐가 외부적으로 계층을 관리해 생활수준은 바꾸는 게 가능하다고 들었었다.
"아니, 그럼 탑주가 하는 게 도대체 뭐야?"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질문하자 지크프리트는 이야기했다.
"……당연히 탑주가 하는 건 없다. 그저 권리를 누릴 뿐이지."
"……."
김현우는 굉장히 당당하게 말하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바로잡지 않은 이상 대화가 평행선을 달릴 것이라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뭐, 사실 그보다 더 귀찮은 건 김현우가 사실을 일일이 바로잡아 줘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김현우는 지상을 내려다보고는 이내 주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
어차피 김현우가 나서서 무엇을 해줄 것이 아닌 이상 그가 나서는 것은 필요한 오지랖이니까.
"다른 탑도 다 여기랑 비슷하냐?"
김현우의 질문에 지크프리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야기했다.
"다른 탑을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 보통 최상층에는 몇 번 정도 이야기를 목적으로 가 본 적이 있기는 해도 이렇게 계층을 구경하지는 않으니까."
다만-
"내가 알기로 계층들은 전부 다 다르다고 들었다. 어떤 곳은 하늘이 있는 곳도 있고, 또 어떤 곳은 반대로 부유섬으로 이뤄져 있는 곳도 있다고 들었던 것 같군."
지크프리트의 말.
그에 김현우가 추가로 질문을 하려는 순간.
"조사가 끝났네."
노아흐는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를 바라봤다.
"어떤데?"
"우선 모든 탑이 외형만 다르고 이런 구조라는 전제하에 결론부터 말하면."
"말하면?"
"내가 생각한 계획이 거의 100%확률로 성공 할 수 있을 걸세."
####
51번 탑의 최상층.
"얘들 아직도 기절해 있냐?"
김현우의 물음에 청룡은 대답했다.
"마력을 계속해서 빼앗기다 보니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 힘든 것 같더군."
"그래? 그보다 손오공은 어디에 있어?"
"손오공 말인가? 급한 일이 있다고 하더니 9계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쉬려고 내려간 게 아니라?"
"이서연을 달래러 내려간 것 같더군."
"……서연이 달래러?"
김현우의 되물음에 그의 옆에 있던 아브는 저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을 내더니 이야기했다.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요."
"뭐가 그래?"
"아니……."
아브는 김현우에게 처음 손오공이 최상층에 왜 올라왔는지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 주었고, 그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있던 김현우는.
"……."
손오공에게 짧은 애도를 표하고는 자리에 앉으려다 또 한번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야차가 안 보이네."
분명 그는 처음 50번 탑으로 이동했을 때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 야차를 최상층에 대기시켜 놓고 갔었다.
"야차 님을 찾는 거라면 그분은 손오공과 같이 9계층으로 내려가셨다."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 일을 빨리 끝내고 내려오라고 하더군."
"……."
청룡의 말에 김현우는 그제야 자신이 야차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던 것을 떠올렸고 순식간에 피곤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가디언? 갑자기 왜 그래요?"
"아니, 그냥 좀 갑자기 곧 피곤해져야 할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손으로 자신의 눈을 한번 문지른 김현우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 앉았고 이내 노아흐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 방법이라는 게 뭔데?"
김현우의 물음.
그에 노아흐는 이야기했다.
"우선 설명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물어보도록 하지. 자네는 그저 계층에서 탑주들에게 업이 전달되지만 않게 하면 되는 겐가?"
노아흐의 물음에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그렇지? 탑주들이 업을 받지 못하면 결국 세계수에서 나오는 업을 생산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김현우의 대답에 노아흐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이내 자신의 품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노아흐는 탁자 위에 보석 하나를 꺼내 두었다.
그 무엇도 들어가 있지 않은 듯 무척이나 투명한 빛을 띠고 있는 보석.
김현우는 보석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게 뭐야?"
"업을 담을 수 있는 보석일세."
"업을 담을 수 있는 보석이요……? 아, 이거 설마."
아브의 탄성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 했다.
"아브는 알아챈 듯하군. 지금 내가 꺼내놓은 것은 바로 예전 심마가 다른 등반자들에게 업을 나누어 줄 때 썼던 그 보석일세."
"그런데……?"
김현우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노아흐를 바라보자 그는 이내 김현우의 손에 들려 있던 보석을 가져가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금부터 나는, 이 보석을 새롭게 개조할 걸세."
"새롭게 개조한다고?"
"그래, 개조라고 해도 특별한 개조는 아닐세. 그저 나는 이 보석이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스스로 업을 흡수할 수 있도록 개조할 생각이라네."
노아흐의 말.
그에 김현우는 처음에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노아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335화. 불쾌한 진실 (3)
"그러니까 네 말은 이걸 개조한 뒤에 각 계층의 땅속에 박아 넣으면 그곳으로 업이 전부 빨려 들어간다 이거지?"
"정답일세."
김현우의 물음에 만족했다는 듯 대답하는 노아흐.
그는 감탄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노아흐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내 아브가 입을 열었다.
"음…… 우선 제작자님이 어떻게 하려는지는 알았는데……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는 소용이 없지 않을까요?"
"어는 순간부터는 소용이 없다니?"
"당연히 저 보석을 박아 넣고 그게 제작자님 말대로 계층의 업들을 흡수한다면 처음에는 당연히 업이 모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저 보석이 다 차게 되면……."
아브가 그렇게 말하며 말을 줄이자 노아흐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도 준비를 할 생각일세. 업이 꽉 차면 그 업을 쓸데없는 소비로 전부 날리는 식으로 만들어 두면 되겠지."
"그런 것도 가능해?"
"이 정도야 내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네. 물론 시간은 조금 걸릴 수도 있겠지만 말일세."
"식은 죽 먹기라며?"
"만드는 건 쉽지만 걸리는 시간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 않은가?"
노아흐의 반박에 김현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시간은 얼마 정도 걸리는데?"
"흐음, 만들기 시작해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1주에서 2주 정도는 걸릴 것 같군. 사실 하나하나 만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네만 수량이 수량이지 않은가?"
거기에-
"혹시라도 불량품이 있으면 안 되니 검사까지 전부 하려면 역시 2주 정도는 필요할 것 같군."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고는 이내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잠깐."
"왜 그런가?"
"보석을 계층에 박아야 한다고 했지?"
"그렇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업을 흡수하려면 계층 안쪽에다 박아 넣는 게 좋겠지."
"……그럼 필연적으로 보석을 설치하려면 정령파벌이 있는 탑에 가야 한다는 거네?"
"맞네."
노아흐의 대답.
그에 지크프리트는 난색을 표하며 이야기했다.
"……직접 들어가는 건 여러모로 힘들 것 같은데."
"왜?"
김현우의 질문.
그에 지크프리트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선 제일 처음으로 걸리는 게 많다."
"……걸리는 거?"
"그래, 너는 잘 모르겠지만 모든 탑주들은 자신의 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일종의 보안을 걸어 놓고 있다. 한마디로 그 보안을 뚫지 못하면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지."
"부수면 되잖아?"
김현우의 심플한 대답에 지크프리트는 일순 한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어? 표정 봐라?"
"흠, 흠흠 아니다……."
이내 김현우의 주먹을 보고는 급하게 말을 바꾸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무튼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면……그 보안은 물리적으로 부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 좌표의 문제다."
"……좌표 문제?"
"그래, 그들은 자신의 탑으로 들어올 수 있는 좌표를 숨겨놨다. 한마디로 그 좌표를 알지 못하면 그 탑으로 갈 수 없다는 거지."
게다가-
"우선 들어가도 문제다. 들어가면 당장 탑주들과 맞붙어야 하지 않나?"
"그건 별로 문제가 안 되는 것 같은데?"
김현우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묘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물론 처음 돌파할 때는 모르겠다만 아마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너를 상대하기 위해 뭉치기 시작할 거다."
"우리도 애들 데려가면 되잖아?"
김현우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도대체 누구를?' 이라고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 녀석이 탑주로 있는 탑에는 기상천외한 놈들이 있었지.'
잠시 평범하게 생각하고 보니 잊고 있었으나 김현우가 탑주로 있는 탑에는 일개 계층민 주제에 다른 탑주들과 대등하게 싸우거나, 혹은 탑주를 아예 찍어 눌러 버릴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김현우는 눈치를 슬쩍 보더니 이내 이야기했다.
"만약 그렇다면 당장 탑주들과의 싸움은 문제가 없다고 치지만 역시 좌표의 문제는……."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말하며 말을 흐리다-
"……아!"
"……?"
"방법이 있기는 하다!"
"뭐?"
"좌표를 찾을 방법 말이다! 물론 전체라고는 할 수 없다만 한 가지 정도 방법이 있다!"
"그게 뭔데?"
김현우의 질문에 지크프리트는 자신이 생각한 것이 이상하지 않은지를 다시 생각해 보듯 잠시 입을 우물거리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부서진 세계수의 뿌리 안.
그곳에서 나이아드는 초조한 표정으로 하루가 가까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정령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아니, 분명 무슨 일이 생겼다.
나이아드는 비록 확인할 길은 없었으나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그냥 확신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지크프리트를 상대하는 데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으니까.
"무슨 일이 난 것 같군."
그것을 예상했는지 나이아드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프리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고, 그것은 오리아드와 에리얼도 마찬가지였다.
근심이 있는 표정.
지금 당장 회의장에는 없었으나 잠시 밖에 나가 있는 다른 탑주들도 은근히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걱정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설마 지크프리트에게 패배한 건가?'
나이아드는 스스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곧바로 지워버렸다.
애초에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렇다면…….'
나이아드는 그다음에 자연스럽게 오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그녀가 '탑주들이 지크프리트한테 패배한 건가'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한순간이라도 머릿속에 떠올렸던 이유는 바로 이 생각을 부정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김현우가 지크프리트를 도와주었다는 생각을.
'……설마 자기한테 붙었다고 진짜 도와준 거야?'
나이아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김현우가 일전에 보였던 행동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도저히 평범하다고는 절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모습.
게다가 그의 성격은 그저 순수하게 정신 이상자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싸이코 패스 같았다.
그리고 그 일련의 성격과 행동을 보았기에 나이아드는 그가 분명 지크프리트를 돕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탑주들을 보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이아드는 지금까지 초조해했으나.
'아니, 오히려 잘됐어.'
오히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떠올리며 그 생각을 바꾸었다.
물론 정령파벌에게 있어서 탑주가 4명이나 소멸하게 되는 것은 굉장히 뼈아픈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당장 세계수에 넣는 업에 차질이 빚어지게 되니까.
그러나 만약 잘만 하면 오히려 그 정도의 피해만으로 김현우를 처리할 수 있었다.
'관리기관……!'
바로 관리기관을 이용해서.
만약 김현우가 지크프리트를 데리고 오려는 정령들을 모조리 소멸시켰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오히려 나이아드는 손 한번 까딱하지 않고 김현우를 처리할 수 있었다.
관리기관은 탑에, 정확히는 거래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아주 싫어하고, 나이아드가 그것을 빌미로 관리기관에게 부탁하기만 하면 그들은 분명히 움직일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나이아드는 이내 지크프리트에게 갔던 정령들이 순수하게 돌아오기보다는 그들이 거기에서 소멸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의 마음이 바뀐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저, 정령들이 돌아왔습니다!"
갑작스레 뿌리로 뛰어 들어온 중급정령의 말에 나이아드는 순간이지만 인상을 찌푸렸으나 금세 표정을 환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이군요……! 그들의 상태는 어떤가요?"
"그……그것이……우선 한번 다들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심상치 않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중급정령.
그에 나이아드는 슬쩍 이상함을 느끼고 곧바로 세계수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 다른 탑주들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렇게 뿌리의 밖으로 나온 나이아드는-
"안녕하살법!"
"끄엑!"
부러진 세계수의 나무밑동에서 볼칸을 땅바닥으로 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김현우의 발차기에 볼품없이 하늘은 나는 볼칸이 탑주들 사이로 떨어졌고,
"이,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네녀석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나 있는 거냐?"
탑주들은 볼칸을 발로 차버린 김현우를 보며 이를 악물고 소리를 질렀으나 그는 애초에 관심도 없다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 이내 나이아드를 발견하고는 씨익 웃었다.
"이야, 이거 참 오랜만이네? 우리 며칠만이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쭈그려 앉은 김현우의 모습에 나이아드는 이를 악물고는 그를 노려봤다.
나이아드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더더욱 재미있다는 웃음을 지은 김현우.
그는 그다음 타자를 고르듯, 이번에는 퓨리를 집어 들었다.
"그, 그만둬!"
퓨리의 외침이 들렸으나 김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머리통을 붙잡은 뒤 그대로 나이아드를 향해 집어 던졌다.
"끄아아악!"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나이아드에게로 날아가는 퓨리.
그녀는 주변의 물을 만들어내 날아오는 퓨리를 받아내고는 그를 거칠게 옆에다 내려놓았고, 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고는 아프겠다는 듯 과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우…… 좀 아프겠다. 거 같은 동료인데 좀 잘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야?"
"당신, 지금 여기서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뭐가 무사해? 지금 협박하는 거야?"
"당신……!"
"아니, 좀 어이가 없네? 너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인가 본데, 지금 나 정도면 엄청나게 관대한 거 아니야?"
"뭐, 뭐라고요?"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는 나이아드에게 김현우는 뻔뻔하게 왼손을 들어 올리고는 손바닥을 펼친 뒤 엄지를 접었다.
"맨 처음으로, 지금 네가 보냈던 정령들이 전부 살아 있고."
그다음에는 검지.
"두 번째로, 네가 지금 내 친구를 건드렸는데도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고."
그다음에는 약지를 접었다.
"세 번째로, 원래 반 죽여놨을 수도 있었는데 그냥 아무런 고문도 안 하고 바로 이곳으로 데리고 왔고."
마지막으로는 소지를 접었다.
"네 번째로, 지금 내가 친히 직접 이곳으로 와서 네 친구들 직접 배송하고 있잖아?"
중지 손가락만 남은 상태로 나이아드에게 손짓하는 김현우.
분명 그 뜻이 무엇인지 나이아드는 잘 몰랐으나 그녀는 이상하게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나이아드가 열받아 하는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피식 하는 웃음을 지은 채 자신의 옆에 있는 두 탑주들을 집어 들었다.
머리통을 쥐자마자 자신이 조금 전 퓨리와 같은 꼴이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몸을 비트는 정령들.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씨익 웃은 뒤 그 둘을 제각각 다른 곳으로 집어 던졌다.
드디어 세계수의 나무 위에 혼자 있게 된 김현우.
허나 그는 두려움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표정으로 이내 조금 전처럼 다시 쭈그려 앉아-
"야, 우리 화해할까?"
"……??"
-나이아드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336화. 응~ (1)
하남에 있는 장원의 건물 중 하나.
"그래서, 제대로 말도 안 하고 탑의 최상층에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지!"
손오공의 말에 이서연은 반쯤 뜬 눈으로 손오공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거지?"
"정말이라니까? 나는 분명 말대로 아브를 데리러 갔다가 곧바로 그녀의 부탁을 듣고 그곳에 남게 됐던 것뿐이야."
손오공의 필사적인 설득.
그에 이서연은 한동안 반쯤 뜬 눈을 없애지 않고 손오공을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그, 그래. 이해할 수 있지?"
"이해하고 말게 뭐가 있어, 최상층의 일이라는데."
이서연의 말에 손오공은 살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살았다는 듯 마음을 쓸어내리고는 이야기했다.
"그래, 진짜 어쩔 수 없었다고."
몇 번이고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강조하며 이서연을 설득한 손오공.
그녀는 결국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고, 이내 건물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는 손오공.
'좆 될 뻔했네 진짜.'
손오공은 분명 9계층으로 돌아오자마자 바가지를 긁힐 생각에 스트레스가 만빵이었던 상태였으나 예상외로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상황에 안심했고.
"……우선 급한 불은 껐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혼자 중얼거리는 말에 야차가 대답하자 이내 손오공은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정말로 그녀의 화가 풀린 것으로 보이냐는 것이다."
"아니…… 바가지 안 긁은 걸 봐서는 딱히 화난 것 같지는 않은데……?"
손오공의 말.
그에 야차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쯧쯧 거리며 이야기했다.
"역시 너는 여심(女心)을 단 하나도 모르는 게로구나."
"그게 무슨……."
"내가 볼 때, 아마 이대로 그녀를 보내면 너는 이전보다 더욱 심한 바가지를 긁히게 될 것이다."
"그……그게 무슨!"
"내게 질문하는 것보다 따라 나가는 게 좋을 것이다."
야차의 의미심장한 말.
그에 손오공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다 이내 곧바로 밖으로 뛰어나가며-
'진짜 하나도 모르겠네……!'
-이내 그렇게 독백했다.
####
나이아드는 순간 김현우가 한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와 함께 시작된 정적.
"저……저 미친놈이!"
그러나 그 정적은 나이아드의 옆에 있던 이프리트 덕분에 깨지고 말았다.
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듯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불꽃을 사방으로 흩뿌려대며 말했다.
"웃기지 마라! 화평!? 화평이라고!? 지금 네놈이 한 짓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냐!"
이프리트의 극대노에 김현우는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그리고 또 왜 그렇게 화를 내? 분조장이야?"
"뭐? 분조장!?"
"분노조절장애냐고, 너는 전부터 그러더라? 좀만 툭툭 건들면 곧바로 열받아 가지고 달려들잖아? 응?"
"이……이자식이!!"
이프리트가 역정을 내자 김현우는 순식간에 얼굴에 웃음기를 빼고는 이야기했다.
"그러면, 저번처럼 나한테 또 한번 맞아 볼래?"
"……."
그 말과 함께 순간이지만 말문이 막힌 이프리트.
그 모습을 보던 김현우는 다시 피식 웃으며 이죽였다.
"분노조절 장애가 아니라 분노조절잘해였네."
"이이……!"
허나 김현우의 노골적인 조롱에도 이프리트는 나서지 못하고 그저 으드득 거리며 애꿎은 화를 다른 곳에 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조용해진 이프리트를 확인한 김현우는 이내 한번 시선을 돌려 이곳저곳에 있는 탑주들을 바라보다 이내 나이아드를 바라보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무튼, 내 제안 어때?"
"……."
인상을 찌푸리며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나이아드.
김현우는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야, 너희들 지금 이 순간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이거 마지막 찬스야. 모르겠어? 라스트 찬스 같은 거라니까?"
"……."
"솔직히 이렇게 착한 놈이 세상에 어디 있냐? 맨 처음에 시비도 너희들이 걸었고, 분명 그다음에 아무것도 안했는데 태양신 보낸 것도 너희들이었고, 응?"
"……."
"아니야? 맞잖아? 그래서 내가 반격한 거잖아?"
"……분명 그 건에 대해서는 사과를 했던 것 같은데요?"
나이아드의 말에 김현우는 순간 빡친 표정을 지으며 순간 말을 멈췄으나 이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니~ 지금 그걸 설마 말이라고 하는 건 아니지?"
"뭐라고요?"
"아니 씹- 이 아니라, 너희는 그냥 사과만 하면 모든 게 없던 일이 되냐? 응? 사람 친 뒤에 사과하면 그냥 끝나는 거야? 어? 설마 그게 규칙처럼 되어 있는 거?"
"……."
"그럼 나도 그래도 되겠네? 탑주 죽인 다음에 실수로 했다고 사과하면 그걸로 끝나는 거 아니야? 아니잖아? 그런데 왜 계속 그런 개 씹- 이 아니라, 그런 헛소리를 내뱉는 거야?"
김현우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정령들을 바라봤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좋은 기회잖냐. 응? 생각해 보면 잘못은 너희들이 다 해서 일어나게 된 싸움인데, 오히려 맞은 쪽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거 안보여? 응?"
"……피해는 저희가 압도적일 텐데요?"
"나는 먼저 맞았는데?"
"……그거랑 이건 좀 다른-"
"같은 건데? 오히려 비슷한 영역 아닌가?"
아니다. 전혀 틀리다.
허나 김현우는 딱히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기에는 너무 귀찮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냥 그 두 개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으로 마음속의 합의를 봤다.
"……."
그와 함께 찾아온 침묵.
김현우는 가만히 나이아드의 침묵을 기다리며 한마디했다.
"뭐, 아무튼 간에 나는 너희한테 선택권을 주는 거야,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 말을 끝으로 기다리겠다는 듯 입을 다문 김현우.
나이아드는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적어도 나이아드가 생각하기에 김현우는 이런 식으로 화평을 제안할 사람이 아니었다.
'겉으로만 저러고 사실 속으로는 심계가 깊은 건가?'
나이아드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
그러나 나이아드는 김현우의 제안에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이아드는 김현우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
계속해서 흘러가는 시간.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느긋한 표정으로 나이아드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조건이 있어요."
나이아드의 입에서 나온 말에 김현우는 웃음을 지었다.
"말이 통하네."
"자……잠깐! 탑주님 지금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녀의 말에 격하게 반발하는 일부 탑주들.
나이아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한번 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반발하는 탑주들을 막아내고.
"한번 말해봐. 되도록 전부 들어줄 테니까."
김현우의 말에 그녀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선, 원래 저희 정령파벌이었던 지크프리트를 지금 이곳으로 송환해 주세요."
그녀의 첫 번째 요구.
김현우는 그 정도야 어렵지 않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그의 긍정에 나이아드는 곧바로 다음 요구를 입에 담았다.
"그다음으로는 공식적인 선상에서 저희 정령파벌에게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합니다."
"공식적인 사과?"
"예."
나이아드의 말에 김현우는 음, 하고 살짝 침음성을 흘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 물론 내가 선빵친 것도 아니라서 좀 어치구니 없기는 한데…… 뭐, 해달라면 해줘야지."
김현우의 긍정.
"그리고 또, 뭐 있어? 아니면 이 정도로 끝?"
"아뇨, 아직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솔직히 이 정도나 들어줬으면 이제 그쪽에서 양보해 줄 때 아닌가?"
김현우의 물음에 얼굴을 굳히는 나이아드.
그에 김현우는 과장된 표정으로 졌다는 듯 양손을 한번 들어 올려 보이고는 이야기했다.
"그래, 한번 이야기해 봐."
그의 말에 나이아드는 지체 없이 이야기했다.
"저희가 당신을 먼저 건드린 것에 대해서는 분명 저희의 잘못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세계수를 무너뜨린 것은 저희가 저지른 잘못보다 큽니다."
"그래서?"
"이 세계수가 다시 자라 날 때까지, 51번 탑에서 나오는 업을 일정 저희 파벌에 넘겨주세요."
굳은 표정으로 건의하는 나이아드.
김현우는 순간 가만히 있다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세계수가 다시 재생할 때까지 업을 넘기라 이 소리야?"
"그렇습니다. 물론 저도 저희 탑주들의 사정을 아는 만큼 전부를 요구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튼, 결국 세계수가 복구될 때까지 업을 넘겨야 한다는 거네?"
"맞아요."
나이아드는 그렇게 자신의 할 말을 끝내고 김현우의 표정을 바라봤다.
진지한 표정.
그 모습을 보며 나이아드는 김현우의 답을 기다리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올까?'
사실 협상의 내용을 말할 때도 나이아드는 김현우가 어째서 자신에게 화평을 제안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김현우가 이런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를 찾아보면 몇 가지 정도 가설을 세울 수 있기는 하지만 역시 나이아드는 김현우가 화해를 제안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찌 보면 김현우가 제일 껄끄러워 할 만한 조건만을 그에게 내걸었으나, 신기하게도 김현우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첫 번째 반응도 긍정적.
두 번째 제안에 대한 반응도 긍정적.
……특히 두 번째 제안의 경우에는 김현우가 예전에 한번 거절한 전례가 있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제안을 했을 때, 김현우는 무척이나 쉽게 나이아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물론 마지막 조건에서는 김현우도 당장 갈등하고 있는 모양이었으나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혹시 정말로?'
그런 김현우의 모습에 나이아드는 자신의 믿음이 슬쩍 흔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 정말로 화해 제안을 한 거라면?'
그녀는 자신이 김현우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파악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서 당장 김현우에게 지금 당장 싸움을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상황이 된 거라면?'
나이아드는 김현우가 침묵에 침묵을 더할수록 본능적으로 자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도 김현우의 침묵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침묵이 얼마나 지났을까.
"후……."
김현우는 긴 침묵을 깨고 가만히 눈을 뜨는 것으로 나이아드를 바라봤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긴장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허나 입을 열거라고 했던 생각했던 김현우의 입은 요지부동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그것을 기다리다 못한 나이아드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결정은 내렸나요?"
"그거야 당연하지."
"그럼 답해주시죠. 제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이고 싸움을 멈추실 건가요? 아니면 저희와 끝까지 갈 건가요?"
나이아드의 조급해 보이는 물음.
그에 김현우는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정말인가요?"
이내 나이아드의 답변에 가감없는 미소를 지으며-
"당연히 개구라지 병신아."
-그녀에게 조금 전 보여주었던 중지를 들어 올렸다.
337화. 응~ (2)
순간적으로 정적이 찾아온 그곳에서, 김현우는 멍을 때리고 있는 나이아드를 비웃으며 이야기했다.
"당연히 구라지 진짜로 그걸 믿냐?"
비웃음이 담긴 김현우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이아드는 지금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심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야말로 악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찡그려진 얼굴.
감정의 격류를 누르지 못하는지 나이아드의 주변에 일렁이는 물들은 죄다 뾰족하게 변해 있었으나 김현우는 그런 나이아드의 모습에도 전혀 쫄지 않았다.
"개 빡쳤나 보네?"
"이……이 오물만도 못한 놈이!"
"응 아니야~!"
마치 이죽거리듯, 가벼운 말투로 나이아드의 말을 부정한 김현우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야기했다.
"야, 솔직히 이건 속은 놈이 잘못 아니냐? 이미 갈 때까지 간 상황에 왜 사과를 해?"
엌엌엌.
과장된 표정으로 나이아드의 모습이 우습다는 듯 낄낄거리는 그.
"게다가 내가 선빵 친 것도 아닌데? 응? 평범하게 생각을 해보라고 이 멍청아."
"그 입 닥쳐!"
"아, 이제 존댓말도 그만두기로 했나보네? 하긴 대가리 돌아가는 것에 비해서 말투가 좀 고상하기는 하더라."
피식.
"그렇게 반말 찍찍 싸는 게 딱 네 지능이랑 어울리는 것 같은데?"
"이……이이이이이!!!!"
나이아드는 더 이상 분을 참치 못하고 자신의 주변에 뾰족하게 만들어져 있는 물의 가시들을 김현우에게 날렸다.
눈 깜작할 속도에 그의 앞에 도달하는 가시들.
탓!
그러나 김현우는 가볍게 몸을 옆으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나이아드의 가시를 피하고는 계속해서 이죽였다.
"야, 이걸 못 맞춰?"
"아아아악!! 모두 뭘 멍하니 보고 있는 거죠!? 저 개 같은 새끼를 빨리 죽여 버려요!!"
나이아드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
그에 탑주들은 당황하면서 이내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세계수의 주변이 형형색색의 원소와 다양한 색으로 가득 차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이야기했다.
"어이쿠 다들 빡쳐가지고 이 악물고 죽이려고 하네? 근데 너희들 폭죽 같아서 좀 멋있기는 하네. 형형색색 빛나는걸 보니까 말이야."
태평하게 감평까지 하는 그.
그에 나이아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몸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이곳에서 도망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예요!"
"왜? 그냥 가면 되는데?"
"흥! 제가 언제 당신이 이 공간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해준다고 하기라도 했나요?"
"그걸 굳이 허락을 맡아야 하나? 내가 나가고 싶으면 나가는 거지."
김현우의 말에 나이아드는 비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한번 나가보시는 게 어때요?"
"안 그래도 나갈 거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무엇인가를 하려 했으나.
"……응?"
곧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이내 나이아드는 그런 김현우를 비웃으며 이야기했다.
"이제 보니 멍청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었군요!"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슬쩍 당황한 표정을 짓는 김현우.
그에 나이아드는 비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처음 잡힌 정령들이 알려준 좌표로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이 공간에 보안이 걸려 있지 않았기에 그냥 들어올 수 있었던 거예요. 아시겠나요?"
"……!"
"그리고 정령들이 돌아왔을 때, 저는 다시 이 공간에 보안을 걸어놨죠."
한마디로-
"이제 제가 직접 이 공간을 열지 않는 이상 당신이 공간이동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이에요!"
"……이런!"
"이제 자신의 멍청함을 깨달으셨나요?"
나이아드의 비웃음에 김현우는 당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누가 봐도 당황한 김현우의 표정.
그것에 나이아드는 자그마한 희열을 느끼며 김현우를 보며 이죽였다.
"어디 한번 목숨을 구걸해 보시죠! 벌레처럼!"
그녀의 희열어린 목소리.
그리고-
"풋."
김현우는 곧 양팔을 올리며 비웃음을 간직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
그 모습에 순간 이상함을 느낀 나이아드는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으나.
"푸하하하하핫!!"
이내 이어지는 김현우의 폭소덕분에 나이아드는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폭소를 한 김현우는 이내 자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이야기 했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웃어버렸네."
"……드디어 미친 건가요?"
"아니, 미친 건 아니고 그냥 네가 혼자 지랄 쌩쇼하는 걸 보니까 웃겨서 말이야. 진짜 개웃기네."
어디 한번 목숨을 구걸해 보시죠! 벌레처럼!
그 뒤 김현우는 나이아드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그녀와 똑같은 포즈를 취했고, 이내 그것이 웃긴지 또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 모욕에 다시 나이아드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고, 그녀는 이를 악물고서는 김현우를 노려보며 이야기했다.
"이이이익! 이 미친 새끼가 진짜! 빌기라도 했다면 적어도 유예를 주기라도 했을 텐데 이제는 다 필요 없어요!"
"응~ 나도 필요 없어."
김현우는 나이아드의 말에 반박하며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푸른색의 수정을 꺼낸 뒤 이내 히죽 미소 짓고는-
"두 번이나 속다니 역시 대가리가 물이라 그런지 능지가 떨어지는구나!"
"그게 무슨……!"
-이내 나이아드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신이 쥐고 있던 수정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수고해~"
그와 함께 사라져 버린 김현우.
나이아드는 순간 사라져 버린 김현우를 바라보며 두 눈을 부릅떴으나, 사라진 김현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한동안 멍하니 있던 그녀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김현우를 찾아요!"
"예? 아니, 지금 방금 김현우가……."
"멍청하기는! 지금 보안이 걸려 있는데 김현우가 세계수의 도움 없이 밖으로 빠져나갔다고요?"
그건 불가능해요!
거의 비명을 지르듯 소리친 나이아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자신의 몸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곧바로 다른 탑주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서 찾으세요! 조금 전에 보인 것은 눈속임이 분명해요! 김현우는 분명 이 공간에 있어요! 이 공간 안에 있다구욧!!!"
나이아드의 비명.
그에 탑주들을 허겁지겁 자신의 능력을 회수하고는 김현우를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5시간 뒤.
"……아무래도, 정말 공간 밖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김현우의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이아드는 정말로 곡성에 찬 비명을 질렀다.
####
51번 탑의 최상층.
"그래서…… 화해를 하자는 식으로 해서 시간을 끌었다는 거죠?"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중에 구라라고 말해주니까 처음 보는 표정이 나오던데?"
"처음 보는 표정이요?"
"응, 항상 존댓말만 하던 녀석이 갑자기 온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반말을 찍찍 하더라고, 그래서 한 번 더 놀려주고 왔지."
"……그래서 그렇구나."
"응? 뭐가?"
"아니, 아까부터 51번 탑에 침입하려고 시도를 하는 공간이동진이 엄청 많아서요."
아브의 물음에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물었다.
"침입하려고 시도하는 애들?"
"네. 사실 아까 가디언이 자료를 모으겠다고 하고 갔을 때 이쪽에서도 나름대로 보안에 대비를 할 필요가 없어서 간단하게 해봤거든요."
"보안? 아, 지크프리트가 말한 거?"
"네. 생각보다 만지기 쉽더라고요. 그냥 좌표 혼선에다가 직방향으로 이종 공식을 도입하기만 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 네가 열심히 설명해 줘 봤자 나는 전혀 모르니까."
김현우의 말에 묘하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브.
그에 옆에 있던 지크프리트는 살짝 고민하는 듯하다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군."
"넌 또 뭘 알아?"
"그들이 보안에 막히는 이유 말이다."
"?"
김현우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세계수의 마력은 어디든 보안을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이동진을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
"내가 저번에 이야기해 주지 않았나?"
"그랬나?"
주 내용 빼고는 전부 그런대로 걸러들었기에 긴가민가 하는 표정을 짓는 김현우.
그는 이내 가볍게 손짓하며 이야기했다.
"아무튼 뭐…… 그렇게 되면 전부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니야? 보안 전부 뚫을 수 있다며?"
"그래. 다만 그들이 그걸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세계수가 박살 나 있기 때문일 거다. 세계수가 무너져도 그 능력은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다만 탑주들 전체를 한 번에 옮길 만한 마력은 세계수가 원래대로 유지돼야만 사용할 수 있는 거니까."
"한마디로, 다 같이 못 오니까 사용하지 않는다 이 말이지?"
"정답이다."
지크프리트의 대답을 들은 김현우는 다시 시선을 돌려 아브를 바라봤다.
"그래서 어때. 찾을 수 있겠어?"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김현우가 세계수에 돌아와서 주었던 초록빛의 보석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것만 있으면 파악 가능할 거예요."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짓는 김현우.
그가 이번에 정령들을 굳이 죽이지 않고 정령파벌에 들어간 이유는 탑주들을 죽이지 말라는 데블랑의 조언도 있었으나 제일 큰 것은 바로 세계수에 얻을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수에 담긴 마력.'
지크프리트는 정령파벌에 속해 있는 탑주들의 탑이 세계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아브는 그 소리를 듣고 김현우에게 세계수의 샘플이 있으면 탑주들의 좌표를 특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곧바로 아브의 의견을 수용해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아브가 원하는 두 개의 물건을 가져왔다.
첫 번째는 바로 세계수의 샘플.
그것은 쉬웠다.
그저 세계수의 위에 대충 쪼그려 앉아서 주먹으로 몇 번 후려치기만 해도 그 파편이 김현우의 손 위에 쌓였으니까.
다만 조금 어려웠던 건 바로 아브가 그다음으로 요구했던 '세계수의 마력'이었다.
물론 이것도 김현우가 직접 뭔가를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노아흐가 준 투명한 보석을 세계수에 꽂고 조금만 기다리면 됐으니까.
다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적어도 세계수에서 마력을 뽑을 때까지는 일정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나이아드에게 구실을 하나 만들었고, 김현우는 무척이나 성공적으로 세계수의 마력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덤으로 나이아드의 분노까지.
'뭐, 후자는 원래부터 얻었던 것 같지만.'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브가 자신이 가져온 샘플들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저걸로 뭘 어떻게 좌표를 특정한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사실 물어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약 아브에게 물어봤다가는 또 이런저런 이론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할 테고, 김현우는 당연히 아브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문과니까.
'……그냥 결과가 나올 때까지 가만히 있자.'
이내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그렇게 1주 뒤-
"다 됐어요, 가디언!"
김현우는 연락을 받았다.
다만-
"서방님……?"
"……설마."
"……"
연락을 받았을 때, 김현우의 상황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338화. 응~ (3)
김현우는 두 제자…… 아니, 두 와이프를 보며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저기요 가디언?]
"……."
[가디언? 안 들려요? 음…… 역시 이번에 개발한 거라 바로 잘 작동되면 이상한 건가?]
아니, 아니다.
아브의 목소리는 지금 김현우의 귓속- 아니, 귓속 정도가 아니라 그냥 머리에 깔끔하게 인식이 될 정도로 확실하게 들리고 있었다.
다만 김현우가 답변을 못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 미령과 하나린 때문.
"……."
'언제 얘들이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지?'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두 제……자가 아니라 와이프를 쳐다봤다.
무엇인가를 노리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자들.
"……."
왠지 여기에서 판을 깨버리고 도망갔다가는 도저히 무슨 일이 일으킬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제자들은 짓고 있었다.
"……저기,"
"말씀하세요."
"서방님."
"……."
마치 둘이서 한 몸인 것처럼 말하는 그녀들의 모습에 김현우는 또 한번 소름이 돋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도대체 어느 사이에 저렇게 친해진 거지?'
김현우는 불과 얼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는 꽤 오래됐으나 김현우에게는 딱히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 기억.
적어도 그 기억 속에서 미령과 하나린은 저런 관계가 아니었다.
무조건 만났다고 하면 서로에게 폭언을 날리는 것을 기본 베이스로 깔고 들어가는데다가 김현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시로 이를 악물고 싸움을 벌이던 게 바로 김현우가 기억하던 그녀들이었다.
물론 심마를 죽이고 그다음 날을 기점으로 그녀들의 관계가 어느 정도 진전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김현우는 드디어 두 제자들이 싸우지 않아서 좋아했었다.
그런데.
"말씀해 보세요……?"
"저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스승님."
적어도 지금만큼은 김현우는 예전의 자신이 했던 생각을 살짝 후회했다.
'이건 너무 생각이상으로 관계 진전이 된 것 같은데…….'
그것도 그냥 관계 진전이 아니라 누가 보면 원래 몸이 하나였던 사람이 두 개의 인격으로 나눠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들의 행동은 닮아 있었다.
"……."
"……."
"……."
침묵.
그 불편한 침묵을 한동안 계속해서 유지했던 김현우는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침착해. 생각해보면 이건 내가 쫄 일이 아니라고.'
맞다.
그녀들의 제자는 분명 탑 내에서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을 정도로 강하지만, 김현우는 그냥 자신의 탑에 있어서는 최강자였다.
당연히 두 제자가 무력으로 이길 리가 만무했다.
한마디로, 김현우는 쫄 필요가 없었다.
"……."
없다.
"……."
없……다고 생각하기 위해 스스로를 세뇌하고 있었다.
"후우."
깊은 한숨.
김현우는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미령과 하나린을 바라보며 흠흠거리며 목을 가다듬었고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급하게 가볼 일이 생겼어."
"……가볼 일이라……."
"그렇군요."
김현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들.
허나 조금 소름이 돋는 것은 분명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기는 한데 그 눈동자는 김현우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분명히 5일 전에도 그렇게 말하시며 저희를 거절하셨던 것 같은데."
"4일 전에는 손오공과 청룡의 수련을 봐준다는 핑계로 거절하셨던 것 같고."
"분명 엊그제는 수련을 봐주느라 많이 힘들다는 이유로 거절하셨고."
"어제는 내일로 미루는 것으로 거절하셨던 것 같았던 것 같습니다 스승님."
"……."
둘이서 차례대로 김현우의 휴식 기간 동안 했던 말을 중얼거리는 두 사람.
"……."
"그래서 결국 오늘까지 왔는데……."
"설마, 이번에도 이렇게 도망가실 생각이시군요."
"……."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말했잖아? 내가 굳이 거절한 이유는 분명히 일이 있어서였다니까?"
김현우의 당당한 말.
……아니, 자세히 들어보면 떨림이 느껴지는 변명.
하나린이 물었다.
"……그럼, 이번에는 누구 때문이죠?"
"누……누구 때문이냐니?"
"누가 사부님을 불렀냐는 말이에요. 그 정도는 알려주셔도 되지 않을까요?"
김현우는 그때 새삼스럽게 하나린이 무표정을 지으면 이렇게 소름돋게 변한다는 것을 깨달으며 입을 열었다
"그, 아브가 불렀는데…… 내가 저번에 말했지? 위쪽에 일이 있다고 말이야."
"그렇군요. 아브가 불렀군요?"
하나린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함께 미령은 그런 하나린의 옆에서 동그란 구슬을 하나 꺼내들었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구슬.
김현우는 그 정체를 깨닫고는 이야기했다.
"야, 그거 내 구슬 아니야?"
"맞습니다. 서방님."
그것은 바로 노아흐와 아브가 김현우에게 만들어준 이동용 구슬이었다.
잡아먹는 마력이 좀 많기는 하지만 마력을 불어넣기만 하면 구슬 안에 있는 마법진이 자동으로 펼쳐져 순간이동진을 만들어주는 구슬.
미령은 곧바로 그 구슬에 마력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가동하기 시작하는 구슬.
김현우는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갑자기 구슬을 왜 가동하는데……?"
"걱정 마세요. 잠시 일(?)을 치르는 동안만 제구실을 하지 못하도록 진찰을 좀 하고 오겠습니다."
"지……진찰?"
순간 그 말을 듣고 뇌정지가 온 김현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령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달았고.
"야! 알았어! 알겠다고! 그거 미룰 테니까 그만 둬!"
"……정말인가요?"
"서방님?"
"그리고 소름 돋으니까 말은 한 명씩 해라 제발……."
김현우의 체념 어린 목소리에 두 와이프는 그제야 산뜻한 미소를 지었고.
"……."
김현우는 그날, 영혼을 빼앗긴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대해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
"와……."
"……엄청 피곤해 보이는 군."
"일주일 동안 쉬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온 거지? 설마 정령들이 9계층에 쳐들어왔나?"
노아흐와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힘없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신경 쓰지 마.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
"해야 할 일?"
"……그런 게 있어."
김현우는 피곤한 표정으로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손짓을 한 뒤, 이내 피곤한 표정으로 아브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완성했다는 건 전부 다 됐다는 거지?"
"네? 아, 맞아. 네! 다됐어요!"
아브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주머니 속에 있는 물건을 김현우에게 꺼내 보여줬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바로 나침반 같은 모양의 기계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계라기보다는…….
"모형?"
김현우가 중얼거리자 아브는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모형이 아니에요, 지금 제가 만들어놓은 것 하나하나가 전부 필요한 것들이에요. 우선 나침반의 침은 세계수의 마력과 샘플을 같이 넣어서 만든 건데요. 제작자의 도움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아브.
그에 김현우는 무척이나 당연하게도 평소처럼 그녀의 이야기를 끊으려고 했으나.
"?"
절레절레.
김현우는 곧 아브의 옆에 앉아 있던 노아흐와 지크프리트가 조용히 고개를 젓자 살짝 의문을 표했고.
"이 판 같은 경우에는 가디언이 유사 상황 시에 도망칠 수 있도록 설계했어요! 비록 들어가는 마력이 분명 많을 테지만 당장 일이 생겼을 때 순식간에 도망칠 수 있을 거예요."
이내 김현우는 노아흐와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절래거리자마자 아브를 보고는 대충 그들이 왜 고개를 저었는지 깨달았다.
"……."
아브의 눈가에 묘하게 생겨 있는 다크서클.
"그리고 이 뒷판 같은 경우는 사실 그냥 일반적인 판인 것 같아도 이게 바로 가디언의 이동마법을 도와줄 마법진이 새겨져 있는 곳이에요. 물론 파손이 된다고 해도 판형 앞부분의 기본침 을 이용하면-"
김현우는 그것을 보곤 결국 문과인의 신분으로 아브의 이야기를 묵묵히 끝까지 들었고.
"열심히 만들었네? 고마워."
"별말씀을요!"
이어지는 칭찬에 아브는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내 차례군."
그리고 아브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노아흐가 기다렸다는 듯 김현우의 앞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투명한 보석들을 꺼내 놓았다.
"뭐야, 좀 걸린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빨리 만들었네."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확실히 나도 처음 만들 때만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네만 생각보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더군."
노아흐의 말을 들으며 김현우는 책상에 놓인 자신의 손바닥만 한 보석을 집어 들었다.
"이걸 계층에 박아 놓기만 하면 된다 이거지?"
"그렇네."
"……새삼스럽게 생각이 든 건데, 이 자그마한 거 하나 박는다고 그 계층에서 나오는 업이 전부 흡수가 될까?"
김현우의 질문에 노아흐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게. 애초에 이곳도 마찬가지지만 아무리 업을 많이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계층에서 만들 수 있는 업은 한정되어 있네."
"……많이 적나 보네?"
"굳이 말하면 엄청 적은 양은 아닐세. 다만 많은 양도 아니지."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보석을 만지작거렸고, 노아흐는 거기에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아마 자네가 그걸 계층에 박아 넣으면 그걸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걸세."
"원래도 찾을 수 없는 거 아니야?"
"아니지. 만약 업의 흐름에 민감한 탑주가 있다고 하면 만약 일반적인 보석을 박았을 때 금방 특정할 수도 있을 걸세. 다만 그건 내가 그것마저도 따로 개조를 했지."
"……뭐, 위치를 알 수 없게 하는 개조 같은 건가?"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놀랍다는 듯 손뼉을 탁 치며 말했다.
"바로 정답일세. 보석은 곧바로 업을 흡수해서 자신의 위치를 가릴 걸세. 그 원리는…… 생각보다 복잡한데 듣겠나?"
"……아니, 그냥 그런 기능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두면 될 것 같아."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될 것 같군. 모든 준비는 끝났으니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하고는 아브가 만들어준 나침반을 한번 바라본 뒤 이야기했다.
"근데 말이야. 이거 하나 더 만들 수는 없나?"
"네? 하나 더요?"
"응."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난감한 표정으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으음…… 아무래도 재료가 부족해서 하나 더 만들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런데 왜 굳이 두 개를?"
아브의 물음에 김현우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 했다.
"만약 두 개를 만들 수 있다면 야차와 같이 움직일 수 있잖아?"
"아."
그의 말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야차는 다른 탑주들보다 훨씬 강했기에 김현우와 같이 움직일 수 있기는 했다.
"뭐…… 사실 이 방법을 생각해 낸 시점부터 내가 정령 녀석들이랑 싸우는 건 딱히 필요도 없고 힘만 빼는 일이니까. 원래는 그냥 둘이서 빨리 끝내면 어떨까 했는데."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이야기 했다.
"생각해 보니까 조금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생각이 나서 괜찮을 것 같아."
김현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묻는 아브.
"더 좋은 생각이요?"
"뭐, 한번 보고 있어봐. 아 그리고 혹시 뭣 좀 하나 더 추가해 줄 수 있어?"
김현우는 그저 그렇게 말하고는 가벼운 웃음을 지었고, 아브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진심이에요?"
아브는 곧 김현우의 말을 듣고는 두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339화.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한다 (1)
천사들이 모여 있는 천계.
중앙에 위치해 있는 거대한 신전에서 루시퍼는 천사들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흐음, 먼저 움직였다 이거지?"
"예. 그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뒤에 정령들이 51번 탑으로 공간이동을 하려던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바로 총력전을?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무래도 전투를 치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
"예. 우선 외부적으로 정황만 포착해서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예상으로는 아마 정령들은 51번 탑에 진입도 하지 못했을 확률이 큽니다."
가브리엘의 말에 루시퍼는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말고 잠시 고민했고, 이내 피식 웃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감이 잡히네."
루시퍼의 중얼거림에 가브리엘은 이야기했다.
"저희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우리?"
"예."
"글쎄……."
잠시 고민하던 루시퍼.
"어떻게 할까?"
그는 오히려 가브리엘을 보며 반대로 물어왔고, 질문을 받은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다 이야기했다.
"저라면 아직 움직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저희들이 하등 얻은 것이 없으니까요."
가브리엘의 말에 루시퍼는 만족했다는 대답했다.
"정답. 바로 맞췄어. 정답이야."
"감사합니다."
"이제야 좀 '천사'에 어울리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됐네."
루시퍼의 말에 가브리엘은 슬쩍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그렇습니까?"
"그래, 잘 기억해 둬. 우리는 어디까지나 '천계'의 이익을 위해 활동해야 해. 천사는 언제나 다른 하등한 종족들보다 위에 있어야 하고. 우리는 그의 아들들이니까."
그리고-
"그의 아들인 것을 자청하기 위해서라면 '외형'이 중요해, 우리는 그 어디에서나 신성해야 해. 가만히 있을 때도, 혹은 이야기를 할 때도."
그것이 혹여-
"악마들이나 진득한 학살극이라고 해도 우리의 외형은 중요하고, 혹시라도 우리의 신성을 잃을 수 있을 만한 '손해'는 절대로 보지 말아야 하지."
"……명심하겠습니다."
가브리엘의 말.
루시퍼는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했다.
"다른 이들에게도 이야기를 전해 놔.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물론 그 녀석의 사지를 찢어주고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게 우리에게 손해가 된다면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씨익-
"우리는 신성해야 하니까."
루시퍼의 말에 가브리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루시퍼가 가브리엘의 보고를 듣고 있을 때.
"……."
헤르메스는 '공간' 안에 있었다.
그곳이 무슨 공간인지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헤르메스가 있는 공간은 그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무척이나 특별한 공간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헤르메스가 서 있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그 방의 이름은 그저 '공간'일 뿐이었다.
"흐음."
그곳에서, 헤르메스는 공간 내에 있는 마력 재생장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한 명의 사람이 본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은 수십 개의 재생장치들은 전부 제각각 다른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허나 제각각 다른 화면을 비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헤르메스의 시선은 단 한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운데에 있는 재생장치.
그곳에는 검은색의 화면만이 나올 뿐이었으나 헤르메스는 이내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이내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후우……."
헤르메스가 내쉰 한숨과 함께 그의 주변에 떠 있던 재생장치들은 모조리 그 빛을 잃고 꺼지고 말았다.
그와 함께 완전히 어두워진 공간.
헤르메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고, 이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역시 아무리 해도 51번 탑은 전혀 보이지를 않는군.'
그는 조금 전 어두운 화면만을 보여주고 있었던 가운데의 화면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내 능력으로는 그 어디든 볼 수 있어야 할 텐데.'
헤르메스가 가지고 있는 능력.
그것은 분명 무엇인가를 보는 데 집중되어 있었고, 그 덕분에 헤르메스는 본격적으로 힘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탑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마력의 소모가 장난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는 관리기관 하에 놓여 있는 것이라면 보지 못할 것이 전부 없었어야 했다.
없었어야 했는데.
'역시 보이지 않는다.'
헤르메스는 보이지 않던 51번 탑을 생각했다.
분명 심마가 탑을 가지고 있었을 때만 해도 헤르메스는 종종 이 공간에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그를 염탐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김현우가 탑주가 된 뒤로, 이상하게 헤르메스는 전혀 김현우가 있는 51번 탑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헤르메스는 아주 예전에도, 이런 경우를 딱 한 번 겪어본 적이 있었다.
"……."
그는 말없이 시선을 돌려 재생장치가 꺼져 어두운 공간 뒤쪽에 놓여 있는 잡동사니들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방패도 있었고, 또한 검도 있었으며 그 옆에는 아무렇게나 놓인 삼지창도 존재했다.
또 어느 곳에는 망치가 존재하기도 했고, 또 활이 존재하기도 했으며 어떤 곳에는 굉장히 기형적으로 보이는 무기들도 몇 개 존재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마치 번개의 모양을 그대로 형상화 해놓은 듯한 무기.
"……."
그리고 헤르메스는, 그 어두운 공간 안에서 자신의 시선에 놓여 있는 그 잡동사니들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
51번 탑의 최상층.
김현우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나침반을 한번 확인하고 문득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까 요즘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었는데, 이거 아티팩트 로그가 안 뜨네?"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건 바로 51번 탑 이외의 물건이 섞여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51번탑 이외의 물건이 섞여 있으면 로그가 뜨지 않는 거야?"
"네, 애초에 제가 정보를 따로 정리해서 입력해 놓지를 않았으니까요."
"네가 입력을……? 아, 그러고 보니까……."
"설마 잊은 건 아니죠? 애초에 이 탑에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던 건 '통괄자'인 저라고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어필하듯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그녀는 슬쩍 의심하는 듯했으나 이내 표정을 풀고는 이야기했다.
"보석은 챙기셨나요?"
"당연하지."
"그럼 나침반에 마력을 불어 넣으시면 돼요."
"몇 곳이나 돌아야 하지?"
"총 아홉 곳 정도네요."
"……응? 좀 적지 않나? 최소 열 곳은 돼야 하는 거 아니야?"
"지크프리트 씨가 전에 말해줬잖아요. 세계수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탑주들도 있다고요."
"아, 그랬지…… 잠깐, 그럼 의미 없는 거 아닌가?"
"왜요?"
"지금 당장 아홉 곳을 막더라도 결국 다른 탑에서 업을 수급할 수 있다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다."
"왜?"
"탑과 세계수를 연결하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다 그건 세계수가 원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나 가능한 거다."
지크프리트의 말에 김현우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면야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고, 아브는 이내 추가적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가디언은 마력을 불어넣는 순간부터 제가 좌표에 넣어놓은 데로 차례대로 탑에 이동할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으음, 그냥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지금 마력을 불어 넣으면 제가 설정해 둔 첫 번째 탑으로 이동하게 될 거예요. 거기서 일을 전부 보시고 마력을 한 번 더 불어넣으면 두 번째 탑으로 가는 형식인거죠."
"아, 그렇게 해서 탑 아홉 곳을 전부 돌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이거지."
"네. 맞아요. 다만 혹시라도 당장 탑으로 복귀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나침반 전체에 마력을 집어넣는 게 아니라 나침반의 침쪽에만 마력을 불어넣으시면 곧바로 51번 탑으로 복귀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알았어. 아, 그리고 혹시나 이동했을 때 보안에 걸려서 막힐 확률은 있어?"
"좌표는 이미 전부 알아냈고, 혹시나의 보안이 걸려 있을 때 그것을 뚫을 장치도 그 나침반에 전부 집어넣어 놨어요."
"……그래?"
사실 어떻게? 라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저번과 마찬가지로 김현우가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 올 것을 알기에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는 그저 칭찬을 입에 담았다.
"유능하네."
"헤헤……."
김현우의 칭찬 한마디에 기분이 좋다는 듯 웃음을 짓는 아브.
"자, 그럼 다녀올게."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침반에 마력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
"후……."
정령파벌에 속해 있는 분노의 정령 퓨리의 탑.
온통 붉은 마력이 넘실거리는 그곳에서 퓨리는 망연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골치 아프다.'
그가 한숨을 내쉬고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자신의 입지가 정령파벌 내에서 무척이나 낮아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 아직까지 그의 입지는 낮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일 테고, 퓨리는 자신의 지위가 낮아질 것이라는 걸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크으으윽……!"
'그렇게 굴욕을 당할 줄이야.'
퓨리는 불과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천사에게 도움을 받아 김현우를 치는 것보다는 정령파벌만의 힘으로 김현우를 처리하자고 강하게 주장했던 탑주들 중 하나였고, 그렇기에 그는 지크프리트를 잡는 데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퓨리는 오히려 파벌 내의 자신의 지위를 끌어 올릴 수도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정령들은 대부분 보수적이었기에 천사의 힘을 빌리는 나이아드를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탐탁찮게 보고 있었고.
퓨리는 그것을 노리고 정령파벌만의 힘으로 김현우를 소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퓨리는 지크프리트를 잡으러 가며 분명 자신의 지위가 조금은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었다.
그래, 50번 탑에 갈 때까지는.
'……도대체 그놈들은 뭐냔 말이다.'
50번 탑에 갔을 때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지크프리트가 아닌 다른 녀석들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탑주조차 아니라고 말하는 그들을 우습게 봤으나 싸우면 싸울수록 퓨리는 더 이상 그들을 우습게 볼 수 없었다.
'탑주도 아니면서 그렇게 강하다니……!'
그들은 분명 탑주가 아니었음에도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했다.
'특히 그 원숭이는…….'
연계를 해서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위험했다.
'물론 그대로 갔다면 분명 우리가 이겼을 테지만…….'
문제는 그다음.
탑주들은 그 뒤에 찾아왔던 김현우에 의해 모조리 박살 나고 말았다.
압도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강함.
물론 퓨리도 김현우가 이프리트와 싸우는 모습을 탑주 회의에서 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퓨리는 그가 두렵지 않았다.
결국, 그때의 이프리트는 혼자였고, 파벌이 힘을 합치기만 하면 그 녀석을 잡는 것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김현우는 터무니없이 강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살짝 당황한 것만으로도 그들은 모두 김현우의 손에 리타이어 됐으니까.
"……후우."
그 덕분에 자신을 포함해 파벌 내의 지위를 조금이라도 올려보려던 정령들은 사이좋게 인질로 잡혀 굴욕적으로 파벌에 복귀하게 되었다.
"하……."
앞으로 그의 앞에 생겨날 가시밭길에 진득한 한숨을 내쉬는 퓨리.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있는 퓨리의 옆에-
"야, 일주일만인데 좀 수척해진 것 같다?"
"!!"
-상상하기 싫은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340화.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한다 (2)
분노의 정령 퓨리는 자신의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온몽의 마력이 정지되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고.
"기, 김현우?"
"왜 그렇게 귀신 본 표정으로 봐? 응?"
김현우는 곧 분노의 정령을 보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혹시, 쫄?"
"도……도대체 네가 어떻게 여기에!"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여는 퓨리.
그에 김현우는 씨익 웃더니 대답했다.
"글쎄, 어떻게 왔을까?"
그의 장난스런 말투에 온몸에 소름이 돋은 퓨리는 김현우의 옆에서 거리를 벌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곧바로 마력을 일으켜 탑의 보안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이게 무슨!'
퓨리는 분명 자신이 몇 겹이나 철저하게 걸어놓았던 탑의 보안 마력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 그저 외부의 거대한 충격으로 인해 뻥 뚫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퓨리는 그에 입을 떠억 벌리면서도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이상함을 순식간에 캐치하고 생각했다.
'도대체 왜 내가 눈치채지 못했지?'
퓨리의 탑에 깔려 있는 마력은 순수하게 그의 것이었고, 분명 그는 나름대로 마법진을 설치하며 조금이라도 보안에 문제가 있다면 곧바로 이상을 나타나도록 설계해 놨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증상도 없다니……!'
김현우가 이곳에 들어와 자신의 옆에서 목소리를 속삭일 때까지 퓨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보안은 도대체 어떻게 뚫은 거야……!?'
모든 탑에 걸려 있는 보안은 기본적으로 탑에 있는 좌표를 숨기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한다.
한 마디로, 애초에 뚫을 문조차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김현우가 있는 51번 탑의 경우는 애초에 '형체 없는 자'가 탑을 만들며 자신의 위치를 노출했기에 거의 모든 탑주들이 그 위치를 알고 있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 탑주들은 서로의 좌표를 다른 이들에게 공유하지 않았다.
공유해 봤자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는 실이 훨씬 많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만약 어느 특정한 방법을 통해 좌표를 입수할 수 있었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탑의 보안을 뚫기는 어렵다.
기본적으로 탑주들에게 보급되는 보안 마법진은 탑주가 들어오려는 상대를 허락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데다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강제로 탑에 들어가려고 하면 엄청난 마력을 대가로 바쳐야 한다.
그래서 그 어디든 좌표만 있다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세계수의 마력은 굉장히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의문을 품고 사념에 잠긴 퓨리의 의식을 강제로 밖으로 꺼낸 김현우는 여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그에 퓨리는 노골적인 공포가 담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내가 너를 어떻게 할 것 같은데."
씨익.
비틀린 웃음을 짓는 김현우의 모습.
그에 퓨리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공포심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깨달았고, 이내 그는 발작하듯 자신의 주먹을 휘둘렀다.
파아앙!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김현우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가는 주먹.
분명 그 자세에서는 불가능한 속도로 날아오는 주먹을 보며 김현우는 기다렸다는 듯 목을 뒤로 젖혀 퓨리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퓨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몸을 뒤로 젖힌 김현우에게 한번 더 주먹을 휘두르며 생각했다.
'우선은 뒤로 떨쳐낸다……! 그리고 만약 김현우가 조금이라도 내게서 멀어지면 곧바로 세계수로 이동해 김현우가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거야.'
공포에 젖어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살아온 지혜로 재빠르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정리해 넣은 퓨리는 또 한 번 주먹을 휘둘렀고.
"거, 저번부터 보기는 봤는데 너는 주먹만 쓰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기교가 없냐?"
"!!"
김현우는 그의 공격을 너무나도 쉽게 피해내고는 반대로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끄아아악!"
이번에도 저번과 별다를 바 없이 순식간에 매다 꽂히는 퓨리.
그는 급하게 일어나려고 했으나.
"다음에 보자."
빡!
김현우는 퓨리가 일어나려는 그 순간 깔끔하게 그의 머리를 후려 치는 것으로 그를 기절시켜버렸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어……어어?"
그의 머리가 도저히 인간의 기준으로는 꺾일 수 없을 정도로 꺾였다는 것.
뒤로 90도 가까이 꺾인 퓨리의 목을 보던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설마 죽었나?'
김현우는 조금 더 힘 조절을 해야 했었나 생각하며 슬쩍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바라봤으나 무척이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죽은 것 같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얘 인간 아니지?'
뭐, 겉모습으로 봐서도 퓨리가 인간의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김현우는 자신이 순간 착각을 해놓고 괜히 손해를 본 기분이 들었다.
빡!
그렇기에 괜스레 기절해 있는 퓨리의 머리를 한 번 더 후려친 김현우는 이내 미련 없이 일어나 자신이 쥐고 있던 파란 나침반을 가볍게 휘둘렀다.
후우웅!
나침반을 휘두르자마자 김현우의 마력을 머금었던 나침반은 크게 공명하며 이내 어느 한곳을 향해 마력을 쏘아보냈고.
"곧바로 찾았네."
김현우는 곧 마력이 쏘아지는 곳에 이탑의 지하로 내려가는 곳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한눈에 척 보기에도 어두운 길.
파직!
김현우는 자신의 마력에서 튀어나오는 스파크를 빛 삼아 어두운 계단을 걸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없이 이어진 것처럼 끝이 나지 않는 길.
김현우는 슬쩍 지루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지크프리트가 관리하고 있던 계층에 내려갈 때도 이랬던 것을 기억하고는 참을성 있게 걸음을 옮겼고.
곧 그는 얼마의 시간을 걸어 자신의 앞에 나타난 거대한 문을 망설임 없이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풍경.
"……오."
그 풍경을 보며 김현우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석양이 진 하늘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붉은 하늘 안에 담긴 산들이 눈에 보였고, 그 앞에는 놀랍게도 중세시대의 성처럼 보이는 것도 같이 보이고 있었다.
다만 멍하니 풍경을 감상하고 있던 김현우가 시선을 멈춘 것은 바로 붉은 하늘에 의해 붉게 물들어 있는 땅을 바라봤을 때였다.
"……이런 씹."
그곳에는 김현우의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끔찍한 풍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어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 있었으나 김현우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유난히도 그 땅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
김현우의 시선에 보이는 것은 바로 붉은 피가 대지를 적히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시체.
종종 그 주변에는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몬스터의 시체가 있을 때도 있었으나 분명 대부분 그것은 사람의 시체였다.
그것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무엇인가에 의해 온몸이 산산이 찢긴 시체가 여기저기 창대에 매달려 걸려 있는 모습을 본 김현우는 곧 인상을 찌푸리다 그 시체들 사이에 있는 거대한 비석을 발견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 무엇인가가 적혀 있는 비석.
김현우는 무엇인가가 적혀 있는 비석을 읽어보기 위해 곧바로 하늘에서 뛰어내려 비석 근처에 착지했다.
"쯧."
창대에 매달려 있는 시체들을 찌푸린 눈으로 쳐다보던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려 비석을 바라보았고.
이내 그는 기형적인 언어로 쓰여 있던 언어가 읽을 수 있게 바뀌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의문을 표하다 이내 자신의 손에 끼워져 있는 번역반지를 떠올렸다.
'이건 51번 탑에서 나온 건데 다른 탑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가 보네.'
김현우는 짧게 감탄하고는 이내 한글로 바뀌기 시작한 글귀를 읽어나갔고.
"……그러고 보니까 이 새끼가 분노의 정령이라고 했지?"
곧 김현우는 이 비석이 무엇을 목적으로 세워져 있는 것인지에 대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비석에는 예언 비스무리한 게 써져 있었다.
물론 써져 있는 소리는 김현우의 입장에서 보면 전부 개소리였기에 전부 읽지 않았으나, 간단하게 요약할 수는 있었다.
'광기에 미쳐라.'
비석은 대충 요약했을 때 그런 말을 담고 있었다.
조금 세세하게 읽어보자면 항상 분노에 미쳐 있으라거나, 적들을 상대할 때는 항상 분노로 자신을 불태워 일말의 자비를 보이지 말라거나 하는 글들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인 시체는 분노를 담아 잘게 찢으라는 싸이코스러운 말까지.
'이게 예수가 말했던 그거란 말이지?'
김현우은 비석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바로 예수가 말했던 탑주들의 업 모으기의 일환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주변을 돌아봤다.
당장 김현우의 주변에 마구잡이로 찢겨진 채 걸려 있는 시체들.
'이거 완전 미친 새끼네.'
처음 예수에게 들었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으나, 실제로 보니 그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가 아무리 싸움질을 많이 하고 조금 잔인한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고 해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시체들을 마구잡이로 찢어서 창대에 달아놓는 것은 본 적 없었으니까.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현우가 지금 당장 올라가서 퓨리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김현우는 되도록 관리기관의 어그로를 끌어서는 안 되니까.
그렇기에 잠시 눈앞의 비석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그는 이내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뭐, 별수 없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한 뒤 자신의 머릿속에서 퓨리가 한 짓에 대해 깔끔하게 지워버렸다.
결국 그가 생각하고 열받아한다고 해서 그 녀석을 당장 죽여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깔끔하게 퓨리를 소멸시킬 생각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는 세워진 비석을 향해 망설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앙!!!!
김현우가 손을 휘두르자마자 터져나온 엄청난 폭음.
그와 함께 김현우의 주먹이 닿은 곳을 기점으로 세워진 비석이 산산조각 나며 박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김현우는 자신의 품안에 있는 보석을 꺼내 곧바로 땅 속에 박아 넣었다.
비석을 세워놓은 곳이고 문을 열면 바로 눈에 보이는 곳이기는 하다만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 아닌가?
게다가 괜히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다간 시간도 더 걸리고 화딱지도 조금 더 날 것 같았기에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땅바닥에 보석을 박아두고는 곧바로 다시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내려갈 때는 분명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았으나 김현우는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계층을 벗어나 탑의 최상층으로 향했고.
"후."
내려가기 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탑의 최상층에 도착한 김현우는 여전히 목이 90도로 꺾인 채 기절해 있는 퓨리에게로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고는.
빠아아악!
"끄엑!"
곧바로 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기절한 상태에서 당황과 공포에 물든 얼굴로 정신을 차린 퓨리.
물론 김현우는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으으……으으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래.
"뒤져 이 개새끼야."
죽일 생각은.
341화.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한다 (3)
"……천사들에게 한 번 더 제안을 걸자는 말인가?"
세계수의 뿌리 안.
그곳에서 나이아드는 자신을 포함한 4명의 정령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 맞아요."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의 물음에 굳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이아드.
그에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은 탐탁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 했다.
"……이 상태에서 한 번 더 제안을요?"
"네.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시피 저는 천사에게 조금 더 보상을 주고 그들을 조금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에요."
나이아드의 흔들림 없는 표정에 땅의 정령왕 오리에드는 거부감이 느껴지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죠, 오리에드?"
"……나이아드는 지금 파벌 내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오리에드의 말에 나이아드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오리에드의 말대로 현재 정령파벌 내의 상황은 그녀에게 있어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우선 가장 크게 돌아선 것은 바로 나이아드를 포함한 4대 정령의 민심.
처음 세계수가 세워지고 지난 몇 백년간 이어져 오던 4대 정령들의 민심은 최근 들어 땅바닥에 곤두박칠 치고 있었다.
그 이유?
당연히 설명할 것도 없이 김현우 때문이었다.
애초에 수장이라는 것은 외부적으로 일이 생겼을 때 잘 대처를 해야만 하는 자리고, 그렇기에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현재 4대 정령왕들은?
"확실히, 최근 들어 탑주들이 저희에게 보내는 시선이 달라지기는 했어요."
지금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정령파벌을 하나로 묶어주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고 보는 세계수는 이미 김현우가 개박살을 내놓았고.
4대 정령왕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소멸만 당하지 않았다 뿐이지 말 그대로 떡실신을 당했으며.
으득-
무엇보다 그들을 향한 시선이 좋지 않은 이유는 바로 천사의 힘을 빌리려 한 것 때문이었다.
'어차피 저희끼리 해결하지 못할 걸 알면서 짖기는……!'
나이아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빛이 변해가기 시작하는 탑주들을 생각했다.
정령들은 누군가의 힘을 빌리는 것에 대해 굉장히 보수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사실 누구라도 상대 파벌에 힘을 빌리고 싶어 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당장 나이아드만 하더라도 천사와 악마쪽에 힘을 빌리려 할 때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었으니까.
그러나 그때 당시의 상황에서 나이아드의 선택은 합리적이고,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기에 김현우는 상상 이상의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그에게는 그뿐만이 아니라 정령왕급의 탑주를 가볍게 가지고 놀 만한 이가 붙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나이아드는 어디까지나 정령파벌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일을 해결하고자 그들과 연합을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게 괴물 같은 놈들을 두 명 다 정령파벌의 힘만으로 때려잡았다가는 그 뒤의 피해회복을 할 때까지의 시간이 자연스레 길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정령파벌의 탑주들은 그런 나이아드의 합리적인 선택을 탐탁찮게 바라봤다.
물론 나이아드가 그동안 쌓아 온 이미지로 그런 탐탁찮은 시선을 없앨 수는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고, 그 덕분에 탑주들의 민심은 땅에 떨어졌으니까.
'본인들도 분명 알고 있으면서 그런 식으로 비난질이나 해대고 있는 꼴이라니……!'
탑주들은 멍청하지 않다.
그렇기에 그들은 분명 지금 이 상황이 정령파벌 혼자서 해결 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거기에 덤으로…….'
지크프리트를 잡으러 갔던 다른 탑주들의 말에 의하면 세계수를 박살 냈던 그 괴물 외에도, 51번 탑에는 탑주를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더 있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탑주들도 전부 깨닫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정령파벌의 힘만으로는 이 이상 김현우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허나 그것을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령들은 나이아드를 포함한 4대 정령을 보는 시선을 바꾸지 않고 있었다.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 보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 탑주들이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 보려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자존심 때문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머저리들…….'
나이아드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어요. 당신들도 아실 텐데요?"
나이아드의 말에 그녀를 제외한 다른 정령왕들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정령파벌 만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그들은 전부 깨닫고 있었으니까.
"……."
"……."
나이아드의 말 이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의 눈치만을 보는 정령왕들.
그에 나이아드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저희에게는 이제 이 방법밖에 없어요. 게다가 천사들이 저희의 제안을 받았을 때 당신들에게는 이미 이야기를 해놓았었잖아요? 아마 한 번 더 제안을 해야 할 것 같다고요."
나이아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령왕들.
그녀는 이전, 악마들이 제안을 받지 않았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해놓았었다.
천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극도로 추구한다는 것은 당연하게 알려진 상황이었고, 원래라면 나이아드는 업이 부족해 보이는 악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천사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악마가 제안을 받지 않았기에 나이아드는 이미 예전에 정령왕들에게 그들을 휘두를 만한 조금 더 큰 먹이를 줘야 할지도 모른다고 언질을 준 상태였다.
"……그래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독단으로 천사들에게 한번 더 제안을 걸었다간……."
이프리트의 걱정이 담긴 말에 나이아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만히 있자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말을 흐리는 이프리트와 망연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에리얼과 오리에드.
그렇게 답답한 회의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을 때.
"나, 나이아드 님!"
"……?"
그녀의 앞에 물의 중급정령인 닉스가 나타났다.
무척이나 급한 표정으로 뿌리 안으로 들어온 성인크기의 반 정도 되는 인간형 정령은 자신을 쳐다보는 다른 정령왕들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빠……빨리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닉스에 다급한 표정에 얼굴을 굳힌 나이아드.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닉스의 뒤를 따라 뿌리 위로 걸음을 옮겼고.
"끄어어어어-"
"……퓨리?"
그녀는 곧 자신의 앞에서 끔찍한 비명을 흘리고 있는, 분노의 정령 퓨리였던 것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갑자기 누군가가 세계수 안으로 들어오셔서 모시러 가봤더니 이런 모습으로……."
닉스가 그렇게 말하며 말꼬리를 흐리자 나이아드는 곧바로 퓨리에게 다가가 물을 이용해 그의 몸을 들어올렸다.
"퓨리, 괜찮은 건가요?"
그의 얼굴 위에 슬슬 물을 뿌리며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퓨리를 깨우기 위해 시도하는 나이아드.
그리고 곧.
"사, 살려줘! 살려달라고! 김현우……김현우가!!!"
나이아드는 퓨리의 비명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이름에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렸다.
####
빠아아악!
"끄엑!"
"인신 공양 비석이 최소 세 개에."
빠각!
"아아아아아악!!!"
"거기에 세워져 있던 얼어 죽은 시체가 최소 삼십."
뻐어어억!
"끄아아악! 아파! 그만……그만해!!! 그만! 제발 그만!!! 으아아아악!!!"
"그리고 무엇보다-"
빠아아아아아아아악!!!!
"-면상이 띠꺼워."
김현우의 마지막 일격에 얼음의 정령 아칸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얼음으로 만들어진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고.
"흐음……."
그렇게 고개를 처박고 기절한 아칸을 바라본 김현우는 짧게 생각하는 듯 하며 턱을 쓰다듬더니 이내 쩝, 하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진짜 시간만 있었으면 샌드백처럼 샹들리에에 묶어두고 패는 건데."
정말 유감스럽게도 지금 김현우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아직 김현우에게는 남은 탑이 하나 있었으니까.
'뭐, 어차피 이제 한 곳밖에 안 남긴 했는데…….'
"쩝."
그래도 하루죙일 이 녀석만 팰 수도 없는 노릇이라 김현우는 이쯤에서 깔끔하게 손을 털기로 했다.
게다가 이미 김현우는 이전 탑에서도 화산의 정령 볼칸 덕분에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
물론 싸우느라 시간을 많이 소비한 것이 아닌, 보석을 박으러 들어간 김현우가 볼칸이 지상에 해 놓은 짓을 보고는 빡쳐서 그를 패는 데 시간을 소비한 것이었다.
……뭐, 사실 볼칸뿐만이 아니라 김현우가 이동했던 탑들 안에 탑주들이 있었다면 그는 어김없이 김현우에게 뒤지게 처맞았다.
그냥 처맞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뒤지게 처맞았다.
특히 빛의 정령인 '위스프'는 자신의 업을 모으기 위해 대부분의 인간의 시력을 강제로 빼앗은 대가로 김현우가 직접 '두 눈'이 보이지 않는 기분을 체험시켜 주었다.
물론 정령이라 그런지 영구적인 체험은 불가능했으나 그래도 위스프가 재미있어서 비명을 지르다 못해 실신할 때까지.
김현우는 그때를 떠올리고는 만족했다는 듯 미소를 지은 뒤 이제는 상당히 익숙하게 나침반을 붙잡고 마력을 집어넣었다.
그와 함께 곧바로 아브가 정해놓은 대로 마지막 탑을 향해 이동한 김현우.
순식간에 다른 탑에 들어온 김현우는 이제는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듯 약간은 어둡게 인테리어 되어 있는 성을 한번 둘러보곤.
"……없네."
이내 이곳에는 탑주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쉬운 표정으로 짧게 탄식하고는 곧바로 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찾아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김현우는 어두운 계단을 걷는 것이 아닌 크게 도약을 했다.
계단은 쭉 앞으로 이어져 있었기에 김현우는 슬쩍 앞으로 도약을 하며 발을 몇 번 차주는 것으로 빠르게 계층을 연결하는 문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끼기기기기긱-!
김현우의 손에 의해 순식간에 열리는 문.
그리고-
"정령이란 새끼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취미가 엿 같은 거야……?"
그는 자신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계층에 장난질을 쳐놓은 정령들을 떠올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번에 보이는 것은 바로 사방에 깔려 있는 고치들.
마치 거미들이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고치들이 하늘과 땅을 막론하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딴 것 같이 만들어져 있는 고치들을 보며 혀를 차던 김현우는 이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땅바닥에 보석을 심고
주변의 고치들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이 새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마 그가 탑에 있었다면 김현우는 손수 그놈을 여기에다 끌고 와 저 고치처럼 둘둘 말아다가 시간을 조금 들여서라도 샌드백처럼 사용할 용의가 있었다.
그런 아쉬움을 가지며 다시 탑의 최상층으로 걸음을 옮기는 김현우.
그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빠르게 탑의 최상층으로 올라올 수 있었고.
"어이쿠, 이게 뭐야? 언제 이렇게 다 몰려들었어?"
"이 개 같은 새끼……!"
김현우는 곧 자신의 앞에서 어금니를 악물고 있는 나이아드와 다른 탑주들을 볼 수 있었다.
342화. 연합 폭발시키는 법 (1)
어두운 공간.
'그것'이 있는 허수공간과도 같이 생긴 그 공간에는 두 개의 눈동자가 움직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나는 푸른색의 동공을 가지고 있는 눈동자였고.
다른 한 명은 붉은색의 동공을 가지고 있는 눈동자였다.
"그래서, 좌표는 아직도 못 찾은 건가?"
푸른색의 동공을 가지고 있는 눈동자. 데블랑이 묻자 붉은 동공을 가지고 있는 눈동자는 유감스럽다는 말투로 이야기 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군.]
"이제 찾을 만한 곳은 다 찾아보지 않았나?"
데블랑의 물음에 붉은 눈동자는 맞다는 듯 눈꼬리를 흔들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맞네. 더 이상 찾아보지 않은 곳은 없지.]
"……큰일이군."
[혹시 그분에게 물어 좌표에 대한 힌트를 특정할 수는 없겠나?]
붉은 눈동자의 물음.
그에 데블랑은 불가능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건 조금 힘들 것 같군.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당장 그분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네. 애초에 그분이 알던 때의 이곳과 지금 이곳은 많이 다르지 않나?"
[……확실히 그렇군. 그분이 자신의 좌표를 알고 있었을 때는 이곳에 아직 탑 대신 '양식장'이 있었을 때니 말일세.]
"게다가 그때는 우리 말고도 그분의 수하들이 더 있지 않았나."
[그것도 맞는 말이지.]
담담하게 긍정하는 붉은 눈동자.
하지만 그는 답답하다는 듯 눈동자를 찌푸리고는 이야기 했다.
[하지만 내가 계속해서 말했듯 이제 더 이상 찾을 수 있는 곳이 없네. '양식장'때 있었던 신화들이 있었던 좌표를 뒤져봐도 그 흔적이나 '통로'가 남아 있는 곳은 없네.]
"……."
눈동자의 말에 침묵하는 데블랑은 이내 고민하는 듯하다 이야기했다.
"혹시……."
[왜 그런가?]
"관리기관에 통로가 남아 있을 확률은 없나?"
데블랑의 물음엔 눈동자는 순간 동공을 크게 떴지만 이내 이야기했다.
[안심해라, 그럴 일은 전혀 없다.]
"……어째서?"
[애초에 관리기관의 좌표는 이 탑들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애초에 '통로'는 양식장이 있을 때 그 근처에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니-
[애초에 통로가 관리기관 근처에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이것 참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군."
데블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51번 탑 근처는 찾아봤나?"
[51번 탑 근처라면…… 김현우가 있는 곳을 말하는 건가?]
"맞다."
[아니, 애초에 그곳은 찾아보지 않았다. 그곳은 애초에 양식장이 자리하던 곳도 아니지 않나?]
"그렇긴 한데…… 우선 한번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나? 그 어디에도 없는 상황이라면 우선 다 찾아보는 게 나을 것 같군."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가만히 있을 생각인가?"
[끄응……]
데블랑의 말에 침음을 흘리던 눈동자는 이내 알겠다는 듯 눈동자를 한번 깜빡이고는 이야기했다.
[솔직히 그곳에 있을 것 같지는 않네만…… 한번 찾아보도록 하지.]
그렇다고 관리기관 근처를 기웃거리다가 발각되기는 죽기보다 싫으니 말일세.
붉은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눈을 감았고.
눈동자가 눈을 감음과 함께, 데블랑은 그 공간에서 빠져나와 눈을 떴다.
"후우……."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데블랑은 괜스레 초조해지는 자신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리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는 지금쯤 되면 '그분'이 말하는 좌표에 대해서 어느 정도 단서를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분은 통로가 옛 양식장의 사이에 있을 거라 말했었고, 그것은 곳 그들이 찾아야 하는 장소가 관리기관에 의해 세워진 50개의 탑으로 제한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50개의 탑은 분명 많다고 하면 많은 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많은 양도 아니었다.
실제로 데블랑의 동료는 오늘 50개의 탑을 전부 조사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 50개의 탑에서 그분이 말하는 '좌표', 즉 통로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대충 찾은 건 아닐까?'
데블랑은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가 탐지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으니까.
"후……."
그렇기에 데블랑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자신의 답답함을 달랬다.
####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일곱 명의 탑주들.
그 와중에서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온몸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나이아드를 보며 김현우는 이야기했다.
"옹기종기 모여서 온 거 보니까 맞은 놈 중에 한 명이 열심히 기어가서 전했나 보네?"
김현우의 물음에 나이아드는 두 눈을 부릅뜨며 김현우를 바라보았으나 저번처럼 그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는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김현우를 쳐다볼 뿐.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김현우는 그 탑주들 사이에 자신에게 신나게 두드려 맞은 탑주들 몇 명이 끼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곤 이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응?"
마치 친한 친구에게 장난을 치듯 입을 여는 그.
그러나 역시 나이아드를 포함한 다른 정령들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김현우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
그런 탑주들의 모습에 김현우는 곧 그런 그들을 보며 슬쩍 의문을 가졌으나 이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을 떨었다.
"뭐야, 다들 말하기 싫은 거야? 그럼 내가 질문 좀 해도 되나?"
"……개 같은 새끼."
"뭐야? 이야기하기 싫은 거 아니었어? 질문한다고 하자마자 곧바로 말하네?"
"누가 그 질문에 답할 거라 생각하는 거죠?"
"뭐, 그런 걸 일일이 고민해 본 적은 없는데? 그냥 물어보고 대답하지 않으면 마는 거지 뭐. 게다가 내 질문이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요."
나이아드의 물음에 김현우는 피식 웃더니 이야기했다.
"뭐? 제정신이 아니라고? 그것 참 좋은 칭찬이네."
"……뭐라고요?"
"그건 너희 입장에서 제정신이 아니라는 거 아니야? 지금까지 탑 돌면서 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봤는데 존나 역겹더라."
응?
"그런 새끼들 하고 똑같은 정신머리 박혀 있는 사람 취급 받기는 진짜 존나게 싫거든. 역겨워서."
"……."
"그 조그만 한 업 더 모으려고 아주 개지랄을 해놨더라? 어떤 새끼는 시체를 다 찢어놔서 효수한 새끼도 있었고, 또 어떤 새끼는 사람들 시력을 전부 없애버린 놈도 있고……."
쯧.
"또 어떤 새끼는 사람들 전부 동사시켜 죽여놓고…… 또 당장 이곳만 해도 무슨 거미들이 감아놓는 것 같은 실로 사람들 전부 칭칭 감아놨더만? 도대체 그건 또 무슨 새로운 인신공양이냐? 여기 탑주 지금 거기에 있지?"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나이아드 뒤에 있는 정령들을 바라보자 그들은 놀랍게도 그의 시선이 향하자마자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렸고.
김현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정령들 사이에서 왠지 거미의 형상과 비슷하게 생긴 정령을 찾을 수 있었다.
"너지?"
"……!"
그의 물음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거미 형상의 정령.
"딱 하면 딱이라더니, 진짜 벌레같이 생겼네."
김현우는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정령을 보며 혀를 차곤 이내 그들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너희들, 양심이라는 게 있기는 하냐? 시발 지적 생명체라는 새끼들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지?"
"……어째서 그걸 당신이 신경 쓰는 거죠?"
"뭐? 내가 왜 신경 쓰냐고?"
김현우가 어이없어하며 되묻자 나이아드는 인상을 찌푸린 채,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그저 계층 안에서 업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되는 에너지일 뿐이에요."
"……농담이지?"
"역시 정신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고작 그딴 에너지 덩어리에 신경 쓰는 것을 보니 제 생각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군요."
비웃음을 짓는 나이아드.
"와우……."
그런 그녀를 보며 김현우는 도대체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저도 모르게 그리 중얼거리고는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말로 진심이야?"
"아닌 것 같나요?"
"……."
나이아드의 대답.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또 한번 감탄한 표정을 짓고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주먹을 쥐고는 이야기 했다.
"……대단한데?"
"제 생각에는 고작 그런 에너지 덩어리를-"
"아니, 그거 말고. 너는 나를 빡치게 만드는 데 재능이 있다는 소리였어."
"그것 참 영광스럽군요."
김현우의 말에 비틀린 웃음을 짓는 나이아드.
그에 김현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탑주들이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는데, 진짜 이 새끼들은 상식을 초월하다 못해 박살 내버렸네?"
파직-!
마력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
순식간의 그의 주변에 흩뿌려진 마력은 스파크를 만들어 내며 주변의 공기를 잡아먹기 시작했고, 정령들은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전투를 준비했으나.
"……됐다."
김현우는 전투를 준비하는 정령들을 보곤.
씨익.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끌어내고 있던 마력을 없애버렸다.
그에 순간이지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는 정령들.
그 모습을 보던 김현우는 맨 처음 나이아드가 보았던 실실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너무 쫄지 마. 애초에 지금 당장 너희와 치고받고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어차피 지금 싸워봤자 김현우는 정령들을 소멸시킬 수 없었다.
소멸시키면 지금 당장 피해를 받는 것은 김현우 자신이었으니까.
다만-
"다음에 보자. 진짜로."
-데블랑이 좌표를 찾았을 때, 김현우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정령들의 골통을 모조리 깨버리겠다고 결심한 뒤 나침반을 들어 올려 마력을 집어넣었다.
우우우웅-!
하얗게 빛나는 나침반.
김현우는 빛나는 나침반을 손에 쥐고는 입을 열었다.
"그때는 너희들 대가리를 따버릴 테니까."
####
천계는 언제나 평화로웠다.
탑주들이 아닌 천사들은 구름 위를 유영하고 있는 건물이나 정원들을 관리하거나 그 일이 끝나면 여유로운 일상생활을 영위했고, 그것은 천계에 사는 탑주들도 마찬가지였다.
파벌 내의 세력 싸움이나, 자잘한 개인 간의 다툼은 애초에 천계에서는 있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그것들은 전부 어느 정도의 힘을 소모해야만 성립하는 것이니까.
'신성'을 자신의 목숨보다도 우선시 지켜야 하는 천사들에게 있어 그런 것은 정말 쓸데없는 힘의 소비였을 뿐이니까.
그렇기에 천계는 그 어는 것보다도 풍요로웠고, 또 어느 곳보다 평화로웠다.
그래.
조금 전까지는.
"이야, 인사 한번 하러 오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이 마중 나와주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천사들은 천계의 안쪽에 들어와 있는 한 남자를 보며 전부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은 조금 전 신전에 도착한 탑주들도 마찬가지였다.
뚫려 있는 신전이 한순간에 꽉 찰 정도로 많은 천사들이 몰린 상태.
허나 그 신전의 주인인 루시퍼는 천사들이 꽉 들어찼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음에도 그것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무척이나 당당한 자세로 루시퍼의 앞에 마주 선 남자.
"야, 오랜만이다?"
김현우는 그렇게 웃으며 루시퍼에게 인사를 건넸다.
343화. 연합 폭발시키는 법 (2)
"겁도 없이,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김현우에게 말을 건넨 루시퍼.
그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뭘 어디라고 들어와? 네가 있다길래 온 거지."
김현우의 말과 동시에 천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탑주들은 루시퍼가 김현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총력전을 벌여도 나름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소멸시킬 수 있는 자.'
탑주들의 머릿속에 공통적인 생각이 떠오르며 그들은 언제라도 김현우가 행동함에 따라 몸을 움직일 수 있게 긴장한 상태로 경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런 탑주들의 모습을 한번 슥 둘러본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 했다.
"뭐야, 다들 왜 저렇게 쫄아 있어?"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김현우의 말에는 전혀 대답하지 않는 탑주들.
"겁 대가리를 너무 상실한 거 아니야?"
루시퍼의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지금 당장 너를 죽여야 하는 적진에 그렇게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들어온 것부터 그런 말을 듣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 설마 걱정해 준 거야? 그렇다면 고맙네."
"……."
"근데 어째? 나는 오늘 싸우러 온 게 아니라 그냥 어떤 사실을 좀 전해두려고 온 건데."
김현우가 그렇게 넉살을 떨며 말했으나 루시퍼는 그 넉살을 받아 줄 의향이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걸 왜 네가 정해?"
"뭘?"
"이곳에서 싸울지 말지 말이야. 지금 당장 너와 싸울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바로 나야. 알았어?"
"글쎄? 우리가 굳이 싸울 이유가 있나?"
"그야 이유는 당연히 있지. 우선 첫 번째로 우리는 정령 쪽에게서 의뢰를 받았어. 그리고 두 번째, 나는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난 너를 당장 찢어 죽이고 싶거든."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는 루시퍼.
그에 김현우는 괜스레 무섭다는 듯 과장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으나, 곧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리며 이야기 했다.
"그래? 근데 그거 알고 이야기하는 거지?"
"?"
"지금 너희들이 다 같이 달려들어서 나를 잡는다고 해도, 정령파벌에서는 너희들에게 약속했던 마력을 지급하지 못할걸?"
"뭐야, 지금 이간질 한번 하겠다고 적진 한가운데까지 와서 입을 털고 있는 거야?"
"설마? 당연히 고작 이간질 하려고 이렇게 적진에 홀로 들어오지는 않지."
"그러면? 지금 너는 정령파벌이 우리에게 약을 팔고 있다는 거야? 고작 그 정령파벌이?"
말투만 들어보더라도 정령파벌을 얕보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드는 루시퍼의 말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아니지. 걔들이 약을 팔지는 않아. 아마 너희에게 했던 제안도 진심일걸?"
"?"
"근데 여기서 요점은, 더 이상 걔들은 너희에게 했던 제안을 지킬 수 없게 됐다는 거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파란색 나침반을 들어올렸다.
그와 함께 크게 웅성이며 경계하기 시작하는 천사와 탑주들.
허나 그런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현우는 여전히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만약 내 말이 가짜 같다면 지금 당장…… 아니, 지금 당장은 말고 한 1, 2주 뒤에 세계수에 가서 한번 확인이라도 해봐. 그럼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말이야."
우우웅!!
그와 함께 발광하기 시작한 나침반.
김현우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루시퍼에게 가벼운 웃음을 보여준 뒤.
"그럼 수고해라."
이내 푸른빛과 함께 천계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그 모습에 저마다 경계를 취하고 있던 탑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던 루시퍼는 김현우가 있을 때까지 없애지 않았던 미소를 지우곤 이야기했다.
"가브리엘."
"예."
루시퍼의 부름에 천사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가브리엘.
"저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거기에 덤으로 저놈이 어떻게 이 천계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고."
"곧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브리엘은 그렇게 말하며 루시퍼의 앞에서 모습을 감췄고, 그는 고요한 표정으로 김현우가 나타났었던 곳을 말없이 응시했다.
"후……."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리엘, 아니 데블랑은 벌써부터 자신의 머리에 두통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
51번 탑 최상층에 있는 저택.
"……그래서 천계까지 들렀다가 왔다는 건가?"
지크프리트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야지, 내가 걔들 업을 전부 틀어막아봤자 정령들이 사실을 은폐하면 끝나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지크프리트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굳이 생각해 보면 그렇긴 하다만, 애초에 진짜 업이 틀어 막혔다면 그건 아마 삽시간에 퍼질 거다."
"왜? 무슨 알림기능이라도 있냐?"
"그런 건 아니다만, 만약 세계수로 가는 업이 사라진다면 지금 박살 난 채 그나마 밑동만 유지하고 있던 세계수도 완전히 말라 죽을 테니까."
"그래? 근데 기간이 있을 거 아니야?"
"아니다. 세계수는 조금이라도 양분을…… 그러니까 업을 공급받지 못하면 말 그대로 삽시간에 말라죽어 버린다."
"……개복치네?"
"개복치가 뭔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업을 끊어버렸다면 뿌리에 업을 다시 이어 놓는 게 아닌 이상 세계수는 죽는다. 지금은 세계수가 토막나기는 했어도 업을 꾸준히 투자해 세계수를 살릴 수 있는 확률이라도 있다만……."
지크프리트는 잠시 고민하곤 이야기했다.
"만약 진짜 말라죽어 버린다면 이제 그건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 굳이 방법이라고 한다면 세계수를 아예 처음부터 새로 키우는 건데……."
"건데?"
"아마 지금 상태에서 세계수를 다시 키우는 건 불가능할 거다. 애초에 내가 세계수의 탄생을 지켜본 입장은 아니지만 정령들은 분명 그렇게 말하며 세계수를 귀중히 아꼈으니까 말이야."
지크프리트의 말.
그에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기분 좋은 답변이네."
"그보다…… 도대체 천계는 어떻게 갈 수 있었던 거냐?"
"천계?"
"그래, 내가 알기로 천계는 애초에 좌표 자체가 공개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뭐, 잘 갔지."
"……잘?"
"그래, 잘."
김현우의 말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 지크프리트.
그러나 김현우는 그런 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손에 쥐어진 나침반을 바라봤다.
'역시 노아흐랑 아브는 대단하니까.'
김현우가 천계에 갈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아브가 '천계'의 좌표를 추적했기 때문이었다.
언제 추적했냐고?
'어떻게 데블랑이 나를 불렀던 그 짧은 순간에 좌표를 추적할 수 있었지?'
그것은 바로 데블랑이 김현우의 얼굴을 보기 위해 그를 소환했을 때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노아흐와 아브는 도대체 무슨 방법인지는 모르겠으나 천계 쪽으로 이어진 좌표를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좌표를 수집했지?'
물론 김현우 혼자 생각해 봤자 나오는 답은 없다.
애초에 그는 그런 자잘한 것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모르는 것을 넘어 무지했으니까.
게다가 굳이 노아흐와 아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는 게, 애초에 기초지식이 없어서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냥 노아흐와 아브가 대단하다는 것으로 모든 생각을 일축하기로 했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머리를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면 괜히 머리만 아플 테니까.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생각을 끝낸 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브랑 노아흐는 어디에 있어? 생각해 보니까 보이지를 않네."
그의 물음에 지크프리트는 대답했다.
"일 때문에 잠시 아래로 내려갔다고 들었다."
"……일 때문에 아래에 내려가?"
"그래, 무슨 일인지는 말해주지 않더군."
"그렇단 말이지?"
지크프리트의 말에 그렇게 답한 김현우가 그렇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갑자기 어디 가나?"
"나도 잠시 아래 좀 내려갔다가 오려고. 최상층좀 보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는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저택 밖으로 나가는 김현우.
그 모습을 보며 지크프리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
세계수가 있는 공간.
아니, 이제 그 공간은 그렇게 부를 수 없게 되었다.
"……."
"세……세계수가……!"
"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세계수에 모여 있는 정령들은, 안 그래도 밑동밖에 남아 있지 않은 세계수가 그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으니까.
밑동밖에 남지 않았으나 분명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던 세계수는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말라비틀어지고 있었고,
그 뿌리들이 말라비틀어지자마자 세계수의 주변으로 크게 조성되어 있던 푸른 녹지는 그 힘을 잃고 뿌리가 말라비틀어진 곳을 대신하기 위해 무너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싱크홀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상황.
탑주들은 혼란에 빠져 무너져 가는 세계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그것은 바로 정령파벌을 이끄는 나이아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 얼굴에 어떤 표정을 띄우지도 않고, 그저 멍한 표정으로 말라비틀어지는 세계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지금 무슨 일이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의문.
그러나 그 의문에 답해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 여기에 있는 탑주들은 지금, 이 상황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지 아예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이아드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이아드를 포함한 탑주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누구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김현우…….'
으드드득!
나이아드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 세 글자에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물인데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사방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두 눈을 부릅뜬 채 무너지던 세계수를 바라보고 있던 나이아드는 그다음으로 의문을 가졌다.
'도대체 어떻게?'
주제가 바뀌자 마자 나이아드의 머릿속을 유영하는 수많은 정보들.
그러나, 나이아드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의문을 찾기도 전에 그녀는 진실을 찾을 수 있었다.
"업이……! 세계수에 공급되고 있던 업이 거의 끊겼어요!"
"……!"
세계수가 말라비틀어지자마자 식겁해서 세계수의 상태를 관조하던 드라이어드는 드디어 원인을 알았다는 듯 소리를 쳤고.
"어……업이 공급되지 않는다고?"
"그……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설마 탑들이 지금 한순간에 전부 무너지기라도 했다는 건가?"
"아……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고! 나는 조금 전까지 탑에 있었어! 멀쩡한 내 탑에 있었다고!"
탑주들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 거렸다.
그것은 나이아드도 마찬가지.
'도대체 어떻게?'
이 사태의 원인이 김현우 때문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머리로는 김현우가 '어떻게'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알 길이 없었다.
애초에 탑을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탑의 '업'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이아드의 머릿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의 고리.
그 의문 속에서,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나이아드!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하죠!?"
"나이아드!!"
"나이아드!!!"
-바로 자신이 그 상태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하……."
그녀는 절망 어린 표정으로 무너지는 세계수를 바라봤다.
344화. 연합 폭발시키는 법 (3)
"……."
드라이어드가 나무를 이용해 임시로 지어 놓은 회의장의 안 쪽.
"……."
"……."
"……."
분명 정령파벌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탑주가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장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조용하다기 보다는 그저 탑주들이 눈치를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나이아드의 눈치를.
"……."
더 정확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누가 나이아드를 포함한 4대 정령왕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에 대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물론 그들 또한 잘한 것은 없었다.
나이아드는 세계수가 무너졌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나 그것은 다른 탑주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들이 이렇듯 나이아드를 확실하게 공격과 질책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탑주다.
그러나 그녀는 탑주임과 동시에 정령파벌을 이끄는 수장의 역할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래, 그녀가 질책당할 이유는 그것 하나로 충분했다.
"……그래서, 이 일을 어찌 할 생각이오, 나이아드."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바로 수호의 정령 가디언의 말.
나이아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자, 이번에는 그 옆에 있던 화산의 정령 볼칸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이야기라도 하는 게 어떻겠소?"
"그래, 당신은 정령파벌의 수장이잖소?"
볼칸에 말에 호응해 입을 여는 퓨리.
그들의 말을 기점으로 침묵이 가득했던 회의장에는 그 대신 매서운 공격과 질책 섞인 음성이 날아다니기 시작하는 공간이 되었다.
지크프리트를 처리하러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네 정령 중 드라이어드를 제외한 세 정령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나이아드에게 은근슬쩍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말을 과장했고.
고작 그런 저급한 선동에 당한 정령들은 나이아드와 그 양옆에 앉아 있는 4대 정령들을 비난했다.
"이제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더 이상 세계수도 없는데 이를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하! 저번에만 해도 그렇게 떠들더니 이번에는 입도 못 여는군, 왜? 항상 먹던 세계수의 과실을 먹지 못하니 입도 말라버렸나?"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은 비난들을 날리는 탑주들.
물론 그렇게 비난한다고 해서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인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탑주들도 전부 내심 깨닫고 있었다.
그저 그들은 탓할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자신이 아니라고, 자신이 아닌 이 녀석 때문에 상황이 요지경까지 오지 않았냐고 탓을 할 만한 대상이 필요한 것뿐이다.
왜?
바로 자신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나이아드가 가만히 듣고 있자 정령들의 입에서 나오는 비난의 강도가 점점 더 높아지기 시작했다.
점점 더 가파르게 올라가는 비난의 수위.
그러나,
그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정령들은 나이아드를 비난하는 것을 멈추기 시작했다.
허나 그것은 결코 그들이 쓸데없는 자존감이 총족된 것도 아니고, 나이아드가 불쌍해 보여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어느 순간 문득 느꼈을 뿐이었다.
나이아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
"……."
다시 한번 적막이 회의장을 감싼다.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열렬하게 나이아드를 비난했던 탑주들이 은근슬쩍 시선을 돌리고, 그 옆에 있던 다른 탑주들 역시 나이아드의 눈치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쓸데없는 자존감 채우기는 끝나셨나요?"
나이아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는 탑주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나이아드에게 당장 달려들 수 있을 정도로 이를 들이밀던 탑주들은 어느새 처음의 그때로 돌아와 있었다.
나이아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탑주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흐음…… 다들 잘들 짖으시더니 갑자기 조용해지셨네요."
나이아드의 비난.
그 말에 가디언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뭐라고? 지금 짖는다고 표현한 거요?"
"그럼? 어떻게 표현해 드려야 할까요? 좀 더 정확히 찝어서 패배한 개새끼들의 울부짖음으로 이름 붙여 드릴까요?"
"나이아드!"
분노한 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가디언.
그러난 나이아드는 대노한 가디언의 모습에도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계속해서 입을 움직였다.
"제가 틀린 말을 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틀렸나요?"
"당연히 틀렸-"
"아니, 단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요. 모든 게 진실이죠."
나이아드는 그제야 무표정했던 얼굴에 시니컬한 표정을 만들고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세계수가 말라비틀어질 때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죠?"
"……."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탑주들.
"정답이에요. 당신들은 지금 그 행동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았죠. 그저 발을 동동 구르며 세계수가 말라가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어요."
"……."
"당신들은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세계수가 처음 무너질 때부터 지금까지. 당신들은 그냥 멍청이들처럼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요."
담담한 나이아드의 말.
그러나 그런 나이아드의 말을 부정하는 이들은 그 누구도 없었다.
아무리 그들이 그녀를 욕하며 그 사실을 가리려 해도, 그 말은 사실이니까.
이내 완전히 조용해진 탑주들을 본 나이아드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 이상 제 이야기에 반박할 탑주들은 없는 것 같으니 현 상황에 대해서 말해보도록 하죠."
"……."
"지금 현재 세계수는 완전히 죽었습니다. 예전에는 그 뿌리 정도는 살아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죽어버렸죠."
네, 완전히요.
"회생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뿌리가 살아 있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당장 죽었으니까. 더 이상 세계수가 되살아날 가능성은 없어요. 이제 세계수를 되살리는 방법은 가지를 다시 세울 수밖에는 없죠."
"크흠……."
나이아드의 말에 침음성을 흘리는 탑주들.
"그리고, 세계수가 그렇게 된 이유는 김현우 때문일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냥 높은 것도 아니고 매우 높습니다."
-비록,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나이아드가 그렇게 뒷말을 이으며 자신의 말을 끝내자 그녀의 눈치를 보던 탑주 중 한명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여는 나이아드.
"천사에게 힘을 빌리는 방법도 더 이상은 불가능해요. 아시다시피 그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없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요."
"……."
"그러니, 저는 관리기관에 부탁을 할 생각이에요."
"……관리기관에?"
나이아드의 말에 슬쩍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탑주들.
그도 그럴 것이 관리기관은 철저히 비즈니스적으로 움직이는 집단이라는 것을 다들 알기 때문이었다.
은근히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뽑아먹을 것은 골수까지 싹싹 긁어모으는 것이 바로 그들이 하는 일이니까.
그런 탑주들의 불안을 본 것인지, 나이아드는 입을 열었다.
"네. 관리기관에 의뢰할 겁니다. 저희 파벌 전체의 업을 제공하는 대가로요."
"……!"
"자, 잠…… 그게 무슨……!"
"이견은 받지 않을 거예요. 탑주분들도 모두 느끼고 계시잖아요? 어차피 저희는 끝났어요. 세계수는 무너졌고, 대체 김현우가 무슨 짓을 해놓은지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탑에서는 더 이상 업이 나오지 않게 되었죠."
"……."
"한마디로 저희는 모든 것을 잃었어요."
그리고-
"어차피 이렇게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니 저는 남은 모든 것을 바쳐서 김현우 그 개자식을 죽여버릴 거예요."
나이아드의 담담한 선언.
허나 그런 그녀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제하시는 이는 없었고.
"모든 것을 잃더라도 협력 부탁드려요. 탑주님들."
나이아드는 그렇게 말하며 시니컬한 표정 속 숨겨진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
"으이구~ 너무 귀엽잖아!"
"그마해여!"
"앙~♡ 너무 귀여워!"
"그-마안……!"
목동에 있는 고급 일식집.
"그마아안 해여어어어 제발!!!"
그곳에서, 아브는 이서연에게 실시간으로 얼굴 폭행을 당하는 중 이었다.
이서연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 바뀌는 아브의 얼굴을 본 이서연은 행복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으나, 아브는 그야말로 지옥에 온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러나 분명 얼굴을 밀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은 아브의 볼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이서연의 손길을 받으며 후회하는 아브.
최상층에 올라가 있던 아브가 은근히 이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굳이 9계층으로 내려온 이유.
그것은 바로 음식 때문이었다.
고작 일 주일을 9계층에 있었을 뿐이었으나 아브는 그 일주일동안 9계층에서 지내며 많은 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물론 냉동음식들이야 그녀가 예전에도 즐길 수 있기는 했으나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그녀가 치료 때문에 9계층에 머물 때 먹었던 초밥 때문이었다.
아브의 입맛을 한번에 사로잡았던 초밥.
그것에 홀려 아브는 결국 9계층으로 내려왔으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한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저도 모르게 다른 테이블에 있는 이들에게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살……려……줘……!"
아브의 애처로운 한마디.
그러나 이서연의 바로 앞에 있던 손오공은 그런 아브의 시선을 애써 무시할 뿐이었고, 그녀와 최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는 노아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스마트패드라는 것은 정말로 신기하군."
"그런가? 이곳에는 그것 말고도 다른 신기한 것들이 많다."
"역시 언제 한번 시간이 날 때 이곳에 머물러서 좀 진득하게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군."
청룡과 밥을 먹는 것도 잊은 채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브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김현우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서방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음, 맛있네."
"이것도 드시는 게 좋습니다."
"이것도 맛있."
"이것도 드세요."
"그래, 그런데 좀, 너무 빠른데?"
"아니에요. 서방님은 맨날 위에서 열심히 일하시니 평소에 든든하게 드셔두셔야죠?"
"아내가 내조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배웠습니다. 서방님."
"아니, 그 마음은 참 기특한데 이제 그만-"
김현우는 실시간으로 자신의 두 와이프에게 음식공격을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김현우와 그 주변의 넓은 자리를 놔두고 김현우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는 미령과 하나린은 김현우의 양 어깨에 붙어 지극정성으로 그에게 먹을 것을 넘겨주고 있었다.
음식에 의해 부풀어오른 볼이 줄어들 때면 음식이 들어가고,
음식에 의해 부풀어오른 볼이 줄어들 때면 또 음식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기묘한 상황은 바로 김현우의 뒤쪽으로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
다른 한쪽에는 양복을 입고 있는 이들이 좌르륵 도열해 있었고, 다른 쪽에는 가면을 쓰고 있는 패도 길드원들이 좌르륵 도열해 있었다.
……물론 손에는 음식이 든 그릇을 든 채로.
"아니, 잠깐만 그만 좀 먹여…… 이제 배부르다고."
"안 돼요, 서방님,"
"서방님, 더 드셔야 합니다. 이정도로 아직 저희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아니, 내가 만족한다는데 도대체 왜 너희들이 만족이 안 된다는 거야!?"
따지는 김현우.
그러나 그의 입 안으로는 음식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것을 보는 아브의 눈에는 하나가 더 보였다.
다들 열심히 제각각의 일을 하느라 바쁜 와중이라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한 것 같았으나 아브는 똑똑히 보았다.
김현우가 보이는 창문 뒤의 건물에서 야차가 맛있겠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모습을.
"……."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아브는 분명 전혀 바뀌지 않은 자신의 상황이 갑자기 괜찮게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345화. 외팔이는 과거를 지고 있다 (1)
백발의 실눈을 가지고 있는 남자.
"오랜만이군."
"오랜만입니다."
헤르메스는 앞에 앉아 있는 외팔이에게 조용히 인사를 하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부서진 궁전을 바라봤다.
아니, 부서진 궁전이라고 칭하는 것보다 그저 폐허라고 보는 것이 나을 정도로 흔적만 남아 있는 궁전.
그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는 흔적 속에서, 외팔이 검사는 쓸쓸히 앉아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헤르메스는 입을 열었다.
"……아직도 이곳은 이런 상황이군요."
헤르메스의 말에 외팔이검사는 말 없는 웃음을 짓고는 이야기했다.
"그래, 아직도 이곳은 이런 상황이지."
어쩌겠나?
"애초에 내가 아니라면 이것들을 기억해 줄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을 텐데."
외팔이는 그렇게 말하며 짐짓 아련한 표정으로 궁전을 바라봤다.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폐허.
천장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고, 천장을 받치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기둥마저도 이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월의 흔적을 가지고 낡게 풍화되어 있었다.
그나마 이곳에 궁전이 있었다고 알려주는 것은 이미 음각마저 희미해진 대리석 바닥뿐.
그것들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외팔이는 이내 헤르메스를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평소라면 얼굴을 비추지 않는 자네가 나를 찾아온 것으로 봐서는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송구합니다."
"아니, 아닐세. 그럴 수 있지. 사실 생각해 보면 그 이전에도 우리의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니 말일세."
언뜻 보면 헤르메스를 비난하는 듯한 말투로도 느껴질 수 있는 외팔이의 말.
그러나 외팔이의 말투에서는 그런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어찌 보면 외팔이의 말투에는 묘한 친근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
"이런, 잡설이 너무 길었군. 자네에게 있어서 과거 이야기는 상당히 하기 힘든 일을 텐데 말이야. 너무 내 생각만 한 것 같군."
외팔이의 말.
그에 헤르메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외팔이의 말에 헤르메스는 이내 그의 앞에 앉아 이야기했다.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의뢰…… 의뢰라……그것도 꽤 간만에 들어보는 말이로군. 게다가 더 신기한 건 앞으로 자네의 입에서 튀어나올 대상이 누구인지도 대충 짐작이 간다네."
외팔이의 말에 헤르메스는 순간 말을 멈췄으나 이내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리해야 할 사람은 51번 탑주인 김현우입니다."
"소멸인가?"
"소멸입니다."
"소멸이라…… 뭐, 요즘 그 친구 이야기가 가만히 있는 내 귀에도 꽤 많이 들리더군."
외팔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홀로 납득하는 듯하더니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래서, 나 이외에 다른 이도 탑에 참가하는가?"
"예. 아마 예상으로는 두 명 정도 더 참가할 것 같습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순간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끈 외팔이는 이내 자그마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미움을 너무 많이 사버린 모양이군."
"……."
헤르메스는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으나 외팔이의 말에 동의했다.
이번 의뢰를 받았던 나이아드에게서 헤르메스는 정말로 무한한 악의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정말로 순수한 악의.
스스로를 파멸 시켜서 까지 김현우를 소멸시키고 말겠다는 그 순수한 악의는 헤르메스를 저도 모르게 압박했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상기했던 헤르메스는 외팔이의 말에 동의를 하며 표정을 굳혔고, 그런 헤르메스의 표정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궁전 한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곳에 있는 것은 하나의 낡은 검.
사실 말이 낡은 검이지 녹이 슬어서 과연 검을 뽑을 수나 있을까? 하고 의심이 들게 만드는 칼을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팔에 쥔 외팔이는 이내 헤르메스를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알겠네. 그 의뢰를 받도록 하지. 솔직히 나도 좀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야."
노인의 말에 헤르메스는 순간 외팔이를 응시했으나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알겠습니다. 만약 갈 준비가 되시면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도록 하지."
외팔이의 긍정에 헤르메스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그의 앞에서 자취를 감췄고.
"흐음……."
헤르메스가 몸을 감췄던 곳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노인은 이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녹슨 검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어떨지 궁금하군."
그렇게 외팔이가 헤르메스게에 의뢰를 받았을 때.
"……아무래도 김현우의 말이 정말인 것 같습니다."
"정말로 세계수가 완전히 박살 났다고?"
"예. 분명 처음에는 미약하게나마 세계수의 기운이 남아 있어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어제 부로 세계수의 힘이 전부 소멸한 것을 봐서는……."
가브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말꼬리를 흐리자 루시퍼는 굉장히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끄덕이더니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세계수가 박살 난 게 진짜라는 말이지?"
"우선은 느껴지는 바로는 그렇습니다."
"당장 살아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예. 그 공간 자체에서 아예 세계수의 마력이 소멸한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정령쪽에서 세계수를 새로 지정해서 키워야만 될 것 같은 수준입니다.
천사의 말에 루시퍼는 감탄했다는 듯 저도 모르게 박수를 짝 치며 이야기했다.
"이 새끼 진짜 상상 이상이네?"
루시퍼의 말에 앞에 있던 가브리엘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그는 몇 번이고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했다.
"아니,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어떻게 세계수를 소멸시킨 거지?"
루시퍼의 물음에 가브리엘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이야기했다.
"그것까지 자세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만 우선 염탐한 정보에 의하면 세계수가 소멸하기 전, 김현우가 정령파벌에 속해 있는 탑에 들렀다고 합니다."
"……정령파벌에 속해 있는 탑?"
"예. 대충 그 내용을 토대로 해서 대략적으로 정리를 해본다면…… 아무래도 김현우는 세계수와 연결되어 있는 탑주들에게…… 아니, 정확히는 탑에게 어떤 조치를 취한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의 말에 잠시 고개를 숙이며 고민에 빠진 루시퍼.
그는 잠시 고민하다 가브리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상하는 게 있어?"
"물론 예상하는 게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몇 개는 개연성이 맞지 않고, 또 몇 개는 너무 현실성이 없는 것들이라 따로 말씀을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예."
가브리엘의 대답에 루시퍼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보이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야…… 사실 세계수가 소멸한 건 우리에게 있어서 그다지 큰일도 아니고 말이야."
확실히 루시퍼의 말대로 그에게 있어서 세계수가 소멸한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세계수가 사라진 덕분에 그가 받아야 할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 게 손해라면 손해였으나 애초에 천사 쪽에서는 잃은 것이 전혀 없었기에 상관없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이득이지.'
김현우는 강했으니까.
'내가 잘못 생각했어.'
분명 이전에 김현우를 만났을 때, 루시퍼는 그를 힘만 좀 있는 병신으로 봤다.
그도 그럴 게, 그가 탑주회의나 다른 곳에서 보여주는 모습이나 소문들은 루시퍼가 그를 그렇게 보기에 충분한 역할을 했으니까.
'어디서든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멍청한 짓이지.'
또한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나 자신의 속마음을 가감없이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멍청한 짓이었다.
이익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감추고 숨길수록 더더욱 극대화되니까.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행보들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것 투성이었다.
쓸데없이 싸움을 걸고.
쓸데없이 관심을 끌고.
쓸데없이 적을 만든다.
적어도 루시퍼의 눈에는 김현우의 행동이 지독한 비상식으로 보였기에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김현우가 세계수를 소멸시켜 버렸을 때부터 루시퍼는 김현우에 대한 평가를 바꾸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강하기만 한 병신 같은 놈'에서,
'어쩌면 겉은 그저 눈속임이고, 속으로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계산하고 있는 놈'으로.
"……."
사실 이것이 너무나도 큰 논리의 도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루시퍼는 인지할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루시퍼는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한 가능성을 없애지는 않았다.
적어도 루시퍼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 일련의 상황은 도저히 노리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는 상황들이었으니까.
'아무튼,'
멍청이라면 모르겠으나 괜히 상대하기 껄끄러운 놈을 건드리는 것은 그리 이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루시퍼는 세계수가 소멸한 것을 내심 다행으로 생각하곤.
"아."
짧게 탄성을 터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김현우가 어떻게 여기로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알아봤어?"
루시퍼의 물음에 가브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 또한 조사를 해봤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 먼저 김현우를 이곳으로 초대한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가브리엘의 말에 루시퍼는 순간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
하남에 있는 장원에서 김현우는 장원에 굉장히 넓게 그려져 있는 마법진을 보며 질문했다.
"이건 또 뭐야?"
김현우의 물음에 전부 그려진 이동진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던 야차는 이내 답했다.
"이동진이니라."
"……이동진?"
"그렇느니라."
"갑자기 이동진은 왜?"
김현우의 질문에 야차는 스윽 웃더니 김현우의 옆구리를 툭 치고는 이야기했다.
"두 아내와 밤새 열심히 만리장성을 쌓아 올리느라 듣지 못했나 보구나."
"……하던 말이나 계속해."
야차의 말에 괜히 낯부끄러워진 김현우는 괜히 얼굴 주위를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이야기했고, 야차는 여전히 얄궂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이야기했다.
"이 마법진은 '밖'과 이어진 마법진이다."
"……밖과 이어진 마법진?"
"그래, 정확히 말하면 손오공과 청룡의 본래 고향을 말하는 것이니라."
"그러니까…… 칠대성이 간 곳을 말하는 거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손오공의 동료들인 칠대성을 떠올리자 야차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정답이니라."
"그런데 갑자기 고향은 왜?"
"수련 때문이니라."
"……수련?"
"그렇느니라."
"아니, 이렇게 갑자기?"
김현우가 묘한 표정으로 묻자 야차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뭐…… 굳이 말하면 이미 저번부터 이야기가 나온 터라 갑자기 수련을 하러 간 것은 아니다."
"……그래?"
"그렇느니라. 뭐…… 사실 내가 어느 정도 꼬신 부분도 없잖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꼬셨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김현우의 질문에 야차는 곧바로 대답했다.
"저번에 일이 한번 있지 않았느냐?"
"일……?"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다 이야기했다.
"설마 탑주들이랑 싸우는 걸 말하는 거야?"
"그렇다. 그걸 빌미로 꼬셨더니 곧바로 넘어오더구나."
묘한 웃음을 지는 야차.
"뭐……."
사실 김현우의 입장에서는 같이 싸울 수 있는 동료가 조금이라도 더 필요하다보니 동료들이 강해진다고 하면 딱히 불만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시간.
"……그래서, 저 둘이 돌아오는 데에는 어느 정도가 걸리는데?"
"흐음…… 그렇구나. 대략 100년 정도니라."
"……그래? 100년……응? 100년!?"
김현우가 슬쩍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야차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느니라. 대충 100년 정도 걸릴 것이니라."
다만-
"내가 그 둘을 도와준다면 100년이 아니라 한 달 정도로 그 수련의 시간을 줄일 수 있지."
"응? 그럼 그냥 한 달 아니야?"
김현우의 어리둥절한 물음.
그에 야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는-
"흐음, 유감이지만 그건 아니니라. 100년이나 걸리는 수련시간을 한 달로 줄이려면 나도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네가 내 부탁을 조금 들어 준다면…… 조금 노력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냐?"
"……?"
-곧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묘한 제안을 했다.
346화. 외팔이는 과거를 지고 있다 (2)
그곳은 녹림(綠林)이었다.
지상에서 보나 하늘에서 보나 보이는 것은 오로지 나무뿐이었고, 그나마 있는 굴곡에도 절벽보다는 나무들이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끝없이 펼쳐져 있는 녹림에서.
"으아아아! 시발!! 이러다 뒤지겠다!"
손오공은 거대한 돌에 깔려 있었다.
무척이나 매끈해 보이는 돌.
아니, 사실 그것은 매끈한 돌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손오공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바로 오행산이었으니까.
물론 손오공도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는 예전에 석가여래에게 오만을 떨다 500년 동안 이 오행산 아래에 깔려 끔찍한 수감생활을 보낸 적이 있었으니까.
"아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때의 수감생활.
제대로 된 음식은 먹지도 못했고 맨날 빌어먹을 쇠구슬과 구리물만 마셔야 했던 그때를 떠올린 손오공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는 생각했다.
'내가 왜 조금 더 강해지겠다고 여기에 기어 들어와서……!'
그가 벌써 몇 천 년도 지난 끔찍한 수감생활을 다시 하고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야차의 제안 때문이었다.
'이 오행산에서 자력으로 탈출할 수만 있으면……!'
투전승불의 업은 지금 단계에서 한 단계 더 올라설 수 있을 것이라는 야차의 말.
그렇기에 손오공은 야차의 말을 듣고는 그녀가 직접 만들어준 허수 공간에서 스스로 오행산의 지하로 들어가 이 끔찍한 고통을 다시 겪고 있는 것이었다.
"으그그그극-!!"
그그그극-!
손오공이 이를 악물고 양팔을 땅에 딛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양손을 딛고 있는 땅이 순식간에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파이고, 그와 함께 오행산에 눌려 있던 그의 허리가 아주 조금이지만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쿠우우우웅!!!
손오공은 약 0.5cm 정도 자신의 몸을 들어 올린 시점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을 지탱하던 손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으갹-!! 이런 씨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손오공의 허리를 끊어 놓을 듯 짓누르는 오행산.
손오공은 자신의 입안에서 쌍욕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지 않고 인상을 찌푸리고는 이내 시선을 올려 오행산 바로 위에 붙어 있는 부적을 바라봤다.
그때와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주겠다며 야차가 붙여놓고 간 부적.
'이게 정말 내가 옛날에 수감되어 있을 때 붙여져 있던 그 부적이라고?'
말도 안 된다고, 손오공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처음 부처의 손바닥 안에서 장난을 치다가 오행산에 깔렸던 손오공은 지금과 비교해서 별다른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허나 지금은?
오행산에 깔리고 난 뒤, 삼장을 따라 고행을 시작한 뒤부터 그는 수많은 난제를 넘어 업을 얻을 수 있었고, 나중에 가서는 여래에게 인정받아 투전승불의 업을 얻기도 했다.
그래, 한마디로 500년 동안 강제로 수감당했던 그때와 지금은 전혀 다르다는 이야기였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오공은 이 오행산에서 쉽게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끄으으……."
바닥에 깔린 채 죽겠다는 듯 신음을 흘리고 있는 손오공.
그리고-
"잘하고 있느냐?"
그렇게 죽을상을 지으며 오행산에 깔려 있는 손오공의 앞에 야차가 나타났다.
"끄…… 죽겠습니다……가, 아니라. 왜 그렇게 땀을 많이 흘리십니까?"
손오공은 순간 깔려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야차의 모습을 바라봤다.
상당히 땀을 많이 흘리고 있는 야차의 모습.
은근히 볼이 상기되어 있는 그녀의 모습에 손오공은 일순 고개를 갸웃했으나 손오공은 곧 충격적인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후후…… 미리 조금 받아뒀느니라."
"……??"
그것은 바로 묘하게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야차의 모습.
손오공은 순간 자신이 무엇인가를 본 것인지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이내 그녀의 입술이 묘하게 번들거린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아."
그제야 손오공도 자신이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큼큼거리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다시 표정을 정리한 뒤 물었다.
"흠흠……. 아무튼, 뭐 보시다시피 잘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느냐."
"……그보다, 이거 정말 한 달 만에 가능한 겁니까?"
"당연히 가능하니라. '밖'의 시간으로는 말이다."
"……밖의 시간이라는 건……."
"적어도 100년 안에는 가능하다는 말이니라."
"……왠지 그럴 줄 알았습니다."
손오공이 한숨을 내쉬자 그녀는 씨익 웃으며 이야기했다.
"뭐, 너무 실망하지는 말거라, 애초에 너도 깨닫고 있긴 했지 않느냐? 그 상태에서 한 단계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그건 그렇긴 한데……."
손오공은 벌써 부터 100년간 이 오행산에 처박혀 있을 생각을 하니 절로 한숨이 나오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야차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나도 나름대로 보상을 받았으니 이제부터 너희를 도울 생각이니 말이다."
"……보상?"
"흠흠, 그런 게 있느니라."
"……."
손오공은 문득 그 보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굉장히 궁금해졌으나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
'……김현우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알겠네.'
야차의 헤실헤실한 표정을 보았을 때, 그 보상이 100% 김현우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도록 하자꾸나. 물론 내가 도움을 준다고 해도 오행산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니라.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그녀의 물음에 손오공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애초에 고행을 다시 하는데 의미가 있는 이유는 바로 본인 혼자 그 고행을 극복하는 데에 있었으니까.
"그럼 잘 듣도록 해라."
그리고 곧 야차는 그 말과 함께 손오공에게 오행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단서에 대해 말해주기 시작했다.
####
탑의 최상층.
"와……. 영혼 흡수 당하셨어요?"
"……묻지 마."
김현우의 대답에 아브는 순간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으나 이내 어깨를 슬쩍 으쓱이고는 이야기 했다.
"너무 수척해진 것 같은데요?"
"……."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김현우는 왜인지 꽤나 수척해 보였다.
마치 영화 같은 데에서 보면 흡혈귀가 사람의 피를 쭉쭉 빨았을 때 되는 모습이라고 하면 비유가 될까?
"……."
물론 그렇게까지 홀쭉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튼 김현우의 외형은 누가 봐도 굉장히 수척해진 사람의 모양새였다.
"……정말 상당히 수척해 보이는군, 마력은 멀쩡한 것 같은데 말일세."
김현우의 모습을 한번 바라본 노아흐가 김현우의 맞은편에 앉자, 김현우는 피곤한 표정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고는 이야기했다.
"뭐 아무튼 나에 대해서는 그렇게 크게 신경 쓸 건 아니야. 약간 회포를 푸는 데에 조금 어울려준 거니까."
"……회포?"
아브의 되물음.
"그래서, 뭔가 침입 흔적 같은 건 있어?"
그러나 김현우는 그런 아브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곧바로 다른 질문을 던졌고, 그에 슬쩍 뚱한 표정을 짓던 아브는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아뇨. 전혀 없어요."
"전혀?"
"네, 사실 저도 이곳에 침입할 수 있는 이들이 있을 것 같다 싶어서 집중적으로 보안을 유지했는데…… 전혀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전혀 없다는 말이지?"
"네, 전혀요."
"흐음……. 좀 신기하긴 하네."
김현우는 사실 그 이후로 분명 정령 파벌에서 뭔가를 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상하게도 정령쪽에서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거라던가.'
뭐 사실 지크프리트도 정령파벌에서 자신쪽으로 팀을 돌린 마당이라 김현우의 입장에서 제대로 된 외부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데블랑과 계속해서 연락이 됐으면 모르겠는데…….'
이미 김현우가 세계수를 완전히 박살 내버린 터라 천사와 정령의 연합은 끝난 것과 다름없었으나 이쪽에서 천사쪽의 상황을 확인할 수 없는 이상 김현우가 외부의 정보를 얻기는 상당히 힘들었다.
'……뭐 조금 더 있어봐야 하나?'
어차피 얻지 못하는 정보를 머릿속에서 요리조리 굴려봤자 결국 나오는 게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김현우는 빠르게 머릿속의 생각을 지우고는 다른 주제를 꺼내들었다.
"지크프리트는?"
"우리가 9계층에서 돌아온 뒤 자신도 잠시 50번 탑에 돌아가 봐야 한다고 하고는 돌아갔다네."
"그래?"
"듣기로는 50번 탑에 쌓인 업을 회수하러 간다고 하더군."
"업 회수라…… 하긴 관리기관에게 내줘야 하는 업은 뽑아내야지…… 응?"
"……왜 그러나?"
"그냥 갑작스레 생각이 난 건데, 관리기관한테는 마력을 사용하는 대가로 꾸준히 업을 내놓아야 하잖아?"
"그렇지?"
"그럼 이다음에는 또 언제 업을 회수하러 오는 거지?"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곤 이야기했다.
"그건…… 잘 모르겠네요?"
"그치? 나도 그쪽에서 어떤 주기로 업을 회수하러 오겠다는 소리는 못 들었던 것 같아서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노아흐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야기했다.
"뭐, 그것도 이미 때가 되면 전부 알 수 있지 않겠나? 어차피 우리 입장에서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니 말일세."
"……뭐, 그것도 그렇긴 하지."
긍정하는 김현우.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고는 이내 물었다.
"그럼 아직 별다른 정보는 안 들어온 거지?"
"그렇다고 보면 될 것 같군."
노아흐의 대답.
그에 김현우는 느긋한 표정으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투덜거렸다.
"어째 점점 내가 신경 쓰고 있는 일이 많아지는 것 같단 말이야."
"뭐…… 그거야 예전에도 그렇지 않았나?"
"아니, 뭐 그건 그렇긴 한데……."
김현우는 지금 상황에 맞는 말을 고민하는 듯 잠시 인상을 찌푸리곤 이야기했다.
"예전에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더라도 조금 쉬는 타이밍이 있었던 것 같거든? 예들 들어 등반자가 올라오고 나면 한동안은 좀 조용하다던가 말이야."
근데-
"요즘에는 뭔가 좀 일이 계속해서 터지는 느낌이란 말이야."
"그럼 잘된 거 아닌가? 이번 기회에 쉬면 되니까 말일세."
"그치, 지금 특별히 일이 없으니 조금 쉬면 딱 좋을 타이밍인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뭔가 찜찜하단 말이야."
"……뭐가 찜찜하다는 거예요?"
아브의 물음에 김현우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했다.
"……뭔가 계속해서 일이 있어야 하는 타이밍에 이렇게 갑자기 휴식이 생겨 버리니까 좀 찜찜한 느낌?"
파직-!
"!"
"!"
김현우의 말과 함께 그의 눈앞에서 번쩍이는 푸른 전류.
그에 노아흐와 아브는 순간 깜짝 놀랐으나 김현우는 왜인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자신의 눈앞에 파직거리기 시작하는 전류를 바라봤다.
그리고-
"……?"
"편지……?"
김현우는 파직거리는 전류 속에서 빠져나온 한 장의 편지…… 아니, 편지라고도 할 수 없는 종이쪼가리를 확인할 수 있었고, 곧 김현우가 접혀진 종이를 펴자.
"……이건 또 뭐야?"
그곳에는 단 한 단어가 써져 있었다.
"조심하라고……?"
'조심해라.' 라는 단어가.
347화. 외팔이는 과거를 지고 있다 (3)
50번 탑의 최상층.
"쩝……."
지크프리트는 황망한 폐허가 되어 있는 최상층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고치고 싶기는 한데.'
사실 지금 당장 업을 소모해서까지 최상층을 고치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탑의 최상층을 고친다고 해봤자…….
'또 박살 나겠지?'
분명 그가 재건해 놓은 최상층은 다시 박살 나리라는 것을 지크프리트는 짐작하고 있었다.
"……."
물론 이미 지금 시점에서 보면 천사와 정령의 연합은 이미 깨진 상태고 정령들도 세계수를 잃어버린 터라 내부적으로 일이 들끓어 당장 쳐들어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크프리트는 지금 당장 옛날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에휴."
그렇기에 지크프리트는 그저 한숨을 한번 내쉬는 것으로 황폐한 풍경에 대한 위로를 대신하고는 몸을 움직였다.
분명 보이는 것은 쩍쩍 갈라진 땅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폐허뿐이었으나 지크프리트는 어렵지 않게 길을 찾아 걸음을 옮겼고.
"흡!"
곧 그는 폐허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 안쪽을 향해 손을 밀어 넣었다.
분명 수많은 잔해가 디딤돌이 되어 있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손쉽게 그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은 지크프리트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안쪽의 잔해를 파헤칠 수 있었고.
"후."
지크프리트는 그 잔해 속에서, 동그란 구슬을 찾을 수 있었다.
사람의 몸통 크기 정도 되는 구슬을 묘하게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지크프리트는 이내 구슬의 가운데 부분을 눌러 구슬을 열었고.
"……세 개라."
그는 곧 그 안에 모여 있는 붉은빛의 결정들을 볼 수 있었다.
붉은 빛깔로 빛나고 있는 결정들,
지크프리트는 못내 아쉽다는 표정으로 구슬 안에 들어 있는 결정들을 바라보다 이내 그것을 챙기고는 그대로 자신이 들었던 구슬을 잔해 속에 밀어 넣었다.
어차피 이 '업'을 가공하는 구슬은 탑주들이 부수지도 않을뿐더러 애초에 부수려고 해도 부서지지 않는 물건이었으니까.
게다가 저것이 탑의 최상층에만 있어야 업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지크프리트는 구슬을 넣어 놓은 곳을 다시 잔해로 뒤덮었고.
"자네인가? 51번 탑주에게 붙었다는 탑주가."
"!!"
곧 지크프리트는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가 시선을 돌림과 함께 보인 것은 바로 한 외팔이였다.
혹시 노숙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낡은 옷을 입고 있는 외팔이.
그는 느긋한 웃음을 지으며 지크프리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그와 함께 지크프리트의 머릿속을 유영하기 시작하는 수많은 생각들.
그러나 그 수많은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이미 지크프리트는 본능적으로 외팔이를 경계하며 몸을 슬금슬금 뒤로 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크프리트는 외팔이가 말할 때까지 그의 존재조차도 감지하지 못했고, 곧 그것은 다시 말해 외팔이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으면 언제든 죽일 수 있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게 했으니까.
'도대체 누구야?'
그렇기에 지크프리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거리를 벌리면서도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크프리트의 머릿속에는 저런 모습을 한 탑주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정령파벌쪽에 있었을 때 들었던 탑주들의 이야기를 떠올려 봐도 그를 특정하는 단어를 찾을 수가-
"……!"
-있었다.
"오, 혹시 내가 누구인지 알았는가?"
지크프리트가 경악한 표정으로 두 눈을 휘둥그레 뜨자 외팔이는 여전히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 했고.
"검신(劍神)……?"
지크프리트의 중얼거림에 외팔이는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 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아는 것 같다만, 나는 그런 위대한 이름으로 불릴 만한 사람은 아닐세. 나는 그저 죄인(罪人)일 뿐이니 말일세."
외팔이의 말.
그에 지크프리트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어째서 관리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탑주가 움직인 거지?'
설마, 김현우가 한 짓이 선을 넘는 행위였나?
지크프리트의 머릿속에서 또 한번 떠오르기 시작하는 수많은 생각.
그러나 지크프리트으 생각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내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는 자네도 알 거라고 생각하네."
"……."
"한 번에 51번 탑으로 갈 수 있으면 좋았겠네만…… 정말 이상하게도 51번 탑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더군. 그 헤르메스조차도 51번으로 들어가는 포탈을 만들지 못했네."
그래서-
"51번 탑주와 동맹을 맺은 자네를 찾으러 왔다네."
"……."
검신의 말에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지크프리트.
그에 검신은 이야기했다.
"만약 침묵을 유지하거나 발뺌을 하려 하는 것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걸세. 세상에 어두운 나라도 의뢰받은 대상의 정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조사를 하고 오는 편이니 말일세."
"……."
검신의 말은 한마디로 다 알고 있으니 괜히 발뺌을 하거나 침묵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지?'
그리고 그 상황에서 지크프리트는 갈등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외팔이에게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렇기에 그는 더욱더 초조했다.
자신이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곧 자신이 아예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의 강자라는 소리였으니까.
한 마디로, 여기서 침묵을 유지했다가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민.
외팔이는 그런 그의 고민을 기다려 주겠다는 듯 느긋하게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지크프리트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조심해라?"
김현우는 편지의 내용을 다시금 읽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고 그냥 하얀 종이 위에 적혀 있는 네 글자.
"저한테도 보여주세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아브에게 쪽지를 넘겨주었고, 마찬가지로 쪽지를 받아 본 아브와 노아흐는 곧 김현우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뭘 조심하라는 걸까요?"
"……그러게 말이야, 뭐 제대로 써 놓은 게 없어서 알지를 못하겠네."
편지가 나왔을 때 터져나온 푸른 전류로 보아 이것은 필시 데블랑이 쓴 것임이 틀림이 없었다.
애초에 그 푸른 전류는 데블랑이 자신을 부를 때나 소환될 때 보았던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혹시 천사들이랑 정령들의 연합이 깨지지 않았나?'
그렇기에 김현우는 곧 데블랑이 이 편지를 보낸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추리해 보았으나, 역시 그 진위를 자세하게 알 길은 없었다.
"아니 썅. 편지를 줄 거면 좀 이유까지 같이 써서 주던가, 왜 이렇게 이유는 말도 안 하고 보내는 놈들이 많아?"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아브는 편지를 보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좀 급하게 쓴 것 같은데요?"
"……급하게 썼다고?"
"네. 물론 저도 잘 모르는 단어이기는 한데 번역기능을 끄고 보면 필체가 조금 날려져 있거든요."
아브의 말.
그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 순간.
"?"
김현우는 곧 하던 생각을 지우고 저택 너머로 느껴지는 기운에 인상을 찌푸리곤 입을 열었다.
"……누가 들어온 것 같은데?"
"응? 누군가 들어온거라면…… 아마 지크프리트 씨가 아닐까 하는데요?"
"그렇군, 분명 50번 탑에 업을 가지러 다녀오겠다고 했으니 말일세."
아브와 노아흐의 말.
허나 김현우는 대답하지 않고 저택 너머를 빤히 바라봤고, 그제야 아브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어? 하는 소리를 내뱉고는 이야기했다.
"……이제 보니까 두 명이 들어온 것 같네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이야기했다.
"너희는 내려가 있어."
갑작스레 진지하게 바꾸니 김현우의 말투.
그리고 그와 함께 김현우는 아브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곧바로 저택의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오, 이제야 만났군."
저택 밖의 거대한 공동에서, 김현우는 자신에게로 걸어오고 있는 한 노인을 볼 수 있었다.
낡은 옷을 입은 채 허리에는 녹이 슬어 제대로 뽑아질 것 같지도 않은 검을 차고 있는 외팔이 노인은 다른 한손에 지크프리트 뒷덜미를 잡은 채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신기하군, 탑 사이의 통로라,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었어. 혹 그 통로는 자네가 설치한 겐가?"
김현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렇게 이야기하는 외팔이.
그는 곧바로 답했다.
"그건 알아서 뭐하게?"
"흐음, 그렇게 대답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저 통로를 설치한 것은 자네가 아닌가보군."
외팔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지크프리트를 김현우에게로 던졌다.
탁!
외팔이가 던진 지크프리트의 뒷덜미를 잡아 챈 김현우.
뭔가 켁, 거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으나 김현우는 신경 쓰지 않았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외팔이는 웃으며 이야기 했다.
"받게. 꽤 의리가 있는 친구더구만."
"의리?"
"그래, 자네를 만나기 위해 통로를 조금 알고자 했네만 그 친구는 끝까지 말하지 않더군. 내가 알기로 자네들은 동맹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네만 확실히 동료의식이 있지 않은가?"
그거 그냥 나한테 목줄 잡혀서 그런 건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 나왔으나 김현우는 굳이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고는 지크프리트를 저택 쪽으로 던져두었다.
쨍그랑! 하는 소리를 내며 저택 안에 처박히는 지크프리트.
"……동료를 좀 심하게 다루는 것 아닌가?"
"어차피 안 죽잖아? 게다가 지금 당장 나랑 있다가 공격당하는 것보다는 저기에 박혀 있는 게 더 안전할걸?"
"뭐, 그건 그렇네만……."
외팔이 노인은 뭔가 묘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으나 김현우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지?"
외팔이든 김현우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서로 알고 있었다.
허나 외팔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김현우의 질문을 받아 주었다.
"의뢰를 받고 왔지."
"의뢰?"
"그래, 정령파벌 쪽에서 들어온 의뢰를 받고 왔네."
"……그래? 그쪽에는 줄 만한 게 아예 없을 텐데?"
김현우의 물음에 외팔이는 허허 웃으며 이야기했다.
"눈에 보이는 보상만이 전부는 아니지."
"……그래서, 나를 죽이러 오셨다?"
"뭐 우선 의뢰받은 것은 그런 내용이 맞기는 하네."
외팔이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끼기기긱- 끼기기기긱!!!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외팔이의 손에 의해 꺼내진 칼.
"……."
그의 손에 들린 칼은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우선 도신부터가 그랬다.
분명 여타 다른 칼이라면 아름다운 은빛을 머금고 있어야 할 도신은 칙칙한 회갈색을 띄고 있었고, 날이 있는 부분은 마치 상어의 이빨처럼 여기저기 이가 나가 있었다.
맞았다가는 베여죽는 것이 아니라 파상풍으로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칼.
그에 김현우는 노인을 바라보고는 이야기했다.
"……몸도 딱히 안 좋아 보이고 주워온 칼도 그렇게 멀쩡해 보이지는 않는 것 같은데, 감당할 수 있겠어?"
김현우의 도발.
그러나 노인은 그저 느긋한 웃음을 지으며 망가질 대로 망가진 칼을 들어 올렸고.
"자네도 깨닫고 있지 않나?"
"!"
그다음 순간-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말일세."
-외팔이는 김현우의 뒤에 서 있었다.
348화. 외팔이는 과거를 지고 있다 (4)
50번 탑의 폐허.
"쯧."
그곳에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한 명은 오른손이 마치 괴물의 손처럼 끔찍하게 자라나 있는 남자였고,
다른 남자는 선명하게 반짝거리는 은발이 굉장히 특이한 남자였다.
그중에서도 반짝거리는 은발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피로하고 지겹다는 듯 폐허에 드러누워 몇 번이고 하품을 하고 있었고,
괴물의 손을 가지고 있는 다른 한 명은 지금 상황에 무엇인가 불만이 있는 듯 몇 번이고 혀를 차며 폐허의 돌덩이들을 툭툭 차 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꽈아앙!
"아니, 이 노친네는 도대체 어디를 간 거야!?"
조금 전까지 불만이 차오르다 못해 넘쳐흐를 것 같던 남자는 폭발하듯 자신의 발에 차이는 돌덩이를 세게 후려 차며 씩씩거렸다.
대지를 크게 울릴 정도로 시끄러운 소음.
그에 은발의 남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거 너무 힘이 넘치는 거 아니야? 그냥 느긋하게 있으면 되잖아?"
"아니 뭘 느긋하게 있어? 지금 당장 그 새끼 조지러 가야지! 의뢰를 잊어버린 거야?"
그의 말에 은발의 남성은 귀찮다는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더니 이내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괴인(怪人), 너도 저번에 들었던 거 아니야? 검신이 다 알아서 한다잖아? 왜 굳이 네가 나서서 뭔가를 하려고 해? 게다가 51번 탑으로 넘어가는 입구도 모르면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걸 해야만 의뢰비를 받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거 안 해도 알아서 나눠준다고 하잖아?"
"설마 그 말을 진짜로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밀레시안?"
그들이 50번 탑에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그들이 바로 검신(劍神)과 함께 김현우의 소멸을 의뢰받은 관리기관 소속의 탑주들이기 때문이었다.
"……으음"
괴인의 말에 밀레시안은 조금 전까지 하품만을 하고 있던 입을 슬쩍 우물거린 뒤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믿는데."
"도대체 뭘 믿고?"
"너는 한 번도 일 관련으로 그 노인장과 마주친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 애초에 그 노인장은 딱히 그럴 사람이 아니야."
괴인은 밀레시안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근거야?"
"게다가 그 사람 이명을 생각해 보면 딱 답이 나오지 않아? 여러 가지 있잖아?"
"……이명?"
밀레시안의 말에 괴인은 순간 노인의 이명들을 한 번씩 떠올려 보고는 이내 인상을 찌푸리고는 이야기했다.
"알고 보니 너도 미친놈이군."
"뭐?"
"도대체 어떻게 '검신'이나 '죄인'같은 이름이 우리가 여기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되는 거지?"
괴인의 말.
그에 밀레시안은 깜빡했다는 듯 탄성을 내지르며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까 너는 '양식장'때 탑주가 아니었지?"
밀레시안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괴인.
그 모습을 보며 밀레시안은 느긋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너무 그렇게 화내려고 각 잡지 마.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본 거였으니까."
너도 알잖아? 나는 맨날 잠만 자느라 시간개념이 그렇게 없거든.
밀레시안의 말에 괴인은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너는 대체 뭘 보고 그 녀석이 자기 혼자 해결한 의뢰비를 우리에게 나눠줄 거라 생각하는 거지?"
괴인의 물음.
그에 밀레시안은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감았다.
"흠……."
"……."
"흐음……."
"……."
"Zzz……."
"골통을 그대로 잡아 박살 내주지."
"이번에도 가벼운 농담이야. 왜 그렇게 사람이 삭막해?"
밀레시안은 그렇게 말하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하려면 양식장 때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래? 전부 다 설명해 줄까? 아니면 그냥 요점만 설명해 줄까?"
"간단하게, 요점만 부탁하지."
"애초에 그 노인장한테 있어서 의뢰로 받을 수 있는 건 쓸모없는 물건이기 때문이야."
"……."
"……."
"그게 끝이야……?"
"요점만 말하라며?"
"아니 이런 씨발……."
괴인은 도대체 이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밀레시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이야기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다 이야기해 줬잖아?"
"아니 이런 씨발!! 그건 그냥 요점이 아니라 결과잖아! 기승전결에서 기승전을 빼먹고 결만 길게 늘여서 말하는 게 요점이야? 응?"
"그게 요점 아니야?"
"요약하더라도 최소한 말뜻이 이해는 되게 해야 할 거 아니야!?"
괴인의 괴성에 밀레시안은 처음으로 짧게 혀를 차더니 눕혔던 몸을 일으키고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말고는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는데?"
"……너 진짜 죽고 싶냐?"
괴인의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
그러나 밀레시안은 그런 괴인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곤-
"그냥 좀 느긋하게 기다려 봐. 진짜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애초에 의뢰비용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그렇게 말했다.
"그 노인장은 이미 전부 먹어치워 버려서 올라갈 곳이 없거든."
####
"!"
김현우는 뒤를 보지 않음에도 외팔이가 그곳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고, 곧바로 발을 뒤로 차올렸다.
1초?
아니, 순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빠른 반응속도.
그러나 외팔이는 너무나도 가볍게 김현우의 공격을 피해냈다.
마치 김현우가 다른 이들의 공격을 피할 때처럼, 고개를 하나 까딱하는 것으로 공격을 피해낸 외팔이.
김현우는 짧게 혀를 차면서도 뒤로 차올렸던 발을 크게 횡으로 돌려 외팔이를 목을 노렸으나, 이미 외팔이는 정확히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그의 공격을 피해내고는 검을 휘둘렀다.
이가 빠져 사람을 제대로 벨 수 없을 것 같은 검을.
하지만 김현우는 그 검을 막는 것을 포기하고는 곧바로 몸을 뒤로 뺐다.
"호."
그에 순간적으로 이채를 띄는 외팔이의 눈.
그는 재미있다는 듯 이가 빠진 자신의 검을 회수하며 이야기했다.
"이 검을 막아내지 않고 피하는 이는 굉장히 오랜만이군."
"……."
허나 외팔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기만 하던 김현우는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조금 전 피하지 않았으면 베였다.'
물론 외팔이가 들고 있는 검의 외견은 그야말로 폐품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검이었다.
애초에 녹이 생길 대로 생긴데다가 검을 휘두른 것도 근육 하나 없는 앙상한 외팔이니까.
하지만 분명 그럼에도 김현우는 검을 피했다.
무엇인가가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검에서 특유의 기척이 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본능.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본능은 김현우에게 검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렸고, 그렇기에 그는 검을 막고 반격하는 것이 아닌 회피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런 미친."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일어난 풍경을 보며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분명 조금 전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그 공간이 마치 그림처럼 찢겨져 검은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저 녹슨 검을 가볍게 한번 휘두른 것만으로 만들 수 있는 풍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비이상적이고 풍경.
그 모습을 본 외팔이는 검을 가볍게 쥐고는 이야기했다.
"역시 자네는 내 생각대로 다른 탑주들과는 다른 부분이 굉장히 많은 것 같군."
"……뭐?"
"말 그대로일세. 지금 탑에 군림하고 있는 탑주들은 '예전'과는 급이 다를 정도로 그 능력이 떨어져 있으니 말일세. 자네처럼 '본질'을 보는 사람은 지금에 와서는 얼마 남지 않았거든."
"그게 뭔 소리야?"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는 김현우.
허나 외팔이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의 녹슨 검을 들어 올렸다.
"이 이상으로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조금 더 자신의 힘을 증명해 보는 것은 어떤가?"
"……."
그 말에 김현우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파지지직-!
김현우는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마력이 몸 전체를 가볍게 돌며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고, 광휘 섞인 전류가 김현우의 몸에서 튀어나간다.
동시에 삐죽삐죽 서기 시작하는 김현우의 머리.
그러나 거기에서 김현우의 변화는 끝나지 않았다.
"호."
외팔이가 감탄함에 따라 김현우의 등 뒤에는 하얀색의 전류와 대조되는 흑원이 생겨난다.
마치 하얀 빛 사이에서 자신을 과시하듯 칠흑 같은 어둠을 유지하고 있는 반원은 마치 여래의 광배(光背)처럼 김현우의 뒤를 어둠으로 물들였고.
"흡!"
김현우는 그 변화가 끝남과 동시에 외팔이에게 달려들었다.
잔상조차 남지 않는 속도로 외팔이의 앞에 이동한 김현우는 번개 같은 속도로 외팔이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으나, 외팔이는 마치 그 일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피했다.
허나 공격은 그 하나에서 끝나지 않고 연속해서 이어진다.
그의 오른팔이 곧바로 고개를 기울인 외팔이의 얼굴을 향해 날아간다.
물론 그것마저도 외팔이는 인지에 맞지 않는 가벼운 움직임으로 피해낸다.
순간의 기지를 발휘한 김현우가 오른팔을 그대로 접어 외팔이의 쇄골을 찍어 누른다.
그러나 외팔이는 그 찰나에 일어난 김현우의 공격도 가볍게 몸을 뒤로 흘리는 것으로 피해낸다.
"쯧-!"
짧게 혀를 찬 김현우는 계속해서 주먹과 발을 휘두른다.
양 주먹이 외팔이의 상체를 어지럽게 흘러 다니고, 그의 다리가 열심히 외팔이의 온몸을 향해 휘둘러진다.
고작 1분도 되지 않은 사이에 휘둘러진 수십, 수백 번의 공격.
그러나 무척이나 기묘하게도 김현우가 휘두른 공격은 그 무엇 하나 외팔이에게 닿지 않았다.
꽝!
외팔이를 노렸던 김현우의 다리가 바닥을 찍어 내림과 함께 찾아온 잠시간의 소강상태.
그는 외팔이에게서 거리를 두며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어떻게?'
분명 조금 전 김현우는 전력을 다해 외팔이를 공격했다.
허나 정말 기묘하게도 김현우가 시도한 모든 공격은 외팔이에게 전혀 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눈앞에 보이는 외팔이가 자신보다 빠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 빠르기는 했으나 모든 힘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자신보다는 느렸으니까.
하지만 분명 그는 자신의 공격을 피했다.
오히려 자신보다 늦게 움직이면서.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김현우가 이내 슬쩍 눈을 크게 뜨고 외팔이를 바라보자 그는 웃으며 이야기 했다.
"똑똑하군. 대부분의 탑주들은 공격이 먹히지 않으면 초조하기를 반복하는데 자네는 냉철하게 분석을 하는군."
"……너, 대체 뭐야?"
김현우의 물음.
그것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고, 노인은 그런 김현우의 말뜻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허나 외팔이는 간단히 웃으며 대답했다.
"말했지 않은가? 나는 말 그대로 의뢰를 받은 자일 뿐일세. '지금' 자네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지."
"……."
인상을 찌푸리는 김현우.
그에 노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슬쩍 눈가를 내리더니.
"뭐, 그래도 이것 하나는 이야기해 줄 수 있다네."
"……?"
"검신(劍神)."
"……검신?"
"그래, 지금은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 그리고 아주 옛날에는, 그래."
-이내 그렇게 말했다.
"티르(Tyr), 라고 불리기도 했네."
349화. 외팔이는 과거를 지고 있다 (5)
"이런 젠장."
천계의 신전 중 하나.
평화로워 보이는 신전 안에서 데블랑- 아니 우리엘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자신의 집무실 책상에 앉아서 생각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우리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아까 전 대천사 회의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필이면 검신(劍神)이 움직이다니…….'
루시퍼에게 들은 이야기.
분명 그것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데블랑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김현우가 난장판을 쳐놔서 어떻게 해야 하나 조마조마 하기는 했으나 결국 그는 혼자 힘으로 천사와 정령 파벌의 연합을 깨버렸으니까.
물론 정령 파벌을 거의 한계까지 몰아붙였으니 나이아드가 분명 관리기관에 붙을 것은 우리엘로서도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상황이 막장으로 치달을 줄이야…….'
다만, 지금 이 상황은 데블랑의 예상을 간단하게 넘어버렸다.
사실 그로서는 관리기관에서 김현우를 처리하기 위해 검신을 포함한 다른 관리기관 소속의 탑주들을 보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밀레시안과 괴인까지…….'
물론 그 둘은 검신보다 늦게 도착했기에 데블랑이 50번에서 51번 탑으로 이어지는 입구에 급하게 결계를 쳐서 그 둘이 51번 탑으로 넘어가는 상황을 막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데블랑은 검신이 51번 탑에 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우선 급하게 조심하라는 쪽지를 어떻게든 보내기는 했는데…….'
사실 고작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가 저도 모르게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아주 '혹시나?'의 경우 김현우가 검신을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래, 아주 혹시나의 경우.
퍼센트로 따지자면 대충 1% 정도.
'……김현우도 강하기는 하다.'
사실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행적을 보면 탑주들 중 그 누구도 김현우가 강하다는 것에 이견을 제시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었다.
그만큼 김현우의 행보는 파격적이고 또한 패도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51번 탑에 들어가 버린 그 외팔이는 그런 김현우보다도 더한 괴물이라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데블랑은 그가 탑이 존재하기 전에도 살아 있던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무엇보다 그가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관리기관의 소속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우-"
데블랑은 탑이 존재하기 이전 그의 이명이 '신살자(殺神)'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
탓!
김현우가 전력으로 땅을 박차 티르에게로 돌진한다.
인지를 초월한 속도.
파지지직!
잔상마저 남기지 않는 속도로 티르에게 돌진한 김현우는 다시 한번 이전과 같이 주먹을 휘두르는 것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오른 주먹으로 노인의 얼굴을 노리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피하는 노인의 옆구리에 발차기를 휘두른다.
허나 상황은 아까와 같았다.
노인은 그 찰나의 순간 속에서도 김현우와 정확히 시선을 맞추고 있었고, 분명 그보다 느린 속도로 몸을 움직여 김현우의 몸을 피했다.
아까와 같은 전투의 반복.
그러나-
꽈아앙!
"!"
티르는 마른하늘에 불현듯 내리치는 거대한 번개에 지금껏 사용하지 않았던 검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생긴 빈틈.
김현우는 기다렸다는 듯 티르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으나, 그는 번개를 막아냄과 동시에 곧바로 몸을 뒤로 빼는 것으로 공격을 피했다.
아니,
-피하려 했다.
"!"
티르의 동공이 급격하게 커지며 분명 조금 전 앞에 있었던 김현우의 모습을 찾았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티르는 몸을 뒤로 빼기 위해 체공한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이 일순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시선을 뒤로 돌렸고.
씨익-
그곳에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서 있는 김현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활처럼 휜 그의 다리에서 마치 증기기관처럼 마력들이 터져 나오며 압도적인 질량을 자랑하고, 티르의 몸이 점점 김현우에게로 다가옴과 동시에-
"흡!"
꽈아아아아──────!!!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다리를 휘둘렀다.
청각을 잡아먹을 정도로 엄청난 소음이 김현우의 귀를 메우고.
일시에 터져나간 마력들이 김현우의 눈을 어지럽힌다.
그럼에도 김현우는 시각과 청각이 봉인된 그 사이에서-
"쯧"
-혀를 찼다.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조금 전의 공격이 실패했기 때문.
분명 조금이라도 스쳤다면 김현우의 발에 감각이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공격을 가할 때, 김현우의 발에는 조금의 타격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 마디로-
"호오, 대단하군. 지금까지 탑주들과 싸우며 친우들의 권능을 세 개 이상 사용해 본 것은 또 처음일세."
-티르는 아직 멀쩡했다.
"……."
김현우는 청각과 시각이 돌아오자마자 느긋한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티르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어디를 보더라도 아무런 피해가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
"……."
심지어 그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느긋하게 검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제대로 싸울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
그러나 더 짜증이 나는 건-
'이거 완전 괴물 같은 노인네잖아……?'
-그가 그렇게 여유를 부려도 될 정도의 강자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김현우는 티르와 지금까지 약 두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물론 그것은 5분도 되지 않는 짧은 공방이라고 할 수도 있었으나, 그 짧은 순간에 이뤄진 공방은 굉장히 밀도 높은 공방이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그 두 번의 공방에서 얻은 정보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얻은 정보라고는 자신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것이 그의 눈 덕분이라는 것을 빼고는 그 어느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한 마디로 두 번의 공방 동안 김현우는 먼저 싸움을 걸어놓고도 일방적으로 정보를 내주기만 할 뿐이었고.
오히려 티르는 김현우의 공격을 받아주는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정보를 뿌리지 않았다.
그 사실은-
'이대로 싸우면 내가 진다.'
-제대로 싸우는 순간, 김현우가 티르에게 진다는 소리와 같았다.
'어떻게 하지?'
김현우의 머리가 순식간에 회전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상념과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으나 김현우는 그것들을 빠르게 정리하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니,
생각하려 했다.
조금 전까진.
"!"
김현우는 불현듯 자신의 앞에 티르가 다가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선을 올리자 그곳에는 녹슨 검을 휘두르고 있는 티르가 보였고,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몸을 옆으로 움직여 티르의 검이 휘두르는 범위를 벗어났다.
허나-
촤아아악!
분명 김현우가 휘두르는 검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몸에는 세로의 거대한 자상이 생겼다.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피.
"크학!?"
김현우의 시선이 일순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졌으나 그는 곧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티르를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몸을 뒤로 움직였고, 다행히 티르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조금 전과 같이 다시 검을 늘어뜨린 티르.
"아오 씨발……!"
김현우는 자신의 가슴에 짙게 난 자상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티르를 바라봤고.
"씹!"
그다음 순간, 김현우는 티르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힘차게 땅을 박차 앞으로 달려 나갔다.
카가가각-!
그와 함께 뒤에서 들리는 무엇인가가 갈리는 소리.
"역시 신기하군, 세 개 이상의 권능을 이용해서 움직이고 있는데도 공격을 피해내다니."
그 뒤에 들려오는 티르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순식간에 자세를 잡고는 티르가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조금 전의 느긋한 표정에서, 이제는 조금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는 티르.
그는 더욱더 흥미가 가득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고는 이야기했다.
"자네는 더욱더 나를 설레게 하는군. 그러니-"
허나 그 대답에 김현우는 답하지 않고 그저 자세를 잡고 티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진심을 다해 가도록 하겠네."
티르는 그 말과 함께 김현우의 앞에 나타났다.
마치 공간을 그대로 도약한 것 같이 나타나는 티르의 모습에 김현우는 곧바로 몸을 움직인다.
티르의 검이 아까와 함께 김현우를 노리고 날아들지만 김현우는 곧바로 몸을 비틀어 피해낸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우의 상체에는 다시금 거대한 자상이 생겼다.
푸화아아악!
티르의 앞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피.
'분명히 피했는데……!'
김현우의 생각이 그 찰나의 순간 어지럽게 섞여나갔으나 그는 그 꼬인 실타레를 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곧바로 다음 동작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
티르는, 곧바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녹슨 검이 위에서 아래로 그어진다.
분명 그 녹슨 검이 지나간 곳은 김현우가 없는 허공.
그럼에도-
푸화아아악!
김현우의 오른 허벅지에는 자상이 생겼다.
녹슨 검이 이번에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 그어진다.
김현우의 몸 한가운데에 또 한번의 자상이 새겨진다.
분명 김현우는 티르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티르의 검은 그에게 닿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현우는 티르의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베이고 있었다.
녹슨 검이 횡으로 휘둘러진다.
김현우의 다리가 베인다.
녹슨 검이 위로 올려쳐진다.
김현우의 몸통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녹슨 검이 아래로 내리쳐진다.
김현우의 팔이 베인다.
베이고, 베이고, 계속해서 베인다.
그에 따라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김현우.
그리고 그때가 돼서야 김현우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외팔이가 휘두르는 검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마력을 이용해 막아보려 해도 불가능했다.
그가 검을 베는 순간을 노려 몸을 피해 봤으나 그것도 불가능했다.
마력을 팽창시켜 노인의 몸을 구속하려고 해도 이상하게 노인은 찰나의 순간만을 멈칫할 뿐, 곧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휘둘렀다.
티르가 휘두르는 검은 '무조건' 김현우의 몸을 베었다.
마치 '필연적'인 듯.
그렇기에 김현우는 더 이상의 회피를 그만두고는-
파지지지직!
-그대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것을 본 티르의 검이 아래에서 빠르게 위로 그어 올려진다.
푸화아아악!
그와 함께 느껴지는 왼팔의 격통.
그러나 김현우는 티르가 단 한 번의 동작을 취할 동안 그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우가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하지 않고 오롯이 김현우를 바라보는 티르의 모습.
김현우가 주먹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티르의 몸이 예상했다는 느릿하게 움직여진다.
마치 미리 김현우가 휘두를 곳을 '본 것'처럼 움직이는 티르.
허나 김현우는 그 사실을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올린 주먹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티르의 얼굴이 있던 쪽으로 내질러지는 주먹.
하지만 그 순간.
씨익.
김현우의 입가에는 기묘한 웃음이 번짐과 동시에.
화아아악!
"?!"
그는 티르의 앞에 번개를 터트렸다.
파지지지직!!!
순간적으로 방출된 전류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새하얀 빛을 만들어내고, 그 빛이 일순 티르의 청각을 빼앗는다.
그리고-
빠아아아악!
처음으로, 김현우의 주먹이 티르의 얼굴을 후려쳤다.
350화. 외팔이는 과거를 지고 있다 (6)
빠아아악!
강렬한 타격소리와 함께 티르의 얼굴이 돌아가고, 김현우는 순식간에 허공에 체공한 티르의 앞에 섰다.
아직 온전한 시야를 찾지 못한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티르.
김현우는 그의 앞에 도달하기 직전 또 한번 사고를 가속하며-
"후-"
-그와 함께 김현우는 찰나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다.
모든 것이 멈춰 있는 것 같은 찰나의 세계 속.
금방이라도 땅바닥에 처박힐 것 같은 티르의 체공 시간이 압도적으로 늘어나고, 그것은 김현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이 느려져 있는 공간 속에서, 김현우는 서서히 감겼다 뜨여지기 시작하고 있는 티르의 눈을 보며 망설임 없이 자세를 잡았다.
오른팔을 마치 발리스타처럼 당긴다.
그와 함께 모이는 마력.
순식간에 김현우의 팔 근처로 모인 마력들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뿜어져 그의 주먹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먹어치우고, 그때가 돼서야-
"후읍-"
섬뢰(閃雷)-
-김현우는 자신의 온 몸에 마력을 돌려, 그 찰나의 시간에서 몸의 자유를 되찾았다.
-격(格)
찰나의 시간에서 몸의 자유가 풀리자마자 번개 같은 속도로 티르의 얼굴을 후려친 김현우.
삐──────────────!!!
굉음이 들릴 새도 없이 그의 귀에서는 익숙한 전자음이 들렸고, 김현우의 눈앞은 새하얀 번개와 마력의 폭풍으로 완전히 차단되었다.
허나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도 김현우는 아까 전과는 다른 만족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감각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야가 회복되는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자신의 주먹에 확실하게 닿았던 촉감을 느끼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고.
이내 그는 시야가 회복됨에 따라 티르의 모습을 볼 수 있었-
"!"
텁!
-다.
시야가 회복되자마자 보이는 것은 검을 휘두를 준비를 하는 티르의 모습.
그렇기에 김현우는 곧바로 그에게 달려가 티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 그가 검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 덕분에 허공에서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검.
손에서 느껴지는, 노인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거력에 김현우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얼굴을 피고는 이야기했다.
"이거 진짜로 괴물 같은 노인네잖아? 왜 이렇게 힘이 강해?"
"……자네, 용케도 방법을 떠올렸군."
"이 정도야 쉽지. 결국 휘두르지만 못하면 너는 공격하지 못하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
노인은 답하지 않고 조금 전과는 다른 진중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에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은 김현우.
티르의 검은 확실히 위력적이다.
아니, 위력적이다 못해 사기적이었다.
그 어느 곳에 검을 휘두른다고 해도 티르의 검은 무조건 적으로 자신이 노린 상대에게 치명상이라고 봐도 될 정도의 상처를 입혔다.
물론 피할 수도 없다.
무조건적으로 맞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휘두름.
그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휘두르더라도, 티르의 검은 노리는 상대에게 맞는다.
정말로 검신(劍神)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능력.
아마 김현우도 범천(梵天)의 업이 없었다면 고작 몇 번의 공격을 받은 것만으로도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었다.
허나 그는 몸을 끊임없이 재창조할 수 있는 범천의 업이 있었고, 그렇기에 그의 공격을 맞으며 결국 이 결론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입가를 비틀어 올리고 있는 김현우와 반대로 얼굴을 굳히고 있는 티르.
허나, 곧 얼굴을 굳히고 있던 티르는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역시, 자네는 대단해."
"대단은 개뿔, 네가 더 괴물 같지."
"아니, 아닐세, 나는 자네에 비하면 그저 세발의 피에 불과하네. 그도 그럴 것이-"
티르의 몸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자네는, 혼자 싸우고 있지 않은가?"
동시에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
김현우는 곧바로 왼쪽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으나, 티르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제자리에 서서 그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그것에 순간 이상함을 느낀 김현우.
허나 그는 주먹을 멈추지 않았고.
꽈아아아앙!
"!"
김현우는 티르의 앞에 있는 무엇인가가 자신의 주먹을 막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이런 씹-!"
그것이 티르의 주먹이라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김현우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고는 곧바로 몸을 뒤로 뺐다.
꽈아아앙!
그와 함께 떨어진 것은 한 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번개.
"아까 보니 자네는 번개를 조금 다루는 것 같더군. 그건 내 친우들도 전문이기는 하지."
그와 함께 김현우의 주변에 떨어지기 시작하는 무차별적인 번개.
김현우는 기적적인 직감으로 몸을 이리저리 날리며 번개를 피했으나.
"!"
어느 순간, 김현우는 자신의 발을 무엇인가가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두 눈을 부릅뜨고는 아래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건 또 뭐야!?"
김현우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그림자를 바라봤다.
꽈아아아앙!
그와 함께 떨어지는 번개.
김현우는 발이 묵인 채 그 번개를 그대로 받아냈고, 이내 끔찍한 고통에 저도 모르게 악소리를 질렀다.
허나 아직 그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
번개가 끝난 뒤, 갈라진 땅에서는 손에 닿기만 해도 녹아버릴 것 같은 뜨거운 불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거대한 폭풍.
뜨거운 불을 머금은 폭풍이 순식간에 김현우의 주변으로 몰아치며 그의 살을 갉아먹는다.
"이런 개 씨바아아아알!!"
꽈아앙!
김현우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을 피해내기 위해 자신을 붙잡고 있던 그림자들이 있던 벽을 통째로 부숴버리고 하늘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푸확!
"컥-!"
김현우는 자신의 몸에 꽂힌 붉은 봉을 바라봤다.
마치 피로 도색을 해 놓은 것 같은 시뻘건 봉.
김현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몸에 꽂혀 있는 것이 창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하, 이런 개씹-"
그는 어느샌가 자신의 머리 위에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운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허탈한 음성을 내뱉었다.
쿵-!
쿠구구구궁-!!
쿠구구구구구구궁-!
운석이 가까워 질 때마다 대지가 진동하고, 허공에 떠 있던 김현우는 그 운석을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대로 운석과 함께 지상으로 처박혔다.
김현우가 주먹을 휘둘렀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굉음과 함께 주변의 대지가 터져나간다.
마치 무엇 하나 남기는 것 없이 깨끗하게 무로 돌려버리겠다는 듯 터져나가는 대지.
그 마지막에-
"……."
-김현우는, 결국 살아남았다.
물론 살아남았다고 해도 갑작스레 모든 공격을 그대로 맞아버린 김현우의 모습은 조금 전과 같지 않았다.
온몸에서 보이는 상처.
그것들은 분명 치료되고 있었으나 이전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느릿하게 치료되고 있었고, 김현우는 아직 몸의 상처가 제대로 치료되지 않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완전한 폐허.
지크프리트를 던져놓았던 저택 같은 것은 이미 옛날에 사라져 버렸고 보이는 것은 오로지 잔해뿐이었다.
50번 탑과 똑같이, 아니 어쩌면 50번 탑보다도 심하게 박살 난 51번 탑의 최상층.
김현우는 허탈한 표정으로 그 주변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티르를 바라보았다.
"!"
그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다만, 그는 바뀌었다.
분명 처음 봤을 때 그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것 같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습은 오랜만이군."
구릿빛 피부의 짙은 흑발을 가진 남자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척 보기에도 권위가 느껴지는 백색 갑옷을 입은 납자.
김현우는 순간 그가 티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으나 이내 그가 외팔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런 생각을 접어두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김현우는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졌다.
"……."
꿀꺽-
티르에게서 나오는 기세가, 김현우의 생각을 멈추게 했으니까.
티르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검을 바라봤다.
그 검은 이미 조금 전에 보았던 녹슨 검이 아니었다.
선명한 보랏빛을 띠고 있는 도신은 금방이라도 먹이를 찾는 듯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그 이외에도 수많은 무기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김현우의 배를 뚫었던 붉은 창.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붉은 창과는 대비되는 황금색의 창이었다.
그다음에 보이는 것은 겁화처럼 타오르는 붉은 검.
또 다른 것은 기묘한 모양을 가진 활.
그 이외에도 수많은 무기들이 티르의 등 뒤에 떠 있었다.
허나 티르는 그런 것을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듯 이제야 상처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하는 김현우를 바라보고는 이내 웃음을 지었다.
"역시, 자네는 괴물이군."
"……지금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김현우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그러나 티르는 여전히 평온한 표정을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자네는 혼자 싸우는 데 비해 나는 다른 친우들의 힘을 빌리고 있지 않은가?"
"치매 왔어? 그게 어딜 봐서 네 동료들의 힘이야?"
"자네가 어떻게 볼지는 모르겠네만, 지금 내가 사용하는 힘은 내 친우들의 힘이 맞네."
티르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무엇인가를 회상하듯 침묵하곤.
"맨 처음-"
마침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자네에게 떨어졌던 번개의 권능은 바로 '토르'의 것일세. 그는 자네보다도 훨씬 세밀하고 강렬한 번개를 다룰 수 있었지."
그다음으로-
"자네의 발을 묶은 그림자의 권능은 바로 '화니르'의 것일세. 그는 겁이 많기는 했어도 그림자만큼은 잘 다뤘네."
마치 과거를 회상하듯.
"땅에서 솟아오른 불은 '로키'의 권능일세. 그 녀석은 장난치기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다루기가 영 힘들었지."
한 명, 한 명,
"떠올랐던 폭풍은 내 친우, 오딘의 것이지. 자네의 심장을 뚫었던 붉은 창도 그 친우의 것이지."
담담하지만 슬쩍 그리운 어투를 담아, 김현우에게 이야기했다.
젊어진 그의 입에서, 신들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계속해서-
계속-
계속-
정말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티르는 옛날의 그리움을 회상하듯 이야기했고.
이내-
"이둔, 그래……. 그녀도 있었군. 사실 그녀의 권능 덕분에 내가 이리 전성기의 모습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지."
티르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설명을 이어나가지 않고 김현우를 바라봤다.
침묵-
김현우의 몸은 이미 전부 회복되어 있었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것은 티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티르였다.
"그래, 어쩌면 자네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군."
"……?"
"내가 말했던 친우들은, 나와 함께 신화를 만들어나갔던 이들은…… 이미 없으니까 말일세.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웃기군."
-애초에, 그 친우들을 죽인 것은 전부 나였으니까.
자조적으로 웃는 티르.
그에 반해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스스로 동료들을 죽여놓고 그렇게 그리운 척 회상하고 있는 거야?"
"우습게 보이겠지. 사실 나도 스스로가 우습긴 하네. 결국 그에게 멸망하는 것이 무서워 동료들을 모두 죽이고 삶을 연명한 내가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나는 지켜나가야만 하네."
"……뭐?"
"이 이상, 친우들을 아는 이들은 없지. 그들의 역사도, 그들의 신화도, 그리고 그들의 이름까지도- 모두 그가 없애버렸으니까."
그러니-
"적어도 나 하나는 기억해야 하지 않겠나?"
-그 친우들을.
"그 신화를."
-그 이름들을.
"이제는 남겨져 있지 않은───아스가르드를 말이야."
티르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에 쥐어진 '펜릴'의 날을 세웠다.을 후려쳤다.
351화. 외팔이는 과거를 지고 있다 (7)
티르의 손에 쥐어져 있는 펜릴의 날이 마치 날카로운 맹수의 이빨처럼 떨린다.
금방이라도 먹잇감을 잡아먹을 듯.
그리고 그 일순간을 기점으로.
꽝!
김현우와 티르는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소름끼치는 소음이 들림과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앞에 나타난 둘은 서로가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다.
먼저 행동한 것은 티르.
그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펜릴을 준비 동작도 없이 세로로 휘둘렀다.
애초부터 준비 동작은 필요 없었다는 듯 최대한으로 축약되고 간소화된 베기.
물론 김현우 또한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이미 그로서는 펜릴의 그 일격이 무척이나 사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
검을 중반까지 휘두르던 티르의 눈가가 슬쩍 커진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바로 앞까지 거리를 좁힌 김현우 때문.
검은 근접무기다.
허나 그럼에도 검이라는 무기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했다.
검을 휘두르는 데에는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그것은 바뀔 수 없는 진리이자 또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오히려 자신의 몸을 깊숙이 들이밀어 그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막았다.
김현우의 몸 때문에 경로가 막혀 검을 완전히 휘두르지 못한 티르.
그러나-
"역시-"
빠아아악!
"-똑똑하군."
그 순간, 김현우는 티르를 바라보고 있던 자신의 시야가 위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다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바로 누가 사이의 코뼈에서 느껴지는 고통.
김현우는 그제야 자신이 칼자루의 끝부분으로 얻어맞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는 서둘러 시야를 아래로 내렸다.
"!"
그러나 이미 검을 휘두른 티르.
촤아아악! 툭!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의 감각이 끊긴다.
그다음으로 들리는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소리.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오른손이 잘려나갔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굳이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김현우는 지금 당장이 기회라는 듯 주변의 마력을 끌어모으며 남아 있는 왼 주먹을 휘둘렀다.
휘둘렀던 검을 회수하려던 티르는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검을 이용해 김현우의 공격을 막아내려했으나-
"!"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 멈칫함은 티르가 가지고 있는 '스카디'의 마력을 흡수하는 권능 덕분에 순식간에 풀리고 말았으나 이미 그 시점에 김현우의 주먹은 티르의 얼굴 지척에 도달해 있었다.
까아아앙!!
허나 이번에도, 그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바로 공격을 막아낸 푸른색의 검 때문.
순간적으로 티르와 김현우의 얼굴에 몇 감정이 교차해 나간다.
그리고-
"흡!"
빠아아아악!
김현우는 그 자리에서 티르가 무엇인가를 하기 전 그대로 그를 향해 박치기를 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조금 전의 김현우처럼 시야를 상실한 티르.
그러나 김현우가 추가적으로 공격을 가하려 함과 동시에 티르의 주변에 있던 무기들은 순식간에 김현우에게 달려들었기에 그는 아쉬워하면서도 몸을 뒤로 날릴 수밖에 없었다.
"후읍!"
참았던 숨을 내뱉음과 함께 과한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려오고, 그제야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격통이 더더욱 확실히 다가왔다.
"……씨발."
오른손은 분명 범천의 업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었으나 예전과 비해 그 속도가 더없이 느렸다.
그에 비해 기습적으로 한 대를 맞은 것 빼고는 아무런 피해도 없는 검신.
그 인상이 찌푸려진 것을 봐서는 아무래도 아픈 것 같긴 했다.
후욱- 후욱-
김현우의 입가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다시금 공격을 준비하듯 펜릴을 들어 올리는 그.
김현우는 다급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야 잠깐만!"
"……왜 그런가?"
"뭐 이야기 해줄 거 있다며?"
김현우의 말에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티르.
"그게 무슨 소리지?"
"아니, 씨발 니가 아까 전에 그랬잖아? 무슨 들을 자격이 된 것 같으면 말해주겠다고! 말 안 해줄 거야?"
김현우의 말에 티르는 기묘한 표정을 짓고는 잠시 고민했고, 김현우는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봤다.
더럽게 재생이 느린 오른팔.
하지만 그것이외에도 김현우에게는 지금 당장 시간을 끌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너무 차이가 난다.'
티르와 김현우의 차이는 너무 심했다.
아니, 사실 이 탑에 오르기 전만 해도 김현우는 항상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웠다.
절대로 이기지 못할 것 같은 녀석들을 결국에는 이기고 탑의 끝에서 심마를 죽인 것이 바로 김현우였다.
하지만,
'진짜……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
지금 김현우의 눈앞에 있는 상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머릿속에서 승리라는 글자를 지운다.
티르가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도 김현우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뇌를 헤집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티르를 이길 수 있을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무엇을 생각해도 나오는 것은 패배.
적어도 지금까지 그가 만난 적들은 그 어느 한 부분에서는 부족한 면이 있기 마련이었다.
허나 티르는?
'만능(萬能)'
그는 만능이었다.
근접 전투는 물론이고, 검을 휘두를 수 없는 초근접전의 상황에서도 그는 김현우에게 밀리지 않았다.
마력을 이용한 싸움에서도 김현우의 기술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권능을 이기지 못한다.
하물며 센스 면에서도 마찬가지.
"……."
거의 모든 부분…… 아니, 그냥 모든 부분에서 티르는 김현우를 상회하고 있었다.
그 생각이 끝나자마자 드는 것은 압도적인 무력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포기라는 단어는 김현우의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그는 이곳에 없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끊임없임 머리를 굴리며 티르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자네는 분명 훌륭하네. 확실히 다른 탑주들과는 다르지."
"……."
"하지만, 딱 그것뿐일세. 자네의 실력으로는 내가 아는 진실을 말해주기에는 부족한 것 같군."
티르의 말에 김현우는 짧게 김현우는 짧게 혀를 찼다.
물론 그가 알고있는 비밀이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김현우는 그저 시간이 필요했을 뿐.
"그럼,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자네는 굉장히 특이했고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이라는 생각이 들게도 했네만."
스릉-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는 딱 그 정도뿐이군."
그 말과 함께 티르는 검을 펜릴을 위로 들어 올리려 했고.
툭-! 투투투툭!
"……?"
티르는 곧, 검을 들어 올리자마자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줄기를 볼 수 있었다,
갑작스레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던 빗줄기.
솨아아아아-!
그것은 어느 한순간 거대한 소나기가 되었고.
탓!
그 어느 순간, 폭우(暴雨)가 되어 티르의 시야를 방해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티르가 김현우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동료들의 권능들은 이런 얄팍한 수 하나에 막힐 정도로 허튼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시야에 약간의 방해가 생길 정도는 되었다.
티르의 검이 생각보다 공중에 많이 머물렀다.
그리고 그 어느 순간, 티르는 자신의 앞에 보이는 김현우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검을 내리치려다-
"아니군."
"!"
이내 곧바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 그곳을 향해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텁!
그리고 그와 함께 옆으로 접근하고 있던 김현우는 갑작스레 시선을 돌려 검을 휘두르는 그의 공격을 막아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안 되나.'
그가 '시각'을 주로 이용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급작스럽게 생각해 봤으나 아무래도 티르에게는 이 방법도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빡!
"큭!"
휘두르는 검을 막고 있었던 김현우의 시야가 티르의 공격으로 인해 땅으로 꺼지고, 그에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발을 휘둘러 티르의 몸을 후려 찬다.
깡!
발을 휘두르자마자 무언가에 허공에 떠 있는 붉은 검에 의해 막히는 그의 공격.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오려 했으나 그것을 억지로 참아내고는 다음 공격을-
"?"
-이어 나가려 했다.
필사적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던 왼손이 보인다.
그다음으로는 쉼 없이 쏟아지던 폭우가 거짓말처럼 멈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이제 막 검을 중반까지 내려치고 있는 티르의 모습이 보인다.
다만 그 상황에 이상함을 느낀 이유.
그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이 멈춰 있다는 것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멈춰 있다.
그렇다는 건-
"……눈동자?"
[딩동댕~! 정답입니다.]
티르의 위에서 검은 동공을 가지고 있는 눈동자가 허공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데블랑이 급하게 불러서 와보니까 이런 상황이네? 설마 내 말을 무시한 거야?]
눈동자의 말.
그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뭔 네 말을 무시해?"
[내가 말했었잖아? 관리기관에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이야. 네가 들키지 않았으면 저 양식장의 유물이 여기와 있겠어?]
"……양식장의 유물?"
[뭐, 그런 게 있어.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이미 이 녀석과 네가 한판 붙고 있다는 건데…… 아무래도 밀리고 있는 것 같네.]
"밀리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마 이 상태에서 조금만 더 싸우면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눈꼬리를 휘었다.
[확실히 그래 보이네, 이 녀석은 여유로워 보이는 반면에 너는 딱 봐도 급해 보이니까.]
"아니, 도대체 이 새끼는 왜 이렇게 강한 거야? 무슨 탑주 밸런스가 이렇게 안 맞아?"
그의 투덜거림에 눈동자는 이야기했다.
[아니, 쟤가 특이한 거야. 사실 쟤랑 한 명 더 있는 놈 빼고는 딱히 엄청나게 독보적이다! 라고 할 만한 녀석은 없지. 그런데 말야-]
눈동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김현우를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듯 눈꼬리를 반대로 휘며 이야기했다.
[사실, 네가 질 만한 상황은 아닌데?]
"……뭐라고?"
[못 들었어? 네가 저 녀석에게 질 만한 상황은 아니라니까?]
눈동자의 말에 잠시 멍을 때린 김현우, 이내 그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상황 안 보여? 이제 좀만 더 싸우면 뒤지겠다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네가 왜 지는지 모르겠다니까?]
"……."
갑자기 평행선을 달리기 시작하는 대화.
김현우는 반쯤 뜬 눈으로 눈동자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아니, 그냥 개사기라니까? 애초에 저 사기눈깔을 어떻게 이기냔 말이야? 공격을 하면 무슨 미래 예지라도 하는 것처럼 다 피해 버리는데."
[뭐, 저 녀석이 가지고 있는 예지안 말하는 거야?]
"지금 쟤 눈깔에 달려 있는 권능이 그거야?"
[뭐, 정확히 말하면 좀 다른 거지만 그것과 비슷한 느낌의 업이기는 하지.]
-근데 말이야.
[네가 저걸 사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양심이…… 그렇지 않아?]
눈동자의 말.
"그건 또 뭔 소리야?"
[너는 저것보다 더한 게 있잖아? 네 눈말이야.]
"……내 눈?"
[그래, 저 예지안이 꼬우면 너도 '얻으면' 되잖아? 네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352화. 내 눈깔 사용법 (1)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김현우의 물음, 그에 눈동자는 눈꼬리를 반쯤 내리고는 이야기했다.
[아니, 설마 모르는 건 아니지?]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 아닐까?"
[……와!]
김현우의 말에 짐짓 감탄했다는 듯 중얼거리는 눈동자.
[대충 예상은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진짜로 예전부터 단 하나도 모르고 있던 거야?]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아니, 그러니까 뭘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건데?"
[네 능력]
"……내 능력?"
김현우가 되묻자 눈동자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이야기했다.
[그래 네 능력 말이야. '내 눈'을 가지고 있잖아?]
"……네 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김현우를 보며 눈동자는 갑작스레 머리가 아픈 듯 자신의 눈동자를 한번 감더니 이야기했다.
[……사실 이쯤 이야기하면 대충 적정선으로 전부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네.]
"뭘 이쯤 이야기하면 적정선으로 알아들어? 내가 무슨 추리 천재 같은 거냐? 단서 몇 개만 띡 말해놓고 대충 이야기 맞춰보라고 하면 다 맞추게?"
[……알았어, 사실 딴지를 걸 곳이 많기는 한데 이제부터 설명해 줄게. 물론 일일이 하나하나 찝어서 설명해 줄 수는 없어.]
-시간이 모자라니까.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슬쩍 고민하는 티를 낸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기 말이야, 네가 맨 처음 천마랑 싸울 때 기억나?]
"……천마랑 싸울 때?"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천마와 처음 싸울 때의 기억은 상당히 오래되기는 했으나 기억이 완전히 희미해질 정도는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게다가 조금 더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그때가 바로 자신이 처음으로 마력을 개화했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뭐, 대충은?"
[그럼 네가 마지막에 썼던 기술을 어떻게 썼는지 기억하고 있어? 마지막에 천마를 죽였을 때 썼던 기술 말이야.]
"……패왕괴신각?"
[이름은 중요하지 않긴 한데, 아무튼 그 기술을 어떻게 썼는지 기억하냐 이거야.]
"그거야 당연히-"
마력을 개화하고 나서, 천마가 마력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응용해서 자신만의 기술로 리메이크 한 것이었다.
"……뭐, 조금 따라해 봤지?"
[그다음은?]
"괴력난신이랑 싸울 때 말하는 거지?"
[그래.]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에는 괴력난신이 썼던 마력의 팽창을 나름대로 리메이크했었다.
[으음…… 화수분과 싸울 때는 조금 애매하니까 넘기고…… 무신(武神)이랑 싸웠을 때는 어때?]
김현우는 그때를 다시금 상기하고는 중얼거렸다.
"그때는…… 무신이 쓰던 무공을 카피해서 사용했지."
[게다가 지금 네가 쓰고 있는 그 뇌신화인지 뭔지도 그때 거기서 사용한 거잖아?]
맞다.
김현우는 그때 당시 무신이 사용하는 무공을 따라 해 뇌신화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거기까지 질문을 들었을 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뭐?"
[지금까지 네가 기술을 써 온 방식 말이야.]
눈동자는 질문했다.
"……이상하다고?"
[그래, 설마 너 스스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상하지 않아? 너는 무공에 대해 배운 적이 있어?]
"……."
김현우는 무공을 배운 적 없다.
정확히는 천마에게 나름대로 무공에 대해 전수받긴 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신을 만난 후의 이야기였고 심지어 천마에게 무공을 전수받을 때도 소주천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배운 적도 없었다.
한마디로 김현우는 기본조차 모른다.
[없지?]
"……."
물론 김현우 혼자 무공이랍시고 수련했던 것은 있었다.
허나 그것은 진짜 무공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김현우가 혼자서 뇌내망상으로 만든 것들일 뿐.
[게다가 사실 그 이외에도 자세히 생각해 보면 조금 탐탁찮은 것들이 있지?]
있다.
김현우는 눈동자의 말을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분명 너는 무공을 한 번도 연습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보란 듯이 단 한 번밖에 보지 않은 뇌신화을 사용할 수 있었지.]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 불렸던 그녀의 기술은 어때?
[그녀는 패도적이지만 그녀가 사용했던 마력의 팽창은 아주 세세한 컨트롤을 할 수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들이지. 네가 그렇게 한순간 봤다고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야.]
-그렇다면 전우치와 싸웠을 때 번개로 만들어 냈던 흑룡은?
[그건 애초에 네가 구현하는 게 불가능한 기술이야. 그 녀석은 마력이 아닌 선기와 도력을 사용하고 있었고, 네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마력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너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을까?]
그 뒤로도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는 눈동자.
그리고-
[도대체, 네가 어떻게 진화론적으로 봤을 때 너보다 월등히 높은 성인(聖人)도 소멸시키지 못했던 심마를 소멸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해?]
눈동자는 그렇게 의문을 던지며 김현우를 바라봤고, 그가 미처 답하기도 전에.
[그건 눈이 있기 때문이야.]
"……눈?"
[그래, 내 '눈'을 네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말한 눈동자는 이내 씨익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내 눈동자는 이론상으로는 '네가 본 모든 것들을 똑같이 사용할 수 있거든.']
"……뭐?"
[뭐, 당연히 아직 내 정체를 모르는 네가 듣기에는 농담 같은 설명일 수도 있어, 그런데 이미 너는 이미 그 눈동자의 힘을 열심히 사용하고 있잖아?]
-아주 예전부터 말이야.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모습에 눈동자는 눈웃음을 지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이제 알겠지?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눈이 얼마나 사기적인 건지?]
####
펜릴을 쥐고 있는 남자는 쏟아져 내리는 폭우 속에서 친우들의 권능을 이용해 어둠 사이로 몸을 숨긴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대단하군.'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은연중에 느껴지는 감정.
티르는 비록 이 싸움에서 김현우를 압도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김현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여태껏 보아왔던 탑주 중에서는 한 명 정도를 빼고는 가장 강했다.
그것뿐인가?
'……오딘과 같은 패기도 마음에 드는군.'
김현우는 지금까지 티르와 싸우며 여러 번 절망을 맛보았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티르는 일부러 김현우가 절망을 맛볼 수밖에 없도록 조절하며 그를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마치 최후의 기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보이는 것들을 가볍게 깨부숨으로서 절망감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탑주들은 이 지점에서 무너진다.
자신이 필살기라며 준비했던 그 기술들이, 티르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강한 탑주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기술이 하나하나 무참하게 깨지는 모습을 봤을 때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기술들이 깨진다는 것은, 곧 자신의 무력함을 실질적으로 마주보게 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허나 눈앞의 그는 어떤가?
그는 아무리 자신이 불리하더라도 달려들었다.
그의 기술을 전부 깨버려도 달려들었고,
그에게 고통스러운 상처를 남겼음에도 어쭙잖은 말장난으로 시간을 끌어가며 또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티르는 김현우가 신기했다.
그리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
과거의 자신은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렇기에-
아쉽다.
-티르의 가슴 속 한켠에는 그런 생각이 은연중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만약 김현우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어땠을까?
자신을 죽이지 못하고 비슷하게 대적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왔더라도 티르는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었다.
만약 그가 자신과 비슷할 정도까지 왔다면, 그에게는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너무 약했기에 티르는 곧 자신의 마음속에 들었던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쏴아아아아-!
그의 귓가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그 어느 찰나, 눈에 보였던 것은 바로 눈속임을 하려는 김현우의 모습.
그는 폭우로 두 시야를 가린 뒤 마력을 형상화해 자신과 비슷한 이를 앞에다 놔두고 자신의 옆을 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김현우.
그러나 티르는 그가 달려오는 타이밍에 맞춰 어렵지 않게 몸을 비틀 수 있었고, 곧 그가 달려오는 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텁!
순식간에 그의 앞에 도착한 김현우가 칼을 휘두르려는 티르의 팔을 막아섰으나 그는 '오딘'의 권능을 이용해 순식간에 그의 힘을 꺾어버리고 칼자루로 그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빡!
"큭!"
짧은 음성과 함께 고개를 숙이는 김현우.
순간적인 빈틈이 생긴 그를 보며 티르는 이제 이 싸움을 끝낼 생각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어차피 김현우에게서 볼 것은 전부 봤고, 이대로 싸움을 질질 끌어봤자 아쉬움만 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의 검이 내리그어짐과 동시에 필사적으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고개를 드는 김현우가 눈에 보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쯤 펜릴은 검은 이미 그의 지척에 다가가고 있었고, 그에 따라 티르는 김현우의 최후를 예감했다.
허나-
촤아아악!
"!"
"씹!"
-끝이 아니었다.
티르의 검이 그의 머리에 닿기 전, 그는 오히려 머리를 들기를 포기하곤 그대로 다시 고개를 숙이곤 그 상태로 몸을 뒤틀어 검을 내리치고 있는 티르의 손에 주먹을 날렸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판단.
물론 이미 티르의 검은 이미 거의 내리그어지고 있던 터라 김현우는 가슴에 큰 자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멍해진 티르의 상황을 놓치지 않고 기세 좋게 자리에서 일어난 김현우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자마자 다시 폭우 속으로 뛰어 들어갔고.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티르는 허, 하는 헛웃음을 지음과 동시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아쉬움이 더더욱 진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티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쉬운 표정으로 김현우가 숨어들어 간 폭우 속을 바라보았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떨어지는 폭우 덕분에 가시거리가 줄어들긴 했으나 티르는 여전히 김현우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보인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지 저만치 떨어져서 숨을 고르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
티르는 그렇게 숨을 고르고 있는 듯한 김현우의 모습을 가만히 봤다. 하지만 더 이상 그에게 시간을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쉬움이 더욱더 진해졌다고 해서 그가 바뀐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면 그를 살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티르는 직접 그의 앞에 갈 필요도 없다는 듯 폭우 속에서 검을 들어 올렸다.
보라색의 검신 위로 빗방울들이 타고 내린다.
그 찰나의 순간.
티르는 김현우를 보며 검을 휘둘렀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마자 티르의 손에 쥐어져 있던 펜릴이 그의 베기에 호응해 공간을 가른다.
공간을 가르고 나아가는 종착지는 바로 김현우가 있는 곳.
촤아아아악!!
티르의 검이 휘둘러짐에 따라 빗물들이 베이며 물소리가 튀어나오고,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김현우의 신형이 그대로 절반으로 갈라져 쓰러진다.
예정된 결말.
티르는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봤고.
"뭘 그렇게 열심히 베고 있어?"
"!"
곧 들려오는 목소리에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353화. 내 눈깔 사용법 (2)
"!"
순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은 티르의 잠재의식이 자신의 머리 위를 유영하고 있는 티르빙을 등 뒤에 있는 김현우에게 쏘아 보냈다.
잠재의식의 명령을 받아 순식간에 쏘아져 나가는 티르빙.
쩡!
허나 티르빙은 그의 몸을 꿰뚫지 못했고, 오히려 그의 주먹에 의해 튕겨져 나갔다.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티르.
허나 이미 김현우는 뒤를 돌아보고 있는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깡!
물론 그 주먹은 티르에게 닿지 않았고, 그의 앞을 막은 궁니르에 막히고 말았다.
티르는 이 상황에 순간적으로 흥미를 느꼈으나 이내 곧 그 흥미를 거두고는 검을 휘두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뒤 조심해."
"뭐-?"
"난 말했다?"
빠아아아악!
-티르는 자신의 뒤통수에 느껴지는 고통스러운 감각에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본능적으로 몸을 반바퀴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티르의 손에 쥐어져 있는 펜릴이 떨어지는 빗물들을 베고 등 뒤에 있는 상대를 베었다.
펜릴은 검을 휘두르는 티르에게 분명 무엇인가를 베었다는 감각을 넘겨주었으니까.
그렇기에 티르는 시선을 들어 자신이 무엇을 벤 것인지 확인했고.
"……무슨?"
티르는 벤 것이 바로 김현우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체와 하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피를 흩뿌리고 있는 김현우.
허나 그는 곧 그렇게 쓰러지고 있는 김현우가 마력으로 변화하여 사라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한눈팔면 안 되지!"
"!"
까아아앙!
그는 곧 자신의 뒤에 있던 김현우가 주먹을 내질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주먹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허공을 돌고 있는 무기에 의해 막혔으나 뒤를 돌아 김현우를 마주한 티르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신기한 재주로군."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에게서는 더 이상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초조함'과 '불안함'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티르는 분명 그가 사용하는 기술을 직접 파훼하며 그에게 심적인 부담을 만들었고 그에 김현우는 분명 몇 수 전까지만 해도 눈빛 안에 초조함과 불안함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치? 나도 처음 써보는데 역시 좋은 것 같더라고."
"뭐라ㄱ-!"
까아앙!
폭우 속을 뚫고 나와 갑작스레 주먹을 날린 또 다른 김현우를 베어낸 티르는 슬쩍 굳은 표정으로 김현우의 눈을 바라봤다.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고 어느새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그의 모습.
티르는 묘한 표정을 거두고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니,
티르는 그런 생각을 해놓고는 스스로 부정했다.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그에게 있어서 어떠한 것을 깨닫거나 멘탈을 정리할 시간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게 보여줬던 그 감정들은 전부 연기였다는 말인가?'
그것 또한 아니었다.
분명 조금 전에 그가 보냈던 불안과 초조함은 가짜가 아닌 진짜였으니까.
"……."
티르는 그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문이 점점 증폭하기 시작하는 것을 깨닫고는 김현우를 바라봤다.
"……."
그 짧은 시간 동안 김현우는 이내 이전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은 채 그의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갑작스레 바뀐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티르는 문득 자신의 기억 속에 묻혀 있는 또 다른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아주 예전에 있었던, 그러나 자신이 잊을 수는 없는 아스가르드가 멸망하기 직전의 기억.
그때에도 티르는 갑작스레 저런 식으로 변했던 자신의 친우를 떠올릴 수 있었고, 곧 티르는 51번 탑과 연결되어 있던 통로를 떠올렸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통로.
허나 그 통로는 그도 분명히 알고 있는 통로였다.
"……역시, 그랬나?"
짧은 중얼거림.
김현우는 티르의 짧은 중얼거림을 듣고는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그의 생각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촤아아악-!
김현우가 생각하기도 이전, 펜릴은 움직였으니까.
남아 있는 한쪽 팔에서 크게 회전한 펜릴이 바로 앞에 있는 김현우를 찢어발기겠다는 듯 휘둘러진다.
칼자루에서 튕긴 빗물이 마치 총알처럼 사방으로 튀어나가고, 그의 검이 순식간에 김현우의 몸을 지난다.
이번에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는 김현우의 몸.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검은 김현우의 분신을 베었고.
"!"
베어진 김현우가 미소를 지으며 사라짐과 동시에 그는 곧 사방에서 달려들기 시작하는 김현우를 볼 수 있었다.
오른쪽에서 나타난 김현우가 발을 차올린다.
그의 뒤에 떠 있던 레바테인이 공격을 막아낸다.
김현우가 베였던 앞쪽에서 그의 비슷한 속도로 달려든 김현우가 주먹을 휘두른다.
칼을 한번 횡으로 휘둘러 막아낸다.
왼쪽에서는 티르의 자세를 무너뜨리는 것을 노리고 달려든 김현우가 태클을 건다.
가볍게 몸을 띄우며 궁니르를 사용해 김현우의 심장을 꿰뚫는다.
찰나의 시간에 마치 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듯 달려들기 시작하는 수많은 김현우.
허나 사방에서 달려드는 김현우의 공격에도 티르는 당황하지 않고 그들을 모조리 처리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방으로 달려드는 김현우를 처리한 티르는 마침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어째서 더 분신을 사용하지 않는 겐가?"
티르의 물음에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딱히, 더 이상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이미 분신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전부 얻었거든."
"……그게 뭔지 궁금해지는군."
"그새 다시 궁금증이 차올랐나 봐?"
"원래 노인은 변덕이 심한 법 아니겠나?"
"뭐, 확실히 틀딱들이 변덕 하나는 또 기가 막히지."
"게다가, 자네에게도 기회가 아닌가? 굳이 아까 그것을 물어본 걸 보면 자네도 비밀에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일세."
물론 그 말은 김현우가 단순히 시간을 끌기위해 꺼낸 말이었으나 그는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자세를 잡았다.
"뭐, 이제는 그렇게까지 궁금하진 않아. 어차피 들을 거니까 말이야."
그의 오만한 선언.
노인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고, 김현우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다는 듯 티르를 향해 달려 나갔다.
벌써 몇 번인지 모를 김현우의 돌격.
이번에도 그의 돌격은 똑같았다.
마력을 잔뜩 담은 발로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티르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별다른 전략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정면돌파라는 말이 어울리는 김현우의 모습.
그에 티르는 김현우를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르려 했고,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검을 휘두르는 팔을 막았다.
그에 티르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검을 막아낸 김현우를 떨치기 위해 칼자루를 아래도 내려 김현우의 머리를 찍어 내렸고-
"!!!"
-그다음, 티르는 그 김현우가 자신의 공격을 미리 '예견했다는 듯' 피해내는 모습을 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허나 그렇게 놀란 상태에서는 티르는 절대 자신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예견하듯 곧바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젖힌 김현우의 얼굴을 타격하기 위해 손등을 이용해 얼굴을 후려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김현우는 그 공격을 예측했다는 듯 피해내곤-
빡!
"큭!?"
오히려 그는 자신의 몸을 들이대 그의 시야를 제한시키고는 그가 미처 보지 못한 오른손을 이용해 티르의 얼굴을 올려쳤다.
순간적으로 돌아가는 티르의 시야.
그 순간 그의 잠재의식은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김현우를 방해하기 위해 자신의 주변을 유영하고 있는 동료들의 무기를 쏘아보냈으나-
"!"
-티르는 곧 자신의 무기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상함을 느꼈다.
빠아아악!
그와 함께 티르의 복부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
"컥!"
그에 티르는 처음으로 신음을 터트리며 저 멀리로 날아갔고-
"내가 말했지?"
-김현우는 무척이나 심각하게 굳어버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티르를 바라보며 보란 듯이 입가를 비틀어 올린 뒤.
"이미 필요한 건 전부 얻었다고."
그렇게 말했다.
####
모든 것이 메말라 버린 붉은 대지.
하늘에 떠 있는 것은 시리도록 차가워 보이는 만월이었고, 그 만월의 주변으로는 아름다운 별빛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별빛이 수놓아져 있는 곳 아래에는 하나의 집이 있었다.
그 집은 거대하지 않았다.
또한, 사치스럽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무엇인가 비밀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한 민가.
그래,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 그 붉은 황야 아래에 올라와 있는 집은 그저 평범한 집이었다.
물론 그 집의 안쪽도 밖의 외견과는 다르지 않았다.
집안에는 그저 몸을 따뜻하게 녹일 수 있는 난로가 하나 있을 뿐이고, 낡은 책상과 잠을 잘 수 있는 공간 정도가 마련되어 있을 뿐이었다.
허나 그 집 안쪽에 있는 이는 그런 허름한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마치 나무처럼 딱딱해 보이는 손.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보기 흉한 껍질들로 온몸이 감싸져 있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낡은 책상에 앉아 그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그 남자.
예수의 일곱 번째 제자 중 한 명인 '베드로'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그는 자신의 껍질 속에서 붉은 눈동자를 내보이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붉은 눈동자를 뜬 채로 몇 번이고 눈을 껌벅거리더니 이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짜 단서를 찾았다고……?"
그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조금 전의 풍경을 상기하며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거기에 있을 줄이야.'
베드로는 얼마 전 단서를 찾는 데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을 시기에 데블랑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51번 탑 근처를 찾아보라고 했던 데블랑의 말.
허나 그는 51번 탑을 찾는 것을 탐탁찮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51번 탑은 양식장이 사라지고 탑이 들어섰을 때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51번 탑에 통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있다고?'
단서가 있었다.
그것도 생각보다 무척이나 찾기 쉬운 곳에, 단서가 있었다.
어느 정도냐고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관리기관이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찾기 쉬운 곳에 통로는 버젓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몇 번이고 그 자리에 지어져 있는 통로가 혹여나 함정이나 가짜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으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은 가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진짜 같았다.
아니, 그것은 그냥 진짜 단서였다.
"……이렇게 어이없이 찾을 줄이야."
베드로는 뭔가 맥이 빠진다는 투로 중얼거리며 낡은 의자에 몸을 기대었으나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일으키고는 다시 두 눈을 감았다.
지금 당장 쉬는 것보다는 이 사실을 데블랑한테 알리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렇게 베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떴던 눈을 다시 감았고.
"무슨 일이지?"
"단서를 찾았다."
그는 곧 심연 속에서 데블랑을 만날 수 있었다.
354화. 내 눈깔 사용법 (3)
욱신!
"끙-"
김현우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티르를 향해 웃음을 날렸으나, 실질적으로는 지금 당장 대가리가 터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과한 두통을 앓고 있었다.
'확실히, 되기는 한다.'
티르는 시선을 돌려 티르의 주변에 떠 있는 무기들을 바라봤다.
붉은 검부터 시작해서 아까 전 자신의 배를 꿰뚫었던 창까지.
그의 머리 위를 유영하고 있는 수많은 무기들은 현재 제자리에서 마치 렉이 걸린 것처럼 버벅이고 있었다.
마치 지금 당장 움직이는 것을 누군가한테 제어받는 듯.
물론 그것은 바로 김현우가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갑작스레 '눈동자'가 그에게 나타나 주고 간 힌트.
김현우가 원하는 한 그의 눈에 비춘 것은 무엇이든지 따라할 수 있다는 눈동자의 그 힌트 덕분에 김현우는 현재 티르와 똑같은 업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그뿐인가? 김현우는 티르의 업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다른 이의 업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김현우가 조금 전의 사용했던 분신이 바로 그 예.
'……솔직히 그렇게 잘될 줄은 몰랐는데.'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억지로 삭혀가며 조금 전을 회상했다.
눈동자에게 그 사실을 듣고 나온 뒤, 김현우는 별다른 특별한 과정 없이 손오공의 분신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 별다른 과정은 애초에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냥 원래부터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분신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분신이 도대체 어떤 구조로 사용할 수 있는 건지조차 모르는데도.
그것은 티르의 눈인 예지안도 마찬가지였고, 마찬가지로 그가 허공을 유영하고 있는 검을 움직이는 권능 또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더욱더 심한 건 김현우는 사실 티르가 정확히 무슨 권능을 써서 저 무기들을 움직이는지조차 몰랐다.
그런데도 김현우는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김현우는 권능이나 능력을 발동해야하는 기본적인 원리구조를 모르고도 그와 똑같은 결과를 내고 있다, 이 소리였다.
그야말로 사기적인 능력.
'……지나친 마력의 소모랑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만 어떻게 했으면 사기적인 능력에서 안 끝나는 건데.'
물론 그런 사기적인 능력이라도 단점이라면 있었다.
우선 그 능력을 따라 하기 시작하면 마력이 지나치게 소비되는 것이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능력을 따라하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심해진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지끈거리는 것이 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심해진다.
그것이 바로 김현우가 일부러 잘 사용하던 분신능력을 지운 이유.
'아무튼, 이걸로 우선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위치까지 왔다.'
김현우는 티르를 바라봤다.
요전과는 다른,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티르.
김현우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 이내 귀찮다는 듯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들을 한 구석으로 집어넣었다.
비록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겠지만 이미 그와 동등해진 이상 더 이상의 작전은 무의미 했다.
어차피 그에게 잔재주는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이번에도 잘 싸우나 한번 보자고."
김현우는 이전과 같은 정공법을 택했다.
팟!
그의 신형이 사라진 뒤 순식간에 티르의 오른 편에 나타난다.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르는 티르.
허나 김현우는 검을 휘두르는 티르를 막지 않았다.
그 덕분에 펜릴은 아무런 제재 없이 깔끔한 허공을 베었으나.
파칫-!
김현우는 펜릴의 허공이 벤 공간 대신 그 아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이제 곧 자신의 몸이 도착할 공간을.
그곳에는 펜릴의 검이 휘둘러지자마자 검은색의 실선이 마치 확장하듯 만들어지고 있었다.
'보인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것을 보며 망설임 없이 몸을 한계까지 숙여 검은 실선을 피해냈고, 곧 굳은 표정으로 검을 회수하는 것 대신 곧바로 검을 휘두르려는 티르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빠아악!
깔끔한 타격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김현우의 주먹은 그의 얼굴이 아닌 칼자루를 잡고 있는 그의 손에 막히고 말았다.
뻐억!
공격을 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김현우의 신체를 후드려 차는 티르.
그러나 이번에도 김현우는 마찬가지로 그의 공격을 피해낸다.
그것을 기점으로 시작 된 근접전.
김현우의 주먹이 휘둘러지고, 티르의 검이 망설임 없이 김현우를 향해 움직인다.
그러나 티르가 아무리 검을 휘두르고 김현우가 주먹을 휘둘러도, 그 둘은 서로의 공격에 맞지 않았다.
방어조차 하지 않는다.
그 둘은 서로의 공격을 계속해서 피할 뿐, 서로 맞닿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공격 속에서 김현우는 슬슬 자신에게 한계가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이러다 뒤지는 거 아니야?'
욱씬-!
이유는 점점 더 심해지는 두통.
티르의 위에 떠 있는 무기들을 막고 그와 같은 예지안을 손에 넣어 전투를 벌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것을 유지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어느 정도냐고 한다면, 티르가 습관적으로 무기를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머리통이 그냥 깨져버릴 것 같을 정도였다.
"쯧"
그리고 그 여파는 현재의 전투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는 중이었다.
촤악-!
분명 티르와 김현우는 모든 공격을 피하고 있었으나 김현우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의 몸에 상처가 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더 이상 오래 끌면 안 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론.
그는 이제 곧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가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렇기에 그는 끊임없이 티르의 공격을 피하며 그에게 먹일 결정적인 일격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
-김현우는 생각을 마쳤다.
촤아아악!
김현우가 생각을 마침과 동시에 줄곧 렉이 걸린 것처럼 움직이고 있던 티르의 무기들이 그의 생각대로 김현우를 공격한다.
부지불식간에 그에게 달려드는 무기들.
그러나 김현우는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무기들을 모조리 피해내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궁니르를 몸을 비트는 것으로 피해내고 시간차를 두고 양옆으로 쏘아져 내리는 궁니르와 티르빙을 몸을 뒤로 젖히는 것으로-
깡-!
-피해낸다.
거친 쇳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보이는 것은 묵직해 보이는 망치와 도끼.
망치는 본연의 몸에 번개의 힘을 담고 있는 김현우에게 파직 거리는 번개를 쏘아 보냈고 도끼는 그에게 다가선 어느 순간 자신의 크기를 기형적으로 불렸다.
허나, 그것들의 종착지는 김현우의 몸통이 아닌 폐허가 된 땅바닥이었다.
콰아아아아!
그의 귀를 일순간 좀먹을 정도로 엄청난 소음.
그 마지막에서 김현우는 검을 휘두르는 티르를 볼 수 있었으나 그는 굳이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촤아아악!
빗방울을 가르며 그의 검이 깔끔하게 횡으로 그어지고, 그와 함께 김현우의 몸에 붉은 실선이 생긴다.
푸화아악!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서 터져나오는 붉은 피.
티르는 갑작스레 회피를 멈추고 그대로 공격에 당한 김현우를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봤으나 이윽고 그를 끝내기 위해 또 한번 검을 움직이려 했으나-
"……!?"
-어느 순간, 티르는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을 휘두른 그 자세로, 더 이상 검을 회수하지 못할 정도로 굳어버린 몸.
그리고-
"걸렸네."
그런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자신의 입가에 흐른 피를 닦으며 웃음을 지었다.
티르는 곧 이 상황을 김현우가 만든 것임을 깨닫고는 발두르의 권능을 사용해 주변에 있는 마력들을 지우려 했으나.
'마력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모든 것을 없는 것으로 돌릴 수 있는 발두르의 권능은 김현우의 마력을 지울 수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김현우를 바라봄과 동시에 김현우는 아직까지도 입가로 줄줄 흘러내리는 피를 닦고는 한 걸음을 옮겼고.
"!"
그는 자신의 주변에 밀집되어 있는 마력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팽창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에 부담이 될 정도로 심한 압박을 넣기 시작하는 김현우의 마력.
그는 팽창하는 마력에서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에 마력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전보다는 확실히 버티기 쉬워진 그.
허나-
이 보(二 步)
김현우가 한 번 더 걸음을 옮김과 동시에 티르는 자신의 마력을 밀어내곤 더더욱 심하게 팽창하는 마력을 느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티르가 뒤늦게 무슨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김현우는 또 한걸음을 옮겼다.
삼 보(三 步)
쿠그그그그그극-!!!!
팽창한 마력이 주변의 폐허들을 무자비하게 없애버리기 시작한다.
-욱씬!
그리고 그와 동시에 김현우의 머릿속을 찌르듯 울리는 두통.
김현우는 자신의 눈앞이 서서히 희미해지는 것을 깨닫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냥 놔버리고 싶다.'
그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흘러드는 생각.
티르의 마력 무효화와 동시에 몸을 확실히 구속 할 수 있는 십보멸살(十步滅殺)을 사용한 덕분에 이미 한번 그의 칼에 베였다
그리고 그렇게 베인 상처는 더 이상 재생하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의 몸에는 이미 마력이랄 게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안 그래도 없는 마력을 억지로 끌어다 쓰기 시작한 시점부터 김현우의 몸에는 지독한 상실감이 들기 시작했고.
욱씬-!
티르의 권능 덕분에 그의 머리는 이미 생각이라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냥 머리를 그냥 따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끔찍한 고통.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김현우는 이 최후의 공격을 멈출 수 없었다.
이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순간 이 싸움은 자신의 패배가 되니까.
김현우는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흐릿해진 시야를 억지로 다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사 보(四 步).
폐허의 잔해들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오 보(五 步)
마치 공간이 압축되듯 바닥과 바닥이 갈리는 소리가 김현우의 귀를 시끄럽게 어지럽힌다.
한계까지 다다른 정신 상태에 그 소리는 김현우를 짜증스럽게 했으나 그는 앞으로 나간다.
칠 보(七 步)
김현우는 어느새 자신의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부신 시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이미 한계치를 넘어섰기에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나 역시, 그의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팔 보(八 步)-
청각이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앞으로 나아갔다.
구 보(九 步).
그리고 그렇게 그가 아홉 걸음을 내디뎠을 때, 그는 자신의 주먹을 들어 올렸다.
물론 감각은 없었다.
아니, 이미 김현우는 자신의 몸에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가 평소에 하던 것처럼 주먹을 들어 올리고, 그 주먹을 발리스타처럼 뒤로 꺾는다.
'만다라라도 만들 마력이 있으면 좋으련만.'
주먹을 뒤로 당기며 김현우의 머릿속으로 잠시 그런 감각이 스쳐지나갔으나, 이내 그는 그 마음을 지워버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게 최선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감각 속에서 김현우는 끝까지 당겼던 주먹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향해 휘두르며 마지막 걸음을 옮겼고-
삐──────────────!!!!
-김현우는 귓가에 새로이 들리는 전자음 소리를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355화. 내 눈깔 사용법 (4)
50번 탑.
불만족스럽게 폐허를 왔다 갔다 하는 괴인과 그와는 반대로 폐허에 앉아 느긋한 표정으로 누워 있던 밀레시안.
진짜 잠에 빠진 것처럼 눈을 감고 있던 밀레시안은 어느 시점에 눈을 크게 뜨고는 중얼거렸다.
"이거 실화야?"
밀레시안의 갑작스러운 중얼거림.
물론 그는 작게 중얼거렸으나 현재 아무런 소음도 없는 50번 탑에는 그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잘 들렸고, 그렇기에 괴인은 말했다.
"무슨 일이야?"
"아니……."
"……?"
그의 물음에도 잠시 분간이 안 되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밀레시안.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입을 벌렸고, 그런 밀레시안의 모습을 보던 괴인은 답답하다는 듯 짜증을 냈다.
"혼자 그러지 말고 말을 해봐라, 도대체 뭐냐?"
"……노인장이 간 것 같은데?"
"갔다고? 어디로?"
"……발할라로 말이야."
"발할라……?"
괴인은 그렇게 되물으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밀레시안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설마, 죽었다고?"
"어."
깔끔한 대답.
괴인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검신이 죽었다고?"
"몇 번을 묻는 거야?"
"아니 네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나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해서 이렇게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있잖아. 안 보여?"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하는 밀레시안은 이내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고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괴인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 했다.
"너도나도 열심히 검신이 그렇게 강하다고 빨아주더니, 뭐 탑주 한 명한테 져?"
괴인의 말.
그에 밀레시안은 그를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너도 참 알 만하다."
"……뭐?"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게 어때? 검신의 능력은 이미 네가 관리기관 소속의 탑주가 되기 전부터 인정받은 거야. 모르겠어?"
"……."
"이 경우에는 검신이 소멸한 게 검신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네가 자신하던 그 늙은이를 이길 정도로 탑주가 강하다고?"
괴인의 말에 밀레시안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는 생각했다.
'혹시 내가 잘못 파악한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것이었다.
적어도 그의 능력은 이런 데에 한해서는 한없이 정확하니까.
그렇다면 나오는 결론은 단 하나밖에 없다.
'……51번 탑주에게 노인네가 당했다고? 아스가르드를 통째로 등에 지고 있는 그 노인네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능력은 분명 검신의 소멸을 알리고 있었다.
"……."
한동안의 침묵.
자리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하던 밀레시안은 이내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포기."
"뭐라고?"
"포기한다고."
밀레시안의 말, 그에 괴인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여기까지 와서 포기한다니!"
"애초에 입구도 못 찾는데 무슨 수로 51번 탑으로 넘어가려고?"
"그거야 지금부터 찾아보면 될 일이다!"
"됐고, 난 포기할 거니까 51번 탑주 잡고 싶으면 너나 가라."
그렇게 말하며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밀레시안의 앞에 소환되는 푸른색의 포탈.
"아니, 설마 노인이 죽었다고 그대로 내뺀다고? 네 녀석 그렇게 쫄보였나?"
밀레시안이 진짜 이곳에서 떠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급하게 말하는 괴인.
허나 밀레시안은 이미 미련 따위는 저 멀리 던져 버린 지 오래라는 듯 이야기했다.
"당연하지. 너는 그럼 그 괴물하고 맞짱 뜨려고?"
"오히려 지금이 기회 아닌가?"
"무슨 기회?"
"검신이 힘을 빼놨을 것 아닌가?"
"그래서? 검신이 어느 정도 힘을 빼놨으니까 지금 찾아가서 조지면 승산이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야?"
"그렇지."
"그럼 혼자 가는 건 어때?"
밀레시안의 제안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는 괴인.
허나 밀레시안은 그런 괴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포탈로 시선을 돌리고는 이야기했다.
"그렇게 봐도 나는 안 갈 거야. 애초에 검신이 힘을 빼놨다고 해도 그 노인네를 이길 정도면 우리로는 쨉도 안 될 테니까."
"의뢰비용이 만만치 않잖나?"
이번에는 타협하듯 말을 건네는 괴인.
"내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지."
그러나 밀레시안은 단호했다.
"게다가 너도 알다시피 나는 마력을 많이 사용하는 것도 아니니까."
밀레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더 이상의 볼일은 끝났다는 듯 괴인의 말을 듣지도 않고 포탈 안으로 들어가려다-
"그리고 인형극 놀이는 사절이야."
-이내 어느 한쪽을 바라보고는 그렇게 말하더니 그것을 끝으로 정말 포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후우우우웅---!
그가 들어가자마자 순식간에 닫히는 포탈.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괴인은 이내 탄식했다.
"하, 이런 씹…… 이제야 좀 허덕임에서 벗어나나 싶었더니만."
괴인은 그런 밀레시안의 모습을 보고는 잔뜩 탄식을 내뱉고서는 그 자리에 서서 짧게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그는 이번 의뢰로 걸린 업과 마력이 좀 많이 필요한 상태였으니까.
"……에이 씨발."
허나 결국 괴인은 밀레시안과 똑같은 선택을 했다.
괴인이 손짓하자 열리는 붉은 포탈.
그는 짜증을 부리며 붉은 포탈로 들어갔고, 괴인이 들어가자마자 붉은 포탈은 순식간에 닫혀버렸다.
그렇게 적막해진 50번탑의 최상층.
"……."
그곳의 폐허 한구석에서는 헤르메스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괴인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
[이번에는 위험했네.]
들리는 목소리에 김현우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보이는 것은 까만 어둠과 앞에 떠 있는 눈동자.
왠지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김현우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마 못 움직일걸? 이곳은 네 정신세계니까.]
"대충 예상했어."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잠시 한숨을 내쉰 뒤 이야기했다.
"그나저나 그 뒤로 일어나자마자 네 얼굴을 봐서 조금 이해가 안 되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된 거야?"
[그 뒤라면 언제?]
"내가 티르하고 싸울 때 말이야."
김현우는 티르와 싸웠을 때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시야가 완벽하게 끊겼을 때 분명 어거지로 공격을 시도한 뒤로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기에 눈동자에게 물었고.
[뭐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는 잘 쉬고 있으니까.]
눈동자에게서 나온 대답은 다행스럽게도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잘 쉬고 있다고?"
[그래, 뭐…… 너도 알다시피 나도 자주 잠을 자야 해서 계속 본 건 아니지만 야차가 너를 9계층으로 데리고 가는 것까지는 봤거든.]
-그 뒤에도 조금 봤지만.
히죽거리며 김현우가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웃는 눈동자.
눈꼬리가 기묘하게 꺾여 있는 것이 기분 나빴다.
"……도대체 뭘 봤길래?"
왠지 조금의 불안감을 가진 김현우가 질문하자 눈동자는 이야기했다.
[뭐…… 별건 아니고.]
"별건 아니고?"
[네 제자…… 아니, 네 와이프들 쩔더라.]
"……?"
[여러 가지 의미로.]
히죽거리는 눈동자.
김현우는 분명 전혀 불안할 것이 없는데 불안해졌다.
"……도대체 뭘 본 거야?"
[뭐~ 별건 아니야? 그냥 네가 야차한테 구출되고 나서 대충 5일 정도 쓰러진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조금 지켜봤거든.]
"5일이나? 아니 나랑 대화할 때는 10분도 힘들다고 한 놈이 5일씩이나???"
김현우가 딴지를 걸자 눈동자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너와 이야기할 때는 직접 실체화 하고 이야기까지 하느라 힘든 거지만 그냥 지켜보는 건 그리 큰 마력이 소모되지는 않거든.]
-뭐 말 그대로 '상대적'이지만.
"……그래서 뭘 봤는데?"
"뭐 별거 아니라니까? 그냥 네 와이프들이 은근슬쩍 야밤에 들어오거나 혹은 야차가 야밤에 들어오거나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
-준비도 열심히더라.
"……."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약간 자괴감 비스무리한 것을 느꼈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억지로 털어내고는 이야기했다.
"아무튼…… 그럼 내가 이겼다는 거지?"
[뭐 우선은 그렇지.]
"우선은? 또 그건 무슨 말이야?"
[그건 네가 9계층에 내려가 보면 알 거야. 이제 보니 그 녀석도 꽤 재미있는 녀석이더라고.]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자 순간 묘한 표정을 짓는 김현우.
허나 그는 곧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 깨어나는데?"
[아마 지금 의식이 사라지면 곧바로 깨어날걸? 어차피 깨어나려던 걸 내가 붙잡은 거니까. 아마 자연스럽게 깰 거야.]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이야기의 주제를 돌려 이야기 했다.
"그런데 너는 왜 꼭 다 뒤져가는 사이에 나오는 거냐?"
[응 뭐가?]
"나 싸우고 있을 때 말이야. 항상 보면 내가 거의 뒤지기 직전까지 가면 나와서 힌트를 주고 가잖아?"
[아~ 그거?]
"그래 그거."
[그게 어때서?]
"……그게 어때서라니, 그냥 애초에 처음부터 알려줬으면 무난하게 흘러갈 거 아니야?"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일리가 있다는 듯 눈꼬리를 슬쩍 흔들었다.
[뭐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
"알고 있으면서 대체 왜?"
[우연이야.]
"우연이라고?"
[그래, 내가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너를 계속보고 있겠어? 나도 나 나름대로 할 일이 있는데 말이야.]
'이미 5일 동안 내 병실을 훔쳐본 걸로 봐서는 딱히 할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생각이 김현우의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그는 눈동자가 딱히 이 질문에 답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화를 끝내 버렸고.
[이제 슬슬 깨어나겠네. 그럼 다음에 봐.]
눈동자의 말을 끝으로 김현우는 어두컴컴한 세상이 다시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 그리고 지금 깨어나면 상황이 좀 재미있을 테니까 나중에 후기 부탁해~]
그 눈동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처음 깨어나서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물감이었다.
분명히 몸은 내 몸이었는데 몸 어디 한쪽에서 묘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그다음에 들리는 것은 목소리.
"아이들아, 너희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모양인데 너희 둘을 이렇게 이어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게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닌가요? 저희도 바보같이 수긍하기도 했죠. 하지만 지속해서 저희 서방님한테 이런 일을 하는 것은 허락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호오? 감히 아녀자가 남편에게 족쇄를 채우려 드는 것이더냐? 가장의 체면이 땅에 처박혔구나. 가장의 권위를 무시하는 아녀자가 붙어 있다니 이 얼마나 불쌍한고."
"가장의 권위에서 따질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이야, 너도 설마 이 나를 못 믿는 게냐?"
"……우선 잡고 있는 것을 좀 놓으시죠."
"어허, 이걸 어떻게 놓는단 말이냐, 너희들이 내 손 위를 꾹 잡고 있지 않느냐? 너희들이 먼저 놓거라."
"……먼저 놓으실 수 있을 텐데요?"
"이거 보이지 않느냐? 너희 손이 위에 있데도-"
"그냥 쑥 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는 못하겠구나."
"……."
그 목소리를 들으며 김현우는 뜨던 눈을 다시 감았다.
356화. 새로운 진실이 꽤나 많다. (1)
"후……."
천계에 있는 거대한 신전.
안쪽에 있는 집무실에서 우리엘은 간만에 평온함을 느낀다는 듯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들어 우리엘은 자신의 골치를 썩이던 일이 너무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한 가지가 아닌 두 가지나.
우리엘은 평온한 얼굴로 조금 전 자신과 같이 정체를 숨기고 있던 베드로에게 들었던 정보를 상기했다.
'통로가 확실하다라.'
물론 우리엘, 아니 데블랑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이었다.
허나 그때만 해도 데블랑은 그 소식을 들었음에도 기뻐할 수 없었다.
그때 당시에는 김현우가 검신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었을 때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정말 설마설마 했지만…… 그 녀석이 검신을 소멸시켜 버릴 줄이야.'
데블랑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베드로에게 당장 단서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해도 그는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단서를 찾았다고 해도 그분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 녀석, 그러니까 김현우가 없으면 단서를 찾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걱정하던 데블랑의 예상과는 달리, 김현우는 검신을 깔끔하게 소멸시켜 버렸다. 그 타격이 조금 있는 것 같기는 했으나 아무튼 중요한 건 검신을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 검신을 말이다.
'후후…….'
검신이 죽었다는 것은 다른 탑주들에게는 그저 그런 수준의 가십거리일 뿐이겠으나 그에게 있어서는 느껴지는 바가 조금 달랐다.
검신은 관리기관에서 사용할 수 있는 패들 중에 단연 최상급이라고 할 수 있는 패다.
그런데 김현우는 그 패를 소멸시켜 버렸고, 그것은 곧 관리기관과 척을 지고 있는 자신들이 활동하기에 조금 더 편한 환경이 되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뭐, 그래봤자 걸리면 죽는 것은 똑같았으나 아무튼 조금이라도 그쪽에 손실이 나서 심적 부담이 조금 줄어들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뭐, 그것까지는 좋긴 한데.'
데블랑은 이내 평온한 표정을 지우고 지난 일주일간 풀리지 않는 의문을 다시 화두로 올렸다.
물론 모든 일이 잘 풀려서 딱히 짚고 넘어갈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살짝 의문이 드는 것.
'……도대체 누구지?'
데블랑은 일주일 전의 그때를 상기했다.
김현우에게는 당장 조심하라는 편지를 보내고 검신이 먼저 51번 탑에 들어간 틈을 타 밀레시안과 괴인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50번 탑에 광역으로 결계를 쳐 51번 탑으로 통하는 입구를 숨겼다.
허나 입구를 숨긴다고 해도 불안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분에게 받은 결계의 능력은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했으나 밀레시안과 괴인이 작정하고 50번 탑을 뒤지기 시작하면 찾아낼 수 있었을 테니까.
물론 밀레시안과 괴인은 결국 51번 탑으로 연결되는 문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 버렸으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
문제는 바로 데블랑이 50번 탑에 걸었던 결계 위에, 누군가가 추가로 결계를 덧씌운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물론 추가로 덧씌워진 결계는 아무리 봐도 자신이 쳐 놓았던 결계를 조금 더 은밀하게 만들어주는 기능을 했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과 같이 김현우를 도우려 했다는 것.
허나 문제인 것은 도대체 그가 누구인지 현재의 데블랑으로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데블랑은 한동안 집무실에 앉아서 고민을 이어나갔다.
####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안에 있는 관저의 지하.
관 너머로 보이는 형형색색의 업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이내 시선을 돌려 헤르메스를 바라봤다.
"……소멸시키지 못했다는 건가?"
"예."
묵묵한 대답.
그 대답을 듣고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던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헤르메스를 멍하니 바라보고는 말했다.
"거기에 검신(劍神)은 소멸했고?"
"예."
"……괴인과 밀레시안이 같이 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남자의 물음에 헤르메스는 잠시 말을 아끼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그들로는 51번 탑주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헤르메스의 말.
그에 남자는 자신의 혀로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그 정도라고?"
"……."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헤르메스.
그에 남자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허나 다른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이내 침묵했다.
"……."
"……."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지는 침묵.
그 긴 침묵 동안 헤르메스는 고개를 들지 않고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였고,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침묵을 유지하다 곧 시선을 틀고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그 말씀은."
"놔두도록 하게."
남자의 말에 헤르메스는 순간 실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봤고, 그런 그의 반응에 남자는 대답했다.
"어차피 처리도 못 하지 않는가?"
"……그건"
헤르메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남자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물론 그 녀석을 놔두는 건 나로서도 그렇게 기쁘지 않지만 그나마 탑주 중에서는 강자 측에 속하는 검신이 죽었다면 다른 녀석을 보내도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소리 아닌가?"
"……."
그는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남자의 말에는 전혀 틀린 점이 없었으니까.
그런 헤르메스의 침묵을 긍정으로 읽은 남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튼,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결국 그 녀석을 당장 잡을 방법은 없으니 그냥 놔두도록. 사실 원래라면 자네라도 보내서 그 녀석을 처리하고 싶지만……."
-조금 있으면 전부 끝나니 말이야.
남자의 말에 헤르메스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 말씀은?"
"내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습니다."
"그래, 말 그대로의 이야기야. 이제 진짜로 얼마 남지 않았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앞에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업을 바라보고는 씨익 웃었다.
"사실 2주기 정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거든."
"그렇다면."
"1주기. 이제 1주기 정도만 지나면 내가 생각하던 업이 전부 모이게 되지. 물론 정령 쪽이 그 녀석 덕분에 완전히 박살 나서 들어오는 업이 좀 적을 예정이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제 1주기만 더 있으면 대업을 이룰 업이 완전히 모이지.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입가를 비틀어 올리는 남자.
그에 헤르메스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이야기했다.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억겁의 기다림 끝에 도달하셨군요."
"그래, 길었지. 참 길었어."
그러니-
"이제 그 녀석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
"이 1주기가 지나고 나면 어차피 이놈이든 저놈이든 내가 직접 깔끔하게 묻어버릴 테니 말이야. 그러니 자네는 이 1주기 동안 일이 터지지 않게 잘 관리하기만 하면 되네."
-알았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헤르메스를 바라봤고.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그의 말에 답했다.
####
병실 안.
"……형 상태가 왜 그래요?"
"……왜?"
김현우의 되물음에 김시현은 딱히 답하지 않고 그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분명 잠에 빠진 것은 일주일 정도일 텐데 그의 눈은 굉장히 피곤함에 찌들어 보였다.
물론 처음에 봤을 때만 해도 그냥 이제야 잠에서 깨어나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줄 알았으나 시간이 조금 지나니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김시현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
김시현은 조금 전 이 병실에 들어오기 전 신나게 싸움을 벌이고 있던 3인방을 떠올렸다.
'분명 미령과 하나린…… 그리고 야차님이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 조금만 더 싸우면 병원이 그대로 폭삭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살기를 담아서 싸우고 있던 그들을 생각하며 김시현은 몸을 떨었다.
게다가 김시현의 입장에서 그것보다 조금 더 신기했던 것은 그들의 싸움이 1:1:1의 개인전이 아니라 팀 대 개인이었다는 것이었다.
'딱 봐도 미령과 하나린이 같은 팀이고…….,'
야차가 개인이었다.
분명 옛날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미령과 야차가 같은 팀이고 하나린이 개인이어야 맞을 텐데 지금은 이상하게 팀이 바뀌어 있었다.
뭐…… 물론 그것은 김시현이 현 김현우의 와이프들의 구도가 어떻게 되는지 몰랐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
그렇기에 김시현은 조금 전 보였던 와이프들의 싸움을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넘기고는 다시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래서, 몸은 어때요?"
"……좋진 않아."
"뭐, 딱 봐도 그래 보이기는 하네요."
"쉬지를 못했거든."
"네……?"
김시현의 되물음.
그에 김현우는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이내 피곤하다는 듯 괜스레 손을 휘적거리며 말을 아꼈다.
"……?"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알 수 없다는 듯 쳐다보는 김시현.
허나 김시현은 그의 손짓을 보고는 이내 작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입을 다물었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물었다.
"그래서, 서연이는 안 왔어? 아까 석원이 형이랑도 같이 온다며?"
김현우는 아까 전 이곳에 오기 전 이서연과 김시현, 그리고 한석원이 같이 온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물었고 김시현은 별 어려울 것 없다는 듯 답했다.
"뭐 다들 좀 사정이 있어서요."
"사정?"
"네. 석원이 형은 지금 열심히 한국 내에서 굴지의 1위 길드가 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중이거든요."
"……1위 길드?"
"네, 던전 권한 관련해서 최근에 열심히 여기저기 움직이시던데요?"
"너는?"
김현우의 물음에 김시현은 그가 무엇을 물어보는 것인지를 잠시 고민하다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기했다.
"저는 지금 여기서도 충분히 만족하거든요. 게다가 여기서 더 늘리면 일이 더 고달파질 것 같아서요."
김시현의 대답에 김현우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또 한번 물었다.
"그럼 이서연은 왜 안 왔어?"
"아마 걔도 오늘 일정이 밀려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게다가 오늘은 길드 내에서 일이 벌어진 게 많아서 급하게 중재하러 간다고 하더라고요."
"거기는 또 무슨 일인데?"
"들어보니까 그렇게 큰일은 아니더라고요. 뭐 사실 제가 볼 때는 요즘 너무 길드 관리에 소홀해서 그렇게 일이 터진 것 같긴 한데……."
"길드 관리에 소홀해?"
"네."
"왜?"
"손오공이 수련한답시고 떠났잖아요?"
"……그렇지?"
그것은 김현우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애초에 그 덕분에 지금 밖에서 야차와 그의 와이프들이 신나게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근데 손오공이 수련을 하고 오겠다는 걸 이서연에게 말하지 않아서…… 음, 조금 기분이 상했나 봐요."
"……한마디로 계속 저기압 상태다…… 뭐 그런 거?"
"네."
김시현의 끄덕거림.
그에 김현우는 참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본 뒤 짧게 탄식했고, 그런 그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김시현은 무엇인가가 떠올랐다는 듯 짧게 탄성을 내지르곤 이야기했다.
"아, 그리고 보여드릴 것도 있어요."
"보여줄 거?"
"네. 이거요."
김시현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손에 쥐고 있었던 검을 그에게 내밀었고.
"……이건?"
그는 곧 어렵지 않게 보라색의 도신을 가지고 있는 그 검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펜릴……?"
그것은 바로 티르의 무기인 펜릴이었다.
357화. 새로운 진실이 꽤나 많다. (2)
아름다운, 허나 무척이나 웅장한 폭포가 있었다.
마치 세상의 지평선을 폭포 하나로 깔끔하게 나눠놓은 것처럼 방대한 폭포.
세찬 물줄기가 끝없이 떨어지며 무지개를 만들어내고 있는 그 폭포 아래의 나무 아래에서, 밀레시안은 눈을 감은 채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누워 있었다.
중세시대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나 입었을 것 같은 가벼운 튜닉과 낡디 낡은 가죽 모자를 쓰고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은 어찌 보면 양치기로 보이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철없는 소년으로 보이기도 했다.
허나 곧 그가 눈을 떠 숨겨진 금안(金眼)을 내보였을 때, 비로소 그는 몸에서는 '소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내게는 무슨 볼일인데?"
동시에 밀레시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그러자 얼마 있지 않아 밀레시안이 누워 있던 나무의 뒤쪽에서 올백 머리를 한 남자, 헤르메스가 나타났다.
서로를 무표정하게 쳐다보며 침묵하는 둘.
먼저 입을 연 것은 밀레시안이었다.
"무슨 볼일이냐니까?"
8할의 나른함, 그리고 2할의 짜증이 느껴지는 밀레시안의 말투.
허나 그럼에도 헤르메스는 얼굴색이 전혀 바뀌지 않은 채로 그를 바라봤고, 이내 밀레시안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 말했다.
"뭐야, 나 죽이러 왔어?"
밀레시안의 질문.
"아니."
헤르메스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런 헤르메스의 모습에 밀레시안은 참으로 이상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피차 너랑 내가 이렇게 개개인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할 만한 사이는 이미 '양식장' 시절에 끝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헤르메스.
그에 밀레시안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이야기했다.
"이야기 좀 해 봐."
"알고 있었나?"
밀레시안의 재촉에 처음으로 입을 여는 헤르메스.
"뭐?"
"일주일 전 말이야."
"일주일 전? 뭐…… 그 노인네 발할라로 날아갔을 때?"
헤르메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밀레시안을 바라봤다.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이 긍정이라는 것을 알아 챈 밀레시안은 별거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뭐? 너랑 또 모르는 놈이 그 50번 탑 전체에다 결계 친 거? 당연히 알고 있었지."
"……그렇다면 어째서 그 결계를 파훼하지 않았지? 네 눈이라면 쉬울 텐데."
다시 한번 묻는 헤르메스.
그에 밀레시안은 곧바로 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
"거기에다가 귀찮고, 내가 왜 굳이 그런 일을 해야 돼? 애초에 처음부터 나는 매사에 의욕도 없고 귀찮아 죽겠는데?"
"……."
"게다가 내가 뭐 그 의뢰를 수행해서 받은 마력이 필요할 일이 있기는 한가? 그 노인장처럼 지켜야 될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너처럼 그놈 꽁무니에 붙은 것도 아니고."
밀레시안의 대답에 헤르메스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리고는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됐다."
"뭐가?"
밀레시안의 질문.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허나 헤르메스는 그런 밀레시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고-
"저런 씹…… 에휴, 모르겠다."
그런 헤르메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밀레시안은 이내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기에.
####
김시현의 손에 쥐어져 있던 펜릴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고는 이야기했다.
"이걸 왜 네가 가지고 있어?"
"……음? 제자들…… 아니, 와이프들에게 이야기 못 들었어요?"
"?"
김현우가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시현은 멋쩍은 표정으로 자신의 볼을 한번 긁적이고는 이내 김현우가 쓰러져 있을 때 일어난 일을 간단히 설명했고.
그는 드디어 깨어난 지 6시간 하고도 30분 만에 자신이 쓰러져 있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듣고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정령들이 단체로 쳐들어오려고 했다고?"
"물론 저야 실질적으로 탑 위에 가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야차…… 아니, 셋째 형수님 그렇게 말하던데요?"
"……?"
"?"
"?"
"……왜 그렇게 봐요?"
김현우의 멍한 표정을 보며 떨떠름하게 되묻는 김시현.
그에 김현우는 이걸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자신의 입가를 달싹이다가 이내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이야기했다.
"아니, 아니야……."
"?"
"됐고, 이야기나 계속해 봐."
김현우의 재촉에 김시현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뭐, 제가 들은 건 딱 여기까지라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할 말은 없는 것 같은데…… 굳이 추가하면 정령들이 와서 손도 못 쓰고 돌아갔다는 것 같아요."
"뭐……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좀 알 듯 말 듯한데…… 아니, 애초에 이쪽으로는 어떻게 넘어온 거야?"
김현우가 알기로 정령들이 보안을 무시하고 51번 탑으로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세계수의 마력을 이용해서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다른 게 있나?'
잠시 생각하던 김현우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그 생각을 지웠다.
그 녀석들이 쳐들어왔다면 나도 마찬가지로 그쪽에 쳐들어가면 그만이었으니까.
뭐, 그전에 잠시 휴식을 하기는 해야겠지만.
"그래서, 이 펜릴을 네가 가지고 있던 이유가 말상대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거지?"
김현우가 김시현의 손에 쥐고 있는 펜릴을 가리키며 말하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했다.
"뭐, 그렇죠. 우선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경험하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으니 한번 쥐어보세요."
김시현은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에게 자신이 쥐고 있던 펜릴을 넘겨주었고, 펜릴을 넘겨받은 순간.
[간만의 대화로군.]
김현우는 자신의 머릿속을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반응했다.
"……티르?"
[역시 잊고 있지 않을 줄 알았네.]
"어떻게 된 거야?"
[뭐, 우선 이렇게 검을 잡고 이야기하는 것은 좀 불편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보도록 하게.]
김현우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고는 조용해지는 티르.
김현우가 묘한 표정으로 검을 바라보고 있자 김시현이 입을 열었다.
"이야기 좀 하다 오세요."
"뭐?"
김현우가 되물은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시야가 새하얀 빛에 둘러싸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의 눈에서 김시현이 완전히 사라진 뒤.
"……."
김현우는 처음 보는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웅장하다 못해 거대하다고 생각되는 신전.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마치 장식장처럼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인간형 석상의 손에 잡혀 있는 익숙한 무기들이었다.
검, 창, 활, 망치, 둔기 등등등-
몇몇은 낯설었지만 또 몇몇은 그의 눈에 익은 무기들이 마치 전시가 되어 있듯 인간형 석상의 손에 잡혀 있었다.
그런 석상의 위에는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보석처럼 박혀 있었고, 그 끝에는-
"왔군."
-티르가 앉아 있었다.
정말 화려한 신전하고는 어울리지 않게 투박한 돌 의자에 앉아 김현우를 환영하고 있는 티르의 모습.
김현우는 순간 의문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으나 이내 그의 맞은편에 준비되어 있는 의자를 향해 걸어가 앉고는 질문했다.
"여기는 또 어디야? 내면세계?"
"반 정도 정답일세. 내면세계는 맞네만 자네의 내면세계가 아니라 이 검 안의 내면세계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냥 간단히 말해서 이 검이 가지고 있는 마력으로 만든 세계라고 생각하면 되네. 물론 물리력이라고는 전혀 없지만 말일세."
"……아, 그래."
김현우는 딱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어차피 설명을 들어봤자 알아듣지 못할 말이 나올 거라는 패턴을 깨닫고 있었기에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무엇이 말인가?"
"지금 이 상황 말이야."
김현우가 자신이 앉아 있는 돌 의자를 툭툭 치며 말하자 티르는 별것 아니라는 듯 이야기 했다.
"자네도 이미 김시현 그 친구에게 들어서 대충 짐작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굳이 다시 설명을 해보자면-"
티르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일주일 전의 싸움에서 나는 자네에게 졌네, 육체가 완전히 소멸해 버렸지. 그래서 내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검에 내 영혼을 집어넣어서 이렇게 살아 있다네."
"……."
"뭐, 그다음에는 자네가 알던 대로 자네의 처인지 첩인지 모를 여자가 자네와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내려왔고, 나는 할 일도 없는 김에 나를 이긴 자네의 세계가 궁금해서 정보라도 알아볼 겸 여기저기 나를 든 이들에게 말을 걸었지."
-뭐, 나중에는 다들 귀찮다고 자네의 동생인 김시현만이 내 말 상대가 되어줬네만.
"썩 나쁘지는 않았다네."
게다가-
"그렇게 경계하지 말게, 어차피 나는 자네에게 졌고, 육체와 권능이 소멸한 이상 자네와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말일세. 애초에 더 이상 싸울 생각도 없지만 말이네."
"……싸울 생각이 없다고?"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
티르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자 김현우는 의심 어린 눈길로 바라봤다.
한동안의 침묵.
그러나 김현우는 의심 어린 눈길을 거두는 것 대신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일주일 전에도 이런 느낌이었던가?'
지금 김현우의 눈앞에 보이는 티르의 모습은 그저 사람 좋은 외팔이 노인의 모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일주일 전에 느껴지던 위압감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
물론 그것은 그저 분위기일 뿐이었으나 김현우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위화감으로 다가왔고 이내 그런 김현우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티르는 이야기 했다.
"만약 내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라져서 그런 겐가?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일세. 지금 내게는 친우들의 권능이 남아 있지 않으니 말일세."
"권능이라면……."
확실히 그와 일전을 치를 때 그가 친우들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듣기는 했었다.
"이미 내 권능들은 남아 있지 않네. 내 육체가 소멸함에 따라 자연스레 모두 사라져 버렸지."
그의 말에 김현우는 인간형 석상들이 들고 있는 낯익은 무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기에 있는 것들은……?"
"저것들은 모두 내 기억 속에 남은 형상들일 뿐이지. 한 마디로 자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네. 애초에 내가 지금 당장 육체를 얻는다고 해도 이미 친우들…… 그러니까 '신'들의 권능을 모두 잃어버린 나는 자네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테니 말이야."
"……."
그런 티르의 말에 한동안 의심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그제야 눈길을 거뒀고 티르는 입가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그럼 이제 슬슬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군."
"이야기라면……?"
"자네도 저번에 듣고 싶다고 하지 않았는가?"
"뭐, 확실히……."
시간을 끌려고 듣고 싶다고 했던 것 같긴 한데 그게 정확히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는 사실 잘 몰랐기에 애매하게 대답을 한 김현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티르는 이내 곰곰이 생각하는 듯 하곤 말했다.
"뭐, 내가 하는 이야기는 아마 자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네."
"?"
"그도 그럴 것이…… 자네, '눈동자'와 손을 잡고 있지 않나?"
"……!!"
김현우는 두 눈을 부릅뜨며 티르를 바라봤다.
358화. 새로운 진실이 꽤나 많다. (3)
"……."
김현우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티르를 노려보자 그는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설마 비밀이었나?"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냐라……. 처음 예상한 것은 50번 탑에서 자네가 있는 51번 탑으로 넘어올 때 사용했던 통로를 보며 대충 예상했지."
"……통로?"
김현우는 그렇게 반문하며 50번 탑과 연결되어 있는 통로를 떠올렸고, 티르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 이미 그 통로에서부터 짐작하고 있었다만?"
"……그 통로에서 어떻게?"
김현우가 반문하자 이번에는 티르가 요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설마설마 하네만, 자네 설마 그 통로가 '눈동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겐가?"
티르의 말에 김현우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군. 대단하다고 해야 하려나?"
"……그보다 그게 무슨 소리야? 50번 탑과 51번 탑을 연결하고 있는 통로가 눈동자와 관련되었다는 소리는 뭔데?"
김현우의 물음에 티르는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우고는 이야기했다.
"솔직히 정말로 모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네만…… 지금 50번 탑과 51번 탑을 잇고 있는 통로는 바로 그 눈동자의 업으로 만들어진 통로일세."
"뭐? 정말로?"
과도하게 놀라는 표정을 보이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티르.
"자네, 정말로 모르고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을 몰랐다는 것은 좀 말이 안 되는데……."
"?"
"뭘 그런 표정을 짓고 있나? 물론 문을 열지 않고 통로를 지나지 않으면야 눈동자 특유의 업이 느껴지지 않아서 모를 수도 있네만 자네는 이미 그 통로를 몇 번 지나다닌 것 아닌가?"
"……그렇지?"
"그런데도 모르고 있다니."
티르는 작게 고개를 젓더니 이내 확정하듯 말했다.
"아무튼, 자네가 눈동자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그 통로를 보고서 하게 되었네. 뭐 그 이후에도 몇 가지 걸리는 게 있기는 했네만 제일 큰 것은 그것이었지."
티르의 말에 순간적으로 복잡한 표정을 짓던 김현우는 물었다.
"근데, 그걸 어떻게 안 거야?"
"말하지 않았나."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그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것이 눈동자의 업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건 이미 눈동자를 한번 만나봤다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질문에 티르는 고개를 저었다.
"유감스럽네만 나는 한 번도 눈동자를 만나본 적이 없네. 다만 그 업을 쓰는 자는 만나본 적이 있지."
게다가 내가 앞으로 할 이야기도 그 이야기에 관한 것이지.
티르의 말에 김현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티르는 이내 살짝 고개를 낮추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충 해야 할 이야기를 정리하는 듯한 모습에 김현우는 잠자코 그의 정리가 끝나기를 기다렸고,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양식장'에 대해서, 혹시 알고 있는 게 있는가?"
티르는 그렇게 서두를 던졌다.
"양식장……? 뭐, 그냥 단순히 양식장이라면 대충 어떤 건지 알고 있기는 한데."
"이런, 그냥 이야기하다 보니 질문이 잘못됐군. 내 말은 이 탑이 생기기 이전의 이야기를 알고 있냐는 의미로 물어보는 걸세."
"……과거 이야기를 말하는 거야?"
"그러네만,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으니 간단하게 설명해 주도록 하겠네."
티르는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관리기관이 관리하고 있는 이 공간에 총 50개…… 아니, 자네의 것까지 해서 총 51개의 탑이 세워져 있네만, 과거에는 이곳에 탑이 세워져 있지 않았네."
"그럼?"
"벽이 세워져 있었지."
"……벽?"
"그래, 모든 탑들이 있는 공간을 동그란 원이라고 가정하고 이야기한다면 그때에는 동그란 원을 총 세 등분으로 나누는 벽이 쳐져 있었네. 그리고 그 세 등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각 공간에는 각각 다른 이들이 살고 있었네. 아니-"
-다른 이들이라기보다는 그저 신화로 표현할 수 있네만.
티르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신화?"
"그렇네. 총 세 등분으로 나누어진 공간에 들어와 거주하고 있던 이들은 전부 매개체로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종족으로서 '신화'를 쌓은 이들이었네."
티르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추가로 말을 이었다.
"물론 각 신화를 자칭하는 명칭들이 너무 많네만 그냥 자네가 알아들을 수 있게 간단히 말하자면 그 세 등분의 공간 속에는 각각 '올림푸스', '아스가르드', '에린' 이렇게 세 신화가 각 공간 안에 있었네."
티르의 말에 김현우는 문득 그 사이에 낯익은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스가르드라면……."
아스가르드, 그것은 분명 김현우가 티르와 일전을 치를 때 그 단어를 말했던 적이 있었다.
"자네도 여기까지 들었으니 대충 예상했겠네만 나는 옛날 아스가르드의 '신' 중 한 명이었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의 궁금증을 채워주고는 한 번 더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렇게 세 신화가 각각의 넓은 공간에서 이 좁은 공간으로 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였네. 마력이 부족했거든."
"마력?"
"그렇네. 자네가 '마력'에 대해 얼마나 상세하게 알지는 모르겠네만 마력은 정말 당연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중요한 것일세."
-마치 공기와도 같은 것이지.
티르의 말에 김현우는 대충 다음을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대충 예상이 가기는 하는데, 한 마디로 원래 살던 곳에 어떤 이유로 인해 마력이 고갈돼서 골골거리던 중에 관리기관에서 접촉을 해서 이쪽으로 넘어왔다…… 뭐 이런 이야기지?"
"!"
김현우의 말에 놀랐다는 듯 그를 바라보는 티르.
"자네, 사실 원래 알고 있었던 것 아닌가?"
"……대충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럴 것 같아서 이야기 한 건데?"
"신기하군. 싸울 때 보니 그리 지능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
"뭐?"
"아니, 내가 잠시 실언을 했군. 노인이 되면 쓸데없는 넋두리가 많아져서 말일세. 허허허."
"……."
김현우는 순간 뭐라고 할까 했으나 티르는 눈치 빠르게 그가 다른 말을 할 타이밍도 주지 않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무튼 자네의 예상대로, 이유는 모르겠네만 마력의 고갈이 점점 심해지는 차에 관리기관 쪽에서 손을 내밀어 넘어온 게 맞네. 사실 그때 입장에서는 우리에게 전혀 나쁠 것이 없었으니."
"관리기관이랑 원래 어느 정도 선이 있었던 거야?"
"……그런 건 없었네만."
"그런데 그렇게 간단히 제안을 수락한다고?"
김현우가 '너희들 바보 아니야?'라는 표정으로 티르를 바라보자 그는 변명하듯 이야기했다.
"우리라고 전혀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네. 허나 그때 당시에는 상황이 상황이었던 터라 그들의 제안이 달콤하게 들렸지."
-게다가 조건 자체도 사실 그렇게 의심할 만한 건 아니었네. 딱 지금의 탑주들이 관리기관과 한 계약과 비슷했지.
"아무튼, 사실 그렇게 들어왔을 때 만해도 사실 나쁘지는 않았네. 아니, 오히려 나쁘다기보다는 너무 좋았지."
티르는 그때를 회상하듯 잠시 시선을 위로 올리고는 중얼거렸다.
"그때의 그곳에는 부족한 것이 하나 없었지. 아스가르드의 백성들이 충분히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마력이 꾸준히 공급된 데다가 영토 자체도 엄청 넓은 것은 아니었네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네."
다만-
"문제는 관리기관이 갑작스레 폭군처럼 변하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되었지."
"……갑자기?"
"뭐, 정확히 말하면 '갑자기'는 아니었네. 관리기관이 그렇게 변한 이유는 바로 내가 말했던 '눈동자' 때문이었으니까."
"눈동자 때문이라고?"
"그래,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눈동자'와 협력하는 자들이 신화 사이사이에 숨어 있다는 소문이 났을 때였지."
티르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네. 풍부하던 마력은 한순간에 끊기고, 든든한 조력자였던 관리기관의 그 남자는 갑자기 미친놈처럼 돌변해 눈동자의 끄나풀을 찾는다는 이유로 우리를 마구잡이로 공격하기 시작했네."
-물론 제일 먼저 죽은 것은 백성들이었지.
"그래 놓고 하는 말은 더 가관이었네. 갑작스레 나타나서 백성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는 한다는 말이 '끄나풀'을 데리고 온다면 이 이상 죽이지는 않겠다더군."
서서히 굳어지는 티르의 표정.
김현우는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고, 티르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그때 일어났던 일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당연히 반기를 들고 저항했으며.
올림포스와 에린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관리기관에 저항했으나 그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올림포스는 한 명의 생존자를 제외한 모두가 죽음을 맞이했고, 그것은 에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아스가르드의 경우에는-
"……모조리 숨는 데 성공했다고?"
김현우의 물음에 티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숨는 것은 말 그대로 미방책일 뿐이었네. 당장 마력은 이미 바닥날 대로 바닥난 상태였던 데다가 어차피 그 이상 버티고 있어봤자 결말은 뻔했네."
하지만-
"거기에서 더 골치가 아팠던 것은 올림포스와 에린에서 끄나풀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네."
"……올림포스와 에린에서 끄나풀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건."
"그래, 자네의 예상대로 눈동자의 끄나풀은 아스가르드의 신 중 한 명이라는 소리였지."
-그렇기에 내부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고, 이미 그 사실을 이후로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배척하기 시작했다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외부의 적을 두고 당장 살아갈 터전이 없어졌다고 서로에게 검을 돌리는 꼴은 말일세. 게다가 그 신들도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시점이었지."
"몇 명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는 건……."
"이미 전부 죽었다는 소리일세. 그 남자에 의해서 말일세."
티르는 마치 기억하기 싫은 과거를 기억하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 나는 제안을 받았네."
"……제안?"
"그래, 그 남자에게서 온 제안이었지 아스가르드의 신 중에 있는 '눈동자'의 끄나풀을 죽인다면, 신들을 모두 죽여 버린 다른 곳과는 다르게 이곳은 기회를 준다고 하더군."
"기회……?"
"그래, 죽었던 신들을 살려주겠다는 제안이었지. 심지어 내가 끄나풀을 찾는데 필요에 의해 죽였던 신들도 모조리 다시 살려준다는 파격적인 제안."
"……왜 네게만 그런 제안을 했는데?"
"그 시점에서 이미 살아남은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꽁꽁 숨어 그 남자라도 찾아낼 수 없는 공간 속으로 도피한 뒤였네."
그리고-
"나는 그와 싸우다 패배했던 때였지."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티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허공을 바라봤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한동안 가만히 있던 그는, 힘겹게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그 제안을 받은 뒤 나는 그 남자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아 그 제안에 나름대로 고뇌 하며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돌아갔네."
사실 끄나풀만 죽인다면 죽었던 친우들을 다시 되살릴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말일세.
"……근데 신을 살린다는 소리를 그렇게 간단하게 믿어도 되는 거야?"
"믿을 수밖에 없었네. 그는 분명 그때 싸움에서 패배해 목숨을 잃었던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되살려냈으니까."
"되살렸다고?"
"그래, 창조신이라고 불리는 자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신의 소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더군."
티르는 여전히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고, 곧-
"그리고, 결국 그 고민에 끝에, 나는 어리석게도 남아 있는 친우들을 죽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네."
-티르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359화. 새로운 진실이 꽤나 많다 (4)
어두운 공간 속.
"단서를 찾았어?"
"예."
데블랑의 말에 화색 어린 목소리로 답한 어둠속의 그것은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았네?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의 말에 이번에는 데블랑의 옆에 있던 붉은 눈동자. 베드로가 이야기했다.
[……솔직히 전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곳에 있어서 당황했습니다.]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곳?"
[예. 말하셨듯 저는 무조건 단서가 예전 '양식장'이 지어져 있는 곳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이제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럼?"
"오히려 그곳에 다다를 수 있는 통로는 양식장과는 조금 위치가 다른, 50번과 51번을 이어주는 탑에 있었습니다."
"흐응, 거기에 있었다는 말이지?"
[예.]
"뭐, 진짜로 의외인 곳에 있기는 했네."
가볍게 수긍하는 그것.
허나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그것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한 모션을 취하며 이야기했다.
"……근데, 조금 이상한데?"
[무엇이 말입니까?]
"나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닌데, 분명 내가 말하지 않았나? 단서는 옛 아스가르드가 있었던 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말이야."
그것의 말에 데블랑과 베드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분명 단서를 찾기 시작할 즈음부터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그것은 그들의 대답에 조금 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야기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이상하단 말이야? 애초에 50번과 51번 탑 근처에는 내 업이 있는 게 불가능할 텐데……."
[그렇다면……?]
"뭐, 정말로 우연으로라도 그 탑이 관리기관의 눈에 띄지 않고 거기까지 이동했을 수도 있겠다……는 가설도 있기는하지만……. 상식적으로 그 확률은 0%에 가깝단 말이야?"
그러면 결국-
"누군가가 일부러 내가 그곳에 남겨놓은 유일한 단서를 그곳으로 옮겨놨다는 이야기거든?"
그것의 말에 데블랑과 베드로의 눈동자가 약간은 굳어졌다.
만약 진짜로 그렇다면 그 통로의 존재를 아는 이가 지금 일을 치르는 자신들 말고 또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허나 그것의 말에 의해 침묵은 얼마 안 가 깨졌다.
"뭐,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게 무슨?]
"누가 내 단서를 거기다가 가져다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요점은 통로를 옮겨놓은 녀석이 내 업을 소멸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너희가 내 업을 찾았다는 거니까."
[하지만 혹시 함정일 수도…….]
"함정일 확률은 거의 없을걸? 애초에 나랑 척을 진 녀석들은 관리기관밖에 없는데…… 그 녀석이면 함정을 팔 필요도 없이 내가 애초에 이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통로를 완전히 뭉개버렸겠지."
[……확실히.]
데블랑이 일리가 있다는 눈꼬리를 한번 떨자 그것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우선 내 단서를 찾았으니까 그 통로를 회수해서 좌표를 찾아봐. 아마 그것도 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그것의 질문에 베드로는 답했다.
[우선 직접 만져봐야 정확히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계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 알았어. 그렇다고 해서 단서를 얻었다고 너무 날뛰지는 말고, 분명 '양식장'때도 통로를 얻는 데까지는 성공한 뒤에 실패했으니까 말이야."
그것의 말에 명심하겠다는 듯 조심스레 눈을 감는 두 눈동자.
그 모습을 본 그것은 이내 더 이상 할 말은 끝났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아무튼, 그럼 다음에 들고 올 정보는 기대해 봐도 되겠네. 그렇지?"
[물론입니다.]
굳게 대답하는 베드로.
그에 데블랑은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인사를 하기 위해 눈을 감으려는 중 문득 든 생각에 눈을 뜨고는 이야기했다.
"하나만 더 보고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아직 보고할 게 더 남아 있어?"
그것의 물음에 데블랑은 눈동자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는 얼마 전 검신과 김현우가 싸웠을 때 50번 탑에서 일어난 일을 그것에게 보고했고.
그 말을 듣고 있던 그것은 왠지 묘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으나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만약 찾아 볼 수 있다면 그것에 관해서도 찾아봐."
그것의 말.
그에 눈동자들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
"……아무튼, 결국 그렇게 돼서 나는 결국 살해자(殺害者)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네."
티르의 말에 김현우는 아무런 말없이 그가 해주었던 말을 조용히 곱씹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해보면 결국 너는 남자의 제안에 따라 몰래 숨어 있는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모조리 죽였고……."
"그중에서 '오딘'이 눈동자의 끄나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네. 심지어 지금 생각해 보면 얼핏 그는 자네와도 비슷하더군."
"나와 비슷하다고?"
"생김새라든가 사용하는 기술이 비슷하다는 게 아닐세. 그것보다는 패턴이 비슷하더군."
"패턴?"
"그래. 이렇게 이야기하면 친우를 깎아내리는 것 같아 좀 그렇네만, 오딘은 전투에 있어서는 내게 상대가 되지 않았네."
-뭐, 그것은 그저 특성의 차이지만 말일세.
"그리고 오딘이 눈동자의 끄나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와 나의 차이는 예전과 별다를 바가 없었지. 그는 내게 시종일관 밀리기만 했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는 깜짝 놀랄 정도로 성장하더군. 마치 얼마 전 나와 싸웠던 자네처럼 말일세."
"……성장한다고?"
"그래, 전투를 하며 성장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네. 특히 오딘이나 자네같이 이미 일정 이상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이들은 애초에 '전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치는 이미 전부 다 얻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정도지."
그런데도-
"그는 성장하더군. 어느 한순간을 기점으로 더더욱 날카로워지고, 어느 순간에는 바로 내 턱밑에 자신의 창을 찔러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마치 자네처럼."
"……."
"그리고 거의 마지막이 돼서는 그 통로에서 느꼈던 눈동자의 업을 약간 끌어내서 사용하더군. 뭐, 자네는 그 업을 사용하는 게 아닌 내 기술을 그대로 따라한 게 좀 달랐네만."
아무튼, 자네의 패턴 자체도 내가 생각하던 것에 약간의 확신을 가져다주었지.
"자네가 눈동자와 손을 잡고 있었다는 생각에 말일세."
티르의 말이 끝나자 김현우는 아주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내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이야기했다.
"……그럼 너는, 눈동자를 싫어할 것 같은데. 아니야?"
김현우는 티르의 이야기를 모조리 들었다.
그가 결국 남자의 제안에 따라 남아 있던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오딘을 죽여버린 것부터 시작해서,
결국 그 남자가 티르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에게 그저 아스가르드의에 속한 신들의 업만을 넘겨주었다는 것을.
"……."
김현우의 물음에 순간 침묵한 그.
그러나 곧 티르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닐세. 솔직히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죽였을 때만 해도 눈동자에게 분노가 차 있던 상태였네만…… 지금은 아닐세."
"……어째서?"
"진실을 아니까. 자네, 내가 처음 했던 말 기억하고 있나? '양식장'이라는 말 말일세."
"……기억하고 있어."
"지금이야 대충 예상하고 있겠지? 양식장은 바로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을 말하고 있는 것일세. 물론 지금이야 탑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네만."
"……."
"왜 그때 우리가 살았던 땅의 명칭이 양식장인 줄 아는가? 그건 바로 우리가 그 남자의 가축이었기 때문일세. 그는 그저 우리를 좋을 대로 이용한 것이지. '업'을 모으기 위해서 말일세."
그리고 그렇기에-
"나는 눈동자를 증오하지 않는다네. 어차피 오딘이 눈동자의 끄나풀이 아니라고 했더라도…… 아마 우리는 같은 파멸을 맞이했을 걸세."
"……."
"아니, 오히려 어느 시점에 와서는 눈동자에게 고맙더군."
"……?"
"어차피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시점부터 파멸은 예정되어 있었네. 다만 눈동자 덕분에 그에게 자그마한 엿을 날려줄 수 있지 않았는가?"
"……."
"게다가 거기에 덤으로…… 아주 조금이나마 죄인(罪人)으로서 그들이 있던 자리와 이름을 지켰으니 지금의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네."
티르는 그렇게 말하며 줄곧 굳어져 있던 얼굴을 조금이나마 폈다.
물론 굳어져 있던 얼굴을 조금 풀었다고 해서 표정이 밝아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이전보다 티르의 얼굴은 편해 보였다.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고민하는 듯하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야기 했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그럼 그 옆에 따라다니는 헤르메스도?"
"그는 나와 같은 출신은 아니네만 올림포스 출신이지."
"……조금 전에 네가 다른 신들은 모조리 죽었다며?"
"그의 경우에는 올림포스의 신들이 죽기 전에 그 남자에게 붙었지."
"……남자한테 붙었다고? 다른 신을 버리고?"
김현우의 말에 티르는 잠시 침묵하다 이야기했다.
"뭐, 우선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면 그렇네."
티르의 말에 김현우는 짧게 혀를 차고는 이내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럼, 결국 네가 말한 그 남자…… 그러니까 관리기관의 목적은 업을 모으는 거네?"
"그렇네."
"이유가 뭔데?"
김현우의 질문.
그에 티르는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그것까지는 모르네."
"……응? 모른다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나? 뭐, 애초에 처음부터 그의 옆에 붙은 헤르메스라면 뭐라도 조금 알고 있을 확률이 있겠네만…… 나 같은 경우는 애초에 업을 받을 때 빼고는 그 남자를 만난 적이 없네."
아니-
"애초에 그에게 새롭게 '양식장'을 '탑'으로 조성하겠다는 이유를 대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저 장기말로 사용되었던 것이 나인데, 내가 무슨 대단한 진실을 알고 있겠나."
티르의 말에 김현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또 그렇네."
김현우의 납득.
티르는 그런 김현우를 보며 대답했다.
"아무튼, 내가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까지일세. 사실 결론을 생각해 보면 이런 구질구질한 과거 이야기까지는 굳이 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군."
티르의 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아니, 뭐 나름대로 도움이 되기는 했으니까 나쁘진 않네."
무엇보다 50번 탑과 51번 탑을 연결하고 있는 통로가 눈동자의 업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정보이다 못해 그 자체가 현재 막혀 있는 조사를 뚫을 수 있는 길이었다.
……뭐, 이미 그 사실은 데블랑과 베드로가 조사를 끝마친 상태였지만 그것을 모르는 김현우는 쓸 만한 정보를 얻었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그렇게 김현우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줄곧 그 뒤에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았던 티르가 돌연 입을 열었다.
"어쩌면 남자의 계획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도 있겠군."
"헤르메스를 말하는 거야?"
"아니, 그는 아닐세. 다만 그 남자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한 명 정도 내가 회유할 수 있는 이가 있기는 하네."
"……그게 누군데?"
김현우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던 티르는-
"탐왕(貪王)."
-이내 그렇게 이야기했다.
360화. 남자라면 쇼부를 봐라 (1)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그곳은 마치 관리기관이 있었던 관저의 풍경과 흡사했으나 이곳에는 관저 같은 건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새하얀 공간.
만약 이곳에 들어온다면 그대로 공간감각과 방향감각을 통째로 잃어버릴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그 안에는 한 명의 인영이 그 공간에 앉아 있었다.
무척이나 낡아 보이는 거적때기를 몸 전체에 뒤집어써서 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 이외에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바로 사슬에 묶여 있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냥 들기도 힘겨워 보이는 무거운 사슬들이 그를 중심으로 X자를 만들어 거적때기를 휘감고 있었다.
마치 그를 이곳에 봉인이라도 해 놓으려는 것처럼.
사슬에 감겨 있는 거적때기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잠깐 잠깐 움직였다.
찰그락-
찰그락-
몸을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찰그락 소리.
허나 거적때기 안에 들어 있는 그것은 자신에게 감겨 있는 사슬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저 아주 약간의 떨림만을 계속할 뿐이었고.
찰그-
타그르륵-!
이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조금씩 움직임을 보이던 거적때기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마치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처럼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거적때기.
"……."
그 모습을 저만치서 지켜보고 있던 헤르메스는 이내 몸을 돌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우드드득-
"서방님? 제대로 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으득-!
"물론 저희는 서방님의 뜻에 따를 생각입니다. 정말입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서방님을 내조하는 아내들이니까요."
"네, 그럼요."
빠지지직-!
"……."
"아……."
김현우는 병실 침대에 앉아 나지막한 탄식을 내지르며 자신의 앞에 일어난 일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뭐 사실 특별하게 일어난 일은 아니다.
그저 티르를 만나고 내면세계에서 빠져나온 뒤, 언제나와 같은 상황이 김현우를 반겨주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흠~ 너도 남자라면 빨리 이 아이들에게 적당한 훈수를 내려주거라."
까드드드득-!
-이번에는 아무래도 좀, '언제나와'같은 상황이 조금 과도하게 일어난 것 같았다.
"……."
"……."
"……."
……일어난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
김현우가 내면세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본 풍경.
그것은 박살 나 있는 병실이었다.
마치 실내에 폭풍과 지진이 연속으로 쓸고 가면 이런 느낌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한 풍경.
정말 기적같이 김현우와 김시현이 있던 근처 공간은 애초에 먼지 한 톨 튀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으나 그 이외의 지역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저, 전 가볼게요."
그 뒤에 들리는 김시현의 조막만한 목소리.
그에 김현우는 곧바로 머릿속의 위기를 감지하고 김시현의 손을 잡아챘다.
"야, 야- 어디가?"
"아……아니, 저는 이야기 다 끝났는데요?"
"아니, 아까 할 말있다면서?"
"제, 제가요?"
눈에 띌 정도로 과장되게 시선을 돌리며 김현우를 노려보고 있는 그녀들을 바라본 김시현은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아뇨? 그런 적 없는데요?"
"아니, 있다며!"
지금 네가 가면 뒤지니까 살려줘. 라는 속뜻을 확실하게 내포하고 있는 김현우의 외침.
"아……아뇨, 전 없어요."
허나 그런 김현우의 소리 없는 외침은 김시현의 형, 죄송해요. 살 사람은 살아야죠. 라는 뜻을 내포한 말 한마디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김시현은 혹시나 그녀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릴까 걱정하며 눈치를 엉망진창이 된 병실에서 걸음을 옮겼고.
"야, 김시현! 너 임마 내가 말한 것도 다 안 들었으면서 어디가?!"
"나머지는 문자로 하세요!"
김시현은 결국 김현우가 넘겨놓은 최후의 한 수도 가볍게 받아 넘겨버린 채 이미 반쯤 박살 나있는 문을 열고 도망가 버렸다.
호다다닥! 이라는 의성어가 들릴 정도로 빠르게 병실에서 멀어져 가는 김시현의 발소리를 어처구니없이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조심스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들을 바라봤다.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아내들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야차.
물론 그 자신만만한 표정 너머로 은근히 분노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김현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김현우는 기본적으로 이런 인간관계에 대해서 그리 생각을 깊이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직설적으로 말하고.
혹여라도 자신과 대립하는 놈이 있다면 우선 싸우고 본다.
한마디로 그의 인간관계는 그냥 일직선이라고 말하는 게 좋을 정도로 굉장히 심플하기에 그는 딱히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렇게 곤란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
"……."
"……."
그는 지금 이 상황에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위기가 아닌 엄청난 위기.
"빨리."
"말하시는 게."
"어떨까요, 서방님?"
"……내가 너희들 그거 하지 말라고 했지?"
마치 둘이서 한 몸이 된 듯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말하는 미령과 하나린.
아니, 분명 반년전만 해도 개년이니 썅년이니 열심히 서로 욕을 박고 서로를 죽일 듯이 싸웠으면서 요즘에는 마치 처음부터 함께했던 반쪽짜리 존재 같은 느낌으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덤으로 김현우를 점점 더 압박에 몰아넣는 것은.
"……빨리 답을 내려줬으면 좋겠구나."
"……."
슬슬 얼굴에 웃음이 아니라 진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야차의 모습이었다.
지금 와서는 은근히 등 뒤에 마력이 넘실거리는 게 두 눈에 보일 정도로, 입가는 웃고 있지만 진심을 내고 있는 그녀의 모습.
"……."
김현우는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침묵.
"……."
"……."
"……."
누가 먼저 말하지 않고, 그저 긴 침묵이 그들을 덮친다.
미령과 하나린은 더 이상의 할 말은 없다는 듯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것은 야차도 마찬가지.
김현우는 그 압박감 속에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멈추기 위해 저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쫄 필요가 없다.'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김현우는 여기에 있는 모두가 아무리 난동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전부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뭐, 힘으로 진짜 제압할 수 있다고 해서 다짜고짜 힘으로 제압한다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요점은 김현우가 그녀들보다는 강했다.
그것은 곧 김현우가 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라고, 김현우는 지금 이곳과는 전혀 맞지 않는 논리를 자신의 머릿속에다 억지로 집어넣고는 몇 번이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후우-"
한숨.
"……."
"후……."
또 한숨.
"……."
도합 세 번의 한숨으로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한 뒤 김현우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들을 바라봤다.
여전히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들.
그에 김현우는 한껏 굳은 표정으로 그녀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치고는-
"……."
마주치고는-!
"……."
"……."
"……."
"……여기는 공공장소니까, 이 이야기는 나중에 퇴원하고 나서 말하면 안 될까?"
……그렇게 말했다.
직선적인 인간관계 덕분에 딱히 거절이나 유연하게 말을 돌릴 생각조차 안 했던 김현우의 머릿속에서 나온 말 치고는 나름대로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기에 김현우는 속으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걱정 마세요, 서방님. 애초에 이 건물에는 서방님과 저희밖에 있지 않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서방님의 절대 안정을 위해 전부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뭐라고?"
"다른 곳으로 전부 옮겼습니다."
"아니 그게 가능해?"
"가능합니다. 어차피 이 병원은 저희 길드에서 사들인 거니까요."
미령의 말에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학 병원을 사?"
"예. 건물을 포함해서 재단까지 전부 매입했습니다."
"……아니, 대학 병원을 왜 사?"
"그야 당연히 서방님을 안정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미령의 말에 김현우는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야기했다.
"아니, 그러면 그냥 이 병실 하나만 있어도 되잖아? 굳이 살 필요까지 있어?"
김현우의 말에 미령은 고개를 슬쩍 갸웃하더니 이야기했다.
"굳이 말입니까……?"
"…….굳이라니."
"병실을 빌리려면 귀찮지 않습니까?"
"?"
"우선 계약서 작성을 좀 많이 해야 합니다. 게다가 괜히 밤사이에 있는 문제 덕분에 괜히 시끄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자는 밤사이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무엇보다 통제가 쉽습니다."
"……무슨 통제?"
"……여러 가지로?"
'도대체 내가 이쪽에 신경 쓰지 않는 사이에 뭘 하고 있는 거야?'
김현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미령과 하나린을 바라봤으나 이내 되었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통제하고 싶으면 그냥 군대를 만들지 그러냐…… 아니, 차라리 협회를 돈으로 사는 것도 괜찮겠네."
김현우의 농담 섞인 말에 미령은 갑작스레 시선을 오른쪽을 돌렸다.
"?"
"……."
그리고 김현우의 시선이 돌아감에 따라 자연스레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는 하나린.
김현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진짜 샀어?"
"어쩌다 보니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아니, 도대체 뭘 하면 협회를 살 수 있는 건데?"
김현우의 황당한 표정을 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는 두 와이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야차는 기회라는 듯 기묘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이야기했다.
"어쩌다 보니까가 아니지 않느냐?"
"……!"
"……!"
야차의 말에 무섭도록 그녀에게 집중되는 시선.
허나 야차는 그녀들의 눈빛 공격 따위는 가볍게 넘길 수 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김현우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네 와이프들은 협회를 먹으려고 무력시위를 했다."
"무슨 그런 거짓을!"
"우리는 단순히 협조를 좀 도와달라는 식으로 말한 것뿐이에요!"
"이러나저러나 결국 협회 위에 거대한 운석을 띄운 건 너희들 아니느냐?"
"큭."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무는 그녀들.
그에 괴력난신은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김현우에게 말했다.
"이것 보거라, 이 아이들은 아직 내조를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니라, 그러니 나를 정처로 삼아 내조를 하게 하는 게 훨씬 좋지 않겠느냐?"
"닥치세요, 할망구!"
"무……뭐라? 지금 무어라고 했느냐?"
"할망구라구요! 좀 늙었으면 빠져 계세요! 애초에 원래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게 누군데!?"
갑작스레 자신들끼리 싸우기 시작하는 그녀들.
말로서 시작한 싸움은 점점 그녀들이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주변의 공간이 박살 나기 시작했으나 김현우는-
"휴-"
그 모습을 보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살았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저 아주 단 한순간 유예가 늘어난 것뿐이었으나, 김현우는 무척이나 소중하게 잠깐이나마 늘어났던 유예를 즐겼다.
361화. 남자라면 쇼부를 봐라 (2)
그녀들의 싸움으로 인해 거대한 대학병원의 상층이 엉망진창으로 변한 지도 일주일.
김현우는 그 혼란의 시기를 어떻게든 빠져나와 결국 병원에서 퇴원했다.
'……사실 일주일 전에도 퇴원해도 됐을 텐데.'
이미 일주일 전 김현우가 눈을 떴을 때, 이미 그는 충분히 밖의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충분히 회복된 상태였건만 그의 와이프들은 김현우의 퇴원을 반대했다.
뭐, 겉으로는 순전히 전투의 피로가 가실 때까지 쉬라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김현우의 눈가에 다크서클이 조금 더 짙어진 것으로 설명이 가능했다.
"으음-"
피곤한 표정으로 하품을 하며 조수석에 앉아 있는 김현우를 본 김시현은 이야기 했다.
"일주일 동안 많이 피곤했나 봐요?"
"말도 마라."
짧게 말하며 또 한번 하품을 한 그는 이내 머리를 긁적거리며 시선을 돌려 밖을 보았다.
이제 막 하남 사거리를 지나고 있는 차량.
그런데-
"……?"
김현우는 왠지 주변이 묘하게 낯설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뭐지? 이 알 수 없는 익숙함은?'
물론 하남 거리야 미령이 장원을 만들었을 때부터 자주 돌아다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애초에 그가 살던 곳도 아닌 데가 이렇게 익숙할 리 없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조금 더 창밖의 풍경을 자세하게 관찰했고.
"아……."
이내 곧 김현우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이 거리에 익숙함을 느끼는지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야, 저기 걸어 다니는 애들 패도 길드원들 아니야?"
그것은 바로 하남의 거리를 걸어 다니고 있는 이들 때문이었다.
물론 김현우가 패도 길드원들의 얼굴을 일일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패도 길드원의 숫자는 많다.
정말 많다.
게다가 심지어 얼굴에는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니는데 김현우가 어떻게 얼굴만으로 그들이 패도 길드원이라는 것을 알까?
하지만 지금 김현우가 그들이 패도 길드원인 것을 알아보고 있는 이유는 바로 평상복으로 보이는 그들의 옷 위에 아주 익숙한 가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깨에 메어져 있거나 허리춤에 달려 있는, 김현우 흑역사의 산물인 가면.
지금 인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그 가면을 허리춤이나 어깨에 메고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얘들이 이제 가면 장사도 하는 거야?"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창밖의 풍경을 보며 눈을 질끈 감는 김현우.
그에 김시현은 대답했다.
"아닐걸요? 아마 저기 걸어 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패도 길드원 일 거예요."
"뭐? 저기 걸어 다니는 애들이 전부?"
물론 피크 때처럼 엄청난 게 많은 인구가 유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 김현우의 눈에 보이는 이들만 해도 그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네, 얼마전에 패도 길드가 하남에 있는 땅이랑 아파트를 닥치는 대로 사서 전부 패도 길드원의 숙소로 사용하기 시작했거든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김시현.
김현우는 어이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아니, 그게 돼? 아니, 분명 돈이 있으면 모든지 할 수 있다곤 해도…… 뭔가 그런 법 같은 거 있지 않냐?"
"법이요?"
"그래."
한국에는 법이 있다.
"법은 누가 만들었는데요?"
"……사람이겠지?"
"그쵸? 그럼 사람은 뭘로 움직일까요?"
"……돈?"
"네."
김시현은 더 이상 말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듯 앞을 바라봤고, 김현우는 김시현의 논리에 저도 모르게 납득하며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차를 몰았을까.
"도착했어요, 형."
"안에 지크프리트는 있지?"
"네. 게다가 아브와 노아흐도 와 있어요."
"그 둘도? 일주일 전에는 올라갔다고 하지 않았나?"
"형한테 전할 말이 있어서 다시 내려왔다고 하더라고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량에서 내렸고, 이내 곧 무척이나 익숙한 장원의 건물을 두 눈으로 확인한 뒤 김시현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너는 간다고?"
"네. 저도 이번에는 회의에 참석해야 하거든요."
"회의?"
"네. 정부주관으로 하는 회의 있어요."
"……정부주관 회의라고? 옛날에도 그런 게 있었나?"
"당연히 옛날에는 없었죠. 근데 예전과는 다르게 헌터들의 능력이 점점 더 강해지니까 정부쪽에서도 슬슬 힘을 쓰더라고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알았어."
"네, 그럼 회의 끝나고 봐요 형."
김현우의 말에 스스럼없이 차량을 출발시키는 김시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문을 지키는 패도 길드원들에게 간단히 손짓으로 인사를 마친 뒤 곧바로 장원 안으로 들어가 그들이 모여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넓은 방으로 걸음을 옮겼고.
"앗 왔다!"
김현우는 곧 건물 안에 들어가자마자 그곳에 있는 노아흐와 아브, 그리고 지크프리트와 만날 수 있었다.
김현우를 만남과 동시에 그에게 내려온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아브와 노아흐,
그들의 이야기를 한동안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러니까."
김현우는 한쪽에 앉아서 펜릴을 들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지크프리트를 한번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당장 정리를 해보면 데블랑이 눈동자를 만날 단서를 찾았다는 이야기지?"
"맞아요! 그쪽에서는 가디언이 깨어나면 바로 알려주라고 하더라고요. 조만간 한번 만나야 할 것 같다면서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에게 푸른 보석을 주었다.
"이건?"
"그쪽에서 주고 간 거예요. 일종의 호출기라고 하더라고요."
"……항상 생각하는 건데 얘들은 왜 이런 걸 만들어 놓고 꼭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걸 주는 거야?"
그렇게 투덜거린 김현우는 이내 자신의 주머니에 푸른 보석을 집어넣고는 이내 펜릴을 붙잡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너는 어때?"
"나, 나말인가?"
"그래, 너."
"뭐…… 나쁘지 않다."
"?"
"……왜 그러지?"
"내가 몸 상태를 물어보는 걸로 보이냐? 티르랑 이야기 한 걸 물어보는 거잖아?"
김현우의 물음에 그제야 그가 무엇을 물어봤는지 깨달은 지크프리트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곤 이내 머리를 긁적거리곤 이야기했다.
"우선 직접 이야기 하는 게 좋을 듯하군."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펜릴을 넘겨주었고, 김현우가 펜릴을 받아들자마자.
[확인이 끝났네.]
티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어땠어?"
[조금 미묘하더군.]
티르의 목소리.
그의 말에 김현우는 일주일 전 그에게 들었던 말을 짧게 상기했다.
'지크프리트가 아스가르드의 신과 비슷한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지.'
그에게 탐왕의 대한 정보를 듣고 난 뒤에 티르는 김현우에게 부탁을 했었다.
부탁의 내용은 바로 자신이 한 방에 기절시켰던 지크프리트에게 데려다 달라는 것.
그리고 그가 굳이 자신이 쓰러뜨린 지크프리트에게 다시 가려는 이유는 바로 그의 영혼이 자신이 아스가르드에 있던 신 중 한 명인 '지크프리트'의 영혼과 흡사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라 이야기했었다.
"뭐가?"
[……분명 맨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분명 지크프리트와 굉장히 비슷하다고 생각했네만…….]
"근데?"
[……영혼을 보는 내 권능이 없어진 탓인지 지금 내 능력으로는 그가 진짜 지크프리트의 영혼을 쥐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
-애초에 그걸 확인해 보려고 살려놓은 것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내 권능이 사라져서 확인을 못하는군.
짧게 탄식하는 티르.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뭐, 지금에 와서는 이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을 것 같군…… 스카디의 권능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에는 말일세.]
뭐-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애초에 저 '지크프리트가'진짜 내가 알고 있는 지크프리트라고 해도 이미 지금 저기에 있는 지크프리트와 내가 기억하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일 테니 말일세.]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상당히 우울해 보이는 티르의 목소리.
허나 김현우로서도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도리였기에 그저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선 검을 들고 있던 지크프리트에게 펜릴을 돌려준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다 지체없이 자신의 주머니 속에 있는 푸른 보석을 꺼내들었다.
####
새하얀 신전.
"왔군.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
김현우는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데블랑을 바라보며 곧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단서를 찾았다고?"
"그래, 이제 조금의 시간만 들이면 그분의 업을 해석해 그분이 있는 곳의 좌표를 알아 낼 수 있게 되었다."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 단서라는 게 혹시 50번 탑이랑 내 탑을 이어주는 통로를 말하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데블랑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이야기했다.
"……알고 있었나?"
"아니, 애초에 통로로 이용한 적은 있어도 그게 단서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그렇다면 어떻게 알았지?"
"티르한테 들었거든."
"티르?"
데블랑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반문하자 김현우는 그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말했다.
"검신(劍神) 말하는 거야."
"……검신? 그는 자네에게 소멸 당하지 않았나?"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검신과 싸운 뒤 현재까지 일어난 일들을 데블랑에게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고, 그 이야기를 전부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과연…… 그렇게 된 건가?"
"뭐, 거기에서 나도 나름대로 정보를 얻기는 얻었는데……."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문득 깨달았다는 듯 데블랑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면 너는 알고 있냐?"
"뭘 말하는 거지?"
"관리기관에서 도대체 뭘 노리고 저렇게 업을 모으고 있는지 말이야. 듣기로는 '양식장'때도 그랬던 것 같은데 말이야."
김현우의 물음에 데블랑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모른다."
"……뭐야? 너도 몰라?"
"당연하다. 뭐, 관리기관이 업을 전부 모으면 무슨 일을 벌일지는 알고 있지만…… 관리기관이 탑에서 모은 업을 어떻게 사용하려고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더군."
애초에-
"그건 그분께서도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라고 들었다."
"……눈동자도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래, 나도 저번에 한번 궁금해서 여쭤본 적이 있다만. 그것에 관련해서는 딱히 이야기를 해주시지는 않더군."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너무 어처구니없는 짐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이지.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고 이내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이제 단서도 찾았으니 당분간 할 일은 없는 건가?"
"뭐, 아마 그렇게 될 거다. 관리기관 쪽에서 굳이 움직이지 않는다면야, 이제부터는 적당히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 이거지?"
김현우의 묘한 어투에 데블랑은 흠칫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뭔가를 하려는 거라면 그냥 하지 마라, 지금 시점에서 관리기관의 이목을 끄는 것은 그렇게 좋은 선택지가 아니니까."
"이미 어그로는 다 끌리지 않았을까?"
"……확실히 이목을 끄는 것을 관두라기보다는 관리기관이 앞으로 자네를 어떻게 해보기 위해 하는 공격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궁리하는 게 더 맞을 것 같긴 하군."
"한마디로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다는 소리잖아?"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거지?"
데블랑이 묘하게 불안감이 담긴 표정으로 바라보자 김현우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냥, 갚아줘야 할 빚이 있어서 그것 좀 갚아주려고."
362화. 남자라면 쇼부를 봐라 (3)
세계수가 있었던 그 넓은 숲지는 이제 예전 같은 모습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대한 세계수가 있었던 자리는 세계수가 말라비틀어지며 거대한 공터가 생겨 있었고, 그 세계수를 마치 수호하듯 퍼져 있었던 나무들도 전부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더 이상 이 공간에는 기존의 나무들을 유지할 정도의 업이 공급되지 않고 있었으니까.
물론 이 공간 자체에서 생산하는 업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이 공간을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애초에 이 공간은 다른 탑에서 업을 받아 유지할 것을 전제로 만들어 최상층의 크기가 다른 탑들과는 달랐기 때문.
그렇게 모든 게 완전히 말라붙은 공간에서, 4대 정령왕을 포함한 탑주들은 드라이어드가 만든 말라비틀어진 회의장 속에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정령들의 회의장 사이사이에 보이는 공석.
그들은 바로 이 공간에 탑의 업을 연결하지 않은 탑주들이었다.
"……배신을 하다니."
이프리트가 저도 모르게 화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 말에 동조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동료들의 배신을 말한 이프리트나, 여기에 앉아 있는 정령들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이 파벌의 종점을 알고 있었으니까.
"……."
끝.
너무 복잡한 수식어 없이, 깔끔하고도 단조로운 단어 하나로도 지금 정령파벌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었다.
더 이상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모든 걸 잃었다.
첫 번째로 아직 업을 잃지 않은 탑주들이 탈주하기 시작하면서 그 위세가 약해졌고.
두 번째로 관리기관에 진 빚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아지면서 애초에 파벌이 성립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김현우……."
정령 파벌쪽에서 그렇게 이를 악 물고 죽이려고 했던 김현우는 결국 살았다.
"하……."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모를 탄식.
사실 나이아드가 엄청난 양의 업을 담보로 지불할 때만 해도 정령파벌은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애초에 세계수가 있는 공간 자체가 망가진 이유는 김현우 때문이니 김현우가 없어지면 자연스레 그가 각 탑에 해놓았던 짓들도 사라질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고.
만약 김현우가 검신의 손에 소멸하게 되면 정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어떻게든 파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
파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 따위는 전혀 불가능했다.
관리 기관에서 보낸 검신은 결국 김현우를 소멸시키지 못했고.
그 뒤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검신과의 싸움 덕에 탑의 보안마저 완벽하게 박살 나 버린 51번 탑에 침입해 김현우를 죽여 보려 했으나 그들은 김현우에게 도달하지도 못했다.
'……도대체 어째서 탑주를 몇 명이나 상대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놈들이 그 탑에는 존재하는 거야?'
그 이유는 바로 탑의 최상층에서 마치 자신들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기하고 있던 야차와 또 다른 두 명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정령들은 김현우가 있는 곳까지는 도달하지도 못한 채 그저 뒤지게 쳐맞다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
정령파벌은 이런 상황까지 밀려오게 되었다.
"……."
"……."
"……."
분명 공석들이 존재하기는 했어도 정령 파벌에는 아직 열이 넘는 탑주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 먼저 입을 여는 이들은 없었다.
그저 다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안하고 있던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나이아드는 입을 열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이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 어떤 말을 해도 호응을 받을 수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자신마저도 더 이상 파벌이 살아날 수 있는 구멍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침묵이 만들어진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야, 여기 완전 개판이네?"
활기찬 목소리가 나이아드의 귓가에 울림과 동시에 나이아드는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며 시선을 돌렸고.
"우리 존나 오랜만이지? 응?"
그 곳에는 김현우가 아주 기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이아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현우……!"
그의 이름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이아드.
다른 정령들도 마찬가지로 김현우의 모습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암울하고 칙칙했던 회의장에 분위기는 한순간에 반전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김현우는 피식하는 웃음을 입가에서 지울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이구? 나 한 명 왔다고 너무 분위기가 확 바뀌는 거 아니야?"
나 완전히 분위기 메이커인데?
키득키득 거리며 얄밉게 말하는 김현우.
나이아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이 개새끼……."
"어이구, 이제는 존대도 안 쓰고 욕까지? 이제 다 무너져서 갈 데까지 갔다 이거지? 하긴~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체면 챙겨봤자 너한테 뭐가 남아 있겠냐~ 응?"
낄낄낄.
마치 조롱하듯 과장된 몸짓까지 사용하며 그녀를 조롱한 김현우.
허나 정령들은 이전과 같이 분개하지도 않았고 또한 광분하지도 않았다.
"응? 뭐야? 이번에는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지랄도 안 하네?"
그들은 김현우를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볼 뿐, 더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다른 탑주들에게 있어 김현우는 이제 자신들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강자라는 이미지가 붙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탑주 중에서는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검신을 이겼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김현우가 아무리 조롱을 한다고 해도 그에게 달려들지 못했고, 그것은 지금까지 항상 그와 설전을 벌이던 나이아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보니까 너희들, 파벌에 속해 있던 애들도 좀 빠져나갔나 보네? 전보다 숫자가 조금 줄어 있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김현우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나이아드.
허나 그는 나이아드의 대답은 애초에 필요도 없었다는 듯 혼자 말을 이어나갔다.
"자 그럼 우리 인사치레는 그만하고 본격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고, 응?"
"……본론?"
나이아드 대신 파벌에 속해 있는 탑주중 누군가가 대답한 말.
그에 김현우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야기했다.
"그래 본론! 내가 설마 아무런 볼 일도 없는데 굳이 여기를 찾아오겠어? 응? 그러니까 우리 짧게 끝내자 짧게."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나이아드를 포함한 다른 정령들이 잘 보이도록 검지와 중지를 펼치고는 이야기 했다.
"내가 지금부터 두 가지 선택지를 줄 거야. 각자 취향에 맞게 고르면 돼. 알았지?"
"그게 무슨-"
"첫 번째."
그의 말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물으려는 정령의 말을 끊고 곧바로 입을 여는 김현우.
"존나 쎄게 한 대만 맞는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검지를 쥐며.
"두 번째,"
말을 이어나갔다.
"평범하게 딱 10대만 맞는다. 물론 이 경우에는 두 대는 얼굴에, 8대는 몸 곳곳으로 분산시켜서 때려줄게."
그의 말에 쥐죽은 듯 침묵하는 회의실.
그에 김현우는 산뜻한 웃음을 보이며 이야기했다.
"뭣들 해? 빨리 정하지 않고? 내가 굳이 세 번째를 정해줘야겠어?"
"……세, 세 번째?"
"그래, 세 번째."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말에 대답한 정령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오, 너 전에 그 인간 고치로 만들었던 그놈이구나?"
"히익-"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는 거미.
그 모습을 보며 피식 하는 미소를 지은 김현우는 이내 주먹을 올리며 이야기했다.
"너는 그때 제대로 못 때렸으니까 이번에 세 번째로 맞으면 되겠네."
"도……도대체 세 번째가 무슨-"
"뭐긴 뭐야, 세 번째는 그냥 그런 거 없이 뒤지기 직전까지 맞는 거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고는.
"딱 대."
빠아아아악!
이내 망설임 없이 거미 정령의 얼굴에 죽빵을 갈겨버렸다.
####
하남에 있는 장원 안의 건물.
무척이나 상쾌한 표정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왔던 김현우는 이내 간만에 보는 천마를 보며 인사를 했으나 이내 그가 인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고.
"앗! 안녕하세요!"
"어 그래, 그런데……."
"네?"
"……쟤 뭐해?"
그는 곧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구미호의 인사를 받으며 천마의 상태를 물었다.
"아 저거요? 무슨…… 동경하던 사람을 만났다고 하던데요?"
"응? 동경하던 사람? 뜬금없이……?"
"네."
김현우는 순간 고개를 갸웃하며 천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바라봤고.
"……펜릴?"
이내 김현우는 천마가 펜릴을 잡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곧 조금 더 그의 상태를 확인해보자 김현우는 천마가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가 곧 내면세계에 갔다는 것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김현우는 이내 구미호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이야기했다.
"동경하던 사람이라고 했다고?"
"네, 그러던데요?"
"……그래?"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천마랑 티르랑 접점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마와 티르의 접점은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배경부터 다른데.'
기본적으로 천마의 배경은 동양쪽이고 티르의 배경은…… 뭐 그도 잘 모르겠으나 입고 있는 옷을 봐서는 절대로 중세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동경하던 사람이라니.'
김현우는 눈을 감고 있는 천마를 한동안 바라보곤 어깨를 으쓱했다.
'뭐, 조금 있다 일어나면 물어봐야지.'
그는 그렇게 생각을 일축해 버리곤 구미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요즘은 자주 안 보이는데 뭐하고 살아?"
"그야 당연히 남편이랑 행복하게 지내고 있죠."
"……천마랑?"
"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짓는 구미호는 이내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천마를 데리고 데이트를 나간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와 대충 어떤 식으로 살고 있는지까지.
김현우는 그녀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다 말했다.
"아주 행복해 보이네."
"그럼요!"
"그래?"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게요?"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난 김현우를 보며 입을 여는 구미호.
그런 그녀를 보며 김현우는 왠지 씁쓸하지만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세 명이거든."
"……네? 세 명이요?"
"두 명까지는 어떻게 되는데, 세 명은 힘들더라고."
"……그게 무슨?"
"아, 천마한테는 나중에 시간 내서 집으로 오라고 좀 해줘."
김현우는 그 말을 끝으로 갑작스레 건물의 창문을 열더니 그대로 빠져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져 버릴 정도로 빠르게 없어진 김현우.
구미호는 갑작스레 빠져나간 김현우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번에야말로!! 서방님께 제대로 물어보겠어요!!"
"흥! 그 이야기는 저번에 끝난 것이 아니더냐!?"
"……이제 그 정도면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정말 배은망덕한 것들이로구나! 도대체 너희들이 누구 덕분에 그 녀석의 품안에 똬리를 틀 수 있었는지 잊었느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게다가 당신도 약속을 지키지 않기는 매한가지일 텐데요!!"
이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미령과 하나린, 그리고 야차를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확실히, 좀 많이 힘들지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363화. 남자라면 쇼부를 봐라 (4)
3일 뒤, 51번 탑의 최상층.
"복구 끝났네?"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은 최상층의 모습을 보며 김현우가 입을 열자 아브는 묘하게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안쪽도 조금 더 고급스럽게 보강했어요."
"……안쪽도?"
"네! 한번 들어가 보세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었고.
"……응?"
이내 저택의 내부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중얼거렸다.
"여기, 내 집 맞지?"
김현우의 중얼거림.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아브가 바꿔놓은 최상층 저택의 내부는 이전과는 너무 다르게 바뀌었다.
굳이 김현우의 취향으로 생각을 해본다면, 좋은 쪽으로 변하기보다는 상당히 미묘한 쪽으로.
"……이게 뭐야?"
김현우의 앞에는 고급 저택의 풍경이 보이고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무척이나 넓어 보이는 거실.
원래 김현우의 저택은 생각보다도 거실이 넓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이 전부 쪼개져 있었으니까.
근데 지금 김현우가 보고 있는 저택의 내부는 나뉜 방을 전부 합쳐 놓은 것 같았다.
'아니, 방을 전부 합쳐놔도 이렇게 커질 수가 있나?'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아브가 다가오며 이야기했다.
"어때요?"
"어떻고 자시고, 뭔가 엄청 넓어졌네?"
"그쵸? 일부러 넓게 만들었어요."
"일부러?"
"네. 처음에야 원래 봤던 저택을 그대로 따라서 만들었지만 생각해 보니까 저희는 그럴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뭐, 그렇긴 하지"
애초에 최상층에는 요리를 해먹을 일도 없을뿐더러 사실 1층은 잠을 자는 공간이 없다 보니 이렇게 만든 것 같았다.
"근데, 뭔가 좀 어색하긴 하네."
분명 밖에서 보면 천호동에 있는 그 저택인데 내부는 좀 다르다 보니 살짝 어색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거기다가 이곳이 조금 더 어색한 이유는 바로 1층의 내부가 굉장히 럭셔리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는 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 가면은 좀 치우면 안 되냐?"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저택 한편에 김현우의 옛 가면이 조각되어 있었다.
김현우의 지적에 아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앗, 저건 별로인가요? 들어보니 미령 씨나 하나린 씨가 꼭 넣는 게 좋겠다고 해서 넣은 건데요."
"……걔들한테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나는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네."
"으음, 뭐 그렇다면야……."
아브는 그렇게 말하며 간단히 손을 휘적였고, 이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넓은 방 안에 존재했던 조각상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고 있던 김현우는 항상 그랬듯 집 내부에 있는 소파에 앉았고.
아브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보안은 어때? 저번에 미처 못 물어봤었는데, 나랑 검신이 싸울 때 만들어 놨던 보안이 전부 박살 나 버렸다며?"
김현우의 질문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면 그랬죠. 그런데 걱정하지 마세요. 애초에 보안은 정령들이 쳐들어온 뒤로 전부 다시 복구했으니까요."
게다가-
"이번에는 조금 추가적인 보수를 하기 위해서 제작자가 따로 움직이고 있어요."
"노아흐가?"
"네. 이번처럼 내부의 싸움에 보안이 깨지지 않도록 추가적인 장치를 해놓겠다고 하더라고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다 이야기했다.
"아, 그럼 이참에 조금 빡세게 해봐."
"빡세게요?"
"응,"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며칠 전 데블랑에게 들었던 말을 들려주었고, 그 이야기를 전부 들은 아브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네요. 그럼 지금 보안 정도가 아니라 관리기관이 어떻게 나올지를 대비해서 조금 더 철저하게 대비하라는 거죠?"
"그렇지."
"알았어요. 그 이야기는 제작자가 오면 상의해서 보안을 강화하도록 해볼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아브.
김현우는 그런 아브의 모습을 보며 늘어지는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묻듯이 눕히고는 눈을 감았다.
'……여기서 추가로 해야 할 게 있나?'
데블랑 쪽에서는 이제 단서를 찾았으니 확실히 눈동자에게로 향할 수 있는 좌표가 생길 때까지 몸을 사리고 기다리라는 말이 있었고.
아브에게도 관리기관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어떤 식으로든 보안을 강화하라는 말을 해 놓았다.
"으음……."
자신이 쓰러진 틈을 타 51번 탑으로 쳐들어왔던 정령들도 찾아가서 똑같이 갚아 주었고…… 더 이상 당장 김현우가 나설 일은 없었다.
뭐, 천사나 악마가 갑자기 미쳐서 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엔 말이다.
'그럼 이제 단서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휴식인가?'
확실히 이제 김현우가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주체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
뭐, 생각해 보면 애초에 그가 주체적으로 움직였던 건 대부분 정령 파벌 관련으로 생긴 일들뿐이었지만.
'뭐…… 굳이 나서서 정보를 알아보려면 알아볼 수 있는데.'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티르에게 들었던 탐왕(貪王)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탐왕이 자세히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으나 티르는 자신이 그를 회유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그 남자의 목적에 대해서 알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을 했었다.
'어쩔까.'
김현우의 머릿속에 들어찬 고민.
허나 그 고민은 얼마 가지 않았다.
"아브."
"네?"
"아마 보안 관련 일 말고도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천호동에 있는 김현우의 자택 안.
[그래서, 탐왕에게 가자는 소리인가?]
"네가 가면 정보를 알 수 있을 거라며?"
김현우의 말에 티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확실히 그를 회유하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그에게 나름대로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걸세.]
"회유는 확실히 할 수 있는 거야?"
[당연히 100%는 아닐세.]
"……응?"
김현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티르는 어이없어하며 이야기했다.
[뭘 그렇게 놀라나?]
"아니, 저번에는 자신 있게 말했잖아? 회유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야."
[그때야 당연히 그렇게 말했다만 또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이 세상에 100%는 없다네. 마치 자네가 나를 싸움에서 이긴 것처럼 말일세.]
티르의 말에 김현우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다 이야기했다.
"아무튼, 그럼 가능성 정도는 있다고 말해야 하나?"
[그렇네. 내가 그를 회유하면 충분히 그는 우리에게 설명을 해줄 걸세.]
"흠…… 탐왕이라는 애도 너처럼 그 남자한테 원한이 있는 거야?"
[……뭐,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원한이 있기도 하고 은혜가 있기도 하군.]
"……뭐야 그건?"
[자세한 건 그에게 듣는 게 좋을걸세. 이 이야기는 남이 아무에게나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니 말일세.]
"……그래?"
[그렇네.]
"그럼 지금 바로 가면 되나?"
김현우의 물음.
허나 티르는 곧바로 부정했다.
[아니, 유감이네만 지금 당장 가봤자 아마 이야기도 하지 못할걸세.]
"그건 또 왜?"
[아마 지금 탐왕은 동면 중일 테니 말일세.]
"……동면?"
[……뭐, 솔직히 말하면 동면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봉인에 더 가깝네만……]
티르가 말을 흐리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아니, 걔 탑주 아니야?"
[맞네.]
"근데 무슨 탑주가 봉인을 당해 있어?"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는 우리 같은 탑주들과는 조금 사정이 다르네.]
티르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던 김현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곤 이야기했다.
"뭐, 아무튼 그건 알겠고…… 그럼 언제쯤 가야 하는데?"
[……대충 자네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105시간 정도 뒤에 도착하면 될 것 같군.]
"……105시간?"
[아마 그쯤 되면 그의 정신도 깨어 있을걸세. 밖에서 대화를 직접 나누지는 못해도, 최소한 내면세계에서 대화를 할 정도로는 깨어 있겠지.]
티르의 말에 김현우는 탐왕에 대해 더더욱 궁금해졌으나 어차피 계속해서 묻는다고 해봤자 딱히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그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하고는 이야기했다.
"뭐, 대충은 그건 알겠고. 그럼 대충 4일간은 할 게 없다 이거네."
[당장은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게 어떤가? 내가 들어보니 자네는 아주 쉼 없이 돌아다닌다고 하던데.]
"그건 누구한테 들었어?"
[꽤 많은 사람이 자네 이야기가 나오면 그렇게 말하더군, 아주 쉼 없이 뭔가를 하기 위해 움직인다고 말일세.]
"……."
그러고 보니 티르는 다른 이들과도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확실히, 좀 많이 움직이기는 했지."
허나 그것은 김현우가 하고 싶어서 했다기보단 어쩔 수 없는 그의 성격의 문제에 가까웠다.
"쩝."
애초에 김현우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미뤄둘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니까.
"이놈의 성격이 문제라니까."
김현우가 짧게 중얼거리며 탄식하자 티르가 말했다.
[……그런가?]
"나는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야. 당장 앞에 무슨 일이 있으면 무조건 해결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거든."
[……흠.]
"뭐야? 그 못 믿겠다는 듯한 소리는."
김현우의 지적에 티르는 이야기했다.
[아니 뭐, 못 믿겠다는 건 아닐세. 확실히 다른 이들에게 자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런 성향이 조금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말일세.]
"그렇지, 나는 이상하게 뭔가 해결해야 할 게 있겠다 싶으면 곧바로 해결하지 않고서는 찜찜하더라고. 편하게 쉬려고 해도 쉴 수가 없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렇군.]
"그 성격 때문에 탑에 갇혀 있을 때도 단 하루도 안 쉬고 열심히 뺑뺑이를 돌았다니까? 뭐, 애초에 내 성격이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같이 강해지지도 못했겠지만."
[흐음, 그렇구만.]
어느새 김현우의 한탄 아닌 한탄을 들어주며 동조하기 시작한 티르.
김현우는 한동안 그에게 이런저런 한탄(?)을 하며 자신의 성격이 굉장히 피곤하다는 듯 이야기했고.
그렇게 한탄을 하던 중, 돌연 티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일세.]
"응? 왜 그래?"
[자네가 그렇게 바로 앞에 있는 것들을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럼 저것부터 먼저 해결하는 게 어떤가?]
"저것?"
[그래, 나를 보지 말고 앞을 보게.]
티르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앞을 바라봤고.
"서방님, 요즘들어 통 요상하게 마주치지를 않아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역시 집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그렇노라, 도대체 어디를 그렇게 몰래몰래 돌아다니는 게냐? 저번부터 말했지만 이제 슬슬 정리를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후. 서방님, 아시겠지만 저는 무슨 말이 나온다고 해도 서방님의 뜻에 거스르지 않을 거랍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말씀해 주세요."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아."
메마른 목소리.
분명 조금 전 티르와 이야기할 때와는 다르게 탁한 목소리가 김현우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내 생각에 자네가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건 바로 저것인 것 같군.]
티르의 말.
그에 김현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진중한 분위기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들을 보면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364화. 남자라면 쇼부를 봐라 (5)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훈훈한 공기가 감돌던 저택 내부에 냉막한 공기가 차오른다.
물론 김현우 혼자만 그렇게 느낀 것인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들은 냉막한 공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후……."
저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
요즘 그녀들을 보면 척수반사적으로 나오는 한숨이 또 한번 흘러나온다.
'확실히, 계속 이렇게 도망쳐봤자 사태가 악화되기만 할 뿐이겠지.'
김현우는 지금껏 억지로 외면해 왔던 진실을 마주보기로 하고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바라봤다.
자기들끼리 마력을 이용해 기싸움을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 쌍의 눈은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김현우는 미령과 하나린, 그리고 야차를 차례대로 바라봤다.
미령과 하나린은 지극히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야차의 경우에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론 그 자신만만한 미소 속에 은근히 숨어 있는 초조함도 눈에 보였다.
"……."
"……."
"……."
침묵.
마치 데자뷰가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김현우는 차분하게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잘 헤쳐나갈 것인지 생각했다.
'우선 저번처럼 은근슬쩍 넘기는 건 안 되겠고.'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은근슬쩍 넘기려면 얼마든지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돼서야 티르의 말처럼 정말 끝이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 이 시점에 어느 정도 마무리를 짓는 편이 좋을 터였다.
"……."
그렇게 김현우가 고민하는 와중에도 침묵은 계속되었으나, 김현우는 이전처럼 침묵에 초조해하지 않고 침착하게 생각했다.
'생각해 보자, 이 상황을 지혜롭게 넘길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지?'
말로 타일러 볼까?
김현우는 그 생각을 떠올리기만 하고 바로 폐기했다.
애초에 그는 욕을 제외한 말을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힘으로……?
김현우는 그것 또한 떠올리기만 하고 곧바로 폐기했다.
그는 애초에 그녀들을 힘으로 찍어 누르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찍어 눌렀다고 해도 이 불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커질 수도 있다.
"으음……."
신중하게, 고민의 고민을 거듭해서 답을 찾는 김현우.
그녀들은 입을 열지 않고 김현우가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게 도움을 주었고.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좋아."
마침내.
김현우는 깊은 고민을 끝내고 그녀들을 똑바로 바라봤다.
"……."
"……."
"……."
그가 생각이 끝난 듯 자신들을 바라보자 오히려 긴장하기 시작한 그녀들.
미령과 하나린은 살짝이었으나 지었던 무표정에 약간의 금이 가 있었고, 야차의 경우는 이미 짓고 있었던 웃음은 관계없이 굉장히 아찔한 것을 보고 있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다 따라 올라와."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예?"
"무슨……?"
"그게 무슨 소리더냐?"
그의 말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되묻는 그녀들.
허나 김현우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오른손으로 가리킬 뿐이었고. 이내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택의 2층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들은 곧 2층에 무엇이 있는지 깨닫고는-
"……."
"……."
"……."
얼굴을 붉힌 채 김현우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정확히 18시간 뒤. 오후와 저녁을 넘기고 아침이 되었을 때.
"형…… 펜릴 받으러 왔는데…… 왜 뒤지려고 해요?"
"아무 일도…… 없었다."
김시현은 곧 쇠약사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그로부터 3일 뒤,
"아, 오셨어요?"
탑의 최상층에 나타난 자신을 보며 인사하는 아브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김현우는 이내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내가 말한 것들 준비는 다 끝났어?"
"네! 잠시만요."
아브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저택의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곧바로 밖으로 나와 김현우에게 저번에 주었던 나침반 모형을 가져다주었다.
"이건?"
"저번에 드렸던 거예요. 물론 이번에는 사용한다고 해서 저번에 찍어놓은 좌표로 가는 것이 아니라 티르가 알려주었던 좌표로 이동할 거예요."
-사용법은 저번과 마찬가지고요.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지?"
"네. 마찬가지로 돌아올 때도 저번에 하셨던 것처럼 마력을 불어 넣어주기만 하면 충분해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거리곤 이내 곧 아브에 손에 쥐어져 있는 펜릴을 받아들었다.
"좌표는 제대로 입력한 것 맞지?"
[만약 누군가가 탑의 위치를 옮겼다면 우리가 허수공간에 빠질 수도 있겠네만,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안전하게 탐왕이 있는 곳으로 도달할 수 있을걸세. 그보다- 그녀는 상당히 유능하더군.]
"응? 아브 말이야?"
[그래, 저번에도 자네가 쓰러져 있을 때 몇 번 정도 이야기를 해보기는 했네만 생각 이상으로 유능한 친구로군. 설마 그 복잡한 전이진을 이 아티팩트 하나에 욱여넣을 수 있을 줄이야.]
"……그게 대단한 일이야?"
[당연히 대단한 일일세. 애초에 사람의 몸을 이동시켜야 하는 전이지는 만들기부터가 굉장히 까다롭네. 그것도 그냥 까다로운 것이 아니지. 기본적으로 조합해야 하는 수식만 해도-]
그 뒤로 마법에 대해 일장연설을 이어나가는 티르를 보며 김현우는 한동안 그 이야기를 듣다 말했다.
"너, 검사 아니었어? 왜 이렇게 마법에 대해서 잘 알아?"
[지식은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해가 되지는 않지.]
"아, 그래."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세요?"
김현우의 대답에 궁금한 듯 묻는 아브.
애초에 펜릴을 쥐지 않은 이상 티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아브의 입장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너 대단하다더라."
"저요?"
"그래. 이동진을 이 자그마한 물건 안에 넣을 수 있는 게 대단하다던데?"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괜스레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헤헤, 이 정도는 기본이죠!"
칭찬 한 번에 기분이 상당히 좋아진 아브.
김현우는 피식 웃고는 이내 곧바로 나침반을 쥐었다.
"그럼 곧바로 다녀올게."
"아, 네! 조심하세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돌아올 때는 가실 때와 마찬가지로 마력을 집어넣기만 하면 돼요!"
"알았어."
[확실히 지금 가면 딱 타이밍이 맞을 것 같기는 하군.]
티르의 말을 들으며 김현우는 곧바로 자신의 손에 있는 나침반에 마력을 집어넣기 시작했고, 이내 곧 그가 쥐고 있는 나침반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웅-!!!
눈앞을 순간이나마 깜깜하게 만들 정도로 새하얀 빛무리.
그리고 그 빛무리가 사라졌을 때.
"……응?"
김현우는 새하얀 공간에 도달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그는 급하게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역시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은 새하얀 공간.
그것을 보며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잘못 온 거 아니야?"
[아닐세. 이곳이 맞는 것 같군.]
"맞다고?"
[그렇네. 게다가 내 생각대로-]
-쾅!
"!"
[-지금 딱 동면에서도 깨어난 것 같군.]
김현우가 큰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말했다.
[우선 가보도록 하세.]
"……알았어."
티르의 말에 긍정하며 곧바로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김현우.
언제까지 이어져 있을 것 같은 새하얀 공간을 얼마나 걸었을까?
쿵! 쿵!
김현우는 곧 처음에 들었던 그 소리에 가까워지게 되었고, 이내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볼 수 있었다.
"……뭐야 저거?"
사슬에 묶여 있는 거적때기.
적어도 김현우의 눈에는 그 모습을 아무리 좋게 표현해 줘도 그렇게밖에 표현이 되지 않았다.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자, 티르가 입을 열었다.
[잘 도착했군.]
"뭐 대충 예상하고 있기는 한데…… 얘가 탐왕(貪王)이야?"
[맞네.]
"……정말 그 별명이랑은 다르게 언밸런스하네."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탐왕의 모습을 조금 자세하게 바라봤다.
물론 자세하게 본다고 해봤자 사슬에 묶여 있는 그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척 보기에도 더러움이 물씬 담겨 있는 꾸덕구덕한 거적때기가 덮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보이는 것은 그 거적때기 안에 있는 것을 묶어두기 위해 X자로 교차되어 있는 사슬뿐.
게다가 그 거적때기 안에 있는 무엇인가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쿵! 쿵! 쿵!
그가 움직일 때마다 들렸다 내려앉는 사슬.
[우선 나를 그에게 조금 가져다주겠나.]
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 들려온 티르의 목소리에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고 그 거적때기 앞으로 다가갔고.
"흐음."
이내 잠시 고민하던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티르를 거적때기 위에다 올려놓았다.
그와 함께 조용해지는 거적때기.
김현우는 한동안 티르를 올려놓은 그 앞에서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다, 이내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티르를 붙잡았다.
[끝났네.]
"성공이야?"
[흠…… 반 정도라고 해두지.]
"……반 정도?"
[우선 안쪽으로 초대하도록 하지. 만약 혹시라도 외부에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내가 곧바로 연결을 끊도록 하겠네.]
"알았어."
티르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곧 자신의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오."
김현우는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의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가 감탄사를 내뱉은 이유.
"이게 다 뭐야?"
그것은 바로 김현우가 바라본 곳에 엄청난 양의 책이 탑을 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는 게 아니라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는 것을 읽는다고 치더라도 100년은 거뜬히 걸릴 것 같은 양의 책을 보며 말없이 감탄하던 김현우는 이내 자신의 눈이 닿는 곳이 모두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땅에도 책.
하늘에도 책.
앞을 봐도 책.
옆을 봐도 책.
그저 커버의 색이 다를 뿐인 책들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왔군."
이내 자신의 앞에 티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탐왕은?"
"저기에 있네."
티르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몸을 슬쩍 비켜주었고, 이내 김현우는 그제야 탐왕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학자?"
탐왕의 모습을 처음으로 본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하던 생각을 입으로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탐왕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학자의 외형과 닮아 있었다.
얼굴에는 외눈 안경을 쓰고 있고 짙은 흑색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남자.
그는 김현우의 말에 읽던 책을 내려놓고는 그를 바라보고는 이내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반갑습니다. 김현우라고 했나요?"
"응, 그런데……."
"티르 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김현우의 앞으로 다가오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도 아마 티르 님께 제 이야기를 들었을 테지만 다시 한번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탐왕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미는 탐왕.
김현우는 굉장히 뜻밖의 표정으로 탐왕을 바라보며 왜인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어…… 그래."
김현우의 대답에 그는 웃음을 지었고, 그 웃음에 비례해 김현우는 더더욱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이 새끼, 왜 이렇게 멀쩡해 보이지?'
-그렇게 생각했다.
365화. 탐왕(貪王)인가, 탐왕(探王)인가 (1)
여덟 개의 뜨거운 형벌을 받는 지옥.
그렇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 팔열지옥(八熱地獄).
그 어떤 물건이나 사람이라도 닿기만 하면 완전히 녹여버릴 수 있는 시뻘건 용암이 끊임없이 사방으로 흘러내리고.
몸에 닿는 것만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끊임없이 옮겨붙는 규환지옥(叫喚地獄) 안에서-
"잡아라!"
"망나니가 지옥에 들어와서 깽판을 친다!"
"어서 성군을 모셔와! 어서!"
"네 녀석 손오공! 감히 하늘의 지엄한 율법을 어기고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당장 썩 내려오거라!"
"이런 씨팔, 진짜!"
손오공은 자신을 뒤따라 오는 지옥의 요괴들을 끊임없이 쳐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발을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떨어질 것만 같은 규환지옥을 위태롭게 통과하며 앞뒤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요괴들을 때려눕히는 그.
"잡아! 잡아라!!"
"저기 있다!"
"망나니 손오공을 잡아라!"
"그만 쫓아와 이 미친 새끼들아!"
손오공은 마치 인원수 제한이 없는 듯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요괴들을 보며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개새끼들……! 여의봉만 있었으면 그냥 한번에 전부 날려버리는 건데.'
손오공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항시 여의봉이 쥐어져 있던 자신의 오른손을 쥐락펴락했으나 유감스럽게도 현재 그의 손에는 여의봉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손오공은 야차의 말에 의해 시험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죽어!"
"너나 죽어 이 개새끼야!"
빠아아악!
자신에게로 힘차게 점프하며 검을 휘두르는 아귀의 머리통을 그대로 찍어버린 손오공은 지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출구를 찾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요괴뿐.
여기를 봐도 요괴.
저기를 봐도 요괴.
심지어 자신이 떨어지면 그것으로 죽음이 확정되는 용암 속에서도 식어귀(食魚鬼)들이 탐욕스러운 이빨을 들이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탈출하라는 거야!?'
그 상황 속에서 손오공은 인상을 찌푸리며 야차의 말을 상기했다.
자신이 깽판을 치고 나왔던 팔열지옥을 여의봉 없이, 순수한 자신의 힘으로 다시금 헤쳐나오라는 야차의 말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가 겪고 있는 팔열지옥은, 적어도 그가 아는 팔열지옥보다 세 배 이상으로 많은 병력이 있었다.
여의봉이라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아무리 병력이 많이 온다고 하더라도 수월하게 팔열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었다.
여의봉은 기본적으로 여러 명을 한번에 쓸어버리기에 좋은 무기였으니까.
하지만-
'없는 걸 열심히 찾아봤자 의미는 없지.'
손오공은 현 상황을 무척이나 잘 깨닫고 있었기에 여의봉에 대한 아쉬움을 접어두고 몰려드는 요괴들을 어떻게 따돌릴지 생각했다.
그리고-
[열심히 하고 있느냐?]
손오공이 몸을 움직이려 함과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그는 답했다.
"야차 님?"
[오랜만인 것 치고는 생각보다 진척이 느리구나, 이제 네 번째라니.]
"……여의봉 없이 지옥을 빠져나가려니 빡센데요?"
손오공의 투정.
물론 이렇게 투정을 부려봤자 야차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저 다그침뿐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손오공은 이 살인적인 난이도에 저도 모르게 그리 입을 열었고.
[그렇느냐? 만약 너무 힘들다면 조금 힌트를 주도록 하겠느니라.]
"……?"
손오공은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느냐?]
"아니, 평소랑은 조금 다르신 것 같은데."
[……평소랑 다르다니?]
손오공은 그 말까지 듣고서 야차의 톤이 평소보다 올라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그냥 올라가 있다기보다는 꽤 상기되어 있는 듯한 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렇기에 손오공은 자신의 눈앞에 달려오는 요괴의 머리통을 후려치며 물었고. 야차는 갑작스레 후후- 거리는 목소리를 내더니 이야기했다.
[들켰느냐?]
"들키고 자시고 목소리 톤이 좀 높으신데요?"
[후후후- 그럴 만한 일이 있었느니라.]
"그런 말한 일……?"
[그래, 내 드디어 반려를 얻었으니 얼마나 기쁘겠느냐?]
"……아하……가 아니라……엑? 반려요?"
손오공의 놀란듯한 말투.
[왜 그렇게 놀라는 것이냐?]
그에 야차는 궁금해하면서 물었고.
손오공은 순간 멍을 때리다 갑작스레 자신의 앞으로 달려드는 요괴를 기겁하며 쳐내고는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
"아니, 연세가 있으신데 그 나이──가 아니라! 아니아니아니아니!!"
-으려다 급하게 정신을 차리고는 급커브를 틀었으나.
[……수고하거라.]
"네? 저기요? 야차……님? 야차 님!?"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손오공은 깨달아 버렸다.
#####
"제 얼굴에 뭐 묻은 거라도 있나요?"
자리에 앉고 나서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에 혹시나 해서 물음을 던진 탐왕.
"아니, 그건 아닌데."
허나 김현우는 이런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의 모습을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현재 바라보고 있는 탐왕의 모습은 상당히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멀쩡한 놈인가?'
김현우는 지금까지 탑을 오르면서 단 한 번도 정상인의 범주에 들만한 이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물론 김현우를 만나고 난 뒤 어떠한 경로(?)를 통해 멀쩡해진 이들이 있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그가 탑을 올랐을 때 만났던 이들은 대부분 어딘가 결함이 있었다.
당장 김현우가 탑을 오르다 만난 이들 중에 제일 정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아흐만 봐도 그렇다.
지금이야 김현우의 든든한 조력자지만 노아흐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면 그는 자신을 심마와 맞서 싸울 수 있게 만들려고 자그마치 13년간 탑에 가둬놓은 사이코였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탐왕의 경우는 애초에 거적때기에 보쌈당해 사슬에 돌돌 묶여 있는 것을 보고 나름대로 각오까지 했는데…….
"……."
"……?"
'진짜 생각 이상으로 멀쩡하네.'
김현우는 오히려 자신의 생각보다도 너무 멀쩡해 보이는 탐왕의 모습에 일종의 충격을 받았다.
"……제가 혹시 실례되는 행동이라도 했습니까?"
그렇게 김현우가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을 때 들려온 탐왕의 목소리.
그제야 김현우는 정신을 차렸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미안, 아무래도 내 생각과는 좀…… 너무 달라서 너무 멍해져 있었던 것 같네."
김현우의 말에 그 옆에 있던 티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확실히, 현실세계에 있는 탐왕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하지."
"하하하…… 이것 참, 흉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는 탐왕의 모습.
그 모습은 왕에 어울리기보다는 그저 소소하게 학문을 탐구하는 학자의 모습이었다.
"아무튼, 나는 이만 빠지도록 하겠네."
"응? 갑자기?"
"내가 말하지 않았나. 애초에 이곳은 자네가 있던 탑처럼 안전한 곳이 아닐세, 그러니 망을 보는 사람이 한둘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나?"
"아."
그의 말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
티르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곤 다시금 탐왕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우선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네. 아무래도 자네의 이야기는 내 입으로 하기에는 조금 그렇더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티르 님."
예의를 중요시하는 듯, 고개를 깊게 숙인 탐왕.
"그럼, 나는 감시를 하고 있을 테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게."
그 모습에 별것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친 티르는 그 말을 끝으로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져 버렸고.
이내 탐왕은 티르가 사라진 자리에서 곧바로 시선을 돌려 김현우를 바라봤다.
"우선, 티르 님께 김현우 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들었습니다만…… 제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시던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곧바로 본론을 물어보는 탐왕.
김현우는 만족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관리기관에 있는 남자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맞아?"
그의 말에 탐왕은 알 듯 말 듯한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야기했다.
"역시 대충 이런 이야기를 질문하고 있을 것이라 내심 짐작하고 있기는 했습니다만, 역시 제 생각이 맞았군요."
"답하기 어려운 이야기야?"
김현우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는 탐왕.
허나 그는 곧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대답해 줄 수 있어?"
"……아마, 그 남자에 대해서는 다른 탑주들보다는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래?"
김현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탐왕은 이내 자신의 안경을 고쳐 쓰고는 이야기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궁금한 것은 무엇입니까?"
김현우는 두말할 것 없이 곧바로 말했다.
"그 남자의 정체, 그리고 그 남자가 업을 모아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에 대해서 알고 싶어."
김현우의 말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탐왕은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맨 처음에 물어보신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 답해드리겠습니다."
탐왕의 목소리에 곧바로 귀를 세우며 집중하기 시작한 김현우 그러나-
"그 남자의 정체는,"
-김현우는 곧 탐왕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저도 모릅니다."
"……뭐라고?"
김현우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탐왕은 무척이나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남자의 정체는 저도 모릅니다."
"아니, 다 알 것처럼 이야기해 놓고 갑자기 그렇게 대답한다고?"
"죄송합니다만 아마 그 남자의 정체는 이 탑…… 아니, 이 차원 전체를 뒤져봐도 알 수 없을 겁니다. 심지어 본인에게 찾아가도 말입니다."
"……본인에게 찾아가도 모른다고?"
"예.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그는 자신의 이름이 없으니까요."
"……그게 뭔 개소리야?"
"말장난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이야기입니다. 그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노 네임이라고 하죠."
"……노 네임?"
"예. 물론 그는 자신을 그저 3인칭으로 지칭하고 있으나 제가 편의상 그렇게 부르기로 했습니다."
탐왕의 말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정말로?"
"정말입니다. 제가 굳이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게다가-
"애초에 거짓말을 치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김현우 님의 질문을 받지도 않았겠지요."
"……."
확실히 탐왕의 말은 일리가 있었기에 김현우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다 이야기했다.
"……정리해 보자면 관리기관에 있는 그 남자는 이름이 없다(Nameless) 이 말이지?"
"예, 그전에도, 지금도 그 미래에도 그가 무엇을 하지 않는 한 그의 이름은 없을 겁니다."
거기에-
"이 이야기는 김현우 님이 물어보신 후자의 질문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녀석이 업을 모으는 이유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예. 우선 설명을 전부 드리기 전에 결론부터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어차피 결론을 먼저 알고 들어야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탐왕은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를 바라보며-
"노 네임(Nameless), 그자는 지금 자신의 이름을 만들기 위해서 업을 모으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말했다.
366화. 탐왕(貪王)인가, 탐왕(探王)인가 (2)
"이름을 만들기 위해?"
"예."
김현우의 물음에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던 탐왕은 이내 살짝 고민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적어도 제가 아는 바로, 그 남자는 아마 자신의 이름을 만들기 위해서 업을 모으고 있을 겁니다."
"……도대체 왜?"
"저한테 그렇게 물으신다고 한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왜 이름을 만들기 위해 업을 모으고 있냐 이 말이야. 애초에 이름이라는 건 그냥 스스로 붙이면 되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탐왕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우리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가능합니다만, 그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다르다고?"
"예. 당신의 이름은 어디서 지어졌습니까?"
다짜고짜 물음을 던지는 탐왕.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뭐, 부모님이 지어주셨겠지?"
'김현우'라는 이름은 자신이 너무 어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셔 이제는 얼굴조차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었다.
그 말을 들은 탐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이름이 지어지기 전의 김현우 님은 무엇이라 불렸습니까?"
"……그건 또 뭔 소리야."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뜻이 아닌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당신이 '김현우'라는 이름을 받기 전, 당신은 무엇이라 불렸습니까?"
"……무엇이라 불리지도 않았겠지."
"바로 그겁니다."
"?"
"저희는 태어날 때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굳이 말하면 저희는 태어나고 나서 이름을 받는 '후천적'인 존재들이죠."
ー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존재들은 후천적으로 이름을 얻습니다. 당장 이 탑에 있는 이들은 어떨까요? 예를 들어보면 한때 아스가르드의 주신의 자리를 가지고 있던 티르도 후천적으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령들도 원소와 등급에 따라 후천적으로 이름을 얻게 되죠. 천사나 악마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이들은 김현우 님의 말과 같이 스스로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다."
-애초에
"그들의 이름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니까요. 그들의 이름은 그저 누군가가 지어준 후천적인 이름일 뿐이며, 그 이름은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탐왕은 잠시 뜸을 들이는 듯하다 이야기했다.
"노 네임(nameless), 그는 아닙니다."
"……왜?"
"그는 애초에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자신의 고유명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탐왕의 말.
김현우는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고 탐왕을 할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후천적으로 이름을 만드는 이들이 아닌 애초에 처음 '존재'할 때부터 자신의 고유명사가 존재하는 이들은 자신들에게 그 '고유명사' 외의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왜?"
"그들은 '고유명사' 그 자체니까요."
탐왕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김현우는 살짝 고민하다 질문했다.
"잠깐, 애초에 고유명사가 있다는 건 이미 이름이 있다는 소리랑 똑같은 거 아니야?"
그 질문에 고개를 젓는 탐왕.
"조금 다릅니다. '고유명사'는 어찌 보면 이름이라고 불릴 수도 있겠으나 또 어찌 보면 아니죠. 불이나 물 같은 고유명사가 개인의 '이름'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요."
"……거참 더럽게 이해하기 힘드네."
탐왕의 말에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팔짱을 끼는 김현우.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의 입장에서 탐왕이 말하는 것은 그저 말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김현우를 보며 탐왕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노네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유명사인 '마력'을 벗어나고 싶어하죠."
"……마력?"
"예. '마력'. 그것이 바로 관리기관의 수장인 노 네임의 고유명사입니다."
마력.
그것은 마치 산소와 같은 것이었다.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무조건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력이었다.
"……마력이라고?"
"예. 김현우 님도 들었으니 아시겠죠? 그 남자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말입니다."
탐왕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김현우가 그 남자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가 관리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 중 보았던 이들은 헤르메스뿐.
허나 그렇다고 해도 이미 김현우는 티르의 말을 통해 그 남자가 얼마만큼이나 강한지 대충 예상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티르를 홀로 싸워서 이기고 그의 목숨까지 다시 되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
그 이외에도 다른 신들을 압살했다는 소리도 들었으나 김현우에게는 그것보다 티르를 가볍게 압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와닿았다.
김현우는 티르와 싸워 보았으니까.
"그것은 그가 '마력'이라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입니다."
"……마력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거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는 그냥 '마력' 그 자체입니다. 한마디로 마력을 이용한 일이라고 하면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죠."
"……완전히 개 사기네."
김현우가 짧게 투정을 부리자 탐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기는 아닙니다. 애초에 그에게는 그게 당연한 일일 테니까요."
"그러니까 선천적 금수저라는 거 아니야? 아니, 금수저가 아니라 유일수저 급이네."
"……뜻은 모르겠습니다만 뉘앙스를 보니 대충 그 내용이 맞을 것 같군요."
탐왕의 말.
그의 긍정을 듣고 있던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다 이야기했다.
"근데 그놈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유일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면서 무슨 이름을 얻는다고 저렇게 깝치는 거야?"
불만 어린 김현우의 말.
그에 탐왕은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그거야…… 저도 잘 모르겠군요. 노 네임이 이름을 가지기 위해 업을 모으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그가 무슨 이유로 이름을 얻으려고 하는지는 알지 못하니까요."
다만-
"저희가 그것을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그와 저희는 시작점부터 다르니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리도 없을 테고요."
탐왕의 말에 김현우는 확실히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사람들에게는 다들 제각각의 이유가 있고, 이해하지 못할 고충 같은 것도 있으니까.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남자에 대한 생각을 일축했고, 탐왕은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 말했다.
"우선 그 남자에 대해서 답해드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답해드린 것 같군요. 아니면, 혹시 질문하실 것이 남으셨습니까?"
"음……."
탐왕의 물음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다 이야기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놈이 하는 짓이 그다지 이해가 안 되기는 하네."
"하는 짓…… 말씀입니까?"
"그래.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지 않아? 애초에 그렇게 강력한 힘이 있으면 이렇게 탑이나 양식장 같은 걸 만들지 말고 직접 발로 뛰어서 업을 모으는 편이 더 나을 것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탐왕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확실히 그의 고유명사가 마력인 만큼 그가 직접 뛰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상당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가 업을 얻고자 한다면 아마 자신 혼자서도 무한히 업을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왜 그렇게 안 하는데?"
"아마 자신이 섞여 들어가는 것이 싫었겠죠."
"……자신이 섞여 들어간다고?"
김현우의 물음에 탐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신도 탑주이시니 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맞습니까?"
"……뭐, 그렇지?"
업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일생이나 어떤 일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김현우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이 직접 업을 모으지 않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손이 타지 않은 순수한 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손이 타지 않은?"
"예. '마력'인 자신이 이름을 얻기 위해서 마력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겁니다. 이미 저번에는 실패했으니까요."
"저번이라면…… 양식장 때를 말하는 거지?"
"맞습니다. 물론 그때도 그 남자는 어느 특정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금과 같이 탑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죠."
"……그 특별한 일이라는 건."
"'그녀'의 끄나풀이 남자의 양식장에 몰래 침투한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녀라면…… 설마 눈동자를 말하는 거야?"
"티르 님은 눈동자라고 자칭하기도 하더군요. 아무튼, 그때 눈동자의 끄나풀이 그의 양식장에 들어왔을 때 남자는 힘을 사용해 버렸고 결국 그는 이름을 얻는 데 실패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태어나게 된 거죠."
"……아, 그래. 응?"
"예?"
"……방금 뭐라고 그랬어?"
"그래서 제가 태어나게 된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김현우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와 함께 시작된 잠시간의 침묵.
허나 그 침묵은 김현우의 질문에 의해 얼마 가지 못했다.
"네가 태어나게 된 계기라고?"
김현우의 질문에 탐왕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양식장에 관한 이야기는 티르 님에게 어느 정도 들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맞습니까?"
"맞아. 대충 양식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까지는 전부 들었지."
"그렇다면 그리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탐왕은 그렇게 말하며 괜스레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하듯 큼큼하는 헛기침을 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이 티르에게 들은 대로, 양식장은 결국 남자의 손에 의해 멸망해 버렸습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그녀의 끄나풀이 있다는 것은 매우 큰일이었으니까요."
"……."
"그렇게 양식장에 멸망에 가깝게 밀어 넣은 뒤, 그는 지금까지 모으던 업에 자신이 일정 부분 섞여 들어갔다는 것을 깨닫고는 '양식장'을 '탑'으로 새롭게 개편해 버립니다."
어차피 자신이 섞여 들어간 업은 그에게 있어서는 쓸모가 없는 업과 같았으니까요.
"신들을 불러모았던 자리에는 정령과 천사, 그리고 악마들이 들어서고, 탑은 그 남자의 뜻대로 다시 업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남겨진 '양식장' 때에 모았던 업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 그 업을 모조리 탑을 관리해 줄 부하를 만드는 데 사용해 버립니다."
-그 실험에 대해서는 딱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뭐 결국 실험은 실패했습니다."
"……?"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보셨을 겁니다. 사슬에 칭칭 감겨 있는 제 몸을."
"뭐, 보기는 봤지."
"그것은 그 남자가 양식장 때 모은 업을 제 몸에 모조리 때려 박은 결과입니다."
"……그 말은?"
"저는 분명 그 업 덕분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얻었습니다만, 저는 제 몸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물론 아예 제어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어를 한다고 해도 고작 몇 년에 하루 정도밖에 불가능합니다."
그 하루도 저 몸 안에 있으면 끊임없는 파괴충동과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죠.
"아무튼 그 덕분에 저는 원래의 몸으로 활동하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이렇게 내면세계에서 책을 보는 것으로 생활하고 있는 겁니다."
-뭐, 이 책도 사실 제가 몇 안 되는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며 적어놓은 것들뿐이지만.
그 말에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펴져 있는 책을 바라봤다.
인쇄된 글자가 아닌 무엇인가가 잔뜩 휘갈겨져 있는 책.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이제 좀 대답이 되셨습니까?"
-탐왕은 그리 이야기했다.
367화. 탐왕(貪王)인가, 탐왕(探王)인가 (3)
무거운 침묵이 도서관 내를 감돌았다.
"……."
"……."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안쓰러운 표정으로 탐왕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
물론 김현우는 탐왕이 겪었던 일을 겪어보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김현우는 자신의 육체가 컨트롤을 못할 정도로 폭주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허나 그럼에도 김현우는 왠지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려 이 풍경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책이 많았기에 단순히 서고라고 생각했던 그 모습이, 김현우의 눈에 조금씩 다르게 비춰지기 시작했다.
분명 탐왕이 앉아 있는 곳은 눈에 띌 정도로 많은 양의 책이 쌓아져 있었다.
그래, 책이 정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쌓여 있었다.
그에 따라 보이는 사실들.
그의 주변에 쌓여 있는 책들은 제목이 없었다.
또한 북커버도 자세히 보면 색만 다를 뿐 그 이외에는 전부 똑같은 문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쌓인 책들 중 잘못 놔두었는지 펼쳐져 있는 책들.
"……."
그곳에는 지식을 전달하는 의미의 '책'과는 너무나도 다른, 분명 반지로 번역된 부분을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필체로 책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다른 펼쳐져 있는 책도 마찬가지.
"……."
김현우가 그 풍경을 확인하며 침묵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줄곧 아무런 말도 없이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던 탐왕은 이내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 너무 그렇게 안쓰러운 눈으로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지금 제 삶에 만족하니까요."
"……지금 삶에?"
김현우는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듯 물었다.
적어도 김현우의 시선으로 탐왕의 현재 생활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포기한 생활과도 같이 비추어졌다.
어쩌면-
'-내가 혼자 12년 동안 탑에 갇혀 있을 때보다도 더.'
김현우가 탑 안에 강제로 갇혀 있던 12년의 시간.
그 기억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좆같다 못해 PTSD가 걸릴 지경이었고, 어쩌다 한번 탑 안에 다시 갇히는 꿈을 꿀 때면 그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기도 했다.
그 정도로 좆 같았던 탑.
김현우가 그 끔찍한 탑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희망이다.
언젠가는 이 탑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것 때문에 김현우는 13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도 그 탑 안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탐왕은?
"……."
적어도 그의 말을 들었을 때, 그에게서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김현우는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날뛰는 통에 상시로 봉인해 놓아야 하는 육체.
혹여나 본래의 몸을 제어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고작 그 기간은 하루일 뿐이며 그마저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파괴충동이나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탐왕은 살아 있을 동안 이렇게 봉인된 상태로, 자신이 만든 이 독방 같은 공간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혼자서.
이 아무것도 없는 독방에.
"……."
"……흠흠"
김현우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본 탓일까? 탐왕은 자신의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뭐, 너무 그렇게 안쓰러운 표정으로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연민 어린 눈빛으로 보실 필요도 없어요. 애초에 저는 지금 제 삶에 만족하니 말입니다."
"……지금 이 삶에 만족한다고?"
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 속에서, 혼자 책에 아무도 읽어줄 리 없는 글자를 쓰는 것이?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탐왕을 바라봤고, 그는 김현우의 얼굴을 보곤 대답했다.
"확실히 당신이 보기에 제 생활은 지독히 끔찍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저는 지금 말했듯 지금 이 생활에 그리 큰 불만이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아쉬운 게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러나 이 생활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어떻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문하는 김현우.
그에 탐왕은 간단하게 답했다.
"저는 당신과 다르니까요."
"……."
"만약 제가 당신처럼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다 이렇게 갇혔다면 미쳐버렸을 겁니다. 저는 자유를 구속당한 것이 되니까요."
하지만-
"저는 '원래부터' 이랬습니다. 애초에 제가 태어날 때 저는 '자유'를 이미 박탈당한 채로 태어났죠."
"……."
"그렇기에 딱히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물론 김현우 님이나 티르 님을 볼 때면 가끔 제 처우가 조금 불행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딱 그것뿐입니다. 아니-"
탐왕은 말을 한번 골랐다 이야기했다.
"-오히려 그런 불행함을 느끼기보다는 호기심이 생길 뿐입니다. 그저 밖의 세계가 궁금할 뿐이죠."
"……그럼 보통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잖아?"
김현우의 물음에 탐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게 그런 '선택지'가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애초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게는 애초부터 그런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살 운명이 정해진 겁니다."
마치-
"노 네임(Nameless), 그 남자처럼 말입니다."
탐왕의 말에 김현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탐왕을 바라봤다.
잠시간의 침묵과 약간의 시선 교환.
그 마지막에서, 김현우는 결국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알았어.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탐왕.
그는 곧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이야기했다.
"그래서, 더 이상 궁금한 것은 없습니까?"
탐왕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애초에 물어보고자 하는 건 전부 물어봤어."
"그렇군요. 그럼, 저도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아, 별건 아닙니다."
탐왕은 그렇게 말하며 잠시 몸을 돌려 자신의 뒤편에 있는 초록색 책과 깃펜을 꺼내 들었다.
"그저 김현우 님 세계의 이야기를 조금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왕이면 문화 관련한 이야기로 말입니다."
"……우리 세계의 이야기?"
"예. 저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만큼 다른 이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듣는 게 취미가 되었거든요. 혹시 가능하겠습니까?"
탐왕의 물음.
그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뭐, 문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는 해도 우선 할 수 있는 데만큼은 해볼게."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내 김현우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탐왕의 서재.
아니, 서재라고 칭하기보단 탐왕 스스로 거대한 낙서장이라고 칭하고 있는 그곳에서, 그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초록색 북커버에 적어 놓았던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본인이 적은 것이 맞는데도 불구하고 탐왕은 그 책이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듯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며 그 책을 정독했고.
마침내 그가 넘기던 초록색 책장이 마지막 장이 되었을 때.
"오셨군요."
탐왕은 조금 전까지 들고 있는 초록색 책을 내리며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 헤르메스를 바라봤다.
딱히 놀란 표정도 짓지 않고,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는 탐왕을 보며 헤르메스는 이야기했다.
"그래서, 보상으로 들은 이야기는 즐거웠습니까?"
은은히 미소를 지으며 묻는 헤르메스의 질문에 탐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예.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어떤 면에선 당신이 들려준 이야기보다도 즐겁더군요."
"그렇습니까?"
"예 재미있었습니다. 적어도 이곳에서 들을 마지막 이야기로는요."
탐왕의 말에 헤르메스는 놀랐다는 듯 실눈을 슬쩍 뜨며 물었다.
"……알고 있었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본체와 연결을 끊으려고 해도, 본체는 계속해서 정보를 제게 보내오니까요."
쓸데없는 감정까지 보내서 유쾌하지는 않지만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탐왕은 이내 헤르메스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예, 완벽히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착실히 진행되고는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쪽은 어떻습니까?"
헤르메스의 질문.
그에 탐왕은 답했다.
"조금 힘겹기는 하지만 저는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당신뿐입니다."
탐왕의 말에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헤르메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요."
"벌써 가십니까?"
"마음만 같아서는 이곳에서 조금 더 휴식을 취하고 싶지만, 아직 할 일이 많으니까요."
헤르메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짧게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고, 그가 사라진 곳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탐왕은 이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조금 전까지 자신이 읽던 책을 바라보곤-
"……나도 정말로 가능할까?"
-미련이 묻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
51번 탑의 최상층.
[과연, 그렇게 된 것이로군.]
조금 전까지 김현우에게 탐왕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티르는 흥미롭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예상 못 하고 있었어?"
김현우의 질문.
그에 티르는 곧바로 대답했다.
[뭐……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자세하게 예상하지는 못했네만, 대충 이런 느낌일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네.]
"그래?"
[뭐, 아무래도 그 건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으니 말일세. 어떻게 보면 수많은 예상 중에 하나가 걸려들었다고 해도 맞은 표현이겠군.]
그만큼 '노 네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티르의 말.
김현우가 마치 그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침묵하자, 티르는 곧 있어 질문했다.
[그나저나, 그러면 이제 휴식을 조금 취하는 겐가?]
"휴식?"
[그래. 어차피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전부 끝내지 않았나?]
"뭐……."
당장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없다.
자신에게 쳐들어왔던 정령들의 대가리도 시원하게 깨버렸고.
탐왕에게서 그 남자가 무엇을 노리고 업을 모으는지도 들었다.
남은 것은 이제 데블랑이 단서에 대해 해석해 눈동자가 있는 곳으로 길을 여는 것뿐.
그러나-
"해야 할 일은 없지만 이제부터 또 할 일은 있지."
[……이제부터 할 일?]
"수련해야지…… 아니, 애초에 수련이라기보단 이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 정도지만."
[능력?]
"있잖아? 내가 저번에 너와 싸웠을 때 썼었던 능력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티르는 한순간 침묵하고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내 권능을 똑같이 사용했던 그것 말인가?]
"정답."
티르와의 싸움 도중 눈동자에게 듣고 나서야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는 그 능력을 떠올리며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점검할 때도 됐지.'
당장 깨어나고 나서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하느라 시간을 소모했으나 이미 며칠 전을 기점으로 몸은 이미 저번의 건강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러니 이제 해야 하는 것은 이번에 새로 얻은 능력의 점검.
'이것을 어떤 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연구해 봐야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능력의 한계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곧바로 시작해 볼까?
생각과 함께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김현우.
[……자네는 정말로 가만히 휴식을 취하는 것을 전혀 못 하는 것 같군.]
그 모습을 보며 티르는 중얼거렸다.
368화.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짓을……? (1)
51번 탑의 최상층.
"흐으음."
아브가 새롭게 만든 저택의 1층에는 아브와 노아흐가 있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군.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든 겐가?"
-아브와 노아흐가 앉아 있는 소파 옆에는, 놀랍게도 육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던 티르가 재구성된 자신의 육체를 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별건 아니에요. 말씀드렸듯이 지금 만들어진 그 육체는 그저 마력으로 만든 것뿐이니까요."
놀라워하는 티르의 모습을 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브가 설명을 해주었으나 티르는 여전히 감탄을 멈추지 않고는 이야기했다.
"그게 신기하다는 말일세. 병장기에 깃들어 있는 영혼이나 에고를 이런 식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니."
게다가-
티르는 자신의 앞에 있는 종이를 한 장 집어 들었다.
분명 마력으로 만들어진 몸인데도 불구하고 들리는 종이.
"조금이지만 물리력도 행사할 수 있지 않은가?"
티르의 끝없는 감탄.
그 모습에 아브는 뿌듯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티르에게 자신이 만든 기술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고.
"……."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노아흐는 괜스레 훈훈한 표정으로 아브를 바라봤다.
물론 무기에 담긴 에고를 시각화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것은 아브뿐만 아니라 노아흐도 상당히 많은 부분 기여를 했으나 애초에 그는 딱히 그걸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곧 티르에게 시각화 장치의 설명에 대해 끝낸 아브.
그는 자신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육체가 이 세계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듯 종이를 붙자고는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응?"
-이내 그 종이에 적혀 있는 내용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뭔가?"
"아, 그건 이번에 저희가 새롭게 만들 장치예요."
"새롭게 만든다고……?"
"예, 저번에 가디언이 관리기관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만일에 대비해서 탑의 보안을 조금 더 견고하게 만들어달라고 하셨거든요."
아브의 말에 티르는 고개를 끄덕이곤 중얼거렸다.
"확실히, 관리기관에 대비하는 것이라면 해도해도 부족하기는 할 것 같군."
"그런가요?"
아브의 질문에 티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관리기관에 있는 그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네, 솔직히 사실대로 말해보자면, 과연 이런 식으로 보안을 강화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군."
"……그 정도예요?"
"뭐, 그 남자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지금 이 51번 탑에 있는 보안을 깰 사람은 없어 보이니 말일세."
티르의 말대로, 현재 51번 탑에 걸려 있는 보안은 무척이나 단단했다.
아니, 단단하다 못해 철저했다.
안에서 깨지 않으면 밖에서는 다른 탑주들이 절대로 깨지 못할 정도로.
한마디로 지금 이 51번 탑은 관리기관의 남자가 움직이는 상황만을 제외하고 본다면, 현재 존재하는 탑들 중에는 가장 보안이 단단한 탑이었다.
"으음……."
티르의 말을 듣고 슬쩍 고민하는 아브.
노아흐는 티르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혹시, 그걸로도 부족한 겐가?"
"……그것?"
"지금 자네의 손에 들려 있는 것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티르는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종이를 내려놓았다.
"유감이지만 나는 이 종이에 있는 내용을 읽고서 답을 한 게 아닐세. 분명 내용은 읽을 수 있지만 이 몸은 이렇게 보여도 몸을 쓰는 사람이라 말일세."
하지만-
"아마 어떤 보안을 하더라도 만약 관리기관의 그 남자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결코 막을 수 없을 걸세. 그냥 자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할 정도지."
티르의 말에 깊게 고민하던 아브는 이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혹시, 그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흠,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
티르는 아브의 질문에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민에 빠졌고, 이내 이야기했다.
"뭐, 보안을 한다기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하네. 물론 그게 지금 이런 상황에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그게 무슨 방법인가요?"
"뭐, 너무 기대하지는 말게나,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알고 있는 '권능'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니 말일세."
티르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방법을 알려주었고,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노아흐와 아브는-
"확실히, 그런 방법이 있었군."
"가능할까요?"
"……흠, 지금 당장 실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만, 우선 한번 마법진을 만져보도록 하지."
순식간에 진행되는 이야기.
그에 티르는 순간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이야기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설마, 내가 알려준 방법을 해보려고 하는 겐가?"
"네."
"그렇네만?"
너무 자신 있게 말하는 아브와 노아흐.
그 모습에 티르는 순간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잘못되었나? 라고 생각해봤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진 않았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티르는 묘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으나 이미 노아흐와 아브는 티르가 더 이상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
티르는 결국 그들에게 딴지를 걸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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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에 있는 S급 던전 '지옥 성지'는 요즘 국내 헌터들에게 굉장히 각광받는 던전 중 한 곳이다.
그 첫 번째 이유.
그것은 바로 '지옥 성지'를 독점하고 있는 패도 길드에서 입장료나 수입을 아주 조금만 떼는 것도 있었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지옥 성지의 특성 때문이었다.
지옥 성지의 특성.
그것은 바로 던전 내에 있는 거대한 성에서 끊임없이 리젠되는 몬스터 때문이었다.
던전은 기본적으로 쿨타임이라는 것이 있었다.
던전의 보스를 죽이면 던전은 당분간 몬스터 리젠이 줄어들고, 다음 보스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는 각 주기에 따라 다르지만 1달부터 3달까지,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허나 지옥 성지는 조금 달랐다.
이 S급 던전에는 기본적으로 보스몹이라고 할만한 몬스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대신 나오는 것은 끊임없이 리젠되는 몬스터.
성을 파괴하지 않고 놔두기만 하면 정말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리젠되는 몬스터는 요즘 들어 한계치가 풀려 한참 성장하고 있는 S급 헌터들에게 정말로 좋은 사냥터였다.
기본적으로 다른 던전보다는 효율성 자체가 달랐으니까.
물론 다른 던전과 같이 이 던전도 보스로 취급되는 성을 오랫동안 놔두면 '몬스터 웨이브'가 진행되기 때문에 2주에 한 번 정도는 성을 파괴해 줄 필요가 있었으나, 그사이의 공백을 빼더라도 헌터들에게 지옥 성지는 정말로 좋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지옥 성지는 성이 파괴되고 생기는 2주의 공백을 빼면 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S급 헌터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래.
불과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 이런 썅."
러시아에서 온 S급 헌터 '코첸'은 자신의 앞에 달려드는 지옥귀를 일격에 베어 죽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그가 투덜거리자 그의 옆에 있던 중갑을 입은 남자 '소코블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올 때를 잘못 정한 것 같군."
그들이 짜증을 부리고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조금 전 이 던전에 들어오기 전 들었던 소리 때문이었다.
"아니, 왜 갑자기 제약 없이 풀어놓았던 독점 던전을 다시 제한하려고 하는 거야? 하필이면 오늘, 그것도 지금 이 타이밍에?"
그것은 바로 오늘 특정 시간대를 한정으로 '지옥 성지'에 잠시 독점 제한을 걸겠다는 소리 때문이었다.
서걱-
코첸이 앞서 흘러나온 다른 지옥귀를 또 한번 베어내자 소코블란은 이야기했다.
"뭐, 너무 짜증내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어차피 특정시간대 정도 아닌가?"
"문제는 그 특정 시간대에 나가지도 못한다는 게 문제지."
코첸의 말에 소코블란은 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코첸의 말대로 오늘 지옥 성지에 들어온 헌터들은 지옥 성지에 들어오기 전에 그런 주의를 받았다.
던전을 이용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던전 내에서 사냥을 하는 도중 '특정 시간대'가 걸리게 되면 던전에서 나오면 안 된다는 소리를.
물론 위험한 상황에 놓였을 경우 빠져 나와도 된다는 말도 하기는 했으나.
"……여기는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게 더 힘들지."
스코블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 보이는 것은 족히 일백은 넘어 보이는 헌터들.
그것도 다들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진짜배기 S급 헌터들이었다.
지옥 성지가 사냥을 하기에 편하다는 소리를 듣고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헌터들.
한마디로 이곳은 몬스터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위험해질 상황은 전혀 아니라는 소리였다.
코첸은 짜증을 내며 슬슬 뒤로 빠지기 시작하는 헌터들을 보고는 대답했다.
"도대체 뭘 하려고 사람을 나가지도 못하게 해?"
"보나마나 몬스터가 리젠되는 숫자를 늘리려고 하는 거겠지."
지옥 성지의 특이한 특성 중 하나.
그것은 바로 던전의 입장한 헌터의 머릿수에 따라 몬스터의 리젠 숫자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머릿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몬스터의 리젠 숫자가 적어지고, 머릿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몬스터의 리젠 숫자가 많아진다.
그 사실을 다시금 상기한 코첸은 다가오는 지옥귀를 베어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혀를 차고는 몸을 뒤로 뺐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스코블란은 그런 코첸의 뒤를 따라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불만이 많아 보이는 S급 헌터들이 모여 있는 대열에 합류했다.
헌터들이 몹을 잡지 않기 시작하자 부지불식간에 늘어나기 시작하는 몬스터들.
그렇게 늘어나기 시작한 몬스터들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응?"
한순간에 모인 시선.
던전에 들어온 것이라고는 믿길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추리닝 차림을 하고 던전 안에 들어와 있는 남자를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헌터들.
허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김현우……?"
"어, 정말이네?"
"……진짜인가?"
"와 진짜야?"
불만스럽던 헌터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며 그 주변이 호들갑스럽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헌터들에게 있어 김현우를 본다는 것은 마치 유명한 연예인을 보는 것과 같았으니까.
애초에 그는 압도적인 강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어떤 단체나 정부에 속해 있지도 않은 덕분에 언론에 얼굴을 비춘 적이 무척이나 적었다.
그것뿐인가? 김현우의 아래에는 패도길드와 저번 분기에 신흥강자로 등극한 암중길드가 있기에 파파라치들은 감히 김현우를 찍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초반에는 파파라치들이 은근히 김현우의 사생활을 찍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모두 사라졌으니까.
마치 처음부터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한마디로 그 유명세에 비해 딱히 공석이나 언론에 얼굴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 김현우를 보는 것은 힘들었기에 S급 헌터들은 그의 등장에 너나 할 것 없이 호들갑을 떤 것이었고.
그다음-
"……?"
김현우가 단 한 걸음을 옮겼을 때.
"……어?"
S급 헌터들은 갑작스레 자신들의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들이 모조리 터져나가는 것을 보며 호들갑을 멈췄다.
369화.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짓을……? (2)
김현우가 걸음을 내딛자마자, 마치 처음부터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터져나가는 지옥귀들.
아니, 지옥귀들뿐만이 아니었다.
-끄에에에에엑!
지성이 없는 지옥귀를 조종하는 '상귀'들도, 그리고 그런 상귀들은 지휘하는 '악귀'들도, 모조리 터져 나간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원리로, 또 어떻게 재현되었는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헌터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그저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저 가볍게 그들에게로 향하던 김현우가 어느 순간 조금 전과는 다른 걸음을 한 걸음 내디뎠고, 그것으로 지옥 성지에 있는 몬스터들은 순식간에 박살 나 버린 그 순간을.
"……."
그들의 상식을 가볍게 뒤집어 버리는 말도 안 되는 광경에 헌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만약 김현우가 아닌 다른 헌터가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면 분명 눈앞에서 그 모습을 보았더라도 저도 모르게 의심이 들었을 것이었다.
허나 헌터들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의심 따위는 일절 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왜냐고?
그는 김현우였으니까.
그래, 그것 하나면 저 엄청난 광경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김현우'라는 이름 석 자는 헌터들에게 있어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꽝!
또 한 걸음을 내딛는 김현우의 일보에 이제 막 성문 밖으로 나오는 몬스터들이 터져 나간다.
또 한번, 그저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몬스터들을 박살 내는 김현우의 모습.
헌터들은 그 엄청난 광경을 찍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모습을 그저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무렵.
"어어?"
"갑자기 두 명이 됐다고?"
김현우의 신형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두 명이 된 김현우는, 딱히 어느 때라고 할 수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그 숫자를 늘려나갔다.
네 명.
여덟 명.
열여섯 명.
그 이상.
순식간에 늘어나기 시작한 김현우는 성문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몬스터들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분명 끝없이 소환되는 몇백 마리와 고작 서른 남짓 될까 한 김현우들의 싸움.
그러나 전쟁에서는 숫자가 힘이라는 말을 전면으로 부정하듯, 김현우들은 꾸역꾸역 몰려나오는 몬스터들을 순식간에 전부 때려죽였다.
그리고 한차례 흘러나오던 몬스터들을 모조리 학살해 버린 김현우의 분신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대신-
"응?"
"저건, 또 뭐야?"
김현우의 주변으로, 악귀가 쥐고 있던 병장기들이 떠올라 그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의 주변을 돌기 시작한 병장기는 몬스터들이 성벽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하자마자 성지 주변을 날아다니면 몬스터를 학살하기 시작했고.
"……."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몬스터의 상대 방법을 바꾸어 가면서 김현우는 지옥 성지에 있는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땅에서 마그마가 흘러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는 성벽에 거대한 허리케인이 생기기도 한다.
그다음에는 마력이 전부 떨어진 듯. 몬스터들의 공격을 일일이 피하며 손으로 그들을 때려죽였고.
그다음으로는 마력이 떨어진 것은 거짓말이었다는 듯 김현우의 주변으로 번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몬스터가 성벽에서 빠져나올 때마다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이며 그들을 학살한 김현우.
"흠……."
그는 자신에게 달려들다 바람으로 만들어진 칼날에 의해 순식간에 걸레짝처럼 변해 땅바닥에 처박히는 악귀의 시체를 보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대충 견적이 나오네.'
확실히 '눈동자'가 알려준 김현우의 능력은 사기였다.
'……따라 하고자 한다면 전부 따라 할 수 있었다.'
김현우는 이 지옥 성지에 들어오고 나서 단 한 번도 자신이 만들었던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봤던 다른 사람들의 기술만을 사용해 싸움을 벌였다.
괴력난신이 사용했던 기술부터 시작해서 전우치가 사용했던 기술 같은, 탑 내에서 보았었던 기술까지.
나중에는 이 탑의 최상층에 올라와 볼 수 있었던 다른 탑주들의 기술까지 전부 사용했고.
김현우는 특정 몇몇 개의 능력 말고는 거의 대부분의 능력이 그가 원하는 대로 전부 자유롭게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령들이 쓰던 자연계는 사용 가능. 하지만 티르가 무기를 이용해 사용했던 능력들은 사용이 안 되네.'
티르가 저번에 내리쳤던 번개.
김현우가 듣기로 그것은 '권능'이 아닌 그가 들고 있는 무기 중 하나인 '묠니르'의 능력을 사용했다고 했었고.
그것은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맞춘 '궁니르'도 마찬가지.
그리고 티르가 자신의 권능이 아닌, '무기'의 능력을 빌어 보인 능력은 유감스럽게도 김현우가 따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제한.
욱씬-!
"씁."
아무래도 김현우가 '따라 하는 것'으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래도 두 개 정도가 한계인 듯했다.
물론 세 개를 사용하려고 하면 할 수 있었으나 이렇게 멀쩡한 상태에서도 능력을 세 개 이상 사용하면 머리를 그대로 믹서기에 넣고 갈아버리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외에도 김현우는 능력을 사용하다 이런저런 제한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면 김현우의 몸을 나누는 '분신' 같은 경우는, 그 분신을 일정 수 이상으로 많이 만들면 마치 능력을 세 개 사용할 때처럼 두통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흐음……."
그렇게 얼마나 능력을 사용했을까?
김현우는 대충 이 능력을 파악하고는 몬스터를 학살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제야 어떤 건지 알겠네.'
이 능력은 게임으로 치자면 점유율 게임 같은 느낌이었다.
총 100%의 점유율을 사용할 수 있고, 자신아 따라 하려는 능력마다 각각 얼마 정도의 점유율을 사용해야만 해서 능력이 약할 경우 4, 5개까지는 동시에 사용이 가능했으나.
'빡센 건 두 개…… 아니, 한 개도 버거울 때가 있네.'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대충 규정을 내릴 수 있었다.
물론 이다음으로는 이 점유율을 늘릴 수 있는지 한번 실험을 해보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그것은 단시간에 노력한다고 해서 될 것 같지 않았기에.
'뭐, 오늘은 이 정도로만 하자.'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던전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S급 헌터들을 넘어 던전의 밖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김현우! 진짜 김현우다!"
"진짜다!"
"김현우 씨, 인터뷰 부탁드립니다! 제발요!"
"제발 한마디만!"
"김현우 씨 저번처럼 기자회견 같은 건 안 하시나요!? 세상에서 김현우 씨의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현우 씨!"
그가 던전 밖으로 나오자마자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입구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가면을 쓰고 있는 패도길드원들 덕분에 김현우의 앞에 마이크를 들이밀지는 못하고 있었으나 무척이나 열성적으로 그를 부르고 있었고.
"으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무척이나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기자들을 바라본 뒤 피식 웃고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딱 세 개만 질문받겠습니다."
"!!"
김현우의 말에 순간 조용해진 입구.
"저요! 제가 하겠습니다! 저!"
"부탁드립니다! 저를 지명해 주십시오!"
허나 던전 입구는 그의 말 한마디에 이전보다도 더 시끄러워졌고.
김현우는 느긋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용히 안 하면 그냥 가버린다?"
"……."
"……."
"……."
김현우의 말에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기자들.
그 모습에 만족하며 김현우는 조금 전까지 자신의 앞에서 열성적으로 녹음기를 휘두르고 있던 남자를 지명했다.
"가, 감사합니다!"
"질문 빨리합시다. 좀 피곤해서 빨리하고 들어가고 싶으니까."
김현우의 말에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 그는 벅찬 얼굴로 질문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김현우 헌터! 저는 AD일보의 유학철 기자라고 합니다! 바쁘시다니 바로 질문하겠습니다. 혹시 이번에 중국 쪽에서 바꾼 결혼제도 개선에는 김현우 헌터가 끼어 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결혼제도 개선?"
김현우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기자는 곧바로 추가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예, 중국은 이번 3일 날을 기점으로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가 가능하도록 결혼제도를 바꾸었는데…… 혹시 모르고 계셨습니까?"
기자의 물음.
그에 김현우는 순간 멍을 때리다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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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붙은 대지 위에 세워져 있는 자그마한 고성.
그 고성 안에는 두 명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한쪽은 척 보기만 해도 두려움을 느낄 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악마였고.
그에 비해 다른 한쪽은 보기만 해도 성스러움이 물씬 풍겨져 나오는 천사였다.
잠깐의 침묵.
"……여기는 무슨 일이지? 루시퍼."
허나 곧 그 침묵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예수에 의해 깨졌다.
"뭐, 내가 굳이 너를 만나러 오는데 이런저런 이유가 필요해?"
"……굳이 힘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면서 이 고행의 길을 걷지 않던 네가?"
"뭐, 너무 그렇게 사소한 건 따지지 말자고."
실실거리며 대답한 루시퍼.
허나 그 모습에 예수는 조금 더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며 인상을 찌푸렸고, 곧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루시퍼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거참 너무 섭섭하게 대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같은 혈육인데."
"……같은 혈육이라고 이야기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그런데 어쩌나? 결국 너와 나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같은 혈육인데."
루시퍼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예수.
허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예수는 한숨을 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나는 너와 할 이야기가 없으니 돌아가 보는 게 좋을 거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쫓아내야겠지."
예수의 담담한 말에 루시퍼는 피식하며 웃음을 짓고는 이야기했다.
"쫓아낸다고? 나를? 네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지금 너와 내 차이가 얼마나 심한지 알고 있기는 해? 너는 아버지의 신성을 포기하고 타락하고 나는 아버지의 신성을 지금까지 지켜왔는데?"
"네 녀석은 정말로 그것으로 그분의 신성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거냐?"
"당연히."
"……."
루시퍼의 단언에 입을 다무는 예수는 이내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곧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다물었고.
"그럼, 더 이상 할 말도 없는 것 같은데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 되려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왜 그렇게 쌀쌀맞아? 오히려 네가 들어도 좋아할 법한 이야기를 가져왔는데 말이야."
루시퍼의 말.
허나 예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전혀 그럴 것 같진 않군."
"그래? 정말로?"
마치 간을 보듯 예수에게 말을 던지는 루시퍼.
그 경박해 보이는 모습에 예수는 또 한번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으나 이내 단호하게 이야기를 끊었다.
"정말이다."
허나 그런 예수의 대답에도 루시퍼는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않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를 다시 살리는 이야기에 대해서인데?"
"!!!"
370화.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짓을……? (3)
헌터 킬의 커뮤니티 사이트의 베스트 게시판 1위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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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김현우 일부다처제실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글쓴이 : 후로로고고곡
링크1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11403223
우선 상황 설명 ㅈㄴ귀찮기 때문에 링크로 대체함.
만약 링크 읽기 싫은 사람은 그냥 세 줄 요약으로 확인만 하셈.
세줄 요약.
1.김현우가.
2.여자 세 명이랑.
3.결혼함.
이게 나라냐 씨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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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821
오랑울탄 : 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현우 결혼하려고 법 바꾸는 거 실화? 그것도 한국법도 아니고 중국법을 바꾸네 ㅋㅋㅋㅋㅋㅋㅋㅋ
ㄴ 홀렁이 : 김현우 처음 탑에서 나왔을 때부터 행적을 쭉 지켜봤는데, 이 새끼는 '진짜' 개씹상남자임, 다 지 꼴리는 대로 함 엌ㅋㅋㅋㅋㅋ
ㄴ 양자헌터 : ㅇㅈ ㅇㅈ ㅆㅇㅈ 이 새끼 항상 볼 때마다 생각하지만 진짜 개썅마이웨이임.
내인생은무조건A급 : 중국법 일부다처제로 바꾼 김현우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특징.
ㄴ내인생은무조건A급 : (죽창이미지) 용서할 수 없음. [ 베스트 댓글로 선정되었습니다.]
ㄴ조롱이마롱이 : 이거……맞다……헌붕이들 눈물 질질 짜고 있잖어 어흐흐흐흐규ㅠㅠ
인생자박자박 : 야 근데 왜 여자가 세 명임? 두 명 아님? 내가 알기로 한 명은 패룡이고, 한 명은 암중비약이잖아? 김현우 그새 한 명 더 꼬심? 이번엔 누구임?
ㄴ SSS급헌터 : 자세히는 모르는데 예전에 파파라치들이 자주 사진 찍던 걔 아닌가?
오챠야양 : 김현우 이 개 X같은 새기, 왜 혼자 다 해쳐먹냐? 저런 새끼들 때문에 우리 같은 새끼들은 결혼도 못 하고……진짜 저런 새끼들은 죽는 게 맞다.
ㄴ 조용한뱃살 : 이상, 30살 모쏠아다 헌붕이의 한탄이었습니다.
ㄴ 후로록 : 한탄이고 뭐고 이 새끼 파파라치 당하겠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 이게나라임? : ㅅㄱㅅㄱ 이제 이분 파파라치 당하시겠네요 ㅋㅋㅋㅋ
ㄴ 지판준검 : 이미 파파라치 당하셨답니다. 명복을 빌어주세요.
……
……
……
.
--
천호동의 저택에서 멍하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김시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너도 알고 있었어?"
"뭘요?"
"일부다처제 말이야."
김현우의 물음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요즘 그거 모르면 간첩이죠. 지금 그것 때문에 전세계에서 얼마나 난리가 났는데요?"
"……난리가 나?"
"인권협회부터 시작해서 온갖 윤리단체랑 UN쪽에서도 갑작스러운 중국의 제도 변경에 반발하는 눈치가 컸죠."
"……근데 나는 왜 몰랐지?"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김시현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형은 그때 티르랑 싸우고 나서 한참 정신을 잃고 치료를 받을 때인 것 같네요."
뭐, 사실 형이 깨어난 뒤에도 그 관련한 이야기는 항상 자주 나왔던 것 같긴 한데……
김시현은 그렇게 말을 이어나가려다가 이내 뒷말을 멈추었다.
김현우가 왜 알아챌 수 없었는지 대해서 대충 감이 왔기 때문이었다.
"흐음……."
반면 김현우는 기묘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통해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이야기했다.
"아니, 근데 제도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거야?"
"보통…… 그렇지는 않죠? 제가 조금 전에 말했듯이 당장 중국의 법을 바꿀 때에도 이런저런 말이 많이 나왔다니까요?"
"근데 그냥 바꾼 거야?"
"네, 뭐 그래도 모두의 반대 속에 바꾼 건 아니에요. 나름대로 어느 정도 정리를 하더라고요."
"정리?"
"네. 분명 처음에만 하더라도 각 국가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성명발표든 뭐든 비난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목소리가 하나둘 줄어들기 시작하더라고요."
"……뭐, 뇌물 같은 건가?"
"뭐, 그것도 있죠."
"그것도? 그럼 다른 건?"
"……뭐, 정리죠."
"정리?"
"네, 정리요."
"……."
김현우는 왠지 그 정리의 뜻을 나름대로 파악할 수 있었기에 더 이상 김시현에게 그것에 대해 묻지 않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무튼, 오늘 그것 때문에 갑자기 머리가 아프더라고. 심심할 겸 기자들 질문이나 받아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런 이야기나 듣고 말이야."
"……뭐, 모르는 상태면 나름대로 충격적이기는 하겠죠."
"그래서, 너는 언제 결혼하냐?"
"네 저요?"
"그래, 너 아냐랑 사귄 지 꽤 되지 않았냐?"
김현우의 기억으로 김시현은 아냐와 사귄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애초에 김현우가 둘이 사귀는 것을 몰랐을 때도 몰래 사귀고 있었으니까.
그런 김현우의 질문에 김시현은 잠시 고민했다.
"글쎄요…… 뭐, 대충 저도 어느 정도 타이밍이 되면 결혼해야겠지 생각은 하고 있는데, 막상 지금 당장은 좀 아니더라고요."
"그래? 왜?"
"……그냥 뭔가."
"……뭔가?"
"뭔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느낌이라."
김시현의 중얼거림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그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간만에 하릴없는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이제 슬슬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그럴까요? 어차피 형수님들은 다들 일이 있다고 하던데."
"뭐, 그런 것 같더라."
"그럼 우리끼리 먹죠."
김시현과 김현우가 어떤 저녁을 먹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가디언! 잠깐 올라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김현우는 자신의 머릿속에 울리는 아브의 목소리에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고.
"형 갑자기 왜 그래요?"
"미안한데 밥은 먼저 먹어라."
김현우는 그 말을 끝으로 곧바로 탑의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
김현우가 탑의 최상층에 올라오자마자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악마였다.
마치 나무껍질로 피부가 이뤄져 있는 것 같은 남자.
김현우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한 번에 알아맞힐 수 있었다.
"……예수 쪽이야?"
"그렇습니다. 저는 베드로라고 합니다."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그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스승님의 말씀 때문에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분명 51번 탑의 보안은 원래대로 돌아왔을 텐데?"
"듣기로 50번 탑에 가면 51번 탑으로 갈 수 있는 입구가 있다고 하길래 그곳을 통해 이곳에 왔습니다."
베드로의 말에 김현우는 '단서'가 있는 문쪽을 보며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까 저것도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이참에 50번 탑도 누군가가 침입하지 못하게 보안을 철저하게 만들어야 하나?'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예수가 나를 찾았는데?"
"정말 죄송하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 당장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혹시 저와 스승님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의 말.
김현우는 순간 묘한 표정으로 베드로를 바라보다 생각했다.
'……예수가 나를 왜 찾지?'
지금의 상황에서 당장 그와 연관되어 있는 일은 없었기에 김현우는 그가 자신을 왜 찾는지 쉽게 예상할 수 없었으나-
"뭐, 좋아."
-그는 이전에 만났던 에수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이내 베드로의 제안을 어렵지 않게 수락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준비를 하도록 하지요."
베드로의 말에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베드로,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그 옆에 있던 아브와 노아흐, 그리고 펜릴에게 잠시 인사를 해둔 뒤 곧바로 베드로의 뒤를 따라 들어갔고.
"……."
김현우는 언젠가 다시 보았던 붉은 대지를 볼 수 있었다.
붉은 대지와, 저 너머에 보이는 거대한 고성 하나.
"……뭐야, 또 여기? 그냥 한 번에 성으로 갈 수는 없어?"
김현우가 불만이라는 듯 중얼거리자 베드로는 이야기했다.
"이곳은 무조건 걸어야만 하지. 게다가…… 당신과 할 이야기가 조금 있기도 하고."
"……?"
갑작스레 말투가 바뀐 베드로.
김현우는 의아함을 느끼며 그를 바라봤고.
"뭐, 데블랑에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소만, 내가 그분의 단서를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또 다른 한 명이오."
"……너도 눈동자의?"
"그렇소. 우선은 걸으며 이야기하도록 하지. 어차피 이 고행의 길을 걸을 동안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전부 할 수 있을 테니 말이오."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며 고성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시작되는 베드로의 말.
"우선 자네를 이렇게 만날 생각은 없었으나, 어쩌다 보니 운이 따랐군."
"운?"
"그렇소. 데블랑, 그 친구와 다르게 나는 그와 같은 결계능력이 전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없으니까 말이오."
뭐, 사실 자네와 내가 만나도 할 이야기는 얼마 없지만 말이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린 뒤 이야기했다.
"허나 이왕에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으니 현 상황이라도 대충 이야기해 주도록 하겠소."
"……현 상황?"
"그렇소. 정확히는 내가 찾은 단서를 해석하는 일이지."
"단서라면…… 그 통로를 말하는 건가?"
"맞소. 이미 내 능력인 '이탈'을 통해 그 모습을 한번 보기는 했지만 이번에 스승님의 명령 덕분에 당신을 만나러 가며 다시 보니 역시 그것은 '단서'가 확실하더군."
"……그래서, 해석하는 데 진척은 좀 있어?"
"당장은 빠르게 진행되는 중이오. 아마 이 상태로 빠르게 나아간다면 적어도 한두 달 정도 안에는 해석을 전부 끝낼 수 있을 것 같더군."
"한두 달 이내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 정도만 기다리면 눈동자를 만날 수 있다 이거지? 그 녀석에게 관리기관을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알게 되고?"
"그렇소, 아마 그분이라면 틀림없이 그 녀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오."
베드로의 말.
그 이외에도 김현우는 베드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고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우는 자신이 고성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왔네?"
"역시 대단하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고행의 길을 전부 걸어오는 데 고작 30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잖소?"
"……고행의 길?"
김현우는 저번에 다른 이가 자신과 함께 고성으로 올 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베드로에게 고행의 길에 대해 물으려 했지만.
"우선은 올라가 보도록 하시오, 아마 스승님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베드로는 그 말을 하며 고성의 문을 열어주었고, 김현우는 묘한 불만이 담긴 표정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고성의 위로 올라갔다.
이미 한번 올라와 봤기에 익숙한 고성의 계단을 오른 지 얼마나 되었을까?
김현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의 끝에 다다를 수 있었고.
"오랜만일세."
김현우는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예수를 만날 수 있었다.
371화. 딱 대 (1)
"도와주게."
자리에 앉자마자 들린 예수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우선 무슨 일인지부터 설명을 해줘야 도와줄지 말지를 정할 거 아니야?"
김현우의 말에 예수는 두통이 밀려온다는 듯 머리를 붙잡고는 이야기했다.
"미안하군, 지금 경황이 없어서 말일세. 너무 진도를 앞서나갔군."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의 물음에도 머리를 부여잡고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던 예수는 이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제야 진정했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우선, 지금 상황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고 싶은데, 들어줄 수 있겠나?"
예수의 말에 김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고, 약 10분 정도의 시간 동안 예수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김현우는.
"……하나님을 살린다고? 루시퍼가?"
김현우의 물음에 예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게 가능한 거야?"
"절대로 불가능하네. 애초에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분을 살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 말일세."
무엇보다-
"그분은 소멸하지 않으셨네."
단언하는 예수.
그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그럼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는 거 아니야? 하나님을 살리는 건 불가능하다며? 아니, 애초에 살아 있다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말에 예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애초에 기본적으로 '그분'이 소멸한다는 것은 세계가 사라진다는 것과 마찬가지일세. 한 마디로 그가 사라지는 것은 이 세계가 멸망하는 것과 마찬가지."
그런데 어떻게 그분이 사라지겠나?
"게다가, 애초에 그분은 소멸하지 않으셨더라도 지금 당장 불러오실 수 있는 분이 아닐세.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 그분께서는 이 세계를 자신의 몸 전체로 지탱하고 계시니 말일세."
"……."
그런 예수의 말을 한동안 듣고 있던 김현우는 대답했다.
"근데 왜 걱정을 해? 하나님이 네 말처럼 살아 있다면 결국 루시퍼의 말은 헛소리나 다름없는 게 되는데 말이야."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 김현우를 보며 예수는 이야기했다.
"확실히, 그가 만약 진짜 하나님을 살릴 생각을 했던 것이라면 나도 제지하지 않았을 걸세. 다만 문제는-"
"……?"
"-그 녀석이 하나님을 살리는 것을 빌미로 다른 이를 살려내려고 해서 문제일세."
"하나님을 살리는 것을 빌미로 다른 이를 살려내려고 한다고?"
김현우의 되물음에 예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래, 그는 지금 하나님을 살려내는 것을 빌미로 '야훼'를 되살려내려고 하네."
"……야훼?"
"그렇네."
"……?"
김현우는 슬쩍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김현우는 초코파이를 먹기 위해 기독교를 접했기에 딱히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기억 한편에 야훼는 하나님을 이른다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둘 다 똑같은 사람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
허나 예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당연히 아닐세, 물론 그 '시작'은 같네만……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야훼는 다른 존재지."
"……시작은 같은데 본질은 다르다고?"
김현우의 물음에 예수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내 애매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이 부분에 관해 설명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네만…… 우선 설명을 안 하고 넘어갈 수도 없으니 간단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네."
예수는 그 말과 함께 김현우에게 '야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야훼는 하나님이 그 이름을 가지기 전……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
"조금 다르기는 하네만, 지금 당장은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하네."
예수의 긍정.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며 예수가 간단하게 해주었던 말을 복습하듯 머릿속에 떠올렸다.
'한 마디로 '야훼'에서, 이름을 받은 게 하나님이라는 소리인가.'
예수는 맨 처음 모든 존재가 야훼에서 시작되었고, 그중에서 '이름'을 부여받고 따로 떨어지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설명했다.
그 설명을 잠시 동안 생각하고 있던 김현우는 또 한번 드는 궁금증에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잠깐, 근데 그러면 하나님보다는 야훼가 더 강한 거 아니야?"
"그건 아닐세. 말 그대로 그는 본질일 뿐, 그분보다 더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네. 그러니 루시퍼도 그를 소환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
예수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아무튼, 만약 루시퍼가 진짜 야훼를 소환하기라도 하면 일이 골치 아파질걸세."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아마 그는 야훼를 소환한 그 순간부터 다른 탑을 정복하기 시작할걸세."
"……다른 탑을 정복해?"
"그렇네, 아마 야훼의 힘을 휘둘러 탑들을 식민지화 시킬걸세. 그리고 아마 그 대상엔 자네와 나도 포함되어 있겠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예수.
김현우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관리기관이 있잖아? 걔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텐데?"
"아니, 아마 관리기관은 움직이지 않을걸세."
"왜? 다른 탑을 정복한다며? 내가 알기로 탑주를 죽이면 관리기관이 움직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네가 알고 있는 것이 맞네. 허나 관리기관은 나서지 않을걸세,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설 상황이 나오지 않겠지."
"나설 상황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 아마 루시퍼는 관리기관이 나서지 않게 선을 지킬걸세."
"……그게 어떻게 가능해?"
"탑주를 죽이지 않는다면 가능하지. 말 그대로 '죽이지만' 않는다면 말일세."
예수의 말에 김현우는 대충 예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다른 탑을 천사파벌의 식민지로 만든다? 탑주는 죽이지 않고?"
"그렇네. 지금 시점에서 야훼를 소환하기만 하면 그들에게는 탑주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이 굉장히 쉬워질걸세. 이미 균형이 깨졌으니까."
"……파벌 말하는 거지?"
"그렇네. 원래는 세 파벌, 그러니까 각각 천사와 악마, 그리고 정령파벌이 고르게 전력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네. 그래서 중심이 지켜졌지."
"……만약 천사쪽에서 야훼를 소환해도 두 파벌이 손을 잡으면 되니까?"
"그렇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환한 야훼를 온전하게 막지는 못해도 대항이 되기는 했지. 하지만 지금은?"
"……."
정령 파벌은 자신에게 박살 나 이제 파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약체가 되었다.
남은 것은 천사파벌과 악마파벌뿐.
"……확실히."
이런 식으로 불균형이 생긴다면 천사쪽은 확실히 정복 활동을 벌이기가 굉장히 쉬운 상태가 되었다.
'어찌 보면 내 탓도 있……나?'
정령파벌을 박살 낸 것은 자신이었다.
뭐, 결국 그 녀석들이 자초한 일이기는 했지만.
"흐음……."
잠시 고개를 숙이며 고민을 시작하는 김현우.
예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김현우가 생각할 시간을 주었고,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우우웅-
"?"
김현우는 자신이 메고 있던 하수분의 주머니가 부르르 떨린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 얼마 있지 않아 그 진동이 '푸른 보석'에서 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김현우의 기억이 맞다면 이것은 분명 아브를 통해 넘겨받은 데블랑의 호출기였다.
푸르게 빛나고 있는 호출기.
'데블랑이 부르고 있는 건가?'
우우웅-!!
호출기는 마치 김현우의 생각에 답이라도 하는 듯 세게 진동했고,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예수는 김현우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급한 일인가?"
우우웅-!!!!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김현우가 떨떠름하게 푸른 보석을 잡고 중얼거리자 예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이야기했다.
"급한 일이 생겼는데 더 이상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지. 다만 만약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이것으로 연락을 주었으면 하는군."
예수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이내 김현우가 들고 있는 것과는 상반된 색인 붉은 보석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곳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단번에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네. 물론 고행의 길은 걸어야 하지만 말일세."
"알았어."
예수의 말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이내 예수가 넘겨준 붉은 보석을 자신의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고 곧바로 자신이 쥐고 있는 푸른 보석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우우우우웅-!!!
마력을 집어넣자마자 조금 전보다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 보석은 이내 새하얀 빛을 내며 김현우의 시야를 가렸고.
이내 새하얀 빛이 걷혔을 때.
"안녕?"
"……루시퍼?"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루시퍼를 볼 수 있었다.
루시퍼를 본 순간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김현우, 허나 그는 그 자리에서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시선을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오른쪽을 보자 보이는 것은 천사였고.
왼쪽을 봐도 보이는 것은 천사였다.
이 꼴을 보아하니 뒤는 말할 것도 없이 천사들이 잔뜩 모여 있을 것 같았고, 루시퍼의 뒤쪽에는.
"……!"
머리에 피를 잔뜩 흘린 채 새하얀 빛에 속박되어 있는 우리엘…… 아니, '데블랑'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허나 김현우는 최대한 표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루시퍼를 바라봤다.
진한 웃음을 짓고 있는 루시퍼.
"이야, 이거 참…… 우리엘이 누군가랑 은근히 내통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았는데…… 설마 그 사람이 지금 화제의 중심인 너인지는 전혀 몰랐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푸른 보석을 흔들었고, 김현우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김현우는 이 순간 '찰나의 시간'에 들어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을 휘젓는 수많은 생각들.
허나 나오는 답은 없었다.
'이럴 때는 정보가 필요한데…….'
데블랑이 부른 줄 알고 불려온 터라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
적어도 루시퍼가 어디까지 알고 있나부터 시작해서, 지금 이게 어떻게 하다 일어난 상황인지 정도는 알아야 충분한 대응이 가능했으나 김현우에게 정보는 없었다.
한동안 계속된 고민.
허나 결국 김현우는 그 고민을 치워버렸고.
-씨익
"들켰네?"
그냥 깔끔하게 데블랑 사이의 관계를 인정하기로 했다.
물론, 관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하며 루시퍼가 무슨 질문을 할지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해보기 시작했고,
"이야,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너무 심하게 굴리는 거 아니야? 그러다 터질걸?"
익살스럽게 대꾸하는 루시퍼를 보며 김현우는 여전히 지은 미소를 없애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뭘 굴려?"
"뭐야, 설마 시치미 떼려는 거?"
"뭘 시치미를 때? 들켰다고 말했잖아?"
김현우의 대답에 그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는 루시퍼.
허나 그는 곧 김현우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그래 뭐, 그 이상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으면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나는 너를 추궁하려고 이 자리에 부른 게 아니니까."
"……?"
그의 말에 순간 인상을 찌푸리는 김현우.
허나 루시퍼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슥 하는 웃음을 지은 뒤.
"나와 손을 잡자. 김현우."
이내 그렇게 말했다.
372화. 딱 대 (2)
"손을 잡아?"
무거운 침묵 속에서 김현우가 입을 열자 루시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래, 나와 손을 잡자 이거지. 너도 예수한테 갔다 와서 알고 있지? 내가 앞으로 할 일을 말이야."
루시퍼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거 완전 스토커네?"
"스토커는 무슨, 내가 알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정보가 들어오는 것뿐이야."
그리고-
"예수와 네가 만나서 지금 할 이야기는 당연히 내 이야기밖에 없다는 것을 대충 알고 있으니까 예상할 수 있었던 거지."
넉살을 떨며 대답한 루시퍼.
"아무튼, 어떻게 할래?"
"뭘 어떻게 해? 내가 굳이 너랑 손을 잡아야 한다고?"
김현우의 대답에 그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굳이라는 표현은 여기에서는 맞지 않는 표현 아닐까? 우선 당장 나와 손을 잡으면 네가 얻을 수 있는 게 많을 것 같은데. 안 그래?"
"……."
루시퍼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침묵했다.
언뜻 들어보면 김현우는 확실히 루시퍼의 손을 잡는 것이 이 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선택임은 틀림이 없었다.
허나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본다면?
'……저 녀석이 얼마나 정보를 들고 있냐에 따라 다르지.'
요점은 루시퍼가 얼마나 정보를 들고 있느냐.
데블랑과의 관계가 들킨 것까지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 이후.
'어디까지 알고 있지? 눈동자에 대한 것까지? 아니면 그냥 순수하게 나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다 정도로만?'
후자라면 다행이다.
허나 전자라면?
'……골치 아픈데.'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려 피를 흘리고 있는 데블랑을 바라봤다.
정신이라도 차리고 있으면 고갯짓이라도 해도 의사소통을 할 법하건만 얼마나 후려팼는지 그는 피를 뚝뚝 흘리며 기절해 있었다.
한마디로 김현우는 지금 이 상황에서 마땅히 정보를 방법이 없었다.
"흐음."
김현우가 쉽게 답을 내지 못하고 있자 들려오는 루시퍼의 목소리.
"왜 그렇게 고민해? 어떤 면으로 봐도 네가 이득 아니야?"
"……어떤 면으로 봐도?"
"당연하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들어서 알고 있잖아? 이제부터 내가 무엇을 할지, 이건 상당히 윈윈이라고?"
루시퍼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넉살스러운 웃음을 조금 더 과장되게 짓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이제부터 정복 전쟁을 할 거야, 개 박살이 난 정령파벌은 범위 안에 들어가고, 정말 당연하게도 나와 같은 핏줄을 가지고 있는 악마쪽도 그 범위 안에 들어가지."
-원래라면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내 범위 안에 끼어 있지."
루시퍼의 말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네가? 나를?"
"당연히! 설마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김현우의 입에서 곧바로 나오는 대답.
허나 루시퍼는 김현우의 대답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하는 웃음을 지었다.
"뭐, 솔직히 말해서 네 업적은 인정해. 이것저것 떠들어도 너는 탑주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녀석 중 한 명인 검신(劍神)을 소멸시켰잖아? 사실 그것만으로 자신감을 가질 이유는 충분하지."
"……."
"그런데 말이야, 그건 결국 개인이야. 아무리 강한 탑주라고 해도 일개 개인이라는 말이지. 물론 너는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어, 그도 그럴 게 너는 정령파벌도 혼자 개 박살을 내버렸잖아?"
루시퍼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김현우를 인정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그것도 대단하지. 일반적인 탑주라면 해내지 못할 거야. 하지만 네가 그 녀석들을 일대다수로 팰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 녀석들이 정령들이라서 그런 것뿐이라는 걸 알아뒀으면 해."
"……정령이라서 내가 일대 다수를 상대할 수 있었다고?"
"당연하지, 설마 탑주들이 네가 주먹 한번 휘두르면 픽픽 쓰러질 정도로 약할 거라 생각해? 전~혀 아니거든."
아-
"확실히 악마들은 그럴 수도 있겠네. 걔들은 워낙…… 못 먹고 자라서 말이야."
키득키득.
루시퍼의 농담에 주변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그는 이야기했다.
"아무튼, 그 녀석들이랑 우리를 같은 선상에서 보면 안 될 거야, 우리는 그 녀석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니 말이야."
루시퍼의 말.
김현우는 입을 다물며 그를 바라봤고, 그 모습을 보던 루시퍼는 다시 한번 그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네가 나와 대적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냥 편하게 나한테 붙는다면? 적어도 너랑 51번 탑에는 아무 일도 없게 되는 거지."
심지어-
"네가 이 배신자랑 무엇을 하려 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뭐 솔직히 듣고 싶기는 한데……그냥 계약서만 한 장 써주면 끝이지."
"……계약서?"
"그래, 뭐 그래도 그렇게 제약이 빡센 계약서는 아니야, 그냥 '우리'와 기본적으로 싸우지 않겠다는 조약을 가지고 있는 계약서 정도?"
그리고-
"이 녀석만 깔끔하게 정리하면 너와 나는 완전히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말씀이지."
어때?
"완벽한 윈윈전략이지? 솔직히 나도 너를 손해 보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이렇게 같은 편으로 영입해서 손해를 메꾸면 나도 좋고 너한테도 좋은 거지."
"……."
"아, 뭐 머리가 좋은 너라면 당연히 내 제안을 받을 것 같기는 한데, 정말 혹시라도 네가 이 제안을 받지 않을 경우에는-"
"뭐, 이 자리에서 바로 죽인다 이건가?"
"정답이야. 게다가 이곳에서라면 너를 아주 편하게 죽일 수도 있지. 우리 천사들은 적어도 이 천계에 있을 때만큼은 어느 정도 능력에 버프를 받거든. 어……?"
루시퍼는 그렇게 말하더니 문득 떠올랐다는 듯 김현우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이 버프를 가지고 너를 소멸시키려고 하면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해서 소멸시킬 수도 있겠네."
그의 말에 김현우는 눈가를 좁혔다.
'……이 새끼 말빨 봐라?'
김현우는 그의 말을 들으며 루시퍼가 이 상황을 최대한 잘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은근히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주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은근히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찍어누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은근히 선택을 재촉하는 듯한 말투.
물론 그렇다고 해서 루시퍼의 그런 말재간이 김현우에게 통하지는 않았다.
"말 잘하네."
그도 그럴 것이-
"칭찬 고마워, 그래서 어떻게 할래? 승낙하고 여기서 계약서 끄고 깔끔하게 끝낼래? 그게 아니면 여기서 소멸당할래?"
"둘 다 싫어."
-김현우는 루시퍼의 말을 맨 처음부터 들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너무 욕심이 과한 거 아니야?"
"과하기는, 다 내가 할 수 있으니까 말하는 거지."
피식 하는 미소를 짓는 김현우.
루시퍼는 그 모습을 보며 마주 웃더니 이야기했다.
"뭐, 내심 자만이 심해서 이런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기는 했는데…… 설마 이렇게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줄은 또 몰랐네? 상당히 똘똘한 줄 알았는데."
"그래? 나는 네가 병신같아 보이던데."
"……."
김현우의 욕설에 순간 말을 멈춘 루시퍼.
허나 김현우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근데 그렇잖아? 애초에 처음부터 손잡을 생각이 없는 사람한테 쫄래쫄래 이야기하니까 더럽게 웃기더라고."
조금 전 루시퍼가 했던 것처럼 낄낄거리며 웃는 김현우.
그에 루시퍼는 자신의 입술을 훑으며 이야기했다.
"……진짜 죽고 싶구나?"
"진짜로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하! 그래 뭐 좋아. 내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줬는데 그런 식으로 반응하다니…… 그럼 소원대로 해줄게. 가브리엘!"
"예!"
"성역을 발동시켜!"
루시퍼의 말에 힘차게 답한 남자.
그는 곧바로 하늘 위로 치솟은 순간 무엇인가를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고, 그가 조용히 읊조리는 동안-
척! 척! 척!
김현우를 포위하듯 감싸고 있던 천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제각각 칼날에 성스러운 빛이 스며 들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화아아아악!
천계가, 황금빛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마치 축복이 내려지는 듯 황금으로 찬 천계.
그와 함께 루시퍼는 자신의 날개를 펼쳤다.
순백의 날개가 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하고, 그의 양옆에 있던 세 쌍의 날개를 가지고 천사들이 제각각 전투 준비를 시작한다.
창칼 등등의 수많은 무기들이 천사들의 손에 쥐어지고.
"이제 마지막 선택지 같은 건 없어. 넌 여기서 죽는다."
그 앞에서 순백을 창을 들어 올린 루시퍼는 마치 선고하듯 김현우에게 창을 들이밀며 말했다.
숨 막히는 대치상태.
허나 김현우는 그 상태에서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상황에서 김현우는 웃음을 짓고는 루시퍼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허세는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사람이 죽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섬뜩하게 경고하는 그.
허나 김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래, 확실히 네 말대로 여기서 싸우면 내가 질 수도 있겠네."
"……."
-이내 루시퍼의 말을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순간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루시퍼.
그에 반해 김현우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황금빛 광채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그것은 이 주변 천사들의 마력을 증폭하고 있었다.
당장 김현우는 피부로 천사들의 마력이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실 그건 김현우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이곳에서 강하면 뭐하나?
어차피-
"!"
-김현우는 이곳에서 전혀 싸울 생각이 없는데.
"이런!"
"!"
김현우의 신형이 순식간에 이동했다.
아니, 그것은 이동이라고 하기에도 뭐 했다.
루시퍼의 증폭된 마력은 그의 감각을 분명 이전보다 몇 배는 예민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렇기에 그는 알 수 있었다.
김현우가 단순히 '이동'을 한 것이 아닌 '마법'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사용했다는 것을.
"안 돼!"
루시퍼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며 시선을 돌렸을 때.
이미 김현우는 우리엘을 붙잡고 있는 천사를 저 멀리 날려버린 뒤 우리엘을 확보한 상태였다.
물론 뒤늦게 김현우가 이동한 것을 알아챈 천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김현우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고, 그것은 루시퍼도 마찬가지였으나-
슥-!
김현우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마치 그 자리에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졌다.
눈을 굴리며 김현우가 이동한 곳을 찾는 루시퍼.
그러나 그는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는 굳이 올 필요 없었는데."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김현우의 목소리.
그 근처에 있던 천사들은 그 목소리에 반응해 곧바로 몸을 돌리고, 루시퍼도 그에 따라 몸을 돌리려고 했으나.
"악!?"
루시퍼는 몸을 돌리기도 전에 김현우가 자신의 머리채를 붙잡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어차피 너는 무조건 데려갈 거였거든."
김현우의 다음 말과 함께, 루시퍼는 금세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몸을 뒤로 돌리려 했고-
"저쪽 가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나 어디 한번 보자."
그가 어떻게든 머리를 돌린 그 순간.
"!"
루시퍼는 김현우의 손 위에 들려 있는 푸른 나침반이 밝게 발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373화. 딱 대 (3)
조금 전까지 성호를 외워 천계 전체에 성역을 친 가브리엘은 당혹성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사라졌다.
김현우가.
아니, 사실 김현우만 사라졌다면 그리 당황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성역을 펼쳤을 때 보였던 모습을 생각하면 김현우는 분명히 숨겨진 한 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렇기에 내심 가브리엘은 그가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심지어 여차하면 우리를 배신한 우리엘까지 데리고 도망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허……."
천사들의 수장이자 야훼를 소환하려면 무조건 필요한 루시퍼까지 같이 들고 사라질 줄은 몰랐다.
"어…… 어떻게 해야."
"루, 루시퍼 님이……."
"이건…… 대체?"
루시퍼가 사라지고 침묵이 도래했던 것도 잠시, 천사들은 하나같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대고 있었고, 그것은 조금 전 루시퍼의 옆을 보좌하던 다른 대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서히 웅성거림이 확산되듯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는 주변.
허나 가브리엘도 이 상황에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라 웅성거리는 이들을 막지 않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으나.
"……쯧."
가브리엘은 이내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오는 대답은 단 하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조용!"
가브리엘의 한마디에 웅성거림을 넘어서서 혼란의 목소리로 도배되기 시작했던 천사들이 순식간에 진정된다.
가브리엘은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슬쩍 잡고 고개를 살짝 젓고는 이야기했다.
"그렇게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그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또 무슨 술수를 써서 루시퍼 님을 데려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황하지 마라! 우리는 지금부터 51번 탑으로 간다!"
"루시퍼 님을 구출하러 가는 겁니까?"
"그래."
굳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브리엘.
분명 루시퍼가 가지고 있는 강함은 믿을 만한 것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상대가 상대였다.
'김현우…….'
그야말로 괴물이라는 칭호가 잘 어울리는 남자.
그 남자한테 끌려갔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물론 그 녀석도 생각이 있으니 '관리기관'이 움직이는 것을 상정해서 루시퍼 님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가브리엘은 불안한 눈빛으로 눈썹을 좁혔다.
'아무래도 그 녀석이라 불안하군.'
김현우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들이 하나같이 상상 이상의 파격적인 짓거리였기에 가브리엘은 불안했다.
"……."
그러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지금은 이런 걱정보다도 루시퍼를 구출해 내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
넓은 초원.
그곳은 한때 김현우가 청룡을 불러내 수련을 했던 곳이기도 했으며, 심마와 싸우기 전에는 다른 이들과 한 번씩 전투를 하며 자신을 일깨웠던 곳이기도 했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허수공간'.
그 안에서.
"이 자식……!"
루시퍼는 땅바닥에 굴러다녔던 몸을 순식간에 일으켜 이제 막 포탈 안에서 빠져나오는 김현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느긋한 표정으로 루시퍼를 바라보며 걸어 나오는 김현우.
그는 웃음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노아흐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물론 김현우는 예수에게 향하기 전에 탑의 최상층에 노아흐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루시퍼를 데려온 것이었으나 만약 노아흐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또 최상층 다 부숴먹고 있었겠지. 게다가 이렇게 여유를 얻지도 못했을 거고.'
김현우는 아브가 만들어준 나침반의 긴급귀환을 사용해 이곳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데블랑을 던져두고 노아흐에게 부탁에 루시퍼를 이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뭐, 들어오기 전에 아브랑 노아흐에게 빠르게 사정설명을 했을 테니 야차도 바로 올라올 테고…….'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루시퍼를 바라봤다.
오만가지 마이너스적인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퍼.
불과 조금 전의 실실거리던 페이스가 깨진 모습은 김현우의 입장에서는 꽤나 볼만한 볼거리였다.
"뭐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실실 쪼개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죽상이야?"
"……."
"얼굴 좀 피라니까? 아, 설마 이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해서 그렇게 인상 굳히고 있는 거야?"
실실거리는 얼굴로 입을 여는 김현우.
루시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으나, 이내 김현우는 루시퍼가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무엇인가를 하려는 것을 깨달았다.
계속해서 마력을 뿜어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루시퍼.
김현우는 어렵지 않게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뭐야, 도망치려고?"
"……!"
굳어지는 루시퍼.
김현우는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뭐, 막지는 않을게, 어차피 네가 백날 마력을 끌어올려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해봤자 여기서는 무용지물일 뿐이지만."
이곳은 허수공간이다.
기본적으로 다른 곳이랑은 전혀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는 곳.
그렇기에 이곳은 노아흐나 아브가 만든 이동진이나 아이템이 아니면 평범한 마법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었다.
"큭……."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오른손에 창을 소환하며 김현우를 바라보는 루시퍼.
그의 몸이 금방이라도 전투를 준비하듯 날카롭게 벼려졌으나 김현우는 여전히 전투자세를 잡진 않았다.
분명 루시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강렬했으나, 고작 그것뿐이었으니까.
무거운 침묵.
-슥!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바로 루시퍼였다.
그는 땅을 박차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날개를 펼쳐 김현우의 앞으로 날카롭게 쏘아졌다.
마치 말을 탄 기마병처럼 창을 길게 늘어뜨리며 압도적인 리치를 지닌 채 돌격하는 루시퍼.
하지만 김현우는 그런 루시퍼의 궤도에서 변하기 위해 몸을 옆으로 옮겼으나,
파지지직!
김현우가 몸을 옆으로 옮기기가 무섭게 루시퍼의 날개 뒤에 살벌한 기가 맺히며 주변의 공기를 번개처럼 가르기 시작했다.
김현우의 회피공간을 없애버리는 루시퍼의 공격.
허나-
"!"
-김현우는 그런 루시퍼의 공격을, 그저 가볍게 제자리에 눕는 것으로 피해냈다.
루시퍼가 창을 내릴 수 없는 그 찰나의 시간에 몸을 눕히는 것만으로 그의 공격을 피한 김현우.
루시퍼는 곧바로 김현우의 아래를 스쳐 지나가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 했으나.
-텁!
김현우는 루시퍼의 다리를 붙잡고는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꽈아앙!
"큭!"
루시퍼의 신음과 함께 터져나가는 지반.
김현우는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의 다리를 마치 손잡이 삼아 쉴 새 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꽝! 꽝! 꽝! 꽝!
"큭! 끅!? 켁! 껙!"
마치 주변 땅을 매타작하듯 루시퍼의 몸을 무기 삼아 신나게 내리치는 김현우.
루시퍼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곤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김현우를 향해 창을 날렸으나 동체가 흔들리는 중 쏘아 보낸 창은 김현우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창도 휘두르니까 정신도 말짱한가 보네?"
"이런 개-"
"100번 추가다."
꽝! 꽝! 꽝! 꽝!
루시퍼의 신형이 바닥으로 추락할 때마다 녹색빛의 풀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부서진 토사가 대신한다.
"하나! 둘! 셋! 넷!"
그 뒤로는 부서진 토사들이 마치 황폐해진 땅처럼 척척 갈라지고,
"열여덟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
다음으로는 척척 갈라진 땅이 완전히 뒤집어지며 마치 주변 땅을 개간하듯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구십칠 구십팔 구십구-"
-김현우는 그대로 루시퍼의 양다리를 잡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구십구 번이나 땅에 처박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신이 남아 있는지 김현우가 하려는 짓을 필사적으로 제지하려는 루시퍼.
그의 손이 애처롭게 김현우의 추리닝 상의를 붙잡았으나 김현우는 신경 쓰지 않았고, 이내 그의 몸이 중력에 따라 아래쪽으로 낙하하는 그 순간-
"백!!!!"
꽈아아아아앙!
루시퍼는 개간이 되어 있던 땅을 완전히 박살 내며 그 땅속에 파묻혔다.
그 모습을 보며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는 김현우.
루시퍼는 김현우가 자신의 다리를 놓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처박혔던 땅바닥에서 일어나 곧바로 김현우와 거리를 벌렸으나, 김현우는 그런 루시퍼를 굳이 쫓지 않았다.
오히려.
"이야, 너 그래도 좀 괜찮네? 솔직히 바로 기절할 줄 알았는데 멀쩡하잖아?"
"이 빌어먹을 새끼……!"
김현우는 실실거리며 루시퍼를 놀렸다.
그 모습에 더더욱 빈정이 상한 듯 인상을 찌푸리는 루시퍼.
김현우는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이야기했다.
"뭐, 욕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아무튼 우선 고맙다는 말부터 시작할게."
"그게 무슨-"
탓!
루시퍼의 말과 동시에 보지도 못할 속도로 빠르게 그의 앞에 도달한 김현우.
휘둥그레진 루시퍼의 눈동자가 김현우를 바라보고, 그에 김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내가 원래 실험하던 게 있어서 말이야. 너한테는 맘 놓고 실험할 수 있을 것 같네."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
51번 탑의 최상층에 있는 저택 안에서 아브와 노아흐, 그리고 티르는 침대에 누워 있는 데블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분명 그 사람이죠?"
"그래 이 사람은 분명 그때 김현우를 만나러 찾아왔던 이 같군."
"……그때랑은 인상이 완전히 다르네요."
"확실히, 그때는 날개랑 링이 없어서 몰랐는데…… 확실히 날개랑 링이 있으니 조금 다르군."
노아흐의 끄덕거림에 티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이 사람도 '눈동자'와 함께 움직이는 사람인가?"
"우선 내가 알기로는 그렇게 알고 있네. 그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 분명 아까 그를 찾아왔던 것은 천사가 아니라 악마일 텐데 말이야."
"……그러게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걸까요?"
"뭐, 우선 김현우, 그가 말한 걸로 봐서는 천사 쪽과 본격적으로 척을 진 것은 확실한 것 같더군. 그가 데려온 자는 천사파벌의 수장인 루시퍼였으니 말일세."
"네……? 설마 아까 전에 가디언이 머리채를 붙잡고 데려왔던 그 사람이요?"
"그렇네."
"……그 사람이 천사 파벌의 수장이에요?"
"……맞다만,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겐가?"
티르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이야기했다.
"아니, 뭔가 딱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요…… 뭔가 가디언이 그렇게 머리채를 붙잡고 나타나 버리니까 좀……."
"아……."
"확실히…… 그건 좀 그렇군."
아브의 말에 납득하는 노아흐와 티르.
허나 곧 티르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물론 루시퍼가 조금 전에 보인 추태처럼 약하지는 않네…… 오히려 그는 각 파벌의 수장 중에서는 무력면에서 가장 강할걸세…… 뭐, 머리를 굴리는 것도 말일세."
다만-
"그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것은 김현우잖나? 그럼 어쩔 수 없는걸세."
"……아."
"……흠."
티르의 말에 마치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는 둘.
그렇게 그들이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
"흠, 부른다고 해서 왔는데…… 무슨 일인 게냐?"
아브는 저택의 문쪽에서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림에 따라 고개를 돌렸고, 이내 야차의 모습을 보며 가볍게 인사하려 했으나.
"……응?"
곧 아브는, 야차의 양옆에 서 있는 남자들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으며-
"누구……?"
-그렇게 말했다.
374화. 딱 대 (4)
빡!
김현우의 올려 차기에 루시퍼의 턱이 위로 들어 올려진다.
"켁!"
그와 터져 나오는 애처로운 비명.
허나 김현우는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그의 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커헉!?"
저 멀리 날아가 머리통으로 땅을 개간하는 루시퍼.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짠! 2명이야!"
"!!"
루시퍼가 날아간 그곳에는, 이미 김현우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끄으으-"
빠아아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다시 김현우가 있던 곳으로 날려지는 루시퍼는 이내 또 한번 땅바닥에 머리가 처박힌 채 개간되었던 땅을 한 번 더 개간했다.
"이야, 이거 완전히 농기구로 써도 되는 거 아니야?"
"이……이이이이!!!"
노골적인 놀림에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분노에 가득 찬 모습으로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는 루시퍼.
물론 김현우는 그런 루시퍼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는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터져 나오는 번개들.
꽝! 콰가가강!
"야, 전기지짐이 좋아하냐?"
"뭐? 그게 무슨 께에에에에엑!!!"
루시퍼는 김현우의 말에 미처 전부 대답하지 못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에 맞았다.
쾅! 쿠르르릉! 쾅! 콰쾅!
한 방으로 끝나지 않고 끝없이 내리치는 번개.
그때마다 루시퍼는 비명을 질렀으나 김현우가 떨구기 시작한 번개는 그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떨어졌다.
그 뒤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싸움.
아니, 싸움이 아니라 폭행.
루시퍼는 거의 한 타임이 지날 때마다 김현우가 새롭게 가져온 다른 능력으로 열심히 구타를 당했다.
어느 정도냐고 한다면, '살아 있는 것보다는 죽는 게 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할 정도로 끔찍한 구타를.
그렇게 끝날 것 같던 구타가 지속된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하루?
열흘?
그것도 아니면 한 달?
루시퍼는 어느 순간 더 이상 자신의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며 힘겹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느긋한 표정으로 루시퍼의 앞에 서 있는 김현우.
그는 씨익 하는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대답했다.
"고맙다. 덕분에 실험해 보고 싶은 건 전부 실험했네."
"네 녀석……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돌아가기만 하면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루시퍼의 분노에 서린 외침.
그러나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뭐? 죽여? 네가 나를 죽인다고?"
"그래! 다시 돌아가기만 하면……! 네 녀석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허참, 누가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했어? 왜 그렇게 확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 혼자서 나를 구하러 오는 천사들을 모조리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걔들이 진짜 너를 구하러 올 거라고 생각해?"
김현우가 씨익 웃으며 이야기하자 루시퍼는 분노의 찬 눈동자로 흙이 가득하게 묻은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쪽은 내가 있어야만 야훼를 소환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까 야훼인가 뭔가를 소환한다고 했지?"
새삼스레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 그는 루시퍼를 바라봤다.
"그래…… 뭐, 네 말처럼 너를 구하러 천사들이 온다고 치자, 그렇다면 너는 그때까지 멀쩡할 것 같아?"
"흥! 이딴 공격을 아무리 해봤자 소용없어!"
"그래?"
"그럼 거짓으로 말하겠어?"
"한 1년 정도 조져도 그렇다 이거지?"
"……1년? 너는 우리 천사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피식-
"아마 그때쯤이면 이미 너는 내 손에 죽고도 남았을 거다."
번들거리는 분노를 눈동자에 담은 채 살기등등하게 대답하는 루시퍼.
한족 입가가 치켜 올라간 것을 보면 김현우에게 나름의 위압감을 심어주려 한 것 같았으나… 유감스럽게도 온몸에 흙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라 그런지 오히려 우스워 보였다.
'말을 해줄까?'
이 허수공간의 시간개념은 밖과는 다르다.
김현우 본인조차도 이 시간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는 자세히 모르고 있었으나 그 괴리가 상당히 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몇십, 몇백 일이 흐를 때 저쪽에서 흐르는 시간은 고작 며칠뿐.
"흐음……."
잠깐의 고민을 하던 김현우는 이내 루시퍼에게 허수공간에 관련된 말을 해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마 그도 대충 맞다 보면 자신이 무슨 상황에 빠졌는지 알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 전에-
"우선 쉬고 있어."
"뭐?"
"친구들이 너 구하러 온다며? 우선 그 녀석들부터 처리해야지."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
51번 탑의 최상층.
"……응?"
김현우는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굉장히 낯선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낯선 얼굴이라기보다는 굉장히 익숙한 얼굴이라고 보는 것이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손오공이랑 청룡?"
"오, 드디어 왔네."
"오랜만이군."
김현우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고 있는 손오공과 청룡이기 때문이었다.
"오, 왔느냐?"
김현우가 온 것을 보며 반갑게 인사하는 야차.
그녀에게 슬쩍 고개를 끄덕여 주며 김현우는 그들이 앉아 있는 소파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이내 입을 열었다.
"밖으로 나온 걸 보니, 수련은 전부 끝났나 보네?"
"말도 마라, 진짜로 하다가 뒤질 뻔했어."
"……그건 나도 동감이로군."
왠지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손오공과 청룡.
"그래도 힘은 얻은 거 아니야?"
"……뭐, 그래, 얻기는 얻었지. 다만 힘을 얻었다기보다는 기존의 업을 강화시켰다고나 할까……."
"기존의 업을 강화시켜? 그건 또 뭔데?"
김현우의 물음에 청룡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그에게 자신들이 해온 수련에 대해 말해주었다.
"아, 그러니까…… 한마디로 업을 덮어썼다 이거네?"
"정확히 말하면 그냥 덮어썼다기보단 기존에 있던 업을 조금 더 '위대하게' 바꾼 거지."
손오공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신기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해?"
"……뭐, 사실 나나 청룡만 있었다면 불가능하지. 애초에 업을 '다시' 한다는 것은 애초에 그때와 똑같은 상황을 연출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말이야."
"후후- 그래서 이 몸이 많이 도와주지 않았느냐?"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펴고 말하는 야차.
그 모습에 손오공과 청룡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야차 님이 없었으면 시작도 못할 계획이기는 했지……. 더럽게 고생하기는 했지만……."
"……마찬가지다."
"무얼, 기존의 힘을 더더욱 견고하게 다지고 싶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거기에 더해서, 이제는 '둔갑술'을 쓰지 않아도 온전히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잖느냐?"
"뭐…… 그런 그런데."
왠지 음울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손오공과 그 옆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청룡.
허나 그 침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야차에 의해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 우선 듣기로는 천사파벌과 척을 졌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느냐?"
"아, 안 그래도 설명하려고 했는데."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급하게 루시퍼를 허수공간 안으로 집어 넣느라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야훼라니, 정말로 그를 되살릴 수 있단 말인가?"
김현우의 말을 들은 뒤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바로 노아흐였다.
"왜? 야훼에 대해서 좀 알고 있어?"
"아니.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닐세. 애초에 나는 그분에게 신탁을 받기는 했어도 실질적으로 야훼가 있었을 때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일세."
다만-
"야훼를 소환할 수만 있다면…… 확실히 천사파벌은 엄청난 전력을 얻게 될걸세."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노아흐.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뭐, 천사가 당장 야훼를 소환해서 이곳으로 오지는 않을 거야. 애초에 야훼를 소환하려면 내가 데리고 온 루시퍼가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것 참 잘된 일이군. 방금 전에는 도대체 천사파벌의 수장인 루시퍼를 왜 데려왔나 했는데 말일세."
"으음……."
사실 루시퍼가 있어야 야훼를 소환할 수 있다는 말은 이곳에 와서 깨달은 것뿐이었고, 김현우는 그냥 그가 하는 말이 정말 꼴 보기 싫어서 몇 대 때릴 요량으로 데려온 것뿐이었으나-
"뭐, 그렇지."
-이 같은 경우는 굳이 오해를 풀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기에 김현우는 가벼운 긍정으로 그 화제를 넘겼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겐가? 자네 말을 들어본다면 이제 곧 이 51번 탑에 천사들이 몰려오는 것 같다만."
티르의 질문.
김현우는 곧바로 대답했다.
"뭐, 그건 지금부터 막아야지."
"……흐음, 천사들의 물량은 꽤나 많을 텐데…… 괜찮겠나?"
"확실히 숫자만 보면 많기는 많은데…… 딱히 그렇게 걱정을 해야 하나? 애초에 천사들이 이곳에 오려면 50번 탑으로 와서 저기를 넘어야 하는 거 아니야?"
김현우가 50번 탑과 연결되어 있는 문에 시선을 주자 티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그렇군…… 좁은 곳에서 상대하겠다는 겐가?"
"맞아,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지."
"조금 전까지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티르의 되물음에 김현우는 씨익 웃고는 손오공을 바라봤고.
"?"
손오공은 김현우의 생각을 도통 알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50번 탑에서 51번 탑을 잇고 있는 어두운 통로.
"쯧,"
천사들과 함께 어두운 통로를 걸으며, 가브리엘은 짧게 혀를 차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좁군.'
물론 통로 자체는 한 사람이 움직이기에는 어느 정도 충분한 넓이였으나 가브리엘은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닌 천사들과 함께 움직인다.
그 숫자만 최소 150명.
그러다 보니 가브리엘에게는 이 통로 자체가 너무나도 비좁았다.
게다가 그의 짜증지수를 실시간으로 높이고 있는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도대체 언제까지 가야 하는 거지?'
-바로 끝이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져 있는 통로 때문이었다.
분명 한 시간은 넘게 이동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이 어두운 길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고, 그것에 가브리엘은 더더욱 짜증지수가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야, 진짜 오고 있을 거라더니 엄청나게 오고 있네?"
선두로 몸을 움직이고 있던 가브리엘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김현우인가?'
그는 급하게 시선을 들어 확인해 봤으나 마법으로 밝혀진 빛에 의해 보이는 얼굴은 김현우가 아니었다.
"너는 누구지?"
가브리엘의 물음.
허나 천사들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뭐, 어차피 조금 있으면 헤어질 사이니까 그건 알 거 없고. 너희들 똑바로 일렬로 서 있는 거 맞지?"
"……뭐라고?"
"혹시라도 벽에 기대 있다거나 하면 빨리 일렬로 서 있어."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있던 회색빛의 봉을 그들에게 들이밀었다.
"무슨?"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가브리엘.
그러나-
"너무 궁금해하지 마, 어차피 지금 알 수 있을 테니까."
가브리엘은 곧 이어지는 남자의 다음 말에 의문을 느꼈고.
"커져라, 여의-"
가브리엘은 곧, 동굴의 입구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봉을 보며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375화. 딱 대 (5)
남자, 손오공이 들고 있던 봉이 갑작스레 거대화하며 통로를 막아버리자 가브리엘은 두 눈을 부릅뜨며 인상을 찌푸렸다.
"야, 한 번 더 물어보는데…… 정말 일렬로 제대로 선 거 맞지?"
그러던 와중 들려오는 손오공의 목소리.
가브리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고작 이렇게 막는다고 해서 우리들이 진격하지 못할 것 같나!?"
"당연히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
손오공의 말에 가브리엘은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눈가를 좁혔으나.
"아, 혹시 모를 거라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건데, 너희들 설마 내가 이렇게 벽을 막은 것만으로 끝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게 또 무슨……!"
"뭐,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좀 귀찮아서 못하겠고, 우선 어차피 경험할 거니까 한번 당해봐."
그리고-
"무조건 일렬로 서라, 이 통로 사이에 껴서 믹서반죽 같은 게 되기 싫으면 말이야."
손오공의 말에 정말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낀 가브리엘은 곧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깨달았고-
"길어져라. 여의-!"
"이런 씹!!!!"
곧 가브리엘은 통로를 가득 채운 채 자신들을 덮쳐오는 거대한 벽을 보며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천사들이 손오공의 여의봉에 의해 51번 탑에 제대로 접근도 못 하고 모조리 쓸려 나갔을 때쯤.
"……이걸 사용해 보겠느냐?"
"이건 또 뭐야?"
51번 탑의 최상층에서, 김현우는 야차가 넘겨준 물건을 받아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현우가 들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나무로 된 염주였다.
물론 평범한 나무는 아닌지 염주 알 하나하나에 미세한 마력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딱히 그것 이외에는 특별할 것 없는 염주 목걸이처럼 보이는 물건.
김현우가 그것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자 야차는 입을 열었다.
"바로 백팔봉인주(百八封印珠))라는 물건이니라."
"백팔봉인주?"
"지금 내가 네게 준 백팔봉인주는 주어진 힘에 취해 무차별적으로 하늘의 질서를 어지러뜨리는 죄인들을 계도하기에 딱 알맞은 물건으로 만들어진 것이니라."
"……뭐, 봉인 같은 거야?"
"맞느니라. 그 백팔봉인주를 계도하고자 하는 이에게 씌운다면, 그는 그때부터 무조건 네가 하는 말에 따라야 하느니라."
뭐-
"그 목걸이를 씌우려면 결국 목걸이를 쓸 사람의 동의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야차의 말에 김현우는 백팔봉인주를 바라보다 이야기했다.
"그럼 계약서랑 별 차이 없는 거 아니야?"
김현우에게는 노아흐가 만들어준 계약서가 아직 몇 장 남아 있다.
종이에 지켜야 할 수칙을 적고 사인만 하면 곧바로 계약이 성립되는 계약서.
물론 상대방이 그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단점(?)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김현우가 보기에는 야차가 준 백팔봉인주와 계약서는 별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흠, 그건 틀린 생각이니라."
"어느 부분에서?"
"우선 첫 번째로, 백팔봉인주는 그 계약서와는 비교도 안 되는 구속력을 가지고 있으니라."
"……구속력?"
"계약서는 결국 하는 게 수칙을 정하는 것뿐이지 않느냐?"
"그렇지?"
"허나 그 백팔봉인주는 다르다. 그냥 동의를 받고 씌우기만 하면 그 대상은 목걸이를 씌운 이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심지어 그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라도 말이니라."
"……말이 안 되는 거라니? 그게 뭐야? 뭐, 자살을 하라 거나?"
"그런 것도 있으나…… 흐음, 조금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옛 천계에는 도산신군(逃散神軍)이라는 멍청이가 한 명 있었는데, 그 녀석이 내게 대들려고 하길래 그 녀석을 여자로 만들어 지옥에 던져 버렸느니라."
"……?"
"왜 그러느냐?"
"……여자로 만든다고?"
"내 말하지 않았느냐? 말도 안 되는 것도 모조리 가능하다고 말이다."
"뭐, 사실 그 정도까지는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한데……."
확실히 계약서처럼 수칙을 쓰지 않고 목걸이만 씌우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좋은 점인 것 같긴 했다.
"뭐, 그럼 이 염주의 사용법은 그냥 루시퍼한테 동의만 받고 씌우기만 하면 끝난다 이거지?"
"정답이니라."
야차의 깔끔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곧바로 염주를 챙기고는 노아흐에게 눈짓했고,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루시퍼가 있는 허수공간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 개새끼!"
워프의 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워프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루시퍼의 얼굴을 붙잡아 다시 안쪽으로 집어 던진 김현우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녀올게. 혹시 손오공이 천사들 못 막고 뚫리면 바로 워프 열어주고."
그렇게 말한 뒤 워프 안으로 몸을 옮겼다.
텁!
워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창을 휘두르는 루시퍼.
그의 몸은 흙바닥에 몸을 굴렸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어이쿠, 내가 쉬라는 동안 휴식도 잘 취했나 보네?"
김현우의 비틀린 웃음에 루시퍼는 이를 악물더니 이야기했다.
"네 녀석…… 대체 나를 어디에 가둔 거냐?"
"어디에 가두다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능글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김현우.
그에 루시퍼는 인상을 찌푸리며 곧바로 날개를 움직여 빛으로 된 광선을 쏘았으나 이미 그 공격을 예상하고 있던 김현우는 루시퍼의 광선을 가볍게 피했다.
"저번에 뒤지게 맞았을 때는 성질이 조금 죽은 것 같았는데, 조금 안 쥐어팼다고 다시 성질이 고약해졌네?"
"이익……!"
이제 예전과 같이 여유롭던 모습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이 순수하게 빡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는 루시퍼.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씨익 웃은 뒤 이야기했다.
"아무튼, 그런 너를 위해서 내가 두 가지 선택지를 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두 가지 선택지……?"
루시퍼의 되물음에 김현우는 자신의 품 안에서 야차에게 받았던 봉인주를 꺼내고는 슥슥 흔들며 말을 이어나갔다.
"첫 번째, 지금 내가 손에 흔들고 있는 이 염주를 얌전히 목에 걸고 '동의합니다.'라고 한마디만 하고 밖으로 나간다.'
-두 번째.
"내 제안을 자존심 세워서 거절한 뒤에 뒤질 때까지 쳐맞고 자존심이랑 쪽 다 판 뒤에 강제로 목에 건다."
"어때, 선택하기 쉽지?"
김현우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루시퍼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억지스러운 비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내가 죽더라도 그 목걸이를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군."
"그래? 그럼 그냥 두 번째를 선택한다 이거지?"
"흥! 선택하고 자시고! 나는 애초에 네 장난에는 놀아줄 생각따위는 없어!!"
마치 악을 쓰듯 입을 여는 루시퍼를 보며 김현우는 고개를 젓고는 이야기했다.
"왜 그렇게 힘든 길로 가려고 해? 편한 길이 옆에 있는데."
허나 루시퍼는 김현우의 말에 답하지 않고 그대로 김현우의 얼굴에 주먹을 내질렀고.
"!"
"네가 선택한 거니까,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빠아아아아악!!
그때부터, 김현우의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다.
"자, 그럼 1번 코스부터 갑니다."
그렇게 말하며 땅바닥에 팽개쳐진 루시퍼의 머리를 한 손으로 붙잡는 김현우.
"……코스라니 그게 무슨……!"
루시퍼는 뒤늦게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유감스럽게도 루시퍼는 김현우에게 전혀 대항하지 못했다.
"잔디 롤러코스터라고 알아?"
카가가가가가가각-!!!!!!
루시퍼의 머리통을 땅바닥에 박고 그대로 달려나가는 김현우.
그는 마치 농부와 같은 마음으로 초록빛으로 가득 찬 땅을 순식간에 개간하기 시작했고,
"땅을 개간했으니까 이제 씨앗을 심어야지!"
곧 땅을 개간한 김현우는 그대로 루시퍼의 몸을 땅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그 뒤로 이어지는 수많은 기행.
루시퍼는 그런 김현우의 기행 속에서 두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한 가지는 바로 자신의 몸에 이렇게 수많은 기능(?)이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바로-
"그……그만!"
"아직 안 끝났어."
김현우가 얼마나 상상 이상의 또라이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애처롭게 말하는 루시퍼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이내 씨익 웃은 채 이야기 말했다.
"자, 용암 퐁듀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루시퍼를 용암에 그대로 꽂아버리는 김현우.
물론 루시퍼의 신체는 고작 용암 따위에 녹아내릴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더라도 용암 안이 뜨겁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사실.
"어푸! 으갸아아아아악! 어푸풉!"
"너무 좋아하는데?"
"주……죽여! 어푸풉! 그냥 죽이라고 이 개새끼야!"
"그건 안 되지~ 죽였다가 관리기관의 시선을 끌면 어떻게 해?"
루시퍼는 마치 물고문을 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온몸을 비틀었고. 김현우는 계속해서 싸움을 빙자한 고문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결국 루시퍼의 마음은 꺾였다.
"사……살려줘! 알았어! 알았다고! 목걸이 쓸 테니까 살려줘!"
애처롭게 빌며 항복선언을 하는 루시퍼.
그러나-
"으갸아아아아악!"
루시퍼는 곧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를 맞고 또 한번 비명을 지른 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루시퍼를 바라보며 김현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왜 그런 표정이야?"
"그……그게 무슨."
"네가 하기 싫다며?"
"그러니까 지금 하겠다고……!"
"어허…… 낙장불입 몰라?"
"이런 미친……!"
"뭐? 미친?, 미친???"
"아……아니, 그게 아니라……."
"넌 역시 안 되겠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들고 있던 루시퍼의 머리통을 다시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반항할 거야, 안 할 거야!?"
"아……안 할게요! 안 하겠습니다! 살려줘!!!"
비명을 지르는 루시퍼.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하루? 열흘? 아니면 한 달?
아니면 그것보다 많이?
"……."
적어도 루시퍼의 입장에서는 일 년이 넘게 흐른 것 같은 그 시간 속에서, 김현우는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그를 향해 봉인주를 건네주었다.
온몸이 흙먼지투성이인 채로 봉인주를 건네받는 루시퍼.
김현우는 말했다.
"아, 쓸 때 '동의합니다.'라고 말한 뒤에 쓰는 거 잊지 마. 그리고 만약이라고는 해도 네 힘으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허튼수작도 부리지 말고."
김현우의 말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 루시퍼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동의합니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팔.
허나 루시퍼가 염주를 쓰기 직전, 그의 팔이 멈추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시퍼는 이 목걸이를 쓰게 되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략 깨닫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하루."
"……?"
"하루 걸렸다고."
"……???"
"너도 알고 있지? 이곳이랑 저쪽의 시간개념이 조금 다른 거 말이야. 하루 지났다니까? 네가 대충 몇 달 정도 신나게 맞았잖아? 근데 그 시간이 저 밖에서는 하루라 이 말이지."
"하……하루라고?"
"그치, 고작 하루 만에 모든 일이 일어난 거야."
김현우의 말에 루시퍼는 곧바로 들고 있던 봉인주를 자신의 목에 착용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376화. 너무 심하게 때렸다 (1)
어두운 성 내부.
그곳은 무한히 많은 책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보이는 것은 책, 책, 책.
그리고 또 책.
서고, 바닥, 하늘까지 가리지 않고 책장과 책이 늘어서 있는 그 모습은 굉장히 웅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중앙.
책들이 한가득 채워져 있는 가운데에는 키 작은 노인이 있었다.
어린아이의 키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분명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오는 노인.
그 노인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몇 번이고 책 안을 탐방하다 문득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내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왔는가?"
노인의 말에 조금 전 소음을 냈던 남자. 헤르메스는 계단으로 올라와 가볍게 인사했고, 노인은 그런 헤르메스의 모습을 보더니 이내 책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요즘 자주 들르는군."
"뭐…… 할 일이 없다 보니."
헤르메스의 말에 노인은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자네, 설마 내가 밖의 상황을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당연합니다. '서고장'께서 밖의 상황을 모르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죠."
헤르메스의 말에 서고장은 미묘한 표정을 짓고는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할 일이 없다라……?"
서고장이 그렇게 말하며 헤르메스의 얼굴을 바라봤으나 그의 얼굴은 여전히 가벼운 미소에서 변하지 않았다.
마치 가면을 쓴 듯.
그렇게 한동안 얼마의 침묵이 흘렀을까.
서고장이 한숨을 쉬면서 헤르메스에게서 시선을 돌렸을 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제가 두 번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서고장님께서는 아시고 계실 텐데요?"
헤르메스의 말에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서고장.
허나 그는 순식간에 당황한 표정을 감추고는, 이내 조금은 경계하는 표정으로 헤르메스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내게 그 이야기를 해주는 저의가 뭐지? 분명 어느 정도 입단속을 당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서고장의 말에 헤르메스는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왜일까요?"
"……내가 장난치는 것으로 보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헤르메스를 노려보는 서고장.
또 한번 무거운 침묵이 그 둘의 사이를 지나갔으나 헤르메스는 서고장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시작되는 서고 안.
"아뇨,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런 대답은 왜 하는 거지?"
서고장의 물음에 헤르메스는 곧바로 이야기했다.
"저는 그저 나름대로의 기회를 드리려고 했을 뿐입니다."
"……기회?"
"예. 지금 이 시점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어차피 일을 기록하기 위해 그녀마저도 배신한 당신에게 말입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서고장은 얼굴을 굳혔다.
####
"뭐야 저거?"
김현우의 물음에 손오공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아니 뭐, 천사들이 아무리 밀어놔도 어떻게들 들어오려고 바락바락 기어 오길래…… 그냥 반대편입구까지 한 번에 뚫어놨지."
"……."
"어차피 천사들이 이곳에 못 오게 막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손오공의 말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야 그렇기는 하지. 근데 여의봉은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설령 박살 난다고 해도 마력만 있으면 충분히 다시 복구시킬 수 있어."
"그렇다면야."
고개를 끄덕이면서 납득한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다음으로 화제를 넘겼다.
"그런데, 왜 너랑 티르밖에 없어?"
"응?"
김현우의 말대로, 분명 모두 모여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탑의 최상층에는 손오공과 티르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브랑 노아흐는 이번에 네가 말했던 보안……? 을 조금 더 강화시킨다고 둘이서 어디론가 사라졌고, 야차 님은 내가 이렇게 막아둔 걸 보고 잠시 쉰다면서 아래로 내려갔지. 뭐, 바로 부를 수 있게 호출기를 주시면서 말이야."
"청룡은?"
"아브랑 노아흐 따라갔어."
곧바로 나오는 손오공의 대답에 김현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태평한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김현우의 머릿속에 슬쩍 스쳐 지나갔으나 손오공의 여의봉이 입구를 꽉 막고 있는 것을 보니, 걱정이 사라져 버렸다.
'확실히…… 그냥 뚫기는 힘들어 보이네.'
"그런데……그건 뭐냐?"
"응?"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며 입구를 바라보고 있자 이번에는 손오공이 물음을 던져왔다.
"뭐 말하는 거야?"
"아니, 네 뒤에 있는 애 말이야."
"……루시퍼 말하는 거야?"
"걔가 루시퍼야?"
손오공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아니…… 근데 애가 왜 죽어 있어?"
"죽어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루시퍼를 바라봤다.
멍하니 서 있는 루시퍼.
어딜 봐도 죽지 않았다.
"안 죽었잖아?"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닌데……."
"그럼 뭔 소리인데?"
"……너는 몸이 살아 있으면 전부 다 살아 있는 거냐?"
"그럼 그게 살아 있는 거지 뭐야?"
"아니, 애 맛탱이가 갔잖아?! 눈 좀 보라고!"
손오공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루시퍼를 바라봤다.
"……아."
그냥 옆에서 볼 때는 자세히 몰랐었는데 조금 가까이서 보니 루시퍼의 눈에는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흐음…… 진짜네?"
"도대체 애를 어떻게 굴리면 저렇게 되는 거야?"
손오공이 왠지 질린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이야기하자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뭐 딱히 어떻게 하진 않았는데? 그냥 평범했어."
"뭐가 평범했다는 거야?"
"뭐긴 뭐야, 그냥 평범하게 팼다 이거지."
"……평범하게 팼다고?"
"그래, 네가 원래 얘를 못 봐서 그런데 원래는 자존감이랑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목걸이를 씌우는 게 쉽지 않았거든."
"아니…… 그래도 그건 좀 너무 간 것 같은데…… 도대체 얼마나 팬 거야?"
손오공이 떨떠름한 물음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이야기했다.
"뭐…… 그냥 대충 적당한 샌드백이다 싶어서 그냥 온갖 방법으로 팼지, 게다가 너도 알다시피 허수공간은 죽어도 죽는 곳이 아니잖아?"
김현우의 말에 손오공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 물었다.
"그냥 물어보는데 네가 거기서 저 녀석 구타한 것 중에 가장 가볍게 구타했다고 생각하는 게 뭐야?"
"……그게 뭔 소리야?"
"말 그대로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팼다며? 그중에서 가장…… 약한 방법이 뭐냐고."
"왜 그런 걸 질문해?"
"됐으니까 빨리 말해봐."
손오공의 말에 김현우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야기했다.
"……용암에 담갔다 빼기?"
"뭐?"
"아니, 이 경우에는 용암 고문이라고 하는 게 맞나?"
김현우의 말에 순간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손오공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지옥보살(地獄菩薩)이 실직할 정도로 끔찍한 짓을 했네."
"뭐, 나도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야, 이 녀석이 그냥 순수하게 목걸이를 목에 걸겠다고 했다면 나도 그냥 걸었을걸?"
물론 후반에는 루시퍼가 오히려 목걸이를 걸고 싶다고 하고 김현우가 그걸 무시하며 신나게 후려 팼으나 그는 굳이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조금 심하군."
손오공과 김현우의 뒤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있던 티르도 눈에 초점이 사라진 채 멍하니 서 있는 루시퍼를 보며 중얼거리자 그는 괜스레 옆에 있는 루시퍼를 툭 쳤다.
"야. 왜 그렇게 굳어 있어? 말 좀 해봐."
"동의합니다."
"……뭐?"
"동의합니다."
"아니 뭘 동의해?"
"동의합니다."
김현우가 무슨 말을 하든 그렇게 중얼거리는 루시퍼.
손오공과 티르가 무서운 무엇인가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자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루시퍼를 툭툭 쳤으나, 아무리 툭툭 쳐도 그는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이런 건 때리면 고쳐지나?"
"이 상태에서 더 때릴 생각을 한다고?"
"……나는 한 번에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되는구만."
김현우의 말에 경악하는 손오공과 티르.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슬쩍 눈가를 좁히며 말했다.
"그럼 그냥 놔두지 뭐, 어차피 시간 지나면 알아서 회복될 것 같은데 뭐. 그보다 데…… 아니, 우리엘은 아직 안 깨어났어?"
"우리엘?"
손오공이 그게 누구냐는 듯 되묻자, 티르는 곧바로 답했다.
"만약 자네가 데려온 자를 말하는 거라면 이제 곧 있으면 깨어날 것 같더군."
"그래? 그럼 좀 기다려 볼까? 어차피 천사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그 녀석의 말도 좀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자 손오공이 물었다.
"그래서, 얘는 이제 어디다 둘 거야?"
"어디다라니?"
"천사라며? 아무리 우리가 있다고 해도 9계층에 이놈을 풀어놓을 수는 없을 거 아냐? 게다가 최상층에 놔두는 것도 좀 그렇고."
"뭐, 그건 그렇긴 하지. 근데 걱정할 필요 없어. 티르는 아까 들었잖아? 봉인주의 능력에 대해서."
김현우는 그렇게 운을 띄우며 손오공과 티르에게 이야기를 시작했고-
"윽."
그때, 2층에 있는 침대에 누워 있던 데블랑은 약한 신음 소리와 함께 자신의 정신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감각을 느끼며 힘겹게 눈을 떴다.
'살아……남았나?'
데블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와 간단한 가구들뿐.
그렇기에 데블랑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 있어서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자 떠오르는 이전의 기억.
'분명 그때…….'
데블랑은 눈동자에게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고하던 중 루시퍼에게 걸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데블랑은 이미 이전부터 루시퍼에게 의심을 사고 있었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맞는 말이었다.
'내 결계를 뚫고…… 우연히 교신을 봤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 결과 데블랑은 그 자리에서 손도 쓰지 못하고 루시퍼와 천사들에게 제압당했고, 곧 그의 품에 있던 호출기로 김현우를 호출한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후의 기억도 어렴풋이 나기는 했으나 그것은 단편적인 정보뿐.
'……쯧, 분명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데블랑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실책을 탓했다.
분명 결계의 능력을 사용해 잘 숨겼다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들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
한참이나 자신의 실책을 탓하며 짙은 한숨을 내쉬고 있던 데블랑은 곧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마 지금 그의 예상으로, 김현우는 천사와 본격적인 대립을 세우고 전투를 준비 중일 테니 조금이라도 정보를 풀어 도움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터벅- 터벅-
머리가 어질거리기는 했으나 걷는 데는 이상이 없었기에 데블랑은 빠른 속도로 방문을 열고 나가 곧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아래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곧 그는 아래층에 내려가는 도중 김현우의 목소리와 함께 이상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앉아."
"오, 진짜 하는데?"
"일어나."
"……신기하군."
그곳에는 김현우와 그의 동료들로 보이는 이들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또한 앞에는 분명히 자신의 눈으로는 루시퍼로 보이는 이가 서 있었다.
그리고-
"앉아."
김현우의 말에 따라 앉는 루시퍼의 모습을 본 데블랑은.
"?????????"
김현우가 부를 때까지, 자신의 눈을 몇 번이고 비볐다.
377화. 너무 심하게 때렸다. (2)
"……그게, 사실이란 말인가?"
데블랑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데블랑이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루시퍼를 바라보자 그는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조용히 '동의합니다.'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아니, 다들 왜 그렇게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봐? 그냥 별거 안 했어. 그냥 패기만 했다니까?"
몇달 동안 쉴 새 없이 팼다는 이야기는 쏙 빼고 말하는 김현우.
"그냥 후드려 패기만 했는데 루시퍼가 이렇게 변했다고?"
"그렇……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럴 리가 없어."
"그건 또 뭔 소리야?"
"루시퍼는 지금 이런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해도 본래는 그분의 뜻에 의해 '타천'해 지옥에 몸을 맡긴 자였는데…… 그런 자가 그저 맞았다고 정신을 놔버린다고……?"
데블랑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자,
"……역시 심마를 때려잡을 때부터 알아봤다만……."
"……사탄이 실직하겠군."
손오공과 티르는 각각 한마디씩 하며 김현우를 질린 눈으로 바라봤고.
"아니, 정말로……?"
"그럼 내가 거짓으로 이렇게 말하겠나?"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좀…… 심했나?'
끊임없이 동의합니다를 중얼거리고 있는 루시퍼를 보며 김현우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고, 그런 그를 바라보던 데블랑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말 루시퍼가 자네에게 더 이상 반항하지 못한다면 애초에 지금 천사들이 진격하는 것도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그래?"
"당연하다. 결국 천사 쪽에서는 루시퍼가 없으면 야훼를 만들지 못하니까. 자네도 듣지 않았나?"
"그래 뭐…… 열심히 때리고 있던 루시퍼에게 듣기는 했지."
김현우의 긍정에 데블랑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손오공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야기했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해?"
"뭘?"
김현우의 물음에 손오공은 고갯짓으로 통로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저걸 언제까지 저렇게 막아놓을 건 또 아니잖아?"
"뭐. 사실 그것도 그렇지."
김현우가 긍정하자 데블랑이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그들과 대화하는 건…… 만약 네가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내가 해결하도록 하지."
"네가?"
"그래, 물론 네가 루시퍼를 제압한 시점에서 천사파벌과의 싸움은 이긴 것과 다름이 없네만…… 그 녀석들은 조금 다른 쪽으로 귀찮거든."
"다른 쪽이라면?"
"아마 네가 루시퍼를 제압한 것과는 별개로 그를 구해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달려들 거야."
"……루시퍼를 구해내려고?"
"그렇지. 그들 입장에서 야훼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루시퍼를 되찾아야 하니까 말이지."
"……그냥 루시퍼를 시켜서 전부 돌아가라고 하면 되지 않나 싶은데. 아니면 제약을 줘서 다시 천계로 돌려보내던가…… 아, 그건 안 되려나?"
"절대로 그들에게 루시퍼를 돌려줘서는 안 된다. 그들은 아마 루시퍼를 데려가는 순간 어떻게든 그 목걸이를 풀기 위해 수작을 부릴 거고…… 최악의 상황에는 루시퍼의 목숨을 버림패로 삼겠지."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야훼를 소환하는 데는 루시퍼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말 그대로 '루시퍼'의 몸만이 필요할 뿐이지."
"그렇다는 건……."
"만약 최악의 경우, 천사들은 루시퍼를 강제로 제압해 그의 몸을 활용해서 야훼를 소환할 확률이 높다 이거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루시퍼가 아니라 자신들의 신이니까."
게다가-
"애초에 그분에 의해 '타천'한 루시퍼가 천사파벌의 머리를 맡고 있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확실히…… 그건 좀 의외기는 했지."
뭐, 김현우의 입장에서는 예수가 악마 진영을 맡고 있길래 당연히 대립적인 구도로 생각해 그렇게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으나 확실히 자세히 생각해보면 꽤나 이상하기는 했다.
적어도 그의 기억 속에 루시퍼를 제외한 천사들은 딱히 악마로 보이기보다는 '천사'로 보였으니까.
'……뭐, 그렇게 생각하면 루시퍼도 그냥 척 보면 천사로 보이기는 하는데…….'
김현우가 루시퍼를 보며 생각하자 데블랑은 곧바로 김현우의 의문을 해소시켜 주었다.
"그가 천사들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야훼' 때문이지."
"아."
그 한마디로 김현우는 대략적인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러니까, 신을 살릴 수 있다고 해서 그 신을 살린답시고 루시퍼를 수장으로 세웠다…… 뭐 이런 거야?"
"뭐,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만…… 천사들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거였지. 게다가 루시퍼는 정말로 야훼를 소환할 수 있다는 증거를 우리에게 보이기도 했고."
"……그럼 루시퍼를 주는 건 안되겠네."
"그렇지."
데블랑의 긍정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멍을 때리고 있는 루시퍼의 모습을 바라보다 말했다.
"뭐, 그럼 우선 네가 어떻게 해봐. 솔직히 나는 말로 하기는 좀 힘들 것 같아서."
"……그럼 천사쪽인 내가 확실하게 협상하도록 하지."
"근데 어떤 식으로 협상하려고? 네 말대로라면 천사들은 고지식의 결정체인 것 같은데. 루시퍼를 되받기 위해서 관리기관에 꼰지르는 거 아니야?"
"이쪽도 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나?"
"……야훼소환?"
"정답이다. 뭐…… 사실 관리기관 쪽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만 천사 쪽에서는 이 카드를 가지고 협상대에 앉으면 나쁘지 않게 협상할 수 있을 것 같군."
데블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한 김현우는 이제야 한숨을 돌리겠다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누웠고.
"음……?"
"왜 그러지?"
갑작스레 의문이 든다는 듯 데블랑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아니, 뭐 지금 당장 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아닌데 말이야."
"무슨 궁금증이지?"
"……루시퍼가 지옥에서 쓰던 이름은 다르지?"
"루시퍼가 지옥에서 쓰던 이름."
"그러니까 너희들의 말로…… 타천했을 때 이름이 다르지 않아?"
"혹시 사탄이라는 이름을 이야기하는 건가?"
"맞아."
"그런데 그게 갑자기 왜……?"
데블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하자 김현우가 이야기했다.
"아니, 내가 알기로 '심마'의 이름 중 하나가 사탄이라고 들었던 것 같아서 말이야."
김현우는 과거의 기억을 뒤졌다.
자신이 이제 막 탑의 최상층에 도달했을 때 싸움을 벌였던 심마에 대해서.
그는 분명히 자신이 실마리를 찾아서 밀어붙이고 있었을 때, 자신의 이름들을 이야기했었던 적이 있었다.
김현우가 그 점을 들며 고개를 갸웃하자 데블랑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기했다.
"뭐, 그건 말 그대로의 이야기다. 애초에 그자의 능력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의 생각을 먹고 자라나는 괴물이니 그 어떤 '존재'라도 될 수 있는 것이지."
"아, 그러니까 애초에 루시퍼와 그 심마는 다르다는 거지?"
"정답이다."
데블랑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손오공을 바라봤다.
"손오공이라고 했나? 저것 좀 치워줬으면 하는데, 가능하겠는가?"
"알았어,"
데블랑의 말에 손오공은 어렵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짓했고, 이내 거대한 소음이 들렸다.
"치워졌을 거야."
"그럼, 우선 다녀오도록 하지."
"혼자서 그렇게 가도 되는 거야? 아까 전에도 천사들한테 대가리 깨져서 피 흘리고 있었잖아?"
"……걱정 마라, 이번에는 알아서 잘 처신할 테니."
데블랑은 김현우의 말에 그렇게 대꾸하며 곧바로 곧바로 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데블랑에게 관심을 껐다.
'자신 있다고 했으니까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김현우는 이내 다시 시선을 돌려 루시퍼를 바라보곤 이야기했다.
"그래서, 얘는 어디다 두는 게 좋을지 생각해 본 사람?"
"……흠,"
"확실히 어디다 두기에는 좀 애매하군. 언제 다시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고 말일세."
티르의 말에 김현우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것도 그러네……."
"그냥 힘을 전부 제약한 다음에 허수공간에 박아놓는 건 어때?"
손오공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는 하네. 그럼 조금 이따 데블랑이 오면 허수공간 문 좀 열어달라고 할까?"
"그게 낫겠네. 어차피 거기서야 정신을 차려도 깽판 못 칠 테니까 말이야."
"……혼자 아무도 없는 곳에 두는 건 조금 어떨까 하네만…… 그래도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인 것에는 동의하네."
손오공과 티르의 동의.
허나 자신의 처우가 실시간으로 결정되고 있는 와중에도 루시퍼는 아무런 반응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흐음……야."
루시퍼를 고심 있게 바라보고 있던 손오공이 문득 김현우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왜?"
"아니, 별건 아니고 갑자기 좀 궁금한 게 생겨서."
"뭔데?"
"쟤 목걸이에 걸려 있는 저 봉인주말이야. 저걸 쓰기만 하면 그 어떠한 말도 안 되는 명령이라도 따르게 된다고 했지?"
"……그렇지? 야차가 말하기로는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도 된다고 하던데."
김현우의 말.
그 말을 듣고 있던 손오공은 다시 입을 다물었고, 김현우는 그런 손오공을 보다 어깨를 으쓱하며 티르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손오공은 다시 루시퍼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야."
"……왜 불러 또?"
"얘, 여자로 만들면 이쁠 것 같지 않냐?"
"……뭐?"
"……뭐, 확실히 전사들 중에는 동성을……."
김현우와 티르가 순서대로 묘한 시선을 보내자 손오공은 다급하게 부정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럼?"
"나는 그냥……."
"그냥?"
"이 녀석을 자세히 보니 만약 여자가 된다면 펜타이스의 '채현'이랑 닮았을 것 같아서."
"……."
"……."
"아니 왜 그렇게 봐!?"
"병신."
김현우의 입에서 필터를 거치지 않고 나온 폭언.
그러나 손오공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인지 슬쩍 시선을 돌리며 이야기했다.
"그냥 그런 생각만 해봤다는 거다! 해봤다는 거!"
"이거 서연이한테 일러야지."
"갑자기 이야기가 왜 거기서 그렇게 돼!"
발광하는 손오공.
김현우는 진장하라는 듯 그에게 제지하고는 이내 루시퍼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확실히 나도 조금 궁금하기는 하네."
원래 그런 생각은 조금도, 아예 요만큼도(?) 없었던 김현우였으나 손오공의 말을 듣고 난 뒤라 그런지 김현우는 묘한 고민을 하며 루시퍼를 바라봤고, 이내 이야기했다.
"한번 해볼까?"
김현우는 그렇게 이야기를 꺼내곤 손오공을 바라보자 그는 왠지 묘한 기대가 담긴 얼굴로 그를 바라봤고, 티르의 경우에도.
"흠…… 확실히, 조금 궁금하기는 하군."
묘한 표정으로 긍정을 내비쳤다.
그렇게 은연중 이 자리에 있던 이들의 동의를 얻은 김현우는 루시퍼를 바라보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여자로 변해봐라…… 이렇게 하는 거 맞나?"
그리고 그다음-
"……오우야."
그 자리에 있던 세 명은 말을 잃었다.
378화. 너무 심하게 때렸다. (3)
"와……."
김현우는 눈앞에 변해버린 루시퍼를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고.
"오우야……."
손오공은 그 옆에서 김현우의 감탄에 추임새를 넣어줬으며.
"호오-"
티르는 자신이 유지해왔던 틀딱티를 버리고 루시퍼의 모습을 관심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세 명의 관심을 한몸에 가지게 된 루시퍼는…….
"무, 무슨!? 지금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남자일때와는 다른 새된 목소리로 자신의 몸을 보며 경악했다.
분명 원래의 모습과는 다르게 초점이 없었던 눈이 바르게 돌아와 있는 루시퍼의 모습에 김현우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야? 정신이 다시 돌아왔는데?"
"그러게?"
"흐음…… 아무래도 봉인주가 강제로 몸을 조작하면서 정신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게 아닐까 하네만…… 자세한 건 모르겠군."
"기, 김현우 이 새끼! 내 몸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
"뭐?"
"……예요?"
뒷 말이 급작스럽게 공손해지는 루시퍼를 보며 김현우는 피식 웃더니 이야기했다.
"기억은 멀쩡한가 보네."
"으그으윽-!"
이를 악물고 김현우를 바라보는 루시퍼.
여자로 변해서 그런가 유들유들했던 루시퍼의 모습과는 다르게 굉장히 사나워 보이는 여성의 얼굴로 변모한 그녀의 눈가에 은근히 눈물이 고였다.
"야, 쟤 우는데?"
"뭐야? 우냐?"
"아……아니다!"
귀엽게 외치는 루시퍼.
분명 인상은 사나워 보이는데 왜인지 모르게 가학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표정을 짓는 그녀.
그 모습을 보며 티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여자가 되며 이런저런 부분들이 다 바뀐 것 같군."
"어떤 식으로?"
"아까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잘 모르네. 그도 그럴 게 내가 만든 게 아니지 않나?"
"……근데 그 녀석이 여자로 변한 것치고는 너무 많이 바뀐 것 같은데."
김현우는 여자로 변한 루시퍼의 모습을 보며 남자였을 때의 루시퍼를 떠올려 봤다.
우선 제일 처음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웃음을 잃지 않던 그 야비해 보이는 얼굴.
……물론 야비해 보이는 얼굴이라는 건 김현우의 주관적 평가일 뿐이고 루시퍼의 얼굴은 척 보면 굉장히 미남이었다.
그것도 딱히 인상이 강해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을 유들유들하게 넘길 수 있는 인상.
그러나 지금 여자로 변한 루시퍼의 얼굴은 분명 미녀기는 미녀였으나 굉장히 인상이 강렬했다.
"도……도대체 뭘 봐! 뭘 보냐고!"
김현우를 포함한 손오공과 티르가 루시퍼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괜스레 자신의 몸을 가리며 입을 여는 루시퍼.
"옷 다 입고 있어서 볼 데도 없는데 도대체 뭘 가리는데?"
"끅! 이이이이익!"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울먹거리는 눈망울로 세 명을 차례대로 바라보는 루시퍼.
그 모습을 보며 손오공은 무엇인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이건……?"
"이건…… '채현'급……! 그 이상이다!"
손오공의 말에 저도 모르게 혀를 찬 김현우.
허나 그는 곧 자신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장난기에 씨익 웃으며 이야기했다.
"야, 그럼 서연이랑 비교하면?"
"아."
김현우가 이서연을 언급하자마자 정색하는 손오공.
"저랑 장난치세요?"
"……미안."
정색하다 못해 존댓말까지 쓰는 손오공의 모습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압도되어 사과까지 했다.
김현우가 사과하자마자 루시퍼를 바라보는 손오공.
그는 루시퍼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근데 확실히 예쁘기는 하네."
"……호오, 예쁘다고 했느냐?"
"그래 저 정도면 예쁘지."
"그렇느냐?"
김현우는 대답하자마자 자신에게 물음을 던졌던 목소리가 손오공이나 티르의 목소리가 아닌 여성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이 곧 야차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돌아가는 사고.
지금 이 시점에서는 대답이 느려서도 안 되고 빨라서도 안 된다.
마치 원래 할 이야기였다는 듯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입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래도 역시 야차급은 아니지."
'됐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고 속으로 저도 모르게 쾌재를 부르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 있는 것은 야차.
그중에서도 야차의 얼굴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가 직접 뒤돌아보기 전에 느꼈던 서늘한 한기는 느껴지지 않는 얼굴.
그 모습에 김현우는 마음속으로 안도하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돌아보는 티르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손오공.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삼류들의 눈빛을 무시하며 야차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왔어?"
"그래, 이제 막 왔느니라…… 그런데, 좀 재미난 것을 하고 있구나?"
"아, 이거? 손오공이 궁금해서 해보자고 하더라고."
물론 자신도 궁금했기에 시켜본 것이었으나 그 진실은 숨기고 교묘하게 거짓을 말하는 김현우.
그에 야차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했다.
"네가 궁금했던 것은 아니느냐?"
"절대."
단호하게 선을 긋는 그.
야차는 순간 웃는 표정을 지우고 김현우를 바라봤으나 이내 흠, 하는 소리와 고개를 끄덕거리곤 김현우의 옆자리에 앉았고.
'후'
야차의 모습을 본 김현우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다시 올라왔어? 쉰다고 하더니."
"가만히 생각하다 보니 내가 쉴 수 있는 곳은 네 옆밖에 없지 않느냐? 그래서 다시 올라왔느니라."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김현우의 어깨에 슬쩍 머리를 기대는 야차.
김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고는 이내 조금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에 대해 물어보았다.
"……흐음, 성격이 바뀐 것 말이더냐?"
"그래, 거기에 덤으로 인상도 조금 바뀌었고 말이야."
김현우의 물음에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야차는 이내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면이 나온 것 같구나."
"……내면?"
"그래. 원래 기본적으로 교류가 있는 생명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교류를 위한 가면이라는 게 존재하느니라. 그 어떤 성격이든 말이다."
"……그럼 루시퍼의 저 모습은."
"네가 지금 생각하는 대로, 아마 저 모습은 내면…… 그러니까 루시퍼가 원래 숨기고 있던 모습일 확률이 크단 말이니라."
"이익!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이런 성격인데!"
야차의 말에 히스테릭하게 받아치-
"……요"
-고 싶었던 루시퍼는 왠지 감정이 복받쳤는지 이제 울먹거리던 눈에서 눈방울이 슬슬 떨어지기 시작했고.
"야, 진짜 우는데?"
"아……."
"……배려가 없네."
"내가 뭐! 내가 뭘 했다고!?"
김현우는 곧 갑작스레 자신에게 딜을 박는 손오공과 티르를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리고 그렇게 김현우가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무렵.
"……흠,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렇군."
51번 탑 최상층의 외부에서는, 노아흐와 아브가 실시간으로 마법진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근데 이 마법진을 이렇게 움직이면 함수가 깨져 버려서……."
"그렇군. 확실히 티르, 그가 말한 대로 하려면 함수와 평행이 깨져서는 안 되지. 만약 잘못하면 전부 날아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흐음, 게다가, 애초에 이건 좀……."
"왜 그러지?"
"이건 어떻게 해봐도 좀 전체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요."
아브의 말에 노아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기도 하군. 애초에 그가 알려준 방법은 이 탑 전체를 이동할 수는 없을 것 같긴 하네."
"그쵸?"
"……흠, 그럼 최상층…… 아니, 최상층에만 사용하면 안 되겠군. 9계층에 사용해야 하나?"
"만약 9계층에 마법진을 다시 설치한다고 치면……."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하는 노아흐와 아브.
그리고 그 뒤에는 청룡이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도술을 익힌 청룡으로서는 기본적으로 오행에 기반한 진 식들을 꽤나 많이 알고 있는 편이기에 나름대로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 아브와 노아흐를 따라왔다.
하지만 그가 따라오고 나서 들은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마법진들.
'……함수? 평행도축이론이라는 건 또 뭐지?'
기본적으로 진식을 오행의 이치로서 배운 청룡에게 그 이야기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었다.
마치 문과가 이과의 수업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
그렇게 한동안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청룡은 곧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나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으니 가도록 하지."
"아, 네."
"그럼 먼저 가 있도록 하게."
조금의 여지도 없이 빨리 가라는 듯 최상층과 연결되어 있는 포탈을 가르치는 노아흐와 아브.
청룡은 왠지 모르게 묘한 서운함을 느끼며 포탈을 향해 몸을 돌렸고, 이내 포탈을 넘어 곧바로 탑의 최상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
그리고 최상층으로 들어오자마자 저택 안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시 고개를 갸웃한 청룡은 이내 걸음을 옮겼고.
곧 저택의 내부에 들어가자.
"……응?"
청룡은 대단히 기묘한 상황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눈에 첫 번째로 보인 것은 바로 당황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김현우.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미소를 짓는 야차.
그 옆으로는 손오공과 티르가 왠지 모르게 짜게 식은 눈을 하고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초가 여러 번 붙어도 될 것 같은,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가 김현우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물론 청룡이 들어온 뒤에도 그들은 청룡이 들어왔다는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니 이런 씹, 너희들 잊었어!? 얘 루시퍼야 루시퍼! 그 재수없는 새끼가 그냥 여자로 변한 것뿐이라니까?!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흠, 그것도 확실히 그렇긴 하네만."
"왠지, 이 상황만 보면 네가 굉장히 쓰레기처럼 보여서."
"'이 상황만 놓고 보면' 이겠지! 이미 전후 상황 다 알면서 왜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리치는 김현우.
그 소리를 통해서 청룡은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우선 눈앞에 울고 있는 그녀가 지금 자신들의 적인 루시퍼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어떠한 상황 때문에 여자가 되었다는 것까지, 전부 이해했다.
그렇게 청룡이 상황을 이어나가는 와중에도 루시퍼의 울음소리는 상대적으로 더더욱 커졌으며 김현우의 외침은 더더욱 커졌고.
"그냥 남자로 돌리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 고성이 오가던 도중 갑작스레 야차가 던진 한마디에 김현우는 굉장한 혜안을 가지고 있다는 듯 야차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입을 열-
"다시 남자가-"
"안 돼!!!!!!!!!!!!!!!!!!!"
-려고 했다.
그래, 열려고 했다.
다만, 김현우의 외침은 갑작스레 들려온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에 멈추고 말았다.
그래,
비명 같은 목소리를 내지른-
"아……안돼!"
-청룡에 의해서.
"아니 씹, 너는 또 왜 갑자기 지랄이야!?"
그리고 김현우는 왠지 얼굴에 눈에 보일 정도에 홍조가 들어 있는 청룡을 보며 기분 나쁘다는 듯 욕을 박았다.
379화. 너무 심하게 때렸다 (4)
그로부터 2일 뒤.
요즘 잘나가고 있는 이태원의 바비큐 양식집.
"……말도 안 되는군."
그곳에서는 날개를 숨긴 데블랑이 자신의 입에 들어간 고기를 씹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가 말도 안 되는데?"
"모든 것이 완벽한 게 말도 안 되는군."
"……."
김현우가 호들갑을 떠는 데블랑을 보며 입을 다물자 그는 그제야 차근차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선 고기의 온도부터일세. 나오자마자 이렇게 먹기 좋은 온도로 구워져서 나오다니…… 거기에 덤으로 고기 안의 육즙이 하나도 빠져 있지 않고……."
데블랑은 고기의 겉면을 포크로 톡톡 치면서 이야기했다.
"거기에 더해서, 무엇보다 잡내가 단 하나도 나지 않는 것 자체가 놀랍군. 처음 이 9계층에 왔을 때도 놀랐지만, 이곳의 음식 발달 수준은 천계보다도 뛰어나군."
게다가-
"이 매콤한 소스…… 정말 일품이로군."
그렇게 말하며 소스에 고기를 찍어 먹는 데블랑은 굉장히 만족한 표정으로 고기를 음미했고,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있는 고기를 입에 가져갔다.
'……확실히 맛있긴 한데.'
확실히 고기가 맛있긴 한데 굳이 저 정도로 오버를 해서 표현할 만한 맛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들었으나 몇 번이고 고기를 맛있게 썰어 먹는 데블랑의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조용히 그 생각을 뒤로 밀어버리곤 질문했다.
"그래서, 이틀 동안 안 나타나더니 어떻게 일은 잘 해결된 거야? 네가 안 와서 또 나가야 하나 생각했다니까?"
김현우의 말.
그의 말대로 데블랑은 천사들을 설득시킨다고 말한 뒤 이틀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조금 전 갑작스레 귀환했고, 김현우는 대충 밥이라도 먹으며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를 이곳에 데려왔는데…….
"음! 으으음!!"
이야기에 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열심히 고기를 먹어대고 있는 데블랑 덕분에 이야기는 단 하나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바베큐 집을 가지 말고 일식집을 갈 걸 그랬나.'
김현우는 은근히 뒤늦은 후회를 했으나 이내 살짝의 인내심을 발휘해 그가 음식을 전부 먹을 때까지 기다렸고.
"……흠흠, 미안하군. 생각보다 너무 음식이 맛있어서."
"……."
데블랑은 고기를 다 먹은 뒤에야 자신이 너무한 것을 알았는지 멋쩍은 표정으로 사과했다.
"뭐, 그건 됐고 그 이야기나 해봐. 천사들이랑은 잘 이야기가 끝난 거야?"
"물론이지. 그들과는 확실하게 담판을 짓고 왔다."
"그럼 루시퍼를 다시 찾으러 오지는 않을 거라, 이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직접 시도하진 않을 거다."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떻게 협상했길래? 걔들은 좀 고지식해서 이 악물고 달려들 거라며?"
"뭐, 내가 그렇게 말을 조리 있게 한 건 아니다. 그냥 서로 잃을 걸 말해주었을 뿐이지."
"……잃을 거?"
데블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래, 사실 그쪽은 엄연히 따지면 '루시퍼' 외에는 잃은 게 당장 없지 않나?"
"……뭐, 내가 애초에 피해도 주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정령 파벌에 빗대서 그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해줬을 뿐이다. 거기에 덤으로 조금의 협박도 추가해서 잘 알아듣게 설명했지."
"……그래?"
뭐, 어떤 식으로든 잘만 해결했다면 상관없었기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이내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눈동자 쪽은 어떻게 된 거야? 저번에 그것으로도 할 이야기가 있다며?"
김현우의 물음에 데블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뭐 사실 그렇게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이제 슬슬 해독이 전부 되어가는 것 같더군."
"좌표를 거의 다 찾았다는 말이지?"
"우선 내게는 그리 말하더군. 아마 얼마 있지 않아 진짜 그분이 있는 좌표를 알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그거 잘됐네. 나한테는 말 안 해주더니 벌써 거기까지 갔다 이거지?"
"네게 말해주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데블랑의 물음에 김현우는 악마파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 말을 듣고 있던 데블랑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친구는 워낙 조심성이 많은 친구라 말이야."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고, 데블랑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 그를 보며 이야기했다.
"아무튼, 베드로가 좌표를 찾을 때까지 이제 남은 건 정말 기다리는 것뿐일세."
"확실히, 이제 더 이상 외부적으로 움직일 일이 없긴 하네."
정령 파벌은 박살 나서 더 이상 건드릴 필요도 없게 되었고, 천사파벌도 루시퍼를 이쪽에서 제압한 덕분에 더 이상 말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악마 파벌은 오히려 내게 고마워 할 테니 이쪽과 적대할 일은 없을 거고…….'
이제 남은 것은 관리기관과 그 관리기관 내에 속한 탑주들뿐.
"……관리기관에서 이번 일을 가지고 움직이려나?"
김현우가 물음을 던지자 데블랑은 미묘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마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움직이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군. 루시퍼가 이쪽에 제압되어 있다고 해도 업은 꾸준히 관리 기관에게 가고 있으니."
-뭐,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군.
데블랑의 이어지는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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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크프리트는 검신 티르에게 한 방에 의식을 잃은 뒤, 9계층으로 내려온 이후 굉장히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애초에 문화랄 것도 없이 그저 서로 치열한 싸움만을 반복하며 살아왔던 지크프리트는 기본적인 문화라는 것을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기에 경험할 수 있는 게 더더욱 많았다.
아주 기본적인 스포츠나 간단한 영화관람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가서는 손오공에게 배운 아이돌이나 게임 등을 하며 아주 즐거운 문화 컨텐츠를 접했다.
"엄청나잖아, 이거……."
"바로 아이돌 데뷔가 가능한 수준인데?"
물론 그것 말고도 지크프리트는 이곳에서 굉장히 다양한 경험을 하고는 했다.
대략 예를 들자면 분명 위에 가서는 탑주 정도는 몇 명이고 후드려 팰 수 있는 무력을 가진 손오공이 어느 순간만 되면 요상하게 생긴 봉을 들고 아이돌 덕질을 하는 모습이라던가.
그게 아니라면 양주병 안에 들어가 술을 마시며 샤워를 하는 청룡의 모습도 본 적이 있었고.
그것보다 더 충격인 건 바로 탑 위에서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파괴신 그 자체로 불리는 김현우가 자신보다도 무력이 약한 와이프한테 은근히 시달리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지크프리트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9계층.
그러나 기본적으로 모든 생물은 적응을 하고, 지크프리트도 마찬가지로 그런 일상에 적응했다.
이제는 손오공이 아무리 개지랄을 떨며 덕질을 해도 무덤덤하고, 청룡이 양주를 몇 병이나 까서 샤워를 한다고 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게 되었다.
뭐, 김현우가 와이프들을 은근히 피하는 것도 익숙해지다 보니 오히려 자신의 언변이 늘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앞을 바라봤다.
보이는 것은 무척이나 감탄하는 표정으로 턱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손오공과 청룡.
그리고 그 앞에는 요즘 tv에 자주 나오는 아이돌 복장을 하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
뭐, 사실 그것까지만 본다면 그렇게 엄청난 사실은 아니었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그렇게 넘길 수 있다.
다만 지크프리트가 지금 저 모습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저기에서 아이돌 복장을 입고 수치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가 바로 '루시퍼'라는 것 때문이었다.
루시퍼.
그 이름은 지크프리트도 잘 알고 있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많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사 파벌의 수장인 루시퍼는 정령 파벌에서 제일 꺼려 하는 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그 심계가 무척이나 깊고 겉으로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으나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괴물.
정령파벌의 나이아드가 그렇게 설명할 정도로 루시퍼는 무서운 존재였고, 또한 지크프리트가 몇 번 모습을 봤을 때도 확실히 그녀가 했던 말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나를 한낱 장난감으로……!"
-지금 이곳에서는 괴물이라고 불리던 루시퍼가 수치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손오공과 청룡에게 감평을 당하고 있었다.
"아니, 뭘 그렇게 생각해? 너도 예쁜 옷이 있으면 입어보고, 좋잖아?"
"하나도 안 좋아!"
"흐음, 그럼 다른 옷이 좋은 건가?"
"안 좋다고! 안 좋아! 이딴 거 입기 싫으니까 남자로 돌려달란 말이야!!!"
"……."
소리를 지르며 반항 같지 않은 반항을 하고 있는 루시퍼외 변태 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청룡.
손오공은 최대한 자제하려 하고 있지만 왠지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인 상황.
분명 어제를 포함해 두 번 정도 저러는 모습을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저 모습 자체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휙!
"사……살려줘!"
급작스럽게 고개를 돌려 지크프리트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루시퍼.
그러나-
"어허, 누가 보면 하기 싫은 거 억지로 시키는 줄 알겠다, 야."
"억지로 시키는 것 맞잖아. 이 ㅈ…… 나쁜 새끼들아!"
"흐음, 이 옷이 싫다면 이번엔 이 고딕으로……."
"그───────만──────해!!!!!!!!"
"……."
지크프리트는 도저히 그 둘을 말릴 자신이 없었기에 그대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김현우의 아내들이 있다면 모를까, 나는 불가능하지.'
그도 그럴 게 애초에 이 건물 내에서 자신의 순위가 제일 떨어진다는 것은 본인도 정말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지크프리트는 어쭙잖은 정의감에 불타 모험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고민을 하던 중.
문득 지크프리트는 이 건물에서 평소와 다른 점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김현우의 아내들이 없네?'
보통은 아무리 없어도 한 명은 무조건 있기 마련인데, 오늘은 신기하게 단 한 명도 건물에 있지 않았다.
그것에 지크프리트가 새삼스럽게 이상함을 느끼고 있을 때,
"……."
서울 길드의 길드장 집무실에서는, 김시현이 착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눈앞에 놓인 세 개의 문자를 차례대로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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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8시 30분에 서방님을 이곳으로 불러 줄 것.
만약 서방님이 성공적으로 자리에 나오면 원하는 보수를 지급하도록 하겠음
-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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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6시 30분까지 서방님을 신촌으로 불러주세요. 단둘이서 움직일 거니까 혹시 다른 사람한테 말은 마시고요.
물론 굉장히 만족할 만한 보수를 준비해 놨으니 부탁드려요.
-하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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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 집ㅇㅡ로 불ㄹㅓ ?
-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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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특성이 잘 녹아들게 잘 써놓은 문자 메시지.
야차는 스마트폰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치고는 폰을 잘 활용하고 있는 듯했다.
"……."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왜 다 나한테 지랄이야."
김시현은 자신에게 온 문자들을 차근차근 하나씩 보고는 이내 굉장히 피곤하다는 듯한 한숨을 흘리곤 두 눈을 감았다.
"……하."
왠지 벌써부터 자신을 갈구는 형수들의 모습이 생각났기에 김시현은 스트레스가 몰려오는 기분을 받았다.
380화. 너무 심하게 때렸다. (5)
그로부터 정확히 5일 뒤.
하남에 있는 장원의 건물.
그곳에서 여전히 청룡과 손오공에 의해서 이런저런 옷을 입고 있는 루시퍼를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곧 데블랑에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연락이 왔다."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곧바로 되물었다.
"연락이라면, 베드로한테서?"
"맞다. 이제 좌표를 찾았다고 하더군."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곧바로 눕듯이 앉아 있던 소파에서 허리를 펴고는 이야기했다.
"……그럼 이제 그 녀석을 만나러 가면 되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데블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든 준비를 끝내놨으니 우선 준비가 끝나거든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하더군."
"그럼 지금 바로 가면 되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말에 데블랑은 순간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뭐…… 그것도 그렇네만, 조금 더 쉴 생각은 없는 건가?"
"쉴 생각? 굳이? 이미 전부 준비가 끝났다며?"
"그렇긴 하다만, 보통은 이왕 쉰 김에 조금 더 쉬려고 생각하지 않나?"
데블랑의 물음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쉬는 건 쉬는 것 같은 기분이 안 들거든."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하지만 역시 인사는 제대로 해두는 게 좋을 거다. 우선 한번 좌표를 타고 그분이 있는 곳까지 들어가기 시작하면 얼마가 걸릴지 모르니까 말이야."
"멀 수도 있다는 소리지? 어느 정도나?"
"그건 나도 잘 모른다. 알다시피 나도 그분을 단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은 없으니 말이야. 다만 분명히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기는 할 거다."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알았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래 뭐, 그럼 내일 가자."
김현우 말에 고개를 끄덕인 데블랑은 자신은 미리 올라가 있겠다는 소리를 하고는 그대로 최상층을 향해 올라갔고.
그렇게 한순간 자신의 앞에서 사라진 데블랑을 바라본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려 아직까지도 루시퍼를 가지고 놀고 있는 청룡과 손오공을 바라봤다.
'쟤들은 질리지도 않나.'
아주 지극정성으로 그녀를 꾸미는 데 안달이 나 있는 그 둘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데블랑을 따라 바로 가지 않은 이유.
그것은 바로 오늘 와이프들과의 저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
모든 일이 끝나고 그저 기다림만 가득하던 5일간, 김현우는 자신의 와이프들과 일대일 데이트를 했다.
발단은 바로 첫날 와이프들의 불화로 터져버린 김현우의 집 때문이었다.
김시현에게 대충 사정을 들었기는 했으나 도대체 그 결론이 어째서 자신의 집이 폭팔하는 것으로 이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아무튼 그렇게 벌어진 일 때문에 김현우는 그다음 날부터 각각 한 명의 와이프와 일대일 데이트를 즐겼다.
'……그래봤자.'
어째서인지 데이트를 즐긴다는 느낌이 그리 들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미령과 데이트를 할 때는 그냥 점심 먹고 하루종일 방에 처박혀 있었고. 하나린과 데이트 할 때도 아주 멋지고 호화로운 호텔에서 방에 처박혀 있었고.
마지막으로 야차와 데이트를 할 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3일 동안 어디 나간 기억보다 지냈던 방이 더 잘 기억날 정도다.
뭐, 그래도 역시 세 명보다는 한 명이 편했다.
'……오늘은.'
세 명이지만.
김현우는 새삼스럽게 생각하고 보니 그냥 데블랑을 따라 바로 출발하는 게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당장은 편할 수 있는데…….'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뒷감당이 불가능했다.
김현우의 얼마 안 되는 경험상 특히 와이프들에게 있어서 뒷감당이 불가능한 일은 절대 저지르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어차피 저지르는 순간 그 뒷감당을 수습하는 것도 김현우가 할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곧바로 몸을 옮겨 오늘 약속이 잡혀 있는 5성급 호텔로 걸음을 옮겼다.
####
"……이걸 다 빌렸어?"
김현우의 물음에 하나린은 별것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다.
"예. 서방님이 시끄러운 건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호, 확실히 이런 곳은 굉장히 고풍스럽구나."
한껏 꾸며 입은 하나린이 실풋 웃으며 이야기하고, 그 뒤를 따라 야차가 감탄하며 주변을 돌아본다.
그와 함께 나오는 음식들.
김현우는 그녀들을 한번 바라보다 이내 미령을 바라보고는 물었다.
"응?"
"……왜 그러십니까, 서방님?"
"아니, 머리스타일이 바뀐 것 같네?"
김현우의 물음에 미령은 굉장히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흠흠…… 서방님이 예전 탑에 있을 때 긴 머리가 어울리신다고 하셔서 계속 기르고 있었습니다만…… 최근에는 땅에 닿을 정도가 되었길래 머리를 조금 틀어 올려보았습니다만…… 괜찮습니까?"
"뭐, 잘 어울리네."
"……감사합니다."
미령은 그녀답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고, 야차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흐음, 이 몸에게는 딱히 할 말이 없느냐?"
"응? 너……?"
"그래, 나 말이니라. 뭔가 바뀐 것 없느냐?"
야차의 물음에 순간 느긋했던 머리가 한순간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차의 그 어디를 바라봐도 딱히 바뀐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김현우가 순간적으로 당황한 순간,
씨익-
"뭐, 너무 그렇게 찾으려고 하지 말거라, 애초에 나는 이 아이들처럼 다른 분장을 하고 나오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야차는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
그 말에 순간적으로 마음속의 안도의 한숨을 내쉰 김현우.
그러나-
"뭐, 사실 나는 이 둘과는 다르게, 딱히 꾸미지 않더라도 가장 매력이 높지 않더냐?"
"……."
"……."
-김현우는 곧 야차가 한 다음 말 덕분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또 선을 넘으시네요?"
"흐음? 내가? 언제 그랬느냐?"
"조금 전입니다."
"허허,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이지 않느냐?"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하는 그들.
정말 이상하게도 세 명만 있으면 이렇게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도대체 왜인지 모르겠다.
김시현이나 이서연에게 들은 바로는 딱히 자신을 빼고 세 명이 모여 있을 때를 보며 그렇게 큰 문제가 있지는 않아 보인다고 하던데 이상하게 자신이 껴 있으면 꼭 이렇게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그날.
결국 김현우는 저녁을 반 이상 남긴 채 방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
51번 탑의 최상층.
"인사는 전부 끝냈나?"
데블랑의 말에 김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래."
"그럼 곧바로 출발하는 게 좋겠군. 잠시만 기다려라."
데블랑은 그렇게 말하곤 이내 자신의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조작하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노아흐와 아브를 바라보고는 이야기했다.
"뭐, 내가 없을 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진 않은데…… 만약 내가 없을 때 무슨 일 생기면 탑 잘 지키고 있어. 알았지?"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아브.
"이제 가도록 하지."
김현우가 당부를 하는 동안 데블랑은 모든 준비를 끝낸 것인지 자신의 앞에 포탈을 만들어 놓았고. 그는 이내 망설임 없이 포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이곳이야?"
"잘 도착한 것 같군."
김현우와 데블랑은 황야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없는 황야.
허나 그 황야의 모습은 김현우가 익히 알고 있던 모습과는 다르게 굉장히 특이했다.
"……모든 게 흑백이네?"
그가 본 황야는, 모든 것이 흑백으로 나누어져 있는 듯했다.
분명 흙빛을 띄어야 할 것 같은 모래는 새하얀 빛을 가지고 있었고, 하늘은 원래 하늘이 순수하게 가질 수 있는 색이 아닌 검은색 빛을 띄고 있었다.
마치 태양을 반전해서 보는 것 같이.
김현우는 그렇게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다, 이내 저 앞에 있는 집을 보고는 말했다.
"저곳이야?"
"맞다."
"아니, 왜 악마들은 탑 최상층이 다 이런 꼴이야?"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자 데블랑은 별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뭐, 다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있으니까 그렇게 만들어 놓았겠지. 우선 가도록 하지."
먼저 걸음을 옮기는 데블랑.
김현우는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고, 이내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조그마한 오두막 앞에 도착한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나오는 베드로를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
"굳이 시간을 계속 끌 필요는 없지."
"뭐, 우선 들어오시오."
김현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오두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베드로는 이내 별다른 설명도 김현우와 데블랑이 앉아 있는 책상 위에 무엇인가를 꺼내 놓았다.
"이건……."
"종?"
베드로가 꺼내 놓은 것, 그것은 바로 종이였다.
"이게 바로 그분에게 가는 길을 잡아줄 열쇠일세."
"어떻게 사용하는 건데?"
"종을 한번 휘두르면 '길'로 가는 문이 열릴걸세. 그리고 그 길에 들어가게 되면 곧바로 또 한 번 종을 울리면 되지."
"……그게 끝?"
"그렇네. 종을 또 한번 울리면 이 종에서 나온 마력이 그분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 줄걸세."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더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 종을 내밀어 김현우에게 건네주었고.
그 종을 받아 든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안 가?"
"당연히 따라갈 거다. 이제야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찾았는데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
데블랑의 말.
그러나 베드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해."
"그게 무슨 소리지 베드로?"
"말 그대로의 의미일세. 그분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지금 내가 만든 저 종이 필요하네. 종이 없으면 중간에 길을 잃고 말겠지."
"……종이 하나 있지 않은가?"
데블랑의 말에 베드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 소리가 아닐세, 내 말은 한 명당 한 개씩 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네. 물론 종이 없어도 김현우를 따라갈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자면 위험부담이 너무 커."
베드로의 말에 김현우는 투덜거리며 이야기했다.
"……도대체 그놈은 어디에 숨어 있길래 가는 길이 위험해?"
"그런 곳에 숨어 있으니 관리기관도 쉽게 그녀를 건드릴 수 없는 것일세."
베드로의 말.
김현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그냥 나 혼자 만나고 와도 되나?"
"……뭐, 사실 지금 입장에서는 그러는 게 훨씬 좋을 것 같군. 그 종을 만드는 데 꽤 많은 시간이 소비되니 말일세."
게다가-
"자네가 그분을 만나서 데려오기만 한다면, 굳이 우리가 거기까지 갈 필요조차도 없으니."
베드로의 말에 데블랑은 순간 묘한 표정으로 베드로를 바라봤으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지.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겠다."
"……뭐, 그래 그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쥐고 있는 종을 한번 움직였고.
딸랑-
청명한 소리와 함께, 또 한번 포탈이 열리기 시작했다.
칙칙한 검은 빛을 띄우고 있는 포탈.
"잘 갔다 와라."
"걱정 마."
김현우는 데블랑의 말에 단답한 뒤 곧바로 검은 포탈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이내 김현우가 들어간 뒤.
"……이렇게 돼서 유감이군."
푸욱-!
"……무슨?"
데블랑은 자신의 배에 꽂혀 있는 칼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381화. 관리기관 (1)
황야의 오두막.
데블랑은 자신의 힘이 점점 빠지는 것을 느끼며 무감정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베드로를 바라봤다.
제일 처음 든 의문은 도대체 어째서 그가 자신을 배신했는지.
그다음으로 든 의문은 어째서 자신에게 항시적으로 발동되어 있는 결계가 발동되지 않았는지.
그 이외로도 여러 가지 의문이 데블랑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으나 가장 큰 것은 그것이었다.
"도대체…… 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여는 데블랑.
그러나 베드로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데블랑의 배를 찔렀던 검을 그대로 놓아버렸다.
털썩-
그 자리에 쓰러져서 피를 흘리는 그.
분명 일반적인 검이라면 이 정도의 상처쯤은 어렵지 않게 털고 일어날 수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검에 찔린 그 순간부터 데블랑의 몸속에 있는 마력들은 마치 봉인이 된 듯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마력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마치 트랩에 걸린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으그윽-!"
어떻게든 움직여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데블랑.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데블랑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애쓸 필요 없네. 자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그 검은 뽑지 못할 테니."
"도대체…… 왜 배신을?"
"뭐, 엄연히 말하면 배신은 아니네만, 자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그게 대체 무슨……!"
데블랑은 수많은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으나 베드로는 그런 그의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넘기며 자리에 앉았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리네…… 그리고 자네가 그동안 살아남을 것 같지도 않군. 그러니 그냥 이렇게만 알아두게."
그냥-
"나는 확률이 조금 더 높은 쪽에 걸은 것뿐일세."
"……확률이 조금 더 높은 쪽이라고?"
"그래. 자네와 내가 그분에게 가는 통로를 찾지 않았나?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어떻게든 그분을 따를 생각이었네."
"그런데, 어째서……?"
"불가능하더군."
"……뭐?"
"단서를 얻었네. 그 단서 속에서 그분에게 향하는 좌표까지 찾았지. 허나, 그곳은 갈 수 없는 곳이었네."
"그게 대체 무슨……."
"말 그대로야, 그분이 있는 곳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네. 그것은 김현우라도 마찬가지지. 애초에 '길'이 없는 곳을 어떻게 갈 수 있다는 건가?"
"좌표가 있다고……!"
"그래, '좌표'는 있네. 그러나 '길'은 없지. 물론 그분이 인정하신 김현우라면 뭔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그것을 뚫고 그분의 봉인을 풀 수도 있네. 다만 그 확률이 더럽게 낮을 뿐이지."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무 바닥을 피로 적시고 있는 데블랑을 바라봤다.
"내가 배를 갈아탄 이유는 그것뿐일세."
베드로의 말을 끝으로 데블랑은 자신의 시야가 서서히 암전하는 것을 깨닫고는 이를 악물곤 손을 움직여 자신의 배에 꽂힌 검을 쥐었다.
어떻게든 마력의 움직임을 막고 있는 검을 빼내려 안간힘을 쓰는 그.
허나 베드로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그저 자리에 앉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데블랑은 그런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배에 박힌 칼을 빼내기 위해서 힘을 주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아무리 손에 힘을 주어도, 데블랑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점점 더 흐려지는 시야.
조금 전까지는 흐릿하게라도 베드로의 모습이 보였건만, 지금에 와서는 그 모습이 아예 보이지 않았고.
거기에 더해서 주변의 시야가 점점 더 검게 변하고 있었다.
'이렇게…… 끝난다고?'
데블랑의 머릿속에서 피어난 의문.
하지만 그 의문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미 데블랑의 시야는 까맣게 암전해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으며, 그의 손은 분명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든 탈출, 해, 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그 강박적인 생각 한 가지마저도, 데블랑의 정신이 수면 아래로 잠김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데블랑의 정신이 사리짐과 동시에 남은 것은 그저 차가운 시체.
"……."
베드로는 자신의 마룻바닥을 적시며 그대로 눈을 감은 데블랑의 시체를 무감정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시선을 옆으로 돌려 이야기했다.
"말대로, 그쪽에서 지시한 건 모두 끝냈소."
시체만을 빼면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중얼거린 베드로.
그는 곧 어두운 백야 속에서 비추는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고.
"……."
-이내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
"……뭐야?"
포탈을 넘어온 김현우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보고 있는 풍경은 아무래도 베드로에게 들었던 풍경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으니까.
제일 처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새하얀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관저였다.
"……."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짓다, 저도 모르게 손에 들려 있던 종을 한번 흔들어 보았다.
-딸랑
맑은 소리를 내며 퍼지는 종소리.
그래, 그것뿐이었다.
"……망가졌나?"
만약 베드로의 말대로라면 김현우가 종을 흔드는 그 순간 종에서 마력이 빠져나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려줘야 했으나, 그가 아무리 종을 흔들어도 마력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딸랑 딸랑.
그저 맑은 종소리만이 몇 번이고 울릴 뿐.
'……대체 뭐야?'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며 들고 있던 종을 집어넣었을 때.
"……놀랍군."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봤다.
"너는?"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한 남자였다.
딱히 눈에 남는 특색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조금 이질적인 것은 그가 마치 현대생활에 나올 것 같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 정도.
그 남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더니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어떻게 이곳에 왔지? 김현우."
남자의 말에 김현우는 눈가를 좁혔다.
'누구지?'
어떻게 내 이름을 안 거야?
김현우의 머릿속에 한순간 들이차기 시작하는 생각.
그런 김현우의 모습에 남자는 순간 묘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이어지는 침묵.
허나 그 얼마 되지 않는 침묵 속에서 남자는 금방이라도 상황을 파악한 듯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있는 이곳으로 온 모양인데. 안 그런가?"
남자의 질문.
김현우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으나, 그가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남자는 이야기했다.
"아니, 굳이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네. 자네의 표정만 봐도 지금 상황이 대충 짐작이 갈 것도 같군."
다만-
"하나 확실한 건 네 명줄은 여기까지라는 거지."
"뭐?"
김현우의 질문에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간단하게 손짓했을 뿐.
그러나.
"컥!?"
그 순간, 김현우는 자신의 몸 위에 무엇인가가 떨어져 내린 느낌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쾅! 콰가가가각!
김현우가 짚고 있는 땅에 거미줄 같은 금이 나타난다.
"끅!?"
한순간에 일어난 일.
김현우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그는 딱히 놀라는 어감 없이 이야기했다.
"역시, 이 정도는 무난하게 버티는군."
"이런 씹……!"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된 것인지 궁금한가? 척 봐도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남자의 물음에 김현우는 답하지 않고 온몸에 마력을 돌렸다.
그의 의지에 따라 순식간에 퍼져나간 마력이 김현우의 몸에 활력을 불어넣자 움직이기 시작하는 몸.
허나 그 움직임은 무척이나 굼떴고, 남자는 김현우가 몸을 세우는 동안 기다리다 이내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이곳은 관리기관이다."
"……!"
남자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김현우.
그 말 한마디로 김현우는 어렵지 않게 그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었다.
"……관리기관 수장이 친히 마중을 다 나온 거야?"
"이곳에는 헤르메스를 제외하면 나밖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없거든."
남자, 노네임의 말을 들으며 김현우는 머릿속으로 이 상황이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내가 관리기관 앞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
하지만 김현우는 어렵지 않게 그 수 많은 생각 중 두 가지를 예상할 수 있었다.
한 가지는 바로 순전히 베드로의 실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관리기관에 이렇게 올 확률은 '실수'라고 보기에는 이상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배신.'
베드로가 배신을 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맞아 떨어진다.
다만 이 예상에도 이상한 점은 있었다.
'저 녀석이 나한테 어떻게 이곳에 왔냐고 물어보는 것을 보면…….'
노네임은 자신이 이곳으로 온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행위 자체가 기만일 수도 있었으나, 노네임이 내게 굳이 그런 식의 기만을 할 이유는 없었다.
'씨발,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듯 남자를 바라봤다.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관계가 아니었다.
당장 뒤지면 사실관계가 무슨 소용인가? 이미 나는 이 세상에 없는데.
'우선은 살아야 한다.'
김현우는 자신의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을 전부 한쪽으로 욱여넣어 버렸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고, 김현우에게는 당장 지금의 생존이 중요했으니까.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침착함을 되찾는 김현우.
김현우의 눈에 약간의 투지가 감도는 모습을 보며 남자는 스윽 웃음을 짓곤 이야기했다.
"평점심을 찾고 한다는 생각이 나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이라니, 똑똑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알 수가 없군."
남자의 말에 김현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그의 말에 꼬투리를 잡아 남자가 먼저 힘을 쓰게 유도했겠지만, 지금의 김현우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럴 이유조차도 없었다.
"……."
김현우는 이미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으니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남자, 노 네임은 자신보다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사실 도망칠 수 있다면 도망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차피 지금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김현우는 너무나도 빨리 캐치했다.
무엇보다 지금 김현우에게는 이곳에서 당장 다른 곳으로 도망칠만한 아티팩트도 하나 없었다.
'……혹시 모르니 아브한테 만들어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짧은 후회를 하면서도 김현우는 그저 조용히 침묵하며 남자의 공격을 대비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노네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뭐, 그래도 도망치지 않고 바로 싸우려 하는 것을 보니 내가 굳이 힘들게 잡을 필요는 없어서 좋을 것 같군."
그럼-
"나름대로 한번 놀아주도록 하지."
-노네임은 움직였다.
382화. 관리기관 (2)
51번 탑의 최상층의 저택.
그 안에서 한동안 책을 읽고 있던 티르는 곧 저택의 문이 열리며 들어온 아브와 노아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마법진은 완벽하게 설치된 겐가?"
티르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덕분에요. 처음에는 조금 애를 먹기는 했는데…… 오늘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만들어 놓고 왔어요. 지금 당장 마법진을 사용하라고 하면 바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요."
아브의 말에 티르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노아흐는 그런 티르의 모습을 보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좀 궁금하기는 하군."
"무엇이 말인가?"
"자네가 말하기로 관리기관의 수장인 '노 네임'은 무척이나 강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네."
"문득 마법진을 만들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일세. 과연 아무리 강자라고 해도 과연 이 마법진을 실행할 날이 올까 싶더군."
노아흐의 말에 티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이전에도 말해줬네만, 만약 그 남자가 정말로 51번 탑을 박살 내려 한다면 이 51번 탑은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릴걸세."
"……정말로 그 정도라는 말인가?"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성격일세. 이렇게 보여도 이전에는 질서와 정의를 맡던 신이니 말일세."
티르의 말에 노아흐는 역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번에는 그 옆에 있던 아브가 질문했다.
"……가디언이 그 눈동자라는 사람을 만난다면 관리기관을 막을 수 있는 건가요?"
자리에 앉아 있던 아브가 티르를 바라보며 묻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군. 알다시피 나는 김현우가 말한 눈동자에 대해서는 그저 그 존재를 알고만 있을 뿐이니까 말이야."
-다만.
"그 남자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과연 그 눈동자라는 존재를 만나도 그 남자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군."
담담하게 중얼거린 티르.
아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이야기했다.
"……노 네임이 도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강하다…… 강하다라……."
아브의 말에 중얼거리는 티르.
허나 그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중얼거림을 멈추고-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는 '강하다'라는 것으로 재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군…… 그래도 굳이 표현을 하자면……."
"그는 그냥 '재앙' 그 자체라고 보는 게, 나는 맞다고 본다네."
-이내 그렇게 중얼거렸다.
####
김현우는 그 순간까지도 노네임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서 검색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노네임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전무하다 봐도 될 정도로 적었으나 지금은 그 적은 정보라도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김현우의 머릿속에 마땅히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분명 노네임과 싸워본 티르에게 그가 강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가 정확히 어떤 식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지 듣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도중.
"……?"
김현우는 자신을 찍어 누르는 압력이 약해졌다는 것을, 아니- 아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고.
"근접전이 주특기인 것 같은데. 맞나?"
"!"
김현우는 자신의 오른편에, 남자가 다가왔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뒤로 뺐다.
본능적인 움직임.
몸을 뒤로 내빼며 김현우의 다리가 옆에 나타난 남자를 향해 날아간다.
허나 그대로 허공을 가른 김현우의 다리.
조준은 분명했으나, 남자는 그대로 사라졌다 그의 앞에 나타났다.
"나도 근접전으로 상대해 주지."
평온한 말투.
그 말이 마치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듯했기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휘둘렀으나, 이번에도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져 그의 주먹이 목표를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
빠악!
"컥!?"
김현우는 그다음 순간, 자신의 시야가 반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로 느껴지는 것은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스러운 충격.
그러나 그것보다 김현우를 더 놀라게 했던 것은 바로 남자의 속도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시야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그 기감을 느끼기도 전에 남자는 김현우를 공격했다.
"큭!"
김현우는 땅바닥에 몸을 처박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직! 파지지직!
그의 주변이 날카로운 방전음과 함께 김현우의 머리가 올라간다.
그러나 그런 김현우의 변화에도 무색하게-
빡!
"끅!?"
김현우는 남자를 볼 수 없었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남자의 속도를, 김현우는 전혀 따라잡을 수 없었다.
뒤로 튕겨져 나가는 그의 몸.
반전되는 시야 속에서 김현우는 자세를 잡고 있었던 남자의 모습을 정확히 보았고, 그가 움직인다고 생각한 그 순간.
"흡!"
김현우는 찰나의 순간을 인지했다.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 찰나의 순간.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에 들어가고 나서야 김현우는 움직이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그 찰나의 시간 속에서도 무척이나 빠르게 김현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떨어지고 있는 김현우의 몸.
그것을 타격하기 위해 달려오는 남자.
거리는 한순간에 좁혀졌다.
남자의 주먹이 찰나의 시간 속에서도 유연하고 부드럽게 휘어져 김현우의 얼굴을 노리고, 김현우는 그것을 보며 본능적으로 찰나의 시간 속에서 방어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꽈아앙!
터져나오는 소음과 함께, 찰나를 인지했던 김현우는 다시 한번 하늘을 날았다.
콰가가가강!
그의 신형이 관저의 외벽을 부수고 그 안에 처박혔으나, 김현우는 또 한번 자리에서 일어나 부서진 외벽을 통해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변한 모습도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차이.
"신기하군. 솔직히 막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노네임은 그렇게 말하며 무심한 듯, 허나 조금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나, 그런 남자의 웃음을 보며 김현우는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억지로 웃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다.
'……하.'
그냥,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단 세 번.
세 번이다.
남자와 김현우가 맞부딪힌 게 세 번.
그런데 고작 그 세 번으로 김현우는 너무나도 뼈져리게 깨달았다.
"……괴물새끼."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자신은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예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것은 확정이었다.
또한 단언이었다.
김현우는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이길 수 없다.
으득-
'아니, 아니야. 침착해라.'
김현우는 이를 악물며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서려는 좌절감과 탈력감을 억지로 밀어내고는 냉정함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노네임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더 이상 공격을 이어나가지 않고 김현우의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상황에 김현우는 작게 감사하며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렸다.
'아직 패배를 확정하기는 이르다.'
노네임은 티르의 말대로…… 아니, 어쩌면 티르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몇 번 부딪힌 것만으로 포기하는 것은 도저히 그의 성미에는 맞지 않았다.
'분명히 있을 거다. 돌파구가 있을 거야.'
완전무결한 생물은 없다.
또한 완전무결한 필승의 전투법 따위도 없다.
티르의 차원을 찢는 검도 처음에는 답이 없을 것 같았으나 결국 싸움을 통해 그 돌파구를 찾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김현우는 분명 돌파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담았다.
"……."
다시금 전투 자세를 잡는 김현우.
그 모습을 보며 노네임은 비소를 지었다.
"마인드 컨트롤이 나쁘지 않군. 역시 그년의 끄나풀다워."
"……."
탓-!
"!"
"아무리 패배하더라도 그 흙탕물에서 끝까지 발버둥 치는 게 말이야."
바로 앞에 나타나며 입을 여는 남자.
김현우는 곧바로 인지를 찰나로 끌어들였다.
다시 한번 모든 것이 느려지는 주변.
그 속에서, 남자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멈춰 있는 김현우의 명치를 후려치기 위해 휘둘러지는 주먹.
김현우는 그 주먹을 피하는 방법으로 에리얼의 능력을 생각했으나 그것을 사용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방어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늦는다.
그렇기에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흡!"
노네임과 마찬가지로 주먹을 내미는 것이었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일시적으로 마력을 돌린 김현우만이 가속한다.
그 속도는 비등.
남자의 주먹이 김현우의 심장을 노리고, 그와 반대로 김현우의 주먹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그의 턱을 노린다.
그리고-
빠아아아악!
김현우는 남자의 턱을 주먹으로 후려침과 동시에, 명치에 심각할 정도의 통증을 느끼며 날아갔다.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는 시야.
그러나 속 편하게 땅바닥에 처박히기를 기다릴 수는 없기에 그는 풀렸던 인지를 다시 한번 끌여 들였다.
그 속에서 보이는 것은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다가오는 노네임의 모습.
김현우는 다시 한번 찰나의 시간 속에서 가속해 몸을 움직인다.
꽈아아앙!
이번에는 그대로 발을 휘두르는 남자의 발을 맞받아쳤으나, 결과는 이전과 마찬가지.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악물고는 그다음 곧바로 인지를 찰나로 끌어내렸다.
주먹을 맞부딪친다.
발을 휘두른다.
얼굴을 노리고 휘두르는 공격을 막아낸다.
그 순간 순간 가속을 사용해 남자의 공격을 막아낸 김현우는 인지와 가속을 연속해서 사용한 부족용을 느끼면서도 노네임의 허점에 대해서 찾을 수 있었다.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움직임.
그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간단하고 간결했으나, 그와 동시에 무척이나 단순했다.
기본적인 공격에 신묘한 묘리 같은 것 없었다.
그저 노네임은 무식할 정도로 파괴적인 힘과 스피드를 바탕으로 김현우를 찍어누를 뿐이었다.
빠아아악!
"큭!"
또 한 방.
노네임의 공격을 막아낸 김현우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또 한번 인지를 끌어들였다.
그제야 보이는 남자.
모든 풍경이 달라진 곳에서 그는 여전히 똑같았다.
폐허가 되어버린 관저에서 그는 여전히 일직선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부서진 대리석 바닥에서도 그는 여전히 맨 처음과 같이 오른 주먹을 크게 휘두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집중했다.
지척에 다가온 노네임.
그의 주먹이 이전과 같이 뻗어 온다.
애초에 주먹을 제대로 휘두르고 있다곤 느껴지지 않는, 그저 파괴력과 스피드만 앞세워 뻗은 주먹.
그의 주먹이 김현우의 얼굴을 정확히 노리고 휘둘러지고.
김현우는 주먹이 자신의 눈앞에 도달한 순간-
"흡!"
주먹이 얼굴에 닿는 짧은 간격을 이용해 주먹을 피해냈다.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남자의 자세.
가속해서 이미 움직인 신체 덕분에 김현우의 인지는 원래대로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그는 억지로 인지를 이 찰나의 시간 속에 잡아놓고는 몸을 계속해서 가속했다.
뿌드드득!
부하를 이기지 못한 몸이 기괴한 소리를 냈으나, 김현우는 마찬가지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신경 쓰는 대신-
"뒤져-!!"
-무너지는 남자의 얼굴을 그대로 땅으로 내려찍는 것을 택했다.
꽈아아아아앙!!!!!
383화. 관리기관 (3)
거대한 폭음과 함께 노네임의 몸이 바닥에 처박힌다.
일어나려고 하는 그.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빠아아악!
곧바로 휘둘러진 김현우의 발이 재빠른 포물선을 그리며 남자의 얼굴을 후려친다.
위로 들려지는 노네임의 턱.
김현우는 멈추지 않고 공격을 이어나갔다.
'절대로 공격을 멈춰서는 안된다.'
또한, 너무 강하게 공격해 남자를 날려 버려서도 안된다.
어디까지나 바로 앞.
김현우의 연타가 이어지는 범위 내에서 남자를 공격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줘서는 안된다.'
만약 조금이라도 시간을 준다면 노네임은 그 찰나에 정신을 회복하고 달려들 터였으니까.
물론 이 짧은 단타로 남자를 쓰러뜨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김현우는 그것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지만, 지금 김현우의 머릿속은 이 남자를 어떻게 쓰러뜨릴 수 있을까, 에 대한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녀석의 체력을 최대한 깎아놓겠다는 일념이 있을 뿐이었다.
빡! 빡! 빡! 빡!
남자의 발을 위로 올려차 처음부터 기동력을 봉쇄하며 계속해서 연타를 이어나간다.
그 어떤 묘리도 섞여 들어가지 않은, 오로지 스피드에 치중한 공격.
물론 그것은 김현우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조금이라도 묘리를 담아 주먹을 후려치려다 남자가 정신을 차리는 순간 그에게 조금이라도 데미지를 넣을 기회를 날려 버리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끊임없이 연타를 이었으나-
"!"
"약하군."
김현우는 그다음 순간, 노네임이 자신의 연타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인 손이 노네임의 목소리가 들려 온 오른쪽을 향해 쏘아졌으나-
텁!
"!"
노네임은 공격을 피하는 것 대신 그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냈다.
곧바로 그의 손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에리얼의 능력을 사용한 김현우.
그러나-
"!"
분명 에리얼의 능력을 활용해 자신을 바람으로 만들었는데도, 김현우는 노네임의 손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년이 이번에는 제대로 된 끄나풀을 만들었군."
당황하고 있는 김현우를 바라보며 말하는 노네임은 이내 평온한 표정을 지우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너한테 '눈'을 준 걸 보니 말이야."
텁!
"……!"
김현우가 올려 찬 발마저 막고는 평온하게 중얼거리는 노네임.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고, 그와 반대로 노네임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그의 손과 발을 놓아주었다.
그는 노네임이 손과 발을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에리얼의 능력이 제대로 발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능력을 풀곤 곧바로 다른 능력을 사용하려 했으나-
"하지만, 아직 숙달되지는 않았군."
-남자는 이전과 같이 김현우에게 도달했다.
"!"
급하게 인지를 끌어내리는 김현우.
그는 이미 수십 번의 사용으로 깨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으나 그것을 감내했고.
어떻게든 자신의 인지를 끌어내린 순간.
"!"
김현우는 그 느려진 인지 속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노네임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그 남자의 입술.
너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입술모양을 읽은 순간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가속하려 했으나-
"커억!"
그는 곧 이어 자신의 명치를 후려친 남자 덕분에 가속하지 못했다.
집중이 풀림과 함께 원래대로 돌아오는 인지.
반전한 시야와 함께 터질 것 같은 머리.
허나 김현우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번에는 그의 등에 충격이 가해졌다.
빠아아악!
"카학!"
터져나오는 신음.
김현우는 자신이 본능적으로 땅바닥에 처박혔다는 것을 깨닫고 일어나려 했으나 곧 이어 들어오는 연타에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씨발!'
김현우는 곧 노네임이 하는 것이 바로 조금 전에 자신이 그를 상대할 때 사용했던 전법인 것을 깨닫고는 이를 악물었다.
공격을 하기는 해도 절대로 자신의 공격범위를 벗어나지 않은 곳에서 무자비하게 공격을 가하는 노네임.
하지만 그것보다도 김현우의 인상을 찌푸려지게 만든 것은.
'이 개새끼가 일부러……!'
그가, 굳이 이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김현우의 경우 당연히 노네임보다 스피드가 떨어질 수밖에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공격방식을 취한 것이었으나 그는 달랐다.
지금의 자신보다 적어도 몇 배는 빠른 스피드를 가지고 있는 그는 애초에 이럴 필요가 없었다.
"씹!"
그렇기에 김현우는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십 번이고 사용했던 인지를 억지로 끌어내리려 했으나, 이미 한계치까지 운용한 인지는 더 이상 김현우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니, 받아주지 못했다.
빠아아아아악!
김현우의 시야가 크게 돌아가며 그의 몸이 부숴진 폐허를 구른다.
몇 바퀴나 굴러서 부숴진 기둥에 처박힌 김현우의 몸.
그는 잡히지 않는 초점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억- 허억-!"
맞기만 했는데도 그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거친 숨소리.
반명 노네임은 여전히 평온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그가 입고 있던 옷이 조금 더러워지고 정장 상의의 단추가 터져나간 것 뿐.
"가성비가 개 쓰레기네……."
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조금 전 공방의 가성비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불합리했다.
그저 상의 단추가 터진 것 빼고는 아무런 흉터가 없는 노네임에 반해, 김현우는 이번 공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찰나의 순간을 보는 것도, 이젠 안 될 것 같은데…….'
-무엇보다 김현우는 조금 전 남자와의 공방을 이어나가기 위해 모든 마력을 쏟아부은 결과, 더 이상 남자와 싸울 '환경'을 만들지 못했다.
그야말로 완패.
"씨발."
김현우의 입가에서 터져 나온 욕지거리.
그러나 김현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방법이…….'
끈임없이 돌아가는 김현우의 머리.
한편, 그 욕을 들은 노네임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욕설이라, 도대체 무슨 의미지?"
"……."
김현우는 생각을 이어나가면서도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욕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나? 그냥 하는 거지, 씨발."
그의 말에 노네임은 흥미롭다는 듯 김현우에게로 다가갔다.
물론 이전처럼 전투를 이어나가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평범한 발걸음.
그와 대충 1장 정도의 거리를 남기고 자리에 선 노네임은 흥미가 담긴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당연히 알지. 욕에는 그 의미가 담길 수도 있고, 혹은 담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데 굳이 왜 물어봐?"
"네 목소리는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
김현우가 답하지 않자 남자는 좋을 대로 이야기했다.
"패배자의 목소리는 어떨 것 같나? 비참하지, 누군가는 비장해. 또 누군가는 애절하기도 해. 보통 내게 겁도 없이 덤볐다가 죽을 때가 된 녀석들은 그런 목소리를 내지."
"뭐?"
"그에 반해 억지로 허세를 부리는 미물들은 대부분이 거만한 목소리를 내지, 그게 아니면 비소를 지으며 자신의 표정을 감추거나."
그런데-
"너는 담담하군. 지나치게 담담해. 마치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이야."
"……."
"너는, 지금 이 지경이 돼서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노네임의 말에 김현우는 순간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지금 김현우가 다른 방법을 갈구한다고 해서 남자를 이길 수 있을 확률은 없었다.
그래,
그냥 없었다.
남자의 질문에 의해 김현우의 머릿속에 새삼스럽게 각인되는 무력함.
허나 김현우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그 무력함을 억지로나마 밀어내며 자기암시를 걸었다.
'포기하면 끝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길이 생긴다는 확신은 병신 같은 생각임이 분명하지만, 포기하면 끝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맞는 소리다.
그렇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또한, 그가 지켜야 하는 것도 남아 있었다.
"……."
순간적으로 흔들리다 진정되는 김현우.
그 모습을 본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대단할 정도의 자기암시로군, 그년이 정말 끄나풀을 잘 만들어 뒀어. 이렇게까지 독한 놈을 끄나풀로 만들 줄이야……!"
어찌 보면 슬쩍 유쾌하다고 볼 수도 있는 남자의 웃음.
그러나-
"그런데 말이야, 그거 알고 있나?"
"……무슨-"
"확실히, 너는 지금까지 내가 본 녀석 중에서는 '가장'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될 정도로 대단해, 다른 건 몰라도 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기암시는 정말이지 감탄이 나오는군."
그래서인지-
"만약, 그 자기암시를 가능하게 하는 '힘'까지 빼앗아 버리면 어떻게 될지. 솔직히 궁금해지는군."
"뭐?"
김현우의 되물음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담담히 김현우의 앞에 손을 내밀었을 뿐.
그리고-
"……어?"
김현우의 주변에 파직거리던 전류가, 사라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김현우가 있는 힘껏 키워놓은 안력도 평범하게 돌아갔고.
마력에 의해 압도적으로 강화되었던 신체 능력도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돌아갔다.
한순간,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갔다.
"이게, 무슨……?"
그리고 김현우는, 자신의 몸에 마력이 사라진 것을 깨닫곤,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떴다.
없다.
마력이 없다.
김현우의 몸에 일부처럼 녹아 있던 마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하……."
허탈한 표정을 짓는 김현우.
온몸을 짓누르는 무력감이 그의 이성을 찍어누른다.
압도적인 상실감.
그 속에서, 김현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노네임을 쳐다봤다.
그리고 보았다.
쿠그그그그극-!
그의 몸에서 넘쳐나고 있는 마력을.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티르에게 들었던 노네임의 이름 아닌 이름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마력'.
노 네임, 그는 '마력'이었다.
"너도 알고 있는 것 같군. 내가 무슨 존재인지 말이야."
침묵.
김현우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넘칠듯한 마력을 자랑하고 있는 티르를 멍하니 바라보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런 개씨발."
그의 입에서 나온 욕설.
김현우의 욕설에 남자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더니, 이내 광소했다.
듣고 있는 김현우의 귀가 터져버릴 정도로 엄청난 광소.
갑자기 병이 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친 듯이 웃어젖히는 노네임의 모습을, 김현우는 멍하니 바라보았고.
콰직!
"……?"
김현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
깨닫지도 못했다.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김현우는 깨닫지 못했다.
그를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했던 마력은 이미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마력을 사용해야만 사용할 수 있었던 눈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눈알을 굴려 시야를 아래로 내리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에 대해 깨달을 수가 있었다.
"……."
그곳에는 남자의 손목이 있었다.
정확히는, 김현우의 심장이 있는 부분에, 남자의 손목이 파고 들어가 있었다.
그의 몸에 파고 들어간 손목 사이에서 줄줄 흘러나오고 있는 시뻘건 피.
그 붉은 선혈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김현우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쿨럭."
자신이 이제 곧 죽는다는 사실을.
384화. 나 진짜 죽었냐? (1)
"쿨럭-!"
김현우의 입가로 피가 터져 나온다.
붉은 선혈.
물론 그는 지금까지 싸워오면서 몇 번이나 자신의 피를 보았다.
어떨 때는 몸 전체가 박살 나서 바닥을 가득 적실 정도로 피가 흘러나오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흘러나와야 할 피조차 모두 사라져 버렸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끄륵……."
그때 흘렸던 피와 지금 흘렸던 피는, 그 인상이 달랐다.
김현우는 시선을 들어 노네임을 바라봤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지었던 광소도 그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고, 그 이외에 다른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담담한 무표정.
꿀럭-
그와 함께 김현우의 심장이 있던 곳에서 꿀렁임과 함께 붉은 피가 터져 나온다.
시선을 내린 김현우.
그곳에는 변하지 않은 사실이 그저 담담하게 그의 시선에 비춰지고 있었다.
남자의 손목은 여전히 자신의 심장 안에 들어가 있었고,
그 손목을 타고 붉은 선혈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쿨럭-"
자신의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도 마찬가지.
"……아."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김현우는 어느 순간, 자신의 의식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입가에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린다.
"하……."
몇 번이나 봤던 풍경.
분명 큰 싸움이 있었을 때는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씨, 발……."
그때와 지금은, 느끼는 바가 전혀 달랐다.
달라진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마력.
지금 김현우에게는 마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 차이 하나로, 김현우는 점점 흐려지는 의식과 함께 자신의 머릿속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하는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공포였고.
그것은 분노였으며.
또한 허탈감이었고.
마찬가지로 자괴감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죽는다고?'
아니, 안 된다. 죽어서는 안 된다.
김현우는 자신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되뇌었다.
'우선, 우선 손을 빼내야.'
그는 시야가 어두워진 상태에서도 억지로 자신의 손을 움직였다.
아니, 제대로 움직이고 있기는 하는 걸까?
이미 시야가 어두워진 김현우는 자신의 손이 뜻대로 움직이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감각은 이미 옛적에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러나 김현우는 그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자신의 손을 움직여 자신의 심장에 손을 집어넣은 남자의 손을 붙잡고, 또한 밀어내기 위해 애썼다.
"……크륵-!"
김현우의 입가에서 선혈이 튀어, 노네임의 옷에 묻었다.
곧 정장 사이로 스며드는 피.
남자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역시 미물이로군. 내가 멍청했어."
"끅……!"
"너는 내 생각처럼 똑똑하지 않다. 또한 대단하지도 않지. 그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군. 그냥-"
퍼석-!
김현우의 심장 안에 들어갔던 남자의 손이 꾹 쥐어진다.
그와 함께 터져나가는 무언가.
김현우의 심장에서 또 한번 피가 튀고, 어두웠던 김현우의 시야가 완전히 점멸한다.
그 뒤에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
"너는, 그냥 멍청한 것이었군."
그 목소리를 끝으로 김현우는 자신의 의식이 잠식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지로 정신을 차리려고 해봐도 마치 강제로 수면으로 끌어 당겨지는 듯한 느낌.
'아직 안, 되는……데…….'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결국 그것은 순간을 찰나였을 뿐이었고.
'씨……발…….'
그는 자신의 정신이 수면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최후에, 한마디 욕설을 끝으로 정신의 끈을 놓아버렸다.
촤악! 털썩-
남자가 손을 빼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쓰러지는 김현우.
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고, 그의 몸은 남자가 손을 빼낸 순간부터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노네임은 이내 조용히 발을 들어 올렸다.
크그그그극-!
발을 들어 올리자마자 남자의 발치에 모이는 섬찟한 마력.
그는 김현우의 시체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해 발을 휘두르려 했고.
그 순간-
카득-
"……."
노네임은 들을 수 있었다.
폐허에서 들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정확히 말하면 폐허의 지하에 있는 그곳에서 나는 소리를.
"도대체 어떤 놈이……."
평온하던 노네임의 얼굴에 평온이 사라지고.
김현우의 시체를 박살 내려던 노네임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는 자신의 몸을 마력으로 변환시켜 자신이 있던 곳으로 내려가면서도 김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나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고, 그의 몸은 아까 그가 심장을 터트릴 때 같이 박살 내놓았다.
그렇기에, 노네임은 이내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돌렸고, 이내 그렇게 사라졌다.
####
하남에 있는 장원의 건물 중 하나.
그곳에서,
"그만! 그만! 그만하라고!!!"
"한 번만 입어 보라니까? 응?"
"싫어! 이제 새벽이라고! 술 좀 그만 처먹고 자란 말이야!"
그곳에서는 한참 청룡과 루시퍼, 그리고 손오공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한 번만 더!"
"싫어 이 미친새끼들아!"
한 번만 더를 외치는 청룡과 이제는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청룡의 대가리를 후려쳐 버리는 루시퍼.
그렇게 그들이 싸움 아닌 싸움을 벌이고 있던 그 어느 순간.
툭-!
문득, 루시퍼의 목에 걸려 있던 봉인주가 깨졌다.
"?"
"응?"
순간 일어난 일에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청룡과 손오공.
루시퍼는 순간 그 소리가 어디서 난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봉인주가 깨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봉 인주를 만지작거렸다.
파사사삭-
루시퍼가 만지자마자 파사삭 거리는 소리를 내며 완전히 부스러지는 봉인주.
"이렇게 갑자기?"
그녀는 순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부숴진 봉인주를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청룡과 손오공을 바라봤다.
그녀와 멍하니 시선을 교환하는 손오공과 청룡.
루시퍼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신의 손에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고.
퍼어엉!
그녀는 곧 자신에게 입힐 옷을 들고 있던 손오공과 청룡을 날려 버리고는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력의 봉인이 풀렸다!
김현우가 그렇게 사람을 쥐어 패고서 걸어놓은 봉인주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부숴졌고, 그 덕분에 자유를 얻은 루시퍼는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마력을 이용해 날개를 꺼냈다.
그가 제약을 걸어놓은 덕분에 염색체가 변하고 나서는 전혀 꺼내지 못했던 날개.
루시퍼는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저 멀리 날아간 손오공과 청룡이 있던 곳을 바라보곤 곧바로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저 녀석들을 즈려 밟아주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지금은 탈출해야 한다.
루시퍼는 그렇게 생각하며 곧바로 자신의 날개를 펼쳤다.
부숴진 장원 사이에서 펼쳐지는 백색의 날개.
그리고-
"엇……?"
루시퍼는 날개를 펼친 순간,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마력에, 날갯짓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끅!?"
순식간에 온몸을 짓누르는 마력.
루시퍼는 이 불합리할 정도로 압도적인 힘에 두 눈을 부릅뜨면서도 이내 더더욱 심하게 가해지는 고통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앞에는.
"야, 야차?"
야차가 나타났다.
그러나 루시퍼는 곧 그녀의 상태가 이전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항상 장난스럽고 빙글거리던 미소가 감돌던 그녀의 입가에는 지독하리만치 냉정한 무표정이 담겨 있었고.
마력을 숨기고 다니던 그녀의 주변에는 루시퍼마저도 강제로 찍어누를 정도로 압도적인 마력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터벅- 터벅-
아무런 말없이 그녀의 앞까지 다가온 야차.
그녀는 곧 시선을 아래로 내리곤 이내 허리를 숙여 루시퍼의 아래에 깨져 있던 염주를 들어 올렸다.
이제는 완전히 박살 나, 조각밖에 남지 않은 그것.
야차는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곤 이내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그랬느냐?"
"네…… 네?"
정말 자연스럽게 나오는 존댓말.
야차는 무표정하게 물었다.
"네가 이 염주를 부쉈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콰드드드드득!
"케헥!?"
야차의 말과 함께 자신의 온몸에 가해지는 압력을 느끼며 비명을 지른 루시퍼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열었다.
"제…… 제가 아니에요! 진짜로 아니에요! 그, 그냥 갑자기 터졌어요! 그냥 갑자기 터졌단 말이에요!!"
루시퍼의 필사적인 애원.
허나 야차의 마력을 조금 더 매서워지기 시작했고, 조금 전 루시퍼에게 날려지고 난 뒤 서둘러 제자리에 복귀한 손오공과 청룡도 그런 야차의 패도적인 기운을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위에 다녀오도록 하겠느니라."
야차는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
관리기관 관저의 지하.
아니, 이제 관저는 남아 있지 않으니 폐허의 지하라고 부르는 게 훨씬 더 잘 맞는 그곳에서, 노네임은 무척이나 익숙한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헤르메스."
노네임이 입을 열자 고개를 돌리는 헤르메스는 이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허나 헤르메스의 미소 어린 인사에도, 노네임은 굳은 얼굴로 형형색색의 빛나는 업들이 모여 있는 업 앞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 말이다."
"아, 이것 말씀입니까?"
노네임의 물음에 헤르메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몸을 돌려 업들이 가득 차 있는 방의 유리를 두드렸다.
통-통-
깔끔한 소리를 내는 유리.
"그냥, 구경 중이었습니다."
"구경 중이라…… 내가 없는 이곳에 굳이 들어와서, 홀로 구경을 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그도 그럴 게, 이제 곧 있으면 보지 못할 광경인데 지금이라도 눈에 담아 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뭐라고?"
"말 그대로입니다. 이제 저 광경은 못 본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금 나를 앞에 두고서,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뭐지? 죽고 싶다는 건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여는 노네임.
그러나 헤르메스는 그저 말없이 웃으며 노네임을 바라볼 뿐이었고, 곧 계속해서 실실거리는 웃음을 지우지 않는 헤르메스를 바라본 그는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는 말했다.
"감히 네가 나를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입니다. 사실 이미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만."
"뭐?"
노네임이 순간 표정을 찌푸리자 헤르메스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몸을 치웠고, 이내 헤르메스가 서 있던 자리 바로 뒤에는-
"……탐왕?"
-탐왕이, 벽 안에서 노네임이 지금까지 모아왔던 업을 무자비하게 흡수하고 있었다.
물론 평범한 신이나 사람이 다른 이의 업을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강대해도 다른 사람의 업을 아무런 장치 없이 흡수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신을 파괴하는 일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탐왕(貪王)이라면?
애초에 존재 자체가 다른 이들의 업을 모아 탄생한 그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업을 흡수하고 있는 탐왕의 모습을 본 노네임이 본능적으로 몸을 튕긴다.
그러나-
"설마, 제가 고작 준비를 이것밖에 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죠?"
노네임은 걷 자신의 앞을 겹겹이 가로막는 엄청난 양의 방어막을 보며 헤르메스를 노려봤다.
385화. 나 진짜 죽었냐? (2)
"고작 이딴 걸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노네임의 일갈.
헤르메스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전혀요. 제가 만든 이런 방어막 따위는 그저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과 함께 노네임은 거침없이 자신의 손을 움직였고, 그가 한번 손을 움직이자 앞을 막고 있던 방어막들이 하나둘씩 깨지기 시작했다.
쨍그랑! 카르르르륵!!
유리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하는 방어막.
헤르메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그래도, 20초 정도는 번 것 같군요."
"네 녀석!"
그의 말에 노네임은 분노를 표출하며 사방으로 마력을 뿜어냈다.
당장 마력을 뿜어내는 것만으로도 이곳 전체를 박살 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마력이 지하 공동에 몰아친다.
그러나 헤르메스는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공동 전체를 밀어버리면 당신이 지금까지 모은 업도 전부 허사가 돼버릴 텐데요?"
헤르메스의 말.
확실히 그의 말대로 노네임이 이곳에서 모든 마력을 운용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앞에 있는 방어막 따위는 순식간에 부실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네임의 앞에 깔려 있는 것은 일개 방어막 따위가 아니었다.
'……폭발진.'
조금이라도 충격이 가해지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폭발진이 지금 노네임의 앞을 막고 있는 것의 정체였다.
물론 폭발진이 아무리 터진다고 해도 노네임은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폭발진에서 나오는 화력을 헤르메스에게 돌려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섣불리 폭발진을 터트리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공간 때문이었다.
"쯧."
폭발진이 단 하나라도 터진다면 이곳은 통째로 날아간다.
그리고 이 공간이 통째로 날아간다는 소리는 다르게 말해서 노네임이 그동안 쌓아왔던 업도 함께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 되었다.
카르르르륵!
그렇기에 노네임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겹쳐있는 폭발진을 하나씩 제거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너무 느리신 거 아닙니까? 그렇게 느리게 걸어오셨다간 당신의 자식이 그동안 모은 업을 전부 먹어 치울 것 같은데 말입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노네임은 인상을 찌푸리며 탐왕을 바라봤다.
정신을 잃은 채 사슬에 묶여 있는 탐왕은 노네임이 모아놓은 업이 들어 있는 그 공간 안에서 거의 무한정하게 업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노네임은 헤르메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감히 네가 나를 배신하다니."
"배신이라뇨? 말을 참 섭섭하게 하시는군요."
"뭐?"
"애초에…… 저와 당신은 서로 팀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 개새끼야."
실눈을 뜨고 있던 헤르메스의 눈가가 한순간에 악귀처럼 일그러진다.
"내가 정말로 네 팀이라고 생각한 거야? 정말로?"
"감당할 수 있겠나?"
노네임의 차가운 경고.
헤르메스는 지금까지 보여왔던 정중한 태도는 처음부터 거짓말이라는 듯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감당은 이 개새끼야! 이미 네가 그때 내 동료들을 죽이면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은 이미 넘어섰어, 알아?"
헤르메스는 그렇게 말하며 아주 짧은 찰나로 과거를 회상했다.
자신의 동료이자 아버지였던, 그리고 누나와 형들, 또한 동생과도 같았던 그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해했던 노네임의 모습을.
헤르메스는 자신의 입가를 혀로 문지르며 손을 움직였고.
우우우우웅-!!!!
이내 헤르메스의 앞에 조금 전까지 없었던 폭발진이 새롭게 겹쳐지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문 노네임은 급하게 손을 들어 올려 헤르메스의 마력을 빼앗았다.
아니, 빼앗았다기보다는 '없앴다'.
애초에 '마력' 그 자체인 노네임에게 있어서 마력은 당연히 자신의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씨익-
"……!"
노네임은 헤르메스의 몸에서 자신의 마력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앞에 겹겹이 만들어지는 폭발진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 눈을 떴다.
"내가 설마 대비도 안 해뒀을 것 같아?"
헤르메스의 말에 곧 인상을 찌푸리며 폭발진을 해제하는 데 박차를 가하는 노네임.
"도대체 언제부터 일을 꾸민 거지?"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헤르메스는 비웃음을 지우곤 이야기했다.
"당연한 것 아니야? 처음부터다."
"……."
"너한테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그때부터 나는 줄곧 이때를 꿈꾸고 있었어, 너를 이 두 손으로 직접 죽여버릴 지금 이 순간을 말이야……!"
"김현우를 관리기관에 떨어트린 것도 네 녀석의 짓인가."
"그렇다면?"
"쓸데없는 짓을 했군."
"쓸데없는 짓이라니? 그 녀석 덕분에 이렇게 준비를 할 수 있었는데 말이야. 내 입장에서는 감사를 몇 번이나 해도 모자랄 정도지. 자기의 목숨을 희생해서 네 시간을 끌어주었으니 말이야."
"멍청한 놈. 나를 정말로 밀어내고 싶었으면 김현우를 은밀하게 돕는 게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본 것 같군."
"그 생각도 이미 해 봤지. 그런데 말이야. 애초에 복수라는 건 내 손으로 직접 해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어?"
게다가-
"김현우가 네가 찾던 그 녀석을 데려올 때까지는 시간이 꽤 많이 걸릴 것 같더라고?"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노네임의 추측에 헤르메스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답했다.
"적어도 이곳에서 내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무 곳도 없어…… 뭐, 그 녀석이 있던 51번 탑은 보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아무튼-
"네가 모르는 것 정도는, 전부 알고 있었지."
헤르메스의 말.
"멍청하군.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결국 그 좋은 패를 버림패로밖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건가?"
노네임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에 헤르메스는 슬쩍 얼굴을 굳힐 뻔했으나 곧바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는 이야기했다.
"복수는 직접 해야지, 안 그래? 너도 내 형제들을 직접 죽였으니까."
"과연 네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럼, 이만큼의 시간이 있었는데, 못할 거라고 생각해?"
헤르메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품속에서 자그마한 스위치를 하나 꺼내 들고는 망설임 없이 눌렀다.
버튼을 누르자마자 생성되는 포탈.
노네임은 본능적으로 형성되는 포탈을 막으려 했으나.
"소용없어, '물건'에 담긴 업은 빼앗지도 못하잖아?"
헤르메스의 말과 함께, 노네임은 포탈에서 떨어져 쏟아져 내리는 것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그것들은 무기였다.
어느 것은 닿기만 해도 온몸이 시커멓게 타들어 갈 것 같은 전류를 내뿜고 있었고.
또 어느 것은 청명한 기운을 주변에 뿌려대고 있었다.
또 다른 것은 죽음의 기운을 사방에다 흩뿌려 닿는 모든 것들의 생명을 빼앗고 있었고.
마지막에 포탈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목걸이는 포탈에서 빠져나온 무기들을 하나둘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노네임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탑을 만들 때 같이 처분하려고 했던 것을 빼돌렸나."
"정답. 멍청이 같이 모든 전권을 내게 맡기는 통에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을 수 있었지."
헤르메스의 말에 노네임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멍청한 놈. 내가 네게 전권을 맡긴 이유는 그것들이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너 같은 놈이 그것을 다시 주워 사용한다고 해도 나를 막을 수는 없다."
노네임은 그렇게 말하며 폭발진을 더더욱 빠르게 부숴나가기 시작했다.
겹겹이 쌓여 있던 폭발진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순식간에 사라져 나가고, 그와 함께 헤르메스의 주변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하늘에 떠 있던 무기들의 주변에, 형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흐릿한 안개로 만들어진 그 형상은 노네임이 폭발진을 깨면 깰수록 그 형상을 온전하게 잡아나가기 시작했고.
이내 노네임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던 폭발진을 완전히 없앴을 때.
"그럼 어디 한번 실험해 보면 되겠네?"
노네임의 앞을 막고 있었던 것은,
"어디 한번 뚫어봐."
헤르메스가 아닌 그리스의 신들이었다.
####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단 하나의 오두막만 있는 그 백야에서.
"끄아아아악!"
조금 전까지 죽은 데블랑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던 베드로는 하얀 모래에 얼굴을 처박고는 자신의 떨어져 나간 오른팔을 붙잡고 신음하고 있었다.
허나 그런 베드로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컥!"
-그는 곧 자신을 압박하는 마력에 의해 하얀 모랫바닥에 처박혀 헛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런 베드로의 앞에 걸어오는 한 인영.
"똑바로 말하거라."
야차는 소름끼칠 정도의 무표정으로 모랫바닥에 처박힌 베드로의 머리를 짓밟으며 이야기했다.
뿌드드득!
"끄아아아아악!!!!!"
골통이 깨져나가는 소리에 비명을 지르는 베드로.
그러나 야차는 밟는 힘을 줄이지 않고 말했다.
"김현우는, 어디로 갔느냐?"
"끅…… 끄으윽"
"설마 말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 게냐?"
"그, 그는…… 관리…… 관리기관에 갔소."
베드로의 힘겨운 말.
그에 야차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그가 거기에 간다고 말하지 않았거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그건?"
망설이는 베드로.
그에 야차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머리통을 밟고 있는 발에 힘을 주었다.
꾸드드드득-!
나뭇조각이 한계에 달한 듯 터져나가는 소리.
베드로는 비명을 지르듯 입을 열었다.
"어…… 어쩔 수 없었소!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업이……!"
"……대업?"
"큭……."
베드로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으나, 이내 결심했다는 듯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이야기할-
"대업을 위해 어쩔 수 없었소. 그 남자를 죽이기 위해서 김현우, 그의 희생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끄허어어억!!"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입을 열고 있었던 베드로의 얼굴은 그대로 모랫바닥에 처박혀 버렸으니까.
야차는 제 자리에 주저앉아 바닥에 처박힌 베드로의 얼굴을 꺼내 들었다.
"으으으-"
안 그래도 나무껍질이 마구잡이로 자라있는 모습에 흉측했던 베드로의 얼굴은 그 주변을 가리고 있던 껍질 깨지면서 더더욱 흉측하게 변했으나 야차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내 지아비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이것이더냐?"
야차의 눈에서 느껴지는 살기.
아니, 그것은 살기 같은 단어로 정정할 수 있는 그런 단위의 감정이 아니었다.
"……!!"
야차가 뿌리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 베드로.
그러나 그는 덜덜 떨면서도 입을 열었다.
"마, 맞소."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다음으로 올 고통에 대비해 눈을 꾹 감았으나,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고, 이내 조심스레 다시 눈을 뜬 그곳에서, 베드로는 볼 수 있었다.
"……."
야차가, 지금 당장 자기를 죽여 버리고 싶어 하는 것을 억제하는 그 모습을.
베드로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고.
한참동안이나 베드로를 바라보며 몇 번이고 자신의 손에 피를 터트리던 야차는 이내 덜덜 떨리는 숨을 쉬며 자신을 타이르듯 몇 번이고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내 지아비가 간 곳으로 안내해라. 지금 당장."
야차는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386화. 나 진짜 죽었냐? (3)
백야.
"살려-"
퍼석-!
그곳에서, 야차는 자신을 향해 입을 여는 베드로의 머리통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부숴 버렸다.
분명 나무껍질과 같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던 그였으나 머리통이 터질 때 나는 소리는 분명 인간의 머리가 터질 때 나는 소리와 같았다.
"하……."
그렇게 머리통이 박살 난 베드로의 시체를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야차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봉인주가 깨졌을 때. 야차는 곧바로 최상층으로 올라와 아브와 노아흐의 도움을 받아 김현우가 갔다고 알고 있던 백야에 도착했고.
이 백야에 도착하자마자 야차는 죽어 있는 데블랑의 시체를 봄과 동시에 베드로를 협박해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꼭 좀 들었으면 했던 정보부터 시작해서.
모순적으로 듣고 싶지 않았던 정보까지 모두.
야차는 들을 수 있었다.
"……정말로?"
야차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행동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 중얼거림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걸, 그녀는 스스로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베드로의 말을 통해 야차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들었다.
헤르메스가 김현우를 미끼로 이용해 노네임을 죽이려는 계획을 아주 옛날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갈 수 없는 관리기관에 혹여나 갈 수 있다고 해도, 김현우를 살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라는 소리를.
야차는 멍한 표정을 짓다 자신의 품속에서 김현우에게 주었던 봉인주 조각을 꺼내 들었다.
"……."
봉인주는 기본적으로 그 주인인 '김현우'와 연결되어 있고, 곧 봉인주가 터졌다는 것은 바로 김현우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
그 백야에 앉아. 몇 번이고 봉인주 조각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짓던 야차.
"하……."
이내 그녀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곤 부숴진 손에 쥐고 있던 염주조각을-
툭.
-자신의 품에 안고서는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 누구에게도 더 이상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듯.
####
관리기관 지하에 있는 거대한 지하공동은 그득한 싸움의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사방에는 박살이 난 벽들이 거미줄과도 같은 빗금이 처진 채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고, 그것은 땅도 마찬가지.
그나마 멀쩡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곤 업을 가두고 있는 유리창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헤르메스가 지키고 있던 유리창 앞에서.
"큭……."
"이제 좀 정신이 들었나?"
헤르메스는 노네임에게 목을 잡힌 채로 들려 있었다.
제대로 숨을 쉬기 힘든 듯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헤르메스와 달리 노네임은 상의가 찢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큰 상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네가 아무리 나를 죽이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미물."
"……."
노네임에게 목이 잡힌 채 일순간 굳은 표정을 짓던 헤르메스,
그러나 그는 억지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봤다.
보이는 것은 박살 난 공동의 모습과 그 공동 사이사이에 있는 무기들.
어느 것은 이가 나갔고, 또 어느 것은 완벽히 박살이 나 있는 무기들을 바라본 헤르메스는 다시 시선을 돌려 노네임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는 무표정이었던 얼굴이 한껏 비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바뀌어 있는 노네임.
헤르메스는 그와 마주 웃으며 이야기했다.
"과연 네가 진짜 이겼다고 생각해?"
"뭐라고……?"
-쩌저적!
"!"
노네임의 대답과 함께 깨져나가기 시작하는 유리창.
그는 업을 가둬두고 있는 유리창에 금이 생기자마자 헤르메스를 내팽개치고 유리창을 보수하기 위해 손을 내뻗었다.
우우우우웅!!!
한순간 깨진 부위로 모여든 마력.
그 마력들은 순식간에 금이 간 유리창으로 옮겨져 수리를 시작했고, 헤르메스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손위에 있는 버튼을 흔들며 이야기했다.
"정말 계속 막아놔도 괜찮겠어? 안쪽에는 네 자식이 네가 지금까지 모아온 업을 전부 먹어치우고 있는데?"
굳어지는 노네임의 표정.
확실히 지금 이 상황에서 노네임은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의 목적은 모아 놓은 업을 흡수하는 것.
그런데 이미 그 모아놓은 업은 탐왕이 흡수하고 있었고, 지금 이 상황에서 탐왕을 막기 위해 노네임이 안으로 들어간다면-
'……내가 나머지 남아 있는 업을 전부 흡수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노네임은 지금까지 모아왔던 업을 모조리 날려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유리창을 깨버리면 그것도 마찬가지로 업을 날리게 되는 일.
한마디로 노네임은 지금 이 상황에서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이었다.
헤르메스가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노네임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보내자.
"고작 내 대업을 조금이라도 더 늦추기 위해 이딴 짓을 벌인 거냐?"
노네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헤르메스.
노네임은 이어서 말했다.
"너희가 작정하고 이런 짓을 벌여봤자 결국 내게 돌아오는 피해는 없다. 나는 그저 너희 때와 같이 똑같은 희생양을 만들어 업을 모으면 될 뿐이지."
"……."
헤르메스는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그저 벽에 기댄 채로 노네임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을 뿐.
그에 노네임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쩌저저적!
곧바로 부숴지고 있던 유리의 수리를 그만두고, 오히려 유리창쪽을 향해 움직여 업을 보관하고 있던 유리를 박살 내버렸다.
쨍!!
시끄러운 소리를 만들어내며 깨지는 유리.
그와 함께 유리창 너머에 있던 업들이 순식간에 밖으로 빠져나와 제멋대로 흩어지기 시작했으나 노네임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헤르메스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면 유감이군. 네가 아무리 나를 곤란하게 만들어봤자 내가 네 뜻대로 당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너 같은 미물에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부상을 당한 헤르메스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는 조금 전까지 자리에 있던 탐왕을 보았고.
"……!"
노네임은 곧 조금 전까지 자리에 있었던 탐왕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빙고."
동시에 헤르메스에게서 들린 소리.
그리고 그다음 순간.
촤르르르르르륵!!
노네임은 자신의 몸이 사슬에 감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순간에 자신의 몸을 구속한 사슬.
"크르르르륵……!"
"탐왕인가……!"
노네임은 그 사슬을 움직이는 것이 탐왕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자신의 몸을 마력으로 바꿨으나.
"……무슨?"
사슬에 감긴 그 순간부터 노네임은 자신의 몸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던 마력이 마치 무엇인가에 막힌 듯 빠져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네가 아무리 마력을 끊임없이 뿜어내도 그 사슬은 못 풀어. 알잖아? 그 사슬은 마력을 흡수한다는 걸."
"……!"
"아까 네가 말했지? 고작 시간 끌기를 위해 이렇게 한 거냐고."
"……헤르메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내가 직접 너를 죽이겠다고 말이야."
"흥! 과연 네 능력으로 나를 죽일 정도의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
헤르메스의 즉답에 순간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은 노네임.
"내 능력으로 너를 소멸시키기에는 당연히 턱없이 부족하겠지. 그건 맞는 말이야."
그런데-
"네 뒤에 있는 탐왕이라면 어떨까?"
"!"
헤르메스의 말에 그는 두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등 뒤에 붙어 있는 탐왕을 바라봤다.
자신의 몸에서 기묘한 광채를 흩뿌리며 노네임을 잡아두고 있는 탐왕.
헤르메스는 한껏 굳어진 노네임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짓곤 이야기했다.
"지금 탐왕의 몸에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업이 들어 있어. 그리고 조금 전 네가 사슬에 흘린 마력 덕분에 통제가 되지 않는 탐왕의 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지."
"네 녀석……!"
"아, 혹시라도 걱정하지 마. 아주 만약에라도 네가 탐왕의 자폭에서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이 공동이 무너지면 너는 허수공간에 처박히게 될 테니까. 아무리 너라도 허수공간에 빠지면 답도 없잖아?"
헤르메스의 말과 함께 조금 더 밝게 빛나기 시작하는 탐왕. 그의 주변으로 거친 마력의 격류가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며 노네임은 악을 질렀다.
"네 녀서어어어어억!!!"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잘 가라."
헤르메스는 비틀린 웃음을 그의 등 뒤에 묶여 있던 탐왕이 자폭하는 순간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
"이라고, 할 줄 알았나?"
-다.
####
사후(死後) 세계라는 것은 진짜로 존재할까?
그것이 바로 김현우가 처음 수면 아래로 잠수했던 정신이 위로 부상하며 떠오른 생각이었다.
과연 사후세계라는 것이 존재하면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게되는 걸까?
그것이 그다음으로 떠오른 의문.
김현우는 그렇게 멍하니 생각을 이어나가다, 문득 자신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지?'
그 의문과 함께 떠오르는 여러 가지 가정.
'나도 티르처럼 무기같은 데에 스며들고…… 뭐 그런 건가?'
맨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적어도 김현우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살아남아 이렇게 생각을 이어나갈 수 있을 만한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김현우는 혹시나 자신이 살아남았나? 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굴려봤으나 곧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나는 확실히 죽었지.'
그는 확실하게 그때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마력을 빼앗긴 상태에서 남자의 손에 무력하게 살해된 자신의 모습을.
그때 노네임이 자신을 보며 짓던 표정도.
또한 자신의 피가 바닥을 적시는 것도.
마지막으로 자신의 시야가 어둡게 변하는 것까지, 김현우는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뭐지?'
그렇기에, 김현우는 어떻게 자신이 아직도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지금 당장 그는 몸을 움직이려고 해도 마치 몸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마치 관전자 시점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라고 하는 게 비유에 맞을까?
'도대체 뭐야?'
김현우는 이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최대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죽고 난 뒤, 그다음이 혹시나 기억날까 생각해 봤으나 마찬가지로 그때의 기억은 시야가 어둡게 물든 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의 기억은 김현우에게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김현우가 고민을 이어 나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드디어 깨어났네?]
"……이 목소리는,"
[오랜만이이야.]
"……눈동자?"
김현우의 말에 줄곧 어두웠던 주위가 불현듯 바뀌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시야가 푸르게 바뀌기 시작하고, 조금 전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김현우의 몸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니, 그것은 굳이 말하면 몸이 보인다기보다는 마치 어둠 속에서 몸이 새롭게 재구성된다고 표현하는 게 훨씬 더 어울렸다.
그와 함께 보이는 것은 김현우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거대한 눈동자.
그리고-
[이제야 진짜 만날 수 있게 됐네.]
그 거대한 눈동자 뒤에서 걸어 나오는 한 인영을, 김현우는 볼 수 있었다.
387화. 나 진짜 죽었냐? (4)
헤르메스의 눈에 비친 마지막 장면.
그것은 탐왕의 폭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듯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노네임이 침착한 표정으로.
아니-
비웃음 섞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와 함께 일어난 폭발.
헤르메스의 눈이 새하얗게 점멸하고 오감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정도로 저릿한 폭발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새하얀 빛으로 끌고 들어갔고.
헤르메스는 분명 그곳에서 함께 사라지는 노네임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
그랬는데…….
"컥-"
헤르메스의 입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온다.
그 하얀 빛이 사라진 뒤 그에게 생긴 의문.
첫 번째는 어떻게 그 폭발에 휘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아 있는지에 대해서였고.
두 번째는-
"미물의 생각치곤 나쁘지 않았다."
"어떻게……?"
분명히 죽거나 허수공간에 처박힐 거라고 생각했던 노네임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목을 붙잡고 있는 것 때문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공동이 파괴되지 않았다고?'
공동은 파괴되지 않았다.
물론 업이 있던 공간을 격리하던 유리는 박살 났고, 흡수한 업과 함께 자폭한 탐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지금 헤르메스와 노네임이 서 있는 공동은 전투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전혀 파괴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헤르메스가 두 눈을 부릅뜨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노네임은 헤르메스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이야기했다.
"고맙게 생각해라. 그 폭발에서 널 살려둔 것도 바로 나니까."
"어떻게……!"
"그런 당연한 걸 말해야 하나? 정말로?"
씨익-
"나는 '마력'이다. 이 세상의 근원과도 같은 내가…… 그저 한순간을 소비해 모은 업 따위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너무나도 우스운 오산이 아니냐?"
"이런 젠장……!"
진심으로 분하다는 듯, 악귀같이 인상을 찌푸리며 노네임을 바라보는 헤르메스.
그러나-
뚜둑!
노네임이 헤르메스를 쥐고 있던 손에 망설임 없이 힘을 집어넣자마자 그는 그대로 고개가 옆으로 꺾여 즉사했다.
털썩!
노네임이 힘을 풀자 너무나도 허무하게 쓰러지는 헤르메스.
노네임은 감정 없는 눈으로 그 모습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망가진 공동의 모습을 바라봤다.
무엇하나 멀쩡하게 남아 있는 것 없이 박살 난 공동.
위층도 김현우와의 싸움 덕분에 완전히 박살 났다.
"쯧."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쉰 노네임은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실패로군."
그가 맨 처음 자신의 이름을 가지기 위해 업을 모았을 때는 그년의 끄나풀을 잡느라 일을 망쳤다.
'……이번에는 끄나풀이 아니라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살려둔 놈이 일을 망칠 줄이야.'
노네임은 헤르메스의 시체를 망설임 없이 걷어 차버렸다.
뿌드드드득!
노네임의 발차기 한방에 가볍게 분쇄되는 헤르메스의 시체.
그렇게 하릴없이 굴러가는 헤르메스의 시체를 바라보던 노네임은 이내 부숴진 공동에 그나마 남아 있는 가죽 소파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
노네임은 움직이지 않고 고민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좋아."
노네임은 그 오랜 시간의 고민 끝에 결국 답을 찾은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실수 없이 해보도록 하지."
노네임은, 다시 한번 업을 모을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을 먹음에 따라 노네임의 손에 모여들기 시작하는 푸르른 마력.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파괴.
물론 지금까지라면 만들어놓은 세계를 멸망시키기 전에 자신의 손발이 될 만한 이들을 남겨놓았겠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귀찮아도 어쩔 수 없지.'
노네임은 이번 일을 바탕으로 자신이 만들 다음 세상에는 홀로 업을 모으겠다고 다짐했으니까.
물론 헤르메스가 일을 처리해 줄 때랑은 다르게 매우 귀찮게 될 것이 뻔히 보였으나 그래도 노네임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고작 자신에게 업을 모으는 것이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그 이상으로 조급했으니까.
그렇기에 노네임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에 모인 마력으로 포탈을 열었고.
"……우선, 나를 제일 귀찮게 했던 녀석부터 처리하도록 하지."
노네임은 제일 처음 파괴해 버릴 곳으로 51번 탑을 선택했다.
####
그 거대한 눈동자의 뒤에서 나온 것은 한 여자였다.
잿빛의 긴 생머리를 가지고, 그 머리색과는 상반되는 검회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는 여자.
두 눈은 마치 흑요석처럼 짙은 어둠을 가지고 있었으나 묘하게 빛나고 있었고, 잿빛의 긴 생머리 주변에는 그녀의 눈동자와 비슷한 색의 보석들이 여기저기 달려 있었다.
"안녕. 이렇게 실물로 본 건 오랜만- 아니, 처음이지?"
"……네가, 눈동자야?"
"맞아. 직접 보니까 감상이 어때?"
눈동자일 때 들렸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마치 말괄량이가 이야기하는 듯한 하이톤의 목소리.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로?"
"응? 설마 못 믿는 거야? 그럼 이렇게 대화해야 하나?"
눈동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자신의 앞에 거대한 눈동자를 만들어냈다.
그가 평소에 봤던 눈동자.
[이렇게 대화하길 원해?]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자 김현우는 고래를 젓고는 이야기했다.
"아니, 됐어."
"흐흥~ 그럴 줄 알았지."
김현우의 단답에 곧바로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동자를 치워 버리는 그녀.
그는 도무지 왜 눈동자가 신이 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된 거야? 우선 그것부터 설명해 줬으면 좋겠는데."
김현우의 물음에 눈동자는 말했다.
"뭐,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너는 죽었어."
"죽었다고?"
"그래. 너도 기억은 나지?"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뭐…… 마지막에 심장이 뚫려서 죽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네가 어떻게 해서 살린 거 아니야?"
"아닌데?"
"……그럼 나는 너랑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게다가 이렇게 몸도 멀쩡한데?"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몸을 움직여 봤다.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몸.
게다가 노네임과 싸웠던 상처조차도 없었다.
김현우가 의문을 표하자 눈동자는 김현우의 앞에 주저앉아 이야기했다.
"당연히 멀쩡하지. 그건 네 남아 있는 업으로 만들어진 육체니까."
"……업으로 만들어진 육체? 그건 또 뭐야?"
"말 그대로, 네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업을 전부 다 소모해서 만든 육체라 이 말이지."
"그럼 살아난 거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생각해 봐, 업이라니까? 업이 네 눈에 보이거나 해? 그냥 그건…… 으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마침내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래! 그냥 '영혼'에 손발을 붙여줬다고 생각하면 편하겠네. 아무튼 네가 살아난 건 아니야."
"그럼…… 다 끝난 거?"
"아니, 당연히 그것도 아니지. 만약 전부 끝났다면 내가 그대로 소멸할 예정이었던 네 영혼을 그렇게 눈치 보면서 힘들게 여기까지 데려왔겠어?"
눈동자의 말.
"관리기관에서 나를 데려온 거야?"
"뭐, 운이 좋았지. 사실 원래라면 데려오는 것도 불가능할뻔했는데 다행히 일이 잘 풀려서 말이야."
"일이 잘 풀렸다니?"
김현우의 물음에 눈동자는 기다렸다는 듯 그가 쓰러졌을 때 관리기관에서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뭐, 정확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는데. 대충 그때의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어."
"……헤르메스가 뒤통수를 쳤다……라. 거기다 나를 이용한 것도 그 녀석일 확률이 높다 이거지?"
"뭐 말 그대로 정황상 확률이라는 거지. 너를 이용해서 그놈을 관저 밖으로 끌어낸 뒤에 자신들은 안에 들어가서 원래 하려던 일을 한 거지."
"다른 내용은 아는 거 없어?"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불만스럽다는 듯 김현우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내가 말했지? 애초에 나는 네 영혼을 데리고 오느라 그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정황도 없었다니까?"
거기에다-
"내가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갔으면 바로 노네임한테 내가 나왔다는 걸 광고하는 건데, 내가 굳이 가겠어?"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무튼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는 거지?"
"당연하지. 사실대로 말해주자면 너는 지금 이 상태로도 부활할 수 있어,"
"……정말로?"
"내가 뭐하러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내가 힘만 조금 써주면 너는 곧바로 부활할 수 있어. 다만 지금 부활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게 문제지."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지금 살아나면 과연 그놈을 이길 수 있을까?"
눈동자의 물음.
그에 김현우는 순간 침묵하다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아마, 못 이기겠지."
"맞아. 정답이야. 너는 그 녀석을 못 이겨."
"아니, 애초에 그 녀석을 이기는 게 가능해? 그 녀석의 근원은 마력이라며?"
"그렇지?"
"그런데 그 녀석을 도대체 어떻게 이긴다는 거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노네임에게 죽었을 때를 떠올렸다.
애초에 제대로 상대가 되지도 않았던데다. 거의 마지막에 와서 김현우는 자신에게 있는 마력을 빼앗긴 뒤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그때 느꼈던 압도적인 무력감.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자 눈동자는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그놈이 조금 괴물 같은 놈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래도, 너는 이길 수 있어."
"이길 수 있다고……? 내가?"
"만약 네가 그놈을 이길 수 없었으면 내가 여기에 너를 직접 데려오지도 않았을걸? 이렇게 열심히 설명하지도 않았을 거고."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이야기했다.
"……그 녀석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수련해야지."
"……수련?"
"뭐, 수련이라고 해도 대단한 건 아니야. 그리고 네가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몸이나 어떤 깨달음을 위해 몸을 혹사하는 것도 아니지."
"……그럼?"
"그냥 너는 체험하기만 하면 돼."
"……체험?"
"그래, 하지만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 아직 준비가 조금 덜 끝났거든."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쪽을 향해 턱짓했고, 김현우는 그녀가 턱짓을 한 곳으로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저건?"
"저게 다 만들어져야 해."
그리고, 그곳에서 김현우는 이 푸른 공간 안에서 작게 빛나고 있는 구체 하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분명 자그마하지만 확실한 빛을 발하고 있는, 마치 하늘에 놔두면 그대로 별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자그마한 빛.
김현우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눈동자는 이야기했다.
"아무튼 저게 다 만들어질 동안은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그전까지 우선 해줘야 하는 이야기부터 해줄게."
"해줘야 하는 이야기?"
"그래, 네가 옛날에 물어봤잖아? 내 정체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말이야."
확실히, 김현우는 어느 순간 눈동자를 만났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곤 김현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 지은 뒤,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388화. 경험을 얻는 것 (1)
"아, 그러고 보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조금 전까지 중요한 이야기를 할 듯 입가를 우물거리던 눈동자의 질문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뭔데?"
"너는 그놈이 왜 업을 모으는지에 대해 알고 있어?"
그녀의 물음에 김현우는 슬쩍 고개를 갸웃하다 예전에 데블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눈동자는 노네임이 하려는 일을 짐작만 하고 있다고 했었지?'
김현우는 그것을 떠올리곤 이야기했다.
"우선 내가 알기로 노네임은 자신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 것 같던데 말이야."
"역시 그렇지?"
"……뭐, 내가 탐왕에게 들은 걸로는 그렇다고 하더라."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동자는 이미 짐작했다는 듯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이야기했다.
"우선 제일 먼저 큰 틀을 설명해 줄게."
"큰 틀?"
"그래, 도대체 왜 지금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알고 있는 거야? 너는 노네임의 목적도 몰랐다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거든. 다만 확신을 못 했을 뿐이지."
"……확신을 못 했을 뿐이라고?"
김현우의 되물음에 눈동자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새끼가 그렇게 머저리 같은 줄 누가 알았겠어."
그녀의 탄식에 김현우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뭐라고?"
"말했잖아? 그 녀석이 그렇게 머저리 같은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몰랐단 말이야."
짜증이 난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던 그녀는 김현우를 바라봤다.
"너는 이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뭐라고 생각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냥 생각해 보면 다 중요하지 않아?"
"틀렸어."
"……이런 선문답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쭉 알려주는 게 어때?"
김현우의 말에 잠시 그를 째려보는 눈동자.
허나 그녀는 곧 됐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이야기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바로 '업'과 '마력'이야. 물론 네가 말한 대로 다른 것들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두 개지."
"……그래?"
"어째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인데?"
그녀가 탐탁잖다는 표정으로 질문하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곧바로 이야기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사실이야. 이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 중 제일 중요한 두 가지는 바로 마력과 업이지."
우선-
"마력은 세상 만물을 기본적으로 구성하는 원재료와 같아. 땅부터 시작해서 네 몸, 그리고 기본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들의 원재료는 엄밀히 따져보면 다 다르긴 하지만 결국 '마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지."
"……그게 말이 돼?"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당장, 내가 사는 곳은 튜토리얼 탑이 올라오기 전에는 마력이 없는 세계였는데?"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건 정확히 말하면 마력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마력이 있더라도 마력을 느낄 수 없는 세계였겠지. 애초에 마력이라는 건 없을 수가 없어. 그건 마치 원재료와 같은 거니까."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업은?"
"업은 말 그대로 역사잖아?"
"……역사?"
"이렇게 말하면 너무 어렵나? 그럼 그냥 과정이라고 하자."
"과정이라면……."
"말 그대로, 모든 물건을 만들 때는 기본적으로 과정을 거치잖아? ……예를 들어 의자를 만들 때는 맨 처음 뭘 하지?"
"……재료를 찾겠지?"
"바로 그거야. 나무를 베고 그것을 의자로 만드는 데까지의 과정. 조금 더 태초로 내려가 보면 씨앗이 흙에 심어져, 그 흙을 비집고 나와 나무가 되는 데까지에도 과정이 있잖아?"
김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동자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 모든 것은 '업'이야. 아주 하찮은 미생물이나 자그마한 꽃과 나무들이 피어나는 것도 모두 과정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이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행하는 과정까지, 그것은 모두 '업'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이지."
그렇기에-
"그 두 가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말이야, 마력은 원재료고, 업은 그것을 가공하는 과정을 말하는 거니까 말이야."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말했다.
"이 정도로 설명해 줬으면 대충 내 정체가 뭔지도 짐작이 가지?"
"……너는, '업'인 거야?"
"뭐, 굳이 명칭을 표현하자면 그렇게 되지. 그래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네? 어느 정도 추리력은 있는 것을 보니 말이야."
"……."
김현우는 반박하고 싶었으나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 멍청한 놈과 나는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야.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이 세상을 이끌어나가야 하지. 뭐, 초반만 해도 별문제는 없었어. 그냥 서로 할 일 열심히 하면서 살았지."
"할 일이라면?"
"그냥 할 걸 했다는 소리지. 이렇게 '자아'를 가지지 전에는 말이야."
"자아……?"
"그래, '자아' 말이야. 애초에 그게 문제의 시작은 전부 그것 때문이야. 너도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두 요소가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게 말이야."
"……뭐, 확실히."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결국 그녀에 말에 따르면 마력과 업은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자아를 가지고 있다?
"……."
뭐, 이해가 안 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조금 이상한 건 맞았다.
"그럼 네 말대로라면 원래 너랑 마력은 자아를 가지지 않았다는 거야?"
"그렇지. 애초에 우리는 그저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일 뿐이니까. 근데 문제는 어느 순간 마력이 자아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거지. 거기에 덤으로 나까지 말이야."
"……갑자기?"
"그래, 갑자기. 솔직히 나도 아직까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왜 우리가 자아를 가지게 됐는지 말이야."
그녀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다만 마력과 내가 자아를 가지게 된 뒤에도 얼마 뒤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어. 그냥 각자 할 일을 했거든. 근데 문제는 마력이 문득 욕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부터지."
"욕심?"
"그래, 그 녀석은 갑자기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하더라."
"모든 것……이 정확히 뭐야?"
"말 그대로 전부를 말하는 거야. 자신이 마력을 나누어주면서 보는 것들을 전부 가지고 싶어 하더라고."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름까지 가지고 싶어 했지."
"이름까지 가지고 싶어 했다는 건."
"그래, 말 그대로의 이야기야. 그 녀석은 '이름'을 가지고 싶어 했어. 뭐, 그리고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말하지 않아도 대충 예상할 수 있지?"
"……너는 마력이 자신의 이름을 가지려고 하는 것을 막다가 실패했고, 그래서 여기에 숨었다…… 뭐 그런 거야?"
김현우의 답변에 눈동자는 빙고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그 녀석이 이름을 가지게 되면 좀 문제가 크니까."
"뭐…… 나도 대충 듣기는 했는데,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자기밖에 만족할 수 없는 파멸이 일어나지."
"……자기밖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과 나는 결국 이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야, '자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그건 변함이 없지. 근데 '마력'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갑자기 이름을 얻게 된다?"
만약 그렇게 되면-
"파멸이 일어나는 거야.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제일 중요한 두 요소 중 하나인 '마력'은 그 녀석의 이름을 가지게 됨에 그 성질이 다르게 바뀌겠지. 그렇게 되면?"
"파멸……."
"그래, 파멸이야. 마력은 모든 세계의 원재료와 같은데, 그게 다르게 변질되면 당연히 파멸하겠지. 뭐, 그 머저리 녀석은 죽진 않겠지만."
쩝-
"아무튼 네 생각대로 나는 그 녀석을 막으려다가 실패하고는 여기에 숨은 거야. 솔직히 시간이 지나면 좀 생각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직도 자신의 이름을 얻기 위해 업을 모으고 있는걸 보니…… 아무래도 자력구제는 절대 불가능이겠네."
하긴 애초에 관리기관 같은 별 시답잖은 걸 만들어서 업을 모으는 것을 볼 때부터 자력구제는 포기하는 게 맞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별빛과도 같은 구체를 바라봤다.
"흐음…… 이야기는 끝났는데 아직도 시간이 좀 남았네. 또 무슨 이야기해 줄까?"
눈동자의 물음.
김현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이렇게 태평해도 되는 거야? 조금 전까지는 꽤나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심각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분위기도 처질 필요는 없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수련을 할 때도 아니고 이야기만 하던 중이었으니까. 그래서, 질문은 없어?"
가볍게 넘기는 그녀.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야기했다.
"뭐, 나도 궁금한 게 있긴 한데."
"뭔데?"
"지금 밖의 상황은 어때?"
"밖의 상황?"
"그래, 관리기관에서 내 영혼을 데리고 나온 뒤에 일어난 일 말이야. 혹시 아는 거 없어?"
김현우의 물음에 눈동자는 흐음, 하며 잠시 묘한 신음을 흘리더니 이야기했다.
"알기는 하는데…… 조금 단편적인 정보밖에 모르지. 내가 아까 말해준 것들 있잖아?"
"뭐, 그건 알겠는데…… 데블랑이랑 베드로가 뭐든 보고를 했을 거 아니야? 그리고 베드로, 그 새끼한테도 좀 볼일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그 새끼가 헤르메스랑 짜고 친 거 아니야? 애초에 그 새끼가 준 종을 흔들어서 관리기관이 있는 곳에 가게 된 건데."
인상을 찌푸리는 김현우를 보며 그녀는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유감이네."
"왜?"
"베드로는 죽었거든."
"……뭐?"
"베드로는 죽었다니까? 그것도 네 아내의 손에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아, 그리고 네 말대로 외부의 정보들은 항상 베드로와 데블랑이 하나하나 보고해 줘서 대충 정세를 파악하고 있긴 했는데 지금은 몰라."
"?"
"데블랑도 같이 죽었거든."
"……뭐라고? 누구한테?"
"네 아내가 죽인 베드로한테 죽었지."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바라봤고.
"한 번만 설명할 거니까 잘 들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베드로와 데블랑, 그리고 야차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 말을 전부 들은 김현우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있다 이야기를 정리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헤르메스 편에 붙어서 나를 미끼로 사용하기 위해 관리기관에 보낸 거고, 이어서 내가 간 뒤에 데블랑을 처리했다 이거지?"
"맞아."
"……그럼 아까 이야기할 때 말해주지 왜 지금 말해줘?"
"그때는 말 그대도 널 데려올 때 무슨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말하고 있었던 거니까 굳이 꺼내지 않은 거지."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이전번 그녀의 표정과 마찬가지로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자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내가 아는 건 두 달 전에 일어났던 그 일들이 끝이야. 나머지는 어떻게 됐는지 몰라."
-이내 그렇게 이야기했다.
389화. 경험을 얻는 것 (2)
"……두 달 전이라고?"
김현우의 되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간대로면 그 정도 될 것 같은데?"
"내가 두 달 동안 누워 있었다고?"
"너야 눈을 감았다 뜨니 바로 이곳이었겠지만, 확실히 네가 기절해 있는 동안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어."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잠깐, 그럼 그 두 달 동안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잖아?"
"……뭐, 확실히 그놈의 행동 패턴을 생각해 본다면……."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생각하는 듯하더니 툭 내뱉었다.
"무슨 일이 생긴 정도가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답시고 아마 모든 것을 무로 돌려버렸을 확률이 높아."
"……뭐라고?"
김현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눈동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래도 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마."
"지금 그 말을 듣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게 말이 돼?"
"내가 말했잖아? 그놈의 행동 패턴을 생각해 봤을 때의 확률이라고."
"……거의 100%의 확률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어, 확실히 좀 그렇긴 하지, 적어도 그 녀석의 목적이 변하지 않았다고 치면 그놈은 또 한 번 세계를 멸망시킨 다음에 다시 만들려고 할 테니까."
"……."
"그래도 아직 네 탑은 괜찮을 거야."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괜찮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걸 어떻게 아는데?"
"혹시나 싶어서 그곳에 나름대로의 장치를 해놨거든."
"……장치?"
"그래, 원래라면 최악의 수를 상정해 두고 만들어 둔 장치지."
"그건 또 뭐야?"
"지금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 둔 거야. 네가 너무 날뛰어서 관리기관이 먼저 움직여 탑을 박살 내 버린다면 지금처럼 네 영혼이라도 챙겨보려는 심산으로 알림 장치를 만들어 뒀거든."
후후, 하는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입을 여는 눈동자를 보며 김현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아까부터 생각하는데 그냥 처음부터 말하면 안 돼?"
"뭘?"
"그냥 확률 이야기를 하기 전에 네가 51번 탑에 알림장치를 해놨다는 것 먼저 이야기하라는 소리야."
"너무 사소한 걸 신경 쓰네. 아무튼, 아직 네가 있던 곳이 박살 나지 않았으니 다행이잖아?"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그건 그렇긴 한데…… 혹시 그곳에 메시지 같은 걸 보낼 순 없나?"
김현우의 물음에 눈동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왜?"
"당연히 내 힘이 드니까. 만약 평소 같았더라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메시지 정도는 남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저것 때문에 무리야."
눈동자는 턱짓으로 빛나고 있는 구체를 슬쩍 가리키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거기에 덤으로 내가 직접 밖의 상황을 보고 오는 것도 무리야. 그것도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힘이 드니까."
한마디로-
"지금 상황에서 너랑 내가 밖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냥 없다고 보는 게 좋아. 정말 무리해서라면 밖의 상황을 볼 수도 있긴 하지만…… 그럼 반대로 네가 힘을 얻어서 밖으로 나갈 때까지가 오래 걸리겠지."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지?
눈동자의 물음에 김현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중얼거렸다.
"……우선은 그걸로 만족해야겠네."
사실 김현우에게 있어서 그 사실은 한정적이지 않았다.
전부.
어차피 김현우에게는 그 51번 탑이, 그중에서도 9계층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필요한 정보를 전부 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빛나는 구체를 바라봤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뭔데?"
"저 수련은 어느 정도 걸리는 거야?"
"저거? 글쎄?"
"글쎄 라니?"
"나도 잘 모르겠어. 애초에 너 말고 저걸 할 사람은 예전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을 거니까. 오직 너만 하는 거야. 근데 내가 어떻게 걸릴 시간을 알겠어?"
"……그럼 대략적으로라도 찍어 맞출 수 없어?"
"당연하지. 그래도…… 굳이 예상을 해보라고 한다면 네가 하기에 따라 수련의 시간은 천차만별로 바뀔 거야."
뭐- 저번에도 말했듯 애초에 수련처럼 네가 거창하게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녀는 짧게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된 것 같으니까 우선 가보자."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김현우가 따라오는 것도 확인하지 않고 빛이 나는 구체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김현우는 그런 그녀를 따라 마찬가지로 걸음을 옮겼다.
이전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는 별빛과도 같은 구체.
"자, 그럼 준비도 끝났으니까 본격적으로 한번 시작하자."
"어떻게 하면 되는데?"
"간단해. 그냥 다가가서 저 빛나는 구체를 쥐기만 하면 돼."
"……그러면 수련이 시작된다는 의미지?"
"그렇지."
"저 안에서 뭘 하게 되는데?"
김현우의 질문.
그에 눈동자는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내내 말했잖아? 네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냥-
"너는 느끼고, 또 깨닫기만 하면 돼."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의 등을 툭 밀었고.
"……."
김현우는 자신을 구체 앞으로 밀어 넣은 그녀를 한번 바라본 뒤, 곧 망설임 없이 빛나는 구체를 움켜쥐었다.
####
관리기관의 관저.
두 달 전에 폐허가 있던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깔끔하게 만들어져 있는 관저의 안쪽 방에는 노네임이 있었다.
툭- 툭-
언제나 자신이 앉아 있던 가죽의자에 앉아 책상을 툭툭 두들기는 노네임.
"흐음……."
그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듯 책상 위에 띄워져 있는 거대한 홀로그램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떠 있지 않은 자그마한 홀로그램창.
그래, 노네임이 보고 있는 홀로그램창에는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칙칙한 칠흑뿐.
그러나 노네임이 화면에 띄워놓은 그곳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51번 탑이 있었던 곳이었다.
"……."
화면만 봐서는 그 흔적조차도 완전히 말소되어 버린 탑.
그러나 노네임이 굳이 그곳에서 화면을 돌리지 않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아직도 그곳에 마력의 유동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저번과 같군.'
노네임은 인상을 찌푸리며 탑을 만들기 이전, 자신이 양식장을 운영할 때 겪었던 일을 상기했다.
그때도 그는 그년의 끄나풀을 잡으려고 했었으나 그 녀석들이 이런 식으로 숨어드는 바람에 결국 티르에게 일을 맡겨 끄나풀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냥 놔둘까.'
사실 그년의 끄나풀이라고 볼 수 있는 김현우가 자신의 손에 죽은 시점에서 51번 탑은 업을 잘 수급할 수 있는 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노네임은 세계를 파괴하기로 한 그 시점에서 망설임 없이 51번 탑을 그 자리에서 날려버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허나 그렇게 탑을 날려버려도 그 일부분은 그가 예전에 한 번 겪어봤던 식으로 그 위치를 숨겨 버렸고.
게다가 저런 식으로 완전히 좌표를 바꾸어 숨어버렸다면 찾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노네임은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역시 그냥 놔두기에는 조금 거슬리는데.'
노네임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민.
그는 그 덕분에 지금 두 달째 이미 진작에 밀어버렸어야 하는 다른 탑들을 전혀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동안 자리에 앉아서 고민하고 있던 노네임은 문득 묘안을 떠올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묘안'이라기보다는 쓸데없는 것을 처리하고는 싶지만 더 이상 깊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은, 세월이 만든 나태함이 불러들인 생각이었다.
####
휜 구체를 붙잡자마자. 김현우는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자신의 시야가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새하얗게 물드는 것.
그다음으론 그의 감각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모든 것이 하나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한 그 공간.
허나 자신의 감각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두려움과 불안함보다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시간이 흐른다는 것 자체도 까먹을 정도로 평온한 공간에서,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무엇인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볼 수 있었던 첫 번째 풍경.
'……?'
그것은 군대였다.
엄청난 숫자의, 아무리 끝을 본다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엄청난 숫자의 군대.
그리고 그 아래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회색의 도복을 입고 있는 한 남자.
김현우는 곧 시야가 명확하게 확보되자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
남자는 포위당해 있었다.
적게는 수천, 많게는 만이라는 숫자가 가볍게 넘어 보이는 엄청난 숫자의 군대에.
그러나 그런 압도적인 수의 차이를 앞에 두고서도 남자는 의연했다.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오히려 그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와 함께 쇳소리가 초원을 진동시켰다.
수천의 군대가 한순간에 똑같이 검을 빼 들은 것만으로도 그것은 이미 엄청난 장관이 일어난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고.
남자가 엄청난 숫자의 군대에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을 시작으로, 적막했던 초원에는 쇳소리가 가득해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포위되었음에도 그 기세를 잃지 않고 병사들을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현우는 3인칭의 시점으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정말 실제와도 같은 영화를 감상하는 것 같은 느낌에 김현우는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도 까먹은 채 멍하니 남자의 전투를 바라봤다.
압도적인 숫자에 밀리지 않고 무참히 병사들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남자의 모습.
검을 들고 돌격하는 병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화살이 날아와도 그것들을 받아쳤고.
리치가 긴 창이 날아와도 그것을 발재간으로 재치고 창병들을 도륙했다.
죽이고-
죽이고-
죽인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김현우는 깨닫지 못했다.
다만, 김현우는 순간 자신이 압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저 남자가 보여주는 것은 김현우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병사들은 숫자가 많고 그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병사들과 다르게 상당히 강했으나 그럼에도 김현우가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허나 그럼에도 김현우는 압도되었고, 곧 그것에 의문을 느꼈다.
어째서?
한번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고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자 김현우는 너무나도 쉽게 그 의문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마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김현우의 눈 앞에 있는 남자는, 전혀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서 김현우는 몇 번이고 재확인을 해봤지만 남자는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마력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그 압도적인 군세를 홀로 도륙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김현우가 그것을 깨달은 순간.
"……!"
-그의 시야가 바뀌었다.
390화. 경험을 얻는 것 (3)
서울 길드 꼭대기 층에 있는 길드장 집무실.
[그럼, 아무래도 지원은 당장 힘든 것 같군.]
"예, 죄송합니다."
[아닐세. 지금은 어느 쪽이라도 힘들지 않은 곳이 없으니 말일세.]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리암의 목소리.
그는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김현우 헌터는 아직 미궁에서 돌아오지 않았나?]
리암의 물음.
김기현은 대답했다.
"……예,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스마트폰 너머로 전해지는 침묵.
[알겠네. 그럼 이만 끊도록 하지. 만약 김현우 헌터가 돌아오면 곧바로 연락을 좀 줬으면 하는군]
리암의 말에 김시현은 짧게 답을 하며 끊었고.
"후……."
그는 곧 깊은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 pc에 떠올라 있는 화면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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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번 몬스터 대재앙 사태 요약해 준다.
글쓴이 : 다엎드려라
너희들도 알고 있겠지만 최근 들어서 던전과 미궁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건 다 알고 있을 거임.
그것도 헌터들이 분명히 끊임없이 보스를 잡아서 던전 쿨타임을 돌리고 있는데도 그런다는 거지 ㅇㅇ…….
솔직히 한 1~2주 정도만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고 끝났으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거의 한 달째 몬스터웨이브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아직도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는 거임.
게다가 당장 한국에야 헌터들이 많아서 이 몬스터 대재앙 사태가 일어나도 어느 정도는 괜찮지만 외국 쪽, 특히 인도네시아랑 이란 쪽은 헌터가 부족해서 지금 지원받고 나서도 완전히 정부가 위태위태 하자너?
땅덩어리 큰 중국이나 미국, 그리고 여러 다른 나라들도 전부 애를 먹고 있고.
게다가 지금 같은 추세로 던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추세면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는 소리다.
자, 다 알아들었지?
알아들었으면 지금부터 요약 간다.
1. 지금 당장.
2. 땅을 팔아서 하고 싶은 거 전부 해라.
3.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
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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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820개
윤꽃길 : ㅋㅋㅋㅋㅋㅋㅋ ㅇㅈ 또 ㅇㅈ
토토로는웃고 : ㅈㄹ ㄴ 몬스터 웨이브 당장은 다 막고 있는데 뭔 개소리냐. 선동하지 마셈;;;
ㄴ 조졌따리 : ㅂㅅ 이게 어떻게 선동이지? 지금 몬스터 웨이브 일어나고 나서 전 세계 경제 나락으로 처박히고 집값 뚝뚝 떨어지고 있는 거 모름? 지금 서울 특정한 곳은 집값 반토막 이상으로 나버렸던데.
ㄴ 토토로는웃고 : 그건 한번이라도 몬스터 웨이브에 뚫렸던 곳이고 ㅋㅋ 아직 다른 곳은 괜찮음
ㄴ 조졌다리 : 아니 ㅅㅂ, 그럼 지금 던전이 늘어나고 몬스터 웨이브가 늘어나고 있는데 곧 있으면 집값 다 떨어진다는 소리랑 뭐가 다르냐고.
총총 : 뭐, 암튼 그건 그런데 요즘들어 김현우는 왜 안보임? 엄청 조용하네. 얼굴 한번 보여줄 때 됐는데.
ㄴ 내일모래자책감MAX : 그러게 저번에 누가 글쓴 거 보니까 무슨 미궁 들어가서 아직 안 나온 것 같다고 하던데.
ㄴ 총총 : 미궁 들어갔다가 안 온 것 같다고? 그냥 죽은 거 아님?
ㄴ 성애자 : 병신ㅋ 김현우가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냐. 생각좀 해라.
ㄴ 총총 : ???? 왜 갑자기 욕질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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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판이네."
조금 전까지 PC에 출력되던 글을 읽고 있던 김시현은 금방이라도 눈을 감아버릴 듯 피곤에 찌든 눈으로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한 댓글에 집중했다.
총총 : 미궁 들어갔다가 안 온 것 같다고? 그냥 죽은 거 아님?
"……나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김시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제는 꽤 예전이 되어버린 일을 상기했다.
'김현우는 죽었느니라.'
느닷없이 하남에 돌아온 야차의 첫마디.
그 한 마디 말에 의해 모두는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미령과 하나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야차에게 달라붙어 몇 번이고 김현우의 행적을 다시 물어왔고, 그 자리에 있던 손오공과 청룡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없었다가 뒤늦게 이야기를 들었던 이서연과 한석원도 마찬가지.
물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착잡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들도 미령과 하나린처럼 야차에게 물어 볼 것이 많은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게 정말이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누구에게 죽었느냐?
당장 김시현이 김현우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머릿속에 떠올랐던 여러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들이 굳이 물어보지 않았던 이유는-
"……."
-더 이상의 물음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야차의 얼굴이 너무나도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갑작스러운 김현우의 죽음 선언으로 인해 분위기가 한참 어색해져 있을 때, 재앙은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처음에는 재앙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년마다 일어나는 의례행사처럼 길드 중에서 던전을 소홀히 관리한 이들이 나왔다고 생각했을 뿐.
허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김시현은 이 사태가 단순히 길드의 관리 소홀로 일어나는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몬스터를 처리했음에도 던전 밖으로 몬스터가 흘러나오는 몬스터 웨이브가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당장은 괜찮았다.
적어도 지금의 헌터들은 예전 헌터들보다는 질적으로 크게 상승해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면?
'……힘들어.'
당장 맨 처음만 해도 괜찮았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헌터들은 점점 힘겨움을 느꼈다.
'……쉴 시간이 없을 정도라니.'
헌터는 결국 이능력을 가지고 말도 안 되는 힘을 다루기는 하지만 결국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기본적으로 휴식이 필요하다.
허나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도 없이 계속해서 몬스터들이 몰려온다면?
'…….'
당장에는 괜찮겠지만 지치는 헌터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버티기가 힘들어질 것이었다.
'당장 패도길드와 암중비약이 뒤에서 나름대로 활약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들도 인간이다.
언제 지칠지 모른다.
'게다가 몬스터 웨이브가 이렇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유도 찾지 못했고…….'
그야말로 첩첩산중.
일이 단 하나도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김시현은 막막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키배가 벌어지고 있는 pc를 바라보며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다 문득 생각했다.
'이럴 때 형이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아니, 의문형이 아니라 확신형이어야 했다.
아마 형이 있다면 이 상황은 무조건적으로 달라졌을 터였다.
그 사람은 한 줄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도 어떻게든 일을 헤쳐 나가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김시현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에서 없는 사람을 찾아봤자 되는 것이 없다는 걸 김시현은 잘 알고 있었기에-
덜컥!
"길드장님! S급 던전인 지옥성지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바로 출발하자."
"예!"
-그는 김현우가 했던 것처럼, 어떻게든 발버둥치기 위해 노력했다.
####
시점이 바뀌었다.
이전번이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시점이었다고 치면.
이번에는 1인칭으로 김현우는 누군가의 시점을 보고 있었다.
눈앞에 병사들이 쉴 새 없이 도륙 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그 남자일거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한 김현우.
그는 왜 갑작스레 시점이 이렇게 바뀌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내 자신이 조금 전 보았던 남자의 움직임을 보기 위해 노력했고.
'씹…… 제대로 안 보이잖아?'
김현우는 눈의 움직임이 자신의 의사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짝 손을 내려 움직임을 보려 해도 남자는 자신의 움직임이 아니라 달려드는 병사들을 보고 있었기에 김현우는 남자의 움직임을 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허나 그럼에도 김현우는 그 순간순간 짧게 손과 발이 보이는 남자의 움직임을 캐치할 수 있었다.
아주 잠깐이기는 했으나, 분명 보이기는 했다.
그렇게 남자의 움직임에 집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시각만이 아니라 촉각이 그대로 재현되면 좋을 것 같은데.'
김현우는 그리 생각하며 일말의 아쉬움을 느꼈다.
아무리 슬쩍슬쩍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체 동작이 아닌 순간 동작일 뿐이었기에 남자의 움직임을 자세히 파악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이번엔 남자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 보다는 병사들의 움직임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병사들이 어떤 식으로 공격하고, 이 남자가 어떤 식으로 그 공격을 받아내는지를 김현우는 두 눈으로 담기 시작했다.
'……!'
그리고, 김현우가 보는 방법을 바꾸자마자 생각 이상으로 많은 정보가 들어오는 것에 놀라움을 느꼈다.
병사의 창이 남자의 머리를 향해 찔러 들어오고 양쪽에는 두 남자가 각각 사선으로 검을 내리쳐 양팔을 노린다.
그 이외에도 시간차를 노리고 들어오는 수십 개의 병장기들.
각각의 리치나 특징도 다른 무기들이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남자의 몸.
자신의 머리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병사의 창을 붙잡은 남자가 창을 왼쪽으로 움직여 검을 막고 곧바로 쥐고 있는 검을 크게 오른쪽으로 돌려 우방과 후방을 노리던 병사를 처리한다.
그 뒤로도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검로.
시간차를 두고 달려오던 병사들이 그의 검에 의해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끝없이 달려드는 병사들과.
끝없이 검을 휘두르는 남자.
사람의 몸은 하나고.
그가 들고 있는 검 또한 하나였다.
한 손바닥으로 열 손바닥을 막을 수 없듯. 그가 들고 있는 검 하나로는 병사들의 검을 모조리 막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허.'
그는 해내고 있었다.
마력도 사용하지 않은, 그저 순수한 육체를 이용해 마력을 이용하고 있는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김현우는 그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
그는 어는 순간, 자신의 촉각이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깨닫게 된 이유는 바로 날카로운 압박감 때문이었다.
순간적이지만 숨을 삼키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압박감은, 고작 촉각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온몸을 찌르는 듯한 소름 돋는 살기로 김현우의 정신을 헤집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다시 한번 남자를 경외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압박감 속에서, 이 정도로 움직인다고?'
이 초원에 있는 수많은 병사들의 살기가 남자에게 꽂힌 것만큼 가해지는 압박은 엄청났다.
그러나 그럼에도 남자는 움직이고 있다.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 남자의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검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남자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느껴지는 근육의 움직임.
남자의 시선이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남자가 무엇을 위해 병사들의 공격을 일부러 회피하지 않고 막는지까지.
김현우는 어느새 남자의 시선으로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
김현우는 자신의 후각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았다.
제일 처음 나기 시작하는 것은 비릿한 혈향.
그리고 은은히 나는 풀내음.
그다음으로는 곧바로 미각이 느껴졌다.
입안에서 나는 비릿한 철의 맛.
마지막으로-
"아……."
김현우는, 자신 스스로가 검을 휘두르고 있는 남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391화. 경험을 얻는 것 (4)
모든 것이 느껴진다.
당장 김현우의 눈에는 아직까지도 처리하지 못한 수천의 병사들이 달려들고 있고.
그의 몸은 수천이 내보내는 진득한 살기와 마력으로 인해 극도로 민감해져 있다.
후각은 저릿한 혈향과 모순되게 묘하게 올라오는 풀 내음을 맡고 있으며.
또한 미각은 슬슬 지치기 시작한 남자의 비릿한 철분 맛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까아아앙!
검이 부딪힐 때마다 나는 거대한 철 소리는 분명히 김현우의 귓가에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촤악!
김현우- 아니, 남자의 검이 병사의 몸을 사선으로 갈라 버린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쓰러지는 병사.
아까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들의 표정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함과 동시에 휘둘러지는 검.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김현우는 더더욱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맨 처음에는 남자의 시선으로 전장을 보며 그의 행동을 보는데 집중했다.
허나 지금은?
깡! 촤아아악!
김현우는 그런 것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그는.
"흡!"
완전히 그 남자가 되어 버린 것처럼,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특별한 무엇 하나에 집중하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남자, 아니- 김현우는 검을 휘두르며 병사들을 도륙해 나간다.
그의 마음속에 들어차던 경외심도 사라지고.
마찬가지로 쉴 새 없이 움직이던 눈도 서서히 진정된다.
그저 김현우는 한 번도 제대로 휘둘러본 적이 없는 검을 이용해 병사들을 처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이 몸을 움직이는지, 아니면 남자가 이 몸을 움직이고 있는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완벽하게 동화한 김현우.
그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고, 그 마지막에-
"……후."
김현우- 아니, 남자는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 위에 홀로 서 있었다.
거친 심장소리가 김현우의 청각을 울리고.
초원에 가득 들어차 있는 시체가 김현우의 시야에 담긴다.
너무나도 많이 휘둘러 덜덜 떨리는 손의 촉각이 그의 몸에 닿고.
풀 내음이 사라진, 진득한 혈향만이 남은 냄새도 마찬가지로 김현우의 코에 담긴다.
그리고 그 순간-
"……!"
김현우는 자신 앞에 보이던 세계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때, 어렵지 않지?]
모든 것이 지독할 정도로 현실감 넘치던 세계가 한순간에 깨짐과 함께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조금 생각하는 듯하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했다.
"뭐, 할 만하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김현우는 눈동자가 어째서 자신에게 그런 상황을 보여줬는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도 업을 얻을 수 있다니…….'
김현우는 아직도 자신의 손에 남아 있는 검의 감촉을 느꼈다.
분명 그것은 눈동자가 만든 특수한 상황이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그 상황에서 남자에게 동화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업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쌓아 온, 그만의 업을.
[그렇지?]
공간에서 전체적으로 울리는 목소리.
눈동자는 대견하다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이야~ 그래도 처음에 이렇게 바로 감을 잡고 동화할 줄은 몰랐어. 솔직히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래?"
[그럼! 너야 맨 처음에 성공해서 그런 거지, 다른 사람들한테 시키면 애초에 제대로 하지도 못할걸?]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슬쩍 고개를 갸웃했다.
말 그대로 김현우는 눈동자의 말대로 맨 처음에 동화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는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는 빙글거리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뭐 네가 빠르게 동화한 이유도 내 '눈'이 있어서 그런 거지만.]
"……네 눈?"
[그래, 뭐 사실 내 눈이 아니어도 네 재능은 솔직히 상당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네가 그 정도로 빠르게 다른 사람의 생에 동화되어 업을 빨리 얻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내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
확실히 생각해 보면 눈동자는 예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아니, 정확히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자신의 눈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이렇게 쉽게 져도 되냐는 소리를.
"네 눈이라는 게 정확히 뭔데?"
김현우의 물음.
그에 눈동자는 어이없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설마 눈치도 못 채고 있던 건 아니지?]
"그러니까 어느 부분에 대해서 말이야?"
또 한 번의 물음.
그에 눈동자는 순간 말이 없어졌으나, 이내 이야기했다.
[배우지 않았던 기술을 사용한 적 없어?]
"……배우지 않았던 업?"
[그래. 말 그대로야. 기억나는 게 몇 개 있을걸? 아니 어쩌면 몇 개 정도가 아닐 것 같은데?]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고, 이내 이야기했다.
"……처음으로 천마랑 싸웠을 때?"
[그때도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때는 내 힘보다는 네가 당장 마력을 얻고 나서 무작정 마력을 형상화 한 것뿐이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네가 '눈'을 사용한 건 지금의 야차…… 그러니까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상대할 때부터지.]
"……."
[뭐, 솔직히 너라면 그렇게 깊게 생각을 할 것 같진 않지만 좀 이상하지 않았어? 수라무화격인가 뭔가 하는 기술을 쓸 때 말이야. 너는 분명 마력의 형상은 변화시킬 수 있어도 형질은 변화시킬 수 없었잖아?]
확실히, 눈동자의 말대로 김현우는 단 한 번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복잡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하는 게 가능했기에 했을 뿐이고, 그것에 대해서는 의문조차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지금 의문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애초에 그때 당시의 김현우는 절대로 마력을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네가 무신(武神)을 상대했을 때는 어때?]
"무신을 상대했을 때?"
[그래, 네가 무신을 상대했을 때도 그렇잖아? 너는 그저 무신이 사용하는 무공을 본 것만으로도 자기 멋대로 무공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어.]
"아."
[뭐, 물론 그건 실제로 무신이 사용하는 무공처럼 효율이 좋지도 않고 마력의 분배도 제각각이었지만, 아무튼 그건 네가 무공을 단 하나도 모를 때 사용했던 진짜 '무공'이지.]
"……."
[그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무공을 본 적도 없고, 또한 쓴 적도 없어. 그런데 무신과 싸우는 그 순간, 그 무공들을 단순히 본 것만으로 따라한다? 그 녀석이 투자한 시간이 담긴 무공을?]
"……확실히."
[그게 바로 네가 가지고 있는 '눈'의 힘이야. 나처럼은 아니더라도 그 눈은 다른 사람의 '업'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지.]
게다가 너처럼 조금 재능이 있다면-
[그 업을 미흡하게나마 따라 할 수도 있고 말이야. 뭐, 이건 내가 말했다시피 눈 말고도 나름대로의 재능이 필요한 거긴 하지만.]
눈동자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첫 동화를 이 정도로 빨리 끝냈다면 생각보다 빨리 끝날 수도 있겠는데?]
"……그래? 지금 내가 이 동화를 끝내는 데 어느 정도 걸렸는데?"
[대충 1분에서 2분 정도 걸렸네.]
"……그렇게 짧다고? 분명 내가 체감한 건 최소 3시간은 된 것 같은데."
[내가 설마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만들었겠어? 당연히 어느 정도의 정신 가속을 넣었지. 청룡이 제시한 수련을 하는 걸 보니까 100배 정도의 정신 가속도 끄떡없던데?]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다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근데 너는 어떻게 그걸 전부 알고 있어? 나를 항상 보고 있는 것도 불가능하다면서."
[네 영혼을 데려오면서 이번 기회에 네 업을 쭉 훑어봤거든.]
"그런 것도 가능해?"
[그런 것도 가능해. 거기에 덤으로 조금 노력해서 네 취향도 나름대로 파악할 수 있었지.]
"……갑자기?"
김현우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재미있다는 듯 웃는 눈동자는 이야기했다.
[아무튼, 정신 가속 덕분에 시간 활용도는 극상이야. 너한테는 이득이지.]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다른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앞으로 아까 전에 했던 동화는 몇 번이나 더 해야 하는 건데?"
[아직 많이 남았어.]
"어느 정도나?"
그의 물음에 눈동자는 잠시 무엇인가를 뒤적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묘한 신음을 터트렸다.
[아.]
"왜 그래?"
[아니, 생각보다 숫자가 작아서. 이거라면 진짜 빨리 나갈 수도 있겠는데?]
"몇 명인데?"
[27220명]
"……뭐라고?"
[……27220명이라고, 아 미안, 실수했어.]
"실수……?"
[조금 전에 한 명 처리했잖아? 이제 27219명 남았네.]
"……."
김현우는 왠지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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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의 거대한 신전.
그곳에서 가브리엘은 한 남자와 대면하고 있었다.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
그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가브리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51번 탑을 전부 처리해라."
"……."
그것은 말이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인 명령.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아래에 있는 자에게 하달하는 명령이었다.
허나 그런 고압적인 태도에도 가브리엘이 아무런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대답이 없군. 네 뒤에 있는 것들처럼 되고 싶은 건가?"
"……아닙니다."
바로 가브리엘의 뒤에 있는 수많은 천사들의 시체 때문이다.
누가 보면 천계에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고 말해도 믿을 정도로, 신전 여기저기는 천사들의 시체가 있었다.
어떤 것은 그로테스크하게 죽어 있는 시체부터 시작해 온갖 다양한 시체들이 신전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바로 가브리엘의 동료라고도 할 수 있는 대천사들의 시체도 마찬가지였다.
'관리기관은 괴물이란 말인가……!'
가브리엘은 자신의 앞, 원래라면 루시퍼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그의 모습을 슬쩍 바라보며 생각했다.
처음 그가 관리기관 소속임을 밝혔을 때, 천사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들킨 줄 알고 그에게 달려들었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상황이었다.
'……대천사는 나를 빼고 전부 사망. 탑주들은 여섯 정도가 살아남았지만…….'
고작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사이에. 천사들은 전력의 50%를 그대로 허공에 증발시켜 버렸다.
'괴물…….'
그렇기에 가브리엘은 본능적으로 남자에게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고.
가브리엘의 대답에 한동안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가브리엘의 앞에 다가가.
툭-
그의 어깨를 한 번 치고는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라. 너한테는 무척이나 중요한 이야기일 테니까."
"……."
"51번 탑이 사라진 걸 알고 있나?"
"알고 있기는…… 합니다."
가브리엘의 대답.
남자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51번 탑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았다고……?"
"정확히는 그 흔적이 남아 있지. 너는 그 탑을 찾아서 없애라. 만약 네가 그 탑을 없애는 데 성공한다면."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사들의 시체 너머로 걸음을 옮기며.
"지금 살아 있는 천사들은, 앞으로 있을 멸망에서 제외해 주도록 하지."
그렇게 이야기했다.
392화. 경험을 얻는 것 (5)
새하얀 공간에 있는 관저의 지하,
그 안에서, 남자는 다시금 깨끗하게 만들어져 있는 지하 공간을 바라봤다.
저번의 공동과는 다르게 반듯한 정육면체로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공간.
저번에 만들었던 공간과 비슷했던 점이라고는 가운데에 만들어져 있는 유리의 위치 정도였다.
"……이 정도면 된 것 같군."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이내 만족했다는 듯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유리를 건드렸다.
웅-
남자가 건드린 곳을 중심으로 강하게 공명하는 유리.
그것은 남자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마력을 있는 대로 갈아 넣어 만든, 그의 마력을 가지고도 손쉽게 깰 수 없는 유리였다.
벽도 마찬가지.
헤르메스가 자신의 뒤통수를 친 것을 떠올리며 남자는 아예 이 지하 공간 자체를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깨지 못하는, 그야말로 완전한 금고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그는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옆에 둘 생각은 없었으나, 혹시나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
그렇기에 한동안 그 공간을 여유롭게 바라보던 남자는 곧 생각을 돌려 자신이 조금 전에 만나고 왔던 천사와 정령, 그리고 악마 진영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이제 남은 건 그 녀석들이 51번 탑의 잔재를 처리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인가.'
뭐, 사실 자신이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을 고작 그런 녀석들이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지.'
-'혹시'의 상황이 있을 수 있으니, 그리고 두 번째로는 어차피 그 좌표 어딘가에 숨어버린 녀석들을 찾지 않는 이상 그들을 잡을 수 없었기에, 남자는 그들에게 51번 탑의 잔재를 맡긴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원하는 선물 또한 주었으니. 효율 또한 나쁘지 않을 테지.'
물론 남자는 협박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협박은 최선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각 파벌의 기를 팍 죽여 놓은 뒤, 그들이 지금 당장 필요로 하는 것들을 다시 '만들어'주었다.
'뭐, 악마 쪽은 만들어주지 않았지만.'
그쪽은 힘을 이용해 그들을 찍어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기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반발할 뿐.
그렇기에 남자는 그들에게 딱히 무엇인가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그가 천사와 정령에게 했던 선고를 똑같이 말해주고 나왔을 뿐.
털썩-!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느새 자신이 항상 있던 그 방으로 돌아와 가죽 의자에 앉았고.
'그럼, 느긋하게 기다려 보도록 하지.'
이내- 그는 슬쩍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남자가 그렇게 잠깐의 말미를 가지고 느긋한 기다림의 시간을 가질 때.
"……."
"……."
"……."
예전, 정령 나이아드가 다른 파벌들의 수장을 초대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원탁이 자리한 자그마한 공간 안에는, 세 명의 파벌 대표가 둥글게 앉아 있었다.
저번과 똑같은 상황.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천사 파벌의 수장이었던 루시퍼가 아닌 가브리엘이 앉아 있는 것이었으나 지금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모두 모인 것 같군."
가브리엘의 목소리.
그에 예수와 나이아드는 그 시선을 가브리엘에게 맞추었고, 곧 그는 예수와 나이아드를 한 번씩 바라보곤 이야기했다.
"오늘 여기에 모인 것은 아마 당신들도 예상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맞습니까?"
가브리엘의 물음.
그에 나이아드는 슬쩍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관리기관 때문이겠죠?"
"맞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을 이 자리에 부른 이유는 바로 관리기관에서 찾아온 그 남자 때문입니다."
가브리엘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여러분은 저와 똑같은 제안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만."
"……51번 탑의 잔재를 치우라는 제안 말인가요?"
"맞습니다. 저 또한 그에게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저희를 이곳에 모은 거죠? 당신도 그를 만났다면 그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을 텐데요?"
나이아드의 되물음.
확실히 그녀의 의문은 타당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각 파벌에게 그런 말을 했으니까.
51번 탑을 처리한 녀석은 '멸망'을 피하게 해준다고.
물론 남자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위에 의해서 멸망이라는 단어를 꺼냈는지 그들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이야기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있는 이들이 그 남자의 말에 전혀 의심을 품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 남자가 보여준 힘 때문이었다.
고작 몇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사이에 탑주들과 대천사들이 무참히 쓸려 나간 모습을 보았기에, 가브리엘은,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나이아드는 그의 말을 믿었다.
물론 아무런 피해 없이 그를 만났던 예수조차도.
"51번 탑의 잔재를 처리한 이들만 멸망해서 살려주겠다는 말…… 말입니까?"
"그래요. 그걸 생각해 보면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떠들고 있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나이아드의 말.
가브리엘은 고개를 끄덕이곤 이야기했다.
"맞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51번 탑의 잔재를 처리하고 나서 살 수 있는 것은 이 세 파벌 중 한 곳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다르다고요?"
나이아드의 말.
그에 가브리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이야기했다.
"우선, 이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정도 확인하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뭐죠?"
"남자가 주는 선물, 받으셨습니까?"
"……주는 선물이라면?"
나이아드의 물음.
가브리엘은 거침없이 말했다.
"이제부터는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파벌에서는 그 남자에게 '야훼'님을 살릴 만한 육체를 받았습니다."
"……야훼라고요?"
"예. 그리고 아마 제 생각에 정령 쪽은 세계수를 다시 받았을 것 같은데. 아닙니까?"
가브리엘의 물음에 순간이지만 포커페이스를 깨트린 나이아드.
그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자기가 하고 있는 생각을 나이아드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그 남자가 저희를 경쟁시키기 위해 그저 없는 말을 지어냈다는 건가요?"
나이아드의 물음에 가브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너무 이상하니까요."
"……이상하다?"
"예. 이상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게 이상하다는 거죠?"
"따져보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구체적으로는 동기에 관한 문제입니다."
"……동기?"
"예. 딱히 관리기관은 저희를 멸망시킬 만한 동기가 없습니다. 분명 그 남자의 힘이라면 저희를 멸망시키고도 남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동기가 부족합니다."
"우선 저희는 딱히 관리기관과 척을 진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희는 때에 맞춰 그들에게 업을 지급하고 정당한 대가로서 마력을 얻어 왔죠."
"……."
"그게 유지된 지만 수백 년입니다. 그 동안 관리기관은 어떤 불만도 없었고, 또한 어떠한 관여도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관리기관 쪽에서도 딱히 불만을 느낄 상황이 없었다는 겁니다."
나이아드의 조금 집중하는 모습을 확인한 가브리엘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거기에 덤으로, 그 남자는 지금 저희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정령계 쪽에서 받은 건 아마 완전히 죽어 버렸던 세계수겠죠?"
가브리엘의 물음에 나이아드는 순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수긍했다.
"……아직 완벽하게 자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맞아요."
"만약 당신이 관리기관이라면 어차피 멸망시켜야 하는 파벌에게 그런 거대한 선물을 만들어 주겠습니까?"
"……확실히 그렇게 하진 않겠죠."
나이아드의 긍정.
가브리엘은 슬쩍 미소를 지었으나 이내 보이지 않게 그 미소를 감추고서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기에 저는 51번 탑의 잔재를 처리하는 것을 각 파벌이 따로따로 처리하는 것이 아닌, 협업을 해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늘 이 자리를 만든 겁니다."
어떻습니까?
가브리엘의 물음.
나이아드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고.
"……."
그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던 예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가브리엘과 나이아드를 지켜보았다.
그렇게 각 파벌의 대표들이 모인 회의가 끝나고 난 뒤의 천계.
"……잘되셨습니까?"
"그래. 악마들은 몰라도 정령파벌은 확실하게 끌어들였다."
가브리엘은 포탈을 넘어오자마자 물어오는 다른 탑주에게 가볍게 대답한 뒤 미소를 지었다.
'걸렸다.'
사실 가브리엘이 나이아드를 설득할 때 제시했던 이야기들은 얼핏 보면 그럴듯하지만 그 실상은 전혀 분별력이 없는, 그저 순전히 가브리엘이 좋을 대로 생각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그 남자가 51번 탑을 빠르게 처리하려고 했다면 파벌을 갈라놓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붙여 놓았겠지.'
물론 가브리엘도 그 남자가 정확히 무엇을 노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가브리엘이 굳이 자리를 만들어서까지 다른 파벌들을, 정확히는 정령 파벌을 자신의 팀에 끌어들인 이유는.
'……정령들의 세계수만 있다면, 51번 탑의 잔재에 도달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
바로 정령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수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수의 마력은 그 어느 보안이라도 뚫고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
자신의 계획이 차근차근 맞물리는 것을 느끼며, 가브리엘은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
이를 모를 남자의 업 이후로도, 김현우는 계속해서 다른 이들의 업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그 어떨 때, 김현우는 이전과 같이 초원에 있었고.
또 어떨 때는 지하에 있었으며.
또 어떨 때는 늪지에.
또 어떨 때는 지상이 보이지 않는 하늘에 있을 때도 있었다.
그 이외의 수많은 지형 속에서 김현우는 누가 보더라도 경외를 느낄 수 있는 이들의 업에 직접 동화해 그들의 업을 경험하고 있었다.
"야."
"왜?"
"……이건,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금 전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상기했다.
기본적으로 김현우는 지금까지 여러 업을 경험했고, 그 중에는 당연하게도 인간이 아닌 이들도 다수 존재했다.
어떨 때는 인간이었고.
어떨 때는 꼬리가 달려있는 아인종이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천사나, 그와 반대로 악마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엄청난 난쟁이가 될 때도 있었는데, 그들의 업도 김현우는 군말 없이 체험하고 경험을 얻었다.
그러나-
"흐음, 확실히 제대로 동화하지 못한 걸 보니 다시 한번 해야 할 것 같은데. 굳이 말하자면 어느 부분에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손발은 달려 있어야 할 거 아냐!?"
-아무리 김현우라고 해도, 거대한 개미에게 동화하기는 싫었다.
그것도 사람은 그냥 먹어치울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개미는.
김현우의 말에 그녀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인간형이 아니라 그러는 건가?"
"당연하지! 개미로 싸우는 법을 배워봤자 뭐 하냐 이 말이야!"
김현우의 말.
허나 그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걱정 마. 설마 내가 네게 전혀 필요 없는 일을 시킬 거라고 생각해?"
"그건 아니지만……!"
"그럼 한 번 더 해봐."
이내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를 다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이런 씹.'
김현우는 다시 개미가 된 기분을 느끼며 욕을 내뱉었다.
393화. 경험을 얻는 것 (6)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S급 던전 '아크라크의 무법지대'의 외부.
"……피해는 어때요?"
"우선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 것을 미리 짐작하고 길드원들을 배치한 덕분에 큰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만……."
이서연의 앞에 서 있던 길드원은 착잡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던전 출입구를 제한하는 건물은 다시 작업하려면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나 걸릴까요?"
"원래라면 3일 정도를 예상했습니다만, 지금 당장 이 곳에 투입한 인력도 없고 아쉬운 대로 외부 인력을 고용하려 해도 요즘엔 외부 인력도 남아나지를 않아서……."
길드원의 말에 이서연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을 기점으로 몬스터 웨이브가 더 심해지네.'
물론 이런 이유를 알 수 없는 몬스터 웨이브는 두 달 전을 기점으로 시작되었으나, 부쩍 최근에 들어서는 몬스터 웨이브의 빈도가 더더욱 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헌터 약소국은 이미 몬스터 웨이브 덕분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다른 국가에 지원을 받고 있으며, 강대국이라고 해도 몬스터 웨이브로 인한 피해가 심심찮게 나오는 중이었다.
한국의 경우에는 다른 국가보다는 확실히 상황이 나았으나 말 그대로 상황이 나은 것뿐,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우 오빠가 있었으면 분명 어떻게든 해줬을 텐데…….'
두통이 찾아오던 도중 저도 모르게 든 생각.
그러나 이내 이서연은 인상을 굳히더니 고개를 젓고는 머릿속의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약해질 뿐이었으니까.
"……우선 이곳은 길드 쪽 인력을 이용해 보수하도록 해요. 그리고 D급 던전 인원 차출해서 이곳에 추가로 배치하시고요."
그렇기에 이서연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길드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한편, 한참 지구가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동안.
"……."
푸르지만 어두운, 왠지 모순되는 느낌이 드는 공간 안에서 그녀, 눈동자는 김현우의 모습을 줄곧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아무리 정신 가속했다고 해도…… 이 속도는 말도 안 되는데……?'
눈동자가 준비한 업.
그것들은 모두 그녀가 김현우만을 위해서 준비한-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미친놈을 쓰러뜨리기 위해 그녀가 손수 준비한 위업(偉業)들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준비한 대부분의 위업들은 정말 위업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엄청난 것들이 많았다.
한 마디로, 그녀가 그 미친놈을 쓰러뜨리기 위해 모아 놓은 업은 절대로 지금의 김현우처럼 슥슥 끝낼 수 있는 종류의 업들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한 번, 아무리 못해도 최소 두 번이라.'
김현우는 달랐다.
그녀가 지금까지 내놓은 업들을 김현우는 대부분 한 번에, 한 번에 못하면 두 번 내로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
그 짧은 시간에.
그 엄청난 업들을 전부.
'동화를 통해 그 사람의 업을 얻는다는 건 보통 쉬운 게 아닌데…….'
업은 한 사람의 경험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은 자신의 업들을 모으고 모아 위업을 만들어낸다.
그녀가 김현우에게 내주고 있는 위업들은 모두 한사람의 일생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집약되어 있는 위업들.
한 마디로 김현우는 동화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생과도 가까운 업들을 단 한 번의 전투에 모두 흡수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눈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의 눈은 이런 경험을 흡수할 때는 상당한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김현우가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경험을 흡수할 정도로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저건 순수하게 김현우의 힘이라는 소리.
'……뭐, 특수한 상황에는 조금 당황하는 것 같지만.'
그가 이 앞으로 나타날 다른 업의 특수성 때문에 당황한다고 해도 수련은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는 빠른 시간 내에 끝날 것 같았기에 눈동자는 담담히 업을 겪고 있는 김현우를 내려다봤고.
김현우는-
'이런 씹!'
자신의 몸이 개미가 된 기분을 느끼며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완벽한 개미는 아니다.
분명 처음 동화했을 때는 시각밖에 동화하지 못해서 몰랐으나 촉각까지 동화하고 나자 김현우는 지금 자신이 동화하고 있는 이것이 완벽한 '개미'라기보다는 '개미 인간'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팔 다리는 있다.'
그리고 등에 개미 같은 다리가 몇 개 더 자라 있다.
그럼에도 김현우가 맨 처음 이것을 개미라고 확신했던 이유는 바로 그가 서서 싸우는 것이 아닌, 진짜 개미처럼 엎드려서 싸웠기 때문이었다.
등 뒤에 달린 여섯 개의 다리로 몸을 움직이거나 지탱하며 손과 발로는 마주 달려오고 있는 벌레 아인들을 순식간에 쓸어버리는 개미.
마치 사각이라는 것이 없는 듯, 위에서 오는 공격이나 아래에서 오는 공격도 순식간에 피해내는 개미.
분명 맨 처음에는 몰랐으나, 김현우는 촉각을 느끼게 된 순간부터 개미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보이지 않는 공격을 피할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전신이 레이더가 된 것처럼 민감하다.'
그건 바로 몸에서 느껴지는 레이더 때문이었다.
분명 마력이 아닌 신체적 특성으로 보이는 개미인간의 레이더는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적들을 하나도 놓침 없이 모두 포착했다.
위쪽에 둘.
좌측에 하나 .
우측 하방에 셋.
땅 아래에 여섯.
뒤쪽에 셋.
김현우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가득 채우는 엄청난 정보량.
순간적으로 뇌정지가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김현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정보량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필사적으로 그 정보들을 처리하며 개미 인간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분명 자신과 동화하고 있는 이 녀석은 이 엄청난 정보를 전부 머릿속에 정리하고 움직이고 있음이 분명했으니까.
그렇게 김현우가 얼마나 몰려오는 정보를 정리하기 시작했을까?
그는 문득 다른 감각들이 열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곧 그 상태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개미인간의 동기화를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후……."
동기화가 끝나자마자 한숨을 내쉬는 김현우.
'지금까지 동기화를 하면서 피곤한 적은 없었는데.'
사실 개미인간을 제외한 지금까지의 동기화는 김현우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김현우가 동화했던 이들은 아인들이나 천사, 악마가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허나 지금은?
'……너무 빡센데.'
김현우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는 듯 자신의 등에 있던 것 같은 다리들의 감각을 떠올렸다.
지금이야 거의 몇 십 시간 가까이 개미인간에 동화되어 있다 보니 익숙해졌지만 처음 개미인간의 촉각에 동화했을 때 느꼈던 이물감은 상당히 심했다.
"두 번째 안으로 끝내다니, 대단한데?"
김현우가 그렇게 회상하고 있자 어두운 공간 안에 들리는 눈동자의 목소리.
"혹시 다음에도 개미인간이야?"
그의 물음에 눈동자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는 콧소리를 내더니 대답했다.
"아니. 이번에는 아니야. 오히려 네가 지금까지 동화 속도가 제일 빠른 인간이야."
"그것 참 다행이네. 그보다, 이제 얼마나 남았어?"
"벌써 그걸 물어보는 거야? 아직 절반도 안 왔는데?"
그녀의 물음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뭐? 절반도 안 왔다고? 이렇게 많이 했는데?"
"당연하지. 더 정확하게 말해줄까?"
"……아니, 됐어."
왠지 정확한 숫자를 들으면 한숨부터 나올 것 같았기에 김현우는 그녀의 제안을 가볍게 거절 하고는 다른 것을 물었다.
"그가 말고, 시간은 얼마정도 지났어?"
"시간?"
"그래, 내가 처음으로 이 동화 수련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나 지났어?"
"음…… 대충 10일 정도?"
"……10일?"
"그래, 가끔 대화하는 것 빼고는 계속 동화만 하고 있으니까 꽤 빠르게 진척되고 있기는 하네."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은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내가 말했잖아. 네가 얼만큼 빨리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니까? 당장 네가 각성해서 내가 준비해 놨던 업을 전부 10초 안으로 끝내 버리면 당장 내일이라도 끝날 것 같은데?"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말했다.
"……그게 되겠어?"
"될 수도 있지? 말했잖아? 이 수련이 언제 끝날지는 전적으로 너한테 달린 문제라니까?"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했다.
"다음으로 넘겨줘."
김현우의 말.
그에 눈동자는 아무런 말 없이 김현우에게 다른 업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생각보다 평범한데?'
그리고 그 곧바로 바뀐 장면을 보며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보이는 것은 어느 깊은 계곡.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같이 붉은 갑주를 입고 있는 엄청난 양의 병사들과, 그런 엄청난 병사들에게 포위당해 있는 한 남자였다.
그 누가 보아도 남자에게 불리한 싸움.
허나 김현우는 그런 남자의 상황을 보면서도 위급하다기 보다는 '평범하다'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다른 이들의 위업을 처리하며 이것보다 더한 상황들을 경험했으니까.
특히 지금 이 상황은 김현우가 방금 전에 체험했던 개미인간보다 몇 배는 나았기에 그는 살짝이지만 안심했다는 투로 붉은 병사들 사이에 있는 그 남자를 바라봤다.
낡은 옷을 입고 있고 있는 남자.
지금까지와 보아왔던 이들과는 조금 다르게, 특이하게도 남자의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적어도 김현우가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이들은 대부분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아인같이 몸 자체가 무기인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허나 눈앞의 남자는 완벽한 인간.
눈동자도 다음은 인간이라고 했으니 갑자기 아인처럼 변할 리도 없었다.
그렇게 김현우가 생각의 고리를 이어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스으윽!
남자는 불현듯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김현우는 남자의 움직임을 보고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뭐야?'
남자의 움직임은 기묘했다.
분명히 빠른 것은 아닌데 빠른 것 같은, 눈에 착시가 오는 것 같은 기묘한 움직임.
게다가 남자는 또한 무척이나 고요했다.
움직이고 있는데도 남자의 주변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분명 뱀처럼 땅을 훑으며 지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소음 하나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퓻-!
남자의 검지가, 애매한 속도로 움직여 붉은 병사의 머리를 그대로 관통함에 따라 싸움은 시작되었다.
전투의 양상은 김현우가 항상 봐오던 업과 비슷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한 명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들고.
남자는 몰려드는 병사들을 어렵지 않게 도륙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김현우는 그 모습을 보며 남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 집중하기 시작했고.
그 어느 순간 김현우는 자신의 시야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으며 본격적으로 이 남자에게 동화할 준비를-
'……?'
-하지 못했다.
'뭐야?'
시야가 바뀐 그 순간 당연히 보여야 하는 것은 그 남자의 시각에 동화하는 1인칭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김현우의 앞에는 전혀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죽여!"
"우측에 창을 찔러 넣어라!"
츠즈즈즛!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김현우는 어째서 이 남자에게 동화했을 때, 시야 대신 청각이 먼저 열렸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씹'
지금 붉은 갑주를 입은 수천의 병사들과 싸우고 있는 이 남자는 맹인이었다.
394화. 이렇게 포기하지는 않는다 (1)
맹인(盲人)이란, 말 그대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보이는 것은 그저 끝없는 어둠.
그렇기에-
"아니.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뭐가?"
-김현우는 귓가에 병사들의 고성과 함께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만을 듣다가 첫 번째를 그대로 끝내버렸다.
"아니, 어떻게 맹인을 따라해?"
"따라하면 되잖아?"
"안 보이는데 어떻게!?"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나오는 말.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뭐라고?"
"나라고 방법이 있겠어? 그냥 나는 네가 그놈을 이길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특별한 위업들을 엄선해 네 입에 밀어 넣고 있을 뿐이라고."
그런데-
"거기에서 씹는 법까지 알려달라고 하면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줘야 해?"
한 마디로 업을 받아먹는 것은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엄연히 말하면 눈동자의 말은 틀린 게 없으니까.
"……쩝."
그녀의 말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맛을 다신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으나 역시 불만이라는 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난이도가 너무 팍 올랐는데……."
"걱정하지 마, 지금 이 업을 터득하지 못하면 다른 위업들도 터득하기는 힘들 테니까."
"……뭐?"
"설마 내가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너한테 잡히는 업을 하나씩 주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 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던 김현우는 은근슬쩍 고개를 저었으나 그녀는 이미 무엇인가를 눈치챈 듯 뚱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더니 이야기했다.
"너는 지금 차근차근 올라가고 있는 거야. 물론 내가 지금 네게 경험시켜 주고 있는 업들은 하나같이 위업이라고 불리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 업에도 분명히 위아래는 있어."
"……그래서 나 같은 경우는 제일 아래에 있는 업부터 서서히 얻으며 올라가고 있다…… 뭐 이런 말이지?"
"맞아. 애초에 그렇게 올라가지 않고 그냥 내가 툭툭 던져주기만 하면 업을 얻는 속도도 속도지만 네가 힘들 테니까. 내가 몸소 이렇게 해주고 있는 거라고."
그녀는 그렇게 말해놓고는 왠지 낯부끄러웠는지 괜스레 큼큼거리면서 목소리를 정리하더니 이야기했다.
"아, 아무튼!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업을 클리어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힘들어진다는 소리야."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알았어. 다시 부탁해."
김현우의 말과 함께 다시 어둠으로 물드는 김현우의 시야.
그와 함께 김현우의 주변에는 날카로운 병장기 소리가 들려왔다.
"……."
아마 이전에 기본적인 동화는 성공한 터라 3인칭으로 보는 것 없이 곧바로 1인칭으로 넘어 온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은근히 들리는 병장기 소리.
병사들의 고함이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지금은 김현우가 아직 그 남자를 3인칭으로 보고 있을 때의 초반 상황과 비슷해 보였다.
툭-툭- 차그륵-
사방에서 들리는 병장기 소리가 동화된 귓가를 민감하게 건드린다.
그리고, 그렇게 움직이던 병장기들의 소리가 바뀌기 시작하고.
-츠즈즉.
김현우는 곧 땅을 부드럽게 긁는 듯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남자가 움직이는 소리.
김현우는 단번에 그것을 눈치채고 난 뒤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움직였었지?'
김현우는 분명 맨 처음, 남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 봤었다.
물론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으나 중요한 것은 그 남자의 움직임이 아직 김현우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는 것.
츠즈즈즛-!
김현우가 본격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하자 3인칭으로 볼 때는 전혀 들리지 않았던 남자의 움직이는 소리가 병장기 소리를 뚫고 들리기 시작했다.
왼쪽의 발이 길게 미끄러지는 듯한 소리.
그 다음으로는 남자의 팔이 움직이는 소리가, 김현우의 귓가에 들려온다.
그리고-
퓻-!
남자의 손이 일순 가볍게 움직이는 소리와 동시에, 김현우는 남자가 병사의 머리를 꿰뚫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
그와 함께 들려오는 병사들의 목소리.
허나 김현우는 자신의 귓가로 들려오는 소음들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남자가 내는 소리에 집중했다.
분명 무척이나 조용했으나, 그 소리는 잘 들렸다.
남자의 발이 땅을 긁고,
또 어떨 때는 다른 병사들의 몸을 발판 삼아 지나가며.
또 어쩔 때는 병사들의 몸을 후려친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남자의 소리.
그 어느 순간, 김현우는 자신의 몸에 촉각이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와 함께 넓어지는 기감.
그리고 그와 동시에 김현우는 어째서 눈동자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느껴진다.'
김현우는 남자의 촉각에 동화되자마자 주변에 있는 병사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허나 그것은 순전히 소리뿐만이 아닌-
'저번에 동화했었던 개미 인간의 업인가…….'
-바로 개미인간과 동화하면서 얻었던 감각 때문이었다.
분명 두 눈은 아직도 어둠에 물들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주변이 보였다.
창을 찔러넣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고.
바로 앞에서 간발의 차로 검을 휘두른 병사의 모습이 보였고.
심지어 저 멀리서 활을 쏘려고 준비하는 병사의 시선 또한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느낀 순간부터-
"……."
김현우는, 더 이상의 시간을 끌 필요도 없이, 곧바로 후각과 미각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저번까지만 해도 이해하지 못했던 남자의 움직임이 소리와 감각을 통해 전해지고, 남자가 하려는 움직임이 무척이나 손쉽게 예측되고 재현된다.
마치 자신과 하나가 된 것 같은 일체감.
그 끝에서-
"봐. 할 수 있지?"
"……그러게."
김현우는 순식간에 맹인의 업을 받아올 수 있었다.
"뭐, 그래도 너무 안심하지 마,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진짜라고?"
"그래, 지금까지는 그냥 가벼운 운동 느낌이라 이 말이지."
"……진심?"
"진심 설마 그런 평범한 위업들로 그 녀석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게 비교적 평범한 업이었냐고 되묻고 싶었던 김현우였으나, 그는 고개를 슬쩍 젓는 것으로 그 의문을 자신의 마음속으로 집어넣었다.
어차피 그 질문을 던져봤자 변하는 건 없다.
그렇기에-
"곧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자."
"잘 생각했어."
김현우는 설명을 듣기보단 그 시간에 조금 더 수련에 집중하기로 했다.
####
거대한 숲 한가운데.
"……정말로, 세계수가 살아날 줄이야."
나이아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서 자생하고 있는 나무, 세계수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지금 당장 그녀의 앞에 있는 세계수는 자그마한 나무일 뿐이었으나 그 나무에서 뿜어지고 있는 마력은 분명 세계수의 그것이었다.
게다가 그 남자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전부 다 자라기까지 수백에서 수천 년이 걸리는 세계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마치 하루를 100년처럼 뛰어넘는 세계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이프리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옆에 있던 에리얼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말도 안 되는 상황이네……."
그렇게 지금 당장도 눈에 보일 정도의 성장을 이루고 있는 세계수를 멍하니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래서, 정말 천사들과 손을 잡을 생각인가?"
들려오는 이프리트의 말에 나이아드는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이프리트?"
"말 그대로의 이야기다, 나이아드. 정말로 천사들과 손을 잡을 생각이냐는 말이다."
"……그럼 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나요?"
나이아드의 물음에 슬쩍 인상을 쓰며 인상을 찌푸리는 이프리트.
"방법이 있는 건 아닌데……."
"제대로 된 방법도 없으면서 그렇게 이야기하지 마세요. 게다가- 저희들은 그곳에 있는 이들을 처리할 힘도 없지 않나요?"
나이아드의 말에 이프리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으니까.
허나 이프리트는 다시 고개를 들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번에 그 개자식은 소멸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 녀석만 없다면 우리끼리도 어떻게든……."
"그게 정말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요, 이프리트?"
"……."
나이아드의 말에 입을 다무는 그.
"확실히 이프리트, 당신이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도 대충은 알고 있어요. 저희가 51번 탑에 남아 있는 잔재를 세계수의 마력으로 찾아 천사를 보내고 난 뒤를 걱정하는 거겠죠?"
"그래."
"확실히, 저도 그건 걱정이 되는 부분이기는 하네요."
이프리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에리얼.
허나 나이아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 둘을 슬쩍 바라보고는 말했다.
"마찬가지로 저도 그 부분을 생각하고 있긴 해요. 가브리엘 그자는 마치 진실인 것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결국 그 부분들은 전부 자기 좋을 대로 남자의 말을 해석한 것뿐이니까요."
"……깨닫고 있었다고?"
"당연하죠. 설마 제가 당신보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나요?"
은근히 상처가 될 만한 말을 하는 나이아드.
그러나 이프리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이아드는 이내 자신과 함께 서 있는 세 명의 정령왕들을 바라보곤 이야기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대비는 모두 하고 있으니까요."
"……대비를 하고 있다고?"
"네. 이프리트가 걱정하는 건 천사들이 잔재를 모두 없애 버리고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렇다면 해결은 간단해요. 애초에 천사들이 돌아올 일을 만들지 않으면 그만이죠."
"……돌아올 일을 만들지 않는다고?"
이프리트의 되물음에 나이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기로 이미 천사 쪽도 김현우에게 당했던 것 같더군요. 게다가 저희만큼은 아니지만 천사 쪽에서도 김현우를 제외한 강자가 51번 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게 동맹을 제안할 때 했던 말이 자신들의 전력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야훼라고 했나?"
"네 맞아요. 실제로 그 야훼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천사들은 그것을 전적으로 믿고 있는 것 같더군요."
아무튼-
"천사들은 그 야훼와 함께 51번 탑의 잔재를 지우러 갈 거예요. 이미 자신들이 당한 전적이 있으니 그 야훼라는 것 혼자 보내지는 않겠죠. 뭐, 마찬가지로 저희도 몇 명의 탑주들을 같이 보내야겠지만요."
"의심을 피하는 건가?"
"맞아요."
고개를 끄덕인 나이아드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렇게 해서 천사들이 모두 51번 탑의 잔재에 들어가 그 잔재를 정리하는 것을 본 순간 저는 문을 닫을 겁니다."
"……천사들을 그곳에 고립시키겠다는 건가?"
"맞아요."
"빠져나올 확률도 있지 않나?"
"당연히 빠져나올 확률도 있겠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어차피 그리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
"어차피 저희가 먼저 남자에게 보고를 하면, 그것으로 이미 천사들이 돌아가야 할 천계는 그 남자에 의해 멸망할 거예요."
안 그런가요?
나이아드의 되물음에 이프리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395화. 이렇게 포기하지는 않는다 (2)
하남에 있는 장원의 건물
끼이이익-
"하……."
건물의 문이 열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온 것은 바로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크프리트였다.
털썩-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스러지듯 눕는 지크프리트.
"뒤지겠다……."
그는 피곤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조금 전 막고 왔던 몬스터 웨이브를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된 거지…….'
야차에게 김현우가 소멸했다는 소리를 듣고 난 뒤, 지크프리트는 그 당시에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애초에 그에게는 사실 무엇을 선택할 만한 권한 자체가 없었다.
애초에 김현우와 붙어먹었을 때부터 지크프리트는 더 다른 곳에 붙는다는 선택지 자체를 스스로 없애버린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
아무튼, 그 덕분에 지크프리트는 51번 탑에서 떠나지 못하고 지금 당장 다른 이들을 도와 몰려들고 있는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래, 처리하고 있기는 한데.
"……너무 많아."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사실 지금 당장 몬스터 웨이브에 나오는 몬스터들은 지크프리트의 발끝조차도 따라오지 못하는 몬스터들이 많았다.
던전이 F급이든 S급이든, 지크프리트가 처리하러 간 몬스터를 처리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그 빈도.
그나마 2주 전에는 괜찮았으나, 어느 시점부터는 몬스터 웨이브의 양이 더더욱 많아졌다.
아니,
이제는 그냥 24시간 실시간으로 몬스터를 처리하지 않으면 몬스터들이 도시를 침공하는 것처럼 변해 버렸다.
그 덕분에 TV에선 드디어 세계의 멸망이 찾아왔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고. 김현우의 동료였던 계층민들이 경제 대공황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심각하게 말하고 있었던 것도 봤다.
한 마디로 지금 51번 탑은 멸망 직전이라는 소리였다.
'거기에다가…….'
지크프리트는 시선을 돌려 거대한 건물 한쪽에 위치한 거대한 문을 바라봤다.
김현우가 소멸되었다는 소식을 전한 이후로부터 굳게 닫힌 뒤 더 이상 열리지 않고 있는 문.
'……도대체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그 곳은 바로 김현우의 아내들인 야차와 미령, 그리고 하나린이 들어가 있는 곳이었다.
"흠……."
종종 마력의 기운이 느껴져서 저 안쪽에서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도대체 저기서 무엇을 하는지 까진 지크프리트도 알 길이 없었기에 그는 여태껏 했던 것처럼 다시 관심을 꺼버렸고.
-우우우우웅!
이내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출동벨에 지크프리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쾅-!
"……응?"
지크프리트는, 지금까지 열리지 않았던 문이 거칠게 열리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
김현우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업을 쌓아 나갔다.
눈동자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김현우는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점점 더 골 때리는 업에 부딪혔고.
적어도 김현우가 생각하기에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업들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김현우는 어떨 때 용암이 들끓는 창살 안에 갇혀 한 팔밖에 쓰지 못한 채 몰려드는 악마들을 학살해야 했고.
또 어떨 때 김현우는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먹어치우며 몰려드는 괴물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 장소들도 다양했다.
분명 처음에는 초원 같은 곳이나, 조금 음습한 동굴 정도였던 장소들은 어느 시점부터 바뀌기 시작해 나중에는 이곳이 도대체 어디인지 모를 이상한 곳에서 싸움을 벌일 때도 있었다.
상황도 마찬가지로 점점 변해갔다.
분명 수많은 병사들을 상대하기만 했던 업들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상대하는 이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 대신 적들의 질이 올라갔다.
한 명을 처리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압도적인 격차를 가진 상대들.
어느 특정한 업에서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 덕분에 몇 번이고 업을 얻는 것에 실패할 정도로 끔찍한 경험도 있었다.
그러나 김현우는 그것들을 모두 이겨내며 끊임없이 업을 얻었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계속-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그래, 분명히 흘러갔다.
적어도-
"후……."
-그 시점이 되었을 때 적어도 김현우는 엄청난 시간이 흘러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기화가 끝나자마자 멍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어둠 속에 주저앉은 김현우.
그는 한동안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지?'
김현우는 가물가물한 표정을 지으며 눈동자와 마지막으로 대화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가 막 3주쯤 지났었다고 했나?'
가물가물하지만 김현우는 분명 그렇게 들었던 것 같았다.
'……존나게 힘드네.'
그 다음으로 드는 생각.
눈동자가 말하기로 지금 김현우가 움직이고 있는 이 몸은 진짜 육체가 아니라고 들었다.
한 마디로 피곤할 일이 없다.
심지어 진짜 육체라고 하더라도 김현우는 실질적으로 자신의 육체를 활용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다른 이들의 몸속에 동화해 그들의 경험을 흡수해 업을 가져오고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눈동자도 이 수련은 그저 받아먹기만 하는 업이기에 김현우가 지금까지 해오던 업보다 편할 거라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진짜 뒤지겠는데.'
이상하게 그 어느 순간부터, 김현우는 자신이 해오고 있는 수련이 심하게 힘들어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지? 라고 생각해보면 딱히 기억은 나지 않았다.
아니, 어느 시점에는 분명 편한 시점도 있었다.
그러나 그 편한 시점이 지난 후부터, 김현우는 서서히 이질감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이질감이 들지는 않았다.
김현우가 이질감이 들기 시작한 것은 바로 얻었던 업들을 이용해 다른 이들의 경험을 본격적으로 얻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물론 처음에는 별거 없었다.
그저 아직 업이 정착하지 않아서 묘한 이질감이 든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김현우는 그 이질감이 더더욱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결국 지금에 와서는, 업 하나를 얻는 것에 굉장한 피로감을 느꼈다.
'아니. 아니지.'
이걸 피로감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무엇인가 애매했다.
뭐라고 할까…… 이건 마치…… 마치…….
"정신 차려."
김현우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자 들리는 목소리.
그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그 목소리가 눈동자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으면서도 김현우는 스스로에게 의문을 느꼈다.
'……왜 이렇게 인지하는 게 늦었지?'
인지하는 것이 늦었다.
정확히는 들린 목소리가 '눈동자'의 목소리라는 것을 캐치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길었다.
왜?
김현우의 머릿속에 다시 한번 떠오르는 의문.
허나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내지 못한 채 김현우는 눈동자의 다음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 계속 그렇게 멍 때리고 있으면 존재 자체가 박살 날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을걸?"
그녀의 목소리.
김현우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라고?"
"멍 때리고 있지 말란 소리야."
"……존재가 박살 난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네 상태는 지금 당장 터지기 직전의 폭탄과 같은 상태거든."
눈동자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김현우.
"터지기 직전의 폭탄이라고?"
"당연하지. 지금 네가 얼만큼의 업을 네 몸에 담았는지 알아?"
"……."
"약 25000명 정도야. 조금 더 세세하게 말하면 27111명이지."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고, 눈동자는 이야기했다.
"왜? 놀랐어?"
"……확실히 조금 놀랐네."
김현우는 업들을 얻으며 그와 함께 시간의 흐름을 느꼈고, 분명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스스로가 이렇게 끝에 닿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좋아? 지금 자기 몸이 박살 나기 직전인데?"
그러나 그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는 칭찬보다는 냉소적인 목소리로 김현우를 힐난했고, 그에 김현우는 살짝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씹. 지금 누가 누구한테 이런 수련을 시켜놓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
눈동자는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나지. 하지만 반대로 내 말을 듣지 않고 수련을 계속한 너도 문제야."
"……뭐? 수련을 계속해?"
김현우의 물음에 눈동자는 조금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분명히 계속 멈추라고 말했을 텐데도 아무런 말도 없이 네 멋대로 다음 업을 수련한 건 너잖아?"
"……내가 그랬다고?"
김현우는 순간 자신의 머릿속을 뒤졌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기억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김현우의 머릿속에는 눈동자의 목소리가 들렸던 기억이 어느 순간을 제외하고는 아예 없었다.
"역시 기억이 안 나나보지?"
"……."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김현우를 보며 눈동자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업에 먹히기 전에 네 정신을 되찾아서."
"……나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김현우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자 그녀는 현재 그에게 일어난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고.
"……그러니까, 내가 너무 생각 없이 업을 얻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밀려들어오는 업들한테 그대로 정신이 먹혀 버렸다. 뭐, 이런 말이야?"
"그래, 정확히는 네가 10000명째의 업을 수련할 때부터 서서히 업에 먹혔지.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내 말도 들은 체만 하고 계속해서 업을 탐했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나도 조금 안일했어. 네가 업에 먹히지 않게 조절했어야 하는데 아차 하는 사이에 업에 먹혀서는 그대로 내가 준비해 놓은 업을 아귀처럼 먹어치웠으니까."
"……그럼 지금은 괜찮은 거야?"
"아니, 전혀 괜찮지 않아."
"……멈췄잖아?"
"저기 말이야. 멈췄다고 네 몸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생각해?"
"내 몸 상태?"
"지금 계속 정신이 멍하잖아. 안 그래?"
눈동자의 물음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계속해서 정신이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그 증상은 네 존재가 네가 얻은 업들에 의해서 지워지고 있는 거라고."
"……내 존재가 지워져?"
"그래. 너도 알겠지만 업이라는 건 그 사람의 경험을 말하는 거야. 그리고 지금 네 몸에는 2만여 개가 넘는 위업들이 들어차 있지. 그것도 쓰잘데기 없는 업들이 아닌, 하나하나가 모두 위업(偉業)인 것들이 말이야."
"……그 업들 때문에 내 존재가 지워진다는 거야?"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네가 아무생각 없이 계속 위업을 몸속에 집어넣는 바람에 네 존재가 지금 네가 먹어치운 업들이랑 동화하려고 한다는 거지."
"잠깐, 지금 내 존재가 지워질 정도로 많은 개수의 업을 먹어치워서 그런 거라면 그건 업을 천천히 얻든 늦게 얻든 상관없는 거 아니야?"
"틀렸어. 만약 네가 업을 얻는데 조금의 여유라도 뒀었다면 업이 네 존재가 얻은 업들과 동화되는 게 아니라 그냥 업으로서의 기능만 하겠지."
조금 더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네가 생각 없이 배가 부른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음식을 처먹은 덕분에 지금 뒤지기 직전까지 왔다 이거야."
"……."
김현우는 눈동자의 말에 지금 상황을 가만히 되짚어보고는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좆됐다 이거지?"
"아니."
"……그럼?"
"개 좆된 거지."
"씨발."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396화. 이렇게 포기하지는 않는다 (3)
51번 탑의 최상층.
아니, 이제 계층 자체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최상층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그곳에서, 아브와 노아흐는 피곤한 표정으로 소파에 눕듯이 앉아 있었다.
"……진짜 큰일이네요."
아브의 중얼거림.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버티는 것도 힘들 것 같군."
그는 그렇게 말하며 최상층 곳곳에 펼쳐져 있는 마법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마법진들은 51번 탑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멸망하고 난 뒤부터 그들이 만들기 시작한 것들이었다.
'설마설마 했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힘이라니.'
노아흐는 인상을 찌푸리며 51번 탑이 멸망했을 때를 떠올렸다.
분명히 아무런 징조도 없었다.
그저 김현우가 소멸했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 전체적으로 암울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을 뿐.
한데 갑자기 박살 나버린 것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압도적인 힘 때문에.
무슨 보안을 해 놓았던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보안이라는 것의 기능은 탑 내부에 있을지 모르는 침입을 지키는 것이지 탑 전체를 날려 버리는 공격에 대해서는 대적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으로 티르가 알려준 방법으로 9계층은 살리긴 했지만…….'
하지만 51번 탑이 멸망을 넘어 그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뒤에도 9계층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티르가 알려주었던 방법 때문이었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자신들의 몸을 지키기 위해 만든 차원 마법.
그 마법을 9계층에 깔아둔 덕분에 그나마 9계층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 살아남을 수만 있었다.
"끙…… 설마 이렇게 문제가 심할 줄이야."
노아흐는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당장 티르의 말대로 9계층과 최상층만을 따로 좌표가 찍히지 않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것 까지는 어떻게든 성공적이었으나 문제는 그 이후였다.
'……관리가 전혀 불가능하다니.'
어떻게든 살려놓은 9계층은, 탑에서 계층을 떼어놓은 이후로 관리가 불가능했다.
뭐, 사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당연히 이럴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결국 아무리 김현우가 살던 곳이라고 해도 그곳은 엄연히 탑에 속한 계층 중 하나였고, 다른 계층 간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은 몰라도 간접적인 상호작용은 항상 있어 왔으니까.
'……하긴, 이렇게 만들어 놓고 9계층이 온전히 잘 돌아가길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노아흐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급하게 9계층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려놓은 마법진들이 최상층에는 한가득이었다.
"이제 더 이용할만한 마법진은 없는 겐가?"
노아흐의 중얼거림에 아브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더는 없어요.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에요……."
"그런가……."
확실히 지금 9계층만 어떻게든 꺼내놓은 것은 사람으로 치면 모든 것을 내다 버리고 심장만을 가져와 살린 것과 똑같은 것이라 어떻게든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이렇게 놔두기에는…….'
9계층이 당장 오늘내일한다는 것이 문제.
물론 지금 당장은 9계층 내부에서 어떻게든 하는 모양이지만 제한 마법진이 완전히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덕분에 9계층은 몬스터의 증폭이 끝없이 이뤄지고 있었다.
'……마력을 아예 없애 버리면 몬스터들도 힘을 잃겠지만.'
문제는 그나마 한 계층으로 줄어들어 예전에 모아놓았던 마력석으로 유지하고 있는 9계층의 마력을 끊어 버리면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9계층도 같이 붕괴할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 덕분에 노아흐와 아브는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혹시 무슨 좋은 방법 없을까요? 티르님?"
고개를 돌리며 정면에 앉아 있는 티르에게 묻는 아브.
허나 그도 이번에는 드물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유감이네만 나는 이런 데에는 전혀 지식이 없어서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군."
"그런가요……."
티르의 말에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브.
노아흐는 그런 아브의 모습을 보고는 이야기했다.
"뭐, 우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취하도록 하세.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 아닌가?"
그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아브.
그렇게 침묵이 지속된 지 얼마나 되었을까?
끼이이익-!
침울하게 앉아 있는 아브의 귓가에 들리는 문소리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고.
"……야차 님? 거기에다가 미령 님이랑 하나린 님까지??"
"전해줄 말이 생겼느니라."
이내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전과 같이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야차는 앉아 있던 아브와 노아흐, 그리고 티르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게…… 정말입니까?"
이내 야차의 설명을 듣고 있던 노아흐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
"그럼 이제 어떻게 해?"
김현우는 눈동자의 말을 듣자마자 자신의 정신이 살짝이나마 각성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멍했던 정신이 한순간이지만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
"으음…… 글쎄, 솔직히 나도 네가 정신을 잃고 내 통제를 벗어나서 업을 취할 줄은 몰랐어서 마땅히 생각해 놓은 게 없는데……."
눈동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야기했다.
"뭐, 그나마 한 가지 방법이라고 하면 조금 쉬는 거지."
"……쉰다고?"
"그래, 지금 너는 과식을 넘어서 온몸이 가득 찰 정도로 폭식을 한 상황이야. 그 상태에서 조금 휴식을 취하면서 네가 지금까지 먹어치운 업들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리면……."
"괜찮다 이거야?"
"그래. 만약 네가 온전히 정신을 차리고 네 몸에 있는 업이 완전히 자리 잡을 때까지 버티면 괜찮아질 거야."
"어느 정도나 걸리는데?"
"……으음, 지금 추이로 봐서는 대충 네가 아는 세계의 시간으로는 1년 정도?"
"1년!?"
"그래, 설마 하루 만에 네 몸 안에 있는 업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줄 알았어? 만약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양심이 없는 거야."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1년이라는 시간이 옆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그럼 어떻게 해? 방법이 없는데. 게다가 지금 네 상태로 수련이 가능하겠어?"
"……뭐라고?"
"너 지금 계속해서 순간순간 멍 때리는 시간이 있거든."
"……."
'확실히…….'
김현우는 현재 스스로가 잠깐잠깐 정신이 흐릿해진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분명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집중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흐릿해지는 그의 인식.
그는 억지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어?"
그다음 순간 자신이 다시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다는 것을 깨닫고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봐, 생각보다 심하지?"
"……그러네."
"그러니까 조금 쉬도록 해.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어."
"정말로?"
"정말로."
"아니, 근데 그래도 1년이면 이미 탑이 개 박살 나 있을 거 아니야?"
김현우의 말에 그녀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더니 뒤늦게 이야기했다.
"부정은 하지 않을게. 사실 나는 솔직히 너를 처음 데려왔을 때만 해도 어째서 내가 미리 붙여놓은 감시장치가 터지지 않았나 고민했었거든."
"……지금 내 앞에서 탑 멸망하라고 고사 지내냐?"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다만 어디까지나 당연한 게 일어나지 않아서 의문이 들었다는 거지."
그녀의 말을 끝으로 시작된 침묵.
김현우는 주저앉아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 또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지금 몇 개월이나 지났어?"
"몇 개월이나 지났냐니?"
"내가 수련하고 나서 얼마나 지났냐고."
김현우의 물음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제 한 달하고…… 대충 2주에서 3주 정도 지났나? 또 이렇게 말하니까 새삼스레 네가 대단해 보이네? 업에 먹혔다고는 해도 이렇게 단기간에 그 많은 업을 전부 경험할 줄이야."
그녀가 새삼 대단하다는 말투로 김현우를 칭찬했으나 그는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침묵.
그리고-
"역시 안 되겠어."
"뭐가?"
"그냥 계속하는 게 낫겠다고."
"……아니, 지금까지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아니, 그냥 처음부터 제대로 듣지도 않은 거야?"
눈동자가 언성을 높였으나 김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다 들었지. 너는 네 목숨이 오락가락 한다는데 제대로 안 듣고 배기겠냐?"
"아, 그럼 그냥 목숨을 허공에다가 던져버리고 싶다는 거야?"
"……."
김현우가 아무런 말도 없이 컴컴한 하늘을 빤히 바라보자 눈동자는 노골적인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네가 아무리 그렇게 봐도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어. 지금 당장 네 몸도 못 가누면서 뭘 어떻게 하려고 수련을 계속하자는 거야?"
"기합으로 어떻게 되겠지."
"기합으로 어떻게든 됐다면 그냥 그 미친 새끼도 만나자마자 죽여 버리지 그랬어."
"……."
입을 다무는 김현우.
허나 곧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네 말대로 이곳에서 느긋하게 쉬다가 힘을 얻고 나갔다고 치자."
"……."
"뭐, 다 좋다고 쳐. 나는 제대로 힘을 얻었으니 그 새끼랑 싸움을 벌일 거고, 결국에는 이겼다고 치자. 그럼 나한테 남는 건 뭔데?"
"너한테 남는 거……?"
"뭐, 너한테는 거창한 대의가 있다고 치자고, 근데 이미 1년이나 늦게 나가서 탑이- 그러니까 내가 있을 곳이 사라져 버린 나는, 뭐가 남는데?"
그 말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으나, 김현우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정답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야.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남아. 너는 결국 그놈을 잡고 해피엔딩을 맞이할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한테 그건 패배한 결말이라 이거야. 응?"
그리고 그렇게 내 패배를 기다릴 바에는-
"그냥 지금 당장 뒤지더라도, 나는 발버둥치는 게 맞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해?"
김현우의 말.
그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렇게 하게 둘 것 같아?"
"그럼 그냥 이 상태에서 소멸해 버리지 뭐. 내가 정신을 놔 버리기만 하면 내 존재는 소멸한다며?"
"……진심이야?"
"내가 또 나는 못 되는데 남 잘되는 꼴은 못 보거든."
분명 정신이 순간적으로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도 씨익 하는 웃음을 지어 보이는 김현우.
그 모습을 보며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눈동자는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야기했다.
"……내가 졌어, 네가 소멸해 버리면 이 이상 그 미친놈을 막을 만한 놈도 사라지는 거니까. 이번만큼은 내가 져야겠네."
그녀의 패배 선언에 씨익 하는 웃음을 짓는 김현우.
그러나 그녀는 곧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냥은 안 돼."
"……뭐?"
"그렇게 정색하지 마. 너를 막겠다는 소리를 한 게 아니니까. 다만 네가 계속해서 수련을 하게 되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우.
그에 눈동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방식을 좀 바꿀 필요가 있겠어."
"……방식을?"
"그래."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397화. 이렇게 포기하지는 않는다 (4)
"뭐, 사실 대단한 방식이라고 할 건 없어. 그냥 순서를 바꾸는 것뿐이니까."
"……순서?"
"그래, 순서. 지금 네가 폭식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아무튼 지금 네 몸 안에는 27000명의 업이 들어 있어."
결론만 보면-
"너는 거의 대부분의 업을 성공적으로 흡수했다는 거야."
"그래서?"
"그러니까, 조금은 넘겨도 될 것 같아."
"……넘겨도 될 것 같다니?"
김현우의 되물음에 눈동자는 곧바로 이야기했다.
"이제 네가 얻어야 할 업은 약 100개정도. 네가 지금까지 얻었던 27000개의 업에 비하면 세발의 피 정도지. 물론 이 업들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애초에-
"내가 저번에 말했듯 나는 업을 순차적으로 배치했으니까, 얻기 쉬운 업은 전부 앞으로 두고 얻기 어려운 업은 모두 뒤로 배치해 놓았거든."
"……그렇다면 오히려 더더욱 남아 있는 업들을 넘기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그녀는 곧바로 답했다.
"네 몸이 원래라면 당연히 이 업들을 넘기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야. 다만 네 몸 상태를 생각해서 남은 100개의 업을 넘기겠다는 거지."
"……그것들을 모두 넘겨도 노네임을 이길 수 있어?"
"확신은 못 하지."
"뭐?"
"애초에 '노네임을 이길 수 있는가?' 에 대한 대답으로 나한테 나올 대답은 이것 하나밖에 없어. 네가 모든 업을 전부 얻고 노네임에게 도전해도 질 수 있지."
"……."
"너도 어렴풋이 알고 있잖아? 나는 그저 네가 이길 수 있는 확률을 끌어올려주고 있는 것뿐이야. 한 마디로 '절대적'이 아니라는 소리야."
"그럼, 내가 100개의 업을 수련하지 않고 노네임과 붙었을 때의 승률은?"
"그것도 좀 애매한데…… 굳이 말하면 2할 정도?"
"……그렇게 짜다고?"
"물론 100개의 업을 전부 수련하면 3할 정도까지는 오를 거라고 봐. 그리고 그 미친놈을 상대로 3할 정도의 승률이면 꽤 대단한 거 아니야?"
"그럼 결국 100개의 업을 전부 얻어야 어떻게든 비빌 언덕을 만들 수 있다 이 말 아니야?"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는 김현우.
그녀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뭐, 사실 그게 맞는 말이긴 해. 근데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만약 원하지 않더라도 나는 뒤에 남은 100개의 업을 네게 주입해 줄 생각이거든."
눈동자의 말에 순간 요상한 표정을 지은 김현우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말장난하지 말고 그냥 어떻게 할 건지 결론부터 말해 봐."
"……처음부터 말장난을 할 생각은 없었어. 그냥 어떻게 설명을 해주다 보니 말장난처럼 되어 버렸을 뿐이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침묵했다.
그 뒤 다시 열린 입술.
"지금 네 상황은 아까 설명했듯 더 이상 수련을 지속할 수 있는 몸이 아니야, 아마 지금처럼 업을 수급하면 몸이 터져 버리겠지."
그 상황에서-
"지금 네게 남은 방법은 대충 시간을 들여서 업을 전부 소화하는 방법이 제일 좋아.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옳지. 어찌됐든 내 입장에서는 그게 가장 '안전하게'가는 방법이니까."
그와 함께, 어두운 공간 안에서 줄곧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눈동자가 김현우의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건 네가 싫다고 했으니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야."
"그게 뭔데?"
김현우의 물음에 눈동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쿠우우웅-!
"컥!?"
김현우는 그 다음 순간, 눈동자의 주먹이 자신의 명치에 꽂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순식간.
그가 제대로 인지하기 전에 김현우의 앞에 도달한 그녀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휘둘렀고, 그 반동으로 김현우는 어둠 속에서 순식간에 튕겨져 나갔다.
그렇게 해서 김현우가 신나게 땅을 구른 뒤 보인 곳.
"……여기는 또 뭐야."
그곳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는 어느 초원이었다.
앞뒤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푸른 초원만이 끝없이 이어져 있을 것 같은.
무엇인가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초원.
"어때, 괜찮지?"
김현우는 주변을 바라보던 도중 들리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눈동자를 바라봤다.
"……싸움을 걸려면 우선 말부터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미안, 그래도 네가 얄미워서 무조건 한번은 때려주고 싶었거든."
슬쩍 혀를 베어 물며 가벼운 장난이었다는 것을 어필하듯 고개를 한번 으쓱인 눈동자.
김현우는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이번에 해야 할 건 뭔데?"
"간단해, 나를 이기는 거야."
"뭐?"
"아, 너무 걱정하지 마. 이곳은 네가 알고 있던 허수 공간과 비슷한 세계니까 네가 아무리 소멸한다고 해도 10초 안으로 되살아나거든."
거기에-
"멍한 것도 없어지지 않았어?"
"……어? 그러네?"
김현우는 자신의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보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조금 전에도 눈동자와 이야기하면서 계속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허나 지금은 그런 현상이 전혀 없었다.
무력감도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정신이 말짱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한동안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다 이야기했다.
"이건 또 어떻게 한 거야?"
"뭐, 별거 아니야. 그냥 '일시적'으로 막은 거지."
"……일시적으로?"
"그래, 아마 대충 시간상으로 봤을 때 5시간 정도만 지나도 아까 전처럼 다시 정신이 오락가락 할걸?"
"……그럼 다섯 시간 동안만 수련을 하는 거야?"
"그럴 리가? 그 정도만 할 거라면 너를 여기로 끌고 오지도 않았겠지."
눈동자는 그렇게 하며 자신의 몸을 전부 풀고는 이야기했다.
"너는 지금부터 나랑 싸워서 네가 목구멍이 막히도록 밀어 넣은 업들을 소화하면 돼."
"……소화하라고?"
"그래, 결국 네 존재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건 소화가 안 된 업들 때문이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업을 강제로 소화하면 우선 급한 불은 끄는 거지."
"아니 잠깐, 소화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 건데?"
"나는 모르지? 결국 업을 소화하는 건 네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아니 이런 씹."
김현우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팍 찌푸리자 눈동자는 피식 웃다가 이내 기억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말이야."
"……그리고?"
"만약 다섯 시간이 지났는데도 네가 업을 하나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아마 그대로 소멸할 수도 있으니까 우선 이 악물고 어떻게든 해 봐."
"야, 잠깐, 뭐라고? 그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김현우의 경악성 어린 소리.
그러나 이미 그녀는-
"안 봐준다?"
김현우의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
끝없이 내리치는 폭포가 배경으로 있는 초원.
그 초원에 자라 있는 단 한 그루의 나무에서,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있던 남자는 불현듯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요즘에는 방구석폐인들이 자주 밖으로 나오는 시기인가 보네."
"……."
밀레시안의 말에 말없이 나무 뒤에서 모습을 나타낸 노인.
서고장은 양 팔을 베게 삼아 누워 있는 밀레시안의 모습을 보고는 이야기했다.
"자네는 아직도 그러고 있는 겐가?"
서고장의 물음.
그에 밀레시안은 귀찮다는 표정을 없애고는, 이내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이 상태에서 뭘 더 할 수 있는데?"
"……."
"괜히, 저번처럼 성질 긁으려고 온 거면 그냥 가는 게 좋을걸, 내가 요즘에는 기분이 좀 안 좋아서 말이야."
밀레시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 눈을 감았으나.
"헤르메스가 죽었네."
"……."
곧 서고장의 말에 의해 밀레시안은 감았던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잠시 무슨 감정이 담겨 있는지 모를 표정으로 서고장을 바라본 밀레시안은 이내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그거 알려주려고 온 거야? 근데 이걸 어째, 이미 나도 다 들었거든."
"……그런가?"
"아니, 애초에 듣지 않아도 대충 알 수 있는 내용이잖아? 그 새끼가 정말 순수하게 그 자식 밑에서 일이나 도왔을 것 같아?"
피식-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밀레시안이 그렇게 말하며 비틀린 웃음을 짓자 한동안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서고장은 이내 이야기했다.
"그가 세계를 재창조하려고 하더군."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엿이라도 먹였네. 살아 있으면 축하한다고 해주고 싶은데?"
"그리고 아마, 그는 자네를 죽이러 올 걸세."
서고장의 말에 밀레시안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고장.
그가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밀레시안은 지금 상황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하니까 이제는 모든 것을 다 날려 버리고 아예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 뭐 이거야?"
"……."
서고장은 말없이 긍정했고. 그로 인해 침묵이 이어졌으나 밀레시안은 곧 자조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한테 온 이유는 뭐야? 어차피 그 녀석이 그렇게 결정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확실히 밀레시안의 말대로 그가 자신들을 필요 없다고 판단해 처리하려고 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의 힘은 그만큼 압도적이었으니까.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그런데 왜?"
밀레시안의 말에 서고장은 담담히 말했다.
"여기에 온건 내 의지가 아니라 헤르메스의 의지일세. 나는 그저 심부름을 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할 뿐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밀레시안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뭐야?"
그것은 구슬이었다.
무지개색 빛으로 빛나는 구슬.
밀레시안이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자 서고장은 이내 몸을 돌리며 이야기했다.
"내가 예상하기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다른 탑주들을 처리하러 이곳에 올 걸세."
"우리 말고 어쭙잖은 파벌이나 만든 탑주들을 먼저 처리할 것 같은데?"
밀레시안의 말에 서고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네. 그는 파벌에 속해 있는 탑주들의 능력을 정확히 모르니 혹시 쓸데가 있을지 몰라 살려둘 걸세. 지금 당장만 해도 그는 파벌을 이룬 탑주들을 멸망시키고 있지 않으니까 말일세."
하지만-
"우리는 다르네. 그는 관리기관에 속해 있는 탑주들의 능력은 전부 알고 있지. 그리고 우리의 능력이 지금 당장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고 말일세."
서고장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자신의 손을 들어 가볍게 수인을 맺었고
우웅-!
서고장은 곧 자신의 발아래 생겨난 마법진을 바라보곤-
"아무튼, 내가 해줄 말은 이게 끝일세."
-그대로 마법진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애초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바닥에 있던 마법진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서고장.
밀레시안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서고장을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그가 주고 간 무지갯빛 구슬을 바라보았다.
"……."
영롱하게 빛나는 구슬.
'도대체 왜 나한테 이걸……?'
밀레시안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 구슬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
밀레시안은 그 어느 순간, 자신이 거대한 서고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당신이 헤르메스가 말한 밀레시안인가요?"
곧 밀레시안은, 그 안에서 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398화. 이렇게 포기하지는 않는다 (5)
빠아아악!
"큭!"
눈동자의 내리찍기로 인해 아래로 내려간 시선.
허나 김현우는 그 동안 업을 먹어치운 덕분인지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을 보지 않고도 그녀가 있는 곳을 인지하고 곧바로 발을 휘두를 수 있었다.
꽝!
분명 그녀가 있는 곳을 정확히 타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애꿎은 땅이 부서지고.
뻑!
"큽!"
김현우는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시큰한 고통을 느끼며 초원 바닥을 굴렀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던 진흙 사이를 몇 번이고 구른 김현우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 눈동자가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래도 업을 먹어치운 게 헛일은 아닌가보네."
눈동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김현우의 앞에서 입을 열었다.
"……."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지?'
김현우는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 다짜고짜 공격을 걸어오는 눈동자와 줄곧 싸움을 이어나갔다.
아니, 그건 싸움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당연히 맞는 쪽은 김현우.
'저 정도로 강하면 그냥 눈동자가 직접 노네임과 싸워서 그를 소멸시키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눈동자는 김현우에게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줬다.
'지금에 와서는 그래도 공격을 막을 정도는 되지만…….'
그럼에도 김현우는 아직까지 한 번도 그녀에게 타격을 입힐 수가 없었다.
그렇게 김현우가 아무런 말도 없이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자, 눈동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돼."
"……뭐?"
"너는 분명히 얻은 업들을 나름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긴 해. 실제로 싸우면서 은근슬쩍 보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런데 그 정도로는 안 된다 이거야."
"……?"
눈동자의 말에 순간 묘한 표정을 짓는 김현우.
여기서 뭘 더 어쩌라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바라보자 그녀는 스윽 하는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뭐, 시간도 없으니까 여기서 설명하는 것 보다는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네. 몸으로 체득하는 게 훨씬 빠르겠지?"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전과 같이 자세를 잡았고,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무엇인가 온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 순간.
"!"
김현우는 겨우 잡을 수 있게 된 그녀의 신형을 또 한 번 놓치게 되었다.
허나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김현우가 얻었던 수많은 업은 지금까지 그녀와의 싸움으로 다져져 오감으로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게 해주었으니까.
'오른쪽!'
김현우는 확신하며 오른쪽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군더더기 없는 내지르기.
그가 주먹을 내지르기 시작하자마자 나타난 눈동자의 모습.
분명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에 놀랐을 법도 하건만 눈동자는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김현우가 내지르고 있는 주먹을 아래서 위로 가볍게 쳤다.
뻑!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김현우가 두 눈을 크게 떴으나 그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김현우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김현우는 그런 그녀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녀와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빼며 다리를 차올렸으나.
"!?"
그녀는 너무나도 부드럽게 김현우의 공격을 피했다.
아니, 그것을 피했다라고 하는 게 맞을까?
눈동자는 분명 그 자리에 있었고, 김현우는 분명 그녀의 몸을 노리고 정확히 발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그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 김현우가 발을 휘둘렀던 그곳을 가로질러 그의 품에 파고들었으니까.
'내 공격이, 흘려진 건가?'
눈동자가 자신의 앞에서 주먹을 휘두를 때 든 생각.
그녀는 마치 정답이라는 듯 김현우의 눈을 보더니 그대로 웃음을 짓고는-
빠아아악!
그의 머리통을 그대로 위로 올려 쳐버렸다.
올라가는 시야.
김현우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있는 힘껏 손발을 휘둘렀으나 역시 눈동자는 그의 공격을 모두 피해 버렸고.
그 결과.
철푸덕!
"씹……."
김현우는 또 한 번 잡초 아래에 있는 진흙 밭에 얼굴을 처박았다.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현우.
그 모습을 보며 눈동자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감탄하고 있었다.
'설마 이정도로 회복이 빠를 줄이야.'
사실 그녀는 김현우를 이 공간으로 데려오며 그가 회복할 가능성보다는 오히려 '소멸'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업에 잡아먹혀 쉬지도 않고 27000개의 업을 모조리 먹어 치웠으니까.
'사실 27000개의 업을 일련의 소화 과정 없이 채우기만 했어도 이미 존재가 사라져야 정상인데.'
김현우는 버텼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업을 실시간으로 소화하고 있어.'
김현우가 눈동자와의 싸움을 통해 업을 실시간으로 소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업이라는 것 자체가 소화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게다가 김현우의 경우 자신의 도움으로 업 자체를 경험한 터라 확실히 업을 소화하기는 편할 것이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업이 한 두 개일 때 이야기고, 김현우 같은 경우는 현재 당장 몸에 소화하지 못한 업이 10000개는 가볍게 넘어갔다.
그 10000개가 넘어가는 업들을 차근차근 소화하는 것.
그것은 자신의 몸에 가지고 있는 업을 한 두 개 소화하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뭐, 당장의 부작용은 해결해 줬지만…….'
2만 개가 넘는 업을 억지로 몸에 담은 대가로 김현우는 오히려 업에 먹혀 존재를 잃어버릴 뻔했으나 그것은 눈동자가 막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막았다'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그도 그럴게 김현우가 당장 여기서 날뛰고 있어도 그의 사망 타이머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당장 그를 처음 여기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그의 사망 타이머는 아무리 많이 쳐줘야 다섯 시간 정도였다.
허나 지금은 어떤가?
"……역시 대단해."
김현우는 이곳에 들어와 그녀와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자신의 몸속에 있는 업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조금 과장을 보태 설명하면 한번 주먹을 뻗을 때마다 하나의 업을 완전히 흡수하는 정도.
그런 엄청난 속도로 업을 소화하는 덕분에 김현우는 지금 이 세계에서 5시간이 아닌 50일이 가까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뭐, 그래봤자 밖은 이제 5일 정도 지났겠지만.'
그래도 김현우의 속도는 대단했다.
어느 정도냐고 한다면 굳이 그에게 일일이 경험을 시키는 것보다는 자신이 일일이 업을 모두 사용해서 보여주는 방법이 더 성장이 빠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
거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경험'을 얻는 것은 상대방과 싸우기보단 '동화'를 통해 그 업을 얻는 것이 훨씬 빨랐다.
김현우가 저 정도로 빠르게 업을 흡수할 수 있는 이유도 이미 경험을 통해 몸속에 있는 업을 소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빠른 것일 뿐.
'역시 싸우면서 더 강해지는 건, 사례가 있긴 하지만 한계가 명확하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을 끝내며 김현우를 바라봤다.
온몸에 흙탕물을 뒤집어썼으나 아직 살아 있는 눈.
분명 맨 처음에 김현우를 상대했을 때만 해도 그가 소멸한 다음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던 그녀는 다시 한번 김현우에게 기대를 걸어보기로 정했고.
"……업들을 한 번에 같이 사용하라 이 말이지?"
고작 한번 움직임을 본 것만으로도 자신의 의도를 파악한 김현우를 보며,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정답이야."
그 말 직후.
콰아아앙!
초원은 또 한번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
세계수가 있는 숲.
분명 얼마 전만해도 다른 나무들보다 조금 큰 정도였던 세계수는 지금에 와서는 몰라볼 정도로 커져 이제 나름 '세계수'라는 이름을 달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며.
나이아드는 홀로그램 상으로 보이는 천사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쪽에서도 준비는 전부 끝난 건가요?"
[그렇습니다. 우선 저희 쪽에서는 그쪽에서 제대로 된 잔해의 위치만 찾았다면 곧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가 끝난 상황입니다만…… 그쪽은 어떠십니까.]
"저희 쪽도 파벌에 속해 있는 탑주 중 한명이 지금 남아 있는 '잔해'에 가본 적이 있어서 그것을 바탕으로 좌표를 찾고 있습니다."
[혹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가브리엘의 정중한 물음.
그에 나이아드는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다 이야기했다.
"아무리 늦어도 5일 이상은 걸리지 않을 겁니다. 우선 잔해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그 주변을 찾기는 했으니까요."
나이아드의 말에 흡족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은 가브리엘은 슬쩍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조금 더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가브리엘은 그대로 통신을 종료했고, 한동안 빈 화면을 띄우고 있던 수정 구슬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시선을 돌려 에리얼을 바라봤다.
"그래서, 에리얼 현재 진행 상황은 어떤가요?"
그녀의 물음에 에리얼은 슬쩍 뜸을 들이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우선 제가 예전 그곳에 갔었을 때 느꼈던 바람을 바탕으로 찾고 있어요. 아마 조금만 더 찾으면 대충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군요."
에리얼의 대답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이아드.
"조금만 더 고생해주세요 에리얼. 당신이 그 위치를 찾아내기만 하면 저희는 더 이상 힘을 뺄 일이 없으니 말이에요."
그 말에 에리얼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금 눈을 감고 자신의 몸을 바람화해 사라지는 그녀를 본 나이아드는 미소를 지으며 세계수를 바라봤다.
불과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갖춰진 세계수의 모습.
물론 예전의 크기와 상당히 많이 차이 나기는 했으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정도면 충분해.'
세계수는 지금도 충분히 경악할 만한 속도로 자라고 있었고, 나이아드는 거기에 단 하나의 불만도 없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완전히 박살 나버린 세계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
정령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 말고는 없었기에 나이아드는 조용히 웃음을 지으며 세계수를 바라봤고.
그 순간.
"호오- 저번에 무너뜨린 것 같은데 잘 자라고 있지 않느냐? 분명 몇 천 년이 걸려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말이니라."
나이아드는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고.
곧 그녀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너…… 너…… 너는?"
말까지 더듬으며 입을 여는 나이아드.
"왜 그러느냐?"
허나 그런 나이아드의 경악 어린 표정에도 그저 그녀는 느긋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이아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녀가 누구인지 나이아드는 기억하고 있다.
아니, 기억하다 못해 매일 밤 꿈에 나올 정도로 그녀의 모습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도 그럴게 세계수를 박살내 버린 것은 김현우와 같이 있었던 이 여자였으니까.
"네…… 네가, 네가 대체 어떻게 여기에!?"
말까지 더듬거리며 묻는 나이아드.
그에-
"내가 좀 이 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니라."
-야차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399화. 이렇게 포기하지는 않는다 (6)
모든 것이 황금으로 빛나는 신전 안.
"크아아악!"
그 곳에서, 태양신 라는 남자의 손에 목이 쥐어져 허공 매달려 있었다.
"대…… 대체 왜?"
남자의 손에서 떨어지기 위해 발악을 하면서도 입을 여는 태양신 라.
그에 남자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표정으로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
"필요가 없으니까."
"그…… 그게 무슨. 끄아아아악!"
라는 그에게 물음을 던지려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남자는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남자의 손을 뽑아버렸다.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라.
분명 불로불사라는 이름답게 그의 왼손은 다시 자라야 정상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남자가 뽑아버린 팔은 더 이상 재생되지 않았다.
그저 붉은 피만이 황금빛 신전에 뿌려졌을 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라가 남은 한쪽 팔을 휘둘러 자신의 병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모래에서 형태를 갖춰가는 병사들.
물론 남자는 그런 병사들 따위는 알 바도 아니라는 듯 라의 반대 팔을 한 번 더 잡아 당겼고-
푸우욱!
"끄아아아악!"
라의 반대쪽 팔이 뜯겨짐과 동시에, 남자의 몸에는 병사들의 창이 박혀 들어갔다.
그러나-
"흐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저 혼비백산해 비명을 지르는 라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재생되지 않는 양팔을 바라보며 이제는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라.
그 모습을 흥미 없이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이번에는 다리로 손을 가져가는 것이 아닌 손날을 세워 팔을 들어 올렸고.
"!"
곧 남자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은 라는 병사들을 움직여 그의 움직임을 막게 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병사들.
병사들은 자신들이 쥐고 있던 무기들도 전부 놔 버리고는 남자의 몸에 매달려 그의 행동을 제지하기 시작했다.
어떤 병사들은 그의 팔을 붙잡았고,
또 어떤 병사들은 아예 남자와 라 사이에 껴 공격을 대신 맞겠다는 듯 인간 방패를 자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푸욱-!
"커헉!"
아무리 병사들이 그의 행동을 막으려고 노력했어도, 남자를 막을 수는 없었다.
후두두둑-!
병사들이 아무리 달라붙어 그의 행동을 제지했어도, 결국 그는 자신이 목을 틀어쥐고 있던 라의 심장에 손을 박아 넣었으니까.
스으으으으-!
남자가 손을 박아 넣자마자 처음부터 있었다는 게 거짓이라는 듯 사라지는 모래 병사들.
"도…… 도대체…… 왜! ……도대체 왜!!!!"
태양신 라는 급격히 생명이 꺼지기 시작하는 눈으로 이를 악물곤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으나 남자는 그런 라의 증오 어린 표정에도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말하지 않았나?"
퍼석!
-그의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이제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라가 죽은 뒤, 남자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털썩-!
남자가 손에 힘을 풀자마자 힘없이 처박히는 라의 몸뚱이.
불로불사라는 말이 거짓말인 것처럼 더 이상 재생되지 않은 육체는 라의 목숨이 끊기자마자 먼지로 변하기 시작했고, 이내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이제 두 명 남았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직 죽이지 않은 두 명의 탑주를 떠올렸다.
한 명은 '밀레시안',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저번부터 지금까지 살려두었던 '서고장.'
"……."
사실 서고장은 살려둘까 싶었으나 두 번째로 '탑'을 운용해본 결과, 서고장은 딱히 필요가 없었다.
'차라리 살려둔다면 내가 죽였던 이 녀석이나 괴인왕을 살려두는 게 더 좋았겠지.'
남자는 라가 있던 곳을 바라보며 생각했으나 이내 미련 없이 그곳에서 시선을 뗐다.
애초에 더 이상 남자는 다른 이들을 옆에 두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밀레시안과 서고장을 죽인 뒤에는 녀석들도 죽일까.'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일을 맡겨놨던 파벌들을 생각했다.
그냥 처음부터 멸망시켜 버릴까 하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을 맡겨놓은 각 파벌들.
'솔직히 그 녀석이 죽은 시점부터 51번 탑에 무슨 잔재가 남아 있던 딱히 상관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자연스럽게 황금빛 신전에 배치되어 있는 의자에 앉아 고민하던 남자.
허나 그는 곧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만악의 근원이 될 수도 있는 것은 뿌리 뽑는 게 좋지.'
물론 파벌들이 정말로 51번 탑의 잔재를 찾아내 박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나 우선은 조금 더 말미를 주는 편이 좋아보였기에 남자는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을 조금 보류하기로 했다.
'……그 대신 악마 쪽이라면 멸망을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남자는 시종일관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봤던 예수를 생각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던 예수.
그때야 자신을 앞에 두고 담담한 태도를 고집하는 예수가 신기해서 살려두었으나 생각해보니 굳이 살릴 이유가 없었기에 남자는 탑주들의 정리가 끝나는 대로 악마 파벌은 깔끔하게 정리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우우웅-!
이내 그는 포탈을 만듦과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왜 그렇게 겁먹는 것이냐? 내가 딱히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낄낄거리며 웃는 야차.
나이아드는 한껏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마력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나이아드의 주변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물.
허나 야차는 그런 나이아드의 전투태세를 보면서도 여전히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설마 나와 싸우려는 것이냐?"
"……혼자 왔나요?"
"그건 왜 물어보는 것이냐? 혹시 이 몸이 혼자 왔다고 하면 너희들이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물어보는 것이냐?"
야차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분명 나이아드밖에 없었던 주변에 정령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다.
각각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정령들.
그러나 야차는 그런 정령들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을 지었고, 그에 나이아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또 한 번 물었다.
"이곳에는 왜 온 거죠?"
목적을 묻는 나이아드.
"그걸 내가 굳이 대답해 주어야 하느냐?"
"……."
"뭐, 그래도 우선 내가 필요한 것을 얻으러 온 입장이니 그걸 말하지 않고 가져가는 것은 도적과 다를 바 없는 일. 그러니 말해주도록 하겠다."
"……."
"나는 세계수를 가지러 왔느니라."
"뭐…… 뭐라고요?"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는 나이아드.
그에 야차는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세계수를 가지러왔느니라. 뭐, 원래 처음에는 내가 세계수를 죽여 버린 터라 세계수의 잔재라도 한두 개 얻어갈까 했는데……."
야차는 고개를 돌려 세계수를 바라봤다.
얼마 전만큼은 아니었으나 그 위용을 빛내고 있는 세계수.
"이렇게 전부 자라 있을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느냐?"
씨익 하고 웃는 야차.
그에 나이아드는 눈을 부릅뜨고 이야기했다.
"지금 저희가 힘들게 다시 살려놓은 세계수를 가져가겠다고 말한 겁니까?"
"아, 걱정 말거라. 거대한 나무가 필요한 거라면 이 본체는 가져가지 않을 것이니라."
"무슨……?"
"내가 필요한 건 세계수의 마력이니라. 그러니 세계수의 마력만 뽑아가도록 하겠느니라."
아무렇지도 않게 나이아드의 속을 뒤집어 놓는 야차.
허나 그녀의 눈이 가볍게 웃음 짓고 있는 것을 보며 나이아드는 야차가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나이아드는 저도 모르게 끌어올려지는 살의를 굳이 없애지 않고 물었다.
"……그 정도로 실력에 자신이 있나요?"
"당연히 있지. 없으면 도발을 할 리도 없지 않느냐?"
뭐-
"하지만 나는 일단 움직일 수 없느니라. 세계수에 있는 마력을 남김없이 가져가려면 '내 몸'을 통해 가져가는 게 가장 좋으니 말이다."
"무슨!?"
"어라? 설마 모르고 있었느냐? 이미 이전부터 세계수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었다만?"
야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이아드는 고개를 쳐들고 세계수를 바라봤고, 이내 두 눈을 부릅뜨며 세계수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런 미친-!"
세계수가, 죽어가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푸른빛을 내뱉고 있던 세계수는 부분 부분이 칙칙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지금 무슨 짓을!"
나이아드의 말이 마치 공격신호라도 된 듯 정령들이 서 있는 야차에게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꽈아아아앙!
대부분의 정령들은 세계수의 앞에서 바로 떨어지는 거대한 여의봉에 의해 진입로가 막힐 수밖에 없었고,
그런 여의봉을 그나마 피해서 간 정령들은.
"무슨-!"
"흥."
빠아아악!
이내 미령과 하나린의 공격에 다시 밖으로 튕겨나가야만 했다.
그와 함께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는 하늘.
나이아드는 본능적으로 하늘을 쳐다봤고, 곧 하늘에 자신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생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하늘이 자신의 것인 것 마냥, 흐린 구름 사이를 유영하고 있는 거대한 무언가.
그리고-
"설마, 내가 정말로 혼자 왔다고 생각했느냐?"
나이아드는 야차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김현우는 이미 셀 수도 없을 만큼 진흙바닥에 처박혔고, 눈동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김현우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허나 그럼에도 끝나지 않은 싸움.
눈동자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 김현우가 일어나면 곧바로 다가와 싸움을 걸었고, 그도 마찬가지로 그녀와 싸움을 이어나갔다.
빠아아악! 텁! 뻐억!
둔탁한 파열음이 계속된다.
물론 그 파열음은 오로지 김현우에게서만 나는 소리였다.
애초에 눈동자는 이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현우에게 단 한 대도 맞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고무적인 성과는.
텁!
"쯧-."
눈동자가 어느 순간부터 김현우의 공격을 피하기보다는 막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빠악!
싸움의 양상은 계속해서 변했다.
김현우가 무엇을 깨달았다 싶어 그녀를 파훼하려 하면 눈동자는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그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기술을 사용한다.
아니, 기술이 아니었다.
업.
그녀는 마력을 사용한 필살기 같은 일격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눈동자가 보여준 것은 그저 순수한 박투술과 격투술.
그렇기에 김현우는 자신이 경험했던 업을 토대로 그녀의 공격법과 방어법을 파훼할 새로운 방법을 생각했고. 그녀는 김현우가 공격을 파훼하는 순간 또 방법을 바꾸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진 전투.
그 동안 김현우와 눈동자는 말없이 그저 손발을 섞었다.
시간도 세지 않고,
그저 무한하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김현우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새롭게 바꿔서 사용하는 격투술들이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또 어느 순간.
"……!"
김현우는 눈동자가 사용하는 기술들을 빠르게 파훼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그녀의 공격을 빠르게 파훼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건- 더 이상 그녀의 기술이 새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공격이 막힐 때마다 기존의 묘리를 사용하지 않고 김현우도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묘리를 끌어온 그녀는 지금에 와서는 기존의 묘리를 돌려쓰고 있었다.
적어도 김현우가 한 번 이상 경험해 봤던 것을 다시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을 순간-
"!"
김현우는 너무나도 쉽게, 눈동자의 뒤를 점할 수 있었다.
400화. 잘 받아가마 (1)
"끄꺄악!"
나이아드는 자신의 얼굴을 붙잡은 야차의 손을 양손을 붙잡으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으그으으윽!"
어떻게든 자신의 얼굴을 붙잡은 야차의 손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나이아드.
양손에 힘을 주기도 해보고 물을 이용해 야차를 공격하거나 그녀의 숨구멍을 순간적으로 틀어막아 당황하게 해보려고도 했으나.
"시답잖은 장난을 치는구나."
야차는 꿈쩍도 하지 않고 붙잡은 그녀의 얼굴을 놔주지 않았다.
뿌득-!
"꺄아아아악!"
야차가 손에 힘을 주자 비명을 지르는 나이아드.
그녀는 자신 자체를 물로 돌리려고 했으나 그것조차도 야차의 손에 잡힌 시점부터 불가능했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비명을 지르는 것밖에 없었고.
"아……안 돼!"
나이아드는 비명을 지르는 도중 들려오는 이프리트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야차의 손 사이로 세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아!!"
세계수가,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어느 정도 말라가고 있다는 느낌만이 들었다면 지금에 와서는 완전히 시들어 버릴 것 같은 세계수.
나이아드는 흥미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야차를 보며 악 소리를 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왜 우리한테 이러는 거냐고!"
그녀의 비명에 야차는 나이아드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본 것이냐?"
"그래!! 왜 그러는데! 도대체 우리가 뭘 했길래 그러냐고! 어떻게 보면 우리는 피해자야! 피해자라고! 너희는 잃은 게 없지만 우리는 잃은 게 많다고!"
논리조차 맞지 않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그저 비명에 가까운 악소리.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천사 쪽도 너희들의 적이잖아! 그 녀석들도 선물을 받았다고!! 그 녀석들도 '모체'를 받았단 말이야! 왜 우리만! 왜 우리만 이러는 거냔 말이야!!!"
"……."
그녀의 비명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야차는 이내 무엇인가 떠올랐다는 듯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설마,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
"너희와 우리는 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냔 말이다."
그 말에 나이아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굳은 표정을 지었고. 야차는 곧 입을 열었다.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네 생각은 틀렸느니라."
"뭐라고?"
"내가 고작 너희 같은 이들에게 악의를 느낄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전혀 아니지. 나는 딱히 너희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느니라."
"그게…… 무슨?"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그저 이 세계수가 필요할 뿐이다. 그것도 되도록 빠르게 말이다. 그렇기에 너희들을 습격한 것뿐이지, 그 이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그래, 애초에 나는 너희에게 그런 감정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그저 이 세계수가 내 지아비를 살리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구해가는 것일 뿐이다."
"…… 지아비를 살린……다고?"
"그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표가 있는데 굳이 대의명분이 있어야 하느냐?"
아니-
"없어도 상관없다. 그 목표야말로 내게는 그 무엇보다 거대하고 위대한 대의명분이니 말이다."
"!"
야차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이아드의 몸을 그대로 던져버렸다.
땅바닥에 처박히는 나이아드의 육체.
그녀는 서둘러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렸으나.
"아……."
이미 그녀가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세계수는 또 한번 완전히 말라 비틀어져 더 이상 생명의 기운을 가지지 않게 되었고.
"얻을 건 전부 얻었으니 가보도록 하겠느니라."
이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정령들을 무참히 박살 내고 있던 야차와 그 동료들은 마치 처음 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하……."
그곳에는, 마른 세계수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김현우의 주먹이 눈동자의 얼굴을 노린다.
허를 찔렸다는 표정으로 급하게 고개를 트는 눈동자.
공격이 이어진다.
김현우의 손발이 빠르게 움직여 허를 찔린 눈동자를 타격하기 위해 움직이고, 반대로 눈동자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그의 공격을 피해낸다.
엄청난 마력의 유동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공방을 주고받는 김현우와 눈동자가 있었을 뿐.
텁!
김현우의 주먹이 눈동자의 오른손에 잡힘과 동시에 눈동자의 왼발이 그의 옆구리를 노린다.
그에 김현우는 최대한 몸을 앞으로 밀착해 눈동자의 공격에서 받는 피해를 줄이며 오른 팔꿈치로 그녀의 얼굴을 후려친다.
고개를 뒤로 젖혀서 피하는 눈동자.
1초가 미처 지나지 못하는 그 시간에 오고 가는 수많은 공방.
김현우의 몸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눈동자의 움직임도 김현우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움직인다.
그 끝에서.
빠아아악!
눈동자는 결국 김현우에게 일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날아가 김현우와 마찬가지로 흙바닥에 처박힌 눈동자.
김현우는 순간 멍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바라보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고.
"축하해."
김현우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그 순간, 그녀는 마치 날아갔다는 게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다는 듯 그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말없이 눈동자를 쳐다보는 김현우.
분명 자신과 같이 땅바닥을 굴렀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더러워진 부분이 없는 눈동자.
김현우는 질문했다.
"바닥에 구른 거 아니었어?"
"구르긴 굴렀어. 다만 이곳은 내면세계이다 보니까 굴러도 곧바로 원상태로 복구할 수 있거든."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왜 지금 알려줘?"
"알려줄 상황이 없었잖아?"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순간 말을 잃었다.
"……."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김현우는 지금 처음 눈동자에게 일격을 먹였고, 그 전까지는 열심히 맞기만 했다.
뭐, 사실 열심히 맞을 때도 그냥 한 마디 해서 알려주면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김현우는 굳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걸고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내 상태는 지금 어떤 거야?"
김현우의 화제 전환.
눈동자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최상이야."
"최상?"
"솔직히 말하면 내가 여기에 데려오면서도 얼마 안가서 소멸할 줄 알았는데…… 지금은 애초에 소멸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업을 많이 소화했어."
"……그래?"
김현우가 슬쩍 화색하며 대답하자 눈동자는 조금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진짜 신기하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뭐가?"
"너 말이야. 물론 네가 이미 그 수많은 업을 먹어치운 이유도 있겠지만 나랑 싸울 때 업을 소화하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던데."
"……그래? 뭐 나는 그냥 하던 대로 한 것뿐인데."
김현우의 대답에 눈동자는 묘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고는 이야기했다.
"그래서 더 신기하다는 거야. 보통 수련을 통해 업을 빠르게 얻는 이들은 많아도, 남과의 싸움을 통해 업을 빠르게 얻는 이는 거의 없거든."
"……거의 없다는 건 그래도 몇 명 정도가 있다는 거 아니야?"
"있기는 있는데 그들도 너처럼 빠르게 업을 얻지는 않아."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가만히 생각하다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준 '눈' 때문일 확률은?"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겠지. 내가 저번에 말해줬던 대로 내 눈은 보고자 하는 업을 볼 수 있게 만드니까."
다만-
"네가 가지고 있는 눈과 네 재능을 다 합쳐서 생각해 봐도 네가 업을 소화하는 속도는 비정상이라 이거지."
눈동자의 물음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아무튼 결국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야?"
"그건 그렇긴 하지?"
"그럼 굳이 생각할 필요 있어?"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으음, 하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뭐, 확실히 지금 당장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아무튼 잘 풀린 상태기는 하니까."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질문했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결국 시간은 얼마나 지난거야?"
"시간?"
"그래, 내가 여기에 들어오고 나서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김현우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하늘을 바라봤다.
변하지 않는 풍경.
이 덕분에 김현우는 분명 자신이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는 있었으나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 질문에 눈동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이제 한 2주 정도려나?"
"2주? 그것밖에 안 지났어?"
"뭐, 그렇지? 애초에 이곳의 시간은 네가 원래 알고 있던 허수공간보다도 느리게 시간이 지나도록 축을 뒤틀어놓은 곳이니까."
눈동자의 말을 듣고 있던 김현우는 이야기했다.
"그럼 결국 최종적으로 두 달 정도가 지난 거네?"
"뭐…… 네 시간으로 환산해 보면 대충 그 정도 되지 않을까?"
"그럼 못 얻은 업도 전부 얻고 나갈 수 있는 거 아니야? 기존의 업도 전부 소화했다며?"
김현우의 질문에 눈동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해."
"……왜?"
"배울 업이 없거든."
"배울 업이 없다고?"
"그래, 내가 아까 말했잖아? 싸울 때 업을 얻는 속도가 빠르다고."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순간 그게 무슨 말인지 생각하듯 입을 열지 않다가 물었다.
"설마."
"그래, 나는 마지막에 와서는 네가 소화해야 할 업이 아니라 네가 얻어야 하는 이들의 업을 사용해서 너를 상대했어. 그런데 너는 분명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녀석들의 업을 무척이나 빠르게 얻어가더라고."
"……정말로?"
"그럼 거짓말이겠어?"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순간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으나 딱히 그런 장면이 기억나지 않았다.
애초에 김현우의 입장에서는 눈동자의 공격을 어떻게 막고 반격할까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아무튼 수련은 끝?"
"맞아. 이제 더 이상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이미 나는 너한테 거의 모든 것을 준 셈이니까 말이야."
딱!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쳤고, 그와 함께 김현우가 있던 곳은 그가 처음에 있었던 푸른 공간으로 되돌아왔다.
"이제 끝이야. 수련은 말이야……. 수련은 말이지."
왠지 기묘하게 말을 늘리는 그녀.
김현우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질문했다.
"그럼 이제 다시 돌아가면 되는 건가?"
"맞아. 돌아가면 되긴 하는데."
"……하는데?"
눈동자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색한 웃음을 짓더니 이야기했다.
"마력이 아직 다 안 모였네."
"……그게 무슨 소리야?"
"뭐, 너도 이해할 만한 아주 당연한 이야기이긴 한데."
그녀는 그렇게 서두를 시작하며 김현우에게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이내 한동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포탈을 열 마력이 없어서 못 나간다 이거지."
"맞아."
"그럼 그 포탈을 열 만한 마력을 모으기까지는 얼마나 걸리는데?"
김현우의 말에 그녀는 흐음- 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이야기했다.
"대충……."
"대충?"
"……3개월?"
"……농담이지?"
"아니."
"……."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401화. 잘 받아가마 (2)
"아니, 3개월이나 걸리면 엄청나게 오래 걸린다는 소리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는 김현우.
그에 눈동자는 진정하라는 듯 양손을 들고 휘휘 저으면서도 이야기했다.
"솔직히 오래 걸리는 건 아니지. 애초에 그 미친놈한테 걸리지 않고 조용히 마력을 모았을 때 걸리는 시간이 그 정도인 걸 감안하면 얼마나 빨리 모으는 건데?"
게다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이 그것뿐인 줄 알아?"
"……뭔가 해야 되는 게 더 있어? 수련은 끝났다며?"
"네 육체는?"
"뭐?"
"네 육체 말이야. 내가 말했지? 지금 네가 쓰고 있는 그건 육체가 아니라니까? 그냥 업을 붙여 만든 덩어리일 뿐이지."
"……그러고 보니."
김현우는 확실히 그녀에게서 그런 말을 듣기는 했었던 것 같았다.
그가 슬쩍 입을 다물자 눈동자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네 육체를 다시 재구성하는데도 엄청난 마력이 든다고. 사람 만드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너 정도 되면 뚝딱뚝딱 만들 수 있는 거 아니야?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했잖아?"
"나는 어디까지나 업에 한해서 전문가인거지, 육체를 만드는 건 내 전문이 아니거든? 내 전문분야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뚝딱뚝딱 만든다는 거야?"
"쩝."
눈동자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신 김현우는 막막하다는 표정으로 제자리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아무것도 없이 3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뭐…… 그래야겠지."
"그건 좀……."
"왜? 그 전에 조금 쉬고 있으면 되잖아?"
"……이 사태를 놔두고 어떻게 편히 쉬냐? 네 말대로라면 지금 탑은 그놈한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 아니야?"
"뭐, 그건 그렇지."
"게다가 이곳에서는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잖아?"
"그것도 맞아."
"그런데 어떻게 쉬겠냐고~!"
김현우가 그렇게 앓는 소리를 하며 탄식을 내뱉었으나 눈동자는 이번에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라고 이런 말을 해주고 싶지는 않은데, 이건 진짜 방법이 없어. 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건 어찌 보면 네 탓도 있는 거라고."
"내 탓?"
"……뭐 굳이 이야기하자면 전부 네 탓은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도 있지만. 아무튼 네 탓도 일정 부분 있다 이거야."
눈동자의 말에 잠시 고민한 김현우는 이내 말했다.
"……설마 업에 먹힌 것 때문에?"
"그것뿐이었다면 그래도 한 달 안으로 어떻게든 해봤을 텐데, 네 영혼을 이리로 데려오고, 또 여기서 네가 수련할 수 있는 육체를 만드는 것까지 마력을 쓰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라고."
"아……."
짧게 탄식하는 김현우.
확실히 들어보니 지금 이 사태는 그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김현우의 잘못이 더 컸다.
……사실 뭐, 애초에 저쪽에서 주는 입장이라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웃기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망했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고, 눈동자는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더니 이야기했다.
"그럼 그동안 수련이나 조금 하고 있는 건 어때."
"수련? 또? 이미 필요한건 전부 얻었잖아?"
"그렇다고 쉬기는 싫다며?"
"……뭐 그것도 그렇긴 하지."
김현우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눈동자는 잠시 기다려 보라는 듯 고민하더니 이야기했다.
"그럼 이참에 수련이나 해. 여러 방면으로 말이야."
"……여러 방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으음…… 내가 직접 설명하기는 좀 귀찮으니까 그냥 한번 경험해 보는 게 어때? 내가 볼 때는 너도 좋아할 것 같은데."
눈동자의 물음에 순간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 김현우.
그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내가 수련을 한다고 해서 마력을 더 사용한다든가 그런 건 아니지?"
"당연하지. 애초에 지금 네가 경험하는 것들은 다 내 '업'이라고. 그냥 내 힘을 쓰는 것뿐이야. 뭐, 저번처럼 네가 업에 먹혀서 존재가 지워질 수도 있는 위기가 온다면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래?"
"그래."
눈동자의 긍정을 들은 김현우는 잠시 생각했으나 이내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알았어."
그녀의 말을 어렵지 않게 수락한 김현우.
그도 그럴 게 사실 고민하고 있어봤자 바뀌는 것은 없었다.
게다가 눈동자가 자신에게 굳이 이런 사기를 칠 리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에 결국 차라리 세 달 동안 기다려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수련을 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었다.
"음, 그럼 간단하게 이것부터 한번 해볼까?"
김현우가 간단하게 수락하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눈동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엇인가를 고르기 시작했고.
이내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그럼 한번 경험해 보고 감상 좀 들려줘."
"……감상을 들려주라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경험할 건 내가 경험하지 못하는 종류라서 말이야. 아무튼 한번 경험해 봐."
눈동자는 그렇게 말한 뒤, 조금 전 그 공간에서 빠져나왔을 때처럼 손가락을 맞부딪혔고, 손가락이 부딪히자마자.
-우우우웅!
김현우의 옆에 떠 있던 자그마한 구체는 새하얀 빛을 내며 김현우를 삼켜버렸다.
그리고-
"아아- 주인님."
"!?"
김현우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여자들이었다.
'이게 무슨-.'
그의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가는 짧은 생각, 허나 김현우는 곧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지금 네가 경험하고 있는 건 난봉왕(難捧王)의 경험이야.]
-골치가 아프다는 듯 두 눈을 감아버렸다.
####
51번 탑의 최상층.
"그런고로. 네가 좀 희생해야겠느니라."
야차에 의해 새로운 봉인주가 씌워져 다시 그녀에게 반항하지 못하게 된 루시퍼는 곧 2주 만에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뭐…… 뭐라고요?"
"……설마 제대로 듣지 못한 게냐? 내 지아비를 살리기 위한 육체로서 좀 희생을 해줘야겠다 이 말이니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야차.
허나 그 무표정함에 언뜻 느껴지는 광기에 루시퍼는 등에 소름이 듣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건 좀……."
"?"
'좆됐다.'
루시퍼는 야차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 할 수 있었다.
당장 고개를 슬쩍 갸웃거리고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최후는 변하지 않지만 우선은 들어주겠다.' 라는 표정을 짓고는 야차.
루시퍼는 이 자리에 앉아 혹시라도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이가 없을까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미령과 하나린.
당연히 그녀들은 전혀 도와줄 생각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옆에는 아브와 노아흐, 그리고 티르가 있었으나 그들도 그저 자신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고 있을 뿐 딱히 도와주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왜 이때 그 녀석은 없는 거야!?'
루시퍼는 머릿속으로 짜증을 내며 종종 자신에게 붙어 있던 청룡을 떠올렸으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이 자리에 없었다.
"혹시 너와 항상 장난을 치는 청룡을 찾는 게라면 유감스럽게도 그 녀석은 현재 9계층에 일어난 몬스터들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으니 여기 올 일은 없느니라."
뭐- 온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말이다.
야차의 말에 루시퍼는 이를 악물고 야차를 바라봤으나 이내 슬쩍 악물던 이를 숨겼다.
여기서 적의를 드러낸다고 해봤자 오히려 본인만 불리해진다는 걸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루시퍼는 이 엄청난 위기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고,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지금 말하는 걸 들어보니까 제 육체를 김현우를 살리는데 쓴다고 하는데…… 제가 들은 게 맞나요?"
조금 전의 사나운 얼굴과는 다르게, 조신한 표정으로 묻는 루시퍼.
그에 야차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느니라."
"그럼 혹시 그 새─ 가, 아니라 김현우의 영혼도 가지고 계신 건가요?"
"영혼을 가지고 있냐고?"
"예. 저도 지금 야차님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소멸한 이를 다시 되살리려면 육체보다도 그의 영혼이 필요-."
"그건 당연히 알고 있느니라."
"그, 그런가요?"
"그런 절차적인 것은 걱정하지 말거라. 적어도 죽은 자를 다시 소생하는 일은 내가 너보다 잘 알 테니 말이다."
"그…… 렇군요."
"그리고 굳이 아까의 질문에 답을 해주자면, 지금 이곳에서 네게 육체를 양도받고 나면 나는 곧바로 김현우의 영혼을 데려올 생각이니 그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야차의 확신이 담긴 말.
'양도가 아니라 강제로 뺏는 거겠지……!'
루시퍼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속으로 어떻게든 살아날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으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좋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 아니야. 좋은 생각이 나질 않아도 생각해야 해. 이,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게 좋지? 자신의 쓸모 있음을 어필해야 하나?'
복잡해지는 루시퍼의 머릿속.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루시퍼가 지금 당장 야차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루시퍼는 51번 탑에 있는 이들과는 기본적으로 적대적이었으며, 봉인주를 찬 뒤에도 그것은 똑같았다.
게다가 김현우가 소멸했을 때 청룡과 손오공을 공격하고 빠져나가려고 했었고, 거기에 덤으로 그녀는 현재 난리 중인 몬스터 웨이브를 막으러 다니지도 않았기에 그들의 관계는 딱히 변하지 않았다.
허나 그 속에서 루시퍼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강신이라면 몰라도 육체를 아예 뺏긴다니……!'
육체를 뺏긴다는 것.
그건 그냥 사실상 원 육체 주인의 영혼을 없애버리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야차라면 자신은 정말 아무런 손도 못 쓰고 그대로 육체를 넘겨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루시퍼는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계책을 짜내기 시작했고.
"저…… 저기!"
"또 왜 그러느냐?"
"저는, 그…… 여자잖아요? 만약 김현우를 이 육체로 되살리면 그도 그녀가 되지 않을까요?"
결국 너무나도 과도한 생각으로 인해 뇌정지가 와 버린 루시퍼의 머릿속에서 나온 최후의 변명은 바로 그것이었다.
"!"
"!"
그리고 그것은 의외로 미령과 하나린에게는 효과가 있었는지 그들의 눈이 조금 커졌고,
"흠, 확실히 너는 봉인주를 깨고 다시 씌우는 바람에 성별이 고정됐었지. 생각해 보니 그런 기억이 있구나."
"네…… 네! 그쵸!"
야차도 생각해 보니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퍼를 바라봤다.
허나-
"뭐, 그래도 걱정하지 말거라."
"네……?"
"없다면 달면(?)되지 않겠느냐? 설마 육체에 다른 영혼도 집어넣을 수 있는데 그걸 못하겠느냐? 뭐…… 조금은 힘들 수도 있지만 말이다."
후후후, 하며 웃음을 짓는 야차.
그에 루시퍼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하며 끝났다는 듯 고개를 숙였고.
"자, 그럼 할 말은 모두 끝난 것 같으니 슬슬 시작하도록 하겠느니라."
야차는 망설임 없이 루시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루시퍼의 머리에 닿으려는 순간-
"자…… 잠깐만요!"
"……또 할 말이 남아 있느냐?"
"아뇨! 그게 아니라…… 찾은 것 같아요!"
"뭘 말이냐?"
"제 육체 말고도 김현우에게 어울리는 육체 말이에요!"
-루시퍼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빛냈다.
402화. 잘 받아가마 (3)
"……모체?"
"네! 분명히 저번에 말씀하셨잖아요? 정령 파벌에는 세계수를 줬고 천사 파벌에는 야훼의 모체를 주었다고.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제 몸보다는 야훼의 모체를 사용하는 쪽이 훨씬 좋을 거예요……!"
루시퍼의 말에 야차는 순간 흐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야기했다.
"어느 면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냐?"
'당연히 제 몸을 안 뺏기는 게 좋은 거죠!'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루시퍼는 곧바로 생각해 두었던 다른 말을 꺼냈다.
"우선 관리기관에서 만들어 주었다는 모체는 애초에 영혼이 들어가지 않은 깨끗한 육체라는 게 중요한 거죠. 보통 영혼이 한번 들어갔다 나온 육체는 아무리 영혼을 성공적으로 안착시켜도 육체에 안착한 사람이 괴리감을 느끼니까요."
"흐음."
야차는 루시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그녀의 말은 야차가 알고 있는 바와 똑같았으니까.
원래 줄곧 맞는 틀에만 끼워져 있다가 맞지 않은 틀에 들어가기 힘든 것처럼, 사람의 영혼도 자신의 육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육체에 들어가면 괴리감을 느낀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일어나든 말이다.
하지만 정말 만약에라도 단 한 번도 영혼이 들어가지 않은 육체가 있다면 되도록 그 육체를 사용하는 쪽이 좋았다.
이론상이지만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육체는 보통 영혼이 들어감에 따라 영혼이 괴리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 영혼에 맞춰 육체가 바뀌어 버리니까.
"……."
잠시간의 침묵.
루시퍼는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하는 야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고, 이내 그녀는 입을 열었다.
"뭐 네 말대로라면 확실히 그 모체를 얻는 편이 좋아 보이기는 하다만…… 이미 천사 쪽에서 모체를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느냐?"
야차의 물음에 루시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들은 모체를 사용하지 못해요."
"이유는?"
"그 모체를 사용하려면 제가 있어야 하니까요."
짐짓 묘한 자랑스러움이 느껴지는 루시퍼의 말에 야차는 설명을 요구했고, 루시퍼는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전부 다 듣고 난 뒤.
"……한 마디로 야훼의 강신은 너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로구나."
"맞아요. 그러니 아직 그쪽에서는 야훼의 모체를 받기만 했을 뿐 사용하지는 못 했을 거라는 거예요."
"흐음……."
또 한 번 고민하기 시작한 야차는 이내 루시퍼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거짓말인 것 같지는 않구나."
"휴우……."
야차의 말에 이제야 한시름을 놓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는 그녀.
허나 야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한숨을 내쉬느냐?"
"네, 네? 그야 우선 제 몸을 빼앗길 상황은 벗어난 것 같아서…… 요?"
"그러느냐?"
"그런……데요?"
다시 불안으로 물드는 루시퍼의 얼굴.
그에 야차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고는 이야기했다.
"그럼 이번에는 천사 파벌에 가서 날뛰어야 하나?"
야차의 말에 루시퍼는 다시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에 관해서는 제게도 좀 생각이 있는데……."
"생각?"
"예."
"한번 말해 보거라."
야차의 말에 루시퍼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내보였으나 이내 결심했다는 듯 야차를 보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고.
곧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야차는 자그마한 미소를 지으며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나쁘지 않겠구나."
"그쵸?"
"그럼 지금 바로 할 생각이느냐?"
"우선 허락만 해 주신다면요."
루시퍼의 말에 야차는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내 얼마 있지 않아서 루시퍼의 제안을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루 뒤의 천계.
"……루시퍼 님?"
"……그래 나야."
"정말로……?"
"정말로, 왜 계속 물어봐?"
"……."
가브리엘은 히스테릭한 표정을 짓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루시퍼를 바라보며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뭐지?'
가브리엘은 갑작스레 돌아온 루시퍼를 보며 의심을 먼저 시작했다.
그는 분명 51번 탑에 있었고, 가브리엘도 그가 죽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고 있기는 했다.
애초에 루시퍼가 죽었다면 그가 조성해놓았던 신전조차 부숴졌을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바뀌어 있을 줄은.'
가브리엘은 멍한 표정으로 루시퍼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보였던 차가운 이미지는 어디로 가고 히스테릭한 모습이 보이는 루시퍼.
순간 가브리엘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루시퍼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나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마력은 분명 루시퍼의 그것이 정확했다.
그렇기에 가브리엘은 천계로 돌아온 루시퍼를 몇 번이고 쳐다봤고.
"우선은 들어가, 이야기는 내 신전 안에 돌아가서 차근차근 해줄 테니까."
루시퍼의 말에 가브리엘은 결국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결국 어리둥절한 상황임이 분명하기는 해도 가브리엘의 입장에서 지금 이 상황은 전혀 나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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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건 좀 아니지 않냐?"
"왜?"
그녀의 물음에 김현우는 기분이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바라보다 이야기했다.
"이건 수련이 아니잖아?"
"왜 수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쓸모가 없잖아!"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는 김현우.
허나 눈동자는 그런 김현우의 버럭하는 모습에도 저번과 같이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이야기했다.
"왜 쓸모가 없어? 너한테라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도대체 저게 어딜 봐서 노네임과 싸울 때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데?"
"당연히 노네임과 싸울 때는 필요 없겠지, 아니면 혹시 아내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내 성적 취향은 동성-."
"난 이성애자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고 눈동자는 그런 김현우를 바라보고는 이야기했다.
"근데 왜 그렇게 광분을 해?"
"……분명 도움이 될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수련을 받으려 했는데 상상이상의 것이 나와서 그래."
김현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조금 전 그가 보았던 모습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
그리고 그것은 여러 의미로 대단했다.
조금만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도대체 남자라는 개체가 이렇게까지 길고 오랫동안 많은 여자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게 놀라웠다.
진짜 눈동자의 말대로 난봉왕(難捧王)이라는 타이틀을 얻기에 전혀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눈동자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아무튼, 너도 좋았던 거 아니야?"
"안 좋았거든?"
"표정은 안 그런데?"
급히 표정을 관리하는 김현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눈동자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게다가 애초에 맨날 아내들한테 기를 빨리는 게 네 일상이잖아? 딱 봐도 눈에 보이길래 조금 불쌍해서 거기에 도움을 주고자 내가 수고스럽게 저 녀석의 경험을 가지고 온 거라고."
대단한 선심을 썼다는 듯 입을 여는 눈동자.
"그것 참 고맙네……. 그런데 그것도 살아남아야 그 뒤를 고민하는 거지, 지금 당장 살아남을지, 아니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걸 수련해봤자 의미 없잖아?"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해도 굳이 지금 당장은 더 이상 수련 관련해서 시킬 게 없어. 게다가 지금 네 상태는 딱 그걸로 최선이라고."
"……그런가?"
"적어도 내가 볼 때는 그래."
"……조금 더 수련을 하면?"
"뭐 역시 안 하는 것보다는 승률이 늘겠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너무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고…… 대충 0.00001% 정도 아닐까?"
"……구체적이지 않다는 것 치고는 너무 구체적인데?"
김현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자 눈동자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한 마디로 지금 당장 네가 수련을 해봤자 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야. 이미 너는 나랑 싸우면서 터득할 수 있는 모든 기교 같은 건 터득한 상태니까."
뭐-
"굳이 수련을 한다고 치면 육체를 얻고 나서 대충 며칠 정도 육체에 영혼을 맞춘다는 느낌으로 수련을 하는 건 괜찮을 것 같네."
"그럼 지금 당장은……."
"아까도 말했지? 지금 네가 노네임에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수련은 다 했다 이거야."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번에도 그랬지만 그녀가 저토록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보면 역시 더 이상 수련할 수 있는 요소는 없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
"그래서 좀 배웠어?"
눈동자의 질문.
김현우는 그녀의 질문이 무엇인지 생각하다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어봤다.
"……갑자기 그건 왜?"
"그냥 좀 궁금해서."
"그게 왜 궁금해?"
"궁금해 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나는 애초에 무성이기는 하지만 결국 따져보면 약간 여성 쪽에 치우쳐져서 그런 업은 얻어 놓기만 하고 경험을 못해 봤거든."
눈동자의 말.
김현우는 그 말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는 듯 몇 번이고 그녀의 눈빛을 바라봤으나 이내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조금?"
"조금이라는 건 조금만 배웠다는 소리야?"
"뭐…… 그냥 대충 느낌만."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갑작스레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한 현자타임에 빠졌으나 이내 순순히 그녀가 궁금해하는 질문에 대답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럼 조금 더 해볼래?"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더 해보라고?"
"여기서 할 일없이 멍 때리는 것보다는 낫잖아?"
"흠……."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고민을 시작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김현우가 현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다른 것.
'아무리 경험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이랑 하는 건 좀…….'
물론 진짜가 아니다.
김현우는 그저 경험을 보는 것이고, 그 난봉왕의 시선으로 그저 그의 경험을 배울 뿐이다.
허나 이 수련의 특성상 우선 제대로 일체화를 하게 되면 경험하고 있는 업 자체가 내가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뭔가 묘한 죄책감이 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거기에 더불어 묘하게 뒤통수가 간지럽고 벌써부터 바가지를 긁히는 듯한 소리까지 들린다.
"……."
뭐, 사실 야차 같은 경우야 바가지는 안 긁지만 미령과 하나린 같은 경우는 은근히 순종적이면서도 철저하게 바가지를 긁는 스타일이다.
심지어 선도 아슬아슬하게 지켜서 화도 낼 수 없는. 철저한 계산에 따른 갈구기 스킬.
"흐음……."
얼마나 고민을 이어갔을까.
눈동자의 눈빛에 슬쩍 지루함이 들어설 때쯤이 돼서야 생각을 끝낸 김현우는 확실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이건 좀 아니야.'
물론 바가지를 긁힐 일은 없다.
거기에 덤으로 들킬 일도 없고.
김현우가 직접 바람을 피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제안을 확실하게 거절하기로 했다.
"……네 말이 맞긴 하네."
"그치?"
"부탁해."
"나도 후기 부탁해~"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지금 당장 그만두라는 '이성'의 제안을 거부한 김현우는 다시 한번 난봉왕의 경험 속으로 들어갔다.
403화. 잘 받아가마 (4)
"……그 말인즉슨, 우선 51번 탑의 잔재는 아예 박살 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어떻게 이곳에 와있겠어?"
루시퍼의 히스테릭한 목소리에 기분이 나쁠 만도 하건만, 가브리엘은 그런 표정은 전혀 짓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 잔재 쪽에 병력을 보내기만 하면 51번 탑은 완전히 끝이라는 소리 아닙니까?"
"아니."
"……?"
"아직 괴물들이 몇 명 남아 있거든."
루시퍼의 말에 가브리엘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말했다.
"김현우의 측근들 말입니까?"
"그래, 그렇게 박살 난 세계에서도 몇 명은 멀쩡하더라고."
루시퍼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치 질린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곧바로 화제를 돌려 이야기했다.
"그보다, 그게 진짜야?"
"그것이라면, 그분의 모체 말씀이십니까?"
"그래. 네가 아까 전에 말해줬잖아?"
루시퍼의 말에 가브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정말입니다. 관리기관의 그 남자는 저희에게 51번 탑의 잔재를 처리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분이 깃들 수 있는 육신을 선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브리엘의 말에 루시퍼는 허탈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든 강신만 시키려고 했던 아버지의 육체를 한 번에 만들어냈다…… 라."
"저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습니다만, 그 모체는 확인 결과 진짜로 그분의 힘을 그대로 담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모체는 어디에 있는데?"
"제 신전 지하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만약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모체에 그분을 강신-."
"아니,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아니시라면?"
가브리엘의 물음에 루시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이야기했다.
"지금 내 몸 상태가 정상으로 보여?"
"……뭐, 우선 성별이 바뀌신 걸 제외하고는……."
가브리엘은 그렇게 말하려다 순간 말을 멈추고는 이야기했다.
"마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으셨군요."
"그래. 그러니까 지금 당장 모체에 그분을 강신시키는 건 무리야. 아무리 적어도 10시간 정도는 필요해."
루시퍼의 말에 가브리엘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10시간 뒤 곧바로 준비를……?"
"그렇게 해. 그때면 내 마력도 전부 회복되어 있을 테니까."
루시퍼의 말에 가브리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몸을 돌려 밖으로 이동했다.
"……."
가브리엘이 가자마자 순식간에 조용해진 신전 내부.
그에 루시퍼는 곧바로 히스테릭한 표정을 지우고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괜히 한다고 했나.'
제일 먼저 밀려드는 후회에 루시퍼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으나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진 않고 생각을 이어나갔다.
'우선 내 생각대로라 괜찮기는 한데.'
루시퍼가 아무런 문제 없이 천계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야차와 다른 이들이 루시퍼를 그냥 보내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루시퍼가 아무런 피해 없이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녀가 야차에게 했던 제안 때문이었다.
'모체를 가지고 올 테니 나를 천계로 보내 달라는 제안.'
야차는 그것을 수락했고, 루시퍼를 천계로 보내주었다.
그 대신.
"……."
자신이 걸고 있는 이 봉인주에 엄청난 숫자의 제약을 걸고.
'이제 15시간 남았나?'
야차의 말대로라면 15시간 뒤에 야차가 따로 조작을 하지 않는다면 이 봉인주는 그대로 루시퍼의 목에서 터져 그녀는 그대로 소멸하고 만다.
그것뿐인가?
야차는 혹여나 그녀가 다른 마음을 먹을 생각을 하지 못하게 여러 가지 행동에 관한 제약을 걸어두었다.
애초에 그런 제약을 걸지 않더라도 루시퍼는 야차를 배신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루시퍼는 야차에게 신임을 얻고 싶어 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 루시퍼는 비빌 언덕이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사실 정말 원래의 상황이라면 이렇게 탈출을 해서 어떻게든 천사들과 머리를 맞대 봉인주를 파괴했겠지만, 이미 그들에게 자신을 대용할 '모체'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마 가브리엘은 내가 야훼를 강신시키면 나를 죽이려 들 거다.'
애초에 루시퍼가 한번 '타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천계에서 다시 최고의 권력을 쥘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강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야훼'를 강신시킬 수 있는 자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모체만 없었다면 루시퍼는 야훼를 자신에게 강신시키는 것으로 자리를 지킬 수 있다.
허나 모체가 있는 이상 이미 그건 불가능하고, 오히려 모체에 야훼를 강신시키는 순간 자신을 죽일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은 확실하다.
'만약 죽지 않더라도…….'
신전 지하에 처박혀서 빛조차도 없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뭐, 지금 당장 거기서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하에 처박혀도 얼마 있지 않아 전부 죽임 당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지금 루시퍼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몸을 비빌 곳이 오히려 김현우한테 끌려갔던 51번 탑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참으로 기묘한 상황.
허나 루시퍼는 낙담하지 않았다.
뭐, 애초에 낙담하지 않았기에 야차에게 점수를 따러 손수 자신의 머리채를 잡았던 김현우를 살리기 위해 모체를 가지러 오지 않았나?
루시퍼는 왠지 모르게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졌으나 이내 곧 그런 기분을 없애고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글퍼지는 것은 모체를 빼돌리고 나서 해도 상관없을 테니까.
그렇게 루시퍼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그녀가 있던 신전을 빠져나온 가브리엘은 자신의 신전을 향해 움직이며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탈출, 탈출이라.'
가브리엘은 돌아온 루시퍼를 떠올렸다.
아무리 봐도 옛날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누가 봐도 이질적인 루시퍼의 모습.
물론 그 안에 느껴지고 있는 마력은 그녀가 틀림없이 루시퍼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기에 우선 의심을 거두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녀는 뭔가 좀 이상했다.
하지만-
'뭐, 그래도 상관없지.'
가브리엘은 딱히 루시퍼가 어떻든 어떻게 변했든, 그리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어차피 그가 루시퍼에게 얻어내야 할 것은 그분의 강신뿐이니까.
만약 루시퍼가 모체에 안정적으로 그분을 안착시켜 주기만 한다면, 이제 더 이상 천계에서 루시퍼는 필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천사였으나 한번 타천한 존재.
가브리엘을 포함한 다른 대천사들이 그를 받들어 준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그분을 강신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지, 다른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분의 강신이 제대로 되기만 하면 된다. 강신만 제대로 되면……'
그렇기에 가브리엘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잡생각을 지워 버리고 단 한 가지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모든 것의 시작은 그분이 강림할 때니까.
'정령들이 습격을 받아서 어떻게 해야 했는데, 이것 참 상황이 잘 됐군.'
가브리엘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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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길드의 최상층.
"……하."
한참이나 집무실 책상에 앉아 보고서를 읽고 있던 김시현은 보기만 해도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보고서를 책상에 툭 내려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점점 감당이 안 되는데?"
"그러게요."
김시현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냐.
분명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은 김현우였으나 이제 김현우보다는 아냐가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 이라는 이미지가 박힐 정도로 그녀는 가디언 길드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정말로 큰일인데. 이 정도는 감당이 안 돼."
"이쪽도 마찬가지다. 감당이 불가능 한 수준이더군."
아냐의 뒤를 이어서 김시현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서연과 한석원.
패도 길드와 암중비약 길드를 제외한, 한국 헌터계를 거의 꽉 붙잡고 있는 네 길드의 길드장은 집무실에 모여서 하나같이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석원이 형, 부산 쪽에 지원 가능해요?"
"아니, 불가능 해. 당장 광주 쪽 막는 것도 인력이 총동원 중이다."
"……패도 길드랑 암중비약 길드를 쓰는 건."
"그쪽 인력은 이미 예전부터 텅텅 비었어."
"미치겠네……."
"이쪽도 고민이에요. 이제는 헌터들의 로테이션이 너무 쉴 새 없이 돌아가서 다들 불만이 극에 달한 상태라……."
각각의 사정을 털어놓는 길드장들.
그 모습을 보며 김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러다 멸망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김시현의 말 한 마디에 무거워지는 분위기.
그제야 그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괜스레 흠흠거리며 분위기를 전환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나저나 오공이랑 청룡은 다시 복귀했어?"
"네. 그 덕분에 우선 구멍이 난 부분은 전부 막았어요."
"확실히 손오공의 분신술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하지."
한석원은 손오공이 한 순간 수백 수천 명으로 불려져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서연은 어두운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뿐이지 시간이 지나면……."
"……."
이서연의 말에 다시금 이어지는 침묵.
그러나 이서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처음 일어날 때부터 점점 늘어나던 몬스터 웨이브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말로 이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듯 끝없이 늘어났고, 지금 당장 헌터들이 허덕이는 상황에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지금 당장 세계멸망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몬스터는 거의 전 세계를 뒤엎고 있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떻다고 했지?"
한석원의 물음에 아냐가 대답했다.
"우선 대부분의 국가들은 어떻게든 몬스터를 막아내고 있는 것 같아요. 다만 이미 몇몇 약소국들은 없어져 버렸죠."
"……."
"게다가 그게 더 문제에요. 약소국들이 전복되서 없어지면 그 몬스터들은 자연스레 이웃국가로 향하게 되니까 더더욱 큰 부담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 덕분에 흔들리지 않던 나라도 위태위태 한다고 하더라고요."
연쇄작용.
그 말에 김시현은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내 주변을 돌아보고는 이야기했다.
"뭐, 다들 너무 그렇게 기죽지 말자, 사태가 심각해져도 이제 믿을 것 하나는 생겼잖아?"
김시현의 말,
"……오빠가 부활할 수도 있다는 소리 말하는 거지?"
"그래, 우선 형만 부활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김시현의 근거 없는 믿음과도 같은 말.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서연을 포함한 다른 이들은 그런 김시현의 말에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믿기지 않지만 그 말을 믿고 싶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걸까?
그래, 물론 그것도 있을 것이었다.
허나 그것보다도 더 큰 이유는 바로-
'왠지, 진짜로 오빠가 온다면 이 사태를 어떻게 해줄 것 같은데…….'
-바로 김현우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였다.
분명 김현우는 여기에 있는 그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은 어떻게든 해결해 버렸던 전적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우선 어떻게든 버텨보자."
"맞아요. 길드장님이 오신다면 분명 어떻게든 해주실 테니까…… 저희는 그때까지만 버텨 봐요."
'하긴, 오빠가 적어도 어떻게 해줄 만큼까지는 지켜봐야지."
그렇기에, 그들은 아직 이곳에 없는 김현우를 원동력 삼아,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c
404화. 잘 받아가마 (5)
"드디어 그분이 다시 강림하시는 건가……."
"아아…… 정말 오래도록 기다려온 일이 이렇게 현실이 되다니…… 꿈만 같습니다."
뒤쪽에서 중얼거리는 천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브리엘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강림이.
'마냑 그분이 루시퍼를 통해 제대로 강림하시기만 한다면.'
가브리엘은 분명 이 천사 파벌이 압도적인 힘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에 덤으로 관리기관에 있는 그 남자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그도 야훼가 제대로 강신하기만 하면 천사 파벌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가브리엘을 포함한 천사들은 그분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다.
"루시퍼는 데리러갔나?"
"그…… 아니, 그녀라면 먼저 신전에 도착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천사의 말에 더더욱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가브리엘.
본인이 어떤 꼴을 당할지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그분을 살리려는 것을 보니 가브리엘의 입장에서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
"이게 무슨?"
신전 앞의 가브리엘은 어느 순간 신전을 지키고 있는 지천사들이 그대로 땅바닥에 박혀 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브리엘이 오자마자 힘겹게 고개를 드는 지천사 중 한명.
그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가브리엘을 보고는 중얼 거렷다.
"가…… 가브리엘 님……!"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배…… 배신입니다! 루시퍼가…… 루시퍼가 배신을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가브리엘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지천사는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도 입을 열었다.
"신전에 루시퍼가 도착했길래 가브리엘 님의 명령대로 그녀를 모체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는데…… 갑작스레 그녀가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다른 인원들은 어떻게 됐지?"
"다…… 다른 인원들도 모조리 당했…… 쿨럭!"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쓰러진 지천사.
가브리엘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신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다른 탑주들도 마찬가지였다.
허겁지겁 뛰어 들어간 신전 안,
그 곳에서 가브리엘은 모체가 놓인 관 위에 있는 루시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 왔네?"
너무나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별다른 경계도 없이 가볍게 인사하는 루시퍼의 모습에 가브리엘은 순간 머릿속에 혼란이 왔으나,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루시퍼…… 네가 지천사들을 저 꼴로 만들어 놓은 거냐?"
더 이상의 존대는 없는 반말.
루시퍼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여기 쓰러져 있는 애들 보면 나한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잖아?"
루시퍼가 그렇게 말하며 쓰러져 있던 천사들을 하나둘 턱짓으로 가리키자 가브리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째서 배신했지?"
"설마, 그걸 정말 몰라서 나한테 물어보는 건 아니지?"
루시퍼의 물음에 입을 다무는 가브리엘.
그녀는 시니컬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설마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야훼를 강신시킬 줄 알았던 거야?"
"루시퍼……!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지랄."
"뭐, 뭐라고!?"
"게다가 너희들이 하나 착각하고 있는데, 어차피 내가 이 몸으로 야훼를 강신시킨다고 해도 너희들이 원하는 아버지는 만날 수 없다니까? 사실 너희도 알고 있잖아?"
"……!!!"
인상을 찌푸리는 가브리엘.
다른 천사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가브리엘은 루시퍼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었기에 더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네 녀석……!! 그렇다고 배신을 해!?"
"……그럼? 죽는 거 뻔히 알고서 그냥 나 죽여 달라고 강신시켜야 돼? 너는 그 정도 대가리 밖에 안 되는 거야?"
루시퍼의 도발에 가브리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순식간에 튀어나갔다.
신전의 안쪽 입구에서 중앙에 있는 루시퍼의 앞까지 순식간에 도약한 가브리엘.
그는 곧바로 자신이 사용하는 빛의 검을 만들어 루시퍼를 향해 내려쳤으나-
까가가가가각!!!!
유감스럽게도 가브리엘의 공격은 루시퍼의 주변에서 펼쳐지는 방어막 덕분에 그대로 막혀 버리고 말았다.
"이건 또 무슨-!"
당황했다는 듯 입을 여는 가브리엘.
루시퍼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설마 내가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너희가 올 때까지 기다렸을까……? 뭐, 사실 지금 몰려온 놈들 정도야 내 손으로도 처리할 수 있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과 모체를 덮고 있는 방어막을 한번 훑고는 미소지었다.
"역시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루시퍼의 말에 분개했다는 듯 검을 잡고 부들거리는 가브리엘.
그리고 그런 가브리엘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짓는 루시퍼.
"언제까지 그 알량한 방어막이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가브리엘의 물음에 루시퍼는 피식 웃더니 이야기했다.
"글쎄다…… 이제 2분 정도 남은 것 같은데?"
"……2분 뒤를 감당할 자신이 있나?"
"너 바보지?"
"……뭐?"
"생각을 좀 해라 가브리엘, 너는 어떻게 내가 없어지고 수장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아직 그렇게 멍청해?"
루시퍼의 독설에 순간 멍한 표정을 지은 가브리엘.
"뭐, 뭐라고?"
"말 그대로야, 가브리엘. 멍청한 생각 좀 그만 하라는 거야. 내가 설마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제 2분 정도밖에 안 남은 방어막을 믿고 너희랑 이야기를 하고 있겠냐니까?"
루시퍼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가브리엘.
그는 이야기하는 도중 급하게 시선을 내려 모체를 바라봤고,
"네 녀석! 그분의 모체를 어쩔 생각이냐!!!"
이내 루시퍼의 방어막 안에 들어가 있는 모체를 보고는 악을 쓰듯 물었다.
"네가 알아서 뭐하게?"
하지만 전혀 대답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입가를 비틀어 올리는 루시퍼.
그 모습에 가브리엘은 어떻게든 방어막을 뚫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이내 루시퍼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그의 앞에 어느 한 물건을 꺼내 놓았다.
"그…… 그건!"
가브리엘은 그 물건이 어떤 것인지를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너도 잘 알지?"
그것은 바로 일전에 김현우가 천계를 탈출할 때 썼던 파란 나침반이었다.
"으아아아아!!!"
미친 듯이 방어막을 향해 검을 내리치는 가브리엘.
그의 표정은 이 이상 천사가 아니라 악마로 치부해도 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시퍼는-
"그럼, 모체는 잘 받아갈게."
"루시퍼어어어어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런 씨바아아아아아알!!!!!!!!!!!!!!!"
가브리엘의 비명이 신전 안을 가득 채웠다.
####
"오우야."
경험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저도 모르게 입을 여는 김현우의 모습에 눈동자는 피식하는 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았어?"
눈동자의 물음에 순간 표정을 정리하는 김현우.
그는 슬쩍 눈을 돌리더니 이야기했다.
"……조금?"
"이번에는 아주 제대로 즐겼나 보네."
눈동자의 질문에 김현우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오른쪽으로 길게 돌리는 것으로 대답할 뿐.
그 모습을 보며 한동안 킥킥거리던 눈동자를 보던 김현우는 이내 입을 열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어?"
"아직 일주일도 안 지났어."
"……실화야? 내가 거기에 있던 건 아무리 짧게 세어 봐도 4박 5일……."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다 이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더니 묘한 탄식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까 그 안에 들어가면 시간이 느려지지?"
"느려진다기보다는 그냥 네 정신이 가속화되는 거지."
"돌겠네……."
다시금 죽상이 되는 김현우의 표정.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말했다.
"다른 수련을 하는 건 어때?"
"다른 수련?"
"뭐…… 요컨대 전투가 아닌, 조금 다른 업들은 이것저것 많거든."
"예를 들면……?"
"뭐 굳이 그렇게 예를 들것이라고 할 것 없이 애초에 업이라는 것은 아주 간단한 발견부터 시작해서 위대한 것까지 모두 업이 되니까. 아마 네가 찾는 건 전부 있을 것 같은데?"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했다.
'다른 업이라…….'
허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김현우는 딱히 다른 일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기에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 딱히 얻어 보고 싶은 업은 없는데……. 그냥 분류를 몇 가지 말해보는 게 어때."
"흐응…… 그래? 그렇다면야……."
김현우의 말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한 눈동자.
허나 얼마 있지 않아 그녀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뭐, 그럼 너희 탑…… 아니, 정확히는 네가 살았던 9계층에 관한 업은 어때?"
"뭔데?"
"정치 관련 업인 것 같은데."
"정치 관련 업?"
김현우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눈동자는 자신이 찾은 업을 읽으려는 듯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우선 이름은 아돌프 히틀-."
"그건 안 하는 걸로 할게."
말이 나오자마자 곧바로 받아치는 김현우.
"왜?"
"그냥, 이름만 들어보니 대충 누구인지 알 것 같아서, 게다가 별로 그 사람의 업을 경험해 보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순간 묘한 표정이 되었으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다른 업을 좀 찾아보지 뭐."
그 뒤로 이런저런 업을 찾기 시작한 눈동자는 이건 좀 괜찮은 게 있다 싶을 때마다 김현우에게 업을 추천했으나 김현우는 전부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냥 하기 싫은 거 아니야?"
눈동자의 물음에 김현우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이야기했다.
"그러게, 아무리 들어도 딱히 이거다 싶은 게 없는데."
"취미가 전혀 없어?"
"……뭐, 그렇지?"
생각해 보면 김현우의 삶은 딱히 취미라는 게 존재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 고아원에 버려졌을 때부터 그는 좆같은 원장을 피해 어떻게든 홀로 생존했으며 그 뒤에는 군대에 간 뒤 곧바로 탑에 끌려 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당연한 이야기지만 탑 안에 들어갔을 때 그가 나름대로의 취미 생활을 즐길 만한 여건은 전혀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그저 하루 종일 탑을 도는 것이 일상.
뭐, 한때는 중2병이 늦게 와서 말도 안 되는 무술을 만들어서 놀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취미라기보다는 중2병의 한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밖에 나왔을 때는?'
초반에는 게임이고 인터넷이고 이것저것 취미를 붙일 만한 걸 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어느 시점부터 등반자니 뭐니 하는 놈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점점 할 시간이 없어졌다.
거기에 어떻게든 탑주를 처리하고 이제야 좀 쉬나 했더니 곧바로 관리기관이라는 놈들이랑 엮여 이렇게 난리를 치는 중이 아닌가?
"……내 인생 이렇게 보니까 왜 이렇게 현타가 오지."
김현우는 갑작스레 현자 타임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며 급하게 고개를 흔들었고,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냥 난봉왕의 업이나 하나 더 경험할래? 아직 몇 개 남아 있는데."
"……."
그 물음에 김현우는 이번에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0.1cm 정도 내렸다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405화. 잘 받아가마 (6)
51번 탑의 최상층.
"이게 그 모체인 게냐?"
"예."
루시퍼의 말에 야차는 관 안에 있는 육체를 한번 바라봤다.
그 어느 특색도 없는, 그저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인 육체.
허나 야차는 이 관 속에 들어 있는 육체가 얼마나 잘 만들어져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어느 영혼도 들어가지 않은, 깨끗한 육체라는 것을.
"확실히 이 육체가 훨씬 나아 보이는구나,"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야차.
그에 루시퍼는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럼, 이제 김현우를 살릴 준비는 모두 끝난 건가요?"
"뭐, 그렇구나."
"그것 참 잘 됐네요."
"흐음, 그렇느냐?"
웃음인지 무엇인지 모를 표정으로 루시퍼를 바라보는 야차.
그녀의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의심을 읽어낸 루시퍼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제 이쪽을 배반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제 상황은 이미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더 이상 비빌 곳이 없기도 하고요."
루시퍼의 말에 야차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확실히 그때 듣기는 했지."
루시퍼가 천계로 떠나기 전,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 야차에게 한번 늘어놨던 적이 있었기에 야차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퍼의 말을 수긍했다.
적어도 그때 그녀가 한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야차는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혹여나 그녀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더라도 루시퍼의 목에 걸려 있는 봉인주는 철저하게 그녀를 구속해 줄 것이었기에 야차는 루시퍼에게서 신경을 거뒀다.
"이것만 있으면 가디언을 살릴 수 있는 건가요."
야차의 긍정 뒤에 곧바로 질문을 던지는 아브.
그에 야차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로서 모든 준비는 끝났느니라. 이제 남은 건…… 영혼을 데리고 오는 일 뿐이지."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야차.
아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했다.
"우선 저번에 말해주셨던 장치는 만들었어요."
"만드는 데는 성공했느냐?"
"예. 우선은요."
아브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이건……."
"말했던 물건이에요."
아브가 꺼내놓은 것.
그것은 육분의와 비슷한 형태의 물건이었다.
"말씀대로 이곳에 그 사람의 마력이 머물렀던 물건을 놓기만 하면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이에요."
"정말로 능력을 증폭시키다니, 대단하구나."
"아뇨. 이건 굳이 말하면 제 능력보다는 야차님이 주신 보패(寶貝) 덕분에 만들 수 있던 것이라 저는 그저 이 보패의 능력을 조금 더 증폭시킨 거예요."
아브의 말에 미소를 지은 야차는 더 이상 시간을 끌 것 없다는 듯 자신의 품에서 부서진 염주를 꺼냈다.
"정말 그거면 되는 겐가?"
노아흐의 물음.
야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에도 설명했듯이 '천칭보패(天秤寶貝)'는, 그 사람의 영혼이 그 어디에 있던 영혼이 소멸하지만 않으면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매개체를 통해 그 영혼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는 물건이니라."
애초에-
"그의 영혼이 아직 소멸하지 않고 살아 있는 사실도 그 천칭보패를 이용해 찾아낸 것이지."
괴력난신은 그렇게 말하며 부서진 염주 조각을 망설임 없이 육분의 위쪽에 올려 두고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뭐, 그때에는 결국 보패의 힘이 부족해 김현우의 영혼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그 보패의 능력을 증폭했다면. 아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혼을 찾고 나면."
"준비해 놨던 세계수의 마력을 사용할 것이다. 혹시라도 마력이 모자라지 않도록 정령 쪽에 있던 것을 싸그리 가져왔으니 그 마력이 부족할 일은 없겠지."
"나침판도 바로 좌표를 입력할 수 있게 준비해 놨어요."
아브의 말.
그에 야차는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아브가 꺼내놓은 육분의를 향해 손을 올리곤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보패를 가동시키겠느니라."
"……딱히 모체에 별다른 준비는 해 놓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미령의 물음.
그에 야차는 고개를 끄덕이곤 이야기했다.
"원래라면 분명 모체에도 이런저런 준비를 해야 한다만 저렇게 깨끗한 모체일 경우에는 오히려 우리가 손을 대는 쪽이 더 좋지 않으니라."
야차의 설명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미령.
그 모습을 한번 바라본 야차는 이내 자신의 손에 마력을 모아 보패에 마력을 집어넣기 시작했고.
우우우웅-!
곧 마력을 집어넣은 보패는 순식간에 엄청난 공명음을 내며 푸른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와 별개로 그저 침묵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이들.
야차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미령과 하나린은 저도 모르게 양 손을 꾹 붙잡고 있었고, 아브와 노아흐, 그리고 티르와 루시퍼는 육분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우우웅-!!!
모두가 긴장하는 순간에도 끝없이 공명음을 토해내는 육분의.
그렇게 얼마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
"……."
"……."
"……."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침묵을 깨고-
"드디어 찾았느니라."
-마침내, 야차가 입을 열었다.
####
"저기 말이야."
"왜?"
김현우의 말에 대답하는 눈동자.
업의 경험이 끝난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이제 슬슬 궁금해져서 불어보는 건데 말이야. 이 난봉왕이란 놈…… 인간은 아니지?"
"……그건 왜?"
"아니. 솔직히 인간이 이렇게……."
"……이렇게?"
"그 뭐라고 해야 하지…… 이렇게 위대하다…… 아니, 위대하는 말은 조금 이상한 것 같고."
한참이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김현우는 이내 이야기했다.
"……미친놈이라고 말해야 하나?"
"아니, 갑자기 뭘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눈동자의 물음에 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당연히 이놈의 업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내가 봤을 때 이놈은 인간이 아니야."
"그러니까 왜?"
"싸움도 아닌데 일대 다수를…… 그것도 10명 정도가 아니라 수십 명이나 되는 다수를 전부 상대하는 게 평범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서 물어보는 거야."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확실히…… 그건 좀 대단하지."
"그래서, 아무튼 이 난봉왕이라는 놈은 인간이 아닌 게 맞지?"
"아니, 인간인데?"
"뭐?"
"인간이야. 뭐 신의 피가 흘러들어간 반인반신도 아니고, 그냥 어디를 봐도 평범한 인간이라고 볼 수 있지."
"……실화야?"
"그럼 이런 걸로 굳이 거짓말을 칠까?"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입을 다물었다.
뭐…… 확실히 지금 이 주제는 딱히 거짓말이라는 게 필요한 주제는 아니긴 했다.
그렇기에.
"……이 새끼 정체가 뭐야?"
김현우는 이내 순수한 궁금증을 담아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지난 몇 번간 난봉왕의 경험을 얻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야 난봉왕이 무슨 놈인지도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므흣한 광경을 멍하니 지켜봤을 뿐이었으나.
'…….'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이 난봉왕이라는 놈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했다.
김현우는 적어도 난봉왕의 업을 10개 이상 들어가 봤고.
그 10개 이상의 업에서 난봉왕은 그 이름이 가져다주는 위명답게 일타 수십 피를 기본으로 깔고 들어갔다.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압도적인 위업.
김현우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자 눈동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뭐, 아무리 네가 그렇게 생각해도 난봉왕은 그냥 인간이야. 딱히 그 인생을 보면 특이점이라고 할 만한 게 존재하지도 않고, 무슨 특별한 힘을 받지도 않았어."
"……거참 대단하네."
그냥 야설주인공이네.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이야기했다.
"이제 며칠 남았어?"
"2일."
"……2일 남았다고?"
"아니, 네가 거기 들어갔다 나온 지 이제 2일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소리야.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눈동자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한테 계속 얼마가 지났냐고 물어본다고 한들 시간이 흐르지는 않아."
"쩝."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김현우.
눈동자는 그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근데 왜 그렇게 자주 물어봐? 정작 업을 경험할 때는 아예 생각도 안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 같더니만."
"나도 그랬으면 계속 물어보지는 않았겠지."
확실히 난봉왕의 업은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감탄이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현우가 거기에 완전히 집중할 수는 없었다.
결국 김현우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밖의 일이었으니까.
"밖의 상황은 알 수 없다고 했지?"
"뭐, 정 궁금하다고 하면 알아볼 수는 있지."
"……만약 그렇게 해서 알아보면 내가 나갈 시간은 더더욱 늦춰지는 거고?"
"정답."
"씹."
인상을 찌푸리는 김현우.
허나 그는 곧 입을 열었다.
"아주 조금만 보는 건?"
"……뭐?"
"아주 조금만, 뭐…… 예를 들어 무슨 상황인지만 슬쩍 보는 건 조금 마력이 덜 들지 않을까?"
김현우의 물음에 눈동자는 순간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이야기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역시 그런 건 안 되겠지?"
"'안 되겠지?' 가 아니라 당연히 안 되는 거야. 우선 정신이라도 내보내려면 무조건적으로 마력은 많이 들게 되어 있다고."
눈동자의 말.
그에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갇혀있으니까 진짜 돌아버리겠네."
"난봉왕의 경험이나 계속 쌓으면 되잖아?"
"걔는 업을 그렇게 봤는데…… 아직도 남은 업이 있다고?"
"뭐…… 이제 큰 건 몇 개 없고 작은 게 몇 개 있지."
"작은 거?"
"일타 이피랑 일타 삼피 정도가 남았네. 우선 이거라도 하고 있는 게 어때?"
"그거 말고 다른 할 건 없지?"
"네가 뭔가에 관심이 있다면야 해도 되겠지만…… 딱히 다른 데는 관심이 없다며?"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그거라도 하고 있지 뭐."
"그래, 너무 밖 생각만 하지 말고 우선은 쉬어. 결국 쉬는 것도 네 컨디션에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야."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쳤고.
손가락을 침과 함께 김현우는 또 한 번 주변이 어둡게 물드는 것을 깨달으며 느긋하게 다음 업이 재생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저기.]
한참이나 업을 경험하던 도중 들려오는 눈동자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순간 입을 열었다.
"왜?"
[지금 좀, 문제가 생겼어.]
"문제?"
[그래, 문제. 좀…… 뭐라고 할까…… 지금 상황에 대해서 굉장히 좋은 일이기도 한데…… 너한테는 굉장히 안 좋은 문제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하는 눈동자.
김현우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김현우의 물음에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듯 신음을 흘린 눈동자는 이내 말을 아끼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선 꺼내줄게.]
눈동자는 그렇게 말한 뒤 김현우의 대답을 채 듣지도 않고 그를 업 밖으로 꺼냈고.
"……."
"……."
"잘 지냈느냐?"
김현우는 눈동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슬쩍 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미령과 하나린, 그리고 야차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
-김현우의 나지막한 탄식이 눈동자의 귓가를 울렸다.
406화. 딱 기다려라 (1)
"……야차?"
"오랜만이구나."
김현우의 멍한 목소리에 답한 야차.
그는 이내 시선을 돌려 야차의 양 옆에 있는 미령과 하나린을 바라봤다.
"너희들도……."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서방님."
"잘 지내신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하네요, 서방님."
"……."
김현우는 순간 그녀들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눈동자를 바라보고 물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물론 입을 열어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김현우는 그저 눈빛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상황을, 김현우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런 김현우의 눈빛에 눈동자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는 갑자기 검지를 들어 자신을 가리키곤-
'너'
그리고는 곧바로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스윽 그었다.
'좆됐어.'
'아…….'
그런 눈동자의 사인을 본 김현우는 그녀가 전한 뜻을 혹시 자신이 잘못 해석한 게 아닐까 싶었으나-
"……."
"……."
"……."
아무래도 그녀들의 뜬눈을 보아하니, 김현우는 자신이 눈동자의 뜻을 아주 훌륭하게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나 김현우는 지금도 최대한 머리를 굴리며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고. 곧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만 있어 봐. 좀 이상한데?'
생각해 보면 김현우는 난봉왕의 업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래. 그건 맞다.
그리고 그 업을 경험하는 것을 야차를 포함한 미령과 하나린에게 걸렸을 때, 당연히 그녀들이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녀들은 내가 경험하고 있는 업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눈동자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으니 생각해 보면 그런 업을 경험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있겠지.
허나 그런 업을 직접 경험하는 모습을 볼 수 는 없었을 것이었다.
한 마디로, 지금 이 상황은 김현우가 충분히 말빨로 무마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뜻.
김현우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찰나에. 김현우는 눈동자의 손짓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를 필사적으로 가리키는 손짓.
김현우는 그녀의 필사적인 손동작을 보고는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고.
"아……."
김현우는 눈동자가 손짓하는 저 너머에 있는 거대한 스크린을 보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물론 마력으로 만든 스크린은 지금 당장 하얀 백지를 띄우고 있었으나 대충 저 스크린의 존재를 깨달은 것만으로도 김현우는 지금 상황을 이해했다.
너무 완벽하게 이해해서, 다시 머리를 리셋시켜 버리고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이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 끝에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첫마디를 해야 될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김현우는.
"미안……."
왠지 모르게 그 한 마디를 남기며 고개를 숙였다.
####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잠시 뒤.
"……그럼 우선 51번 탑이 완전히 박살 났는데…… 9계층은 어떻게든 살아 있다 이거지?"
"맞느니라. 물론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조금 위태위태한 상황이니라."
"세계 멸망 직전이야?"
김현우가 심각하게 물어보자 야차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구나, 뭐 지금처럼 계속해서 몬스터가 늘어나면 정말로 9계층이 멸망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다른 애들이 막고 있어서 그 정도라는 거지?"
"그렇느니라…… 솔직히 오공과 청룡, 그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정말 빠르게 멸망의 길을 걸었을 수도 있느니라."
그녀의 말에 김현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래서, 몬스터가 갑작스레 그렇게 많이 생기는 원인은 알아냈어?"
"원인이라면야…… 당연히 아브에게 들어서 대충 알고 있느니라. 다만, 여기서 전부 설명할 수는 없겠구나."
"왜?"
"이유가 너무 많아서 말이다."
"너무 많아?"
김현우의 되물음에 야차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로는 그렇느니라.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유를 뽑는다면…… 그래, 9계층이 혼자 딸랑 남은 것 때문이라고 하더구나."
"혼자 남은 것 때문?"
"너도 알다시피 탑의 계층은 서로 다 다른 생태계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그건 탑이라는 거대한 하나로 통제되고 있지 않느냐?"
"……그렇지?"
"근데 그런 상황에서 9계층만 살아남은 것이니라. 동물로 치자면 머리와 꼬리는 완전히 사라지고 몸통만 남은 거라고 보면 되겠지."
야차의 설명에 김현우는 어렵지 않게 탑이 무슨 상황에 빠져 있는지를 깨닫고는 입을 열었다.
"아브와 노아흐가 그 이외에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어?"
"최대한으로 복구 중이기는 한데, 그 상황에서 자신들 선으로는 이게 한계라고 하더군."
"그럼 이미 막을 수 없다는 소리야?"
김현우의 물음에 야차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니라. 다만 그것에 관해서는 아브와 노아흐에게 직접 듣도록 하거라, 어차피 나도 9계층의 재건에 대해서는 그리 깊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보니 제대로 듣지를 않아서 말이다."
야차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이내 곧 생각을 정리하며.
"……그런데, 너희는 뭐 하고 있냐."
자신의 양옆에 꼭 달라붙어 있는 미령과 하나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나 김현우의 답변에도 드물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양옆에 꼭 붙어만 있는 미령과 하나린.
그에 야차는 그녀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냥 놔두거라. 지아비가 한 순간 죽은 줄 알았다가 다시 만났는데 그 반응이 정상 아니겠느냐?"
"아니 뭐 딱히 나도 뭐라고 할 생각까지는 없어."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양옆에 붙어 있는 하나린과 미령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을 이어나간 뒤, 이내 질문했다.
"그럼, 지금 현재 상황을 정리해보면 너희들은 나를 찾으려고 새롭게 자란 세계수를 박살 내고, 천사들이 받았던 그 야훼의 모체까지 얻어서 나를 데리러 왔다 이거지?"
"맞느니라."
"그리고 세계수와 그 모체는 노네임이 다른 파벌들에게 나를 죽이라는…… 정확히는 51번 탑의 잔재를 없애라는 선물로서 준거고?"
"그것도 맞느니라."
"……왜 굳이 그렇게?"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차의 말을 들어보면 노네임은 51번 탑을 깨끗하게 날려 버렸고. 그의 힘이라면 딱히 다른 파벌에게 51번 탑의 잔재를 부수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접 해결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었다.
근데 왜?
"아마 그 미친놈은 잔재를 못 찾으니까 그럴 거야."
김현우가 고민하고 있을 때 들린 눈동자의 목소리에 그는 답했다.
"못 찾는다고?"
"그래, 애초에 순수한 마력 자체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긴 한데…… 딱히 뭔가를 탐지하는 건 또 다른 문제거든. 특히 지금 9계층처럼 아예 차원 단절로 도망가 버리면 더 찾기 힘들겠지."
"그래서 다른 파벌에게 시켰다 이거야?"
"그렇지. 아마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기 전, 치워야 할 쓰레기한테 혹시라도 구르는 재주가 있을까 싶어 한번 맡겨본 게 아닐까 싶은데."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세계수랑 야훼의 모체가 될 수 있는 육체를 만들어준다고?"
"내가 저번에 말했지? 할 수 있는 분야가 다르다고. 적어도 그 미친놈에게 육체를 만들거나 세계수를 되살리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거겠지."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렇구나."
"……뭐야? 왜 날 봐?"
"아니, 그냥."
어물쩍 넘기는 김현우.
눈동자는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으나 이내 쯧 하고 혀를 차는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야차라고 했던가?"
"맞느니라."
"그럼 지금 9계층에는 저 녀석의 육체가 되어 줄 모체가 있는 거야?"
"그렇느니라. 영혼을 데려가기만 하면 곧바로 되살릴 수 있게 해놨느니라."
야차의 말에 눈동자는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김현우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축하해, 계속 언제 나갈 수 있냐고 물어보더니 지금 당장 나갈 수도 있겠는데?"
"준비는 다 끝난 거야?"
"들어 보니까 그렇네. 애초에 네가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포탈을 만드는 것도 있었지만 육체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있었거든."
근데-
"포탈은 이미 저쪽에서 열고 들어왔고, 육체도 마찬가지로 내가 아니라 그녀석이 만든 거라고 생각하면 내가 만든 것보다는 훨씬 잘 만들었을 테니, 바로 가도 될 것 같은데?"
"그래……?"
눈동자의 말에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우.
그녀는 그런 김현우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가기 전에, 네가 꼭 들어야 할 내용이 있으니까 그것만 듣고 가도록 해."
"……들어야 할 내용?"
김현우의 되물음에 눈동자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
51번 탑의 최상층.
아브는 아무런 반응 없이 있는 육분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잘 도착했을까요?"
그녀의 물음.
노아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뭐, 잘 도착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그렇겠죠?"
아브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육분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우우웅!
육분의에서 환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
환한 빛은 순식간에 앞으로 솟아나 거대한 포탈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아브와 티르, 그리고 노아흐는 저도 모르게 만들어지는 포탈에 집중했다.
그리고-
우우우웅!
거친 공명음과 함께, 아브는 포탈 안에서 야차를 비롯한 미령과 하나린이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돌아왔느니라."
가벼운 인사.
아브는 곧바로 물었다.
"가디언의 영혼은 찾았나요?"
그 물음에 야차는 대답하는 것 대신 자신의 품 안에 있는 구슬을 내밀었고, 아브는 순간 그 구슬에 아주 익숙한 마력이 풍긴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이야기했다.
"성공했군요!"
"당연하느니라.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영혼을 찾았다고 말이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야차는 이내 구슬을 꾹 쥐고는 시선을 돌려 루시퍼가 가져왔던 관을 바라보고는 슬쩍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루시퍼는 어디 갔느냐?"
"아, 루시퍼라면…… 자기도 9계층 일을 조금이라도 돕겠다면서 내려갔어요."
"흐응……."
아브의 말에 야차는 순간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피식 웃고는 곧바로 관을 향해 다가가 망설임 없이 관 뚜껑을 열어젖혔다.
관 뚜껑을 열어젖히자마자 보이는 것은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육체.
그 육체를 바라보고 있던 야차는 이내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구슬을 육체의 심장 위에 올려 두었고, 이내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시작된 침묵.
야차의 목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지고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그 짧은 순간.
우우우웅!
야차의 목소리만 들려오던 그 공간에 아까 전에 들렸던 공명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육체 위에 올려져 있던 구슬에서 무엇인가 빠져나오더니 이내 육체를 향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
육체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407화. 딱 기다려라 (2)
처음에는 분명 밋밋하기만 했던 육체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분명 특별할 것 없는 얼굴의 골격이 비틀리며 그들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을 만들어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몸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변화하는 육체.
우드득거리며 소름 끼치는 소리가 연속해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 마지막-
"씹, 존나 아프네."
-관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김현우는 육체를 얻고 완전히 부활 할 수 있었다.
####
"흐음……."
김현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어딜 봐도 거울에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자르기 싫어 대충대충 잘랐던 머리도 그대로였고, 그냥 그럭저럭 평범하게 생긴 외모도 그대로였다.
키도 마찬가지.
몸에 있는 근육을 생각해봤을 때, 체중계는 재보지 않았으나 아마 체중도 딱히 변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완벽하네."
김현우는 시험 삼아 자신의 손을 쥐었다 피며 중얼거렸고, 그것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야차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틀림없이 마음에 들 거라고 말이다."
그녀의 물음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 애초에 너무 위화감이 없어서 내가 다른 육체에 들어온 건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원래 내가 있던 육체에 들어온 것 같아."
"그건 당연하느니라. 애초에 네 모체는 영혼에 맞게 재조정이 가능한 육체니 말이다. 아마 네가 생각하는 네 모습을 그대로 투영했을 게다."
"그런 거야?"
"그런 게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한 야차.
김현우는 마찬가지로 어깨를 으쓱이며 이내 거울에서 시선을 돌려 아브와 노아흐, 그리고 티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육체는 이걸로 됐고. 우선 당장 상황 좀 설명해줘. 야차한테 듣기는 했는데 조금 더 자세히 들어야 할 것 같으니까."
"물론이에요!"
김현우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 아브는 김현우가 한 번 소멸하고 나서 있었던 일을 또 한 번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설명을 차근차근하게 듣고 있던 김현우는 아브가 말을 끝내자마자 입을 열었다.
"우선 노네임이 51번 탑을 박살 낸 것 까지는 들었고, 마찬가지로 9계층이 위기라는 것까지는 들었는데 지금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없는 거야?"
그 물음에 아브는 살짝 고민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있기는 해요."
"있다고?"
"네. 다만 저희들이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 마법진만 가득 만들어서 대처하고 있는 건 그 방법을 실행하려면 지금 이 보안을 풀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보안을 푼다는 건……."
"아까도 설명했다시피 지금 이 9계층이 살아남은 이유는 탑이 공격받자마자 티르가 한 조언처럼 차원을 완전히 단절시켜 9계층을 통째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이에요."
음-
"정확히는 이동시켰다기보다는 숨겼다고 보는 게 좋지만…… 아무튼 조금 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지금 제가 말한 보안은 한 마디로 9계층을 보이지 않게 만든 거예요."
아브는 잠시 말을 끊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생긴 거죠."
"……그것도 듣기는 들었어. 뱀으로 치면 머리와 꼬리가 사라지고 몸통만 남은 격이라 이거지?"
"음, 그것보다도 심각해요. 이 경우는 그냥 뱀을 15등분 했는데 그 중 한 토막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상황이 된 거니까요."
"……."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어요. 지금 이 문제는 9계층만이 남아 있어서 탑에 연계되었던 마력과 마법진들이 자연스럽게 연계되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부작용이니까요."
"뭐야, 그럼 마력 때문에 그러는 거야?"
"네, 하지만 마력 때문이라고 마력을 끊어 버리기라도 하면 9계층은 지금보다 빠른 속도로 몰락할 거예요. 저번에 한번 설명 드렸었죠?"
확실히, 이 안건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아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번 들은 적이 있기는 했다.
"아무튼 그런 상황이라 결론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어요. 그냥 다른 몸통을 만들어서 탑의 형색을 다시 갖추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다만 문제는 이렇게 모습을 감춘 상태로는 탑을 만들기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인거죠."
"……탑을 만드는 게 그렇게 빠르고 간단해?"
"당연히 그렇지 않죠. 다만 이번에는 탑을 안정시키는데 당장 도움을 주실 분들이 많으니까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지금 시점에서 가장 문제인 건 결국 노네임인 거네?"
"맞아요. 거기에 덤으로 정령이랑 천사 쪽이 문제죠."
"……? 거기는 왜? ……아."
김현우는 그렇게 묻다 말고 새삼스럽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면 눈동자와 같이 있을 때 그때의 상황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세계수랑 모체를 훔쳐왔다고 했지?"
"세계수는 야차님이 직접 청룡과 손오공을 이끌고 가서 개박살을 내버리셨고, 모체는 루시퍼님이 침입해서 가져오셨어요."
"……? 루시퍼가?"
"그건 내가 설명해주겠느니라."
김현우가 순간 놀라며 묻자 야차는 곧바로 입을 열며 루시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그 이야기를 듣던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마디로 비빌 곳을 우리로 정했다 이거네?"
"그렇느니라. 머리가 생각보다 잘 돌아가더구나."
"……그럼 루시퍼를 포함해서 손오공이랑 청룡은 아래에서 열심히 몬스터 웨이브를 막고 있다 이 말이지?"
"맞아요."
아브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고 있던 김현우는 물었다.
"이대로 가면 대충 얼마 정도 버틸 수 있어?"
"얼마 정도…… 라시면?"
"말 그대로, 이렇게 은신한 채로 얼마 정도를 더 버틸 수 있겠냐 이거지."
"얼마 정도라……."
고민하기 시작하는 아브.
허나 그런 아브의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미령이 입을 열었다.
"서방님, 아마 이대로 간다면 9계층은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할 겁니다."
"……한 달을 못 버텨?"
"예. 이미 작은 국가들은 몬스터 웨이브에 의해 완전히 몰락했고, 그 옆에 있는 국가들은 멸망한 국가에서 몰려오는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골치를 썩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최선을 다해 지원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거기에 청룡과 손오공, 그리고 루시퍼까지 가담한 거 아니야?"
"하루마다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는 숫자가 점점 커지고 있는 추세라 더더욱 막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완벽한 멸망이 한 달 남았다는 거지. 실제로는 지금 당장 9계층은 멸망에 접어들고 있어요."
미령과 하나린의 말.
그에 김현우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버티고 버텨도 한 달…… 게다가 실질적으로 한 달이 아니라 지금 당장 멈춰야 할 판이라 이거지.'
사실 이 고민을 할 것도 없었다.
아브가 결국 보안을 풀지 못하고 이렇게 숨어 있는 이유는 바로 51번 탑을 노리고 있는 노네임 때문이고, 이 본질적인 문제는 노네임을 처리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깊게 들어가던 고민을 끝냈다.
어차피 그가 어떻게 고민한다고 해봤자 나오는 결론은 하나다.
"그럼, 바로 준비해볼까."
그것은 바로 노네임을 죽이는 것.
어차피 모든 본질적인 해결책은 노네임을 죽이는 것이었다.
노네임을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더 이상의 생각을 중단했다.
####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그 위에 지어져 있는 관저.
마치 이 세계의 중심을 잡는 듯 홀로 세워져 있는 관저 안쪽에는 그 남자가 변함없는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툭- 툭-
그와 함께 들리는 것은 남자의 검지가 가죽을 툭툭 치는 소리.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 동안이나 가죽 의자를 치며 시간을 때우고 있던 남자는 서서히 두 눈을 뜨고는 중얼거렸다.
'……슬슬, 전부 처리할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저번을 떠올렸다.
이미 그는 관리기관 산하에 있는 탑주들을 처리했다.
태양신 '라'도 남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괴인왕'도 마찬가지로 그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며 관리 기관 산하 중에서 가장 오래된 탑주인 서고장도 결국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파멸이라…….'
남자는 서고장이 소멸하기 직전 말했던 단어를 떠올렸다.
그는 분명 자신에게 얼마 있지 않아 스스로가 파멸할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남자는 그 말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세상에서 자신을 파멸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다만 그에게 있어서 신경 쓰이는 것은 바로 그가 죽이지 못한 한 명 때문이었다.
'……밀레시안.'
맨 처음 '양식장'을 만들었을 때 살려두었던 이들 중 한 명인 그는 도대체 어떻게 낌새를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눈을 피해 그대로 몸을 숨겨 버렸다.
물론 고작 한 명이 지금 시점에서 몸을 숨긴다고 해서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할 수는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으나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옆에 두지만 않는다면 그 녀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테지.'
헤르메스가 결국 자신의 업을 이렇게나마 박살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가 그에게 결국 '권한'을 줬기에 생겼던 일이었다.
그 말인즉슨 밀레시안이 아무리 때를 기다리며 몸을 숨겨봤자 그가 이번처럼 다른 이들에게 편의를 위해 권한을 넘기지만 않으면 밀레시안이 기다리는 때는 절대 오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남자는 밀레시안에게서 신경을 끄고 이제 남아 있는 파벌들을 떠올리곤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구르는 재주도 없는 머저리들이었나.'
처음 그들에게 선물을 줬을 때만 해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네임은 분명 강했으나 부족한 것은 있었고 아무리 힘없는 머저리들이라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대표적으로 헤르메스가 그러했다.
그는 남자가 가지고 있지 않은 넓은 탐지 능력과 이동 능력을 동시에 겸비했었으니까.
허나 지금 그가 51번 탑의 잔재를 처리하라고 맡겨놓은 이들은?
'……이제 얼마나 지났지?'
소식이 없었다.
적어도 그로서는 꽤 많은 시간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서 오는 보고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때까지 말이 없다는 것은 그 녀석들이 아직 51번 탑의 잔재를 찾아내지 못했거나.
'찾아냈더라도 실패했거나…… 인가'
물론 찾아내기만 했다면 그래도 좀 도움은 됐을 것이다.
만약 찾아냈는데 실패한 것이라면 자신이 가서 직접 멸망시키면 되는 거니까.
허나 찾아내는 것조차 실패했다면, 그건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머저리들과 같았다.
"……쯧."
한 번 더 혀를 찬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시간은 충분하게 주었고, 그로서는 딱히 더 이상 기다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걸 언제까지나 붙잡고 있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남자는 저번에 멸망시켜 버렸던 악마 파벌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제 남아 있는 나머지 파벌을 모두 없애 버리고, 또 한 번 업을 모을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우우우웅-!!!!
그는, 포탈을 열었다.
408화. 딱 기다려라 (3)
51번 탑의 최상층.
"확실히 그것도 그렇네."
김현우는 아브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쪽은 관리기관으로 통하는 좌표를 모르고 있어…….'
그가 고민하고 있던 것은 그것.
이미 목표는 세워졌다.
애초에 당장 노네임이 9계층을 없애 버릴 위협만 사라지면 9계층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허나 문제는 바로 관리기관으로 통하는 좌표.
'생각해 보면 내가 관리기관에 갔을 때도.'
김현우는 결국 스스로 의도해서 관리기관에 간 것이 아니라 데블랑의 동료인 베드로가 배신을 때리고 자신을 그곳으로 보냈기에 관리기관 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한 마디로 김현우는 지금 당장 관리기관에 있는 노네임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티르, 혹시 아는 거 없어?"
김현우의 질문.
그러나 티르는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나도 관리기관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 위치까지는 모르는군,"
"……루시퍼가 알고 있을 확률은?"
"물어보고 와도 상관없다만, 아마 그녀도 관리기관의 위치를 알고 있지는 못할 거다. 애초에 내가 알기로 관리기관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를 제외하고는 헤르메스뿐일 테니."
"거 더럽게 조심스러운 놈이네."
짧게 짜증을 내비치는 김현우.
그렇게 그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자 이번에는 조금 전까지 조용히 있던 아브가 입을 열었다.
"혹시 정령 파벌이나 천사 파벌은 알고 있지 않을까요?"
"? 걔들이?"
"네. 생각해 보면 정령 파벌이랑 천사 파벌은 51번 탑의 잔재를 없애 버리라는 명령을 듣고 그에게 선물을 받았잖아요?"
"……그렇지?"
야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다.
"그리고 저희는 그들이 받은 선물을 빼앗아서 가디언을 살린 거고요."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그쪽에서는 결국 명령을 받고 선물을 받은 입장이니 노네임과 통하는 통신 수단 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포탈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루시퍼도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 구나?"
생각해 보면 루시퍼는 내가 죽기 전에 뒤지게 패고 데려왔으니 애초에 노네임과 만난 적도 없었을 것이었다.
"착각했네."
눈동자의 경험에 너무 오랜 시간을 머물러서 그런 것인지 온 기억의 혼선을 정리한 김현우는 생각을 정리하고는 대답했다.
"확실히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기는 하네."
확실히 아브의 말에 꽤 신빙성이 있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려놓고 통신수단 하나 없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
게다가 어차피 노네임이 세계를 재창조 할 생각이라면 더 이상 지금까지처럼 자신의 위치를 숨길 필요도 없으니 어쩌면 관리기관의 좌표를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흐음."
거기까지 생각을 끝낸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우선 정령 파벌 쪽으로 가보는 걸로 할까."
"바로 준비할까요?"
입을 여는 아브.
그러나 김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아니야?"
"……바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뭐, 나도 사실 바로 가고 싶기는 한데, 아직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할 일?"
아브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애들이 고생 중이라며? 조금이라도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
####
"씹, 너무 많아!"
"야! 거기 뚫린다! 뚫린다고 이 새끼야! 제대로 안 막아!?"
"전열 탱커들은 뒤로 빠져서 정비해! 후열 이제 진입한다! 여기 중심지 한복판이야! 몬스터들 터져 나오면 다 좆되는 거라고!"
5일 전 하남 쪽에 나타난 S급 던전 '부패 오물'의 입구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음 소리.
그 앞에서-
촤아아아악!
자신에게 달려들던 몬스터들을 끊임없이 베어내던 김시현은 이내 후열에 있던 탱커들이 앞으로 달려오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몸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은 슬슬 몸을 뒤로 빼는 김시현을 잡아두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들었으나, 그의 검은 몬스터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하나씩 죽어 나가는 몬스터들.
그렇게 몇 마리의 몬스터를 베어냈을까?
"허억- 허억-."
김시현은 어느새 자신이 후방으로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너무…… 많아.'
그 뒤로 자연스레 밀려오는 생각.
김시현은 이를 악물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고 나서 몬스터가 많지 않은 적은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 숫자는 김시현이 평소에 감당하는 것보다도 훨씬 많았다.
"허억…… 허억"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를 정도로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몬스터 웨이브는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물론 지금 이곳의 몬스터 웨이브가 끝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의 몬스터 웨이브가 끝나면, 지금 이곳에서 몬스터 웨이브를 막고 있는 헌터들은 최소한의 병력을 빼고는 전부 다른 몬스터 웨이브가 터지고 있는 곳으로 이동해야 하니까.
'지친다…….'
김시현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면서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흘렸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의지로 버텨왔으나 아무리 생각에도 조금만 더 있으면 한계가 몰려올 것 같았다.
그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
그들도 당장 열심히 싸우고 있기는 했으나 헌터들의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막아봤자 다른 곳에 또 다른 웨이브가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얼굴들.
김시현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이를 악물고 있자.
"길드장님!"
저 멀리서 한명의 헌터가 김시현을 향해 뛰어오는 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헌터가 김시현의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길드 소속의 통신 헌터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김시현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뛰어올 일은 지금 상황에서는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다른 구역이 뚫린 건가.'
김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순식간에 지금 있는 병력들을 어떻게 분산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러는 동안 통신 헌터는 김시현의 앞에 다가왔다.
"길드장님!"
"……?"
헌데- 헌터의 표정이 김시현이 예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물론 자신과 마찬가지로 며칠간 격무에 시달렸기에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맞았으나, 그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기쁨이 떠올라 있었다.
"왔어요!"
그 모습에 김시현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있을 때 불현듯 입을 연 헌터.
"누가……?"
그에 김시현은 물었고.
"김현우 헌터가 왔어요!"
"……!"
이내 헌터의 말에 김시현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꽈아아아앙!
김시현은 자신의 뒤쪽에 들리는 거대한 굉음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순간적이지만 땅을 흔들리게 할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에 주변의 콘크리트가 마구잡이로 박살 나는 게 눈에 보인다.
"무! 물러나!"
당황스러워 하며 뒤로 물러나는 헌터들.
허나 김시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서진 콘크리트와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몬스터의 시체.
그 가운데에.
"김시현, 잘 있었냐?"
"……형!"
평소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김현우가, 김시현을 바라보며 웃음 짓고 있었다.
####
하남에 위치한 장원.
"……서방님 그렇게 마력을 전부 소모해도 되는 겁니까?"
미령의 걱정스러운 말투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애초에 내가 그곳에서 배운 건 마력으로 싸우는 법이 아니니까."
실제로 김현우는 눈동자에게 마력을 이용한 싸움 방법은 단 하나도 배우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배우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
'그 녀석은 마력을 사용한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놈이 아니니까.'
오히려 마력을 자기 멋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녀석이기에 마력을 사용해봤자 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대충 500명인가."
김현우는 분신을 만드는데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마력을 사용해 버렸다.
처음 비교할 때와는 다르게 텅텅 비어 있는 자신의 마력.
조금 공허한 느낌이 들기는 했으나 어차피 지금 자신이 사용한 마력은 노네임과의 싸움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김현우는 알고 있었다.
'그냥 들고 갔다면 저번처럼 손짓 한 방에 마력이 사라졌겠지.'
그리고 그럴 바에는 당장 9계층의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 훨씬 더 옳은 사용법이었다.
"다른 애들도 전부 몬스터 웨이브를 막으러 간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이번에는 하나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맞아요. 다만 청룡은 다른 곳에 가 있어요."
"다른 곳? 어디?"
"'지상'에요."
"……지상?"
김현우는 그 의미를 생각하다 이내 하나린이 말한 지상이 어디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탑 아래를 말하는 거지?"
"예. 청룡은 몬스터 웨이브를 막을 만한 이들을 데려오겠다고 하며 내려갔기에 현재는 9계층에 있지 않아요."
하나린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손오공과 야차, 청룡까지 전부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김현우가 이곳에 와서 마력을 전부 쓴 이유는 9계층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도 있었으나, 또 다른 생각으로는 모든 전력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물론 미령이나 하나린은 가진 무력이 그렇게 크지 않지만 청룡과 손오공, 그리고 야차를 포함한 다른 이들을 데려간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네.'
내려와서 본 9계층의 모습은 김현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물론 그들이 과소평가해서 말해줬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실물을 보니 김현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했다.
그리고 만약 이 상태에서 최고 전력을 뺐다가는…….
'정말로 무너질 수도 있나.'
"흠……."
물론 김현우의 분신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겠지만 그래도 전력이 빠지는 것은 빠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청룡이 언제 녀석들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확실히 청룡이 칠대성을 포함한 도움을 줄 만한 이들을 데려온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겠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다.
결국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그러나 그 선택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혼자 가야겠어.'
생각해 보면 야차나 손오공, 그리고 청룡은 강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력을 사용한다.
한 마디로 전력 자체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뭐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하지만 그것보다는 9계층을 지키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김현우가 결국 힘겨운 싸움 끝에 노네임을 처리한다고 해도 9계층이 터져 버리면 그의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니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을 결정하고는 이내 미령과 하나린을 한번 바라보곤-
"그럼, 나는 다시 올라가 볼게."
그렇게 말한 뒤, 망설임 없이 구슬을 이용해 탑의 최상층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준비는 끝났어?"
"네. 말씀만 하시면 바로 정령 쪽으로 통하는 포탈을 열 수 있어요."
김현우는 곧바로 정령 파벌 쪽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409화. 딱 기다려라 (4)
"끄아아아아악!!!"
소름끼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이프리트의 몸에서 터져 나오던 불씨가 서서히 식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으나 이프리트의 심장을 뚫어 버린 손은 환상이 아니라는 듯 그의 몸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았고.
툭-
그 마지막, 분명 인간의 형태로 찬란한 불꽃을 뿜어내고 있던 이프리트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쩌저적-
완전히 타버린 재가 되어 그대로 갈라지는 이프리트의 몸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던 나이아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나지막한 탄식.
나이아드는 멍하니 이프리트였던 잿더미를 바라봤다.
"……."
더 이상 그 잿빛의 시체에는 생명이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곳에는 나이아드가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던 풍경이 보이고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말라비틀어진 세계수가 불꽃에 휩싸여 있는 모습.
그 앞으로 정령들의 시체가 눈에 보인다.
정령들의 특성상 마력으로 신체가 이루어져 있기에 제대로 된 시체가 남아 있는 것은 없었으나, 그럼에도 숲 곳곳에 버려져 있는 시체들은 나이아드의 눈을 어지럽혔다.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것은 시체, 시체, 시체.
아마 정령들의 시체가 마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보다도 엄청난 숫자의 시체가 눈에 보일 것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떠올린 그녀는.
"이제 너만 남았군."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
숲을 불태우고 모든 정령을 싸그리 몰살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나이아드의 앞으로 다가오는 남자.
나이아드는 그 남자를 보며 입을 뻐끔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상황을 나이아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
분명 정령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부 생존해 있었다.
비록 세계수가 박살 나 앞을 걱정하고 있어도 우선은 살아 있었다.
헌데 지금은?
"……."
그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자신과 의견을 나누던 정령들은 단 한 마리도 남지 않고 모조리 죽음을 맞이했고, 그들이 생활하던 숲은 그 단시간에 황폐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장난처럼, 빠르게 바뀌어 나간다.
그렇기에 나이아드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 상황을 바라봤고, 남자가 앞에 다가온 순간이 돼서야 자신의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내뱉었다.
"대체…… 왜?"
"무슨 의도로 묻는 거지? 설마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것 같은데."
"일을 실패했다고 이런 처사는……."
"왜 그렇게 생각하나? 이미 나는 충분히 말했던 것 같은데. 51번 탑의 잔재를 처리하지 않으면 너희를 멸망시키겠다고."
"그…… 그렇다면 천사 쪽은 어째서!"
나이아드의 말에 남자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라, 너를 죽인 다음에는 그곳이니까."
"……아."
그 말을 듣고 나이아드는 불현듯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애초에 자신들이 51번 탑을 없애든 말든 자신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군요?"
"늦게라도 알아차린 걸 보니, 다른 놈들보다는 조금 낫군. 그래봤자 같은 미물들이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꽝!
"끄학!"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발을 그대로 들어 그녀의 몸을 짓눌렀다.
신음을 터트리는 나이아드.
그녀는 뒤늦게 반응해 자신의 몸 위에 올라와 있는 발을 치우기 위해 양손을 움직였으나, 이내 조금씩 더 강해지는 압력에 비명을 지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남자는 평온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뭐,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라."
"뭐…… 라고요?"
"굳이 한 번 더 말해야 하나? 억울해하지 말라는 소리다. 어차피 따지고 보면 네 녀석들도 결국 나와 같은 것 아닌가?"
"그게 무슨……."
"너는 스스로가 이용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
"그렇다면 네가 관리하는 탑에 있는 이들은 어떻지?"
"……!"
남자의 말에 순간 입을 벌리는 나이아드.
그는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결국 네 녀석들은 그들을 이용할 뿐이지 않았나? 아니,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지금 나보다도 더욱더 심하게 그들을 학대해 왔지."
"……."
"안 그런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업을 얻기 위해 탑 안에 있는 생명들을 학대하고 탄압하지 않았나? 게다가 어떤 놈들은 말도 안 되는 인신공양을 하기도 하더군."
피식-
"결국 너와 내가 다른 것은 무엇이지? 어째서 너는 그렇게 원통해 하는 거냐?"
"그…… 그건……!"
"네가 한 일과 내가 한 일이 다르다고 말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라고 하고 싶군. 결국 너와 내가 한 일은 똑같다. 변명의 여지가 없지."
나이아드는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으나 반박하지 못했다.
그 남자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으니까.
그녀를 포함한 모든 탑주들은 업을 모으기 위해 탑 안에 있는 이들을 수탈해 업을 모았고, 그들이 어떤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한 마디로, 결국 나이아드와 눈앞에 있는 남자가 하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이아드가 입을 다물자 남자는 피식 웃음을 짓고는 그대로 나이아드를 짓밟고 있던 발에 힘을 주었다.
"커헉!"
뿌드드득!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흐릿해지기 시작하는 나이아드의 형체.
그녀의 몸이 물처럼 흩어지는 것을 보며 남자는 그녀를 짓밟았던 다리를 그녀의 몸속에서 빼내었고. 이내 곧 나이아드는 물이 되어 주변에 흩어졌다.
그리고-
"이건 또 뭐야? 같은 팀끼리 치고 박고 싸운 거야?"
"……!"
천사 진영으로 가는 포탈을 열려던 남자의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저도 모르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우리 구면이지? 이 개새끼야."
남자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김현우를 보며 순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김현우?"
"설마 시력도 퇴화한 건 아니지?"
이죽거리며 대답하는 김현우.
그에 남자는 곧 휘둥그레 떴던 눈을 없애고는 곧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히 그때 죽였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났지?"
그의 물음.
김현우는 씨익 웃고는 대답했다.
"알아서 뭐하게?"
"……."
김현우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던 남자는 이내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입을 열었다.
"그년이로군."
"그년이라니?"
"숨긴다고 해서 내가 눈치채지 못할 것 같나?"
남자는 드물게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으나 김현우는 그 얼굴에도 딱히 긴장하지 않고 입가를 비틀어 올리곤 이야기했다.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그리고 엄연히 말해서 나를 살려준 건 눈동자가 아니라 너잖아?"
"……뭐?"
"네가 줬던 세계수의 마력이랑 야훼의 모체 말이야. 그거 꽤 좋더라?"
김현우의 말에 그제야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고는 인상을 찌푸리는 그.
"……멍청한 녀석들."
나지막한 중얼거림, 그러나 곧 남자는 찌푸린 인상을 펴고는 다시금 무감정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 앞에는 왜 나타났지?"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지?"
"네가 살아나서 다시 온다고 해도 달라지는 결과가 있을 것 같나?"
"만약 없었다면 네 앞에 찾아왔을까?"
"……멍청하군. 대충 생각해 보니 그년이 네게 무엇인가를 해준 것 같은데, 고작 그것만으로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다."
"거 한두 달 안 본 사이에 겁이 좀 많이 는 거 아니야?"
"……뭐라고?"
"왜? 저번에는 아무런 말도 없이 우선 죽이겠답시고 달려들었잖아? 근데 이번에는 안 그러는 거 보니…… 혹시 쫄?"
키득거리며 도발하는 김현우.
남자는 가만히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고는 이내 헛웃음을 흘린 뒤 이야기했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죽고 싶은가 보군."
"그러니까, 입만 털지 말고 우선 와 보라니까?"
"……후회하지 마라."
그 말에 남자는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 김현우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빠르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터벅거리는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남자.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몸의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남자의 발소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긴장하는 김현우.
그리고 어느 순간.
툭-
남자의 신형이 사라졌다.
적어도 김현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럼에도 김현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분명 그의 신형은 김현우의 눈앞에서는 사라졌을지라도, 그의 감각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빡!
"!"
-노네임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주먹을 막아낸 그를 놀랍다는 듯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과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김현우.
마치 그것이 시작이라는 듯, 남자의 신형이 다시 한번 사라진다.
이번에는 뒤.
그 다음에는 위.
남자의 신형이 순식간에 이리저리로 옮겨나가며 김현우에게 손과 발을 내지른다.
그리고 김현우는 그렇게 내질러지는 남자의 공격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막아낸다.
단 하나의 유효타도 없이 그의 공격을 막아내는 김현우.
그 모습에 노네임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그의 공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맨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움직이며 김현우를 공격하고 있었고, 오히려 저번과는 다르게 순간순간 페이크까지 섞어 가며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허나 김현우는 그 공격들을 모조리 막아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어디에서 어떻게 움직여 주먹을 휘두를지 예측이라도 하듯.
텁!
"쯧."
공격이 막힌 노네임은 짧게 혀를 차곤 혹시 김현우의 뭔가가 바뀌었나 싶어 그의 몸을 파악해봤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니, 그때와는 다른 것이 하나 정도 있었다.
'……마력이 전혀 없다고?'
그것은 바로 김현우의 몸속에는 현재 단 한 줌의 마력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럴 리가…….'
눈에 보이는 정보를 의심하며 남자는 몇 번이고 김현우의 몸을 이리저기 관조해봤으나 보이는 것은 같았다.
김현우의 몸에는 마력이 남아 있지 않았고, 딱히 그의 몸 자체도 변한 것은 없었다.
'……역시 그년에게 '업'을 얻어왔나.'
그렇다면 남은 것은 역시 그년에게서 얻어온 '업'.
물론 남자는 김현우가 그녀에게서 무슨 업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그년에게서 받은 것이 어떠한 업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는 있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김현우가 마력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공격을 이렇게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남자는 그렇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김현우를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순간-
"!!"
"뭔 생각을 그렇게 해?"
-남자는 김현우의 말과 함께 그의 주먹이 자신의 얼굴 앞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빠아아아악!
그리고-
"왜 이렇게 약해졌어?"
"이 새끼가……!"
-김현우의 도발에 노네임은 처음으로 악귀 같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410화. 딱 기다려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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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현 상황. 김현우 역삼역 출동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글쓴이 : ㅇㅇ
김현우 어디서 뭐하다 왔는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역삼역 S급 던전에 출몰해서 한두 방에 몹 정리하고 사라졌다 ㄷㄷㄷ…… 머임?
(추가)
구라라고 하길래 인증 사진 올린다.
(대충 김현우가 역삼역에 등장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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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48개
모두의여고생쟝 : 와 얘는 진짜 몇 개월 동안 뭐하다가 이제 오냐????
ㄴ 이첨치 : 기사 읽고 와라, 3개월 전에 미궁 탐험 내려갔다고 했잖아. 아마 지금 다시 올라온 것 같은데?
ㄴ 모두의여고생쟝 : 아 진짜? ㅈㅅㅈㅅ몰랏네.
내바위 : 지금 역삼역에 왔다고? 나는 아까 천호역에서 나오는 거 봤는데? 그 짧은 시간에 거기까지 이동한 건가?
ㄴ 오리리릭 : ㄴㄴㄴㄴㄴ 그거 아님 지금 여기서 노가리 까지 말고 뉴스 확인해보셈, 지금 나타난 김현우 수 100명 넘어간다고 하던데 ㅋㅋㅋ
ㄴ 호롱이 : ? 이건 또 뭔소리임? 김현우가 왜 100명이 넘어가?
ㄴ 오리리릭 : 뉴스 보셈.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5&oid=001&aid=00117778
ㄴ 호롱이 : 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현우 추정 140명은 또 뭐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거?
어그로충 : 이것도 들가보셈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5&oid=001&aid=002211221
ㄴ 양그키르 : ??? 이게 먼데?
ㄴ 어그로충 : 미안하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 끌었다.
ㄴ 초중빛세일 : 이 와중에도 이런 어그로 ㅈㄴ 끄네, 이시국에 어그로 자중해라 온 세상이 개판이 나있는데 어그로를 끄네.
ㄴ어그로충 : 응 내맘이야~ 너도 빨리 링크 들어가서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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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시에 있는 s급 던전 앞.
"……드디어!"
이서연은 스마트폰에 시시각각 떠오르는 반응을 보며 밝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으나 이내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가 여러 명이라는 건 뭐지?'
손오공의 분신술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되는 건가?
위이이잉!
이서연이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자 기다렸다는 듯 김시현에게서 걸려오는 전화.
마침 스마트폰을 들고 있던 그녀는 곧바로 김시현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곧 이서연은 김시현에게 현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간단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오빠가 분신술을 이용해서 몬스터 웨이브를 정리하고 있다 이거지?"
[맞아. 본체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본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이야기를 전해 받은 건 형의 분신이거든.]
"분신이라고?"
[응, 듣기론 분신들한테 몬스터 웨이브 정리를 맡겼고, 본체는 다시 최상층으로 올라갔다고 하더라.]
김시현의 말에 이서연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명히 김현우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알았어. 그럼 결국 우리는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지?"
[맞아.]
이서연의 물음에 대답하는 김시현.
[그리고 이제 서울 쪽은 굳이 우리 도움이 없어도 될 거야. 석원이 형이랑 현우 형의 분신이 붙어 있으니까 나도 경기 쪽으로-]
그리고 곧 그는 자신이 앞으로 움직일 곳을 이서연에게 피드백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한동안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고 있던 이서연은 분명 전화를 받기 전보다는 한층 밝은 표정으로 정리가 끝난 던전을 바라보다가 피식 하고 웃음을 지었다.
'고작 한 사람이 돌아왔다고 이렇게 희망이 생길 줄이야…….'
너무 김현우에게 의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이서연은 안도감이 들었다.
김현우가 돌아왔다는 것.
아직 실물로 본 적도 없고 그저 사진과 김시현의 증언을 통해 들었을 뿐이었으나, 이서연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암담함은 분명히 옅어졌다.
그렇기에-
"……그럼, 열심히 버텨 봐야지."
이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혼자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리고는 실시간으로 반응이 올라오고 있는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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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는 달려드는 노네임을 보며 기묘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분명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묘리나 미학이 없는, 그저 오로지 힘과 속도에만 의존하는 전투스타일은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느 면에서 봤을 때 스피드는 이전보다도 빨라진 것 같았다.
그야말로 김현우는 감히 시도할 수조차도 없는 압도적인 속도.
눈으로는 당연히 쫓을 수 없었다.
남자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은 그가 눈동자에게 얻었던 수많은 업 속에서 경험했던 인지 능력들.
그 수 만 개의 업이 그대로 김현우의 몸에 쌓여 남자의 움직임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개미 인간이 되었을 때 얻었던 감지 능력이 남자의 움직임을 예측해 주었고.
맹인이었을 때 얻었던 예민한 청력이 남자의 주먹이 어디를 노리는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준다.
그 이외에도 김현우가 얻었던 수많은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그는 마력을 아예 사용하지 않고도 남자의 공격을 너무나도 가볍게 피해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느껴지는 기묘함.
'……이렇게 피하기 쉬웠던가?'
김현우는 그의 공격을 피하며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쉽게 공격을 피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너무 일관적이야.'
그래, 그의 공격은 너무 일관적이었다.
주먹을 휘두른다.
발을 찬다.
그의 공격은 이렇게 두 가지의 묘사만 사용해도 충분히 담아낼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고, 또한 단순했다.
물론 노네임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속도 덕분에 아무리 단순한 공격이라도 위협적인 것은 맞았다.
그래,
눈동자를 통해 경험을 얻지 못했다면, 아마 김현우는 지금도 노네임의 공격에 고전했을 것이었다.
탁!
오른쪽 뒤에서 머리를 노리고 주먹을 내지르는 노네임의 공격을 머리를 옆으로 꺾는 것으로 피해낸 김현우는 순간적으로 어깨를 올려쳤다.
"!"
맹인에게서 배웠던, 온 몸을 사용해 상대의 힘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반환공.
노네임의 손이 위로 치솟아 올라가며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는다.
그와 동시에 제자리에서 몸을 돌린 김현우는 노네임이 움직이기도 전에-
"컥-!"
그의 목젖을 손날로 후려쳤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낮은 탄성.
살짝 무너졌던 자세는 김현우가 목젖을 침과 함께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김현우는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 그의 얼굴을 팔꿈치로 후려쳤다.
빠악!
돌아가는 머리.
김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자의 앞에 바로 딱 붙어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도망갈 수 없도록 초근접전으로 단단히 마크하며 패고 있었다.
빡! 빡! 빠각! 뻑!
맞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공간.
노네임은 순간순간 눈을 부릅뜨며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현우에게 역공을 가했지만.
"안 된다니까 그러네."
"이런-!"
빡!
그는 금세 김현우에게 틈을 내어주었다.
이전번에 싸웠을 때와는 전혀 다른 싸움의 양상.
하지만 김현우는 압도적으로 노네임을 압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그를 압박해 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는 눈동자에게 어느 정도의 승률 예측을 들은 상태였으니까.
'내가 이길 승률은 3할.'
그래, 고작 30%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고 해서 눈동자의 말이 절대적인 것마냥 믿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동자의 조언을 무시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녀가 괜히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빡!
김현우의 주먹에 턱을 맞은 노네임이 뒤로 밀려난다.
그러나 김현우는 여전히 노네임이 자신과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위해 그의 몸을 붙잡았고.
그 순간-
"!"
김현우는 자신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허리를 비틀었다.
꽝!
그와 함께 터져나가는 무언가.
김현우는 순간적으로 시야가 가려진 상황에서도 머리를 굴렸다.
'무시하고 더 달라붙어야 하나? 그게 아니면 이쯤에서 만족하고 빠져야……?'
그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으나 이미 김현우의 몸은 등 뒤에서 한 번 더 느껴지는 아찔한 느낌에 오른쪽으로 빠지고 있었고.
꽈아앙!
김현우가 오른쪽으로 몸을 튼 그 순간, 김현우는 무엇인가 날아와 폭발하는 것을 보고는 몸을 뒤로 뺐다.
"……확실히, 이전보다는 성장했군."
그와 함께 들리는 목소리에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부서진 나무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노네임을 볼 수 있었다.
얼굴에는 한껏 불쾌함을 가득 담은 채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 찢어진 상의를 저 멀리로 내팽개친 노네임.
김현우는 스윽 하는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그래? 그냥 성장한 정도가 아니지 않아? 그냥 뒤지게 맞았잖아?"
"……."
그의 도발에 인상을 찌푸리는 노네임.
허나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야기했다.
"정말로 내가 모든 힘을 다해서 상대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설마 마조였어?"
"……뭐라고?"
"지금 말은 네가 모든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거잖아?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굳이 쓰지 않았다는 건 맞는 걸 즐긴다는 말 아니야?"
조금 더 인상을 찌푸린 노네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데?"
"……."
"왜? 네가 할 말 대신해 줘서 놀랐지? 조금 더 맞고 싶으면 말해. 나는 아직도 너를 쥐어 패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하니까."
"……굉장히 어쭙잖은 도발이군."
"너는 굉장히 어쭙잖은 변명을 하고 있고 말이야."
피식 웃으며 받아치는 김현우.
그 말에 노네임은 불쾌감으로 가득 차 있던 얼굴을 악귀 같이 일그러뜨리고는 자신의 주먹을 꽉 쥔 채 대답했다.
"……더 이상 장난은 끝이다. 너 같은 새끼한테 시간을 쏟는 것도 불쾌하군."
"저기요? 말투가 조금 거칠게 바뀌셨는데요?"
이죽거리는 김현우.
그러나 노네임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손을 휘둘렀고-
"!"
김현우는 곧 자신의 아래에서 무엇인가가 온다는 것을 재빠르게 감지하고는 그대로 뛰어 올랐다.
쾅!
그가 뛰어오르자마자 타이밍 좋게 솟아져 나오는 것.
그것은 바로-
'나무줄기'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김현우의 주변에 있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뭐야 씹."
부서진 나무의 잔해들.
굴러다니던 돌멩이.
무엇인지 모를 조각.
김현우가 한 눈에 인식하기도 힘들 온갖 것들이 그가 뛰어오른 순간 허공에 부유했고.
꽝!
"큭!?"
허공에서 터진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어렵사리 피해낸 김현우는 폭발의 반동으로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리고-
"지금부터 알려주도록 하지."
김현우가 급하게 일어나 노네임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
"마력을 다룬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이야."
그는 엄청난 양의 잔해가 자신의 주변을 감싸 안듯이 포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지랄났네."
김현우는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에게 몰아치는 잔해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411화. 노 네임 (Nameless) (1)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공간 속.
"으음……."
그 공간 속에 어울리지 않게 놓여 있는 목재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 눈동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잘 하고 있으려나?'
그녀가 하고 있는 생각은 바로 김현우에 관한 것.
'아마 지금쯤이면 슬슬 만났을 것 같은데.'
솔직히 마음만 같아서는 김현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원래 그 녀석의 육체와 포탈을 만들어주려던 마력도 그 녀석의 아내들 덕분에 절약했으니까.
"으음……."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지금 당장 김현우의 모습을 들여다보는데 소모되는 마력이었다.
'물론 어쩌다 보니 남은 마력이기는 한데…….'
당장의 궁금함을 위해 사용하는 것보다는 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그때를 대비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하고 있기에 그녀는 마력을 사용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거기에다가-
'어차피 내가 그 싸움을 들여다보더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그저 쓸데없는 궁금증이 총족되는 것 뿐.
만약 자신이 즉흥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마력을 소모해서라도 김현우와 그놈의 싸움을 봤겠지만, 어차피 자신이 아무리 봐도 도움을 줄 수 없다면 마력을 소모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었다.
"쩝."
한참의 고민 끝에 결국 마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을 내린 눈동자는 괜한 아쉬움에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잘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
당장 김현우는 그녀가 준비했던 업을 모조리 얻은 데다가, 후반에 와서는 오히려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어갔다.
허나 그렇게 하더라도 김현우의 승률은 3할 정도…… 아무리 잘 쳐주더라도 4할 정도였다.
아무리 김현우가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어 갔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의 무력은 그 남자 앞에서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 마디로 눈동자는 김현우가 노네임과 대적할 수 있는 기본 정도만을 갖춰준 것이었다.
'애초에 그 이상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눈동자는 묘한 우울함이 담긴 표정으로 마지막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던 김현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뭐가 그렇게 자신이 있는지, 걱정하는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
눈동자는 그 모습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은 뒤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그는 업에 먹힐 때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눈동자에게 부정적인 면모를 보여준 적이 없기는 했었다.
심지어 수련을 할 때는 눈동자의 예상을 뛰어넘은 적도 있었다.
"……."
그래서일까.
'어쩌면…….'
솔직히 눈동자는 맨 처음, 김현우가 아직 9계층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점부터 그에게 '눈'을 주기는 했으나.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가 '심마'를 잡았을 때는 어느 정도의 기대를 하기는 했으나, 마찬가지로 그것은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겠다'싶은 정도의 기대였을 뿐 확연한 기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현우를 직접 만났을 때도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국 김현우는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해도 그놈에게 처참하게 짓밟혔고, 별다른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한 채 그대로 소멸할 뻔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승률이 3할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조금은-.'
눈동자는 업에 먹힌 뒤, 그 업을 강제적으로 소화시키기 위해 자신과 싸웠던 김현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당장 소멸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김현우.
허나 그는 눈동자의 예상을 깨고 오히려 소멸하는 것이 아닌 그녀의 업을 차근차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냈다.
그것도 싸움을 통해서.
말 그대로 싸우면서 강해진다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듯, 김현우는 한 번 몸을 부딪힐 때마다 무척이나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 나갔고, 나중에는 싸움을 통해 얻지 못했던 나머지 업도 전부 얻어 버렸다.
그 순간에 느꼈었던, 압도적인 무언가.
분명 김현우는 자신보다 약했으나, 김현우의 그 모습은 눈동자를 압도하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했다.
그렇기에-
"……기대해 볼 만하려나?"
눈동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중에 보자'라는 한 마디 말을 남긴 채 자신의 아내들과 돌아간 김현우의 모습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편한 미소를 지었다.
####
수많은 잔해들이 김현우를 노리고 쏟아져 내린다.
"쯧."
혀를 차며 피해내는 김현우.
그러나 잔해들은 집요하게 김현우를 노리며 달려든다.
위에서는 나무 잔해가 쏟아져 내리고,
아래에서는 나무줄기가 김현우의 몸을 묶기 위해 땅을 파고 올라온다.
좌중에서는 돌멩이들이 김현우를 중심으로 돌며 쏘아지고 있었고.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노네임이 쏘아낸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는 확실한 기회를 잡겠다는 듯 김현우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허나-
"후-."
당장 자신의 주변으로 쉼 없이 쏟아지는 공격들을 마주하면서도 김현우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전 노네임을 공격할 때보다도 냉정하게 그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부동명왕(不動明王)의 업 덕분인가.'
김현우가 그렇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눈동자를 통해 경험할 수 있었던 부동명왕의 업 덕분.
탓!
김현우는 쏟아지는 잔해를 피해 땅을 박차며 주변의 잔해들을 끊임없이 경계하면서도 현 상황에 대해 냉정하게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잔해들은 아무리 쳐내봤자 의미가 없다.'
김현우가 이리저리로 몸을 움직이며 자신에게 달라붙는 잔해들을 쳐내고 있었으나 달려드는 잔해는 전혀 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늘어나고 있어.'
부서진 잔해들을 잘게 부서져 또 김현우에게 쏘아졌고, 그 이외에도 실시간으로 주변에 있는 잔해들이 김현우 주변으로 모여드는 상황.
물론 이런 잔해 따위는 아무리 맞아봤자 김현우의 몸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으나 이상하게도 그의 직감은 몰려드는 잔해들을 모조리 피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도 이해할 수 없는 직감.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우는 자신의 직감이 왜 몰려드는 잔해를 피하라고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꽈아앙!
"큭!?"
김현우가 몸을 띄우는 찰나의 틈에 그의 오른손에 닿은 잔해는, 순식간에 김현우의 몸에 붙어 그대로 폭발했다.
문제는 그 폭발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
콰아아아아아────────!!!!
김현우의 옆에 있던 돌멩이가 터지자마자 그의 주변에 있던 잔해들은 마치 분진 폭발이라도 일어나듯 너도나도 터져나가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그 상황에서 최대한 몸을 뒤로 내뺐으나 결국 폭발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허나 폭발에 휘말려 청각과 시야가 일순 사라진 그 순간에도 김현우를 향한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온다!'
머리를 노리고 두 방.
다리를 노리고 한 방.
오른팔을 노리고 세 방.
찰나의 순간에 다가오고 있는 무엇인가 자신의 어느 부위를 노리는지 깨달은 김현우는 힘껏 몸을 비틀었고.
꽈아아앙!
김현우는 보이지 않는 그 새하얀 폭발 속에서, 또 한 번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다.
기예를 넘어서, 이제는 거의 예술의 경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공격을 피해낸 김현우는 곧 회복되는 시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노네임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걸려 있던 불쾌감 대신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는 남자.
그는 땅에 착지한 김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잘 피하는군."
"이제 격투로는 못이길 것 같으니까 전술을 바꾼 거야? 이건 너무 야비하지 않나?"
김현우의 도발.
허나 노네임은 그의 도발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평정심을 유지하며 이야기했다.
"애초에 내가 격투만으로 너를 상대한 건 핸디캡이라는 걸 모르겠나?"
"이제 핸디캡 가지고는 못 이기겠다 이거네?"
또 한 번의 도발.
허나 노네임은 의외로 너무나도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년에게서 조금 배운 것이 있다 보니 이제 핸디캡을 가지고는 상대하지 못하겠군. 하지만-."
노네임은 김현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 이유보다도 네 녀석 같이 입을 놀리는 녀석한테 굳이 핸디캡을 가지고 싸울 이유 또한 느끼자 못한다."
노네임의 말에 김현우는 피식 웃고는 이야기했다.
"그래서 본 실력을 꺼냈다 이거야? 네가 말한 어쭙잖은 도발에 걸려서?"
"설마, 걱정 마라. 아직 너는 내 전부를 온전히 눈에도 담지 못했으니까."
"……."
남자의 말에 입을 다무는 김현우.
뭐 정말 당연한 것이었으나 김현우는 이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고작 조금 전에 보여준 것 가지고는 눈동자가 자신의 승률을 3할로 친 것을 이해 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지금만 해도 노네임이 보여준 능력은 상식을 초월했다.
고작 나무나 돌멩이들이 폭발물이 되고, 심지어 그 잔해들이 김현우에게 날아오는 속도마저도 엄청나게 빨랐다.
별다른 말없이, 그저 사기라는 말이 어울리는 능력.
김현우가 그렇게 노네임의 능력을 회상하고 있자, 그는 불현듯 물어왔다.
"너는 마력이 무엇이라 생각하지?"
"……뭐?"
김현우의 되물음, 허나 노네임은 자기 멋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력은 근원이다. 이 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근본이라고도 할 수 있지. 원하는 바에 따라 그 어떤 형태도 만들거나 이룰 수 있고, 또 어떠한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
노네임의 말에 김현우는 본능적으로 그가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튀어 나갔다.
그가 설명하며 무엇인가를 하게 놔둘 정도로, 김현우는 멍청하지 않았으니까.
기묘한 움직임으로 땅을 찬 김현우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노네임의 앞에 나타난다.
"!"
순간이지만 눈을 크게 뜬 노네임의 모습.
김현우는 그의 얼굴에 주먹을 갈기려 했으나-
"!?"
덜덜덜-
노네임의 코앞까지 도달했던 김현우의 주먹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멈춰 버렸다.
어떻게든 힘을 주려고 해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그의 주먹.
그 모습을 바라보며 노네임은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년이 말하지 않았나? 아무리 네가 열심히 준비를 한다고 해도 나를 이길 확률은 얼마 없다고."
"……!"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뜨는 김현우.
노네임은 피식 웃으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나? 애초에 그건 당연한 건데."
"뭐라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정말 멍청하게도 이해를 하지 못한 건가?"
"그게 무슨-!"
김현우는 입을 여는 순간 자신의 몸 전체가 묘한 한기에 둘러싸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그 녀석이 나를 피해 그곳에 숨어 있는 건, 당연히 나와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
"근데 그 녀석 본인도 아니고 그저 그년의 힘을 조금 얻었을 뿐인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않나?"
노네임의 말과 함께, 한기가 느껴지던 몸이 한 순간 얼어붙었다.
순간이지만 제대로 된 움직임을 취할 수 없을 정도로 꽝꽝 얼기 시작하는 김현우의 몸.
그와 함께-
"지금부터 알려주도록 하지."
노네임은 웃음을 지었다.
"네가 어째서 나를 이길 수 없는지를 말이야."
412화. 노 네임 (Nameless) (2)
파지지직-!
노네임의 말과 함께 주변의 대기가 얼어붙는다.
엉망진창으로 박살 났던 잔해들과 돌멩이들이 얼어붙고, 그나마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나무와 수풀도 마찬가지로 얼어 버렸다.
울창한 초록빛을 가지고 있던 숲이 한 순간 새하얗게 뒤덮이는 것을 보며 김현우는 눈을 부릅떴고.
"우선, 가벼운 것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쿠그그그그그그극-!!!
김현우는 곧 위에서 들려오는 지진과도 같은 소리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올리고는 경악했다.
"이런 미친-."
김현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
그것은 거대한 운석이었다.
새하얀 얼음으로 된 운석.
그것이 온몸이 얼어 버린 김현우의 머리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시시각각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김현우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을 덮으며 다가오는 운석.
"어디 한번 네 무력함을 느껴봐라."
노네임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뒤로 뺐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운석을 바라봤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막아 낼 수 없을 것 같은.
보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엄청난 크기의 운석은 지상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엄청난 진동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김현우는 운석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몸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고.
-콰드드드득!
운석이 지상과 충돌하기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김현우는 자신을 얼려 버린 얼음을 깨고는 자리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제는 김현우의 머리 위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가까이 와 있는 운석.
김현우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뒤로 내뺐고, 운석은 간발의 차이로 김현우의 머리를 피해,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콰가가가가강!
엄청나 충격파와 함께 주변의 땅을 먹어치우며 땅바닥에 처박히는 운석.
그로 생기는 충격파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뒤로 날아갔으나 이내 안전하게 착지했고, 그 순간-
"……!?"
-땅바닥에 처박혔던 운석이, 멈췄다.
땅바닥의 모래가 터져 나오고,
부딪힌 충격으로 인해 사방으로 깨져나가는 얼음 조각들이 멈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멈춰 버린 공간.
부서진 얼음 조각이 마치 예술 작품처럼 거대한 운석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에 김현우는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그 순간-
"!!"
-멈춰 있던 얼음 조각들이 김현우를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한 번 더 몸을 피하는 김현우.
꽈아아앙! 꽝! 꽈르르륵!
쩌저적! 쩌적! 쩌어엉!
김현우의 몸에 닿지 못하고 땅에 처박힌 얼음 조각들은 순식간에 주변을 얼려 버리거나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터져 나오는 또 다른 파편들.
"이런 씨발 진짜!"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김현우는 순식간에 움직여 그것들을 모조리 피해내곤 곧바로 땅을 박차 노네임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차피 이대로 피하기만 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바로 본체를 잡는 것.
그렇기에 김현우는 노네임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하나?"
"!"
김현우는 곧 자신의 위로 떨어지는 또 한 번의 운석에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마치 빙하를 통째로 소환시켜서 떨어뜨리는 것 같은 거대한 운석.
"아, 그리고 하나는 부족해 보여서 몇 개 정도 더 준비했다."
"이런 개씹-."
그리고 그 옆에 추가로 보이는 두 개의 운석을 보며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는 몸을 멈췄다.
'어떻게 해야 하지? 피해야 하나?'
찰나의 순간에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생각들.
허나 김현우가 멈춰 있을 시간은 얼마 없었다.
'……몸이 얼어붙는다.'
그가 멈춰 있는 그 순간, 이 숲 전역에 퍼져 있는 냉기는 김현우의 몸을 얼렸으니까.
그렇기에 빠르게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김현우가 선택한 건-
"너무 빠르게 목숨을 포기하려 하는군."
-바로 떨어지는 운석을 무시한 채 노네임의 앞으로 다가서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노네임의 앞에 다가선 김현우, 노네임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어딜 가려고?"
"!"
김현우는 노네임의 움직임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이미 그의 뒤로 움직여 그의 옷깃을 붙잡은 상태였다.
순간적으로 얼굴을 굳힌 노네임. 김현우는 또 한 번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으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의 주먹은 노네임의 코앞에서 멈춰 버렸다.
인상을 찌푸리는 김현우와, 반대로 웃음을 짓는 노네임.
'이렇게 빨리 얼어붙는다고?'
김현우는 실시간으로 얼어붙고 있는 자신의 몸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자신의 몸을 과하게 비틀어 아까보다도 빠르게 몸에 붙어 있던 얼음을 부수려 했으나-
"내가 부숴주지."
빠아아악!
"크학!?"
김현우는 곧 남자의 주먹에 얻어맞아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콰자자자작!
완전히 얼어 버린 땅을 갈아 버리며 땅바닥을 구르는 김현우의 육체.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
이미 그 순간, 김현우의 몸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주변에서 팽창한 마력 때문.
거기에 더해서 김현우가 멈춰 서자마자 그의 몸을 타고 온 냉기는 김현우의 육체를 순식간에 얼려 버렸고.
"아…… 씨발."
그런 김현우의 위로, 거대한 운석들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운석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얼음 조각들이 한 번 더 움직여 김현우가 있었던 곳을 향해 떨어져 내린다.
그와 함께 터져 나가는 지상.
새하얗게 얼어 있던 지상에 잿빛 연기가 만들어지고, 시뻘건 화마가 그런 잿빛의 연기를 먹어치우며 나타난다.
그리고 그 끝에서.
"목숨은 질기군."
김현우는 옷이 걸레짝이 된 상태로 걸어 나오며 인상을 찌푸렸다.
'좆 될 뻔했다.'
운석이 떨어지는 그 순간, 김현우는 반환공을 이용해 자신을 압박하는 마력의 힘을 밖으로 돌림으로써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것을 빌미로 최소한의 피해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정도가 최소한의 피해라는 게 문제지만.'
김현우는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고작 한 번의 공격으로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가득했다.
물론 그 상처들은 김현우의 거동에 문제를 줄 정도의 큰 상처가 아닌, 그저 자잘자잘한 상처일 뿐이었으나 문제는 그가 노네임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하고 이렇게 됐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자잘한 상처라도 쌓이기 시작하면 무시하지 못하니까.
"……."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저 위에 서 있는 노네임을 바라봤다.
조금 전, 곧바로 자신을 죽여 버리겠다는 그 말은 어디다 버렸는지 주변에 흐르고 있던 냉기를 거둔 노네임.
김현우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곳에서 빠져나오면서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던진 질문.
그도 그럴 것이 노네임이 전투 스타일을 바꾼 그 순간부터 김현우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이렇다 할 타격을 가하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고 방법이 보이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근접을 포기하고 이렇게 마구잡이로 원거리로 공격을 때려 붓는데다가 아무리 근접전으로 다가가더라도 노네임의 마력 때문에 공격이 불가능했다.
한 마디로 어떻게 하든, 김현우는 노네임에게 공격을 먹일 수단이 없었다.
'게다가 이 정도가 '가볍다'면.'
……이 뒤에는 또 뭐가 있을지, 김현우는 상상도 하기 싫었기에 인상을 찌푸렸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노네임은 이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 그럼 가볍게 몸 풀기는 끝났으니, 다음으로 가도록 하지."
"……."
"무엇이 좋지?"
"……뭐라고?"
"중력을 반전시킨 세계에서 운석을 막아보는 건 어떤가? 아니면 오히려 중력이 수백 배인 곳에서 용암에 담가져 보는 건? 그것도 아니라면 공기 중의 모든 마력을 자그마한 가시로 만들어 줄까? 아마 상당한 고통이 수반되겠지."
"……."
김현우가 입을 다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네임은 자신의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 너를 처리하는 데 사용할 방법은 말이야. 무엇을 원하지? 어떤 방식으로 고통 받기를 원하나?"
비틀린 웃음에 더해져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광기가 엿보이는 그 모습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 전에는 한 번에 죽인다고 해놓고, 말이 너무 바뀌는 거 아니야?"
"생각해보니 한 번에 죽이는 건 너무 편하게 보내 주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떻게든 고통을 준 뒤에 죽이겠다?"
"의도를 잘 알고 있군."
"또라이 같은 새끼. 남자 새끼 맞냐? 왜 이렇게 말이 바뀌어?"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인상을 찌푸렸으나 노네임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쿠그그그그그극-!
"……!"
땅이 울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용암이 터져 나왔다.
갈라진 틈 사이로 꾸역꾸역 흘러나오기 시작한 용암을 보며 김현우는 곧바로 땅을 박찼고, 조금 전까지 그가 서있던 곳은 순식간에 용암으로 뒤덮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냉기로 가득 찼던 숲이, 이번에는 용암에 의해 모든 것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얼어 있던 나무는 고작 몇 초도 되지 않아 용암 속으로 그 자취를 감추고, 모든 것이 타고 깨지는 소리가 김현우의 귓가에 쉴 새 없이 들려온다.
허나 그런 것보다도 김현우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
온 하늘을 가릴 정도로 수많이 떠 있는 운석들과.
노네임의 주변을 기점으로 넓게 퍼져 나가는 둥그런 구체들이었다.
"……2차전을 시작하도록 하지. 어디 한번 이것도 피해보도록 해라."
노네임의 말이 기점이 됨과 동시에 낙하하기 시작하는 운석들.
그 엄청난 광경을 보며 김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는 그제야 눈동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씨발, 괜히 내 승률이 3할이라는 게 아니었네.'
이런 괴물을 도대체 무슨 수로 이긴다는 말인가?
아니, 괴물이 아니다.
적어도 노네임이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는 어찌 보면 무력 면에서는 '신'과 같았다.
아니, 이미 충분히 신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을 김현우에게 몇 번이고 보여주고 있었다.
'……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는 현자타임.
그럼에도 김현우는 그 현자타임을 억지로 마음 한 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떨어져 내리는 운석들을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하지?'
또 한번 드는 고민.
지금까지 노네임과 싸우면서 몇 번이나 던졌던 고민이 또 한 번 김현우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 김현우의 머릿속에서는 저 엄청난 것들을 감당해낼 만한 기발한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저것들은 마력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전부 막아낼 수 없었을 것이었다.
"……."
'아니, 아니야…….'
김현우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면 지금 김현우는 스스로에게 '어떻게 해야 하지?'같은,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던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해내야만 했다.
그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애초에 지금 당장 이것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면, 결국 노네임에게 닿는 것도 못한다는 것이니까.
'분명 눈동자는 내게 승률이 3할 정도 있다고 했지.'
3할.
퍼센테이지로 따지면 30%.
물론 30%라는 승률은 낮다.
하지만 30%라는 승률은 엄연히 말하면 10번을 싸워 3번 정도는 이긴다는 소리.
한 마디로, 김현우에게는 아주 조금이기는 하겠으나 노네임을 이길 확률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후우-."
김현우는 다시 한번 자신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리는 운석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413화. 노 네임 (Nameless) (3)
천계의 중앙에 위치한 신전.
거대한 신전 안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모여 있었다.
가장 낮은 계급의 천사부터 시작해서, 탑의 주인인 천사들까지. 수많은 천사가 신전의 한 가운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착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
그곳에는 천사 파벌을 이끌고 있는 가브리엘이 신전 한가운데에 있는 받침대를 말없이 만지고 있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분이 강신할 모체가 있었던 그곳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바로 루시퍼 때문에.
까득!
가브리엘은 이를 악물며 루시퍼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조롱을 하고는 그분의 모체를 들고 사라진 그녀를.
"썅!"
꽈아아앙!
가브리엘의 주먹이 내리쳐짐과 함께 그가 만지고 있던 받침대는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은 그 누구 하나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숙연한 표정으로 가브리엘의 화난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가브리엘은 저도 모르게 씩씩거리던 숨을 억지로 진정시켰으나, 이내 분에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를 물고는 자신의 바로 앞에 앉아 있는, 그나마 살아 있던 대천사 중 한명이자 탑주 중 한 명인 라구엘에게 물었다.
"위치는 파악했나?"
"……우선 그동안 모아 왔던 마력을 전부 사용해서 루시퍼가 이동한 좌표는 특정하는 데 성공했다."
라구엘의 말에 가브리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분을 강신하기 위해 지금까지 천사들이 어떻게든 진득하게 모아 왔던 엄청난 양의 마력.
무슨 일이 있어도 그분이 강신할 때 사용하자고 생각했던 그 엄청난 양의 마력을, 가브리엘은 사용했다.
어차피 모체도 빼앗기고 루시퍼도 배신한 이상 그분을 다시 되살릴 길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모체를 빼앗아간 루시퍼를 쫓아가 어떻게든 모체와 루시퍼를 잡아오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가브리엘은 모든 마력을 루시퍼의 위치를 찾는데 사용했고.
다행이 '길'을 제시하는 대천사인 라구엘은 그 엄청난 양의 마력을 사용해서 루시퍼가 이동한 곳.
정확히는 51번 탑의 잔재가 있는 곳을 찾았다.
"포탈을 열어라."
가브리엘의 한 마디.
그에 라구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이 옆에 들고 있던 책을 펼쳤다.
책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성스러운 빛.
그것은 순식간에 라구엘의 앞에 뿌려져 거대한 오망성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것은 종래에 와서는 거대한 원형 포탈로 변했다.
그 모습을 보며 라구엘은 입을 열었다.
"이 포탈을 통과하면 곧바로 그 잔재에 도착할 거다."
라구엘의 말에 가브리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사들을 바라봤다.
그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천사들을 바라보는 가브리엘.
허나 천사들은 그런 가브리엘의 뜻을 알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그분을 위해!"
수많은 천사들이 마치 하나처럼 신전에 퍼짐과 동시에, 천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앞다투어 새하얀 포탈을 향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포탈에 빨려 들어가듯, 망설임 없이 행진을 이어나가는 천사들.
그 모습을 보며 가브리엘은 천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잔혹한 얼굴로 생각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모체를 찾겠다……. 그리고 루시퍼 그년은…….'
까득-!
'무조건 죽이겠다. 무조건 죽여 버리겠어……!'
가브리엘은 그렇게 다짐하며 천사들이 행진하고 있는 포탈을 바라봤다.
그 짧은 생각을 하는 사이에 천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과 자신을 기다리는 대천사들뿐.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가브리엘은 이내 걸음을 옮기며.
"가자."
그렇게 말했고.
이내 가브리엘과 그를 기다렸던 대천사들은 마침내 51번 탑의 잔재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응?"
그는 51번 탑에 발을 들인 순간,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쿠그그그그그그극────!!!
온 세상을 멸망시킬 것 같은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운석.
그것을 바라보며 김현우는 생각했다.
업(業)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젠가 자신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업(業)이라는 것은 여러 갈래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결국 보편적인 정의는 생명이 삶을 살아오면서 스스로가 죽음에 달할 때까지 쌓아 온 업적을 말한다.
그리고 김현우가 눈동자를 통해 얻은 수만 개의 업은 일반적인 업이 아닌 눈동자가 노네임과의 싸움에서 조금이라도 승률을 올리기 위해 준비한 위업(偉業)들 이었다.
하나하나가 역사에 기록되고 후세에 길이길이 알려질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을 어떻게든 이뤄내는 위업(偉業).
허나 위업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필멸자(必滅者)들에게서 나온 업.
눈앞에 펼쳐진 재앙을 막기에는 역사에 기록되고 후세에 남겨진 위업도 작아보였다.
그래.
고작 하나의 위업(偉業)만으로는 작았다.
허나-
"후우-."
-김현우가 가지고 있는 위업은, 고작 하나가 아니었다.
이제는 강렬한 충격파를 쏘아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운석을 바라보며, 김현우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는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운석과 김현우의 크기 차이는 아무리 좋게 쳐줘도 수천 배.
보는 것만으로 헛웃음이 나오는 압도적인 질량의 차이는 김현우를 그저 한 톨의 덧없는 생명으로 보이게 했다.
바닥에는 용암이 금방이라도 김현우를 잡아먹을 듯 혀를 날름거리고,
위에서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릴 정도로 시린 운석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상황.
그 속에서 김현우는 눈을 감고 떠올렸다.
자신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모든 업을.
그리고, 그 거대한 운석이 김현우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그 순간-
"후읍-."
-김현우의 손이 움직였다.
바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운석의 끝에 손을 댄 김현우의 손바닥이 자연스레 아래쪽으로 밀린다.
그와 함께 터져 나가는 땅.
붉은 용암이 넘쳐흐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다음-
툭-
분명 김현우를 박살 낼 듯 떨어져 내리고 있던 운석은, 마치 그 자리에 선 것처럼 멈춰 버렸다.
그것은 바로 혼자 떨어지던 태산을 받쳐 든 투군자(投軍者)의 묘리였으며-
쿠-그그그극! 파가가가가각-!!!!
김현우의 손에 닿은 운석이 그가 쥔 손을 기점으로 정확히 절반으로 쪼개지는 것은 홀로 절벽을 가른 태극선신(太極仙神)의 묘리였고.
그리고-
"흡!"
이내 절반으로 갈라진 운석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 떨어지고 있는 다른 운석들을 부순 것은, 그 예전 홀로 거신(巨身)을 박살 냈던 나찰귀(羅刹鬼)의 묘리였다.
김현우의 몸에서 재현된 세 개의 묘리는 그의 의도에 따라 떨어지던 운석을 그대로 박살 내 버렸다.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위업.
그것을 보며 김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다.'
김현우는 지금까지 위업을 사용할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노네임의 공격을 피하는 데에 주력했다.
그 이유는 바로 김현우에게 다음이 없기 때문.
만약 그에게 마력이 있었다면 노네임에게 아무리 공격을 당하더라도 범천의 업을 이용해 자신의 몸을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 김현우의 몸에는 마력이 없다.
아니, 애초에 그의 몸에 마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노네임은 김현우가 마력을 사용하게 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지금까지 어떻게든 피해를 입지 않고 전력을 보존하기 위해 그의 공격을 절대 전면으로 받지 않았다.
물론 그 이외에 스스로에게 든 의심도 있었다.
과연 자신이 지금까지 배운 업들을 잘 사용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
물론 맹인에게서 배운 직감이나 개미인간에게 배운 탐지 능력은 그가 사용하지 않아도 거의 반영구적으로 항상 사용되고 있는 것이었으나 다른 것은 아니었다.
오롯이 김현우가 기억하고 사용해야만 발휘되는 묘리와 기술들.
김현우는 솔직히 자신을 믿지 못했다.
과연 정말로 그 경험을 통해 얻은 묘리나 기술로 노네임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운석을 마주 두고, 김현우는 그제야 깨달았다.
결국 이러고 있어 봤자 자신은 결코 노네임을 이길 수 없다고.
아무것도 못 하고 피하기만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긴다는 말인가?
그렇기에 김현우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다잡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가 아닌 '어떻게든 해야 한다.' 로.
마음속에 드는 '의문'을 '확신'으로.
"후우……."
김현우는 마치 주마등과 같이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경험들을 떠올렸다.
어떤 이는 인간이었으며, 인간을 초월한 선(仙)이기도 했고.
애초에 인간이 아닌 자들이 있는가 하면, 인간과 비슷한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김현우는 그 모든 경험들을 분명 스스로 경험하고 자신의 몸속에 담았다.
한 마디로, 처음부터 그는 의심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이었다.
-스윽
벽을 타고 올라 김현우의 몸을 녹이겠다는 듯 사방으로 다가오는 용암.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모든 것을 녹여 없애는 용암에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 발자국.
그러나-
쿠그그그그그극!!!!!
-김현우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 발자국은 단 일보(一步)로 세상을 가른 무적존(無敵尊)의 발걸음이었고.
쩌-저저적! 콰가가가가각!!!!!!
김현우의 한 발자국은, 마치 홍해의 기적처럼 바닥을 갈랐다.
김현우의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던 용암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안으로 쏟아져 내려갔고, 뒤늦게 다른 곳에 떨어지고 있던 운석들이 사방에 떨어져 괴악한 충격파를 만들어낸다.
허나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김현우는 그 자리에서 뛰어 올라 노네임의 앞에 다가섰다.
"……."
지금까지의 일을 전부 보고 있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그의 모습.
김현우는 노네임의 앞에서 망설임 없이 주먹을 휘둘렀고.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김현우의 몸을 얼려 버렸다.
쩌저저적-!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얼어붙는 김현우의 몸.
그 모습을 보며 노네임은 미소를 지었으나-
까드드드드득!
곧 그다음 보이는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전보다도 많은 마력을 소모해 공간에 있는 온도를 극한까지 끌어내렸기에 김현우는 얼어붙은 그대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어야 했다.
그러나-
빠아아악!
"카학!?"
그가 경험했던 만년빙설(萬年氷雪)의 업은, 그 극한으로 떨어진 온도 속에서도, 김현우의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일 수 있게 해주었다.
김현우의 주먹에 맞아 순식간에 튕겨나가는 노네임.
그의 주변에 떠 있던 중력장들이 뒤늦게 김현우에게 도달해 그의 몸을 짓씹어먹을 듯 달려들었으나, 그것들은 단 하나도 김현우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로 몰리는 중력장들을 쳐내며, 김현우는 노네임의 모습을 바라봤다.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이 빠진 용암 속에서 걸어 나오는 노네임.
물론 고작 용암에 빠진 것으로 피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으나 역시 저 모습을 보니 괴물이라는 단어가 김현우의 머릿속에 연상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처럼 긴장감이나 압박감이 들지는 않았다.
노네임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음에도 더 이상 긴장되지 않았고.
그가 손을 휘저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로 두렵지 않았다.
그래.
"이 자식……!"
이제는,
"덤벼."
두렵지 않았다.
414화. 노 네임 (Nameless) (4)
모든 것이 책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그곳.
하늘, 땅, 벽 할 것 없이 엉망진창으로 놓여져 있는 책들을 멍하니 바라고 있는 남자, 밀레시안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 탐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헤르메스가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예."
탐왕의 긍정.
그에 밀레시안은 저도 모르게 답답하다는 듯 '하'하는 탄식을 내뱉고는 이야기했다.
"……그럼, 다 예측하고 있었다는 말이야?"
밀레시안의 말에 탐왕은 잠시 고민하고 있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적어도 제게 이야기하기로는요."
"그런데 지금 네 말은 헤르메스가 결국 네 상황을 전부 예측하고 있었다는 걸로 들리는데?"
"다시 한번 말했듯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헤르메스는 제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이야기해주었고, 그건 제가 말했듯이……."
탐왕은 자신의 옆에 쌓아둔 책들을 보여주었다.
"약 1800가지의 상황이 넘어갑니다. 한 마디로 예상했다기 보다는…… 그냥 운 좋게 하나의 수를 때려 맞춘 거지요. 그리고 거기에 맞는 최선의 행동을 또 생각해 놓은 것이고요."
"미치겠군."
도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밀레시안, 그러나 그는 곧 이야기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뭐, 아시다시피 저희는 숨어 있는 상황이고 밖의 상황은 알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저희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다는 거죠."
"한 마디로 우선은 밖에 나가봐야 알 수 있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탐왕의 말에 밀레시안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미 그는 탐왕에게서 헤르메스가 남겨놓은 것들에 대해 들어버렸다.
그렇기에-
'그 새끼, 나한테는 저번에 끼어들지 말라고 하더니, 결국에는 나를 이용할 생각이었잖아?'
-밀레시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럼, 결국 움직여야겠네."
이내 그는 은신처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
지상에 있는 천산(天山).
그 곳에는 한 남자, 아니 청룡이 천산의 꼭대기에서 묵묵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오랜만이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곧바로 시선을 돌린 청룡은, 이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수인, 평천대성(平天大聖) 우마왕(牛魔王)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난 지 이제 3일도 되지 않은 것 같다만."
청룡의 말.
그에 평천대성은 하하핫- 하며 호기로운 웃음을 토해내고는 대답했다.
"그 정도도 오랜만이라고 하기에는 충분하지!"
"……뭐,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딱히 이해는 안 가지만 딱히 그것을 정정하고 싶지 않았던 청룡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래서, 이곳에 와 주었다는 건 나와 함께 9계층으로 가겠다는 소리로 봐도 좋겠지?"
청룡이 지금 혼란스러운 9계층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홀로 이곳에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서서히 멸망의 길로 들어서려는 9계층을 어떻게든 막아보기 위해 원군을 요청하러 온 것이었다.
"물론이지."
"생각보다 쉽게 정했군."
"안 될 건 뭐 있나? 만약 그 녀석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곳에 처박혀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러는 자네는? 이곳에 있는 3일간 원군을 요청할 수 있는 곳에는 전부 요청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확실히 평천대성의 말대로, 청룡은 지상에 내려오고 난 뒤 3일간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원군을 요청하러 다녔다.
물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칠대성(七大聖)의 수장인 평천대성이 있는 곳이었고, 그 다음은 청룡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천계(天界).
그 다음으로는 혹시 몰라 지옥(地獄)에도 갔다 왔고, 그 이외에도 원군을 요청할 수 있는 곳이면 그 어디로든 돌아다니며 원군을 요청했다.
그렇게 3일.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태양이 한 가운데 뜰 때 천산의 꼭대기로 와달라는 말을 했던 것을 상기한 청룡은 시선을 돌려 평천대성을 바라봤다.
"자네 혼자 왔나?"
청룡의 물음.
그에 평천대성은 씨익 웃더니 입을 열었다.
"혼자 왔겠나?"
그의 물음과 함께 평천대성의 뒤로 요괴들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굴들은 청룡의 입장에서도 꽤 얼굴이 익숙한 칠대성들이었다.
그런데-
"……응?"
칠대성 이후로도. 올라오는 이들이 있었다.
그냥 있었던 게 아니라 꽤 많았다.
"……."
아니, 그냥 존나 많았다.
"이 숫자는 대체……?"
청룡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평천대성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통쾌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화과산의 원숭이들이지. 뭐, 겸사겸사 다른 아우들의 부하들도 껴있고 말이야."
"……많군."
청룡은 어느새 넓었던 천산의 꼭대기를 가득 채운 수많은 요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물론 그들 하나하나가 대성들처럼 강하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많은 수라면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수척했던 얼굴에서 조금이나마 밝아지는 청룡의 얼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인과를 벗어난 요괴(妖怪)들이 이렇게 잔뜩 모여 있다니, 이것 참 보기 힘든 광경이로군."
청룡은 하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하늘로 시선을 돌렸고.
"……긴나라(緊那羅)!"
이내 곧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있는 천계의 팔부신, 긴나라를 바라보며 곧 천계에서도 지원을 보냈다는 사실에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동방의 수호신이여. 저는 상제(上帝)의 명을 받들어 남방의 수호신을 도우러 왔나이다."
"상제께서…… 직접 하명하셨다고?"
청룡의 물음에 긴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렇습니다. 상제께서는 도움을 받았으니 응당 베풀어야 한다며 저와-."
"……새들이 많군."
"-일천의 천군(千軍)을 보내시어 당신을 도우라 하셨나이다."
평천대성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공감할 정도로 청룡은 빠듯하게 가득 차 있는 하늘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한명 한명이 일반 병사 수백을 너끈히 상대할 수 있다는 천군(千軍)들이 일천.
청룡은 아마 이 상황을 내려다보고 계실 상제에게 감사함과 동시에-
"……우선, 잠시 설명을 하도록 하지."
곧 요괴들과 천군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본 청룡은 곧바로 긴다라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이해했습니다. 저도 하늘에 귀의했으나 한때는 저들과 같았던 몸. 적어도 당신들을 돕는 동안 저들과 분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생각보다 쉽게 풀리는 이야기에 청룡은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곤 말했다.
"그럼, 이제 올 사람들은 전부 왔나?"
청룡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산의 꼭대기에 모여 있는 수많은 군세를 바라봤고, 그렇게 포탈을 열려던 순간.
쿵!
청룡의 앞에, 무엇인가 솟아올랐다.
"……?"
순식간에 집중되는 시선.
그에 따라 청룡의 앞에 솟아오른 돌기둥은 순식간에 갈라졌고, 이내 그 안에서는-
"……오관대왕(五官大王)?"
지옥의 십왕지옥(十王地獄)을 관리하는 대왕 중 검수지옥(劍樹地獄)을 관장하는 오관대왕이 청룡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돌기둥 안에서 빠져 나온 뒤 앞에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고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희귀한 광경이군."
확실히, 그의 입장에서 요괴와 천군이 서로 대적하지 않는 모습은 굉장히 희귀한 광경이었기에 오관대왕은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이내 조금 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이야기했다.
"이런, 너무 희귀한 광경이라 저도 모르게 추태를 부렸군."
"충분히 이해한다."
청룡의 말.
그에 오관대왕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튼, 십왕의 의견을 조율한 결과, 우리는 세상의 인리를 지키기 위해 힘쓰는 동방의 수호신과의 신의를 지키고자 원군을 지원하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소."
"그렇다면……."
"이 몸, 오관대왕이 당신의 필요가 끝날 때까지 지옥에서 보낸 원군이 되어 줄 생각이외다."
거기에-
"검수지옥을 지키는 삼천의 검귀들까지 말이오."
오관대왕의 말과 함께 여기저기서 솟기 시작하는 돌기둥.
쩌저저적-!
천산을 뒤덮을 정도로 많이 솟아오른 돌기둥들은 순식간에 깨져 나가기 시작했고, 이내 그 안에서는-
끼릭- 끼리리릭!
온 몸이 검으로 덮여 있는 검귀들이, 듣기에는 조금 기괴한 소리를 내며 돌기둥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병력.
그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멍을 때리던 청룡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는 이야기했다.
"정말 고맙다."
청룡의 말에 오관대왕은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무얼, 우리는 빚을 청산하려고 하는 것뿐이오."
"빚……?"
"자네들 덕분에 이 세상에 망가지던 인리들이 다시 세워지지 않았소? 자네들이 천하를 구했고, 그에 따라 우리가 원군을 보내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니 너무 개의치 마시오."
오관대왕의 말에 청룡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산의 꼭대기에는 화과산(花果山)의 원숭이들을 포함한 요괴들의 군단이.
천산의 하늘에는 긴나라(緊那羅)와 함께 한 일천의 천군(天軍)이.
그리고 천산의 절벽에는 오관대왕(五官大王)과 삼천의 검귀(劍鬼)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엄청난 군세.
청룡은 그 군세들을 바라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문을 열도록 하겠소."
그 말과 함께 청룡은 곧바로 마력을 이용해 허공에 술식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천산의 절반 정도를 삼킬 정도로 거대해진 술식.
우우우웅!
청룡이 마력을 사용해 술식 안에 무엇인가를 그려 넣을 때 마다 마력은 그에게 공명하며 푸른빛을 내뿜기 시작했고.
이내 청룡의 움직임이 끝났을 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들 고맙다."
청룡은 그 말과 함께 거대한 포탈을 향해 몸을 집어넣었다.
그 뒤를 따라 포탈 안으로 들어가는 군세들.
천군이 그 날개를 활짝 펼치며 포탈 안으로 들어가고.
요괴들이 흥에 취해 뒤엉켜 들어가며.
검귀들이 대왕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들어간다.
그렇게 순식간에 포탈 안으로 모조리 들어간 세 개의 군세.
그리고 그렇게 포탈의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아무래도, 들어오자마자 바로 전투가 일어날 것 같은데, 모두 괜찮겠소?"
청룡은 51번 탑의 최상층 쪽에 잔뜩 몰려있는 천사들을 보며 입을 열었고.
"아……."
반대로, 포탈을 통해 끝없이 몰려오고 있는 군세들을 바라보고 있던 가브리엘은-
"이런 씨발."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고.
그러자-
"애들아 가자."
"저게 그 천사라는 건가?"
"그런 것 같군 천군이랑은 조금 다르게 생긴 걸 보니 말이야."
"제일 앞에 있는 놈 대가리는 내가 깨보도록 하지."
가브리엘의 말과 함께 요괴들이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선두를 서기 시작했고.
"천군이여, 수호신을 도와라!"
하늘을 날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들고 있던 창을 머리 위로 올려 투창을 준비했으며.
"모든 일은 윤회로서 제 기능을 하는 법, 잘못된 윤회를 올바르게 돌려라, 검귀들이여."
-검귀들이, 천사들에게로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415화. 노 네임 (Nameless) (5)
무엇인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 챈 노네임의 표정이 조금 전과 같이 일그러진다.
참으로 다채로운 표정 변화.
허나 그런 감상을 전부 내뱉기도 전에 노네임은 행동을 시작했다.
가볍게 손을 흔드는 그.
허나 그 한 번의 동작과 함께 노네임의 등 뒤로 수많은 창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푸르른 색을 띄고 있는 창들은 노네임의 등 뒤를 기점으로 마치 증폭하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이내 순식간에 퍼져 나간 창들은 숲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증식했다.
그와 동시에 한 번 더 손을 휘두르는 노네임.
그리고-
카드드드득!
"!"
-김현우는 자신의 몸이 무거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쿠그그극! 콰가각!
김현우를 기점으로 주변의 땅이 마구잡이로 파헤쳐진다.
마치 굉장히 무거운 것을 박아 놓아 땅이 찌그러지는 것처럼.
그것을 보며 김현우는 노네임이 자신의 주변에 있는 중력을 배가시켰다는 것을 깨달았고.
"어디 이것도 평범하게 막을 수 있는지 보도록 하지."
이내 노네임은 그를 향해 끝없이 만들어져 있는 창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당장 김현우의 눈에 보이는 창만해도 수천.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으나 아마 자신의 뒤쪽에도 그 정도의 창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한 김현우는 눈앞에 다가오는 창이 자신의 몸통을 정확히 노리고 쏘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마력으로 만들어진 저 창이 순수하게 창만의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달은 김현우는 몸을 움직였다.
배가된 중력 덕분에 조금 전과는 현저하게 느려진 김현우의 속도.
그러나 그는 조급해하지도, 또한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김현우의 경험에는 정확히 이런 상황은 아니었으나 이런 상황과 흡사한 곳에서 싸움을 벌였던 필멸자들의 경험이 몸속에 깃들어 있었으니까.
틈을 주지 않고 날아온 창들을 바라본다.
처음에는 몸통을 노리고 날아오던 창들은 어느새 위치를 바꿔 김현우의 몸 여기저기를 노리고 있었다.
머리를 노리는 창이 13개.
몸통을 노리는 창이 21개.
왼팔을 노리는 창이 8개.
오른팔을 노리는 창이 11개.
오른 다리.
종아리.
허리.
…….
…….
그 모든 정보들이 일순 김현우의 인지 능력을 통해 그의 머릿속에 입력되고. 동시에 김현우의 양손이 기수식과 같은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후우-."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심해 속에서, 해룡들의 공격을 모조리 받아 쳤던 해산신(海山神)의 움직임이, 김현우의 몸속에서 재현되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은 느렸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손은 쏘아지는 모든 창들을 모두 흘려낼 정도로 빨랐다.
굉장히 모순되는 광경.
그의 두 손은 분명히 느리게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네임이 쏘아내는 창은 단 하나도 김현우의 몸을 통과하지 못했다.
물론-
꽈아아아앙!
김현우가 흘려낸 창이 그 어디서 터진다고 하더라도, 김현우는 상처받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는 이것보다도 더한 공격을 몇 십, 몇 백, 몇 천번이나 막아낸 흑군산(黑君山)의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것뿐인가?
자신의 몸을 한없이 무적에 가깝게 만드는 금강불괴의 경험이 그의 몸에 녹아 있었고.
자신의 몸에 절대 독을 허락하지 않았던 만독불침의 경험이 그의 몸에 녹아 있었고.
심지어는 자신의 몸에 손조차 닿기를 두려워해 모든 것을 반대로 돌리는 반환공의 경험이 그의 몸에 녹아 있었다.
그 이외에도 오로지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고안된 기술과 만들어진 육체의 경험들.
그것들은 마치 원래 김현우의 몸속에 있었던 것처럼 연계해 그의 몸에서 나타나는 중이었고.
그렇기에-
"후우-."
김현우는 장마철의 소나기보다도 많이 쏟아졌던 그 엄청난 양의 창을 아무런 피해도 없이, 모조리 막을 수 있었다.
"……칫."
그리고 그런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노네임은 인상을 찌푸린 손을 한 번 더 휘둘렀다.
피슛-!
그와 함께 김현우의 몸에 난 상처.
허나 김현우는 노네임이 한 짓이 대기 중의 마력을 날카로운 칼날로 바꾼 것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곧바로 금강불괴와 만독불침을 이용해 그의 공격을 무효로 만들었다.
굳어지는 노네임의 얼굴.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말했다.
"거 모습, 표정 한번 다채롭네."
"내 힘이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노네임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연다.
당연히 김현우는 그의 힘이 이곳에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지금 자신이 업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나서야 눈동자가 말한 3할의 승률을 확보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직 그에게는 남은 것이 있을 것이었다.
"그럼 어디 한번 보여줘 봐."
김현우의 말.
그에 노네임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곧바로 마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마치 봉인이 해제되듯,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진 마력들.
이미 숲의 모습이 아니, 폐허의 모습이라고 해도 될 그 황폐한 대지에 노네임의 밀도 높은 마력이 흩뿌려지기 시작한다.
쿠그그그그그그그그극─────────!!!!!
그와 함께 발생하는 엄청난 소음.
마치 마력이 그대로 유형화되어 사방에 있는 모든 것을 잡아먹을 듯 뻗어 나간다.
점점 더 세를 넓히는 노네임의 마력.
물론 김현우로서는 노네임이 하려고 하는 무엇인가를 하게 둘 정도로 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그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흥, 늦었다."
"……!"
김현우는 그 다음 순간, 노네임 자신에게 손을 뻗음과 동시에 등에서 느껴지는 소름끼치는 기분에 몸을 틀었고-
콰지지지지직-!!!
노네임의 손이 펴진 정면으로, 무엇인가 깨져 나갔다.
마치 차원이 깨져 버린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조각 나 있는 공간.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그에 노네임은 다시 한번 김현우를 향해 펼친 손바닥을 조정했다.
그러나 그 다음, 노네임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다.
"!"
이미 김현우는 노네임의 앞에 와 있었으니까.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노네임이 서둘러 손을 김현우에게로 조준하려 했으나 김현우는 오른손으로 그의 손바닥을 옆으로 쳐냈다.
중심을 잃는 노네임.
김현우는 그것이 기회라는 듯 곧바로 노네임의 품에서 파고들어가 주먹을 휘둘렀으나.
"!"
그 다음 순간, 김현우는 자신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인은 바로 마력의 팽창.
김현우는 곧바로 반환공을 이용해 마력의 팽창을 외부로 돌렸으나, 그 짧은 찰나의 시간에 노네임은 이미 그의 사정거리를 벗어났다.
그와 함께-
쿠그그그극-!
끝없이 퍼져 나가고 있던 마력으로 인한 소음이 사라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김현우는 자신이 서 있던 공간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폐한 대지의 땅을 밟고 있었던 김현우는 어느새 새하얀 공간 속에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그것에 김현우는 이상함을 느끼기도 잠시.
-치이이이익!
김현우는 곧 새하얀 공간 속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는 용암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고.
"이 곳은 내 세상이다."
"……뭐?"
곧 어느 순간 사라졌던 노네임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곳을 확인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말 그대로, 이곳은 마력으로 만든 내 세상이라는 소리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지. 예를 들면-."
-이렇게 말이야.
"!"
노네임의 손가락이 소리를 내며 부딪히고, 김현우는 순간 자신의 시야가 깜깜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야는 멀쩡했다.
다만 이 새하얀 공간이 어둡게 변했을 뿐.
허나 그럼에도 김현우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어둠에 적응해 무엇인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완전한 암흑.
그 사이에서-
"!"
김현우는 느껴지는 감각에 의존해 본능적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들리는 절삭음.
"이 공간은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지. 그리고 그것은 이 통제권 안으로 들어온 너도 마찬가지다,"
그 말과 함께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는 김현우의 시야.
다만-
"……이건 또 뭐야?"
김현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새하얀 공간이 아닌, 여기저기에 섬이 떠다니는 부유 공간에 떠 있었다.
물론 그저 부유 공간일 뿐이라면 김현우가 놀라는 일 또한 없었을 테지만, 그가 굳이 입을 연 이유는.
치지지지지지직-!!!
그런 부유섬들의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는 비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화염 비라고 하는 게 맞을까?
맞기만 해도 온 몸이 타들어갈 것 같은 화염들이 쉴 새 없이 부유섬에 떨어지고 있었다.
물론 화염 비뿐만이 아니었다.
또 어느 공간에는 모든 것을 녹이는 부식성 비가.
다른 곳에서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그리고 또 다른 곳에는 김현우조차 제대로 파악이 안 되는 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뿐인가.
'……공기 중의 마력도 전부 칼날로 바뀐 건가?'
김현우는 자신의 몸이 살짝 움직였음에도 자신의 팔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것이 피부를 긁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 느껴지는 것은-
'……중력인가.'
김현우는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중력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게다가 아까처럼 김현우의 주변에 중력이 적용되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만 중력이 적용되는 것 같았다.
마치 게임으로 치자면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온갖 디버프를 전부 받고 시작하는 기분.
거기에다 김현우는 그 이외에도 이 공간에 어떠한 장치가 추가적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당장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으나 분명했다.
'무엇인가가 있다.'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을 끝내며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으며 노네임을 바라봤다.
노네임은 김현우의 바로 맞은편에 있는 부유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이내 헛웃음을 흘린 김현우.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노네임이 자신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기라는 말이 정말로 잘 어울렸다.
부유섬 곳곳에는 용암이 흐르고 있고, 맞기만 해도 치명적일 것 같은 갖가지 비들이 쏟아져 내린다.
거기에다 중력까지.
'이래서 3할인가.'
거기에다 김현우가 아직 인지하지 못한 무엇인가까지 생각해보면, 확실히 눈동자의 눈은 정확했다.
아니, 오히려 눈동자는 김현우를 조금 더 과대평가 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3할이라…….'
허나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김현우는 두렵지 않았다.
결국 3할이라는 승률은, 30%라는 승률이 있다는 것이고, 설령 눈동자가 그것을 잘못 계산했다고 해도 결국 승률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었다.
눈동자가 김현우에게 경험시켜준 그 수많은 업들은, 분명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필멸자들의 위업(偉業)이 담긴 것들이었으니까.
슥-
김현우의 생각이 끝나자 노네임의 손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들어 올려졌다.
중력이 김현우의 몸을 짓누르고,
여러 가지 디버프가 김현우의 행동을 제한했다.
그래도-
콰지지지지직-!
"흡!"
김현우는 노네임이 손바닥에서 무엇인가를 쏘아낸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몸을 움직여 그에게로 도약했다.
416화. 노 네임 (Nameless) (6)
-콰르르르륵!
공방이 이어져 나간다.
김현우의 몸이 움직여 노네임을 압박하고, 노네임은 무척이나 다양한 방법으로 김현우를 궁지에 몰아 세웠다.
"!"
움직이던 도중 갑작스레 찾아온 암전.
그것은 김현우가 지금까지 키워왔던 인지 능력으로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애초에 눈이 없는 맹인신권(盲人神拳)의 경험을 체득하고 있었으니까.
갑작스레 눈앞이 멀었다고 해서 김현우의 움직임은 둔해지지 않았다.
허나 문제는 그 다음.
"!"
"역시 인지 기관까지 바꾸면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가보군."
노네임은 김현우의 눈을 가린 상태에서 김현우가 느끼고 있는 인지 기관을 뒤틀어 버렸다.
분명 왼손이 움직여야 하는데 오른발이 움직이고, 반대로 오른발이 움직여야 하는데 오른손이 움직이는 기괴한 인지.
허나 그것마저도.
빡!
"큭!"
"이 정도야 적응하는 건 쉽지."
김현우는 극신좌(極身座)가 가지고 있었던 양의심공(兩儀心空)으로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니라 김현우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모든 종류의 경험은 그가 극한의 상황에 몰림에 따라 세부적인 곳에서 그를 돕고 있었다.
허나 그렇게 수 만 가지의 경험이 김현우를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쯧……!"
결국 한계는 있었다.
촤악!
자신의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자상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바로 앞에 있는 노네임의 복부에 주먹을 찔러 넣었다.
"칵!"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뒤로 나가떨어지는 노네임.
김현우는 순간적으로 다시 그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
그가 몸을 움직이자마자 느껴지는 여러 가지 변화.
인지가 변화되고.
중력이 사라진다.
순간 허공에 붕 떠오르는 몸.
그와 함께 심야가 연속으로 깜빡거리며 점멸한다.
순간적으로 몸에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에 김현우 인상을 찌푸리며 잠깐 비틀거렸으나.
"……."
이미 그가 한번 비틀거린 순간, 노네임은 김현우의 사정거리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괴물 같은 놈……."
이전과는 다르게, 옷 여기저기가 터져 있는 노네임에게서 나온 말에 김현우는 웃음을 지었으나 사실 그도 지금 이 상황이 마냥 웃을 수만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러다 좆되겠는데.'
김현우는 노네임을 바라보면서도 냉정하게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물론 그의 몸 상태는 최악까지는 아니었다.
아직 김현우는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체력이 충분히 남아 있었으니까.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체력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지, 체력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 때문이었나.'
김현우는 자신의 몸에 난 상처들을 바라봤다.
여기저기 피가 터지고 날카로운 무엇인가에 찢기거나 피멍이 든 부위들도 있었다.
그에 비해 노네임은?
"……."
그는 옷이 조금 찢어졌을 뿐이지, 몸에는 상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상처를 회복했다고 말하는 편이 맞았다.
"……."
압도적인 불합리함.
김현우와 노네임이 아무리 맞붙더라도 결국 체력이 떨어지고 피해가 누적되는 것은 김현우 혼자일 뿐.
노네임의 실질적인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 김현우의 승률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쪽은 결국 체력이 깎이고 있고, 저쪽은 체력을 100% 유지 중이니까.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된다.'
그 덕분에 머리를 굴려서 나온 결론.
허나 그렇다고 해도 그 다음에 드는 생각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김현우는 지금까지 노네임과 싸우며 그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고, 그렇기에 섣불리 내놓은 답에 결론을 낼 수가 없었다.
그는 노네임을 한방에 소멸시킬 만한 공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냉정한 판단.
'…….'
김현우는 노네임을 단 한 방에 쓰러뜨릴 만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그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하나하나가 무시하지 못할 필멸자들의 절대적인 위업들이었고, 김현우는 그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허나 아무리 대단한 위업이 몇 만 개나 있을지라도 노네임을 단번에 죽일만한 기술은 없었다.
"쯧."
이내 생각을 끝내고 짧게 혀를 차는 김현우.
노네임은 그 짧은 찰나에 정비를 맞췄는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다시 한 번 노네임과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의 시야가 끊임없이 반짝이며,
그의 감각이 끊임없이 뒤바뀐다.
그렇게 해서 늘어나는 상처들.
김현우가 아무리 체력을 보존하려고 해도 노네임을 상대로는 절대로 체력을 보존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공방을 이어나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끅!"
김현우는 공방이 순간적으로 끊어질 듯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미개하군, 고작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을 싸웠으면서 벌써부터 체력의 한계가 보이니 말이야."
들려오는 노네임의 목소리.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그어진 자상 덕분에 쉼 없이 피가 흐르고 있는 모습.
거기에 더해서 오른팔이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물론 뼈가 부러지고 피가 흐른다고 해서 김현우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수많은 업이 있었고, 그 업들 중에는 이런 상처를 입었을 때 그 상처를 임시적으로나마 치료하는 방법 또한 있었으니까.
허나 문제는-
"……."
-바로 기세등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노네임이었다.
"흐……."
오른팔에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을 억지로 삼키며 김현우는 생각했다.
'……이게 내 승률이 3할인 이유였나.'
아니, 애초에 눈동자가 이것조차 고려하지 않고 말했을 확률을 생각해 보면 지금 승률은 더더욱 떨어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싸우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방법이 필요해…… 방법이.'
김현우는 앞에 서 있는 노네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것도 최대한 빠르게.
'……이제 얼마 못 버틴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의 체력은 서서히 빠지고 있었고, 지금 당장 오른팔도 임시 조치를 해놓기는 했으나 그것은 분명 오래 가지 못할 것이었다.
한 마디로, 더 이상 시간을 끈다면 김현우가 노네임을 이길 수 있는 타이밍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지?"
"!"
김현우가 고민하는 와중 또 한 번 달려든 노네임.
그는 조금 전 김현우가 상처를 입은 것으로 나름의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이번에는 아까 전보다 깊게 들어와 싸움을 걸기 시작했다.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공방.
노네임이 김현우에게 각종 디버프를 걸며 공격하고, 김현우는 그런 노네임의 디버프를 파훼하며 그를 공격한다.
단조로운 노네임의 공격패턴.
허나 그 실체를 깨달은 김현우는 그 단조로운 공격 패턴에도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배우지 못한 게 아니라 배우지 않은 것이었나.'
솔직히, 맨 처음 김현우는 노네임의 공격 패턴을 비웃었다.
그는 분명 신과도 같은 능력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모든 부분에서 미숙했다.
근접전은 그 속도가 빨라서 위협적일 뿐이었지 당연히 미숙했고, 그가 김현우에게 보여주고 있는 비현실적인 능력도 겉으로 보기에만 대단해보일 뿐 실속은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노네임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못하는 느낌도 받았다.
마치 수련을 한 번도 안한 사람이 갑작스레 힘을 얻어 자기 멋대로 쓰고 다니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렇기에 김현우는 노네임을 비웃었건만…….
'……애초에 배울 필요가 없었던 거군.'
그와 싸움을 오래 지속해 보니 깨달을 수 있었다.
노네임은 굳이 싸움을 배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우선 기본적으로, 노네임은 가지고 있는 능력만으로도 다른 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지고 놀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혹여나 노네임과 평수를 이룰 만한 강자가 나오더라도 그 강자는 노네임을 이길 수 없다.
결국 노네임은 그 근원이 '마력'이니 만큼 지치지 않을 테고.
강자는 결국 지칠 테니까.
그러니까 한 마디로 노네임은 싸움을 배우는 것조차 불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그저 자기 마음대로 마력을 사용해 상대방과 싸워 그 힘을 빼놓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는 승리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빠각!
"큭!"
김현우의 공격을 막은 노네임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내뺐다.
곧바로 쫓아가는 김현우.
허나 이번에도 그는 노네임의 능력으로 인해 더 이상 그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번에도 김현우와 노네임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또 한 번 빠지는 체력.
그것을 느끼며, 김현우는 결국 다짐을 내렸다.
'이 다음번에, 끝을 낸다.'
물론 끝을 낼 수 있다는 확신은 김현우에게 없었다.
허나 해야만 했다.
어차피 이 이상 밀리기 시작하면 더 이상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승률은 0%에 수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김현우는 깨닫고 있었으니까.
노네임이 움직인다.
몇 번이나 봤던 같은 모습으로,
몇 번이나 봤던 같은 움직임으로.
몇 번이나 봤던 같은 경로로.
이곳에서, 김현우는 분명 다가오는 노네임의 첫 공격을 막음으로써 공방의 시작을 알렸다.
그의 공격은 충분히 파훼할 수 있었고, 최대한의 체력 손실을 막기 위해 김현우는 되도록 모든 공격을 막았으니까.
그러나-
"!"
김현우는 이번에,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노네임의 팔이 힘차게 뻗어지는 그 순간, 김현우는 노네임의 앞으로 달려 나갔다.
놀란 듯 눈을 뜨는 노네임,
빠아아악! 우드득!
그의 주먹이 김현우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물론 주먹이 제대로 내뻗어지기 전에 앞으로 나간 터라 노네임의 공격을 최소화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옆구리의 뼈가 아작 나는 소리를 들으며 김현우는 이를 악물었고,
빠각!
"크악!"
이내 김현우는 노네임의 쇄골에 자신의 손을 밀어 넣어 그를 붙잡았다.
피가 튀는 잔인한 광경.
노네임은 순간적인 고통에 몸부림치며 김현우의 손에서 빠져나가려 했으나 벗어날 수 없었다.
현재 김현우의 오른손에는 혼자 십만산(十萬山)을 붙잡았던 백자(百者)의 묘리가 깃들어 있었으니까.
그 상태에서, 김현우는 자신이 노네임에게 먹일 수 있는 최대의 기술을 떠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공격하는 자세가 무너지지 않도록 중심을 지지하는 오른발에 태극수신(太極水神)의 묘리가 깃들고.
공격의 축 그 자체가 되는 왼발에는 천상대군(天上大軍)의 중법(重法)이 깃든다.
바짝 치켜든 왼손에는 무적자(無籍者)와 사신무관(四身武官)의 묘리가 깃들고.
그의 몸에는 이 모든 것을 자연스레 조화하게 만들어 주는 무극해(無極海)의 심공이 깃들었다.
그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노네임은 어떻게든 김현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는 노네임을 놔주지 않았다.
흘러간 시간은 찰나.
허나 김현우의 몸에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더욱 많은 양의 업이 재현됐다.
그 모습을 보며 본능적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노네임은 김현우의 집중을 방해하기 위해 그에게 이변을 만들었다.
시야를 가두며.
중력을 수시로 가변시키고.
머리 위로는 뜨겁게 타오르는 화염 비를.
그리고 그의 인지 기관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 놓았다.
허나.
어두워진 시야는 경험을 쌓음으로 인해 늘어난 인지 능력으로 대체했고.
자기 멋대로 늘어나는 중력은 심천신자(心泉神子) 보법(步法)으로 완화했으며.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화염 비는 팔열성군(八熱聖軍)의 업을 이용해 버티고.
제멋대로 어질러진 인지 능력은 귀영수(鬼影殊)의 감각으로 대체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은 완벽한 일권(一拳).
콰드드득-!
그 모습을 보며 노네임은 마치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아까 전 한 번 후려친 그의 옆구리를 다시 한번 후려쳤다.
소름끼치는 뼈 소리.
허나 김현우는 끔찍한 고통에 이를 악물면서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노네임에게 주먹을 내뻗었다.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 따위는 나지 않았다.
마력이 모여들지도 않았다.
심지어 주변의 사물이 부서지는 것도 아니었고.
진동이 터져 나오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하고도 조용한 일권은 김현우의 손에서 만들어졌고.
그저-
"후읍-!"
-노네임의 심장을, 정확하게 꿰뚫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파츳!
김현우와 노네임의 몸이, 소리도 나지 않는 빛 속에 잠겼다.
417화. 이제 정말- (1)
김현우의 시야를 가렸던 새하얀 빛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서서히 돌아오는 시각과 청각.
그는 조금 전과는 다른, 피로에 찌든 눈으로 주먹을 내질렀던 자신의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후"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있는 노네임을 바라봤다.
"이 새끼……!"
그래, 그는 살아 있었다.
그저 머리와 상체 일부분만을 남긴 채.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을 몰골로, 그는 김현우에게 악의가 가득 담긴 눈빛을 쏘아내며 입을 열었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그 말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몰골로?"
"고작 내가 이딴 육체 하나가 망가졌다고 해서 소멸할 것 같나? 천만해! 시간만 있으면 나는 다시 육체를 원 상태로 돌릴 수 있다!"
노네임의 외침.
확실히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온 몸이 박살이 나 있던 그의 육체는 아주 약하긴 하지만 실시간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내가 그때까지 널 놔둘 것 같아?"
김현우의 한 마디.
그에 노네임은 같잖다는 듯 웃으며 이야기했다.
"흥, 그따위 몸 상태로 내게 뭔가를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
확실히 노네임의 지적대로 김현우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기는 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덜렁거리는 오른팔.
수많은 경험이 그를 도와주기는 했으나 결국 노네임의 몸부림을 꽉 붙잡고 있었던 대가는 상당히 컸다.
'……움직이지도 않네.'
게다가 슬슬 몰려오는 고통도 상당했다.
마치 오른팔에 있는 모공 사이사이에 뜨거운 쇠봉을 어거지로 쑤셔 넣는 듯한 고통.
물론 그의 몸에 난 상처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갈비뼈도 박살 났고.'
그것은 바로 김현우의 왼쪽 옆구리.
욱씬-
"쯧."
오히려 어떻게 보면 오른팔보다 이쪽이 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네임의 타격으로 인해 완전히 박살이 나 버린 갈비뼈는 그가 가지고 있는 경험으로도 임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부서진 뼈가 폐를 찌르고 있는지 숨을 쉴 때마다 마치 공기가 날카로운 칼날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임에도, 김현우는 느긋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너처럼 몸 전체가 박살 나지 않았으니 당연히 가능하겠지."
"하지만 네가 나를 괴롭힌다고 해서 내 부활을 막을 수는 없을 거다."
"왜?"
"너는 언젠가는 지칠 테니까."
"내가 지치기 전에 너를 소멸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나 보지?"
"설마 내 육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면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비웃음이 가득 담긴 노네임의 목소리.
그는 아무런 말없이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천만해! 네가 아무리 이 육체를 소멸시킨다고 해도 나는 죽지 않는다! 물론 다시 되살아나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하지만-
"나는 '마력'이다. 이 세상의 근본이라 이 말이다. 고작 이 육체가 사라진다고 해도 나는 다시 되살아난다!"
게다가-
"애초에 지금 상태의 너라면 이 재생되고 있는 육체도 소멸시키지 못하겠지."
비웃음을 담아 이야기 하는 노네임.
김현우는 아무런 말없이 노네임의 앞으로 다가와.
털썩.
그의 앞에 주저앉고는 이야기했다.
"뭐, 확실히…… 마력을 죽일 수는 없지."
"……?"
"네 말이 당연해. 마력을 소멸시킬 수는 없잖아? 네 말대로 마력은 근원이니까. 정말 마력이 소멸하기라도 하면 세계가 통째로 붕괴될 텐데. 내가 어떻게 마력을 소멸시키겠어?"
-게다가
"네 말대로 나는 마력을 소멸시킬 수 있을 만한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노네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으나, 이내 비웃음을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지금 목숨을 구걸하려는 생각인가? 만약 그렇다면 너무 늦었-."
"무슨 소리야? 나는 그냥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그건 너와는 엄연히 다른 문제지."
"……뭐?"
노네임의 물음에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마력을 소멸시킬 수 없다고 했지, 너를 소멸시킬 수 없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뭐라고?"
노네임의 말에 김현우는 완전히 헤져버린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에서 검은색의 구슬을 하나 꺼내들었다.
김현우가 밖으로 꺼내들자마자 기기묘묘한 색으로 변해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하는 구슬.
노네임은 그가 꺼낸 구슬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다 이내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 그건!"
"뭐야, 눈동자는 네가 전혀 모를 거라고 했는데 너는 알고 있나 보네?"
김현우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눈동자가 자신에게 구슬을 주었을 때를 생각했다.
그가 아내들과 그 공간에서 떠나기 직전, 눈동자는 그에게 이 구슬을 넘겨주며 이야기했었다.
자신이 무력으로 노네임을 이겨도 그를 죽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노네임은 '마력'이 자아를 가지게 된 이였고, 그렇기에 노네임이 죽는다는 것은 곧 마력의 소멸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김현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김현우가 아무리 난 놈이라고 해도 이 세상의 근원을 소멸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눈동자는 김현우에게 노네임을 소멸시키는 것 대신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그건 바로-
"그년이 만들었던 봉안(封按)……!!"
-노네임의 자아를 봉인할 수 있는 봉인 구슬, 봉안이었다.
애초에 문제는 마력에 있지 않았다.
문제는 마력이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 자아가 '노네임'이라는 것.
그렇다는 것은 곧 마력이 가지고 있는 자아를 봉인하기만 하면 그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김현우가 봉안을 들고 웃음을 짓자 노네임은 그제야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몸을 버둥거렸다.
허나 노네임의 몸은 재생이 끝나지 않았기에 그저 제자리에서 몸을 굴리고 있을 뿐이었고, 그에 이번에는 김현우가 비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왜? 이 구슬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아?"
"이 자식…….이 개새끼가!!!!!!!"
욕설을 내뱉은 노네임.
허나 김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슬을 노네임의 머리 근처로 가져다 대며 이야기했다.
"욕은 구슬 안에서 실컷 해."
노네임의 머리에 닿자마자 갑작스레 변하기 시작하는 봉안의 색.
"어떻게……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떻게 네까짓 미물이 나를 이렇게 만들 수 있냔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노네임이 비명을 지르자 김현우는 말했다.
"숙련도가 다르니까."
"……뭐?"
"숙련도가 다르다니까?"
김현우가 노네임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의외로 너무나도 간단한 것이었다.
눈동자는 노네임에게 졌다.
분명 눈동자는 업 그 자체인 만큼 김현우보다 많은 업을 두르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노네임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저 멀리까지 도망가야만 했다.
허나 아무리 위업이라고 해도 그녀의 업을 단 일부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김현우는 노네임을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노네임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숙련도의 차이 때문이었다.
노네임은 압도적으로 강하다.
그리고 눈동자도 그와 마찬가지.
허나 그 둘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숙련도가 '전혀'라고 할 정도로 없었다.
눈동자는 수만 개의 업을 자신의 입맛대로 섞어 쓰기는 했으나 그 이상의 발전은 없었고, 노네임의 경우도 마력으로 이런저런 일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그것은 완벽하지 못했다.
'뭐…….'
그들로서는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만큼 애초에 수련이라는 단어 자체가 머릿속에 없었을 것이었다.
애초에 노네임의 무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적할 자가 없을 만큼 강력하니까.
'……그리고 그 덕분에-.'
김현우는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고!!!"
비명을 지르는 노네임.
"수고해라."
허나 김현우는 그런 노네임의 말에 짧은 인사로 화답했고,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리에 놓여 있던 봉안이 새하얀 빛과 함께 무엇인가를 흡수하기 시작했고-
"아…… 안 돼! 안 된다고!!! 안 돼!!!!!!"
-노네임의 몸이 재생을 멈추기 시작했다.
재생이 멈추고 오히려 급속도로 빛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노네임의 몸.
그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으나 빛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노네임의 몸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고.
"안…… ㄷ-!!"
그 마지막, 노네임의 몸은 완전히 분해되 버림과 동시에 김현우가 쥐고 있는 봉안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김현우는 검은색으로 변해 버린 구슬을 자신의 품 안에 넣자마자.
털썩.
그대로 뒤로 드러누웠다.
"씨발, 존나 아프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자마자 느껴지기 시작하는 끔찍한 고통.
오른팔은 이전보다 조금 더 확연하게 고통이 느껴지고 있었고, 특히 그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숨을 쉴 때마다 폐에서 끔찍한 고통이 전해지는 것이었다.
마치 폐를 그대로 찢어 버리는 것 같은 고통.
그에 김현우는 몇 번이고 인상을 찌푸리다 자리에서 일어나려했지만.
"……이거 좆됐네."
김현우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힘을 많이 썼나.'
그제야 드는 안일한 생각.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보려 해도 김현우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저 주머니에 있는, 아브가 다시 만들어 준 나침반을 사용하기만 해도 돌아갈 수 있는데, 지금 당장 김현우는 그 정도의 행동을 할 힘도 없었다.
아니, 사실 솔직히 말하면 그의 몸은 한참 전부터 한계였다.
그저 업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던 것뿐.
'어떻게 하지…….'
슬슬 멍해지기 시작하는 머릿속에 든 생각.
돌아가기는 해야 하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고, 솔직히 주머니 속에 있는 나침반을 꺼내 그것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열린 포탈 안으로 기어 들어갈 힘도 없을 것 같았다.
"가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혼잣말.
자신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지금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 사실을, 김현우는 인지하고 있었다.
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흐려지는 시야.
김현우는 고민하려 했으나 긴장이 풀림과 함께 그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주었던 업들이 일제히 풀리며 그의 정신은 마치 서리가 낀 듯 흐릿해지기 시작했고.
'우선, 조금만 눈을 감고 나서 생각해볼까.'
김현우는 마침내 머릿속에 떠오르던 생각들이 수면 아래로 사라짐과 함께 서서히 눈을 감아 버렸다.
그가 눈을 감기 시작하자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 김현우의 몸 상태.
그동안 의식적으로 막고 있던 임시조치가 풀리며 그의 옆구리와 오른팔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
그렇게 쓰러져 있는 김현우의 앞에, 묘한 표정을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쓰러진 김현우를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개박살이 나 있는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남아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이, 황폐한 땅만이 남아 있는 풍경.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남자.
아니 밀레시안은-
"……헤르메스, 아무래도 네가 틀린 것 같은데?"
이내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김현우를 바라봤다.
418화. 이제 정말- (2)
51번 탑의 최상층에서 나름대로의 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을까.
"크아아아악!!"
"다른 세계의 천족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하길래 천계(天界)의 신장(神將) 정도는 되는 줄 알았더니, 이거 완전히 쭉정이들이로구먼?"
우마왕이 자신의 앞에서 힘겹게 검을 맞대고 있는 가브리엘을 보며 흥미가 식는다는 듯 입을 열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어디서 같잖은 악마 주제에……!"
"같잖아? 지금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처지라고 생각하는가?"
뻑!
"켁!"
우마왕은 순식간에 그의 칼을 쳐내고는 곧바로 가브리엘의 얼굴을 후려쳐 버렸다.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처박히는 가브리엘.
허나 우마왕은 그를 끝내 버릴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멍청하군, 힘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걸 보니 말이다."
"마력만…… 마력만 있었다면 네 녀석들쯤은……!"
우마왕의 말에도 가브리엘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무리 네게 마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웃기지 마라! 만약 마력이 있어서 성역을 선포할 수 있다면 너희 같은 녀석들은 아무리 몰려와도 전부 도륙 내 버릴 수 있다!"
한껏 악에 받쳐 비명을 지르는 가브리엘.
그는 이 상황이 억울했다.
'만약 마력만 충분했다면……! 이곳으로 오는 데 마력을 전부 사용하지만 않았으면!'
가브리엘은 '천사'들에게 허락된 성역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었고, 그렇다면 싸움의 양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래. 성역을 만들 수만 있었다면.
가브리엘이 그런 생각을 하며 우마왕을 노려보자 그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짙은 웃음을 지으며 가브리엘의 앞에 다가갔고.
뿌드드득!
"끄아아아악!"
곧바로 가브리엘이 검을 붙잡고 있던 오른손을 그대로 뜯어내 버렸다.
붉은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쓰러진 채 비명을 내지르는 가브리엘.
우마왕은 그런 가브리엘의 앞에 주저앉아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었겠지. 네가 선포인가 뭔가를 사용할 수 있었으면 정말 우리를 죽일 수도 있었겠지. 네 말대로라면 말이야."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만약' 아닌가?"
"크흐윽-!"
"아무리 네가 만약을 부르짖어봤자 이곳에는 그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다. 그래, 네 동료들도 말이야."
우마왕의 말에 가브리엘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았고, 곧 우마왕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주변은 더 이상 시끄럽지 않았다.
분명 가브리엘이 우마왕과 맞부딪힐 때만 해도 시끄러웠던 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져 있었다.
어떤 이유 때문에?
바로-
"아……."
-전쟁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무엇인가가 쉼 없이 부딪히던 쇳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천사들이 힘을 모으기 위해 냈던 함성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지금 그의 눈에 비추고 있는 것은 완전히 박살 난 천사들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퍼석!
-가브리엘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끝났군."
가브리엘의 머리를 발로 밟아 터트려 버린 우마왕은 싱겁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천사들의 시체.
드문드문 요괴들의 시체가 보이고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천사들의 시체에 비하면 그 수가 무척이나 낮았기에 우마왕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걸로 끝인가?"
"아니, 오히려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만."
우마왕의 대답에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청룡.
확실히 그로서는 천사가 이런 식으로 쳐들어올지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과하게 데려온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 덕분에 천사들을 아주 편하게 막아낼 수 있었기에 청룡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내심 뿌듯해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저 천사들을 막은 것은 사실상 예정에 없던 일이다."
"그렇다면 아직 해야 할 일이 좀 남아 있다 이거지?"
"그렇다."
청룡의 끄덕거림에 우마왕은 나쁘지 않다는 듯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대답했다.
"나쁘지 않네, 솔직히 이 정도로는 김이 빠졌는데. 안 그러냐?"
"확실히 형님 말대로 저놈들이 살짝 부족하긴 했죠. 오랜만에 싸움인데 말입니다."
"이참에 그동안 못 풀었던 욕구나 싹 다 풀고 갑시다. 어차피 지상에서는 서로 세를 회복하는 중이라 아직 싸우지도 못하니까 말이야."
"나도 동감."
우마왕의 말에 대답하는 다른 칠대성.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긴나라(緊那羅)는 청룡의 옆에서 슬쩍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저희도 마찬가지로 끝까지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외다."
오관대왕의 대답.
그들의 확인을 받으며 다시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청룡은 이내 또 한 번 허공에 법진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럼, 지금부터 잘 부탁하겠소."
청룡은 마침내 그 말과 함께 9계층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자, 그럼 진짜로 한번 놀아볼까!"
요괴를 포함한 천군과 검귀들이 9계층에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
김현우가 처음 눈을 떴을 때.
"형! 드디어 일어난 거예요?"
"……?"
"……왜 그래요? 그런 뚱한 얼굴로?"
그는 자신의 앞에서 묘한 표정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김시현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김현우의 말.
그에 김시현은 '도대체 이 형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다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설마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든가, 그런 건 아니죠?"
"멀쩡한 사람을 왜 기억 상실로 몰아가?"
"아니,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니까 그렇죠. 그런 게 아니라면 됐어요."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는 김시현의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그에게는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병실의 풍경.
"……뭐지?"
김현우는 병실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자신이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을 때를 회상해봤으나.
'……분명 그때…… 거기서 쓰러졌던 것 같은데?'
김현우는 분명히 노네임을 가둔 뒤, 더 이상 움직일 기력이 없어 결국 나침반을 사용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던 기억이 있었다.
'……혹시 정신을 잃은 뒤에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싶어서 어거지로 포탈 문을 열고 들어왔나?'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건 불가능했으니까.
한참이나 혼자 고민하고 있던 김현우는 곧 시선을 돌리고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우선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안 되는데, 설명 좀 부탁해."
김현우의 물음.
그에 김시현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하려고 했는데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길래 우선은 가만히 있었어요. 그럼 지금부터 우선 간단하게 이야기해 드릴게요."
김시현은 그렇게 말한 뒤, 곧바로 차근차근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밀레시안이라는 녀석이 나를 데리고 왔다고?"
"네, 우선 아브가 말하기로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김현우는 현 상황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대충 깨달을 수 있었다.
"……걔가 대체 누군데?"
"저야 모르죠. 다만 형을 그냥 데리고 온 걸 보면 딱히 악의는 없었던 거 아닐까요. 게다가 형이 정신을 차리면 다시 한번 찾아오겠다고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고민하는 듯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만약 내게 무슨 악의가 있었다면 이렇게 데려다 줄 이유가 없긴 했다.
김현우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만약 그 상태로 공격을 당했다면 그는 꼼짝없이 또 한 번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 테니까.
'……뭐, 다시 찾아온다고 했으니 그 녀석이 누구인지는 그때 가서 볼 일이고…….'
"그래서, 내가 쓰러지고 얼마나 지났어?"
"이제 일주일이에요. 사실 어제까지는 다들 모여 있었는데 아무래도 다들 수습을 해야 하다 보니 슬슬 시간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수습?"
"네."
김시현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김현우에게 현재 9계층의 상황을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고, 그는 또 한 번 가만히 설명을 듣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슬슬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다 이거네?"
"맞아요."
김현우는 김시현이 해주었던 설명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그가 노네임을 죽이고 난 뒤, 밀레시안은 그를 아브에게 가져다주며 노네임이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그에 아브는 곧바로 차원 단절을 풀어버리고 티르와 노아흐, 그리고 야차의 도움을 받아 급하게 탑을 재건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9계층에 나타났던 몬스터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9계층에 나타났던 몬스터들은 청룡이 데려온 '지상'의 원군들이 대부분 쓸어버렸고.
"지금은 아직도 웨이브가 계속되기는 하고 있지만 그렇게 신경을 쓸 정도는 아니라 이거지?"
"그쵸, 게다가 생겼던 던전들도 다시 사라지고 있어서요."
"……다시 사라져?"
"저도 아브한테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탑을 다시 만들고 마법진을 원래 위치로 돌림에 따라 던전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가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뭐, 대충 알겠네."
'아무튼 던전이 사라진다.' 정도로 이해한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여태껏 보아온 서울의 풍경이 있었으나 그 사이에는 분명 싸움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이기는 했다.
예를 들면 건물 사이사이에 은근히 금이 가 있다든가,
원래 건물이 있어야 할 것 같은 부지에 건물 대신 철골들이 가득 들어서고 있다든가 하는 것들.
허나 그 풍경은 분명 일주일 전 김현우가 보았던 풍경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뭐, 다들 바빠 보이기는 하네."
김현우의 물음에 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원래 뒷수습이 제일 힘든 법이니까요. 아마 한국이 그나마 피해가 덜한 편일걸요?"
"그래?"
"네. 저번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지금 작은 소국들은 전부 멸망해 버린데다가, 미국만 해도 당장 피해가 엄청나거든요."
뭐-
"그런 만큼 헌터들도 많다보니 결국 어디든 빠르게 예전의 모습을 되찾겠지만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했다.
"아무튼, 우선 끝난 거네?"
"뭐…… 그렇다고 봐야 하죠? 이제 남은 건 뒷수습뿐이니까요."
김시현의 긍정.
그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낮이 되었는지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들.
그것을 아무런 의미 없이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구나."
한 마디.
김현우는 그 한 마디를 혼자 중얼거린 이후에도, 한참이나 병원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
입가에는 조그만 미소를 짓고서.
419화. 에필로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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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직도 현 시국 모르고 깝치는 새끼들을 위해 만든 몬스터 웨이브 끝나고 난 뒤 현 상황 요약본.
작성자 : 글좀다읽어라
너희도 알다시피 전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의심하지 않던 몬스터 웨이브가 거짓말처럼 끝나고 2주가 지났다.
'뭐? 지금도 몬스터 웨이브 가끔가다 나오는데 뭔 헛소리함?' 이런 소리로 댓글 쌀 거면 애초에 쓰지를 마라. 니들이 뭐라 하던 몬스터 웨이브는 이제 끝에 접어들었으니까.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냐고?
당연히 아무런 근거도 안 가져오고 이런 말을 하면 내가 병신이라는 거니까 당연히 나도 이런 저런 근거가 있음.
우선 첫 번째로 몬스터 웨이브의 횟수 감소임.
이건 그냥 전 세계 사람들 누가 읽어도 공감할거임.
2주 전 대한민국 몬스터 웨이브 발생 횟수가 1041회였음.
감이 옴? 1041회라고.
24시간 동안 몬스터 웨이브가 1041회나 터졌다는 거임.
그런데 2주가 지난 지금은?
24시간 몬스터 웨이브 발생횟수가 7회밖에 안됨.
물론 예전에 비하면 몬스터 웨이브 발생 횟수가 7회인 것도 엄청나게 많은 거지만 당장 몬스터 웨이브 횟수가 퍼센테이지로 10~20%증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떨어졌다는 이야기임.
심지어 지금 발생하는 몬스터 웨이브도 예전처럼 던전 내의 보스를 잡지 않아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고 말이야.
게다가 그 이외에도 몬스터 웨이브가 잔뜩 일어나는 시기에 생겨났던 던전들이 다시 사라지고 있음.
이것도 마찬가지로 너희들도 전부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
그러니까 몬스터 웨이브가 끝났는지 안 끝났는지 가지고 논쟁하는 병신들은 더 이상 없길 바람.
그리고 이제 이 글을 쓴 원래 이유인 몬스터 웨이브가 끝나고 난 뒤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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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명의 김현우가 몬스터 웨이브가 터지고 있는 던전 앞을 한방에 정리하는 움짤)
미안하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끌었다…… 김현우 싸움수준 ㄹㅇ실화냐? 진짜 세계관최강자들의 싸움이다…… 그찐따같던 김현우가 맞나? 진짜 김현우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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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23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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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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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
"난리도 아니네."
마우스 휠로 달려 있던 수천 개의 댓글을 한번 훑어 본 김시현은 피식하는 웃음을 지으며 이자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후……."
김현우가 깨어나고 일주일.
그 일주일 동안 세상에는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우선 제일 먼저 변한 것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국가들이 다시금 기틀을 잡기 시작했다는 것.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각 국가들은 몬스터 웨이브의 횟수가 확연하게 줄어듦에 따라 도시 복구를 하고 있기는 했었으나 또 언제 몬스터 웨이브가 터질지 몰라 다들 눈치만 보고 있었다.
허나 시간이 지나며 몬스터 웨이브의 횟수가 확 낮아졌다는 것을 체감한 각 국가들은 그제야 도시 복구를 시작했고. 그 덕에 지금 전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 중인 추세였다.
'뭐…….'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랍 쪽에서는 나라를 잃었던 소국들이 이때다 싶어 다시 자신들의 나라를 개국한답시고 분란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고.
거기에 이번 몬스터 웨이브 덕분에 터져 버린 경제는 아직 제대로 복구되지 않았다.
'뭐…… 협회 쪽에서 손을 쓰고 있으니 어떻게든 복구가 되겠지만.'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협회 쪽이 아니라 그 협회를 뒤에서 주무르고 있는 패도 길드와 암중비약 길드 덕분에 복구가 될 것이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빠르게 복구가 될 것이라고 김시현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
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당연한 이유가 있었을 뿐.
'……며칠 전에 현우 형이 뉴스를 보다가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며칠 전, 김현우의 부상이 전부 치료되고 난 뒤 가졌던 파티, 거기서 TV를 보던 중 한참 경제가 심각해졌다는 뉴스를 보고 있던 김현우가 아무런 의미 없이 '경제가 빨리 살아나야 할 텐데.' 라고 중얼거렸다.
그저 뉴스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린 김현우의 말.
그러나 그 옆에는 미령과 하나린이 있었다.
그래, 그게 전부다.
허나 그것뿐이라고 하더라도, 패도 길드와 암중비약 길드가 움직일 확률은 90%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김현우의 제자이자 와이프인 그녀들은 김현우가 말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말도 안 되는 것이라도 그의 앞에 가져다 놓고 마니까.
김시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저도 모르게 의자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최근에는 김시현 본인도 뒤처리 덕분에 굉장히 많은 시간을 쏟아 붓고 있었으니까.
'오늘은 쉴까.'
잠시간 자리에 앉아 고민하고 있던 김시현은 이내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그렇게 김시현이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51번 탑의 최상층에서는.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헤르메스도 뒤통수를 칠 준비 중이었다는 거지?"
"그렇지. 뭐 결국 본인은 실패하고 소멸해 버렸지만."
김현우와 밀레시안이 서로를 마주 보며 독대하고 있었다.
"……자기가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탐왕에게 노네임을 죽일 계획을 짜서 네게 전한 거고?"
"뭐, 사실상 노네임을 '죽일 수 있는' 계획이라기보다는 그의 계획을 어떻게 해야 조금 더 효율적으로 방해할 수 있을까 정도였지."
애초에-
"그 녀석에 계획에는 '노네임'을 죽일 수 있는 루트는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하나가 있었다고? 그게 뭔데?"
"노네임이 업을 모아서 이름을 지으려 할 때 업을 모아놓는 공간 자체를 그대로 폭파해서 노네임을 허수 공간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는데……."
뭐-
"그 계획도 읽어 보니 정말 기적에 기적이 겹쳐야 사용할 수 있는 계획 중 하나라 있으나 마나 한 계획이었지…… 아무튼,"
밀레시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결국 반 강제로 그 녀석의 의지를 이어받게 돼서 지금 그 녀석이 이제 어떻게 움직이나 보러 갔었는데-."
"내가 노네임을 봉인시킨 상태였다?"
"그렇지. 그래서 나는 노네임을 처치해 줘서 감사했다는 의미로 네 주머니에 있는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51번 탑까지 데려다 준거야."
-나로서는 할 일을 줄여준 거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야.
밀레시안의 말에 김현우는 이내 그를 빤히 바라봤으나 이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했다.
"그래서, 오늘 나한테 찾아온 이유는 뭐야?"
"이유?"
"그래. 애초에 내가 편하도록 이런 설명이나 하자고 왔을 것 같지는 않은데."
김현우의 말에 밀레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맞아. 내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해준 이유는 네 신뢰를 얻기 위해 겸사겸사 해준 말이고. 사실 진짜 궁금한 건 따로 있지."
"뭔데?"
"그 녀석 말이야,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 녀석이라니?"
"노네임 말이야. 지금 네가 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는 그 녀석."
"뭐야, 처리했다고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김현우의 물음에 밀레시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너를 51번 탑으로 옮겼을 때 눈치챘거든. 노네임을 완전히 죽인 게 아니라 봉인했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굳이 물어보러 온 거야."
밀레시안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슬쩍 의문을 표하며 물었다.
"그런데 그때 노네임이 봉인 당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슬을 가져가지 않았던 거야? 네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내가 기절했을 때 봉안을 가져갔어도 될 것 같은데."
김현우의 물음에 밀레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봉인까지 됐는데 일 키울 필요는 없잖아? 게다가 노네임을 맞다이로 잡은 놈하고 싸우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밀레시안의 시원한 대답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곧바로 이어 말했다.
"만약 처리를 마땅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면 그냥 허수 공간에 던져 버리는 건 어때?"
"……허수 공간에?"
"그래, 거기에다 던져 버리면 혹여나 누군가가 봉인을 풀 염려는 전혀 없어질 테니까 말이야."
"흠……."
확실히 밀레시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허수공간은 애초에 좌표가 없는 곳과 달랐으니까.
그러나-
"제안은 고맙지만 이미 정해둔 곳이 있어서."
"……? 정해둔 곳?"
"걱정하지 마, 허수 공간 보다 몇 배는 더 안전할 테니까."
김현우의 말에 한 순간 믿음이 안 간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밀레시안.
허나 조금 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 굳이 물어보지는 않네?"
"뭐, 애초에 네가 목숨 걸고 봉인했는데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는 않을 것 같아서."
게다가-
"애초에 헤르메스랑 나름대로 친해서 그놈이 하려던 일을 대신해 주고 있긴 하지만 결국 나는 그놈이 아니니까 말이야."
뭐-
"그와 별개로 노네임이 개새끼라는 건 똑같이 동의하지만."
밀레시안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더 이상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했다.
"그럼 잘 부탁해."
"가려고?"
"그래야지. 어차피 할 이야기도 다 끝났고. 나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 해야 할 일?"
"그래, 이제 슬슬 차원이 '붕괴'할 테니 나도 나름대로 도망쳐야 하지 않겠어?"
"……? 붕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되묻는 김현우.
그에 밀레시안은 이야기했다.
"말 그대로야, 지금 만들어져 있는 탑들은 노네임이 마력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이니 그 녀석이 봉인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붕괴할 거다."
"그렇다면……."
"아, 물론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애초에 이 51번 탑은 그 녀석이 '만든'탑이 아니라 이 탑의 원주인인 '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만든 탑이니까. 아마 같이 붕괴하지는 않겠지."
밀레시안은 그렇게 말하곤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몸을 뒤로 돌렸다.
"아무튼,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아무쪼록 그 봉인은 잘 부탁해."
밀레시안은 그렇게 말한 뒤 정말 더 이상 볼일은 없다는 듯 포탈을 만들어 사라져 버렸고,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잠시 생각에 빠졌으나 이내 잘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51번 탑을 제외한 다른 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김현우도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악마 파벌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탑들이 붕괴되는 것에 대해 고민했겠지만. 이미 노네임이 만든 탑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천사는 51번 탑에 쳐들어왔다가 청룡이 데려온 지원군에 의해 모조리 죽임을 당했고.
정령 파벌과 악마 파벌은 노네임의 손에 완전히 멸망해 버렸으니까.
"……."
잠시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던 예수를 떠올렸던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가볍게 저어 그 생각을 지워 버리고는-
"이제 슬슬 가볼까."
밀레시안의 말대로, 김현우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우우웅-
마치 기다렸다는 듯, 검은색의 포탈이 김현우의 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보며 순간 헛웃음을 지은 김현우는 이내 안쪽으로 들어갔고.
"뭐야, 다 보고 있었던 거야?"
"그 멍청한 놈이 봉인 당한 게 느껴졌거든. 그 덕분에 눈치 보면서 마력 수급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사실 봉인되고 난 뒤에는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지."
이내 그 어둠 속에서, 김현우는 다시 한번 눈동자를 만날 수 있었다.
420화. 에필로그 (2)
"자."
눈동자를 만나자마자 김현우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봉안을 꺼내 그녀에게 넘겨주었고, 곧 눈동자는 그가 넘긴 봉안을 받아들고는 가만히 바라봤다.
잠시간의 침묵.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정말 대단하네."
자신이 만들어 주었던 봉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이내 그렇게 중얼거리며 김현우를 바라봤다.
"뭐, 이 정도야."
물론 노네임을 잡다 이미 한 번 죽은 걸로도 모자라 밀레시안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또 한 번 죽을 뻔한 김현우였으나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피식하는 웃음을 흘리고 눈동자는 말했다.
"솔직히 네가 이길 확률이 3할에서 4할이라고 말하기는 했는데…… 정말로 이길 줄은 몰랐어."
"거 믿음이 부족하네."
"어쩔 수 없잖아? 솔직히 당장 내가 상대했어도 졌었는데 고작 내 힘을 넘겨준 필멸자가 그 미친놈을 봉인할 수 있을지 어떻게 알았겠어?"
"그럼 뭐 하러 나를 수련시켰는데?"
"……그거야 당연히 최후의 발악 같은 느낌이었지."
"그래서, 그 최후의 발악으로 노네임을 봉인한 기분은 어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최고기는 하네."
눈동자의 말에 피식 웃은 김현우는 이내 그녀의 손에 들려져 있는 봉안을 턱짓하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그건 어떻게 할 거야? 다시 봉인이 풀린다거나 하지는 않는 거지?"
"당연하지. 봉인을 했는데 다시 풀 수도 있는 봉인이라면 애초에 안 하는 게 낫지 않겠어? 결국 이 상황을 또 겪어야 하는데?"
"그럼 봉인은 안 풀린다는 이야기네?"
"그렇지 뭐…… 정확히 말하면 이론상으로 풀 수는 있지만 그냥 불가능하다고 보면 돼. 게다가 어차피 이곳보다 더 깊은 곳에 둘 생각이거든."
"더 깊은 곳?"
김현우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저번에 말했다시피 이곳은 허수 공간 안에 위치한 공간이야 그건 알지?"
"뭐, 저번에 들었던 것 같긴 한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허수 공간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허수를 넘어선 무(無)의 공간이 있거든."
"……거기에다가 그걸 집어넣으면 절대로 못 찾는다…… 뭐 이런 이야기야?"
"맞아. 그 무의 공간에다가 이 봉안을 던져 넣으면 설령 그 공간 속에서 노네임의 봉인이 풀린다고 하더라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건 무리거든."
말 그대로-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야."
눈동자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당연한 소리야."
눈동자의 긍정을 본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그래서, 이제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나?"
"그래,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 봉안을 무의 공간에 던져 넣고 나면 더 할 일은 없는 거지……?"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 더 이상 네가 움직일 만한 일은 없어. 오히려 네가 사고를 치지만 않으면 세계에 평화가 찾아올걸?"
"그렇다면야 다행이네. 이제는 진짜 좀 쉬고 싶거든."
김현우의 안도의 한숨을 바라본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번에는 쉬자고 할 때도 제대로 안 쉬었잖아?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녀의 물음에 김현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때랑 지금은 다르잖아? 그때는 노네임을 봉인시켜야 하는 과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니까."
"그래?"
"애초에 나는 일하는 게 싫거든."
그렇게 말하는 김현우를 눈동자는 순간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으나 이내 그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걸로 해줄게."
"그런 걸로 해줄 게가 아니라 진짜야."
"그래 알았어."
김현우의 말에 그렇게 대답한 눈동자.
그녀는 그 뒤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며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보다 뭘 할지에 대해서라…… 솔직히 생각해 본 적이 없네."
"그래? 여기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었으니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을 거 아니야?"
"뭐, 확실히 '업'을 받는 것 말고도 '자아'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 경험해 보고 싶은 일들이 몇 개 있기는 한데…… 그 이외에는 딱히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보면 별로 없네."
"왜?"
"애초에 내가 자아를 제대로 가지기 시작했을 때는 그놈이 이름을 얻겠다고 한참이나 깝죽거리고 있을 때거든."
"딱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는 거네."
"그렇지?"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뭐…… 그렇다면야 일 끝내고 내 탑으로 내려와. 나름 즐길 거리가 있을 테니까."
"흐응, 그래?"
"뭐…… 애초에 모든 업을 가지고 있는 네가 흥미가 있을 만한 게 있을지는 좀 모르겠지만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묘하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아마 거기에 가면 내가 좀 흥미 있어 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거든."
"……하고 싶은 게 없다더니 그새 이것저것 보면서 나름대로 해보고 싶은 걸 찾았나보지?"
"내가 말했잖아? '몇 개' 없다고 말이야."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바라봤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무튼-
"일이 다 끝나면 찾아와. 잘 곳 정도는 마련해 줄게."
"기대할게."
눈동자는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자신의 손을 한번 휘둘렀고, 그와 함께 김현우의 뒤에 포탈이 만들어졌다.
"그럼 나중에 보자."
눈동자의 말.
그에 김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눈동자가 만들어준 포탈 밖으로 몸을 움직였고.
김현우는 곧 51번 탑으로 돌아오자마자 티르와 노아흐를 양쪽에 두고 무엇인가를 곰곰이 고민하고 있는 아브를 볼 수 있었다.
"앗. 가디언!"
곧 포탈에서 빠져나온 김현우를 보며 반갑게 인사하는 아브.
김현우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무슨 일이야? 탑을 재건하는 데 문제라도 생겼어?"
그의 물음에 아브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오히려 탑은 잘 만들어지고 있어요."
오히려-
"티르 님이나 야차 님이 도움을 주셔서 이전보다 훨씬 정교하게 만들고 있어요. 이전 탑에서 있었던 불필요한 요소들도 모두 뺄 수 있었고요."
"그런데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음…… 그게."
아브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김현우에게 고민하는 내용을 털어놓기 시작했고 한동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현우는.
"……요약해서 각 계층에 이주할 만한 생명체가 있어야 한다…… 뭐 이런 거야?"
"네. 사실 1계층부터 7계층까지는 상관없어요. 애초에 거기는 예전의 탑에서도 던전이 나오는 곳은 아니었으니까요."
다만-
"8계층이나 10계층, 그리고 11계층과 12계층은 거주할 만한 거주민이 필요해요."
"얼마나?"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대답했다.
"적어도 탑이 멸망하기 전에 그 계층에 살고 있었던 숫자만큼은 아니라도……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를 처리할 정도는 돼야 해요."
"……굳이?"
김현우의 물음.
그것에 대답한 것은 아브가 아니라 노아흐였다.
"만약 9계층을 다시 처음부터 만들었다면 당연히 이런 번거로운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옛날의 탑을 다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보니……."
"……옛날이랑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이거야?"
"맞네. 사실 던전의 숫자를 우리 쪽에서 자체적으로 줄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거든."
-일종의 설계 실수인 셈이지.
노아흐의 말에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김현우는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요약해 보자면 던전 때문에 다른 계층에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거잖아?"
"그렇네."
"그냥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를 방치하면 안 돼?"
"안 된다네."
"왜?"
"몬스터 웨이브 안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파괴 욕구를 가지고 있으니 말일세. 아마 그들을 막는 녀석이 없다면 탑에 들어가는 자원이 천문학적이 될 걸세."
거기에 우리도 망가진 계층을 다시 만들어 내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게 되겠지.
노아흐는 그 이후에도 다른 계층에서 나타나는 던전을 방치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알려주었고 이내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냥 가만히 놔두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겠네."
"맞아요. 그래서 고민 중이었어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예전에 탑을 만들었을 때는 어떻게 다른 계층에 살던 이들을 만든 거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애초에 그건 저 같은 '총괄자'나 '제작자'의 관할이 아니었으니까요."
"아."
아브의 대답에 김현우는 새삼스레 이 탑을 만든 이들이 다섯 명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우선 문제는 그것밖에 없다 이거지? 탑은 잘 만들어지고 있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탑은 저번보다도 훨씬 잘 만들어지고 있어요. 정말 기초적인 것까지는 못 건드려도 조금 세부적인 부분에서 이것저것 건드릴 수는 있으니까요. 근데……."
"……? 왜?"
"혹시 가디언은 생각해둔 해결책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아브의 물음.
그에 김현우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음.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어쩌면 탑에 정착시킬 만한 애들을 좀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
"뭐, 너는 우선 신경 쓰지 말고 탑에만 신경 쓰도록 해. 알았지?"
김현우의 말.
그에 아브는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이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고, 김현우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9계층으로 내려갔다.
####
하남에 있는 장원의 거대한 건물.
"크하하하하하하!!! 고작 그 정도밖에 못 마시는 거냐?"
"저는 천에 귀의한 몸. 그렇게 상스럽게 병나발을 불지는 않을 겁니다."
"너무 그렇게 격식 차리지 말라고! 여기는 천계가 아니잖아!"
에서는 연회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쟤들은 안가냐?"
대충 2주가 넘는 시간 동안이나.
김현우가 눈앞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칠대성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 옆에 있던 손오공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야기했다.
"저번에는 조금 재미가 없었다나 뭐라나. 이번에는 진짜 연회처럼 할 모양이던데?"
"진짜 연회가 뭔데?"
"말 그대로 진짜 연회지. 이 상태에서 대충 20일 정도 더 먹고 마시면 그나마 연회에 틀에 맞춰진 느낌 아닐까?"
손오공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20일? 그럼 20일 동안 술을 처먹는다는 이야기야?"
"뭘 그렇게 놀라? 원래 요괴들의 연회는 기본적으로 한번 시작하면 100일 이상 간다고."
"……그럼 저쪽에 있는 긴나라인가 뭔가 하는 애는?"
"천계 쪽도 연회를 한번 하면 성대하게 열어서 꽤 길게 하는 편이지. 물론 요괴들보다는 그 일수가 작지만."
"보통 얼마 정도 하는데?"
"……50일 정도?"
"천계도 만만찮네. 그럼 지옥은?"
"……지옥?"
"그래, 저기 저쪽에 저 사람은 지옥에서 왔다며?"
김현우가 턱짓으로 오관대왕을 가리키자 오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은…… 아마 천계랑 비슷할 거야?"
"왜 확신이 없어?"
"그야 당연히 내가 지옥의 연회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나는 지옥과는 그리 연이 좋지 않거든."
손오공은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더니.
"그보다. 탑 재건은 어때?"
이내 그렇게 물어왔고.
"아, 그러고 보니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이야기가 좀 있어."
"……뭔데?"
김현우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너, 네 부하들이 몇 명이나 있다고 했지?"
421화. 에필로그 (3)
"부하들은 갑자기 왜?"
"잔말 말고 말 좀 해봐."
김현우의 물음에 손오공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슬쩍 생각하더니 말했다.
"뭐, 많겠지."
"?"
"……왜 그런 눈으로 봐?"
"정확한 숫자도 모르냐?"
김현우가 묘하게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손오공은 기가 찬다는 듯 허, 소리를 내더니 이야기했다.
"아니 그럼 우두머리가 일일이 부하들이 몇 명인지까지 세어야 하나? 게다가 그놈들은 제멋대로 내 아래로 들어오니까 그냥 많다는 것만 알 뿐이지, 실제로는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고."
"……그래?"
"근데 갑자기 부하들이 몇 명 있나 물어보는 건 왜? 어디 인력 같은 게 필요하기라도 한 거야?"
손오공이 술을 홀짝이며 묻자 김현우는 고개를 젓고는 아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손오공에게 그대로 해주기 시작했다.
"결국 요약하자면 각 계층에 거주 인원이 필요한데, 내 부하들이 많으면 부하들을 다른 계층으로 옮기고 싶다…… 뭐 이런 거야?"
"뭐, 그렇지? 우선 거주가 가능하다고만 하면 환경 조성은 네 부하들에게 맞춰서 해줄 수 있다고 하던데."
"환경 조성?"
손오공이 묻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우선 그쪽에서는 결국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를 처리하기만 하면 되는 거라서 환경이나 지형은 알아서 조형해줄 수 있다고 하더라."
"거 참 편리하네. 애초에 환경을 조성할 수 있으면 그냥 환경 조성으로 몬스터가 못나오게 막으면 되는 거 아니야?"
"예를 들면?"
김현우의 물음에 손오공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뭐, 굳이 예를 들자면…… 환경을 그냥 용암밖에 없는 용암 지대로 만들어 놓으면 몬스터들이 못 나오지 않을까?"
"……만약 용암에 버틸 수 있는 몬스터가 나오면?"
김현우가 묻자 손오공은 순간 멍을 때리더니 이내 중얼거렸다.
"어…… 그, 그런가?"
"당장 이 근처에도 용암 던전 같은 게 있지 않나?"
"확실히 저번에 막으러 갔을 때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반대로 극한까지 추운 빙하지대는?"
"말 그대로 그 빙하 지대를 버틸 수 있으면 의미 없겠지."
"……그것도 그렇네."
손오공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결국 던전의 몬스터를 처리할 수 있는 거주인이 필요하다는 소리네."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굳이 물어보지도 않았겠지. 그래서, 가능할 것 같아?"
김현우의 물음에 손오공은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다 이야기했다.
"뭐, 결국 내 부하들이니까 내가 하라고 하면 하겠는데…… 내 부하가 아무리 많더라도 계층하나를 전부 커버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싶은데. 8계층처럼 계층 하나하나가 작은 지형 정도라면 몰라도 말이야."
"그럼 8계층을 맡으면 되겠네."
"……갑자기?"
"어차피 9계층을 제외한 모든 계층에 거주민이 필요하거든."
"아니,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8계층도 분열이 되어 있어서 작은 거지, 그 분열되어 있는 계층을 전부 합치면 꽤 거대한 크기 아니야?"
손오공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이제 8계층은 분열되어 있지 않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듣기로는 이전처럼 할 필요가 없어서 그냥 하나로의 층으로 통일했다고 하던데? 물론 크기는 분열된 정도의 사이즈로."
"……그럼 그 작은 구역에 8계층에 있던 몬스터가 전부 다 온다는 거 아니야?"
"……어? 그게 그렇게 되나?"
김현우가 새삼스레 중얼거리자 손오공은 반쯤 뜬 눈으로 김현우를 바라봤고. 그와 함께 어색한 침묵이 지속됐다.
"그 이야기. 다시 해줄 수 있소?"
그 와중에 들린 목소리.
김현우와 손오공은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고.
"……오관대왕?"
김현우는 곧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오관대왕을 볼 수 있었다.
"저번에 인사를 한 뒤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군."
"뭐 그렇긴 한데…… 이야기라면 내가 방금 전에 말했던 계층 이야기를 말하는 거야?"
김현우의 물음에 오관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들어 보니 잘하면 서로 도움이 될 수 있겠거니 싶어서 말이오."
"……그게 무슨 소리야?"
김현우의 물음에 오관대왕은 곧 입을 열었다.
"지금 지옥은 땅이 부족하오."
"땅이?"
김현우의 되물음에 오관대왕은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시작으로 김현우에게 현재 지옥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지옥 두 개가 사라졌다고?"
"그렇네."
"확실히, 생각해 보니 그렇네."
"뭐가?"
"팔열성군이랑 팔한성군, 너는 마주친 적이 있나 없나 모르겠는데 분명 그 녀석들 중 한 명도 심마 밑에 있었거든."
"아, 확실히. 한번 본 적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아니, 무기만 봤었나?"
김현우는 잊고 있던 기억 한편에서 그 단어들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 두 명 덕분에 지옥이 통째로 사라졌다?"
"통째는 아니오, 적어도 49의 시험을 담당하는 9개의 지옥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다만 본래 세 개로 나누어진 지옥이 하나로 줄어든 만큼 지금 지옥은……."
오관대왕은 말을 하다 말고 인상을 찌푸리곤 힘겹게 말했다.
"지옥(地獄)그 자체요."
"……지옥이 지옥 같다니."
말이 좀 기묘하게 우스웠다.
"아무튼, 그게 현 지옥의 상황이오."
"그래서 내 말에 관심이 있었던 거네."
"그렇소. 우리 입장에서는 당장 땅이 부족한 입장이니 지옥에 갇힌 이들을 수용 할 수 있을 만한 땅만 있더라도 그 땅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소. 아니,"
-애초에 죄인들에게 그 몬스터를 처리하게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오관대왕은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김현우는 그런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우선 잠시만 기다려 봐."
곧바로 그 자리에서 구슬을 이용해 탑의 최상층으로 사라져 버렸고.
"?"
"?"
손오공과 오관대왕이 상황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데려왔어."
"가디언? 갑자기 무슨?"
김현우는 아브를 데리고 와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고.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브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에서 뻘쭘하게 서있던 오관대왕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눈 지 5분.
"그럼 11계층과 12계층을 맡아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공간의 축소는 이쪽에서 그 팔열지옥과 팔한지옥으로 비슷하게 맞출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오오 그렇소!? 이것 참 낭보로구먼!"
"아, 그리고 혹시 던전의 문제에 대해서인데-."
아브는 금세 오관대왕과 함께 일을 순식간에 진척시키고 있었다.
"저기 말이야."
"왜?"
"저거, 저렇게 진행해도 되는 거야?"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왠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질문하는 오공.
그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때서?"
"아니, 뭔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것처럼 너무 순식간에 진행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러면 뭐 어때? 결과만 좋으면 되지."
"뭐…… 확실히 그렇긴 한데……."
손오공은 묘한 표정으로 벌써부터 이런저런 세부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아브와 오관대왕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고.
"아 오공 님도 잠깐 와주시겠어요?"
"응? 나?"
"네! 가디언한테 듣기로는 8계층에 오공 님도 8계층에 부하들을 거주시킬 거라고 하시던데요?"
아브의 말에 손오공은 한숨을 내쉬며 '아직 확실하게 정한 것도 아닌데.'라는 중얼거림을 내뱉었으나 이내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
이내 아브 쪽으로 걸음을 옮긴 손오공을 바라본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라운지 바 앞의 의자에 앉아 떠들썩한 건물 내부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 정도인가? 너무 느릿하지 않나?! 응!?"
"큭, 너희들이 오히려 미친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술을 밀어 넣는 거야? 게다가 이 술, 도대체 뭔데 마력으로 해소가 안 되는데?"
"……설마 마력으로 지금까지 숙취를 해소한 건가? 애들아! 벌주다! 벌주를 줘라!"
"그게 무슨!! 자…… 잠깐 나는 이 이상 마시면 큰일-! 읍!"
제일 우측에 보이는 것은 칠대성과 지크프리트의 모습이었다.
어떻게든 술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지크프리트와 그의 몸을 구속해 어떻게든 그의 입 안에 술을 밀어 넣는 우마왕의 모습.
그리고 다른 칠대성들은 저마다 키득거리며 그런 지크프리트와 우마왕의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시선을 이동하자 그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제법 특이한 조합이었다.
'……천마랑 구미호…… 그리고 티르?'
칠대성처럼 왁자지껄 떠들지는 않아서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고 있었으나 천마와 티르는 진지하게 무엇을 이야기하는 듯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구미호는 그런 천마의 옆에서 그의 입에 가끔 가다 안주를 하나씩 넣어주고 있었고.
'생각해 보니까 저 녀석들이 무슨 관계인지도 한번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조금 있다 가보자.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또 한 번 시선을 돌렸고.
"……응?"
이번에는 꽤 특이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청룡이랑…… 루시퍼?'
그것은 바로 장원의 밖이 보이고 있는 2층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는 루시퍼와 청룡의 모습 이었다.
서로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들의 모습.
물론 그것뿐이라면 '조금 특이하구나.'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김현우가 시선을 계속해서 고정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에게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묘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냥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는 한데 느껴지는 묘한 느낌.
김현우가 그들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
김현우는 어느 순간 루시퍼의 머리가 청룡의 어깨에 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쟤들 만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으나 이내 그는 시선을 돌림과 함께 그 생각도 지워 버렸다.
뭐, 남의 연애사야 자신이 신경 쓸 것이 아니었으니까.
"……."
그 이외에도 김현우는 여기저기로 시선을 돌려 벌써 몇 주나 왁자지껄하게 지속되고 있는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어느 곳에서는 청룡이 데려온 긴나라와 그들의 수하들인 몇몇 천군들이 한쪽 테이블에 앉아 무한정으로 먹을 것을 흡수하며 술을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또 다른 쪽에서는 아직 돌아가지 않은 화과산의 원숭이 몇몇이 테이블이 아닌 땅바닥에서 다른 요괴들과 술을 마시는 모습도 보였다.
그 이외에 이서연과 한석원, 그리고 아냐와 김시현도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한쪽 구석에 테이블을 잡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평화롭네.'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김현우는 머릿속에 든 생각에 홀로 피식하는 웃음을 터트리곤 들고 있던 술을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댔고.
"서방님,"
"저희 왔습니다."
김현우는 입가에 술이 닿자마자 들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려 어느새 양옆에 앉아 있는 미령과 하나린을 바라보았고.
"외로워 보이는구나. 왜 혼자 있는 게냐?"
이내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야차를 보며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이야기했다.
"기다리고 있었지."
"누구를 말이더냐?"
"너희들을."
김현우의 담백한 말투.
그에 야차는 순간 놀라는 듯했으나 이내 김현우의 맞은편에 서서-
"말은 잘하는구나."
-꽃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422화. 에필로그 (까불지 마라.)
천계(天界)에 있는 거대한 황궁.
그 끝에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수련장.
다른 천계의 사람들이 천무관(天武官)이라 부르는 그곳에는 두 명의 사내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남자는 옥황(玉皇)의 인정을 받은 천계의 대장군으로서 무(武)의 끝에 닿아 있다고 정평이 나 있는 노인, 검천(劍天)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바로 그런 검천의 앞에 서 있는 남자였다.
껄렁껄렁한 얼굴을 하고 모든 천인(天人)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검천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청년.
그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옥에 가둘 때는 언제고 다시 꺼내서 부른 거야, 영감?"
듣기만 해도 자신의 싸가지가 어디로 실종되었다는 듯 막말을 내뱉는 청년의 말에 검천은 순간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옥에 가둔 건 네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가둔 것이다."
"지랄."
"어째 옥에 갇혔던 50년 전과 별 다를 바가 없구나."
"어쩌라고?"
"놈!!!!!"
검천의 중후한 외침에 순간 거대한 수련장이 들썩였으나 청년은 그런 검천의 노호성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는 귓구멍을 후비며 이야기했다.
"거 귀 안 먹었으니까 조곤조곤 말하는 게 어떨까?"
"으득-."
청년의 말에 검천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있는 검에 손을 가져갔으나, 이내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것을 참아내며 한탄했다.
"도대체 옥황의 후계가 왜 저렇게……."
고개까지 떨구는 검천.
검천의 중얼거림대로 현재 그의 앞에 있는 청년은 바로 차기 옥황의 후계인 이랑진군(二郞眞君)이었으나.
"거참 쫑알쫑알거리네. 할 말 없으면 나간다?"
이랑진군은 옥황의 후계라는 자리가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경박하고 야성적이었다.
그리고 검천은 이랑진군이 어째서 저렇게 삐뚤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저 녀석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이가 이 천계에 아무도 없다니…….'
그것은 바로 이랑진군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이가 적어도 천계(天界)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 경박하고 야성적이었으나 옥황의 후계라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라는 듯 엄청난 무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덕분에 천계에서는 검천을 포함한 대장군들도 그를 막을 수 있는 이들이 없었다.
물론 옥황이 직접 훈육을 한다면 이랑진군을 찍어 누를 수 있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옥황은 지금 당장 집무가 바빴고, 앞으로도 집무가 바쁠 예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계를 포함한 세상의 이치가 원래대로 돌아온 지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깐만 기다려라. 50년 전 대련을 핑계로 오천의 천군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옥에 투옥됐던 너를 그냥 꺼내줬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검천이 그리 생각을 정리하곤 이야기하자 이랑진군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이야기했다.
"그럼 할 말이 뭔데?"
끝까지 존댓말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이랑진군의 모습.
그에 검천은 이를 악물었으나 이내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더 진정시켰다.
어차피, 저 녀석이 저렇게 떠들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이랑진군, 너는 옥에서 원래 약조되었던 시간보다 빠르게 나왔으니 그 벌로 탑에 가주어야겠다."
"……탑?"
"설마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검천의 물음에 이랑진군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곤 이야기했다.
"그야 뭐, 모르지는 않는데……."
확실히 그의 머릿속에도 '탑'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있기는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천이 말하는 탑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탑이 맞다면, 탑의 11계층과 12계층에는 2년 전, 각각 팔열지옥과 팔한지옥이 들어섰다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랑진군은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지금 나보고 지옥에 가라는 거?"
"지옥에 가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럼 내가 왜 탑에 가는데?"
"네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뭐? 예절?"
"그래, 탑의 10계층, 그곳에 갔다 와라."
검천의 말에 이랑진군은 다시 한번 탑의 10계층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고, 이내 곧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무관(武官)……?"
그 무관을 칭하는 별다른 이명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무관이 있다고만 알려져 있는 10계층.
물론 그 이외에도 그 10계층에 있는 무관에 단 1년이라도 있다가 나오는 이들은 무조건 이전보다도 몇 배는 강해져서 나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 무관이다."
"내가 왜?"
"만약 네가 가지 않으면 너는 다시 투옥될 것이다."
"나를 가둘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불가능하다만, 옥황께서는 가능하시겠지."
검천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이랑진군.
"그럼 그곳에서 남은 옥 생활을 전부 채우고 오라 이거야?"
"그것 또한 아니다."
"……뭐?"
이랑진군이 고개를 갸웃하자 검천은 말했다.
"너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선택?"
"한 가지는 그곳에서 남은 형량만큼 생활하다 돌아오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그 무관의 주인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무관의 주인을 쓰러뜨려? 그래봤자 나한테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만약 네가 무관의 주인을 쓰러뜨린다면 지금 네게 있는 형량을 없던 것으로 해주겠다."
"……진짜로?"
"옥황께도 이미 허락을 맡아 놨다."
"그거 나쁘지 않네."
검천의 말에 비로소 미소를 짓는 이랑진군을 보며 그는 이야기했다.
"그런데, 너는 정말로 네가 그 무관의 주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내가 못 이길 거라고 생각해?"
이랑진군이 내보이는 압도적인 자신감.
물론 그의 무력은 저 정도의 자신감을 만들어 줄 정도로 대단하기는 했다.
적어도 천계에서 이랑진군을 이길 수 있는 이들은 몇 없을 테니까.
하지만 검천은 적어도 이번에는 그의 자신감이 무척이나 위험한 화를 부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대답했다.
"만약 네가 정말로 자신이 있다면 무관의 주인에게 대련을 신청하면 된다. 아마 그 사람은 네 대련을 피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 그것 참 번거롭지 않아서 좋네."
이랑진군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이내 미소를 짓고는 곧바로 몸을 돌렸고.
"그럼, 대충 며칠 있다 보자고."
마치 자신이 며칠 안에 돌아올 것이 확정이라는 듯, 느긋하게 손을 휘적거리며 넓은 수련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수련장을 빠져나간 이랑진군을 바라보던 검천은 이내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이 참에 확실히 예절을 배워오겠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기도 장원 내로 모습을 감췄다.
####
이랑진군이 50년 전 투옥된 뒤 빠져나온 천계는 너무나도 많이 달라졌다.
분명 탑으로 인해 망가졌던 자연의 이치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시작으로 인재가 부족했던 천계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무엇보다 자신이 있었을 때만 해도 모종의 수법으로 인해 탑에 갇혀있던 꼰대마저도 다시 밖으로 나와 천계를 통치하고 있었다.
자신이 투옥되어 있는 동안 너무나도 많은 게 바뀌어버린 천계.
허나 이랑진군은 자신이 있었다.
비록 50년간 투옥되어 있었다곤 해도 자신의 무력은 변하지 않았고.
천계는 50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이들은 몇 없었다.
그렇기에 이랑진군은 자신의 무력을 믿고 고작 하루도 안되는 시간에 천계 관리의 도움을 받아 무관이 있는 10계층에 도착할 수 있었고.
"한 판 뜨자!"
곧 산 한가운데에 만들어져 있는 무관 한 가운데에 들어와 연무장 건물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자신의 삼지창을 들이댔다.
"……."
자신에게 창을 들이미는 이랑대군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보는 남자.
그의 자세는 이랑대군이 보기에도 심히 묘하게 보였는데, 온몸에 귀찮음을 머금은 것 같은 몸짓으로 의자에 늘어지듯 앉아 있었다.
거기에 덤으로 분명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한쪽 편으로는 묘하게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이랑진군은 이내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쫄?"
한 마디.
그에 순간 이랑진군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눈이 커지는 듯하더니.
"하."
이내 어처구니없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넌 또 뭐야?"
남자의 물음.
그에 이랑진군은 남자에게로 들이민 삼지창을 휘저으며 이야기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굳이 알 필요 없고, 그냥 나랑 한 판 붙자니까? 뭐, 쫄리면 그냥 나한테 진 걸로 하고."
"……."
그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랑진군을 바라보던 남자는 잠시 멍을 때리더니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랑 한 판 붙자 이거지?"
"바로 그거지."
"나랑?"
"그래, 설마 진짜 쫀 거야?"
"쫄았냐고?"
"응, 한 판 붙자면 길게 입 털지 말고 바로 한 판 딱 붙으면 되는 건데 지금 너는 일부러 질질 끌고 있잖아?"
"내가?"
"몇 번이나 물어볼 생각이야? 그냥 쫄았으면 쫄았다고 이야기하라니까? 손속 정도는 봐줄 테니까 말이야."
이랑진군의 자신만만한 목소리.
그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거렸고.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한 판 붙자 이거지?"
남자의 말.
그에 이랑진군은 기다렸다는 듯 삼지창을 바로 쥐며 이야기했고-
"그래, 특별히 선공은 양보해 줄게."
-남자는
"그것 참-."
"!"
-대답과 동시에 이랑진군의 앞에 나타났다.
"고맙네."
빠아아아아악!!!!
그와 함께 들리는 엄청난 굉음.
"커…… 억?"
그리고 그 굉음이 들린 다음 순간, 이랑진군은 자신이 산 중턱에 처박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쿨럭-!"
그와 함께 터져 나오는 붉은 피.
이랑진군은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고.
"뭐해?"
"!"
빠아아악!
"끄아아아악!"
자신의 몸이 그대로 두 동강이 나 버릴 것 같은 고통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거참 귀청 떨어지겠네."
"쿨럭! 이…… 이 새끼……!"
뒤늦게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의 명치를 밟고 있는 남자의 발을 어떻게든 떼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이랑진군.
허나 남자의 발은 그가 아무리 힘을 써도 움직이지 않았고.
오히려-
쿵!
"케헥!"
이랑진군은 남자의 진각 한 방에 그대로 땅바닥에 심어져 버렸다.
"끄르륵-!"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는 이랑진군.
그 눈빛을 바라보던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야, 내가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았거든?"
"……무-슨…… 쿨럭!"
"내가 오늘 와이프들한테 바가지를 너무 긁혀서 말이야…… 거 외박 한두 번 했다고 바가지를 오지게 긁더라고. 뭐, 사실 눈동자랑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건 내 잘못이긴 한데…… 그래도 일주일 넘게 바가지를 긁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냐?"
-게다가 내가 원해서 한 것도 아니고 눈동자가 강제로 한 거라고.
마치 친한 친구에게 하소연하듯 말하는 남자.
허나 이미 이랑진군의 눈에 남자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고 있었다.
"……괴, 괴물."
"거, 섭하게 왜 그래? 먼저 싸움을 걸은 건 너잖아."
남자는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꽉 쥔 주먹을 들어 올렸고, 그에 이랑진군은 저도 모르게 항복이란 단어를 소리치려 했으나-
"하…… 항- 읍! 읍읍!!"
남자. 아니,
"남자가 이렇게 빨리 항복을 외치면 안 되지~."
김현우는-
"아직 내가 스트레스가 좀 덜 풀렸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마치 악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좀 맞자."
"으으으으읍!!!!!!!!!!"
언제나와 같이, 살의가 가득 넘치는 주먹을 이랑진군에게 휘둘렀다.
423화 외전 01. 5년 후의 나는…… (1)
아침.
누군가는 출근을 하고.
또 누군가는 헌터로서 던전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모두가 바쁘고 노련하게 움직이는 아침 시간.
서울 하남에 있는 거대한 관저.
"……."
그 앞에서 김현우는 굳게 닫혀 있는 관저의 정문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삼키고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관저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검은 가면을 쓴 패도 길드원.
김현우는 마치 누가 들을까 겁을 먹은 것처럼 무척이나 조용한 속도로 그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야. 륭."
김현우의 물음에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륭.
그는 바로 2년 전에 지어진 이 집의 문지기로서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언제나 이 관저의 앞을 지키고 있는 패도 길드의 수하들 중 한 명이었다.
륭의 몸짓에 김현우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곧바로 물었다.
"어떠냐?"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내가 뭘 물어보고 있는지 잘 알잖아?"
김현우의 물음에 륭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분명 륭은 김현우가 자신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어떻게 전달할지 완벽하게 고민을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잠시간의 침묵.
김현우가 왠지 긴장된 얼굴로 륭을 바라봤고.
륭은 가면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얼굴로 김현우를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제 생각을 말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빨리."
륭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바심 넘치는 표정을 지었고.
"제가 보기에……."
"보기에?"
"……아무래도 좆된 것 같습니다."
"……정말?"
"적어도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아."
륭의 말에 김현우는 짧은 탄식을 내뱉더니 이내 걱정이 넘치는 얼굴로 물었다.
"많이 좆됐어?"
"저번에도 한 번 외박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했지…… 했었지."
"제가 보기에는 그때의 2, 3배쯤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겠습니다."
"씹…… 2, 3배라고?"
"예. 적어도 제 생각에는 그 정도일 것 같습니다."
"……그, 그럼 아닐 수도 있다는 거잖아?"
김현우의 물음에 륭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절대 아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는 네 생각일 뿐이라며……!?"
"제 생각일 뿐이지만 지금까지 제 생각이 틀린 적은 없지 않았습니까?"
김현우는 륭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동안 륭의 바가지 데이터는 단 한 번도 김현우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 말은 곧 륭의 말대로 지금 이 관저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의 아내들의 분노 게이지가 머리끝까지 차 있다는 소리.
"……지금 들어가면 좀 심하게 맞을까?"
김현우의 물음에 륭은 시선을 돌려 옆으로 턱짓했고, 곧 턱짓에 따라 오른쪽을 바라본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분명 관저 옆에는 화단이 있었는데…….'
지금 보니 화단이 아니라 거대한 구멍이 파여 있었다.
"……저건?"
"오늘 새벽 4시 20분경, 야차 님께서 홧김에 휘두른 주먹에 저렇게 돼 버렸습니다."
"……."
김현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파여 있는 구멍을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기에 뚫려 있는 것은 단순히 야차가 홧김에 만들어 놓은 구멍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들어가야 할 구멍인 것 같았다.
'다음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을 시에는…… 너무 화가 날지도 모르겠느니라.'
으스스-
김현우는 몇 달 전, 외박 후 몰래 들어왔을 때 야차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는 륭에게 물었다.
"……안 들어가는 게 좋겠지?"
"적어도 제 생각에는……."
"얼마 정도 기다려야 할까?"
"20……."
"20일……?"
김현우의 짐작에 륭은 고개를 젓고는 대답했다.
"20년 정도……."
"……정말로?"
김현우의 물음에 륭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미묘한 고갯짓으로 김현우의 임종을 알리는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고, 김현우는 그런 륭의 모습을 보고 난 뒤.
"……!"
갑작스레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벌컥!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곧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문소리.
륭은 곧바로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기침하셨습니까."
"그래."
륭의 말에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는 미령.
'정말 단단히 화나셨군.'
원래도 김현우가 옆에 있을 때를 빼고는 항상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현재 그녀의 표정은 무미건조한 것을 넘어선 무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무표정 뒤로 넘실거리는 진한 분노의 기운.
"……서방님은?"
"아직……."
미령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한 륭.
물론 김현우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앞에 있었으나 그 사실을 그대로 말하기에 륭은 꽤나 의리가 두터운 남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김현우에 대한 의리라기보단 그녀의 분노를 눈앞에서 맞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으나, 아무튼 륭은 의리를 지켰다.
"오면 바로 전음을 보내라."
"알겠습니다."
쾅!
륭의 말과 동시에 부서질 듯이 닫히는 문.
그에 륭은 슬쩍 고개를 저으면서도 조금 전 김현우가 있던 곳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천하의 절대자(絶對者)도 역시 아내들 앞에서는 꼼짝 못 하는 건가.'
전 세계에서 그 누구도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해 김현우에게 붙여진 절대자라는 이명.
허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김현우라고 할지라도 아내들에게는 꼼짝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륭은 퍽이나 우스워 한동안 웃음을 지었다.
***
성내동에 있는 고급 아파트의 옥상.
"……또 왔어요?"
"'또'라니, 간만에 동생을 보러 왔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
김시현은 김현우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를 보러 온 게 아니라 형수님들 피해서 도망친 거겠죠."
"미령이 전화 돌렸냐……?"
순간 뜨끔한 표정으로 묻는 김현우.
그에 김시현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화를 돌린 게 아니라 그냥 보기만 해도 안다고요."
"그, 그래?"
김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자 김시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뭐 때문에 외박한 건데요?"
"아…… 이번에?"
"네."
"그냥 뭐…… 술이나 한잔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
"눈동자랑 한잔한 거죠?"
김시현의 물음.
그에 김현우는 또 한 번 시선을 돌렸으나 이내 대꾸할 것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눈동자랑만 마신 건 아니야."
"그럼요?"
"청룡이랑 오공도 있었어……. 아니! 진짜 내 말 좀 들어 봐! 애초에 간만에 만나서 술 좀 마시면 가볍게 하루 정도는 지날 수 있는 거 아니야?!"
"뭐, 간만에 만났으면 그렇겠죠."
"그치!?"
"그런데 형은 고작 1주일 만에 만난 거잖아요."
"그…… 그래도!"
"그리고 듣기로는 저번에도 한 번 장기 외박을 한 덕분에 원래 주말에는 같이 모여 있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뭐, 다 아는 방법이 있죠."
사실 미령이 한 이야기를 주워들은 것이었으나 김시현은 굳이 그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여기 있게요?"
"……한 20년 정도?"
"장난치지 마세요."
김시현의 차가운 대답에 김현우는 뭔가 상처 받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이야기했다.
"……김시현, 많이 차가워졌구나."
상처받았다는 듯 입을 여는 김현우.
그에 김시현은 순간 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차가워지고 자시고 애초에 이제 막 결혼한 신혼집에 거의 2주 간격으로 찾아오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것도 아침 댓바람부터!"
김시현의 일갈.
그에 김현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했다.
"그…… 그런가?"
"그렇죠!"
"여기, 커피 드세요."
김시현의 대답과 동시에 들리는 목소리.
"오, 아냐."
"길드장님, 이번에도 아내분들한테 쫓기시는 거예요?"
"……좀, 그럴 일이 있어서."
그의 말에 아냐는 살짝 웃더니 커피를 놔두고는 김시현의 옆에 앉았고. 김현우는 그 둘을 바라보다 이야기했다.
"야, 근데 이제 2년 정도 지났으면 신혼 생활은 끝난 거 아니냐?"
김현우의 물음.
확실히 그의 기준으로 신혼 생활은 보통 1년…… 아니, 3개월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한 말이었으나 김시현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신혼은 5년까지거든요. 저희는 아직도 파릇파릇하다고요."
"후후후, 이이도 참."
"……."
김현우는 갑작스레 서로를 향해 다정하게 몸을 붙이는 둘을 보며 순간 무엇인가를 입 밖으로 내뱉으려 했으나 이내 그것을 참아 내곤 말했다.
"그래, 너희들 잘났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김현우.
김시현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이야기했다.
"형도 가정에 조금 관심을 가지시는 게 어때요? 너무 관심을 안 가지니까 형수님들이 난리를 치시는 거 아니에요?"
"나도 나름 노력하고 있다고는 생각하는데."
"……정말로요?"
"정말로."
"정말로?"
"……."
김현우는 김시현의 거듭되는 물음에 아무런 말없이 또 한 번 시선을 피하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려고요?"
김시현이 물었다.
그에 김현우는 왠지 식어 버린 눈빛으로 김시현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여기는 나와 공감해 줄 수 있는 녀석이 없을 것 같아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다른 곳?"
"그래, 동료를 찾으러 간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볍게 손을 휘적이곤 곧바로 김시현이 살던 집에서 사라져 버렸다.
문을 열지 않았음에도 도대체 어디로 나간 건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김현우.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시현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뭐가요?"
"현우 형이 밖에서 하는 것만 보면 사실 아내한테 휘둘릴 사람으로는 절대 안 보이잖아?"
김시현의 말에 아냐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죠."
김현우.
그를 밖에서 부르는 이명으로는 절대자(絶對者)가 있다.
그 누가 와도 막을 수 없고,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이뤄진다고 하기에 붙여진 이명.
게다가 김현우가 마지막 몬스터 웨이브를 기점으로 5년간 세상에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것은 당연했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섬 하나를 주먹 한 방에 날려 버리는 사람이 아내들한테 질질 끌려 다닌다고는 생각도 못 하겠지.'
김시현은 그가 했던 수많은 일 중 하나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고, 그렇게 그 둘이 김현우가 5년 동안 했던 업적을 되짚는 동안.
"자…… 잠깐! 미안!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잘못하기는 뭘 잘못해! 나가! 나가라고! 나가!"
"아니 내가 잘못-!"
"나가라고!!!!!!!!!!!!!"
김현우가 다음으로 향한 단독 주택의 정문에서는 실시간으로 엄청난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한없이 쭈그러든 남자의 목소리와, 반대로 그 쭈그러든 목소리를 타박하는 성난 여성의 목소리.
그렇게 실랑이가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적어도 오늘 하루는 들어올 생각하지 마!"
꽝!
문에 금이 갈 정도로 세게 닫힌 단독주택의 정문.
그리고 그 앞에서는…….
"3분 정도 봤는데 이번에는 좀 오래 버텼네."
"인생 시발……."
금이 간 정문 앞에서 울적해진 표정으로 쫓겨난 오공이 조용히 욕설을 내뱉었다.
424화 외전 02. 5년 후의 나는…… (2)
국제 헌터 협회의 중앙 건물 2층.
"흐음."
그곳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목조 인테리어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고.
그 2층의 집무실 안쪽에는-
"그래서, 슬슬 위험하다 이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국제 헌터 협회의 협회장인 리암이, 조금 전 들어온 협회원의 보고를 들으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중이었다.
"……."
"……."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어느 정도 지났을까?
곧 입을 다물고 있던 리암이 자신의 머리를 톡톡 치고는 이내 정리하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늑대(wolf)'라는 놈들이…… 절대자…… 아니, 김현우를 상대로 뭔가 하려 한다 이거지?"
"……네."
"제정신이 아니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협회원의 말에 리암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만우절 장난 같은 거 아닌가?"
"솔직히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보고서에 써 있는 내용을 읽어 보시면 아시다시피…… 그들은 아무래도 정말 저지르려는 것 같습니다."
"돌아 버렸군."
리암의 짤막한 감상.
그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협회원을 내보냈고,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5년 전만 해도 안 그랬는데…… 요즘에는 세상이 너무 평화로워져서 그런가 미친놈들이 많아진 것 같군.'
거대 몬스터 웨이브가 터지고 5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 5년간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다.
우선 몬스터 웨이브가 서서히 진정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세상에는 던전들이 존재했고, 그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와 함께 김현우가 나올 때쯤 더 이상 신인들을 모으지 않던 튜토리얼 탑도 몬스터 웨이브가 끝난 시점부터 다시금 새로운 헌터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헌터 협회는 5년 전보다도 훨씬 커져 있는 상태였다.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실 지금의 헌터 협회는 오롯이 헌터 협회라기보다는 그 뒤에 패도 길드와 암중 길드가 있는 실정이긴 하지만.'
패도 길드와 암중 길드는 5년 전 몬스터 웨이브가 끝나는 것을 기점으로 더 이상 여러 방면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움직이지 않고 있다기보다는 내실을 다지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패도 길드와 암중 길드는 말만 다른 두 길드지, 사실상 하나나 다름이 없게 되었으니까.
아무튼 그런 덕분에 다른 길드들이 열심히 세력을 불려 나름대로의 입지를 구축했고, 지금도 구축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구축해 봤자.'
리암은 패도 길드와 암중 길드가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헌터들이 공들여 구축해 놓은 길드들은 마치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박살 날 것이라는 것을 무척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두 개의 길드가 아무리 웅크려 있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세계 최강이라고 불릴 만큼 엄청난 군세를 가진 길드였고.
'무엇보다…….'
그 세계 최강의 길드를 가지고 있는 길드장의 남편은 김현우였다.
절대자(絶對者) 김현우.
반대로 말하면-
'그 엄청난 군세를 업고 있는 김현우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녀석들도…… 정신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리암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책상이 있는 곳에서 하나의 검은 스마트폰을 꺼냈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집어넣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리암은 김현우를 만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사실 굳이 노리는 사람이 있다고 전해 주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한데.'
애초에 김현우가 노린다고 해서 죽을 사람인가?
만약 김현우를 습격하기라도 했다가는 오히려 습격한 놈들이 불쌍해질 확률이 높았다.
'…….'
하지만 역시 알게 된 이상 이야기는 해 줘야 할 것 같았기에 리암은 대충 생각을 정리하며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
"아, 이제 어떻게 하냐……."
오공의 집 근처.
정확히 말하면 손오공과 이서연의 집 근처에 있는 공원의 벤치에서 현타가 온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손오공.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모르지."
그의 대답에 김현우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손오공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긴, 너도 쫓겨난 신세일 텐데 이걸 묻는 것 자체가 조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군."
"누가 쫓겨나?"
"쫓겨난 거 아니었나?"
김현우는 손오공의 물음에 인상을 찌푸리고는 이야기했다.
"전혀 아닌데."
"……그럼 뭔데?"
"그냥 안 들어갔어."
당당하게 답한 김현우의 대답에 순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손오공은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곤 이야기했다.
"그게 쫓겨난 게 아니라고?"
"당연히 아니지. 애초에 나는 집에 들어간 적이 없으니까."
김현우의 당당한 모습.
그에 손오공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해할 만하네."
"뭘?"
"나야 지금 들어가도 그냥 바가지만 긁히고 끝나겠지만 너는……."
왠지 안쓰러운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는 손오공.
김현우는 그런 손오공의 눈빛에 반박하고 싶었으나 곧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집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손오공이 지금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잘못하면 진짜 아까 봤던 구덩이가 내 무덤이 될지도…….'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자신의 처지가 굉장히 처량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별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전 세계를 적으로 돌려도 혼자 이길 수 있는, 아니, 전 세계가 아니라 탑 전체를 적으로 돌리더라도 전부 처리해 버릴 수 있는 괴물 같은 무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
아내들은 이길 수 없었다.
애초에 이건 무력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싸우는 게 훨씬 속 편하지…….'
아내들하고는 싸울 수조차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싸울 수는 있었으나 애초에 싸우는 순간 패배는 김현우가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잘못은 김현우가 한 거고, 만약 그가 화를 내기라도 하면 그것은 결국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고 하는 짓이니까.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쩝."
괜스레 입맛을 다시는 김현우는 아직도 자신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손오공에게 물었다.
"그런데 청룡은?"
"청룡?"
"그래, 걔도 어제 있었잖아?"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어제의 일을 회상했다.
세계 일주를 마치고 왔다고 하는 눈동자 덕분에 김현우를 포함한 청룡과 손오공은 간만에 만나서 술판을 벌였다.
뭐, 간만이라고 해도 눈동자를 빼면 다들 3일이나 1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멤버였으나, 요점은 눈동자가 껴 있었기에 평소보다 조금 더 과하게 술을 마셨고.
그 결과로 눈동자를 포함한 손오공과 청룡, 그리고 김현우는 아침이 다 되고 나서야 집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분명 청룡도 끼어 있었다.
"걔는 잘 있겠지."
"……왜?"
손오공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는 김현우.
"걔 아내는 루시퍼잖아."
"……그런데?"
"애초에 걔는 청룡이 하루 이틀 외박한 걸로는 딱히 화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뭐라고? 정말?"
"뭐, 본인한테 듣기론 말이야. 게다가-."
손오공은 갑작스레 고개를 갸웃하며 마력을 방출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보니까 쫓겨나지도 않았나 보네."
"진짜로……?"
"아니, 새삼스럽게 뭘 그리 놀라? 애초에 걔는 우리처럼 바가지 긁힌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말이야."
"……그게 정녕 실화라고?"
"지금까지 술 먹으면서 맨날 자랑하던 게 그거였잖아?"
"……이 새끼, 완전 천사랑 결혼했네?"
"……천사 맞잖아?"
"아,"
그러네.
"지금까지 술 마시면서 뭘 들었던 거야? 그놈 맨날 입만 열면 내 와이프가, 내 와이프가- 하면서 공처가처럼 지랄했는데."
김현우의 말에 뭘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힘없이 받아 주는 손오공.
"……확실히."
생각해 보면 와이프 이야기만 나오면 귀를 닫아서 그렇지, 확실히 청룡이 자신의 와이프에 대한 자랑을 많이 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기는 했다.
"……어쩔 수 없지."
"……왜?"
"루시퍼한테 이야기 좀 하러 가려고."
"……무슨 이야기?"
"걔가 예전에 약혼자를 NTR 했었던-."
"이런 악마 같은 새끼……."
손오공이 짜게 식은 눈으로 김현우를 바라보자 그는 다시 한숨을 쉬며 벤치에 기대앉았다.
"농담이다 농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잘 살고 있는 애들한테 굳이 그런 지랄을 하지는 않아."
김현우의 말에도 불구하고 손오공은 그를 빤히 바라봤으나.
"에휴."
이내 손오공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더니 벤치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김현우가 물었다.
그에 손오공은 잔뜩 피곤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평생 여기에 있을 건 아니니까 우선 다시 가 봐야지."
"다시 간다고? 어디를?"
"어디긴 어디야, 집에 다시 가지."
"……정말로?"
'진심이야?'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표정으로 물어보는 김현우의 모습에 손오공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평생 담쌓고 지낼 것도 아닌데 빨리 가서 풀어 줘야지. 게다가 오늘 무슨 날인지 잊어버렸어?"
"……오늘?"
"그래, 오늘 랑이 돌잔치잖아?"
"……아, 그러고 보니."
김현우는 마음 한편에 묻어 두었던 기억이 손오공의 말을 듣고 나서야 새삼스레 떠올랐다.
"……오늘이 벌써 그날이야?"
"내가 알기로는 오늘이야. 그래도 돌잔치인데, 안 갈 건 아니잖아?"
"뭐…… 그렇긴 하지."
오늘이 바로 천마와 구미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이랑'의 돌잔치였던 것을 새삼스럽게 기억해 낸 김현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지? 그러니까 빨리 집에 용서나 빌러 가라고. 오늘 돌잔치에 아무런 일 없이 출석하고 싶으면 말이야."
손오공의 말에 심술이 난 김현우는 괜스레 입을 열었으나-
"언제는 천계도 혼자 때려 부쉈다던 놈이 여자 하나한테 고개를 숙이다니-."
"혼자 마력 때려잡은 너는 어떻고?"
"……."
결국 본전도 못 찾고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나는 가볼 테니까 너도 빨리 들어가 봐. 원래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말은 들어봤지? 아마 조금이라도 빨리 들어가서 용서를 비는 게 너한테 훨씬 좋은 선택이 될 거다."
손오공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나는 어쩌지."
그런 손오공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복잡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손오공의 말대로 계속 이렇게 죽치고 있어 봤자 뭔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보니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집으로 가야 하는데.
"……."
역시, 지금 들어가면 그리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기에, 그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고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게냐?"
"고민을 좀……."
"무슨 고민?"
"집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는…… 야…… 야차?"
-김현우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야차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래서, 어디 한번 이야기를 들어 볼까?"
김현우는 앞에서 생긋 미소 짓는 자신의 아내를 보며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425화 외전 03. 5년 후의 나는…… (3)
51번 탑의 최상층은 5년 전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새하얀 백색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하나의 집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그곳.
허나 5년이 지난 지금, 그저 공허하기만 한 백색 공간이었던 그곳은 생각보다 많이 바뀌어 있었다.
우선 제일 먼저 아무것도 없었던 투명한 백색의 공간이 거대한 숲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
그 가운데에는 누가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별장이 지어져 있었고, 그 주변에는 별장을 아름답게 인테리어할 조경이 가꾸어져 있었다.
별장의 오른 편에는 싱그럽게 꽃이 피어 있었다.
반대로 아름다은 별장 안쪽의 왼편에는 느긋하게 구경할 만한 연못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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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카놈 : 응 아니야~ 이새끼 공략 이상하게 하는데 애초에 던전소울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처음에 망령 반지를 먹어야 한다구요~ 존나 알못인데 아는 척하는 거 역겨움 ㅅㄱ
ㄴ아브가지 : ???? 아는 척한 적 없는데;
ㄴ양카놈 : ㅈㄹ ㅋㅋㅋㅋ 조금 전까지 계속 첫 시작에 망령반지 먹는 게 좋다고 개깝쳤잖아. 아님?
ㄴ아브가지 : 아니 그건 맞으니까 맞다고 말한 거죠ㅋㅋ 제 말 틀렸음? 게다가 애초에 써놨잖아요. 처음 시작하는 뉴비만 망령반지 먹으라고,
ㄴ양카놈 : 지랄 ㅋㅋ 금세 수정했네.
ㄴ 아브가지 : 수정하기는 뭘 수정함?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거 수정한 적 단 한 번도 없는데.
ㄴ 양카놈 : 암튼 너 같은 뉴비가 공략글 쓰는 거 보니 던전소울도 끝나기는 끝났나 보네ㅋㅋㅋㅋ 수고해라~
ㄴ 아브가지 : 뭐야? 갑자기 이렇게 도망간다고?
ㄴ 아브가지 : 야.
ㄴ 아브가지 : 야 이 개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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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악! 진짜!"
아브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컴퓨터를 바라보며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것들이……!"
그녀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갑작스레 시비를 걸고는 자신의 기분을 망가뜨린 댓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겜알못 새끼들이 진짜……!!"
아브는 포니테일로 묶어 올린 자신의 머리를 짜증 난다는 듯 헝클어뜨리며 댓글을 작성했으나 이미 그녀의 기분을 망쳐 버린 악플러는 더 이상 댓글을 읽지 않는지 사라져 버렸다.
그에 한동안 컴퓨터 앞에서 씩씩거리던 아브는 이내 짜증이 난다는 듯 발가락을 이용해 발아래에 있는 컴퓨터 본체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는 그대로 침대로 다이빙했고.
"아브, 이제 곧 9계층으로 내려가야 하니까 빨리 내려오는 게-."
"아 알았어요!"
이내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짜증스럽게 대답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쯧."
그리고 그렇게 짜증스럽게 대답한 아브의 목소리를 들은 노아흐는 이내 소파에 앉아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이것 참, 고작 9계층에 있는 인터넷 덕분에 성격이 저렇게 바뀌다니……."
"확실히 그렇군, 나도 아브가 저렇게 바뀔지는 몰랐는데 말이야."
티르의 동조.
지난 5년간 탑의 최상층에는 딱히 대단한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굳이 변화라고 해 봤자 밖의 배경이 달라졌다는 것과, 이 탑의 최상층에 본격적으로 9계층의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일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브가 인터넷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 이 최상층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도 좀…… 너무 인격의 변화가 큰 게 아닌가?"
티르가 중얼거리자 노아흐는 고개를 저었다.
"……뭐,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는군. 다만 그냥 외적으로 보이는 성격이 변한 것뿐이지, 내부까지 변하지는 않았을 걸세."
"최근에 위에서 혼자 욕설을 내뱉는 걸 생각해 보면 내부까지 변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닌가?"
"……."
티르의 말에 노아흐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사실, 노아흐도 최근 아브의 방이 있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흠칫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분명 처음에는 그냥 간단한 아쉬움이나 짜증 정도였던 것 같은데.'
허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점점 더 거침없어졌다.
김현우가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씨발'을 가끔 입에 담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최근에는 욕에 거부감이 없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마음대로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야 이 씨발 새끼야! 너가 사람 새끼냐!
"……."
노아흐는 아브가 비교적 최근에 내뱉었던 욕설을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는 중얼거렸다.
"관리를…… 해야 하나?"
아니, 관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웃긴 발상이기는 했다.
아브는 저래 보여도 결국 자신과 비슷한 시간대를 살았고, 무엇보다 노아흐와 아브는 서로 누가 누구를 관리하는 관계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아브는 노아흐의 입장에서도 조금 관리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뭐, 결국 노아흐가 아브를 관리할 수는 없겠지만.
'……김현우에게 부탁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노아흐는 저번에 한번 최상층에 올라와 이야기를 나누고 간 김현우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현우에게 이야기하면 아브를 어떻게든 관리해 줄 것 같긴 했다.
'오늘 내려가서 한번 이야기를 나눠 봐야겟군.'
노아흐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 이상 아브에 대한 생각을 이어 나가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자네는 어쩔 텐가?"
"나는 여기에 남도록 하지."
"흠, 천마는 자네가 오면 굉장히 좋아할 것 같은데 말일세."
노아흐의 말에 티르는 고개를 저었다.
"뭐, 확실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네만. 솔직히-."
"?"
"……내가 부담스러워서 말일세."
티르의 말에 노아흐는 순간 머리 위로 갈고리를 띄우다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확실히 조금 부담스럽기는 할 것 같군. 알았네."
끼이이익-
노아흐가 긍정을 하자마자 열리는 문소리.
그와 함께 들리는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에 노아흐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지금 바로 갈 거예요?"
그는 곧 대충 옷을 걸치고 나온 아브를 바라봤다.
눈가에는 얼마나 잠을 자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는지를 보여 주듯 다크 서클이 나 있었고, 대충 걸쳐 입고 나왔다는 게 눈에 보이는 후드티는 여기저기 접힌 자국이 있었다.
'……그냥 마력만 사용해도 옷을 원래 상태로 돌릴 수 있을 텐데.'
패션인가?
노아흐는 일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곧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이제 슬슬 내려가야 할 것 같군."
"그럼 바로 가요."
노아흐의 말을 듣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최상층 밖에 설치해 둔 포탈로 걸음을 옮기는 아브.
그것을 보며 노아흐는 괜스레 입맛을 다시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
하남에 있는 거대한 관저의 1층 거실.
"……."
"……."
"……."
"……."
그곳에는 김현우와 그의 아내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었다.
사실 앉아 있기만 둥그렇게 앉아 있었다 뿐이지 이건 거의 심문회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둥글게 앉아 있는 하나린과 미령, 그리고 야차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김현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
침묵.
또 침묵.
김현우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꺼내도 면죄부가 되지 못할 것을 알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그녀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묵묵하게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래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야차였다.
"어디 변명이라도 한번 해 보거라."
"맞아요, 서방님,"
"들어는 드리겠습니다."
야차가 입을 열자 차례대로 입을 여는 하나린과 미령.
그에 김현우는 슬쩍 눈치를 보고는 어제 있었던 일을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10시 전에는 들어오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맨 처음으로 꺼냈고, 그 뒤에 그림자가 세계 일주를 마치고 와 가볍게 한잔하자는 말에 거부했다가 청룡과 오공도 있다는 말에 좀만 마시려고 술자리에 참가했다는 것도 이야기했으며.
"그래서, 어쩌다 보니 시간이 좀 늦었네."
결국 간만에 만난 그림자를 포함해 다른 이들과 어울려 놀다 보니 시간이 조금 늦었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김현우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해하느니라."
"!"
김현우는 야차의 말에 순간적으로 고개를 올렸으나, 이내 곧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그래, 지아비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서 막겠느냐? 안 그렇느냐?"
그도 그럴 것이 야차는 분명 입으로는 이해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 표정에서는 냉정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확실히…… 서방님이 어떻게 하든 간에 저희는 막을 수가 없죠."
"맞습니다. 저희는 그저 서방님의 안사람일 뿐이니까요. 게다가 저희는 다 잡아 놓은 물고기일 뿐이니……."
"잠깐! 내가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고!"
김현우는 미령의 말에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반박했으나.
"오호, 그렇느냐? 그렇다면 너는 우리 모두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더냐?"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흐음, 이상하구나."
"무…… 뭐가?"
"아니, 그렇지 않느냐? 보통 소중한 인연들은 서로의 약속을 절대로 안 깨지 않느냐?"
"……."
김현우는 거기까지 듣고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자신이 좆 됐다는 것을, 김현우는 지금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으니까.
'좆 됐다.'
지금 이 상황에서, 김현우는 더 이상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녀들의 비난을 막을 수 없었다.
만약 여기서 논리적으로 대응하면 야차는 분명 또 그 말을 비꼬아서 김현우에게 던질 것이고, 만약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면 잘못을 인정한 대로 바가지를 긁히게 될 것이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그 상황에서 야차는 어느새 도끼눈으로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것은 다른 아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죄송합니다."
김현우는 결국 잘못을 구했다.
어차피 이렇게 회피하나 저렇게 회피하나 결말은 뻔했다.
그리고 그렇게 이리저리 회피하며 바가지를 긁힐 바에 김현우는 깔끔하게 사과하는 것을 택했다.
"흐음? 뭐가 죄송한 것이냐? 우리는 그저 의견을 물어본 것뿐이지 않느냐?"
"죄송합니다."
물론 김현우가 사과한다고 해서 그녀들의 화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건 아니었다.
예전 같은 경우야 한두 번 정도는 가벼운 사과에 끝나는 해프닝이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서방님, 왜 죄송하다고 하시는 겁니까? 저희는 그저 말씀을 듣고 싶은 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설마, 서방님은 지금 저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으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런 말에는 절대로 대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년간에 쌓여 있는 노하우로 알고 있는 김현우는 모든 대답을 '죄송합니다.'로 통일했고.
"……다음부터는 약속을 잘 지켰으면 하느니라."
"저도요."
"저희가 힘든 부탁을 드리는 건 아니잖아요, 서방님?"
"……죄송합니다."
김현우는 약 한 시간 동안 87번의 '죄송합니다.'를 연발해 아내들의 용서를 받아 낼 수 있었다.
426화 외전 04. 5년 후의 나는…… (4)
하남에 있는 거대한 장원의 내부.
분명 5년 전에도 꽤 상당한 크기였건만 지금에 와서는 아예 왕궁과 비슷할 정도로 엄청난 크기를 가진 장원의 중앙에는-
"형, 왔어?"
"그래……."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사실 엄연히 말하면 축제가 아니라 천마와 구미호 사이에서 나온 랑이의 돌잔치일 뿐이었으나.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중앙 건물을 기점으로 엄청난 수의 인원이 모인 것을 보니 지금 이 건물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 돌잔치인지 축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 듣기로는 요괴들이 잔뜩 왔다고 하더라고요."
"……요괴들?"
김현우가 그렇게 되물으며 시선을 돌리자 확실히 눈에 익은 요괴들이 보였다.
요괴뿐인가?
"……천군? 쟤들은 왜 여기 있어?"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있더라고요."
김시현의 대답에 김현우는 건물의 입구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긴나라를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 우르르 서 있는 천군들까지.
"……거참 특이하구먼."
그렇게 중얼거린 김현우는 이내 시선을 돌려 마찬가지로 건물 입구에서 열심히 사람들을 접대하고 있는 천마와 구미호를 볼 수 있었다.
무엇인가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것처럼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가볍게 젓고 있는 천마와 반대로 열심히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구미호.
김현우는 김시현과 함께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앗, 주인님!"
그가 움직이자마자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리고 손을 흔드는 구미호.
순간적으로 모이는 주변 시선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는 이야기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아…… 앗,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버릇이 돼서 그만……."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하는 구미호에게 대충 손사래를 친 김현우는 천마와 구미호를 한 차례씩 훑어봤다.
천마는 무복을 입고 있는 상태였고.
구미호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한복을 입고 있는 상태.
그 둘의 모습이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듯 한 김현우는 물었다.
"그래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아, 그게……."
난처해졌다는 듯 김현우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인 구미호.
그에 옆에 있던 천마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잘못 새나간 것 같더군."
"이야기가 잘못 샜다고?"
김현우의 되물음에 천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째서 장원이 이만한 인원이 모여 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럼 결국 손오공이 칠대성이랑 술 마시다가 말을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거라는 소리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더군."
"미친."
천마가 해 준 설명은 김현우를 황당하게 했다.
"돌잔치를 축제로 알고 이렇게 모여들었다고……?"
"……뭐, 그 덕분에 손오공이 저기서 일일이 해명 중이다만."
천마가 턱짓하자 김현우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려 반대쪽을 바라봤고, 곧 손오공이 건물로 몰려오고 있는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어우."
그리고 그 뒤에서 열심히 손오공의 바가지를 긁고 있는 이서연의 모습까지.
"쟤는 어째 성격이 더 더러워진 것 같냐."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전번에는 넘겨 줄 서류 기입 잘못했다고 한 시간 동안 붙잡고 늘어지더라고요."
김현우가 이서연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김시현.
홱!
허나 김현우는 곧 무엇인가를 눈치챘는지 곧바로 도끼눈을 뜬 채 이곳을 바라보는 이서연을 보며 곧바로 시선을 돌렸고.
"솔직히 사람이 조금 많아지기는 했지만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래?"
"네. 목적은 조금 달라도 결국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것은 축제가 아니라 랑이의 돌잔치니까요."
구미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으쓱한 김현우는 물었다.
"그보다. 너희 둘 다 여기에 나와 있어도 되는 거야? 랑이는?"
"랑이는 건물 안에 있죠. 제 분신이 랑이를 봐주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구미호의 말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간만에 만난 그들과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김시현과 함께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천마는 진짜 독기가 빠졌네요."
"그런가?"
"네. 생각해 보면 미호는 저희 집에 가끔가다 놀러 와서 보기는 하는데 천마는 거의 1~2년 간격으로 한두 번씩 보거든요. 근데 저번이랑 사람이 완전 딴판인데요?"
김시현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 천마의 모습을 떠올려 보곤.
"……확실히 예전이랑은 조금 다르긴 했지."
생각해 보면 천마는 구미호랑 만났을 때부터 조금씩 유해진 성격을 보여 주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기세가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허나 지금은?
"꽤 달라졌어."
확실히 달라지기는 한 것 같았다.
분명 아까 전 만났던 천마에게는 더 이상 예전에 느꼈던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여기 있었군."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자 들리는 목소리.
그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고.
"……리암?"
"오랜만이군, 그동안 잘 지냈나?"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서 가볍게 손을 들고 있는 리암을 볼 수 있었다.
"너도 온 거야?"
자연스레 다가가며 인사하는 김현우.
그에 리암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으나 이내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렇네, 다만 이런 풍경은 예상하지 못했군."
"이런 풍경……? 아."
김현우는 리암의 뒤쪽을 한번 훑어보고 나서야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당장 장원의 밖은 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대부분의 요괴들이 인간으로 둔갑하고 있는 상태였으나, 내부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훨씬 많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 요괴들.
'……이거 돌잔치인데 괜찮은 건가?'
김현우는 순간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날려 버렸다.
생각해보면 구미호도 요괴가 아닌가?
구미호의 자식인 랑이도 반쯤은 요괴의 피가 섞인 것일 테니 그렇게 큰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 생각을 접어 두곤 리암의 말에 대답했다.
"확실히…… 너는 이야기만 들었나?"
"그렇네."
물론 리암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5년 전 몬스터 웨이브를 막기 위해 요괴가 동원되었기에 어느 정도 알고 있기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괴가 갑작스레 나타나 혼란스러운 사회를 진정시킨 것은 어찌됐든 리암의 몫이었으니까.
'뭐, 나도 그때 당시에는 없어서 아내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뿐이지만.'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야기했다.
"너무 긴장할 거 없어, 여기에 있는 녀석들은 모두 놀러 온 녀석들이니까. 딱히 이상한 짓을 하다 가지는 않을 거야."
"그건 나도 딱히 걱정하고 있지 않네. 그냥 어색한 것뿐이지."
"그럼 다행이고."
"그보다. 전해 줄 이야기가 있네."
"전해 줄 이야기?"
김현우의 되물음에 리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어디에 있는지 모를 어두운 지하실.
그 안에서는 네 명의 사람이 늑대 가면을 쓴 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인가?"
제일 먼저 입을 여는 한 남자.
그에 늑대 가면 중에서도 눈가 쪽에 세로로 긴 흉터가 있는 가면을 쓴 남자가 대답했다.
"그래, 오늘이다."
"……그런데, 정말 건드려도 되는 거야? 솔직히 별로 안 내키는데."
흉터가 있는 늑대의 대답에 전혀 탐탁지 않다는 듯 의문을 제기하는 다른 늑대 가면.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남자의 물음에 조금 전 이야기를 꺼냈던 다른 남자는 말했다.
"너무 위험하지 않아? 애초에 절대자를 건드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선을 넘은 것 같은데."
늑대 가면의 반박.
그에 그 맞은편에 있던 다른 이도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했다.
"확실히 오늘까지 기한이 있어서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자를 건드리는 건 너무 무모한 것 같긴 하다."
"아무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두 명의 늑대 가면.
흉터가 있는 늑대 가면은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작전의 변화는 없다."
"진심이야?"
"진심이다. 너는 애초에 내가 왜 이런 작전을 짰다고 생각하지?"
"……명성?"
"그래, 바로 명성이다."
늑대 가면은 척 봐도 두꺼워 보이는 손으로 원탁을 툭 치더니 이야기했다.
"너희는 계속 서로를 가면을 쓴 상태로 본 터라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전부 S급 헌터들로 이뤄져 있다."
게다가-
"이곳에 있는 전부, S등급 헌터 랭킹 100위 안에 들어가 있지."
입을 열지 않는 가면들.
남자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너희도 알겠지만 우리는 이 조직을 만들고 거진 1년 동안 조직을 키워 왔다. 하지만 정체를 알리지 않고 조직을 키우다 보니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뭐-
"돈이라도 조금 더 부을 수 있다면 상관없겠다만 지금도 자금은 걸리지 않을 한계선에서 다들 사용하고 있지.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조직을 빠르게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명성을 얻는 것이지."
"명성 때문이라면 그냥 다른 일을 해도 될 것 같은데? 이를테면 다른 S급 헌터 암살이라든가 말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죽음을 명성을 올리는 데 사용하자는 가면 중 하나.
허나 흉터를 가지고 있는 늑대 가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으로는 안 된다."
"왜?"
"물론 네 말대로 하면 명성을 얻을 수는 있겠지. 다만 그 명성은 딱히 우리의 이름을 키우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진 않을 거다. 이미 그런 일은 번번이 일어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한 마디로 압도적인 명성을 얻기에 적합한 건 절대자를 건드는 것밖에 없다…… 뭐 이거네?"
"정답이다. 절대자를 건들 수 있다면 우리의 명성은 하늘 끝까지 올라갈 테지. 그리고 그건 정체된 조직의 성장을 압도적으로 올려 줄 것이다."
"근데 그러다가 절대자가 빡 돌아서 우리 죽이겠다고 설치면 다 죽는 거 아니야?"
근심 어린 걱정의 목소리에도 흉터를 가지고 있는 늑대 가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걱정 마라. 절대자가 혹여나 우리를 건들 일은 없을 테니까."
"왜?"
"내가 말하지 않았나? 우리는 절대자를 직접 건드는 게 아니다. 엄연히 말하면 절대자의 측근을 건드는 거지."
"……측근?"
"그래. 물론 그녀의 아내들을 건들기는 힘들다. 또한 그와 항상 같이 다니는 모습이 보이는 김시현이나 이서연을 건드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
흉터를 가지고 있는 늑대 가면이 거기까지 말하자 다른 이들은 그제야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설마…… 천마를?"
"맞다. 정확히 말하면 천마보다는 그의 아내인 구미호를 납치할 거다."
"그게 우리만으로 가능하려나?"
"가능하다. 그녀의 전투 능력은 높지 않으니까. 5년 전에 찍혔던 영상을 토대로 몇 번을 분석해 본 결과, 그녀는 우리 중 두 명이 붙으면 어렵지 않게 붙잡을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납치하고 나면……."
"대충 우리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나면 풀어 줄 거다."
"거참 할 맛 안 나는 일이네."
작게 투덜거리는 늑대 가면.
그에 흉터를 가지고 있는 늑대 가면은 묘한 웃음소리가 담긴 말투로 이야기했고.
"뭐, 걱정하지 마라, 만약 이번 일이 잘 풀리기만 하면 우리 조직은 생각보다도 거대해질 테니까."
그의 말에 다른 늑대 가면이 저도 모르게 수긍하고 있을 때.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늑대 가면을 쓰고 있는 이들 중 입을 열지 않고 있던 한 명이, 입을 열었다.
427화 외전 05. 5년 후의 나는…… (5)
"왜 그러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늑대 가면을 쓰고 있는 여자에게 흉터를 가진 늑대 가면이 말했다.
정확히는 S급 세계 랭킹 12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미냐'는 가면 속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 녀석들, 진짜 제정신인가?'
미냐는 시선을 돌려 자신과 같은 가면을 쓰고 있는 다른 늑대 가면들을 바라봤다.
다들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긍하는 모습.
그 모습을 보며 미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이게 현실성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물론 이 원탁의 상석에 앉아 있는 흉터를 가지고 있는 늑대 가면의 논리는 딱히 틀린 것이 없기는 했다.
명성을 얻기 위해서 김현우의 측근을 건든다.
그래, 이 논리는 완벽하다.
완벽해서 반박조차 할 수 없다.
애초에 지금 이 시대에 김현우를 건드리려고 하는 이들은 그 어디를 찾아봐도 없으니까.
당연히 김현우 본인이 아니라 그 측근을 건든 것이라도 확실히 명성이 오를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런 명성이 퍼졌을 때 과연 우리가 멀쩡히 살아 있을까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렇기에 미냐는 별다른 부정 없이 수긍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미냐의 말.
그에 흉터가 있는 늑대 가면은 미냐 쪽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애초에 김현우의 측근을 인질로 붙잡는 시점부터 우리가 위험해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아?"
"그걸 걱정하는 건가?"
"당연한 거 아니야? 기껏 명성을 얻어봤자 죽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미냐의 말.
그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곧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라. 이미 계획은 전부 준비해 놨으니까."
"……계획?"
"그래, 만약 구미호를 납치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면 그 즉시 우리 중 한 명이 파 놓은 심해 셸터에 몸을 숨길 거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심해 셸터에 들어가는 순간,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입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박살 내 버릴 생각이다. 그렇다면 김현우가 우리의 위치를 알아도 찾아오지는 못하겠지."
뭐-
"애초에 우리의 위치를 알지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럼 밖으로 나갈 때는?"
"텔레포트를 이용하면 된다."
"……텔레포트?"
"그래, 내가 말하지 않았나? 지금 모여 있는 넷은 전부 S등급 상위권에 있는 헌터들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텔레포트를 이용할 수 있는 이도 있다."
그리고-
"그 이외에도 전반적인 계획은 모두 짜 놓았다. 우리의 명성을 끌어올릴 만한 책부터 시작해서 일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가 의심받지 않기 위한 연막도 전부 쳐 놨지."
-계획은 완벽하다.
그렇게 말을 끝마치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흉터 늑대를 보며 미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생각했다.
'……너무 자신들을 과신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
확실히 과신할 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여기에 모여 있는 그들은 당장 밖에서는 다른 아무도 건들지 못할 정도의 명예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명예는 자신의 랭킹에서 나오고, 그 랭킹은 헌터가 가지고 있는 힘에서 나온다.
오히려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는 편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곳에 있는 이들은 개개인이 헌터 사회에서 꽤 큰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냐는 이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건드리려고 하는 이는 김현우였다.
애초에 S등급 랭킹에도 등재되지 않은, 마음만 먹으면 혼자 힘으로라도 세계를 멸망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는 괴물.
그런 랭킹마저 초월한 괴물한테 자신들의 랭킹을 기준으로 힘을 과신해 봤자 어리석은 짓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미냐는 한 번 더 입을 열-
끼이이익.
-지 못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늑대 가면들.
그들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두었던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리고는 어둠에 가려진 문 쪽을 바라봤고.
곧 그들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한 인영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너, 너는……."
"네가 대체 왜 여기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늑대 가면들.
그리고 그 맞은편에서는-
"내가 조금 심심해서 온 거긴 하지만 일일이 설명해 주기는 귀찮고, 그냥 두 가지 중에 하나만 선택해라."
현 S등급 랭킹 1위-
"하나는 뒤지게 맞고 나한테 묶여서 끌려가는 거고, 또 하나는 그냥 조용히 연행되는 거야."
-지크프리트가,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어떻게 할래?"
그들을 향해 제안했다.
***
"나를 노린다고?"
김현우의 물음에 리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정확히 말하면 자네를 노린다기보다는 조금 다른 방향인 것 같긴 하네만……."
"그건 또 뭐야? 다른 방향?"
"뭐, 상식적으로 자네를 노릴 일은 없지 않은가? 그 친구들이 만약 세속과 한 10년 정도 연을 끊은 게 아니라면 말일세."
리암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다 이야기했다.
"뭐, 확실히 그렇긴 하지."
아무리 세상 뉴스에 관심이 없는 김현우라도 지금 세계에서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나를 건드리려 하는 건데? 아니, 애초에 나를 건드리려는 이유가 뭐야?"
김현우는 그렇게 질문하며 자신과 척을 지었던 이들을 머릿속에서 하나둘 꺼내 생각해 보기 시작했으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을 습격할 만한 이들은-
"……."
'은근히……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 보니까 좀 많은 것 같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5년간 김현우는 이런저런 이들이랑 몇 번 정도 부딪힌 적이 있기는 했다.
뭐, 부딪혔다고 해 봤자 곧바로 다음 날만 되면 김현우에게 꼬리를 내리기는 했으나 아무튼 이런저런 트러블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흠……."
김현우가 고민하고 있자 리암은 이야기했다.
"그저 순전히 내 생각이기는 하네만. 아마 그들은 딱히 자네에게 원한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닐 걸세."
"원한이 없다고? 그럼 왜?"
"아마 인지도 때문이겠지."
"……인지도?"
리암은 김현우의 물음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고, 이내 그 이야기를 한동안 듣고 있던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한 마디로, 그냥 나와 드잡이질을 했다는 위명 때문이다?"
"그럴 확률이 상당히 높네."
"……병신인가?"
"……부정할 수 없군, 사실 나도 처음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네."
리암의 동의에 잠시 고민하던 김현우는 말했다.
"뭐, 아무튼 울프라는 놈들이 나를 노리고 있다 이거지? 알아 둘게."
"알아 둘 필요 없습니다. 서방님."
김현우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고.
"오랜만에 뵙는군요."
"마찬가집니다."
김현우는 자신의 뒤에 미령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 볼일을 전부 마치고 도착했습니다."
"하나린과 야차는?"
김현우의 말에 묘하게 뾰루통한 표정을 짓는 미령.
허나 그녀는 곧바로 김현우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하나린은 아직 길드에 볼일이 남아서 늦을 것 같고, 언니는 같이 들어오다 아시는 분을 만나 잠시 인사를 하러 가셨습니다."
그보다-
"서방님께서는 그 일을 전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왜?"
"이미 그 일이라면 전부 조치를 끝내 두었으니까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김현우의 옆으로 붙는 미령.
김현우는 그것이 칭찬을 바라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곳은 보는 이가 많았기에 미령의 몸을 슬쩍 안아 주는 것으로 끝냈고.
"……과연."
한동안 고민을 하고 있었던 리암은 미령의 말에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했다.
"확실히, 저희 쪽에서 얻은 정보가 패도 길드에 가지 않을 리가 없군요."
리암의 말에 김현우의 옆에 붙어 있던 미령은 고개를 슬쩍 끄덕이곤 대답했다.
"아마 지금쯤 도착했을 겁니다."
"도착이요? 누구를 보내셨길래……."
"현 1위를 보냈죠."
"1위라면…… 지크프리트?"
김현우의 물음에 미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리암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고는 혼자 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그 뒤로 김현우와 이런저런 인사치례를 하고는 헤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리암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물었다.
"그런데, 걔는 아직도 S급 1위 타이틀 안 내려놨어?"
"예. 아무래도 감투가 나쁘지 않나 봅니다. 서방님."
미령의 말에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해 보면 그 녀석은 원래 탑주였을 때도 정상의 위치라는 것을 꽤나 좋아했던 것 같은 기억이 남아 있기는 했기에 김현우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는 넘어갔고.
"응?"
"왜 그러신가요, 서방님?"
"아니, 조금 전까지 시현이가 옆에 있었는데……."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노아흐와 이야기하고 있는 김시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간만이군."
김현우가 오자마자 김시현과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입을 여는 노아흐.
"그러게. 요즘에는 어떻게 지내?"
"뭐, 꼭대기 층의 생활은 언제나 비슷하네. 예전과 조금 다른 점은 취미가 조금 늘었다는 것 정도?"
"그래? 저번에는 무슨 프라모델 만들더니, 이번에는 뭘 하는데?"
노아흐는 김현우의 물음에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그건 여기서 이야기해 주기는 그러니 다음에 한번 올라와서 보도록 하게. 아마 그 편이 더 좋을 테니."
"……그래?"
"그렇네. 그리고 그보다 잠시 둘이서 따로 할 이야기가 있네만, 괜찮겠나?"
"둘이서만?"
"그렇네."
노아흐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김현우.
허나 김현우는 곧 자신의 옆에 붙어 있던 미령을 바라보며 허락을 구했고, 미령은 약간 불만인 듯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으나.
"……어쩔 수 없군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김현우의 옆에서 떨어졌다.
"그럼 잠깐 둘이서만 걷지."
"……뭐, 그래 그럼."
노아흐의 말에 그의 옆을 따라 걷는 김현우.
그가 노아흐와 걸음을 옮기며 잠시 시끌벅적한 내부를 감상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다름이 아니라 내가 자네를 이렇게 따로 불러낸 이유는 아브 때문일세."
"아브? 아브가 왜?"
김현우가 되묻자 노아흐는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음…… 아브가 조금 물든 것 같아서 말일세."
"아브가 물든 것 같다고?"
"그렇네."
노아흐는 그렇게 서두를 던진 뒤, 곧 자신이 지금까지 봤던 일을 김현우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음, 결론을 말해 보면 아브가 조금 인터넷을 과도하게 사용해서 물든 것 같으니 내가 좀 제한을 둬 달라…… 뭐 이런 거야?"
"그 말이 정확하네."
"그걸 굳이 내가?"
"적어도 내가 하는 것보다는 자네가 하는 게 훨씬 나을 걸세."
게다가-
"애초에 내가 아브에게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지 않나? 그녀의 외형이야 소녀의 모습을 취하고는 있네만 실제 겪은 세월은 나와 비슷하니 말일세."
김현우는 '그럼 나는?'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으나 이내 노아흐의 표정을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우선 한번 보고 나서 정하지 뭐."
428화 외전 06. 5년 후의 나는…… (6)
그 직후.
"아, 가디언!"
"오랜만이네."
노아흐의 말을 들었던 김현우는 건물의 한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아브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흠…… 외견이 좀 변했나?'
자연스레 아브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녀를 탐색하는 김현우.
지난 5년간을 생각해 보면 아브의 외형은 꽤 많이 변했다.
기본적인 외형이 변했다기보다는 분위기가 변했다고 보는 쪽이 맞을까?
굳이 어느 쪽으로 변했냐고 물어본다면 조금 시크한 쪽으로 분위기가 변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5년 전을 기점으로 했을 때 분위기가 그렇게 변했다는 것이지. 딱히 최근이랑 비교해 봤을 때 아브가 그렇게 바뀌었다는 점은 찾지 못했다.
'아니, 우선 좀 이야기를 해 봐야 하나?'
생각해 보면 노아흐가 이야기했던 것도 외견에 관한 내용보다는 인터넷에 물들어서 말이 험해졌다는 둥의 이야기였었기에 김현우는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밥 먹고 있었어?"
"네, 위에서 아무것도 안 먹고 내려왔거든요."
별다른 기색 없이 대답하는 아브.
그 뒤를 기점으로 김현우는 아브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그 둘은 한동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즘에도 게임만 뒤지게 하고 있다 그거네?"
"뭐, 사실상 이제 제가 해야 하는 일은 전부 끝난 상태니까요.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탑은 저희가 따로 조율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혼자서 돌아가거든요."
게다가-
"5년 전에 들어왔던 지옥 쪽에서 항상 상당한 양의 마력이 생산돼서 마력에 신경을 써야 할 필요도 없고요."
"……지옥에서 마력이 들어와?"
"네. 저번에 듣기로는 망자들을 구제하면서 나오는 마력이라고 하던데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김현우는 아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가 문득 기억났다는 듯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너 내가 저번에 올라갔을 때는 게임 블로그인가 뭔가 한다고 하지 않았냐? 그건 어떻게 됐어?"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순간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이야기했다.
"어그로들 때문에 짜증 나요."
"어그로?"
"네! 글쎄 제가 이번에 새롭게 시작한 게임의 공략을 올렸는데-."
김현우가 슬쩍 호응해 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오는 아브의 불만.
그는 아브의 불만을 차근차근 듣다 이야기했다.
"뭐, 진짜 네 말대로 어그로네."
"그쵸? 사람이 열심히 개고생해서 숨은 장소까지 찾아서 공략 글을 올렸는데 그런 댓글이 많으면 짜증 난다고요."
열심히 푸념하며 한숨을 내쉬는 아브.
김현우는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 생각했다.
'……딱히 노아흐가 말한 것처럼 변한 점은 없는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지금까지 아브와 이야기하는 동안 그녀가 자신처럼 욕설을 내뱉는 것은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운영하는 게임 블로그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
'음…… 조금 거칠어진 것 같긴 한데.'
뭐, 확실히 저번에 비하면 게임 블로그 이야기를 할 때는 조금 예민해진 것 같긴 한데 노아흐가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김현우가 그렇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아브가 물었다.
"가디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응? 아니, 잠깐 생각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무슨 일이요?"
아브의 물음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했다.
'이걸 이야기 해 주는 게 좋으려나?'
그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
'뭐 별 상관없겠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아브에게 노아흐가 자신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고.
드르르륵-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브는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브?"
김현우의 물음.
그에 아브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잠깐의 미소를 보여 준 뒤.
"죄송해요, 가디언. 제가 갑자기 급하게 갈 곳이 생겨서요. 일어나 봐도 될까요?"
"……뭐 그래."
"그럼 조금 있다가 뵐게요."
김현우의 말에 짧게 목례를 하고는 곧바로 자리를 뜨는 아브.
그런 그녀를 보며 김현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따로 바뀐 점은 없는 것 같네.'
노아흐가 말했던 대로라면 조금 전에 만난 아브는 상당히 불량한 태도를 보여 줬어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인상을 쓰고 대답한다거나, 대답에는 절대로 욕설을 섞지 않지만 은근히 구시렁대는 모습들이라든가.
그 이외에도 노아흐가 아브에 대해 말해 준 것은 많았으나 적어도 김현우가 지금까지 이야기해 본 결과 김현우에게 딱히 그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5년 전이랑 똑같은 것 같은데.'
옷을 입는 스타일이나 외견. 그리고 말투가 살짝 바뀐 것을 빼면 아브는 역시 아브였기에 김현우는 더 이상 노아흐가 했던 말을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대충 생각했던 일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본격적인 돌잔치가 시작되었다.
……뭐 사실 돌잔치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축제의 느낌이 더 강했으나 막상 당사자인 랑이나 구미호, 천마는 딱히 불편해하는 기색이 없었기에 돌잔치는 무사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뒤의 연회.
오공의 허위 사실을 믿고 이곳으로 올라온 칠대성을 포함한 다른 이들은 지금까지는 돌잔치라서 봐주고 있었다는 듯 본격적으로 놀아재끼기 시작했고,
"개판이네."
그 덕분에 연회장은 그야말로 개판이 되고 있었다.
아니,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뭔가를 어지럽히고 있지는 않아 보였으나 원체 사람이 많다 보니 그냥 분위기 자체가 그런 느낌이 드는 듯했다.
아무튼, 그렇게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던 김현우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건물 밖에 빠져나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는 중이었고.
"안녕?"
"……눈동자?"
김현우가 그렇게 밖에서 내부의 풍경을 바라보던 중, 그는 자신의 앞에 어제 만났던 눈동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뭐해?"
김현우의 벤치 옆쪽에 슬쩍 앉으며 입을 여는 눈동자.
그에 김현우는 별 생각 없이 말했다.
"뭐, 그냥 술 마시다가 기분 전환 겸 밖으로 나와 있지. 그보다 너는 어디에 있다 왔어?"
"나야 뭐, 원래 하던 것처럼 오랜만에 한국에 온 기념으로 이곳저곳 바라보고 있었지."
"좀 쉬는 게 어때? 5년 동안 돌아다녔는데 질리지도 않냐?"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 눈동자는 저번에 김현우가 말했던 대로 육체를 만들어 9계층으로 내려와 세계를 여행했다.
그래, 쉬지도 않고 장장 5년간, 눈동자는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물론 중간 중간 서울에 돌아올 때도 있었으나 그 기간은 다 합쳐 봤자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정도였기에 김현우가 그녀를 위해 준비해 준 집은 현재 먼지만 날리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김현우의 물음에 눈동자는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잖아?"
"돌아다니는 게 재미있어?"
"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재미있지?"
"……그 정도나 돌아다녔는데 이제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런 재미를 느끼는 거야?"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되묻자 눈동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그냥 말 그대로 보는 게 재미있는 것뿐인데?"
"……뭐?"
"너도 알다시피 나는 업이라서 모든 종류의 업을 전부 가지고 있기는 해. 하지만 그렇게 모인 업을 가지고 있는 거랑 이렇게 직접 돌아다니면서…… 음-."
눈동자는 거기까지 말하곤 단어를 고르듯 긴 침음을 내뱉다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업을 쌓는 느낌'은 꽤 다르거든."
"……뭐 나는 잘 모르겠다만 네가 그렇다면야 그런 거겠지."
"당연히 너는 모르겠지. 애초에 나랑 입장이 다르니까 말이야."
김현우는 눈동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까딱거렸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는 이내 피식 하고 웃음 지은 뒤 이야기했다.
"그래서, 어제는 잘 들어갔어?"
눈동자의 물음.
그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잘 들어갔을 것 같아?"
"흐음, 너무 잡아 뒀나?"
"다음부터 너랑은 술 안 마실 거야. 아니, 마시더라도 한 잔만 마시고 바로 들어간다."
"정말로?"
"그럼 가짜로 이렇게 말하겠냐?"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야기했다.
"오늘 진짜로 죽다 살아났다고. 진짜 내 기분을 한번 느끼게 하고 싶은데…… 업으로 그런 건 못 하나?"
"뭐, 내가 하고자 한다면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나는 마조히스트 아니라서 말이야.
실풋실풋 웃으며 대답하는 눈동자.
"쯧."
김현우가 짧게 혀를 차자 눈동자는 그를 바라보고는 이야기했다.
"네가 정 그렇게 바가지 긁히는 게 싫으면 내가 방법을 하나 알려 줄까?"
"……무슨 방법?"
"바가지 안 긁히는 법 말이야."
"……바가지 안 긁히는 법? 뭐, 설마 바가지 긁는 아내에게 대처하는 업 같은 것도 있고 그런 거야?"
"뭐어, 그런 업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내가 알려 주는 방법은 그런 방법이 아닌걸?"
"그럼 뭔데?"
김현우가 눈동자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는 은근슬쩍 그가 있는 곳으로 몸을 기대고는 이야기했다.
"나랑 같이 여행을 가는 거지."
"……여행?"
달라붙는 눈동자의 행동을 순간 멍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김현우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밀어내려 했으나.
"야, 좀……."
"사실 이미 9계층은 지난 5년간 구석구석 돌아다녀서 더 이상 돌아다닐 곳이 없던 참이거든."
"아니, 그것보다 좀 떨어-."
"그러니까 나랑 지상에 내려가 보지 않을래?"
"지상이고 나발이고 좀 떨어지라니까."
그렇게 말하며 눈동자를 밀어내는 김현우.
그에 눈동자는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완전히 유부남이 다 됐네?"
"유부남이 다 된 게 아니라 이미 5년 전부터 유부남이었거든? 그리고 내가 저번에 말했지? 그렇게 오해할 만한 행동은 하지 말라니까?"
-나 진짜 죽는다고…….
김현우가 불안한 듯 주변의 눈치를 보며 말하자 눈동자는 여전히 입가에 지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지상에 내려가면 네 아내들의 바가지도 듣지 않을 수 있게 되니 좋지 않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 아니지? 나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건 질색이야."
김현우의 거절.
그에 눈동자는 그런 김현우를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이야기했다.
"네가 정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생각은 해 봐."
"아니, 생각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별로 갈 생각 없다니까?"
김현우의 연속된 부정.
허나 그런 그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눈동자는 씨익 웃고는 이야기했다.
"그럼 우선 오늘은 돌아가 볼게."
"뭐? 이렇게 갑자기?"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럼, 목숨 간수 잘하고 있어."
"……목숨 간수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김현우의 물음.
허나 눈동자는 더 이상 김현우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그대로 사라져 버렸고. 한동안 눈동자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김현우는.
"서방님?"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이 내가 본 것에 대해 좀 설명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느냐?"
"아……."
-곧 자신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429화 외전 07. 5년 전, 리옌 (1)
진륜 기업은 바로 20년 전부터 중국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국의 가호를 받는 거대한 대기업이었다.
물론 5년 전, 튜토리얼 탑이 처음 이 세상에 나타나고 그에 더해 던전이나 몬스터들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하며 기업이 비틀거리던 때도 있었으나 진륜 기업은 중국의 가호를 받는 대기업 중 하나인 만큼 그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세상에 헌터와 길드들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도 진륜 기업은 지금까지 중국의 대기업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래.
지금까지는.
"젠장!"
중국 광저우, 다른 고층 빌라와는 궤를 달리할 정도로 높이 지어져 있는 건물의 꼭대기 층.
"지금 이걸 보고서라고 가져온 거야!?"
진륜 기업의 본사이기도 한 그곳에서 줄곧 집무실의 고풍스러운 가죽 의자에 앉아 보고서를 읽고 있던 남자는 분노에 차 쥐고 있던 보고서를 앞에 있는 남자에게 내던졌다.
펄럭-!
그와 함께 사방으로 비산하는 보고서들.
허나 그 보고서를 남자에게 넘겨준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는 허리를 숙이고는 이야기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죄송하면 다냐고!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남자의 분노가 담긴 외침.
허나 양복을 입은 남자는 그런 남자의 외침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자신의 앞에서 손가락을 놀리고 있는 남자, '이청'은 진륜 기업을 이끌고 있는 사장이자, 혼자서 이 거대한 회사를 맘대로 주무를 수 있을 정도로 대부분의 회사 지분을 들고 있는 대주주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개-!!"
남자에게 쏟아지는 무차별적인 욕.
그러나 그는 이것이 으레 있었던 일이었다는 듯 그저 묵묵히 이청의 욕을 듣고 있었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이청은 남자에게 지껄이던 욕을 멈추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왜 동부 쪽 개발 허가가 박살 난 건데? 어?!"
"……우선 대외적인 이유는 이번에 동부 쪽에 새롭게 생긴 던전 때문인 것 같습니다."
"던전? 또?"
"그렇습니다. 그 덕분에 저희 쪽에 쥐어져 있던 개발권이 중환 기업 쪽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뭐? 중환 기업? 왜 거기서 그 이름이 나와?"
정색하며 말하는 이청.
그도 그럴 것이 중환 기업은 진륜 기업보다도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진륜 기업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가호를 받고 빠르게 크기를 늘리고 있는 기업 중 하나였다.
사실 그것뿐이라면 이청이 중환 기업에 이리 격렬하게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허나 이청이 중환 기업에 이리 격렬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바로 중환 기업의 성장세 때문이었다.
5년 전, 튜토리얼 탑이 나타나고 난 뒤, 중환 기업은 던전과 미궁으로 인해 경제 구조가 뒤바뀔 때쯤 나타났다. 바뀐 경제 구조 속에서 국가의 도움을 받고 물 타기에 성공해 한순간에 그 세력을 엄청나게 불렸다.
그래, 어떻게 보면 드라마틱하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한순간에 거대하게 커져 버린 중환기업.
심지어 최근에 들어서는 슬슬 진륜 기업의 사업권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추세라 이청은 중환 기업을 굉장히 꺼려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동부 쪽은 던전이 세 곳이나 발생한 덕분에 청룡 길드 쪽에서 던전 거점을 만드는 것으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그런데?"
"……중환 기업 쪽에서도 '길드'를 가지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중환 기업이 손을 써 동부 쪽 개발권을 가져가 버린 듯합니다."
"이런 개새끼들……!"
인상을 팍 쓰며 치를 떨듯 주먹을 부들거리는 이청은 곧 윽박을 질렀다.
"도대체 우리 소속 헌터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어!? 게다가 생각해 보니 우리 쪽도 길드는 있는 거 아니야!? 근데 왜 중환 기업에게 개발권을 뺏기는데!? 왜!?"
"사장님의 말씀대로 저희 쪽에도 길드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길드'에 관련해서는 중환 기업보다 많이 떨어지는 터라……."
게다가-
"최근에 중환 기업은 S급 헌터를 길드에 영입하는 데 성공해서 아무래도 던전이나 미궁이 관련된 일에 관련해서는 저희가 밀릴 수밖에……."
"하, S등급 헌터? 중환 기업에서 S등급 헌터를 영입했다고?"
"……예."
"순위권은?"
"……482위입니다."
"허, 어중이떠중이도 아닌 S등급 482위 헌터를 영입했다고? 중환 기업 쪽에서?"
"예."
"도대체 그 새끼들이 무슨 수로?"
이청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S등급 헌터는 적어도 기업이 운영하고 있는 길드에서는 굉장히 영입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 이 시점에서 S등급 헌터는 혼자 길드를 만들기만 해도 다른 길드에 영입돼서 일하는 것보다 막대한 보상을 가져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외의 다른 관점을 생각해 봐도 S등급 헌터가 고작 기업의 길드에 들어온다는 것은 굉장한 손해였다.
이청이 인상을 찌푸리고 생각을 이어 나가자 그의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잠시 우물쭈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 제가 신경이 쓰여 알아 본 결과, 현재 중환 기업 쪽에 있는 S등급 헌터는 아무래도 중환 기업 쪽과 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연이 있다고?"
"예. 정확히는 중환 기업의 이사진 중 한 명과 연이 닿아 있는 듯한데…… 정확히 누구와 연이 닿아 있는지는 아직 확인을 하지 못했습니다."
남자의 말에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이청은 한동안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정유환은 어떻게 됐지?"
정유환.
그는 대한민국 소속의 S등급 헌터로서, 현재 중환 기업에 소속되어 있는 S등급 헌터와는 비교도 안 되게 높은 순위에 있는 헌터 중 한 명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청이 갑작스레 타국에 있는 정유환 헌터에 대해서 묻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따님분에 관한 건이라면…… 더 이상 조건을 조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정유환 헌터와 이청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저번에 한국 협회 쪽에서 잠시 얼굴을 비췄을 때, 따님에게 단단히 홀린 것 같더군요."
"그 쓸모없는 딸이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되기도 하는군."
입가를 비틀어 올린 이청.
몇 달 전.
이청이 한참 늘어 가는 중환 기업 소속의 길드를 보며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그에게 은밀히 들어온 문서 한 장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유환 헌터가 보낸 문서.
그것에는 온갖 거창한 예의와 하잘것없는 아부 등이 있었으나 결국 그 문서 안에 담겨 있는 의미는 단 하나였다.
'네 딸을 주면 네 밑으로 들어가 주도록 하겠다.'
그 두 장에 달하는 길고 긴 문자들은 이청의 눈앞에서 아주 간단한 하나의 문장으로 보여졌다.
"그래도, 아마 따님만을 보고 그런 제안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흥, 그건 당연히 알고 있다."
정유환 헌터는 S등급 중에서도 37위에 달하는, 중환 기업의 S등급 헌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상당한 고랭크 헌터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엄청난 자원이 고작 딸 한 명으로 넘어온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당연히 이런저런 계산을 했겠지.'
분명 트리거는 딸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었겠으나, 그가 이런 문서를 보내온 것은 딸을 제외하고서라도 분명 자신에게 얻을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터였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청은 정유환 헌터의 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 정유환이 원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 정도면 S등급 37위를 데려온 값으로는 파격적이기도 했다.
'그 쓸모없는 녀석과 바꾸는 것이니까.'
이청은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몇 살인지는 만난 지가 너무 오래 되어 기억나지는 않지만 애초에 세상일에 지나치게 소극적인데다 죽은 제 어미를 빼닮아서 얼굴 반반한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그래.'
이청의 입장에서는 하등 쓸모없는 녀석이었다.
적어도 그의 딸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단 한 번도 도움이 된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이청은 이 상황이 너무나도 달가웠고 그렇기에 남자에게 물었다.
"그래서, 리옌은 지금 어디에 있지? 답장을 받았으면 곧장 선물을 보내 줘야 하지 않겠나?"
자신의 딸을 선물 정도로 평가 절하하는 이청.
허나 정작 그 말을 내뱉은 이청은 자신의 표현에 그 어떤 하자가 없다는 듯 당당했고. 앞에 서 있던 남자는 그런 그의 말에 곧바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인사를 위해 따님을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남자의 대답에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본 이청은, 옅은 미소를 띠우곤 이야기했다.
"자네가 아직 내 비서인 이유가 바로 보이는군."
"감사합니다."
이청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주름이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당장 정유환 헌터가 기업 내에 있는 길드에 들어오기만 하면 지금까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깝치던 중환 기업을 철저하게 찍어 누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고작 찍어 누르는 정도가 아니었다.
'우선 정유환이가 오기만 하면-.'
진륜 기업의 자금력으로 찍어 누르기만 해도 중환 기업은 지금보다도 훨씬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이청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는 듯 미소를 지었고.
그렇기에 10시간 뒤.
"……사, 사장님. 따…… 따님분이."
"왜?"
"따, 따님분이 튜토리얼 탑에 끌려가신 것 같습니다……!"
"……."
빡!
이청은 결국 자신 안에 있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 악귀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비서의 머리를 재떨이로 찍어 버렸다.
***
이청이 화를 못 이겨 비서의 머리를 깨고 6개월 뒤.
튜토리얼 탑의 중간 계층이자 '아귀들의 서식지'라고 이름 붙여진 그곳에서.
끼륵! 끼르르륵!
끼륵!
한 여자가 필사적으로 아귀들에게서 도망가고 있었다.
온몸이 상처로 뒤덮일 정도로 많은 공격을 받은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쓰러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웠으나,
"으흑! 끄흑!!"
그녀는 온몸에 느껴지는 끔찍한 격통을 살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 하나에 어거지로 이겨 내며 다음 층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허나-
끼르르륵!
푸욱!
"끅!?"
그녀는 곧 아귀가 던진 무딘 창에 다리가 뚫려 쓰러지고 말았고, 그녀가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끼륵! 끼르르륵! 끼륵!
이미 그녀의 주변은 아귀들이 가득했다.
입가에는 침을 흘리며 흉측한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하는 아귀들을 보며 그녀는 끔찍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으나.
"아……."
공포에 잠겼던 그녀의 얼굴은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체념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께륵! 끼르르륵!
그와 함께 더더욱 신이 난 듯 소리를 높이는 아귀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땅에 끌거나 날카로운 이빨을 딱딱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 순간-
꽈아아아아앙!
"!?"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아귀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약한 자여, 살아남고 싶은가?"
그녀, 아니-
"……아?"
리옌은, 아귀들의 서식지에서 '그'를 만났다.
430화 외전 08. 5년 전, 리옌 (2)
리옌.
그녀는 진륜 기업 사장인 이청의 단 하나밖에 없는 딸이다.
허나 거기서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녀의 가치는 딱 거기까지라는 것이다.
이청의 단 하나밖에 없는 딸.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리옌을 보는 관점이었으며, 그 이외에 다른 시선으로 보는 이들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청은 그녀를 철저하게 기업에서 배제했으니까.
아니, 기업에서만이 아니었다.
이청은 애초에 자신의 생활에 그녀를 두지 않았다.
분명 같은 저택에 살기는 했으나 그 둘은 기본적으로 서로 마주치지 않았으며 마주치더라도 이야기를 하는 일은 없었다.
한 마디로 이청은 리옌에게 철저할 정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애초에 리옌은 이청이 원해서 태어난 딸이 아닌, 그저 철저하게 이해관계로 점철되어 있는 기업 관계로 인해 태어난 딸일 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리옌은 자신의 모친이 돌아간 뒤부터는 그저 기본적인 생활을 빼면 무관심 속에서 자랐다.
그렇기에 그녀는 분명 다른 이들에게는 재벌 2세라고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차츰 학창 생활을 이어 나가며 굉장히 소심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나 이청은 역시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마치 그녀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듯, 이청은 가끔 저택에서 리옌과 마주칠 때면 그녀를 은근히 찍어 누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리옌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쓸모없는 년.'이라는 말.
분명 이청의 입에서 습관적으로 튀어나와 이제는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많이 들었던 그 말은 안 그래도 소심한 그녀의 성격을 더더욱 망가뜨렸다.
더 이상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그리고 그렇게 리옌의 안에 존재하던 무엇인가가 망가진 그 시점부터, 그녀는 삶에 큰 미련을 두지 않게 되었다.
어디에 있든, 무슨 자극이 오든 그녀의 기분은 더 이상 변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 사라졌다.
그래.
그랬을 터인데…….
"구배지례(九拜之禮)를 하거라."
"네……?"
리옌은 이 상황에 몇 년 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감정의 편린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뭐 하느냐? 어서 구배지례를 올리라니까?"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괴인 때문.
아니, 엄연히 말해서 그는 괴인이 아니었다.
당장 얼굴에는 슬쩍 보더라도 흠칫할 정도로 무섭게 생긴 가면을 쓰고 있기는 했으나 분명 그 안에 보이는 눈동자는 인간의 그것이었다.
거기에다 당장 쓰고 있는 가면을 빼면 그의 몸은 평범한 인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에 리옌은 그가 이 탑에 존재하는 몬스터가 아닌 인간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굳이 괴인과 인간으로 나눌 필요도 없이 그는 자신을 구해 주었다.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위기에 처해 있던 자신을.
그렇다면 곧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라는 소리였다.
자신을 사지로 밀어 넣었던, 같이 탑을 오르던 이들과는 다르-
빡!
"끄꺄악!?"
리옌은 머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저도 모르게 생각하다 말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야말로 눈물이 핑 돌 만큼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는 머리를 부여잡은 리옌은 곧 시선을 돌려 가면을 쓰고 있는 괴인을 바라보았다.
"ㅇ…… 왜……."
'때려요?'라는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리옌은 그 말을 필사적으로 집어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구배지례를 하라고 했을 텐데……?"
눈앞에 있는 남자의 분위기가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리옌은 당장 어두웠던 기억을 끄집어내기도 전에 점점 더 흉폭해지고 있는 괴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곧바로 구배지례를 했다.
그런데-
빡!
"끄약!?"
분명 구배지례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머리를 때리는 괴인의 모습에 리옌은 다시금 머리를 부여잡으며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끄으으으으-!? 대…… 대체 왜!?"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구배지례를 하라고!"
엄중하게 선포하듯 이야기하는 괴인.
그에 리옌은 순간적인 두려움을 느꼈으나 본능적으로 지금까지 탑을 오르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몇 번이고 했던 말을 또 한 번 내뱉-
"내, 내가 누군지 알고 나를 이렇게 막-!"
빡-!
-지 못했다.
탑 안에서 제대로 한 사람 분을 하지 못하는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어 준 '진륜 기업의 딸'이라는 타이틀과 '재벌 2세'라는 타이틀.
그것은 분명 그녀가 싫어하는 타이틀이었으나 모순적으로 여기까지 안전하게 올라올 수 있게 해 주었다.
허나 지금은?
"꺄아악!"
"조용히 하거라, 제자야. 너는 오늘부터 나의 제자가 될 것이다. 빨리 내게 구배지례를 올리거라."
"무, 무슨-!"
제자라고!?
리옌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괴인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당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절을 한 번밖에 하지 않지? 반항하는 것이냐?"
괴인의 말에 리옌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틀렸는가에 대해서.
그녀는 이청의 눈에 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그의 딸이라는 표면적인 모습 덕분에 다른 또래들보다는 상당히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가 배운 지식 중에는 분명 구배지례에 대한 지식도 있었다.
"아, 아니 구배지례를 하라고 하시길래……."
"구배지례(九拜之禮) 모르느냐?"
진지하게 말하는 괴인.
그에 리옌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역시 잘못된 지식에 대해서는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았기에 입을 열었고.
"아니, 그,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구배지례는 아홉 번 절하는 게 아니라……."
빠악!
"끼야악!"
"어디서 스승이 말하는데 말대답이야! 썩 하거라!"
그곳에서, 리옌은 자신의 지식이 쓸모없는 것이라는 것을 체득했다.
"어서!"
"히익!"
마치 사자후를 쓰는 것처럼 자신의 고막을 찢어 버릴 듯 우렁차게 외치는 괴인의 호통.
그에 리옌은 눈물을 글썽이며 결국 그 자리에서 나머지 여덟 번의 절을 끝냈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괴인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그럼 내 이제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네게 나의 모든 것을 전수하겠노라."
"……."
괴인의 말에 리옌은 불안한 눈빛으로 괴인을 바라봤다.
솔직히, 그녀는 괴인의 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올라가고 싶어도.'
리옌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그녀가 홀로 아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이유는 바로 자신과 함께 탑을 오르던 다른 이들 때문이었으니까.
맨 처음.
그녀가 이 탑 안에 끌려 들어왔을 때만 해도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같이 탑에 들어온 이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비록 이청이 그녀를 내놓은 자식 취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의 딸인 리옌의 얼굴은 외부에 상당히 알려져 있었으니까.
허나 그렇게 얻어 낸 환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탑을 오르면 오를수록 지쳐 갔으며.
점점 리옌에 대한 대우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탑을 오르면 오를수록 더더욱 강력한 몬스터를 만났으며, 어느 순간에는 동료들을 잃기도 했다.
그렇기에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제대로 한 사람 분을 못 하는 리옌의 모습은 곧 부정적으로 비춰졌고.
종래에 결국 그녀는 쫓겨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무슨 짓을 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달아났다.
그녀는 분명 아귀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기 전, 자신을 빼고 모여 있던 그들이 하던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
그렇기에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이 괴인에게서 도망쳐 그들에게 합류한다고 하더라도, 그들과 함께 탑을 올라가는 것은 무리라는 사실을.
이제 자신은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
그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차자마자 느껴지는 우울감.
그러나-
빡!
"끄으으윽?!"
"어디서 스승이 말하는데 지금 딴 짓을 하는 거냐? 거 건방진 제자로구나."
리옌의 우울감은 괴인의 꿀밤으로 인해 금방 깨져 버렸다.
분명 가벼운 꿀밤일 텐데도 불구하고 두개골이 그대로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에 리옌은 몸을 뒤틀었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괴인은 가면 아래로 보이는 입가로 웃음을 지었다.
오싹!
그와 함께 리옌의 몸에 돋는 소름.
그녀는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이곳에서 도망치는 게 맞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으나.
"자, 그럼 구배지례도 올려서 내 제자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한번 열심히 해 보자꾸나."
"……."
"대답 안 하냐?"
"예…… 예!"
리옌은 그 순간, 자신이 그 괴인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고.
-그리고 그다음부터, 리옌은 지옥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심기체에 대해 알고 있느냐?"
"심기체…… 말씀이십니까?"
"그래. 근데 내가 보니 너는 심기 중 그 어느 하나 제대로 충족된 것이 없다. 그러니 우선 수련을 하는 데에 가장 기본이 되는 신체부터 단련을 하도록 하겠다."
그 말과 함께 괴인은 리옌을 거대한 공터로 데려갔다.
튜토리얼 탑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굉장히 넓은 공터.
심지어는 분명 있어야 할 것 같은 몬스터도 없이, 마치 진짜 수련장을 용도로 만들어진 것 같은 그 모습에 리옌은 기묘함을 느꼈다.
"뛰어라."
그와 함께 들리는 괴인의 목소리에 리옌은 어정쩡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뭐 하느냐? 뛰라고 했느니라."
"아…… 알겠습니다. 그럼 얼마만큼 뛰면 되겠습니까?"
리옌의 물음.
그에 괴인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네 몸이 완성될 때까지."
"……예?"
"허허, 첫 제자가 이렇게 말귀가 밝지 못하다니…… 통탄할 일이다……! 통탄할 일이야!"
빡!
"끄약?!"
"제자야. 모름지기 스승이 뛰라고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알았느냐? 그냥 너는 뛰기만 하면 되는 거란다."
해석하면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해라.'라는 뜻이 가득 담긴 괴인의 속뜻을 깨달은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이곤 괴인이 하라는 대로 뛰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녀로서는 자신을 지켜 주고 있는 괴인의 말을 듣는 것이 더 살아남는 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렇지 않은가?
어차피 자신을 지켜 주던 이들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그녀 본인 또한 자신이 한 사람 분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머리를 때리는 것은 그만둬 달라는 이야기는 하고 싶었으나, 살아오며 만들어진 그녀 특유의 소심한 성격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저 괴인 앞에서는 누구라도 그런 말은 못 할 것이라고, 리옌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그녀는 결국 지금 당장은 이 괴인의 밑에 있는 것이 살아남는데 적절하다는 판단이 들어 그의 아래에 있기로 했고.
정확히 그로부터 일주일 뒤.
'……그냥 죽는 게 좋지 않을까?'
리옌은 미쳐 버린 스승의 아래에 있는 것과 편안하게 눈을 감는 죽음 사이에 진지하게 무게 추를 달고 있었다.
431화 외전 09. 5년 전, 리옌 (3)
괴인- 아니, 자신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스승의 아래에서 수련을 시작한 지도 한 달.
아니, 사실 리옌은 자신이 여기에서 도대체 몇 달을 있었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헤엑- 헤엑-"
"호오, 농땡이를 부리시겠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스승님!"
-그녀는 지금 날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빡세게 굴려지고 있었으니까.
"그럼 빨리 뛰어!!"
호통을 치는 괴인, 아니 이제는 스승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된 그의 목소리에 리옌은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심장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뛰기 시작했다.
'도망치고 싶어도망치고 싶어도망치고 싶어도망치고 싶어도망치고 싶어도망치고 싶어도망치고 싶어도망치고 싶어도망치고 싶어도망치고 싶어도망치고 싶어도망치고 싶어도망치고 싶어-!!'
그녀의 머릿속에 빠르게 맴도는 생각.
'저 사람은 정말로 미쳤어…… 미쳤다고!'
리옌은 자신에게 단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괴인을 울상을 지으며 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제자로 있던 지난 한 달.
아니, 한 달인지, 아니면 몇 달인지 모를 그 시간 속에서 리옌은 저 괴인이 얼마나 상상 이상으로 괴팍한 인간인지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리옌은 저 괴인의 제자로 들어온 직후 계속 이 공터를 빙글빙글 뛰고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냥 뛰게만 한다면 리옌도 참을 수 있었다.
그녀는 탑에서 1인분을 하지 못하기는 했으나 어떻게 보면 결국 시스템의 축복을 받은 헌터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스테이터스의 효과를 받아 일반인보다 신체 능력이 꽤 높은 편이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헤엑-! 헤엑-!"
-쉬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신체 능력이 강화되었다고 해도 결국 인간은 인간.
오래 뛰면 결국 지치는 것은 똑같았다.
허나 그런데도 괴인은 리옌이 뛰는 것을 멈추지 못하게 했고, 결국 그녀는 자신이 정신을 잃지 않으면 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괴인과 지낸 시간이 얼마인지 애매한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일어나면 계속해서 뛰다가 결국 기절을 해야만 쉴 수 있고, 기절한 상태에서 다시 일어나면 또 뛰게 한다.
그야말로 끔찍한 고통의 반복.
그렇다고 해서 숨이 차 쉰다거나 하면 저 괴인은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체벌을 가했다.
그냥 뛰고 있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의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는 딱밤을…….
"헥-! 헥-!"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힘겹게 뛰는 리옌.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뛰는 것을 멈추고 싶었으나 저만치서 바라보고 있는 괴인 덕분에 그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이유?
그거야 당연히 리옌은 괴인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당장 머릿속에는 그냥 죽어 버리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기는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
진짜로 죽는 것은 두렵다.
게다가, 애초에 그녀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이미 옛적에 자신의 목숨을 끊었을 것이었다.
리옌이 탑에 들어오기 전에는 이렇게 육체적으로 심하게 몰린 적은 없었으나, 정신적인 면에서 이미 한계의 한계치까지 몰려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리옌은 이렇게 지독한 훈련 속에서도 아주 가끔 정도는 밖에 있었을 때보다는 육체가 힘든 이곳이 낫다며 자기위로를 할 때도 있었다.
뭐, 결국 현실도피를 위한 자기위로였지만.
"흑- 흡-!"
뛰고 있던 리옌의 자세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뜀걸음을 유지하고 있던 다리가 서서히 멈춰 가기 시작하고, 두 눈에 점점 공허함이 느껴진다.
그 순간-
"멈춰라."
괴인의 말에, 리옌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는 괴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멈춰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그의 말에, 리옌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도.
"허억- 허억-"
그 괴인의 말에 그대로 주저앉아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산소를 끌어 모으지 못하면 그대로 죽을 것 같다는 듯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열심히 공기를 빨아들이는 폐.
그것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슬슬 희미해지던 정신이 다시금 돌아오기 시작했을 때, 괴인은 리옌에게 말했다.
"정보창을 열어 보거라."
"정보……창?"
리옌은 그렇게 되묻고는 저도 모르게 반말했다는 것을 깨닫고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쌌으나,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괴인은 그녀를 때리지 않고 이야기했다.
"열어 봐라."
담담한 괴인의 말투.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눌 때 들려왔던 고압적인 말투와는 다르게 담담한, 아니- 지금까지의 목소리를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부드러운 톤으로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 리옌은 눈치를 보면서도 정보창을 열었고.
------------------------
이름 : 리옌
나이 : 15
성별 : 여
-능력치-
근력 :F+
민첩 :E+
내구 :C-
체력 :C++
마력 :--
행운 :C-
SKILL
[튜토리얼 플레이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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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리옌은 자신의 정보창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스텟이 올랐어?'
스텟이 올랐다.
물론 그녀는 이따금 그녀의 눈 위에 떠오르는 정보창을 보고 자신의 스텟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으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이렇게 많이 올라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 올F였는데…….'
올 F.
탑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특별한 이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올 F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는 탑을 50층 가까이 올라오면서도 거의 모든 스텟이 F급 위로 올라가지 못했었다.
애초에 그녀는 싸우지 않았으니까.
헌데 지금은?
'근력을 제외한 모든 스텟이 한두 단계씩 올랐다고……?'
스텟을 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현재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와 헌터로서 활동하고 있는 헌터들 중 대부분은 탑 졸업을 B+ 정도에서 마무리한다.
그것도 자신이 주로 사용하는 스탯만 B등급까지 오를 뿐, 자신이 주로 사용하지 않는 스탯은 대부분 C나 E,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면 F로 마감한다.
그런데 지금 리옌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근력은 아직 F였으나 그것을 제외한 모든 스텟은 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내구와 체력은 무척이나 큰 폭으로 올라 있었다.
고작 한 달이라는 시간 만에.
"체력과 내구가 얼마만큼 올랐느냐?"
리옌이 멍하니 스텟을 보고 있자 입을 여는 괴인.
그에 리옌은 자신이 멍하니 정보창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이야기했다.
"체…… 체력은 C++, 내구는 C-예요……."
은근히 눈치를 보며 말하는 리옌.
그에 괴인은 잠시 입을 다물고,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듯하다 이야기했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구나. 뭐, 그렇게 수련을 했으니 올라가지 않는 게 이상하지."
"수련……이요?"
리옌의 말에 괴인은 순간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너는 지금까지 네가 뛴 게 수련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는 소리더냐?"
"아, 아뇨! 그…… 그건 아닌데……."
솔직히 수련이라기보다는 그저 괴인의 악의적인 무언가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리옌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필사적으로 다른 변명을 내세웠다.
"그, 그냥! 제가 이 정도로 스텟이 오를 줄은 몰랐어서요……."
은근히 말을 줄이는 리옌의 모습.
그에 괴인은 어깨를 으쓱이곤 이야기했다.
"대가를 받는 거다."
"……대가요?"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강해지게 해 주겠다고. 너는 지난 한 달간 내 수련을 착실하게 따라왔고, 그 대가를 받은 것이다."
대가.
리옌에게 있어서 그 단어는 굉장히 생소했다.
애초에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딱히 대가라고 할 만한 것을 받아 보지 못했으니까.
무엇인가 옳은 일을 했을 때 받는 칭찬도 그녀에게는 없었고.
반대로 나쁜 일을 했을 때 받는 타박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물론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들도 그녀가 공부를 한 대가라고 볼 수는 있었으나 그녀는 적어도 그것을 '대가'라고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남들에게 맞추어 했다고 생각할 뿐.
그런 상태였기에, 리옌은 '대가'라는 단어 자체에 저도 모르게 굉장한 매력을 느꼈고, 또한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기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그런 감정을 리옌은 괴인에 의해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괴인은 멍하니 정보창을 바라보고 있던 리옌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말하도록 하겠다."
"무엇을……?"
"나는 네가 탑 밖에서 누구였는지, 또는 무엇을 하던 이였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또한 딱히 네가 무슨 과거나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하지 않다."
"……."
"다만 전부 모르고 궁금하지 않더라도, 이것 하나 정도는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다."
"……."
"만약 네가 내 수련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따라올 수 있다면, 너는 최강이 될 수 있다."
"!"
리옌은 괴인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최강.
솔직히 그 단어는 리옌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비이성적이고 와닿지 않는 단어였다.
또 어떻게 들으면 그 '최강'이라는 단어는 솔직히 조금 오글거리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강'이라는 단어는 유치하지 않은가?
그래.
유치하다.
'최강'이라는 단어는 비현실적이니까.
허나 정말 모순적이게도, 그렇기에 최강이라는 단어는 매력이 있었다.
분명 비현실적이고, 누군가는 오글거리는 단어라고 칭할 수도 있는 그 단어.
최강.
분명 리옌도 괴인에게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니 잘 따라와라."
리옌은 우습게도 자신이 유치하다고 생각한 단어에 매력을 느꼈고. 또한 그렇기에 그런 괴인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본능에 따라.
"흠."
그런 리옌의 반응이 좋았던 것일까.
괴인은 가면 아래로 보이는 입가에 기분이 좋다는 듯한 미소를 띠고는 정말로 만족스럽다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네 이름을 짓도록 하겠다."
"네? 제 이름을……?"
"그래. 어차피 내 제자가 된 순간부터 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내 수련을 다 이겨 내고 탑을 나가는 순간, 너는 다른 사람이 될 테니까."
괴인의 말에 리옌은 순간 자신의 가슴이 크게 고동치는 것에 놀라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괴인은 입을 다물고는 한참이나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래, 그게 좋겠군."
"……?"
괴인- 아니.
"이제부터 네 이름은 미령이다."
스승은,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었다.
432화 외전 09. 5년 전, 리옌 (4)
튜토리얼 탑 71계층에 조성되어 있는 거대한 정글.
분명히 탑 안임에도 불구하고 정글의 생태계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무척이나 많은 나무들이 겹겹이 우거져 있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자세히 찾아보면 그 정글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공터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거대한 공터.
물론 튜토리얼 탑을 오르는 예비 헌터들이 그 거대한 공터를 알 턱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은 튜토리얼 탑 71계층을 자세히 뒤져 봐야만 알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실 그 거대한 공터는 딱히 예비 헌터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기연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거대한 공터는 공터일 뿐.
그 공터가 숲이 우거진 밀림 속에 있다는 것이 조금 특이할 뿐이었다.
아무튼 밀림에 있는 게 신기한 그 거대한 공터에서.
"스승님,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
"……스승님?"
"어? 어어…… 그래."
약 1년 전 자신의 앞에 있던 그녀, 미령을 제자로 받았던 괴인…… 아니, 김현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미령이 가지고 온 거대한 고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오우거 고기입니다."
김현우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그의 앞에 비치되어 있는 평평한 돌덩이에 내려놓아진 거대한 고기.
군데군데 탄 부분들이 보이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잘 익은 거대한 고기를 김현우는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고, 그 뒤를 이어서 미령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저번에는 약간 질기다고 하시길래 이번에는 나무에 걸어 두고 두 시간 정도 꾸준히 팼으니 아마 고기가 연할 겁니다."
"그렇구나……."
"……스승님? 혹시 불편하신 거라도……?"
김현우의 묘하게 멍한 대답에 불안해하는 듯한 느낌으로 묻는 미령.
그에 김현우는 고개를 젓고는 이야기했다.
"아니다. 먹자꾸나."
"예 스승님."
김현우의 대답에 조금 전까지 지었던 불안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가 고기를 집어 들자마자 같이 고기를 집어 드는 그녀.
미령을 보며 김현우는 머릿속에 저도 모르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김현우는 입가에 미령이 구워 온 고기를 가져다 대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아니, 분명 이게 맞기는 한데…….'
이 상황은 김현우가 의도한 상황이 맞기는 했다.
그는 튜토리얼 탑의 저주에 걸린 뒤, 자신이 흔히 보던 무협소설에서 봤었던 '깨달음'을 얻어 이 탑을 빠져나가기 위해 무공을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서 무협 소설의 클리셰 중 누군가를 가르치다 갑자기 깨달음을 얻는다는 전개가 꽤 많았기에 자신도 무협 소설의 스승들처럼 제자를 들여서 키웠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것도 거의 1년 동안 말이다.
'뭐…… 그렇게 해서.'
김현우는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뤘다.
비록 무협 소설 속의 내용이기는 했으나 그는 수많은 소설을 바탕으로 세세하게 써져 있는 무공들을 이용해 자신만의 무공을 만들었고. 또한 자신이 이름까지 준 제자도 나름 잘 키웠다.
'아니, 아니지…….'
잘 키운 게 아니다.
잘 컸다.
그래.
사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김현우가 지난 1년간 직접 제자를 키웠다기보다는 그녀 스스로 잘 컸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김현우는 진짜 무공을 그녀에게 알려 준 적이 없으니까.
물론 김현우는 그녀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전수해 주었으나 정말 당연하게도 그건 진짜 무공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김현우가 소설을 읽고 만들어 낸 가짜.
당연히 어떠한 묘리 같은 것이 들어가 있을 리 만무했다.
물론 당장 무공을 만들 때만 해도 '혹시 정말 무공을 배워서 깨달음을 얻으면 탑에서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과 더불어 기묘한 무공뽕에 차 있어서 제멋대로 무공을 만들었으나 실질적으로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우선 무협 소설은 기본적으로 판타지에 기반한 소설이었고.
설령 정말로 무공이 있다고 해도 무공에는 내공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가?
허나 김현우는 내공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
그는 그저 지금까지 자신의 신체 능력으로 무공을 사용해 왔을 뿐.
한 마디로, 김현우가 지금까지 제자한테 알려 줬던 무공들은 그저 그가 소설에서 보았던 무공들의 겉모습을 그럴듯하게 변형해서 사용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는 소리였다.
……뭐, 물론 그렇게 만든 기술 중에서 몇몇은 실전에서 사용했을 때 정말 도움이 되기는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김현우의 능력치가 이미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했기에 가능한 것뿐.
실제로는 김현우의 무공을 연마해 봤자 제대로 사용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
김현우가 미령을 바라보는 순간, 앞에 앉아 고기를 먹고 있던 미령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꽝!!
거대한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다시 김현우의 앞에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이쪽으로 오우거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기에 처리하느라……."
"……비영보(飛影步)를 사용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이 제자가 깨달음이 부족해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만, 최근에는 그럭저럭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랑스럽다는 듯 입을 여는 미령.
그런 미령을 보며 김현우는 생각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미령은 마치 김현우의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처럼, 진짜 무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미령이 사용하는 것이 진짜 무공인지는 김현우조차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김현우는 그저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기반으로 해서 무공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 비해 미령은 아직 모든 능력치가 자신보다 낮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알려 준 무공을 멋대로 잘 사용하고 있었다.
심지어 미령은 비영보 같이 김현우도 한번 만들어 보고 대충 사용해 보니 그냥 뛰는 게 더 빨라서 사용하지 않게 된 보법도 진짜 무림인들처럼 잘 사용했다.
'도대체 뭐지???'
김현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
물론 아무리 무공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녀는 항상 대련할 때마다 자신한테 졌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그녀가 진짜 무공을 사용한다는 게 문제다.
어쩌면 무공을 만든 나보다도 더 무공을 잘 사용하고 있다는 게……
'……진짜 천재인가?'
김현우는 미령을 바라봤다.
다시금 열심히 고기를 뜯고 있는 미령의 모습.
만든 본인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데 미령이 무공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천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 정도면 그녀의 과거가 궁금해지는 수준.
뭐, 지난 1년 동안 그녀를 제자로 수련시키며 들었던 그녀의 과거들이 있기는 했다.
'……어쩌다 보니 듣게 된 것뿐이지만.'
김현우는 처음 미령에게 이름을 지어 줬을 때 그녀에게 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했었다.
거기에 더불어서 애초에 과거 따위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라고 했기에 뒤늦게 그녀의 과거가 궁금해지기는 했으나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고작 몇 개월 전이었을 뿐이었으나 그때의 김현우는 궁금증보다는 '스승'의 컨셉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허나 시간이 지나고 수련하는 기간이 길어지며 점점 미령과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김현우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항상 수련이 끝나고 잘 때쯤이 되면 과거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맨 처음 김현우에게 과거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사람'의 이야기라고 했으나 그는 자연스레 그것이 미령의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학대받는 가정에서 자랐다……라.'
사실 김현우는 고아였기 때문에 학대받는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다.
애초에 부모가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겠나?
다만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가장해서 말하는 미령의 표정은 굉장히 좋지 못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척 봐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미령에게 나름대로의 조언을 해 주었다.
……사실 조언도 제대로 된 조언이라기보단 무협소설에서나 나오는, 조금 어처구니없는 조언을 해 줬으나 아무래도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하는 듯했다.
아니, 만족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때부터 미령은 무엇인가 조금 바뀐 것 같았다.
분명 그때만 해도 항상 모든 일에 소심하게 대했던 그녀는 그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것에 적극적으로 변했다.
무공을 배우는 것도 그렇고.
김현우와 대련을 하는 것에도 굉장히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뿐인가?
오랫동안 지냈다 뿐이지, 항상 자신에게 말할 때도 소심하게 중얼거리던 미령이 그다음을 기점으로는 자신에게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예전과는 다르게 좀 더 공손해졌다.
"……."
솔직히 당장 그때는 너무 한순간에 바뀌어 버린 미령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썩 나쁘지 않았기에 그렇게 넘겼었는데.
"……스승님?"
"아니, 아니다. 어서 먹어라."
"알겠습니다."
왠지 무협뽕이 빠져 버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미령에게는 그것이 무협뽕이 켜지는 스위치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사실 김현우 자신이 해 주었던 말도 안 되는 조언 같은 거로 미령의 트라우마가 날아가 버린 듯하니 결국 괜찮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긴 했다.
'아무튼, 이제 슬슬 내보내야 하려나.'
김현우는 미령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미령은 너무 오랫동안 이 탑 안에 있었다.
물론 김현우야 애초에 저주를 받아 이곳에서 나갈 수 없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으나 미령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는 나갈 수가 있던 것이다.
뭐, 사실 지금까지야 김현우가 거의 반 강제적으로……
"……흠."
잡아 두고 있었나?
'언제부터인가 그냥 자신이 여기 있는 게 좋아서 남아 있다는 느낌도 조금 받았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게 요점이 아니라 미령을 내보내는 게 맞다는 소리였다.
김현우가 못 나간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그녀를 이 안에 잡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무리 김현우라고 해도 그 정도의 양심은 남아 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김현우는 더 이상 그녀에게 알려 줄 무공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애초에 김현우는 대충 몇 개월 전부터 무공 만드는 것을 멈춘 상태였고, 사실 최근 한 달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놀았다.
왜냐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제멋대로 무공을 만들어 봤자 진짜 깨달음은 얻을 수조차도 없고, 거기에 더해서 탑도 탈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뭐, 사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탑을 탈출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계속 들기는 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 생각이 마음속 한 구석 생각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결론이 나왔다.
내가 제멋대로 만든 무공으로는 탑을 탈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말이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더 이상 무공을 만들지 않았고 그 결과, 그는 더 이상 미령에게 가르쳐 줄만한 무엇인가 남아 있지도 않았다.
뭐, 더 가르쳐 봤자 지금 그녀는 충분히 강해서 딱히 필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슬슬 내보내자.'
그렇기에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고.
"제자야."
"예, 스승님."
"이제 슬슬 하산하거라."
그 순간-
오싹-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는 왠지 죽어 버린 미령의 눈을 보며 저도 모르게 오싹거림을 느꼈다.
433화 외전 10. 5년 전, 리옌 (5)
튜토리얼 탑 71계층에 조성되어 있는 거대한 정글에는 놀랍게도 밤과 낮이 있었다.
분명 하늘에는 천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모순적으로 이 탑의 정글은 시간대에 따라 빛의 명도가 바뀌었다.
낮에는 탑의 천장이 정글을 밝게 비추었고.
밤에는 탑의 천장에 있는 빛이 꺼짐으로써 어둠이 찾아왔다.
그야말로 완벽한 밀림.
그곳에서.
[반드시! 스승님이 오롯이 천(天)으로 계실 수 있는 땅을 이 제자가 직접 만들어 놓도록 하겠습니다!]
"으-!"
김현우는 정확히 한 달 전, 미령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손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지금껏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줄곧 벗지 않았던 가면을 쳐다보았다.
81계층에 있는 이블데드가 쓰고 돌아다니는 해골을 김현우 마음대로 리메이크해 썼던 가면.
김현우는 오늘 그 가면을 가만히 만지다 불현듯 자신을 죽은 눈으로 쳐다보았던 미령을 떠올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미령이 아무리 천재라서 무공을 잘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김현우를 이길 수 없다.
실제로 그녀와 김현우가 싸운 전적만 봐도 315전 전승인데다가 애초에 김현우는 이 탑 안에 갇힌 지 햇수로 5년이 넘어가고 있는 고인물 중에서도 씹고인물이었다.
당연히 고작 1년 동안 탑에 있던 그녀가 김현우를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분명히 그럴 텐데…….
'……도대체 뭐였지? 그 압도적인 위압감은?'
김현우는 한 달 전. 미령과 대화할 때 그녀에게 압도적인 무엇인가를 느꼈다.
왠지 무엇인가 죽어 버린, 그 어느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에서 나온 압도적인 위압감.
그 덕분에 김현우는 괜스레 그냥 빨리 하산하라는 소리 한 마디면 끝날 것을 장장 한 시간 가까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녀를 설득해야 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지?'
사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었어도 그냥 빨리 올라가라고 하면 됐을 텐데, 그때의 김현우는 도대체 무엇에 홀렸는지 그녀의 비위를 맞췄다.
그 압도적인 무엇인가에 눌려서.
"흠……."
김현우는 가슴 속에 묘하게 남는 찜찜한 느낌에 몇 번이고 그것을 다시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나오는 것은 없었기에 그 생각을 그대로 넘겨 버렸다.
'뭐, 이미 지나간 일인데.'
사색할 시간은 많았으나 애초에 김현우는 성격상 딱히 떨떠름한 일을 기억에 남겨 두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달 전에 있던 일을 기억에서 잊어버리려-
"아."
-했으나, 그는 새삼스레 자신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미령을 하산시키고 자신이 쓰고 있었던 저 가면을 벗었을 때부터 김현우는 왜인지 마치 트리거가 켜진 것처럼 자신이 행동했던 것들 하나하나에 쪽팔림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는 무슨 짓을?'
분명 가면을 쓰고 있을 때의 자신은 이 모든 것에 간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나?
"……."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네 위에는 아무것도 없고, 있는 것은 오직 천(天)인 나뿐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
"씨바아아아아알-"
김현우는 기억을 회상하다 말고 저도 모르게 머리를 부여잡았다.
'내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다고?'
실화인가?
정말로?
도대체 어떻게?
'지금은 그 생각만 해도 당장 쪽이 팔리기 시작하는데…… 내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했다고?'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체성에 혼란이 올 정도.
그렇기에 김현우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최대한 자신을 진정시켜 보려 했으나 왠지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씹,"
오히려 자신이 미령, 아니 제자에게 했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를 본격적으로 제자로 들이려 했을 때.
[다시 한번 말하도록 하겠다.]
[무엇을……?]
[나는 네가 탑 밖에서 누구였는지, 또는 무엇을 하던 이였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또한 딱히 네가 무슨 과거나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하지 않다.]
[…….]
[다만 전부 모르고 궁금하지 않더라도, 이것 하나 정도는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다.]
[…….]
[만약 네가 내 수련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따라올 수 있다면, 너는 최강이 될 수 있다.]
김현우는 그 기억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양손을 쥐었다 폈다.
"이런 개 썅……."
'정녕 저것이 내가 했던 말인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김현우가 내뱉었던 말은 오글거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글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김현우가 그때 그녀에게 했던 말은 바로 즐겨보던 무협 소설에서 나오던 씬을 멋있다고 생각해 제멋대로 리메이크해서 쓴 것뿐이니까.
'……와.'
물론 김현우가 멋있다고 생각했던 저 대사는 소설 속에서는 꽤 멋있는 장면에 속하기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잘 맞춰져 있었으니까.
상황 연출이라든가, 주인공과 적의 대립 구도, 그리고 그 대립 구도 속에서 결국 패배한 주인공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등.
그 대사가 나왔을 때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소설 속에서는 상황적 묘사가 잘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은?
그런 상황 연출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능력치가 절대로 오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한 달 동안 극한 상태로 몰아넣고 자신의 제자에게 그딴 오글거리는 말을 내던진 것이란 말이었다!
'거기에다가-'
지금껏 딱히 생각해 보지 않아서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미령이라는 이름 또한 자신이 읽던 무협 소설에 나왔던 히로인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뒤로 점점 떠오르기 시작하는 흑역사에 몸을 비틀었으나 사실 그 무엇보다도 김현우가 더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1년 동안 자신의 아래에 있던 제자 때문이었다.
그래.
자신의 제자.
1년 동안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어찌 보면 내 장단에 맞춰 어울렸던 그 제자!
"……."
솔직히, 조금 마음을 진정시키고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면 물론 그녀에게도 긍정적인 변화들이 있기는 했다.
우선 그녀는 김현우가 만든 무공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상당한 무력을 얻었다.
'……그런데, 사실 이건 생각하고 보면 그냥 나한테 붙들리지 않고 탑을 탈출했으면 자연스럽게 저런 무력을 얻었을 것 같긴 한데.'
김현우는 순간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내 고개를 젓고는 곧바로 다음 생각을 이어 나갔다.
두 번째로, 그녀는 1년 동안 이곳에 있으며 개고생을 하기는 했으나 본래의 소심한 성격을 버리고 굉장히 강직해졌으며, 김현우는 사실 어찌 보면 그녀의 카운슬링을 해 주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는 밤이 되기만 하면 자신의 가정사 같은 것을 줄줄이 이야기했고, 김현우는 그것을 하나하나 받아 주었다.
'다만 문제는…….'
김현우가 해 주었던 것은 일반적인 카운슬링이 아니었다.
한참 그녀에게 미령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무공 만들기에 심취해 있던 김현우는 그녀의 고민을 전부 고리타분한 무협식 사고관…… 그것도 소설 속 무협식 사고관을 통해 해결해 주었다.
한 마디로 별 말도 안 되는 해결 방법을 내놓았다 이 말이었다.
예를 들어.
Q. 아버지가 저를 정략혼으로 넘기려고 합니다.
A.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마라. 만약 억지로 시킨다면 네 아버지라도 처리해 버려라.
같이, 절대 일반인의 사고방식에서는 나올 수 없는 한국식 양산형 무협 소설처럼 카운슬링을 해 주었다.
그런 식으로 무협식 카운슬링을 해 준 결과, 결국 김현우의 제자인 그녀는 극도의 무협 중2병에 걸렸다.
그러니 한 마디로 그녀는 자신감을 얻은 대가로 수치심이 날아가 버렸다는 소리였고.
"……."
결국 그녀가 제대로 이득이라고 얻어 간 건…… 없는 것 같았다.
"흠."
김현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래도 튜토리얼 탑 밖에 나가면 중2병이 조금 사그라들지 않을까?'
순간적이나마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던 김현우였으나 그는 한 달 전, 그녀를 열심히 설득했던 때를 떠올리며 양심에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죽은 눈을 하곤 자신을 바라보는 미령을 달래기 위해 김현우는 여러 가지로 그녀를 설득했으나 먹히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과장된 말투로 포장된.
마치 무협 속의 스승과 제자가 나눌 것 같은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탑에서 빠져나갔다.
한 마디로 그 정도의 중증 중2병이 걸려 버렸으니 그것이 고쳐지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
한 동안 멍하니 고민하고 있던 김현우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나도 모르겠다.'
만약 김현우가 지금 당장이라도 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면 그는 곧바로 달려 나가 밖에 있는 제자에게 깃든 중2병을 없애 버리고 싶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김현우는 결국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탑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김현우는 그저 자신의 제자였던 그녀의 수치심에 명복을 빌었다.
"……."
살짝 미안한 감정을 담아서 말이다.
####
그렇게 김현우가 명복을 빌고 있는 그 시각.
중국 광저우에 있는 진륜 기업의 고층 빌딩 꼭대기 층에는 두 남자가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맞은편에 있는 남자는 바로 진류기업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이청'
그리고 그 반대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바로 1년 전, 이청과 그 딸에 관한 이야기로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나누었던 정유환 헌터였다.
"……."
"……."
서로를 마주보고는 잔잔한 웃음을 흘리는 둘.
그중에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바로 이청이었다.
"1년 전과 생각이 바뀌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이청의 말에 정유환은 자신의 손에 끼어져 있는 번역반지를 한번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제가 마음에 드는 따님분이 탑에 들어간 것이 정말 유감이라고요. 저는 정말로 따님분을 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유환 헌터의 말에 이청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있으면 리옌이 여기로 올 겁니다.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시죠."
"그거 괜찮군요."
미소 지으며 앞에 있는 와인을 마시는 정유환.
그런 정유환의 눈에 깃들어 잇는 탐욕과 음욕을 읽어 낸 이청은 미소를 지었다.
'……결국 죽을 때까지 쓸모가 없는 줄 알았는데, 결론적으로는 내게 도움이 되기는 하는구나……!!'
이청은 그렇게 생각하며 약 한 달 전 한국의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온 자신의 딸 리옌을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같이 들어간 다른 헌터들과는 다르게 혼자서만 몇 달 뒤에 빠져나온 리옌은 빠져나오자마자 한국에서 벗어나 중국으로 돌아왔다.
'뭐, 그 덕에 헌터 등급이 얼마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헌터 등급이 얼마라고 해도 리옌은 결국 신입 헌터였고 앞에 있는 정유환 헌터는 1년 동안 더더욱 랭킹이 상승해, 이제는 S등급 10위권에 그 이름을 올리고 있었으니까.
탐욕이 깃든 정유환의 미소에 마찬가지로 탐욕이 깃든 웃음을 전한 이청은 자신의 딸인 리엔이 오기를 기다리며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사실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애초에 이청은 그녀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정유환에게 연락을 했을 뿐, 사실 그조차도 아직 리옌을 보지 못했으니까.
애초에 이청은 딸을 그저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밖에 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끼이이익-!
최상층의 문이 열리며 그녀가 나타났다.
그리고-
"무, 슨……!?"
이청은, 곧 경악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434화 외전 11. 5년 전, 리옌 (6)
이청은 거대한 집무실의 문이 열림과 함께 들어오는 자신의 딸을 바라보고는 금세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리옌?"
이청의 중얼거림.
그것은 리옌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느껴지는 의문 때문에 중얼거린 것뿐.
'……정말로 리옌인가?'
이청은 자신의 앞으로 서서히 걸어오기 시작하는 리옌을 보며 두 눈을 의심했다.
그는 리옌을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는 해도 집에 들어갔을 때는 그녀의 모습을 꽤나 자주 보았었다.
지 어미를 닮아서 항상 왜소한 체격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자신과 마주칠 때면 언제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마치 패배한 개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다니는 모습은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리옌의 모습은?
"……."
"……."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리옌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이청이 리옌의 바뀐 모습에서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바로 그녀의 눈이었다.
눈.
분명 탑에 들어가기 이전까지만 해도 불안함과 두려움, 그 이외에 온갖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담고 있었던 그녀의 눈동자가 오히려 지금은 마주치는 것이 왠지 거북할 만큼 그 기백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외형.
언제나 온몸을 가리고 있는 치렁한 옷들을 주로 입고 다녔던 그녀는 그런 옷 대신 검은색의 치파오를 입고 있었고, 눈을 가리기 위해 길게 길렀던 머리는 옆으로 모아 묶어 놓았다.
그야말로 이청이 보았던 리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
허나 그럼에도 이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앞에 선 그녀가 리옌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얼굴.
이전에는 항상 머리로 가리고 있어서 몰랐으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모아 뒤로 묶은 그녀의 얼굴은 분명 어미를 닮아 있었기에 이청은 그녀가 리옌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다음 순간-
"내가 분명히 싫다고 했을 텐데?"
"……?"
이청은 순간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반말을 했다고?'
나한테?
"……허."
이청이 저도 모르게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으나 리옌은 그 자리에 서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느껴지는 거북한 무언가.
마치 리옌이 진짜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 이청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탑에서 빠져나오더니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 거냐. 리옌?"
자신의 앞에 정유환이 있다는 것도 까먹어 버리고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는 이청.
평소의 그라면 리엔이 이런 돌발 행동을 하더라도 분위기를 유지하며 여유 있게 넘어갈 능력이 있었다.
허나 그런데도 이청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보다 키가 작은 리옌을 내려다보는 이유는 바로 그녀의 눈빛 때문.
'도대체 무슨…….'
그녀의 눈은 마치 모든 것을 자신의 아래로 보는 듯한, 마치 피식자를 앞에 둔 포식자의 눈과 같았다.
두려움이라고는 한데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지독하리만치 독한 무엇인가 가득 차 있는 그 눈빛.
이청은 그 눈빛을 이겨 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것만으로 리옌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된 이청.
그러나 리옌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해서 아까 전에 느껴졌던 그 기묘한 위압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위압감.
이청은 이 말로 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렸고.
"튜토리얼 탑을 빠져나와서 그런지 꽤 성격이 많이 바뀌었네요?"
그 순간, 이청은 자신의 귓가로 들려온 정유환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려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툭-
조금 전까지 마시고 있던 와인을 내려놓은 채 리옌을 바라보고 있는 정유환.
그는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저도 이해해요. 튜토리얼 탑은 사실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죠. 게다가 그렇게 자만할 수 있는 합당한 힘도 같이 주어지고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묘한 웃음을 짓는 정유환.
그에 리옌은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정유환의 모습을 바라보았고,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그렇게 자만하는 건 좋지 않아요. 지금 당신은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상황 파악이 되지 않겠지만 엄연히 말하면 당신은 아직 햇병아리-."
펑!
-하지 못했다.
정유환 헌터가 소파에 늘어지듯 누우며 느긋한 소리로 이야기함과 동시에 이청의 귓가에 들려오는 거대한 폭음 소리.
마치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진 듯 터져 나오는 소리에 이청은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눈을 감았다 떴고.
"……!!"
이청은 곧 자신의 앞에 앉아 있던 정유환 헌터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쿨럭-?"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리옌을 바라보는 정유환.
그 모습을 보며 리옌, 아니 미령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따위가 내게 그딴 소리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미령의 발언.
그런 미령의 발언을 순간적이나마 이해하지 못한 정유환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곧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맞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펑!
그와 함께 터지는 또 한 번의 폭음.
정유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위로 튀어 올라갔으나, 유감스럽게도 이번의 폭음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펑!
한 번의 폭음이 울렸을 때, 정유환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피가 사방에 흩뿌려지고,
펑!
두 번의 폭음이 울렸을 때, 그의 눈이 뒤로 까뒤집히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세 번째 폭음이 울렸을 때.
콰지지직!
정유환 헌터는 부서진 소파와 함께 바닥에 처박혔다.
"……!"
그야말로 떡이 된 시체처럼 땅바닥에 처박힌 그의 모습에 이청은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정유환을 바라봤다.
지금 당장 병원에 가지 않으면 그대로 죽어 버릴 것처럼 피를 흘리는 그의 모습.
"대체…… 무슨?"
이청은 몇 초 전의 상황을 회상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어떻게 정유환이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이청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폭음이 몇 번이고 터지더니 정유환이 그대로 쓰러져 버린 것이다.
s등급 랭킹 중에서도 10위권 안에 드는 정유환이……!
그리고 그것을 새삼스레 깨달은 순간, 이청은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미령을 돌아봤고.
"!"
이내 그녀의 오른손에 진득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막 묻은 듯 점액질의 형태로 툭툭 떨어지고 있는 피.
그 모습을 본 순간 이청은 정유환이 어떻게 저렇게 된 것인지에 대해 유추할 수 있었으나-
'주먹으로…… 때린 거라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이청은 정유환이 맞는 그 순간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거기에다 더 놀라운 건 바로 정유환이 리옌에게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이제 고작 튜토리얼 탑에서 나온 지 한 달도 되지 않는 헌터에게 말이다.
"……."
그렇게 해서 상황 파악을 완전히 끝낸 이청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리옌을 조금 전과는 다르게 떨리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지금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이 예전에 알던 리옌이 아니었다.
"너…… 너는 대체 뭐야……?"
이청의 입에서 나온 물음.
분명 그것보다도 조금 더 의미 있는 질문을 할 수 있었으나, 이청은 마치 무엇인가에 끌리듯 그 말을 입에 담았고.
그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을 두려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청을 보며 비릿하게 웃음 짓고는 이야기했다.
"미령."
"뭐……?"
"나는 미령이다."
그녀의 말에 이청은 이상하다는 듯 입을 열려고 했으나.
빡!
"끄악!?"
그녀는 이청의 얼굴을 후려치는 것으로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소파에 자빠져 피가 줄줄 흐르는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미령을 올려다본 이청.
"!"
그는 곧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미령의 눈을 보고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을 쳐다만 보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위압감에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고.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마라."
이청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느새 두려움이 담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청의 손에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줄 만한 것들이 많았다.
당장 진륜 기업의 소속으로 있는 헌터들이 수천은 되었으며 자신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이곳으로 튀어 올 수 있는 헌터들이 수십이었다.
그뿐인가?
미령이 사라져 정유환을 영입할 수 없게 된 이청은 지난 시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결국 S등급 헌터도 둘이나 영입했다.
만약 헌터들만의 무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나라의 힘을 사용하는 것 또한 가능했다.
한 마디로, 그에게는 지금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이 많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이청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한해서는 미령의 말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듯 입을 막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침묵.
"……."
"……."
이청은 두려운 눈빛으로 미령을 바라보고, 그녀는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이내 시선을 돌리고는 밖을 바라보았다.
광저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광경.
"……."
미령은 그 광경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맨 처음 탑에서 나왔을 때를 떠올렸다.
분명 스승님이 하늘로 있을 수 있는 영토를 만들어 놓겠다고 하고 나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녀는 탑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을 오롯이 서 있을 수 있게 만들어 준 스승과 떨어진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꼈고.
탑에서 빠져나온 순간,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 준 스승님이 더 이상 없다는 생각에 무서움을 느꼈다.
'그건 아니야.'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분명히 스승님은 탑에서 빠져나옴과 동시에 만날 수 없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스승님은 분명히 자신에게 있었다.
'나한테 있다.'
그래, 스승님은 자신에게 있었다.
스승님이 알려 주셨던 무공들이 자신에게 있었고.
스승님이 알려 주셨던 지식들이 자신에게 있었으며.
스승님에게 받은 이름이 있었다.
그 이외에 스승님이 해 주셨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전부 이미 자신의 몸속에 배어 있었다.
그렇기에 스승님은 분명히 내게 있었다.
미령은 주먹을 쥐며 시선을 돌렸다.
보이는 것은 자신을 두려운 눈빛으로 보고 있는 이청과 그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나자빠져 잇는 나부랭이가 한 명.
"……."
보기만 해도 추함이 느껴지는 모습에 미령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만약 옛날의 그녀라면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사람들이었으나 이제는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스승님의 보은으로 힘을 얻었고, 그 증거로 그녀는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 않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내려다보던 이들을 더더욱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렇기에-
'지켜봐 주십시오. 스승님.'
미령은 자신을 두려운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자신의 아버지'였'던 것을 바라보며.
'제가 반드시, 스승님이 오롯이 천(天)으로 계실 수 있는 땅을 일구어 놓겠습니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퍼석!
435화 외전 13. 김현우의 일상 (1)
김현우는 상당한 유명인이다.
아니, 상당한 유명인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김현우는 굉장한 유명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와 그의 동료들은 지구가 몇 번이고 멸망의 위기를 거칠 때마다 몇 번이고 지구를 구해 냈기 때문이다.
허나 사실 그렇다고 해도 그 유명세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빛이 바래기 마련이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새로운 이슈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기존의 이슈들은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간다.
마치 모든 이슈가 그렇듯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김현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김현우는 원래라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가장 빠르게 잊혀야만 했다.
애초에 김현우는 미디어 매체에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지 않으니까.
뭐, 정확히 말하면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그저 귀찮을 뿐이지만, 아무튼 그렇기에 김현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빨리 잊히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래, 원래라면 말이다.
"흐음……."
한가한 오전.
김현우는 느긋하게 1층의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김현우의 무릎 위에는 미령이 앉아 김현우와 찰싹 달라붙은 채 그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서방님……."
부시럭- 부시럭-
괜스레 김현우를 부르며 자신의 등을 밀착시키는 미령의 행동에 김현우는 익숙하다는 듯 한 팔로는 그녀의 몸을 껴안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김현우의 손에 따라 부드럽게 넘어가는 미령의 머리.
"─♡"
그에 미령은 무척이나 만족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김현우의 손길을 즐겼다.
분명 결혼을 하고 같이 산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미령은 집에 둘만 남게 되면 줄곧 이런 식으로 김현우에게 애교를 부리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건 김현우의 입장에서도 썩 나쁘지 않았다.
아무리 밤의 스킨십이 많다고 해도 밤의 스킨십과 낮의 스킨십은 꽤나 다른 법이니까.
게다가 같이 살아 본 결과 미령은 특히 아침이 꽤 귀여운 편이었다.
그녀는 낮이나 밤에는 이미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예의와 격식을 차리는 편이지만 아침에는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탓인지 애교를 부린다.
괜스레 김현우가 있으면 그 근처에서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그런 미령의 일면은 꽤 귀엽기에 김현우는 이런 그녀의 애교가 싫지 않았다.
'게다가…….'
사실 이런 식으로 애교를 부리는 건 미령밖에 없다.
당장 반대로 이 집에 남아 있는 사람이 하나린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김현우는 아마 지금 집에 없었을 것이다.
정확히는 하나린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나가 데이트를 즐기게 됐겠지.
뭐, 그렇다고 해서 하나린과의 데이트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요즘에는 순간이동장치가 아주 잘 만들어져 있기에 이 세상 여기저기를 빠르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데이트 장소는 차고 넘치는 데다가 워낙 하나린이 에스코트를 잘 해 주다 보니 김현우는 꽤 편하게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다.
다만 하나린과 같이 데이트를 하는 경우에는 온전히 데이트로 거의 모든 시간을 소비해야 하기에 집에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김현우에게는 좀 아쉬운 느낌이긴 했다.
뭐? 야차는 어떻냐고?
"……."
……야차 같은 경우도 어찌 생각해 보면 미령과 같은 느낌이기는 했다.
우선 하나린처럼 밖에 나가자고 하지도 않는 데다가 그녀도 김현우와 비슷해 밖을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집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다.
다만 야차와 둘이 있을 때는 이런 식으로 소파 위에서 뒹구는 게 아닌 거의 침대 위에서 뒹군다는 점이 좀 다르다고 할까?
"……."
뭐, 그것도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역시 김현우에게 베스트는 이런 식으로 느긋하게 지내며 일상을 만끽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최근에는 '너무 쉬었나?'라는 생각이 김현우의 머릿속에 잠깐잠깐 생각났다가 사라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는 더 쉬고 싶었다.
거기에다 집에 있을 때 딱히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지, 막상 김현우가 만들어 놓은 윗 계층의 무관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는 꽤 움직이는 편이다.
"……어?"
그러고 보니까 무관에 들르지 않은 지도 이제 1년이 넘어가는 것 같은데……?
김현우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어차피 무관에는 홀로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을 아랑진군밖에 없다는 것을 떠올렸기에 이내 신경을 껐다.
어차피 그 녀석은 자신이 없어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으니까.
김현우는 그런 생각을 끝으로 미령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손을 움직여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콩 콩.
쓰다듬는 것을 그만두자 불만이라는 듯 자신의 머리를 이용해 김현우의 가슴팍을 툭툭 치는 미령.
그런 미령의 불만에 김현우는 그녀를 안고 있던 왼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었고, 이내 드라마가 나오고 있던 TV 채널을 돌렸다.
그리고, 곧.
"……응?"
김현우는 굉장히 익숙한 이가 TV속에 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오공……?"
김현우가 돌린 TV 속에 나오고 있는 인물은 바로 손오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서연.
그가 시선을 돌려 TV의 메인 패널을 확인해 보자 그곳에는 '헌터를 알다 특별편! 헌터 부부의 일상!'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저거, 내가 나갔던 프로그램 아닌가?'
김현우가 그렇게 생각하며 TV를 멍하니 바라보자 곧 꽤 익숙한 얼굴의 MC가 나왔다.
'내가 예전에 나갔던 그 프로그램 맞네.'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TV를 돌렸다.
뭐 사실 생각해 보면 이서연이 TV에 나오는 장면은 꽤 많이 본 데다가 손오공도 둔갑을 할 수 있게 된 뒤로는 꽤 미남형의 얼굴이었기에 TV에 나와도 위화감이 없었다.
한 마디로 별로 신기하지도 않다, 이 말이었다.
고롱-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고 있는 미령의 머리를 마치 기계처럼 쓰다듬으며 채널을 하나하나 돌려보던 김현우.
그리고-
"?"
김현우는 채널을 돌리던 중 굉장히 기묘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니, TV 프로그램이 기묘한 것은 아니었다.
방송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이름은 '홀리캠프'. 김현우가 알기로 그 프로그램은 일반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예능과 다큐가 적절히 섞여 있는 TV 프로그램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묘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건 바로-
"눈동자……?"
바로 홀리캠프에 '눈동자'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홀리캠프의 MC와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런지, 김현우가 습관적으로 TV 채널을 돌려 버릴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대체 왜?"
김현우는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사실 눈동자가 나오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김현우가 알기로 눈동자는 자기가 해 보고 싶은 것들이라면 그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하는 여자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녀가 TV에 나오는 것도 갑작스러운 그녀의 변덕이 작용했다고 하면 납득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김현우는 그런 것과는 별개로, 눈동자의 TV 출연에 긴장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홀리캠프 아래에 떠 있는 패널에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절대자'의 사생활 공개!]
그건 바로 패널 메인에 떠 있는 그 글자 때문.
사실 글자만으로는 덜덜 떨 필요가 없다.
다만 김현우는 저런 패널을 달고 캠프에 나와 있는 사람이 눈동자라는 점에서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꼈고.
곧 김현우가 TV에 집중함과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절대자의 사생활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저희가 알고 있는 절대자는 김현우 헌터밖에 없거든요. 혹시 그분의 사생활을 공개한다고 하신 게 맞나요?]
남자 MC의 물음에 눈동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오오! 그런데 아시다시피 홀리캠프에서는 타인의 사생활 폭로보다는 출연하신 출연자분의 고민을 듣는 게 메인 컨텐츠라서요……! 혹시 실례지만 절대자의 사생활은 출연자분의 고민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물론이죠.]
깔끔하게 대답하는 눈동자.
그에 남자 MC는 척 보기에도 활달한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이야기했다.
[자 그럼 지금 당장 고민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네]
남자 MC의 진행에 살짝 웃음을 지은 눈동자는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저도 모르게 미령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손을 멈춘 채 왠지 불안한 느낌을 받으며 TV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절대자와 한번 잘 수 있을지 고민이에요.]
[……네?]
"홀리쉣-."
김현우는 그와 함께 TV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는 황급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품 안에 있는 미령의 상태를 확인했다.
문질문질-
미령은 잠에 취해서 그런지, 딱히 TV에 집중하지 않았는지 김현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 미친년이 진짜……!'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눈동자가 오고 지난 5년간, 그녀는 딱히 문제를 일으키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김현우가 도대체 얘는 살아 있는 것이 맞는지 궁금할 정도로 그녀는 조용히 전 세계를 여행했다.
뭐…… 그렇게 여행을 다니던 도중에도 한 번씩 한국으로 돌아와 김현우를 곤란하게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저건?
"아……."
김현우는 슬쩍 시선을 내려 미령의 눈치를 보았다.
고롱-
여전히 잠에 취해 기분 좋게 눈을 감고 있는 미령의 모습.
김현우는 조심스레 TV소리를 낮추고 리모컨을 움직여 TV를 '홀리캠프'로 돌렸다.
[어…… 그러니까 혹시 지금 그 말은 내연녀 관계라는……?]
[내연녀 관계였으면 나오지 않았겠죠?]
"……."
어째 분명 TV를 돌린 것은 단 한순간이었음에도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지나간 것 같았다.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었으면 내연녀라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인가?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채널을 돌리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TV로 직접 보는 것보다는 스마트폰으로 보는 것이 미령에게 들킬 확률이 작기 때문이었다.
실시간 검색어.
1. S등급심사기준상위.
2. 튜토리얼 샵 오픈.
3. 미안하다 사랑하지 않는다.'
…….
……
…
…
인터넷에 들어가자 보이는 실시간 검색어.
김현우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곧바로 새로고침을 눌렀고.
실시간 검색어.
1. 김현우 내연녀
2. S등급심사기준상위.
3. 튜토리얼 샵 오픈.
4. 미안하다 사랑하지 않는다.'
…….
……
…
…
"이런 씹."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인기 검색어 1위에 도달한 '김현우 내연녀'를 보며 피곤하다는 듯 두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이건 진짜 확실하게 이야기해 놓는 편이 낫겠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는 조금 미묘하게 거절했던 느낌이 있기는 했었는데 아무래도 이건 확실하게 해 두지 않으면 눈동자가 더 사태를 키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전에-
우우우우우웅-!
[마나님.]
"……하"
-아무래도 와이프들에게 해명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며 김현우는 전화를 받았다.
436화 외전 14. 김현우의 일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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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현우 내연녀 실화냐 ㅋㅋㅋㅋ?
글쓴이 : 호에에에
김현우 와이프만 세 명이면서 내연녀를 만든다고?? 이새끼 진짜 어떻게 되버린거 아니냐?
근데 그와중에 내연녀 존나 이쁜거 봐라 ㅅㅂ 왜 나만 여친없음?
댓글 1382
빡빡빡 : 김현우 내연녀 실화냐? 진짜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미 자기 옆에 여자 세 명이나 끼고 있으면서 그 와중에 한 명 더 몰래 쥐고 있었던 거 진짜 레전다……
ㄴ 실버일검 : 아ㅋㅋㅋㅋㅋㅋ 현우쿤~~~~~~ 와이프 세 명만으로는 부족한 거냐구~~~~wwwwwwwwwwwww
ㄴ 정공킨터 : 근데 진짜 김현우 레전드기는 하다, 여자 3명도 부족해서 한 명을 더낀다고?
32세유부남헌터 : 이 새끼는 좀 대단하네, 도대체 무슨 힘이 남아돌아서 여자를 4명이나 끼고 사는 거지? 나는 한 명도 존나게 힘든데……시발 대단하다.
ㄴ 천연공격 : 사실 김현우가 대단한 게 아니라 당신이 힘이 없는 게 아닐까요? ㅋ
ㄴ 32세유부남헌터 : 결혼 안 했으면 아가리털지말고 가서 꺼져라 씨발련아. 존나 화나게 하지말고.
ㄴ 지존잼민 : 아재 갑자기 급발진 ㄷㄷㄷㄷㄷㄷㄷㄷ
지로리아 : 아 씨발 ㅋㅋㅋ 와이프도 다들 세계급에서 한따까리 하는데 도대체 저기에서 어떻게 더 한명 더 채울 생각을 한거지? 진짜 존나 혁명마렵다 ㄹㅇ ㅋㅋㅋㅋㅋ
ㄴ 호다다닥 : ㅇㅈ 존나 혁명 마렵긴 하네 ㅋㅋㅋ 불평등함 MAX.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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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김현우는 그 이외에도 달려 있는 수많은 글들을 보며 괜스레 혀를 차며 인터넷 사이트를 간단하게 탐방했다.
보이는 것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이름들.
어느 사이트를 들어가도 실시간 검색어에 가득 들어차 있는 자신의 이름과 이명을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앞에 앉아 있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생긋거리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눈동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아니, 도대체 그런 사고는 왜 치는 건데?"
"사고라니?"
"……설마, 모른 척하려는 건 아니지?"
김현우가 이야기하자 눈동자는 마치 진짜로 모르겠다는 듯 손가락을 자신의 입가 근처에 대고 머리를 갸웃갸웃하더니 이내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아, 설마 아까 전에 TV에 나와서 했던 말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거 아니면 너랑 내가 이렇게 만나고 있겠냐."
김현우는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지금 그들이 만나고 있는 곳은 자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카페.
물론 카페 안은 주인 말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가 있는 카페는 하나린이 김현우를 위해 만들어 놓은 개인 카페였으니까.
김현우가 피곤하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 있으니 눈동자는 이야기했다.
"그건 좀 섭섭하네."
"뭐가?"
"그 일이 아니었으면 만날 일 없었다는 거 말이야. 좀 섭섭하게 들리는데?"
"……인상 찌푸리고 만날 일이 없었을 거란 말이야."
"굳이 인상을 찌푸려야 할 일인가?"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자신이 보고 있었던 스마트폰을 보여 주며 이야기했다.
"당연히 인상을 찌푸려야 할 일이지. 지금 네 덕분에 내 인기가 아주 급상승 중인 거 몰라? 거기다가 와이프들 설득하는 것도 이제는 지친다고."
뭐, 물론 김현우의 경우야 이번 건은 꽤 가볍게 넘어갔다.
왜냐고?
'……거의 한 달 가까이 와이프들이랑 붙어 있었으니까.'
그렇다.
김현우는 천마의 돌잔치가 끝나고 나서는 줄곧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밖에 나가지 않고 와이프들과 일상을 즐겼다.
물론 항상 셋이서 일상을 즐긴 것은 아니었으나 무조건 한 명 이상은 자신과 붙어 있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한 마디로 알리바이가 있다는 소리였다.
'뭐…… 거기에다.'
이미 한 달 전에 눈동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해 두었기 때문에 설득하기도 편했다.
"인기가 급상승하면 좋은 거 아닌가?"
"……농담이지?"
김현우의 물음에 괜히 살짝 웃음을 지은 눈동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킹치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현우쿤-"
"개드립은 그만 치고, 아니 왜 5년 동안 여행 잘 다니고 돌아오더니 갑자기 그러는데?"
김현우가 정말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눈동자는 괜스레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냥, 진심 반 농담 반?"
"아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말 그대로 반은 조금 재미있어서 그렇게 한 거고, 나머지 반은 한번 네 와이프들을 제끼고 옆자리를 어떻게 해 볼까 싶어서 말해 본 거지."
뭐, 첩도 괜찮고.
눈동자의 이어지는 말에 김현우는 왠지 모르게 떨리는 눈동자로 이야기했다.
"……장난이지?"
"아닌데?"
"……그럼 나 암살 작전이라도 펼치는 거야?"
"너를 죽인다고? 누가? 아, 네가 5년 전에 저 멀리 던져 버렸던 마력이 널 암살하기라도 해?"
"그런 의미가 아니란 건 당연히 알고 있을 텐데?"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표정을 얼굴에서 지워 버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아니, 도대체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냐고?"
"그래, 저번에 몇 번 정도 대시했을 때도 전부 차 버리더니 말이야. 그냥 시원하게 한번 해 주면 안 돼?"
당당한 눈동자의 요구.
왠지 김현우는 남녀가 뒤바뀌어야 대화가 꽤 그럴듯하게 성립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혼란스러워지려는 마음을 다잡고선 이야기했다.
"아니, 너는 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내가 그렇게 좋아?"
"아니."
칼 같은 단답.
"……."
분명 김현우가 원하는 대답이기는 했으나 갑자기 정색까지 하고 칼같이 끊는 것을 보니 괜스레 자존심이 상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칼같이 거절하는데, 대체 왜?"
"너는 나랑 비슷하니까."
"……비슷하다고?"
"그래. 물론 나처럼 완전히 '업' 그 존재 자체로서 있는 건 아니지만 분명 내가 모으고 모아 둔 업을 모조리 얻었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
"그래서 그런 거야, 애초에 나랑 최대한 비슷한 사람이 너밖에 없으니까 너한테 흥미가 끌리는 거지."
"……그게 관심이 있다는 거 아니야?"
"아니야."
"……아, 그래."
"솔직히 내 취향은 너 같은 사람이랑은 조금 차이가 있지. 뭐 그것도 전부 여기에 와서 여러 사람을 구경하고 나서야 생긴 거지만 말이야."
"어이구, 그러셔?"
김현우의 대답에 눈동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내 취향은 너처럼 하루 종일 누워서 하릴없이 있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일어나서 보람찬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좋아."
"전형적인 샐러리맨을 좋아하는 거야?"
"아니, 차근차근 아주 사소한 거라도 자신의 업을 쌓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지."
"……거참 특이한 이상형이시네."
김현우는 그렇게 대꾸하더니 문득 대화의 주제가 다른 것으로 비껴 나갔다는 것을 깨닫고는 주제를 돌렸다.
"아무튼, 여기서 확실히 못 박아 두는데, 너랑 뒹굴 일은 없으니까 이런 짓은 좀 자제해."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거 엄청 비싸게 구네."
"엄청 비싸게 구는 게 아니라 이게 당연한 거라는 생각은 안 드냐?"
김현우의 말에 눈동자는 곧바로 반박했다.
"흐응, 그렇게 지조를 열심히 지키시는 분이 내가 난봉왕의 업 좀 체험해 주라고 줬을 때는 혼자 거기에 몇 주 동안 처박혀 있었나?"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한다고?"
"맞잖아?"
"그건 너 때문이잖아?"
"내가 넣어 준 건 맞지만, 즐긴 건 너 아니야?"
사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요소를 찾지 못한 김현우는 급하게 다른 논리를 내세웠다.
"즐기긴 즐겼어도 그건 내 몸이 아니었잖아?"
논리가 박살 난 마구잡이식 논리를 들이미는 김현우의 모습에 눈동자는 묘하게 식은 눈으로 그를 보며 이야기했다.
"아, 그러셔?"
"아니 잠깐만…… 왜 내가 갈궈야 하는 입장인데 오히려 반대로 변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야?"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자 눈동자는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기했다.
"아무튼 알았어. 보니까 갑자기 자신의 지조를 철저하게 지키는 철벽남이 되어 버린 모양이니까 어울려 줄게."
"몇 번이고 말하지만 어울려 주고 자시고 애초부터 주지도 않을 거였거든?"
"그러니까 어울려 준다는 소리지. 게다가 어차피 좀 있으면 9계층에서 나가기도 할 거고."
"……9계층에서 나간다고?"
김현우의 되물음에 눈동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9계층은 지난 5년 동안 충분히 돌아다니면서 감상했으니까 이제는 다른 곳에 한번 가 보려고."
"다른 곳이라면?"
"지상으로."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말했었지?"
김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 달 전 눈동자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눈동자는 물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그때 대답은 못 들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거야?"
"그때 대답이라니?"
"내가 권유했잖아? 같이 지상으로 내려가자고."
눈동자의 말에 김현우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됐어. 안 그래도 무관에 몇 달 동안 갔다 오는 것도 뭐라고 듣는 판에 지상 내려갔다가 얼마나 바가지 긁히려고?"
"흐음, 그래? 그렇다면 뭐 별수 없지."
"……생각 외로 가볍게 포기하네?"
"뭐 내가 가자고 해서 네가 가지는 않을 테니까. 뭐 거기다가 '지금'일 뿐이니까."
"……지금이라니?"
김현우의 물음에 눈동자는 조금 전의 뚱한 표정을 지우고는 곧바로 묘한 미소를 띠우고 이야기했다.
"그건 네가 날 따라서 지상으로 내려오면 알려 줄게. 그럼 또 언젠가 보자."
"어? 야 잠깐만!"
김현우는 갑작스러운 작별 선언에 당황해서 그녀를 잡으려 했으나.
그다음 순간, 이미 눈동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
김현우는 순식간에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눈동자를 보고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결국 왜 방송에 나가서 그런 거냐고……."
지금까지 했던 말들을 들어 보면 결국 방송에 나와서 그런 말을 할 이유는 전혀 없지 않은가?
"아오……."
김현우는 자신의 스마트폰에 떠 있는 인터넷 창의 인기 검색어를 슥 훑어본 뒤 나지막한 탄식을 흘리고는 이내 전원을 꺼 버렸다.
어차피 고민해 봤자 이미 일은 저질러졌고 더 이상 김현우가 수습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뭐.'
게다가 이미 김현우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와이프들의 민심은 어떻게든 했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외부에서 떵떵거리는 것보다는 자신과 함께 있는 와이프들의 민심이었으니까.
'내가 왜 하지도 않은 일을 이렇게 열심히 설명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우는 괜스레 머리를 긁적이고는 아까 전 미령의 표정을 떠올렸다.
이제 막 잠에서 깨서는 김현우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지만 왠지 굉장히 실망이라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모습.
"쯧……."
그것을 생각하니 눈동자를 향한 적개심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으나 딱 이정도 선까지는 질 나쁜 장난 선에서 넘어갈 용의가 있었다.
……뭐 어차피 결국 막지도 못했고.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 오후에 있을 하나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437화 외전 15. 김현우의 일상 (3)
이탈리아 파리에 있는 굉장히 고풍스럽고 유명한 레스토랑 '구스토 사르도라'
바깥의 해변이 보여 굉장히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곳에서 김현우는 어디론가 전화하고 있는 하나린을 느긋한 표정으로 마주 앉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시선을 잠시간 받고 있던 하나린은 이내 스마트폰을 내려놓곤 질문했다.
"왜 그렇게 빤히 바라보세요, 서방님?"
"뭐, 그냥 '새삼스레 많이 바뀌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하나린은 순간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제가요?"
"응, 최근에는 꽤 팔다리도 자주 드러내고 다니니까 말이야."
김현우의 말에 하나린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묘하게 감동이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경을 안 쓰시는 척 해도 전부 보고 계신 거였네요?"
"……내가 언제 신경을 안 썼다고 그래?"
그냥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김현우는 그렇게 뒷말을 남기며 하나린이 입고 있는 옷을 슥 훑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보라색의 원피스.
패션 감각이 '전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없는 김현우의 눈에 하나린이 입고 있는 것은 그저 보라색 원피스였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디자이너들이 하나린의 오더로 인해 바로 오늘 하루 있을 데이트를 위해 만들어 낸 옷이었다.
허나 서술했듯 패션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김현우는 그 수수한 원피스 속에 들어가 있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심미적인 패턴이나 은밀한 모습보다는 그녀가 짧은 옷을 입었다는 것에 더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김현우는 탑 안에서나 밖에서 그녀가 팔 다리가 드러나는 짧은 옷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뭐 이미 볼 건(?) 전부 본 사이지만. 아무튼 그녀가 짧은 옷을 입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어째서 사시사철 온몸을 가릴 수 있는 옷을 선호하는지에 대해서도 김현우는 잘 알고 있다.
아니, 잘 알고 있는 것을 넘어서서 아주 잘 알고 있다.
'……개새끼들, 지금 생각해도 열 받네.'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연스레 그때를 회상했다.
아마 시기상으로는 미령을 떠나보내고 나름대로 중2병 티는 전부 벗어 던진 뒤, 한참 탑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을 때쯤이었던 것 같다.
'60계층이었나……?'
튜토리얼 탑에는 매 회차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헌터가 되기 위해 탑을 오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헌터가 되기 위해 탑을 오른다기보다는 그 탑에서 빠져나가고 싶기에 탑을 오른다.
허나 탑에 소환되는 모든 사람이 탑을 빠져나가기 위해 오른다고 해서 모두가 탑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탑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죽고, 소수만이 그 탑에서 빠져나가 헌터가 된다.
물론 지금 같은 경우야 애초에 국가 차원에서 모든 시민에게 의무적으로 튜토리얼 탑에 대한 사전 공부를 시키는 터라 옛날보다는 생환 확률이 높긴 했으나 그래도 사상자가 심심찮게 나온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탑에 들어간 이들 중에서 20%만이 빠져나와 헌터가 된다고 할 정도로 '헌터'가 될 확률은 극악이었다.
아무튼, 옛날에는 탑에 끌려 들어가는 그 순간 생환율이 낮다 보니 탑에서는 꽤 여러 가지 일이 벌어졌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여러 가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일들이 판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탑에 들어와 모인 사람에 따라 그런 일의 회차별 발생 빈도가 나름 조절되기는 했으나 그런 비윤리적인 일들은 절대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사실상 탑 안은 그 어떤 법에도 구애받지 않는, 말 그대로 무법지대인 곳이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서방님?"
"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생각하다 그런 말을 내뱉고서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하나린과 김현우의 첫 만남은 그리 유쾌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김현우와 하나린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거나, 그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던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점의 김현우는 컨셉질을 하는 것도 지겨워져서 혼자 여기저기 죽치고 다닐 때다 보니 애초에 하나린과 갈등이 생길 일 자체가 없었다.
다만, 그녀에게는 굉장히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
김현우가 하나린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같이 탑을 오르던 남자들에게 안 좋은 일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으니까.
그가 저도 모르게 슬쩍 시선을 돌려 하나린을 바라보자 그녀는 묘하게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사실 그때는 서방님께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는 못했죠."
"미안."
김현우는 괜스레 하나린에게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 같아 사과했으나 그녀는 슬쩍 고개를 젓고는 이야기했다.
"아뇨, 괜찮아요, 서방님. 사실 그것 때문에 탑 밖으로 나와서도 트라우마에 걸려 있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그 상황이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뭐……?"
그녀의 말에 김현우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슬쩍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나린은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만약 그때 그 새끼들이 저를 해하려 들지 않았으면 서방님과의 인연도 없었을 테니까요."
"뭐, 그것도 그렇긴 한데……."
확실히, 그녀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때의 김현우는 탑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절망감과 현타가 지독하게 왔었던 터라 탑을 오르는 헌터들에게는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던 때였으니까.
만약 김현우가 아무 생각 없이 탑을 오르고 있던 그때, 하나린이 그 남자들에 의해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움직이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역시 좀 안 좋은 추억 아니야?"
김현우가 생각을 끝내며 조심스레 묻자 하나린은 묘하게 고개를 젓곤 이야기했다.
"분명히 안 좋은 추억인 건 맞지만,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그런 일이 있지 않았다면 서방님과 연이 닿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살짝 웃음을 짓곤 대답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최근에는 그때 그 상황을 만들어 준 새끼들한테 감사하고 있답니다."
"……트라우마까지 걸렸으면서?"
김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자 하나린은 미소를 유지하며 슬쩍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건 서방님과의 연을 만들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한없이 작은 것이라고 생각되는걸요? 게다가 이제는 그 트라우마도 어느 정도 던져 버렸고요."
무엇보다-
하나린은 들었던 팔을 슬쩍 자신의 입술에 대며 물었다.
"결국 제 처음은 서방님이 가져가셨으니까요."
후후 웃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하나린을 보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낯간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그냥 그런 일 없이 밖에서 만났으면 그런 트라우마도 없었을 거 아니야?"
"뭐, 어떻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지만 저는 역시 서방님과 탑 안에서 있던 추억을 버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하나린의 말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예전을 회상했다.
정확히는 하나린을 그 녀석들로부터 구한 뒤의 기억을.
'……오히려 처음에는 나를 굉장히 경계했던 것 같은데?'
실제로 김현우가 하나린을 맨 처음 구조해 주었을 때, 그녀는 김현우를 굉장히 경계했다.
정확히 말하면 김현우를 경계했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모든 것을 경계하는 듯했다.
그러나 김현우는 이미 그녀를 자신이 평소에 머물던 곳으로 데려왔던 터라 다시 내보내기도 그렇기에 챙겨 주었고 어느 순간부터 하나린은 슬슬 김현우에 대한 경계심을 풀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김현우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챙겨 주는 터에 하나린의 경계심이 풀린 것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뭐, 그는 딱히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챙겨 줬다기보다는 안 그래도 탑에서 빠져나가지 못해 지독한 현타가 오던 도중 우연찮게 연이 닿게 된 그녀를 챙겨 준 것뿐이었다.
……사실 그건 변명이고, 좀 깔끔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외로워서 그녀를 챙겨 준 것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김현우 혼자 생활해 왔다면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허나 그는 이미 탑에서 생활하며 자신이 억지로 제자로 만들었던 미령과 함께 지낸 전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로움을 느꼈고, 그렇기에 하나린을 잘 챙겨 준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그녀의 경계가 풀어진 시점부터 김현우는 하나린과 탑 안에서의 생활을 지속했다.
언젠가는 김현우가 미령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를 수련시키기도 했었고,
오히려 미령에게 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나눌 때도 있었다.
허나 거기에서 기묘했던 것은 김현우나 하나린 모두 탑 외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하나린이 나름대로의 수련을 통해 혼자서도 탑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상황이 되었음에도 김현우에게 탑을 빠져나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고.
반대로 김현우도 그녀가 탑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린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뭐…… 결국 나중에는 김현우가 괜히 하나린을 붙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결국 내보내기는 했으나, 아무튼 그와 그녀의 탑 생활이 기묘하기는 했다.
그리고 김현우 같은 경우는 오히려 지금 하나린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적어도 김현우의 시선에서는 하나린이 자신 때문에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추억이야?"
김현우의 질문.
그에 하나린은 미소를 지우고 묘하게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서방님은 저희 둘만의 추억이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솔직히, 나는 네가 나 때문에 나가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아, 그건 맞아요."
하나린의 물음에 김현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럼 강제로 있었다는 거잖아?"
"네? 왜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건가요?"
"아니, 나 때문에 있던 게 맞다며?"
김현우의 물음에 하나린은 오히려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
그에 마찬가지로 김현우도 고개를 갸웃거리기를 잠시.
레스토랑의 메인 디쉬가 차려질 때까지 계속된 둘의 갸웃거림은 하나린의 웃음을 시점으로 깨졌다.
"풋."
"?"
가벼운 웃음.
그에 김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다시금 뚱한 표정 대신 입가에 미소를 걸고는 답했다.
"네. 저는 서방님 때문에 있었던 게 맞아요."
다만-
"저는 어디까지나 제가 원해서 남아 있던 거예요."
"……네가 원해서?"
"네. 어디까지나 제 생각과 제 의지대로, 밖보다는 서방님의 옆에 있는 게 훨씬 더 좋고 행복했으니까 남아 있던 것뿐이에요."
이걸로-
"대답이 되었을까요? 서방님?"
하나린의 대답과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에 김현우는 또 한 번 손으로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438화 외전 16. 김현우의 일상 (4)
패도 길드와 암중 길드로 인해 완전히 재개발 되어 버린 멕시코시티는 현재 국제적인 관광지로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패도 길드와 암중 길드가 합작으로 만들어 낸 멕시코시티의 전경은 전 세계인의 눈을 홀리기에는 충분했으니까.
거기에다 없는 것 또한 없었다.
끝내주는 풍경? 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노래가 울리는 클럽? 있다.
힐링을 취할 수 있는 동양풍의 호텔? 있다.
사시사철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하루마다 수백억의 돈이 왔다 갔다 하는 카지노? 있다.
멕시코시티는 그야말로 없는 게 없을 정도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휴양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타워였다.
별 다른 이름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령과 하나린이 '김현우 타워'로 지으려던 것을 그가 어떻게든 막아 결국 아무런 이름도 없이 타워라는 밋밋한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었으나.
"……."
아무튼 그런 밋밋한 이름과는 다르게 '타워'는 관광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타워의 옥상.
단 네 명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은 그곳에서, 김현우와 하나린은 멕시코시티의 정경을 보며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으, 이거 진짜 비싼 와인 맞아?"
김현우가 인상을 찌푸리고 자신이 들고 있던 와인을 바라보며 이야기하자 하나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네, 당연하죠. 아마 시중에서 억 단위는 가볍게 넘을 걸요?"
"고작 이게?"
김현우가 글라스에 담긴 와인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바라보자 하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제가 알기로 이 와인은 유럽에 있는 S급 던전인 '와인 창고'에서 가져온, 굉장히 오래 숙성된 와인이거든요."
"거참 돈 벌기 쉬운 S급 던전도 있네."
김현우가 쯧 하며 와인이 담긴 글라스를 내려놓자 하나린은 싱긋 웃으며 이야기했다.
"음…… 그럼 우선 처리할까요?"
"……응? 뭘 처리해?"
"당연히 이 와인을 여기에다 놔 둔 사람이죠."
"……어째 너는 가만 보면 변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변한 것 같지를 않네."
김현우가 혀를 내두르자 하나린은 여전히 미소를 간직한 채 이야기했다.
"그럴 리가요. 저는 꽤 많이 변한걸요?"
"……우선 손동작으로 데스 사인을 보내는 건 그만 둬."
"서방님이 원하신다면요."
김현우가 이야기하자 하나린은 웃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들어 올렸던 엄지를 그대로 회수했고, 그는 이 타워 어딘가에 있을 남자의 목숨을 구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이야기했다.
"너는 딱히 그래 보이지 않는데 어떨 때는 너무 가차 없는 면이 있더라."
그의 말에 하나린은 음 하는 소리를 내곤 이야기했다.
"저도 언제나 그러는 건 아니에요."
"……그래?"
"당연하죠. 아까 전에 파리에서 이곳으로 넘어 왔을 때, 길드원이 실수했었잖아요?"
"실수……? 아, 그거?"
김현우는 아까 전을 회상했다.
하나린의 낯부끄러운 말을 듣고 난 뒤,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모두 해결한 둘은 곧바로 순간이동 장치를 이용해 멕시코로 넘어왔다.
그중에 있었던 자그마한 트러블.
아니, 트러블도 아니었다.
그저 순간이동 장치를 준비했던 길드원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대충 3~4분 정도 멕시코로 오는 게 늦어졌을 뿐이다.
"뭐, 그렇긴 했지?"
"봐요. 그쵸?"
하나린의 말을 순간 이해하지 못한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묘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설마 그걸 지금의 예시에 가져다 대는 거야?"
"당연하죠? 그때는 무려 4분 32초나 늦었는데 그런 거니까요."
"……고작 4분 정도인데?"
"서방님, 고작 4분 정도라니요? 저희 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몇 시간도 없는데 그중에도 4분 정도면 굉장히 긴 시간이죠."
하나린의 말에 김현우는 '어제도 둘이서 뒹굴뒹굴했잖아.'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그 말을 다시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애초에 하나린이나 미령이나 한번 삐지면 그렇지 않은 척 해도 사람을 말려 죽이기 때문에 되도록 삐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게 중요했다.
아니, 사실 김현우가 굳이 배려하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그의 몸은 그간의 학습을 통해 자연스레 입을 다물게 했다.
"뭐…… 그래."
"그쵸? 게다가 애초에 오늘 이곳에 온 것도 서방님의 버킷리스트 때문에 온 거니까요."
"아. 버킷리스트?"
"네."
김현우는 다시금 미소를 짓는 하나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버킷리스트.
그것은 바로 하나린이 탑 안에 있을 때 김현우가 생각 없이 이야기했던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기억해 만든 것이었다.
"이번에는 뭔데?"
김현우의 물음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고층 빌딩에서 느긋하게 와인을 한 잔 마시면서 새벽녘에 폭죽이 터지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하셨죠."
"……그거 참 디테일하게 기억하고 있네."
"그럼요. 서방님이 탑에서 하신 말씀들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머릿속에 남아 있답니다."
"그러냐……?"
"그럼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 이제 서방님의 버킷리스트는 이걸 빼면 딱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
하나린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끄덕였다.
아마 그녀도 알고 있겠지만, 김현우는 탑 안에서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까지는 아니지만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탑 안에서 느긋하게 수다를 떨며 나오는 대로 뱉어 대던 아무 말 대잔치를 기억하는 것이 신기했다.
물론 그중에서는 김현우도 가끔 가다 기억하는 것이 있었으나 하나린은 정말 거의 대부분의 내용을 기억하듯 이렇게 김현우가 탑 안에 있을 때 했었던 말을 한 번씩 체험시켜 주었다.
'……저번에는 '카지노에서 100억 쓰기'였지.'
김현우는 하나린과 함께 카지노에 갔을 때를 떠올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100억 쓰기가 그렇게 쉬울 줄이야.'
아니, 정확히는 100억 쓰기가 아니라 100억 잃기나 다름없었다.
김현우는 도박을 하는 순간부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귀신같이 돈을 잃었으니까.
물론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운이 좋아 한두 판 정도는 이기기도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다른 판은 '전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기지를 못했다.
'그 이외에도…….'
지난 5년간, 김현우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버킷리스트를 하나린에 의해 체험할 수 있었다.
펑-!
그렇게 생각하던 중 들리는,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
"아, 시작했네요."
하나린의 말에 그대로 시선을 돌린 김현우는 곧 시커먼 하늘에 형형색색의 폭죽이 터져 나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돈을 도대체 얼마나 퍼부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폭죽은 조금의 텀도 없이 하늘로 올라 새 형형색색의 불꽃을 지체 없이 뽐내고 있었고, 김현우는 그것을 멍하니 감상하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고마워."
김현우의 한 마디. 그에 순간 하나린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생각해 보니까 고맙단 말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김현우의 중얼거림과도 같은 말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는 순식간에 미소를 깨뜨리며 허둥댔다.
"가…… 갑자기 그런 말씀을 이런 타이밍에……?"
최근에는 그에게 미소만을 보여 주었던 하나린의 표정이 드물게 무너진 것을 보며 김현우는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이런 타이밍이니까 하는 거야."
그 말에 하나린은 펑펑 터지는 폭죽 사이로 보이는 김현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고, 그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김현우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린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결국 김현우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탑 안에서 무심결에 말했던 내용들을 모조리 기억했고, 그것을 체험시켜 주고 있었다.
한 마디로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
사실 김현우는 이전부터 몇 번이고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아무리 결혼을 하고 볼 거 다 본 사이라고 해도 그에게 있어서 고맙다는 말은 굉장히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그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자주 나오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으……."
미소가 사라지고 왠지 모르게 조급함이 들어찬 하나린의 표정을 보며 김현우는 지금 상황이 레스토랑에 있을 때와는 정반대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린은 김현우의 말에 당황하고 있고, 김현우는 그런 하나린을 보고 있다.
'이런 느낌이었나?'
하나린은 가끔 가다 자신이 당황할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상황을 일부러 연출하고는 했기에 김현우는 이 상황이 썩 즐거웠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두운 밤을 수놓아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불꽃들이 하나 둘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형형색색의 불꽃들은 서서히 그 숫자를 줄여 가기 시작했고.
펑-!
마지막으로 터진 붉은색의 화려한 불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폭죽은 터지지 않았다.
"끝났네."
다시금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는 김현우.
"아뇨, 아직 안 끝났어요."
허나 그런 김현우의 말에 곧바로 반박하는 하나린을 보며 그는 다시금 시선을 돌렸고, 곧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허둥거리던 표정을 완전히 지운 채 다시 원래처럼 잔잔한 미소를 띠우고 있는 하나린.
그 모습에 조금 아쉬움을 느끼며 김현우는 물었다.
"뭐가 안 끝나? 혹시 추가적으로 더 터져?"
"서방님, 혹시 서방님은 탑에 있을 때 본인이 말하셨던 버킷리스트를 기억하고 있으신가요?"
김현우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역으로 질문을 던지는 하나린의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몇 개는 기억하고 있긴 한데 사실 전부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
그의 말에 하나린은 미소를 짓고는 이야기했다.
"사실 제가 오늘 보여드렸던 폭죽을 끝으로, 서방님의 버킷리스트는 전부 끝났어요."
"……그래?"
"네. 그러니까 서방님은 이제 제 버킷리스트에 어울려 주셨으면 해요."
하나린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버킷리스트?"
"아, 걱정하진 마세요. 어차피 버킷리스트라고 해도 제가 서방님과 할 버킷리스트는 딱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뭐, 그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
가볍게 이야기하는 하나린의 말에 마찬가지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김현우.
그에 하나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김현우의 손을 잡고는 그대로 테라스의 안쪽으로 들어가.
스륵-
옷매무새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당황했다는 듯 입을 여는 김현우.
그에 하나린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갑자기가 아니에요. 그도 그럴 게, 서방님이 제 버킷리스트에 어울려 주신다고 했잖아요?"
"……그 버킷리스트라는 게-"
김현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자신의 입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는 하나린.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 흐를 동안 안쪽 방에서는 농밀한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고.
"제 버킷리스트는-"
이내 김현우의 입에서 떨어진 하나린은-
"아기 만들기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입술을 겹쳤다.
439화 외전 17. 김현우의 일상 (5)
옛날에서 현대로.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세상은 점점 발전했다.
그리고 그렇게 발전한 세상 속에서도 야차가 현대 문명의 결정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풋."
-컴퓨터였다.
아니, 정확히는 컴퓨터보다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인터넷이었다.
항상 입고 있던 동양풍의 한복이 아닌, 마치 김현우와 작정하고 깔 맞춤을 한 것 같은 검은색 츄리닝을 걸친 채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는 현재 유튜X에 올라와 있는 웃긴 영상을 보며 혼자 킥킥거리고 있었다.
"정말 재미있구나."
유튜브 영상을 바라보며 킥킥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 야차.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분명 어둡기만 했던 창문에 슬슬 새하얀 빛이 들어올 때쯤이 돼서야 야차는 영상을 보는 데 밤을 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나, 그녀는 날이 밝아진 것을 기점으로 유튜브를 끄고 다른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곳은 바로 요즘 커뮤니티 사이트 중에서도 꽤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헌터&사이드'라는 커뮤니티였다.
사이트에 접속하자 주르륵 보이기 시작하는 글들.
그중 몇 개는 글의 제목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저급한 말들이 써진 것도 보였으나 야차는 그런 말들이 너무나도 익숙한 듯 그대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애초에 헌터&사이드는 익명으로도 게시판에 글을 쓸 수 있는 사이트라 그랬다.
야차는 그중에서도 가장 위에 있는 글을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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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멕시코시티에서 김현우랑 하나린 봄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작성자 : S급이되고싶은남자
(사진)
[대충 하나린과 김현우가 타워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사진]
어제 아무생각없이 휴양지 왔는데 타워로 들어가는 김현우랑 하나린봄, 김현우는 TV에서 보던 것 보다 좀 덜생김 ㅋㅋㅋㅋㅋ 그런데 시부레 그 옆에 걸어가던 하나린은 원피스 입고 있었는데 ㄹㅇ 역대급으로 존나게 예쁘더라. 진짜 보는 순간 가슴이 웅장해졌었다 ㅋㅋ.
댓글 1323
오존층 : 김현우는 실물로 몇 번보기는 했는데 내가 하나린도 봤었거든? 근데 맨날 안꾸미고 가죽재킷만 입고 다녀서 몰랐는데 존예였네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ㄴ 리루리로 : 헉헉헉 나린누나 나 쥬X가 이상해-!
ㄴ 정병병도 : 이새끼 김현우한테 뼈도 안남기고 뒤지고 싶어서 이런글 쓰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로 캡쳐해서 암중길드에 보냈음 ㅅㄱ
ㄴ 리루리로 : ㅋㅋㅋ병신 컨셉인데 그걸 신고하겠다고 하네 ㅋㅋㅋ
ㄴ 리루리로 : 신고했냐……?
ㄴ 리루리로 : 진짜로……??
ㄴ 리루리로 : 아니지?
ㄴ 정병병도 : ㅋ.
ㄴ 리루리로 : ??????? 야 이 개새끼야 살려줘!!!!!!!!
23세김찬순 : 와ㅋㅋㅋㅋㅋ 이거 실화인가 진짜 레전드네. 하나린 왤케 예쁘냐 ㄹㅇ
ㄴ 정찰병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팬카페 개설 바로 해버렸구요~
ㄴ 오링 : 이미 팬카페 있다. 주소 줄테니까 들오셈, 이 사진하나로 회원수 2만명 증가한거 실화냐 ㅋ
ㄴ 오리너구리가먹고싶다 : 이새끼들 유부녀 팬카페를 개설하고 쳐 앉아 있네? 싸이코들이세요????
ㄴ 23세김찬순 : 내 여친보다 나음 ㅅㄱ.
ㄴ 오리너구리가먹고싶다 : ?
ㄴ 정찰병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레전드.
쥬시케잌 : 와 하나린 진짜 이쁘다. 하지만 역시 나는 내 여친이 좋다. 나랑 성격이나 모든 면에서 잘 맞고 요즘에는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자주듬 ㅋㅋ
ㄴ 인생설계사 : 그 위기를 잘 넘겨야 네 인생이 좋아질거다.
ㄴ 조롱이떡 : 그래서 누물보?
……
……
…….
……
……
그 아래로 수 없이 써져 있는 댓글.
그러나 야차는 중간부터 글을 읽다 말고 다시 시선을 올려 하나린과 김현우가 타워 안으로 가는 장면을 빤히 바라봤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야차는 곧 빤히 바라보던 사진과 컴퓨터를 꺼 버리고는 자신의 뒤에 있는 침대에 뛰어 들었다.
"엌."
침대에 뛰어들자마자 이불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
"일어났느냐?"
야차는 미소를 지으며 이불 아래에 있는 무엇인가를 깔아뭉개며 입을 열었고.
"……누구 덕분에 한 순간에 잠에서 깼네."
곧 야차의 몸 위에 깔려 있던 김현우는 그대로 이불을 걷으며 하품했고, 야차는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 번 더 하자고?"
곧바로 자신의 옆에 누워 몸을 밀착한 야차를 보며 김현우는 그렇게 물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이제 슬슬 나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니라.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느냐?"
"뭐…… 그건,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빨리 나가자꾸나."
야차는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씻겠다는 말과 함께 곧바로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런 야차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김현우는 곧 한 번 더 하품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몇 시지?'
그 와중에 드는 생각에 김현우는 옆에 있던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이 정도면 늦게 일어난 것도 아니기에 김현우는 느긋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야차의 방에서 나갔다. 곧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 멍하니 꺼진 TV를 바라보던 그는 미령과 하나린이 집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부터 야차였나?'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어젯밤부터다.
"흐음."
3주 전, 그러니까 김현우가 하나린과 타워에서 밤을 지새운 그 뒤로, 그녀들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일주일씩 독점하는 계약을 맺은 듯했다.
아니, 어찌 보면 이미 다들 묶여 있는 사이라 독점이라는 말도 조금 묘하기는 한데…… 아무튼 그 덕분에 김현우는 뜻밖의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당장 그의 입장에서는 하루마다 다수를 상대하고 있었던 입장이었으니까.
'……그것도 2주 뒤면 곧 끝나겠지만.'
와이프들에게 듣기로 우선 1주일씩 독점하는 것은 맞는 듯했으나 지속하지는 않을 것 같기에 아마 야차의 순서와 이어지는 미령의 순서가 끝나고 나면 이 안정적인 밤도 끝이었다.
'그러니까 최대한 즐겨 놔야지.'
물론 이 의미가 그녀들과 함께하는 밤이 싫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싫은 것과 힘든 것은 다르지 않은가?
"……."
뭐, 그런 거였다.
"준비는 끝났느냐?"
김현우가 생각을 끝내고 느긋하게 TV를 감상하고 있자 어느새 샤워를 마친 야차가 소파에 앉아 있는 김현우의 머리에 붙으며 물었다.
김현우는 물기에 젖은 야차의 머리카락이 자신의 눈가를 간지럽히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아니, 이제 슬슬 씻어야지."
"흐음, 내가 씻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게냐?"
"잠도 깰 겸 TV 좀 봤어."
"그러느냐."
대답과 함께 김현우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야차의 팔.
"뭐어, 나의 지아비가 잠에서 깨기 위해 TV를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슬슬 씻는 게 어떻느냐?"
야차의 부드러운 목소리.
……그런 야차의 권유에 김현우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실을 향해 이동했다.
그렇게 김현우가 밖으로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친 뒤.
"그래서, 어디를 가는데?"
"흐응, 궁금하느냐?"
"……조금?"
김현우의 대답에 야차는 기묘한 미소를 짓고는 이야기했다.
"바로 알려 주는 건 재미가 없으니 우선은 그냥 따라와 보지 않겠느냐?"
"뭐…… 그렇게 말한다면야."
"고맙느니라."
김현우의 수긍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답한 야차는 그를 데리고 저택 밖에 있는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정원의 중앙에 도착한 그녀는 품에서 영롱한 빛을 내뿜는 구슬 하나를 꺼냈다.
"그건 뭐야?"
김현우의 질문.
"뭐, 우선 보고 있거라."
허나 야차는 그런 김현우의 질문에 제대로 답해 주지 않은 채 자신이 들고 있는 구슬을 정원의 중심에 던졌고.
우우우웅-!!
야차가 내던진 구슬은 땅에 떨어지기 직전 공명음과 함께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쿠그그그긍-!
엄청난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주변의 마력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한 구슬.
김현우는 슬쩍 시선을 돌려 야차를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구슬을 보고 있었기에 그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우우웅-!!
어느 순간, 계속해서 마력을 흡수하던 구슬의 주변으로 마법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구슬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아아악-!!
순식간에 정원의 중심에 생겨난 거대한 마법진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구슬이 있는 곳에 겹치며 하나의 포탈을 만들어 냈다.
"그럼 가자꾸나."
포탈이 만들어지자마자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들이미는 야차.
김현우는 야차가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으나 곧 별다른 의심 없이 포탈을 향해 걸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야차가 연 포탈을 들어간 다음 순간.
"!"
김현우는 무척이나 거대한 궁전을 볼 수 있었다.
그래, 새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궁전을.
"……와."
그 궁전의 위용은 딱히 예술이나 디자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김현우라도 저도 모르게 감탄을 토해 내게 할 정도로 멋지고 아름다웠다.
분명 하얀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궁전이라 어색함이 느껴질 법한데도 불구하고 김현우의 앞에 놓인 궁전은 어색함이라고는 한 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신성한 느낌이 들 뿐.
김현우가 멍하니 궁전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서 가자꾸나."
그는 야차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디야?"
또 한 번의 질문.
그러나 야차는 했던 말을 번복할 생각은 없는지 그저 미소를 지으며 김현우의 팔에 팔짱을 끼곤 이야기했다.
"우선은 들어가서 알려 주도록 하겠느니라."
그와 함께 걸음을 옮기는 야차.
김현우는 엉겁결에 야차의 손에 이끌려 궁전을 향해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그그그그그그긍─!!!!
김현우와 야차가 궁전에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둘의 행차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열리기 시작하는 문.
야차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듯 별다른 리액션 없이 스무스하게 궁전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곧 새하얀 길이 야차와 김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꾸나."
아까와 같이 말하며 걸음을 재촉하는 야차.
김현우는 이제 야차가 말해 주기만을 기다리며 그녀의 뒤를 쫓았고, 마침내 그 기나긴 통로를 전부 걸어 나왔을 때.
"오랜만이군. 야차."
"너도 별다를 바 없는 모양이로구나."
김현우는 거대한 공동 내부에 있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뭐,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어차피 우리는 이 세계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만 하는 존재이거늘."
"나는 아니지 않느냐?"
"그건 네가 지나치게 망나니라 그렇지 않나?…… 그보다, 그 남자는?"
"내 전에 혼자 올 때 말하지 않았느냐? 내 지아비니라."
비단옷을 입고 있는 남자의 질문에 가볍게 답하는 야차.
그에 남자는 순간 놀란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으나 이내 표정을 관리하고는-
"……우선 묻고 싶지만 자기소개부터 하겠느니라. 이 몸은 팔부신왕(八部神衆) 제석천(帝釋天)이라 하느니라."
-그렇게 이야기했다.
440화 외전 18. 김현우의 일상 (6)
김현우도 감탄할 정도로 엄청난 크기를 가지고 있는 새하얀 궁전.
그 안에서 김현우는 자신을 제석천이라고 소개한 남자를 바라봤다.
척 보기에 과해 보이지 않는 묵색의 비단옷을 입고 있는 그는 이내 김현우를 빤히 바라보고는 놀랍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럼 초면에 실례이긴 하나, 질문을 좀 해도 되겠는가?"
제석천의 물음.
김현우는 야차를 한번 돌아보고 난 뒤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제석천은 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한번 휘저었다.
"우선은 앉도록 하게. 내 너무 경황이 없었군."
손을 한번 휘젓자마자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듯 생긴 의자와 탁자.
그것을 보며 김현우와 야차는 각각 자신의 뒤에 만들어진 의자에 앉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제석천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자네가 정말로 저 망나니와 배를 맞춘-"
빡!
제석천의 말이 전부 끝나기도 전에 들린 소름끼치는 소음은 그의 머리에서 터져 나왔고, 곧 의자에 앉아 있던 제석천의 몸은 순간적으로 하늘을 날다-
퍼석!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말을 너무 함부로 한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 게냐?"
동시에 들리는 야차의 살벌한 목소리.
그에 제석천은 분명 높이 날아 땅바닥에 처박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에 앉으며 이야기했다.
"흐음, 옛날에는 망나니라는 소리를 들어도 오히려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나? 갑자기 때리다니 어이가 없군."
"그때랑 지금이랑은 상황이 다르지 않느냐?"
"흐음, 그런가? 내가 보기에 맨날 네 동생하고 광란의 밤을 달렸-."
빠아아악!
다시 한번 저 멀리 처박히는 제석천의 몸.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음을 짓고 있던 야차의 얼굴은 딱히 바뀌지 않았으나 그사이에는 자그마한 빡침이 담기기 시작했다.
"내 지아비가 오해할 만한 소리는 하지 말라고 했지 않았느냐?"
"흐음…… 난 사실 그대로…… 아니, 아니다."
야차의 말에 그렇게 대답하려던 제석천은 이내 그녀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급히 말을 바꾸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흠흠……."
목소리를 정리하며 다시금 근엄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는 제석천.
허나 이미 야차에게 몇 번이고 후려 맞는 것을 본 김현우는 더 이상 제석천이 처음 봤을 때처럼 신비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인가?"
"……뭐, 맞긴 한데……."
제석천의 질문에 답해 주는 김현우.
그에 제석천은 진심으로 놀라워하며 야차를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지?"
"……? 무슨 생각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망…… 이 아니라, 야차와 혼약을 올린 거냐고 물은 것일세."
"……무슨 생각이라니?"
김현우는 그렇게 대답하며 자신이 야차와 결혼할 때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떠올려 봤으나 딱히 특별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어쩌다 보니 갈 때까지 갔고, 그렇기에 결혼했다.
'……어째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좀 로망이 없는 것 같긴 하네.'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어차피 그때는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결혼하기는 했으나 지금은 꽤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그때 타오르지 않아서 최근에 와이프들이 더 예뻐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 있기에 김현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뭐, 그냥 자연스럽게 결혼한 것 같은데……?"
김현우가 그렇게 말하자 제석천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허허……."
이내 묘하게 탄식하듯 김현우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차에게 꿰이다니, 정말로 복이 없는 사내…… 큼큼, 아니, 지금 이 말은 없던 것으로 하지. 잊어 주게나."
말을 이어 나가다 급하게 입을 다무는 제석천.
김현우는 보이지 않아도 야차가 앉아 있는 곳에서 느껴지는 적의에 자연스레 어깨를 으쓱였고, 그에 슬쩍 눈치를 보던 제석천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야차에게 호감이 갔던 이유는 무엇인가?"
"……호감이 가는 이유?"
"설마, 없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래도 혼약을 올린 사이인데 그 정도가 없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런가?"
그렇게 말하며 김현우를 바라보는 제석천.
김현우는 이제 슬슬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하며 시선을 돌려 야차를 바라보았으나.
"……."
……아무래도 이번 질문은 야차 본인도 궁금해 하는 듯했기에 김현우는 야차에게 호감이 갔던 이유를 생각해 봤다.
그렇게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음, 그렇게 특징적으로 무엇 때문에 호감이 갔느냐고 물어보면,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응? 그렇다면 딱히 호감 가는 요소도 없는데 혼약을 올렸다는 건가?"
제석천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나는 내가 싫어하는 건 뒤져도 못하는 사람이거든."
"그럼?"
"그냥 어느 순간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호감이 생겼다…… 정도로 이야기하면 될 것 같네."
김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시선을 돌려 야차를 바라보았다.
'흠, 통과인가.'
야차의 표정이 썩 나쁘지 않은 것을 보고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뿌듯한 마음을 느끼면서도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제 슬슬 나도 질문을 했으면 하는데."
"해 보게."
김현우의 말에 왜인지 모르게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제석천은 이내 얼굴에서 그 표정을 지우고는 손을 내밀었고 김현우는 곧바로 질문했다.
"그래서, 나는 왜 여기에 온 거야? 아무래도 야차가 내 소개를 해 주려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나한테는 이야기를 안 해 줘서 말이야."
김현우가 슬쩍 야차를 보며 이야기하자 제석천은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아.'하는 소리를 내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이야기도 제대로 해 주지 않고 데려온 건가?"
제석천의 물음에 야차는 괜스레 흠흠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이야기했다.
"그냥 너는 내가 부탁한 것만 잘 해 주면 되느니라."
"허허, 역시 예전의 망나니가 아니랄까 봐. 뻔뻔하기가 그지 없…… 지만, 네 부탁이니 들어주도록 하겠다."
제석천은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이내 김현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가 직접 네게 이유를 말해 주지는 못할 것 같군."
"……아, 그러셔?"
"뭐,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네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제석천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을 한번 휘젓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손바닥 위로 푸르른 구체를 하나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우우웅-
마력의 공명음을 내며 순조롭게 제석천의 손에 모이기 시작한 마력.
김현우는 도대체 제석천이 무엇을 하려나 싶어 야차를 돌아봤으나 그녀는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같은 표정으로 그를 한번 바라본 뒤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끝났다."
제석천의 손 위에 모이던 푸른색의 구체가 완성된 듯 반짝거리는 빛을 내기 시작했고, 곧 제석천은.
"자, 그럼 어디 한번 보고 오거라."
그 말과 함께 김현우에게 자신이 손에 모은 푸른 구체를 던졌다.
그에 김현우는 순간 반응할까 했으나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구체가 딱히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
제석천이 던진 푸른 구체를 맞은 김현우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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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대로 제대로 해 준 게 맞느냐?"
야차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인 김현우를 바라보며 묻자 제석천은 두말할 것 없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며 이야기했다.
"당연하다, 설마 내가 다른 속셈이라도 부릴 줄 알았나?"
제석천의 말에 그가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야차.
그에 제석천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애초에 나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이를 데려와 놓고 의심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니…… 애초에 네가 데려온 저 자는 아마 나와 범천(梵天)이 함께 와서 수작질을 부리려고 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당연한 것이니라."
은근한 자신감을 보이며 대답하는 야차의 모습에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어진 제석천은 혀를 내두르며 이야기했다.
"정말 그 망나니 같던 야차가 맞는 것인가? 실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장면이로다."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는 야차의 말에 제석천은 곧바로 답했다.
"애초에 예전 같으면 네가 저런 것으로 걱정이나 할 것 같은가? 당장 자기 동생을 간헐천에 처 집어넣고도 잘만 돌아다니던 녀석이 말이다."
"그거랑 이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냐?"
"허허, 사랑에 빠지면 바뀐다더니, 그 야차가 이리 변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흥."
괜스레 얼굴을 돌리는 야차의 사나운 반응에도 제석천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내 한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야차는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져 있는 김현우를 안아 들었다.
키 차이가 꽤 나서 그런지 굉장히 어색한 모습.
제석천은 물었다.
"설마 벌써 가려고 하는 건가?"
"여기에 더 있어 봤자 서로 할 이야기도 없지 않느냐?"
"흐음, 이런 모습을 보면 내가 알던 그 개망나니 야차가 맞는 것 같은데…… 거 도통 모를 일이구나."
"……만약 내가 지아비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이 궁전을 통째로 박살 내 버렸을 것이니라."
"뭐, 너무 그렇게 과민반응하지 마라. 어차피 이제 곧 있으면 네 지아비라는 사람도 알게 될 사실 아니냐."
"쯧……."
제석천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야차.
허나 제석천은 그런 야차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아마 그 자는 대충 2~3일 뒤에 눈을 뜰 것이다. 아마 네 지아비라면 조금 더 빠르게 눈을 뜰 수 도 있지만…… 보통은 그 정도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지. 게다가-."
제석천은 드물게 능글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 하-
"원체 살아온 세월이 많지 않-."
빠아아아악!
-지 못했다.
순식간에 궁전 한 구석에 처박히는 제석천.
야차는 그런 그를 보며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김현우를 안고 돌아갔고, 그렇게 그녀가 궁전에서 빠져나간 뒤.
"끄응."
제석천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궁전 한 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앉아 야차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거, 좀 바뀌었나 했더니 지아비가 못 보는 곳에서는 그 성깔이 여전하군."
제석천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주 예전, 지상에 팔부신장이 모여 있었을 때 야차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흐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혼자 지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야차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으로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동생을 지옥 제일 깊은 곳인 간헐천에 처박아 놓고 느긋하게 술을 마시는 야차의 모습이 떠올랐다.
"……."
그 뒤로는 심심하다는 이유로 같은 팔부신장인 아수라와 가루라에게 시비를 걸어 몇 년에 걸쳐 싸움을 벌인 것까지.
"……이제 보니 많이 좋아진 것이었군."
거기까지 생각하던 제석천은 그녀의 성격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해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런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지아비에게 '과거'를 보여주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군."
이내 제석천은 야차가 자신에게 했던 부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전의 통로를 바라봤다.
441화 외전 19. 김현우의 일상 (7)
모든 것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간헐천(間歇泉)의 입구.
"누님 왜 갑자기 저를!"
빡!
"아가리 닥치거라, 어디서 감히 내게 반항하느냐?"
"그…… 그런 게 아니라……!"
"헛소리 하지 말고 반성이나 하고 있거라."
"누…… 누님!? 아…… 안됩니다! 살려 주십쇼! 누님! 누님!!!!!!!!!"
쿠그그그긍-!
영원히 열려 있을 것만 같은 간헐천의 입구가 닫히기 시작하고, 간헐천 너머에 있던 두억시니가 외마다 비명을 지르며 입구 너머를 향해 손을 내뻗었으나.
까드드득!
"끄아아악!"
야차는 입구 너머로 손을 내뻗는 두억시니의 손을 망설임 없이 짓뭉개 버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내 분명 조화를 지키라 했거늘, 천둥벌거숭이처럼 천(天)과 지(地)를 어지럽혔으니 마땅히 그 벌을 받거라."
"그…… 그렇게 따지면 누님도-."
"아가리 닥치거라!"
그런 야차의 말과 함께 완전히 닫혀 버리는 간헐천의 입구와 그 앞에서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쉬는 야차.
그리고.
"흠."
그 너머에서,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는 야차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분명 야차의 과거 모습이라고 생각될 그곳에서, 김현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가 그 모습을 보면 마치 김현우가 그 자리에 정말 있었다고 생각할 정도.
그러나 김현우는 과거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흠……."
-야차의 과거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 도대체 어찌 그리 미련한 짓을 한다는 말이냐…… 나처럼 상황을 봐 가면서 해야 하거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야차의 모습과 함께 세상이 서서히 암전하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김현우를 빼고는 새까맣게 변해 버리는 주변.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시커멓던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고, 그와 함께 다른 이야기가 김현우의 앞에서 흘러 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야차.
그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김현우는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이런걸 보여 주지?'
김현우는 바뀐 세상 속에서 신명 나게 뛰어다니며 전투를 벌이고 있는 야차를 바라봤다.
자신을 향해 몰려들던 요괴들의 머리를 한 손으로 박살 내 버리고, 입가에는 찢어질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야차.
그녀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망설임 없이 다른 요괴들을 도륙 내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야차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
물론 겉모습이 바뀐 것은 아니었으나 제석천이 던진 푸른 구에 맞고 난 뒤 보게 된 야차의 과거 모습은 그녀의 현재 모습과 그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굳이 표현을 해 보자면 지금의 야차는 꽤 느긋하고 중후한 면모가 때때로 보이는데 비해 저 때의 야차는 굉장히 사나워 보인다.
아니, 느낌상으로 사나운 게 아니라 정말로 사나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현재 야차의 일화를 두 눈으로 전부 보고 있었으니까.
'맨 처음에는 요괴였지.'
김현우는 제석천의 마력구를 맞고 맨 처음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굉장히 작은 요괴로서 삶을 시작한 그녀의 모습을.
굉장히 작은 체구로, 자신보다 몇 배는 더 돼 보이는 요괴들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바로 지금, 그녀가 모든 요괴들을 혼자서 학살하고, 야차(夜叉)라는 이름을 얻는 장면까지, 김현우는 그 모든 장면을 두 눈에 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요괴들을 무한하게 학살하고 있는 야차의 모습을 멍하니 감상하던 그 어느 순간.
까드드드득!
야차가 자신의 앞에 서 있던 마지막 요괴를 죽임과 동시에 주변이 다시 칠흑의 어둠 속으로 잠기기 시작했고.
"어?"
그 다음 순간, 김현우는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자각했다.
"일어났느냐?"
김현우는 깨어난 것을 자각하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자연스레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며 자신이 있는 곳이 집의 소파 위라는 것을 깨달았고.
"……일어났어."
곧 김현우는 자신의 옆에서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야차를 보며 멍하니 대답했다.
대답 후의 가벼운 침묵.
입을 우물거리던 김현우는 곧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본 건, 네 과거지?"
그의 물음에 야차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맞느니라. 그래서, 감상은 어땠느냐?"
"……감상?"
"그래, 감상을 묻는 것이니라."
괜스레 묘하게 눈을 빛내며 물어보는 야차의 모습에 김현우는 순간 '이 순간에 대답을 잘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으로 뇌를 풀가동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그는 그냥 솔직하게 느낀 바를 말하기로 했다.
"……솔직히 왜 과거를 보여 줬는지는 모르겠는데, 나쁘지 않았어."
솔직히, 김현우는 야차가 어째서 자신의 과거를 보여 주었는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야차와는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김현우는 야차에게 딱히 그녀의 과거에 대해 캐물은 적도 없었고, 야차도 마찬가지로 과거의 이야기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는 야차가 어째서 자신에게 이렇게 긴 과거를 보여 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흐음, 정말로 모르겠느냐?"
야차의 물음.
그에 김현우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야차는 곧바로 질문을 바꿨다.
"그렇다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소리더냐?"
"응?"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딱히 나쁘지 않았다고."
야차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말 그대로의 의미인데. 애초에 내가 네 과거에 대해 알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네 말은 이참에 내 과거를 알게 되서 좋았다는 의미더냐?"
"뭐…… 그렇지? 모르는 것보다는 알고 있는 게 좋으니까."
"흐응, 그러느냐."
김현우의 답변이 정답이었는지, 야차는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앉아 있는 그의 품속으로 기분이 좋다는 듯 자연스럽게 파고들었다.
그의 품 안에서 꿈틀꿈틀하며 자리를 잡은 야차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를 바라보곤 이야기했다.
"보여 주고 싶었느니라."
"뭐?"
"과거 말이다."
"……갑자기?"
김현우의 물음에 야차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리 갑작스레 내 과거를 보여 주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고, 이참에 기회가 돼서 보여 준 것이니라."
"……그래?"
김현우의 대답에 야차는 그의 양팔을 붙잡아 자신을 껴안게끔 만든 뒤에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알기로, 미령이나 하나린은 튜토리얼 탑에서 만났다고 하지 않았느냐?"
"……뭐, 그랬지?"
"거기다가 그 탑에서 하나린과 미령의 과거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고 들었느니라."
야차의 말에 김현우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미령과 만났을 때는 한참 중2병에 빠져 있던 터라 가끔 가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있었으나 대부분 중2병 감성으로 대답하느라 그 기억이 확실치 않았다.
'뭐…… 그와 반대로 하나린의 과거는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과거 전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 나름대로 중요한 과거들은 전부 알고 있기는 했다.
"그래서 그렇느니라."
"……그래서?"
"그래."
그렇게 대답하며 야차는 왠지 얼굴을 붉히고 머리카락을 괜스레 문지르더니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솔직히, 나 정도 돼서 이런 질투심은 조금 낯부끄럽지만, 조금 질투가 났느니라."
"……질투?"
"그렇느니라. 들어보면 미령과 하나린은 전부 너와 공유하는 과거가 있는 것 아니더냐? 그런데 막상 생각해 보니 나는 너와 마땅히 공유하고 있는 과거가 없더구나.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드니-."
야차는 슬쩍 김현우의 눈을 오른쪽으로 피하며 이야기했다.
"-왠지 뒤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한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으며 야차를 바라봤고.
그런 김현우의 표정에 야차는 괜스레 비죽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흠…… 흠…… 내가 질투를 했다는 게 그렇게 못 미더운 것이냐?"
"음…… 솔직히 말하면 좀?"
김현우의 대답에 야차는 곧 괜스레 삐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으나,
"!"
야차는 곧 자신의 몸을 꾹 끌어안고 머리 위에 턱을 올린 김현우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귀엽게 느껴지네?"
"……흥, 갑작스레 입바른 말을 해 봤자 떨어진 기분이 다시 올라오는 것은 아니니라."
야차의 말에 김현우는 피식 웃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화가 풀리는데?"
그의 물음.
그에 야차는 자신의 몸을 꾹 끌어안은 김현우의 손을 붙잡고는 다시 시선을 위로 올리며 이야기했다.
"내 화를 풀고 싶다면…… 네 과거 이야기를 좀 해 줬으면 좋겠구나."
"내 과거?"
야차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령과 하나린에게 듣기로는 너는 딱히 지금까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깊게 설명한 적이 없다고 들었느니라."
"그래……? 나는 대충 어느 정도는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김현우가 자신의 과거를 아예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렇게 대답했으나 야차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단편적인 이야기를 말하는 게 아니니라."
"그럼?"
"네 과거를 전부 들려주길 원하느니라. 이 내가 아직 한창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준 것처럼 말이니라."
야차의 말에 김현우는 조금 전까지 봤었던 야차의 과거를 떠올렸다.
'확실히…….'
지금의 야차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가 봤던 과거의 그녀는 굉장히 야성적이고 피를 보기 좋아하는 싸움광의 느낌이 강했다.
게다가 그냥 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상대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을 만들기도 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김현우는 딱히 그것이 야차의 부끄러운 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본인은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았다.
"안 해 줄 것이냐?"
김현우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자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야차의 목소리.
"아니."
"그럼 지금부터 들으면 되는 것이냐?"
"뭐…… 그렇기는 한데, 솔직히 너무 기대하지는 않는 게 좋을걸. 애초에 내 이야기는 딱히 재미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그렇느냐?"
"그렇고 말고, 애초에 네 과거처럼 화려한 무언가가 있지는 않아. 그냥……."
김현우는 잠시 생각하다 이야기했다.
"네가 요즘 읽는 판타지 소설들로 치자면…… 1화부터 100화까지 고구마가 연속으로 나오는 느낌이지."
"그래도 상관없느니라."
"그래?"
김현우의 물음에 크게 고개를 끄덕거린 야차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곤 씨익 웃으며 이야기했다.
"애초에 내가 원하는 건 이야기의 재미가 아니라 우리 둘만의 비밀이니라."
"……둘만의 비밀?"
"그렇느니라. 애초에 아무도 네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그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둘만의 비밀이 생기는 것 아니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우리 둘만이 공유하는 비밀 말이다."
그녀의 말에 김현우는 일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그거 괜찮네."
이내 웃음을 지으며 곧 입을 열었다.
442화 외전 20. 10계층의 무관 (1)
천계(天界)에 있는 거대한 황궁.
도대체 몇 층으로 이뤄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황궁은 굉장히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황궁 건물의 이곳저곳에는 번쩍거리는 황금이 건물의 품위를 한껏 올리며 번쩍거리고 있었고, 그곳을 받치고 있는 옥기둥은 닿기만 해도 미끄러질 것 같은 광택을 내뿜고 있었다.
"흠……."
그리고, 그런 황궁의 중간층에 있는 거대한 집회실의 옥좌에는 한 노인이 앉아 건물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황금색의 용포를 입고, 초연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있는 그.
"옥황이시어. 부르셨나이까."
옥황상제(玉皇上帝)는, 자신의 앞에 부복한 채 고개를 숙이는 한 남자, 검천(劍天)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옥황의 끄덕임에 고개를 깊게 숙이며 입을 여는 검천.
그에 옥황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랑진군이 10계층에 올라간 지 얼마나 지났는가?"
"이랑진군이라면…… 이제 막 3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흐음, 3년이라."
누군가에게는 길고, 누군가에게는 짧은 시간을 홀로 되뇐 옥황은 한 동안 자신의 가슴께까지 내려와 있는 수염을 한번 쓸어내리더니 말했다.
"검천이 보기에는 어떤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10계층의 무관을 말하는 것이다. 과연 그곳에서 정말 그 녀석의 인성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옥황의 물음.
검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랑진군이 인성을 고쳐먹는 것…… 이라.'
이랑진군(二郞眞君)이 가지고 있는 이명들은 꽤 많았다.
우선 대표적으로 옥황을 제외한 모두가 기본적으로 이랑진군을 '천계의 망나니'로 부르고 있었고, 그와 같은 기수를 가지고 있는 무관 동료들에게 이랑진군은 무자비한 폭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이외에는 '구제할 길 없는 머저리'와 '제천대성 2세'같은 별명이 붙어 있기도 했다.
한 마디로, 이랑진군은 천계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천하의 개망나니로 인정했던 제천대성과 양대 산맥, 아니 양대 산맥을 넘어서 있었다.
'애초에 태생부터 다르니, 그 간극도 더 커 보이지…….'
그도 그럴 것이 결국 제천대성은 요괴였기에 하늘에 올라와서 깽판을 쳐도 그저 그러려니 하는 느낌이 강했다.
……뭐, 애초에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었기 때문이었으나 아무튼 천계에서 나오지 않은, '요괴'라는 태생으로 직위를 얻었기에 '그럼 그렇지~'같은 느낌으로 넘어갔다 이 말이었다.
허나 이랑진군은?
그는 태생부터 제천대성과는 달랐다.
그 누가 뭐래도 기본적으로 이랑진군은 따지고 보면 옥황의 피를 이은 데다가, 심지어 가지고 있는 일신의 무력도 무척이나 강하다.
헌데 옥황의 피를 이은 이랑진군이 제천대성과 맞먹을 정도로 개망나니 짓을 하고 돌아다닌다?
제천대성 때보다 더 짜게 식은 시선을 받는 것은 당연한 순서라고 볼 수 있었다.
'아무튼…….'
본제로 돌아와 결국 옥황께서는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과연 10계층에 있는 무관에 보낸 이랑진군이 인성을 고쳐먹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물음이라기보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묻는 것이 더 맞다고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옥황께서는 천계에 있을 때 이랑진군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지켜보고 계셨으니까.
……한 마디로, 옥황은 이랑진군을 그 10계층에 있는 무관에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의 인성이 올바르게 고쳐지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옥황이 이랑진군의 인성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천이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깊이 고민하는 이유는 바로 10계층에 있는 그 남자 때문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는 거대한 '탑'의 주인이자.
천계 전체를 적으로 돌려도 콧방귀 하나 뀌지 않을, 엄청난 무력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그 남자.
'김현우…….'
그 때문에 검천은 옥황의 질문에 답을 미루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검천은 그를 오랜 시간 봐 오지 않았으나, 알고 지낸 약 4년 동안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는 망나니와 흡사하다.'
아니, 어찌 보면 모든 망나니의 정점이 그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검천이 본 김현우는 자기 자신을 포장하기 싫어했고, 무조건 하고 싶은 대로만 행동했다.
'하지만 그래도…….'
검천은 김현우가 이랑진군의 인성을 충분히 바르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이랑진군 이전, 김현우가 심심하다며 굴릴 똘만이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검천은 망나니들을 몇 명 보내 주었었고, 그 뒤로 3개월의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무관에 있던 망나니들은 모두 개과천선했다.
그래, 개과천선(改過遷善)이다.
물론 그들이 이랑진군처럼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지는 않았으나 결국 인성이 되먹지 못한 놈들인 것은 분명했기에 검천은 김현우의 신묘한 가르침에 감탄했던 적이 있었다.
분명 행동은 망나니인데 어떻게 장군들도 포기한, 인성이 바르지 못한 이들을 개과천선 시키는지 굉장히 신묘했다.
게다가 실제로 김현우의 무관에 갔다 온 이들에게 질문을 해 봐도 그들은 그저 '스승님에게 배웠습니다.'만을 반복할 뿐이기에 검천은 그가 더더욱 신묘하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그 모든 것을 고려하며 고민하던 검천은 곧 입을 열었다.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조금이나마 그의 성정이 부드러워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검천의 말에 옥황은 순간적이지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검천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거짓을 고한 적이 없으며, 기분 좋은 빈말보다는 항상 충언(忠言)을 이르는 이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제가 감히 확신을 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아마 제 말대로 그곳에서 모든 형량을 받고 온다면…… 희망이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검천의 말에 감탄하는 표정으로 입을 벌리는 옥황.
그는 한동안 자신의 수염을 쓸어내리며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시간이 약 일 각 정도를 넘었을 때.
"검천, 혹시 무관에 단기로 수련을 보낼 만한 인물이 있나?"
옥황은 검천에게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
"……아, 진짜 가기 싫은데."
탑의 10계층,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푸른색의 숲만 끝없이 지속되는 그곳에는 한 남자, 정확히는 한 천인(天人)이 터덜거리며 하늘을 걷고 있었다.
그런 걸음걸이와 마찬가지로 얼굴은 오만상을 찌푸린 채 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는 바로-
"내가 왜 이딴 곳에 와야 해?"
-천계의 대장군이라고 불리는 검천의 아들이자, 이제 막 천군(天軍)에 들어가 그 무위를 인정받아 백인대장(百人大將)의 직위를 가지고 있는 '지천'이었다.
"쯧."
지천은 혀를 차며 숲으로만 이뤄진 땅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아버지는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는 얼마 전, 자신을 이곳으로 올려 보낸 아버지, 검천과 했던 말을 회상했다.
'10계층에 갔다 오너라.'
한참 연무장에서 무예를 갈고 닦을 때, 갑작스레 검천이 찾아와 내린 명에 지천은 어리둥절해 하며 되물었다.
'10계층에……?'
'그래, 그곳에서 3개월간 짧은 수행을 받고 오너라.'
'10계층이라면 탑주가 세운 무관으로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지천은 무관에 대해 자세히는 몰랐으나 그래도 10계층에 무관이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곳에 들어갔다 나온 녀석들이 어느 정도 교화가 되어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검천에게 되물었으나.
'잔말 말고 갔다 오너라.'
검천은 지천에게 그리 명을 내리며 돌아서 버렸고, 그 덕분에 백인대장이 되어 꽤 편하게 군 생활에 적응하고 있던 그는 결국 졸지에 이런 오지에 있는 10계층에 오게 되었다.
하지만 검천이 그렇게 말했어도, 지천은 어째서 아버지가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는지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랑진군…… 보나마나 그 망나니 녀석을 보고 오라는 소리겠지.'
지천은 이랑진군을 생각함과 동시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천계의 개망나니 이랑진군.
남한테 피해란 피해는 다 끼치면서 자신의 직위와 무력으로 모든 것을 전부 해결해 버리는 그 개자식의 얼굴을 떠올리자 지천은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랑진군이 피해를 안 끼친 이들이 없을 정도다 보니 지천도 그에게 당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개망나니가 실전 연습한다고 설친 덕분에 3달 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던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데…….'
지천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끝없이 푸르른 산 중턱에 세워져 있는 건물을 보았다.
크다면 클 것 같고 작다면 작을 것 같은 건물.
하늘에서 본 바로는 지천이 평소에 보고 지내던 천계의 궁보다도 훨씬 작았으나 그는 그곳이 10계층에 있는 무관임을 의심치 않고 내려갔다.
탁!
별다른 저항 없이 경쾌하게 무관의 바닥에 발을 디딘 지천은 전체적인 건물의 모양새를 다시 한번 둘러봤다.
역시나 느껴지는 감상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조금 흔한 무관의 느낌 정도.
문 바로 앞에는 수련생들이 수련할 수 있는 연무장이 있고, 그 앞에는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인지 생각보다 노후화된 건물의 외관이 보였다.
"흠……."
허나 조금 신기한 것은 분명 건물의 외관은 조금 노후화되어 있었는데 지금 이 건물을 감싸고 있는 담벼락은 굉장히 깨끗하다는 것.
그냥 깨끗한 것도 아니고 마치 며칠 전에 지은 것 같이 자그마한 때도 타 있지 않았다.
"……."
왠지 균형이 맞지 않는 기묘한 모순에 지천을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무관의 외견에는 신경을 끄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임무이기도 한 이랑진군을 찾으려 했으나-
"……없나?"
-아무리 마력 파장을 넓게 퍼트려도 이랑진군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이랑진군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지천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지천은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천계의 망나니 이랑진군.
분명 인성에 조그마한 문제가 있는 녀석들이 이곳에 와서 어느 정도 교화가 되었다고 했어도 그 녀석만큼은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개망나니니까.
구제불능 개망나니.
그게 바로 이랑진군이었다.
'……보아하니 이 계층 말고 다른 곳에 짱박혀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다가 이 무관을 관리하는 탑주도 보이지 않는 것 같고.'
지천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연스레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무관의 풍경을 한 번 더 바라봤다.
그리고-
꽝!!!!!
그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마자 들리는 우렁찬 굉음에 그는 재빠르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고.
"누…… 누구? 아, 아니 잠깐만…… 이…… 이랑진군?"
그곳에는, 피떡이 된 이랑진군이 담벼락에 처박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내가 무관 관리 제대로 해 놓으라고 하지 않았냐, 제자야?"
지천은 노후화된 무관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한 남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443화 외전 21. 10계층의 무관 (2)
노후화된 무관의 안쪽.
지천은 그곳에서 한 남자…… 아니, 김현우와 대면하고 있었다.
"……."
"……."
10계층으로 내려온 지천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김현우와, 되도록 그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지천.
만약 지천의 아버지인 검천이 보았다면 천계의 백인대장이 그리 패기가 없어서 어찌 할 생각이냐고 호통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천은 자신의 행동이 틀리지 않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김현우의 시선.
지천은 그런 그의 시선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며 자연스레 눈알을 굴리다 곧 뻥 뚫려 버린 건물의 벽 사이로 보이는 이랑진군을 보았다.
'저게 정말 내가 알고 있던 이랑진군이 맞나?'
그 모습을 보자마자 드는 생각.
분명 김현우의 시선을 피하며 그의 모습을 여러 번 보기는 했으나 몇 번을 봐도 지천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허."
개망나니 이랑진군.
천계에선 항상 온몸에 장신구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면서 자기가 심심하면 천군들을 후려 패고 다니는 구제 불능 쓰레기가 이랑진군이었고.
그 상판에 항상 재수 없는 웃음과 오만하고 나태한 표정이 같이 들어 있는 것이 이랑진군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 모습은?
"……."
그야말로 볼품없었다.
치렁치렁하고 사치스러운 비단옷?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종놈이나 입을 것 같은 다 헤진 무복이었다.
사치스러운 장신구?
그의 손발에 묶여 있는 수갑과도 같은 것은 장신구라기보다는 구속구라고 보는 게 좋았다.
거기다 지천이 제일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이랑진군이 짓고 있는 표정.
그는 항상 천계에서는 오만하고 비웃음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짓고 다녔다.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다른 사람들을 모두 깔아뭉개며.
그런데-
"야, 제대로 안 해?"
"힉! 아…… 아니요! 스승님! 저…… 저는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의 얼굴에는 그런 표정들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고, 그 대신 비굴한 표정만이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빨리 해."
"옙!"
우렁찬 대답과 함께 필사적으로 자신이 박혔던 콘크리트 벽을 수리하는 이랑진군.
그 모습을 보며 지천은 아까 전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담벼락이 새것 같았던 이유는…… 너무 부셔 먹어서 다시 만들다 보니 새로 만든 것 이었나…….'
그렇게 지천이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의문들을 하나씩 풀어 갔을 때쯤.
"그래서, 네가 검천의 아들이라고?"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천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네, 맞습니다."
"왜 왔는데?"
"그…… 3개월 동안 이곳에서 단기적으로 단련을 좀 하라고……."
사실 그 말을 하지 않고 이랑진군이 담벼락에 처박히는 것을 봤을 때부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내린 명을 어길 수는 없었기에 지천은 그렇게 대답했고.
"단기 단련이라고?"
"그…… 예."
"너도 뭐 잘못했냐?"
"네?"
"뭐 잘못했냐고."
몸을 느긋하게 뒤로 뉘이며 묻는 김현우.
그에 지천은 순간 어벙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이랑진군을 떠올리고는 정열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저는 천군 내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아 백인대장의 직위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저 망나니…… 아니, 이랑진군처럼 중죄도…… 아니, 경죄도 저지른 적 없습니다."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지천.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김현우는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했다.
"그렇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왜 왔는데?"
"……예?"
"넌 죄가 없다며?"
"그…… 그렇죠?"
"왜 왔냐니까?"
김현우의 물음.
그에 지천은 자신이 대화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를 생각한 뒤, 이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제가 대화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지천의 물음에 김현우는 턱짓으로 이랑진군을 가리키며 말했다.
"쟤가 여기에 있는 걸 보면 대충 감이 오지 않아?"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감이 오기는 하는데…… 저는 정말로 죄를 지은 게 없습니다."
진짜라는 듯, 이번에는 김현우의 눈을 보고 똑바로 이야기하는 그.
그 모습에 김현우는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중얼거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예?"
"……아니, 내가 검천이랑 이야기 해 둔 게 있어서 말이야……."
흠,
잠시 말을 멈추고 고민하기 시작하는 김현우.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인 김현우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고.
"뭐,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봐. 잠깐 확인 좀 해 보고 올 테니까."
"……확인이라니? 무슨?"
지천은 그렇게 물었으나 김현우는 그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가볍게 몸을 일으켰고, 그 다음 순간-
팟-!
"!?"
김현우는 그의 앞에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순식간에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진 김현우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지천은 곧 자신이 그의 행동을 단 하나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으나.
"사…… 살려 줘!"
곧 그는 자신의 다리춤을 붙잡고 늘어지는 이랑진군의 모습에 생각을 이어 나가지도 못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 무슨 갑자기 왜 그래?!"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달라고! 나를 이곳에서 꺼내 줘! 제발! 제발! 이곳에 더 있다가 죽을 거라고! 제발 살려 줘!!"
실성한 듯 지천의 다리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는 이랑진군의 모습에 지천은 당황하며 그를 밀어냈으나.
"으아아아아악! 살려 줘!"
마치 PTSD에 걸린 것처럼 비명을 질러 대는 이랑진군의 모습에 지천은 우선은 그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우, 우선 진정해! 진정하라고!"
"진정하게 생겼어!? 진정하게 생겼냐고! 빨리 나 좀 구해 줘!!! 그렇지, 아버지한테! 아버지한테 말 좀 해 줘! 지금 당장 천계로 올라가서 아버지한테 말 좀 해 달라고!"
"아…… 아니 무슨 말을!"
"여기 미친놈이 살고 있다고! 스승님…… 아니 탑주는 미친놈이야! 이 세상에 다시없을 사악하고 또라이 같은 놈이라고!"
온 산이 떠나가도록 비명을 지르며 지천에게 소리치는 이랑진군.
거의 반 미친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그를 보며 지천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악!!"
이랑진군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 비명을 질렀고,
곧 그런 그를 바라보던 지천은 이내 두려운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조금 전까지 김현우가 있던 곳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지천이 이랑진군을 달래고 있을 때쯤.
무관이 있던 곳과 한참이나 떨어진 숲속에 도착한 김현우는 자신의 앞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기둥을 조작하기 시작했고.
우우웅!
곧 김현우가 조작한 기둥은 기이한 소리를 내며 하얀 빛을 내뿜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대한 거울을 하나 만들어 냈다.
[오랜만이오.]
거울을 만들어 내자마자 그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김현우는 대답했다.
"오랜만이긴 한데, 그것보다는 물어볼 게 있어서 연락했어."
[물어볼 것이라면……?]
"지천인가 뭔가 하는 애는 왜 보낸 거야?"
안부를 물음과 동시에 본론으로 들어가는 김현우.
그에 질문을 받은 검천은 순간 입을 다물었으나 곧 이야기했다.
[……말 그대로, 조금 단기적으로 수련을 시켜 주셨으면 해서 보내게 됐소.]
"딱히 수련이 필요해 보이지는 않던데? 들어보니까 딱히 문제가 있는 녀석인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김현우의 물음에 검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그렇소.]
"그럼 굳이 여기 보낼 필요 없다니까? 나한테는 어디까지나 천계에서 교화가 안 되는 망나니들이나 보내라고 말이야. 내가 저번에 말했던 것 같은데?"
김현우의 말에 검천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그에게 실제로 그런 말을 했었으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김현우가 그런 말을 했느냐?
'스트레스 풀려고 만들었는데 괜히 진짜 가르쳐야 하는 놈이 있으면 피곤하잖아…….'
그는 무관을 제대로 굴릴 생각이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가 무관을 만든 이유는 꽤 여러 가지였으나 종합적인 이유는 결국 심심해서였다.
그래, 심심해서.
물론 그에게는 남에게는 없는 것들이 있었고, 그가 원하고자 하면 얻지 못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더 심심함을 느꼈다.
그렇기에 그는 대충 심심함이나 때우고 아내들한테 바가지 긁혔을 때 스트레스나 풀자 싶어서 10계층에 무관을 만들었고.
그 뒤에 천계나 지상에 있는 다른 곳에 성격 개조가 필요한 망나니가 있으면 올려 보내라고 언질을 주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김현우의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무관은 그에게 꽤나 나쁘지 않은 만족감을 선사해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현우의 무관에 왔던 망나니들이 그의 심심함을 달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김현우의 기본적인 마인드는 '기브 앤 테이크'였으니까.
받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김현우는 자신에게 올라오는 망나니들이 있다면 그들을 신나게 쥐어 패면서도 나름대로 수련 또한 같이 시켜 주었다.
그 수련이 죽는 것보다 더한 지옥급으로 끔찍하기는 했으나 아무튼 김현우의 수련을 받고 나면 대부분의 망나니들은 인성이 바르게 잡힘과 동시에 그 무력도 진일보해서 하산했기에 그의 제자로 들어온 이들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뭐, 그건 어디까지나 김현우의 생각일 뿐이었지만.
[……사실, 그를 보낸 것은 조금 다른 이유가 있기는 하오.]
"……무슨 이유?"
[내가 저번에 말했듯 지금 수련을 받는 이랑진군은 옥황의 아들이오.]
검천의 말에 잠깐 고개를 갸웃했던 김현우는 이내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러니까 수련을 목적으로 보냈다기보다는 이랑진군이 어떻게 변해 있나 한번 보려고 보냈다?"
[……그렇소. 저번에 수련을 시킬 때는 절대로 10계층에 올라오지 말라고 주의를 시키시지 않았소? 그 때문에 직접 찾아가지는 못하겠어서…….]
검천이 그렇게 말을 줄이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말은 자신이 했던 말이 맞았으니까.
괜히 스트레스를 푸는…… 게 아니라 수련을 하는 모습이 보이면 조금 서로 어색해질 수도 있기에 망나니들을 올려 보낸 뒤, 수련을 하는 동안은 절대 10계층에 올라오지 말라고 주의를 주긴 했었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했다.
"뭐, 그런 거라면야 알았어."
[그럼……?]
"뭐, 결국 이랑진군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거니까 네 아들은 오늘 바로 보내도록 할게."
[알겠소.]
곧바로 수긍하는 검천.
김현우는 곧바로 말을 끝맺으려는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
"아마 이랑진군은 예정보다 조금 더 오래 있을 것 같아."
[그렇소……?]
검천의 질문에 김현우는 씨익 웃으며.
"응, 원래는 그냥 보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아직 좀 교육이 덜 된 것 같아서 말이야."
무관이 있는 쪽을 바라보곤 대답했다.
444화 외전22. 10계층의 무관 (3)
천계의 무관 건물 내부.
"……이랑진군은 어떻지?"
검천의 물음에 지천은 순간 입을 다물고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를 곰곰이 생각한 뒤 곧 답을 냈다.
"이랑진군은…… 수련을 잘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예. 적어도 제가 봤을 때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예전에 있던 오만함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오만한 얼굴 대신에 공포에 찌든 얼굴이 있었지만요……라는 소리가 목구멍 바로 너머까지 올라왔던 지천이었으나, 그는 필사적으로 그 말을 다시 안으로 넘겼다.
그는 김현우에게 경고를 받았으니까.
"……그게 정말이더냐?"
검천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지천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이 아닙니다."
"허……."
그에 말에 진심으로 감탄한 듯 낮게 탄성을 터트리며 묘한 웃음을 지은 검천은 이내 중얼거렸다.
"정말 신기하군, 그 누가 가르쳐도 절대 고쳐지지 않던 그 망나니의 인성이 고쳐지고 있다니…… 정말 신묘한 자로군."
검천의 감탄사에 지천은 순간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지천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것은 오로지 진실.
허나 그럼에도 그가 검천의 앞에서 시선을 돌리고 있는 이유는, 바로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자는 신묘한 힘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그래, 신묘한 힘 같은 게 아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저 압도적인 무력.
그래, 이랑진군마저도 한 손가락으로 벌레 잡듯 찍어누를 수 있는 그 압도적인 무력이 김현우가 가지고 있는 신묘한 힘의 정체였다.
꿀꺽.
지천은 아까 전 김현우와 만났을 때를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무엇을 확인해 보러 간다고 말했던 그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었고, 지천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이랑진군을 최대한 달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시 나타난 김현우는 곧바로 지천의 다리에 붙어 있는 이랑진군에게 수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수련이 아니라 구타였다.
일방적인 구타.
"……."
어떻게든 살려달라며 도망치는 이랑 진군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후려 패는 김현우의 모습이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지천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털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어차피 김현우에게 나름대로 경고를 전달받은 이상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
아니, 사실 그건 협박조차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현우는 한참이나 이랑진군을 후려 팬 뒤 자신에게 '지금 여기서 본 것을 이야기할 거면 이야기해도 딱히 상관은 없다'라고 말했으니까.
그래.
그 말만을 하고 김현우는 자신을 그대로 돌려보내 줬다.
다만 문제는 그 말을 했을 때 김현우의 분위기.
분명 이야기를 해도 된다고 했으나 그가 풍기고 있는 분위기는 그가 했던 말 스스로를 그대로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군생활을 하느라 눈치가 빨라진 지천은 그런 김현우의 말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성공적으로 캐치했다.
'게다가'
오히려 천계로 돌아오며 지천은 어쩌면 잘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이랑진군의 인성은 평범한 스승에게서는 절대로 고쳐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지천도 종종 했었으니까.
거기에다 이랑진군이 옛날에 천계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면 사실 지금 그의 처벌은 오히려 딱 적당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가 천계에서 했던 일은 만약 이랑진군이 옥황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이미 골백번은 처형당했을 정도로 또라이 같은 짓을 저지른 적도 있었으니까.
"아무튼 수고했다."
"예."
그렇기에 지천은 자신이 10계층에서 보았던 사실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린 채 자신의 아버지가 하고 있는 오해를 풀지 않고 무관의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천계에 이랑진군의 이야기가 올라갔을 때 10계층에서는-
"제자야, 설마 내가 정말로 못 들을 거라 생각했냐?"
"으아아아악! 살려주십쇼! 제발 살려주십쇼!"
"뭔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너를 죽이기라도 했냐 아니면 팔다리를 날려버리기라도 했냐?"
-이랑진군과 김현우가 수련을 하고 있었다.
아니, 어디까지나 김현우의 입장에서만 수련이었지 그것은 이랑진군의 입장에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아니, 제가 어떻게 스승님을 때릴 수 있겠습니까!?"
"때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때릴 수 없는 거잖아."
"……."
김현우의 말에 이랑진군은 순간 입을 다물었으나 이내 긴박한 표정으로 곧바로 다음 말을 내뱉었다.
"아, 아무튼 제발 좀 살려주십쇼!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그래? 잘못했어?"
김현우의 물음.
그에 이랑진군은 곧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숙였다.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로요! 제가 감히 겁도 없이 스승님의 험담을 늘어놨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주십쇼……!"
"그래?"
"예!"
"그렇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맞으면 되겠네."
"……네?"
"맞으면 되겠다고."
"그게, 무슨……?"
"잘못을 했으면 맞아야지, 안 그래?"
"자, 잠깐!"
"이 악물어라."
꽝!
변명을 하기도 전에 저 멀리 날아가 버린 이랑 진군.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김현우가 이내 땅바닥에 처박혀 있는 이랑진군에게 다가가자 그는 필사적으로 처박혀 있던 땅바닥에서 빠져나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고.
김현우가 다시 주먹을 들어 올린 그 순간-
"잠깐! 잠깐만요!"
"왜?"
"스, 스승님!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뭐가 이럴 때가 아니야?"
김현우의 물음에 이랑진군은 번개같이 대답했다.
"오늘 할 일이 있으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쵸!?"
"내가 할 일이 있다고 했다고?"
"네네! 그렇게 말하셨습니다! 아까 전에 지천이 찾아와서 미처 잊어버리셨던 것 같은데……! 분명 스승님은 오늘 내려가셔야 한다고 저한테 그랬었습니다! 꽤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입니다!"
필사적으로 입을 여는 이랑진군.
그에 김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아."
곧 그는 이랑진군의 말처럼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이 돌아가는 날이었지.'
김현우가 9계층에서 이랑진군을 지도(?)하기 위해 10계층에 올라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기에 슬슬 내려가려고 했었다.
만약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도 내려가지 않는다면 또 와이프들에게 바가지를 긁혀야 했으니까.
저번에는 이랑진군 가르치겠다고 대충 3달 정도 내려가지 않았다가 와이프들에게 대차게 봉변을 당한 적도 있었기에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뭐, 그렇긴 하지."
"그, 그렇죠? 그러니까 우선 이 제자를 신경 쓰시기보다는 볼일을 보러 가시는 게……."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이랑진군.
그 눈에 깃들어 있는 절실함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런가?"
"그, 그렇죠! 저번에도 조금 늦게 가셨다고 와이프분들게 혼났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랑진군의 말에 김현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
"그렇죠? 그러니까 빨리……."
"근데, 그걸 굳이 걱정해 줄 필요는 없는데."
"……네?"
"네가 굳이 내 와이프들한테 바가지 긁히는 걸 걱정해줄 필요는 없다 이 말이지."
"그…… 어떻게 스승님인데 걱정을 안 하겠습니까!?"
"지랄."
김현우의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입을 다무는 이랑진군. 허나 그는 여기에서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 아무튼! 지금 빨리 안 가시면 큰일 날 겁니다!"
"왜 큰일 나는데?"
"드, 듣기로는 바가지를 심하게 긁히신다고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그건 네가 걱정할 게 아니라니까? 게다가 어차피 하루 정도 늦는 것 정도로는 뭐라고 말 안 할걸?"
"하…… 하루?"
그 말을 직역하면 지금부터 자신을 하루 정도 가열차게 후드려 팰 것이라는 말이었기에 그는 두려움을 담은 표정으로 김현우를 올려봤고.
"그래, 그러니까 우선은 준비해라."
김현우는 더 이상 이랑진군에게 반론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 그대로 주먹을 들어 올린 채 주먹을 휘두-
"흐음, 그렇느냐?"
-르지 못했다.
"……!"
들려온 미성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굳어지는 김현우의 얼굴.
그에 이랑진군은 경악한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적어도 그로서는 김현우의 굳은 얼굴을 본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을 뒤지게 팰 때 순간순간 굳은 얼굴들이야 당연히 본 적이 있었지만 저렇게 얼굴 전체에 'x됐다'라는 느낌으로 굳어지는 얼굴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이랑진군은 이 괴물이 진짜 좆됐다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당장 가지고 있는 무력만 해도 혼자 천계를 다 때려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무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이야기를 들어보면 천계의 망나니나 동방의 수호자가 쌍으로 덤벼도 1분을 버티지 못한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스승이 목소리 하나에 저렇게 위기감 넘치는 표정을 짓는다?
그것이 이랑진군에게는 무척이나 신비로운 일이었다.
"그렇구나, 역시 지아비는 우리의 약속이 하루를 아무렇지도 않게 미룰 정도로 별것 아닌 일이었던 게구나?"
이어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그에 이랑진군은 굳어버린 김현우의 몸 뒤에 다가와 있는 여성.
"그런게야?"
야차를 볼 수 있었다.
"그, 그게 아니라."
그리고 거기에서, 이랑진군은 또 한번 정말 놀라운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뭐가 아니더냐?"
"아, 아니, 이 녀석이 너무 스승한테 버릇없이 굴길래 잠깐 겁을 줄 용도로 말한 것이었지 진짜 하루 지나서 가겠다는 소리는 아니었어. 정말이라니까?"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여성에게 열심히 변명을 하는 김현우의 모습을 보며 이랑진군은 또 한번 입을 벌렸다.
변명을 한다고?
자신의 스승이?
모든 것을 다 때려 부수고, 자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항상 심심풀이로 세계 파괴를 일삼고 다닐 것 같은 자신의 스승이?
"흐음, 정말이더냐?"
"정말이지!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흐음……."
의심스러운 눈으로 김현우를 쳐다보는 야차.
허나 그녀는 곧 있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했다.
"뭐, 지아비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우선은 넘어가 주도록 하겠느니라."
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김현우는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10계층으로 넘어온 거야?"
"당연한 것 아니냐? 시간이 슬슬 되었는데 이쪽으로 넘어오지를 않길래 확인 겸 와봤을 뿐이다."
"그, 그래?"
"그럼 가도록 하자꾸나. 그리고, 거기?"
야차의 물음에 이랑진군은 순간적으로 멍을 때리다 입을 열었다.
"예, 예!"
"괜찮으면 그쪽도 같이 가도록 하자꾸나."
"네, 네? 저도요?"
"그렇니라. 듣기로는 이곳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을 하고 있다지? 그럼 가끔의 휴식도 필요하지 않겠느냐?"
야차의 말.
그에 이랑진군은.
"가, 가겠습니다!"
이 세상에 천사가 있음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445화 외전23. 10계층의 무관 (4)
이랑진군,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스승님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거라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지 않은가?
자신의 스승인 김현우는 혼자서 탑을 정복한 괴물인데다가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업적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자신이 그 무력을 직접 눈앞에서 보았다.
그것도 그냥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이나.
물론 그게 다른 적과 싸우는 데에서 보여준 것이 아닌, 순전히 자신을 조지기 위해 보여줬다는 것이 조금 서글픈 점이기는 하나 아무튼 그 때문에 이랑진군은 김현우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흐음…… 서방님이 저희와의 약속을 팽개치고 하루나 더 늦게 오려고 했다 이 말인가요?"
"서방님……."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건 어디까지나 저 녀석이 너무 말을 안 들어서 그냥 겁이나 좀 주려고 했던 말이라니까?"
이랑진군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일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당장 앞에 보이는 것은 얼굴에 당황스러움이라는 감정을 보이며 최대한 입을 열고 있는 김현우의 모습.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그런 김현우를 반쯤 뜬 눈으로 지켜보며 타박하고 있는 두 명의 여인.
당장 느껴지는 마력이나 기세만 생각해보면 스승님의 앞에 있는 두 여인은 당장 스승님의 반의 반절보다도 못한 무력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서방님, 저는 오늘 서방님이랑 이곳에 오는 날을 기대하며 밤새 기다렸는데……."
"저도 마찬가지예요. 오늘 이날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이 섬을 통째로 개조했는데……."
"아니이…… 그러니까 그냥 오려고 했다니까? 정말이야. 내가 왜 약속을 안 지키겠어, 응?"
그 둘은 김현우를 찍어누르고 있었다.
무엇으로?
바로 말빨로.
아니, 저것은 말빨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일차원적이었다.
그렇다면 기세……? 그것도 아니라면 힘……?
한참이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는 태양빛 아래에 서서 김현우의 앞에 서 있는 그녀의 아내들이 내뿜고 있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던 있던 이랑진군은.
"오, 네가 김현우의 제자냐?"
곧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고.
"……?"
곧 그는 굉장히 기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남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깨달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설마…… 투전승불?"
기묘한 의구심이 섞인 이랑진군의 말.
물론 이랑진군은 투전승불- 아니, 손오공을 그리 많이 보지는 못했고 심지어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모습은 자신이 알던 손오공의 모습과 달랐으나, 그가 패도적인 기운을 흩뿌리며 천계의 무관을 박살 냈던 장면이 아직 선명했기에 그렇게 중얼거렸고.
그에 이랑진군의 앞에 서 있던 손오공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이야, 천계에 있는 놈을 제자로 받았다기에 혹시나 했는데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 애들이 있네?"
"……."
아니, 애초에 손오공이 천계에서 한 짓을 생각해본다면 그가 천계인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질 일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거기다 그 앞에 서 있는 이랑진군은 손오공 다음가는 천계의 망나니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터라 손오공을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분명 이전에 스승님에게 9계층에 손오공과 청룡이 있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는데…….'
이렇게 만나보니 기분이 묘하게 색달랐다.
'아니…… 색다른 게 아니라.'
분명 느껴지는 기운은 자신이 알고 있던 손오공이 맞는데에 비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지나치게 평온해 보였다.
'내가 알던 그 손오공이 맞나?'
분명 오래전 일이기는 하지만 천계에서 보았던 손오공의 기운과 모습은 이렇지 않았다.
흘러나오는 기운은 당장이라도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패도적이었고,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손오공은 천계의 무관을 다 때려 부수며 흉신악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헌데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그는 척 봐도 느슨해 보이는 고무줄 반바지와 상의에는 싸구려로 보이는, 해바라기가 그려진 반팔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척 봐도 동네 아저씨, 그 이상으로는 점을 쳐줄 수 없을 것 같은 모습.
그런 생각을 하며 이랑진군이 멍을 때리고 있자 손오공은 멍을 때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이내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런, 역시 저 녀석한테 뒤지게 맞았나 보네."
"뭐, 척 봐도 보이는군."
손오공이 입을 열자마자 동감이라는 듯 그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청룡.
그에 이랑진군은 순간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응? 아니야? 의외로 안 맞았나 보네?"
"아니, 그건 아니긴 한데 어떻게 제가 뒤지게 맞았다는 걸 다 알고 계시는……?"
물론 이랑진군의 머릿속에 짐작할 수 있는 요소가 많긴 했으나 그는 저도 모르게 물어보았고, 그에 손오공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곤 대답해 주었다.
"그야 뭐, 너 망나니라며?"
"네……?"
"아니야?"
"아니, 그…… 맞기는 하죠?"
이랑진군은 본래 10계층의 무관에 오기 전 천계에서 개망나니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막장짓을 벌이고 다녔다.
"거기다가 저놈은 빡칠 때만 10계층에 내려가잖아?"
"네……? 그게 무슨……?"
이랑진군의 말에 손오공은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감탄사를 터트리곤 이야기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너는 모르겠구나. 쟤가 10계층에 내려가는 날은 자기 와이프들한테 죽도록 갈굼당해서 쫓겨날 때거든."
그러니까 뒤지게 처맞을 수밖에 없지.
손오공의 말에 이랑진군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하다 곧 깨닫고 말았다.
'나, 지금까지 그냥 화풀이 대상이었던 거……?'
자신이 지금까지 뒤지게 처맞았던 것은 그저 김현우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물론 김현우에게는 하루종일 맞을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수련이라 할 만한 것은 또 하기는 했었기에 그저 그의 성격이 더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이랑진군은 자신이 뒤지게 처맞게 된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허나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이게 이랑진군은 앞에 서 있는 미령과 하나린, 그리고 저 멀리서 느긋하게 누워 있는 야차를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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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자신을 한참이나 추궁하고 있던 하나린과 미령을 달랜 김현우는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 듯 해변이 비치되어 있는 의자에 쓰러지듯 누웠다.
"죽겠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김현우.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가 이 외딴섬의 해변에 바캉스를 온 그는 자그마치 세시간이 넘게 아내들의 마음을 풀어주어야 했다.
야차의 경우야 9계층으로 오는 내내 어떻게든 구워삶았으나 문제는 미령과 하나린.
'……솔직히 이야기 안 할 줄 알았는데.'
김현우는 사실 야차가 하나린과 미령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줄 알았건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야차는 해변에 오자마자 곧바로 미령과 하나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
"……."
김현우는 몇 시간 만에 부쩍 퀭해진 눈으로 해변 근처의 파라솔에서 이서연과 루시퍼를 포함해 열심히 떠들고 있는 미령과 하나린을 바라봤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동네 아줌마들처럼 신나게 떠드는 모습.
그 모습을 보다 보니 김현우는 새삼스레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옛날에는 진짜 상상도 못할 모습인데.'
생각해보면 그리 옛날도 아니다.
5년 전만 해도 하나린과 미령은 다른 이들과 그리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편은 아니었다.
당장 미령 같은 경우는 다른 사람들과는 대화를 하는 것보다는 무력으로 찍어누르는 편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부류였고, 하나린의 경우에는 이야기를 조금 하기는 해도 그건 대화가 아니라 상대방을 찍어누르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이서연이 던진 농담에 하하호호 웃는 미령과 하나린을 보면 김현우는 격세지감을 느끼고는 했다.
나쁘지 않은 변화.
'……하지만 갈구는 스킬이 늘어나는 건 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김현우는 다시금 죽을상을 지었다.
분명 하나린과 미령은 지난 5년 동안 굉장히 부드러워졌다.
미령 같은 경우야 말할 것도 없고, 하나린도 마찬가지.
그러나 기묘하게 그녀들이 점점 부드러워지는 만큼 이상하게 구박하는 강도가 조금씩 강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맨 처음에는 미안하다 몇 마디면 가볍게 풀렸는데.'
이제는 미안하다 정도가 아니라 최대한 자기를 변호하면서 어떻게든 그녀들을 화를 풀어주어야만 구박이 풀리기에 요즘 김현우는 아내들의 눈치를 자주 보는 편이었다.
"에휴."
그렇게 한숨을 쉬며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오늘도 고생하는군."
"왔냐."
저 멀리서 슬쩍 다가와 묻는 청룡에게 대꾸한 김현우는 피곤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10계층에서 하는 말도 조심해야겠더라."
"재수가 없던 거지."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제자 조지려고 한 말 한마디를 딱 들어버리냐."
김현우의 넋두리에 피식하는 웃음을 지는 청룡.
"뭐,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나. 정말 네 말대로 조심하는 수밖에는 없지. 그보다."
"?"
"자네 제자는 왜 데려왔나?"
청룡이 자연스레 김현우의 옆에 앉아 손가락을 놀리자 김현우는 시선을 돌려 모래사장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이랑진군을 발견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해변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궁상을 떨고 있는 그의 모습.
그에 김현우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쟤? 내가 데리고 오려던 건 아니었는데…… 근데 쟤 왜 저렇게 궁상을 떨고 있어?"
김현우의 물음에 청룡은 곧바로 대답했다.
"손오공이 진실을 알려줘서."
"진실?"
"자네가 와이프들한테 바가지를 긁힐 때마다 도망치듯 10계층으로 올라간다는 소식을 전해줬지."
"아, 아니 잠깐, 그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꼭 와이프들한테 바가지 긁혀서 그 화풀이를 쟤한테 하는 것처럼 들렸다는 거 아니야?"
"틀렸나?"
새삼스럽다는 듯 묻는 청룡.
그에 김현우는 빠르게 답했다.
"아니, 뭐 틀리진…… 않지?"
사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긴 했다.
허나 김현우가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맞다고 하더라도 그는 어느 정도 합법적인 선 내에서만 스트레스를 풀었다.
예를 들면 딱 돌아갔을 때 시켰던 일을 전혀 안 해놓았거나, 성취가 자신의 마음에 들 정도로 따라오지 못했을 때만 폭력을 행사한다는 소리.
그렇기에 김현우는 딱히 이랑 진군이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저렇게 억울해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차피 때릴 걸 때린 것인데 뭘 그리 억울해한단 말인가.
한동안 그렇게 생각하던 김현우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났다.
"어디 가나?"
묻는 청룡.
"그냥, 생각해 보면 이제 슬슬 보내줘도 되지 않나 싶어서."
그에 김현우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해변 한가운데에 풀썩 주저앉아 있는 이랑진군에게 다가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랑진군.
"가, 감사합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청룡은.
"……성불?"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며 김현우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외전24. 튜토리얼 탑 (1)
이랑진군이 천계에 온 지도 석 달.
갑작스러운 김현우의 하산 명령으로 천계에 돌아오게 된 이랑진군은 옛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우선 처음으로, 그는 굉장히 성실해졌다.
예전의 이랑진군은 정말 당연하게도 모든 수련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모든 수련에 참가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무관에서 항상 시행하는 수련을 방해했으면 했지 올바르게 참가한 적이 없었다.
헌데 지금은?
"...정말 신기하군."
검천은 놀라운 표정으로 아직 수련시간도 되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나와 검을 휘두르는 이랑진군을 보며 감탄했다.
지금부터 무관의 정식 수련이 시작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나도 일찍부터 나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일찍 나온만큼 일찍 들어가는 것 아니냐? 라고 생각 할 수도 있었으나 그것또한 아니었다.
그는 일찍나와서 수련을 하고 심지어 정식 수련도 모조리 끝내고 나서야 돌아간다.
그 와중에 불평불만 같은 것이 단 한번은 나올 만도 한데 이랑진군은 기괴하게도 그 모든 수련을 불평불만 없이 끝내고 간다.
그래, 불평불만 없이 전부 끝내고 들어간다.
그 이랑진군이...!
'물론 아직 석 달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작 석 달 정도라고 해도 이랑진군이 저토록 성실하게 수련에 임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검천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감탄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검천이 감탄하는 이유는 그 이외에도 다른 무관의 원생들에게서 들려오는 이랑진군의 소문 때문이었다.
'원래는 들려오는 소문이 백이면 백 다 개망나니같은 소문이었는데...'
과거, 그러니까 이랑진군이 아직 김현우에게 보내지지 않고 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때만 해도 그의 평판은 그야말로 개망나니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나빴다.
당장 투옥이 되고 나서도 하루종일 소음을 일으켜 다른 죄수들을 괴롭히는가 하면, 언젠가는 틈을 타 간수들을 팬 적도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그전에는 더한 소문도 돌았다.
그야말로 천하의 개망나니라는 이명이 아깝지 않은 행동.
허나 그가 10계층의 무관에서 돌아온 석달의 시간 동안 퍼진 소문들은 어떤가?
'...다른 사람을 돕는다고? 저 녀석이?'
퍼진 소문들은 대부분 이랑진군의 선행에 대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렇게 퍼진 선행들은 대부분 일반 원생이나 무인들이 당연히 실천하는 것이었으나 그것을 행한 사람이 아무래도 이랑진군이다 보니 소문이 퍼졌다.
애초에 옛날의 그를 알던 사람들은 이랑진군이 어떤 놈인지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보니 소문이 안 날래야 안 날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착한 놈이 착한 일을 하면 당연한 것이지만 천하의 개쌍놈이 선행을 베푸는 것은 충격격이었으니까.
'도대체 얼마나 저 생활이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검천은 너무나도 바뀌어버린 이랑진군의 모습에 감탄하며 또 한번 그의 행동을 교정했던 김현우를 떠올리며 감탄했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기에 이랑진군이 저렇게 변한 것이지?'
미친 개한테는 매가 약이다를 몸소 실천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이랑진군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감탄하는 검천.
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검천의 머릿속에는 그 망나니인 이랑진군을 저렇게 개과천선 시킬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아무튼. 그 덕분에 이제 천계의 후계에 관한 쓸데없는 이야기들은 나오지 않게 되겠군.'
그는 그저 수련을 하고 있는 이랑진군을 보며 몇 번이고 탄성을 내지를 뿐이었다.
허나 그렇게 세간의 평가가 급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이랑진군의 속마음은 세간의 평가와는 꽤 달랐다.
'쉬고싶다. 지금 당장 누워서 퍼자고 싶다. 당장이라도 그냥 검을 내팽개치고 쉬고싶다.'
그가 지난 석달간 보여준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랑진군의 마음 속.
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랑진군이 이토록 열심히 천계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때문이었다.
'그런데...그만 둘 수가 없어...!'
그것은 바로 불안감.
이랑진군은 분명 처음 천계로 돌아올 때만 해도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렇지 않은가?
그 곳에는 김현우가 없더라도 그가 자신에게 걸어 놓은 아티팩트 덕분에 항상 살인적인 수련양을 채워야 했고, 심지어 그가 돌아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뒤지게 맞는게 확정이었다.
그런데 천계로 돌아오면?
그런 지옥은 모두 끝난다.
김현우의 수련을 버티고 왔으니 더 이상 옥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되는 데다가 천계에 돌아가면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랑진군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천당 그 자체였던 것이다.
허나 그렇기에, 그는 의구심을 느꼈다.
'...도대체 왜 나를 그냥 하산시켜준 걸까?'
맨 처음으로 든 의문은 그것이었다.
어째서 자신을 하산시켜 주었을까 하는 의문.
그도 그럴 것이 이랑진군은 아직 하산할 때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말이라고는 더럽게 안 들어 처먹어서 김현우가 올 때마다 처맞은 데다가 불과 하산하기 직전에는 지천에게 김현우의 험담을 했던 것을 들키기까지 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해 봤을 때 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의심.
'설마, 시험하고 있는 것인가? 나를 조금이라도 더 확실히 조지기 위해?'
당연하게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근거는 너무나도 충분할 정도로 넘치고 많았다.
자신의 스승은 제자의 죄를 그렇게 쉽게 눈감아 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 그것만 생각해봐도 이랑진군은 이 상황이 굉장히 잘 풀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의심해볼 만 했다.
그렇기에 이랑진군은 천계에 올라온 뒤 김현우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라 굳게 믿으며 바른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누군가는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이랑진군을 보며 비웃을 지도 몰랐다.
이미 10계층에서 하산했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거기다 이 천계에서 어떻게 너를 감시하냐는 이야기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랑진군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스승은 아무리 불가능한것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해낼 수 있는 괴물이며, 만약 지금 이 시험에서 책이라도 잡혔다간 정말 영영 그 10계층에서 벗어날 수도 없을 거라는 것을!
...물론 그것은 전부 이랑진군의 뇌내망상이었으며 김현우는 바가지를 긁은것에 대한 분풀이로 이랑진군을 팼다는게 괜히 미안해져서 그를 내보내 준 것뿐이었으나.
'도대체 시험은 언제 끝나는 거지? 도대체 언제...!'
이랑진군은 자신이 스승님에게 시험당하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바른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은 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말이다.
그리고 이랑진군이 열심히 칼을 휘두를 동안.
"오, 오랜만일세."
김현우는 간만에 탑의 최상층에 와 있었다.
"간만이네."
정자에 앉아있는 노아흐에게 여유롭게 인사를 하며 집을 통하는 정원으로 들어온 김현우는 순간 갸웃하며 물었다.
"? 티르는 어디에있어? 항상 같이 있더니."
김현우의 물음에 노아흐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 했다.
"그는 안쪽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다네."
"? 드라마?"
"그렇네. 요즘들어 무슨 요상한 드라마에 빠졌는데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 그런가 요즘엔 눈만 뜨면 드라마를 보더군."
쓸쓸하게 중얼거리는 노아흐.
왠지 노년의 쓸쓸함을 보는 것 같기에 김현우는 괜스레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답했다.
"...뭐, 힘내."
"그렇게 걱정해줄 것은 아니라네. 그보다 어서 들어가보게나 지하로 가면 아브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네."
노아흐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간만에 아브가 자신을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뭐, 호출이라기 보다는 대충 놀러와서 얼굴이나 보고 가라는 말이랑 비슷하지만.
"오랜만."
"자네로군. 아브는 지하에 있으니 그곳으로 가면 될 거라네."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티르에게 가볍게 인사하는 김현우였으나 그는 TV에서 나오는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는지 김현우에게는 제대로 된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시선을 돌려 티르가 보고 있던 드라마를 엿봤다.
[이 여편네가 감히 바람을 펴!?]
[바람은 무슨! 그러는 자기도 옆집 여시하고 밤마다 산책나가는 거 모를 줄 알았어!?]
[뭐..뭐라고!?]
[아니야!? 입이 있으면 말이라도 해보라고!]
[이 여편네가 진짜!]
[두...두분 다 진정하세요!]
[진철이 넌 가만히 있어! 어디서 27년동안 모쏠인 새끼가 대화에 끼어들어?!]
[테에엥...]
"...?"
분명 10초 내외를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앞뒤 내용이 기괴하게 돌아가고 있는 드라마의 내용.
'...이런 걸 본다고?'
허나 정작 그런생각을 하며 그를 바라보니 티르는 금방이라도 TV에 빨려들어갈 듯 드라마 속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장난으로 건들였다가는 극대노를 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는 티르.
그것을 한동안 바라보던 김현우는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거실을 지나 지하로 걸음을 옮겼고, 그곳에서 곧 아브를 볼 수 있었다.
"아브."
"앗, 오셨나요. 가디언?"
그녀를 부르자 마자 무엇인가를 만지다가 재빠르게 반응한 아브.
김현우는 느긋하게 손을 흔들며 이야기했다.
"여기서 뭐하고 있어?"
그의 물음에 아브는 스윽 하는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조금 특이한 걸 만들고 있어요."
"특이한 거?"
"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실래요? 이제 곧 완성되니까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이내 끄덕거렸고, 그에 아브는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의 아래로 펼쳐진 마법진들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아브의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중얼거렸다.
'아브도 많이 바뀌었네.'
뭐 예전에도 느끼기는 했으나 요즘의 아브는 예전과는 확연히 바뀐 점이 많아졌다.
우선 기본적으로 외형의 변화가 크다.
'분명히 예전에는 어린애 같은 모습이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 아브의 모습은 누가 봐도 꽤 성숙한 모습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최근의 아브는 옷을 꽤 바꿔 입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그 어디에 있던 하얀원피스에 검은 자켓을걸치고 있는 것이 기본 베이스 였던 것에 비해 최근의 아브는 어딘가의 디자인 잡지에서 볼 것 같은 옷을 주로 입고 있었다.
'뭐 시간이 지나니까 바뀌는 거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마법진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아브를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다 됐어요!"
아브는 그 말과 함께 김현우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고.
우우웅-!
그와 함께 지금껏 아브가 만들고 있던 마법진이 맥동하며 어떠한 홀로그램을 만들어냈다.
"...이건?"
마치 디스플레이같은 모습의 홀로그램이 허공에 띄워진 것을 보며 김현우가 중얼거리자 아브는 곧바로 답했고.
"과거 재생장치에요."
"과거 재생장치?"
"네. 이 탑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볼 수 있는 과거 재생장치요. 저번에 가디언이 과거가 궁금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녀의 말에 순간 고개를 갸웃거린 김현우는 뒤늦게 낮은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아브의 말을 긍정한 그는 흥미가 간다는 표정으로 아브가 만든 과거 재생장치를 바라보았다.
447화. 튜토리얼 탑 (2)
"그런데 그걸 용케 기억하고 있었네?"
김현우가 몇몇 녀석들의 과거를 알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것은 꽤 옛날의 이야기였다.
어느 정도로 옛날 이야기였냐고 한다면 지금으로부터 대충 3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연말에 모여 너나 할 것 없이 연회라고 말하며 술을 들이붓던 김현우는 문득 미령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정확히는 완전히 과거가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수련을 받고 탑 밖으로 빠져나갔을 때의 과거가 궁금했다.
허나 기묘하게도 미령은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부분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흘러가듯 했던 말을 아브는 기억하고 있던 것이었다.
"뭐어, 이 마법진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저도 조금 보고 싶은 게 생겨서요."
"보고 싶은 거?"
"네."
아브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지하실 한편으로 가 노트북을 하나 가지고 나왔고, 이내 김현우에게 보여주었다.
[ch지존hc]
[호구다209]
[지로타롱]
[지랄이하늘로]
[겜잘알]
....
...
..
.
그 아래로 써 있는 수 많은 아이디들을 보며 김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야?"
"제 블로그에 악플 단 애들이요."
"……근데 굳이 악플 단 애들 과거를 알아서 뭐하게?"
"분명 제 블로그에서 악플달고 분탕치는 거 보니 딱 봐도 앰생…… 아니,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게 눈에 보여서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더라고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순간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왠지 아브한테서 단 한번도 못들어본 욕설을 들은 것 같은데.'
물론 조금 전 그녀가 내뱉은 욕설은 김현우도 가끔가다 쓰기도 하고 심지어는 커뮤니티에서 꽤 자주 보는 욕설이었으나 그것이 아브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이게 저번에 노아흐가 말했던 그 기분인가.'
허나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 김현우와는 반대로 아브는 서둘러 말을 바꿔 이야기 했다.
"아무튼! 우선 만든 건 가디언을 위해서였으니까 먼저 사용해도 좋아요."
"그건 고마운데, 이거 어떻게 사용하는 건데?"
"아, 그건 간단해요. 그냥 이 구슬을 쥐고 대충 보고 싶은 연도와 누구를 보고 싶은지를 떠올린 다음에 마력을 불어 넣으면 탑에 연결되어 있던 데이터베이스가 자료를 찾아 이 홀로그램으로 투사할거에요."
"그거 왠지 굉장히 간단해 보이면서 어려워 보이네."
김현우의 말에 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핵심만 설명해 드린 거니까요. 거기다 이걸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건 가디언밖에 없어요."
"그건 또 왜?"
"탑주는 기본적으로 탑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마력만 불어넣어도 탑에서 데이터베이스를 열게 해주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게 안 되거든요."
"아, 그래…… 뭐, 우선은 사용해 볼게."
"네, 한번 사용해 보세요. 저도 아직 제대로 구동되는지까지는 확인을 못했으니까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김현우는 곧바로 아브가 넘겨준 구슬을 받고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다,
'그럼, 우선 미령부터 먼저 봐볼까.'
이내 생각을 끝내고 미령을 과거를 먼저 봐보기로 했다.
솔직히 좀 많이 궁금했으니까.
애초에 미령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려 하는 데다가 꼭 어디를 갔다오면 자신의 생활을 일일이 보고하듯 털어놓기도 한다.
한마디로 비밀이 없다.
허나 그렇게 비밀이 없이 모든 것을 알려주는 미령도 그때의 일은 김현우에게 알려주지 않다보니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미령이 나갔을 때가 대충 이때쯤이었나?"
혼잣말하며 대충 미령이 나갔을 때를 떠올린 김현우는 이내 익숙하다는 듯 구슬에 마력을 흘려넣었고.
우웅-!!
구슬에 마력을 흘려넣마자 반응한 마법진은 순식간에 밝게 빛나며 가운데에 떠 있는 디스플레이에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오."
감탄하는 김현우.
그와 함께 곧 디스플레이 안에서는 거대한 궁전의 모습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척 봐도 굉장히 넓어 보이는 궁전.
바닥의 대리석에는 그가 진저리를 치는 그림이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이 예전 자신이 몇 번 정도 가 보았던 패도길드의 궁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이 엄청 많네요."
또한 아브의 중얼거림대로 디스플레이에서 보여주고 있는 광경에는 궁전 내에 꽤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치 사극 드라마에서 보는 것 같이 일렬로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끝에 보이는 상석, 척 보기에도 굉장히 화려한 황좌가 배치되어 있는 곳에.
"앗, 미령이네요."
미령이 있었다.
굉장히 자그마한 체구라 황좌의 절반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으나 그 누구도 감히 그런 미령을 올려다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잠시간의 침묵 끝에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에 아룡 길드 쪽이 저희 패도 길드의 의견에 반발하는 터라 서쪽으로의 확장은 아무래도 조금-"
"죽여라."
"……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옥구슬이 흘러가듯 아름다운 목소리.
허나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냉철함에 맨 앞에서 보고를 하고 있던 남자는 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처리하겠습니다."
"그냥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씨를 말려라."
미령의 말에 순간적으로 입을 열려던 남자는 급하게 입을 다물고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다음."
미령의 말이 울려퍼지자 이번에는 곧바로 다음 사람이 나와 보고를 시작했다.
"남쪽 던전을 홀로 점검하고 있는 태룽 길드가-"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라."
"동쪽 길드 연합체가-"
"반항하면 죽여라."
"광저우에 있는 헌터 협회에서 패도 길드에 대한-"
"이상한 짓을 하면 죽여라."
제대로 말을 하기도 전에, 무조건 적으로 죽여버리라고 일출하는 미령.
그야말로 냉혹한 폭군의 기질이 보이는 그 모습에 아브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는 이야기했다.
"와…… 저건 좀 굉장히…… 그렇네요."
뭐라 특별하게 표현하지는 못하고 묘하게 중얼거리는 아브.
그에 김현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음, 이런 부분 때문에 이야기를 안 해준 건가?'
확실히 옛날에는 모르겠으나 결혼을 하고 난 뒤의 미령은 은근히 자신의 이런 부분들을 감추게 되고 오히려 요즘에는 슬쩍슬쩍 애교를 떠는 느낌으로 바뀌고 있었다.
'뭐, 그게 무슨 심경의 변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뒤로 김현우와 아브는 미령에 관한 영상을 조금 더 보다 종료했다.
그도 그럴 게 미령의 영상을 계속 보아봤자 나오는 것은 끝없이 이야깃거리를 가져오는 부하들에게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뿐이었고.
무엇보다 김현우가 더 이상 영상을 보지 못한 이유는-
[하아…… 스승님, 보고싶습니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애틋하게 자신을 부르는 미령의 모습이 계속해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김현우는 딱히 잔인한 것을 볼 때도 딱히 감정이 동요하는 타입은 아니었고, 심지어 멜로드라마를 볼때도 그리 감흥 없이 보는 타입이었으나 이상하게 자신과 관련되어 있으면 감정의 동요가 심했기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영상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음…… 이다음에는 하나린 씨를 보실 건가요?"
아브의 물음.
"음……."
사실 하나린같은 경우야 이미 예전에 많이 돌아다니면서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기는 했었으나 자세하게 들어본 적은 없었다.
"……원래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좀 봐볼까?"
그렇기에 잠시 고민했던 김현우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뒤 또 한번 마력을 불어넣으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내가 나왔을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좀 확인해 볼까.'
그녀에게서 자신이 나오기 전에는 무엇을 했는지 들었었으나 자신이 나온 뒤부터는 그저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라고만 대답했던 하나린이기에 김현우는 이참에 그 준비가 무엇이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켜지기 시작하는 디스플레이 화면.
김현우는 집중하기 시작했고.
"……히익?"
아브는 디스플레이에 나오는 화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질색했다.
"어우……."
김현우도 마찬가지.
그도 그럴 것이 디스플레이에서 비추고 있는 화면은 자그마한 방이었다.
딱히 인테리어도 되어 있지 않은 자그마한 방.
다만 그들이 슬쩍이나마 정색을 한 이유는 그 아무것도 인테리어 되어있지 않은 자그마한 방에 붉은 액체들이 여기저기 튀어 있는 것 때문이었다.
딱 봐도 저 근처에 묻어 있는 것들이 피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기에, 아브는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방의 전경에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끼이이이익!
그렇게 방의 전경에 혀를 내두르고 있자 열리는 문.
그에 방 한 구석에 있던 한 외국인 남성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피가 덕지덕지 묻은 벽 한편으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열린 문 사이로 하나린이 들어왔다.
"안녕?"
가볍게 인사하며 들어오는 그녀.
허나 그 분위기는 김현우와 있을 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아, 암중비약……!"
그녀의 옛 이명을 부르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남자를 보며 스윽 웃은 하나린은 이내 그의 앞에 앉아 입을 열었다.
"우리 이번이 두 번째인가?"
"그, 그렇습니다."
소심하게 대답하는 남자.
그런 그를 보며 한번 미소를 지어보인 하나린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남자의 손을 내리찍었다.
"끄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는 남자.
허나 그 소름끼치는 비명에도 하나린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신 미디어 매체인 'TTS'의 실질적인 회장, 테오 잭, 우리 저번에 약속하지 않았나? 이렇게 만나지 않기로 말이야."
"그…… 흐흐흑!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응?"
"그, 그…… 저는 그때 말 뜻을 이해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말뜻을 이해를 못했다고? 내가 뭐 어려운 주문한 거 아닌 걸로 아는데…… 응?"
하나린은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그의 손등에 내리찍은 단검을 회수도 하지 않은 체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내가 특별한 부탁 했어? 아니지? 그냥 사소한 부탁 하나잖아. 응? '김현우'를 너희들 미디어의 먹잇감으로 쓰지 말라니까?"
"죄, 죄송합니다."
"흐음, 정말로?"
"저, 정말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있도록 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요……!!"
"지금 내가 그 말 한두 번 듣는 줄 알지?"
"네……?"
"네가 오기 전에는 BBC 회장님이 왔다 가셨고, 그 전에는 미국 헌터타임지 총부장이 왔다 갔었어. 뭐 그 놈들 이외에도 이 곳에 들른 친구들이 꽤 많은데 말이야."
씨익-
"우선 그 친구들 중 몇 명을 빼고는 전부 다시 여기에 끌려왔거든. 어떻게 됐는지는 뭐…… 이 방을 보면 잘 알 것 같은데. 응?"
"히, 히이이익!"
"뭐, 그래도 우리 회장님이 믿어달라고 하니까 이번에는 손 하나로 봐줄게. 아! 너무 걱정하지마 손을 자른다는 게 아니라 지금 네 손등에 박혀 있는 그거 하나로 용서해 준다는 소리야."
-물론
"다음에도 그러면 얄짤없다? 그러니까 명심하고 있어. 절대로 김현우와 관련돼서 부정적인 이슈를 만들거나 터뜨리지 마. 만약 그러다가 걸리면."
하나린은 지금까지 짓고있던 미소를 거짓말같이 없애버리곤.
"어떻게 될지는, 상상하지도 않는게 좋을거야."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경고했다.
448화. 튜토리얼 탑 (3)
"오……."
"음……."
그 뒤로 한동안 하나린의 과거를 보고 있던 김현우와 아브는 어느 순간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불어넣던 마력을 끊어 디스플레이를 꺼버렸다.
"……."
"……."
잠시간의 침묵.
사실 김현우로서는 하나린이 대충 이런 느낌의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야 그럴 게 본인이 말해준 것도 있었고 애초에 그녀가 데리고 다니는 인원들이 기본적으로 마피아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기에 에상은 하고 있었으나.
"확실히……."
그냥 예상을 하는 것과 이렇게 직접 보는 것이랑은 역시 차이가 꽤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을 위해 해준 일인데 무슨 충격을 받을 일이 있다는 말인가?
'뭐…… 조금 심해 보이는 것 같긴 하지만.'
자신이 아레스 길드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잊어버린 듯 태평하게 생각한 김현우는 이내 입을 열었다.
"이제 나는 볼 건 전부 본 것 같은데."
"더 보고 싶은 사람 없으세요?"
"음…… 당장은? 그냥 네가 하는 것 좀 보다가 나도 생각나면 조금 더 해보지 뭐."
"그렇다면 이제 제가 할게요."
김현우의 말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구슬을 받아간 아브는 이내 자신의 옆에 노트북을 넣고 구슬에 마력을 흘러넣은 뒤 그녀의 블로그에 악플을 단 녀석들의 실체를 하나하나 확인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
"……."
아브와 조용히 노트북을 닫았다.
"……하."
갑작스레 10년은 늙어버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는 아브.
그런 그녀를 보며 김현우는 괜스레 그녀의 등을 툭툭 쳐주었다.
"가디언, 현타가 너무 오는데 어떻게 하죠……?"
"나도 이해한다……."
그녀의 멘탈이 박살 난 이유는 바로 노트북 속에 있는 닉네임들을 검색했기 때문이었다.
'척 봐도 정상인인 것 같지 않은 닉네임이 여럿 있기는 해서 이럴 것 같기는 했지만…….'
아브가 장치를 이용해 본 악플러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우선 블로그에서 내내 분탕을 치며 아브를 괴롭히던 악플러 'ch지존hc' 초등학교 5학년의 잼민이었으며.
그다음으로 아브가 블로그에 글을 포스팅 할때마다 달려와서 싸움을 걸었던 '호구다209'는 28살에 집 안에 처박혀 부모님 등골을 박살 내던 앰생 백수였다.
그 이외에도 아브가 검색한 악플러들 대부분은 일상생활을 하지 않는, 어찌 보면 사회에서 도태된 이들뿐.
"아니…… 솔직히 알고 었었거든요?"
"……."
"그런데 막상 보니까 제가 이런 놈들이랑 그렇게 드잡이질을 하면서 싸웠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자신의 몸에 차오른 자괴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를 보며 김현우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 덕분인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아브는 흔들거리는 멘탈을 다잡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물었다.
"우선 저도 확인할 건 끝났는데, 혹시 가디언은 더 보고 싶은 것이라도 있나요?"
"더 보고 싶은 것이라…… 딱히 없는데……."
"그럼 그냥 끌까요? 어차피 볼 건 다 봤으니까요."
아브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김현우는 고개를 젓고는 대답했다.
"아니, 이왕에 만들었으니까 좀 써먹어 볼까?"
"어떻게요?"
"음…… 과거회상?"
"아, 가디언이 맨 처음 저와 만났을 때 말이죠?"
"아니, 그것보다 훨씬 전,"
"훨씬 전이요?"
아브의 말에 김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그녀가 쥐고 있던 구슬을 넘겨받아 마력을 불어 넣기 시작했고.
곧 디스플레이에서는 김현우에게 굉장히 익숙한 전경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곳은……."
"너도 알지? 튜토리얼 탑."
"뭐, 우선 알고 있기는 해요. 제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요."
아브의 말을 들으며 김현우는 디스플레이를 바라봤다.
보이는 것은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튜토리얼 탑 1층의 전경과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어리둥절해 보이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진짜 오랜만이네."
그것을 보며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디스플레이에서 보여주는 화면을 바라봤다.
'저때가 막 군대에서 전역했을 때였나?'
고아원에서 빠져나온 뒤, 벌어먹고 살기가 너무 막막해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군대를 지원해 들어가서 별 개고생을 다 한 뒤 빠져나왔을 때였다.
그래, 그때에 김현우는 튜토리얼 탑에 끌려왔던 것이었다.
전역의 기쁨을 다 누리지도 못한 채.
'뭐…… 사실 전역의 기쁨보다는 또 어떻게 먹고 살까 막연하게 고민하던 시기이기는 한데…….'
그런 김현우의 생각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듯 영상은 계속해서 흘러가기 시작했고, 김현우는 곧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영상은 김현우가 원할 때에 적절하게 이야기를 자르며 하이라이트만을 보여주었다.
뭐, 애초에 이 마법장치 자체가 구슬을 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김현우가 조종하는 것이었으나 그로서는 아무튼 나쁘지 않았다.
홀로 탑을 오르다 10층쯤에서 처음 이서연과 한석원, 그리고 김시현과 함께 팀을 맺어서 올라간 장면이 지나가고.
그 뒤로 여러 가지 장면들이 흘러 지나간다.
그리고 그 뒤.
"……나 왜 돌아왔냐?"
김현우가 탑의 100층까지 올라가 다시 1층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보여진다.
"……와."
"왜 그러세요?"
"아니, 영상으로 보고 있는 거긴 한데, 그냥 다시 보기만 해도 빡이 치네."
실제로 이때의 김현우는 거의 며칠동안 혼자 1층에 앉아서 궁상을 떨었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개고생을 해서 탑의 끝에 올라갔는데 자신 혼자만 탈출을 못했으니까.
[이럴수는 없다고오오오오오오오오!!!!!!!!]
영상 속의 김현우가 궁상을 떠는 모습을 시작으로 영상은 계속해서 흘러가기 시작했다.
궁상을 떨던 김현우가 다음으로 들어온 이들과 함께 다시 탑을 오르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또 결국 100층까지 올라갔지만 다시 1층으로 돌아온 것까지.
그 뒤부터는 장면이 슬라이드처럼 바뀌며 장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혼자서 탑을 클리어 한 것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또라이 짓을 하며 탑을 오르는 모습들이 슬라이드처럼 스쳐지나간다.
그야말로 개고생을 했던 흔적들이 하나둘씩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던 김현우는.
"아."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더는 디스플레이에 넣고 있던 마력을 그대로 끊어버렸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가디언?"
그에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연 아브.
그런 그녀에게 김현우는 질문했다.
"아브, 튜토리얼 탑 아직도 있지?"
"튜토리얼 탑이요? 그야 당연히 있죠. 애초에 저번에 안 지우셨잖아요?"
김현우가 탑주가 된 그 시점부터 그는 튜토리얼 탑의 존재를 어떻게 할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
튜토리얼 탑은 어찌 됐든 결론적으로는 많은 희생자를 만드는 것이 많으니까.
허나 그런 디메리트에도 불구하고 김현우는 결국 튜토리얼 탑을 없애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혼란을 막기 위해서.
세상은 원래 튜토리얼 탑이 없었고, 헌터라는 존재가 없었다고 해도 잘 돌아갈 것이었다.
왜냐?
애초에 몬스터라는 존재가 없었고 헌터라는 존재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9계층은 이미 튜토리얼 탑이 이미 생겨있었고 그에 따라 헌터들과 던전, 몬스터와 미궁이 만들어져 있는 세상이었다.
그런 시점에서 튜토리얼 탑을 없애버리면?
이미 양산한 헌터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 아니라면 튜토리얼 탑을 없애는 것은 결국 힘의 양극화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될 뿐이었다.
무엇보다 탑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몬스터도 처리해야 했기에 튜토리얼 탑의 존재는 필연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기에 결국 김현우는 튜토리얼 탑을 놔두었다.
"탑 안에 사람들이 있나?"
김현우의 물음에 아브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 9계층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튜토리얼 탑에는 사람들이 없어요. 아마 다음 달쯤에는 가득 차겠지만요."
"흐음, 그렇다는 말이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는 김현우.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아브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굉장한 위화감.
'이런 걸 어디서 느껴봤더라?'
아브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김현우를 보며 몇 번 정도를 갸웃거리자 곧 입가에 미소를 띤 김현우는 입을 열었다.
"아브."
"네?"
"나 가볼 데가 생겼어."
"갑자기 어디를요?"
"튜토리얼 탑."
"튜토리얼 탑으로요?"
"응."
"……거기서 뭐 하시려고요?"
아브의 왠지 불안감이 담긴 목소리에 김현우는 씨익 웃더니 이야기했다.
"아브."
"네?"
"내가 생각해 봤는데, 어차피 9계층에는 튜토리얼 탑이 꽤 있잖아?"
"그렇……죠?"
"그치? 그럼 하나 정도는 그냥 박살 내 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네? 그게 무……슨?"
"아니, 생각해 보니까 옛날부터 꼭 하려고 했었는데 이제야 떠올랐거든."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 말을 듣고 있던 아브는 곧 자신이 느끼고 있던 이 기묘한 위화감에 대해서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그, 그랬지. 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때는 항상 가디언이 터무니없는 짓을……!'
사실 김현우의 말이 맞기는 했다.
9계층에 튜토리얼 탑은 상당히 많았고 그중 하나가 파괴된다고 해도 딱히 엄청나게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래, 9계층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어차피 한국에 튜토리얼 탑이 없더라도 다른 나라에 퍼져 있는 탑에서는 언제나 그랬듯 헌터를 양산할 테니까.
허나 아브의 입장에서 튜토리얼 탑이 사라지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만약 한국에 있는 탑을 작살내 버리면 해야 할 일이……!'
현재 탑의 각 계층은 굉장히 조화롭게 맞춰져 있다.
그래, '굉장히' 조화롭게 맞춰져 있다.
모든 계층에 있는, 탑에서 만든 건물 하나하나가 작은 톱니바퀴처럼 세세하게 끼워져 있어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다.
자 그럼 여기서 반대로 생각해보면 현재 탑은 굉장히 위태로운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뭐 그렇다곤 해도 정말 위태로운 상황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탑의 최상층에는 탑을 관리하고 있는 아브가 있으며 그녀가 혹여나 탑을 관리하지 못하면 노아흐가 탑을 관리하면 된다.
한 마디로 탑이 위태해지는 것은 아니긴 하다.
……다만 튜토리얼 탑의 무너졌을 때 아브의 업무량이 위태로워지는 것뿐.
물론 대충 한 달 정도만 고생하면 충분히 조화를 잘 맞출 수는 있었으나 그것은 곧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고 아브는 지금 시점에서 별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5년 전을 기점으로 딱히 일을 하지 않았기에 놀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브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있는 김현우를 뒤늦게 말려보려 했으나.
"미안. 나도 좀 도와줄게."
"안 도와줄 거잖아요오오오오옷!!!"
아브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김현우는 이미 자신의 마력을 이용해 튜토리얼 탑으로 순간이동해 버렸다.
449화 튜토리얼 탑 (4) 完
튜토리얼 탑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누구일까?
물론 헌터들은 튜토리얼 탑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애초에 그들은 튜토리얼 탑을 끝까지 올라 헌터가 된 이들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탑을 올라 헌터가 되었다고 해서 튜토리얼 탑에 대해서 잘 알고 있냐. 라고 생각해 본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탑을 오르는 데에만 집중했기에 튜토리얼 탑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는 없었다.
아마 튜토리얼 탑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는 부류도 그저 각 계층에 나오는 몬스터를 외우고 있는 이들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제작자는 어떨까?
튜토리얼 탑을 만든 제작자.
적어도 김현우가 알기로 튜토리얼 탑을 만든 이는 아브가 아니었다.
뭐,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맨 처음 '탑'을 만들 때에 어느 정도 튜토리얼 탑에 대한 간단한 디자인 정도는 했었다고 이야기 했지만 탑을 만든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튜토리얼 탑은 만든 것은 바로 노아흐.
허나 그 또한 튜토리얼 탑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했다.
이유?
그는 말 그대로 튜토리얼 탑을 '제작자'의 입장에서 만들기만 했을 뿐이지 세부적은 디자인이나 환경 조성을 그가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튜토리얼 탑의 세부 디자인을 했는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김현우가 노아흐에게 듣기로 튜토리얼 탑의 세부디자인은 '범천(梵天)'이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뭐, 사실 김현우가 생각해 봐도 그 녀석 이외에는 저런 세부적인 디자인을 할 것 같은 사람은 없긴 했다.
노아흐와 아브는 어차피 튜토리얼 탑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 이미 배신을 당해 숨어 있었던데다가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지하세계에 박혀 있던 그 괴물은 척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범천과 심마인데 김현우가 보기에 심마는 그런 세세한 디자인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고 그렇다면 남은 건 범천뿐이다.
그렇다면 이 튜토리얼 탑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범천일까?
그렇다.
범천이 맞다
뭐, 아마 범천이 튜토리얼 탑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범천이 이미 김현우한테 소멸당했다는 것.
그 때문에 현재 튜토리얼 탑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김현우였다.
12년 동안 튜토리얼 탑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별별 지랄을 다 했던 김현우가, 현재로서는 튜토리얼 탑을 가장 자세하고 세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김현우는 너무나도 빠르게.
"웃차."
튜토리얼 탑의 지하에 있는 핵을 찾을 수 있었다.
보라색 빛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핵.
그것을 보며 김현우는 미소를 지었다.
튜토리얼 탑은 무력으로 인해 부서지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김현우가 무력으로 아무리 완벽하게 부숴 버린다고 해도 튜토리얼 탑은 다시 복구된다.
탑 지하에 있는 이 핵이 있기만 한다면 말이다.
'내가 12년 동안 여기서 개지랄을 떨지 않았으면 이런 게 있었는지도 몰랐겠지.'
확실히 튜토리얼 탑의 구성하고 있는 이 핵은 절대로 일반적으로 탑을 오르는 헌터는 찾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이곳에 올 수 있는 입구는 튜토리얼 탑 1층에 있기는 하지만 그 입구는 숨겨져 있었다.
그냥 슥 보는 것으로는 모를 정도로 치밀하게.
두 번째로 만약 이탑에 들어온 사람이 지하로 향하는 입구를 찾았다고 해도 그들은 지하로 들어올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하로 통하는 입구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여는 것이 아닌, 무력을 이용해 파괴해야만 입구를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 두 가지의 조건 때문에 이 튜토리얼 탑의 핵이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아마 지금 시점에서는 김현우밖에 없을 것이었다.
'아니, 아브 정도면 알수도 있지.'
김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은 뒤 왠지 감상 어린 표정을 지으며 튜토리얼 탑의 핵을 바라보았다.
김현우가 맨 처음 이 핵을 발견한 것이 정확히 몇 회차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으나, 하나 확실한 건 그가 이 핵을 꽤 빠르게 찾았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탑에 갇히고 아직 탑을 클리어한지 20회차가 넘어가지 않았던 김현우는 아직 탈출의 꿈을 버리지 않았을 때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때당시 이 핵을 발견했던 김현우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핵을 파괴하겠다고 다짐했었으나 결국 그는 핵을 파괴하지 못했다.
그래.
탑의 저주가 풀려 빠져나가는 그때까지 말이다.
'……뭐, 사실 모든 능력치가 한계에 도달한 뒤 핵 파괴에 실패한 뒤로는 해보지도 않았지만.'
아마 탑의 저주가 풀렸을 때쯤에도 김현우는 핵을 파괴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뭐, 지금이라면 손가락 하나로 파괴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피식 웃은 김현우는 그대로 주먹을 쥐고는 핵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려 했으나.
"흠……."
핵과의 거리를 5cm 정도 남겨두고 잠시 고민하던 김현우는 이내 자신의 주먹을 회수하고는 생각했다.
'이제 마지막인데 간만에 클리어나 한번 해볼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김현우는 새삼 자신이 몇 초만에 탑을 클리어 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기에 튜토리얼 탑의 지하에서 나와 1층으로 돌아왔다.
"후……."
보이는 것은 이미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튜토리얼 탑 1층의 풍경.
그냥 익숙한 것이 아니라 정겨운 것이 마치 집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뭐, 이곳에서 자그마치 12년이나 있었으니까.'
정겹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탑을 탈출하기 전에 냈던 기록이 몇 초였더라?"
몸을 풀며 곰곰이 생각한 김현우는 자신의 마지막 기록이 대충 1분 대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씨익 웃은 뒤, 예전의 자신이 했던 것처럼 제 자리에 서서 몸을 낮췄다.
콰득……콰드드드드득!!!
다리에 힘을 모으기 시작하자 김현우의 발 주변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크레이터.
그다음-
꽈아아아아앙!
그는 튜토리얼 탑의 벽들을 모조리 박살 내며 탑을 오르기 시작했고.
"크렉!?"
단 10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튜토리얼 탑의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탑의 벽을 뚫고 올라온 김현우를 어처구니 없다는 듯 바라보는 발록.
그는 간만에 보는 발록의 얼굴을 보며 간만이라는 듯 미소를 지은 뒤-
-꽈아아앙!
발록이 미처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그의 머리를 박살 내 버렸다.
쿠웅!
머리가 사라진 채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발록.
그것을 보며 김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제는 10초 정도 걸리네.'
사실 옛날에도 각 10계층 마다 있는 보스들이 있는 방을 뚫을 수 있었다면 클리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벽을 뚫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아무리 시간을 단축시켜도 1분 대가 한계였었다.
'자, 그럼 하고 싶은 것도 전부 끝났고…….'
그렇게 한동안 발록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열려있는 포탈로 이동 하려다-
피식.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는, 이내 걸음을 돌려 자신이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튜토리얼 탑 1층으로 되돌아 가 다시 핵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우우웅-!!!
김현우가 돌아오자 그가 부서트린 것을 복구라도 하고 있는 듯 보랏빛 마력을 힘차게 흩뿌리고 있는 보석을 보며 김현우는 주먹을 들어올린 뒤.
"흡!"
망설임 없이 보석을 후려쳤다.
콰지지지직!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박살나는 보석.
쿠그그그그그긍!!
그와 함께 탑이 붕괴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순식간의 주변의 벽들에 금이 가기 시작하며 무너져내리기 시작하는 튜토리얼 탑.
그것을 보며 김현우는 묘하게 후련한 듯한 표정으로 무너지는 튜토리얼 탑을 바라보곤 생각했다.
'좀 늦은 감이 있긴 하네.'
김현우가 굳이 아브의 반대를 무릎쓰고서라도 이렇게 튜토리얼 탑을 부순 이유는 바로 그가 예전에 했던 다짐 때문이었다.
한탐 튜토리얼 탑에서 못 나가고 혼자 개고생을 하며 탑을 수십번이나 뺑뺑이 돌았을 때 김현우는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이 좆 같은 탑 내가 나중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박살 내 버린다.'
그 생각은 그가 제풀에 지쳐 반쯤 포기하고 컨셉플레이를 즐기기 시작했을 때도 했던 생각이고.
미령과 하나린을 제자로 받았을 때도 했던 생각이며.
맨 나중, 튜토리얼 탑의 저주가 해제되었을 때도 하던 생각이었다.
허나 어째서 지금 와서 탑을 부숴버렸냐고 묻는다면, 그건 순전히 그가 그 다짐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잊고 있었다.
애초에 김현우는 튜토리얼 탑을 부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탑에 나왔을 때부터 수많은 일에 휩쓸렸으니까.
맨 처음 나왔을 때는 어떤가?
이제야 조금 쉬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아레스 길드랑 엮였다.
그다음에는?
아브를 만나고 나서부터 등반자들을 상대하느라 쉴 여유가 전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없었다.
그렇다면 등반자들이 슬슬 올라오지 않게 된 시점에는 어떤가?
그때는 또 정복자들이 내려와서 깽판을 쳤다.
그 녀석들을 전부 처리하고 이 탑의 보스인 심마까지 처리해 이제야 조금 쉬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는 이제 헤르메스와 마력이 괴롭혔다.
한 마디로 김현우는 튜토리얼 탑에서 빠져나온 그 시점부터 단 한번도 편안하게 휴식을 즐기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 다짐도 잊어버렸던 것이었다.
아무리 그 다짐이 중요한 것이라도 당장 앞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면 어쩔 수 있겠는가.
'뭐, 지금이라도 다짐을 실행했으니 됐지 뭐.'
여전히 조금 늦었다는 감이 있긴 하지만 김현우는 결국 만족했다.
결국 아브와 함께 재생장치를 뒤적거리다 생각해내기는 했으나 아무튼 다짐을 실행한 건 맞았으니까.
'……아브가 화내려나?'
이미 이곳에 들어올때부터 화를 냈었으니 아마 화가 나 있는 것은 두말 하면 잔소리일 테고.
'열심히 도와줘야겠네.'
튜토리얼 탑을 부수고 다시 만드는게 좀 어처구니 없이 보일 수 있기는 했으나 김현우로서는 이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튜토리얼 탑을 박살 내는 것은 어느의미로는 나름대로의 끝맺음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완전히 무너지고 있는 튜토리얼 탑을 보며 별다른 후회없는 후련한 얼굴로 마력을 이용해 9계층에 있는 자신의 집을 향해 텔레포트 했고.
"호오, 왔느냐?"
"……."
"……."
"……."
아브를 어떻게 도와줘야 하나 고민하며 저택 안으로 돌아온 김현우는 곧 소파에 앉아 있는 자신의 아내들을 볼 수 있었다.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맞이해주는 아내들.
다만 조금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그런 아내들 사이에 어느새인가 내려온 아브가 내려와 있다는 것이었고.
"흥."
아브가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듯 고개를 옆으로 홱 돌림과 동시에 아내들이 일제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아."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김현우는 아브가 도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엇인가'를 아내들 한테 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서방님, 저희에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령의 말을 들으며 김현우는 작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외전 end-